도끼 만행사건에 이어 두번째 현대사.
최은희 신상옥 납치사건입니다.
최은희는 1926년생의 여배우였다.
그녀는 1953년 영화 감독이던 신상옥씨와 결혼한 사이였는데
신상옥감독은 배우 오수미와 불륜관계
오수미가 신상옥의 자식까지 낳자 최은희는 신상옥과 일단 이혼을 한다.
그후 예술학교 교장직에 머무르며 후배들을 양성중이였던 최은희
이때 왠 낮선 인물들이 최은희에게 접촉한다.
홍콩에서 최은희에게 합작 작품 제의 및 후원제의가 들어온것.
최은희는 의아했지만 일단 초대에 응했다.
초반며칠 최은희는 그들과 함께 여러의논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가 갑자기
부둣가에서 배를 태우더란다ㅡㅡ
최은희가 타지 않으려고 버티자
갑자기 수상한 장정들이 나타나 강제로 태우더니 하는 말.
'지금 동무는 위대한 장군님 품으로 가는 겁네다'
헐 님들아..
최은희는 북한 공작원들에게 낚여버린것.
결국 울고불고 난리를 쳤지만 마취되어 속절없이 북으로 끌려갔다.
마취에서 일어나 보니 그를 맞이하는건 김정일의 면상;
세간에는 김정일이 오입질을 하기 위해 최은희를 납치했다고 소문이 퍼졌지만
김정일은 공산당을 선전하는 사업에 주력하던 때라 이에 이용하기 위해 그녀를 납치했던 것.
이즘 신상옥은 외국에 자주 나갔는데 마침 최은희 납치소식을 듣고
그 당시 미국에 있던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을 만난다
김형욱은 틀림없이 북한놈들의 소행이라고 말했으며
신상옥은 비록 이혼한 사이였으나 그대로 내버려 둘수 없었기에 그녀가 실종됬던 홍콩을 방문한다.
그리곤 자기도 납치당한다ㅡ,ㅡ
또 다시 북한공작원들에게 낚인것.
신상옥은 납치되어 보위부에 끌려가 혹독한 생활을 하게된다.
처음에 북한의 요구에 순순히 응하지 않았기 때문.
결국 1983년이 되서야 신상옥은 북한의 영화발전에 노력하겠다는 서약서를 쓰고 풀려난다.
그때부턴 또 북한이 엄청난 환대를 해줬다.
신상옥이 서약서를 쓰자 김정일은
'최은희 선생님을 다시 돌려드립니다.'
라고 말하며 같이 살게해주기도 했다.
최은희는 불륜 때문에 이혼한 사이였으나 북한에서
그것도 자기를 구하려다 납치당해온 전 남편을 만나자 그동안 쌓인 미움이 한방에 고클린으로 청소하듯
없어졌다고 한다
위 사진 맨 왼쪽이 김정일인데 김정일은 이들 부부에게 상당히 잘 대해줬다고 한다.
보다시피 그의 생일 파티에 신상옥과 최은희가 초대되기도 했으며 그것도 김정일이 직접 초대했다
이떄 일화로 김정일 아들 김정남을 만나는데 최은희가 이름을 물어보자 김정남이
아줌마가 내 이름 알아서 뭐하게?
이렇게 싸가지없게 대꾸해서 할말을 잃었다고 한다
어찌됬든 최은희와 신상옥은 호사스러운 생활속에서 제법 많은 영화를 만들었다.
돌아오지 않는 밀사. 춘향전 .
그리고 괴수영화 불가사리등이 있다.
이들은 국제영화제에도 나가서 감독상이나 여우주연상을 타기도 하는등 명성역시 높아졌으나
억지로 끌려와 있는 북한 생활이 행복할순 없는 법.
이들은 북한의 야만성과 비정함을 너무 잘 알고 있었고
자기들의 이용가치가 떨어지면 언제라도 자신들을 해칠거라는 공포감에 빠져있었다.
특히 최은희는 더 심해서
북한이 어디로 이동하는 지시만 내려도 무서움에 몸서리쳤다고 한다.
이들은 훗날을 대비
김정일의 육성을 직접 녹음해두기도 했다.
그렇게 몸은 호사스러워도 마음속으론 가시밭길과 같은 시간을 보내던 그들은
오스트리아 빈을 방문했을때 드디어 탈출 기회를 잡는다.
빈에는 마침 신상옥의 일본인 친구가 와 있었고 그와 식사약속을 구실삼아 자신들을 감시하던 북한감시단을 따돌렸다.
그리곤 택시를 타고 열라게 튀었다.
목적지는 바로 미국대사관.
자유의 몸이 된 그들은 북한소속으로 김정일 김일성을 찬양하던 대외활동과는 180도 다르게
김일성 개객끼! 김정일 개객끼!를 외치며 공산주의자가 아님을 밝힌다.
ok 합격! 어서와
그러나 그들은 바로 한국으로 가지 않고 미국에 잠시 머물렀는데
남한은 당시 이 형이 집권하던 시기.
배신자로 몰릴까 염려되어 바로 남한으로 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들 부부는 89년에 잠시 귀국했다가 2000년대 김대중 정부때 완전히 한국 품으로 돌아왔다.
신상옥 감독은 2006년에 별세했으며 최은희씨는 아직 생존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