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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펌글] 이 나라는 과연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 ... 독재인가 혁명인가?
로지스틱 함수 부정선거 의혹을 최초로 제기한 그루터기 추억님의 글 입니다.길이 아주 깁니다. 죄송합니다.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15&articleId=2261070&pageIndex=1이곳 아고라에, 이번 대선의 부정개표 의혹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혁명’에 대한 발언들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 잠시 이런 발언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그렇다면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 대한민국에, 과연 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가? 우리는 이 문제를 좀 더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우리는 가장 먼저, 무엇을 보고 혁명이라고 부르는지, 혁명의 개념부터 정확하게 알아야만 된다. 왜냐하면, 혁명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파악하고, 혁명의 정의를 분명하게 인식함으로써, 현재 전개되고 있는 부정개표 논란으로 인한, 마치 폭풍전야와도 같은 정국이, 장차 시민혁명으로까지 연결될 수 있을 것인지 아닌지를, 좀 더 쉽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동시에, 과거 박정희가 일으켰던 5.16이 군사쿠데타인지 아니면 혁명인지도, 보다 쉽게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5.16의 명칭에 대한 여러 가지 논란들을 정리하는데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양심과 학문에 대하여, 정직하고 그 의식이 깨어있는 대한민국의 역사학자나 정치학자들은, 박정희가 일으킨 5.16이 군사쿠데타가 분명하다고 얘기한다. 반면에 그의 딸 박근혜는, 자기 아버지가 일으켰던 5.16에 대하여, 쿠데타라는 말을 거의 하지 않고, 이 사건을 혁명이라고 부르고 싶어 한다. 그녀는 양심적인 학자들이 5.16을 군사쿠데타로 부르는 것에 대해 반발한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자기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 대통령이 되려고 한다는 말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안병욱(65) 가톨릭대 교수는 ‘프레시안’의 최형락 기자와 한 인터뷰에서, 박근혜 정부가 이명박 정부보다 과거사와 관련해 더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며 “역사 전쟁이 전개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녀가 과거사 문제를 ‘박정희 명예 회복’이라는 기준에서 다룰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박정희의 5.16이 군사쿠데타가 아닌 혁명이었다는 박근혜의 주장을, 그녀 자신이 대통령이 됨으로써, 반드시 관철시키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그녀의 생각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잘못된 생각의 연장선상에 놓여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박정희의 5.16을 혁명이라고 주장하는 근거 중의 하나가, 5.16이 ‘성공한 쿠데타’라는 것이다. 그리고 5.16 군사쿠데타가 성공한 것이라고 판단하는 근거는,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그 '기간'이 매우 길었다는 점이다. 마치 고려왕조에 반란을 일으켜 조선왕조를 세운 이성계의 ‘역성(易姓)혁명’처럼, 박정희의 5.16 군사쿠데타를 동일한 혁명으로 간주한다. 왜냐하면, 둘 다 성공의 기간이 매우 길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어이없는 생각은, 박정희를 이성계처럼 왕으로 간주할 때만 타당할 뿐이다. 누구든지 어떤 방법으로든, 일단 왕이 되고 나면, 왕은 권좌에 앉아서 나라를 다스리면서, 자신에게 반역하는 모든 자들을 역적으로 규정하고 이들을 가차 없이 처단해 버린다. 왕은 역도들을 토벌하기 위해, 나라의 군대를 동원한다. 그렇다면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는 ‘대한민국 공화국’이 아니라 ‘박씨 왕조’를 창건한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역성혁명을 통해 ‘이씨 왕조’를 창건한 이성계처럼, 박정희가 일으킨 5.16도 혁명이 되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만약 사람들이 박정희 시대의 대한민국을 '박씨 왕조'라고 기꺼이 부를 수만 있다면, 조선왕조를 창건한 이성계의 역성혁명처럼, 박정희의 5.16 군사쿠데타를 혁명이라 불러도,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단지 대한민국의 국명을 ‘박씨 왕조’로 바꾸지만 않았을 뿐이지, 마치 한 나라의 왕이 반역자들을 토벌하기 위해서 군대를 동원했던 것처럼, 쿠데타를 일으킨 자신의 군대를 지속적으로 동원해, 대한민국을 강압적으로 통치했다. 박정희는 쿠데타로 세운 자신의 군사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여러 차례 군대를 동원한 것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계엄령과 위수령 및 긴급조치 등을 선포하면서 언론을 통제하고, 모든 반대파 정치세력들을 탄압했다. 박정희는 자신의 독재통치에 반발하는 대학교에는 휴교령까지 내렸다. 마치 왕이 자기 나라를 자기 마음대로 다스리듯이, 독재자 박정희는 스스로를 ‘박씨 왕조’의 왕인 것처럼 여기고, 대한민국을 강압적으로 통치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단지 독재자였을 뿐이지, 결코 왕이 아니었다. 5.16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독재자 박정희의 딸 박근혜가, 현재 부정개표 논란이 일고 있는 선거쿠데타와 같은 방법으로, 그 부친의 대를 이어서 또 다시 정권을 잡은 것처럼 보인다. 왕조가 대를 이어 자기 자식들에게 왕좌를 물려주듯이, 그 딸이 대를 이어 대통령 당선자로 발표되었으니까, 드디어 박정희가 창건한 ‘박씨 왕조’가 완성되었다고,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가 보다. 앞서 언급한 ‘프레시안’과 인터뷰했던 안병욱 교수는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의 90% 이상은 박정희의 딸이라는 점 때문 아닌가. 한국 정치는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의 지형에서 약간의 변화만 있을 뿐, 50년 넘게 그 틀이 바뀌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치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고 있으니까, ‘이씨 왕조’를 창건한 이성계의 역성혁명처럼, 박정희가 일으킨 5.16 군사쿠데타도, 이제는 5.16 혁명으로 바뀌어야만 한다는 논리인가? 너무나도 어처구니없고 치졸한 발상이다. 쿠데타(coup d'Etat)라는 단어를 직역하면, '국가에 대한 일격' 이라는 뜻이 된다. 그리고 이 뜻 그대로, 쿠데타는 무력적인 방법을 동원해서 정권을 빼앗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쿠데타는, 특정 분야의 지배 세력이 자신의 권력을 더 강화하고 더 확대시키기 위해서 일으키는 국가적인 변란이다. 즉, 쿠데타는, 이미 권력을 가지고 있는 지배계층에 속한 자들이 일으키는, 정권찬탈 행위인 것이다. 쿠데타 주동세력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기존 권력의 강화나 확대 및 또 다른 권력의 전복을 도모한다. 이를 위해, 이들은 다른 사람이나 다른 세력이 장악하고 있는 권력을 강제로 빼앗는 일을 서슴없이 자행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쿠데타 주동세력은, 기존의 법과 질서를 따르지 않은 채, 합법적인 지휘계통 상에 있는 권력을 무시하거나 파괴하는 불법을 저지르게 된다. 이런 쿠데타는, 쿠데타를 일으킨 주체와 쿠데타를 시행한 방법에 따라서, 군사쿠데타, 정치쿠데타, 선거쿠데타 등으로 나눠진다. 군인들이 군사력을 동원해서 일으킨 것이 군사쿠데타이고, 정치인이나 통치자가 정치력을 이용해서 일으킨 것이 정치쿠데타다. 그리고 부정개표 논란이 야기되고 있는 이번 선거처럼, 불법과 거짓 및 조작선거 등의 방법으로, 기존권력을 계속해서 유지하려 하거나, 보다 더 강화하고 확대시키려는 것이 바로 선거쿠데타다. 그러므로 쿠데타에 의한 권력이동은,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 사이에서 벌어지는 권력투쟁이 아니라, 기존의 지배계층 내부에서 전개되는 권력투쟁이다. 이런 쿠데타는 단지 권력의 수평이동만을 가져올 뿐이다. 이처럼 지배계층 내부의 수평적인 권력이동에 불과한 쿠데타와는 달리, 혁명은, 억압받고 있던 피지배계층 사람들이 자신을 억압하고 착취하던 지배계층에 대하여 반란이나 폭동을 일으켜서, 이를 성공시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이런 혁명이 발생할 경우에는,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의 위치가 수직적으로 급반전하게 된다. 즉, 지배계층은 몰락하여 피지배계층이 되고, 피지배계층은 혁명을 통해 권력을 쟁취함으로써, 새로운 지배계층으로 등장하게 된다. 물론 이런 과정에서 어부지리를 얻어서, 혁명을 일으킨 계층과 혁명으로 권력을 잡은 계층이 불일치하게 되는 그런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다. 프랑스혁명 때는 지배계층이 단두대로 보내져, 그곳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해야만 했었다. 이제 ‘쿠데타’라는 말이 유래된 프랑스 정치와, 반복적인 혁명을 통해서, 민주주의를 쟁취하고 정립시켰던 프랑스 정치사를 이 자리에서 잠시 살펴보기로 하자. 1789년에 발발한 프랑스혁명이 성공하자, 혁명을 주도한 ‘공화파’들은 왕정을 폐지하고, 당시 왕이었던 루이 16세를 처형시켜 버린다. 권력을 잡은 공화파는 ‘국민공회’를 설립한 후, ‘프랑스 제1공화국’을 출범시킨다. 하지만 이들 공화파는 나중에, 의회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우익 지롱드파’와 사회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좌익 자코뱅파’로 나뉘어서, 서로 갈등과 대립을 계속하게 된다. 이러한 상호 대립의 결과, 마침내 좌익인 자코뱅 당이 승리하면서, 우익인 지롱드파를 대규모로 숙청하게 된다. 정적들을 모두 숙청하고 권력을 움켜쥐게 된, 자코뱅 당의 총수 “로베스피에르”는, 이후 무소불위의 독재적인 권력을 행사하게 된다. 프랑스의 이런 정치적 상황아래서, 그 유명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등장한다. 당시 군인이었던 나폴레옹은 로베스피에르의 독재통치 아래서, 출세의 과정을 한 단계씩 밟아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과정 중에서, 독재자 로베스피에르가 실각하고 그의 공포정치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때 독재자 로베스피에르 일당으로 간주되었던 나폴레옹은, 매우 힘든 고난의 시간들을 보내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 공화정에 대한 ‘역 반란’이 일어나, 프랑스혁명을 주도했던 ‘국민공회’가 매우 큰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프랑스혁명을 무력화시키려는, 극우 보수 및 왕당파 폭도들을 모두 진압하고, 극적으로 기사회생하게 된다. 이처럼 극적으로 재기에 성공한 나폴레옹은, 주변국들과의 전쟁에서도 계속 승리를 쟁취하면서, 프랑스의 국가영토를 지속적으로 확장해 나갔다. 그러자 국민들은 이런 나폴레옹을 폭발적으로 지지하게 된다. 하지만 프랑스 공화정부는, 나폴레옹의 이런 엄청난 대중적 인기를 몹시 경계하기 시작했다. 결국 프랑스정부는 그의 정치적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나폴레옹을 프랑스에서 멀리 떨어진, 지중해 건너편에 있는 이집트 지역으로, 원정 보내 버린다. 그런데 이런 원정 명령을 받은 나폴레옹은, 고려왕조의 장군으로 왕의 명령에 의해 멀리 중국 땅으로 나아가던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갑자기 회군하여 조선왕조를 세운 것처럼, 이집트로 원정을 가는 도중에 프랑스로 되돌아와서,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탈취해 버린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쿠데타(coup d'Etat)’라는 말은 바로 이 때 생겨난 것이다. 아무튼 나폴레옹은 프랑스혁명이 일어난 3년 뒤인, 1792년에 군사쿠데타를 일으켜서, 당시 의회역할을 하던 500인회를 해산시키고, 제1통령이 된다. 그리고 나중에는 법을 고쳐서 종신통령이 된다. 이런 나폴레옹의 모습은, 5.16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한 후, 유신헌법을 만들어서 끝까지 권좌에 남아 있으려 했던, 독재자 박정희의 모습과 매우 유사하다. 종신통령이 된 나폴레옹은, 쿠데타를 일으킨 지 12년째 되던 해인, 1804년에 마침내 프랑스의 황제로 즉위해 버린다. 프랑스 민중들이 프랑스혁명을 통해서, 루이 16세를 처형하고 왕정을 폐지했지만, 왕정을 대신했던 공화정 출신의 나폴레옹이,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면서, 왕정을 폐지시킨 지 15년 만에, 다시 왕정을 부활시킨 것이다. 당시 프랑스혁명 이후에 전개되던, 매우 혼란스러운 정국에 불안을 느끼던 민중들은, 단지 정치적으로 안정을 얻기만을 간절히 바라면서, 자기들의 손으로 폐지해 버린 왕정과 왕좌를, 나폴레옹이 다시 차지하도록 그냥 내버려 둔 것이다. 이처럼 프랑스는, 나폴레옹이 황제로 즉위하여 다시 왕정으로 되돌아갔지만, 역사적으로 그 유명한 ‘워털루’ 전쟁에서 나폴레옹이 영국 연합군에 패배함으로써, 황제의 자리에서 폐위되게 된다. 나폴레옹이 폐위된 이후에는, 프랑스혁명 때 처형됐던 “루이 16세”의 동생들이 다시 프랑스 왕궁으로 돌아와서, “루이 18세”와 “샤를 10세”라는 이름을 가지고 차례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 이들은 비록, 프랑스혁명으로 인해 처형된 루이 16세처럼,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귀족과 부유층과 같은 지배계층을 중심으로 한 정책들을 펼치면서, 프랑스혁명을 일으켰던 일반 민중들을, 또 다시 왕과 귀족의 노예와도 같은 피지배계층으로 전락시켜 버렸다. 하지만 한번 혁명을 일으킨 경험을 지니고 있는 프랑스 민중들은, 1830년에 또 다시 들고 일어나서 “7월 혁명”을 일으켰다. 이 혁명으로 “샤를 10세”는 폐위되고, 그의 친척인 “루이 필립”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 프랑스 민중의 혁명에 의해서 왕으로 옹립된 루이 필립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평민들의 왕”이며 “민중의 친구”라고 불렀다. 루이 필립이, 피지배계층으로 전락해 있다가 혁명을 일으킨 프랑스 민중의 눈치를 살핀 것이다. 그러나 이런 루이 필립도 나중에는, 역시 지배계층의 본색을 드러냈다. 루이 필립은 당시 지배계층이었던 보수파들에게 자신이 가진 권력의 일부를 나누어 주었다. 동시에 루이 필립은 또 다시, 가진 자들만을 위한 ‘기득권 옹호정책’을 시행했다. 루이 필립 왕에 의해서 지명된 보수파의 수상은, “부자가 되라. 부유해지면, 투표권을 얻게 될 것이다”라는 말을 공개적으로 서슴없이 하고 다닐 정도로 ‘기득권 옹호정책’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당시 프랑스의 유권자는, 단지 성인남자의 3% 정도에 불과할 정도로 매우 제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런 일들로 인해서, 돈이 없이 가난했던 민중과 농민과 노동자들은, 기득권 옹호정책을 펼치는 루이 필립과 보수파 세력들에게 거세게 반발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그동안 ‘사회적인 평등’과 ‘차별 없는 투표권’을 주장하면서, 이를 적극적으로 요구하던 ‘공화파’와 ‘사회주의자’들에게 주목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들 공화파와 사회주의자들 및 민중의 주도로, 1832년에 재차 “6월 항쟁”이 일어나게 된다. 하지만 이 항쟁은, 루이 필립 왕을 지지하던 왕당파의 진압으로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굴복하지 않은 프랑스 민중들은, 그 이후 16년의 세월이 지난 뒤인 1848년에, 공화파의 주도로 또 다시 “2월 혁명”을 일으킨다. 이 2월 혁명이 성공하면서, 루이 필립 왕은 결국 폐위되고 만다. 또 다시 왕정이 막을 내리고, 공화정이 세워진 것이다. 이른 바 ‘프랑스 제2공화국’이다. 그런데 매우 아이러니컬한 것은, 새로 탄생한 제2공화정이, 2월 혁명 당시에 공화파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던 ‘파리의 노동자’들을 탄압하고, 이들의 저항을 무력으로 진압해 버린 것이었다. 정말로 아이러니컬하게도, 2월 혁명에 주도적으로 동참했었던 노동자와 민중들이, 혁명에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피지배계층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왕정일 때는 왕족과 귀족들이 그들의 지배계층이었다. 그리고 혁명을 통해서 공화정이 들어서게 되자, 돈 많은 자산가 계층인 이른 바, “브르조아” 계층이 지배계층으로 새롭게 등장하게 된 것이다. 결국 가난한 노동자들인 이들 “프로레타리아” 계층은, 또 다시 피지배계층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폐위 된 나폴레옹 황제의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이, 망명 중에 있다가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는 제2공화정의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루이 나폴레옹은 나중에 자신의 삼촌이었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후광을 등에 업고 마침내 대통령에 당선된다. 마치 독재자 박정희의 후광으로, 박근혜가 대통령 당선자로 발표된, 작금의 상황과 아주 유사하다. 당시 피지배계층이었던 농민들과 노동자들에게는, 자코뱅파와 같은 ‘좌익’도 공포의 대상이었고, 왕당파와 같은 ‘우익’도 역시 공포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이런 무시무시한 좌익과 우익의 틈바구니 속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해 주고 자신들을 보호해 줄 통치자로, 루이 나폴레옹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민중들의 지지로 대통령이 된 루이 나폴레옹은, 이런 민중들의 희망과는 달리, 자신의 숙부였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바라보면서, 자기도 자신의 숙부처럼, 절대 권력을 지닌 황제가 되려는 욕심을, 이미 그 마음속에 지니고 있었다. 결국 대통령 루이 나폴레옹은 자신의 손아귀에 프랑스 군대를 완전히 장악하고서, 자신이 꿈꾸고 있던 왕정에 반대하면서, 공화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모두 탄압하고 박해하기 시작했다. 이런 모습은 선거에 의해서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국민들의 희망과는 전혀 다르게, 자신의 욕심만을 추구하면서 독재통치를 일삼고 있는, 문민독재자 이명박의 모습을 생각나게 한다. 아무튼 루이 나폴레옹은 공화정치를 가능하게 해주던 보통선거를 모두 중지시켜 버렸다. 그리고 선거집회 역시 그 자신이 철저히 통제했다. 또한 루이 나폴레옹은 자신이 계속해서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헌법상에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는, 대통령에 대한 ‘재선금지조항’의 개정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런 그의 시도는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루이 나폴레옹은 1851년에 프랑스 제2공화정 의회를 해산하고, 이른바 “친위쿠데타”를 일으키게 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어리석은 프랑스 민중들이, 과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당시처럼, 이번에도 역시 “나폴레옹 만세”를 외치면서, 이런 루이 나폴레옹을 또 다시 “나폴레옹 3세”라는 이름의 황제로 등극시킨 것이다. 이런 모습은 독재자의 딸 박근혜를 계속해서 지지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어리석은 민중들의 모습과 완전히 오버랩 된다. 숙부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해서, ‘쿠데타’라는 용어가 만들어 졌다면, 그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에 의해서 ‘친위 쿠데타’라는 말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모습을 보고, ‘자본론’이라는 책을 써서 공산주의 이론의 토대를 놓은 칼 마르크스가, “역사는 반복 된다”고 그렇게 말했다. 마르크스는 역사의 반복을 이야기 하면서, 한 번은 비극으로, ‘또 한 번’은 희극으로 역사가 반복 된다"고 했다. 그가 ‘또 한 번’의 역사를 희극이라고 말했던 것은, ‘비극을 한 번 체험하고서도, 나중에 동일한 비극을 또 다시 그대로 받아들이는 모습이, 결코 웃을 수만은 없는, 가장 비참한 희극과도 같은 아이러니컬한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자국의 역사를 바라보던, 프랑스의 한 정치학자는 “모든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들은, 자신의 수준에 꼭 맞는 그런 정부를 갖는다”고 지적했다. 결코 가볍게 흘려들어서는 안 되는 그런 말이다. 우리 대한민국도 역시, 그 국민들의 수준에 꼭 맞는 그런 정부를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땅 대한민국에서 독재자 박정희의 딸이, 자기 아버지가 일으킨 5.16 군사쿠데타를 혁명이라고 하면서, 독재적인 사고방식과 천박한 역사의식을 드러냈는데도, 이런 여성을 국민들의 거의 절반이나 되는 사람들이 지지하고 있는 현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영국 수상이었던 처칠의 발언이 생각나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처칠은 한국을 향하여 거의 조롱조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 속에서 장미가 피길 바라는 것과 같다”라고. 이런 말들을 생각해 보면, 칼 마르크스가 말한 것처럼, 독재의 망령이 떠돌고 있는 이 땅 대한민국에서, 또 다시 독재통치의 비참한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다. “비극으로 점철된 가슴 아픈 역사를 겪고서도, 이런 역사로부터 아무런 깨달음도 얻지 못한 채, 똑 같은 비극을 또 다시 되풀이 하는 것만큼 비참한 희극”이, 과연 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쿠데타와 혁명에 대한 이러한 개념을 가지고서, 박정희가 일으켰던 5.16을 살펴보면, 이미 군대 안에서 장성으로서 군사 권력을 지니고 있었던 박정희 소장이 일으킨 5.16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일으켰던 쿠데타처럼, 혁명이 아니라 분명한 군사쿠데타인 것이다. 또한 이번 선거에서 독재자 박정희의 딸 박근혜가 51.6%의 득표율로 당선된 것이, 득표율 추정 프로그램에 의해서 사전 조작된 것이 확실한 것으로 밝혀진다면, 박근혜의 대통령 당선자 발표는, 이미 모든 권력을 손 안에 틀어쥔 여당에 의해서 저질러진, 분명한 선거쿠데타로 명확하게 ‘판명’ 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군사쿠데타는 군대에 의해, 그 계획이 매우 은밀하게 계획되고 추진되다가, 불시에 기습적인 방법으로 전격 감행되어 정권을 탈취하게 된다. 그리고 쿠데타가 성공한 이후에는, 자신의 군사력을 가지고서 계엄령을 선포하고 언론을 통제하며, 국회의 활동을 정지시키거나, 기존의 헌법을 개정 또는 폐지시켜 버린다. 이런 조치들을 통해서 쿠데타 세력은, 자신의 반대파 세력들의 활동을 일단 억압한 후, 나중에 이들을 전부 숙청시켜 버리는 것이다. 박정희는, 당시 제 6군단에 속한 포병대, 해병대, 제1공수 특전단 등을 동원하여, 군사쿠데타를 일으켰다. 5월16일 오전 9시에 '군사혁명위원회'를 구성하고, 전국에 즉각적인 '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는 그 즉시 모든 언론들을 통제했으며, 헌법을 정지시키고, 반대파를 숙청하는 등의 작업을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박정희는 원래 1960년 5월 8일을 쿠데타 거사일로 정했었지만, 그해 발생한 4.19 혁명으로 인해서 이 계획이 좌절되자, 한 해 뒤인 1961년 5월16일에, 다시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이처럼 박정희의 ’권력에 대한 야심‘은 아주 집요했었다. 당시에 박정희가 일으킨 5.16은 너무나도 명백한 '군사쿠데타'였다. 따라서 당시 모든 신문들은 헤드라인에 '쿠데타 발생‘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물론 당시 신문에서도 '혁명군'이라는 말을 기사에 사용하기도 했었는데, 이는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군대가, 자신들을 가리켜서 자칭 '혁명군'이라는 말을 구호로 내걸었기 때문에, 그렇게 기사에 사용되어진 것뿐이다. 그런데 이런 과거의 기사를 보고서, 5.16을 혁명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쿠데타를 일으킨 세력들이, 자신을 스스로 혁명군이라고 주장했던 사실을 보도한 그런 기사를 보고서, 아주 분명한 군사쿠데타를 '혁명'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결코 옳지 않은 일이다. 당시에 모든 외신들 역시, 극동아시아의 작은 나라 한국에서 '쿠데타'가 발생했다고 보도했었다. 이처럼 박정희가 일으킨 5.16은, 당시 지배계층에 의해서 억압과 착취를 당하고 있던 피지배계층에 속한 어떤 민중이나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일으킨 혁명이 결코 아닌 것이다. 앞서 살펴 본 프랑스 정치사에 비추어보거나, 쿠데타라는 단어를 정의해 놓은 ‘백과사전적인 개념’에 비추어 볼 때도, 5.16은 아주 명백한 ‘군사쿠데타’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넷 포털 등에서 5.16을 검색해 보면, ‘쿠데타’와 ‘혁명’이라는 말이 모두 다 5.16 뒤에 붙어서 나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독재자 박정희가 일으킨 5.16 군사쿠데타에 대한 분명한 개념정리가, 아직까지도 제대로 정립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군사쿠데타를 일으켰던 그 독재자의 딸이 당선자로 발표되었으니, 역사적 개념의 혼동은 더욱 더 가속화되어질 것 같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 박정희가 일으킨 것과 같은 군사쿠데타는,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또는 경제적으로 전국적인 대규모의 위기상황이 초래되거나, 야당이나 여당을 포함한 기존 정치권의 무능으로 인해서, 의회의 정상적인 기능이 중지되거나 마비되는 일들이 나타나게 될 때, 보다 쉽게 발생한다. 동시에, 이런 정치경제 및 사회적인 상황들과 맞물려서, 군대 내부에 ‘권력에 대한 야심’을 가지고 있는 군부 지배세력이 존재할 때, 군사쿠데타는 매우 쉽게 일어난다. 독재자 전두환도 역시, 권력에 대한 이런 엄청난 야심을 가지고서, 또 다른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전형적인 인물인 것이다. 앞서 쿠데타는, 쿠데타를 일으킨 주체와 쿠데타를 시행한 방법에 따라서, 군사쿠데타, 정치쿠데타, 선거쿠데타 등으로 나눠진다고 했었다. 군사쿠데타는 군인들이 군사력을 동원해서 일으킨 것이고, 정치쿠데타는 정치인이나 통치자가 정치력을 이용해서 일으킨 것이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장군이 일으킨 것이 군사쿠데타라면, 그 조카 루이 나폴레옹 대통령이 일으킨 친위쿠데타가 바로 정치쿠데타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이승만 자유당 정권시절에 발생했던 3.15 부정선거가 바로, 실패한 선거쿠데타인 것이다. 이번 대선의 개표부정에 대한 것도 역시, 독재자 이명박에 의해서 자행된 선거쿠데타로 현재 규정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만약 그 전모가 드러나게 되면 실패한 선거쿠데타가 될 것이지만, 이대로 덮여서 모두 그냥 넘어가버리고 말면, 성공한 선거쿠데타로 역사에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모두가 잘 알고 있듯이, 3·15 부정선거는, 1960년 3월 15일 제4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의 1인 장기집권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려고, 당시 여당이었던 자유당이 자체 조직과 경찰 및 관료조직, 그리고 ‘반공단체’ 등을 모두 동원해서 저지른, 엄청난 부정선거였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자유당의 부통령 후보자였던 이기붕을 부통령에 당선시키기 위해서 그의 측근들이, 내무부 관료들 및 자유당소속의 정치폭력배 등을 동원하여, 부정 선거와 개표 조작을 감행한 선거쿠데타 사건이었다. 이런 3.15 부정선거는 결국 전국적으로 범국민적인 저항을 불러일으켜서, 마침내 이승만을 하야시킨 4·19 혁명을 촉발하게 되었다. 부정 선거가 폭로되자, 전국 각지에서 부정선거에 반대하는 거센 항의시위가 일어났다. 시위도중 마산 앞바다에서 실종되었던 김주열 학생이, 1960년 4월에 그 눈에 최루탄이 박힌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이 사건이 결국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고, 마침내 국회에서는 모든 선거를 무효로 처리해 버렸다. 그 후, 이승만 대통령이 재선거를 약속했지만, 자유당 독재를 펼쳐오던 대한민국 제1공화국은, 4월 27일 결국 붕괴되고 말았다. 이때 당시에는 부정선거가 모두 폭로되고, 이로 인해 독재자 이승만을 하야시킨 4.19 혁명이 발생했었는데, 왜 지금은 모두들 이렇게 조용한 것인가? 그것은 언론이 독재자 이명박의 손아귀에 모두 장악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미 대한민국의 언론은 모두 죽어있다고 보아도 된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시점에서, 과거 4.19혁명과는 또 다른 그런 혁명을 생각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아무튼 4.19 혁명은, 당시 권력의 지배계층에서 소외되어 있던 피지배계층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서, 통치자인 이승만 대통령을 그 권좌에서 쫓아내고, 지배계층인 자유당을 붕괴시킨 ‘전형적인 혁명구도’로 진행된 사건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학생들에 의해서 촉발된 이 4.19 혁명은, 나중에 박정희가 일으킨 5.16 군사쿠데타에 의해서 무참하게 짓밟혀 버렸다. 나중에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켰던 독재자 박정희는, 김재규의 총에 의해서 제거되었고, 박정희가 만든 유신체제는 모두 붕괴되었다. 그 이후에, 또 다시 민주화를 향한 ‘서울의 봄’과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하지만 이 역시, 독재자 전두환이 일으킨 군사쿠데타에 의해서 철저하게 유린되고 말았다. 학생들과 국민들이 흘린 뜨거운 피로써 일어난 민주주의가, 군인들의 군홧발에 의해서 참혹하게 짓밟히고 유린되어 버린 것이다. 이런 슬픈 대한민국의 역사는, 비록 지난 선거에 의해서 대통령으로 선출되긴 했지만, 문민독재 통치를 펼친 독재자 이명박에 의해서, 그 가슴 아픈 역사를 계속 이어가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이런 끈질긴 독재의 역사가, 이제 독재자의 딸에게까지 이어질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깊이 우려하고 있다. 이명박 독재정권은, 독재에 맞선 시민들의 민주화 투쟁인 ‘광주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사실과 실체를 모두 외면한 채, ‘5.18 광주항쟁’을, 단지 왜곡된 정보를 받아들인 소수의 ‘폭동’으로 몰고 가려는, 아주 몰상식하고 몰염치한 시도를 지속적으로 추진해 왔다. 이것은 역사의 진실을 뒤집어엎으려는, 가증스런 범죄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박정희가 일으킨 5.16을 군사쿠데타가 아닌 혁명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역시, 역사의 진실을 뒤집어엎으려는 더러운 작태를 자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5.16을 군사쿠데타가 아닌 혁명이라고 억지주장을 하는 반면에, 5.16 군사쿠데타 세력이 군홧발을 동원해서 짓밟아버린 4.19 혁명은, 그 혁명성이 너무나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좀처럼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완전한 자가당착이요 적반하장의 논리인 것이다. 이처럼, 독재자의 세뇌를 통해서 끊임없이 독재의 향수에 젖어 있는 사람들은, 4.19 혁명의 그 선명한 혁명성마저 모두 부정한 채, 적반하장으로 명백한 박정희의 5.16 군사쿠데타를 5.16 혁명이라고 부르고 싶어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이라는 아주 선명한 키워드를 사용해서, ‘국가기록원’ 이라는 국가기록포털( http://contents.archives.go.kr )을 통해, 3.15와 4.19에 관한 기록들을 모두 공개하고 있다. 그러므로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독재자의 딸 박근혜를 포함해서, 5.16을 군사쿠데타가 아닌 혁명으로 부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부족한 역사의식과 역사에 관한 일천한 지식들을, 다시 한 번 더 깊이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박정희의 5.16 군사쿠데타를 5.16 혁명으로 바꾸어 부르면서, ‘박씨 왕조’를 재건하려는 독재자의 딸 박근혜에 의해서, 지난 세월들 동안 가슴 저미도록 고통스럽게 전개되어 온 대한민국의 역사는 ... 이제 과연, 어디를 향해서 흘러갈 것인가? 독재자 이승만의 3.15 부정선거가 4.19 혁명을 불러왔듯이, 현 부정개표 시국이 또 다른 혁명을 부르는 그 길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4.19 혁명의 꽃을 꺾어 버린 박정희와,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처참하게 짓밟아 버린 전두환 같은 독재자들이 득세하는, 또 다른 독재의 길로 나아갈 것인가? 앞에서도 계속해서 말씀드린 것처럼, 쿠데타란 지배계층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인 반면에, 혁명이란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지난 19세기에 지배계층 사람들은 피지배계층에 대한 억압과 수탈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다윈의 진화론과 관련된 ‘약육강식’, ‘적자생존’, ‘우생학’ 등의 개념을 사용해서 사람들 상호간의 치열한 ‘경쟁체제’를 끊임없이 조성해 왔다. 지배계층에 의해서 널리 이용된 이 같은 ‘사회적 다윈주의’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전반까지 동서양의 온 세계를 넘나들면서, 지배계층의 사상적 토대를 제공해 주었다. 그 결과 마침내, 이들 지배계층을 위한 정치경제적 이데올로기로, ‘신자유주의(Neoliberalism)’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살인적인 ‘경쟁’을 가장 효율적인 도구라고 주장하는 ‘사회적 다윈주의’나 ‘경제적 신자유주의’는, 약육강식이나 적자생존을 강조하는 진화론의 체계에 그 사상적 뿌리를 두고 있다. 하지만 이들 이데올로기는, 모든 인간을 도덕적인 ‘선’이나 ‘덕’과는 전혀 상관없는, 마치 짐승과도 같은 천박한 존재로 전락시켜 버렸다.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이라는 짐승세계의 원리에 의해서, 내가 살아남고 또 내가 더 즐기기 위해서, 남들에게 온갖 못된 짓과 패악을 자행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지배계층은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기득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신자유주의라는 정치철학적 이론을 가지고서, 피지배계층을 지속적으로 억압하고 착취할 수 있는 온갖 방법과 계략들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고 있는 중이다. 그 결과 신자유주의는 경제적으로도 ‘양극화’를 가속화시키는 부작용을 끊임없이 야기 시키고 있다. 오직 ‘경쟁’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신자유주의자들은, ‘노동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면서, 자신들의 지배를 받는 피지배계층의 사람들을, 마치 자신의 노예와 같은 존재로 만들어 버리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한다. 하지만 짐승이 아닌 인간은, 비록 노동할 수 없는 경우에 처하더라도, 최소한 인간답고 사람답게 살 권리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권리를 누리기 위해서, 생존에 필요한 기본 식량과 의료혜택을 반드시 공급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자들은 사회적 약자와 힘없는 노동자들, 신체적 장애자들에 대한 배려를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생산성과 경쟁의 측면에서 전혀 효율적이지 않은, 매우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이들을 간주해 버리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지난 5년 동안, 이명박 독재정권이 수많은 서민과 장애자 극빈자들의 복지혜택을 과감하게 축소시켜버린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 김영삼 정부 때인, 1997년의 금융위기 이래로 한국에 등장하기 시작한, 신자유주의의 정치철학적 개념은( 여기서 경제적인 측면에서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것은 깊이 논의하지 않기로 한다 ), 현재 우리나라에서 소수 지배계층의 통치 이데올로기의 하나로 자리 잡고 있음과 동시에, 대다수 피지배계층인 국민들에 대한 지속적인 억압과 착취를 가능하게 만드는 거대한 사상적 매트릭스를 형성하고 있다. 이번 대선도 지배계층의 이런 견고한 매트릭스 체계 안에서 치러진 것이다. 따라서 비록 지배계층의 기득권 수호를 위한 다양한 선거조작이 있었다 하더라도, 지배계층이 만들어 놓은 온갖 매트릭스에 갇혀서 지내는 피지배계층의 대부분은, 이런 부정과 거짓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또 운 좋게 이를 파악했다 하더라도, 이들은 지배계층이 만들어 놓은 이런 억압과 착취의 매트릭스를 무너뜨릴 만한, 적절한 수단과 방법을 쉽게 찾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무기력하고 절망적인 상황들이 오랫동안 지속되고 가속화되면, 마침내 자포자기 해 버린 일단의 군중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동시에 이들에게 힘을 싫어주고, 이들에게 새로운 삶의 동기를 부여하고, 이들로 하여금 일어나서 행동하게 만드는 깨어있는 지식인들도 역시 반드시 나타나게 된다. 인류 역사가 지금까지 그렇게 전개되어 왔다. 절망한 군중과 지식인들은 힘을 합쳐서, 자신들의 삶에서 희망을 빼앗아간 지배계층의 각종 매트릭스를 파괴하기 위해서, 그야말로 사력(死力)을 다하게 된다. 삶에 대한 전혀 새로운 동기부여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바로 이 힘이 ‘혁명’을 가능하게 만드는 힘이다. 때문에 세간에서는, 피지배계층을 ‘철저하게 절망하도록 만드는 일’을 일컬어, 지배계층이 피지배계층을 ‘날이 시퍼렇게 서도록 더욱 더 모질게 탄압하는 일’이라고 그렇게 부른다. 현재 이 땅, 대한민국의 서민들은, 신자유주의적인 사회정치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지배세력의 기득권에 의해서, 끊임없는 억압과 착취의 매트릭스 속에 갇혀서 살고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야말로 날이 시퍼렇게 서도록 모질게 탄압받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미국산 수입쇠고기 개방이나 한미 FTA, 4대강 사업, 온갖 레버리지를 동원한 부동산거품들, 각종 민영화 정책 등도 모두 다, 소수의 지배계층이 만들어 놓은 억압과 착취의 매트릭스 안에서 발생하는, 지극히 당연한 일에 불과할 뿐이다. 지배계층은 피지배계층의 온갖 반발과 저항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계획한 이런 여러 가지 일들을, 계획한대로 하나씩 하나씩 고집스럽게 추진해 나가면서, 이를 자신들의 승리라고 착각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현재 섣부른 자축의 샴페인 뚜껑을 열심히 터트리고 있는 중이다. 지금 이곳 아고라에서 거세게 일고 있는 부정개표와 선거조작에 관한 온갖 항의에 대해서도, 모든 언론들을 통제한 지배계층이 이를 철저히 억압하고 무시함으로써 무력화시키려는 것도 역시, 동일한 억압과 착취의 매트릭스 체제하에서 발생하는 일련의 통과의례에 불과할 뿐이다. 이들은 국민들이 ‘수개표’와 선거과정에 대한 총체적인 점검을 요구하는 모든 항의를,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견고한 매트릭스 시스템 안에서, 모두 묵살해 버리고 말 것이다. 그리고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승리의 나팔을 불어댈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 있다. 이들 지배계층이 이런 행동들을 취함으로써, 더욱 더 절망의 끝으로 내몰리는 국민들과 깨어있는 지식인들이, 마침내는 행동을 개시하게 될 것임을, 이들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일단 거대한 ‘혁명’의 도화선에 불이 붙기 시작하면, 그리고 그 혁명의 폭탄이 터져버리면, 지배계층이 만들어 놓은 온갖 억압과 착취의 매트릭스는 모두 다 파괴되어 버릴 것이다. 그리고 지배계층의 운명은 일순간에 급 전락 하게 될 것이다. 실제로 이런 혁명의 도화선에 불이 붙기 전까지는, 그 어느 누구도 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 불은, 수많은 억압과 착취를 지속적으로 당해온 피지배계층이, 마침내 자포자기(自暴自棄) 하여 사즉생(死卽生)의 상태에 도달해야만, 비로소 타오르기 때문이다. 쿠데타와 혁명에 대한 개념을 혼동하는 사람이 많은 것처럼, 쿠데타를 통해서 만들진 독재와 이에 저항하는 혁명도 역시, 그 상호연관성이 매우 높다. 독재의 지난(至難)한 끝에는 반드시 혁명의 그림자가 너울대는 것이다. 이제 이명박 문민독재에 이어서, 군사독재와 유신독재를 시행했던 독재자의 딸이, 자기 아버지가 일으킨 군사쿠데타를, 감히 혁명으로 미화하려는 역사의식을 가지고서 또 다른 문민독재를 꿈꾸고 있다. 군사쿠데타를 혁명이라고 생각하는 그러한 잘못된 역사인식과 의식구조 아래서는, 반드시 독재적인 사고방식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사고방식을 지닌 지배자는 이에 반발하는 피지배계층과 제대로 소통할 수 없게 된다. 이로 인해, 독재자 자신의 일방적인 사고방식을 따라서 행해지는 독재 통치는, 필연적인 수순이며 당연한 결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독재 통치는, 좀처럼 중간에서 끝이 나는 법이 없다. 자기 부하의 총에 의해서 비명에 간 그녀의 아버지처럼, 반드시 극단의 끝으로까지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결국 그 극단의 끝에서, ‘혁명’의 거대한 폭탄에 연결되어 있는 도화선에 불이 붙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혁명의 폭탄은 터지게 된다. ‘이명박근혜’와 ‘새누리당’은, 앞서 언급했던 ‘프랑스혁명’ 때, 지배계층이 단두대로 보내져, 그곳에서 그들의 비참한 최후를 맞이해야만 했던 그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 기회가 주어져 있을 때, 이를 붙들지 못하면, 기회는 비극을 이끌어 오게 된다. > 긴 글,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루터기 추억님의 글 목록을 첨부합니다. 관심있으신 분들은 클릭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순서대로 ^^]과연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 ... 독재인가 혁명인가? [28] 경제|1시간 전이곳 아고라에, 이번 대선의 부정개표 의혹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혁명’에 대한 발언들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 잠시 이런 발언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그렇다면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 대한..각 지역별 득표수도, 이렇게 사전에 세팅되어 조작 될 수 있다. [184] 경제|13.01.12만약 누군가가, 박근혜와 문재인 두 후보의, 지역별 총 득표수를, 사전에 세팅해서 맞추어 놓았다면아마도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득표수 조작을 시도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가장 먼저, 두 후보의, 최종 표차이 &..부정선거는, 매트릭스 구조 아래서 만들어진 것일 뿐입니다. [146] 경제|13.01.10매트릭스의 본질은 거짓이며 속임수다. 매트릭스란 존재하지 않는 가상현실과 같은 거짓된 세계로, 실제의 현실세계를 대신해 버리는 것이다.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다. "매트릭스는 사방에 있다. 진실을 못 보도록..대한민국은 지금 ... 독재국가인가 아니면, 민주국가인가?? [106] 경제|13.01.08저는 이 글에서, 우리나라가 독재국가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는, 독재의 특징들 일부를 열거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이런 특징들을 살펴보면서, 지금 우리나라의 상태가 독재통치하에 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이..어떻게 SBS 득표곡선이, 로지스틱 함수값으로 표현될 수 있나?? [234] 경제|13.01.05지난 번에 ... 로지스틱 확률을 추정하여 ... SBS 누적득표수 곡선이 ... 로지스틱 곡선임을 보여드렸었는데 ...너무 어렵다고 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어서 ... 최종 결론만 아주 쉽게 요약해서 ... 다시 올려드립니..지금 많은 국민들이 ... 새로운 정치인과 정당을 요구하고 있다. [157] 경제|13.01.04저는 제가 과거에, 이곳 아고라에 올렸었던, 아래와 같은 글을 통해서 ( 뒤에, 일부 요약한 것을 이곳에 함께 올려놓았습니다), 2000년대를 이끌어 나갈 우리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과연 어떤 자질을 가지고 있어야..한겨레에 보도된 세분 교수님들의 견해에 대한 ... 저의 답변 .. [768] 경제|13.01.03제가 올린 글의 댓글에 ... 네티즌들께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올려 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찾아가 보았더니 ... 제가 이곳 아고라에 올린 글에 대해서 ...한겨레 신문 허재현 기자가 ... 대선 부정선거 논란 관련..로지스틱 함수에 의한, 득표수 사전 추정의 전체 시나리오!! [162] 경제|13.01.03지난 번까지 ... 이번 대선 개표에 따른 득표율 그래프에 대한 ... 로지스틱 곡선 분석을 시도했었습니다.그리고 ... 1분 단위의 득표수를 추정하는 작업도 ... 역시 시행 했었습니다. 이제는 이런 결과들을 가지고..로지스틱함수에 의해, 박근혜 득표수를 실제로 추정했습니다. [426] 경제|13.01.02오늘은 ... 로지스틱함수를 가지고서 ... 박근혜 후보의 누적득표수를 실제로 사전에 예측하는 작업을 하겠습니다.때문에 ... 수학적으로 조금 까다로운 부분이 있지만 ... 어렵게 생각되는 분들은 그냥 넘어가시고..추정된 박근혜 득표수를 이용해, 자동적으로 계산된 문재인 표!! [550] 경제|13.01.01네티즌 "너바나"님이 ... 다음과 같은 ... 이번 대선 개표 그래프를 ... 이곳 아고라에 올려 주셨었습니다. 이 그래프가 올라와 있는 ... 너바나님의 글 주소는 ... 아래와 같습니다. http://bbs1.agora.media.da1분 단위의 박근혜 득표자료를 오차율 1.5% 이내로 정확히 예측! [523] 경제|12.12.31많은 네티즌들이 ... 제가 지난 번에 올린 글에서 ... 실제 박근혜 후보의 누적득표량 수치를 이용해 ...역산을 통해 ... 로지스틱 확률 p(t)값을 구하고 ... 또 이를 이용해서 실제 누적득표율 f(t)를 구한 것을 놓..로지스틱 곡선형태의 대선 득표수에 대한 합리적인 의심과 의문! [582] 경제|12.12.30제가 앞서 올렸던... 로지스틱 곡선과 관련한 몇개의 글들에 대하여 ... 수학을 모르기 때문에 어렵다는 말들을 하시는 네티즌들이 많이 계셨습니다 ... 따라서 이번 글에서는 ... 수학의 함수식을 전혀 언급하지 않..누적득표량에 대한 로지스틱곡선들이 ... 알려주는 중요한 것들 [453] 경제|12.12.28앞서 올린 로지스틱 함수를 가지고 박근혜 후보의 시간대별 누적득표량을 계산한 것 때문에 논란이 많은 것 같다. 역산을 한 것이라는 말도 있고, 조작이라는 말도 있고, 사기라는 말도 있었다. 물론 역산을 한 것이..로지스틱함수에 의해 사전에 계산된 ... 박근혜 후보의 득표수!! [2717] 경제|12.12.27이번 대선의 득표수를 나타내는 SBS 자료의 득표량 곡선은 ... 대단히 매끄러운 로지스틱곡선이었다. 따라서 만약 ... 누군가가 전형적인 로지스틱 함수를 이용하여 ... 시간대별 득표수를 미리 설계했다면 ...그리..로지스틱곡선에 의한, 간단한 당선 유력 발표시점 산출 방법 [87] 경제|12.12.26박근혜 후보와 문재인 후보의 시간별 득표현황을 보면 ... 전형적인 로지스틱곡선임을 지난 글에서 보여드렸었다.이제는 ... 만약 로지스틱곡선 모양의 득표현황이 ... 로지스틱 함수를 이용하여 ... 인위적으로 만..이번 대선 득표율 그래프는 ... 정확히 로지스틱곡선에 해당된다 [78] 경제|12.12.25선거 개표결과 나타난 득표율 그래프는 ... 정확히 로지스틱 곡선이다. 먼저 선거 개표결과 그래프를 보면 다음과 같다. 그리고 로지스틱 곡선을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캡쳐한 화면이 가로로 축소되어 잘 안보이므긴급!! ... 일단 투표용지에 대한 가처분 신청이 필요하지 않나? [8] 경제|12.12.24투표용지 소각에 대한 ... 여러 의견들이 제시되고 있다. 법적 보관기일이 있기 때문에 ... 당분간은 보존 될 것이라는 의견과 ...25일부로 소각할 예정이라는 ... 또 다른 의견들도 올라오는 형편이다. 정확한 것은..검표(재개표)에 관한 법률임 ... 7일 이내에 요구해야 됨! [64] 경제|12.12.22전산조직에 의한 투표 및 개표에 관한 규칙 [시행 2010.1.25] [중앙선거관리위원회규칙 제324호, 2010.1.25, 일부개정] 제1조(목적) 이 규칙은 각급 선거관리위원회가 「선거관리위원회법」 제3조제1항제4호 및 제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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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터] 레미제라블 - 왜 마리우스는 감옥에 가지 않았을까 ?
제게는 영화 레미제라블에서 가장 마음에 아픈 장면이, 팡틴느의 비참한 처지나 장발장이 죽는 장면이 아닙니다. 바로 앙졸라가 그랑테르와 함께 사살되는 장면입니다. (Do you hear the people sing ? TO THE BARRICADES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하나 생깁니다. 앙졸라는 재판도 없이 현장에서 즉결 처분으로 사살되었는데, 똑같이 정부군에 반항하여 싸웠고,
실제로 병사들을 몇명 살해하기까지 한 마리우스는 어떻게 아무 처벌을 받지 않았을까요 ? 장발장이 하수구를 통해서 마리우스를
빼내오기는 했지만, 주변 사람들 모두가 마리우스는 ABC의 친구들의 하나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텐데, 그는 왜 이후에라도 경찰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지 않았을까요 ? 그냥 현장에서 붙잡히지만 않았기 때문에 마리우스가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이고, 나중에라도
마리우스가 바리케이드에서 반란에 가담했던 수괴 중 하나라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마리우스는 당장 교도소로 가서 강제 노역에 처해지거나
심지어 교수형이라도 받게 되는 것일까요 ? 그럴리가 없지요. 만약 그랬다면, 테나르디에가 틀림없이 경찰에 고발하지 않을테니
전재산의 반을 내놓아라 하면서 마리우스를 협박했을테니까요. (원작 소설에서, 결국 테나르디에는 마리우스로부터 2만 프랑의 돈을 뜯어내는데 성공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건 마리우스의 아버지인 퐁메르시 대령의 유언 때문이었지요.)망작이라고 일컬어지는 1998년작, 리암 니슨과 우마 써먼 주연의 레미제라블을 최근에 EBS에서 방영해주는 것을 보았는데, 거기에
실마리 비슷한 것이 나옵니다. 그 영화에서는 마리우스를 데리고 하수구를 통해 기어나온 장발장과, 그 앞에 나타난 자베르 사이에
대충 이런 대화가 오갑니다.(처음에는 좀 그럴싸하게 나가더니... 가면 갈 수록 영화 전개가... 매우 이상했어요.)장발장 : 난 체포해도 좋으니 1시간만 달라, 이 친구를 그 조부의 집에 데려다 주고 잡혀가겠다. 치료를 하지 않으면 이 친구는 죽는다.자베르 : 뭐하러 그런 수고를 해야 하지 ? 이 반란군 친구는 치료를 받더라도 결국 어차피 교수형을 받을텐데.장발장 : 며칠 안에 대사면령이 내려질거야.(이 1998년 영화가 망작인 대표적인 이유. 저 주먹들고 설치는 찌질이가 마리우스이고, 혁명의 리더가 마리우스 본인입니다 !! 앙졸라는 대체 어디에 간것인지 !!!)실제 원작 소설에서는 이런 대화가 안나옵니다. (이 1998년 영화는 이래저래 망작입니다. 심지어 앙졸라가 아예 안나옵니다
!!!!) 그런데 이 영화에서, 일개 도주 범죄인인 장발장이 어떻게 감히 '며칠 안에 사면령' 이야기를 운운할 수 있었을까요
? 그냥 영화가 망작이라서 ? 왜 마리우스가 사법 처리를 피하고 코제트와 행복하게 부르조아의 삶을 누릴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보시려면, 이야기가 아주 길어집니다. 먼저 먹는 과일인 배 이야기부터 들으셔야 합니다.(물론 프랑스니까 우리나라 나주 배가 아닌 서양배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서양배는 저렇게 좀 표주박처럼 생겼어요.)다음은 민음사에서 나온 레미제라블 한국어판의 일부분입니다. 정기수라는 교수님이 번역하셨는데, 소개를 보니 서울대 불문과를 나오시고
프랑스 보르도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으셨고, 프랑스 교육 문화 훈장도 받으셨으니 불문학 쪽에서는 최고 권위자이십니다.-----------------------------------------어느 여름날 저녁 루이 필리프는 걸어서 돌아오다가 어리디어린 건달 하나가 뇌이 궁전의 쇠 문설주에 엄청 큰 배 하나를 숯으로
그리려고 발돋움하며 땀을 흘리고 있는 것을 보고, 왕은 앙리 4세로부터 이어받은 착한 마음씨를 가지고 그 건달을 도와 배를 다
그리고 나서, 그 아이에게 루이 금화 한 닢을 주면서 말했다. "저 위에도 배가 있구나."-----------------------------------------(저도 영화보고 나서 충동구매로 질렀습니다 ! 근데 번역체에 약간 실망했어요.)이
문장이 이해가 되세요 ? 전 맨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가 이해를 못했습니다. 제가 가진 펭귄 클래식 영문판으로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이 책은 Normal Denny라는 분이 영어로 번역한 것인데, Radley College라는 곳을 나왔고, 그냥
비엔나와 파리에서 공부했다 라고만 설명이 붙어있네요.)...then gave him a coin, a louis d'or. "There's a pear is on that, too," he said.이러면 좀더 이해가 쉽게 됩니다. 그러니까 '저 위에도 배가 있다' 라고 번역하기 보다는, '그것(금화) 위에도 배가 있단다' 라고 번역하는 편이 나을 뻔 했습니다. 불어판을 보니 이렇게 되어 있더군요."La poire est aussi l?-dessus."Bing
translater로 번역을 해보니 저 l?-dessus 라는 단어는 on it, on top으로 번역이 되고, 네이버 불어
사전을 봐도 저건 그냥 "그 위에" 라고 번역이 되어 있던데, 그걸 왜 굳이 "저 위"라고 번역을 해서 '문설주 위를 말하는
건가' 하고 헷갈리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이렇게 설명을 드려도 아직 이해가 잘 안되시는지요 ? 이걸 완전히
이해하시려면 일단 민음사의 주석을 보셔야 합니다. 주석에는 '배는 루이 필립의 문장'이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마도
저 금화 위에 루이 필립의 문장인 배가 찍혀 있나 보다 라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것이 나폴레옹의 꿀벌 문장입니다. 나폴레옹이 황제에 즉위할 때, 참모진들이 고심 끝에 고른 문장입니다. 나폴레옹 이전에도,
원래 프랑스 왕가 문장에 꿀벌이 들어간 적이 있다고 하더군요. 근데 꿀벌보다는 나방을 닮은 것은 에러.)나폴레옹의 문장이 꿀벌(벌꿀이 아닙니다 꿀벌입니다)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왕의 문장이 먹는 배일리가 없쟎습니까 ? 사실 배라는
것은 루이 필립의 문장이 아니라 별명이었고, 그것도 조롱하는 별명이었습니다. 1831년, 그가 왕좌에 오른 이후에 나온 아래
만화를 보면 아시겠지만 그의 두상이 약간 배를 닮았거든요. (루이 필립, 배로 진화하다)아,
여기서 배란 물론 서양배를 뜻합니다. 서양배는 굳이 따지면 약간 표주박처럼 생겼지요. 그러니까 저 대담한 부랑아 소년은 감히 궁전 문설주에다 왕을 조롱하는 낙서를 하다가 왕 본인에게 딱 걸린 것인데, 왕 본인이 그 조롱 낙서를 그리는 것을 도와주고 이 불쌍한 소년에게 금화까지 준 것입니다. 그러면서, 금화 위에 새겨진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며 루이 필립이 "이 금화 위에도 배가 있다" 라고 농담을 한 것입니다. 당시 금화 앞면에는 항상 왕의 얼굴을
새기게 되어 있었거든요.(루이 필립 때 나온 금화는 사진을 못 찾겠네요. 이것이 루이 필립 때 나온 5프랑 짜리 은화입니다.)(이것이 루이 14 때의 금화, 흔히 Louis d'Or 라고 부르는 물건입니다. 불어로 금이 Or 에요. 금값만 따져도 현재 가치로 약 40만원 정도 합니다.)레미제라블 속의 저 문장은 가브로슈를 소개하면서 파리의 어린 부랑자들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는 부분에서 나옵니다. 하지만 여기서 여러분이 느끼셔야 하는 것은 바로 저 루이 필립이라는 왕의 관대함입니다.잠깐, 루이 필립이 관대하고 착한 왕이었나요 ? 예, 맞습니다. 이건 레미제라블 속에도 언급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의
주인공 마리우스와 앙졸라, 그리고 ABC의 친구들은 이 어질고 착한 왕을 몰아내려고 했었나요 ? 그건 나중에 보도록 하고,
먼저 이 루이 필립이라는 왕에 대해서 간단히 보셔야 합니다.(어서 와, 내 진짜 얼굴은 처음이지 ? 저 위에 배는 잊어버려.)일단 루이 필립은 원래 부르봉(Bourbon) 왕가 출신이 아닙니다. 루이 필립은 오를레앙 (Orleans) 가문의 왕자였는데, 이
오를레앙 가문은 부르봉 가문과 함께 유서 깊은 카페 (Capet) 왕조에서 갈라져 나온 귀족 가문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부르봉
가문은 장남, 오를레앙 가문은 차남인 셈이었지요. 당연히 왕은 모두 부르봉 가문에서 나왔고, 오를레앙 가문은 그냥 공작이라는
작위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오를레앙 가문을 프랑스 사람들은 'la branche cadette', 영어로는 cadet
branch, 즉 분가(나눌 분, 집 가)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아, 그러고보니 민음사 레미제라블 5권 99페이지에 있는
주석도 오타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blanches cadette 라고 되어 있던데, 이건 더 젊은 백색, 혹은 백색 사관
후보생이라는 뜻이고, 아마 branche cadette를 쓰려고 하다가 오타가 난 것 같습니다.(이 분이 루이 필립 1세의 아버지 루이 필립 2세입니다. 2세와 1세가 바뀐 것 아니냐고요 ? 아닙니다 !)루이 필립은 이렇듯 애초에 왕이 될 운명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지요. 루이 필립의 아버지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 필립 2세 (Louis Philippe II)는 당시 왕이었던 루이 16세와는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계몽 사상을 신봉하는 자유주의자였습니다. 그로 인해 운명의 삼부회가 소집되었을 때도 루이 필립 2세는 제3신분 편을
들었고, 혁명에 협조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혁명을 주도했습니다. 오를레앙 공작으로서 그의 거처였던 파리 시내 루아얄 궁
(Palais-Royal)은 급진파인 자코뱅들의 본거지일 정도였습니다. 루이 필립 2세 자신도 열혈 자코뱅이었습니다. 참
묘하지요 ? 공작이 자코뱅이라니 ! 미국의 오올리언즈 (Orleans, 루이지애나의 뉴 오올리언즈가 아니라 메사츄세스 주의
소도시입니다)라는 도시 이름은 독립 전쟁 당시 자신들을 후원해준 바로 이 양반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것입니다.(몽생미셸 하니까 어딘지 귀에 익지 않습니까 ? 화보에 자주 나오는 해안가의 그 유명한 몽생미셸 성 바로 그 곳입니다.)그의 아들 루이 필립도 당연히 그 아버지 영향을 받아서 자유주의자로 교육을 받고 자랐습니다. 혁명이 터지기도 전인 1788년,
당시 불과 15살이었던 루이 필립은 몽생미셸(Mont Saint-Michel)의 감옥 문을 부수기도 할 정도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레미제라블에도 나오지요. 뿐만 아니라, 그는 1792년 유명한 발미 (Valmy) 전투에 직접 참전하여 혁명을 진압하러
침공하는 프로이센 군과 싸우기도 했지요. (1792년 발미 전투에서의 루이 필립입니다. 중앙에서 약간 왼쪽에, 말에서 내려서서 투구를 쓴 채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바로 루이 필립입니다. 바로 그 옆에 말을 탄 장교는 그의 친동생이고요. 발미 전투의 의의에 대해서는 발미(Valmy)에서 생긴 일 http://blog.daum.net/nasica/6862441 참조)그의 따뜻하고 고귀한 품성을 전해주는 일화는 많습니다. 가령 젊어서 군에 있을 때, 성난 마을 주민들이 혁명에 반대하는 카톨릭
사제들을 때려죽이려고 몰려들자 자신이 홀홀단신으로 폭도들과 사제들 사이에 버티고 서서 카톨릭 사제들을 구해낸 적이 있었지요.
본인 자신은 혁명파인데도, 혁명으로 인해 불필요한 살상이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아마 덕분에 사제들을 놓친
마을 사람들은 이 젊은 귀족 장교에게 무척 화가 났을텐데, 바로 다음날 어떤 사람이 강물에 빠지자, 루이 필립이 물에 뛰어들어 이
사람을 구해냈습니다. 결국 이 용감함에 감복한 마을 사람들이 그에게 월계관을 선사했다고 합니다.하지만 그 자신은
결국 반혁명파로 몰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루이 16세의 처형에는 반대한, 입헌 군주제를 지지하는 온건파였습니다. 반면에 그의
과격한 자코뱅 아버지는 아예 성을 '평등'이라는 ?galit? 로 바꿔버리고 루이 16세의 처형에 찬성표를 던졌습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혁명은 그다지 아름답게 돌아가지만은 않습니다. 발미 전투에서 그의 상관이었던 두무리에 (Charles Fran?ois
Dumouriez) 장군은 혁명 정부의 무능력과 과격함에 질려버린 상태라서, 차라리 1791년의 헌법 체제, 즉 입헌 군주제로
되돌리기 위해 오스트리아군과 손잡고 반혁명 군사 쿠데타를 계획했습니다. 이 계획은 사전에 탄로가 나서 실패했는데, 두무리에의
부하였던 루이 필립도 이에 연루되어, 결국 두무리에와 함께 오스트리아로 망명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아들의 망명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파리의 아버지 오를레앙 공작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게 되지요.(이
분이 두무리에 장군입니다. 그는 영국으로 가서 영국의 연금을 받으며 나폴레옹에 저항하며 살았습니다. 루이 18세 복위 이후,
프랑스군으로의 복귀를 꾀했으나, 이미 프랑스군은 나폴레옹의 실력파 부하 원수들이 다 꽉 잡고 있었으므로 실패... 결국 영국에서
쓸쓸히 여생을 마쳤습니다.)여기서부터 루이 필립의 진짜 고생이 시작됩니다. 그는 곧 오스트리아를 떠나 스위스, 스칸디나비아, 핀란드, 심지어 미국 등으로
정처없는 떠돌이 생활을 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마치 낭만적인 세계 여행을 즐긴 것 같지만, 그는 따로 금전적인 지원을 받는
곳이 없었기 때문에, 생활이 궁핍했던 것입니다. 레미제라블에도 나오는 이야기지만, 그는 끼니를 때우기 위해 타고 다니던 말을
팔기도 했고, 어떤 기숙 학교에서 수학과 지리, 프랑스어 교사 노릇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와 동행하던 여동생은 놀랍게도
삯바느질을 해서 생활비를 보탰다고 합니다. (다만 그런 와중에도 여기저기서 여자들과 놀아나 사생아들을 남겼다는 점은
에러...) 그래서 루이 필립은 젊어서 고생을 해 본, 시민 왕으로 불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지요.1830년 7월
혁명이 벌어졌을 때, 샤를 10세는 자신의 손자에게 양위를 한다고 선포하고는 망명길을 택했습니다. 그러나 민중들은 당연히
공화제를 원했습니다. 부르주아 계급은 그에 비해서 공화제의 혼란을 두려워했고, 이런 상황 속에서 '시민 왕'이라고 할 수 있던
루이 필립이 그 대안으로 떠올랐습니다. 서민의 삶이 무엇인지 아는 착한 왕이라, 참 멋져 보이지 않습니까 ? 결국 루이 필립은
부르봉 왕조를 쫓아낸 세력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었던 것이지요. 19세기의 프랑스 혁명은 대개 부르조아, 즉 중산층 계급이
선도하지만 결국 일반 민중들이 몸빵을 담당해서 피를 흘리는데, 그 성과는 역시 다시 중산층 계급에서 독점하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
같습니다. (이
그림이 1830년 7월 혁명을 묘사한 가장 유명한 그림이자 제 블로그의 타이틀 화면인 Eug?ne Delacroix 작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La libert? guidant le peuple) 입니다. 이 그림은 당시 역사화치고는
파격적으로 사건 직후인 1830년에 그려졌습니다. 화가인 들라크루아는 정작 이 혁명에 직접 참여하여 총을 들지는 않았는데,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내가 조국을 위해 싸울 수 없다면, 조국을 위해 그리겠다 !' 라고 말을 했다고 합니다. 저 그림에는
노동자와 부르조아 중산층 시민, 거리의 불량 소년 등이 모두 합심하여 왕정 타파에 나선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저 불량
소년이 훗날 빅토르 위고에게 가브로슈에 대한 영감을 주었을 거라는 추측이 많으나, 정작 위고는 그에 대해 아무 말을 한 것이
없습니다. 이 그림은 제작 즉시 매우 유명해졌는데, 레미제라블의 배경이 되는 1832년 6월 봉기 이후 대중에게 전시되는 것이
금지되었다고 합니다. ㅉㅉ)루이 필립은 이렇게 인기 많은 왕으로 시작했지만, 그 인기는 급속도로 나빠졌습니다. 애초에 공화제를 원했던 민중이 '자신들이
이용만 당하고 얻은 것은 없다'라고 분노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루이 필립의 정치는 결국 투표권 보유자를 줄이고, 금융가 및
지주들만을 위한 방향으로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그런 분노가 좀 설익게 터져 나온 것이 루이 필립 즉위 2년 만인 1832년
6월, 즉 레미제라블에 묘사된 무장 봉기 사건입니다. (이 1832년의 파리 무장 봉기 사건은 실패한 사건이다 보니 별로 잘 알려지지도 않았으나, 빅토르 위고에 의해 불멸의 영광을 누리게 되었지요.)빅토르 위고는 이 봉기 사건 당시에는 루이 필립의 지지자였고, 레미제라블 내에서도 루이 필립 개인에 대해서는 무척 칭찬을 아까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앙졸라가 굳이 무장 봉기를 일으켜야 했던 것은, 루이 필립을 몰아내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프랑스에서 왕을
몰아내기 위해서였다고 묘사했지요.(루이 필립 당신에게 개인적인 감정은 없소이다 !)자,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왜 마리우스가 중대 범죄인 반란을 저지르고도 무사할 수 있었는지를 보지요. 사실 그 답은 레미제라블 안에 다 묘사되어 있습니다. 민음사의 번역을 그대로 옮깁니다.-----------------------폭동은 사회의 현 상태에서, 모두의 책임이므로 거기에는 어느 정도 눈을 감아 줄 필요가 뒤따른다.게
다가 또 언어도단인 지스케의 법령은 의사들에게 부상자들을 고발하도록 명령했는데, 그것은 여론을 분개시켰고, 단지 여론 뿐만 아니라
첫째로 국왕을 분개시켰으므로, 부상자들은 그 분개 때문에 감추어지고 보호받았으며, 현행의 전투에서 포로가 된 사람을 제외하고,
군법회의는 감히 아무도 괴롭히지 못했다. 그러므로 아무도 마리우스를 괴롭히지 않았다.-----------------------여기서 지스케 (Henri Gisquet)라는 양반은 당시 실존 인물로서 1831년부터 1836년 사이에 파리 경찰청장을 한
분입니다. 저 양반은 제딴에는 자기 임무에 충실하고자, 여기저기 많이 도망쳤을 반란 가담자들을 색출하기 위해 파리 전역의
의사들에게 총상이나 자상을 입은 부상자들의 신원을 경찰에 알리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것이 무척 효과적인 방법이었던 것이, 이
명령을 어길 경우 의사들은 면허를 잃는 등의 처벌을 받을 수 있으므로, 본인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신고를 할 수 밖에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반란 가담자 색출을 위해, 그것도 부상자들의 색출을 위해 의사들에게 신고를 강제한 것은 너무나도 비인도적인
조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어디까지나 착한 왕이었던 루이 필립 본인이 그 조치에 대해 벌컥 화를 냈던 모양입니다. 결국
마리우스가 사법 조치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지스케 청장의 악의에 루이 필립 왕의 선의가 빚어낸 오묘한 조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저는 빅토르 위고의 말, '폭동은 사회 모두의 책임'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와서 닿네요.(1835년의 루이 필립 암살 미수 사건입니다.)루이 필립의 관용 정신은 특히 자기 자신의 목숨을 노렸던 암살 미수 사건에서 극에 달합니다. 1835년 쥬세페 피에스키
(Giuseppe Mario Fieschi)라는 코르시카인이 무려 25개의 총신을 묶은 특수 화기를 동원해 루이 필립의 암살을
시도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때 루이 필립은 이마만 살짝 총알에 긁혔으나, 그의 말은 총알에 맞아 죽었고, 나폴레옹의 부하였던
모르티에 (?douard Adolphe Casimir Joseph Mortier) 원수를 포함한 무려 17명이 사망했으며 다수가
부상당했습니다. 이 대학살극을 벌인 피에스키는 나폴레옹의 매제이자 유럽 제일의 기병 지휘관이었던 뮈라(Murat)의 부하
병사였는데, 고향에 돌아와 절도 등의 범죄로 인해 10년 형을 살았고, 그 이후에도 (꼭 장발장처럼) 평생 따라다니는 가석방 감시
때문에 어려움을 겪다가 사회에 불만을 품고 일을 저질렀다고 합니다. 그의 딱한 사정을 들은 루이 필립은 특히 모르티에 원수의
죽음을 안타까와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부상을 입은 것이 나였다면 그 자를 사면해줄 수 있었을텐데 !" (이 분이 모르티에 원수입니다. 루이 필립은 모르티에 원수의 장례식장에서 아예 대놓고 통곡을 했다고 합니다. 왕실 예법에는 어긋나지만,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부분이지요.)레미제라블에 나왔던 봉기 사건은, 확실히 너무 설익은 혁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파리 시민들은 아직 이 착한 루이 필립을 지지했던 것
같습니다. 이 봉기 사건이 진압된지 얼마 안되어 행사에 참여했던 루이 필립에게 파리 시민들은 진심어린 환호를 보냈다고
하니까요. 어떻게 보면 시대에 뒤떨어진 왕정이 루이 필립이라는 개인의 매력으로 십수년 더 버틸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는 결국 1848년 2월 혁명으로 쫓겨나 영국으로 망명하여 거기서 죽었습니다.(영화 레미제라블 피날레 부분에서 나온 이 초대형 바리케이드는 마침내 왕정을 무너뜨린 1848년 혁명을 뜻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1848년 2월 혁명 때 만들어진 바리케이드는 정말 초대형으로서, 높이가 20m에 달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만들어진
공화국은 극심한 혼란을 겪다가 불과 3년만에 나폴레옹 3세에 의해 다시 무너졌다는 것은 에러...)(하지만 괜찮습니다. 민중의 힘은 강합니다. 언제든 민중을 억압하는 정권이 나오면, 결국 바리케이드의 영웅들이 또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왜 이번 대선에서는 졌냐고요 ? 민주당이 정말 민중을 대표하나요 ? 이번 대선에서 민중의 뜻은 박근혜 측에 있었던
것이지요 뭐. 오늘날 우리가 정권 교체를 바리케이드를 쌓고 피를 흘리며 하지 않아도 되고, 그저 임시 공휴일인 투표일에 동네
투표장에 가서 도장만 찍고 오면 되는 것이 다 과거 바리케이드의 영웅들 덕택입니다. 고맙게 생각하고, 또 소중하게 투표권을
행사하십시요.)최근 대선이 끝난 이후, 여당이 재집권하게 되자 이에 절망한 노동자들의 자살이 잇달았지요. 내용을 보면 회사 측에서 파업에 의해
재산상의 손해를 보았다면서 엄청난 액수의 손해 배상 소송을 한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 같더군요. 노동 운동하시는 분들
개개인도 식구가 딸린 가장이니까, 당장 사람을 빚더미에 깔리게 하는 손해 배상 소송은 어떻게 보면 감옥에 보내는 것보다도 더
무서운 압박인 것 같습니다. 제가 노동 운동에는 별로 관심을 못 기울여서 잘 모르긴 합니다만, 그래도 사람을 극단적인 선택으로
몰아 붙이는 그런 조치들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풀어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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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Leclerc
프랑스 육군이 1980년대 후반부터 개발에 착수하여 1990년대 초에 완성시킨 제3세대 주력전차이다.
1960년부터 1980년대에 걸쳐 생산·배치한 AMX-30 시리즈의 후속기종으로 개발된 것이다.
베트로닉스(차량용 전자시스템)의 도입 등 다른 제3세대 전차보다 발전된 설계로 개발되어 공개 때부터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
켰다. 다른 제3세대 전차와 구별하기 위하여 3.5세대 전차라고 불리기도 한다.
최대의 특징은 뛰어난 베트로닉스와 자동장전(裝塡)장치, 그리고 혁신적인 동력장치에 있다. 베트로닉스는 전차장용의 선회형
잠망경, 포수용 안정화 조준·시찰장치, 레이저 거리측정장치, 모듈러형 디지털 컴퓨터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 장치는 미국
육군의 M1A2나 챌린저 2와 같은 규격의 데이터 버스와 연결되어 있어서, 각각의 전차 단위로서뿐 아니라 부대 단위로서의
전투력도 획기적으로 증강시키고 있다.자동장전장치는 서방측 전차에서는 보기 드문 것으로, 이 장치의 도입으로 승무원의 수를 3명으로 줄일 수 있게 되었다.
전차 내의 배치도 혁신적이다.
특히, 포탑 안에 나란히 배치된 전차장과 포수석에는 각각 3면의 제어 패널과 VDU(다용도 정보표시판)이 장착되어 있다.
이를 통하여 사격통제장치나 자동장전장치, 자동고장진단장치 등을 작동시키고, 주포·부무장을 조작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또한, 이 장치를 통하여 전차들 사이에서 또는 지휘소와 전차 사이에서 전투정보를 신속하게 주고받을 수 있다.주포는 프랑스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120㎜ 활강포이다.
발사 가스가 포탑 내부로 유입되는 것을 막는 배연기 대신 압축 공기를 사용하여 강제적으로 발사가스를 방출시킨다.
장갑은 기본구조 위에 모듈 장갑을 추가로 채용하였다.
고효율화로 엔진이 차지하는 공간이 줄어들어 차체가 짧으며, 자동장전장치의 채택으로 포탑 높이도 낮다.
그래서 미국의 M1A1보다는 10t 정도 가볍지만, 전차가 작기 때문에 방어력은 비슷한 수준을 보유하고 있다.1992년 이후 프랑스 육군의 주력전차로 채택되었다.
앞으로 기존의 AMX-30전차를 모두 대체할 예정이며, 21세기에 프랑스 기갑부대의 주력전차로 활용될 것이다.
프랑스 외에 아랍에미리트 육군도 주력전차로 르클레르를 채택, 450대를 발주하고 1994년부터 배치하고 있다
찌니지롱작성일
2009-12-07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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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베네주엘라 기갑 전력
카라카스 독립기념 행상에서 전시되어 있는 스콜피온90 경전차. 총78대를 보유 하고 있다.스콜피온경전차는 스파르탄(Spartan)·술탄(Sultan)·샘슨(Samson)·시미타르(Scimitar)·사라센(Saracen) 등의 계열차량을 가진 장궤식(裝軌式) 전투정찰장갑차이다. 영국의 방위산업체 알비스(Alvis Limited)가 개발하였다. 영국 육군의 제식 이름은 FV101이다. 경전차로도 분류된다.
1950년대 말 영국 육군이 FV601 살라딘(Saladin) 장륜식(裝輪式) 정찰장갑차를 대체하기 위한 신형 장갑차를 요구하면서 개발이 시작되었다. 1964년부터 본격적인 개발에 착수한 알비스는 1967년 9월 영국 육군과 시제차 17대 제작 계약을 체결하여, 1970년 5월 영국 육군이 제식 채용하고, 같은 해 7월 벨기에가 도입을 결정하였다. 1972년 영국 육군, 1973년 벨기에 육군에 인도되었다.
차체와 포탑은 알루미늄합금을 용접해 제작했으며, 차체와 포탑 정면은 14.5㎜, 양 옆과 뒷부분은 7.62㎜ 철갑탄을 방어할 수 있다. 전투중량이 8t에 불과하기 때문에 C-130 수송기로 2대를 수송할 수 있다. 차체 앞부분 왼쪽에 조종석을 배치했으며, 포탑에 차장과 포수가 탑승한다. 엔진은 재규어의 J60 Mk100B 6기통 수랭식 가솔린기관, 출력은 190마력이다.
기본형인 정찰장갑차의 무장은 L23A 76.2㎜ 라이플포 1문과 포탄 40발, L43A 7.62㎜ 동축기관총과 실탄 3,000발이다. 1981년 등장한 스코피온 90은 36구경 코케릴 MkⅢ 90㎜ 라이플포 1문과 포탄 33발, L43A 7.62㎜ 동축기관총과 실탄 3,000발을 탑재할 수 있으며, 기본형과 수출형 모두 포탑 양 옆에 4연장연막탄발사기를 1개씩 장착하였다.
스코피온 시리즈는 1995년까지 3,500대 이상 생산되었으며, 영국 육군과 공군이 약 1,850대를 운용 중이다. 벨기에 701대를 비롯해 말레이시아·베네수엘라·나이지리아·뉴질랜드·에스파냐·타이 등 세계 10여 개 나라에 수출되었다. 걸프전쟁과 보스니아내전에서 영국 육군이 사용하였다.
제원
분류 : 장갑차제작국가 : 영국제작연도 : 1967년사용국가 : 영국·벨기에·에스파냐·타이·뉴질랜드·나이지리아 외제원 : 길이 4.79m, 너비 2.24m, 높이 2.10m, 전투중량 8.07t, 최대속도 80.5㎞, 항속거리 644㎞, 승무원 3명
2005년 카라카스 독립기념일 행사에 등장한 AMX-13C-90경전차.베네주엘라 AMX-13 51구경 90mm CN-90-F3 라이플포를 장착한 FL-13 포탑을 장착 합니다.AMX-13C90경전차는 총 36대를 보유 합니다.AMX-13전차는 세계 최초로 자동장전장치를 장착하고, 포탑 전체를 움직여 주포를 조준하는 방식을 채용하였다. 값이 싸고 조작이 쉽기 때문에 라틴아메리카와 동남아시아 등의 개발도상국들이 수입하였다.
1951년 지아트의 이시레물리노공장(Ateliers d'Issy les Moulineaux)에서 개발한 시제차가 AMX-13으로 제식 채용한 뒤, 1952년부터 1980년대 말까지 약 4,500대가 생산되어 프랑스를 포함해 25개 나라에 배치되었다.
AMX-13 전투중량 15t의 경전차로, 프랑스의 식민지에서 사용하기 위한 공중으로 수송이 가능하다. 차체 뒤에 포탑을 장착했기 때문에 차체 앞부분 오른쪽과 왼쪽에 각각 조종석과 기관실을 배치하였다. 장갑 두께는 차체 정면 15㎜, 포탑 정면 25㎜로 얇기 때문에 방어력이 부족하다. 특히 포탑은 상하좌우로 움직이기 때문에 외양이 독특하고, 대전차무기에 취약하다.
주무장은 61구경 75㎜ 라이플포 CN-75-50과 포탄 37발이며, 부무장은 7.5㎜ 기관총 F1 2정과 실탄 3,600발이다. 뒤에 등장한 개량형은 포탑 양 옆에 2발씩 모두 4발의 SS-11 대전차미사일을 장비했으며, 방어용으로 2연장연막탄발사기를 포탑 양 옆에 1개씩 장착하였다. 보병지원용으로 개발된 AMX-13/FL11은 포탑이 작아졌지만 주무장을 48구경 75㎜포로 교체하였다. 엔진은 소팜(SOFAM) 8Gxb 8기통 수랭식 가솔린기관으로, 최대출력은 3,200rpm에서 250마력이다.
교량전차·구난전차·자주포·지휘차·탄약수송차 등이 개발되었으며, 싱가포르 350대, 에콰도르 108대, 인도네시아 275대, 페루 110대를 비롯해 아르헨티나·레바논·베네수엘라 등에 각각 100여 대가 수출되었다. 21세기에 들어와 프랑스를 포함해 대부분의 나라에서 퇴역 중이다.
분류 : 전차제작국가 : 프랑스제작연도 : 1951년사용국가 : 프랑스·아르헨티나·인도네시아·싱가포르 ,베네주엘라,페루,에콰도르,도미니카 공화국제원 : 길이 6.36m, 너비 2.51m, 높이 2.30m, 전투중량 15t, 최대속도 시속 60㎞, 항속거리 350~400㎞, 승무원 3명, 제작(개발) 지아트
베네주엘라 밀리터리 행사에 전시된 TPZ 푹스 보병 수송차.한국군도 보유하고 있다.총10여대를 보유하고 있다.푹스 APC는 1960년대 독일 육군의 요구에 따라 헨셀사에서 트란스포트 판저1이라는 이름으로 개발한 차량의 발전형이 푹스이다.1979년에서 1986년 사이에 996대가 양산되어 독일 연방군에 인도되어 운용 중에 있다.참고로 제작사인 헨셀사는 현재 라인메탈 지상 시스템사에게 흡수 되었다.걸프전 당시에는 화샐방 대응 정찰 차량이 턱없이 부족했던 미국과 영국,이스라엘군에게
푹스 화생방 정찰 차량이 무상으로 공급 되었으며,그 이후 미육군은 제너럴 다이내믹스사를 통해 개량형 M93A1을 정식 발주하게 된다.최근 유고 슬라비아 연방 작전에는 장갑 강화형이 파견되어 우수한 성능을 과시하기도 했다.푹스 역시 수륙 양용 성능을 중시하여 차량 후반에 설치된 2기의 프로펠러로 수상을 주행한다.표준 정착장비로는 화생방 대책 시스템과 패시브 나이트 비전이 있다.
푸스는 화생방 정찰 차량이기 때문에 7.62mm 기관총 1정만을 방어용 무장으로 장착하고 있으며,
다른 무장은 없다.
제원
탑승원:2+10명
구동 형식 6x6
무장 7.62mm 기관총 1정
전투중량 19톤
톤당 마력 16.84마력
길이 6.83m
폭 2.98m
파워팩 메르세데트 벤츠 OM302A
8기통 디젤 320마력
ZF 자동 트랜스미션
최대속도 시속 105km
운반 c-130 수송기
차량 유형 기본형은 병력 수송형,구급 장갑차,지휘형,박격포 탑재형,화력 지원형 -화력지원은 HOT 대전차 미사일을 장착한다. ,구난형
2004년 카라카스 독립 기념일에 등장한 베네주엘라 헌병대 V-150 구난형 장갑차
베네주엘라 V-150 보유 숫자는 총 130여대 가량 보유하고 있습니다.
V-150 드래곤 정찰장갑차.90mm 코케일 라이플포를 장착하고 있다.총 42대를 보유하고 있다.
V-150은 일종의 하이브리드형으로 V-200이 등장한 다음에 나온 형식인데, V-200을 바탕으로 하여 일부 형상은 V-100에서 가져옵니다. 디젤과 가솔린엔진을 장착할 수 있고 대부분 사우디아라비아 국가경비대용으로 생산하였습니다. 이 형식을 V-150S라고 합니다.
1980년대에 포르투갈은 Chaimite라는 이름으로 면허생산을 하면서 90mm 포를 탑재한 V-400 Chaimite형을 개발하였지만 포르투갈육군은 미국이 만든 V-150 Commando형을 선택하여 15대를 1989년 도입하여 Braga에 있는 제 6 기병연대에 배치하였습니다.주무장은 코케일 포탑에 90mm CM90 Mk.3 1문과 동축기관총으로 7,62 M60E 1문, 차장석에 7,62 M60D 1정을 장착하고 있습니다. 제원
Crew ; 3 + 6 men Weight 12.700 kg Speed 116 km/h Autonomy 885 km Equipment Broad ranges of accessories can be delivered with the vehicle. at only . The dragoon, completely amphibian, are propelled in water by its wheels, at a speed of 4,8 km/h, while three drain pumps absorb water infiltrating by the opening of the doors and the trap doors. Utilsé like simple vehicle armoured personnel carrier, Dragoon is usually equipped with a turret identical to that of the M-113A2 armed with a machine-gun of 12,7 mm or 7,62 mm assembled on pivot. The vehicle can also receive two-seater turrets carrying a gun of 25 or 90 mm and coaxial and anti-aircraft machine-guns of 7,62 mm. There are more specialized versions including/understanding vehicles of the genius, breakdown service and command vehicles. The electronic warfare version has many aircraft of connection and a hydraulically-operated mast which perhaps lengthened to improve the transmission.
Alternatives: A vast range of models was developed, command vehicle, carries mortar etc. Armament Gun of 20 mm and or a machine-gun of 7,62 mm
Crew 3 + 6 men Shielding ? mm Weight 12.700 kg Speed 116 km/h Autonomy 885 km Equipment Broad ranges of accessories can be delivered with the vehicle.
베네주엘라군 드래곤 300 보병 수송차모델.무장은 m60기관총 한정 뿐이다.총 59여대를 보유하고 있다.
제원
In service 1963-Present Production history Manufacturer Cadillac Gage Variants See Variants Specifications Weight 9,888 kilograms (21,800 lb) Length 5.69 metres (18.7 ft) Width 2.26 metres (7 ft 5 in) Height 2.54 metres (8 ft 4 in) turret roof, 1.98 metres (6 ft 6 in) hull top Crew 3+2
Armor classified Primaryarmament 1x 코케일 Mk3 90 mm gun, 1 x 20 mm, 1 x 7.62 mm Machinegun Secondaryarmament 2x6 40 mm Smoke Dischargers Engine V-504 V8 diesel turbo charged engine202 bhp Power/weight 18.75 bhp/ton Operationalrange 643 kilometres (400 mi) Speed 88 kilometres per hour (55 mph) road, 5 kilometres per hour (3.1 mph) water
시위 진압 중인 베네주엘라 국가 방위군 ur-416 보병 수송차.사진을 봤서 2004년으로 보이며,UR-416은 국가 방위군만 보유하고 있다.40여대 정도 보유하고 있다고 들었다.무장은 M60기관총 1정이다.한국군도 독일제 UR-416과 피아트 6614와 대결해서 UR-416이 패배하고,피아트6614가 KM900이란 명칭으로 면허 생산 되었다고 한다.
제원
제원탑승인원 2+12 길이 5,21m. 차폭 2,2m. 포탑까지 차고 2,52m (차체상부까지 2.25m) 지상고 0.44m전투중량 7,6 ton. 자체중량 5.7 ton기본무장 7,62mm 기관총 1문. 엔진 Daimler-Benz OM352배기량 5.675 cc출력 120 hp. 출력대비중량비 16,5 Hp/t 구동방식 4x4 변속기 4단 G 717.800형.Transfer case 2단최대속도 85 kmh km/h 행동거리 700 km 연료탱크 150리터등판각 60% 경사각 35%호통과넓이 1,4m. 수직장애물 0.55m도섭수심 0.8m장갑두께 8mm
2005년 카라카스 독립 기념일에 시가행진 중인 베네주엘라 국가 방위군 피아트 6614 보병 수송차.아직 몇대 있는지 밝혀지지 않았다.한국에서는 KM900 장갑차로 면허 생산 되기도 했다.KM900은
현재 한국 공군 헌병대에서 사용 중이다.베네주엘라 장갑차 전력은 모두 합쳐서 500여대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2012년 정도에 BMP-3 보병 전투차 130여대를 보유하는 걸로 알려져 있다.
제원
제조국:이태리
무게 8.5톤
길이 5.86m
넓이 2.5m
높이 2.18m
무장 M60 7.62mm 기관총 1정 또는 M-2 12.7mm 중기관총 1정
최고속도 100km
야지속도 50km
수상속도 4.5km
최대 주행거리 700km
엔진 Fiat Model 8062.24 디젤엔진
출력 160마력
승무원 2명(조종수,차장)
탑승인원 9명
2005년 카라카스 군사 퍼레이드에서 시가 행진 중인 베네주엘라 VCI APC 총73대를 보유합니다.
제원
Type Infantry fighting vehicle Place of origin France Specifications Weight 15.0 tonnes Length 5.7 m Width 2.67 m Height 2.41m Crew 3 + 10 passengers
Armor 10-40mm Primaryarmament turret mounted 20mm cannon Secondaryarmament 12.7 mm machine gun or 7.5 mm machine gun Engine SOFAM Model 8Gxb 8-cyl. water-cooled petrol Power/weight 16.7/tonne Suspension Torsion-bar Operationalrange 350 km Speed 60 km/h
2003년 카라카스 독립기념일에 시가 행진 중인 베네수엘라 해병대 LVTP7A1 상륙용 장갑차
베네수엘라군 2009년 카라카스 밀리터리 퍼레이드에 등장한 AMX-30B2 전차.스노켈 장비가 장착 되어 있다.스노켈 위에 있는 전차병이 들고 있는 총기는 PGM 에카티 저격총으로 보인다.군복은 넘버6 초록색 단색 위장복을 입고 있다.AMX-30B2전차는 총 90여대를 보유하고 있다.87여대라는 소리도 있다.차후에 T90E 전차 100여대를 도입하기로 한다.만약 콜롬비아가 T-72를 보유한다면 T-9E를 보유한 베네주엘라에 비해 전력이 열세가 된다.AMX-30 전차는 105㎜포를 장비한 제2세대 전차로, 중동전쟁 등에서 활약하였다. 프랑스에서는 1990년대 개발된 르클레르가 배치되면서 퇴역하였다. 프랑스 육군에 약 1,300대가 비치된 것을 비롯해 그리스·카타르·사우디아라비아·베네수엘라·칠레·에스파냐 등에 수출되었다. 1957년 프랑스와 독일이 체결한 유럽 표준전차 개발협정에 따라 개발이 시작되어 1960년 9월 첫번째 시제차 2대가 제작되었다. 프랑스 육군은 1961년 7월 시제차 6대를 추가 발주하고, 1963년 초 상파뉴 사격장에서 일반에 처음 공개하였다. 1963년 7월 프랑스 육군이 AMX-30으로 제식 채용하였다. AMX는 개발을 담당한 이시레물리노공장(Ateliers d'Issy les Moulineaux)의 머리글자를 딴 것이며, 30은 중량 30t급을 뜻한다. 1967년부터 프랑스 육군에 배치되었다.
주무장은 지아트가 개발한 56구경 105㎜ 라이플포 CN-105-F1이다. 부무장은 초기형이 12.7㎜ 중기관총 M2를 동축무기로 장비했지만 뒤에 20㎜ 기관포 F2(type M693)로 교체되었다. 차장용 큐폴라에도 차 안에서 원격사격이 가능한 7.62㎜ 기관총 F1을 장비했으며, 탑재탄 수는 105㎜ 포탄 47발과 20㎜ 기관포탄 1,050발, 7.62㎜ 기관총탄 2,070발이다. 자체 방어를 위해 2연장연막탄발사기를 포탑 양 옆에 1개씩 장착하였다.
차체는 압연 방탄강판 용접, 포탑은 주조방식으로 제작하였다. 포탑 정면 장갑두께는 약 80㎜, 옆면은 약 42㎜로 추정된다. 화력통제시스템(FCS)은 광학식 조준경과 거리측정기만 사용한다. 야간전투를 위해 능동식 암시장치와 적외선/백색광 탐조등을 장비하였다.
동력장치는 720마력의 이스파노 수이자(Hispano-Suiza) HS110 12기통 수랭식 디젤기관과 전진 5단 후진 1단 5SD-200D 자동변속기 등으로 구성되었다. 스노클을 부착하면 2m, 스노클 없이 1.3m 깊이의 강을 도하할 수 있다.제원
분류 : 전차제작국가 : 프랑스제작연도 : 1961년사용국가 : 프랑스·그리스·사우디아라비아·베네주엘라 외제원 : 길이 9.48m, 너비 3.10m, 높이 2.29m, 전투중량 36.0t, 최대속도 시속 65㎞, 항속거리 500~600㎞, 승무원 4명, 제작(개발) 지아트
베네주엘라 해병대 EE-11 우라투 보병 수송차.사진의 모델은 20MM 올리콘 대공포를 장착하고 있는 대공형 모델이다.
출처:kj-club
샤오웨이작성일
2009-08-24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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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프랑스육군 Leclerc전차
프랑스육군 Leclerc전차 프랑스 주력전차 Leclerc 기동모습입니다. 마지막은 2006년 Eurosatory에서 발표된 시가전용 Azur (Action en Zone Urbaine)프랑스 육군이 1980년대 후반부터 개발에 착수하여 1990년대 초에 완성시킨 제3세대 주력전차이다. 1960년부터 1980년대에 걸쳐 생산·배치한 AMX-30 시리즈의 후속기종으로 개발된 것이다. 베트로닉스(차량용 전자시스템)의 도입 등 다른 제3세대 전차보다 발전된 설계로 개발되어 공개 때부터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다른 제3세대 전차와 구별하기 위하여 3.5세대 전차라고 불리기도 한다.최대의 특징은 뛰어난 베트로닉스와 자동장전(裝塡)장치, 그리고 혁신적인 동력장치에 있다. 베트로닉스는 전차장용의 선회형 잠망경, 포수용 안정화 조준·시찰장치, 레이저 거리측정장치, 모듈러형 디지털 컴퓨터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 장치는 미국 육군의 M1A2나 챌린저 2와 같은 규격의 데이터 버스와 연결되어 있어서, 각각의 전차 단위로서뿐 아니라 부대 단위로서의 전투력도 획기적으로 증강시키고 있다.자동장전장치는 서방측 전차에서는 보기 드문 것으로, 이 장치의 도입으로 승무원의 수를 3명으로 줄일 수 있게 되었다. 전차 내의 배치도 혁신적이다. 특히, 포탑 안에 나란히 배치된 전차장과 포수석에는 각각 3면의 제어 패널과 VDU(다용도 정보표시판)이 장착되어 있다. 이를 통하여 사격통제장치나 자동장전장치, 자동고장진단장치 등을 작동시키고, 주포·부무장을 조작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또한, 이 장치를 통하여 전차들 사이에서 또는 지휘소와 전차 사이에서 전투정보를 신속하게 주고받을 수 있다.주포는 프랑스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120㎜ 활강포이다. 발사 가스가 포탑 내부로 유입되는 것을 막는 배연기 대신 압축 공기를 사용하여 강제적으로 발사가스를 방출시킨다. 장갑은 기본구조 위에 모듈 장갑을 추가로 채용하였다. 고효율화로 엔진이 차지하는 공간이 줄어들어 차체가 짧으며, 자동장전장치의 채택으로 포탑 높이도 낮다. 그래서 미국의 M1A1보다는 10t 정도 가볍지만, 전차가 작기 때문에 방어력은 비슷한 수준을 보유하고 있다.1992년 이후 프랑스 육군의 주력전차로 채택되었다. 앞으로 기존의 AMX-30전차를 모두 대체할 예정이며, 21세기에 프랑스 기갑부대의 주력전차로 활용될 것이다. 프랑스 외에 아랍에미리트 육군도 주력전차로 르클레르를 채택, 450대를 발주하고 1994년부터 배치하고 있다.제원은 길이 9.87m, 높이 2.46m, 너비 3.71m, 바닥높이 0.5m이며, 최대속도 71㎞/h, 항속거리 550㎞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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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한국의 k1 : 일본의 90 전차를 비교하는 미국 네티즌들...
ourkids 10-13-2005, 11:25 PM이건 한국의 새로운 주력전차야.나는 현재 주력전차의 사진(우린 K1A1 주력전차라 불러)을 올린후 새로운 한국군 주력전차를 올렸어.1. K1A1http://www.army.mil.kr/yookun/yo-2/img/74.jpgWeight/Engines: 54.5t/1,200hpSpeed/Limit distance: 65km/h, 437kmAmmo round/degree: 36 rounds / 60 degreeEtc: 120mm linemetal canon, MG50, M604 crews / Made by Hyundai2. K2http://kr.img.dc.yahoo.com/b11/data/military/b7/1128865038_bemil.jpg"아직 정확한 데이터 없음"AlisterMcRae10-14-2005, 12:06 AM처음 스레드 제목을 보았을때 "새로운 북한전차"로 보였어. 내눈엔 M-60으로 보였지."어떻게 북한에서 M-60을 사용하지?"라고 순간 생각이 들었어. 하하하.turan810-14-2005, 12:07 AMWow. Thanks for the pic, its the first real one I've seen of the K2.와~ 사진고마워. 이것은 최초의 K2 실차로 보이는데.몇가지 참참고하자면1. 주포탑이 매우 견고하게 만들어졌어.2. 포탑은 간결하고 수납공간으로 둘러싸여 있어. 이것으로 승무원들의 짐을 수납하기 용이하고 방어력도 향상되지.3. 독립된 탐색장치가 동축기관총관 연동되어있어. 이건 진보야.내가 보기에는 사이드 스커트에 복합장갑을 사용해서 견고해졌고 보다 향상된 엔진을 사용한것 같아.ourkids10-14-2005, 01:18 AM새로운 한국군 주력전차의 wmv파일을 올리니까 즐겨봐.http://www.ittrans.com/XK2.wmvuribury87110-14-2005, 10:21 AM저 수납상자는 모듈장갑역활을 해.Nickel110610-14-2005, 10:50 AM좋은 장갑이야Ghostwolf10-14-2005, 11:27 AM이거 르클레르 같잖아!unclechuckles10-14-2005, 11:38 AM나는 내 현대 엘란트라보다 더 잘달리길하는 바람이야.S.H.P.D10-14-2005, 12:11 PMhttp://tuku.military.china.com/military/pic/2005-09-20/815841_185536806.jpg이건 새로운 북한전차야 - 티안마 호랑이Dalleer10-14-2005, 12:33 PM내가 이해하는한 K1A1은 2000년에 투입된것으로 알아.누가 한국의 최종 계획을 알려줘.Bluezoo10-14-2005, 12:47 PM좋은 사진이야!SEAHAWK10-16-2005, 06:57 AM정말 좋은 사진 감사 :-D난 한국이 새로운 전차를 개발중인것을 몰랐어.새로운 전차는 K1A1인줄만 알았지. 그나저나 정말 좋은 전차군.:-)Nrom10-16-2005, 07:36 AMLooks like its very well armored.겉보기에도 좋은 장갑을 가졌군.RedStormRising10-16-2005, 07:44 AM좋은 사진. 이 새로운전차는 포탑이 마치 르클레르 전차와 같은 느낌으로 다가와.black templar12-03-2005, 06:34 AM저 박스는 모듈장갑같아.만약 모듈장갑이라면 왜 위로 열리는 거지?저건 장갑역할을 하기에는 충분히 강해보이지 않아.포탑이 매우 매끈해보여, 다시말해 장갑이 얇아 보여ENSIGN FOREVER12-03-2005, 08:41 AM1) 최고 등판 경사도가 어떻게 되지? (이건 한국같은 산악지형이 많은 나라에서는 매우 중요해)2) 포탑이 완전 새롭군, 그런데 이건 리빌딩한거야? 아님 새로설계해서 만든거야?I_hate_posers12-03-2005, 10:11 AM이건 어디로 보나 현대ㅐㅐㅐㅐㅐㅐㅐㅐㅐㅐ로 보여. 좋은 사진.Jim Warford12-04-2005, 02:36 AMhttp://tuku.military.china.com/military/pic/2005-09-20/815841_185536806.jpg사진이 안열려. 다시 붙여줘!Jim Warford12-05-2005, 12:12 AMhttp://tuku.military.china.com/military/pic/2005-09-20/815841_185536806.jpg사진이 안열려. 누가 이것좀 다시 게시해줘. 프리리리리리리즈으으으..==========================================================================================================동아시아의 호랑이 한국과 일본 주력전차.일단 요건 투표결과부터 총 10명이 참가하여K1A1 승 5명90식 승 3명비긴다.승무원자질이 가른다. 2명나중에는 M4A1, AK-47과 같이 소총쪽으로 흘러서 걍 SKIP했습니다. 결론은 K1A1에 실전우수를 90식에 기술우수를 부여하는 분위기...==========================================================================================================US_Raider 9/27/2005한국과 일본의 현용 주력전차야. 누가 쎌거 같아?R. O. Korea’s K1A1 Main Battle Tank Weight: 53t Armament:One 120mm, M256, 32 rds, one 7.62mm co-axial machine-gun; one 12.7mm anti-aircraft machine-gun; 12 smoke discharges (six on each turret) Powerplant: 1,200hp turbo dissel, Japan’s T-90 Main Battle Tank Weight: 50t ARMAMENT:120mm smooth bore gun, 1 - 12.7mm (Cal. 50) heavy machine gun, 1 - Type 74 7.62mm mounted machine gun Powerplant: 1,500hp turbo dissel emrldwpn 9/30/2005중국 98식 주력전차를 어때?SPECIFICATIONS Crew: 3 Weight: 52t Engine: 1,200hp (Type 98) or 1,500hp (Type 98G) liquid cooled diesel Transmission: Mechanical, planetary Track: Metallic with RMSh, with rubber-tyred road wheels Suspension: Torsion bar Radio: Receive/transmit, telephone, laser communications Dimension: Length: 11.00m; Height: 2.20m; Width: 3.40m Ground Pressure: N/A Cruising Range: 450km, or 600km with external tanks Speed: Max road 70~80km/h; max off-road 60km/h; average cross-country 35km/h; max swim N/A Fording Depths: 5m with snorkel Main Gun: Indigenous 125mm smoothbore Rate of Fire: 8 rounds/min (autoloader), 1~2 r/min (manual load) Elevation/Depression: N/A Auxiliary Weapon: One coaxial 7.62mm machine gun; one 12.7mm air-defence machine gun Fire Control: Laser rangefinder input, onboard computer, wind sensor, and control panel US_Raider 10/1/20053-0-1, 오~ 놀라운걸 (한국3명, 일본0명, 비김 1명이었던 모양임)나는 90식전차의 자동장전장치와 보다 파워풀한 엔진에 더 점수를 주겠어.90식은 3명의 승무원과 자동장전장치가 분당 8발을 쏠수 있는데K1A1은 분당 4~5발을 4명이서 쏠수 있어.그리고 90식 전차가 톤당 마력이 우수해서 기동성이 더 좋아중국의 99식은 같은시대의 전차가 아니므로 제외. (2000년대 전차) K1A1과 90식 전차는 90년대 전차야iamjaey 10/1/2005자동장전장치가 제대로 작동하나? 자동장전장치는 문제를 일으키면 심각해이건 긴급상황이 발생하면 손으로 하는것만큼 조치를 취하지 못하지.자동장전장치는 I/O콘트롤러버그와 같이 약간의 문제가 있고 이것은 아직 기술적으로 해결불가능해예를 들어 M1A1이나 다른 신형전차들이 아무도 자동장전장치를 채용안했지.몇년전에 일본애들이 훈련중에 자동장전장치가 고장나서 훈련을 하지도 못한적이 있어. 물론 수동으로 전환하지도 못했지이것은 실전에서 치명적이고 벌써 적에게 파괴당했을것이야.두번째 문제가 있는데 90식전차는 매우 비싸. K1A1 이나 중국의 98식보다 3배나 비싸. 성능은 같다고 해도 비용도 매우 중요한다. 전쟁이 발발해서 K1A1을 100대 찍을때 일본은 70대찍는다는 이야기야200대의 90식전차를 계획했지만 90식전차는 아직도 주력이 아니야. 반면 한국은 6년만에 K1A2로 넘어가려하고 있지.(K2전차에 대한 정보를 못얻은듯...)세번째로 K1A1, 90식, 98식은 그 나라 지형에 맞게 디자인되는 거야.2004 토요타 랜드쿠르즈(4.7L-V8)는 BMX X5(4.4L-V8)보다 큰 엔진을 가지고 있어.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BMW X5보다 랜드크루져를 좋다고 이야기하지 않아.만약 니가 엔진 디자인의 알고리즘이 이해가 안간다면 너는 다른 좋은것과 비교해보지 않아서야.나는 K1A1이 좋은 엔진을 가졌다고 이야기 하지 않아. 나는 엔진의 크기는 의미가 없다고 이야기하는것이야.1200마력 대 1500마력 이게 무슨의미가 있지?120mm 저압력포는 미국이 원산이고 같은 종류야. 다시말해 "120mm저압력포"대 "120mm포"는 같다는 것이지.이제 벨런스이야기를 하겠어.90식이 K1A1보다 낳아. 세계최고전차중 4위지. 그리고 K1A1은 7위고. 그러나 자동장전장치와 엔진이야기가 아니야.일본의 고급기술을 넣었지만 I/O콘트롤러와 같이 버그들이 있어. K1A1은 90식보다 약간 밀릴뿐이야.다시말해 전투능력이 90식과 같은 3대의 K1A1과 1대의 90식과 싸워 누가 이길까? 많은 나라들이 자동장전장치보다 수동장전을 실전에서 선호하는지 이해해야해다른관점에서 3vs1의 전투라면 분당5발*3대=분당15발 vs 분당8발의 차이야. 자동장전장치가 문제있다면 0발vs15발. 90식과 K1A1이 99%의 명중률로 같다면....나는 단지 세계랭킹 4위로 90식을 투표하였어.이건 내 기호에 맞는 전차야.일본은 한국보다 좋은 기술을 가졌지. 그러나 모든경우수를 따져서 무기를 비교하는 것은 무리야.정답은 한국,일본,중국간 전쟁이 나지 않는다면 아무도 알수가 없어.RE: Tigers of E. Asia, MBT of RoK & Japan. - 10/1/2005 2:38:37 PM emrldwpn 10/1/2005맞아. 맞아. 96식은 어때?Crew: 3 Weight: 48 tons Engine: 730 hp liquid cooled diesel Transmission: Mechanical, planetary Track: Metallic with RMSh, with rubber-tyred road wheels Suspension: Torsion bar Radio: Receive/transmit, telephone Dimension: Length: 10.28 m; Height: 2.30 m; Width: 3.450 m Ground Pressure: 0.771 kg/cm 2 Cruising Range: 700 km, or 900 km with external tanks Speed: Max road 57 km/h; max off-road 45 km/h; average cross-country 35 km/h; max swim N/A Fording Depths: 1.4 m unprepared; 2.4 m with snorkel Main Gun: 125 mm 2A46M smoothbore Rate of Fire: 6~8 rounds/min Elevation/Depression: +14 to -6 degree Auxiliary Weapon: One coaxial 7.62 mm machine gun; one 12.7 mm air-defence machine gun Fire Control: ISFCS with laser rangefinder input, onboard computer, wind sensor, and control panel US_Raider 10/2/2005 먼저 너의 멋진 답글에 감사하다. 이건 매우 즐거워자동장전기술문제 : 모든기계는 문제를 가지고 있지. 내 2003 E320은 10번이나 첫해에 수리를 보냈어.90식은 70년대에 설계된 M1A2보다 후에 나온 전차이니 문제가 많이 잡혔을거야.90식이 비싼건 사실이지. 1대당 $9백만이니 M1A2가 $5백만, 중국98/99식이 겨우 $2백만. K1A1의 가격은알지 못하지만 $2~5백만 사이일거라 짐작해.우리는 1vs1상황에서 생각하자고. 3vs1이나 5vs1이 아니라. 숫자를 집어 넣으면 중국 59식D형은 10,000대가 나와.90식 전차는 282대가 출고되었고 한국에서 멀지않은 곳인 7기갑사단에 배치되어 있고 74식 전차는 700대정도일본 전차는 총 982대가 있지.120mm 주포는 달라. K1A1은 M1A1과 같은 종류이지만 90식은 독일에서 설계된 레오파트2와 같은 모델이야.1500마력 엔진은 1200마력의 K1A1보다 가벼운 90식에 기동성을 부여해주지<< 출처 : 개소문닷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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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T-80U soviet dedium
사용국가:러시아.키프로스.중국.대한민국 제작연도:1985년 수출국가:키프로스.중국.대한민국 제작사:옴스크 공장 설계국 제원:전투중량 46t, 차체길이 7m(포신 포함 9.656m), 높이 2.202m, 바닥높이 0.446m, 노상 항속거리(추가연료 탱크가 있는 경우) 440㎞ 승무원:4명 부무장:12.7㎜ 대공기관총.7.62㎜ 기관총.발연탄발사기 8개 T-80U는 서방측 전차에 대항하기 위하여 구 소련이 1980년대 초반부터 개발에 착수하여 1985년에 완성시킨 T-80의 발전형이다. 서방측에 그 존재가 알려진 것이 1989년이었으므로, 서방측에서는 이 전차에 'SMT 1989'라는 명칭을 붙였다.SMT는 Soviet Medium Tank(소비에트 중형 전차)의 약칭이다.차체와 포탑은 T-80과 거의 동일한 것을 사용하지만, 무장·장갑·엔진 등을 개선하였고, 사격통제장치와 야시(夜視) 장치를 고도화시켜 이동간 사격과 야간 전투능력을 비약적으로 향상시켰다. 장갑은 T-80과 같은 복합장갑을 사용하지만 반응장갑은 보다 신형으로 교체되었다. 이 장갑은 성형 작약탄뿐만 아니라 운동에너지탄에도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초기의 생산형은 전투중량이 42t급이었으나, 현재 옴스크의 공장에서 생산이 계속되고 있는 T-80U에서는 장갑방어력을 비롯한 각 부분의 개량과 강화 때문에 전투중량이 46t으로 증가되었다. 차체와 포탑을 포함한 전체적인 외관은 서방측의 제3세대 주력 전차보다 약간 작다. 전장에서의 기동성을 향상시킬 목적으로 가스터빈 엔진을 채용하고 있는데, 도로상에서 70㎞/h, 비도로에서 48㎞/h의 최대속도를 낼 수 있다. 그러나 연료소비율이 높아서 차내 연료만으로는 노상 항속거리가 335㎞에 머문다.승무원은 3명이다. 주무장은 '장탄통부착 날개안정철갑탄(APFSD)'이나 대전차 유탄(榴彈) 등 각종 전차포탄 외에 사정거리 5㎞의 반자동 레이저빔 유도식 대전차미사일도 발사할 수 있는 125㎜ 활강포 겸 미사일 발사기 1문, 부무장으로 12.7㎜ 대공기관총 1정과 7.62㎜ 기관총 1정, 발연탄발사기 8개를 장비하고 있다. 탑재 탄환은 45발인데, 28발은 자동 장전장치에 탑재한다. 발사속도는 분당 8발 정도로 프랑스 르클레르 전차의 분당 15발에 비하여 떨어진다. 그러나 실전에서 사용하기에는 충분한 발사속도이다.제원은 전투중량 46t, 차체길이 7m(포신 포함 9.656m), 높이 2.202m, 바닥높이 0.446m이다. 노상 항속거리(추가연료 탱크가 있는 경우) 440㎞이며, 도하 수심 5m의 강을 건널 수 있으며, 등판능력은 63%이다.T-80U 전차는 최근에 등장한 서방측 3세대 전차 중에서 1990년대 중반 이후 출현한 것을 제외하면 이들과 거의 동등한 성능을 갖고 있다. 서방측 전차의 2분의 1 정도의 저렴한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어, 성능대비 가격면에서 우수한 전차라는 평을 받고 있다. 한국은 러시아에 제공한 경제협력 차관의 상환분으로 T-80 33대를 도입하여 운용하고 있다. 출저:밀리터리 하우스
때마왕작성일
2006-08-11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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