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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약방의감초들
제가 일찍이 올렸던 <국내 연기파 배우>, <헐리웃 연기파 배우> 게시물 시리즈가 짱공 영화팬 유저분들께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요.... 초심으로 돌아가~ 이번에는 대한민국 최고의 감초 연기자들과 중화권 배우들을 시리즈로 다뤄보려 합니다.선정 이유와 방식은 지극히 제 주관적이라는 것을 알려드리며, 심한 욕설이나 비방은 삼가합시다. - 이문식 -1967년 11월생/ 약방의 감초 이야기를 할 때, 절대 빠지지 않는 한양대학교 연극과가 배출한 위대한 배우이자 ‘명품조연’ 이라는 용어 자체를 탄생시킨 원조 감초. 이 양반의 출연작을 일일이 열거하는 것이야 말로 노가다 중에 생 노가다...배우들의 성지인 대학로에서 오랜 기간 내공을 쌓다 영화판에 진출하여... 수많은 작품의 단역과 조연을 거쳐, 공중파 3사의 드라마까지 전 방위 공습. 구수한 사투리 연기와 익살스런 표정연기에선 당해낼 자가 없음.영화 <구타유발자>에서의 이문식을 본 사람이라면... 그가 코믹 연기뿐만 아니라. 무게감 있는 연기 또한 훌륭히 소화해 낼 수 있는 내공 충만한 고수임을 알아봤을터. 원래 대학로 연극배우 시절, 무시 못하는 정극 형 배우였는데, 매체 업계의 연출자들과 투자자들이 너무 코믹 캐릭터만 으로 활용하는 것 같다는 아쉬움이....그는 무슨 역을 시켜도 다 잘할 배우임. - 성지루 -1968년 10월생/ 2000년 초반, 시대를 강타했던 강철중 패밀리 중 한명으로, 감초계의 어른 격. 사실적인 대사처리와 엇박자의 호흡으로 많은 사람들의 배꼽을 빠트렸다. 극단 ‘목화’를 대표하는배우이며, 삶에 찌든 양아치 연기는 임창정도 적수가 못됨. 주로 뒤통수 잘 치는 간사하고 또 상황에 따라 우매한 판단을 하는 인물로 곧 잘 나오지만 그마저도 미워할 수 없게 만드는 독특한 매력을 발산하는 배우이다. 생활고로 보험 설계사 등 안 해본 일이 없는 실전파이며, 뺑소니를 당한 형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경찰들도 손 놓은 사건 자체를 본인이 직접 발로 뛰어 해결한 적이 있을 정도로... 집념과 의지의 사나이임. - 오달수 -1968년 6월생/ 극사실연기의 진수. ‘대두 배우’가 연기를 잘한다는 업계의 통설을 여실히 입증시킨 극단 ‘연희단 거리패’의 전설적인 배우이자 현재 극단 ‘신기루 망원경’ 대표. 박찬욱 감독이 대학로에서 연극을 보다 큰 머리와 인상적인 연기력에 반해 그를 중용했다고, 연극계에선 오래전부터 존경받는 배우였고, 당시, 그를 바라보는 연극계의 평은 ‘빛 보는 건, 시간문제.’ 쯤....... 되었다고.......개인적으로 연극 <남자충동> 과 영화 <올드보이>에서의 그 사실적 연기.....잊혀지지 않는다. 이 양반 연길 보고 있노라면..... 정말이지...‘감기가 싹 가시는거야~’ (올드보이 中 오달수 대사.) - 유해진 -1970년 1월생/ 그의 힘으로 이끌어 가야하는 영화가 계속해서 만들어 지고 있기에..... 그는 이제 더 이상 명품조연으로 불리기엔 민망한 입장일 터, 허나 영화계 데뷔 초기에는 누군가 꼭 집어 얘기해주지 않으면 절대 찾아낼 수 없었던 개미 같은 배우였다. 그러나 <주유소 습격사건>의 양아치 역과 <공공의적>에서 칼잡이 역 등이 대중들 기억에 각인되면서....그의 무한 롱런이 시작됨. 늘 불쌍하고 억울한 캐릭터에서 <부당거래>를 통해 얼마든지 이미지 변신에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음. 역할이 주는 이미지와는 달리, 그를 아는 지인들 사이에선 ‘인텔리 신사’로 통한다고 한다. 말수도 적고, 그렇게 잡학다식하다고..... 김혜수가 뿅간 이유가 있음. - 손병호 -1962년 8월생/ 선정의 이유는 단 하나임. <파이란>에서의 용식역.... ㅎㄷㄷ 했음.영화 자체가 주는 감동과 애잔함 그리고 배우들의 명연기의 향연...정말이지 행복했음. 그중 몇 안 되는 씬으로 대중들과 관계자들에게 확실히 각인된 배우 손병호. 이후 그가 맡은 상업 영화에서의 8할은 악역. 결국 잦은 악역 출연은 그에게 연기적인 부분에 있어 심각한 매너리즘을 선사한다. 위기를 느낀 그는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 연극판으로 돌아감. 또 무겁디 무겁던 이미지를 잦은 예능 나들이로 희석시키고, 좀 더 친 대중적인 노선을 걷게 됨... 오히려 재발견으로 해석되어.. 한동안 재기발랄한 그의 능력이 집중 조명 받았다. 위기를 피하지 않고 정면 돌파한 그의 미래가 더욱 기대됨. - 고창석 -1970년 10월생/ 부산 출신으로 구수한 사투리와 넉살 좋은 이미지로 최근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아마도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 작품은 김기덕 사단의 영화인 <영화는 영화다>가 아닐까? 극중 영화감독으로 호연하였는데, 얼마나 배역에 잘 녹아 들어갔는지, 실제 영화의 감독이 아니냐는 괴소문(?)에 시달리기도 했음. 이후, 영화의 저력이 대중에게 어필되고 롱런에 들어감. 예능 나들이로 연이어 홈런을 치고, 이미지적으로 크게 흥함.요새는 TV 드라마, 본업인 무대 등에서 개성있는 행보를 이어가는 중. 필자와는 연남동 중국집에서 우연히 만났다는...ㅋ 와이프분도 연기자 출신으로 상당히 미인이셨음. 머리가 상당히 크던데....ㅋ역시, 대두배우 불패론의 한 축임. - 박철민 -1967년 ?월 생/ 남도 사투리 연기의 양대산맥. (한 축은 이한위) 약속되지 않은 애드리브 연기로 같이 작업하는 연출자와 동료들의 평가에 있어 호불호가 갈리는 배우. 하지만 굉장한 촉을 가진 배우로써 힙합퍼로 치면 길거리 즉흥랩의 달인. 뿌리가 노동 연극이어서 그런지 연극적 또는 영화적 약속에 둔감하다고 본인 입으로 직접 밝힘. 대본에 쓰여져 있는 대로 연기 하지 않아 한때, 작가들에게는 기피 대상 1호 였다고... 허나 재기적인 기량과 인간냄새 나는 유쾌한 연기 영역에서의 존재감은 비교 대상이 없을 정도. 많은 대중들에게 사랑 받고 있음. 엄청난 생활고에 시달려 과일 장사도 오래 했고, 친형님이 뻑치기로 사망하기도 했으며, 과거 광주 민주화 운동에도 선봉에 서는 등. 인생자체가 드라마임. - 조진웅 - 1976년 3월생/ ‘꿈은 이루어진다’ 의 표본. 부산 극단에서 열심히 연극작업을 하다 무작정 상경, 각종 오디션을 보러 다니며 갖은 단역과 고생을 사서함. 그러다 유하 감독의 눈에 들어 <말죽거리 잔혹사>,<비열한 거리>를 통해 선 굵은 배우 계보에 연착륙, 중간 중간에 출연한 드라마에서 호연하여 인지도를 넓힌 뒤, 영화계에서 더욱 공격적인 활동을 개시한다.그가 작은 역할로 안 나오는 개봉 영화가 없었을 정도. 결국 오랜 설움 끝에 <범죄와의 전쟁>에서 김판오 역으로 전국에 ‘살아있는데~’ 열풍을 일으킴. 명품조연을 넘어서 이제 주연이 가능한 대형 배우로 거듭났다는 것이 정설. 멋진 배우 조진웅~! - 마동석 -1971년 3월생/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이색적인 배우. 전직이 이종격투 트레이너. ㅎㄷㄷ~ 그것도 어디 강아지 송아지 단체가 아닌 UFC, 프라이드의 챔프출신인 전설의 주먹 마크콜먼이 소속 되어 있었던 <팀 해머하우스>의 수석 트레이너.....진실로 마크콜먼의 전담 트레이너로 필요할 땐 스파링, 경기 세컨 까지 봤다고 함. <팀 해머하우스>의 소속 선수들인 케빈 랜들맨, 웨스 심스, 브랜든 힝클 등도 마동석과 함께 운동했던 식구들이라니...... 업계에서 강호동 쩌리 되는 거 시간문제임. 당시 영어 이름도 Don Lee 인데...... 이 Don자가 설마 이태어로 극존칭이라는 그 Don? 대부에서 알게 되었던.....ㅋ 하여간 이 엄청난 프로필을 감당한 사람이 김지운 감독.. <놈놈놈>에서 대사 한마디 없이 모든 것을 힘으로만 해결하는 무식한 곰역을 주고, 이래저래 소문 내 주었는지.... 역시 범상치 않은 신체조건과 또 나름 준수한 연기력으로 남자 냄새나는 마초 영화의 단골 손님. <이웃사람>,<범죄와의 전쟁>등을 통해 더욱 자신의 입지를 굳힘. ㅆㅂ.... ‘나 무술 배웠다. 건들지 마라’ 가 거짓말이 아니었어..판오네 식구들 줄초상 날 뻔 했다.ㅋㅋ - 신정근 -1966년 9월생/ 경상도, 충청도 사투리는 모르긴 몰라도 시켜 놓으면 짱 먹을 것 같은 배우. 능글능글하고 독특한 보이스가 매력적인 배우. 365일중 360일 이상 음주 하신다는 전설의 취권배우. 전자공학도로 역시 대학로를 대표하는 이색배우. 배우의 이름은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나 정작 얼굴을 보면 아~! 이 배우! 하게 되는ㅋㅋ 뭐 그런~전형적인 유형의 배우. 개인적으로 너무 좋아함. 희소성이 있는 배우임. - 김정태 -1972 12월 생/ 고생하면 또 빼놓을 수 없는 배우. 영화 <친구><똥개>를 통해 대중에게 알려지기 전 까지 정말이지 오랫동안 눈물 젖은 빵을 먹었던 대기만성형 배우. 연극계의 적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항상 국회도서관을 이용하며, 다량의 독서를 통해 역할구축에 힘썼다고 함. 수많은 오디션 낙방과 경제적인 좌절을 넘어선 진정한 부산 사나이. 최근 작품에서 쓸데없는 애드립을 많이 치는 것 같은데.. 그간의 설움에 있어서 너무 많은 것을 보여주려는 ..강박이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음. 굳이 그러지 않아도 <친구>에서의 도로꼬 같은 역처럼...짧은 대사 한마디, 우두커니 서서 찡그리는 표정 하나로 모든 것을 표현하는 멋진 배우가 되었으면...! -박원상-1970년 1월 생/ 대학로에서 연출, 연기, 극작이 가능한 3툴즈 예술인을 찾기란 쉽지 않은 법. 허나 그 모든 것이 가능한 이가 있었으니, 그가 곧 박원상. 대학로에서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예술가다.임순례 감독의 <와이키키 브라더스>, 최동훈 감독의 <범죄의 재구성>에서 여자 잘 후리는 선수로 나와 사실적인 연기로 전직을 의심 받기도 했으며, <부러진 화살>, <남영동1985> 등에서는 어느덧, 극에선 없어서는 안 될 중추적인 배우로써 활약했다. 또 숭실대 독어독문학의 출신. 고향인 대학로 연극계에서는 진작 스타지만, 다수의 독립영화, 상업영화의 크고 작은 역들을 통해 끊임없이 영화계의 문을 두드렸던 그는 이제 두 마리 토끼 사냥을 원한다. 이밖에 류승룡,윤제문씨는 이제 주연급이 아닌가 해서 빼고.....이대연,기주봉,안길강, 성동일, 조성하,안내상 등의 배우들을 다루려 했으나 손 아파 포기ㅡㅡ; 이밖에 또 어떤 배우들이 있을까요?ㅋㅋ 근데, 희소성이 생명인 것이 '명품' 이건만....명품이 너무 많다는....ㅡㅡ;
졸라맨2작성일
2013-04-10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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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위안부
위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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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8일 버마랑군에서 연합군 장교와 인터뷰 중인 중국인 위안부의 모습
종군위안부(한자: 從軍慰安婦, 일본어:從軍慰安婦(じゅうぐんいあんふ), 영어:Comfort Women) 또는 일본군 성노예(영어:Japanese Military SE.Xual Slavery)는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일본군의 성적 욕구를 해소하기 위한 목적으로 강제적이거나 집단적, 일본군의 기만에 의해 징용 또는 인신매매범, 매춘업자 등에게 납치, 매수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일본군에 징용 또는 납치, 매매되어 성적인 행위를 강요받은 여성을 말한다.
위안부의 구성원으로는 조선인을 포함한 중국인과 타이완인 등이 포함된다. 그 밖에 필리핀과 태국, 베트남과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일본 제국이 점령한 국가 출신의 여성도 일본군에게 징발되었다. 생존한 사람들은 하루에 30번 이상 성행위를 강요당했다고 증언했으며 일본군 위안부 피해국 가운데 유일한 유럽 국가인 네덜란드의 얀 할머니는 1990년에 세계 최초로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임을 밝혔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네덜란드령 동인도)에 살고 있던 얀 할머니는 KBS 다큐멘터리 <KBS 스페셜>과의 인터뷰에서 일본군의 성폭력을 피해 달아났다가 다시 일본군에게 잡혀왔다는 증언을 한 바가 있다. 얀 할머니의 고백 이후 엘른 판 더 플루흐 할머니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였음을 증언했다. [1]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1994년8월 31일무라야마 도미이치내각총리대신(총리)이 위안부에 대해서 사죄의 담화를 낸 바 있다.[2] 또한 1996년에 하시모토 류타로 총리 역시 위안부에 대해서 사죄의 편지를 보낸 바 있다.[3] 아울러 이 문제가 샌프란시스코 평화 조약이나 양국간 각종 조약(한일기본조약 등)따위로 법적으로 해결이 완료되었다고 주장하였다.[4] 한편 일본 측은 대한민국 정부 또한 미군을 위해 위안부와 비슷한 것을 운영한 적이 있었다고 주장한다.[5][6]
대한민국에 거주하는 위안부 피해자 본인들은 일본 정부의 사과 의지가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1992년부터 현재까지 서울특별시종로구에 위치한 대한민국 주재 일본 대사관 앞에서 매주 수요시위를 개최하고 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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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명칭
2개요
3증거
4차출 방법과 대상 그리고 규모
4.1유괴와 납치
4.2인원
5소송
6논쟁
6.1소수 주장
7국제사회의 일본의 반성 촉구
7.1미국 하원 본회의의 위안부 결의안
7.1.1경과
7.2각국의 위안부 결의안
7.3유엔 인권이사회 보고서
7.4수요시위
8관련 기사
9참고 자료
10같이 보기
11주석
12바깥 고리
[편집]명칭
일부에서 근로 정신대인 여자 정신대(女子挺身隊)와 위안부를 혼용해서 사용하지만, 여자 정신대와 위안부는 다르다. 여자 정신대는 일본 정부에 징용되고, 일반의 노동을 강요당한 여자를 일컫는 반면 위안부는 일반의 노동 대신에 성적인 행위를 강요당한 여자를 일컫는다. '정신대'의 '정신(挺身)'은 '솔선하여 앞장선다'는 뜻으로 적절한 용어가 아니다.
대한민국 관계 법령에서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라고 사용하고 있다. '위안부'라는 용어는 이 제도를 통해 '성적 위안'을 받은, 가해자 일본군 중심의 용어라는 문제가 지적되기도 하였으나 당시의 공식 문서에서 사용되고 있어 일본군 또는 정부의 개입 사실을 보여주는 용어라는 의미도 있다. 피해 여성 입장에서 본다면 이를 '성노예'로 부를 수 있으나 강한 어감 때문에 피해 여성들은 '성노예'라는 명칭에 부정적이다. '위안부' 관련 인권 단체인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서는 관련 용어에 관한 연구와 논의를 꾸준히 벌이고 있는데, 1995년 제3차 일본군‘위안부’문제 아시아연대회의 때부터 이 문제의 역사적 의미를 살리기 위해 '위안부'에 강제적·부정적 의미를 환기시키는 작은 따옴표를 붙여서 한국어로는 일본군 '위안부'라는 고유명사를 쓰고 영어로는 Military SE.Xual Slavery by Japan(일본군 성노예)로 쓰기로 결의하였다.[7][8][9]1998년 유엔 인권소위원회 특별 보고관의 보고서에서는 '일본군 성노예'(Japanese Military SE.Xual Slavery)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이 문제의 본질을 드러내는 국제적인 용어로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문서 내용.[10]
일본 정부는 공식적으로 '종군위안부'(從軍慰安婦)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으나, '종군'이라는 말에 내포된 자발적인 의미와 일본 극우 세력에서 쓰는 표현이기 때문에 옳지 못한 명칭이라는 지적이 있다.[11]
[편집]개요
(이 문단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위안부는 일제강점기 말기 전시체제 일본군 위안소로 연행되어 강제로 성폭행 당한 여성들을 일컫는 말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정부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치르는 동안 일본 군인들의 성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집단적 성행위 장소인 이른바 군대 위안소를 제도화하고, 식민지 및 점령지 출신의 여성들을 전선으로 수송하여 성노예 역할을 강요했다. 일본군이 영내에 설치된 위안소에 식민지 여성들을 끌고 가 병사들을 상대로 강제적인 성노리개로 삼았는데, 이를 자기들 용어로는 "위안부"라고 불렀다. 위안부란 말도 실제로는 완곡어법에 불과했으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성노예였다. 특히 문제가 되는 부분은 여성들의 의사에 관계없이 강제로 끌고 가거나 혹은 "일자리를 소개시켜 준다", "공장에서 일하게 된다"라고 모집한 뒤 태평양 섬 등지의 외딴 곳에 성노예로 보냈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해당 지역의 일본군이 항복을 거부하고 자폭할 때 일본군의 비밀 누설 방지라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 같이 죽도록 강요되기도 했다. 이를 옥쇄 정책이라고 한다.
당시 피해 여성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구타, 가해는 일상다반사로, 군도나 칼 등으로 몸을 긋거나 담뱃불로 지지는 등 가히 고문에 가까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매일 수십 명의 남자들을 상대하기에 성병에 걸리거나 임신 후 강제로 중절수술을 받고 건강이 악화되어 죽는 경우도 많았으며, 배식량은 극도로 떨어져서 영양실조도 많았다고 한다.
성노예 피해자들은 간신히 전쟁이 끝나도록 살아남았으나, 태평양 전쟁 이후 패전국으로서 일본의 전후보상 문제가 관련당사국들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되어왔던 것에 비해, 위안부는 일제의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선 오히려 '일본군과 놀다온 더러운 여자들'이란 잘못된 오해와 편견의 대상이 되며 억울한 질타를 받기도 하다가, 나중에나 진실이 밝혀지고 육체적 및 정신적 피해 등을 포함해서 평생 그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기에 지금도 일본 정부에 피해배상을 요구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이를 쉽사리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심지어는 심하게 왜곡해서 받아들이는 게 문제가 있다. 일본 측의 입장은 크게 3가지로서 '위안부는 자발적으로 참가했다', '정당한 대가를 받았다', '피해보상의 근거가 없다.' 등으로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자발적 참여의 근거로는 여성들의 서명이 담긴 문서와 일본 여성 참여의 증거 등이 있는데, 끌려온 여성들의 대부분은 글도 쓸 줄 모르는 경우가 많은데다, 취업 서류로 알고서 서명했다가 끌려간 경우라는 증언들로 볼 때 날조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대가론의 경우, 당시 '지불됐다'라는 임금 자체도 여성들에게 직접 전달되지 않았을 뿐더러 강제성과 인권 모욕의 경우는 대가로 어떻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란 점에서 논점이 이탈된다. 하지만 실제 당시 여러 기록이나 증언들을 보자면 위안부의 징집 절차에는 친일파 조선인이 다수 협력했다는 점에서 부끄러운 사실도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피해 보상의 경우 독일의 경우보다도 더 피해 보상을 해줘야할 문제다. 왜냐하면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정권은 전쟁으로 붕괴되어 그 후대 정권과는 완전히 분리되었고, 구 정부의 정통성 자체를 헌법상으로 부정하는 입장이다. 그래서 후대 정권에 전쟁 책임을 묻기는 좀 애매하지만, 도의적인 책임에 따라 후대 정권들이 나치정권의 시대를 후회하고 보상한다는 의미에서 배상을 하는 것인 반면 일본 정부는 그 때나 지금이나 기본적으로는 같은 정부다. 심지어 천황을 비롯한 국가 수뇌부 대부분과 군 지휘부도 대부분 전쟁 후까지 살아남았다. 전쟁 중의 지휘부 책임은 지금 정부가 계승해야 될 문제인 것이지만 정작 일본은 그 피해 보상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게다가 동양인 여성들의 피해 보상에는 굉장히 둔감하던 일본 정부는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홍콩 등지에서 백인 성노예 피해자가 나타나자 즉각 사과하고 피해 보상을 한 사례가 있는 등 이중적인 태도를 나타내고 있다.
[편집]증거
1945년4월 당시 중국 쿤밍에서 포로들을 조사했던 미 육군 조사보고서에는 일본 공장의 여직공을 뽑는다는 모집 공고를 보고 속아서 모집에 응했다는 당시 증언의 내용이 공개됐으며[12], 1937년12월 21일 중국 상하이 주재 일본 총영사관 소속 경찰관이 보낸 문서에 황군장병 위안부녀 도래에 관한 의뢰의 건’이라는 제목의 공문이 공개됐다.[13]
미국 의회조사국(CRS) 보고서에 미군이 미얀마에서 발견한 20여 명의 한국인 출신 '위안부'의 증언과 호레이스 언더우드 박사가 미국 정부에 보고한 일본군의 한국인 위안부 강제동원 기록, 네덜란드 정부문서기록보관소에 보관된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 자료 등을 증거로 제시했다.[14]
일본군이 조선인 부녀자 현황을 파악하고 이를 근거로 위안부를 강제로 징집했음을 뒷받침해주는 판결문 기록이 발견되었다.
[편집]차출 방법과 대상 그리고 규모
[편집]유괴와 납치
일본 요시미 교수가 1980년 우연히 발견한 위안부 관련 서류에는 중국 북부를 점령한 구 일본군의 참모가 위안소의 설치를 명령하는 내용 이 담겨 있었다.[15]
1956년에 중국에서 행해진 일본인 전범 재판으로 스즈키 히라쿠 중장의 자필진술서에서 조선인과 중국인 여성을 유괴해 위안부로 만들었다는 진술이 적혀 있다.
교토시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주제로 한 ‘전쟁의 진실을 말하는 모임’에서 1942년싱가포르에서 육군 헌병대 통역관으로 근무했던 나가세 다카시(永瀨隆·89) 씨는 “조선 위안부들은 모두 군용선에 실려 왔다”고 증언하였다. 그리고 당시 상부 명령으로 한반.도에서 온 여성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치러 와 있던 그에게 그 여성들은 “싱가포르의 일본군 식당에서 일하기로 돼 있었는데, 이곳에 도착하자 (일본군이) 위안부를 할 것을 강요했다”라고 하면서 억울함을 토로했다고 증언했다.[16]
인도네시아자카르타에서 위안소를 운영했던 일본인(아오치 와시오, 1967년 야스쿠니에 합사) 네덜란드에서 진행된 전범재판소의 재판에서 "아오치는 1943년6월 2일 군정감부로부터 매춘업소를 개설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의를 제기했지만 재차 지시를 받은 후 이를 수용했다"라고 군이 위안소 설치를 지시했음을 인정했다.[17]
일본 국립국회 도서관 보관되어 있는 극동 국제 군사 재판의 문서 중에 인도네시아 모어섬에서의 일본 육군중위에 대한 심문조서에는 현지 여성을 강제로 '위안부'로 만든 사실이 진술되어 있다.
최근, 일본군 위안부가 사용했던 콘돔이 발견되었다. [18]
[편집]인원
일본군 위안부 총인원은 정확한 자료가 발견되지 않았으나 쥬오대 요시미 요시아키 교수의 계산법에 의하면 약 20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편집]소송
한국인 등을 중심으로 위안부였던 사람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지만, 한일기본조약으로 해결 완료 등을 이유로 패소했다. 현재 일본 사법부에서는 전쟁 전 국가간의 배상이 법에 명시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일본의 전쟁범죄에 대해 인정하지도, 책임지지도 않으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나, 일부 법조인과 국회의원들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송신도 할머니의 재판을 변호하거나, 배상의 걸림돌인 전후보상법 개정을 시도하는 등 위안부 할머니들의 편에서 일하고 있다.[1]
2000년에 도쿄에서 있었던 여성국제전범법정을 통해, 히로히토 천황과 일본 정부에 유죄를 선언했지만, 피고인이 부재했으며 강제력이 없는 민간 재판이었으므로 이 선언은 현재의 상황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2008년10월 31일에 일본에 위안부 책임을 인정하는 첫 권고를 한 바 있다.[19]
일본 정부는 현재까지 배상 등에 소극적으로 대처하고 있어,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노령으로 사망할 때까지 시간을 끌어 연금을 지급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또한 2009년 일본 정부는 태평양전쟁 당시 강제 동원한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에게 후생연금 탈퇴 수당으로 1인당 99엔(1300원)을 지급하는 등 일본의 전쟁범죄에 대해 책임지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20]
[편집]논쟁
일명, '고노 담화'라고 일컬어지는 위안부 관계 조사결과 발표에 관한 고노 내각관방장관 담화에서 위안부 모집에 구 일본군이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이에 관여하였으며 강제연행을 인정하고 있지만, 일부 일본 우익 세력은 위안부는 강제연행은 없었으며 단순한 매춘부로, 인권침해는 없었다고 주장하며 고노 담화의 수정을 요구하고 있다. 이들은 유튜브 등의 매체를 이용하여 이러한 주장을 홍보하고 있으며, 동시에 일본에서 일본군 위안부 홍보활동을 하는 운동가들을 협박하여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거나 활동을 방해하고 있다.[21] 하지만 바우넷 재팬등의 일부 시민단체는 여전히 2005년8월 1일 도쿄에 바우넷 재팬의 전 대표인 아츠 야오리의 유산으로 일본군 위안부 홍보관을 설립하는 등 일본의 전쟁범죄를 고발하고 있다.[1]
[편집]소수 주장
안병직 서울대 경제학과 명예교수는 "위안부를 일본 국가권력이 강제 동원했다는 자료는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증언자가 있을 뿐인데, 이것은 참고자료에 불과하다. 강제 동원 증거가 없다고 해서 자발적이라는 것은 아니다. 강제와 자발 사이에 있는 엄청나게 많은 중간항이 있다. 한국에는 아직도 수많은 위안부가 존재하는데, 이들이 강제동원된 것이 아니라고 해서 자발적이라 말할 수 있나. 그들에게는 수많은 불가피한 사정이 있는 것이 아닌가?" 라고 말했다. [22]
군사평론가 지만원은 '수요시위 참가하는 할머니들의 건강과 혈색이 너무 좋아보인다.'고 이유를 들면서 '가짜 위안부가 아니냐?'면서 의혹을 제기했다. 그는 위안부를 '일본군 위안부'와 '종군 위안부', '정신대'로 구분한 뒤 "진짜 피해를 본 '일본군 위안부'는 전체 20% 정도이며 어려운 형편에 스스로 성을 판 종군 위안부가 80% 쯤 된다더라"고 썼다. [23]
일본 우익은 '유가증권' 개념인 '군표'를 사용한 것을 들어 위안소 제도를 일종의 공창제와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제도를 정당화하려고 하였다. 공창제와 비교해서 군 위안소는 전시라는 상황에서 군이 관리·운영함으로써 위안부 여성의 인권을 더 보장하기 힘든 면이 있었다.[24]
[편집]국제사회의 일본의 반성 촉구
[편집]미국 하원 본회의의 위안부 결의안
끊임없이 위안부 결의안 채택을 위해 노력한 미국 민주당 레인 에번스(Lane Evans) 전 하원의원
2007년 미 하원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된 위안부 결의안을 제출한 민주당의 마이크 혼다 의원
일본 정부에게 위안부 존재를 인정하고 이 문제에 대한 책임을 질 것을 요구하는 위안부 관련 결의안(House Resolution 121) H. Res. 759은 2001년 처음 미국 하원에 소개되었고 2006년에 미 하원 국제관계 위원회에서 통과되었다. 일본계 하원의원을 포함, 공화당과 민주당 통틀어 50명이 넘는 의원의 지지를 받고 있는 이 결의안은 일본정부의 강한 로비활동에도 끝내는 하원에서 만장일치로 정식 통과하였다.[25]
일본 정부가 결의안 통과를 저지하기 위해 하원의장과 주일 미국 대사를 지낸 민주당의 거물 토머스 폴리를 로비스트로 고용한 것으로 알려졌다.[26]
현지 시간으로 2007년6월 26일, 39대 2의 표차로 미 하원 외교위원회에서 결의안이 채택되었다.[27]
현지 시간으로 2007년7월 30일, 만장일치로 미 하원 본회의에서 결의안이 채택되었다.[28][29]
[편집]경과
1999년 미국 민주당 레인 에번스(Lane Evans) 의원, 일본군의 위안부 강제 동원 사실을 주장하여 미 의회 의사록에 기록으로 남기면서 이 문제를 이슈화. 레인 에번스 위원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에 의한 ‘위안부’의 사용을 비난하는 법안을 2000년부터 꾸준히 미국의회에 상정해왔다.[1]
2001년 - 1차 결의안 제출, 상정되지 못함
2005년 - 2차 결의안 제출, 상정되지 못함
2006년9월 12일 - 3차 결의안 제출, 상정되고 심의됨. 회기가 지나 폐기됨.
2006년 말 - 에번스(Evans) 의원 파킨슨병으로 정계은퇴
2007년1월 31일 - 미국 민주당 마이크 혼다(Mike Honda) 의원, 4차 결의안 제출
2007년2월 15일 - 하원 외교위원회 아태 환경소위원회에서 위안부 청문회 처음 개최
2007년6월 26일 - 결의안 외교위원회 상정, 찬성 39 대 반대 2로 통과
2007년7월 30일 - 하원 본회의에서 만장일치 투표로 결의문 채택
마이클 혼다 의원은 이 날 하원 본회의에서 "이 결의안은 나의 스승이자 동료 의원이었던 에번스 전 의원의 끊임없는 노력 덕분"이라고 말함[30]
[편집]각국의 위안부 결의안
2007년11월 8일, 네덜란드 하원은 일본군의 위안부 강제 동원에 대해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와 보상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하였다.[31]캐나다에서도 같은 해 11월 28일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에 대한 일본정부의 공식적인 사과와 책임을 촉구하는 위안부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하였으며[32], 12월 13일에는 유럽의회가 위안부 결의안을 채택하였다.[33]2008년3월 11일에는 필리핀 하원이 위안부 결의안을 채택하였다.[34]
[편집]유엔 인권이사회 보고서
유엔 인권이사회는 2008년10월 30일 발표한 보고서를 통하여 일본이 위안부 동원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사죄, 보상하여 피해자의 존엄성을 회복시켜야 하며, 이를 학생과 대중에게 알리고 부인하지 말 것을 촉구하였다.[35]
[편집]수요시위
이 부분의 본문은 수요시위입니다.
수요시위는 대한민국 출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매주 수요일마다 대한민국 주재 일본 대사관 앞에서 벌이는 항의 시위로, 1992년1월 8일에 10여 명으로 시작된 이래 현재까지 시위 참여 인원 3만여 명, 발표 문건 600여 건, 최고령 시위 참가자,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 지속된 집회이며 현재까지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1]
[편집]관련 기사
사카모토 치즈코. 조명되지 못한 필리핀 ‘위안부’문제. 일다. 2006년 6월 25일.
박유하. 위안부 문제, '일본 때리기'만이 능사인가. 프레시안. 2007년 4월 13일.
박희정. 역사교과서 논란과 한 ‘위안부’여성의 죽음. 일다. 2008년 12월 12일.
윤정은. 위안부운동 “지식인들 머리로 하는게 아니야”. 일다. 2009년 3월 18일.
[편집]참고 자료
위키문헌에 이 글과 관련된 자료가 있습니다.
미국 하원의 위안부 결의
H. Res. 759 : 위안부 관련 결의안
H. RES. 121 (Engrossed-in-House) : 미국 하원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된 결의안
EBS 지식채널 E
일제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생활안정지원 및 기념사업 등에 관한 법률
이슈 털어주는남자 133회-'미쓰비시와 말뚝'
[편집]같이 보기
미하원 위안부 결의안 121(en:United States House of Representatives House Resolution 121)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
스즈키 노부유키(ja:鈴木 信行)
일제시대의 강.간(en:Rape during the occupation of Japan)
나치독일의 강.간(en:Rape during the occupation of Germany)
전쟁 강.간(en:War rape)
태평양 전쟁
일본 제국
일본의 전쟁범죄
오카무라 야스지
무라야마 담화 - 무라야마 총리가 1995년에 발표한 담화
고노 담화
아시아여성기금
마이크 혼다
레인 에번스 - 미국 의회의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 채택을 위해 노력한 미국 하원 의원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이승연 - 일본군 위안부를 소재로 한 누드 영상집으로 파문을 일으킨 대한민국의 배우
일본의 성매매
성노예
가라유키상
백마사건(ja:白馬事件)
얀 루프 오헤른(Jan Ruff O'Herne)
주석
↑ 가나다라마http://www.kbs.co.kr/1tv/sisa/kbsspecial/vod/1383556_11686.html 일본군 위안부 세계가 껴안다 - 1년간의 기록 2006년2월 25일 방영
↑?閣?理大臣の談話 平成六年八月三十一日 首相官邸
↑아베 “위안부 사죄마음 변함없다”
↑アジア女性基金事業?施に際しての?理の手紙 首相官邸
↑http://www.nytimes.com/2009/01/08/world/asia/08korea.html?_r=1&scp=8&sq=Comfort%20Women%20Korean%20War&st=cse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67635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정신대연구회 (1997년 4월 30일).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위안부들 2 (증언집)》. 한울. ISBN 978-8946024175
↑군위안부 바로 알기 - 위안소/위안부. 한국정신대연구소. 2012년 1월 16일에 확인.
↑제3차 아시아연대회의 결의문 (HWP).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e-역사관 (2006년 12월 16일). 2012년 1월 16일에 확인. 관련 게시물 및 영문 결의문(게시물) 참고.
↑링크 제목, 기타 설명.
↑위안부란 용어해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e역사관
↑"위안부 동원 강제성 있어" 미 정부 기밀문서 발견(조선일보)
↑"일제, 위안부 강제동원 영사관까지 개입했다" 당시 일본 문, 군대ㆍ경찰 역할분담 입증
↑美의회보고서, 아베총리 위안부발언 공개반박 연합뉴스 2007-04-09.
↑요시미 교수 “日 정부는 위안부 진실을 외면”, 2007년 03월 12일 경향신문.
↑日軍 통역관 “위안부 군용선으로 강제연행”, 2007년07월 09일 경향신문.
↑"일본군 위안소 설치 지시 판결문 발견"<교도> 연합뉴스 2007-04-11.
↑2차 대전 일본군 콘돔 발견 - 중앙일보2009년6월 10일자 기사
↑유엔 인권위, 일본에 위안부 책임 인정 첫 권고
↑'99엔은 농락' 日 후생연금 수당에 분노 폭발
↑Daum 미디어다음 - 뉴스
↑'보수는 이렇게 말한다' 안병직 시대정신 이사장
↑지만원씨 '가짜 위안부' 의혹 제기 파문
↑김성재. ‘공창제’는 진정한 대안인가. 한겨레21. 2004년 10월 13일.
↑미 하원 결의안 관련 기사: Congress backs off wartime Japan rebuke
↑日정치인, 지지율 떨어지면 한국에 도발? 노컷뉴스 2007-03-07
↑'미 하원, 위안부결의안 ‘39:2’ 압도적 다수로 채택', 한겨레신문, 2007.6.27.
↑'美하원, 35분 만에 위안부결의안 만장일치 통과' 2007.7.31. 매일경제
↑'美하원 위안부 결의안 일지' KBS뉴스, 2007.7.31.
↑99년부터 3차례 발의… 이슈화, 조선일보 2007-08-01
↑네덜란드의회, 위안부 결의안 만장일치 채택, 《조선일보》, 2007.11.11.
↑캐나다도 日에 사죄요구, 《캐나다 한국일보 케이티타운》, 200.11.30.
↑(단신) 유럽의회, '위안부 결의안' 채택, 《MBC뉴스》, 2007.12.14.
↑필리핀 하원,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 채택, 《연합뉴스》, 2008.3.12.
↑유엔 "日, 위안부 동원 즉각 사죄.보상해야", 《매일경제》, 2008.10.31.
[편집]바깥 고리
나눔의 집 홈페이지
아래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홍보 만화 (또는 동영상) “다시 태어나 꽃으로”이다.
다시 태어나 꽃으로 : 한국어/만화
Born again as a flower : 영어/만화
もう一度生まれたら 花に : 일본어/동영상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e역사관 - 대한민국 여성가족부 제공
일본군 위안부 - 독도수호지기 제공
미국 국립 문서 보관소 태평양 전쟁 당시 미군이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를 조사한 자료가 보관되어 있다.
한국 정신대 문제 대책 협의회 홈페이지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홈페이지
일제 강점하 강제 동원 피해자 유족회 홈페이지
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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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저작권이 영국공식문서 같은 것에서 온지라;;
함부로 못올리겠더군요.
업로드 문제로 일부단어(강.간, SE.X, 반.도, 성.기)는 본 내용과 다르게 수정했습니다.
내용이 엽기라 올려봅니다.
황제네로작성일
2013-02-08추천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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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네이버 기사에 가끔 뜨는 헤드 뉴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10041836002&code=990000
이 기사에서 조선일보는 안철수 후보가 서울대에 업적이라고 제출한 논문이 공동저자 중 한명의 석사논문을 재탕했다고 얘기합니다. “두 논문
3개의 표, 6개의 그래프 100% 일치”라며 대단한 발견을 한 듯 들떠 있는 모습이네요. 이걸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심난합니다.조선일보에도 과학담당기자가 있을 테고, 꼭 과학 담당이 아니라도 최소한의 성의만 있다면, 그래서 서울대 측에 어떤
연유인지를 물어보기만 했다면 이런 한심한 기사는 안 썼을 테니깐요.
1) 학위논문은 원래 학술지에 게재하는 게 원칙이다다른 이의 석사논문과 서울의대학술지에 제출한 논문의 표.
그래프가 일치한 건 당연한 일입니다.석사를 받은 논문을 학술지에 게재(이걸 publish라고 합니다)했으니까요.부연설명을
하자면, 석사를 받은 논문은 50부 정도만 찍혀서 모교와 국회도서관을 비롯한 몇 군데 기관에 보관될 뿐, 다른 이들이 보기는
힘들잖아요.그래서 보다 많은 이들이 볼 수 있게 내용을 요약해 학술지에 싣는 것이고요, 그렇게 함으로써 다른 연구자들에게 인용도
될 수 있습니다.그런데 그게 왜 다른 이의 석사논문과 일치하냐고요?석사논문 실험을 할 때 혼자 하는 법은 없습니다.
지도교수를 비롯해 다른 이들이 그 연구에 도움을 주지요. 그래서 석사논문을 낼 때는 단독으로 내지만, 학술지에 실을 때는 도와준 사람들을 모두
저자로 포함시켜요.석사나 박사논문을 학술지에 게재할 때 저자가 열 명 이상이 될 수도 있는 건 그런 이유입니다. 안철수 후보가
공동저자에 포함된 건, 설사 그때가 군복무중이었다고 해도 석사논문을 도와준 이상 당연한 귀결입니다.
이게 제 학위논문을 퍼블리시한 건데요, 저자가 네명이나 되잖습니까?
2) 그 당시엔 학위논문을 가지고 연구비를 신청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서울대 생리학교실에선 1988년 석사학위를 받은 연구를 가지고 1990년 서울대병원 연구비를
신청했네요.이 대목이 이해가 안갈 수도 있겠지만, 그 당시엔 학위논문을 가지고 연구비신청을 한 뒤 새로운 연구를 하는 게
관행이었거든요. 이 관행이 생긴 이유는 연구라는 건 될지 안될지 모르는 일을 하는 분야이기 때문이어요.우리나라는 모험적인 연구를
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1년 단위로 결과보고서를 내고, 또 논문으로도 제출해야 하거든요. 만약 결과가 안나오면 연구비를 토해내야 하니까 이 일
저 일을 해본 뒤 된다 싶으면 그때 연구비를 써내는 게 관행이었습니다.일반 사람들은 이미 제출된 제자 논문을 가지고 연구비 신청을
하는 걸 이해 못하시겠지만, 그 시절엔 어느 누구도 이런 관행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이 관행은 1993년 한 야심찬 공무원의
등장으로 인해 사라지게 됩니다. 이미 제출된 석사논문 제목과 연구비신청서의 제목이 똑같다는 데 의문을 품은 그 공무원은 각 대학의 연구비를
모조리 뒤져 이런 사례가 한둘이 아니라는 걸 알아냅니다. 솔직히 이 감사에 걸린 교수들은 나름대로 다 열심히 연구하는 분들이었지만, 그리고 다른
교수들도 이게 관행이었다고 역설했지만, 몇몇 교수들이 징계를 받아야 했습니다. “제자 논문을 가지고 연구비 타내!”라는 질타에 맞설 논리를 갖고
있진 못했으니깐요.그 뒤 이런 관행은 조금 바뀌었고, 석사논문이 제출되기 이전의 연구결과를 가지고 연구비를 신청하게 됐지요. 아까
그거랑 이거랑 무슨 차이가 있겠냐 싶지만, 조삼모사는 사람에게도 필요한 덕목이더라고요.어찌되었건 88년의 석사논문이 90년
연구비신청에 이용된 건 비난받을 일은 아니어요. 게다가 석사논문으로 연구비를 신청한 분은 생리학교실의 김우겸 교수님이고, 안철수 후보는 그 일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사정이 이러함에도 조선일보는 말도 안되는 기사를 써서 안 후보를 공격합니다.이게 정말로 무지의
소치일까요?그렇진 않을 겁니다.기사를 읽는 독자들 중 과학계에 몸담은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어요. 그저 “어 정말
그러네”라면서 조선의 선동에 넘어가겠죠. “알고보니 거짓말쟁이에 의혹도 많다”는 댓글이 몇 개 보이더군요.일등신문인 조선일보가
노리는 건 바로 이런 부분일 겁니다. 뉴데일리의 빛나는 활약 덕분에 한동안 조선일보를 잊고 있었는데, 조선일보는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그나저나 안철수 후보를 존경해오던 1인으로서 마음이 아픕니다. 모든 국민으로부터 존경을 받던 분이 대통령 후보가 되면서 천만 이상의
안티를 거느리게 됐고, 또 상식 이하의 신문과 진흙탕 싸움을 해야 하니깐요.그래서 전 안철수 후보가 나오지 않기를 바랐지만, 이왕
나왔으니 어쩌겠어요. 이렇게라도 응원해야죠.앞으로는 블로그에 열심히 글을 올리겠습니다. 저를 다시 블로그로 불러주신 조선일보에게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안철수 논문 표절에 대한 내용이네요.표절 대상이 되는 학위논문지를 쓴 학생이 올린 글이라고 합니다.뭐 개인적으로 석사학위과정 중인 저로서도 논문 표절이라는 기사에 의문을 제기했는데...이 기사가 정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네이버에서 가끔 메인 뉴스로 뜨더군요.... 검색해서는 찾아보기 힘들더라구요.
짱나고로작성일
2012-10-05추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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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수다] 일본 관동군 소속 731부대 사진 (혐오 주의)
손발을 결박하고 무마취 상태에서 손으로 장기를 꺼내는 모습
생체 실험 장면을 지켜보고 있는 일본 군의관과 733 부대 관계자들
생체 실험을 당하고 있는 여성 피해자
세균 실험으로 피부가 검게 타버린 피해자
피해자의 가죽으로 표본을 만드는 모습
731부대가 사용한 이시이식 세균 도기폭탄의 모습(이시이 시로 = 731부대의 주모자)
며칠전 일본의 한 시민단체가 과거 일본 관동군 소속 731부대(속칭 마루타 부대)의 극비문서를 공개함에 따라 인간을 한 낟 실험쥐만도 못한 생체 실험 대상으로 삼은 일본의 만행이 드러났습니다.
일본 관동군에 소속된 731부대는 만주 하얼빈 등에 주둔하면서 1936년부터 1945년까지 약 9년간 중국인과 한국인, 러시아인 등을 상대로 발진티푸스와 콜레라 등 세균을 주입하는 생체 실험을 하였고, 마루타(통나무)로 불리는 731부대의 실험대상자만 3,000명이 넘으며 이들은 실험과정에서 대부분 숨진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사실 그동안 일본군 731부대의 세균전 관련 범죄는 반인륜 범죄행위로 지탄을 받아왔지만, 일본 도쿄 전범재판에서 세균전과 관련돼 기소된 전범은 없었고 일본 정부 역시 자료가 없다는 핑계로 관련 내용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한 시민단체인 '731부대의 실체를 밝히는 모임'은 교토의 국립국회도서관 간사이관에 보관돼 있던 731부대 관련 극비문서를 찾아내 이를 세상에 공표하기에 이릅니다.
이 단체가 발견한 극비문서는 일본 육군 군의학교 방역연구실에서 근무하던 군의관이 작성한 보고서로 731부대가 1940년부터 1942년 사이 중국 각지에서 벌어진 6차례 작전에서 세균 무기를 사용한 날짜와 살포량 및 1, 2차 감염자가 2만 5946명에 달한다는 내용이 구체적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별개이긴 하지만 이미 증인들과 증거가 나올만큼 나온 일본 위안부 강제 징집과 이번에 밝혀진 일본의 생체 실험 문제 등 일본은 자신들이 저지른 과오에 더이상 눈돌리지 말고 하루빨리 해당국의 국민들에게 무릎 꿇고 사죄를 해야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아래는 이번 일에 대한 일본 2ch 반응을 개소문닷컴 047 hyeok님이 번역해주신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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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군. 또 시작이야.
한국의 망상은 끝이 없다.
731 부대는 조선인이 많지 않았어?
왜 이런 시기에 이런 기사를 쓰지. 일본이 힘든 시기에 더 일본을 힘들게 할 작정인가?
이런 일 절대 없다. 100 % 날조다. 731 부대에 관련된 중요문서는 모두 미국이 가져갔다.
사죄는 얼마든지 하겠다. 미안미안. 하지만 돈은 못줘.
소문으로만 존재하는 731 부대가 원인이라고 꾸미는 건가?
남경대학살도 날조. 날조의 증거가 되는 동영상을 유튜브에 올렸으니까 봐줘.
페니실린의 효과가 재발견된 것이 1941 년. 세균전을 생각하는 것은 가능했겠지만, 실행에 옮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종군위안부 일도 그렇고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 거야?
한국도 그렇지만, 중국도 버블붕괴를 예상하고 돈이 없어질 것 같으니까 필사적으로 돈을 요구해 올거다.
아시히 신문도 이 뉴스를 보도했다. 날조라면 아시히의 죄는 크다. 적은 일본국내에도 있다.
사실인지 아닌지가 가장 중요하지만, 아사히신문등 좌파 일본 언론은 한국 레벨이니까 믿을 수 없다. 한국식의 국수적으로 이념을 앞세운 보도는 신뢰성 제로.
중국경제가 위험해지면 일본군의 만행을 물고 늘어진다. 한국도 마찬가지고.
한국과 아사히신문은 일본을 비방중상하고, 세계가 일본을 공격하도록 거짓을 흘려보내고 있다. 누가 아사히신문을 박살내 줬으면 좋겠다. 일본에 백해무익.
군대가 병기를 개발하는 것이 뭐가 문제야.www
731 부대가 방역부대고, 위생과 전*방지의 역할밖에 하지 않은 것은 미국 정부문서가 증명하고 있다.
일본의 사죄를 주장하는 일본내부 세력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한국의 반일교육을 개선하는 것은 어렵다. - 친일파를 위한 변명의 저자 " 김완섭 "
일본은 정말 멍청이다. 60 년이나 전의 애매한 데이터를 가지고 비밀문서발견이라고 떠들다니. 누구도 납득할 수 없다.
넷우익은 세균병기까지 날조라고 말하는 건가?
↑ 세균병기는 아군까지 위험해질 가능성이 높아서 사용할 수 없었다. 스스로가 만든 세균에 아군이 감염되지 않도록 항체를 만들지 않으면 실전에 투입할 수 없으니까. 동남아에서 전*으로 고전한 구일본군에 그런 기술력은 없었다.
↑ 실제 일본이 세균전을 했으면 미국이 이것을 빌미로 원폭을 투하한 악행에 대해 변명거리로 삼았겠지.
↑ 전* 예방을 위한 대책으로서 연구한 것이지 병기로서 연구한 것은 아닌 것 같다.
↑ 이번에 발견된 데이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전* 피해조사일 가능성도 있지.
한국이 보기에는 일본군의 의료활동도 세균전, 고용되서 일한 것도 강제노동, 돈 벌러 일본군을 따라다닌 것도 강제연행입니다.
영국은 외국에 알려지면 불리한 기록은 파기한다. 일본도 이를 배워야한다.
설사 일본이 세균병기를 사용한 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세균병기보다 원자폭탄을 사용한 미국이 *들이다. 일본의 언론이라면 731 부대 같은 것보다 원폭을 사용한 잘못을 알릴 의무가 있다.
절묘한 타이밍에 이런 자료가 발굴되는군, 이걸로 중국이 분노한다든가 하는 흐름으로 흘러가겠지. 안 봐도 훤하다. 1 년 일하면 집한채를 살 수 있는 종군위안부, 세균전의 전문가인 「 위생방역 」부대. 이야~ 일본제국은 굉장했구나.
강제연행 → 단순한 징용으로 노예매매와는 다르다.
종군위안부 → 단순한 매춘. 돈을 받고 전쟁터에서 매춘하고 있었을 뿐.
731 → 검역부대가 어느사이엔가 생체실험부대로 둔갑. 증거도 없는 날조.
아사히신문은 중국공산당의 지시를 받는 빨갱이. 일본에서 쫓아내야 한다.
화학병기의 사용은 중국군과 러시아군이 먼저 했다. 일본은 이에 대항했을 뿐이야. 중국과 러시아가 이를 비난할 자격은 없다.
이 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무기로서 전쟁중에 사용한 것이니까 문제는 없다. 중요한 것은 생체실험이 있었는지 없었는지의 문제인데 날조는 있어도 생체실험의 증거는 없다.
한연작성일
2011-10-18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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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일곱시내고향님 글 왜 삭제하셨나요?
응? 글 왜 삭제하셨나요??
짱공은 댓글 달아도 글이 삭제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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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는 어디 타임머신 타고 왔는가?위의 말들이 논파된지가 언젠데 아직도 이러고 있는가~~박정희가 일본 군관학교에 입학했다는 명확한 사실이 있는데 광복군이라 주장하는 이유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그리고 혈서 문제에 관해서,출처가 '반일, 친북'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라 못믿겠다는 건 또 무슨 어거지 소린가? 허허~뉴데일리는 무조건 신뢰하고 민족문제연구소 자료는 무조건 못믿겠다는 말인가?엄밀히 말하면 진정한 출처인 저 만주일보는 현재 일본국회도서관에 소장 중인데자네 주장의 신빙성을 얻으러면 일본으로 건너가 저 자료의 허구성을 입증하면 되는 거 아닌가? 안 그런가~?만주일보가 폐간되었기에 사실이 아니라는 말은 정말 무지의 소산이라네,, 만주일보의 역사적 변천을 한 번 알아보게나,,게다가 저 신문기사의 내용에 부합하는 이낙선과 유증선의 발언은 들어보았는가?친일인명사전 발간 금지에 대한 유족들의 법원 신청이 기각 되었다는 건 아는가?자네가 주장하는 내용들은 대부분 그 당시 우수수 쏟아져 나왔다가 법원 판결 이후에 사그러 들었었다네,,
장지연에 대해서는 추후에 시간이 나면 따로 말하겠다만, 기본적으로 그 이후에 친일 행각이 있었다네,,자네 장지연이 친일인명사전에 어떻게 등재되어 있는지 보았는가?아니, 친일인명사전 자체를 보았는가?자꾸 선동, 선동하는데 오히려 선동 당하고 있는 건 자네가 아닌가?자네가 이런 자료를 올리는 심리적인 배경은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뭐 특별히 박정희를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네, 허나 사실관계는 조금 더 분명했으면 하는 바람이네,개인적으로 친일인명사전이 조금 수정되었으면 하는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 말일세.
다 떠나서 자네의 행동이 더욱 얼척없었네,, 하~처음에는 신문기사 자료만 올려놓더니, 그것만으로는 어그로를 끌기에 부족하다고 느꼈는지곰새 슨상님을 추가시켰네, 그려?자네가 이런 글을 쓰는 건 진정 박정희를 옹호하고 싶어선가, 아니면 여기서 난동을 피우고 싶은겐가?뭐, 결국 자네의 자유니 상관 없네만은,적어도 사내라면 보다 건설적이고 정당한 행동을 하는 편이 낫지 않나 싶은데 말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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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혈서 논란에 대해 신빙성을 제기한 일곱시내고향의 글에 제가 달은 댓글입니다.
내가 나름 공들여 적은 댓글이 날아가버린 줄 알고 깜짝 놀랐으나,
다행히 Ctrl+C 해논 게 살아있었네요~
조금 더 이야기 해보고 싶었는데, 아쉽군요,,
그런데, 현무의계시로도 활동하시는 건 게시판에 글을 하루에 다섯 개 이상 못쓰기 때문인가요?
어떤 면에서는 참 고생 많으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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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 20여명에게 당한 강.간묘사 보고서 공개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 20여명에게 당한 강.간묘사 보고서 공개
일본에서 "에조 보고서"라는, 편지 형식으로 된 정식 보고서가 있는데 에조라는 사람이
명성황후의 시해 장면을 아주 정밀하게 묘사해놓았다.
먼저 낭인들이 20명 정도 궁에 쳐들어와서 고종을 무릎 꿇게 만들고 이를 말리는 세자
의 상투를 잡아 올려서 벽에다 던져 버리고 발로 짓밟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 명성황후를 발견하자 옆구리 두 쪽과 배에 칼을 꽂은 후 시녀들의
가슴을 다 도려내고 명성황후의 아랫도리를 벗겼다.
그리고 돌아가면서 20명이 강.간을 했다.... 살아있을 때도 하고 한 6명 째에 죽어있었는
데도 계속 했다.. 시체에 하는게 시간이고 살아있는 거에 하는게 윤간인데 명성황후는
시간과 윤간을 다 당했다. 그리고 그것을 뜯어 말리는 충신의 사지를 다 잘라버렸다. (에
조는 하지 않았다)
어떤 놈들이 한 나라의 황후를 그렇게 대하는가. 이 경우는 고대에도 근대에도 절대 찾
아볼 수 없다.
그렇게 한 후 너덜너덜해진 명성황후의 시체에 얼굴부터 발 끝까지 차례대로 한 명씩 칼
로 쑤셨다. 죽은 후에도..(이건 에조도 함)
그리고 여자로써 가슴도 도려내는 큰 수치를 당했다.그것을 길거리 서민들이 다 보고있
는데서 시행했다.
그 다음에 명성황후 시체에 기름 붓고 불로 활활 태웠다.
일본 사학자가 이 문서를 발견하고 수치스러워서 공개를 안 했다고 할 정도
그리고 공개를 2002년 폴란드전 때 했는데 조중동 어디에도 기사를 실지 않았다.
범인중 상당 수가지식인들이었고 그 중에 여섯명은 유학파였다. --
명성황후, 시해 전 '능욕'당했다" [단독발굴] '에조 보고서' 일본서 입수 국내 첫 공개 정지환 기자
침략과 저항, 지배와 피지배의 불행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일본과 한국. 21세기를 맞
아 처음으로 치러지는 월드컵 공동개최를 계기로, 두 나라가 불행했던 과거를 정리하고
새로운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그러나 그러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발생했다. 양국 정상이 참여한 가운데 월
드컵 개막식이 열리던 바로 그날, 일본 정부의 대변인인 후쿠다 야스오 관방장관이 "핵
무기 무장" 발언을 한 것이다. 물론 일본 정부는 "진의가 잘못 전달됐다"면서 적극적인
해명에 나섰지만, 한국인들에겐 지금까지 망언 파문 때마다 일본이 보여온 '치고 빠지
기'의 전형적 수법으로 비쳐질 뿐이다.
우리는 또다시 터져 나온 이 '망언'을 통해 진정한 한일관계의 재정립이 그렇게 쉬운 일
만은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절감한다. 그렇다면 한국과 일본이 과거를 정리하고 새로
운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방법은 정녕 없는 것일까. 물론 그 방법은 있다. 불행한 역사
에 대한 철저한 진실 규명의 첫걸음을 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잊을 만 하면 터지는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과 각종 망언, 그때마다 냄비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가 식어버리는 한국의 반일감정은 이제 더 이상 '미래지향적 이웃사촌'이 되
는 방법이 될 수 없다. 일본의 역사왜곡을 규탄할 때는 선봉에 서다가도 국내에서 친일
잔재 청산 주장만 나오면 침묵을 지키거나 딴지를 거는 기득권 세력과 수구언론에 이 일
을 맡겨둘 수도 없는 상황이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숨겨진 진실을 파헤친 이 글은 바로 그러한 문제의식에서 쓰여진
것이다. 다시 말해 19세기 막바지에 발생한 이 비극적 사건이 20세기 전반기를 점철한
한일 두 나라의 불행한 인연의 첫 단추였다는 것, 이 잘못 끼워진 첫 단추를 바로 채우
지 않고서는 전향적 한일관계의 정립은 단 한 발짝도 앞으로 갈 수 없다는 것이 이 글의
문제의식이다.
물론 지구촌 최대의 경사인 월드컵 기간 동안에 '악몽의 역사'를 거론하는 것은 시기적
으로 적절치 않다는 지적이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였을까. 주간 <오마이뉴스> 3호에
이 글이 처음 실렸을 때, 국내 언론사 중에서 관심을 표명한 곳은 단 한 곳도 없었다. 한
작가가 어렵게 찾아낸 명성황후 최후의 진실, 그 단말마적 비명은 '메아리 없는 외침'으
로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불행한 역사의 회상은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니며, 망각과 방치로 결코 치유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유태인들이 왜 시기와 장소를 구분
하지 않고 끊임없이 나치의 범죄 행위와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전 세계인에게 상기시키
려 했는지, 그들보다 더 참혹한 과거를 가지고 있는 우리는 그 진의를 깨달아야 할 것이
다.
따라서 전 세계인이 주목하는 한일 월드컵이야말로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진실을 언급하
기에 가장 적절한 시점이라는 것이 기자의 생각이다.
그렇다면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진실은 무엇인가.
명성황후 시해사건 직후 일본 낭인 중 한 명이 작성해 일본 본국으로 비밀리에 보낸 보
고서가 있었다. 사건 발생 71년 만인 1966년 한 일본인 역사학자에 의해 최초로 공개
된 '에조(英臟) 보고서'가 바로 그것이다. 이 보고서는 그 동안 역사학계 일부에만 알려
져 있던, 명성황후에 대한 일본인들의 '능욕(凌辱)'과 '시간(屍姦)'의 근거가 됐다.
그러나 이 문서는 그 존재만 알려져 있었을 뿐 전문(全文)이 국내에 입수되거나 공개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최근 작가 김진명씨가 이 문서의 전문을 찾아내 기자에게 전달했
다. 지금부터 이 문서를 '나침반과 지도' 삼아 107년 전에 발생한 '아프지만 결코 잊어서
는 안 될' 그 날의 진실을 찾아 역사기행을 떠나보자.
1. '에조 보고서'는 어떻게 작성됐나
1895년 10월 8일 새벽.
일본의 군인, 외교관, 언론인, 거류민, 낭인 등으로 구성된 암살단은 경복궁에서 조선 침
략의 최대 걸림돌인 명성황후를 제거하기 위한 비밀작전 '여우사냥'을 수행하고 있었
다.
광화문 등을 통해 궁내로 난입한 그들은 무단 침입을 꾸짖는 고종의 어깨에 무례하게 손
을 얹어 주저앉혔으며, 세자의 상투를 잡아당겨 방바닥에 내팽개치고 칼등으로 목줄기
를 후려치는 행패를 부렸다. 그들의 행패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왕비를 참혹하게 살
해한 뒤 기름을 부어 시신을 불태우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그날 오전 9시 20분. 주한 일본공사관 수비대 소속 니이로(新納) 해군 소좌는 본국 대본
영 육군참모부에 한 장의 전문(電文)을 보냈다. '극비(極秘)'라는 붉은 낙인이 찍힌 이
전문에는 '국왕무사 왕비살해(國王無事 王妃殺害)'라는 문구가 짤막하게 적혀 있었다.
그것은 일본 정부의 공식 라인을 통해 '여우사냥'의 성공을 알린 보고서였다.
이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던 을미사변(乙未事變)의 전모다. 그러나 어
느 때부터인가 그것은 '절반의 진실'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당시 상황
을 기록한 별도의 새로운 문서가 뒤늦게 발견된 것이다.
'별도의 새로운 문서'가 작성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1895년 10월 9일.
▲ 에조의 보고서
을미사변이 터진 바로 다음날 작성된 또 한 건의 보고서가 일본 본국으로 날아왔다. 조
선 정부 내부(內部, 요즘의 내무부) 고문의 직책을 가지고 있던 이시즈카 에조(石塚英
藏)가 일본 정부의 법제국장관인 스에마쓰 가네즈미(末松謙澄)에게 별도로 보낸 장문의
보고서였다.
그렇다면 이시즈카 에조는 어떤 인물인가. 오랜 추적 끝에 '에조 보고서' 전문을 입수한
작가 김진명씨는 "일인들이 경복궁에 난입하여 명성황후를 살해할 당시 현장에 있던 20
대의 젊은 낭인"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에조가 갖고 있던 조선 정부 내부 고문은 정식 직책이 아니다. 그가 조선 정부로부터 월
급을 받거나 관복을 입고 등청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당시는 일본이 조선에서 위세
를 떨치고 있던 때라 낭인들이 명목상 하나씩 그런 직책을 얻어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실제로 1988년 <민비암살(閔妃暗殺)>을 발간한 일본의 저명한 전기작가 쓰노다 후사코
((角田房子) 여사도 자신의 저서에서 에조를 "민비의 유해 곁에 있던 일본인"이라고 설
명한 바 있다. 에조가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목격자'였다는 사실
을 뒷받침해주는 발언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에조가 스에마쓰에게 별도
의 보고서를 보낸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에조가 조선에 들어오기 전 "법제국 참사
관"을 지냈다는 후사코 여사의 설명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즉 에조는 당시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현장 총지휘자라고 할 수 있는 미우라 고로(三浦梧
樓) 조선주재 일본공사의 재가를 받지 않고 전직 상사에게 보고서를 보낸 것이다. 이와
관련, 다시 김진명씨의 설명을 들어보자.
"에조는 미우라 공사 몰래 보고서를 작성하여 본국으로 보냈다. 실제로 사건의 원인에서
부터 실행자, 사후대책까지 충실히 기록돼 있는 이 보고서에는 미우라 공사의 책임과 처
벌을 암시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따라서 '에조 보고서'는 철저하게 일본의 입장에서 명
성황후 시해사건을 조사하고 재판한 '우치다 보고서'나 '히로시마 법정기록' 등과는 성
격을 달리한다. 다시 말해 사후에 은폐되고 조작됐다는 의심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유일
한 문서라고 할 수 있다."
제보에서 공개까지 한 달 걸린 이유
본격적 논쟁은 역사학계의 몫
작가 김진명씨 측으로부터 기자에게 연락이 온 것은 약 한 달 전이다. 그는 자신의 소설
<황태자비 납치사건>의 결정적 모티브였던 '435호 비밀문서'의 존재를 추적하던 중 마
침내 진본을 찾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솔직히 그 때만 해도 기자는 그의 제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작가에겐 미안하지만, 쇼비니즘을 조장하는 소설이라는 선입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기자는 <황태자비 납치사건>도 읽지 않은 상황이었다.
충북 제천에 있는 그의 작업실을 방문하기 직전에야 끝마친 '뒤늦은 독서'와 그의 진지
하고 열정적인 기초설명을 들은 뒤에야 이 문서, 즉 '에조 보고서'의 역사적 무게가 피부
에 와 닿았다.
작가가 굳이 기자에게만 이 문서를 전달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모든 언론
사에 보도자료를 돌릴 경우 자칫 일회성 기사로, 그것도 역사적 본질은 사라진 채 선정
적으로 다뤄질 가능성이 높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둘째, '젊은 세대'에게 이 역사의 진실
을 알려주기 위해서는 인터넷 매체인 <오마이뉴스>가 가장 적합할 것이라는 작가의 현
실적 판단이 작용했다.
그러나 이 문서는 곧바로 보도될 수 없었다. 여기에도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문
서의 배경이 된 당시의 상황을 완전히 이해하기 전에는 섣불리(?) 기사를 쓰지 않겠다
는 기자의 고집 때문이었다. 실제로 기자는 국사 교과서와 문학작품에서부터 전문서적
까지 20여권의 단행본과 자료를 입수해 통독한 뒤에야 기사 작성에 들어갔다. 둘째, 한
일 월드컵 공동개최에 악영향을 주지는 않을까라는 우려도 작용했다. 역사의 상흔을 쓸
데없이(?) 덧내는 것은 아니냐는 반론의 제기도 충분히 예상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내 생각을 바꿨다. 부끄럽고 고통스런 과거라고 해서 망각하는 것이 진정한 치유의 방법
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 문서의 역사적 의미에 대한 본격적 논쟁은 물론 관련 학계의 몫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런 점에서 이 기사는 '문제의 제기'이자 '미완의 보도'인 셈이다. 기자가 언젠가 명성황
후와 관련된 역사적 공간을 순례하는 답사기를 쓰려는 이유도, 그리하여 '과거와 현재
의 대화'를 통해 명성황후의 현재성을 밝히려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2. 보고서의 존재는 어떻게 알려졌나 '에조 보고서'는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70여년이 흐르는 동안 철저하게 숨겨져 있었
다. 이 보고서를 맨 처음 찾아낸 사람은 일본의 역사학자 야마베 겐타로(山 健太郞, 19
05∼1977). 그는 1966년 2월 <일한병합소사(日韓倂合小史)>를 이와나미(岩波書店)에
서 발간했다.
그는 이 저서에서 "사체 능욕"이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썼는데, 이것이 바로 그후 국내 역
사학계에서 거론되기 시작한 '명성황후 능욕설'의 원조가 됐다.
한편 그는 이보다 앞선 1964년 <코리아평론> 10월호에 '민비사건에 대하여'라는 논문
을 발표했는데, 이것이 <일한병합소사>의 기본 골격이 됐던 것으로 보인다.
<일한병합소사>가 처음으로 국내에 소개된 것은 16년이 흐른 뒤인 1982년 6월이다. 신
학자 고 안병무 선생이 <한일합병사>(범우사)로 제목을 바꾸어 번역했는데, 문제의 '능
욕설' 대목을 이 책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1895년 10월 7일 밤부터 다음날 이른 아침에 걸쳐서, 대원군이 훈련대에게 호위되어 있
는 동안 일본 수비대와 대륙 낭인의 무리가 칼을 빼들고 경복궁으로 밀고 들어가서 민비
를 참살하고, 그 사체를 능욕한 뒤에 석유를 뿌려 불을 질러버린 것이다."
이 대목이 '에조 보고서'를 근거로 서술된 것임은 물론이다. 그러나 일반적
으로 세상에 알려진 것과 달리, 당시 그는 이 책에서 보고서의 존재는 거론하지 않았다.
야마베 겐타로가 '에조 보고서'의 존재를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은 1966년 9월 발간한 <
일본의 한국병합(日本の 韓國倂合)>이었다. 친북 계열 출판사에서 발간된 이 책은 국내
에 번역되지 않았다.
결국 겐타로는 7개월의 시차를 두고 두 권의 책을 발간한 셈인데, 그나마 '에조 보고
서'의 존재를 언급하고 일부 내용을 소개한 두 번째 책은 국내 학계의 주목을 받지 못했
던 것이다. 물론 야마베 겐타로의 언급 이후 '능욕설'은 재일 사학자 박종근, 나카쓰라 아키라 등에
의해서도 거론된 바 있기는 하다. 그러나 '능욕설'의 전적(典籍)이라 할 수 있는 '에조
보고서'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의 저서에도 등장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 보고서를 찾아 헤
맸던 김진명씨의 설명이다.
'에조 보고서'가 다시 언급된 것은 22년이 흐른 뒤였다. 앞에서 거론했던 쓰노다 후사코
여사의 <민비암살>에 잠시 등장한 것이다. 이 책은 1988년 발간되고 몇 달 후 조선일보
사에 의해 번역됐는데(번역자 김은숙 한국교원대 교수), '능욕설' 관련 부분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더욱이 민비의 유해 곁에 있던 일본인이 같은 일본인인 나로서는 차마 묘사하기 괴로
운 행위를 하였다는 보고가 있다. 전 법제국 참사관이며 당시 조선 정부의 내부 고문관
(실제 보고서에는 '고문'이라고 적혀 있음-기자주)이었던 이시즈카 에조는 법제국장관
스에마쓰 가네즈미 앞으로 보낸 보고서에서 '정말로 이것을 쓰기는 괴로우나…'라고 서
두에 쓴 후에 그 행위를 구체적으로 쓰고 있다."
그러나 쓰노다 여사는 이 책에서 '구체적인 그 행위'에 대해서는 소개하지 않았다. '차
마 묘사하기 괴로운' 에조의 심정에 동감한 것일까.
한편 국내에서 명성황후 능욕설이 제기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그것은 앞에서 거론했던
야마베 겐타로의 첫 번째 책이 <일한합병사>로 국내에 번역되어 들어온 후부터로 보인
다. 그러나 기자가 명성황후의 최후와 관련된 국내 기록을 샅샅이 뒤져본 결과, 능욕설
의 근거가 된 '에조 보고서' 전문을 직접 찾아보려는 시도는 전혀 없었던 것으로 확인됐
다. 대다수가 야마베 겐타로의 소개와 해석에 그대로 의존하고 있었을 뿐이다.
3. 보고서 전문을 어떻게 찾아냈나
'에조 보고서' 전문을 찾아 헤매던 김진명씨는 쓰노다 후사코 여사의 <민비암살>을 정독
하다가 그 행간에서 명성황후의 죽음에 '어떤 비밀'이 숨어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
다. 그래서 이 책을 번역한 김은숙 교수를 통해 후사코 여사로부터 대여섯 권의 전적을
소개받았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을 온통 헤집었지만 그는 도저히 문제의 '에조 보고서' 전문을 찾아
낼 수 없었다. 마침 후사코 여사마저 "기억이 희미하다"며 한 발짝 물러선 최악의 상황이
었다. 막다른 골목에 이른 김진명씨는 평소 알고 지내던, 동경 히토츠바시 대학에서 외
교사를 전공하는 권용석씨에게 보고서를 찾아줄 것을 부탁하고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권씨가 몇 권의 책과 자료를 보내왔다. 그 중에는 앞에서 기자가 거론한
<일본의 한국병합>도 있었다. 김진명씨는 이 책을 읽다가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
기에는 문제의 '능욕' 장면 중 일부가 소개돼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최종
목표가 아니었다. 그가 원한 것은 보고서의 일부가 아니라 전문(全文)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김진명씨는 문득 짚이는 것이 있어 <일본의 한국병합>을 다시 꺼내들었
다. 문득 겐타로가 '에조 보고서'를 발견한 장소를 어딘가에 밝혀놓지 않았을까라는 생
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에조 보고서'가 언급돼 있는 이 책의 223쪽을 보자 주석
이 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부리나케 주석 번호를 찾아보니 다음과 같이 출전이 밝혀져
있었다.
"국립국회도서관(國立國會圖書館) 헌정자료실(憲政資料室) 장(藏) <헌정사편찬회문서
(憲政史編纂會文書)>".
역사학계에서 수없이 거론됐지만 정작 전문은 공개되지 않았던 '에조 보고서'가 역사학
자가 아닌 한 작가의 끊임없는 관심과 열정적인 추적을 거친 끝에 '우연히' 발견된 순간
이었다.
그러나 김진명씨는 이 문서를 즉각 찾지는 않았다. 문서를 찾으면 공개해야 하고, 이 문
서의 공개가 월드컵 공동개최를 앞둔 한일 양국에 엄청난 파장을 미칠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다시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일본의 역사왜곡과 고이즈미 총리
의 전격적인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지켜보면서 더 이상 공개를 늦출 수 없겠다는 결심
을 했다고 한다.
그는 일본의 권용석씨에게 일본 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에 가서 이 문서를 찾아 팩스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리하여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갔던 '에조 보고서' 전문은 장
장 107년만에 그렇게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4. 보고서엔 어떤 내용 들어 있나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원인과 발단에서부터 실행자와 사후 대책까지 충실하게 기록하고
있는 '에조 보고서'의 분량은 각 2쪽씩을 차지하고 있는 목차와 서문을 포함해 모두 12
쪽이다. 아울러 보고서는 (1)발단 (2)명의 (3)모의자 (4)실행자 (5)외국사신 (6)영향 등
의 소제목이 붙어 있는 6개의 장으로 구성돼 있다.
기자는 이 보고서를 김진명씨로부터 입수한 뒤 일본어에 정통한 전문가에게 번역을 맡
겼다. 그러나 주로 고어(古語)와 사어(死語)로 쓰여 있어 도저히 완벽한 번역을 할 수 없
다는 답변을 받았다.
다만 보고서에 한자로 표기된 '부덕의(不德義)' '경솔천만(輕率千萬)' '직무상 책임(職務
上 責任)' '주모자(主謀者)는 미우라 공사(三浦 公使)' 등의 표현이, "미우라 공사의 책임
과 처벌을 암시하는 내용이 들어 있고, 사후에 은폐되고 조작됐다는 의심으로부터 벗어
나 있는 유일한 문서"라는 김진명씨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
다.
한편 기자는 이번 취재 과정에서 겐타로보다 좀더 자세하게 '에조 보고서' 내용을 인용
한 서적을 발견하는 의외의 성과를 얻었다. 친일문제전문가인 정운현 <오마이뉴스> 편
집국장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는 일본 서적들을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뒤지던 중 찾
아낸 <외교문서로 말하는 일한병합>(합동출판, 1996)이 바로 그것이다.
재일 사학자 김응룡씨가 쓴 이 책은 '에조 보고서' 전문 중 10분의 1 정도만 인용하고 있
었지만, 지금까지 나온 어떤 저술보다도 풍부하게 보고서 내용을 소개하고 있었다. 다음
은 이 책에 서술된, '에조 보고서'의 주요 내용에 대한 설명이다.
"에조는 법제국장 앞으로 보낸 보고서 안에서, 왕비 살해를 일본의 모든 이들이 생각하
고 있었다고 보고서 머리에 적고 있다. 왕비 살해의 필요성은 미우라도 일찍부터 생각
해 오고 있었다고 말하고, 일본의 수비대가 주력이었던 일, 왕비 살해와 사체에 대한 능
욕의 상황을 자세하게 적고 있다. 폭력이 난무하는 현장을 외국인들에게 보인 데다, 이
외국인들과 언쟁까지 벌인 일과 대궐에서 난동을 끝내고, 보기 흉한 몰골로 대궐에서 철
수하는 것을 대궐 앞 광장에 몰려든 조선인 군중들과 서둘러 성안으로 들어가는 러시아
공사에게도 보이고 말았다고 보고하고 있다."
그러나 "사체에 대한 능욕"이란 대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 역시 명성황후의 최후와
관련해서는 야마베 겐타로의 해석을 그대로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5. 보고서에 담긴 진실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한편 김진명씨는 '에조 보고서'와 관련해 기자에게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그의 발언
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모든 한국인들은 명성황후가 난자 당해 죽은 걸로만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절반의
진실'에 불과하다. 다만 '에조 보고서'의 존재를 접한 극소수의 일본인과 한국인 학자들
만이 명성황후가 살해당한 뒤 시간된 걸로 주장하고 있다. 나조차도 그런 기존의 해석
에 따라 <황태자비 납치사건>에서 시간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그는 '에조 보고서'를 자세히 읽어본 뒤 생각이 바뀌었다고 한다. 다시 그의 말
을 직접 들어보자.
"명성황후 최후의 장면을 기록한 유일한 문서인 '에조 보고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명성
황후가 시해 직전 즉 살아 있는 동안 능욕당하고 불태워지면서 죽었을 가능성이 농후하
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명성황후는 시간(屍姦)을 당한 것이 아니라 강.간을 당한 것이
다."
- 에조 보고서 "특히 무리들은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왕비를 끌어내어 두세 군데 칼로
상처를 입혔다.
나아가 왕비를 발가벗긴 후 국부검사(웃을(笑) 일이다. 또한 노할(怒) 일이다)를 하였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기름(油)을 부어 소실(燒失)시키는 등…"
그것은 참으로 충격적인 주장이 아닐 수 없었다. 그의 주장을 검증하기 위해서는 '에조
보고서'에서 능욕 장면을 묘사한 대목을 직접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보고서에서 실제로
그 부분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주요 한자 표기 그대로 살렸음-기자주). "특히 무리들은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왕비(王妃)를 끌어내어 두세 군데 칼로 상처를 입
혔다. 나아가 왕비를 발가벗긴 후 국부검사(웃을(笑) 일이다. 또한 노할(怒) 일이다)를
하였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기름(油)을 부어 소실(燒失)시키는 등 차마 이를 글(筆)로
옮기기조차 어렵도다. 그 외에 궁내부 대신을 참혹한 방법으로 살해(殺害)했다."
그는 이 부분을 소리 내서 몇 번이나 되풀이해 읽은 뒤 이렇게 주장했다.
"보고서 어디에도 살해한 뒤 능욕을 했다는 논리의 근거가 없다. 이 주장은 한국의 역사
학자들이 야마베 겐타로의 해석을 아무런 비판 없이 그대로 따른 것에 불과하다. 겐타로
는 1966년 보고서 전문을 소개하지 않은 채 이 부분만 따로 떼어내 소개한 뒤 '사체를 능
욕했다'고 해석해 버렸고, 이것이 한국에서까지 그대로 정설로 통해왔던 것이다. 그러
나 '에조 보고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사람을 죽였을 때는 반드시 '살해'라는 구체적인
표현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뒤에 나오는 '궁내부 대신 살해'라는 대목이 결정
적인 방증이다."
실제로 시해 장면을 묘사한 '에조 보고서'를 뒷받침하는 증언과 자료들은 많다. "일본인
흉한들은 왕비를 내동댕이치고 구둣발로 가슴을 세 번이나 내리 짓밟고 칼로 찔렀다"(왕
세자 이척의 증언) "왕비는 뜰 아래로 뛰어나갔지만 붙잡혀 넘어뜨려졌고 살해범은 수
차례 왕비의 가슴을 짓밟은 뒤에 칼로 거듭 왕비를 찔렀다"(영국 영사관 힐리어가 북경
의 오코너에게 보낸 보고서) 등이 대표적이다.
다만 그들은 명성황후가 그렇게 칼에 찔려 즉사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대해 김진명
씨는 이렇게 반론을 펼쳤다.
"그들은 최후의 장면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이 아니다. 나중에 궁녀 등에게 전해들은 얘
기를 다시 전달한 것에 불과하다. 더욱이 '에조 보고서' 이외의 어떤 기록에도 '능욕' 부
분은 나오지 않는다.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피해자인 명성황후와 가해자인 일본인
들이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죽었고, 일본인들은 진실을 철저하게 은폐하고 조작했다. 가
해자 중의 한 명이면서도 미우라 일파와 입장을 달리 했던 에조의 증언이 가장 진실에
가깝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창밖을 응시하며 한참이나 침묵을 지키던 그가 마침내 다시 말문을 열었다.
"결국 일본인들은 명성황후를 시간한 것이 아니라 강.간한 것이다. 진보적 역사학자로
알려져 있는 야마베 겐타로조차 인류 역사상 전례가 없는 이 끔찍한 만행에 놀라 보고
서 전문은 소개하지 않고 '사체 능욕'이라고 축소해서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한
주권 국가의 왕비에게 만행을 저지른 것과 그것을 은폐하고 조작한 것에 대해 인정하고
사죄해야 한다. 한국인들 역시 처참하게 능욕 당하면서 죽어간 명성황후의 원혼을 풀어
줘야 할 책임이 있다."
..
자넷작성일
2010-07-21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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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한국전쟁때 학도소년병들의 전차중대 이야기VOL1-전차중대 연혁
photo by Phil Symond via Garry Loveria위사진은 57전차중대의 소년전차병 선배님들이 탑승하셨던 한국전쟁 당시의 M36 잭슨 대전차 자주포 제 57 전차중대 소년전차병들의 이야기 - 전차중대 연혁http://myhome.naver.com/boy_tank에서 발췌이글은 만 16세와 17세의 지원 학도병으로 구성되었던 57전차중대의 이야기로서 소년전차병 홈페이지의 글입니다. 저작권은 소년전차병 홈지기님에게 있으며 관련 내용을 디펜스 코리아에 올려서 보다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도록 하기를 허락받은 것임을 밝혀둡니다. 少年戰車兵 (第 57 戰車中隊) 년혁서기 1952년 4월말 서울의 학교가 학년제 변동으로 어수선 하던 시절 전쟁의 와중에서울지구 병사구 사령부 모병관이 소년 전차하사관 후보생 포스터를 붙이며 각교실에 모병 강연을 하면서 일본에서 6개월 기술교육받고 전차를 수령한 후 한국전선에 투입한다고 모집함1952 년4월13일자 경향신문 일간지 계제되었으나 당시 확인하지 못함또한 3월17일 육군전차하사관후보생모집이 계제 확인불명 그러나 소년전차병 년령도 만18세이나 만16세와17세가 많었음]국회 도서관에서발취서기1952년 5월 13일(입대=훈특 163-5호)논산훈련소 2기 제23연대2중대에 소년전차하사관 후보생으로 입소(1 중대는 갑종장교 후보생)서기1952년 7월20일 (보병학교로 배속전환 (2 훈특 233 호))논산훈련소 수료 서기1952년 7월22일 육군전차교육대 입교 전차교육 전과정 교육(조종, 정비, 통신. 포수등)서기1952년10월25일 (보병학교 특별명령 을90호) 육군보병학교 전차교육대 졸어과 동시 상병으로 진급 서기1952년11월15일 (陸本特(을)3270(3))보병학교로부터 제 57 전차중대로 배속전환당시 교장 조남철님, 중대장 박우춘 대위, 부관 서대현 중위, 보급관 1명소대장 박승일, 김능수, 박도신, 김형고님 4명과 소년전차병들이 함께M-36전차 23대(M32 구난차 포함)을 수령 전투준비를 완료서기1952년12월00일 선발대를 출발시키고 우리는 송정리역 에서 기차에 실려 서부전선에도착 임진강 옆에(현 북삼교 동쪽 주둔 20여일후 전투 가 치열하였던 노리고지와 베티고지 특히 휴전직전에는 정면에 배치,1사단지역최전방에 투입 적과의 전투에서 막강한 전차포로 많은 전투를 수행특히 휴전직전에는 치열한 공방전에 김만술 소위를 탄생시킨 엄호작전에 참여하여 전투를 수행하였으며 박고지 Queen고지 전투에서힘든 전투를 수행하면서 많은 희생자를 내고 휴전을 맞았다 ★ 西記1953年6月25日 ~ 1953年6月29日까지※(戰史記錄, 西部戰線 의 戰況, 754 쪽 ∼ 797 쪽) ( 2. 250高地 - 199高地, 一名 Queen高地 및 朴高地 戰鬪)★ 西記1953年7月15日 ~ 1953年7月16日까지 ※(戰史記錄, 西部戰線 의 戰況, 798 쪽 ∼ 807 쪽) ( 一名 Betty 高地 의 戰鬪) 서기 1953년6월19일 [전사기록 756쪽 하단부 10쩨줄] 制 57 戰車中隊는第3戰車大隊 2中隊로 改稱을 하였고 大隊長 은金東馥소령, 中隊長은 박상석 大尉로 編成되었다(國本一般命令제111호 :53年4月25日 부에 의거 光州 機甲學校에서 創設) 서기1953년7월27일 休戰으로 우리는 서울에서 8.15 市街行進을 마치고 春川을거쳐 江原道 인제읍 北쪽 江邊에 주둔後 다시 楊口 林堂里에 옮겨 中東部戰線에 投入하여 防禦 任務를 隨行하였다(現 펀치벌능선등) 그후 전우들 일부는 기갑장교(OCS 80기)로 任官되고 部隊가 再編되어第3戰車大隊 2中隊로 命名 되어 왔다
사진/글출처: DEFENCE KOREA 김수영님.
1952년 4월 27일 소년전차 하사관후보생 특별모집
육군본부는 서울, 부산, 대구, 광주지구 병사구사령부를 통하여, 소년전차하사관후보생 모집을 한다면서 모병관이 각 훈육소(서울 지역은 각학교 학생들이 함께 수업한 장소) 와 학교 교실에 방문 일본에서 6개월 기술교육을 실시하고, 전차를 수령 후, 한국전선에 투입한다는 조건으로 모집에 착수하였다.(추기.모집 당시에 소년 전차하사관후보생으로 모집 되어졌다.)
[1952년4월13일자 경향신문 일간지 계제되었으나 당시 확인하지 못함또한 3월17일 육군전차하사관후보생모집이 계제 확인불명 소년전차병 년령도 만18세이나 만16세와17세가 많었음] 국회 도서관에서발취
한국군 학도소년병들이 한국군 최초의 기갑대대에 배속되어서 제57전차중대에서 활동한 이야기들입니다. 첫편은 한국군 제57전차중대의 연혁입니다.
1952년 5월 13일 : 기초훈련 (논산훈련소 입소)
모집된 120 여명 소년 전차 하사관후보생 으로 논산훈련소 2기 제23연대 2중대로 입소, 10주간의 기초훈련을 마치고, 동년 7월 20일 수료 (훈특명 제163-5호)
1952년 7월22일 : 전차병 훈련 (전차교육대 입교)
육군보병학교 전차교육대 입교, 13주간의 전차조종, 정비, 통신. 포술 등, 전 과정의 교육을 받고, 동년 10월 25일 수료와 동시, 상등병으로 진급 (보교특명 (을)90호)
1952년11월15일 : 전투부대(제57독립전차중대)에 배치
120여명 전원이 52년 11월 8일 창설된 제57독립전차중대 부대원으로 충원(육특명(을)3270호)되어, 전전으로 출동 준비 및 부대훈련 실시.
초대 중대장 박우춘 대위, 부관 서대현 중위, 보급관: 1명 제 1 소대장 소위 朴承一, 제 2 소대장 소위 金能秀제 3 소대장 소위 朴道信, 제 5 소대장 소위 金炯高,
1953년1월10일 : 서부전선으로 출동 전투참전
전남 광주(송정리)에서 철도 편으로 경기 연천 중면으로 이동, 서부전선에 투입, 미 제1군단에 배속 후, 한국군 제1 보병사단에 재 배속되어, 250고지 - 199고지(박 고지 및 Queen고지) 및Betty고지의 치열한 전투에 참전, 혁혁한 전공을 세우다.
★ 1953年6月25日 ~ 1953年6月29日까지※(戰史記錄, 西部戰線 의 戰況, 754 쪽 ∼ 797 쪽) ( 2. 250高地 - 199高地, 一名 Queen高地 및 朴高地 戰鬪)
★ 1953年7月15日 ~ 1953年7月16日까지 ※(戰史記錄, 西部戰線 의 戰況, 798 쪽 ∼ 807 쪽) (一名 Betty 高地 의 戰鬪)
1953년6월19일 : 개편(제3전차대대 2중대로)
제57독립전차중대는 제3전차대대 제2중대로 개편 되었으며, 대대장 소령 김동복, 중대장 박상석 대위 가 부임하였다.
1953년7월27일 : 휴전
휴전 직전 치열한 공방전에서 김만술 소위를 탄생 시킨 Betty고지 방어 작전에 참가 근접 지원 사격으로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데 일조 하였으며, 제1소대장인 박승일 소위의 전사와 소대원의 희생을 감내하면서 휴전을 맞았다.
그 공로로 소대장 3명이 무공훈장을 수여 받았다. 제3소대장 소위 박도신(朴道信) 은성충무무공훈장 증번호: 120409호 제2소대장 소위 김능수(金能秀) 금성화랑무공훈장 증번호: 63849호 제5소대장 소위 김형고(金炯高) 금성화랑무공훈장 증번호: 63850호
수상일 1953년8월28일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확인, 국방부장관 김성은
1953년8월15일: 서울시가행진 및 대대본부 지역으로 이동
휴전 후, 처음으로 실시된 광복절 축하 국군 시가행진에 우리 중대가 천지를 진동하는 전차의 궤도소리를 울리면서 대한민국 전차부대를 대표하여 시가행진에 참가 국민들로 부터 많은 박수 갈채를 받았다. 시가 행진을 마치고 왕십리에 집결 철도편으로 춘천으로 이동 후, 제3전차대대본부가 위치한 강원도 양구 임당리로 이동, 제3전차대대 제2중대로서 중동부 전선에 투입되어 방어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2004년9월15일: 6.25참전 소년전차병 전적비 건립
1953년,1-7월 휴전 일까지 소년 전차병 중대(제57독립전차중대)가 적과 싸워 희생을 무릅쓰고 많은 전공을 세운 바로 그 자리, 경기도 연천 최전방 태풍고지 위에 자랑스럽게 6.25참전 소년전차병 전적비를 국가보훈처, 재향군인회와 연천군의 후원을 받아 보병 제28사단의 지원 하에 제막식을 성대히 거행하다.
2005년5월16일: 부대전통 계승 및 추모식
국가보훈처와 재향군인회의 후원과 보병 제28사단의 지원 하에, 자랑스런 전적비 앞에서 소년전차병부대로 창설된 제57독립전차중대(현 보병 제3사단 전차대대 제2중대)의 전통을 이어주기 위하여, 부대기에 "6.25참전 제57전차중대 소년전차병"라고 쓴 수치를 달아주고, 고 박승일 소대장의 추모식을 거행하다.
사진/글출처: 하늘대장군의 잡탕 블로그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네이버 블로그
한국군 학도소년병들이 한국군 최초의 기갑대대에 배속되어서 제57전차중대에서 활동한 이야기들입니다. 첫편은 한국군 제57전차중대의 연혁입니다. 두개의 사이트에서 올려진걸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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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전설적 해군 이야기
전설이란?
누구에게나 나름의 전설이 하나쯤은 있을 것입니다. 내가 다니던 학교에선 양산박의 전설이 아주 유명했었는데요 하여간 왕년에 주름 잡았던 그런 추억이 나중에 전설이 되는데 그 전설의 공통점은 두고두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다는 겁니다.그런 측면에서 우리 대한민국 해군에도 전설이 있습니다. 시대별로 화려한 전설이라고나 할까요. 그런데 그것을 다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럼 대한민국해군 3대전설을 오늘은 아주 간략하게 말해볼까 합니다.
대한민국 해군의 첫번째 전설 : 해군의 영원한 전설인 백두산 함1. 백두산함의 전설 : 이건 너무도 유명합니다.
사진 : 미해군이 초창기 한국해군에 넘겨주기 직전에 함포를 장착하고 있는 백두산함. 바로 저 함포로 6.25 전쟁 개전과 동시에 부산으로 접근하던 북괴 무장수송선을 격침함.인터넷 검색하면 쫘악하고 나옵니다. 6.25전쟁초기 북괴 무장수송선을 부산앞바다에서 격침시킴으로써 대한민국 후방을 온전하게 유지시킬 수 있게끔 한 대한민국 해군의 영원한 전설이자 최초의 A매치 승리자 바로 백두산함입니다. 너무 유명하니까 설명하면 예의가 아닐 것 같아서 이쯤해서 패슈..===================================================================================2.대한민국 해군의 두번째 전설 DE-73함 (충남함)이야기 : 이름하여 한국해군 73함의 소련잠수함 추적 강제 부상사건 이라고도 합니다.
사진 : 두번째 전설의 주인공 DE-73충남함과 동급인 미해군 루데로급이 자료 찿느라고 고생 좀 했는데 드디어 찿았습니다. 아마 이 전설 모르는 분들 꽤 될겁니다.대한민국 해군의 능력을 소련과 미국에게 유감없이 보여준 완전 초대박 전설이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 후 우리는 미국으로 부터 프래쳐급 전투수송함 (충무급)을 비롯해서 각종 전투함을 무상 제공 받았습니다. 뭐 그 당시 미국으로 부터 무상으로 받지 않은 것이 없었던 시절인데 그럼 "73함의 전설"은 무엇인지 말씀 드리겠습니다. 대충 이야기 하자면 미국 해군 본부에서 군 원조 프로그램의 하에 Cannon, Rudderow, Buckley급 호위 구축함들은 1950년 중순부터 시작하여 1960년 말 까지 총 9척이 도입되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DE-73함인 충남함이입니다. **************************************************************<미국이 5,70년대 우리에게 무상제공했던 전투함>한국명(전함종류) (미국명)DE-71 (캐논급) 경기함(DE-770 Muir)DE-72 ( " ) 강원함(DE 771 Sutton)DE-73 (루데로급) 충남함(DE-706 Holt) <---- 대한민국 해군 2번째 전설의 주인공PF-81 ( " ) 경남함(DE-712 Cavallaro)PG-82 ( " ) 아산함(DE-598 Harry L. Corl) PG-83 ( " ) 웅포함(DE-600 Julius A Raven)PF-85 (버클리급) 경북함(DE-207 Kephart)PG-86 ( " ) 전남함(DE-212 Hayter)PF-87 (로데로급) 제주함(DE-236 William M. Hobby)*****************************************************************그럼 소위 73함 충남함의 전설은 무엇인고 하면 국회도서관에서만 볼수 있는 내용인데 "73함 소련잠수함 추적사건"으로 등재된 엄청난 사건중의 하나이고 대한민국 해군 2번째 전설의 주인공이 바로 그것입니다.내용은 73충남함이 64년 10월 13일 소련잠수함을 7시간동안 추적 부상하게 한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소련 잠수함은 디젤인데 동해상에서 우리 해군의 소나에 걸려서 도망하다가 결국 숨쉴려고(?) 자신을 노출 시킬 수 밖에 없었던 당시로서는 완천 초대박 사건이었습니다.이로 인해서 대한민국 해군의 능력을 미국에게 과시 하게 되었고 당시 우리 해군관계자가 미해군으로 부터 훈장까지 받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해변에서 다이아 찿기보다 더 힘들다는 바다에서 잠수함 찿기라고 하는데 그것을 끝까지 추적해서 부상까지 시켰으니 이건 대잠전에 길이 남을 하나의 사건이자 분명한 전설입니다. 그런데 이런 전설을 메니아 조차 모르는 분이 많다고 느껴서 오늘 몇자 끄적여 봅니다.그런데 73함 충남함은 호다사마라고나 할까 그로 부터 딱 3년후인 67년 1월 14일 진해만 근처에서 정기여객선 한일호(140톤)와 충돌하여 한일호가 침몰해 96명이 익사했던 사고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법원에서는 쌍방과실로 판결을 받았는데 하여간 천당과 지옥을 번갈아 오고 간 해군의 2번째 전설임에는 틀림 없다 하겠습니다.===========================================================Rudderow(충남)급 호위 구축함*제원및 성능배수량: 표준 1,450 톤 (만재 1,810 톤) 전장: 306 ft (93 m) 전폭: 37 ft (11.3 m) 흘수: 13.75 ft (4.2 m) 기준 추진력: 2개의 보일러, 제네랄 일랙트릭 터보 전기 드라이브 2대 망간청동 3600 파운드 3 bladed 추진기 8.5 피트 직경, 7개 ft 7 인치 피치 12,000 마력 (8.9 MW) 2개의 방향타속도: 24 노트 (44 km/h) 항속거리: 4,940 nm @ 12 노트 무장: 2문 x MK-30 127 mm/38 2연장함포혹은 단장함포 1문~2문(함수1,혹은 함수1,함미1) 3문 x Mk-1/56(국산형으로 개조) 2연장 40 mm 포 6~8문 x Mk-4 20 mm 단장포 2문 x (533 mm) 어뢰 발사관 1문 x Mk-10 hedgehog 발사관 8대 x Mk-6폭뢰 발사관 (12발) 2발 x 예비 Mk-9 폭뢰 인원: 15명의 장교, 195명의 승무원 =================================================================================3. 대한민국 해군의 3번째 전설 : 강원함의 전설 . 기어링급 전투함의 대표격인 강원함의 전설을 뺄 수는 없을 겁니다.이 3번째 전설은 많은 분들이 알고 있는 것인데 83년도에 울릉도 동북방 해상에서 북괴 간첩선 모함을 격침시킨 전설입니다.
기어링급은 이제 다 도태되었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헬기 플랫폼으로서 선구자격인 전투함인 것은 다 아시는 상황이고,,당시 강원함에 탑재된 알류트헬기가 대함 미사일(씨 스쿠아?)로 북괴 무장 간첩선을 격침시킨 것은 해군의 3차원 입체 작전의 쾌거였습니다. 그 이후 북괴는 간첩선에 의한 수상 침투를 포기하고 반 잠수정 내지는 잠수함으로 침투 방법을 바꿨다고 전해지고 있으니 분명히 강원함은 해군 3번째 전설의 주인공이 되고도 남을 것입니다.이상 대한민국 해군 3대전설을 간략하게 말씀드렸습니다. (초 스피드 작성으로 인해서 많이 거칩니다. 이해^^)이제는 퇴역해서 전시물로 사용되고 있지만 강원함의 전설은 대한민국 해군과 함께 같이 간다.
< 출처 : 야후 - viggen(비겐)님 블로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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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한나라당 인터넷 알바의 실체
한나라당 인터넷 알바의 실체 [아고라 Sensation님 글]
국민소통위원, ‘온라인 홍위병’인가
한나라당서 공개 모집한 140명 누리꾼… 친정부 성향 ‘악플’ 올리는 ‘알바?’"한나라당에서 위촉한 국민소통위원들이 100여 분 되는 것으로 아는데, 이 분들이 과연 국민과 한나라당 사이의 소통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 묻고 싶다.” 누리꾼 김동훈씨가 2월 23일 아고라에 올린 글이다. 그는 이날 국회도서관 강당에서 열린 한나라당 국민소통위원회 보고대회 ‘통(通)하였느냐’에 패널로 참석했다. 그는 “‘알바’소리를 듣는 국민소통위원에게 한나라당에서 금품을 받은 적이 있느냐고 묻던데, 누리꾼이 말하는 ‘알바’는 돈을 받고 고용되었는지를 떠나 아무런 비판 의식 없이 한나라당을 옹호하고 논리적 정황 없이 반대편을 비난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라고 말했다.신상정보 공개하지 않아 의혹 증폭
한나라당 측에서는 어떤 금전적 대가도 제공하지 않는다는 점으로 국민소통위원회를 ‘알바’라고 규정하는 것은 잘못됐다고 주장한다. 사진은 한나라당 측이 소통위원에게 제공한 내부정보 문건.
알바 또는 알밥. 실제 아고라를 비롯한 인터넷에서는 ‘알바 또는 작전세력’에 대한 의혹이 끊이지 않는다. 한나라당이 누리꾼을 대상으로 국민소통위원을 공개 모집한 것은 지난해 11월. 그리고 1월 6일 한나라당 디지털정당위원회에서는 국민소통위원 위촉식을 거행했다. 당초 100명을 예정했지만 실제 임명된 소통위원은 140명이다. 어떻게 보면 의혹은 한나라당이 자초했다. 소통위원의 명단은 공개했지만, 직업이나 나이 등 ‘신상 정보’는 공개하지 않았다. 촛불시위 이후, 친정부·한나라당 성향의 ‘악플’은 눈에 띄게 증가했지만 악플을 단 이들이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일부 누리꾼은 “친정부 성향의 악플들을 보면 거의 도배하듯 반복해서 달려 있는 경우가 많고, 또 악플이 달리는 시간대가 업무시간이라는 점에서 ‘알바’ 의혹이 제기되는 것은 당연하다”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의혹은 국민소통위원에 ‘집중’됐다. 국민소통위원의 활동은 거의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리꾼은 아고라 대화명을 근거로 ‘국민소통위원 가려내기’에 나섰다. 검색을 통해 습관적으로 쓰는 대화명과 아이디를 찾아내고 다시 아이디와 실명을 일치시키는 작업이다. 누리꾼이 실명을 밝혀낸 국민소통위원은 2~3명. 블로그나 기타 ‘흔적’을 발견한 경우도 10여 명 되었지만 의혹은 계속됐다. 2월 23일, 보고대회가 끝난 후 국민소통위원이 모였다. 이들의 ‘면면’이 오프라인에서 처음으로 드러난 것이다. 이날 보고대회에 참석한 소통위원은 전체 140여 명 중 50여 명. 예상 외로 이날 자리에 함께한 소통위원들은 40~50대의 비중이 높았다. 한 소통위원은 “아무래도 평일 열리는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자영업자나 수도권에 거주하는 분 아니겠냐”고 말했다. 소통위원 임명 후 지난 40일, 국민소통위원들은 실제 어떤 활동을 했을까. 이들의 활동거점은 네이버에 개설된 비공개 카페다. 현재 회원은 133명. 치우천황이라는 닉네임으로 아고라 자유토론방·정치방에서 활동하는 윤영훈(54·학원영업)씨는 “아고라 이전에 서프라이즈 등에서 인정받았던 한나라당 성향의 논객”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아고라에서 얼마나 활동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먼저 ‘우리’를 정립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소통위원들 사이의 ‘소통’이 아직 부족하다는 의견이다. “한나라당 홈페이지의 공고를 보고 소통위원에 지원했다”는 김형진(22·정치외교학 전공)씨는 아고라 닉네임을 밝히지 않았다. 그는 “활발하게 활동하지 않았고, 고정적인 닉네임으로 썼다기보다 가끔 들어가 의견을 남기는 정도로 활동했다”고 말했다. 기쁜소식이라는 닉네임을 사용하는 박필웅씨는 자신이 소통위원이라고 공개적으로 밝힌 경우다. 그는 “이름을 밝히지 않으면 또 ‘알바’라고 억측이 난무할 것이고, 또 나는 떳떳하기 때문에 밝힌 것”이라며 “사실 소통위원 중에는 재력가도 많은데 무슨 돈이 아쉬워서 알바를 하겠는가”라고 반문했다. 본지가 접촉한 국민소통위원들은 모두 ‘알바’라는 의혹에 강하게 부인했다. 김형진씨는 “아르바이트라면 행위에 대한 ‘페이’가 있어야 하는데, 지금까지 단 한 푼도 받은 적이 없다”고 강조했다. 정국 현안 정리 ‘정보’ 메일로 받아하지만 ‘편의’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소통위원은 “소통위원으로 임명받은 며칠 뒤부터 메일과 문자로 각종 ‘정보’가 날아왔다”고 밝혔다. 이 소통위원은 “굳이 기사를 들춰보지 않아도 될 만큼 현재 인터넷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누리꾼 반응은 어떤지, 한나라당 의원이 어떤 프로그램에 나와서 어떤 발언을 했는지 정리한 자료가 거의 매일 이메일로 들어온다”라며 “딱히 참여를 독려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어떤 의원이 아고라에 글을 남겼으니 들어와서 의견을 밝혀달라’거나 ‘한나라당 주최 행사안내’ 등의 문자메시지도 수시로 온다”라고 밝혔다. 문건의 제목은 ‘오늘의 인터넷 일일동향’이다. 형식은 대동소이하다. ‘오늘의 이슈’라는 제목으로 한나라당과 관련한 이슈들로 ‘네티즌동향’ ‘포털사이트’ ‘인터넷언론’ ‘인터넷토론방’을 체크하는 내용이다. 다시 두 번째 카테고리인 ‘토론방 이슈’에는 누리꾼 사이에서 갑론을박 하는 내용을 간단히 요약해놓았다. 세 번째 카테고리 제목은 ‘특이사항’. 아고라에 올린 한나라당 의원 글에 대한 반향을 담고 있다. 2월 2일자 문건의 경우 각각 한나라당의 경제국회 ‘속도전’, 그리고 극악범죄자 신상공개, 정두언 의원이 아고라에 올린 글에 대한 반향을 다루고 있다. 정두언 의원이 올린 글에 대해서는 “대다수 누리꾼 거센 비판, 하지만 꾸준한 소통 노력 높이 평가”라고 자화자찬성 평가(?)도 내리고 있다. 문건을 생산한 곳은 한나라당 디지털정당위원회다. 김성훈 한나라당 디지털정당위원장은 “동향문건 작성은 디지털 정당위원회의 일상 업무이며, 당원뿐 아니라 기자들에게도 배포하는 일종의 편의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고 해명했다. Weekly경향은 이번 취재를 진행하면서 실제 온라인카페를 매개로 아고라에 지원을 요청하는 우파 성향 카페를 여럿 발견했다. 한 사용자가 인터넷뉴스나 토론방의 ‘지원’을 요청하며 링크를 남겨놓으면 해당 글에 가서 찬성 댓글을 남기거나 찬성버튼을 누르는 방식이다. 실제 네이버에 개설된 ‘ㅁ카페’의 경우 ‘오늘의이슈(댓글출동)’라는 코너가 있다. 해당 코너는 ‘우수회원’ 등급만 참여할 수 있다. “hnr○○○으로 오전에 방금 다녀왔고 오후에 또 가겠습니다”라는 댓글을 따라 실제 뉴스에 들어가보니 해당 아이디로 쓴 댓글을 발견할 수 있다. ‘ㅁ카페’ 회원 중 국민소통위원으로 참여한 이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김성훈 한나라당 디지털위원장은 “실제 국민소통위원들이 밝힌 경력에 그런 카페들을 운영한 경력을 밝힌 경우는 있지만 지금까지 이어지는지는 체크사항이 아니기 때문에 알 수 없다”고 밝혔다. 아고라에 지원 요청 우파 카페 발견그러나 누리꾼에 의해 구체적 활동내역이 밝혀진 경우도 있다. ‘낭만신사’라는 닉네임을 다음 아고라에서 사용하고 있는 서병근(57·부동산업)씨는 역시 국민소통위원인 ‘명랑소녀’ 등과 함께 ‘대한민국지킴이연대’라는 카페를 하고 있다. 서병근씨가 ‘낭만신사’라는 아이디로 아고라에 등록한 글은 모두 1581건. 엄청난 수다. 닉네임으로 프로필 조회를 해보면 동일한 게시물을 11~12개씩 등록하고 있다. 아고라 내 모든 토론방에 게시글을 하나씩 올리고 있는 셈이다. 일방적인 홍보가 아니냐는 지적에 대해 서씨는 “아고라에 투여하는 시간은 평균 잡아서 하루에 30분에서 한 시간 정도”라며 “다 자기 일이 있기 때문에 최단 시간에 최대한 능력을 발휘해야 하기 때문에 일일이 답글을 달진 않는다”고 말했다. 국민소통위원회로 대표되는 한나라당의 소통 노력은 얼마나 평가될까. 현재까지는 대체적으로 부정적이다. 민경배 경희사이버대 NGO학과 교수는 “어찌됐건 온라인게시판 내에서 토론에 참여한다는 것은 자발적 의지로 참여해야 정상”이라며 “정당조직원을 규합해 대거 인터넷에 풀겠다는 발상 자체가 인터넷 소통의 속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아니냐”고 비판했다. 민 교수는 “내용이 어떻게 되었던 정치적으로 제도화된 책임 권한을 갖는 이들이 직접 나서서 누리꾼과 대화하겠다는 것은 긍정적인 시도”라면서도 “대리인을 조작해서 자율적으로 운영하는 공간에 들어가는 것은 결국 공론장을 교란시키기 위한 온라인 홍위병 육성책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김성훈 한나라당 디지털정당위원장 “140명으로 여론조작 가능하다고 생각하나”
김성훈 한나라당 디지털정당위원회 위원장. <김석구 기자>정두언 의원이 국민소통위원장을 맡고 있지만 한나라당 조직체계에서 국민소통위원회는 디지털정당위원회 산하에 있다. 김 위원장은 “디지털위원회 산하에 재선의원이자 MB의 최측근이 앉아 있는 것도 하나의 파격”이라고 평했다. 2월 26일 오후 여의도 국회앞 디지털정당위원회 사무실에서 김 위원장을 만났다. <편집자 주>2월 23일 행사나 활동을 보면 다음 아고라에 집중되는 것 같다. 왜인가. “지난해 5월 디지털 정당위원회 선거를 거쳐 위원장으로 뽑혔다. 디지털 쪽을 연구하고 당에서 맡아 인터넷을 조사해보니 의외로 활성화된 토론방이 없었다. 조회수가 1000이 넘는 토론방이 다음 아고라밖에 없다. 비판적이고 반한나라당 정서를 갖고 있지만 그런 이야기를 듣는 게 소통의 기본이라고 생각했다.”한나라당에 대한 비판이 압도적인데. “한 9 대 1 정도 되는 것 같다. 물론 9는 비판적 의견이다. 비하하거나 욕설도 많지만 합리적인 비판도 있다. 보수 쪽으로부터도 욕을 먹는다. 좋은 데도 많은데 왜 아고라에 쓰냐는 것이다.”알바가 꼭 돈 거래만 의미하는 것이 아닌 ‘여론조작을 위한 홍위병 혹은 작전세력’ 정도의 개념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앞에 이야기한 것처럼 찬반의견이 1 대 9다. 설령 국민소통위원 140명이 다 동원된다고 하더라도 여론조작이 가능한 이야기인가. 실제 여론조사를 하면 대통령 지지율이 30% 정도 나온다. 연령대 등을 고려해도 아고라에서 15% 정도는 우리 쪽 의견이 나오는 게 정상이라고 생각한다.”한나라당 지지자들이 남긴 글도 욕설이나 도배하는 이른바 악플이 많다. 악플 게시자 중 국민소통위원이 없으리라는 법은 없지 않나. “한 분 한 분이 어떻게 활동하는지는 알 수 없다. 우리는 이념적 성향이나 연령, 지역 등을 다 고려해서 폭넓게 뽑았다. 지원자 중 ‘보수’보다 아무래도 ‘진보’라고 한 사람이 별로 없어 자기 성향을 ‘진보’라고 한 분들은 거의 발탁됐다. 욕설이나 도배, 허위사실을 올리지 말자는 원칙을 정했다. 위반한 사례가 나오면 당연히 국민소통위원 자격을 박탈할 것이다.”일부 국민소통위원의 경우, 활동을 제대로 하는지 의문이 제기된다. 감투를 얻기 위해 지원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국민소통위원이라는 것이 경력이 된다면 얼마나 되겠는가. 실제 명함을 받아 보면 경력을 죽 나열한 경우가 있다. 앞으로 2기, 3기를 모으면서 보완할 것이고, 또 아고라에 글을 남길 때 국민소통위원임을 밝히는 방향으로 유도할 것이다.”
이석현의원“다음아고라에 여당알바 수백명 침투했다”
민주당 이석현 의원은
11일 “포털사이트 다음 아고라광장에 지난달부터 수백명의 여당 알바들이 침투했다”고 주장했다.이 의원은 이날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 연석회의에서 “이 정권이 미네르바를 구속한 이후 인터넷상에서 표현의 자유를 질식사시키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이 의원은 “여당 알바들이 정부비판 글만 올리면 욕설 댓글을 수도없이 반복적으로 올리면서 토론 문화에 재를 뿌리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아고라에 적힌 글의) 일부 아이피를 조사해 보니 그 사람들은 한나라당이 위촉한 국민소통위원”이라고 근거까지 제시했다.이 의원은 “정말 이정권이 어떤 정권인지 알 수 있다. 이 정권이 포털 다음에 압력을 넣었는지 다음 메인 페이지의 초기 화면에서 아고라를 다음달부터 지우겠다고 한다”고 맹렬히 비판했다.이 의원은 나아가 “이 정권의 네티즌 탄압은 진시황후 분서갱유와 마찬가지”라며 “인터넷 토론문화를 불사르고 논객을 구속하면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몇푼의 돈으로 당신의 영혼을 팔려합니까?
가자서작성일
2009-03-11추천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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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미국,소련이 놀란 한국해군 전설
전설이란?누구에게나 나름의 전설이 하나쯤은 있을 것입니다. 내가 다니던 학교에선 양산박의 전설이 아주 유명했었는데요 하여간 왕년에 주름 잡았던 그런 추억이 나중에 전설이 되는데 그 전설의 공통점은 두고두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다는 겁니다.그런 측면에서 우리 대한민국 해군에도 전설이 있습니다. 시대별로 화려한 전설이라고나 할까요. 그런데 그것을 다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럼 대한민국해군 3대전설을 오늘은 아주 간략하게 말해볼까 합니다.
대한민국 해군의 첫번째 전설 : 해군의 영원한 전설인 백두산 함1. 백두산함의 전설 : 이건 너무도 유명합니다. 사진 : 미해군이 초창기 한국해군에 넘겨주기 직전에 함포를 장착하고 있는 백두산함. 바로 저 함포로 6.25 전쟁 개전과 동시에 부산으로 접근하던 북괴 무장수송선을 격침함.인터넷 검색하면 쫘악하고 나옵니다. 6.25전쟁초기 북괴 무장수송선을 부산앞바다에서 격침시킴으로써 대한민국 후방을 온전하게 유지시킬 수 있게끔 한 대한민국 해군의 영원한 전설이자 최초의 A매치 승리자 바로 백두산함입니다. 너무 유명하니까 설명하면 예의가 아닐 것 같아서 이쯤해서 패슈..
(참고로 백두산함에 관한 자료는 제가 올린 자료를 검색하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
2.대한민국 해군의 두번째 전설 DE-73함 (충남함)이야기 : 이름하여 한국해군 73함의 소련잠수함 추적 강제 부상사건 이라고도 합니다.
사진 : 두번째 전설의 주인공 DE-73충남함과 동급인 미해군 루데로급이 자료 찿느라고 고생 좀 했는데 드디어 찿았습니다. 아마 이 전설 모르는 분들 꽤 될겁니다.대한민국 해군의 능력을 소련과 미국에게 유감없이 보여준 완전 초대박 전설이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 후 우리는 미국으로 부터 프래쳐급 전투수송함 (충무급)을 비롯해서 각종 전투함을 무상 제공 받았습니다. 뭐 그 당시 미국으로 부터 무상으로 받지 않은 것이 없었던 시절인데 그럼 "73함의 전설"은 무엇인지 말씀 드리겠습니다. 대충 이야기 하자면 미국 해군 본부에서 군 원조 프로그램의 하에 Cannon, Rudderow, Buckley급 호위 구축함들은 1950년 중순부터 시작하여 1960년 말 까지 총 9척이 도입되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DE-73함인 충남함이입니다. **************************************************************<미국이 5,70년대 우리에게 무상제공했던 전투함>한국명(전함종류) (미국명)DE-71 (캐논급) 경기함(DE-770 Muir)DE-72 ( " ) 강원함(DE 771 Sutton)DE-73 (루데로급) 충남함(DE-706 Holt) <---- 대한민국 해군 2번째 전설의 주인공PF-81 ( " ) 경남함(DE-712 Cavallaro)PG-82 ( " ) 아산함(DE-598 Harry L. Corl) PG-83 ( " ) 웅포함(DE-600 Julius A Raven)PF-85 (버클리급) 경북함(DE-207 Kephart)PG-86 ( " ) 전남함(DE-212 Hayter)PF-87 (로데로급) 제주함(DE-236 William M. Hobby)*****************************************************************그럼 소위 73함 충남함의 전설은 무엇인고 하면 국회도서관에서만 볼수 있는 내용인데 "73함 소련잠수함 추적사건"으로 등재된 엄청난 사건중의 하나이고 대한민국 해군 2번째 전설의 주인공이 바로 그것입니다.내용은 73충남함이 64년 10월 13일 소련잠수함을 7시간동안 추적 부상하게 한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소련 잠수함은 디젤인데 동해상에서 우리 해군의 소나에 걸려서 도망하다가 결국 숨쉴려고(?) 자신을 노출 시킬 수 밖에 없었던 당시로서는 완천 초대박 사건이었습니다.이로 인해서 대한민국 해군의 능력을 미국에게 과시 하게 되었고 당시 우리 해군관계자가 미해군으로 부터 훈장까지 받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해변에서 다이아 찿기보다 더 힘들다는 바다에서 잠수함 찿기라고 하는데 그것을 끝까지 추적해서 부상까지 시켰으니 이건 대잠전에 길이 남을 하나의 사건이자 분명한 전설입니다. 그런데 이런 전설을 메니아 조차 모르는 분이 많다고 느껴서 오늘 몇자 끄적여 봅니다.그런데 73함 충남함은 호다사마라고나 할까 그로 부터 딱 3년후인 67년 1월 14일 진해만 근처에서 정기여객선 한일호(140톤)와 충돌하여 한일호가 침몰해 96명이 익사했던 사고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법원에서는 쌍방과실로 판결을 받았는데 하여간 천당과 지옥을 번갈아 오고 간 해군의 2번째 전설임에는 틀림 없다 하겠습니다.===========================================================Rudderow(충남)급 호위 구축함*제원및 성능배수량: 표준 1,450 톤 (만재 1,810 톤) 전장: 306 ft (93 m) 전폭: 37 ft (11.3 m) 흘수: 13.75 ft (4.2 m) 기준 추진력: 2개의 보일러, 제네랄 일랙트릭 터보 전기 드라이브 2대 망간청동 3600 파운드 3 bladed 추진기 8.5 피트 직경, 7개 ft 7 인치 피치 12,000 마력 (8.9 MW) 2개의 방향타속도: 24 노트 (44 km/h) 항속거리: 4,940 nm @ 12 노트 무장: 2문 x MK-30 127 mm/38 2연장함포혹은 단장함포 1문~2문(함수1,혹은 함수1,함미1) 3문 x Mk-1/56(국산형으로 개조) 2연장 40 mm 포 6~8문 x Mk-4 20 mm 단장포 2문 x (533 mm) 어뢰 발사관 1문 x Mk-10 hedgehog 발사관 8대 x Mk-6폭뢰 발사관 (12발) 2발 x 예비 Mk-9 폭뢰 인원: 15명의 장교, 195명의 승무원 =================================================================================3. 대한민국 해군의 3번째 전설 : 강원함의 전설 . 기어링급 전투함의 대표격인 강원함의 전설을 뺄 수는 없을 겁니다.이 3번째 전설은 많은 분들이 알고 있는 것인데 83년도에 울릉도 동북방 해상에서 북괴 간첩선 모함을 격침시킨 전설입니다.
기어링급은 이제 다 도태되었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헬기 플랫폼으로서 선구자격인 전투함인 것은 다 아시는 상황이고,,당시 강원함에 탑재된 알류트헬기가 대함 미사일(씨 스쿠아?)로 북괴 무장 간첩선을 격침시킨 것은 해군의 3차원 입체 작전의 쾌거였습니다. 그 이후 북괴는 간첩선에 의한 수상 침투를 포기하고 반 잠수정 내지는 잠수함으로 침투 방법을 바꿨다고 전해지고 있으니 분명히 강원함은 해군 3번째 전설의 주인공이 되고도 남을 것입니다.이상 대한민국 해군 3대전설을 간략하게 말씀드렸습니다. (초 스피드 작성으로 인해서 많이 거칩니다. 이해^^)이제는 퇴역해서 전시물로 사용되고 있지만 강원함의 전설은 대한민국 해군과 함께 같이 간다
자료제공 : 한국해군의 역사와 현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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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조선군의 도검 패용방식
안녕하십니까? 맨날 눈팅만 하던 다크킬러 입니다. 고전물(?)도 올라오는 것을보고 용기를 내어 하나 올려보네요.
타 사이트에 올려놨던 시리즈들 중에 하나입니다. 반응 좋으면 더 가져오려구요. 그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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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다크킬러입니다. 지난 조선후기 군사체제 시리즈를 마무리 하고 긴 공백 기간 동안 너무 논 것 같아 뭘 해볼까 고민 하던 차에 시간도 생기고 여차 저차해서 부록으로 조선의 칼 패용방식에 대해 한번 주접을 떨어 보려고 합니다. 다 아시다시피 본 필자는 매~~~우 심각한 내용도 나름 코미디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좀 쓰잘때기 없는 능력을 지녔기에 이번에도 그런 식으로 타이핑 되겠습니다. 이해하시고 그럼 시작 합니다.ㅋㅋ
◆ 조선의 환도.
위에서 밝혔듯이 주제는 칼의 패용방식이다. 그런데 왜 갑자기 다~ 아는 환도에 대해 다시 설명 하냐고 따지는 독자들이 있을 줄 안다. 그럼 필자는 당연히 이말 밖에 해줄 말이 없다. ‘니가 모르는 것도 있다고’. 흠흠.. 어쨌든 그렇다는 거다.
환도에 대해 아예 그냥 디테일하게 나갈 것인가 아니면 패용과 관련된 부분만 국소적으로 디테일하게 나갈 것인가에 대해 고민해본 결과 보너스 페이지인 만큼 쉽게 쉽게 패용관련 부분만 설명하고 넘어가겠다.
보는 바와 같이 환도이다. 허고 많은 사진 중에서 것도 이것보다 입흔 환도사진들이 많이 있는데도 굳이 필자가 이 놈 사진을 올린 이유가 있다. 바로 환도의 패용방식을 설명하려면 ‘띠돈‘이란 놈이 가장 중요한데 바로 그 ’띠돈‘이 잘 보이기 때문이다.
◎ 띠 돈
띠돈!! 그래 이놈 이름부터 뭔가 확 와 닿지 않는가? 조선 및 한국의 칼 패용방식을 이해하려면 이놈부터 짚고 넘어가야 한다. 그럼으로써 그동안 영화 및 드라마, 기타 모든 매체들에 의해 우리에게 각인되어 왔던 한국의 칼 패용방식이 왜놈들과 달리 얼마나 간지나는지 알게 해줄 것이다.
여기 또 띠돈이 화면빨 잘 받은 환도사진이 있다. 이쯤 되면 우리 캅훼의 잘나가시는 옵하야들은 띠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바로 끈목에 연결되어 달려있는 쇠붙이이다.
대충 작동방법도 감이 오실 것이라 믿는다. 띠돈의 중앙에 있는 봉이 환도를 앞뒤로 쉽게 돌려 찰 수 있도록 해준다. 이래도 감이 안온다면 이사진 한 장이면 먼소린지 바로 알 수 있다.
◎ 칼의 패용
요로코롬 간지나게 뒤로 차븐다는 것. 이해를 돕기위해 영상캡쳐 자료를 더 보여주겠다.
물론 이것이 조선만의 패용방식은 아니고 중국이나 유럽이나 개나 소나 다 저렇게 차고 다녔다.
◎-1 근데 왜 이렇게 패용했을까?
왜 이렇게 차고 다녔을까? 단순히 간지나 보이기 위해서? 당연히 이건 개소리겠고... 왜 그럴까? 저렇게 뒤로 패용하고 다니면 당연히 발도시간이 길어진다. 칼집을 쳐서 띠돈을 이용해 조낸 간지나게 칼을 앞으로 돌리고 발도하면 정말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캐간지 상황이겠지만 실전에서는 당연히 번거로운 동작일 뿐이다. 해답은 조선군의 무장방식에 있다.
◎-2 조선은 조낸 엘프지향 국가였다.
그렇다. 다 알겠지만 조낸 활질만 하는 국가다. 저번 시리즈물에서도 그렇게나 강조했듯이 조선은 궁의 나라이다. 조선군은 팽배수를 제외한 거의 모든 병과에서 활을 무조건적으로 소지했다. 잘 쏘던지 못 쏘던지는 알바가 아니었다. 타국가에서 역사적으로 이런 식의 제식무장이 있었다면 쓸때없는 낭비라고 하겠지만...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조선은... 이래도 되는 나라였다;;; 조선의 무과에 응시하려면 필수과목이 궁시였다. 하다못해 문인들도 활은 즐겨 쐈다. 더군다나 시골 샌님도 활질은 했다. 심지어 시골아낙들도 활질을 하고 다녔다. 임진왜란 기간 중 백발성성한 노인이 산중턱에서 마을주민들을 희롱하는 왜군을 쏘아 맞추고 너털웃음을 지어 재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정말 왜군입장에서는 끔찍했을 것이다.
◎-3 동개차야 된다고!!
동개. 그렇다. 동개를 차야됫었다. 초기에는 활을 궁대(弓袋) 혹은 궁건(弓鞬) 이라고 부르는 주머니에 넣어 휴대했고, 활은 시복(矢菔)에 넣어두었다. 그러던 것이 시복과 궁대를 연결하여 동개(茼箇)라는 것을 만들어 착용하였다.
『고건(櫜鞬) 또는 동아[筒兒]라고도한다. 또 패동개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이미 동개를 찼다는 뜻이다. 활꽂이와 화살꽂이가 따로 있는데, 활꽂이는 버선 모양이며, 활이 반쯤 들어가고, 화살꽂이에는 화살의 아랫도리만 들어간다. 모두 가죽과 천으로 만드는데 색깔은 흑색 ·녹색 ·홍색 ·금색(金色) ·밤색 등이 있다. 동가도(動駕圖)나 능행도(陵行圖)를 보면 동개를 왼쪽이나 오른쪽 허리에 오도록 하고 화살꽂이는 반대쪽으로 멘다.』
활동개와 살동개를 착용한 모습이다.
역시 마찬가지.
대마도정벌 기록화의 동개착용 모습이다. 물론 맨 왼쪽의 앞사람이 반대쪽으로 패동개 하고 있지만 뭐..이건 당시 왼손잡이 오른손잡이 맘이었을지도 모르니 패스!
이와 같이 동개를 착용했을 경우 손잡이가 앞으로 오게 되는 일반적인 도검패용방식은 동개를 뽑을 때나 활을 조준할 때(마상에서는 특히나!!) 거치적거리게 된다. 따라서 도검의 손잡이 부분을 뒤로 돌려버린 것이며 이에 따른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 띠돈매기 방식이라는 상콤한 지혜물이 개발된 것이다.
현재 우리에게는 이색적인 모습이겠지만 이는 비단 우리만의 패용방식이 아니라 동북아시아, 중앙아시아, 동-서부 유럽에서 두루 나타난 방식이다. 일본문화에 찌든 우리에게만 색다르게 보일 뿐이다. 보너스로 기타 문화권에서의 동개착용과 도검패용방식이다.
◆ 여러 방식의 패용법.
위에서 우리는 왜 패용방식이 특이했나에 대해 살펴보았고 그 이유도 알아보았다. 그렇다면 이제 여러 가지 방식의 패용방법을 알아보자^^
여러 방식들이다. 대충 간암을 잡고 머릿속에 그려보라. 고리 메기는 떡보면 일반적인 패용방식이기에 제끼고 본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둘러메기 방식부터 설명하겠다.
◎ 둘러메보까? ※ 둘러메기
『서울 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정조세자책봉의례도(正租世子冊封儀禮圖)를 보면 국왕을 보위하는 운검(雲劍)들이 상당한 길이의 환도를 등에 둘러메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다른 그림에서도 운검들은 대부분 긴 운검을 끈을 이용하여 등 뒤로 메거나 아예 한 손으로 잡고 어깨 위로 메고 있는 것이 관찰된다. 현존하는 환도중 육군박물관 소장 흑칠장운검은 칼집에 세 개의 고리가 달려있다. 이 칼을 등에 메는 경우에는 양끝의 고리에 끈을 매어 착용했을 것으로 보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가운데 고리와 칼집입의 고리를 끈목으로 매어 허리에 매달기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등에 맨 운검은 그 길이가 상당히 긴 편이어서 칼을 풀어 내리지 않고는 발도가 불가능하다고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칼집만 길 뿐 그 안의 칼날은 짧았을 것이다.』
운검만 메는 것이 아니라 환도를 메버려도 된다. 가장 간지나는 자세이며 실전상황에서 활을 쏘다가 적이 다가오면 바로 손을 어깨너머로 넘겨 잡자마자 그대로 발도하면서 위에서 아래로 베버리는 것이다. ㅠ.ㅠ 정말 캐간지 자세가 아닐 수 없다.
관련 이미지 자료는 대체 빌어먹을 아무리 뒤져보아도 웹상에는 없다. 정조세자책봉의례도(正租世子冊封儀禮圖)에 이 방식이 나와 있다고 하나 이걸 보려면 국회도서관이나 관련 도서관에 직접방문해야 한다고 하니;; 시간 나시면 한번 찾아가 보도록 해라. 아마 이미지 떠논 것이 없나보다.
◎ 조낸 설명한 거다~! ※ 띠돈메기 - 패도(佩刀)
『조선시대의 그림에 나타나는 대표적인 환도의 휴대 방법은 띠돈을 이용하여 좌측 요대에 칼을 비스듬하게 매어 늘어뜨리는 것이다. 이 때 칼자루는 뒤로 향하며 칼집 끝이 앞을 향하게 된다. 그러나 같은 요대라도 그 위치는 거의 겨드랑이 바로 밑에서부터 골반 부위까지 다양하였기 때문에 칼의 위치 또한 다양하다. 조선 후기의 안릉신영도(安陵新迎圖) 행렬에서 중군은 갑옷위로 두른 남광대에 가죽띠를 두르고 그 띠에 칼을 메었기 때문에 칼은 허리 아래에 45도 정도로 비스듬히 늘어져 있다.』
◎ 일반사병들의 뺑끼! ※ 뒤꽂이 - 대도(帶刀)
『뒤꽂이란 정조의 화성 행차를 묘사한 반차도(班次圖)에서 보이듯이 환도를 허리띠의 뒷춤에 별도의 고정 장치 없이 그냥 꽂는 것이다. 이는 주로 하급 병사들에게서 나타나는 칼의 휴대 방법이다. 칼은 칼집의 중간 부분 정도에서 허리띠에 걸려있다. 칼을 뒤춤에 그냥 찔러 넣어 휴대하는 경우 환도에는 가타나의 율형(栗形)이나 반각(返角)이 없기 때문에 빠르게 걷거나 뛰면 칼이 빠질 염려가 있다. 따라서 끈목을 허리띠에 거는 등 나름대로의 칼 고정 방법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예나 지금이나 일반사병들에게 불편한건 그냥 불편한 것일 뿐이다. 조총수나 궁병 및 포병, 창수들에게는 도검은 지금의 대검과 같은 존재일 뿐이다. 헌데 이것을 굳이 다른 도검이 상대적으로 중시되는 병과처럼 패용할 필요가 있을까? 우리 병장들은 조낸 고민하는 거다.
‘아 시바..조낸 한번 털리고 말어 아니면 미친듯이 계속 이러고 삽질하고 살어?’.... 답은 이미 나와있다.‘벨라믄 베쇼!! 알게 뭐야~;; 내가 불편하단디.’결국 편한 맛에 하는 군대생활 아닌가(?응?;) 그렇다고 이에 대해 제제를 가할 또라이 장교들도 없다는 것!!
정규방법이 아닌 뺑끼인만큼 별다른 고정방법이 없었다. 따라서 당시 군복을 입어본 필자의 경험상 칼집의 끈목부분에 당시 군복의 전대를 통과시켜 멘 것으로 보인다.(원래는 조선의 무기와 갑옷 - 민승기 이책에서 나온 말이다;; 근데 진짜 입어본 경험에 따르면 이 말이 맞는 거 같다;) 정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들의 잔머리는;;
보이는 바와 같이 지금의 부사관 이상 급은 감히 못하는 패용방식이다. 5성장군인 일반 사병급만 한다;;
◆ 결 론
지금까지 우리는 잘못된 매체들을 통해 잘못된 조선군 및 한국의 도검 패용방식에 물들어 있었다. 드라마에서 감히 칼집을 손에 들고다니는 장면들이 많이 보인다. 물론 이런 식의 패용방식도 있었다. 장도(杖刀), 집도(執刀) 라하여 들고다니는 것이다. 허나 이런 방식의 패용방법은 매우 이례적인 경우에만 적용되는 것으로써 일반적인 제식 패용방식이 아니다.
간혹 일빠 및 일본문화에 심취한 떠라이들에게서‘사무라이의 칼 찬 모습을 봐라 조선얼라는 저리 어벙하니 칼들고 다니니 맨날 줘 터지지. 역시 사무라이가 캐간지 인거3’이라는 발언을 들을 때마다 속에서 수퍼 볼케이노가 폭발한다. 안구는 그냥 퍼펙트 스톰이다. 아~~ㅠ.ㅜ 그놈들에게 정말 제대로 무장한 조선군을 보여주고 싶어서 미치겠다.
말도 안 되는 사상에 빠지신 미디어매체 제작자들이 뭐가 멋있다고 그렇게 조선군의 복식을 나름 재창조한 후 애들한테 입혀서 다니게 하는지 모르겠다. 또 툭하면 서양 갑주를 카피하는데..본 필자는 조선군의 제대로 된 무장복식이 더욱 멋있다고 장담한다. 괜히 꿀리니까 땡깡부리는게 아니라... 정말 진짜로 더 멋있단 말이다. ㅠ.ㅠ
아~~아. 캐간지나는 빨강 두정갑에 동개와 시복을 차고 패도방식으로 환도를 패용한 후 여분의 칼을 오른쪽 어깨쪽에 시복 뒤쪽으로 하여 둘러메기하고 있는 모습이란!! 아아악!! 그때의 그 포쓰란!! 그 이미지를 구하려야 구할 수가 없어서 보여주지 못하는 본 필자를 욕해라!! ㅠ.ㅠ 그거 보여주고 나면 애들 진짜 질질 싼다!!
하루빨리 어떤 개념 제대로 박힌 제작자들이 올바른 조선군의 모습을 스크린이나 브라운관에 재현해 주었으면 한다. 정말 간곡한 바람이다. 좀더 멋있게 보이기 위해 일부러 현 디자이너들이 손을 댄 과거 복식은 뭔가 싸구려 맛이 난다. 그냥 그 시대복식 그대로의 리얼리즘이 가장 멋있다는 사실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사진 출처 및 참고자료 : 조선의 무기와 갑옷 - 민승기
http://cafe.naver.com/s7204.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102
http://blog.daum.net/koreabow/9392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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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터] 명성황후의 치욕적인 시해 보고서네요 (눈물이...)
일단 퍼온글이라 ...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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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에조 보고서"라는, 편지 형식으로 된 정식 보고서가 있는데 에조라는 사람이 명성황후의 시해 장면을 아주 정밀하게 묘사해놓았다.먼저 낭인들이 20명 정도 궁에 쳐들어와서 고종을 무릎 꿇게 만들고 이를 말리는 세자의 상투를 잡아 올려서 벽에다 던져 버리고 발로 짓밟았다.그런데 그게 아니고 명성황후를 발견하자 옆구리 두 쪽과 배에 칼을 꽂은 후 시녀들의 가슴을 다 도려내고 명성황후의 아랫도리를 벗겼다.그리고 돌아가면서 20명이 강간을 했다.... 살아있을 때도 하고 한 6명 째에 죽어있었는데도 계속 했다.. 시체에 하는게 시간이고 살아있는 거에 하는게 윤간인데 명성황후는 시간과 윤간을 다 당했다. 그리고 그것을 뜯어 말리는 충신의 사지를 다 잘라버렸다. (에조는 하지 않았다)어떤 놈들이 한 나라의 황후를 그렇게 대하는가. 이 경우는 고대에도 근대에도 절대 찾아볼 수 없다.그렇게 한 후 너덜너덜해진 명성황후의 시체에 얼굴부터 발 끝까지 차례대로 한 명씩 칼로 쑤셨다. 죽은 후에도..(이건 에조도 함)그리고 여자로써 가슴도 도려내는 큰 수치를 당했다.그것을 길거리 서민들이 다 보고있는데서 시행했다.그 다음에 명성황후 시체에 기름 붓고 불로 활활 태웠다. 일본 사학자가 이 문서를 발견하고 수치스러워서 공개를 안 했다고 할 정도그리고 공개를 2002년 폴란드전 때 했는데 조중동 어디에도 기사를 실지 않았다.범인중 상당 수가지식인들이었고 그 중에 여섯명은 유학파였다.-------------------------------------------------------------------오마이뉴스 기사 추가명성황후, 시해 전 '능욕'당했다" 한일월드컵과 107년전 '을미사변' [단독발굴] '에조 보고서' 일본서 입수 국내 첫 공개 정지환 기자 침략과 저항, 지배와 피지배의 불행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일본과 한국. 21세기를 맞아 처음으로 치러지는 월드컵 공동개최를 계기로, 두 나라가 불행했던 과거를 정리하고 새로운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그러나 그러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발생했다. 양국 정상이 참여한 가운데 월드컵 개막식이 열리던 바로 그날, 일본 정부의 대변인인 후쿠다 야스오 관방장관이 "핵무기 무장" 발언을 한 것이다. 물론 일본 정부는 "진의가 잘못 전달됐다"면서 적극적인 해명에 나섰지만, 한국인들에겐 지금까지 망언 파문 때마다 일본이 보여온 '치고 빠지기'의 전형적 수법으로 비쳐질 뿐이다. 우리는 또다시 터져 나온 이 '망언'을 통해 진정한 한일관계의 재정립이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절감한다. 그렇다면 한국과 일본이 과거를 정리하고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방법은 정녕 없는 것일까. 물론 그 방법은 있다. 불행한 역사에 대한 철저한 진실 규명의 첫걸음을 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잊을 만 하면 터지는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과 각종 망언, 그때마다 냄비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가 식어버리는 한국의 반일감정은 이제 더 이상 '미래지향적 이웃사촌'이 되는 방법이 될 수 없다. 일본의 역사왜곡을 규탄할 때는 선봉에 서다가도 국내에서 친일 잔재 청산 주장만 나오면 침묵을 지키거나 딴지를 거는 기득권 세력과 수구언론에 이 일을 맡겨둘 수도 없는 상황이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숨겨진 진실을 파헤친 이 글은 바로 그러한 문제의식에서 쓰여진 것이다. 다시 말해 19세기 막바지에 발생한 이 비극적 사건이 20세기 전반기를 점철한 한일 두 나라의 불행한 인연의 첫 단추였다는 것, 이 잘못 끼워진 첫 단추를 바로 채우지 않고서는 전향적 한일관계의 정립은 단 한 발짝도 앞으로 갈 수 없다는 것이 이 글의 문제의식이다. 물론 지구촌 최대의 경사인 월드컵 기간 동안에 '악몽의 역사'를 거론하는 것은 시기적으로 적절치 않다는 지적이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였을까. 주간 <오마이뉴스> 3호에 이 글이 처음 실렸을 때, 국내 언론사 중에서 관심을 표명한 곳은 단 한 곳도 없었다. 한 작가가 어렵게 찾아낸 명성황후 최후의 진실, 그 단말마적 비명은 '메아리 없는 외침'으로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불행한 역사의 회상은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니며, 망각과 방치로 결코 치유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유태인들이 왜 시기와 장소를 구분하지 않고 끊임없이 나치의 범죄 행위와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전 세계인에게 상기시키려 했는지, 그들보다 더 참혹한 과거를 가지고 있는 우리는 그 진의를 깨달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전 세계인이 주목하는 한일 월드컵이야말로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진실을 언급하기에 가장 적절한 시점이라는 것이 기자의 생각이다. 그렇다면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진실은 무엇인가. 명성황후 시해사건 직후 일본 낭인 중 한 명이 작성해 일본 본국으로 비밀리에 보낸 보고서가 있었다. 사건 발생 71년 만인 1966년 한 일본인 역사학자에 의해 최초로 공개된 '에조(英臟) 보고서'가 바로 그것이다. 이 보고서는 그 동안 역사학계 일부에만 알려져 있던, 명성황후에 대한 일본인들의 '능욕(凌辱)'과 '시간(屍姦)'의 근거가 됐다. 그러나 이 문서는 그 존재만 알려져 있었을 뿐 전문(全文)이 국내에 입수되거나 공개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최근 작가 김진명씨가 이 문서의 전문을 찾아내 기자에게 전달했다. 지금부터 이 문서를 '나침반과 지도' 삼아 107년 전에 발생한 '아프지만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그 날의 진실을 찾아 역사기행을 떠나보자. 1. '에조 보고서'는 어떻게 작성됐나 1895년 10월 8일 새벽. 일본의 군인, 외교관, 언론인, 거류민, 낭인 등으로 구성된 암살단은 경복궁에서 조선 침략의 최대 걸림돌인 명성황후를 제거하기 위한 비밀작전 '여우사냥'을 수행하고 있었다. 광화문 등을 통해 궁내로 난입한 그들은 무단 침입을 꾸짖는 고종의 어깨에 무례하게 손을 얹어 주저앉혔으며, 세자의 상투를 잡아당겨 방바닥에 내팽개치고 칼등으로 목줄기를 후려치는 행패를 부렸다. 그들의 행패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왕비를 참혹하게 살해한 뒤 기름을 부어 시신을 불태우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그날 오전 9시 20분. 주한 일본공사관 수비대 소속 니이로(新納) 해군 소좌는 본국 대본영 육군참모부에 한 장의 전문(電文)을 보냈다. '극비(極秘)'라는 붉은 낙인이 찍힌 이 전문에는 '국왕무사 왕비살해(國王無事 王妃殺害)'라는 문구가 짤막하게 적혀 있었다. 그것은 일본 정부의 공식 라인을 통해 '여우사냥'의 성공을 알린 보고서였다. 이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던 을미사변(乙未事變)의 전모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인가 그것은 '절반의 진실'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당시 상황을 기록한 별도의 새로운 문서가 뒤늦게 발견된 것이다. '별도의 새로운 문서'가 작성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1895년 10월 9일. ▲ 에조의 보고서 을미사변이 터진 바로 다음날 작성된 또 한 건의 보고서가 일본 본국으로 날아왔다. 조선 정부 내부(內部, 요즘의 내무부) 고문의 직책을 가지고 있던 이시즈카 에조(石塚英藏)가 일본 정부의 법제국장관인 스에마쓰 가네즈미(末松謙澄)에게 별도로 보낸 장문의 보고서였다. 그렇다면 이시즈카 에조는 어떤 인물인가. 오랜 추적 끝에 '에조 보고서' 전문을 입수한 작가 김진명씨는 "일인들이 경복궁에 난입하여 명성황후를 살해할 당시 현장에 있던 20대의 젊은 낭인"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에조가 갖고 있던 조선 정부 내부 고문은 정식 직책이 아니다. 그가 조선 정부로부터 월급을 받거나 관복을 입고 등청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당시는 일본이 조선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던 때라 낭인들이 명목상 하나씩 그런 직책을 얻어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실제로 1988년 <민비암살(閔妃暗殺)>을 발간한 일본의 저명한 전기작가 쓰노다 후사코((角田房子) 여사도 자신의 저서에서 에조를 "민비의 유해 곁에 있던 일본인"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에조가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목격자'였다는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발언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에조가 스에마쓰에게 별도의 보고서를 보낸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에조가 조선에 들어오기 전 "법제국 참사관"을 지냈다는 후사코 여사의 설명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즉 에조는 당시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현장 총지휘자라고 할 수 있는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조선주재 일본공사의 재가를 받지 않고 전직 상사에게 보고서를 보낸 것이다. 이와 관련, 다시 김진명씨의 설명을 들어보자. "에조는 미우라 공사 몰래 보고서를 작성하여 본국으로 보냈다. 실제로 사건의 원인에서부터 실행자, 사후대책까지 충실히 기록돼 있는 이 보고서에는 미우라 공사의 책임과 처벌을 암시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따라서 '에조 보고서'는 철저하게 일본의 입장에서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조사하고 재판한 '우치다 보고서'나 '히로시마 법정기록' 등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다시 말해 사후에 은폐되고 조작됐다는 의심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유일한 문서라고 할 수 있다." 제보에서 공개까지 한 달 걸린 이유 본격적 논쟁은 역사학계의 몫 작가 김진명씨 측으로부터 기자에게 연락이 온 것은 약 한 달 전이다. 그는 자신의 소설 <황태자비 납치사건>의 결정적 모티브였던 '435호 비밀문서'의 존재를 추적하던 중 마침내 진본을 찾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솔직히 그 때만 해도 기자는 그의 제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작가에겐 미안하지만, 쇼비니즘을 조장하는 소설이라는 선입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기자는 <황태자비 납치사건>도 읽지 않은 상황이었다. 충북 제천에 있는 그의 작업실을 방문하기 직전에야 끝마친 '뒤늦은 독서'와 그의 진지하고 열정적인 기초설명을 들은 뒤에야 이 문서, 즉 '에조 보고서'의 역사적 무게가 피부에 와 닿았다. 작가가 굳이 기자에게만 이 문서를 전달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모든 언론사에 보도자료를 돌릴 경우 자칫 일회성 기사로, 그것도 역사적 본질은 사라진 채 선정적으로 다뤄질 가능성이 높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둘째, '젊은 세대'에게 이 역사의 진실을 알려주기 위해서는 인터넷 매체인 <오마이뉴스>가 가장 적합할 것이라는 작가의 현실적 판단이 작용했다. 그러나 이 문서는 곧바로 보도될 수 없었다. 여기에도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문서의 배경이 된 당시의 상황을 완전히 이해하기 전에는 섣불리(?) 기사를 쓰지 않겠다는 기자의 고집 때문이었다. 실제로 기자는 국사 교과서와 문학작품에서부터 전문서적까지 20여권의 단행본과 자료를 입수해 통독한 뒤에야 기사 작성에 들어갔다. 둘째, 한일 월드컵 공동개최에 악영향을 주지는 않을까라는 우려도 작용했다. 역사의 상흔을 쓸데없이(?) 덧내는 것은 아니냐는 반론의 제기도 충분히 예상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내 생각을 바꿨다. 부끄럽고 고통스런 과거라고 해서 망각하는 것이 진정한 치유의 방법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 문서의 역사적 의미에 대한 본격적 논쟁은 물론 관련 학계의 몫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기사는 '문제의 제기'이자 '미완의 보도'인 셈이다. 기자가 언젠가 명성황후와 관련된 역사적 공간을 순례하는 답사기를 쓰려는 이유도, 그리하여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통해 명성황후의 현재성을 밝히려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2. 보고서의 존재는 어떻게 알려졌나 '에조 보고서'는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70여년이 흐르는 동안 철저하게 숨겨져 있었다. 이 보고서를 맨 처음 찾아낸 사람은 일본의 역사학자 야마베 겐타로(山 健太郞, 1905∼1977). 그는 1966년 2월 <일한병합소사(日韓倂合小史)>를 이와나미(岩波書店)에서 발간했다. 그는 이 저서에서 "사체 능욕"이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썼는데, 이것이 바로 그후 국내 역사학계에서 거론되기 시작한 '명성황후 능욕설'의 원조가 됐다. 한편 그는 이보다 앞선 1964년 <코리아평론> 10월호에 '민비사건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했는데, 이것이 <일한병합소사>의 기본 골격이 됐던 것으로 보인다. <일한병합소사>가 처음으로 국내에 소개된 것은 16년이 흐른 뒤인 1982년 6월이다. 신학자 고 안병무 선생이 <한일합병사>(범우사)로 제목을 바꾸어 번역했는데, 문제의 '능욕설' 대목을 이 책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1895년 10월 7일 밤부터 다음날 이른 아침에 걸쳐서, 대원군이 훈련대에게 호위되어 있는 동안 일본 수비대와 대륙 낭인의 무리가 칼을 빼들고 경복궁으로 밀고 들어가서 민비를 참살하고, 그 사체를 능욕한 뒤에 석유를 뿌려 불을 질러버린 것이다." 이 대목이 '에조 보고서'를 근거로 서술된 것임은 물론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세상에 알려진 것과 달리, 당시 그는 이 책에서 보고서의 존재는 거론하지 않았다. 야마베 겐타로가 '에조 보고서'의 존재를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은 1966년 9월 발간한 <일본의 한국병합(日本の 韓國倂合)>이었다. 친북 계열 출판사에서 발간된 이 책은 국내에 번역되지 않았다. 결국 겐타로는 7개월의 시차를 두고 두 권의 책을 발간한 셈인데, 그나마 '에조 보고서'의 존재를 언급하고 일부 내용을 소개한 두 번째 책은 국내 학계의 주목을 받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야마베 겐타로의 언급 이후 '능욕설'은 재일 사학자 박종근, 나카쓰라 아키라 등에 의해서도 거론된 바 있기는 하다. 그러나 '능욕설'의 전적(典籍)이라 할 수 있는 '에조 보고서'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의 저서에도 등장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 보고서를 찾아 헤맸던 김진명씨의 설명이다. '에조 보고서'가 다시 언급된 것은 22년이 흐른 뒤였다. 앞에서 거론했던 쓰노다 후사코 여사의 <민비암살>에 잠시 등장한 것이다. 이 책은 1988년 발간되고 몇 달 후 조선일보사에 의해 번역됐는데(번역자 김은숙 한국교원대 교수), '능욕설' 관련 부분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더욱이 민비의 유해 곁에 있던 일본인이 같은 일본인인 나로서는 차마 묘사하기 괴로운 행위를 하였다는 보고가 있다. 전 법제국 참사관이며 당시 조선 정부의 내부 고문관(실제 보고서에는 '고문'이라고 적혀 있음-기자주)이었던 이시즈카 에조는 법제국장관 스에마쓰 가네즈미 앞으로 보낸 보고서에서 '정말로 이것을 쓰기는 괴로우나…'라고 서두에 쓴 후에 그 행위를 구체적으로 쓰고 있다." 그러나 쓰노다 여사는 이 책에서 '구체적인 그 행위'에 대해서는 소개하지 않았다. '차마 묘사하기 괴로운' 에조의 심정에 동감한 것일까. 한편 국내에서 명성황후 능욕설이 제기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그것은 앞에서 거론했던 야마베 겐타로의 첫 번째 책이 <일한합병사>로 국내에 번역되어 들어온 후부터로 보인다. 그러나 기자가 명성황후의 최후와 관련된 국내 기록을 샅샅이 뒤져본 결과, 능욕설의 근거가 된 '에조 보고서' 전문을 직접 찾아보려는 시도는 전혀 없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대다수가 야마베 겐타로의 소개와 해석에 그대로 의존하고 있었을 뿐이다. 3. 보고서 전문을 어떻게 찾아냈나 '에조 보고서' 전문을 찾아 헤매던 김진명씨는 쓰노다 후사코 여사의 <민비암살>을 정독하다가 그 행간에서 명성황후의 죽음에 '어떤 비밀'이 숨어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 책을 번역한 김은숙 교수를 통해 후사코 여사로부터 대여섯 권의 전적을 소개받았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을 온통 헤집었지만 그는 도저히 문제의 '에조 보고서' 전문을 찾아낼 수 없었다. 마침 후사코 여사마저 "기억이 희미하다"며 한 발짝 물러선 최악의 상황이었다. 막다른 골목에 이른 김진명씨는 평소 알고 지내던, 동경 히토츠바시 대학에서 외교사를 전공하는 권용석씨에게 보고서를 찾아줄 것을 부탁하고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권씨가 몇 권의 책과 자료를 보내왔다. 그 중에는 앞에서 기자가 거론한 <일본의 한국병합>도 있었다. 김진명씨는 이 책을 읽다가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에는 문제의 '능욕' 장면 중 일부가 소개돼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최종 목표가 아니었다. 그가 원한 것은 보고서의 일부가 아니라 전문(全文)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김진명씨는 문득 짚이는 것이 있어 <일본의 한국병합>을 다시 꺼내들었다. 문득 겐타로가 '에조 보고서'를 발견한 장소를 어딘가에 밝혀놓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에조 보고서'가 언급돼 있는 이 책의 223쪽을 보자 주석이 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부리나케 주석 번호를 찾아보니 다음과 같이 출전이 밝혀져 있었다. "국립국회도서관(國立國會圖書館) 헌정자료실(憲政資料室) 장(藏) <헌정사편찬회문서(憲政史編纂會文書)>". 역사학계에서 수없이 거론됐지만 정작 전문은 공개되지 않았던 '에조 보고서'가 역사학자가 아닌 한 작가의 끊임없는 관심과 열정적인 추적을 거친 끝에 '우연히' 발견된 순간이었다. 그러나 김진명씨는 이 문서를 즉각 찾지는 않았다. 문서를 찾으면 공개해야 하고, 이 문서의 공개가 월드컵 공동개최를 앞둔 한일 양국에 엄청난 파장을 미칠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다시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일본의 역사왜곡과 고이즈미 총리의 전격적인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지켜보면서 더 이상 공개를 늦출 수 없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한다. 그는 일본의 권용석씨에게 일본 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에 가서 이 문서를 찾아 팩스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리하여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갔던 '에조 보고서' 전문은 장장 107년만에 그렇게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4. 보고서엔 어떤 내용 들어 있나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원인과 발단에서부터 실행자와 사후 대책까지 충실하게 기록하고 있는 '에조 보고서'의 분량은 각 2쪽씩을 차지하고 있는 목차와 서문을 포함해 모두 12쪽이다. 아울러 보고서는 (1)발단 (2)명의 (3)모의자 (4)실행자 (5)외국사신 (6)영향 등의 소제목이 붙어 있는 6개의 장으로 구성돼 있다. 기자는 이 보고서를 김진명씨로부터 입수한 뒤 일본어에 정통한 전문가에게 번역을 맡겼다. 그러나 주로 고어(古語)와 사어(死語)로 쓰여 있어 도저히 완벽한 번역을 할 수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 다만 보고서에 한자로 표기된 '부덕의(不德義)' '경솔천만(輕率千萬)' '직무상 책임(職務上 責任)' '주모자(主謀者)는 미우라 공사(三浦 公使)' 등의 표현이, "미우라 공사의 책임과 처벌을 암시하는 내용이 들어 있고, 사후에 은폐되고 조작됐다는 의심?막觀壙? 벗어나 있는 유일한 문서"라는 김진명씨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편 기자는 이번 취재 과정에서 겐타로보다 좀더 자세하게 '에조 보고서' 내용을 인용한 서적을 발견하는 의외의 성과를 얻었다. 친일문제전문가인 정운현 <오마이뉴스> 편집국장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는 일본 서적들을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뒤지던 중 찾아낸 <외교문서로 말하는 일한병합>(합동출판, 1996)이 바로 그것이다. 재일 사학자 김응룡씨가 쓴 이 책은 '에조 보고서' 전문 중 10분의 1 정도만 인용하고 있었지만, 지금까지 나온 어떤 저술보다도 풍부하게 보고서 내용을 소개하고 있었다. 다음은 이 책에 서술된, '에조 보고서'의 주요 내용에 대한 설명이다. "에조는 법제국장 앞으로 보낸 보고서 안에서, 왕비 살해를 일본의 모든 이들이 생각하고 있었다고 보고서 머리에 적고 있다. 왕비 살해의 필요성은 미우라도 일찍부터 생각해 오고 있었다고 말하고, 일본의 수비대가 주력이었던 일, 왕비 살해와 사체에 대한 능욕의 상황을 자세하게 적고 있다. 폭력이 난무하는 현장을 외국인들에게 보인 데다, 이 외국인들과 언쟁까지 벌인 일과 대궐에서 난동을 끝내고, 보기 흉한 몰골로 대궐에서 철수하는 것을 대궐 앞 광장에 몰려든 조선인 군중들과 서둘러 성안으로 들어가는 러시아 공사에게도 보이고 말았다고 보고하고 있다." 그러나 "사체에 대한 능욕"이란 대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 역시 명성황후의 최후와 관련해서는 야마베 겐타로의 해석을 그대로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5. 보고서에 담긴 진실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한편 김진명씨는 '에조 보고서'와 관련해 기자에게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그의 발언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모든 한국인들은 명성황후가 난자 당해 죽은 걸로만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절반의 진실'에 불과하다. 다만 '에조 보고서'의 존재를 접한 극소수의 일본인과 한국인 학자들만이 명성황후가 살해당한 뒤 시간된 걸로 주장하고 있다. 나조차도 그런 기존의 해석에 따라 <황태자비 납치사건>에서 시간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그는 '에조 보고서'를 자세히 읽어본 뒤 생각이 바뀌었다고 한다. 다시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명성황후 최후의 장면을 기록한 유일한 문서인 '에조 보고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명성황후가 시해 직전 즉 살아 있는 동안 능욕당하고 불태워지면서 죽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명성황후는 시간(屍姦)을 당한 것이 아니라 강간(强姦)을 당한 것이다." ▲ 에조 보고서 "특히 무리들은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왕비(王妃)를 끌어내어 두세 군데 칼로 상처를 입혔다(處刃傷). 나아가 왕비를 발가벗긴(裸體) 후 국부검사(局部檢査)(웃을(笑) 일이다. 또한 노할(怒) 일이다)를 하였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기름(油)을 부어 소실(燒失)시키는 등…" 그것은 참으로 충격적인 주장이 아닐 수 없었다. 그의 주장을 검증하기 위해서는 '에조 보고서'에서 능욕 장면을 묘사한 대목을 직접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보고서에서 실제로 그 부분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주요 한자 표기 그대로 살렸음-기자주). "특히 무리들은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왕비(王妃)를 끌어내어 두세 군데 칼로 상처를 입혔다(處刃傷). 나아가 왕비를 발가벗긴(裸體) 후 국부검사(局部檢査)(웃을(笑) 일이다. 또한 노할(怒) 일이다)를 하였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기름(油)을 부어 소실(燒失)시키는 등 차마 이를 글(筆)로 옮기기조차 어렵도다. 그 외에 궁내부 대신을 참혹한 방법으로 살해(殺害)했다." 그는 이 부분을 소리 내서 몇 번이나 되풀이해 읽은 뒤 이렇게 주장했다. "보고서 어디에도 살해한 뒤 능욕을 했다는 논리의 근거가 없다. 이 주장은 한국의 역사학자들이 야마베 겐타로의 해석을 아무런 비판 없이 그대로 따른 것에 불과하다. 겐타로는 1966년 보고서 전문을 소개하지 않은 채 이 부분만 따로 떼어내 소개한 뒤 '사체를 능욕했다'고 해석해 버렸고, 이것이 한국에서까지 그대로 정설로 통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에조 보고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사람을 죽였을 때는 반드시 '살해'라는 구체적인 표현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뒤에 나오는 '궁내부 대신 살해'라는 대목이 결정적인 방증이다." 실제로 시해 장면을 묘사한 '에조 보고서'를 뒷받침하는 증언과 자료들은 많다. "일본인 흉한들은 왕비를 내동댕이치고 구둣발로 가슴을 세 번이나 내리 짓밟고 칼로 찔렀다"(왕세자 이척의 증언) "왕비는 뜰 아래로 뛰어나갔지만 붙잡혀 넘어뜨려졌고 살해범은 수 차례 왕비의 가슴을 짓밟은 뒤에 칼로 거듭 왕비를 찔렀다"(영국 영사관 힐리어가 북경의 오코너에게 보낸 보고서) 등이 대표적이다. 다만 그들은 명성황후가 그렇게 칼에 찔려 즉사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대해 김진명씨는 이렇게 반론을 펼쳤다. "그들은 최후의 장면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이 아니다. 나중에 궁녀 등에게 전해들은 얘기를 다시 전달한 것에 불과하다. 더욱이 '에조 보고서' 이외의 어떤 기록에도 '능욕' 부분은 나오지 않는다.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피해자인 명성황후와 가해자인 일본인들이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죽었고, 일본인들은 진실을 철저하게 은폐하고 조작했다. 가해자 중의 한 명이면서도 미우라 일파와 입장을 달리 했던 에조의 증언이 가장 진실에 가깝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창밖을 응시하며 한참이나 침묵을 지키던 그가 마침내 다시 말문을 열었다. "결국 일본인들은 명성황후를 시간한 것이 아니라 강간한 것이다. 진보적 역사학자로 알려져 있는 야마베 겐타로조차 인류 역사상 전례가 없는 이 끔찍한 만행에 놀라 보고서 전문은 소개하지 않고 '사체 능욕'이라고 축소해서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한 주권 국가의 왕비에게 만행을 저지른 것과 그것을 은폐하고 조작한 것에 대해 인정하고 사죄해야 한다. 한국인들 역시 처참하게 능욕 당하면서 죽어간 명성황후의 원혼을 풀어줘야 할 책임이 있다." 한일 월드컵이 열리는 오늘, 우리는 "나의 억울한 죽음을 잊지 말라"는 명성황후의 단말마적 외침을 가슴으로 생생히 들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2002/06/03 오후 3:32 당시 글을 실었던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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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한 참 된 글이군요 왜 난 못봤을까??
이래서 아픈 역사는 그냥 그냥 뭍혀가고 그러는거군요... 아~~
써긋내작성일
2007-08-24추천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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