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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영국 매거진, 세계에서 가장 쿨한 동네 3위에 종로3가 선정
영국의 여행 매거진이 2만 7천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여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쿨한 동네 49'에 서울의 종로 3가가 3위로 선정됐다. 선정기준은 음식, 음료, 유흥, 문화뿐 아니라, 코로나 이후의 공동체 정신과 회복력등도 포함됐다. 종로 3가의 선정 이유로는 궁궐과 화랑, 탑골 공원에서 바둑 두는 노인같은 전통적인 문화와 길거리 곳곳에 숨어있는 음식점, 카페, 호프 등 현대적 문화의 공존을 뽑았다. 또한 매거진은 종로 3가가 서울 LGBT의 본거지이기도 하다고 덧붙였다. 한편, 세계에서 가장 쿨한 동네 2위에는 미국 시카고의 앤더슨 빌, 1위에는 덴마크코펜하겐의 뇌레브로가 꼽혔다. https://www.timeout.com/coolest-neighbourhoods-in-the-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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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일반] 문화 대혁명(중국 인민의 역사-마오쩌둥) 1962~1976 3부
프랑크 디쾨터 저/고기탁 역 누가 동지이고 누가 적인가? 이는 혁명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다. - 마오쩌둥 연대표 1956년 2월 25일제 20차 소련 공산당 대회에서 니키타 흐루쇼프가 스탈린 정권 때 재판 없이 행해진 잔인한 숙청과 대대적인 추방, 처형 비난함. 1956년 여름제8차 중국 공산당 전국 대표 대회 중 당헌에서 <마오쩌둥 사상>에 대한 부분이 삭제되고 개인숭배가 비난받음. 1956년 겨울 ~ 1957년 봄마오쩌둥이 대다수 동료들의 조언을 무시한 채 백화제방 운동을 통해 보다 열린 정치 풍조를 부추김. 중국 전역에서 시위와 저항 운동, 파업이 일어남. 1957년 여름비난 공세가 거세지면서 당의 지배권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는 등 백화제방 운동이 역화를 일으킴. 방침을 바꾼 마오쩌둥이 비판적인 목소리를 낸 이들을 향해 당을 무너뜨리려는 <불순분자>라고 비난함. 덩샤오핑을 책임자로 임명한 반우파 투쟁에서 50만 명이 박해를 받음. 당은 주석을 중심으로 결집하고 몇 개월 뒤 대약진 운동이 시작됨. 1958년 ~ 1961년대약진 운동이 기간 중 모든 농민이 인민공사라고 불리는 거대한 집단 농장에 소속됨. 이후 몇 년 간 고문과 과로, 질병, 굶주림 등으로 수천만 명이 사망함. 1962년 1월수천 명의 당 간부들이 참가한 베이징에서 열린 확대 회의에서 류사오치가 기근을 인재로 서술. 마오쩌둥에 대한 지지가 사상 최저 수준에 이름. 1962년 여름마오쩌둥이 집단 농장의 토지가 재분할되는 상황을 비난하고 <계급투쟁을 잊지 말라>라는 슬로건을 내세움. 1962년 가을사회주의 장점을 대중에게 교육하고 계획 경제 테두리 밖에서 일어나는 경제 활동을 탄압하기 위해 사회주의 교육 운동이 시작됨. 1963년 ~ 1964년류사오치가 사회주의 교육 운동에 거세하고 자신의 아내 왕광메이를 시골로 보내 공작대를 이끌게 함. 거의 모든 성이 <자본주의 노선>을 택했다는 비난을 받음. 500만 명이 넘는 당원이 처벌 받음. 1964년 10월 16일중국 최초 핵실험이 성공함. 1964년 10월 ~ 11월모스크바에서 일어난 무혈 쿠데타로 흐루쇼프가 실각함. 몇 주 뒤 크렘린 궁전 환영 연회에서 만취한 소련 장관이 저우언라이가 이끄는 대표단에게 마오쩌둥을 제거하라고 조언함. 1965년 1월마오쩌둥이 사회주의 교육 운동의 지침을 개정하고 <자본주의 노선을 취하는 당내 고위 인사들>을 겨냥함. 1965년 11월 10일야오원위안이 저명한 사회학자이자 베이징 부시장인 우한의 희곡 [하이루의 파면]을 대약진 운동에 대한 간접적인 비판이라고 주장하는 논설을 발표함. 1965년 12월 8일 ~ 15일마오쩌둥이 린뱌오의 조언에 따라 뤄루이칭을 인민 해방군 참모 총장직에서 해임함. 1966년 5월 7일마오쩌둥이 린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군과 인민이 구별 없이 융화되는, 요컨대 군사조적 조직과 정치적 세뇌를 아우르는 유토피아적 전망을 제시함. 이 편지는 후에 5.7지시라고 불림. 1966년 5월 4일 ~ 27일우한의 상관인 베이징 시장 펑전과 뤄루이칭, 루딩이와 양상쿤이 반당 범죄로 고발됨. 당과 국가의 고위층에 침투해 있는 <부르주아의 대표적인 인물들>이 5.16통지문으로 알려진 당 내부 문서를 통해 고발됨. 1966년 5월 25일네위안쯔가 베이징 대학교의 수뇌부를 <흐루쇼프 같은 수정주의자 집단>이라고 고발하는 대자보를 교내에 붙임. 1966년 5월 28일천보다가 이끌고 마오 부인(장칭)과 캉성, 야오원위안과 장춘차오가 참여하는 중앙 문화 혁명 소조가 구성됨. 1966년 6월 1일전 국민에게 <모든 괴물과 악마를 척결하라!>라고 촉구하는 글이 [인민일보]에 발표됨. 전국 곳곳에 휴교령이 내려짐. 1966년 6월 ~ 7월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이 중등학교와 대학교에 공작대를 파견해 문화 대혁명을 이끌게 함. 공작대는 곧 보다 급진적인 학생들과 충돌하면서 학생들은 <우파>라고 비난함. 1966년 7월 16일마오쩌둥이 양쯔 강에서 수영을 하며 문화 대혁명을 완수하겠다는 투지를 드러냄. 1966년 8월 1일5.7 지시에 고무된 일단의 학생들이 중국을 자본주의로 되돌리려는 공모한 자들과 싸울 것을 다짐하면서 자칭 홍위병이라는 조직을 만들고 마오쩌둥이 그들에게 지시 서한을 보냄. 중국 전역에서 학생들이 홍위병을 조직하고 출신 성분이 불량한 사람들을 공격함. 1966년 8월 5일마오쩌둥 본인이 직접 쓴 대자보 <사령부를 포격하라>가[인민일보]에 실림. 마오쩌둥은 공작대를 파견한 <지도자 동지들>이 <반동적인 부르주아 노선>을 취하고 조직적인 <백색 테러>를 가했다고 비난함. <우파>로 낙인찍힌 학생들이 구제를 받음. 1966년 8월 12일중앙 위원회 전체 회의에서 린뱌오가 류사오치를 대신해 2인자 자리에 오름. 1966년 8월 18일군복을 입고 홍위병 완장을 두른 마오쩌둥이 톈안먼 광장에서 100만 명의 학생들을 사열함. 마오쩌둥은 이후 수개월에 걸쳐 총 1200만 명의 홍위병을 사열함. 1966년 8월 23일[인민일보]가 홍위병의 폭력성과 그들이 벌이는 구사회의 모든 잔재를 파괴하려는 운동에 찬사를 보냄. 1966년 9월 5일홍위병에게 교통과 숙박이 무료로 제공됨. 많은 홍위병이 마오 주석의 사열을 받고 베이징을 찾는 가운데 다른 홍위병들은 혁명적 조직망을 수립하기 위해 전국을 종횡하며 지역의 당 권력자들<자자파>라고 공격함. 1966년 10월 3일홍위병에게 공격을 받은 당내 조직들의 지원 요청에 천보다를 주간으로 둔 당 기관지 [붉은 깃발]이 그들을 두둔하기는커녕 오히려 사설을 발표하고 <부르주아 반동 노선>을 따르는 당 내부의 <반혁명 수정주의자들>을 비난함. 1966년 11월 1일<대중을 마치 무지하고 무능력한 존재처럼 취급한다. 라며 고위 당원들을 비난하는 사설이 또다시 [붉은 깃발]에 발표되면서 일반 대중에게 당 지도자들에 대한 반감을 촉발하고 저항 조직 결성을 부추김. 1966년 12월 26일마오 부인이 새로 결성된 전국 임시 노동자 연맹 대표단을 접견한 자리에서 문화 대혁명이 시작된 이래 당 지도자를 비난했다는 이유로 해고된 사람들을 모두 복직시키라고 요구함. 일흔 세 번째 생일을 맞은 마오쩌둥이 그날 저녁에 <내전의 전국적인 확산>을 환영하며 축배를 듦. 1967년 1월 6일장차 <1월 폭동>으로 불리게 될 사건에서 100만 명의 조반파 노동자들이 상하이 당 위원회 권력을 박탈함. 마오 주석이 다른 지역의 조반파도 <탈권>하라고 촉구함. 1967년 1월 23일<혁명 대중>을 지원하라는 명령이 군에 하달됨. 1967년 2월 11일과 16일저우언라이의 주재로 열린 정치국 회의에서 원로 사령관들이 중앙 문화 혁명 소조원을 비판함. 마오쩌둥이 곧장 이들 사령관들을 맹렬히 비난하고 나서면서 린뱌오와 중앙 문화 혁명 소조가 보다 막강한 힘을 갖게 됨. 1967년 4월 6일<프롤레타리아 좌파>를 지원하라는 명령에도 불구하고 일부 지역에서 군이 오히려 당 지도자들 편에 섬. 4월 6일 군에 하달된 새로운 지시에 따라서 조반파에 대한 발포가 금지되고 군 사령부를 습격한 이들에 대한 보복이나 대중 조직을 해산시키는 것이 금지됨. 1967년 5월대개는 군까지 개입된 파벌 간의 폭력 사태가 전국으로 확산됨. 1967년 7월 20일우한의 두 대립 세력을 중재하기 위해 파견된 중앙 문화 혁명 소조원 두 명이 조반파를 편드는 듯 한 태도를 보였다는 이유로 지역 군인들에게 납치됨. 린뱌오는 이 사건을 지역 군 사령관의 반란으로 규정하고 비밀리에 우한을 방문 중이던 마오 주석에게 즉시 상하이로 떠날 것을 권유함. 1967년 7월 25일우한에 억류되었던 중앙 문화 혁명 소조원들이 환영을 받으며 베이징으로 귀환하고 베이징 시민들이 해당 사건을 <반혁명 폭동>이라며 규탄함. 린뱌오가 군에 대한 장악력을 더욱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됨. 1967년 8월 1일린뱌오를 마오 주석의 가장 충직한 부하로 묘사하며 군대에서 <주사파>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설이 [붉은 깃발]에 살림. 서로 다른 파벌의 무력 충돌이 여름 내내 전국으로 확산됨. 1967년 8월 22일저우언라이에 비판적인 조반파가 외교부를 장악하고 베이징 소재 영궁 공관에 불을 지름 1967년 8월 30일마오 주석이 폭력을 제지하고 나서면서 중앙 문화 혁명 소조원 몇 명에 대한 체포를 명령함. 며칠 뒤 대중 조직이 군대의 무기를 탈취하는 행위가 재차 금지됨. 1967년 9월마오쩌둥이 전국을 순회하며 모든 혁명 세력의 위대한 동맹을 촉구함. 1968년 3월 22일린뱌오가 군 지도자 여러 명을 체포하도록 명령하며 자신의 군대 장악력을 더욱 확고히 함. 1968년 7월 27일 칭화 대학교에 파견된 마오쩌둥 사상 선전대가 홍위병들을 굴복시키고 징계함으로써 홍위병 시대가 막을 내림. 1968년 9월 7일모든 성과 주요 도시에 혁명 위원회가 수립되고 저우언라이가 전면적인 승리를 선언함. 1968년 여름 ~ 1969년 가을새로운 혁명 위원회가 <당원 정화> 운동을 기회 삼아서 그들의 적을 <스파이>와 <반역자>라고 고발함. 1968년 12월 22일도시 학생들에게 시골로 내려가 재교육을 받으라는 마오 주석의 지지가[인민일보]에 발표함. 1968년과 1980년 사이에 모두 1700만 명에 달하는 학생들이 도시에서 추방됨. 1969년 3월제9차 중국 공산당 전국 대표 대회가 개최되기 몇 주 전 중국과 소련 군대가 우수리강 유역에서 충돌함. 린뱌오가 중국을 더욱 무장시키는 계기가 됨. 1969년 4월제9차 중국 공산당 전국 대표 대회에서 린뱌오가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지명됨. 1970년 2월 ~ 11월<일타삼반>이라는 같은 이름으로 전개된 두 개의 운동이 <반혁명 활동>과 <경제 범죄>를 공격 대상으로 삼고 쉰 명 중 한 명꼴로 관련 행위에 연루되었다며 대중을 겁박함. 1970년 여름마오쩌둥이 국가 주석직을 둘러싼 쟁점을 이용해서 린뱌오의 충성을 시험함. 1971년 4월마오 주석이 미국 탁구 대표팀을 중국에 초대함. 1971년 여름남부 지방 순회에 나선 마오 주석이 린뱌오의 이름을 한 번도 거명하지 않음으로써 그의 권위를 약화시킴. 1971년 9월 12일마오쩌둥이 베이징으로 돌아옴. 자정이 막 지난 시간에 린뱌오와 그의 아내와 아들이 베이다이허 여름 휴양지 외곽에서 서둘러 비행기에 탑승함. 비행기가 몽골에서 추락하면서 탑승자 전원이 사망함. 1972년 2월 21일 ~ 28일닉슨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함. 1972년 8월군대가 병영 복귀함. 이후 수 개월 동안 다수의 정부 관리자와 당 간부가 복권됨. 1973년 11월 ~ 1974년 1월마오 부인과 장춘차오, 왕홍원과 야오원위안이 단결하여 저우언라이에 대항하면서 얼마 뒤 <사인방>이라는 이름을 얻게 됨. 저우언라이를 겨냥한 전국적인 규모의 정치 운동이 시작됨. 1974년 4월마오 주석이 덩샤오핑을 승진시켜 유엔에서 중국 대표단을 이끌게 함. 1975년 1월마오 주석이 승인 아래 저우언라이가 중국의 농업과 산업, 국방과 과학 기술을 개선하기 위한 <4대 현대화> 계획에 착수함. 1975년 11월 ~ 1976년 1월마오쩌둥이 자신이 죽고 나면 덩샤오핑이 자신의 유산을 훼손할 거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힘. 덩샤오핑이 여러 당 대회에서 비판을 받으면서 맡고 있던 대부분의 공직에서 해임됨. 1976년 1월 8일저우언라이 총리 사망. 1976년 4월 4일 ~ 5일저우언라이에 대한 대중의 폭발적인 지지가 톈안먼 광장의 대규모 시위로 이어지고 경찰과 군대가 폭력으로 진압함. 1976년 9월 9일마오쩌둥 사망. 문화 대혁명 대약진 운동의 실패 이후, 노쇠한 마오쩌둥은 잃어버린 자신의 위상을 회복하고 정적들을 제거하고자 한다. 자본주의적 시장 정책이 공산주의 이념의 순수성을 위협한다는 주장과 함께 문화 대혁명이 일어났다. 마오쩌둥을 숭배한 홍위병들이 득세했고, 라이벌 당파와의 권력 투쟁이 벌어졌다. 순수성이라는 이름 아래, 거리는 반자동 무기를 든 군인들로 가득 찼다. 그리고 인민의 50분의 1을 짓밟은 피의 숙청이 이어졌다. 디쾨터는 이 책을 통해 마오쩌둥의 마지막 시기와 격동의 중국을 교차함으로써, 문화 대혁명의 전모를 밝혀낸다. - 본문 발췌 “우리는 홍위병이다. 당신에게 혁명적 조치를 취하러 왔다!” - 본문 중에서 1966년 6월 1일 [인민일보]에 실린 한 성동적인 사설이 독자에게 <모든 괴물과 악마를 척결하라!>라고 촉구했다. 문화 대혁명의 신호탄이 된 이 글은 <반동적인 기득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동자를 속이고, 기만하고, 무력하게 만들려는> 부르주아 계급의 앞잡이들을 고발하라고 요구했다. 스탈린을 닮고자 했던 마오쩌둥은 비스탈린화 움직임에 개인적으로 위협을 느꼈다. 아울러 세계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인 위대한 소련에서 흐루쇼프가 어떻게 그처럼 단독으로 완전한 정책적 반전을 꾀할 수 있었는지 의아했다. 공산주의 논리에 따르면 생산 수단의 소유 문제를 둘러싼 사회주의식 개혁이 일단락된 다음에는 개인주의적인 사고부터 민간 시장에 이르기까지 부르주아 문화의 모든 흔적을 영원히 제거할 새로운 혁명이 필요했다.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넘어가는 데 혁명이 필요한 것처럼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로 넘어갈 때도 혁명이 필요했다. 마오쩌둥은 이를 문화 대혁명이라고 불렀다. 1부 초기 (1962 ~ 1966) 7,000인 대회 1962년 1월, 약 7,000명의 당 간부들이 인민 대회당에서 역대 최대 규모로 열린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전국 각지로부터 도착했다. 대약진 실패에 대한 성토를 하기 시작했다. 류사오치, 린뱌오 등은 마오쩌둥의 잘못을 당의 잘못으로 돌려 마오쩌둥은 7,000인 대회에서 살아남았다. 하지만 당에 대한 주도권을 상실하게 될까 봐 그 어느 때보다 전전긍긍했다. 1934년 당시 소련에서 열린 일명 승자들의 대회 즉 제17차 소련 공산당 전당 대회는 결국 희생자들의 대회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후 4년에 걸쳐 2,000명의 대의원 중 절반 이상이 처형되거나 강제 노동 수용소로 보내졌다. 스탈린은 대공포 정치를 통해 자신의 적을 사냥하는 데 더욱 박차를 가했다. 사회학자 로버트 서비스의 말처럼 <스탈린의 잔인성은 마치 오소리 덫처럼 기계적으로 작동했다>. 마오쩌둥의 경우는 변덕스러운 쪽에 훨씬 가까웠다. 그는 자신의 주도적인 지위를 유지하고자 일부러 사회를 뒤집어엎고 수많은 사람에게 폭력을 부추겼다. 더 이상 대기근을 부정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마오쩌둥이 취한 첫 번째 행보는 기근의 책임을 계급의 적에게 돌리는 것이었다. 사회주의 교육 운동이 <계급 투쟁을 잊지 말라>라는 표어와 함께 시작되었다. 빈농과 중산층 농민들로 이루어진 다양한 위원회가 활용되었다. 허베이 성 싱타이 지구에서는 수천 명의 농민들이 조직되어 <자본가>와 <독자적으로 농사를 지으려는 사람들>을 공격했다. 무엇보다 사회주의 교육 운동은 농촌의 일반 서민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런데 수정주의가 중국을 장악하지 못하도록 하려면 요직에 있는 권력자들을 공격해야 했다. 류사오치는 민초를 조사하도록 자신의 아내를 파견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국의 대규모 공작대에 합류해서 그녀를 따르라고 요구했다. 마오쩌둥은 이 같은 하향식 접근 방식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공작대를 잇는 지도자가 일반인의 표적이 되는 상향식 운동을 선호 했다. 그리고 1965년 1월 사회주의 교육 운동 지침을 새로 만들었다. 핵심 내용 중 하나는 <당내 요직에 있는 주자파를 잡아라.> 라는 것이었다. 바로 1년여 뒤에 홍위병은 문화 대혁명에서 이 구절을 철저히 이용하고 문화 대혁명은 사회주의 교육 운동으로 계승하게 될 터였다. 마오쩌둥의 오른팔 린뱌오 1959년 여름 루산 회의에서 린뱌오는 마오 주석을 옹호하는 대열에 합류해서 특유의 가늘고 높은 목소리로 <오직 마오쩌둥만이 위대한 영웅이며 그 같은 위치는 그를 제외한 누구도 감히 탐낼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우리 모두는 그 보다 한참 부족하니 아예 넘볼 생각도 하지 말라!> 린뱌오는 개인적으로는 자신의 비밀 일기장에 대약진 운동이<환상에 기초하고 있으며 완전히 실패>라고 털어놓았을 정도로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그럼에도 주석을 최대한 추켜세우는 것이 권력을 유지하는 최선의 방법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이미 오래전에 마오쩌둥을 우상화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은 터였다. 린뱌오는 마르크스, 레닌주의 이론을 마스터하는 지름길로써 마오쩌둥 사상을 학습하도록 장려하기 시작했다. 군인들은 마오쩌둥 전집에 나오는 짧은 구절들을 암기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1961년 4월부터 [인민일보]는 가장 눈에 잘 띄는 1면에 주석의 말을 인용해서 게재하기 시작했다. 독자들은 인용구를 잘라 내 차곡차곡 수집하기 시작했다. 1964년 1월 그동안 게재된 인용구를 등사판으로 인쇄한 요약집이 출간되었고 5월에는 개정판이 인민 해방군에 배포되었다. 개정판은 조야한 빨간색 비닐 표지가 적용되었고 일반적인 군복 주머니에 쉽게 들어가도록 손바닥만 한 크기로 제작되었다. 헌사에는 린뱌오가 레이펑의 일기에서 고른 문구가 들어갔다. <마오 주석의 책을 읽고, 마오 주석의 말을 듣고, 마오주석의 지시에 따라 행동하고, 마오 주석의 훌륭한 투사가 되자.> 1965년 8월에 개정판이 나왔을 즈음에는 일명 <작은 붉은 책>으로 알려진 [마오쩌둥 어록]이 군인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수백만 권이나 배포된 상태였다. 마오쩌둥 어록집 군사적 모델을 향한 열정은 정식 교육에 대한 경시로 이어졌다. 린뱌오의 표어 <정치가 최우선>이었다. 내내 지식인을 헐뜯어 왔던 마오쩌둥은 이제 교육 제도 전체에 대한 의구심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63년 2월 13일은 온 국민이 중국 설날을 기념하는 춘절 행사에서 그는 고등학교와 대학교 시험을 팔고문에 비유했다. 팔고문이란 청나라 때 과거에 응시한 지원자들이 논증을 펼치기 위해 익혀야 했던 문체였다. <나는 이 방식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방식은 완전히 바뀌어야 한다. 문제를 사전에 공개하고 학생들에게 관련 내용을 공부하게 한 다음 책을 참고해서 답을 적도록 하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다.> 심지어 더욱 도발적인 견해를 내놓기도 했는데 커닝에도 장점이 있다는 주장이었다. <만약 당신이 올바른 답을 적고 내가 그 답을 베낀다면 내가 쓴 답도 옳은 것으로 간주될 것이다.> 교사가 지루한 강의 내용을 장황하게 이야기할 때 조는 학생들의 손을 들어 주기도 했다. <허튼소리는 들을 필요가 없다. 그 시간에 차라리 머리를 식히는 편이 낫다.> 일부 학생들은 곧장 마오쩌둥의 메시지를 받아들였다. 교사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 생각이 필요 없는 이론 교육, 암기에 의한 학습 등을 중시하는 억압적인 교육 제도에 짓밟힌 기분이 들었다. 그런 그들을 위해 마오쩌둥이 편을 들고 있었다. 또 다른 미래의 홍위병 말처럼 <수업은 내 시간을 낭비했고 선생님들도 내 시간을 낭비했다.> 많은 학생들이 주석이 불러 줄 때를 기다렸다. 미래의 홍위병들 마오쩌둥은 문학계와 예술계를 향해서도 비난을 쏟아 냈다. 이 축제의 진정한 스타는 그의 아내였다. 마오쩌둥의 4째부인 장칭은 야망과 권력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성까지 이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1962년 9월 29일 수카르노 대통령의 방문을 받았을 때 장친이 함개 있는 사진이 [인민일보]를 통해 공개되고 본격적으로 정치 입문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녀는 정치에 점점 깊이 개입할수록 건강 염려증과 신경 쇠약증이 호전되었다> 마오쩌둥 주치의가 언급했다. 1963년 질투에 사로잡힌 잔인한 군주에게 처형당한 첩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사극은 마오쩌둥의 심기를 건드리고 이에 본격적인 행동에 나선 장칭은 자칭 문화 감시자로서 연극과 음악, 영화 등의 제작에 관련된 지침을 내놓기 시작했다. 마오쩌둥의 <계급 투쟁을 잊지 말라>라는 슬로건 아래 단결한 류사오치도 문화 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힘을 보탰다. 문화계에 혁명사상을 고취하고자 당이 조직한 문화 혁명 오인소조라는 단체에 장치 장칭이 합류 단지 희곡 작가 몇 명을 공격하기 위함이 아닌, 문화부보다 더 높은 곳을 겨냥한 훨씬 중요한 임무를 맡길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했다. 1965년 2월 그가 비밀 임무를 위해 장칭을 상하이로 보내면서 문화는 다음 단계의 혁명을 시작할 무대가 될 터였다. <4인방>으로 대활약할 마오쩌둥의 4째 부인 장칭 1957년 초 주석이 지식인들을 향해 불만을 표출하며 당원들이 업무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호소했을 때 펑전은 베이징 시장으로서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해 이 운동을 저지했다. 베이징에서 본사를 둔 [인민일보]는 백화 운동과 관련한 마오쩌둥이 가장 중요한 연설을 몇 주가 지난 다음에야 보도했다. 이 공식 당 기관지의 편집장 덩퉈가 시장의 지시를 따른 까닭이었다. 펑전은 당이 1954년 7월에 문학계와 예술계에 대한 정화 임무를 맡기기 위해 조직한 오인소조도 이끌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을 [반당 파벌]에 속해 있다고 주장하며 숙청하기에 이른다. 2부 적색 시대 (1966 ~ 1968) 5월 16일에 당 고위층 인사들 사이에서는 펑전이 수도인 베이징을 수정주의 요새로 탈바꿈 시켰다는 공지문이 회람되었다. 마오쩌둥은 당 전체에 <당과 정부 기관, 군부대를 비롯한 문화계 전반에 스며든 이런 부르주아의 대변인들과 연을 끊어라>라고 요구했다. 그들은 <혁명에 반대하는 수정주의 세력>이었다. 정권을 잡고 조건이 무르익는 대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부르주아 독재 체제로 바꾸려는 자들이다. 마오쩌둥은 끔찍한 경고를 내놓았다. <그들 중 일부는 우리가 이미 파악했고 일부는 그렇지 못하다. 일부는 우리가 여전히 신뢰하고 우리 후계자로 훈련시키고 있는 사람들이다. 요컨대 여전히 우리 곁을 바싹 달라붙어 있는 흐루쇼프 같은 자들이다.> 마오쩌둥의 메시지는 당내 고위층 인사들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유력한 베이징 시장이 실각할 수 있다는 것은 다른 사람도 이내 그의 뒤를 따를 수 있다는 말이었다. 당원들은 주석의 발언을 놓고 회의하는 자리에서 테이블 너머로 서로를 감시하기 시작했다. 몇몇은 주석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믿지 않는 것이 자신의 안위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이 마오 주석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주석을 제외한 모두를 의심해야 한다. 주석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모두 의심해야 한다.> [인민일보]를 읽는 일반인들은 권력의 회랑에서 모종의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직감했다. 마오쩌둥이 한동안 공개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도 의혹을 더욱 부추겼다. <문혁 초기 중앙문혁소조의 영도자들: 왼쪽부터 장칭(江靑), 천보다(陳伯達), 캉성(康生), 장춘차오(張春橋). 마오쩌둥은 1966년 천보다를 중앙문혁소조의 조장으로 임명했다./ 공공부문> 그사이 마오쩌둥은 펑전이 이끌던 오인소조의 해체를 위해 움직였다. 오인소조 대신 마오쩌둥의 심복들로 구성된 중앙 문화 혁명 소조가 등장했다. 중앙 문화 혁명 소조는 곧 문화 대혁명의 전 과정을 지휘하면서 모든 상위 결정이 내려지는 가장 중요한 정치 기구가 되었다. 황제가 대신들의 반대를 우회하기 위해 만든 내부 조직처럼 중앙 문화 혁명 소조는 당과 정부와 군대 위에 군림할 터였다. 중앙 문화 혁명 소조에는 장칭과 캉성, 야오원위안과 장춘차오를 비롯한 주석의 몇몇 심복들이 포함되었다. 국제 어린이날이기도 한 6월 1일에 중앙 문화 혁명 소조가 첫 번째 폭탄을 투하했다. 천보다는 [인민일보]에 발표한 선동적인 논설에서 서민들을 향해 <모든 괴물과 악마를 척결하라!>라고 강력히 촉구했다. <자신들의 반동적인 공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노동자를 속이고 기만하고 멍청하게 만들려는 하는> 부르주아의 대변자들을 척결하라는 외침과 함께 문화 대혁명이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천보다의 논설은 <사상계와 문화계> 전반에 자리 잡고 있는 <부르주아 출신의 전문가들>, <학술계의 권위자들>, <신망 있는 대가들>을 콕 찍어서 지목했다. 이제 중국은 곳곳에서 발견되는 반혁명적인 음모에 맞선 공격적인 정치 운동에 휘말려 있었다. 1966년 6월 1일 베이징 대학교를 고발하는 네위안쯔의 글이 전파를 타자마자 전국의 사무실과 공장과 학교에 대자보가 붙기 시작했다. 수만 명에 달하는 당 간부들이 중학교부터 출판사에 이르기까지 수도 전역의 교육 기관 내 공작대에 합류하도록 보내졌다. 전국의 다른 지역들도 수도와 경쟁에 나섰고 서둘러 공작대를 파견했다. 공작대가 어디를 가든 그들의 관리 아래 있는 학교나 대학은 온통 대자보로 도배되어 있었다. 공작대는 <괴물과 악마>를 비난하도록 학생들을 부추겼다. 앞서 [인민일보]에 발표된 논설에 따르면 그들은 문화계를 독점해서 노동자들을 억압하려 했다. 일부 학생들은 이미 자신들을 가르치는 교수들 중 몇몇의 출신 배경에 대해 면밀한 조사를 시작하였다. 공작대의 자극에 고무된 학생들은 초기에 교사들을 비난했다. 증오로 가득한 분위기가 고조되자 설전은 공작대에 의해 지목된 표적을 향한 물리적인 공격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어떤 희생자는 바보 모자를 쓰고 다녀야 했고 어떤 희생자는 목에 <자본주의 앞잡이>나 <흑방 분자>, <제국주의 스파이> 또는 그 밖의 죄목이 적힌 팻말을 매달고 다녀야 했다. 학생들에게 떠밀려서 때로는 잉크까지 뒤집어쓴 채 학교 안에서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교사들도 상당수 목격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바보 모자는 더욱 길고 무거워졌고 목에 매다는 팻말도 더욱 크고 묵직해졌다. 때로는 팻말이 돌멩이를 가득 채운 바구니로 대체되기도 했다. 링컨이 다니던 학교의 교장의 목에 깊은 상처를 냈을 정도였다. 교장과 다른 교사들은 부서진 징이나 냄비를 치면서 그리고 자신의 죄를 외치면서 맨발로 학교 안을 행진해야 했다. <나는 흑방분자다!> 공작대는 공장도 엄하게 단속했다. 상하이 제 17방적 공장에서는 조만간 사인방 중 한 사람으로 영전할 왕훙원이라는 젊고 잘생긴 보안 책임자가 문화 대혁명에 앞장서고 있었다. 그는 생산량을 늘릴 목적으로 고정급이 아닌 능률급을 지불하는 행태를 비난했다. 그와 그의 추종자들은 8,000명의 공장 노동자에게 불만을 부추겼다. 6월 말이 되자 반격을 위한 공작대가 파견되었고 불만을 제기했던 사람들을 핍박했다. 수백 명의 노동자들이 <반당 분자>라는 비난을 받았고 왕훙원에게는 <이기적인 출세주의자>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류사오치는 단시간에 중국에서 가장 미움 받는 지도자로 전락했다. 휘하의 공작대들은 수많은 사람을 순교자로 만들었다. 마오쩌둥이 베이징으로 돌아갈 준비를 마쳤다. 문화 대혁명을 완수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며 양쯔 강에서 수영하는 마오쩌둥. 1966년 7월 16일 마오쩌둥은 세간의 이목을 피해 몇 달 동안 연속으로 아주 은밀하게 전국을 여행하는 등 수수께끼 같은 행보를 보였다. 동료들조차 그가 어디에 있는지 항상 알지 못할 정도였다. 사회주의 교육 운동 기간에 <아버지는 가깝다, 어머니도 가깝다, 그래도 마오 주석이 제일 가깝다>라는 짧은 노래가 인기를 끌기도 했다. 하지만 현실 속의 그 지도자는 먼 사람이었다. 라디오에서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었고 공개된 자리에 좀처럼 모습을 나타내지도 않았다. 1966년 7월 16일 주석은 양쯔 강에서 그 유명한 수영을 함으로써 공적인 생활에 복귀할 거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는 양쯔 강의 거센 물살을 타고 하류로 떠내려가다가 한 시간 뒤 강 건너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붉게 상기되고 잔뜩 들뜬 얼굴>이었다. 마오쩌둥은 공작대를 견제하기 위해서 중앙 문화 혁명 소조 원들을 파견했다. 베이징으로 복귀하는 길에 난징에 들른 마오쩌둥의 부인은 공작대를 지지하는 수뇌부가 꼭 주석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아니라고 경고했다. 그녀는 <공작대를 맹신하지 말라>라고 설명했다. <근본적으로 우리 편인 이들 공작대의 지휘자들은 권한이 강화되어야 하지만 근본적으로 우리에게 반대하는 지휘자들의 권한은 몰수되어야 한다.> 7월 24일에는 하얀색 잠옷을 입은 마오쩌둥이 거처로 사용하는 다오위타이 국빈관 1층에서 당 지도층 인사들을 맞이했다. 그는 <대중을 두려워하고 학생들을 탄압한다.> 라며 그들을 질책했다. 주석은 공작대를 해체하라고 요구했다. 마오쩌둥은 해방자로 여겨졌다. 총회 중에 중앙 위원회가 내놓은 가장 주목할 만한 성명은 8월 8일에 대대적으로 홍보된 <프롤레타리아 문화 대혁명에 관한 결정문>이었다. 결정문은 주된 공격 목표가 <자본주의 노선을 선택한 당내 권력자들>이라고 선포했다. 그럼에도 진짜 권력은 지도부가 문화 대혁명을 재가하자마자 중앙 문화 혁명 소조에게로 넘어갔다. 마오쩌둥은 중국의 의사 결정 기관들을 사실상 완전히 장악했다. 여름 동안 <우경 세력>과 <반동분자>로 고발되었던 사람들이 이제 주석을 중심으로 뭉쳤다. 8월 8일 문화 대혁명 지침을 방송하면서 라디오는 초등학교와 중등학교를 비롯한 전문학교와 대학교 학생들에게 불리한 어떠한 조치도 없을 거라고 강조했다. 마오쩌둥은 학생들에게 직접 다가갔고 그들에게 가장 신뢰할 수 있는 협력자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들은 쉽게 외부의 영향을 받았고 조종하기가 쉬웠으며 싸우고 싶어 했다. 무엇보다 보다 능동적인 역할을 열망했다. 주석은 자신의 주치의에게 <반란을, 혁명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의존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이들 악마와 괴물을 굴복시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 라고 털어놓았다. 8월 1일 마오쩌둥은 칭화 대학교의 한 부설 중학교에 다니는 일단의 어린 학생들에게 친전을 보내서 그들을 지지한다는 뜻을 전했다. 그들에게 <저항은 정당한 행위다>라고 조언했다. 해당 학생들은 두 달 전에 자체적으로 조직을 결성하고 홍위병이라는 이름을 지은 터였다. 이제 주석의 허락까지 얻자 홍위병 그들은 죽을 때까지 마오 주석과 혁명을 지키겠다고 맹세했다. 아울러 충실한 투사를 자청한 까닭에 사복을 버리고 군복을 입기 시작했다. 몇몇은 가족 중에서 나이 든 구성원이 입었던 군복을 찾아 입었다. 지나치게 딱 맞는 군복이나 때깔이 좋은 옷은 부르주아적이라는 이유로 못마땅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언제든 계급의 적에게 쉽게 채찍을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죽 허리띠는 필수였다. 붉은 면직물에 황금색으로 <홍위병>이라고 적힌 완장까지 더해지면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다. 모든 사람이 홍위병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 중 상당수는 순수한 혈통을 가진 사람들만이 홍위병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원로 혁명가의 자식인 그들만이 문화 대혁명을 이끌기 위해 꼭 필요한 계급적 배경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그들은 애초 공산주의자로 태어난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부르주아에게 저항하고 위대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지지하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났다. 아버지의 권력은 아들에게로 이어져야 한다. 이른바 세습이라는 것이다.> 출신 배경이 나쁜 사람은 누구든 배제할 것을 요구하는 한 쌍의 대구가 빠르게 퍼져나갔다. <아버지가 영웅이면 그 아들도 영웅이다. 아버지가 반동이면 그 아들도 잡종이다.>혈통을 바탕으로 한 이 배타적인 조직의 회원 자격을 갖춘 중학생은 베이징에서 다섯 명 중 한 명꼴도 되지 않았다. 홍위병은 마오쩌둥의 <저항은 정당한 행위다>라는 선전 포고를 듣자마자 교사들과 관리자들을 향해 물리적인 공격을 시작했다. 마오쩌둥의 격려문을 받은 지 3일 뒤인 8월 4일 칭화 대학교 부설 중학교 학생들은 그 학교 교장과 교감을 <흑방의 우두머리>라고 비난하며 억지로 죄를 뒤집어씌웠다. 뒤이은 며칠 동안 홍위병들이 돌아가면서 그들을 폭행했다. 어떤 학생은 곤봉을 사용했고 어떤 학생은 채찍이나 구리 버클이 달린 허리띠를 선호했다. 누군가가 교감의 머리에 불을 질렀다. 베이징 사범 대학교에서 운영하는 어떤 여학교에서 첫 번째 사망자가 발생했다. 볜중윈 교감은 이미 6월 말에 공작대가 지켜보는 가운데 한차례 고문을 당한 적이 있었다. 학생들은 그녀의 얼굴에 침을 뱉고, 흙을 먹이고, 머리에 바보 모자를 씌우고, 손을 등 뒤로 묶은 채 피멍이 들도록 때렸다. 공작대가 물러난 뒤로 홍위병은 부르주아 세력을 학교에서 몰아내기로 결심했다. 8월 5일 오후가 되자 홍위병은 <흑방>을 조직했다는 이유로 학교 관리자 다섯 명을 고발했다. 볜중윈은 몇 시간에 걸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기절했다. 그리고 그대로 쓰레기차에 버려졌다. 두 시간 뒤에 마침내 길 건너편 병원으로 옮겨졌을 때는 그녀에게 사망 진단이 내려졌다. 중앙 문화 혁명 소조원들은 내내 홍위병들을 만나고 돌아다녔다. 이 학교에서 한 팀을 만난 다음에 저 학교에 가서 또 다른 팀을 만나는 식이었다. 이미 7월 28일에 마오 부인은 베이징 대학교를 방문해서 군중을 향해 <우리는 사람을 때리는 행위를 옹호하지 않는다. 하지만 설령 사람을 때린다고 하더라도 그게 무슨 대수인가!>라고 말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서 다음과 같은 견해를 피력하기도 했다. <악한 사람이 선한 사람에게 맞으면 맞을 만하기 때문이다. 선한 사람이 악한 사람에게 맞으면 칭찬은 선한 사람에게 돌아간다. 선한 사람이 선한 사람을 때리면 그것은 오해 때문이며 반드시 풀어야 한다.> 8월 13일이 되자 베이징 공인 체육관에 군중 집회가 준비되면서 부추김은 더욱 심해졌다. 수만 명의 학생들이 운집한 가운데 몇 주 전에 홍위병을 위협했다는 일반인 다섯 명이 무대 위로 끌려 나와서 <무뢰한>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구타와 허리띠를 이용한 채찍질도 가해졌다. 투쟁 대회를 지켜보던 저우언라이와 왕런중은 폭력을 중단시키려는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았다. 마오주석에게 완장을 채워주는 쏭야오 가장 큰 지지 행사는 8울 18일에 열렸다. 100만 명이 넘는 어린 학생들이 톈안먼 광장에 쏟아져 나온 날이었다. 그날 행사의 절정은 쑹빈빈이라는 한 여학생이 주석의 소매에 홍위병 완장을 채워 주는 특별한 영광을 누린 순간이었다. 그녀는 한원로 장군의 딸이었고 2주 전에 볜중윈이 고문으로 사망한 학교의 학생이었다. 쑹빈빈을 비롯하여 홍위병을 이끄는 지도부 학생들은 베이징 시 당위원회에 해당 사실을 개인적으로 보고한 터였다.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는 가운데 마오쩌둥이 그녀에게 빈빈이라는 이름이 무슨 뜻인지 물었다. 그녀가 <우아하다>라는 뜻이라고 대답하자 주석은 <군인답다>라는 의미의 야오우가 더 잘 어울릴 것 같다고 제안했다. 쏭야오는 단박에 유명 인사가 되었다. 홍위병에 둘러싸인 마오쩌둥 린뱌오 문화 대혁명의 초기 단계에서 수도를 제외한 대다수 지역의 많은 학생들은 아직 어느 수준의 폭력까지 용인될 것인지 확인이 없는 상태였다. 홍위병의 진정한 조직으로서 행동에 나선 것은 구사회의 유물을 파괴하려는 운동을 통해서였다. 8월 18일에 마오 주석과 나란히 연단에 모습을 드러낸 린뱌오는 학생들에게 <착취 계급의 모든 낡은 사고와 낡은 문화, 낡은 전통, 낡은 관습>을 타파하며 앞으로 나아가라고 촉구했다. 봉건적 이념이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의 생각을 구속해 온 상황에서 이제 중국의 혁명적인 색깔이 결코 바래지 않도록 확실히 하려면 이런 문화적 유물이 청산되어야 했다. 전통이란 산 사람에게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과거의 죽은 손이었고 완전히 박살 내야 할 어떤 것이었다. 해방 전부터 공산당과 운명을 같이하기로 결심했고 당 지도층 인사들과도 많이 알고 지내던 미국인 시드니 리튼버그는 이런 분노 섞인 메시지에 깜짝 놀랐다. <온통 박살 낸다는 말뿐이었다.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바로 그 사람들이 지난 20년 동안 이룩한 모든 것을 정말로 파괴하려는, 산산이 부수고 새로운 어떤 것을 건설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낡은 세상에서 전쟁을 선포한다 린뱌오의 호소는 널리 퍼져 나갔고 이튿날이 되자 베이징의 홍위병은 낡은 세상에 전쟁을 선포한다는 대자보를 당당히 내걸었다. <우리는 모든 낡은 사고와 낡은 문화, 낡은 관습과 낡은 습성을 비난하고 박살 내고자 한다. 이발사와 재단사, 사진사와 거리에서 책을 판매하는 행상을 비롯해서 부르주아 계급에 봉사하는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 우리는 낡은 세상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고자 한다!> 홍위병은 하이힐과 화려한 헤어스타일, 짧은 치마, 청바지, 볼온 서적이 즉시 사라져야 한다고 선언했다. 8월 19일에 이런 선동적인 발언이 실린 신문 수천 부를 찍어 유포했다. 8월 20일 저녁이 되자 홍위병들이 여러 무리로 나뉘어 베이징 거리를 배회하면서 구체제의 냄새를 풍기는 대상을 닥치는 대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기존의 표지판 위에 새로운 혁명적인 이름을 써 붙이면서 기리 이름도 바뀌었다. 양복점이나 이발소처럼 서비스 업종에 속하는 가게들이 공격받으면서 가게 주인들도 모욕을 당하거나 때로는 폭행까지 당했고 강제로 가게를 닫아야 했다. 8월 22일 오전이 되자 분위기는 더욱 험악해졌다. 홍위병이 강제로 머리를 깎고 바지통을 찢거나 하이힐 굽을 자르면서 일반인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같은 날 신화 통신은 <마오쩌둥의 어린 장수들>이라며 홍위병을 열렬히 지지하고 나섰고 낡은 문화를 청산하려는 그들의 노력을 칭송했다. 그 결과 8월 23일부터 26일까지 전국에서 폭력 사태가 일어났다. 홍위병은 과거를 상기시키는 모든 대상을 향해서 폭력을 휘둘렀다. 그로 인한 여파는 장차 수개월 동안 지속될 터였다. 1966년 8월 말부터 폭력 사태가 진정되었다. 상하이에서는 시 당국이 홍위병을 좋아하지 않으며 시 차원에서 홍위병을 진정시킬 거라는 소문이 퍼졌다. 학생들은 여전히 무리를 이루어 거리를 행진하면서 혁명가를 부르고 심벌즈를 울렸지만 불같은 열정은 이미 죽어 있었다. 많은 표어들이 담장과 창문에서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상점들은 다시 문을 열었다. 집을 습격당했던 다른 많은 희생자들처럼 정녠은 엉망이 되어 버린 자신의 집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대부분의 살인 사건이 집중되어 발생한 베이징에서는 9월 초부터 홍위병의 공공연한 폭력 행위가 감소하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부터는 완전히 중단된 듯 보였다. 경찰도 다시 본연의 임무에 복귀했다. 시민들은 10월 1일 국경절 행사에 맞추어 도시를 단장하느라 바빴다. 3부 암흑 시대 (1968 ~ 1971) ……… 4부 잿빛 시대 (1971 ~ 1976) ……… 로 이어집니다. Epilogue 수천만 명이 죽어 가는 동안에도 중국이 붕괴되지 않았던 이유 중 한 가지는 공산당 이외의 가능한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산재한 비밀 종파든 제대로 조직되지 못한 지하당이든 간에 기존 정권을 제외한 무엇도 이 광대한 땅덩어리를 통제할 수 없었다. 그리고 군 내부의 쿠데타 가능성은 1959년 루산 총회 뒤 린뱌오가 실시한 광범위한 숙청으로 미연에 방지 되었다. 공산주의 역사는 숙청의 역사이기도 하다. 끝없는 숙청을 통한 견제 세력의 약화, 공포를 통한 시민들의 우민화를 꾀한다. 마오쩌둥 사상 학습반부터 5.7 간부 학교에 이르기까지 끓임 없는 재교육 운동은 물론이고 가택 수색과 분서, 공개 굴욕, 수많은 숙청 등에도 불구하고 낡은 습관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문화 대혁명은 개인의 가장 내밀한 생각과 사사로운 감정을 비롯하여 개인의 삶을 둘러싼 모든 측면을 개조하고자 했지만 많은 경우에 표면적인 순응을 이끌어 냈을 뿐이었다. 대중은 기만에는 기만으로, 거짓에는 거짓으로, 공허한 빈말에는 공허한 표어로 맞섰다. 그들은 순응하는 척 연기하면서 주어진 순간에 자신에게 기대되는 대사를 정확히 읊을 줄 아는 뛰어난 배우들이었다. 마오쩌둥 사망 후 개방, 개혁, 서방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덩샤오핑은 민주사회로 가는 듯 했으나…….1989년 6월에 덩샤오핑은 군대를 동원했다. 베이징에서 민주주의를 외치는 시위대를 진압하라고 직접 명령했고 그에 따라 탱크가 톈안먼 광장으로 밀고 들어갔다. 그날의 학살은 야만적인 힘과 철권통치에 대한 의지를 보여 주었고 오늘날까지도 생산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일당 국가의 독재에 이의를 제기하지 말라. 이상 인민 3부작을 완료 하였습니다. 중국의 역사 지식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로오데작성일
2021-09-30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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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시무7조 (스압)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서 청원 진행 중인 '진인(塵人) 조은산이 시무 7조를 주청하는 상소문을 올리니 삼가 굽어살펴주시옵소서'라는 제목의 글에 28일 오전 10시20분 현재 21만5100여 명이 동의했다. ⓒ 청와대 게시판 기해년 겨울타국의 역병이 이 땅에 창궐하였는 바,가솔들의 삶은 참담하기 이루 말할 수 없어그 이전과 이후를 언감생심 기억할 수 없고감히 두려워 기약할 수도 없사온데그것은 응당 소인만의 일은 아닐 것이옵니다백성들은 각기 분(分)하여 입마개로 숨을 틀어 막았고병마가 점령한 저잣거리는 숨을 급히 죽였으며도성 내 의원과 관원들은 숨을 바삐 쉬었지만지병이 있는 자, 노약한 자는 숨을 거두었사옵니다병마의 사신은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를가려 찾지 않았사오며절명한 지아비와 지어미 앞에가난한 자의 울음과 부유한 자의 울음은공히 처연 했사옵고,그 해 새벽 도성에 내린 눈은정승댁의 기왓장에도 여염의 초가지붕에도함께 내려 스산하였습니다하오나 폐하인간의 본성은 본디 나약하나이 땅의 백성들은 특히 고난 앞에 결연하였고인간의 본성은 본디 추악하나이 땅의 백성들은 특히 역경 앞에 서로 돕고 의지하였나니아녀자의 치마로 돌을 실어왜적의 골통을 부순 행주산성이 그러하였고십시일반 금붙이를 모아빈사 직전의 나라를 구해낸 경제위기가 그러했듯이는 곧 난세의 천운이오 치세의 근본이 아니고무엇이겠사옵니까이듬해 봄폐하의 성은에 힘입어권토중래한 이 나라 백성들은저마다 살 길을 찾아 짚신끈을 다시 매었고민초들의 삶은 다시 용진하였으니지아비, 지어미는 젖먹이를 맡길 곳을 찾아집과 집을 오가며 동분서주 하였고서신을 보내어 재택근무에 당하는 등살 길을 찾아 고행하였는 바,고을 안 남루한 주막에서는백성의 가락국수가 사발에 담겨남겨진 할미와 손주의 상에 올랐는데경상의 멸치와 전라의 다시마로 육수를 낸 국물은아이의 눈처럼 맑았고할미의 주름처럼 깊었사오며산파가 다녀간 고을 민가에서는어미의 산도를 찢어내며 고군분투한 아이가마침내 탯줄을 끊어 울음을 터트렸고창자를 저미는 고통에도 초연했던 어미는아이를 받아 젖을 이어내고 울음을 터트렸사온데그 울음과 울음의 사이가 가엾고 또한 섬뜩해소인은 낮게 엎드려 숨죽였사옵니다소인이 살펴보건데백성은 정치 앞에 지리멸렬할 뿐위태로움 앞에 빈부가 따로 없었고살고자 함에 남녀노소가 따로 없었으며끼니 앞에 영호남이 어우러져 향기로웠습니다아뢰옵기 황송하오나 폐하백성들의 삶이 이러할 진데조정의 대신들과 관료들은 국회에 모여들어탁상공론을 거듭하며 말장난을 일삼고실정의 책임을 폐위된 선황에게 떠밀며실패한 정책을 그보다 더한 우책으로 덮어백성들을 우롱하니 그 꼴이 가히 점입가경이라어느 대신은 집값이11억이 오른 곳도 허다하거늘현 시세 11프로가 올랐다는미 친 소리를 지껄이고 있으며어느 대신은수도 한양이 천박하니세종으로 천도를 해야 한다는해 괴한 말로 백성들의 기세에찬 물을 끼얹고본직이 법무부장관인지 국토부장관인지아직도 감을 못 잡은 어느 대신은전월세 시세를 자신이 정하겠다며여기저기 널뛰기를 하고 칼춤을 추어미 천한 백성들의애 간장을 태우고 있사온데과연 이 나라를 일으켜 세우려는 자들은일터에 나앉은 백성들이옵니까아니오면 궁궐과 의회에 모여 앉은대신들이옵니까또한 역사를 되짚어 살펴보건데과연 이 나라를 도탄지고에 빠트렸던 자들은우매한 백성들이었사옵니까 아니오면제 이득에 눈먼 탐관오리들과무능력한 조정의 대신들이었사옵니까하여 경자년 여름간신이 쥐떼처럼 창궐하여 역병과도 같으니정책은 난무하나 결과는 전무하여 허망하고실(實)은 하나이나 설(說)은 다분하니민심은 사분오열일진데조정의 대신들과 관료들은제 당파와 제 이익만 챙기며폐하의 눈과 귀를 흐리고병마와 증세로 핍박받는 백성들의 고통은날로 극심해지고 있는 바,소인이 피를 토하고 뇌수를 뿌리는 심정으로시무 7조를 주청해 올리오니 부디 굽어 살피시어조정의 대신들과 관료들은 물론 각지의 군수들을재촉하시고 이를 주창토록 하시오면소인은 살아서 더 바랄 것이 없고죽어서는 각골난망하여그 은혜를 잊지 않겠사옵니다하여 소인 조은산은 넙죽 엎드려삼가 시무 7조를 고하나니一. 세금을 감하시옵소서세금이라는 것이 본디 그 쓰임에 있어나라의 곳간을 채워 국가 재정을 이어나가고군대를 키우며 나라의 발전을 도모해백성들이 삶을 영위해 나가도록 하는 것은지당한 일이오나이 나라의 조세 제도는십시일반의 미덕이 아닌육참골단의 고통으로 전락한 것이작금의 현실이오며부유한 것이 죄는 아니거늘 소득의 절반을 빼앗고부자의 자식이 부자가 되면 안되니 다시 빼앗고기업을 운영하니 재벌이라 가두어 빼앗고다주택자는 적폐이니 집값 안정을 위해 빼앗고일주택자는 그냥 두기 아쉬우니 공시가를 올려 빼앗고임대사업자는 토사구팽하여 법을 소급해 빼앗고한평생 고을을 지킨 노인은 고가주택에 기거한다하여 빼앗으니차라리 개와 소,말처럼 주인의 사료로 연명할지언정어느 누가 이 땅에서 기업을 일궈 나라에 이바지하고어느 누가 출세를 위해 부단히 노력하겠사옵니까또한 증세를 통해 나라의 곳간은 채울 수 있을지언정소비 둔화와 투자 위축 등의 부작용 역시 존재하거늘이토록 중요한 국가시책을 어찌하여 나라에 널린학자들의 의견 한번 여쭙지 않고 강행하시옵니까폐하조세는 나라의 권한이고납세는 백성의 책무이나세율은 민심의 척도이옵니다증세로 백성을 핍박한 군왕이어찌 민심을 얻을 수 있겠사오며하물며 민심을 잃은 군왕이어찌 천하를 논하고 대업을 이끌 수 있겠사옵니까부디 망가진 조세 제도를 재정비하시고세금으로 혜택을 받는 자가 아닌,세금을 납부하는 자가 납득할 수 있도록세율을 재조정하시어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시옵소서二. 감성보다 이성을 중히 여기시어 정책을 펼치시옵소서스스로 벌어먹지 않고 노니는 백성이스스로 벌어 토하듯 세금을 각출한 백성의피와 땀에 들러붙어 배를 두드리고나라의 곳간을 갉아 재정적자를 초래하는 것은감성이오진정으로 나라의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곳간을 열고 자비를 베풀어 구휼하며재정을 알뜰히 하여 부국강병의 초석을 닦는 것은이성이니감성이 이성을 앞서면게으른 백성이 고기를 씹고병약한 백성이 마른 침을 삼키는 것과 같으며이성이 감성을 앞서면게으른 백성이 고기를 얻기 위해 화살촉을 갈고병약한 백성이 죽 한 사발로 기운을 차리어다시 일터로 나가는 것과 같사옵니다또한 기업을 옥죄는 규제와 세금을 완화하고양질의 일자리를 저절로 토해내게끔 하여지속 가능한 발전을 꾀하는 것은 이성이오비정규직철폐니 경제민주화니소득주도성장이니 최저임금인상이니세상물정 모르는 것들의 뜬구름 잡는 소리로기업의 손과 발을 묶어 결국54조의 혈세를 쏟아붓는 것은 감성에 불과하니감성이 이성을 앞서면암탉을 때려잡아 그 고기를 잘게 나누어굶주린 이들에게 흩뿌려 기름진 넓적다리살에아귀다툼을 벌이게 하는 것과 같고이성이 감성을 앞서면암탉에게 좋은 먹이를 내어 살을 찌우고크고 신선한 달걀을 연신 받아내어백성 모두가 닭 한마리씩을먹을 수 있는 것과 같사옵니다또한 폐하께오서 그리 씹어대고 물어뜯던22조의 4대강 사업이 그 실체라도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이성이 감성을 누른 까닭이옵고마땅히 기업이 해야할 일을 백성의 혈세로 대신한 바폐하의 54조는 증발하여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것은바로 감성이 이성을 누른 까닭이온데폐하를 비롯한 대신들과 관료들이 모두백성들의 감성을 자극해 눈물을 쥐어 짜내기 위한지지율 확보용 감성팔이 정책에만 혈안이 되어있는 바,이러한 조정 정책의 기조 변화없이어찌 다가올 160조 신분배 정책을 지지할 수 있으며어찌 그에 따른 결과를 기대할 수 있겠사옵니까폐하역사는 군왕의 업적을 논할 뿐당대의 지지율을 논하지 않사옵니다부디 정책을 펼치심에 있어감성보다는 이성을 중히 여기시고 챙기시어작금의 지지율로 평가받는 군왕이 아닌후대의 평가로 역사에 남는 패왕이 되시옵소서三. 명분보다 실리를 중히 여기시어 외교에 임하시옵소서나라의 지정학적 요소와 주변국들의 정세를 간파하지 못하여한미일이냐 북중러냐 갈피를 잡지 못하고 좌고우면하니앉은 자리는 가시방석이오 일어서니 키는 제일 작은 것이작금의 현실이온데일본과의 외교 마찰로 무역 분쟁을 초래하였으나이를 외교로 해결하지 않고 정치로 해결하시려불매운동을 조장하고 양국관계를 파탄낸 바,여론은 반전되고 지지율은 얻었으나결국 동북아 안보의 상징인 지소미아가흔들리는 지경에 이르렀으니이것은 명분의 외교이옵고중국의 패권주의와 북국 돈왕(豚王)의 핵도발의엄중함을 먼저 고려하시어 한미일 3국의 동맹을강화하시며 안보의 기틀을 마련하시고절치부심하여 국력을 키워 극일을 이룬 후에야비로소 아베의 골통을 쥐어박고 고환을 걷어차진정한 사과와 보상을 취하는 것은실리의 외교이옵니다또한 일본의 의류업체가 연이어 폐점하고일본의 자동차 업체가 한국 철수를 선언하며일본의 기업 또한 한국 기업과 거래를 끊고심지어 농산물과 수산물까지 수입금지에 처한다니의류업체 근로자, 매장 근로자, 유통업자, 자동차 업체 근로자영업사원, 수리기사, 농민, 어민, 수출입 관련 근로자항공사, 항공사 근로자, 관광사, 관광사 근로자 등수많은 백성들의 일자리와 생계가 위태롭게 된 것은명분이 실리를 앞선 까닭이온데이는 결국 백성이 다른 백성의밥그릇을 걷어찬 꼴과 무엇이 다르며손이 발을 밉다하여 입을 틀어막아함께 굶어 죽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사옵니까또한 평화와 화해 따위의 허황된 말로감성에 목마른 백성들을 현혹시켜실질적인 핵폐기는 안중에도 없는북국의 돈왕과 더불어 성대한 냉면잔치를 열고결국 구밀복검한 무리들로부터 토사구팽 당하여백성의 혈세로 지은 연락사무소가 폭파되고삶은 소대가리라는 치욕마저 당하는 것은명분의 외교이옵고국제적 합의에 따라 대북제재를 충실히 이행하시고적극 동참하시어 북국의 돈줄을 막아서서히 고사시키시며동시에 한미일 동맹을 굳건히 하여북국의 돈왕이 스스로 처지를 깨닳아핵개발을 포기하고 시장을 개방토록 하는 것은실리의 외교일진데과연 폐하께오서는 외교에 임하시오며명분과 실리 중 무엇을 택하셨사옵니까또한 명분과 실리 중 무엇을 얻으신 것이오북국과 일본과 중국과 미국 중 무엇과 화친하였으며작금에 이르러 결국 무엇이 남았다는 말이옵니까미국의 트럼프는 미치광이지만자국민의 이익을 확실히 보호했고중국의 시주석은 공산당의 수령이지만중국의 시장경제를 대외로 이끌었으며북국의 돈왕은 독재자이지만최빈국의 지위를 핵보유국으로 끌어올렸고일본의 아베는 굴욕외교로 이름났으나그만큼 실리는 챙긴다는 평이 있으며러시아의 푸틴이 장기집권을 꿈꾸는 건백중 칠십을 넘나드는 지지율이 있기 때문일진데폐하께서는 핵도 없고 백성의 삶은 파탄이오시장경제는 퇴보하였으며 굴욕외교 끝에실리 또한 챙기지 못하였고 또한지지율은 절반도 채 되지 않으시면서어찌 장기집권을 꿈꾸며독재자의 길을 걷는미치광이가 되려 하시는 것이옵니까영명하신 폐하저들은 폐하의 정치적 신념과감성의 논리에 귀기울여 줄 만큼한가로운 자들이 아니옵니다시국은 시급하여 촌각을 다투고늑대와 표범과 호랑이는 굶주려 먹이를놓고 다투고 있는데 어찌 폐하께오서는한가로이 초원에 풀이나 야금야금뜯어 삼키고 계시는 것이옵니까부디 통촉하시어 안목을 넓게 가지시고정치와 이념을 외교와 따로 다루시어실리를 위한 외교에 임하시옵소서그리하여 북국 돈왕의 핵탄두 아래백성들을 지켜주시옵고 국토를 보전하시옵소서四. 인간의 욕구를 인정하시옵소서소인이 여염의 촌락을 하릴없이 거닐다막연히 들린 주막에서는 고을 무뢰배들이만취해 젓가락을 두들기며 장단을 맞추었고주막 한 켠 작은 탁자에서 홀로산낙지를 씹으며 탁주를 들이키던 한 노인이그에 맞춰 읇조리니 좌중의 시선이 쏠리며일순간 적막이 흘렀던 바,그 이야기가 하도 기가 차고 신명이 나폐하께 아뢰오니 통촉하여 들어 주시옵소서"반도의 어느 작은 나라에 돼지가 혁명을 일으켜돼지의 나라를 세웠으니 이를 숯불 공화국이라 칭하였고연호를 한돈이라 칭하였으니 한돈 사년 어느 날돼지의 왕이 몸소 교지를 내려나라의 모든 돼지들에게 이르길과인이 듣기로 작금의 돈륜이 무너질 대로 무너져축사가 쪼개지고 울타리가 넘어지니돈권 또한 참담하기 이를 데 없도다구유통의 쌀겨가 귀중하기로소니너희들의 돈격보다 귀중하랴하여 과인이 이르노니이 나라의 모든 돼지들은그 품종과 육질을 막론하고 앞으로꿀꿀 거리는 소리를 금하며 또한먹는 것을 금하여 돈성을 다스릴 것인 바,이를 어길 시 모두 육절기에 넣고 갈아소시지와 순대로 만들어 정육점에 효시할 터이니그리 알고 너희는 마땅히 받들라라고 명하였으니이에 나라의 모든 돼지가 꿀꿀 거리며 아우성일진데족발에 불똥이 튄 건 다름아닌 조정의 관돈들인 바,비서실 돼지는 제 목소리가 제일 큰 줄도 모르고도리어 수석 돼지들에게 꿀꿀거리지 말 것을 종용했으나이내 제 몫의 구유통이 청주와 반포에 걸쳐두 개인 것이 발각되었고국토부 돼지는 별안간 궤엑 멱 따는 소리를 내며꿀꿀 파시라 꿀꿀 파시라 구유통을 파시라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으며대변돈실 돼지는 흑석동 상가에 몰래 기어들어가대부업자에게 빌린 돈으로 뻥튀기를 처먹다 발각돼족발이 안보이도록 줄행랑치니결국 여섯의 관돈이 한날 한시에 사의를 밝히고축사 담을 넘어 도주하다 말린 꼬랑지가 밟혀목살을 잡힌 채 대궐로 끌려와 모진 고문을 당했는데그 광경이 처참하기 이를 데 없어대포집이 껍질을 뜯고 족발집이 족을 잘라내며국밥집이 머릿고기를 삶아내는 고통에여섯의 관돈들은 이실직고하였으니 이와 같았다더라돼지는 꿀꿀거려야 제 맛이오돼지같이 처먹어야 돼지다운 것인데어찌 폐하께서는 돼지에게돼지답지 않을 것을 강요하고돼지의 본능과 욕구를 버리라 하시옵니까돼지는 처먹어야 그 삶이 의미가 있는 것이오돼지가 돼지다워야 돼지로써 살 수 있는 터인데애당초 돼지의 본능을 무시한 교지를 내리시니저희 대신들이 어찌 이를 백성들에게강요할 것이오 또한 스스로 이를 따르겠나이까라며 돈지라ㄹ을 하고이구동성으로 꿀꿀대었는데설상가상으로 성문 밖에 성난 백성 돼지들이숯불을 들고 모여 꿀꿀거리기 시작하였고숯불로 흥한 자 숯불로 망하리라 외치며 결국성문을 깨어트리고 왕의 침소를 향해 치닫은 바,금과 은으로 치장하고비단으로 감싼 침소에는돼지의 왕 또한 꿀꿀대며구유통에 머리를 박고 있었고머리맡에는 '돼지가 먼저다'라는글귀가 선명했다 하더라”……………………폐하영끌의 귀재, 희대의 승부사, 대출 한도의 파괴자라 불리우는 흑석 김O겸 선생이재개발 상가를 튀기려다 결국 발각되어언론에 튀겨지고 백성에게 씹히다 결국신기전과 같이 꽁무니에 불이 붙은 듯 내빼고지역구의 배신자, 절세의 교과서,50분의 기적, 대변인 사냥꾼이라 불리우는 반포 노O민 선생이대신과 관료들에게 집을 팔라며 호통치다본인 또한 다주택자인게 발각되어결국 지역구인 청주를 버리고 한양의 노른자위반포를 택해 뭇매를 맞았는데소인은 큰 엿과 작은 엿을 양 손에 쥔 아이에게무어라 설득해야 작은 엿 대신 큰 엿을 버리게할지 몰라 한참을 골똘히 생각하였고또한 양 손에 멀쩡히 들고있는 제 엿을무슨 이유를 들어 버리게 해야할지 몰라더욱 골똘히 생각하였사옵니다하오면 폐하큰 엿을 버리고 작은 엿을 쥔 아이의검소함과 청렴함을 칭찬하여 본보기로 삼는 것이마땅하옵니까두 손에 멀쩡히 들고있던 제 엿을함부로 버린 것도 모자라 큰 엿을 버리고작은 엿을 택한 아이의 무지함과 성급함을나무라는 것이 마땅하옵니까그저 백성들을 기만하여 지지율을 확보하고세금을 긁어 모으고자 만천하에 벌인정치적 놀음에 누가 누구의 발목을 잡는 것이옵니까폐하臣김O겸과 노O민은 죄가 없사옵니다이는 경제적 이득을 취하고자하는 인간의기본적이고 상식적인 욕구를 죄악시하여폐하 본인 스스로도 지키기 힘든 것을아랫 것들에게 강요한 폐하 스스로의 잘못이며이 불쌍한 자들의 죄는 그저지키지 못하여 깨어질 것을 스스로 알면서도폐하의 엄포와 성화에 못이겨머리와 손과 입이 각기 따로 놀아나백성들을 농락한 죄 밖에 없사옵니다말은 말답게 달려야 제 맛이오개는 개답게 짖어야 제 맛이고돼지는 돼지답게 처먹어야 제 맛이며인간은 인간답게 제 이득을 챙기고주판알을 튕겨 손익을 따지며경제적 이익을 추구해야 제 맛인데애초에 인간의 욕구에 반하는 정책을 내시고이를 대신과 관료들에게 막연히 따를 것을 명하니어찌 백성이 따를 것이오 어느 신하가 제 자리를지킬 수 있겠사옵니까폐하조정이 우왕좌왕하니백성 또한 다르지 않사옵니다인간을 인간으로 보아야인간이 보이는 법이거늘조정의 모든 정책이 인간의 욕구에 반하는모순덩어리들 뿐이옵고 인간의 욕구를죄악시하여 이를 말살하려는 극단책 뿐이온데어찌 백성들의 동의를 바라고어찌 그 성과를 바랄 수 있겠사옵니까부디 통촉하시어 정책을 전개하심에인간의 욕구를 받아들이시고 인정하시어더 이상 이러한 참담한 광경이백성 앞에 펼쳐지지 않도록 해주시옵소서五. 신하를 가려 쓰시옵소서정세는 역동하여 요란하고민심은 역류하여 요동치니나라는 좌우로 갈라졌으며간신은 역행하여 요사스럽고충신은 역린하여 요절하니국법은 깨어져 흩어졌사옵니다나라의 위태로움은 풍전등화와 같고백성의 곤궁함은 이루 말할 수 없어굽은 목을 겨우 세워동서남북을 널리 살펴보니영웅은 깊이 잠들어 몽중이오현자는 깊이 숨어 은둔하니 보이지 않사옵니다犬王(개의 왕)은 곰과 범을 부리지 못하고鳥王(새의 왕)은 수리와 매를 부리지 못하니들끓는 것은 이리요 까마귀떼 뿐이라소인은 통탄하며 먹을 갈고신음하며 붓끝을 가지런히 해삼가 아뢰올 뿐이니 통촉하여 주시옵소서폐하조정의 대신 열 중 셋은 허황된 꿈을 좇아국사를 말아먹는 이상주의자요나머지 일곱 중 셋은 허황된 꿈을 팔아표장사를 하는 장사치나 다름없고나머지 넷 중 셋은 시뻘건 혓바닥을 낼름거리며폐하의 귓구멍을 간지럽히는 아첨꾼이며나머지 하나는 그저 자리만 차지해세금만 축내는 무능력한 것들이니폐하 청하옵건데한날 한시에조정의 대신들과 관료들을 기립시키시어폐하의 실정에 대한 의견을 물으시옵소서실책과 실정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이백성을 팔아 폐하의 업적을 칭송하며용비어천가를 목놓아 부르는 자에게는진하게 우려낸 사약 한 사발을 내리시어폐하의 눈과 귀를 흐리고 조정을 농락한 죄를물어 국법의 지엄함을 널리 알리시고함구하여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며좌중의 눈치만 살피는 자에게는차가운 냉수 한 사발을 내리시어복지부동하여 세금만 축내는 것을 꾸짖으시며폐하의 실책과 실정에 대하여조목조목 따지며 신랄하게 비판하는 자에게는잘 빚은 술을 한 잔 내리시어 격려하시되비판과 더불어 해법과 계책을 내놓는 자에게는한 잔의 술과 함께 영의정의 명패를 하사하시고조정의 중심이자 폐하의 지기로 삼으시어폐하의 자비로움과 영명함을 천하에 알리시옵소서또한 새 인재를 등용함에 있어각지의 서생들을 불러 모아민주와 인권, 자유를 각각 새긴세 개의 명판을 나눠주시고한 손에 하나씩만 들 수 있으니참고하여 이행하라 명하신 후민주와 인권의 명판을 양 손에 든 자는따로 불러 모아 감옥에 모조리 투옥하시고또한 일가의 재산을 모두 압류하도록 명하시어자유를 버린 댓가를 치르도록 하시고자유와 인권의 명판을 양 손에 든 자는폐하의 어수(御手)를 높이 들어양 볼따귀를 힘껏 후려치시고나의 자유가 너의 인권과 상충하니누가 이기겠는가. 하문하시어민주적 절차에 의한 입법과 그로 인한 법치의귀중함을 일깨워 주시옵고자유와 민주의 명판을 양 손에 든 자는조정의 하급 관리에 임명하시되사헌부와 포도청 그리고 고을 관아의대민업무를 도맡아 처리케 하시어인권의 진정한 뜻을 스스로 깨우치게 하시며만에 하나왼손에 자유와 민주 두 개의 명판을 들고오른손에 인권의 명판을 든 자가 아뢰길자유가 없는 민주는 독재와 마찬가지요민주가 없는 자유는 무법천지와 같은 바,둘은 양분될 수 없고 필히 양립해야 할 것이니본디 이 둘은 하나인 것과 다름없어 함께 왼손이오,오른손에 인권은 이들을 능히 거들 수 있으니여기 세 개의 명판이 다 있소이다 라고 답한다면그 자를 즉시 진사의 자리에 올려 국사의 중책을 맡기시옵고한양의 대궐같은 집과 조선 제일의 명마가 끄는 마차또한 하사하시어 그로 하여금 나라의 대업을 이끌고폐하의 업적을 함께 빛내도록 하시옵소서폐하인사는 곧 만사라 하였사옵니다이 땅에 널린게 학설이거늘태반이 반쪽짜리 이념에 지나지 않고또한 널린게 학자이거늘태반이 한쪽으로 치우친 선동꾼에 불과하온데하물며 조정의 대신들은 어떻겠사옵니까부디 민주와 인권을 앞세워 감성과 눈물을 팔고그럴듯한 감언이설로 백성들의 표와 피를 팔아제 입신양명의 수단으로 삼는 저 들쥐와 같은무리들을 긁어모아 스스로를 박멸하라 명하시옵고자유의 가치를 알고 몸소 행하며자유와 민주와 인권의 조화를 논하는총명한 인재를 신하로 쓰시어 나라의 평안을 되찾아백성의 앞길을 인도해 주시옵소서六. 헌법의 가치를 지키시옵소서나라의 근본은 백성이오 백성의 근간은 헌법이니이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오 대한민국의 주권은국민에게 있으며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고규정한 헌법 1조와 그 뜻이 같사옵니다또한 나라의 크고 작은 집회에서는위 헌법 1조를 가사로 옮긴 노래가 흘러나왔고폐하께서는 항상 그 자리를 지키셨으니광우병 파동, 세월호 참사, 박근혜 퇴진운동이그러했습니다헌법 제1조를 부르짖으며 백성들을 이끌어헌법에 의거해 전대통령을 파면하였고헌법에 의거해 대통령에 선출되었으며헌법에 의거해 선서를 하셨사오니헌법에 의거해 직무를 수행하고헌법에 의거해 백성의 권리를 보장하시오며헌법에 의거해 국토를 보전해야함이 마땅하오나헌법에 의거해 그 자리에 오르신 폐하 스스로헌법의 가치를 훼손하고 적시된 조항을 무시하며헌법에 내재한 백성의 가치를 짓밟고헌법이 보장한 인간의 권리에 침을 뱉으사헌법이 경계한 무소불위의 권력을무아지경으로 휘두르니나라와 백성의 근간인 헌법이 조각나 깨어지듯민심 또한 조각나 깨어져 흉흉하옵고온 나라가 서로 쪼개져 개싸움을 벌이고 있사온데그 꼴이 참으로 처참하기 이를 데 없사옵니다그저 다주택자와 고가주택거주자를 잡아 족치시어무주택자의 지지율을 얻겠다는 심산으로건국 이래 최초로 토지거래허가구역을지정하시고 임대차 3법을 강행하시어헌법 제14조 거주이전의 자유를 박탈하시고기회는 공정하며 과정은 평등하고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란 폐하의 선포에 따라학업이 뛰어난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들을모조리 섞어 한 교실에 집어넣어 하향평준화를통한 진정한 평등을 이루어 내시어헌법 제31조 1항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교육을 받을 권리를 박탈하시고이른바 6.17 대책으로나라에 득이 된다하여 적극적으로 장려한임대사업자를 거듭된 부동산 정책 실패의희생양으로 삼아 법을 소급하여 토사구팽하며내 집 마련의 꿈에 들떠있던 백성의중도금을 막아 뒷통수를 후려치는 등헌법 제13조 2항 소급입법으로부터재산을 지킬 권리를 박탈하시고경제적 이득을 취하고자하는 인간의기본적 욕구마저 말살하여 개돼지의 표본으로삼으려 헌정 이후 최초로 백성의 재산권 행사에법적 처벌을 운운하며 겁박하여헌법 제23조 재산권의 보장을 박탈하시니백성들은 무주택자 다주택자로 갈리고강남권과 비강남권으로 갈리고조정지역과 투기지역으로 다시 갈리고임대인과 임차인으로 또 갈리어서로를 물어뜯고 씹어대며 쥐어뜯고 있사온데도대체 이제는 또 어디의 무엇을갈라내고 도려내며 찢어내실 심산이옵니까백성은 각자 다르나 합쳐져 하나인데이는 대야에 담긴 물을 쪼개어반은 발을 닦고 나머지 반으로 세수를 하며다시 쪼개어 세안을 하고 양치를 하며이내 마셔버리는 꼴과 같으니폐하께오서는 헌법을 찢어내고 백성을 갈라내고이제는 폐하 스스로의 옥체도 갈라내고 찢어내어육시를 할 참이옵니까폐하이 나라가 폐하의 것이 아니듯헌법은 폐하의 것이 아니옵니다헌법은 불가변한 가치를 지닌 국법이오이 나라의 역사와 같은 성문법이며백성을 위해 백성에 의해 제정된 민정헌법인 바,헌법을 짓밟는 것은 백성을 짓밟는 것과 같고헌법을 저버리는 것은 나라의 역사를 부정하며미래를 저버리는 것과 같사옵니다바라옵건데스스로 헌법을 지키시고 보전하시어깨어진 민의를 추스려 민심을 회복하시고사멸한 정도를 되살려 정의를 바로 세우사처참히 조각난 이 나라를 다시 합쳐 주시옵소서마지막으로 폐하七. 스스로 먼저 일신(一新)하시옵소서직언하옵건데이 나라는 폐하와 더불어 백성들이합쳐 망친 나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옵니다이 나라에 상식과 신뢰와 도의는 사멸했고또한 헌법은 깨어졌으며 국회는 나락이니오로지 죽고 죽이며 뺏고 빼앗기는감성과 분노의 정치만 있을 뿐입니다이는 폐하만의 잘못도 아니고조정 대신과 관료들만의 잘못도 아니옵니다그것은 백성 또한 무지한 까닭이며엄중한 현인들의 경고와 선대 공신들이남긴 역사적 사실에도 불구하고일국의 지도자를 저잣거리의 광대 뽑듯이감성에 젖어 눈물로 내세운 댓가입니다소인은 평생을 살아오며무주택자 일주택자 다주택자라는 단어가이토록 심오하고 엄중하며 잔인한 것인지폐하의 실정 하에 처음 깨닫사오며일찍이 폐하의 막역지우였던故노무현 선황의 통치 하에서도,폐하의 정적이었던 이명박 선황과폐하의 제물이었던 박근혜 선황의통치 하에서도 경험하지 못했던참담한 헌법유린과 처절한 수탈과극심한 분열과 외교적 고립을 겪사옵니다개구리가 찬물에 담궈져서서히 달궈지는 동안 미동도 하지 않듯이 땅의 백성은 백성 스스로 선출한폐하의 실정에 하나둘씩 권리를 내어주다결국에는 헌법 조문 안에 조차 속하지 못하는아픔을 겪사오나아직 절반의 백성은스스로 벌어먹지 않고도 내어지는끼니 앞에 굴복하여 제 몸이 익어껍질이 벗겨지는 것 조차 깨닫지 못하옵고가진 자에 대한 끝없는 분노에 눈이 멀어제 자식들이 살아갈 삶이제 인생보다 나아야 한다는 일말의책임감 또한 느끼지 못하옵니다폐하께서 추구했던 인권은 고작사람을 죽이고 부녀자를 간음한파렴치한 것들에게만 내려지는 면죄부가 되었고폐하께서 부르짖던 민주는절반의 백성에게는 약탈이고절반의 백성에게는 토벌이며과반수를 넘는 자가 벌이는 정당한 도륙이자합법적 착취의 수단으로 전락하였으니자유는 선대 공신들의 무덤을 파내어찾으오리까 아니오면죽어 자빠져 저승길에서 찾으오리까소인이 감히 묻사옵니다무릇 정치란백성과의 싸움이 아닌백성을 뺀 세상 나머지 것들과의 싸움인 바,폐하께서는 작금에 이르러무엇과 싸우고 계신 것이옵니까국내외에 어지러이 산적하여 당면한 과제는온데 간데 없고 적폐청산을 기치로정적 수십을 처단한 것도 부족하여이제는 백성을 두고 과녁을 삼아왜곡된 민주와 인권의 활시위를 당기시는 것이옵니까폐하스스로 먼저 일신하시옵소서폐하의 적은 백성이 아닌,나라를 해치는 이념의 잔재와백성을 탐하는 과거의 유령이며또한 복수에 눈이 멀고 간신에게 혼을 빼앗겨적군와 아군을 구분 못하는 폐하 그 자신이옵니다또한 갈등과 분열의 정치를 끝내겠다는폐하의 취임사를 소인은 우러러 기억하는 바,그 날의 폐하 그 자신이오며폐하께서 말씀하신 촛불의 힘은무궁하고 무결하여 그 끝을 알 수 없는 바,그 날의 촛불 그 열기이옵니다성군의 법도는 제 자신마저 품을 수 있으나폭군의 법도는 제 자신 또한 해치는 법,부디 일신하시어갈등과 분열의 정치를 비로소 끝내주시옵고백성의 일기 안에 상생하시며역사의 기록 안에 영생하시옵소서간신의 글은 제 마음 하나 담지 못하나충신의 글은 삼라만상을 다 담는 법,소인의 천한 글재주로 일필휘지하지 못해삼라만상을 담지는 못하였으나우국충정을 담아 피와 눈물로 대신하오니다만 깊이 헤아려 주시옵소서이천이십년 팔월인천 앞바다에서 塵人 조은산 삼가 올립니다 세줄요약못하겠어요 누가 좀 해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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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조선의 실존했던 몬스터 헌터 더 위쳐들
경상도에서만 석 달 동안 수백명이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다. -조선왕조실록 1402년 5월 기사- 이번 년도에 평안도 일부 지역에서 호랑이에게 잡아먹힌 사람의 숫자가 일 백명이 넘었다.강원도 한 도에서만 호환으로 300명이 사망했다 -숙종 실록 1701년- 어린아이와 노인들은 늑대에게 잡아먹혔다. 늑대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어 피해가 막심했다.맷돼지 들은 농작물을 해칠 뿐만 아니라 아이들을 물어 뜯고 잡아 먹기도 했다.호랑이 들은 임금의 궁궐 한복판 까지 마음 껏 활개치고 다녔다.만 백성들이 호랑이와 식인 맹수들에게 시달렸다. 온 팔도에 피 바람이 몰아쳤다. 그러나 그들이 두려워 하는 것이 단 한가지 있었으니...조선의 몬스터 헌터.바로 착호 갑사이다. 한반도는 좁은 면적에도 불구하고 경이적인 맹수 밀도를 자랑했다.국토의 70% 가 산과 숲인 데다 1등급의 식수가 여러 곳에 뻗쳐있고 강수량이 풍부했기 때문이다.고대에도 엄청난 호랑이 숫자 때문에 호담국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표범, 불곰, 스라소니 등 대형 맹수들과엄청난 숫자의 늑대들이 드글댔다.조선왕조 실록에 이례적으로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만 보자.철종 때까지 관청에서 조정으로 보고된 호랑이 한테 죽은 사람의 기록은 3,989명, 늑대에게 죽은 사람은 헤아릴 수가 없다. 기록되지 않은 피해는 어마어마 했을 것이다. --------------------------------------------------------------------------고대부터 팔도의 모든 백성들이 각종 맹수들에게 갈갈이 찢기고 잡아먹혔다.심지어 임금의 궁궐 한 복판 까지 호랑이가 헤집고 다녔다.마침내 세종이 즉위 한지 3년.세종은 호랑이와 식인 맹수들을 처리할 특수한 사람들을 모을 것을 명한다.그러나 지원자가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산 채로 온몸을 뜯겨 먹힌다는 공포는 엄청난 것이다.전쟁 경험 많은 병사들도 꺼려했다.-------------------------------------------------신분제가 엄격한 조선에서 이례적으로 능력만 있다면 비천한 자라도 임기를 마치면 종 4품 실직에 올리겠다고 발표했다.그러나 그것도 임기동안 살아있거나 팔 다리가 뜯어 먹히지 않아야 4품이 되는 것이다.천민들 조차 멸시받을 지언정 도축 백정이나 무당, 북청 물장수들은 안전하면서 수입이 짭잘했기에 오지 않았다.봉급도 맹수들을 추격하는 동안의 숙박비, 장비 값, 치료 값 등을 빼면 남는 게 없었다. 위쳐와 비슷한 위치다.그러나 어느 시대에나 특이한 사람들은 있기 마련이다.천민들 중에서 가장 비천한 자들, 식인 맹수에게 지인을 잃은 복수자들 등등이들은 오직 몬스터들에게 백성들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지원한 것이다. -------------------------------------------------------------------이들의 선발 과정은 그야말로 혹독했다.수박, 즉 맨손 격투로 5명과 싸워 이겨낼 수 있음을 증명해야 했다.양 손에 50근, 30 kg 을 들고 백보를 한 번도 쉬지 않고 갈 수 있는 체력과 근력이 있어야 했다.대형 맹수들은 일반 화살로 맞추기도 어렵고 타격도 없기에무거운 강노나 대형 목궁을 들고 150 보의 표적을 정확히 타격 할 수 있어야 했다.맹수와의 추격전을 위해 말을 타고 마상 격투술을 할 수 있어야 했다.평지에서 창술과 검술을 잘 다룰 수 있어야 했다.그리고 이 모든 선발 시험을 거쳐 통과된 사람들은 마지막 최후의 과제가 주어지니..------------------------------------증인과 관인 입회하에 호랑이 사냥에 돌입해실제로 호랑이를 죽인 사람만이 최종 합격자가 될 수 있었다!그 과정에서 수 많은 사람들이 물어 뜯기고 잡아먹혔음은 굳이 기록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이런 혹독한 선발에서 마침내 성공한 용사들이 있었으니이들은 그야말로 살아있는 인간 흉기 들이었다.이들 40명을 이르러 초대 착호갑사라 이르렀다. 사회에서 더 이상 발 붙일 수 없는 사람들, 대역죄인의 후손, 천 민 중에서 가장 비천한 사람들이 많았기에위쳐처럼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경멸 받는 존재였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는 이들은사람을 해치는 식인 맹수가 나타났다하면 전국 팔도 어디라도 달려갔다.----------------------------------------- 착호들은 엄격한 야간 통금에도 마음대로 이동할 수 있으며,각종 관문을 프리패스 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이들은 맹수의 흔적을 추적하고 행동 반경을 고려하여 덫을 설치하고 전술을 짜는 레인저 같은 파트,무겁고 거대한 철궁을 들고 원거리에서 요격해, 맹수를 몰아넣는 화력 담당창과 칼을 들고 근접 백병전으로 호랑이와 불곰 등과 싸워 처리하는 백병전 파트 등으로 나뉘었다.물론 그 하나하나 모두 다방면으로 뛰어난 전투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이들 초대 착호갑사 40인은 워낙 출신이 비천한 이들이 많은지라 별 언급이 없으나이 초대 착호갑사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싸웠는지는 후대의 기록과 대우가 증명해준다.초대들이 멸시받고 무시받았던 것에 비해후대에는 착호갑사들이 식인 맹수를 무찌르고 귀환하면백성들이 줄지어서 환호 행렬이 모여들었고나중에는 440명 까지 부대가 점점 커지고가장 비천한 천민도 궁궐 호위에 선발되기도 했으니 말이다.물론 규모가 커지면 예니체리나 맘루크가 그랬듯이정치에 이용되고 폐단이 쌓여 악용되기도 했지만그것은 후대의 일.세종 3년. 두려움을 이기고 모여든 이 초대 착호갑사 40인들은그야말로 순수한 사명감에 불타올랐던 위대한 몬스터 헌터들이었던 것이다.----------------------------------------------------------------대형맹수류의 씨가 거의 마른 근대에 조차종류별로 1년에 수천마리에 달하는 맹수들이 사냥될 정도였는데중세에 한반도 백성들은 진짜 아비규환의 몬스터 들에게 덥힌 수준.착호갑사들은 레알 몬스터 헌터, 위쳐들이었습니다.
하루스작성일
2020-07-11추천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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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글터] 조선시대 주술과 관련된 죽음 일화
첫번째 이야기는 조선의 제 16대 임금이었던 인조시절 이야기 라고 합니다.1623년. 평안감사로 재직한 적이 있던 박엽(朴燁)은 군대를 잘 관리하여 그 명성을 떨치고 세력을 키울 수 있었다고 합니다.하지만 그는 호기롭게 노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기도 했는데, 구름 모양으로 배를 꾸며 놓고 기생들과 악사들을 그 배에 태워서 안개 낀 강에 배를 띄운채 뱃놀이를 자주 했다고 합니다.그렇게해서 물위를 떠다니면서 노는데 마치 구름을 타고 다니는 신선이 노는 듯한 흥취를 즐겼다고 하는데요.박엽은 또한 평양성 성벽 위에 환하게 횃불을 밝혀서 밤에도 성벽이 낮처럼 밝게 빛을 뿜도록 장식해서 그 아름다움을 즐기기도 했다고 합니다. 박엽은 한편 새롭게 오늘날 70평 규모의 극장 같은 것을 지어서 평안도 내의 노래를 잘하는 기생 백여명을 모아 놓고 그 안에서 밤새 노래를 듣고 춤을 보며 즐겼으며, 여러가지 음란한 놀이를 하며 놀았다고 합니다.그런데, 그러던 중 박엽은 한 왜국의 주술사에게"사람 일만을 죽여야 살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는 죽을 것이다."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고 합니다.그 주술사는 점을 잘치는 것으로 매우 이름이 높은 자였으므로, 박엽은 이내 겁에 질려 떨게 되었고, 마침내 자신의 목숨을 살릴 운명으로 가기 위해 부하들과 주민들을 하나 둘 처형하기 시작하는 만행을 저질렀다고 합니다.박엽은 1만명을 죽인다는 목표로 사소한 잘못을 한 사람들도 모두 사형을 시켰는데, 애초에 엄한 벌을 내려서 군대를 다스린 사람인 만큼 군인들이 사소한 죄로 사형 시켰고, 나중에는 자신이 놀고 즐기기 위한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세금을 걷을 때, 불만을 품은 사람들을 사형시키기 시작했다고 합니다..박엽이 닥치는대로 사람들을 사형시키고 다녀서 점차 평안도 주민들의 원망을 사게 되었다고 합니다..마침 조정에서는 김자점이 정권을 틀어쥐면서 반대 세력들을 처단하려 하고 있었으므로, 김자점의 반대파였던 박엽의 혹독한 형벌 집행을 문제 삼기 시작했다고 합니다..결국 김자점은 박엽을 사형시켰다고 합니다.박엽은 1만명의 사람을 다 죽이지 못해서 자신이 죽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박엽에게 죽음을 내린 김자점이 스스로 이름 대신에 쓰던 자(字)가 바로, "일만(一萬)"이라는 이름이었다고 합니다..박엽에 대한 이야기는 청성잡기에 나와 있다고 합니다. 또 박엽에 관한 내용 자체는 반대파가 박엽의 죄상에 대해 과장시킨 측면도 보인다고 합니다.이와 비슷한 이야기로는 세종대왕 시대의 광평대군의 이야기가 있다고 합니다.세종대왕은 다섯번째 아들인 광평대군의 운명에 대해 신분을 숨기고 점을 보게 하였다고 합니다. 점쟁이는 점을 치는 대상이 광평대군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는 상태로 점을 쳤는데, 그 결과 "이 사람은 젊은나이에 못 먹어서 굶어 죽을 운명"이라고 예언하였다고 합니다.세종대왕은 얼토당토 않은 예언이라고 생각해서 "임금의 아들이 어찌 굶어 죽겠는가?" 라고 하면서역시 점을 치는 것은 미신일 뿐이라고 웃었다고 합니다.하지만, 그래도 만약을 대비해서 광평대군에게 사고 팔 수 없이 영원히 유지되는 땅에 대한 권리를 내려서 결코 먹을 것이 부족하지 않도록 제도를 마련해 주었다고 합니다..그러던 1444년. 20세의 광평대군은 어느날 밥을 먹다가 생선가시가 목에 걸리게 되는 되었다고 합니다..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이 가시를 뽑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결국 광평대군은 목에 걸린 가시 때문에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괴로워하다가 굶어 죽었다고 합니다.조선 건국 초 복진의 죽음 한편. 조선 건국초에는 복진(卜眞)이라는 사람이 여러가지 주술을 쓰는데 능했다고 합니다..복진이 스스로 점을 쳐보니, 자신이 죽을 날짜를 알게 되었고, 또 점을 쳐 보니, 자신의 목숨은 임금에게 달려 있다는 점괘가 나왔다고 합니다.복진은 임금에게 찾아가 자신의 목숨을 구해달라고 사정해야 겠다고 생각했는데,궁궐 속으로 들어가 임금이 있는 곳 까지 갈 방법이 마땅치 않았습니다. 복진은 둔갑술을 여러가지로 연구하고 연습해서 마침내 몸을 숨기고 궁궐 속을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고안했다고 합니다.복진은 열심히 몸을 숨기는 방법을 연습해서 자신이 죽을 날짜가 다 와서야 겨우 몰래 궁궐 속으로 숨어 들어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복진은 이내 몰래 임금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임금에게 목숨이 달려 있음을 말하고 도움을 구하려 했다고 합니다..그런데, 임금은 복진을 보자 깜짝 놀라더니,"몸을 숨기고 궁궐을 침범해 깊은 곳까지 들어 왔으니, 죄가 무겁고, 참으로 위험하다."라고 하고는, 궁궐 속에 몰래 침범한 죄로 복진을 붙잡아 그 날로 사형시켜 버렸다고 합니다.출처 : 용재총화 , 청성잡기 https://blog.naver.com/ghshffnfffn1/221987283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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