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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뇌피셜]굥이 경제폭망을 유도하는 이유
윤석열 패거리들이 전방위적으로 나라경제, 역사, 안전문제등 사회 전 분야를 심각하게 망치고 있다. 표면적 이유는, 좌파 정권에 물든 공산세력 국민들을 정신 못차리게 하기 위함이지만, 내 생각에는 여기엔 아주 지독한 보험이 숨겨져 있겠다. 만약, 현정권의 폭정으로 민주당이 다시 집권하게 된다면, 매우 확률 높게 그동안 학수고대하던 이재명의 대표공약인 기본소득, 기본정책들이 대대적으로 우선 시행될 것이다. 당연히 부자감세와 같은 기득권 옹호 정책에 반발하던 국민들에겐 무척 효능감있고, 압도적 지지율이 나올게 뻔한 개혁적 정책이기 때문에, 윤석열 패거리들이 여기에 독을 타는 것이다. 이재명 기본시리즈는 전제 조건이 하나 있다. 국가의 큰 힘을 시민들에게 다시 되돌려 주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국가 재정이 튼실해야 한다. 다시 말해, 나라 살림을 거지꼴로 만들어 놓으면, 이재명 기본시리즈는 시작도 못하게 된다. 취임 후.. 당장 시급한 일들이 산적한데, 조중동이 공격하기 좋은 사회주의 포퓰리즘 기본소득이 아니라 지금 당장 일본총리, 미국 대통령 만나서 야당이 제대로 견제 못해 한국 경제 망했고,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된거라며 겐세이 놓을게 뻔하기 때문에 시작도 힘들어 진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기본시리즈를 어렵게 강행하면, 나라 경제가 이렇게나 힘들어졌는데, 좌파 놈들은 신분을 속일 수 없다고 조롱질 할 테고, 효과가 생각보다 못하면,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 >> 이재명 OUT! 효과가 좋다면 >> 미래세대 부채비중 늘린다고, 2030세대 이재명을 공격하라! 운동이 펼쳐질 것이다. 이런 사회적 부작용, 갈등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국가 재정이 건전하고, 어느정도 여력이 있어야만 이재명표 기본시리즈가 가능한데, 지금 윤석열이 나라곶간을 제대로 회복불능상태로 털어먹으면, 이재명이 대통령이 된다고 해도 5년동안 기본시리즈 시작도 못하고, 하기도 전부터 이미 국민여론은 지금은 시기상조이니 나중에 하자고 역풍론이 다시 대두 될 것이다. 당연히 윤석열 똥치우기만 하다보면..이재명다움도 발휘하기 힘들어 지고, 무능한 행정가 이재명이 한국경제도 찢었다..라는 억울한 덮어씌우기 신공으로 이후 총선에서 국짐당 다시 정권줘야 한다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기 쉬운데, 이런 측면에서 현 윤석열 입장에선 지금 당장 나라경제를 폭망시켜도 손해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에..저들은 지들 손해가 전혀없는 꽃놀이패로 현재 나라 운전대를 안심하고 음주운전 중인데, 만약, 꼼수로 정권연장되다면 한동훈표 일본속국이 완성되는 것이고, 정권을 잃어도 이재명을 거지꼴난 경제 대통령으로 발목 잡을 수 있다 자신하니 이 보다 쉬운 정치 노림수가 없는 것이다.
레딛고작성일
2023-08-29추천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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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일반] [정치] 21세기 국제정치와 투키디데스
로버트 D. 카플란 저/이재규 역 들어가면서… 이 책의 핵심적인 메시지는 “세계 정치는 현실주의적 윤리에 기초한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선한가 혹은 악한가?” 현실주의 윤리와 성악설은 인간의 본성을 선하다고 전제하여 그들 스스로 자유롭게 내버려두면 문자 그대로 세상은 잘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현실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로 접어들게 된다. 홉스는 “최고의 미덕은 어울릴 수 있는 사람들과는 어울리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는 담을 쌓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홉스에 따르면, 이타주의는 인간의 본성이 아니며, 원래 인간은 욕심이 많을 뿐 아니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은 인간의 자연 조건이고 자유는 오직 질서가 확립된 후에만 제기되는 문제이다. 따라서 개인들은 자신의 안전을 위해 자신의 권리를 보다 큰 권위에 일부 양도하게 되는데, 그 권리를 양도받아 개인들을 지켜주고 분쟁을 정의롭게 해결해주는 실체를 홉스는 구약성서 욥기에 나오는 리바이어던에 비유했다. 리바이어던이 곧 국가를 암시하는 것은 다 아는 사살이다. 그러나 주권 국가들로 이루어진 국제 사회는 리바이어던이 존재 하지 않는다. 냉전 종식 이후 리바이어던이 없는 세계에서 미국이 세계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가 저자의 주된 관심사이다. 그 역할을 UN과 같은 국제기구들이 하지 않는가 하고 반론을 제기하겠지만, 영국의 역사가 E. H. 카는 “UN과 같은 국제 기구는 초강대국들이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범위 안에서만 제 기능을 발휘할수 있다”고 말한다. 자기희생을 내건 기독교의 윤리는 개인에게는 적용될 수 있을지 모지만 사회와 세계라는 보다 큰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사상으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본다. 보다 크고 현실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사적이고 작은 이해는 무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무엇이 도덕적이고 무엇이 미덕인가? 마키아벨리는 국가의 안전을 위해서는 군주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말이다. 그런 관점에서 공산주의를 용인하고 평화를 지키려 했던 카터보다 공산주의에 대해 강경책을 취한 레이건이 현실적 도덕적인 지도자이고, 테러를 묵인했던 클린턴보다 테러와의 전쟁을 벌인 부시 대통령이 훨씬 도덕적이라고 저자는 보았다. 테러집단들이 첨단무기를 손쉽게 장악할 수 있는 지금, 기독교적 성선설적 외교정책은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그들은 그 어느 때보다 잔인할 뿐만 아니라 한층 더 잘 무장하고 있다. 전사들을 상대하는 데 필요한 것은 대응 속도이지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법이 아니다. 그것이 바로 미국이 국제형사재판소를 거부하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손자는 전쟁의 발발은 정치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전쟁에서 최고의 목표는 싸우지 않고도 이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 정치의 실패에 따른 폭력적 결과인 전쟁을 피하기 위한 최고의 방법은 현실주의적으로 사고하는 것이라고 서술한다. 전쟁은 피해야 하는 것이지만 때로는 불가피한 정치의 연장이다. 자국의 이익을 전략적, 현실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냉정하고 비도덕적인 사람들이나 하는 사이비 윤리가 아니라. 전쟁의 무서움을 알고 또 그것을 회피하려는 사람들의 도덕적 행동이다. 저자는 “미래를 알려고 하는 사람은 과거를 돌이켜보지 않ㅇ르면 안된다. 이 세상 어느 시대 모든 것들은 고대에 그 전례가 있었으니까”라는 마키아벨리의 말을 빌려, 위기가 큰소리치며 험한 파도를 헤치고 그 모습을 나타내면, 오늘날 지도자들은 세계라는 것은 “현대”도 아니며 더 나아가 “탈현대”도 아니며, 오직 고대의 연속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린다. 이 책의 본질적으로 전쟁에 관한, 보다 정확히 말해 국제정치학에 관한 책이다. 1장 ‘현대’ 세계란 없다. (THERE IS NO ‘MODERN’ WORLD) 미래의 위기들이 엄청난 파도를 일으키며 들이닥칠 때, 세계는 ‘현대’도 ‘탈현대’도 아니며 ‘고대’의 연속에 지나지 않음을 우리의 지도자들은 깨닫게 될 것이다. 세계는 기술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대 중국과 고대 그리스, 로마의 최고 철학자들이 이해했고, 또한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그 해법을 알았던 바로 그 세계이다. 20세기의 악몽은 유토피아라는 이름으로 괴물같이 등장한 포풀리즘 운동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그들의 권력은 신기술에 의해 증폭되었다. 나치당은 노동자의 권리를 수호하기 위한 십자군으로서 출발했는데. 1919년 뮌헨의 열쇠수리공 안톤 드렉슬러가 조직했고 그 이듬해 히틀러가 당수가 되었다. 볼셰비키 또한 정치적 소요를 틈타 등장했으며, 나치와 마찬가지로 사회혁명이라는 꿈을 이용했다. 나치와 볼세비키가 권력을 쥐게 되자 산업시대의 발명품들은 그들이 저지르는 범죄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마오쩌둥은 소위 유토피아적 공동체 구축을 통해 노동직약적 산업화를 추진했디만, 1958년에서 1962년 사이의 대약진 운동 기간 동안 최소 2천만 명의 중국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런 점에서 20세기는 21세기의 지표가 될 자격이 없는데도 오직 바보들만이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포퓰리즘 운동이 지금도 무질서를 야기하고 또 정치적, 경제적 형명을 요구하면서 세계를 헤집고 다니기 때문이다. 아시아 지역은 특히 관심의 대싱이다. 인도, 파키스탄, 중국, 그리고 다른 여러 지역이 신기술, 민족적 열망, 그리고 그들 국가 내부의 분열과 겹쳐진 포퓰리즘 운동으로 들끓고 있다. 포퓰리스트들의 분노는 사회적, 경제적 긴장에 의해 촉발되지만, 때로는 지구가 점점 더 도시화되는 데 따르는 인구증가와 자원의 희소성 때문에 확대되기도 하였다. 앞으로 수십 년 내에 20억 또는 30억 이상의 인구가 개발도상국들의 방대하고 열악한 도시들에 거주하게 될 것이다. 자본에 의한 불평등 정보의 확산으로 야기 되는 복잡한 이슈들은 새로운 분열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나는 앞으로 모든 사태의 전개를 어두운 측면에 초점을 맞춘다. 왜냐하면 미래가 틀림없이 어두울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외교정책의 위기가 항상 그런 면에서 발생되어 왔기 때문이다. --------------------------------------------------------------------------------------- 서구의 정책결정자들은 민족적, 종교적 소란이 정치적 억압 때문에 일어난다고 믿고 있지만, 사실은 민주 사회가 그토록 혐오하는 폴력은 종종 정치적 자유에 의해 유발된다. 저임금에 시달리고, 일자리도 없으며,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민족과 종교적 신념으로 분열된 수많은 노동자들보다 더 마음이 흔들리기 쉬운 이들도 없고, 규율과 올바른 방향 제시가 필요한 이들도 없다. 특히 평화 중재는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다. 왜냐하면 성공적인 평화 회담은 권력이 집중되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오직 강력한 권력자들만이 평화 유지에 필요한 역사적 전환을 정당화할 수 있다. --------------------------------------------------------------------------------------- ‘현대’라는 말 그 자체가 우리의 삶과 시대를 과거와 단절시키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현대’ 사상, ‘현대’ 정치, ‘현대’ 건축, ‘현대’ 음악 등과 같은 표현은 과거의 연장이나 과거에 대한 대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부정하고자 하는 의도이다. ‘현대’라는 용어는 진보를 축복하는 말이다. 우리 자신과 기술이 보다 더 ‘현대적’이 될수록-우리의 삶이 기계화되고 추상적이 될수록- 우리의 본능은 더욱더 반항적이 되고, 비록 포착하기는 어렵겠지만 한층 더 교활하고 사악해질 가능성이 있다. 전자통신은 직접적인 대면을 피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에, 심리적 부담 없이 훨씬 더 쉽게 잔혹행위를 실행할 수 있게 한다. 얼굴을 맞대는 회의를 없애고 전자통신을 전면적으로 활용한 회사들에서 기업 권력이 가장 비인간적으로 행사되었다고 한다. 능력주의 또한 인간의 공격성에 기름을 붓는데, 그 이유는 능력주의가 많은 사람은 사람들에게 야심을 성취할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능력주의는 서로간에 필사적인 경쟁을 하도록 유도한다. 기술 진보로 인해, 앞으로 국가들 간의 관계나 다른 여러 정치 집단들 간의 관계가 한층 더 조화롭거나 현명하게 유지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거의 모든 국제 문제에는 해결책이 존재한다는 것은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소리다. 종종 거기에는 해답이 없으며,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혼란과 불만족스런 선택뿐이다. 그것이 바로 1927년 조지 마셜 장군이 조지아주의 포트베닝에 있는 보병학교 사령관이 되었을 때, ‘해결책’을 강조한 교범을 폐기하고 그것을 장교들이 ‘주도성’과 ‘판단력’을 갖추도록 교육시키는 ‘현실적인 훈련들’로 대체했던 이유이다. 예비 대통령과 국무장관들을 위한 교범에는 포트베닝에서 보여준 마셜 장군의지혜가 반영되어야 한다. 다음과 같이 물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아테네 몰락의 시대를 적어도 마음속으로 되씹어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기본적인 국제 문제에 대해 폭넓은 지혜와 깊은 확신을 가지고 사고할 수 있겠는가. 마셜 장군은 고대의 역사를 알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리더십을 위한 새로운 규칙들에는 고대의 역사가 반영되어야 할 것이다. 내가 앞으로 설명하겠지만, 고대의 역사는 21세게 초반 몇 십년 동안 우리가 직면하게 될 문제에 대한 가장 확실한 지침서이다. --------------------------------------------------------------------------------------- 이 책은 무엇을 생각할지에 관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생각할지에 관한 책이다. 나는 특정한 정책에 관해서가 아니라 단순한 직감이 아닌 사고의 결과물로서 정책에 관해 쓸 예정이다. 마셜과 같은 노련한 정책결정자달은 감정이 아니라 필요와 이익에 기초하여 정책을 수립했다. 마셜 플랜은 유럽에 대한 선물이 아니라 소련의 팽창을 봉쇄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필요와 이익이 적절히 고려되었을 때, 역사는 그러한 사고를 ‘영웅적’이라 서술한다. 외교정책의 위기들은 전투와 같다. 국내 정치는 통계적 연구결과를 활용할 수 있고, 행정부와 입법기관들 간의 협상을 통해 도출되는 경향이 있지만, 외교정책은 종종 폭력적이고 종잡을 수 없이 변화하는 해외 상황, 그리고 문화적 차이에 의해 더욱 복잡해지는 사태들을 파악하기 위해 순전히 직감에 자주 의존하게 된다. 민주주의와 기술이 그것들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제도들보다 더 빨리 발전하는 세계에서-심지어 국가들 자체도 도시화와 정보화에 의해 생각 이상으로 약화되고 변형되고 있다-외교정책은 과학이라기보다 영구적인 위기 관리의 기술이 될 것이다. 미래의 위기들이 엄청난 파도를 일으키며 들이닥칠 때, 세계는 ‘현대’도 ‘탈현대’도 이니며 ‘고대’의 연속에 지나지 않음을 우리의 지도자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세계는 기술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대 중국과 고대 그리스, 로마의 최고 철학자들이 이해했고,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그 해법을 알았던 바로 그 세계이다. 또한 회의주의와 건설적인 현실주의라는 고대의 전통을 드러내보였던 조지 마셜과 같은 이들도 그러했을 것이다.
로오데작성일
2022-08-15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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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일반] [공정하다는 착각]을 읽고
공정하다는 착각 『The Tyranny of Merit: What's Become of the Common Good?』 '능력주의의 폭정: 과연 무엇이 공동선을 만드나?' 한 대기업 그룹의 장남이 자신의 성공스토리와 노하우를 담아 책으로 발간했다. [성공하려면 미친듯이 노력해라] 아마 대부분 사람들은 제목을 듣자마자 반감이 생길 것이다. "뭘 노력했다는거지? 이미 성공한 채로 태어난 거 아니야?", "나랑 똑같은 조건이었으면 그게 가능했을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든다. 정말 그는 진심으로, 자신의 미친듯한 노력만으로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이런 태도는 어떤 식으로 사회에 영향을 미칠까? 내가 가진 재능과, 사회로부터 받은 대가는 과연 온전히 내 몫인가? 아니면 행운의 산물인가? 저자 마이클 센델은 정치, 철학, 종교, 사회 등 다양한 관점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았다. 우리 사회는 공정한가? 하나의 예시를 들어보자. 대학 입시 절차는 공정한가?? 거액의 돈을 들여 "뒷문"으로 들어가거나, 뇌물과 성적 조작, 스펙 품앗이을 통해 "옆문"으로 들어가는 문제가 있다. 이런 표면적인 문제를 제외하고, "정문"만 남기면 입시 절차가 공정해질까? SAT같은 표준화된 시험에서도 시험생 집안의 소득과 점수가 비례관계를 나타낸다. 아이비리그 대학생 2/3 이상이 소득상위 20% 이상이다. 프린스턴과 예일은 미국 소득 하위 60% 학생보다 상위 1% 학생이 더 많다. 물론 탈락한 지원자들의 소득 비율도 보아야 정확하겠지만, 상위권 대학교에 다닌다는 것은 소득 수준에 엄청난 영향을 받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문제에 대해 진보주의자들은 해결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진보주의자들은 소수자 우대정책이 이러한 불공정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참된 능력주의는 출발선을 고르게 해야 실현될 수 있다고 말한다. 반대로 보수주의자들은, 소수자 우대정책은 능력주의를 역행하는 것이며, 또다른 역차별을 만들어 낼 뿐이라고 반발한다. 기회의 평등에 힘을 주면 결과가 불평등해지고, 결과의 평등에 힘을 주면 기회가 불평등해지는 아이러니한 상태이다. 어느 한 쪽이 맞고 틀리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어보인다. 학위 소지에 따라 소득격차가 벌어지면서, 대학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가 되었고, 어느 대학에 들어가느냐도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소득 격차가 벌어짐에 따라 인생의 실패에 대한 두려움도 커지고, 적어도 내 자식이 평범하게는 살았으면 하는 바람에 부모는 자녀의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되었다. 저자는 여기엔 더 의미심장한 목적이 있다고 한다. 명문대 간판을 달도록 함으로써 "능력주의의 광채"를 두르려 한다는 것이다. 능력주의 사회에서는 "나 스스로의 재능과 노력으로 여기에 섰다"고 믿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오로지 스스로의 힘으로만 이뤘다고 할 수 있을까? 부모와 교사의 노력, 타고난 재능과 자질, 우연히 얻은 재능을 계발하고 보상해줄 수 있는 사회에 태어난 행운은? 공정성을 넘어선 능력주의의 또다른 문제는, [성공한 사람들이 자신보다 덜 성공한 사람들에게 나타내는 태도]에서 발생한다. '나의 성공은 나의 능력에 따른 것이고, 나는 마땅이 이런 권리를 누릴 자격이 있다.'는 생각은 직업의 귀천없음을 무너뜨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엘리트 층이 교만하다는 인식을 쌓게 하였다. 이런 성공한 사람들에 대한 포퓰리즘적 분노가 인종적, 민족적, 성적 다양성 등을 토대로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성공한 사람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성공한 것인가? 아니면 통제 범위 밖의 요인들이 작용해 성공한 것인가? 우리가 스스로를 자수성가한 존재, 자기충족적 존재로 볼수록 우리의 성공에 대해 빚진 느낌이나 감사의 마음을 가질 까닭은 줄어든다. 우리가 자유로운 인간 행위자이며 성공도 실패도 할 수 있다고 보는 생각은 능력주의의 일면이다. '성공한 사람은 그럴만해서 성공했다'는 신념이 중요 포인트다. 막스 베버는 이렇게 보았다. "운 좋은 사람은 운이 좋다는 사실에 만족하는 경우가 드물다. 운이 좋다는 사실을 넘어 자신이 '그럴만하다'고, 나아가 남들에 비해 '그럴 자격이 있다'고 확신하기를 바란다. 또한 운이 나쁜 사람들도 자신의 당연한 업보일 뿐이라고 믿기를 바란다" 능력주의의 폭정은 이러한 충동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이는 단순히 개인의 수준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힐러리는 선거운동 기간동안 "미국이 선하기 때문에 위대하다"는 표현을 자주 썼다. 이는 능력주의 신념을 국가에 적용한 것이다. 부유하고 강력한 국가가 미덕 덕분이라면, 부유하고 강력한 시민도 그렇지 않을까? 많은 진보파와 자유주의자들은 운의 우연성을 강조한다. 성공과 실패는 인성과 미덕만이 아니라 운과 상황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고 지적한다. '선량하니까 위대하다'는 섭리론에 내포된 능력주의는 다양한 논쟁들에 그대로 반영되어 미국 내에 퍼지게 된다. 오늘날 자신의 정책이나 정치적 동맹자를 변호하며 "역사의 옳은 편에 서 있다"고 하고, 그 비판자들에 대해서는 "역사의 잘못된 편에 서 있다"라고 규정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런 승리주의적 표현은 대체로 민주당 대통령이 즐겨 썼다. (빌 클린턴 25번, 오바마 32번) 오바마는 취임 연설에서 독재자들과 폭군들에 대해 엄한 경고를 날렸다. "부패와 기만, 반대파에 대한 억압으로 권력을 유지해 온 사람들은 알아야 합니다. 그들이 역사의 잘못된 쪽에 있음을" 역사가 되기도 전에 역사를 들먹이는 일은 역시나 문제가 있다. 첫째, 일이 저렇게 사담 후세인을 몰아내었지만 민주주의가 자리 잡지는 않았다. 잠깐의 봄은 새로운 독재와 탄압의 겨울로 바뀌어버렸다. 둘째, 역사가 예측한 대로 흘러갈지라도 그것이 곧 도덕적 정당화의 기반이 될 수는 없다. 결국 옐친이 아닌 푸틴이 역사의 옳은 편에 서 있었다고 할 수 있음이 드러났다. 적어도 그가 독재로 권력을 계속 유지했다는 점을 보자면 말이다. 시간이 가면서 오바마의 섭리론은 변화를 위한 예언자적 외침이라기보다, 미국 예외주의를 부추기는 재확언에 가까워졌다. "미국이 예외적인 까닭이 뭐냐 하면, 결국 옳은 길로 간다는 겁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도덕 세계의 궤적은 길지만 반드시 정의를 향해 휘어진다고 말한 그대로입니다.그러므로 미국은 특별합니다. 그래서 미국이 특별해집니다." 저자는 능력주의의 이상은 계층의 이동성에 있지, 평등에 있지 않음을 주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동시에, 능력주의가 완전히 구현될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하면서, 이는 이뤄질 수 없는 조건이고 이뤄진다 하더라도 완전히 공정한 것도 아니라 말한다. 너무 당연한 소리같다. 서로가 서로에게 빚지고 있음을 느끼고 공동체로써 유대감을 형성해야 하고, 일의 존엄성을 회복함으로써 능력의 시대가 풀어버린 사회적 연대의 끈을 다시 매도록 해야 한다는 심심한 말로 글이 마무리된다. 능력주의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능력있는 사람을 채용하는 것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무거운 짐을 옮기는 일엔 힘이 쌘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그 능력의 대가를 오로지 자신의 몫이라고 생각하는 교만이 능력주의의 횡포로 이어지고 있다. 승자와 패자 사이의 간극은 더욱 멀어지고, 패자의 불만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능력주의의 옳고 그름을 떠나, 이런 흐름에 많은 사람들이 동요하고 있으며 포퓰리즘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과연 인간이 모든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을까? 이 말이 맞다면 나는 의지가 약한건가? 어쩌면 맞는 말인 것 같기도 하다. 모두들 성공을 위해 노력한다고 하지만, 대부분은 '성공을 위한 노력'과 '현재에 안주하는 안락함' 사이의 적당한 타협점을 가지고 있다. 결국 그 타협점에 맞춰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아니면, 모든 능력과 환경은 주어지는 것이니 그저 흐르는 물처럼 겸손히 길을 따라 가야하는 것일까? 내 가정형편이 너무나 어렵고 열악했다면, 혹은 어느 전쟁터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면, 지금의 삶조차 이뤄낼 수 있었을까? 혹시, 지금 내가 가진 의지조차도 환경적인 요인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은 아닌가? 그것도 아니면, 반반인가? 사물로 존재하는 삼각형을 계속해서 확대하다 보면, 언젠가 그것은 더이상 삼각형이 아닌 울퉁불퉁한 다각형이 되어 있다. 삼각형은 실제로 존재할 수 없는 이상적인 개념이지만, 우리는 이런 이론적 개념을 파고들고 활용하며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다. 이처럼, 절대적인 객관성은 실존할 순 없으나 우리가 발전하기 위해 추구해야 할 기준이 된다. 능력주의도 마찬가지다. 현재의 능력주의가 가진 한계에 집착하여 기준 자체를 없애기보다, 이상적인 능력주의를 위한 노력과 연구를 끊임없이 시도해야 한다. 개인의 능력을 측정하기 위한 더 나은 패러다임이 생기기 전까지 능력주의는 마땅히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준을 확대하고 확대하여 디테일한 오류를 찾아 고치는 것이 우리 사회가 발전하는 방향이 아닐까 생각해보며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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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선진국은 한국에 비해 코로나에 돈을 얼마나 썼을까
정부 여당이 또 추경을 준비중이다. 20조원 안팎이 될 것 같다. 결국 빚이 될 것이다. 또 비판이 이어진다. ‘재정폭주, 후세는 안중에도 없나’ 같은 자극적인 기사가 등장한다.정부 빚을 줄이자는 주장은 늘 그럴 듯하다. 정부 재정을 아끼자는 충고다. 진짜 미래를 걱정하는 것 같다.하지만 거기까지다. 이 주장하는 사람들은 결정적으로 "지금 이 상황이 정부가 빚내서 돈을 더 쓸 상황이냐?"고 묻지 못한다. 왜냐면 "지금 이 상황은 정부가 빚내서 돈을 더 쓸 상황이기 때문이다".그럼 이 위기에 정부는 재정을 얼마나 써야할까? 우리만큼, 또는 우리보다 잘 사는 나라의 재정지출과 비교해보면 얼추 답이 나온다. 우리 정부가 재정을 너무 펑펑 썼는지, 너무 아꼈는지 가늠할 수 있다. 선진국의 지난해 재정 적자는 참담했다. 정부의 빚은 정말 눈덩이처럼 불었다. 일본은 지난해 재정 적자가 GDP의 -14.3%나 된다. 영국은 -13.3%, 프랑스는 -9.2%를 기록했다. 국가 재정에 매우매우 민감한 독일(독일은 재정이 파탄나서 히틀러 정권을 경험한 나라다) 마저 -4.5%의 적자를 기록했다.IMF는 지난해 10월, 선진국의 재정 적자폭이 평균 GDP의 13.1%에 달할 것으로 전망했다. 바이러스의 침공으로 국민들이 쓰러져가자, 다들 거둔 세금보다 13% 정도 예산을 더 쓴 셈이다.반면 우리는 GDP 대비 3.7%의 재정적자를 기록했다(통합재정수지/기획재정부/IMF 추산 한국의 기초재정수지(General Government Primary Balance 적자폭도 3.7%다).그런데 우리언론은 ‘통합재정적자 6배 늘어, 악어입 벌어진다’같은 기사를 쏟아냈다. 선진국의 재정 적자가 얼마나 천문학적인지는 굳이 살펴보지도, 말하지도 않는다.재정적자가 늘어난 것은 코로나 극복을 위한 재정지출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럼 구체적으로 얼마나 썼을까? 바이러스에 대응하는 재정부양책으로 우리 정부는 GDP의 3.5%를 썼다.반면 뉴질랜드는 GDP의 19.5%, 싱가포르는 16.1%, 캐나다는 12.5%, 미국 11.8%, 일본 11.3%(자료 IMF)에 달하는 예산을 경기부양에 쏟아 부었다. 그런데도 한국언론은 '무너지는 나라 곳간, 후손들 삶 막막...' 같은 기사를 내보낸다. 그럼 이들 나라의 후손들 삶은 얼마나 막막한가.오죽하면, 미 재무부가 한국 정부는 돈을 더 써야 한다고 지적한다. 지난 4월 미 재무부는 '거시경제·환율보고서'에서 ‘한국의 코로나19 재정 지출 규모가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너무 작으며, (한국의 역사에서는 큰 규모지만) 재정을 더 투입해 경제적 지원을 해야한다’고 지적했다.재정을 확대해 구체적으로 ‘청년들에게 경제적 기회를 넓히고’, ‘노년층의 빈곤을 예방’할 것으로 조언했다. 그런데 이 무렵 우리 언론에선 ‘재정적자 증가폭 역대 최대, 숨막히는 부채공화국’같은 기사가 쏟아졌다.그럼 우리 정부가 선진국보다 턱없이 낮은 수준으로 코로나 극복 예산을 써서, 재정 적자를 줄였으니 참 잘한 것일까?국가가 돈을 쓰지 않으면 국민의 부채가 늘어난다. 실제 지난 한 해 동안 우리 가계부채는 8.6%p(171조원)나 늘었다. 덕분에 가계부채는 이제 2,000조 원에 육박한다. 너무 힘든데 정부가 지원을 해주지 않자, 힘들어진 국민들은 결국 빚을 늘렸다.같은 기간 미국 국민들의 가계부채는 4.9%, 일본은 3.9%, 영국은 6.2%, 이탈리아 3.7%, 스페인은 5.6% 늘었다. 유로존의 평균 가계부채는 4.9% 늘었다(자료 BIS 국제결제은행).우리보다 훨씬 코로나가 심하게 창궐해 1년 가까이 가게 문을 닫은 나라의 국민들이 우리보다 빚은 덜 늘어났다. 그러니 우리 정부가 재정을 아껴서 재정 적자를 줄인 것이 과연 박수 받을 일인가? 어머니가 돈을 아껴 아들 빚이 훌쩍 늘어났는데, 그게 진짜 잘 한 것인가? https://n.news.naver.com/article/056/0011068869 하지만 홍 부총리는 아무리 봐도 쉬운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는 것 같다. 카드 캐시백, 소비쿠폰 확대 정책 같은 것보다는 전국민 재난지원금이 단순하고 정책 전달 경로도 명확하다. 재정 제약으로 상위 계층에 같은 금액을 줄 수 없다면, 이해하기 어렵고 효과도 의심스러운 생색내기용 정책 대신 소득에 따라 재난지원 금액을 달리하는 보편적 차등지급을 하면 된다. 하기 싫은 정책을 이렇게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 홍 부총리의 생명 연장의 비결인가 진짜 관료주의 폐해란말이 이분한테 딱어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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