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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테크] [금융] 2030 직장인을 위한 성공재테크 전략
지난주 금요일 한 직장인이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펀드상담을 신청하였다.
이름만 대도 알만한 대기업에 다니고 있는 그는 단순히 목돈을 만들기 위해 적립식펀드 투자를 한다고 했다. 적립식이고 30대초반의 젊은 나이이기에 비과세혜택이 유지되는 공격적인 성향의 국내 성장형펀드를 권해주고 펀드에 재무목표라는 이름표를 붙이라고 조언해 주었다.
대부분 펀드에 투자를 하고 있지만 ‘펀드에 투자해서 이 돈은 언제 어디에 써야지!’라는 구체적인 목표가 없는 경우가 많다. 필자는 상담할 때마다 예금이건 펀드건 통장에 목표라는 생기를 불어 넣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금번 호에서는 직장인들을 위한 월급통장 활용 노하우와 재무설계에 관해 정리하고자 한다.
얼마 전 취업포털 리쿠르트에서는 흥미로운(?) 설문결과를 발표하였다.
직장인 2명 중 1명은 월급을 받은 지 17일 만에 다 써버린다는 것이다. 특히 남자보다 여자가, 미혼보다 기혼자가 이런 경향이 강했으며 월급을 모두 써버리는 데 걸리는 시간은 평균 17.2일로 조사됐다. 주된 이유로는 대출과 빚 때문이라는 응답이 30.8%, 월급이 적어서, 물가가 많이 올라서 등 순으로 나타났다.
실제 월급날이라고 해서 설레고 기뻐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듯 하다.
잊지 않고 고스란히 빼가는 신용카드 사용대금, 대출원리금, 보험 및 예금상품 등으로 자동이체 되고 나면 통장이 바닥인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우 비상금을 이용하거나 카드 현금서비스를 전전하다가 돌려막기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악순환의 고리를 더욱 튼튼히 만들게 된다
#샐러리맨의 3개의 주머니: 생계자금·자산축적·오락 주머니
세계적인 증권사에서 자금을 운용했고 챨스슈왑의 사장을 역임한 티모시 메카시는 샐러리맨들에게 3개의 주머니를 준비하라고 한다. 3~6개월간의 비상자금으로 현금처럼 쓸 수 있는 CMA·RP등에 운용하는 생계자금 주머니, 재산증식을 위한 투자(주식·채권·펀드 등)용 오락주머니, 그리고 목돈마련(결혼·출산·교육·내 집 마련)과 노후보장용 자산축적 주머니가 그 3가지이다.
통장을 이렇게 분류하라는 것은 우선 재무목표를 먼저 설계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국가·기업·개인 모두 기준에 입각한 경영원칙이 없이 무리한 투자와 소비를 하게 되면 위기를 맞게 된다. 국가는 97년과 같은 IMF금융위기, 기업은 흑자도산 그리고 개인은 파산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미혼이라면 결혼, 내 집 마련 등의 재무 목표를 세우고, 기혼이라면 자녀출산, 교육, 내 집 마련, 노후설계라는 재무목표를 세우는 일은 인생설계를 하는데 기초공사와 같은 꼭 필요한 과정이다.
#재무목표를 우선적으로 설정하라!
재무목표를 설정하라고 하면 어렵게 느끼는 경우가 있는데 ‘살아가면서 맞이하게 될 일들에 대비해서 통장을 하나씩 준비하라는 의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목표가 있는 사람만이 땀을 흘린다는 말이 있다. 목표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행동에는 큰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학생으로서 직장인으로서 누구나 단기 중기 장기적인 목표를 세우고 작은 성과이지만 목표를 달성함으로써 큰 만족과 행복을 느끼게 된다.
재무목표설정은 단기적인 계획뿐 아니라 1년 10년 20년까지의 장기 계획도 필요하다.
대부분의 직장인이라면 유일한 돈줄은 월급이며, 이 월급을 활용하여 작은 돈으로 목돈을 만들어 재테크를 해야 한다.
따라서 각각의 목표에 맞는 통장(적금, 채권, 주식, 펀드 등)을 만들어 기계적으로 자동이체가 되게 한 후의 자금으로 생활을 하고, 여유자금을 모아 투자용 오락주머니를 활용하는 것이 순서이다. 이처럼 결혼, 출산과 아울러 자녀교육비, 자녀 결혼비용, 내 집 마련용 통장을 만들어 각각의 통장에 이름표를 붙여놓고 장기투자마인드로 접근한다면 단기적인 투자성과에 흔들리지 않고 시간이라는 우군을 활용한 복리투자에 성공할 수 있다.
#선 저축 후 소비하는 습관을 길러라!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수많은 인생의 이벤트를 맞이하게 된다.
졸업 후 취업, 결혼, 출산, 내 집 마련, 자녀 출가, 은퇴, 노후를 거쳐 아름다운 추억과 수많은 사람들의 애도 속에 생을 마감하게 된다. 이러한 이벤트마다 돈이라는 현실적인 문제를 대하게 되며, 각각의 이벤트에 맞는 필요자금을 준비했다면 즐거운 이벤트가 될 수 있는 반면 그렇지 못했다면 고통스럽고 비극적인 이벤트가 될 것이다.
따라서 소득(월급)이 크던 작던 선 저축 후 소비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위에서 나열한 이벤트와 필요한 자금들의 재무목표를 세워 먼저 저축한 후 소비를 해야지, ‘인생 뭐 있어?’라는 식의 쓸 것 다 쓰고 즐기고 난 후 저축하다가는 비극적인 이벤트를 맞이하게 된다.
#부자들의 제1의 습관: 절약하고 세는 돈을 막는다!
모든 부자들은 단돈 10원이라도 의미 없는 곳에 쓰지 않으며, 적은 푼돈이라도 이자가 높은 곳이라면 발 품을 파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선 의미 없이 세는 돈이 없는지를 체크해야 한다.
보험은 중복되어 지출되는 것은 없는지? 조금만 더 일찍 출근한다면 택시나 자가용 대신 버스를 이용하여 교통비를 줄일 수 있다. 또한 점심식사 후 당연히 손에 들려있을 점심값에 버금가는 값비싼 커피 대신 사무실 커피를 이용하거나, 담배를 줄이는 등의 세는 돈을 잡아야 한다.
흡연으로 인한 손해는 실로 적지 않다.
대학생시절 22살부터 지금까지 18년 동안 흡연을 한 사람의 담뱃값은 한 갑에 2,500원을 기준으로 했을 때 무려 16,200천원이었으며 하루 20개비(1개비당 이동시간을 고려하여 3분)를 18년간 피움으로써 무려 270일을 고스란히 공중에 돈을 뿌리고 건강을 악화시키는데 투자해온 셈이다.
이 돈을 년 10% 금융상품에 투자한다고 했을 때 43,000천원의 수익을 낼 수 있다. 돌이켜보면 얼마나 많은 기회손실이 발생했는지 알 수 있으며, 미래의 기회손실 또한 가늠해 볼 수가 있다.
이뿐이랴? 흡연의 부작용으로 인한 건강악화와 의료비용과 사회적인 비 호감은 그 어떤 비용으로도 환산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또한 부자들은 금융재테크에 성공하여 부자가 된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금융재테크는 물가상승률을 상회하는 수익을 내면 만족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좀처럼 무리한 투자에 나서지 않으며, 따라서 손해를 보는 경우도 드물다. 부자들의 공통점은 직장인이건 개인사업자이건 자기가 하는 일에 최고가 되었으며, 그로 인한 부가가치로 부와 명성을 얻었다. 따라서 명확한 재무목표를 설정하여 장기투자 마인드로 단기적인 손실에 아까운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기 보다는 각자의 분야에서 최고가 되기 위한 노력이 가장 중요한 재테크의 포인트가 아닐까?
#급여통장은 어떤 것이 좋을까?급여통장의 현명한 선택이 필요하며 급여통장은 돈이 잠시 고이는 저수지이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의 급여통장은 입사에 인사부에서 일괄적으로 개설한 은행의 자유저축예금통장이다. 월급이 들어오면 상당기간 이 계좌에서 적잖은 돈이 보람없이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은행 통장들도 스윙서비스를 통해 금리를 차등하여 주기는 하지만, 급여통장으로서 제격은 CMA이다. 최근 일부 증권사에서 일정 조건(급여이체, 적립식펀드 가입)에 해당되면 4.5%의 고금리를 주는 CMA를 출시하고 있는데, 급여통장에 500만원이라는 돈이 있다고 했을 때 은행의 보통예금과의 차이는 실로 대단하다.
무려 22만원에 해당되는 금액이며, 4인 가족 기준 반년 동안 먹을 수 있는 쌀의 분량이다. 그러나 CMA는 재테크의 시작은 될 수 있지만, 만능 통장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월급이 잠시 머물렀다가 재무목표의 통장으로 가기 전에 잠시 머무르는 저수지이자 관문으로 활용해야 한다.
#노후준비를 월급만으로 잘 할 수 있을까?
지난해 S생명에서 조사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55%가 노후 준비라고 답했다. 그러나 이들 중 노후준비라고 가늠할 수 있는 연금상품의 가입자가 43%에 불과했으며, 이는 정작 필요성을 느끼면서도 쉽게 나서지 못하는 현실적인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아무튼 노후준비는 선택이 아닌 필수항목으로 급여생활자들에게 힘겹지만 지금부터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
기본적인 생활을 위한 최소장치로서 국민연금이 있다고는 하지만, 재정건전성악화 등으로 크게 믿을 바가 못 된다는 각오로 스스로 준비하는 것이 최선이다.
급여생활자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노후준비 상품은 연금상품이다. 가입하는 기관과 성격에 따라 연금신탁, 연금보험, 연금펀드로 나누지만 모두 연말정산 소득공제 혜택(연간 납입 보험료의 300만원 한도)이 있어서 장기투자로 인한 수익 외에도 연말정산 후 적잖은 세금을 돌려받을 수가 있다.
연금상품의 소득공제 효과는 장마펀드(불입금액의 40%범위 내 300만원 한도)에 비해 훨씬 크다. 납입금액의 100%(한도 300만원)에 대해 소득공제혜택을 주기 때문이다. 연봉 4000만원의 근로자가 년 300만원을 연금상품에 입금한다고 했을 때, 연말정산 후 되돌려 받는 세금은 528,000원에 달한다. 연말정산 세제혜택만 감안할 때 최고의 절세상품이 된다.
이 상품들은 5년 이내에 해지 시 기타소득세와 가산 세를 부담하므로 장기적인 목표 하에 가입해야 하는 대표적인 장기상품이다. 연말정산 소득공제 욕심에 무리해서 가입하지 말고, 노후용으로 당분간 없어도 되는 돈이라고 생각하고 가입하는 것이 좋다. 또한 특별상여금 등의 뜻밖에 수입이 생길 경우 연금상품 및 노후준비용 투자통장에 노후자금으로 추가 불입하는 것도 좋다.
그러나 이들 상품의 소득공제라는 아름다운 꽃 뒤에는 세금이라는 가시가 있다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연금상품으로 소득공제를 받게 된다면 연금수령 시 연금소득세 5%를 납부해야 한다. 또한 최근 감세로 인한 재정수지 악화로 소득세 인상여지가 있으며, 연금소득이 금융소득에 합산된다는 것도 감안하여 투자를 결정하는 것이 좋다.
#푼돈이 목돈을 만든다. 푼돈 모으기 노하우?
돈 모으는 법…… 살아가면서 쉼 없이 수행해야 할 고단한 과제이다.
각자 노하우가 있겠지만 쉽게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공유한다. 치사하고 구차하다고 하지 마라…… 돈이 생기지 않는가?
1. 지름신의 유혹을 뿌리쳐라!
평소에 갖고 싶었던 신상의 유혹을 과감하게 뿌리쳐라. 값비싼 신상 조금만 기다리면 더 싸게 살수 있다. 특히 남성들의 경우 음주후의 호연지기 기상으로 2차 3차를 외친 후, 아침에 숙취에 고생하고 카드 명세서에 한번 더 까무러치곤 한다. 절주를 통해 건강도 챙기고 음주가무 비용도 아껴보자!
2. 대형 할인마트…… 구입목록 리스트를 준비하고 가라!
할인마트에 가게 되면 나도 모르게 카트를 한 가득 채우게 된다.
생각지도 않았던 물건들이 싸다는 이유로 내 지갑을 호시탐탐 노리게 된다. 지금 싸니까 사뒀다가 나중에 쓰지 라고 생각하면 결국 쓰지 않을 물건을 사고 난 후 집에 와서 후회하게 된다. 대형마트에 갈 때는 반드시 필요한 목록을 준비하여 계획적인 소비를 하는 것이 좋다.
3. 신용카드보다는 현금이나 체크카드를 이용하라!
부자들은 좀처럼 신용카드를 쓰지 않는다.
세원노출이라는 부분도 있겠지만 무절제한 소비심리를 누르기 위한 것이다. 신용카드를 쓰게 되면 몇 천원이건 몇 백만원이건 무게감 없이 서명한번으로 계산이 되고 만다.
그러나 지갑에서 구겨진 천 원짜리 하나를 꺼내더라도 무게 감이 느껴지지 않은가? 또한 지갑 속에 당당하게 자리하고 있는 신용카드들 포인트와 할인이라는 미끼를 던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주력 카드를 제외하고는 해지하는 것이 좋다. 한 장의 신용카드가 지출관리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4. 수익이 부족하면 부업이라도 해라!
필자가 아는 사람은 게임회사의 캐릭터 디자이너이다.
그는 주말이나 쉬는 날에 무의미하게 보내지 않고, 인터넷을 통해 디자인 아르바이트를 하여 월급과 맞먹을 정도의 수입을 내고 있다. 내가 가진 실력과 노하우를 활용한 알바를 통해 돈도 벌고 능력도 배가 시키면 좋지 않을까?
5. 필수지출은 자동이체를 해라!
특히 펀드 및 적금은 월급날에서 가장 빠른 날짜에 자동이체신청을 해라!
김종석 /‘2010 실전 재테크 시나리오’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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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정남규.유영철.연쇄살인범들 얼굴공개사진 !!!
정남규
정남규는 지난 2004년부터 2006년까지 길가던 어린아이나 집에 있는 부녀자를 성폭행하고 둔기로 내려치는 잔인한 수법으로 2년 동안 무려 13명을 살해했으며, 20명이 중상을 입었다. 정남규는 유영철과 함께 범행 순간에 느끼는 쾌감을 위해 살인을 저질렀고 이후에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사이코패스의 전형으로 알려져 있다.
무고한 사람들을 제 맘대로 죽이고 자기는 또 자기스스로 목숨끊어? 나쁜놈 자기도 여러사람들이 원하는대로 죽임을 당해야하는건데 자기절로 목숨을 끊어버려?죽어도 시원찬은 놈..흠..정남규 이놈도 남한테 죽임을 당할때 그느낌을 받아 봐야되는데....
2003년 9월 11일 교도소를 출소한 유영철은 13일 후 서울강남구 신사동에서 명예교수 이은옥(72세)과 부인 이덕(67세)을 살해했으며, 그해 10월에는 9일에 종로구 구기동에서 강은순(82세) 등 일가족 3명을, 16일에 강남구 삼성동에서 유준희(60세)를 살해했다. 2003년 11월 18일 화요일에는 종로구 혜화동에서 김종석(87세) 등 2명을 살해했고, 2004년 4월에 노점상 안재선(44세)을 살해하고 시신을 월미도에 버렸다. 이에 앞서 2004년 3월부터 그해 7월까지는 마포구 노고산동의 한 오피스텔에서 한숙자, 고선희, 우주연, 김미영, 임미연(27세) 등 2004년 한 해 동안 여성 11명을 살해하여 서울 각지에서 주로 부유층 노인 또는 출장마사지사 여성 등 총 21명을 살해한 혐의를 받았다.
한편 유영철은 2004년 7월 18일 체포되었는데 현장검증에서 26명을 살해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안양 초등학생 납치 살해 사건은 2007년 12월 25일 경기도 안양시에서 이혜진(여성, 당시 10세, 초등학교 4학년)과 우예슬(여성, 당시 8세, 초등학교 2학년)이 동시에 납치되어 살해된 사건이다. 2008년 3월 11일 경기도 수원시 부근 칠보산 일대에서 이혜진이 시신으로 발견되어 최종적으로 살해된 것으로 3월 13일 판명되었다. 3월 16일 유력한 용의자 정성현(남성, 1969년생, 당시 38세)이 검거되었다. 3월 17일 용의자가 범행을 자백하며 자신이 우예슬도 살해했다고 실토하였다. 3월 18일 경기도 시흥시 군자천에서 토막난 우예슬의 사체 일부가 발견되었다. 3월 19일 발견된 사체는 우예슬의 것으로 확인되었다. 6월 18일 안양 초등생과 군포 부녀자 정 모(44세) 등 총 3명을 토막 살해한 범인 정성현에게 수원지법은 사형을 선고했다. 정성현은 이 날 판결에 불복해 고등법원에 항소하였으나, 10월 17일 서울고법도 정성현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정성현은 역시 이 날 판결에 불복해 대법원에 상고하였으나, 이듬해 2월 26일 대법원은 상고를 기각하고 사형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에고 나라 세금만 축내고 진짜 저런놈을 사형시켜야지 사형도 안시키고 ㅡㅡ
에효~~ 진짜 ,,, 사형이면 머하냐고 사형도 안시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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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교수시국선언 비난 나선 교수들 알고 보니 뉴라이트 계열 단체의 세몰이
교수 시국선언 비난 나선 '교수' 128명알고 보니 뉴라이트 계열 단체의 '세몰이'
"지금은 탄압받는 상황 아니다... 우리가 침묵하는 다수 대변"
09.06.09 08:38 ㅣ최종 업데이트 09.06.09 14:29
손병관 (patrick21)
시국선언
▲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이명박 대통령의 사죄와 전면적인 국정쇄신을 촉구하는 전국 대학교수들의 시국선언이 지방 대학으로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9일 오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대한민국의 미래를 생각하는 교수들' 주최로 열린 '일부 교수들의 릴레이식 시국선언을 우려한다' 기자회견에서 김종석 홍익대 교수(왼쪽에서 첫번째)가 기자회견 취지를 설명하고 있다.
ⓒ 유성호
시국선언
"지금은 권위주의 시절처럼 탄압받는 상황 아니다"
뉴라이트 계열의 대학교수들이 9일 대학가로 확산되고 있는 교수들의 반(反)정부 시국선언을 비난하는 기자회견으로 세몰이를 시도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뜻에 동조하는 교수들이 63개 대학 128명이라고 밝혔는데, 기자회견에 참석한 교수들 대부분이 뉴라이트 계열의 시민운동 단체에 몸담은 인물들이었다.
박효종 서울대 윤리교육과 교수 등 11명은 이날 오전 서울 무교동 프레스센터에서 '대한민국의 미래를 생각하는 교수들' 128명의 이름으로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들은 "4․19민주혁명이나 6․10 민주항쟁 때는 명백한 선거부정과 강압적인 통치방식에 대해 항거해야 한다는 지식인들의 공감대가 있었고, 또 이를 위해 촌각을 다투어야 하는 절박성도 있었지만 지금은 다르다"며 "현 시점에서 일부 교수들이 시국선언문을 발표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 태도인가 하는 점에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한국의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다"는 '반정부' 시국선언 교수들의 주장에 대해 "언론과 방송이 정부·여당의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또한 지식인들이 개별적으로 정부를 비판하는 글을 공개적으로 써도 과거 권위주의정권 시절처럼 탄압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니다"고 반박했다.
"침묵하는 다수를 무시하고 시끄러운 소수가 민주주의 위협"
이들은 기자회견에서 자신들의 생각이 지식인 사회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고 주장했다.
9일 오후 1시 현재 반정부 시국선언에 참여한 대학교수들의 숫자가 2500명에 육박했지만, 불과 128명의 서명을 받은 자신들이 '침묵하는 다수'를 대변하고 있다는 얘기다.
박효종 서울대 윤리교육과 교수는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민주주의가 후퇴한다는 주장은 좌파·진보진영에서 일관되게 펴온 담론인데, 이러한 담론이 국민적 공감대를 얻었다는 증거는 없다"며 "우리의 목소리가 사방에서 외치는 노예의 목소리가 아니라 침묵하는 다수의 생각과 지성을 대변한다"고 주장했다.
김종석 홍익대 경영학과 교수도 "침묵하는 다수를 무시하고 시끄러운 소수가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어느 쪽이) 다수냐 소수냐의 판단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숫자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도 교수 사회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잘 알고 있다. 우리와 뜻을 같이하면서도 여러 가지 사정으로 서명하지 못한 교수들도 있지만, 릴레이식 시국선언에 반대하는 교수가 절대 다수라고 생각한다."
이재교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87년 6월항쟁 때도 시국선언 교수의 숫자가 2000명을 넘지 못했는데 1500명이 적은 숫자가 아니다"는 기자의 물음에 대해 "6월항쟁 때의 시국선언은 교수들의 굉장한 용기를 필요로 했는데, 지금의 자유로운 분위기와 그 당시 분위기를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답했다.
"광장은 정부 재산... 개방 후 벌어질 사태 누가 책임지나"
이들은 정부와 서울시의 서울광장 봉쇄에 대해서도 '당연한 조치'라는 반응을 보였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경영학부 교수는 "서울광장을 개방한 후에 벌어질 사태에 대해 누가 책임질 수 있겠나? 아무도 책임질 수 없는 광장을 개방해놓고 '민주주의 후퇴'라고 얘기하는 것은 억지"라고 말했고, 이재교 교수도 "광장은 정부의 재산인데, 현저하게 질서를 어지럽힐 시위를 막기 위해서는 (광장 출입을) 막을 필요가 있다"고 거들었다.
특히 윤 교수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에도 정권 퇴진을 얘기하는 시위대가 있었냐? 지금은 광장 개방만 안 해도 정권 퇴진을 쉽게 얘기하는데, 그분들이 5년 전에도 이리 쉽게 정권 퇴진을 요구했는지 묻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 시절에도 진보(한미fta 추진)와 보수(국가보안법 폐지 시도)를 막론하고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각종 시위들이 적지 않았다. 2004년 10월 4일에는 반핵반김국민협의회에서 주최한 '국보법 사수 국민대회'가 서울광장에서 끝난 후 주최측이 청와대 행진을 선동하다가 물대포를 쏘는 경찰과 충돌했지만, 폭력사태가 생긴 후에도 보수단체의 집회가 불허된 일은 없었다.
ⓒ 유성호
시국선언
참여 교수 상당수는 뉴라이트 계열 시민단체 소속
9일 성명서를 발표한 교수들은 "6일 저녁에 첫 모임을 열었는데, 불과 3일 만에 많은 교수들이 동참했다"(김종석 교수)고 자랑했지만, 성명서에 참여한 교수들 상당수가 뉴라이트 계열 시민단체라는 인적 네트워크로 얽혀있었다.
박효종 교수와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바른사회시민회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고, 김종석 교수는 같은 단체의 공동대표와 전경련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장을 지냈다.
윤창현 교수는 바른사회시민회의 사무총장을, 전삼현 숭실대 법학과 교수와 최창규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같은 단체의 운영위원을 각각 맡고 있다. 조희문 인하대 연극영화과 교수는 바른문화예술포럼 회장을, 이명희 공주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는 반(反)전교조 성향의 자유주의교육운동연합 대표를 각각 맡고 있다.
뉴라이트 정책위원장을 지낸 안세영 서강대 국제대학원장과 김영호 성신여대 국제정치학과 교수(뉴라이트싱크넷 운영위원장), 이재교 교수(뉴라이트재단 이사)도 비슷한 성향의 교수로 분류되고, 황성빈 세종대 분자생물학과 교수는 '촛불시위 중단', '미디어법 개정 촉구' 등의 성명서에 참여했던 인물이다.
이명박 정부를 지지해온 이들이 반정부 시국선언에 이처럼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들은 이명박 대통령의 낮은 인기를 의식해서인지 "최근의 민심 이반에는 정부의 책임도 없지 않다"고 밝혔다.
박효종 교수는 "소통과 설득의 리더십 (부족이) 그분의 큰 문제가 아닌가 생각하고, 과감한 국정쇄신이 필요하다"며 "(우리의 주장이) 이명박 정부가 정치를 잘하고 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고 말했다.
이들의 성명서 전문은 다음과 같다.
일부 교수들의 '시국선언'을 바라보는 우리의 견해
지금 한국사회는 난국에 처해 있다. 전 세계적인 경제위기는 외환위기 때보다 더 험난한 고통을 강요하고 있고,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도 안보적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다. 여기에다 한국사회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극적 죽음으로 인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내외의 엄중한 상황은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마음을 합쳐 위기돌파를 할 것을 요구한다.
그럼에도 이 시점에서 일부 대학교수들이 '릴레이식'으로 시국선언문을 발표함으로써 국민들에게 혼란과 분열, 대립과 갈등을 부추기고 있는 사태를 깊이 우려하며 유감으로 생각한다. 지금이야말로 서로 상대방의 잘못을 따질 때가 아니라 각자 자신의 뒤를 돌아보고 엄중한 자기반성을 통하여 대한민국의 미래를 생각할 때이기 때문이다.
첫째, 우리는 대학교수들이 비판적 지성을 가진 지식인으로 사회와 정치발전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할 책무를 지니고 있으며, 과거에도 그런 역할을 해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 시점에서 일부 교수들이 시국선언문을 발표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 태도인가 하는 점에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과거 4․19민주혁명이나 6․10 민주항쟁 때는 명백한 선거부정과 강압적인 통치방식에 대해 항거해야 한다는 지식인들의 공감대가 있었고, 또 이를 위해 촌각을 다투어야하는 절박성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물론 정치권이 제 역할을 잘하고 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이명박 정부는 출범 때 약속한 대로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섬기는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지 못하다. 여당은 웰빙 체질을 벗지 못한 채 자신들만의 권력투쟁에 몰두하고 있으며, 야당은 반대를 위한 반대로 일관하면서 기회만 있으면 국회보다 광장으로 달려 나가려 하고 있다. 이 모두 국민들의 여망을 저버리는 실망스러운 처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정부 정책에 비판을 하고자 한다면 정상적인 방식을 통해 따지고 수정을 요구하는 것이 우리가 발전시켜 온 민주주의의 원리에 맞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둘째, 우리는 시국선언문들에 담겨있는 내용이 균형 감각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에 우려를 표명한다. 한국사회 다수의 사람들이 이념적 입장을 떠나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라 좌와 우, 진보와 보수, 여와 야 등 정치적 입장에 따라 시각과 견해가 첨예하게 달라 쟁점이 될 수밖에 없는 문제들을 마치 국민들 사이에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는 시대적 요구인 것처럼 포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점은 비판적 지성으로서 공정하고 정직한 태도가 아니다.
셋째, 일부 교수들은 시국선언문에서 한국의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우리는 이러한 주장에 결코 동의할 수 없다. 언론과 방송이 정부․여당의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또한 지식인들이 개별적으로 정부를 비판하는 글을 공개적으로 써도 과거 권위주의정권 시절처럼 탄압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가하면 경찰은 물매를 맞으면서도 폴리스라인을 넘는 일부 과격폭력시위에도 인내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현실을 두고 과연 민주주의의 후퇴라고 할 수 있는지 묻고 싶다.
자유는 방종과는 다른 것이다. 자율과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다. 쇠파이프와 화*까지 등장하는 불법․폭력을 동반하는 집회․시위마저 허용하는 것은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 자유의 남용에 이른 불법행위에 대해 엄정한 법집행을 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후퇴가 아니라 국민의 안전과 사회의 평화, 나아가 민주주의의 수호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우리는 믿는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일방적 내용을 담은 시국선언이란 형식을 통해 자기의 일방적 주장을 기정사실화하기보다는 공론의 장에서 건설적 대화와 학문적 소통을 통해 접근하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는 것이 우리의 판단이다. 이에 우리는 적절한 시점에서 공개적 학술토론회를 개최할 것을 정중하게 제안하는 바이다.
지성은 지성다운 태도를 가질 때 의미가 있다. 소금이 짠맛을 잃는다면 소금이라고 할 수 없는 것처럼, 지성도 마찬가지다. 지성이 불편부당성과 겸손함을 가질 때, 비로소 지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 자신들만이 공감하는 정파적 내용을 일방적으로 시국선언이라는 형식을 빌어 발표하는 것은 불편부당하고 공정한 방식이라고 할 수 없다. 사회적 공감대가 없어 쟁점이 되고 토론의 주제가 될 만한 사안들을 굳이 선언문형식으로 발표하여 국민들을 격동케 하는 것은 지성의 바른 표출이라고 볼 수 없으며, 국민에 대한 예의도 아니라고 본다. 또 각 대학공동체의 전체 구성원이 아닌 소수 교수들의 의견을 '00대학교수 일동'이라고 하면서 그 대학교수 전체의 의견처럼 사회에 비치게 하는 것도 바람직한 태도는 아니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로 국민 모두 충격을 받은 상황에서 지금은 어느 때보다 통합과 안정이 필요한 시기이다. 모든 이들의 중지를 모아 작금 우리가 처한 심각한 내우외환을 슬기롭게 극복해야 할 때, 자신들만의 정파적인 견해를 정론인 것처럼 강변함으로써 사회에 혼란을 조성한다면 이는 무책임한 비지성적인 태도라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 '남 탓'을 하기보다 스스로의 잘못은 없었는지 차분히 성찰하고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함께 힘을 모을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자 한다.
2009. 6. 9대한민국의 미래를 생각하는 교수들
강경근(숭실대) 강규형(명지대) 강신천(공주대) 강용구(공주대) 강철희(연세대) 곽태원(서강대) 곽한병(경기대) 구정모(강원대) 권근원(서경대) 권봉상(경기대) 김경환(성균관대) 김경환(서강대) 김관보(카톨릭대) 김광윤(아주대) 김명수(한국교원대) 김민호(성균관대) 김성수(강남대) 김세곤(동국대) 김세중(연세대) 김영기(경인교대) 김영호(성신여대) 김용직(성신여대) 김용철(부산대) 김원식(건국대) 김정동(연세대) 김종석(홍익대) 김지철(세종대) 김창석(공주대) 김형곤(건양대) 김호섭(중앙대) 남성일(서강대) 노부호(서강대) 류병운(홍익대) 류청산(경인교대) 류해일(공주대) 문선화(부산대) 박동운(단국대) 박상규(연세대) 박영석(조선대) 박인환(건국대) 박형래(강릉대) 박효종(서울대) 배기효(대구보건대) 배진영(인제대) 배호순(서울여대) 변지석(홍익대) 변홍식(계명대) 선우석호(홍익대) 성극재(경희대) 손기형(전남대) 손양훈(인천대) 송호열(서원대) 신도철(숙명여대) 신윤창(강원대) 안세영(서강대) 안재욱(경희대) 안종범(성균관대) 양준모(연세대학교) 엄기욱(군산대) 오성(세종대) 오한진(관동대 의대) 유세희(한양대) 유양근(강남대) 유호열(고려대) 윤석민(서울대) 윤창현(서울시립대) 이경주(홍익대) 이규식(연세대) 이덕봉(동덕여대) 이명희(공주대) 이상복(강남대) 이상훈(재능대학) 이석규(세종대) 이성호(중앙대) 이영철(광주대) 이윤식(인천대) 이은영(한국관광대) 이재교(인하대) 이종남(극동대) 이종호(공주대) 이지환(경인여대) 이채식(우송공업대) 이평우(고려대) 이학식(홍익대) 이한식(서강대) 이형렬(대전보건대) 이훈구(연세대) 임석철(아주대) 임주영(서울시립대) 장명화(호원대) 전삼현(숭실대) 전선영(용인대) 전엄봉(수원대) 전영록(제주관광대) 전용덕(대구대) 전정수(서경대) 전홍찬(부산대) 정규석(강원대) 정기택(경희대) 정승윤(부산대) 정인교(인하대) 제성호(중앙대) 조동근(명지대) 조동섭(경인교대) 조동우(포항공대) 조성환(경기대) 조승호(강남대) 조윤영(중앙대) 조중근(장안대) 조희문(인하대) 천세영(충남대) 최강식(연세대) 최 균(한림대) 최석만(세종대) 최 인(서강대) 최창규(명지대) 하우봉(전북대) 한혜빈(서울신학대) 허원기(인하대) 허 윤(서강대) 홍기칠(대구교대) 홍성걸(국민대) 홍의석(광운대) 홍재욱(인천대) 황성빈(세종대) 황혜정(조선대) 황홍섭(부산교대)
출처 : 교수 시국선언 비난 나선 '교수' 128명알고 보니 뉴라이트 계열 단체의 '세몰이' - 오마이뉴스
서울대 시국선언할때 교수 몇천명 중에서 겨우 백몇십명이냐고 비웃음치더니
니들은 63개 대학 수십만명 교수중에 겨우 128명이냐?
출처 : 한열사
71번작성일
2009-06-10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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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글터] [펌]한국 희대의 살인마들(기네스북에도 올라가 있는)
1.우범곤순경
1982년 4월 26일 오후 9시 30분쯤 경남 의령경찰서 궁유지서에 근무하는 우범곤 순경(당시 27세)이 예비군 무기고에서 카빈소총 2정, 실탄 129발, 수류탄 6발을 들고 나와 8시간 동안 궁유면내 4개 마을을 쏘다니며 무차별 난사, 주민 56명을 죽이고, 34명이 중상을 입었다.
우 순경은 우선 우체국에서 일하던 전화교환원을 살해, 외부와 통신을 두절시킨 뒤 전깃불이 켜진 집을 찾아다니며 총을 쏘고 수류탄을 터뜨렸다.
살해당한 사람은 1주일된 영아부터 70세가 넘은 할머니도 있었다. 우 순경은 자정이 지나자 총기난사를 멈추고 평촌리 외딴 농가에 몰래 들어가 서 씨 일가족 5명을 깨운 뒤 27일 오전 5시 30분쯤 수류탄 2발을 터뜨려 자폭했다.
경찰은 평소 술버릇이 고약했던 우 순경이 내연의 처와 말다툼을 벌인 뒤 술취한 흥분상태에서 좌천에 대한 인사불만과 애정문제가 폭발하면서 일어난 우발적인 사건으로 결론지었다.
서정화 내무부장관이 물러나고 당시 근무지를 이탈했던 의령서장 등 3명의 경찰관과 방위병 3명이 구속됐다. 허술한 무기관리와 진압체계의 취약 등 경찰의 고질적인 문제점을 드러낸 대표적인 사건으로 남아있다. 또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경찰관이 무고한 주민에게 총을 마구 쐈다는 점에서 충격이 더 했다.
2. 대구 지하철 방화범 김대한
대구광역시 중구 성내동(城 內洞) 중앙로역 구내에서 50대 남자가 플라스틱통에 들어 있는 휘발유에 불을 붙인 뒤, 바닥에 던져 12량의 지하철 객차를 뼈대만 남긴 채 모두 태워버린 대형참사로, 2003년 2월 18일 오전 9시 53분에 일어났다.사고 원인은 50대 중반의 한 지적장애인이 자신의 신병을 비관하다 판단착오로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다. 이 방화범은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南山洞) 명덕역에서 지하철을 탄 뒤 경로석에 앉아 있다가, 성내동 중앙로역에서 열차가 서행하는 틈을 타 갑자기 불을 질렀다.이 사고로 열차는 완전히 불에 타 뼈대만 남았고, 중앙로역 천장과 벽에 설치된 환풍기, 철길 바깥쪽 지붕들도 모두 녹아 내려 역 구내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바뀌었다. 출근시간이 지나기는 했지만, 많은 시민들이 타고 있어서 인명피해도 엄청나 192명이 사망하고 148명이 부상을 당하였다.사고 다음날 정부는 대구를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하였으나, 사고 직후 대구광역시와 지하철 종사자들이 사고를 축소·은폐하고, 현장을 훼손하는 등 부실한 대응으로 피해가 확대된 것으로 밝혀져 더 큰 충격을 주었다. 이로 인해 방화범과 지하철 관련자 8명이 구속 기소되었고, 방화범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이 사고로 지하철 관련기관 사이의 공조체제 구축, 사고현장 탐색 및 복구, 훼손된 시신의 개인식별, 유족지원 등 대형참사와 집단사망에 따른 각 과정의 체계화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3.유영철
유영철(柳永哲, 1970년 4월18일 ~)은 20039월부터 2004 7월까지 20명을 연쇄 살인한 범죄자이다.(21명으로 알려져 있으나 20명이다.
2003년 9월11일 전주교도소를 출소한 유영철은 13일 후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서 명예교수 이은옥(72세)과 부인 이덕(67세)을 살해했으며, 그해 10월에는 9일에 종로구 구기동에서 강은순(82세) 등 일가족 3명을, 16일에 강남구 삼성동에서 유준희(60세)여사를 살해했다. 2003년 11월 18일 화요일에는 종로구 혜화동에서 김종석(87세) 등 2명을 살해했고, 2004년 4월에 노점상 안재선(44세)을 살해하고 시신을 월미도에 버렸다. 이에 앞서 2004년 3월부터 그해 7월까지는 마포구 노고산동의 오피스텔에서 한숙자, 고선희, 우주연, 김미영, 임미연(27세) 등 2004년 한 해 동안 여성 11명을 살해하여 서울 각지에서 주로 부유층 노인 또는 출장마사지사 여성 등 총 21명을 살해한 혐의를 받았다
4.정남규
"죽이고 싶었다. 다""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자기 나름대로는 천명을 채워야 하는데, 천명을 채워야하는데, (잡혀서) 억울하다.""아주 단호하게 '내가 미안한 감을 느꼈으면 그 짓을 했겠느냐.'
죄의식이나 이런 것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어요."
5.조승희
조승희(1984년1월18일 ~ 2007년 4월 16일)는 버지니아 폴리테크닉 주립 대학교 1.5세이다.
버지니아 폴리테크닉 주립 대학교에 따르면, 조승희는 이 학교 영문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대한민국 서울시 도봉구에서 태어나, 한국 국적을 가졌지만, 어릴 때 미국으로 이민 와서 미국 영주권을 가지고 있고 버지니아 주의 센트레빌에 주소가 등록 되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학내 기숙사인 하퍼 레지던스 홀(harper residence hall)에 살고 있었다. 현지 경찰은 그가 글록 19, 발터 p22 두 정의 권총을 소지하고 기숙사에서 최초의 두 명을 총으로 쏘아 죽였으며, 2시간 반 후 수업 중이던 강의실 몇 곳을 오가며 총을 무차별적으로 난사한 뒤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이 사건으로 32명이 사망하였고, 29명이 부상 당했다고 집계되었다. 경찰은 총기 지문 확인을 통해 그가 범인이라고 밝혔다.
6.백백교 전용해
1923년 가평에서 백백교를 창시하였다. 민심 교화와 광명 세계의 실현을 명분으로 포교를 시작하여 신도들의 금품을 갈취하고 여신도들을 성폭행했다. 또한 배반할 기미가 보이는 314명의 신도를 죽이거나 생매장하였다. 1937년 수사망을 피해 도망치다가 자살했다.
7.김대두
1970년대 9월즈음 일주일 사이에 평택,양주,시흥,수원등의 4개지역의 외딴집에서 일가족이 글로 표현하기도 참혹할 정도로 살해당한는 사건이 발생했다.노인 어린이 갓난아기라 할것도 없이 생명이란게 있으면 무작정 죽이는 그런 사건이 벌어진것이다
김대두는 2004년 유영철사건이 발생할때까지 총 17명을 연쇄살인한 희대의 살인마로 기록된다.
8.지존파
현실사회에 대해 일찍부터 불만을 품어 온 김기환은 1997년 4월경 학교 후배 강동은, 교도소 동기 문상록 등과 함께 전라남도 함평군 대동면에서 대학입시 부정사건에 대해 의견을 나누다가 부유층에 대한 증오를 행동으로 나타내자는 데에 뜻을 같이하였다. 지존파라는 이름의 범죄집단을 조직하고 1,200여 명에 달하는 백화점 고객명단을 입수하여 범행대상으로 삼았다. 이해 7월 일당 6명은 충청남도 논산에서 최미자를 성폭행한 후 연습 삼아 살해 암매장한 뒤 전라남도 영광군 불갑면 금계리의 지하실 아지트에 창살감옥과 사체를 은닉하기 위한 사체 소각시설을 갖추었다. 이어서 이종원-이모 부부, 소윤오-박미자 부부를 납치 감금하였다가 가까스로 탈출한 이모 여인을 제외한 3명을 모두 살해하고 사체를 토막내어 소각하는 등 9월 15일까지 4차례에 걸쳐 엽기적인 연쇄 살인행각을 벌였다. 이 사건은 조직에 가담했던 한 여인의 제보로 10월 6일 범인들이 모두 체포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재판 결과 검거되기 이틀 전에 조직에 가담한 이경숙을 제외한 두목 김기완을 비롯하여 강동은, 김현양, 문상록, 강문섭, 백병옥 등 지존파 전원이 강도살인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항소심과 대법원의 최종판결에서도 1심의 형량이 확정되어 11월 2일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9.화성연쇄살인사건
밥은먹고 다니냐?
◇화성 부녀자 연쇄강 간살인 사건일지▲1차=86년 9월 19일 오후 2시. 태안읍 안녕리 풀밭에서 이완임 씨(71)가실종 5일 만에 하의가 벗겨진 채 목이 졸려 살해된 시체로 발견됨.▲2차=86년 10월 23일 오후 2시 50분. 태안읍 진안리 농수로에서 박현숙씨(25)가 옷이 모두 벗겨진 채 양손이 뒤로 묶이고 스타킹으로 목이 졸려살해됨. * 흔적.▲3차=86년 12월 21일 낮 12시 30분. 이계숙 씨(22)가 약혼자를 만나고 귀가하다가 살해된 뒤에 정남면 관항리 논두렁에서 스타킹으로 목졸려 숨진채 발견. * 흔적.▲4차=87년 1월 11일 오전 10시 30분. 홍진영 양(18)이 태안읍 황계리 논에서 입에 재갈이 물리고 양손은 뒤로 묶인 채 목도리로 목이 졸린 시체로발견. 국부에서 혈액(b형) 검출.▲5차=87년 4월 23일 오후 2시. 권정분 씨(25)가 태안읍 안녕리 공장 옆의울타리 넝쿨 밑에서 하의가 벗겨지고 양손이 묶인 채 시체로 발견.▲6차=87년 5월 9일 오후 3시. 박은주 씨(29) 태안읍 진안리 야산에서 브래지어, 내의, 블라우스로 각각 세 차례 목이 졸린 시체로 발견.▲7차=88년 9월 8일 오전 9시 30분. 안기순 씨(54)가 팔탄면 가재리 농수로에서 블라우스로 목이 졸려 살해된 시체로 발견됨. 입에 재갈. 양손 뒤로 묶여 있고 * 흔적.▲8차=88년 9월 16일 오전 6시 30분. 박상희 양(14)이 태안읍 진안리 집에서 잠자다가 목이 졸려 살해된 채 발견. 남자의 체모 발견. 감정 결과 b형혈액형과 티타늄 원소 분석.▲9차=90년 11월 16일 오전 9시 50분. 김미정 양(14)이 태안읍 병점5리 석재공장 뒤 야산에서 목이 졸려 숨진 채 발견.▲10차=91년 4월 4일 오전 9시 30분. 동탄면 반송리 야산에서 권순상 씨
10.김선자살인사건
1988년 가정주부 김선자(49)가 친아버지와 동생을 포함, 5명을 독살한 사건이 발각됐다.
그는 1986년부터 2년간 건강 음료에 청산가리를 넣어 권하는 방법으로 채권자를 죽이고 금품을 갈취했다.
범행 동기는 카바레에 출입하며 쌓인 빚 300만원이었다.
10.도끼살인마 고재봉
△희대의 살인마 고재봉 서울에서 검거(1963) 희대의 살인마 고재봉이 검거됐다. 강원도 인제에서 이득중(36) 중령집에 침입,이 중령과 부인 그리고 세 자녀와 가정부 등 6명을 도끼로 무참히 살해한 후 귀금속을 훔쳐 달아난 고재봉은 범행 24일만에 한 상인의 신고로 서울에서 검거된 것이다. 검거된 고재봉은 1963년 12월12일 사형을 구형받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우범곤 순경 짧은 시간안에 연쇄살인 많이 한걸로 기네스북에도 올라가 있죠
출처 : 이종격투기 카페
71번작성일
2009-05-02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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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14연대 반란사건이후의 한국군의 숙군작업과 폐해.
사진은 14연대 반란사건이후 여수에서의 진압군과 진압군에 항복하는 시민인지 반란군 협조자인지 모르는 부녀자들 입니다.
숙군.. 소위말하면 군에서 있는 숙청을 이야기합니다. 한국군에서의 숙군은 14연대의 좌익들의 여수반란사건이후 에 명령불복종및 사상문제에서의 대두가 되면서의 숙군작업이 진행됩니다. 물론 그 숙군작업에서 글에서 나타나겠지만.. 김창룡이라는 아주 미친놈이 발광을 해대서.. 지휘관 인재들 죄다 참살하는 경우로 나가게 됩니다. 암튼 관련글이니 참고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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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군의 배경>
숙군의 주요 목표는 군부내의 좌익세력들을 몰아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숙군을 초래하게 된, 원인은 미군정의 오판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미군정은 한국인들이 현 정부보다는 그들 개개인이 밑고 있는 각 정당들에 대한 충성심이 높다고 판단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이유로 미군정은 한국인들이 단결하여 강력한조직을 만들기 힘들다는 이유를 들어서 군인들을 받아들이는데 아무런 평가나 제약을 두지 않았다. 군사국 고문인 이응준이 이러한 것에 제동을 걸고, 신원조회와 조사를 통하여 군인들을 받아들이고자고 주장하였으나,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미군정에 의해 거부된다.
그 결과, 좌익군사 사설단체에서 활동하던 이들이 대규모로 군에 입대하게 된다. 대표적인 예로, 국군준비대 부산지대 부위원장인 오덕준이 장교로 임관할 당시에 그를 따르는 수많은 사병들이 함께 입대했으며, 국군준비대 경북지부 간부였던 하재팔이 창설요원으로 입대하자 그를 따르는 수많은 무리가 또다시 군에 입대한 사실이다. 이밖에도 좌익반란 혐의를 띈채, 국군과 경찰로 부터 수배를 받던 수많은 사람들이 국군의 근간이 되는 국방경비대에 입대하게 된다.
이렇듯, 자신들의 입지를 마련한 이들 좌익세력들은 군부내에 점조직화하며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1947년 미소공회가 결렬된 후, 미군정은 산하의 방첩대에게 명령을 하달하여, 국군내에 있는 남로당 세력들의 활동을 감시하도록 했다. 그 이유는 국방경비대내의 좌익세력들이 확장하게 되면, 좌익에 의한 혁명적 상황이 발생했을 때, 자칫 국방경비대를 동원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숙군의 전개>
1948년 11월, 제주도에 있던 제 11연대의 연대장 박진경 대령의 암살사건이 군부내 좌익세력의 숙청에 대한 시발점이 된다. 우선 전군을 상대로 하여 구체적이고 대규모적인 사상검열이 시작되었다. 그 결과, 부산지역에 있던 11명의 장교들이 조사끝에 무혐의 처분을 받았으며, 제 10연대에서는 총 68명이 체포되었고, 제 1연대에서는 총 89명이 체포되었다. 뿐만 아니라 제 15연대에서는 총 102명을 체포하였으며, 제 4연대 소속의 하사관들이 대거 검거되었다.
당시 이범석 국방장관은 군인들의 사상에 매우 큰 관심을 가졌으며, "공산주의자들에 대해서 끝까지 항거하는 자세를 가진 군대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당시 군부내에서 이루어진 대규모의 숙군은 당시 출범한지 얼마되지 않은 정부의 가장 큰 과제 중 하나였기 때문에 숙군은 신속하게 전개되었다. 1948년 9월까지, 총 1,600여명의 군부내 공산주의자들과 좌익세력들이 검거되었다.
이렇듯 대규모의 숙군이 점차 확대되자 미 군사고문단은 서한을 통해, 혐의를 받은 이들에 대해서, 경찰이 아닌 군이 직접 조사, 처리하라고 제안한다. 그러면서 주한미군방첩대를 이양하기 위해서 국군방첩대의 창설을 권고한다. 이러한 이유로 1948년 9월 부터, 국군의 장교들과 사관후보생들을 상대로 1개월 간의 특무교육을 실시하였으며, 그 결과 총 40여명의 인원이 교육을 수료한 뒤, 각 부대로 돌아가 부대내에서 방첩대를 창설하게 된다.
또한 원활한 신원 조회를 위해 1948년 8월 부터, 경찰의 협조를 받아 지문 채취를 실시하였으며, 근 한달만에 전군의 절반에 해당하는 병력에 대한 지문채취를 끝내게 된다.
제주도에서 있었던 제 11연대장의 암살사건이 숙군의 시발점이었다면, 1948년에 있었던 여수 10 . 19 사건은 숙군이 대규모로 확대된 전환점이었다.
당시 이범석 국방장관은 10월 22일 연설에서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선동과 반동을 일삼는 무리들에 대해서 정부는 엄격한 조치를 취할 것이다"라고 밝힌다. 이어서 10월 24일 이승만 대통령도 "공사주의자들이 사회를 어지럽히고 있는 만큼, 강력하게 대응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11월에는 채병덕 총참모장이 "군부내의 사상이 불순한 장병은 물론, 물질적으로 좌우되는 장병과 장교들도 적발할 것이다"라고 밝히며, 곧 있을 대규모의 숙군을 천명한다.
이렇듯 정부가 군부의 숙군을 주장하던 당시, 정부와 대립하고 있던 국회도 숙군의 문제에 있어서는 한목소리를 내어 정부의 숙군에 대해서 힘을 실어주었다. 당시 국회에서는 국군이 공산주의자들과 좌익반란 혐의자들의 피난처가 되고 있다고 성토했다.
여수 10 . 19 사건에서 토벌에 회의적이고 소극적인 자세를 가진 자들이 대규모로 포착되고, 심지어 광주에 주둔하고 있던 제 4연대의 병력들 중 반란군에 합류하는 자들이 나타나자 곧 육군 정보국 산하의 조사반이 숙군을 위한 조사를 실시하였으며, 총 1천여명이 조사를 받아 이 가운데 150여명에 달하는 남로당 인원을 적발하였다. 또한 제 1여단에서도 대규모의 숙군이 실시되어 불순분자 600여명이 검거되었으며, 그 외에도 100여명의 장교와 1천여명의 병사들이 조사를 받았다.
1949년 3월 채병덕 총참모장은 다음과 같이 밝혔다. "군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건전한 사상과 우수한 장비이다. 과거 3년간 미군정의 잘못된 정책으로 인해 군부내의 공산주의자들이 대거 잠입하게 되었다. 하지만 10 . 19사건을 계기로 대규모의 숙군을 실시한 결과, 반란에 참가한 이들을 제외한 총 326명의 장교와 병사 1,170명을 처벌하였으며, 이중 이재복, 이용수, 김영식, 김종석, 최남근, 오일균 등을 체포하여 그 조직이 완전하게 드러나, 숙군은 완벽하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발표에도 불구하고 이후에도 지속적인 숙군은 전쟁발발 전까지 계속되었다.
<숙군의 결과와 평가>
대대적인 숙군사업은 1949년 7월에 표면적으로 종결되었다. 이 숙군 기간동안 총 4,000여명에 달하는 장교와 장병들이 처벌을 받았으며, 이들 병력은 당시 전체 군병력의 5%에 달하는 엄청난 숫자였다.
숙군의 대상자 중에서 반란주모자와 적극적인 가담자, 폭력. 파괴 혐의자는 엄중한 처벌에 처해 졌으며, 소극적 가담자나 과거 좌익경력이 있는 자들은 정상을 참작하였다. 그 결과 전체 숙군 대상자의 90%는 불명예 제대하는 차원에서 일단락 되었으며, 나머지 10%는 사형과 징역형 등에 처해졌다.
공산좌익세력들은 전군에 대해서 점조직화된 세포망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사과정에는 난관이 많았다. 하지만 꾸준히 계속 되어진 숙군결과 이들 군부내의 공산좌익세력들이 모습을 감추게 되었으며, 이후 벌어진 전쟁에서 국군 부대들의 성공적인 전투수행과 전쟁 과정에서 북한에 귀순한 부대가 없었다는 점에서 숙군의 의의는 크다고 볼 수 있다.
출처: Daum 카페 THIS IS TOTAL WAR - [유틸의 한국전쟁사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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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헌병사령관이었던 신상철은 숙군 과정이 무리했음을 다음과 같이 인정하고 있다.
당시 가장 중요한 것은 시급히 숙군을 끝마쳐야 한다는 점이었다. 결국 명백한 물증이 없었던 만큼
자백이 증거의 대부분이었다. 반대로 '누가 누가 보장하면 빼준다'는 것이 하나의 원칙처럼 돼 있었다.
내가 '책임질 수 있다'고 보증해 풀려난 사람들도 몇 명 있었다(박정희 소령이 대표적인 예).
국방부 발행의 《한국전쟁사》1에서도 "조사 방법이 증거주의가 아니고, 심문하여 자백하지 않으면
고문으로 자백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고문의 결과 동기생이나 또는 술친구들의 자백에 말려
끌려 들어간 무고한 장병들이 고생을 해야 하는 실례가 있었다"
"사형을 당한 사람들이 처형장 마당에서도 애국가를 부르는가 하면, 대한민국 만세, 이승만 대통령 만세를
부르고 총살을 당했다"고 언급함으로써 숙군 과정에 무리가 있었음을 인정하고 있다.
이렇듯 엄청난 문제가 있었던 숙군 과정에서 김창룡이 보인 병적인 행동은 극에 달하고 있었다.
김창룡은 당시 창립 준비 중인 공군을 40명이나 체포했는데 이는 당시 공군의 거의 전원을 의미했다.
이와 관련하여 박원석 중위(1965년 공군 참모총장)의 경우, 박 중위를 잘 알던 김정렬 대령이 나서
그 검거 경위를 묻게 되었다. 김 대령의 회고에 따르면, 김창룡은 박 중위에 대해 아무런 증거도 없으나
앞으로 접촉할 가망성이 있는 것 같아서 우선 잡아둔 것이라고 대답했다 한다.
이 정도면 그는 정신과 상담치료를 받아야 하는 좌익 강박증 환자였지,
차가운 이성과 냉정함을 갖춰야할 수사관은 아니었던 것 같다.
김 창룡이 주도한 숙군이 전혀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가장 결정적인 반증은
다음해 한국전쟁 발발 시 국군의 행태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개전 당시 국군의 어처구니없는 행태 속에는 군내 일부의 교묘한 사보타지의 냄새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 개전이 임박한 상황에서 주요 야전지휘관을 교체한 것도 모자라
최전선 부대의 배치마저 바꾸는 상식이하의 행동을 기획한 자가 누구인지를 이제는
밝혀내야 하지 않을까? 왜 하필 비상경계령이 개전 하루 전에 갑자기 해제되고 장병들의 외박과
휴가마저 허락되었을까? 24일의 육본 파티는 누가 계획했던 걸까?
이 형근장군등 상당수의 야전지휘관들이 의심했던 군내 제5열의 흔적이 이렇게 곳곳에서
묻어났다는 것은 군내의 숙군이 정작 잡아야 할 좌익프락치가 아니라 숙군대상자 거의 대부분이
무고했던 사람들만 잡아다 처벌했기 때문이었다.
숙군은 좌익을 색출한 것이 아니라 친일매국세력들이 자신들의 눈에 거슬렸던
사람들을 의도적으로 솎아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당시 숙군과정에서 처형된 사람들 중에는 미군에서조차 ‘설마 그 사람이 공산주의자일까‘라고
의구심을 드러내며 아쉬워하던 인재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유능한 인재들이
없어진 상황에서의 한국군이 전투에서 곤혹을 치룬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김창룡의 최대 업적인 숙군의 가장 큰 혜택을 입은 것은 역설적으로 인민군이 아니었을까?
숙군에도 불구하고 군내에는 여전히 제5열이 존재했다는 방증이 너무 여러 곳에서 보인다.
출처:네이버 밀리커리 군사카페 andie0712님의 -다시 쓰는 한국 전쟁사(40)/인물평전(3) 이승만의 수족 김 창룡-글 일부 발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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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군 과정에서 떨친 악명
그러나 군 내부에서 진행된 숙군에는 많은 무리가 따랐다. 당시 헌병사령관이었던 신상철은 숙군 과정이 무리했음을 다음과 같이 인정하고 있다. 당시 가장 중용한 것은 시급히 숙군을 끝마쳐야 한다는 점이었다. 결국 명백한 물증이 없었던 만큼 자백이 증거의 대부분이었다. 반대로 "누가 누가 보장하면 빼준다"는 것이 하나의 원칙처럼 돼 있었다. 내가 "책임질 수 있다"고 보증해 풀려난 사람들도 몇 명 있었다. 군대좌익 조직의 비밀 명단이 입수된 뒤에 암호를 풀어 해당자를 잡아오는 식으로 진행됐는데, 동명이인으로 엉뚱한 사람이 걸려 들어오는 예도 있었다. 또 한 명을 잡으면 "아는 놈 이름을 대라"고 때려가며 조사를 했는데 급한 김에 마구 불다보니 엉뚱한 사람들이 많이 들어왔다.한편 국방부 발행의 《한국전쟁사》1에서도 "조사 방법이 증거주의가 아니고, 신문하여 자백하지 않으면 고문으로 자백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고문의 결과 동기생이나 또는 술친구들의 자백에 말려 끌려 들어간 무고한 장병들이 고생을 해야 하는 실례가 있었다" "사형을 당한 사람들이 희생을 당하는 마당에서도 애국가를 부르는가 하면, 대한민국 만세, 이승만 대통령 만세를 부르고 총살을 당했다"고 언급함으로써 숙군 과정에 무리가 있었음을 인정하고 있다.이렇듯 문제가 있었던 숙군 과정에서 김창룡이 보인 병적인 행동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건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예컨대 김창룡은 당시 창립 준비중인 공군을 40명이나 체포했는데 이는 당시 공군의 거의 전원을 의미했다. 이와 관련하여 박원석 주위(1965년 공군 참모총장)의 경우, 박 중위를 잘 알던 김정렬(金貞烈) 대령이 나서 그 검거 경위를 묻게 되었다. 김정렬 대령의 회고에 따르면, 김창룡은 박 중위에 대해 아무런 증거도 없으나 앞으로 접촉할 가망성이 있는 것 같아서 우선 잡아둔 것이라고 대답했다 한다. 백선엽 회고록 《실록 지리산》에 쓰여진 또 하나의 사건 또한 당시 김창룡의 다소 어처구니없는 행태를 잘 보여 주고 있다.한번은 김창룡이 잡아들인 수백 명의 영등포 특별부대 장병들이 재판에 회부됐다 . 사건을 담당한 이운기(李雲起) 법무관은 이들의 진술서가 판에 박은 듯이 똑같아 이상하다고 내게 문의해 왔다. 알아보니 김창룡이 부평을 순찰하는데 술집에서 인민군 노래가 울려 퍼져 즉각 술집을 포위해 잡아들이고 보니 특별부대 장병들이었다. 중대장인지가 무조건 한 곡씩 노래를 하라고 시켰는데 한 병사가 노래를 못한다고 극구 사양하면서 "아는 노래는 월남하기 전 이북에서 배운 노래밖에 없다"고 했더니 "그거라도 하라"고 해 생긴 소란이었다. 김창룡은 이들을 잡아들여 "친한 놈 이름을 대라"고 족쳤는데 그래서 수백 명이 검거됐다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책임질 테니 무조건 무죄로 상신하라"고 했는데 이 일로 이운기 법무관은 김창룡으로부터 "너도 빨갱이다. 꼭 잡아넣겠다"는 위협을 받았고 나와도 몇 달간 신경전을 폈다.이 시절 무리한 조사로 인해 세간에 이야깃거리가 되었던 사건도 발생했었다. 1949년 9월 하순, 동대문 일대의 권력가인 고희두(高羲斗, 당시 47세)가 방첩대에서 고문 치사된 사건이 그것이다. 이 사건으로 취조자 도진희(都晉熙)는 9년형을 선고받았으나 복역 중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석방되었고, 방척대장인 김창룡은 전속 명령을 받았다. 당시 방첩대는 빨갱이를 조작하는 곳이라는 일반의 혹평을 받고 있었을 정도였다. 이 문제를 계기로 항의와 변명이 오가는 사이에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반공은 더욱 강고(强固)해졌고, 나아가 이승만 대통령은 반공의 이름으로 자신의 독재를 강화시켰다. 전쟁의 발발과 이를 통한 이승만 독재의 강화는 김창룡의 활동 여지를 보다 넓혔고 이에 그는 다시 한 번 물을 만난 듯했다. 그러나 그의 남용된 권력 행사는 점차 곳곳에서 적을 만들기 시작했다.
출처:디펜스코리아 hero님 -악질중의 악질 김창룡..- 글 일부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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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볼수 있듯이 악질친일파였던 김창룡이 숙군작업을 하면서 다수 피해를 보게 만든건 독립군 출신들 특히 광복군 출신들이었습니다. 심지어 이범석 장군마저도 국방장관에서 실각하게된 이유가 되기도 했습니다.(그래도 숙군작업을 거쳤어도 영관급에서나 위관급에서는 다수의 광복군 출신도 볼수 있었습니다) 이 숙군의 무리한 문제로 다수의 억울한 군에 필요한 지휘관 인재들이 증거도 없이 희생당했고 미군에서조차도 이사람은 아니다 싶은 사람조차도 죽여댄 일자무식의 악질친일파 김창룡의 숙군작업덕에 한국전쟁에서 우리군의 일부 지휘관의 무능력도 한몫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잊혀질수 없게된 사실이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숙군작업을 했어도 위 글에 있듯이 진짜 간첩을 제대로 잡지 못한 것이 바로 한국전쟁 직전인 육군본부 하달에 있어서의 모습이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김창룡의 무식함 덕에 큰 혜택을 본건 인민군이니까요.
김창용 사후에 있었던 한가지 후일담을 소개합니다. 60년대의 어느 해인가의 육사 입학 시험에 김창용의 아들이 응시를 하여 면접 시험까지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아들의 용모가 죽은 김창용을 너무도 빼어 닮아, 육사 교장을 포함한 면접관들이 혼비백산하였다는 이야기가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던 비화 제1공화국에 나옵니다. 이 일화만 보아도 김창용의 무자비했던 숙군 작업에 장교들이 얼마나 공포심에 시달렸고 치를 떨었는지 엿볼수 있습니다. 김창용의 아들은 당시 육사 시험에 최종 낙방 하였다고 합니다.
얼마나 그의 숙군의 악행이 심각했는지를 알수 있고 지금도 군에서 기무사하면 장교들이 두려워하는 이유이기도 한 것으로 압니다. 배우지도 못한 무식한놈이 헌병되어서 아부로 특진해서 숙군작업해서 국군을 망친 장본인입니다.
p.s 참고로 김창룡이 암살당했을때 이승만 대통령이 국장에 현재 국립묘지에 묘소되었다고합니다. 당장 끌어내야할 존재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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