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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글터] [펌,청구야담]우 임금을 만난 포수(問異形洛江逢圃隱)
읽다보니 재미있어서 퍼왔습니다.읽을수록 무서운 이야기는 아닌 듯 해서 여기까지만...출처http://bbs2.ruliweb.daum.net/gaia/do/ruliweb/default/327/read?articleId=13534335&bbsId=G005&itemId=145&pageIndex=4
----------박천의 한 포수가 묘향산에서 사냥을 했다.묘향산은 큰 산이어서 인적이 미치지 않은 곳이 많았다.포수가 사슴 한 마리를 보고 거의 잡을 뻔 했으나 결국 잡지 못했다.하루 종일 쫓아다녔지만 결국 사슴을 잡지 못하고 떠돌다 깊은 산 속 골짜기에 이르게 되었다.게다가 날까지 저물어 어디로 가야할 지 알 수 없었다.위태로운 상황에 겁을 먹고 있는데, 깎아 세운 듯한 골짜기 가운데 작은 길이 있어 앞으로 몇 리를 나아가니 초가집 한 채가 있었다.그 집은 12칸이 길게 통해 있었는데, 한 칸만 주방이었을 뿐 나머지는 문도, 창도, 벽도 없이 길게 통해 있었다.주방에서는 아름다운 한 여자가 저녁밥을 짓고 있었는데, 포수를 보고도 별로 놀라거나 이상히 여기는 기색이 없었다.포수가 깊은 산 속에서 길을 잃었다고 말하자 그 예쁜 여자는 정성스럽게 응대하였다.포수가 젊은 나이의 치기로 시험 삼아 유혹을 했더니 여자 또한 부끄러워 하는 기색이 없어 쉽게 관계를 맺었다.잠시 후 여자가 저녁밥을 내왔는데 반찬은 곰발바닥, 사슴포, 산돼지 고기 등이었다.포수가 남자는 없느냐고 물어보자 여자는 [사냥 나갔다.] 고 대답했다.4시쯤 사람 발자국 소리가 나자 여자는 바로 뛰어나가 맞이하였다.포수가 나가보니 거인이 뜰에 서서 등에 지고 온 짐을 땅에 풀어 놓고 있었고, 그 짐의 크기는 집 한 칸만 했다.그 사람은 몸도 크고 키도 커서 지붕보다 30m는 더 높이 솟아 있었기에 방 안에서는 도저히 그 사람의 얼굴조차 볼 수 없었다.거인이 아내를 보며 말했다.[오신 손님을 잘 대접하였소?][예, 잘 대접해 드렸습니다.]거인이 마침내 방 안으로 들어오는데, 그 사람은 키가 너무 컸으므로 방으로 똑바로 들어오지 못하고 머리부터 서서히 구부려 들어와 그대로 누웠다.그 누운 길이가 11칸의 방을 모두 채웠다.그 거인이 들어오자마자 곧바로 누운 것은 그의 앉은 키가 대들보보다 높아 몸을 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거인이 포수에게 물었다.[당신은 오늘 하루 종일 사슴을 쫓았지만 잡지는 못하지 않았소?][예, 그렇습니다.][당신은 저 여자와 관계를 갖지 않았소?]포수는 [저 거인이 이처럼 신령하고 거대한데다 내가 지은 죄를 이미 헤아리고 있구나! 어찌 속일 수 있겠는가!] 라고 생각하며 사실대로 고하고 용서를 빌었다.거인이 말했다.[걱정할 것 없소. 내 비록 저 여자를 이 곳에 두고 있지만 음식을 시중들게 한 것 뿐 처음부터 가까이하지 않았다오. 당신이 그녀와 관계를 가졌다해도 나와는 상관 없는 일이니 두려워할 필요 없소.]그리고 거인은 여자를 돌아보며 말했다.[먹을 것을 준비해 오시오.]여자는 명령을 받들어 조금 전 거인이 메고 왔던 큰 돼지 한 마리를 잘라 큰 그릇에 가득 담아 내왔다.모두 날고기였고 다른 음식은 없었다.거인이 고기를 모두 먹고난 뒤, 잠잘 때가 되자 다시 여자에게 말했다.[저 손님과 함께 자시오.]여자가 비록 포수와 함께 누워 있었지만, 포수는 의아스럽고 두려운 마음 때문에 밤새 그냥 잠만 잤다.다음날 아침 다시 그 거인을 보자 그저 사람과 비슷할 뿐, 진짜 사람은 아니었다.포수의 마음 속에서는 별의별 괴이한 생각이 다 떠올랐다.날이 밝자 그 거인은 누운 채 여자를 불러 말했다.[손님의 밥과 내 밥을 같이 차려오시오.]여자가 명령을 받들어 밥을 준비하여 내왔다.포수의 것은 밥과 반찬을 익혔으나, 거인의 것은 어제처럼 날고기만 그릇 가득 담겨 있었다.음식을 다 먹자 거인은 긴 몸을 이끌고 방 밖으로 나왔는데, 마치 긴 이무기가 요동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머리부터 똑바로 기어나온 거인은 바깥 뜰에 나와서야 드디어 앉고 말했다.[내가 당신의 관상을 보니 정말 복이 대단하구려. 그대가 어제 이 곳에 온 것 역시 내가 유인했던 것이오. 저 여자는 이 곳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 아니니 두려워말고 데려 가시오. 또 내가 모아 놓은 호랑이, 표범, 노루, 사슴, 곰, 돼지 등의 가죽은 이 곳에 쌓아 놓아도 소용이 없으니 당신에게 주겠소. 그렇지만 당신은 힘이 약하여 많이 짊어질 수 없을테니 내가 힘을 다해서 운반해 주리다.]거인은 동굴 속에 산더미처럼 쌓아두었던 가죽들을 큰 그물에 담아 어깨에 메고 나오더니 말했다.[당신은 저 여자를 데리고 나보다 먼저 가다가 어느 곳이던 배가 멈추는 곳에서 멈추시오.]포수가 안주 항구에 이르니, 그 거인도 산더미 같은 가죽을 등에 짊어지고 그 곳에 도착해서 말했다.[이것들을 팔면 당신들 집안이 평생 먹고 살 재산을 될거요. 나 또한 당신에게 바라는 것이 있소. 닷새 후 소를 두 마리 잡고, 소금을 100석 사서 이 곳에서 나를 기다려 주시오. 내가 그 때 반드시 다시 오리다.]마침내 포수와 거인은 거기서 작별했다.포수는 배를 빌려 여자와 가죽을 실었다.여자는 아내로 삼고, 가죽은 팔아서 엄청난 돈을 얻었다.그 거인이 사람인지 아닌지는 여자 역시 모르는 것 같았다.닷새 뒤 포수는 소를 잡고 소금을 구해서 약속한 장소에 나가 기다렸다.역시 거인이 왔는데, 지난번처럼 등에 가죽을 지고 왔다.거인은 소는 모두 먹어 치우고, 소금 100석은 가죽을 담아온 그물에 넣어 짊어졌는데, 조금도 힘들어하는 기색이 없었다.거인은 또 [닷새 후에 또 소금 100석을 가져와서 이 곳에서 나를 기다려 주시오.] 라고 말하고 갔다.포수는 거인의 말대로 소금을 준비했는데, 혹시 소는 거인이 잊어먹고 말하지 않은 것인가 싶어 소 두 마리도 잡아서 약속 장소에서 기다렸다.거인은 또 가죽을 등에 잔뜩 짊어지고 왔다.역시 예전처럼 소금을 그물에 넣어서 가져가다, 잡아온 소를 보고는 보기도 싫다는 듯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만일 소가 먹고 싶었다면 먼저 내가 말했을 것이오. 이치상 이번에는 당연히 먹지 않아야 하오.]고개를 흔들면서 가는데, 포수가 절실한 마음으로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우리는 같은 사람이 아니고 또 오랜 친구도 아닌데 당신은 나에게 예쁜 아내와 큰 재산을 주셨습니다. 지금 내가 소를 잡아온 것은 비록 당신의 지시를 받은 것은 아니지만 은혜를 갚기 위해 드리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한 입 먹어보지도 않고 가십니까?]포수가 또 간청하니 거인이 손가락으로 셈을 해보고는 말했다.[당신이 그렇게까지 말하니 비록 5일의 기한을 늦추더라도 정성을 받아들여야겠구려.]거인이 고기를 다 먹고 가면서 말했다.[이제 영원히 만날 수 없을 것이오. 좋은 것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니 부디 스스로를 안전히 보호하시오.]포수가 다시 거인 앞에 꿇어 앉아 길을 막으며 말했다.[사람들이 상대를 대함에 있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상대가 어떤 존재인지 아는 것입니다. 게다가 영원히 이별해야 하는 마당에 아직 어떤 분인지도 모르겠으니 마음이 아파서 슬픔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어르신은 사람이십니까? 아니면 짐승이십니까? 도깨비십니까? 아니면 산신령이십니까?]거인이 말했다.[정해진 법이 있어 스스로 내가 누구인지 알려주는 것은 불가능하오. 그대는 내년 단오날에 낙동강 나루터에 가서 기다리다가 초립을 쓰고 청색 도포를 입은 채 검은 말 위에 앉아 있는 미소년을 만나면 그에게 물어보시오. 그러면 알 수 있을 것이오.]그리고 거인은 홀연히 가버렸다.포수는 한편으로는 이상하고 괴이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 이상으로 슬펐다.집으로 돌아와 가죽을 모두 팔아버리고, 드디어 평안도 지방에서 손꼽히는 부자가 되었다.포수는 다음해 단오날이 오기를 기다리다가 낙동강 나루터에서 기다렸다.과연 한 미소년이 보였는데, 거인이 말한 것과 똑같은 모습이었다.포수는 말 앞으로 다가가 인사를 하고 그 소년에게 거인에 관해 물었다.그러자 소년은 길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것은 좋지 않은 소식입니다. 그 분은 우 임금이십니다. 우 임금이 물체로 존재하면 다행이지만 없어지는 것은 불행입니다. 보통 천지의 정기가 변화하여 영웅, 호걸이 됩니다. 임금이 성스럽고 신하가 충직하고 국가가 태평하며 백성이 편안하면, 아무리 위대한 영웅이라도 세상을 구할 필요가 없지요. 그렇기 때문에 영웅이 되지 못한 정기들이 모여서 우 임금의 모습을 불러내는 것입니다. 우 임금은 깊은 산 골짜기에 몸을 감췄다가, 세상이 어지러워져서 액운이 나타날 것 같으면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이 때 소금이 꼭 필요하지요. 우 임금이 목숨을 거두면 정기가 우주에 흩어져 수많은 영웅들이 무더기로 태어납니다. 영웅이 태어나는 것에 어찌 까닭이 없겠습니까? 그가 소금을 달라고 했던 것은 소금을 먹고 죽으려 했던 것입니다. 소금은 첫번째 5일 동안 먹으면 몸이 쇠약해지고, 그 후 두번째로 5일 동안 소금을 먹으면 죽게 됩니다. 그러나 중간에 만약 생고기를 먹으면 5일을 더 버틸 수 있게 됩니다. 우 임금이 두번째에 굳이 쇠고기를 사양했던 것은 아마 그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아! 이제 30년 안에 우리나라에 중국 삼국시대처럼 영웅 호걸들이 넘쳐날테니 우리나라가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의 복은 정말 축하를 받을만 하군요. 우 임금은 당신을 친구로 삼고, 덕 있는 아내를 주었습니다. 그가 그 여자를 범한 적이 없다고 했다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사람이 타고나는 기는 남자는 양기이고 여자는 음기입니다. 그러나 남자라고 해서 양기만 있는 것은 아니고, 여자라고 음기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남자에게는 양기 중에 음기가 있고 여자에게는 음기 중에 양기가 있어서 그 때문에 교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 임금은 완전히 양기만을 가진 신령한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와 관계할 수 없지요.]포수는 이 이야기를 듣고 무척이나 신기해하며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 소년의 이름을 물었다.소년이 말했다.[내 이름은 정몽주입니다.]그리고 소년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너 갔다.이후 30년도 되지 않아 나라 안이 크게 어지러웠고, 수많은 영웅들이 연달아 나타났으니 이것은 죽은 우 임금으로 인한 것이 아니겠는가?백성들이 전란에 시달려 고깃덩이가 되는 것이 예삿일이었지만, 그 포수만은 온 집안이 무사하여 죽은 사람 하나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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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수다] 24절기
24節氣
※ 24節氣 中 마지막 節候이며 一年 中 가장 추운 때.. 時期 : 小寒 15日후부터, 立春前까지의 節氣
24節氣의 由來와 時期
인간이 월력(月曆)을 만든 가장 큰 이유는계절의 변화를 기록하기 위해서입니다.농경사회에서는계절의 변화에 민감할 수 밖에 없는데농사를 짓기위해 씨를 뿌리고추수를 하기에 가장 좋은 날씨를 알아야 했기 때문입니다.음력의 24절기도 이런 바탕에 근거하고 있습니다.24절기는 봄·여름·가을·겨울 4계절에각각 여섯개 씩 자리잡고 있으며, 각각의 절기는 앞뒤 절기와 유기적인 연관성을 가지며 1년을 이룹니다.24절기는 태양의 운동에 근거한 것으로춘분점(春分點, 태양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향해 적도를 통과하는 점)으로부터태양이 움직이는 길인 황도를 따라 동쪽으로15˚ 간격으로 나누어 24점을 정하였을 때, 태양이 각 점을 지나는 시기를 말합니다.정확히 말하면 천구상에서 태양의 위치와 황도가 0˚ 일 때 춘분, 15˚ 일 때 청명, ....., 300˚ 일 때 대한으로 정한 것입니다.(24 × 15 = 360)
<봄의 節氣>01. 입춘(立春)_02월 04일 또는 05일 : 계절의 시작 봄에 들어섰습니다.02. 우수(雨水)_02월 18일 또는 19일 : 내리던 눈은 그치고 비가 옵니다.03. 경칩(驚蟄)_03월 05일 또는 06일 : 벌레들이 깨어나네요. 겨울잠을 자던 개구리가 땅밖으로 나왔습니다.04. 춘분(春分)_03월 20일 또는 21일 : 둘로 나눈 봄의 한 가운데. 밤과 낮의 길이가 같습니다.05. 청명(淸明)_04월 04일 또는 05일 : 따듯하면서도 맑은 그야말로 화사한 봄이네요.06. 곡우(穀雨)_04월 20일 또는 21일 : 촉촉하게 내리는 봄비 맞으며 새싹이 움틉니다.<여름의 節氣>07. 입하(立夏)_05월 05일 또는 06일 : 더위의 시작 여름입니다.08. 소만(小滿)_05월 21일 또는 22일 : 식물의 푸르름이 조금씩 대지를 덮습니다.09. 망종(茫種)_06월 05일 또는 06일 : 씨(종자)를 뿌려 한해의 농사를 시작합니다.10. 하지(夏至)_06월 21일 또는 22일 : 여름의 한 가운데. 낮의 길이가 가장 깁니다.11. 소서(小署)_07월 07일 또는 08일 : 작은 더위.12. 대서(大署)_07월 22일 또는 23일 : 큰 더위.<가을의 節氣>13. 입추(立秋)_08월 07일 또는 08일 : 사색의 계절 가을입니다.14. 처서(處署)_08월 23일 또는 24일 : 더위는 한 풀 꺽였습니다.15. 백로(白露)_09월 07일 또는 08일 : 일교차가 커지면서 이슬이 맺혔네요.16. 추분(秋分)_09월 23일 또는 24일 : 가을의 가운데. 밤과 낮의 길이가 같아 졌습니다.17. 한로(寒露)_10월 08일 또는 09일 : 이슬도 차가워졌습니다.18. 상강(霜降)_10월 23일 또는 24일 : 서리까지 내립니다.<겨울의 절기>19. 입동(立冬)_11월 07일 또는 08일 : 추운 겨울에 접어 들었습니다.20. 소설(小雪)_11월 22일 또는 23일 : 많은 양은 아니지만 눈이 내렸습니다.21. 대설(大雪)_12월 07일 또는 08일 : 눈다운 큰 눈이 내렸습니다.22. 동지(冬至)_12월 21일 또는 22일 : 겨울의 절정. 추운 겨울밤이 왜 이리 긴지요.23. 소한(小寒)_01월 05일 또는 06일 : 작은 추위24. 대한(大寒)_01월 20일 또는 21일 : 큰 추위
24절기 소개 태양의 황도상의 위치에 따라 특징지은 계절적 구분
24節氣 外 節日 4大名節 (설, 寒食, 端午, 秋夕) - 三伏 (初伏, 中伏, 末伏)
입동에서 대한까지 봄부터 가을까지가 일하는 계절이라면겨울은 쉬면서 다음해를 준비하는 계절로입동·소설·대설·동지·소한·대한 등의 절기가 있습니다.19. 김장철 - 입동상강과 소설 사이에 들며 음력 10월, 양력 11월 8일경 입니다.겨울 동안의 김치를 장만하는 김장은 입동을 기준해서 합니다.김장은 입동 전 혹은 입동 직후에 해야 제 맛이 난다고 합니다.입동이 지난지가 오래되면 얼어붙고, 싱싱한 재료가 없으며, 일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입니다.20. 겨울의 시작 - 소설입동과 대설 사이에 들며 음력 10월, 양력 11월 22일이나 23일경 입니다.이 때부터 살얼음이 잡히고 땅이 얼기 시작하여 점차 겨울이 든다는 기분이 들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직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어 소춘(小春)이라는 다른 말로 불리기도 합니다.소설 무렵, 대개 음력 10월 20일께는 관례적으로 심한 바람이 불고 날씨가 차갑습니다.이 날은 손돌(孫乭)이 죽던 날이라 하고 그날 부는 바람을 손돌바람이라고 해서외출을 삼가했으며 특히 뱃길을 조심했습니다.21. 눈이 많이 내리는 절기 - 대설소설과 동지 사이에 들며 음력 11월, 양력 12월 7, 8일경 입니다.이 시기에 눈이 많이 내린다는 뜻에서 대설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이것은 원래 재래 역법의 발생지이며 기준 지점인 중국 화북지방의 상황을 반영하여 붙여진 것입니다.그렇기 때문에 이 시기에 꼭 적설량이 많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이 날 눈이 많이 오면 다음해에 풍년이 들고 푸근한 겨울을 난다는 속설이 전해오기도 합니다.22. 작은 설 - 冬至1년 중에서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입니다.하지로부터 차츰 낮이 짧아지고 밤이 길어지기 시작한 동짓날에 이르러 극에 도달하고다음날로부터 차츰 밤이 짧아지고 낮이 길어지기 시작합니다.고대인들은 이 날을 태양이 죽음으로부터 부활하는 날로 생각하고 축제를 벌여태양신에 대한 제사를 올리기도 하였습니다.
23. 1年 中 가장 추운 날 - 小寒
동지와 대한 사이에 있으며 음력 12월, 양력 1월 5일경입니다.절후의 이름으로 보아 대한 때가 가장 추운 것으로 되어있으나, 우리 나라는 소한 때가 가장 춥습니다.'대한이 소한 집에 놀러 갔다가 얼어 죽었다', '소한 추위는 꾸어 다가도 한다'는 속담이 나온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24. 24節氣의 마지막 - 大寒
24절기의 마지막 절후로 양력 1월 20일경을 말합니다.대한은 음력 섣달로 매듭을 짓는 절후입니다. 원래 겨울철 추위는 입동에서 시작하여소한으로 갈수록 추워지며 대한에 이르러서 최고에 이른다고 하지만 이는중국의 지형에 근거한 것이고, 우리 나라에서는 1년 중 가장 추운 시기가 1월 15일경이므로중국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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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공일기장] 드래곤 가디언 - 7화 뭐든지 해봐야 되는 거다 (3)
다음날. 아침에 마당에서.
멍이 들은 내 얼굴을 보면서 정욱씨 왈.
“그래도 아기씨가 힘 조절 좀 했는가 봐예?”
완전히 삐졌다는 표시로 아무 말 없이 고개 돌림.
“마, 어제는 그래도 본의 아니게 마이 미안했심더.”
이보세욥, 미안해하는 표정이 아니신데. 얼굴근육이 웃음을 참을려고 막 움찔움찔 하시는데.
하기사 뭐 정욱씨도 불가항력이었겠지. 아무 생각 없이 잠깐 나왔을텐데, 그런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으니 갑자기 구경꾼이 되었겠지. 뭐 이렇게 좋게 생각하고 넘어가려고 했어. 나중에사 이모님에게 들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반정욱씨는 완전히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수영이 보내놓고 숨어서 구경했던 거라더구만. 헐.
"미안한 것도 풀 겸 해서 오늘은 특별코스 훈련을 할 낍니더.“
그 말을 하더니 나를 데리고 안채 뒤쪽에 있는 철제문을 열었어. 그 철제문은 지하실로 통하는 문이었지.
그 문을 열어놓고 조그만 사다리를 잠깐 타고 내려갔는데, 어둑한데서 불을 키니까 옅푸른 색의 형광등들이 파바박 켜지면서.
와우. 이건 뭐 거의 일개 중대 쯤은 보급할만한 정도의 병기고가 눈앞에 떡 버티고 있더구먼. 저격용 라이플, 대물저격라이플,M4A1 소총 계열부터 시작해서 슈타이어AUG, AK계열, 드라고노프, MP5 계열, 스미스&웨슨, 심지어는 잡지같은 데서나 볼 수 있던 외국군소회사의 커스텀 총기까지.
거기에 한 쪽 벽면은 권총이 종류별로, 한 쪽 벽면은 수류탄 및 각종 폭탄들이 즐비하게 있는 거야. C4, TNT, 그 외 여러 가지 규격의 탄약들. 9mm, 5.56mm, 7.62mm. 심지어는 6.8mm나 38, 45구경 같은 놈들까지. 거기에 폭발물은 뭐 듣도보도 못한 것들 등등. 그리고 가운데쯤에는 가지가지 모양의 나이프들과 광학옵션 등등.
그런 걸 다 어떻게 아냐고? 뭐 인터넷에서 사진도 봤고, 군대도 다녀왔고, 다른 남자직원들이랑 이야기하다 보면 그런 이야기가 떠오를 때도 있고, 또 동료 한 놈이 완전 골수 밀리터리 취미라서 어울리다가 잡지도 보고 그랬던 적도 있고.
그런 취미에 돈을 들인다는 것 자체는 꿈도 못 꿔봤지만, 그래도 나름 공부하고 즐겼었다고.
“마 여기가 제 보물창고입니더. 막 피가 끓을라 카지 않십니꺼?”
“진짜, 조금 흥분되네요?”
“그치예? 그치예? 큭큭큭~그니까 오늘은 스페샬인기라예. 사격 말입니더.”
“사격이요?”
“야. 사격연습 할낍니더~”
그러면서 막 혼자서 뭐가 신났는지 이것도 설명하고 저것도 설명하고. 이 총은 의외로 총열이 좋아서 저격엔 쓸 만하다는 둥 저 총은 피카티니 레일이 안붙어 있던 건데 커스텀으로 일체화 되어서 만들어진 거래는 둥, 이건 규격이 몇 파이인데 몇 파이 짜리는 너무 작아서 바꾼 후에 미국 특수부대가 채용했다는 둥, 혼자서 막 신나서 나도 알아듣기 어려운 정보들을 늘어놓고 있는 거야. 딱 모습이 전의 그 밀리터리 취미의 직장동료 같았지.
혼자서만 신이 났길래 난 그냥 옆에 있는 AK처럼 보이는 소총을 하나 집어 들었지.
이것저것 막 보다가 뭘 하나 건드렸는데, 팅 하면서 총이 막 분해가 되어버리고 부품들이 떨어지네?
“지후씨 뭐하능교!”
정욱씨가 화급하게 달려와서 그 광경을 확인했어.
“지후씨, 아무거나 막 손대지 마이소!”
서슬이 퍼래져서 막 그러는데, 아이 참나. 이까짓거 가지고.
“에이, 알았어요. 다시 조립해 놓을께요.”
“조립한다고예?”
“네. 그럼 됐죠?”
그리고서 난 그냥 막 생각나는 대로 완전히 조립을 해서 진열대에 내려놓았어.
정욱씨가 멍해진 얼굴로 그걸 다시 집어 들더니 노리쇠를 당겨서 격발을 해보더라고. 정확하게 격발이 되는 철컥 소리가 들리자 정욱씨가 날 바라봤어.
“이거, 분해조립해 본적 있십니꺼?”
“아뇨, 그냥 설계도만 대강 봤어요.”
“우째 설계도만 봤는데 조립을 합니꺼?”
“에이, 왜 이래요. 남들도 다 할 텐데. 이 스프링은 여기 들어가서 노리쇠 지지해줘야 되고, 얘는 가스 조절관이니까 여기로 들어가면 되고, 노리쇠 뭉치는 여기쯤 있으면 되고......”
“지후씨.”
정욱씨가 날 쳐다보면서 진지하게 물었지.
“전에 뭐했십니꺼?”
“네? 그냥 회사원이었는데......”
어째 분위기가 영 이상한 거 있지. 탄이랑 M4계열 총 하나 챙겨서 나갔는데, 정욱씨가 아무 말도 않고 있는 거야. 혹시 내가 괜히 총 만져서 삐졌나 싶어서, 나도 그냥 가만히 있었지.
사격장은 이모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어. 차타고 가면 7분쯤 걸리더라고. 근처 군부대에서 이용한다는 사격장인데, 이미 책임 군부대와는 이야기들이 다 되어 있다고 안내해준 국정원 요원이 말하더라. 그래, 그런가 보다 싶었지. 그 곳도 거의 산등성이를 깎아놓아서 250m 사로까지는 오르막이었어.
예비군에서도 사격을 해보긴 했지만, 그 땐 영점이나 잡는다고 쐈던 거고, 진짜 제대로 된 사격은 해볼 턱이 있었나. 그런데 쏘는 총이 우리나라엔 없는 총이라니. 막 설레지 않겠어? 군대 다녀온 남자라면 이건 뭐 그냥 기본인거야. 덤으로, 난 군대에서도 거의 특등사수였으니까.
어쨌건 표적들을 좀 세워 놓고, 실제 훈련에 돌입했어.
“영점부터 잡을 테니까 준비하시라예.”
“네? 이 총, 영점 안잡아도 될 것 같은데.....”
“뭐라꼬예?”
“영점, 안잡아도 될 거 같다고요. 그냥 놓고 쏴도 될 것 같아요. 이렇게 잘 잡혀 있는데......”
영 못 믿는 눈치기에 일단 영점사격 표적지 25m쯤 놓고서는 탄창결합하고 노리쇠 당기고, 조정간 단발에 놓고, 사격개시. 여기까지야 군대에서 기본으로 했던 거고.
10발을 쏴봤어. 영점표적판에 맞은 거 보니까 내 말이 맞더구만. 정욱씨가 고개를 갸웃하면서, 그런가 보다 하고 그 다음으로 넘어갔지.
정욱씨가 별다른 말없이 한 번 쏴 보라길래 그냥 처음 단계부터 쭈욱 빠른 속도로 착착착 해나갔어. 그냥 서서쏴로 조준하고, 쏘고. 조준하고, 쏘고. 군대 있을 때와는 달리 헤드셋 모양의 귀마개를 해서 귀 아픈 건 없더라고. 화약의 매캐한 냄새와 총알이 튀어나가면서 느껴지는 뻐근한 반동. 너 그리웠다. 흐흐흐.
표적판을 가지고 내려오면서 정욱씨는 혼이 나간 얼굴을 하는 거야. 나도 표적판을 봤는데, 역시 내가 쏜 대로 탄공이 조금 위트 있게 하트 모양을 그려놓고 있었지.
역시 특등사수 실력 아직 죽지 않았구나. 여담이지만, 내 보직이 전투공병이었는데 주변 부대들은 보병. 보병 중에서도 총 잘 쏜다고 소문나서 거의 소대저격수 정도로 키우고 있던 난다긴다 애들 다 나와서 붙어도 사격대회 1등 먹었던 나니까. 보병 애들은 공병을 못 이기냐고 개굴르면서 복귀하고 난 대대장 포상휴가만 세 번이나 받았던 역사. 이거 쫌 내 자랑 같아서 싫다. 큿큿큿.
(사실, 그 때는 휴가 나가도 별로 할 일은 없었지만.....)
“다시 쏴보소. 이번엔 좀 작은 걸로.”
표적판을 100m 사로에 놓을 걸 250m에 놓고 쏘라니. 이거야 원. 그래도 쏴봤어. 이번엔 좀 더 신경 써서 30발 한 탄창 다 비워서 별모양으로.
“다시 쏴보소. 좀 더 작은 걸로.”
아놔 사람 놀리는 거임? 무슨 사과박스에나 쓸법한 널빤지 조그만 걸 주워 와서 250m 사로에 놓는 거야.
에라, 기분이다. 이번엔 위에서 아래로 점선으로 톡톡톡.
완전히 날 보는 정욱씨의 표정이 괴물 같은 걸 바라보는 꼴이 되어가더군. 나도 이제 슬슬 정욱 씨의 반응을 이상하게 느끼기 시작했어. 이번엔 외국 동전 좀 큰 걸 놓고 그걸 쏘래.
나도 장난으로 하면 안 되겠다 싶어서, 이번엔 진지하게 표젹을 노려봤지. 아, 작긴 하더군. 하지만 못 쏠 정도는 아닌 것처럼 느껴지더라. 딱히 말로 잘 설명할 순 없었지만, 동전이 확 눈앞으로 당겨놓은 것처럼 보이는 게, 정확히 가운데로 쏘면 어떻게 될 것도 같았어.
딱 한 발만 쏘고서, 정욱씨가 동전을 가져오는 동안, 난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했어.
정욱씨가 내민 동전을 들여다보니, 동전은 정확히 가운데에만 구멍이 나있었어. 정욱씨가 놓던 자리에서 허릴 굽혀서 가져왔으니까 동전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던 거겠지? 난 2002년때 히딩크가 어퍼컷을 하던 것처럼 이얏호, 하면서 승리의 세레모니를 했고.
“좋십니더. 확인차 마지막.”
이번에는 산등성이까지 전력질주로 뛰면서 일정간격으로 표적을 연발로 쏘라는 거야. 또 내려오면서 일정간격으로 표적을 연발로 쏘고. 그렇게 5발씩 끊어서 30발 전부.
헑?
안 그래도 아직 체력이 점병이인데 무슨.
하지만 해보라면 해봐야지. 뭔가 확인하고 싶은 것 같은 눈치인데, 나도 슬슬 오기가 생기고.
그래서 뛰는데.
헥헥헥헥헥아유젠장헥헥헥헥헥......이러다디지겠네
가서 챡 엎드려 다다다다다 쏘고.
헥헥헥헥헥흐억학헉악헥헥헥헥헥......아슈바된장맞을
가서 또 엎드려 다다다다다 쏘고.
나중엔 지겨워져서 내려올 땐 대강 서서쏴로 쏘면서 왔다.
정욱씨가 표적판을 보고는 마침내 알겠다는 듯이 말했어.
“능력, 이거네예.”
“흐아압헉켁.....네? 뭐라구요? 하윽흑컥.....”
아직도 허파의 반란이 진압 안 된 관계로 숨을 몰아쉬고 있는 내게 정욱씨가 표적판을 보여줬어. 그제서야 나도 허파 따위 어떻게 되든 간에 그냥 놀라버리고 말았지.
표적판은 정확히 중심부, 그것도 탄공하나만 집중적으로 뚫어져 있더군.
사격이란 건 호흡이 중요하다는 사실, 군대에 가면 기본으로 배우는 거잖아. 그런데 호흡이 단오날 춘향이 널뛰듯 한 상태인 건 둘째 치고, 뛰면서 근력 딸려서 자세까지 흐트러진 상태에다가 거리까지 중구난방인 상황인데도, 난 표적에 정확히 다 맞춘 거야.
난 눈이 동그래져서 정욱씨를 바라봤어.
“체력이고 뭐고 다른건 다 젬배이인데.......총이랑은 엄청 친하다는 거, 그게 지후씨 능력인기라예.”
정욱씨도 어느 정도는 감격, 어느 정도는 놀라움, 어느 정도는 뭐가 이따우야 하는 식의 표정으로 표적지들을 훑어보면서 말했어.
나? 더 말해서 뭘 해. 팔짝 뛰었지. 좋아서.
누가 보면 록키 영화 찍는 줄 알았을 거야. 마지막에 애이드리아아아아안~하고 부르는 그 때 모습처럼.
드디어 진짜로, 수영이네한테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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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문근영은 빨치산 슬하에서 자랐다 (feat .지만원)
배우 문근영은 빨치산 슬하에서 자랐다
문근영 기부천사 만들기는 좌익세력의 작전인가?
지만원 시스템클럽 대표
기부천사 만들기, 좌익세력의 작전인가?2008 년11월13일, 사회복지공동모금회는 지난 6년간 8억5000만원을 익명으로 기부한 20대 연예인이 바로 배우 문근영(21)이라고 발표했다. 이로부터 좌익 메뚜기떼들이 '문근영 영웅 만들기'에 혈안이 돼 있다. (편집자 주: 문근영의 기부행위는 찬양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인터넷 매체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익명의 20대 연예인 기부자'에서 문근영의 실명이 밝혀지기까지의 점진적인 언론플레이 과정은 교묘한 영웅만들기로 보일 수 있다.) 문 근영이 갑자기 “기부천사”가 된 반면 대통령의 얼굴은 많이 깎였다. 민주당 송영길 의원은 11월14일, “오늘 훈훈한 소식은 국민 여동생 문근영이 매년 남모르게 공동사회복지기금 8억 5천만원을 계속 모금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자기 재산 헌납하겠다던 이명박 대통령은 자기 재산을 내놓기는커녕 양재동 노래방 주인에게 건물 명도하라고 소송을 제기했다”고 받아쳤다. 손녀 문근영에 쏟은 빨치산의 사랑 하 지만 기부천사라는 문근영이 빨치산 손녀이고, 2005년 외할아버지가 죽기까지 빨치산 밑에서 사랑을 받고 자랐다고 하니 마음이 씁쓸하다. (편집자 주: 문근영이 빨갱이라고 하면 안 된다.) 연좌제는 전두환 시절에 이미 철폐했기에 빨치산 외손녀라는 것을 문제 삼을 수는 없지만, 지난 3년 전까지도 빨치산 할아버지에게서 사랑을 받으면서 자라는 동안 그녀는 빨치산의 가르침을 많이 받았을 것이라는 생각에 기분이 개운치 않은 것이다. 데일리 서프라이즈는 류낙진이 살아 있을 때( 2004년12월)의 인터뷰를 냈고, 거기엔 문근영 부모가 직장을 다니기 때문에 할아버지가 문근영을 눈에 넣어도 안 아프게 키웠다는 내용이 있다: “류 옹은 생전 문양이 ‘어린 신부’를 찍기 훨씬 이전,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기 전부터 광주집 벽에 문양(문근영)의 포스터를 붙여 놓고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손녀의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열혈 팬’이자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류 옹은 2004년12월14일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손녀’라며 ‘내가 키가 170cm인데 근영이는 나를 볼 때마다 나를 앞으로 안고 키를 재고 뒤로 안고 키를 재곤 한다’며 흐뭇함을 전했다.” “류 옹은 ‘근영이는 천성적으로 착하고 겸손하다’며 ‘나쁜 친구, 좋은 친구 가리지 않고 잘해주고 집에 데려와 자신이 직접 음식을 해서 같이 먹는다’고 말했다.” “ 류 옹은 ‘근영이 부모가 다 공무원으로 직장에 다니느라 근영이는 외할머니가 주로 키웠다’며 ‘나는 근영이에겐 장기수가 아니라 외할아버지일 뿐이다. 나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을 텐데도 잘 받아들이고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전했다. 문근영 가문은 김대중-노무현 충신들 문 근영의 외할아버지는 골수 빨치산 류낙진, 그녀의 작은 외할아버지는 5·18 때 진압군의 총탄에 사망했고, 이모와 외삼촌도 당시 경찰에 연행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2008.11.14. 경향신문에 의하면 류낙진의 동생 류영선은 5.18 광주사태에서 5월27일 도청을 사수하다가 계엄군의 총탄에 숨졌다고 보도하고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안다. 1995년 검찰조사결과에 의하면 류영선은 당시 27세로 5월26일, 시위구경을 나갔다가 YWCA에서 M-16 총탄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5월26일에 광주시내에는 계엄군이 없었다. 그래서 그가 맞은 M-16은 계엄군이 가진 M-16 이 아니라 시민군이 가진 M-16인 것으로 판단된다. 초등학교 시절 문근영은 이런 집안 배경 때문에 연예인이 되겠다고 했지만 문근영의 부모는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면 연기자가 될 수 있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었다는 일화도 있는 모양이다. 아버지 문홍근씨와 어머니 류선영씨는 광주시청 산하 공무원으로 재직하다 문근영의 뒷바라지를 위해 지난 10월 명예퇴직 신청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네티즌에 의하면 “영화 ‘어린신부’가 개봉됐을 때 문근영의 아버지가 ‘탄핵중인 노무현 대통령이 이 영화를 보고 잠시 웃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는 말도 들었다”고 했다 한다. 빨치산 류낙진의 프로필 류락진은 노무현 시절인 2005년 4월에 사망한 골수 빨치산으로 기록돼 있다. 6.25 당시 지리산 일대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하다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고, 57년 가석방된 후 63년 “혁신정당”사건으로 구속돼 67년 석방됐고, 71년 다시 “호남통혁당재건위”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88년 가석방됐다. 출소 후 운동권을 상대로 빨치산 강연을 벌이다 94년 “구국전위” 사건으로 구속돼 8년형을 선고받고 99년 광복절특사로 석방됐다. 93년 1월 조직된 구국전위는 “조선노동당”의 남한 내 지하조직으로서 창립선언문과 강령 및 규약에서 북한의 주체사상을 지도적 지침으로 삼고 있다. “구국전위는 위대한 김일성 동지께서 창시하시고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께서 발전 풍부화시켜 오신 새로운 노동계급의 혁명적 세계관이며 남반부에서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완수의 가장 정확한 학설인 주체사상을 유일한 지도이념으로 삼는 주체형의 김일성주의 지하조직이다.”2002년 백운산지구 빨치산위령비 비문작성 사건으로 징역 8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고, 이적단체 범민련 남측본부 고문으로 활동하다 2005년 사망했다. 그 가족들은 부의금 5천만 원을 통일운동에 써달라며 빨치산 단체인 범민련 남측본부에 기탁했다. 이상한 배우들의 대행진 “ 광우병이 득실거리는 소를 뼈 채로 수입한다니 어이가 없다. 차라리 청산거리를 입안에 털어 넣는 편이 오히려 낫겠다”고 말해 물의를 일으켰던 배우 김민선은 영화 ‘미인도’에서 신윤복으로 나오고, SBS에서 방영중인 드라마 ‘바람의 화원’ 에서는 문근영이 신윤복으로 나오고 있다. 영화 미인도는 2008.11.13일 처음 개봉됐는데 하루에 10만 명이 관람했다고 한다. 그리고 조중동은 신윤복을 대상으로 한 작품들에 극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 대한민국이 참으로 어지럽다. 문화를 점령하라, 김일성 교시 (1976년 8월 대남 공작원들과의 담화)” 지하당 조직들은 남조선의 작가 예술인들을 더 많이 포섭하여 혁명가로 만들고 그들이 외롭지 않게 똘똘 뭉쳐서 혁명적 필봉을 들고 창작활동을 할 수 있도록 묶어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작가들이 창작한 한편의 시가 천만 사람의 가슴을 감동시키고, 총칼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는 우리의 혁명적 노래가 적의 심장을 꿰뚫을 수 있다는 긍지와 자부심을 불어넣어 주어야 합니다.” (1976년 8월 대남 공작원들과의 담화)“지하당 조직들은 남조선의 작가 예술인들이 사실주의에 구애되지 않고 대담하게 혁명적 기교를 발휘할 수 있도록 잘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장 이세중 회장은 김대중 노무현 사람1993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1996-2000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협의회 공동대표1998 한국방송공사 이사장1998-2002 사회복지공동모금회 부회장2000 (현) 광화문 문화포럼 회장 2002 (현) 환경재단 이사장2004 (현) 노사문제연구소 이사장2005 (현)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제5대 회장 왜 갑자기 빨치산 가문을 기부천사로 등장시켰을까? 최 근 환경운동연합 및 환경재단 사람들과 김대중-노무현 쪽 사람들이 대거 부정에 연루되어 쇠고랑을 차는 것이 좌익들로서는 커다란 부담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좌익들은 이런 분위기를 뒤엎을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귀여운 여배우 문근영은 일찌감치 빨치산의 손녀라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다. 문근영을 TV연속극에서 띄우고, 거기에 더해 그녀를 8억5천만원을 기부한 익명의 기부천사로 띄움으로써 문근영으로 하여금 확고한 천사의 지위를 차지하도록 한 후에, 바로 그 위대한 천사 문근영이 빨치산의 손녀라는 것을 연결하여 빨치산은 뿔달린 사람이 아니라 천사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이미지화하려는 심리전인 것으로 보인다. 드라마에서 저들은 신윤복을 기득권세력인 양반에 저항하는 상징적 인물로 부각하려 할 것이다. 기득권 세력에 저항하고 기득권세력 그리고 기득권세력으로 이루어진 국가를 전복하는 것이 4.3사건이요 5.18사건의 정신이라는 것이다. 영화 미인도는 누가 제작했나? < 미인도>는 <식객> 에 이어 전윤수 감독, 이성훈 프로듀서 콤비의 두번째 작품이다. 이성훈 프로듀서는 <태극기 휘날리며>의 흥행신화를 일궈낸 한국영화의 실력파 영화인이다. <식객>이후 두 번째 기적을 이룰 <미인도>는 하늘이 내린 그림 재주를 타고났으나 여인의 몸으로 태어나 어쩔 수 없이 남장을 해야만 했던 화가 신윤복과 그녀를 둘러싼 슬프면서도 매혹적인 사랑을 담은 스토리로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상상력이 가미된 한국형 팩션 무비의 또 다른 지평을 열 예정이라 한다. 신윤복은 누구인가? 신 윤복의 그림은 한마디로 ‘사회 저항적 에로티시즘’을 통해 기득권 세력에 대한 반항하는 민중의식을 표현한 것으로 전해진다. 혜원 신윤복(1758-?)은 단원 김홍도(1745~?)와 쌍벽을 이루는 조선후기 풍속화가로, 회화를 관장하는 국가기관인 도화서의 화원으로 첨절제사의 벼슬을 하다 속화를 즐겨 그려 도화서에서 쫓겨난 것으로 전해지는 것 이외에는 생애가 거의 알려져 있지 않고 있다. 시정 촌락의 풍속도 중에서도 기녀․무속․주점의 색정적인 면을 많이 그린 풍속화가로서 현실 묘사에 치중하고 있는데, 이는 유교 풍의 사회에 대한 예술로서의 저항인 동시에 인간주의적인 욕망을 표현하려는 의도라고 평가되고 있다. 색채 감각이 돋보이는 산수화 작품을 남기기도 하였지만 한량과 기녀를 중심으로 남녀간의 애정이나 낭만을 다룬 풍속화로 특히 이름을 날렸다. 대다수의 소재가 부녀자와 양반들로 축소되었다. 혜원 신윤복의 그림 중에 가장 널리 알려진 유명한 작품은 ‘단오풍정’, 단오절에 창포물에 머리 감고 그네를 뛰는 등의 세시풍속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반라의 상태로 목욕하는 여인을 훔쳐보는 소년들의 모습에서 노골적인 묘사가 익살스러움으로 어느 정도 누그러지는 효과를 보인다. 부탁합니다. 최근 신윤복을 영화와 드라마와 언론들에게 갑자기 띄워 신윤복 신드롬을 만들어내는 이유를 파악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두 개의 작품에 이상한 여배우들이 주연으로 출연하고 있습니다. 2008.11.14. [지만원 시스템클럽 대표: http://systemclub.co.kr/]
출처 :I Love Soccer (축구동영상) 글쓴이 : 달이차오른다자자
71번작성일
2008-11-17추천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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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바이크] 왜 다들 좋은 차만 올리는겨..?
국산차 서민차도 좀 올려주시지... 차겟이므로 이런 게시물도 필요하리라 생각하오 루핑옹~
자~~~~
본행이 모닝 살려고 벼르고 벼르는 중 ㅎㅎㅎ
요새 혼자 인터넷 견적 뽑고 헤헤헤헤 하고 있삼 ㅋㅋㅋ
전 말이죠
1. 난 사제 휠 달고 싶은데....
2. 카오디오도 사제로 작업 할꺼므로 필요 없공
3. 스틱 살꺼임
이정도 생각하면서 ....헤헤
님들 같음 어느 걸로 사것어요?
● 모닝(morning)
차종
판매가격
공급가격(부가세)
주요기본품목
선택품목
l
7,390,000
6,718,182(671,818)
■ 엔진 : 1.0 sohc엔진, 5단수동변속기, 연료탱크(35ℓ)■ 외관 : 측면방향지시등, 범퍼(바디칼라), 리어가니쉬(바디칼라),아웃사이드미러(레버조절식/블랙), 라디에이터그릴(크롬), 155/70r 13타이어&세미휠커버■ 내장 : 반직물시트■ 안전/편의사양 : 운전석에어백,시트벨트프리텐셔너&로드리미터(앞좌석), 8인치 브레이크부스터, 더블폴딩시트(뒷좌석), *바이저(운전석/동승석/화장거울/덮개/티켓홀더), 파워윈도우(앞좌석,조명), 센터콘솔,컵홀더, 트렁크하단트레이, 뒷유리열선,재떨이(이동식),시트백포켓(앞좌석),템포러리타이어,1단오디오,스피커(4개),루프안테나,에어필터, 이모빌라이져, 글로브박스조명, 블루아웃사이더 미러, 메모홀더, 시트백후크 , 사이드프로텍터(크롬), 파워&틸트스티어링, 핸즈프리
* 4단 자동변속기 : 1,170,000* 에어컨 : 540,000* 동승석 에어백 : 230,000
lx
고급형
7,710,000
7,009,091(700,909)
l 기본품목외안개등, 풀휠캡, 칼라유리,바디칼라 아웃사이드미러(전동식+열선), 직물시트(우븐), 파워윈도우(뒷좌석/조명),운전석윈도우(원터치오토다운),파워도어록(중앙집중식),리어와이퍼&와셔, 타코메타, 디지털시계, d/n룸미러, 시트언더트레이(동승석), 보조제동등,무선도어리모컨키
* 4단 자동변속기(운전석 암레스트 포함) : 1,220,000* 에어컨 : 540,000* 13"알루미늄휠 : 220,000* 동승석 에어백 : 230,000 * 프리미엄패키지 :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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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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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x 고급형 기본품목외6:4분할시트(뒷좌석),분리형헤드레스트(뒷좌석),리어스포일러, 사이드실몰딩, 크롬사양(아웃사이드도어핸들,인사이드도어핸들,파킹브레이크 핸들),메탈페인팅(오디오,클러스터),메탈그레인(센터페시아,at인디케이터 판넬)
스페셜
8,340,000
7,581,818(758,182)
lx 최고급형 기본품목외최고급인조가죽시트, 열선시트(운전석/동승석), *바이저,*글라스케이스, 시트벨트높이조절장치(앞좌석), 자외선차단글라스(앞유리)
* 4단 자동변속기(운전석 암레스트 포함) : 1,220,000* 에어컨 : 540,000* 14" 알루미늄휠 : 270,000* 동승석 에어백 : 230,000* abs(리어디스크브레이크 포함) : 480,000* mp3 cdp : 530,000 (트위터스피커 + 2단오디오 포함)
slx
최고급형
8,210,000
7,463,636(746,364)
lx 최고급형 기본품목외165/60r14타이어,가죽커버(스티어링휠,변속기노브),트렁크네트
* 4단 자동변속기(운전석 암레스트 포함) : 1,220,000* 에어컨 : 540,000* 14" 알루미늄휠 : 270,000* 동승석 에어백 : 230,000* 프리미엄 패키지 : 120,000
스페셜
8,480,000
7,709,091(770,909)
slx 최고급형 기본품목외최고급인조가죽시트, 열선시트(운전석/동승석), *바이저,*글라스케이스, 시트벨트높이조절장치(앞좌석), 자외선차단글라스(앞유리)
* 4단 자동변속기(운전석 암레스트 포함) : 1,220,000* 에어컨 : 540,000* 15"알루미늄휠 : 300,000* abs(리어디스크브레이크 포함) : 480,000 * mp3 cdp : 530,000 (트위터스피커 + 2단오디오 포함)* 동승석에어백 : 230,000
밴
6,660,000
6,054,545(605,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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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기타] www.kiamoters.co.kr
내 여자친구 사진인데...차사면 차에서도 화장하려면 앞에 거울도 있어야되는데 푸헤헤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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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대만 언론 "한국은 역사 훔치는 도둑에 무뢰한 민족"
혐한증(嫌韓症) 계속 고조돼 양국 정부차원에서 시정 시급
요즘 대만 언론에는 ‘몰염치(沒廉恥) 한국인’들이 자주 등장한다. 몰염치의 주 내용은 ‘(한국인은)예의 없는 민족이고, 남의 역사(歷史)를 훔치는 민족’이라는 것. 한국인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면에서 예의가 없고, 무슨 역사를 얼마나 훔쳤길래 대만 언론들은 우리에게 몰매를 때리는 것일까?‘한국인들은 공자도, 노자도 다 한국인이라 한다’ ‘심지어 석가모니조차 한국인이라 우긴다’…. 이런 보도가 나오면 중화권의 젊은 네티즌들은 당연히 흥분하게 마련이다. 즉시 ‘아예 히틀러, 뭇솔리니, 빈 라덴도 한국인이라 우겨라’는 비아냥을 한국인들을 향해 쏟아낸다. 한국인들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내용들이 대만에서는 그럴 듯하게 왜곡 포장돼, 한국을 비판하고 냉소하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인 입장에서 보면 이보다 억울할 수는 없는 일이다.문제는 대만 언론들의 ‘혐한증(嫌韓症) 부추기기’ 기사들은 근거마저 찾을 길이 없다는 점이다. 현지 언론들은 심지어 ‘조선일보’ 같은 한국 유력 매체들 보도를 인용하는 형식으로 그럴 듯 하게 포장하면서 날조기사를 만든다. 조선일보에 확인만 해도 됐을 것을 확인 절차를 생략하고 무책임하게 기사를 작성했다는 얘기가 된다. 어느 누군가 독자 신뢰를 사기 위해 한국 유력 매체 기사라는 포장 하에 인터넷에 흘리면, 이를 현지 유력매체들이 그대로 믿고, 고스란히 되받아 혐한증을 재확산시키는 구조가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혐한증을 부추기는 대만 언론과 인터넷의 한국 왜곡의 실체를 들여다 보자.
◆“한국인은 석가모니가 한국인이라 주장한다”중국시보는 지난 6월1일 ‘한국인들은 석가모니를 한국인이라 부른다’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제목부터가 참 허무맹랑하다. 기사 도입부부터 왜곡된 시각이 엿보인다. “한국의 문화확장 활동이 또다시 거세지고 있다. 노자·공자를 한국인이라 하더니, 이제는 석가모니조차 한국인이라 말하고 있다.”본문은 더 황당하다. 아예 ‘조선일보’ 보도로 포장하기까지 했다. 물론 조선일보는 보도한 사실이 없고, 해당 기사를 취재한 사실조차 없다. 한국인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취재 대상조차 될 수가 없는 사안이다.그렇다면 우리도 모르게 조선일보가 보도(?)했다는 내용은? “성균관대 연구 결과, 기원전 700년을 전후해 제주도의 한국인들이 항해에 나섰다. 일부 사람은 일본으로 갔고, 일부는 말래카해협, 또 일부는 뱅골만(灣)으로 흘러 갔다. 그런데 성균관대 조사 결과, 석가모니가 속한 석가족(族)은 아리안족이 아니었다. 석가족 생활을 살펴보면 동아시아 생활 색채가 나타나는데, 이를 통해 추론하면 석가모니는 한국인이었을 것이라는 게 연구결과였다는 것. 조선일보가 썼다는 이 보도가 중국 본토 인터넷으로 퍼지자 즉시 현지 언론의 화제가 됐고, 일부 중국 네티즌들은 비꼬다 못해 아예 한국인들을 염치없고, 몰상식한 민족으로 비하했다. ‘히틀러, 무솔리니, 빈 라덴도 한국인이라 주장하라’고….”중국의 일부 네티즌들은 또 이렇게 비아냥거렸다고 중국시보는 전했다. “세계에 이렇게 무뢰(無賴)한 나라가 있을 수 있나! 어느날 한국 사람들이 팬더·펭귄·재규어 등도 한국에서 나왔다고 주장하지 않을까?…”
◆“콩국도 한국 것? 한국인은 역사 좀도둑!”우리가 전혀 알 지도 못하는 음식문화까지 들먹이며 한국인들을 한껏 조롱하고 있는 게 대만 언론이다. 중국시보는 지난 6월9일 타이베이(臺北)발 보도를 통해 “한국인들은 단오절은 물론 ‘중의’(中醫)까지 한국 것이라고 주장한데 이어 중국본토 네티즌들은 최근 심지어 또우장(豆漿·콩국)이 한국에서 만들어져 중국으로 건너온 것이라고 한국인들이 주장한다는 사실을 찾아냈다. … 이러다간 중국인들이 모두 한국인들의 후예가 되는 것은 아닐 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신문은 그 근거로 상하이(上海) 인터넷 신민왕(新民網) 보도를 인용, 한국의 한 식품회사가 ‘한국은 또우장의 발원지(發源地)라고 상품에 표기했다’는 사례를 들었다. 사실 여부에 상관없이 민간기업이 한국식 콩 식품을 상업적으로 홍보하다 벌어진 광고문구 하나를 가지고 마치 전 한국인이 나서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있는 것처럼 한국을 일방 매도한 것이다.대만 케이블 tv인 tvbs는 작년 6월9일 보도를 통해 “콩국을 중국인이 발명했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인데 한국이 발명했다는 것은 일종의 (역사)좀도둑질 행위”라고 맹비난했다.
◆“만리장성도 한국이 축조했다” 주장도연합보 등은 작년 10월 ‘만리장성도 한국인이 축조했다’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이 때는 이름마저 희한한 오가능((吳可能)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교수가 허위 인용됐다.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우커넝(吳可能, 오가능의 중국 만다린발음)교수는 2007년 7월 5일 서울의 최대 학술지 ‘추리(追理)’에 기고한 ‘한국역사의 만리장성에 관한 고찰(韓國歷史萬里長城考)’ 논문에서 이렇게 밝혔다. “우 교수는 한국인이 한자(漢字)를 발명했다고 말했다. 게다가 만리장성을 중국인이 만들었고, 이를 세계 7대 기적이라 부르는 것은 한국인을 무시(無尊重)하는 것이며, 평가단의 무지(無智)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울러 한국역사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며, 한국인 민족감정을 매우 손상시키는 일이다. 당연히 시정돼야 한다.”대만 언론들의 한국 역사왜곡은 소설 수준을 넘어도 한참 넘었다. “우 교수는 또 ‘중국의 영토 80%는 이미 한국의 통치를 받았다. 대부분의 만리장성은 한국인이 축조한 것’이라 주장했다. 수양제가 고구려를 세 차례 침략했음에도 모두 실패했다. 이후 한반도의 국가들은 수(隋)나라에 복수하기로 했다. 고구려와 남쪽의 신라·백제 삼국 연합군이 동시에 중국 중원(中原)으로 진공해 들어가 금새 중국 영토의 80%를 점령했다.”대만 언론들은 또 한국이 새로운 교과서를 만들어 역사왜곡에 나섰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정부 공직자 회의에서까지 거짓뉴스가 진실로 둔갑연합보는 지난 14일 황푸치(黃福其)·저우메이후이(周美惠) 두 기자 실명으로 다음의 기사를 올렸다. ‘핑시티엔덩(平溪天燈)행사 신청 반려되다’ 제목의 타이베이현(縣)발(發) 보도였다. 핑시티엔덩(平溪天燈)는 ‘핑시’(平溪)지역의 고유 민속행사. “타이베이현 정부는 지난 5월 핑시티엔덩(平溪天燈)행사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해 달라고 유네스코에 신청하겠다고 밝혔으나, 행정원 문화건설회(文建會)가 신청을 반려했다. 대만이 유엔회원국이 아니라 신청할 방법이 없다는 게 이유였다. (그런데)타이베이현 관광국은 ‘핑시티엔덩지에(平溪天燈節)행사가 최근 디스커버리(discovery) 채널 투표조사 결과 전세계 두번째로 큰 축제 카니발로 선정됐다면서 정부의 ‘헛수고 하지 말자’는 판단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입장이다.…그런데 ‘용모양의 배젓기’(劃龍舟) 행사는 원래 중국인들의 단오절 전통의 민속놀이였다. 그러나 한국이 유네스코에 (단오절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해 달라고 신청해 승인 받았다. 한국은 올 2월 관계자들을 타이베이현으로 파견해 핑시티엔덩지에(平溪天燈節)행사를 참관 조사했다. 정말 한국이 핑시티엔덩지에(平溪天燈節)를 표절(剽竊)해 자기네 나라 민속놀이화 할지 여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당연히 이를 바로잡아 시정해야 한다.”대만 공무원들의 한국에 대한 오해는 계속 이어진다. 타이베이현 문화국 리빈(李斌)씨 얘기. “한국 참관단이 타이베이시 공자제전(祭孔儀制) 행사를 시찰했다. 당시 시 정부는 성심성의를 다해 지원했다. 각종 의식·복장(服裝)자료까지 제공했다. 그런데 (이렇게 잘 대접했는데도) 한국이 유네스코에 공자제전(祭孔儀制)을 세계문화유산 지정을 신청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한국인들은)심지어 공자가 한국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다행히 중국공산당이 공자제례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신청, 한국이 이를 훔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한국인은 어느새 대만 공직사회에서 남의 은혜도 모르고, 역사마저 훔치려는 좀도둑이 된 것이다.
◆대만 방송들도 한국 때리기방송들의 보도내용도 혐한증(嫌韓症)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할 정도로 위험천만스럽다. 대만 케이블 tv인 tvbs는 작년 12월18일 ‘풍수(風水)문화를 한국이 세계유산으로 신청할 것이며, 중국은 불만’ 제하의 기사를 내보냈다. 내용은 황당무계하기 이를 데 없다. 한국인들 입장에서 보면 도무지 들어본 적이 없는 내용들이다. “최근 한국이 계속해서 콩국도 한국 것, 중의(中醫)도 한국 것, 한자도 한국이 발명한 것이라고 한데 대해 중국인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다. 이런 와중에서 한국이 또 유네스코에 풍수(風水)를 한국의 비물질자산이라며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할 것이라 한다. 그리고 유네스코에서 이를 통과시킬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베이징 풍수사(師)들이 경악하고 있으며, 이를 강도행위라고 비난하고 있다.”
◆현지 한국인들도 “황당하고 빨리 시정해야”당연히 부정적인 영향이 한국과 한국인에게 드리워진다. 대만의 신문 독자와 네티즌, 시청자들은 ‘한국인들은 무뢰한 국민’이라며 노골적으로 혐한증(嫌韓症) 증세를 드러내고 있고, 그 정도 역시 심해지고 있다는 게 현지 한국인들의 얘기다. 현지 대만업체에 근무 중인 한 교민은 “공무원들이 한국인들이 자기네 문화를 훔칠 지 모른다는 얘기를 버젓이 할 정도로, 대만의 거짓뉴스가 대만인들에게 큰 악영향을 주고 있다”면서 “한국 정부나 언론 차원에서 대만 정부와 언론에 공식 항의를 통해 이를 바로잡는 게 시급하다”고 말할 정도다.[이광회 기자 santafe@ch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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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글터] 서안피라미드 관련글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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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15 03:22
http://blog.naver.com/anjunhyeong/60028695331
<< 故 장문구(張汶邱 )씨가 임종전 증언내용 >>"1963년4월에 우리 고적 발굴팀 36명은 당국으로부터, 진시황의 다른무덤으로 추정되는 유적을 조사해야하니 대기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출발전, 조사단장은 우리발굴단원들에게 이번 유적은 매우 중요하여 조사,발굴 내용을 외부에게 일체 누설하면 안되니 이점을 각별히 유념하기 바란다고 말하였고, 우리 일행은 기차와 버스,트럭을 나누어타고 이틀만에 목적지인 넓은 평원지대에 도착하였는데 창밖으로 이집트 피라밋처럼 거대한 피라미드들이 많이있었고, 도착한 우리발굴단원들은 하나같이 모두 탄성을 질렀어요. 우리 중국에도 이런 피라밋이 있었구나! 하는 기쁨과 경이로움이 뒤섞여서 말이죠, 우리는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의 또다른 이 엄청난 유적을 발굴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조사단은 4팀으로 나뉘어져 이후 3일동안 피라미드의 가장 큰 순서대로 먼저 가운데 3개 피라미드를 지정하여 발굴하기 시작했습니다. 3곳다 거의 한 형태의 것이었는데 이중 양옆의 두곳보다는 가운데것이 대단했어요.거대 한 벽돌 피라밋 지하입구로 들어가자 약 3~5층으로 석실이 나뉘어져 있었고, 상층부 공간으로 들어갈수록 말과 마차를 그림으로 화려하게 조성된 벽화, 그림, 여러 문자(중국글 한국글등)들, 조각류 약 6200여점, 맷돌, 절구, 솥, 그릇등 생활도구 1500여점, 배추김치(원래김치인 백김치) 동물의 뼈등 음식물 400여점, 청동검 활 금관(신라형) 칼,창등 장신구류등 부장품 7800여점, 상투머리를 한 정 중앙시신(진시황의 모습과 흡사했슴)등 14구과 호위상 3000여점 등이 대량발견 되었습니다.우리는 난생처음보는 이러한 너무나도 엄청난 유물, 유적에 대해 모두 하나같이 무엇에 홀린듯하였으며, 마치 외계인의 세계,외계인의 무덤을 발굴하고있는듯한 느낌들이었습니다.저는 그 유물들을 확인하면서 목록을 작성하는 일을 했었는데, 작업 3일째되던날 대충 7할정도 파악, 작성된 상황이었고 이날 오후쯤에 이를 당시 발굴 단장이던 모 교수에게 중간 보고하자 그분은 큰 한숨을 내쉬면서 이런말을 했어요, “이 유적은 우리 화하족유물이 아니라 조선인들의 유적이다...중화역사 이전의 조선문명이야!" 라고 말하면서
큰일이다!.. 일단 당국에 보고 한 후에 다시 지시를 받아야 하니 지금까지 발굴을 모두 중단하고 유물들은 모두 그자리에 두고 일단,오 늘은 그만 나가세!" 라고 말하여 모두 발굴을 중단한채 나와 숙소에 있게 되었는데, 그날 밤 발굴중단과 동시에 철수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우리 발굴단원들은 모두 의아하게 생각했으나 곧 그 유적이 우리의 유적이 아니기때문이라고 이해하였고 일행은 그곳에서 떠나기에 앞서 숙소에서 현지공안에게 이곳에서의 비밀을 지키겠다는 서약서를 작성 제출였고, 그렇게 돌아온 이후, 그 피리미드들에 관해 더이상 들은적은 없습니다.
그게 그 피라미드에 대한 저로써의 마지막이었고 제가 아는 다 입니다"
http://www.coo2.net/bbs/zboard.php?id=con_my&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335
내몽골, 만주, 북중국 지역에 가면 정체불명의 피라미드들이 수 없이 서 있다.... 현재까지 밝혀진것은 100개이상이다. 평균 25 ~100 m 높이의 피라미드들이다. 그 중에는, 뉴욕의 엠파이어 스테이츠 빌딩과 맞먹는 300 m의 높이를 가진 것도 있다. ( 63 빌딩의 거의 2배 가까운 높이 ) 이집트의 기자 피라미드보다 거의 2.3배 정도 높고, 면적 또한 여의도보다 큰 거대한 건축물이다. 이런 것을 축조하기 위해서는, 고대의 기술로는 연인원 100만명이 소요된다고 한다.최초의 발견은, 1945년에 인근을 비행하던 미국 수송기 조종사의 사진촬영과 보고서에 의해서이다. 그 이전까지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산으로 알고 있었다.1963년에, 중국의 고고학자들은 이들 거대한 피라미드를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의 무덤으로 예상하고 발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73년에 실시된 고고학계의 탄소 연대 측정법에 의해, 그 거대한 피라미드는 진시황의 무덤보다 수 천년 앞서 만든것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현재, 이들 유적들은 중국 공안 당국에 의해 철저하게 숨겨지고 있다. 학술적인 조사도 불가능하며 중국에 의한 연구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독일의 고고학자인 `하우스돌프`씨는 피터 크랴샤 라는 친구와 함께 여행객으로 가장하고 평상시 잘 알고 지내던 중국의 시 관광부 장관과의 긴밀한 관계를 이용해 외국인 금지 구역으로 묶여있던 북중국 일대의 피라미드들을 몰래 사진으로 담는데 성공하였다.그 후 중국 공안당국은 촬영사실을 알아내고 하우스돌프씨와 친구를 검거하여 카메라 및 필름등을 압수하였으나, 다행히 촬영 직후 곧바로 모든 사진들을 독일로 보내, 서방세계에 북중국의 피라미드들을 알리는데 성공하였다. 세계역사를 다시 써야 하는 21세기 최고의 고고학 발견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미국과 유렵의 수 많은 서구의 고고학자들이 중국 정부에 발굴을 허가해 달라는 공문과 압력을 수차례 보냈다. 처음에는 중국정부에서는 북중국 및 만주땅에는 옛날부터 야만민족과 기마민족들이 살았던 곳이라 진보된 문명이 없다고 말하고 , 독일학자의 사진과 보고서는 조작된것 이라고 발뺌 하였다. 하지만 야만민족이나 기마민족이 만들기에는 너무나도 정교하고 웅장하여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아무튼, 그런식으로 계속 발뺌해오던 중국정부에서는, 계속되는 서구학자들의 발굴요구 및 서구 케이블 TV에서 몰래 중국에 잡입하여 카메라로 찍어 서구사회에 방송하는 노력에 힘입어 , 최근에 중국의 일부학자들이 그 존재를 인정하고 아직 발굴기술과 유물 보존기술이 부족해 다음세대로 그 발굴을 연기하게 되었다는 말만 살짝 흘렸다고 한다. 그 발표와 함께 10년전부터 고구려의 역사를 중국역사에 편입시켜 자국학생에게 가르치고 전 세계에 고구려 역사가 중국역사라고 홍보하고 있는 중이다.보시는 바와 같이, 북중국의 피라미드들은 위로갈수록 낮아지고 계단식 형태의 모양을 띄는 만주와 한반도에 널려있는 고구려의 무덤과 너무나도 똑같은 모양과 형태를 가지고 있다. 학계에서는 이러한 건축공법을 [들여쌓기 공법]이라고 부르며, 중국과 일본에는 찾아볼 수 없는 고구려 고유의 건축공법이라는데 의의를 다는 학자는 아무도 없다. 그러면, 이 5,000년 전에 이 지역에서 이런 문명을 가진 집단은 누구일까?
중국인인가? 아니다. 중국인은 황하 유역에서 농사짓고 청동기 만들고 있었다. 몽골인인가? 아니다. 몽골인들은 당시 존재도 없었다. 거란족? 오환족? 이들은 완전 유목민으로서, 정주 문명과 관계없다. 여진족? 이들도 유목민이다. 5,000년 전에 이 지역에 관계된 국가나 민족은 누구인가? 모든 역사책에는, 이 지역에 단군 조선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아직은 추측에 불과하며 충분한 조사와 연구가 이루어진 후에 밝혀질 일이다. 아무튼, 고구려 및 고조선 등과의 연관성은 배제하더라도, 중국이 이 유적들을 애써 감추고 있는 것은 석연치 않은 일이다.
(주 : 그리고 비교적 근래에 만주에서 4400년전 청동기가 발견되었다. 이른바 '황하문명'의 지금까지 발견된 최고 오래된 청동기는 4200년전 것이다. 중국 당국이 발칵 뒤집혔다. 중국 역사서 들에서 보아도 고구려는 민족이 백제 신라와 같았고 말(언어)도 같았음. 한민족의 문명이 중국보다 빨랐고 중국 문명은 한민족의 문명을 받아서 된 것이라 하는 역사적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보강: 중국 신화통신이 위의 사실을 극히 일부 밝힌 내용 -
위사진은 고구려의 장군총(將軍塚) 이다.위의 피라미드들과 모양은 같은데 크기는 차이가 많이 난다. 이를 보아도 고조선이 얼마나 큰 나라였는지를 알 수 있는 것 같다.
쭝국당국은 고조선 고구려역사를 쭝국역사라 우기는 것이 성공하였다고 생각하는 순간 위의 배달한국 고조선의 피라미드들을 대대적으로 세계에 자랑하려 하고 있다. 봐라 우리가 세계 최초의 문명이다라고... 그리되면 한국인들은 선조의 유산을 지키지 못한 등신들이 될 것이다... 물론 그리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중국에서 발견된 괴 피라미드들의 이야기
과연 중국에 높이 300m의 피라미드가 존재한다는 설화는 사실일까요?
현재까지 이집트와 남미등지에서만 발견된 피라미드가 중국에도 존재한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은 다름아닌 독일의 고고학자 할트위그 하우스돌프씨 라고 합니다
. 중국의 시안지방에서 남쪽으로 100km 떨어진, 고대 황제의 무덤 근처에서 발견된
피라미드들의 숫자는 무려 15개가 넘는다고 하며,
이는 1945년 인근을 비행하던 미국 수송기 조종사에 의해 처음으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현재 중국의 피라미드는 전세계의 고고학자들에 의해 외면 당하고 있다고 하며,
그 이유는 중국의 공안 당국이 피라미드 근처의 모든 지역을 외국인 출입 금지지역으로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1963년 중국의 고고학자들에 의해 탐사된 피라미드는 당시 진시황의 무덤으로
오판 되었다고 하나, 1973년 에 실시된 카본 대이팅 실험에 의해 괴 피라미드는
진시황보다 수천년이 앞선것임이 밝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독일인 여행객으로 가장한 하우스돌프씨는 자신을 초청한 중국인이
시안시의 관광부장관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어,
외국인출입금지 지역을 탐사 할수 있었다고 하며,
그는 당시 피터 크라사라는 독일인 친구와 동행을 하였다고 합니다.
후에 외국인 고고학자가 출입금지 지역에 들어와 사진을 촬영했다는
사실을 알아낸 중국의 공안당국은 하우스돌프씨의 카메라를 빼앗고
모든 필름을 검증 하였다고 하나,
당시 피라미드가 담긴 필름들은 모두 발각되기전 독일로 보내졌다고 합니다.
카메라를 세관에 빼앗긴뒤 통역관과 같이 인근의 농부들에게 피라미드에 관한
질문을 한 하우스 돌프씨는, 피라미드 옆에 집을 짓고 사는 농부들 조차
자신의 옆에 있는 거대한 유적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모르고 있는 기괴한 상황을
목격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1994년 독일로 다시 돌아온 하우스돌프씨는 "하얀 피라미드"란 고고학 서적을
출간하여 유럽의 베스트 셀러가 되었습니다.
(그림설명: 피라미드앞에서 밭을 갈고있는 농부의 모습)
과연 위의 피라미드들은 누구에 의해 만들어진것 일까요?
중국의 공안당국은 어떤 이유에 의해 타국인들이 피라미드를 탐사하는것을
극구 거부하는 것일까요?
신비를 드러내는 동방의 피라미드 <!-- 본문 --> <!-- 삽화 사진 출력 --> ▲ 중국 서안에 존재하는 피라미드 중국에도 피라미드가 존재한다. 이 사실을 여태 중국 정부는 숨기고 있다. 오히려 자랑스러워 해야 할 사실을 숨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Hausdorf <!-- //삽화 사진 출력 --> 최근에 네티즌들에게 "만주 피라미드"의 존재 여부를 논하는 큰 이슈가 된 사진이 하나 있다. 다음은 그 문제의 사진이다. 아래 사진은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전혀 아니면서, 우리 한민족처럼 생긴 사람이 소를 끌고 가는 모습이어서 너무도 친근감을 준다. 이 사진은 독일의 학자인 하우스도르프(Hartwig Hausdorf)에 의해서 찍힌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에게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중국에 피라미드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사실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었다. <!-- //본문 --> <!-- 삽화 사진 출력 --> ▲ 최초로 서양에 제보되었던 중국의 피라미드 ⓒ 나의택 <!-- //삽화 사진 출력 --> 2차 대전 당시 중국 서안(西安: 당나라 수도였던 장안)을 비행하던 비행하던 미공군 조종사는 눈 아래 특이한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마치 이집트의 피라미트처럼 생겼다. 그는 얼른 카메라에 담아서 신문사에 기고했다. 이 사실은 “미국조종사의 시안 서남쪽 외딴 산의 거대 피라미드 발견”란 제목으로 『뉴욕타임즈』에서 보도된 바 있다.(1947.3.28) 그러나 당시 중국 당국에서는 그 존재 자체를 부인하고 해당 지역에 외부인의 통제를 금지시켰다. 공식적인 외교 사절을 통해서 중국 내륙의 피라미드에 대한 탐사를 요청하는 각국의 언론도 묵살했다. 이 사진 이후로 중국에 존재하는 피라미드는 사실상 잊혀져 갔고, 전설이 되어 갔다.
● 중국의 피라미드를 서양에 제보한 하우스도르프
그러나 호기심 많은 서양인들은 더욱 궁금해했고, 비밀탐사까지 시도하는 사람도 있었다. 1994년 3월, 하우스도르프는 친구와 함께 비밀리에 촬영하여 마침내 북중국의 ‘하얀 피라미드(White Pyramid)’의 존재를 서방세계에 알리는데 성공하였다. 그에 의하면, 이런 피라미드가 100개도 넘게 있는데, 개중에는 이집트에서 가장 높은 쿠푸왕 피라미드(146.5m)보다 두 배 이상 높은 300m 이상의 것도 있었다고 한다. 또 근처에서 만난 한 승려는 이 피라미드가 대략 5천여년 전의 것이며, 자신의 사원에 있는 매우 오래된 고서古書에서 이 피라미드를 당대의 명승고적으로 소개한 것을 보았다 했다. 이런 사실을 듣다보면, 지금의 꽉 막힌 이성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고대의 신비스런 숨결을 느낄 수 있다.
하우스도르프에 의하면, 고고학자 왕시핑Wang ShiPing 교수는 서안 일대에 피라미드가 처음 세워진 시대를 4,500년 전으로 밝히고 있다. 그런데 당시는 바로 동방족 성황들이 중원문화를 개척하던 무렵이다. 현재 서안 서쪽에는 강(姜)씨의 시조로 동방 동이족의 성황으로 알려진 염제 신농씨의 탄생지인 보계시가 자리 잡고 있다. 이런 것을 생각해보면, 그 피라미드가 만주에 있냐, 중국 내부에 있냐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중국에서 역사 기행을 하다 보면 깊은 숲속에 숨겨진 거대한 고대 유적들의 이야기를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고 한다. 이처럼 규모가 큰 유적들은 대개 그 지역에 매우 발달된 문명이 존재했음을 증명한다. 그런데 중국당국은 자랑스럽게 공개하기보다는 오히려 삼엄하게 통제하며 감춰두고만 있으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일부에서는 중국 한족이 아닌 동이족의 문물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라고 하나 아직은 좀 더 지켜봐야 할 문제이다.
그런데 "피라미드 배경의 밭가는 소" 사진은 일부 네티즌들에 의해서 만주에 존재하는 피라미드냐 아니냐를 놓고 의견이 분분해진 경향이 있다. 중국 내륙에 존재한다면 그것은 우리 한민족과 관계가 없는데, 왜 한민족의 원류인 동이족과 연관을 시키려고 하느냐는 일부 네티즌들의 반론이 있기도 했다.
● 만주에 존재하는 진짜 한민족 피라미드
그러나 세계 학자들의 개방 요구가 높아지자 최근 중국에서도 일부를 공개하고 있다. 최근 중국의 대표적인 통신사인 신화통신은 만주에서 5,000여 년 전의 피라미드를 발견했다고 보도한 바 있다.(2001.7.9) 이 피라미드의 꼭대기에는 7개의 묘장과 제단이 있었고 별자리와 관련된 글자가 나왔다 한다. 발굴을 지휘한 고고학자 곽대순(郭大顺)은 이것이 요령성, 하북성, 길림성 인접지역에 주로 분포하던 홍산문화의 유물이라고 했다. 일반적으로 홍산문화는 동이족의 문화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피라미드의 사진은 인터넷을 아무리 뒤져도 나오지 않는다. 내가 중국에 거주하는 동포에게 문의를 해서 찾아보기를 문의를 해보았으나, 그도 찾지 못했다. 그가 전하길 중국에서는 인터넷을 단속해서, 동이족의 문화와 관련된 사진이나 자료가 유통되는 것을 단속한다는 증언을 들을 수 있었을 뿐이었다.
● 러시아에 의해 발견된 티벳 피라미드
피라미드는 티벳 지역에도 엄청나게 존재했다. 중국 정부에서 공개를 하지 않고 있을 따름이다. 황당하게도 티벳 지역의 피라미드는 중국 과학자가 아닌, 러시아 과학자에 의해서 발견되었다. 러시아 과학자들은 티벳 서부에서 100여 개에 달하는 거대한 피라미드 무리를 발견했다고 제보했다.(중앙일보 2000.7.5) 100개가 넘는 대규모 피라미드 유적이라면 이것을 발견했다고 말하는 것은 말이 안되는 소리다.
이 사실을 보도한 러시아의 유력 주간지인, 『논증과 사실(аргументы и факты)』, 18, 19호에서는 티벳의 피라미드뿐 아니라 티벳에 깊이 뿌리내린 신교문화의 흔적도 실감나게 전하고 있다. 티벳의 전설에 따르면 “신의 아들이 지상에 출현하여 도시를 건설하고 지상에 거대한 영향을 미쳤다.”라고 한다. 이것은 배달환웅이 신단수에 내려와 신의 도시인 신시(神市)를 열었다는 것과 너무도 비슷하지 않는가? 또 “티벳의 라마승에 의하면 그들의 종교는 종교라기보다는 고대 옛 문명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것이다.”라고 한다. 치우천황을 이은 15대 환웅인 치액특(蚩額特) 천황 때 티벳을 개척하였다는 설이 있는데, 그들이 말하는 ‘옛 문명’이란 배달국에서 전수된 신교 문명임에 틀림없다.
그래서인지 티벳은 한민족과 많은 유사점을 갖고 있다. 언어만 보더라도, '할머니→할매', '할아버지→할배', '부엌→정지', '밥 먹었나→밥 무운나'처럼 비슷한 말을 쓰고 있고, 한민족 특유의 삼태극 문양을 쓰고 있다. 고대에 티벳은 환국, 배달시대 신교문화권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동방의 피라미드, 장군총
흥미롭게도 서안, 만주, 티벳 지역에서 발견되는 피라미드들에서 몇가지 공통점이 나타난다. 수메르, 메소포타미아의 지구라트와 이집트의 초기 피라미드 그리고 중국 지역의 피라미드들은 모두가 계단식으로 구성되었고 위로 올라가는 층계가 있다. <!-- //본문 --> <!-- 삽화 사진 출력 --> ▲ 집안의 고구려 고분군 고구려인들은 땅의 절반은 주거지로, 절반은 무덤으로 사용하였다.ⓒ 나의택 <!-- //삽화 사진 출력 --> 그런데 이와 유사한 피라미드가 우리 역사에도 보인다. 중국 집안(集安)의 유적들 중 가장 경이로운 것은 12,358기나 되는 고구려의 무덤떼이다. 일본인 한 학자가 “고구려인들은 땅의 절반은 주거지로, 절반은 무덤으로 사용하였다.”고 했는데, 조상숭배를 바탕으로 하여 삼신상제신앙을 하는 신교문화의 흔적을 실감나게 느낄 수 있다. 이 중 중국 학자들에게 ‘동방의 피라미드’(東方金字塔)라는 호칭을 얻을 정도로 찬사를 받는 장군총을 보자면, 계단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옆에는 위로 올라가는 층계가 있다. 이집트 피라미드가 소형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를 거느리고 있듯, 장군총 주변에도 작은 고인돌처럼 생긴 무덤의 수호자 배총(陪塚)과 12개의 호석(護石)이 있다. <!-- //본문 --> <!-- 삽화 사진 출력 --> ▲ 장군총 광개토대제의 왕릉으로 알려진 장군총은 중국학자들에게는 '동방의 피라미드'라 불리운다.ⓒ 나의택 <!-- //삽화 사진 출력 --> 이상으로 중동과 중국 일대에 발견되는 피라미드와 고구려 장군총을 살펴보면서, 그 밑에 감춰진 신비스런 배달국과 환국의 존재를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마찬가지로 동방의 피라미드의 정체 역시 아직 미스테리로 남아있다. 원래 인간문화의 뿌리, ‘기층(基層)문화’는 땅 속의 뿌리처럼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비스런 고대의 문화가 파괴되면서 그 자리에 '이성'을 바탕으로 한 역사(historical) 시대가 펼쳐지게 되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문명이란 깊고 깊은 인간 정신의 심연 중에서도 얇은 껍질에 불과한 '이성' 편향이 아니던가?
고고학의 마지막 개척지는 바로 인류 문명의 시원지인 천산 동쪽의 환국과 동방의 배달 조선이란 것을 우리는 느낄 수 있다. 이유야 어찌 됐건, 여태 감춰져 있는것은 분명하고 또 앞으로 드러나게 될 것도 분명하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이 동북공정이나, 서남공정이니, 중화문명시원공정이니 수많은 공정(工程)을 돌려서 자기들 입맛대로 채색을 한들 때가 되면 드러나고 말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순전한 마음으로 믿는다.
● 참고문헌 * Hartwig Hausdorf, 『Die Weisse Pyramide』. 이 책은 94년 발간된 이래 유럽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 김상일, 『인류문명의 기원과 한』347~378쪽. 50년대 미공군 비행사에 의해 촬영된 중국 피라미드의 존재를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싣고 있다.
(출처 : '중국에서 발견되 피라미드의 실체가 궁금합니다..' - 네이버 지식iN)
檀君은 神話아닌 우리國祖 - 원로 문헌 사학자 이병도(李丙燾)씨 조선일보 특별기고 - 〈조선일보 1986년 10월9일(목)자〉 "역대왕조의 단군제사 일제때 끊겼다" 대체 天이란 말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되지만 그중에서 天을 君長의 뜻으로 해석할 때에는 開天節은 즉 「君長을 開設한다」는 것이 되므로 開國, 建國의 뜻이 된다. 그러면 우리의 이른바 開天은 즉 最古 시조인 檀君의 즉위와 開國을 의미하는 開天이라고 보아야 하겠다. 그런데 三國遺事 紀異 제1권의 「古朝鮮(王儉朝鮮)」條에 의하면 『檀君王儉이 阿斯達에 도읍하고 國號를 朝鮮이라 하였다』고 했다. 단군의 아버지 桓雄이 「弘益人間」의 理念을 가히 실현할 만하므로 하늘이 그를 인간세계에 내려보내 다스리게 하니 桓雄이 무리 3천을 이끌고 태백산頂 神檀樹下에 내려와 이곳을 神市라 하고 그를 桓雄天王이라고 하게 되었는데, 그는 風伯(風神) 雨師(雨神) 雲師(雲神)의 三神을 거느리고 主穀 主命 主刑 主善惡등 무릇 人間三百六十餘事를 主管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것은 일견 지상국가를 천상국가의 한 연장으로 觀念한데서 생긴 신화와 같이 보이나 이 신화를 검토하면 桓雄천왕의 존재는 실상 지상국가를 개창한 君長이라기 보다는 인간사회의 百事를 주관하는 守護神的 성격을 가진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서낭당은 천왕당 이 守護神의 住處는 곧 神壇樹로 이것은 지금 民俗중에 생생히 남아 있다. 다시 말하면 지금의 서낭당이 그곳이니 仙王堂(서낭당)은 즉 天王堂인 것이다. 이 서낭당의 나무가 곧 神壇樹 그것이고 그 밑의 돌무더기가 神壇이다. 그리고 옛날에 이 神壇을 중심으로 한 부락이 神市였던 것이다. 神壇樹는 실상 원시사회의 수목숭배(樹木崇拜)에서 시작되어 처음에는 樹木자체가 神 그것이었는데, 그후 변천하여 神壇樹는 天神 天王의 降下階段, 혹은 天王의 住處 또는 그것의 상징으로 여기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렇다하고 옛날의 國號는 대개 도읍지의 이름과 일치하므로 단군의 도읍지라고하는 아사달(阿斯達)이 정작 국호였고 朝鮮은 후에 이르러 「阿斯達」을 雅譯한 것이니 이에 대해서는 서울大 논문집(社會科學)제2집에 「阿斯達과 朝鮮」이란 졸고를 통해서 자세히 발표하였다. 환웅천왕이 熊女와 혼인하여 단군을 낳았다는 이야기가 古記에 전하여 오지만 여기의 웅녀는 古記에는 熊이 女神으로 化한 것이라 하나 이는 熊(곰) 토템族의 여자로 해석하여야 옳다고 나는 年來 주장해 오고 있다. 즉 熊을 神聖視하여 자기의 조상이 곰에서 나왔다 하여 종족의 칭호로 삼던 족속의 여자란 뜻이다. 그리고 보면 웅녀는 地上族이라 할 수 있고 이에 대하여 환웅은 天上族, 天神族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단군은 즉 이 천신족과 지신족과의 결혼에서 생긴 것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10월3일(음력)을 開天節이라 하여 단군의 開國日로 기념하여 온 데는 역시 의의가 있는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원래 十月節은 종교적으로나 민족적으로 큰 의의를 가진 달이다. 즉 十月節은 4계절의 하나로서 계절과 농업과는 큰 관계를 가졌으므로 고대 농업사회에서는 계절이란 것을 상당히 중시하였다. 그래서 계절마다 부락공동체의 종교적 대제전이 행해져 신인공락(神人共樂)의 놀이를 하였던 것이다. 이를 季節祭(Season festival)라고 하는 것인데 계절제중에서도 더 중요시하는 것이 落種(下種)시의 계절제와 추수기의 계절제였다. 이 두 계절제는 어느 계절제보다 더 중요시하고 따라서 그 의식도 성대하였다. 전자는 즉 神에게 年事의 豊登을 기원하는 것, 후자는 수확에 대한 감사제 혹은 薦新祭로서 서양에서는 이것을 「Thanks giving」이라 하여 오늘날까지도 행하고 있다. 옛날 우리나라에서도 落種期의 祭典을 五月에, 추수기의 그것은 10월에 행하여 군중이 한데 모여 天神에게 제사하고 歌舞와 飮朱로 주야를 쉬지 않고 즐겁게 놀았는데(君民이 同樂하였는데) 이 제사를 수리라고 했던 것 같다. 후세에 5월端午를 수릿날이라 하며, 수리취떡을 만들고 술을 빚어 여러 가지의 놀이를 하며 十月을 상달이라 하여 초생에 집집이 神에게 고사하고, 선조무덤에 時祭를 지내는 풍속이 있지만 이야말로 옛날로부터 내려오는 五月祭 十月祭의 遺風이라 할 것이다. 「상달」은 「수리달」 「수리」란 말은 上,高,山,神 등을 의미하는 古語로 그 어원은 「솟」「소슬」에 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보면 10월을 상달이라고 하는 것도 즉 「수리달」의 譯으로 볼 수밖에 없다. 夫餘의 迎鼓祭, 高句麗의 東盟祭, 東濊의 舞天祭가 다 이러한 추수감사제인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고 고려시대에 성행하던 燃燈大會, 八關大會도 春冬二期의 국가적 대제전이었지만 그중에도 가장 성대하던 것이 仲冬八關이었다. 그런데 최근세 갑오경장이후로 민족의식 민족정신이 앙양됨에 따라 이 10월절의 古俗을 갱생시켜 이로써 檀君立國의 開天節을 삼은 것은 오랜 전통에 기인한 역사적 의의가 있는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옛날 민속에 흔히 음력10월초생 특히 3일에 「고사」를 지내왔다는데 왜 3일을 택했느냐 하면 3이란 수는 세계적으로 널리 애용되는 수인 까닭이다. 3은 鼎足의 수인만큼 안정감을 가진 것이니 1이나 2는 실상 不安定監의 수이다. 일제의 멍에를 벗고 해방이 되자 그 해로부터 개천절을 우리의 전 민족적 국경일로 삼아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행하여 오다가 정부수립 후에는 양력 10월3일로 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위에 말한 것들은 졸저 「斗溪雜筆」에 이미 말한 바 있다. 그런데 顯正會理事 李喜秀씨가 1977년 10월 「顯正誌」에 「史書上에서 본 國祖檀君」이라는 제목하에서 三國遺事의 저자 一然이 지금은 없어진 「古記」와 「舊三國史記」와 현존 魏書와는 다른 또 하나의 魏書의 檀君記事에서 인용하였다고 그 출처를 밝히고 있을 뿐 아니라 事大의 입장에서 기술한 三國史記의 저자 김부식도 삼국이전의 史記를 의식적으로 피하려고 하면서도 여러 곳에서 고조선과 단군에 관하여 언급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단군에 관한 記載를 제외하였지만 同書卷十七 高句麗本紀五 東川王二十一年春二月條에 「王以丸都城經亂不可復都築平壤城移民及廟社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惑云王之都王儉」이라고 하였다(惑云이하의 王之는 王노릇을 하였다는 動詞로 읽어야 하고 「都王儉城의 都도 동사로 읽어야 할 것을 잘못 「王之都王儉」이라고 連書하였다. 그뿐 아니라 이때의 平壤은 지금의 평량(平土良)이 아니라 고구려의 黃城(皇城, 즉 丸都城)의 對岸인 東黃城(今江界)인 것이다. 지금의 평량에는 아직도 이때 樂浪郡이 건재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仙人王儉之宅」이라고 한 평량은 후일의 평량(지금의 평량)의 지칭이므로 前後者를 혼동하여서는 안된다. 당시 平壤은 다른 곳 金富軾과 같은 史家의 태도로 미루어보면 古聖箕子之宅이라고 하지 않고 仙人王儉之宅也라고 한 것은 金富軾의 머리속에 지금의 평량이 仙人王儉의 도읍지인 것은 움직일 수 없는 史實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內外史書들이 한결같이 지금의 평량을 王儉城이라고 하는데 이의가 없었던 것 같다. 김부식이 古記를 인용한 부분을 보면 ①史記地理誌高句麗條에서 古記云朱蒙自夫餘逃難至來本則紇升骨城 ②史記 志一 祭祀條에서 「古記云溫祚王二十年春二月設壇祀天地」 ③史記 列傳 金庾信上에서 金春秋가 講和하려고 高句麗에 갔던 기록 가운데 주석을 달기를 「此與本言眞平王 十二年所書一事而小異以皆古記所傳故兩存之」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보면 古記에는 檀君記史가 기재되어 있을 뿐아니라 그 기록이 高句麗에 金春秋가 갔던 西紀640년대까지도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金富軾이 史記 高句麗本紀 東川王二一年書二月條에서 「평량은 본래 仙人王儉의 宅」이라고 한 것은 역시 古記이거나 檀君記를 인용한 것으로 밖에는 볼 수 없다. 그리고 金富軾은 三國史記에서 新羅의 六村도 朝鮮의 遺民이 山間에 와서 자리잡은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三國史記 卷第一新羅本記第一에 보면 「始祖姓 朴氏‥卽位居西干時年十三國號徐那伐先時 朝鮮遺民分居 山谷之間爲六村」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一然이 인용한 古記의 檀君記載를 근거있다고 볼 수 있으며 거듭 언급하지만 金富軾이 평량이 仙人(檀君)王儉의 宅이라고 명기한 데서 古記가 檀君記事를 實載하였다고 볼 수 있다. 一然이 마치 근거도 없는 古記를 들먹여서 檀君記事를 지어냈다고는 볼 수가 없다. 우리 민족이 여러차례의 國難을 겪으면서도 檀君廟에 제사하며 국가의 대행사인 축제때에는 노래(世年歌)에 의하여 檀君의 사적을 전해 내려온 사실은 너무도 명확하다. 세종실록권40 세종10년 戊申6월條에 柳寬의 上書를 보면 文化縣 九月山 東嶺허리에 神堂이 있는데 어느 때에 세웠는지 알 수 없으나 北壁에 환웅천왕, 동벽에 환인천왕, 서벽에 단군천왕을 모셨는데 文化縣 사람들은 이를 三聖이라고 일컬으며 산아래 부락을 聖堂里라고 한다고 하였다. 柳寬은 그 上書중에서 「九月山은 縣의 主山이던 檀君朝鮮 때에는 阿斯達山이라고 하였으며, 新羅에 와서 闕山이라고 고쳤다. 그때에 文化縣을 闕口縣이라고 처음에 이름하였다. 高麗때에 儒州監務로 하고 후에 또 文化縣으로 고쳤다. 산 이름의 闕자를 느리게 소리내어 九月山이라고 부른다. 두 首의 시에 나타나 文化의 동쪽에 藏壯이라고 하는 지명이 있다. 父老들이 전하기를 檀君의 都邑地라고 한다‥」하였으며 「九月山下에는 桓雄을 南面으로 모시고 東西向으로 桓因과 檀君을 모신 三聖堂이 지금도 존재하며 檀君이 立都하였다는 자취를 볼 수 있다」고 하였다. 世宗18년 丙辰 12月丁亥條 柳思訥(柳寬의 조카)의 上書중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臣以世年歌考之檀君初都平(土良)後都白岳武丁八年乙未入阿斯達山爲神基歌曰亨國一千四十八至今廟在阿斯達則등無所처乎又況高麗建廟於九月山下其堂宇位版猶存與世年歌合」. 이로써 보면 古記 檀君記 외에 歌詞형식으로 된 檀君記事가 전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그 世年歌는 사실들과 부합되니 檀君記載에 근거가 있다고 하였다. 柳思訥은 漢城府使를 지냈는데 또 상서하기를 「臣이 檀君世年歌를 보니 檀君은 朝鮮의 시조입니다. 그 출생이 일반사람과 다르고 沒함에 神이 되었다」고 하였다. 어쨋든 朝鮮世宗代까지 檀君世年歌가 남아있었고 識者들이 그것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은 명기해 둘 만한 사실인 것이다. 앞에서 제시한 柳寬의 上書에 따르면 三聖堂은 黃海道 九月山 東嶺에 있다. 柳寬은 젊었을 때부터 거기에 내려가서 父老들로부터 檀君事迹이 오래되었음을 알았다고 했다. 三聖堂에 桓雄天王을 上座에 모셔서 南面하게 하고 東壁에는 桓因天王을 모셔서 西向하게 하고 西壁에는 檀君天王을 모셔서 東向하게 하였다고 한다. 三聖堂의 경내외에는 새짐승들이 서식하지 않으며 산짐승도 들어가지 않는다고 했다. 또 가뭄이 심할 때 빌면 비가 내린다고 했다. 文獻備考 卷64 札考1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三聖祠는 황해도 文化縣 九月山에 있으며 桓因 桓雄 檀君을 모셨으며 春秋로 제사를 드린다 하고, 역시 文獻備考에 의하면 조선조 成宗13년에 황해도 관찰사 李芮之의 말에 좇아서 九月山에 三聖廟를 세우고 평낭(土良)의 檀君廟의 예에 따라서 매년 香祝을 보내어 제사를 지낸다고 하였다. 東國輿地勝覽 卷42 文化縣祠廟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三聖祠는 桓因 桓雄 檀君의 祠이다. 춘추로 제사를 지내며 가물 때 빌면 효험이 있다.」 「東國輿地勝覽 卷51 平낭條」에 보면 두 首의 詩를 통하여 「開國한 지가 멀고 먼 檀君은 朝鮮始祖이다. 檀君의 역사는 언제 비롯되었는가. 堯와 함께 開國하였다고 들었으니 去今 四千年이며 檀君廟를 남겼다」고 하였는데 여기에는 主體思想이 담겨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조선 양조를 통하여 1천년간에 단군에 대한 국가적 태도는 廟를 세우고 祭祀를 받드는 등 자못 융성하였다. 이것은 단군을 國祖로 섬겼음을 알 수 있다. 세종때 새 祠堂 지어 文獻備考 卷13 輿地考1 歷代國界1에서는 檀君朝鮮國을 첫머리에 싣고 遺事의 기록을 인용한 다음에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달고 있다. 「白嶽은 지금의 文化縣이며 九月山의 본명은 闕山인데 檀君의 궁궐터가 있기 때문이다. 闕山은 소리를 느리게 내어 闕山이 구월산으로 와전되었으며 九月山의 藏唐京은 또 藏藏坪으로 와전되었을 것이다. 세종때의 司은注簿 鄭陟(정척)의 상서에 의하면 「평낭의 箕子祠堂에 가보니 箕子의 位牌는 북쪽에 있어서 南向하였고 단군의 위패는 동쪽에 있어 西向하였다. 臣의 생각으로는 단군은 唐堯와 같이 입국하였고 箕子는 武王의 명으로 朝鮮에 봉하여졌으니 帝王曆年數로 보더라도 帝堯에서 武王까지는 1230여년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箕子가 북향하여 南面하고 箕子보다 앞서서 立國한 檀君을 東쪽에 配享하는 것은 立國傳世의 선후에 위배됩니다. 臣이 本朝의 諸祀儀式을 고찰해보니 檀君祭의 陳設圖에 이르기를 「神位는 堂의 중앙에 모셔서 南面토록 되어있으며 臣이 箕子祠에서 본 西向의 坐는 陳設圖와 맞지 않다. 만일 단군을 箕子와 나란히 南向하게 하더라도 단군을 上座에 箕子를 다음에 앉히는 것이 立國의 선후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름이 箕子祠堂인데 단군을 주신으로 하는 것도 편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臣의 생각으로는 따로 檀君祠堂을 지어서 단군을 南向하게 하고 제사를 받들면 祀儀에도 맞을 것 같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세종은 札曹에 명하여 鄭陟의 장서대로 시행토록 하였다. 이상에서 보면 단군은 역대왕조에서는 國祖로서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받들었으니 箕子보다는 上位로 여기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檀君의 祭享이 끊어진 것은 日帝 때부터였다고 본다. 檀君朝鮮 연구 숙제 三國遺事의 檀君記載는 他書 등에서 뒷받침되는 바가 없지 않으므로 믿을 만한 것이며 一然의 창작은 결코 아님을 알 수 있다. 一然이 인용한 古記도 金富軾의 인용古記와 일치되는 바가 많으므로 古記는 당시에 분명히 있었으며 金富軾도 仙人王儉과 그 도읍지를 평양으로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 古記에는 檀君史記가 분명히 있었음을 또한 알 수 있다. 檀君의 世年歌가 전하여져서 많은 識者들이 알고 있었으며 여러 곳에 檀君의 祠廟祭天壇 등 많은 유적이 남아 있다. 또 享檀君陳設圖가 世傳되어 왔고 그것은 檀君祭儀가 끊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역대왕조에서는 朝議에 의하여 建廟 奉祭祀했던 것이다. 만일 檀君이 하나의 전설 신화거리에 불과하다면 위와 같은 일들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아무튼 檀君과 檀君朝鮮에 관한 記載는 숙제로 남길지언정 신화로만 단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된다. 三國史記에서 檀君記載를 제외한 것은 金富軾의 事大的 태도보다는 ①삼국사기의 명분상 삼국이외에는 夫餘등도 모두 제외하였으며 ②신라중심의 삼국사로 하였고, 신라보다 상대의 역사는 피하려고 한 데다 ③단군을 부인하려는 생각보다는 신라사를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가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네이버 누리마루님글을 퍼왓읍니다
관심있는분들은 네이버에서 서안피라미드 치면나와있으니 보시기바랍니다
믿고안믿고는 보시는분들의 선택입니다
관심있는분에게 많은도움이돼엇으면합니다
참고자료도 하나올립니다.
참고로 같이 올렷읍니다... 감사합니다
많은도움이 돼엇으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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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글터] 귀신 ,저승그실체에대하여2
음 하하하 이거는 유명견문록이라는 저서입니다.. 저도 존경하는 중국 명판관 여주선생님에대한이야기구요 뭐일단 알아두면재미있는일이죠 ㅎㅎ
~~~~~~~~~~~~~~여기서부터펌
이 글은 1945년경 중국의 유명한 재판관인 여주선생이란 사람이실제 살아서 저승에 가서 명부 재판관을 지냈다는 믿기 어려운 얘기입니다.우리가 간간이 들어왔던 저승에 대한 얘기를명부에서 벌어지는 재판을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 글들이 전부 사실이라 확인할 수는 없지만 저승세계에 대해 조금 더 접근해 갈 수 있는 글이라 생각합니다.그리고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다시 한번 진지하게 되돌아 보게 하는 글이기도 합니다.
번역자의 이끄는 말
이 '저승문답'은 최근(1945) 중국의 제2의 포청천으로 명성을 드날렸던명판관 여주(黎澍)선생의 실제 저승 재판기록이다. 여주선생은 다 아는 바대로 나이 많고 덕이 높고 또 명판관으로 법률계에 소문이 난 사람이다.그는 늘 평소에 자신이 저승의 재판관으로 다년간 있었고,수면중에 잠깐 명부(冥府)에 가서 그 옥안(獄案)들을 처리했노라고 말하곤 하였다.그때 중국군의 참모장 임유양은 그와 매우 절친한 사이로 그러한 저승이야기를 자주 듣곤 하였다. 그리하여 그 바쁜 와중에도 어느 날 하루 짬을 내어 본격적으로 임참모장이 그간의 경위를 직접 묻고그에 대한 여주선생의 구술(口述)을 손수 수록하여 저승문답이란 한 권의 책이 이루어진 것이다. 흔히들 요즘 신세대인들은자칭 소위 과학과 문화를 연연하여 저 신명세계 귀신이야기를 하면아주 질겁을 하고 무슨 벌레를 씹었거나 똥밟은 것처럼 몸서릴 치고 도망간다.그리고 아주 무지몽매한 미개인 취급을 하고 있다.그리하여 저 신명세계를 부정하는 현대 문화인들이살인, 강도, 강간, 부정, 비리를 이처럼 서슴없이 자행하는 것일까? 생혈을 빨고 인육을 뜯는 저 막가파나 지존파 등이 생기는 것이 아닐까? 모든 종교의 가르침이 이 '심령' '신명세계'에 중점을 두고 교화하는 것일텐데, 이렇게 번창한 종교의 주장이 무슨 힘이 있단 말인가?불교의 윤회설은 차치하고서라도 인류의 영원한 스승인 공자도 그 주역(周易) 계사편에서" 역은 위로는 천문을 관찰하고 아래로 지리를 살피고 있다.그러므로 이승과 저승의 일을 알며, 사물의 시초를 미루어 사물의 종말을 알수 있는 것이다.그러므로 죽고 사는 이치를 알 수 있으니,정기(精氣)가 엉기어 모인 것이 생물이 되고, 변하여진 것이 영혼인 것이다. 그러므로 귀신의 실체와 정상을 알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고, 또 중용(中庸)에서 말하기를," 귀신의 덕됨이 왕성하기도 하구나.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지만 만물의 본체가 되어 있어 빠뜨릴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그런데 소위 사대부라고 하는 사람들이 귀신을 무시한다든지 귀신을 말하기를 꺼린다는 것은바로 공자를 무시한 것이며, 주역을 모르기 때문인 것이다.우주 자연의 섭리가,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모난 것이 있으면 둥근 것이 있는 것이다.이걸 미루어 생(生)과 멸(滅),음(陰)과 양(陽),유(幽)와 명(明),인(人)과 귀(鬼)가 모두 상대적으로 넓혀져 존립하는 것이 사물의 당연한 이치인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읽고 난 뒤에 두렵고 놀라서 무서워 떨면서 지나온 일들을 반성하고 다짐하였다.귀신을 믿고 안믿고간에 어쨌든 이 한편의 책은 권선징악의 공이 모두 갖추어 있어서세상인심을 바로 잡는 데에 유익된 바가 없지 않겠기에 여기에 번역하여 게재하는 바이다.
♣ 선생이 지난날, 일찍이 저승의 재판관이 되었었다 하셨는데 정말 그랬습니까? → 그렇습니다. 세간 사람들이 이런 말을 들으면 모두 괴이하게 여길 터이지만나로서 볼 것 같으면 그 일이 일상적인 일이어서 조금도 괴이하지 않았습니다. ♣ 그것이 어느 때의 일이었습니까? → 청나라말 광서(光緖) 경자(庚子, 1900)무렵의 일로써, 내 나이 열아홉살 때의 일이었습니다. ♣ 소임은 어떤 직무에 관계했으며 어느 부 밑에 속했습니까? 그리고 직원은 몇 명이 있었는지요? → 동악부(東嶽府) 아래에 속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 동악은 보지 못했습니다.다만 사건을 집행한 뒤에 공사를 가지고 보고를 올렸을 뿐입니다.나는 그때 분정(分庭)의 정장(庭長)을 책임 맡았었는데, 따로 배심원 네사람을 두었었고봉사한 귀졸(鬼卒)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 저승재판관을 몇 년이나 맡았었습니까? 그리고 그 일은 매일 가서 처리했습니까?또 어느 지방을 관할했었습니까? → 전후 4~5년간을 했었고, 날마다 가서 했습니다.관할구역은 화북(華北)의 다섯 성을 맡았었습니다. ♣ 저승에서는 왜 선생을 재판관으로 삼았었는지요? → 나 또한 일찍이 같은 사건을 맡아서 조사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지요.또 수전세(數前世)에서도 저승판관을 했었습니다.그 속세 인연의 끈으로 해서 다시 그 일을 맡았을 뿐입니다. ♣ 저승에도 규정 법률이 있습니까? 있다면 선생은 그런 율법을 학습하지 않았을 터인데,어떻게 재판에 착오가 없을 수 있을까요? → 내가 그 규정 법률이 있었던 것을 못 보았던 것 같은데,다만 그 제안을 판결하면 저절로 그 급소에 정확히 들어맞았었습니다.그러므로 처음부터 오래 생각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 선생이 맡아서 했던 일은 어떤 종류의 사건이었습니까? → 내가 맡았던 일은 사람이 죽은지 10개월 이내의 것으로,그 사람의 생전에 지은 선행과 악행의 사건을 맡아서 했습니다.기한을 넘긴 일을 따로 맡아서 처리하는 주무자가 있었습니다. ♣ 선생은 그때에 염라대왕을 보았습니까? →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 사람의 생전에 하였던 선악의 행위를 귀신이 어떻게 다 알고 다 볼 수 있단 말입니까?빠뜨리지 않고 다 기록되어 있습니까? → 예. 귀신은 형체가 없는 것도 능히 다 볼 수 있고, 소리가 없는 것도 다 들을 수 있습니다.인간 세계의 온갖 사상과 행위를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귀신은 스스로 다 알고 다 알 수 있습니다.그 기록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그리고 또 귀신은 사람의 머리 위의 붉고, 누렇고, 희고, 검은 빛깔을 보고서그 사람의 행위와 생각의 선악을 다 알 수 있습니다. ♣ 죄 지은 귀신도 또한 교활한 변명을 합니까? → 예. 극히 많습니다. 죄 지은 귀신은 그가 지은 죄악에 대해서 역시 교활한 변명을 늘어놓습니다.그러다가 그 죄의 확실한 증거를 제시하면 그때에서야 고개를 푹 떨어뜨리고 아무 말이 없습니다.일찍이 한 귀신을 심판하는데,그 사람이 생전에 겉으로는 위선적인 행위를 닦으면서 남 모르게 못된 짓을 다 했습니다.그리하여 그 악행 범죄의 사실에 대해서 극력 부인을 하는데,내가 보니까 그 사람의 죄악이 산처럼 쌓여 있었어요. 증거를 확실히 파헤쳐서 극형을 가하려 하는 찰라에,그 귀신이 뜻밖에 금강경(金剛經)을 외우고 있어요.그러니까 좌우 배심원들이 그 귀신의 머리 위에 붉은 빛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는황급히 심판을 정지할 것을 요구했습니다.나는 그 배심원들이 그 귀신한테서 뇌물을 받고 사정에 끌려서 그러는가 하고이에 형을 더 무겁게 가하려 하니 그 귀신이 더욱 힘써 금강경을 외우는 것입니다.좌우 배심원들이 나더러 "빨리 일어나서 삼가 공손히 서 있어라"고 하더군요. 내가 이르기를 ," 나는 공판정의 우두머리인데 어찌하여 범죄자를 향하여 공손히 서 있어야 하느냐? "고 했더니,좌우 배심원들이 이르기를, "아닙니다. 이 귀신의 머리정수에 불광(佛光)이 이미 나타났는데,그런데도 그를 심판하면 부처님을 모독한 게 되니 심판을 정지한 것만 못합니다"라 해요.
내가 그때 그들을 보니까 그들은 모두 일어서서 두손을 공손히 모으고 서 있는데,그 모습이 어찌나 공경한지 극히 장엄해요.내가 그들에게 묻기를,"그러면 이 죄인을 어떻게 판별하여 처리하려 하는가?" 하고 따졌더니,그들이 이르기를, "그를 판결하기를 사람의 태에 보내기를 수차례하여 그로 하여금금강경을 기억하여 외울 수 없을 때를 기다려 그때에 가서 다시 그 죄를 다스리면 됩니다."그래요. 내가 말하기를,"그를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면 그로 하여금 오히려 유익되게 하는 것이 아닌가?또 그를 수차례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면, 그가 응보(應報)를 받게 되는 것은수백년 이후라야 되는데, 어찌 그리 더디게 하여 그르치려 하는가?" 고 했더니좌우에서 말하기를,"그로 하여금 잠깐 태어났다가 금방 태안에서 죽게 하면몇 년이 안 가서 이미 몇 대를 거친 것이 되니, 그가 지은 죄업은 죄업대로 과보를 받게 되고,금강경을 외운 것은 또한 금강경을 외운 공덕이 있게 되니,이 두 가지가 모두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훗날 그가 지은 죄업을 분별하여 응보를 받게 하면두 가지 일이 조금도 어그러지지 않습니다" 그래요.그래서 내가 마침내 그렇게 하도록 윤허를 하였습니다. ♣ 사람이 죽은 뒤에 그 귀신의 뜻은 얼이 빠져 꿈속 같은 것이 아닙니까?그렇지 않으면 맑고 성성하여 평상시와 같습니까? → 맑고 성성하여 살아 있을 때와 같습니다. ♣ 저승에 들어갈 때는 매일 어느 때입니까? 그리고 그 안건을 심리하는 시간은 얼마나 걸립니까? → 최초에는 매일 해질 무렵이지만, 그후로는 대낮에도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 오후에 갑니다.오고 갈 적에는 모두 간단한 상여를 타고 가는데, 달리는 발걸음이 매우 빠릅니다.그리고 안건을 심리하는 시간은 언제나 짧은 시간 내에 합니다.그러나 복잡한 안건을 만나면 역시 연장하여 여러 날이 걸리기도 합니다.다만 이런 안건은 극히 적습니다. ♣ 저승에 들어갈 때에 그 사람의 신체는 현재 수면(睡眠)상태입니까? → 저승에 들어갈 때에는 몸은 평상 위에 누워 있고 모습은 깊이 잠이 든 것 같습니다.마시지도 않고 먹지 않아도 또한 굶주리지 않고 목마르지도 않습니다.어떤 때에는 친한 벗들이 갑자기 찾아와서 또 불편한 일을 가지고 이야기하면,눈을 감은 채 건성건성 대답하는데, 모습이 마치 잠에서 깨어난 사람 같았습니다.어떤 객이 와서 묻고 하면 또한 그 물음에 따라 대답하는데,다만 말이 입에서 나오지도 않고, 또 객이 무슨 말을 하는 지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 저승 갔다가 되살아 나오면 정신도 또한 피곤한 줄을 깨닫습니까? → 정신은 조금 피곤하고 모습은 마치 막 잠에서 깨어난 사람 같습니다. ♣ 저승길에도 음식이 있습니까? → 예, 있습니다. 그러나 다만 음식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 저승 재판관의 복장은 어떻습니까? 그리고 또 그 공문의 격식은 어떻습니까? → 내가 저승판관으로 있을 때는 아직 청나라가 있을 무렵이었습니다.그렇기 때문에 그 복장과 공문의 격식은 모두 만주국 청나라의 법식과 똑 같았습니다.다만 중화민국이 들어선 이후로는 고쳐져서 새 제도를 따랐습니다. ♣ 저승판관도 역시 봉급이 있습니까? → 예, 있습니다. 다만 사람에 대해서는 조금도 쓸 곳이 없기 때문에 수령하지 않습니다. ♣ 저승의 형벌의 종류는 얼마나 됩니까? → 저승의 형벌의 종류는 매우 많습니다.이 인간세상의 형벌에 비교하면 참혹하기가 백배나 됩니다.만약 지금 사람들이 그걸 본다면 참혹한 형벌이라 할 것입니다.그러나, 나의 경력으로 보면, 인류가 차라리 인간 세상의 형벌을 받을지언정,절대로 저승 법정에서는 형벌을 받지 말아야 합니다.
즉 이 세상에서는 형을 받으면 형이 끝나면 그것으로 끝나지만저승에서는 형이 끝난 뒤에도 또 다시 그 죄과에 따라 재형을 받습니다.비유하자면,이 세상에서는 열 사람을 죽였다면 그 죄는 한번 죽는 것으로 끝나지만,저승에서는 반드시 열 번의 형을 받습니다.형이 끝나면 다시 생을 바꿔 태어난 십대의 생까지 살인죄의 사형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형이 톱으로 자르고, 맷돌로 갈고, 칼끝이 뾰쪽뾰쪽 세운 산 위를 맨발로 걸어서오르게 하고, 기름 가마솥에 넣고 수레로 사지를 찢고 하는 등의 형이 실제로 있습니다.죄의 응보는 참으로 두렵습니다. 이와 같으니까요. ♣ 저승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어떤 종류의 덕행입니까?그리고 최악의 죄로는 어떤 종류의 죄업입니까? → 저승에서 가장 귀중하게 여기는 것은, 남자는 충과 효이고, 여자는 절개와 효도입니다. 이 두 가지를 행한 사람은 비록 죄업이 있다 하더라도 또한 반드시 경감하여 줍니다.최악으로 여기는 것은 음탕과 살인죄 두 가지입니다.그리고 살인죄는 또 음탕에 비하여 더욱 무겁습니다.만약에 음탕으로 인하여 인명까지 살해한 자는두 가지 중죄를 함께 저질렀기 때문에 한결 죄를 덧씌운 것이 됩니다.그러므로 예로부터 "만가지 악 가운데 음탕이 첫째요, 백가지 선 가운데 효도가 먼저다"라고한 말이 참으로 헛말이 아닙니다. ♣ 저승에는 이미 문장으로 이루어진 성문법률(成文法律)이 없는데,그 죄의 가볍고 무거운 것을 어떻게 저울질합니까? → 여기에서 그 범죄의 동기와 발생의 결과를 보고 그 정황을 살피고 사리를 참작하여서그 경중을 결정합니다.지금 여기에서 절도죄를 한 것을 가지고 비유한다면,그 절도질을 한 사람이 본래 생계에 압박되어 한 것이고,망녕되어 다른 나쁜 데에다가 쓰려고 한 짓이 아니라면,그리고 도둑맞은 사람이 부자인 한 사람에만 관계되었고, 그 액수도 크지 않으며,또 그 부자의 생계에 별 영향도 없고 그 부자가 그 도둑맞은 것에 대해 또한 크게 애석하게여기지도 않는다던가, 또 그 도둑맞은 것이 장차 그걸 가지고 가서 음탕한 짓이나, 도박을 하거나,담배, 술등 정당하지 못한 부정한 곳에 용도로 쓰려고 한 것이라면, 그 죄는 되려 가볍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 도둑맞은 부자가 그것을 하인들에게 의심을 두고 심하게 꾸중을 하여,그 책망을 받은 하인이 억울하고 분이 나서 자살을 하게 되었다면,또 가난한 사람의 쌀 사고 약 살 돈이라면,그리고 도둑맞은 것으로 인하여 굶어죽고 병들어 죽는 데까지 이르렀다면,또는 압박을 받아 스스로 몸을 빼어 싸움에 뛰어들어 인명을 살상하는 데 이르렀다면그 정황을 살필 때 매우 무겁습니다.그리고 이러한 경우에는 보통의 절도죄만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 저승의 법정에서 죄를 심판할 때도 간혹 착오가 있습니까? → 절대로 없습니다.저승법정에서는 범인의 죄상에 대해서 모두 일찍이 정밀히 조사해 두었고,또 확실한 증거가 있기 때문에 그 심판은 지극히 공정합니다.따라서 착오된 일이란 절대로 없습니다. ♣ 우리 범인은 하룻사이 또는 일생동안에 한 생각 일어났다가 한 생각 없어지는 것이얼마인지 모릅니다. 또 선행을 한 것, 악행을 저지른 것을 바로 자기도 다 기억을 못합니다.그러나 저승 법정에서는 사람들의 공과 죄를 아주 미세한 것까지도 죄다 기록되었다면또 어찌 그 번거롭고 수고스러운 것이 이와 같음을 꺼리지 않을까요? → 사람의 사상이란 게 마치 한 생각 일어났다가 한 생각 사라지고갑자기 해놓고선 이내 잊어버리곤 하여 저 공중의 새 발자국 같고 물위에 뜬 거품 같아서저승에서도 역시 다 기재된 것은 아닙니다.그러나 만일 한 마음을 오로지 쏟아서 그 생각하고 생각하는 것이 떠나지 않으면비록 나타나지 않은 행위일지라도 또한 공과 죄가 있으면 기록될 수 있습니다.만약 그 생각이 행위로 이뤄진다면 그 공과 죄는 더욱 현저하게 나타납니다. ♣ 크게 수행한 사람도 죽은 뒤에 역시 저승에 가서 재판을 받습니까? → 저승 법정에서 관리하는 것은 모두 업(業)안에 끌려 다니는 사람들입니다.용록(庸碌)한 사람도 평범한 사람들로서 큰 선행도 없고 큰 악행도 없는 사람들을 관리합니다.만약에 크게 수행한 사람은죽은 뒤에 곧바로 극락,천당(天界)에 올라가기 때문에 저승을 거치지 않습니다.이런 사람은 저승명부에 이름이 없기 때문에 저승에서 심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중 혹시 천당에 오르는 것이 조금 늦는 사람은 어쩌다가 저승을 거쳐가기도 하는데, 이런 사람이 저승에 오면, 저승판관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서 내려서서 그를 맞이합니다.그러면 그 혼백은 걸을 때 마다 점점 높아져서 마치 구름사다리를 걷는 것 같습니다.그가 저승법정에 가까이 오면 그 높이가 법정지붕의 용마루와 나란히 섭니다.이러한 사람은 이름점고가 끝나는 즉시 곧바로 천당에 오르기 때문에 잡아매어 둘 수가 없습니다. ♣ 저승법정에서도 서양인을 잡아옵니까? 만약에 서양인이 오면 피차에 언어는 어떻게 회통합니까?만약에 양인이 없다면 양인이 죽은 뒤에는 어디에 가서 심판을 받습니까? → 내가 저승판관이 되었을 때가 마침 경자년(庚子,1900) 8개국 연합군이 북경을 공격한 지55일만에 항복한 뒤이기 때문에 국내외의 군대와 민간인들이 많이 죽었습니다.그러기 때문에 저승에도 다소의 서양사람들이 법정에 들어온 것을 보았습니다.그러나 저승에서는 저절로 그들의 말이 통해(通解)되었습니다.어느 날 그 난리에 죽은 한 제독(提督)과 또 충성으로 나라를 보위하다가 의분이 복받쳐슬퍼하고 한탄하다가 몸을 버린 자가 심리를 받은 일이 있었는데,나는 친히 그들이 똑같이 곧바로 천계(天界)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한번도 그들의 심리를 관리하지 않았습니다.그리고 또 중국의 저승 재판소가 이 한 곳만이 아니고,또 구미(歐美)의 각 나라도 또한 따로 저승 재판소가 있어서 각기 그 정황에 따라 처리합니다. ♣ 저승에서는 어떻게 이승 사람을 써서 저승으로 데려갑니까? → 부유하고 고귀한 사람들은 그 저택에는 항상 많은 신들이 수호하고 있고,그 사람의 좌우에서 심부름하는 사람들은 오랫동안 날쌔고 힘이 장사이어서양기(陽氣)가 왕성하기 때문에, 저승사자가 그 사람 병상에 접근할 수 없습니다.비유하면 장군이 병영 안에서 병들어 죽으면 그 4주동안은 경위가 삼엄하고 창과 대포가죽 늘어서 있으며, 영내의 병사들은 또 모두 소년들이어서 양기가 펄펄 끓고 있어서저승사자 귀신이 그 앞에 가까이 갈 방법이 없기 때문에반드시 산 사람의 혼을 써서 그를 끌어갑니다. 그래서야 심리할 안건이 도달합니다. ♣ 칼로 목이 잘려 죽거나 기타 참혹하게 죽은 귀신들은 그 몸뚱이와 머리가 온전치 못한데,그 영혼들은 보통 병들어 죽은 귀신들과 구분이 있습니까? →그 영혼만은 모두 온전하여 보통귀신과 다름이 없습니다.오직 그 얼굴 모습만이 조금 모호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그리고 또 그 상처에 핏자국이 남아 있고, 용모가 참척하여 고통이 있는 것 같습니다. ♣ 귀신도 또한 소멸의 기한이 있습니까? → 예, 있습니다. 내가 본 옛 귀신은 멀리는 송나라, 원나라 때까지에만 이르고,당나라 이상의 귀신은 절대로 본 적이 없습니다.선불(仙佛)이 된 분을 제외하고는 만고에 길이 생존 할 수 없습니다. ♣ 사람은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에 이르는 동안에 용모가 점점 변하여 가는데,귀신의 용모도 또한 나이에 따라 노쇠해집니까? → 귀신의 용모는 그 병들어 죽을 때까지는 똑 같습니다.해가 오래 지났다고 해서 노쇠해지지 않습니다. ♣ 저승에도 낮과 밤이 있고, 해와 달, 별들이 있습니까? → 저승에도 역시 낮과 밤이 있어 이승과 똑 같습니다.그러나 오직 해와 달, 별들은 절대로 볼 수 없습니다.그 정확한 모습은 마치 사천(四川)에 큰 안개가 낀 것 같고화북(華北)에 뿌연 황사 덮인 날씨와 같아서 이승의 밝은 세계에는 미치지 못합니다.귀신들은 따스한 8시 이후부터 11시까지에 이르러서야 그칩니다.그리하여 귀신들은 양기가 터지기 시작하면 모두 어둡고 그늘진 곳으로 피하여 숨습니다.오후에 그늘이 점점 많아지면 외출합니다. ♣ 저승에도 역시 춥고 덥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습니까? → 예, 그렇습니다.다만 여름에는 이승같은 무더위가 없고 겨울에도 이승같은 매서운 추위에 비해 덜 춥습니다. ♣ 저승에도 역시 음식점이 있습니까?그리고 이승 사람이 만든 종이돈을 저승에서 사용할 수 있습니까? → 예, 음식점이 있지요. 거기에는 나물 음식종류가 많습니다.이승 사람이 만든 지전(紙錢)을 저들도 또한 사용하여서 물건을 살수가 있습니다. ♣ 저승에서도 매일 세끼 밥을 먹습니까? → 거기에서는 매일 한끼만 먹어도 여러 날 배부를 수 있어서 날마다 꼭 세끼를 먹지 않습니다. ♣ 저승에서도 잠을 잡니까? → 예, 거기에도 역시 침상과 잠자리, 요, 이불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잠자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겨우 가다가 잠깐 벽에 기대든지, 눈을 감고 조금 쉬든지 하면 곧 수면하는 것과 똑같습니다.이승사람들처럼 매양 잠잘 때 꼭 7~8시간씩 자는 것은 아닙니다. ♣ 저승에도 시가지가 있고, 상점이 있습니까? → 예, 있지요. 그러나 규모가 매우 작아서 여기 인간 세상의 작은 점포와 다름이 없습니다.거기서 파는 것은 음식과 잡용품들이 많고, 다만 웅장하고 화려하고 넓고 큰 인간세계의큰 공사(公司)라든지 양행(洋行)같은 것은 없습니다. ♣ 이승에서 만든 음식을 귀신들도 먹습니까? → 그렇습니다. 오직 그 기(氣)만을 흠향할 뿐이요, 진짜로 먹지는 않습니다.만약 여름철에 식품이 두 그릇이 있어서한 그릇은 귀신에게 제공을 했고, 다른 한 그릇은 제공하지 않았다면이 제공한 음식은 제공하지 않은 음식과 비교하여 반드시 먼저 부패합니다.그것은 귀신이 이미 그 음식의 기를 섭취하였기 때문입니다. ♣ 저승의 음식을 이승의 것과 비교하여 어떤 게 더 좋습니까? → 아마 이승의 것에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 귀신도 그 분묘에 가서 살고 쉬고 하는 곳으로 삼습니까? → 그렇습니다. ♣ 사람이 처음 죽을 때 영혼이 육체를 떠날 적에 역시 고통이 있습니까? → 사람이 죽을 때는 모두 질병이 있고,영혼이 육체를 떠날 때는 마치 방문을 열고 외출하는 것 같아서 처음에는 곤란이 없습니다.지금까지의 아프고 괴로운 고통을 되돌아보면 도리어 편안해지는 것 같습니다.그가 처자식들을 불쌍히 여기고 또는 두고 온 재산에 미련을 두어 마음속에 간직하고숨이 떨어지지 못하면 영혼이 쉽게 육체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 때가 가장 고통스럽습니다.만약이 사람이 타고난 성품이 맑고 깨끗하여 욕심이 없고,처자식과 재산에 대해서 또한 미련과 끌리는 욕심이 없다면,영혼이 육체를 떠날 적에 곧바로 옷을 벗듯이 훌훌 떠나가는데,조금도 힘을 허비하지 않습니다. ♣ 스님들이 경을 외워 죽은 혼령을 천도하면 망인에게 결국 이익이 있습니까? → 스님이 경을 외우면 망인에게 이익이 있는지 없는지를 특별히 일괄적으로 말하기가 어렵습니다.비유하자면 그 사람이 생전에 큰 선행을 하였으면 죽은 뒤에 곧바로 극락,천계에 오르기 때문에그 사람에게 본래 경 읽은 공덕이 필요가 없습니다.그 사람이 생전에 크나큰 죄악을 저지른 사람이라면 죽은 뒤에 즉시 지옥으로 떨어지기 때문에그 사람 역시 쉽게 이 경 읽은 공덕을 받아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그러나 우리 보통 사람에게 이르러서는 생전에 큰 선행도 악행도 없는 사람은 경을 읽어서천도를 얻으면 어두운 지옥세계가 환하게 밝아져서 죄업이 경감되고 이익이 특별히 커집니다. 그리고 경을 외우는 사람의 도의 행적이 높고 낮음에 따라서 또한 막대한 관계가 있습니다.만약 경을 외우는 사람이 도가 높은 고승이고 효자 현손과 관계가 있으면,그 경 한권을 외우는 것이 보통 중이 외우는 것보다 열배에 해당합니다.그리고 어떤 보통 평범한 스님이라도 경을 지극 정성으로 외우면 또한 상당한 이익이 있습니다.만약에 행이 없는 막행막작의 스님이고 또 마음이 전일치 못하여 건성건성 외운다면이익도 적을 뿐 아니라, 어떤 때는 터럭 끝만큼도 이익 되는 게 없습니다.더구나 망인의 과보에는 효과에 이르지 못합니다.또 송경의 가장 좋은 효과는 망인의 7일,49일 이내가 좋고,이 기간을 지나면 망인이 지은 업에 따라 이미 다른 데에 생을 바꿔 태어나 버릴 수 있습니다.그러면 그 공덕이 돌아가서 죽은 자는 바로 받을 수가 없습니다. ♣ 귀신과 사람의 수효가 어느 것이 더 많고 어느 편이 더 적습니까?그리고 사람들은 귀신을 무서워하는데, 귀신도 사람을 무서워합니까? → 귀신세계의 귀신의 수효는 인간세계의 사람들의 수효에 비해 그 숫자가 훨씬 많습니다.오고 가고 가고 오고 울타리에 맞대고 담벼락에 붙어 있어 가는 곳마다 모두 다 귀신들입니다.사람들이 다니는 길에도, 귀신들은 길 한 가운데보다는 도로 양편 곁으로 많이 걸어 다닙니다.사람들은 밝은 곳을 따라 다니는데, 귀신들은 어두컴컴한 곳을 따라 다닙니다. 그런데 사람도 귀신을 무서워 하지만 귀신도 또한 사람을 무서워합니다.그리하여 귀신도 사람이 오는 것을 보면 또한 반드시 피하여 달아나 버립니다.정직한 사람과 군자는 귀신도 반드시 공경하지만 그 귀신들이 업신여기고 농락하는 자는모두 심성이 바르지 못하거나 시운이 쇠미해진 사람일뿐입니다.그러므로 우리 인간들은 오후부터 해질 무렵 저녁 늦은 시간까지는 길을 걸어갈 때에절대로 길 양편 가장자리나 어두컴컴한 그림자 진 곳은 걷지를 말아야 합니다.저녁 늦은 시간에 문밖에 나설 때에는 반드시 느린 걸음으로 천천히 걷되가끔씩 기침소리를 내어서 그들로 하여금 피해 달아나도록 해야 합니다.그렇지 않고 뜻밖에 나오면 귀신과 대질러서 그 충격으로 거꾸러지는 일이 발생합니다.사람 몸도 역시 오싹 한기가 끼치고 겁내어 떨리게 되는데,이것은 음과 양이 서로 상충되어 피차가 모두 불편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 귀신이 걸어 다니는 것과 산사람이 걷는 것과 구분이 있습니까? → 귀신의 발 부위는 분명치 못하여 마치 안개 속을 걸어 다니는 것 같고걸음걸이가 매우 빨라서 사람의 느린 걸음과는 같지 않습니다. ♣ 귀신이 닭울음소리를 무서워하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 햇빛이 밝아오면 영혼이 불안해집니다.그러기 때문에 햇빛을 피하여 달아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이것은 마치 우리가 불이 달궈진 큰 기계의 용광로 열기를 무서워하는 것과 같습니다.그러나 몸가짐이 품행있는 귀신은 역시 닭울음소리를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 선생의 전세에서부터 쌓은 그 근기가 이와 같고 또 보통사람보다 훨씬 뛰어나셨으니,아마 내세에도 역시 윤회생사(輪回生死)를 면제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 윤회생사를 뛰어 넘는다는 게 어찌 그리 용이할 수 있습니까?즉 나의 내생에도 역시 면할 수 없습니다.일찍이 같은 종사자에게 부탁하여 이에 대하여 조사를 해보았습니다.그랬더니 그가 이르기를,나의 내세에는 응당 반드시 하남과 남양일대에서 다시 태어날 것이라 하였습니다.그러나 단 수십년 이내에 세상의 물정과 세태인사(世態人事)가 변천하여아마 저승의 기록도 고쳐질 수도 있을겁니다. ♣ 저승의 관리들도 역시 인간세상을 바꿔 생을 받아 태어납니까? → 그렇습니다. 비유하자면 현재 공무원으로 있는 사람은 특히 높이 취직하는 것이무직자인 보통사람에 비해 쉬운 것과 같습니다. ♣ 귀신이 인태(人胎)에 들어가는 것은 수태(受胎)시에 즉시 들어 갑니까?아니면 출산시에 들어갑니까? → 두 가지 다 있습니다. ♣ 여러 귀신들이 우글우글 왕성한 것은 오랜동안 저승에 떨어져 있어서어찌하여 일찍이 빠져 나오지 않는 것입니까? → 사람은 적고 귀신은 많기 때문에 그에 배당하여 분배할 수 없어서입니다.그리고 또 태어나는 집도 그 귀신과 원래 인연이 있어야지 바야흐로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만일 그 사람이 생전에 교제가 넓어서 서로 아는 사이가 많다 보면바로 그 사람 집에서 투태 되기가 자연 쉬워집니다.만약에 빈궁한 사람이 늙어 죽을 때까지 동구 밖까지도 나가보지 못해서평소 사람들과의 교제가 극히 적으면 그 사람은 죽은 뒤에 귀신무리에 젖어들어생을 받는 어떤 기회의 인연으로 나가기가 어렵기 때문에 반드시 오랫동안 기다려야 됩니다.그리하여 인연이 있는 자를 만나면 이에 곧 생을 받아 투태하게 됩니다. ♣ 불교를 배운 사람은 죽은 뒤에 극락세계에 태어나고 도교를 배운 사람은 통천복지에 태어나지만유교를 배운 사람들은 죽은 뒤에 어디에 가서 태어납니까? → 역시 하늘나라 천계(天界)에 태어납니다. 그리고 결코 소멸되지 않습니다. ♣ 선생은 그 뒤에 어찌하여 저승판관 노릇을 하지 않았습니까? → 내가 원하지 않은 지가 오래 되었고,그리고 여러 차례에 걸쳐 휴직하기를 빌었지만 번번이 모두 허락을 받지 못했었는데그 뒤에 동사자들이 금강경(金剛經)을 많이 외우도록 가르쳐 주어서 그 법대로 시행했더니그 공덕이 쌓여 2천번 이상이 찼기 때문에 드디어 다시는 가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 선생은 평소에도 늘 귀신을 볼 수 있습니까? → 내가 저승판관으로 있을 때에는 귀신을 호출했을 때나 안했을 때를 막론하고 늘 귀신을볼 수 있었지만 중화민국(中華民國)초 이후부터는 귀신을 보는 것이 점점 적어지더니,중화민국 10년 이후에는 완전히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 맨 처음 저승판관으로 들어오라는 것을 어떻게 통지 받았습니까? → 어느 날 밤에 꿈속에서 옛 의관을 단정히 갖춘 한 사람이 찾아와서내 방으로 들어서서 이르기를 "중대한 일이 있어서 정성스레 받들어 모시려하니수고스럽겠지만 바쁜 일을 도와주시기를 청합니다."라고 합니다.내가 그 사람에게 일러 말하기를,"그대가 어떤 일을 위임하려는 지는 모르나, 다만 내 힘이 모자랄까 두렵다"고 하였더니그 사람이 말하기를 "선생께서 제발 윤허만 해준다면 할 수없는 것은 아닙니다." 라고 하기에,나는 그가 본 뜻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지만 오직 그의 예의바른 용모가 단정하고 공경하며,그 태도가 지극정성 간절하여 정의상 차마 물리칠 수가 없어 마침내 묵묵히 허락하고 말았습니다.그랬더니 그 사람이 마음속으로 매우 기뻐하면서 서로 약속한 수일 뒤에 곧 모시러 오겠노라고다짐하고 드디어 이별하였습니다. 깨고 보니 꿈이었습니다.내 자신 속으로 한낮 꿈이라 여기고 특별히 마음에 두지 않았었는데 드디어 4~5일이 지난뒤에,꿈속의 그 사람이 또 와서는 내게 일러 말하기를 "지난번의 승낙해주신 은혜를 받잡고특별히 가마를 준비하여 정성스레 받들어 모시려고 왔습니다."라고 하지 않겠습니까?그때 내가 보니까 말 한 필의 수레가 문밖에 메어 있어서 드디어 함께 수레에 올랐더니,얼마 안가서 어떤 관아(官衙)에 이르렀습니다.수레에서 내려서 그 안으로 들어갔더니,그 사람이 나를 인도하여 한 행랑방에 이르러 자리에 앉은지 조금 후에 바로대청마루에 올라 안건을 심리하도록 청하였는데, 한 범죄인을 끌어다가 놓고좌우배심원들이 원안을 진술하여 주면서 나에게 판결하도록 요청하였습니다.내가 이르기를,"내 본래 이의 설정을 모르는데 어찌 감히 망령되이 판결할 수 있단 말인가?"하고 거절을 하니,좌우 배심원이 이르기를, "그대가 성심으로 미루어 헤아려 보면 그 의사가 어떠한지를곧 법에 비추어 징벌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기에 내가 잠깐 자세히 생각해보고 이르기를"이러 이러한 것이냐"고 했더니, 좌우 모두가 "그렇다"고 대답하고곧 나에게 판결문에 서명하도록 하고 죄범을 끌고 가버렸습니다.그리고는 이내 마차로 나를 돌려 보내주었습니다. ♣ 선생의 부모님도 이 실정을 아셨습니까? → 내가 저승판관이 된 최초에는 그 비밀을 잘 보전하려고 감히 드러내어 말하지 않았었는데,그 뒤에 부모님이 내가 빈방에 혼자 있으면서도 간간이 사람과 말하는 소리를 들으시고는차차 그 실정을 아시게 되었습니다.대개 내가 저승판관이 된 뒤부터는항상 저승친구들의 왕래가 있었는데 오직 나만이 볼 수 있고 나만이 들을 수 있었지,다른 사람은 모두 듣지도 보지도 못하기 때문에 오직 나의 말만을 들었었지요. ♣ 저승친구들이 올 때에는 역시 음식을 많이 장만하고 초대합니까? → 아닙니다. 다만 맑은 차 한 잔이면 이미 그 정을 다하는 데 족합니다. ♣ 저승에서도 역시 해마다 그 명절과 휴가가 있습니까? → 예. 이승과 다름이 없습니다.음력 설날과 청명, 한식, 단오, 추석, 동짓날 등을 만나면 역시 반드시 며칠을 쉽니다.그러나 단 아직 일, 월, 화, 수, 목, 금, 토 등의 주일은 없었습니다. ♣ 귀신은 어떻게 그 모습을 바꿀 수 있습니까? → 모든 귀신들은 모두 마음대로 변환(變幻)할 수가 있습니다.다만 반드시 저승 법정의 허가를 얻어야 됩니다. ♣ 선생은 일찍이 무슨 무슨 중요한 안건을 심판하였습니까? → 일체의 모든 안건이 모두 다 매우 평범한 안건으로서절대로 인정과 사리의 밖의 것은 없었습니다.또 그 죄상도 환히 밝아서 증거가 확실하기 때문에,복잡 다단하여 밝히기 어려운 정황은 없었습니다. ♣ 일찍이 각처를 유람한 경력이 있습니까? → 없습니다. ♣ 소의 머리를 하고 말 얼굴을 한 귀신이 정말 있습니까? →모두 가면의 도구를 쓰고 흉폭한 혼령들을 공포케 하려고 한 것입니다.만약 어질고 착한 혼령들에게는 이런 흉칙한 모습은 절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 새, 짐승의 혼령은 역시 새, 짐승의 형상을 하였습니까? → 이것은 따로 한 부에서 맡아서 관할한 바로써 나에게는 관계치 않았기 때문에나는 모르는 일입니다. ♣ 저승에서도 염불하면서 수행하는 자가 있습니까?염불을 하고 송경(誦經)을 한 사람은 이미 이런 공덕이 있는데, 저승의 모든 귀신들이 어찌빨리 염불 송경을 하여 지옥에서 벗어나서 극락,천당으로 오르기를 구하지 않습니까?만약에 염불을 할 줄을 모른다면 어찌 다른 사람의 염불하는 것을 따라서 본받지 않는지요? → 한 번 저승에 도착하면바로 그의 업력(業力)에 가로 막혀서 자연 그 염불하고 송경할 줄을 모릅니다.즉 우리가 염불하고 송경을 하면 저들도 보고들은 바가 없기 때문에수행은 마땅히 이 한 입기운이 끊어지기 전에 해야지 한번 숨이 끊어지면 힘이 되기가 어렵습니다. ♣ 귀신은 이미 형체가 없는 것(無形)을 볼수가 있고 소리가 없는 것을 들을 수가 있다고 하였는데어찌 우리들의 염불 수행하는 것은 도리어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것입니까? → 자기의 업력에 가리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시험삼아 비교하여 봅시다.세간의 어떤 사람이 본래 신앙이 없었는데 어쩌다가 굶주리고 추위에 핍박되어서우리들의 염불수행에 대하면 역시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그리하여 곧 그로 하여금 우연히 보고 듣게 하면그러나 그 사람의 욕심에 끌리고 얽매여서 그 신심(信心)이 일어나지 않고,또 신심이 견고하지 않아서 마침내 수행하지도 않고 염불하지도 않습니다.저 귀신들이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 귀신의 말소리와 우리 인간의 말소리와 어떻게 다릅니까? → 귀신의 말소리는 날카롭고 짧고도 급합니다. ♣ 이 세상을 귀신의 입장에서 보면 사람과 귀신이 함께 섞이어 사는 게 되고,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이승과 저승이 둘로 동떨어진 것인게 결국 그 경계는 어떻게 구분합니까? → 그 나눠진 경계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또 그 분계가 없는 것 같기도 하여이런 정황은 참으로 뚜렷이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 산 사람의 혼과 죽은 사람의 귀신이 그 형상과 그 얼굴빛이 차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 나는 그 때 거기에 대해서는 마음에 두지 않았었는데, 당연히 조금은 분별이 있지요? ♣ 귀신도 역시 어떤 감상을 가지고 있습니까? → 예. 그들도 역시 감각이 있어 심히 괴로워합니다.그러기 때문에 그들의 말은 몹시 슬픈 것이 많습니다. ♣ 귀신이 사람의 태에 들어갈 때(入胎)에 저승에서는 무슨 교훈(敎訓)이 없습니까?가령 그들로 하여금 악을 돌이켜 선으로 향하라는 말 따위 말입니다. → 없습니다. 오직 새나 짐승의 태에 던져질 때에는 귀신으로 하여금 그 정황을 모르게 하고,또 남자 여자를 바꿔 만들 때에는 반드시 어떤 누각에서 좋은 경치를 구경케 한다든지 하여그들로 하여금 그 속에 들어가는 것에 대한 즐거움을 갖게 합니다. ♣ 저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에 해와 달이 밝게 비치고 있는데,어찌 저 저승(幽界)에는 비치지 못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어떤 물건이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까?그리고 만일 이승과 저승이 다른 지역이라면 어떻게 사람과 귀신이 함께 길을 갈 수가 있습니까? → 항상 구름과 안개가 막아 가리웠기 때문에, 저 푸른 하늘과 밝은 태양을 보지 못합니다.다만 귀신들은 밝은 데서 어둡고 그늘진 곳으로만 갈 수 있고 더욱이그 밤사이에 활동하기 때문에 사람과 귀신이 동행할 수 있습니다. ♣ 저승에서는 어떤 책력을 씁니까? 음력입니까? 양력입니까?그리고 모든 공문서에 역시 년, 월, 일을 씁니까? → 예, 만청(滿淸)시대에는 만청시대의 책력을 썼고,공문서에서 쓰는 년, 월, 일도 이승과 똑 같습니다. ♣ 저승에도 또한 비,바람,눈,서리가 있습니까? → 보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이승의 비, 바람, 눈 서리를 만날 때 저승의 모든 귀신들이 역시그 추위에 덜덜 떨면서 괴로워하고 또 잔뜩 웅크리고 오그라들어 편치 못한 상태를 보입니다. ♣ 귀신들도 또한 서로 응수(應酬)하고,애경사에 경축하고 조문하는 예절이 있습니까? → 예, 이승과 다름이 없습니다. ♣ 향촉(香燭)은 어디에 쓰입니까? → 촛불은 그 광명(光明)을 취하고, 향은 그들을 불러오게 하는 데 쓰입니다. ♣ 폭죽은 어디에 쓰입니까? → 귀신들은 폭죽을 무서워합니다. 그러므로 적의하게 쓰일 데가 없는것 같습니다. ♣ 그 염불송경이 그렇게 큰 공덕이 있다면, 유가의 경서를 읽는 것도 또한 공덕이 있습니까? → 예, 공덕이 있습니다. ♣ 불교의 호법신(護法神)은 위다요,도교의 호법신은 왕영관(靈官)인데유교도 또한 호법신이 있습니까? → 모릅니다. 유교는 신도(神道)로써 설교하지 않기 때문에 호법신의 필요가 없는 것 같습니다.그러나 그 경전, 서적은 귀신의 가호를 받는 것은 역시 의심할 의의가 없습니다. ♣ 저승의 봉급은 어디에서 마련하여 옵니까?이것 역시 금전, 양곡, 세금의 항목으로 거두어들인 것입니까? → 일찍이 이것에 대해서 그들에게 물어 보았더니, 그들은 나에게 묻지 말라고 부탁합디다.그래서 잘 모릅니다. ♣ 사람의 머리 위의 빛깔은 무슨 색으로써 선과 악을 삼습니까? → 붉고, 희고, 누런 색을 좋게 여기고, 검은 색을 나쁘게 여깁니다. ♣ 귀신이 사람으로 변하고, 사람이 귀신으로 태어난다면결국 이 세간에는 사람이 먼저입니까, 귀신이 먼저입니까? → 여기에 대해서는 마땅히 두 방면으로 나누어서 말해야 할 것입니다.먼 상고시절 이전에 혼돈이 처음 열리고 순박(醇朴)한 기운이 흩어지지 않았을 때에는먼저 인간이 있은 뒤로부터 뒤에 귀신이 있었고, 그 후세에는 귀신이 먼저 있은 뒤로부터사람이 있게 되었습니다. ♣ 귀신들도 역시 생각이 있어서 이승의 아내와 여자아이들을 그리워합니까? → 예, 귀신들도 역시 매우 그리워하는 생각이 있습니다.그러나 시일이 오래가면 자연 담백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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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중국인들의 야욕 -한반도를 차지하라-
요즘 중국 포털사이트의 군사 코너는 분위기가 후끈하다. (중국의 주요 포털사이트에는 군사 코너란이 따로 있을 정도로 밀리터리 매니아들의 층이 두텁다) 지난 5일 중국 정부가 독자 개발해 실전 배치했다며 젠(纖)-10 전투기를 공개했기 때문이다. 젠-10 전투기는 마하 2.0의 속력에 작전반경 1100㎞, 항속거리 2500㎞, 무장 탑재량 7t으로 한국과 대만의 주력 전투기인 미제 F-16을 능가하는 성능을 가진 것으로 평가된다는 것이다. 1988년 중국 정부가 개발에 들어간 이래 근 20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젠-10 전투기는 겉 모습과 크기, 무게 등이 F-16 전투기와 비슷하다. 그래서 F-16 전투기의 이스라엘 판이었던 '라비' 전투기의 설계를 모방했다는 지적도 있고 엔진과 핵심 레이더가 러시아제여서 젠-10이 '신토불이' 중국산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기지만 네티즌들은 별로 상관하지 않는 분위기다. 이제야말로 중국이 최신 전투기 생산국가의 대열에 당당히 합류했다는 점에 큰 의미를 둔다. 젠-10의 탄생에 결정적 공헌을 한 시험비행 전문 조종사 리중화도 중국 언론들에 의해 영웅으로 떠올랐다. 여기에 황창 국방과학기술공업위원회(국방과공위) 비서장이 지난 9일 기자회견에서 "중국은 이미 항공모함 건조능력을 갖췄으나 건조할 것인가 말 것인가, 건조 시기 등에 대해서는 검토중"이라고 답한 것도 중국의 밀리터리 매니아들에게 즐거운 소식이었다. 젠-10 특집란까지 마련한 시나닷컴(jczs.news.sina.com.cn)에는 15일 "일본의 f-15J도 젠-10의 적수가 될 수 없을 것", "아시아 각국에서 젠-10 구매 문의가 잇따르고 있는 가운데 파키스탄이 36대(15억달러)를 구매할 의향"는 기사가 실려있다. "대만군의 모의 시험결과 젠-10이 30분안에 제공권을 장악하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기사도 눈길을 끈다. 젠-10은 일단 대만을 겨냥하지만 그 작전반경으로 볼 때 한반도도 공격권안에 들어간다.
젠-10 특집 기사에 묶인 한반도 점령 시나리오 기사그런데 젠-10 전투기 특집난에 관련 기사로 묶여있는 글 하나가 눈길을 끈다. '중국은 대담하게 한반도에 출동해 평화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는 글이다. 제목은 고급스럽지만 내용은 중국군의 한반도 장악의 필요성과 시나리오다. 이 글은 국내 포털사이트 '다음'의 '아고라'와 비슷한 시나닷컴의 '시나논단'에 '지우텐무싱'(九天牧星)이라는 아이디의 네티즌이 쓴 글이다. 어째 아이디부터 범상치않다. 대체 어떤 내용이기에 중국 최대 포털인 시나닷컴 편집자의 눈에 띄어 배치되었는지 궁금했다. 한번 요약 번역해 봤다.
▲ 중국 시나닷컴에 실린 한 네티즌의 한반도 점령의 필요성과 시나리오
한반도는 중국의 전략적 요충지대(소와 같은 짐승의 방어수단인 뿔로 비유-편집자 주)로 역대 중국 정부가 중시했다. 특히 한반도 북부 정권은 대부분 우리 정부의 보호를 받았거나 우리 국토의 일부분이었다. 한반도가 해양세력(특히 일본)으로부터 침략을 받을 때 우리는 몸을 일으켜 나섰다. 그 무능한 만청(晩淸) 정부도 내우외환의 상황에서도 이씨 조선에 대한 일본의 침략을 격퇴하기 위해 출병했다. 이는 한반도의 안전이 중국의 전략적 안정 확보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그래서 옛날 마오쩌둥 주석을 핵심으로 한 당 중앙은 건국 직후 엄청난 일이 산적해있음에도 불구하고 유엔군에 맞서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戰爭·한국전쟁)을 벌였다. 이로 인해 우리 국토가 옛 소련처럼 해체되는 일을 피할 수 있었다.현재 한반도는 다시 전쟁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한·미 연합군에 의한 공격, 한국군 단독 공격, 북한 내부에서의 내란 등 3가지 가능성이 있다. 만약 이 가운데 한가지 사태라도 발생한다면 필연적으로 중국의 전략적 안전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인데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 것인가?일부 '지식분자' 들은 북한에서 전란이 발생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강건너 불구경 하듯이 국경을 폐쇄하기만 하면 되며 북한이 점령당하는 것은 우리와 상관없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경제 건설에 영향을 받을 뿐 아니라 강적을 만들어낼 뿐 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북한 정권이 무슨 허튼 짓을 하든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미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북한 사태 강건너 불구경 안된다"만약 '지식분자'들 이런 관점이 현실이 된다면 중국의 국가 전략적 비극이 도래할 것이다. 수십만·수백만의 북한 난민들 심지어 무기까지 탈취한 가진 북한 군대가 밀려들텐데 국경만 폐쇄한다고 될 것인가?더구나 북한은 줄곳 번시(本溪·중국 랴오닝성 중부에 자리잡고 있는 공업도시) 이동의 땅은 자기들의 영토로 생각해왔다. 한번은 김태양(김일성 주석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임-편집자 주)이 열차를 타고 중국 땅을 거쳐 러시아에 간 적이 있다. 절반 쯤 갔을 때 "어디까지 왔나?"라고 묻자 수행원이 "번시"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김태양은 "아! 아직도 우리나라 땅을 벗어나지 않았구만"이라고 말했다.패배한 북한군들이 중국 땅에 건너와 유격전을 벌인다면 우리는 이들을 토벌할 수도 그렇다고 하지 않을 수도 없다. 만약 토벌하지 않는다면 미·한 연합군은 우리 국경까지 밀려올 것이다. 만약 토벌한다면 우리나라의 조선족들은 무슨 생각을 할 것이며 국제 여론은 어떻게 볼 것인가? 중국은 흉폭한 악당의 오명을 뒤집어 쓰게 될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북한의 멸망을 방치한다면 전략적 방호벽은 없어질 것이며, 적들이 우리 집안에까지 칼을 들고 들어와 위협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면 우리는 제2차 '항X원조전쟁'(X로 표현한 것은 미래에 대항할 적이 미국일수도 있고 아니면 한국·일본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편집자 주)을 준비해야 할 것인가? 현재 우리의 종합 국력과 국제적 지위는 훨씬 더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다. 적극적으로 행동하면 곤란한 처지를 면할 수 있다. 필자에게는 한가지 계책이 있으니 출병해서 (한반도를) 장악하는 것이다. 모두들 (지난 1995년) 미군과 영국군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내전에 개입했을 때 러시아군이 갑자기 전쟁터에 출연하자 미국과 영국은 이에대해 속수무책이었다. 현재 우리들은 당시 러시아 군보다 더 강한 후방 지원 능력을 가지고 있다.그러면 어떤 상황에서 한반도에 출병해야 할까? 첫째는 어떤 외국 군대도 삼팔선을 넘을 수 없으며, 만약 그럴 경우 중·북 우호조약에 따라 삼팔선 부근으로 중국군이 출동할 것이라고 결연한 성명을 발표하는 것이다. 우리의 목적은 오직 평화 수호에 있다고 밝혀 도덕덕 승리를 확보해야 한다. 물론 만약 전쟁이 발생한다면 우리들은 감연히 칼을 뽑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대만도 수복할 수 없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북한과 대만은 전략적으로 이미 일체다. 두 번째는 외국군이 참전하지 않을 경우에도 북한에서 벌어지는 내전의 화염이 압록강으로 번질 수 있다는 점이다. 중국군은 능동적으로 대동강 선으로 출병해야 한다. 동시에 엄격하게 국경을 폐쇄하고 중·북 국경지대에 난민촌을 건설하고 북한의 핵시설을 장악하며 필요할 경우에는 철저하게 파괴해야 한다.세번째는 적극적인 중재와 회담을 주선하고 고구려 왕조의 재건립을 갈망하는 미친 정권에 대항해 북한 안 친중파를 보호·유지해야 한다. 한국은 현재 히틀러식 미친 무리들이 존재하고 있다. 이들은 중화문화도 한국인들이 창조했고 단오절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했다. 그들은 이미 수백년된 서울의 명칭을 한성(漢城)에서 쇼우얼(首彌)로 바꿨고 한강(漢江)도 한강(韓江)으로 바꿀 계획이라고 한다. 중의학(中醫學)도 한의학(韓醫學)으로 변경했으며 중국 대부분의 영토가 그들의 영토라고 주장한다. 지난해 우리가 지린성 창바이산(백두산)에서 공사를 하자 허튼 소리를 늘어놓았다. 현재 남북한 모두 '삼한통일'의 계획을 가지고 있는데, 중국의 조선족 밀집거주지역, 러시아의 고려인 밀집거주 지역을 통합해서 과거 고구려 왕조를 재건립하려는 것이다.--------------------------
ohmynews 에서 퍼왔습니다만...
우리도 치밀하게 대중국전략을 세워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북한과 통일이 된다해도 가장큰 문제가 될것이 중국이고요...
우리도 우리땅을 우리손으로 되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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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글터] 크리스마스와 성탄절?
12월 25일은 연인들이 가장 기다리고 솔로들이 가장 증오하는 크리스마스입니다.이런 크리스마스를 여러분은 어떻게 부르십니까? 크리스마스? 성탄절? 저는 크리스마스를 성탄절이라고 부르는 사실에 대해 분개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경위로도 크리스마스는 성탄절로 번역될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성탄절은 정말 말도 안되는 번역이고 써서도 안되는 말입니다. 왜냐... 그것은 두가지 글자가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 중 첫번째로 문제가 되는 글자는 바로 '절(節)'자 입니다. 우리나라 공휴일에 쓰이는 용어는 2가지입니다. 일(日)과 절(節)이지요. 당연한 이야기지만 둘로 나뉘어 쓰이는 것은 두 용어에 격이 틀리기 때문입니다. '절'의 사전적 의미는 24절기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더불어 추석, 설날, 단오, 한식 등의 전통의 명절을 일컬어 절이라 부릅니다. 다만 추석이나 설 등은 흔히 단독으로 명칭되어 왔기 때문에 굳이 절을 붙여 부르지는 않습니다. '절'의 또다른 의미는 '국경일'입니다. 한마디로 국가적으로 경축할, 혹은 경건해야할 사건이 일어난 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삼일절, 광복절, 제헌절, 개천절 등등, 이 가운데 하나라도 국가 혹은 민족적으로 중대한 날이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분 계십니까? 개천절이 약간 의심의 소지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분명 충분히 중대한 날입니다.이에 반해 '일' 혹은 '날'은 국가적인 경축일은 아닙니다. 그저 국가 혹은 단체가 특별한 행사를 목적으로, 혹은 '절'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중요한 날로 여겨서 공휴일로 만든 날입니다. 식목일, 현충일, 석가탄신일, 한글날,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등이 있지요. 그렇다면 성탄'절'은 어떻게 '절'로 불리울 수 있을까요. 기독교, 천주교의 숭배대상인 예수님이 태어나신 날. 이 날은 전적으로 기독교 신자에게만 중요한 날입니다. 우리나라의 국교가 기독교 혹은 천주교이거나 아니면 기독교도 및 천주교도가 우리나라에서 80~90%에 달하는 절대다수를 점하고 있다면 혹시 또 모를 일이지요. 하지만 종교의 자유가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우리나라에서 예수님의 탄신일은 국가적으로 경축해야 할 날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탄절'에서 '절(節)은 잘못된 글자입니다.물론 기독교 및 천주교에는 성탄절 이외에도 많은 '절'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국가적으로 인정하는 경축일은 크리스마스 하나 뿐이지요. 크리스마스를 제외한 다른 '절'은 논거의 대상이 아닙니다. '절'이라는 글자가 국가가 특허권을 낸 것은 아니니 기독교에서 내부적으로 경축하는 날에 '절'을 사용한다 한들 문제가 될 것은 아무것도 없지요. 하지만 '성탄절'은 다릅니다. 국가에서 인정하는 경축일인 만큼 그 날의 취지와 의의를 따져서 적합한 품격의 용어를 부여해 주어야지요. 그렇다면 크리스마스는 성탄절이 아닌 성탄일이 되어야 합니다.두번째 문제가 되는 글자는 바로 성(聖)입니다. 단, 이 부분에 대해서는 그저 개인적인 푸념에 불과할 지도 모르니 심각하게 받아들이실 필요는 없습니다. '절'에 대한 문제에 대해 열성적이신 기독교도분들께서 반론을 제기하신다면 논쟁해드릴 용의 및 의무감은 있지만 '성'에 관한 부분은 전적으로 저의 개인적 견해이므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아 주십시요. 聖의 원래 의미는 무엇일까요. 성스러운? 신령스러운? 고결한? 등등 많은 이야기가 나오실 수 있겠지만 위에서 말한 모든 의미는 절대적으로 기독교로부터 비롯된, 엄밀하게 말해 틀린 의미입니다. 물론 여러분께서 옥편을 뒤져 보신다면 아마도 위와 같은 의미가 적혀 있을 것입니다. 위와 같은 의미인 것은 맞지만 그 의미가 여러분이 머리속에서 떠올리는 그런 의미는 절대 아닙니다. 聖은 당연히 한자이니만큼 중국 및 한자 문화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한자 문화권은 결코 유학과도 떼어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즉 聖은 철저하게 유교적인 글자입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신 聖人 과 기독교에서 말하는 聖人을 여러분은 같은 의미라고 생각하십니까? 聖의 원래 의미는 완성된 것, 즉 成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나 成보다도 더욱 더 완벽한 모습 그것이 聖입니다. 유교에서 말하는 모든 禮에 어긋나지 않는 삶을 살며 만백성을 위하고 평화로운 일생을 보내는 사람, 그것이 바로 聖人입니다. 그러므로 聖의 의미는 결코 기독교와 눈꼽만큼의 연관성도 없습니다. 그러나 어찌하다보니 기독교가 한자 문화권에 포교해 들어오면서 聖을 기독교에 적합한 단어로 생각하고 선점해버린 것입니다. 불교가 仙이나 敎를 점유했듯이 기독교도 聖을 기독교용 단어로 점유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절대로 성탄절이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제 주위에서도 그런 말을 쓰면 난리납니다. 당연히 원어인 크리스마스로 써야 할 일이지요. 아니면 성탄일로. 그리고 저는 일부러 예수탄신일이라고 씁니다. 이것은 결코 기독교를 모독하려거나 비하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나라에서 기독교, 천주교와 맞먹는 지위를 가지고 있는 불교에서도 그 숭배 대상인 석가모니의 탄신일을 석가탄신일이라 부릅니다. 석가는 샤카무니를 음차해서 한문으로 쓰는 것이지요. 붓다는 한사람이 아니기에 부처탄신일이라고 쓸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현생에 태어나 중생을 계도한 유일의 붓다인 샤카무니의 탄신일을 기리는 것이지요.크리스마스도 하등 다를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예수님탄신일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이미 탄신이라는 말에 충분한 경의가 들어있는바 그냥 예수탄신일이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일부 극렬 혐신도분들은 야소탄신일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이건 명백하게 타 종교를 배척하는 행위지요. 이 말은 쓰지 말아야겠습니다.- 아무튼 결론은 '성탄절'은 쓰지 말자 입니다. 최소한 성탄일이라고 부르자! 그게 좀 불편하면 그냥 크리스마스라고 원어로 부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