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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각 대학별 슬로건
서울대 : 누군가 조국의 미래를 묻거든 고개를 들어 관악을 보게 하라 / Veritas lux mea(라틴어 "진리는 나의 빛") 연세대 :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 YONSEI Standing Proud(세계 속에 자랑스러운 연세) 고려대 : 민족의 고대에서, 세계의 고대로 / 자유, 정의, 진리 서강대 : Be as proud of Sogang, As Sogang is proud of you(그대 서강의 자랑이듯, 서강 그대의 자랑이어라) 한양대 : 세계를 향하여! 미래를 향하여! / 사랑의 실천 성균관대 : 한국지성 600년, 미래인재의 산실 / 仁義禮智(인의예지) / Over the sky to the world best 이화여대 : 이화! 즐겁게 세상을 흔들어라 중앙대 : 의에 죽고 참에 살자 / 한국의 중앙에서, 세계의 중앙으로 한국외대 : 진리, 평화, 창조 / 내 꿈에, 세계를 플러스 경희대 : 뉴밀레니엄, 평화와 공존의 대학 / 그대 살아 숨쉬는 한 경희의 이름으로 전진하라 홍익대 : 예술과 학문의 만남 동국대 : 동국사랑 아름답게 동국미래 희망차게 건국대 : 시대를 앞선 지성, 세계를 향한 도전 숙명여대 : 세상을 바꾸는 부드러운 힘 인하대 : 인하에서 배우고 세계에서 펼치자 국민대 : 21세기 글로벌 시티즌을 양성하는 국민대학교 숭실대 : 진리와 봉사를 세계로 단국대 : 민족애를 바탕으로 인류사회에 공헌하는 전문인 양성 가톨릭대 : Three distinct campuses, One great University(각기 다른 세 캠퍼스, 하나의 큰 대학) / A Step Forward(한걸음 더)
성신여대 : 성신의 네가지 약속! 변화, 성장, 이상, 완성 / Bright Sungshin(빛나는 성신) 명지대 : 명지대학교는 나무처럼 늘 푸른 마음으로 사람을 키웁니다 덕성여대 : 나의 브랜드 발전소 / 나의 브랜드 파트너, 덕성여자대학교 동덕여대 : 변화를 꿈꾼다면, 변화의 시작은 동덕과 함께 - 세상 앞에 한 발짝 더 / 그녀가 가는 곳이 길이 됩니다 서울여대 : 나를 깨우고, 사회를 깨우고, 미래를 깨우는 대학 한성대 : 다르다 그래서 멋지다 삼육대 : 사람을 변화시키는 교육, 세상을 변화시키는 대학 서경대 : 북경엔 북경대, 동경엔 동경대, 서울엔 서경대 오산대 : 서울에서 가깝다고 걸어오지 마세요 / 우리곁에 항상 가까운 대학! 오산대학 포항공대 : 100%를 위한 1%, 포항공대와 함께 한국 과학의 미래를
존나멋지다..근데..
너희 광운대꺼 알아? "꿇어라 광운이다"
★★★★★★★
1. 서울대: 명실공히 대한민국 본좌. 그동안 理科에서는 카포대, 文科에서는 연고대의 도전을 받으면서도 절대 권력을 유지한 지존. 이제 국내에서는 더 이상 적수가 없고, 단지 외국대학들과 최후의 결전만을 앞두고 있다. 서울대 출신 議員과 長官의 숫자가 과반수를 넘고 있는 상황에서, 그 기득권 포기는 불가능에 가까울 듯. 최고에 걸맞지 않은 낡고 무미건조한 캠퍼스는 옥의티로 지적된다.
2. 연세대: 90년대 중반만 해도 國立大 본좌는 서울대, 私立大 본좌는 연세대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기세가 드높았지만, 현재는 理科는 카포대에 밀린지 오래고 文科에서도 고려대의 거센 도전에 밀리는 모습이다. 고려대의 LG-POSCO 경영관에 자극받은 연세대는, 세계적 건축 거장 '알바로 시자'를 영입하여 최신식 경영관을 신축 중이다. 이웃인 서강대, 이대와 함께 트라이앵글을 형성, 신촌 大學文化를 주도하고 있으며, 2005년 5월 신축한 매머드급 세브란스 병원은 연세대의 간지를 더해주고 있다.
3. 고려대: 해병대, 호남 향우회와 더불어 우리나라 최강의 인맥으로 평가 받음. 그동안 연세대에 밀리며 만년 私學 2等의 이미지를 풍겼으나, 고대=法大, 연대=經營 이미지를 깨고야 말겠다는 무서운 집념으로 몇 년 전부터 엄청나게 經營大를 띄웠으며, 거의 학교를 갈아 엎는 듯한 엄청난 투자로 국내 최고의 간지 캠퍼스를 만들며 대망의 세계 대학 200위권에 진입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인문계에서만 연세대를 따라잡았을 뿐, 아직 이공계와 의약학 계열은 연세대에 비해 더 분발이 필요하다.
4. 서강대: 서울대의 '鶴峴學派'와 쌍벽을 이루는 서강대의 '西江學派'는 선성장 후분배 정책을 주도하며, 1960-80년대 한국 經濟의 고도 성장을 이끌었다. 한 때 經營과 經濟, 新聞放送을 중심으로 이웃 대학인 연세대를 위협할 정도로 막강 위력을 보이기도 하였으나, 협소한 캠퍼스와 짧은 역사, 의대 및 예체능 계열의 부재로 끝내 본좌급 名門大 진입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특히 최근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로스쿨 및 연구중심 대학으로의 전환 움직임은 서강대를 더욱 우울하게 만들고 있다.
5. 성균관대: 한 때 모재단의 부도로 정부의 국제대학원 선정에도 떨어지는 등 비참한 처지였지만 삼성의 인수로 부활의 전기를 맞게 되었다. 그러나 一等主義를 강조하는 삼성에 별다른 성과를 보여주지 못해 늘 戰戰兢兢 중이며, 최근 반도체학과 학생 모집의 대실패와 삼성의 친아들인 ICU의 등장에 크게 긴장하는 모습. 전통의 강호 성대法大 출신의 막강한 법조계 인맥이 강세이고, 성대醫大는 서울醫大와 맞먹는 극강 인풋을 자랑하나, 서울醫大와 연세醫大에 비해 전통과 인맥에서 아직은 열세이다.
6. 한양대: 한 때 이공계 파워를 바탕으로 三大私學을 외치며 호기를 부리던 때도 있었지만, 20세기 산업화 시대에서 21세기 정보화 시대로 진입하면서 자연스럽게 쇠퇴의 길을 걷고 있다. 최근에는 카이스트와 포항공대, ICU 등 초일류 工科大學들의 부상으로 이공계 名門大가 되겠다는 포지셔닝에도 실패한 듯 보인다. 하지만 한양工大 출신들의 인맥과 맨 파워는 서울대 다음갈 정도로 막강하며, 그동안 착실히 쌓아온 설고연 다음가는 한양法大의 성과는 한양대의 로스쿨 유치에 밝은 희망을 주고 있다.
7. 중앙대: 演劇, 映畵, 放送 등의 예술 관련 분야로 일가를 세우며 발전했지만, 근래 실용학풍이 대세를 이루며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걸었다. 그런데도 최근 국악대학 육성에 의지를 보이며 예술 중심 대학을 선언한 국악인 출신 총장은 중대에 큰 부담이 되고 있으며, 가뜩이나 많은 중앙대의 민속학-아동복지-사회복지-문헌정보 등 비인기학과의 과잉 문제와 맞물려 몰락을 부채질 하고 있다. 간판인 신방과는 국내 최다 언론사 간부 배출의 자랑하며, 송도에 대규모 國際文化藝術 허브 조성 계획을 갖고 이다.
8. 경희대: 중앙대와 함께 인서울 中上位圈의 마지노선 대학이다. 공원과 같이 꾸며진 아름다운 하두리 캠퍼스와 韓醫-齒醫-醫學-藥學-韓藥-韓方으로 이어지는 보기 드문 의약학 라인은 경희대를 떠받치는 두 기둥이나, 이것만으로 名門大가 되기에는 부족해 보인다. 매년 8-9위권의 司試合格率과 행정학과 기준 역대 4위의 行試合格者 배출을 자랑하는 行政名門이다. 이를 바탕으로 한 법조계와 정관계 인맥이 두텁기로 유명하며, 곧 있을 로스쿨 선정 여부가 경희대에게는 최후의 심판이 될 가능성이 크다.
9. 이화여대: 과거 연고대 다음가는 名門大로 불리우며 女子大學의 본좌임을 자처했던 이화여대는 이제는 단국대, 아주대, 외국어대와 함께 최근 십 년간 가장 쇠퇴한 대학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큰 쇠락을 겪었다. 그것은 여대로서의 한계성 때문으로, 여자들만 들어갈 수 있다는 자체가 이화여대에게 큰 약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하지만 司試, 行試, CPA 등등의 각종 國家考試에서 지금도 매년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있으며, 현 國務總理를 비롯, 곳곳에 포진한 이대 동문파워의 위력은 가히 名不虛傳이라 할 만 하다.
10. 서울시립대: 과거 농업대학이 전신으로 1987년까지도 서울산업대로 불리우다, 綜合大學으로 승격이 되며 이름을 서울시립대로 바꾼 비교적 젊은 후발 주자다. 시립대의 간판인 稅務학과, 都市行政학과의 경우 상위 2% 이내의 막강한 인풋을 자랑하며, 이들 학과를 중심으로 매년 行試, CPA, 稅務士, 鑑評 등에서 우수한 성과를 올리고 있다. 그러나 과거 변변치 못했던 수준 때문에 다소 부실한 사회적 인맥이 단점이며, 근래 쟁쟁한 사립대학들의 치열한 경쟁 속에 공립대학으로서의 성장의 한계에 부딪치고 있다.
11. 한국외국어대: 과거 外交官 士官學校라 불리우던 외대는 졸업생들이 서울대, 연고대 인맥에 밀려 아프리카와 중동, 남미를 떠돌았음에도 불구하고 인기가 많았다.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연고대 떨어지고 외대가는 학생이 많았을 정도로 강세였으나, 해외여행이 자율화되고 어학연수가 보편화 되면서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걸어, 지금은 건동국단과 함께 五國大로 불리고 있는 실정이다. 간판인 英語학부는 지금도 상위 2.5-3%의 꾸준한 선방을 유지하고 있으며, 과거 극강 인풋의 英語학과 출신 동문파워는 위력적이다.
12. 부산대: 부산의 서울대로, 수도권을 제외한 地方의 綜合大學 중에서 최고의 본좌 학교이다. 이 때문에 로스쿨 및 연구중심대학 선정 등에서는 언제나 연고대와 함께 큰 수혜를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극심한 인서울 선호현상으로 과거에 비해 점수가 많이 낮아지긴 하였으나, 아직도 司法試驗, CPA 등에서 꾸준히 10위 안에 랭크되는 저력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工大 출신 대기업 CEO 배출 전국 5위 안에 들 정도로 이공계도 강세이다. 대한민국 제2의 도시 부산의 성장과 함께 앞으로 지속적인 발전이 예상된다.
13. 인하대: 인하대는 인천-하와이 대학의 줄임말로, 하와이 출신이었던 이승만 大統領과 하와이 교포들의 지원으로 설립되었다. 대한항공을 보유한 한진그룹이 재단으로 들어온 후 큰 발전을 이루었으며, 같은 한진 재단 하에 있는 항공대와 인하공전과는 兄弟 關係를 맺고 있다. 工大인맥의 경우 한양工大 다음갈 정도로 막강하며, 카포대 포함 전국 공대랭킹 10위 안에 드는 名門工大이다. 아태물류, 국제통상을 중심으로 文科도 뜨는 중이며, 탄탄한 한진그룹의 재원을 바탕으로 지속적인 발전이 예상된다.
14. 건국대: 건국햄과 건국우유, 동물병원의 튼튼한 자원을 바탕으로 축산학에서 동물학, 수의학으로 이어지는 국내 최고의 축산-수의 계열을 보유. 역대 政治人 배출 4위, 행정학과 기준 行政考試 7위, 4급 이상 公務員 출신학교 6위를 랭크하고 있는 막강한 法-政-行 라인업은 축산, 수의와 함께 건대의 자랑이다. 부동산학의 명문답게 최근에 학교 앞 야구장 부지를 거액에 매각하여, 그 자금을 학교발전에 투자하는 수완을 발휘. 지속적인 건국대의 허벌난 투자는 장래 五國大의 수장 자리를 예고하는 듯 하다.
15. 경북대: 부산대와 쌍벽을 이루는 지방 종합대학교의 본좌급 학교. 과거 부산대와 함께 서울 중상위권 대학들과 경쟁하며 盛世를 누렸으나, 수험생들의 극심한 인서울 선호현상으로 하락의 길을 걷고 있다. 매년 서울의 중앙대, 경희대와 司法試驗 합격을 다툴 정도로 法大가 유명하며, 아직도 대기업 등에서의 경북대 출신에 대한 선호도는 상당하다. 법조계와 정관계, 재계 등의 경북대 인맥은 훌륭하며, 앞으로 정부의 地方國立大 육성정책과 맞물려 다시 한번 재도약할 잠재력과 가능성이 충분한 학교이다.
16. 동국대: 최근 창학 100주년을 맞이했으나 사회의 지속적인 무관심으로 무언가 새로운 전기가 필요할 듯한 佛敎 大學. 우리나라 불교계를 이끌어 가는 대학으로 또 다른 불교대학인 중앙승가대와는 라이벌 관계지만, 동국대 불교철학과 도쿄대 인도철학은 우리나라 불교계 최고의 엘리트 코스로 평가 받는다. 警察行政學科와 演劇映畵科가 간판이나 특별한 시너지 효과를 내지 못하고 있으며, 최근 신축한 일산 불교병원도 건대병원에 비해 잘못된 입지 선정으로 큰 스포트라이트를 못 받고 있는 실정이다.
17. 아주대: 아주대는 프랑스의 지원으로 만들어진 한불기술대학이 모체로, 연세대 출신 김우중의 대우그룹이 아주대를 인수한 후 연세대와 함께 큰 성장을 이루었던 대표적인 대학. 그러나 대우그룹의 갑작스러운 부도와 해체 후 연세대와는 달리 大學評價에서도 대폭락을 하는 나락을 경험하였다. 그러나 한양工大와 더불어 그동안 쌓아놓은 아주工大의 브랜드 덕분에 최악의 사태는 모면하고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전반적인 이공계의 쇠퇴로 앞으로의 뚜렷한 비젼은 발견못하고 있다.
18. 홍익대: 홍익대는 과거 서울대 美術界와 대립하며 서울대에 버금가는 美術大學으로 유명했으나, 최근에는 실용 디자인 분야에서의 라이벌 대학인 국민대의 거센 도전을 받고 있다. 建築 등 미술 연계 전공이 발전했고 신촌에 입지한 것이 가장 큰 장점으로, 개방적이고 잘 노는 이미지로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많지만 학교 이미지에 비해 낙후되고 협소한 캠퍼스가 큰 약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홍대 정문인 멀티미디어관이 완성되면 외관은 좀 나아지겠지만 기타 건물이 너무 떨어지는게 현실.
19. 국민대: 과거 쌍용그룹 재단의 후원을 받으며 크게 성장하였다. 쌍용그룹의 몰락 후 아주대처럼 몰락을 예상했으나 그동안 쌓아놓은 디자인 및 藝術系列을 바탕으로 서울대, 홍익대와 함께 美術界 빅3을 형성하고 오히려 다른 학교보다 공격적인 투자를 통해 캠퍼스 면에서도 큰 변혁을 이루어냈다. 그러나 다른 五國大 그룹과 비교해서 지방 캠퍼스가 없고, 건국獸醫, 동국韓醫, 단국齒醫처럼 의약학 계열이 없는 것이 성장의 한계로 보인다. 장래 국민대에 경전철이 뚫린다면 새로운 발전의 전기가 될 수도.
20. 숙명여대: 과거 梨花女大와 함께 영부인 배출 순위에서도 경쟁 관계를 이루며 크게 발전했지만 최근 전반적인 여대의 하락으로 큰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지속적인 투자로 말미암아 장래 이화여대와 함께 여대 부문에서는 부동의 라이벌 관계로 굳어져, 이변이 없는 한 갑작스러운 몰락은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梨花女大가 의외로 안티 세력이 많은 반면에 淑明女大는 참하고 조신한 이미지로 상대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창학 100년을 맞으며 名門女大의 이미지를 굳히고 있다.
21. 숭실대: 1897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배위량(W.M.Baird) 박사에 의해 설립된 崇實學堂이 기원으로 우리민족 最初의 大學이다. 내실있는 학문을 추구하는 것으로 유명하며, 문과에서는 경영과 사회복지가 강세이다. 특히 숭실대 社會福祉학과는 교수 및 평판도 부문에서 서울대와 쌍벽을 이룰 정도로 유명하다. 숭실대의 간판은 컴퓨터공학 분야로 1995년 대한민국 최초로 컴퓨터학부를 창설하였으며, 이듬해 국내 최초로 IT대학을 설립하였다. 어딜 가든지 숭실대컴공 하면 알아줄 정도로 인지도가 있다.
22. 전남대: 광주광역시 북구 용봉동에 위치한 전남대학교는 광주-전라 지역에서 부동의 본좌급 국립대이며 부산대, 경북대와 함께 지방 종합대 빅3으로 불리우는 地方名門大이다. 매년 10위권의 司試合格者를 배출하는 法大가 강세이며, 서울의 서강대, 건국대, 시립대 등과 司試合格 순위를 다투는 저력을 보여주고 있다. 높은 司試合格率을 바탕으로 법조계와 정계에 많은 동문들이 진출해 있으며, 지역 안배를 고려한 로스쿨 선정시 광주-전라를 대표하는 전남대의 로스쿨 유치 가능성은 밝다고 볼 수 있다.
23. 단국대: 한 때는 동국, 건국과 함께 三國大를 형성하며 치의예 및 특수교육, 연극영화 등에서 두각을 나타내었으나 김영삼 정부 때 미운털이 박혀 부도의 위기를 맞아, 지금은 外國語大, 建國大, 東國大, 國民大 등과 五國大를 형성하며 겨우 명맥을 이어나가고 있다. 그러나 역대 長, 次官 배출순위가 9위에 이르고, 과거 잘나가던 시절의 인맥들이 사회곳곳에 포진해있어 갑작스럽게 몰락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2007년에 용인 죽전으로 캠퍼스가 이전할 계획이나, 이전한다 해도 큰 변화는 없을 듯 하다.
24. 세종대: 1940년 서울여자학원의 전신인 경성인문학원을 모태로 설립되었으며, 1979년 男女共學체제로 전환하면서 현재의 世宗大學校로 교명이 개편되었다. 경희대와 쌍벽을 이루는 호텔경영으로 유명하며, 호텔경영-관광경영-외식경영의 세종대 호경라인은 리츠칼튼 CEO, 바비엥 레지던스 사장 등 이 분야 굵직한 著名 人士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호경과 함께 체육-무용-음악-영화예술-만화애니매이션-회화-패션디자인-산업디자인 등으로 이어지는 막강한 예체능 라인은 세종대의 얼굴이자 상징이다.
여러분이 목표하시는 대학이 여기 있나요? 그렇다면 모두들 화이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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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각 대학교 슬로건 모음 (고3 자극용)|
서울대 : 누군가 조국의 미래를 묻거든 고개를 들어 관악을 보게 하라 / Veritas lux mea (라틴어 '진리는 나의 빛')
포항공대 : 100%를 위한 1%, 포항공대와 함께 한국 과학의 미래를
연세대 : 오라! 연세로, 가자! 세계로 / YONSEI Standing Proud (세계 속에 자랑스러운 연세)
고려대 : 민족의 고대에서, 세계의 고대로 / 자유, 정의, 진리
서강대 : Be as proud of Sogang, As Sogang is proud of you (그대 서강의 자랑이듯, 서강 그대의 자랑이어라)
성균관대 : 한국지성 600년, 미래인재의 산실 / 仁義禮智 (인의예지)
한양대 : 세계를 향하여! 미래를 향하여! / 사랑의 실천이화여대 : 이화! 즐겁게 세상을 흔들어라
한국외대 : 내 꿈에, 세계를 플러스
서울시립대 : 서울을 보다 세계를 보다 내일을 보다
중앙대 : 한국의 중앙에서, 세계의 중앙으로
경희대 : 뉴밀레니엄, 평화와 공존의 대학 / 그대 살아 숨쉬는 한 경희의 이름으로 전진하라
동국대 : 동국사랑 아름답게 동국미래 희망차게
건국대 : 시대를 앞선 지성, 세계를 향한 도전
홍익대 : 산업과 예술의 만남
아주대 : Dynamic Tomorrow Ajou
인하대 : 인하에서 배우고 세계에서 펼치자
부산대 :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 속의 명문대학
숙명여대 : 세상을 바꾸는 부드러운 힘
국민대 : 21세기 글로벌 시티즌을 양성하는 국민대학교
숭실대 : 진리와 봉사를 세계로
단국대 : 민족애를 바탕으로 인류사회에 공헌하는 전문인 양성
항공대 : 세계를 향한 날개짓의 시작!
성신여대 : 성신의 네가지 약속! 변화,성장,이상,완성 / Bright Sungshin
덕성여대 : 나의 브랜드 파트너, 덕성여자대학교
광운대 : 동북아 IT 최강대학
명지대 : 명지대학교는 나무처럼 늘 푸른 마음으로 사람을 키웁니다
상명대 : 색깔있는 대학, 푸른 꿈을 꾸는 대학
동덕여대 : 변화를 꿈꾼다면, 변화의 시작은 동덕과 함께, '세상 앞에 한 발짝 더' / 그녀가 가는 곳이 길이 됩니다
서울여대 : 나를 깨우고, 사회를 깨우고, 미래를 깨우는 대학
세종대 : 넓은 세계로 나를 이끄는 세종대학교
가톨릭대 : Three distinct campuses, One great University (각기 다른 세 캠퍼스, 하나의 큰 대학)
한성대 : 다르다 그래서 멋지다
삼육대 : 사람을 변화시키는 교육, 세상을 변화시키는 대학
서경대 : 북경엔 북경대, 동경엔 동경대, 서울엔 서경대
경기대 : New Start! New Kyonggi! / 한국의 얼을 지닌 세계와 미래를 위한 창조적 인재양성
경원대 : 한계를 깨고 더 높은곳을 향하는 대학총신대 : 세상의 빛이 되는 젊은 지성성공회대 : 인권과 평화의 대학
오산대 : 서울에서 가깝다고 걸어오지 마세요 / 우리곁에 항상 가까운 대학! 오산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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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대가 제일 멋진 듯
킥오프넘작성일
2011-02-04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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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독재정권 시대로 퇴행하는 상아탑
독재정권 시대로 퇴행하는 상아탑
‘권위주의로의 회귀’ ‘대량 구조조정’ ‘강한 언론통제’를 통해서 대학의 민주주의가 훼손되고 있다. 어두운 과거로 돌아가는 대학 사회의 현실을 살펴보았다.
[103호] 2009년 08월 31일 (월) 13:45:08
고재열 기자 scoop@sisain.co.kr
생전에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명박 정부를 비판하며 한국 사회가 ‘민주주의·서민경제·남북관계’의 위기에 처해 있다고 지적했다. 김 전 대통령 식으로 표현하면 지금 대학 사회는 ‘권위주의·구조조정·언론통제’의 위기에 처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 사회 양심의 마지막 보루가 되어야 할 상아탑이 오히려 사회보다 더 뒷걸음치는 모습이 여름방학 기간에 여기저기서 벌어졌다. 지난 8월19일 중앙대 학부생 4명과 대학원생 2명은 학교 학생지원팀으로부터 문자 메시지를 한 통씩 받았다. “8월17일 총장실 무단침입으로 인하여 학칙 제15조4호에 의거, 징계 처리할 예정이다”라고 경고하며 사실 확인을 하겠으니 오라는 내용이었다. 중앙대 학생들은 학교 측이 이명박 정부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냈던 진중권 교수를 독어독문학과 겸임교수직에서 해임한 것에 항의해 총장실을 방문했다.
김영곤씨가 고려대의 시간강사 88명 해고에 항의해 본관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당시 상황에 대해 최동민 독어독문학과 대표는 “총장비서실에 서한 전달을 위해 왔다고 얘기했고 전달하라고 해서 들어갔다. 서한을 놓고 나왔는데 나중에 학교 측에서 ‘약속을 안 잡고 왔으니 무단침입이다’라고 주장했다”라고 말했다. 문제가 된 것은 레드카드였다. 학생들은 서한을 전달하고 총장실에 레드카드를 붙이고 나왔다. 학교 측은 현장을 취재한 한겨레 기자가 블로그에 올린 동영상을 보고 참가자를 가려냈다. 학교 측은 학과 조교를 불러서 동영상을 보고 학생들의 신원을 파악하게 했다. 최 대표는 “졸렬함의 극치다. 징계의 근거가 되는 학칙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총장님이 화가 많이 나셨다고 했다. 총장의 진노가 징계 근거냐고 묻자 답이 없었다”라고 말했다. 중앙대 학생들은 진 교수를 위해 고별 강의를 마련했다.당사자인 진중권 교수는 자신의 해임 소식에는 덤덤했지만 학생들에 대한 징계 소식에는 분노했다. 그는 “중앙대에서는 저를 잘랐지만 학생들은 마음속에서 저를 선생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 고맙다. 학생들이 안 다쳤으면 좋겠다. 제발 학생들은 안 건드렸으면 좋겠다. 우리는 이런 일에 훈련이 되어 있지만 학생들은 그렇지 못하다. 교육자로서 최소한의 선은 지켜주었으면 한다”라고 말했다. ‘학습권’ 침해에 항의하는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학과 교수들도 진 교수에 대한 일방적 해임을 ‘학문 자율성’과 ‘교수권’ 침해로 보고 항의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학교 측은 오히려 징계 카드로 맞받아치며 문제를 키웠다. 학생들은 학교 측이 학과 구조조정과 하남캠퍼스 이전 문제를 놓고 반발이 일어날 것에 대비해 미리 ‘시범 케이스’로 징계함으로써 단속하는 것으로 해석했다.중앙대는 이재오 전 의원, 유인촌 장관, 백용호 국세청장 등 이명박 정부 실세가 졸업한 대학이다. 박범훈 총장 역시 대선캠프에서 활동했다. 현 정부 실세가 배출된 학교에서 현 정부의 행태가 그대로 답습되고 있었다. 곳곳에서 시간강사 대량해고비슷한 상황인 대학이 한 곳 더 있다. 바로 이명박 대통령의 모교인 고려대다. 지난 8월26일 지난 학기까지 고려대에서 ‘노동의 역사’를 강의했던 김영곤씨(59)가 학교 구내에서 1인 시위를 벌였다. 김씨를 포함한 강사 88명이 일방적으로 해고당했기 때문이다. 학교 측은 ‘4학기 이상 강의한 자, 박사학위 미소지자’ 따위 기준을 제시하고 이에 해당하는 181명 중 88명을 일방적으로 해임했다. 고려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대우중공업노동조합 사무국장과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 의장을 거치고 1800쪽 분량의 <한국 노동사와 미래> 등 여러 권의 저작을 남겼지만 김씨는 ‘강의 부적격자’로 찍혀 해임되었다. 프로 기사 한철균 7단도 이 조건에 해당되어 바둑 강의를 하지 못하게 되었다. 영남대와 부산대와 성공회대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영남대에서는 60여 명, 부산대에서는 70여 명, 성공회대에서는 80여 명의 시간 강사가 같은 이유로 해고되었다. 김영곤씨는 “2년 이상 고용한 노동자를 정규직으로 전환시켜야 하는 현행 비정규직법을 의식한 조처로 다른 대학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런데 제대로 상황 파악도 안 된다. 산술적으로 따져보면 이런 상황에 처한 시간강사 규모가 5000명 정도는 될 수 있다”라고 말했다. 김씨가 분노하는 것은 대학이 더 이상 털 것조차 없는 시간강사의 주머니를 털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시간강사 등 비정규 교수의 지위는 더 낮아질 수 없을 정도로 낮다. 최근 10년간 시간강사 8명이 생활고를 이유로 자살했다. 서울대 강사만 4명이 자살했다. 최하위 그룹인 이 시간강사를 희생양 삼는 조처가 벌어지는데 모두가 침묵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번 학기에 임용되지 않은 강사 88명 중에 직접 행동에 나서는 사람은 김씨뿐이었다. 기자회견이나 1인 시위에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억울하지만 문제를 제기할 경우 찍혀서 교수로 임용되는 데 장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학원 앞에서 만난 한 시간강사는 “울고 싶어도 소리 나게 울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처지다. 형편없는 대우에도 자괴감이 들지만 이런 현실을 하소연도 못하는 것이 더 비참하다”라고 말했다.
해고된 명지대 ‘일반조교’들이 총장실 앞에서 점거 농성을 하고 있다. 이들은 복직을 위해 200일째 학교와 맞서고 있다.김씨는 역시 비정규직 교수인 아내 김동애씨와 함께 시간강사 등 비정규 교수의 교원 지위 확보를 주장하며 국회 앞에서 700일 넘게 ‘노숙투쟁’도 벌이고 있다. 20명이 시작했지만 지금은 그와 아내, 둘뿐이다.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의 김씨가 시집간 딸에게 용돈을 받아가면서도 이 일을 하는 이유는 노동운동가로서, 노동 전문 학자로서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다. 그와 그의 아내는 고령이라 제도가 바뀌어도 혜택을 볼 수 없다. 김씨와 함께 <비정규 교수 벼랑 끝 32년>을 쓴 아내 김동애씨는 “대학 교원에서 시간강사를 제외한 것은 1977년 박정희 독재정권이 정권에 비판적인 젊은 학자들을 탄압하기 위해서 취한 조처였다. 그런데 이 제도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우리처럼 교원 자격이 없는 나라는 인도네시아와 필리핀뿐이다”라고 말했다.고려대 총학생회는 요즘 청소 용역 아주머니들과 함께 학교와 ‘폐지 전쟁’을 벌이고 있다. 최저임금 수준의 임금을 받고 한 달에 3만원의 식대 보조금을 받는 아주머니들은 그동안 모은 폐지를 팔아 식대로 써왔다. 그런데 학교 측이 폐지 판매금을 회수하려 들자 갈등이 생긴 것이다. 한 총학생회 관계자는 “학교의 알뜰함에 할 말을 잃었다. 학생들과 더불어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비정규직에 대한 조처는 대학이 사회보다 더 가혹했다. 명지대에서는 올해 초 ‘일반조교’ 95명이 한꺼번에 해고되는 일이 벌어졌다. 학교에서 적게는 4년에서 많게는 13년까지 일해온 이들은 사실상의 행정직원이었다. 지방노동위원회에서 부당 해고를 인정하고 복직 판결을 내렸지만 학교 측은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았다. 학교 측은 ‘일반조교’ 제도를 폐지한 대신 비정규직으로 행정보조원이라는 자리를 만들고 졸업생들에게 지원을 독려했다. 학교 측은 일반조교의 언로를 차단했다. 대부분이 학교 졸업생이지만 학교 홈페이지에 아이디를 차단했고 심지어 이들을 돕는 학생들의 아이디까지 차단했다. 서수경 대학노조 명지대 지부장은 “학교 측 임원이, 교수들이 커피 자판기에서 직접 커피를 뽑아 마시면 되는데 불필요하게 일반조교를 두고 있다며 우리를 자판기 정도로 보는 것에 분노했다”라고 말했다. 일반조교들은 총장실을 2박3일 동안 점거한 뒤에야 8월24일 문제 해결에 임하겠다는 학교 측의 답변을 받아냈다. 대학 내 신자유주의 물결과 함께 쌍벽을 이루는 것은 바로 권위주의 시대로의 회귀다. 학생 자치활동에 대해 학교 당국이 고압적 자세를 취하고 있다. 고려대에서는 출교생들이 법원 판결을 받고 복학했지만 학교 측은 재징계를 진행했고 동국대에서는 총장부속실 점거를 했다는 이유로 총학생회장에게 유기정학 처분을 내리기도 했다. 지난 6월20일, 연세대 총학생회는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콘서트, 다시 바람이 분다>를 열 예정이었다. 그런데 행사 사흘 전 학교 측은 공연 다음 날 2차 사법시험이 있다며 불허 통보를 했다. 공연이 시험 준비에 방해된다는 것이었다. 총학생회가 공연을 강행하려고 하자 학교 측은 정문 앞에 ‘버스산성’을 쌓아 공연 준비차량의 출입을 막는 한편 징계 협박을 하며 총학생회를 위협했다. 결국 공연은 장소를 옮겨 성공회대에서 열렸다. 박준홍 연세대 총학생회장은 “학우들이 이 행사를 준비하느라 고생을 많이 했는데 안타까웠다. 집회도 아니고 콘서트라는 형식을 통해 추모하는 것이었는데, 대학생들이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는 것까지 막을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라고 말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추모하는 공연을 학생들이 열려고 하자 연세대(위 왼쪽)와 부산대(위 오른쪽)는 공연을 불허하고 공연 준비를 막았다.7월10일, 노무현 추모 콘서트 부산 공연을 열었던 부산대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재연되었다. 학교 측은 추모 콘서트가 ‘정치색이 짙다’며 행사를 불허했다. 연세대와 마찬가지로 정문에 ‘버스산성’을 쌓고 공연 준비차량 출입을 막았다. 학생과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이 사흘 동안 비를 맞으며 손수레에 나눠 실어 반입한 끝에 어렵게 공연이 성사될 수 있었다. ‘정치색이 짙다’는 것은 대학 당국이 학생들의 자치활동을 막는 데 쓰는 ‘전가의 보도’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는 ‘정치색이 있다’며 예술을 학교 밖으로 밀어냈다. 학생과 강사들이 준비한 ‘자유예술대학’이 총장 선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불허했다. 결국 ‘자유예술대학’은 ‘자유예술캠프’로 격하되어 학교 밖에서 진행되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비상대책위원회 이현빈 부위원장은 “실망스러웠다. 학교 측과 한 달 정도 협의하고 모든 요구조건을 받아들였는데도 학교 측은 무조건 하지 말라고 했다”라고 말했다. 총장이었던 황지우 시인이 시간강사 신분으로라도 강단에 복귀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학교 당국은 받아들이지 않았다.학생들의 자율활동을 막는 대학 당국의 조처는 ‘학원 사찰’ 시비까지 낳고 있다. 지난 8월24일 서울대 공대 학생회는 “농활을 끝내고 농민대회에 참석하려는데 공대 행정실에서 학생대표에게 연락이 왔다. 그리고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는데 집회에 참석한다고 들었다. 집회에 참석하지 마라. 징계를 주겠다’고 통보했다. 경찰이 학원 사찰을 하고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라고 폭로했다. 학교 측은 “경찰은 원래 학생들의 활동에 관심이 많다”라고 항변했다. 총학생회 간부에 대한 ‘연행·수배’ 빈번촛불집회 1주년을 전후해 경찰의 학생운동 견제는 본격화되었다. 집회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운동권 학생들과 학생회 간부를 마구잡이로 연행해갔다. 누리꾼에게 ‘고대녀’로 알려진 ‘다함께’ 활동가 김지윤씨를 5월28일 연행한 것을 시작으로 7월7일에는 건국대 총학생회장 등을 연행했고, 7월11일에는 노무현 추모 콘서트를 마치고 귀가 중인 전국예술계열대학생연합 집행위원장을, 7월24일에는 성공회대 부총학생회장을 연행했다. 한국대학생연합 의장인 이원기 부산대 총학생회장은 벌써 세 번이나 연행되기도 했다. 이원기 회장은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상식적인 이야기를 하는데 개 끌듯이 끌고 가는 이유가 궁금하다”라고 말했다. 건국대 정치대 학생회장, 생활도서관장 등과 연행된 하인준 총학생회장은 홍제동 대공분실에서 경찰 조사를 받았다. 조사를 받고 나온 그는 “캐비닛 하나를 가득 채울 만큼 수사자료가 많았다. 내 모든 이메일이 수사당했고 내가 참석했던 모든 집회에서의 행적이 채증되어 있었다. 두려웠다”라고 회고했다. 대학생들은 경찰의 마구잡이식 연행이 학생의 사회참여를 견제하기 위한 것으로 보고, 부당한 수사라며 경찰 소환 요구에 응하지 않고 있다. 현재 고려대·숙명여대·덕성여대 총학생회장 등 5~6명의 학생이 수배된 상태다(오른쪽 상자 기사 참조). 이제 2학기가 시작되었다. 학교에 돌아온 학생들이 방학 동안 퇴행한 학내 민주주의를 되돌리기 위해 ‘행동하는 양심’을 보여줄지, 민주주의 최대의 적이라는 ‘무관심’에 또 한번 좌절하게 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시사인 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5166
가자서작성일
2009-09-03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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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부산대 총학생회장 석방요구 38개대학 총학생회장 성명서
부산대 총학생회장 석방요구 38개대학 총학생회장 성명서 [한대련님 편집]
반값등록금 요구하고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 콘서트 주최한 것이 그리도 밉더냐!
이명박 정권의 정치보복 규탄한다!
한대련 이원기의장을 조속히 석방하라!
7월 15일 한국대학생연합(이하 한 대련) 의장 이원기(부산대학교 총학생회장)이 경찰에 의해 강제 연행당했다. 경찰은 등록금넷에서 주최한 2학기 등록금투쟁 계획발표 기자회견 도중 폭력을 행사하며 기자회견장에 난입, 이원기의장을 표적, 강제연행하였고 항의하는 참가자들에게 최루액을 분사하였다.
아직 끝나지 않은, 아니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명박 정권의 정치보복!
이원기 의장이 백주대낮에 폭력적으로 연행된 것은 이명박 정권의 명백한 정치보복이다.
이원기 의장에 대한 연행은 대선공약인 반값등록금 이행을 요구하며 계속해서 정권을 압박한 것에 대한 보복이며, 또한 부산대학교 총학생회장으로서 학교본부의 행사불허와 봉쇄를 뚫고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 콘서트를 개최한 것에 대한 정치적 보복의 성격이 짙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49재가 끝나자 마자 이명박 정권은 다시금 정치보복의 기지개를 펼치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왜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해야만 했는가. 바로 이명박 정권에 의한 정치보복때문이 아니었는가. 500만 추모객이라는 숫자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명박 정권은 아직도 모르겠는가.
이명박 정권은 공안통치를 중단하라!
7월 들어서 이원기 의장을 포함해서 대학생 6명이 경찰에 의해 강제로 연행당했다. 건국대학교 총학생회장을 비롯한 건국대생 3명은 경찰의 소환절차도 없이 긴급체포되어 홍제동 대공분실로 연행되는 일도 있었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대학생들이 80년대 대학생 선배들이 당했던 일을 그대로 다시 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명박 정권은 7,80년대 공안통치의 부활시켜 정권의 위기를 타개해보려 시도하고 있지만 어림도 없는 일이다. 과거 독재정권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국민들을 납치해 고문하고 투옥시키고 최루탄을 쏘았지만 결국 국민의 힘에 굴복하고 말았다. 우리는 이명박 정권에게 이제 그만 어리석을 짓을 멈추고 민심에 순응할 것을 경고한다. 또한 이원기 의장의 조속한 석방을 다시 한번 요구하는 바이다.
2009년 7월 16일
서울대련 의장 숙명여대 총학생회장 박해선
북부대련 의장 덕성여대 총학생회장 문소영
고려대 총학생회장 정태호
성신여대 총학생회장 이은
건국대 총학생회장 하인준
서강대 총학생회장 서유미
서울산업대 총학생회장 차지현
동국대 총학생회장 신동욱
성공회대 총학생회장 박명희
숭실대 총학생회장 배유진
항공대 총학생회장 김상하
홍익대 총학생회장 한아름
한국외대 총학생회장 추성호
세종대 총학생회장 이시행
국민대 총학생회장 김동환
동덕여대 총학생회장 최현나
한국예술종합학교 총학생회장 방성혁
경기대련 의장 중앙대(안성) 총학생회장 곽호진
경희대(국제) 총학생회장 주현탁
루터대 총학생회장 이태호
수원여자대학 총학생회장 허은비
한양대(안산) 총학생회장 황정욱
한신대 총학생회장 한별
광전대련 의장 전남대 총학생회장 오주성
광주교대 총학생회장 노현송
광주여대 총학생회장 임고은
조선대 총학생회장 박희재
조선이공대 총학생회장 고만석
목포해양대 총학생회장 최대한
대경대련 의장 영남대 총학생회장 김일환
경북대 총학생회장 성동현
부산대 부총학생회장 안득균
부경대 총학생회장 이원숙
동의대 총학생회장 이철모
부산교대 부총학생회장 박은정
울산대 총학생회장 이석태
고려대(세종) 총학생회장 임현묵
공주교대 총학생회장 유종범
<총 38개 대학 총학생회장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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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공연으로 노통도, 국민도 더 편해졌으면"
[인터뷰] '다시 바람이 분다' 부산 공연 마친 이원기 부산대 총학생회장
09.07.12 12:49 ㅣ최종 업데이트 09.07.12 15:14
윤성효 (cjnews)
노무현, 다시 바람이 분다, 이원기, 부산대
▲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위한 자리 10일 오후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콘서트 '다시 바람이 분다'가 부산광역시 금정구 장전동 부산대학교에서 1만여명의 시민들이 모인 가운데 진행됐다. 고 노무현 대통령을 위해 마련된 노란의자에 밀짚모자가 얹혀 있다.
ⓒ 사진제공 민중의소리 김철수
다시 바람이 분다
▲ 이원기 부산대 총학생회장이 밀짚모자를 들고 노 전 대통령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 사진제공 민중의소리 김철수
다시 바람이 분다
"수고했습니다. 악수 한 번 해요."
부산대 총학생회 이원기(25·통계학 4년·한국대학생연합 의장) 회장은 지난 10일 밤 11시경 부산대 넉넉한터에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사를 받았다. 정준하(개그맨·배우)를 닮아서가 아니라,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공연인 '다시 바람이 분다'를 '성공적'으로 마쳐 관객들이 감사의 인사를 한 것이다.
그는 공연 도중 무대에 올라 인사할 때는 1만 명의 관객들로부터 뜨거운 박수를 받았고, 공연이 끝난 뒤에는 인사를 받느라 분주했다. 이날 맨 앞 자리 한 가운데 있던 의자는 비워져 있었고, 거기에는 밀짚모자가 놓여 있었다. 그 밀짚모자가 놓인 곳은 귀향한 뒤 밀짚모자를 즐겨 쓰며 농사를 지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리였다.
▲ 이원기 부산대 총학생회장이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위해 마련된 자리에 놓여있던 밀짚모자를 쓰고 시민들을 향해 인사를 하고 있다.
ⓒ 유성호
이윤기
이날 추모공연 사회를 본 오한숙희씨는 이원기 회장을 무대로 불러내 그 모자를 써 보도록 했다. 이원기 회장은 "이 순간을 위해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면서 "이번 공연으로 노 전 대통령께서 가시는 길이 조금이라도 더 편해지고 우리 마음도 더 편해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앞서 부산대·동의대·부경대·부산교대 총학생회가 부산대에서 추모공연을 열려고 하자 부산대는 '계절학기 수업 지장'과 '청소 문제', '정치적 중립' 등의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 부산대는 8일 아침부터 교직원을 정문에 배치시켜 놓고 공연 관련 물품의 진입을 막았다. 또 학교측은 대형버스 등을 이용해 학교로 통하는 4개의 모든 문을 차단했다.
우여곡절 끝에 8일 무대 설치에 필요한 시설물들이 들어갔고, 9일에는 음향시설이 학교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비가 내렸지만, 차량 동원이 차단돼 학생들은 리어카에 물품을 싣고 옮기기도 했다. 부산대 정문 앞에선 8일과 9일 저녁 촛불문화제가 열리기도 했고, 부산대 민주화교수협의회(회장 이민환)는 대학 본부를 비난하는 성명서를 내기도 했다.
부산지역 시민사회단체들도 추모공연 성사를 위해 힘을 모았다. 한 인사는 "부산대가 불허해 논란이 커지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공연을 한다는 사실이 알려졌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날 저녁 추모 공연은 3시간30분 가량 진행됐다. 열정적인 신해철의 공연에 이어 출연진 모두가 무대에 올라 '사랑으로'를 관객들과 함께 불렀다. 공연 뒤 관객과 자원봉사자들은 쓰레기를 줍기도 했다. 공연을 마친 뒤 이원기 회장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48시간 무대시설 지키느라 밤샘도 불사
▲ 10일 저녁 부산 금정구 부산대학교 '넉넉한 터'에서 열린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추모콘서트 '다시 바람이 분다'에서 이원기 부산대 총학생회장이 노 전 대통령 얼굴이 그려진 부채와 노란색 손수건을 묶고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다.
ⓒ 유성호
다시 바람이 분다
- 우여곡절이 많았다. 콘서트를 잘 마친 소감은?
"처음에 학교가 불허해서 몸싸움을 벌이기도 했는데, 마음이 편하지 않은 상황들이 계속 되었다. 모두 고맙게 생각한다."
- 서울에서의 추모공연도 연세대에서 열려고 하다가 무산되었다. 부산대 공연이 원활하게 진행될 거라고 생각했나?
"부산대 공연은 공연기획단에서 결정했다. 공연 이야기를 듣고 성사가 되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고, 그래서 총학생회도 좋다고 했던 것이다."
- 처음 부산대 본부가 불허한다고 했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나.
"처음부터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번 공연은 학생회 차원에서, 학생 자치권으로 하는 행사다. 학교가 허락하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라고 보았다. 어차피 학교가 나서서 무대 설치를 해주거나 도와 줄 것이라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학생과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루어질 것이라 봤다. 시간이 지나면서 반드시 해야 하는 공연이라는 생각을 더 갖게 되었다."
- 학교가 처음에 공연을 불허해 논란이 되면서 오히려 더 많이 알려졌다고 보는 측면도 있던데.
"그런 면은 있다. 하지만 다음에는 이런 마찰이 없었으면 한다."
- 교직원과 학생들이 몸싸움도 벌이기도 했는데, 다친 사람은 없는지.
"다친 사람은 없다. 다음에는 이런 불상사가 없기를 바란다."
- 대학본부에 항의방문을 한 것으로 아는데.
"방학이라 많은 학생들은 가지 않고, 총학생회 간부 등 30여 명이 본관에 항의방문을 갔다. 학생처장님을 만나 학생 대표 자격으로 왔다고 했더니, 학생처장님께서는 '30명이 어떻게 학생 대표가 되느냐'는 식으로 말씀하시더라. 그래서 '대통령이 외국정상과 회담하러 갈 때 전 국민을 데리고 가느냐'며 '학생회가 학생 대표 아니냐'고 말했다. 학생처장님의 그같은 발언은 학생을 무시한 것이라 본다."
- 이번 공연을 준비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때는.
"8일 오후에 넉넉한터로 들어온 무대 시설을 지키는 게 가장 힘들었다. 혹시 침탈이 있을지 몰라 밤을 새워가며 지켰다. 48시간 지킨 것이다. 몸도 피곤하고 잠도 잘 수 없었다."
"교수님들 성명이 큰 힘... 학교측과는 잘 풀어 나갈 것"
▲ 8일 오전 부산대 교직원들이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 공연과 관련한 물품 진입을 정문에 앉아서 막자, 이원기 부산대 총학생회장(왼쪽)을 비롯한 학생들이 교직원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추모공연을 열게 해 달라며 호소하고 있다.
ⓒ 윤성효
노무현
▲ 10일 오후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콘서트 '다시 바람이 분다'가 부산광역시 금정구 장전동 부산대학교에서 1만여명의 시민들이 모인 가운데 진행됐다.
ⓒ 사진제공 민중의소리 김철수
다시 바람이 분다
- 8일 오전 교직원들이 정문을 막자 학생들이 20여 분간 무릎을 꿇은 채 공연을 열도록 해 달라고 호소했는데, 처음부터 무릎을 꿇을 것이라 생각했는지?
"처음부터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대학본부 측이 너무 극단적으로 대처하는 게 싫었다. 그러나 학생들의 진심을 보여주고 싶었다. 정치적인 집회가 아니고, 학생 자치권 확보 차원이라는 걸 호소하고 싶었다. 총장님의 지시에 의해, 교직원들이 업무를 보지 않고 정문에 나와 있다는 게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마음을 알아 달라는 호소하기 위해 무릎을 꿇었다."
- 9일 민주화교수협의회에서 성명서를 냈던데.
"그 소식은 서울에 있을 때 들었다. 하루 전날 정문에서 열린 기자회견 때 이민환 회장을 비롯한 교수들이 나와 주셨는데, 대학본부가 불허한 공연을 교수들이 지지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린다. 교수님들의 어려운 결정이 큰 힘이 되었다. '부산대는 민주화 성지'라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다."
- 우여곡절 끝에 공연을 열기는 했지만, 대학 본부와 학생회, 교수 사이에 그래도 상처가 남아 있는데.
"이후에 잘 풀어나갔으면 한다. 다시는 이런 마찰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란다. 대학본부와 총학생회가 최근에는 만나지 못했는데, 조만간 만나서 이야기를 통해 풀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서로 감정이 남아 있는데, 열린 마음으로 풀어나갈 것이다."
- 추모공연 비용은 어떻게 되는지.
"기획팀에서 모금했는데, 크게 모자라지는 않는 것으로 안다."
- 개인적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좋은 부분도 있고 그렇지 않는 부분도 있다고 본다. 비정규직보호법이 참여정부 시절에 통과되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철폐하고자 했던 국가보안법도 그렇게 되지 않았다. 여러 가지 평가가 있을 수 있다. 그 분은 더 나은 민주주의를 위해 일했던 분이라 본다. 이명박정부 들어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국민들이 노 전 대통령을 더 추모하는 것 같다."
출처 : "추모공연으로 노통도, 국민도 더 편해졌으면" - 오마이뉴스
가자서작성일
2009-07-16추천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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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대학별 슬로건 & 엠블렘
서울대 - 누군가 조국의 미래를 묻거든 고개를 들어 관악을 보게 하라 연세대 - 오라! 연세로, 가자! 세계로 고려대 - 민족의 고대에서, 세계의 고대로 서강대 - Be as proud of Sogang, As Sogang is proud of you (+ 그대 서강의 자랑이듯 서강 그대의 자랑이어라) 한양대 - 세계를 향하여! 미래를 향하여! 성균관대 - 한국지성 600년, 미래인재의 산실 이화여대 - 이화! 즐겁게 세상을 흔들어라 중앙대 - 한국의 중앙에서, 세계의 중앙으로 경희대 - 뉴밀레니엄, 평화와 공존의 대학 홍익대 - 예술과 학문의 만남 동국대 - 동국사랑 아름답게 동국미래 희망차게 건국대 - 시대를 앞선 지성, 세계를 향한 도전 숙명여대 - 세상을 바꾸는 부드러운 힘 인하대 - 2005년 삼성최다입사 국민대 -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운 대학 숭실대 - 한국 최초의 대학 단국대 - 민족애를 바탕으로 인류사회에 공헌하는 전문인 양성 가톨릭대 - Three distinct campuses, One great University
(서강대와 마찬가지로 가톨릭계열 학교는 영어를 쓴다) 성신여대 - 성신의 네가지 약속! 변화,성장,이상,완성 명지대 - 명지대학교는 나무처럼 늘 푸른 마음으로 사람을 키웁니다 덕성여대 - 나의 브랜드 발전소 동덕여대 - 변화를 꿈꾼다면, 변화의 시작은 동덕과 함께, "세상 앞에 한 발짝 더" 서울여대 - 나를 깨우고, 사회를 깨우고, 미래를 깨우는 대학 한성대 - 다르다 그래서 멋지다 삼육대 - 사람을 변화시키는 교육, 세상을 변화시키는 대학 서경대 - 북경엔 북경대, 동경엔 동경대, 서울엔 서경대 오산대 - 서울에서 가깝다고 걸어오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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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터] 서울에서 전철/버스로 갈 수 있는 명소들입니다.
1. 경복궁 ~ 국립고궁박물관 ~ 광화문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유료입장)자세한 것은 여기 클릭 http://cafe.naver.com/livejob/19560 2, 종묘 - 지하철 3호선 종로3가역 / 서울시내버스 100,160,150,260,370,140,201... (유료입장)3. 창경궁(종묘와 연결되어있음) - 종묘에서 넘어가면 됩니다. 서울시내버스 108,162,171,172,272,301.. (유료입장)4. 혜화동, 대학로지역 - 지하철 4호선 혜화역, 서울시내버스 140,150,160,143,161,301번 이용5. 이화장 - 이승만대통령이 살던 집 / 지하철 4호선 혜화역, 6. 동대문운동장 인근 쇼핑타운 - 지하철 2,4,5호선 동대문운동장역 7. 덕수궁 ~ 덕수궁미술관 ~ 시청앞 광장 - 지하철 1,2호선 시청역, (유료입장, 시청앞 광장은 입장료 없음)8. 창덕궁과 후원 - 지하철 3호선 안국역, 서울시내버스 171,172,272번 (유료입장, 5월부터 창덕궁 후원 특별관람이 시작됨)9. 여의도공원 - 지하철 5호선 여의도역, 여의나루역에서 도보, 160,260,262번 버스 이용, 10. 명동거리 - 지하철 4호선 명동역11. 장충단공원 ~ 수표교 - 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역12. 강남역 거리 - 지하철 2호선 강남역, 서울시내버스 140,470,471,402,4312,4424,9400,9404,9410,971113. 낙성대(강감찬장군 사당) - 지하철 2호선 낙성대역에서 도보 1km자세한 것 여기를 클릭 http://home.megapass.net/~sealove78/travel/20040209.htm14. 인왕산 -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에서 도보 / 경복궁역에서 0212,1020번버스로 자하문하차, 거기서 등산 (필히 현지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볼것.. )15. 국립중앙박물관 - 지하철 1,4호선 이촌역 (유료입장)16. 올림픽공원,몽촌토성 - 지하철 8호선 몽촌토성역 17. 암사동 선사유적지 ~ 선사박물관 - 지하철 8호선 암사역 / 잠실과 강남역에서 340번버스 (유료입장)18. 선정릉 - 지하철 2호선 선능역 / 서울시내버스 472,4312,6411번 이용 (유료입장)19. 인사동거리(고미술상가, 경인미술관, 찻집..) - 지하철 1,3,5호선 종로3가역 / 지하철 3호선 안국역 / 시내버스로 종로2가 하차.20. 탑골공원 - 종로3가역과 종각역 중간 / 시내버스로 종로2가 하차21. 남산타워 - 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역에서 02번 버스로 타워까지 접근가능 (유료입장)22. 서대문독립공원 -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 서울시내버스 471,701,702,703,704,706,707,9703,9709.. (유료입장)23. 성북동 간송미술관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에서 1111,2112번 버스로 성북초교 하차,간송미술관은 매년 2회(5월말, 10월말) 특별전 공개 전시때만 관람 가능.자세한 건 여기를 클릭 http://home.megapass.net/~sealove78/travel/20041030.htm24. 성북동 선잠단터 - 간송미술관 입구 성북초교 맞은편에 안내문과 제단 유적이 있음자세한 건 여기를 클릭 http://home.megapass.net/~sealove78/travel/20041030.htm25. 성락원 / 심우장 - 심우장은 만해 한용운 선생이 살던 집으로, 간송미술관에서 성북동(삼청터널) 안쪽으로 들어가면 이정표가 있음, 성락원은 성북초교 3거리에서 성락원 방면 이정표로 10분 거리.. 성락원은 조선 후기 별서 유적으로 현재 개인소유, 몰래 요령껏 관람 할 것자세한 건 여기를 클릭http://home.megapass.net/~sealove78/travel/20031025.htm 26. 육군사관학교박물관 - 청량리역과 청계천,서울역에서 202번 버스로 육사입구 하차, 들어갈때는 필히 신분증 제출27. 태강릉 - 태릉만 공개, 강릉은 비공개, 서울시내버스 202번으로 태릉 하차28. 우이동 북한산 도선사(서울에 대표적인 고찰)/ 봉황각, 우이동계곡 - 동대문운동장에서 144번 버스 / 창덕궁, 시청, 서울역에서 109번버스 / 지하철 4호선 수유역에서 101,120,170번 버스로 우이동 종점하차, 도보29. 북한산 진관사(서울에서 제일 산사다운 사찰 중 한곳이며 제일 시골 지역) -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에서 진관사 들어가는 7724번(30~60분 간격)이용, 혹은 종로에서 720번버스로 기자촌에서 내려 도보 30분30. 헌인능 - 지하철 3호선 양재역에서 140,470,471,4421번 버스로 헌인능 하차, 종로2가에서 470,471번버스 이용31. 63빌딩 - 지하철 5호선 여의도역에서 62번버스 이용, 강남고속터미널에서 362번 버스 이용32. 삼성역 무역센터(코엑스몰) - 지하철 2호선 삼성역33. 어린이대공원 - 지하철 5호선 아차산역 / 지하철 7호선 어린이대공원역34. 서울숲 - 지하철 2호선 뚝섬역 / 청량리역에서 410번버스 이용35. 세검정 ~ 홍지문 ~ 보도각백불 고적답사 도보 코스 - 2호선 신촌역에서 110,170번버스로 홍지문, 상명대하차 / 경복궁역에서 0212,7016,1711번 이용자세한 건 여기를 클릭 http://home.megapass.net/~sealove78/travel2/20050820.htm36. 이태원 - 지하철 6호선 이태원역37. 서울시립미술관/ 덕수궁돌담길 - 지하철 1,2호선 시청역 / 시립미술관에서 현재 피카소 특별전이 열리고 있음38. 경희궁, 서울역사박물관 -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에서 도보 10분, 종로에서 160,161,260,720,470,471번 버스이용39. 사직공원(사직단) ~ 황학정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에서 도보 10분, 서울역에서 706,707번 버스, 창덕궁, 창경궁에서 272번 버스,종로1가에서 606번 버스40. 전쟁기념관 - 지하철 4호선 삼각지역41. 효창공원 - 지하철 6호선 효창공원역에서 도보 10분42. 선유도공원 - 지하철 2호선 당산역에서 도보 20분, 한강 가운데에 떠 있는 섬43. 상암 월드컵경기장 일대 - 지하철 6호선 월드컵경기장역 / 종로에서 271번 버스, 시청에서 171번 버스 이용44. 북한산 삼천사, 삼천리골(서울에서 제일 깨끗한 계곡) - 구파발역, 서울역, 서울역사박물관에서 704번 버스, 삼천리골입구 하차 도보 40분. 앞에 진관사에서 도보 30분자세한건 여기를 클릭 http://home.megapass.net/~sealove78/travel2/20050515-1.htm45. 삼청동길, 삼청공원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에서 삼청동 방면으로.. 46. 세종대왕기념관 , 영휘원, 숭인원(조선 후기 황족들의 묘) - 지하철 1호선 청량리역에서 홍릉수목원 방면으로 도보 20분47. 우정총국, 조계사 - 지하철 1호선 종각역48. 노량진 사육신묘 - 지하철 1호선 노량진역 / 종로에서 150번 버스49. 보문사(석굴암 있는 곳) - 지하철 6호선 보문역 / 종로에서 103번 버스자세한 건 여기를 클릭 http://home.megapass.net/~sealove78/travel/20040526.htm50. 석촌호수,롯데월드 - 지하철 2,8호선 잠실역51. 신림동 호림박물관 - 지하철 2호선 신림역에서 도보52. 국립묘지 - 지하철 4호선 동작역 / 노량진에서 360,361,363번 버스, 서울역에서 752번 버스53. 신당동 떡복기촌 - 지하철 2,6호선 신당역54. 삼성산 호압사, 한우물, 석구상 - 지하철 2호선 신림역에서 5711번 버스, 호압사입구 하차. 등산을 좀 해야되나, 좋은 곳임..55. 북악산 백사골 백석동천 별서유적지 - 북악산 북쪽에 숨겨진 옛 별서(정원) 유적지, 서울과 완전 딴 세상인 곳..56. 수락산 벽운계곡 일대 - 수락산역 1번 출구 ~ 은빛주공아파트 ~ 벽운동계곡 ~ 덕성여대생활관 ~ 수락산 산신당(산악회뒤쪽) ~ 수락산 정상지하철 7호선 수락산역 / 서울시내버스 1152,1153,1154번57. 도봉산 도봉계곡 일대 (도봉사, 도봉서원, 천축사, 조대비별장) - (유료입장)도봉산역 ~ 도봉산 141,142번종점 ~ 도봉산 등산 (도봉사 / 도봉서원 ~ 천축사 ~ 도봉산 능선)지하철 1,7호선 도봉산역서울시내버스 141,142,1127,1128번 도봉산 종점서울시내버스 100,140,150,160,161,108,107,1018,1148번 도봉산역 하차58. 도봉산 무수골 일대 (이인 신도비 / 원통암) - (등산시 유료입장)도봉역 ~ 무수골 ~ 성신여대생활관 ~ 이인 묘 신도비(서울지방문화재, 세종대왕의 아들, 느티나무집 뒤쪽 언덕에 있음) ~ 도봉산 (원통암, 도봉산 능선)창동역에서 무수골 가는 마을버스 이용,서울시내버스 141,142,140,108,150번등으로 도봉역(성황당)하차 도보 20분59. 연산군묘 (사적 362호) - 조선 제 10대 군주, 폭군으로 널리 알려졌으나 실상은 반란파에 의해 많이 왜곡된 불운의 군주..현재 묘역은 관람 불가이며, 아래서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됩니다.서울시내버스 130(쌍문역,장한평역,천호역),1144번(창동역,노원역)으로 정의공주묘 하차, 정류장 기준 서남쪽 언덕에 있는 무덤이 연산군 묘역,60. 방학동 은행나무 - 서울에서 제일 오래된 나무로 수령이 800년을 넘어갑니다. 가을에 오면 정말 아름다운 곳.. 연산군묘역 바로 앞에 있습니다.61. 4.19국립묘지 - 1960년 4.19혁명때 죽어간 199명의 넋이 잠들어 있는 곳서울시내버스 104번(서울역,혜화역,길음역), 1119번(창동역,수유역)으로 4.19 하차63. 북한산 화계사 - 고려 초기에 세워지고 조선 중기 이후에 크게 성장한 고찰, 절 내에는 서울지방유형문화재 65호인 대웅전이 있습니다.서울시내버스 152(길음역,서울역,신림역),151(서울역, 혜화역, 미아역),1165번(미아3거리역, 수유역) 화계사(한신대)하차, 64. 정릉 - 조선 최초의 왕능으로, 조선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묘역 (사적 208호) - 유료입장서울시내버스 110,143,170,171,7211번으로 정릉우체국이나 정릉2동사무소 하차, 도보 15분길음역에서 143,171,7211,110번 이용65. 의릉 - 조선 20대 군주인 경종의 능역 (사적 204호) - 유료입장청량리역에서 서울시내버스 147,261번 의릉입구 하차66. 살곶이다리(전환교) - 중랑천 위에 걸린 조선 초기 돌다리, (사적 160호)지하철 2호선 한양대역 하차, 중랑천으로 도보 10분67. 불암산 학도암 - 조선시대 사찰로, 19세기에 조성된 거대한 마애석불이 있습니다.청량리역, 중화역에서 1221번버스 이용, 영신여고나 중계본동사무소에서 내려서 도보 20분, 불암산 정상까지 산행 가능68. 아차산성 - 고구려시대 산성으로 고구려시대에 조성된 여러 보루 및 군사 유적이 발견된 곳지하철 5호선 아차산역에서 도보, 또는 영화사(동의초교) 방면 마을버스로 영화사까지 가서 산행 시작69. 길동생태공원 - 자연학습의 장으로 유명한 곳 강동역에서 서울시내버스 300,361,370번으로 길동생태공원 하차, 70. 가양동 일대 (양천향교 ~ 소악루 ~ 양천고성터 ~ 허가바위 ~ 구암공원 사적 도보 코스) -양천향교는 서울 유일의 향교로 지금의 중등학교 , 소악루는 조선시대 누각으로 겸재 정선이 극찬을 했던 명소,양천고성터는 삼국시대에 조성된 성터 유적, 허가바위는 양천허씨(의암 허준이 대표적)의 시조와 관련된 자연 동굴, 구암공원은 허준이 살았던 곳을 사적공원화 한 곳,당산역에서 6631번버스로 구암공원 / 양천향교 하차, 신촌역에서 6712번버스로 구암공원 / 양천향교 하차71. 남산한옥마을 - 북촌(종로구의 가회동, 인사동, 삼청동, 안국동 일대)에 있던 조선 후기 한옥을 옮겨놓은 곳,지하철 3,4호선 충무로역에서 도보 10분, 서울시내버스 104,507,604번 대한극장이나 극동빌딩에서 하차72. 오금공원 - 송파구 오금동에 조성된 시민 공원으로, 공원 내에는 서울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조선시대 묘역 2곳이 있습니다.지하철 5호선 개농역 하차73. 신촌 봉원사 - 조선시대 사찰, 일명 새절로도 불립니다.경복궁역(적선동)에서 서울시내버스 606,272번 이용, 봉원동 하차신촌역과 독립문역에서 봉원사까지 들어가는 마을버스가 있습니다.74. 효령대군묘 - 태종의 2자인 효령대군의 묘역지하철 2호선 방배역, 방배역4거리에 있습니다.서울시내버스 142,148,641,461번 이용75. 압구정동 거리 - 일명 강남 패션의 중심거리..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서울시내버스 143,472,4312,362,410,240,148,4421번 이용76. 풍납토성 - 백제시대 토성유적, 천호대교 남단에 있습니다. 길쭉한 언덕처럼 생긴 곳지하철 5,8호선 천호역 / 서울시내버스 300,370,361,340번 이용77. 예술의전당 - 지하철 3호선 남부터미널역78. 낙산공원 - 서울의 영원한 좌청룡 낙산(낙타산)에 조성된 공원지하철 1,4호선 동대문역 / 4호선 혜화역 / 6호선 창신역에서 도보79. 방이동백제고분군 (사적 270호) - 백제시대 옛 무덤을 살펴볼수 있는 곳 잠실에서 3314,3315,3220번버스 이용, 백제고분 하차, 80. 동서울터미널 옆 테크노마트 - 지하철 2호선 강변역(동서울터미널)81. 봉천동 마애미륵석불 - 17세기에 조성된 마애석불, 관악산 북쪽 자락에 숨어 있는 불상으로, 숨바꼭질하는 심정으로 한번 찾아보세요.지하철 2호선 낙성대역 -> 낙성대 -> 인헌아파트에서 등산 시작 -> 상봉약수터 북쪽 바위에 숨어 있음82. 운현궁 - 흥선대원군의 사저, (유료입장)지하철 3호선 안국역83. 남산식물원 , 안중근의사기념관, 남산시립도서관 일대 - 광화문, 시청, 서울역, 강남역에서 402번 버스84. 손기정공원 (구 양정고등학교) - 손기정이 1936년 베를린 올림픽때 받은 월계관수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곳.지하철 4호선 회현역에서 604,263번버스로 손기정공원(구 양정고) 하차85. 절두산성지 - 조선 후기, 천주교 신도들을 집단으로 처리하던 곳.. 당산철교 북단에 있습니다.절두산은 머리를 자른다는 뜻..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천주교 박해 성지성지 부근에 구한말~왜정때 우리나라에 머물며 조선 사람들을 위해 많은 일을 해왔던 외국인들의 묘역이 있습니다.지하철 2,6호선 합정역에서 도보 10분,86. 무계정사 - 세종의 3남인 안평대군의 별장이 있던 곳, 지금은 무계정사라 쓰인 암각만 남아 있습니다.경복궁역에서 서울시내버스 1711,0212,7022번 이용 부암동사무소 하차, 도보 10분87. 봉은사 - 신라시대 고찰로, 조선시대에는 성종의 능인 선릉의 원찰,얼마전에 사망한 백남준의 칠칠재(49재)를 지냈던 곳이지요지하철 2호선 삼성역에서 도보 10분 / 지하철 7호선 청담역에서 도보 15분서울시내버스 361,640번 봉은사 하차88. 북악산 숙정문 - 4월부터 개방되는 곳으로 성북동에서 올라갑니다.자세한 것은 아래 참조http://blog.naver.com/py1978/80023394811 기타. http://www2.visitseoul.net/culturemap_new/areaview.asp서울 문화 관광 지도입니다.여기도 참조http://blog.naver.com/salutyoon201?Redirect=Log&logNo=12002942803315일까지 여의도 벚꽃축제기간이랍니다. 봄입니다.연인들이야 뭐 말 할 것도 없겠고..쏠로부대원들은 오랜만에 부모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보는 것은 어떨까요?서울 분들은 자신이 가본 곳은 얼마나 되는지, 체크도 해보시고, 자신만 아는 명소가 있으면 올려주셨으믄 싶네요서울분 아니신 분들도 각자 자신의 고장에서 명소들 올려주시는 것도 괜찮아보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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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인] 황선홍 You'll never fly alone.
요새 축구를 보면 시원찮은 득점력과 골결정력으로 실망을 많이 하곤 합니다.전통적으로 윙포워드를 이용해서 득점을 하기 때문에 그만큼 스트라이커의 역활이 커지는데..누가 제2의 황선홍이니, 황선홍이 후계자로 뽑았다느니 하는 말은 있지만..황선홍을 누가 대체할수 있단 말입니까?94년 미국월드컵.. 한골을 따라잡고 분이 풀리지 않는지 화난 듯한 셀레브레이션..비난이 큰 만큼 선수생활도 순탄하지 않았죠부상으로 그라운드에 서지 못한 시간만 따지면 3년 가까이 된다는 기사도 있었고..어쨋든 제가 기억하는 황선홍의 최고의 순간은 98년 4월 부상에서 회복한 후 잠실경기장에서 펼쳐진 한일전에서 멋진 오버헤드킥을 골로 연결.2-1 승리의 주역이 되었고, 이날 보여준 슬라이딩 세리머니는 최고였죠.한창 축구보러 돌아다닐때라 경기장에서 직접 봤는데, 일본에서 원정온 수천명의 울트라스 중 눈물을 뿌리며 돌아가는 이도 적지 않았습니다.두번째는 역시 02 월드컵 폴란드전에서의 골..--------------------------------------------------------------------------------`황선홍이 쓰는 황선홍 이야기'프롤로그8살때 어머니가 떠났다.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잊기 위해 공터에서 혼자 공을 차기 시작했다.그리고 어느날 깨어 보니 유명한 축구선수가 되어 있었다.그 만큼 나는 축구에 미쳐 정신 없이 살았다. 그러나 후회하지 않는다.축구가 있었기에 나는 외롭지 않았고, 사랑하는 아내를 만날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 인생에서 축구를 빼면 나는 아무 것도 가진 게없다. 아버지와 형제,아내와 딸 모두가 축구 때문에 견고해진 가족이라고 생각한다. 거역할수 없었던 나 황선홍의 운명,축구 이야기를 이제 축구 팬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 덜그덕 덜그덕 그릇 부딪히는 소리에 눈을 뜬다. 살짝 젖혀진 커텐사이로 따사로운 가을 햇살이 고개를 뒤밀고 있다. 모처럼 늦잠을 잔 모양이다. 아이는 아직도 깊은 잠에 취해 있는 듯 세근거린다. 아내의 경쾌한 설겆이 소리와 아이의 부드러운 숨결은 묘한 조화를 이루며 나를 고요하고 달콤한 아침의 세계로 안내한다. 혼자가 아닌 가족과 함께 있다는건 이렇게 사소한 것에서도 행복이 느껴지는 모양이다.모처럼 맞은 휴일이므로 늦잠을 자도 되건만 아내는 언제 일어났는지 벌써 아침 준비의 마무리인 찌개의 간을 보고 있다. 그런 아내를 놀라게할 요량으로 살며시 다가가 허리를 덥썩 껴안는다. 순간 화들짝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뜨는 아내. 이내 까르르르 햇살 같은 웃음을 온 집안에 뿌린다. 그런 아내를 이번에는 가슴에 힘껏 안는다. 참으로 따뜻한 가슴을 가진 여자다." 어머니 없이 보낸 유년 시절 "- 나의 고향은 충남 예산군 응봉면 입촌 2리. 예산읍에서 약 4km 떨어진 산촌이다. 조상 대대로 살아온 이 마을은 집성촌으로 지금도 황씨 이외의 성을 가진 사람은 보기 드문 곳이다.1968년 7월 13일에 태어난 나는 이 곳에서 네 살까지 산 후 서울로 올라왔다. 아버지가 운수업을 하는 관계로 할머니와 할아버지 품을 떠나 우리 식구만 따로 이사를 하게 된 것이다. 워낙 어렸을 때의 일이라 이때의 기역은 뚜렷한 게 없다.1975년 3월 나는 집에서 가까운 묵동국민학교에 입학했다. 놀기 좋아했던 나는 학교가 파하는 대로 중랑천변에 있는 둑방으로 달려갔다.그 곳에는 학교운동장보다도 넓은 놀이터가 잘 조성되어 있었다.그 날도 나는 친구들과 어울려 신나게 공을 차며 놀다 어두컴컴해져서야 집에 돌아왔다. 그런데 집안 분위기가 여느날과는 많이 달랐다. 고질병처럼 집안을 눅눅하고 냉랭하게 점령하고 있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불화가 마침내 정점에 다다른 것이었다. 내가 집에 들어왔을 때 어머니는 이미 어디에 갔는지 안 보이고, 아버지만 안방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부부 싸움이 있고 난 후에는 반드시 어머니가 2, 3일 정도 친척집에 머무르곤 했다. 때문에 며칠만 지나면 곧 어머니가 돌아오고 집안은 다시 예전의 평온을 되찾으리라 생각했다.그것은 형도 마찬가지였다.그러나 어머니는 일주일이 가고 한 달이 가도 돌아오지 않았다. 기다리다 지친 우리는 아버지에게 "엄마 왜 이렇게 안 오냐"고 보챘다. 그럴때마다 아버지는 "이제 너희들 엄마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끼리 살자"라고 타이르곤 했다. 그래도 우리는 아버지 몰래 어머니를 기다렸다.몇 달이 지나도 우리는 어머니의 귀가를 단념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어머니를 향한 우리들의 맹목적인 기다림은 그리움에서 미움으로 차츰 변색되어 갔다.그 해 겨울 내내 나는 중랑천변의 둑방에서 친구들과 공을 차며 놀았다. 저녁이 되면 친구들은 저녁 먹으라며 데리러 온 어머니 손에 끌려 하나 둘 집으로 들어갔다. 친구들이 모두 들어가고 어둠만이 내려앉은 둑방에서 나는 한참 동안을 앉아 있곤 했다. 불꺼진 집에 들어가기가 싫었던 것이다. 그 시절 내가 가장 부러워 했던 건 어머니가 있고 불빛이 따스하게 어려 있는 집이었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그리움 "- 유난히 길게 느껴지던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자 아버지는 도저히 안되겠다고 생각했던지 우리 3남매를 시골 할머니 댁으로 내려 보냈다. 서울에 올라온 지 만 5년 만에 고향땅을 다시 밟게 된 것이다.전학 수속을 밟은 나는 곧 예산국민학교 2학년에 배정되었다. 집에서 학교까지의 거리는 약 4km. 버스가 없어 10리 길을 꼬박 걸어다녀야 했다. 그것도 덩치가 제법 큰 산을 두개씩이나 넘어서. 코 앞의 학교를 다니던 서울 생활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고달픈 하루 하루가 시작되었다.그러나 채 한 달이 되지 않아 나는 시골생활에 재미를 붙였다. 워낙 놀기를 좋아해 친구들과 금방 사귀었을 뿐만 아니라, 멀게만 느껴지던 학교와의 거리도 걸음걸이가 익숙해지자 차츰 가깝게 느껴졌다.그러나 무엇보다 내가 시골 생활에 쉽게 젖어들 수 있었던 건 나를 사랑해 주고 귀여워해 주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계시다는 점이었다. 나는 이제 더이상 서울에서처럼 불빛이 있는 집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그러나 시골에서의 행복했던 나날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긴 아버지가 다시 우리를 서울로 불려들였기 때문이다.우리 3남매는 고향 마을과 두번째 이별을 감수해야 했다. 할머니 할어바저는 물론 친구들도 이내 섭섭해 했다.각별히 친했던 친구 몇 명은 떠나오던 날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아버지의 트럭은 목동을 지나 한참 더 동쪽으로 달렸다. 그때서야 나는 우리가 살 곳이 옛날에 살던 집이 아님을 알수 있었다. 헤거름에야 우리가 짐을 내린 곳은 묵동보다 더 시골스러운 곳이었다. 동생 선경이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아빠 여기도 서울이야?" 하고 묻자 아버지는 "이곳은 서울이 아니라 구리라는 곳이란다."라고 말했다.이듬해 봄 나는 구리시 도농동에 있는 양정국민학교 4학년에 편입했다. 양정국민학교는 다른 학교와 달리 특이한 전통이 하나 있었다. 해가 바뀌고 신학기가 되면 4,5,6학년이 모여 1천M`달리기를 하는 것이다. 때문에 형과 나는 전학 수속을 밟자 마자 환영식인 양 대회에 참여했다.달리기를 비교적 잘했던 나는 촌놈이라고 얕볼까봐 더 열심히 뛰었다. 그런데 한참 뛰다 보니까 내 앞에 아무도 없는 것이었다. 결국 나는 지켜보던 학교 선생님들을 깜짝 놀라게 하며 1등으로 골인했다. 대회 역사상 4학년이 1위로 골인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고 했다.신학년 달리기 대회 이후 나는 교내 스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곧바로 육상부원으로 차출되었다. 그래서 구리시에서 주최하는 각종 대회에 참가해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이를 계기로 전국 소년 체전에 출전할 경기도 대표 선수를 선발하는 대회에도 나갔다. 그러나 2등까지만 출전권이 주어지는 이 대회에서 나는 아깝게 3위에 그치고 말았다. 이때 내가 대표로 선발되어 소년 체전에 출전했다면 나의 인생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축구 선수가 아닌 육상 선수로 성공할 수도 있었다는 예기다. 물론 이도 저도 아니었을 확률이 더 많지만 말이다. 사람이란 언제나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이 있게 마련인 모양이다. " MVP 받고 울어 버린 날 "- 매일 뛰기만 하는 육상에 싫증을 느낄 무렵 나는 교내 축구 선수로 선발되었다. 정식 축구팀이 생긴 게 아니라 경기도 내 국민학교 친선 경기를 갖기 위해 일시적으로 구성한 팀이었다. 운동이라면 뭐든 소질이 있었던 나는 축구 대회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남다른 감각이 있었던 것이다.5학년 봄 어느날 서울 숭곡국민학교 이종수 선생님이 나를 찾아왔다. 축구팀을 창단하는데 선수로 뛰어볼 생각이 없느냐는 것이었다.이 사실을 안 담임 선생님은 어떻게 내가 축구에 소질이 있다는 걸 알고 찾아왔냐고 물었다. 그러자 이종수 선생님은 "가능성 있는 선수를 찾아 경기도 일대를 돌던 중 우연히 게임하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말하자면 나는 기초부터 훈련만 잘 시키면 훌륭한 선수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방과 후 친구들과 공을 차면서 은연중 '나도 차범근 같은 선수가 될 수 없을까?'하고 꿈을 꾸었던 나인 만큼 싫어 할 이유가 없었다.날아갈 듯 기쁜 마음으로 집으로 달려와 아버지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 했다. 반대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기뻐했다.숭곡국민학교로 전학하자 또 다시 장거리 통학이 시작되었다. 구리에서 서울까지는 거의 한 시간이 걸렸다. 때문에 늦어도 새벽 5시에는 일어나야 아침 운동에 지각하지 않았다. 구리에서 통학하는 선수는 나 말고도 나승화(이 친구는 아무래도 현재 포항의 주전 사이드어택커이지만 부상으로 휴식중인 전 올림픽 대표 나승화선수를 일컫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괄호안은 옮긴이 주.)라는 친구가 있었다. 승화는 이상하게도 나랑 죽이 잘 맞았다. 사는 곳도 그랬고 미쳐도 좋을 만큼 축구를 좋아한다는 공통점도 그랬다. 우리는 남들보다 운동장을 한 바퀴라도 더 돌고 공을 단 1분이라도 더 차 보기 위해 등교 시간을 더욱 앞당기기도 했다.숭곡국민학교는 늦게 창단된 팀이었지만 전국에서 우수한 선수만을 모아 만든 팀이었기 때문에 서울 시내에서 열리는 대회마다 우승하며 화제를 낳았다. 그러던 중 6학년 때에는 마침내 서울시 국민학교 대회 패권을 거머쥐었다. 이 대회에서 나는 총 5골을 기록해 유력한 득점왕 후보에 올랐다. 그런데 3,4위전으로 밀려 뒤늦게 게임을 가진 허순구라는 친구가 한꺼번에 3골을 넣는 바람에 득점상을 목전에서 놓치고 말았다.시상식에서 내 이름 대신 허순구라는 친구의 이름이 불려졌을 때 나는 그만 챙피한 줄도 모르고 눈물을 쏟았다. 다 잡은 토끼를 놓쳐 아쉽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팀이 우승을 해서 기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고 있는데 갑자기 내 이름이 불리워졌다. 얼떨결에 눈물을 훔치고 시상대에 섰더니 나 보고 최우수 선수라며 트로피를 주는 것이었다. 놀라기는 나 뿐만 아니라 동료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최우수 선수상은 기존에 없던 상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또 한번 울고 말았다." 외로운 아버지와 그리운 어머니 " - 81년 나는 마침내 숭곡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용문중학교에 입학했다. 용문중학교는 축구부가 결성된 지 얼마 되지 않은 팀이어서 성적이 최하위였다. 내가 그런 용문중학교를 택한 것은 좋은 팀에 가서 후보나 교체 멤버로 뛰느니 성적이 저조한 팀에 가서 주전으로 뛰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만큼 축구에 자신이 있었다. 이 같은 생각은 나의 단짝 승화도 마찬가지여서 우리는 나란히 용문중학교에 진학했다.중학교는 운동량이나 환경이 국민학교와는 많이 달랐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변화는 합숙 훈련 때문에 통학이 불가능해졌다는 점이었다.합숙 훈련은 통학할 때까지만 해도 몰랐던 사실 하나를 친구들에게 알려 주었다. 내게 어머니가 없다는 사실. 다른 친구들의 경우 어머니들이 시도 때도 없이 드나들었는데 나는 한번도 찾아와 주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고 내 신세를 한탄하거나 비참해 하지는 않았다. 나에게는 누구보다 든든한 후원자 아버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숙소 대신 내가 뛰는 경기장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찾아다녔다.그렇게 열성적으로 경기장을 찾아다니던 아버지가 어느 날 횡반 보도를 건너다 과속으로 달리던 차에 치여 한 쪽 다리를 심하게 다쳤다. 아버지는 자신의 고통은 아랑곳 하지 않은 채 내가 뛰는 경기를 못 보게 된것에 대해서만 굉장히 안타까워 했다.최선을 다해 뛰어라는 아버지의 당부를 마음 속에 새기며 경기에 출전했다. 경기장은 경기도 시흥이었다. 우리 팀은 나와 승화가 3학년이 되면서 전력이 절정에 달해 있었다. 나는 깁스를 하고도 나의 선전을 기원하고 있을 아버지를 생각하며 쉬지 않고 뛰었다. 그러던 중 어느 순간 관중이 많지 않은 스탠드를 한번 힐끗 보았는데 그 곳에 아버지가 와 있었다. 내 눈이 잘못 된 건가 하고 다시 보았지만 틀림없는 아버지였다. 불편한 다리를 목발에 의지해 겨우 겨우 온 것이었다. 갑자기 뜨거운 무엇인가가 가슴 저 밑바닥에서 울컥 치솟았다. 골문을 향해 뛰면서 나는 마음 속으로 깊이 다짐했다.'아버지를 위해서, 나 자신을 위해서, 반드시 대한민국 최고의 선수가 되리라'고.84년 나는 용문중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용문고로 진학했다. 이때부터 내가 키운 꿈은 후에 월드컵 대표 선수가 되어 20여년 넘게 한번도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지 못한 한국 축구의 한을 풀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월드컵 본선 진출은 생각했던 것보다 빨라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이루어져 버렸지만 말이다.고등학교 2학년이 되자 내 키는 180 Cm를 넘어섰다. 축구 선수치고는 큰 키였다. 그러나 바짝 야윌 대로 야위어 체충은 형편 없었다. 이런 나를 볼때마다 아버지는 안타까워 했다.겉으로 표현은 안 해도 '어머니가 있었더라면 건강에 더 많은 신경을 쓸수 있을텐데'하고 속상해 하는 것 같았다. 벌써 10년 가까이 독방을 지키고 있는 당신의 외로움을 접어두고 자식 걱정부터 하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생각할 때마다 오래 전에잊어 버린 듯한 어머니가 떠오르곤 했다. 괜히 미워지는 것이었다.그러나 가슴 한편에는 어머니에 대한 걱정이 자리를 차지하고있었다. 낯선 곳에서 힘겨운 삶을 지탱하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머리속을 꽉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월드컵이 달아 준 화려한 날개 "- 고등학교 3학년이 되자 대학 진학 문제를 놓고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축구에 대한 개인기나 볼 감각은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체력이 약해 나는 대학들이 탐낼 만한 선수가 결코 아니었다. 게다가 대학진학에 있어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청소년 대표 경력도 없었다. 그야말로 무명 선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내가 한양대 진학에 꿈을 갖고 있었던 것은 감독을 맡고 있던 이회택 선생님이 나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양대는 우리와 자주 연습 게임을 가져 친숙한 팀인데다 당시 대학 축구의 최정상을 달리고 있었다. 두 말할 나위 없이 나는 한양대에 진학하고 싶었다.그런데 각 대학의 선수 스카웃이 한창 진행될 때 나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이회택 감독이 포항제철 신임 감독으로 부임하고 말았다. 유일하게 나의 가능성을 인정해 주었고 나에게 믿음을 준 견고한 끈 하나가 끊어지자 나의 한양대 진학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축구를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겪은 좌절이었기에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이런 나를 붙들어 준 이는 아버지였다.아버지의 애정어린 격려에 힘입어 나는 건국대에 진학했다. 그리고 얼마되지 않아 이회택 감독을 만나볼 기회가 생겼는데 그는 내게 한양대에 진학하지 않았냐고 의아해 했다. 감독으로 가기 전 후임 감독에게 용문고의 황선홍을 꼭 스카우트 하라고 부탁해 놓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버스가 떠난 후였다. 이회택 감독은 내 어깨를 두드려 주며 "건국대도 훌륭한 팀이니까 열심히 해라. 그래서 다음에는 꼭 나랑 함께 뛰자".아무도 알아 주지 않는 나를 인정해 주는 그가 너무나 고마웠다.내 이름 석자가 신문지상과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것은 대학 2학년 때 였다. 그 해 봄 내가 속해 있는 건국대는 전국 대학 축구연맹전에서 최정상의 고지를 점령했다. 당시 4학년에 재학중이던 고정운선배(이때부터 대표팀 최고의 콤비중 하나인 이둘의 플레이가 빛을 발하기 시작하나 봅니다. 괄호안은 옮긴이 주)와 이상윤 선배의 절정에 달한 기량과 나의 어시스트가 빛을 발한 것이다. 이 대회를 계기로 내 이름 앞에는 언제나 '미완의 대기'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88년 11월 7일. 이 날은 내가 생일 다음으로 소중히 생각하는 기념일이다. 처음으로 태극 마크를 단 날이기 때문이다.대학 선수로서 대표팀에 선발된 선수는 나와 고려대 4학년에 재학중이던 홍명보, 단 두 선수였다.(역시 대표팀 최고의 콤비중 하나인 이둘의 인연은 이때부터.. 괄호안은 옮긴이 주.) 월드컵 대표 선수라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을 정도로 붕 뜬 상태에서 한달이 지났다.그리고 나의 첫 시험 무대인 제 9회 아시안컵 대회 결전의 날이 밝았다. 첫 상대 팀은 일본이었다. 대표팀 막내였던 나는 이태호 선배의 교체멤버로 투입되어 헤딩슛 한골을 멋지게 성공시켰다. 88년 12월 6일 카타르에서 첫선을 보인 나의 신고식이었다. 대일전이었던 만큼 나의 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올랐다.이듬해인 89년 5월 마침내 이탈리아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전이 전개되었다. 4조에 속한 우리 팀의 첫 상대는 싱가폴이었다. 5월 23일 열린이 경기에서 나는 두 골을 성공시켰다. 첫골은 전반 7분 경 황보관 선배의 문전 센터링을 헤딩슛으로 연결시켰고, 두번째 골은 전반 20분 경 최순호 선배의 어시스트를 받아 왼발로 성공시켰다. 이를 시발로 말레이지아, 네팔 등 세 팀과 6번의 경기에서 총 7골을 터뜨리는 기염을 토했다. 국가대표 막내로서 처음으로 출전한 월드컵 무대에 화려하게 데뷔한 것이다." 드래프트 거부와 독일 유학 "- 월드컵 예선전이 끝난 그 해 가을 나는 낯선 여인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학교 체육실로 걸려왔는데 받자 마자 내 이름을 확인하곤 흐느끼는 것이었다. 직감으로 나는 어머니임을 알았다. 갑자기 머리속이 아득해진 것이었다. 말문이 막히기는 어머니도 마찬가지인지 한참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렇게 10분 정도를 수화기만 들고 서 있었다. 내가 먼저 거기가 어디냐고 물었다. 어머니는 잠시 머뭇머뭇거리더니 대전이라고 알려 주었다.그 날 저녁 나는 무작정 대전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어머니를 만났다. 20년 만의 상봉인데도 눈물이 안 나왔다. 어머니의 생활이 너무나 안정되어 보였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어머니는 재혼을 해 잘 살고 있다고 했다. 그 순간 우리 3남매 때문에 재혼도 마다하고 홀로 외롭게 살아온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동시에 심한 배신감과 분노가 가슴 속에 이글거렸다. 그래서 하룻밤 자고 가라는 어머니의 간청을 더 이상 전화하지 말라는 말로 매정하게 뿌리치고 황황이 돌아서 버렸다. 서울행 새벽 기차에 오르자 마자 나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도 아랑곳 하지 않고 한없이 울었다. 아버지가 가엾어서 울었고, 20년 만에 만난 어머니에게 너무나 매정했던 내가 싫어서 울었다.졸업이 몇 개월 앞으로 다가온 그 해 겨울 나는 선수들에게 전적으로 불리한 프로 축구 신인 드래프트를 거부했다. 아시안 게임과 월드컵 대표 선수로 활약한 내가 연봉 3천 만원이라는 헐값에 몸을 팔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내가 원하는 팀에서 뛰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생각은 홍명보도 마찬가지였다. 이탈리아 월드컵 대회 출전을 통해 극도로 가까워진 명보와 나는 의기투합했다. 스타 플레이어에 대한 정당치 못한 대우를 우리가 좀 희생해서라도 개선해 보자고 팔을 걷어붙인 것이다.결국 명보와 나는 프로 구단의 노여움을 사 소속이 없는 그라운드의 미아가 되었다. 그런 가운데 해가 바뀌었고 대학을 졸업했다. 그리고 그 사이 포항제철의 이회택 감독을 만나 장래 문제에 대해 의논한 결과 독일유학을 결심했다. 그에 드는 경비는 유학을 끝마친 후 입단한다는 조건으로 가계약을 맺은 포항제철이 지원해 주기로 했다.독일 유학은 생각보다 쉽게 이루어졌다. 89년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전에서 나의 활약을 눈여겨 봐 두었던 독일 아마 리그 클럽 축구단들이 곧바로 입단 테스트를 제의해 온 것이다. 그래서 한 달 후 테스트를 받은 결과 레버쿠젠 아마 팀으로부터 입단 제의를 받았다.이 클럽은 분데스리가 아마 리그 팀으로 90-91 시즌에서 8위를 차지한 팀이었다. 또한 레버쿠젠 1부 팀은 한국 최고 스타였던 차범근 선배가 몸담았던 팀이어서 낯설지 않았다.7월 7일 레버쿠젠에 정식 입단한 나는 베스트11로 기용되어 4차례의 연습 경기에서 5골을 터뜨려 독일의 스포츠 잡지인 'BILD"지로부터 '황색 폭격기'라는 극찬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91-92 시즌에서 총 17골을 성공시켜 차범근의 '차붐'에 이어 '황붐'이라는 유행어를 창출해냈다.그러나 독일 생활은 너무나 힘들고 외로웠다. 주말이 되어도 찾아올 이가 없는 아파트에서 진한 향수병과 싸워야 했다. 입에 맞는 음식이 없어 끼니를 그대로 거른채. 게다가 동료 선수들의 베타심도 무시할 수 없었다. 독일은 아마 리그를 거쳐 1부 리그로 진출하는 것이 정규 코스처럼되어 있어 선수들 간의 경쟁력이 심했다. 그런 자국 선수들이 피부색이 다른 나를 호의적으로 대해 줄 리가 없었다." 결혼과 또 다른 날의 시작 "-그 즈음 나는 지금의 아내와 열애에 빠졌다. 우연히 교포들이 마련한 유학생들을 위한 만찬에 갔다가 만났는데 처음 본 순간 반해 버렸다. 그래서 내 가이더를 맡고 있던 친구에게 특별히 소개해달라고 부탁했다. 덕성여대 독문학과 3학년에 재학 중 어학 연수 차 유학을 온 그녀는 본대학에서 공부 하고 있었다. 첫 만남 후 얼마 안 되어 나는 그녀와 단 둘이 만났다. 교포 2세이면서 나의 가이더였단 친구가 내가 그녀에게 반한것을 알고 자리를 주선해 준 것이었다. 그녀와 나는 본 대학 캠퍼스를 거닐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끝도 없이 나우었다. 언어와 풍습의 차이로 그 동안 서로 많이 외로었던 것이다.그 날 이후 나는 하루가 멀다 하고 본으로 달려갔다. 부터팔에서 본은 1백30여 킬로미터 쯤 떨어져 있어 자동차로 거의 2시간 정도가 걸렸다. 그럼에도 나는 피곤한 줄 모르고 달려가곤 했다. 그녀와 있으면 마음이 너무나 편안했기 때문이다.그 해 8월 나는 상파울리와의 경기에서 심한 부상을 입고 쓰러졌다. 검사 결과 무릎 십자 인대가 파열되었다는 진단이 나왔다. 결국 나는 남은 경기를 포기한 채 병원에 입원해 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에도 한 동안 입원해 있어야 했는데 그녀가 어떻게 소식을 들었는지 이것 저것 먹을 것들을 챙겨 병문안을 왔다. 그리고 근처 허름한 여인숙에 방을 얻어 며칠 동안 나를 간호해 주었다. 그녀의 극진한 간호를 받으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이 여자를 놓치지 않으리라'고.부상으로 5개월여 간을 쉬고 완쾌되어 갈 무렵 한국에서 월드컵 대표 선수들이 독일로 전지 훈련을 왔다. 내가 속해 있던 팀과 연습 경기를 갖기로 되어 있던 전날 나는 밤새 한잠도 못잤다. 고정운, 하석주, 홍명보등 그립고 반가운 얼굴들을 만난다고 생각하니 잠이 오지 않은 것이었다.다음 날 부퍼탈 팀과 경기를 가진 월드컵팀은 다른 팀과 몇 차례 더 연습 경기를 가진 뒤 귀국길에 올랐다. 매일같이 연습이 끝난 뒤 대표팀숙소를 찾아가 명보와 밤을 새며 이야기 꽃을 피우던 나는 귀국 가방을 챙겨주며 솟구치는 눈물을 참고 또 참았다. 마음 같아서는 나도 대표팀 무리에 끼어 당장 귀국하고 싶었던 것이다. 명보와 마지막 인사를 하고 돌아온 나는 텅빈 아파트에서 누가 볼새라 목욕탕 샤워기를 틀어 놓고 펑펑 울어 버렸다.그리고 5개월 후 나는 꿈에도 그리던 고국 땅을 밟게 되었다. 포항제철이 국내 프로 축구 활성화를 목적으로 나를 부른 것이다. 드래프트 제도상 전년도 시즌 꼴지팀인 유공에 입단해야 하는 나를 지명 선수 5명과 트레이드시키는 파격적인 조건하에 맞아 준 것이다. 끝내 분데스리가 1부팀에 진출하지 못하고 돌아왔다는 아쉬움이 있긴 했지만 고국에 돌아온 기븜은 컸다.귀국한 후 한 동안 휴식을 취했다. 독일에서의 부상 휴우증을 없애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곧바로 월드컵 대표팀에 합류했으며 크리스마스 때는 독일에서 만나 함께 귀국한 지금의 아내와 결혼식을 올렸다. 얼마 안 되어 월드컵 예선전을 치르기 위해 카타르로 떠났다. 내가 진 책임감의 부피는 선배들이 많았던 4년 전과 비교도 안 될 만큼 무거웠다. 그런 부담감 때문인지 나는 제대로 뛰지 못했고, 우리 팀은 카타르에 형편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리고 패배에 대한 비난의 화살은 온통 내게로 쏟아졌다. 카타르 경기 이후 축구 팬들은 내게 치욕스런 징크스 하나를 붙여주었다. '황선홍이 뛰는 경기는 무조건 진다'라고. 어둡고 긴 터널과 같았던 그 징크스는 올해 들어서야 조금씩 깨지기 시작했다. 독일 유학 전의 내 페이스를 이제야 되찾은 것이다. 거기에는 아버지와 이회택 감독님의 끊임없는 격려가 있었고, 아내의 정성어린 내조가 있었다. 이 지면을 통해 두 분 스승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그리고 나의 사랑 아내에게도.글/황선홍 . 정리/서철인 기자 . 사진/김경한 기자월간루키=========================================================상당히 오래전인데, 이 글을 읽고 그의 열렬한 팬이 되었습니다.그의 굴곡진 인생이 좋았고 그걸 이겨내 최고의 선수가 된 그가 존경스러웠습니다.내 마음속의 영원한 18번 황선홍!!!* 민이ª님에 의하여 게시물이 이동되었습니다.
ETA™작성일
2006-02-18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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