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토론이 아니라 퍼포먼스였다. 새빨간 립스틱에 더 진한 매니큐어, 화려한 목걸이를 걸친 공연예술가 낸시랭이 미디어워치 대표 변희재씨와 마주 앉자마자 물었다. “누구세요? 혹시 연예인?” “저는 각종 기사 언론 보도를 비평하는….” “(짝짝짝) 너무 훌륭하세요. 전 뭐하시는 분인가 했어요. PD님도 자세히 모르신다 하더라고요.” CJ E&M이 제작하는 온라인 채널 ‘인사이트TV’의 <3분토론>이라는 프로그램에서 ‘SNS를 통한 연예인의 사회 참여는 정당한가’라는 주제로 토론을 시작한 참이었다. 시작부터 ‘듣보잡’ 취급당한 보수 논객이 “정치적으로 줄 서지 마시라”고 공격을 퍼부어도 낸시랭은 무심히 늘 어깨에 올리고 다니는 고양이 인형만 어루만진다. “나중에 두고 보자”고 협박 트윗을 날렸대도 “아, 몰랐어요. 그래도 욕은 안 하셨네요” 하고 우아하게 웃어 보인다. 의심, 단정, 훈시… 삼십육계만 빼고 우익의 방책을 모두 써본 보수 논객은 결국 카메라 앞에서 귓불까지 벌겋게 달아올랐다. 극우에 관한 10분짜리 우화 같던 이 프로그램이 유튜브에 오른 그날은 하필 만우절이었다.
고양이처럼 싸우기
“정치에 대해 잘 모르면서 내 친구나 다름없는 강용석·전여옥·나경원을 모독한다면 안티 변희재나 다름없기 때문에….” “친구세요? 만나지도 않고 술도 안 먹는다며 그게 무슨 친구예요. 하하하.” 자신은 누구와도 달라야 한다는 ‘명품 논리’로 살아온 낸시랭에게 하필 ‘진영 논리’를 들이대다니, 한 수 가르치러 왔다는 논객이 가르침만 받고 간 것도 당연하다. 평소 좌충우돌하던 이 보수 논객이 낸시랭을 저격하러 나선 것은 낸시랭이 포털 사이트 네이트에 정기적으로 기고하는 ‘뉴스&톡’에서 한 발언 때문이다. 칼럼에서 낸시랭은 전여옥·강용석 의원에게 “우리 셋이 아트로 세계 정복하자”거나 나경원 전 의원에게 “그렇게 억울하시면 저와 같이 비키니 시위를 하자”는 제안을 던졌다. “저 낸시만큼이나 ‘보수’를 사랑하시는 전여옥 의원님! 우리 같이 손잡고 멋진 작품해서 돈 많이 많이 벌어봐요! 앙~.” 낸시랭의 공격 화법은 독특하다. 남들은 싸울 때 발톱을 먼저 세우지만, 낸시랭은 자신은 무식하고 무개념인데다 돈도 좋아하고 미국 국적자라며 약점을 풀어헤친 뒤 상대방에게 윙크를 날린다. “그런데 저랑 너무 똑같아요!” 10년을 무개념, 노출증, 관심병이라고 공격받아온 낸시랭이다. 도발과 싸움의 내공이 없을 리 없다.
진짜? 가짜?
2003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란제리 퍼포먼스로 첫발을 내딛고, 2004년 광주 비엔날레에서 누드 포스터에 사인회를 하며 자신의 육체가 작품이 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늘 자신을 아티스트라고 소개하지만 비즈니스를 하기 원한다는 속내도 숨겨본 적이 없다. “국내 최초로 선보이는 연예인형 아티스트”라며 주저없이 자신을 신상품 선반에 올린다. 자신이 소비된다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을 전시해온 그는 새 놀잇감을 찾은 것일까? 전시장이든, 명품관이든, 서울 청담동 나이트든, 방송사든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는 곳에 자신을 던져온 엔터테이너의 감각이 지금 가장 재미있고 뜨거운 분야는 정치라고 속삭이는 것일까?
“우리는 정치적 이야기 말고 다른 말도 하잖아요. 왜 그중에서 정치적 발언만 예민하게 대하는지 궁금해요.” 토론에서 낸시랭은 천진하게 되물었다. 보수 논객으로서는 답하기 곤란한 문제다. 토론을 보고 난 뒤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것은 한 가지다. 길면 못 알아듣겠다며 상대의 논리에서 가장 누추한 부분을 짚어내는 감각. 이것은 내공일까, 아니면 그저 운이 좋았던 것일까. 상대가 문화방송, <한겨레>, <오마이뉴스>를 친북 매체라며 열변을 토하면 간단히 되묻는다. “근데 북한 쪽에 서 있는 매체가 뭐예요? 누가 그렇게 정했어요?” 이것은 전략일까, 본능일까. 낸시랭은 원래 똑똑한 사람인데 안 그런 척 해온 것일까.
조광희 변호사는 이날 토론을 보고 “낸시랭이 강용석·전여옥·변희재의 천적이 될 수 있는 이유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전시하려는 강한 욕망’을 가졌으면서도 그들보다 선량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는 트윗을 남겼다. 이것은 상대평가다. 그날의 토론 덕분에 낸시랭이 누구보다 영리해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낸시랭은 영악한가, 순진한가. 낸시랭은 지금 정치적인가, 비정치적인가. 이미 여러 해 전에 진중권도 같은 질문을 한 일이 있다. “백치미를 가진 것과 백치미를 연출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명품 밝히는 여성인 것과 그런 여성인 척하는 것 역시 전혀 다른 일이다. 문제는 낸시에게서는 이 두 차원이 잘 구별되지 않는다는 것. 그의 존재가 주는 당혹감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많은 이들은 낸시의 경우 전자에 가깝다고 믿는 모양이다. 하지만 누가 아는가? 사람들이 그렇게 믿는 것까지가 그의 전략일지, 아니면 이미 그는 그런 구분 자체가 의미 없어진 시대에 가 있는지.”(<호모 코레아니쿠스>)
우스운 것은 지난해 진중권이 다시 낸시랭의 ‘무개념’을 공격했다는 점이다.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한 낸시랭이 “더치페이를 하는 남자는 한 여자만 만나는 게 아니라 여러 여자를 만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라고 말하자, 진중권은 바로 “밥값 내주기 아까운 여자” “뇌에 주름이 하나 없다”는 표현을 쓰며 공격했다. 낸시랭은 “진중권씨, 제발 저에 대한 관심 좀 끊어주세요. 저를 그렇게 좋아하시는 건 알겠지만… 전 부담스럽네요. 저는 당신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거든요”라며 그 뒤엔 그와 말을 섞지 않으려 했다. 낸시랭은 변희재만의 천적이 아니다. ‘비평가’라는 타이틀을 쓴 이들의 맞수다.
언제까지나 ‘큐티, 섹시, 키티’ 낸시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낸시랭 인터뷰
“된장녀? 개념녀? 전 아무 생각 없어요”
사실 낸시랭은 예의를 중시하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권위나 직함을 내세우며 그와 이야기하자고 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낸시랭은 “아, 그러세요” 하며 바로 보수를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 ‘낸시랭 사용설명’을 위한 중요한 팁은 낸시랭과 이야기하고 싶으면 그와 그의 고양이 인형 ‘코코 샤넬’을 존중하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너를 알고 싶다”는 말도 솔직하게 해야 한다.
1. 변희재씨와 토론이 어땠는지.
너무 지루했고 답답했어요. 하지만 진행자도 없이 둘이서 얘기하는데, 게다가 그분이 10년 동안 뭘 써왔다고 하시니까 듣는 게 예의인 것 같았어요. 저는 핵심만 이야기하면 되니까 대인배의 자세로 들었어요.
2. 말이 길어지면 코코 샤넬을 어루만지던데.
저는 원래 그래요. 재미있거나 지루하거나 리액션이 절로 나오죠. 코코 샤넬 털은 정말 길고 부드러워요. 코코 샤넬은 8년 전 제가 일본에서 입양한 들고양이 인형인데, 계속 사랑을 주고 대화하고 전시도 다 데려가니까 특별한 존재가 됐어요. 전 물체에도 영혼이 있다고 믿어요.
3. 당신에게 변희재와 진중권은 무엇이 다른가.
변희재씨는 이번에 처음 봤고, 진중권씨는 스토커 같아요. 저를 너무 사랑하시는 것 같지만 말씀하시는 게 찌질해요. 전 진중권씨가 1천억원을 줘도 그와는 밥 안 먹어요.
4. 당신을 상처 입히는 악플이 있는가.
제가 변태라서 그런지 악플을 보면 미소가 지어져요. 저는 악플러든 열성팬이든 정말 감사하게 생각해요. 지금 이 순간에도 서울 인사동이나 평창동의 수많은 갤러리에서 전시가 시작돼요. 평균 1년 동안 작품을 준비해서 잘나가는 작가는 한 달, 신진 작가는 일주일의 전시 기회를 얻게 되죠. 하지만 아무도 그 아티스트를 몰라요. 무관심이 가장 큰 형벌이죠.
5. 총선 때 퍼포먼스를 한다던데.
4월9일에 서울 광화문 광장과 후보들 벽보,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앞에서 퍼포먼스를 하고요, 11일에는 투표 현장에서 다른 퍼포먼스를 하지요. ‘3분토론’이 나간 뒤 제 아트 세계를 이해하고 도와주신다는 연락들이 왔어요. 다큐멘터리 영상과 비키니 퍼포먼스로 투표를 독려하고, 제가 꿈꾸는 나라, 러브·피스·아트가 가득 찬 나라를 알릴 거예요.
6. 사회 참여가 많아졌다. ‘개념녀’로 변신한 것인가.
‘된장녀’든 ‘개념녀’든 제가 한 말 아니잖아요. 전 아무 생각이 없어요. 제가 팝아티스트로서 미디어와 TV를 넘나드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최초였기 때문에 보수적인 미술계가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을 거예요. 쭉 비난을 받았지만 저는 제가 루이뷔통 같은 명품을 좋아한다는 것을 숨긴 적 없어요. 남들이 쓰레기라고 하든 연예인이 되고 싶어 안달 난 애라고 하든, 전 그냥 저에요. 제가 항상 하는 말 있잖아요. “저스트 비 유어셀프!”(Just be yourself·그냥 있는 그대로의 당신을 보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