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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원세훈 부인 갑질, A부터 Z까지
원세훈 부인 남편 선고에 ‘실망이다’ 반발, 오른손 부르르원세훈 패악질에 국정원 5명 자살..부인 갑질도 무궁무진"원세훈, 국정원 회의서 "야당 선거후보 단일화는 북한 지령" 원세훈 부인의 행동에 대한 누리꾼들의 관심이 그야말로 뜨겁다.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이 국가정보원 여론조작 사건으로 징역 4년을 선고받자 원세훈 부인 이병채씨가 법정에서 언성을 높인 것으로 복수의 언론들의 보도했기 때문.‘원세훈 부인’은 이 때문에 주요 포털 핫이슈 사회 키워드로 등극한 상태다.지난 30일 오마이뉴스에 따르면 원세훈 부인 이병채씨는 선고를 듣고 법정을 나와 기자들과 만나 “어떻게 원장님에게만 죄가 있나, 판사 중에서도 오아시스 같은 새로운 판사의 판결을 기대했는데 실망이다”라고 언급했으며, 이후 손수건을 든 오른손을 부르르 떨며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원세훈 부인이 주목을 받는 또 다른 이유는 국정원 인사처장 출신의 더불어민주당 김병기 의원이 31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와의 인터뷰에서 ‘원세훈 부인 갑질’을 증언했기 때문.김병기 의원은 이 자리에서 “원 전 원장 부인에 비하면 박찬주 전 대장 부인의 갑질은 경미한 수준”이라고 전제한 뒤, 국정원 직원이 원세훈 전 원장 부부가 사용하는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자 냉장고에 자물쇠를 채웠던 일화, 고위 간부가 원세훈 전 원장 부부 텃밭 가꾸기에 동원된 사례, 원세훈 부인의 강아지가 도망 다니자 찾으러 다닌 강아지 관리 담당 직원의 고충 등을 전했다. 한편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으로 파기환송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재직 당시 야당이었던 민주당의 선거전략에 대해 `북한 지령`이라고 지칭한 것으로 나타났다.31일 법조계에 따르면 원 전 원장의 파기환송심 판결문에는 2009년 5월부터 2013년 1월까지 개최된 전 부서장 회의에서 원 전 원장이 한 발언이 담겼다.원 전 원장은 2010년 4월 16일 회의에서 그해 있었던 지방선거에 대해 언급하며 "민주당은 어떻게 민주노동당에 13개씩 자리를 주느냐"며 "민주노동당은 대세에 안 들어간다. 김정일 지령이야. 그래(그리) 모으라는 것은…"라고 말했다. 이어 "선거에서 단일화하라는 것이 북한의 지령이다"며 "북한 지령대로 움직이는 것은 결국 종북 단체 아니냐"고 말했다 이는 당시 야당이던 민주당이 민주노동당과 후보 단일화 전략을 펼친 상황을 비판한 것으로 재판부는 특정 정당과 정치인에 대한 내용이라고 판단했다. 2012년 4월 20일 회의에서는 민주당 등 야권에 상당수의 `종북 좌파` 국회의원이 있다는 취지의 언급도 있었다. 원 전 원장은 "통합진보당만 13명이고 종북좌파 40여명이 여의도에 진출했다. 이 사람들은 우리나라 정체성에 대해 계속 흔들려 할 것"이라며 "우리 원(국정원) 공격도 여러 방법으로 할 것"이라고 말했다. 햇볕정책에 대해서도 "지난 정부가 어떻게 했느냐. 북한을 도와주겠다는 사람들과 똑같은 것을 해왔다"며 "그러니까 북한은 우리 정부를 우습게 본다. 기침만 하면 쌀 갖다 주지, 뭐 갖다 준다"고 비판했다. 또 "좌파정권 때 10년 동안 북한 위협을 핑계 대고 퍼줬다"고 언급했다.반대로 여당에 대해서는 "국민 의사가 많이 반영된 것이 여당이고 국민 지지가 적은 것이 야당"이라며 "이 정부가 하는 일이 국민 다수가 원하는 것이다. 원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자신 있게 해야 한다"며 노골적인 지지 발언을 펼쳤다. 녹취록에는 여론 조성에 대한 발언도 담겼다.원 전 원장은 2009년 12월 18일 회의에서 세종시 수정안, 4대강 찬성에 관한 여론 조성을 지시하며 "심리전을 해서 좌파들이 앞으로 잘 가는 (국가정책의) 발목을 잡으려는 것을 여러분들이 차단시키는데 앞장 서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또 2011년 8월 22일 회의에서 "4대강, 제주 해군기지 이런 부분에서도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사람들을 우리가 정리를 좀 해야 한다"고 언급했다.재판부는 이런 원 전 원장의 회의 발언에 대해 "국정원 직원들은 지시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며 `업무상 지시`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녹취록에서 나타난 원 전 원장의 발언을 정치 개입과 선거 개입의 유죄 판단 근거로 인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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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펌] 진짜 싸움의 시작
이제 진짜 싸움의 시작이군요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bestofbest&no=285708 이 싸움의 시작. 언제부터일까요? 문제의 시작은 저 멀리 이승만 때 부터 겠지만, 지금 우리가 겪는 이 싸움의 시작을 저는 '문재인 당대표'부터라고 봐요. 지독한 싸움의 시작이 그때 였던 거죠. 이 싸움은, 반 박근혜 싸움도 아니고, 반 새누리당 싸움도 아니었어요. 이 싸움은, 기존의 썩어빠진 시스템에 대한 싸움이에요. 어마어마한 싸움이죠. 문재인이 당대표가 되면서 당 혁신안을 당헌 당규에 못 박았죠. 처음 있던 일. 그만큼 어려운 일이었죠. 다양한 부가 결과들이 나왔지만, 핵심은 '계파정치 타파'에요. 덕분에 국민의당이 생겨났죠. 계파정치를 하지 못하면, 결국 국민을 봐야 해요. 나눠먹기가 사라져요. 지금까지 구축해놓은 내부의 힘, 내부의 인맥, 내부의 권력과 같은 것들이 힘을 잃게 되요. 국민의 의중을 살펴야 하고, 국민에게 머리를 조아려야 하죠. 그동안 자기들이 쌓아놨던 기득권이 무너지기 시작하죠. 가진게 많을 수록, 갖춘 것이 많을 수록, 그러나 알맹이가 적을 수록, 이 사태를 그냥 바라보고 넘길 수는 없겠죠. 밥그릇 뺏기니까. 그래서 이런 집단이 모여서 어떻게든 세력을 만들고 버티는 거에요. 다음에는 인력 충원이에요. 각계의 전문가들을 영입하기 시작해요. 오직 정치적인 수사로만 남아 있는 국회의원으로는 안된다고 생각한 거에요. 국회에 들어가서 제대로 일해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국회의원 무용론이 고개를 들고 있었잖아요. 하지만 국회의원은 꼭 필요하죠. 제대로 일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일할 줄 아는 사람들이 당으로 들어와요. 지금은 당당한 국회의원이 되어 있는 분들이죠. 초선 의원들이 이렇게 많이 활약하는 국회 본 적 있나요? 손혜원, 표창원, 조응천, 김병기, 박주민과 같은 초선 의원들이 전문 영역에서 일을 해주고 있는 거에요. 그러면서 동시에 총선 준비를 합니다. 시스템의 개혁을 위해서는 국회를 국회의원을 개혁해야 되요. 의석수를 바꿔야 하는 거죠. 그래야 제대로 일하는 국회를 만들 수 있으니까요. 더불어 지역구도도 같이 타파해야 해요. 지역주의도 한국을 좀먹는 최악의 시스템 중의 하나니까요. 최선의 노력을 다했지만, 사실 미완으로 남긴 했어요. 호남에서 국민의 당이 승리했으니까요. 그럼에도 전국정당이라고 불릴 만한 결과를 만들어 냈고, 원내 1당이 되면서 한 단계 더 나아갔습니다. 당의 개혁, 이후에는 국회의 개혁까지 이뤄졌죠. 이제 남은 것은 국가의 개혁, 즉 정권 교체인거죠. 그래서 다음 단계가 진정한 전문가 집단이 모인 싱크탱크형성이었죠. 국가를 위해 일할 사람들을 모은 거에요. 그것도 신념을 가지고 제대로 일해줄 사람들. 지식인들과 연합하기 시작해요. 국민성장포럼이죠. 제대로 나라를 위해 일해줄 사람을 모으는 일. 인사가 만사이기 때문에, 꼭 필요한 일이죠. 이쯤 되면 두려움이 생겨요. 더민주가 안정되고, 더불어 원내 1당이 되고, 대권을 위한 대규모의 씽크탱크까지 완성이 되면서, 기존의 나쁜 시스템 위에 살아가던 이들은 두려움을 느끼죠. 이제 설자리가 점점 없어지거든요. 그러니 어떻게든 이 상황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아야 해요. 모 신문사는 청와대를 공격해요. 시스템이 아니라, 한 개인의 문제로 치환하려는 노력이죠. 모 집단은 개헌을 생각해요. 또 일부는 대통령 탈당을 이야기 하기도 하구요. 가정이지만 누군가는 전쟁을 통한 정권 연장을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어요. 계속된 전투에서 패했기에 전쟁을 이기기 위한 난리가 시작됐어요. 그런데 나쁜 시스템에서 눈치보고 조심하던 언론이 이제 공격을 시작해요. 제대로 일하기 시작한 국회도 공격을 시작해요. 이제는 그 만큼의 든든함이 생긴거에요. 그렇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져요. 사람들은 환호하죠. 이제 끝났구나. 하지만 문재인은 조심스럽게 움직여요. 이유는 간단해요. 개인에 대한 싸움이 아니라 시스템에 대한 싸움이니까요. 만화책처럼 한번에 쌱 될 것이 아닌거에요. 이미 오래된 전투가 이어져 오고 있었으니까요. 혼란이 찾아오니, 기존에 설자리가 점점 부족했던 모든 집단이 살 길을 찾기 시작해요. 예를 들면, 지역주의 기반에 안착해 있었지만, 더이상의 세 확장도, 대권도 불가능해져 버린, 다음 총선에서는 거의 100%로 과거 9석 민주당 꼴이 될 가능성이 높은 당이라던지, 잘못하면, 가장 공고했던 지지기반을 다 잃고, 다시는 여당도 야1당도 되기 힘들어 보이는 처참한 상황에 봉착해 가는 당이라던지, 어쩌면, 자신들이 쌓아놓은 모든 것을 잃고, 옥살이 밖에 답이 없을 범죄자 무리 및 가담자라든지. 이런 집단들이 살길을 찾아 이제는 난동을 부리기 시작하는 거에요. 이건 박근혜 게이트 때문에 발생한 위기가 보다는, 기존부터 천천히 숨통을 조여왔던 시스템 개혁 작업 때문에 일어난 위기였어요. 그러니 박근혜가 물러나는 것이 이 싸움의 목적지가 아니에요. 문재인의 행보는 그래서 느렸던 거구요. 더불어 이런 상황이기에 박근혜 게이트는 어떤 집단에게는 '숨통'이 된거에요. 이렇게 큰 혼란이 생기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킬 다양한 방법들을 시도해 볼 수 있거든요. 따라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반감을 그대로 표출해 자기는 대통령 쪽이 아닌 척 하는 내부자들도 있고 이 참에, 대선은 물건너 갔으니 어떻게든 지역기반으로 권력을 유지해보고 싶은 기득권 개헌 세력도 있고 심지어는 이들과 손을 잡으려 하는 더민주 내부세력도 있는 겁니다. 살 길이 보이는 거에요. 기존 시스템에서 행복했던, 그러나 끝이 어두워 보였던 이들에게는 '박근혜 게이트'가 숨구멍이 되고 있는 거죠. 그들이 이제 모두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마침내, 피아가 명확해 졌네요. 남김없이. 그것을 국민이 목도하는 순간인 거에요. 참 긴 싸움이었어요. 하지만, 한가지 다행인 건, 이미 이 싸움은 우리가 거진 이긴 싸움이라는 점이에요. 박근혜가 물러나지 않아도 탄핵이 되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하도 진적이 많아서 놀랄수도 있고 두렵기도 하겠지만, 걱정마세요. 우리가 이겨요. 이미 기존 시스템을 붕괴시킬 수 있는 사전 작업을 착착 해놓았으니까요. 마지막 아주 약간 남아 있는, 우리가 질 수도 있는 가능성을 원천 봉쇄하기 위해서 꼭 해야될 것만 기억하면 돼요. 1. 잊지 않는다.- 잊지 마세요. 누가 탄핵을 반대하는지, 누가 적과도 손잡자고 하는지, 누가 자꾸 본질을 흐리는지. 그들이 사쿠라 입니다. 2. 개헌 반대 입장을 공고히 한다.- 개헌하려면 어차피 국민투표 해야 해요. 절대로 의원 내각제로의 개헌은 국민이 거부 한다는 것을 밝혀야 해요. 이들의 꼼수에 넘어가지 말고 국민이 '의원내각제'를 거부한다는 것을 명확히 해야해요. 많이 퍼트려야 해요. 탄핵과도 묶는 것을 거절해야 해요. 개헌반대 탄핵찬성. 간단해요. 참고로, 추진하다 국민투표로 반대되면, 다음 일은 뭐 바이 짜이찌엔 이겠죠. 3. 내부 총질을 하면 안되요.- 아마 그들은 내부에서 총질하도록 소스를 막 던질거에요. 그러면 안되요. 대신 '사쿠라'에 대한 강한 비난. 적극환영합니다. 더민주는 만능도 아니고, 무조건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어요. 그 만큼의 힘을 국민이 안 줬어요. 그러니 더민주가 최선을 다하고 있다면, 실망하지 말고, 비난하지 말고, 오히려 그 분노를 상대에게 돌리세요. 4. 지치면 안되요.- 어차피 이렇게 될 줄 알았죠. 문재인이 왜 이 시점에 계속 지역 돌아다니게요? 이 싸움의 끝은, 박근혜 탄핵이 아니에요. 정권교체에요. 그게 안되면 말짱 도루묵이에요. 따라서 박근헤 탄핵을 외치며 앞으로 나가는 것보다는 국민의 여론이 숙성될 때까지 계속 기다려야 해요. 그리고 계속해서 설득해야 해요. 우리는 이미 두 번의 실패를 했어요. 지금 싸움은 박근혜를 쫓아내는 싸움이 아니라, 정권을 교체하는 싸움이에요. 긴 싸움입니다. 버텨요. 속 시원한 해결책도 결론도 없어요. 그들도 끝까지 버티고 또 버티고, 또 버텨야해요. 결과가 안나온다고 고개를 돌려서도 안되고, 지겹다고 이젠 짜증난다고 관심을 버려서도 안되요. 우리가 포기하지 않으면 무조건 국민이 이기는 싸움이에요. 우리도 끝까지 버텨야 합니다. 제가 가장 열 받는 건, 저 기존 시스템 위에 올라탄 놈들이 사용하고 있는 전략의 근간에 '국민은 개돼지'라는 판단이 들어 있는 거에요.-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식을 거잖아.- 어차피 니들 서로 싸우다 지칠거잖아.- 어차피 이번 일만 넘기면 니들 다시 우리에게 표 줄거잖아.- 어차피 니들은 우리의 전략에 휘말리게 되어 있잖아.- 어차피 니들은 개돼지잖아. 두고 봅시다. 누가 더 끈질기고, 누가 더 쌘지. 이미 우리는 이길 수 있는 배경을 다 갖춰 놓았어요.내년 12월에 대선을 치른다 해도 상관없습니다.우리가 버티면 정권은 교체가 될 것이고,그때 이작가 말대로 특별법해서 다 조져도 되니까요. 지치지만 맙시다. 버티면 이깁니다. ----- 요즘 들어 그나마 야당 역할을 하는데가 더민주와 정의당 뿐이 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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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피카소가 그린 한국 전쟁
'한국에서의 학살' (Massacre en Cor?e)한국전쟁을 주제로 한 작품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으로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을 들 수 있습니다. 피카소는 1944년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했습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프랑스 공산당 기관지인 '뤼마니테'가 전쟁화보와 함께 전쟁의 전개양상에 대해 상세하게 보도함으로써 프랑스는 물론 유럽의 많은 지식인이 한국전쟁을 제3차 세계대전으로 인식하였으며 그에 부응해 반전평화운동도 활발하게 전개됐습니다.당시 프랑스의 발로리스에 체류하고 있던 피카소는 프랑스 공산당의 요청으로 '뤼마니테'가 전하는 한국전쟁에 대한 기사를 참고하며 1950년 9월부터 제작에 착수, 1951년 1월 18일 '한국에서의 학살'을 완성했습니다. 이 작품은 1950년 10월 17일부터 12월 7일까지 황해도 신천군에서 벌어진 학살사건을 내용으로 한 것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미군이 신천군 인구의 약 4분의 1에 해당하는 3만5383명을 살해했다는 소문이 전해지면서 전 세계의 좌익이나 진보운동진영의 공분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러나 한국전쟁 전문가인 박명림의 연구에 의하면 이 사건은 미군에 의해 자행된 것이 아니라 한국군과 유엔군이 북진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반공우익 민간인들에 의해 저질러진 사건일 가능성이 큽니다. 즉 북한군이 황해도에서 퇴각하면서 우익민간인 400여 명을 살해하자 한국군의 북진에 앞서 광복동지회를 결성한 신천 지역 우익인사들이 10월 13일 봉기를 결행, 공산정권에 부역한 자들을 닥치는 대로 숙청한 결과 600여 명의 좌익인사들이 살해당했던 것입니다. 결국 신천학살은 우익들의 반공 봉기과정에서 빚어진 좌우익의 상호 살육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천학살은 피카소가 그림을 구상한 이후에 일어났으며 더욱이 신천학살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작품이 신천학살을 주제로 한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피카소는 '뤼마니테'가 전하는 기사에 의존하여 한국전쟁을 상상했고, 당시 프랑스 지식인들이 가졌던 보편적인 반전평화사상에 따라 이 그림을 그렸던 것입니다. 마치 기계처럼 무자비한 처형을 집행하는 군인과 그 앞에선 희생자를 대비시킨 작품의 구도와 형식은 나폴레옹의 프랑스 점령군에 맞선 스페인 마드리드 시민들의 저항을 잔혹하게 보복한 현장을 그린 고야의 '1808년 5월 3일'과 마네의 '맥시밀리언 황제의 처형'으로부터 빌려온 것으로써 피카소는 그것을 입체주의와 자신이 1920년대부터 추구했던 신고전주의 방식으로 번안했던 것입니다. 이 그림이 발표되자 미군 당국은 즉각 학살 연루를 부정했으며, 프랑스 공산당조차도 이 그림이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를 성취하지 못했다고 비난했습니다. '한국에서의 학살'에서 전쟁에 대해 반대한다는 메시지와 보편적인 휴머니즘 이외의 그 어떤 것도 발견할 수 없다는 점은 '게르니카'가 바스크인들이 사는 도시에 대한 융단폭격의 참상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과 함께 전쟁을 도덕의 차원으로 바라보고 있는 피카소의 한계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학살'이 1951년 '살롱드메'에 출품됐다는 소식을 접한 미국 미술계는 혼란과 당혹에 빠졌습니다. 특히 미국 연방수사국(FBI)은 피카소가 미국을 한국전쟁의 원흉으로 몰고 가는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책동에 동원된 위험인물이자 공산주의자이며 심지어 소련의 첩자로 분류하여 25년간 그를 사찰했습니다. 이 작품이 임시수도 부산으로 피란한 미술가들에게 알려지면서 피카소는 한국에서도 논란의 중심으로 떠올랐으며, 김병기는 부산의 한 다방에서 피카소와의 결별을 선언하였습니다.파브로 피카소 1952년 작품 전쟁과 평화 윗 그림이 '평화', 아래 그림이 '전쟁'1954년 발행된 잡지 '문학예술'의 창간호에 김병기는 1952년 어느 날 부산 남포동의 한 다방에서 낭독했다는 '굿바이 피카소'란 글을 발표했다. 그가 피카소와 결별을 선언한 것은 '타임'에 소개된 '한국에서의 학살' 때문이었다. 당시 다방에 모였던 미술가들에게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타임'과 같은 시사지는 현대미술의 동향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매체였다. 김병기는 '한국에서의 학살'에 대해 "미군 기계화 부대가 벌거숭이 우리 민중을 향해 총을 쏘는 극심한 선전미술"이라고 소개했다. 북한에 있던 최승희의 남편이자 열성적인 좌익문학가인 안막이 그것을 북한에 유리하도록 대서특필한 사실도 그를 자극했다. 그는 결별선언문에서 피카소의 '전쟁'과 '평화'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피카소는 발로리스의 한 지역 유지로부터 로마네스크 풍의 낡은 성당('평화의 사원')을 장식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두 점의 대형그림을 1952년 10월에 완성했다. 두 그림 중 '전쟁'은 창과 방패, 정의의 상징인 저울을 든 남자 전사와 전쟁을 상징하는 괴물을 병치시킨 것이다. 전사의 손에 쥔 방패에는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가 그려져 있다. 반면에 전쟁을 상징하는 칼, 창, 도끼를 휘두르는 병사들의 실루엣을 경계로 맞은편에는 머리에 뿔이 달린 괴물이 한 손으로 피묻은 칼을 휘두르고 있으며 다른 손으로는 해충을 퍼뜨리고 있다. '전쟁'에 등장하는 도상 중에서 서로 대척지점에 있는 비둘기와 해충은 한국전쟁과 반전운동을 상징한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특히 해충은 북한과 중국이 선전했던 세균전에 대해 암시한 개연성도 있다. 당시 북한정권 외무상 박헌영은 1951년 5월 유엔에 미군이 1950년 12월과 이듬해 1월에 걸쳐 천연두를 퍼뜨렸다고 공식항의했다. 중국과 소련의 언론은 이 사실을 대대적으로 보도했으며 '뤼마니테'(프랑스 공산당 기관지)역시 이 선전전에 동조하는 기사를 게재했다. 세균전에 대한 의혹은 북한이 이녹, 퀸, 오닐 등의 미군 포로들의 자백을 공개하면서 증폭되었다. 때마침 피카소의 친구이자 문필가인 르와가 프랑스 공산당원의 자격으로 1952년 6월 북한을 방문하여 이녹을 만났을 때 세균전에 대한 폭로가 북한의 강요에 의한 거짓자백이자 석방을 전제로 꾸며낸 이야기라는 고백을 듣고 그 사실을 서방언론에 발표했다. 따라서 '전쟁'에 나오는 해충이 한국에서의 세균전을 상징한다는 것은 추정에 불과하다. 게다가 당시 세균전의 진위여부에 관한 논란이 끊이지 않았음을 감안할 때 피카소가 미군의 부도덕성을 공격하기 위해 이런 이미지를 채택했을 것이란 해석은 설득력이 없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병기는 피카소가 '레지스탕스의 시기에 코뮤니스트들이 가장 용감했다'는 소박한 동기에서 '한국에서의 학살'을 제작했을 것으로 추론하며 "코뮤니스트가 된 이후에 당신의 작품이 의도하는 에스프리가 점점 피상적인 리얼리티의 파악으로 흐르고 있다"고 비판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과 '평화'에 대해서도 "치졸한 극락도와 지옥도로 변하였다"고 단정했다. 김병기의 시각에 피카소의 작품들은 리얼리티 정신을 배반한 것이었고, 더욱이 그가 공산당에 가입한 사실을 강조해 이 그림들이 코뮤니스트의 공식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단정했던 것이다. 김병기의 시각은 냉전체제 아래 미국사회를 휩쓸었던 매카시즘의 정책과 정서에 의해 강화된 반공주의적 정보만을 취득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즉 김병기의 결별선언은 이런 반공정서를 대표하고 있는 것이다. 국민대 교수·미술평론가 http://blog.chosun.com/blog.log.view.screen?blogId=1406&logId=5650726피카소는 한국전쟁에 관심이 많았고, 평화를 굉장히 열망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를 많이 그렸는데요. 다양한 모습의 비둘기와, 소녀가 안고 있는 비둘기 등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그리고, 우리나라의 중요한 곳에도 피카소의 이 비둘기 작품이 쓰였다는 걸 아시나요? 그곳은....바로, '판문점' 입니다.어, 그런데 지금의 판문점과는 다른 모습이죠? 지금의 판문점이 지어지기 전, 회담소로 지은 건물로 지금은 사진으로만 볼 수 있습니다. 건물 정면엔 피카소의 '평화의 비둘기'가 조각되어 있습니다.피카소가 평화를 바랬던 마음을 담아, 전쟁에 참가한 사람들의 바람을 담아, 한반도 평화를 가져오길 바라며 '평화의 비둘기'를 단 것으로 보입니다. 이 회담장에서 평화를 몰고 올 수 있게 말이죠. 하지만 판문점은 새로 지어졌고 지금까지도 그대로 있습니다.여전히 긴장과 냉랭함이 흐르는 판문점. 그 옛날 평화를 바라며 비둘기를 달아 만들었던 것처럼 어서 그 자리에, 한반도에 평화가 오기를 바랍니다.그래서 그때엔 '평화' 그림처럼 사람들이 춤을 추고, 놀고, 누우며 평화를 만끽했으면 좋겠습니다. 피카소는 지상에 없지만 그 뒤를 잊는 화가들은 한국전쟁의 참혹함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에 찾아온 평화를 축하하는 그림을 그렸으면 좋겠네요. 아마 하늘에 있는 피카소도 기뻐할 겁니다.피카소가 한국과 많은 인연이 있다는게 참 신기하지 않으신가요?이제 판문점이 분단의 상징이 아닌 비둘기평화공원으로 바뀌는 그날을 기원합니다!http://blog.unikorea.go.kr/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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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박정희 친일 의혹, 그 더러운 진실
좌파들의 박정희 관련 날조선동의 99%는 반박 가능합니다.
유입분들이 반드시 읽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글은 우리나라에서 위인 박정희를 폄하하는 세력들의 주장에 대한 반박문을 실은 글입니다.
글이 매우 길기 떄문에 시간내서 보시기를 권장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박정희를 폄하하는 것에 반박하는 방법보다
박정희를 폄하하는 세력의 실체를 알리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저는 이미 박정희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도처에 깔려 있으므로
그것부터 차근차근 반박해 보고자 합니다.
우선, 시작부터 종지부를 찍어드리겠습니다.
친일진상규명위 "박정희=친일파 입증 불가"
[단독] 민족문제연구소와 대통령직속위원회의 상반된 평가
09.11.06 16:04l최종 업데이트 09.11.06 16:13l박상규(comune)
▲ 박정희 전 대통령의 만주군 혈서지원 기사가 실린 1939년 3월 31일자 <만주신문> 사본. 해당 기사에 따르면 박 전 대통령은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일본)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습니다"라고 밝히는 등 일제에 적극적인 의사를 밝히고 있다. 붉은색 원 안의 사진의 인물이 박 전 대통령이다(자료 사진).
ⓒ 민족문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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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 족문제연구소가 박정희 전 대통령이 만주군에 지원하며 일본제국에 혈서로 충성을 맹세했음을 뒷받침하는 자료를 공개한 가운데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친일진상규명위)'가 박 전 대통령을 친일파로 분류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친일진상규명위는 오는 30일 활동을 종료할 예정이지만, 민간연구기관과 정부기관이 역사적인 인물에 대해 전혀 상반된 평가를 내린 셈이어서 적잖은 논란이 예상된다.
친일진상규명위의 핵심관계자는 6일 <오마이뉴스>와 한 전화통화에서 "20일경 발간되는 위원회의 최종 보고서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친일파로 분류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핵 심관계자는 "지금까지 많은 논의를 했지만 박 전 대통령의 친일 행위를 입증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며 "박 전 대통령의 친일 행위를 입증할 자료가 없어서 심의를 보류한 것이지, '박 전 대통령은 영원히 친일파가 아니다'라고 못 박은 건 아니다"며 이같이 말했다.
또한 이 관계자는 "민족문제연구소가 이번에 공개한 자료를 우리는 그동안 입수하지 못했다"며 "새로운 자료가 나왔으니 후대의 역사가들이 다시 평가해주길 바란다"고 판단을 유보했다.
관 계자는 "새로운 자료가 나왔으니 다시 평가할 수 있지 않냐"는 질문에 "위원회의 보고서는 벌써 인쇄가 들어갔고, 지금 와서 새롭게 연구하고 추가할 수는 없다"고 답했다. 결국 대통령 직속 위원회는 박 전 대통령에 대해 '후대의 평가에 맡긴다'는 애매모호한 결론을 내린 셈이다.
친일진상규명위는 2004년 12월 29일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개정법률'이 국회에서 의결됨에 따라 이듬해 5월 31일 발족했다.
친 일진상규명위의 설치 목적은 "친일반민족행위의 진상을 규명하여 역사의 진실과 민족의 정통성을 확인하고 사회정의 구현에 이바지하기 위함"이다. 위원회의 기능은 ▲친일반민족행위 조사대상자 선정, 친일반민족행위 조사 및 결정 ▲친일반민족행위 관련 국내·외 자료의 수집 및 분석 ▲조사보고서 작성·발간, 사료편찬 및 사료관 건립 등이다.
이들의 활동기간은 "구성을 마친 날부터 4년(6개월 연장가능)"으로 규정돼 있어 오는 11월 30일 위원회는 정식 해산된다.
친 일진상규명위의 활동 근거가 되는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은 '친일반민족행위'를 ▲국권을 지키기 위하여 일본제국주의와 싸우는 부대를 공격하거나 공격을 명령한 행위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투쟁하는 단체 또는 개인을 강제해산시키거나 감금·폭행하는 등의 방법으로 그 단체 또는 개인의 활동을 방해한 행위 ▲독립운동 또는 항일운동에 참여한 자 및 그 가족을 살상·처형·학대 또는 체포하거나 이를 지시 또는 명령한 행위 등 총 20개 항으로 나눠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규정을 두고 봤을 때, 혈서로 일본제국에 충성을 맹세하고 만주군에 입대한 박 전 대통령의 행위가 과연 친일이냐 아니냐를 두고 많은 논란이 일 것으로 보인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254890&CMPT_CD=P0000
노무현 직속 친일진상규명위 "박정희 친일 근거 없다"
등록날짜 [ 2012년12월04일 22시52분 ]
[핫 뉴스=이승훈 기자]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선후보의 “다카키 마사오” 발언이 화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충성 혈서를 쓰고 친일 행위를 했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는 근거 없는 허위 사실로 드러나 이 후보의 선거법 위반 논란이 불거졌다.
이 후보는 4일 오후 서울 여의도 MBC에서 열린 대통령 후보 1차 TV토론에 출연해 “충성혈서 써서 일본군 장교 된 다카키 마사오, 한국 이름 박정희는 군사 쿠데타로 집권하고 유신독재 철권을 휘둘렀다”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의)뿌리는 속일 수 없지 않겠냐”며 박 후보를 공격했다.
이 후보의 발언은 박 후보의 부친인 박 전 대통령이 과거 만주군에 지원하기 위해 다카키 마사오로 창씨개명을 했으며 혈서를 써 일본제국에 충성을 맹세했다는 오랜 의혹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러나 이는 이미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으로 밝혀진 허위 사실이다. 2005년, 즉 노무현 참여정부 시절 대통령 직속 기구로 발족했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이하 친일진상규명위)’는 지난 2009년 4년 간의 조사를 마치면서 “박 전 대통령을 친일파로 분류할 수 없다”는 결론을 냈다.
2009년 11월 6일 <오마이뉴스>의 보도에 따르면 친일진상규명위의 핵심관계자는 해당 매체와의 통화에서 “박 전 대통령은 친일파로 분류되지 않는다”며 “지금까지 많은 논의를 했지만 박 전 대통령의 친일 행위를 입증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이에 종북단체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에 뿌리를 두고 있는 기관 ‘민족문제연구소’가 1939년자 <만주신문> 기사를 근거로 박 전 대통령이 만주군관학교에 지원하기 위해 혈서를 썼다는 의혹을 제기했으나 만주군관학교 합격 발표일자(1939년 2월 24일)와 혈서 관련 기사(3월 31일)의 순서가 모순된다는 사실이 밝혀져 사실상 사장됐다.
특정 후보에 대한 허위사실 또는 근거 없는 비방은 공직선거법 제250조(허위사실공표죄) 및 동법 제251조(후보자비방죄)를 위반하는 행위다. 선거관리위원회는 이 후보 처벌 여부에 대해 자세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핫뉴스 이승훈 기자 (cellines@hanmail.net)
http://hot-news.kr/detail.php?number=10468&thread=27r01
결론 : 이에 종북단체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에 뿌리를 두고 있는 기관 ‘민족문제연구소’가
1939년자 <만주신문> 기사를 근거로 박 전 대통령이 만주군관학교에 지원하기 위해 혈서를 썼다는 의혹을 제기했으나 만주군관학교 합격 발표일자(1939년 2월 24일)와 혈서 관련 기사(3월 31일)의 순서가 모순된다는 사실이 밝혀져 사실상 사장됐다.
근거라곤 민문연에서 들이민 만주신문 하나뿐인데 기사에도 나왔다시피
앞뒤 내용이 하나도 맞질 않아 학계에선 이미 사료로 취급할수 없다 결론
노무현 정부 시절 노무현은 박근혜를 공격하기 위해
이미 사학적으로 끝난 사실인 박정희 친일 논란을 다시 부활시켜
친일진상규명위라는 좌파사학자들 모임을 자신의 직속 기관으로 두어 조사하게 했습니다.
당연히 결과는 "박정희 대통령은 친일이라 할수없다" 였고,
물론 언제나 그랬듯이 그들에게 결과는 중요하지 않았지요.
만주군관학교의 박정희
좌파들의 주장 중에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 들어갔으니 친일파라고 합니다.
지청천 장군, 백선엽 장군, 김수환 추기경 이런 사람들도 일본군 출신이었으며
워싱턴 대통령, 장개석, 간디도 영국군 출신이었습니다.
일본군에 복무했다고 다 친일파로 모는 게 타당한 걸까요?
이건 '김백일'이라고 흥남철수작전을 지휘한 다른 분에 대한 얘기지만,
일본군에 있었다고 친일이면
워싱턴, 간디도 친영파인가요?
국공합작 하여 항일항쟁 주도한 장개석도 여러분 말대로라면 친일파겠네요.
일본을 그토록 혐오했던 이우 황자 역시 일본 육사 출신이니까 친일이네요.
일본군 장교였던 김수환 추기경도 친일파였겠군요?
그리고 '일본군 복무하면 닥치고 친일' 이 논리대로라면 김대중 대통령도 친일 아닌가요?
목포상고 졸업앨범입니다.
빨간 원 안에 있는 사람이 목포상고 학생회장이었던 김대중입니다.
고등학생이 사회 유지로 여겨지던 시대에 목포상고 회장은 그 지역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런데, 여운형이 조선인 황군 지원 권유 격문을 쓰던 바로 그때에
김대중이 몸소 일본군복을 입고 연극 공연을 하며 졸업 사진을 찍은 것입니다.
해방이 되자마자 여운형씨의 공산당 조직은 건준으로 변신하는데, 이때 김대중이 목포지부 간부가 되었습니다.
즉, 김대중은 친일파 여운형의 추종자였으며,
일본군복을 입고 대일본 제국을 위해 나가서 싸우자며
조선인 학생들을 선동했던 그 행동 대장이었던 것입니다.
이건 당시 일본군복입니다. 김대중이 입고 있는 것과 100% 일치하죠.
학도병이라도 일본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일본 황제로부터 봉급을 받는 군인은 누구든 반드시 저 복장 차림이어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박정희가 친일파라는 기준을 갖고 본다면
김대중은 일왕에게 충성을 맹세한 친일파입니다.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짤 두 개만 더 첨부할게요.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에서 학생 대표로 축사를 읽었다는 말이 있는데
생도 대표 이름 잘 보세요.
결론. 개구라.
만주국과 일본
그리고 박정희는 일본 육사가 아닌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하였는데,
만주국군이 일본군이었다면
이런 불온교사 경력의 박정희는 신원조회에 걸려 절대로 사관학교로 진학할 수 없었고,
입학 후에도 곧 입학이 취소되었겠죠.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던 이유는
만주국은 일본의 신원조회망을 벗어난 제3국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겁니다.
그러니까 박정희는 일본군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만주군이었던 것입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박정희의 나이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만주군관학교에서 두 차례나 입학을 거부했다고 하는데,
박정희를 일본 황국신민화 정책에 이용하기 위해
만주군관학교에 보낸 것이라는 그들의 주장과 전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만약 일본이 박정희가 일본군이 되기를 원했다면
무엇하러 나이 트집을 잡아 두차례씩이나 불합격시켰을까요?
어차피 충성하겠다는 의지가 중요한 건데요.
박정희는 1940년 2월 불온교사로 찍혀 문경의 교사직에서 면직되었고,
바로 그 다음 달, 즉 1940년 4월 4일에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3수하려면 2~3년 걸리는데 어떻게 3월 한 달 사이에 3수할 수 있었을까요?
만주국은 일본이 만든 나라 맞습니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만주군을 일본군으로 인식하지 않았습니다.
만주국은 엄연한 독립국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무지한 사람들은 만주국에서 근무하면 친일파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당대 사람들에게는 행정상뿐만 아니라 정서상으로도 만주국이 일본과 혼동될 수 없음이 너무도 분명했습니다.
만약 만주국이 일본 통치권 안에 있었으면 만주국 경찰로 복무했던 광복군 대장의 조카 김일련은 일본 신원조회에 걸렸을 것입니다.
발해의 유민 후예들이 거주하던 간도는 우리땅임을 알던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조선인이 만주국 건국에 동참하면 친일파라는 정서가 전혀 없었습니다.
위는 일본 인명사전에 기록된 박정희의 경력입니다.
중앙의 19-7이라는 연대 표시 바로 옆에 박정희는 "만주국군 소위"였음이 명기되어 있습니다.
만약 자국군이었디면 일본군(日本軍)이라고 명기하였겠죠. 그러나 외국군이었기에 만주국군이라고 한 겁니다.
일본인들이 박정희는 일본군이 아니었다는데,
도대체 왜 한국의 어떤 무지한 이들은 박정희가 일본군이었다는 황당한 주장을 하나요?
박정희는 유학생이었으며, 유학생은 일본군 장교가 될 수 없었습니다.
한국 육사에도 아프리카나 동남아 등지에서 유학생이 옵니다.
만약 아프리카 사람들이 한국 육사에 유학했던 아프리카 군인을 한국군이라 부르면
우리가 무슨 생각이 들까요? 마찬가지인 겁니다.
위에 네째 줄에 보면 "일본육군사관학교 유학"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일본육사에 입학한 것이 아니라, 포병학교 과정을 일년간 이수한 겁니다.
1940년대의 일본 육사 유학생반을 보면 유학생들은 일본사관생도 제복도 입지 않았을 뿐더러
수업도 유학생들끼리 따로 받았습니다.
위의 박정희 학력에 57기생 상당으로 되어있을 뿐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아 김대중이고 뭐시고... 워싱턴 장제스는 그렇다 치자. 박정희는 혈서까지 쓴 X끼잖아' 하겠죠.
자, 좋아요. 그럼 이제 박정희 혈서 들어갑니다.
박정희 혈서 진위여부 논란
여러분이 좋아하는 친일혈서를 보여드리겠습니다.
1939년 3월 31일 만주일보에 공개되었다네요.
조갑제의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를 보면
문경 심상소학교 재직 당시 동료교사였던 유증선 씨의 증언이 나옵니다.
"1938년 5월 숙직실에서 만주군관학교 입학적령 20세에 걸려 고민하는 박정희에게 유증선이 충고하길
나이도 한 살 정도 줄이고 편지와 함께 혈서를 쓰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박정희는 그의 충고를 받아들여 즉석에서 면도칼로 새끼 손가락을 그어
'진충보국 멸사봉공'이라는 혈서를 바쳤고 만주신문에서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①만주군관학교 입학제한 연령이 20세라는 부분과
②나이를 한 살 줄였다고 말한 부분입니다.
일단, 만주군관학교 입학제한 연령은 몇 살이었을까요?
관련하여 쇼와 14년에 작성된
『陸軍預科士官學校生徒、陸軍經理學校予科生徒及陸軍幼年學校生徒召募告示の件』이라는 일제의 공문서를 확인해보았습니다.
보면 응시자격 연령이 16세 이상 ~ 20세 미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유증선이 증언한 바 당시 1938년이면 박정희 나이가 22세일때인데,
한 두살 낮춘다고 응시자격이 생겼을리가 없겠죠.
이쯤에서 유증선이 소설을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게다가 중앙일보 지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상유 선생의 지적처럼
박정희는 1939년 10월에 시험을 쳤기 때문에,
그로부터 1년 5개월 전에 혈서를 보냈다는 얘기는 여러모로 의심이 가네요.
당시에는 모집여부 조차도 알 수가 없었답니다.
왜냐하면 1939년에야 만주군관학교 설립에 관한 얘기들이 나왔기 때문이죠.
결정적으로 유증선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증거가 있습니다.
박정희는 대구사범시절 재학시절 교련과목 이수자여서
하사관 자격이 있었습니다.
하사관 자격이 있는 자는 위의 제한연령 규정에도 불구하고 26세 미만까지 지원할 수 있었으므로
박정희가 나이 문제로 고민했네 어쨌네 하는 것은 개구라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안 믿으실까봐 증거자료 첨부합니다.
(출처는 앞의 왜말 문서와 같습니다)
두번째로 나이를 한 살 줄였다고 한 부분을 보겠습니다.
1945년 일제가 작성한『임시육군군인군속계』상에 나타난 박정희의 생년월일을 보면
대정 6년(1917년) 9월 30일으로 되어있는데 이는 박정희 대통령의 실제 음력 생일과 같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박정희는 나이를 고친 적이 없는 거죠.
혈서 위조, 이게 끝이 아닙니다.
앞서 혈서가 공개된 신문이 1939년 만주일보라고 했는데
만주일보는 1935년에 폐간되었다는 게 밝혀졌습니다.
일본 국회도서관 홈페이지입니다.
이에 당황한 민족문제연구소(박정희 혈서 떡밥을 공개한 데)는
만주일보가 아닌 만주신문이었다고 주장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알 거면 제대로 알고 까시든가...
게다가 만주신문은 만주어와 중국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던 만주국 국민들도 전혀 안 보는 신문이었으며, 일본인들도 안 보는 신문이었습니다.
더 웃기는 건 1939년 2월 24일에 이미 만주군관학교 합격자가 발표되었는데
왜 기사는 1939년 3월 31일에 나왔을까요?
여러분이 알아서 판단하십시오.
혈서 이야기는 이것만 하고 끝내겠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박정희의 혈서지원설을 입증하기 위해 제출한 만주일보 사본의 기사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반도의 젊은 훈도로부터 29일 치안부(治安部) 군정사(軍政司) 징모과(徵募課)로
조선 경상북도 문경 서부 공립소학교 훈도 박정희군(23)의 열렬한 군관지원 편지가 호적등본, 이력서, 교련검정합격 증명서,
그리고 ‘한목숨 다바쳐 충성함 박정희(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라는 혈서를 쓴 종이와 함께
동봉된 등기로 도착해 담당자를 감격시켰다."
징모를 말그대로 풀이하면 징집과 모병을 뜻하는데,
만주국이 국병법에 따라 징병제를 실시한 것은 1941년입니다.
징모라는 말은 상당히 어폐가 있는 것이지요.
만주국 발행 정부공보를 아무리 뒤져봐도 징모과는 찾을 수 없었다.
박정희가 혈서를 썼다는 1938년 9월 무렵 만주군관학교의 모태인 중앙육군훈련처의 군관후보생 모집공고를 보면
치안부 군형과(軍衡課)에서 채용공고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제출한 신문기사의 진위가 또 한번 되네요.
징모과라는 부서는 있지도 않은 유령부서이며,
징병제를 실시할 무렵에 정모과라는 부서가 존재했지만 이 또한 징모과와는 엄연히 다른 부서입니다.
분명 '재신경칙위치안부군형과'라고 되어 있네요.
존재하지 않는 부서에 혈서를 제출한 박정희의 정체는?
1939년 박정희 혈서에 대한 만주일보 기사를 갖고 좌빨새끼들이 혈서 혈서 드립을 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 만주일보라는 신문사는 1935년에 이미 폐간되어 없어진 신문입니다.
게다가 혈서에 대한 증거물은 이 조작기사 말고는 쥐 코딱지 만큼 없음 대충 정리해봅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만주일보에서 박정희 혈서 기사가 실렸다고 5년동안 주장.
근데 만주일보는 1935년에 폐간 으잌ㅋㅋㅋ
뻥카가 들통나자 민족문제연구소는 만주일보가 아니라 만주신문이라고 말을 바꿈.
근데 만주신문은 일본에서 보는 것도 아니고 그냥 만주 기관지임 + 만주신문은 창간호도 없음.
근데 최근에 근데 일본 국회 도서관 마이크로필름에서 기사 발견.
좌좀들은 만주신문이 찌라시면 일본 국회 도서관에 찌라시도 있냐면서 극딜 시전
여기서 저 신문의 이상한 점을 찾자면??
1. 신문 원본이 없음.
2. 조작된 복사본 한장만 있음.
3. 박정의 친일혈서 기사 부분만 어떻게 딱 하나만 있을수 있을까?
4. 그 당시엔 쓰지 않던 현대 일본어 표현으로 적혀있는걸로 보아 일본어를 완벽하게 통달하지 않은 사람이 쓴것이라고 확인이 되고 있음.
5. 아까도 말했듯이 애초부터 날짜가 맞지가 않음.
혈서를 썻다고 한 날짜는 3월 29일.
근데 실제로 학교의 합격자 발표는 2월 24일..
박정희가 친일 혈서를 썻다는 진실된 근거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혈서 사진도 혈서 목격자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박정희가 입학한 학교는 만주육군 사관학교였는데
만주국군은 일왕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습니다.
(2년후에 일본육군사관학교로 편입)
박정희 혈서의 진실 여부를 가지고 논쟁하는 자체가 악질 좌파들의 박정희 죽이기 프레임에 갇히는 것입니다.
일제시대에 태어나 황국 신민으로 길러졌고 고등교육을 받으려면 충성스런 황국 신민 행세를 해야 가능한 시대인데,
그 이후 실질적인 친일행적이 있나 없나를 가지고 판단해야지
안그러면 지 청천, 백 선엽 장군 등등 모두 친일파가 됩니다.
일단 만주군은 일왕하고 아무 상관이 없는 곳입니다.
그곳에 들어갈때 일왕한테 뭐 충성이니 뭐니 이딴게 없어 만주국의 군대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조선인은 그당시 일본군에 입대할수 없었습니다.
조선인들은 일본군의 장교로 안 뽑았습니다.
그렇기때문에 박정희가 교환학생 방식으로 일본육사로 건너간뒤 졸업하고도,
졸업자 명단에 일본군 장교 소위 박정희가 아니라,
만주군 장교 소위 박정희라고 나와있었지요.
그리고 저 신문자체가 조작입니다.
혈서신문은 원본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이크로필로으로 복사한 사본만이 존재 합니다.
사본은 법적증거력이 매우 현저히 떨어집니다.
조작가능성 때문이지요.
원본은 없고, 사본이라는것도 현대식 일본어가 쓰여진 엉터리이고,
글을 쓴사람 행적은 오리무중입니다.
일본 국회도서관에서 나온 저것을 원본이라고 생각하는 좌파가 태반입니다.
가장 중요한것은 그 짧은 기사안에 중대한 오류가 3가지 이상 밝혀졌기때문에
학계에선 신빙성을 담보할수 없다는 이유로 완전히 사장되었다는 것입니다.
국회도서관이고 자시고 일본 국서인 일본서기 내용이 다 진실이라면 신라와 백제는 3세기부터 4세기까지 일본 식민지였습니다.
백번 양보해서 좌좀들 말대로 박정희가 혈서를 쓰고 입학했다고 해도
입학하기 위해 호소 형식으로 쓴 것일 뿐입니다.
그것으로 박정희를 친일파로 둔갑시키기에는 여러 증언들로 인해 명함하나 내밀 수 없지요.
혈서가 진짜든 아니든 문제는 우리의 인식입니다.
좌파들 역겨운 것 중의 하나가, 혈서 들먹일때 '조갑제도 혈서 썼다고 하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좌파들은 조갑제 주장에서 혈서 대목은 수긍하면서 그것이 첩보원으로 들어가기 위해 행했던 일이라는 것과 비밀 광복군을 했다는건 부정합니다.
보고싶은 것만 보고 듣고싶은것만 보는 전형적인 진영논리지요.
‘만주신보’ 사본을 공개한(그래서 아직 진부 논란이 없지 않지만) 민족문제연구소는 혈서 자체를 소신파 친일의 명백한 증거로 보지만, 그 자체가 억측입니다.
당시 나이 많은 시골 교사 박정희로서는 입학을 위한 편법으로 대일 충성의 수사(修辭)를 발휘했다고 보는 게 훨씬 자연스럽습니다.
즉 제스처에 불과했지요. 교사 시절의 유다른 반일성향을 염두에 두자면, 면종복배(面從腹背)의 트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일제 앞에 복종하는 척하며 다른 꿈을 품었던 경우입니다.
앞으로 혈서 때문에 박정희 친일파 프레임에 갇히지 마세요.
혈서를 썼든 안 썼든 그것이 박정희 친일 행위라고 주장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5. 창씨개명 했다?
창씨개명 하면 친일파? 당시 김대중 대통령(일본명 도요타 다이쥬)을 포함한 국민의 80%가 창씨개명했습니다.
그러면 우리 국민의 80%가 친일파겠네요.
김대중은 일왕이 죽었을 때 머리까지 조아린 골수 종자 인데, 왜 박정희만 물고 넘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김대중이 도요타 다이쥬 라는 창씨개명을 했다는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요.
혹자는
"창씨개명 한 게 죄가 아니라, 두 번 한 게 죄다"라고 합니다.
박정희가 '다카키 마사오'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했었는데
그 이름이 조선인의 냄새가 난다 하여
나중에 '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이름으로 다시 바꿨다는 소문이 있는데,
여기서 잠깐, 오카모토 미노루는?
1929년의 광주학생항일운동에서 공(?)을 세운
사이비교육자인 한 왜놈으로 악명이 높은 사람입니다.
이를 반박하고자, 박정희 대통령의 대구사범 동기동창으로서
인하대 학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울산에 거주하시며 온라인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계신 김병희 옹의 말을 퍼왔습니다.
김병기 옹의 홈페이지인 http://home.megapass.co.kr/~gimbyngh/ 들어가면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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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김병희)는 홈페이지[http://home.megapass.co.kr/~gimbyngh/]를 가지고 있어서,
지구촌 사람이면 누구든지 마음대로 와서 구경도 하고 글도 쓸 수 있게 하고 있는데,
오늘 새벽에는 "이상유"라는 분이 오셔서 쓴 글에서 다음과 같은 사연을 보았다["…"은 수십 자씩 생략했음을 뜻함]:
"저는 서울에서 근무하는 교사 이상유입니다. …
저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
박 대통령에 대한 근거 없는 음해가 많았지만, …
오카모토 미노루라는 다른 창씨 명도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너무도 악질적입니다. …
그러다가 인터넷을 검색하던 중 정말 우연치 않게
박사님과 고민철 씨가 게시판에서 주고 받은 글을 보게 되었는데,
그 곳에는 제가 그렇게도 오랫동안 찾아다니던 오카모토 미노루의 비밀이 상세히 설명되어 있었습니다. …
순간 박대통령을 음해에 앞장서던 김삼웅이 떠올라 치를 떨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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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은 독립기념관장을 하던 중에도 신촌의 서점에서 가끔 만나기도 하였습니다. …
이제 박대통령이 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음해가 사실이 아니라는 확실한 근거를 가지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모두가 박사님의 소중한 증언 덕분입니다. …
홈페이지 어딘가에 오카모토 미노루의 사진을 올려놓았다는 글이 있던데 찾을 수가 없군요.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위의 이상유님 글을 요약하면
박정희 대통령의 창씨 명이 타카키 마사오(독립군을 비밀리에 도와준 사람으로 독립군사이에 유명) 와
오카모토 미노루(김상웅이 주장)라는 설이 있는데 있는데,
오카모토 미노루는 노무현 정권때 독립기념관장으로 임명된 김삼웅이 박정희를 음해하려고 조작한 것이라는 것이다.
참으로 기가 막힌다. 사이비사학자에게 독립기념관장이란 중책을 누가 천거해서 누가 임명(김대중)했는지는 모르지만,
꼴두기가 어물전 망신시키는 꼴이군. 필자는 다음과 같은 회답을 보냈다:
"이상유님 보세요
혜서 잘 읽었습니다. 교육 동지를 만났군, 반갑습니다.
더욱 박정희 대통령의 참모습을 아시려고 주야 분투하신다니,
전교조 무리들이 많다는 곳이라 진흙 속에서 구슬을 만난 느낌입니다.
박정희군은 저의 죽마고우인지라,
그가 오카모토(岡本) 운운의 일본식 이름을 가진 일이 없음을 잘 알고 있는데,
어느 엉터리 사학도가 그런 발설을 한 모양입니다.
오카모토라는 대구사범 교유는 광주학생사건 때 우리 조선인학생들을 때려잡아 수훈 갑인 자로서,
당시의 조선총독이 대구사범 학생감으로 특진시켰기에,
박군(박정희)이나 저를 포함한 우리 대구사범 조선인 학생들은 전원이 그를 개나 돼지처럼 악종으로 보았답니다.
그 사학자(김상웅-김대중 추종자), 그 자는 틀림없이 친북정권의 수하로서 박 대통령을 음해하려는 의도로,
그 악종의 성을 박군의 일본식 성으로 둔갑시킴으로써,
국민들의 박대통령에 대한 추모의 정을 말살 내지는 희석시키려는 음모의 발로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제가 자서전을 쓰면서 그 오카모토 학생감에 관해서 여러 번 언급은 했지만,
모두가 교육자다운 모습은 없고, 시종일관 조선인 학생의 사상동향에서 민족정신을 뽑아,
독립운동의 씨를 말리려는 그의 더러운 수작을 폭로했을 뿐이었고,
귀하께서 말씀하신 그의 사진을 올린 기억은 없습니다.
여불비례
2008. 11. 13 울산 일산진에서 김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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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병적과 서류를 모두 뒤져보면
박정희는 광복 때까지 '다카키 마사오'라는 이름으로 등장합니다.
오카모토 미노루가 절대 아니라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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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정희군은 저의 죽마고우인지라, 그가 오카모토(岡本) 운운의 일본식 이름을 가진 일이 없음을 잘 알고 있는데, 어느 엉터리 사학도가 그런 발설을 한 모양입니다. 오카모토라는 대구사범 교유는 광주학생사건 때 우리 조선인학생들을 때려잡아 수훈 갑인 자로서, 당시의 조선총독이 대구사범 학생감으로 특진시켰기에, 박군이나 저를 포함한 우리 대구사범 조선인 학생들은 전원이 그를 개나 돼지처럼 악종으로 보았답니다.
그 사학자, 그 자는 틀림없이 친북정권의 수하로서 박 대통령을 음해하려는 의도로, 그 악종의 성을 박군의 일본식 성으로 둔갑시킴으로써, 국민들의 박대통령에 대한 추모의 정을 말살 내지는 희석시키려는 음모의 발로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제가 자서전을 쓰면서 그 오카모토 학생감에 관해서 여러 번 언급은 했지만, 모두가 교육자다운 모습은 없고, 시종일관 조선인 학생의 사상동향에서 민족정신을 뽑아, 독립운동의 씨를 말리려는 그의 더러운 수작을 폭로했을 뿐이었고, 귀하께서 말씀하신 그의 사진을 올린 기억은 없습니다.
여불비례
2008. 11. 13 울산 일산진에서 김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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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희 옹은 박정희 대통령의 대구사범 동기동창으로서 인하대 학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울산에 거주하시며 온라인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졸업사진
왼쪽이 오카모토. 오른쪽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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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제2창씨명으로 알려진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의 실제 이름은 오카모토 히로시(岡本寬)이다.
實자와 寬자가 워낙 비슷해, 옮겨쓰면서 혼동하는 경우가 많았던 모양이다.
실제로 국사편찬위원회의 조선총독부 직원록에 의하면 1935년에는 實로 표기가 되어 있고 1936~1943년까지는 寬로 표기가 되어있다.
히로시가 미노루로 둔갑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 같다.
오카모토는 1930년 조선공립고보에서 시작하여 1932년 광주학생사건 당시 광주제일고보의 교유(敎諭)로 있었는데,
물의를 일으킨 조선학생들을 일망타진한 수훈갑의 공로가 있어 1등급 특진하고,1935년,
그러니까 박정희가 3학년이었을 때 대구사범학교로 영전하게 되었다.
당시 대구사범학교는 현준혁의「교유 및 생도의 비밀결사사건」이 발생한지 얼마되지 않아
교육당국은 학생들의 불온사상을 특별히 감독하고 단속할 필요가 있다 생각하여 오카모토를 대구사범학교로 발령시킨 것이다.
과연 오카모토는 당국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오카모토가 부임한 이후 많은 조선인 학생들이 퇴학과 정학을 밥먹듯이 당했던 것이다. 게다가 워낙 학생들을 개패듯이 팼기 때문에, 학생들로부터 원성이 자자했다고 한다.
오카모토는 이렇게 조선인 학생들을 짓밟고 일어선 덕에 그 뒤로도 승승장구하여,
1940년에는 6등 授瑞寶章이라는 서훈을 받고 함경남도 道視學官을 거쳐 1944년에는 청주사범학교장을 지냈다.
평교사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직위까지 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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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 박정희 ≠ 오카모토 미노루
2번 개명 안함 .
오카모토와 박정희는 다른사람입니다.
군속계만 봐도 1945년까지 高木正雄 그대로 쓰고 있습니다.
교사의원면직 발령원부나 보고 날조를 하던가.
1940년.
충격적인 사실은,
박정희 = 오카모토 미노루’ 는
북한에서 시작된 날조라는 점입니다.
선동당한 사람들은 박정희 창씨개명이 오카모토 미노루라며 열심히 사람들을 또 선동하고 있습니다.
대선토론회에 등장한 박정희 대통령의 창씨개명 문제
이시완 자유기고가, leeshiwan@gmail.com
대선 후보 토론회를 보다가 통합진보당의 이정희 후보가 갑자기 뜬금없는 ‘다카키 마사오’라는 단어를 언급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러자 인터넷 포털에서는 갑자기 ‘다카키 마사오’라는 검색어 순위가 급등하고,
덩달아 박정희 전 대통령의 또하나의 ‘창씨개명’한 이름으로 알려진 ‘오카모토 미노루’ 라는 이름까지 검색 랭킹에 등장했다.
이것을 본 많은 네티즌들은 무책임하게 트위터, 인터넷 댓글을 양산하며 한동안 한국 사회에서는 들리지 않았던 이름인
‘오카모토 미노루’를 들고 나와 박정희와 박근혜 후보를 공격하는데 여념이 없다.
이런 소동을 보고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은 ‘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이름이
어디서 기원했는지도 모르고 무조건 퍼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박정희=오카모토 미노루라는 말을 퍼뜨리고 있는 그들에게 한번 물어보고 싶다.
박정희의 창씨개명이 ‘오카모토 미노루’ 라는 얘기를 도대체 어디에서 들었느냐고 말이다.
그들의 대답은 뻔하다. 최상천의 ‘알몸 박정희’(2001), 강준만의 ‘한국 현대사 산책’,
그리고 재미 언론인 문명자의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1999), ‘김형욱 회고록’(1985),
전 독립기념관장 김삼웅의 칼럼 및 저서 등이 바로 그들의 ‘근거’다.
하지만, 그 어떤 자료도 정확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단지 ‘카더라’ 라는 수준에 그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여기서 한번 생각해볼 점이 있다. 바로 위 인물들의 공통점에 대해서다.
박정희가 오카모토 미노루라고 열심히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박정희와 대립했던 사람이거나,
김대중 전대통령의 측근, 혹은 친북 인사들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안티 박정희’의 요소를 가진 사람들이라는 말이다.
그들의 주장은 과연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 것일까?
안티박정희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객관적인 근거라며 늘 가져오는 근거는 일본 측에서 발간한 ‘일본육해군 총합사전’이다.
실제 이 사전의 2판(2005)에 보면 박정희의 일본이름이 오카모토 미노루라고 분명히 나와 있다.
'일본육해군 총합사전' 2판 (2005)
하지만, 명심해야할 것이 있다. 이 사전은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기록이 아니라,
도쿄대학 출판부에서 출판한 ‘개인출판물’이라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점은 이 사전의 초판(1991)에는 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이름이 없는데,
2005년 발간된 2판에 갑자기 이 이름이 추가되었다는 점이다.
필자는 도쿄대학 출판부를 통해 이 사전의 저자에게 ‘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이름의 근거를 확인해 본 결과,
“근거 확인이 안되니 3판을 출판할 때는 ‘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이름을 삭제하겠다”라는 답변을 받았다.
한국의 ‘안티 박정희’ 세력이 금과옥조처럼 받들어 오던 ‘일본측 자료’ 의 설득력도 이것으로 없어진 셈이다.
그렇다면 대체 이 ‘박정희=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주장은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현재까지 언급되고 있는 자료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은 1985년에 나온 ‘김형욱 회고록’인데,
필자가 발견한 그 보다 더 오래된 기록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것은 놀랍게도 ‘북한’ 에서 시작되었다.
1973년 8월11일자 북한의 로동신문을 보면 김대중 납치사건 직후에 박정희에 대한 비판을 집중적으로 쏟아놓는데,
그때부터 ‘오카모토’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남조선의 한 집권자는 우리 인민이 일제 침략자들에 항거하여 싸울 때 혈서를 써서
‘천황’의 ‘적자’가 될 것을 맹세맹세한 후 ‘특등 일본인으로’,
‘돌격대장’으로 ‘오까모도중위’로서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위하여 싸우는 애국적 인민들을 탄압하기 위한
이른바 ‘토벌’에 110여회나 참가하였으며 조선동포들이 살고 있는 마을에 불을 지르고
불속에서 기여나오는 동포 어린이들과 늙은이들을 총창으로 마구 찔러 죽이고 생매장하는
몸서리치는 만행을 손가락 하나 떨지않고 감행한 자이라는 것도 모르는 사람이 없다.“
(1973년 8월11일 로동신문)
여기서 ‘오까모도’가 박정희를 지칭한다는 것은 1987년 북한의 금성청년출판사에서 나온
‘원쑤는 재침을 노린다’라는 책에서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그 내용을 인용한다.
일본 군국주의 우두머리 한놈인 구모놈은 박정희 역적놈을 ‘가즈오료리점’에 특별히 불러내다 먹자판을 벌려놓았는데
이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말이 오갔다.
“자네 퍽 몰라보게 됐네”
“각하, 절 알아보시겠습니까? 사랑 받던 오까모도입니다”
“아무렴 알아보고 말구”
“그떄 선생님은 저를 돌격대장이라고 불렀지요”
“그랬지.암 돌격대장이야.
오까모도군이 지금 남조선의 실권자로 나타났지만
내 눈에는 옛날 자주빛깔 만주국군의 군관생으로밖엔 보이지 않네”
“고맙습니다. 기억해 주셔서.
저 역시 그 때를 자주 추억하곤 합니다”
(「원쑤는 재침을 노린다」금성청년출판사1987)
한일회담을 비판하기 위해 일본을 찾은 박정희를 악의적으로 ‘오까모도’ 라고 설정하여,
일본인에게 저자세로 일관하는 인물로 그려놓은 것이다.
단지 북한과 한국의 일본어 표기법이 달라 ‘오카모토’가 북에서는 ‘오까모도’로 표현되고 있을 뿐이다.
한국에서 1973년 이전에 박정희를 ‘오카모토 미노루’ 라고 주장한 책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한국 사회에 퍼진 ‘박정희=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설은 북한의 주장을 확인도 없이
그대로 받아들여 정적비판을 위해 퍼뜨렸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 주체가 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안티박정희’ 진영이다.
문명자씨는 김일성, 김정일 부자와 직접 면담을 할 정도로 친분이 있던 사람이었으며,
김형욱씨 역시 박정희의 미움을 사 미국으로 망명하여 박정희 정권 비판의 선봉에 섰고,
김삼웅씨는 박정희의 정적 김대중씨가 만든 평민당 당보의 주간을 맡을 정도로 친DJ의 성향이었다.
다른 사람들 역시 전형적인 ‘안티 박정희’ 성향의 인물들이다.
나는 한국 사회에서 나름 중요한 위치에 서 있는 이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이 본 ‘박정희=오카모토’라는 근거는 어디에서 보았느냐고.
북한자료가 아니라면 당당히 밝힐 수가 있을 것 아닌가.
지금까지 박정희 친일설, 혈서설 등에 대한 갑론을박이 있었지만,
박정희=오카모토 미노루에 대한 제대로 된 근거제시는 단 한번도 없었다.
만약 근거가 있다면 진작에 나오고도 남았어야 한다.
만약 그 출처가 차마 북한이라고 말하지 못하고, ‘카더라’ 라고 말을 하고 싶다면
한국 사회에 무분별하게 퍼진 그 ‘설’에 대한 책임을 과연 누가져야할까?
정적 비판도 좋지만 도를 넘어서는 인신공격은 정파,
시대를 떠나 어느쪽이건 자제해야 하지 않을까?
박정희는 왜 만주군관학교에 갔을까
고산 고정일 선생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박정희는 일본의 황국신민화 정책에 반발, 초등학교 교사직을 버렸습니다.
그에겐 무엇보다도 힘이 필요했고, 그 힘이란 근대적인 선진문화였습니다.
그즈음 선진문화 중 하나가 일본군사체제였기에 만주군관학교로 달려갔습니다.
적진 소굴로 들어간 것입니다. 이는 불을 훔치러 간 '프로메테우스 행보'입니다.
그는 만주군관학교 일본육군사관학교에서 일제대륙침략선봉 황야의 늑대 이시하라 간지,
천황의 여우 기시 노부스케 두 걸물의 만주국건설 산업경제개발방략과 근대적 국가통략을 공부합니다."
백강 조경한 선생이 말하는 박정희
자세한 설명은 이 짤로 대체합니다.
(오타가 났습니다. 조경환이 아니고 조경한입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22&aid=0000043430&viewType=pc
조경한 선생은 실제로 박통과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2041700209207001&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82-04-17&officeId=00020&pageNo=7&printNo=18626&publishType=00020
박정희가 친일파라고 생각했더라면 친일파를 더럽게 싫어했던 조경한 선생이 그를 가까이했을 리가 없습니다.
좌파들은 조경한 선생님 일대기를 부정하기까지 합니다.
박정희가 친일파였다면 김학규 장군을 깍듯이 대해줬을 거 같습니까?
아무리 조작드립 치면서 역사를 왜곡해봤자 역사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정작 친일파 집단을 신봉하는 새끼들이 애국자를 친일파로 덮어씌우는 만행을 저지르는 것이
오늘 대한민국의 현실입니다.
백범 김구 선생이 말하는 박정희
박정희의 비밀요원 활동을 기록한, 육군본부의 창군전사 기록을 공개합니다.
http://www.donga.com/e-county/sssboard/board.php?no=379335&s_work=view&tcode=01001
원문의 일부를 밑에서 언급합니다.
이곳에 가시면 직접 보실 수 있습니다.
(스압을 조금이나마 줄이기 위해 링크를 걸었습니다.)
김구 선생님과 조경한 선생님의 말이 구라라면
박정희는 광복 후 반민특위에 이름이 올라갔겠죠.
어떤 분이 백범 선생은 저런 글 쓴 적 없다고 하시던데,
글쎄요, 사실 저게 진위여부 논란이 많습니다.
그래서 대신 이걸 보여드리겠습니다.
김학규 장군 얘깁니다.
http://cafe.naver.com/bohunstar/14551
박정희 독립군 토벌했나
박정희가 만주군 장교 시절 팔로군을 공격한 적은 있습니다.
하지만 팔로군은 어디까지나 중국 공산당의 군대일 뿐, 독립군이 아니죠.
사실, 일제 말에 독립군은 만주를 떠나
중국 내륙으로 다 이동한 상태였다고요.
실제로 류연산이라는 작자가 박정희 독립군 토벌설을 제시했다가
그렇다 합니다 ㅇㅇ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에서 모든 성적이 아주 우수했지만 전체 성적이 바닥이었습니다.
이유는 황국신민과목을 백지로 냈거든요.
박정희가 모든 과목에서 최우수 성적을 얻으면서도
늘 전체 성적이 바닥을 헤메고 있는 이유가 궁금했던 아리카와 당시 중좌는
박정희가 윤리 등 황국신민 과목에는 백지 답안을 제출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맺어졌으며 오래 지속된 사제지간의 일화는 아주 유명합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갑자기 군관학교에 들어갈 생각을 했을까요?
백범김구의 백범일지에는 박정희와의 만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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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군관학교에 입학 하려던 박정희대통령은 김정균을 통해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났습니다. 김정균은 상해임정에서 비밀첩보원을 하던 김구 선생님의 수족과도 같은 분이었습니다. 남의사 소속의 왕정국, 산서성 총사령관 염석산과 더불어 독립 운동을 하던 분이었습니다. 그 김정균의 일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 김구 선생은 1939년 3월 어느날 청년 박정희를 만났다. 그때 박정희는 20대 초반으로 아주 적극적인 사고를 지닌 청년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그때 처음 박정희 청년을 김구 선생에게 소개해준 사람이 김정균의 친한 친구인 신영학 이라는 친구다. 신 영학을 통해 소개받은 김정균은 박정희 청년의 뚜렷한 역사 의식과 조국 광복의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것을 보고는 김구 선생에게 소개를 하였다. 그때 박정희를 처음본 김구 선생은 박정희를 1시간동안 부동자세로 세워 두었다. 김구 선생이 본 박정희는 키는 크지 않았지만 부럽뜬 두 눈을 보고는 멈칫 놀랐다고 박정희가 나간후에 김정균이한테 말했다고 김정균이는 기록하고 있다. 박 정희 청년은 1시간 부동자세로 서 있었지만 자세하나 흐트러 지지 않았다. 김구 선생이 박정희 청년을 세워두고 외출을 하여 40여분만에 돌아 왔으나 박정희는 그때까지 부동 자세로 서 있었다. 그때 김구 선생은 박정희가 서 있는 자리에 비밀 표시를 해 두었다. 그랬는데 박정희는 그자리에서 1cm도 움직이지 않고 1시간을 서 있었다. 그기에 감탄한 김구 선생은 박정희 청년이 예사로운 사람이 아니라고 후에 그곳에 모인 광복군 동지들께 말했다고 김정균이는 기록하고 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김구 선생은 박정희를 예의 주시 하고 있었다. 아마 1945년에 광복이 못되고 했더라면 박정희는 김구 선생을 도와 일을 했을것이다 라고 김정균이는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김구 선생이 박정희를 만주 군관 학교를 보낼려고 하였으나 박정희 청년이 적을 알아야 한다며 굳이 일본군 사관학교에 입학을 하였다고 김정균이는 기록하고 있다. 박정희가 일본군 사관학교에 다니면서도 일본군의 무기정보 일본군의 전술공부등 많은 정보를 김정균이에게 알려 주었다. 박정희 소좌가 일본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선양으로 떠날때도 김정균이한테 알려 주었다. 김구 선생은 박정희 소좌가 선양으로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김정균이는 기록하고 있다. 김정균이와 박정희 소좌는 수시로 연락을 하면서 일본군의 동태 작전능력 병력이동 계획 일본군의 동태를 알려 주었다고 김정균이는 기록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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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1945년 만주국군 소위 박정희는 비밀광복군이었음을 서술한 세 권의 책이 있다. 왼편부터 ‘광복군’(1967년), ‘창군전사’(1980년), ‘육사 졸업생’(1984년).
바로 1967년에 출판되었던 도서 "광복군" 중 핵심 내용을 보여주는 두 페이지 사진이 있다. 이 책의 내용을 간추리면 만주국군 소위 박정희는 1945년 2월 광복군에 가담한 뒤 뜻이 맞는 한국인 동료들과 부대 안에 비밀조직을 만들고 훈련 때면 사병들에게 우회적 방식으로 독립사상도 고취했다. 이어 광복군 제3지대장이던 김학규 장군으로부터 “부대를 장악하고 있다가 적당한 기회에 일본군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고 대기하던 중 일제가 예상보다 빨리 항복하는 바람에 거사 시기를 놓쳤다는 것이다. 소설 형식의 이 증언이 입증되기 전까지는 소설로만 간주되었다. 그러나 최근 미 국방성과 미 국립문서보관소가 광복군 OSS 자료들을 연달아 공개하면서 독립군 역사를 새로 써야 할 만큼 이 책의 내용이 정확하다.좌빨들은 만주에 독립군이 존재하였던 것처럼 주장해 왔으나 이것은 엄청난 거짓말이다. 1920년의 청산리전투를 끝으로 독립군은 러시아령 자유시로 이동하였으나, 러시아의 조종을 받은 조선인 공산당 무장단체의 공격을 받아 태반이 사살되었으며, 생존자들은 여운형이 배심원이었던 재판으로 처형되거나 강제노역소로 끌려가 독립군이 괴멸되었다. 이후 독립군은 다시 형성되지 못했다. 그리고 1940년에 창설된 광복군 소재지는 만주가 아니라, 중국 임시수도 중경이었다. 그리고 광복군의 주요 임무는 드라마에서 보는 것처럼 정규전이나 게릴라전이 아니라, 첩보전이었다. 태평양전쟁 참전국으로서의 임정 광복군의 주요임무는 비밀광복군, 즉 광복군 OSS를 통한 첩보전이었음을 광복군이 쓴 역사소설 "광복군"은 증언한 것이며, 그것이 실제 역사적 사실이었음이 이제 명확하게 입증된 것이다. 만약 비밀광복군 박정희의 역할이 없었다면 조선은 영영 독립하지 못하였을지 모른다. 미국은 몇차례 일본과의 휴전을 고려해야 하는 기로에 있었다. 왜 미국이 한국전쟁 때 북한과 휴전하였는가? 유엔군의 승리할 승산이 있음을 보여주는 첩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 때는 그 출처가 박정희로 거슬러올라가는 첩보가 있었다. 이른바 관동군 주력부대가 남양군도로 이동하였다는 첩보였다. 연합국으로서는 이 중대한 첩보가 절실히 필요했으나, 오로지 광복군 OSS를 통해서만 이 첩보를 얻을 수 있었고, 광복군은 박정희를 통해서만 이 첩보를 얻을 수 있었다. 박정희는 일본군의 고급기밀을 빼올 수 있는 유일한 조선인 만군 군관이었다. 신징(新京) 교외 제3독립수비대 대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관동군 대좌 아리카와 게이이치(有川圭一)가 바로 박정희의 대구사범학교 시절 교련 스승이었으며, 박정희의 만주군관학교 진학이 가능하도록 도와준 후원자였으며, 박정희에게 독립운동을 격려하며 관동군 기밀을 빼주었다. 아리카와 대좌가 남양군도로 출전하면서 박정희에게 이런 유언을 편지로 보냈다: <이 전쟁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일본은 망할 것이요, 조선은 독립할 것이다. 나는 죽으러 가나 자네는 자네 조국을 위해 살게>. (그 편지에서 말한 대로 그는 1945년 6월 오키나와에서 전사하였음.) 일본은 연합국이 전혀 눈치챌 수 없게 관동군 주력부대를 남양군도로 빼돌리고 있었는데, 이 군사기밀을 아리카와 대좌가 박정희에게 누설하였으며, 이 정보가 광복군에게로, 광복군을 통해서 미국으로 전해져, 미국이 광복군과 합동으로 상륙작전을 준비하는 동시에 러시아에 태평양 전쟁 참전을 요구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이 항복을 선언하였을 때 미국이 깜짝 놀랐다. 원자폭탄 두 개를 투하하였으나, 일본이 그토록 쉽게 항복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천황이 항복으로 마음을 정하게 된 일차적 이유는 원자폭탄의 위력이 아니라, 관동군이 러시아군의 침공에 별 저항도 못하고 무너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일본 군부는 최후의 일인까지 결사저항 국민명령을 내리려 했는데, 천황이 선수쳐 항복선언을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박정희를 통해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이 입수하여 연합국에 전달한 관동군 고급군사기밀 첩보에 어떤 중대한 의미가 있었는지 분명하지 아니한가! 박정희 비밀 광복군설을 뒷받침하는 근거자료가 백범일지에도 실려있다. 아래는 백범 김구 선생의 『 아. 그리운 조국 산하』에서 발췌한 단락이다:<<『 1944 년』 이 모양으로 광복군이 창설되었으나 인원도 많이 못하여 얼마동안을 유명무실하게 지내다가 문득 한 사건이 생겼으니 그것은 50 여명 청년이 가슴에 태극기를 붙이고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 정청으로 애국가를 부르며 들어오는 것이었다. 이들은 우리 대학생들이 학병으로 일본군대에 편입되어 중국 전선에 출전하였다가 탈주하여 안휘성 부양의 광복군 제 3 지대를 찾어온것을 지대장 김 학규 장군이 보낸 것이었다. - 중략- 이 것이 인연으로 우리 광복군이 연합국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 미국의 OSS 를 주관하는 서젠트 박사는 광복군 제 1 지대장과 합작하여 서안에서 윔츠 중위는 제 3 지대장 김 학규와 합작하여 부양에서 우리 광복군에서 비밀 훈련을 실시 하였다... - 이하 중략 - >>그리고, 이 광복군 OSS, 즉 비밀광복군에 대한 김구의 이 기록의 사실성은 미 국립문서보관소가 지난 해(2008년)에 공개한 자료로 다시 한번 확증되었다. 이기청 (의병정신선양회 사무총장·방송인)도 증언하기를 5·16쿠데타가 일어나고 얼마 안돼서 한 젊은이가 마지막 임정요인이었던 백강 조경환 선생 면목동 집으로 찾아와 큰절을 하였다. 동행한 사람이 “대통령이십니다” 하기에 보니 박정희였다. 그는 "박 대통령은 '제가 만주에 있던 다카키 마사오입니다'하는데, 조선인 병사들을 독립군으로 빼돌렸던 다카키의 이름을 익히 들었기 때문에 놀랍고도 반가웠습니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는 독립군을 보충해야 할 매우 어려운 상황이어서 박 중좌의 도움은 컸다고 합니다"라고 말하는데 사실이었다. 미 국립문서보관소가 최근 공개한 자료가 밝히듯이 미국 OSS는 그때 광복군에 200명을 더 모병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었다 (http://www.sundayjournalusa.com/article.php?id=14994&page=4&s=&o=&k= ). 광복회 자료에 따르면 이때 탈출한 학병과 일본군 조선인들 중에서 탈출 학병 12 명과 징병학병 탈출 160 명을 광복군 제 1 지대 3 구대에 편성 배치하였고, 제 3 지대에도 50 여명의 탈출 학병들을 충칭으로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자료 역시 미국 국립문서보관서 기록과 일치하며, 박정희가 만주군 보병8단에서 근무한 시기와도 일치한다.이승만 박사가 창설에 큰 기여를 한 OSS(미국 전략정보국) 아시아 지부 광복군 OSS의 첩보전 만군 소위 박정희가 큰 기여를 했다는 증언은 김구 계열의 광복군 인사들만 한 것이 아니다. 우사 김규식의 비서실장이었던 송남헌이 김대중 정권 시절 출간한 아래의 도서 "해방 3년사를 보라."
이 책 26쪽은 이렇게 기록한다. "1945년 2월 9일 만주군 제8단위문하기 위해 [신 태양 악극단] 찾아 왔다. 박 정 희 소위는 조선에서 新太陽樂劇團(단장 金 履 泰)이 보병 제 8단을 위문 공연차 왔을 때 樂劇團의 잡부로 변장하여 일하던 李 龍 基(光復軍特殊要員)와 접선하여 광복군 사령관 李靑天 장군의 밀서와 함께 光復軍 第3支隊 金 學 奎의 지령을 받았다." 이것은 1967년 광복군이 출간한 도서 "광복군"과 일치하는 증언이다. 그리고, 독립운동가 출신 송남헌은 좌파 진영에서는 누구보다도 독립운동사에 해박한 인물이었다.좌 빨들은 좌파 사하계의 거장 송남헌의 이 기록을 부정하지 못한다. 이 기록을 부정할 때 좌파 사학계는 무너지기 때문이다. 1921년 러시아령 자유시에서 러시아 붉은군대의 지원을 받아 독립군을 괴멸시켰던 여운형, 해방을 앞둔 시기에는 학도병 지원 권유 격문을 썼던 여운형이 그래도 독립운동가로서의 생색을 내려면 건국동맹 활동을 인정받아야 한다. 그런데, 군사행동을 위한 건국동맹의 실제적 주역은 만주건국동맹이었고, 만주건국동맹이란 여운형을 추종하던 만주국군 군관 박승환이 만주군에 군적을 둔 조선 출신 장교를 상당수 규합, 만주 일대에 산재한 독립전하의 연계를 도모하고 인근 주재 부대와 통합하여 1개 사단의 병력으로 국내 진공을 계획한 것을 말한다. 이것이 실제 있었던 사실이었다.미국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할 것을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미국은 8월 중 한반도 침투작전을 실시하는 것이 중요하였으며, 이 작전을 위해 조선인 병력이 절실히 필요했다. 미국은 광복군에 병력 추가 모집을, 그리고 본토에 침투 작전시 협력할 연계 세력을 확보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때는 민족주의 계열이냐 공산주의 계열이냐를 따질 겨를이 없이 조선인 독립운동 단체들이 모두 힘을 합쳐야 할 시기였다. 그래서, 광복군 사령관 이청천 장군이 박정희 만군 소위에게 국내 진공 계획에 참여하라고 밀서로 지령을 보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그러면, 어째서 박정희가 비밀광복군이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여태 모르고 있었는가? 언론의 자유가 넘치는 미국에서조차 미주 한인 80 여명이 첩보기관 OSS에서 근무했다는 사실을 60 여년간 감추어 왔다. 일본에서도 맥아더 장군의 요구로 일본 정부가 원산상륙작전에 참전케 한 일본인들이 국익을 위해 그 사실을 평생 비밀로 하여야 했다. 극동 CIA 전신인 비밀광복군의 임무는 비밀을 지키는 것이었다. (1961년 5월 극동 CIA 담당자가 혁명 주체는 박정희 장군이라는 사실을 아는 순간 미국의 입장은 군사혁명 지지를 기정사실화한 사실을 상기해 보라.) 박정희의 상관이었던 문용채는 비밀조직으로서 만주국군 내에 비밀광복군이 있었다는 사실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임을 이렇게 증언한다:<<"1945년 4월 박승환,박준호,이상열,최창륜과 나는 [조선건국동맹 만주분맹 군사 위원회]를 조직했다. 그때 봉천비행단에는 박임항과 최창륜이 있었는데 최창륜 이 2기 대표로 박정희를 추천했다.나의 계급은 만군대위였고 그는 소위 시절이 다. 박정희는 반벽산(半壁山)에서 근무했고 나는 그곳에서 가까운 금주헌병대에 있었기 때문에 몇번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박정희는 술자리에서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을 신랄히 비판하며 오래가지 못할 것 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만날 때마다 조국광복의 방략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 이역땅에서 향수를 되씹으며 서로의 회포를 털어 놓았다. 그는 만군 제 8단의 일 본인 장교들의 감시를 피해가며 조국광복운동에 참여했다. 박정희가 만군에 있을때 조선의 독립군과 연관이 있었느냐 없었느냐 하고 학자 들 간에 논란이 있는 모양이나 그당시 우리는 비밀활동을 했기 때문에 겉으로 드 러나지는 않았고 [조선건국동맹]이라는 것은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국내파 독립 운동단체이다.>>이 외에도 모든 증언들이 박정희가 비밀광복군이었다는 사실을 가리키고 있으며, 당시 태평양전쟁 전개 과정과, 이를 둘러싼 일ㄹ련의 사건들 및 모든 사건의 정황들이 만주국군 보병 8단 박정희 소위는 비밀광복군이었음을 입증한다. 적어도 만주국군 내에 조선인 장교단이 주축이었던 만주건국연맹이 있었다는 사실을 좌파 학자들은 부정할 수 없다. 이것을 부정하면 여운형은 완전 부정되며, 여운형이 완전 부정되면 좌파의 역사 논리는 설 자리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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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까기로 유명했던 송남헌이 쓴 책에 박정희가 광복군 쁘락치한 기록이 나옵니다.
http://bookstore21.net/korean/815/park-oss.htm)
골수 좌파 지식인의 증언
포 털사이트 <네이버>에서 <송남헌>이라는 사람을 두들겨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 <송남헌[宋南憲, 1914.4.11~2001.2.20] 한국의 독립운동가, 현대사 연구가. (중략) 광복 후 군사정부에 의해 좌익으로 몰려 옥고를 치렀으며, 출옥 후에는 통일운동을 사회운동으로 확산하는 데 힘을 기울이며 현대사 연구가로 여생을 보냈다.> 이 정도면 극우보수주의자 입장에서 보면 완벽한 '좌빨' 아니면 거의 '빨갱이' 수준이다.
특 히 5.16군사혁명 직후 박정희 정권 하에서 2년 간의 옥살이를 하였으니 그가 어떤 입장인지 알만하다. 그런 그가 <해방 3년사>라는 책을 썼다. 그 책의 26페이지를 그대로 복사해 옮긴다. 이 글에는 <만주군 박정희 중위가 광복군 비밀요원이 되는 과정>을 스스로 증언하고 있다.
(위에서 다섯번째, 아래에서 세번째 줄 주목. 이 씨는 다음 날 (2월 10일) 저녁 부대간부들과 회식하는 자리에서 박정희 중위, 신현준 대위와 만나는 데 성공했다. 이씨는 자기 신변을 밝힌 뒤 광복군 총사령관 이청천 장군의 직인이 찍힌 광복군 임명장을 박중위와 신대위에게 주었다. 이래서 그들은 광복군 비밀요원이 됐다.)
(아래에서 네번째 줄 주목 : 이 국내 진공에 관한 비밀 거사에 참여한 바가 있었던 조선출신 군인 가운데는 朴正熙(박정희) 전 대통령도 있었으며....)
http://blog.daum.net/lawrenceeb/7065239
몇몇 사람들은 독립군을 때려잡았다고 주장하는데,
이건 자세히 알아보면 진짜 개병/신같은 소리입니다.
http://www.bookstore21.net/korean/815/faked-article.htm
이글만 봐도 알겠지만,
당시 진짜 독립군은 거의 궤멸되서 만주쪽엔 없었습니다.
그곳에서 싸운건 중국 만주 지역을 철권통치하던 무장한족(군벌)이었습니다.
당시 삶이 힘들어 만주로 이주해 온 사람들을 받아준건 만주국이었거든요.
한족들은 조선인이 땅을 소유하는걸 엄격하게 막고 박해했습니다.
그런데 무장한족은 자기들이 점령하던 지역을 빼았겼으니 만주국과 싸우려 들겠지요?
그들의 기치가 '조선인과 일본인을 쫓아보내자'였고 그게 항일부대라고 불린 이유입니다.
그들에게는 항일 독립군이였을지 몰라도 우리 조선인 입장에선 적군이였지요.
그러니 박정희는 그곳에서 그들과 싸우는걸 즐거워 했을 겁니다.
이후 박정희는 광복되기전 광복군으로 들어갔고
OSS 지금은 CIA로 불리는 조직으로 들어가서 활동을 했습니다.
http://www.bookstore21.net/korean/815/park-oss.htm
http://systemclub.net/bbs/zb4pl5/zboard.php?id=president_park&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08
이래도 박정희가 친일파인가요?
어쨌건, 박정희를 못 까서 안달인 악마같은 좌파새끼들의 필살기라고 주장하는 친일파 증거니까,
까는건 제대로 반박해줘야겠지요.
박정희가 독립군에 협조 한것은 백범 김구선생님이 인정 했고
백범 일지에 기록되어 있는 일입니다.
독도 팔아넘겼나?
대한민국에 귀화한 일본인으로 독도가 대한민국 영토임을 널리 알리고 계신 호사카 유지 교수의 말을 빌려 왔습니다.
“박정희 때문에 일본이 독도를 포기했다”
한국인으로 귀화한 일본인, 안티 박정희 세력에 일갈
독도 수호운동가
세종대 교수
귀화한 일본계 한국인
호사카 유지
귀화한 일본계 한국인으로 ‘독도사수’ 운동을 벌여온 호사카 유지(사진. ほさかゆうじ) 세종대 교수가,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일부 세력의 ‘왜곡’에 일침을 가했다.
그는 14일 중앙일보 기고문에서, 지난달 말 프레스센터에서 열렸다는
‘한일협정’ 관련 심포지엄에서의 자신의 발표문을 어느 인터넷신문이 크게 왜곡해서 보도했다고 전했다.
발표문 내용은 <한일협정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독도문제를 한·일회담의 의제에서 제외하라”고
도쿄에 있던 이동원 외무부 장관에게 지시하면서 “본건은 한국 정부의 안정과 운명이 걸린 중대한 문제이므로
만약에 한국 측이 수락할 만한 해결책이 나오지 않는다면 한·일회담을 중지해도 좋다”고 말했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는 “한국 정부의 이런 단호한 방침에 일본 정부가 양보해 독도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로 회부하겠다는 안을 거두어들였고,
독도 명칭을 교환공문에서 삭제했으며, 한국 측이 제시한 구속력이 없는 ‘조정’으로 분쟁을 해결한다는 내용의 최종안이 마련되었다”며 “내 발표문의 취지는 박정희 정권이 독도문제만큼은 처리를 잘했고
이 협상 과정에서 일본이 사실상 독도를 포기했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그 심포지엄 내용을 보도한 어느 인터넷신문이 내 발표문을 크게 왜곡해서 보도했다”는 것.
그는 “박정희 정권이 독도문제를 심하게 망가뜨렸다는 취지로 내 발표문을 소개한 것”이라며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내 발표문과는 완전히 반대인 내용을 사실인 양 써서 보도했다”고 분개했다.
그러면서 “이처럼 심한 왜곡은 그동안 내 의견에 악성 댓글을 썼던 일본인들도 하지 않은 처사”라며
“그런데 대한민국 내에서 자신들의 취지나 노선에 맞지 않는다 해서 주제발표자의 발표내용을 심하게 왜곡해
사람의 명예를 실추시키다니 기가 막혔다”고 했다.
특히 “한·일협정 협상 당시 독도문제가 한국 측 잘못이라는 왜곡된 결론을 내면,
국제법상 독도의 위치가 위태롭게 된다”며 “그런 중대한 상황으로 확대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서
자기들만의 이익을 위해 왜곡을 서슴지 않는 사람들은 나라를 망하게 할 가능성을 내포한 사람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생각이 짧은 것이다”라고 질타했다.
이어 “‘나’라는 한 개인이 화가 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며
“왜곡해서 쓴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한 개인이 사회에서 신뢰를 잃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며
오로지 자신들의 주장이 부정당하는 것이 두려울 뿐인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이같이 밝힌 그는, “이번 사태의 관건은 바로 ‘박정희’였다”며
“아마도 ‘박정희’가 잘한 일이 하나라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그들은 생각하는 것 같다.
독도문제에서 박정희가 뭔가 잘했다는 주장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리라”라고 꼬집었다.
그럼에도 “1965년도의 환경 속에서 박정희는 일본으로 하여금 독도를 포기하게 만든 게 사실”이라며
“‘박정희’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진실은 제대로 밝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와함께 “그리고 그와 같은 신념을 관철시키고 싶다”며 “나는 한 정치가를 두둔한 것이 아니며
있는 그대로를 판단해서 알렸고 내 신념대로 움직였을 뿐”이라고 덧붙였다.
요약
박정희의 외교 덕분에 일본이 독도를 포기했다는 발표문을 발표함.
근데 그걸 한국 좌파들이 반대로 왜곡해서 보도.
"박정희가 독도를 팔았다" 라고 생각하는 놈들은 전부 속은것.
실제로 독도 영유권이 훼손된 때는
김대중 정부 때 체결한
독도를 중간수역에 넣은 신한일어업협정. (당시 해양수산부장관은 노무현)
http://rightnews.kr/sub_read.html?uid=3258§ion=sc3
http://www.wbkn.tv/?m=bbs&bid=news&uid=3115
[인터뷰] 호사카 유지 세종대 독도종합연구소 소장
연합국의 합의 없이 통보된 미국무성 '러스크 서한'은 무효
2011년 04월 18일 (월) 10:09:38 이석호 기자 dolko@hanmail.net
< 편집자주> 지난달 일본에는 강도 9.0의 지진이 발생했다. 한일 양국의 응어리진 역사를 잊고 국내는 물론 해외 동포사회도 일본에 온정의 손길을 보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일본 문부과학성은 내년부터 사용될 중학교 지리 및 사회교과서를 검정하면서 독도를 일본 영토로 기술한 교과서 검정본을 모두 승인했다. 다시 일본에 대한 비판여론이 뜨겁게 일고 있다. 최근 독도문제에 있어 가장 주목받는 인물인 호사카 유지 교수를 만나기 위해 세종대 독도종합연구소를 찾았다.
- 한국정부의 독도에 대한 미온적인 태도를 비판하고 있다. 독도문제에 있어 일관되게 강조해온 ‘조용한 외교’라는 틀을 바뀌어야 한다는 의미인가.
“일 본은 독도가 분쟁지역화 되는 것을 노리고 있기 때문에 ‘조용한 외교’에는 저도 찬성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실제로는 평소 조용한 외교를 펼치는 한국정부가 일본 측에서 사건을 일으키면 매우 강경한 외교로 돌변한다는 데 있습니다. 현재까지 하지 않았던 실효지배 법안을 갑자기 부활시키려는 것을 보면 오히려 일본의 공세에 말려들어간 것이 아닐까 걱정됩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독도지배의 정당성 논리를 확실하게 밝히는 일입니다. 지금 한국 정부의 독도공식 사이트는 외교통상부에 있는 ‘대한민국정부의 독도에 대한 기본입장’이고 이 문서만을 보면 잘 작성되었지만 일본 외무성 사이트에 올라와있는 일본 측 독도주장과 비교하면 문제가 많습니다. 공식견해가 일본 측 주장을 압도적으로 능가하면 독도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법입니다. 외교통상부의 사이트뿐만이 아니라 외교부에 링크된 준 공식사이트도 문제가 많습니다.”
- 일본은 독도가 자신들의 영토라는 논리적 근거로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거론하고 있다.
“일 본 외무성 사이트에 올려 져 있는 독도 팸플릿 등의 내용을 보면 1951년 8월10일 샌프란시스코 조약 초안 작성과정 마지막 단계에서 미국 국무성이 미국주재 한국대사관으로 ‘사실상 독도는 일본영토’라는 내용이 포함된 소위 ‘러스크 서한’을 보냈습니다. 일본 측은 이 공식서한이야말로 독도가 일본영토로 남았다는 증거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 발견된 미국 국무성 비밀자료에 의하면 이 ‘러스크 서한’은 한국정부에게만 비밀리에 송부되었고 다른 연합국들에게 공표되지도 않았고, 결과적으로 연합국간의 합의가 없었던 문서로 밝혀졌습니다. ‘독도가 일본영토’라는 주장은 당시 미국 일국만의 견해이지 연합국들의 합의를 얻어야 하는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규칙을 어긴 서한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연합국들이 합의한 내용이 아닌 서한이 아무리 공식문서의 형식으로 한국정부로 송부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원천적으로 무효입니다. 미국을 제외한 연합국대표 10개 국가들은 모두가 독도를 한국영토로 보고 있었습니다. 미국은 서한을 공표하면 다른 연합국들이 미국에게 항의할까 우려해 비밀문서로 한국에 보낸 것으로 보입니다. 일본정부는 ‘러스크 서한’이 독도가 일본영토라는 증거라고 10개 국어로 세계에 발신하고 있는데 한국 측이 이 문제에 대해 침묵을 지키고 있어 문제가 큽니다.”
- ‘러스크 서한’이 무효라고 처음 밝힌 것은 언제인가? 외통부도 사실을 알고 있나.
“지 난해 9월 제가 펴낸 <대한민국 독도>(2010, 책문)를 통해 처음 공개했습니다. 올해는 곧 논문으로 발표할 것입니다. 외통부가 ‘러스크 서한’에 대해 모르고 있을 리가 없습니다. 아마도 앞으로는 공식 사이트를 통해 상세한 내용을 밝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1965년 한일기본조약이 우리나라가 독도에 대한 불리한 빌미를 준 것이 아닌가.
“결 코 그렇지 않습니다. 한일기본조약에는 독도문제뿐만 아니라, 재일한국인의 법적지위협정, 문화재 반환협정, 어업협정 등이 포함됐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독도문제가 한국에 불리하게 돌아간다면 다른 모든 협정문서에 서명하지 말고 귀국하라고 이동원 외무부장관에게 강하게 명령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이에 당시 일본 사토내각은 양보를 시작했습니다. 결국 한일양국이 ‘분쟁해결을 위한 교환공문’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일본 측은 국제사법제판소로 독도를 회부하자고 되풀이해온 제안을 철회했고 분쟁해결방식을 ‘중재’로 바꿨습니다. 그 단계에서는 독도명칭이 문안 속에 있었습니다. 일본은 독도를 분쟁지역으로 규정해 놓고 싶어 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중재라는 일본 측 제안도 한국 측이 승낙하지 않자 일본정부는 독도명칭을 완전히 공문에서 삭제했습니다. 타결된 교환공문은 양국 간의 분쟁은 우선 외교상의 경로를 통한 해결을 모색하고 그것이 안 될 경우에는 제3국을 통한 조정으로 해결하자는 문구로 정해졌습니다. 결국 독도는 한일협정의 대상이 아니라는 한국 측 주장은 독도명칭을 교환공문 초안에서 삭제함으로 인해 관철됐습니다. 이후 일본 외무성은 ‘이것은 한일양국이 장래 매우 평화스러운 관계를 구축했을 때 독도문제도 평화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뜻’이라고 하면서 사실상 일본이 독도를 포기했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는 발언을 되풀이했습니다.”
- 논리 대 논리로 대응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독도문제에 있어 가장 확실한 논리적 증거는 무엇인가.
일 본이 역사적으로 적어도 세 번에 걸쳐서 ‘독도가 일본영토가 아니다, 조선의 부속이다’라는 공문서를 남겼습니다. 1696년, 1870년, 1877년의 세 번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일본 측 독도논리의 핵심적 주장인 ‘고유 영토론’이 무너집니다. 그리고 1905년 이전의 일본의 공식지도가 독도를 일본영토에서 제외하거나 조선의 소유라고 명기까지 했습니다. 1905년의 일본에 의한 독도강제편입도 국제법으로 보면 일본이 한국을 침략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것이므로 무효가 되고 샌프란시스코 조약이나 한일협정에서도 지금까지 언급한 대로 독도는 한국영토로 인정받았다고 판단됩니다.
호사카 소장은 또한 1883년 일본 해군성 수로부가 발행한 공식문서인 ‘수로지(水路誌)’에서 독도를 ‘리안코르토 열암’으로 기록한 것을 강조했다. 이 명칭은 독도의 프랑스 명 ‘리앙쿠르 락스’에서 딴 것. 그리고 각종 수로지에는 독도가 ‘리앙쿠르 호’에 의해 1849년에 ‘처음으로 발견되었다’고 명기되어 있다. 이것은 당시 일본정부가 역사적으로 독도를 송도(松島=마쓰시마)로 불러왔다는 사실조차 완전히 잊어 버렸다는 것을 의미하고 결국 독도가 일본고유영토라는 논리를 부정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호사카 소장은 주장한다.
- 한국정부가 걱정하는 것은 독도가 분쟁지역화 되어 국제사법재판소로 회부된다는 점이다.
“조 사한 바에 따르면, 1965년 한일협정 체결 이후 일본은 한국정부에 대해 한 번도 공식적으로 독도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회부하자는 얘기를 한 적이 없습니다. 그들이 65년에 양국 간에서 교환공문을 맺는 과정에서 국제사법재판소에 의한 한일 간의 분쟁 해결방식을 포기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국제사법재판소 문제로 필요 이상으로 시끄럽습니다. 일본은 교환공문의 진실을 알면서도 마치 현재까지 계속 한국정부에게 국제사법재판소 행을 제안하고 있다는 식으로 분위기를 고조시키려고 시도하고 있지요. 물론 독도에서 한일 양국 간에 국지전이 일어나면 독도문제는 UN안보리를 거쳐서 국제사법재판소로 갈 가능성은 남아 있습니다. 그 부분은 잘 다스려야 합니다.”
- 제 3국과 함께 독도 문제에 대한 토론을 할 필요는 없는지.
“독 도는 한국의 고유영토이므로 다른 나라들과 독도문제를 논의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지요. 일본은 앞으로 한국 측이 독도를 둘러싸고 일본과 협상테이블에 앉는 것을 내심 바라고 있지요. 그런 일본의 전략에 말려 들어가면 안 됩니다. 우리는 확실한 논리와 자료를 내면 조용하게 독도문제를 끝낼 수 있습니다. 우리와 대립하려는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는 작업이야말로 독도 조용한 외교의 핵심이어야 합니다.”
한편 전 세계 지도 정보 서비스 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구글어스’에서 독도를 확인해 보면 독도의 이름은 리앙쿠르 록스(Liancourt Rocks)라고 표기돼 있다. 세계 최대의 인터넷 백과사전인 위키피디아에도 ‘독도’라는 주제어가 ‘리앙쿠르 암석’으로 뒤바뀌어 있다. 일본이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내세워 다른 국가들을 설득시키는 동안 한국은 조용한 외교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8년 전 한국인으로 귀화해 독도문제에 전념하고 있는 호사카 소장의 조언을 되새겨 봐야할 시점이다.
<호사카 소장은?>
일본에서 ‘렌즈’ 개발 사업을 해오던 아버지의 가업을 잇기 위해 동경대 공학부를 수학했다. 어려서부터 서양사 등 세계사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전공과 상관없이 독학으로 한일역사에 대한 공부를 했고, 재일동포사회를 알게 됐다.
88 년 고려대어학당에서 9개월간 한국어공부를 했던 그는 고려대 정치외교학과를 다녔다. 이후 ‘45년 이전 한일역사’에 파고든 그가 가장 궁금해 했던 역사적 명제는 “왜 일본은 아시아를 침략했는가”였다. 그가 독도문제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 후반부터. 세종대학교 교수인 그는 2008년 12월에 세종대에 독도종합연구소를 만들었고 소장으로 부임해 현재에 이르렀다.
http://www.newscj.com/news/articleView.html?idxno=146900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으시다면
호사카 교수의 '대한민국 독도'를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외교문서 보니까 사실이 아니라는데? 어떻게 할까요?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박정희는 1965.6.22. 소위 구-한일어업협정을 체결했습니다.
여기에서도 독도는 우리 땅이었습니다.
1965년 한일협정 당시 돈을 주는 대가로 일본이 또 독도를 거론했다는데요,
1965년 5월 17일, 미국 존슨 대통령은 방미중인 박정희를 만나
한일협정 진척을 축하하면서 독도를 일본과 공유하라, 공동등대를 설치하라 종용했습니다.
박정희는 이를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미국이 힘으로 밀어붙이려 했지만(1965.6.15, 국무부문건 364호) 박정희는 장관급 회담을 거절하겠다며 맞섰습니다.
미국대사는 박정희는 그 무엇으로도 독도를 바꾸려 하지 않는다며 밀어붙이기의 불가능성을 본국에 보고했다고 합니다.
독도는 1998년의 신한일어업협정에 의거 한일공동 어로수역의 중간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즉 우리의 국토인 바다가 국제법상 일본에게 영유권이 '인정'되었습니다.
이 협정은 1998년 11월 28일. 김대중 정권(당시 해양수산부장관은 노무현)당시에 이뤄 졌습니다.
그리고 일본대중문화를 개방한 사람은 노무현 대통령입니다.
문재인은 이런 박정희를 친일독재정권이라고 매도하며
일본이 자꾸 독도를 탐내자 박정희가 화나서 한 말인
"네놈들한테 줄 바에(다른나라에 독도를) 차라리 폭파시켜 버리는 게 낫다."라고 한 말을
독도를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고 왜곡하여 공격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몇몇 좌파들은 박정희가 일본과 독도 밀약을 했다고 어거지를 부리는데,
참고할 것은, 독도 밀약을 해도 한국이 이득이고, 안 해도 이득이라는 겁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독도밀약의 내용입니다.
1. 한.일 모두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 가능. 이의제기 하지마.
2. 장래에 어업구역 설정할 때 중복이면 공동 수역으로 지정.
3. 현재 한국이 점거 현상 유지. 경비원 증강 시설 증축 불가능.
4. 합의를 계속 지켜나간다.
이 4가지입니다.
3번을 자세히보면 한국이 점거한 현상을 유지합니다.
누가 지랄하고 뭐고 실효지배권은 한국이 가지고 있다는 점이지요.
밀약을 했는데 일본이 독도 자기땅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실효지배권이 우리에게 있는데 궤변을 일삼게 되는 것입니다.
게다가 저 밀약을 통해서 멍청한 쪽국이 돈을 쥐어줬지요. 경제발전하라고.
또한 일본정부에서는 독도밀약을 부정하고 있으며,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본은 독도밀약 주장을 부인하네요.
독도밀약이 일본에 유리한 조약이었으면 일본이 독도밀약을 표면에 끄집어 냈어야지 왜 부정하고 있을까요?
11. 한일국교정상화
이제 좌파들은
'아 닥쳐 광복 후에 친일했잖아 굴욕외교 한일국교정상화 모르냐?' 할 겁니다.
글쎄요, 일단 이건 박정희 대통령이 잘못한 측면이 분명 있습니다.
굴욕외교라고 할 수 있는 측면이 충분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매국'이라고 몰아붙이기에는 확실히 문제가 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일본과 대일청구권문제의 타결을 위해 7차례나 회담,
우리가 요구하는 8억 달러와 일본이 제시하는 최고액 7000만달러중
무상으로 3억 달러,차관 2억달러, 민간 상업차관으로 1억 달러 이상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한일국교정상화를 타결합니다.
물론 많이 받으면 좋겠지만 돈 주는 쪽이 일본인데
국교정상화를 위해 돈을 많이 달라고 하면 일본이 해 줄까요?
(사실 저것도 그 당시로는 거금이었습니다만)
또한 위 금액은 보는 사람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집니다.
대일청구권? 저 돈이 적다고요?
그렇다면 도대체 얼마를 받아내야 '잘 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요?
배상액이 아무리 많은들 일본이 우리를 유린한 댓가에 턱없이 적은 것이겠죠.
일본이 갖고 있는 돈을 다 줘도 모자랄 지도 모릅니다.
또한, 배상액 금액 과소 여부를 떠나
일본과의 악연을 일단 떨어버리고
국교정상화를 통해 일본과 보다 더 자유로운 경제교류를 가능하게 해서
대한민국은 결국 실질적 과실을 얻었다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명심할 것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괴롭혔든 안 괴롭혔든
우리나라에 돈을 빌려줄 의무는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돈빌려달라 해봤자 안빌려주면 그만인 겁니다.
아무것도 없는 한국에 돈을 빌려줘봤자 일본이 돈을 돌려받을 수나 있었을까요?
법정 스님도 수필 '광복절에 생각한다'에서
일본이 우리에게 잘못한 것을 잊어서는 안 되지만,
일본은 일단 우리의 이웃이고,
또 우리보다 더 앞서 있어 배울 점이 많기 때문에
일본과 가깝게 지내서 나쁠 게 없다고 했습니다.
또 우리가 과거사에 너무 집착해서
일본이라는 나라와 화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지적하셨고요.
그러면 법정 스님도 친일파겠네요.
그리고 대일청구권을 받은 나라가 있는지요?
수십억달러를 요구만 하고 받지 못하면 괜찮고
그것보다 적은 돈이라도 받아 냈으면 친일파?
생존한 위안부 할머니들이 일본에게 보상 못 받는 이유가 위의 대일청구권 때문이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 당시 대일청구권을 받았기 때문에 현재 못 받는 것일까요?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이 정신대문제와 관련하여 대일보상을 요구하지 않을 것임을 발표하였으며,
11월 국제법률가협회에서 일본의 배상의무가 있으며,
1965년 한일협정의 청구권에 불법인권침해와 위안부 개인의 권리침해에 관한 청구는 포함되지 않는다고 밝혔습니다.
특히 위안부문제에 관하여 한국, 타이완, 일본, 필리핀, 타이, 홍콩등 아시아 6개국 여성단체에서
공동보조를 취할 것을 결의하였습니다.
즉 일본으로부터 위안부문제로 보상받은 나라는 현재까지 없습니다.
만약 '위안부 문제 보상 못 받게 한 사람이 친일파'라면
김영삼 대통령이 친일파겠네요.
그리고 일본이랑 수교할 때 받은 돈 갖고 뭐했습니까?
미얀마, 태국 같은 나라들은 호텔이나 보트 짓고 놀고 있을 때
박정희 대통령은 경부고속도로, 포항제철소 등을 만들어
대한민국 산업발전의 초석을 닦았습니다.
그 돈을 한 푼도 남기지 않고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쓴 거죠.
----------- 추가 -----------
김대중도 위안부 문제 없었던 걸로 하자고 했습니다
----------- 추가 -----------
김대중은 그 돈으로 도로 짓고 제철소 지으면 우리나라 망한다고
차라리 그 돈으로 옥수수를 사 먹자고 하였지요.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장면 정부도 계획했습니다.
그런데 나라 안에 그걸 할 만한 돈이 없어서 실패했죠.
스타크래프트 하시는 분들만 이해하시겠지만,
'SCV가 다 죽었는데 미네랄이 40밖에 없다'
뭐 이런 상황이었단 말입니다.
결국 외자의 도입이 필요했고,
박정희 대통령은 이 외자의 도입을 위해
'민족의 미래를 위한 슬픈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한일수교 반대시위로 잡혀간 이명박의 젊은 모습
박정희는 남로당에 가입했으니 빨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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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절반이나 더 남았는데 너무 길어 여기까지만 옮깁니다
[출처] [유입필독] [스압] 박정희 친일의혹, 그 더러운 진실[링크] http://www.ilbe.com/3457703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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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F-35의 밝혀진 문제점들.
자료를 찾아보며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점이 있다면 F-35에 대한 긍정적인 기사에 관한것은 대부분 록히드마틴에서 제시한 스펙과 데이터를 근거로 제시하며 부정적인 기사는 대부분 미국 유명 항공관련 싱크탱크인 Jane's 나 영국 왕립 군사 합동 연구소, 저명한 항공군사 전문가 들이 출처더군요. 글이 좀 깁니다. 이분은 뭔가 오해가 심한것 같다. 근거도 없이 그저 F-22만 하더라도 뛰어난 정비성을 보인단다. 이분의 말씀대로 F-22가 B-2의 그것보다 뛰어나다면 대체 왜 B-2에 F-22의 도료를 적용하지 않는것일까. 그리고 F-35가 F-22와 B-2의 그것보다 훨씬 나은 특수소재를 사용한다면 대체 왜 엄청난 비용을 사용하면서F-35의 스텔스 도료와 마감재를 사용하지 않는것일까.밑의 글은 기사 발췌 부분이다.-중략- B-2의 비행시간당 정비소요는 119시간으로 B-1B 랜서의 60시간에 두배에 달한다보통 본토에서 발진하는 경우 한번 작전에 24시간 이상 비행하는 B-2 폭격기는 한번 작전후 최소한 3,000 시간 이상의 정비를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중략- 그것은 기상 상황에 따라 황사나 우박 구름 등 통과하면서 기체 표면에 매우 많은 상처를 남길 수 있는데 이때 스텔스 코팅이 심각하게 상할 수 있으며 RCS 값이 엄청나게 올라간다. 그래서 스텔스도료나 시트의 관리와는 별도로 기체 포면에 대한 정기적인 점검과 보강(스텔스 흡수 마감재로 틈을 메꿔주는 작업) 이 필요하다. 그래서 비행 후에는 정밀하게 살펴서 손상된 부위에 전파흡수 도료를 재도장하거나 흠집을 보강한 마감재는 하루정도 굳기를 기다려야 다시 비행이 가능하다. 이런 방식으로 관리를 해줘야하는 B-2나 F-22에 비해 전파흡수 시트를사용하는 F-35가 관리에 더 용이해진것은 사실이다. 시트는 도료에 비해 상대적으로 습기에 강하고 비행 후 관리점검을 하는데도 시간이 적게든다. 그러나 전파흡수 시트 또한 작전비행 시 대기중의 황사와 같은 미세물질과 충돌을 통해 기체 표면에 손상이 가는 경우가 많기때문에 F-35 또한 정밀 관리를 해야만 하는점은 동일하다. 그러나 전파흡수 시트로처리가 불가능한 리벳머리나 각종 점검 창 틈새등은 기존의 마감재로 채워넣어야 한다.-중략- 비행소티당 정비시간은 F-117 22시간/소티 F-16 12시간/소티 이다. F-22와 F-35는이런 정비소요를 줄이기위해 매우 큰 노력을 기울였고, 개발계획에서 기존 항공기에 비교하여더 적은 정비시간이 소요될것으로 발표되었지만 실제 F-22의 경우 계획보다 훨씬 많은정비가 소요된다는것이 밝혀졌다. 미공군은 F-22는 비행시간당 20시간 정도의 정비를 필요로 하였으며 비행시간당 운용유지비는 44,000 달러라고 밝혔지만, 2009년 언론에 공개된 미 국방부 내부자료에 의하면 F-22는 비행시간당 34시간의 정비와 비행시간당 49,808 달러의 비용이 소모된다고 한다. -2013. 김병기 기자 대체 무슨 근거로 말씀하시는건지 당최 알 수가 없는 대목이 위에 있다. F117과 F-22의 비행시간 당 정비소요시간이. 무슨 근거인지 나도 궁금해진다.예로 제시할 어느 기체인지 모를 스텔스 처리 부분이다. 얼마나 세심한 작업이 필요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스텔스 도료의 문제와 비용, 정비 소요 시간을 둘째 치더라도 우리가 경악할만한 일이 있다.록히드 마틴의 데이브 스캇 F-35 국제영업담당 총괄본부장에 의하면 일본에 장래 이탈리아와 동등한 FACO(최종 조립 체크아웃) 시설이 건설될 것이라고 한다. 보도에 의하면 기체의컴포넌트 약 300점 가운데 약 40%에 해당하는 주익, 미익, 후부동체, 엔진의 조립을 일본에서 하도록 록히드 마틴측에서 약속하였다. FACO는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 있어서의 정비거점이 될 뿐만 아니라 부품이나 컴포넌트의 판매 거점이 될 수 있다. FACO 가 나고야에 건설될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호주 공군이나 싱가폴 공군의 F-35A 가 정기 데포 수리정비를 위해 날아올 것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항공기의 정비는 라인정비, 중간정비,데포정비 가 있는데 라인정비나 중간정비는 F-35의 사용국에서 스스로 할 수 있지만 데포정비는 그렇지 않다.- 항공팬 2012년 3월호 Junichi ISHIKAWA 일본에 동아시아 정비 허브를 만든다는것은 꾸준히 제기되어온 사실이었지만 FX 사업에 그 문제를 끄집어 내는 사람은아무도 없었다. 문제는 스텔스 도료와 마감재의 정비를 주기적으로 해주어야하는데 그것을 록히드마틴에서 사용처에 허용치 않고 일본에 정비거점을 만들어 그들이 직접 한다는것이다. 스텔스라는것은 미국의 군사기밀이라는점 때문이다. 미국이수긍하는 우방인 일본에 그것을 만들어 보안을 유지한다는 계획인 것이다. 라인정비나 중간정비라는 용어는 일본에서 사용되는 언어인것 같다. 데포 정비라는것은 Depot 정비 를 의미한다. 공군 정비업무 3단계중 1단계는 부대정비. 비행 전후에 실시하는 정비 업무이다. 일종의 출격전 자가점검. 2단계는 야전정비. 자동차로 비교한다면 정비센터에서 부품이나 볼트를 조이는 일이나 오일이나 타이어를 교환하는 일 따위. 비행단 까지 에서 담당합니다. 3단계 Depot 정비 라는게 창정비 입니다. 완전 분해 점검을 하는 일입니다. 스텔스 도료 점검 부분은 이부분에 해당됩니다.말 그대로 한국의 F-35는 일본에 가서 창정비를 해야합니다. 일본이 호시탐탐 노리는 독도 영유권 분쟁 발생시나 그 외를 제하더라도 군사적으로 별로 우방이지 않은 일본과의 사이에창정비를 일본에서 해야한다는 정신나간 일이 벌어집니다.그리고 일본은 저렇게 많은 것을 록히드마틴에 얻어왔지만 우리나라는 서류더미 몇개 받는것으로 끝난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군사, 외교적으로 이 무슨 행동인지, 그러면서 까지 F-35를 옹호하며 끝까지 구매를 진행해야하는지 당최 궁금합니다.참고로 노르웨이의 경우 F-35에 자국산 미사일을 탑재로 구입을 허용하였습니다. 자 이제 중요한 스텔스 문제 입니다.-중략- F-35의 스텔스 성능은 잘 알려져 있듯이, 오직 X-band 에 대해서만 성능을 발휘할 뿐이다. 이 점은 이미 오래전에 지적된 사항이다. 기술적으로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전자기파에는 VHF,UHF,L,S,C,X,Ku 등의 다양한 파장의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이 모든 전자기파들 중에서 F-35는 X-band 에 대해서만 스텔스 성능을 발휘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도 측후방을 제외한 전방의 적기에서 나오는 레이더파에만 자신을 숨길 수 있다.하지만 F-35의 스텔스 성능에서 더욱 심각한것은 부족한 스텔스 성능 자체가 아니라 F-35의 부족한 스텔스 성능을 보충해줄 수 있는 재밍을 비롯한 전자전 시스템과 가동성 측면에서 거의 형편없는 평가를 감수해야할 정도로 형편없는 미완의 전투기라는 점이다. F-35A 는 공중전에서 이른바 회피 기동을 신속하게 할 수 가 없는 수준인 중력가속도 한계가 G 4.6 에 지나지 않는다. 원래 ROC 에는 5.3 이었다. G 4.6 이라는 수치는 지금은 사라져버린 맥도널더글라스의 F-4 팬텀과 노스룹의 F-5 급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마하 0.8에서 1.2로 넘어가는 가속 성능 역시 원래 ROC에서 무려 8초나 늘어나고 말았다. 모르긴 몰라도 조종사들은 이 정도로 성능이 저하된 F-35라면 '그런 전투기 뭐하러 사나?' 의문을 가지지 않을수가 없을 것이다. (참고: F-35 3개 기종중에서 가장 심각하게 성능이 하향 조정된 기종은함재기인 F-35C 이다. 마하 0.8에서 1.2로 넘어가는 가속성능이 무려 처음의 요구 성능에서 43초나 늦추어졌다. 항모의 이착함 방식을 사출식에서 스키 점프형으로 다시 설계해야하는 엄청난 부담을 잘 알면서도 영국이 F-35C 를 포기하고 가장 비싼 기종이기도 한 F-35B 형을 선택하기로 사업 방향을 바꾼 것도 모두 이러한 F-35C의 설계 결함에서 나온 성능하향 때문이다. -2014.4 디펜스 타임즈 코리아 - 고수찬 www.ausairpower.net 에서 가져온 F-35의 RCS 값이다. X-band 뿐인지, 혹은 S-band 도 함께 적용되는지는 중첩된 내용도 있지만 공통된점은 두가지 전파라 하더라도오직 전방 부분만 스텔스가 유효하다. 나머지 엄청나게 많은 문제점들과 그에 대한 사실해명들이 있지만 적게되면 논문급이 되므로 각 기사만 발췌해서 올립니다.-JSF 테스트팀이 Guy Norris 에게 F-35의 테스트파일럿이 인터뷰한 내용중마하 1.6의 속도로 비행중 수평미익에서 스텔스 코팅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착륙해야만했으며, 엔진의 열차단 패널의 손상등을 입었기에 이후 테스트는 마하 1 정도의 속도에서이루어졌다고 하였다- 군사, 항공 전문가 Bill Sweetman 2011.12.13??????2011년 미 해군은 F-35C 의 설계결함과 인도지연으로 인한 전력공백을 우려2015년 폐쇄할 예정인 수퍼호넷의 생산연장과 함께 41대 구입을 2012년 예산에 반영2012년 7월 16일 온,오프라인 매거진 인사이드 더 네이비미공군의 경우 F-35의 인도지연 및 전력공백을 우려하여 F-16 300대의 수명연장 및업그레이드 사업 진행 승인. 예상비용의 경우 최근 대만의 F-16 A/B 145대의 업그레이드 사업에 53억달러가 들었으니 대략 예상하더라도 110억 달러라는 막대한 비용.-2012. Jane's이 기사로 알 수 있는점은 미군조차 F-35 프로그램이 실패할것이라는 전제 하에 움직인다는 것이다.대만의 F-16 업그레이드를 기준으로 잡았으니 미군의 업그레이드의 경우 110억달러를 상회할것이라는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IHS Jane's 컨설팅에서 조사한 F-35A의 비행시간당 비용은 21,000~51,143 F-15 C/D/E 28,636~36,633 , 유로파이터 타이푼 8,200~18,0002010년도 F-22 비행시간당 운용유지비는 63,929달러. 1시간 비행 후 45시간의 정비 소요-2013. 이승준 기자 F-35의 비행시간당 비용은 록히드마틴에서 제시한 21,000 달러를 제외한 나머지 51,143 달러까지의 금액은 영국왕립군사합동연구소나 Jane's, 기타 항공군사학자들의 의견이다. 아직 미완의 항공기라지만 너무나도 대립되는 모습이 참으로 애처롭다. 저 갭이 큰 데이터를 못믿겠다면 당연한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F-22의 비행시간당 운용유지비를 참고하면 된다. F-22보다 첨단의 기술이 들어갔다고 록히드마틴이 광고를 하니 비행시간당 운용유지비는 더 올라갈 수도 있을것이다. -중략- 마하4의 속도를 내는 램젯 공대공 미사일이나 미사일 내부에 재밍과 ECM 장치를 갖춘 IRIS-T 같은 공대공 미사일에 과연 F-35 같이 기체 전면의 X/S-Band 전파에 대하여만 스텔스 성능을 발휘하는 로우급의 스텔스기가 견디어낼 수 있을까? 최고속도가 마하 1.5에 지나지 않고 동체 후미에는 전혀 스텔스 처리가 될 수 없는 F-35는 마하 4급 미티어와마하 3급이지만 적외선 시커를 장착한 IRIS-T 를 피할 수 없을것이다. -중략- F-35의 엔진은 추력편향 성능도 없으며 수퍼크루징도 없다. 게다가 F-22의 세배가넘는 2400만 라인에 달하는 소프트웨어는 1993년 개발계획을 발표하면서 여지껏 고작 4% 완성된 상태다. -중략- F-35의 도입을 원하는 한국의 경우 구매의사를 밝혔음에도 실제비행을 허락하지 않은채 오직 시뮬레이터만 타보라고 하는 것이다. -중략- 3000대가 넘는 물량을 생산해 미공군, 해군, 해병대에 공급하고 8개국에 500대를 팔려고 하면서 록히드마틴은 단 한대의 복좌기도 만들지 않았으며 만들 계획도 없다. 이 오만한 설계 개념을 우린 어찌 생각해야할까 -중략- 오직 단좌기만 생산하여도 시뮬레이터로 충분히 훈련을 소화해낼 수 있다고 하면서도 정작 실제 임무 시스템은 4%만이 완성되었다. 대체 실제 기체 대신 타보고 구입하라는 시뮬레이터는 무슨 소프트웨어로 구동되는가? -중략- 향후 생산 물량이늘어난다면 값은 저절로 떨어진다고? 보잉의 F-15는 1,500대 이상을 팔았는데도 여지껏 1억달러를 내라는데 믿어도 될까?-2013. 이승준 기자 위에서는 X-band 에 대하여만 스텔스가 가능 하다는데 이승준 기자는 S-band 도 언급된다. 하지만 이지스 레이더에서주로 사용되는 S-band 레이더에 대해 스텔스를 발휘한다 하여도 어차피 정면에서만 가능한 쓰레기 기술이기에 X 나 X/S 나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된다. 아니 , 거기서 거기다.2012년 1월 미 싱크탱크인 국방정보센터의 윈슬로우 휠러는 캐나다 의회에서 낮은 작전효율에 대해 증언했다. 공개된 자료에 의하면 F-22의 경우 작전 투입율은 61%에 못미치며B-2의 작전효율은 55%로 나왔다. F-35는 과연 몇%나 될것인지 말안해도 알것이다. 라며 캐나다 의회에 경고했다.- 2012 로이터 통신저 윈슬로우 휠러 라는 항공 군사 전문가의 경고에 캐나다 의회는 F-35를 전면 보류하고 수퍼호넷을 검토하고 있다.경고문은 장문이지만 일부만 발췌했다. 그 장문의 경고라는것은 013년 펜타곤 연례보고서에 나타난 문제점에 관하여 군사전문가인 윈슬러 휠로의 기사에 잘 요약되어 있다. 윈슬로 휠러는 처음부터 발견된 F-35의 결함들이 거의 수정이 가해지지않은채 그대로 지속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으며, 여기에는 스텔스 코팅과 소프트웨어, 엔진연료 연소 및 누유문제, 근접항공지원, 헬멧 문제등이 모두 망라되어 있다. -중략- 스텔스 코팅 문제는 이전에도 지적된 문제로서 3개 기종 모두 꼬리날개 부분에서 연장된 애프터버너를 사용한 후 고속에서 분해되었고, 새로운 코팅으로도 수정이 안되었다. 테스트 프로그램은 새로운 자료들을 수집할 것이며, 그 동안에는 '계측기' 가 장착되지 않은 F-35 항공기는 기동한계와 애프터 버너 사용에 제한을 받게 될것이다. -2013 Aviation Week 지.-중략- 로이터가 입수한 25페이지 분량의 보고서에서 마이클 길모어 국방부 무기 성능 시험 소장은 F-35의 기술적인 문제를 상세히 기술하고 있으며 '받아들일 수 없는' 전투기의 소프트 웨어 성능에 비판의 초첨을 맟추고 있다 -중략- 이번주 미 의회에 제출될 예정인 보고서는 F-35가 신뢰성은 더욱 떨어지고 유지보수는 예상보다 더 힘들어지고 있는 한편 미사일발사로 인한 추진체의 화재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2012 이연수 공군 예비역 장교 2011년 펜타곤이 작성한 긴급보고서인 Quick Look Review of F-35 Concurrency 에서 문제점을 제시.어차피 극비라지만 위키에도 떠버린 내용이라 상관없다는 분위기. -HMDS(헬멧탑재 디스플레이 시스템) 의 비정상 문제와 IPP(통합 파워 패키지) 의 전력공급문제 -F-35C 의 어레스트 후크 설계변경 -F-35B 의 연료투기 시스템 문제. 화재의 위험성 있음-피로수명주기를 못채울 수 있는 약한 동체 설계 구조-적재하중초과에 대한 위험. F-35B 의 경우 기체 전면부 과도한 중량 초과로 수직 착륙시 균형상실 문제.-스텔스 도료와 마하 1.2를 넘길 경우 열마찰로 인한 도료 손실 문제-애프터버너 사용시 기체 손상 문제-공조 시스템 설계 문제로 콘트롤 시스템과 조종사를 냉각시키지 못함-ALIS(자율병참정보) 시스템 개발 미완료-번개에 대한 운행불가 문제.-제작비의 기하급수적인 상승 문제. F-16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록히드마틴은 F-35의 복좌기를 계획조차 하지 않고 구매국에게 시승조차 제공하지 않는다.시뮬레이션으로 타보고 구매하라는것인데 위에서 언급했듯이 고작 4% 완성된 시스템과 시뮬레이션은 다른 소프트웨어인것인가? 역설적이지 않을수가 없다. 일본은 F-35를 가져오면서 엄청난 기술을 획득할것이다. 창정비를 국내에서 하게되니까. 우리나라는 과연 무엇을 얻어오는것인가. 군사적으로 말이 많은 FX 문제는 유로파이터가 대안이라고 쓴글이 아니다. F-35는 분명 문제가 있는 물건이라는것을 상기시키고 싶다. 본인은 F-15K 를 더 들여오는게 국내 군사 상황에 맞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F-4 의 폭장량이나 F-16과 A-50이 커버할 수 없는 행동반경을 가지고 있는게 F-15K 지 유로파이터나 F-35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셀레멘더작성일
2014-07-12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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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NSC 무력화, 각료회의 표류 대통령 ''안보참모'' 없다
NSC 무력화, 각료회의 표류 … 대통령 ''안보참모'' 없다
현재 청와대는 국가안보 위기상황에 대응할 능력이 있는가.
천안함 침몰사건을 지켜본 많은 국민들이 의심스러워하고 있다.
사건 직후 긴급 소집된 네차례의 안보관계장관회의에서 ‘북한 연루’ 발언이 오락가락하는 등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
였기 때문이다.
이명박정부는 취임 직후 국가안전보장회의(NSC)법을 고쳐 NSC의 양대축인 상임위원회와 사무처를 모두 없앴다.
각 부처에서 파견됐던 120명은 해당 부처로 되돌아가거나 퇴직했다.
소관 업무를 대통령실로 이관하면서 역할과 기능도 대폭 축소했다. NSC 위기관리센터는 대통령실장 직속 위기정보
상황팀으로 축소됐고, 센터장도 비서관급에서 2급 행정관으로 강등됐다.
2008년 7월 금강산 관광객 피격사건이 발생하자 여당에서조차 비판 목소리가 나왔다. 공성진 당시 한나라당 최고위원은 “대통령에게 보고가 상당시간 지체되고 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데는 NSC 폐지도 한가지 이유가 됐다”고 지적했다.
이후 외교안보수석이 위원장을 겸임하고 위기상황팀장도 1급 비서관급으로 격상했다. 하지만 과거 NSC 사무처가 담당했던 부처조율과 정보총괄기능은 살아나지 않았다.
실무를 아는 참모들이 없으니 안보관계장관회의가 대통령을 보좌하는 데 한계가 있다.
김성환 외교안보수석은 외교부 출신이고, 위기관리센터의 김남수 팀장은 국가정보원 출신이어서 안보 현안을 제대로 꿰기 어려웠다.
G20정상희의 등 병행업무도 많다. 김병기 국방비서관은 외교안보수석실 내에서조차 역할이 제한적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참여정부 시절 초대 청와대 안보실장(NSC 사무처 관할)을 역임했던 송민순 의원(민주당)은 “장관들이 주요결정을 내리려면 실무를 꿰고 있는 참모들이 제대로 갖춰진 구조가 아니면 안된다”고 말했다.
NSC가 없어지면서 33개 분야 285개의 위기발생시 행동지침을 담은 매뉴얼도 무용지물이 됐다. 이 매뉴얼에는 부처·기관별 대응요령과 민간자원 동원방식이 수록돼 있지만 주목받지 못했다.
해군 2함대는 재난상태에 긴급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인천·경기 지역에 민간 인양·구난업체를 ‘동원업체’로 지정해두고 있다(내일신문 3월 30일자 참조). 하지만 이 매뉴얼은 사건 직후 무시됐다.
합동참모본부는 교전, 대량인명사고 등 17개 사항에 대해 지휘통제반장이 장관, 합참의장, 작전본부장에게 즉시 보고토록 하는 매뉴얼조차 지키지 않았다.
김태영 국방장관과 이상의 합참의장은 사건 발생 53분, 49분이 지나서 보고를 받았다.
참여정부에서 합참의장을 역임했던 이상희 전 국방장관은 이런 문제점을 인식, 지난해 국방부에 ‘전략수준의 전쟁지도 및 위기관리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OOOO과’를 설치했다. NSC 위기관리센터 역할을 국방부가 맡도록 ‘국방지휘본부’를 만드는 계획도 포함됐다. 하지만 이 장관이 중도하차하면서 발전계획도, 본부신설방안도 모두 물거품이 됐다.
그 와중에 천안함 사건이 터졌다. 군 관계자는 “천안함 사건 직후 안보관계장관회의를 네차례나 열었지만 혼란만 야기했던 건 청와대에 제대로 된 안보관계시스템이 없기 때문”이라며 “대통령 주변에 안보를 아는 참모가 없다”고 비판했다.
조숭호 기자 shcho@naeil.com
파란지붕 아래 모든 노무현스러운 것들을 없애고 쥐맛대로 한 결과.
그러면서 나모델을 비롯한 것들은 좌파정부탓이니 기강해이 탓이나 하고 앉아 있지.
집권3년차에 언제까지 시스템정비만 하고 있을래.
한심스러운 쥐박아. 뭐가 뭔지도 모르고 일단 뻥커에만 기어들어 가면 일이 해결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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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김선생은 우리의 영웅이 될 수 없는 이유
김선생이 돌아가신 마당에...장례식에 재뿌리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아무리 생각을 하여도 역사가 왜곡되는 듯 하여
가정하여 글을 한번 써 봅니다:
식당을 하여 돈을 좀 벌어보려 하면....그것을 추진하는 당사자인 가장은 어려운점이 많습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전세보증금도...자존심 상하지만...내 부인에게 과거에 진한 농담하고....좀 심하게 이야기 하면 히롱라고도
볼 수 있는행동을 한 치사한 돈많은 놈을 설득하여 돈을 꾸어 와야하고...
남들은....정의를 위해 데모하러 나갈 때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좋은 재료 구입하고...반찬 준비하고....위법인줄 알면서....
손님들 차량을 불법 주차도 해야하고... 부인이나 여직원을 고객이 히롱 해도 참아야 하고... 면허도 없고 오토바이 타본적도 없는데
급해서 안전장구 않하고 배달을 하다가(다칠거 뻔히 알면서도...) 다치고(월남파병)....경쟁이 하도 심하다 보니....손님이
현금으로 주면 10%의 부가세를 슬적 당국에 신고하지 않고....그래서...경쟁이 치열한 상황에서...우여곡절 끝에...매달 임대료를
납부하고....자식들 교육비 대고.....좌충우돌 꾸려나가고...가끔 욕은 먹어도 하여간 무사히 남보다 자식들도 배골지 않고 민패
심하게 않끼치고..열심히 살아 갑니다(제 이야기는 아님...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적은 것임)
하지만...식당에 들어와서 ...실제로 일 않한사람이 불평하기는 쉽죠...훈수 두기는 쉽다는 야기죠.
반찬이 짜다...양이적다..왜 전라도 만큼 맛있지 않느냐....왜 식당이 깨끗하지않냐?....방은 왜 이렇게 좁고..음식은 왜 늦게 나오냐?
불법 주차는 왜 하느냐...근로기준법에 의하면 6시땡치면 퇴근해야 하는데 직원을 7시까지 노동 시키냐...근로자들 오버 타임은 왜
않주냐.....직원들을 애 토요일에 근무시키냐...여성권익에 위배되게 왜 고객의 음댐패설을 방치하느냐....임대료는 계약서상 명시되
있는 날자 보다 3일이나 늦게 내냐....그리고...
애시당초 치한놈한테서 왜 자존심과 정의를 팔아 가면서 돈을 왜 꾸어왔냐....일본에서 배상권 팔아 먹고 포스코
세운 자식들보다 *다! 라고 훈수두기는 쉽죠.
김선생이 많은 팬을 가지고 있는 이유중에 하나가...
끊임 없는 남비판과....소외된 계층의 나누어 주기(대표적인사건이 민노총 설립/태백 도박장.../여자들 퍼주기/교육의 평균 하양 전
교조).... 북한 퍼주기(노벨상 ?...). 하지만...김선생이 이나라를 위해 애시당초 생산적인 일을 한게 뭐가 있습니까?
남이 정말 욕먹어가면서...이루어놓은 곡식을 퍼다 준것아닙니까? 남이 지은 밥 퍼는 주것이 뭐가 영웅이죠?
1950~60년대 부터 주구리 장창 민주화...경주고속도로 반대...등등 끝없는 정부 비판을 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개인적으로 생각 할 때 경제적으로 민주적으로 대한민국은 비약적으로 발전 했다고 생각 합니다.
근데 정부가 뭘 그렇게 잘못 했다는 거며....
군사정권이많이죽였다?...몇명 죽였죠?... 군사정권이라도 국가를 않지키고...국방이 않되거나...여러 파들이 우왕좌왕하다가
전쟁/민란이 일어나...수천명 죽는 것은..개화도 제대로 않된 나라에서는 거의 거치게되는 다반사의 일 입니다.
생명을 한명이라도 죽이는 것이 정당화는 않되지만...현실이 그렇다는 거죠.
이세상이 이상만 가지고 않되죠. 대중 선생과 유사한 삶을 산...넬슨 만델라라 남아공을 잡은 후 현재
요하네스버그는 남자가 대낮에 지나다녀도 살인과 * 당하는 도시가 되었죠. 인권이 있고 살인/* 당하면 그게 무슨 소용?
인권과 민주주의가 중요하지만..그시대에 맞도록 차곡차곡 올라가는 갑니다.
그리고....아무리 과거에 대통령이었다고 해도....현재 대통령이 있는데 무슨 말이 많습니까?
최근에...공개된 일기에도....(물론 일기 쓰는 것은 자기 자유지만..공개되는 것이 문제죠)
현정부를 비판 하는 글이 있는데...이명박 정부가 설사..약간의 문제가 있어도 ....일개의 국민은 비판할 수 있어도...
과거의 리더 였던 사람은 떠들고 다니면 않되죠. 그것이 결국 도움은 않되고 국가의 혼란이 될수있다는 왜 모르죠.
그러한 엉터리 리더쉽을 어디서 배웠으며....
대통령 그만두고도 과거의 투덜이 근성은 어디 버리지를 못하나 보죠.
직접 확인은 못해 봤지만....박정희 전 대통령이 그랬다죠...
"내무덤에 침을 뱉어라...잘살게 해줄 테니...."
리더란....욕을 먹을 준비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한회사의 사장은 욕을 먹더라도..치사하도라도....회사가 망하지 않도록 할 의무가 있으며
한 나라의 대통령은 자신이 욕을 먹도라도..국가를 발전하도록 리드할 의무가 있는 겁니다.
투자의 귀재 워렌버핏읠 말중에 이런말이 있죠;대중이 박수치는 투자는 옳지않은 투자일 가능성이 많다....
김대중은 대중(public)을 먹고 살았죠. 말은 좋죠..하지만...대중이 원하는 데로 가면 그나라가 잘가봐야 중간 밖에 더 갑니까(지금필리핀 쯤 되었겠네요...누나들 이웃나라 몸팔러 가고....tg대신 씨티백 타고 댕기고....)
아이가 사탕을 달라고 지랄 한다고 사탕을 주면 않되는 것이고...그래서 리더가 필요하고 뽑는 것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이 언제...사탕발림에 설레발리까는 대통령을 원합니까? 진정한 리더가 필요한 것입니다.
항상 정의 앞에 있고...세계평화를 위하고... 통일을 염원하고..... 그런 듣기 좋은 내용을
자기가 모두 주도한 것인양 포장하고 선동하고 떠들고... 상받으러 다니는 것이
그게 무슨 우리의 영웅이죠?
아무리 미사여구를 늘어놓고...자기들이 서민을 위한 것인양 포장을 하여도...투덜이들 때 보다...박통과 전통 때에
- 서민들이 식당 하여 24평 ...32평... 42평..아파트 늘려 나가기는 더 쉬웠으며...
- 치안에 관한한 선량한 서민들이 * 않당하고 부녀자들이 히롱 않당하고 살기가 더 좋았고
- 지금과 같이 매춘(있었지만...매춘지역은 주택가와 구분이 있었죠)과 도박과....양아치들의 설처댐에
전국토의 구석구석이 물들지 않았고
- 똑똑하고 열정이 있는 서민들이 부자로 등극 할 수 있는 기회가 훨 씬 많았으며...
- 똑똑하고 열정있는 학생들이 사교육을 않받더라도...서울대학교와 유학을 갔다온 사람들 많으며
- "투덜이들"..."설처데기 좋아하는 일부 책만 본 똘아이들" 그리고...조폭 들에게는 정말 고문에 가깝게 살기 힘든 나날들이었다는
명백한 사실은 누구도 부정을 못하죠.
남을 퍼주고 싶으면 남의 호주머니 털어서 또는 지 아버지가 벌어놓은 것으로 하지말고...
자기가 욕먹어가면서 열심히 일해서 그것을 퍼줘야 영웅이 되는 거죠.
김선생을 굳이 비교하자면...정말 뺑이처서 일하고 식당을 만들고 있는 아버지에게 사사건건 시비걸고 식당일 홀 서빙 도와 주기는
커녕...아버지 나쁜 놈이라고 말하고 다니던 아들이 식당대표로되어 아버지가 벌어놓은 돈으로 소외된 사람들 퍼주고..상받은 꼴이
된것라고도 볼수 있죠.
통일문제도 그렇습니다; 통일을 하려면...쉽게 설명하여 멀마나 많은 돈이 들어가냐하면(우리나라 경제력으로는 버틸수가 없죠)...
대부분의 서민 가정(5인가정)이 잘해야 마이너스 않되는 상황에서...거지새끼 3명정도를 추가 부양해야하는 절박한 문제 입니다.
밥사주고...옷사주고..학교보내고....방도 구해줘야 하고....
통일도 신뢰에 의해 차곡차곡 가야지...우리가 벌어논 돈을 니가 뭔가 한방에 퍼주니? 처음부터 빤스를 내리면 그담에 뭘 줘야..만족 하죠? "마약+*"?
통일을 그렇게 하고 싶으면....대중이 니가 번돈으로 한번 해봐라! 그럼 내가 영웅이라고 불러 드릴께.
일부 순진한 농민과 노동자는 속일 수있어도....국민이 전부다 속아 넘너간다고 생각 하면 오산이죠.
저같은 경우...대가리는 않좋아도 돈 계산은 정확한데...김선생의 언행은 돈계산을 해보면 앞뒤가 않맞는 다는 거죠.
갠적으로 아무리 생각을 하고 또해도.... 그사람은 우리의 영웅이 아니죠(각자 생각은 자유지만...).
진정한 우리의 영웅은 소리나지않거나....또는 심지어 욕먹은 사람중에 한명이라고도 볼수 있죠.
그렇게 죽기 직전까지..남 비판에 목메고 떠들고 지랄 하는 사람들이 우리의 영웅은 아니죠.
추신:
제가 이렇게 말을 자유스럽게 할수 있는 것이 김선생의 은혜로움이라고 주장 하시는 분들이 많은데...제가 하나 확실 하게 말씀 드릴 수 있는 것은 김선생이 60년대부터 정권을 잡았다면....대한민국 경제수준이 필리핀 정도 되거나...사회가 매우 혼란 스럽거나....
민주주의가 지금보다 못했을 것으로 확신을 합니다. . 즉, 초기에 민주와 대중의짖는 소리에 경청을 주장하는 정권이 들어 섰다면....독재정권이 들어 섰던 것 보다 지금 오히려 민주주의가 후퇴되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 입니다.
그러한것을 보고 우리는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합니다
무식무지교육반
정확한 지적이십니다. 가장 중요한 점은 이중적인 점이며, 우리나라 교육을 하향 평준화 및 사상 교육에 전념한 점입니다. 친북 사상을 어린 아이들에게도 전파하였고, 우리나라 교육을 하향 평준화하였습니다. 또한, imf 를 닥치게 만든 장본인 이면서, 마치 자기가 대통령이 되어 imf 를 물리친 것으로 멋지게 승화시켰죠, imf 가 노동법 정리 및 부실 기업 정리를 요구하였을 때는, 김영삼 정부가 그것을 못하도록 국회를 나와 서민들과 농성을 벌여 imf를 초래해 놓고는, 그 점을 이용하여 대통령이 된 후는, 오히려 가장 먼저 한 것이 정리해고 단행과 우리 나라 기업 및 각종 부동산을 헐값에 외국에 팔아 넘긴 일입니다. 굴지의 기업을 헐값에 팔아 넘기고, 국민들의 금을 다 모금하여도 imf 를 못 벗어날 수 있을까요?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또한, 친북 노선을 강조하며 북한에 천문학적인 금액을 아무런 조건없이 주는데, 누가 노벨상을 받지 못하겠습니까? 정말로 엄청나게 잘 짜여진 연극 대본 처럼, 못해본 것이 없이 해 볼 것은 다 해본 사람입니다. 왜 이런 사람을 국장으로 모셔야 하는지 정말 이해할 수 없습니다.
08/21 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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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k는 나의꿈
지금 이렇게 편하게 비판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한층 더 발전했음을 의미하는데 그런 부분에서 큰 기여를 했기에 추모하는 것입니다. 곡식 퍼다주었다고 불평하시는데, 그때문에 남북 화해 분위기가 외국 시장에 잘 비추어져서 외국인들의 자본이 많이 들어와서 imf를 빨리 극복하게 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또한 만약 그 돈이 북으로 가지 않았다면 국방의 증강으로 사용되었겠죠? 전 개인적으로 한국은 대단한 나라라 생각하며 자부심도 많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시절 한국 젊은이들이 타국의 총알받이로 가서 벌어들인 돈으로 경부고속도로를 짓는 다는데, 당연히 그 가치를 아는 사람으로서는 반대했었겠지요? 어쨋건 이 나라 민주주의를 한층 발전시킨 위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비판은 자유이고, 반박도 자유겠지요? 어디까지나 자신의 생각을 적는 곳이니까요.
08/21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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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막돌이
김선생이고 이선생이고 박선생이고 간에 세계적인수준에 개지랄문화와 항상불만이많은 국민들 상대로는 영웅이될수는 없습니다 케네디 선생도 레이건 선생도 한국서 대통령질했으면 .. 에브리데이 개지랄에욕처먹을 것입니다
08/21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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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기
헐..
08/22 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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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소처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08/22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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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이짜나
살해위협과 사형선고.. 감금생활.. 나 같으면 민주주의고 나발이고 국민이고 측근이고 간에 그 생활 못한다..
08/22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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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리얼짱
지지하는 사람들이 얼만데 님은 할수없겠지만 할수있는사람도 많습니다
08/22 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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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ya
재밌는 글이네영
08/22 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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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신호
에혀
08/22 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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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뚜와리
국민이 못배우고 배따슬때 애기는, 자식이나, 손자 앉혀놓고, 하시고...... 이제는 아니죠~! 김선생 ? 절대 영웅은 아님니다...... 착각하지마셈~!
08/22 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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칡뿌리
에효~ 이런 병싄같은 ㅅㄲ들 막말 쳐 할 수 있는것도 그 놈의 민주주의때문이지. 이런놈들 깝칠 줄 알았으면 김대중이 민주주의 운동은 안했을껀데 ㅋ
08/22 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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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ferrari
박대통령이 진정한 서민대통령이었습니다. 강압적인 측면이 있긴했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추진력과 리더십이 필요한때였죠. 70년대말 변화하기 시작하였고 문화부흥쪽으로 가닥을 잡으셨지만 뜻을 못이루고 그만...... 역사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김대중이 서민대통령이요?헐~~ 헐 기업대통령 세금모아서 북한 퍼주기 대통령이었죠. 평화요? 그래서 북에서 핵을 만들었나요?
08/22 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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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여과기
아이러니 하군... 한 ceo는 사장 맘에 안든다고 뒤집어엎고 자기가 차지하면서 직원이 비판하면 가차없이 잡아다가 몽둥이질을 했고 그러다 부하직원으로부터 배신 한 ceo는 모함과 핍박에도 보복하지않고 오히려 죽일려고 했던 사람들을 용서 공과는 분명히 있겠지만 당신말에는 오히려 박통과 전통은 이상적인 ceo상과 부합이 안됨 . 당신말대로라면 수퍼권력을 그만큼 가지고 있었으면서 못하는게 이상함 살아있을때 면전에 침을 뱉으라고 해야지 죽어서 무덤에 침뱉으면 뭐합니까? 죽은사람 저주밖에 더 됩니까? 그냥 당신의 영웅은 박정희,전두환이라고 말씀하시고 김대중은 우리의 영웅이 아닌 나의영웅이 될수 없다하고 이야기하시는게 간단하실듯
08/22 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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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론소동생
지금 내가 이렇게 말 마음데로 할 수 있음이... 김선생의 은혜로움 때문이다....이땅의 민주주의가 김선생이 만든 것이라..... 과연 그런것인지.....한번 사실관계를 정확하게 짚어볼 필요가 있는 대목이죠..... 주둥아리는 항상 서민을 위했는데....사실은 그렇지 않은것을 보면 그부분도 반대일수도 있다는 이야기죠.
08/22 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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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고객
민주화를 혼자 개인이 이루었다는건 사실 좀 억지스럽기는 하지만..불씨는 지폈다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쉬쉬하고 독재정권에 할말 못하고 눈치 볼때 누군가가 나서서 총대를 맨다면.... 사실 그사람이 나라면...정말 할수 있을까 하고 생각을 해봅니다. 지금이야..당시 독재정권으로 인해 비약적인 경제 성장을 이룰수 있었지만..지금 컴터앞에서 비판의 글을 남기는 사람들 모두 그 독재정권시대로 돌아가 살수 있을까 하는 자문을 해보심이 어떨까요 전 박통의 독재정권으로 경제성장을 이룬건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지금 우리세대들이 혜택을 보는 것이구요..하지만 당시 국민들은 박통 정권이 무서워 그를 따랐던거지 스스로 경제를 살리기 위해 노력하기는 힘들었을것입니다.
08/22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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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억벌기
알론소동생님아 내 댓글 못 읽었나?? 무식무식해도 조온나게 무식해도 이렇게까지 무식하고 몽매하면 글 싸지르지 말라고 말했을텐데.. 이젠 ㄱ ㅐ 소리도 안되는 ㄱ ㅐ트림 같은 소리만 하구 있네 내가 하다못해 중고딩책이라도 읽고 글을 싸지르라했건만... 말은 죽어라 안들어요.. ㄱ ㅐ라도 알아듣겠당.... 하긴 그 머리를 갖고계시니 영웅들린 기분으로 알바들이 추천 눌러주는 이 맛에... 싸지르는걸 보니 참 잼나네요... ㅋㅋㅋ ㄷㅅ
08/24 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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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쌍막돌이란 닉넴 댓글이 젤로 공감가네 ^^
노게인작성일
2009-08-24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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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사외이사에 MB 낙하산 무차별 투하
사외이사에 ‘MB 낙하산’ 무차별 투하 [2009.03.06 제750호]
[줌인] 투기 의혹으로 공직 낙마한 인사는 물론 선거캠프·인수위 출신들 대거 추천돼
‘MB맨들의 사외이사 낙하산 투하.’
정권이 바뀌면서 기업의 사외이사진 색깔도 바뀌고 있다. 정권과의 친소 관계에 따라 사외이사진이 줄줄이 교체되고 있다. 참여정부 때 요직을 거친 인사들이 물러나고 이명박 정부 출범 과정에서 직·간접적으로 일을 도운 인물들로 채워지고 있다. 이 때문에 사외이사 자리가 정권의 전리품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비판이 뒤따른다.
사외이사는 사실상 기업의 모든 의사결정에 참여하며 막대한 권한을 행사한다. 하지만 경력이나 전문성에서 업무와 전혀 관련 없는 사람들이 사외이사로 선임되는 사례가 여전하다. 경영에 대해 잘 모르는 인사들이 이사회에서 제대로 된 발언과 의견을 내놓기는 어려운 일이다. 기본 자질이 의심되는 인사까지 낙하산을 타고 사외이사로 내려오고 있는 것은 더 큰 문제다.
포스코·KT·KT&G 등 민영화 공기업 다수 영입
» 부동산 과다 보유와 투기 의혹을 받은 이춘호 여성부 장관 내정자가 2008년 8월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브리핑실에서 전격 사의를 표명하고 있다. 그는 KT 사외이사 후보에 올랐다. 사진 연합
포스코는 사외이사진을 대폭 교체했다. 포스코는 사외이사진 9명 중 절반이 넘는 5명을 새로 선임했는데, 지난 대선 때 이명박 캠프에 참여한 유장희 이화여대 명예교수와 대통령직인수위 자문위원 출신인 김병기 전 삼성경제연구소 대표가 새로 뽑혔다. 유 교수는 지난 대선 당시 이명박 대통령 후보 경제 부문 정책자문단에 속해 있었고 현 정부 출범 뒤 ‘대한민국 건국60년 기념사업위원회’ 민간위원으로 위촉된 적이 있다. 김 전 대표는 2004년 당시 재정경제부 기획관리실장에서 퇴직하면서 바로 삼성에 취업해 논란을 빚었다. 당시 그는 공무원 퇴직 뒤 밀접한 업무 연관성이 있는 민간기업 취업을 2년 동안 금지한 공직자윤리법을 무력화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포스코의 사외이사는 외부의 사외이사후보 추천자문단에서 3배수로 추천을 받아 내부 이사후보 추천위원회에서 선정한다. 포스코 쪽은 “두 분 모두 경제 전문가여서 사외이사로 선임된 것으로 알고 있다”며 정치적 연관성에 대해선 선을 그었다.
KT는 3월6일 주총에서 허증수 경북대 교수와 이춘호 인하대 교수의 사외이사 선임안을 처리한다. 이 교수는 지난해 이명박 정부 초대 여성부 장관 후보에 올랐다 부동산 투기 의혹이 드러나며 낙마한 인물이다. 이 교수는 45억8197만원의 재산을 신고했는데, 자신과 자녀 등의 이름으로 주택·건물 14건과 토지 22건을 갖고 있었다.
허 교수는 지난해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국가경쟁력강화특위 기후변화·에너지 태스크포스팀장으로 활동하고 있을 때 향응을 받아 사퇴했다. 허 교수는 인천시로부터 교통편을 제공받아 인수위 소속 인사 8명과 함께 강화도까지 가 갯벌장어 전문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KT 쪽은 “통신사업도 많은 이산화탄소를 배출한다. 전력을 많이 쓰기 때문이다. 허 교수는 기후변화와 에너지 대책 관련 경험이 있기 때문에 선임했다. 이춘호 교수의 경우 여성계를 대변하는 분이어서 선임했다. 이 교수는 또 대종상 영화제 심사위원을 맡기도 해 KT가 진행하는 콘텐츠 사업에도 도움이 된다”고 해명했다.
KT&G가 2월11일 공시한 사외이사 후보 3명 중 김원용 이화여대 교수 역시 지난 대선 기간에 가동된 ‘전략홍보기획조정회의’의 일원으로서 이명박 대통령의 최측근에서 당선을 도운 것으로 알려졌다.
세 회사는 민영화된 공기업이다. 이들 회사는 과거 공기업 시절 경영 능력이나 전문성과는 전혀 무관한 퇴역 정치권 인사들이 돌아가며 임원으로 내려오는 것이 관행이었고, 그로 인한 경영의 비효율성이 심각한 문제였다.
LG전자는 3월13일 주총에서 이명박 대통령 측근인 김상희 변호사를 사외이사로 새로 선임한다. 김 변호사는 1993년 대검찰청 기획과장, 1999년 서울 고등검찰청 검사장, 2004년 법무부 차관을 거쳐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이다. 특히 이명박 대통령 당선 뒤 ‘이명박 특검법’에 대한 헌법소원 심판을 제기한 소송 대리인이었다. 현 정부에서 법무부 장관 후보 등으로도 거론된 바 있다. LG전자는 “김 변호사가 검찰 출신이어서 사외이사의 감독 기능을 잘할 것으로 보고 선임된 것으로 안다. 정치적 배경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LG전자 등도 MB 측근·인척 모셔와
현대제철도 같은 날 주총에서 오정석 서울대 교수를 사외이사로 선임한다. 오 교수는 미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을 졸업하고 스탠퍼드대학에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대통령의 형인 이상득 의원의 사위로, 오명 건국대 총장의 아들이기도 하다. 오 교수는 1970년생의 젊은 이사 후보로, 다른 사외이사들과 20년 가까이 차이가 난다. 오 교수와 함께 사외이사 후보로 추천된 전형수 김&장 법률사무소 고문과 김상대 고려대 건축공학과 교수는 각각 1953년·1949년생이다. 오 교수는 유명 대학 출신에 젊은 나이로 교수가 된 것은 맞지만, 사외이사를 할 만큼 독자적인 사회적 명성을 얻은 것은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
이들을 사외이사로 영입한 기업들에 대한 비판도 뒤따른다. 독립성과 전문성을 갖춰 기업경영을 견제해야 할 사외이사가 기업의 방패막이로 활용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사외이사제는 국제통화기금(IMF) 위기 직후인 1998년 국내에 처음 도입됐다. 회사 내부 인사로만 채워진 이사회로는 IMF 때처럼 기업의 방만 경영을 막을 수 없다는 비판 여론이 커졌기 때문이다. 당시엔 상장회사는 회사 전체 이사 수의 4분의1 이상을 사외이사로 선임하도록 했다. 이어 1999년엔 회사 자산이 2조원 이상인 일반 기업과 금융회사는 이사회의 절반(최소 3인 이상) 이상을 사외이사로 꾸리도록 했다.
상장사의 사외이사 연봉은 평균 2천만~3천만원 수준이다. 하지만 대기업은 7천만~8천만원까지 연봉을 책정하고 있다. 지난해 현대자동차의 사외이사 보수가 연 8700만원으로 가장 많았다. SK텔레콤·LG전자도 연 7천만원 이상을 지급하고 있다. KT는 6천만원이다. 사외이사는 1년에 약 12번 이사회에 참가한다. 대부분의 사외이사들이 2개 직업을 겸하고 있다. 금감원 자료를 보면, 시가총액 100대 기업의 사외이사 직업은 기업인이 38%로 가장 많다. 다음으론 학계(30%), 법조계(14%), 전직 관료(6%)가 뒤를 이었다.
신희진 경제개혁연대 연구원은 “전 정권의 낙하산 인사를 바로잡겠다며 다른 낙하산을 대신 내려뜨리는 몹쓸 구태가 재연돼서는 안 된다. 실질적인 독립성과 전문성을 갖춘 사외이사를 선임해 기업지배구조를 건실하게 함으로써 외부 압력에서 자유로운 기업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금융지주회사에도 사외이사 논란
금감원, 사외이사 소속 기업과 부적절한 거래 조사
금융권에서도 사외이사 논란이 불거지고 있다. 현재 금융감독원은 금융지주회사의 기업인 출신 사외이사가 자신이 속한 기업과 거래를 주선하거나 이에 개입한 사례가 있는지를 점검하고 있다. 조사 대상은 KB·신한·하나 금융지주다. 기업인 출신 사외이사가 없는 우리금융지주는 빠졌다. 금감원 쪽은 “사외이사가 속한 기업의 대출이나 보증이 객관적인 심사 절차만으로 이루어졌는지, 거래가 성사되도록 사외이사가 적극적인 의사표시를 했는지 등을 보고 있다. 조사 결과 문제점이 발견되면 제도 개선을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 금융지주회사 관계자는 “기업 출신 사외이사들이 소속 은행과 여신관계 거래를 맺는 건 업계의 관례”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신한지주는 2월12일 사외이사 12명 가운데 절반을 교체했다. 신한지주 사외이사 임기는 1년이지만 대부분 유임되고 매년 2명 정도 교체됐던 점에 비춰 큰 폭의 물갈이인 셈이다. 다른 지주회사들도 금융당국의 견제 움직임에 내심 불만을 표시하면서도 대책을 강구하는 모습이다. 현재 기업 출신 사외이사는 KB지주에 3명, 하나지주에 4명이 있다.
이같은 논란의 배경에는 사외이사의 막강한 권한이 자리잡고 있다. KB지주는 사외이사들이 참여하는 이사회 산하에 각종 경영 현안을 검토하고 최종 결정하는 경영전략위원회 등 7개 소위원회를 운영하고 있다. 신한은행은 기업 지배구조를 전반적으로 논의하는 이사회운영위원회 등 6개, 하나금융은 사외이사추천위원회 1개를 두고 있다. 이들 위원회 위원장은 모두 사외이사, 위원은 사외이사와 등기 임원인 회장·사장 등이 맡는다.
현행 금융지주회사법의 허점도 문제다. 금융지주회사법 38조와 시행령 17조를 보면 ‘지주회사의 자회사와 대출거래가 있는 기업과 특정 거래기업의 이익을 대변할 우려가 있는 사람은 임원이 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좀더 명확한 금지 규정인 금융지주회사법 40조와 시행령 19조에선 ‘금융지주회사와 매출 총액의 10% 이상에 해당하는 단일 거래 계약을 체결하거나 대출 총액이 자본금의 10% 이상인 법인의 상근 임직원은 사외이사가 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즉, 거래 금지 대상을 ‘금융지주회사’로만 한정해놨기 때문에 자회사인 은행 등과 거래계약을 해도 직접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김동현 금감원 금융지주총괄팀장은 “특정인을 처벌하는 차원은 아니지만, 사외이사 제도 정비가 잘 안 된 부분이 있어 제도 개선을 염두에 두고 조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이태희 기자 herme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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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한국잠수함,수출된다던 뒷얘기
어제 코리아타임즈 기사를 통해 공식화된 한국 해경의 인도네시아산 CN235-220 MPA 해상초계기 8대 도입건과 관련하여 이상한 기류가 느껴지고 있습니다,.그래서 여러가지로 생각을 해보았는데, 가장 최악의 시나리오로 생각되는 것은 한국해군이 운용중인 209급을 매각하고 해상초계기를 도입하는 바터제입니다.물론 중고잠수함 수출이 아니고 신규로 건조하여 수출하는 방안이 좋을 것입니다.현재 거론되는 잠수함 수출방식중에는 기술이전 방식으로 2척을 인도네시아에서 건조하며 인도네시아가 발주한 잠수함 창정비(수리) 시설건설 사업을 수주하는 방안도 검토중이라는 소식도 있습니다 (연합뉴스 7월 1일자) 그러나 대우해양조선이 209급 2척을 신규로 건조하여 인도네시아에 수출하는 것이 아니고 한국해군이 보유중인 9척의 209급 잠수함중 2척을 인도네시아에 판매하는 댓가로 해상초계기 8대를 들여오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209급 일번함 장보고함 (SSK 61)
만약 운용중인 함정을 주고 초계기를 도입하는 상황이라면 예상되는 문제를 몇가지 생각해봅니다. 먼저 비대칭전략으로 적극 도입이 추진되던 잠수함전력이 당장 문제가 생길 것으로 보이는 점입니다. 현재 3척이 건조되어 시험운항중이거나 막바지 치장공사중인 214급 잠수함에서 결함이 발견되었으나, 별 문제가 없는 것으로 조치한 후 해군에 인도된 까닭에 과연 정상적인 잠수함전력이 될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점입니다.그러나 잠수함의 생명이라는 은밀성이 슈노켈사용시 소음이 과다하여 문제라는 점은 당장 해결이 어려울것이며, 심해에서 운용하므로 문제가 없다는 식으로 넘어갔다는 소식대로라면 잠수함으로써는 치명적인 약점이기 때문입니다. (디펜스타임즈 7월호 참조)게다가 문제가 되고 있는 214급에 대한 완벽한 해결없이 추가건조가 추진된다고 하면 이는 한국해군에게 더욱 많은 문제를 던져준다는 심각한 사항이 될 것입니다.단지 업체의 잠수함 생산라인을 유지해주고자 국민세금을 허투르 사용하려는 계획이라면 즉시진지한 검토를 해봐야 할 것입니다. 209급 이순신함 (SSK 068)
또한 중고잠수함을 수출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거래금액에도 이상한 점이 발견되고 있습니다.어제 코리아타임즈에 따르면 부수장비를 포함한 인도네시아산 초계기 가격은 대당 2천5백만불로 8대 도입시 총 2억불정도입니다. 그러나 양국간 거래금액은 10억달러라는 것입니다.만약 중고잠수함을 오버홀후 수출하는 것이라면 신조선 가격의 반에도 미치지 못할 것으로 추정하므로 2억달러라는 금액과 엇비슷하게 될텐데, 거래금액이 10억달러나 되므로 당장 눈에 보이는 차액 8억달러는 과연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물론 연합뉴스 소식처럼 창정비 시설공사등과 기술이전 비용이 포함되어 대박을 터트린 경우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결과이므로 전혀 다른 얘기가 되고, 전력증강과 무관한 해경용 해상초계기 사업에 방사청이 끼어든 이유도 설명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면에 무엇인가가 있다면하는 기우를 떨쳐버리기 어렵습니다.직접건조도 아니고 기술이전이라면 독일 HDW가 대부분의 이익을 취할 것이고 우리에게 남는 것은 없을 것일텐데 계약금액과 우리가 줄 돈과 차액이 더욱 크게 벌어질텐데 어떻게 바터제가 된다는 것인지 참 이상한 일입니다.게다가 일을 추진한 업체가 프XX제 전투기 도입과 불X사업등에도 관여하였고 카XX헬기 도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던 경력이 있으며 최고권력기관의 비서가 개입되어 있다는 소문에는 아연질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209급 나대용함 (SS 069)
노정권 시절 만들어져 방산물자 도입과 수출에 전권을 행사하던 방사청입장이 새 정권에서 요구하는 경제살리기에 부응이라도 하듯 수출도 하면서 동시에 비용절감을 통한 214 잠수함 추가건조로 경제도 살린다는 명분으로 운용중인 잠수함 수출을 추진하는 것이라면 아랫돌 빼서 윗돌 고이는 정책과 유사한 상황으로 우려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술이전을 통해 수출도 하고 비용도 절감하는 대박이라면 방사청이 한 일중 크게 칭찬받을 일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무기거래의 흑막뒤에 펼쳐지는 일들은 대부분 흑심이 함께 하고 있다는 과거의 예를 보면서 진정한 자주국방을 걱정하는 국민의 한사람으로 이것저것 걱정도 해보는 수준이길 바랍니다.터키해군의 Preveze Class (German design 209-1400) 잠수함 내부 도면
어제 YTN 뉴스에 김병기님이 군사전문가로 나와 인터뷰한 부분에 대해 여전히 찌질이들이 본질보다는 손가락만 바라보면서 엉뚱한 소리를 해대고 있더군요.내막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욕부터하고 사람 깍아내리기를 좋아하는 부류들이지요. 에고 한심한 것들....염라대왕은 뭐하나 몰라, 밥값축내는 인간들 내버려두고...CN 235를 도입하면서 209 급 잠수함을 인도네시아에서 라이센스 생산하게 해준다는 바터거래를 청와대가 나서서 급하게 도입하려는 부분에 대해 의혹의 눈길을 보내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 추진을 하는 비서관이 국방정론을 걷겠다며 돈이나 걷는 모단체 이사로 있는 점은 진정한 하이 개그입니다. (어떤 회장이라는 찌질이는 뭣도 모르면서 헛소리를 해대고 있지만....) 국익이 걸린 문제가되어 이미 오래전에 인지한 문제이지만 언급을 삼가고 있었지만 신문에 기사화 되고나서 YTN 에서 뉴스로 다루게되어 오래된 매니아에 불과한 제게까지 인터뷰 요청이 들어오더군요. 처음에는 여러번 고사하다가 어차피 공개된 내용이니 가능하면 정확한 상황을 설명해 줄 필요가 있겠다 싶어 인터뷰에 응했습니다. 그런데 상당시간 인터뷰한 내용은 온데간데 없고 초계기가 폭풍우 속에서 구난작업을 할 때는 위험에 처할 수있다는 언급 하나만 달랑 인용했더군요. 편집 신공에 당한 셈입니다. 현재 대우조선은 인니 잠수함 오버홀을 수주한 이후 인니에 잠수함을 수출하는 계획에 대해 아무런 준비가 없습니다. 오히려 비관적으로 보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도 그럴것이 인니 내부에서 잠수함 도입사업은 2009 년후반에 시작되는 사업이고 내부적으로 한국과 수의계약보다는 공개 경쟁입찰을 해야한다는 주장도 강하기때문에 어떻게 방향이 잡힐지 아직 모르는 상황이고 예산도 부족합니다. 더우기 러시아가 매우 좋은 조건으로 ( 거의 반값으로 ) 치고 들어오는 상황이라 더욱 그렇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비관적으로 봅니다. 왜냐하면 인니의 요구조건인 인니내에 조선소를 건설하여 제작해야한다는 조건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요구조건이기 때문입니다. 대우조선 특수선 사업부를 인니에 옮긴다면 모를까 인니의 용접공 기술수준이나 여러 제반 조건을 고려할때 비현실적인 요구조건입니다. 설사 강행한다고해도 과연 그 품질을 관리하여 제성능을 낼 수있을지 의문입니다. 여기에 해경 초계기 도입 사업 일정과 잠수함 수출건은 일정이 너무 차이가 나서 동시 진쟁되기 어렵습니다. 일단 항공기부터 들여오고 잠수함 수출건은 더 협상을 하는 상황으로 가게될 것으로 보입니다. 과거 인니에서 8 대의 CN-235 를 도입할때도 나중에 절충교역으로 도입하기로 했던 국산 방산장비 ( 차량등 ) 를 수출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사례가 있기에 걱정하는 것입니다. 지난번 처럼 수송기만 도입하고 정작 잠수함 수출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이 충분히 있습니다. 여기에 해경 초계기 도입 예산은 1000 억 내외인데 비해 CN-235 를 도입할 경우 기체 가격 1600 - 2000 억 여기에 장비 통합비용 800 억 내외 해서 모두 2400 -2800 억 정도로 늘어납니다. 물론 청와대가 앞장서서 교통정리를 한 사업이니 예산 증액이야 문제가 없을지 모르지만 결국 국회에서 동의해야 결정될 내용입니다. 방산수출도 좋지만 형식승인도 받지 못한 기체를 불확실한 잠수함 수출건을 명분으로 수의계약으로 들여온다는 것이 과연 행정적절차나 예산관리상 올바른 일인지 의문을 표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동안은 국익을 고려해서 참아왔고 YTN 에서 보도할때도 많은 부분은 국익이 있으므로 보도를 자제해달라고 설득해서 일부 민감한 내용이 빠지기도 했습니다. 이제 국방장관이 인니를 방문하여 이번건에 관한 양해각서(MOU) 체결을 추진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MOU 는 국제법상 법적인 구속력을 가지는 조약이 아니기에 이를 근거로 먼저 항공기를 도입하는 것은 ( 해경의 일정을 고려할때 먼저 들어오게될 것입니다. ) 실수하는 것이 될 수있다고 생각되어 이제 공개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지금도 이해를 할 수없는 것은 청와대 비서관이 왜 이일에 나서서 의혹을 키웠을까 하는 것입니다. 잠수함 수출은 원설계 보유국인 독일정부의 동의를 얻어야하는 일이고 인니의 요구조건도 비현실적인 내용이고 인니 군 내부 상황도 러시아의 끼어들기로 불확실한 상황인데 이런 기본적인 문제점을 충분히 고려하고 결정한 것인지 아니면 관련 업체들의 로비에 놀아난 것인지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알 림 : 위 자료는 중복이 될 수 있음을 알림니다
자료제공 : 코리아타임즈 / YT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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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광조우급 052B형 - 168함 다목적 구축함
< 마스트와 함교에 집중된 무장과 레이더들> < 마스트의 Top-plate 3D 회전식 대공 레이더 > < 탈레스의 골키퍼를 4기 도입한 후, 복제를 한 것으로 알려진 Type730 > < 스텔스 설계된 포탑의 100mm 주포 > < 헬기 격납고 위에 설치된 9M38 SAM > < 다용도 로켓 발사기 : 채프 및 대잠 로켓용 > < 16개의 YJ-83 (C-803) 대함 미사일 > < Ka-28 대잠 헬기는 꼬리 로터가 없으며, 메인 로터는 2중 반전 방식이다.>
< 2005년 8월 동지나해 해상에서 벌어진 러시아 중국 합동훈련에서 로켓을 발사하고 있다 >
< 제1도련선, 제2도련선 돌파를 목표로 구축함들을 대량으로 건조하고 있다 >
※ 최근 중국 해군이 건조하였거나 건조중인 구축함과 프리깃함에 대한 중국식 프로젝트 이름인 051, 052, 053, 054 등의 분류명이 각 매체나 자료마다 모두 달리사용되고 있어, 상당한 혼란을 주고 있습니다. 이 곳에서는 Globalsecurity나 Fas 등의 군사종합 싸이트의 자료가 아닌 중국 해군전문 싸이트나 중국군 전문 싸이트의 공통점을 기준으로 중국식 프로젝트명을 사용하였습니다. 따라서 중국식 프로젝트명인 051, 052, 053, 054 등의 호칭 보다는 함번과 함명을 기준으로 자료를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Luhai급 구축함은 051B, 052B, 052C의 3가지 파생형이 있다. 이 중 052B는 051B의 선체를 기반으로 한 스텔스형으로 볼 수 있으나, 052C형은 052B형을 바탕으로 이지스함과 같은 위상배열 레이더를 설치하며, HHQ-9 장거리 대공미사일을 탑재하는 차이가 있다.
기준 배수량은 051B는 6,000톤 ; 052B는 6,500톤(만재 7,500톤) ; 052C는 7,000톤 정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Luhai급 051B형은 함번 167 Shenzhen號 단지 1척만 건조되었는데 1996년 5월에 건조를 시작하여 1997년에 진수된 후 이듬해인 1998년에 취역 하였다. Luhai級의 초도함인 051B형의 167 Shenzhen號는 대공미사일로는 HQ-7 SAM 단거리 대공미사일만 탑재하고 있어 제한적인 방공능력만 갖추었었다.
단거리 대공미사일 HHQ-7 SAM으로 무장된 Luhai급 051B형 167함(Shenzhen號)은 중국 해군이 갖으려는 차기 구축함 052B형으로 넘어가는 중간단계의 시험함 성격이 강하며, 중국 해군은 052B형을 통하여 비로서 실질적인 구역 방공능력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선체를 보다 스텔스화하여 설계한 함번 168, 169 함은 052B형으로 분류 된다.
함 번
함 명
진 수
취역
168
Guangzhou
2002. 5. 22
2004.7.15
169
Wuhan
2002. 10. 2
2004
Globalsecurity.org에 때르면 052B형은 러시아의 SA-N-6과 유사한 새로운 HQ-9 장거리 대공미사일을 장착또는 예정
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HQ-9는 중국이 자체 설계한 로켓 모터, 러시아의 S-300PMU의 탐색 및 유도 하드
웨어 그리고 미국 패트리어트의 유도 기술이 접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HQ-9는 장거리 함대공 미사일로 고성능 항
공기, 순항 미사일, 공대함 미사일, 전술 탄도 미사일에 대응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 S-300PMU/SA-N-6의 사거
리 150~200km ; 속도 마하 1.7 ; 고도 30,000m ; 크기 750mm x 50mm ; 전체 중량 1,800 kg ; 고폭탄 탄두 중량 145
kg )실제로 중국은 1991년 48 ~ 72개의 미사일에 사용할 수 있는 S-300PMU의 배터리를 구입하였으며, 추가로 1994
년에는 120개분의 미사일 배터리를 구매하였었다. 1993년에는 이스라엘로부터 패트리어트 미사일 1기 또는 미사일
기술을 이전 받았다고 단언 되었었다. 1997년에는 US Office of Naval Intelligence에 의해 "진보된 서방 시스템 기술
이 HQ-9에 접목 되었다"고 시사한 바 있으며, 1991년 걸프전 이래 중국 베이징에는 서방으로부터 많은 군사 회사들
이 모여들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함에도 중국은 각 레이더 시스템의 통합에 여전히 어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HQ-9 수직발사기의 위치는 052C형과 같은 헬기 격납고 우현과 100mm 주포 뒤에 위치한 HHQ-7 SAM 장치대와
같은 갑판 상으로 추정된다. 수직발사기에 의해 발사되는 HQ-9 함대공 미사일의 운용을 위해 프랑스의 ARABEL 처
럼 전자적 그리고 기계적 스캔능력이 결합된 것으로 보여지는 새로운 3D 다기능 위상배열 레이더를 탑재하였다. 전
방 마스트 꼭대기에는 Sovremenny급에도 설치된 MR 750 Frega-MA Top Plate 3D 대공 수색 레이더가 비스듬히
장치되어 있다.
대공 미사일과 그의 발사 시스템과 관련하여 예리한 분석으로 잘 알려진 '김병기'님은 수직발사기를 장치할 공간
이 없어 보이며, 더불어 대공 센서와 무장은 거의 소브르멘니급의 것을 그대로 차용한 것으로 볼 수 있어, HHQ 9 을
유도하고 싶다면 새로운 레이더와 발사 시스템을 갖추어야하는데 그런 증거가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는 분석을 내 놓
고 있다. 실제로 현재까지 공개된 사진상에서 보여주는 052B함의 대공 미사일은 HHQ 9등과 같은 VLS가 아니라 167
號와 같은 SA-N-12로 무장되어 있다고 분석 된다.
9M38 Buk-M1-2 (NATO 코드명: SA-N-12) 중거리 대공 미사일과 함교부의 앞쪽에 장치된 화력관제 유도용 Dome
형 레이더들은 러시아로부터 직수입한 것으로 보인다. 함교의 위에는 2개의 레이더가 있고 (함교 앞쪽에 있는 SAM
발사기용), 후방 마스트 뒤쪽에도 2개가 자리잡고 (헬기 격납고 옆의 SAM 발사기용) 있어, SA-N-12용으로 8개의 다
중 화력통제 채널을 제공한다.
전체적인 설계 개념은 Sovremenny급 미사일 구축함과 비슷하며, 그 함정은 이지스형의 시스템보다는 많이 뒤떨어
지는 제한적인 함대 방공능력을 갖도록 설계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저렴한 비용과 비교적 짧은 기간에 함정을
건조할 수 있는 장점이 되고 있다.
052B 168함과 169함은 051B형인 167 Shenzhen號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전체적인 외관은 크고 완만하게 경사처
리 되었고, 프랑스의 라파예트처럼 서방의 차세대 프리깃들에 흔히 볼 수 있는 일반적 형상으로 설계되어 중국 함정
으로서는 획기적으로 혁신한 선형 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전반적인 스텔스형 설계와 선체의 도장을 레이더파 흡
수 도료로 코팅한 선체임에도 불구하고 함교와 마스트 주변에 집중된 무장과 레이더의 배치로 레이더 탐지면적을 증
대시켜 버린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선체는 강철로 되어 있으며 생존구역에 대한 장갑처리가 되
어 있다.
프랑스의 Creusot-Loire 100mm (Type 210)와 유사한 신형의 100mm 주포의 포탑은 스텔스 설계 되었으며, B 포지
션에 설치 되었다. 러시아의 AK-100 100mm 59경장(포신의 길이가 포구경의 59배라는 뜻) 단장포는 사정거리 15K
m 이며 분당 최대 90발을 발사할 수 있으며, 화력관제 레이더와 통합된 자동방식으로 대수상 및 대함 공격은 물론 저
속으로 접근하는 미사일 요격 등의 다목적을 갖고 있다.
대공 수색 레이더는 E/H밴드를 사용하는 러시아의 MAE-5 (NATO 코드명 : Top Plate) 3D 대공수색 레이더를 운용
하고 있다. 이 레이더는 항공기의 경우 최대 탐지 거리 250km, sea-skimming 으로 돌진하는 미사일의 경우 최대 50k
m 이다. 러시아의 9M38 Buk-M1-2 (NATO 코드명: SA-N-12) 중단거리 대공 미사일의 화력통제는 4개의 러시아제 Fro
nt Dome 화력통제 레이더가 맡고 있으며, 이는 소브레멘니급의 6개와는 비교된다. 주포와 대함 미사일의 화력통제
는 D/E/F밴드의 러시아제 Band Stand에 의해 운용 된다.
지휘통제 시스템으로는 Luhai급에서 사용되는 ZJK-4-3a의 업그레이드형인 ZJK-5 전투 시스템이 장착되어 있으며,
ZJK-5는 1553B 군용 데이터 버스와 100mbps 이서네트( ※ 참조 Ethernet - 동축케이블을 데이터전송 매체에 이용
한 네트워크 통신 장치. 버스형 CSMA/CD방식인 LAN의 상품명으로, 원형은 1975년에 제록스사가 개발, 그 뒤 80년
에 제록스사·DEC사·인텔사 등 3사가 개량형을 공동개발하였다. 동축케이블과 트랜스시버로 구성된 통신속도 10Mbp
s의 LAN에 기초하고 있다)를 구축하여 지상 관제소와 연계할 수 있다.
052B형의 다른 특징들을 살표보면 위성통신 안테나, 함미 좌현쪽으로 재배치된 Ka-28 헬기용 격납고, 헬기 격납
고 지붕 우현쪽으로는 SA-N-12 발사기의 배치, 함교 뒤쪽 양현에 하나씩 자리 잡은 Type 730 CIWS, 함교 앞쪽 플랫
폼에 설치된 4개의 대형 caliber 다목적 MLRS (다련장 로켓 발사기 - 대잠 로켓 또는 디코이 발사용으로 추정 됨), 함
중간의 연돌 뒤쪽에 설치된 4연장의 YJ-83 대함 미사일 발사기를 볼 수 있다. YJ-83 대함 미사일의 발사기는 서방의 s
ea-sparrow 함대공 미사일 발사기인 Mk 29 Mod. 1의 모습과 외관이 유사하다.
YJ-83 (C-803) 대함 미사일은 연돌과 헬기 격납고 사이의 데크에 좌우 교차 방식으로 장치되어 있으며, 4연장 4기
로써 총16개를 탑재하고 있다. 서방의 함정들이 통상적으로 8개의 대함 미사일을 장착하는 것에 비해 16개씩이나 장
착한 모습은 Sovremenny급의 복사판이자 강력한 화력을 보유하려는 개념이 잘 나타난 부분으로 대공방어력 보다는
대함 공격력이 강조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sea-skimming, radar-homing의 중거리 대함 미사일로 함교위의 Ban
d Stand 레이더로 유도 되며, 최종 유도단계에서는 마하 1.5의 초음속으로 목표물을 공격 한다. 헬기의 중게없이 150
Km의 사거리를 갖는다.
날씨에 관계없이 전천후 운용이 가능한 대잠 및 대함 공격용 Ka-28 헬기는 어뢰 및 다양한 무장이 가능하며 모함으
로부터 200km 이상의 거리까지를 작전반경에 둘 수 있다.
동력은 CODOG방식으로 우크라이나의 DA80/DN80 개스 터빈을 장치 하였다. 052B 초도함인 168 廣州號는 상하
이의 강남 조선소에서 건조되어 2002년 5월 25일 진수 되었으며 2003년 7월 23일 첫 항해에 들어갔다. 두 번째 함인
169 號는 2002년 10월에 진수 되었다. 168號는 2004년 7월에 취역되었으며, 아래의 취역식 관련 사진으로 볼 때 169
號도 함께 취역한 것으로 보인다.
똥꼬X작성일
2007-05-13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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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가상한일 전쟁 (비밀의 김병기님의 글 펌)
가상 한일전쟁.(비밀의 김병기님글 펌). 엄청난 내공이 보입니다. 번호 : 7834 글쓴이 : 앙그라마이뉴조회 : 463 스크랩 : 2 날짜 : 2006.04.27 10:08 ================================================================= 독도사태를 통해 보는 한국 일본의 전력비교 서론 일단 정치-외교적으로 볼때 한-일간의 전면전은 상당기간 불가능하다. 물론 우발적인 충돌이 일어나고 이 충돌이 에스컬레이션되어 제한전을 벌이게될 가능성은 어느정도 있을 수있겠지만 전면전은 어렵다는 것이다. 일본은 미국의 영향력 아래 있는 동안 외교적으로 한국과의 전쟁을 벌이기가 불가능하고 또한 일본자위대는 전면전을 위한 준비가 거의 돼 있지 않다. 한국은 북한의 위협이 존재하는 한 일본과의 전면전은 불가능하고 북한이 없어지더라도 한국의 국력을 고려할때 일본과의 전면전은 불가능하다. 다만 일본이 침공을 시도할 경우 어느 정도의 방어능력을 가질 수있는가를 이야기하는 것이 현실적인 내용이 될 것이다. 한일 전쟁은 어떤 경우에도 미국에게 손해가 되므로 미국은 받아들일 수 없다. 물론 무리한 가정을 세우고 조작된 상황을 묘사하여 한일전의 시나리오를 그려보는 것은 있을 수 있겠지만, 현재 국제정치학계의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일본이 독자적으로 한국과 전쟁을 시도할 수는 없다는 것이 옳은 견해일 것이다. 그러나 우발적인 상황을 이용하여 전면전으로의 확산을 카드로 한국을 위협하고 외교적으로 압박하는 정도의 상황은 충분히 생각해볼 수있을 것이다. 이 경우도 일본은 허용된 범위에서만 행동의 자유를 가질뿐 허용치를 넘어설 경우 미국의 개입이 이루어지게된다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 일본은 마이즈루에서 해자대 기동훈련이 (집합훈련) 이루어지는 시기를 골라서 독도 부근해역 해저 측량을 시도함으로서 교묘한 압박을 한국에 가하려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이 강경하게 나오면서 분위기가 점점 험악해져 가니까 결국 미국이 개입하게되고 한국이든 일본이든 어정쩡한 상태에서 봉합을 하지 않을 수 없게된 것이다. 일단 이런 위기 상황을 경험하면서 한국과 일본의 전력비교가 매우 큰 관심사로 올라오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해상전력 자체의 비교에 큰 관심을 가지지만 사실 현대전에서는 특정군의 전력만을 비교하는 것은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현대전은 정보전력과 공군전력에의해 그 향방이 결정된다는 것이 걸프전과 이라크전의 가장 중요한 교훈이다. 즉 해상전력도 그 자체의 전력보다도 정보전 능력과 공군전력이 어떠한가에 의해서 더욱 더 큰 영향을 받기때문에 한일 해상전력의 비교는 종합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한-일간의 해상전력 비교는 정보전 능력과 항공전력, 여기에 해상전력까지 종합적으로보 비교해야 정확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1. 정보전 능력 일본의 종합적인 정보전 능력은 미국에 비해서는 아직 초보적인 수준이지만 한국에 비해서는 상당한 우세를 점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먼저 모든 정보전의 기본이 되는 일본의 각종 통신 감청능력은 세계적인 수준으로서 인정받고 있다. 이것은 대형감청 설비를 (코끼리 우리로 알려진) 미국과 일본이 공동으로 운용하고 있는 데서도 잘나타나고 있다. 이 들 설비는 중국과 북한 러시아를 대상으로하는 대규모 설비로서 한국에 대한 통신감청은 매우 손쉽게 이루어진다. 통신감청은 모든 전쟁에 있어서 기본적인 정보자산으로서 정확한 적의 상황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자료가 된다. 한국군의 감청 장비는 대부분 대북한용 감청설비로서 일본을 향한 감청설비는 거의 없다. 매우 적은 수량이 일본의 통신을 감청할 능력을 가졌을 뿐이어서 한일간의 감청 능력차이는 매우 큰 것이 현실이다. 백두 정찰기가 대표적인 감청설비인데 이것을 남쪽에서 운용한다면 일본에 대한 제한적인 감청이 가능하지만 (주로 규슈와 혼슈 일부 ) 실제로 백두정찰기는 평시에 대북용으로만 운용되고 있기 때문에 한-일간에 위기시 평소에 수집한 기본 자료가 적어서 과연 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레이더 신호를 비롯한 각종 전자장비의 신호정보를 평시에 수집하면서 적 항공기나 함정의 독특한 전파신호 특성을 파악하는 신호정보 수집기도 전시에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된다. 전파신호의 고유한 특성을 DB 화 시켜서 보유할 경우 ESM 을 통해 수집된 신호정보 특성을( 일종의 지문과 같은 ) 분석하는 것만으로 적함이나 장비 항공기를 손쉽게 식별할 수있어서 적에 대한 선제 공격에 결정적인 우위를 가지게 하는 자산이다. 일본은 오래전부터 신호정보 수집기를 운용해왔고 ( YS-11 을 개조한) 현재는 P-3 해상초계기를 개조한 EP-3 신호정보 수집기를 여러대 보유하여 활발히 운용중이다. 이에 비해 한국군은 아직 제대로된 신호정보 수집기를 보유하고 있지 못한 상태이고 단지 소형 신호정보 수집함을 몇 척 운용하고 있을 뿐이다. 신호정보의 전파 특성상 선박형보다는 항공기형 신호정보 수집기의 수집 능력이 월등한 것이 현실이고 이것은 그대로 한-일 간의 전력차이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정찰위성의 경우 일본은 현재 1 m 급 광학위성을 하나 운용하고 있고 1 m 이상의 해상도를 가지는 SAR 위성을 가동 준비 중이다. 그리고 2007 년까지 광학 1 기 / SAR 1 기를 추가 확보하여 총 4 기 체제를 갖출 계획을 가지고있다. 여기서 07 년 발사하는 광학 정찰위성은 50 cm 급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의 정찰위성 계획은 일본과 비슷한 수준으로서 올해 1 m 급 (실제는 1 m 미만으로 알려짐) 광학정찰위성이 발사되고 2010 년대 초반까지 SAR 와 50 cm 급 정밀 광학정찰위성을 확보할 것으로 알려져있다. 위성분야에서 일본이 조금 앞서 있지만 실제 그 차이는 크지 않다. 그것은 위성자료 분석은 (특히 SAR 정보 분석) 매우 오랜 경험과 숙련도가 요구되는 작업으로서 보통 10 년에서 15 년정도의 경험을 가져야 제대로된 분석을 할 수있다고 한다. 이렇듯 소프트웨어 측면에서 한일의 격차는 더욱 크지 않아서 한국이 마음먹고 도전해볼만한 분야이다. 조기경보기의 경우에 한국이 17:0 으로 완전 열세이고 이제 한국이 EX 사업을 통해 조기경보기를 결정하더라도 2015년 이전에는 제대로된 운용능력을 확보하기 어려워서 당분간 열세를 벗어나기 어려운 분야이다. E-8 ASTOR 같은 공중지상감시기의 영역에서는 한국이 조금 앞서있다고 말할수 있다. 한국이 소형 기체이기는 하지만 금강시스템을 확보하여 운용능력을 배양하는 중인데 비해 일본은 이런 기종을 운용하고 있지 않다. 해상 감시능력의 경우 일본이 외형적으로는 매우 앞선 능력을 보유하고 있는 상황이다. ( 80 : 8 로서 10:1 의 격차를 가진다) 그러나 실제 중요하게 요구되는 해상식별 능력에 있어서는 일본도 이 분야에서는 그렇게 큰 능력을 가진 것은 아직 아니다. 아직 광학위성은 1 대 뿐이라 같은 지역을 다시 찍는데 2 -3 일이 소요되고 E-767 의 경우 장거리 탐지는 가능하나 식별이 어렵다. 식별이 가능한 P3C의 경우 120 km 정도에서 식별이 가능해서 상당히 접근하지 않고서는 아군합정의 식별이 어렵다. 이 점은 양측이 비슷해서 적 방공권에 접근하지 않고서는 적함대를 정확히 식별하고 공격할 능력이 양측에게 모두 부족하다는 것이 현실이다. 정보전 능력의 비교는 일본에 비해 한국이 확실한 열세에 있다. 한일의 전력차이는 이 정보전력 차이에서 명백하게 시작된다. 그러나 이런 정보전 능력의 차이는 한일간의 상대적인 차이이지 미국과 비교하면 양측 모두 부족하다. 특히 한 일 모두 전체적인 C4ISR 을 네트워크 시스템으로 연동하여 운용하고 있는 가를 따져보면 둘다 미국에 비해 확연하게 떨어져있다. 일본은 좋은 눈을 제대로 전체 시스템에 적용하여 활용하는 측면에서 준비가 덜된 상황이다. 특히 마지막 공격력이라는 측면에서는 한국에 비해서도 부족하다. 물론 평화헌법상의 공격무기 제한이라는 족쇄가 그 원인일 것이다. 물론 이런 네트워크화의 시도는 양국 모두 도전 중이고 전체적인 시스템의 구축은 일본이 조금 빠르겠지만 공격시스템까지 완비된 것을 따질 때는 한국이 앞서게 될것이다. 2. 공군전력 공군전력의 핵심이라고 할 수있는 조기경보기는 앞서 이야기한대로 일본이 17 기 운용 중인데 비해 한국은 단 한 대도 운용하고 있지 않다. 물론 조기경보기가 없다고 완전히 불리한 것만은 아니다. 문제는 조기경보기가 없을 경우 지상 방공레이더만으로는 적의 저공침입을 완벽하게 탐지해 내기가 어렵고 탐지하더라도 조기 탐지가 어려워서 거의 대응하기 어렵다는 데 문제가 있다. 또 하나의 문제점은 지상방공 레이더망에 의존할 경우 적의 정밀공격에 취약해서 조기경보기의 높은 생존성에 비교할 때 지속적인 방어망 유지에 큰 어려움이 생기게된다. 현재 일본은 주력 전투기로 190 여대의 F-15 J 와 50 여대의 F-2, 70 여대의 F-4EJ 를 운용중이다. 숫자로 볼 때는 4 대의 F-15 K / 175 대의 F-16 / 120 대의 F-4 / 200 여대의 F-5 를 운용중인 한국과 비교할때 320 : 500 으로 일본이 열세인듯 보이지만 실제 전투능력은 그렇지 않다. 일본이 비교적 최신의 기체를 중심으로 운용하고 있는데 비해 한국공군 작전기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F-4/F-5 의 경우 이미 수명이 다되어가는 노후기에 구세대 전투기로서 F-15 나 F-2 에 대적할 수없는 전투기들이다. F-16 과 BVR 교전이 가능한 AIM-120의 조합으로 F-15 J 와 스패로우 미사일의 조합을 대항하는 것은 어느정도 가능성이 있어 보이기도 하고 많은 매니아들이 이런 분석을 하기도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못하다. 스패로우가 세미 액티브 방식의 미사일이기는 하지만 F-15 의 에너지 파이팅 능력과 월등한 레이더 성능과 전장상황 파악에 강력한 장점을 가지는 조기경보기의 존재를 고려할때 결국 잘해야 비등한 전투를 할 수있게될 것이다. 여기서도 F-16 과 F-15 J 의 무장 탑재능력의 차이와 양국이 보유한 BVR 전 능력을 가진 전투기 숫자의 차이 ( KF-16 137 대 F-15 J 190 여대 ) 와 전자전 능력차이를 고려하면 한국이 분명한 열세를 보일 것으로 판단된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일본과의 공대공 전투는 한국에게 매우 불리하다. 적어도 독도 상공을 주전장으로 이야기할때 한국은 일본에게 제공권을 빼앗길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한국이 강릉이나 예천에 F-16 을 전진배치하여 작전하고 일본이 F-15J 를 오키섬에 긴급전개하여 작전한다고 가정할때 일본은 조기경보기를 운용하여 전장을 확실하게 파악하며 전투에 임할 수있지만 한국은 울릉도에 배치된 방공레이더를 통해서 작전을 해야하기때문에 제한적인 시야만을 가진 상황이다. 예를 들면 오키에서 이륙하여 저공으로 독도에 접근한다면 울릉도에 배치된 FPS-117 레이더는 지구 곡면때문에 수평선 아래로 가려져서 독도 근방에 와서야 이들 전투기를 발견할 수 있다. 한마디로 조기경보가 안된다는 말이다. 물론 급한대로 P-3C 의 APS -137 레이더를 이용하여 제한적인 감시를 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도 조기경보기가 아닌 이상 단순한 탐지와 경보 수준의 지원이 가능할 뿐이다. 더우기 P-3C 는 해상초계 및 대잠작전이라는 고유한 임무를 수행하는 데만도 업무가 과중하기 때문에 쉬운 이야기가 아니다. 여기에 공중전투의 향방을 결정짓는 데 중요한 전자전( ECM ) 능력에 있어 일본이 우세하다. 일본의 전자전 능력은 정평이 나있어서 한국이 F-16 과 AIM-120 을 도입하였을때 일본은 호들갑을 떨며 긴장했었지만 일본은 곧바로 AIM-120 을 소량 시험용 명분으로 도입한 후 이를 분석하면서 자국 방산업체를 중심으로 이에 대응하는 전자전 장비를 개발( 실제는 기존형을 개량)하여 실전배치를 마친 상황이다. 이에 비해 우리는 일본이 독자적으로 개량/개발한 공대공 미사일들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상황이라서 우리가 확실한 열세를 보이고있다. 이런 여러가지 요소를 고려할때 한국은 일본이 마음을 먹고 독도를 침공하고자 할때 이를 막을 능력이 없다고 판단된다. 독도 상공에 대한 제공권을 우리가 확보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일본도 독도를 넘어서 강원도 해안을 넘어서기 어려울 것이다. 독도 제공권의 확보가 어려울지라도 아군 방공망이 백업하는 본토에 가까운 해안에서는 한국 공군이 일본공자대 전투기를 방어하는데는 큰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여기에는 중요한 변수가 있는데 일본이 과연 한국 본토의 방공레이더망과 대공미사일망을 정밀 공격하여 파괴할 능력이 있는가이다. 이 점에서 일본은 아직 준비가 덜되어 있다 . F-15 J 전투기에는 정밀 지상공격 능력이 없고, F-4 EJ 에게나 있는 정도이지만 이것도 정밀공격은 어려운 형편이다. 정밀한 표적획득과 지속적인 공격을 통해 한국공군과 대공방어망을 와해시킨다는 것은 현재의 일본 항자대 실력으로는 어려울 것으로 판단된다. 또 하나의 변수는 일본이 한국 본토를 공격한다는 것은 완전한 전면전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 경우에는 한국이 다양한 비대칭 전력을 사용하여 일본을 공격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잠수함을 이용한 수중 침투 공격이나 순항미사일, 현무 2 등의 미사일을 통한 공격 등이다. 이런 한국의 반격을 고려할때 어설픈 정밀공격 능력을 가진 일본이 한국 본토 공격을 결심하기는 어려울 것이고 독도와 강원도 해안 중간선 정도에서 한일 공군간의 저지선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생각된다. 이 저지선은 대마도 부산 해역에서는 매우 혼란한 상황을 보일 것으로 보인다, 양측 공군기지의 거리를 고려할때 한국이 부산과 그 주변 동남해안 일대의 공업지대를 방어하기 위해 공군력을 집중하여 방어할 것으로 보여 일본도 쉽게 접근하기는 어렵고 한국도 일본쪽 공역을 침공하기 어려운 상황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제공권 경계선은 대마도 부산 중간선에서 유지되어 서쪽으로 가면서 제주도 앞바다까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광주나 목포 등지에 전개될 공군전력과 제주기지에 배치될 전투기를 고려할 때 규슈지역 공군기지에서 출격하는 자위대 전투기들을 제주도 상공에서 저지하는 것은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즉 제주도는 방어가 가능할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이때 해군은 목포에서 출항해서 흑산도쪽으로 돌아서 제주로 가는 항로를 통해 제주도의 보급선을 유지할 수있을 것이다. 전반적으로 한국공군은 일본의 공군력의 압박을 해안선에서 100 km - 50 km 영역에서 저지할 수있을 것으로 보이며 대체로 이선이 양측의 제공권 확보 영역으로 나누어지겠지만 이 영역에서 양측으로 100 km 정도의 해역은 ( 적 공군기 활동을 고려할 때 50 km 정도 안쪽의 공역에서 공격한다고 가정할 때 ) 공대함 미사일 공격권이라서 양측 해군의 작전이 불가능한 영역이 될 것이다. 3. 해군전력 수상함은 공고급 이지스 구축함 4 척을 포함하여 자함 방공능력을 가진( 대공 미사일을 보유한 함정 ) 함정이 50 여척 : 6 척 / 구형 소형 초계함 9 : 34 척 으로서 한국해군이 절대적인 열세를 보인다. 그러나 양국의 수상함대는 제공권을 벗어난 작전을 수행할 능력이 부족하므로 ( 공중감시 및 방어 능력 미비 ) 한일간 전쟁이 벌어질 경우 양측 모두 자국 공군의 제공권이 확보된 해역에서만 작전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양측 공군이 형성하는 제공권 영역을 고려할 때 양국 해군의 작전은 다음과 같은 범위를 가지게될 것이다. 일본은 동해에서 독도와 울릉도 주변 해역까지 작전이 가능하겠지만 한국공군의 강원도 해안에서의 장거리 공대함 미사일 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높아서 이 작전은 제한적인 수준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즉 울릉도쪽으로의 접근은 조심스러울 것으로 보이고 독도 주변 해역과 독도 오키 사이 해역에서 주로 작전을 하게될 것이다. 물론 독도상공에서 제공권 확보를 위한 치열한 공중전이 벌어질 동안 양국해군이 원거리 미사일교전을 벌일 가능성도 있어 보이지만, 한국해군이 절대 열세인 상황에서 쉽사리 해전에 응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열세의 상황에서는 해군 전력보존이 더 중요할 것이고 해군은 동해 함대를 서해로 퇴각 시켜 보존하거나 동해에 남아서 결전을 벌일 것인지 여부를 결심해야할 것이다. 만일 동해에 남아있는다면 독도 제공권을 빼앗긴 후 동해안의 한국 함대는 북한 해역으로 피하지 않는 이상 동해안에서 생존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즉 동해는 일본해군이 제해권을 확보하게 될것이라는 얘기다. 대마도 부근해역은 어느 해군도 작전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양측 해군이 상대방의 지대함 미사일 사정권을 의식해야하기 때문이다. 일단 대마도에 배치될 것으로 예상되는 지대함 미사일 포대 ( 현재 일본은 150 개의 지대함 미사일 발사차량에 600 여기를 운용중 ) 를 고려할때 한국해군은 부산에서부터 진해 광양에 이르기까지 작전이 불가능하다. 물론 공중공격을 고려한다면 진도 부근 해역에서의 작전까지도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결국 한국해군은 제공권의 열세로 동해와 남해에서의 작전이 불가능하고 목포기지를 최전선으로하는 서해함대로 전락하게될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정리하면 동해는 일본이, 서해는 한국이 남해는 양측 모두 활동이 어려운 교착상태에 있게될 것으로 보인다. 일본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아서 일본 수상함대는 남해안의 섬에서 발사할 지대함 미사일의 위협을 고려할때 현재의 남해 쪽 한일 EEZ 경계선을 넘어설 능력이 없다. 공중 공격까지 고려한다면 사세보 부근에서부터 항상 경계태세를 갖추어야할 것으로 보인다. 일본도 수상함대를 가지고 한국을 직접 공격하거나 위협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말이다. 다만 일본이 할 수있는 일은 제주도 남방 해역이나 오키나와 주변 해역에서 한국에서 나오거나 한국으로 향하는 선박을 검문해 저지함으로써 한국 해상 수송로를 봉쇄하려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배후에 중국이 있는 한 봉쇄가 이루어질수 없다. 한국은 서해를 통해 중국 항구에 하역을 하여 환적을 할 수있고 필요시에는 중국 해안을 따라 항해함으로써 일본의 검문을 피하여 홍콩이나 중동, 유럽으로 해상 수송을 할 수있다. 아메리카 대륙으로의 화물은 중국에서 환적을 하여 수송하는 방법이 가장 좋을것으로 보인다. 한마디로 아무리 일본 해군이 커도 한국의 해상 수송로를 완전히 봉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잠수함 전력은 일본이 3000 톤급 17 척 : 한국 1200 톤급 9 척으로서 숫적인 열세에따른 전력 불균형은 명백하다. 디젤 잠수함은 그 특성상 길목이 되는 특정 해역에 매복하고 있다가 기동하는 수상함대나 수송선을 공격하는 임무나 적 항구 주변에 침투하여 기뢰를 매설한다든지 아니면 선박의 왕래가 빈번한 해역에 매복하여 무차별 공격을 펼치는 식으로 운용하게될 것이다. 일본은 일단 서해로 피해 있는 한국 수상함대를 찾아 공격하거나 목포 평택 군산 인천 등의 항구에 침투하여 기뢰를 부설하려 하겠지만 서해는 매우 수심이 낮고 해저 지형이 복잡, 잠수함 작전이 가능한 영역( 거의 수로 수준) 이 제한되어 만만치 않은 작전이 될 것이다. 즉 지형상의 이점을 이용하여 한국은 잠수함 몇척을 주요 수로에 매복시키고 대잠 헬기와 구축함들을 가지고 일본 잠수함대 공격을 충분히 방어할 수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일본은 잠수함을 이용하여 중국으로 쪽으로 향하는 수송선단이나 중국으로부터 오는 수송선단을 공격하려하겠지만 이것도 서해의 낮은 수심과 중국을 자극할 가능성 때문에 자유로운 공격이 어려운 형편이다. 일본은 한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항구가 많고 먼거리에 분산되어 한국이 잠수함으로 항구를 봉쇄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한국해군이 주요 항구를 선별하여 항구 주변에 기뢰를 부설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일본의 해안은 대양에 접한 해안으로서 잠수함침투 작전을 펼치기에 큰 어려움이 없는 상황이다. 물론 일본의 막강한 대잠전 능력은 한국 잠수함대의 작전에 엄청난 압박이 될것이다. 이런 압박은 주로 80 여기나 되는 해상초계기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여기에 100 여대에 가까운 대잠 헬기도 상당한 위협이다 그러나 일본의 국토 길이는 3000 km 이상이고 ( 홋카이도에서 오키나와까지 ) 해안선은 1만 km 이상이다. 상대적으로 작은 한국이 방어에 유리한 반면 큰 일본은 방어에 불리한 면이 있다. 숫자는 적지만 소음이적고 은밀한 작전에 유리한 한국 잠수함대는 일본을 생각보다 많이 괴롭게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어보인다. 양측 잠수함대는 제공권이 한쪽으로 기울지않고 교착상태에 머무르는 상황에서 수상함의 작전이 제한되므로 유일한 해군작전 전력으로 활약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서해와 중국이라는 변수에 제한되는 일본측보다는 한국측이 더 활발한 작전을 벌이게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일본의 막강한 대잠전력을 고려할때 이런 잠수함작전은 소모율이 높아서 지속적인 작전은 불가능할 것이다. 4. 비대칭 전력 많은 사람들이 한국의 비대칭 전력에 상당한 기대를 보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큰 변수가 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많은 매니아들이 큰 기대를 가지는 특수전부대 전력은 소규모 침투를 통해 게릴라전을 벌여 혼란을 줄수는 있으나 일본에게 핵심적인 타격을 줄 정도의 대규모 상륙/침투 능력은 없다. 일단 일본의 조기경보기를 비롯한 치밀한 방공능력과 대잠전력을 고려할때 대규모 침투나 상륙작전은 불가능하다. 물론 소규모로 침투하여 게릴라전을 펼침으로써 일본을 괴롭게하는 정도는 가능하겠지만 이런 게릴라전으로 전쟁의 향방을 바꿀 가능성은 거의 없다. 한국이 가진 비대칭 전력으로는 미사일 전력이 있다. 일본이 제대로된 대지공격용 미사일을 가지지 못한 데 비해 한국은 현무 2 등이 전력화되는 중이라 한국이 우세한 분야이다. 물론 아직은 일본에게 치명적인 타격은 불가능할 정도의 적은 수량이지만 매우 고통스럽게 만들 수있는 능력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순항미사일의 경우 조기경보기로 어느정도 감시 추적은 가능하지만 동시에 수십기 이상 발사한다면 방어하기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아직 한일 양측 모두 공격이나 방어 준비가 덜 된 상황이라 전체적인 대세에 끼치는 영향은 미미할 것으로 보인다. 5. 결론 정보전 능력에서 일본이 명백하게 앞서지만 절대적인 우세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일본이 더 잘 듣고 더 잘보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일본도 이 본 것을 제대로 활용하여 방어하는 데는 어느정도 능력이 있지만 공격하는 데는 별로 준비가 안 돼있는 상황이며 어느쪽이든 미국이 도와주지 않으면 현대전의 핵심 키워드인 정밀타격 능력을 발휘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공군력에서 일본이 우세하여 독도 주변과 대마도 상공에서의 제공권은 일본이 가지게 되겠지만 일본은 한국의 본토를 침공하여 방공망을 와해 시킬 정밀 공격능력의 부재로 교착상태를 이룰 가능성이 높다. 일본은 아직 준비가 덜 되었다. 그러나 이런 제한을 극복하는 것은 일본이 마음만 먹으면 단기간 내에 가능하다. 어느쪽이든 본토를 쉽사리 공격하여 확전시키지 못할 것이고 섣불리 확전을 시도하다가는 상대방 본토에 대한 무차별 공격을 당하게 되어 양국 모두 경제-정치-외교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된다. 만일 양국의 주요 반도체 공장이나 조선소 자동차 공장이 파괴된다면 전세계 경제는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될 것이다. 만일 무차별 공격을 벌이는 전면전이 되어버리면 한국보다는 일본이 더욱 불리하다. 한국은 장거리 공격능력이 이미 갖추어가는 상황이고 중요 표적이 될만한 아까운 시설은 일본이 훨씬 더 많이 가지고 있다. 일본은 대마도에 대함미사일을 배치하는 것만으로도 한국의 부산항과 광양항을 봉쇄할 수 있지만, 인천이나 평택항을 봉쇄할 능력은 없다. 한국 해군은 동해와 남해에서 쫒겨나서 서해쪽에 피해 있게될 것이다. 서해쪽의 항구들은 잠수함 봉쇄를 시도하기에는 너무 얕은 해역이고 제공권 확보가 어려워서 수상함 봉쇄가 어렵다. 그리고 오키나와 주변 해역에서 한국 선박을 검문하여 봉쇄한다 하더라도 한국 선박은 중국연해를 따라 홍콩으로 나아갈 수 있고 상하이에서 환적할 수 도 있어서 완전봉쇄는 이루어지지 못한다. 한국은 잠수함을 이용하여 제한적인 일본의 해상수송로에 대한 공격은 가능하지만 지속적인 작전이 불가능하여 일본에 대한 해상로 봉쇄는 이루어질 수없다. 한마디로 일본이든 한국이든 상대방을 확실하게 굴복시키거나 패퇴시킬 능력은 아직 없다는 것이 결론이다. 일본은 한국을 본격적으로 침공할 능력을 갖추기까지는 우발적인 충돌이 벌어지더라도 전면전으로 확산되기 전에 미국이나 중국을 통해 외교적인 봉합을 시도하려 할 것으로 보인다. 그냥 퍼왔는데 문제가 된다면 쪽지주시면 바로 지우겠습니다..맘대로 퍼온거라 문제가 될지 모르겠네요..^^;
제멋대로작성일
2006-04-27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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