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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황교안 법무 "5.16은 혁명", "국보법 개정으로 종북 증가"
황교안 법무 "5.16은 혁명", "국보법 개정으로 종북 증가"
서영교 "석사 논문 특혜 의혹, 재산증가도 석연치 않아"
민주통합당은 14일 공안통 검사 출신인 황교안 법무장관 후보자의 편향된 역사관, 대학원 석사논문 특혜, 석연치 않은 재산 증가 의혹을 제기하며 강도높은 검증을 예고했다. 법무장관 인사청문위원인 서영교 민주통합당 의원은 이날 보도자료를 통해 "황 후보자는 국가보안법, 집회시위법을 무한신봉하는 맹신적 편향성을 가지고 있다"며 황 후보자의 과거 발언들을 공개했다. 황 후보자는 부산고검장에서 물러난 지 한 달만인 지난 2011년 10월 24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요즘 종북세력이 많아진 건 1991년 국가보안법을 개정할 때 법에 주관적 요건이 추가되면서 예견됐던 현상”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1998년 저술한 저서 <국가보안법 해설> 인사말을 통해서도 "국가보안법은 통일 이후에도 존속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2009년 저서 <집회시위법 해설서>에서는 "집시법은 4·19 혁명 이후 각종 집회와 시위가 급증하여 무질서와 사회불안이 극에 달한 상황 속에서 5·16 혁명 직후 제정됐다"며 '4·19혁명은 혼란', 5·16쿠데타는 혁명'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그는 용산참사에 대해선 "당시 경찰의 강제진압이 신속히 단행된 이유는 농성자들의 불법·폭력성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다. 서 의원은 황 후보자 발언을 소개한 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임기 초 법무부장관을 국보법·집시법 맹신론자를 기용하려는 것에 대해 항간에서는 사법개혁보다 공안정국 조성용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다"며 "법은 최후의 수단이 되어야 함에도 국보법·집시법을 맹신하는 공안검사의 색안경 시각이 교정되지 않는다면 법무부 수장으로서의 자격에 부족함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밖에 황 후보자의 성균관대 대학원 석사논문에 대한 특혜 의혹과 소명이 불분명한 재산 증가 의혹도 제기됐다. 서 의원에 따르면, 황 후보자는 지난 1995년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을 수료한 것으로 저서에 표시됐지만, 석사논문은 10년 후인 2005년 10월 제출, 12월 통과됐다. 성균관대는 지난 2011년까지 석사수료 후 5년 내 논문통과 규정을 두고 있었다. 황 후보자는 논문 제출 전후로 서울중앙지검 2차장검사, 서울고검 검사, 부산지검 동부지청 차장검사로 재직 중이었다. 서 의원은 또한 "2009~20011년 연도별 공직자재산신고 내역을 분석한 결과 황 후보자가 대구고검장 시절인 2010년 자금출처가 제대로 소명되지 않는 예금 증가분이 발견됐다"며 "황 후보자는 2010년 재산신고에서 배우자가 보유하고 있던 사채 4천500만원을 본인 및 배우자 예금을 인출해 상환했다고 소명하고 있지만 2010년 재산신고내역을 보면 후보자와 배우자의 예금이 오히려 전년 대비 총 4800여만원 늘었다. 검사장 연봉이 평균 8500여만원인데 연봉을 전액저축한 게 아니라면 자금 출처에 대한 소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노회찬 "X파일 덮은 황교안이 무슨 검찰개혁?"
"검찰에 보관 중인 280여 미공개 X파일 공개해야"
대법원의 확정판결로 의원직을 상실한 노회찬 진보정의당 공동대표는 14일 "'안기부 X파일' 사건을 지휘했던 황교안 법무부장관 후보자는 당시 떡값검사들에 대해 제대로 조사조차 하지 않은 사람"이라며 비난했다. 노 공동대표는 이날 오후 국회에서 기자들과 만나 "(황 후보자는) 한국의 법원에서 받아들여진 적 없는 '독수독과론(위법하게 수집된 증거에서 파생된 증거의 증거능력을 인정하기 어렵다는 이론)'을 적용해 저와 기자 2명을 기소하는 잘못된 판단을 내렸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이어 "심지어 당시 사임한 법무부 차관이 불법녹취록에 자신의 이름이 있다는 것을 대법원 간부를 통해서 이미 알고 있었다는 발언까지 했지만 수사 정보가 피의자에게 새어나간 것도 조사하지 않았다"며 "공교롭게 과거 이 사건을 덮는 것을 주도했던 사람이 지금 검찰 개혁을 지휘해야 할 법무부 수장으로 지명되고 검찰개혁을 촉구한 저는 같은 시각 국회를 떠나게 됐다"며 우회적으로 박근혜 당선인을 비판했다.그는 "이것이 불의가 이기고 정의가 졌다고 보지 않는다"며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한편 그는 "당시 언론을 통해 공개된 X파일 관련 테잎은 2~3개에 불과하고, 280개가 넘는 테잎이 아직 공개되지 않고 서울중앙지검 캐비넷에 보관되어 있다. 미공개 테잎에 어떤 새로운 불법행위가 담겨있는지는 아무로 모른다"며 "거대 권력 비리들을 밝혀내고 합당한 처벌을 받게 하도록 계속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여야 의원 159명의 선고 연기 탄원에도 불구하고 대법원이 확정판결을 내린 데 대해선 "이렇게 서둘러 재판을 강행해서 결과적으로 국회의 입법권을 침해한 행위에 대해 납득할 수 없다"며 "개정된 법에 따라 제가 의원직을 유지하게 되는 결과를 대법원은 바라지 않은 것 같다"고 꼬집었다. 그는 당대표 유지 등 향후 거취에 대해선 "당 지도부와의 논의를 통해 결정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황교안 법무장관 내정자 "세상법보다 교회법 우선 적용돼야"
황교안 법무부장관 내정자가 본인의 저서에서 세상법보다 교회법을 우위에 두는 듯한 발언을 한 것으로 확인되면서 향후 국회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논란이 일 것으로 예상된다.황 내정자는 지난 2012년 펴낸 '교회가 알아야 할 법 이야기'(요단출판사)에서 '교회 내부에서 적용되는 종교법인 '교회법'과 세상법 간의 충돌이 일어날 경우 어떻게 하느냐'는 물음을 던지며 "우리 기독교인들로서는 세상법보다 교회법이 우선 적용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이 이 세상보다 크고 앞서시기 때문"이라고 언급했다. 그는 또 법률상 세상법이 교회법보다 우선시 하는 규정에 대해 "아쉬운 일"이라고 말했다.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기도 한 황 내정자는 이 저서에서 교회와 관련해 발생할 수 있는 법률관계를 설명하면서 "세상법이 교회법의 입장을 고려하며 적용된다고 하더라도 '세상법 우선 적용 구조' 자체는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보면 마땅치 않다는 생각이 들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 "(기독교 신자들은) 국가나 법이 교회나 종교의 특수성을 전폭적으로 고려하여 세상 법의 적용을 자제해 주기를 바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황 내정자의 저서가 교인들을 대상으로 한 책이지만 그가 새 정부의 법무행정을 관장하는 장관직에 내정됐다는 점에서 다소간의 논란은 불가피해 보인다.다만 그는 "헌법에 규정되어 있는 '종교의 자유'도 필요한 경우 제한될 수 있는 것"이라며 "기독교인도 역시 국가라는 테두리 안에서 국가의 보호를 받으면서 생활하고 활동하는 것이므로 그러한 바램이 다 충족되기는 어려운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황 내정자는 아울러 글 말미에서는 "국가에 대해 법을 만들고 운용함에 있어서 교회와 종교의 특수성을 반영해 주도록 촉구하는 것은 필요하다"면서 "일단은 국가의 법 질서를 존중하고 그 범주 안에서 종교활동과 신앙생활을 해나가야 할 것"이라고 마무리했다.
가자서작성일
2013-02-14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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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기초자료] 광우병에 대한 전문가 토론회입니다.보시고판단하세요.
[이전에 퍼온 글입니다. ]"광우병 발생후 수입중단? 소잃고 외양간 고치기"'광우병의 과학적 진실과 한국사회의 대응방안' 토론회 개최... 각계 전문가 대거 참여08.05.19 12:03 ㅣ최종 업데이트 08.05.19 18:59 구영식·이경태 (sneercool)광우병 쇠고기 ▲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주최로 19일 오후 서울의대 동창회관에서 열린 전문가 토론회에서 황상익 서울의대 교수 등 참석자들이 '광우병의 과학적 진실과 한국사회의 대응방안'에 대해 토론하고 있다.ⓒ 남소연 광우병[최종신 : 19일 오후 6시] "광우병 발생후 수입중단? 소잃고 외양간 고치기" 3시간을 훌쩍 넘긴 토론회 내내 자리를 지킨 이들은 오는 20일 외교통상부가 발표할 한미 간의 쇠고기 추가협상 내용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궁금해했다. 현재 한미 양국은 "미국에서 광우병이 발생할 경우 수입금지를 취할 수 있다"는 검역주권 관련 조항을 추가하기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날 토론회에 참석한 패널들은 "그 정도의 수준만으로 광우병 위험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지적했다. 특히 정태인 교수는 "한미FTA가 발효되면 투자자가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이상 새로운 조항은 전혀 효력이 없다"고 지적했다. 박상표 정책국장은 "검역주권은 미국의 도축장 등에 대한 승인권이나 취소권 등을 확보하는 것도 포함한다"며 "그 중 일부인 수입중단 조치를 가지고 검역주권을 회복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검역주권을 축소해서 말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우석균 정책실장도 "광우병 발생 이후 수입을 중단하는 것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라고 잘라 말했다. 이날 발제자와 토론자들은 토론회가 끝난 뒤에 기자들과의 일문일답을 주고받았다. 다음은 일문일답 요약이다. - 내일 외교부가 별도의 외교문서를 만들어 검역주권을 명문화하겠다는 내용을 발표하겠다고 한다. 별도의 외교문서가 국제법상 효력을 가질 수 있나? ▲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주최로 19일 오후 서울의대 동창회관에서 열린 전문가 토론회에서 정태인 성공회대 겸임교수가 '광우병의 과학적 진실과 한국사회의 대응방안'에 대해 토론하고 있다.ⓒ 남소연 정태인정태인 교수(성공회대 겸임교수) "합의문서가 더 우선한다. 물론 '고위험 소는 EU 수준으로 조사를 한다'는 문구를 넣고 합의할 수는 있다. 그런 조치가 없다면 광우병 위험에서 벗어났다고 할 수 없다. 또한 한미FTA가 발효되면 그것도 효력이 없다. 한미FTA는 국내법과 동등하다고 하지만 헌법 위에 있기 때문이다. 투자자가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지 않나." - 또한 정부는 미국 FDA보다 느슨한 SRM 규정을 강화하겠다고 하는데 이것이 안전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가? 우희종 교수(서울대 수의대) "미국 FDA 규정 자체가 위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것에 맞춰 바꾼다는 것 자체는 눈가리고 아웅하기다. 이번 협상에서 미국에 그것이 안전하다는 증거를 가져오라고 요구했어야 했다. 그런데 정부의 관료들은 그런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에게 과학적 증거를 가져오라고 한다. OIE 규정은 각국의 특성을 고려해 안전문제를 규정하라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는 한 안전은 보장되지 않는다. 미국의 느슨한 규정을 전제로 (협상내용을) 수정하는 것이 국민의 안전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SRM은 최근 개정된 EU 기준으로 전면수정해야 한다. OIE의 SRM 기준은 EU 기준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EU의 예전 규정은 삭제되고 최근 미국 입맛에 맞는 기준으로 개정됐다." 정해관 교수(성균관대 의대) "SRM의 문제는 이것이 한식의 재료가 된다는 점이다. 그런데 EU의 기준은 고기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티본스테이크에 척수가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EU는 음식에서 제외했다. 우리 음식에 맞는 SRM 기준이 들어가야 한다." 우석균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실장 "수입중단이 가능하든 가능하지 않든 광우병이 발생한 이후 수입을 중단하는 것은 소잃고 외양간 고치기이자 사후약방문이다." 박상표 수의사연대 정책국장 "수입중단 조치가 검역주권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정부는 얘기한다. SRM의 수입을 중단하는 조치를 확보하는 것도, 미국의 도축장 등에 대한 승인권이나 취소권 등을 확보하는 것도 검역주권이다. 그 중 일부만 가지고 검역주권을 회복하겠다는 것은 검역주권을 축소해서 얘기하는 것이다. EU는 모든 연령의 소 내장 전체를 SRM으로 지정했다. 장간막도 SRM으로 지정했다. 그런데 우리는 회장원위부만 SRM으로 지정했다. 이렇게 곱창에서부터 차이가 있다. EU에서는 12개월 이상 소의 경우 척수와 안구 등을 SRM으로 지정했는데 우리는 30개월 미만은 편도와 회장원위부만 SRM으로 지정하고 나머지는 SRM에서 제외했다." - 우리가 요리하는 국물의 기본은 뼈를 우려내서 만든다. 작은 식당에서는 미국산을 쓸 가능성이 높은데 이럴 경우 안정성이나 위험성을 어떻게 판단할 수 있나? 우희종 교수 "뼈의 어떤 부위인지가 문제다. 미국에서 들여오는 축산물은 안전할 수 없다. 현재 타결된 조건으로 보면 식생활에 SRM이 노출될 수 있다." 정해관 교수 "먹기 싫으면 안먹으면 된다는 데 지금은 그 수준을 넘어섰다. 사골국물의 경우 1회용 제품으로도 많이 출시돼 있다. 소비자가 미국산인지 아닌지, 내가 먹고 싶지 않은 것은 먹고 싶지 않다고 정부에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 [4신 : 오후 5시20분] "광우병 한차례 발생하면 60조원 손실" ▲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주최로 19일 오후 서울의대 동창회관에서 열린 전문가 토론회에서 권호장 단국대 의대 교수가 '광우병의 과학적 진실과 한국사회의 대응방안'에 대해 토론하고 있다.ⓒ 남소연 권호장오후 3시 토론회에 참석한 패널들은 입을 모아 정부의 무책임한 협상과 대응 태도를 질책했다. 권호장 단국대 의대교수는 "환경 및 먹거리 정책은 원인·결과에 대한 과학적 증거가 불확실하더라도 위협이 있을 때는 예방조치를 취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정부가 광우병 논란에 대해 과학적 근거를 운운하는 것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권 교수는 "어떤 물질이 유해하다는 결정을 내리기 위한 과학적 방법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며 "일례로 폐암 등을 일으키는 석면은 130년 전부터 사용됐고 그 유해성이 50~60년 전에 보고됐지만 한국에서는 2009년부터 사용을 전면금지하도록 돼 있다"고 지적했다. 또 "영국은 사전예방의 원칙에서 기회를 여러번 놓쳐 인간광우병을 발생케 했다"며 "현재까지 광우병이 어떤 전파방식과 발병기전을 가지는지 과학적으로 밝혀진 바가 없는 이상 SRM 부위는 들여오지 않는 것이 맞다"고 주장했다. 박상표 국민건강을 위한 수의사연대 정책국장은 "기본적으로 위험분석은 과학 차원에서의 위험평가, 정책 차원에서의 위험관리, 공청회·토론회 등의 위험정보 교환 세가지 카테고리에서 이뤄져야 하는데 이번 쇠고기 협상은 과학적 근거에 따라 정책을 입안한 것도 아니고 국민들의 불안에 대해 해소하지도 못한 채 밀실에서 이뤄졌다"고 비판했다. 박 정책국장은 "수차례 전문가들과 정부 스스로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위험성을 지적했고, EU의 쇠고기 수입에 대해서는 국제수역사무국(OIE)의 기준을 따르지 않았음에도 지금은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이고 있다"며 "이런 점이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잃도록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정부가 수입위생조건과 검역이란 '둑'을 무너뜨려 국민들을 홍수위험에 빠지게 했다"며 "이제 우리 국민들은 각자의 생존을 위해 각개약진을 해야 할 판"이라고 한탄했다. "광우병 논쟁은 과학 대(對) 경제, 하지만 경제적으로도 손실 커" 정태인 성공회대 겸임교수는 "광우병 논쟁이 마치 과학 대 과학처럼 비춰지고 있지만 사실은 과학 대 경제의 싸움"이라며 "정부 관계자들도 미국산 쇠고기 수입의 문제점을 잘 알고 있지만 한미FTA로 얻을 이득이 더 크다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정 교수는 이 같은 정부 측 관계자의 생각은 '착각'으로 단정지었다. 정 교수는 "정부는 한미FTA를 통해 10년 동안 한국이 6% 성장할 것으로 말하는데 광우병이 단 한차례만 발생하더라도 60조원의 손실이 발생한다"며 "뻥튀기한 성장률일지라도 단 한번에 다 이득을 날려버리는 격"이라고 말했다. 정 교수는 "과학의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현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사전예방의 원칙을 최대한 미룬 영국의 경우 복구비용만 11조원이 들었지만, 초기 대처를 잘한 일본은 1조 3천억원 정도만 사용했다"며 이 같은 주장을 뒷받침했다. 또 "미국도 이 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자국 내 축산업의 60% 이상을 대기업이 쥐고 있는데다 이들이 로비로 5백억원 이상을 사용해 새로운 규제 조치를 전면 보류케 만들었다"며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성을 지적했다. 정 교수는 "현실적으로 한국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일본 정도의 안전성을 보장한 뒤 미국에게 안전수준을 올릴 것을 요구하는 것"이라며 "캐나다와 일본의 축산두수 별 도축두수 비용을 계산해 분석할 때 약 5천억원 정도를 5년 정도 투자하면 가능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한미 쇠고기 협상은 미 축산업계의 이득을 위한 것... 이미 미국은 계산 끝냈다" 한편, 우석균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실장은 미 캔자스 주정부가 2004년 작성한 문건 '광우병 관련규제로 인한 미 축산업의 경제적 손실'을 공개하고 "한미 쇠고기 협상은 미 축산업계의 이득을 위한 협상"이라고 주장했다. 우 정책실장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미국에서 식용으로 사용하지 않는 소장 부위를 수출할 경우 미 축산업계는 9600만 달러를, 고압기술을 사용해 뼈에 붙어 있는 육점 및 단백질 등을 회수하는 선진회수육(AMR)을 수출할 경우 2500만 달러를 벌어들이는 등 현재 한미 쇠고기 협정에서 SRM 부위에서 제외된 부분만 수출할 경우 연 2억 달러의 이득을 벌어들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논란이 된 동물성사료 조치에 대해 여러가지 시나리오를 세우고 각 시나리오별 이득 계산도 끝난 것으로 드러났다. 우 정책실장은 "미국에서 한국 및 일본에게 수출하는 소에 대한 광우병 검사를 하지 않았을 때는 한 두당 55달러 정도를 버는데 검사를 100% 할 경우 이득이 20% 정도 낮아진다"며 "광우병 전수검사를 한다고 해서 미 축산업계가 망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윤 마진이 낮아질 뿐"이라고 설명했다. 또 "고작 20달러 정도의 이윤을 더 남기기 위해 한국 국민들이 검사하지 못한 소를 먹어야 한다"며 "도대체 한 사람의 생명은 과연 얼마인가"라고 한탄하기도 했다. 우 정책실장은 "한국정부가 '국제적 기준을 따르는 것이 원칙'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국제 무역 과정에서 위생검역주권에 대한 문제를 전혀 모른다는 뜻"이라며 "위생·안전성 문제를 입증할 책임이 수입국에 주어지는 WTO의 위생검역협정보다 각국이 높은 수준의 원칙을 정할 수 있는 것이 지금까지 협상의 원칙이었다"고 비판했다. 더불어 "앞으로 한미FTA협정이 체결되고 투자자-국가 직접 소송제가 도입되면 이제 국가가 국가에게 제소하는 것이 아니라, 카길·몬산토 등의 수출업체가 곧바로 정부에 문제를 제소하는 등 검역주권 문제는 더욱 악화될 것"이라며 "미국 산업의 이익을 위해 한국민들의 생명을 포기한 한미쇠고기 협정은 무효화되어야 하며, 한국 국민의 권리를 위해 한미FTA를 조기에 비준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3신 : 19일 오후 3시 50분] "특정위험물질(SRM)의 국내 유입을 차단하는 것이 가장 중요" ▲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주최로 19일 오후 서울의대 동창회관에서 열린 전문가 토론회에서 정해관 성균관대 의대 교수가 '새로운 전염병 인간광우병(VCJD)의 역학과 전망'에 대해 발제하고 있다.ⓒ 남소연 정해관우희종 교수에 이어 정해관 교수(성균관대 의대 예방의학과)가 '인간광우병(vCJD)의 역학과 전망'이란 주제로 발표에 나섰다. 정 교수는 영국·프랑스 등의 사례들을 근거로 인간광우병 잠복기, 유전자형에 따른 발병 위험도 등을 집중 분석했다. 정 교수는 인간광우병의 잠복기와 관련 "이종 프리온에 의한 질병이므로 잠복기간이 더 길 것으로 추정된다"며 "최소 5년이지만 사람의 일생보다 길 수도 있다"고 추정했다. 그는 "프랑스의 경우 90년대 중반 이후 공격적으로 생기기 시작해 지금은 (발병율이) 떨어진 상태이긴 하지만 최근 3년간 15명이 발병하는 등 앞으로 감소할지 증가할지 현재로선 추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프랑스에서 인간광우병이 없어졌다고 얘기하는 것은 납득하기 힘들다"며 "프랑스 자체에서도 앞으로 10명 이상 더 발병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고 전했다. 다만 그는 "영국의 경우 애초 2010년까지 상당히 오래 지속하면서 몇백명이나 몇만명 더 발생하지 않겠느냐 하는 우울한 주장이 있었지만 우리 예상보다 빨리 감소하는 추세"라며 "올해 들어 발생한 환자는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교수는 "현재 영국은 종식기에 가까워 보이나 이는 MM형에서 발생한 것을 기준으로 추정한 것"이라며 "프랑스의 경우 MM형 유행의 정점을 향해 진행하는 단계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그는 "잠복기가 길고 저향력이 더 높다는 VV/MV형의 유행이 시작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며 "무증상 환자와 임상 전 환자의 규모에 대한 파악이 충분하지 않지만 긴 잠복기를 가진 환자를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개인의견임을 전제로 "유행이 종식됐다고 하려면 앞으로 최소 50년 이상은 더 두고 봐야 한다"며 "향후 50년 이상 장기간에 걸쳐 지속적인 추적 관찰과 감시체계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인이 인간광우병에 걸릴 위험은 어느 정도인가? 이어 정 교수는 "쇠고기와 부산물 수입과 관련 한국인이 인간광우병에 걸릴 위험은 어느 정도인가'라는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그는 "소에서 푸드체인(food chain)으로(2단계), 푸드체인에서 인간으로(3단계), 인간에서 인간으로(4단계) 전염되는 단계를 거친다"며 "다만 우리나라는 3단계까지는 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종간 장벽 때문에 광우병이 푸드체인을 오염시키더라도 인간까지 오염시키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면서도 "하지만 광우병이 사람에게 넘어와 인구집단에서 유행하면 종간장벽이 없어진다"고 강조했다. 이는 광우병이 한국인에게 발병하면 종간 장벽조차 무너져 이전단계보다 빠르게 전염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정 교수는 "광우병 특정위험물질(SRM)이 포함된 부위가 들어오면 파기하거나 다른 동물의 사료로 가야 하는데 그것이 사람의 입으로 들어온다"며 "우리나라처럼 다량의 SRM에 노출된 경우는 드물다"고 우려했다. 그는 "SRM 등의 국내 유입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며 "SRM에 대한 규정은 국민의 식성을 고려해 가장 엄격한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쇠고기 수육이나 꼬리곰탕 등의 재료가 되는 SRM의 국내 유입 차단과 함께 푸드체인의 안정성 확보도 강조했다. ▲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주최로 19일 오후 서울의대 동창회관에서 열린 전문가 토론회에서 정해관 성균관대 의대 교수가 '새로운 전염병 인간광우병(VCJD)의 역학과 전망'에 대해 발제하고 있다.ⓒ 남소연 정해관"광우병 발생하면 천문학적 비용 들어간다" 정해관 교수(성관관대 의대)는 이날 토론회에서 인간광우병이 발병할 경우 엄청난 사회적 비용이 들어간다고 강조했다. 정 교수는 "국내에서 환자가 발생할 경우 어떤 사태가 벌어질까?"라고 물은 뒤 "의료행위의 안전문제가 직접 영향을 받는다"고 자답했다. 그는 광우병의 발생지인 영국의 경우 환자와 그의 가족에게 1인당 2만2000파운드(약 5000만원)가 지출된다는 점을 들어 "우리도 영국의 절반 정도는 지출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인간광우병 발병의 문제는 개인이 지출해야 할 비용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정 교수는 전염을 막기 위해 의료기구 등을 교체하는 데 엄청난 비용이 소요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의료기구의 소독방식을 전면적으로 바꾸는 데 들어가는 비용은 영국의 경우 2억파운드(약 3750억원)"라며 "전체 수술기구 소독과 1회용 (의료기구) 교체 비용까지 감안하면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간다"고 주장했다. 정 교수는 이런 비용 외에도 ▲수혈 안전을 위한 비용 ▲건강진단, 수술적 치료, 수혈 등을 기피함으로써 발생하는 질병 희생자 ▲국가적 신인도 하락, 의료산업 불황, 관광기피 등으로 인해 발생하는 비용 등도 추가로 언급했다. 그는 "인간광우병 환자로 인한 국가손실은 일반 위험에 비해 월등히 크다"며 "따라서 발생환자 '0명'을 기준으로 모든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2신 : 19일 오후 2시50분] "광우병이 전염병 아니라고? 정부가 '괴담' 유포" ▲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주최로 19일 오후 서울의대 동창회관에서 열린 전문가 토론회에서 우희종 서울대 수의대 교수가 '광우병의 과학적 진실과 한국사회의 대응방안'에 대해 발제하고 있다.ⓒ 남소연 우희종'광우병의 과학적 진실과 한국사회의 대응방안' 토론회가 19일 오후 1시 서울대 의대 함춘회관 3층 대강당에서 열렸다. 첫 번째 발제자로 나선 우희종 서울대 수의과대학 교수는 "정부가 광우병은 전염병이 아니라는 등 괴담을 유포하고 있다"며 "그런 태도야말로 국민들을 더욱 헷갈리고 있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또 그는 "요즘 사태를 지켜보면 우화 '벌거벗은 임금님'이 생각난다"며 "모든 국제적 결과와 과학자들은 광우병이 매우 주의를 요하는 전염병임을 말하고 있고 국민들도 다 알고 있는데 이명박 대통령만 못 듣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더불어 "진정한 국제적 기준은 각 나라의 특성을 고려해 과학적 검토 하에 설정하려는 것"이라며 "한국 정부는 오직 국제수역사무국의 권위에만 의존해 국민들을 설득하려고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우 교수는 정부의 현재 정책 및 협상 태도에 대해서도 비판을 아끼지 않았다. 우 교수는 "EU나 국제수역사무국은 각국의 감시체계와 오염정도 등이 다르기 때문에 각국 헝편에 맞게 SRM 기준을 반영하게 돼 있다"며 "국민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보다 엄격한 기준을 적용해 협상하는 것이 옳다"고 비판했다. 또 "광우병에 대한 정책을 입안할 때 국민들이 얼마나 불안해하고 있고, 얼마나 광우병의 위험성을 아는지 파악해야 하는데 정부는 국민들의 불안을 '괴담'으로 몰고 가고, '안전하니 믿고 따르라'고만 한다"며 "더 이상 국민을 속이려 하지 말고 현실적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강변했다. 다음은 우 교수가 정부 측의 주장에 대해 반박한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정부 괴담 1] 광우병은 전염병이 아니다? 우 교수는 "한승수 국무총리가 대정부 질문 때 광우병은 전염병이 아니다"고 주장한 것에 대해 "정부 관계자가 공인도 되지 않은 이야기를 공식적인 자리에서 이야기한다는 것은 충격적이었다"며 "광우병은 다만 천천히 진행될 뿐, 분명한 전염병"이라고 말했다. 우 교수는 "광우병은 정부가 그토록 좋아하는 국제수역사무국(OIE)가 '인수공통전염병'로 규정한, 탄저병, 사스 등과 동일한 위험도인 생물안전등급3(BSL3)의 전염병"이라고 밝혔다. 또 정부 관계자가 "접촉이나 공기로 전염되지 않아 전염병이라 보기 힘들다"고 말한 것에 대해 "그렇다면 살모넬라나 O-157 등도 전염병으로 부르지 않아야 한다"며 정부 주장의 허실을 꼬집었다. [정부 괴담 2] 광우병이 5년 내로 사라진다? 우 교수는 "광우병의 잠복기가 5년에서 30년이 되는데다,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상황이다. 무증상 환자들이 나타나는 현실에 비춰봤을 때 정부의 주장은 과학적 근거가 없다"고 일갈했다. 우 교수는 "광우병이 5년 내로 사라진다는 정부 주장의 논거는 현재 감소 추세라는 것밖에 없다"며 "그것은 마치 세상에 흉측한 일이 많으니깐 말세가 올 것이라는 이야기와 같은 것으로 과학자가 밝힐 입장이 아니다"고 비판했다. 그는 일본, 유럽, 미국 등에서 활약하고 있는 석학들의 의견도 소개했다. 일본의 T. 요코하마 교수는 한국 정부의 주장에 대해 "지금껏 광우병이 발생한 국가 중에 아직 청정 국가로 내려간 사례가 없는데 어떻게 광우병이 사라지냐"고 반문했고, 미국의 G. 텔링 교수는 "프리온에 노출된 많은 이들 중에 앞으로 수십 년 내에 발병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견해를 밝혔다. [정부 괴담 3] 소 광우병 발병 사례가 많은 EU와 사례가 적은 미국의 광우병 특정위험발생 물질(SRM)이 다른 것은 당연하다? 우 교수는 "국가를 불문하고 발병한 개체 내에서 질병 진행에 따른 병원체 증식, 감염 조직 양상은 똑같다"며 "미국의 광우병이 EU와 발병 양상이 서로 다르다는 과학적 자료가 있지 않는 한 광우병에 대해 보다 엄격한 EU의 기준을 따른 것이 옳다"고 말했다. 특히 우 교수는 "미국은 소에 대해서 전수검사를 하지 않고, 도축환경도 미비한 상황인데 현재 타결된 새로운 위생수입조건에 따르면 EU 기준으로 SRM 부위인 30개월령 미만 소의 창자, 장간막, 뇌, 안구, 척수 등이 수입된다"며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그는 "현재 소 광우병이 감소추세에 있는 것은 전수검사와 같은 능동적 감시체계 덕분"이라며 "2000년 이후 태어난 25개월령 소에게서도 광우병이 발견된 적 있을 만큼 광우병 발병 연령도 불확실하다"고 경고했다. ▲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주최로 19일 오후 서울의대 동창회관에서 열린 전문가 토론회에서 우희종 서울대 수의대 교수 등 참석자들이 '광우병의 과학적 진실과 한국사회의 대응방안'에 대해 토론하고 있다.ⓒ 남소연 광우병[1신 : 19일 오전 11시 50분] 광우병 진실 제대로 밝혀주마'광우병의 과학적 진실과 한국사회의 대응방안' 토론회 지난 17일 6만여개의 촛불이 청계천 일대를 가득 메웠다. 16세 여학생은 "미국산 쇠고기가 안전하다는 거짓말과 궁색한 변명을 그만해 달라"고 정부에 당부했다. 그의 말처럼 정부는 그동안 '궁색한 변명'으로 일관해왔다. 미국의 동물성 사료 금지조치가 완화된 것을 '강화'된 것으로 오역하는 미숙한 실수를 해놓고 "미 식품의약국(FDA)의 보도자료를 잘못 번역하는 바람에 잘못 설명했다"고 거짓말도 했다. 미국에서 광우병 발생특정위험물질(SRM) 부위로 지정한 쇠고기가 한국에 그대로 들어온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광우병 발생 경험이 많은 EU의 기준을 가지고 협상에 임했다"고 변명했지만 한미 쇠고기 협상에서 결정된 새로운 수입위생조건과 EU 기준을 비교한 결과 그 역시 헝편없는 거짓말임이 드러났다. 그래서 국민들은 분노했다. 전국 74곳 시도 지역에서 연인원 20만명 이상이 촛불을 들었다. "협상 전면무효화, 고시 철폐"를 요구했다. 혼쭐이 난 정부도 한 걸음 물러섰다. 정부는 현재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검역주권을 행사하는 방향으로 미국과 추가협상을 진행 중이다. 그러나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성에 대한 정부 관계자들의 태도는 변화가 없다. 정부 관계자들은 "국제수역사무국(OIE)의 기준을 따랐다"며 과학적 근거를 갖춘 '국제적인 기준'을 내놓을 것을 거듭 요구하고 있다. 이제 각계의 전문가들이 정부의 요구에 대해 답을 내놓는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는 19일 오후 1시부터 서울의대 동창회관 함춘회관 대회의실에서 전문가들을 초청해 '광우병의 과학적 진실과 한국사회의 대응방안'에 대한 토론회를 개최한다. 우희종 서울대 수의학과대학 교수와 정해관 성균관대학교 의과대학 교수가 소 광우병과 인간 광우병에 대해 발제하고 2부 토론에서는 권호장 단국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정태인 성공회대 겸임 교수, 박상표 국민건강을 위한 수의사연대 정책국장, 우석균 건강권 실현을 위한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실장,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송기호 변호사가 참여할 예정이다.-----------------------------------정경사 게시판을 보면, 전두환 전대통령에 대한 논란, 5.18에 대한 논란,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논란, 그외 FTA, 천안함, 광우병 등등왜곡된 정보를 알고계신거 같아 글 올려봅니다. 자신과 입장이 다른 분들은 뭐라 하실 것이고, 혹시나 이곳에서 상주하는 십알단이 계시거나, 국정원 관계자분이 계신다면.. (제 생각엔 있을거 같아요. 방가 ^^) 못마땅하시겠지만..의식있는 분, 정보가 부족하셨던 분들께 도움이 되기 바라며..좋은 하루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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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매국노 이완용
위키펌성명이완용(李完用)출생1858년 6월 7일, 경기도 광주사망1926년 2월 12일, 일제강점기 조선(67세 7개월 5일)분야장사꾼정치주요활동일제의 대한제국 국권 침탈에 적극 기여함평가매국노, 팔 수 없는 것을 팔아 누릴 수 없는 것을 누린 자비고친일인명사전 등재젊은 시절늙은 모습(1916년)여러분은 인간이 원숭이로 진화한 장면을 보고 계십니다그도 갔다. 팔지 못할 것을 팔아서 누리지 못할 것을 누린 자. 이제부터는 천벌을 영원히 받아야지.[1]- 동아일보, 이완용의 사망 직후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으로, 친미, 친러, 친일 코스를 차례로 밟다가 결국 친일파로 진로를 결정해 한일 병합 조약 체결을 주도한 매국노의 필두.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이란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매국노로 대한제국을 일본에 앞장서서 팔아 넘긴 매국노의 수장이다.[2]악명이 너무나 자자하여 을사오적이라고 하는데 웬만한 사람은 이완용 빼고 다른 인간들은 이름이 생각이 안 날 정도이다. 심지어 근현대사, 국사를 배울 때 을사오적 이야기가 나오면 거진 모든 아이들이 이완용 빼고 나머지를 잊는다.[3] 덕분에 자기 혼자 주야장천 까이느라 다른 지구가 끝나는 날까지 가루가 되도록 까도 시원찮은 자들의 방어막이 되고 있다(프렌드 실드?).국립중앙도서관에 보관된 우봉 이씨 족보를 보면 족보에 이완용의 이름은 의도적으로 삭제한 듯 빈칸으로 남아있고 연필로 간단히 적혀있을 뿐 사실상 족보에 이름이 파였다.위의 설명이 너무 길어 보이면 그냥 '쳐죽일 존재'나 '인간말종', '인간 쓰레기', '천하의 개쌍놈', '나라를 판 만고의 역적 쉐키',[4] 당장 전차를 몰고 가서 머리통을 날려버려야 할 새퀴, '견공자제분', '한국 역사상 최대최악의 간신' 등등으로 줄여서 말해도 문제 없으며 대놓고 깐다 해도 누구 하나 말릴 사람 없는 몇 안 되는 작자.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가루가 되도록 까도 시원찮은 인간. 어떤 의미로는 대단하다.[5]"○○○ 개.새.끼해봐의 가장 올바른 예Contents1 이완용의 생애1.1 을사조약 이전까지의 삶과 매국노로 까이는 이유1.2고종 폐위, 군대 해산에 참여하여 총리직을 얻다1.3 다시 살아난 후 합병 전야까지1.4 강제 병탄 후, 그리고 그 말로2 이완용의 성품3 이완용에 대한 떡밥4 변명은 아닌(?) 이야기5 관련 어록6 기타1 이완용의 생애 ¶1.1 을사조약 이전까지의 삶과 매국노로 까이는 이유 ¶이완용은 1858년 6월 7일 경기도 광주시 낙성면#에서 출생하였으며, 그의 부친은 우봉 이씨 이석준(李奭俊, 다른 이름은 이호석(李鎬奭))이고 생모(어머니)는 신씨였다.그의 집안은 고려시대의 잠성부원군 이공정의 후손이었다. 이공정의 아들 이자의는 문하시중을 지냈고, 조선조로 와서도 그의 조상들은 대대로 고관을 역임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이완용의 생가 15대조인 이길배가 태종 때 도관찰사를 지낸 것을 비롯해 문과 급제자 40명, 우의정 1명, 대제학 1명을 배출한 대표적 양반 씨족 가운데 하나이다.[6] 16대조 이교(李喬)는 판서, 15대조 이방년(李芳年)은 밀직이며 14대조 이순(李淳)은 과거에 급제해 감사를 역임했으며, 조선 성종 때의 유명한 청백리였다. 생가의 11대조 이세명(李世銘)은 을묘사화에 연루된 선비였으며, 10대조 이간(李人+間)은 무과에 급제해 수군절도사를 지냈다. 9대조 이의원(李義元)이 동지중추부사였고 8대조 이우(李寓)가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것을 마지막으로 더이상 관직을 배출하지 못해 몰락한 양반으로 가난하였다. 이완용의 생가 직계 가문은 9대조 이래로 이렇다할 벼슬살이를 한 사람이 없어 우봉 이씨 가문 중에서도 가세가 가장 빈한한 편에 속했다. 따라서 그의 생부 이호석은 겨우 선비의 체면을 유지하며 어렵게 살아온 것으로 추정된다.원래 몰락양반가문이었지만 이호준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권력의 핵심부에 들어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고 양자여서 출세욕이 강하였다.1882년 증광문과에 급제한 뒤 고종이 축하연주를 하라고 하였다.[7] 세자를 가르치면서 순종과는 사제의 인연을 맺었고 탄탄대로를 달리던 이완용은 또다시 변신할 기회를 맞이하는데 국제업무를 담당할 신진관료를 교육하기 위해 고종이 육영공원을 만들었는데 거기서 헐버트를 만나게 되었고 이때 영어를 배웠다.미국은 조선과 거리를 멀어 침입할 우려가 적고, 부국이니 덕을 볼 것이고, 종교지상주의 국가이니 야심이 적을거라 판단, 미국은 부강함이 천하제일이라는 당시 조선 분위기에 미국주재 공사로 나가게 되었다. 이는 청의 극심한 반대에도 무릅쓴 고종의 결단이었다. 미국에서 2년 5개월간 주미 외교관으로 근무한 기간은, 그가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관계의 현실과 근대화된 서구열강의 모습을 보면서 친미파 관료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일본을 피해 미국공사관으로 고종을 피신시키려 시도한다(춘생문 사건).[8][9] 이후 참찬관으로 미국으로 다시 건너갔다가 재차 트러블을 일으켜 미국 정권에 달라붙어 있기 어려워지자 미국의 반대세력인 친러파로 변신, 국내의 친미파 세력을 견제한다.하지만 친러파 내에서도 트러블을 내고 찍혀 활동이 어려워졌고, 1898년 3월 11일, 이완용은 전북관찰사로 발령을 받고 좌천되었다. 정치적 영향력 확대와 국내 이권을 노리는 러시아에 대해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반러여론이 커지자 독립협회에 속해있던 이완용도 정치적으로 힘을 잃은 것이다. 그리고 관찰사로 부임한지 닷세만에 직무태만으로 감봉, 공금횡령으로 파직위기를 맞고 독립협회에서도 제명되었다.이완용은 독립협회의 위원장, 부회장과 회장을 지냈으며 독립협회 존속기간의 3분의 2 이상을 이끌었다(회비도 가장 많이 냈다고 한다). 독립문 현판도 이완용이 썼으며 의무교육을 처음 정착시킨 사람이기도 했으니..[8] 나름대로는 친일 이전의 경력을 보자면 전형적인 엘리트의 삶을 살았고는 할 수 있는데... 이후의 행적으로 말짱 부질없는 약력이 되고 말았다.일부 이완용을 옹호하는 시각에서는 그가 초창기 애국계몽운동가로서 활동하면서 조선의 개화와 독립을 추진하던 중, 초반에는 일본이 조선을 둘러싼 열강 중 가장 힘이 없어서 일본과 친했다가, 카츠라-태프트 밀약을 비롯한 일련의 미국이 조선을 버리는 스탠스를 보이며 미국을 신뢰할 수 없게 되자, 스스로 자포자기, 매국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는 시각도 있다. 사람들이 이완용을 특히 매국노로 기억하는 것은 초반의 애국 개화사상가 이미지에서 돌연 변신을 한 데 대한 배신감이 커서 그렇다고 하는 견해도 있다.어쨌거나, 인생의 말로를 천하의 매국노로 보내기로 한 것은 스스로 선택한 일이며, 그 이전 활동이야 어쨌건, 결국 그는 자신의 이익과 영달을 위해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일 뿐이다.1.2 고종 폐위, 군대 해산에 참여하여 총리직을 얻다 ¶본격적인 나라 팔아먹기의 서막새로운 힘을 찾던 이완용은 이번엔 친일파로 변신해[10] 일제의 무력을 등에 업고 고종을 협박, 을사조약을 체결시켜 을사오적의 수뇌로 불리게 된다. 그런데 웃긴 건 이때 이완용의 대사가 "나라를 위해서 이 조약을 체결한다"였다. 물론 개뿔, 아주 뻔뻔함의 극치다.[11]을사조약을 체결시킨 실적 덕분에 이토 히로부미의 추천으로 내각총리대신이 되었으며 헤이그 특사 사건이 대외적으로 공표되자 이를 빌미로 고종의 양위[12]를 강요, 사실상 한 국가의 왕을 갈아치웠다. 역적 놈의 새퀴.이미 그 전부터 이토 히로부미는 을사오적 일원인 박제순[13]에게 넌지시 고종 퇴위를 제의하나, 의외로 별로 동조하지 않자 그를 물러나게 하고 이완용을 참정대신으로 앉힌 것이었다.여하간 고종은 황제 대리를 주장하며 끝까지 버텼다. 궁내부 대신 박영효마저도 그 꼴을 보기 싫어서 그 자리를 피했으나 이완용은 스스로를 궁내부 대신 서리에 임명하고(;;) 그 일을 행했다. 그 직후 (20일) 메이지 일왕의 "순종 즉위" 축하 메시지가 오자 즉각 반응, (22일) 대리청정을 황제로 바꾸어버렸다. 그리고는 24일 정미7조약(한일 신협약)으로 내정까지 통감의 지배를 받는다라는 안을 하나 수정하지 않고 통과시켰다. 황실보호 따윈 언급되지도 않았다. 그리고 8월 1일에는 군대를 해산시켰다. 그리고, 정미의병이 한창 일어났을 때 이완용은 일본군 대장 하세가와를 매일 찾아가 의병토벌에 대해 논의했었다고 알려져 있다. 거기서 '조선인 현병보조원 제도'를 계획하는 데 크게 일조했고, 의병장 허위가 체포되었을 때, 허위를 처벌할 것을 순종한테 상소를 올린 것도 이완용이었다.[14]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에게 자꾸 요구를 하고, 결국 고종은 넘겨주면서 백성들과 의논한다고 했지만 이토는 폐하가 언제 백성들과 정사를 의논했습니까?라는 말에 데꿀멍.이 시기에도 총리대신을 해먹으면서 형 이윤용을 궁내부 대신으로, 사돈 임선준은 탁지부대신으로, 승녕부 총관(고종의 비서실장)은 처남 조민희, 아들 이항구는 승녕부의 시종을 시키는 등 인척 내각을 이룩했고, 황태자 책봉 문제에도 참여하여 콩고물을 챙겼다.1909년, 이토 히로부미는 통감에서 물러나면서 일선에서 물러나는 것처럼 보였지만 동시에 사법권을 넘기는 작업을 계획하고 있었다. 심지어 사돈까지 반대하면서 내각 총사퇴를 주장했다. 내각내에서도 반대가 빗발치고 내각 총사퇴가 사실상 기정사실화 되자 그는 2대 통감 소네 아라스케와 자기 멋대로 조약에 서명하고는 회의는 없다고 통보해 버린다. 이건 무슨.....어차피 이 시기 일본 내각에서는 한일 강제합병 계획이 통과된 상태이긴 했다.12월 4일에는 일진회의 한일합방 성명서가 발표되었다. 양심은 있었는지 아니면 합방의 공을 빼앗기기 싫었는지, 그도 아니면 명목상이라도 총리 자리를 계속 하고 싶었는지 모르지만 그는 반대성명을 내고 열을 내고 반대한다. 그가 그나마 변호 될 수 있는 것은 이 부분이지만, 1910년 8월 22일 체결된 한일합병조약은 일진회의 계획보다도 한국에게 훨씬 불리했다.이런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이완용의 집은 민중들에 의해 불타버렸고 자신 또한 12월 22일 명동성당 앞에서 이재명 열사[15]의 습격을 받는다. 그러나 우연히 인력거꾼 박원문이 그의 앞을 막아서는 바람에 목숨을 건진다. 불행히도 박원문은 대신 부상을 당해 절명하고 만다. 이재명 열사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그 자리에서 재차 이완용을 공격했지만 치명상을 입히지는 못 하고 체포된다. 이재명 열사는 합병 후 박원문을 살해한 죄로 1910년 9월 교수형에 처해졌다.여담이지만 당시 이뤄졌던 외과 수술에 대한 기록은 몇 남아 있지 않은 중요한 의학사 자료로 인정된다. 동 시기의 다른 외과 수술 기록이 전부 파기된 데 비해 재판의 증거로 사용되었기에 남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 수술은 대한민국 최초의 흉부외과 수술로 기록되어 있으며, 한국 의학사를 연구하는 학자분들이 "한국 의학의 발전이 5년만 늦었어도......"라는 말을 하게 만든다. 실제로 모 의대의 흉부외과 총론 시간 첫 수업에서 이 에피소드를 소개하며 "의업에 충실한 것이 민족과 역사에 죄를 짓게도 한다."라는 농담을 했다고 한다. 흠좀무? #또한 맹꽁이 서당에서도 경술국치 당시 이용직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며 나는 너님처럼 길거리에서 칼빵맞기 싫다며 디스한 장면도 나온다.1.3 다시 살아난 후 합병 전야까지 ¶5월 30일 부로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제3대 통감에 오른다. 군부 출신으로 강경파였던 그는 일방적으로 경찰권 회수를 통보했고, 내각은 데라우치가 한국에 입국하기도 전에 무기력하게 통과시켜버렸다. 7월 23일, 한국 합병에 대한 세부사항 논의까지 마치고 데라우치는 입국했다. 이즈음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는지 이완용도 요양을 마치고 상경했다.이완용은 8월 4일부로 비서 이인직("혈의 누" 작가)을 통해 합병을 먼저 제의했다. 아마도 송병준의 일진회 등에게 선수를 뺏기기 싫었던 모양. 통감부마저도 "그물도 안 쳤는데 물고기가 뛰어들었다."라는 반응을 보냈다. 합병 조약문에서 이완용은 "국호 한국과 황실의 왕 칭호만은 절대 양보할 수 없다."라면서 추가를 요구했는데, 황실 보호가 아닌 어디까지나 황실의 지지를 통한 자기 입지 강화를 위해서였다. 일본 입장에서도 황실이 고분고분한 것은 결코 나쁘지 않았기에 이를 받아들였다.주저하는 이들을 데라우치에게 일러바쳐 압력을 행사하고, 반대하는 학부대신 이용직을 일본 수해 위문 사절단으로 동경으로 보내는 등 (이용직은 이를 간파하고 가지는 않았다.) 갖은 수단을 써서 순종의 윤허를 받았다. 고종에게는 "신이 하지 않아도 송병준과 일진회가 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는데, 이완용이 물러 난 후 고종은 "'신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런 매국의 거사는 하지 않겠다.'고 한 자는 바로 이완용 아니던가! 그가 무슨 낯으로 짐을 본단 말인가!"라고 통곡했다.그리고 8월 22일, 이완용은 이용직에게는 통보도 하지 않고 최후의 내각 회의를 열고는 한일합병조약을 통과시켜버렸다. 이후 1주일 동안은 숨겼다가 8월 29일자로 순종의 이름으로 발표 된다.그의 나이 52세, 그는 그렇게 나라를 팔아먹었다.1.4 강제 병탄 후, 그리고 그 말로 ¶1916년 8월 4일자 매일신보. 이완용이 기고한 글로 순종의 장남, 왕세자 영친왕(이은)과 일본 귀족과의 강제결혼 결정을 '내선융화'로 미화한 내용의 글이다.(이 문서의 이전 버전에 '이왕가'라는 표현이 보이는데 이는 경술국치 이후 일본이 대한제국 황실을 하대하면서 사용한 용어이다. 이왕가, 이왕직,등은 모두 황실을 격하시켜서 낮춰 표현한 것. 단 이조는 좀 다르다. 일본에서는 한반도를 모두 조선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지리적 위치와 국가의 호칭을 구별하는 것이다. 일본인 입장에서 조선 백자라고 하면 그게 한반도에서 나온 것을 말할 뿐 삼국시대인지 고려인지 조선인지 알 수 없다. 그래도 우리 입장에서는 쓰지 말자. 사실 합방 이후의 '조선' 표현 자체도 멸칭이다. 합방 직후에 일본은 '대한'을 모조리 '조선'으로 바꾸는 작업부터 했다)강제 병탄이 이루어지자, 일본으로부터 훈1등 백작 작위를 받았다. 조선인이 조선인을 감시하는 "조선인 헌병제"도 이 자의 아이디어였으니, 1910~1919년 사이의 헌병 경찰 제도는 사실상 이자가 만든 것이었다.[16]명목상의 총독 자문기관인 중추원의 고문과 부의장을 지냈다. 3.1 운동 직전에 민족대표가 가담을 요청했다는 떡밥이 있으나 그것은 뒤로 미루도록 한다.3.1 운동 직후엔 "어리석은 조선인들"이란 내용으로 시작되는 뻘글을 3번이나 발표했다가[17] 다시 집이 불탔다. 이 뻘글 발표로 다음 해 후작으로 승급하였고 팔아 먹을 나라도, 국민도 없어지자 조용히 살다가 1926년, 68세의 나이에 폐렴으로 뒈진다뻗는다.진작 좀 죽었으면 좋았으련만,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하게 시망했다니 분통 터지는 것은 당연한 일. 다만 사망원인을 보듯이 이재명이 찌른 칼날이 평생 그를 옥죄어 왔던 것은 사실이다.(1926년 2월 13일자 매일신보 기사. 신문 1면에 이완용 사망소식을 대서특필로 다뤘다.)사후는 생전보다 더 화려했는데, 일본인과 조선인으로 이루어진 50명의 장례위원들이 참석했고 조선총독부 중추원부의장정2위대훈위후작이공지구란 휘황찬란한 깃발을 들고 장례가 치뤄젔다. 그의 장례 행렬은 그의 3천평짜리 집 옥인동부터 광화문까지 이어졌는데 고종 사후 이후 최대 인파가 몰렸다고 한다. 한편 그때까지 명맥만 존속하던 대한제국 황실은 그에게 훈 1등 이화 대수장과 금척 대수장을 수여했다. 에라이...하지만 당시에도 민중에게는 증오의 대상이었으니...1926년 2월 13일자 동아일보 1면 사설에 실린 기사. '무슨 낯으로 이 길을 떠나가나'라는 제목으로 이완용에 대한 기사를 실었다. 여기서 동아일보는 "그도 갔다. 팔지 못할 것을 팔아서 누리지 못할 것을 누린 자"라는 희대의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 가면 어찌된 일인지 해당 기사 부분만 기사가 지워져서 볼 수 없다. 그러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한국근현대신문자료에 가면 원문 이미지를 볼 수 있으니 참조하자. 옛날 신문이라 한자가 좀 많다.그밖에도 동아일보 "횡설수설" 란에는 이틀 연속으로 그의 죽음에 대한 짤막한 촌평을 달아두고 있다. 이건 네이버에서도 확인 가능하다. 어떻게 보면 요즘말로 고인드립 수준이지만, 그가 저지른 짓을 생각하면 이 자한테는 그래도 된다.2월 12일 : 구문(口文 : 흥정을 붙여 주고 그 보수로 받는 돈) 후작 이완용은, 작일(作日 : 어제) 황천객이 되엿다고, 지옥행하노라고 무던이 고달풀걸2월 13일 : 구문 공신 이완용은 염라국에 입적하엿스니, 염라국의 장래가, 가려(可慮 : 걱정이 되어 마음이 편하지 못하다)[18]그의 묘는 전라북도 익산군(現 익산시) 낭산면에 있었는데, 매국노다 보니 지속적인 훼묘사건이 빈번이 일어났고, 해방 이후에는 당연히 매우 심하게 훼손되었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1978년에 이완용 후손(정확히 말하면 증손자 이석형)이 파묘를 하였다. 오늘날, 이완용의 묘가 있었던 곳은 채석장으로 바뀌었다. 파묘할 때 지속적으로 훼손된 묘였지만 붉은 명정에 쓰인 '조선 총독부 부의장'이란 글은 상하지도 않고 그대로였다고 한다. 이 관은 박물관에 있다가 이완용의 손자뻘 친척이라고 상당 기간 오해받던[19] 국사학자 이병도가 사비로 구입해 자택에서 불태워 버렸다.[20]직함도 참 여러가지로 받아서 조선귀족원 회원, 농사장려회 회장, 조선물산공진협찬회 명예회원, 일본제국군인후원회 조선지부평의원, 조선귀족회 부회장, 농림주식회사고문, 교육조사위원, 총독부산업조사위원, 조선미술전람회심사원, 조선사편찬위고문, 조선농업교육연구회고문, 선만노몽(조선, 만주, 러시아, 몽골)연구협회고문 등을 지냈다.이런 모습 때문에 그는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6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조사,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06인 명단에 포함되어 있고,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는 이완용과 그의 손자인 이병길의 재산을 국가로 환수하기로 결정하여 환수작업이 진행 중이다. 또한 2009년 공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이완용의 이름이 당연히 그리고 당당히 들어가 있다. 안 들어가 있었으면 높으신 분들은 암살당할 뻔했다.2이완용의 성품 ¶처세엔 뛰어나고 영민한 인물인 것은 확실한 것 같다. 초기에는 그의 영민함을 감탄했던 선교사 겸 의사인 앨런(알렌)도 후에 이런 평을 남겼다.이완용? 그는 한마디로 기계 같은 사람이다.즉, 머리는 잘 돌아갈지 몰라도 줏대라는 것은 찾아 볼 수가 없는 인물이란 평.[21 참고로 알렌은 고종을 어떻게 평가했냐 하면, 매천야록에는 "내가 구만 리에 사천 년의 역사를 봤지만 조선 황제 같은 인종은 처음 보는 인종이었습니다."라고 평가했다. 실제로 알렌은 조선을 그다지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개인으로 보기에는 '매국노'의 이미지와는 조금 거리가 있긴 하다. 집에서는 항상 한복을 입고, 치부에는 애썼지만 첩 하나 거느리지 않는 면모를 가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개인적인 도덕성 등이 그를 결코 정당화할 수 없었다는 것은 알아두자. 단지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이미지와 조금 다르다는 것.그러나 그 치부에 애쓴 것이 장난이 아니었다. 민영휘[22] 다음 가는 조선에서 두번째 부자가 그였다.[23] 그것도 물려 받은 것은 거의 없이 그의 대에 나라 팔아먹어 대부분을 벌어들인 것이다. 땅으로는 경기도와 전라도 일대에 여의도 2배 면적을 보유했으며,[24] 집을 여러번 옮긴 부동산 투기의 선구자이기도 했다. 한일 신협약 때 10만원, 합병 때 15만원의 은사금을 일본에게서 받았다.한국 최초의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은 그를 가리켜 '마음이 바르고 나라를 자기 목숨보다 중히 여기는 정치가', '대한(大韓)의 몇 째 안 가는 재상', '황상 폐하를 보호하여 우리나라 자주독립의 권리를 튼튼케 한 인물'로 평했다고 하지만...... 앞에도 밝혔지만 이완용은 당시 독립협회의 중심 간부였다. 더구나 당시엔 친러/친미파로 그다지 매국노 티를 내지 않았었다.3 이완용에 대한 떡밥 ¶이완용의 행적에 대해 대한제국의 근대화를 꾀한 인물이란 평가를 하는 자들이 있으나 한 마디로 말해서 헛소리이고, 여러 마디로 말해서 근거가 없다.게다가 그런 소리를 지껄이는 자가 김완섭 같은 작자이다. 뉴라이트같은 자들조차도 이완용 미화는 좀 자제하는 편. 그러나 일제 강점지가 축복의 시대라고 열광하는 자들이잖아? 아마도 환호하고 위대한 인물로 찬양할거야그 같은 주장의 증거로 자주 제시하는 것이, 당시 독립협회와 얽혔던 일인데, 이는 당시 조선 지식계층의 한계를 보여주는 대목이지 이완용의 위치를 말해주는 대목은 아니다. 게다가 정황으로 보았을 때 이완용은 지극히 개인적인 보신에 신경 썼던 사람이므로, 그가 민족이나 대의를 위해 행동했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가끔씩은 "황실을 보호했다"라는 주장이 나오기도 하는데, 위에서 보았듯이 결코 신경을 쓰지 않았으며 단지 황실에게 조금이라도 환심을 사고 입지를 넓히기 위해서였다. 이 떡밥 때문에 명성황후(드라마)에서도 마치 그 시절에는 조선 왕실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처럼 묘사되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 도리어 그는 고종 독살설의 가장 강력한 용의자이다.3.1 운동 때엔 민족대표들이 선언에 참여해 달라고 권유했으나, 최소한의 염치가 있었는지 "내가 말아 먹은 것을 다시 민족대표라고 어떻게 얼굴을 들이미냐?"라고 말했다는 주장이 있다. 추측하자면 본심은 일본한테 밉보이기 싫었던 것으로 보인다만, 그래도 그런 사건이 모의되고 있다는 것을 총독부에 고해바치지는 않았다고 한다. 정말 마지막 양심은 있었던 것일까…[25]“내가 이제 와서 이런 일에 참여함은 무안한 일이며 알긴 아는구나 이 일이 잘 되면 먼 동네 사람을 기다릴 것도 없이 이웃 사람에게 맞아 죽을 것이오. 응? 이번 운동이 성공해서 내가 맞아 죽게 된다면 차라리 다행한 일입니다.뭐라고? ” #근데 학계에서는 검증되지 않은 어디까지나 루머이다.[26] 정말 마지막 양심이 있던 측은 이용직 같은 인물이 있다.이완용의 평판이 얼마나 안 좋았는지, 아들 이승구가 요절하자, 이완용이 며느리와 간통해서 그걸 안 아들이 남 보기 부끄럽다고 자살한 거라는 소문까지 돌았다.[27] 하지만 이승구는 을사조약이 체결되기 이전인 1905년 음력 7월에 자살이 아니라 병으로 죽었다. 어렸을 때부터 몸이 허약했던 이승구는 사망 당시 26세였다.순종때인 1908년, 이완용은 한국 최고의 매국노 답게 조선시대에 간신으로 취급받은 사람들의 복권을 건의했고 결국 받아들여졌다. 순종은 실권이 없었다. 그 때 복권된 대표적인 사람이 윤원형. 다만, 복권자를 자세히 보면, 정쟁에 휘말려 역적 취급된 소론, 남인, 북인계 인사들이 있었고, 이인좌의 난에 가담한 사람들, 여기에 고종을 시해하려한 사람들이 대표적이었다. 그래서 그 와중에 임진왜란의 의병장이었던 정인홍이 복권되긴 했다.[28] 어쨌거나 당대 간신으로 취급받던 사람들임에는 맞다. 다만 그건 당대의 시선이고, 오늘날 정인홍을 간신으로 보거나, 숙종 대의 남인계 대신들이나, 영조 초반의 소론계 대신들까지 간신으로 취급하지는 않으니, 이 부분은 역사의 판단에 맡길 문제인 듯. 애당초 이 취급의 발단은 순종의 즉위 기념 대사면령의 일환이었다.1909년, 이재명 의사가 명동성당에 갔다 온 이완용을 암살하다 실패한 사건 때문에 이완용이 기독교인이라는 루머도 있는데, 이는 안티기독교의 개드립에 불과하다. 암살 시도가 있었던 그 날 명동성당에서는 벨기에 왕 레오폴드 2세의 서거로 추도식이 열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총리대신 자격으로 추도식에 참석한 것일 뿐이었다. 결정적으로 그는 일본에게 아부하고 충성했지만 일본의 문화는 불교밖에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죽는 순간까지도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29]성균관대학교 홈페이지에 역대 총장 명단에 이완용이 포함되어 있다. 정확히 말하면 성균관 대사성. 어찌되었던 총장급 인물로 성균관대학교 홈페이지에 적혀있다. 컨트롤 + f키를 이용하여 직접 찾아보자. 덕분에 성대는 훌리건들에게 '친일파가 총장한 학교 ㅋㅋㅋ'라고 억울하게 테러당한다. 정작 성균관대에서도 게재는 할지언정 흑역사로 취급하고 있건만...단, 이 당시의 '대사성'의 실질적인 위치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대사성이 당대 성균관을 총괄하던 직책인 것은 맞지만 실질적으로 현재의 총장과 비슷한 급의 인물이었다고 보기 힘들 것 같다. 조선 초기에는 실제적으로 대사성이 권위를 가진 직책이었으나, 이후 성균관은 정계진출에 그다지 유리하지 못한 뻘코스 취급을 받고 그에 따라 대사성의 지위도 급격히 추락하였다. 고종 때 와서는 그냥 좀 어느정도 실력만 되면 대사성 타이틀만 붙여줬다고 봐야 할 듯. 실제 저 페이지로 들어가보면 고종대의 대사성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80년대 동시대를 다룬 KBS 대하사극 독립문에서는 태조 왕건에서 왕건 큰 장인으로 나온 고 김진해씨가 이완용으로 열연했다. 역시 이 드라마에서는 매국노 시전을 적절히 보여주었다. 후대의 사극 명성황후에서는 충신으로 나오지만. 가문의 보정?4 변명은 아닌(?) 이야기 ¶물론, 지나치게 혼자만 대표로 까인다는 평은 있을 수 있다. 그럴 만큼 하도 나라 팔아먹는데 물불 안가리고 나서기도 했지만….학계에서 보는 이완용은 매국노로서의 위치를 제외하면 '줏대없는 개화파 정치인' 정도이다. 친미파-친러파-친일파로 변한 그의 모습도 주도적으로 변했다기 보다는 아관파천 과정에서 친러파로,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는 과정에서 친일파가 되었다. 개화를 하기는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어떤 생각을 유지하는 전개에서는 스윽 밀려나가는 인간형이었다고 보면 된다.앞에서 말했듯이 영어에 능통하고, 글도 좀 쓰고 평판도 괜찮은 등(물론 을사조약으로 매국노가 되기 이전 이야기) 얼굴마담으로서 갖추어야 할 요소는 모조리 갖추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30] 이후에도 훌륭한 얼굴마담으로서의 역할을 해내었기 때문에, 일본 측에서도 높은 평가를 하는 이유가 되었다. 의외로 멀쩡한 시대에 태어났으면 고만고만한 좋은 관료로 살았을지도 모를 인물. 그랬다고 해도 하늘을 손바닥으로 가릴 수는 없는 거고......5 관련 어록 ¶우리는 미국 같은 부강한 근대적 국가를 건설해야지, 남의 나라 노예가 되는 핀란드 같은 나라가 돼서는 안 된다.- 1896년 7월, 이완용 <독립협회 강연>중 발언 해가 아직 바다 속을 떠나지 않았을 땐 온 산이 어둡더니, 하늘로 떠오르니 온 세상이 밝아지는구나.[31]- 이완용이 일장기에 써 넣은 글 6 기타 ¶웃기는 일이지만, 일본어는 죽을 때까지 한 마디도 할 줄 몰랐다. 이토 히로부미나 데라우치 마사타케 등과 대화할 때는 반드시 영어로 했다고 한다. 처음 육영공원에서 배운 영어는 형편없는 실력이라서 미국에 파견되었을 때 같이 간 이상재의 자조(반벙어리)를 면치 못했지만, 오랜 미국생활로 인해 그의 영어실력은 일취월장. 총독부의 인간들보다도 한 수 위였다고. 흠좀무.[32] 알고 있는 일본인 인맥도 넓지 않아서, 이토 히로부미나 데라우치 총독 정도만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자가 1906년 학부대신(일종의 교육부/교과부 장관) 시기에 공교육의 일본어 시간 도입을 추진하고, 가장 교육시간이 많은 과목으로 만들어 버렸다. 일본에서는 이완용이 아니면 할 수 없었던 일이라며 칭찬했다.근대 문물에 관심은 있었던 것 같다. 낭비가 심하기로 유명한 궁중식단(상다리가 부러져라 차린다는 표현이 여기서 시작되었다)의 병폐를 비판하고 샌드위치를 점심으로 가져왔던 사람이 이완용. 당시 궁중식단의 경우 그렇게 거하게 상을 차린 후 윗사람이 다 먹지 못한 음식들은 그대로 아랫사람에게 주었다. 먹다남긴 거나 먹으라는 의미가 아니라 덕을 나눠준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반찬을 집을 때에는 결코 남이 먹다 남긴 것처럼 헤집지 않는 습관이 생겼다. 절대 임금이 그 많은 음식을 혼자만 먹고 남겨서 버리는 거 아니다. 다만 그러다 보니 식사시간이 한정없이 길어지고 임금부터 다 먹고나면 너무 많은 시간이 흐르곤 했다. 음식 쓰레기 문제가 아니라 그런 비효율성이 문제였던 것. 그리고 그 비효율성을 타파하고 덤으로 음식 쓰레기도 줄인 그는 효율적으로 나라를 팔아먹고 자신이 쓰레기가 되는 위업을 달성한 꼴이 된 것이다.앞에서 말했듯이 글씨는 꽤 잘 써서 당대의 명필축에 들었다고 한다. 실제로 독립문 현판의 '독립문'이라는 글자는 그가 쓴 것.[33] 하지만 행적 때문에 글씨의 수준과 관계없이 가격은 바닥을 긴다.또한 재테크에도 뛰어나 조선 팔도 곳곳에 이완용의 사유지를 늘려갔다. 그가 병탄 이후 벌어들인 돈이 400억 원이 넘는다고 하며 자기 재산의 3배를 늘렸다. 최근 그의 후손들이 땅을 찾는다 어쩐다 한 것도 그 때문이리라.여담으로 이완용이 같은 친일파의 추천으로 하마터면 종묘에 모셔질(배향될) 뻔한 사건이 있었다. 이게 실현됐다면 종묘에서 여러 사람 뒷목을 잡았으리라...애니메이션 코드 기아스 반역의 를르슈에 나오는 쿠루루기 스자쿠의 행동이 마치 이완용을 떠올린다 하여 스완용이라 불리며 종종 언급되기도 한다. 하지만 스완용은 별로 생각 없이 애니 보는 사람들이 스자쿠보다는 이완용을 까기 위해서 만든 용어일지도...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을 낚아서 코기 팬들을 늘리는데 일조했었는데, 매천야록에서 일본식으로 바꾼 이름이 주작 - 즉 스자쿠라는 떡밥이 돌았다. 그러나 매천야록에는 주작이란 말이 등장하지 않는다. 정식으로 창씨개명한 이름은 리노이에 칸요우(李家完用). 그냥 이씨 가문의 완용이라는 이름이다.마지막으로, 어쩌면 유일하게 긍정적인 점이다. 대한제국 최초로 의무교육을 실시한 건 이완용이었다. 하지만 그런 점이 그의 과오를 덮어줄 수는 없다. 앞 항목에서 본 그의 성품 때문에 그의 행적을 덮어줄 수도 없다. 아돌프 히틀러 항목을 참조하자. 따지고 본다면 모든 후손들이 '의무로' 자기를 욕하게끔 배우도록 한 희대의 병크.국가가 지정한 100퍼센트 매국노이니 애국열사다 뭐다라고 포장하는 짓을 하면 그 즉시 매국노로 몰린다. 아니 그 전에 포장할 만한 건덕지도 없다.그리고 이렇게 여러 가지 의미로 유명하다 보니 다른 동명이인들의 삶도 완전히 망쳐버렸다. 즉 이 인간 때문에 이완용이라는 단어는 대한민국 내에서 언급만 해도 부정타는 단어의 상징이 되버린 셈이다.[34] 어찌보면 이것도 악업에 추가해야 할지도?여하간, 인간으로서는 참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다갔다.그런데 얼마전 이완용에 대한 평전이 나왔다.(한겨레 출판사) 저자에 따르면, 이완용은 '합리적인 근대인'이었기에 ‘충군(忠君)’과 ‘애국’이라는 이데올로기적 가치를 위해 용기를 내거나 제국주의의 폭력에 분노하기보다는 자신을 포함한 다수가 문명화의 혜택을 누리기 위해 절대로 분노하지 않는 이성적 인간이었다. 그로 인해 을사조약과 한일병합조약을 주도하면서 평소 자신의 소신이었던 왕과 왕실에 대한 의리를 지켰다고 한다. 아무래도 미.친 것 같아요. 이 자식 안 되겠어 빨리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시험문제에서도 신랄하게 까였다. #국사선생님의 분노라고 치면 다 나온다.3.1 운동에 경고하는 개소리를 하기도 했다. 뒤질수록 깔 거리만 나온다.참고: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1] 그의 사망 다음날인 1926년 2월 13일자에 실린 사설이다. 하지만 일반인이 가장 접근하기 쉬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 수록되어 있는 버전은 당시에 검열을 받았던 건지 해당 부분이 훼손되어 있어서 판독할 수 없다.[2] 역시 대세에 대한 감각은 뛰어났는지, 죽기 전에 아들에게 남긴 말이... "내가 보니까 앞으로 미국이 득세할 것 같으니 너는 친미파가 되거라." 후덜덜. 역시 희대의 매국노답다.[3] 사실 이 매국노 목록을 외울 필요는 없지만 이완용이 매국노라는 것 정도는 안 외워도 다 알기 때문에 큰 차이는 없다. 학생들은 다만 이 사실을 배우면서 이완용이 얼마나 악랄한 친일파였나를 배울 뿐이다.[4] 대한제국의 시각으로 봤을 땐 명백히 역적 맞다.[5] 이러다보니 후대의 동명이인들은 그저 안습.[6]윤덕한, 《이완용 평전》 (중심, 2005) 23페이지[7]고종실록 1882년 11월 2일.[8] 1895년 11월에 있었던 고종의 경복궁 탈출 미수 사건. 이범진이 주도하였고, 이완용, 이윤용, 윤치호, 민상호 등이 참여하였다. 목표는 고종이 경복궁을 벗어나 미국 대사관으로 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병력 동원을 위해서 참여시킨 훈련대 대대장 이범래, 이진호가 이를 일본에 밀고해서 실패하였다. 이 사건에 참여했던 이들은 이후 고종의 높은 평가를 받게 되는데, 이는 이완용도 예외가 아니었다.[9] 작가 송우혜는 이 사건의 주도자를 엄비로 보고 구국의 화신 엄비 운운한다. 그러다 잊혔다. 북한에서는 일단 미국이 개입했다는 것과 이완용이 침여했다는 점을 들어 미제국주의자 대위 훈련대장 다이와 매국노 이완용, 윤치호가 작당한 고종 납치극이라고 주장한다. 전자나 후자나 흠좀무.[10] 이완용은 근본적으로 친미파였고, 1904년까지만 해도 철저한 배일(排日)세력이었다. 1890년대 아관파천을 주도하고, 친러파로 활동했던건 일시적이다. 그러나 천성적으로 권력과 돈에 민감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러일전쟁을 계기로 친미주의자에서 친일파로 변신하게 된다.[11] 당시 사람들은 이완용을 처벌할 것을 강력하게 호소했다. 이완용은 오히려 '시국은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종묘사직을 지키고자...' 하는 내용의 X소리만 남발했다.[12] "고종의 양위를 사죄의 표시로 하여 만족한 일본이 더 이상 보복을 하지 않도록" 하려고 했다나.[13] 을사조약 시기 외무대신. 이후 참정대신 한규설이 항의표시로 물러나면서 참정대신을 맡게 된다. 을사조약 시기에도 초기엔 반대하던 입장이었다. 그래봐야 매국노지만. 경술국적도 된다.[14] 의병장 허위는 결국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하고 만다.[15] 당시 현역 군인이었다. 물론 사병.[16] 헌병보조원 제도는 사실, 정미의병 때 부터 있었다.[17]1차는 4월 5일 "황당한 유언에 속지 마라."였고, 4월 7일에 "돌이켜 자신을 구하라."라는 협박성 뻘글을 다시 썼다. 5월 29일, 3.1 운동이 가라앉자 조선은 일본의 통치 아래 복지가 증가했으며, 실력양성에 힘써야 한다는 최종 뻘글을 썼다. 이런데도 그가 민족대표를 할 뻔했다고?[18] 쉽게 말해서 염라국도 팔아먹을까봐 걱정된다는 이야기(...). 왜 염라대왕도 독살하시게?[19] 이병도의 조부와 이완용의 항렬이 같아 손자뻘이란 거지 실상은 그냥 남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머나먼 친척이다. 촌수로 따지면 30여 촌 정도 될 꺼라고 하니.[20] 이에 대해 정지환 기자는 이병도가 자신의 실증주의를 져버린 행위라고 비판했다.[21] 그런데 이 부분은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다. 즉, 기계처럼 매뉴얼에 따라 딱딱 행동한다는 것이다. 마치 일본처럼 말이다.[22] 민씨척족 세도가문에서 권세를 누린 수구파 관료. 일제에 합병되고 난 이후에 악질 친일파로 변신했다. 일제시대 동안 가장 많은 재산을 가진 조선인 중 한 명.[23] 죽기 직전에 보유한 자산이 당시 돈 300만원으로, 지금 돈으로 450억원 가량 된다.[24] 이중 훗날 국가에서 귀속시킨 것이 10,900평방미터(3천평 남짓), 그의 땅의 1% 밖에 되지 못한다.[25] 이완용은 일제 경찰로부터 비밀리에 감시당하기도 했었다. 뭐, 본인은 이걸 모르고 있었지만 말이다..[26] 이 때 민족대표는 마찬가지로 박영효 에게도 같은 권유를 했었고, 이 사건 때문에 제법 까인 감이 있다. 박영효도 그 정도인데 이완용을?[27] 매천야록에 자세히 나와 있다.[28] 이완용이 자기가 찔려서 간신들의 복권을 추진했는데 그 와중에 광해군의 간신으로 취급받고 인조반정때 처형된 정인홍이 복권되었다. 문제는 근현대로 오면서 정인홍은 조선을 구원한 위대한 세 사람 중의 1인으로 까지 취급되었고 인조 는 조선 최악의 암군으로 까이고 있으니 아이러니.[29] 부연하자면, 레오폴드 2세는 유럽 열강들의 식민지 나눠먹기 행사에 동참하여 콩고라는 벨기에 영토의 50여배나 되는 식민지를 넘겨받은 위인이다. 그리고 그 땅을 왕실의 사유지 형식으로 다스렸는데, 고무 등 천연자원을 워낙 악랄하게 수탈하여 제국주의가 한창이던 유럽에서도 대차게 까였으며 인격도 별로 좋지 않아 독일의 입방정 황제 빌헬름 2세에게 사후 디스당하기도 하였다.[30] 그 전에 다른 을사오적들은 정말 평판이 안 좋았다. 이미 을사조약 한참 전부터 노골적인 성향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반대로 이완용은 그런 점이 별로였기 때문에. 그래서 을사오적에 포함된 인물 중에서는 이완용이 가장 의외의 인물로 평가받았다. 또한 이완용은 조선 말기에 임금으로부터 신임받았던 근왕주의 엘리트 관료였기에 그는 일개 매국노 정도가 아니다.[31] 未離海底千山暗 及到天中萬國明[32] 때문에 정사를 맡을 때도 이토 히로부미와 같이 영어를 그나마 할 줄 아는 일본인과 영어로 대화하며 일했다.[33] 사실, 독립문 건립에 가장 앞장섰던 사람도 이완용이었다.[34] 이완용이란 이름 가진 것 하나 때문에 불행한 삶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TV로 나올 정도이니...... 동명이인이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나왔을 때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이건 한국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이런 식의 동명이인들이 까이는데 예를 들자면 미국의 경우 독립전쟁 당시 영국과 내통하여 반역을 저지른 베네딕트 아놀드와 이름이 같은 동명이인들도 독립전쟁이 끝난 지 200여 년이 넘은 지금도 자국내에서 까이기도 한다. 히틀러의 경우는...... 말 안해도 알 거다. -------------------------------------------------------------------------------------------------------------- 밑에 LOD 보고있냐? 니놈이 말한 이완용이 진정 나라를 위해 나라를 팔았다고 생각하냐?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면 넌 진짜 정신나간 놈이다. 어떻게 하면 너처럼 될 수 있냐. 맨날 일본애니 보면서 수음 좆나게 치면 그렇게 될 수 있는거냐? 좀 알려줘라 내 주변사람들한테 절대로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게.너의 댓글을 보고 내 눈을 의심했다. 한국인이 어떻게 이완용이를 두둔할 수 있는지.. 진성 친일파매국노인 그새끼를.. 아직 늦지 않았다. 너의 그 잘못된 생각을 바꿔라. Lod쪽지보내기회원정보 보기닉네임 검색 12/04/26 13:04:46 [124.xxx.xxx.xxx]추천신고아뭐니이거 아주 환상속에 국가를 꿈꾸는 사람이군이런걸 매국노라고 하지 잘나가는 이완용집안이 돈때문에 나라를 판건줄 아나조선의 시대발전을 위해 나라를 판거다 현실을 보지못한 우매한결과가 남기 역사적 범죄다.일본의 군대부활은 생각도 못하지죠 님은 한반도 미군철수후 벌어지는 일은 단순한게 아닌데요일본군대 다시 생기고 중국 러시아 영토분쟁 시작 대한민국 국방력 경제력 딸림 결과 완벽한 패배2차대전 독일과 같은 기술적우위도 없고 전략전 우수한 지휘관도 없음 미군이 대한민국 군대 덜떨어져서 전시작전권 안주는건 아시나요그렇다고 전쟁을 치룬 국가에 절대적인 공포감도 못주고 전쟁은 끝남 결과 그냥 호구로 평생살아야함 그리고 영토분쟁에 동맹은 없는거 아시나요.백두산의 반은중국 소유입니다. 러시아는 일본과 영토분쟁이라고 하지만 엄연이 러시아도동해에대한 어느정도의 미약할정도의 주장권이 있는게 현실입니다. 그리고6.25 북한동맹군 이였던 나라입니다.일본은 독도먹으려고하고 한반도를 노린나라 러시아 중국 일본 동맹을 누가 해줄까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때와서 미국찾을 까요ㅋㅋㅋㅋㅋㅋㅋ 이제는 별힘도없는 UN이 뭔가할까요.
순강도작성일
2012-04-26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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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삼성공화국의 탄생
작성자 공돌이님
[ 삼성공화국의 탄생 ]
일제하에 있던 1936년 이병철 회장이 첫 사업 후보지로 마산을 선택한 이유는
수탈된 쌀의 집결지가 마산이라는 점이었다. 이 회장은 정미업과 함께 운송업을
시작했고 이는 '수탈된 쌀을 일본으로 보내는 과정을 원활히 해 발생하는
이윤을 추구하는 행위'였다.
해방 이후 전쟁 인플레로 물자가 부족하던 1953년 이 회장은 삼성물산주식회사를
설립 무역업으로 막대한 이익을 남긴 후 "국민의 일상적인 필수품을 언제까지나
수입에 의존하고 있으면 해외의존의 국민생활이나 경제체질을 영원히 탈피할
수 없다"며 설탕, 밀가루, 면화 등의 소비재 산업에 진출한다.
이는 당시 민중들이 생활필수품과 의약품 부족으로 고통을 겪고 있었던
상황에 비춰본다면 '독점재벌의 본질'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 회장은 제일제당 사업과 관련 호암자전에서 “사업 취지에 대한 상공부 등
관계당국의 이해와 지지로 18만불, 그리고 내자의 부족분은 상공은행의
이상실 행장이 선뜻 2천만환의 융자를 허락해 가능했다"고 밝히고 있는데
이 부분은 정권유착의 의혹이 있는 부분이다.
실제로 4.19혁명을 촉발시킨 계기가 됐던 1960년 자유당 정부의 3.15부정선거
관련 검찰수사에서 이 같은 의혹은 사실로 확인된다.
315부정선거와 관련 삼성물산이 정치자금으로 3억원을 제공한 것이었다.
또한 삼성그룹 계열의 한국비료가 사카린 원료 OTSA 60톤을 건축자재로
가장해 일본으로부터 들여와 판매한 사건이 언론에 의해 발각됐고, 이 사건으로
이 회장은 라디오 서울과 동양 텔레비전 방송, 그리고 '중앙일보'를 세우며
언론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해방 이후 고 이병철 회장은 주요은행의 지분을 50% 이상 잠식하며 설탕 등의
독점 소비재 사업에서 발생하는 이익 중 많은 부분을 부동산에 투기한다.
결국 거대한 이윤을 창출할 수 있었고 이에 기반한 문어발식 확장을
시도하게 된다.
박정희 정권 시절 정부의 전폭전 지원으로 삼성전자를 설립하며 호텔 신라,
삼성석유화학, 삼성중공업 등을 연이어 설립한다.
1980년 전두환 정권이 취임하며 재벌의 문어발식 사업확장을 금지하는
9·27조치에도 불구 결국 삼성은 삼성반도체, 삼성정밀, 삼성시계, 동립산업,
조선호텔 등 10여 개 기업을 설립하거나 인수하며 현대를 추월 재계 1위의
자리를 점령해 '삼성공화국'을 완성하게 된다.
일제시대와 해방 이후 이어진 독재정권과 삼성의 검은 유착은 삼성이
거대재벌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됐고, 삼성은 '삼성공화국'의 완성과
더불어 인맥과 혼맥을 이용한 '삼성공화국 굳히기'를 시도하기에 이른다.
[ '삼성공화국' 대물림을 위한 삼성 일가의 정략적 결혼 ]
■ 고 이병철 회장
이병철 회장은 슬하에 4남 6녀를 뒀고,
장남 맹희씨는 1958년 손영기 농림부 양정국장의 딸 복남씨와 결혼,
3남 건희씨는 법무장관 과 내무장관 을 거쳐 중앙일보 회장 을 지낸 홍진기씨의
장녀 나희씨와 결혼,
큰딸인 인희씨는 고려병원(현 삼성강북병원) 고문을 지낸 조운해씨와 결혼,
차녀 숙희씨는 LG그룹 구인회 창업주의 3남 구자학 아워홈 회장과 결혼,
넷째딸 덕희씨는 이정재 씨의 아들 종기씨와 결혼,
다섯째딸 명희씨는 국회의원 과 삼호방직 및 삼호무역 회장을 지낸 정상희씨의
차남 재은씨와 결혼했다
삼성이라는 '족벌가문'의 혼사치고 조촐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직접적인
혼사를 통한 혼맥보다는 사돈과 사돈의 사돈으로 이어지는 혼맥을 따져보면
삼성을 중심으로 '한다하는' 집안들의 연결이 집중돼 있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이병철 회장이 타개한 뒤 4남 6녀중 삼남인 이건희 회장이 삼성그룹 회장으로
등극하며 본격적 분가작업을 시작, 보광, 한솔, 신세계, 제일제당, 새한 등이
계열을 분리하지만 혈맥과 혼맥을 중심, 삼성으로 집중되고 있다.
■ [언론계] 조.중.동, 삼성과 핏줄나누기
조선·중앙·동아일보 등 거대 신문사들의 재계 혼맥은 삼성그룹과
직·간접적으로 닿아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우선 이건희 삼성 회장이 중앙일보 홍진기 전 회장의 장녀인 나희씨와 결혼했다.
홍 전 회장의 차녀 나영씨가 노신영 전 국무총리 차남 노철수씨와 혼사를
맺으면서 연결된 중앙일보 혼맥은 노 전 총리로부터 현대 정주영 전 명예회장,
김동조 전 외무장관, 허광수 삼양인터내셔널 회장까지 연결된다.
허 회장의 장녀 유정씨는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의 장남인 준오씨와 백년가약을
맺어, 중앙일보에서 삼성을 거친 혼맥이 조선일보까지 연결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건희 회장의 차녀가 동아일보 김병관 명예회장의 차남과 혼인을 한 것까지
포함하면, 삼성과 3개 신문사의 혼맥도가 완성된다.
[ 삼성의 한미FTA 노림수, "M&A로 포식" 노골화 ]
■ 삼성경제연구소
삼성경제연구소는 친노 직계그룹인 이광재 라인에게 한미FTA 필요성을 전수하였다
삼성경제연구소는 2006년 9월 3일 <글로벌 기업의 M&A 동향과 전략적 시사점에
관한 연구>라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핵심은 "M&A를 많이 한 기업일수록 시장점유율이 크게 상승하고 성장도 빨랐다.
따라서 한국기업들에게 M&A는 필수적 경영요소가 됐으며, 못하면 도태된다"며
"한미FTA는 M&A 활성화 기회"라는 것이었다.
즉 국내 최대 재벌 삼성이 한미FTA가 비준되면 활짝 열리게 될 투자 조항을
토대로 본격적인 알짜 기업 '먹어치우기(=인수·합병=M&A)'에 나설 것임을
천명한 것이다.
결국 한미FTA는 필연적으로 한국 재벌과 미국 다국적 기업간에 국내 공기업 및
알짜 기업을 놓고 M&A를 통한 먹어치우기 전쟁이 벌어질 것을 예고하는 것이다.
재벌들이 한미FTA를 절절히 원하는 이유중 일부분이다.
<헌법 119조 2항의 사실상 폐지 등>
■ 한미 FTA 수혜자
한미FTA가 비준되면 누구보다 가장 큰 수혜를 누릴 당사자는 바로 '삼성과
이건희 회장'이다.
이미 NAFTA를 체결한 멕시코 사례에서 보듯 FTA로 농촌이 붕괴돼
도시민빈으로 몰려들고, 이들 농민과 도시에서 직장을 잃은 사람들이
멕시코 거리에 쏟아져 나와 노점상과 유리창 닦기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도
민영화 과정에서 특혜를 받은 재벌들은 FTA로 막대한 이득을 보며
세계적 갑부 순위가 껑충껑충 올라갔다.
예를들면 멕시코 최대 제빵기업 빔보, 코로나 맥주회사, 유리회사 비트로,
시멘트회사 세멕스 같은 기업들, 이들 기업들만이 FTA로 막대한 이득을 보았다
<민영화 과정에서 특혜를 받은 기업들>
최근 노골적으로 드러낸 M&A 속셈으로 볼 때, 삼성을 비롯한 한국 재벌들이
한미FTA를 통해 꿈꾸는 '또 하나의 세상'도 멕시코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다.
■ 한미FTA는 "힘 센 놈에게 몰아주기"
(FTA로 인한) 외국인 투자에 대해 대단한 환상을 갖고 있는데, 외국인들이 돈을
들고 와서 새로운 공장을 짓나. 아니다. 쓸만한 기업을 인수합병하는 게 전부다.
경제성장이나 일자리 늘어나는 것과 무관하다. 인수합병하고 나면 하는 게 뭔가.
정리해고 아닌가. 이래서 기존에 있던 멕시코 기업들 중에 몇 개 먹을만한 것
골라먹고 나머진 죽여버리는데 그때 인수합병한 자금이 외국인투자로 잡힌다.
수치가 늘어난 건 너무 당연하다. KBS 방송내용중
미국의 초국적 기업과 겨루기 위해서는 그에 대적할만한 경쟁력을 갖추어야 한다.
그럴려면 필연적으로 경쟁력이 떨어지는 중소기업, 영세기업, 동네 가게들은
정리하거나 도태시켜 힘 센 놈 하나에게 몰아줘야 한다. 이른바 구조조정이다.
즉 한미FTA로 미국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더욱더 한쪽에 몰아주는 독점.대형화가
극성을 부리게 될 것이다.
한미FTA 자체가 그걸 훨씬 자유롭게 하자는 게 핵심이기 때문이다.
외국인 투자자에 대한 '내국민 대우 원칙', '이행의무 부과 금지', '송금 자유 보장'을
핵심으로 하는 한미FTA로 인해 더욱 날개를 달게 된 미국의 거대 투기자본이
국내 알짜 기업을 노리면 이에 대항하기 위해 국내 기업은 더욱 독점.대형화로
몸집을 키우거나, 벌어들인 돈을 투자하는 대신 쌓아놓고 몸을 사리게 될 것이다.
당연히 양극화는 더욱 극심하게 진행될 것이고, 그 희생자는 힘없고 근근이
살아가는 도시자영업자, 영세기업, 노동자, 농민 등 서민이다.
■ 재벌이 한미FTA로 얻은 이득 사회 환원?-NO
손경식 CJ그룹 회장은 “FTA 체결로 수출이 늘겠지만, FTA로 발생하는
기업 이익의 사회 환원에는 동의하기 어렵다”며 “기업 경쟁력 해칠 정도의
사회공헌은 바람직 않다”고 말해 한미FTA를 바라보는 재벌의 시각을 보여준다.
[ 삼성공화국의 완성 ]
■ 개관
보험시장 1위 (삼성화재)
백화점 할인소매점(신세계,E마트) 1위
신용카드시장(삼성카드) 2위
증권(삼성증권) 6위
가전,컴퓨터,메모리,HDD,휴대폰(삼성전자)- 1위
조선 (삼성중공업) 2위
IT(삼성 SDS) 1위
자동차 (르노삼성 자동차 지분 12% 소유)
의료 (삼성의료원)대략 1위
대학 (성균관 대학교) 서열 6위정도
건설(삼성건설) 2위
설비(삼성 엔지니어링) 1위
군사무기/카메라(삼성 테크원)- 대략 1위
언론(중앙일보) 1위 또는 2위
경비/보안(에스원) 1위
의복 (제일모직) 1위
호텔-신라호텔
스포츠- 축구 야구 농구 배구 등등..
놀이터-애버랜드
광고 - 제일기획
은행-삼성은행
환율조정-삼성그룹
국가정책-삼성경제연구소
■ 이명박정부의 의료민영화
정부가 ‘의료서비스산업 선진화 방안’이라고 부르는 이 같은 정책방향이
삼성경제연구소와 삼성생명 등에서 발표된 보고서들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비지니스 프랜들리’를 외치는 이명박 정부의 삼성 사랑은 의료정책에서
영리병원 허용과 민간의료보험 확대로 대표되는 미국식 의료상업화 정책이라는
공통의 목표를 바라보고 있다.
삼성보고서에 따르면 의료서비스 산업의 고도화 과제로 ‘영리의료법인 허용’,
‘요양기관계약제로의 전환’, ‘민간의료보험의 활성화’등을 주요 과제로 꼽고 있는데,
이러한 내용은 2008년 3월 10일 기획재정부의 ‘대통령 업무보고’ 에 그 내용을
그대로 담겨있다.
최근의 의료민영화법안도 비슷한 내용의 법안이다
■ 산업은행
국회는 지난 4월 30일 산업은행 민영화 법안을 의결했다.
5년 안에 산업은행을 정책금융공사와 산은지주회사를 분리하고
산은지주회사의 지분 49%를 민간에 매각한다는 것이 법안의 요지다.
49%를 인수한 업체에게는 추가로 2%를 매입할 수 있는 우선권을 줌으로써
경영권마저 완전히 넘길 수 있다.
재벌이 산업은행을 인수하는 것은 금융 산업과 산업자본을 엄격히 구분한다는
‘금산 분리 원칙’에 어긋난다. 이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손’이
움직였다. 정부·여당은 지난 4월30일 은행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산업자본의 시중 은행 지분에 대한 소유 한도를 4%에서 9%로 상향 조정했고,
사모 출자 펀드(PEF) 지분에 대한 산업자본의 소유 한도를 18%(당초 10%)로
올렸다. 즉 은행법 개정안 통과로 ‘금산 분리 원칙’이 무너졌다.
재벌은 이제 시중 은행 지분 9%를 소유할 수 있고, 복수의 사모 출자 펀드를
통해 은행 지분을 얼마든지 매입할 수 있게 되었다.
삼성그룹은 은행 업종을 제외한 주요 금융업종에서 시장 1~2위를 차지하고 있다.
산업은행까지 인수하면 삼성그룹은 종합금융그룹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삼성전자를 필두로 한 제조업과 산업은행을 주축으로 한 금융업을
양수겸장하면서 삼성그룹은 한국 경제를 주도하게 된다.
■ 방송법 개악의 표적 'MBC', 삼성 등 재벌 지배력 강화
①대기업과 신문뉴스통신은 지상파를 20%까지 소유
예를 들면, MBC에 대해 삼성과 중앙일보가 각각 20%씩 소유하여
최대 주주가 될 수도 있다
②종합편성, 보도전문편성 채널은 재벌과 신문이 49%까지 지분소유를 가능,
재벌들 간의 상호협력으로 우호지분을 확보하여 선거철 등 민감한 시기에
보도와 편성을 입맛에 따라 조정하여 여론을 왜곡할 수도 있다
③종합편성 등 국내 여론형성 채널에 외국자본이 20%까지 출자할 수 있다
세계적 미디어 재벌 루퍼드 머독 같은 이들의 한국 언론시장 진출에
길을 열어 주겠다는 것이고 한미 FTA와도 관련된다
<용어해설>
종합편성채널은 의무편성이 되어 의무송신이 됩니다. 그것도 전국을 대상으로
나간다. KBS와 EBS와 마찬가지로, 전국을 대상으로 하는 방송이다.
참조>신문기사 등
명불허전작성일
2009-06-15추천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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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충격, 뉴라이트 전국대학생회도 장악!
충격, 뉴라이트 전국대학생회도 장악! (아고라 flowerrain님 글)
[명박퇴진][충격] 뉴라이트가 대학교 총학생회를 장악했다!!
전두환에겐 전대협이 명약이었다..그러나 지금의 대학생들은??
그러나 지금의 대학생들이 정신 못차리는 이유는
과거의 독재자가 대학생들에의해 물러나는 것을 보고...
오랜 시간과 돈을 들여....
각 대학 총학생회를 뉴라이트들이 점령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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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각 대학 선거에 돈으로 개입하고...
부산대 총학선거 뉴라이트 금권선거 개입폭로 기자회견..
증거 자료들...
학교게시판 대자보...
뉴라이트의 이러한 돈 놀이로....
뉴라이트 대학생 단체는 만들어지고...
뉴라이트 대학생 전진대회
계속 돈으로 해결한다...
이명박 지지성명을 낸 42개의 총학생회는 전부 비운동권을 표방하며
총학생회에 당선되었다.
‘비운동권’ 총학생회가 MB 팬클럽으로 전락하다.
비운동권 학생회를 표방하며 당선된 그들이 이제는 이명박을 지지하자고 호소하고 있다.
학외활동 보다 학생의 복지를 외치고 “비운동권 학생회”를 표방하면서,
대외활동을 적극적으로 하고 보수세력이라 할 수 있는 이명박 후보를 적극 지지하다니
얼마나 모순적인 행위인가
이들은 진보성향의 학생회를 “학생 복지를 신경 쓰지 않는 운동권”이라 비판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학생들을 위한 무색의 정치를 펼친다고 주장했었다.
하지만 결국 이들은 보수정당의 이명박 후보를 적극지지 해,
주장의 앞뒤가 맞지 않음을 증명하게 됐다.
뉴라이트 학생연합 출범과 그 궤를 같이한다.
지난 10월 30일, 17개의 대학생으로 구성된 뉴라이트대학생연합은 ▲공동체 자유주의의 전파
▲좌편향 학생운동 재정립 ▲선진한국 역군 양성을 목표로 공식출범했다.
지난 10여년간 보수진영의 뉴라이트가 대학가에 침투한 결과,
조직의 결실을 맺고 공식단체로 출범했던 것이다.
이미 일부 학교에서는 뉴라이트 진영이 탄탄하게 자리잡고 있었고
총학생회를 중심으로 하는 조직력은 상당한 수준에 달해있었다.
이런 상황에 뉴라이트 대학생연합이 출범한지 한 달 뒤,
2007년 42개의 총학생회가 이명박 지지성명을 발표하면서
뉴라이트의 라인업은 더욱 공고해졌다.
이제 마지막 하나의 상황, “과연 ‘비운동권’을 표방하는 2008년 신임 총학생회장이
공식적으로 입장을 표명할 것인가?”가 남아있다.
현재 전국 많은 학교에서 ‘비운동권’을 표방하는 총학생회가 당선될 확률이 높다
. 이들이 이명박 후보를 지지하게 된다면 그 파급력은
오늘에 비할 바가 아닐 것이고 뉴라이트의 삼각구도는 완성단계에 이를 것이다.
출처:http://bloggernews.media.daum.net/news/519664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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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일제강점기 간행 신문조가리, 히로히토와 그 처를 1면에 올리고
일장기와 함께 '천황폐하' 외치고 있다.
일제신문이었다. 이 조선일보가 지금은 조중동과 함께, 새끼일본인들의
소굴이요, 새끼미국인들의 소굴인 '뉴라이타'와 함께,
뉴라이타 회원인 츠키야마 아끼히로(월산명박)
현 대한민국 대통령 노릇하는 자를 적극 옹호하고 있다.
매국노 집안. 왼쪽부터 매국노 이완용. 이완용의 질손인 민족반역자 이병도.
이병도의 손자인 이장무 서울대총장.
할아버지 이병도의 후광으로 사학계에서 활동하는 이건무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현 고고학회 회장 겸 용인대 교수
이병도는 누구인가?
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는 1922년 12월 일황의 칙령에 따라
'조선사편찬위원회' 설치 때부터 1938년 3월까지 만 16년 동안
24,409쪽에 달하는 .반도 조선사. 34권을 완간하였다.
일본의 계략대로 우리 역사를 왜곡한 이병도는
일본의 제 1등 공신으로 인정받아 일본천왕으로부터
거액의 포상 금과 금시계를 받았다.1945년의 8.15 해방을 맞아 진단학회의 자진해산 후에도
조선사편수회에는 꾸준히 나가던 이병도는 해방 후 경성대학과
그 뒤를 이은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로 취임하고 곧이어
서울대학 대학원장에 취임하였다.
이병도는 1960년 문교부장관에 등용되고 같은 해 학술원 회장에 선임되었다.
1962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1965년 동구학원(東丘學園) 이사장,
1966년 성균관대학교 교수 겸 대동문화연구원장에 취임하였으며
1969년 국토통일원 고문에 추대되었다.
1976년 동도학원(東都學院) 이사장에 선임되었고
1980년 85세의 고령으로 국정자문위원(國政諮問委員)에 위촉되었다.
그 동안 문화훈장 대한민국장, 학술원 공로상,
서울특별시 문화상, 5.16민족상 등을 수상하였다.
1986년 10월 9일(목)자 조선일보에 단군은 신화가 아니고
우리나라 국조이며"역대왕조의 단군제사는 일제 때 끊겼다"라는
제목으로 특별기고 하여 우리나라 고대역사 왜곡의 사실을 발표하고
1989년에 죽었다.
한국, 이렇게 된것이 바로 썩은역사를 청산하지 않은 탓이죠.
안에서는 이렇게 매국노들이 나라를 절단내고 있는 사이,
중공은 동북공정으로 한반도를 티벳처럼 한개 성으로 만들려고
착착진행하고 있고,
현재 북한을 반 중국체제로 만들어 가고 있죠. 식량원조,
연료공급하면서
북한정권 살려주는 대신, 각종잇권 다 가져가고 있어요.
그리고 여차하면, 북한 접수하려고 국경에 15만
인민해방군 주둔시켜 놓고 있죠.
한국 이대로 가다간, 우리의 아들 딸 세대엔 나라 사라지고
정신적으로는 외래종자들만 우글거리게 생겼네요.
결국, 이면박의 실체를 알아야, 오늘날 망국사태를 풀수 있습니다.
아직도 아끼히로리가 한국인인줄 알고 있는 분들, 정신차려야 합니다.
그의 할아버지때 부터 이미 월산명박 즉, 츠키야마 아키히로로
창씨개명하였다. 그의 일본에서의 성장과정을 아셔야 대운하,
자주국방포기(방사청폐지추진)등 나라거덜내는 모든 문제가 풀립니다.
>>>>
이명박의 일본가족사진도 나오는데 기가막혀 말문이 막힙니다.
뉴라이트와 매국노당은 이를 철저히 숨기고 아끼히로를
대통령후보로 세운것, 한국인이라면 꼭 알아야 합니다
이/명/박의 실체를 다룬 충격적인 동영상 꼭 보세요.
외국에서 제작되었네요.
도저히 한국인이라고 볼수 없어요! 뉴라이트와 조중동,
재벌들의 음모가 고스란히 담겨있내요.이명박 지지자들도
끝까지 보시고 지지하길, 아래 누르시고 <부끄러운유산>방 보세요.
나하고 상관없다고 침묵할때,
바로 당신의 목을 조여올겁니다.
가자서작성일
2008-07-04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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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글터] 이병도 그는 누구인가??
이병도, 이완용 후손 현대사/독도/북간도
과연 병도는 어떤 인물인가? 일제식민지 시대에 우리나라 역사 왜곡의 주역이었던 병도(1896-1989)는 노론(老論) 유력 가문인 우봉(牛峰) 이씨이다. 열두 살인 1907년에 서울로 올라온 후 일인이 경영하는 불교고등학교를 찾아가 일어(日語)를 배웠다. 나라를 빼앗겨 대한독립을 위하여 수많은 청년 학도들이 목숨을 바쳤으나 병도의 뇌리에는 애초부터 항일 의지 따위는 없었다. 매국노 완용의 후손 병도는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의 장기적 계략에 포섭되어 일본 국비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와세다대학 사학과를 1919년에 졸업했다. 이때 일인 학자 요시다(吉田東伍)가 이미 한국의 역사를 변조하여 저술한 일한고사단(日韓古史斷)을 독파하였다. 또한 우리나라 역사왜곡의 주역 일인 학자 동경제국대학의 이케노우치(池內宏)와 와세다대학의 강사 츠다(津田左右吉)로부터 문헌고증학, 즉 실증사학의 기초를 다지며 한국역사 왜곡에 대한 개인적인 세뇌 지도 교육을 받았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던 해 귀국한 병도는 이케노우치의 추천을 받아 1925년에 설치된 『조선 반도사』 편수회의 핵심위원으로 들어갔다. 이병도는 촉탁이기 때문에 무보수로 일했다고 변명하면서 이 시절 규장각 도서를 열람할 수 있었던 것이 자신의 학문적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합리화하곤 했다. 이 시절 그는 조선사편수회에서 발간하는 학술지 등에 한4군(漢四郡)의 강역을 한반도 내의 존재 설을 강력히 주장하고 고?척?풍수도참(風水圖讖) 사상, 그리고 조선시대 유학사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는데, 당연히(?) 일어(日語)로 쓴 것들이었다. 이때 쓴 논문들은 문헌고증학의 관점에서는 꽤 수준이 높은 것이었으나 일제식민지 치하에서 단제 신채호의 민족주의사학과는 서로 배치되는 논리들이었다. 1920년대 연희전문.보성전문.이화여전 등이 민립대학 건설 운동을 일으키자 일본은 경성제대의 문을 열어 이 운동을 좌절시켰는데, 경성제대는 이런 불순한 목적의 대학답게 식민사학을 맹렬히 전파하여 『조선 반도사』를 합리화 시켰다. 이외에도 호소이(細井肇)를 비롯해 아오야나기(靑柳南冥) 같은 일본 국수주의 국학자들도 조선사편수회와 경성제국대학과 함께 식민사학을 쏟아내어 조선국은 고대로부터 반도국가로서 미개한 민족이라고 역설하고 있었다. 일황의 칙령에 의하여 『조선 반도사』편찬에 착수한 일제는 우리나라는 고대부터 반도국가로 왜곡시킨 우리역사를 합리화하고 세뇌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어용 학술단체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1922년의 조선사편찬위원회와 1925년의 조선사편수회였다. 『조선 반도사』편찬의 고문에는 일인들과 한국인들이 함께 포함되었는데, 일본측은 경성대 교수인 로이타(黑板勝美).미우라(三浦周行) 같은 학자들인 반면 한국 측은 역사학자가 아니고 친일 정객 완용.영효.윤용, 중현 같은 역적으로, 임명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죽을 때까지 이 단체의 고문으로 있었다. 당시 초대조선총독은 취조국이 관장하던 업무를 1915년 중추원으로 이관하고, 『조선 반도사』"편찬과"를 설치하고 우리민족의 대 역적인 완용과 중현 등 역적들을 고문으로 앉히고 1916년 1월 조선총독부 중추원은 참의와 부참의 15명에게 『조선 반도사』 편집 업무를 맡기고, 일본 동경제국대학 구로이다 가쓰미(黑板勝美) 박사와 일본 경도제국대학 미우라(三浦周行) 교수, 경도제대 이마니시(今西龍) 등 3인에게 지도, 감독을 의뢰하였다. 1922년 12월 일황 훈령(訓令) 제64호를 공포하여 『조선 반도사』편찬위원회”를 설치하고,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위원장으로 한 15명의 위원회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완용, (권)중현 등 역적들과 일본인 어용학자들이 합작하여 한국인 학자들의 외면으로 『조선 반도사』 편찬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자 조선총독부 총독 사이토는 "『조선 반도사』편찬위원회"를 “ 조선사편수회 ”로 명칭을 바꾸고, 일황(日皇)의 칙령으로 설치근거의 격을 높이고 확대 개편하였다. 1925년 6월에는 "일황칙령" 제218호로 "조선사편수회" 관제를 제정 공포하고 조선총독부 총독이 직접 관할하는 "독립관청"으로 승격시켰다. 독립관청으로 승격된 총독부의 절대적인 지원을 받는 『조선 반도사』편수회는 막대한 인적.물적 역량을 동원해 삼한과 삼국은 고대부터 한반도 중부이남 지역에 위치한 부족국가로서 중국에서 설치한 한사군(漢四郡 : 낙랑군(樂浪郡).임둔군(臨屯郡). 현도군(玄菟郡).진번군(眞番郡)이 한반도 내에 있었다고 주장하며 고대부터 한국은 중국의 속국이라는 이론을 수없이 쏟아내 조선의 식민지화를 정당화시켰다. 참고 : 한사군' 일본이 왜곡·날조해놓은 역사1926년 문을 연 경성제국대학도 식민사학을 전파한 또 다른 기관을 만들었다. 1930년 5월 경성제대 교수와 조선사편수회원, 그리고 조선총독부 관리들이 총동원되어 청구학회(靑丘學會)라는 어용 학술단체를 조직하는데 이들 역시 조선총독부의 막대한 지원을 받았다. 일제의 한반도 및 대륙침략 의도에 발맞춰 조선과 만주를 중심으로 한 극동문화 연구와 보급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이 어용 단체는 저술 출판.강연 등의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이 단체의 회무감독은 경성제대 교수인 일인 쇼우다(小田省吾)였고, 서기는 조선사편수회 서기인 마에다(前田耕造)였는데, 병도는 신석호와 함께 이 단체의 핵심위원이었다. 또한 병도는 이나바(稻葉岩吉)쇼우다 등의 일본인 및 손진태. 홍 희.유홍렬 등 한국인들과 함께 이 어용 학술단체의 기관지인 청구학총(靑丘學叢)의 주요 필자이며 또 다른 식민사학의 학술지인 조선사학의 주요필자 였다. 당시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1933년 불교전문학교 강사 시절이었다. 일본인 학자들과 함께한 청구학총이 어용단체로 밝혀지자 이를 두려워한 일제와 병도는 일인을 배제하고 순수 민간 학술단체로 위장하여 1934년 5월에 진단학회(震檀學會)를 설립하였다. 즉 일인을 배제하고 순수 민간 학술단체로 위장하여 국내 및 주변 지역에 대한 역사.언어.문학 등 인문학에 관한 연구를 목적으로 한국 학자의 힘으로 연구하고, 그 결과를 국어로 발표하려는 의도 하에 창립되었다. 초대 편집 겸 발행인 병도(丙燾)는 이화여자전문학교에 출강하면서 기관지인 진단학보(震檀學報)를 발행하고 일제강점기 1941년 6월 제14호로 종간하고 해산됐다. 그 후 1945년 8.15광복 후 다시 진단학회가 발족된다. 일제가 조선사편수회를 통해 유포시킨 식민사학의 핵심은 크게 두 가지 인데, 그 하나는 사대성이론이며 다른 하나는 정체성이론이다. 한국 역사는 고대부터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의 역사이자, 고대 이래로 발전하지 못한 정체된 사회라는 것이 두 이론의 논리였다. 따라서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것은 역사의 퇴보가 아니라 진보라는 것이 이들의 식민지 지배논리였다. 『조선 반도사』 편찬 실무자 스에마쓰(末松保和) 등 20여명의 일인 학자들과 한민족의 반역자 이완용의 후손 두계(斗溪) 병도(李丙燾).신석호(申奭鎬).홍희(洪憙) 같은 한인학자들이 참여하여 드디어 24,409쪽에 달하는 반도 조선사 34권이 완간 했던 것이다. 민족반역자 병도는 1922년 12월 일황의 칙령에 따라"조선사편찬위원회" 설치 때부터 1938년 3월까지 만 16년 동안 24,409쪽에 달하는 .반도 조선사. 34권을 완간하였다. 일본의 계략대로 우리 역사를 왜곡한 병도는 일본의 제 1등 공신으로 인정받아 일본천왕으로부터 거액의 포상 금과 금시계를 받았다. 1945년의 8.15 해방을 맞아 진단학회의 자진해산 후에도 조선사편수회에는 꾸준히 나가던 병도는 해방 후 경성대학과 그 뒤를 이은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로 취임하고 곧이어 서울대학 대학원장에 취임했다. 그때 김상기.이상백.이인영.유홍렬.손진태 등 사학자들과 조윤제.이숭녕 등 국문학자들이 서울대 교수로 취임해 진단학회는 친일 학자들이 완전히 장악했다. 그러나 병도의 해방은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해방 다음날 경제사학 계열의 백남운을 중심으로 조선학술원이 결성되고, 같은 날 진단학회도 재건되었으나 진단학회가 곧 “ 친일파 제명운동 ”에 들어간 것이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구속되었던 조윤제가 주도한 이 운동의 제명 범주에 병도가 들어간 사실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결국 병도는 재건된 진단학회를 주도할 수 없었고 송석하와 조윤제가 위원장과 총무를 맡고, 송석하가 사망하자 1948년 8월 이상백이 그 뒤를 이었다. 병도의 일제시대 행보는 떳떳할 수 없는 경력이었다. 그러나 친일파 식민사학자 병도가 남한 학계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는 1950년 6.25전쟁이었다. 6.25전쟁은 많은 민족주의 인사들이 납북됨으로써 남한 학계를 가짜 실증사학의 병도 독무대로 만들었던 것이다. 남북휴전 다음해인 1954년에 병도가 진단학회의 이사장으로 취임 할 수 있었다. 6.25전쟁을 계기로 병도는 친일파 청산 제 1호에서 벗어나 국사학계를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같은 해 병도는 식민사학을 유포하던 경성제대의 후신인 서울대학교 대학원장과 학술원 부원장을 맡아 역사학계의 최고 원로로 부상했다. 병도는 1960년 문교부장관에 등용되고 같은 해 학술원 회장에 선임됐다. 1962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1965년 동구학원(東丘學園) 이사장, 1966년 성균관대학교 교수 겸 대동문화연구원장에 취임했으며 1969년 국토통일원 고문에 추대됐다. 1976년 동도학원(東都學院) 이사장에 선임됐고 1980년 85세의 고령으로 국정자문위원(國政諮問委員)에 위촉됐다. 그 동안 문화훈장 대한민국장, 학술원 공로상, 서울특별시 문화상, 5.16민족상 등을 수상했다. 1986년 10월 9일(목)자 조선일보에 단군은 신화가 아니고 우리나라 국조이며 "역대왕조의 단군제사는 일제 때 끊겼다" 라는 제목으로 특별기고 하여 우리나라 고대역사 왜곡의 사실을 발표하고 1989년에 죽었다. 또한 병도의 저서에 《한국사대관, 한국사(고대편, 중세편) 《고?척?연구》등이 있다./ 박선협
드헤작성일
2008-01-06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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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인] 김혜수씨 이러면 곤란합니다.
이름 : 김혜수 생년월일 : 1970년 9월 5일 신체 : 169cm, 50kg, A형 가족사항 : 남동생 탤런트 김동현 학력 :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데뷔영화 : 깜보 (1985년) 출연영화 : 열한번째 엄마, 바람 피기 좋은 날, 좋지 아니한가, 타짜, 분홍신, 얼굴없는 미녀 출연방송 : MBC 한강수 타령, KBS 장희빈, 황금시대, 국희,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 수상 : 2006년 제27회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 '타짜' 화제 : 2005년 경기영상위원회 영상위원에 위촉
맥클로린작성일
2007-01-08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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