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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용해인의 기본소득당 동덕여대 학생들과 연대선언.
동덕여대 사태에서 배후 세력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메디컬 페미니즘 관련 인사들. 여성의당 인물들의 연관된 사진도 나온 상태라 사람들이 의심하는 중이고. 과격한 폭력시위로 여성 친화적이라는 언론사와 정치인들도 손절치는 시점에서 용해인님이 동덕여대 학생들과 연대 선언이 나와서 먼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최근 이슈가된 오조오억은 상황에 따라 문제 없다고 생각했지만 혐오로 사용할수도 있는 단어라 각자 판단의 영역으로 보았지만 지금 시점에 동덕여대쪽에 붙는다는게 정치인으로 표에 유리하다고 생각하면 한걸까요. 기본소득당과 여성의당이 기존에도 여러 행보를 같이한 이력이 있고 겹치는 인물이 많은 상황이라 더욱더 구설에 휩싸이는 분위기 입니다. 동덕여대 학생들의 학내 민주주의 투쟁에 연대합니다최근 동덕여대 학생들이 학교의 공학 전환 논의에 반발하며 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대학이 독단으로 공학 전환을 논의하고 있음이 알려지자 총학생회를 비롯한 학생들은 본관 점거, 반대 서명, 릴레이 대자보 등 대응에 나서며 공학 전환 논의 철폐 및 학생들과의 소통체계 구성을 요구하고 있다. 그간 동덕여대 본부는 이번 공학 전환뿐 아니라 상경계열 통폐합, 여성학 전공과정 폐지 등 학생과 상의 없이 의사결정을 강행한 바 있었고, 이에 학생들은 더 이상의 독단적 행정은 없어야 한다며 학내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고 있다.그러나 대학 본부는 반민주적이고 여성혐오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본부는 시위의 원인을 제공한 학교의 책임은 외면한 채, 최대 54억원의 피해보상과 CCTV 색출을 운운하며 학생들을 겁박했다. 19일 학생총회에서 공학 전환 안건이 반대 2천여 표에 달했음에도 학교는 의구심부터 표했다. 심지어 처장단 인터뷰에서는 찬성하는 학생들에겐 미안하다며 학생 간 갈라치기를 시도하고, “젠더 프리는 김이 빠진다”는 성차별적 발언까지 하며, 학교 측 자료 공개를 거부했다. 이는 명백한 불통이다. 학생들을 설득하기 위한 조치도 취하지 않을 뿐더러 도리어 겁박하는 본부 측의 태도에는 어떤 민주적 가치도 보이지 않는다.학교의 무능과 무책임은 더 악랄한 혐오를 부추기고 있다. 언론은 시위의 이유에 집중하기보단 ‘폭력’과 ‘젠더 갈등’으로만 시위를 규정하며 학생들에 대한 혐오와 조롱을 부추기고 있다. 그렇게 불거진 ‘난장판’에 신남성연대는 동덕여대에 혐오 집회를 예고했고, 서울시와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는 학생들을 비난하며 혐오에 편승했다. 그런데 학생을 보호해야할 학교 본부는 “어쩔 수 없다”며 학생을 향한 폭력을 방치하고 도리어 이를 조장하고 있다. 학교가 민주주의와 성평등의 가치를 파괴하는 것을 넘어 학생의 안전마저 내팽개치고 있는 현실이 참담하다.동덕여대 학생들은 한국 사회에 여전히 성차별이 현존하기에 여대가 필요하다고 외치고 있다. 학교 측은 인구 및 재정 감소로 인한 대학 발전 방향이라고 주장하지만, 이윤 논리에만 매몰되는 것은 여대의 존재 의의와 목표를 묵살하는 것일 뿐더러 비민주적 공학 전환은 결코 그 대안이 될 수 없다. 오히려 현재 학교의 학생에 대한 태도, 그리고 정치와 사회의 혐오적 태도야말로 지금 여자대학이 존재해야 하는 현실의 불평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평등과 민주주의를 지켜내는 것은 연대의 힘이다. 많은 이들이 동덕여대 학생들의 투쟁에 연대하고 있다. 대학이 민주적으로 작동하게끔 하는 정당한 싸움의 과정에서 성차별과도 동시에 맞서야 하는 여대의 현실을 알기 때문이다. 더욱 넓고 거세지는 요구에 학교 본부는 민주적인 소통으로 응답해야 할 것이다. 애초에 비민주 행정으로 사태를 촉발한 책임을 다하고, 재학생을 색출하고 협박하는 치졸한 행태를 멈춰야 한다. 기본소득당 청년대학생위원회도 대학이 민주적으로 작동하도록 투쟁하는 동덕여대 학생들에게 연대할 것이다.2024.11.25.기본소득당 청년·대학생위원회 ====================================================================================== 野 진성준 "동덕여대 사태 원인, 대학당국에→ 링크 클릭 금투세 그분아님 ?? 野 진성준 "동덕여대 사태 원인, 대학당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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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엽기영상] 커세어, Mac을 위한 첫 번째 진정한 게이밍 키보드와 마우스 공개
해외 기사를 번역(GPT-4o mini)한 것이므로 오역이 있을 수 있습니다. 커세어, Mac을 위한 첫 번째 진정한 게이밍 키보드와 마우스 공개 게이밍은 전 세계를 강타한 매체로, 수십 년 전 가정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게임이 성장함에 따라 예상치 못한 플랫폼에서도 채택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애플의 맥 컴퓨터는 오랫동안 인기 있는 기계였지만, PC에 비해 게임 부문에서는 항상 뒤쳐져 있었습니다. 커세어는 맥용 진정한 게이밍 키보드와 마우스 조합으로 이를 변화시키기 위해 나왔습니다. 저는 맥 생산성을 위해 레이저 바이퍼 V3 프로 마우스를 사용하고 있으며, 글로리어스 게이밍 키보드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애플의 제품보다 인체공학적으로 훨씬 우수합니다. 커세어는 RAM, 액세서리 및 전원 공급 장치와 같은 다양한 PC 구성 요소를 제공하는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커세어 K65 플러스 무선 키보드는 맥 전용으로 글래셔 블루와 프로스트 색상으로 제공됩니다. 동일하게 M75 무선 게이밍 마우스도 프로스트 변형이 애플 온라인 또는 애플 스토어에서 현재 구매 가능합니다. 새로운 색상 옵션의 이러한 장치는 애플에서만 구입할 수 있습니다. 179.95달러의 K65 플러스 무선 키보드는 75% 크기 키보드로(PC용 동일 버전은 현재 아마존에서 156달러에 판매 중입니다), 커세어의 MLX 레드 v2 리니어 스위치를 탑재하고 있습니다. macOS 및 iPadOS와 호환되며, 맥용 커스터마이징을 위한 iCue 소프트웨어도 지원합니다. 2.4GHz 무선 또는 블루투스 연결을 통해 맥북 프로를 포함한 모든 설정에 쉽게 연결할 수 있습니다. 또한 최대 266시간의 배터리 수명을 제공하여 충전 빈도를 줄일 수 있습니다. 커세어가 이러한 주변기기의 사진을 새로운 애플 맥 미니 M4 칩과 함께 배치한 것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이 작은 맥 미니는 맥 사용자에게 완벽한 게임 rig처럼 보이며, 거의 어디에나 적합합니다. M4 프로 칩의 CPU와 GPU 성능 향상 덕분에 게임을 수월하게 처리할 수 있습니다. 애플은 최근 애플 아케이드와 같은 게임 시장에 더 집중하고 있으며, 데스 스트랜딩과 같은 타이틀을 PC로 가져오고 있습니다. 129.95달러의 M75 무선 게이밍 마우스는 맥 게이밍 분야에 필요한 또 다른 추가 요소로, 맥용 옵션이 매우 적습니다. PC 게이밍 마우스는 맥에서 잘 작동하지만, macOS에 맞춤화된 마우스가 있는 것이 좋습니다. 26K DPI 커세어 마크스맨 옵티컬 센서와 필수 RGB 조명이 탑재되어 있습니다. 현재 이 커세어 마우스와 키보드는 애플 스토어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출처 : https://hothardware.com/news/corsair-unveils-the-first-true-gaming-keyboard-and-mouse-for
큐큐큐쿄작성일
2024-11-21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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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조종사가 권총쏘는 이야기
현대의 모든 군인들은 무장을 휴대하고 전투에 임하고 전투기 조종사라도 예외는 아님. 전투기는 그 자체로도 매우 강력한 무기체계지만 격추되면 알루미늄 관짝이 된다는 사소한 단점이 있어서 이를 대비해 조종사들도 개인무장을 휴대함 조종사들이 본격적으로 총기를 휴대하기 시작한 것은 비행기가 전쟁에 본격적으로 투입된 1차 세계대전부터인데, 1머전 극초기에 비행기는 폭격이나 제공권 장악이 아니라 단순한 포병 관측과 정찰을 위해 투입되었기 때문에 권총의 휴대 여부는 딱히 중요하지 않았음. 그냥 들고나가고 싶은 사람만 휴대하고 나가는 정도? 하지만 비행기의 임무가 단순 정찰에서 CAS같은 근접항공지원이나 폭격으로 발전하게 되면서 곧 지상군에게 비행기란 존재는 반드시 격추시켜야 하는 중요목표가 되었고, 이 성가신 비행기를 조종하는 조종사는 저격수와 함께 사살 1순위가 되었음. 따라서 각국은 소총이나 야포, 그리고 대공포를 이용해 상대방의 비행기를 격추시키려고 했음. 이에 따라 격추시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거나-혹은 자살하기 위한 권총이 조종사의 필수품이 되었고, 거의 대부분의 조종사가 권총을 휴대하고 출격하기 시작했음. 조종사들이 휴대한 권총은 각국이 운용하던 제식 권총부터 조종사 개개인이 군에 입대하면서 가지고 온 사제 권총까지 다양했는데, 당장 조종사들이 입는 옷부터 통일되지 않았던 시기였어서 그럼. 사실 이당시의 권총은 생존용이라기보단 자살용에 가까웠음. 왜냐하면 1머전 초중기의 비행기는 너무나도 조약한 수준이라서 현대 기준에서 보면 모든 부분이 종이비행기 수준으로 형편없었음 방어력뿐 아니라 엔진 출력도 병신이라 전쟁 막바지인 1917년에야 100마력이 넘는 엔진을 장착한 비행기들이 등장했을 정도. 당시의 낙하산은 20kg가 넘었고, 조종사들은 20kg짜리 ‘짐덩이’ 대신 20kg어치의 탄약을 싣거나 기동성을 위해 낙하산을 내다버렸음 게다가 쌍팔년도를 아득히 뛰어넘는 ‘낭만의 시대’였던 특성상 낙하산을 가지고 비행하는 조종사는 비겁하거나 자신감이 없는 씹게이새끼로 여겨졌음. 당시에는 거의 대부분의 높으신 분들이 ‘유능한 조종사는 낙하산 따위는 생각하지 않는다’ 라고 굳게 믿고 있었고, 각국의 공군사령부는 조종사를 현재처럼 신경 쓰지 않았음. 아 물론 애초에 낙하산 자체를 조종사들한테 지급하지 않은 나라도 있었고 비겁하든 뭐든 조종사 살리는게 먼저라고 봤던 나라도 있었음 아무튼 간에 중요한건 당시의 항공기술은 매우 뒤떨어졌고, 이는 비행기의 생존성이 극히 떨어졌단걸 의미했음. 당시에 방염이란 개념이 존재할리가 없었기에 추락해서 찌그러진 비행기에 갇혀 산 채로 불타는 일이 지금보다 훨씬 많았으며, 그런 상황에 처한 조종사 중 많은 이들은 편리한 해결책을 위해 권총을 휴대하고 있었음. 그리고 시간이 흘러서 1머전 종전 이후 항공기술력이 발전하며 조종사들의 복장과 항공기의 무장도 크게 달라졌음. 하지만 여전히 조종사를 포함한 군용기 승무원들의 개인무장은 권총 뿐이었음. 아 사실 권총 말고 다른걸 휴대하신 분들도 있었는데 일본제국의 비행기 조종사들은 권총과 함께 일본도도 패용했음 격추당한 뒤에 반자이돌격이라도 하려했던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조종사의 개인무장이 권총으로 제한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는데, 조종사에게 지급되는 권총은 적지에서 마주친 적과의 교전용이라기보다는 야생에서의 생존수단, 즉 유사시 동물을 사냥하거나, 적 민간인을 위협해서 삥뜯는데 사용하라고 지급되는 측면이 강했기에 굳이 좁은 항공기 내부에 거추장스러운 볼트액션식 소총이나 기관단총을 쑤셔박을 이유가 없었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이 맞닥뜨렸던 전장은 2차 세계대전이었고, 그나마 ‘신사적이었던’ 서부전선이 아닌, 독일과 소련이 맞붙었던 동부전선이나 야만 그자체였던 태평양 전선에서는 적진에 낙하한 조종사를 잔인하게 사살하거나, 포로로 붙잡은 후에 고문하고 살해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음. 이렇게 되자, 조종사들은 동물들 사냥하라고 지급된 권총으로 최후의 교전을 벌이는 경우가 발생하기 시작했고, 몇몇은 이렇게 M1911을 전자동으로 개조해서 들고다니기도 했음 하지만 권총을 쏴본 군붕이들이라면 알겠지만 권총은 더럽게 안맞고 사정거리도 너무 짧으며 화력도 약함. 따라서 각국은 조종사만을 위한 생존용 총기 (Survival Rifle)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고, 이런 배경 속에서 탄생한게 나치 독일의 M30 삼렬총과 미국의 M-4 서바이벌 라이플, 그리고 M-6 ASW임 우선 M30 삼렬총의 경우, 사냥광이었던 괴링의 입김 때문에 독일 공군에 채택되었음. 이렇게 알루미늄 상자에 분해된 채로 비행기 내에 보관되어 있었고 주로 북아프리카 전선의 독일군 조종사들에게 지급되었음. 여기에는 청소 키트, 12게이지 슬러그탄 20발과 12게이지 버드샷 20발, 그리고 9.3x74mmR 소프트 포인트 소총탄 20발이 동봉되어 있었는데, 소프트 포인트 탄환이 지급된 이유는 조종사가 사람을 향해 총을 쏘면 당시 국제법에 위반되기 때문이라고… 그러나 정규군에 제대로 된 보급을 하기도 빠듯한 독일이 이런 고급 사냥총을 모든 항공기에 탑재하기에는 무리가 컸으며, 작동 구조가 매우 복잡한데다 나치 독일의 난잡한 생산체계 덕분에 단가가 매우 비싸졌음. 따라서 이 독특한 삼렬총은 1941년부터 1942년까지 단 2,456정만이 생산되었음. 생산된 총의 대부분은 공군 장교들이 사냥용으로 쓰거나, 사냥 매니아였던 헤르만 괴링이 자신과 함께 사냥을 즐기러 찾아온 인사들에게 선물로 주기 위해 사용했다고 함… 다음으로 M-4 서바이벌 라이플은 제 2차 세계대전중 개발이 시작되어 1949년부터 미 공군에 납품되었던 22구경 볼트액션 소총이었음. 주 목적은 적과의 교전이 아닌 야생에서 동물을 사냥하거나 개인 호신용으로 쓰기 위한 용도였기에 상대적으로 저위력이고 반동도 약한 22.lr탄을 사용했고, 비용 절감을 위해서 M265 22구경 사냥용 볼트액션 소총을 개조, 접철식 개머리판을 장착하고 무게절감을 위해서 목재 부품을 모두 제거했음. 따라서 소총치고는 가벼운 1.8kg의 무게를 가지게 되었음 성능에 만족한 미군은 1950년까지 약 29,000정의 M-4 소총을 생산해서 배치했음 M4 서바이벌 라이플은 분명히 좋은 무기였지만 몇 가지 단점이 드러났음. 우선, 22.lr의 성능이 호신용이 아닌 사냥용으로써는 생각보다 그닥이라는 불만이 있었고, 또 총기 자체의 내구도가 너무 약했음. 따라서 1950년, 미 공군은 Ithaca Gun Company에 새로운 조종사용 소총 제작을 요구했음. T39라는 이름으로 개발이 시작된 이 소총은 M-6 Aircrew Survival Weapon이라는 이름으로 미군에 납품됨. 접히는 개머리판에는 9발의 22구경 탄환과 4발의 .410 산탄이 보관되어 있었으며, 조종사는 발사핀 선택기를 사용하여 총탄을 발사할 총열을 선택해 발사할 수 있었다고함. 또한 M-6은 주로 B-52, B-1폭격기 승무원들에게 보급되었는데, 이들은 냉전 기간 동안 북극과 알레스카 지역에서 작전을 수행했기 때문에 방아쇠는 장갑을 착용하고도 사용할 수 있게 디자인되었음. 최대 사거리는 22구경 호넷탄을 사용할 경우 100m, .410 bore의 산탄을 사용할 경우 25m였음. 채택한 지 몇 년 후, 미국 조종사들은 이를 원하지 않았지만 M-6 ASW를 실제로 테스트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음.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기 때문임. 베트남군은 충분히 강했고, 결과적으로 미 공군은 큰 손실을 입었음. 조종사들은 때때로 낙하산을 타고 도망쳐야만 했고, 파라레스큐가 그들을 구출하거나-혹은 베트남군에게 붙잡힐때까지 그들 중 일부는 이 ‘서바이벌 라이플’을 사용해야만 했음 미군의 보고서에 따르면 베트남에서 M-6 ASW는 훌륭한 총기와는 거리가 멀었음. .410산탄은 실제로 다양한 사냥감을 사냥하는 데 편리한 수단이었고, 곤경에 처한 조종사는 신선한 고기를 요리할 수 있었으나 베트남에서의 주요 위협은 굶주림과는 거리가 멀었다는게 문제였음. 조종사는 적들과 쉽게 마주칠 수 있었고, 적과의 대치 상황에서 M-6은 거의 쓸모가 없었음. 여분의 탄약 없이는 겨우 몇 발만 쏠 수 있었으며, 베트콩과의 교전에서 .22구경의 위력은 크게 부족했음. 결국 70년대에 이 총은 민간에 불하되거나 폐기되었고, 의외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고 함. 이후에도 XB-70을 위해 개발되다 사업 자체가 망하고 M-6을 대체하지 못한채로 시제품 12정만 생산된 아말라이트 AR-5라든가 AR-5를 개량한 AR-7(이건 항공기 조종사용보단 민수용과 특수부대용으로 더 많이 팔렸음) 등이 등장했지만 정작 미군은 도입하지 않았고, 이스라엘 공군이 도입해서 써먹었다고 함. 하지만 ‘조종사용 생존 총기’라는 마이너한 총기 특성상 모든 파일럿들에게 이러한 총기가 보급되지는 않았고, 대다수의 조종사들은 그냥 권총을 들고 작전에 나갔음. 아래는 관련 조종사들의 증언임. ….(전략)….적대국가(여기서는 베트남)의 영토를 비행할 때는 그랬습니다. 해군은 저에게 스넙노즈 .38(길이가 3인치 미만인, 휴대하기 간편한 리볼버)또는 45구경 M1911을 지급받을지 선택할 수 있게 했습니다. 아니면 원한다면 다른 권총을 사서 휴대할 수도 있었습니다. 친구이자 동료가 9mm 자동권총을 직접 구매했습니다. (A-1 스카이레이더에 톱질한 산탄총을 휴대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저는 .38을 선택했습니다. 여러 개의 AK-47이 저를 겨누고 있는 상황에서 체포에 대비해 최후의 저항을 하기 위해 권총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직 미 해군 조종사, 베트남전 참전용사 홀스터에 넣은 .38 리볼버는 비행할 때마다 확인하고 복귀할 때 반납했습니다. 저는 항상 신호탄을 장전했는데, 주된 용도가 신호 보내기라고 생각했습니다. 적의 영토에서 하고 싶은 마지막 일은 권총을 휘두르는 것입니다. -전직 F-111 조종사 공군 조종사에게는 5발이 든 38구경 리볼버가 지급되었습니다. 만약 당신이 똑똑하다면 AK-47과 맞서지 않기 위해서 즉시 내다버렸을 겁니다. -전직 F-4/KC-135 조종사 알래스카에서 비행할 때는 권총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22구경이었 는데, 토끼와 뇌조를 잡아서 먹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국과 베트남에 있을 때, 저는 38 스페셜 리볼버를 휴대했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지급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웃으며 아시아에서 육탄전을 하고싶진 않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것은 무기라기보다는 장신구에 가까웠습니다. 다만 그것이 우리를 더 안정되게 만들었습니다. -전직 F-86, F-100, F106 조종사, 한국전쟁, 베트남전 참전용사 예전에는" S&W .38구경 리볼버를 휴대했습니다. 조끼에 맞는 다른 물건도 휴대할 수 있는 규칙이 있었습니다 (저는 알레스카에서 복무했습니다). 저는 보급계원한테 제 9mm 브라우닝 하이파워용 홀스터를 제봉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6발보다 14발을 쏘는 것이 더 나았고, 6발을 개별적으로 장전하는 것보다 탄창에 장전하는 것이 더 쉬웠기 때문입니다). 비행/탈출중에 스스로를 쏘는 것이 목적은 아니었기 때문에 총은 장전하지 않고 총알은 G-Suit의 주머니에 넣어 두었습니다. 저는 그 무기를 어떤 종류의 자기 방어용으로도 고려한 적이 없고, 오히려 사출 후 하루나 이틀 동안 밖에 있어야 할 경우 먹을 작은 동물을 쏘는 용도로 생각했습니다. 그다지 웃기지 않는 농담은 북극곰을 만났을 때를 대비해 마지막 한 방은 자살용으로 놔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북극곰은 인간과 친하지 않으며, 권총으로 곰을 막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전직 미 공군 조종사 저는 1970-71년 다낭에서 VMFA 115의 RIO(무장관제사) 였습니다. 우리는 S&W 38을 지급받았습니다. 우리는 어깨용 또는 벨트용 홀스터를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어깨용 홀스터를 선택했는데, G 슈트가 벨트 홀스터를 불편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별로 유용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몇몇 이들은 조종석에 M16이나 소드오프 산탄총을 몰래 넣었습니다. 탈출시 어떻게 가져갈 계획이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저희 비행대의 한 조종사는 거대한 대검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우리는 그가 탈출하게 된다면 다리가 잘리거나 더 나쁜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농담하곤 했습니다. -전직 미 해병항공대 장교, 베트남전 참전용사 베트남 출신은 아니지만, 원래 브루클린 출신인 매우 괴짜이지만 성 격 좋은 이스라엘 전투기 조종사를 알고 있는데, 그는 더 이상 전투기를 탈 수 없을 때까지 F-4 팬텀을 몰았고, 아랍 상공에서 격추될 경우를 대비해 항상 맞춤형 진주 손잡이가 달린 2인치 콜트 파이썬 357 매그넘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전직 미 공군 정비사. 저는 베트남에서 총을 휴대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모든 생존 키트를 대기실 상자에 넣어 두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아무것도 없어지지 않고 모두 반환할 수 있었습니다. 총을 잃어버리면 FBI 수사를 받아야 하므로 그런 일은 겪고 싶지 않았습니다. 전투기 조종사와 다른 사람들은 종종 권총을 휴대합니다. (공군은 짧은 M4 카빈총을 사출 좌석에 쑤셔넣는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막의 폭풍 동안 해군항공대의 두 친구는 개인용 개틀을 가지고 갔고, 다른 많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처음으로 전쟁에 나가는 사람들 중에는 걱정하는 친구나 친척이 총을 사거나 선물로 준 사람도 있었습니다. 한 명은 새 9mm 베레타를 선물받았고, .380 리볼버를 선물받은 이도 있었습니다. 베트남에서 많은 항공 승무원은 수류탄을 포함한 다양한 무기를 휴대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여분의 무게를 여분의 생존용 식량이나 무전기 배터리에 투자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보통 베트남 민병대나 북베트남군과의 총격전은 패배로 끝났지만 한 RA-5C 조종사는 .25 hideout을 꺼내 헬기가 들어오는 동안 자신을 잡았다고 생각한 두 명의 NVA를 쏘았고, 그는 구출되었습니다. -전직 미 해군항공대 장교 저는 1970년 첫 임무로 태국에서 B-52를 조종했고, USAF의 제식 권총인 .38구경 S&W 리볼버를 받았습니다. 100m에서 6번 중 6번은 표적을 맞출 수 있었습니다. 1990년대 후반에 저는 육군 예비역 동료들에게 제 첫 사격이 M1 Garand였다고 놀리곤 했습니다. 그들은 믿기 어려워했는데, 육군이 최소 1950년대 중반에 이 무기를 없앴기 때문입니다. 제가 1965년에 공군사관학교에서 훈련받을때까지 공군은 이 무기를 사용했습니다. 공군사관학교에 가기 전에, 저는 고등학교 때 권총으로 유타와 네바다에서 토끼를 사냥하곤 했는데, .357매그넘 리볼버와 .44구경 리볼버를 사용했었기 때문에 .38구경 리볼버를 다루는 것은 저에게는 간단한 일이었습니다. 전투 임무중에 저는 USAF에서 보급한 .38구경 S&W 리볼버를 비공식적으로 테스트했고 근거리에서 텔레비전 화면과 같은 얇은 표적을 관통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나서 USAF가 여전히 사용 중인 오래되고 약한 리볼버를 보완하기 위해 .38의 작약량을 낮췄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공군이 알루미늄 실린더가 달린 .38 초경량 “에어크루” 리볼버를 1,000개 이상 구매했기 때문에 이 탄약 [약장탄을 말하는듯?]을 구매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리볼버는 표준 .38 스페셜 탄약을 사용하면 폭발하는 성가신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쉽게 두개골이나 뼈에 튕겨져 화가 난 채로 피흘리는 적을 남겼습니다. 첫 번째 파병 동안 B-52에 있을 때는 약한 .38이 괜찮았는데, 대부분 적 지대공 미사일의 사거리를 넘어서 날았고 격추에 너무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B-52가 홍강 계곡과 하노이/하이퐁 지역으로 이동한 후, 지대공 미사일과 MiG에 큰 손실을 입었지만, 그것은 2년 후의 일이었습니다) 그런 다음 두 번째 파병을 준비하기 위해 더 나은 총을 가지고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번에는 B-52가 아닌 팬텀이었습니다. 저는 약 2개월 동안 비행기와 병력의 절반 이상을 잃은 부대에 갔습니다. (1972년 부활절 공세 직후, 미 공군이 다시 북쪽으로 진군했을 때). 그래서 호신용 무기에 대한 우려가 있었습니다. 저는 .44 Automag 을 사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하지만 44구경 자동권총은 F-4용 G-Suit와 함께 착용하기에는 너무 크고 무겁단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상자에 그대로 두었습니다. 저는 9mm 브라우닝 하이파워를 가지고 다낭으로 떠났습니다. 저는 항상 권총을 편안하게 사용했고 항상 100m 근처에서 맞닥뜨린 적을 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제가 비행한 세 가지 다른 유형의 지역에 대한 철학/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북베트남의 홍강 계곡과 같은 거주 지역에서 격추된다면 (세계에서 가장 인구 밀도가 높은 지역입니다) 논에서 저를 구출하러 오는 민병대와 북베트남 군인들에게 항복해야 할 가능성이 큽니다. 도망치거나 숨을 수 없다면 그게 해야 할 일이었고, 우리는 그들이 우리를 살아서 데려오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물론, 심하게 구타당하긴 하겠지만-일단 살아는 있었으니까 말입니다. 라오스의 호치민 루트에서 격추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북베트남 군인들이 그 지역을 통제했으며, 평화 협정에 사용할 “포로 거래”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저는 하노이의 감옥으로 보내질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습니다. 호치민 루트 밖에서 라오스에서 격추되었다면, 그것은 더 미묘했습니다. 주된 목표는 구조대가 헬리콥터와 A-1 또는 A-7로 나를 발견할 때까지 숨는 것이었습니다. 나쁜 놈들에게 발견되면, 총을 쏘고 도망가서, 당신과 그들 사이에 최대한 거리를 둔 다음, 다시 숨어들었습니다. 제가 그들을 100m 밖으로 따돌리고 엄폐할 수 있다면, 저는 대다수가 AK로 그 사정거리에서 저를 맞힐 수 없다는 것을 알았고, 구조대가 도착할 때까지 저는 “비교적” 안전했습니다. 캄보디아—잊으세요. 우리는 그들이 어떤 이유에서든 또는 아무 이유 없이 자국민을 학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크메르 루즈의 손에 사라진 모든 서양인은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제 선택은 숨는 것이었지만, 불가능하다면 죽을 때까지 총을 쏴댈 생각이었습니다. 남베트남은 라오스와 비슷했습니다. 대부분의 적의 통제 지역은 NVA(북베트남군)가 운영했습니다(베트콩 게릴라와는 대조적으로, 일반적으로 그들의 지역에는 포로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살아서 잡힐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상황은 상황에 따라 달랐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는 없지만 모든 옵션에 대비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저는 제 9mm 하이파워에 탄창 1개를 넣고 베트남 전역에서 150회 이상의 임무를 수행했고, 착용한 GI 웹 벨트 앞쪽에 여분의 탄창 6개를 장착했습니다. 위험한 임무에 투입될 경우, 추적탄이나 플레어탄을 섞어서 약 60발이 든 .38을 장착했습니다. 38구경 탄약은 무료로 제공되었기 때문에 연습하고 휴대할 수 있는 탄약이 많았지만, 9mm는 구하기가 더 어려웠습니다. 저는 또한 CIA 요원을 통해서 9mm ‘Swedish K’ 기관단총 (칼 구스타프 M/45) 2개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다낭에서 자주 공격을 받았고, 라오스 국경에 가까운 태국 북부의 기지에서도 두 번 더 공격을 받았기 때문에 보호를 위해 “후치 건”(무슨 총을 말하는지 모르겠음) 또한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조종석에 M/45 기관단총을 한두 번 실었지만 .44 AutoMag처럼 항상 방해가 되었습니다. 지휘소에서 근무하는 동안 무전망에서 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라오스에서 비행하는 FAC(전선통제관)인 USAF 소령이 추락했고 Pathet Lao(라오스의 좌파-친베트남 무장단체)가 그를 쫓아와 총을 쏘았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그를 살아서 데려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1시간 이상 적과 싸웠고, 그렇게 하면서 우리에게 그가 입은 모든 상처와 그를 사냥하던 소대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이는데 성공했는지를 보고했습니다. 나는 그에게 파라레스큐를 보내려고 노력했지만, 뜻대로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그는 이미 몇 발을 맞은 상태였다고 했고, 다음날 무전으로 그가 죽었음이 확인되었으며, 사령관은 그를 살려내려고 하지 않은 것에 대해 질책을 들었습니다. 한가지 기괴한 이야기는 Pathet Lao에 의해 포로로 잡혀서 파리 협정 당시 살아있었던 것으로 알려진 USAF와 NAF 승무원(350명 이상—다른 이야기입니다)은 결국 단 한 명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 소령은 CAR-15(특수부대에서 사용하는 짧은 M-16)와 일종의 반자동 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던것 같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이 무엇인지 물어볼 시간이 없었습니다. 태국 북부에 있는 제 F-4 비행대의 다른 이들은 .45구경 M1911과 .357 리볼버를 가지고 다녔고, 와이오밍 출신의 친구 한 명은 7인치 총열을 가진 Colt .45 싱글액션 리볼버를 가지고 다녔습니다. 제가 본 가장 특이하고 부러웠던 총은 베트남에 가기 전에 만났던 한 지휘관이 가지고 다닌 것인데, 바로 일체형 소음기가 장착된 .22 Ruger 반자동 권총이었습니다. 그가 그것을 가질 수 있는 ‘자격’을 받았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중략)…….. 테러 지역을 비행하는 모든 항공 승무원은 조종석에 가장 크고 최고의 무기를 휴대하고 사용할 준비를 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현재 우리의 적들은 제네바 협약을 존중하지 않으며 체포되는 일은 드뭅니다. 체포되면 다음에 일어날 일은 총격을 가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만들 것입니다. -전직 B-52, F-4 조종사, 걸프전-베트남전 참전용사 보면 알겠지만 거의 모든 조종사들이 단순하게 권총만 휴대하고 다녔단걸 알 수 있음. 이후에도 대다수의 조종사들은 특수한 서바이벌 라이플보단 그냥 권총을 들고 작전에 나갔던것 같음. 하지만 2010년대에 상황이 다시 변하게 되는데 이새끼들 때문임 전세계가 위아더월드로 ISIS를 공습하는 와중에 격추된 조종사가 제대로 된 포로대우를 받을리가 없었고 이는 곧 붙잡힌 요르단군 조종사가 끔찍하게 화형당하며 현실이 됨 이에 기겁한 네덜란드 공군은 공습에 참여하는 자국군 조종사들한테 MP9 기관단총을 홀스터에 넣어 휴대하게끔 했고 시리아 반군과 ISIS에게 자국군 조종사가 맞아죽는걸 본 러시아군도 조종사에게 20발짜리 스테츠킨 기관권총과 다량의 탄약을 휴대시키거나 아니면 아예 AK-74S같은 기관단총을 쥐어줬음. 근데 걍 권총 하나만 심플하게 휴대하는 경우도 있는거 봐선 여기도 조종사마다 케바케인듯 미 공군의 경우에는 3점사형 M-4에 착탈식 총열, 접이식 권총손잡이 장착 등의 개량을 거친 GAU-5 ASDW (Aircrew Self Defense Weapon) 를 2018년부터 도입했는데, ACES II 사출좌석 내부 공간에 이렇게 접어서 수납한다고 하며 현재까지 약 3천정 정도가 A-10, B-1, B-2, B-52, F-15C/D/E, F-16, F22 파일럿들한테 지급되었다고 함. 참고로 F-35는 US16E라는 새로운 사출좌석을 장착해서 GAU-5의 수납이 불가능하기에 권총을 지급한다고 여담으로 헬리콥터 조종사들의 경우 전투기보단 상대적으로 공간이 넉넉하고 추락했을때 적 보병과 맞닥뜨리기 쉬웠던 탓에 XM177같은 카빈을 가지고 타거나 아예 M-16같은 소총을 휴대하기도 했으며 아니면 그냥 권총만 가지고 다니기도 했음. 러시아군의 경우도 AKS-74U같은 기관단총을 휴대하거나 현재도 미국이나 영국의 헬기 조종사들은 M-4나 SA-80을 조종석 옆에 부착해놓음. 한국 공군과 육항대의 경우에는 K-5 권총과 S&W 38구경 리볼버를 조종사 개인무장으로 지급하고 있음.
하메스작성일
2024-11-19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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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체스 역사 속의 TMI들
[시리즈] 체스 옛날 이야기 · 15세기의 체스 대격변 패치, “여왕의 체스” · 인디언 오프닝과 어느 시골 브라만의 이야기 · 미국체스협회 레이팅 2위를 달성한 살인범의 이야기 · 1000년 전의 이슬람 체스 퍼즐, 만수바(+++++++) · 에반스 갬빗에 대한 재미있는 사실. · ㅋㅋㅋㅋ 이건 진짜 체스 성유물이네 · 19세기의 체스계 슈퍼스타, 하워드 스턴튼 上 - 영웅편 - · 19세기의 체스계 슈퍼스타, 하워드 스턴튼 下 - 악귀편 - · 대수기보법과 오스만제국 출신 체스마스터 이야기 · 체스 유럽 전파 초기의 무서운 이야기 · 윌리엄 슈타이니츠 : 세계 체스 챔피언의 탄생 앞선 이야기들과 연관된, 미처 적지 못한 TMI들을 모아옴. 1. 이슬람은 알다시피 우상숭배의 우려 때문에 인간과 동물의 형상표현을 제한했었음. 그래서 아라베스크 같은 추상적인 장식문화가 발달하기도 함. 이는 체스에서도 마찬가지였음. 기물을 너무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면 인디언밥 당할 위험성이 있음. 그래서 당시 이슬람 애들은 샤트란지를 둘 때 이렇게 생긴 기물을 썼음. 각각 뭘 어떻게 추상화한거냐면, 룩(전차)은 양쪽에서 말 두마리가 끌고 있는 모습을 표현하려고 양쪽으로 삐쭉 나와있음. 나이트는 말 대가리 하나가 달려있음. 코끼리는 상아 두 쪽을 표현하기 위해 앞으로 두개 뾰족한 게 나와있음. 킹은 거대한 왕좌, 재상은 그것보다는 조그만한 의자. 졸라 힙하게 생긴듯. 덤으로, 이슬람에서는 최강의 체스 선수들을 알리야트Aliyat, 그에 약간 못 미치는 선수들을 무타까리밧Mutaqaribat이라고 불렀다 함. 2. 19세기까지 체스의 중심지는 파리와 런던이었다고 했는데, 이 파리와 런던에서도 각각 ‘체스의 성지’ 취급받는 장소들이 있었음. 파리에서는, Café de la Régence. 여기는 진짜 오랜 시간동안 체스로 전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였고,유명한 프랑스 체스마스터가 있다 하면 다 여기가 활동거점이었다고 보면 됨. 레갈, 필리도어, 데샤펠, 라부드로네, 생아망 등등… 유명 경기들도 여기서 엄청 자주 열림. 전에 소개한 스턴튼-생아망 매치도 여기. 폴 모피 vs Harrwitz도 여기. 워낙 핫플이다 보니 유명인들도 자주 방문했는데, 루소, 디드로 같은 철학자는 물론이고, 체스를 좋아했던로베스피에르나 보나파르트 나폴레옹도 자주 들렀음.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인 밴저민 프랭클린도 파리 체류 당시 여기 단골이었다고 함. (여기서 필리도어의 사인을 받고 매우 기뻐했다고 전해짐) 공산주의의 아버지인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도 이 카페에서 만나서 친해짐. 안타깝게도 이미 20세기 초에 망해서 오늘날에는 방문할 수는 없음. 파리의 Café de la Régence보다는 약간은 급이 딸리지만, 런던의 성지는 Simpson's Grand Divan Tavern이었음. 스턴튼 편에서 스턴튼이 겜졌다고 분풀이로 욕했던 그 장소임. 여기도 정말 많은 체스 마스터들이 자주 찾던 곳이었는데, 스턴튼, 안데르센, 모피, 라스커, 타라쉬 등등등… 체스 두고 있으면고기 잘라서 옆에먹을 수 있게 놔주는 서비스가 당시 체스인들에게 아주 인기가 좋았다고 함. 슈타이니츠도평상시에 여기 와서 대국료 받고 손님들이랑 체스 두면서생계를 유지했음. 아돌프 안데르센과 Lionel Kieseritzky가 불멸의 게임(the immortal game)을 둔 장소도 바로 여기. 그냥 체스 핫플로만 유명했던 게 아니라 음식점으로도 졸라게 유명한 곳. 아서 코난 도일도 이 음식점의 단골로, 셜록 홈즈 시리즈에서도 셜록 홈즈가 “심슨 가서 밥이나 먹을까” 하는 대목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고 함. 윈스턴 처칠도 이곳을 자주 찾았음. 놀랍게도 이곳은 아직까지도 운영중이고, 런던에서 가장 전통 있는 레스토랑 중 하나임. 체스 핫플이던 시절은 한참 지났지만 그래도 레스토랑 장식으로 체스를 제법 활용하고 있음. 00년대에는 여기서 이벤트성으로 체스대회를 열기도 했다고 함. 방문객들 말에 따르면 체스 관련 옛날 희귀템들도 레스토랑 안에 제법 전시되어 있다고 함. 코로나 때 경영난으로 일시 휴업을 했고, 2025년에 재개장한다니까, 런던에 방문할 재력이 되는 체붕이라면 꼭 방문한 뒤 인증샷을 남기도록 하자. (음식 존1나게 비싸다고 함ㅋ) 3. 19세기, 20세기 체스사는 사료가 많을 테니 그렇다 치고, 1000년도 전의 인도, 페르시아, 이슬람, 중세 유럽 체스사 같은 건 대체 누가 연구한 걸까? 바로 이 사람. 영국의 학자 H. J. R. Murray가 체스사에 있어서는 거의 신화적인 연구자임. 글에서도 몇 번 언급을 했었는데, 이 사람이 저술한 “A History of Chess”는 1913년에 발표된 책인데도 아직도 체스사 GOAT 취급을 받고 있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체스 인도기원설’을 정설로 정립한 게 바로 이 책. 이 사람은 사실 이 사람 본인보다 아버지가 더 유명한데, 제임스 머레이 교수라고, 대한민국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옥스퍼드 영어사전”의 초대 편집장임. 언어학자로 엄청나게 뛰어났던 사람이라 25개 언어를 알고 있었다는 괴담 같은 이야기가 있음… 심지어 제임스 머레이가 주인공인영화도 있음;;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 장남인 H. J. R. Murray도 여러 언어에 제법 능통했는데,아버지 급에는 미치지 못하고 12가지 정도의 언어를 알고 있었다고 함. 그 언어 중에는 아랍어, 아이슬란드어, 중세 독일어, 중세 라틴어, 산스크리트어 등이 포함되어 있었음… 본직은 교수였는데, 체스 역사에 대한 작업을 해보는 게 어떠냐는 von der Lasa 남작(당대 꽤 유명했던 독일 체스마스터)의 제의를 받고, 작업에 착수함. 특히 당대에는 ‘체스의 기원이 도대체 어디인가?’라는 논쟁이 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었음. (페르시아 기원설 / 인도 기원설이 계속 싸움.) 근데 Murray가압도적인 언어 지식과 수집가들에게 얻어온 세계 각지의 졸라게 광범위한 사료들을 바탕으로 A History of Chess를 집필하면서 인도 기원설을 채택함. 그 뒤로 인도 기원설이 그냥 정설이 되어버림. 세상에 비슷한 작업을 흉내낼 수 있는 사람 자체가 없는데 뭐 이의를 어떻게 제기하겠음?? 인도 페르시아 이슬람 고문헌 함 읽어보실분?? 한 체스 역사가는 “체스 역사가들이 머레이의 작업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것을 내놓는 데에 적어도50년이 필요했다”고 말하기도 함. A History of Chess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체스 역사가들이 연구를 시작할 때 가장 먼저 참고하는 서적. 체닷 포럼에서도 “체스사 책좀 추천해주세요” 하면 이거나 읽으라는 댓글이 졸라게 달림. (근데 900페이지짜리 고봉밥이라 실제로 다 읽은 놈 얼마나 있을까 싶음) 진짜 별에 별 자료를 다 갖다놔서한국 장기도 매우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음 ㅋㅋ 옆에 ‘쟝긔판’이라고 써놓은 게 킬포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dcbest&no=280652
조깅27작성일
2024-11-15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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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너무 못생겼다, 한국차 진짜 망했다…싼타페·쏘나타, 한국인만 욕했던 속사정 [최기…
車, 환경·역사·문화·정치 종합산물나라별 車선호도에도 ‘환경결정론’현대차 ‘따로 또 같이’ 전략 통했다 반대로 길이 좁아서 차를 가까이에서 보게 되는 유럽인과 한국인은 정제되고 잘 생긴 차를 좋아한다. 한국에서 YF쏘나타에 대해 처음에는 찢어진 눈(헤드램프)와 과격한 캐릭터 라인이 부담스럽다는 평가가 나온 이유다”(조범수 현대미국디자인센터 책임매니저) 현대차 YF쏘나타는 쏘나타 시리즈 중 가장 파격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한국에서는 ‘못생겼다’고 혹평받았다. 반면 미국에서는 역동적이면서 과감한 디자인으로 호평받으며 현대차 브랜드 인지도를 끌어올렸다. 미국에서만 160만6512대 판매됐다. 글로벌 누적 판매대수는 212만6697대를 기록하면서 쏘나타 최전성기를 이끌었다. 한국에서 디자인 혹평을 받은 YF쏘나타가 실제 판매에서는 폭발적인 인기를 끈 ‘부조화’의 해답을 한국이 아닌 미국 캘리포니아 남부 도시 얼바인에 자리잡은 현대미국디자인센터에서 찾았다. 현대차는 지난 5일(현지시간) 현대미국디자인센터를 국내 언론에 최초로 공개했다. 이곳에는 50여명이 직원이 근무하면서 디자인 기획, 스타일링 개발, AHJEPF 제작, 컬러와 소재 개발 등 디자인 관련 통합 업무를 수행한다. 한국의 남양디자인센터와 유기적으로 협업해 미국 시장에 최적화된 디자인을 설계하는 게 가장 중요한 업무다. 1년에 완전변경(풀체인지) 5개 차종의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현대차가 북미 시장에 선보이는 다수 차종의 디자인이 이곳에서 탄생한다. 2009년 출시된 6세대 YF쏘나타도 이곳에서 디자인했다. YF쏘나타 못지않게 국내에서 못생겼다는 혹평에 시달렸지만 현대차의 든든한 효자차종이 된 신형 싼타페도 미국디자인센터와 남양디자인센터가 유기적으로 협업한 결과물이다. 미국 자동차 디자인에도 환경결정론이 영향을 줬다. 미국인들은 남성적인 매력을 발산하고 덩치가 큰 차종을 선호한다. 19세기 서부 개척 시대 프런티어 정신과 카우보이 문화, 청교도가 가져온 가족 중심 문화, 넓은 땅과 저렴한 기름값 등이 맞물린 결과다. 한눈에 존재를 알 수 있는 강렬한 디자인의 YF쏘나타와 싼타페가 미국에서는 호평받았지만 한국에서는 초기에 혹평받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류승욱 현대미국디자인센터 책임매니저는 “땅이 넓은 미국에 사는 소비자들은 멀리에서도 보이는 차의 실루엣을 중요하게 여긴다”며 “이와 달리 유럽인과 한국인은 차의 실루엣보다는 디테일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했다. 환경결정론은 자동차 관련 법규에도 영향을 준다. 법규는 차종 디자인에도 작용한다. 색상, 옵션(사양)에서도 환경결정론에 영향을 받은 미국인과 한국인의 선호도가 달라진다. 하학수 현대미국디자인센터장(상무)는 “안전법규 차이로 미국차는 후드가 높지만 현대차는 낮아 상대적으로 왜소해보인다”며 “미국차보다 한국차가 색상이 다양하고 미국인보다 한국인이 옵션을 더 많이 넣는다”고 설명했다. 하 센터장은 한국에서 YF쏘나타 못지않게 디자인 혹평에 시달렸지만 현재는 미국은 물론 한국에서도 현대차의 든든한 효자가 된 신형 싼타페의 성공 비결도 귀띔했다. 하 센터장은 “싼타페는 차박(차에서 숙박)과 레저활동에 적합하도록 뒤쪽 공간에 짐을 더 쉽고 많이 실을 수 있게 설계됐다”며 “마룻바닥 콘셉트도 적용해 차의 공간 활용성과 편의성을 강화했다”고 설명했다. 물론 미국적인 차는 미국에서 인기를 끌 가능성이 높지만 환경과 배경이 다른 국가에서는 판매부진을 겪을 수 있다. 글로벌 시장에서 통할 수 있는 디자인을 채택해야 한다. 현대차가 한국, 미국, 유럽, 인도, 일본, 중국에 디자인센터를 설립해 ‘대륙·나라별 맞춤형 디자인’을 개발하는 한편 ‘따로 또 같이’ 전략으로 각 센터 간 유기적인 협력을 추진하는 이유다. 현대차가 미국 전기차 시장에서 테슬라의 가장 강력한 대항마로 성장한 데에는 디자인도 한몫했다. 아이오닉5에 가장 애정이 간다는 하 센터장은 “테슬라 전기차의 디스플레이는 처음 봤을 때는 ‘와우’하고 놀라지만 돌발 상황 때 조작이 불편하다”며 “현대차는 디자이너들이 안전과 직관성에 공들였다”고 강조했다. 미국 전기차 소비자들의 구매심리와 요구를 파악하고, 이를 디자인에 적극 반영한 결과는 현대차그룹의 판매 성과로 이어졌다. 현대차그룹은 올해 3분기까지 미국에서만 전기차를 총 9만1348대 판매했다. 7만111대를 기록했던 전년 동기와 비교하면 30.3% 증가했다. 같은 기간 미국 전기차 시장은 올들어 IRA 세액 공제 축소, 저가 전기차 출시 지연, 고금리로 인한 소비자 부담 가중 등으로 성장세가 대폭 둔화됐다. 현대차는 GM, 포드 등 미국 주요 업체들을 제치고 테슬라에 이어 3분기 누적 판매 2위를 기록했다. 미국 시장조사업체 켈리블루북에 따르면 현대차·기아의 2024년 1~3분기 미국 전기차 시장 점유율은 9.5%로 10%에 육박하고 있다. 테슬라는 상처뿐인 영광에 그쳤다. 점유율은 2022년 2분기 기준으로 65%를 기록하며 절대 강자였던 같은 기간 49.8%로 낮아졌다. 현대차는 전기차 캐즘(일시적 수요 정체)에도 오히려 판매가 늘면서 미국·유럽 브랜드를 제치고 테슬라를 긴장하게 만들 경쟁상대가 됐다.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울프85작성일
2024-11-07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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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웹툰] 유희왕 애니메이션의 근황 이야기
우리들 추억속에서 살아 숨쉬는 [유☆희☆왕] 애니메이션. 우리가 어린시절 그토록 카드에 열광한 이유였으며, 많은 명 에피소드들로 우리의 심금을 울렸다. 그러나 카드를 찍어내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애니메이션을 찍어낸 코나미는 점점 애니메이션 퀄리티에 소홀해진다는 지적을 받게 된다. 특히 유희왕 애니메이션을 보는 가장 큰 즐거움, 듀얼로그(듀얼 경기 내용)에 대해 점점 억지스럽다, 뻔하다 등의 비판이 쏟아지게 되었고 특히 5번째 애니메이션, [유희왕-아크파이브]에서 비판은 정점을 찍게 된다. (아예 나무위키에서 따로 문서를 만들어서 써둔 비판점) 특히 마지막화의 듀얼로그는 심히 처참했는데, 읽기도 힘든 효과들을 마구 욱여넣어 어떻게든 주인공을 이기게 하려는 억지스러운 듀얼로그, 뻔한 전개, 이상한 캐릭터성, 어정쩡한 엔딩 등 아크파이브의 마지막화는 역대급으로 망해버린다. 흠….. 아크파이브가 역대급으로 망해서 경영진이 화가 많이 났군. 특히 마지막화의 듀얼로그가 가장 큰 비판거리였으니, 이를 어떻게 고치면 좋을까? (제작사) 흠…. 그러면 이제 슬슬 유저들도 성장했으니 애니 내용도 좀 어둡게 하고 듀얼로그도 실제 듀얼처럼 상세히 묘사하는게 어때요? 유저들이 애니에 더 몰입할 겁니다 좋은 생각인걸? 좋아 이번에는 전작의 반대로 가보는거야! 그렇게 제작사와 코나미는 6번째 애니메이션 [브레인즈]를 내놓는다. 다행히 브레인즈는 초반에는 나름 인기를 얻으면서 순항하지만 문제는 듀얼로그가 본격적으로 복잡해지는 중반부에 가서 다시 터진다. (악의적인 편집이 아닌 실제 듀얼로그, 무려 8분간 혼자 독백하며 듀얼한다) 이미 실제 듀얼은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복잡해졌는데 제작사에서는 고증을 지키기 위해 모든 전개과정을 애니메이션에 묘사했고, 했던 짓 또 하고 했던 짓 또 하는게 재미있을리가 없으니 듀얼 애니메이션에서 듀얼하는게 제일 재미없는 기묘한 상황이 되어버린 것. 그렇게 브레인즈의 평가도 중반부부터 수직하락하고, 브레인즈의 조기종영이라는 대실패를 다시 맛보게 된다. 시발….. 그 후 코나미는 OCG 애니메이션의 제작을 포기했다. 그러나 애니메이션이 아닌 다른 활로를 찾았는데, 애니메이션에서 카드를 보여주고 출시하는게 아닌 이미 출시한 카드를 사용하는 만화를 연재하기 시작한다. [OCG 스트럭처즈]라는 이 만화에서는 듀얼하는 모습은 보여주되 전개를 다 묘사하지 않고 중간에 스킵하는 형식을 채택했고, 나름 인기를 얻으며 2부 연재중이다. 어짜피 전개를 스킵해도 이미 고일대로 고인 유저들은 주인공들의 패/필드만 보고도 알아서 듀얼로그를 이해했기 때문….. 스트럭처즈 이외에도 듀얼이 아닌 “카드”의 세계관을 다루는 [OCG 스토리즈] 도 동시 연재중이며, 카드들을 모티브로 하여 만든 애니메이션의 PV(팬서비스용)을 공개하기도 하는등 코나미는 아직 유희왕의 2차 산업을 활발히 이어가는 중이다. 언젠가는 다시 유희왕 OCG를 애니메이션으로 다시 만나볼 수 있지 않을까? 출처: TCG 갤러리 [원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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