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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좌파빨갱이의 정체
아직도 좌빨이라는 단어의 어원도 모르면서 좌빨좌빨 거리는데다가,
한술 더떠서 지역까지 붙이더군요.
좌빨이라는 단어의 설명에 앞서 좌파=빨갱이 라는 세계 역사상 전무후무한 발상을
자신의 무식함이 부끄러운줄도 모르고 입밖에 내뱉는 인간들은 "반민주화 독재세력"임을 자인하는 꼴임을 알기 바랍니다.
건국의 아버지, 또는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로 호불호가 갈리는 우남 이승만 (1875년 3월 26일 ~ 1965년 7월 19일) 입니다.
그는 임시정부 시절 자신이 대통령이 아니라면 참여하지 않겠다고 윽박 질러 결국 초대 대통령을 지내며 자신의 영향력을 키워갑니다.
하지만 상해에 있던 임시정부에는 단 한번도 온 적이없고 국내외에서 백성들이 임시정부에 보낸 독립자금으로 미국 호텔방에서 호위호식 하며 지냈고 당시 고가였던 자동차를 타며 스피드를 즐기다 범칙금을 많이 물기도 했습니다.
당시 이승만이 쓴 하루 식비와 호텔 사용비를 합치면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들의 1주일 식량치를 확보 할 수 있었다고 하니 독립자금으로 얼마나 사치를 부리고 살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임시정부 대통령으로써 최악의 일을 저지르게 되는데,
바로 미국 대통령에게 "위임통치청원서" 제출한 것 입니다.
이에 단재 신채호는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 먹었는데 이승만이라는 작자는 없는 나라까지 팔아 먹으려 한다"며 분개 했고 곧바로 1923년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게 됩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
이에 이승만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탄핵 된 대통령이 되고
임시정부는 신채호와 이회영을 중심으로 한 창조파와 안창호, 이동휘를 중심으로 한 개조파로 나뉘게 됩니다.
현상유지파 김구가 없었다면 임시정부는 이승만에 의해 자멸할뻔 하게 됩니다.
그는 임시정부에서 권한을 잃고 홀로 독자적 세력을 형성하다
이후 하와이에서 의형제인 박용만과 대립하여 조선인들 끼리 박용만파와 이승만파를 만들어 지역감정을 일으킵니다.
이에 안창호가 중재에 나섰지만 실패하며 당대의 지성인인 안창호 입에서 "이승만은 미치광이다" 라는 말이 나오게 만들고
박용만은 "이승만과 같은 작자가 나라의 지도자가 된다면 그보다 불행한 나라는 없을 것이다"라며 독설을 퍼붓기도 했습니다.
그는 독립후에 1945년 9월 7일 여운형의 요청에 의해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지만
여운형 김규식 박현영
당시 정치적 거물들이였던 김구(한국 광복군, 임시정부), 여운형(건준), 김규식(미군정), 박헌영(좌익세력) 등에 비해
국내에서 정치적 기반이 약해 현 민주당의 전신인 한민당을 조직한 친일파들과
북한에서 탄압받아 월남한 기독교인들을 포섭하여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닦습니다.
모스크바 3상 회의
같은 해 12월 좌익과 우익의 대립을 폭발하게 만든 모스크바 3상회의가 열립니다.
미국과 소련은 일정기간 신탁통치 뒤 조선의 정부수립과 자유 선거를 지지 하였으나 미국은 즉각독립,
소련은 신탁통치를 하려고 한다는 동아일보의 오보(세계 3대 오보 중 하나로 지정 됩니다.)로
좌익과 우익 둘다 반탁운동을 전개하였고 소련은 민심을 잃게 됩니다.
이 때문에 소련에서는 회의 내용을 전문 공개하며 미국과 같은 입장이라 밝히자
좌익은 반탁에서 찬탁으로 입장을 선회하게 됩니다.
하지만 동아일보의 내용만 알고 회의 내용은 전혀 몰랐던 민중들은 좌익을 비난하며 완전히 등을 돌립니다.
그에 반해 우익은 반탁, 반소련 입장을 확고히 하며 반공 = 애국자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독립군이 대부분이였던 좌익들을 빨갱이라 탄압 하고(이때 임시정부에서 조선의용대를 이끌던 김원봉이 독립군 고문 담당이였던 친일파 노덕술에게 고문을 당하고 분개하여 월북하게 됩니다.)
친일파가 대부분이였던 우익은 애국자로 변하게 되는 말도 안되는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뒤 이승만은 남쪽에서만이라도 총선거를 해 남한만이라도 정부를 세우자는 정읍발언(1946.6)을 합니다.
그 뒤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남한 총선거후 남북분열입니다.
이때까지 좌파는 대부분 독립군이었고 우익은 친일을 했던 무리였죠.
헌데 친일파들이 좌파를 빨갱이라 하며 잡아죽이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계속해서 벌어집니다.
옛날 공전의 히트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에도 이런 장면이 나오죠?
그리고 6.25가 터지고, 좌파빨갱이는 당연히 잡아죽여야할 대상이 됩니다.
동아일보의 오보에서 비롯된 민중의 혼란을 틈탄 이승만과 친일파들의 돋보이는 처세술로,
좌파는 빨갱이가 되었고 우리나라는 남북 분열이 되었답니다.
Lay작성일
2011-02-11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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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근현대사 인물] 건국의 아버지?? 민족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
이승만
건국의 아버지, 또는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로 호불호가 갈리는 우남 이승만 (1875년 3월 26일 ~ 1965년 7월 19일) 입니다.
그는 임시정부 시절 자신이 대통령이 아니라면 참여하지 않겠다고 윽박을 질러 결국 초대 대통령을 지내며 자신의 영향력을
키워갑니다. 하지만 상해에 있던 임시정부에는 단 한번도 온 적이없고 국내외에서 백성들이 임시정부에 보낸 독립자금으로
미국 호텔방에서 호위호식 하며 지냈고 당시 고가였던 자동차를 타며 스피드를 즐기다 범칙금을 많이 물기도 했습니다.
당시 이승만이 쓴 하루 식비와 호텔 사용비를 합치면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들의 1주일 식량치를 확보 할 수 있었다고 하
니 독립자금으로 얼마나 사치를 부리고 살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임시정부 대통령으로써 최악의 일을 저지르게
되는데, 바로 미국 대통령에게 "위임통치청원서" 제출한 것 입니다.
이에 단재 신채호는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 먹었는데 이승만이라는 작자는 없는 나라까지 팔아 먹으려 한다"며
신채호
분개 했고 곧바로 1923년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게 됩니다. 이에 이승만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탄핵 된 대통령이 되고
임시정부는 신채호와 이회영을 중심으로 한 창조파와 안창호, 이동휘를 중심으로 한 개조파로 나뉘게 됩니다. 현상유지파 김
구가 없었다면 임시정부는 이승만에 의해 자멸할뻔 하게 됩니다. 그는 임시정부에서 권한을 잃고 홀로 독자적 세력을 형성하
다 이후 하와이에서 의형제인 박용만과 대립하여 조선인들 끼리 박용만파와 이승만파를 만들어 지역감정을 일으킵니다.
이에 안창호가 중재에 나섰지만 실패하며 당대의 지성인인 안창호 입에서 "이승만은 미치광이다" 라는 말이 나오게 만들고 박
용만은 "이승만과 같은 작자가 나라의 지도자가 된다면 그보다 불행한 나라는 없을 것이다"라며 독설을 퍼붓기도 했습니다.
그는 독립후에 1945년 9월 7일 여운형의 요청에 의해 조선건국준비위원
왼쪽부터 여운형, 김규식, 박헌영과 가족
회를 조직하지만 당시 정치적 거물들이였던 김구(한국 광복군, 임시정부), 여운형(건준), 김규식(미군정), 박헌영(좌익세력)
등에 비해 국내에서 정치적 기반이 약해 현 민주당의 전신인 한민당을 조직한 친일파들과 북한에서 탄압받아 월남한 기독교
인들을 포섭하여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닦습니다.
모스크바 3상 회의 당시 사진
같은 해 12월 좌익과 우익의 대립을 폭발하게 만든 모스크바 3상회의가 열립니다. 미국과 소련은 일정기간 신탁통치 뒤 조
선의 정부수립과 자유 선거를 지지 하였으나 미국은 즉각독립, 소련은 신탁통치를 하려고 한다는 동아일보의 오보(세계 3
대 오보중 하나로 지정 됩니다.)로 좌익과 우익 둘다 반탁운동을 전개하였고 소련은 민심을 잃게 됩니다. 이 때문에 소련에서
는 회의 내용을 전문 공개하며 미국과 같은 입장이라 밝히자 좌익은 반탁에서 찬탁으로 입장을 선회하게 됩니다.
하지만 동아일보의 내용만 알고 회의 내용은 전혀 몰랐던 민중들은 좌익을 비난하며 완전히 등을 돌립니다. 그에 반해 우익
은 반탁, 반소련 입장을 확고히 하며 반공 = 애국자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독립군이 대부분이였던 좌익들을 빨갱이라 탄압 하
고(이때 임시정부에서 조선의용대를 이끌던 김원봉이 독립군 고문 담당이였던 친일파 노덕술에게 고문을 당하고 분개하여 월
북하게 됩니다.) 친일파가 대부분이였던 우익은 애국자로 변하게 되는 말도 안되는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때 김구는 자신이 평생에 가장 후회한다는 반탁에 가담하여 이승만과 손을 잡게 됩니다. 이에 여운형과 김규식이 김구에게
찾아가 반탁을 하는것은 좌우합작에 반대되어 민족이 분열될 수 있다고 설득하지만 김구는 그들의 권유를 뿌리치고 계속 반
탁을 지지 하게됩니다. 다음해 1946년 3월 제 1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열려 미국은 좌우합작 단체에 의한 조선의 정부 수립
을 내세웠고, 소련은 찬탁 단체에 의한 정부를 수립을 내세워 서로의 입장차가 생기자 결국 5월에 휴회하게 됩니다.
이때 이승만이 친일파와
정읍발언 당시 이승만
기독교인들을 앞세워 전라도 정읍에서 남한만이라도 단독정부를 세우자며 정읍발언(1946. 6)을 하게 됩니다.
이 사건은 당시 민족분단의 위기 분위기가 팽배했기 때문에 단독정부 수립에 대해 좌,우익 사이에서도 절대 발언하지 않았던
민감한 사항이였지만 이승만은 그런 분위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발언을 해 엄청난 파문을 일으킵니다.(미국에게 관심조차 못
받자 이승만이 위기감에 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이에 여운형과 김규식이 민족 분열 위기를 느껴 미군정의 지지를 받으며 좌
우합작운동(1946. 7 ~ 1947. 12)을 벌이고 김일성을 만나기 위해 여운형이 직접 북한에 가게 됩니다. 하지만 1947년 3월 트루
먼독트린에 의해 냉전이 시작되어 좌우익 또한 사이가 벌어지고 5월에 제 2차 미소공동위원회 결렬과 여운형의 암살(194
7. 7)로 실패하게 됩니다. 이후 조선의 문제는 유엔 총회(1947. 11)에 넘어가 남북한 총선거 실시를 정하지만 북한의 거부로
민족분열의 분위기는 더욱 더 커지게 됩니다. 이에 위기를 느낀 김구는 반탁입장을 철회
하고 김규식과 함께 김일성을 만나 남북협상운동(1948. 2~ 4)을 전개하지만, 남한에서는 이미 5월 10일 제헌국회로 불리는
단독 선거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제주도에서
방북하는 김구
남한 단독선거 반대 평화 시위를 벌였고 이를 막기 위해 이승만이 보낸 시라소니 이성순의 서북청년단과 경찰의 좌익분자 색
출 명분하에 무차별 민간인 테러를 가하자 제주도민들이 분노하여 민중봉기를 일으킵니다. (1948년 4월 3일 ~ 1950년 초)이
에 미군정은 군대를 보내 무차별 학살을 자행하여 당시 제주도민 13만명 중에 6~7만명이 학살당하는 최악의 사건이 벌어집니
다. (이 일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눈물을 흘리며 사과하기 전까지 정부에서 쉬쉬 되어 왔습니다.) 이때 4.3이라는 숫자를 말 만
해도 잡혀갔다고 하니 어느정도로 탑압을 했는지 짐작이 갑니다.
제주도민들 중에 좌익세력을 추려내는 모습
제주에 파견되기 전에 서북청년단과 경찰을 위로하는 이승만
최근에 발견된 학살된 유골들
민족분열 때문에 단독 선거 반대의 의견이 많았으나 결국 남한에서 1948년 5.10 총선이 실시되고(김구, 김규식, 좌익세력 불
참) 7월 17일 헌법 제정, 결국 독립한지 3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이 수립됩니다. 이로써 통일 정부는 사실상 물거품이 됐
으며 다음달인 9월 9일에 북한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세워 분단이 되고 맙니다. 미국과 소련의 지지로 민족통일 정
부를 세울 수 있었으나 이승만의 주도하에 여운형, 김구 암살과 박헌영과 좌익세력에게 테러를 앞 세워 방해 결국은 지금까지
도 분단된 민족을 만드는데 김일성과 함께 1등 공신이 됩니다. 이후 친일파 청산을 위해 반민족 행위 특별 위원회(1948. 9)
를 만들어 박흥식, 최린, 이광수, 최남선,노덕술등을 체포하지만 이승만은 좌익 잡는 애국자들을 왜 잡아가냐며 화를 냈고 국
회에 김일성의 사주를 받은 자들이 있다며 국회의원들을 고문하고 사형 시키는 국회 프락치 사건을 일으키고 노덕술 휘하
의 경찰들은 국회를 습격하는등 친일파들의 입김에 의해 결국
우리 민족의 염원이였던 과거 청산을 실패하게 되며 이후 이 친일파들은 정치, 경제, 역사, 예술, 문화등등 사회 곳곳에 뿌리
를 내려 지금
반민특위원회
까지도 우리나라의 기득권층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후 한달 뒤 1948년 10월 19일 이승만을 깜짝 놀라게 하는 사건이 벌어지
는데 남한단독 정부 수립 이후에도 계속 진행되고 있었던 제주도민 토벌대를 강화하기 위해 여수와 순천의 14연대에 제주도
출동 명령을 내리지만 당시 경상도 지역은 좌익 세력이 경찰과 군대 곳곳에 있었고 좌익세력이 주 인원이였던 14연대 군인들
은 동족상잔의 제주도 출동 반대와 남북통일을 앞 세워 좌익단체와 동맹휴학에 들어간 학생 청년들과 함께 오전 5시 여수 읍
내를 장악하고 우익세력을 색출한 뒤 곧바로 순천을 오후 3시경 완전히 장악하게 됩니다. 이에 이승만은 21일 10개 대대 병력
을 보내 여수와 순천을 포위하고 계엄령을 선포하여
여순사건 희생자들
진압 작전을 펼치게 되고 대대적인 시가전이 펼쳐지지만 화력과 진압군의 병력 앞에서 반란군은 대부분 진압되 일부는 지리
산과 산악 지역에 들어가 빨치산 활동을 하게됩니다. 여순사건의 가장 큰 피해자는 민간인들이였고 특히 무고한 청년들이 단
지 학생복을 입은 죄, 흰 운동화를 신은 죄, 국방색 런닝 셔츠를 입은죄, 머리를 짧게 깎은 죄, 과거에 좌익단체에 가입한 적
이 있다는 죄, 가족과 친구 가운데 좌익에 가담한 사람이 있다는 죄 아닌 죄로 삶을 마감하게 되었고, 남한 좌익 최고의 단체
였던 남로당원 박정희의 배신 활약으로 좌익 세력이였던 많은 군인과 경찰들이 숙국작업으로 대부분 사형됐습니다. 이후 미
국에서 1950년 1월 12일 애치슨 라인이 선포되고 공산당에 의해 중국 본토가 장악 되자 자극을 받은 김일성은 소련에 무기
를 원조 받고 남한을 공산화 하기 위해 조선의용군과 김원봉을 선두로 하여 6월 25일 남침을 합니다. 이승만과 신성모 국
방부장관은 당황하게 되고 이승만은 라디오를 통해 "우리 국군이 북한군을 막고 있으니
북한을 민주기지로 하자며 북한을 도발했던 이승만(오른쪽)과 아침은 서울 점심은 평양에서라며
자신만만했던 낙루장관 신성모(왼쪽)
안심 하라며 민심을 추스리곤 정작 자신과 대부분 정치인들은 대전까지 내뺐고, 북한군은 미아리까지 치고 내려왔다는 소식
에 민중들은 급히 피난을 가게 됩니다.. 이때 정부는 한강다리를 건너는 민간인을 무시한체 폭파를 감행하여 많은 민간인 사
상자를 냈고 너무나 이른 시간에 폭파로 라디오만 믿다가 미쳐 피난가지 못한 민간인과 전방 전투에서 후퇴한 군인들은 북한
군에게 많은 피해를 받습니다.
폭파된 한강다리, 부교가 놓이고 나서야 피난을 가는 민간인들
이윤열 당시 사회부장관의 회고록에는 이승만이 이범석 국무총리의 의견을 받아 들여 남하하는 북한군을 막기위해 한강 다리
를 폭파 시켰다고 주장하여 윗선에서 결정 됐음을 밝혔습니다. 하지만 애꿎은 채창식 공병감만 사형 당한 체 아직도 누가 명
령했는지 확실한 진실은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까도까도 양파같은 인물이라는...
출처 : I Love Soccer- 孔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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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전.노태우씨포함 권력층,미국부동산 불법취득 파문폭발!!
全.盧태우씨포함 권력층,미국부동산 불법취득 파문폭발!! [진실승리님 정리]
충격!!경악!!
이 나라의 기득권층,권력층의 대다수가 매국노들이란 사실이
만천하에 밝혀지고 있습니다.
국내 언론은 이러한 사실에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진보인터넷 언론인 뷰스앤뉴스만이 단독보도한 내용입니다.
널리 퍼뜨려 주십시요
[美땅투기 x파일] 美 부동산 쇼핑 파문, 정,재계 인사 실명 공개
'시크릿 오브 코리아' 파문 폭발
전 靑수석, 한나라 의원, 재벌총수들, 전직대통령들 즐비
2009-09-15 08:58:59
http://www.viewsnnews.com/article/view.jsp?seq=54650
이명박 정부 전 청와대 수석, 한나라당 의원, 전직 대통령들 일가, 재벌그룹
전-현직 회장 등이 미국에서 부동산을 사고판 내역이 한 재미교포에 의해
낱낱이 공개돼 파문이 일고 있다.
재미교포 안치용(42)씨는 지난달 개설한
‘시크릿 오브 코리아’(secret of korea, http://andocu.tistory.com)
라는 블로그에 국내 정-재계 인사들의 부동산 매입을 증명하는 계약서,
계약 위임장 사본 등 각종 문건과 각종 자료를 실명과 함께 대거 공개했다.
안씨는 등기소와 인터넷 사이트 등을 통해 이들 문건을 적법하게 입수했다고 밝히고 있다.
전직 대통령들 일가, 미국서 부동산거래 왕성
'시크릿오브코리아'에 현재까지 올라온 자료는 모두 234건.
이 가운데 정·재계 인사들과 연관된 부동산 및 관련 서류가 30여 건이 넘는다.
전두환, 노태우 등 전직 대통령의 일가와 관련된 서류는 15건.
여기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 며느리와 노태우 전 대통령 사돈 등의 미국 부동산 쇼핑 내역과 주택 소유권 내역 등이 상세하게 실려 있다.
통장에 29만원에 없다던 전두환 전 대통령의 둘째 며느리인 탤런트 출신
박모씨는 조지아주에서 2003년 36만5000달러짜리 단독주택을 샀다가 이듬해 팔았다.
박모씨는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을 관리하고 있다는 의혹 때문에 2003년 검찰 조사를 받은 바 있다.
노태우 전 대통령 일가도 미국에서 왕성한 부동산거래를 해, 노 전 대통령
아들은 장인인 재벌총수 신모 회장의 도움 등으로 사실상의 유령회사를
설립해 뉴욕에서 100만달러대의 여러 채의 고가 부동산을 사들였다.
최근 거래는 올해 4월에 이뤄졌다.
전두환 전 대통령 사돈이자, 노태우 전 대통령, 이명박 대통령과는 사돈의 사돈관계를 맺고 있는 h그룹의 이모회장은 1987년과 2001년 뉴욕에서
두 차례 부동산 매매로 큰돈을 번 데 이어 뉴저지에서도 부동산거래를 한
사실이 드러났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경우는 이미 검찰수사를 통해 드러난 아들의 주택 매입 사실을 지적했다.
mb정부 김모 전 수석, 9건이나 사들여
전직 대통령과 일가를 제외한 고위 공직자, 한나라당 의원 등 정부여당의 관련서류도 15건이 올라와 있다.
가장 많은 자료는 이명박 정부 초대 수석이었다가 현재는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중인 김 모씨 건으로, '공부하러 갔나? 콘도 사러 갔나?'라는 타이틀 아래
9건의 글과 자료가 공개돼 있다.
수석이 될 당시에도 부동산투기 의혹으로 시끄러웠던 그는 유학생 신분이던 1983∼87년 뉴욕에서 자신과 동생의 명의로 무려 네 건의 부동산을 매입했고, 보스턴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다섯 건의 콘도를 매입했다.
유학생은 한 채만 집을 구입할 수 있었던 당시 법을 정면으로 위반한 행위였다.
고모 한나라당 의원의 경우 1992년과 1999년 미국에서 두건의 부동산을 사들였다.
특히 환란 직후인 1999년에는 뉴저지에서 45만달러의 거액을 주고 고가의
주택을 사들여 논란을 예고했다.
당시 법은 이런 규모의 해외부동산 매입을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현직 재벌총수들도 즐비
전-현직 재벌 총수들의 부동산 매매도 많았다.
박정희시대 산업화의 역군으로 일컬어져온, p그룹의 총수였던 박모씨 일가의 경우 90년대에는 뉴저지에서 두 채를 사고팔았고 2000년대 들어서는 뉴욕 맨해튼에서 3채의 콘도를 사들였다.
특히 지난해 5월에는 맨허튼에서 420만달러(우리돈 52억원)의 최고급 콘도를 사들여 만만치 않은 재력을 과시했다.
d그룹의 박모 회장도 올 1월 뉴욕 맨허튼에 300만달러를 들여 초호화 콘도를 매입했다.
굴지의 여*업인인 a그룹의 장모 회장도 지난해 5월에 앞의 박모 회장과
같은 건물에 위치한 200만달러대 콘도를 사들였다.
특히 장모 회장은 부동산매입 후 즉각 이를 공짜로 자신의 법인에 넘겨,
무상증여 의혹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밖에 문제의 사이트에는 유명 여자연예인이 앞의 박모, 장모 회장과 같은 건물의 200만달러짜리 콘도를 구입한 내역 등, 국내 유명인들의 부동산거래 내역도 실려 있다.
2005년 해외부동산 취득 관련 규제가 완화되기 전까지 해외 체류 한국인은
2년 이상 거주할 목적의 주거용 주택만, 그것도 극히 한정된 액수 내에서만
살 수 있었고 이 내역을 한국은행에 신고하도록 돼 있었다.
따라서 앞서 거론된 인사들 대부분의 미국 내 부동산 취득은 불법이어서,
향후 일파만파의 파문을 예고하고 있다.
임지욱 기자
스포츠서울닷컴은 안씨의 자료를 토대로 미 부동산쇼핑 리스트에 오른 정재계 인사와 거래내역을 정리했다.
김병국 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겸 고려대 정치학과 교수
[*등기부에는 국적이 "미국인"으로 등재..그럼, 이명박은 미국인을 청와대 수석으로 임명함]
국적관련은 여기링크 ☞ http://www.vop.co.kr/a00000267075.html
1983년 11월3일 : 동생 김병표와 함께 뉴욕 맨해튼 275웨스트 96스트릿 유니트 3c 19만 달러에 매입.
1984년 11월9일 : 동생 김병표의 부인 신모씨에게 0달러에 넘김.
1997년 11월25일 : 미국인에게 22만달러에 매도.
1985년 6월3일 : 뉴욕 맨해튼 101 웨스트 75스트릿 콘도 4b호 21만9,500달러에 구입
1998년 9월19일 : 13년 소유 후 외국인에게 26만5,000달러에 매도
1986년 7월 8일 : 한국 재벌이 선호했던 센트럴 파크 옆 61가 사보이콘도 33만 4,500달러에 매입
2001년 8월31일 : 58만 5,000달러에 매도(25만달러 시세차익)
1987년 5월22일 : 동생 김병표와 공동명의로 뉴욕 맨해튼 95가 프린스턴 하우스 콘도 21만 달러에 매입
2000년 9월27일 : 32만달러에 매도
1984년 11월7일 : 동생 김병표에게 보스톤 1105 매사추세스 애비뉴 캠브리지 미들* 카운티 마 유니트 10e 부동산을 친족간 무상증여(매입시기 불분명)
1986년 2월25일 : 김병표 씨 외국인 부부에게 12만5,000달러에 매도.
1984년 11월7일 : 1105 매사추세스 애비뉴 캠브리지 미들* 카운티 마 유니트 8b 부동산을 친족간 무상증여.
1987년 12월8일 : 김병표 씨 외국인에 13만 달러에 매도
1984년 11월7일 : 1105 매사추세스 애비뉴 캠브리지 미들* 카운티 마 유니트 3d 부동산을 동생 김병표에 1달러 혹은 10달러에 매도.
1986년 11월26일 : 김병표 씨 외국인에게 12만5,000달러에 매도
1985년 5월17일 : 1105 매사추세스 애비뉴 캠브리지 미들* 카운티 마 유니트 5a(매입시기 불분명) 김병국, 김병표 소유 부동산을 외국인에게 11만6,500달러에 매도
전두환 전 대통령 아들 전재용-박상아 부부
2003년 5월15일 : 같은해 9월 비자금 사건으로 미국 조지아주 애틀란타로 이주하기 4개월 전 5725 레이크 하이트 서클, 알파레타 가 30022 단독주택(1994년 완공된 2층 건물 방 4개 화장실 4개)을 36만5,000달러에 매입
2003년 11월 : 5733 레이크 라는 법인을 설립 0달러에 소유권 이전.
2004년 4월23일 : 40만3천800달러에 매도 (4만달러 시세차익)
신명수 전 동방유량 회장(노태우 전 대통령의 아들 노재헌의 장인)
1997년 1월9일 : 'house eagle' 법인 설립, 뉴욕 맨해튼 최고 부촌지역으로 센트럴파크 바로 옆에 있는 308 이스트 72스트릿 21b호 부동산을 115만1,000달러에 매입(콘도구입 양도세 4604달러, 호화세인 맨션텍스 11,510달러 뉴욕시 납부)
2000년 1월31일 : buena vista ny 법인에 10달러 매각, 3년도 안돼 1.8배 오른 182만5,000달러에 매각(10억 시세차익)
2001년 6월7일 : '하우스이글' 명의로 150만달러 호화콘도 구입, 170 이스트 87스트릿 e9a호.
2002년 5월6일 : 사위 노재헌에게 이전
2005년 4월 : 210만달러에 매도(6-7억 시세차익)
2008년 4월8일 : 노재헌 'brave ocean llc' 법인 설립(변호사 대리인으로 해 설립)
2009년 4월23일 호화콘도 205 이스트 85스트릿 10f호 브롬튼하우스 181만 달러에 구입
2008년 10월 : 'brave ocean llc'의 실제 주인이 노재헌 씨임을 입증하는 위임장 작성
장영신 애경그룹 명예회장
2008년 5월19일 : 뉴욕 웨스트 57스트릿 39f 1호 콘도를 194만9,948달러에 구입호화세, 부동산 중개비 등 포함 총 212만 달러.
하루만에 '39f1 property llc'라는 법인에 0원에 매각(39f1 property llc는 부동산 구입 2주전 설립된 회사)
이희상 한국동아제분 회장(전두환-노태우-이명박 대통령 사돈)
1987년 9월9일 : 145 이스트 48스트릿 24b호 부동산을 31만달러에 매입, 양도세 1240달러 납부(회계사에 위임장 작성)
2001년 5월17일 : 42만5,000달러에 매도(10만달러 시세차익)
2001년 5월29일 : 뉴욕의 대학로로 불리는 맨해튼 29 웨스트 9 스트릿의 부동산 340만달러에 매입
2005년 5월17일 : 505만 달러에 매도(20억 차익)
1993년 8월9일 : 740 윌로우 런 윙크코프 nj 07481(매입시기 불분명) 부동산을 37만5,000달러에 매도
박태준 전 포철회장 일가
2003년 11월19일 : 뉴욕 맨해튼 315 웨스트 84스트릿 단독주택 320만5,000달러에 구입
2008년 7월10일 : 4년6개월 보유 뒤 625만 달러에 매도(약 75억원 시세차익)
2006년 8월8일 : 2101 브로드웨이에 있는 콘도 9-012호 60만 달러에 구입 현재 보유 중.
박용만 두산 인프라 회장
2009년 1월9일 : 뉴욕 맨해튼 웨스트 57가 43p 2호 콘도를 274만9,000달러에 매입, 세금 8만 달러 복비 17만 달러 등 총 300만 달러. (박 회장의 경우 콘도대금 85%를 모기지론 등 은행대출로 충당.
출처 http://www.sportsseoul.com/news2/ptoday/hotissue/2009/0914/20090914101140300000000_7431498295.html
이밖에 문제의 사이트에는 유명 여자연예인이 앞의 박모, 장모 회장과 같은 건물의 200만달러짜리 콘도를 구입한 내역 등, 국내 유명인들의 부동산거래 내역도 실려 있다. 2005년 해외부동산 취득 관련 규제가 완화되기 전까지 해외 체류 한국인은 2년 이상 거주할 목적의 주거용 주택만, 그것도 극히 한정된 액수 내에서만 살 수 있었고 이 내역을 한국은행에 신고하도록 돼 있었다. 따라서 앞서 거론된 인사들 대부분의 미국 내 부동산 취득은 불법이어서, 향후 일파만파의 파문을 예고하고 있다.
가자서작성일
2009-09-15추천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