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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페이트)그시절 타입문의 우당탕탕 페스나 제작기
2001년 10월 TYPE-MOON 스튜디오 작업실 개설 (창립멤버: 나스 키노코, 타케우치 타카시, 키요베, 하가 케이타, OKSG) Fate/stay night 기획 스타트. 나스 키노코: 플롯 제작, 타케우치 타카시: 캐릭터 디자인 개시 시나리오 제작할 때는 혼자 있고 싶다고 어리광을 부려 사무소 제일 안쪽에 자리 배치 2002년 1월 코야마 히로카즈 영입. 작업 중의 손의 움직임을 디지털 카메라로 포착할 수 없었던 일화로 갓핸드 코야마라는 이명을 부여 2002년 2월 멜티블러드 시나리오 완성 2002년 3월 Fate 플롯 거의 완성 2002년 4월 첫 사원 온천여행 (군마현) 타케우치, 나스의 운전실력 “살아서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어”라고 각오를 다짐 나스, 장난으로 두부가게 근처서 드리프트했을 뿐 발언 OKSG, 차 안에 이니셜D CD 갖다 둔거 누구냐? …난가 발언 키노코, 여행지에서 Fate 플롯 나눠줘도 아무도 안봐주자 킬 리스트에 전원의 이름을 새김 2002년 8월 Fate 발매예정일 그 첫 번째. 원래는 동인게임으로 여름 코믹마켓에서 판매 예정이었음 코믹마켓에서 바스타월 제작 찬성파(타케우치) vs 반대파(나머지)의 대입으로 타입문 해산 위기 나스, 세이버루트 클라이맥스 직전 수술로 입원 BLACK 영입 "저 열심히할게요! 와, 이게 스케줄표인가요! …어라? 여기에 적힌 발매 예정일 벌써 한참 지났잖… 우와, 뭐야 ㅇ…" BLACK 스탠딩CG 채색 업무 시작 (코야마 생존률 상승) 2002년 9월 나스, 세이버 루트 탈고 후 Fate 작업 동결 멜티블러드 작업에 돌입 2002년 10월 에비스의 독일 요리 전문점에서 타입문 상업화 결의. 이른바 에비스의 맹세 2002년 12 Fate 발매예정일 그 두 번째. 멜티블러드가 여름 코믹마켓 예정이었으니, 페이트는 겨울 코믹마켓에서 발매! 라고 의기투합했던 기억. 어느 쪽이든 실현하지 못했음 C63에서 멜티블러드 판매 나스, 겨울 코믹마켓 발매를 위해 어떻게든 린루트 탈고 성공 2003년 1월 코야마, 외주 준 배경이 전부 나와서 그 이후 오니처럼 전부 리터치. 하지만 이것도 전부 BLACK한테 맡겨버리자 발언 BLACK "이른 새해부터 코야마한테 선물 받았는데 이거 반송되나요?" 2003년 2월 Fate 발매예정일 그 세 번째. 겨울 이야기니깐 겨울에 발매하자라고 했지만 어김없이 연기 사쿠라 루트 플롯 재구성 키노코와 타케우치의 밀담에 의해서 용기를 내서 이리야 루트 컷하기로 결정. 굿바이 이리야 2003년 3월 츠키바코(월희 합본판) 제작. 미니미니 시나리오 추가. 앗, 설마 사츠키 시나리오? “가르쳐줘! 미니 알퀘 선생!” 이었음 2003년 4월 상업화에 어울리는 사무소 개설 츠쿠리모노지 영입 동인서클 타입문 활동 정지. 나스, 집에서 작업 시작. 사쿠라 루트 제작 개시 2003년 5월 홈페이지에 그래픽 담당 모집 BLACK, 냉정하게 말하면 그래픽 담당 2명은 좀 무모했음 발언 타케우치, 마릿수에 안드는 나 아오츠키 "가볍게 문의를 넣었는데 후일 선고의 통지 메일이… 어라?" 2003년 6월 아오츠키 타카오 영입 2003년 7월 그래픽 팀, 여름의 배수진. 스탠딩CG 작업 완료 BLACK, 스탠딩CG 너무 많아서 확인 작업에만 하루가 날아갈 정도 코야마, 난 살아남았다고 발언 사쿠라 루트 탈고. 키노코 해방되다 코야마 "츠쿠리모노지 연출을 눈으로 마주하니 사쿠라 루트도 수정해서 그림 소재를 늘리는 방향으로 결정… 또냐" 2003년 8월 나스, H씬 시나리오 작성. "아사쿠사 다리의 마츠리, 에도가와 불꽃놀이 대회의 소리를 들으면서 H씬 쓰다니 살려줘" 2003년 9월 F 나스, 텍스트 수정 그 첫 번째. 츠쿠리모노지의 연출에 활력을 넣기 위해 시시한 문장을 삭제. 분기 텍스트 작성 개시. 리미트는 3주간 2003년 10월 그래픽 팀, 겨울의 배수진. 기본 그림 소재 작업 완료. Fate 체험판 공개 각각 개별 파츠였던 Fate가 착실하게 게임으로 하나로 완성되는 중 츠쿠리모노지 “역시 연출은 수수한게 최고라구요!” 후회 중 BLACK “이제 돌이킬 수 없다네, 나무관세음보살” 2003년 11월 나스 생일에 맞춰서 추억보정 효과를 노려봤지만 연기 알파판 완성. 테스트 플레이 타케우치, 총 플레이 시간 60시간 이상이라 발각 키요베, 발생조건이 불명확한 버그가 나와 풀죽음 나스, ‘그것(정황상 타이가 도장)’을 작성 시작. 리미트는 3일. 그래픽 팀, 그것의 그림 소재를 작성 2003년 12월 게임 제작 작업 거의 종료. 남은 건 디버그디버그디버그디버그디버그디버그 초회판 특전 fate/side material 제작 개시 2004년 1월 마스터업 인쇄물 관련 제작 개시. 패키지 담당, 불같은 7일간 점포 특전 제작. 예정된 온천 여행 취소 코야마 “판촉용 전화카드랑 전화카드랑 전화카드랑… 안끝나” 타케우치 “이런 바보라 미안해…” 공식 통판 특전 제작 OKSG “우리들 언제고 이렇게 만들것 같은데…” 사장 “우리들은 죽을 때 까지 이럴거야” Fate/stay night 발매 돌고 돌아서 우연히도 당초 예정된 시기에 내보낼 수 있었다는 것으로. 타케우치 “TYPE-MOON은 결과적으로 올라잇 이라는게 좌우명이니깐” 전원 “타케우치가 기뻐하고있어!” -------------------------------------------------------------------------- 우당탕탕 대환장 제작기
코이스타작성일
2024-11-28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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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오싹오싹 폰지사기 도요타 상사 살해사건
전국민 앞에서 살해된 도요타자동차와 상관없는 도요타상사의 사장 전국민 앞에서 살해되다. 도요타자동차와 상관없는 도요타상사 사기사건 1985년 6월 18일 도요타상사 니나노 아니 나가노 사장의 집에 취재진이 몰려 든다. 당시 2,000억엔, 당시 환율로 우리나라 돈 약 7500억(지금 환율로 하면 2조원)을 공중 분해한 나사장이 구속 된다는 정보를 듣고, 체포되는 순간을 생중계 하려고 30여명의 취재진이 몰려 든 것이다. 그날 4시 반 즈음 기자들 사이를 비집고 괴한 두명이 나사장을 죽이러 왔다며 품속에서 칼을 꺼낸다. 그리고는 바로 창문을 깨고 들어가 나사장을 칼로 찔러 버린다. 당시 33세 였던, 칼에 찔린 나사장은 병원으로 옮겨 졌으나 과다 출혈로 사망, 칼에 짤려 출혈 중인 장면이 방송에 그대로 노출 된 것이다. 나사장의 회사, 도요타상사에서는 ‘도요타 골드’라는 것을 판매 했다. 금 선물시장에서 금을 거래하며 수익을 얻는다고 금증서를 판매 했다는 것이다. ‘골드’는 우리가 아는 금이어야 하는데 정확히 ‘순금 패밀리 증권’을 투자라는 이름으로 종이 쪼가리를 판 것이다. 금 대신 주는 것이라는데 투자 후에는 반환도 안되고 현금화도 안된다고 한다. 1980년 당시 일본에서는 금괴 선물 거래가 유행이었다. 중간에 사기를 많이 쳐서 그랬는지 정부가 선물거래를 규제하게 되자 나회장은 종이로 거래하는 방식으로 바꾼다. 팔았지만 금을 주지는 않고 금은 도요타상사에 예치를 해야 한다고 한 것이다. 도요타상사에 쌓여가는 금을 보여주기도 했다. (나중에 확인한 바로는 모두 가짜였지만) 그리고 예치 시킨 금에 대해 이자를 준다고 한다 해안가로 밀려온 가짜 금괴 (도요타상사가 버린 것으로 추정) 이들의 방식은 우선 젊은 여성의 텔레마케터가 무작위로 전화를 해서 혼자 사는 노인들을 골라 냈다. 그러면 나사장의 조직들이 찾아가 “할머니 내가 아들이라고 생각해 줘!” “전골 재료를 사왔는데 같이 먹읍시다.” 처럼 인간적인 면에 호소를 했다. 그러다 안되면 장시간 눌러앉아 있거나 드러누워서 사줄 때까지 버텼다고 한다. 도요타상사의 내부 교육 비디오에서 밝혀진 내용은 절대 계약을 하게 할 요령이라며 “혼자 집에 있는 사람을 노려라” “은행 예금보다 다소 유리하다고 강조하라” “진짜 순금을 손에 갖게 하고 무게를 실감하라”등의 거짓말과 성공적인 화술을 구사 하는 방법이 나온다. 또한 “계약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집을 나오지 말아라!” “눌러 앉아라” “엎드려도 마다하지 마라” 등과 같이 영업 방법에 있지도 않은 방법으로 금괴증서를 강매하였다. 그렇게 모은 게 우리 돈 7500억, 약 3만명의 노인들로부터 정도를 모은 것이다. 60개 영업소에 직원이 7000명이나 되었다 한다. 그런데 ‘순금패밀리증권’을 팔다가 알게된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 금괴가 보관되어 있으니 시기가 오면 되면 반환해야 하는 부담이 있었던 것. 그래서 이들은 골프회원권처럼 시기가 지나면 사라지는 상품을 팔려고 했고, 다이아몬드 중 가치가 없는 다이아몬드를 영구적 자산이 될 것이라며 벨기에 다이아몬드라는 이름으로 팔기도 했다. 이외에 해외 신문사업, 항공사 사업, 경륜 발권소, 인도네시아 해군 장비 납품 사업, 아이티 군용 피복 공장 사업, 호주에 레저 클럽 회원권 등 사람들이 혹할 만한 일을 기획 중이었다. 신박하긴 하나 가치가 묘한 물건을 팔 수 있었던 비법은 사이비 종교의 포교 활동에서 아이디어를 가져 온 듯 하다. 실제로 모 종교에 꾸준히 기부를 했다. 일단 믿고 그에 대한 신념을 갖는 것. 회사에서는 그 신념을 심어 주고자 인사말부터 태도까지 철저하게 교육시켰다. 무엇이든 팔 수 있을 듯 한 자신감을 만들어 준 후 상품을 안겨 주면 그만 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잠깐 ‘도요타 상사’라 해서 ‘도요타 자동차’의 계열사는 아니다. 전혀 별개의 회사. 도요타 자동차의 돈을 관리하는 신뢰 있는 업체처럼 보이게 하려고 도요타란 이름을 그냥 붙인 것이다. 기왕 흉내내는 거 ‘도요타 골드’의 광고에 도요타 자동차를 등장 시키고, 도요타 자동차의 광고 모델까지 등장 시키며 도요타 자동차 관계사인 듯 보이게 한 것이다. 도요타상사의 계열사 중에 ‘카지마상사’도 있는데 그 역시 당시 유명했던 ‘카지마 건설사’에서 따왔다 한다. 1985년 도요타상사의 사원이 사기 혐의로 체포되면서 나사장도 참고인 조사를 받게 되는 일이 생긴다. 그런데 조사 다음날 체포를 앞두고 자택에서 살해된 것. 아마 무사히 체포 되었다면 안전 가옥에서 목숨은 보존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나사장을 찌른 그날 두 남자는 피투성이가 된 채로 밖으로 나와 “내가 범인이다, 그러니 잡아가라.”라고 외쳤다. 도망치지도 않고, 칼에 수 차례 찔린 나사장을 끌고 나와 무슨 정의의 사도인 듯 “87살의 노인을 속여서 850만 엔이나 편취한 놈이니 이렇게 되는 게 당연하지.”라고 한다. 당시 나사장을 살해한 이이다씨는 당시 56세 였고, 야노씨는 당시 30세 였는데 보도진에게 “누군가에게 부탁 받았다. 이름은 절대 말할 수 없다.” 라고 했다. 그 사건으로 그 돈들이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쓰여졌는지 모두 사라진다. 의혹 1 나사장은 돈이 모이니 람보르기니와 같은 자가용과 크루저 등을 사며 사치를 부렸다고 합니다. 자료 조사과정에서 그런 기사는 있는데 실물 사진이 없었다. 그가 살해된 아파트는 주택도 아니고 짱구는 못말려에 나오는 아파트 정도.. 의혹 2 살해범은 어떻게 현장에 들어갔을까? 일본 경찰은 그렇게 허술했을까? 의혹 3 남은 돈은 어디로 갔을까? 나사장이 죽은날 지고 있던 돈은 711엔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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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단독] 김건희 취임식 초대장, 정권 흔드는 리스트 되다
[단독] 김건희 취임식 초대장, 정권 흔드는 리스트 되다 (naver.com) 윤 대통령 취임식 초청 명단 입수(상)김 여사, 윤보다 많은 700명 초대공천 개입·관저 공사·주가 조작 등여러 의혹 관련 인물 다수 포함“사적 네트워크, 공적 영향력” 지적 ~~~ 24일 한겨레가 입수한 ‘20대 대통령 취임식 초청 명단’을 보면, 김 여사 명의로 취임식에 초대된 인물은 700여명으로 윤석열 대통령이 초대한 600여명보다 많았다. 대통령실 인사 가운데서는 한동훈 대표가 쇄신을 요청했다는 ‘한남동 8인회’ 가운데 한명인 이기정 의전비서관이 이름을 올렸다. 윤 대통령 부부의 각별한 신임을 받는 것으로 알려진 황종호 대통령실 시민사회수석실 행정관의 아버지 황하영 동부산업 회장 역시 김 여사 초대를 받았다.최근 윤 대통령 부부의 공천 개입, 윤 대통령을 위한 여론조작 의혹으로 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명태균씨도 미래한국연구소 회장 직함으로 아내와 함께 김 여사 초대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정권의 아킬레스건으로 떠오른 대통령 관저 불법 공사의 핵심인 21그램의 김태영 대표도 초청자 명단에 포함됐다. 윤 대통령에게 유리한 미공표 여론조사를 조작한 의혹을 받는 명씨는 공천을 대가로 돈을 받은 혐의(정치자금법 위반)로 구속돼 검찰 수사를 받는 중이고, 김 여사가 운영했던 코바나컨텐츠 첫 기획전시 때부터 협업해온 것으로 알려진 김 대표는 국회 국정감사 출석 요구를 피해 종적을 감춰 논란이 됐다.김 여사의 논문 조작 및 대필 의혹 연루자인 설민신 한경국립대 교수와 김기현 경인여대 교수 역시 취임식에 초대됐다. 설 교수와 김 교수 부부는 김 여사 논문을 대필해주고, 조작된 데이터를 사용한 것으로 의심되는 논문에 공저자로 이름을 올렸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설 교수 또한 김 여사 논문 대필 의혹과 관련해 두해 연속 국정감사에 불출석해 지난달 국회 교육위원회에 의해 고발됐다.과거 검찰이 김 여사 모녀가 23억원대 수익을 올렸다고 밝힌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관련자들도 대거 취임식에 초대받았다. 취임식 전달 보석이 허가된 권오수 전 도이치모터스 회장은 빠졌지만, 아내 안아무개씨와 아들 권혁민 도이치모터스 대표, 오아무개 이사가 초청자 명단에 올랐다.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 2차 주포인 김아무개씨가 주가조작 전주들을 일컫는 ‘비피(BP·주가조작 컨트롤타워 역할을 한 ‘블랙펄인베스트’의 약자) 패밀리’ 일원으로 언급된 김아무개씨와 이아무개씨도 김 여사 초대 명단에 포함됐다. 김 여사에게 명품 가방 등 500만원 상당의 선물을 전달한 최재영 목사 역시 최아브라함이라는 미국 이름으로 취임식에 초대받았다. 김 여사의 어머니 최은순씨가 경기도 성남시 도촌동 땅을 사들이면서 네차례에 걸쳐 349억원이 은행에 예치된 것으로 잔고증명서를 위조한 사건의 공범인 김아무개씨까지 김 여사 명의로 취임식에 초대됐다. [단독] 김건희 라인, 용산 권력 양분…“여사 몫 보고서까지 달라 해” (hani.co.kr) 윤석열 대통령 취임식 명단은? 윤석열 대통령 취임식 초청자 명단이 논란이 된 것은 취임식에서 ‘주요인사'(VIP) 자리에 김건희 여사가 연루된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의 주범인 권오수 전 도이치모터스 회장의 가족이 포함된 사실이 알려지면서다. 시사저널은 윤석열 대통령 취임 두달 뒤인 2022년 7월 해외문화홍보원의 대통령 취임식 촬영 사진을 분석해 권 전 회장 아들인 권혁민 도이치모터스 대표가 취임식에 참석했다고 보도했다. 이때부터 문제적인 김건희 인맥들이 대통령 취임식에 초대된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커졌다. 취임식 초청자 명단이 논란이 되자 행정안전부는 2022년 국정감사에서 대부분 명단이 개인정보보호를 이유로 삭제됐다고 밝혔다. 당시 취임자 초청자는 모두 4만5570명인데, 이들 명단이 대부분 없다는 것이다. 한겨레가 입수한 초청자 명단에는 초청 인사 이름과 함께 ‘대통령님’ ‘여사님’ ‘국민의힘’ 등 초청 주체가 기재돼 있다. 이중 ‘대통령님’ 초청인원은 600여명, ‘여사님’ 초청인원은 700여명으로 집계돼 있다. 초청 주체가 미기재된 카테고리도 있어 대통령 초청 인사가 추가로 있을 가능성 등도 배제할 수 없지만, 대통령 취임식에 대통령 인맥보다 부인 인맥이 더 많이 초대된 점이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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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조종사가 권총쏘는 이야기
현대의 모든 군인들은 무장을 휴대하고 전투에 임하고 전투기 조종사라도 예외는 아님. 전투기는 그 자체로도 매우 강력한 무기체계지만 격추되면 알루미늄 관짝이 된다는 사소한 단점이 있어서 이를 대비해 조종사들도 개인무장을 휴대함 조종사들이 본격적으로 총기를 휴대하기 시작한 것은 비행기가 전쟁에 본격적으로 투입된 1차 세계대전부터인데, 1머전 극초기에 비행기는 폭격이나 제공권 장악이 아니라 단순한 포병 관측과 정찰을 위해 투입되었기 때문에 권총의 휴대 여부는 딱히 중요하지 않았음. 그냥 들고나가고 싶은 사람만 휴대하고 나가는 정도? 하지만 비행기의 임무가 단순 정찰에서 CAS같은 근접항공지원이나 폭격으로 발전하게 되면서 곧 지상군에게 비행기란 존재는 반드시 격추시켜야 하는 중요목표가 되었고, 이 성가신 비행기를 조종하는 조종사는 저격수와 함께 사살 1순위가 되었음. 따라서 각국은 소총이나 야포, 그리고 대공포를 이용해 상대방의 비행기를 격추시키려고 했음. 이에 따라 격추시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거나-혹은 자살하기 위한 권총이 조종사의 필수품이 되었고, 거의 대부분의 조종사가 권총을 휴대하고 출격하기 시작했음. 조종사들이 휴대한 권총은 각국이 운용하던 제식 권총부터 조종사 개개인이 군에 입대하면서 가지고 온 사제 권총까지 다양했는데, 당장 조종사들이 입는 옷부터 통일되지 않았던 시기였어서 그럼. 사실 이당시의 권총은 생존용이라기보단 자살용에 가까웠음. 왜냐하면 1머전 초중기의 비행기는 너무나도 조약한 수준이라서 현대 기준에서 보면 모든 부분이 종이비행기 수준으로 형편없었음 방어력뿐 아니라 엔진 출력도 병신이라 전쟁 막바지인 1917년에야 100마력이 넘는 엔진을 장착한 비행기들이 등장했을 정도. 당시의 낙하산은 20kg가 넘었고, 조종사들은 20kg짜리 ‘짐덩이’ 대신 20kg어치의 탄약을 싣거나 기동성을 위해 낙하산을 내다버렸음 게다가 쌍팔년도를 아득히 뛰어넘는 ‘낭만의 시대’였던 특성상 낙하산을 가지고 비행하는 조종사는 비겁하거나 자신감이 없는 씹게이새끼로 여겨졌음. 당시에는 거의 대부분의 높으신 분들이 ‘유능한 조종사는 낙하산 따위는 생각하지 않는다’ 라고 굳게 믿고 있었고, 각국의 공군사령부는 조종사를 현재처럼 신경 쓰지 않았음. 아 물론 애초에 낙하산 자체를 조종사들한테 지급하지 않은 나라도 있었고 비겁하든 뭐든 조종사 살리는게 먼저라고 봤던 나라도 있었음 아무튼 간에 중요한건 당시의 항공기술은 매우 뒤떨어졌고, 이는 비행기의 생존성이 극히 떨어졌단걸 의미했음. 당시에 방염이란 개념이 존재할리가 없었기에 추락해서 찌그러진 비행기에 갇혀 산 채로 불타는 일이 지금보다 훨씬 많았으며, 그런 상황에 처한 조종사 중 많은 이들은 편리한 해결책을 위해 권총을 휴대하고 있었음. 그리고 시간이 흘러서 1머전 종전 이후 항공기술력이 발전하며 조종사들의 복장과 항공기의 무장도 크게 달라졌음. 하지만 여전히 조종사를 포함한 군용기 승무원들의 개인무장은 권총 뿐이었음. 아 사실 권총 말고 다른걸 휴대하신 분들도 있었는데 일본제국의 비행기 조종사들은 권총과 함께 일본도도 패용했음 격추당한 뒤에 반자이돌격이라도 하려했던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조종사의 개인무장이 권총으로 제한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는데, 조종사에게 지급되는 권총은 적지에서 마주친 적과의 교전용이라기보다는 야생에서의 생존수단, 즉 유사시 동물을 사냥하거나, 적 민간인을 위협해서 삥뜯는데 사용하라고 지급되는 측면이 강했기에 굳이 좁은 항공기 내부에 거추장스러운 볼트액션식 소총이나 기관단총을 쑤셔박을 이유가 없었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이 맞닥뜨렸던 전장은 2차 세계대전이었고, 그나마 ‘신사적이었던’ 서부전선이 아닌, 독일과 소련이 맞붙었던 동부전선이나 야만 그자체였던 태평양 전선에서는 적진에 낙하한 조종사를 잔인하게 사살하거나, 포로로 붙잡은 후에 고문하고 살해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음. 이렇게 되자, 조종사들은 동물들 사냥하라고 지급된 권총으로 최후의 교전을 벌이는 경우가 발생하기 시작했고, 몇몇은 이렇게 M1911을 전자동으로 개조해서 들고다니기도 했음 하지만 권총을 쏴본 군붕이들이라면 알겠지만 권총은 더럽게 안맞고 사정거리도 너무 짧으며 화력도 약함. 따라서 각국은 조종사만을 위한 생존용 총기 (Survival Rifle)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고, 이런 배경 속에서 탄생한게 나치 독일의 M30 삼렬총과 미국의 M-4 서바이벌 라이플, 그리고 M-6 ASW임 우선 M30 삼렬총의 경우, 사냥광이었던 괴링의 입김 때문에 독일 공군에 채택되었음. 이렇게 알루미늄 상자에 분해된 채로 비행기 내에 보관되어 있었고 주로 북아프리카 전선의 독일군 조종사들에게 지급되었음. 여기에는 청소 키트, 12게이지 슬러그탄 20발과 12게이지 버드샷 20발, 그리고 9.3x74mmR 소프트 포인트 소총탄 20발이 동봉되어 있었는데, 소프트 포인트 탄환이 지급된 이유는 조종사가 사람을 향해 총을 쏘면 당시 국제법에 위반되기 때문이라고… 그러나 정규군에 제대로 된 보급을 하기도 빠듯한 독일이 이런 고급 사냥총을 모든 항공기에 탑재하기에는 무리가 컸으며, 작동 구조가 매우 복잡한데다 나치 독일의 난잡한 생산체계 덕분에 단가가 매우 비싸졌음. 따라서 이 독특한 삼렬총은 1941년부터 1942년까지 단 2,456정만이 생산되었음. 생산된 총의 대부분은 공군 장교들이 사냥용으로 쓰거나, 사냥 매니아였던 헤르만 괴링이 자신과 함께 사냥을 즐기러 찾아온 인사들에게 선물로 주기 위해 사용했다고 함… 다음으로 M-4 서바이벌 라이플은 제 2차 세계대전중 개발이 시작되어 1949년부터 미 공군에 납품되었던 22구경 볼트액션 소총이었음. 주 목적은 적과의 교전이 아닌 야생에서 동물을 사냥하거나 개인 호신용으로 쓰기 위한 용도였기에 상대적으로 저위력이고 반동도 약한 22.lr탄을 사용했고, 비용 절감을 위해서 M265 22구경 사냥용 볼트액션 소총을 개조, 접철식 개머리판을 장착하고 무게절감을 위해서 목재 부품을 모두 제거했음. 따라서 소총치고는 가벼운 1.8kg의 무게를 가지게 되었음 성능에 만족한 미군은 1950년까지 약 29,000정의 M-4 소총을 생산해서 배치했음 M4 서바이벌 라이플은 분명히 좋은 무기였지만 몇 가지 단점이 드러났음. 우선, 22.lr의 성능이 호신용이 아닌 사냥용으로써는 생각보다 그닥이라는 불만이 있었고, 또 총기 자체의 내구도가 너무 약했음. 따라서 1950년, 미 공군은 Ithaca Gun Company에 새로운 조종사용 소총 제작을 요구했음. T39라는 이름으로 개발이 시작된 이 소총은 M-6 Aircrew Survival Weapon이라는 이름으로 미군에 납품됨. 접히는 개머리판에는 9발의 22구경 탄환과 4발의 .410 산탄이 보관되어 있었으며, 조종사는 발사핀 선택기를 사용하여 총탄을 발사할 총열을 선택해 발사할 수 있었다고함. 또한 M-6은 주로 B-52, B-1폭격기 승무원들에게 보급되었는데, 이들은 냉전 기간 동안 북극과 알레스카 지역에서 작전을 수행했기 때문에 방아쇠는 장갑을 착용하고도 사용할 수 있게 디자인되었음. 최대 사거리는 22구경 호넷탄을 사용할 경우 100m, .410 bore의 산탄을 사용할 경우 25m였음. 채택한 지 몇 년 후, 미국 조종사들은 이를 원하지 않았지만 M-6 ASW를 실제로 테스트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음.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기 때문임. 베트남군은 충분히 강했고, 결과적으로 미 공군은 큰 손실을 입었음. 조종사들은 때때로 낙하산을 타고 도망쳐야만 했고, 파라레스큐가 그들을 구출하거나-혹은 베트남군에게 붙잡힐때까지 그들 중 일부는 이 ‘서바이벌 라이플’을 사용해야만 했음 미군의 보고서에 따르면 베트남에서 M-6 ASW는 훌륭한 총기와는 거리가 멀었음. .410산탄은 실제로 다양한 사냥감을 사냥하는 데 편리한 수단이었고, 곤경에 처한 조종사는 신선한 고기를 요리할 수 있었으나 베트남에서의 주요 위협은 굶주림과는 거리가 멀었다는게 문제였음. 조종사는 적들과 쉽게 마주칠 수 있었고, 적과의 대치 상황에서 M-6은 거의 쓸모가 없었음. 여분의 탄약 없이는 겨우 몇 발만 쏠 수 있었으며, 베트콩과의 교전에서 .22구경의 위력은 크게 부족했음. 결국 70년대에 이 총은 민간에 불하되거나 폐기되었고, 의외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고 함. 이후에도 XB-70을 위해 개발되다 사업 자체가 망하고 M-6을 대체하지 못한채로 시제품 12정만 생산된 아말라이트 AR-5라든가 AR-5를 개량한 AR-7(이건 항공기 조종사용보단 민수용과 특수부대용으로 더 많이 팔렸음) 등이 등장했지만 정작 미군은 도입하지 않았고, 이스라엘 공군이 도입해서 써먹었다고 함. 하지만 ‘조종사용 생존 총기’라는 마이너한 총기 특성상 모든 파일럿들에게 이러한 총기가 보급되지는 않았고, 대다수의 조종사들은 그냥 권총을 들고 작전에 나갔음. 아래는 관련 조종사들의 증언임. ….(전략)….적대국가(여기서는 베트남)의 영토를 비행할 때는 그랬습니다. 해군은 저에게 스넙노즈 .38(길이가 3인치 미만인, 휴대하기 간편한 리볼버)또는 45구경 M1911을 지급받을지 선택할 수 있게 했습니다. 아니면 원한다면 다른 권총을 사서 휴대할 수도 있었습니다. 친구이자 동료가 9mm 자동권총을 직접 구매했습니다. (A-1 스카이레이더에 톱질한 산탄총을 휴대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저는 .38을 선택했습니다. 여러 개의 AK-47이 저를 겨누고 있는 상황에서 체포에 대비해 최후의 저항을 하기 위해 권총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직 미 해군 조종사, 베트남전 참전용사 홀스터에 넣은 .38 리볼버는 비행할 때마다 확인하고 복귀할 때 반납했습니다. 저는 항상 신호탄을 장전했는데, 주된 용도가 신호 보내기라고 생각했습니다. 적의 영토에서 하고 싶은 마지막 일은 권총을 휘두르는 것입니다. -전직 F-111 조종사 공군 조종사에게는 5발이 든 38구경 리볼버가 지급되었습니다. 만약 당신이 똑똑하다면 AK-47과 맞서지 않기 위해서 즉시 내다버렸을 겁니다. -전직 F-4/KC-135 조종사 알래스카에서 비행할 때는 권총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22구경이었 는데, 토끼와 뇌조를 잡아서 먹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국과 베트남에 있을 때, 저는 38 스페셜 리볼버를 휴대했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지급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웃으며 아시아에서 육탄전을 하고싶진 않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것은 무기라기보다는 장신구에 가까웠습니다. 다만 그것이 우리를 더 안정되게 만들었습니다. -전직 F-86, F-100, F106 조종사, 한국전쟁, 베트남전 참전용사 예전에는" S&W .38구경 리볼버를 휴대했습니다. 조끼에 맞는 다른 물건도 휴대할 수 있는 규칙이 있었습니다 (저는 알레스카에서 복무했습니다). 저는 보급계원한테 제 9mm 브라우닝 하이파워용 홀스터를 제봉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6발보다 14발을 쏘는 것이 더 나았고, 6발을 개별적으로 장전하는 것보다 탄창에 장전하는 것이 더 쉬웠기 때문입니다). 비행/탈출중에 스스로를 쏘는 것이 목적은 아니었기 때문에 총은 장전하지 않고 총알은 G-Suit의 주머니에 넣어 두었습니다. 저는 그 무기를 어떤 종류의 자기 방어용으로도 고려한 적이 없고, 오히려 사출 후 하루나 이틀 동안 밖에 있어야 할 경우 먹을 작은 동물을 쏘는 용도로 생각했습니다. 그다지 웃기지 않는 농담은 북극곰을 만났을 때를 대비해 마지막 한 방은 자살용으로 놔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북극곰은 인간과 친하지 않으며, 권총으로 곰을 막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전직 미 공군 조종사 저는 1970-71년 다낭에서 VMFA 115의 RIO(무장관제사) 였습니다. 우리는 S&W 38을 지급받았습니다. 우리는 어깨용 또는 벨트용 홀스터를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어깨용 홀스터를 선택했는데, G 슈트가 벨트 홀스터를 불편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별로 유용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몇몇 이들은 조종석에 M16이나 소드오프 산탄총을 몰래 넣었습니다. 탈출시 어떻게 가져갈 계획이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저희 비행대의 한 조종사는 거대한 대검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우리는 그가 탈출하게 된다면 다리가 잘리거나 더 나쁜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농담하곤 했습니다. -전직 미 해병항공대 장교, 베트남전 참전용사 베트남 출신은 아니지만, 원래 브루클린 출신인 매우 괴짜이지만 성 격 좋은 이스라엘 전투기 조종사를 알고 있는데, 그는 더 이상 전투기를 탈 수 없을 때까지 F-4 팬텀을 몰았고, 아랍 상공에서 격추될 경우를 대비해 항상 맞춤형 진주 손잡이가 달린 2인치 콜트 파이썬 357 매그넘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전직 미 공군 정비사. 저는 베트남에서 총을 휴대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모든 생존 키트를 대기실 상자에 넣어 두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아무것도 없어지지 않고 모두 반환할 수 있었습니다. 총을 잃어버리면 FBI 수사를 받아야 하므로 그런 일은 겪고 싶지 않았습니다. 전투기 조종사와 다른 사람들은 종종 권총을 휴대합니다. (공군은 짧은 M4 카빈총을 사출 좌석에 쑤셔넣는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막의 폭풍 동안 해군항공대의 두 친구는 개인용 개틀을 가지고 갔고, 다른 많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처음으로 전쟁에 나가는 사람들 중에는 걱정하는 친구나 친척이 총을 사거나 선물로 준 사람도 있었습니다. 한 명은 새 9mm 베레타를 선물받았고, .380 리볼버를 선물받은 이도 있었습니다. 베트남에서 많은 항공 승무원은 수류탄을 포함한 다양한 무기를 휴대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여분의 무게를 여분의 생존용 식량이나 무전기 배터리에 투자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보통 베트남 민병대나 북베트남군과의 총격전은 패배로 끝났지만 한 RA-5C 조종사는 .25 hideout을 꺼내 헬기가 들어오는 동안 자신을 잡았다고 생각한 두 명의 NVA를 쏘았고, 그는 구출되었습니다. -전직 미 해군항공대 장교 저는 1970년 첫 임무로 태국에서 B-52를 조종했고, USAF의 제식 권총인 .38구경 S&W 리볼버를 받았습니다. 100m에서 6번 중 6번은 표적을 맞출 수 있었습니다. 1990년대 후반에 저는 육군 예비역 동료들에게 제 첫 사격이 M1 Garand였다고 놀리곤 했습니다. 그들은 믿기 어려워했는데, 육군이 최소 1950년대 중반에 이 무기를 없앴기 때문입니다. 제가 1965년에 공군사관학교에서 훈련받을때까지 공군은 이 무기를 사용했습니다. 공군사관학교에 가기 전에, 저는 고등학교 때 권총으로 유타와 네바다에서 토끼를 사냥하곤 했는데, .357매그넘 리볼버와 .44구경 리볼버를 사용했었기 때문에 .38구경 리볼버를 다루는 것은 저에게는 간단한 일이었습니다. 전투 임무중에 저는 USAF에서 보급한 .38구경 S&W 리볼버를 비공식적으로 테스트했고 근거리에서 텔레비전 화면과 같은 얇은 표적을 관통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나서 USAF가 여전히 사용 중인 오래되고 약한 리볼버를 보완하기 위해 .38의 작약량을 낮췄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공군이 알루미늄 실린더가 달린 .38 초경량 “에어크루” 리볼버를 1,000개 이상 구매했기 때문에 이 탄약 [약장탄을 말하는듯?]을 구매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리볼버는 표준 .38 스페셜 탄약을 사용하면 폭발하는 성가신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쉽게 두개골이나 뼈에 튕겨져 화가 난 채로 피흘리는 적을 남겼습니다. 첫 번째 파병 동안 B-52에 있을 때는 약한 .38이 괜찮았는데, 대부분 적 지대공 미사일의 사거리를 넘어서 날았고 격추에 너무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B-52가 홍강 계곡과 하노이/하이퐁 지역으로 이동한 후, 지대공 미사일과 MiG에 큰 손실을 입었지만, 그것은 2년 후의 일이었습니다) 그런 다음 두 번째 파병을 준비하기 위해 더 나은 총을 가지고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번에는 B-52가 아닌 팬텀이었습니다. 저는 약 2개월 동안 비행기와 병력의 절반 이상을 잃은 부대에 갔습니다. (1972년 부활절 공세 직후, 미 공군이 다시 북쪽으로 진군했을 때). 그래서 호신용 무기에 대한 우려가 있었습니다. 저는 .44 Automag 을 사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하지만 44구경 자동권총은 F-4용 G-Suit와 함께 착용하기에는 너무 크고 무겁단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상자에 그대로 두었습니다. 저는 9mm 브라우닝 하이파워를 가지고 다낭으로 떠났습니다. 저는 항상 권총을 편안하게 사용했고 항상 100m 근처에서 맞닥뜨린 적을 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제가 비행한 세 가지 다른 유형의 지역에 대한 철학/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북베트남의 홍강 계곡과 같은 거주 지역에서 격추된다면 (세계에서 가장 인구 밀도가 높은 지역입니다) 논에서 저를 구출하러 오는 민병대와 북베트남 군인들에게 항복해야 할 가능성이 큽니다. 도망치거나 숨을 수 없다면 그게 해야 할 일이었고, 우리는 그들이 우리를 살아서 데려오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물론, 심하게 구타당하긴 하겠지만-일단 살아는 있었으니까 말입니다. 라오스의 호치민 루트에서 격추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북베트남 군인들이 그 지역을 통제했으며, 평화 협정에 사용할 “포로 거래”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저는 하노이의 감옥으로 보내질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습니다. 호치민 루트 밖에서 라오스에서 격추되었다면, 그것은 더 미묘했습니다. 주된 목표는 구조대가 헬리콥터와 A-1 또는 A-7로 나를 발견할 때까지 숨는 것이었습니다. 나쁜 놈들에게 발견되면, 총을 쏘고 도망가서, 당신과 그들 사이에 최대한 거리를 둔 다음, 다시 숨어들었습니다. 제가 그들을 100m 밖으로 따돌리고 엄폐할 수 있다면, 저는 대다수가 AK로 그 사정거리에서 저를 맞힐 수 없다는 것을 알았고, 구조대가 도착할 때까지 저는 “비교적” 안전했습니다. 캄보디아—잊으세요. 우리는 그들이 어떤 이유에서든 또는 아무 이유 없이 자국민을 학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크메르 루즈의 손에 사라진 모든 서양인은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제 선택은 숨는 것이었지만, 불가능하다면 죽을 때까지 총을 쏴댈 생각이었습니다. 남베트남은 라오스와 비슷했습니다. 대부분의 적의 통제 지역은 NVA(북베트남군)가 운영했습니다(베트콩 게릴라와는 대조적으로, 일반적으로 그들의 지역에는 포로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살아서 잡힐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상황은 상황에 따라 달랐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는 없지만 모든 옵션에 대비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저는 제 9mm 하이파워에 탄창 1개를 넣고 베트남 전역에서 150회 이상의 임무를 수행했고, 착용한 GI 웹 벨트 앞쪽에 여분의 탄창 6개를 장착했습니다. 위험한 임무에 투입될 경우, 추적탄이나 플레어탄을 섞어서 약 60발이 든 .38을 장착했습니다. 38구경 탄약은 무료로 제공되었기 때문에 연습하고 휴대할 수 있는 탄약이 많았지만, 9mm는 구하기가 더 어려웠습니다. 저는 또한 CIA 요원을 통해서 9mm ‘Swedish K’ 기관단총 (칼 구스타프 M/45) 2개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다낭에서 자주 공격을 받았고, 라오스 국경에 가까운 태국 북부의 기지에서도 두 번 더 공격을 받았기 때문에 보호를 위해 “후치 건”(무슨 총을 말하는지 모르겠음) 또한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조종석에 M/45 기관단총을 한두 번 실었지만 .44 AutoMag처럼 항상 방해가 되었습니다. 지휘소에서 근무하는 동안 무전망에서 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라오스에서 비행하는 FAC(전선통제관)인 USAF 소령이 추락했고 Pathet Lao(라오스의 좌파-친베트남 무장단체)가 그를 쫓아와 총을 쏘았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그를 살아서 데려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1시간 이상 적과 싸웠고, 그렇게 하면서 우리에게 그가 입은 모든 상처와 그를 사냥하던 소대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이는데 성공했는지를 보고했습니다. 나는 그에게 파라레스큐를 보내려고 노력했지만, 뜻대로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그는 이미 몇 발을 맞은 상태였다고 했고, 다음날 무전으로 그가 죽었음이 확인되었으며, 사령관은 그를 살려내려고 하지 않은 것에 대해 질책을 들었습니다. 한가지 기괴한 이야기는 Pathet Lao에 의해 포로로 잡혀서 파리 협정 당시 살아있었던 것으로 알려진 USAF와 NAF 승무원(350명 이상—다른 이야기입니다)은 결국 단 한 명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 소령은 CAR-15(특수부대에서 사용하는 짧은 M-16)와 일종의 반자동 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던것 같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이 무엇인지 물어볼 시간이 없었습니다. 태국 북부에 있는 제 F-4 비행대의 다른 이들은 .45구경 M1911과 .357 리볼버를 가지고 다녔고, 와이오밍 출신의 친구 한 명은 7인치 총열을 가진 Colt .45 싱글액션 리볼버를 가지고 다녔습니다. 제가 본 가장 특이하고 부러웠던 총은 베트남에 가기 전에 만났던 한 지휘관이 가지고 다닌 것인데, 바로 일체형 소음기가 장착된 .22 Ruger 반자동 권총이었습니다. 그가 그것을 가질 수 있는 ‘자격’을 받았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중략)…….. 테러 지역을 비행하는 모든 항공 승무원은 조종석에 가장 크고 최고의 무기를 휴대하고 사용할 준비를 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현재 우리의 적들은 제네바 협약을 존중하지 않으며 체포되는 일은 드뭅니다. 체포되면 다음에 일어날 일은 총격을 가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만들 것입니다. -전직 B-52, F-4 조종사, 걸프전-베트남전 참전용사 보면 알겠지만 거의 모든 조종사들이 단순하게 권총만 휴대하고 다녔단걸 알 수 있음. 이후에도 대다수의 조종사들은 특수한 서바이벌 라이플보단 그냥 권총을 들고 작전에 나갔던것 같음. 하지만 2010년대에 상황이 다시 변하게 되는데 이새끼들 때문임 전세계가 위아더월드로 ISIS를 공습하는 와중에 격추된 조종사가 제대로 된 포로대우를 받을리가 없었고 이는 곧 붙잡힌 요르단군 조종사가 끔찍하게 화형당하며 현실이 됨 이에 기겁한 네덜란드 공군은 공습에 참여하는 자국군 조종사들한테 MP9 기관단총을 홀스터에 넣어 휴대하게끔 했고 시리아 반군과 ISIS에게 자국군 조종사가 맞아죽는걸 본 러시아군도 조종사에게 20발짜리 스테츠킨 기관권총과 다량의 탄약을 휴대시키거나 아니면 아예 AK-74S같은 기관단총을 쥐어줬음. 근데 걍 권총 하나만 심플하게 휴대하는 경우도 있는거 봐선 여기도 조종사마다 케바케인듯 미 공군의 경우에는 3점사형 M-4에 착탈식 총열, 접이식 권총손잡이 장착 등의 개량을 거친 GAU-5 ASDW (Aircrew Self Defense Weapon) 를 2018년부터 도입했는데, ACES II 사출좌석 내부 공간에 이렇게 접어서 수납한다고 하며 현재까지 약 3천정 정도가 A-10, B-1, B-2, B-52, F-15C/D/E, F-16, F22 파일럿들한테 지급되었다고 함. 참고로 F-35는 US16E라는 새로운 사출좌석을 장착해서 GAU-5의 수납이 불가능하기에 권총을 지급한다고 여담으로 헬리콥터 조종사들의 경우 전투기보단 상대적으로 공간이 넉넉하고 추락했을때 적 보병과 맞닥뜨리기 쉬웠던 탓에 XM177같은 카빈을 가지고 타거나 아예 M-16같은 소총을 휴대하기도 했으며 아니면 그냥 권총만 가지고 다니기도 했음. 러시아군의 경우도 AKS-74U같은 기관단총을 휴대하거나 현재도 미국이나 영국의 헬기 조종사들은 M-4나 SA-80을 조종석 옆에 부착해놓음. 한국 공군과 육항대의 경우에는 K-5 권총과 S&W 38구경 리볼버를 조종사 개인무장으로 지급하고 있음.
하메스작성일
2024-11-19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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