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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간첩단 사형 45년 만에.. 정부, 박노수 유족에 23억 배상

심의 허준 작성일 17.09.02 08:4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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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최동준 기자 = 조의정 유럽 간첩단 사건 손해배상 소송 변호인이 1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서 선고기일을 마치고 취재진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법원 "2015년 박씨 무죄 확정까지 사회적 편견에 시달렸을 것"

 

유족측 "고통에 비해 아쉽다, 항소"

1969년 유럽에서 유학 생활을 한 학자 20여명이 줄줄이 중앙정보부 남산 분실로 끌려갔다. '남산'에서 조사받은 사람 가운데 영국 케임브리지대 국제법 교수 박노수(당시 36세)씨가 있었다. 유학 시절 동베를린과 평양을 방문해 북한의 간첩으로 활동했다는 이유였다.

박씨는 1955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대 법대를 졸업하고 1961년 케임브리지대 초청으로 유럽 유학 생활을 시작했다. 국제법 교수로 재직하던 그는 미국 하버드대에서 교수로 와달라는 제안을 받고 1969년 2월 귀국했다. 그런데 그는 귀국 두 달 만인 같은 해 4월 아내와 함께 중앙정보부 남산 분실로 연행됐다. 딸이 생후 6개월 됐을 때였다. 그는 이후 집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중앙정보부는 박씨가 영국에서 유학하던 시절에 동베를린과 평양을 방문한 사실을 들어 간첩 혐의를 자백하라고 강요했다. 수사관들은 박씨에게 권총을 겨누며 '바른 대로 말하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했다. 잠을 재우지 않았고, 몽둥이로 때렸다. 물고문도 있었다. 박씨는 '평양에서 북한 노동당에 입당해 공작금과 지령을 받고 영국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그와 도쿄대 동창으로 함께 평양을 방문했던 김규남(당시 40세) 민주공화당 의원도 고문 끝에 허위로 범행을 자백했다.

박씨와 김씨는 같은 해 11월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1970년 7월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됐다. 두 사람은 재심을 청구했지만 재판을 받아보지 못한 채 2년 뒤인 1972년 7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박씨의 아내는 1심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가 항소심에서 징역 3년으로 감형돼 1년 6개월간 복역한 뒤 사면으로 풀려났다. 박씨의 아내는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다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

이 사건은 이른바 '유럽 간첩단 사건'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위원회는 2006년 이 사건을 조사했다. 과거사위는 2009년 중앙정보부가 불법적으로 체포(연행)해 조사 과정에서 가혹행위가 있었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서울고법은 2013년 박씨의 유족이 낸 재심에서 "박씨는 수사기관에 영장 없이 체포돼 조사를 받으며 고문과 협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허위 진술을 했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과거 권위주의 시절 법원의 형식적인 법 적용으로 피고인과 유족에게 크나큰 고통과 슬픔을 드렸다"며 "사과의 말씀과 함께 이미 고인이 된 피고인의 명복을 빈다"고 했다. 대법원은 2015년 12월 재심 무죄를 확정했다.

박씨의 아내와 딸 등 유족 17명은 지난해 국가를 상대로 70억원 상당의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1일 서울중앙지법 민사26부(재판장 박상구)는 "국가는 박씨의 딸에게 9억여원, 아내에게 8억여원 등 유족들에게 총 23억4700여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박씨의 유족들은 재심으로 무죄가 확정될 때까지 사회적 편견에 시달렸을 것이 분명하다"며 "박씨의 딸은 만 3세에 아버지를 잃었고 가족이 와해돼 현재까지 고통을 겪고 있다"고 했다. 유족 측 조의정 변호사는 "박씨의 아내와 딸이 받은 고통에 비해선 아쉽다는 생각이 들어 항소할 계획"이라고 했다. 이날 법정을 찾은 박씨의 조카는 "법원이 국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해 가족들에게 위로가 될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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