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검색 결과(110);
-
-
-
-

[무서운글터] 영화 아메리칸 크라임의 실제 이야기.( 왕스압 주의)
조회 수 3110 0 댓글 6 베니체프스키 거트루드 (Gertrude Baniszewski / 1929~1990) 이혼녀였던 거트루드는 7명의 자녀와 6명의 유산 전력을 가지고 있는 여성이었다.몇차례의 이혼을 거듭한 그녀는 의지하고 있던 동거남마저 자취를 감추자 생계를 이어나갈 방도를 궁리하고 있던 중, 지인의 소개로 리킨스(Likens) 부부와 만나게 된다.당시 미국의 각 주를 떠돌며 시설에서 일하던 리킨스 부부에게는 두명의 딸이 있었다.16살이던 실비아(Sylvia Likens)와 15살의 제니(Jenny Likens)가 그들이었다.거트루드는 이들에게 주당 20달러에 자신의 자녀들과 함께 고등학교를 보내고 사교활동은 물론 주말엔 교회에 데리고 나가는 것을 조건으로 자신의 집에 하숙 시킬것을 제안한다.이에 리킨스 부부는 흔쾌히 응했고, 두 딸을 그녀에게 맡기고 긴 여정을 떠난다.실비아 리킨스 (Sylvia Likens / 1949~1965)첫 주는 별 문제 없이 흘러갔다.그러나 부모에게서 첫번째 양육비용이 제때 도착하지 않으며 문제는 시작되었다.거트루드는 필요한 돈이 수중에 들어오지 않자 포악한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아무 쓸모도 없는 개 돼지같은 년들. 돈도 없이 너희를 돌보란 말이야?」라며 심한 화를 냈고 실비아의 옷을 내리고 엎드리게 하여 사정없이 구타하였다.얼마 후 돌아온 리킨스 부부가 아이들을 방문하였을 때, 거트루드의 협박으로 실비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며칠 후, 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고 돌아온 거트루드의 자녀들이 실비아가 교회에서 음식을 마구 먹어 보기 안좋았다고 흉을 본다.이에 화가 난 거트루드는 조미료를 듬뿍 쌓아올린 빵을 강제로 먹게 하였다.강압적인 행위에 음식물을 제대로 넘기지 못한 실비아가 그만 빵을 토해내자 이번엔 뱉어낸 토사물을 전부 먹게 하였다.이 모습을 지켜보던 거트루드와 그녀의 자녀들은 매우 흡족해하였다.이후 리킨스 부부가 다시 한번 딸들을 방문하였을 때, 실비아는 거트루드의 지시로 이 일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그녀의 부모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채 다시 여행길에 올랐다.본격적인 학대는 1965년 8월 경 시작되었다.남자친구가 몸을 만지도록 한번 허락한 적이 있다는 실비아의 말을 우연히 듣게된 것이 도화선이었다.이에 거트루드는 불결한 창녀라며 화를 냈고「실비아는 매춘부이며 더러운 성생활을 일삼아 임신을 했다」라며그녀의 자녀들로 하여금 학교에 소문을 퍼트리게 하였다. 또한 자녀들에게 실비아를 폭행하거나 계단에서 밀어 굴러 떨어트리도록 지시했다.<사건의 배경이 된 실제 집>한편 이 시기를 거점으로 거트루드의 학대를 눈치채기 시작한 주변 인물이 등장한다.거트루드의 이웃으로 이사온 중년 부부인 버밀리온(Vermillion) 부부는 많은 아이들을 돌보는 거트루드의 행색을 보고 맘씨 좋은 사람으로 여겨 바베큐 파티를 열었다.그러나 머지않아 버밀리온 부인은 얼굴에 피멍이 가득한 실비아가 음식에 손을 대지 못하고 주위를 맴돌기만 하는 것을 알아차렸다.잠시 후 폴라(첫째 자녀/17세)가 어머니의 허락 하에 히죽거리며 실비아에게 다가가더니 뜨거운 물을 끼얻는 장면도 목격하였다.2개월 뒤, 버밀리온 부인이 무언가를 빌리러 거트루드의 집을 방문했을 때에도눈가에 피멍이 들어 눈을 뜰수 없을 정도의 엉망진창이 된 실비아가 집안을 멍하니 돌아다니고 하는 것을 목격하는 등,이들 부부는 오랜 시간동안 거트루드의 상습적인 학대와 폭력을 눈치채고 있었으나 신고하지 않고 묵인하였다.이웃소녀인 12살의 쥬디 듀크(Judy Duke) 또한 학대의 장면을 목격한 후 자신의 어머니에게「그 집 사람들이 실비아를 마구 때리고 발로 차고 있었어요.」라고 말했으나 그녀의 어머니는「벌받을 만한 짓을 하면 그럴 수도 있다」고 답하고는 무시했다.또 다른 14살의 이웃 소년 리키 홉스(Ricky Hobbs)도 거트루드의 집에서 공공연하게 행해지고 있던 학대를 눈치챈다.그러나 거트루드는 착실한 학생이었던 리키를 교묘히 조종하여 실비아의 고문을 돕는 수행자로서 역할을 다하도록 하였다. 이후 착실한 학생이었던 리키는 잔악에 가까운 잔혹성을 보이며 실비아의 학대에 적극 동참하였다.<리키 홉스와 거트루드>이와 같은 주변 사람들의 철저한 침묵과 묵인 속에서, 실비아에 대한 학대는 걷잡을 수 없이 심각해져 가고 있었다.이 무렵, 실비아는 참석하지도 않았던 학교의 수업에서 껌을 훔쳤다는 혐의를 받게 된다.이에 거트루드는 절도의 자백을 강요하며 손가락 끝마다 담배불로 지지며 고문하였다.(이후로 실비아에게 절도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켜야 한다며 집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은 실비아의 몸에 비벼 담배를 끄는 것이 법칙처럼 되었다.)그 사건 이후로 거트루드는 실비아가 학교에 가는 것을 금했다.등교를 금지당한 이튿날, 거트루드는 실비아에게 음료수를 사오라고 지시한다.돌아온 실비아에게 거트루드는 매춘을 해 음료수를 얻어왔다고 비난하며 남자 자녀들과 이웃 소년들이 보는앞에서 실비아의 몸에 코카콜라 병을 억지로 삽입하였다.코카콜라 병의 무리한 삽입 이후, 실비아에게 요실금이 생겼다.이에 거트루드는 실비아는 더이상 인간이 아니라고 판단, 지하실에 감금하기에 이른다.옷가지조차 박탈당한 실비아는 옷을 벗은채 지냈으며 거의 먹지 못했다.이와 같이 옷을 벗은 상태로 감금된 실비아를, 거트루드는 돈을 받아 이웃소년들에게 구경시켰으며 계단에서 지하실로 밀쳐 떨어트리도록 허락해 주곤 했다.또한 감금된 실비아는 화장실이 없어 지하실 바닥에 용변을 보기 시작했고, 존 주니어(셋째 자녀/12세)는 자신의 용변은 스스로 치워야 한다며 바닥에 쌓인 배변을 먹게 하거나 오줌을 받아놓았다가 마시게 했다.거트루드는 이러한 존의 행동을 매우 흡족해했으며, 배설물에 더러워진 실비아를 정화시킨다는 이유로「목욕요법」을 시작한다.목욕요법이란 실비아의 몸과 마음에 깃든 오물을 씻어내야 한다는 판단 아래그녀의 손과 발을 묶고 뜨거운 물이 담긴 욕조에 던져 넣는 것이었다.거트루드의 자녀들은 실비아를 높이 들어 올려 욕조에 떨어트리며 매우 즐거워하곤 했다.그리고는 화상을 입어 빨갛게 부어오른 실비아의 몸을 소금으로 마구 문질렀다.이와 같은 목욕요법은 하루에 수차례 시행되기도 하였으며, 실비아에게 악취가 심한 날에는 불쾌감을 참을 수 없다며 넘어가기도 하였다. <당시 실비아가 감금되어있던 지하실>이 무렵, 실비아의 여동생 제니 리킨스는 결혼해서 살림을 차리고 있던 큰언니 다이애나(Diana Likens)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들이 처해있는 상황을 설명하고, 경찰에게 연락해 주기를 요청했다.그러나 다이애나는 단순히 보호자인 거트루드에게 꾸중듣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자신과 함께 살고 싶어 거짓을 꾸며내는 것이라 여겨 오히려 괘씸하게 생각했다.그리고 그 편지를 무시해버렸다.그러나 얼마 후,약간의 꺼림칙한 기분이 든 다이애나가 여동생들을 만나러 거트루드의 집을 방문한다.그러나 거트루드는 다이애나가 집 안에 발을 들여놓는 것을 완강히 거부했으며, 이를 이상하게 여긴 다이애나가 그녀의 제지를 무시한채 집안으로 들어가려하자 그녀의 자녀들도 합세하여 경찰에 신고하겠다며 위협했다.이에 다이애나는 근처에 숨어 여동생들이 나올때까지 기다렸다.몇 시간 후, 제니를 발견한 다이애나는 그녀에게 다가갔지만 자신은 실비아에 대해 말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며 도망쳐버렸다.걷잡을 수 없는 불안에 사로잡힌 다이애나는 곧장 사회복지단체를 찾아간다.그녀의 신고에 사회복지사가 거트루드의 집을 방문했다.그러자 거트루드는 남자와 행위를 일삼던 실비아가 임신을 하게되어 가출했다고 진술했다.거트루드의 협박을 두려워한 제니 또한, 실비아는 가출해버렸으며 행방을 모른다고 답했다.이에 사회복지단체 직원은 거트루드 집에 대한 더이상의 방문은 필요 없으며,더 이상 추적할 필요가 없는 사례라고 기록하며 사건을 마무리했다.<제니와 다이애나>10월 21일 저녁 무렵.거트루드는 존(셋째 자녀/12세)과 스테파니(둘째 자녀/15세), 코이 하버드(스테파니의 남자친구/15세)에게 실비아를 지하실에서 데려와 침대에 묶어놓으라고 지시했다.이튿날 아침, 거트루드는 실비아가 침대에 오줌을 싼 것을 보고 분노한다.이에 그녀를 거실로 데려와 자신의 아들들과 이웃 소년들 앞에서 스트립쇼를 시켰고, 콜라병을 몸에 다시 한번 삽입하게 하였다.스트립쇼가 끝나자, 거트루드는 실비아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바닥에 억지로 눕혔다.이어 거트루드의 자녀들이 성냥으로 빨갛게 달군 바늘을 가져와 그녀의 복부에 낙인을 새기기 시작한다.「나는 (I Am)」 이라는 글자가 완성되었다.이어 거트루드는 깔깔 웃으며 바늘을 리키 홉스에게 넘긴다.그에게 「매춘부이며, 그것이 자랑스럽다」 라는 문구를 새기도록 시켰다.리키가 매춘녀의 철자를 묻자, 거트루드는「매... 춘.... 부」 라고 읊조리며 종이에 적어주었다.낙인이 완성되자 거트루드는 흡족해했다. 만족에 찬 거트루드가 방을 나가자 폴라(첫째 자녀/17세)와 셜리(다섯째 자녀/10세)는실비아의 가슴에 낙인을 새기기로 하였다.그녀의 흉부에「S」라는 글자를 새겨 넣기로 하고, 실비아의 동생, 제니를 불러 바늘을 쥐어주며 새기라고 요구하지만 거절한다.제니가 거절하자, 10살의 셜리가 나서서 낙인을 새겨 넣었다.다만 지나치게 흥분한 탓에 잘못 새겨「 3 」이라는 낙인이 되어버린다.(훗날 법정에서 S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 실비아(Sylvia) 혹은 노예(Slave) 어느쪽의 S인지 자신들도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이윽고 다시 나타난 거트루드는 실비아의 낙인에 매우 만족한 듯 크게 웃었다.그리고는 재갈을 풀어주며 실비아에게 말했다.「 이제 너는 결혼도 할 수 없고 누구 앞에서건 옷을 벗을수도 없어. 어때? 」아무런 반항조차 하지 않던 실비아는 가만히 대답했다.「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이대로 있는거에요」 <실비아의 몸에 새겨진 낙인>이후 하버드(스테파니의 남자친구/15세)가 실비아를 지하실로 데려갔고, 그 곳에서 실비아를 상대로 열성적인 유도 연습을 마치고는 흡족히 귀가했다.그날 밤, 제니가 몰래 지하실로 내려와 실비아를 찾아왔다.실비아는 가만히 말했다."난 곧 죽을것같아.."제니가 다녀간 후에는 거트루드가 다시 지하실로 내려와 실비아를 데리고 올라와 침대에서 재웠다.실비아는 이튿날 10월 23일 점심까지 잠을 잤으며, 그녀가 잠에서 깨어나자 거트루드와 스테파니(둘째 자녀/15세)가 그녀를 욕실로 데려갔다.따뜻한 물로 목욕을 시킨 후, 옷을 입히고는 불러주는 대로 편지를 받아 적게 하였다.「저는 밤에 남자들과 놀았어요. 그 아이들이 잠자리를 가지면 돈을 주겠다고 했어요.그 애들을 만족시켜줬지만, 저를 마구 때렸고 온 몸이 멍 투성이가 됬어요.'나는 창녀이며 그것이 자랑스럽다'라고 복부에 새겨 넣었어요.」부모에게 전해줄 편지가 마무리 되자,거트루드는 제니에게 실비아를 근처의 쓰레기장으로 데려가 죽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공포에 질린 실비아는 계단을 뛰어내려가 도주를 시도했으나, 현관 입구에서 거트루드에게 붙잡히고 말았다.거트루드는 슬쩍 웃으며 그녀를 식당으로 데려가 토스트를 몇개 쥐어주었다.그녀는 먹으려 했으나 눈물이 쏟아져 차마 삼킬 수 없었다.이에 거트루드는 곁에 있던 커텐 봉으로 그녀의 입을 후려 갈겼다.이후 존(셋째 자녀/12세)으로 하여금 실비아를 지하실에 감금시키도록 했다.거트루드도 따라서 지하실에 내려가, 접시에 담긴 과자를 그녀에게 건네 주었다.실비아는「개에게나 줘버려 개가 나보다 더 배고플테니」 라고 외쳤다.이에 거트루드는 수차례 그녀의 복부를 걷어차고 지하실을 나왔다.다음날, 10월 24일.지하실로 내려온 거트루드는 야구 방망이로 실비아를 수차례 내려치다가 지나치게 크게 휘둘러 자신의 얼굴을 강타해 눈 주위에 멍이 들었다.매우 불쾌해진 거트루드는 몇번 더 그녀를 내리치고 지하실을 나와 버렸다.이어서는 하버드(스테파니의 남자친구/15세)가 지하실로 내려와 빗자루로 실비아를 사정없이 후려쳤다.이 충격으로 실비아는 의식을 잃었다.그날 저녁부터 다음날 10월 25일 새벽까지 실비아는 삽으로 지하실 바닥을 계속해서 두드렸다.거듭되는 절박한 소리에 이웃들은 경찰을 불러야 한다는 생각은 했지만 아무도 연락하지는 않았다.10월 26일 저녁 무렵,거트루드는 자녀들에게, 실비아가 욕조에서 목욕할 기회를 주라고 말했다.이에 스테파니(둘째 자녀/15세)와 리키 홉스(이웃집 소년/14세)가 실비아를 위층으로 옮겨 옷을 입은 채로 욕조에 넣었다.실비아는 가만히 욕조 깊숙이 잠겼다.잠시 후, 그들은 욕실로 돌아가 잠겨있던 실비아의 몸을 들어 올려 매트리스 위에 눕혔다.그러나 그녀는 아무런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놀란 스테파니가 소생시키려고 노력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공포에 사로잡힌 스테파니는 경찰에 연락했고, 경찰이 도착하자 거트루드는 실비아가 적었던 편지를 차분히 내밀었다.그러나 그 소란스러운 와중, 제니가 경찰관의 소매를 붙잡고 덜덜 떨며 속삭였다.「 밖으로 데려다 주면 모든 것을 말하겠어요..」 <제니 리킨스> 제니의 충격적인 진술을 토대로 사건의 경위를 파악하게 된 경찰은 곧바로 거트루드와 그녀의 자녀들, 하버드와 리키 홉스를 살인죄로 검거하였다. 이웃 소년 4명도 상해죄로 체포되었다. 사체 부검 결과 2도와 3도의 담배 화상이 100여곳 이상, 수백개에 이르는 심각한 타박상과 찰과상, 근육 및 신경손상이 밝혀졌다. 죽음보다 극심한 고통 속에서 입술을 깨물어 그녀의 양 입술은 절단된 상태였다. 외부 성기는 심한 부종으로 막혀있었으나, 처녀막은 손상되지 않아 거트루드의「실비아는 매춘부이며 임신했었다」는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사망 원인은 뇌부종, 뇌혈종, 장기간의 중증 피부 손상에 의한 쇼크로 판명되었다. 1966년 5월. 거트루드와 폴라(첫째 자녀/17세), 존 주니어(셋째 자녀/13세)리키 홉스(이웃집 소년/14세), 코이 하버드(스테파니의 남자친구/13세)는 모두 사형을 구형받았다. 재판 진행 도중 임신 상태였던 폴라가 산기를 보여 병원으로 후송되기도 하였다. 당시 태어난 아이에게, 그녀는 가족간의 결속을 다지는 의미에서「거트루드」라고 이름지어 주었다. 재판 진행 과정 속에서, 각각의 변호사들은 서로 다른 사람들의 죄라고 주장하였다. 재판은 각각의 가해자들의 입장에서 쏟아져나오는 수많은 주장들과 책임 회피, 책임 전가 등이 활개하여 어지럽게 얽혀가고 있었다. 이러한 와중 거트루드는 실비아의 빈번한 매춘, 중년 유부남과의 성관계, 얼마나 반항적이고 공격적인 아이였는지 배심원들에게 전달하려고 애썼다. 뒤이어 증언대에 오른 마리(넷째 자녀/11세)는 차분히 어머니의 말이 맞다고 동조하였다. 그러던 그녀는 반대 심문을 당하던 도중, 돌연 눈물을 쏟으며 하늘을 향해 「하느님, 도와주세요! 」하고 외쳤다. 뒤이어 자신이 지금껏 한 발언은 모두 거짓이며, 어머니 거트루드와 다른 형제들이 실비아를 어떻게 학대하였고 고문하였으며 죽음에 이르게 했는지 그 참혹한 잔상을 샅샅이 고백하였다. 이 증언은 배심원 판결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Gertrude Baniszewski<핵심 주동자> 거트루드는 1급 살인으로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판결이 부당하다고 느낀 그녀는 항소를 거듭하여 최소 18년~종신구금형에 해당하는 형량을 얻게 되었고, 감옥생활을 하는 동안 수선가게를 성실히 운영하며 다른 수감자들의 상담에 상냥하게 귀기울여주는 등, 타 어린 죄수들의 귀감이 되는 모범수로서 18년의 징역을 끝으로 가석방 처리되었다. 1985년 가석방으로 자유를 되찾을 때 까지, 그 상냥한 언동으로 감옥에서「대모(Mom)」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가석방되는 그녀의 모습>거트루드의 가석방 소식은 인디아나 주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제니 리킨스와 그녀의 유족은 TV에 등장하여 눈물을 흘리며 반대의사를 피력했다.이에 각종 시민단체와 범죄반대단체, 학대반대단체들이 발벗고 나서 서명운동과 가석방 반대 시위를 진행하며 유족을 지지하였다.2개월 후, 시민단체는 인디아나 주민 4500명의 가석방 반대 서명을 제출하였으나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거트루드는 모범적 행실을 연유로 가석방 처리되었다.1985년 12월 4일 가석방 된 거트루드는 Nadine Van Fossan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아이오와 주로 이주하여 남은 여생을 살다가 1990년 폐암으로 사망하였다.이 사망소식을 들은 제니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다음과 같은 글귀와 함께 거트루드의 사망 기사를 보냈다.「좋은 소식이 있어요 어머니. 그 늙은 마녀가 죽었대요」(There's Good News Mom. Damn Old Gertrude Died) Paula Baniszewski<첫째 자녀 / 당시 17세>2급 살인죄를 선고받았으나 이에 불복하여 재차 항소하였다.그러나 이와 같은 항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신의 유죄를 인정하고 형을 감면받는 유죄감면신청을 하여 3년간 수감되었다 가석방되었다.훗날 결혼하여 2명의 아이를 두었다. (사진 : 거트루드와 스테파니 모녀가 나란히 수갑을 차고 있는 장면)Stephanie Baniszewski<둘째 자녀 / 당시 15세>훗날 플로리다 주에서 학교 교사가 되었다.결혼하여 자녀도 두고 있다.오늘날까지도 그녀는 인터뷰에서 당시 남자친구였던 코이 하버드와 자신은 죄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사진 : 8개월의 형을 선고 받은 존과 그런 아들이 안쓰러워 눈물 흘리는 거트루드)John Baniszewski<셋째 자녀 / 당시 12세>소년원에서 8개월의 징역을 보낸 뒤 모범수로 가석방 처리되었다.평신도로 살며 이혼가정의 아이들을 상담하였다.또한 존스보로 학교 학살 참사 이후 어린 범죄자들이 자신의 인생을 바꿀 수 있도록 계몽시키고자 자신의 인생을 예를 들어 열렬히 강의하곤 하였다.결혼하여 자녀 셋을 두고, 2005년 당뇨병으로 사망하였다. Marie Baniszewski<넷째 자녀 / 당시 11세>재판에서 계속 혐의를 부정해오다가 실비아의 학대를 인정하므로써 재판의 드라마틱한 순간을 구성해 낸 장본인 Shirley Baniszewski<다섯째 자녀 / 당시 10세>실비아의 가슴에 낙인 찍는 것을 도왔다.「S」를 새기려다 지나치게 흥분한 나머지 「3」자를 새겨버린 장본인.James Baniszewski<여섯째 자녀 / 당시 8세>이 사건을 토대로 한 영화 「아메리칸 크라임」의 개봉 이후, "모든 것은 과장되었다.실비아는 단지 어머니를 열받게 해서 죽은거다." 라고 언급하여 논란을 일으켰다.Dennis Baniszewski<일곱번째 자녀 / 당시 생후 18개월> 위의 여섯 남매들과 아버지가 다른 이복 형제로, 오늘날 결혼하여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 있으며, 실비아의 비극적인 죽음과 관련된 어떠한 사실도 보거나 듣고 싶지 않다고 언급했다. (사진 : 왼쪽은 둘째 아들 존 / 오른쪽이 스테파니의 남자친구 코이)Coy Hubbard<둘째 자녀 스테파니의 남자친구 / 당시 15세>감금 중인 실비아를 상대로 유도 연습을 즐겨하였으며 상습적인 구타를 즐겼다.8개월의 징역살이를 한 뒤 가석방되었으나 이후로도 범법행위를 저질러 여러차례 구속된다.이후 결혼하여 부인과 5명의 아이, 17명의 손주, 1명의 증손주를 두었으나2007년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사진 : 왼쪽은 리키 홉스 / 오른쪽은 둘째 자녀 존)Richard Hobbs(이웃 소년 / 당시 14세)거트루드를 도와 실비아의 학대를 주도적으로 조력했던 인물.실비아의 복부에 낙인 찍는 것을 마무리했던 장본인으로 소년원에 8개월 수감 된 후 모범수로 가석방 처리 되었다.1972년, 만 21세의 나이에 폐암으로 사망하였다. 이 실화는 2007년 미국에서 영화로 개봉되었다.마지막으로, 롤러스케이트와 비틀즈의 음악을 좋아하던 실비아 리킨스와 그녀의 어머니. 나중에 아메리칸 크라임 이라는 영화 개봉 돼었다.
신들어라작성일
2016-12-14추천
7
-

[엽기유머] [펌]산케베츠 불곰 습격사건
*글의 내용이나 사진에서 다소 혐오스러운 표현이 있을 수 있습니다.주의해주세요. 산케베츠 불곰 사건(로쿠센사와 곰 피해사건, 도마마에 불곰 사건)이란 1915년 12월 9일부터 12월 14일까지 홋카이도 루모이 도마마에 마을(현:도마마에초 고단베츠) 산케베츠(현:산케이) 로쿠센사와에서 발생한 일본 역사상 최악의 수해(獸害)사건이다.불곰이 수 차례에 걸쳐 민가를 습격해 개척민 7명이 사망하고 3명이 중상을 입었다. <사건의 경위>사건의 현장이 된 홋카이도 산케베츠 로쿠센사와는 동해(일본해) 연안에서 내륙으로 30km 정도 들어간 곳에 위치해 있다.지명인 '산케베츠'는 원주민인 아이누족의 언어로 '강 하류에 흐르는 강'을 의미하는 '산케?베츠(サンケ?ペツ)'에서 유래하였다. [출처] 산케베츠 불곰사건|작성자 나그네 1915년 11월초의 어느 날 밤, 개척민 부락의 이케다가(家)에 거대한 불곰이 모습을 드러냈지만 기르던 말이 놀라 날뛰었기 때문에 피해는 옥수수 몇 개에 그쳤다. 당시 마을은 개척이 시작된지 얼마 되지 않은 곳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야생동물들의 출몰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지만, 집 주인 토미조는 진흙에 새겨진 발자국의 크기에 불안감을 안게 되었다. 그리고 11월 20일, 불곰이 또 다시 나타났다. 이번에도 별 피해는 없었지만 말의 안전을 위해 토미조는 근처 마을에서 두 명의 포수를 불러 불곰을 포획하기로 한다. [출처] 산케베츠 불곰사건|작성자 나그네그리고 11월 30일, 세 번째로 모습을 드러낸 불곰을 향해 사격을 가했지만 포획에는 실패. 다음날 아침, 둘째 아들인 가메지로를 포함한 네 명은 오니시카산 쪽으로 향한 불곰의 발자국을 쫓아 핏자국까지는 확인했지만 눈보라가 심해져 더 이상 추격을 하지는 못했다. 12월 9일<오타가(家)의 참극>가을에서 겨울에 걸쳐 개척민 마을은 수확한 농작물을 출하하기 위한 여러 작업에 쫓기고 있었다.산케베츠 같은 벽지는 인력이 턱없이 부족하기에 남자들은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밖에서 일을 하며 보낼 수 밖에 없었다. [출처] 산케베츠 불곰사건|작성자 나그네 그리고 12월 9일 아침. 산케베츠강 상류에 위치한 오타가(家) 역시 바쁜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당시 오타가에서 신세를 지고 있던 나가마츠 요우키치(통칭 오도, 59세)가 벌채를 위해 이른 아침부터 집을 나가고 오타가의 가장인 사부로(42세)역시 강 하류에 빙교(얼음다리로서, 목재로 골격을 만들고 그 위에 눈이나 얼음을 덮어 얼려 완성시키는 다리)를 만드는데 사용할 재료 조달을 위해 외출한 상황이었다. 사부로의 아내인 아베 마유(34세)와 오타가에 잠시 신세를 지고 있던 하스미 미키오(6세)만이 집에 남아 곡물 선별 작업을 하고 있었다. [출처] 산케베츠 불곰사건|작성자 나그네당시 로쿠센사와 개척마을의 지도. 12번 집이 오타가이다.점심시간. 오도가 언제나처럼 식사를 위해 집으로 돌아왔는데, 토간(방과 방사이를 흙바닥으로 해둔 곳)의 화로 가장자리에 미키오가 홀로 앉아있었다. 자기를 놀려주기 위해 자는 체하고 있는거라 생각한 오도는 일부러 큰 소리로 말을 걸며 다가가 미키오의 어깨에 손을 얹고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그리고 오도는, 미키오의 얼굴 아랫쪽에 늘러 붙어있는 핏덩어리와 무언가에 물어 뜯긴듯 한 목 부위의 상처를 보게 된다. 머리 옆부분에는 엄지 손가락 굵기의 구멍이 뚫려 있었고 미키오는 이미 숨져있었다. [출처] 산케베츠 불곰사건|작성자 나그네 오도는 공포에 몸부림치며 마유를 불러봤지만 대답은 없었다. 단지 어두컴컴한 안쪽 거실에서 이상한 냄새가 감돌 뿐이었다. 심상치 않은 사태에 집을 뛰쳐나온 오도는 하류의 가교 현장으로 달려갔다. 오도의 이야기를 듣고 오타가로 달려온 남자들은 집안 모습에 충격을 받으면서도 이것이 불곰의 짓이라는걸 알아차렸다. 옥수수를 말리던 입구 반대쪽의 창문은 부서져 있었고 거기서부터 토간의 화로까지 일직선으로 나 있는 불곰의 발자국을 발견한 것이다. 아마 옥수수를 먹으려 창문으로 접근한 불곰의 모습에 마유와 미키오는 놀라 소리쳤을테고, 그것이 불곰을 자극했을 것이다. 발자국이 이어진 거실을 조사해보니 그을려진 장작 몇개가 굴러다니고 있었고 손잡이가 부러지고 피에 물든 도끼가 하나 있었다. 둥글게 찍혀 있는 곰의 발자국은 방 구석으로 이어져 있었고 그곳에는 선혈이 낭자했다. 불 붙은 장작과 도끼를 휘두르며 저항하던 마유가 결국 곰의 공격을 받고 중상을 입었다는걸 의미했다. 곰은 마유를 물고 토간을 지나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던듯, 창틀에는 마유의 것으로 보이는 머리카락이 끼어 있었다. 오도가 미키오의 죽음을 알아챘을 때, 토간에는 따뜻한 찐감자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한다. 즉, 사건이 일어나고 그리 긴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은 사건 직후, 마을 사람 중 한 명이 집 앞 길을 말을 탄채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집에서 숲 방향으로 나 있는, 무언가가 끌린 흔적과 혈흔을 발견했지만 포수가 산에서 잡은 사냥감을 갖고 오타가에서 잠시 쉬고 있다고 생각해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한다. 이런 상황들로 볼 때, 사건은 오전 10시 반 정도에 일어났을거라 추측되었다. [출처] 산케베츠 불곰사건|작성자 나그네 이 사건으로 인해 마을은 발칵 뒤집혔다. 하지만 12월의 홋카이도는 해가 일찍 떨어지기 때문에 미키오의 사체를 거실에 안치한 후인 오후 3시 쯤부터 무언가 행동을 취하기에는 늦은 시간이었다.오타가에서 500m 정도 하류쪽에 위치한 메이케이 야스타로(40세)의 집에 남자들이 모여 차후 대책을 논의했다. 불곰 토벌과 마유의 사체 수색은 다음 날로 미룰 수 밖에 없지만, 경찰과 야쿠바(면,읍,동사무소에 해당되는 관청) 그리고 미키오의 집에 서둘러 연락을 취해야만 했다. 하지만 별 다른 통신 수단이 없기에, 누군가 직접 찾아갈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한 남자가 선발됐지만 본인이 거부해 결국 사이토 이시고로(42세)가 길을 떠나기로 했다. 오타가보다 더 상류쪽에 집이 있던 이시고로는, 급한 볼일로 가장인 야스타로가 집을 비워야만 하는 메이케이가에 가족들을 피난시키고 남자가 한 명은 있어야한다고 생각해 오도를 그 집에 같이 머물게 하는 조취를 취했다. 12월 10일<수색>이른 아침, 사이토 이시고로는 마을을 나섰고 남은 남자들은 불곰 토벌 및 마유의 사체를 찾기 위해 약 30명 정도의 수색대를 결성했다. 전날에 난 곰의 발자국을 쫓아 숲으로 들어간 그들은, 150m정도 들어가다 불곰과 조우하게 된다. 곰은 말보다 훨씬 거대했으며 전신이 검은 털로 덮여 있었고 가슴 부위에 흰얼룩점이 나 있었다. 불곰은 곧 수색대에게 달려들었다. 갑작스런 상황 속에서 총을 가진 다섯 명이 겨우겨우 총구를 들이댔지만 발포를 한건 단 한 명 뿐이었다. 성나 날뛰는 불곰을 앞에 두고 수색대는 뿔뿔이 흩어졌지만 다행스럽게도 불곰 역시 도주를 했기 때문에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 [출처] 산케베츠 불곰사건|작성자 나그네 주위를 추스리고 수색을 이어가던 수색대는 한 분비나무 밑동에서 잔가지가 몇 개 놓여있고 피에 물든 눈 지반을 발견했고 그 밑에서 마유의 사체를 발견했다. 무릎 아래 다리와 두개골 일부만 남겨져 있었다.이제 이 불곰은 사람 맛을 알게 됐다. 마유의 사체를 눈에 숨기려 한 것은 보존식으로 삼기 위한 행동이었다. 빼앗긴 먹이를 되찾으려는 불곰의 습성을 알고있던 한 남자가 말했다. "불곰은 다시 나타날거야" <다시 습격받는 오타가>밤이 되었고, 오타가에는 상이 차려졌지만 불곰의 공격을 두려워 해 9명 만이 찾아왔다. 그 중 한 명인 하스미 치세(33세, 미키오의 모친)가 손님들의 술 시중을 들고있던 오후 8시반 쯤, 큰 소리와 함께 거실 벽이 돌연듯 무너지며 불곰이 집 안으로 들어왔다. 관이 뒤집히고 시체가 흩어졌으며 공포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대들보로 올라가거나 야채 저장소와 변소로 도망가는 등 몸을 숨기려했다. 그런 혼란 속에서, 한 남자가 어이없게도 아내를 넘어뜨린후 밟고 올라가 혼자만 대들보 위로 도망쳤다. 그 후 부부 간에는 싸움이 끊이지 않고 남편은 평생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한다. [출처] 산케베츠 불곰사건|작성자 나그네 이 소동에서도 정신을 잃지않고 기름통을 두드리며 불곰을 위협하는 사람이 있었고, 정신을 차린 또 다른 남자가 총으로 불곰을 쏘았다. 그리고 300m 정도 떨어진 곳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50여명 정도의 남자들이 비명 소리 등을 듣고 오타가로 달려왔지만 이미 불곰은 모습을 감춘 뒤였다. 희생자가 발생하지 않은 것에 안도한 일동은, 일단 메이케이가로 피난하기 위해 하류로 향했다. <메이케이가의 참극> 오타가에서의 소동은 메이케이가에도 전해졌고, 피난해있던 여자와 아이들은 두려움 속에서 불을 때며 밤을 지내고 있었다. 메이케이가를 지키고 있던 몇몇 남자들은 근처로 식사를 하러 나갔다가 오타가에 불곰이 나타났단 소식을 듣고 그쪽으로 향한 상태였다. 그리고, 오타가에서 도망친 불곰은 이 무방비 상태인 메이케이가로 향하고 있었다.[출처] 산케베츠 불곰사건|작성자 나그네 오타가에서 불곰이 도망친지 20분도 지나지 않은 8시 50분경, 넷째 아들인 우메키치(1세)를 업고 토벌대의 야식을 준비하던 메이케이 야스타로의 아내 야요(34세)는 지축을 뒤흔드는 소리와 함께 창을 뚫고 침입한 검은 물체에 놀라, "누구야? 뭐하고 있는거야?" 라고 소리쳤지만 대답은 없었다. 그 정체는 바로 지금까지 본적이 없던 거대한 불곰이었다. 호박을 찌고 있던 화로의 솥이 뒤집히며 화롯불이 꺼지고 혼란 속에서 램프까지 꺼지며 집 안은 암흑 천지가 되었다. 야요는 집 밖으로 도망치려 했지만 공포에 떨며 다리에 매달린 둘째 아들 유지로(8세) 때문에 순간 휘청거렸고 그 틈을 타 불곰이 달려들었다. 불곰은 업고 있던 한살배기 우메키치를 물어뜯었다. 그대로 세 명은 불곰에 휘둘리게 됐고 야요는 머리를 물린다. 그 때, 유일한 집 안 남자였던 오도가 도망치려 대문간으로 달려갔고 거기에 신경을 뺏긴 불곰은 모자를 놓아주었다. 이 틈을 타 야요는 아이들을 데리고 탈출한다. 한 편 곰에게 쫓기던 오도는 으슥한 곳에 몸을 숨기려 했지만 결국 곰에게 허리 부분을 물리고 말았다. 오도의 비명 소리에 움찔한 불곰은 다시 공격 목표를 바꾸기 위해 집 안으로 눈길을 돌렸고, 거기에는 아직 일곱 명이 남아 있었다. 불곰은 메이케이가의 셋째 아들인 긴조(3세)와 사이토가의 넷째 아들인 하루요시(3세)를 일격에 때려 죽이고 사이토가의 셋째 아들인 이와오(6세)를 물어뜯는다. 이런 상황 속에서, 야채 저장소에 숨어있던 이시고로의 아내 사이토 다케(34세)가 얼굴을 내밀었고 그 순간 그녀가 곰의 표적이 되었다. 당시 다케는 임신한 상태였다. 불곰의 발톱에 걸려 거실로 끌려나온 다케는 "배는 찢지마!"라고 소리치며 태아를 살려달라 외쳤지만 공허한 울림으로 끝났고 곰에게 상반신 부터 먹히기 시작했다. [출처] 산케베츠 불곰사건|작성자 나그네 강 하류로 향하던 일행은, 시끄러운 소리와 비명을 듣고 서둘러 메이케이가로 향한다. 도중, 중상을 입은 야요를 만나 메이케이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듣게 되고 집 밖에서 오도를 찾아 보호한다. 남자들은 곰을 포획하기 위해 메이케이가를 둘러싼다. 하지만 암흑 천지가 된 집 안으로 섣불리 들어갈 수는 없었다. 집 안에서는, 다케로 생각되는 여자의 신음소리와 고기를 씹고 뼈를 깨부수는 소리가 들려왔다.집에 불을 지르자는 의견과 집 안을 향해 일제히 사격을 가하자는 의견 등이 나왔지만 아이들이 아직 살아있을 거라고 외치며 야요가 필사적으로 반대했다. 일행은 두 그룹으로 나눠, 한 쪽은 입구 근처에 총을 지닌 열 명 정도가 위치하고 나머지는 집 뒤쪽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집 뒤쪽에 있던 한 사람이 공포를 두 발 쏘자, 불곰은 입구를 부수고 밖에서 기다리던 남자들 앞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맨 앞에 있던 남자가 방아쇠를 당겼지만 불발됐고, 다른 이가 총격을 가하려 했지만 곰은 이미 모습을 감춘 뒤였다. [출처] 산케베츠 불곰사건|작성자 나그네 [출처] 산케베츠 불곰사건|작성자 나그네횃불을 들고 들어간 집 안의 광경은 처참했다. 피는 천장에 까지 튀었고 주위는 온통 피바다였다. 바닥에는 먹다 남겨진 두 아이와 다케의 시체가 있었다. 상반신을 먹히던 다케의 배는 찢겨져 있었고 뱃속의 태아가 밖으로 끌려 나와 있었지만 불곰은 태아에게는 손을 대지 않았던듯, 발견 당시까지만 해도 태아는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한다. 하지만 태아 역시 한 시간 후에 숨을 거두었다. 무사히 살아남은 메이케이가의 장남 리키조(10세)는 잡곡 포대 뒤에서 살육의 일부 현장을 목격했으며, 메이케이가의 장녀 히사노(6세)는 기절해 그대로 거실에 쓰러져 있었지만 다행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서둘러 생존자들을 보호하고 사체를 수습한 일행이 집을 나오자, 집 안에서 갑자기 남자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러일전쟁에 참전했던 한 남자가 홀로 집 안으로 들어가, 거적 아래에 숨어있던 이와오를 발견했다. 이와오는 중상을 입은 상태였다. 어깨와 가슴을 물어 뜯기고 왼쪽 넓적다리에서부터 궁둥이는 뜯어 먹혀, 뼈만 남아있었다.마을 사람들은 전원 분교장으로 피난하기로 하고, 중상자들도 3km 하류에 있는 츠지가에 수용되어 응급 처치를 받았다. 하지만 이와오는 모친인 다케의 참사를 알지도 못한채 "엄마! 곰 좀 쫓아줘요!"라고 외치며 사경을 헤매다 20분 후에 사망하였다. 이틀간 여섯 명, 태아를 포함하면 총 일곱 명이 목숨을 잃었다. 야요 등의 부상자들은 다음날 3km 더 하류에 있는 집으로 옮겼으며 12일에야 고탄베츠에 있는 병원에 입원할 수 있었다. 12월 11일대부분의 주민이 산케베츠 분교장으로 피난해 로쿠센사와에는 인기척을 느낄 수 없었다. 남은 농가는, 두려움 속에서 단단히 문단속을 하며 불곰 퇴치를 위해 불을 땠고 그 불들이, 으스스하고 쓸쓸한 마을을 비추고 있었다. 작은 마을의 주민들 만으로는 더 이상 방법이 없다고 판단한 장로들은 불곰 퇴치를 경찰과 행정기관에 부탁하기로 결정했다. 한 편, 가족에게 닥친 비극을 알리없이 눈길을 내달리던 사이토 이시고로는 관공서와 경찰에 오타가 사건 보고를 끝내고 10일은 도마마에에서 머문 후 11일 마을로 돌아왔다. 그리고 하류의 산케베츠에 도착해 아내와 아이들의 죽음을 전해들었고, 이시고로는 그대로 눈 위에 엎드려 통곡할 수 밖에 없었다.[출처] 산케베츠 불곰사건|작성자 나그네 12월 12일 <토벌대 조직> 로쿠센사와 불곰사건은 홋카이도 도청에 전해졌고, 보안과는 하보로 분서장인 칸 미츠구 경부에게 토벌대 조직을 지시했다. 한 편, 사망자의 검시를 위해 말 썰매를 타고 가장 먼저 현지로 향하던 의사가 정오 무렵 산길에서 불곰의 변을 발견한다. 변에서는 인골과 머리카락, 소화가 덜 된 인육 등이 발견됐고 의사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칸 경부는 근처 마을의 청년회와 소방단 아이누족 등에게 협력을 부탁했으며 무라다총(일본이 영국 기계를 도입해 1880년부터 제조하기 시작한 총)과 일본도 등으로 무장한 많은 인원이 산케베츠에 모여들었다. 부(副)대장에는, 지형에 익숙한 제실임야국(현:임야청 林野?)인물을 임명했으며 대장인 칸 경부는 주요 지점에 대기한채 토벌대에게 수색을 명령했다. 하지만 임야를 능수능란히 누비는 불곰을 찾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매복>해는 떨어져가고 곰의 행적에 대해 아무런 단서도 얻지 못한자 토벌대는 수색에 대한 재검토에 들어간다.불곰은 빼앗긴 먹이를 되찾으려 하는 습성이 있는데, 이걸 이용해 불곰을 유인하는 작전이 제시됐다. 그 먹이란 바로 곰에게 살해당한 마을 사람들이었다. 곧 본부 내 의견이 둘로 갈렸다. 칸 대장은 고심 끝에 결국 그 작전을 수용하기로 하고, 설득을 위해 유족과 마을 사람들 앞에 선다. 칸 대장의 설명에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고 모두 그 작전을 받아들였다. 사태는 그 만큼 절박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희생자의 사체를 불곰 토벌의 미끼로 쓰는 전대미문의 작전이 시작되었다. 총을 잘 다루는 일곱 명의 대원이 선발되었고 교대 요원 한 명을 제외한 여섯 명이, 대들보 위에서 불곰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거실에 놓여진 여섯 사체(태아의 사체를 포함)의 썩는 냄새를 맡고 불곰이 모습을 드러냈다.집으로 다가오는 불곰의 모습에 모두 침을 삼키며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집 바로 앞에 이르자, 불곰은 걸음을 멈추고 잠시 경계를 편 뒤, 몇 번이고 집 주위를 돈 다음 숲 속으로 사라졌다. 남자들은 그대로 다음 날까지 기다렸지만 불곰은 나타나지 않고 작전은 실패로 끝났다. [출처] 산케베츠 불곰사건|작성자 나그네 12월 13일아사히카와의 육군 제7사단 28연대가 사건 해결을 위해 투입이 결정돼 장병 39명이 출동했다.한 편 불곰은, 마을의 빈 집을 돌아다니며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닭을 잡아 먹기도 하고 된장이나 청어절임 등의 보존식을 뒤적거리고 옷과 침구 등을 찢어놓기도 했다. 그 중에서 주목할만한건 여자가 사용하던 베개나 따뜻하게 달궈 난방용으로 쓰던 돌 등에 이상할 정도로 집착을 보였다는 점이다. 산케베츠의 여덟 집이 피해를 입었지만 그 난동 속에서도 불곰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난동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불곰은 신중함을 잃어가고 있었다. 한 번 맛 들인 먹이를 찾아, 대낮에도 불구하고 대담하게 인가에 들어서는 등 경계심이 약해져 있었다. 그리고 행동 영역 또한 점점 넓어지며 강 하류에까지 이르러, 발견될 위험성 역시 높아져 가고 있었다. 칸 대장은 빙교를 방어선으로 삼고, 이곳에 총든 대원들을 배치해 경계에 들어갔다. 해가 저문 후, 다리에서 경비를 맡고 있던 한 대원이 강 건너편 기슭의 나무 그루터기에서 수상한 낌새를 느낀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낮에 새어두었던 그루터기 갯수 보다 한 개 많았고 조금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 것이다. 보고를 받은 칸 대장은, 사람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큰 소리로 말을 걸어봤지만 대답이 없었다. 불곰이라 판단한 칸 대장은 발포 명령을 내렸고 일제히 그 곳을 향해 사격을 가했다. 그러자 수상한 그림자는 서둘러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또다시 곰을 놓쳤다는 생각에 다들 아쉬움과 분한 마음을 분출했지만, 칸 대장은 곰을 잡을 수 있을거란 희망을 갖기 시작했다. [출처] 산케베츠 불곰사건|작성자 나그네 12월 14일 <악마의 최후> 날이 밝자 강 건너편을 수색하기 시작한 일행은, 불곰의 발자국과 혈흔을 발견한다.총을 맞아, 움직임이 둔해졌을거라 판단한 칸 대장은 서둘러 토벌대를 산 속으로 보낸다. 가장 빨리 산 속으로 들어간건 10일, 곰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산케베츠에 찾아온 야마모토 헤이키치였다.오니시카 마을에 살던 야마모토는 젊은 시절, 고등어를 손질하는 부엌칼 하나로 불곰을 쓰러뜨린 경험이 있는 남자로서 군모를 쓰고, 러일전쟁의 전리품인 총 한자루로 수 많은 짐승을 사냥한 유명한 포수였다. 총을 맞은 불곰은 신갈나무에 매달려 쉬고 있었다. 곰은 산기슭을 오르고 있는 토벌대에만 신경을 쓰느라 숨을 죽이고 몰래 다가오는 야마모토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20m 정도까지 곰에 접근한 야마모토는 나무 뒤로 잠깐 몸을 숨긴뒤 사격을 준비했다. 그리고 총성이 울렸고, 첫 발이 불곰의 심장 근처에 명중했다. 야마모토는 재빨리 다음 총알을 넣고 두번째 사격을 가했으며, 총알은 곰의 머리를 파고 들었다. 12월 14일 오전 10시, 서둘러 달려온 토벌대가 본 것은 마을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악마의 최후였다. [출처] 산케베츠 불곰사건|작성자 나그네 <곰 바람(쿠마가제)>불곰은 340kg, 2.7m에 이르는 거대한 수컷이었으며 검은 털로 덮여 있었고, 군데 군데 누런 털이 섞여 있었다. 가슴에서 등까지 이르는 하얀 얼룩점이 특징이었다. 7~8세로 추정되었으며 몸에 비해 머리가 이상하리만치 컸다. 분노가 폭발한 대원들은 봉으로 곰을 내려치기도 하고 걷어차고 밟기도 했다. 200명이 외치는 만세 소리에 산 속은 메아리쳤다. 12일부터 삼일간 투입된 토벌대원은 600명 이상이었으며 아이누족의 개도 열 마리 이상이 투입됐고 도입된 총포는 60정에 달했다. 불곰의 사체는 농가로 끌려나와 말에 실렸다. 하지만 놀라 날뛰는 말을 진정시키지 못하여 결국 남자들 몇 명이 썰매에 싣고 끌기 시작했다. 그런데 썰매를 끈지 얼마 안 가 하늘이 어두워지고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사건 발생 후, 계속 맑은 날씨였건만 눈은 이윽고 눈보라로 바뀌어 썰매 끄는 사람들을 힘들게 했다. 그 후 마을 사람들은, 날씨가 갑자기 변할 때면 '쿠마가제(곰 바람)'라 부르기 시작했다. [출처] 산케베츠 불곰사건|작성자 나그네<해부>눈보라를 뚫고 한 시간 반에 걸쳐 옮긴 불곰의 사체는 산케베츠 청년회관으로 옮겨졌다. 우류라는 곳에서 온 한 아이누족 부부는 곰을 본 후, 몇 일 전 우류에서 한 여자를 잡아먹은 곰일 것이라 하며 그 증거로 뱃 속에서 붉은 옷감이 나올거라 했다. 어느 포수 역시, 아사히카와에서 여자를 잡아먹은 곰이라면 살색 각반이 나올 것이라 했다. 곰을 사로 잡은 야마모토 헤이키치 또한, 이 곰이 아마시오에서 한 여자를 잡아먹고 세 명의 포수에게 쫓기던 녀석이 틀림없다고 진술했다. 해부가 시작되고 위가 열리자 그 안에서 붉은 천과 살색 각반, 아베 마유가 입고 있던 포도색 각반이 머리카락과 함께 발견되었고 모여있던 사람들은 다시 한 번 슬픔과 분노를 느꼈다. 희생자 공양을 위해 곰의 고기는 삶아서 나눠 먹었는데 질기고 단단해 맛은 없었다고 한다. 벗겨낸 가죽은 말려서 간과 함께 50엔에 팔렸고, 토벌대는 이 돈을 피해자 유족들에게 건냈다.모피와 두개골 등은 후에 모두 사라져 지금 전해지는 것은 없다.-그 후-머리에 상처를 입은 상황에서도 굳세게 행동했던 야요는 순조롭게 회복했지만, 업혀 있던채로 곰에게 물어뜯겼던 메이케이 우메키치는 그 후유증으로 2년 8개월 후 사망했다. 우메키치를 포함해 사건의 사망자를 총 여덟 명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같은 집에서 불곰의 습격으로부터 살아남은 메이케이 유지로는 사건 27년 후 태평양 전쟁에서 전사했다.오도 역시 순조롭게 회복해, 그 다음 해 봄부터 일을 시작했지만 일을 마치고 귀가 하던 중 강에 빠져 사망했다. 곰에게 입은 상처가 영향을 미쳤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곰은 사살되고 사건은 해결됐지만, 마을 사람들에게는 심리적 공포심이 남아 있었다. 마을 밖에 연고가 있던 사람들은 서둘러 로쿠센사와를 떠났고 그렇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서진 집을 수리하며 힘들게 겨울을 넘겼다.하지만 봄이 와도 마을 사람들은 기력을 되찾지 못했고, 오타 사부로는 집을 태운 후 하보로라는 곳으로 떠났다. 그 후, 한 명 한 명씩 마을을 떠나 하류에 있는 츠지가를 제외하고 마을에는 단 한 사람도 살지 않게 됐다. 불곰을 사살했던 야마모토 헤이키치는 그 후에도 포수로 활약했고, 1950년 9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그의 손자에 의하면, 평생동안 쓰러뜨린 불곰이 300마리를 넘었다 한다. 그리고 사건 당시 일곱 살이었던 산케베츠 촌장의 아들 오가와 하루요시는 유명한 불곰잡이가 됐다. 그 이유는, 희생자 한 명 당 10마리의 불곰을 잡겠다는 다짐에 따른 것으로, 62년 동안에 102마리의 불곰을 죽인 후 숨진 마을 사람들의 넋을 달래는 위령비를 건립했다. 또한 하루요시의 아들인 다카요시도 포수가 되어 1980년에는, 아버지 하루요시도 쫓은적이 있던 체중 500kg의 불곰 '홋카이타로'를 8년에 걸친 추적 끝에 사살하기도 했다. 그리고 5년 뒤에는 다른 두 명의 포수와 함께 체중 350kg이 나가는 '케이코쿠타로'도 사살했다. [출처] 산케베츠 불곰사건|작성자 나그네 - 사건에 대한 분석 -<원인>이 사건은, 동면에 실패한 곰이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흉폭해져 일으킨 사건이라 여겨졌다. 하지만 그 후, 같은 케이스의 사건이 발생한 적이 없으며 최근 들어 기존의 주장에서 많은 의문점이 발견되고 있다. 일부에서는 에도시대 후기부터 시작된 무분별한 벌목과 메이지 이후부터 시작된 내륙부 개척으로, 야생동물과 인간의 활동 범위가 겹쳐져 벌어진 사건으로 보기도 한다. <교훈> 이 사건을 조사하고 기록해 보고서로 펴냈던 기무라 모리타케는, 사건이 크게 번진 이유에 대해최초에 상처 입힌 곰을 그대로 방치한 것과 평소 총을 다룰 일 없는 농민들의 총기 사용 미숙이 주요인이라 했다. 그리고 문제의 불곰을 통해 다음과 같은 점을 알 수 있다. * 불을 무서워하지 않는다사건 발생 후 마을 사람들은 불로 곰을 쫓으려 했다. 일반적으로 '야생 동물은 불을 무서워한다'라는 인식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타가와 메이케이가에 대한 습격을 통해 볼 수 있듯이 불곰은 등불이나 화롯불 등에 거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 집착심이 강하다옥수수를 몇 번이나 노렸던 점, 산케베츠 사건 전에도 여러 여성을 습격했던 곰이 산케베츠에서도 여성의 옷가지 등에 이상하리만치 집착한 점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먹다 남긴 마유의 사체를 눈 속에 감춰두고, 오타가에 몇 번이나 나타났던 점 등도 불곰의 특성이다. 한 편, 말에게는 전혀 피해를 입히지 않았다. * 도망치는 것을 쫓는다메이케이 야요 등이 구사일생 할 수 있었던건, 불곰이 도망가는 오도에게 신경을 빼았겼기 때문이다. 이처럼 불곰은, 먹이를 먹고 있는 중이라도 도망치는 것을 발견하면 반사적으로 쫓아가는 습성이 있다. * 죽은체를 하면 살 수 있다?메이케이가의 참극에서, 기절해 무방비 상태였던 메이케이 히사노와 다케의 태아는 곰에게 공격을 받지 않았다. 이것은, 불곰이 움직이지 않는 것은 공격하지 않는다게 아니라 단순히 그 때, 다른 먹이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판단된다. * 한 번 인육 맛을 본 동물은 위험하다다른 야생동물과 마찬가지로 곰 역시 사람을 두려워한다. 가끔 사람을 공격하는 이유는, 인간과 갑자기 조우했을 때의 공포심에서 유발되는 것이라 알려져 있다. 때문에 곰 출몰 지역에서는, 종이나 방울 소리를 내어 사람의 존재를 미리 인식시키는 것도 곰 퇴치의 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의 무력함을 알게 되고 인육 맛을 본 곰은 일부러 사람 만을 공격하게 된다. 그러한 곰에게 종이나 방울을 울리는건 위치를 확인시켜주는 꼴이 되어 오히려 위험할 수 있다. 또한 '불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집착심이 강하다' '움직이는 것을 쫓는다' 같은 습성은, 후에 발생한 '이시카리누마타 호로신 사건', '후쿠오카대학 반더포겔부 불곰 습격사건'을 일으킨 곰들의 행동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출처] 산케베츠 불곰사건|작성자 나그네- 사건에 대한 기억-사건의 무대 로쿠센사와에는, 당시의 정경이 재현된 '산케베츠 불곰사건 복원현지'가 조성되었다. 울창한 숲 속에는 당시의 생활을 재현한 가옥과 사건에 대해 설명한 간판, 희생자들을 위한 위령비와 민가를 습격하는 모습의 불곰 모형이 세워져 있다. 또한 로쿠센사와 근처의 홋카이도도(道) 1049호는, '베어로드'라고도 불리는데 귀여운 모습을 한 엄마곰과 아기곰의 모습이 담긴 간판을 길 곳곳에서 볼 수 있다. 관광 활성화와 야생동물 보호를 위해서지만, 산케베츠 불곰 사건에 대해 알고 이 곳을 찾는 사람들은 이 간판을 접한 후의 복잡한 심경을 블로그에 토로하기도 한다. 그리고 도마마에 향토자료관에서도 이 사건에 관한 많은 자료를 접할 수 있다. [출처] 산케베츠 불곰사건|작성자 나그네 출처:http://blog.naver.com/harimi82/60159987620 글의 마지막쯤에 언급된 '홋카이타로'라는 식인곰에 대해서도 번역된 글이 있다면 찾아오고 싶은데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
-
-
-
-
-
-
-
-
-
-
-
[엽기유머] 사형수들의 마지막 만찬
테드 번디 , 43세 , 플로리다 , 강간 , 시간 , 탈옥 , 35명이상 살해 , 전기의자형 , 특식 거절 , 전통적 마지막 식사가 주어짐 , 스테이크(미디엄) , 달걀 ,해쉬브라운 ,토스트와 잼 버터 , 우유 쥬스
존 웨인 가씨 , 52세 , 일리노이 ,강간 ,33명 살해 , 약물주사형 , 12새우튀김 , 오리지날 kfc 한바구니 , 감자튀김 , 딸기 1파운드 , 판결 이전에 가씨는 3개의 kfc 레스토랑을 관리했음
로니 리 가드너 , 49세, 유타 , 강도 , 2명 살해 , 총살형, 랍스터 꼬리 , 스테이크 , 애플파이 , 바닐라 아이스크림 , 반지의 제왕 시청하면서 식사.
티모시 맥베이 ,33세 , 인디애나 , 168명 살해 (오클라호마 폭탄 살해범) , 약물주사형 , 민트초콜레칩 아이스크림 2파인츠
앤젤 디아즈 , 55세 , 플로리다, 살해, 납치 , 무장강도 , 약물주사형 , 식사 거절 , 일반적인 감방식이 제공됐으나 그것마저 거절.
빅터 페규어, 28세 , 플로리다, 납치 살해 , 약물주사형 , 구멍난 올리브 한쪽.
리키 렉터 , 42세 , 알칸사스 , 2명 살해 , 약물 주사형, 스테이크 , 후라이드 치킨, 체리 에이드 , 호두파이 , 그는 호두파이를 남겼고 간수에게 나중을 위해 그것을 아껴두는거라 말함.
라즈니쉬작성일
2013-12-12추천
3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