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군측 헌병. 한글로 된 완장을 차고 있다.
오와 열을 맞추는 북한측 헌병들
서방 기자의 카메라를 보며 불쾌감을 드러내는 중공군 병사.
북한군 참모
유엔군 소속 영국군 헌병
판문점으로 들어가는 유엔군 장성들의 차량 행렬
팔씨름을 하고 있는 중공군과 한국군
양측 상관들의 기 싸움과는 별개로 사병들의 관계는 비교적 완만했다.
공산측 경비병들
유엔측 경비병들
유엔측 검문소. 특이하게도 이사진은 공산측 옵저버로 온 체코슬로바키아 기자가 촬영했다.
정전 체결 소식을 기다리는 세계 각국의 매스컴에서 파견 나온 기자들의 모습
정전 협정 체결장의 경비를 맡은 유엔군 헌병들
각국 지휘부의 사인들
협정 체결 서류 판본을 들어 보이는 한국군 장교.
한국군 대표로썬 유일하게 협상장에 나온 최덕신 육군 소장.
그리고 1986년, 북한으로 귀순했다.
정전회담이 이루어 질 당시 판문점 부근의 군사 분계선.
지금의 dmz의 시초다.
정전 협정 다음날인 7월 28일 에 시체를 수거 하러온 중공군들과 악수하는 미군 장병들.
자국군의 시체를 옮기는 중공군들.
미군 사진병이 사진을 찍자 적개심을 드러낸다.
팻말을 고정하는 미군들
정전 소식을 전해 듣고 기쁜 마음을 표현하는 미 해병대.
그리고 21세기, 이 조치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어느 이름모를 호주 참전 용사의 앨범에서 나온 사진들.
뒷면에는 1953년 7월 27일 정전 당일날 찍은걸로 되어 있다.
같은 날, 판문점 근처에 주둔하던 미 1기병사단 장병들의 기념사진.
정전 몇일 후, 자신들이 주둔 했던 고지에서 철수 하는 중공군들.
그 깃발들에는 平和 (평화) 라고 써져 있었다.
정전 협정 체결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마련된 포로 교환소.
그리고 21명의 미군들은 중국을 택 하였다.
서양인들의 눈으론 판별이 거의 불가능한 한국인과 중국인을 구분하기 위해 써 놓은 표시판.
자신을 설득하려는 북한군 장교에게 욕설을 퍼붇는 북한 포로. 그의 이마에 묶인 천에는 반공(反共) 이라 쓰여있다.
북한군에게 붙잡혔던 미군 포로 존 데니스 일병이 송환절차를 밟고 있다.
그는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진 상황을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다.
송환된 한국군 포로가 헌병에게 피로 쓴 자신의 혈서를 들이보이며 북한측에게 당한 부당한 대우를 고발하고 있다.
약 40여명이 아직도 귀환하지 못하고 있다.
정전 협정 이후인 53년 12월 아침,
1950년 6월25일 시작된 한국전쟁은 1951년 7월에 정전 회담이 개시된 후
양측은 제한 전쟁으로 엄청난 인명과
물자를 소모하면서 까지 전쟁을 끝내려 하였다.
군사분계선 문제는 이미 1952년 1월 27일에 타결되었으며,
1952년 5월에 이르러선 포로교환 문제를 제외하곤 거의 모든 의제에 합의하였다.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의 죽음으로 정전 회담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어
소련 내각은 '한국전쟁을 정치적으로 마감한다.'는 결정을 중국과 북한에 통보하면서
부상포로의 우선 교환에 동의하도록 지시(또는 요청)했다.
1953년 5월 30일 이승만대통령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에게 보낸 친서에서
다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요구하였다.주로 개성과 금강산에 이르는 곳에서 전투가 계속되다가
북한(조선인민공화국)이 소련을 통해 정전을 제의하였고 유엔군 측의 승인으로 정전이 되었다.
현재 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