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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사람이 사라질뻔 했던 우리나라 역사

Cross_X 작성일 17.08.26 14: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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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죽이고 일본인 이주시켜라" 히데요시 지시로 호남 대학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대기를 기술한 ‘에혼 다이코기(繪本太閤記)’에는 조선에서의 전쟁 참상이 삽화와 함께 상세히 묘사돼 있다. 다케우치 가쿠사이가 글을 쓰고 오카다 교쿠잔이 그림을 그린 이 책은 1797년부터 1802년까지 7편84책이 발행됐다. 위 그림은 왜군과 전쟁 당시 아기가 엉금엉금 기어가 죽은 어머니의 젖을 빨고 있고, 길을 가다가 이를 목격한 명나라 장군과 병사들(왼쪽)이 슬퍼하는 장면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 촬영

 

1597년 정유재란을 일으키면서 히데요시는 대놓고 조선 관리고 백성이고 가리지 않고 처단하라고 지시했다. 심지어 조선의 닭과 개도 남기지 말라고 말했다.

“해마다 군사를 보내어 그 나라 사람을 다 죽여 빈 땅을 만든 연후에 일본 서도(西道)의 사람을 이주시킬 것이니, 10년을 이렇게 하면 성공할 수 있으리라.”(‘난중잡록’)

히데요시가 자신의 처조카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를 조선 재침략의 왜군 총대장으로 임명하면서 지시한 말이다. 히데요시는 자신이 죽더라도 자기 자식이 대를 이어서 조선을 굴복시킬 것이니, 장기전을 펼치라고 왜군 장수들에게 주문했다.

히데요시가 조선의 빈 땅에다 일본 서도 사람들을 옮겨 살게 하겠다는 말은 괜한 엄포가 아니었다. 조선군에게 붙잡힌 왜장 후쿠다 간스케(福田勘介)는 상부로부터 다음과 같은 지침을 받았다고 진술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걸을 수 있는 자는 사로잡아 가고, 걷지 못하는 자는 모두 죽여라. 조선에서 사로잡은 사람들은 일본에 보내 농사를 짓게 하고, 일본에서 농사짓던 사람을 군사로 바꾸어 해마다 침범하고 아울러 중국까지 침범할 것이다.”(‘선조실록’)

조선인을 잡아다 일본에서 노동력 착취 등으로 부려먹고, 대신 일본의 일/반인들을 병력으로 차출하겠다는 뜻이었다. 히데요시가 집요하게 사람들을 죽이거나 붙잡아가 빈 땅을 만들겠다고 지목한 곳이 바로 호남이었다. 히데요시는 조선이 임진왜란 이후 지금까지 버틴 것은 조선 수군의 버팀목이자 곡창지대인 호남의 힘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호남을 철저하게 짓밟으면 조선이 힘을 쓰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실제로 왜군은 칠천량 해전에서 이긴 후 조선 땅에 상륙하자마자 호남 지역을 대상으로 집중적으로 분탕질을 쳤다. 1597년 8월 보름 남원성에서 조선인 백성 6000여 명을 도륙하기 이전인 8월 3일 왜군은 섬진강 하구의 하동과 구례에 도착하면서부터 살육, 약탈, 방화 등 만행을 저질렀다. 일본 좌군(총사령관 우키타 히데이에)을 따라 함께 움직인 종군 의승 케이넨(慶念)은 자신의 일기(‘朝鮮日日記’)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왜군들이)신속히 선박에서 내려 너도나도 뒤질세라 재물이 있는 사람을 죽이며, 서로 빼앗는 모습은 제대로 눈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잘못도 없는 사람의 재물을 빼앗으려고 구름처럼 몰려들며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모양새였다.”(1597년 8월 4일 기록)

“들도 산도 섬도 죄다 불태우고 사람을 칼로 베고 쳐 죽인다. 산 사람은 쇠사슬과 대나무 통으로 목을 묶어서 끌어간다. 부모는 자식 걱정에 탄식하고, 자식은 부모를 찾아 헤매는 비참한 모습을 난생 처음 보았다.”(1597년 8월 6일 기록)

“조선 아이들을 잡아서 묶고, 그 부모는 쳐 죽여 다시는 만날 수가 없게 된다. 남은 부모와 자식이 서로 울부짖는 모습은 마치 저승사자의 고문과도 같았다. 애처로운 모자의 이별이 이런 것인가.”(1597년 8월 8일 기록)

왜군은 남원성으로 진격해오는 도중에도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해쳤던 것이다. 케이넨은 그 스스로가 일본군을 따라온 종군승이면서도 악귀처럼 사람을 잡아 죽이고, 들과 산을 불 지르는데 혈안인 된 일본 무사들을 보면서 아수라장 같다고 표현했다.

돈 받고 목숨 살려준 왜군

왜군은 군인이 아니라 강도떼에 가까웠다. 이 역시 히데요시가 부추긴 결과였다. 히데요시는 전쟁에 참가하기를 기피하는 왜군들에게 전쟁은 출세와 돈을 벌 수 있는 호기라고 선동했다. 히데요시는 전쟁에 참여하는 대가로 ‘선물’을 약속했다. 점령지에서의 포로 사냥, 재물과 식량 약탈, 부녀자 겁탈 등을 무제한 허용했다. 병사들이 전쟁에서 획득한 것은 히데요시 자신을 비롯해 그 누구도 뺏어가지 못한다고 보증까지 섰다.

왜병들은 백성을 도륙하면서 목숨 가격을 흥정하기도 했다.

“조선 사람을 사로잡아 남자에게는 쌀 5두(斗)를 걷고, 부인에게는 쌀 3두를 걷은 후에 면사첩(免死帖)을 주었다.”(‘선조실록’)

케이넨 역시 왜군의 일부 병사가 돈을 받고 목숨을 살려주는 광경을 목격했다.(1597년 8월 16일 기록)

왜군은 전주를 거쳐 공주와 청주, 천안 등지로 북상하는 동안에도 사람 사냥과 약탈을 멈추지 않았다. 그해 겨울, 부제학 신식이 전라도를 돌아본 뒤 그 실정을 선조에게 보고했다.

“본도(전라도)는 병화(兵禍)가 더욱 혹심했던 탓으로 읍리(邑里)는 폐허가 되어 사람 사는 흔적이 없고, 곡식은 들판에 가득해도 수확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간간이 살아남은 백성이 흙집 속에 있기는 하지만 그들 역시 적극적으로 살아보려는 생각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침마다 곡식을 가져다가 근근이 입에 풀칠만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눈앞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적에게 잡혀 머리를 깎였다가 도망쳐 나온 사람들로 또한 상복(喪服)을 입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상심되고 참담함을 차마 말할 수가 없습니다.”(‘선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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