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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대한민국 국가유공자

씨씨케이 작성일 20.08.17 01:18:19 수정일 20.08.17 01:2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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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세 다쓰지 布施 辰治

 

 

본래 일본에서 검사로 일하던 도중 어머니와 아들이 동반자살하다 아들만 사망하고 어머니만 살아남은 사건을 처리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의 법상 어머니를 살인미수 혐의로 기소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는데 이러한 상황에 부조리함을 느낀 그는 인권변호사로 전향하였다

 

1911년, 그는 기고문을 통해 조선 독립을 지지한다는 글을 써 일본의 요시찰대상이 되었으며 이후 일제 패망까지 독립운동가들의 변호를 전담하였다

 

광복 이후 그는 1946년 조선 헌법의 초안을 제안하기도 하였으며, 6.25 정전 이후인 1953년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이러한 공로로 2004년 건국훈장을 제수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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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네코 후미코(한국명 박문자)

 

박열 열사의 아내다.

 

그녀는 어릴때부터 일제에 의해 차별을 당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출생신고가 되어 있지 않아 소학교(초등학교)조차 입학할 수 없었다. 또한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의 이모와 함께 가출해버렸고 엄마 또한 다른 남자와 바람이 나 버렸기 때문에 그녀는 완벽히 버림받은 존재가 되어 버렸다.

 

이후 그녀는 9살때 조선의 충청북도 청주로 이주하게 되었으며, 일본인 마을에서 식모로 일했으며 친척들에게 학대당했다고 한다. 친척들에게까지 버림받은 그녀는 자살까지 생각했으나, 우연히 방문한 조선인 마을에서의 환대로 마음을 바꾸었다고 한다. 아마 이것은 그녀가 최초로 받은 환대였을 것이다.

 

그녀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가슴 속에서 뜨거운 감정을 느꼈다 하며, 이후 1922년 박열 열사와 도쿄에서 만나 결혼한다.

 

박열 열사와 무정부주의 운동을 하며 일왕 요시히토 암살 계획을 수립하던 중 1923년 관동대지진이 일어나며 박열 열사와 함께 예비검속이라는 명목으로 체포되었으며, 이후 폭탄으로 일왕을 암살하려 했다는 계획이 탄로나며 박열 열사는 사형(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 후미코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감옥에서 의문사한다.

 

사인은 공식적으론 자살이었으나, 후세 다쓰지 변호사와 후미코의 어머니가 그녀의 사인을 조사하려 했으나 결국 밝혀지지 않았다. 그녀는 2018년에 건국훈장을 추서받는다.

 

 

일본은 싫지만..이런 일본인은 감사하고 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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