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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인류 역사상 천재라 불린 10명
1. 레오나르도 다빈치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그 누구보다 다방면에서 재능을 발휘한 천재다. 그는 미술, 음악, 건축, 군사공학 등에 대한 발명과 해부, 요리, 식물학 등 수많은 분야에서 특출한 재능을 발휘했다. 심지어 요리사로도 활동했다.그가 남긴 그림 중 '모나리자'와 '최후의 만찬'이 유명하다. 특히 레오나르도가 시온 수도회의 비밀 교주였다는 '최후의 만찬' 음모론은 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 코드'의 주요 모티브로 활용되기도 했다. 레오나르도는 천재일 뿐만 아니라 194cm에 달하는 큰 키와 수려한 외모를 가진 것으로 알려져있다.그는 글씨 쓰는 방법도 남달랐는데 거울을 비춰야만 읽을 수 있는 마치 암호문과 같은 글씨를 썼다.2. 윌리엄 셰익스피어영국이 낳은 세계 최고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 그는 햄릿, 오셀로, 리어왕, 맥베스, 로미오와 줄리엣 등의 명작을 남겼다. 특히 '햄릿' 속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라는 대사는 영문학사 전체에서 명대사로 꼽힌다. 언어로 구성되는 모든 것에 통달했던 셰익스피어는 희곡뿐만 아니라 시에도 능했다. 그는 많은 신조어를 만들어 내기도 했는데 직접 쓴 희곡에 나온 2만 단어 중 2000개 단어는 새로운 단어였다고 한다.3. 괴테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독일의 작가이자 극작가, 철학자였고 한때 바이마르 공국의 재상이기도 했다. 그가 남긴 명작으로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파우스트' 등이 꼽힌다.괴테는 정치인의 재능도 겸비했는데 바이마르 공국 재상으로 프랑스군과의 전쟁을 대비했다. 식물학과 과학에도 관심이 많아 과학자들을 후원하기도 했다. 괴테는 수많은 여인들과 사랑을 나눈 것으로도 유명하다.4. 피라미드를 건설한 사람들7대 불가사의 중 하나 이집트의 피라미드. 이 피라미드를 건설한 고대 이집트인들에 대한 자료는 구체적으로 남아 있지 않다.남아 있는 기록은 이집트 제4대 왕조였던 쿠푸 왕의 지휘 아래 약 10만명의 인부가 3개월씩 교대하며 완공까지 30년 이상이 걸렸다는 것뿐이다.특히 피라미드는 신기한 특징을 가지는데 피라미드 안 어떤 지점에 놓아둔 물체는 생명력을 잃지 않는다. 우유는 부패가 늦춰지고 꽃은 빛깔을 쉽게 잃지 않는다.5. 미켈란젤로미켈란젤로는 이탈리아의 조각가이자 건축가 화가, 시인이다.미켈란젤로의 재능을 알아본 건 피렌체의 권력자 메디치 가문이었다. 메디치 가문은 미켈란젤로를 후원하며 많은 작품을 남겼다. 특히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와 '최후의 심판'은 그의 천재성을 보여주는 대표작이다. 6. 뉴턴영국의 물리학자이자 수학자, 연금술사인 아이작 뉴턴.뉴턴이 '자연 철학의 수학적 의미'라는 책에서 발표한 물리법칙은 물리학의 기초가 됐다.그는 집중력이 높기로 유명했는데 저녁 식탁에 앉은 뉴턴이 생각에 잠겨 다음날 아침까지 식사가 그대로 있었다는 일화가 전해지기도 한다.7. 토머스 제퍼슨미국인이 뽑은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 중 한명인 토머스 제퍼슨. 그는 미국 독립선언서의 기초를 잡은 인물이다.1800년 미국 제3대 대통령에 당선된 제퍼슨은 새 수도 워싱턴에서 취임식을 거행한 최초의 대통령이다.대통령이 되기 전 변호사로 일했던 제퍼슨은 재임 중 종교, 언론, 출판의 자유를 확립한 뛰어난 정치가였다. 또 버지니아 대학교를 설립해 민주교육을 보급한 뛰어난 교육자이기도 했다.8. 피디아스고대 그리스 조각가 피디아스는 아테네 예술 활동에 큰 획을 그었다. 그의 최대 업적은 파르테논 신전을 재건한 것으로 특히 그가 만든 신상이 우수해 '신들의 상 제작자'로 칭송되기도 한다.대표작으로는 '아테나 레무니아', '올림피아의 제우스', '아테나 파르테노스' 등이 있다.그가 파르테논 신전 지붕 위에 제작한 조각은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9. 알렉산더 대왕알렉산더 대왕은 그리스-페르시아-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다.스승이었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석을 달아 준 '일리아드'를 원정길에 갖고 다니며 수시로 꺼내 봤다는 일화가 전해진다.알렉산더 대왕은 스승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신에게 '보람 있게 사는 법'을 알려준 사람이라고 밝혔다. 10. 아인슈타인천재의 대명사 아인슈타인. 특수상대성이론과 일반상대성이론을 완성한 아인슈타인은 근대 물리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이론물리학에 기여한 업적으로 1921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이후 일반상대성이론을 중력장과 전자장의 통일장이론으로 확대하기도 했다.천재인 그가 학창 시절 라틴어, 지리, 역사 과목에서 낙제를 받았다는 건 유명한 일화다. 미국의 원자폭탄 연구인 '맨해튼 계획'의 시초를 이룬 아인슈타인은 훗날 '내 인생에 있어 한 가지 큰 실수를 저질렀다'며 이를 후회했다. 이후 속죄하는 마음으로 인종차별, 핵 반대 등 다양한 정치적 활동을 펼쳤다<영국 과학잡지 네이쳐지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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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18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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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수다] 중국 역대 최고의 천재들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명을 자랑하는 중국은세계4대 문명의 발상지중 한곳이며 동양역사의 중심축을 이루며 수많은 영웅, 호걸, 기인, 천재, 성인, 현인들을 배출한 나라입니다특히 중국역사에서 뛰어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던 시기가 있었는데대략 춘추시대와 전국시대, 한, 삼국시대, 당, 송, 명 시대가 그러합니다 특히 위, 촉, 오가 대립하던 삼국시대 [222 ~ 280] 는 중국역사상 가장 기이할 정도로빼어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아직도 중국의 많은 역사학자들은어떻게 이렇게 짧은 기간에 이토록 뛰어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는지 이해가 안될정도라고 말합니다 그럼 중국역사상 가장 뛰어났던 천재들을 제가 아는 범위에서 열거해보기로 하겠습니다 [네이버, 위키 참조] 단,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양진녕, 이정도같은 현대과학자들은 제외하였습니다---------------------------------------------------------------------------------------------------------------강태공 - 주(周)나라 초기의 정치가이자 공신. 무왕을 도와 은나라를 멸망시켜 천하를 평정하였으며 제(齊)나라 시조가 되었다. 또한 그는 병법서인 육도삼략의 저자이기도 하다곽가 - 자는 봉효(奉孝)이고 죽은 후 내려진 시호는 정후(貞侯)이다. 영천군 양책현(陽翟縣) 출신으로 어려서 부터 앞을 내다보는 식견을 지녔으며 조조(曹操)가 가장 아끼던 일급 참모였다 곽가는 그 뛰어난 통찰력과 주도면밀한 계책으로 살아생전 조조로부터 두터운 신음을 얻었지만 안타깝게도 풍토병에 걸려 38세라는 짧은 나이에 그만 요절을 하고 만다 곽가의 죽음을 접한 조조는 크게 애통해하면서, 순유 및 다른 이들을 향해 말하기를 "그대들은 모두 나와 동년배이다. 곽가만이 매우 젊었다. 천하가 태평한 시기가 오면 후사를 그에게 맡기려 했었는데…"라고 한탄하였고 208년 적벽 대전에서 패배하였을때도 조조는 탄식하여 말하기를“봉효가 살아있었더라면 이 지경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텐데. ” 라고 말했을 정도로 곽가에 대한 조조의 총애는 무척 남달랐고 그만큼 곽가의 재능과 지모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조조의 일화를 통해서도 알수가 있다 곽상 - 서진(西晉) 하남(河南) 낙양(洛陽) 사람. 자는 자현(子玄)이다. 일찍부터 노장 사상에 정통했고, 왕연(王衍) 등 청담지사(淸談之士)와 사귀었다. 변재(辯才)에 막힘이 없어 사람들이 위(魏)나라의 왕필(王弼)이 다시 태어났다고 칭송했다. 저서에 『장자주(莊子注)』 33권이 있는데, 『장자(莊子)』의 본문에 완전히 충실하지는 않지만 역대의 장자 주석서를 두루 읽은 지식을 담았고, 불교사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관로 - 용모가 추하고 술을 좋아해서 언행에 거친 면이 있었지만, 『주역』과 수학에 정통하고 관상술에 능했다. 조조(曹操)가 태사로 봉하려 했지만 사양했다. 신출귀몰하게 앞날을 알아맞히어 노숙(魯肅)과 하후연(夏侯淵), 조상(曹爽)의 죽음과 허도(許都)의 대화재를 예언했다. 자신이 48살에 죽을 것을 미리 알았다고 하는데, 과연 그 나이에 죽었다.공융 - 자 문거(文擧). 공자의 20대 손. 후한(後漢) 말기의 학자로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나 신동으로 불렸으며 문필에도 능하여 건안칠자(建安七子)의 한 사람으로도 꼽혔던 인물이다. 삼국지에는 그의 총명함을 엿볼수 있는 대목이 있는데 하남윤(河南尹)이었던 이응(李膺) 과 태중대부 진위(陳?)와의 유명한 일화가 바로 그것이다 굴원 - 중국 전국시대의 정치가이자 비극시인. 학식이 뛰어나 초나라 회왕(懷王)의 좌도(左徒:左相)의 중책을 맡아, 내정·외교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작품은 한부(漢賦)에 영향을 주었고, 문학사에서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높이 평가된다. 김용 - 김용은 중국 문단의 기인(奇人)이자 무협소설의 거장, 혹은 신필로 불리는 인물이다 두보 -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서 시성(詩聖)이라 불렸던 성당시대(盛唐時代)의 시인마량 - 삼국 시대 촉(蜀)나라 양양(襄陽) 의성(宜城) 사람. 마속(馬謖)의 형으로, 자는 계상(季常)이다. 형제 다섯이 모두 재주로 이름이 있었는데 그가 가장 어질고 덕이 높았다. 흰 눈썹을 가지고 있어서 당시 사람들이 “마씨의 다섯 형제 가운데 흰 눈썹의 마량이 가장 뛰어나다.(馬氏五常 白眉最良)”고 했다. 이 말에서 고사성어 백미(白眉)가 나왔다. 마량은 제갈량과도 친분이 두터운 사이이며 삼국지에는 화살을 맞은 관우(關羽)가 화타(華?)의 치료를 받는 동안에 함께 바둑을 두는 상대로 나오기도 한다 방통 - 자는 사원(士元)이다. 촉의 책사로 유명한 인물이며 제갈량을 와룡(臥龍)에 비유하였고 방통은 봉추(鳳雛: 봉황의 새끼)라고 하였다.백거이 [白居易] - 당나라 화주(華州) 하규(下?) 사람. 조적(祖籍)은 태원(太原)이고, 자는 낙천(樂天)이며, 호는 취음선생(醉吟先生) 또는 향산거사(香山居士)다. 백계경(白季庚)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5살 때부터 시 짓는 법을 배웠는데, 15살이 지나자 주위 사람을 놀라게 하는 시재(詩才)를 보였다.범증 - 중국 초나라 항우(項羽)의 모사. 기묘한 계교에 능하여 항우로 하여금 제후의 패자가 되도록 도왔다. 그는 항우에게 한의 패공(沛公 : 고조 高祖)을 죽일 것을 권했으나 오히려 의심을 받고 파면되었으므로 항우를 버리고 팽성(彭城)으로 가서 거기서 사망했다. 후에 항우는 고조에게 패했고, 고조는 그것이 항우가 범증의 말에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회고하였다.서위 [徐渭] - 명나라 절강(浙江) 산음(山陰) 사람. 자는 문청(文淸) 또는 문장(文長)이고, 호는 청등(靑藤) 또는 천지(天池)다. 제생(諸生)이다. 명성이 대단한 데다 천부적인 자질을 타고났으며, 시문서화(詩文書畵)에 모두 뛰어났다. 스스로도 자신은 서예가 최고이고, 다음이 시고, 문이 그 다음이며 그림이 다음이라고 자부했다. 그림은 화초죽석(花草竹石)이 아름다웠고, 서예의 필치는 자유분방한 데다 기상이 넘쳐 창의력이 넘쳐났다. 병법이나 기계(奇計)도 좋아해 호종헌(胡宗憲)의 막하에 있기도 했다. 시서화에 각각 일가를 이루는 천재적인 문인으로, 특히 잡극(雜劇) 「사성원(四聲猿)」을 발표하여 유명해졌다. 자기의 독창성을 중시하여 명나라 초기에 문단을 풍미했던 의고파(擬古派)의 모방을 비웃었다. 죽은 뒤 개성적인 시풍은 공안파(公安派) 원굉도(袁宏道)를 경탄시켰을 정도였다. 저서에 『남사서록(南詞敍錄)』과 『서문장전집(徐文長全集)』 30권이 있다. 명청(明淸) 시대 문단에 끼친 영향이 매우 컸다.섭천사 [葉天士] - 청나라 강소(江蘇) 오현(吳縣) 사람. 이름은 계(桂)인데, 자로 행세했다. 호는 향암(香?)이다. 가업이 의술(醫術)인데, 아버지가 어려서 돌아가시자 아버지의 제자에게 배웠다. 나중에 명의(名醫)들을 널리 찾고 그들의 장점을 수집하여 더욱 정통하게 되어 천하에 이름을 떨쳤다. 기존의 치료법에 얽매이지 않고 옛날의 비방(秘方)까지 두루 활용했는데, 항상 놀라운 효험을 거두었다. 특히 비위(脾胃)와 아동과(兒童科)의 병에 재간이 있었다. 그가 지은 『온열론(溫熱論)』은 온병학설(溫病學說)의 발전을 가져왔다.소동파 - 중국 북송 시대의 시인이자 문장가, 학자, 정치가이다. 자(字)는 자첨(子瞻)이고 호는 동파거사(東坡居士)였다. 흔히 소동파(蘇東坡)라고 부른다. 현 쓰촨 성 미산(眉山)현에서 태어났다. 시(詩),사(詞),부(賦),산문(散文) 등 모두에 능해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 천재 예술가요 못 하는 것이 없었던 팔방미인으로서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천 년이 다 돼 가는 지금까지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중국문예사상 가장 걸출한 인물이었다.손무 - 동서고금을 통해 가장 큰 존경을 받는 손무와 그의 저서 『손자병법』은 중국은 물론 세계 군사사에서 아주 중요한 자리에 있다. 인물은 병가의 성인이란 뜻으로 '병성(兵聖)' 또는 '무성(武聖)'으로 추앙받고, 그 저작은 병가의 바이블이란 뜻의 '병경(兵經)'으로 불릴 정도다. 군사 모략학이란 측면에서 보자면, 손무는 첫손가락에 꼽히는 모략의 대가이기도 하다.승조 - 중국 진(晉)나라시절 구마라습(鳩摩羅什)하에서 인도 용수계(龍樹系)의 대승불교를 공부했다. 그가 남긴 논문집 《조론(肇論)》은 대승의 공(空)사상에 대한 깊은 이해를 보여준 것으로 후세에 큰 영향을 끼쳤다.안회 - 3천 명의 제자를 두었다고 전하는 공자에게는 여러 재주를 가진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중에서 특히 뛰어난 제자들을 10명으로 추려 공문십철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안회는 공문십철중에서도 학문과 덕행에있어서 으뜸으로 꼽혔던 공자의 수제자였다 하지만 안회못지않게 뛰어났던 제자가 있었는데 바로 자공이다 자공은 공자로부터 비록 제사에 쓰이는 보배로운 그릇과 같다는 칭찬을 들었지만, 스스로의 재주를 믿고 자만심이 강하여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過猶不及)는 경계를 듣기도 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하루는 공자가 자공을 불러 안회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자만심이 강한 자공의 속을 떠본 것이다. "너와 회를 비교하면 누가 더 잘 하겠느냐?(女與回也孰愈)" 그러자 자공이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제가 어찌 회를 넘볼 수 있겠습니까. 회는 하나를 듣고도 열을 알지만 저는 하나를 들으면 겨우 둘 정도만 알 수 있을 뿐입니다(賜也何敢望回 回也聞一以知十 賜也聞一以知二)." 우리가 흔히쓰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안다는 말인‘문일지십’[聞一知十] 은 여기서 비롯되었다.왕발 - 초당(初唐) 4걸(四傑)이라 불리는 중국 당나라 초기의 대표적 시인. 종래의 완미(婉媚)한 육조 시(六朝詩)의 껍질을 벗어나 참신하고 건전한 정감을 읊어 성당 시(盛唐詩)의 선구자가 되었다. 일찍이 여섯살때부터 뛰어난 시문을 짓기 시작한 왕발은 아무리 술이 취한상태에서 글을 써도 고칠데가 없다해서 뱃속에 완성된 원고가 들어 있다는 뜻의 복고[腹稿]라는 별명으로 불리워지기도 했다 뒤에 관노(官奴)를 죽였다는 죄로 관직을 빼앗기고 교지(交趾:베트남 북부)의 영(令)으로 좌천된 아버지 복치(福?)를 만나러갔다가 돌아오던 중, 배에서 바다로 떨어져 익사하고 만다 그의 나이 겨우 26세때의 일이다왕필 - 왕필은 중국역사상 기인, 영웅, 천재가 기이할 정도로 많이 배출되었던 삼국시대 위(魏)나라의 학자이다 하안(何晏)과 함께 위·진(魏晉)의 현학(玄學)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왕필은 의(義)와 이(理)의 분석적·사변적 학풍을 창설하여 중국 중세의 관념론체계에 영향을 끼쳤던 인물이다 그리고 왕필은 불과 16세에 『노자』를 주해하였다고 전하는데 그 내용의 심오함과 정확함은 아직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있다 오죽하면 후대의 학자들로부터 왕필이 《도덕경》의 주를 단것인지 그 반대인지 모를 정도다 라는 찬사를 받았을 정도로 왕필의 천재성과 박식함은 그 시대는 물론 후대에까지도 대단하게 여겨질 정도이다 또한 왕필은 노자뿐만이 아니라『주역』에 대해서도 중국역사상 가장 탁월한 주를 내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런 천재적인 식견과 해박한 지식의 소유자도 위나라의 하급관리에만 머물렀으며, 풍토병에 시달리다 23살이라는 짧은 나이에 요절하고 만다 양수 - 폭넓은 지식과 깊이 있는 독서로 조조의 의중을 읽어내는 데에 탁월하였으며 특히 '계륵(鷄肋)'에 관련된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조조가 한중에서 철수할 때 '계륵'을 들어 명령을 내리자 누구도 그 의미를 알아차리지 못하였으나 양수만이 이를 해석하였다. 양수는 닭의 늑골은 국물을 우려내기에는 좋지만 먹기에는 어렵다고 하였으며 이는 버리기는 아까우나 쓸 데는 없다는 의미로 한중을 늑골에 비유하였다고 이해하고 한중으로 부터의 철수를 준비하고 시작하였다. 그러나 평소 대단히 비상한 두뇌를 지닌 양수에게 경계심을 가지고 대하던 조조는 이 계륵에 관련된 일로 크게 노여워하였으며 이 일이 발단이 되어 219년 참수되었다.여몽 - 여몽(呂蒙, 178년 ~ 219년)은 중국 후한 말의 무장으로 자는 자명(子明)이며 여남군 부피현 사람이다 흔히 여몽은 괄목상대라는 고사성어의 인물로 아니면 관우를 생포하여 죽인 몹쓸인간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진수는 여몽에 대해 평가하기를 용맹하면서 지략에도 능하였으니 무장으로써 그만한 인물은 없었다고 평하였다예형 - 후한 말기 평원(平原) 반현(般縣) 사람. 자는 정평(正平)이다. 젊었을 때부터 말주변이 있었고, 성격이 강직하면서 오만했다. 오직 공융(孔融), 양수(楊修)와만 마음을 터놓고 사귀었다. 예형은 사람을 보는 안목이 비범하였고 날카로운 식견이 있었지만 특유의 독설과 무례한 언행으로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은 듣지 못했던 인물이었다 결국 예형은 그 오만방자함때문에 25세라는 짧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고 만다유기 - 제갈량의 라이벌로 손꼽히는 유기 유기는 제갈량과 동시대의 사람은 아니지만 아직도 중국의 많은 사람들은 제갈량의 라이벌로 사마의와 함께 유기를 제갈량의 라이벌로 손꼽는다 명태조의 스승겸 참모였던 유기는 스스로 제갈량보다 낫다고 자부할 만큼 천문과 지리, 정치, 군사 등 모르는것이 없었고 미래에 대한 예언은 물론 독특한 고도의 역술지식을 지닌 인물이었다 이미 유기는 중국에서 제갈량과 함께 천재 군사로서 숭배를 받고 있다이세민 - 당나라의 제2대 황제(재위, 626-649). 시호는 태종(太宗)이다. 아버지는 이연(李淵)이고 어머니는 두(竇)씨다. 중국 역사상 최고의 영주(英主)로 알려져 있으며, 북방민족의 피가 섞인 무인(武人)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수나라 양제(煬帝)의 폭정으로 내란의 양상이 짙어지자 수나라 타도의 뜻을 품고 태원(太原) 방면 군사령관이었던 아버지를 설득하여 거병, 장안(長安)을 점령하고 당나라를 건립했다. 왕위 쟁탈전을 치르면서 무덕(武德) 9년(626) 아버지의 양위를 받아 즉위했다. 수양제의 실패를 거울삼아 명신 위징(魏徵) 등의 의견을 받아들여 사심을 누르고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지극히 공정한 정치를 하기에 힘썼다. 그의 치세는 ‘정관(貞觀)의 치(治)’라 칭송받았고, 후세 제왕의 모범이 되었다.이시진 - 중국 명나라 말기의 박물학자·약학자. 《본초강목》(전52권)의 저자이다. 본초강목은 우리나라의 명의 허준이 지은 동의보감과 함께 동양의학을 대표하는 불후의 명저로 손꼽히는 책이다 본초강목은 저자가 혼자의 힘으로 30년에 걸쳐 집대성한 것으로, 원고를 고치는 일만 3차례나 하였다 한다. 약용(藥用)으로 쓰이는 대부분의 것을 자연분류를 주로 하여 분류하였으며, 총계 1,892종의 약재가 망라되어 있다. 이태백 - 중국 당나라 시인.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 추앙되며 시선(詩仙)으로 불린다.이하 - 특출한 재능과 초자연적 제재(題材)를 애용하는 데 대해 '귀재(鬼才)'라는 명칭이 붙었던 중국 중당(中唐) 때의 시인.장량 - 한나라 고조 유방의 공신. 진승 · 오광의 난이 일어났을 때 유방의 진영에 속하였으며, 후일 항우와 유방이 만난 '홍문의 회'에서는 유방의 위기를 구하였다. 선견지명이 있는 책사로서 한나라의 서울을 진나라의 고지인 관중으로 정하고자 한 유경의 주장을 지지하였다. 장중경 [張仲景] - 본명 張機(장기)이나 장중경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河南省(하남성) 南陽(남양) 출생이라고 전해지며 傷寒論(상한론)의 저자이다. 長沙(장사)의 태수(太守)를 지냈으나, 그의 일족이 열병으로 목숨을 잃자 의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며 질병을 병기와 병증으로 인식하여 그 전의 의학을 진일보 시킨 인물로 평가 받고 있다정호 - 중국 북송(北宋) 중기의 유학자.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 ‘성즉이설(性則理說)’을 주창하였다. 그의 사상은 동생 정이를 거쳐 주자(朱子)에게 큰 영향을 주어 송나라 새 유학의 기초가 되었고, 정주학(程朱學)의 중핵을 이루었다.정이 - 중국 북송(北宋) 중기의 유학자. 형 정호(程顥)와 함께 주돈이에게 배웠고, 형과 아울러 ‘이정자(二程子)’라 불리며 정주학(程朱學)의 창시자로 알려졌다.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철학을 수립하여 큰 업적을 남겼다.정현 - 중국 후한(後漢) 말기의 대표적 유학자. 시종 재야(在野)학자로 지냈다. 제자들에게는 물론 일반인들에게서도 훈고학 ·경학의 시조로 깊은 존경을 받았다. 경학의 금문(今文)과 고문(古文) 외에 천문(天文) ·역수(曆數)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지식욕의 소유자였다. 삼국지에는 유비의 스승 노식이 유비에게 추천서를 주면서 정현에게가서 배워라 라는 대목이 나타난다 조식 - 조조의 셋째 아들로 10여 세 때 이미 "시론 및 사부 10만 자를 외웠다.(誦讀詩論及辭賦十萬言.)"고 할 만큼 총명하여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다. 형 조비와 조창과의 후계자 권력 다툼에서 조식은 조비에게 패하고 말았다. 조비가 제위에 오르자 조식을 죽이기 위해 일곱걸음을 걷는 동안 시를 지어 읊어보라고 했다. 조식이 시를 짓지 못한다면 죽일 것이라고 하였다. 조식은 “콩을 삶는 데는 콩깍지로 태운다(煮豆持作羹). 같은 뿌리의 형제가 왜 다투지 않으면 안 되느뇨(本是同根生相煎何太急)”라고 노래한 7보의 시(七步之詩)를 지었고 이에 조비는 깊이 깨달은 바 있어 그를 살려주었다고 한다.주돈이 [주렴계] - 중국 송나라의 유학자. 도가사상의 영향을 받고 새로운 유교이론을 창시하였다. 세계는 태극->음양->오행->남녀->만물의 순서로 구성된다고 하였다. 또, 도덕과 윤리를 강조하고 우주생성 원리와 인간의 도덕원리는 같다고 하였다.주희 - 주희의 성리학은 오랫동안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지식인 사회를 지배해왔고, 사서에 대한 그의 주석서는 과거에 합격하려는 사람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왜냐하면 그 책이 과거 교재였기 때문이다. 그의 사상은 특히 조선의 지식인 사회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는데 예컨대 송시열이라는 학자는 “세상의 모든 이치는 주자가 이미 완벽하게 밝혀 놓았다. 우리에게 남은 일은 다만 그의 이치를 실천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주자의 말씀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주장을 하거나 주자와 다른 경전의 주석을 다는 자는 사문난적일 뿐이다.”는 취지의 주장을 하기도 하였다. 또 주희의 철학은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 시대에 널리 받아들여져 공적인 인정을 받았다. 우리나라의 유학은 엄밀히 말해서 공자, 맹자의 고대유학이 아닌 주희의 사상이 녹아있는 주자학이 우리나라 유학의 본질이다 제갈량 - 자는 공명(孔明). 촉의 승상. 유비의 삼고초려 이후 세상에 나와 유비와 유선을 받들어 죽는 날까지 한의 중흥에 혼신을 다한다. 당대의 기재로서 천문, 지리, 병법 등에 능통하다. 또 그의 명성은 중국사상 제1인자로 추앙(推仰)되며, 탁월한 지략과 지성충의(至誠忠義)의 사람으로 존경되고, 공자와 아울러 후세 중국에 끼친 영향이 크다.추연 - 중국 전국시대의 사상가. 추연(騶衍)이라고도 한다. 맹자보다 약간 늦게 등장하여 음양오행설을 제창하였다. 세상의 모든 사상(事象)은 토(土) ·목(木) ·금(金) ·화(火) ·수(水)의 오행상승(五行相勝) 원리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이라 하였다.하경명 [何景明] - 명나라 하남(河南) 신양(新陽) 사람. 자는 중묵(仲默)이고, 호는 대복(大復)이다. 8살 때 시를 지을 줄 알았고, 15살 때 거인(擧人)에 급제했다. 홍치(弘治) 15년(1502) 진사에 급제, 중서사인(中書舍人) 등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정덕(正德) 초에 유근(劉瑾)이 집정하자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귀향했다.하안 - 왕필과 더불어 위진(魏晉) 시대 현학(玄學)의 시조로 받들어지는 인물이며 젊어서부터 수재(秀才)로 명성을 얻었다. 용모가 아름다운 데다 얼굴이 희어서 사람들이 ‘부분하랑(傅粉何郞)’이라 불렸다 화타 - 중국 한말(漢末)의 전설적인 명의. '외과의 비조'로 통할 만큼 외과에 특히 뛰어나나, 외과뿐 아니라 내과·부인과·소아과·침구 등 의료 전반에 두루 통하였고, 특히 치료법이 다양하면서도 처방이 간단한 것으로 유명하다.혜능 - 중국 선종(禪宗)의 제6조로서, 육조대사(六祖大師)라고도 한다. 신수(神秀)와 더불어 홍인 문하의 2대 선사로 남종선(南宗禪)의 시조가 되었다. 그의 설법을 기록한《육조단경(六祖壇經)》이 전해진다.호설암 - 청나라의 거상(巨商)인 호설암(胡雪岩·1823∼1885)은 비록 빈손에서 시작하였지만 천재적인 장사수완으로 일약 청나라 제일의 거부가 된 인물이다 제가 꼽은 랭킹 1, 2, 3천재성 - 1 왕필 2 소동파 3 서위, 유기 다방면 - 1 소동파 2 서위, 유기 3 정현 업적 - 1 주희 2 정호, 정이 형제, 추연 3 이시진영향력 [한, 중, 일 포함] - 1 주희 2 승조, 혜능 3 이시진인지도 [한, 중, 일 포함] - 1 제갈량 2 방통, 손무 3 곽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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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미래에서 온 천재
과학자들은 살아 있을때 인정을 받아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경우가 있지만반대로 너무나 뛰어난 재능 때문에 죽어서야 인정 받거나 그의 이름 자체가알려지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니콜라이 테슬라(nikola tesla) 라는 과학자도 이런 케이스로 100년후에 가능할만한것을 100년전에 개발한 인류최고의 과학자로불리고 있죠..테슬라는구 유고 슬라비아의 세르비아 크로아티아(croatia)의 스미즈란(smijlan)에서 출생,놀랄만한 기억력을 가졌으며 6개 국어를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그라츠(gratz)에 위치한 폴리테크닉 공대(polytechnic institute)에서 수학, 물리학, 기계공학을 공부하며 4년을 보냈습니다.마지막 순간까지 지적 탐험을 계속하던 그는 1943년에 갑작스런 심장병으로 여든일곱해의 생을 마감했습니다..그는 천재적이었고 여러 놀라운 발명품을 개발 했는데 그의 연구와 업적은 국가의 통제를 받았습니다..당시에 그의 많은 연구가 일반에 공개 되었다면 원자력에너지 보다 엄청난 에너지를 이용할 수 있었거나, 원자탄 보다 더 무서운 파괴력을 지닌 무기를 만들었을 수도 있었다고 합니다만 그들만의 주장이고
전선없이 불을 켠다던가 하는 무한한 에너지를 끌어쓰는 방법이 대중화 되었다면 그런게 있었다면
세계의 부가 상위1%에 의하여 좌지우지 되는 세계 경제에 엄청난 혁명이 되었겠죠
테슬라의 연구의 가장 큰 성과라면 자연 파괴를 하지 않고 막대한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얻는 다는 겁니다..테슬라는 전선 없이 발전소에서 수백개의 전구를 키는 실험에 성공 했는데 이는 콜로라도 스프링스에 개발한 것으로 지구의 땅이 도체가 되고, 전류를 특정 방법으로 보내서 전선 없이 불을 켜는 방법입니다..이것은 현대과학으로도 아직도 이해가 되지도 않고 풀리지 않는 방법 중에 하나라고 합니다.. 오직 테슬라 만이 알고 있었죠.테슬라는 자연계에 존재하는 우주 에너지를 동력화 해서 움직이는 자동차를 만들기도 하였는데, 속력이 시속 90마일(약 144 km)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는 이미 1900년대 초에 연료가 전혀 필요없는 자동차를 만들었던 것이죠..이밖에도 네온사인, 스피드메타, 자동차 점화시스템 그리고 레이다의 기초, 전자현미경, 전자렌지를 발명,브러시리스모터 발명(한국의 발명가가 발명한 브러시리스 모터와는 다른 형태임),샌드위치형태의 태양전지 발명과 마르코니의 발명이 알려지기 거의 십 년 전에 라디오의 원리를 이미 시연하는데 성공 했었습니다..실제로 1943년에 대법원은 마르코니의 특허가 테슬라의 이전의 기술 때문에 무효라는 판정을 내렸죠. 산업계에서 형광등이 발명되기 40여 년 전에 그의 실험실에서 형광등 발명 및 사용,1898년에 그는 메디슨 스퀘어가든에서 세계최초의 무선조종 모형보트를 시연했습니다.또 그는 u.f.o를 발명 했다는 설이 있습니다..그는 전기추진비행접시를 개발 했지만 스스로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가.. 1900년쯤에 발명된 전기추진비행접시보다 한참 발전된,제2호버젼 전기추진비행접시를 1938년 나치독일에 특허를 냈습니다..이 비행접시엔 탄소제거기와 레이저레이더,전자기모터,컴퓨터등의 것이 장착되어 있었다고 합니다,이 테슬라의 연구는 나치 독일이 과학력이 발전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줬다고 합니다..또 다른 발명품을 보면 무선 에너지 전송 기술, 테슬라 터빈, 테슬라 엔진, 그리고 죽음의 광선 딱딱하고 고정된 필라멘트를 쓰지 않는 네온등은 길이와 모양에 관계없이 제작할 수 있다.무한 동력 장치, 번개 충전용 코일, 무선 전기전송, 지진 발생기 등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연구를 하여 그의 이름이 붙은 여러 가지 장치를 만들기도 하였습니다.노년에는 전자기파 등을 이용하여 지진을 일으키는 지진병기에 대한 연구에 몰두하기도 하였는데, 현재 미국 국방성에서 그에 대한 연구를 비밀리에 진행하고 있다고 합니다.이렇듯 그의 연구는 함부로 발표하기가 두려울 만큼 위험한 것이 많아서정부는 그의 과학적 업적을 인정하기 보다는 그를 독점 하기를 원했습니다..1915년 11월 6일자 뉴욕타임스는 에디슨과 테슬라가 노벨물리학상의 공동 수상자로 결정되었다는 기사를 내보냈지만 정작 수상의 영예는 다른 사람에게 돌아갔다. 스웨덴 한림원이 막판에 수상자를 바꾼 이유는 아직도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정부가 그들의 연구 성과가 알려지는게 두려워서 압력을 넣었다는게 라는 설이 지배적 입니다..테슬라는 인류에게 지구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무한의 에너지를 공급 하는게꿈이 였지만 정부의 압력에 의해 자신이 연구가 위험하다고 깨닫습니다..그리고 그는 자신의 전 생애에 걸쳐 이뤄낸 발명들의 대부분을 자신의 손으로 없애 버려야 했죠.1943년 7월 20일에 필라델피아 해군기지에서 uss eldridge호를 순간이동 시키는 실험이 진행 ㅤㄷㅚㅆ습니다..2차 대전 시기인 1942년 독일의 u-boat(잠수함) 때문에 유럽으로 가는 수송선들이 침몰하는 것에 속수무책 이었던연합군은 테슬라의 자기력 복사 이론을 중심으로 일명 rainbow 작전(무지개다리 타고 건너 간다는 의미로)의 일환으로 미국 필라델피아 해군 기지에서 한 비밀 실험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테슬라가 책임자였지만,전기 장치를 이용하는 것인데 생명의 위험에 대한 대비 없이 실험하려는 것 때문에실험에 반대 했습니다..결국 테슬라가 빠진 상황에서 연구를 되었고 테슬라사 사망(43,1,7)한지 10개월 뒤 1943년 10월 실험이 이루어 졌습니다.테슬라가 죽은 뒤 호텔에서 빼 돌린 많은 자료를 바탕으로 말이죠..하지만 테슬라는 죽기전 자신의 연구 자료를거의 폐기 했기에 이 자료는 반쪽 짜리 였습니다.. 실험은 진행ㅤㄷㅚㅆ고 수백km나 떨어진 버지니아주 근처 해안으로 이동했다 다시 나타나게 하는데는 성공 했지만 배에 승선했던 해군 180명 중에서 120명이 사라지고 일부는 죽거나 배에 붙어서 배의 일부가 되는 엄청난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실험당시 uss eldridge호에는 176명의 선원과 민간과학자 5명을 포함해 총 181명이 탑승했는데 사라졌다 되돌아 왔을 때 생존자는 21명에 그쳤습니다.40명은 방사능에 노출돼 죽거나 감전사로 타죽고 나머지 120명은 실종됐고, 생존자들도 대부분 정신이상자가 되어 강제제대를 했습니다. 전쟁의 와중에 개발을 서두르다가 안전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승무원들이 타고 있는 실제의 선박을 대상으로 실험을 하게 되어 피해는 더욱 컸다. 물론 이 실험에 대해 선원들은 전혀 알지 못한 상태로 임했다고 합니다. 정부는 이 실험을 바탕으로 공간이동 실험을 계속 하려고 했지만 테슬라가 없인 연구 성과가 없어서 취소 ㅤㄷㅚㅆ습니다..이밖에 폐시시킨 테슬라의 발명품과 이론은 상당 합니다..죽음의 광선무기(death ray):발전소 수십기의 수조와트(=수십억kwh)의 전력을 머리카락보다 가늘게 실어서 발사하는 무기입니다..1900년 이전, 그는 테슬라 코일을 실험하는 중에 죽음의 광선무기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음,태양광선보다 50배나 빠른 속도를 가진 빛을 만드는 방법을 발견 합니다..그리고 1915년 테슬라는 5천만 볼트의 전기에너지를 무선으로 원거리에 보내 목적물을 파괴하는 것이 가능하며, 자신은 이미 그 무선송신기를 만들었음을 증명할 수 있고, 이 기구는 세계 아무 곳이나 원하는 목적물을 정확하게 겨냥할 수 있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너무나도 황당하게 여겨져 그의 발표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표면적으로는 아무도 없었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당시 미국은 그가 완성했다는 '죽음의 광선' 관련 기술자료와 실험 데이터 등 모든 문서들을 페터슨 공군기지로 보내 거금을 투입해 '프로젝트 닉'을 추진하여 이 광선 무기의 실현 가능성을 연구했다고 합니다..하지만 그 와중에 한때 테슬러의 광선 무기 문서들이 증발하는 기이한 해프닝이 발생하기도 해 그의 자료 카피가 국외로 유출된 것이 아닌가 논란이 일기도 했죠.. 콜럼비아 대학에서 무기를 연구하던(현 워싱턴 dc에 소재한 국방분석 연구소 소속) 젊은 과학자 타운스(charles hard townes)는 아주 짧은 초단파를 만들기 위해서 고심한 끝에 4년 만인 1950년에 메이저 광선을 만들었는데 이역시 테슬라의연구를 이용한 것이 였습니다.. 이 원리를 이용하여 1958년 하워드휴즈 항공사에서는 레이저 광선을 만들었는데, 미국 역시 1958년 광선무기를 개발하는 '시소우' 급비 프로젝트에 착수하여,1960년 소련 수상 후루시초프는 '새롭고 환상적인 무기가 완성단계에 있다'며 가공할 광선 무기 개발을 공언했습니다,이온레이건: 간단히 말해서 고전압의 전기를 발사하는 총입니다..인공지진기계: 간단히 말해서 규칙적인 진동을 일으켜서 지진을 일을키는 장치 입니다..그는 휴대용 인공지진발생 장치를 발명 했는데 스스로 파손 시켰다고 합니다..목소리와 이미지를 전파에 실어서 공기를 통해 전송하는 방법 발명:대충 am,fm등의 주파수에 음성신호,이미지신호를 실어서 보내는 방법이라고 보면 됩니다,테슬라는 이러한 방법을 이용해 전 지구적인 네트워크화,즉 무선인터넷화를 계획 했습니다,오늘날 같이 무선으로 이미지,목소리,뉴스,날씨,주식등을 알려주는 계획이죠,,그는 무선인터넷,라디오,텔레비전,위*송,휴대용tv,휴대용dmb,위성dmb,핸드폰등을 발명했는데,그야물론 오늘날의 것과는 좀 다른 원시적인 모습이었습니다,무선 송전기술: 테슬라 코일로 규칙적인 전자기파를 발생시킵니다, 반대편 테슬라 코일로 그 에너지를 수신해서 증폭시켜서 전등을 밝히거나 모터를 작동시키거나 그외의 여러가지 일상생활과 산업에 사용할수 있다고 하죠,테슬라의 무선송전 장치를 작게 축소해서 만들면 헨리 모레이의 무한동력 발전기가 된다고 합니다,마이너스 정전기 전류방패막 이론: 마이너스정전기로 둘레를 감싸는 인공전리층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테슬라는 이 원리를 이용해 전기추진 비행접시를 설계 및 제작했다고 합니다, 엄청난 전류발전장치의 발명가로 유명한 테슬라박사는 당시 텅거스카지방의 사람이 살지않던 숲속에, 독자적으로 개발했던 세계최초의 250만와트(=2500kwh) 전류방패의 실험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가 실험을 하고있던 전류방패란, 당시 테슬라박사가 250만와트의 전력을 형성하여 포탄을 막아내는 실험을 하던 전력장치로, 그 실험장치는 포탄을 막아내는 실험중에 그때 일어난 폭발로 인해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고 합니다만 폭탄의 폭팔을 흡수하는데는 성공 했습니다..1908년후 테슬라박사는 전류방패를 만드는 일을 일시적으로 포기했지만 테슬라는 절대로 포기 하지 않았다,인간을 초인화:마이너스 정전기로 인간의 몸을 대전시키면 대전된 인간은 구전번개를 만들수 있고, 하늘에 비를 내리게 하고, 구름을 만들고 우박과 눈을 내리게 할수 있으며, 슈퍼맨처럼 하늘을 날수 있고 물위를 걸을수 있다고 합니다,미 정부는 '몬톡 프로젝트'라고이 이론을 바탕으로 초인을 만드는 실험을 했지만 성공 여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입자광선무기:아원자 입자들이 에너지 장에 의해 자극되어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특정한 목표를 향해 가는 것입니다.테슬라는 입자광선을 엄청난 양의 전자 광선이 번개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입자광선은 강력한 전자기 펄스(emp)도 발생하기 때문에적의 인공위성이나 미사일의 중력장에 혼란을 일으켜 떨어뜨릴 수 있으므로 이중의 파괴력을 지닌다고 합니다..타임머신:1943년 미 해군이 시공초월의 가능성을 파악하기 위해 비밀리에 진행한 특급 실험 필라델피아 익스페리먼트의핵심 기술로 알려진 테슬라의 타임머신 발명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1895년 3일 3일 미국의 뉴욕시에서 전기를 증폭시켜 강력한 전류를 발산하는 테슬라 코일의 변압기 성능을 실험하던 테슬라가 이상한 현상을 목격한 일이 있었습니다.그 현상이란 초강력 전류가 흐르는 자기장 물체가 속도와 방향을 특정 패턴으로 회전할 시 해당 지역의 시간, 그리고 공간이 전류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었죠..당시 회전하는 자기장의 영향을 받은 부분 내부에 시간과 공간을 알 수 없는 또 다른 세계가 보이는 것을 확인한 그는 재빨리 변압기의 작동을 멈추고 이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려 하였다고 합니다..이후에 1895년 3월 12일 평소에 테슬라와 친분이 있던 뉴욕 헤랄드 신문기자 존 아담스는 커피를 마시려고 인근 카페를 방문 하였다가그곳에서 테슬라를 만났다고 합니다.
처음에 테슬라가 자신을 못알아보고
어깨가 아픈지 이를 만지며 고통스러워 하는 것을 본 그는 무슨일이 있었냐고 물었고,테슬라가 몇백만 볼트의 전류를 어깨에 맞았다며 자칫 잘못했으면 죽을 수도 있었다는 말을 하자 수첩을 꺼내 그가 말하는 내용을 빠짐없이 적기 시작 하였다고 합니다.당시 테슬라가 말한 내용은 테슬라 코일에서 발산된 강력한 전류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데 영향을 줬다는 것이었고그는 일주일간 조수와 함께 이와 같은 실험을 계속 진행하다전류를 어깨에 맞고 그 과정에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모습을 한꺼번에 목격했다는 것이었죠...이밖에도 그의 연구 성과와 특허품만 해도 팔백개가 넘는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너무나 뛰어났기에 인정을 받지 않는 그의 연구 성과는 지금도 정부 산하에 관리 되고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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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역사를 이끈 그사람들 이 나이에 무얼했을까 ?
1세:누구나 비슷하게 생겼다2세:될 놈은 약간 이상한 기색을 보인다3세:푸이, 중국 황제가 되다.모짜르트, 하프시코드를 연주하다4세:마이클 잭슨, 가수로 데뷔하다5세:모짜르트, 협주곡을 작곡하다6세:이소룡, 연기를 시작하다7세:베토벤, 무대에 서다8세:편지를 쓸 수 있다 9세:모짜르트, 3곡의 교향곡을 작곡하다10세:에디슨, 과학실험실을 만들다11세:할머니보다 키가 커진다12세:로리타가 험버트를 만나다13세:빌 게이츠, 컴퓨터 프로그램을 시작하다14세:줄리엣, 로미오와 연애를 시작하다15세:복녀, 홀애비와 결혼하다 펠레, 프로축구선수로 첫 골을 넣다16세:이몽룡, 성춘향과 연애를 시작하다. 아리스토텔레스, 대학(아카데메이아)에 입학하다17세:유행가에 자주 등장한다18세:테레사 수녀, 인도에 가다19세:엘비스 프레슬리, 가수 생활을 시작하다20세:다이애나, 찰스 황태자와 결혼하다 빌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사를 설립하다21세:스트브 잡스, 애플컴퓨터사를 설립하다22세:알리, 세계 헤비급 챔피언이 되다23세:주말이 갑자기 의미가 있어지기 시작한다24세:마를린 몬로, 배우 생활을 시작하다25세:니체, 바젤대학 교수가 되다26세:월트디즈니, '마키 마우스'를 발표하다27세:로빈슨 크루소, 해변에 도착하다28세:김영삼, 국회의원에 당선29세:펠레, 1000번째 골을 성공30세:베토벤, '월광 소나타'를 발표하다31세:아직 29살이라고 우길 수 있다32세:군대에 지원해도 받아주지 않는다33세:예수,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다34세:정일권, 육군참모총장이 되다35세:석가모니, 도를 깨치다 나폴레옹, 황제가 되다 퀴리부인, 남편과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다 모짜르트 사망하다36세:마가렛 미첼 여사,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발표하다37세:가족을 위해서 캠코더를 산다38세:병으로 죽으면 엄청 약오른다39세:걸리버, 여행을 시작하다40세:헨리 포드, 포드사를 설립하다41세:이주일, 텔레비젼에 첫 출연하다42세:아이슈타인,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다43세:퀴리부인, 노벨 화학상을 수상하다 유진오, 대한민국 헌법을 기초하다44세:박정희 소장, 5.16 혁명을 일으키다45세:히틀러, 독일의 지도자가 되다46세:간통죄에 많이 걸린다47세:대학을 졸업하고 몇년이 지났는지를 계산해야 알 수 있다 한국의 정동영 국회의원이 방송통신대학 2년에 편입했다48세:통계학적으로 돈을 제일 많이 번다49세:'9'라는 말이 절실히 느껴진다50세:히틀러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다51세:태어난 지 반세기를 넘어선다52세:카드 한 벌과 수가 같다53세:숀 코너리, 마지막으로 007시리즈에 출연하다 사담 후세인, 걸프전을 일으키다54세:라식 수술을 받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55세:정년이 시작된다56세:손주가 자식보다 더 사랑스럽다 노무현,한국화합 대통령당선57세:윌리엄 와일러 감독, 영화 '벤허'를 만들다58세:캐롤 요셉 워틸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되다59세:올브라이트, 여성으로 처음으로 미국 국무장관이 되다60세:옐친, 러시아 초대 대통령 되다61세:'경험'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한다62세:피카소, 21살의 프랑수와즈 질로를 만나 첫눈에 반한다63세:미국에 사는 여인 아셀리 키, 인공 수정으로 출산에 성공하다64세:자신의 후임자를 찾아야 한다65세:교수들의 강제 퇴직 파티가 열린다66세:아라파트, 팔레스타인 대통령이 되다67세:"이제 늙었어"라는 말을 하면 오히려 이상하게 들린다68세:안필준 전 보사부장관, 의학박사 학위 취득하다69세:테레사 수녀, 노벨평화상 수상하다70세:클린트 이스트우드, 마지막으로 영화 출연하다71세:짐을 들고 있으면 주변 사람이 욕을 먹는다72세:부시 전 미국 대통령, 스카이 다이빙에 성공하다73세: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에 재선되다74세:김대중, 대한민국 대통령에 당선되다75세:넬슨 만델라, 남아공화국 대통령에 당선되다76세:기저귀를 차고 자야 맘이 편하다77세:윈스턴 처칠, 영국 수상에 재선되다78세:앞으로의 1년씩이 인생의 보너스로 느껴진다79세:프랑크 시나트라, 마지막 리사이틀 가지다80세:어디를 가나 값을 깍아 준다81세:'長壽'라는 말이 어울린다82세:톨스토이, 가출하여 시골역에서 사망하다83세:괴테, <파우스트> 완성하다84세:보청기 없이는 아무것도 들을 수가 없다85세:프랑스에 사는 장 칼몽 할머니, 펜싱을 배우기 시작하다86세:짠 음식도 이제 신경 쓸 필요가 없다87세:TV연속극이 본방송인지 재방송인지 알 수가 없다88세:사진첩에 있는 사람들 중 반은 기억할 수가 없다89세:파블로 피카소, 자화상을 완성하다90세:자식들 이름을 가끔씩 잊어버린다91세:샤갈, 마지막 작품을 발표하다92세:야생 버섯을 마음대로 먹어도 상관 없다93세:가끔씩 자신의 나이를 잊어버린다94세:다른 사람이 음식을 먹여준다.95세:앞에서 얼쩡거리는 사람들이 자식들일 것이라고 생각한다96세:혼자 화장실에 갔다가는 되돌아 나올 수 없다97세:큰 아들이 정년을 맞는다98세:알츠하이머에 걸리기에는 너무 늦었다99세:고지가 바로 저기다100세:장 칼몽 할머니, 자전거 타기를 즐기다.107세:일본 쌍둥이 할머니 자매 중 킨 할머니 사망하다.120세:장 칼몽 할머니. 건강을 위해 담배를 끊다.121세:장 칼몽 할머니, 'Time's Mistress'라는 노래를 발표하다123세:살아 있으면 기네스북에 오른다
면죄자작성일
2013-02-02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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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천재
지상 최강의 천재 존·폰 노이만너무 머리가 좋아서 화성인, 악마의 두뇌를 가진 남자라고 불리기도 했다.수학·물리학·공학·경제학·계산화학·기상학·심리학·정치학 등모든 분야에서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어렷을 적 놀이로 두꺼운 전화번호부를 완벽하게 암기현재의 PC는 노이만형 컴퓨터라고 하는데, 노이만이 만든 것이 원조6세 때 전화번호부를 사용하여 8자리수의 나눗셈을 암산으로 계산할 수 있었다.8세 때 「미적분」을 마스터, 12세 무렵에는 「함수론」을 독파.참고로 「함수론」은, 이공계 대학생이 1 2년차에 배우는 수학으로고교시절 수학에 자신있는 학생이라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한 수학자가 3개월에 걸쳐 고심해온 끝에 간신히 푼 문제를 노이만은 암산으로 해결;;한 번 보면, 결코 잊지 않는 사진과 같은 기억력컴퓨터 같은 수준의 게산속도로 실제 노이만은 스스로가 발명한 컴퓨터와 경쟁해서 승리할 적 있다.노벨상 수상자조차 따라갈 수 없는 머리회전머리 속에는 면적 1 헥타르 정도의 버추얼 화이트 보드가 있어서노이만은 종이와 연필을 사용하지 않고 그 뇌 캠퍼스를 이용 혼란스러운 사고를 할 수 있었다.지나치게 인간을 초월한 사고능력에 의해 인간이 아니라는 의심을 받기도 했다.수소폭탄의 효율계산을 위해 페르미는 대형 계산자, 파인먼은 탁상 계산기로,노이만은 천정을 바라보며 암산했지만, 노이만이 빠르고 가장 정확한 값을 냈다.하루 4시간의 수면 시간 이외에는 항상 뭔가를 골똘히 생각짖궂은 성희롱을 너무 즐겨서 비서의 스커트 안을 ㄷ르여다 보는 등 그의 행동은 그야말로 에로 그 자체추정 IQ는 250~300으로, 만일 동경대 의댈르 목표로 한다면 1주일 정도만에 합격할 레벨천재라고 일컬어지는 학자 중에서도 발군의 기질한 번 본 것을 결코 잊지 않으며 계산은 컴퓨터보다 빠르다.----------------------------------------------------------------------------------------------------------------누군가가 노이만에게 물었다" 200 마일 길이의 철로의 양쪽 끝에 각각 위치해 있는 두 대의 기차가 시속 500 마일의 속도로 서로를 향해 출발합니다.두 기차가 출발하는 때부터 두 기차가 충돌하는 때까지 파리 한 마리가 시속 75 마일의 속도로 두 기차 사이를계속 왔다갔다 합니다. 파리가 이동한 거리는 얼마입니까? "문제를 들은 노이만은 단 1초도 지체하지 않고 대답했다." 150 마일입니다. "그러자 노이만에게 문제를 낸 사람은 실망스럽게 대답했다." 역시 당신은 속임수에 걸리지 않는군요.보통사람들은 이 문제를 들으면 무한급수를 이용해서 풀려고 하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그러나 그렇게 문제를 풀게 되면 문제의 트릭에 걸린 것이며 실은 이 문제는 파리가 움직이는 시간이2시간이라는 것을 이용하면 간단하게 풀리지요.당신이 이렇게 빨리 대답한 것을 보면 이 문제를 두번째 방법을 이용해서 풀었군요? "그러자 노이만이 대답했다." 아니요, 저는 무한급수를 이용해서 풀었는데요. "----------------------------------------------------------------------------------------------------------------#1유진 위그너(Eugene Wiegner)라는 헝가리 출신의 물리학자로 1963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였습니다.헝가리 출신의 뛰어난 수학자, 물리학자, 화학자 등이 많기 때문에 어느날 기자가 위그너에게" 왜 헝가리엔느 그렇게 뛰어난 천재가 많습니까? " 라고 물어봤다고 하니다.위그너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못 알아듣겠다는 표정으로" 천재가 많다니요? 천재는 오직 노이만 한 사람뿐입니다. " 라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유진 위그너는 대학 시절 수학을 공부하려다 절친한 친구인 노이만의 뛰어난 재능을 보고는자신이 수학을 공부해서는 노이만을 넘어설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물리학으로 전공을 돌렸고,그는 결국 노벨 물리학상까지 받은 것입니다.#2프린스턴 고등과학원에는 오펜하이머, 아인슈타인, 괴델 등 당대 최고의 학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그 중에서도 특히 노이만은 머리가 뛰어났던데 별명이 " 반신 " 이었다고 합니다.당시 고등과학원에서 유행했던 일화로는 노이만은 원래는 신인데 인간을 너무 좋아해서인간들을 철저히 연구한 결과 인간처럼 행동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머리가 좋ㅇ르 수 없다면서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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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글터] 천체 -펄서-
▲ 전자기파 등을 방출하는 펄서
펄서는 1967년 케임브릿지 대학의 안토니 휴이시 교수와 그의 제자 조슬린 벨 버넬이 처음 발견한 천체.
이 별의 존재를 처음 발견하게 되어 노벨 물리학상까지 수상하지만 그건 연구가 몇년 지난 후의 일이라고함.
▲안토니 휴이시 교수(좌) 조슬린 벨 버넬여사(우)
펄서를 알기위해선 일단 중성자성을 알아야하는데 중성자성은 태양보다 20~30배 내외의
무거운 별이 적색거성의 단계를 거쳐서 수명이 다하면
초신성 폭발을 일으키고, 그 중심부분이 중력에 의해 수축에 수축을 거듭하게 되어 전자와 양성자가 결합되어서
구성물질이 주로 중성자로 된 별을 말함. 그 중성자성 중에서 펄스상의 전파를 원자시계만큼 정확하고 일정하게 방출하는 별을 우리는 펄서라 부르는데
(1.5-8.5 밀리초 주기로 광선을 방출하는데 이 방출한 광선이 지구를 향할때만 관측이 가능, 이러한 현상을 등대효과라고 함.)
현재까지 발견된 모든 펄서는 다 중성자성이라 현재까지 천문학계에선 펄서 = 중성자성의 개념으로 보고있슴.
▲ 펄서의 개념도
1. 펄서의 크기
실상 펄서의 크기는 대부분 직경 50km를 넘지 않는 작은크기인데 오래전엔 태양보다 컸을 그 별이 지금은 크기가 이렇다?
이것이 뜻하는 것은, 대신에 질량은 무지막지하게 나간다는 뜻,중력에 의해 압축된 펄서는
크기는 작아졌지만 바늘 끝만한 조각도 빌딩 수십채의 무게와 맞먹고, 티스푼 한스푼만한 양도
수십억톤이 넘는 초 고밀도의 물질로 바뀌게 됨
크기가 겨우 몇 km도 안되는 작은별의 일부분이 그 정도 질량.
▲ 가장 유명한 펄서 중 하나인 게성운의 펄서
2. 펄서의 자전속도
대부분의 행성은 자전을 하고 있는데, 대부분 느리거나 빨라도 몇시간은 걸림,
그런데 이 펄서는 그 괘를 완전히 달리하는 천체.
펄서의 자전주기는 0.1 ~ 10초, 빠른것은 0.1초에 한번씩, 즉 분당 600번 이상을 회전.
드릴보다 빠르게 회전한다고 보면 됨. 보통 천체중에 펄서보다 자전속도가 빠른 천체는 없다고 보면 됨.
얼마전에 다이아몬드 행성이 분당 1만번 자전한다고 했던 유명한 기사가 있었는데, 이건 사실 잘못된 내용임,
다이아몬드 행성은 백색왜성으로 펄서보다 자전이 빠를수가 없슴. 아마도 기사 원문을 쓴 사람이 처음에 잘못썼거나 아니면 그 원문을 번역하면서 번역상 오류가 있거나. 그것도 아니면
단순히 사람들을 자극시키기 위한 낚시성 글로 썼을거라 생각함.
다이아몬드 행성은 엄밀히 말하면 높은 밀도로 펄서의 조석력에 부숴지지 않고 남아있는 백색왜성의 "잔해"
펄서의 주변을 공전하고 있는데, 펄서는 다른별들의 여러 물질을 끌어올수록 더 회전력이빨라짐,
백색왜성의 잔해들이나, 그에 준하는 행성들을 흡수한 펄서의 경우
1분에 1만번 이상 회전하는 초고속의 밀리 세컨드 펄서가 생길수 있다는 말이었는데,
아마도 이 부분을 번역하면서 오류가 난거 같음.
▲ 신의 손이라 불리는 성운 - 이 가운데 펄서가 있다.
3. 펄서가 방출하는 전자기파
펄서는 빠른 자전속도 만큼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분출하는데 이게 바로 전자기파라 불리는 에너지임, 엄청난 자전속도로
에너지를 긁어모아 별의 자기극 방향에서 엄청난 양의 전파나 가시광선, X-선등의 빔을 분출하는데
이는 펄서가 생성될때 수축하면서 자기장이 실타래처럼 뭉치면서 강해지며 주변으로 자기장을 뻗치고, 이 자기장 속에 이온들이 갇히고 펄서가 회전하면서 이 이온들을 주기적으로 방출하면서 생기는 것들임.
지구에서 보면 이 빔은 보였다 안보였다 해서 마치 별이 깜빡깜빡 하는것 처럼 보이는데
그것도 단 몇백만분의 일초도 오차없이 일정하게 깜빡임.
천문학자들은 약 1000만년 가량을 전자기파를 내뿜는데 왜 1000만년동안 방출하고,
어떠한 이유로 그 활동이 잦아지는지, 또 왜 그렇게 일정할수 있는지 아직 그 매커니즘을 규명할순 없다고함.
실상 연구한지 40년이 넘어가는데 아직까지 펄서에 대한 연구는 걸음마 수준이라고함.
펄서도 종류가 있는데,
자전에너지 펄서, 강착에너지 펄서, 마그네타 등 이렇게 종류가 나뉨
신지현작성일
2012-07-06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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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DJ, 노벨평화상 아닌 물리학상 받았어야
“DJ는 노벨평화상이 아니라 노벨물리학상을 탔었어야 했던 사람이다. 그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이 에너지 입자인 햇볕을
이용하여 핵무기를 만들어 주는 방법을 고안해 냈다.”전 안기부직원 김기삼씨가 지난달 ‘김대중과 대한민국을 말한다’라는
책을 출판한데 이어 7일(현지 시간) 미국 뉴욕에서 ‘DJ 노벨상 공작 비밀문서’를 전격 공개했다.
김씨는 이날 뉴저지 포트리도서관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2000년 당시 국정원이 작성했던 DJ 노벨상 공작관련 비밀문서 5건
을 공개하고 “DJ는 김정일에게 인류 역사상 최고액의 뇌물을 몰래 주었으며 김정일은 그 돈으로 핵무기를 개발했다”고 주장
했다.
김씨는 “공개한 문건들은 국정원에서 대통령 또는 고위간부에게 보고된 문서로 공개에 따른 모든 책임을 질 것”이라며 각오
를 밝혔다.김씨가 공개한 문서는 모두 7건으로 이중 5건은 국정원 내부문서이며 1건은 김씨의 기자회견문, 1건은 언론보도 내
용이었다.
김씨는 "노르웨이의 노벨평화상위원회 내에 DJ를 적극 돕는 협조자가 스톨셋 부위원장이었다“며 ”스톨셋은 DJ에게 노벨평화
상을 수여하기 위해서는 인권과 민주주의만으로는 부족하고 남북관계에 어떤 획기적인 돌파구가 필요하다는 언질을 계속 보
내왔다“고 주장했다. DJ는 그 '획기적 돌파구'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고 김정일 역시 DJ의 노벨상에 대한
병적인 집착과 노벨평화상위원회의 입장을 충분히 탐지하고 있었다고 김씨는 주장했다.
김씨는 DJ의 노벨상 수상 공작에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 중의 하나인 스웨덴 교포인 H씨의 방한 과 관련한 국정원 내
부문건을 먼저 공개했다, 김씨는 이 서류가 해외에 주재하는 국정원의 파견관이 본부 데스크로 보내는 비밀 보고서라고 설명
했다.
서류에 따르면 H씨가 2000년 2월말 방한하는데 청와대 관계자가 공항 영접과 호텔 예약 등을 책임진 것으로 나타났다. 이 시
기에 노벨재단의 미카엘 슐만 사무총장도 한국을 찾는다.
문건엔 이들이 박지원 당시 장관을 만나고 DJ를 예방한다고 기록돼 있다. 또 “스웨덴 외무차관이 3월중에 방북하는데 우리 측
의 누가 대북 메시지를 전달할 것인가”를 H씨와 논의할 예정이고 스웨덴 차관은 “공식적으로 노출되지 않은 권위있는 사람을
요구했다”고 기록돼 있다. “또 S문화재단 관계자와 이 문제를 최종 협의할 예정”이라고 적혀있다.
두 번째 문건은 ‘NB사업 관련 보고’로 NB는 Nobel Prize의 약자이다. 이 문건엔 신임 노벨상 위원회 임원 명단이 붙임자료로
첨부되어 있다.
세 번째 문건은 국정원에서 청와대에 보고한 것으로 보이는 ‘금년도 정세전망’이다.
이 문건엔 “특별한 이변이 없는 한 남북정상회담 개최로 우리측 후보가 금년도 유력 수상후보로 부상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또 ‘활동방향’이란 항목엔 로비를 했다는 추문을 경계하고 있고 또한 남북 공동수상론을 경계해야 한다는 부분도 나온다.
김씨는 노르웨이 공관 관계자들의 노벨상 관계자 접촉은 양세훈 전 노르웨이 대사가 쓴 ‘장춘에서 오슬로까지’라는 책에 잘 설
명돼 있다고 말했다.
또 ‘보안대책’이라는 항목엔 “대통령은 노벨상에 초연한 척 보이도록 하고 특히 수상 가능성이 높아질수록 언급을 자제하
라”고 당부하고 있다.
네 번째 자료는 2000년 6월 말 청와대 인사의 노르웨이 출장 지원 관련 문서로 “역대 노벨상 수상자 중 현직에 있으면서 수상
한 사람이 누군지 파악하라는 지시‘가 있다. 김씨는 ”이때 이미 노벨상 수상을 자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다섯 번째 문건은 분데빅 노르웨이 전 총리의 방한 지원에 관한 국정원 내부 보고서로 청와대와 국정원 관계자의 공항 출영
등 성대한 영접을 담은 내용이다.
김씨는 결론적으로 “DJ는 김정일에게 천문학적인 뇌물을 제공하고 남북정상회담이라는 거대한 쇼를 성사시켜 나갔다”며 “현
금을 챙긴 김정일은 태연스레 평화 제스처를 연기해 줌으로써 출연료에 보답해 주었다”고 주장했다.그는 “결국 햇볕정책은 김
정일에게 핵무기와 미사일을 안겨주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라며 “우리는 이제 상시적으로 김정일의 핵공갈 아래 놓이게 되었
다”고 개탄했다.
다음은 김씨의 기자회견 인사말이다.
안녕하십니까? 김기삼입니다.
오늘 국정원의 노벨상 공작 문건을 공개하기 전에, 잠깐 개인적인 소회를 몇 마디 전하고 시작할까 합니다. 양해해 주시기 바
랍니다.
몇 달 전, 북한의 어뢰 추진체를 건저 올려 물증으로 제시했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국민들이 이 명백한 물증을 믿지 않았습니
다. 그래서 제가 오늘 문건 몇 페이지를 제시한다고 하여 과연 국민들이 믿어주실지 하는 걱정이 앞섭니다. 우리 사회에 만연
한 불신의 골을 어떻게 메울 수 있을지 참 막막합니다. 또한, 국민들이 믿어줄 지의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과연 제가 공개하
는 이 문건의 내용이 각 언론사들의 데스크를 통과하여 내일 보도나 될 수 있을 런지 하는 우려도 듭니다. 한 달 전쯤에 제가, “김대중과 대한민국을 말한다”라는 제목의 책을 냈습니다. 제가 책을 낸 이유는, 김대중이라는 희대의 사
기꾼에 대해, 죽어서까지 거짓말을 해대는 이 신통한 사기꾼에 대해, 저라도 나서서 좀 반박을 해야 겠다는 심정이 들었기 때
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저의 책에 대해서는 아무도 보도해 주지 않더군요. 저의 문제에 관한한 여도 야도, 상도동도 동교동도
모두 덮기를 바라는 것 같습니다. 아마 이 문건을 공개하게 되면 전직 직원의 도덕성이 또다사 논란이 될 것입니다. 그동안 저는 전직 직원이 이러한 문건을 공
개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여러 차례 밝혔습니다. 아직도 그런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회 있을 때
마다 정부에서 엄정하게 조사해 줄 것을 요청 드렸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반향이 없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이 문건들을 제
가 혼자 가지고 있는 것은 의미가 없어 졌습니다. 원래 주인에게 돌려드린다는 심정으로 세상에 공개합니다. 공개에 따른 책
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판단은 국민 여러분들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고 있노라면 참 어처구니없을 때가 있습니다. 지난 해 정부는 김대중에게, 국장을 치러주고
국립 현충원에 안장까지 시켜주었습니다. 우리가 죽어서 무슨 낯으로 순국선열들을 뵐 수 있을지 참 난감하기 그지없는 일이
었습니다. 참, 이러고도 무슨 “공정한 사회”를 이루겠다는 것인지 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기회에 저는 다시 한 번 더 강조합니다. 김대중이란 사람은 노벨평화상이라는 쇠붙이에 눈이 멀어 조국을 반역했습니다.
그는 김정일에게 인류 역사상 최고액의 뇌물을 몰래 주었고, 김정일은 그 돈으로 핵무기를 개발했습니다. 이렇게 햇볕정책은
김정일에게 핵무기와 미사일을 안겨주는 것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우리는 이제 상시적으로 김정일의 핵공갈 아래 놓이게 되
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김대중 씨는 노벨평화상이 아니라 노벨물리학상을 탔었어야 했던 사람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아는 핵물리학
이론으로는, 햇볕이라는 것은 태양의 핵폭발 과정에서 나오는 에너지 입자입니다. 그런데 김대중이라는 사람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이 에너지 입자인 햇볕을 이용하여 핵무기를 만들어 주는 방법을 고안해 냈습니다. 이를 전문용어로, 리버스 엔지
니어링이라고 합니다. 이는 물리학의 이론과 실제를 완전히 뒤집는 그야말로 신기원입니다.
더불어 뇌물현표 로스쿨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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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일본에 투하된 원자 폭탄
우라늄과 같은 원자번호가 큰 중원소의 원자핵에 중성자를 충돌시키면 원자핵에 분열반응이 일어나고 2개 이상의 중성자가 튀어나오게 된다. 이 핵분열 과정에서는 감마선과 중성자와 함께 엄청난 열에너지가 방출된다. 이러한 핵분열반응이 일정한 조건하에서 연쇄반응을 일으켜 확대되어 나가면 방대한 에너지를 방출하게 된다. 핵에너지를 군사적 목적에 활용한 것이 원자폭탄이며 연쇄반응의 속도를 조절하여 에너지원으로 활용한 것이 원자력발전이다. 페르미(Enrico Fermi, 1901~1954)는 원자핵이 느린중성자를 포획하여 새로운 원소를 만들 수 있다는 제안을 한 공로로 1938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였으며 이후 핵분열의 연쇄반응의 속도를 조절하여 원자폭탄의 개발과 원자력 발전에 기여하였다.독일에서 핵분열이 최초로 관찰된 뒤 페르미를 비롯하여 미국에 망명한 유럽의 물리학자들은 루즈벨트 대통령을 설득하여 원자폭탄 개발을 위해 비밀리에 맨해튼 계획을 수립하게 된다. 당시 페르미는 연쇄반응을 지속적으로 유지시키는 방법을 개발하는 일의 책임자였다.페르미는 맨해튼 계획의 일환으로 시카고 대학에서 연쇄반응의 빠르기를 조절하는데 중성자를 흡수하는 물질인 카드뮴(Cd) 막대를 원자로에 넣거나 빼는 방법을 이용하여 연쇄반응의 속도를 조절하였고 이 실험은 1942년 12월 시카고 대학의 스쿼시 경기장에서 성공하였다.이후 1943년에는 테네시 주의 오크리지 서쪽 20마일 지점에 원자폭탄 제조용 우라늄 생산공장을 건설하고 뉴멕시코 주의 로스앨러모스 과학연구소에서 폭탄 개발 및 설계를 진행하였다.1945년 7월 16일 뉴멕시코 주 앨러머고도 근처 사막 트리니티에서 시험 폭파를 거쳐 같은 해 8월 6일 일본의 히로시마에 우라늄 235 폭탄을 3일 뒤 나가사키에 플루토늄 239 폭탄을 투하한다. 이 폭탄의 투하로 히로시마에서는 34만 3000명의 인구 중에서 약 7만 명이 사망, 13만 명이 부상, 완전히 연소·파괴된 가옥 6만 2000호, 반소 또는 반파가옥 1만 호, 이재민 10만 명을 냈고, 나가사키에서는 사망 2만 명, 부상 5만 명, 완전연소 또는 파괴가옥 2만 호, 반소 또는 반파가옥 2만 5000호, 이재민 10만 명을 냈다. 또한 이 폭탄으로 일본의 항복이 촉진되고, 제2차 세계대전을 앞당겨 끝내는 효과도 거두었다.1949년 9월 24일 소련에서도 원자폭탄을 보유하고 있음이 발표되었고, 1952년 10월 3일에는 영국이 몬터벨로 군도에서 원폭 실험에 성공하였고, 1960년 2월 13일에는 프랑스가 사하라사막에서 실험에 성공하였으며, 뒤이어 중국·인도·남아프리카공화국 등에서도 원자폭탄을 보유하게 되었다. 원자폭탄은 사용되는 핵분열물질의 종류에 따라 우라늄폭탄과 플루토늄폭탄으로 나뉘며, 큰 것에는 TNT 폭약 수백t에 해당하는 폭발력을 내는 것부터 kt급의 위력을 내는 것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크기의 것이 있다.폭탄의 원료로 사용되는 우라늄 235는 천연우라늄 광석 속에 약 0.7%가 함유되어 있으며, 나머지 99.3%는 비분열성인 우라늄 238로 되어 있다. 우라늄 238에서 우라늄 235를 추출해 내고, 순도 90% 이상으로 농축한 것이 원자폭탄의 에너지원(源)이 된다.플루토늄 239는 원자로 속의 반응을 끝낸 폐기물 중에서 화학적인 처리에 의해 추출된다. 순도 높게 농축된 우라늄 235·플루토늄 239 등 핵분열물질의 원자핵에 중성자를 충돌시키면 원자핵에 분열반응이 일어나고, 핵분열을 일으킨 원자핵으로부터는 다시 2개 이상의 중성자가 튀어나와서 다른 원자핵에 충돌하여 새로운 핵분열을 일으킨다. 이러한 핵분열반응은 연속해서 확대되어 나가며, 연쇄반응을 일으켜서 방대한 에너지를 방출하게 되는 것이다.이와 같이 연쇄반응을 일으키는 상태를 임계상태(臨界狀態)라 하고, 이러한 상태가 될 핵분열물질의 양을 임계량이라고 한다. 임계량은 분열물질의 종류와 순도 및 기타의 조건에 따라서 달라지게 되나, 우라늄 235와 플루토늄 239에서는 5~20kg 정도이다. 원자폭탄은 우라늄 235과 플루토늄 239를 용기에 넣고, 그것을 임계상태가 되도록 한 장치, 기폭장치를 갖춘 것이라고 할 수 있다.원자폭탄은 보통 때는 임계질량보다 작은 덩어리로 나누어서 저장하다가 필요할 때 한 덩어리로 모이게 하여 임계질량 이상이 되면 순간적으로 폭발한다. 우라늄 원자폭탄의 임계질량은 우라늄 235가 93.5%인 경우 약 52kg이고, 크기는 투포환 정도의 크기이다.우라늄 235의 원자폭탄의 작동과정은 다음과 같다.먼저, 폭탄이 떨어질 때 공기압 센서가 기폭 장치에 방아쇠를 당기고 기폭 장치가 발화하면서 재래식 기폭제를 점화시킨다. 원뿔 모양의 작은 우라늄 235 덩어리가 재래식 포신에 발사되어 더 큰 우라늄 235와 만난다.기폭장치에는 포신형(砲身型:gun type)과 내폭형(內爆型:implosion type)이 있다. 포신형은 원통 속에 임계량의 분열물질을 2개로 나누어 넣고, 화약의 힘으로 한쪽 분열물질을 다른 쪽의 것에 합치게 하여 임계상태가 되도록 하는 것이고, 내폭형은 밀도가 성긴 해면체(海綿體)의 분열물질을 중심에 두고, 주위에 폭약을 배치해 두었다가 폭약을 한꺼번에 폭발시켜 빠르게 압력을 가함으로써 임계상태가 되도록 만든 것이다.폭탄의 살상 및 파괴효과는 폭풍·열·방사능의 3대 효과가 종합적으로 작용하여 발휘된다. 폭발은 100만 분의 1초 내에 일어나고, 지속시간은 200만 분의 1초에 불과하다. 이와 같이 극히 짧은 순간에 막대한 에너지가 방출되므로 수백만 도 이상의 고온이 발생하여 주위의 공기를 가열시키고, 가열된 공기는 급격히 팽창해서 폭풍이 되어 무서운 파괴효과를 내게 된다.가열된 공기는 불덩어리를 형성해서 고열의 열복사선을 방출하여 연소 및 화상효과를 낸다. 20kt의 표준 원자폭탄의 경우 100만 분의 1초 안에 6,000만℃, 100만 분의 1.5초 후에는 5,000만℃, 불덩어리의 지름 1m가 되고, 1만 분의 1초 후에는 30만℃, 불덩어리의 지름 13~14m가 된다.또한 온도 5,000만℃가 될 순간의 폭발압력은 수십만 atm에 이른다. 핵반응시에 방출되는 방사능(초기 핵방사능)은 중성자상해(中性子傷害)를 입히게 하고, 넓은 지역에 퍼져 있는 물·흙·먼지 등의 방사성물질로부터 잔류방사선을 방출하게 하며, 죽음의 재라고 하는 방사능진(fallout)을 내리게 하여 광범위한 방사능 오염지대를 형성한다. 폭발에서 발생되는 효과와 에너지의 분포는 대체로 폭풍 및 충격파 50%, 열복사선 35%, 초기핵방사선 5%, 잔류방사선 10%이다.표준 원자폭탄이 공중·지표면에서 폭발한 경우 폭풍효과에 의해서 폭발중심으로부터 1~5km 이내의 목조건물, 300m 이내의 콘크리트건물, 150~220m 이내의 지하 구조물이 파괴되고, 열복사선에 의해서는 2.5km 이내의 가연성 물질이 연소되거나 인원에게 심한 화상을 입히게 되며, 방사선에 의해서는 1km 이내의 전체 인원에게 치사량의 방사선량을 조사(照射)하게 된다.
출처 : http://cafe.daum.net/ssaumjil 대영제국
쿠라라네작성일
2009-10-03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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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제가 말이죠... 리차드 파인만 씨가 어떤 분인지 잘 알거든요??
일단 고인을 명복을 빕니다. 존경하는 분께서 가시니 많이 우울하더군요.
과학 갤러리도 아니고, 그렇다고 제 전문분야가 물리학도 아니지만 누군가의 이름을 빌린다면 그에 따른 책임도 있다고 보거든요.
리차드 필립스 파인만은 1918년 5월 11일 뉴욕 시에서 루실 필립스 파인만(Lucille Phillips Feynman)과 멜빌 아서 파인만(Melville Arthur Feynman) 사이에서 태어났다. 직업 세일즈맨인 멜빌 파인만은 아들에게 자연에 대한 깊은 호기심을 물려주었다. 파로커웨이에서 성장한 리처드 파인만은 라디오를 수리하고 타자기를 고치며 온갖 종류의 퍼즐을 푸는 데 명수였다. 그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인간이 알고 있는 모든 퍼즐은 내게 이르게 되어 있다. 나는 사람들이 발명해 낸 모든 빌어먹을 수수께끼들을 알고 있었다." 수학과 과학에 남다른 재능이 있었던 파인만은 다른 과목은 몹시 싫어해서 다른 물리학자들처럼 폭넓게 독서하거나 교양을 많이 쌓지도 않았다.(그의 IQ는 그렇게 높지 않은 125정도이다. 그런데 훗날의 교양 수준을 본다면, 그는 지능 지수를 측정하는 데 문화적인 요소를 충분히 포함시켜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 산 증인이다.)1935년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assachusetts Institute of Technology: MIT)에 들어간 파인만은 수학에서 불가사의한 소질을 드러냈다. 그는 이론 물리학이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수학적 절차를 상당히 쌓았다. 그가 4학년 때 쓴 논문 「분자 내의 힘과 긴장」은 인상적인 전조였다. 1939년 매사추세츠 공과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파인만은 당시의 유태인에게 불리한 제도적 편견을 극복하고 프린스턴에 들어갔다. 그는 핵물리학의 발전을 이끈 지도자인 존 휠러(John Wheeler)와 작업했는데, 휠러는 금세 파인만의 소질을 간파했다. 파인만은 1942년에 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논문은 「양자 역학에서 최소 작용의 원리」였다. 그는 20대 초반에 이미 미국의 일류급 이론 물리학자로서 평가받게 된다. 파인만은 원자폭탄 작업에 충원되었고 프린스턴에 있을 때 맨하튼 계획에 참여했다. 1943년 뉴멕시코 로스엘러모스(Los Alamos National Laboratory)로 옮겼는데, 그곳에서 원자폭탄이 만들어졌다. 한스 베테(Hans Bethe)는 그에게서 깊은 인상을 받고 파인만을 "총명과 탁월함을 겸비했다"고 평했으며 그를 책임자 자리에 앉혔다. 파인만은 로스앨러모스에서 훌륭하게 일을 해냈다. 그는 임계질량을 통한 중성자 분열과 관련된 복잡한 계산에 독창적인 기법들을 다양하게 도입했다. 또 한 곳에 안전하게 비축할 수 있는 방사성 물질의 양은 얼마인지를 정했고 개발중인 폭탄의 이론적 측면에 대해 강연하기도 했다. 1945년 7월 최초로 그는 핵 장치를 시험하는 자리에 있었다. 어마어마한 폭발을 보며 그가 한 생각은 이러했다. 그저 "의기양양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시종일관 그것을 작동시키느라 힘들게 일했고 정말 작동할지 확실히 믿지 못하고 있었다. 나로서는 늘 이론적 계산에는 믿지 못할 구석이 있다고 생각해 온 터였다. 그것이 내가 맡은 일이었지만 말이다. 자연이 계산한 대로 되고야 만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순간 자연은 우리가 계산한 대로 움직이고 있다."1945년부터 코넬 대학(Cornell University)에서 조교수로 베테와 함께 연구하면서 양자 전기 역학으로 관심을 돌렸다. 파인만이 양자 전기 역학을 수정한 것은 전후 물리학의 주요 사건이다. 기존 이론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언젠가 파인만이 설명한 대로, "계산하여 해를 구하려고 하면 너무나 풀기 어려운 복잡한 방정식으로 빠져든다. 제일 근사한 해를 얻을 수는 있지만, 수정하여 더 정확한 해를 구하려 하면 무한량들이 불쑥 튀어나오기 시작한다." 전자가 전자기장 안에서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작용하는 것은 틀림없지만, 양자 역학의 용어로 그것을 설명하려면 기본적으로 무한수의 양성자 - 우리의 감각으로 인식할 수 없으므로 가상의 입자(Vurtual particle)들로 알려진 - 의 방출과 흡수에 말려들게 된다. 볼프강 파울리(Wolfgang Pauli)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같은 인물들이 숱한 시도를 거듭했지만 계산은 계속 불가능한 해를 산출했다. 그런데도 그 근거가 된 이론은 공격할 수가 없었다. 파인만의 독특한 접근법은 일련의 다이어그램(뒷날 파인만 다이어그램으로 불림)을 써서 전자와 광양자, 전자가 흡수하거나 방출하는 광양자를 추적할 수 있었다. 이들은 양자 전기 역학이 기술하는 기본 운동들이다. 파인만 다이어그램은 추상적 계산을 구체화함으로써 숫자들을 '되틀맞춤(Renormalization)'하고 필요 없는 무한대를 제거할 수 있었다. 이 '경로 적분(path integral)' 방법의 결과로 양자 전기 역학은 완전히 새로 태어났으며, 오늘날에는 10^9까지 놀라운 정확도를 가지고 계산할 수 있다. 1965년 파인만은 노벨 물리학상(Noble Prize in Physics)을 받았다. 같은 시기에 비슷한 방법으로 양자 전기 역학을 재정식화한 줄리언 슈윙거(Julian Seymour Schwinger)와 도모나가 신이치로(Sin-Itero Tomanaga)와 함께였다. 파인만의 방법은 가장 단순하고 직관적이었으며 그의 다이어그램은 소립자와 관련된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광범하게 이용되었다. 파인만은 1951년 캘리포니아 공과대학(California Institute of Technology:CalTech)으로 옮겨 세계적인 이론 물리학자로 왕성하게 활동했다. 초저온 상태에서 중력을 무시하는 액체 헬륨의 이상한 성질을 설명하는 이론도 그의 업적이다.또한 '초유동(Superfluidity)'을 설명하면서 초전도(Superconductivity)와 관련된 현상을 거의 이해하기에 이르렀다. 초전도는 1957년 존 바딘(John Bardeen)과 리언 쿠퍼(Leon N. Cooper), 존 슈리퍼(John R. Schrieffer)에 의해 밝혀졌다. 파인만은 베타붕괴(Beta decay), 즉 방사성 원소의 점차적인 해체로 증명된 '약력'의 움직임에 관한 이론도 발전시켰다. 파인만은 홀짝성 보존 법칙(law of parity conservation)이 약한 상호 작용(Weak interaction)에서는 지켜지지 않음을 발견하고 - 1950년대에 실험을 통해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 "일생 처음이자 유일하게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자연 법칙을 발견했다"고 스스로 묘사할 만한 순간을 경험했다. 친구이자 캘리포니아 공과대학 동료인 겔만(Murray Gell-Mann)은 파인만의 자만을 나무랐다. 하지만 겔만과 파인만은 약한 상호 작용에 관한 일반 이론을 발전시켜 1958년 「페르미 상호 작용 이론」으로 처음 출간했다. 일반적으로 양자 전기 역학은, 또 파인만 자신은 원자 구성 입자의 구조를 설명하는 겔만의 양자 색역학 이론(Quantum chromodynamics) 발전에 기여했다. 파인만은 때론 강의중에 봉고 드럼을 치기도 한 다채로운 교수였다. 그의 스타일은 생기 있고 유머가 넘쳤는데, 그러면서도 물리학의 폭넓은 주제를 놓치는 법이 없었다. 1961년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에서 물리학 개론을 강의했는데 나중에 『파인만 물리학 강의(The Feynman Lectures on Physics)』로 출간되었다. 그 책은 애초에 대학 차원의 교재로 만들어졌지만 독창성 때문에 기초 물리학의 모범적 저술이 되었다. 독자를 위한 여섯 차례의 강의는 1965년 『물리 법칙의 특성(The Character of Physical Law)』으로 처음 출간되었다. 파인만 강의 스타일 특유의 느낌을 담은 그 책은 중력, 과학과 수학의 관계, 에너지 보존 법칙, 대칭 법칙, 엔트로피 개념 등에 관한 기초적인 입문서이다. 1980년대에도 파인만은 캘리포니아 빅서의 에살렌 연구소에서 청중을 상대로 가의했다. 1985년 『파인만씨, 농담하는 거죠 (Surely You're Joking, Mr. Feynman!)』라는 자서전적 회고록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인물이 되었다. 1986년에는 로저스 위원회에 참가하여 우주선 챌린저 호의 이륙시 폭발을 조사하는 정부측 심사원으로 임명된다. 챌린저 호의 일곱 승무원이 생명을 잃었다. 파인만이 폭발의 주요 원인이 고무 덮개가 찬 기온으로 굳어진 데 있음을 알아내자, 그는 대중 매체의 머리 기사를 장식하게 되었다. 그는 청문회에서 극적이고 짧은 순간에, 그 재료에서 떼어 낸 한 조각을 얼음물에 떨어뜨림으로써 고무가 어떻게 일순간 탄성을 잃어버리는지를 보여 주었다. 파인만은 챌린저호의 재앙으로 미 항공 우주국(NASA) 과학자와 기술자에게 가해진 관료적 억압을 강력하게 비난했다. 파인만은 로저스 위원회에서의 활동을 자세하게 그린 『다른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든 왜 걱정하는가? (What Do You Care What Other People Think?)』를 1988년에 출판했다. 파인만은 20세기의 많은 물리학자들처럼 무신론자였다. 그의 아버지도 무신론자였다. 그는 아버지 장례식 때 랍비가 송가를 외려 하자 뒤엎어 버렸고, 만년에는 종교에 관해 그가 한 말들이 캘리포니아의 한 텔레비전 방송국에 의해 삭제되기도 했다. 파인만은 이렇게 말했다. "이 불가사의한 우주, 어마어마한 범위의 시간과 공간, 온갖 동물들, 서로 다른 행성들, 저마다 운동하는 갖가지 원자들 등등, 이 모든 복잡한 것이 그저 한갓 무대 위에 올려져서 신이 선악을 위해 다투는 인간을 지켜 볼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무대는 그런 드라마를 하기에는 너무 크다."파인만은 세 번 결혼했는데, 첫 부인은 1945년 결핵으로 죽었다. 두 번째 결혼 생활이 짧게 끝난 뒤, 1960년 궤네스 하워스(Gweneth However)와 결혼하여 두 아이를 두었다. 1978년 처음 흔치 않은 유형의 암 종창(stomach cancer)을 진단받고 수술로 제거했다. 1986년 임파구에서 또 다른 형태의 암인 감염된 거대 혈청이 나타났고, 이듬해에는 복부에서 종창이 발견되었다. 파인만은 원자탄 작업을 하는 동안 방사능에 노출되어 생긴 종양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파인만의 마지막 강의는 1987년 12월 4일 있었다. 그 강의는 휜공간(curved spacetime)에 대한 것이었다. 두달 후인 1988년 2월 15일 파인만은 숨을 거두었다. 죽기 전 몇 년 동안 그는 어렸을 적 아버지한테서 들은 탄누투바에 가려 했다. 친구인 랄프 라이턴(Ralph Leighton)과는 1980년대에 몽고 근방 러시아의 그 나라를 찾아가는 방법에 관해 길고 흥미진진한 대화를 나눈 적도 있다. 죽기 두 주전 그곳을 여행해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이듬해 7월 친구 레이턴은 파인만을 위해 탄누투바를 방문했다. 키질에 있는 아시아 기념물 센터에는 리차드 파인만을 애타게 했던 기념물이 있다.
여러분 짝퉁 조심하세요~ 짱공 리처드파인만과 구별하셔야 합니다. ^^
이 글 보시고 우울한 마음 잠깐 접으시고, 여기서만 살짝 웃어주세요.
출처는 x이버
해담작성일
2009-05-25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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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제3제국의 핵개발과 영국 스파이
제3제국의 핵개발과 영국 스파이 "로스바우트"
파울 로스바우트(Paul Rosbaud)
로스바우트는 2차세계대전 기간중 독일의 화학자로써 제3제국내에 심어놓은 영국대외정부부(MI6)의 첩보원이다.
(암호명Griffin) 주로 독일의 신무기에 대한 정보를 영국에 넘겼다.
(1896년 11월 18 - 1963년 1월 28일)
* 우측이 스파이다.
오스트리아 Graz에서 태어났고 1차세계대전 기간중 오스트리아군으로 참전하여 영국군에게 포로가 되어 종전을 맞는다.
이때 영국정보부 MI6에 포섭이 된다.
* 이 사람이 MI6소속이다. (물론 007 영화상에서~ ^^)
그는 화학에 대해 공부한후 베를린에 있는 "카이저 연구소"(Kaiser Wilhelm Institute of Physics)에서 연구를 하게되는데 1938년에 유대인인 부인 Hilder와 딸을 나찌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영국으로 보낸후 같이 지낸다. 이후 제3제국을 몰락시키기 위해 다시 독일로 돌아온다.
유대인 물리학자 Lise Meitner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의 도주를 도우며, 설상가상으로 "카이저 연구소"(Kaiser Wilhelm Institute of Physics)는 독일의 핵폭탄 연구소로써 1945년의 베를린 공방전에서 소련의 최후의 목표물이었고 과학자와 기술은 소련으로 빼돌려졌다.
- 제3제국의 핵폭탄 제조에 대한 경고
독일의 과학자 "오토 한"(Otto Hahn)의 핵분열이 상당한 진전을 이루자 이것을 바로 책으로 펴내 경고한것이 첫번째 작전이었다. 그의 즉각적 책출판은 "국제 물리연맹"의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이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독일의 핵개발에 대한 경고편지를 쓰게하였다. 또한 아인슈타인은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전쟁을 뒤집어버릴 엄청난 폭탄제조가 가능하니 도와달라."고 하여 1941년 12월 6일에 "맨해튼 계획"이 37세의 캘리포니아공과대학(Caltech) 교수인 오펜하이머가 맡아 시작된다.
- 신무기 정보를 영국으로 넘김
전격전(Blitzkrieg)의 비밀, 독일군의 무기 시스템에 대한 정보, U-Boat에 사용될 신형어뢰 설계도면 및 탐지용 진공관 등을 마이크로 필름에 담아 영국으로 보낸다. 특히 처칠수상에게 V1, V2 미사일에 대한 정보를 최초로 보고한 스파이다.
- 제3제국의 핵개발 실패 정보를 알림
히틀러는 1939년 폴란드의 도시 드단스크를 독일군이 점령한후 행한 연설에서 "비밀무기가 개발중이며 이 무기만 있으면 우리는 공격받지 않는다."란 연설을 했고, KGB는 독일의 우수한 핵물리학자들이 핵개발을 시작했다는 정보를 얻는다. 미국의 정보기관도 긴장하여 사실관계를 파악하나 영국은 "로스바우트"를 통해 독일의 하이젠베르크를 중심으로 만든 "우라늄계획"은 실패한 것을 정확히 알고있었다.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과학자들은 히틀러가 핵폭탄을 만들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자 원자탄을 인간에게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트루먼 대통령은 원폭 투하를 허용했고 그 대상은 유럽인이 아니라 아시아인이었다.
- 독일의 항복후
1945년 7월 3일 연합군 정보요원들은 독일이 어느정도 핵개발에 진척을 했는지 알기위해 독일에서 과학자들 10명을 을 납치하여 영국의 캠브리지에서 25마일 떨어진 한 농가에 억류해놓고 도청장치를 설치했다. 여기서 얻어진 정보들은 핵폭탄에 일정부분 기여를 한다억류된 과학자들은 "하이젠베르크(Wernet heisenberg, 1901-1976), 막스 폰 라우에(Max von laue, 1879-1960), 발터 게를라흐(Walther Gerlach, 1889-1979), 발터 보테(Walter Wilhelm Georg Bothe, 1891-1957,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카를 폰 바이츠제커(Carl Fredrich von Weizscker), 오토 한 등이다.도청 결과, 독일의 핵개발이 실패한 것은 가공한 우라늄에서 나오는 플로토늄이 폭탄제조에 필수 재료라는 사실을 알지못했고, 핵 반응을 할만한 인원이 없었던 것이었다.
- 도청된 내용
미국이 히로시마에 원자탄을 떨어뜨렸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나누었던 대화다.
오토 한 : 그들은 우리보다 50년 정도 앞서 있었어. 어떻게 30kg 정도의 순수한 우라늄235를 가지고 폭탄을 만들수 있었을까? 하이젠베르크 자네는 왜 2톤이 필요하다고 했었나? 하이젠베르크 : 그들은 아마 우리가 모르는 동위원소 분리법을 사용했던 것 같아. 디브너 : 우리가 실패한 이유는 관리들이 즉각적인 결과에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었어. 미국처럼 장기적인 정책을 펴지 못한 게 우리가 진 원인이야. 바이체커 : 우리도 성공에 근접하긴 했지만, 결국 전쟁중에 완성하지 못했던 게 사실이잖아. 하이젠베르크 : 나는 우리가 우라늄엔진을 만들 수 있다고 믿었어. 하지만 나는 우리가 폭탄을 만들고 있다고는 결코 생각한 적 없네.
* 히로시마에 핵폭탄이 떨어지기 전과 후
- 전쟁후,
런던에서 죽었다.
* 핵폭탄의 희생자들 사진
( 주의 : 19금 /18세이상만/ 임산부, 청소년, 기타 심신박약자는는 들어가지 마시요.)
http://www.mctv.ne.jp/~bigapple/
http://my.opera.com/Mathilda/albums/showpic.dml?album=80083&picture=1056504
* 1945년 8월 6일히로시마에 떨어진 핵폭탄의 이름은 "Little Boy"다.
* 1945년 8월 9일에 B29 폭격기("Bock's Car")가 출격하여 "Fat Man"이라 불리운 원자탄을 나가사끼에 떨어뜨린다.
* 1951년 10월 1일 사막(Desert Rock, Ucca Flats)에서 이뤄진 핵 실험을 지켜보는 미군병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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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글터] 니콜라 테슬라(펌) 에디슨 보다 위대한 과학자 (스크롤 초 압박)
실제로 에디슨은 돈버리에 급급한 쌍놈이었고 실제로 20세기 과학에 지대한 공을 세운 사람은 니콜라이 테슬라입니다.
그는 1888년 최초로 교류 발전기를 만든 사람입니다.(현재 에디슨의 직류전기보다 교류전기가 더 일반적으로 쓰입니다.)그 사람이 만든 2상교류방식 발전기 은 웨스팅하우스사(社)에 의하여 1895년 나야가라 폭포의 수력 발전에 최초로 이용되었다고 합니다.그 사람이 에디슨의 업적에 가렸다는것은 전력 수송 방식에 있어서 교류가 직류보다 열손실이 적기 때문에 우수하다는 문제 때문에 발생한 겁니다.에디슨의 전기회사는 직류를 사용했는데 에디슨 자신도 교류가 우수하단걸 알았거든요.그러나 에디슨은 자신의 사회적 권위를 이용해서 교류를 대중에게 부정적으로 인식시키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바로 사형에 교류전기를 이용하기로 한 것이죠.전기의자 역시 에디슨의 발명품으로 대중들에게 교류가 위험하단 이미지를 주기 위함이었습니다.그러나 에디슨 사후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교류의 우수성이 널리 입증되었죠.니콜라 테슬라의 교류 발명 업적은 에디슨의 사회적 명망에 묻혀버린겁니다.참고로 우리가 자기력선속밀도의 단위인 T(테슬라)도 이 분의 이름을 따라 지은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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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문명을 1백년 앞당긴 천재과학자, 우주에서 길을 잃어 지구에 잘못 태어난 외계인. 미국의 전설적인 과학자 니콜라 테슬라91856~1943)를 일컫는 말이다. 크로아티아 태생인 테슬라는 28세 때인 1884년 미국으로 이주해 수많은 중요한 발명과 선구적 업적을 이뤄냈다. 교류전압 송신, 다상교류 시스템, 무선통신, 고압전원을 만드는 케슬라 코일, 형광등, 라디오 등의 발명자로 그는 기록되고 있다. 자기장의 세기를 나타네는 기본 단위 T는 그의 이름을 따서 제정된 것이다. 그는 에디슨에 필적할 혁혁한 업적을 남겼음에도 생전에 합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불운한 생애을 살았다. 영국 BBC방송의 인터넷 온라인 이용자들은 지난 1천년간 가장 위대한 발명가로 에디슨, 구텐베르크,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이어 테슬라를 4위로 꼽았다. 테슬라의 꿈은 세계 곳곳으로 통신을 가능하게 하며, 기상을 조절하고, 무한한 에너지를 공급하고, 꺼지지 않는 빛을 만들고, 다른 행성에 존재한다고 믿는 생명체와 소통하는 것이었다. 그는 시대를 너무 앞서갔기에 사람들로부터 몽상가, 미치광이란 오래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연구했던 무선에너지 전송기술, 테슬라 터빈, 테슬라 엔진, 입자빔 무기, 공간 자체에서 무한한 에너지를 뽑아쓰는 실험 등은 현재까지도 많은 과학자들이 뒤를 이어 탐구를 계속하고 있다. 테슬라의 연구자료 중 상당 부분은 그의 사후 미국의 국방 정보기관에서 입수해 현재까지도 비밀문서로 분류돼 있다. 그의 연구 중에 현대 과학자들이 따라잡지 못하고 있는 분야가 많기 때문이다. 예컨대 그는 작은 공 모양의 전기덩어리(구형 번개라고도 불린다)를 마음대로 만들고 다루는 시범을 여러차례 보였다.이 현상은 핵융합 플라즈마 연구의 혁신적인 돌파구로 밝혀졌지만 아직도 과학자들은 못하고 있다. 1915년 11월 6일자 뉴욕타임스는 에디슨과 테슬라가 노벨물리학상의 공동 수상자로 결정되었다는 기사를 내보냈지만 정작 수상의 영예는 다른 사람에게 돌아갔다. 스웨덴 한림원이 막판에 수상자를 바꾼 이유는 아직도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니콜라 테슬라(Nikola Tesla:1856-1943)니콜라 테슬라는 1857년 7월, 구 유고 슬라비아의 세르비아에서 태어났다. 테슬라의 어머니는 발명가로서의 재능을 갖고 있었으며 집안의 가구 등을 비롯한 여러 발명품을 고안하였다. 또한 기억력도 월등하게 뛰어나서 상당히 긴 책의 내용을 암기 했다고 한다. 그리고 12살 때 불의의 사고로 죽은 테슬라의 형도 자타가 공인하는 뛰어난 천재였다. 이처럼 집안의 천재성을 물려받은 테슬라는 다섯 살 때 처음으로 수(水)차를 발명하였고, 친척들에게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에너지를 얻는 계획을 설명했다고 한다. 결국 테슬라의 이 계획은, 1895년에 테슬라의 특허를 이용하여 웨스팅 하우스사가 나이아가라 폭포에 교류 발전소를 만듦으로써 실행에 옮겨지게 되었다. 그 후 전기 공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헝가리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교류 모터에 대한 아이디어를 개발하였으며 친척의 소개로 파리에 있는 에디슨의 유럽 지사에서 전기 기술자로 근무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교류 모터에 대한 생각을 계속 발전시키던 중, 자신이 가지고 있던 교류 기술에 대한 가능성을 인정 받기 위해서 1884년 6월 미국으로 이주하여 에디슨의 조수로 일하게 되었다.그러나 테슬라의 기대와는 달리 에디슨은 자신이 발명한 전구의 수요를 늘리기 위해서 직류 방식을 주장하였다. 결국 테슬라는 에디슨과 결별하고 독립된 연구소를 운영하며 교류 발전기와 교류 모터 등 교류 송, 발전 시스템을 완성하였다. 그 후 계속해서 무선 전신과 각종 터빈 등 많은 중요한 발명과 연구를 하여 과학 기술 발전에 큰 업적을 남겼다. 그의 발명에 대한 열정은 만년까지 식지 않았으나 자금 부족으로 매우 불우한 노년을 보냈으며 빈곤과 고독함 속에서 마지막 생애를 마쳤다. 다른 대부분의 천재들과 마찬가지로 테슬라도 사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업적을 니정받게 되었으며 1943년 그가 죽은 후에 미국은 무선 전신에 대한 테슬라의 특허가 마르코니의 특허에 우선함을 인정했다. 그때서야 비로소 웨스팅 하우스 등이 가지고 있던 많은 기술들이 테슬라의 업적으로 평가받게 되면서 인류 역사상 최고의 발명가로서의 지위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테슬라의 뛰어난 재능과 낭만적인 생애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지금 현재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덧붙여서,테슬라는 이외에도 마르코니 보다 훨씬 이전에 그보다 더 훌륭한 라디오 시스템을 개발했으며,그 밖에도 테슬라 코일이라는 현대적인 변압기 형식을 발명하기도 했습니다.또한 자동차 속도계의 특허를 냈으며,터빈,네온사인 등도 만들었으며,형광등이 시중에 출시되기 40년전에 이미 실험실에서 형광등을 쓰는등,그가 특허를 얻은 발명품은 무려 800개에 달한다고 합니다.이 외에도 테슬라의 업적은 많았지만,죽기 전에 그는 자신의 평생에 걸친 연구자료를 싸그리 없애버렸답니다.그로인해 그 훌륭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잊혀진 과학자가 된 것이라고 하네요.
테슬라 코일
전자무기의 창시자, 니콜라 테슬라 알려지지 않은 천재 과학자
현대사회에서 전기라는 것은 인간생활과 분리시킬 수 없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이 전기의 발전에는 에디슨을 위시해서
패러데이, 헤르츠, 볼타 등등 많은 과학자들의 공헌이 있었지만
전기발전에 누구보다 큰 공헌을 하고도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19세기 후반 니콜라 테슬라(Nikola Tesla)가 이 세상에 나왔을 때는
지금과 비교해 전기가 매우 원시적인 상태였다.
기초적인 전기이론은 어느 정도 확립되어 있었지만
직류전기밖에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전기는
배터리에서 생성되는 전기 외에는 대부분이 교류전기다.
교류전기가 보편화되기까지의 과정은 그리 순탄치 않았는데,
교류전기는 그 이론에서부터 실용화까지 완전히 테슬라의 공적이었다.
이것만이 테슬라의 업적은 아니다.
21세기에 들어선 지금도 아직 소개되지 않은 그의 이론과 발명품들이 너무도 많다.
만약 그의 업적이 교류전기 하나로 그쳤다면,
우리는 지금 전기에 관해 에디슨보다 테슬라를 떠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말은 언뜻 듣기에 모순처럼 들릴 것이다.
그의 업적이 한두 가지에 그쳤다면 잘 알려졌겠지만
너무 크기 때문에 우리가 모른다니,
납득하기 어려운 말 아닌가.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고,
인간세상에서는 이런 모순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을
테슬라의 경우를 보고 재차 확인하게 될 뿐이다.
그의 발명품들은 대단한 것들이었지만,
누군가가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빼앗을 뿐만 아니라,
자기네들만의 무기로 사용할 만한 가공할 위력을 가진 것이기에
세상에 숨긴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인류를 위해 좋은 발명을 하고도 매장된 이가 테슬라만은 아니겠지만,
테슬라의 경우는 전자기파 비밀무기와 너무나 중요한 관련이 있기에 여기에 소개한다. 테슬라는 역사 속에 묻혀 버린 무명의 여느 과학자가 아니다.
이 사람은 제2의 산업혁명을 일으킨 장본인이며,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자란 소리를 들을 정도의 인물이다.
그럼에도 세상에서 그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는 마차 시대에 살면서
달에 로켓을 보낼 수 있는 것 이상의 미래를 개척한 과학자였다.
그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을 산 사람이지만,
21세기인 지금에도 세상 사람들이 아는
최첨단 과학기술보다 훨씬 더 앞선 과학을 만들었다.
과학소설의 아버지라고 불리며,
90여 년 전에 녹음기, 마이크로피쉬, 홀로그램, 팩스 따위의 필연적 발명을 예견했고, 1928년에 이미 텔레비전 설계도를 잡지에 발표했으며,
3차 세계대전 이후에 올 것으로 예상한 미래사회를 묘사한
<랄프124C41+>라는 소설을 쓴 휴고 건스백(Hugo Gernsback, 1884~1967)은
이런 테슬라를 가리켜 인류 역사상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과학자라고 평했다.
아르키메데스나 패러데이 또는 에디슨보다도 훨씬 훌륭하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발명이란 것이
이미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지식을 토대로 만든데 비해서
니콜라 테슬라는 두 번 다시 생각할 필요도 없이 과학을 창조했다.
그는 지금까지의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과학자일 뿐 아니라
미래에도 그를 능가할 과학자는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가 대담무쌍한 담력으로 이룩한 기초지식과 혁명적인 과학 발견은
지식세계에서 또다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위대한 과학자가 어째서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까.
여기에서 소개하는 테슬라의 자취는 수박 겉핥기밖에 안되지만,
읽어 가면서 그 원인을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
누군가 조작하고 왜곡한 사실을
절대 진리이자 진실의 역사로 믿는다면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현대의 인류문명은 전기 없이는 상상할 수 없다.
우리가 그 전기의 혜택을 볼 수 있게 된 것은
발명왕 에디슨 덕택이라고 흔히들 알고 있다.
미국의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의 에디슨관에는
이런 에디슨의 업적을 기리는 전시품들이 가득하고,
그곳은 항상 방문하는 이들로 붐빈다.
물론 에디슨이 훌륭한 발명가라는 데는 이견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또 하나의 커다란 역사 왜곡일 뿐이다.
그는 과학자로 알려졌지만,
그의 생애를 들여다보면 과학자보다는
사업가로서 더욱 뛰어난 실력을 발휘했음을 알 수 있다.
자기 자신이 직접 발명했다는 수많은 발명품은
대부분 그가 채용한 고용인들이 발명한 것으로,
특허를 자신의 이름으로 등록했기 때문에 기록상 그의 발명품으로 알려진 것뿐이다.
여기서 무언가 이상한 생각이 들지 않는가.
테슬라의 과학지식과 발명품은
에디슨이 상상하고 이해할 수 있는 범위보다 몇 차원 더 앞선 것이었다.
그런데도 왜 에디슨이 사실 이상으로 과대 포장되어 영웅으로 만들어진 것일까.
이런 의문을 뒷받침해 주는 사례가 하나 있다.
미국 미시건 주 앤아버의 초등학교 교사인 와그너(John Wagner)는
3학년 학생들에게 테슬라에 대해 가르치고
그의 이름을 되살리기 위해 구리로 만든 그의 흉상을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 전시해 줄 것을 요구한 일이 있었다.
테슬라가 받은 특허번호와 모터가
에디슨관에서 에디슨의 흉상과 함께 전시되고 있어
관람객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킨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동상은 박물관에 진열되지 못하고 예일대학에 진열되었다.
이들의 요청에 의해 레빈(Carl Levin)이란 상원의원이 압력을 넣어
겨우 남자화장실 옆 복도 어두컴컴한 구석에
테슬라의 유물이 담긴 작은 유리상자 하나가 진열되었을 뿐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서 발간한
<발명책(The Smithsonian Book of Invention)>에도
니콜라 테슬라라는 이름은 나와 있지 않다.
이 책에는 에디슨이나 경질고무 발명가인 굿이어(Charles Goodyear)를 위시해
전동칫솔이나 자동토스트기의 발명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켄터키 후라이드 치킨요리법을 특허낸
샌더스(Sanders)대령 같은 사람까지 소개되어 있다.
그러나 테슬라는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다.
심지어 미국 고등법원에서 라디오 발명가는
마르코니(Guglielmo Marconi)가 아니고 테슬라임을
오래 전에 판결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마르코니가 라디오 발명가로 소개되고 있을 정도이다.
일련의 사건들로 볼 때 이것은 고의적인 행위로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니콜라 테슬라는 세르비아 혈통으로
현재의 크로아티아의 스밀리얀이라는 곳에서
1856년 7월 9일 태어나 1943년 1월 7일
미국 뉴욕에서 아무도 모르게 혼자서 숨을 거두었다.
그가 태어난 19세기 후반 동유럽은 터키가 대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이에 대항한 독립운동이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그는 세르비아 정교회의 신부인 아버지로부터 지적인 지도를 받았고,
학교교육을 받지는 않았으나 지혜로웠던 어머니에게는
세상의 근본원칙과 인간의 기본적 도리를 배웠다.
그가 어머니와 주고받은 편지를 보면 이런 내용이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수학자이자 과학자이기도 했지만, 훌륭한 음악가였고 시인이기도 했다.
그는 피아노 연주를 즐겼으며,
세르비아의 시를 영어로 번역하는 일을 하기도 했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가장 친한 문학가이며 언론인이었던
친구 부인과 죽을 때까지 정신적인 사랑을 나누었고,
소설가 마크 트웨인(Mark Twain)이나
음악가 스토코프스키(Leopold Stokowsky) 같은 사람들과 친분을 나누고
심지어는 이들과 동업하여 회사를 차리기도 했다.
그가 다섯 살 때 만든 물레방아가 있다.
그 물레방아는 보통 시골 농가에서 볼 수 있는 그런 물레방아가 아니었다.
그것은 걸름막이가 없고 밋밋한 것이었지만,
물의 흐름에 따라 일정한 속도로 돌아갔다.
훗날에 그는 같은 원리로 날개 없는 터빈을 발명했다.
그의 시도가 모두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한번은 지붕 위에서 산에서 내려오는 바람에 각도를 맞춰 우산을 폈고,
몸이 가벼워짐을 느낀 그는
분명히 우산을 이용하면 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몸을 날렸다.
그러나 땅바닥에 정신을 잃고 누워 있는 그를 그의 어머니가 방으로 옮겨야 했다.
또 한번은 풍뎅이를 잡아서 엔진을 만든 일이 있다.
16개의 가는 막대기로 부챗살 모양의 수레바퀴를 만들어
가운데 축을 고정하여 가볍게 돌게 하고 각 살 끝에 풍뎅이의 발을 풀로 붙였다.
한 방향으로 향한 16마리의 풍뎅이들이 날기 위해 안간힘을 쓸 때
수레가 돌아가는 엔진을 고안한 것이다.
그런데 그때 이웃의 한 친구가 찾아와
병 속에 가득 잡아 놓은 풍뎅이들을 마구 먹어 치워 버렸다.
그것을 보고 니콜라는 그 다음부터는 아예 이런 발명을 하지 않았다.
그는 시인으로서도 대단한 경지에 있었다.
스티아치치(Stjiacic) 라는 세르비아의 한 신부가
세르비아 연방의 젊은 작가시절 처음 미국을 방문하여
시카고 공립도서관을 찾았을 때의 일이다.
그 도서관에서 당시 유명했던 세르비아 시인
즈마이-요반(Zmai-Jovan)의 시집을 찾은 그는
번역자가 니톨라 테슬라임을 확인했다.
훗날 스티아치치 신부가 라도 박사의 안내로
메트로폴리탄 빌딩 20층에 있는 테슬라의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을 때
“테슬라씨, 당신이 시에도 능통한 줄은 몰랏습니다.” 했더니,
그는 눈을 크게 뜨고 매우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세르비아 사람들 중에는 노래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문제는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것이지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에디슨, 마르코니, 테슬라 그는
체코의 프라하 대학에서 본격적인 전기기술 교육을 받았다.
그후 부다페스트의 전화회사에서 일하면서
자기감응모터를 착안하여 거의 완성할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그는 파리로 직장을 잠시 옮겨 에디슨과 절친한 ‘베첼러’와 함께 일하게 되었다.
베첼러는 에디슨이 24세에 처음 회사를 차릴 때 고용되었던 기사였으며
에디슨이 프랑스에 파견해 유럽 대륙에 세운
‘대륙 에디슨 회사(Continental Edison Company)의 책임자로 일하고 있었다.
당시 에디슨 회사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세계적인 회사였다. 테슬라는 주변에서 천재로 인정해 주는 기술자였을 뿐 아니라
여러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으므로 문제 해결사로 여러 곳에 파견되었다.
1880년대는 새로운 과학의 이기인 전화를 가설하는 것이 각 국가의 커다란 사업이었다. 그가 일하던 파리의 회사는 에디슨 회사와 함께
독일에 전화시설을 설치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독일 알사스의 스트라스부르에서 전화 설치를 끝내고 개통식 행사를 하기 위해 황제 빌헬름 1세가 참석한 자리에서 전화선이 누전으로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독일은 이것을 고의적인 사고로 오해했고,
프랑스와의 정치관계까지 악화시키고 말았다.
그 여파로 테슬라가 일하던 프랑스 회사는
한 푼도 건지지 못하고 계약을 파기당할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이때 해결사로 파견된 테슬라는
기존 시설을 자기가 고안한 감응모터의 원칙을 이용한
교류전기로 바꾸어 송전하는 시설로 대치하여 모든 문제를 훌륭하게 해결했다.
당시 전기는 반 마일 이상을 송전하는 것이 불가능한 직류뿐이라고 여겨지던 때였다.
테슬라는 이러한 직류의 단점에 착안하여
거리에 관계없이 송전할 수 있는 교류방식을 생각하고 그 방법을 제시했으나
아무도 관심을 주는 사람이 없던 터에,
이러한 좋은 기회를 이용하여 자신의 발명을 증명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에디슨만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생각할 수 있다는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어
테슬라의 공은 에디슨에게로 돌아갔고,
임기응변으로 위기를 건진 장본인은 결국 무시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얼마 안되어 교류문제는 사람들의 머리에서 잊혀져 버렸다.
테슬라가 큰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에디슨은 약속한 돈을 한 푼도 지급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베첼러는
테슬라에게 미국으로 가서 에디슨 밑에서 일하면서
그를 통해 교류전기를 상용화하는 것이 좋겠다고 충고하면서
에디슨에게 소개편지를 써주었다.
1884년 테슬라는 돈 몇 푼과 책 몇 권, 반중력 비행기 설계도와 즐겨 쓴 시집,
자신의 학술논문집, 가장 중요한 베첼러의 소개편지를 들고 미국에 도착했다.
그 편지에는 “나는 이 세상에서 두 사람의 위대한 사람을 압니다.
하나는 에디슨 당신이고,
다른 하나는 이 편지를 가져가는 테슬라라는 젊은이입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미국에 도착한 테슬라는 아르바이트를 해가며 겨우 차비를 충당하여
에디슨이 있는 뉴저지로 가서 소개장을 그에게 보여주게 되었다.
에디슨은 편지를 읽고 곧 테슬라를 채용했다.
유명한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에디슨은 당시 직류발전기인 다이나모 발전기를 개량하여 효율을 높이고
고장 빈도를 줄여 발전단가를 낮추려고 고심하던 중이었다.
이를 본 테슬라는 그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에디슨은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만일 그 일을 성공하면 5만 달러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렇게 쉽게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욕심에
테슬라는 밤잠을 설쳐가며 여러 날 일한 끝에
에디슨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월등한 기계를 만들어 냈다.
에디슨은 물론 이에 대만족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약속한 5만 달러에 대한 이야기가 없었다.
결국 돈 이야기를 꺼낸 테슬라에게
에디슨은 그것은 농담이었다고 하면서
테슬라가 아직 미국의 대화방법을 습득하지 못했다며,
그의 어깨를 두두리며 깔깔대고 웃었다고 한다.
테슬라는 이 때문에 대단히 실망하고 좌절감마저 갖게 되었다고 후에 술회했다.
그럼에도 테슬라는 계속 교륙전기의 개발을 종용했다.
그러나 끝까지 직류가 우월하다고 믿은 에디슨은
굳이 교류전기를 발전시킬 필요가 없다면서 완고한 태도를 유지했다.
에디슨에 대한 많은 실망으로
그를 통한 교륙전기의 발전계획을 단념하게 된 테슬라는 에디슨을 떠났다.
후일 그는 에디슨을 평하여
“에디슨은 볏짚 속에 바늘이 떨어지면
지체하지 않고 볏짚 하나하나를 뒤지기 시작해서
찾을 때가지 꿀벌처럼 일할 사람이다.
나는 약간의 이론과 계산법으로
그가 들이는 노력의 10퍼센트만으로 원하는 것을 찾는 법을 알기에
그의 아둔함을 측은하게 여겼다.”라고 말했다.(New York Times, October 19, 1931)
그 당시는 에디슨의 유명한 백열전등이 각광을 받고 많은 돈을 벌어들이던 때라
백열전등 이외에 다른 방법을 통한 전등을 발명해 보려고 애쓰던 과학자들이 많았다.
테슬라는 이미 아크전등을 발명하여 특허를 낸 후라
몇몇 회사로부터 함께 사업하자는 제의를 받았으나
역시 실권과 이득은 모두 그 사람들이 갖고
자신에게는 아무 이득이 없다는 것을 알고 그만두게 되었다.
이때 에디슨과 같은 나이의 젊은 전기기술자이며
사업가적인 기질과 자본을 갖춘 ‘웨스팅하우스 전기회사’의 사주
‘조지 웨스팅하우스’를 만나게 된다.
그는 테슬라의 교류전기 이론에 심취하고,
그 역시 교류전기만이 유일한 전기보급법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동안 가난에 시달렸던 테슬라는 조지 웨스팅하우스로부터 100만 달러의 제의를 받고 그때까지 등록한 모든 특허들을 웨스팅하우스에게 팔았다.
이때부터 에디슨과 웨스팅하우스의 직류, 교류 싸움이 시작되었다.
학계에서도 이미 익숙해진 직류의 장점을 고수하는 사람들과
새로운 교류의 장점을 이해하여 이를 주장하는 사람들로 나뉘어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 아주 중요한 일이 벌어지는데,
역사상 처음으로 시카고 ‘세계박람회’가 1893년 5월 1일에 열린 것이다.
박람회장에는 25만 개의 전등이 켜질 예정이었고,
당연히 각 전기회사들은 이 일을 따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게 되었다.
결국 낙찰을 받은 회사는 테슬라의 기술을 사들인 ‘웨스팅하우스’였다.
당시 에디슨은 전등 당 18.5달러에 입찰했고 웨스팅하우스는 4.32달러에 입찰했다.
이를 계기로 웨스팅하우스는 박람회장 내에
테슬라의 ‘다상자기감응’ 원리를 이용한 발전기를 설치하고,
직류발전기로는 이런 싼값에 전기보급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여러 개의 직류발전기를 설치하지 않고도
장거리를 전깃줄로 송전할 수 있다는 증거를 보여줌으로써,
교류를 실용적인 전기로 완전히 인식시켰던 것이다.
이 일은 교류가 직류를 능가하는 역사적 계기가 되었고,
에디슨의 직류를 향한 아집도 막을 내리는 사건이 되었다.
1880년대 이후 전기분야 발전은 그야말로 정신을 차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런 와중에 많은 과학자들이 ‘나이아가라’ 폭포의
수력을 전기에너지로 변환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폭포 가까이에 있는 버팔로 시민들도 실현 가능한 일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버팔로까지의 거리가 22마일이나 되어
직류로는 송전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러던 중 시카고 박람회에 이어 독일에서도
삼상 교류발전기를 이용해 108마일 떨어진 곳까지 송전이 가능해지자,
점차 사람들은 버팔로뿐만 아니라 뉴욕시까지도 송전할 수 있고
실상 거리에 제한이 없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미 시카고에서 그것을 증명한 웨스팅하우스사가 공사를 맡아
1895년 4월 20일 버팔로시 가정들은 전기등불을 켜게 되었고,
이후 값싼 에너지와 전기를 이용한 여러 산업이 버팔로시에 몰려들게 되었다.
즉, 일종의 산업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이리하여 1903년에는 세계의 모든 발전소가
테슬라의 원리를 이용하여 교류전기를 만들게 되었다.
그는 또한 공명(共鳴)과 관련하여 지대한 발명을 했다.
그는 여러 형태로 시범을 보였지만 사람들은 보고도 믿지 못할 정도였다.
그중에 하나가 신문기자들 앞에서 보여준 시범이다.
그는 100톤을 견딜 수 있다는 두께 5센티미터, 길이 61센티미터,
폭 30센티미터 철판의 양끝을 고정시켜 놓고
그 위에 탁상시계 크기의 전기진동기를 올리고 한참을 조정했다.
잠시 후 철판과 진동기의 주파수가 서로 맞았을 때
철판이 떨기 시작하더니 점점 그 정도가 심해져 결국 철판은 부러지고 말았다.
이를 목격한 벤슨(A. L. Benson) 기자는
아무리 큰 망치로 두들겼어도 불가능한 일이 벌어졌다고 말했다.
테슬라는 이어 뉴욕의 고층빌딩 건축장에 가서도
이 조그마한 진동기를 철근에 부착시켜
그 위에서 일하던 인부들이 지진이 난 줄 알고 혼비백산하게 만든 일도 있다.
그는 이 원리를 원격지구 역학진동(telegeo dynamic oscillation) 이라고 명명했는데,
이 원리를 이용하면 적 잠수함의 위치를 알아낼 수 있고,
지하 광맥을 찾을 수도 있으며 심지어는 지구도 쪼갤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X-레이도 처음 만들었다.
1895년 12월 독일의 렌트겐(Wilhelm roentgen) 교수가
X-레이의 발견과 유용함을 발표하였을 때
테슬라는 자기가 이미 X-레이를 이용하여 머리를 찍은 사진을 렌트겐에게 보냈다.
렌트겐은 이를 숨기지 않고 큰 관심을 표명하면서 일반에 공개했다.
이 때문에 테슬라는 유명해져 잡지사에 기고도 여러 번 하게 되고 강연도 하게 되었다. 테슬라는 렌트겐 박사에게 영광을 돌리면서도, 그 위험성도 함께 경고했다.
테슬라의 밑에서 지도를 받으며 잠시 공부한 마르코니(Guglielmo marconi)는
1900년 12월 21일 영국의 콘월에서 캐나다 뉴파운드랜드로
짧은 파장을 이용하여 ‘S'라는 글자 하나를 송신하는데 성공했다.
이로인해 ’마르코니‘는 무선통신의 선구자와 영웅이 되어
라디오의 발명가로 판정이 되었고, 대단한 부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보다 2년 전인 1898년 테슬라가
이미 무선통신 라디오의 원리를 특허낸 일이 있었다.
테슬라가 이에 대해 고소하여 승소했으나,
일단 유명해진 마르코니의 인상이 사람들의 뇌리에 박혀 있고,
재벌을 배경으로 한 언론 덕택에
마르코니가 테슬라의 기술을 슬쩍 가져갔다는 사실은 세상에서 빛을 보지 못했다.
테슬라도 이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테슬라는 자기가 그때 실현시키려고 했던 방법이
잘 설비된 철로에서 달리는 호화여객차라고 한다면,
대기를 매체로 짧은 파장을 이용한 마르코니의 방법으로 알려진 그 방법은
마치 촌길을 가는 두 바퀴 마차에 비유할 수 있다고 신문기자들에게 설명했다.
마르코니의 이 방법이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통신방법이며,
100여 년 전인 그때 테슬라가 말한 방법은 아직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소개되지 않았다. 그때 테슬라는 계속해서 설명하기를
마르코니의 대기를 통한 송전방법은
대기 상태에 너무 의존하기 때문에 거리를 고려해야 하며
전파는 대기의 상태 여하에 따라 많은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지만,
자신의 방법은 긴 파장을 이용한 저주파로 지표면을 사용하므로
거리의 제한이나 기후조건에 의한 제약이 전혀 없다고 했다.
마르코니가 짧은 파장으로 무선통신과 라디오를 개발하고 있을 때
테슬라는 롱아일랜드에 ‘워든클리프 타워’를 세우는데 열중하고 있었다.
자기가 말한 방법을 증명하려고 했던 것이다.
시대를 앞선 발명
테슬라는 1899년과 1900년 사이 약 1년간 그의 변호사의 배려로
콜로라도 주 콜로라도 스프링스에 가 있게 되었다.
이 도시에서는 크나큰 기대를 가지고 그를 환영했으며 그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덕분에 그는 높이 51미터, 직경 18미터나 되는 탑을 건설하고
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여러 가지 실험을 하게 된다.
이 실험을 통해 많은 분야에 확신을 가지게 된 그는 1900년 다시 뉴욕으로 돌아가
J.P. 모건의 경제적인 후원을 약속받고, 유명한 ‘워든클리프 타워’를 계획하게 된다.
테슬라가 여기에서 발표한 중요한 주장은 다음과 같다.
● 지구는 표면이 한 극이 되고 또다른 한 극이 전리층
(電離層, 지상 40~400킬로미터 정도에 형성된 기류층)이 상호 작용하는
거대한 전기적 공명체(resonator)이다.
● 지구 자체는 엄청난 전기를 이미 가지고 있기 때문에
수도관을 연결하듯이 뽑아서 쓰는 기구만 만들면 무료로 전기를 사용할 수 있다.
● 무선전기 전송 시스템은 지구표면과 전리층에 있는
기본전파 혹은 고정전파 형태의 에너지를 활용하여 전송할 수 있다.
테슬라는 1901년 초부터 롱아일랜드에 지상높이 57미터, 지하깊이 37미터의 탑에
직경 21미터 무게 55톤이나 되는 버섯모양의 금속관을 씌운
워든클리프 타워의 착공에 들어갔다.
그는 이 탑으로 전기는 무제한으로 무선전송할 수 있고,
방송국 역할도 할 수 있다고 했다.
그의 목표는 누구나 필요할 때 아무데서나 무제한의 전기를
아주 싼값에 얻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사람들이 심한 육체노동의 사슬에서 풀려나
평화와 번영을 즐길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이다.
그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자기 실험실에서 26마일 떨어진 곳에
전깃줄 대신에 땅을 통해 전기를 보내 200개의 전등을 켜보였다.
그러나 후원을 약속한 모건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착공에 들어가 이미 기술자들가지 채용한 테슬라는
특허이익의 51퍼센트를 모건의 소유로 한다는 조건으로
15만 달러의 착수금만 겨우 받았을 뿐이었다.
결국 ‘워든클리프 타워’ 공사는 좌절되고 이에 따른 경제적 압박이 테슬라를 괴롭혔다. 그의 이론을 이해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다만 몇 명의 돈 없는 친구들만이 그를 위로해 주었을 뿐이었다.
모건이 지원을 중단한 이유가
자신이 요구한 시설비가 마르코니가 제시한 것에 비해 너무 많아
경제적으로 수지 타산이 맞지 않을 것이라고
추측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듣고
테슬라는 마르코니의 목적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거대한 일을 할 수 있는 시설을 만들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돈이 많이 드는 것이지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사업은 결코 아니라고 설명했다.
테슬라에 따르면 ‘워든클리프 타워’는
모든 종류의 전신과 음성과 글자를
자유자재로 세계 어느 곳이든 무선으로 보낼 수 있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에 있는 모든 전화와 전신 송신소들의 설비를
개조하지 않고도 모두 연결시켜 줘서
전화 가입자는 전화 하나로 세계 어디서든 통화가 가능하며,
같은 원리로 수신기만 가지고 있으면
육지나 바다에 관계없이 세계 어느 곳에서도
다른 곳에서 들려주는 음악이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다고 했다.
지구 자체가 거대한 도체이기 때문에
당시 유선으로 가능한 일의 대부분이 무선으로 가능하게 된다는 뜻이다.
테슬라는 공사 좌절 이후 특히 1905년 이후에는 이렇다 할 일을 해내지 못했다.
세상 사람들이 그의 천재적인 능력은 인정하면서도
아무도 그에게 투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후에 그는 1907년과 1908년에는 심리적으로 좌절감에 빠지기도 했었다고 술회했다.
그럼에도 그는 쉬지 않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는 이것을 남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기록하여
여러 개의 트렁크 속에 넣어 약 20여 군데에 분산 보관했다.
그가 살던 뉴욕 가버너 호텔에는 1만 달러를 들여 만든 금고까지 있었다.
그는 1943년 1월 7일 아무도 없는 방에서 외롭게 숨졌고,
시체는 호텔 청소부에게 발견되었다.
그가 미국에 온지 59년이 되는 해였다.
그가 죽자 FBI는 외국인 자산관리소를 시켜 그의 모든 소지품을 차압했다.
이에 대해 테슬라를 추모하는 단체들은
그가 남긴 모든 자료를 가져갈 수 있는 합법적인 방법이
이 길뿐이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10년 후에야 유고슬라비아에 사는 그의 조카가
상속권을 인정받고 남은 물건들을 돌려받았다.
이 유물들은 지금 유고슬라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에 있는
‘테슬라 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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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거리 통신
테슬라의 무선송전 주장에 대해 당신 많은 과학자들이
그의 천재적인 능력은 인정하면서도,
무선송전은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많이 했다.
1893년 시카고 세계박람회에 테슬라는 처음으로 교류방식으로
박람회장 전체에 전기를 공급했다고 언급했다.
당시 전기기계의 세계적 권위자였던
독일 베를린 피지코 테크니컬 학회(Physico-Technical Institute)의
헬름홀츠(Herman von Helmholtz) 수석감사가 이 현장으로 구경을 왔다.
그는 테슬라에게 무선송전 방식에 관해 설명을 듣고,
이것이 대단히 실용적인 방식임을 인정했다.
또, 1897년 뉴욕에 온 영국의 켈빈 경은
테슬라의 실험실에서 무선송전 시범을 보고 너무나 놀라
“그렇다면 당신은 헤르츠파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오?” 하고 물었다.
테슬라는 이에 “물론 아니지요. 이것은 전류가 아니라 방사선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때가지 켈빈 경은 무선송전을 믿지 않는 사람이었으나
직접 목격한 순간부터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1900년 1월 테슬라는 콜로라도에서 지구 어디든지
무선으로 통신을 할 수 있는 완벽한 기계를 만들었고,
사진을 세계 각지로 보낼 수도 있으며,
대기를 통해 음악도 보낼 수 있다고 서술했다.
1915년 10월 <타임>에 실린 테슬라 특집의 내용이다.
“테슬라는 목소리를 5천마일 이상이나 덜어진 곳에 보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소리를 아주 깨끗하게 보내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1899년 콜로라도에서 이미 보여주었다.
테슬라가 답답해하는 것은 15년이 지난 오늘(1915년)에도
사람들이 아직 그 원리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는 나중에 이것을 좀 더 자세히 설명했다.
전화가입자들이 뉴욕시에 있는 전화교환소에 등록만 하면
세계 어디서든 같은 전화로 다른 가입자와 통화가 가능한데,
원리는 목소리를 담은 전류가 지각(地殼)을 통해
전화하는 지역에서 일단 무한의 속도로 시작하여
약 6천마일 지점에서 광속으로 늦추어졌다가
다시 빨라져 전화받는 지역으로 무한의 속도로 전달되는 것이다.
이 신기한 무선이란 것은 마치 폭풍이 불어오듯
인간생활에 찾아와 그 기능을 완전히 발휘하게 될 것이고,
그때가 되면 전 세계에 6개 정도의 무선전화 교환소만 있으면
목소리뿐만 아니라 영상까지 서로 교환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즉, 오늘날의 TV, 팩스 따위를 능가하는 것들을
1899년에 그는 이미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1926년 1월 30일에 그가 호텔 객실에서 자기 신세를 한탄하면서 적은 글이 있다.
“모든 실체가 리듬을 가진 분자로서
전 세계를 하나의 거대한 두뇌처럼 작동하게 만드는
무선이 완전히 적용되는 날에는
인류는 거리 감각을 잊어버리고
즉각적으로 누구와도 교신을 하게 될 것이다.
그때에는 사람들이 원거리 전화(tele-phone)와 원거리 영상(tele-vision)으로
마치 얼굴과 얼굴을 맞댄 것과 다름없이 교신할 것이며……
그때의 TV전화는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전화보다도 훨씬 더 간단해져서
사람들은 윗옷 호주머니에 그 TV전화기를 넣고 다닐 것이다…….
필경 가장 가치있는 무선 에너지의 원리를 적응시켜 만들 수 있는 이기(利器)는
연료 없이 현재의 비행기나 비행선이 가지고 있는 여러 한계를 벗어나
자유로이 다닐 수 있는 비행기의 추진력이 될 것이다…….
또 각 가정에 배달되는 종이신문 대신에 사람들이 잠자는 동안에
무선으로 각 가정에 신문이 직접 배달되어 집에서 인쇄된 신문을 읽게 되는 일은
꿈이라기보다 현실에 훨씬 가까운 이야기이다…….
그리고 자동차들의 주차문제와 겸하여 상용도로와 개인용무를 위한 도로를
별도로 사용하는 문제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벨트로 정치된 고층 주차장 빌딩을 세우고 도로는 필요한 대로 겹으로 증폭시키면 된다. 그러나 자동차와 바퀴를 날개로 대치하는 문명이 도래하면
그런 도로마저 결국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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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광선
1915년 테슬라는 5천만 볼트의 전기에너지를
무선으로 원거리에 보내 목적물을 파괴하는 것이 가능하며,
자신은 이미 그 무선송신기를 만들었음을 증명할 수 있고,
이 기구는 세계 아무 곳이나 원하는 목적물을 정확하게 겨냥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너무나도 황당하게 여겨져
그의 발표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표면적으로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 일이 있고 9년 후인
1924년 갑자기 세계 여러 곳에서 살인광선을 발명했다는 과학자들의 발표가 잇따랐다. 1924년 5월 19일 영국의 과학자 그린델매튜스(Harry Grindell-Matthews)는
파리에서 원거리의 비행기를 격추시킬 수 있는 가공의 전자방사선 기구를 발명했으며, 이 가공할 방사선(한국어로 광선 또는 방사선이라는 것은 영어로 ray,
또는 beam을 말한다. ray를 흔히 ‘광선’이라고 번역하지만
‘광선’이란 용어는 빛을 가진 선이란 선입관을 가지게 되는데
반드시 우리 눈에 보이는 빛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radiation, 즉 방사(放射)하는 파(波)를 말하기 때문에
위에서 death ray를 ‘살인광선’ 또는 ‘죽음의 방사선’이라고 불렀다.
따라서 ‘살인광선’은 빛이 없어 눈에 보이지 않는 선(beam)도 포함한다.)은
전 군대의 행동을 마비시킬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그의 발표가 너무 과장됐으며,
4마일이나 7~8마일 정도의 거리라면 몰라도
그 이상의 거리는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에
전 군대의 움직임을 마비시킨다는 말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라고 반박했다.
이에 대해 그린델매튜스는 이미 독일군은 이러한 장비를 가지고 있다고 재반박했다. 그리고 같은 달 24일에는 독일의 과학자 볼레(Herr Wolle)가
독일은 ‘죽음의 커튼’이라고 부르는 전자무기를 세 개나 만들었다고 발표했으며,
다음날인 25일 미국의 과학자 월(T. F. Wall)은 전기에너지를 사용하여
무선으로 비행기나 자동차의 기능을 마비시키는 기술을 특허신청하면서
같은 원리를 외과수술이나 다른 과학 부문에 적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5일 후인 5월 30일
그 전날 뉴욕에서의 발표를 인용한 콜로라도 스프링스의 신문에는
테슬라가 1900년 콜로라도 스프링스에 있을 때 이미 발명한
눈에 보이지 않는 방사선에 접촉되면
운행중인 비행기가 그대로 추락하게 된다고 설명한 기사가 실렸다.
그러나 이러한 발표만 있었지 실제로 사용한 흔적은 발견할 수 없었다.
10년이 지난 1934년 테슬라의 78세 생일날 기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 ‘살인광선’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그 죽음의 광선은 완전히 새로운 물리학의 원리를 이용한 것으로서,
1억만분의 1센티미터에 불과한 이 방사선으로
250마일 거리에 있는 비행기 1만 대를 단번에 떨어뜨릴 수 있으며,
이 장치를 만드는데 드는 비용은 200만 달러 정도이며
건설하는데 3개월이 소요될 것이라고 했다.
설명에 따르면, 미국 전역 12곳에 이런 기지를 설치하여 전자망을 치면
마치 중국에서 만리장성을 쌓아 국가를 보호하듯이
미국은 어떠한 외세의 침입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 방사선은 가스, 디젤, 오일 등 어떠한 연료를 사용하든지 관계없이
모든 엔진을 녹여 버리므로 이 방사선에 대한 방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방사선을 농축하여 사용하면 지나간 자리에 있는 군인이나 장비는
모두 삽시간에 죽고 파괴된다고 한다.
망원경의 조망권 내에서 또는 지평선의 범위 내에서
정확하게 목표를 겨냥하고 파괴하며,
소리도 없고 흔적도 없는 효과적인 무기라고 한다.
1935년 2월호 <리버티>지에 테슬라가 살인광선에 대해 간결하게 설명한 일이 있다.
“나의 발명에는 큰 시설이 필요하다.
그러나 일단 그 시설이 완공되면 200마일 이내에 접근하는
적의를 가진 사람이나 기계,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모두 파괴시킬 수 있다.
우리보다 강한 어떠한 적이 침략해 온다고 해도
이들을 막아낼 장막을 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는 계속해서 자기의 발명과 다른 사람들이 만든 살인광선과의 차이를 설명했다.
다른 사람들의 살인광선은 다량으로 만들 수도 없고
거리가 멀어질수록 급격하게 약해지지만
자신의 것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당시 뉴욕에서 소비되는 총 전력량이 200만 마력(15억 와트)이었는데
이 전력을 모두 사용해도 20마일 밖의 사람은 죽일 수 없는 미약한 양이었다.
후에 다른 과학자들은 테슬라가 말한 다른 살인광선은
그린델매튜스의 것과 비슷한 종류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린델매튜스의 살인광선은
높은 전류로 목표물을 타격하기 위해 자외선을 이용한 것이었고,
자외선 서치라이트의 성능 한계는 테슬라의 것에 비해 훨씬 약했던 것으로 여겨졌다.
문제는 벌써 20세기 초에
테슬라뿐만 아니라 많은 과학자들이 이런 발표를 여러 번 했는데,
지금은 그 아이디어가 갑자기 사라져 버리고
어린이 공상과학만화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 때 소련의 고르바초프 수상과 대결하여
최신과학을 동원하는 소위 ‘스타워즈’를 전개하겠다고 호언하던 그 과학은
과연 21세기의 최신 과학이었는가.
아니면 테슬라를 위시한 1920년대의 여러 과학자들의 망상에 불과한 것인가?
또는 그때 그 자료들을 세계의 모든 정부들을 좌지우지하는
누상(樓上)의 엘리트들이 빼앗고,
지상에서는 그 누구도 사용하지 못하도록 아예 없던 일로 만든 것인가?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로서는 나름대로 결론을 지을 수밖에 없는 이 의문은
또다른 끝없는 질문과 상상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콜럼비아 대학에서 무기를 연구하던
(현 워싱턴 DC에 소재한 국방분석 연구소 소속)
젊은 과학자 타운스(Charles Hard Townes)는
아주 짧은 초단파를 만들기 위해서 고심한 끝에
4년 만인 1950년에 메이저 광선을 만들었다.
이 원리를 이용하여 1958년 하워드휴즈 항공사에서는
레이저 광선을 만들었는데,
그렇다면 이 광선들은 이미 테슬라가 반세기 이전에 말하던 가공할 광선의 일종인가?
테슬라는 태양광선보다 50배 빠른 속도를 가진 빛을 개발했다고 말한 적도 있다.
그는 또 거의 돈을 들이지 않고도 영상을 포함한 모든 통신이 가능하다고 했다.
요즘엔 레이저 하나가 TV 프로그램 2만 5천 개를 동시에 송신할 수 있다.
그렇다면 테슬라가 이미 개발했다고 말한
그 단계에 도달하려면 아직도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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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
테슬라는 에디슨의 백열전등을 아주 조잡하고 미개한 것으로 여겼다.
그가 시범을 보인 전등은 성능이나 품질 면에서 훨씬 더 다양하고 월등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발명한 전등을 상용화하려고 노력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의 비-헤르츠파 전등과 유사한 형광등이
반세기가 훨씬 지나서 세상에 선을 보이기는 했지만
아직도 이 세상에는 그가 제시했던 전등이 소개되지 않고 있다.
또 그는 친구인 음악가 스토코프스키와 작가인 트웨인,
부호의 아들 전기기술자 해몬드(Jack Hammond Jr.) 등과 동업으로 회사를 만들어
전등은 물론 형광등을 이용한 사진기술을 개발하는 사업을 벌인 일이 있다.
이때 마크 트웨인이 테슬라의 실험실에서 형광등을 켜보이는 사진
(1894년 유명 작가 마크 트웨인이 친구 테슬라의 실험실에서
전등을 손에 잡고 손수 실험을 해보고 있는 장면)이 지금도 남아 있어
테슬라가 에디슨의 백열등보다 훨씬 진보된 전등을 만들었다는 증거가 되고 있다.
테슬라가 자기 방에서 전깃줄 없이 불이 켜진 전등을 쥐고 있는 사진도 유명하다.
이는 100만 볼트라는 고압의 전류를 직접 자기의 몸을 통하여 전등이 켜지게 한 것이다. 이것이 테슬라가 개발한 또다른 전등
'동적전자감응전구‘(Electro Dynamic Induction Lamp)로
전깃줄 대신 감응으로 켜지는 전등이다.
21세기에 들어선 현재의 테크놀로지로도 상상하지 못하는 발명품인데,
이것을 테슬라는 1894년 특허까지 받아 놓았다.(U.S. Patent 514170)
그는 콜로라도 스프링스에 있을 때
200개의 전등을 발전소에서 4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전깃줄 없이 켜보이기도 했고,
역시 전선 없이 전기를 전달하여
마치 필라멘트처럼 40미터 길이의 두 갈래로 된 불꽃을
탑과 탑 사이에 일어나도록 하여 운동장만한 크기의 지역을 밝히기도 했다.
그에 의하면,
햇빛은 태양에서부터 9천 4백만 마일 되는 거리를 통과해
지구에 도달하는 진동에 의한 것으로서,
자기가 태양광선을 형성하는 진동과 흡사한 진동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태양광선과 비슷한 광선도 만들 수 있다고 했다.
더군다나 이 광선은 구름이나 다른 방해물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했다.
태양광선은
우주의 공간 ‘에테르(ether)에서 1초에 500조 번 진동함으로써 생기는 것이다.
따라서 그와 같은 진동을 만들기만 하면 되는데,
이미 자기의 기기로 어느 정도까지 진동을 만들었으니
조금 더 개량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바로 동적전자감응전구를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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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격제어 어뢰
1907년 3월 20일 <뉴욕타임스>에 ‘테슬라의 무선어뢰’라는 제목의 기사가 났다.
그 내용은 테슬라가 멀리서 전파로 조종할 수 있는 어뢰를 만들어 실험도 끝냈지만,
무선으로 전파를 보내 직접 파괴하는 것이 훨씬 더 위력이 크다면서,
자기가 만든 기구로 전기에너지를 농축시켜
원하는 지점 어디에나 낙하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에 레나(Lena)라는 프랑스 선박이
이상하게 전기불꽃이 튀면서 폭발한 사고가 있었는데
아무도 그 이유를 모를 때 <뉴욕타임스> 기자가 테슬라에게 질문을 했던 것이다.
테슬라는 이어서 어뢰를 원격조종하기도 하지만
같은 방법으로 어뢰를 공중의 비행체나 수중 잠수체로 변형시켜
이곳으로부터 강력한 전파를 발사하여 목표물을 폭발시킬 수도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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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테르 연료 자동차
현재 세계의 화석연료가 고갈되어 가고 있고 피할 수 없는
‘연료 대란’을 목전에 둔 현실에서
테슬라가 영원히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대기 중의 에너지를 사용하여
고성능의 자동차를 버팔로 시내에서 질주했다는 것은
생각 있는 과학도들에게 자극제가 될 것이다.
근래에 와선 건전지를 이용한 전기자동차가 한참 대두되더니
요즘에는 연료전지(fuel cell)를 이용한 전기자동차가 크게 대두되고 있다.
그때 캐나다 발라드(Ballard Power System)사가 세계 최초로 연료전지 개발에 착수하여 일본이나 독일 유수 자동차 회사들과 합작으로 기술개발을 진행하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요즘 한국의 대기업 중에서도
대체에너지 연구에 뛰어든 곳이 있어 희망을 가져본다.
전기자동차에 대한 인류의 관심은 20세기 후반과 21세기에 들어와서
화석연료 고갈이나 환경문제 때문에 촉발된 것이 아니다.
1920년대에 이미 전기자동차의 필요성에 관심이 고조되었고,
각 자동차 제작사들이 전기모터를 사용하는 자동차를 선보이기도 했다.
당시는 내연엔진을 시동할 때 앞에서 크랭크를 돌려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고
미션도 지금처럼 속도를 변환하는 데 매끄럽지 않았으며
여러 가지 잔고장도 많고 정비 또한 간단하지 않았다.
반면에 전기모터를 사용하는 자동차는 조작이 아주 쉽고
변속할 때 덜컹댈 염려가 없어 여자들도 쉽게 운전할 수 있었고,
기계 자체가 매우 간단해 고장 염려도 별로 없기에
백화점 배달트럭이나 의사들 왕진용으로 주로 사용되고 있었다.
당시 전기자동차 출시로 유명했던 회사들은
디트로이트 일렉트릭(Detroit Electric), 콜롬비아(Columbia), 베이커(Baker),
라우시&랭(Lauch&Lang), 우즈(Woods) 같은 회사들이었다.
지금은 모두 생소한 이름이지만,
그때는 포드, GM 같은 회사들도 여러 자동차 회사들 틈에 끼어 생존경쟁을 하고 있었다. 전기자동차는 배터리로 에너지를 공급하기 때문에
무겁고 덩치가 크며 속력이나 운행시간에 제한이 있는 것이 단점이었으나
그런 상황에서도 특수 용도로서의 인기는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내연엔진의 셀프모터의 등장으로 스위치 하나로 시동이 가능해지자
전기자동차의 인기는 급속히 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전기자동차는 직류모터를 사용하는데,
이에 반해 테슬라는 교류모터를 사용했고
차 뒤에는 180센티미터 정독 길이의 안테나를 장착했다.
1931년 피어스-애로사와의 계약하에 진행된
테슬라의 실험중 자동차를 시험운전한 사람은
테슬라와 같은 유고슬라비아 태생으로 오스트리아 공군 조종사 출신이었으며,
테슬라를 삼촌이라고 부르며 따르던,
피타 사보(Petar Savo)라는 32세의 청년이었다.
1960년대에 와서 사보가 증언한 바에 따르면,
그들은 버팔로의 어느 작은 차고에 들어가서
자동차 본네트를 열고 가져온 진공관 12개를 장치에 꽂고
무언가를 조금 조종하고 시동을 걸었다.
전기를 일으키는 장치는 길이 60센티미터에 폭 30센티미터,
높이 15센티미터의 상자처럼 생겼으며,
사용한 진공관은 어떤 것인지 모르지만 후에 3개는 70L7-GT 진공관으로 밝혀졌다.
사보가 운전대에 앉고 테슬라는 보조석에 앉아
지시하는 대로 시동스위치를 켰는데 아무 소음이 없었고,
전진기어를 넣고 가속페달을 밟으니 앞으로 굴러 나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버팔로 시내를 거쳐 시외에까지 다니면서 시험운전을 했다.
속도계는 120마일(시속 192km)까지 있었으나 90마일(시속 145km)까지 밟았고
그런 고속에서도 자동차는 아주 조용했다.
시험운전을 마친 테슬라는 확신을 얻고 자동차에 대해 설명했다.
그 자동차는 연료가 전혀 필요 없으며,
여기에 사용된 원리는 자동차를 움직일 뿐 아니라 가정에 전기도 공급하게 될 것이고, 결과적으로 기차, 선박, 비행기에도 사용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모터의 원리에 대해서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으나
그의 장치는 단순히 에테르에 있는 신비스런 방사선을 받는 장치일 뿐이며,
그 방사선은 공중에 무궁무진하게 존재하므로
인간은 대기에 그런 에너지가 한없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보는 그 후 8일 동안 계속 그 차로 시내와 시외를 운전하고 다녔으나
피어스-애로사의 휘발유 차종 8기통 125마력(bhp), 366in³ (6천cc)짜리 차의 성능과
거의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마지막 시험운전을 끝낸 그들은
자동차를 다시 버팔로에서 20마일 떨어진 교외의 어느 비밀장소에 가져다 놓고,
시동키와 전기장치를 떼어내 집으로 가져갔다.
그런데 테슬라의 비서가 허락도 없이 차에 대한 소문을 퍼트린 덕분에
테슬라는 어떻게 배터리 없는 전기자동차를 만들 수 있으며
전원은 어디에서 얻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게 되었다.
이에 대해 테슬라는 주변에 널려 있는 에테르에서 얻는다고 마지못해 대답을 했다.
그때 테슬라가 미쳤다는 사람도 있었고 악마를 신봉하는 조직과 연루되어
마귀의 힘을 빌려 괴상한 이적 행위를 한다는 말도 있었다.
피어스-애로사와 협상이 잘 되지 않았거나
다른 사정 때문인지 이 전기자동차는 결국 빛을 보지 못했고
이로 인해 테슬라는 다시 뉴욕시로 돌아가면서 그 장치를 분해해서 없애 버렸다.
참고로 에테르에 대해 설명 하겠다.
원래 에테르는 하나의 가설로, 19세기에 빛, 열, 전자파 같은 것을 전달하는 매체이자
우주공간을 채우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물질로 이해되고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미켈슨-몰리(Michelson-Morley)나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같은 과학자 덕분에 불필요한 가설이 되었고,
지금은 마치 전기가 양극에서 음극으로 흐른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가정에 불과하다.
테슬라가 사회의 통념을 따라 ‘에테르’라고 표현했지만,
실제 그가 말한 것은 ‘슈만공명’을 의미했다.
그는 지구 표면에서 전리층(고도 약 80킬로미터) 사이를
‘슈만층’(Schumann cavity)이라 하고,
슈만층에는 7.83헤르츠의 전자기파가 흐르고 있는데
이를 슈만공면 또는 ‘지구 자장의 맥박’이라고 했다.
이 파장은 지구 표면의 슈만층 어느 곳에나 전혀 약화됨이 없이 돌고 있다는 것이다.
테슬라가 자동차에 사용한 무료전기는
바로 이 슈만공명을 잡아 전기에너지로 변환시킨다는 의미였고,
누구나 간단한 변환기만 있으면
지구 어느 곳에서나 쉽게 전기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그가 이미 그 기구를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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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칼라파
테슬라가 콜로라도 스프링스에서의 실험을 통해 확신을 가지게 된 것은
‘스칼라파’라고 하는 ‘종파’(縱波, longitudinal wave)에 대한 이론이다.
테슬라가 지구에 이미 존재하는 전기에너지를
지구 어느 곳이든 쉽게 보낼 수 있다고 한 것은
전자파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 종파를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 테슬라가 호언장담한 것으로 보아
이미 완전히 독자적으로 이론뿐만 아니라 실용단계까지 도달한 것 같다.
1960년대에 미 국방성 소속 과학자 리치몬드(Walter Richmond)와
비어든(Thomas Bearden) 중령이 이 ‘스칼라파’를 발견했다.
비어든 중령의 말에 의하면,
1963년 소련이 미국의 원자력잠수함 트레셔(Thresher)호를 격파시킨 것이
이 테슬라의 원리를 이용하여 만든 소위 ‘사이코트로닉 무기’ 덕분이었다고 말했다. 1999년 봄 이름을 밝히지 않은 미 육군의 한 장성은
아트 벨(Art Bell)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광선속도(초석 30만 킬로미터)의 4.7배나 되는 속도로
통신이 가능한 단계까지 종단파를 개발했다고 발표하면서,
이것은 해저 어느 곳에 있는 잠수함도 찾아 폭파시킬 수 있고,
실내 온도에서 바위를 녹일 수도 있는 정도라고 말했다.
물론 이것은 21세기 과학에 해당하는 첨단과학이며, 극비에 해당하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통상적으로 전파의 속도가
광선의 속도와 같다는 이론을 완전히 뒤엎은 세계가 놀랄 만한 이야기이지만
거의 100년 전에 이미 테슬라가 혼자서 개발하여 실제 사용하려고 했던 것을
돈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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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조종
1914년 테슬라는 대기 중에 있는 습기에 존재하는 전기를 조작하여
바다에서 무제한의 수분을 끌어오는 것이 가능하며,
전자기파 조작만으로도 산불도 끄고, 짐승이나 곤충, 미생물 등
생물의 멸종이나 파괴를 막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항상 주장하기를 지구의 크기도 조정할 수 있으며,
우주의 행로를 바꾸어 계절을 조절할 수도 있고,
지구를 다른 행성과 충돌시킬 수도 있으며,
유사 태양을 만들어 빛과 열을 생성하여 공급할 수 있다고 장담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의 말을 믿지 않고,
항상 천재에서 미치광이 사이를 오락가락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 테슬라가 이런 원칙을 이용하여
기후를 조종할 수 있다고 말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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퉁구스카 폭발
시베리아 퉁구스카 사건
사건당시 그지역에는 니콜라 테슬라의 전류방패막 연구소가 있었다,
250만와트=2500Kwh의 전력으로 작동되는 전류방패막에
포탄을 발사해서 방어하는 실험이 있었다고한다,
그때 하늘을 거슬러 올라가는 거대한 불덩어리를 많은 이들이 목격했다고한다,
포탄은 전류방패막과 충돌해서 그때 생겨나는 반발력으로 튕겨져 하늘로 날아간것이다,
포탄과 전류방패막의 충돌시 전류방패막은 급격한 진동을 일으켰다,
이러한 진동은 즉 제동복사효과를 일으켜
막대한 양의 가시광선,자외선,적외선,전자기충격파,공기의 충격파를 발생했다,
그때 발생된 파괴력은 15메가톤의 핵무기와 맞먹는다,
(제주도면적에 파괴를 입히는 위력)
1908년 6월 30일 오전 7시 17분
바이칼 호수 북쪽 시베리아 포드카메나야 퉁구스카 강 지역
상공 8킬로미터 지점에서 이상하고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퉁구스카 강 주변은 툰드라가 끝난 남쪽의 광대한 침엽수 원시림 지역이었다.
이 폭발로 바로 밑에 있던
2,150 평방킬로미터 면적에 초속 60킬로미터 강풍에 해당하는 공기파와
섭씨 1,660만도 정도의 열파가 덮쳤으며,
다음 약 8천 평방킬로미터 지역에 8천만 그루 이상 되는 나무들이 불에 탔다.
폭발의 충격파는 런던 지진관측소에까지 감지되었는데,
그 위력은 진도 5의 지진 또는 TNT 10~15 메가톤에 해당하는 것으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의 약 2천 배 규모였다.
이 지역은 광활한 무인지대로 알려져 있으나,
그 속에는 원주민들이 간헐적으로 작은 마을을 구성하고 살았으며,
많은 사슴떼도 살고 있었다.
즉, 이들이 모두 사라져 버린 것이다.
1960년 우바로프(Valery Uvarov) 박사의 조사 때에도
인근에서 약 3천 명의 목격자들이 살아 있었다.
이들에 의하면 북북동쪽 하늘이 밤새 오렌지색을 띤 강력한 노란빛이었고
다음날 아침 동이 틀 때까지 훤했으며,
빛이 번쩍이거나 깜빡거리는 일도 없었고,
무지개나 오로라처럼 빛줄기가 나타나는 경향도 전혀 없었다고 한다.
(‘The Fire Came By",Spenser Russell.The Royal Meteorological Society Quaterly,1930.) 세계적인 과학자들로 구성된 조사단이 여러 차례 답사하여
땅을 40미터나 파보았는데도 운석이나 분화구의 흔적이 없었기 때문에
핵폭탄이나 유성이 떨어진 것은 아니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어떤 이들은 블랙홀이나 반물질(antimatter) 같은 설을 주장하지만,
모두 모순이 많아 여전히 과학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상태이다.
한편 이 사고에 대해 테슬라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중 니켈슨(Oliver Nichelson)이 가장 강력하게 주장했는데,
테슬라가 무선으로 엄청난 양의 전기를
원하는 곳에 보낼 수 있을 뿐 아니라
이를 무기로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을 누누이 했다는 것을 근거로 들었다.
테슬라는 송전시스템을 무기로 사용하려면,
지구의 전기 상황을 조작, 변형시켜야 한다고 설명한 적이 있다.
지구에 대전된 전기의 진동을 송전기와 맞추면 나침반도 다르게 작용할 것이고,
대기 상층부는 마치 그의 실험실에서 사용하는
전구 속에 들어 있는 가스와 같은 성질을 띠기 때문에
지구 전체를 하나의 전기 부속처럼 취급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 그는 일반 전기송전과 파괴를 목적으로 하는 송전의 차이는
다만 시간의 차이일 뿐이라고 했다.
워든클리프 타워로 전압 1억 볼트에 전류 1천 암페어까지 실험을 해본 그는,
만약 이런 전량을 아주 짧은 시간에 방출하게 되면
TNT 수백만 톤을 터트리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내며,
이런 전기 덩어리를 지구 어디든지 원하는 곳에 빛의 속도로 보낸다면
그 지역은 순식간에 증발해 버릴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The Tesla's High Frequency Oscillator",Winfield H. Secor,The Electrical Examiner, March, 1916. p. 615.)
테슬라가 퉁그스카 폭발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또 다른 근거는 1900년부터 약 10년간이
테슬라가 가장 극심한 좌절감으로 고심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모건을 위시한 모든 재벌가들이 재정 지원을 거부했고,
과학계마저도 그의 논리에 동조하지 않았다.
그는 절박한 심정에서 무선송전이라는 그의 발명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보여주기 위해
인명 피해가 없는 지역을 선택하여 시범을 보였고,
그것이 1908년 퉁구스카 폭발이라는 것이다.
평화주의와 인본주의 사상이 투철했던 그가
많은 짐승과 원주민들을 죽이는 일을 했을리 없다는 주장도 있지만,
필경 테슬라 자신도 예기치 않았던 훨씬 큰 위력이 나타난 것일 수도 있고,
테슬라가 원했던 장소에서 빗나간 것일 수도 있다.
목표가 빗나갔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당시 피어리(Robert E. Peary)는
10여 년 동안 계속해서 북극 지역을 측량하고 탐험했는데,
(1902,1906,1909년 북극 정복)
그 탐험팀의 기지가 캐나다의 최북단 엘레스미어 섬의 앨러트였다.
이 앨러트는 지구본에서 워든클리프 타워와 퉁구스카를
북극을 통해 직선으로 연결하면 바로 그 선상에 있었다.
그래서 혹시 테슬라의 원래 의도는
피어리 탐험팀이 가까이에 있는 북극 어느 곳을 목표로 해서
그로 하여금 폭발의 규모를 증언하도록 하려 했던 것이 아니냐는 설도 있다.
자신의 발명이 위대함을 증명해 보이고 자기주장의 중요성을 대대적으로 펼쳐
여론을 몰아 자본가나 투자자들의 주목을 끌러 보려 했으나,
뜻하지 않은 인명 피해와 자연파괴 때문에
오히려 비난을 받을까 두려워 입을 다물었던 것이 아닐까 추측하는 것이다.
여하튼 테슬라가 퉁구스카 폭발의 장본인이 아니었다면,
그가 주장한 ‘저주파 현상’이나 ‘슈만진동’을 위시한 여러 원리와 학설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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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라델피아 실험
2차 세계대전 때 미 해군은
독일의 레이더망에 포착되지 않기 위한 피닉스 작전의 일환으로,
테슬라를 위시해서 폰노이만(John Von Neumann), 허친슨(John Hutchinson),
커텐아워(Emil Kurtenhour), 아인슈타인 같은 당시의 석학들을 소집하여
무지개 작전이라는 실험을 했다.
이 작전은 필라델피아 해군 항만에서 이루어 졌는데
보통 ‘필라델피아 실험’으로 알려져 있다.
처음에는 테슬라가 책임자로 있어 다른 과학자들은 그의 지시를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과학자들이 고집을 피워 테슬라를 따르지 않게 되자
테슬라는 사임하고, 그의 뒤를 이어 폰노이만이 책임자를 맡게 되었다.
폰노이만은 헝가리에서 태어난 수학 신동으로,
6살 때 암산으로 8자리 나눗셈을 할 정도였으며,
당대 가장 뛰어난 수학자 중 하나였다.
그는 독일과 스위스에서 연구하다가
1930년에 미국으로 건너와 프린스턴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그는 폰노이만 기계라는 최초의 컴퓨터를 만든 사람으로
‘폰노이만 대수’, ‘오퍼레이터 이론’, 게임이론 등을 개발했고,
독일 물리학자 하이젠버그(Werner Heisenberg)의 ‘불확실성 원리’를
‘양자물리학의 수학적 기본’이라는 이론으로 증명하기도 했으며,
시간은 과거-현재-미래로 흐르는 선상(線上)의 움직임이 아니라고 증명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그가 남긴 업적은 수없이 많다.
1903년대에 들어서면서 니콜라 테슬라는 이미 수명의 다른 과학자들과
‘시공간 연속체’라는 다른 차원으로 옮겨 다니는 실험을 하고 있었다.
전기를 이용하여 물체가 보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은
시카고 대학에서도 이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다.
한편 이보다 먼저 아인슈타인도 ‘중력과 전기의 통일장 이론’을 발표하고,
이 원리를 이용하여 바다에서 전자기파로 배를 위장하는 방법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1925년~1927년 사이에 독일어로 이 논문을
프러시아 과학저널에 발표했으나 후에 완전하지 못하다고 철회했다.)
폰노이만이 있었던 프린스턴 대학의 진보학문연구소(Institute of Advanced Studies)는 1939년 작은 물체를 보이지 않게 하는 데 성공했다.
이 연구소는 이를 미 정부에 알렸으며,
군에서는 당시 전쟁에 돌입한 상황을 고려하여 이를 실전에 이용하려고 계획했다.
이것이 ‘무지개 작전’으로 구체화되었고,
결론은 테슬라 코일 4개를 작동시켜 자장을 만들고
그 자장으로 소위 ‘과도공간기포’(Hyper Space Bubble)를
물체 주변에 조성해 보이지 않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 원리는 함선 주변에 아주 강력한 자장을 만들어 감싸면
태양빛 같은 광선이나 레이더 등에 사용하는 전파는
마치 아지랑이처럼 굴절하게 되어 보이지 않게 되며,
혹시라도 적이 어뢰를 발사하면 그 진로가 굴절되어 옆으로 빗나가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 실험은 마치 보이지 않는 옷을 몸에 입히는 것처럼
배가 적에게 노출되지 않는 것이 첫 번째 목적이었다.
그때 아인슈타인과 테슬라는
만약 이런 기술이 개발된다면 인류를 위해 사용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경고를 했다.
드디어 1943년 여름, 뉴욕 해군 항만기지 소속
엘드리지(USS Eldridge DE 173) 경구축함에
75Kwh(1500억V로 승압)발전기 두 대,
자장을 만드는 테슬라 코일 4개를 위시한 여러 전기기구를 가득 싣고
필라델피아 해군 항 앞바다에서 실험이 시작됐다.
1943년 7월 22일 오전 9시에 함상의 발전기를 발동시켰고,
곧 선박 주변이 초록색 안개로 가려지면서 선박은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얼마 후 안개 자체가 걷히면서 선박도 함께 사라져 버렸다.
이를 주시하던 해군 고위 장교들이나 과학자들은
선박이 레이더망만 잡히지 않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도 볼 수 없다는 것에 대단히 만족해했다.
얼마 후 발전기를 끄도록 명령하자
다시 초록색 안개가 서서히 나타났다가 그 안개가 가라앉으면서
엘드리지 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육지에 있던 관련자들이 승선해 보니 무언가 매우 잘못되어 있음을 알았다.
갑판에 있던 선원들은 얼이 빠져 있었고,
매스꺼움과 어지러움을 호소했다.
그래서 당국은 선원들을 모두 교체시키고,
앞으로는 레이더에만 감지되지 않게 만드는 방향으로 실험을 변경했다.
10월 28일 오후 5시 15분, 다시 실험이 시작되었다.
발전기를 발동하고 테슬라 코일이 작동하여 전기자장이 일어나자
함선은 점점 사라지기 시작해 뱃머리만 약간 보일 정도였다.
얼마 동안은 모든 것이 예상대로였지만
갑자기 선박에서 파란불이 번쩍 일면서 배 전체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불과 수초 사이에 함선은
약 400킬로미터 남쪽에 있는 버지니아주 노포크함 앞바다에
수 분 동안 나타났다가 다시 필라델피아 해군기지 앞 바다에 돌아왔다.
이번에는 모두 181명이 승선했었는데 그중 120명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으며,
40명은 죽고 21명만이 살아남았다.
그러나 생존자 중 일부는 미쳐 버렸고
산 사람 모두는 신체적으로도 매우 심한 이상 증세를 보였다.
그리고 가장 이상한 일은 그중 다섯 명이
함선의 철판에 박혀 버려 철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애초 레이더망에 걸리지 않게 하려던 실험이
뜻하지 않은 선박과 선원 전체의 텔레포테이션을 맛보는 사고로 끝을 맺은 것이다.
이에 대해 해군 당국은 그런 실험을 한 일이 없으며,
‘엘드리지’라는 함선이 없어진 일도 없다고 주장하고,
그 함선의 일지를 공개하기도 했다.
필라델피아 실험으로 당국과 실험 당사자들은
많은 것을 배웠을 것이고 호기심 또한 커졌을 것이다.
누구보다도 우월한 무기를 가지려는 욕망이 이를 포기했을 리가 없다.
알려진 바로는 미 해군이 1950년대에
‘팀머맨(USS Timmerman)이란 함선으로 또다시 실험을 했으며,
이번에는 엘드리지호 때처럼
400헤르츠를 사용하지 않고 1천 헤르츠를 사용했다고 한다.
이 이론을 비행기에도 적용시키려는 노력도 있었다.
혹시 여러분 중에 라필(Stewart Raffill) 감독이
1984년에 만든 <필라델피아 실험>이라는 영화를 본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 영화에서는 1943년에 사라진 엘드리지 호의 두 수병이
오직 전쟁중의 기억과 전혀 늙지 않은 육체로 1980년대에 오게 된다.
이들은 1980년대의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회적, 정신적 고통을 겪기도 하며 이상한 일이 벌어져
비밀연구당국(몬토크)에 알려지자 위험을 느끼고 도망가다가
결국 다른 차원에 있는 함선에 일종의 블랙홀을 통해 되돌아가
아직도 가동되고 있는 발전기를 부수고 다시 지구로 돌아온다.
이 줄거리는 꾸며낸 것이며,
그들은 그냥 4시간 동안 사라졌다가 돌아왔다는 설도 있다.
하여튼 ‘필라델피아 실험’ 이라는 해프닝은
테슬라 혼자만의 이론으로 일어났던 일은 아니지만,
그와 관계가 있기도 하고
첨단과학이 어떤 경지에 들어가고 있는지를 알리는 차원에서 소개해 보았다.
네루피아작성일
2007-05-15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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