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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베트남전쟁의... SEAL 2편
1972년 4월,
탐 노리스(토마스 놀란드 노리스) 중위가 배트21 아이샬 햄블튼 중령을
구해냈을 때만해도 베트남에남아있는 SEAL 팀은 하나도없었다.
1971년, 미국은 제1, 제2 SEAL 팀 모두를 철수시키고
포로구출 작전등을 수행할 장교3명과 9명의 SEAL 대원만 남겨두었던것이다.
남아있던 대원들은 주로 남 베트남군의 고문단형식으로 잔류하고 있었으며
머지 않아 이들도 미국으로 돌아가게되어있었다.
그러나 사실상 이들은 자신들이 교육시켰던
남 베트남 해군 SEAL 격인 LDNN(Lien Doc Nguoi Nhia)과함께
정보수집을위해 DMZ지역으로 들어가 활동하는 것이 주임무이기도했다.
이들은 통상2명의 미국 SEAL 대원과 4명의 LDNN대원으로 1개의팀을 이루고 있었다.
SEAL과 LDNNSEAL은 장시간매복 보다는 단 시간에 재빨리 임무를수행하고 빠져나오는 전술을 택했다.스토너 기관총과 XM177E2-XM148 40mm 유탄발사기등 다양하게 무장했다.
배트21 햄블튼 구출작전이 있은지 6개월후.
1972년 10월31일밤,
노리스 중위는 정보수집을위해 팀을이끌고 DMZ 로 들어가게되었다.북쪽은 노리스 자신이 햄블튼을 구해냈을 당시와는
비교할 수 없을정도로 많은 북 베트남 군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쿠아 강 남쪽의 남 베트남군 전초기지들 마저 이미 그들의 수중에 놓여있었다.
미군은 항공기로부터는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없게되자
SEAL 팀을 보내 정보를 얻고자했다.
노리스 휘하에는 3명의 남베트남 LDNN대원과
마이클 에드윈 숀튼 이라는1명의 미군 SEAL 하사관이있었다.그들은 고무보트를 이용해 은밀히 북쪽, 6개월 전
노리스가 햄블튼을 구했던 곳으로부터 몇km 정도 떨어진 지점을 향해올라갔다.
만약 무슨일이 생긴다할지라도 이들을 지원해줄 항공기나
지원병력은 전혀 계획되어있지 않았다.
해안을따라 올라간 SEAL은 강줄기를따라 들어가 얕은 곳에 보트를 밀어넣어 숨겼다.
팀은 지금은 북 베트남군의 손에들어가있는 해군기지가 있는 북쪽을향해 도보로 이동했다.
북 베트남 군의 눈을피해 밤새 DMZ 깊숙한 북쪽까지 이동했으나
아침이 가까워질 때까지 그 어떠한 특기할만한 정보도얻을 수 없었다.
노리스는 해가뜨기 전에 철수를 결심하여 수 신호로 알렸다.
서서히 어둠이 걷히는 가운데 보트를 숨긴 장소까지 조심스레
남하하던 팀은 파도소리가들려오자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이제 캠프로 돌아가는 일만 남았다.
마이클 에드원 숀튼
그러다 요란하게 울려퍼진 총성이 고요한 아침을 송두리째 뒤 흔들어놓았다.
강변쪽으로 향하던 SEAL을 발견한 2명의 북 베트남 군과 SEAL팀 간에 교전이 벌어졌다.
총성이 울리자 북 베트남군 증원병력들이 몰려들었다.
노리스는 대원들을 방어하기에 좋은 장소로 이동하도록 명령했다.
그 동안 한명의 LDNN 대원이 엉덩이에 총상을 당했으며,
북 베트남군이 투척한 수류탄폭발로 숀튼도 양쪽다리와 등에 파편상을 당했다.
노리스는 해군 순양함에 함포사격지원을 요청하려했으나 북 베트남군과
너무 근접한 거리에있어서 아군함포에 되려 우군이 당하게되는 상황을 염려해야했다.
시간이 흐르면 더 많은 병력들이 몰려올 것이기에 노리스는 모험을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정확한 좌표를 따서 5분 후 이 곳을향해 포격해주도록 순양함에 무전요청했다.
그리고는 숀튼과 부상당한 LDNN대원에게 먼저 보트를향해 달아나도록 지시하고
앞쪽에 들어가있던 나머지 대원에게도 무전기로 알려주었다.
빨리 빠져나가지 못하면 아군의 함포에 죽게될 판국이었다.
대원들이 보트를향해 달려가는동안 노리스와 한명의 대원이 엄호사격을 가했다.
잠시후, 노리스와함께 엄호사격을 가하던 LDNN대원은
날아온 총탄이 노리스의 머리왼쪽을 때리는 것을 목격했다.
노리스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고, 피를 흘리며 함몰된 노리스의 머리를보고는
죽었을 것이라 판단한 대원은 보트를향해 필사적으로 내달렸다.
보트에 도착하여 노리스를 기다리던 숀튼은 혼자 달려온 대원에게 물었다.
"노리스 중위는?"
이에 대원은 다급하게 큰 소리로 외쳤다.
" 그는 죽었어! 빨리 빠져나가야해!"
숀튼은 결코 전우를 뒤에 남겨두고 가지 않는다는 SEAL의 불문율을 지켰다.
"나는 지휘관없이 혼자 돌아갈 수 없어!"
숀튼은 빠져나왔던 자리로 다시 되돌아 달려가 미친 듯이 노리스를 찾아헤맸다.
그러다 두명의 북 베트남 군과 노리스를 중간에두고 마주치자
그 자리에서 M60 기관총으로 그들을 사살해버렸다.
숀튼은 쓰러져있는 노리스가 아직 숨이 붙어있음을 느꼈다.
노리스를 어깨에맨 숀튼은 보트를향해 달리기시작했다.
강변을향해 달려가는동안 등 뒤에서 무수히 뿌려진 총탄 속에서도
두 사람모두 기적처럼 한발도 맞지 않았다.
그러는동안 천지를뒤 흔드는 함포가 작렬했기 때문에 LDNN대원들은 재빨리 빠져나갔다.
숀튼은 물로 뛰어들어 필사적으로 헤엄을쳐 먼 바다로 도망쳐나갔다.
북 베트남군의 사격은 계속되었다.
숀튼은 노리스의 구명자켓을 부풀린 다음 총상을입은 머리에 물이들어가지 않도록
보호하며 먼 바다로 계속 나아갔다.
정오 무렵, 두 사람은 남 베트남 해군함정에의해 구조되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1973년10월15일
숀튼은 명예훈장을 수여받기위해 백악관으로 들어갔다.
머리에 중상을입은 노리스는 베데스다 해군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치명적 총상을입었던 노리스는 병원에 장기간 입원 후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배트21 아이샬 햄블튼 중령구출작전을 성공시켜 명예훈장을 받은
노리스와 2급명예훈장을 수여받은 구엔 반 키에.
명예훈장을 받을만큼에 버금가는 큰 공을세웠지만 명예훈장 심사대상에
오르지 못한 병사를 대상으로 해군은 엄격한 심사를거쳐
국가 2급명예훈장으로서 해군십자장을 수여했다(왼쪽사진)
물론 대통령의 재가를받아야했으며,
포상자가 결정되면 대통령은 해군장관에게 수여를 명하게된다.
1919년2월4일 제정되어 1917년4월6일자 부터 소급적용된
해군 십자장 수여자격및 대상은
해군, 해병대, 연안 경비대에 종사하는 전 장병들이 포함된다.
1942년8월7일. 미 정부는 국회의 의결을거쳐
3급이던 해군 십자장을 전시공로훈장으로 승격시켜
매달 오브 아너를이은 2급명예훈장으로서 법률로 공식공표하게된다.
따라서 해군 십자장은 1942년8월7일부터
미국의 2급 국가명예훈장으로서의 법적효력을 갖게되는 것이다.
노리스와 1st 준 사관 계급장을 단 숀튼(오른쪽)
숀튼이 베트남 전쟁의 명예훈장 마지막 수훈자이지만노리스가 병원에 입원해있었기 때문에 그동안 숀튼이 수여받아결과적으로는 노리스가 마지막 수훈자가된다.두 사람은 노리스가 퇴원하여 수여받을 때 함께 백악관으로 들어가게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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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해병 저격수 카를로스 헤스콕... 15부 마지막편
베트남에서 사고를당했던 하일랜드 대위(당시 중위)와 대원들은
헤스콕의 생일날 병실로 찾아와 케이크를 나눠먹었다.
하일랜드 대위는 명예훈장 추천서를 제출할 것이라했으나
헤스콕은 그상황에선 누구라도 자기처럼했을 것이라며 강하게 말렸다.
헤스콕이 그 뜻을 굽히지 않자 얼마 후 하일랜드는
개인적으로 만든 메달을 선물하였고, 헤스콕은 이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아내 조는 아들 헤스콕 3세의 5번 째맞은 생일을 축하하기위해
11월14일 금요일에 병원을 떠났다. 손자의 생일 며칠 후,
조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게되었다. 조는 이 사실을 헤스콕에게 알리지 않으려했으나
조의 여동생이 나중에 알게되면 헤스콕이 많이 실망하거라며 부르기를 권했다.
그날 오후 장모님의 사망소식을 접하게된 헤스콕은 집으로 일시 가게된다.
병원당국은 장모 상을당했으며 그동안 치료가 잘되어왔기 때문에 집으로 가는 것을
허가했고, 헤스콕은 12월30일에 병원으로 다시 돌아오게되어있었다.
1970년1월5일, 헤스콕은 중환자 실에서 회복실로 옮겨진 후 해병대로 복귀하게된다.
1월31일, 헤스콕은 해병대 라이플 사격팀의 일원으로서 콴티코 해병기지로 돌아갔다.
그러나 아무리 화상치료가 잘 되었다하지만 헤스콕은
사실 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의 망가진 몸으로는, 아무리 밴드로
사격쟈캣의 어깨를 감싼다한들 M-14 소총의 강한 반동을 이겨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헤스콕의 피부는 열과 추위또한 이겨낼 수 없었다.
피부가 햇빛에 노출되면 피부가 부서질 위험이 있었으며 상처가 덧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흰 장갑과 특별히 소매가 긴 셔츠를 착용해야했고
머리에는 항상 챙이 넓은 모자를 써야만 했다.
어떠한 경우에라도 햇빛에 피부를 절대 노출시켜서는 안되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오직 사격교관 뿐이었다.
병원에서 퇴원은 했지만 수 년동안 통원치료를 다녀야했으며, 의사는 화상들이
많이 호전되었다고 진단했지만 헤스콕은 여러가지 합병증을 가지고 있었다.
쉽게 지쳤으며 심한 어지러움증과 함께 근육을 스스로 제어하지 못했다.
앉기도 힘들었고 걸음걸이는 몹시 부자유 스러웠다.
의사들은 화상의 후유증이라고 진단했을 뿐 다른 이상은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바깥 기온이 내려가면 심한 추위를, 온도가 올라가면 심한 열병을 앓는 것과도 같았다.
의사들은 헤스콕의 피부자체가 열에 견딜수 없고
땀을 조절하는 기능을 모두 잃어 버렸다고 말해주었다.
이것은 결코 회복될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을듣게되자 헤스콕은 자신에게 몹시 화가났다.
그러나, 몸은 망가졌으나 정신은 언제나처럼 강인했던 헤스콕 이었다.
해병 사격팀을 교육 중인 헤스콕(맨앞)
1972년2월13일,
헤스콕은 캠프 리젼에서 노스캐롤라이나 제2해병사단으로 자리를 옮겼다.
여기에서 그는 해병대 라이플 팀들의 사격 코치 중
가장 훌륭한 교관반열에 포함되는 명성을 얻게되었다.
그 어떤 팀들도 600, 1,000 야드 사격에서는 헤스콕 팀의 상대가 되질 못했다.
그러나 헤스콕은 웃음을 잃어 버린지 오래였다.
그는 사격을 하고싶었던 것이다.
시간이 갈 수록 어지러움 증상은 더 악화되었지만 그는 사격연습장에서 연습을 해왔다.
1973년10월, 워터게이트로 닉슨의 사임압력이 가해지고,
남 베트남군은 미국의 지원없이 스스로 북 베트남에 맞서 싸우고 있는 동안
헤스콕은 특무상사로서 맡은 바 임무들을 걸출하게 수행해냈다.
1975년5월, 헤스콕은 버지니아 해군병원에서 2개월 간 내과적인 테스트와 검진을 받았다.
8월5일에 나온 검진결과는 결코 좋지 못한 것이었다.
헤스콕은 다발성 경화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의사가 헤스콕에게 말했다.
"상사. 짧은 기간이지만 지금까지 당신을 죽 지켜보았소...진단결과로 봐서는아마도 해군 능력 평가관들이 당신에게 현역복무 부적격자로서
전역 판정을 내리게될 것같소."
"내가 내임무를 수행하지 못할것처럼 보입니까?"
"당신이 해병대의 편한 부서에서 근무한다면 몰라도...
아무튼 당신은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야하고 휴식이 필요하오."
헤스콕에게 있어서 유일한 희망은 해병대 사격팀을 훈련시키는, 그것밖에 없었다.
"나는 내 일을하면서 필요할 때는 휴식을 취합니다."
"나로서는 어떻게할 도리가 없소. 헤스콕"
헤스콕은 의사에게 전화를 사용해도 되겠느냐고 묻고는 콴티코 기지의
사격과 훈련담당 지휘관인 챨스 레이놀드 중령에게 전화를 넣었다.
헤스콕은 병원에서의 진단결과와 의사의 소견을 모두 말한다음
"나를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나는 해병대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나는 해병대를 떠나는 것을 결코 원치않습니다." 라고 말을 맺었다.
헤스콕의 말을 전해들은 레이놀드 중령은 확고하게 말했다.
"헤스콕, 우리는 언제나 당신을 원하오. 의사에게 그냥 서명하라고 말하시오.
확신하건데 당신은 2주 내에 다시 임무를 맡게될 것이오."
여름이가고 가을로 접어들었다.
콴티코 소총 사격장 주변의 나뭇잎들이 황금색으로 변해가는 가운데
헤스콕은 산들바람을 느끼며 각 사선을 둘러보고 있었다.
당시 헤스콕은 자신의 명확한 목표를 정해놓고 있었으며,
1976년 시즌을 준비하면서 자신은 다시 챔피언이 되리라 결심했던 것이다.
그는 다시 방아쇠를 당기기로 결심하였고 고통을 이기기 위하여 마취제를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물리치료도 병행하여 소총을 어깨에 잘 견착시킬 수가 있었다.
그는 300야드에서는 무척 잘 쏘았지만 600, 1,000야드 서서쏴 사격에는 실망하였다.
불편한 몸으로는 안정된 자세를 유지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이러한 모습을 보고 있었던 해병들은 경외감을 느꼈다고 한다.
소총 개머리판의 정확한 견착과 사격 반동 때문에 피부가 찢어져
터져나온 피에 축축히 젖은 그의 사격 쟈캣과 셔츠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해병들은 사격 후 타겟을 확인하는 그의 흰장갑에서 선혈이 뚝뚝 떨어지는 모습을 보았다.
해병들은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스스로 자신의 장비를 챙겨 사격하는
그 모습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어느날, 데이비드 윌리스 소령이 사격연습 중인 헤스콕을 만나러 사격장을 방문하였다.
윌리스는 하사관인 헤스콕을 진정으로 존경했던 장교였다.
"나는 병원에 공문을 보냈습니다. 그들이 당신의 문제를
곧 처리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요. 자, 여기 그 사본이 있습니다."
윌리스 소령은 헤스콕의 어깨를 툭툭 쳐주고는 사본을 건네주고 떠났다.
그러나 이것은 해병대 내의 다양한
일들을 결코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그는 저격술 및 사격장비 수리,
격발 방법, 훈련, 풍속 등등 모든 분야에서 뛰어난 지식을 소유하고있다.
3. 지식은 오랜 기간을 경험한 산물이다. 결코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그는 여러 해를 몸바쳐 사격 프로그램 개발에 열중했다.
사격팀의 성공은 교관에게 달려있다.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여러 훌륭한 교관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그 어떠한 특별한 대우도 원하지 않았다.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한 조언과 사격술에대한 도움을 얻기위해 항상 그를 찾았다.
그 때마다 그는 우리를 결코 실망시킨 적이 없다.
4. 전투 중 당한 육체적 손실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극복해내려 애쓰는 모습은
젊은 해병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귀감이된다.
5. 우리는 그가 현역으로 남아있기를 원하며,
사격 교관으로서 함께할 수 있게되기를 정중히 요청한다.
우리는 국가에 충성하는 그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결국 병원은 그의 부적합 판정에 서명하지 않았고, 이내 복무 적합 통고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몸의 상태를 주기적으로 검사받아야한다는 조건이 따라 붙었다.
그리고 신경학 전문의인 브랜넌 주니어 해군 대위가
헤스콕의 책임 군의관으로 자원 임명되었다.
하지만.......
다발성 경화증이 악화되지만 않았더라도
그는 해병 사격교관으로서의 원하던 행복을 더 많이 누렸을 터이다...
발신: 해병 사격교육대 / 작전 장교.
수신: 매릴랜드 베데스다
국립 해군 의료 센터.
상사 카를로스 헤스콕
429 74 6238/0369, USMC
1. 신체상의 결함에도 불구하고
헤스콕은 수 년동안 사격팀의
큰 도움이 되었다.그는 언제나 훌륭하게 자신의
임무를 수행해 내었다.
2. 진단결과로 봐서는 특정한 일을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을
그와 우리모두는 잘 알고 있다.
타인이 기념으로 소장하고있던 모신나강 저격소총을 들고있는 헤스콕.
감회가 새로웠을 것이다...헤스콕의 오른 손을 자세히 보십시오. 안타깝습니다
지금까지 해병 저격수 편을 끝까지 애독해주신... 우리 짱 밀리 가족분들 대단히 쌩유~~~ 합니다
음 다음엔 어떤 것을 씨리즈로 올려볼가요? 댓글 달아주시면 제가 엄선해서 올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가을은 남자의 계절 이라고 했던가요? 창 밖으로 보이는 활주로엔 자욱한 한개와 빗줄기가 보이네요...
여러분들 아무리 세강살기가 조오까타고 해도 어딘가에 분명 환한 빛이 보일겁니다 지금 당장은 아니겠지만
오늘보다 멋지고 기분좋은 내일이 있을것입니다..
건강하시고 감기조심 하세요 ^^
내일은 부대 회식이 있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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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기사] 폴아웃 MMORPG 발표
인터플레이가 ‘폴아웃 MMORPG’ <프로젝트 V13>을 발표했다.
<폴아웃>의 지적재산권(IP)을 베데스다 소프트웍스에 매각하면서 ‘재기’를 노리던 인터플레이가 최근 홈페이지를 다시 열고 ‘폴아웃 MMORPG’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인터플레이는 홈페이지를 통해 ‘폴아웃 MMORPG’가 <프로젝트 V13>이라는 이름으로 개발되고 있다고 밝혔다. 또, 1994년 <폴아웃> 1편의 개발에 참여했던 ‘크리스 테일러’가 게임 기획자로 다시 합류했다고 발표했다.
<프로젝트 V13>의 개발팀은 미국 어바인에 위치한 인터플레이의 새로운 스튜디오에서 작업에 매진하고 있으며, <폴아웃> 원년 개발진이 합류하는 등 계속 인력을 충원하고 있다.
‘폴아웃 MMORPG’는 2006년 12월 인터플레이가 작성한 투자제안서를 통해 비밀리에 추진 중이라는 사실이 확인됐다. 엄청난 빚더미에 올라앉으며 ‘파산 상태’였던 인터플레이는 ‘회생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2004년 7월 베데스다에 <폴아웃>의 지적재산권을 매각했다. 당시 인터플레이는 ‘폴아웃 MMO’에 대한 권리는 넘기지 않았다.
이후 계속 ‘투자 유치’에 어려움을 겪던 인터플레이는 2007년 4월 ‘폴아웃 MMO’를 포함한 모든 권리를 베데스다에 양도하는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베데스다는 권리를 넘겨받는 대가로 575만 달러(약 65억 원)를 인터플레이에 제공했다.
당시 계약에는 특별한 조항이 있었는데, 바로 ‘폴아웃 MMO의 개발 및 서비스는 인터플레이가 진행한다’는 내용이었다. 베데스다는 ‘계약 시점으로부터 2년 내에 개발 착수, 4년 내에 서비스 시작, 3천만 달러(약 350억 원)의 개발자금 확보’라는 조건을 달고 폴아웃 MMO의 권리를 인터플레이에 위임했다.
인터플레이는 2007년 11월 사내에 ‘폴아웃 MMO’ 개발팀을 꾸리고 본격적인 개발에 착수했다고 발표했다. 당시 허브 케인 CEO는 “<발더스 게이트> <어스웜 짐> <MDK> 등의 후속작도 개발할 계획”이라며 자신감을 보였다.
부활의 날갯짓을 시작한 인터플레이. 하지만 앞으로 갈 길은 멀다. 베데스다와 맺은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폴아웃 MMO’의 개발·서비스 권리는 베데스다에 넘어가게 된다.
2006년 공개된 인터플레이의 투자제안서에는 ‘폴아웃 MMO’의 비즈니스 모델이 패키지 판매, 월정액 과금 방식으로 나와 있었다. 게임 내용은 핵전쟁 이후 황폐화된 <폴아웃> 원작의 세계관을 최대한 살릴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베데스다가 Xbox360, PS3, PC 버전으로 개발한 패키지 게임 차기작 <폴아웃3>는 10월28일 북미에서, 10월31일 유럽에서 출시된다. 국내에서는 Xbox360 버전이 영문판으로 출시될 예정이다.
※ 이번에 <프로젝트 V13> 개발팀에 합류한 크리스 테일러는 <슈프림커맨더> <스페이지 시즈> <데미갓>을 만드는 개스파워드 게임즈의 크리스 테일러와 다른 사람, 즉 동명이인입니다.
이번에 발표된 폴아웃 MMORPG <프로젝트 V13>.
-출처 : 디스이즈 게임
http://www.thisisgame.com/board/view.php?id=188726&category=102&sub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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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The elder scrolls 3 - Morrowind
- 게임내공 : 상상초월 예전에 울티마 온라인이 자유도의 화신으로 군림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그 정교한 시스템과 미처 제대로 쓰이지도 못한 수많은 섬세한 아트웍리소스들을 보았을때 탄성이 절로 나올 정도였었죠. 그 울온의 자유도에 비견할만한 게임은 아마도 모로윈드가 현재로서는 유일하지않을까싶습니다.(온라인과 오프라인이라는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나오면 폴아웃을 위시한 다른 여타게임들이서운해 하겠지만, 어쩔수 없이 모로윈드에게 한발 양보할수 밖에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제작사인 베데스다가 컨스트럭션툴을 아에 동봉하여 제공하고, 손쉽게 유저들이 모로윈드의 세계를 마음껏 조율할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죠. 그 덕택에 지금 이 시간까지도 해외의 많은 모로윈드 모더들이 다양한 모드들을 제작하여 공개하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수의 모드들중에는 물론 어이없는 것도 있지만, 울티마가 미처 보여주지 못했던 꿈들을 실현한것도 있죠. 스케쥴링이라던가, 잡다하지만 먹고 마시고 잠들지 않으면여러 패널티를 받는다거나, 등등. 심지어는 같이 여행할수 있는 동료, 노예, 자신의 뒤를호시탐탐 노리며 따라다니는 암살자, 원래는 그 세계에 없던 타고다닐수 있는 말.. 하지만 모로윈드도 당연히 단점이 있습니다. 그중 가장 큰것이 제 생각엔 전투부분이라생각됩니다. 기본적으로는 찌르기 베기 내려치기(근접시) 등의 공격법밖에 없어서 전투가심히 단조롭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모드로 약간은 보완이 되죠.( 연속기나 마무리 공격을추가해줍니다) 그리고 두번째가 바로... 맨처음 장점으로 들었던 자유도입니다..... 그 자유도가양날의 비수가 되어서, 모로윈드에 익숙해지지 않은 사람에게는 다가서기 어려움으로변해버리죠. 화려한 외관에 혹해서 접근했지만, 언어의 벽과( 현재 한글화중입니다. )자유도때문에 이리저리 헤메다가, 결국은 모드나 이것저것 마구 깔아서 감상하고 결국은봉인당하는 사태가 많이 보입니다. 약간의 단점이 있지만, 걸작이라 불리기 아깝지 않은 게임이라 생각됩니다.저도 시작은 당나귀에서 구해 플레이했으나, 결국은 2달전에 소장용으로 주문해버렸습니다. 역시 멋진게임은 소장하고 싶다는 욕구를 무럭무럭 키워버리는군요. 글이 길어질수록 점점 흐트러지고 망가지는 느낌이 들어 이쯤에서 줄여야겠군요 ^_^;처음 쓰는 리뷰라 엉망진창인 점을 양해바라며, 즐거운 시간보내시길 바랍니다~
곰곰곰곰작성일
2005-08-06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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