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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남미 난민따라 전염병 퍼져
남미가 아프다, 베네수엘라 난민 따라 퍼지는 전염병경제난 탓 보건의료 시스템 붕괴결핵 등 병 걸린 채로 조국 탈출콜롬비아 등 인접국에 질병 퍼트려브라질서는 18년 만에 홍역 발생살인적 인플레이션과 물자부족 등으로 베네수엘라인들의 대탈출이 이어지는 가운데 이들 난민들의 취약한 건강상태가 주변국의 중대한 위협요소로 떠오르고 있다. 베네수엘라의 공중 보건시스템이 붕괴되면서 난민들이 말라리아, 황열병, 디프테리아, 댕기열, 결핵, 후천성면역결핍증(AIDS) 바이러스 등을 인근 국가로 퍼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외신에 따르면 2014년 이후 콜럼비아 서부지역과 브라질 북부지역에만 230만명의 베네수엘라 난민이 이주한 것으로 추산된다베네수엘라 국경에서 900㎞ 이상 떨어진 브라질 아마존주 마나우스시에는 18년간 발생하지 않았던 홍역이 올 들어 다시 확산되고 있다지난 3월 4건의 의심 사례가 보고된 것을 시작으로 지난달까지 약 1,000명이 확진 판정을 받는 등 맹렬하게 확산되고 있다. 브라질 보건당국에 따르면 북부 아마존주와 로라이미아주에서 올해 2,000명 가량의 홍역 확진판정 환자가 발생했으며, 이 중 12명이 사망했다. 범미주보건기구(PAHO)에 따르면 홍역은 브라질, 콜럼비아, 페루는 물론 대륙 남단 아르헨티나로까지 퍼지고 있다. 미 국립보건기구(NIH)의 남미전염병연구자 아이린 보쉬박사는 1일 월스트리트저널(WSJ)에 “적절한 의료적 조치 없이 국경을 넘는 이들로부터는 수백만 가지 문제가 야기될 수 있다”면서 “공중보건 관점에서 보면 이는 더 나빠질 수 없는 ‘퍼펙트 스톰’의 상황”이라고 우려했다. 베네수엘라의 경제가 회복되기 전까지 이런 상황은 개선되기 어려울 전망이다. 90만명 이상의 난민이 유입된 콜럼비아의 경우 2021년까지 최소 180만명에서 최대 400만명의 베네수엘라 난민이 더 쏟아져 들어올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WSJ는“국제 의료계에서는 베네수엘라 난민사태로 인한 남미의 보건상황이 결정적 위기국면에 도달했다고 경고하고 있다”고 밝혔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469&aid=0000338490유엔방식 실패한것임 유엔은 입으로 멀뚱멀뚱 보고만 있다가 받으라고 하고 돈으로 다 해결할려고함유엔는 난민 발생안하게 그나라를 빨리 해결하는쪽으로 가야함순간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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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미드 ZOO 시즌 2
작년에 시즌1으로 방송을 시작했던 미드 주(zoo)가 시즌2로 돌아왔습니다.사건이 어떻게 흘러가게 될지 조금 더 지켜봐야겠네요.마지막 에피소드에서 치료제를 만들 수 있는 표범과 같이 살아난 제이미를 구출하러 팀원들이 떠나는 것으로 막을 내렸었는데,과연 그 내용이 어떻게 이어질지 한번 보실까요 성난 동물 무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열심히 도망치던 그들의 차를 들이받은 코뿔소.차는 망가지고 주유통이 망가져 차를 타고 더이상 도망갈 수도 없다.동물들이 변이돼 인간의 삶을 위협한다고 해도 어떻게 도심 한복판에 코뿔소가 나타나고 호랑이가 나타나는거지? 동물원 대탈출인가+_+;;새로운 변이 미드 zoo어쨌든 잭슨의 기지로 무사히 위험에서 벗어나지만 잭슨의 팔에 긁힌 상처는 새로운 불안요소가 된다.표범은 찾았지만 제이미에게 더이상의 운이 따라주지 않는건가?그녀를 찾으러 올 동료들을 기다리며 표범을 가두고 들떠 있던 것도 잠시, 제이미를 구해줬던 노인은 집밖을 나섰다가 그만 근처를 배회하던 동물에 습격당해 죽고 만다.설상가상으로 제이미와 표범이 머물고 있는 집을 공격하려는 야생동물들. 동료들을 만나기 전에 위험에 처하고 만다. 배를 타고 가려던 계획은 실패했지만 IADG소속의 엘레노아의 도움으로 제이미를 찾으러 캐나다로 향하지만, 제이미는 그들이 도착하기 전 집을 둘러싼 동물을 유인하기 위해 밖으로 나섰다가 외려 쫓기는 신세가 돼 스스로 탈출 기회를 놓치고 만다.어린 표범만 데리고 돌아온 일행, 미치는 제이미를 찾을 때까지 버티려던 자신을 억지로 헬리곱터에 태운 아브라함이 원망스럽다.헬리곱터 사건 이후로 말끝마다 뒤끝작렬하는 미치=_=ㅋ살상가상으로 제이미를 포기하고 데려온 표범에게서 채취한 샘플은 치료제 효과가 전혀 없다.여전히 변이가 진행 중인 동물들, 잭슨은 그와 비슷한 견해를 갖고 있는 마크 빅커스 박사를 만나러 아르헨티나로 향한다.그나저나 이들이 원하는대로 아르헨티나로 갈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제3자는 누구지? 안타깝게도 만나야 할 박사와 특공대원들이 이미 죽은 후에 도착했다.유일한 생존자 마잔 중위는 동료를 잃은 슬픔에 그를 공격한 변이된 인간에 단단히 화가 났고, 비록 박사는 만나지 못했지만 사람들을 공격한 변이된 인간은 잭슨 일행에게 부상당한 괴물은 연구에 다가갈 새로운 기회이기도 하다.마잔 중위는 절대 동의하지 않지만 연구를 위해 부상당한 괴물을 비행기에 가둔 뒤 잭슨과 아브라함, 중위는 변이의 원인을 찾으러 다시 숲으로 나선다.빨간 산성비가 내리는 숲, 이곳에 코끼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반쯤 정신을 놓은 생존자, 죽은 특공대 시체를 어디론가 옮겨나르는 독수리, 아르헨티나는 새로운 변이의 무대였다.한편 제이미는 집에 머무는 것은 더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판단에 그녀가 향할 마을 이름을 지붕 위에 메세지로 남기고 떠난다.언제 끝날지 기약할 수 없는 여정은 시작부터 애써 떠온 물병이 부주의로 엎어지고 계속되는 추위에 지쳐가는 찰나 새로운 인물을 만난다. 아니 그보다 자신보다 극한 상황에 처한 남자 로건을 구해준다. 동물변이에서 인간변이로 발전한 미드 주 시즌2.잭슨의 부상당한 팔이 위험한 이유이기도 하다.이미 원래의 혈액형을 바꿔버린 부상.잭슨에게도 변이가 나타날 것인가.미치의 연구가 끝나기도 전에 동료의 죽음에 화가 난 중위는 사람들의 반대에도 총을 쏴버리고 만다....시즌1보다 지지부진한 느낌으로 흘러가는 미드 주(zoo).동물들에게만 영향을 미쳤던 변이가 사람에게도 영향을 주게 되면서사건이 어떻게 흘러가게 될지 조금 더 지켜봐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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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B29의 위엄 두번째 이야기
모든 글은 디시인사이드 2차대전 갤러리 쉬발라님 글을 퍼왔습니다.
짤방> B29의 요코하마 폭격사진. (짤출. 라이프2차대전사. 이글 전체의 출처도 그 책)자, 과연 저 자욱한 폭연 밑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을까요? 우리 이쁜이들 준비됬나? 그럼 다함께 밑으로 내려가 보자. 영화 진주만에서 다들 봤다시피, 최초의 일본 본토 공습은 1942년 4월 18일의 둘리틀 폭격대에 의한 게지. 4월 18일 정오.. 상업 고등학교 학생인 17세의 이다 미노루가 기왓장 작살내는 폭음소리에 창문으로 달려가보니, 웬 엔진 두개 달린 뱅기가 지붕위를 스쳐날라가는 게 아닌가, 이런 씨빠빠!! 뱅기에 하얀 별이 그려져 있다!! 저게 바로 쌀나라 뱅기?!! 그 순간 항공기 옆구리에서 검은 깡통들이 후드득 쏟아져 내리는 게 아닌가! 그중 한 개가 집 지붕위에 떨어져서 처마에 걸렸다. (근데 이 쉑은 왜 학교 안가고 집에 짱박혀 있던 거지)우리 이쁜이들 같으면 뒤도 안돌아보고 컴퓨터챙겨서 토셨겠지만, 미노루 이 햏자는 평소에 방공 연습에 착실히 참여했기 때문에 저게 3kg소이탄이란 걸 알아보고 얼른 집에 있는 모래 양동이를 들고 뛰어올라가 빠지직 거리며 덜덜떠는 폭탄에 모래를 퍼부어서 껐다. 가까온 도로에 떨어진 소이탄 2개도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와서 종이 부대에 담긴 모래로 블로킹했다. 일본이 최초로 겪은 이 공습은 1시간만에 끝났고 12명이 죽었다. 경미한 피해이긴 한데... 일본 햏들이 겪은 충격은 상당한 거였다. 방공 연습같은 거야 그냥 시키는 거니까 시키는 대로 하긴 했지만, ㅅㅂ 실제로 미국 햏들이 여까지 날라와서 폭탄을 던지고 갈 줄이야.. 그래서 사람들이 종니 흥분해가지고 평소에 방공 연습때 하던 거 다 잊어버리고 우르르 옥상에 올라가서 뱅기 구경하면서 꺅꺅 거렸지. 사이렌 울리자 방공호에 들어간건 종니 모범생 초딩들 밖에 없었다.이다 미노루와 기타 등등의 사람들이 소이탄을 모래 양동이로 끄는 데 성공하는 바람에, 사람들은 소이탄 그 까이 꺼 걍 살포시 밟아 꺼줌 되겠네- 라는 그릇된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치만, 생각있는 사람들은 종내 덜덜덜 걱정했지. 도쿄라는 도시가 500평방km의 널찍한 평지에 나무와 종이로 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거대한 불쏘시개 라는 걸 아는 거다. 일본 집이라는 게 죄다 나무벽에 종이 창에, 짚으로 짠 다다미로 덮여있고, 부엌에서는 숯을 때거나, 한뼘도 안되는 깊이로 매설되어있는 가스관으로 가스를 끌어다 쓰고 있잖냐. 그래서 예로부터 도쿄에서는 대화재가 자주 났다. 대화재가 자주났는데도 소방시설은 빈약하기 짝이 없었음이다. 더구나 전쟁 무렵에는 소방 설비 유지요원들이 군대에 입대해버렸기 때문에 소방차의 20%는 수리 대기 상태였고 소방대의 지휘도 대개 군사훈련에만 관심있는 자들이 맡았기 때문에 소방대는 소방훈련보다 군사 훈련을 더 많이 받았던 것이다.그래서 군 지도부는 도쿄를 태워먹지 않기 위한 가장 확실하고 간단한 방법을 제시하였으니... 당연히 적 폭격기가 도쿄를 때릴 수 있는 범위 안에 적 기지가 없으면 되는 거 아냐?대륙에서는 버마까지 밀어버렸고, 밑으로는 뉴기니까지 밀어버렸으니 이거 참 쇠고기 안심이로구먼. 둘리틀 씨빠빠가 핳공모함에서 떴다고? 야마모토 햏, 미드웨이에서 그 미군 핳모들 다 뽀개주셈~ 미군 핳모들을 뽀개는 건 실패했지만서두... 미군도 둘리틀의 맨땅에 니킥넣기를 되풀이하진 않았다. B29 완성시킬 때까지는 참고 또 참는 거야. 베틀크루저 나오기만 해봐라, 쪽발 햏들, 해리 포터와 불의 잔을 원샷하게해주마.B29와 제로기와 보잉747의 크기비교둘리틀 폭격대의 공습이후, 일본 정부는 공습 대책을 개선하기 시작했다. 그 핵심 내용은- 10~12대 세대를 한 단위로 묶은 동네 반상회가 주축이 되어서 이 반상회 회장님이 각 가정마다 모래, 물탱크, 양동이, 삽, 빗자루 등등의 방공장비를 잘 구비하고 있는 지 감독하게하고- 반상회별로 양동이 릴레이 훈련을 실시하고 등화관제 규정에 대한 상 벌점 표를 만들어서 상호 체크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기적인 행동을 삼가고, 이웃을 방어하기 위해 단결하겠다]- 라고 서약하는 "필승의 방공선서"를 모든 시민들이 엄숙히 선서했다.......화재 진압 연습을 하는 반상회 회원 아줌마들. 아직 B29 구경을 못 해본 시절.반상회 회장이 하도 들들 볶는 통에, 도쿄 시민들은 씨부렁거리면서도 결국 엉성한 방공호를 집집마다 파긴 팠다. 그 위에 널빤지를 덮고 그 위에 흙 둔덕을 쌓은 다음, 미관을 위해 그 위에 꽃과 야채를 재배하도록 권장되었다.이 방공호 지붕은 방공 연습 때, 사람들이 들어가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그 위에 올라가 서있는 장소로 변했으니, 아무도 그 축축한 방공호 속에 들어가고 싶어하는 사람이 없었거든 (도쿄는 토질이 습해서 당장 지하수가 고였다). 그리고 어차피 불나면 다 뛰쳐나와서 소이탄 끄고 양동이 릴레이해야 하니까 지상에 나와있어야 됬거든. 시 당국은 물건 사러나왔다가 공습에 걸린 시민들을 위해 상점가에도 참호를 파게 했는데, 아 놔, 도데체 물건 사러나왔다가 참호에 떨어져서 발 뿌러먹고 머리 깨지고, 이게 뭔 삽질이래? (참호는 확실히 삽으로 팠겠지) 요렇게 인도를 다 파헤쳐 참호를 파놨따. 일정한 간격을 두고 놓인 큰 방화수 탱크에 대해서도 원성이 높았으니, 거기 괸 썩은 물이 모기떼를 들끓게 한 것이다.... 그렇지.... 이때는 아직 1943년. 모기를 욕할 여유가 아직 있었음이야.1943년 말에는 내무성이 도쿄에 방공 총본부를 설치했고, 이 방공 총본부가 맨 처음 한 일이 뭐냐면- 도쿄 지도를 펼치고- 지도위에 가로 세로 줄을 바둑판처럼 촘촘히 그은 다음에 그 선에 걸려있는 집은 다 헐어버렸어.불이 날 경우에도 그 빈 공간에 막혀 불이 더 번지지 않게하기 위한 방화대를 짠 것이다. 헐린 집에 살던 2만명은 정부가 제공하는 폐가에 입주하거나, 자력으로 새 집을 알아봐야했다. (전체주의 체제는 확실히 위에서 다스리기에는 편한 체제군)드디어 1944년 6월 16일에 일본 하늘에 B29가 처음으로 등장! 뭐 야와타 제철소등 규슈 여기저기를 까러 왔다는데, 뭐 별로 큰 피해는 없었음이야. 중국에서 날아오니까 너무 멀어서 규슈넘어 도쿄가 있는 혼슈까지는 오지도 못하고, 제대로 작전 기동하기도 빡세고, B29승무원들도 아직 이 아쎄이 뱅기 모는 게 능숙하질 않았고, 까마득히 높은 데서 떨구다 보니까 폭탄도 제대로 맞지도 않았던 게지. 빗나간 폭탄이 주택가에 떨어져도, 잘 훈련받은 반상회 회원들이 간단히 불을 껐던 게지. 그러나... 미군이 드디어 사이판과 티니언 섬에 상륙했다. 도쿄에서 2000km 밖에 안 떨어진 곳이야..... B29항속거리는 5600km고. 양퀴햏들이 순식간에 사이판과 티니언에 수백대의 B29를 주차시킬 비햏장을 만들기 시작했고, 도쿄의 고위층들은 드디어 '젖땠다'- 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거지. 그래서 일본 지도부 내에서는, 언제부터 상황이 이렇게 쥐를 쳐맞게 꼬였나 서로 탓하기 시작했다. ㅡ븅신들아, 내가 보르네오까지 병력 다 빼랬잖아 ㅡ씨파... 미드웨이에 나구모 씨빠빠 보낸 넘이 누구냐, ㅡ아흐.. 애초에 진주만부터가 실수였다니까 .. ㅡ븅딱들이 만주국 놀이 할 때부터 알아봤지... ㅡ메이지 유신때부터 좀 착하게 살아보자니까.....ㅡ사무라이 전통이 쫌 거시기하긴 거시기하지... ㅡ내 생각에는 나무에서 내려온 게 가장 큰 실수였던 거 같다.그렇게 서로 탓하기 다툼 끝에, 결국 도조 히데키가 1944년 7월18일 수상직을 사임했다.후임으로 조선 총독이었던 고이소 구니아키 장군이 수상이 되었지만, 이 양반이라고 뭐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었다.이 영감이 고이소 구니아키 수상드디어 1944년 11월 1일에 최초로 도쿄 상공에 B29 한대가 나타났다. 폭탄 떨구러 온건 아니고, 도쿄 방공체계가 얼마나 허술한지 사진 찍어가러 온 거였다.11월 중순에 6대의 B29가 다시 리허설을 위해 도쿄에 나타났다. 이때도 폭탄은 안 뿌렸다. 때마침 점심시간이라서 사람들이 길가에 모여 그것들을 구경했다.청명한 가을하늘에 아련한 엔진음을 남기며 날아가는 은빛 반짝임. 솔직히 그 광경 자체는 너무나 아릅답게 보였기 때문에 구경하던 사람들은 찬탄을 감출 수 없었다. (요격하러 뜬 일본 전투기들은 그 근처에도 닿지 못했고....)그리고 11월 24일 94대의 B29가 도쿄 근처의 공업지대 상공에 출현해 폭탄을 떨구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도 도쿄 시민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으니....사람들은 방공호로 들어가지 않고 B29를 구경하러 죄다 뛰쳐나왔다. 경찰은 사람들을 방공호에 몰아넣기 위해 계속 호루라기를 빽빽거려야 했고, 사람들은 높은 곳으로 올라가서 구경하려고 빌딩 옥상들에 다닥 다닥 붙었다.아직은 도쿄 시 외곽의 공장, 군사시설들만이 B29의 목표였고, 가끔 주택가에 잘못 떨어지는 폭탄은 거기 사는 사람이 운이 나빴다고 밖에 할 수 없었다. 안전하게 초고공 폭격만을 고집한 B29가 무사시노에 있는 거대한 나카지마 비행기 공장에 폭탄들을 떨궜지만- 그건 마치, 우리 이쁜이가 15층 아파트 옥상에서 50원짜리 동전을 던져서 지나가던 초딩을 맞추려는 시도나 다름없었다 (실제로 해보지는 말것. 맞으면 진짜로 죽을 수도 있다).가끔 경량의 마그네슘 폭탄이나 인(燐)폭탄이 튀어올라 지붕위에 떨어지거나 지붕을 뚫고 떨어질 때도 있었는데- 자루가 긴 대걸레나, 축축한 가마니등을 즉각 사용하면 끌 수 있었다. 사실상, 도쿄 시민들은 B29의 공습에 놀랐다기 보다는 차라리 매혹당했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 우리들은 이러한 초기의 공습 때 흥분과 서스펜스를 느꼈다. 오히려 모험감을 맛보았고, 민간인으로 있으면서도 전쟁의 스릴을 겪는 짜릿함에 심장이 두근두근 거렸다."-B29 구경 마니아였던 가토 마스오 기자대부분의 사람들이 저렇듯 B29를 즐겼던 거지. 사람들은 공습의 패턴을 파악하고 거기에 생활 패턴을 맞추기 시작했다. 보통 낮의 공습은 점심시간에 2~3시간 정도 계속되었다. 11월과 12월의 도쿄 공습은 .. 우연인지 일부러 그랬는지 모두 3의 배수 날이었다. 즉, 3일, 24일, 27일, 30일.... 주부들은 이런 3의 배수 날의 정오부터 3시까지는 집에 박혀있었다. 야간 공습기는 '거룩한 방문객' 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웠는데, 그것도 나름대로 재미가 있었으니, 사람들이 11시 30분 전후의 공습 사이렌 이전에 조금만이라도 자두기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게 되었고, 사이렌이 울리면 우르르 현관이나 방공호 지붕에 올라가서 밤하늘에 펼쳐지는 화려한 만화경을 감상하는 거지.탐조등 불빛의 대각선들이 이리저리 밤하늘을 가르고, 대공포화는 불꽃놀이처럼 빵빵 터져대고, 급상승하는 전투기, 멀리 보이는 화재의 불길 등등은... 자신들이 그 불길속에 있게 될 날이 오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던 사람들에게 '전쟁 구경'의 흥분을 제공했다. 옥상에 설치된 '방공포대'..........미 육군 항공대는 일본의 항공기 산업을 절딴내려고 계속 B29를 날려 보냈지. 무사시노의 나카지마 항공기 공장, 오무라,고베,오사카 등징의 항공기 공장을 노린 공습이 계속되었는데, 이 놈의 B29가 초고공을 날아서 좋긴 한데, 그 높이에선 폭탄을 던져도 목표에 맞질 않는 거다. 명중탄 비율이 20% 이하로 나타난 게야. 거기에 더해 두꺼운 구름까지 끼면.... 1945년 1월의 어느 흐린 토요일에 15대의 B29 편대가 무사시노 공장을 폭격하려고 했는데, 밑이 보이지도 않았지. 그냥 아무데나 던졌는데 그게 도쿄 한복판이었어.마침 도쿄에서는 군중들이 방공 사이렌의 해제소리를 듣고 우르르 거리로 다시 나왔는데, 폭탄 무더기가 5번가 긴자 한복판에 떨어진거야. 지하철 역이 직격탄을 맞아 수백명이 죽었고, 극장안에서 또 수백명이 죽었고, 고가 전철 철교 밑에서 또 수백명이 죽었어.무사시노 공장은 단 한발도 안 맞았고.B29한대에 대략 저만큼의 폭탄이 들어간다.육군 항공대의 B29가 그렇게 삽질하고 있을 때,... 2월 17일에 해군 항모에서 출격한 해군 함재기 편대가 무사시노 항공기 공장을 때렸어. 단 1회의 폭격으로 6차례에 걸쳐 수백대의 B29가 때린 피해보다 훨씬더 막대한 피해를 입혔지. 헬캣과 커세어 전투 폭격기는 저공으로 공장상공으로 진입해 들어와서 무사시노 공장의 항공기 생산 라인을 죄다 아작내버린 거야. 일이 그렇게 되버렸으니.... B29 체면이 그냥 씹창난거지. 아 씨... 저 기름만 잡아먹는 물덩치, 그냥 수송기로나 쓸까? 그러나, 하늘의 싱하형- 리메이 장군이 1월에 새로 21폭격사령부 사령관으로 임관해왔다! 형왔다 . 45년 8월 15일까지 존내 떨어라. (리메이 햏의 애정어린 폭격에 대해서는 이전 글들 참조)리메이 햏은 일본의 도시 그 자체를 표적 삼아 저공 폭격으로 몽땅 지져버린다는 깜찍한 전략을 제시했다.그리고 이제 그걸 시작할 참이다.2월 25일. 시험적으로 도쿄의 공장들과 노동자들의 목조 주택을 지져버리기 위해 B29 편대가 대량의 소이탄을 떨궜다. 이 230kg 짜리 소이탄 깡통들이 9000m 상공에서 떨궈졌는데, 때마침 몰아친 센 바람이 이 소이탄들을 대부분 도쿄만과 농촌쪽으로 몰아붙여서 도쿄에는 몇개 안 떨어졌다. 230kg 짜리 쇳덩이도 9000m 상공에서 떨어뜨리면 추풍낙엽처럼 바람타는 법이다.그러나... 리메이햏은 아직 진짜 카드를 꺼내지 않았다. 다음에는 B29들이 훨씬 낮게 날아올 것이다.M47소이탄은 30kg의 양철통으로, 지상 30m에서 폭발하면서 네이팜을 넣은 길이 60cm의 긴 원통 수십개를 광범위하게 뿌리도록 장치되어 있다. 그 원통들이 충격을 받으면 불타는 네이팜을 토해내고, 처음에는 파란 불꽃들이 수없이 파닥거리다가 순식간에 뭉쳐 거대한 불길이 된다.후속 폭격기들은 그 M47이 만든 화염을 겨냥해 M69라는 다른 형태의 소이탄을 투하하는데- 이것은 기름을 담은 3kg짜리 깡통이다. 그것도 백열광같은 불빛을 내며 공중에서 터지며 돌풍같은 불길을 일으킨다. 화염은 도로를 따라 번지고, 뒤따라오는 폭격기들은 점점 커지는 화염의 가장자리에 폭탄들을 투하해 화염의 범위를 더욱 넓혀간다.운명의 그날. 1945년 3월 9일. 심판의 금요일이 밝았다. 도쿄의 밤하늘에 강림하는 심판의 천사 (공중에서 불이 붙은 채 쏟아지는 네이팜탄)이날은 새벽부터 초봄의 산들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오후부터는 3월의 거센 바람이 일기 시작하여 저녁에 접어들면서 바람은 점점 더 강해졌다. 도쿄 시민들은 이런 바람이 부는 날에는 불조심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귀에 젖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그러나 불조심이라는 단어는 곧 기분 나쁜 농담이 될 것이다. 밤 10시 30분, 라디오 방송이 B29 편대의 도쿄 접근을 알렸다. 적기에 관한 정보는 도쿄만으로부터 남쪽으로 오가사와라 군도까지 이어진 일련의 섬에 배치된 감시원들에 의해 잇따라 중계되어 들어왔다. 얼마 후 첫번째 공습 경보 사이렌이 울렸다.밤12시 직전에 제 1번기가 동쪽으로부터 저공으로 급히 접근하여 30lkg짜리 네이팜탄 뭉치를 풀어놓았다. 그것이 땅에 닿자마자 지상에는 화염이 선을 그리며 분출하여 밤하늘을 밝혔다. 2번기는 스미다강 상공에서 1번기의 진로를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며 소이탄을 투하하였다. 1번기와 2번기가 교차하며 던진 소이탄으로, 도쿄의 공장, 상점, 소주택들이 몰려있는 도쿄의 동북지역에 거대한 불의 X자가 조용히 그려졌다.그리고 250대의 심판자들이 폭음을 울리며 3000m의 고도로 진입해 왔다. 도쿄 시민들은 그렇게 낮은 하늘에서 그렇게 많은 B29의 엔진 폭음이 울펴퍼지는 걸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이제까지의 B29놀이랑은 근본적으로 다른 상황이란 걸 다들 본능적으로 깨닫았다. 덜. 덜. 덜. 불의 X자를 기준삼아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네이팜탄과 기름뭉치들이 봄에 내리는 늦은 눈 처럼 도쿄의 은밀한 어둠속에 내려앉기 시작하고. 그 찰나의 순간과 함께 불꽃은 밤하늘 30m 높이까지 치솟았다. 시속45km의 지상풍에 힘입어 화염은 순식간에 옆으로 위로 사방 팔방으로 기세좋게 뻗어나갔다. 그 불의 쓰나미는 골목길과 애써 만들어놓은 방화대 따위는 있지도 않은 것처럼 뛰어넘으며 모든 유기질을 닥치는 대로 삼켜나가기 시작했다.처음 15분 동안에 목조 건물들이 밀집해 있는 구역이 거대한 불구덩이로 변했고, 화염의 열기 때문에 풍속이 시속 65km 이상으로 강해졌다. 시민들은 처음에는 소방훈련때 배운 대로 실천하려고 했다. 소이탄에 물이나 젖은 걸레를 퍼붓기도 하고, 양동이 릴레이를 조직하려고 시도했다. 경찰관, 소방대원, 훈련받은 구조요원들이 지시하는 대로 행동하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정부 당국은 각 동네의 시민들이 자기 할일을 완수하면 그 동네들은 무사할 것이고 결국 도시 전체가 무사할 것이라고 말해왔기 때문에.그러나 그 누구도 적기가 네이팜탄뿐 아니라 기름이 가득찬 25톤짜리 폭탄을 2.6평방km당 1개 꼴로 투하하고, 바람이 질풍처럼 회오리 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말 그대로 바람의 속력으로 밀려오는 불의 쓰나미에 불을 끄려고 시도하던 사람들도 잡아먹혀버렸다. 경찰은 사람들을 방화대, 공터, 혹은 이미 모든 게 다 타버린 장소로 이동시키려고 노력했다. 소방대원들은 살아남은 몇개의 소화전을 통해 화염에 휩싸인 거리를 뛰어다니는 사람들 몸에 물을 뿌려줬다. 불에 타죽지 않은 사람들은 뜨거운 연기에 질식하거나, 불이 산소를 모두 태워버려 질식해 쓰러져 죽어갔다. 도쿄의 동북지역에서는 피난민들이 간논사라는 절에 몰려들었다. 그 절은 오랜 세월, 도쿄의 숱한 화재들 속에서도 한 번도 불타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절이 관세음보살의 가호를 입고 있다고 믿었던 거다.그러나 경내의 정원에 불이 옮겨붙자, 절의 목조 건물과 수많은 수목들은 거대한 화장(火葬)용 장작더미가 되고 말았다.그 멀지 않은 곳에는 요시하라라- 공창가가 있었는데, 여기는 접대부들의 탈주를 막고 외부에서의 화재를 막기 위해 큰 철문들이 닫히게 되어있었다. 수많은 접대부와 손님들이 그 철문 안에서 죽어갔다.남쪽의 니혼바시근처에서 경찰들은 피난민들을 유명한 극장인 메이지좌로 피난토록 했다. 그러나 이미 도쿄를 가득 메운 불에 극장안의 산소도 부족해져갔고 마침내 무대의 막에 불이 옮겨붙자, 극장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화장로(火葬爐)로 돌변하고 말았다.동북지역을 가로질러 흐르는 스미다강은 화염폭풍으로부터 안전할 것 처럼 보였다. 그래서 양쪽 기슭에서 수만명의 사람들이 강의 얕은 물로 뛰어들어갔다. 그러나 도쿄 동북지역 전체가 화로로 변했기 때문에 스미다강도 끓어올랐다. 문자적 의미 그대로 사람들은 물속에서 삶아져 죽었다.다리위에 있던 사람들도 다리의 철골구조가 뜨껍게 달아오르자 물에 뛰어들어 죽어갔다. 3월 9일 밤 12시에 시작된 공습은 3월 10일 새벽 5시 공습 해제 사이렌 소리와 함께 끝났다.소이탄 불길에 직접 쏘여 죽은 시체 네이팜의 파란 불꽃은 1000도를 넘는 고온으로서 인체와 접촉할 경우 수분을 고속으로 증발시켜버리기 때문에 시체의 형태가 비교적 온전하게 유지된다.3월 10일 이후 도처에 시체가 쌓여있었다. 스미다강을 따라 걸어간 한 군의관은 강 기슭에 쌓인 시체들을 보았다."수많은 표류 시체를 보았다. 옷을 걸친 시체도 벌거숭이 시체도 모두 목탄처럼 검게 타있었다. 도무지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그들이 사람의 시체임에는 틀림이 없는데 남녀를 분간할 수 조차 없고, 그 곁을 떠내려가는 물체가 팔인지 다리인지 아니면 불탄 나무조각인지도 식별할 수 가 없었다."반상회 조직은 살아남아서 식량조달과 임시거처 마련을 위해 힘썼다. 군대가 파견되어서 시체들을 수습했다. 신원 확인이 불가능한 시체는 100구씩 모아서 커다란 공동 무덤에 매장하였다. 3월 10일 아침부터 수십만명의 대탈출이 시작되었다. 철도는 빠른 속도로 복구되어 그들을 실어날랐다.천황은 방공호에서 기어나와 나와 2시간동안 폭격지역을 둘러보았다. 단 한차례의 폭격으로 대략 25만동의 가옥이 파괴되었고 180만명이 집을 잃었다. 약 40평방km가 잿더미로 변했다. 사망자 숫자에 대해서는 아무도 확실하게 집계하지 못했다. 정부는 사망자 숫자에 대한 보도를 억제했기 때문에 12만명이 사망했다는 신문 보도는 발표되지 못했다. 프랑스인 기자 로베르 귀엥은 사망으로 간주되는 피해자 수가 19만7천명이라고 보고된 일본 문서를 접했다. 그 후로는 단 1차례의 폭격으로 그처럼 막심한 인명피해를 낸 일은 없었지만, 이 폭격은 공포의 시작에 불과했다.(폭격의 경과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B29덜덜덜' 이전 글들을 참고하시라)5월 24일의 공습으로 간판만 빼고 홀랑 다 타버린 궁성. 군대, 소방대원, 공무원등 1만명이 40대의 소방차를 동원하여 약 4시간동안 진화작업을 벌였다 (주택가가 훨훨타고 있는 동안). 천황가 삼종의 신기는 이때 도쿄 궁성에 보관되어 있지 않았다고 한다. 궁성의 정전을 포함해 27동이 홀랑 다 타버렸다. 천황은 황실 도서관 지하 방공호에 짱박혀 있던 덕분에 무사했다. 그리고 전쟁 끝날 때까지 거기서 살아야 했다.정부는 피난을 금지하는 명령은 내렸지만 수많은 노동자,시민들이 지방으로 달아났다.3월 14일의 오사카 폭격때 274대의 B29는 두꺼운 구름에도 불구하고 레이더를 이용하여 1733톤의 소이탄을 뿌렸다. 13만 4744동의 가옥이 파괴되었지만, 효과적인 방화대와 노동자 가옥의 분산화 정책 덕분에 사상자 수는 그리 크지 않았다. 오사카 소방국은 사망자 4천명, 그 두배의 부상자, 행방불명자가 500명이라고 발표했다.(확실히 관서기질이라는 것이 도쿄에 비해 사상자 숫자를 줄이는 데에 도움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3월 9일의 도쿄 공습 이후, 3월 11일 나고야/ 3월 13일 오사카/ 3월 16일 고베/ 3월 19일 나고야 순으로 진행된 리메이의 3월 1차 공습으로 이들 도시의 면적 82평방km가 불로써 지워졌다.이후 5월들어 공습은 더 큰 규모로 전개되었고 B29는 이틀에 한번씩 날아와서 목표물들을 지졌다. 7월 들어서는 사흘에 두번씩 날아왔다.그런 와중에 미신이 퍼졌으니, 무너진 집에서 상처 하나 입지 않고 용케 빠져나온 도쿄의 한 부부는 그 행운을 폐허더미 속에서 시체로 발견된 그들의 굼붕어 한쌍이 주인을 위해 대신 죽은 것으로 여겼다. 그들은 그 금붕어들을 가까운 절에 들고가서 정성껏 매장했다.소문이 퍼지자, 도쿄의 금붕어란 금붕어는 엄청나게 비싼 값으로 순식간에 다 팔려버렸다. 진짜 금붕어처럼 착색한 가짜 금붕어도 날개돋친 듯 팔렸다. 대동아 공영권 건설을 외치던 대일본 제국의 신민들이 금붕어보고 대신 죽어달라고 빌게 된 것이다.엉뚱한 소문들이 수도없이 나돌았지만 그 중 샒스러운 것 중 하나가 요코하마에 관한 것이었다. 도쿄의 바로 옆에 붙어있는 요코하마는 개전 후 한번도 B29의 폭격을 당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요코하마가 무사히 수개월을 넘기자- 사람들 사이에는 미군이 본토 상륙때 요코하마 항의 부두를 이용하려고 요코하마를 안 태우고 내버려 둔다는 소문이 퍼졌다. 요코하마는 안전하다고 믿은 도쿄 시민들이 도쿄의 마지막 숨통을 끊을 대폭격을 피해 요코하마로 향했다. 피난대열이 도쿄 요코하마간 국도를 가득 메웠다.아이러니컬하게도 미국이 그 시점에서 폭격에서 제외한 도시는 도쿄였다. 6회의 대폭격을 실시한 후 5월 말에 이르러 미국은 더이상 도쿄를 때릴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5월 29일 낮에 B29가 요코하마를 쳤다. 1시간동안의 폭격으로 요코하마의 절반이 잿더미가 되었지만 기적적으로 사망자는 5천명에 불과했다. 다시 가재도구를 버린채 요코하마를 빠져나가는 피난민의 행렬이 줄을 이었다.미군의 폭격 사전 경고 삐라. 일본인들은 궐기해서 독재자들을 몰아내라는 내용도 씌어져 있다. 이 삐라를 줍는 자는 징역 3개월이었다.전쟁이 끝나가는 걸 아쉬워하는 듯- 도합 2천대의 항공기가 동원된 개전이래 가장 대규모 합동폭격이 7월 10일에 결행되었다. 500대 이상의 B29가 오사카 근교의 와카야마와 사카이, 나고야 근처의 요카이치에 있는 정유소, 나고야 배후의 산중에 있는 기후, 도쿄에서 북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센다이의 5개 도시를 폭격했다. 함재기 1천대가 도쿄 주변의 비행장을 때렸다. 300대는 규슈의 비행장을 때렸고 나머지 항공기들은 오사카와 나고야를 폭격했다.그렇게 폭격은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되었다.사람들은 이제 더이상 파괴할 것조차 없겠다고 여길 정도가 되었다. 폭탄은 떨어진 곳에 다시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지만- 도쿄 사람들은 절대 그말을 믿지 않았다.7월까지 미국은 9만톤에 가까운 폭탄을 일본에 투하했고, 총면적 330평방km의 도시 26개를 초토화했다.건물 250만동이 소실되었다. 산업 생산량은 1944년 생산량의 약 40%로 떨어졌다. 석탄 생산은 반으로 줄었다. 정유량은 15%로 줄었다. 항공기 엔진은 4분의1로 줄었다. 총포,화약의 생산량은 45%. 알루미늄은 9%로 떨어졌다.7월까지 약 50만명이 폭격으로 죽었고 그 밖에 1300만명이 집을 잃었다. 옥외생활과 식량부족,영양실조, 결핵 또는 다른 질병으로 죽은 사람의 숫자는 파악되지 못했다.몇몇 사람들은 공업도시인 히로시마가 왜 끝까지 폭격을 받지 않는지에 대해 궁금해했다.그 궁금증이 풀리고 나서야 전쟁이 끝나게 된다
킬링필작성일
2012-01-01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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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스탈린그라드 전투사
<스탈린그라드의 한 임시 엄체에서 진로를 살펴보는 독일군 보병>
<전투가 완전히 끝난 1943년 2월 2일 붉은 기를 들고 스탈린그라드 도심 광장을 내려다보는 소련 병사>
<스탈린그라드의 붉은 10월 공장에서 벌어진 전투>
<폭격을 받아 불타고 있는 스탈린그라드시 전경>
<1942년 11월에 스탈린그라드의 소련군 제62군의 지하 벙커 전투 지휘소에서 제13근위소총사단장 로딤체프(맨 우측)에게
전투명령을 내리고 있는 츄이코프(좌측에서 2번째)>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 육군 제6군을 지휘한 파울루스 장군>
<스탈린그라드 시 남쪽에서 포사격을 하는 독일 포병 부대. 멀리에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최대 격전지 중 하나
였던 곡물 창고가 보인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한 뒤 곡물창고를 지나쳐 가는 독일군 포로들>
<볼고그라드의 마마이 고지에 세워진 스탈린그라드 전투 기념물들. 고지 정상에 52미터 높이의 "나라의 어머니"가
칼을 빼들고 서 있다.
러시아의 전쟁을 이해하는 열쇠는 러시아라는 나라 자체의 이해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독소전은 러시아의 전쟁만은 아니었다. 러시아 제국, 그리고 그 뒤에 세워진 소비에트 연방은 복잡한 민족 지리를 내포하고 있었다. 1940년에 러시아인은 소련연방 인구의 58%만을 차지했다. 러시아인말고도 기타 주요민족만 20개나 되었다. 그중 가장 영향력이 컸던 민족은 우크라이나인과 백러시아인이었으며 독소전의 대부분이 바로 이들의 영토에서 치러졌다.
전쟁은 러시아와 소련 문화의 많은 특징을 보여줬다. 그들이 위기에 강하고 굳센 것, 그들은 남자든 여자든 간에 혹독한 기후와 극단적인 노동 조건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 하지만 단지 그러한 혹독하고 모진 인생 경험만이 독소전에서 러시아인과 그밖의 민족들이 보여준 놀라운 단결력을 설명해주진 않는다. 보통의 사람들은 역사 및 지리, 이 2가지에 기반을 둔 전통을 보여주었다. 과거에 대한 존중과 예술에 대한 사랑, 자신의 뿌리에 대한 자긍심과 소속감이 얼마나 소련에 보편적이었는지는 독소전 당시 여러 이야기 중 오룔(Orel)시에 있는 투르게네프(Turgenev)박물관의 이야기를 들 수 있다.
투르게네프 박물관의 관장은 1941년 소련군의 후퇴 때 독일의 공격을 받기 전에 소장품을 포장해서 열차에 실었다. 러시아의 위대한 문학가들이 앉아서 문학에 대한 위대한 심상들을 떠올리던 낡은 소파들이 사람들 대신 피난열차에 실렸다. 열차가 역에 설 때마다 무시무시한 독일군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동쪽으로 가려는 사람들이 어떻게든 열차
에 오르기 위해 아수라장을 벌였다. 성난 피난민들은 박물관장에게 욕설을 하고 역플랫폼은 아비규환이 되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박물관장은 이 물건들은 위대한 투르게네프 박물관의 것이라고 설명했고 그때마다 사람들은 순순히 열차에 오르는 걸 포기했다.
이것은 소련대중이 예술에 얼마나 애착을 가졌는지 말해준다. 소련의 물리,수학자인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강제수용소에서도 슈베르트의 작품을 부르고 즐기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독소전을 알기전에 소련 사람들의 삶에 있는 이런 요소들을 무시하면 독소전은 이해할 수 없다. 수많은 소련인들이 2차대전에 휘말린 나라중 가장 처참한 통계를 내며 전쟁터에서 쓰러져갔다. 현재 일부 소련 학자들이 많게는 43,000,000~47,000,000으로 추산하는 인적 손실은 단순히 위로부터의 억압과 테러로 설명하기엔 너무나 큰 숫자이다. 러시아의 얼과 넋은 단순한 감상의 도구가 아니었다. 러시아의 얼과 넋은 보통 사람들에게조차 너무나도 중요했던 것이었다.
1942년 가을에 소련 인민들은 투쟁을 위해 정신적으로 스스로 무장을 했다. 모스크바에서 여름에 나타난 공황은 누그러졌다. 스탈린은 몇 해전만 해도 생각할수 없었던 애국심 소생의 선두에 섰다. 스탈린그라드는 이제 1년전 모스크바가 했던 역할을 해야했다. 스탈린그라드가 생존해야 하는 이유는 단지 군사적,경제적인 것만이 아니었다. 스탈린그라드는 로스토프의 재앙 뒤에 되살아난 도전적인 민족주의의 새로운 정신을 상징했다. 그 도시는 스탈린의 이름을 지니고 있었다. 내전기 당시 차리츠인으로 불리던 소도시를 구해내는데 스탈린이 한 역할을 기념해서 고마움을
표시하는 동료 공산주의자들이 1925년에 준 선물이었다. 그 후 10여년 사이에 볼가강의 한적했던 항구가 번창하는공업도시로 변해서 기계와 트랙터를 생산해 내는 거대한 공장들이 들어섰다. 그 공장들이 바로 스탈린그라드전투에서 가장 치열한 전선이 되었던 붉은 10월공장,바리카듸 공장, 트락토르 공장 등이다. 소련은 우크라이나를 잃음으로써, 카프카즈지역에서 나오는 석유와 식량이 볼가강을 통해 흘러나와 북부의 공업 도시들을 먹여살리는게 아주 중요해졌다. 따라서 이 지역은 소련의 전쟁 수행 노력에 매우 중요했다. 물론 스탈린그라드와 남부를 잃은 뒤에도 러시아의
나머지지역에서 계속 싸울수 있었지만 승리의 전망은 어두웠을 것이다. 양측은 이것을 알고 있었다. 방어자와 공격자 모두 스탈린그라드를 둘러싼 싸움이 독소전쟁의 결정적 전투 중 하나가 될것이라고 보게 되었다.
7월에는 독일이 매우 우세했다. 스탈린은 남부를 1942년의 주요 싸움터로 보지 않았다. 막대한 소련군 병력은 훨씬 북쪽이 있었으며 따라서 남부전선의 세력 차이는 공격자인 독일에게 유리했다. 소련군과 독일 및 그 동맹국 군대의 전력 대비를 보면 병력은 187,000명 대 250,000명 탱크는 360대 대 740대, 항공기는 330대 대 1,200대였다. B집단군은 거침없이 진격해서 돈 강을 건너 스탈린그라드로 향했다. 그곳에는 끝없는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그 황량한 지형을 가로질러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Friedrich Paulus)장군이 지휘하는 독일 제6군이 달려갔다.
소련군의 통신망이 무너지면서 소련군 지휘관들은 전투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갔다. 7월 느지막이 스탈린은 스탈린그라드 전방에 방어선을 구축하려고 애쓰고 있던 티모셴코 원수를 해임하고 고르도프(Gordov)장군을 스탈린그라드 전선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7월 23일에 독일 제6군은 치르(Chir)강을 따라 스탈린그라드에서 80마일 떨어진 곳에서 고르도프 휘하의 2개군 ,즉 소련군 제62군과 제64군과 맞추딪혔다. 이 2개군 앞에는 앞으로 넉달동안의 격심한 전투가 기다리고 있었다.
고르도프의 부대는 중무장 기동군에 맞서서 거의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메마른 초원은 독일 지휘관에게 편했다. 붉은 군대는 날이 갈수록 스탈린그라드 쪽으로 밀려났다. 8월 19일까지 파울루스는 카프카즈의 A집단군에서 파견된 제4기갑군의 지원을 받아서 스탈린그라드에 첫 공격을 가할 태세를 갖추었다. 8월 23일에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 북쪽의 볼가 강에 이르러서 강변을 따라 5마일 너비의 돌출부를 만들었다. 같은 날 독일군 부대가 도시 근교에 이르렀다. 독일공군이 폭격기 600대로
스탈린그라드를 폭격해서 도심 전역을 활활 타오르는 불지옥으로 만들었다. 소련측 추산에 따라면 이때 거주민 40,000명이 죽었다. 그 거주민들은 군 보급선을 막지 말고 도시에 머물러 있으라는 명령을 받고 있다가 독일군 폭격에 희생됐다. 파울루스는 자신만만하게 며칠 내에 스탈린그라드를 장악해서 볼가 수로를 끊어 북부로 가는 지원로를 막으리라고 생각했다.
스탈린은 재앙에 직면했다. 쥬코프는 스탈린이 이번에는 부하들을 탓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스탈린이 드디어 전쟁 첫해의 모든 결점을 자신의 책임으로 인정했다. 8월 27일에 쥬코프는 수도를 방어하는 서부 전선군 사령부에서 호출되어 모스크바로 갔다. 그는 그날 저녁 늦게 크레믈에 도착했고 그곳에서는 스탈린이 국가 방위 위원회와 위기를 논의하고 있었다.
스탈린은 쥬코프에게 직접 스탈린그라드로 가서 상황을 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 다음, 쥬코프가 최고 사령관 대리가 될 것임을 알렸다. 쥬코프는 새 직위를 받아들이고 스탈린과 차를 마신다음 스탈린그라드를 향해 떠났다. 쥬코프는 8월 29일에 남쪽으로 비행기를 몰아 볼가 강변으로 갔다. 그는 스탈린의 신임 참모 총장인 알렉산드르 바씰레프스키를 만났다. 두 사람은 전선을 안정시키려는 노력에 착수했지만 병력과 탄약이 너무도 부족했다.
9월 12일에 쥬코프는 다시 모스크바로 날아가 직접 보고를 했다. 바씰레프스키를 대동한 그는 스탈린에게 기존 병력으로는 전선을 지킬수 없다고 했다. 예비 부대가 필요했다. 스탈린이 자기 앞에 펼쳐진 지도를 심각하게 쳐다보았다. 스탈린은 스탈린그라드를 구하기 위해 무엇을 하는 것이 필요한지 명확한 구상을 가지고 다음날 오라고 지시한 뒤 두 사람을 돌려보냈다.
다음날 두사람은 크레믈로 지도 한 장을 가지고 와서 탁자 위에 놓았다. 말은 쥬코프가 했다. 그는 스탈린그라드를 향한 독일군 공세에서 기다랗게 노출된 측면을 가로지르는 반격을 가해서 파울루스를 포위하고 독일군의 전선을 깨뜨릴 것을 제안했다. 현실로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예상되던 독일군의 모스크바 공격에 대비해 스타프가가 모아 두었던 전략 예비 병력을 이용해서 이루어지는 반격을 준비하는데는 45일이 소요될 것으로 생각되었다. 소련의 작전은 독일군 후방을 멀리서 꿰뚫어 파울
루스와 나머지 독일군 전선 사이에 있는 강고한 회랑을 확실하게 열어야만 했다. 스탈린은 그 작전을 거부하지 않았다.
이 작전은 이점이 많았다. 진격한 독일군의 측면에는 취약한 루마니아,이탈리아,헝가리 사단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 사단들은 독일군 부대보다 무장이 빈약했고 분기로 가득한 붉은 군대와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식의 대결을 벌일 의욕이 적었다. 그들은 돌출부 가장자리를 따라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고 돌출부에는 이제 예비 병력이 거의 없었다. 독일군 자체가 힘이 달리고 있었다. 독일군은 이용할 수 있는 철도선 단 하나를 통해 보급 체계가 씨름을 했다. 연료와 예비 부품의 부족으로 독일 탱크와 차량의 운행을 유지하는게 힘들었다.
항공기는 거친 잔디밭 임시 활주로에서 뜨고 내려야 해서 연료소모율이 높았다.카프카즈에서는 A집단군이 신속히 전진하여 석유도시 그로즈늬이 전방의 전선에서 멈추었다. 독일군은 카프카즈 산맥의 통로에 이르렀지만 더 멀리는 전진하지 못했다.
파울루스는 도시 안에 있는 소련 제62군의 병력 부족에 시달리는 10개 사단에 맞서서 25개 사단을 운용했다. 그런데 타당성있는 논지를 통해 소련이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예측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1942년 후반기에 소련은 네 배나 더 많은 강철을 가진 독일보다 더 많은 탱크,항공기,대포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1942년과 1943년 소련의 군사적 소생은 난타당한 공업 경제의 회복에 있었다. 소련의 전쟁 수행 능력은 1941년 독일군의 공격을 받은 지역에서 기계,설비,인력이 극히 경이로운 대탈출을 했기에 복구할 수 있었다. 채 걸어서 몇시간이 안걸리는 거리에서 독일군이 몰려오는 상황에서도 수천 명의 기술자와 노동자들이 개미처럼 공장에 달라붙어 기계를 뜯어내고 설비와 주요물자를 가장 가까운 철도 수송 종점으로 운반했다. 이것들은 우랄 산맥,카자흐스탄,또는 시
베리아에 있는 목적지에 이르러 재조립되었다. 러시아 학자들은 1941년 후반기 동안 동쪽으로 옮겨진 기업체의 수가 최하 2,593개인 것으로 추측한다. 최종적인 총계는 거의 틀림없이 더 높았을 것이다. 25,000,000명이나 되는 많은 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공장과 함께 갔다. 이것은 역사상
견줄만한 예가 없는 인간의 대탈출이었으며 소련의 공업 경제와 농업 소생에 극히 중요한 요소였다. 이러한 유입으로 우랄공업지역의 노동력이 36%늘었으며 시베리아 서부와 볼가 분지에서는 증가율이 25%에 달했다.
천왕성 작전이라는 암호명이 붙은 소련군의 공격 계획은 한 가지 결정적인 요인에 성패가 달려 있었다. 그 요인이란 쥬코프가 전역을 조직하는 데 필요한 45일 동안 스탈린그라드의 방어자들이 버텨 주어야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당시에는 가능성이 거의 전무한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9월 초순 스탈린은 하루나 이틀 내로 스탈린그라드가 함락되어
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 남쪽을 꿰뚫고 소련군의 방어를 쪼개서 다시 한번 볼가강에 도달했으며 도시 안에서 강을 등지고 배수의 진을 친 소련 제62군이 독일 항공기와 포병에게 무자비하게 두들겨 맞았다.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 교외에 연결되는 깊은 골짜기를 거쳐 전진하여 도시의 구역들을 차례차례 봉쇄하고 점령했다.
9월 3일에는 독일군 일부 부대가 볼가 강에서 단 2마일 떨어져 있었다. 소련군은 북쪽의 노동자 거주 지구와 공장들, 중심 지대의 중앙 철도역과 강 선착장 주위 지역, 그리고 스탈린그라드 한가운데에 솟아 있는 작은 구릉인 마마이 고지로 몰렸다. 폭격과 포화로 건물들이 뒤틀리고 벌거벗은 잔해로 변했다.
<포화로 불타오르고 있는 스탈린그라드 시 전경>
전장을 지탱할 수 없어서 소련제62군 사령관 알렉산드르 로파틴 장군은 부대원들을 볼가 강을 건너 동쪽 강변으로 소개시켰다. 그의 상관들은 이것을 직무 유기로 보았고 로파틴은 면직되었다. 그리고 바씰리 이바노비치 츄이코프(Vasilii Ivanovich Chuikov)장군이 9월 12일에 제62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지위관을 잃고 뿔뿔이 흩어진 병사들을 한데 모아 더 효율적인 전투 부대로 묶어 내었으며 항상 독일군의 습성에서 배우고 그들의 약점을 연구했다. 그는 거칠고 건장한 사나이였으며 웃으면 줄지어 있는 금니가 드러났다. 그는 부하들이 견뎌 내는 것을 견뎌 냈고 머뭇거림 없이 죽음과 맞섰다.
그가 도착한 9월 13일에는 파울루스가 소련군을 최종적으로 강 쪽으로 밀어붙이기 위해 휘하 부대를 모아 놓고 있었다. 스탈린그라드에 도착한 츄이코프는 경악한 나머지 "도시의 거리는 죽어 있다. 나무에는 푸른 가지가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모든 것이 화염에 싸여 무너져 있다."고 썼다. 그는 군사령부가 들어서 있는 마마이 고지의 비탈에 급조된 엄체로 갔는데 거의 곧바로 전투에 휘말렸다. 독일군이 언덕으로 돌격해 오자 츄이코프는 어쩔 수 없이 차리차천이 볼가 강과 만나는 지점의 강둑으로 철수해야 했다. 그곳에서 그는 후텁지근하고 통풍이 안 되는 지하벙커에 군 지휘 본부를 급히 만들었다. 그의 생명선은 볼가강이었다. 작은 나룻배의 선단이 식량과 탄약, 그리고 증원군을 실어왔고 부상병을 가득 싣고서 다시 돌아갔다.
9월의 전투에서 붉은 군대는 볼가 강의 가장자리로 내몰린 동시에 인간이 가진 지구력의 한계 밖으로도 내몰렸다. 9월 13일에 시작되어 사흘동안 벌어진 치열한 전투에서 독일군은 중앙 기차역과 마마이 고지로 진격했다. 중앙 기차역은 15번이나 주인이 바뀌었다. 하지만 볼가강 저편에서는 이제 보내줄 것이 거의 다 떨어져가고 있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스탈린은 소연방 영웅 알렉산드르 로딤체프가 이끄는 제 13근위사단에게 빨리 달려가서 스탈린그라드를 구조하라고 명령했다. 제13근위사단은 전선 몇마일 뒤의 메마른 초원에 세워진 철도 종점에서 내려 탱크 15대와 한줌밖에 되지 않는 병력으로 독일군을 막아내고 있던 츄이코프를 구하기 위해 볼가강을 건넜다. 제13근위사단은 거의 100%에 가까운 인력손실을 입었지만 정말 필요한 때에 스탈린그라드로 투입되었다. 소련 제62군은 이들과 함께 볼가강 서쪽 강변의 얼마 안되는 지역을 계속 움켜쥐고 놓지 않았으며 스탈린그라드는 구원을 받게 되었다.
로딤체프의 부하들이 투입된 싸움터는 마치 대지진의 진앙지 같았다. 전 지역에서 불타 버린 건물에서 나온 짙고 거무스름한 재가 흩날렸고 포탄이 쿵 하고 떨어질 때 마다 달표면에 쌓여있는 회색 먼지같은 잿더리가 피어올랐다. 불타는 살에서 나는 악취가 날렸고 집중 포격이나 폭격이 새로 시작될 때마다 폐허가 다시 뒤틀렸다. 전선에는 분명한 테두리가 없었다. 소련군과 독일군의 사이는 수류탄 투척 거리를 넘지 않았다. 소련 군인들은 지하벙커를 통해 독일군 진지선 뒤에 갇힌 채로 전투를 계속 했다. 소련군은 거의 전원이 부상을 입었지만 경상자는 더 이상 전투에서 열외되지 않았다. 많은 중상자들은 그 자리에서 누운채로 죽었고 그들은 강물처럼 흐르는 쥐떼의 먹이가 되었다.
츄이코프는 부하들에게 적이 자기편을 타격할까 무서워서 우세한 공군력과 포병 화력을 전개하지 못하도록 최대한
독일군 진지선에 가깝게 붙으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굳이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아도 9월 하순 무렵에는 독일군 부대들이 볼가강변에서 불과 몇 백 야드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기에 떨어지고 싶어도 떨어질 수 없었다. 한편 강 너머에서는 소련군이 날리는 집중 포격과 로켓이 끊임없이 강을 건너 독일군 진지를 가격했다. 독일군은 곧 도시에서 벌이는 싸움이 초원을 가로질러 빠르게펼쳐지는 항공 및 탱크 작전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탈린그라드에서 독
일군은 짜증나도록 잡기 어렵고 독한 적과 싸워야 했다. 소련 편에 선 강인한 시베리아사람들과 타타르 인들이 칼과 총검을 사용해서 백병전에 능하지 못한 독일군을 공격했다. 낮이면 저격병들이 앉아서 독일군 측에서 움직이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노렸다. 베를린에서 저격수의 위협을 무력화할 명사수들이 왔지만 그들도 붉은 군대의 제물이 되어 쓰러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월 하순에는 시 중심 구역 대부분이 함락되었다. 소연방 영웅 광장에 있는 초대형 백화점 지하실에 숨어 있던 소련군인들은 백화점을 지키다가 죽음을 당했다. 파울루스는 백화점을 본부로 삼았다. 남쪽에서는 거대한 곡물창고에서 58일간의 농성이 벌어졌다. 독일군 탱크와 대포가 곡물 창고를 뒤틀린 골조로 만들자 각 층마다 소련군 수비대가 버텼다. 9월 25일에는 파울루스가 소련 제62군 잔존 병력 대다수가 포위되어 있는 북쪽 공단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원이 모자라는 독일군 3개 보병 사단과 2개 기갑 사단이 3마일 길이의 좁다란 전선을 따라 공격해서 하나를 제회한 모든 공장에서 소련군을 몰아냈다.
살아남은 소련군 부대는 바로 강변에 있는 바리카듸 공장으로 몰려들었다. 츄이코프의 다른부대들은 볼가 강변을 따라서 작은 여러 고립지역에 달라붙었다. 붉은 군대가 스탈린그라드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는 군사적 설명이 불가능하다. 붉은 군대는 스탈린그라드에서 말 그대로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초월적인 인내를 보였다.
츄이코프는 끝까지 부하들사이에 남아 그들을 격려했다. 그의 본부에 폭탄 공격이 가해지고 불붙은 석유가 밀려들어오는 위기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츄이코프는 부하들 사이에 남았다. 그의 결연함은 다른 이들에게도 퍼져 나갔다. 츄이코프는 스탈린그라드가 겪는 혹독한 시련을 견디지 못하는 자들을 용서하지 않았다. 전투 동안 정규 군인과 비정규 군인을 가리지 않고 13,500명 가량이 용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처형되었다고 알려진다. 하지만 그들이 모두 겁쟁이였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츄이코프는 결연한 사명감을 보여 주었고 이것은 그의 지휘를 받은 부하들의 사기에 반영되었다. 모든 나라 군인들과 마찬가지로 소련군도 자기가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하는지 알고 자신의 리더를 신뢰할 때 더 큰 힘을 발휘했다.
한편 볼가강 건너편에서는 스탈린그라드 전선군으로 개칭된 돈 전선군이 굳센 우크라이나 사람인 안드레이 예레멘코 장군의 휘하에 있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싸웠던 50대 남성부터 18살먹은 소년들까지 가리지 않고 모두 볼가강을 건너게 했다. 예레멘코는 전투 경험이 거의 없는 후방의 취사병과 정비병까지 내보냈다. 그들중 25%가량이 강기슭에서 몇 백야드밖에 떨어져 있지 않는 전선에 가보지도 못하고 죽었다. 하지만 살아남아 전선까지 간 자들은 달랐다. 그들은 그 어떤 전투보다 더 치열한 전투 속에 본능적으로 강인한 생존 본능을 개발했고 이들은 곧 훌륭한 군인이 되었다.
비록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츄이코프의 제62군은 혼자가 아니었다. 남쪽에서는 독일군에 의해 츄이코프와 분리된 소련 제64군의 잔존 병력이 독일군의 측면에 맞서 적극 방어를 유지했다. 강 너머에서는 스탈린그라드 전선군의 포격과 다연발 로켓 발사 장치, 즉 카튜샤(Katiusha)의 지독한 공격이 계속됐다. 독일군은 카튜샤를 두려워했다. 카튜샤는 각각 10에이커의 면적에 4톤가량의 폭약을 일제히 날려버릴수 있었다. 날아가는 동안 소리를 내지 않아서 소리를 듣고 피할 수 없었고 일단 발사된 로켓은 로켓에 장전된 폭약을 아주 불규칙하게 흩뿌려서 어디가 공격받을지 예상하기 힘들었다. 10월 무렵에는 소련 공군이 가담하기 시작했다.
한편 쥬코프와 바씰레프스키는 천왕성 작전을 마무리 손질하고 있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숱한 인명이 쓰러져 가는 희생을 치르면서 쥬코프는 자신이 가진 예비 병력을 스탈린그라드에 밀어 넣어 츄이코프를 구하고 싶은 유혹을 몇 번이나 이겨야 했다. 10월과 11월 동안 예비 병력,장비,군마를 양성해 내어 독일군의 기다란 돌출부 북쪽과 남쪽에 대한 전선을 강화했다. 붉은 군대는 병력 1,000,000명 이상, 중포 14,000문 탱크 979대 항공이 1,350대라는 대군을 배치시켰다. 다행히도 그 대군의 전개는 독일 첩보 기관에 걸리지 않았다. 독일 첩보 기관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예비 병력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오판을 하고 있었다.
11월 초순 소련군 총사령부는 작전의 정교한 세부사항을 놓고 토의했고 그 결과는 일선 지휘관과 사단 지휘관들에게 전달되어 작전 계획에서 자신이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명확히 파악하게 하였다. 11월 13일 쥬코프와 바씰레프스키는 스탈린을 찾아가 천왕성 작전의 최종 계획을 내놓았다. 스탈린은 모든 것에 동의했고 작전 개시일을 쥬코프의 재량에 맡겼다. 최종 점검을 한후 쥬코프는 북쪽 측면 공격일자는 11월 19일로, 남동쪽 공격일자는 11월 20일로 잡았다.
츄이코프는 그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츄이코프가 사생결단으로 싸우게 하기 위해 이 모든것은 츄이코프에게 극비리로 진행됐다. 천왕성 작전이 개시되기 까지 며칠간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결정적인 날들이었다. 히틀러는 파울루스에게 빨리 스탈린그라드전투를 끝내라고 재촉했고 결국 11월 9일 도시를 점령하기 위한 마지막 공세를 펼쳤다. 독일 육군 참모 총장 차이츨러(Zeitzler)는 히틀러에게 스탈린그라드를 포기하고 독일군 진지선의 길이
를 단축시켜야 한다고 요청했지만 히틀러는 "나는 볼가 강에서 물러서지 않는다! 나는 볼가 강에서 물러서지 않는다!"라고 고함쳤다.
파울루스는 11월 9일 이른 아침 시간에 7개 사단을 전진시켜서 소련 제62군을 다시 한번 쪼개는데 성공했다. 독일군 부대는 500야드 너비의 회랑을 뚫고 볼가 강에 도착했다. 이 부대는 강 반대편에서 쏘는 맹렬한 포화에 노출되어 공격받았다. 시 북쪽의 작은 교두보들이 독일군에게 포위되었고 마침 볼가 강을 덮기 시작한 얼음들로 말미암아 보급
마저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소련군이 거의 포기상태에 이를 무렵, 소련군은 독일군에게 가까스로 구원을 받았다. 11월 12일 무렵 사흘간의 전투로 인해 기진맥진해진 독일군이 공세를 늦춘 것이다. 힘이 빠질대로 빠진 양측은 참호를
파고 들어갔다. 붉은 군대는 서서히 공단과 건물을 하나둘씩 되찾았고 이로서 스탈린그라드 전투 최대의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그리고 11월 19일, 드디어 천왕성 작전이 시작되었다. 바투틴의 남서부 전선군과 로코소프스키의 돈 전선군이 이동 전진해서 루마니아 제3군과 약간의 독일 예비부대를 덮쳤다. 루마니아 군은 몇시간만에 무너졌고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소련 기갑 부대는 얼어붙은 초원을 가로지르며 지난번 독일군이 보여줬던 모습을 재현했다. 루마니아군은 공황에 빠졌고 11월 21일 항복했다. 27,000명의 루마니아 군이 포로가 되고 남쪽에서도 역시 소련 기갑 부대의 강력한
공격을 받은 루마니아 제4군이 똑같이 빠른 속도로 무너졌다. 나흘만에 소련군의 집게발 2개가 스탈린그라드에서 약 60마일 서쪽에 있는 돈강에서 만났다.
독일군 남부 전선은 혼란에 빠졌다. 붉은 군대는 초원을 스치듯 지나쳐 나아가서 폭 100마일이 넘는 회랑이 파울루스,독일 제6군,제4기갑군의 잔여 부대 등 총 330,000명이 넘는 병력을 독일군 전선과 갈라놓았다. 첫 반응은 탈출하려고 시도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히틀러는 파울루스에게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위치를 사수하라고 명령했고 히틀러와 함께 있던 헤르만 괴링은 항공기로 하루 500톤씩 보급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와 함께 폰 만슈타인 원수에게 회랑을 뚫고 스탈린그라드로 가서 포위된 군대과 육로로 접촉할 길을 만드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하지만 소련군 참모진을 이를 예상하고 있었다. 소련군 참모진은 파울루스를 둘러싼 원에 60개 사단과 탱크 1,000대를 채웠다. 12월 12일, 만슈타인이 비와 진눈깨비가 몰아치는 가운데 그 원을 공격할 때 그는 진격하
기 쉽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포위망을 뚫으려고 하는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 쪽으로 40마일정도 전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소련군은 예비 기갑 사단을 가지고 되받아쳤고 거꾸고 24일에는 만슈타인의 부대가 포위당할 위기에 쳐했다. 만슈타인은 서둘러 퇴각했고 파울루스는 완전히 고립되었다.
독일 제5군은 제4기갑군 일부와 이탈리아 군 및 루마니아군 잔존 병력과 함께 스탈린그라드의 고립지대에 같혔다. 구조될 가능성이 거의 없는데도 항복하면 안된다는 히틀러의 고집때문에 그들은 계속 싸워야했다. 이곳으로 독일 공군의 수송기들이 보급품을 가지고 갔지만 스탈린그라드 상공에서 이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신세대 고성
능 소련 전투기들이 개발되었고 이 전투기들은 소련군에게 제공권을 쥐어줬다. 독일 공군의 손실은 수송기 448대, 승무원 1,000명 이상이었다. 보급 작전은 실패했고 괴링이 약속했던 500톤의 보급품은 공급되지 못했다. 독일군이 받은 보급품은 하루 평균 100톤 미만에 불과했다. 12월과 1월의 악천후에는 이보다 훨씬 밑으로 떨어졌다. 파울루스는 가지고 있는 것으로 싸울수 밖에 없었다.
이제 전세는 역전되었다. 지금부터는 독일군이 당할 차례였다. 그들은 끊임없는 소련군의 포격,로켓,비행기의 공격을 받았다. 탄약과 예비 부품이 모자랐고 스탈린그라드의 1월은 영하 30도까지 떨어지는 혹한이었다. 온기를 유지하기 위해 그들은 찢어 낸 천 조각을 발과 다리에 두르고 무엇이든지 손에 잡히는 것으로 어깨를 덮었다. 식량 배급은 최소한도로 삭감되어 하루에 빵 2온스 설탕 0.5온스만이 배급되었다. 독일군 사이에서 사람고기를 먹는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한편 소련군은 독일군이 항복하지 않자 항공기 300대와 탱크 179대로 보강된 47개 사단병력으로 포위망을 조였다. 소련군은 공격 개시 이틀전에 파울루스에게 항복 조건을 전달했다. 하지만 독일군은 그것을 거절했고 전쟁중 가장 맹렬했던 포격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마지막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흘만에 소련군은 초원을 지나서 시 전방에 이르렀고 소련군의 맹렬한 포격으로 눈으로 쌓였던 하얀 초원이 검은색과 회색으로 변했다. 1월 17일 무렵 고립지대가 원래 크기의 절반으로 줄어들었고 파울루스는 다시 항복을 종용받았다. 하지만 히틀러의 지시가 없었기에 파울루스는 다시 거절했고 독일군은 뒤로 밀려나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에서 독일군은 츄이코프의 부대가 썼던 방법을 이용하여 소련군에 맞섰다.
1월 22일에는 소련군이 마지막 일격을 가하기 위해 재집결했다. 어떤 독일군 부대들은 항복이 죽음보다 나쁘지는 않기에 항복하기 시작했다. 독일군 수중에 있는 마지막 비행장인 굼락(Gumrak)에서 안전한 곳으로 가는 마지막 비행기에 타기 위해 자리를 차지하려는 광란의 쟁탈전이 벌어졌다. 장교들은 뇌물을 주고 자리를 매수했다. 붉은 군대는 도시 구역을 하나하나 차례로 고립시키면서 조여 들어갔고 1월 26일에는 드디어 전위부대가 바리카듸 공장 근처에서수개월 동안 고립되어 싸운 소련 제62군 병사들과 만났다. 두 부대 병사들은 서로 눈물을 흘리며 얼싸안았다. 병사들은 마지막 밀어붙이기를 하면서 혁명 영웅 광장으로 갔다. 소련군은 사로잡은 독일군 장교들을 통하여 1월 31일 점령된 혁명 영웅 광장 한쪽에 있는 백화점 건물에 파울루스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백화점 건물에 포격이 가해지고 화염 방사기가 불을 뿜었다. 독일군 참모 장교 한명이 건물 입구에 나와서 젊은 소련군 장교 표도르 옐첸코 대위에게 신호를 보냈다. 다른 군인 2사람과 함께 옐첸코가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지하실에서 더럽고 냄새나고 겁에 질린 독일군 수백명을 발견했다. 여기에서 옐첸코는 독일군의 항복에 대해서 파울루스가 아닌 그의 참모진과 합의했다.
드디어 그는 본부 뒤에 있는 어느 방으로 들어갔고 수염을 깎지 못하고 기분이 언짢은 파울루스가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다. 옐첸코는 파울루스에게 "자,끝났습니다."라고 말했다. 파울루스는 그에게 애처로운 눈길을 주면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뒤 차가 한대 달려와서 파울루스를 태우고 로코소프스키의 돈 전선군 본부로 갔다.
스탈린그라드 시 북쪽에서는 2월 2일까지 광적인 저항이 계속되었지만 그 후로는 별다른 저항이 없이 시는 잠잠해졌다. 항복 소식에 히틀러는 충격을 받았다. 2월 1일에 히틀러는 파울루스의 항복에 분통을 터뜨리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평시에 독일에서 한 해에 18,000명이나 20,000명 가량 자살을 선택했지. 심지어 그런 처지에 있지도 않았는데 말이야. 자기 부하들 5,6만 명이 끝까지 용감하게 자기를 지키다가 죽는 것을 보는 사람이 여기 있어. 그런 사람이 어떻게 볼셰비스트들에게 자기 몸을 넘겨줄 수 있을까!"
독일 제3제국 전역에 의기소침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다음날 독일 라디오는 바그너의 <신들의 황혼>에 나오는 지크프리트의 장례 행진곡을 되풀이해서 틀었다..
소련이 승리를 위해 치른 대가는 컸다. 붉은 군대는 또 500,000명을 싸움에서 잃었다. 그러나 처음으로 독일군의 손실도 전사 147,000명, 포로 91,000명이라는 파국적인 수준에 달했다. 이로서 독일군은 불패라는 평판을 상실했다.
전투가 끝난 뒤 며칠 동안 도시에서 가장 이상한 일은 고요함이었다. 새로 내린 눈이 폐허를 덮었다. 꽁꽁 얼어붙은 시체들이 여기저기서 으스스하게 눈에 띄었다. 독일군 패잔병들이 지하실에서 나와 잡혔고 소련군 병사들은 저격병과 부비트랩을 수색했다. 전투가 끝난지 며칠 뒤 첫 전쟁 기념물이 시가 내려다보이는 절벽들 중의 한 곳에 세워졌다.
그 기념물의 기초는 독일군 포로들이 만들어야 했다...
짠짠짠_작성일
2008-10-26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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