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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탈북자들의 아이러니
이애란 (탈북자 출신 요리 연구가) 1964년 평양직할시에서 태어났다. 조모가 6.25 전쟁 당시 월남한 사실이 밝혀져 출신 성분에 불이익을 받았고 한지로 추방당하였다. 수학에 두각을 드러내었고 대학 진학을 희망했지만 출신 성분으로 인해 교사의 추천서를 받지 못하였다. 북한 신의주경공업대학 발효공학과를 졸업, 양강도 혜산시 과학기술위원회에서 주류 생산 공장의 품질감독원으로 일하였다. 그러나 미국에서 소설가 활동을 하던 친척이 쓴 소설이 문제가 되어 정치범으로 몰릴 위기에 처하였고, 결국 4개월 된 아들을 비롯한 가족들과 함께 1997년 8월 탈북을 선택한다. 이애란은 중국과 베트남을 경유하여 남한 입국에 성공하였으나, 한창 IMF 한파를 겪던 남한에서 어떻게 정착해야 할지 고민했다.1999년 4월 한 생명보험사의 보험 설계사로 취직하였다. 자존심이 강했던 이애란은 초기 보험 설계사로서 영업을 하는 것에 괴로움을 느끼기도 하였으나, 1년 만에 '프로급'으로 승진하는 등 남한 사회에 잘 적응하였다. 이애란의 남한 사회 적응기는 연합뉴스 기사로 보도되기도 하였다. 보험 설계사 일을 하면서 번 돈으로 본격적으로 북한 음식 관련 사업을 시작하였다. 2000년 연말 사당동에 토끼 고기 전문점 '씀바귀네'를 개업하였다. 2009년에는 이화여자대학교 식품영양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 탈북자 여성으론 최초로 박사가 되었다. 경인여자대학교 겸임교수, 신흥대학교 강사로 재직하고 있다. 또한 2008년 북한전통음식문화연구원을 설립, 한국에 북한 음식 문화를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서울 종로구에서 '능라밥상'이라는 북한 음식 전문점을 경영하는 등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2012년 2월 23일 중국의 탈북자 강제 송환에 반대하여 거리 시위를 직접 시작했으며[7] 단식 농성을 벌이는 등 북한 인권 운동에 나섰다.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국민실향안보당의 비례대표로 출마하였으나 당선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이애란은 남한에서 탈북 여성, 초/중학생들을 경제적으로 돕는 등 탈북자들의 정착을 꾸준히 지원하였다. 이러한 공로를 기려, 2010년 3월 11일에는 미국 국무부에서 주는 '국제 용기 있는 여성상'을 수상하였다. 이애란은 2014년 3월 31일 디지털 조선일보에 “[탈북여성 1호 박사 이애란의 북한 통신 8편] 북한 보위부의 ‘민생단’ 전술과 유우성 사건”이라는 제하의 칼럼을 실었다.이 원장은 이 칼럼에서 “(유우성이) 북한을 제집 드나들 듯 했다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상식 밖의 일”, “유우성은 서울시청에 근무하는 점을 이용해 2만여 명 탈북자들의 신상명세서도 북한 보위부에 넘겼다고 한다”, “일부에서는 이미 간첩으로 판명돼 법적 판결이 이뤄진 사건까지도 조작된 것이라고 뒤집으며 언론을 통해 여론몰이에 나서고 있다”는 등 유씨를 간첩으로 단정했다.서울중앙지방법원 제14민사부는 판결문에서 이와 같은 주장에 대해 “허위 사실에 관한 정정보도 청구권이 인정된다”며 “디지틀조선은 명예훼손으로 인해 유씨가 입은 정신적 고통에 대해 위자료를 지급할 책임이 있다”고 밝혔다. 이에 디지털조선일보는 9일 조선일보 홈페이지에 “사실 확인 결과, 유우성이 북한을 자유롭게 왕래하거나 북한 보위부에 탈북자의 신원정보를 전달하였다는 보도 내용은 사실이 아니고, 당시 유우성이 간첩으로 판명된 판결이 선고된 바 없으며 최종적으로 간첩 혐의에 대하여는 무죄가 확정되었으므로, 이를 바로 잡는다”며 정정보도문을 게재했다. 그러나 칼럼을 쓴 이 원장은 10일 유씨를 간첩으로 단정한 것에 대해 “언론에 나온 거를 그냥 쓴 것”이라며 “그때 당시에 탈북자들 사이에서 여러 사람이 넘어갔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이 원장은 ‘유씨가 북한을 제집 드나들 듯 했다’고 주장한 근거를 묻자 “그 사람(유우성)이 (북한에) 왔다갔다고 동생이 얘기하지 않았느냐”고 대답했다. ‘국정원에 의한 강요된 자백이었다’고 설명하자 “강요받은 자백이었느냐”며 “내가 국정원이나 검찰에 가서 (사실인지) 물어볼 수 있겠느냐. 언론이 보도하니 다 밝혀진 건가하고 쓴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2016년 11월 민중총궐기 맞불집회에서 박근혜 하야 반대 집회를 참석하였다. 탈북해서 정치적으로는 애국보수 집회 활동
맷돌창법작성일
2017-01-31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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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9월 19일 지구촌 오늘
9.11 테러 15주년을 맞은 미 뉴욕에서 폭탄폭발로 29명이 부상을 당했다. 폭탄은 건물 공사장 앞에 놓인 대형 쓰레기통 근처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미연방수사국은 폭발지점 부근에서 비닐봉지에 전선으로 휴대전화가 연결되어 있는 압력밥솥을 발견해 이번 폭발과 관련이 있는지 조사하고 있다. 사진은 폭발 사고가 발생한 지 하루가 지난 18일(현지시간) FBI 요원들이 사고 현장에서 증거를 수집하고 있고, 사고 이후 치안 경계 수위가 강화돼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 지하철 내부,헤럴드 스퀘어 등 곳곳에서 무장경찰들이 순찰을 하고 주변을 살펴보고 있다. 사진 왼쪽 맨 위는 폭발지점 부근에서 발견된 압력밥솥. 미 뉴욕에서 18일(현지시간) 한-미-일 외무장관 회담이 열린 가운데 윤병세 외교부 장관,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 존 케리 미 국무장관이 손을 맞잡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중,러 합동훈련 '해상연합-2016'을 실시 중인 양국 군함들이 18일(현지시간) 광둥성 인근 남중국해에서 주포를 발사하고 있다. 중러 양국 해군은 이번 훈련에 군함 13척, 잠수정 2척, 고정익 항공기 11대, 함재 헬리콥터 10대, 장갑차, 해병대원 256명 등을 대거 투입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기독민주당(기민당)이 수도인 베를린 주의회 선거에 역대 최저 득표를 하며 패배한 가운데 18일(현지시간) 선거에서 약진한 극우성향 ‘독일을 위한 대안(AfD)’ 의 게오르크 파츠데르슈키 후보와 공동 당수인 AfD의 외르크 모이텐 후보가 출구조사결과에 기뻐하고 있다. 18일(현지시간) 실시된 러시아 총선에서 친 푸틴계열인 통합러시아당이 압승한 가운데 상트페테르부르크 외곽의 한 투표소에 군인들이 투표를 하기 위해 줄을 서 있다. 미 뉴욕 다그 함마르셸드 플라자에서 18일(현지시간) 유니세프 모금행사가 열린 가운데 자원봉사자들이 난민 어린이들의 사진과 추모의 촛불을 들고 서 있다.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18일(현지시간) 브라질 최초의 개 올림픽이 열렸다. 개 올림픽에는 다이빙, 수영, 점프,육상 등 4개 종목에 다양한 연령과 크기의 개들이 출전해 실력을 겨룬 가운데 '미마'라는 이름의 개가 점프 종목에 출전하고 있다. 개공원의 소유주이자 개 올림픽 주최자인 마르코 안토니우씨는 스포츠를 통해 인간과 애완견의 친화력을 높이는 것이 이번 대회의 목표라고 말했다.알카에다와 관련 있는 아부 사야프 이슬람 무장 조직으로부터 납치돼 1년만에 풀려난 노르웨이 국적의 키아르탄 세킹스타드가 18일(현지시간) 필리핀 남부 다바오시티에서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과 회동 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아부사야프는 세킹스타드의 몸값으로 약 7억원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경로의 날을 맞은 19일(현지시간) 일본 도쿄에서 노인들이 나무로 만든 덤벨을 들고 운동을 하고 있다. 지난 13일 공개한 정부의 자료에 따르면 일본에서 만 100세 이상 노인이 6만5000명을 넘어 노인 비율이 46년 연속 최고 기록을 경신했다. 스페인 마드리드 패션위크가 열리고 있는 가운데 18일(현지시간) 한 모델이 마리아 피셔먼의 2017 SS 컬렉션을 선보이고 잇다. 중국 후난성 다오현 웨옌 동굴에서 요가 수련자들이 단체로 요가를 하고 있다.코소보 수도 프리스티나의 술탄 메흐메트 파티흐 모스크에서 이슬람 '이드 알 아드하' 축제를 맞아 어린이들이 기도하고 있다.케냐 마사이마라 국립보호구역에서 거대한 악어가 무리에서 떨어진 누를 공격하고 있다.브라질 상파울루에서 열린 미셰르 테메르 대통령 반대 시위에서, 한 참가자가 쓰레기통을 머리에 쓰고 있다.영국 런던 히스로 국제공항에서 착륙하는 여객기 뒤로 동이 트고 있다.이집트 카이로의 알세디크 모스크에서 이슬람 교도들이 '이드 알 아드하' 축제를 맞아 기도하고 있다.캐나다 토론토 국제영화제에서 열린 영화 '더 프로미스' 시사회에서 미국 배우 오스카 아이작(왼쪽)이 프랑스 배우 샬롯 르봉의 다리에 사인하고 있다.카자흐스탄 알마티의 센트럴모스크에서 도살업자가 이슬람 '이드 알 아드하' 축제에 쓰일 양을 안고 있다.중국 랴오닝성 단둥에서 북한 신의주를 연결하는 '신압록강대교'가 완공을 앞두고 있다. 네덜란드 경찰학교에서 훈련 받은 독수리가 드론을 잡고 있다. 네덜란드 경찰은 드론 단속에 독수리를 투입할 예정이다. 반대 시위 여성에 눈이 밑에 달렸군요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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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안보, 어느 쪽이 더 잘하는 걸까?
목함지뢰 이후 남북관계가 더욱 경색되어가는데사실 문제는 이겁니다.김대중 노무현 10년 동안 해놓은 것과이명박 박근혜 10년 동안 해놓은 게 뭐냐는 거죠. 김대중 때 연평해전 일어났습니다. 핵문제로 골치 아팠지만,솔직히 핵문제는 남한이 중재 정도나 할 수 있지직접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북미 관계가 개선되어야 해결 가능한 문제이기 때문이죠. 그 외엔 6.15, 10.4 선언을 성공시키며여러가지 진척을 보았습니다.이는 밑에서 좀 더 적겠습니다. 반면, 이명박, 박근혜는 어떻습니까. 이명박 때 어떤 아주머니가 금강산에서 총 맞아 돌아가셨죠.이명박 때 연평도에서 뚜들겨 맞았습니다. 그외 신뢰도가 떨어지지만 정부 발표를 곧이곧대로 믿는다면천안함이 정말 북한 소행이라면 천안함도 두동강 났고농협이 해킹당했죠. 박근혜 때개성공단 완전 파탄 직전이었고,서로 중단했던 심리전도 부활하고 정부 발표를 신뢰한다면 목함지뢰 사건도 터졌습니다. 대신 이명박과 박근혜가뭔가 개선시키거나 진전시킨 것은 하나도 없죠. 안보는 보수진영이 잘한다 하는데사실 안보측면에서도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의 성과가 더 많습니다. 6.15 공동선언 이후 시행된개성공단, 금강산 관광은 경제적인 효과도 있지만 군사적 의미도 있습니다.둘다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점인데,북한의 입장에선 군사적 요충점을 다소 내어주고 전선을 다소 후퇴시킨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래는 노무현 대통령의 10.4 선언 중 일부입니다. ----- 남과 북은 해주지역과 주변해역을 포괄하는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를 설치하고 공동어로구역과 평화수역 설정, 경제특구건설과 해주항 활용, 민간선박의 해주직항로 통과, 한강하구 공동이용 등을 적극 추진해 나가기로 하였다. 남과 북은 개성-신의주 철도와 개성-평양 고속도로를 공동으로 이용하기 위해 개보수 문제를 협의·추진해 가기로 하였다.남과 북은 안변과 남포에 조선협력단지를 건설하며 농업, 보건의료, 환경보호 등 여러 분야에서의 협력사업을 진행해 나가기로 하였다. ---- 평화협력특별지대는 군사적으로 주요 충돌지점인 서해에서의 충돌가능성을상당히 약화시키는 효과를 가져옵니다. 개성, 신의주 철도, 안변과 남포(강원도 북부)에 경제협력을 하면서이도 금강산, 개성공단 같이 북한 내부지역으로의 도로 및산업단지를 조성하면서 군사적 완충지대 역할을 해주기도 합니다. -----남과 북은 백두산관광을 실시하며 이를 위해 백두산-서울 직항로를 개설하기로 하였다.----- 위도 10.4선언 일부인데 백두산 서울 직항로를 개설하면북한 상공으로 비행기가 떠다닌다는 이야기입니다.물론 위성으로 북한 내부를 볼 수도 있겠지만상시적으로 북한 하늘을 비행기가 떠다니는 게북한으로서도 결단이라면 결단이고, 신뢰의 표시이기도 합니다. ----이를 위해 금강산면회소가 완공되는데 따라 쌍방 대표를 상주시키고 흩어진 가족과 친척의 상봉을 상시적으로 진행 하기로 하였다.------ 이 또한 10.4 선언 내용인데,이산가족 상봉을 박근혜가 제안했는데 북한이 거절하고 뭐하고,사실은 10.4 선언을 지켰다면이벤트 성으로 설이나 추석 때 한번씩 하는 게 아니라상시적인 상봉이 지금쯤 완전히 자리잡았어야 합니다. 남과 북 가족들이 편지 교류 등으로 약속을 잡으면금강산에서 만나는 식이었습니다. 저번 글에도 적었지만, 민간교류가 활성화 되는 것이솔직히 대북심리전 방송 듣는 것과 비교해 영향이 작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본 내용들은 경제 및 인도적 사업들이지만사실 국방 및 안보 이슈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들입니다.애초에 북한과의 사업은 안보 문제와 반드시 결부되어 있기 마련입니다. 김대중 때의 연평해전을 13년이 지난 지금에도 우려먹는데김대중 노무현 때에 실질적인 군사적 충돌은 그게 거의 전부입니다. 안보교육을 하려면 왜 연평도 포격전이라는 최근 년도의 일을 사용하지 않고연평해전을 아직도 들먹입니까? 반면 김대중 노무현 때 이뤄놓고 진전시킨 것은 많습니다. 그런데, 이명박과 박근혜가 한 일은 무엇입니까?얻어터지기만 하고, 강경대응한다면서고작해야 남북관계를 경색시키는 것 뿐실제로 강경대응하고 또 이뤄낸 게 뭐가 있습니까?그러면서 통일세나 걷자고 하고내년에 통일될 수도 있다고 뻘 소리만 하고.실익은 없고. 보수가 안보를 잘한다는 건우리나라에서는 안들어맞습니다.새누리당을 보수라고 칠 수 있다면요.
lt작성일
2015-08-19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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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조선통신사가 바라본 일본
- 조선 통신사 김인겸의 일동장유가에서 발췌 -
1764년 1월 22일 오사카숙소 곁에 높은 난간 위에 앉아 사면을 바라보니,지형도 신기하고 인구도 많을시고 백안이나 되어 뵌다.우리나라 도성 안은 동에서 서에 채 십리가 못되는데부귀한 재상들도 백간집이 금법이요, 다 모두 흙기와를 이었는데장할 손 왜놈들은 천간이나 지었으며,그 중에 부유한 놈 구리기와 이어놓고, 황금으로 집을 꾸며 사치하고,남에서 북에 오기 백리나 거의 되되, 가옥이 빈 틈 없이 빽빽이 들었으며한 가운데 낭화강이 남북으로 흘러가니, 천하에 이러한 경치가 또 어디 있단 말인고?북경을 본 역관이 일행중에 와 있으되, 중원의 장려하기 이에 낫지 않다네.이러한 좋은 세계 해외에 배판하고, 더럽고 못쓸씨로 구혈을 삼아 있어주평왕 때 입국하여 이제까지 이천년을 흥망을 모르고서한 성으로 전하여서 인민이 생식하여 이처럼 번성하니,하늘도 모를 일이라. 탄식하고 한탄한다.
1764년 1월 28일 쿄토
가옥도 많고, 흔한 것이 대밭이다. 토지가 기름 져서 전답이 매우 좋네.이십리 실상사가 삼사상 조복할 때 나는 내리지 않고고, 왜성으로 바로 가니,인민이 부려하기 오사카 만은 못하여도 서에서 동에 가기 삼십리라 하는 구나.관사는 본룡사요, 오층 문루 위에 열 아문 구리 기둥이 하늘에 닿았구나.수석도 아름답고, 죽수도 부드럽네. 왜왕이 사는 데라 사치가 셀 수 없다. 산형이 웅장하고 수세도 둘러싸여 기름진 들판이 끝없이 생겼으니, 아깝고 애닳다.이리 좋은 하늘이 준 땅을 왜 놈의 것이 되어 스스로 황제를 칭하여 자손이 부르니
개 같은 왜인들을 다 모두 소탕하고 사천리 육십주를조선땅으로 만들어서 예의국을 만들고 싶다.
1764년 2월 3일 나고야
육십리 나고야를 21시에 들어오니 번화하고 장려하기 오사카와 같다.
밤빛이 어두워서 비록 자세히 못 보아도 산천이 광활하고 생식이 번성하며전답이 기름지고 가사에 사치하기가 일로의 제일이라.중원에도 흔치 않으니, 우리나라 삼경을 갸륵하다 하건마는 이곳에 비하여 보게되면 매몰하기 가이 없네.(중략) 그 중에 계집들이 일색이라 샛별 같은 두 눈이 주사같은 입시울에
이는 백옥 같고 눈썹은 나비 같고 뼈오리 같은 손과 눈으로 무어 낸듯
사람의 혈육으로 저리 곱게 생겼는고 조비연 양귀비를 만고에 일커르나
예다가 놓으면 응당히 무색하리 월녀천 하백이 진실로 옳을시고
1764년 2월 16일 에도(도쿄)십육일 우장 입고 에도로 들어갈 때 왼편은 가옥이요, 오른편은 바다로다.피산 대해 하여 옥야천리 생겼는데, 누대제택 사치함과 인물남녀 번성하다.성첩이 정장한 거소가 교량주즙 기특한 것이 오사카보다 삼배나 더하구나.좌우의 구경꾼이 무수하니, 서어한 붓 끝으로는 아무것도 기록을 못하겠구나삼십리 오는 길에 빈틈없이 묶었으니, 대체로 세어보면, 백만이 여럿일세여색의 아름답고 고운 것이 나고야와 같다.
일본 에도시대
1773년 11월 26일http://www.kabuki-za.com/syoku/no12.html1774년 2월 3일http://www.kabuki-za.com/syoku/no19.html1775년 8월 16일http://www.kabuki-za.com/syoku/no17.html
매일 매일 메뉴 기록까지 보존되어 있음
에도시대 일본인들이 가부키 극장 관람후
예약한 레스토랑에서 무엇을 먹었는지 현재에도 알 수 있다.
랭킹표
가장 잘나가는 스모선수 , 가장 잘 팔리는 술 종류
이런걸 순위로 만든 랭킹표가 에도시대에 존재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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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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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 10년 (1810년) 4월
내년에 조정에서 일본 측으로 통신사를 보낸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내가 거기 함께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나는 왜놈들에게 관심이 없다. 불과 이백 여 년 전에 조선을 침략하지 않았던가.
박제가의 북학의에서 그들이 사는 도시를 얼핏 들어본 바는 있다만
그것은 너무 과장되어 있는 것이고 그런 도시는 있을 수도 없다.
소북 계열인 그 놈이 무엇을 알겠으며 십여 년전 유배를 간 것도 다 그 이유가 있으리라 싶다.
중화를 멀리하고 왜놈을 높이 샀던 것은 반역의 음모도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순조 11년 (1811년) 10월
우리 통신사 일행은 일본에서 보내온 안내인을 따라서 부산을 떠나 쓰시마 북단에 있는 와니우라로 가는 중이다.
우리 일행의 배는 총 6척으로 일본인 선원들이 같이 타고 있다. 상사선과 부사선에는 각각 세 명, 3선과 4선에는 각각 두 명, 5선과 6선에는 각 한 명이 나누어 탔다.
바람이 부드럽다. 바닷새가 우리 주변에 몰려든다. 오랜만에 바다를 보니 참 좋다. 쓰시마로부터 작은 배 여섯 척이 환영차 마중을 나온 듯싶다.
우리 배를 둘러싸며 호위하며 선두에 섰다. 악기 연주하는 소리가 온 하늘에 울러 퍼지고 깊은 바다에 스며든다.
그 진동에 물속에 있는 물고기들이 마땅히 놀람직하다. 굉장히 인상적이다.
순조 11년 (1811년) 11월 7일
해가 돋았다. 선실을 나가 문설주를 잡고 섰다. 사면이 바다다. 굉장하다. 세상에 이런 구경이 또 있을까 싶다.
온 우주에 사방에 물결만이 있다니, 과연 신은 존재하는구나 싶다.
순조 11년 (1811년) 12월
오사카라는 도시는 정말 굉장하다. 수만 아니, 수십만이나 되는 집이 모두 기와집이다.
여기 부자라는 놈들의 집은 조선의 부자와는 비교할 수가 없다. 그 집의 규모는 마치 조선의 왕과 같이 넓고 그 집의 높이도 층층이 높다.
저렇게 높게 쌓아 올린다면 반드시 무너질 것이라 나는 올라가기를 꺼렸으나 탑처럼 생긴 집들은 그 견고함이 이루 말할 수 없다.
내부의 여러 곳이 황금을 장식되어 있다. 이러한 사치스러움이 조정에도 있었던가? 아니다.
조정도 흉내 내지 못할 것들이 여기 일개 왜인의 집에 이렇게나 많다. 도시의 크기는 한양만하다.
모두가 이다지 번영하고 풍족하게 살 수 있으려면 땅이 넓어야 되는데 그것도 아니다.
왜인들은 도대체 어떤 발전을 하고 있길레 한양의 발전의 수십 배에 달하는 이러한 풍요를 누리고 있는가?
이렇게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가 너무나도 궁금하다.
혹시나 조선통신사가 온다고 이 지역만 특별히 이렇게 꾸며놓은가 싶어 다른 지역도 가보았다.
아니다, 오사카의 모든 곳이 이렇다. 그래, 박제가가 옳았다. 그가 옳았다!
그의 기술은 모두 사실이었던 것이다. 조선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순조 11년 (1811년) 12월
여기는 교토이다. 이 도시는 오사카 정도는 아니지만, 왜왕이 사는 도시인지라 사치스럽긴 마찬가지이다. 왜왕의 성벽마저 사치스럽다.
아니다 사치보다는 아름답다. 나도 이 풍요에 길들여 져버린 것인가.. 더 이상 사치스럽다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왜국에 있고 왜국의 눈으로 이 풍요를 보기 시작했다. 강에 모인 아녀자들이 매우 아름답다. 여자들이 입고 있는 베가 고급스러워 보인다.
순조 13년 (1813년) 1월
나는 재작년 조선 통신사의 서기로 갔다. 온 이후 아직 그 풍요의 충격에 있다..
일본을 무로서 대하던 관점을 탈피하여 문의 일본을 바라보려고 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서 나타나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이를 ‘실사구시’ 라고 한다.
순조 13년 (1813년) 2월
날이 추워진다. 백성들은 가난에 굶주리고 먹을 걱정만 하고 있다. 왜인들은 겨울을 어떻게 나고 있는지 궁금하다.
다시 그곳으로 가서 구국의 길을 모색하고 싶다.
나같이 역사적 통신사로서 일본에 가지 않으면 사람들은 일본을 보고 배울 기회가 전혀 없다.
일본을 접해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 나는 오늘부터 내가 보고 배운 것을 철저하게 객관적으로 기록하고자 한다.
해사일기, 일본록, 승사록, 화국지 등 일본에 관련된 모든 자료를 읽고 수집하여 나의 관찰과 집대성하고 하고자 한다.
순조 13년 (1813년) 3월
대규모의 사절단을 일본에 파견하였고 방대한 견문록이 저술되긴 하였으나 이들의 기술력을 제대로 언급한 적은 없었다.
일본으로부터 도입한 것은 고작 물레방아나 고구마 재배 등에 국한되었다는 것이 난 믿기질 않는다.
이는 우리가 일본을 너무 성리학적 테두리에 가둬놓고 생각한 당연한 결과이며 한계일 것이다.
왜놈들의 일본 경제상에 대해서 내심 경탄하면서도 우리는 왜 화이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는가 대체 알 수 없다.
이들이 강력한 무기를 가져와 쳐들어온다면 우리는 막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있는 그대로의 일본을 직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가 서로를 마음으로는 경멸하면서도 외교를 하고 있었다. 가면을 써가면서 까지 왜 거기서 배우지 못했냐는 말이다.
일본은 무에서 한국은 문에서 강세를 띠며 대등한 외교관계를 하고 있었다.
대일외교관계를 담당한 조엄이라는 작자는 어떻게 이러한 발전상을 보고도 혹평하였는지 궁금하다.
일본의 물레방아, 절구, 제방 공사 등을 견학하고 도입하려 했던 것은 높게 사나 그는 정말 현상을 볼 줄 모르는 인물이다.
왜인들이 만들어 논 사회를 봤어야 옳다. 조엄 이놈은 역사에 남을 죄인이다.
순조 13년 (1813년) 3월
박제가가 유배생활을 끝으로 어디선가 죽었다고 한다..
팔을 걷어 올리고 일본을 따라잡아야 할텐데 조선은 대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가 모르겠다...
이백십작성일
2015-01-06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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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글터] 노르망디의 한국인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동방대대 소속의 병사가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미군에게 포로로 잡힌 사진으로 수많은 네티즌들을 충격에 빠뜨렸고, 이후 국내에서 이 사건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발단은 밴드 오브 브라더스로 유명한 스티븐 앰브로스의 책에 있었던 유타 해안에서 로버트 브루어 중위가 언어가 통하지 않는 동방대대 출신의 병사를 심문했는데 그가 한국인이었다는 설명으로 시작되어 어느 네티즌에 의해 상기의 사진이 한국에 알려지면서 많은 이들이 이 사람의 행방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 사진의 사람이 한국인이란 증거는 사진과 언급된 정보 말고는 없다. 포로 정보 관리는 어떻게 한거냐 연합군 당시 심문자와 참전자만 알고 있는 비밀대충 유타 해안의 한국인이 어쩌다가 이런 모진 일을 겪었는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추측이 있다.1.1 소련군에 징집된 일본군 포로설 일본의 징병으로 끌려감 → 할힌골 전투에서 소련군의 포로가 됨 → 독소전쟁에서 병력이 부족한 소련군이 이들을 소련군으로 징집함 → 독일군의 포로가 됨 → 독일군도 병력보충을 위해 이들을 군사로 씀 → 노르망디에서 연합군에게 붙잡힘.문제는 할힌골 전투나 중일전쟁 때 겉으로는 포로가 되면 안된다고 주장하던 일본군이지만, 나름대로 이면에는 포로 교환 교섭을 했었다는 것을 볼때 소련의 포로에서 소련군 징집은 생각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그러니 마이웨이에서처럼 일본군 포로설은 희박하다. 1.2 고려인? 혹은 중앙아시아계 소련인? 그래서 나온 다른 설은 저 동양인은 원래부터 소련에 거주하던 사람, 즉 고려인이 징집되었다는 설이다. 독소전쟁 당시 소련군 포로 사진 등을 보면 한국인이 아니더라도 동양계 병사들도 드문드문 있다.고려인들은 대독전쟁에는 나름 참전한 경우가 있다. 겐나디 한(1919~1943) 같은 경우는 동아시아계로 드물게 공군 조종사로 복무하며 나치와 싸우다가 격추당해 목숨을 잃었다. 6.25 전쟁 때 조선인민군 총참모장이었던 남일 또한 소련군에서 대위까지 오른바 있다. 소련군에는 동양인이 꽤 많이 섞여 있었고, 고려인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계 소련인도 무차별 징집했으므로 동양인이라고 해서 조선인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무리다. 그러므로 소련군의 동양계 병사- 포로 - SS에 부역의 설이 더 신빙성이 있다.무장친위대에 중앙아시아계 소련인 부대가 공식적으로 편제되어 있었으므로 오히려 "아시아계 소련인설"이 가능성이 높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는 달리 소련군에 아시아인이 상당히 많았기 때문에, 이들이 독일에 포섭되어 무장 친위대에 참여한 것은 별로 이상한 것은 아니다. 이런 독일 부역자를 심사하기 위해 소련군은 스메르쉬를 만들어 호환된 포로 전원을 심사하여 처형하거나 혹은 굴라그로 보냈다. 2 행로는? 이들이 누구이며, 또한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는데 이들의 최후에 대해 앰브로스 등은 "아마 한국으로 돌아가서 한국전쟁을 치렀을 것이다"라고 하고 있으며 어떤 사람들은 다시 소련으로 끌려가 처형당했다[10]고 주장하며 어떤 이들은 그들이 미국에 남아 여생을 지냈다고 추측하나 어느 것도 알 수가 없다.일단은 실제로 이런 사람들이 5~10명 정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사실 연합국은 소련군 전향 포로와 러시아 혁명 이전부터 망명한 코사크계, 백계 러시아인들을 소련에 다시 넘긴 사례도 있었다. 본문 아래의 사례 같은 해피 엔딩이 많기만 바랄 뿐. 사실상 소련군 전향 포로에 대해서 2가지 사례가 모두 공존한다고 보면 된다.어찌보면 역사의 거대한 물결에서 기구한 삶을 산 사람들이라 할 수 있겠다. 비슷한 사례로 일본군에서 중국군(팔로군), 북한군을 거쳐 다시 한국군에 복무한 할아버지도 있다(#).저 사진의 사람인지는 불명이나 위의 이야기는 양경종이라는 조선인의 경험이라는 뜬소문이 돌고 있다.1920년 출생으로 신의주 출신이었던 양경종은 1938년 징집되어 관동군에 배속되었고, 할힌골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다. 자원입대가 아니란 사실을 밝힌 양경종은 곧바로 소련군에 편입되었으며, 1943년 여름 우크라이나 전선에서 다시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다. 독일군에도 똑같이 자원입대가 아니란 사실을 밝히고 "밥만 배불리 먹으면 됩니다"란 말을 들은 독일군 장교는 양경종을 독일군 동방대대에 편입시켰다. 이후 다시 1944년 노르망디 유타 해변에서 포로가 되었고, 영국의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종전 직후 석방된 그는 1947년 미국으로 이주했으며, 1992년 사망할 때까지 전쟁에 대한 이야기는 다시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고 한다. 위의 이야기는 미군에 포로로 잡혔을 당시 심문 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다만 2차세계대전 갤러리에선 양경종을 구라라고 확신하는 듯하다.이 '양경종 설'이 구라라는 증거는 다음과 같다. 애초에 양경종 설이 출현한 것은 2004년 초 도깨비뉴스의 기사《이 1장의 사진: 민족의 비극 그러나 강인한 민초…》의 댓글 중에서였다. 위의 사진을 소개하는 이 기사의 댓글란에 'truth'라는 닉을 쓰는 익명의 인물이 다음과 같은 댓글을 남겼다: 이름 : 양경종생년월일 : 1920년 3월 3일본적 : 신의주관동군 입대 : 1938년노몬한 전투 참전 때 소련군 포로1943년 여름 우크라이나 지방에서 독일군 포로1944년 6월 6일 프랑스 노르망디 유타 해변에서 미군 포로1945년 5월 영국 포로수용소에서 석방1947년 미국으로 이주1992년 4월 7일 미국 일리노이 주 노스웨스턴 대학 부근에서 거주하다 사망평범하게 태어나 수많은 전쟁참화를 겪은 뒤 미국으로 이주40년 넘는 세월을 평범한 미국 시민으로 생활슬하에 2남 1녀 자녀 둠.결코 가족들에게는 자신의 전쟁 경험을 이야기 한 적 없다고 전해짐.해당 기사의 기자는 추가 사실 확인을 위해 개별적으로 연락을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이 익명의 인물은 더 이상의 정보를 남기지 않았다. 양경종이란 인물이 실존 인물이고 자녀가 존재하며 제3자가 행적을 알고 있을 정도라면, 이미 당사자가 고인이 된 마당에 추가 정보 공개 요청에 응하지 않았을 이유가 없다. 또한 언론 및 관련 동호인들의 집요한 추적에 걸려들지 않았을 리도 만무하다. 아울러 다른 이외의 어떤 객관적인 자료도 위의 댓글의 신빙성을 뒷받침하지 않고 있다. 현재로서 '양경종 설'은 정체 불명의 누리꾼에 의한 낚시질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애초 내용도 뭔가 미심쩍고 앞뒤가 맞지 않는다.2005년에 SBS 스페셜에서 "노르망디의 코리안"이라는 제목으로 이들에 대한 2부작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21~22회)#2007년에 발표된 조정래의 역사소설 <오 하느님>은 이 한국인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이를 중심 소재로 삼은 영화 마이 웨이(강제규 감독 작품)가 2011년 12월 22일에 개봉했다. 장동건, 오다기리 죠, 판빙빙(范氷氷) 등 캐스팅이 매우 화려하다중국의 밀리터리넷에서는 이 사람을 중국인이라 주장하고 있다. 3 결론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노르망디에서 연합군 포로가 된 한국인은 있었다. 그러나 이 사진의 사람이 양경종이라는 사람이라는 증거는 없다.. 그가 누구인지는 잘 모르지만 이 사진의 주인공 또한 역사의 희생자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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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국정원 댓글 사건 北 비밀편승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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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민의 시사탱크]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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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tv.chosun.com/site/data/html_dir/2013/11/01/2013110190238.html
북한이 국정원과 군 사이버사령부의 댓글 사건, 이석기 사건 같이 사회적 파장이 큰 정치적 사건에 개입해, 사회 혼란을 야기시키고 있다는 충격적인 주장이 제기돼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북한이 구 소련 KGB가 창안한 일명, ‘비밀편승공작’으로 한층 진화된 대남 심리전을 펼치고 있다는 것인데요. 비밀편승공작은 무엇이고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정영철 전 안기부 해외공작실장과 긴급분석합니다. 안녕하세요?
[주요발언] 정영철 / 前 국정원 해외공작실장
"30년 이상 국정원 해외파트·대북공작 파트서 일해""北, 댓글 사건 원인 제공자""댓글 사건, 北 심리전의 일환" "댓글 작업, 합법과 불법 사이의 경계 찾기 어렵다" "비밀편승공작, 고도의 심리전""일반인, 北의 심리전 여부 판단 어려워" "北, SNS·인터넷에서 대남교란심리전 진행 중" "北 심리전 대응차원 역정보 흘려도 소용없다""北의 비밀편성공작에 대해 국민들 알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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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댓글 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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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인터넷 댓글 문화가 활성화되면서
북한의 대남 선전 전략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통일전선부 출신 탈북 작가 장진성씨는
북한의 통일전선사업부에서는 이러한 대한민국의 변화에 발맞춰
대남 선전 전략의 일환으로 '인터넷 댓글팀'을 운영하고 있다고 증언했다
댓글팀은 2001~2년 경부터 대남 선전 업무를 총괄하는
통일전선부 산하의 '101연락소 3국'에서 운영하고 있다
'인터넷 댓글팀'이라는 명칭이 달린 부서가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제 3국에 소속된 요원들 중에 인터넷을 이용하여 대남심리전을 펼치는 팀이 존재한다
101연락소 팀의 경우 30명 가량의 한국 문화 전문가들로 이뤄져 있다
팀원들은 대한민국 네티즌들의 신조어 사용에도 능통하다
댓글팀 사무실에 노크를 하면 안에서 "들어오삼"이라는 말을 할 정도다
이들은 네이버와 다음 등 각종 유명 포털 사이트에서
여론조작을 위한 댓글을 게시한다
활동 목적은 북한 대남 선전전략의 제1목표인
대한민국 내 친북세력의 확장이다
장씨는 "북핵이 남한을 위한 핵이라는 식의
댓글을 다는 거을 목격한 바 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북한군 대좌(한국의 대령) 출신의 채명민씨 또한
데일리NK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터넷 여론 조작을 담당하는 북한의 요원들은
중국으로 건너가 대한민국 여론 조작 작업을 벌인다
선거철이 되면 대형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
여론을 파악하고, 민감한 논쟁 거리를 던진다
2002년 대선 당시에도 노무현 전 대통령을
당선시키기 위해 여론 활동을 벌였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건은
이들 북한 요원들이 종종 실수로 북한 말을 쓴다는 것이다
그는 "예전에 다음 아고라에서
어떤 네티즌이 부산 출신이라고 소개하면서
글을 올렸는데 '인차'라는 대한민국에서는
전혀 사용하지 않는 북한말을 쓰는 것을 봤다
인터넷 대남 공작 요원들은 대한민국 언어와 문화에 대해
훈련을 받지만 가끔 그런 실수가 나온다"
북한의 해커들은 인터넷 여론 조작에 활용하기 위해
대한민국에서 인터넷에 익숙하지 않은 국내 장년층들의
주민등록번호를 상당수 확보해 놓고 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요원 한 명당
평균 150여 개의 주민등록번호를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네이버와 다음은
주민번호 하나 당 각각 4, 5개의 ID를 생성할 수 있기 때문에
소수의 북한 해커 부대가 여러 개의 ID를 생성해
대한민국의 인터넷 여론 조작을 시도하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북한의 인터넷 공작팀은 종종 비속어 물량 공세를 취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서 '쥐새끼', '쥐박이' 등
원색적인 표현을 사용한 글을 대량 게시한다
물론 이들은 자신의 존재를 숨기기 위해 북한식 비속어는 자제한 채
한국의 종북 진영이나 반정부 성향의 인사들이 생산한
논리와 비속어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북한 인터넷 공작팀이 비속어를 적극 활용하는 것은
보다 자극적인 선동을 위한 전술로 해석된다
2007년 디도스 공격을 포함,
일련의 사이버 테러는 모두가 북한의 소행이며,
이것을 직접 지휘한 인물이 지금의 김정은이고,
현재 대한민국에는 아직도 좀비 PC가 20만여 대가 남아 있다
따라서 우리가 모르는 사이 북한의 심리전은
어느새 우리 곁에서 지금 우리와 호흡을 같이 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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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탈북스토리 - 장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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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한국에서 홀로 힘들 때마다 긴장과 공포로 숨 가빴던 탈북 순간들을 생각해보곤 한다. 국적을 버릴 자유까지 허용돼 있는 자유민주주의 사고로는 탈북이란 것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결단인지 가늠조차 힘들 것이다. 자기는 이미 목숨을 버렸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탈출할 수 없는 것이 북한 땅이다. 아니 붙잡힐 경우 자기 뿐 아니라 가족은 물론 친척들의 운명까지도 위협하는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이다.
내가 친구와 함께 국경연선에 도착한 시기는 오줌 싸면 얼어서 떨어진다는 2004년 북방의 추운 1월이었다. 초기 계획은 산 속 수림에 숨어 있다가 국경 경비대원들이 지나가고 나면 두만강을 넘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작 현장에 도착하고 보니 산은 높은데 몸을 숨길 나무가 한 그루도 보이지 않았다.
친구와 나는 평양 밖을 벗어나 본적 없기 때문에 수 천리 떨어진 국경지역에선 거의 눈 뜬 소경과 다름없었다. 그래서 맞춤한 탈북 장소와 기회를 노리며 두만강연선을 따라 온종일 걸은 길이 백리나 되었다. 밤 열시 경, 한치 앞도 헤아리지 못할 캄캄칠야는 우리를 대담하게 했다. 하여 마침내 강기슭으로 들어서는데 “손 들엇!”하며 풀숲에서 병사가 불쑥 일어서는 것이 아닌가.
그때 반사적으로 내 팔을 꽉 잡는 친구의 손이 나를 더 전율케 했다. 때려눕힐까 하고 생각하는 찰나 그 병사가 이번엔 호각을 불었다. 그러자 의외로 아주 가까운 곳에서 여럿의 손전등들이 켜지며 우릴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변명의 여지조차 없이 우리는 총구들에 떠밀려 국경경비총국 6중대 병실에 들어섰는데 가장 눈에 보이는 것이 쇠살창으로 가려진 작은 감옥과 매달린 수갑들이었다.
“어떻게 이 밤에 두만강으로 접근하신 겁니까? 신분증과 통행증을 봅시다.” 북한 특권층의 아들이었던 친구는 생전 처음 당해보는 총구 앞에서 누가 봐도 탈북 용의자로 확신할 만큼 온 몸을 심하게 떨고 있었다.
“우선 이 친구가 너무 추워하니깐 몸 좀 녹이게 해주시오.”
그러면서 나는 신분증을 꺼내려 안주머니 손을 넣었는데 쿵쿵 뛰는 심장이 만져졌다. 가죽 케이스에 당마크가 새겨진 나의 신분증을 받아 쥔 중대장은 놀란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국경 연선에서 오랜 중대장 경험을 가진 그 군관도 아마 당마크와 빨간 색깔의 조선노동당중앙위원회 도장이 박힌 신분증을 처음 보는 듯싶었다.
북한의 최고위 신분증은 금박으로 당마크가 새겨진 당 신분증과 국장이 새겨진 내각 신분증이 있다. 그 중에서도 당마크는 북한의 절대권력 기관인 조선노동당 신분을 의미하기 때문에 무소불위의 총구도 공손해지기 마련이다. 더욱이 당 통전부는 대남공작이란 특수성이 부여되기 때문에 적화통일의 무기를 쥔 병사들에겐 신비감을 조성한다. 그렇다 할지라도…….
“왜 국경에 접근했습니까?”
중대장은 신분증의 무게와 달리 너무 어려보이는 내 나이를 의심하는지 아래위를 흩어보며 물어보았다.
“무산 시당에 간부사업 가던 중 너무 밤이 깊었고 춥기도 해서 군인병실이라도 찾아서 하루 밤 자고 가려했을 뿐인데”
“아닙니다, 강에 발을 짚었습니다!”
우리를 단속했던 그 재수 없는 병사가 막 소리 질렀다. 나는 이럴 땐 무엇보다 배짱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이 멍청한 놈! 너 어디 감히 총을 들이대고 그래? 아까 널 한 대 쥐어박으려다 참았어!”
중대장이 짧게 지시했다.
“무산시당에 전화해봐, 통전부에서 간부사업 약속 있었는지”
나는 온 몸이 무너져 내려앉는 것 같았다. 난로 앞에서 손을 비비고 있던 친구도 나를 쳐다보는 눈이 끝장이라고 말하는 듯싶었다. 그런데 세상에 이런 일이!
“중대장동지, 정전이어서 무산시당에 전화가 연결 안 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살수 있다는 희망이 내 발밑에서부터 머리까지 치달아 올랐다.
“그럼 내일 확인하기로 하고 일단 좀 자게 해줘! 어 중대장? 우린 피곤해!” 그때 순찰교대를 했는지 한 개 분대가 쓸어 들어왔다. 누군가고 서로 물어보던 병사들 중 소위 계급을 단 군인이 유심히 들여다보던 신분증을 흔들며 소리쳤다.
“어따, 여기 근무하면 혹시 오광일이라고 알아요?”
오광일? 기억을 애써 더듬는데 갑자기 친구가 말했다.
“김책시에 사는 오광일이? 아버지가 김책시당 책임비서 하는 그 애?”
소대장의 얼굴에 금시 화색이 돌았다.
“네 맞아요, 맞아요, 중대장동지 그 시당책임비서 아들이 내 친구예요”
중대장은 의심과 신뢰가 교차하는 얼굴로 소대장과 내 친구를 번갈아보았다. 나는 하늘이 준 기회다 싶어 큰 목청으로 말했다.
“그 오광일이가 정말 친구 맞어? 친구의 친구를 여기서 보다니, 그럼 우리 여기서 좀 재워줄 수 있어?”
나는 중대장이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이 배낭에서 술과 담배를 꺼냈다. 그날 일부러 술을 세잔이나 마셨지만 취하지 않았고 소대장 이불을 쓰고 누웠지만 잠도 오지 않았다. 순찰근무 교대는 한 시간에 한 번씩 하였고 초소로 나갈 때마다 병사들은 실탄과 심지어는 수류탄으로 무장하곤 했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소대장이 쓴 우정의 편지를 받고 다시 길을 떠났다. 은밀한 어둠만을 믿었던 우리에게 병실에서 본 경계의 밤은 거의 절망적이었다. 친구가 불쑥 물었다.
“우리 다시 평양으로 들어갈까?”
우리는 두만강이 옆에서 흐르는 둔덕의 레일위에 맥없이 마주 앉았다.
“우리가 직장에 출근하지 않은지 벌써 3일이 됐어. 이 시간이면 벌써 평양에선 비상이 걸렸을 거야. 알잖아, 당 규정을! 이젠 돌아설 수 없어”
“방법은?” 친구는 마치도 포기하는 방법을 묻는 듯싶었다.
“방법은 기상천외야, 군인들이 우릴 보는 밤이 아니라 우리가 역으로 그들을 볼 수 있는 대낮이야, 지금 뛰자!”
우린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재빨리 본능적으로 나는 중국 땅을 살폈고 친구는 북한 땅을 흩었다.
“군인들이 안보이니 셋까지 세고 뛰자”
“하나, 둘, 셋!”
우린 서로를 마주보며 비장하게 셋을 합창했지만 일어서는 데는 똑같이 실패했다.
군인들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문제라는 인식 앞에서 친구와 나는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말없이 십 분이란 시간이 흐르자 국경의 고요로부터 서서히 충전되는 새로운 담력이 심장을 달구었다. 우린 마침내 말없이 손을 맞잡았다. 서로의 체온을 확인하는 순간 운명의 끝에 함께 섰음을 느끼게 되었다. 아니 이미 더 돌이킬 수 없는 행동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우린 동시에 힘 있게 솟구쳤다. 그리고 돌처럼 단단한 두만강 얼음위로 달리기 시작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소원의 순간이었고 실행의 순간인 것이다. 뛰어가는 발걸음마다 운명을 두드리는 듯 요란했다.
그런데 뒤에서 누군가 소리치는 것이 아닌가?
“저 놈들 봐라! 저 놈들 잡아라.”
본능적으로 돌아보던 나는 아연했다. 우리가 뛰어 온 그 몇 미터 굽이돌이에 바로 병사들 한 무리가 총 들고 서있는 곳이 아닌가. 격발장치를 당기며 총구를 겨누는 것까지 보고 뛰자니 갑자기 뒤통수가 불로 지지는 것처럼 뜨거워졌다. 죽었구나! 아니 죽지 않으리라! 우리는 멀리 보이는 중국의 이름 모를 산만 노려보며 그곳을 향해 서로에게 의지한 채 뛰고 또 뛰었다.
한 발을 짚을 때마다 뼈 없는 살처럼 주저앉았고 또 다른 발을 내 밀어도 마찬가지였다. 산이 가까워질수록 따라오는 주먹들도 가까워지는 것만 같아 차마 돌아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달리는 동안 이상하게도 나는 공포를 초월하는 분통함이 치솟았다. 이 몇 미터 강을 넘지 못해 이때껏 북한에서 짐승처럼 살았는가! 이 몇 미터가 그렇게 혹심한 인권의 차이였던가! 이 몇 미터를 달리는데 나는 왜 죽는다고 생각하는가!
드디어 북한과 달리 수림으로 우거진 중국 산기슭에 엎어졌을 때는, 따라오는 북한병사가 없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 살았다고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쫓겨 온 남의 나라가 쫓아오는 자기 나라보다 더 은혜롭고 감사함에 억이 막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선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떠나온 북한 땅을 마지막으로 바라보던 친구는 돌을 쥐고 힘껏 던지기도 하였다.
이어 친구는 나무가 울창한 산의 깊은 내면에서 안정감을 얻었는지 두 팔을 기껏 벌리고 눈 위에 덥석 드러눕기까지 했다.
“우리 이 산에서 며칠 푹 쉬자. 난 이젠 이 산에서 얼어 죽어도 좋아”
나도 그러고만 싶었다. 수령제일주의도, 집체주의도, 국가보위부도 없는 이곳에서의 죽음이라면 해방만세였다. 그러나 목숨 걸고 온 길이어서 이제부터의 자신이 더 소중했고 그래서 이제부터 정말 탈출이라는 생각이 나를 벌떡 일으켜 세웠다.
“아니야, 우리 이 지역에서 최대한 빨리 벗어나야 돼, 북한에서 중국 변방대에 연락할거고, 그럼 여기서 어물거리다간 우린 잡혀, 그러니 조금만 더 뛰자, 시내로 들어가자”
“어떻게? 시내가 어딘 줄 알고?”
주변을 둘러보던 나의 시야에 마을이 보였다.
처음엔 그 인적이 당황스러웠지만 총구 앞에서도 탈출했다는 자신감이 머리를 쳐들었다.
“꼼짝 말고 여기 숨어있어, 내가 만약 마을에서 붙잡히면 소리칠게, 그러면 즉시 산 속 깊이 뛰어!”
나는 지금의 상황에선 이 선택밖에 없다고 설득했고 그래도 계속되는 친구의 만류를 뿌리치며 마을로 내려갔다.
처음 만난 사람은 아줌마였는데 “말 좀 물어봅시다!”하는 내 말에 대꾸도 없이 무작정 어느 집을 손으로 가리켰다.
나는 그가 중국인이고 그가 가리킨 곳이 조선족이 사는 집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 집 대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흰 개가 짖어대는 소리에 나는 식은땀이 날 정도로 놀랐다. 친구도 뒷산에서 틀림없이 듣고 있으리라. 이 생각이 나를 금시 안심시켰다.
“누구요?”
40대 중반의 남성이 문을 열고 머리를 내밀었다.
나는 중국 현지인을 기만하거나 설득하기엔 너무도 시간이 촉박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즉석에서 700달러를 꺼내 보였다.
집주인은 돈 때문인지 아니면 나의 신변 때문인지 맨 발로 달려 나왔다. 나를 방안으로 끌고 들어가는 힘이 황소 같았다.
연길시내까지만 데려달라는 내 말에는 안중에도 없이 장롱을 열어 가죽 잠바와 바지를 꺼내 던지며 함북 말투로 말했다.
“빨리 입으소.”
“괜찮아요, 이 옷은 일본 옷이에요, 관광객처럼 보이려면”
“안돼요, 여기사람 같아야지 초소에서 단속할 때 주목받을 수 있소, 잔말 말고 이 옷을 입으소.”
“잠시 만요, 저기 친구 하나가 더 있어요.”
“엥? 그럼 왜 그러고 섰어?, 빨리 데리고 오소.”
잠시 후 내가 친구를 데리고 나타났을 때 집주인은 이미 나들이차림을 끝내고 난 뒤였다.
십분 후면 버스가 마을 앞에 도착할 시간이라며 서두르는 와중에 집주인은 주의사항을 알려주었다.
“우선 말을 일체 하지 마소. 혹시 공안이 단속 할 때 말 시켜도 아픈 척 하고, 내가 옆에서 대신 말하겠으니 깐. 만약 단속 당해도 중국말 모른 척해요, 여긴 중국말 모르는 조선족들도 가끔 있으니깐? 그리고 주머니에 돈이 더 있으면 나한데 다 맡기소, 혹시 붙잡히면 내가 그 돈으로 공안과 사업 해볼 테니. 얼마나 있소?”
나는 더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의 말대로 20분 후에 버스가 정확히 도착했다. 수도인 평양에서도 불가능한 버스통행 정상화가 중국의 시골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혀를 차며 우리는 몸을 실었다. 두만강 기슭을 따라 한 시간쯤 달리는 동안 우리는 내내 북한 땅을 새삼스레 바라보았다. 벗어진 민둥산들의 모습이 곧 거기에서 살고 있는 북한 주민들의 헐벗고 굶주린 처지로 보였다. 그들에 비하면 쉼 없이 지껄이는 이 중국 시골사람들은 얼마나 축복받은 인생들인가. 선진국민의 자유로움과 풍요가 물씬 풍겼다. 갑자기 집주인이 우리 쪽을 돌아보며 눈을 끔뻑거렸다. 앞을 보니 검문소가 보였고 무장한 군인들이 손 흔들어 차를 세우고 있었다.
그들이 우리를 뒤쫓아 왔고 그래서 차도 멈춰 세우는 것 같았다. 나는 공안들이 잡는 순간 어떻게 차창 밖으로 뛰어내리고 어디로 도망칠 것인가를 재빨리 살펴보았다. 그러고 나서 친구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잠든 척했다. 그 전에 친구의 감은 두 눈을 잠깐 살폈는데 눈썹을 심하게 떨고 있었다. 나는 그를 안심시켜야겠다는 생각으로 일부러 약간 코를 골았다. 차가 멈춰서고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군화발이 올라오는 둔탁한 소리에서 총의 무게도 느껴졌다. 큰 목청의 중국말이 오갔는데 군인이 우리를 향해 부르는 것 같았다. 다가오는 군화발소리, 승객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눈을 뜨면 지금 어떤 상황일까? 군인이 우리를 노려보는 것일까? 머리카락마다 촉각을 곤두세우고 숨을 세고 있는데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차가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눈을 떠보니 정말 차가 가고 있었다. 훗날 집주인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이렇게 말해주었다.
“공안들은 일일이 검열하기 바쁘니깐 버스에 올라와 한번 쭉 흩어보오, 탈북자 색출이 목적이니깐, 탈북자 얼굴피부를 보면 우리랑 틀리오, 오랜 방랑생활 때문인지 새까맣고 때에 그을렸거든, 그런데 자네들 피부는 평양사람들이어선지 우리랑 비슷해서 그냥 넘어간 것 같소,”
그렇게 피 말리는 두 개의 검문초소를 지나고서야 우리가 탄 버스는 앞이 확 트인 연길시내로 들어섰다. 두만강을 넘을 때의 긴장보다 바로미터의 더 큰 순간들을 체험한 나의 온 몸은 땀에 푹 젖었다. 이제는 공안도 찾기 힘든 시내로 들어섰다. 이제는 13억 중국인의 품에 몸을 숨길 수 있다. 나는 격정을 주체할 수 없어서 친구의 살을 마구 꼬집었다. 그도 같은 심정인지 차창 밖을 내다보는 자신 넘친 시선에는 거침이 없었다. 볼거리를 즐기는 여유를 과시하기나 하려는 듯 어느 한 곳을 손으로 가리키기까지 했다. “연변은 세계로! 세계는 연변으로!”라는 한글 플랜카드가 걸려있었다. “중국의 이 작은 마을도 세계를 지향하는데!” 하는 부러움의 탄성이 저절로 나왔다,
“자본주의 바람을 막기 위해 모기장을 치자! 쇠살창을 치자!”는 북한 구호에 익숙했던 나였기 때문에 더더욱 그 플랜카드가 충격이고 감동이었다. 더불어 폐쇄와 야만으로부터 탈출한 우리의 용단이 천만번 옳았다는 것을 다시금 자부했다.
2.
버스에서 내리자 집주인은 우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 연길까지 왔으니 이젠 헤어지기요, 몸조심하고 잘 가오.”
난 그 손을 잡을 수 없었다.
이미 날이 어두워졌고 말도 통하지 않는 타국에서 어떻게? 어디로 간단 말인가?
“정말 죄송한데 우리랑 좀 더 같이 있어주면 안 돼요? 같이 있으면서 여기 사정도 좀 설명해주고. 공안에게 안 잡힐 지혜도 주면 안 됩니까?”
“엥? 연길에 그럼 아무도 없다는 기요? 무작정 온 거요?”
친구가 한 발 나서며 말했다.
“친척이 있긴 한데 우린 거기로 갈 줄도 몰라요.”
난감해하던 집주인은 보기에도 딱했는지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 전화했다.
“난데요, 창용인데요, 내가 이제 두 사람을 데리고 갈 테니깐 좀 신제지오, 네, 네……. 집에서 멀지 않소”
그가 세운 택시를 타고 우리는 연길시내 한 끝 외진 곳으로 갔다. 매우 어렵게 사는 장모집이라는데 정작 들어가 보니 평양 중산층 보다 나은 수준이었다.
그날 창용 아저씨가 사 갖고 들어간 쇠고기로 우리는 온종일 주린 배를 채우며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김정일을 죽일 놈이라는 욕으로부터 시작한 그는 탈북자들의 처참한 방황실태와 북송참상, 공안들의 탈북자색출 광분 등에 대해 장시간 말해주었다. 왜 북한 군인들이 총을 쏘지 않았는가? 궁금해 하는 우리에게 중국 쪽을 향해 발포하면 국제 법에 어긋나기 때문이었다며, 대담하게 잘 뛰었다고 칭찬을 했다. 그는 탈북자를 많이 만나보았지만 700달러를 준 사람들은 당신들이 처음이라며 그 돈이면 견인기 한 대를 살 수 있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탈북자들에게 돈을 받으면 벌금을 20배로 물리니 만약 공안에 잡혀도 돈 이야기는 절대 해선 안 된다고 거듭 강조했다. 우린 그의 말들에서 여기가 탈북의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기름진 음식도 제 맛을 변변히 느낄 수 없었다. 이 때 창용 아저씨의 핸드폰이 울렸다.
“오, 나 못 들어간다고 아까 말 했잖소 ……. 뭘? 뭘? 정말이야?”
핸드폰을 받는 창용 아저씨의 얼굴빛이 심상치 않았다.
핸드폰을 내려놨을 때는 우리를 마치 처음 보는 눈으로 보기까지 하였다.
“자네들 살인자나?”
뜬금없는 섬뜩한 그 질문에 친구와 나는 마주 보았다.
“살인자라뇨?”
“금방 마누라한데서 전화가 왔는데 변방대와 공안에서 마을을 수색했단 거요, 탈북시간, 복장, 키를 말하는데 당신들 찾는 게 맞소, 근데 문제는 북한에서 받은 통보에 의하면 당신들이 살인자라는데?, 무기도 휴대하고 탈북 했다며? 국경 연선에 지금 난리 났다잖소.”
그의 말에 나는 분통이 터졌다. 우리가 살인자라니! 죄라면 탈북 한 죄밖에 없는 우리에게 사람을 죽인 죄를 들씌우다니!
창용 아저씨가 가까이 다가앉으며 조용히 물었다.
“살인자로 수배하고 찾는걸 보니 내 보기엔 당신들이 그냥 탈북자가 아닌 것 같소, 돈도 있고 얼굴 피부도 그렇고 평양사람들인 것을 보니 분명 먼 일을 하던 사람들인 것 같은데 대체 직업이 뭐였소?”
공안의 시선이 우리를 노리는 이 시점에서 현지인에게 의존하는 것밖에는 다른 길이 없음을 알았다.
나는 중앙기관에서 근무했고 친구 같은 경우 김정일 가까이서 10년을 근무했다는 점, 체제를 비관하고 남조선으로 갈려고 한다는 것까지 솔직히 말했다. 친구가 색 낡은 편지 봉투를 보여주었다.
“우리 친척주소인데 일 년 전에 보내온 것입니다. 이 집까지만 데려다 줘도 감사하겠습니다.”
창용 아저씨는 주소를 유심히 보더니 입을 쩍 벌렸다.
“친척이 엄청 부자인거네요, 이 주소는 여기 동북지방에서도 다 아는 부자촌인데요.”
우리에 대한 신뢰가 더 깊어졌는지 창용 아저씨의 목소리가 다시 커졌다.
“한국 갈려면 나한데 맡기오, 내 조카가 전문 그 일을 하는데 당신들 정도면 편하게 보내줄 수 있소, 그 조카애는 한국 국정원이랑 직접 통화하는 애거든,”
그 때 벨 소리가 울렸다.
“뭐? 뭐야? 그 말을 왜 했어. 이 바보야. 모른다고 할 거지! 알고 있었다고?”
창용 아저씨는 이번엔 얼굴이 창백해졌고 통화가 끝나기 바쁘게 벌떡 일어서기까지 했다.
“빨리 일어섯! 공안이 이쪽으로 오고 있소. 장모집주소를 물어 봤대”
새벽 두 시에 우린 다시 밖으로 나왔다. 창용 아저씨는 내가 처음 만났던 중국 여자를 개년이라며 화를 냈다. 그러더니 돈을 받지 말아야 하는데, 다시는 탈북자를 돕지 않겠다고 결심했는데,라는 말을 여러 번 반복했다.
문제는 정작 밖으로 나오긴 했지만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것이었다.
장모 집에서 멀리 떨어져 우두커니 서있는 창용 아저씨의 뒷모습을 보니 우리의 미래보다 더 어두워 보였다. 우리는 붙잡히면 자살할 각오라도 있지만 그에게는 불안과 후회의 고통밖에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 맞다. 거기로 가자!”창용 아저씨가 문득 소리쳤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장모집 건너편에 빈 집이 하나 있는데 밖으로 자물쇠를 채우고 들어가 있으라는 것이다. 우리는 위험근처로 가기 싫다고 했지만 창용 아저씨는 공안이 수시로 순찰하는 이 밤에 거리를 방황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며 장담했다.
“등잔불 밑이 어둡다잖소, 그리고 공안이 자물쇠가 채워져 있는 빈집에 어떻게 들어가오?”
우리는 그 빈집에서 삼일을 보냈다. 한국 들어간 조카가 낼 온다며 무조건 자기를 기다리라 했다는 것이다. 음식은 창용 아저씨가 어둔 밤에 한 번씩 세끼 빵을 넣어주었다. 차라리 부잣집 친척집에 가 있는 것이 더 편하지 않냐고 물어보았다. 우리는 결단코 반대했다. 우리 신분이 이미 단속됐던 6중대에서 노출이 됐고, 3일이라는 시간 안에 공안은 북한으로부터 우리에 대한 충분한 자료를 받았을 것이다. 안내 용의자에 불과한 창용 아저씨의 장모집도 알아낸 공안이 추적범의 친척집을 수사선상에서 빼놓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설명했더니 머리를 끄덕였다.
그 날도 북한이야기와 조금 엿 본 중국 시골의 발전모습에 대해 장시간 이야기하다 잠들었을 때였다. 시끄러운 중국말과 군화발소리에 눈을 뜬 나는 급히 친구를 깨웠다. 숨죽이고 밖의 동정을 살피던 우리는 동시에 방 한 구석으로 뒷걸음쳤다. 손전등을 켠 누군가 우리가 숨어있는 집을 기웃거리더니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자물쇠를 거칠게 흔들 때에는 가슴을 마구 헤집는 것 같았다. 문이 열렸다. 거구의 한 사나이가 불쑥 들어오다가 우리를 보고 흠칫했다. 보기에도 두려운 군복 입은 공안이었다. 그는 우리가 두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괴성을 지르며 달려 나갔다. 나는 방바닥에서 무엇인가 찾고 있는 친구의 등을 세차게 때렸다. “뭘 해?!”
나는 낮에 내다보군했던 높은 울타리를 어떻게 날아 넘었는지 모른다. 앞에서 달려가는 형체를 쫓아 정신없이 뛰면서 나는 살아야 한다! 살아야 한다! 이렇게 계속 중얼거렸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다가 우뚝 멈춰서고 말았다. 친구인줄로만 알았던 앞의 그림자가 송아지였던 것이다.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다시 돌아섰다. 이 골목 저 골목 헤매면서도 우리가 숨어있던 빈집 근처를 어지럽게 비치는 12개의 손전등을 빠짐없이 세었다. 저 12개 불빛 중 하나라도 놓치지 말아야 나의 은밀한 행동이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친구가 처음 뛸 때와 추정방향을 추적해보려 애쓰며 허리를 굽히고 이리저리 헤맸다. 그때 인기척이 들렸다. 돌아보니 손전등 불빛이 아주 가까운 곳에서 오고 있었다. 허둥거리던 나는 마침 앞에서 서성거리던 황소 뒤로 몸을 숨겼다. 공안과 나와의 거리는 불과 5미터도 안되었다. 황소 배 밑으로 뻗은 내 두 다리를 보지 않을까 숨이 컥컥 막혔다. 나를 의식해서인지 황소는 비실비실 피하다 못해 달렸고 나는 그 뒤에 숨어 어쩔 수 없이 가시나무에 찔리고 뜯기는 채로 뛰고 또 뛰었다. 그렇게 찰나의 위험을 넘기는 동안 어느새 날이 푸름푸름 밝아왔고 공안 승합차가 가는 모습도 보였다. 나는 그때야 쑤시다 못해 무감각해진 발이 양말도 안신은 맨발이라는 것을 알았다. 주저앉았다. 두 손으로 발을 비비면서도 승합차에 친구가 실려 간 것만 같아 눈물이 났다. 나의 착한 친구가 반항도 못하고 짐승처럼 끌려가는 상상에 주먹으로 눈물을 닦고 또 닦았다. 그런데 한참 후 어디선가 나를 찾는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머리를 버쩍 들고 그 쪽을 바라보니 친구였다. 그것도 산 중턱 나무 뒤에 숨어 머리만 내밀고 웃으며 손을 흔드는 것이 아닌가.
나는 단숨에 달려 올라갔다. 친구의 앞에 섰을 때는 주먹으로 힘껏 얼굴과 가슴을 때리며 소리쳤다.
“웃음이 나와? 너 혼자만 살자고 이렇게 멀리 왔냐? 이 나쁜!”
어질기 짝이 없는 친구는 매를 그냥 맞아주었다. 내가 뒤에 따라 선 줄 알고 여기까지 오게 됐다는 말도 다 맞고서야 꺼냈다. 우린 끝내 연인처럼 그러안고 소리 내어 엉 엉 울었다. 울면서 서로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연발했다. 친구가 불의에 들이닥친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내가 북한에서부터 가져온 시집을 챙겨왔다는 것을 알았을 땐 더 미안하고 죄송했다. 그날의 아픔과 설음, 두려움의 때로 얼룩진 노트가 바로 2008년 12월 9일 일본 NHK가 9시 뉴스특보에서 카메라에 담았던 “내 딸을 백 원에 팝니다. 원본이다.
3.
공안이 없음을 분명히 확인한 우리는 날이 어두워질 무렵 마을로 내려갔다.
물론 둘 다 맨 발로 말이다. 창용 아저씨는 장모로부터 꾸중을 받았었는지 들어오라는 말 대신 황급히 밖으로 뛰쳐나왔다.
나는 우리가 무사함을 무척 기뻐해주는 그가 친삼촌처럼 느껴졌다.
"당신들 짐을 공안에서 다 가져갔소. 그 안에 뭐가 들어있었는데?"
중국어 책과 속옷들이었다는 대답에 돈은 없었냐고 다시 물었다.
돈 소리에 창용 아저씨 등 뒤에 서있던 친구 얼굴이 갑자기 사색이 됐다. 나는 그가 입을 열기 전에 재빨리 대답했다.
"돈은 있어요, 내가 갖고 있었어요."
친구가 정말이냐는 눈으로 날 쳐다볼 때 마침 장모의 목소리가 들렸고 창용 아저씨는 집안으로 들어갔다.
"정말 돈을 갖고 있어? 외투 주머니에 있었던 거 아니야?"
친구가 기대 절반 의문 절반으로 물으며 다가왔다.
나는 그를 마당 한 구석으로 끌고 갔다.
"똑똑히 들어, 우린 지금 한 푼도 없어, 빈털터리라고, 그러나 있는 척 해야 돼, 저 사람은 가면 그만이지만 우린 저 사람을 잃으면 끝이야, 내 말 알겠지?"
창용 아저씨가 보따리 하나를 챙겨 나왔다.
우린 서둘러 대충 맞는 신발과 솜옷들을 골랐다.
그리고 다시 산으로 들어갔다.
창용 아저씨는 절대 불을 피워선 안 된다며 조카가 이틀 더 늦는다고 했으니 그때까지만 부디 얼어 죽지 말라고 하였다. 공안이 탈북자들을 잡아들이는 이유 중 하나가 탈북자들 때문에 산불이 많이 나서라고 했다. 그러면서 장모 집에서 자기가 더 머물고 장모 속을 편하게 해주려면 돈이 더 필요하다고 했다. 나는 몹시 화가 난 척 하며 조카가 온 다음에 보자고 단호히 잘라 말했다.
친구와 나는 이렇게 창용 아저씨가 이틀 동안 날라 준 페트병의 뜨거운 물을 그러안고 산 속에서 모포 하나로 붙어살았다.
"우리 서로 여자라고 생각하자"
한번은 친구가 불쑥 던진 이 말이 어찌나 웃겼던지, 우린 정말 아주 오랜만에 웃어보는 것 같았다. 아니 그 짧은 웃음에서 삶이란 이리도 다양하고 그래서 생존만으로도 아름답다고 여겨졌다. 그 이틀 밤의 정취를 나는 죽을 때까지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밤이 점점 깊어지니 산 속의 신비가 태동했다. 언젠가 원산 밤바다 기슭에서 끊임없는 파도소리가 심경을 사로잡았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그 바다처럼 산도 밀림이 설레는 소리로 마치 생명이 숨 쉬는 듯 했다. 우리는 고난의 자신들이 뿌듯했다. 사람은 자연 속에 산다고 하지만 바람을 머금고 산 정상에서부터 밀려 내려오는 소리를 온 밤 듣는 경험자가 얼마나 되랴, 우리는 골짜기 따라 내려오는 1월의 찬바람을 피해 이리저리 자리를 옮기며 두고 온 집이야기와 북한에서의 나날들을 옛말처럼 주고받았다. 그래선지 별들이 또렷한 밤하늘을 우러르며 두 손 모아 한국행의 소원을 빌 때는 눈시울이 젖기도 했다. 십년세월 이 고생해도 그 땅으로 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우리에겐 그날의 대한민국이 별 만큼이나 아득히 멀었다. 다음날 창용 아저씨가 우리와 비슷한 또래의 젊은이를 데리고 나타났다. 신광용으로 자기 이름을 소개한 그는 대뜸 확인 차원이라며 신분증부터 요구했다. 신분증안의 날짜들과 도장이며 인쇄 질감에 이르기까지 전문가처럼 꼼꼼히 체크한 그는 어디엔가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산 중턱까지 닛산 지프차 한 대가 올라왔다. 듣던 바대로 견인기구입에 들떠있던 창용 아저씨와는 차원이 달라보였다. 우리는 창용 아저씨와 포옹으로 이별인사를 마치고 차에 올랐다. 한국 가면 은혜 갚으려 꼭 오겠다는 인사도 잊지 않았다. 물론 돈은 주지 않았다. 다행히도 창용 아저씨가 자기에게 700달러를 준 사실을 조카에게 비밀로 해달라고 애원했기 때문이다.
차는 젊은 신광용 이처럼 힘 있고 멋쟁이였다. 스피커에서 울리는 노래가 한국가요여서인지 내친 기세로 한국까지 쭉 갈 것만 같았다.
그러나 차가 도착한 곳은 연길 시내 어느 번화가였다. 그동안 사람을 무서워했던 우리에겐 번잡함이 어마어마한 공포였다. 광용은 그동안 우리가 겪었던 악몽 같은 사정들을 아는지 모르는지 차에서 빨리 내리라고 하였다. 좀 뒤떨어져 오면 "얼른 오소!"하고 소리쳤고, 공안들이 사방에서 얼른거리는 백화점에 들어서선 큰 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기까지 하였다. 안하무인인 그의 행동은 괴로운 정도가 아니라 고문하는 것 같았다. 그는 일단 백화점에서 옷과 신발들을 사주었다. 나는 그때 거울을 들여다보다 깜짝 놀랐다. 이 얼굴로 여기 서있단 말인가? 서둘러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옷은 괜찮으니 선글라스를 사달라고 했다. 광용은 그게 더 의심스럽다고 했고 우리는 그냥 소원했다. 그 이후부터 친구와 나는 선글라스신사가 됐다. 검은 안경알 뒤에 자신들이 감쳐줬다고 생각하니 어깨가 펴졌다. 그 선글라스가 없었다면 광룡이가 내민 카메라 앞에도 감히 서지 못했을 것이다. 자기가 사용한 돈과 사준 상품들을 윗사람들에게 확인시켜줘야 한다며 광용은 사진을 찍어줄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찍고 보니 뒤에 공안들이 서있었다.
그날은 참으로 호의호식하는 날이었다. 비싸 보이는 식당에서 푸짐하게 먹었고 우리는 난생처음 남녀공용의 찜질방이란 곳에도 갔다.
역시 개혁개방은 달랐다. 어떻게 전혀 모르는 남녀들이 집체적으로, 그것도 속옷차림으로 한 공간에서 버젓이 잘 수 있단 말인가. 이런 것이 바로 북한에서 말하던 자본주의 황색바람이었구나, 빈번히 놀라는 평양촌놈 우리에게 광용은 진짜 자본주의 맛을 보여주겠다며 "때밀이"란 사람을 불렀다. 돈만 주면 내 때도 벗겨주다니. 나는 "때밀이" 아저씨가 힘을 쓰는 동안 너무도 송구하고 크게 신세지는 것 같아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자정 무렵 우리가 간 곳은 신광용의 집이었다. 마중 나온 스물다섯 돼 보이는 여자를 자기 와이프라고 소개했는데 나는 그때 여자를 그렇게 가까이서 본 다는 것이 좀 별스러웠다. 우리가 무인도에서 인간세상으로 온 느낌이랄까, 폐가 같은 빈집도 아니고 산속도 아닌 바닥이 따뜻한 아파트에서 이불을 덮고 잔다는 것 또한 이상할 정도였다. 다음날 일어나니 신광용은 어디 나갔다 왔는지 금방 들어온 옷차림이었다. 전날과는 달리 한 마디도 안했고, 아침식사를 끝내고 난 후에는 우리에게 종이와 볼펜을 각각 주었다. 자기프로필과 가족관계, 한국 정부 앞으로 제공할 수 있는 북한의 비밀정보들, 그리고 탈북이유까지 한 치의 거짓 없이 적으라고 하였다. 그가 특히 강조한 것은 비밀정보인데 그것은 자기도 다 알아서는 안 되니 간단하게 제목처럼 요약만하라고 하였다. 비밀이 뭘까? 어떤 게 정보일까? 아무튼 그의 요구는 국가조치처럼 무언가 숭엄한 감이 들었다. 나는 글을 배우고 난 후 그렇게 심혈을 기울여 곱게 써 본적이 없었다. 친구도 대한민국 대통령 앞으로 편지 쓰듯 정성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신광용은 우리의 자필서류들과 쇼핑사진, 그리고 신분증 복사사진을 우편봉투 안에 넣으며 한국에선 이럴 땐 파이팅! 한다고 했다.
우리는 그 때부터 수 없이 맘속으로 파이팅! 을 곱씹었다. 우리가 더 자신했었던 것은 신광용의 처가 함북출신 탈북자라는 것을 안 후부터였다. 오갈 데 없는 탈북자를 아내로 맞은 그의 인간성이 돋보였고 그 믿음만으로도 우리는 두려움에서 해방되어 행복했다.
그러나 파이팅 10일이 지나도록 그가 장담하던 기적은 오지 않았다.
당신들을 더 숨겨주고 싶은데 돈이 떨어져간다는 광룡의 한숨도 점 점 커져갔다. 나는 우리가 왜 이 집에 계속 있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속 시원히 알아야 했다.
"오늘은 말 좀 합시다. 도대체 누굴 기다리는 것이고 어디까지 우리 문제가 진전 된 겁니까?"
신광용은 처에게 술심부름을 시키고 정색해서 입을 열었다.
"내가 잘 알던 한국사람이 있어요, 탈북자 문제에 관심이 많은 분인데 내 생각엔 국정원 같소, 돈도 몇 번 받았고, 평양출신 탈북자가 있으면 자기에게 바로 연락하라고 했고, 또 있느냐 자주 물어보기도 했소, 그래서 당신들 문제를 그에게 이야기했소, 서류도 그 사람에게 보낸 것이고, 처음엔 돈도 보내고 당신들의 안전을 잘 부탁한다고 하더니 지금은 연락이 안 되네요, 핸드폰 번호조차 바꿔버렸어요,"
나는 그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국정원 직원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사람을 우리가 지금껏 구세주처럼 기다렸단 말인가?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앞으로의 기다림도 무의미할 것이라 생각하니 막막했다. 정말 다른 방법이 없을까? 신광용은 베트남이나 몽고, 혹은 태국으로 가는 길이 있다고 했지만 우리로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국경에서 연길까지 나오는 이 수 백리에서도 여러 번 생사를 넘었는데 그 먼 길을 또 어떻게?
결론은 돈이었다. 더 있자고 해도 돈이고 길을 떠나자고 해도 돈이었다.
친구가 친척 주소를 다시 꺼내왔다. 창용 아저씨와 똑같이 부자촌이라며 감탄하던 광용은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중국말이어서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기분 좋은 통화인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통화 후 광용의 말은 거의 감격 수준이었다.
"이 친구가 기잔데 애 말로는 친척이 맞다면 한국 가는 것은 문제도 아니라오. 그러고 보니 이 이름을 나도 아는데 항일열사로 중국 교과서에도 나와 있는 분이에요. 그 자녀들도 심양에 나가 한 자리씩 하고 있고, 정말 친척이 맞소?"
친구의 선친들 또한 항일투사로, 북한에서도 충신의 귀감으로 인민들에게 선전되고 있다는 말에 광용은 우리의 한국행을 백퍼센트 확신했다. 아니 확신을 넘어 자기 처도 이번 기회에 남한으로 함께 데려가 달라고 부탁까지 하였다. 탈북자의 남편으로 인정 될 경우 조선족의 한국국적 취득이 가능하다며 광용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는 한시도 지체할 수 없었다. 아침이면 중국 공안의 매복감시에 적발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이 밤에 당장 찾아가기로 하였다. 셋은 밖으로 달려 나가 택시를 잡아탔다.
좋은 택시여야 공안이 설사 근처에서 지키고 있어도 의심 못한다며 비싼 택시를 골라 탔다. 30분 쯤 달려 도착해보니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궁궐 같은 집이었다. 주변이 너무 환해 어떤 문제가 생길 경우 탈출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의심스러운 승합차가 서있는 것도 보였다. 하여 나는 집근처를 두 바퀴 더 돌자고 했다. 앞 현관과 이어진 골목들과 담장 주변을 아무리 살펴도 차를 이용하지 않고서는 불의의 정황에 대처하기 힘들어보였다.
우리는 논의 끝에 택시를 뒷골목에 세워두고 광용이를 우선 보내기로 했다. 광용이가 친척을 만나 시간과 약속을 따로 정하고 믿지 못할 경우 택시 있는 곳까지 직접 데려오기로 했다. 그렇게 광용이가 가고 나서부터 나와 친구는 손에 땀을 쥐고 기다렸다. 한초 한초가 일 년 같았다. 친구도 조바심이 났는지 한 바퀴 더 돌자고 했다. 그러나 우리 둘 중 누구도 그 말을 중국택시기사에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30분쯤 됐을 때 광용이가 쫓기듯 달려왔다. 택시에 오르자마자 빨리 출발하자고 두 팔을 마구 흔들었다. 좀 전의 그 어떤 긴장 때문인지 계속 뒤를 돌아보며 숨을 헐떡였다.
예전 같으면 자기 집 앞에 세웠을 택시도 훨씬 멀리 지나쳐 세우게 했다.
그리고 들려주는 그의 말은 전율, 그 자체였다.
"그 집 아들이라고 나왔는데 자긴 사촌 따위는 알고 싶지도 않대, 아버지가 이미 사망했기 때문에 더 상관없다면서 뭐라는 줄 아오? 그 놈이 살인했다며? 살인자가 어떻게 이 집에 오냐고! 공안에서 24시간 지키고 있으니 잡히지 않겠으면 두 번 다신 나타나지 말라고 하는 거요. 그래서 설득하려는데 아까 승합차 봤지요? 거기서 두 놈이 내려오더니 나에게 달려오는 거요,"
나는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서늘했지만 친구는 한 쪽에 쭈그리고 앉아서 서럽게 울고 있었다.
4.
집에 들어가니 좋은 결과를 기대하며 김광선의 처가 특별히 불고기상을 준비하고 기다렸다. 우리는 더 할 말을 잃었다. 더욱이 친구가 자꾸 눈물을 흘리자 남자가 우는 것을 처음 봐서인지 광용의 처는 세운 두 무릎 안에 이마를 쑤셔 박고 있었다. 고기가 까맣게 타자 광용이가 술병을 들었다.
"자, 자 남자들이 뭐 고만한 일을 가지고,그 배짱으로 탈북은 어떻게 했소?"
난 친구의 손에 술잔을 쥐어줬고 광용은 술을 채웠다. 우리는 연거푸 세 잔을 마셨다. 네 번째 잔을 비운 광용이가 "근데, 난 정말 이것만은 궁금한데 우리 처 같은 경우는 배고파서 왔어요, 쌀 가지고 다시 들어가겠다고 처음엔 난리쳤다니깐, 근데 당신들은 평양사람들이잖소, 내 보기엔 직업도 괜찮았던 것 같고, 살인할 사람들도 절대 아닌 것 같고, 탈북 한 이유, 그 이유가 도대체 뭐요?"
"쾅!"
친구가 식탁을 내려친 주먹에 머리를 버쩍 쳐든 광용의 처가 가슴을 부여잡았다. 친구의 그런 눈빛과 목청이 처음이여서 특히 나의 놀램은 더 했다.
"이유? 무슨 이유를 알고 싶은데? 북한에 무슨 이유가 있는데? 이유가 있어서 사람들이 굶어죽었냐고? 이유가 있어서 당에 충성했던 사람들이 숙청됐냐고? 그럼 김일성이 제 아들놈에게 권력을 준 이유가 뭔데? 김정일이가 계속 독재를 하는 이유가 뭔데?"그 말 앞에서 우리는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그렇다. 친구와 나만이 아니라 과연 모든 탈북자들에게 자신들의 탈북을 정당화 할 수 있는 이유가 어디 있으랴. 배고파서 살자고 왔든, 핍박으로부터 도망쳐왔든, 그 정권이 싫어서 버리고 왔든, 그것이 어떻게 자기 친부모형제들과 처자, 고향을 버리고 온 인간의 이유로 될 수 있는가. 그 모든 이유를 생각할 자유마저 철저히 박탈당한 몹쓸 나라가 아닌가!
나는 그날 심화조에 의해 간첩혐의로 숙청된 친구의 장인에 대해서, 남한 서적들을 친구들에게 몰래 돌린 혐의로 국가보위부의 엄격한 조사를 받았던 자신에 대해서 김광선에게 이야기해주었다. 그렇게 온 밤 탈북동기를 말 하고나니 한국행 결심과 용기가 두만강 기슭에서의 초심으로 돌아가는 듯했다.
다음날 우리는 김광선과 작별했다. 우리가 친구의 친척집으로 접근할 것을 예상하고 공안과 북한 국가보위부 해외반탐과 시선이 연길에 집중됐으리라 판단해서였다. 속히 연길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러지 않아도 탈북여성과 사는 김광선의 처지도 불안한데 우리까지 얹혀있을 순 없었다. 김광선은 한국 사람이 연락 올 수도 있으니 자주 통화를 하자며 자기 연락처를 주었다. 그리고 떠나는 내 손에 중국 돈 100원을 주었다. 그는 작은 돈이라고 했지만 우리에겐 천만금과도 같았다.
훗날 처와 함께 한국입국에 성공한 김광선을 만나 그 백 원에 대한 보답을 했더니 그는 그날의 우리보다 더 고마워했다. 그러한 인품을 만나지 못했다면 장담컨대 나는 한국으로 절대 오지 못했을 것이다. 어제도 노원구에 사는 그의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우리는 끔찍했던 탈북과정의 회고에 스스로 혀를 찼다…….
연길시를 벗어나 친구와 내가 밖을 나와 정처 없이 찾아다닌 곳은 십자가였다. 광용의 말에 의하면 성당이나 교회들에서 탈북자들에게 돈과 먹을 것을 주고 간혹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한국에도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주의할 것은 배고파서 탈북한 사람들로 말해야지 살인자로 수배된 상황에서 자기 신분을 노출시킬 경우 신고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목사나 선교사들 중 공안과 연결 된 사람들도 많으니 그 점을 절대 잊어선 안 된다고 몇 번을 강조했다.
우리는 돈과 먹을 것을 공짜로 주는 종교도 있다는 사실에 사람은 다 살게 돼 있다며 기뻐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지붕이 뾰족한 건물들과 십자가를 찾아 온 종일 헤맸지만 매 번마다 허사였다. 대부분 문이 잠겨있거나 건물을 지키는 노인들이 나와 개처럼 쫓았다. 북한에서 말하던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김정일 민족이란 것이 이 정도로 형편없는 줄 몰랐다. 그때마다 친구와 나는 우리를, 아니 북한 주민들을 세상이 이렇듯 멸시하고 천시하게 만든 김정일 정권에 대해 치를 떨었다.
그렇게 날이 점점 어두워졌다. 그런데 이상했다. 배는 고팠지만 워낙 밝은 낮을 무서워했기 때문인지 밤의 어둠 속으로 기분이 풍선처럼 둥 둥 떴다. 항상 숨어 살고 갇혀 살다 넓은 공기를 마음껏 마시며, 이야기도 하며 나란히 걸으니 즐겁기까지 했다. 칼날 같은 눈바람이 무슨 대수이랴. 이대로 가다 벌판에서 쭈그리고 잔들 어떠랴, 우리는 이미 산속에서도 얼어 죽지 않고 살아남은 모진 생명들이 아닌가. 끝도 없이 무연한 중국의 농촌 길에서 우리는 밤하늘에 대고 와! 와! 고함치기도 했다.
그날 밤 연길에서 멀리 떨어진 용정리 어느 집 소외양간에 나란히 누운 우리는 백 원을 들여다보며 참으로 많은 생각을 했다. 솔직히 300만 아사의 나라에서 왔지만 친구나 나는 배고픔이란 것을 남의 나라 일로만 여겼었다. 때로 지방 출장길에서 거리의 시체를 보면 왜 저 사람들에겐 먹을 것이 없었을까? 왜 사람이면서도 굶어죽을까? 왜 훔쳐서도 살려고 노력하지 않았을까? 이것이 생사에 대한 우리의 단순한 의문이었다.
그런데 마지막 그 백 원 앞에서는 우리 눈에도 사람이 가진 목숨의 한계란 것이 보였다. 당장 이 돈마저 없다면, 그래서 하루 이틀 먹지 못하고 방황하다나면 이렇게 굶어죽겠구나! 이렇게 초라해지겠구나! 하는 절망으로 초조해졌다. 그러자 배고픔과 그 결말의 두려움이 육신을 파고들며 몸의 기운이 쭉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이전 같았으면 온 밤 못 자고 주변을 두리번거렸겠지만 그 날만은 공안의 추격 따위는! 하고 체념한 채 잠들고 말았다. 아마도 공안의 존재를 하얗게 잊어 본 것은 그 밤이 처음인 것 같다.
다음날 소 울음소리에 깨어난 우리는 돈 백 원이 품에 있음을 먼저 확인하고서야 자리 털고 일어났다. 그러나 서로 마주보던 친구와 나는 소 외양간 밖으로 절대 나갈 수 없음을 알았다. 언젠가 창용 아저씨가 말하던 방황자의 증표가 얼굴과 옷차림에 역역했던 것이다. 이 꼴로 그냥 밖으로 나가면 누구든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배고픔도 잊고 도망치듯 가장 가까운 집 앞으로 달려가 문을 두드렸다. 노인 한분이 나오셨는데 척 보기에도 우리 꼴이 탈북자 같았는지 바로 문을 닫을 기세였다. 나는 최대한 허리 깊이 숙여 인사했다.
"할아버지, 세수 좀 하게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문을 반쯤 닫던 노인은 무슨 영문인지 온 몸을 밖으로 내밀고 유심히 쳐다보았다. 우리말을 못 알아듣는 중국인인줄 알았는데 갑자기 노인이 "들어오소."하는 것이 아닌가.
잠시 후 노인은 큰 놋대야에 김이 물물 오르는 더운 물을 들고 나오셨다. 우리는 황급히 달려가 대야를 받아 마당 한 구석으로 가져갔다. 혹시 누가 볼세라 말이다. 먼저 씻으라고 서로 양보하던 우리를 지켜보시던 노인이 슬금슬금 다가왔다.
"강 넘어 왔소?"
우리는 고민 끝에 대답했다.
"네"
노인은 머리를 끄덕이시더니 담배를 꺼내 물었다.
"이때껏 밥 달라고 문 두드리던 애들은 많이 봤어도 씻겠다는 사람은 자네들이 처음인 것 같소, 그래 끼니는 해결했소?"
우린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우물쭈물 하는 우리를 보던 노인은 "다 씻고 좀 들어오소."하는 말을 남기시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우리가 조심스레 문을 열었을 땐 노인이 부엌에서 밥을 푸는 중이었다. 그때의 밥 냄새를 나는 자부심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그 쌀밥냄새를 맡고 있는 생존의 자부심이었고, 앞으로도 목숨이 이어질 것이라는 희망의 자부심이었고, 세상이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을 것이란 믿음의 자부심이었다.
노인은 우리가 밥을 먹는 동안 오랜 중국 공산당원의 눈으로 본 김정일을 격앙된 어조로 저주하시였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인민 전체를 굶길 수 있냐며 배를 보니 양심도 없는 놈이라고 했다. 중학교 교사였다는 노인은 단둥과 신의주가 개방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 물어보기도 하셨다. 우리는 북한이 절대 개방할 수 없는 체제의 속성을 장시간 설명 해드렸다. 한동안 듣고 계시던 노인이 가까이 다가앉으시며 물었다.
"말하는 걸 보니 자네들 배운 사람들 같은데 왜 떠돌아다니오?"
남한으로 갈려고 한다는 친구의 대답에 노인은 자기가 잘 아는 한국 교회가 있으니 거기 목사를 만나면 성사될 것이라며 편지와 약도를 만들어 주셨다.
우리는 노인이 주신 편지를 한국으로 가는 여권마냥 소중히 품고 다시 연길로 들어갔다. 정성껏 그려주신 약도 때문인지 시외버스 정류장들이 밀집된 연길시장 근처 "연길교회" 간판도 의외로 쉽게 찾을 수가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세 명의 중년 남성이 있었다. 그 중 안경 낀 사람이 우리를 먼저 보고 반색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목사를 만나고 싶어서요."
우리는 님 자를 말할 줄 모른다. 북한에서 님은 오직 김정일의 존칭어로만 사용되기 때문에 우리에겐 목사가 목사님이 아니었다.
"어디서 오셨는데요?'
"목사에게만 말 할 수 있는데요."
"목사님은 지금 한국 들어가시고 없는데요. 내가 목사님을 대리하고 있으니 나에게 말해도 됩니다."
우린 편지를 꺼냈다. 그가 편지를 읽는 동안 우리는 책상 위의 십자가와 성경책을 이상한 물건처럼 눈여겨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큰 목청이 울렸다.
"탈북자야? 나가!""?""야, 이것들 내보내 탈북자야!"
나는 뜻밖의 상황에 몽둥이로 얻어맞은 것 같았다. 앉아있던 두 사람이 벌떡 일어나 우리를 방안에서 밀어내려고까지 했다. 그 기세에 문까지 힘없이 뒷걸음쳤을 때 갑자기 친구가 무릎을 끊었다.
"우린 한국교회라고해서 찾아왔습니다. 우린 한국에 갈려고 목숨 걸고 탈북한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나가면 우린 죽습니다."
안경 낀 사람이 악을 쓰며 소리 질렀다.
"너희들 같은 놈들이 한 둘이야? 우리 목사님이 너희들 때문에 공안에도 잡혀갔었어, 교회가 문 닫게 생겼어! 일어나서 안 나가? 안 나가!"
나는 억이 막혔다. 이것이 우리가 갈려고 했던 대한민국이었단 말인가? 이것이 우리가 그토록 찾던 한 민족이었단 말인가? 친구의 머리까지 툭 툭 치는 그들의 행패를 보는 순간 나는 그만 이성을 잃고 말았다. 안경 낀 사람의 면상을 후려치고 두 사람을 향해 옆에 있던 십자가를 흉기처럼 쳐들었다.
"공안 불러! 전화해!"
욕이라도 후련히 하고 싶었지만 그 소리에 나와 친구는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공안이 따라 올 것만 같은 착각에 미친 듯이 교회 멀리 뛰고 또 뛰었다. 한국입국 후 내가 한국기독교총연맹 세미나에서 그 이야기를 한 적 있다. 그랬더니 모두가 믿지를 않았다. 아마도 연길 현지 사람들일 것이라며 한국 사람이라면 절대로 그런 일이 없었을 것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그 날의 우리에겐 그 교회가 난생 처음 가 본 한국교회였고 그래서 그들도 한국인일 것이란 생각뿐이었다.
인적이 없는 곳에서 숨을 고르며 도망쳐 온 교회 쪽을 바라보던 그때 우리의 가슴은 먹먹하기만 했다. 방랑자의 희망이란 밟힐 때마다 소멸되는 것이다. 주머니에 남아있던 교회약도를 천천히 찢던 친구가 돈 십 원만 달라고 하였다. 이유를 묻자 오늘만은 술 한 병 사먹자고 하였다. 내가 그 말을 무시한 채 숨어서 잘 곳이나 찾자고 했더니 친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우리가 왜 그래야 하는데? 대한민국? 우린 거기 절대 못가! 금방 보고도 모르겠냐? 저 사람들이 공안에 신고한다잖아! 너나 나나 이젠 어느 민족도 아니야, 그냥 사람 같은 사람일 뿐이라고!"
난 아무 대꾸도 못했다. 우린 태어난 조국을 버렸는데 찾아가고 싶은 조국은 우리를 버린 것만 같아 육신만 있고 삶은 없는 자신들을 보는 듯해서였다.
5.
우린 백 원을 들고 시장 한 끝 매장으로 갔다. 술병을 들고 매만지기도 했지만 무겁게 내려놓고 말았다. 대신 백 원을 50원으로 바꿨다. 교회에서 도망칠 때 공안보다 친구 등을 놓치면 어쩌나 했던 불안이 더 컸기 때문이었다.
50원은 내가, 다른 50원은 친구 손에 쥐어주었다. 불가피한 사정으로 헤어지면 어디서 만나고, 만나도 사전에 자기의 안전신호는 무엇으로 보여줄지 구체적으로 약속했다.
가장 최선은 절대로 헤어지지 않는 것이어서 교회에서 도망칠 때 상황을 되새기며 뛸 때는 골목마다 무조건 오른쪽으로만 가야 한다는 것까지 약속했다. 유사시 연락처라며 그때 외웠던 신광용의 핸드폰 번호를 나는 아직까지도 잊지 않고 있다.
우리는 그때부터 교회를 포기하고 한국기업들을 찾아가기로 했다. 기업인을 직접 만나 우리의 간절한 소원을 아뢰고 그래도 통하지 않을 경우 그 회사가 한국에 보내는 컨테이너에 숨어가자고 계획했다. 그러자면 항구로 가야 했다. 가는 길을 물어보기 위해 신광용에게 전화를 했더니 차라리 연길에서 기업들을 찾아보라고 하였다.
연길은 정말 싫었다. 싫어도 백 원밖에 없는 처지에서 다른 방법 또한 없었다. 우리는 먼저 백 원으로 비누 한 장을 샀다. 배고픈 것은 우리 속사정일 뿐 살자면 남들에게 보여 지는 겉모양부터 다듬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잠은 반드시 우물이나 공동수도, 혹은 시냇물이 있는 외진 농촌에서 잤고. 아침이면 시내로 걸어 들어와 한글 간판 기업들을 찾아다녔다. 물론 신광용이가 사 준 선글라스를 똑같이 끼고 말이다.
누구든 연길로 가보면 알겠지만 거의나 한글이다. 정작 회사를 찾아들어가 보면 한국 상품만 있지 사람은 없었다. 한국의 대표적 기업들인 SAMSUNG이나 現代, LG를 찾아 이틀 동안 헤맨 적도 있었다. 그렇게 4일이 지나는 동안 내 돈은 물론 친구 돈도 거의 바닥이 났다. 그날도 온 하루 굶주림을 참다나니 빈혈이 났다. 만두가게 앞에서 나는 친구에게 사정했다.
“죽을 땐 죽더라도 오늘 네 그 마지막 십 원 쓰자”“무슨 십 원?”“너 십 원 남았잖아. 없는 척 하지 말고 좀 먹자”“정말 없는데?”
처음엔 장난치는 줄만 알았는데 친구가 화까지 내며 모든 주머니를 털어 보이기에 나는 한 구석으로 이끌고 가 그동안 먹고 썼던 돈을 일전도 빠짐없이 계산했다. 두 번 세 번 계산해 봐도 틀림없이 십 원이 남았다.
“너 이래도 발뺌할거야? 너 지금 나한데 십 원을 숨기려고 하는 거야? 왜 그러는데? 너 혹시 나 몰래 먹은 게 있어? 그랬어?”
내 듣기에도 나의 목소리는 크게 들렸다. 그러자 내 시선을 피해 불안하게 여기저기를 둘러보던 친구가 버럭 고함치는 것이 아닌가.
“그래 나 돈 썼다. 너 몰래 칼을 샀다!”
그러면서 허리춤에서 정말 손칼 하나를 꺼내 바닥에 내동이 쳤다.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한 끼도 달래기 힘든 우리 형편에 굳이 칼이 무슨 소용 있는가? 아니 친구에게 왜 나 몰래 칼이 필요했단 말인가?
고개를 쳐드는 친구의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이 보였다.
“우리 한국 못 가, 너무 사정을 모르고 왔어. 한국 사람만 만나면 다 될 줄 알았는데 아니잖아! 우린 지금 꽃제비야. 이러다 잡힐 건 뻔해, 잡히면 너나 나나 살 수 있을 것 같아? 3대멸족이라고! 그래서 차라리 잡힐 바엔. 죽으려고 샀다! 왜?”
바닥에 있는 그의 칼을 보니 내가 죽고 싶었다. 그동안 나의 유일한 위안이고 의지였던 친구가 이런 결심까지 품고 있었다는 사실 앞에 온 몸이 물먹은 솜처럼 잦아들었다. 돈 한 푼 없는 것보다 희망마저 잃는다는 것이 가장 두려운 상실감이었다. 나의 침묵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친구가 사정하기 시작했다.
“이러지 말고 우리 큰 아버지 집으로 가보자. 다른 방법 없잖아. 어차피 매한가지야, 이러다 죽든, 거기 갔다가 죽든”
나는 그때야 친구의 머릿속에 아직도 친척집 미련이 남아있고, 그것이 그를 그토록 나약하게 만드는 원인임을 알았다. 나는 그가 새겨들으라고 마디마다 또박또박 말했다.
“너도 들었잖아. 너 같은 친척이 없다잖아”“사촌형도 공안 때문에 당황했을 거야, 살인자가 아니라는 것을 직접 설명하면 다 이해해, 광용이도 말했지? 우리가 아무 것도 모르고 이 짓하는 것보다 그 사람이 나서면 한국 가는 것은 문제도 아니라고. 가보자,”
나는 당장 그를 설득하기엔 역부족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루 이틀 시간을 두고 마음을 돌려보기로 했다. 아니 친구로서 이해해주리라 믿으며 농촌에 나가 일단 집을 잡고 생각해보자고 했다.
백 원이 있을 땐 어디든 괜찮았지만 무일푼 처지에선 우선 안정적인 숙식장소를 확보하는 것이 다음 일을 추진할 수 있는 선결조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날이 점 점 어두워져서인지, 아니면 사내가 둘이라 위압감을 느껴서인지 어느 집이나 냉정하게 거절했다. 친구가 한숨 끝에 제안했다.
“우린 둘이잖아. 그러니 부담되기도 하고 한편 무섭기도 할 거야, 그러니 각자 집을 구하고 아침마다 이 나무 밑에서 만나자”“만약 못 구하면?”“그래도 내일 만나자, 혹시나 둘 중 한 명이 집을 못 구할 수도 있으니 낼 아침 나올 때 먹을 것을 가지고 오기!”
우린 이렇게 헤어졌다. 친구는 약속한 나무의 마을에서, 나는 고개 넘어 이웃 마을로 갔다. 손 흔드는 친구가 안심되지 않았지만 웃는 얼굴이 나를 끝내 가게 만들었다. 두만강을 넘은 후 처음으로 혼자 걷는 길이어선지 그동안의 일들을 정리해 볼 여유가 있었다.
한국 갈 수 있는 방법이 정말 없을까? 지금껏 만났던 사람들과 사건들에서 잘 못한 것은 무엇이고 앞으로 활용할 경험 가치는 무엇인가? 아니, 우선 무슨 말로 친구를 설득할 수 있을까? 광용이와 짜고 확 겁을 줘볼까? 어느새 날은 어두워졌고 역시나 찾아간 마을에서도 나는 냉대를 받았다. 그 마을은 이상하게도 개들까지도 어찌나 사나웠던지 도저히 편치 않았다.
친구에게 칼이 마침 있으니 만약 함께 동행 했다면 한 마리 잡아먹었겠는데,이 생각에 친구가 갑자기 그리워졌고 그래서 나무마을로 발걸음이 돌아섰다. 그런데 친구는 다행히도 고마운 인정들을 만났는지 나타나지 않았고 결국 나는 나무를 벗 삼아 홀로 보냈다. 아침이 되자 친구가 가져 올 고기만두 생각에 신바람 났다. 그러나 해가 중천에 떠오르도록 친구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 밤에도, 또 다음날 아침도,나는 꼬박 이틀을 굶은 채 그냥 나무를 지켰다.
3일째 되는 날, 필히 친구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광용에게 당장 전화를 해봐야겠다는 판단에 마을을 돌며 집 문들을 두드렸지만 그 소원마저도 쉽지 않았다. 정녕 방법이 없을까?
사람이란 애간장 탈 때에는 저절로 눈물이 나는 것 같다. 뿌옇게 김이 서리는 선글라스를 벗고 흰 눈 위에 주저앉았는데 그 때 옆을 지나던 한 할머니가 멍해있는 나에게 한마디 던졌다.
“조선에서 왔으면 여기 있지 마. 3일전에도 공안이 이 마을을 다 뒤졌어”
이틀을 굶어서인지 아니면 친구의 행처를 전혀 알길 없는 허탈함 때문인지 할머니가 하신 그 말의 의미를 모두 깨닫기까지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이곳을 떠야 한다! 그런데 어디로? 나는 일어서며 정신을 가다듬기 위해 혀를 깨물어 보았다. 그랬더니 아픔과 함께 순간 뇌리를 치는 곳이 있었다. 우리에게 세숫물과 함께 밥까지 주셨던 그 노인의 집이 떠올랐다. 나는 다시 용정리까지 걸어갔고 근심했던 것과 달리 쉽게 중학교 교사를 했다는 그 노인의 집을 찾을 수 있었다.
“친구는 어디 갔소?”“연길교회에서 전화로 공안을 부르기에 도망치다가 헤어졌습니다.”
나는 거짓말 했다. 노인이 소개해준 곳에서 봉변을 당했으니 책임지라는 식이었다. 방으로 들어서기 바쁘게 그 집 전화로 광용을 찾았다. 신호음이 울리는 동안 광용의 첫 음성은 과연 어떨까? 혹시 친구가 받았으면…….하고 기원했다.
“지금 어디요?”
광용의 거친 질문에 나는 흠칫했다.
“나 지금 용정리인데 혹시 친구가 전화 안 왔었어요?”“안 오긴 왜 안와, 이틀 전에 전화 왔었어요.”
나는 안도의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리고 밖에 펴놓은 옥수수를 돌보고 있는 노인의 동정을 살피며 헤어지게 된 경위를 소곤소곤 말했다. 광용의 말에 의하면 급히 만나자고 해서 나갔는데 친구 주제가 말이 아니더라는 것이다.
손전등들이 무리로 마을 입구로 들어서는 모습을 보고 황급히 뛰다나니 산을 넘게 되었고 길을 잃고 헤매던 중 이리저리 온 곳이 연길이었다는 곳이다. 그런데 문제는 친구가 친척집을 찾아가겠다고 고집했다는 것이다. 내가 전화 오면 자기가 친척을 데리고 올 때까지 기다리도록 잘 설득하라며 만약 잡히면 그때 도망치라했다는 것이다.
“안 된다고 했지요?”“어떻게 그렇게 해요? 그 사람 혼자라도 갈 기세던데, 그러다 잡히면 나도 끝나겠는데,”
일단 친구를 집에 숨겨두고 광용이는 다른 사람을 내세워 친구의 작은 삼촌이라는 사람을 만났다는 것이다. 핏줄이 가까워서인지 작은 삼촌은 자기 조카가 절대 살인할 사람이 아니라며 무척 만나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알리려 집에 전화하니 친구가 목욕하고 밖에 나갔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몇 시간 연락이 두절 돼 자기도 지금 바늘방석에 앉은 것만 같다는 게 광용의 마지막 설명이었다. 나는 그동안의 방랑생활에서 자신감이 생겨 잠시 경솔해진 것이니 곧 들어올 것이라며 안심시켰다.
그러나 노인의 집에서 잡일을 해주며 3일을 기다렸지만 친구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 3일 동안 나는 한 번도 심장이 조용히 뛴 적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광용의 다급한 전화가 왔다.
“금방 창용 삼촌 아주머니한데서 전화가 왔는데 친구가 잡힌 것 같아요! 공안이 와서 탈북자들 한데 돈을 얼마 받았냐며 창용 아저씨를 싣고 갔대요. 나도 집을 옮길 테니 당신도 빨리 그 곳을 떠요.”
나는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구나! 하는 당혹감에 두 무릎이 떨렸다. 붙잡히면 죽을 것이라는 충만했던 각오도 그 순간에는 허무하게 무너졌다. 더불어 나도 이제 곧 공안에서 덮칠 것만 같은 착각이 내 몸 안으로부터 세차게 요동쳤다.
6.
광용의 전화를 받고나서 나는 서둘러 옷을 입었지만 이내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돈 한 푼도 없이 어디로 간단 말인가? 그땐 정말 노인네 집 머슴이라도 될 수 있다면! 눈 감고 이런 짧은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그렇지! 눈이 번쩍 떠졌다. 창용 아저씨밖에 없다. 그는 내 돈 700달러씩이나 받지 않았는가. 주었던 걸 돌려달라면 비열한 짓인 줄 알았지만 내 처지에 무슨 인격을 돌보겠는가? 나는 전화를 들었다.
“광용이한데 전화번호를 알았는데요, 창용 아저씨 아직 안 들어왔어요?”“그래,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왜 헤어진 거야?”
창용 아저씨 처는 겁에 질려 목소리까지 떨고 있었다.그것을 안 그때의 나는 정말 몹쓸 인간이었다.
“내 말 똑바로 들으세요, 내 친구는 돈 준 사실을 전혀 몰라요, 내가 준 돈이었거든요, 그러니 안심하세요, 그러나 만약(나는 여기서 힘을 주었다.)내가 잡히는 경우 어떻게 될지 몰라요, 그러니 내가 지금 당장 어디든 멀리 떠날 수 있게 광용이에게 전화해서 돈 100달러를 준다고 약속해요.”
창용 아저씨 처는 하늘에까지 맹세했다. 하여 나는 연길에서 신광용을 만나 300원을 손에 쥘 수 있게 되었고(나머지는 만약 친구가 오면 주라고 남겨두었다.) 심양으로 가는 버스에도 오를 수 있었다. 노인의 말에 의하면 심양주재 한국 영사부가 있는데 거기를 걸쳐 한국 가는 탈북자들이 많다는 것이다.
버스에 올라 털썩 주저앉고 나니 너무도 엄청난 일들이 단 몇 초 사이에 이루어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때에야 친구의 불행에 대해 돌이켜보게 되었다. 정말 잡혔을까? 잡혔다면 지금 그는? 그러나 나는 자신에게 놀랐다. 왜 친구 잃은 슬픔보다 자신을 잃을 공포부터 앞세웠던가? 생사를 약속하고도 나는 왜 자결까지 결심했던 친구를 뒤에 두고 허겁지겁 달아날 궁리부터 했단 말인가? 비겁하고 치사하고 가증스러운 나! 나! 나! 이렇게 되뇌이며 손톱으로 계속 내 살을 꼬집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용서가 안 되고 스스로에 대한 미움을 도저히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흐르자 광용의 말을 다시 한 번 곰곰이 의미해보고 싶어졌다. 창용 아저씨가 공안에 불려갔다. 친구가 잡힌 것 같다. 이것이 전부일 뿐 확실한 근거는 없지 않은가? 아니 창용 아저씨가 미워하던 그 중국여자가 신고하여 단순한 조사 차원일 수도 있지 않은가? 친구는 살아있으리라. 이 미련으로 마음을 다잡으니 박동소리가 약해지며 조금 편해진 듯싶었다.
그것도 잠깐. 나는 이번엔 버스에 불안해졌다. 도 경계선은 물론 군을 하나하나 통과할 때마다 군인들이 올라와 통행증을 일일이 검열하는 북한처럼 이 버스가 검문소 앞에 멎으면 어쩌나 싶어서였다. 6시간 넘게 달리는 동안 그렇게 나는 떨어야 했고 기도해야만 했다. 마침내 야경이 넘치는 도시가 보였다. 그 화려한 중심으로 버스가 당당하게 질주할 때는 친구를 좀 더 기다렸을걸! 저 불빛들을 함께 볼 수 있다면! 하는 후회와 희망이 썰물과 밀물처럼 혈관 속으로 오고갔다. 버스가 멈추기 바쁘게 승객들 중 가장 먼저 내린 나의 눈에 거대한 시계가 보였다. 12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젠 어디든 갈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의 시간은 그 때뿐, 공안들이 또 서있는 광경에 나는 그만 기겁하여 몸을 숨겨 찾아 들어간 곳이 PC방이었다. 물론 알아서 거기 눌러 앉은 것은 아니었지만 우연 중 다행으로 한 구석 의자에 앉아 밤새 눈을 붙일 수 있었다…….
누군가 심하게 흔들어 깨웠다.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나니 핑크색으로 머리를 염색한 여자가 비명 지르며 뒷걸음 치고 있었다. 내가 몸을 솟구칠 때 떨어뜨린 만두 세 개 때문이었다. 나에겐 목숨 같은 식량인 그 만두들을 똥처럼 혐오스럽게 보던 핑크머리가 줍고 있는 내 등에 대고 욕을 했다. 그때 만두를 집으며 나는 속으로 욕했다. “북한 같았으면 네 머리 꼴만으로도 개년 돼!”
나는 그 PC방을 나올 때 간판을 익혀두었다. 훗날에도 또 가리라, 물론 핑크머리년이 없는 곳으로! 밝은 거리를 걷는 나는 연길에서와 달리 발걸음이 가벼웠다. 중국이 이렇게 생겼구나, 이런 곳이 외국이구나. 여권도 없는 공짜 관광이 흡족했다. 북한에서 볼 수 없는 광고들을 신기하게 쳐다보며 걷다나니 불안이 점 점 일어섰다. 한글들이 슬 슬 지워지더니 간판들이 모두가 중국어에 가려졌기 때문이었다. 그 도시가 심양이 아닌 장춘이라는 곳을 알았을 때는 기가 막혔다. 심양은 또 어디란 말인가? 나는 일단 한국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곳부터 찾아가야겠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간 곳이 “고향밥”이란 한글간판 음식점이었다.
“심양 가려고 하는데 알려주실 수 없습니까?”
식당 아줌마는 골똘히 쳐다보더니 대답 대신 무언가 내밀었다. 한글로 된 관광 안내책자였다. 책이 그렇게 인간에게 필요한 물건인줄 그때 새삼 알았다. 그 책이 가리키는 곳으로 버스터미널을 찾아갔고 그 책 덕에 “썬양”하고 입을 열어 티켓도 구매할 수 있었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김광선에게 전화를 걸었다.
“친구소식 없어요? 창용 아저씨는?”
광용은 달라진 것이 없다며 자기 사정을 더 길게 털어놓았다. 급하게 친구 집으로 짐을 옮기다나니 여간만 불편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는 동안 나는 그가 잠시 미웠다.
“내 친구가 꼭 전화 올 겁니다. 절대로 핸드폰을 꺼 놓지 말아요. 내가 지금 심양으로 가고 있으니 만약 친구가 오면 바로 출발하라고 해요”
심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하마터면 환성을 지를 번했다. 관광안내 책자에 심양 주재 한국 영사관 전화번호가 있는 것이었다. 나는 흥분됐다. 장춘 버스와 달리 심양버스는 느려 터진 것만 같아 발을 굴렀다. 빨리 가면 빨리 한국 갈 수 있는데, 심양에서 내리기 바쁘게 전화박스를 찾아 뛰었다. 두만강을 넘을 때부터 이렇게 줄곧 뛰었지만 언제 단 한 번 내 발이라고 느껴본 적 있었던가.
전화박스 안에서 번호를 돌릴 때에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신호음이 울리던 끝에 “여보세요”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자 숨이 컥 막혔다.
“여보세요, 한국 영사관이지요?”“네, 누구세요?”“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한국 영사관이 내 전화를 받고 있다는 사실에 너무도 격정이 끊어 올라 정신없이 이 말부터 마구 해댔다.
“근데 누구세요?”
나는 크게 호흡하고 또박또박 말했다.
“저 북한에서 왔습니다. 친구도 함께 왔습니다. 한국 가려고 합니다. 신분증도 가져왔고 정말 북한 사람 맞습니다.”
응답이 없었다. 기다렸지만 조용했다. 아니 전화가 끊어져 있었다. 망할 놈의 중국 전화! 나는 전화기를 주먹으로 쾅 쾅 쳤다. 고장 났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다시 뛰었다. 달리는 동안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내 전화를 애타게 기다릴 한국 영사관 직원을 생각하니 그동안의 고생들이 한꺼번에 두 눈으로 주르르 흘러 내렸다.
“여보세요”
다른 전화박스 안에서 이번엔 내가 먼저 불렀다.
“네 누구세요?”“금방 전화했던 사람입니다. 한국 망명을 신청하려고 합니다. 신분증도 가져왔습니다. 공안이 우리를 살인자로 지목하고 수배하고 있습니다. 우린 절대 살인하지 않았습니다.”“여보세요, 다 알겠는데 내 말 잘 들으세요, 이 전화가 그렇게 안전하지 않아요, 무슨 말인지 알겠죠?”
그 말에 나는 사방을 황황히 둘러보았다.
“여기 심양에서는 한국 가기 힘듭니다. 한국 갈려면 북경 대사관이나 영사관을 찾아가십시오, 우린 도움을 줄 수 없습니다.”“북경 대사관에는 어떻게 가는데요? 어떻게 들어갈 수 있어요?”“그건 탈북자들이 다 알아서 들어가요. 그것까지 우리가 어떻게 알려줘요?전화 오래 못해서 그러는데 이만 끊겠습니다.”
나는 전화를 그냥 들고 서있었다. 해외공관들의 전화가 주재국 정보기관들의 도청에 노출돼 있고, 그래서 혹시나 공안이 이쪽으로 올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움직이지 못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어떤 시련을 넘으며 왔는데? 설명을 잘 하지 못한 내 탓인 것만 같아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이번엔 받지 조차 않았다.
마치도 그 침묵은 교회에서 중국인들이 우리를 쫒던 욕질 같았고 하루 밤만 재워달라고 애원하는 우리를 보고 쾅 닫아버리던 대문 같았다. 대한민국이 이다지도 먼 단 말인가? 대한민국이 우리 탈북자들을 구출할 권한이 이렇게까지 없었단 말인가? 전화박스 밖으로 나올 때 세상 끝으로 누가 날 밀어버리는 것만 같아 서러움이 확 북받쳤다. 스스로 알아서 가야 한다는 영사관 직원의 그 말에는 북한 주민인 내가 전혀 없었고 그래서 내 보기에도 나란 존재는 이국의 하늘 밑을 떠도는 작은 먼지 같았다.
나는 그날 주머니에 남아있는 마지막 돈으로 술을 마셨다. 한 잔 두 잔 먹다나니 연길에서 친구가 술을 사자고 말했던 그 상황이 그때가 아니라 지금 같았다. 친구가 그리워졌다. 제발 살아서 나에게로 와주었으면, 제발 내일은 그와 함께 새롭게 시작했으면,아파트 옥상 위에서 그렇게 자고 일어난 나는 아침이어도 갈 데가 딱히 없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친구의 칼이 생각났다. 아직도 친구는 칼을 가지고 있을까? 만약 정말로 공안에 잡혔다면 그 칼을 원했던 것처럼 사용했을까? 이 생각까지 이르고 나니 나는 어디든 가야겠다는 결심이 서게 됐다. 그렇다. 북경으로 가자. 남들도 알아서 간다는 길을 내가 왜 못 가겠는가. 가자고 온 것이 아닌가. 여기까지 살아오지 않았는가.
나는 지붕 바닥 한쪽에 고여 있는 눈 녹은 물로 세수를 했고 옷도 툭툭 털었다. 그리고 시를 쓸 때와 같은 영감으로 사색했다. 사람도 땅도 모두 낯 설은 저 밑으로 내려가면 내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계단을 내려 현관까지 가는 동안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결론은 오직 하나였다. 사람이었다. 그것도 말부터 통하는 조선족을 찾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만난단 말인가? 중국말로 꽉 찬 이 심양에서! 그때 문득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
나는 우선 조용한 골목길에 섰다. 그리고 행인들을 행해 조용히 불렀다. 남자가 지나가면 “아저씨!” 여자가 지나가면 “아가씨!”했다. 중국인이라면 그냥 지나갈 것이고 조선족이라면 틀림없이 반사적으로 돌아볼 것이리라. 그렇게 한 시간 또 한 시간, 어느덧 시간이 흐르고 흘러 해가 점점 서쪽으로 기울어졌다. 세끼를 굶은 이 채로 또 하루가 지나면 어쩌나. 그 조바심에 애가 타는데 그때 저만치서 26살 돼 보이는 여자가 내 쪽으로 오고 있었다. 나는 앞에서 부르면 말을 알아듣지 못해도 목소리에 반응하기 때문에 그 여가 등을 보일 때쯤 불러보았다.
“아가씨!”
그러자 그 여가 걸음을 멈추었다. 돌아섰다. 그러더니 말했다.
“저를 불렀습니까?”
7.
"뭘 물어보시게요?"
틀림없는 한국말에 나는 그 여자가 구면처럼 느껴졌다.
"네"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내가 절박해보였던지 그 녀는 선뜻 나에게로 다가오기까지 했다. 나는 그때 가까이 오는 그가 고마웠다. 누군가로부터 이런 관심을 받는다는 것이 내가 아직 멀쩡한 인간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 같아서였다.
"어디를 물어보고 싶은데요?"
나는 마주 선 그가 며칠 동안 씻지 않은 내 몸 냄새에 불쾌해 하지 않을까 내심 걱정했다.
"우선 내 말을 마지막까지 들어주겠다는 것을 약속해주십시오""?"
여자는 조금 당황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그때야 내 아래 위를 얼핏 흩어보았다.
"전 이상한 사람은 절대 아니고 아가씨에게(동무라고 말할 번했다.) 해를 끼칠 사람도 아닙니다. 그냥 5분만 시간을 내서 제 이야기를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여자는 손목시계를 들여다 보고나서 머리를 끄덕거렸다. 나는 내가 북한에서 왔고 친구랑 헤어진 딱한 사정이며, 한국으로 가려고 한다는 것까지 절절히 호소하다시피 했다. 그러나 배고픔과 관련해서는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왠지 그때에는 같은 사람 대 사람 사이에 할 말이 아닌 듯싶어서였다. 내 말을 다 듣고 난 그 여자는 자기가 도울 수 있는 것이 뭐냐고 물었다. 다 들어줄 것만 같은 그 물음에 목구멍까지 나오는 "밥입니다." 말 대신 나는 "한국 가는 방법을 좀 알려주십시오."했다.
내가 그러길 잘했던 것 같다. 그 여자는 낯선 남자라는 경계심을 풀고 부지런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심양보다 북경 영사관으로 다들 간다는 것과, 한국 사람들이 많이 오는 대련으로 가면 고생이 덜하다는 것, 그리고 돈이 있으면 중국 여권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것까지 참으로 아는 것도 많았다.
"어떻게 그런 걸 다 알아요?" 이 질문이면 대화를 좀 더 이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역시나 그 여자는 내가 찾던 말동무임이 분명했다. 또 다시 이어가는 그 여자의 말 들 속에서 가장 반가웠던 것은 화룡시에 사는 자기 아버지가 탈북자들을 농사시키며 많이 숨겨주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무척 놀라며 그의 아버지를 대단한 분이라고 칭찬해주었다. 그러고 나서 내가 연길에서 심양까지 오는 길에 신세졌던 고마운 조선족들과 그들에 대한 나의 감사함을 열렬히 토로했다. 그 여자가 불쑥 물었다.
"이 심양에 친척이 있습니까?"
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럼 어디서 잡니까? 밥이나 먹었습니까?"
나는 먹었다는 말은 차마 입에서 안 나왔다. 잠시 고민하던 그 여자는 핸드폰으로 어딘가 전화를 했다. 혹시 공안에 신고라도 하는 것은 아닐까? 그의 핸드폰과 중국말이 조금 긴장되었다. 이윽고 나를 향해 돌아선 그 여자가 활달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까 친구가 나에게 찜질방 같이 가자고 했었는데 물어보니 표를 주겠답니다. 거기서 자겠습니까? 여기서 멀지 않습니다."
그 아버지의 그 딸이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나는 그와 함께 걸으며 이름을 물었다.
"왕초린!"
몇 번을 못 알아듣는 내 귀가 신기했던지 자기 이름을 소리치며 깔깔 웃었다. 나이는 내가 알아맞히겠다고 했더니 고기 굽는 리어카를 가리키며 맞히면 저 양꼬치를 사주겠다고 했다.
먹을 것 때문에 여자 나이를 가슴 조이며 점쳐 본 적은 아마 그때가 난생 처음인 것 같다. 얼마나 그게 빨리 먹고 싶었으면 "26살!"하고 외친다는 것이 "양꼬치!"해버렸다.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다행히도 초린은 내 실수를 모른 채 양꼬치를 진짜 사줄 것이라며 거듭 다짐했다.
"26살"조심스런 내 음성에 "몇 살?" 다시 물었다."26살"내가 좀 더 크게 말하자 초린은 손뼉을 짝짝 쳤다."틀렸어요, 에궁 양꼬치 못 사주겠다……."
그 말에 양꼬치가 더 간절해졌다.
"도대체 몇 살이에요?""27살"
단호한 그 대답에 나는 속으로 '일 년 늦게 태어 날 것이지...'하고 푸념했다. 그러나 초린은 마음이 예뻤다. 일 년 젊게 봐준 턱이라며 쪼르르 달려가 양꼬치를 네 개씩이나 사들고 왔다. 나는 사람은 역시 고기를 먹어야 한다니깐! 이렇게 감탄하며 두 개를 먹었고 초린이 준 한 개를 또 먹었다. 초린이가 꼭 소원 성취하라며 친구로부터 받은 찜질방 표를 내밀 때 나는 부탁했다.
"조금만 더 있다 가면 안 돼요? 난 그동안 공안에 쫒기며 사람이 무서웠었어요, 그래서 사람이 그리워요."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던 초린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힘내요. 나도 그러고 싶은데 내 대상이 기다리고 있어요.""대상? 그게 뭐죠.""음,,,뭐랄까. 한국에선 애인을 자기라고 부르잖아요. 우리 조선족은 대상이라고 해요"
이후 목욕을 하면서 나는 초린의 말에서 새롭게 안 대상의 의미에 피씩 웃었다. 뜻은 같은데 말이 다른 이국적인 여자를 직접 만난 그 시간이 믿기지 않을 만큼 새로워서였다.
나는 그날 씻고 또 씻었다. 몸이 깨끗해 질 기회가 다시 없을 것 같아 양꼬치 먹은 힘을 다해 때를 밀었다. 비누를 문댈 때 마다 친구생각이 났다. 나는 이렇게 더운 물에 목욕을 하는데 친구의 지금 상황은 어떨까. 광용에게 전화 할 돈도 남기지 않고 술을 사 먹은 내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뜨니 몸은 깨끗해졌지만 대신 아프지 않나싶을 정도로 배가 고팠다. 온 몸이 나른했다. 내가 여기서 어떻게 자게 됐는지. 그것도 한참을 생각해봐야 했다. 이어 초린이 생각이 났다. 참 고마운 애였지. 그런데 그 얼굴을 아무리 되새겨 보려 해도 좀처럼 기억나지 않았다. 그냥 양꼬치만 보였다. 그때 내 옆에 누군가 서있는 것만 같았다. 누굴까? 나는 망설였다. 두만강을 넘은 후부터 내가 먼저 남을 쳐다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맞지요? 어제 그 사람 맞지요?"
그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아니 글쎄 초린이가 아닌가.
"어떻게? 여기 어떻게 왔어요?"
나는 중국 땅에서 처음으로 지인을 우연히 만난 행운에 내가 한국말을, 그것도 북한 억양으로 소리치는 줄도 몰랐다.
"짜잔!"
초린은 폴싹 주저앉으며 플라스틱 통에 담겨진 흰 빵을 보여줬다. 나는 그때만큼은 진심으로 음식보다 사람이 더 반가웠다.
"어떻게 왔어요? 친구랑 같이 왔어요?""아니, 음식 줄려 왔어요. 어제 헤어질 때 사람이 그립다면서 더 있어달라고 말하던 게 자꾸 맘에 걸려서 분명 아침을 굶었겠구나, 이러면서 왔어요. 먹어요."
빵을 집어주는 그 손에 나는 무엇이든 주고 싶었다. 갑자기 공안이 가져간 내 외투안의 달러 생각이 났다.
"내가 어제 대상을 만나 자랑했어요. 이러이런 사람을 만났는데 이러이런 도움을 주었다고"
공상에 잠긴 듯한 초린의 표정이 무척 귀여웠다.
"대상이 뭐라고 해요? 중국 사람인가요?""네, 여기 한족이예요, 금방 뭘 물어봤죠? 아 참 내 대상이 뭐라고 했는지 그걸 물어봤죠?"
나는 그냥 웃었다.
"잘했다고 하던데요. 날 보고 착하다고 하면서 일요일 옷 사 주겠다고 했어요. 그 사람 착하죠?"
나는 둘 다 착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우리 대상도 김정일이 엄청 싫어해요. 아마 중국 사람들은 다 미워할걸요. 배 나온 게 싫어서. 조선은 다이어트 안 하죠?"
나는 마음씨도 말도 예쁜 초린에게 물이라도 떠주고 싶었다. 그래서 주변을 둘러보는데 벌써 그가 냉큼 일어나 물 컵을 두 개 들고 왔다. 그리고 허리를 굽히며 앉는데 옷 사이로 가슴굴곡이 살짝 보였다. 예쁜 그 속살은 도덕이요, 위선이요 하는 그 모든 겉 치례들을 부정하며 순수한 초린이 자체를 보여주는 듯싶었다.
"한국 언제 갈려고요?"
나는 아무에게라도 말하고 싶었던 고민들을 모두 털어놓았다. 설사 초린이가 그냥 사라진다고 해도 그가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무엇인가 얻는 것 같았다. 초린은 영리하기까지 했다. 광용에게 친구안부를 묻는 문제는 자기가 맡겠으니 한국 갈 큰돈을 해결할 논의나 하자고 하였다.
"돈 좀 벌만한 재간이 뭐가 있어요?"
그러고 보니 나는 정말 할 줄 아는 것이 아무도 없었다. 중국에서 지금껏 잘한 짓이란 공안을 피해 달아난 것밖에 없었다. 한숨 끝에 피아노를 좀 친다고 말을 흘렸더니 초린이가 버릇인지 손뼉을 쳤다.
"피아노를 칠 줄 알아요?"서울에서 내가 가끔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피아노를 치면 그들은 북한 사람이 어떻게 피아노를 치냐는 식으로 놀라군 한다. 마치도 북한은 음악도 없는 나라인 것처럼 말이다. 그때도 초린은 피아노란 말에 반신반의하는 기색이었다.
"어느 정도 치세요?""체르니 50번 정도"
초린이가 피아노를 전혀 몰랐다. 체르니 50번이라고해도 그 의미를 이해 못하기에 나는 연습과정을 한참이나 설명해주었다. 그 말을 다 듣고 난 초린은 자기 대상 조카가 한국인이 많이 오는 서탑에 사는데 그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면 용돈도 벌고 기회도 생길 것이라고 했다. 내가 감격에 두 주먹을 불끈 들어보이자 초린은 손뼉 치며 응원해주었다.
8.
초린이는 나 때문에 거의나 두 시간 넘게 여기 저기 통화했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친척의 허락보다 그의 전화비가 더 걱정됐다. 북한 같았으면 그 통화 값이 일반 주민 월급의 3배가 넘을 것이다. 북한에선 핸드폰이 특권의 상징이기도 하다. 가입비만 800달러가 되고 그 외에 접수비용 100달러를 더 내야 한다. 그러고도 중앙체신성 체신상의 사인이 떨어질 때까지 일주일 넘게 기다려야 한다. 그 기간에 중앙체신성은 국가보위부와 인민보안성으로부터 신청자의 범죄경력, 혹은 핸드폰 사용가능 여부를 조회 및 협의한다.
모든 신청자들을 기분 나쁘게 하는 것은 핸드폰 번호를 줄 때 중앙체신성에서 두꺼운 중국산 구식 핸드폰을 300달러에 의무적으로 사도록 바가지를 씌우는 것이다. 그러나 불평 부리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내가 번호를 받을 때만도 허가결정 번호를 보니 2000번 안이었다. 그 소수의 특권으로 들고만 다녀도 폼 나는 물건이기 때문에 대부분 핸드폰 사용자들은 돈을 따지지 않는다. 별도로 해외에서 작고 예쁜 외국 핸드폰을 구입하여 쓰면 그만인 것이다.
가장 인기는 액정판이 칼라로 된 한국의 삼성 핸드폰이 다. 이렇게 핸드폰 구입비까지 합쳐 거의 1500에서 1800불을 주어야 진정 목청 큰 핸드폰 소유자가 되는 것이 내가 북한에서 탈출할 때 당시의 2004년 실상이다. 일반 직장인의 한 달 월급이 2500원인데 핸드폰 한 달 최소 통화비는 2만원이니 열배나 넘는 통화요금에 습관적으로 늘 신경이 쓰였던 나는 초린이가 통화를 끝내고 돌아설 때 손을 저었다.
"안 된다면 그만 둬, 어차피 한국 가야 하는데""아닌데, 데려 오라는데"
초린의 대답은 짧고도 명료했다. 심양의 서탑이란 곳은 중국에 와서도 내가 처음 본 개혁개방 도시였다. 외국의 유명 로고타이프는 물론 한글간판들이 많고 너무도 번화하여 한국이 아닌가싶을 정도였다. 1월말인데도 흰 종아리를 드러낸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자들이 신기했다.
김정일과 함께 원산 갈마초대소에서 식사하며 봤던 왕재산경음악단 무용수들의 짧은 치마 이후 두 번째인 것 같았다. 내가 처음 친구를 만났던 것도 그 자리에서였다. 당조직부 5과에서 지도원을 했던 친구는 할아버지가 김일성의 동지였고, 아버지는 김정일의 동창생이었다.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당조직비서가 혁명선배들을 잘 모실 줄 안다며 사례를 든 이름이여서 북한에서 더 유명했다. 그래서 또 우리는 국경을 넘은 그 순간부터 살인자가 됐을지도 모른다. 변화와 세계가 보이는 이 번영의 도시로 친구와 함께 걸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이 생각으로 초린이가 앞에서 웃으며 손 흔드는 데도 아무 반응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따라갔다.
초린이가 삼촌이라고 소개한 사람의 집은 연길의 신광용의 집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평수도 꽤 넓었고 큰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볕도 무척 밝았다. 가죽소파에 앉을 때에는 뒤로 넘어지는 줄 알았다.
"일단 피아노를 보여 주십시오."
아들 전용으로 보이는 작은 방에 검은 색 YAMAHA가 있었다. 나는 의자에 앉기 바쁘게 페달부터 밟아보았다. 그동안 얼마나 피아노를 그냥 방치했으면 오른 쪽 페달이 눌러지는 것이 아니라 뻑뻑한 게 긁히는 감이 들었다. 건반을 맨 아래 옥타브 음부터 위까지 눌러보니 소리는 괜찮아보였다. 검은색 건반들도 비교적 정상이었다. 다만 조율하지 않은지 좀 오래된 것 같았다. 나는 피아노는 노래하는 생명이기 때문에 자주 관리해주지 않으면 계절과 집안의 온도 변화로 사람의 목소리처럼 음정에도 이상이 온다고 훈시했다.
"한번 해봐요" 초린이가 참지 못하고 졸랐다.나는 숨찼던 시간들을 잊고 잠시나마 안정을 얻고 싶은 갈망에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를 속으로 먼저 의미해 봤다. 그러고나서 "라" 온음을 왼 손으로 지그시 누르며 오른 손으로 미 라~도 미 라~도 이렇게 8분음표로부터 시작하자 옆에 선 초린은 두 손을 살포시 마주 잡았다.
나는 두 눈을 감았다. 가을의 고요를 들려주는 것만 같은 전반부 선율에서 긴장으로 종 종 잊었던 두고 온 집을 보고 싶었다. 아니 보였다. 내가 치던 피아노며 어머니가 늘 앉아 감상하시던 소파, 내 귀가 어두워진다며 아버지가 감춘 헤드폰 대신 녹음기 스피커에 갔다 대고 몰래 듣곤 했던 어머니의 청진기. 그리고 누나가 안고 있던 조카의 작은 손까지 보니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이별이 슬픔으로 이어지고, 소원이 공포로 변하던 여기까지 오는 길의 갈래마냥 내 손이 빨라지는 간주와 후반 부분에선 심장이 막 뛰었다. 마지막 음정과 함께 페달에서 조심히 발을 뗄 때에는 미간이 떨리며 끝내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물을 떠 가지고 온 초린은 건반에 그냥 올려 진 내 손에 쥐어주며 다른 때와 달리 조용히 말했다.
"우리 삼촌 좋은 사람이예요, 그치 삼촌? 나도 오빠가 한국 갈 때까지는 친구처럼 잘해줄게요."
거실로 옮겨 앉은 우리는 앞으로 하게 될 일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초린의 삼촌 말에 의하면 애 교육은 신경 쓰지 말고 기회가 오면 내일이라도 당장 한국으로 가도 좋다고 했다. 아들에게 음악교육을 시키려는 이유는 전문성보다도 인성교육 차원이라고 했다.
어린 나이에 비하면 너무도 고집이 세고 난폭해서 음악정서를 주입시켜 억지로라도 교정해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무엇이 중요한가 물었다. 나는 정서를 알자면 우선 음감부터 익혀야 하기 때문에 청음연습을 동반하며 피아노를 배워주겠다고 했다. 삼촌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지갑을 꺼내어 50원을 내밀었다. 초린이가 손뼉을 치려다 말고 자리를 박차며 발끈했다.
"삼촌 더 주세요!"
당황한 나는 집에서 먹고 자는 것만으로도 큰 신세라며 일어선 초린의 손을 잡아당겼다. 순간 그 손의 부드러움이 내 살 속으로 스며들었다. 산 속에서 날을 새고 소외양간에서 쪼그리고 잘 때 친구와 내가 주로 만졌던 것은 거친 것들밖에 없었다. 때로 친구의 손을 덥석 잡을 때에도 사람의 손이라는 생각을 못했었다. 떨리는 전율이 만져졌고 뜻밖에 살아난 두 목숨이 만져졌을 뿐이었다.
나는 초린의 그 손에서, 그 촉감에서 삶과 인간의 향수가 느껴졌다. 지금도 나는 선불일 뿐이라며 한 달에 350원을 주겠다고 말하는 삼촌을 향해 눈물에 젖어 쏘아보던 초린의 그 눈을 가끔 그려보군 한다.
우리가 이야기를 거의 마칠 때쯤 문이 떨어져 나갈듯 열리며 조그만 애가 쳐들어왔다. 삼촌이 중국말로 소리치는데도 그 애는 무엇을 찾는지 아랑 곳 없이 온 집안을 뛰어다녔다. 그리고는 들어올 때처럼 나갈 때도 문이 깨져나갈 듯이 쾅 닫고 사라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10살짜리 어린 애가 아니라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듯싶어 웃음이 났다. 상상했던 것보다 그 애는 훨씬 씩씩했다. 눈 떠서 잘 때까지 뛰거나 고함쳤다. 매일 아침 9시부터 나는 가르쳤고 초린은 옆에서 통역하고, 이렇게 어른 두 명이 달라붙었는데도 통제가 안 됐다.
피아노 앞에 앉으라면 의자위에 올라서 건반을 발로 밟았고 청음연습 시키려면 들려주는 음정마다 놀리듯 강아지 흉내 내며 멍멍했다. 보다 못해 삼촌 엄마가 한 손엔 막대기와 다른 손엔 칼을 들고 으름장 놓기도 했다. 초린의 설명에 의하면 삼촌엄마가 막대기를 들면 애가 부엌으로 달려가 칼을 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닐세라 삼일 후 그 녀석이 나에게도 칼을 장난감처럼 쳐들고 덤벼들기도 했다. 김광선에게 친구의 행처를 묻고 있는데 전화 선 코드를 뽑기에 쏘아본 것일 뿐인데도 말이다.
나는 그날부터 음악선생이 아니라 독재자가 되었다. 야단치는 것은 기본이고 애가 반항하려면 시범으로 초린이를 때린 척 했고 초린이는 아파 죽는 척 했다. 한번은 어린놈이 초린의 가슴을 들여다보겠다고 막무가내여서 막대기로 엉덩이를 몇 대 때리기도 했다. 울지도 않고 씩씩대던 그 동심의 결심이 어떤 엄청난 계획이었는지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꿈에도 몰랐다.
애가 밖으로 도망친 후 삼촌이 부르더니 70원을 주었다. 하여 내 주머니엔 120원이 모아졌다. 나는 그 돈으로 초린에게 밥을 사주고 싶었다. 고마워서이기도 하지만 그동안 도피생활로 잃었던 나의 인성을 찾고 싶었다. 떠돌며 쫓기는 과정에 밟히고 소멸된 내 인격과 자존심을 찾고 싶었다. 나를 인간으로 복원하고 싶었고 그 열정과 지혜로 하루 빨리 한국행을 다시 시도해보고 싶었다.
해가 점점 식어가는 저녁 쯤 나는 처음으로 외출을 했다. 초린과 그의 대상, 이렇게 셋이서 웨이터들이 현관 앞에 줄지어 선 고급음식점으로 갔다. 내가 사는 밥이어선지 입맛에 맞았다. 초린의 대상은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맘이 통할만큼 괜찮아 보였다. 나는 비로소 초린이의 앞날이 안심되면서도 한편으론 그 대상이 은근 슬쩍 부러웠다.
"너 배신만 해봐라!"
술이 조금 들어가니 이런 공갈도 하게 됐다. 웃으며 던진 그 말을 못 알아들은 초린의 대상은 좋은 뜻인 줄 알고 그냥 미소만 지었다. 나는 그때 언어란 것이 이렇게 중요하구나. 사람의 모든 감정은 언어로부터 시작되는구나 하고 새삼 알았다. 밥값은 내가 몰래 계산했는데 모태주가 비싸서인지 조금 모자랐다. 초린이 카운터로 달려와 야단치는 것을 나머지 돈만 겨우 내게 했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서탑으로 갔다. 대상이 거스름돈을 안 받겠다며 택시에서 먼저 내리자 초린은 기어이 받아내어 내 주머니에 살짝 넣어주었다. 나는 주머니에 들어온 그 손을 또 한 번 잡아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대신 초린이가 두 남자를 양 옆에 끼고 콩 콩 뛰며 걸어서 행복했다.
삼촌 집 앞에서 초인종을 누를 때까지만 해도 웃고 떠들던 우리는 열려진 문 안의 광경에 굳어지고 말았다. 공안이 두 명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심장이 뚝 떨어지는 것 같았지만 왠지 이상하게도 죽고 싶은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다음의 상황에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삼촌 아들이 내 앞으로 흔들흔들 걸어오더니 내 배를 꾹 찌르며 중국말로 뭐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공안 한 명이 내 앞으로 바투 왔다. 대뜸 초린이가 나서며 그 말을 받았는데 나는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공안과 초린이 사이에 고성이 오고 갔다. 이때라 싶었는지 초린이 삼촌이 설명했다.
"우리가 전에 당신이 탈북자이기 때문에 공안에 말하면 붙잡히니깐 절대 밖에 나가 말하지 말라고 했어. 근데 오늘 저 놈이 나가서 탈북자가 있다면서 공안을 데리고 온 거요. 이 사람들이 그래서 왔는데 초린이가 금방 한국 사람이라고 했으니 절대 놀라지 말아요."
공안이 나에게 손바닥을 펼쳐보였다. 초린이가 애인처럼 내 팔을 끼며 웃었다.
"여권 보여 달라고 해요. 가방을 분실했다고 내가 말해주겠으니 아무 이야기나 하세요. 빨리"
우리의 긴장과는 상관없이 덩지 큰 초린의 대상이 다른 공안에게 꽥 소리쳤다. 아마 담배를 끊으라고 욕을 한 것 같았다.
"초린아. 미안해, 나 때문에 삼촌이 벌금 물리는 거 아니야?"
내 목소리를 기다렸다는 듯 초린이가 공안에게 보다 당당하게 말했다. 그랬더니 공안이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급하게 했다. 초린이가 내 팔을 꽉 그러안았다.
"어머나! 차를 부르고 있어요, 어마나 어쩌지?"
그리고 비명처럼 중국말로 소리치자 대상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공안을 콱 밀쳐버렸다. 그와 동시에 초린이가 내 앞을 다급히 막아섰다.
"뛰어요!"
나는 계단을 몇 개씩 짚으며 미친 듯이 날아 내려왔다. 내 뒤에서 울리는 고함과 누군가 넘어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말이다. 그보다도 그 이후로 초린이와 영 영 헤어질 줄도 모르고 말이다.
9.
밖으로 달려 나와 나는 가장 구석진 곳에 숨었다. 혹시나 공안이 가고 나면 초린이를 만나고 싶어서였다. 설사 붙잡혀 북한으로 다시 끌려가도 감사하단 인사와 다음의 만남을 기약하고 싶었다. 그래서 아파트 현관이 보이는 어둠 속에 숨어 지켜보았다. 숨을 겨우 진정할 때쯤 사이렌을 울리며 공안 차가 왔다.
뒤이어 두 대가 다시 들이닥치며 모두 8명이 내렸다. 4명은 올라가고 나머지는 나를 찾으려는지 흩어졌다. 그들 중 한 명이 날 발견할 수 있는 곳까지 접근할 때 나는 슬그머니 일어서 처음엔 걷는 척하다가 이어 냅다 뛰었다. 아마 십 분 넘게 달린 것 같았다. 공안이 따라 붙지 않았다는 것을 두 번 세 번 확인했을 때에야 허리를 숙이고 토하듯 기침하며 가슴을 두드렸다.
그 밤은 몹시 추웠다. 연길에선 어떻게 산에서도 이틀이나 잤을까. 얼어 죽지 않았을까. 초린이 덕에 호강했던 며칠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사무치게 느껴졌다. 그래서 더 보고 싶었고, 도망칠 때 뒤에서 울렸던 쿵 소리가 공안이 문을 막고 있던 초린이를 밀어 버린 것은 아니었는지, 넘어지며 머리가 깨진 것은 아닌지 그가 불쌍해서 울고 싶었다.
나는 내가 너무 멀리 왔음을 깨닫고 온 길을 더듬어 되 돌아가려했다. 그런데 초린이 삼촌 집에서 외출 첫 날 당한 일이라, 그리고 친구랑 함께 뛰었다면 약속대로 골목마다 오른쪽으로 돌아섰겠지만 너무 여념 없었기 때문에 좀처럼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창문에서 내려다 본 기억으로는 기차역과 여러 선의 레일들이 뻗은 곳이어서 나는 그 근처에서 온 밤 헤매었다. 내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그 한참 후였다. 그러나 나는 허전한 게 아니라 오히려 웃음이 났다. 초린이가 맛있다며 손뼉 치던 음식들이 아니었던가. 나는 그날 밤 장춘에서와 마찬가지로 PC방에서 잤다.
다음날 아침 나는 다시 선글라스를 썼다. 시집노트와 신분증이 있는 곳을 만져보니 그대로였다. 가진 것이 많았다면 몰랐겠지만 그때에는 내 재산이 그게 전부여서 겨울옷은 주머니가 많아서 더 따뜻하게 여겨졌다. 초린이 삼촌 집을 찾아보려 노력했지만 어둠 속에서 미처 못 봤던 건물들이 난잡해서인지 밝은 낮이 도리어 더 캄캄했다.
초린이가 표를 주었던 찜질방이라도 찾을 수 있다면 그 앞에서 가다려 보련만,,,,택시타고 움직였기 때문에 도통 알 재간이 없었다. 나는 목숨을 건 이 먼 탈출에서 좀 더 세심하고 치밀하지 못한 자신을 발견하고 심각하게 반성했다. 그리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고 마음을 가다듬으며 방법을 고심했다. 문득 광용이 생각이 났다. 전화를 걸군 했으니 그의 핸드폰에 삼촌 집 번호가 남아있으리라. 그래서 전화를 하면 초린은 기필코 다시 달려 나오리라. 그것이 안 된다면 그동안 고맙다고 인사라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전화를 찾아 두리번거리던 나는 돈! 이 생각에 기운이 빠졌다. 광용에게 전화하고 다시 초린이 삼촌 집으로 연결하자면 최소 1원이라도 있어야 하는데,,,나는 혹시나 떨어진 돈이라도 없을까. 본능적으로 보도블럭을 유심히 살폈다. 땅만 보며 30분 걸었는데도 땡전도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초린이가 언젠가 이야기해줬던 서탑교회가 기억이 났다. 탈북자들이 거기 가서 동냥을 하는데 한국 사람들이 돈을 많이 준다는 것이었다. 어떤 탈북자는 그 돈을 모아 여권을 사서 편안히 갔다고도 했다. 하여 머리를 쳐들고 십자가가 솟아있는 그 하늘을 찾았다. 인생을 통째로 맡기는 구걸이 아니라 인간 對 인간으로서 전화비 1원만 부탁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것은 절대 동냥으로 되지 않으리라! 하지만 보이는 것은 부와 번영을 다투어 자랑하는 건물들과 고객을 부르는 광고 간판들뿐이었다. 그 속에 경회루라는 한글 간판이 보였다.
나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점심 식사 전이라 청소하는 아줌마만 있었다. "안녕하세요"인사했더니 아직 식사시간 전이라고 말해 나는 얼른 서탑교회를 물었다. 그가 그려준 약도와 설명대로 15분 쯤 걸어서 찾아갔더니 마침 한 무리가 그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현재 크리스챤이다. 주말마다 강남교회에서 기도하는 지금 생각해보면 그 시간이 아마 예배 전이었던 것 같다.
그때 그들이 흘리는 한국말이 나는 얼마나 반가웠던지 모른다. 내가 중국에 와서 처음으로 만난 내 민족, 대한민국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패션도 남달랐다. 옷감 재질이나 디자인도 중국 사람들과는 확실히 달라 보였다. 생머리 여자와 머리를 밤색으로 염색한 젊은 남자가 내 옆을 지나칠 땐 북한에서 보았던 "가을동화"드라마 주인공들 같기도 했다. 뿌듯했다. 나의 민족이 보기 좋아서 더 자랑스러웠다. 나는 이미 그들 속에 평등하게 서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말을 걸 수 없었다. 1원쯤은, 이런 생각으로 왔지만 1전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마치도 내가 아니라 내 아버지가 손 내미는 것 같고 내 어머니가 구걸하는 것 같아 도저히 용납 되지 않았다. 차라리 한국으로 보내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더 쉬울 것 같아 문을 열려는데 지키고 있던 사람이 물었다.
"어떻게 오셨어요?""목사 좀 만나려고 합니다. 꼭 말씀 드릴게 있어서 그럽니다."
내 억양에서 북한 사람임을 금방 안 그 사람이 나를 밖으로 밀어냈다.
"죄송한데 목사님은 예배를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일요일에 오세요, 그때 돈 줄게요, 지금은 안 돼요."
난 필사적으로 반항했다.
"난 돈 구걸하러 온 사람이 아닙니다. 돈 때문에 오지 않았습니다. 한국 가려고 왔다구요.""여기 탈북자들 오는 곳이 아닙니다. 영사관이나 대사관으로 찾아가세요, 탈북자들이 여기 자주 오기 때문에 공안도 근처에 많아요, 안 잡히겠으면 빨리 가세요."
서탑교회를 빠져나와 공안을 뒤로 의식하며 걸음을 다그치는 나의 가슴 속에선 울분이 치솟았다. 시집 "내 딸을 백원에 팝니다"에는 "우리 말"이란 시가 있다. 남의 말에 억눌리며 살려 달라 애원하는 그 우리 말이 "남한 사람들이여! 당신들의 국어라고 생각해보시라"고 호소하는 시가 바로 그때 심경을 그대로 옮긴 시다. 나는 정말 그때만큼 대한민국이 미워본 적 없었다. 내 짚는 걸음마다 연길시장 끝에서 외치던 친구의 절규도 들렸다.
"우린 한국 못 가, 너무 사정을 모르고 왔어, 한국 사람만 만나면 다 될 줄 알았는데 아니잖아! 우린 지금 꽃제비야, 이러다 잡힐 건 뻔해. 잡히면 너나 나나 살 수 있을 것 같아? 3대멸족이라고! 그래서 잡힐바엔 차라리 죽으려고 샀다! 왜?"
심장이 울렁거렸다. 친구가 선택했던 칼이 옳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지금 깨닫는 것을 친구는 그때 먼저 안 것일지도 모른다. 공원의 차디 찬 벤치에 앉아 갈 곳 없는 운명을 생각하니 만약 공안과 마주서면 어떻게 할까. 이런 마지막 상황을 그려보게 되었다. 만약 칼이라도 있었으면,,,혹시나 하는 마음에 윗 주머니를 더듬는데 무엇이 잡혔다. 손을 넣어보니 종이었다. 꺼내어 집어 던진 그 종이를 보던 나는 벌떡 몸을 솟구쳤다. 돈이 아닌가. 그것도 1원짜리 두 장이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만 같았다. 아니 어제 밤 택시에서 내릴 때 초린이가 기어이 챙겨 넣어준 거스름돈, 그 2원이었다.
"초린아!"
나는 그 이름을 부르며 달렸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고, 주먹으로 씻고 나면 또 흐려져 앞을 가렸다. 마침내 전화를 밖에 내 놓고 통화 장사를 하는 아줌마에게 나는 돈을 던지다 시피하고 급히 수화기를 들었다. 그다음 광용의 목소리를 기다리며 초린의 얼굴을 생김 그대로 기억해내려 했다.
"여보세요""나예요, 내 말 좀 들어주세요"
광용의 목소리가 들리기 바쁘게 통화시간을 단축할 일념으로, 그래야 초린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오직 그 한 생각으로 빠르게 말했다.
"돈이 없어 그러니 핸드폰을 이제 곧 닫고 내가 계속 통화를 했던 집 번호, 그 번호를 알려줘요, 내가 다시 금방 전화하겠으니깐,""지금 무슨 소리 하는거요?"
다시 설명하려고 하는데 광용의 다음 말이 내 입을 막았다.
"친구가 죽었어요""뭐?""당신 친구가 죽었다구요""무슨 말이야! 똑바로 설명해 이 자식아!"
고함치는 내 입도, 들고 있는 수화기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진정해요. 일단 진정하고 듣기만해요, 창용아저씨가 공안에 갔을 땐 친구 사진만 보여주더래요, 모른다고 하니깐 그냥 협박만 하다가 돌려보내더래요. 근데 어제 친구 작은 삼촌이라는 사람한데서 전화가 왔었어요. 친구가 당신이랑 헤어지고 나서 연길에 왔을 때 내가 말했잖아요, 친구 작은 삼촌을 찾았다고, 그때 내 전화번호를 주었었는데 어제 밤 전화가 왔었어요, 그래서 나갔더니 조카가 죽었다는거예요, 그것도 그냥 죽은 것이 아니라고 막 울어요. 공안에 붙잡혀 가던 도중 오줌 싸게 해달라고 차를 세워 벼랑에서 떨어져 죽었대요."
나는 그 뒤의 광용이 말은 기억나지 않는다. 죽었다. 그 말은 내 친구와 이어질 수 있는 말이 아니어서 그냥 서있기만 했다. 설사 친구의 삼촌이 한 말이라도 절대 가능할 일이 아니었다. 사람이 어떻게 죽을 수 있는가? 다른 사람도 아닌 내 친구가 어떻게 죽을 수 있단 말인가? 틀리는 말 일거야, 아니 오해일거야, 속으로부터 치밀어 오르는 오열에 울지 말자. 울지 말자 스스로 타이르며 걸었다. 그러다 걸음을 뚝 멈춘 그 자리서 나는 주저앉고 말았다.
친구가 그렇게 사정했는데도 사주지 않았던 술 생각이 나서였다. 잠시나마 한국행을 포기할지라도, 그래서 잠시나마 함께 나약해질지라도 그때 술 한 병 사서 먹었을 걸, 그러면 오히려 더 분발했을 걸,,,공안과 북한 보위부의 끈질긴 추격에 피가 타는 삶의 순간을 단 한 번 적셔보려 했을 뿐인데도 그 소원마저 이르지 못한 친구의 곡절에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때 더 안타까웠던 것은 나에겐 돈 한 푼도 없었다. 그래서 위안으로나마 친구의 마지막을 기원하고 두 손 모아 빌어 줄 술 한 잔도 없었다!. 술 한 잔도 없었다!. 술 한 잔도 없었다!
나는 자주 지인들에게 그 친구와 탈북과정을 이야기해주군 했다. 그러면 한결같이 글로 남기라고 했다. 하지만 탈북 후 5년 동안 친구의 마지막 운명을 부정하고 살았던 나였다. 혹시 글로 옮기면 지금도 어디선가 헤매고 있을 친구의 탈북을 방해할 것만 같은 미련 때문이었다.
내가 대한민국 영사관에서 2달 반을 머무르고 있던 마지막 날들에도 내 얼굴을 알아본 청진과 무산에서 온 탈북자가 6명이나 되었다. 그때도 그들은 광용의 말과는 다르게 친구 소식을 전해주었다. 우리가 탈북 후 뒤늦은 조치인지 평성과 청진 등 전국 곳곳에 친구와 내 수배사진이 걸렸었다고 했다.
평양시 중앙기관 사람들의 탈북인데다 친구 가문이 워낙 유명하여 사람들 속에서 소문이 자자했다는 것이다. 며칠 후 동인민반 회의에서 "배신자의 말로"라는 강연을 했는데 그 사례들 중 우리 이야기도 있었다고 한다.
아마 그 6명도 이 수기를 보고 있다면 영사관에서 친구의 죽음을 결단코 부정하던 고집스런 나를 기억할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 친구의 이름을 알고 있는 평양에서 온 고위탈북자가 친구의 자살을 확인해주었고, 그 날부터 나는 매일매일 이 수기를 쓰게 되었다.
이 저녁에도 나는 친구가 마지막을 결심할 때 그 심정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어질고 착한 그가 어떻게 몸이 부서지는 그 벼랑 밑으로 뛰어내릴 용단을 했을까. 하고 눈물 흘리게 된다. 북한은 중국 공안에 그를 살인자라고 신고했다.
남을 살해한 도피자는 절대로 자살하지 않는다. 자유의 선택을 살인으로 규정한 김정일 독재가 살해했고. 북한의 악법인 3대멸족이 살해했다. 내 친구는 이렇게 나이 30에 죽었다. 창용아저씨가 비밀로 해달라던 그 700달러를 가슴에 품은 채, 대한민국에 오지 못한 한을 심장에 묻은 채 말이다.
10.
뜬 눈으로 날을 밝힌 후 나는 완전 다른 사람이 되었다. 더는 공안이 무섭지 않았다. 설사 잡힌다 해도 친구와 똑같은 선택을 하면 그만인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그때의 충격은 나에게 삶이란 매 순간이 기적이고 생명의 도전임을 느끼게 했다. 북경으로 가자! 나는 일어섰다.
자살했다는 광용의 말은 친구가 그렇듯 자살하고 싶을 만큼 괴로운 처지이리라. 내가 빨리 가야 한국정부의 도움으로 그를 구출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광용의 말이 정말로 사실이라면 그렇게 가는 길이 곧 친구의 한을 갚는 복수가 될 것 같았다. 하여 나는 북경으로 가는 차비를 어떻게 구할 수 있을까? 머리를 싸쥐고 고민했다. 도둑질을 할 수 없었고, 그렇다고 일요일을 기다려 서탑교회 앞에서 동냥하는 것은 더욱 싫었다.
나는 이 수기를 쓰는 기회에 심양 서탑의 경회루 사장님께 사죄를 하고 싶다. 이유야 어쨌든 나는 그 분께 사기를 쳤다. 구차한 변명이겠지만 그때 나의 처지에선 한글 간판이 유일한 희망이었고 그래서 경회루로 찾아들어간 것이다.
"사장 좀 불러주세요"
나는 구걸이 아니라 빚 받으러 온 사람처럼 당당하게 사장을 찾았다. 잠시 후 나타난 40대 중반의 남성은 세무조사라도 나 온 중국 공무원 같은 내 폼을 살피더니 직원을 향해 소리쳤다.
"여기 차 두잔!"
직원이 차를 놓고 가기를 기다렸던 나는 입을 열었다.
"전 북한에서 왔습니다."
그러자 사장은 다시 소리쳤다.
"여기 밥 가져와!"
나는 사실 문을 열고 들어설 때부터 요리 냄새에 창자가 끓었지만 그 말에 발끈하는 척했다.
"나는 밥 먹으러 오지 않았습니다. 그냥 말씀 드릴게 있어서 왔을 뿐입니다."
사장은 나를 뚫어지게 보더니 이번에도 역시 직원들을 향해 소리쳤다.
"밥 취소! 가져오지 마!"
나는 순간 오늘 굶겠구나 하고 속으로 탄식했다.
"혹시 000기업을 아십니까?""그 기업이라면 우리 한국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근데 무슨 일로?""그럼 그 회사 000회장님도 아십니까?""내가 어떻게 그런 분을 알겠소. 도체 뭘 물어 보려고?"
나는 그 회장의 프로필을 알고 있었다. 북한에 있을 때 남한의 유명기업들을 대북사업으로 유도하기 위해 통전부가 작성했던 CFO들의 개인 자료들을 열람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통전부의 그 자료들을 토대로 나는 탈북자로서는 도저히 그렇게 알 수 없을 만큼 000기업 회장의 친인척관계와 알려지지 않은 약간의 가족갈등에 대해서까지 자세히 설명했다. 끝으로 중국 한인회 회장과 안면 정도는 있는 것 같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그러고 나서 또박또박 말했다.
"나는 그 분 조카입니다."
사장은 차를 마시다 힐끔 쳐다보았다.
"큰 아버지가 지금 미국 갔는데 저의 탈북을 알고 모레 당장 사람을 보내겠다고 했습니다. 근데 나는 친구가 북경에서 기다리는 관계로 더 못 있을 것 같습니다. 내가 단순히 동냥이나 하러 왔으면 그 이상 요구했겠지만 난 지금 차비만 부탁드리려고 합니다. 꼭 갚겠습니다. 그 이상으로"
아마 경회루 사장님은 속으로 코웃음 쳤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를 대단한 사기꾼으로 보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도 몰랐던 000기업 회장의 흥미진진한 직계 일화까지 주어 섬기는 것을 보고 정말 조카일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아무튼 경회루 사장님은 북경까지 250원 정도 소요될 것이라며 선뜻 내주셨다. 아직까지 중국에 가지 못한 이유로 나는 그 분께 빚을 졌다.
훗날 심양에 가면 꼭 사장님을 만나 뵙고 용서를 빌고 싶다. 내 믿음으로는 웃으며 이해해주실 그런 분이시다.
나는 그렇게 북경으로 갈 수 있었다. 버스에 오르기 전 터미널 근처에서 한국의 대표언론사의 신문을 샀다. 남이 보면 한국 사람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나는 북경으로 가면 어떻게 대사관이나 영사관으로 들어갈지 고민해보았다. 가장 큰 문제는 언어였다. 심양도 서탑을 벗어나면 힘든데 북경은 더 할 것이다. 아니 북경도 서탑처럼 한국거리가 있을 것이다. 그 쪽부터 찾아가야겠다고 결심하며 신문을 펼쳤다. 가보고 싶은 한국이어서 점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고 보게 됐다. 그런데 한 장 두 장 펼치던 나의 눈에 갑자기 불꽃이 튀었다. 한 쪽 작은 구석에 그 신문사 전화번호가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생각을 모으기 위해 눈을 감았다.
북한 노동신문 같은 경우 중국 주재 특파기자 세 명 중 두 명은 단순히 기자가 아니라 대남공작부서와 국가보위부의 스파이다. 한국은 사기업이기 때문에 그런 일이 절대 없을 것이지만 그래도 특파기자의 업무 특성상 한국 국정원과 유대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바로 이 것이다! 특파기자를 찾자! 나는 무릎을 쳤다. 버스에 내리기 바쁘게 전화박스를 찾았다. 신문에 적혀있는 번호를 돌리는 동안 한국 영사관처럼 거절하면 어쩌나 싶어 두근거렸다.
"여보세요"
아가씨 목소리였다.
"안녕하십니까. 제 말을 잘 들어주십시오, 저는 북한 중앙기관에서 근무하다 며칠 전에 탈출한 사람입니다. 저는 한국행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네 신문사에 특종을 제보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습니다.""잠시만요"
아가씨의 목소리가 나보다 더 다급해보였다. 잠시 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반갑습니다. 우선 자신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소개해줄 수 있습니까?""나는 전화를 오래 할 수 없습니다. 지금 쫒기는 몸입니다. 그러니 당신네 신문사 북경 주재 특파기자 전화번호를 알려주십시오, 도청 될 우려가 있으니 반드시 그의 개인 핸드폰 번호를 알려 주십시오.""네 네, 알려드리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곧 알려드리겠습니다."
나는 그가 알려준 번호를 즉석에서 다시 돌렸다. 훗날 특파기자는 나와 만난 자리에서 자기 핸드폰으로 탈북자가 전화 올지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했다. 나는 그 쪽 본사는 왜 그 정도로 멍청하냐고 웃으며 농담했지만 그때의 나에겐 그 전화번호가 운명적인 행운이었다.
"여보세요"
특파기자 핸드폰은 세 번째 시도 끝에야 연결됐다. 나는 그 동안에 내가 한국 영사관과 통화할 때 어떤 점이 실책이었는가를 생각해 볼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단순히 탈북자의 한국행 소원보다도 내가 누구이고, 어떤 정보가 있으며, 그래서 한국에 어떻게 필요할 것이라는 구체적인 이해관계를 상대방에게 정확히 인식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그것도 단 한번 주어진 통화 기회에! 가장 분명하게!
"저는 통전부에서 근무했던 사람입니다." 이 말로부터 시작한 나는 논리정연하게 탈북동기와 앞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현 처지를 이야기했다. 마지막엔 국정원과 연결시켜줄 것을 희망한다는 말로 끝맺었다. 그 분은 오랜 특파기자 경험이 있는지 아주 냉철했다.
"제가 국정원을 모르죠, 알 수도 없죠. 하지만 내가 아는 다른 사람에게 말해보겠으니 십분 후에 다시 전화 걸어보십시오"
나는 정확히 십분 후에 수화기를 들었다. 그러자 다른 번호를 알려주며 지금 그 분이 기다리고 있으니 빨리 해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고맙다고 거듭 인사를 하면서도 혹시 날 피하려고 이러는 것이 아닌가 싶어 차마 전화를 놓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가 알려준 다른 번호는 신호음이 한 번 울리기 바쁘게 반색했다.
"여보세요""안녕하십니까. 저는 북한에서...""알고 있어요, 알고 있어요, 정말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 사람은 내 말을 서둘러 막으며 이야기했는데 그 내용들이 날 놀라게 했다. 그는 내가 친구와 함께 언제 탈북했으며 살인자로 수배되고 있다는 것, 공안은 물론 중국 국가안전국에서도 쫒고 있다는 것과 북한 대사관으로 어제 북한 국가보위부가 나왔다는 것까지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물었다.
"지금 친구랑 같이 있지요?"
친구와 헤어졌다는 나의 대답에 침묵을 지키던 그는 다시 물었다.
"그럼 당신 신분을 확인시켜 줄 수 있는 신분증이 있지요?""네, 그건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갖고 있습니다.""알았습니다. 당신만이라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친구는 훗날 찾기로 하고, 그러니 그 자리에서 절대 떠나지 마세요. 우리가 최대한 빨리 가겠습니다."
그 다음 과정부터는 나는 이야기 할 수가 없다. 내가 더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고마운 손길들의 보호로 안정을 보장 받은 그 나날에도 나는 폭풍의 공포에서 고요의 공포에 떨었다는 것이다.
내가 미처 몰랐던 중국 국가안전국의 추격과 나를 체포하기 위해 별도로 북경까지 파견된 국가보위부의 존재감 때문이었다. 실제로 탈북 전 업무 차로 북경 주재 북한 대사관에 들렸던 평양출신 한 고위 탈북자는 내 사진을 들고 온 국가보위부 사람들과 대화 한 적도 있었다. 그 자리서 북한 보위부 사람들은 한 놈은 잡았으니 나만 무조건 잡아 들어가면 된다고 했고, 북한 대사는 이 넓은 중국 땅에서 어떻게 찾냐고 푸념했다고 한다. 그는 얼마 전에 호혜일이란 이름으로"북한요지경"책을 냈다.
그가 내 손을 잡고 전해주던 그 끔찍한 말들이 서울 생활 5년 동안 꿈에서 자꾸 들리기도 했다. 나는 북경 주재 영사관으로 가는 차 안에서도 혹시나 이 차가 북한 대사관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부들부들 떨었다. 얼마 후 양 옆에 바투 붙어 앉았던 두 사람 중 한 명이 말했다.
"장선생님, 이젠 웃으세요, 머리를 들고 저기를 보세요, 태극기예요. 대한민국 국기예요"
나는 그들이 가리키는 손끝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정말 파란 하늘을 뚫고 일어 선 하얀 태극기가 있었다.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하겠는데 울음부터 쏟아져 나왔다.
진정해야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했지만 나는 그 울음을 그칠 수가 없었다. 그때는 내가 참아야 될 눈물이 아니었다. 눈물이 참아주고 다독여 주어야 할 나였다.
내가 믿어지지 않아서 울었고 함께 못 온 친구 얼굴이 떠올라서 또 울었다. 그때 천만마디 말로도 다 표현 못할 나의 격정을 시집 "내 딸을 백원에 팝니다"에 담았다. 태극기를 보았을 때, 그 깃발을 알지도 못했지만, 그 땅을 보지도 못했지만, 자유와 민주도 몰랐지만 그 밑에 온 몸이 무너져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고,
11.
탈북스토리 연재 후 많은 사람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런 엄청난 고생과 위험을 겪었을지 몰랐다며 어떤 분은 통화 과정에 울기도 하셨다. 그 분들에게 나는 2만 명의 탈북자들 중 한 사람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씀 드렸다. 아니 어쩌면 난 남들에 비해 덜 고생하며 탈북한 행운아일지도 모른다. 북한에서부터 갖고 나온 달러에 기댈 수라도 있었고, 창용아저씨, 신광용씨, 왕초린과 같은 평생 못 잊을 은인들도 만날 수 있었다.
나의 굶주림이란 거지처럼 거리에서 동냥을 한 번도 하지 않아도 될 정도였고, 1월의 산 속에서 추위에 떤 날도 고작 이틀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대한민국 영사관에 들어갈 때까지 중국 땅에서의 방황도 남들처럼 수년세월이 아니라 20일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산속에서 몇 년을 토굴생활 하다가 온 탈북자들, 공안에 잡혀 북송됐다 살아 온 그 기막힌 운명들을 글로 옮겼다면 아마 나의 탈출기는 배낭여행 정도 밖에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곡절 많은 탈북여정을 어떻게 다 그려낼 수 있겠는가. 탈북자동지회 홍순경회장님은 태국에서 북한 보위부에 납치되어 실려 가는 과정에 불행 중 다행의 차사고로 현지경찰에 망명을 요구할 수 있었다. 자유북한방송국 김성민 국장은 쇠고랑을 찬 채로 달리는 북한열차에서 뛰어내려 자유의 소원을 두 손에 꼭 모아 쥐고 무릎걸음으로 얼어붙은 두만강을 기어서 넘었다. 우리의 탈북은 한 목숨만으로도 부족한 것이기도 하였다. 탈북자구출센터 백명학 소장은 세 번이나 북송됐다 세 번 탈출하여 대한민국 품에 안길 수 있었다.
조선일보 강철환기자는 노예 같은 북한공민의 권리조차 없었기에 인권을 찾아 요덕 정치범 수용소에서 살아 나온 사람이다.
이렇게 온 우리들을 대한민국 국민들은 탈북자라고 한다. 그러나 탈북자란 그 이름마저 갖지 못한 채 이국땅을 방황하다 숨진 이들 또한 얼마나 많은가. 메콩강의 급류 속에서 튜브 하나에 가족의 운명을 실었다가 아이만 살려 보낸 한 부부의 비극도 있고, 영사관 진입 도중 공안들이 달려들어 눈앞에서 생이별한 눈물의 母女(모녀)도 있다.
탈북! 그 말은 이렇듯 북한체제의 탈출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결심할 때 이미 생명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목숨의 탈출이기도 하였다.
하기에 인류가 말할 수 있는 모든 비극이 가슴에 응축되어 피멍든 그들, 각자마다 최소한 이별의 아픔이라도 부여안고 모대기는 그들이 바로 우리 2만 명의 탈북자들이다.
나는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부르짖고 싶다. 당신들에겐 그냥 태어난 대한민국이지만 우리 탈북자들에겐 이렇게 죽기를 각오하고 찾아오지 않으면 안 되는 대한민국이라는 것을! 정녕 조국이란 태어난 곳이 아니라 죽어서도 묻히고 싶은 곳이라는 것을!
나는 또한 대한민국의 어르신들에게 엎드려 큰 절을 드리고 싶다.내 조국 반쪽이라도 이렇듯 자유의 땅! 민주의 땅! 선진화의 땅으로 만들어주셨기에 우리는 우리의 생명도 사람의 것이라고 기어이 살아서 가리라! 외치며 사생결단 찾아 올 수 있었다.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나의 두 눈에선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진다.대한민국 흙 한줌도 보듬고 싶을 만큼 이 땅이 고마워서 울고, 그래서 북한에 두고 온 그리운 얼굴들 때문에 또 운다. 이별은 떠나는 마음보다 보내는 마음이 더 아프다 했지만 살아도 삶이 없던 그 땅에선 이별의 권리마저 없었기에 그 아픔마저 주지 못한 나는 이별의 죄인이다.
어디 나뿐이겠는가. 우리 탈북자들 모두가 아직도 탈북하지 못한 가슴 반쪽을 부여잡고 좋은 음식이면 좋은 음식에 목이 메어 울고, 설날이면 또 가는 한 세월에 울고 있다. 분단의 철책선이 땅에만 아니라 그렇듯 생살까지 찢으며 가로 지른 그 수난자들이 바로 우리 탈북자들이다.
이 수기를 쓰는 며칠 동안에도 나는 5년 동안 겨우 잠재웠던 악몽에 또 다시 시달려야 했다. 두만강을 넘다가 총에 맞기도 했고, 창용아저씨 장모집 옆 빈농가에 숨어있다 불쑥 나타났던 공안의 얼굴에 화들짝 놀라기도 했다. 친구가 공안의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 날 살리려고 벼랑에서 뛰어내린 꿈을 꾼 날에는 한 밤중에 일어나 앉아 소리 내어 울기도 했다.
북한 땅에서 어떻게 살았던가 싶을 만큼 기억만으로도 공포에 시달려야 했고 악몽만으로도 숨 가쁜 생사에 가슴조려야 하는 탈북자가 어디 나뿐이랴.
그렇다. 우리 탈북자들은 결코 북한체제를 탈출만 한 사람들이 아니었다.우리의 탈북은 땅에 묻은 사람들의 복수였으며 독재 권력과 인간과의 치열한 전쟁이었으며 살아서 온 인간의 승리였다.
나는 이 수기를 마치며 소원하건대 심양의 왕초린을 찾고 싶다. 내가 인터넷에 글을 올린 이유 중 하나가 그 때문이기도 하다. 지금쯤 대상, 아니 남편이 되었을 그 친구와 결혼도 하고 어느덧 애들도 가졌을 것이다. 어느 날 불쑥 연락이 와서 친구처럼, 아니 친척처럼 소식을 주고받고 내왕도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루에도 수십 번 공상을 해 본다.
영사관에 들어가면 신광용에게 전화를 자유롭게 할 수 있고, 그러면 초린이에게 내 소식도 전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나의 보호를 위해 허락해주지 않았다. 며칠 동안 졸라 마침내 나대신 다른 분이 연락을 넣어 봤지만 그때 신광용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 후에 주민등록증을 받아 대한민국 국민이 된 날 창용아저씨를 통해 바뀐 광용의 전화번호를 알 수 있었고, 그렇게 우리의 인연은 지금도 끈끈하게 이어지고 있다. 안타깝게도 광용은 초린이 삼촌 집 전화번호를 기억해 내지 못했다. 현재 광용은 탈북자인 청진여자와 함께 노원구에서 살고 있다. 예쁜 엄마를 닮은 아들도 있다.
창용아저씨는 우리가 준 700달러로 견인기 대신 소 한 마리와 가전제품을 샀다고 했다. 나는 그들에게, 아니 조선족 사람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다. 솔직히 그들이 없다면 오늘날 2만 명의 탈북자도 없다고 본다. 비록 사회주의 중국에서 살고 있지만 민족적 동정심과 인간의 양심으로 김정일 정권에 침을 뱉는 그들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 탈북자들에겐 숨어있을 은신처와 얻어먹을 만두가 있고 탈출의 방법도 있었다. 그러고 보면 김정일은 민족의 포위망에 든 셈이다.
분단의 38선 너머에는 자유민주주의 국민이 있고 내부에는 주민들의 분노가 있다. 북쪽에는 김정일을 민족의 수치로 생각하는 우리 조선족 사람들이 탈북자들의 탈출을 도와주고 있다. 그들은 중국에선 소수민족일지는 몰라도 대한민국에는 민족과 영토의 유구한 역사와 그 가치의 대를 잇고 증명하는 大민족이라고 본다.
나는 누구보다도 먼저 우리 탈북자들이 그들에게 감사하고 단체 차원에서 연대활동도 벌려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더 많은 탈북자들을 구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절실히 필요하고 그들이 우리의 예의와 도리에 감동하여 탈북자들을 위해 아낌없는 지원을 하게 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정부 차원에서도 조선족 사람들이 親한정서를 가질 수 있는 정책을 추진하여 김정일 정권을 더욱 고립시켜야 한다. 또 그것이 북한체제 붕괴에 대비하는 하나의 방법이기도 하며 궁극적인 통일의 위업이라고 본다.
나는 인터넷을 통해 공개되는 이 수기를 볼 북한 통전부 친구들에게 나의 오늘을 자신 있게 말해주고 싶다. 나는 밥 한 줌에 생명을 느끼고 산 속에서 추위에 떨며 날을 새던 도피자가 더는 아니다. 못 알아들을 중국말에 멸시받고, 개처럼 쫓기고 밥 한줌 값도 안 되는 동전을 소원하던 김정일정권의 주민이 아니다.
나는 현재 국책연구소의 선임연구원으로 근무한다. 대학 강의도 나가고 내 손으로 쓴 책“내 딸을 백원에 팝니다”와 “김정일의 마지막 여자”를 누구의 간섭이 없이 출판할 수도 있었다. 한 달 전엔 서울 친구들도 부러워 할 새 아파트도 가졌다.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대신해주는 고마운 어르신들의 존함을 여기에 적는다면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될 것이다. 나는 이렇듯 충성으로 바치는 삶이 아니라 성취로 가지는 삶을 살고 있으며 민주적인 선거권으로 대통령을 결정할 수도 있다. 나는 내 목숨이 소중하고 내 삶이 이렇듯 풍부해질 수 있다는 것을 이 땅에서 처음 느꼈다.
김정일은 자기에겐 불가능이란 없다고 했다. 그 불가능이란 정권도 총에서 나온다고 말할 줄 아는 독재자의 파렴치하고도 타락한 가능이다. 그러나 나에겐 인간으로서의 불가능이란 없다. 나는 이미 저 북한에서, 그리고 한국으로 찾아오는 험난한 길에서 극도의 공포도 체험해 보았고, 외로워 보았고, 슬퍼 보았고, 친구를 잃은 상실의 아픔도 느꼈다. 나에겐 이젠 더 이상의 아픔이란 있을 수가 없다. 이제 또 어려운 일에 부닥칠지라도 지금껏 겪었던 그 모든 좌절과 비극에 절대 비할 수는 없다. 얼마든지 견딜 수 있으며 백번이라도 다시 일어날 용기가 혈맥에 가득 차 넘친다. 대한민국에서 나에겐 행복할 권리와 성공의 의무만 있으며 또 그것을 위해 열심히 살 앞날만 남았다. 그 모든 것을 바칠 평생의 반려자를 찾아 새 가정도 예쁘게 만들기도 하리라. 이것이 바로 자기에겐 불가능이란 없다는 독재자 김정일과 전혀 다른 나의 무궁무진한 인간의 가능이다.
그동안 저의 글을 보아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되는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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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대화록 전문을 읽어보았음
밑에 분이 읽어보셨다길래 찾아서 저도 읽어봄
대화 내내 노대통령이 대화를 이끌고 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음
김정일은 대화 중간중간 노대통령의 의제 설정에 끌려다니는 모습,,,,
그리고 NLL 포기발언이라고 발췌된 내용들에는 없는 내용들이었는데
북한 4군단지역, 서해지역은 북한의 핵심전력들이 모여있는 곳이기도 하고 잠수함기지를 비롯해서
군사적 요충지인데
그 요충지인 해주지역도 개성공단과 마찬가지로 열어달라는 제의를 했으나
북한 입장에서는 김정일이 언급했듯이 개미 한마리도 숨도 못쉴 정도로 군이 밀집해있는 곳을
개성공단의 성과물이 아직 나오지도 않은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내어준다는 것은 큰 리스크가 있기 때문에
해주를 허락할 수 없다라는 입장이고
남측 입장은 개성공단의 질적, 양적 크기를 키우자는 입장에서 해주와 해상통로를 개방하자라는 입장,,
그렇다면, 북측에서는 해주 방어를 어느 정도 내어주는 조건으로,
NLL을 비롯한 서해지역의 평화지대설정을 요구함
그런 이야기의 흐름에서 NLL의 이야기가 나온 것이고
악의적으로 발췌한 NLL포기발언이라는 발췌문은 사실 북측의 해주 방어의 양보를 담보로 한
개성공단을 비롯한 남북경제협력의 밑 그림들 중 하나인 것으로 파악됨
즉, 보기에 따라서 NLL포기라고 볼수도 있는 노대통령의 제안은 사실 북측도 큰 양보를 한다는 조건으로
이야기가 후속진행된 것임이 밝혀짐
안타까운 것은 이 이상의 협력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는 점,,
대화록의 내용대로 개성공단의 상호협력이 강화되고 진전됐더라면 해주를 비롯한 신의주, 그리고 남북간 기술협력,
특히나 조선분야의 협력이 강화되었고 북한을 세계경제로 이끌어 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
해주쪽 양보는 군부의 저항이 예상됐었지만 전문에서도 보듯 이미 북한 내에서는 양보하는데에 큰 문제가 없는 것으로
합의가 된 것으로 보임
북측입장에서는 개성공단의 성과물에 따라서 우리가 더 개방할 것인지를 판단하려고 했었던 것 같고,,
개성공단이 일시중단된 현 시점에서 그때의 대화록을 보고 있노라니,,,
좀 안타까움
아래는 읽은 곳 링크http://m.pressian.com/article.asp?article_num=60130625101343&rnum=&sc=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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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NLL 관련 정리 2
다 읽고 보니 중요한 것 그리고 발췌본의 오해를 만드는 내용들관련이 더 있어서 추가 합니다. 정일이가 미국과 관련하여 자주 자조라는 이야기를 6자 회담 관련하여 많이 함. -------------------------------이하 아래 에서 밣힌 사이트에서 나온 원문 발췌-----------------------------------대통령: 자주의 문제를 많이 제기하시는데...영국의 토니 블레어의 말하자면 자문을 하는...그 양반 이름이 누구지.. 예, 기든스라는 사람의 책을 보니까 영국이 미국에 너무 의지하지 말고 좀 자주적으로 가라..그리고 유럽을 중시하라.. 이렇게 조언을 해 놓은 것을 봤습니다. 마찬가지로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영국도 보기에 따라 자주적으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은 그 수준으로 올려버리면 세상에 자주적인 나라가 북측에 공화국밖에 없고... 나머지는 다 덜 자주적인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우리가 미국에 의지해왔습니다. 그리고 친미국가입니다. 사실...객관적 사실입니다. 그것이 해방될 때.. 그리고 분단정부를 세우는 과정에서 그리고 한국전이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이렇게 역사적으로 형성되어 온 것이어서 남측의 어떤 정부도 하루아침에 미국과 관계를 싹둑 끊고 북측이 하시는 것처럼 이런 수준의 자주를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나는 시간이 좀 필요하다... 점진적 자주로 가자... 지금까지는 적어도 김대중 대통령이 들어서시기 전까지는 점진적 자주에 대한 의지도 없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을 실제로 자주란 말씀을 자주 하진 않으셨지마는 6.15 회담부터 자주적인 행보...일부입니다. 그 때...김정일: 박정희 대통령이 자주라는 구호가 나오지 않았소?대통령: 그랬습니다. 그분 뭐 핵무기도 만들려고 하셨고...했는데...김정일: 자조...자조지요 뭐..자조..대통령: 근데 그것으로 말하자면 실천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지요...그래서 이제..어쨌든 자주...자주국방이라는 말을 이제 우리 군대가 비로소 쓰기 시작합니다. 주적 용어 없애 버렸습니다. 그다음에.. 균형외교라는 말을 우리 정부에서 와서 쓰고 있지 않습니까.. 공공연하게 쓰고 있지 않습니까..공식 균형외교라는 말을 쓰고 있죠... 작전통수권 환수하고 있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2사단 후방배치를 미국이... 또 이런저런 전략이라고 얘기하지만... 그건 후보 때부터 얘기하던 나의 방침이기도 합니다. 왜 미국 군대가 거기 가 있냐.. 인계 철선 얘기하는데 미국이 인계철선이 디면 우린 자주권을 가질 수가 없는 것 아니냐... 국방을 거기다 맡겨놓고 어떻게 우리가 자주를 얘기할 수 있느냐..그래서 2사단 철수한다는 것이 방침이었는데 마침 미국도 재배치계획을 가지고 있어서 일치해서 용산기지를 이전하는 데 우리가 60억 달러라는 돈이 듭니다. 그런데 60억 달러가 들어도 100억 달러가 들어도 대한민국수도 한복판에 외국군대가 있는 것은 나라 체면이 아니다... 보냈지 않았습니까...보냈고...나갑니다. 2011년 되면... 그래서 자꾸 의제 너희들 뭐하냐.. 이렇게만 보지 마시구요. 점진적으로 달라지고 있구나.. 이렇게 보시면 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략적 유연성.. 전략적 유연성 문제에 있어서 우리가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만.. 동북아시아에서 군대를 움직일 때에는 우리 정부의 승인을 반드시 받아야 된다.. 합의했지 않았습니까.. 작계 5029라는 것을 미측이 만들어 가지고 우리에게 가는데.. 그거 지금 못한다.. 이렇게 해서 없애버리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개념계획이란 수준으로 타협을 해가지고 있는데 이제 그거 없어진 겁니다. 그렇게 없어지고.. 우리는 전쟁사실 자체를.. 전쟁상황 자체를 동의하지 않기 때문에... 그건 뭐 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2012년 되면 작전통제권을 우리가 단독으로 행사하게 됩니다. 그 다음에 어제 엊그제 국군의 날 행사 때 우리 국군의.. 우리 안보 개념은 대북 안보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는 동북아시아 전체를 내다본 안보체제를 갖추어야 한다.. 일관되게 여러가지 이야기 했습니다. 했고.. 한반도가 동북아시아의 균형자가 되어야 한다...이런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뭐 내가 결의가 단호해서 그렇거나 훌륭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이것이 남쪽의 국민들의 보편적 정서로서 가고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제 이 가는 기운은 강력하게 굳혀 나가는 것.. 우리 국민들 사이에서 그 흐름을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굳혀나가는 것은 남북관계에 성과 있는 진전이 있어야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첫 번째가 평화에 대한 어떤 의지 표현이 있어야 되는 것 아니냐 이런 것입니다. 난 그렇게 우선 자주 문제에 대해서 그렇게 점진적 시간적 개념으로 보고... 그다음에 이제 내가 몇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개성공단을 조금 더 속도를 내자 아니면 조금 늦추자 뭐 이런 것이 하는 동안에 우리가 우리끼리 결단을 내고 속도를 빨리 내자.. 그것이 미국하고 사실은 조율을 어느 정도 합니다. 왜 그러냐.. 지금 공단에 반입하는 물건 하나하나에 대한 승인을 미국이 하고 있거든요.. 그럼 승인 안 받고 하면 어떻게 되는냐 소위 고급 컴퓨터 이런 것입니다.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승인 안 받고 하면 안되냐.. 했더니.. 그렇게 미국하고 감정을 많이 상해놓으면 승인이 어려워.. 승인을 안 받으면 어떻게 되느냐... 그것을 생산하는 사람들이 국제무대에서 소위 미국과 관계되는 모든 거래에 있어서 지장이 생기기 때문에 물건을 안 팔라고 한단 말이죠.. 지난번에 BDA때...BDA는 뭐.. 그건 미국의 실책입니다. 분명히 얘기를 하는데.. 실책인데.. 그러나 어쨌든 미국의 실책임에도 불구하고 북측의 돈을 받으라하니까 어느 은행도 안 받겠다 하는 것 아닙니까.. 미측이 가지고 있는 현실적인 힘이고 그 돈 받았다가 은행 거래가 미국으로부터 제재를 당하면 은행을 못 해먹을 판이 되니까 전부다 중국도.. 발빼고 다 발 빼고.. 심지어 미국을 거친 것조차도 미국 중앙은행을 거친 돈조차도 안 받겠다고 하는 것이 경제에서의 현실이거든요.. 그래서 우리도 그런 점에서 자주하고 싶어도 자주하기 어려운 현실적 상황이 존재하는 것이고요.. 원자로.. 경수로 그것 좀 중국에 하고 인도 뭐 이런데 좀 팔아먹을라고 하고 있는데 미국이 오케이하지 않으면 기술은 다 가지고 있는데 마지막 권리증을 그쪽이 가지고 있단 말이죠. 그런데 이번에 이제 권리증이 웨스팅하우스로 넘어와 가지고 이제 그쪽하고 협의를 해야 되는 것이죠. 이제 다른 종속이 아니고 기술종속에 의해서 기술의 격차에 의해서 도리없는 종속이 발생하는 것이죠. 지난번에 경수로 못한다? 그 이종석씨 잘 아실 겁니다. 기존 이종석이 보고 우리가 경수로 짓자? 미국 제끼고? 몇 번 말로 하니까 안되다 그래서 그럼 안 되는 이유를 보고서로 글로 써내라? 분석보고서를 써내라.. 한번 올라왔는데 뭐 좀 자세하지 않아서 한 번 더 이거 이거 이거 다시 보고서를 내보라 지적해서 다시 보고서를 받았는데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끼리 아무리 하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없다는 현실들이? 우리 소위 남측의 경제가 확 주름이 잡힌다든지 기업들이 곤란을 겪는 일들을 정부가 결정해야 된다는 것이.. 되지도 않으면서 고립을 자초하는.. 고립을 자초하는 자주는.. 이것은 할 수 없는 것이다. 세계 역사를 봐도 활발한 교역에 앞장선 국가들이 세계 패권을 가지고 왔던 것입니다. 우리는 세계 패권을 꿈꿀 수는 없겠지만, 한반도가 7천만 경제권을 가지고, 그래서 동북아시아에 실제 중심을 잡는 이런 위치에 가자면 경제에 있어서 앞서가야 되고 경제를 유지하자면 교역권 활발하게 안 할 수 없는 이런 애로가 있다는 점을 이해를 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그렇지만은 이와 같은 세계 경제의 현식속에 북측도 함께 발을 들여야? 시장에는 발을 디뎌야지 안디디고 어떻게 갈 수 있겠느냐? 그런 해명을 좀 말씀드리고요.. 그래서 비위를 살피고 눈치를 보는 이유가 사대주의 정신보다는 먹고사는 현실 때문에 그렇게 되고 있다는 점을 잘 이해를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부시 대통령 종전선언 이 문제에 있어서 정말 한번 성사시켜 보라고 하셨는데? 이 부분 좀 시간을 두고 위원장님하고 뭐 하나 말씀을 나누고 갔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무조건 가가지고 부시대통령한테 하자.. 이것은 아니니까 남북 간에 여기까지 갔으니까, 이제 또 이걸 부시대통령이 그렇게 말했으니까, 그걸 디디고 와서 내가 위원장님께 우리 이런 거 한번 합시다 말씀드릴 수 있었듯이?김정일: 당면하게 이제 부시대통령도 시간없지요 뭐 이제?김양건: 예, 그렇습니다.대통령: 하여튼 뭐 이런 상징적인 행위가 이루어지면 더 좋고.. 아니라 할지라도 뭔가 진전할 수 있는 뭘 토대를 하나.. 디딤돌을 하나 또 위원장께서 이 기회에 만들어주시면 그 디딤돌 가지고 다음 단계로 또 나아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서해 군사분계선의 문제 있습니다. 이 문제는 위원장하고 나하고 관계에서 좀 더 깊이 있는 논의를 해야 됩니다. 우리 남측 군인들 내보내놨더니요.. 갔다와서 그렇게 하지말고.. 지금은 아닙니다만.. 지금은 우리도 여러 가지 있습니다. NLL 타협해라? 대선국면이 아니었거든요.. 그 당시는? 대선 국면이 아니고.. NLL 문제 의제로 넣어라.. 넣어서 타협해야될 것 아니냐.. 그것이 국제법적인 근거도 없고 논리적 근거도 분명치 않은 것인데.. 그러나 현실로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북측 인민으로서도 아마 자존심이 걸린 것이고.. 남측에서는 이걸 영토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혼동이라는 것을 풀어가면서 풀어야 되는 것인데...이 풀자는 의지를 군사회담 넣어놓으니까 싸움질만 하고요.. 풀자는 의지를... 두 가지.. 의지가 부족하고 자기들 안보만 생각했지 풀자는 의지가 부족하고.. 뭐 아무리 설명을 해도 자꾸 딴소리를 하는 겁니다. 그거 안됩니다 하고.. 그 다음에 이런 여러가지 위원장께서 제기하신 서해 공동어로 평화의 바다.. 내가 봐도 숨통이 막히는데 그거 남쪽에다 그냥 확 해서 해결해버리면 좋겠는데.. 이어 놓으면은 군사적으로 이거 뭐 안보 위협이 생기고.. 이렇게 내부에서 보고하는 사람들부터 이러니까... 이 문제는 전혀 무시할 수 없는 일이지만은 말하자면 최고위급에서 이 문제를 말하자면 가야된다... 이번 대선국면에서 뭐 한나라당이 저렇게 하지 않으면 지난 번 내 군사회담에다 이건 다루라고 했거든요.. 했는데 지금은 인제 내가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려있어서 그 얘기를 바로 꺼내긴 어렵지만은 ...그래서 이제 의제는 그렇습니다. 그렇고 이걸 풀어나가는 데 좀더 현명한 방법이 있지 않겠느냐...거기 말하자면 NLL 가지고 이걸 바꾼다 어쩐다가 아니고... 그건 옛날 기본합의에 연장선상에서 앞으로 협의해 나가기로 하고 여기에는 커다란 어떤 공동의 번영을 위한 그런 바다이용계획을 세움으로써 민감한 문제들을 미래지향적으로 풀어나갈 수 있지 않겠느냐.. 그런 큰 틀의 뭔가 우리가 지혜를 한번 발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죠... 해주 아이디어는 오늘 처음 들었습니다. 정몽헌씨가 그런 제안을 했다는 것을 처음 들었는데.. 해주는 군사적으로 민감해서 잘 안 주실 것이라고 들었는데 오히려 나는 거꾸로 생각했습니다. 개성보다 더 해주가 민감한 것으로 들었는데...그 점은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어떻든 해주 발상이라는 것은 그런 큰 틀 속에 들어있는 것인데.. 그냥 배경설명입니다. 그렇게만 들어주시면 좋겠구요... 그래서 공동어로 이런 문제에 대해서 이것은 적어도 뭐 총리급 수준에서도 얘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만... 결정권을 가진 위원장과 내가 한번 얘기를 좀더 깊게 해봤으면 좋겠다... 위원장이 지금 구상하신 공동어로 수역을 이렇게 군사 서로 철수하고 공동어로하고 평화수역이 말씀에 대해서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거든요.. 단지 딱가서 NLL 말만 나오면 전부다 막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는 것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인데 위원장하고 나하고 이 문제를 깊이 논의해볼 가치가 있는게 아니냐... 그리고 국방회담이라든지 이런 문제에 대해서 전향적으로 말씀해주신데 대해서 참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6자회담에 관해서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는데 조금전에 보고를 그렇게 상세하게 보고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남측에서 이번에 가서 핵문제 확실하게 이야기하고 와라...주문이 많죠.. 근데 그것은 나는 되도록이면 가서 판 깨고.. 판깨지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주장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많은 국민들이 또 그게 중요하다고 그래요...중요한 일입니다. 중요한 일인데... 그러나 문제는 6자회담에서 이미 풀려가고 있고 그 틀이 근본적인...문제해결이 가능한 틀이기 때문에 거기서 풀자.. 그런 것들을 내가 계속 주장해왔고..했습니다. 했는데 우리 국민들에게 안심시키기 위해서 핵문제는 이렇게 풀어간다는 수준의 그런 확인을 한번 해주시면 더욱 고맙겠습니다. 안그러면 가가지고 인제 뭐 내가 해명을 많이 해야되죠...한 줄 들어있으면은 가서 뭐 이렇게 간다...이렇게 될 것 같구요.. 경제협력은 좋습니다. 위원장이 지금 때가 아니다라고 보시면 그렇게 저는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런데 그래도 다음에라도 뭔가 총리급에 하더라도 뭔가 위임과 지시가 없으면 앞으로 못나갑니다. 남측도 마찬가지입니다. 총리에게 이런 방향으로 푸시오라고 방향을 주어야 되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그런 점에 있어서 오늘 무슨 결론을 내고 선언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위원장하고 나하고 사이에 경제문제가 어떻게 풀려나가야 되는 지에 대해서 서로간의 의견을...위원장께서 갖고 있는 한계를 분명하게 모르고 우린 우리끼리 막 그림을 그야말로.. 허황된 그림을 많이 그렸습니다. 그러나 남측에서 볼 때 이 그림은 허황된 것이 아니고 정말 이게 돈되는 것인데..앞으로 우리가 일류국가로 가자면 이거 해야되는 것인데... 라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또 이 설명을 충분히 한번 드리고.. 또 우리도 위원장의 한계가 뭐라는 것을 분명하게 가져가면 또 그 아래서 우리가 계획을 다시 만들어서 또 제안을드리고 해야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또 좀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이 점은 나도 아프게 생각합니다. 남쪽 사람들이 개성공단을 가지고 이것이 개방의 미끼인 것처럼 자연히 뭐 개성공단처럼 하면은 북측이 개방하고 개혁할 것이라고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데 대해서는 나도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이건 뭐 여러가지 생각이 있으니까 이야기를 하는 것인데 나는 그런 견해에 대해서는 찬성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아니고 진정한 의미에서 말하자면 경제확산, 기술확산 이거 해야되는 것인데...특구를 얘기하는 것은 공화국 전체의 법 체제를 한국기업이 기업활동을 할 수 있게 바꾼다는 것은 너무 어렵습니다. 신의주도 좋습니다. 신의주라도 그건 뭐...좋고 나진 선봉 다 좋습니다. 문제는 이게 서로 거래방법, 기업운영방법이 너무 다르기 때문에 지금 이대로 특구가 아니고는 투자할 기업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지금 전체 투자 중에 92년...93년부터 투자가 시작됐고.. 94년부터 투자가 시작됐지만은 다 거의 실패하고요.. 성공한 것은 개성공단, 금강산 두 군데 뿐입니다. 지금 남측의 대북투자의 80%가 전부 특구 투자이고요...그 건수로는 80% 정도이고 금액으로는 88%가 특구입니다. 지금 26개 시범사업 하고 있는데 이번에 이제 1단계 분양이 돼서 230개 들어옵니다. 들어오는데 그동안 이걸 1년 정도는 내가 더 당길 수 있었는데 사실은 나도 그 결단을 혼자 할 수 없어서.. 아까 말씀드린 것과 같은 그런 이유로 좀 지체가 된 것을 정말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이런 문제를 고려해서 우리가 특구를 말씀드린 것이지 특구를 가지고 장난치자고 하는 생각은 절대 아니다... 그런 점에 대해서 그렇게 말씀을 일단 드리고요... 그래서 이제 공부를 그동안에 보고서를 이 사람들한테 내가 이만큼 받아놨습니다. 세세하게 위원장께서 좀 아셔야될 부분이 있다고 생각을 해서.. 지금 기업경영에 있어서 무엇이 애로에 걸려 어렵고... 이런 것들을 다 일일이 안하더라도 큰 틀에 있어서.김정일: 법률적인 제도적인 제한턱들은 너무 앞으로 더 어떻게 하든지 간에 앞으로 남조선 경제를 일임하는.. 돈받자고 해도..법률적인 제도적인 조정사업이 아마 있어야 된다고 본인은 생각을 합니다.김양건: 예, 그런 문제들은 제기됩니다. 일정한 문제들은 제기됩니다.대통령: 위원장께서 혁명적 결단을 하셔야 됩니다. 특구를 하시든 특구 이외의 것을 하시든요, 우리도 바라건데 혁명적 결단을 하셔야 합니다. 개성공단이 2000년에 합의가 된 것인데요. 기업 입주한 것이 2004년 아닙니까, 이제 2007년에 와서 230개가 들어온 것입니다. 이게 되게 느린 것입니다. 남측에서도 공단 하나 계획해서 시작하려면 시간이 걸립니다. 공단 하나 들어서는데 10년이 걸리는데요. 우리가 인천특구, 말하자면 인천경제자유구역을 지금 만드는데 아직 황량한 벌판입니다. 2002년에 기획해 가지고 넘겨준 것인데 5년 동안 죽을 둥 살 둥 해도 아직 인천경제자유구역이 자유구역답게 되려면 앞으로 5년, 10년은 더 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경수로 하나 하는 것도요, 정치적 상황 때문에 그렇겠지만, 94년에 합의 되가지고 98년에 첫 삽 뜨고 2003년 초에 중단이 됐는데, 그 중단될 때까지 35% 공정 밖에 안 됐습니다. 그 투자한 돈 13억달러 안고 있습니다만, 우리는 경수로 꼭 지어야 합니다. 아까 김계관 부상이 그랬습니다. 적대시정책 철회하고, 비핵화는 전 조선반도에 한다. 이거 좋습니다. 이미 합의된 거니까. 지금은 6자회담 주제에 남북 문제가 안 들어있으니까 그렇지. 이것은 남북간에도 충분히 합의하고, 이미 합의가 있는 거니까 지켜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평화적 이용권, 적극적으로 찬성합니다. 말하자면 미국이 안 줄려고 하면 6자회담은 성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시간적으로 신뢰를 확보해가는 과정 아니겠습니까. 신뢰를 누구를 기준으로 하느냐, 국제사회에서 사실 그렇습니다. BDA문제는 미국이 잘못한 것인데, 북측을 보고 손가락질하고, 북측보고 풀어라 하고, 부당하다는 거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문제를 실질적으로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국제사회에서 지지를 확보해야 됩니다. 그래서 나는 지난 5년 동안 내내 북핵문제를 둘러싼 북측의 6자회담에서의 입장을 가지고 미국과 싸워왔고, 국제무대에 나가서 북측 입장을 변호해 왔습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내가 행동하면서, 미국하고 딱 끊고 당신 잘못했다고 하지 못한 것은 미국이 회담장을 박차고 떠나 버리면, 북측도 좋은 일이 아니겠지만, 우리 남측으로 봐서도 좋지 않습니다. 남측은 평화가 흔들린다고 하면 주가가 땅에 떨어집니다. 해외에서 빌려오는 돈의 이자가 올라갑니다. 우리는 위원장하고 김대중 대통령하고 6.15때 악수 한번 했는데, 그게 우리 남쪽 경제에 수 조원, 수 십 조원 번 거 거든요. 어제 사진도, 어제 내가 분계선을 넘어선 사진으로 남측이 아마 수 조원 벌었습니다. 뭐 장기적으로, 상징적으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6자회담 깨지면 안되니까, 미국 붙들고 같이 가야, 북측도 못나가게 해야, 그래서 6자회담 가면 아마 북측하고 가장 긴밀하게 얘기하는 쪽이 우리가 아니었을까 그렇게 생각합니다.김정일 : 우리가 민족이긴 민족이죠, 한 민족이죠. 의사소통은 그래도 일본사람들 보다 낫습니다. 일본은 우리하고 상종하고 해도, 밤낮 싸우고, 그래도 속심있는 이야기는 다 북남하고 합니다.대통령 : 우리가 선진강국이 되자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하고 적대관계, 관계정상화 풀어야 되고요. 일본하고도 아니꼬와도 문제를 풀고 가야 합니다. 남북이 말하자면 완전한 협력관계에 들어서고 북측이 국제관계에 들어서고 나면 쫓아내지 못하거든요. 지금은 세게 하면 고립이 되지만, 자리를 잡고 난 뒤에 세게 하면 자주가 되거든요. 자주가 고립이 아니라 진짜 자주가 될 수 있도록 그렇게...김정일 : 옳습니다. 노 대통령님의 견해를 충분히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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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2007년 남북 정상회담 회의록 전문 (국민일보 출처)
[쿠키 정치] 2007년 10월 3일 오전 9시34분.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백화원 영빈관에 마주 앉았다. 2시간 동안 진행된 이날 회의에서 북한의 김 위원장이 남북간의 군사적 긴장을 해소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노 대통령은 경제교류를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을 주로 폈다. 서해 평화 문제가 주로 논의된 오전 회의에 이어, 오후에도 2시간에 걸쳐 회담이 이뤄졌다. 회의 내용은 당시 수행원이 녹음했으나, 녹음 상태가 좋지 않아 국가정보원에 녹취를 맡겼다고 한다. 국정원은 24일 이 정상회담의 녹취록 전문을 공개했다. 초유의 사태다. 주한미군과 북한 핵, 대북 제재, 일본과 북한의 수교 문제 등 한반도 안팎의 민감한 사항에 관한 남북한 정권의 입장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공개 절차와 내용을 둘러싼 국내에서의 논란은 물론, 외교적 파장도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본보는 국정원의 발췌록 전문을 최초 공개한데 이어 이날 회의 내용을 녹취한 내용 전체도 공개한다. 당시 청와대 상황실장이었던 문재인 민주당 의원은, “국정원은 청와대의 지시에 따라 청와대가 제공한 녹음 파일을 녹취해서 대화록을 만들었고,그것을 청와대에 보고하면서 한 부를 더 만들어 가지고 있는것”이라며 “대화록을 대통령기록물이 아닌 것으로 다루는 행위에 대해 반드시 법적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했다. 원본이 대통령 기록물로 돼 있는데, 국정원이 자체 보관했던 사본을 임으로 공개한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국정원은 “6년전 남북정상회담 내용이 현시점에서 국가안보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 것으로 판단하는 가운데, 오히려 회담 내용의 진위여부에 대한 국론분열이 심화되고 국가안보에 심각한 악영향이 초래됨을 깊이 우려했다”고 공개 이유를 밝혔다.
[1차 회의]
일시 : 2007.10.3(목) 09:34~11:45
장소 : 백화원이 영빈관
배석자
- 南 : 권오규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이재정 통일부 장관, 김만복 국가정보원장, 백종천 통일외교안보정책실장, 조명균 안보정책비서관(기록)
- 北 : 김양건 통일전선부장
김정일 : 2000년에 김대중 대통령께서는 하늘길을 열었고, 노 대통령께서는 육로로 온 것이 뜻 깊다고 생각합니다. 수해 때문에 도로 정비가 잘 안되서 불편하지 않았습니까.
대통령 : 그렇지 않았습니다. 주변 경관이 좋아서 편하게 왔습니다. 군사 분계선을 도보로 넘으면서 제 스스로 감동을 느꼈습니다. 평양 시민들께서 성대하게 맞아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위원장께서 직접 마중 나와 주신 것도 감사드립니다.
김정일 : 남쪽에서 대통령이 오시는데 환자도 아닌데 집에서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상 녹음 청취 불가로 기록 내용을 정리)
대통령 : 큰 고통을 받고 있는 모습을 TV를 통해 보았습니다. 정말 걱정을 많이 하고 남의 일 같지 않아서 매우 안타까웠는데, 이번에 오면서 보니까 그래도 흔적이 거의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땀 흘려서 잘 복구하게 된 것을 매우...
김정일 : 내 어제 상임위원장 동지에게 말씀드렸습니다. 먼저 만나시게 되면 수해 피해 때 많이 위문해준 데 대해서 감사를 드리라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대통령 : 큰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합니다.
김정일 : 감사합니다. 많이 도움이 됐고, 혈육의 정을, 우리부터도 감사하게 됐고, 느낀 바가 많습니다.
대통령 : 다소 도움이 되었으면 우리도 기쁜 일입니다.
김정일 : 먼저 대통령께서 말씀하십시오.
대통령 : 예. 나로서는 5년 동안 기다렸던 만남이고요, 다음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여러가지 고민도 많이 하고 준비를 많이 했습니다. 우리가 준비한 것보다 국민들이나 전문가, 나아가 국제 사회까지도 이런저런 주문이 참 많았습니다. 그때 그때 의제가 될 때마다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만 미리 준비를 해놓은 것이 있어서 준비된 것을 가지고 또박또박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김정일 : 모처럼 찾아오셨는데 듣겠습니다.
대통령 : 여러가지 세심하게 신경을 써주셔서 고맙게 생각합니다. 나는 하나의 외교적 절차 아니냐 생각했는데...막상 와보니까 통역도 필요없고 잠자리도 서울의 잠자리와 너무 비슷하고 음식도 똑같고 해서 정말 마음 편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특히 음식도 입에 맞게 잘해주어서 일행 모두가 기뻤습니다.
그리고 또 아주 백화원 여기 뜰도 아주 아름답거니와 시설도 훌륭해서 모두가 마음이 편안하고 또 우리도 이런 것이 하나 있으면 좋겠다 이런 부러움도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는 없습니다.
김정일 : 이 건물이? 그 이야기 들었습니다. 서울이 더 역사야...비슷하잖습니까? 건설이랑 많이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대통령 : 오늘 아리랑 공연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나는 큰 기대를 가지고 있고, 위원장님과 함께 볼 수 있으면 하는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만, 어쨌든 오늘 아리랑 공연에 대해 큰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김양건 : 장군님께서 일정이 바쁘시기 때문에...
김정일 : 일없어, 일없어. 진지하게. 오전에 다른 일정이 없으면 몰라도...
대통령 : 내가 상당히 긴장한 모양입니다. 내가 서류를 바꾸어 가지고...(웃음) 옛날에 우리 변호사가 다른 사건 서류를 가지고 나와서 변론을 하다가 실수를 하는 걸 봤는데 내가 오늘 바꿔 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동안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남북 관계가 반목과 대결에서 벗어나서 화해와 협력의 새로운 단계로 진입을 했습니다. 지난해 남북을 왕래한 인원이 10만2000명 정도 됩니다. 이 숫자는 2000년에 비해서 13배 정도 되는 숫자입니다.
그리고 쌍방간 교역액을 보면 작년도가 13억5000만달러 정도인데 이것은 역시 2000년에 비해 3.1배 정도 증가했습니다. 획기적인 사건은 없었지만 큰 진전이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7년의 과정에서 가장 소중한 성과는 남북 간에 신뢰가 많이 증진된 것으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동안 국내외에서 속도 조절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우리 정부는 그 점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거부하고 속도를 높여서 신뢰 구축을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그동안 해외를 다니면서 50회 넘는 정상회담을 했습니다만 그동안 외국 정상들의 북측에 대한 얘기가 나왔을 때, 나는 북측의 대변인 노릇 또는 변호인 노릇을 했고 때로는 얼굴을 붉혔던 일도 있습니다.
하나하나의 행동이 보이지 않는 과정에서 언젠가는 김 위원장과 대화를 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신뢰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북측에서 볼 때는 많은 한계도 보였을 것입니다. 핵 문제가 불거졌고, 정치적 화해와 군사적 신뢰 구축 분야에서는 상대적으로 진전이 아주 미흡했습니다.
아울러 남북관계 진전에 따라 과거에는 부각되지 않았던 문제들이 새롭게 제기되어서 새로운 진전에 걸림돌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제 지난 7년간 양적, 질적으로 크게 성장한 남북 관계에 걸맞는 새로운 방향을 모색할 단계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남북간에 신뢰를 한 단계 높일 수 있는 전향적 조치들에 대해서 논의를 본격화하고 남북경협도 큰 틀에서 미래지향적으로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남북관계 진전은 역사 발전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정상회담도 어느 순간에 갑자기 된 것이 아니라 분단과 함께 시작된 통일의 노력이 축적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정상회담에 부여한 시대적 요청은 앞으로 어떠한 정세 변화에도 흔들림이 없도록 남북관계를 확고한 반석 위에 올려놓으라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북이 힘을 합쳐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대처해 나가지 못하면 백년 전의 뼈아픈 역사를 되풀이할 우려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남을 통해서 무엇을 합의하고 또 해결할 것인가 하는 것이 핵심이고 또 단순한 만남을 넘어서는 의미가 있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남북관계를 한 차원 높게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첫 번째는 평화 정착, 두번째는 경제 협력의 확대, 세번째로는 통일과 화해하는 세 분야에서 진전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회담에서 내가 김정일 위원장과 해야 할 일은 앞으로 남북관계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잡아주고 책임자들이 협의하고 실천해나갈 수 있는 큰 테두리를 그려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반도 평화와 안정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필요한 협력방안들을 합의하고 이행해 나갈 수 있도록 길을 터주고 남북의 공동번영을 앞당기기 위해서 남북간 경협의 장애요인을 해소하고,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해주며, 남북간 진정한 화해를 위해서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를 어떻게 풀어갈지에 대해서 큰 틀에 있어서 실무자들과 국민들에게 밝혀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에 한반도 평화정착과 남북의 공동 번영, 남북의 화해와 통일 이 세가지 의제 문제를 놓고 차례대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통일 이전에 한반도에 평화가 공고하게 정착되는 것이 시급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평화의 토대위에서 교류협력을 통해서 신뢰를 쌓아가다가 보면 통일은 점차적으로 저절로 오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확고한 평화의 토대위에서 통일을 이룬다는 것이 우리의 입장이며, 통일을 위해서 평화를 희생시키지 않는 것이 원칙이 되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남북 주도하에 통일지향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급선무이여 이를 위해서 북미 관계 정상화와 남북 군사적 신뢰구축을 통한 냉전체제 종식과 핵문제 해결이라는 두 가지 큰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현재 핵문제는 관련 각 측의 노력으로 해결의 방향을 잡았으며, 이는 김 위원장께서 각별한 관심을 갖고 지도력을 발휘해 주신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전쟁이 종식되지 않은 상태에서 55년간 지속되는 현 상황은 청산되어야 하며 이런 면에서 북미 관계가 정상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나는 김 위원장께서 북미 관계 개선을 위한 문만 열어놓는다면 미국이 이에 상응한 관계개선 조치를 속도를 내서 취하도록 계속 재촉할 것입니다. 나는 이번 정상회담에서 김 위원장과 함께 우리 민족의 장래를 위해 남과 북이 주도해서 평화체제 협상을 시작하기로 했다는 것을 전세계에 공표하게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 한반도 평화체제 포럼을 출발시키는 것이 필요하며, 협상 개시에 도움이 된다면 부시 대통령이 제안한 방식대로 3국 정상이 만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군사 분야의 협력도 미룰 수 없는 과제입니다. 여타 분야의 교류협력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미진한 군사 분야의 협력에서도 좀 더 속도를 낼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을 할 것인지는 92년 남북기본합의서에 대부분 명시되어 있습니다. 11월 중 2차 국방 장관 회담을 개최해서 상호 합의 이행이 용이한 사안부터 실천해 나가기를 기대합니다.
다음은 남북간에 공동번영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한반도의 새로운 미래를 위해서는 남북간에 경제적 연계를 강화해나가는 것이 시급합니다. 특히 경제는 체제·제도의 차이에 관계없이 협력이 가능한 영역으로 동북 아시아 새로운 질서의 중심도 경제가 될 것입니다.
남북 경협은 남북 모두가 경제적 활로를 찾고 장기적 성장 동력을 확보하는 계기로 그동안 남북 관계를 이끌어온 중심축입니다. 지난 7년간 3대 경협이 중심이 되어서 남북관계 진전을 견인해왔습니다.
앞으로 개성공단 2단계 개발, 철도·도로 개통, 금강산 관광 특구 확대 등을 우선 추진해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개성공단은 공단 이외의 지역은 통행, 통신 및 군사적 보장 등 여러 장애 요인으로 인해서 경협 확대에 한계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개성공단의 성공을 발판으로 남북이 함께하는 경제특구를 추가로 개발해나가는 것이 장애요인을 포괄적으로 해결하는 효과적인 방안일 것입니다. 특히 해주 지역에 기계·중화학 공업 위주의 서해 남북 공동경제 특구를 설치하게 되면 개성·해주·인천을 잇는 세계적인 공단, 나아가서는 경제지역으로 발전이 가능할 것입니다.
아울러 서해의 평화적 이용과도 연결이 돼서 남북 공동번영과 평화정착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아울러 남북간에 이미 합의한 농업·임업 분야 협력과 보건의료분야 협력, 지하자원 개발협력을 추진해나가는 것도 시급한 과제입니다.
남북경제공동체 건설을 체계적으로 추진해나가기 위해서는 남북이 함께 공동 번영을 위한 경제발전 구상을 협의하고 우선 가능한 사업부터 하나씩 진전시켜 나가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남북 간에 이러한 제반 경제협력 문제를 허심탄회하게 논의하고 또 속도를 높일 수 있는 상시적 협의의 틀을 마련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은 남북의 화해와 통일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평화는 신뢰에 바탕한 화해에서 출발합니다. 그 첫 단계는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미래를 언제까지나 과거의 굴레에 가두어둘수는 없습니다.
특히 이산가족 문제는 지금 해결하지 못하면 해결자체가 영원히 불가능해질 수 있습니다. 최소한 생사확인과 서신교환만큼은 전면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과거 전쟁시기와 그 이후에 소식을 모르고 있는 사람들도 불행한 과거를 마무리한다는 차원에서 이번 기회에 큰 틀에서 해결이 되기를 바랍니다. 위원장의 결단을 간곡하게 요청드립니다.
이와 함께 남북간 화해를 제도화하기 위해 때와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적어도 연 1회 정도는 남북이 정상간에 만남을 만들어야 하며, 당국간 상설 협의기구도 기구로서 서울과 평양에 연락사무소를 상호개설할 필요도 있을 것입니다.
통일문제는 6·15 공동선언을 통해서 정리가 잘 되었다고 봅니다. 서로의 통일 방안에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는 바탕위에서 우선 평화를 정착시키고 점진적·단계적으로 통일을 추진해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또한 그것이 현실적인 접근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서 언급한 한반도 평화, 남북경제공동체 건설, 남북화애의 세 분야에서 진전을 이루고 남북 정상이 자주 만나다보면 결국 통일의 길로 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밖에 몇가지 추가 의제로서 남북 경제협력을 강화하는 보다 높은 단계의 포괄적인 경제협력 강화 합의서를 체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경협이 확대되었을 때 국제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여러가지 문제들을 해소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앞으로 남북 경협이 확대되면, 국제시장에서는 WTO 규정을 들어서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거기에 대한 대비가 앞으로 있어야 되지 않겠느냐. 이것은 앞으로 논의를 해봐야 될 문제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기로 관광협력의 확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금강산 관광사업은 우리측이 보기엔 큰 성공사례라고 생각합니다. 나아가서는 개성과 백두산 등으로 확대해나가는 것이 큰 이득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음에 경제시찰단을 상호교환하는 문제도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동안 몇 차례 경제시찰단의 상호교환이 있었습니다만, 여러 사정으로 중단되어 있는데, 이것은 경제협력을 위해서 준비단계로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한국 전쟁시 사망한 쌍방 군인들의 유해 발굴 송환 같은 것도 우리가 한번 대화를 시작해봐야 되는 것 아닌가 생각하구요. 그 다음에 우리는 북측이 IMF라든지 그 밖에 세계은행 또는 ADB 이런 국제기구에 접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위해서 여러가지 협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정상회담과 정부 당국자간 회담도 매우 중요하지만, 앞으로 국회간의 회담, 여러가지 제도적 문제가 있기 때문에 국회 간에 교류와 회담이 있는 것이 남북간에 교류협력을 좀 장애가 되고 있는 법적·제도적 문제를 해결해나가는데 있어서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욕심을 부린다면 이미 대화가 진행되고 있습니다만, 북경 올림픽에 남북단일팀 참가를 성사하기 위해 정상이 관심을 가지고 노력을 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세가지 큰 주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로서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나머지 문제는 앞으로 추가적인 의제로 말씀을 드린 것으로 이해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좀 딱딱하게 말씀드렸습니다만...
김정일: 감사합니다. 어제 회담에서 이야기 다...
김양건: 기본적으로 다 되었습니다. 어제 상임위원장 동지가 구체적으로 말씀드렸기 때문에 또 그대로 보고 드렸습니다. 그래서 이 자리에서 그에 대한 이야기...
김정일: 밤에 보고 받다보니까 잘...
김양건: 다 아시는 것이고, 다 우리 충분히 논의된 문제입니다.
김정일: 감사합니다. 대통령께서 많은 걸 생각하시고 당면하게 풀어야 할 문제와 전반적으로 이제 국제정세 흐름에 따라서 또 국내 정세에 따라서 약간은 단계가 설정될 수 있겠습니다만, 하여간 좋은 의견을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오늘 말씀드리고자 한것은 다른건 크게 없고... 내가 원래 생각하고 있던 문제를 메모했습니다. 반복을 피하기 위해 체계를 잡아가지고 얘기하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최근에 와서 정상회담에 대해서 많이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은 최근에 와서 그 무슨 다른 어떤 충격적인 계기가 있어서 이렇게 된것도 아니고 6.15선언 나올 당시부터 김대중 대통령께서 모처럼 찾아와주셔서 훌륭한 민족끼리라는 정신을 해서 6.15 선언이 아주 훌륭한 기치다운 선언이 나왔기 때문에 거기에 따라서 이렇게 했는데...
우리 민족이란건 북과 남이 100년 전에 보면 군사적으로 경제적으로 아주 비할바 없이 강해져 있는데, 북과 남이 갈라져 있는것이 한 개 큰 약점으로 세계 면전에서 보이고 있습니다. 나라가 갈라져 있으면 민족에서 비극이지만, 주변에서는 갈라져 있는 것이 항상 슬퍼도 같이 슬퍼하는 사람도 있는 반면에 속으로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두 갈라져 있는걸로 해서 그 주변에서 어부지리를 추구해서... 우리는 민족이 손해를 보건 이득을 보든지간에 자기네가 국제정세 문제에 이해관계가 있는것 많이 있는 것처럼 하지만, 사실상 어부지리를 얻어서 자기배를 불리우는 자기 잇속을 채우는...
이렇게 된다고 보고 주변정세 나라를 봐도 그렇고... 우리민족만이 손해를 보는데, 이걸 앞으로 대통령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단계, 그러한 목표를 가지고 사업을 하나하나 착실히 해나가면 이제 주변 정세에도 어울릴뿐만 아니라 세계정세에도 어울리고... 또 우리민족 문제를 우리 자주적으로 우리 정상들끼리 조선민족끼리 해결한다고 하는 이런 좋은 모범을 보여줄 수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상징적인 첫단계가 북과 남이 힘을 합친다는 것 자체가 두 정상이 만나서 의견을 허심탄회하게 의견 교환하고 여기서 선후차를 가리게 되고 정의와 부정에 대한 것은 똑똑히 판독해서 어느 것부터 먼저해야 우리민족이 부흥, 촉진시키겠는가 이런 문제가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말씀하신 부분들은 대부분 앞으로 공동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인데, 지금 당장은 너무 크다고 그랬나? 조급하고. 말하자면 허황하지는 않지만, 실지로 해결해야 할 문제지만, 현실과는 거리가 먼 빈 구호가 되지 않겠는가하는 이런 주변국들의 생각이나 주변의 어부지리를 챙기는 사람들한테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고.
우리 민족 자체는 6.15공동선언 나온 이후에 정세의 흐름에 파동이 너무 심하니까 또 노대통령께서 오시게 되면 무슨 선언이 나오겠는가하는 주변의 말도 돌아가는데. 이문제에 대해서는 내가 김대중 대통령께도 바로 이 자리에서 내가 얘기했습니다. 자꾸 선언을 내자고 제기하길래. 7.4 공동선언 때 우리민족이 대단히 화해에 넘쳐나서 그걸 크게 기대를 걸었는데, 이런 저런 정권의 교체와 정세변화로 해서 빈종이짝이 되고 말았다. 근데 대통령께서 제기하는 모든 문제 또 우리가 합의본 이 문제를 놓고 다시 문서화해서 내면 이게 또 빈종이짝이 되지 않겠는가.
김대중 대통령께서는 절대 그럴수 없다고 좋은거 하나 내자고 자꾸 독촉을 해서 그래서 6.15 공동선언, 쌍방이 힘들게 완성을 시켜서, 난 6.15 공동선언이 아주 훌륭한 문건이라고 생각... 6.15공동선언 5년 동안의 역사 시간을 보면 그저 상징화된 빈구호가 되고, 빈 종이, 빈 선전곽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대통령께서도 말씀하셨지만, 그기간 많은 발전이 있는것만은 사실인데, 앞으로 모든 문제를 고찰해보면 내 솔직한 심정인데... 우리민족이 자주성 결여로 지금 대국들의 장단에 맞추는... 정치문제도 그렇고...
이 자주성 문제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6·15 공동선언을 재확인하고 그 기치 밑에서 앞으로 단계적으로 발전적으로 어떤 문제들이 제시됐다 하는 것이 더 좋지 않겠는가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선언은 난 개인 생각으로는 뭐 필요하겠는가. 그저 정부라고 하면 문민정부와 참여정부 이 두 정권이 왔다갔다 한 것밖에 없는데 자꾸 문서화되고. 앞으로 어느 정권이 들어서면 그 다음에 또 새로운 선언이 나오자 하고…. 빈말이 될 바에는 어느것 하나를 기준으로 해서 그 기치를 들고 나가면 좋지 않겠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오늘 노 대통령게서 찾아와 주셔서 전세계 만방에 민족적 자주성을 확립한다는 자체를 시위한 걸로 된다고 생각하고, 민족공동의 번영을 이룩해 나간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보여주는 아주 좋은 계기가 되지 않겠는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평화보장 문제입니다. 평화보장 문제는 북남관계를 전진시키고 통일을 실현시키는 데 점차적으로 나서는 문제라고 보고 아주 대통령께서도 좋은 말씀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견해는 무엇보다도 북남사이의 군사적 적대관계를 해소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북남 간의 평화보장 문제에서는 기본, 그것도 빈 구호가 되지 말고 실천적인 문제에서 평화가 보장되자고 하면은, 군사적 적대관계가 해소되지 않고서는 해결될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북남 사이의 군사적 적대관계를 해소한다는 것은 신뢰조성하고 평화보장에 필수적인 선결조건으로 이렇게 딱 문제를 걸어놓고 문제를 봐야하는데….
지금 모든 문제, 이때까지 지나간 5년 동안 보면 군사적 문제와 정치, 군사를 떠난 정치는 있을 수가 없는데, 지금 많은 문제가 군사적으로 신뢰가 조성되지 않고서는 이게 해결될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까 말씀드렸지만, 국방장관회의를 하자고 제기했는데, 그것도 우리가 안하자 한 것도 아니고?. 정세의 흐름 속에서 지금 자주성들이 결여되다 보니까 지금 지체되면 지체되고 연기되면 연기됐지.
김양건: 저번에도 그래서 중단됐습니다. 제주도?.
김정일: 그럼. 대통령께서도 제기한 바와 같이 한달 이내로도 총리급 회담과 동시에 국방장관 회담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역시 선언적인 이런 문건이 암만 좋은 거 나가건 안나가든지 간에 집행을 하자고 하면, 경협문제 같은 것도 총리급에서 논의돼야되지 정상수준에서 암만 합의봤다 해도 집행단계는 총리급에서 해야되기 때문에 총리급 회담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지금 상급회담도 제대로 되지 않는데 정세에 따라서 했다 말았다 하기 때문에 난 바로 그 문제 생각했습니다. 남쪽 사람들이 자주성이 좀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자꾸 비위 맞추고 다니는 데가 너무 많다, 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자주성 있게 우리 민족 내부의 문제면 우리 민족 내부의 문제로 국한시켜서 하자 이렇게 하면 되겠는데 조금 자주성보다도, 자주성이 없다고 하면 너무 인격모욕하는 것 같은데 좀 이렇게 눈치보는 데가 많지 않은가. 좋게 말하면 눈치 보는 데가 많고, 우리 입장에서 보면 자기 주견대로 말을 못하는가 이렇게 내가 생각했습니다.
얼마전에 부시대통령이 노무현 대통령에게 전화할때 종전선언 문제를 언급했다는 말이 지금 돌고 있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아주 의미가 있습니다. 물론 종전을 선언하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될 수 없지만 그것이 하나의 시작으로는 될 수 있다고 보면 어떻겠는가 나는 생각합니다.
조선전쟁에 관련있는 3자나 4자들이 개성이나 금강산 같은데서 분계선 가까운 곳에서 모여 전쟁이 끝나는 것을 공동으로 선포한다면 평화문제를 논의할 수 있는 기초가 마련될 수 있다고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노무현 대통령께서 관심이 있다면 부시대통령하고 미국 사람들과 사업해서 좀 성사시켜 보는것도 나쁘지 않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 다음에 그런 조건이 될 때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완전히 바꾸는게 어떻겠는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 생각은 이번에 모처럼 마련된 수뇌회담에서 조금 희망을 주고, 적대관계를 완전히 종식시킬데 대한 공동의 의지가 있다 보인다 하는 것을 하나 보여주자 하니까 서해 군사경계선 문제, 이 문제를 하나 던져 놓을 수 있지 않는가 난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 의견은 앞으로 국방장관급에서 논의되겠지만 내 생각 같아서는 군사경계, 우리가 주장하는 군사경계선, 또 남측이 주장하는 북방한계선, 이것 사이에 있는 수역을 공동어로구역, 아니면 평화수역으로 설정하면 어떻겠는가. 이 문제만 해도 많이 완화되고 또 적대관계를 종식시키자는 공동의 의사가 나타났다 하는걸 보여주는 것임.
그것가지고 자꾸 쌈질하지 말고, 이걸 하자고 하는 조건에서 어떤 조건이 구비되야 되갔다. 우리군대는 지금까지 주장해온 군사경계선에서 남측이 북방한계선까지 물러선다. 물러선 조건에서 공동수역으로 한다. 공동수역 안에서 공동어로 한다. 이걸 이번 국방장관회담때 내가 인민무력부장에게 바로 이 무?뉨? 연구하고 토론하고 성사시켜 보라. 그렇지 않고는 군사적 적대관계 해소한다 해서는 해결 안된다. 그래서 일차적으로 제일 흔한 방법의 하난데 북방한계선까지 우리가 철수하라. 이건 앞으로, 경계선 문제는 앞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법적으로. 어느 쪽의 기본 틀걸이에 맞추겠는가. 북방한계선이냐? 군사경계선이냐?
이 문제는 앞으로 해결한다 치고, 당장은 공동으로 관리하고 있는 수역내에, 그 수역의 범위를 넓히자 하니까 우리 북방 한계선까지 군대는 해군은 물러서고 그담에 그안에 공동어로구역, 평화수역. 이렇게 평화수역을 하면 인민들에게 희망을 주지 않겠는가. 일단계. 그건 앞으로 흥미있건 없건 간에 의견으로서 안건으로 제기해봐라. 남쪽에다가. 이렇게 내가 결론했었는데, 토론해보라는 과업을 준 걸 오늘 노무현대통령께서 오셨기 때문에 이야기 했던 겁니다.
지금은 생억지 싸움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다에 종이장 그려논 지도와 같이 선도 북방한계선은 뭐고 군사경계선은 뭐고, 침범했다, 침범하지 않았다, 그저 물위에 무슨 흔적이 남습니까. 그저 생억지, 앙탈질하는 게 체질화되다 노니까 50년 동안, 자기 주의·주장만 강조하고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전번에 서해사건때도, 실제로 흔적남은에 뭐냐? 흔적남은게 뭐야? 흔적남은게 뭐 있는가? 대동강에 배 지나간 자리고, 한가에 배 지나간 자리밖에 없다. 배 지나간 자리도 일시 무사 일어나고 없다. 흔적이 없는데.
그래서 내가 자꾸 앙탈진다 생각하지 말고 공동수역 만들면 되지 않나, 앞으로 법하는데 가서는 이론적으로 서로 역사적인 고찰로부터 시작해서 법률적으로 앞으로 해결하자, 쌍방이, 전쟁의산물이니까 좌우간. 이건 앞으로 평화협정 체결할때도 문제가 안건이 서야 할 거고 앞으로 법률적으로 한계선을 통일의 견지에서 볼때는 한계선도 좁히던가 넓히던가 이렇게 돼야지 유물로 남겨놓을 순 없다. 내가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당면하게는 쌍방이 앞으로 해결한다는 전제하에 북방한계선과 우리 군사경계선 안에 있는 수역을 평화수역으로 선포한다. 그리고 공동어로 한다. 분배 몫은 어떻게 되든지간에 공동어로, 군대가 그걸 보호해준다. 그럼 분쟁점이 하나 가셔지지 않겠는가 하는 문제가...
대통령 : 예, 아주 나도 관심이 많은...
김정일 : 그래서 그거로 가야지요. 그래서 내 생각은 경제일꾼이라던가 아마 부총리급에서 이야기되겠지만 장관급에서 이야기되겠지만 아마 분배 몫 가지고 또 이야기될 것 같단 말이지
김양건 : 아무래도 잡아놓으면 분배 몫이 논의될 것 같습니다.
김정일 : 그건 경제일꾼들끼리 논의해야, 토론하라 하고 원칙적 선에서는 쌍방이 이해를 가지고...
대통령 : 말씀중이어서 중간에 내가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 문제가 많이 말씀이 되셔서, 사실 중국배가 잡아가는 것만 남북이 협력해서 잡으면 양쪽이 다 남습니다. 분배를 어떻게 해도 남습니다.
김정일 : 그것도 중국사람들도... 우리가 배 지나간 자리라고 얘기하고... 흔적없는, 중국사람들도 그렇습니다. 그게 니네 바다냐? 문제가 이렇게 되기 때문에, 문제가 토론되야 되겠는데, 앞으로 이런걸 포함해서 문제들 토론하겠다. 이걸 공동의지를 천명하는 게 어떻겠는가? 내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국방장관급 회담은 2000년 9월에 제주도에서 한 이후엔 질질 끌고 왔는데, 이번엔 평양에서 할 수 있다는 것을 천명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한다 해도 좋고, 앞으로 실무적 토론을 거쳐서, 군사당국자 회담에서 안건은 서해 군사경계선 문제를 비롯해서 북남경제협력을 군사적으로 어떻게 보호하겠는가 하는 문제를 토론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6자회담에 대해서도 어제 밤에 보고받았습니다. 좋은 문건이 하나 채택된 걸로 내가 알고 있습니다. 원래 오늘 오후에 보고받게 돼있는데...
이번에 어떤 문건이 나왔는가 하는건 아마 남쪽에서도 흥미있게 생각할 수 있고, 또 우리도 우리 주장이 어떻게 관철됐는가 이런거 내가 흥미있어서 6자회담에 참가했던 우리 단장을 불러놨습니다. 그래서 흥미 계시면 어떤 문건이 됐는가 하는, 물론 귀측에서도 6자회담 대표단장에게 보고를 받았으리라 생각하는데 반대 없으시면 같이 들어보는게 어떤가 생각합니다. 어떤 문건이 나왔는가?
김양건:우리 참가했던 단장이 여기 대기하고 있는데 한번 들어보시겠다면 불러서 들어보시죠.
대통령: 예, 위원장 뜻대로 하시면 좋겠습니다.
김정일:나도 아직 전문으로만 봤지. 그분이 어저께 왔어요. 계관동무 오라 그러라우.
대통령:이번에 보고를 받았습니다. 받았는데. 위원장께서 이번에 확실히 문제를 풀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결단하시고 많은 양보를 하신 것으로 그렇게 보고 받았고, 그렇게 이해가 됐습니다. 어서오십시오.
(김계관 입장)
김계관: 외무성 부상 김계관입니다.
김정일:어제 왔던가?
김계관:어제 왔습니다.
대통령 : 아주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김정일 : 좋은 문건이 나왔는데 문건 나온 걸 개괄적으로 설명해 드리라우.
김계관 : 예,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김정일 : 앉아서 얘기하라우.
김계관 : 말씀 올리겠습니다.
김정일 : 어떤 문건이 좋은 거, 미국 사람들이랑 좋은 문건 만들기 위해서 노력해서 결과가 무엇인가 하는 걸….
김계관 : 예, 이번 회담은 27일부터 30일까지 나흘간 진행됐습니다. 이 기간에 전체회의, 단장회의, 쌍무측 형식을 가지고. 이번 목표는 초기단계 임무가 수행된 상황에서 9·19 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다음단계 목표, 각측의 의무사항, 이행순서를 합의하는 이게 기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조선반도 비핵화가 위대한 수령님의 의지고 우리 과업의 최종목표인 만큼 그에 맞게 결과물을 만들어 내자는 게 기본이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기간 BDA 문제 때문에 잃어버린 시간을 봉창하고 9·19 공동성명 이행을 좀더 빨리 전진해 나갈 수 있는 결과물을 만들어 내자고, 이를 위해서 우리가 9월 초와 지난 8월 13일에 미국측하고 쌍무접촉을 했습니다.
그래서 근본문제에 대해서는 다 합의를 했습니다. 합의된 사항을 이번 전체회의에서 공동의 인식으로 하고 5자 공동 문건을 만들어 내는 걸로 했습니다. 중국측이 초안을 내놨는데 일부 균형적이지 못한 측면이 있고, 특히 어느 문제에서 우리의 의무는 구체적이고 미국측 의무는 두루뭉술하고, 그래서 우리가 미국측하고 바로 회담을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것은 무엇인가? 2007년 12월 31일까지 연내에 신고와 무력화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기 할 건, 우리는 구체적으로 날짜 줄 용의 있다. 그렇게 12월 31일까지 다 하겠다. 그 대신에 미국도 테러지원국 명단 삭제와 적성국 문건 해제를 기본으로 하는, 우리를 적으로 규정한 제도적인 법률적인 장치들을 해제하라. 이걸 시한부는 같다. 그래서 둘이 붙어서 실갱이를 좀 하다가 말대 말도 못하갔다 하면 행동대 행동은 언제 하갔나. 이거야 말대 말인데 다 합의한 건데?. 제네바에서 합의한 거 그거 이행하자고 손을 뗐지 않은가.
이렇게 나오기 때문에 이유가 다른 데 있는 건 명백하고, 그래서 그렇게 못한다. 그래서 우리가 조금 양해해 준다면 지난 기간에 너희가 이런 거 이런 거 하겠다고 한 거 상기하고 2·13 합의문이 있기 때문에 상기하면서 우리가 행동하는 데 병행하여 제네바에서 합의한 선에서 한다. 이렇게 우리가 조금 아량을 신축적으로 보여줬습니다. 그래서 문건 조미가 합의해 가지고 합의한 거다. 이렇게 하면 된다. 그렇게 해가지고 합의문을 만들었는데. 만들고서 조금 특이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30일날 다 모여서 폐막회의를 하는데 다 문건에 의문이 있는가? 다 없다. 좋다. 통과시켰는데 힐이 워싱턴에 갔다와야 되겠다. 가서 라이스 국무장관하고 부시 대통령한테 보고하고 승인을 받고 오겠다. 오지 못하면 연락을 하겠다. 미국대표단 남은 성원들을 인질로 여기 놓고 갔다 오갔다. 그래서 그렇게 하라 해줬습니다.
가서 그날 밤에 전화가 왔는데 라이스 장관을 만났다. 그날이 일요일이니까 일요일 오후에 끝나서 월요일날 오전에 라이스를 만났고 저녁에 부시 대통령을 만나게 된다. 그것까지 만나야 최종이 나온다. 다시 연락이 왔는데 한 자만 고치자. 우리는 동의할 때 한 자도 고치지 못한다는 전제하에서 동의했는데. 고칠라면은 수습 못한다. 그렇게 했는데. 한 자만 고치자. 뭔가 하면 우리 신고 관련된 부분에 시한부가 내용에 들어가 있고 겉에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2007년 12월 31일까지 신고한다. 이렇게 고치자는 내용을 보내왔습니다.
그래서 대책을 세우자고 합니다. 그래서 내용적으로 볼 때 신고에서는 우리가 핵계획, 핵물질, 핵시설 다 신고합니다. 그러나 핵물질 신고에서는 무기화된 정형은 신고 안 합니다. 왜? 미국하고 우리하고는 교전상황에 있기 때문에 적대상황에 있는 미국에다가 무기 상황을 신고하는 것이 어디 있갔는가. 우리 안한다?. 그 다음 핵계획과 관련해서는 모든 핵계획인데 농축 우라늄 문제가 해명되는 차제로 한다. 그래서 해명할 수 있는 걸 쌍방이 해명해야 할 과제로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무력화는 이번에 우리가 미국하고 러시아, 중국, 핵무기 보유국들이 무력화 문제를 다루는 게 국제적으로 관계가 돼있기 때문에 미국이 주무가 되고, 팀장이 되고 거기에 러시아, 중국 전문가들 초청해서 영번에 가서 그뒤 요구된 오갔다는 거 다 보여주고, 사진 다 찍게 하고, 설계도면까지 다 보여줘서 연내 가능한 대상이 어딘가 범위가 어떻게 되겠는가를 다 논의하였고 그거에 따라서 합의를 하였습니다.
전문가들 모여서, 그리고 그걸 눌렀습니다. 그런데 그 대상을 어떤 방법으로 하는가. 방법은 못쓰게 만들지도 안하며, 해외 나가지도 않는다. 우리 땅에 보관하고 있겠다. 왜냐하면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신뢰가 아직도 거기까지 못갔다. 당신네 하겠다고 하다 안 하면, 다시 그걸 지렛대로 돌리며 배짱으로 쓰겠다. 그것도 동의했습니다.
전체 회의에서 다 확인하고. 단 하나 주목되는 것은 국제원자력기구는 여기 개입시키지 않는다. 국제원자력기구와 우리와의 관계는 아직 회복되지 못하고 적대적이라고 하면 적대적이라 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들을 갔다 보내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초기 단계는 시간이 모자랐기 때문에 우리가 부득불 성의조치로서 원자력기구 인원들을 초청해왔습니다. 빨리 들여와야겠는데 그거 논의할 때 한 달 걸릴지 두 달 걸릴지 모르니까. 그래서 데려다가. 하지만 무력화 단계는 안됩니다. 그래서 누가 하는가. 미국이 책임지고 하며, 돈도 미국이 낸다. 그렇게 하는 걸로 이번에 합의를 했는데. 오늘 내일 보도가 되지 않겠는가 생각됩니다.
김정일: 남쪽에서도 서울에 돌아갔다며?
김계관: 네, 천영우 단장선생하고도 협력을 잘했고, 이번에 어떻게나 결과물이 나오게 해서. 미국이 보도문제랑 자꾸 저러는 거는 첫째는 일본을 배려해라 하는 것입니다. 후꾸다가 올라 앉았는데... 그거 하나 있고, 그리고 다른 하나는 지금 대통령 각하 방문과도 조금 연결시켜서 지금 보도를 살살 늦추려고 노력을 하고 있는데 그건 아주 허황한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다 6자가 합의하고 9월 30일부로 합의해있는데 발표가 늦어질 뿐이지. 내용이야 다 돼 있는데. 이젠 그대로 집행해나가면 돼있습니다.
김계관: 요행수 봐라. 미국 사람들 아직도 그러면서. 문건을 다 좋게 만들어놓고도. 노대통령이... 다른 요행수적으로 다른 변화의 징조를 보이겠는가.
대통령: 그건 아닐 겁니다. 기대할 수가 없는데.
김정일: 큰나라 사람들의 의심과 주관주의는 우리 작은나라 사람들보다 더하니깐.
김계관: 우린 지렛대를 명백히 물려논 거는 안 되면 원점으로 돌아간다.
대통령: 수고하셨습니다. 현명하게 하셨고, 잘하셨구요. 뭐 미국이 이 회담 바라고 그러진 않을 것입니다. 나는 공개적으로 핵문제는 6자회담에서 서로 협력한다. 이것이 원칙이다. 그러니까 6자회담 바깥에서 핵문제가 풀릴 일은, 따로 다뤄질 일은 없습니다. 단지 남북간에 비핵화 합의 원칙만 한번 더 확인하고, 실질적으로 풀어나가는 과정은 6자회담에서 같이 풀어나가자 이렇게 갈거니까요.
그런 원칙은 이미 다 얘기했으니까요. 한나라당은 뭐라뭐라 뭐 핵얘기를 좀 많이 쓰라고 그걸 가지고 인제 시비를 자꾸 걸라고 벼르고 있습니다. 우리 입장은 분명합니다. 적어도 합의는 그대로 남북간 합의도 여전히 존재하지만 풀어나가는 과정은 한꺼번에 일괄적으로 6자회담에서 풀어나가자 이거니까요. 그 점에 대해서는 그렇게 아시구요. 수고 많이 하셨구요.
김정일: 그렇게 그럼 저 이 회담하고 관계없어. 설명이 될란가 모르겠어. 대략 어떤 건가 하는 게.
김계관: 설명해 드린 김에 하나만 더 말씀 올리겠습니다. 지금 우리 하고 미국과 차이점이 뭐가 하면. 우리는 미국의 적대시 정책 때문에 생긴 거니까 적대시 정책을 바꿔라 이겁니다. 그런데 그 문제에서 아직도 행동은 안 하고 말로만 바꾼다. 바꾼다. 좋은 말 하다가 어떤 때 뒤집어서 거친 말 또 했다 말았다. 이게 첫째 문제점이고.
둘째는 우리는 전 조선반도 비핵화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북반부 비핵화, 우리한테서 핵무기 빼앗아 내면 비핵화 다 됐다고 생각하는 게 차이점입니다.
세번째는 우리는 평화적 핵활동은 해야되겠다는 거고 미국은 핵이라고 불은 건 다 안 된다는 겁니다. 이걸 조정해나가는 과정에서 많이 꺾이고 있지만 아직도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 어떤 태도변화가 있는가를 예의주시하면서 대응해나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는 6자 틀걸이 내에서 풀며, 6자 틀걸이가 아주 좋다. 이런 데서는 점점 일맥상통하는 점을 갖고 있습니다.
대통령: 예, 잘 알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김정일: 북남경제협력 문제에 대해서는 내가 앞으로 총리급 회담이나 상급회담에서 실무적으로 풀어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토론돼서 성숙시켜서 해결하고 발전 단계로 나가자고 합니다. 북남경제협력이라는 건 민족공동의 이익 하고 번영을 위한 중요한 사업으로 된다는 데 대해서는 나도 동감합니다. 북남경제협력사업은 단순히 경제거래가 아니라 민족의 화합과 통일, 번영에 이바지하는 아주 숭고한 사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민족끼리 정신에 기초해서 풀어나가야 하는데 나는 오늘 대통령께서 제안하신 문제에 대해서는 내가 하나 즉석에서 생각한 것은 새로운 공단들을 내오자고 하는 문제는 아직도 우리나라가 중국땅이라던가 러시아 원동땅도 아니고 조그만 땅인데 거기서 다 뜯어 공단들만 하려고 하면 우리가 이때까지 이룩한 민족자주경제는 다 파괴되고, 시장경제에 말려들어가고, 주체공학이 없어지고 하는 이런 정신적인 재난이 올 수 있기 때문에 아직 시기... 왜냐하면 개성공단에 대해서 초기 정몽헌 선생이 와서 제기해서 내가 동의해준 문젠데. 그때 정몽헌 선생이 나하고 단둘이서 담화하고 단둘이서 밥먹으면서 앞으로 민족으로서 상징이 될 수 있는, 그 몽헌 선생이 구상력이 대단한데, 그대로 안 됐구. 내가 보기엔 개성공단이 더 빠른 길로 나갈 수도 있는데. 또 남측에서 의지가 있었으면 더 빨리 나가는데, 거기 정치가 관여됐고, 주변 나라들이 관여됐고, 내 의견은 그게 번영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는가. 솔직히 생활을 통해서 많이 느꼈습니다.
실례를 들어서 재봉집 하나도 개성공단에 들어올 게 따로 있고 허용되는 게 따로 있고, 일반 경제사회에 나갈 게 따로 있고. 그래서 지금 그런 희생물이 될 바에는 좀더 개성부터 완성시켜 두 측이 노력을 기울여서 완성을 시킨 다음에 하나의 모범을 창조한 다음에 해야지.
지금 빈손으로 나가면 선언에 보도문에 보도되면 우리 인민들은 아마 개성걸 크게 기대를 안 가지고 있었다고 사람들이, 남쪽 사람들에게 땅만 빌려준 거 아니야 이런 말도 하고. 그저 정치적인 대화에 말빨감이나 만들어준 게 아니야 우리 인민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활성화되지 못한 조건에서 새로운 공단만 세운다는 것은 허황된 소리고, 내 체면으로서도 더 요구한다고 말할 수... 공동으로는 안 되고 남측의 의향이면 의향이고, 남측에서 구상이라면 남측의 구상으로만 보도된다는 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새로운 공단하는 건 찬성할 수 없습니다. 개서잉 뚜렷하게 만방에 시위했으면 모르겠는데. 난 좀...
김양건: 상품 자체도 아직 인정을 안 하고 있습니다.
김정일: 새로운 공단이라는 건 남조선 기업인들에게 새로운 일감과 새로운 시장을 넓혀주는 데 동둠이 되는 놀음을 하면 했지 실질적으로 우리에게 아직까지는 이해관계가 없습니다. 그건 동의할 수 없습니다. 우리 따이 서해 해주 또 하겠다 하는데. 내가 보건데. 앞으로 토론해보면, 총리급이나 상급에서 경제 다루는 분들이 또 생각해보십시오.
나는 아직도.... 개성 할 수 있다면야 신의주, 신의주도 내가 몽헌 선생한테 이야기했습니다. 신의주 해보라. 원래 신의주야. 근데 뭐 몽헌 선생이 신의주 까다롭고 힘들다 그러고 그러면 당신 말 들어주겠는데 어디야, 짚으라, 그래서 두 번째 안 내가 꼽은 게 해주였습니다.
그 전기랑 뭐 곤란하고, 원자력발전소, 핵발전소 아니면 큰 중유발전소, 배가 와서 발전 일으키는 해상 발전소나 하나 가져와야지 그거 아보다 배꼽이 큰데 그거 힘들다. 몽헌 선생이 반대했습니다. 어디야. 당신네 어디가 좋은가. 개성.... 그래서 내가 세 번째로 승인한 게 개성이야. 근데 이제 와서 해주 소리가 나왔는데. 우리는 생각도 못해봤고, 내가 아는 건 신의주만 생각해봤는데.
대통령: 예, 위원장께서 이번에 승낙하지 않으셔도 우리가 기다리겠습니다. 다만 이런 문제를 놓고 우리가 왜 그런 얘기를 하는지 이유라도 충분히 설명을 드리고. 그런 대화가 중요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김정일: 그건 우리 입장이 그렇습니다. 그건 난... 우리가...
대통령: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대신 나중에 인제..
김정일: 그리고 군사적인 측면으로 오늘 대통령님께 솔직히 말하는데... 개성도 군사적으로 많이 양보한 거고.. 개성은 평화의 상징이라 해가지고 그건 많이 양보했는데 해주는 솔직히 내가 국방위원회 위원장으로서 말합니다. 해주는 군사력이 개미도 들어가 배길 수 없을 정도로 군사력이 집중된 데인데 그래서 제 얘기는 거걸 만약 하자고 하면 앞으로 개성에서 어떤 모범을 보이고 실제 그만한 걸 희생시키면서라도 공단 차려가지고 어떻게 민족 번영에 이바지하겠는가 하는 게 우리가 납득이 될 때 그땐 우리 개성 아니 해주 달라면 그땐 줘야지요...
그러니까 지금은 군대가 우선 반대할 테고... 지금 개성 당연히 무슨 내각에다가 경제 행위꾼들에게 아마 아직 개성에서 맛도 못본 주제에 무슨 뭐 때문에 해주를 또 내라고... 우리 그럼 자연히 군대는 다 물러 돌아서는 거나 같은 건데... 아마 안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대통령: 중요한 문제 말씀을 다 하신 것 같기 때문에 조금 말씀하신 내용에 대해서 내가 해명드릴 것 몇 가지... 해명이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주장하고 뭐 반론하고 토론할 생각은 없구요... 해명할 만한 것을 좀 말씀을 드리구요... 또 인제 경제 문제에 있어서는 특구 이런 것이 또 못 받아들이겠다 하시면 그렇게 우리도 알겠습니다.
그러나 다만, 특구를 받는다 안 받는다는 그런 작은 문제를 넘어서서 크게 앞으로 남북경제를 공동으로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서 상호 간에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서 어떤 방향으로 가야 될 것이냐에 대해서 위원장 말씀도 좀 충분히 듣고 싶고 나도 또 우리 구상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정몽헌씨가 아주 훌륭한 사람이긴 하지만 그러나 우리 정부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협의하면서 만든 구상보다 더 앞서 있다고 말하긴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을 말씀을 드리고 싶고요... 그래서 내 희망은 지금 시간이 그렇게 많이 남지 않을 것 같은데… 위원장께서 말씀하신 데 대해서 주요 쟁점에 대해서 몇 가지 말씀을 드리고 오후에 시간을 따로 좀 주시면 앞으로 우리가 이런저런 문제를 풀어가는 데 있어서 서로 어떤 구상이 필요한가 하는 데 대해서 구체적인 접근들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김양건: 오후에는 참관이랑 있습니다. 식수가 있고…
대통령: 참관은 잠시 가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위원장께서만 시간을 허락해주시면…
김정일: 이 회담을 그대로 연장하자는 겁니까?
대통령: 예?
김양건: 이 회담을 그대로 연장하는 것입니까?
대통령: 뭐 그렇게 하시던 위원장님 따로 만나도 좋습니다. 지금 내가 말씀을 드릴 것이고…. 아무래도 남은 시간이 더 많은 말씀을 드릴 수 없을 것 같아서 오후 일정을 좀 잡아주십사 하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김양건: 오후 일정은 식수 있고 그다음에 3대혁명 전시관 중공업관 참관이 있습니다. 그다음에 저녁에 집단체조하고…
대통령: 일단 그렇게 말씀드리고…
김정일: 3대혁명 전시관 참관은 특별수행원들이나 하는 거...대통령께서 3대혁명 뭐 보셔도 되고…(웃음) 이야기를 하는 게 더 좋으면 좋다고 생각합니다. 더 실무적인 문제에 우리가 많이 들어갈 필요가 없고 실제 이렇다면 앞으로 상급회담이나 총리급 회담을 하나 새로 설정해가지고 거기서 모든 걸 토론하는 게 낫다고 봅니다.
김양건: 경제문제라면 앞으로 총리회담이랑 어차피 한번 해야 되니까...
대통령: 거 뭐 무슨 의제의 문제라기 보다… 여기까지 와서 위원장하고 달랑 두 시간 만나 대화하고 가라고 그렇게 말씀하시면 됩니까? (웃음) 충분히 잡담을 하더라도 위원장하고 시간을 더 보내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서 배경이라든지 그동안에 우리가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오는 과정에서 우리 나름대로 겪은 고충도 있고 또 미래에 대한 비전도 있고 하지 않겠습니까. 회담의 의제 딱딱한 의제로 다 소화할 수 없는 얘기들은 좀 나누고 싶습니다.
김정일: 그래서 남쪽... 나 개인 생각은… 내 그저 짧은 생각인지는 모르겠는데 이 경제문제에 한해서는 앞으로 내가 총리보고도 이야기 했어요... 남쪽사람들한테 앞으로 문제가 토론되면 무슨 삼성이요 현대요 대우요... 이렇게 하지 마라... 재벌 단위로 하면 내가 알고 있는 대로는 그렇다…. 그것이 아버지가 그 창업자가 있을 때는 우리가 정몽헌 아니...정주영 선생하고 창업자로 내가 아주 많이 기대를 가지고 사업을 했는데…
창업자인 정주영 선생도 역시 실질적으로 자기가 모범을 보이고 한번 해보자고 했는데 역시… 내가 경제일꾼들에게 이야기했습니다. 남쪽은 경제체제가 우리하고 다르니까...어떻해든지 뭐든 의견을 내놔서 합의가 되면은 남쪽 정부가 나서서 하는 걸로 돼야지… 그 기업단위로 했다가는...이번 그 보세요 우리가 현대 하나 해보다가...창업자가 돌아가고 그다음에 그 창업자의 의도를 따르자고 하던 사람들이 또 돌아가고...지금 현정은 여사가 하나 있는데...그저 금강산 하나 경우 유지하는데...숱한 계획했던 게 다 무너지고..
그러니까 남조선의 재력을 다 모아서 남조선 당국적인 이런 투자가 되야지..투자면 투자..협력이면 협력..우리가 많이 쓴맛을 봤단 말입니다. 우리 사람들 다 기업단위로 하자고 하는데 기업단위로 하면 각명하게 그들에게 시간제공하고 그들에게 노력 제공하고..일감주는 것밖에 없고.. 실제 우리 크게 소득, 이득 본 게 없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통령: 기업 말하자면 현대가 일을 이렇게 맡아 하는 이런 방식에 대해서는 남측 정부도 그것이 타당한 방법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미 그렇게 합의를 하셨고 됐으니까 남쪽 정부는 뒷받침을 해줄 뿐이지 우리가 그런 것이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게 하시고요.. 여러 가지 그 말하자면 뭐가 되고 안되는지를 우리도 알아야 계획을 좀 세워볼 텐데 오늘...
김정일: 앞으로 그런 문제가 상정되면 총리급 회담을 하던가 해야지요. 우리가...난 경제는 그저 하자고 하는...활성시키자는 욕망 뿐이지...군대 칼은 쥐고 있지...경제 돈은 못 가지고 있어..그저 그렇게 알면 되겠어요...
대통령: 어쨌든 위원장께서 말씀하신 데 대해서 내가 몇 가지 답변을 좀 하고 싶습니다.
김정일: 예 말씀하세요.
대통령: 자주의 문제를 많이 제기하시는데...영국의 토니 블레어의 말하자면 자문을 하는...그 양반 이름이 누구지..예, 기든스라는 사람의 책을 보니까 영국이 미국에 너무 의지하지 말고 좀 자주적으로 가라..그리고 유럽을 중시하라.. 이렇게 조언을 해 놓은 것을 봤습니다.
마찬가지로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영국도 보기에 따라 자주적으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은 그 수준으로 올려버리면 세상에 자주적인 나라가 북측에 공화국밖에 없고... 나머지는 다 덜 자주적인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우리가 미국에 의지해왔습니다. 그리고 친미국가입니다. 사실...객관적 사실입니다. 그것이 해방될 때.. 그리고 분단정부를 세우는 과정에서 그리고 한국전이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이렇게 역사적으로 형성되어 온 것이어서 남측의 어떤 정부도 하루아침에 미국과 관계를 싹둑 끊고 북측이 하시는 것처럼 이런 수준의 자주를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나는 시간이 좀 필요하다... 점진적 자주로 가자... 지금까지는 적어도 김대중 대통령이 들어서시기 전까지는 점진적 자주에 대한 의지도 없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을 실제로 자주란 말씀을 자주 하진 않으셨지마는 6.15 회담부터 자주적인 행보...일부입니다. 그 때...
김정일: 박정희 대통령이 자주라는 구호가 나오지 않았소?
대통령: 그랬습니다. 그분 뭐 핵무기도 만들려고 하셨고...했는데...
김정일: 자조...자조지요 뭐..자조..
대통령: 근데 그것으로 말하자면 실천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지요...그래서 이제..어쨌든 자주...자주국방이라는 말을 이제 우리 군대가 비로소 쓰기 시작합니다. 주적 용어 없애 버렸습니다. 그다음에.. 균형외교라는 말을 우리 정부에서 와서 쓰고 있지 않습니까..공공연하게 쓰고 있지 않습니까..공식 균형외교라는 말을 쓰고 있죠...
작전통수권 환수하고 있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2사단 후방배치를 미국이... 또 이런저런 전략이라고 얘기하지만... 그건 후보 때부터 얘기하던 나의 방침이기도 합니다. 왜 미국 군대가 거기 가 있냐.. 인계 철선 얘기하는데 미국이 인계철선이 디면 우린 자주권을 가질 수가 없는 것 아니냐... 국방을 거기다 맡겨놓고 어떻게 우리가 자주를 얘기할 수 있느냐..그래서 2사단 철수한다는 것이 방침이었는데 마침 미국도 재배치계획을 가지고 있어서 일치해서 용산기지를 이전하는 데 우리가 60억 달러라는 돈이 듭니다.
그런데 60억 달러가 들어도 100억 달러가 들어도 대한민국수도 한복판에 외국군대가 있는 것은 나라 체면이 아니다...보냈지 않았습니까...보냈고...나갑니다. 2011년 되면... 그래서 자꾸 의제 너희들 뭐하냐.. 이렇게만 보지 마시구요. 점진적으로 달라지고 있구나.. 이렇게 보시면 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략적 유연성.. 전략적 유연성 문제에 있어서 우리가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만.. 동북아시아에서 군대를 움직일 때에는 우리 정부의 승인을 반드시 받아야 된다.. 합의했지 않았습니까.. 작계 5029라는 것을 미측이 만들어 가지고 우리에게 가는데.. 그거 지금 못한다.. 이렇게 해서 없애버리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개념계획이란 수준으로 타협을 해가지고 있는데 이제 그거 없어진 겁니다. 그렇게 없어지고.. 우리는 전쟁사실 자체를.. 전쟁상황 자체를 동의하지 않기 때문에... 그건 뭐 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2012년 되면 작전통제권을 우리가 단독으로 행사하게 됩니다. 그다음에 어제 엊그제 국군의 날 행사 때 우리 국군의.. 우리 안보 개념은 대북 안보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는 동북아시아 전체를 내다본 안보체제를 갖추어야 한다.. 일관되게 여러가지 이야기 했습니다. 했고.. 한반도가 동북아시아의 균형자가 되어야 한다.. 이런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뭐 내가 결의가 단호해서 그렇거나 훌륭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이것이 남쪽의 국민들의 보편적 정서로서 가고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제 이 가는 기운은 강력하게 굳혀 나가는 것.. 우리 국민들 사이에서 그 흐름을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굳혀나가는 것은 남북관계에 성과 있는 진전이 있어야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첫 번째가 평화에 대한 어떤 의지 표현이 있어야 되는 것 아니냐 이런 것입니다. 난 그렇게 우선 자주 문제에 대해서 그렇게 점진적 시간적 개념으로 보고...
그다음에 이제 내가 몇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개성공단을 조금 더 속도를 내자 아니면 조금 늦추자 뭐 이런 것이 하는 동안에 우리가 우리끼리 결단을 내고 속도를 빨리 내자.. 그것이 미국하고 사실은 조율을 어느 정도 합니다. 왜 그러냐.. 지금 공단에 반입하는 물건 하나하나에 대한 승인을 미국이 하고 있거든요.. 그럼 승인 안 받고 하면 어떻게 되는냐 소위 고급 컴퓨터 이런 것입니다.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승인 안 받고 하면 안되냐.. 했더니.. 그렇게 미국하고 감정을 많이 상해놓으면 승인이 어려워.. 승인을 안 받으면 어떻게 되느냐...
그것을 생산하는 사람들이 국제무대에서 소위 미국과 관계되는 모든 거래에 있어서 지장이 생기기 때문에 물건을 안 팔라고 한단 말이죠.. 지난번에 BDA때...BDA는 뭐.. 그건 미국의 실책입니다. 분명히 얘기를 하는데.. 실책인데.. 그러나 어쨌든 미국의 실책임에도 불구하고 북측의 돈을 받으라하니까 어는 은행도 안 받겠다 하는 것 아닙니까..
미측이 가지고 있는 현실적인 힘이고 그 돈 받았다가 은행 거래가 미국으로부터 제재를 당하면 은행을 못 해먹을 판이 되니까 전부다 중국도.. 발빼고 다 발 빼고.. 심지어 미국을 거친 것조차도 미국 중앙은행을 거친 돈조차도 안 받겠다고 하는 것이 경제에서의 현실이거든요..
그래소 우리도 그런 점에서 자주하고 싶어도 자주하기 어려운 현실적 상황이 존재하는 것이고요.. 원자로.. 경수로 그것 좀 중국에 하고 인도 뭐 이런데 좀 팔아먹을라고 하고 있는데 미국이 오케이하지 않으면 기술은 다 가지고 있는데 마지막 권리증을 그쪽이 가지고 있단 말이죠. 그런데 이번에 이제 권리증이 웨스팅하우스로 넘어와 가지고 이제 그쪽하고 협의를 해야 되는 것이죠.
이제 다른 종속이 아니고 기술종속에 의해서 기술의 격차에 의해서 도리없는 종속이 발생하는 것이죠.
지난번에 경수로 못한다? 그 이종석씨 잘 아실 겁니다. 기존 이종석이 보고 우리가 경수로 짓자? 미국 제끼고? 몇 번 말로 하니까 안되다 그래서 그럼 안 되는 이유를 보고서로 글로 써내라? 분석보고서를 써내라.. 한번 올라왔는데 뭐 좀 자세하지 않아서 한 번 더 이거 이거 이거 다시 보고서를 내보라 지적해서 다시 보고서를 받았는데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끼리 아무리 하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없다는 현실들이? 우리 소위 남측의 경제가 확 주름이 잡힌다든지 기업들이 곤란을 겪는 일들을 정부가 결정해야 된다는 것이.. 되지도 않으면서 고립을 자초하는.. 고립을 자초하는 자주는.. 이것은 할 수 없는 것이다. 세계 역사를 봐도 활발한 교역에 앞장선 국가들이 세계 패권을 가지고 왔던 것입니다. 우리는 세계 패권을 꿈꿀 수는 없겠지만, 한반도가 7천만 경제권을 가지고, 그래서 동북아시아에 실제 중심을 잡는 이런 위치에 가자면 경제에 있어서 앞서가야 되고 경제를 유지하자면 교역권 활발하게 안 할 수 없는 이런 애로가 있다는 점을 이해를 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그렇지만은 이와 같은 세계 경제의 현식속에 북측도 함께 발을 들여야? 시장에는 발을 디뎌야지 안디디고 어떻게 갈 수 있겠느냐? 그런 해명을 좀 말씀드리고요.. 그래서 비위를 살피고 눈치를 보는 이유가 사대주의 정신보다는 먹고사는 현실 때문에 그렇게 되고 있다는 점을 잘 이해를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부시 대통령 종전선언 이 문제에 있어서 정말 한번 성사시켜 보라고 하셨는데? 이 부분 좀 시간을 두고 위원장님하고 뭐 하나 말씀을 나누고 갔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무조건 가가지고 부시대통령한테 하자.. 이것은 아니니까 남북 간에 여기까지 갔으니까, 이제 또 이걸 부시대통령이 그렇게 말했으니까, 그걸 디디고 와서 내가 위원장님께 우리 이런 거 한번 합시다 말씀드릴 수 있었듯이?
김정일: 당면하게 이제 부시대통령도 시간없지요 뭐 이제?
김양건: 예, 그렇습니다.
대통령: 하여튼 뭐 이런 상징적인 행위가 이루어지면 더 좋고.. 아니라 할지라도 뭔가 진전할 수 있는 뭘 토대를 하나.. 디딤돌을 하나 또 위원장께서 이 기회에 만들어주시면 그 디딤돌 가지고 다음 단계로 또 나아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서해 군사분계선의 문제 있습니다. 이 문제는 위원장하고 나하고 관계에서 좀 더 깊이 있는 논의를 해야 됩니다. 우리 남측 군인들 내보내놨더니요.. 갔다와서 그렇게 하지말고.. 지금은 아닙니다만.. 지금은 우리도 여러 가지 있습니다. NLL 타협해라? 대선국면이 아니었거든요.. 그 당시는? 대선 국면이 아니고..
NLL 문제 의제로 넣어라.. 넣어서 타협해야될 것 아니냐.. 그것이 국제법적인 근거도 없고 논리적 근거도 분명치 않은 것인데.. 그러나 현실로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통령): 북측 인민으로서도 아마 자존심이 걸린 것이고.. 남측에서는 이걸 영토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혼동이라는 것을 풀어가면서 풀어야 되는 것인데...이 풀자는 의지를 군사회담 넣어놓으니까 싸움질만 하고요.. 풀자는 의지를...두 가지.. 의지가 부족하고 자기들 안보만 생각했지 풀자는 의지가 부족하고.. 뭐 아무리 설명을 해도 자꾸 딴소리를 하는 겁니다. 그거 안됩니다 하고.. 그 다음에 이런 여러가지 위원장께서 제기하신 서해 공동어로 평화의 바다..내가 봐도 숨통이 막히는데 그거 남쪽에다 그냥 확 해서 해결해버리면 좋겠는데..
이어 놓으면은 군사적으로 이거 뭐 안보 위협이 생기고.. 이렇게 내부에서 보고하는 사람들부터 이러니까... 이 문제는 전혀 무시할 수 없는 일이지만은 말하자면 최고위급에서 이 문제를 말하자면 가야된다... 이번 대선국면에서 뭐 한나라당이 저렇게 하지 않으면 지난 번 내 군사회담에다 이건 다루라고 했거든요.. 했는데 지금은 인제 내가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려있어서 그 얘기를 바로 꺼내긴 어렵지만은 ...그래서 이제 의제는 그렇습니다.
그렇고 이걸 풀어나가는데 좀더 현명한 방법이 있지 않겠느냐...거기 말하자면 NLL 가지고 이걸 바꾼다 어쩐다가 아니고...그건 옛날 기본합의에 연장선상에서 앞으로 협의해 나가기로 하고 여기에는 커다란 어떤 공동의 번영을 위한 그런 바다이용계획을 세움으로써 민감한 문제들을 미래지향적으로 풀어나갈 수 있지 않겠느냐.. 그런 큰 틀의 뭔가 우리가 지혜를 한번 발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죠...
해주 아이디어는 오늘 처음 들었습니다. 정몽헌씨가 그런 제안을 했다는 것을 처음 들었는데.. 해주는 군사적으로 민감해서 잘 안 주실 것이라고 들었는데 오히려 나는 거꾸로 생각했습니다.
개성보다 더 해주가 민감한 것으로 들었는데...그 점은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어떻든 해주 발상이라는 것은 그런 큰 틀 속에 들어있는 것인데.. 그냥 배경설명입니다. 그렇게만 들어주시면 좋겠구요... 그래서 공동어로 이런 문제에 대해서 이것은 적어도 뭐 총리급 수준에서도 얘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만... 결정권을 가진 위원장과 내가 한번 얘기를 좀더 깊게 해봤으면 좋겠다... 위원장이 지금 구상하신 공동어로 수역을 이렇게 군사 서로 철수하고 공동어로하고 평화수역이 말씀에 대해서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거든요.. 단지 딱가서 NLL 말만 나오면 전부다 막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는 것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인데 위원장하고 나하고 이 문제를 깊이 논의해볼 가치가 있는게 아니냐...
그리고 국방회담이라든지 이런 문제에 대해서 전향적으로 말씀해주신데 대해서 참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6자회담에 관해서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는데 조금전에 보고를 그렇게 상세하게 보고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남측에서 이번에 가서 핵문제 확실하게 이야기하고 와라...주문이 많죠.. 근데 그것은 나는 되도록이면 가서 판 깨고.. 판깨지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주장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많은 국민들이 또 그게 중요하다고 그래요...중요한 일입니다. 중요한 일인데...
그러나 문제는 6자회담에서 이미 풀려가고 있고 그 틀이 근본적인...문제해결이 가능한 틀이기 때문에 거기서 풀자.. 그런 것들을 내가 계속 주장해왔고..했습니다. 했는데 우리 국민들에게 안심시키기 위해서 핵문제는 이렇게 풀어간다는 수준의 그런 확인을 한번 해주시면 더욱 고맙겠습니다. 안그러면 가가지고 인제 뭐 내가 해명을 많이 해야되죠...한 줄 들어있으면은 가서 뭐 이렇게 간다...이렇게 될 것 같구요..
경제협력은 좋습니다. 위원장이 지금 때가 아니다라고 보시면 그렇게 저는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런데 그래도 다음에라도 뭔가 총리급에 하더라도 뭔가 위임과 지시가 없으면 앞으로 못나갑니다. 남측도 마찬가지입니다. 총리에게 이런 방향으로 푸시오라고 방향을 주어야 되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그런 점에 있어서 오늘 무슨 결론을 내고 선언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위원장하고 나하고 사이에 경제문제가 어떻게 풀려나가야 되는 지에 대해서 서로간의 의견을...위원장께서 갖고 있는 한계를 분명하게 모르고 우린 우리끼리 막 그림을 그야말로.. 허황된 그림을 많이 그렸습니다.
그러나 남측에서 볼때 이 그림은 허황된 것이 아니고 정말 이게 돈되는 것인데..앞으로 우리가 일류국가로 가자면 이거 해야되는 것인데...라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또 이 설명을 충분히 한번 드리고.. 또 우리도 위원장의 한계가 뭐라는 것을 분명하게 가져가면 또 그 아래서 우리가 계획을 다시 만들어서 또 제안을드리고 해야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또 좀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이점은 나도 아프게 생각합니다. 남쪽 사람들이 개성공단을 가지고 이것이 개방의 미끼인 것처럼 자연히 뭐 개성공단처럼 하면은 북측이 개방하고 개혁할 것이라고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데 대해서는 나도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이건 뭐 여러가지 생각이 있으니까 이야기를 하는 것인데 나는 그런 견해에 대해서는 찬성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아니고 진정한 의미에서 말하자면 경제확산, 기술확산 이거 해야되는 것인데..특구를 얘기하는 것은 공화국 전체의 법 체제를 한국기업이 기업활동을 할 수 있게 바꾼다는 것은 너무 어렵습니다. 신의주도 좋습니다. 신의주라도 그건 뭐...좋고 나진 선봉 다 좋습니다.
문제는 이게 서로 거래방법, 기업운영방법이 너무 다르기 때문에 지금 이대로 특구가 아니고는 투자할 기업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지금 전체 투자 중에 92년...93년부터 투자가 시작됐고.. 94년부터 투자가 시작됐지만은 다 거의 실패하고요..성공한 것은 개성공단, 금강산 두 군데 뿐입니다. 지금 남측의 대북투자의 80%가 전부 특구 투자이고요...그 건수로는 80% 정도이고 금액으로는 88%가 특구입니다.
지금 26개 시범사업 하고 있는데 이번에 이제 1단계 분양이 돼서 230개 들어옵니다. 들어오는데 그동안 이걸 1년 정도는 내가 더 당길 수 있었는데 사실은 나도 그 결단을 혼자 할 수 없어서..아까 말씀드린 것과 같은 그런 이유로 좀 지체가 된 것을 정말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이런 문제를 고려해서 우리가 특구를 말씀드린 것이지 특구를 가지고 장난치자고 하는 생각은 절대 아니다... 그런 점에 대해서 그렇게 말씀을 일단 드리고요...
그래서 이제 공부를 그동안에 보고서를 이 사람들한테 내가 이만큼 받아놨습니다. 세세하게 위원장께서 좀 아셔야될 부분이 있다고 생각을 해서..지금 기업경영에 있어서 무엇이 애로에 걸려 어렵고... 이런 것들을 다 일일이 안하더라도 큰 틀에 있어서.
김정일: 법률적인 제도적인 제한턱들은 너무 앞으로 더 어떻게 하든지 간에 앞으로 남조선 경제를 일임하는.. 돈받자고 해도..법률적인 제도적인 조정사업이 아마 있어야 된다고 본인은 생각을 합니다.
김양건: 예, 그런 문제들은 제기됩니다. 일정한 문제들은 제기됩니다.
대통령: 위원장께서 혁명적 결단을 하셔야 됩니다. 특구를 하시든 특구 이외의 것을 하시든요, 우리도 바라건데 혁명적 결단을 하셔야 합니다.
개성공단이 2000년에 합의가 된 것인데요. 기업 입주한 것이 2004년 아닙니까, 이제 2007년에 와서 230개가 들어온 것입니다. 이게 되게 느린 것입니다.
남측에서도 공단 하나 계획해서 시작하려면 시간이 걸립니다. 공단 하나 들어서는데 10년이 걸리는데요. 우리가 인천특구, 말하자면 인천경제자유구역을 지금 만드는데 아직 황량한 벌판입니다. 2002년에 기획해 가지고 넘겨준 것인데 5년 동안 죽을 둥 살 둥 해도 아직 인천경제자유구역이 자유구역답게 되려면 앞으로 5년, 10년은 더 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경수로 하나 하는 것도요, 정치적 상황 때문에 그렇겠지만, 94년에 합의 되가지고 98년에 첫 삽 뜨고 2003년 초에 중단이 됐는데, 그 중단될 때까지 35% 공정 밖에 안 됐습니다. 그 투자한 돈 13억달러 안고 있습니다만, 우리는 경수로 꼭 지어야 합니다.
아까 김계관 부상이 그랬습니다. 적대시정책 철회하고, 비핵화는 전 조선반도에 한다. 이거 좋습니다. 이미 합의된 거니까. 지금은 6자회담 주제에 남북 문제가 안 들어있으니까 그렇지. 이것은 남북간에도 충분히 합의하고, 이미 합의가 있는 거니까 지켜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평화적 이용권, 적극적으로 찬성합니다. 말하자면 미국이 안 줄려고 하면 6자회담은 성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시간적으로 신뢰를 확보해가는 과정 아니겠습니까.
신뢰를 누구를 기준으로 하느냐, 국제사회에서 사실 그렇습니다. BDA문제는 미국이 잘못한 것인데, 북측을 보고 손가락질하고, 북측보고 풀어라 하고, 부당하다는 거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문제를 실질적으로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국제사회에서 지지를 확보해야 됩니다.
그래서 나는 지난 5년 동안 내내 북핵문제를 둘러싼 북측의 6자회담에서의 입장을 가지고 미국과 싸워왔고, 국제무대에 나가서 북측 입장을 변호해 왔습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내가 행동하면서, 미국하고 딱 끊고 당신 잘못했다고 하지 못한 것은 미국이 회담장을 박차고 떠나 버리면, 북측도 좋은 일이 아니겠지만, 우리 남측으로 봐서도 좋지 않습니다.
남측은 평화가 흔들린다고 하면 주가가 땅에 떨어집니다. 해외에서 빌려오는 돈의 이자가 올라갑니다. 우리는 위원장하고 김대중 대통령하고 6.15때 악수 한번 했는데, 그게 우리 남쪽 경제에 수 조원, 수 십 조원 번 거 거든요. 어제 사진도, 어제 내가 분계선을 넘어선 사진으로 남측이 아마 수 조원 벌었습니다. 뭐 장기적으로, 상징적으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6자회담 깨지면 안되니까, 미국 붙들고 같이 가야, 북측도 못나가게 해야, 그래서 6자회담 가면 아마 북측하고 가장 긴밀하게 얘기하는 쪽이 우리가 아니었을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김정일 : 우리가 민족이긴 민족이죠, 한 민족이죠. 의사소통은 그래도 일본사람들 보다 낫습니다. 일본은 우리하고 상종하고 해도, 밤낮 싸우고, 그래도 속심있는 이야기는 다 북남하고 합니다.
대통령 : 우리가 선진강국이 되자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하고 적대관계, 관계정상화 풀어야 되고요. 일본하고도 아니꼬와도 문제를 풀고 가야 합니다. 남북이 말하자면 완전한 협력관계에 들어서고 북측이 국제관계에 들어서고 나면 쫓아내지 못하거든요. 지금은 세게 하면 고립이 되지만, 자리를 잡고 난 뒤에 세게 하면 자주가 되거든요. 자주가 고립이 아니라 진짜 자주가 될 수 있도록 그렇게...
김정일 : 옳습니다. 노 대통령님의 견해를 충분히 알았습니다.
대통령 : 말씀 드릴게 더 남았습니다. 아니면 위원장 말씀 그냥 한 시간 두 시간 듣는 것만이라도, 들어야 하니까요. 연일 줄여서 말씀하시니까...
김정일 : 양건 동무한테 얘기들었는데, 우리 상임위원장이 너무 오래 설명했다고 그러더군요.
대통령 : 위원장 질문이나 말씀을 안 하시면, 내가 이것저것 질문하고 싶은 것도 많으니까요. 오후 시간이나 잡아 주십시오.
김정일 : 오후에 일정이 괜찮겠어요?
김만복 : 아리랑 공연과 만찬 행사는 예정대로 진행을 하고, 그 이전 행사는 우리가 유연성을 가지겠습니다. 그래서 두 분 정상이 이렇게 좋은 얘기를 하고 계시는데 좀 더...
김정일 : 뭘 더 얘기하지요? 기본적 이야기는 다 되지 않았어요?
대통령 : 올라올 때 오전에 확대 정상회담, 단독 정상회담 그렇게 알고 올라 왔거든요. 아침에 얘기 다 했으니까, 오후에 보지 말고 가라 이러면요...
김정일 : 아직 보실 게 많잖아요. 아까도 말씀한 거...
대통령 : 오후에 만남이 없으면요...
김정일 : 정례회담이라고 하는 거, 내가 스쳐 지나갈 수 있기 때문에 얘기하는데, 양 국가가 아닌 이상에는 한 민족끼리니까 정례다, 정례 합시다, 이런 것은 내가 꼭 아버지 집에 설날, 음력 설에 찾아가는 거는 도덕이죠. 간다, 가야 된다, 딱 밝힐 필요 없죠.
대통령 : 수시로 보자고만 해주십시오.
김정일 : 수시로? 문제가 있으면 그저 상호 일이 있으면, 호상 방문 하는 거고...
대통령 : 일이 있으면...일 없으면 볼 일 없다 이렇게 느껴지니까. 그러지 마시고...
김정일 : 그 대신에 격식과 모든 것 다...
대통령 : 좋습니다.
김정일 : 그저 우리 중국 사람들 보고 얘기합니다. 당신네 하고 밤낮 외교하라 그러는데, 옆집에 국경을 가지고 있으니까 친척집에 다니는 것처럼 하는 거지, 뭐하러 밤낮 외교 보자기를 씌워 가지고 사람이 할 말도 자연스럽게 할 수 없게끔 만드는가. 딱딱하게 공식적인 말만 하게...그렇게 하지 말자. 내가 니네 집에 가는데 뭐 전보 하나면 되죠. 삼촌네 집에 갈 때도 급하게 가면...
대통령 : 예. 좋습니다. 동의하겠습니다. 격식과 형식과 절차에 구애 되지 아니하고 수시 만나 민족대사를 우리가 서로...
김정일 : 수시로 협의한다. 정례화라고 하면 우리사람 다 이해 안됩니다.
대통령 : 그렇게 해 주시고요. 그러면 남측 방문은 언제 해 주실랍니까?
김정일 : 그건 원래 김대중 대통령하고 얘기했는데, 앞으로 가는 경우에는 김영남 위원장이 수반으로서 갈 수 있다. 군사적 문제가 이야기 될 때는 내가 갈수도 있다. 그렇게 이야기가 돼 있습니다.
대통령 : 아 그렇게, 우리는 전부 김정일 위원장께서 방문하시기로 약속한 것으로, 우리 국민들은 전부 그렇게 알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김정일 : 미사일 문제요 핵문제요, 지금 가자고 해도 전 세계가 놀래서 와락와락 할 때 내가 뭐하러 가겠어요. 그래서...
대통령 : 그래서 재촉을 안했습니다.
김정일 : 그래서 정세가 있고 분위기가 있고 또 남측도 정서가 있는 것인데 지금 한나라 사람들이랑 너무 그렇게 나오는데, 우리가 뭐하러...호박 쓰고 어디 들어간다는 말이 있는데, 지금 그렇게 하려고 하겠습니까?
대통령 : 남측은 데모가 너무 자유로운 나라라서 모시기도 그렇게...우리도 좀 어려움이 있습니다.
김정일 : 앞으로 모든게 정상적으로 좋게 발전돼 나가면, 앞으로 못갈 조건이 없지 않습니까. 앞으로 또 정세와...
대통령 : 오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김정일 : 남쪽 사람들의 정서도 보아야 합니다. 정서를 봐야 되겠고...
대통령 : 이번에 이 많은 공부를 해 왔는데, 위원장께서 그...
김정일 : 이번에 보니까 총 몇 시간 걸립니까? 서울서 분계선까지 오는데 몇 시간입니까?
백종천 : 평양까지 2시간 반 밖에 안 걸렸습니다.
이재정 : 개성에서 평양까지 2시간 반이고요. 서울에서 개성까지 한 50분 걸립니다.
김정일 : 50분. 비행기 이용하는 거 보다 낫습죠?
이재정 : 훨씬 좋습니다. 정말 위원장님께서 앞으로 철길도 열어주시고 땅 길도 열고, 하늘도 이젠 정기항로를 좀 만들어서 우리 시민들, 국민들이 다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도록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김정일 : 그걸 위해서 우리가 일 하자는 거 아닙니까. 그건 꼭 실현시켜야 됩니다. 도로, 철길도 앞으로 2차 현대화 해야 돼요. 아직도 우리는 일본 잔재, 과거의 일본 잔재가 남이 있는 게 철길입니다. 일본사람들은 신의주하고 저...경의선만 복선 지었고요 다른 데는 복선이란 게 원래 없습니다. 전쟁 이후에 파괴된 이후에는 우리가 복구도 안했고, 일본 사람들이 남긴 식민지 잔재가... 앞으로 개통한다 하면,김대중 대통령께서 철길 물동수송, 물류수송 하는데 크게 의미부여를 했기 때문에 우리가 동참했습니다. 중량대로에 중량차들이 다녀야 하니까, 내가 상징적으로 연결만 했다. 내가 항상 일꾼들에게 얘기하는데, 실제 열자면 너네 할 일이 많지 않느냐. 부산에서부터 중국, 유럽으로 가는 거 속도 어떻게 보장하느냐...
이재정 : 위원장님, 우선 지금 개성까지만이라도 열면, 개성에서 생산하는 양이 한 달에 1500만불 정도인데, 만약에 이게 내년 말까지 가면 한 달에 1억불이 넘게 생산이 됩니다. 이것이 약 25%가 해외로 수출되고, 나머지 75%가 국내에서 내수로 쓰이고 있는데요. 이 물동량만 기차로 수용한다면 물류비용을 40% 줄일 수 있습니다. 저희가 그렇게 하면서 위원장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나머지 철도의 현대화, 이건 또 별도의 투자방법으로 해서 해 나가면, 아마 앞으로 국민들의 희망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김정일 : 그건 반대 없어요. 반대 없어. 아까 경협 문제 얘기했을 때 철도 현대화도 돼야지. 현재는 그냥 했다고 하는 상징적인 것이고, 정상 운영하자고 하면 문제가 복잡합니다. 앞으로 중량화 해야지, 두번째는 한 선만 가지고는 해결이 안 되니까 경의선에 한해 복선 문제가 있고... 제가 러시아 사람들에게 얘기했습니다. 경원선 연장은 복선 못한다. 한 선으로 해야 한다. 우리나라 지형이 좀... 지도 봤죠? 어떻게 생겼는가. 남쪽이 좀 유리하지요. 평평하니까.
김양건 : 남쪽도 지금 연결은 못하고... 동해안 쪽으로는 연결이 안됐어요.
김정일 : 그러니까 그것도 지금 했다고만 돼 있지, 실제 운영하자고 달려들면... 앞으로 글쎄요. 올림픽 후에도... 베이징 올림픽도 남측에서 요구한다고 하는데, 그 기차선 이용해서... 시간이 비행기로 가는 것보다 늦지요?
이재정 : 그러나 의미로는 아마 대단히 큽니다.
김정일 : 의미는 무슨, 인기나 끌어서 뭐하게...
이재정 : 아닙니다. 남북이 함께 응원하기 위해서 같은 기차를 타고 간다는데 대단히 큰 의미가 있고, 위원장님의 결단에 따라서는 세계의 평화의 의지를 보여줄 수 있는 아주 절대적인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김정일 : 그것도 이번에 두 정상이 합의했다 하지요 뭐. 응원단은 그 기차를 한번 써 봐라 하지요.
이재정 : 아주 좋은 말씀입니다.
대통령 : 예, 아주 좋습니다. 그것이 북측의 이미지가 아주 좋아집니다. 공동, 이거 하면 사람들이 북측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투자라든지, 어쨌든 국제적인 모든 관계에서 응대하는 것이 달라지는 것이죠.
김정일 : 응원단은 가는 것만 상징적으로 한번 하고, 돌아갈 땐 비행기로 돌아오라 하지요. 그래야 되지 뭐...
김양건 : 예, 상징적으로 갈 때 그저...
이재정 : 위원장님, 이번 기회에 개성공단까지는 한번 열어 주시면 개성공단 발전에도 대단한 기여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상징적으로 현대화 작업도 우리 대통령님 재임 중에 한번 계획을 세워서 일단 착수를 할 수 있다. 그러면 바람직한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김정일 : 개성공단까지라고 하면, 서울에서 개성공단까지 온다는 거지요?
이재정 : 그렇습니다.
대통령 : 앞으로 개성공단의 제일 큰 애로는 물류애로 발생입니다. 왜냐하면 원자재 들어가야죠, 제품 나가야죠, 물류 애로가 지금 곧 발생할 것이고요. 그 다음 애로가 사람이 모자랍니다.
김정일 : 개성이 공단 때문에 도로 닦지 않았습니까. 그것 갖고 안 되겠어요?
대통령 : 지금 현실이 쌀 40만톤 6월말까지 시작했는데, 11월 20일이 돼야 다 끝나갑니다. 배로 하니까 엄청난 시간이 걸리고요, 우리 생각으로는 어떻게든 개성까지만이라도 물류를 할 수 있게 되고 현대화 작업을 한다면, 개성공단 발전에 기여할 것이고요. 도로 문제도 만일 허락해 주신다면 한강하구에 공동개발을 하면 한강 하구에 있는 공동 모래의 부존량만 해도 10억 입방 미터가 넘습니다. 이걸 돈으로 환산하면 28억불이 됩니다.
김정일 : 골재 생산하는데 돈이 된다면 그건 하십시오.
이재정 : 그건 이번에 위원장님께서 확답을 해 주시면 남북에 굉장한 이득이 되고요. 그걸 통해서 개성-평양 간에 고속도로 사업도 할 수 있을 것이고요.
김정일 : (김양건에게) 좀 쉬고 이야기 할까?
대통령 : 북측이 골재 얘기가 나오고, 조금 전에 NLL 말씀하셨으니까...
김정일 : 한 15분 휴식하고 마저 이야기하지 않겠습니까?
대통령 : 지금 15분 쉬면 12신데...
이재정 : 오후에 시간 좀 주시죠.
대통령 : 그리고 우리 국민들도 두 번, 세 번, 네 번,만나고 오라고 나한테 짐을 지워 보냈는데, 한번 만나고 가면 노무현 쫓겨왔다 쓸텐데, 위원장께서 날 그렇게 할 겁니까?
김정일 : 요새 기자들은, 특히 남측 기자와 일본 기자들은 아주 영리스럽고, 시류에 민감하고 취재활동에서는 정말 만민을 쥐었다 놨다 할 수 있는데, 최근에는 이제 기자가 아니고 작가입니다. 기자들이 모든 이야기를 다 꾸며내고, 저 사람들 보면 지금 기사야 작품이야 하고 내가 그러고 마는데요. 허위...
대통령 : 북측 기자들은 그런 기자들 없죠?
김정일:우린 사실대로 그저...좋으면 좋고, 나쁘다면 나쁘고. 거기서는 자꾸...돈 벌이 하느라고...
대통령:오후 시간 내주시는 게 그렇게 어려우시면 나도 내려갈랍니다.
김정일:그럼 앞으로 자주 만나자고 했으니까, 자주 안건이 생기면 오시면 되지 않습니까.
대통령:자주는 다음 일이고 이번 걸음에 차비를 뽑아가야지요, 무슨 말씀입니까. 그리고 실제로요, 서해문제는 깊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위원장님 말씀도 듣고요.
김정일:‘서해문제도 군사회담에서 꼭 상정되고 긍정적으로 해결하도록 했다’ 이렇게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김양건:아무래도 군사분야는 군 사이에 많이 논의되어야 하니까
김정일:남측의 서해문제에 대한 실질적인 요구는 무엇입니까?
대통령:남측의 요구라기보다는, 나는 그 부분이 우발적 충돌의 위험이 남아있는 마지막 지역이기 때문에 거기에 뭔가 문제를 풀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NLL이라는 것이 이상하게 생겨 가지고, 무슨 괴물처럼 함부로 못 건드리는 물건이 돼 있거든요. 그래서 거기에 대해 말하자면 서해 평화지대를 만들어서 공동어로도 하고, 한강하구에 공동개발도 하고, 나아가서는 인천, 해주 전체를 엮어서 고동경제구역도 만들어서 통항도 맘대로 하게 하고, 그렇게 되면, 그 통항을 위해서 말하자면 그림을 새로 그려야 하거든요. 여기는 자유통항구역이고, 여기는 공동어로구역이고, 그럼 거기에는 군대를 못 들어가게 하고. 양측이 경찰이 관리를 하는 평화지대를 하나 만드는, 그런 개념들을 설정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문제이지요.
그래서 해주특구라는 것은 그것 때문에 들어가는 것이지 실제로 한국경제가 지금 더 바쁘게 중요한 것은 조선입니다. 이 조선 부분이 파급효과가 크거든요. 조선 하나 하려면 각종 부품공업이 먼저 일어나야 하는데, 그 부품공급이 해당공단에서도 만들어져야 하지만, 사람이라는 것이 몇 년 하고 나면 독자적으로 공단 안에서 밖에서 북측 인민들이 창업을 하게 되지 않습니까? 작은 공장들 창업하고, 그렇게 해 나가면서 파급효과가 굉장히 큽니다.
우리도 지금 점차 중국에서 푸대접을 받기 시작하거든요, 조선 부품이라든지, 부분조립하는 소위 블럭공장에서 푸대접을 받고 있어서 우리도 중국 아닌 다른 쪽으로 가야 됩니다. 그래서 일부는 필리핀으로 가고, 다른 데로 가야 되는데, 한국 조선공업하는 사람들은 북측에서 이것만 열어주면 그야말로 북측 경제에 획기적인, 기술이전이라든지 효과가 굉장히 크거든요.
그거 하자면 발전문제도 해결해야 하고, 조선단지를 위해서 발전소 하나 지으면 기왕이면 크게 짓고, 수리하고 키우고 해서 주변 문제, 전력문제까지 해결하는 것이지, 결코 특구 가지고 그것만 파먹고 도망가는 그런 방식으로 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개성에서 지금 우리가 10만㎾ 쓰고 있는데, 40만㎾까지 송전이 가능합니다. 해주까지 뻗어서 갈 수 있고, 개성의 인력문제가 앞으로, 지금 1차 완공되면 그 인력은 괜찮은데, 2차로 3백만평 들어가면 인력이 부족하거든요. 그 사람들 주택을 다 지어야 하는데, 주택지을 계획도 우리가 없고, 주택문제, 출퇴근 문제 등 북측 인민들이 개성으로 이사를 와야 되느냐, 아니면 상당부분 해주 같은데서 문제를 해결해야 되느냐, 이런 문제들이 우리가 걱정입니다.
김정일:그거 오후에 하지요 뭐. 오후 1시간 정도. 1시간 반 정도 예견해서... 오침 계시지요?
대통령:아무 때도 좋습니다. 위원장께서 편리한 때에...
김정일:오침 하십니까?
대통령:할 때도 있고, 안 할 때도 있고 그렇습니다.
김정일:나는 40년 동안 오침이라는 법을 모릅니다.
이재정:대단하십니다. 훌륭하십니다.
김정일:조금 잠들면 그것도 설치고, 많이 자면 골 아프고....
대통령:다른 날은 오침이 되도, 오늘은 안될 것 같습니다.
김정일:(김양건에게) 2시? 2시 반?
대통령:2시 반 좋습니다. 2시도 좋습니다.
김정일:2시 반 시작해서 4시 끝나면...(김양건 부장에게) 내 회의도 저녁시간으로 다 돌려라. 오늘 외무성 사람들 몽땅 모여서 방향을 얘기하려는데... 노 대통령님의 끈질긴 제의에 내가 양보해서 2시 반에 하는 걸로...
대통령:얘기할 거리가 많아서 그렇습니다.
김정일:그리고 보도진에다 얘기하십시오. 토의문제가 대단히 많고 심도있는 말들 많이...우리도 작가 노릇 해 봅시다. 그래서 오후에 더 한다. 그렇게 합시다.
대통령:감사합니다.
김정일:고맙습니다.
ㅇ일시: 10.3(木) 14:30-16:25(115분)
ㅇ장소:백화원 영빈관
ㅇ배석자
-南:권오규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이재정 통일부 장관, 김만복 국가정보원장, 백종천 통일외교안보정책실장, 조명균 안보정책비서관(기록)
-北:김양건 통일전선부장
...(초반부 녹음 안됨)...
김정일:(청취불가)...내일 내가 떠나시기에 앞서 오찬을 하고자 하는데 이야기가 많아서...오늘 일정을 내일로 미루시고, 내일 오찬을 좀...일정을 좀 늦추는 걸로 제의합니다. 오늘 회의를 내일로 하시고...
대통령:아, 돌아가는 거요?
김정일:모레 아침에 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오늘 오후 일정을...
김양건:예.(청취불가)...
김정일:대통령께서 결심 못하십니까?
대통령: 큰 것은 내가 결심을 하고, 일부 작은 것은 의전, 경호실과 상의해야 합니다.
김양건: (청취불가)
김정일: (청취불가)
대통령: (청취불가)? 위원장 각별한 배려로 생각하고?
김정일: 아니 뭐, 내가 아니고 우리 계획을 말씀드려? 멋있게 모셔야죠.
김양건: 오후에 열뢰식 있고 그 다음에? 그것은 안 하셔도 뭐?
백종천: (김양건 부장에게)? 김부장님, 실무자끼리 얘기하시죠.
김정일: 그럼 회담을 그저 오늘로 끝내고, 모든 일정을 끝내겠다고 하면 원래 계획대로 하셔도 되고?
김양건: 내일 오전에 평화자동차하고 서해 갑문에 가십니다.
김정일: 보도대로?
김만복: 오늘 비 때문에 아리랑공연이 어떻게 되시겠습니까?
김정일: 그것 때문에 그래요? 안해도 뭐 일 없습니다. 안 보시겠다면?
대통령: 충분히 말씀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먼저 말씀 드릴까요, 뭐 제일 큰 문제가 미국입니다. 나도 역사적으로 제국주의 역사가 사실 세계, 세계 인민들에게 반성도 하지 않았고 오늘날도 패권적 야망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점에 관해서 마음으로 못 마땅하게 생각하고 저항감도 가지고 있고 새로운 기회가 필요하다는 인식도 가지고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나는 이렇게 생각해 봅니다. 미국이 군사력을 가지고 개입하고 시장에 대한 규제를 가지고 정치적 원력을 행사한다. 말하자면 미운나라에 대해서는 경제제재를 한다든지 미국의 국내법만 가지고도 상당한 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음에는 과학기술의 일종인 기술적인 것인데 이것을 가지고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학적 패권이라는 것은 시간이 좀 지나면 상호적인 관계로 변화를 형성하고?
군사적인 문제는 이제 전 세계적으로 보아서 아프리카라할지라도 타격이라든지 일시적인 침략은 가능할지 모르지만 지배는 불가능한 시대로 간다고 보기 때문에 과거 제국주의 시대 같은 그런 침략과 지배, 이것을 자위력으로 행사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이라크에서도 그런 것이 증명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세상은 바뀌어 가고 있고 경제·시장규제를 가지고 정치적원력을 행사하는 것도 과연 어느 시기까지 갈 수 있을까? 앞으로 10년, 20년, 변화를 내다보면서 곧 한계에 봉착한다고 생각합니다. 중국과의 관계에서 본다면 미국이 중국에 대해서 그와같은 경제권력을 행사하기가 매우 어려운 상황일 것입니다.
물론 그러나 개별기업들이 아직까지 국내법을 가지고 상당히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상황이 변해가고 있고, 이러한 상황을 이용해서 한민족이 슬기롭게 서로 단결하고 또 자주의 문제도 시간을 갖고 서서히 풀어갈 수 있지 않은가 그러한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 남측국민들에게 여론조사를 해봤는데, 제일 미운나라가 어디냐고 했을 때 그중에 미국이 상당숫자 나옵니다.
또 동북아시아에서 앞으로 평화를 해롭게 할 국가가 어디냐, 평화를 깰 수 있는 국가가 어니댜 했을 때 미국이 일번으로 나오고 제일 많이 나오고 많은 사람들이 미국을 지목하고, 그 다음은 일본을 지목하고 다음을 북측을 지목했습니다.
남측에서는 이 변화라는 것도 10년전만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인식의 변화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이 우리민족이 자주적으로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는 환경의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또 남측의 지도자로서 그런한 환경의 변화를 지켜만 보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오전에 내가 말씀드렸듯이 여러가지 노력을 통해 자주적인 역량을 강화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점에 대해서는 의논을 드리고 싶고 그러한 전망을 가지고 풀어나가자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평화의 문제는 나중에 얘기할 기회가 있으리라고 생각됩니다만, 경제문제는 나는 참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일본이 거의 공개적으로 100억달러로서 북·일 관계에 있어서 과거사를 정리하겠다는 생각을 직간접적으로 비추어서 많은 사람들이 북·일관계가 정상화되었을 때, 얼마 얼마 이런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100억달러면 10조가 안되는 돈입니다.
내년도 남북협력기금 예산을 1조 3천억원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년에 세수가 199조원입니다. 세수의 1%이면 199조원이니까 2조 정도 되는 돈입니다. 경제가 성장하고 물가가 오르고 있기 때문에 금액으로만 따지면 일본이 얘기하는 100억불이라는 돈은 5년안이라고 마련할 수 있고, 그것을 어떻게 쓰느냐는 문제는 쌍방이 협상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에 대해한 국민적 동의를 확보하는 과정이 오늘 김 위원장과의 대화입니다. 그 다음에?돈 얘기를 해서 죄송합니다.
김정일: 괜찮습니다.
대통령: 베트남과 중국에 우리가 투자를 하고 있는데 연간 약 20조 가까운 돈을 투자하고 있습니다. 남측 경제를 위한 것입니다. 잘 살자고 하는 것이니까.
그런데 남측 기업하는 사람들 중에서 중소기업하는 사람 모두가 아깝게 생각합니다. 왜 우리가 이것을 중국에 투자하는가, 베트남에 왜 투자해야하는가. 먼저 북측에 투자하고 그 다음에 남으면 중국, 베트남을 가야지 하는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그런데 현실은 거꾸로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중국에 투자하고 베트남에 투자하는 10분의1만 가지고도 200억달러를 연간 투자할 수 있는데?
그런 문제뿐만 아니라 공기업들이 남측에서 도로를 닦고 있는데 도로공사에서 도로를 닦습니다. 도로공사가 닦을 만큼 닦아서 해외로 나갑니다. 알제리, 아르바이잔에 나가고 토지공사도 마찬가지로 알제리, 아제르바이잔에 나가고 있는데 사람들은 그 사업을, 말하자면 모두 정부지원만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들이 기채를 합니다. 국내에서도 기채를 하고 국제시장에서도 기채를 합니다. 투자하고 투자한 수익으로 이제 갚아 나가는데?
정부가 당장 국민의 세금으로 대북협력자금을 조성, 1년만에 못한다고 할지라도 공기업이 일을 하게하고 공기업이 부담하는 이자와 실제 생기는 이자 사이에 발생하는 차액같은 것을 정부가 뒷받침하면서 그렇게해서 투자를 민간투자를 땡겨가지고 정부가 주도해서 집행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남측에서 주택,?임대주택 건설에 이 방법을 쓰고 있습니다. 민자를 동원해서 집을 지어서, 임대를 놓고 그 임대료를 갚는데 그것이 금리장사보다는 못하니까 그 차액을 정부가 보전해주는 방식으로 이렇게 해서 앞으로 10년간 들어갈 돈을 초기에 땡겨가지고 쓰고 10년 15년짜리도 있고 20년 짜리도 있습니다.
땡겨서 먼저 선투자하고 정부가 감당해나가는 이러한 방식으로도 하기 때문에, 그런 해외로 나가는 이 여력을 남북간의 경제에 투자를 하게됐을 때 북측만 이익을 보는 것이 아니고 남북경제가 한꺼번에 성장하게 되고 이렇게해서 동북아시아에 말하자면 우리가 선진 강국을 남북이 함께 만들 수 있는 거 아닙니까.
남북이 열리면, 철도 그전에 말씀하셨습니다만, 대중국 물류사업을 할 수 있고, 러시아, 광궤라든가 있지만, 우선 나진, 선봉, 핫산 그쪽에서 항만건설하고 해서 물류 시작해서 이것을 경원선으로? 또는 동해선은 실제로 물량이 없습니다. 그쪽에서는 물량이 발생하지 않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러시아로 가는 이 철도를 하게 되었을 때 사업성이 있다고 봅니다.
동북아시아 에너지 협력기구 같은 것을 북측이 결심만 해서 공동사업을 하자고만 하면, 우리는 사할린쪽에 있는 에너지 파이프라인으로? 파이프라인으로? 저기 이르쿠츠크? 중국으로 지난번에 우리가 파이프를 했는데, 이것을 중국으로 해서 서해바다로 해서 해저로 땡겨오는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북측을 통과하면 훨씬 빠른 시일안에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근데 인제 이게 되자면 또 북측경제가 함께 발전해 가야되는데, 농업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농업이 중요한데, 농업부분에 있어서는 기업적인 면보다는 민간에서 자발적, 한민족끼리 돕자는 자발적 기여와 정부가 주도해 나가는? 농업부문에 있어서는 그렇습니다. 보건·의료 부문도 기업적 수익 크게 기대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 또한 남북 당국간에 협력을 해야 되고, 당국간 부담이 주로 농업이나 보건·의료쪽에 가고? 그 다음에 인프라 구축이 있는네 철도,도로, 통신, 항만 이런 거 아니겠습니까? 이거 뭐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역시 이 부분은 우선 순위를 먼저 생각해서 지역을 집중적으로 먼저 발달시키고 점차 다른 곳으로 확산되어가는 속도에 맞춰서 그 인프라 구축을 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특구를 이야기하는 것이 북측을 개혁·개방으로 끌어내기 위한 하나의 ?(청취불가)으로서 그렇게 말씀드리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합자법과 합영법에 근거한 경제협력이 너무 어렵고 성공이 되질 않아서, 그래서 성공이 안되는데 반해 특구에서도 빠른 속도로 투자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개성공단에서 아무것도 안 나오고 있지만, 조금 가면 지금 인제 1단계 1차분 사업에서는 여러 종류의 기업이 참여하고 상당히 높은 수준의 기술인력을 가지고 있는 기업이 들어오면 어떤 기업이든 협력 업체가 생기고 납품 하청 이런 거래들이 생기고 여기서 지금 이미 개성공단의 26개 시범 사업 중에서도 공장장을 북측 사람이 맡아야 할 경우가 있습니다.
기술력이 확보되면 곧 이사람들이 여기서 월급받고 있는 것보다는 나가서 개성시내에 가서 공단밖에서 공단안에서도 할 수도 있고 시내가서도 할 수 있고 곧 스스로의 기업들을 창업하게 되는 과정이 생기리라 생각합니다. 또는 같은 기업을 창업할 수도 있고 또 거기에 납품하고 부속거래를 하는 이런 거래를 하는 기업들도 확신될 겁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기술이전, 전수라는 것이죠. 연구소의 기술수준은 북측의 기술수준이 높다고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상업적 시장에서 상품을 만들어내는 것은 연구소 수준을 생산현장에 적응시키는 기술은 저희가 높습니다. 어쩔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근데 지금 개성공단의 일부 기업들은 이미 중국에서도 높은 수요를 내고 있습니다. 노동자들의 생산력이 보다 높단 말이죠. 불량률도 훨씬 낮구요. 아주 큰 가능성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개성공단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는게 아니라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것이죠. 그 씨앗들이 뿌려지고 있잖습니까?
단지 그 오늘 내 점심 먹으면서 남측 수행원들 보고 우리가 말을 조심하자, 우리식으로 이런 말을 한 것이 사실 불신을 야기하고 오히려 우리에게 방해가 된다, 개혁 개방을 유도하기 위해 온 것이 결코 아닙니다. 경제의 성과를 생각하는 것이죠.
중국과의 관계에 있어서 우리가 중국 사람들을 만나면 당국에 신고해야 하는 상대였습니다. 지금 남측의 어떤 사람도 중국의 체제에 대해서 일언반구 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베트남 체제에 대해서 그 체제가 좋다 나쁘다 일체 말하는 사람이 없고 가서 남측 체제를 가지고 말하는 사람이 없구요.
이번에 중국에서 중국어 시험을 봤는데 미국의 마치 토플 토익시험 같은 시험을 봤는데, 16만명이 시험봤는데 11만명이 우리 남측 사람? 체제에 대해서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우린 북측 체제를 존중하는 것이 약속일뿐만 아니라, 도리일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이익이 된다.
독일식의 급작스런 통일은 독일이 엄청난 비용을 부담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능력도 없고 독일은 유럽을 주도하고 있는 국가이지만 우리는 그렇지도 않고?
때문에 거기에 따른 비용과 혼란을 감당할 수 없고 그럴리도, 있을 리도 없겠지만 어느 것이 이익이냐고 가정했을때 우리는 북측이 굳건하게 체제를 유지하고 안정을 유지한 토대 위에서 경제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우리에게 이익이라고 다들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점에 있어서 적극적으로 생각하자는 말씀드리고 싶고 오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조선공업 같은 것은 우리 남측을 위해 돌파구를 열어 주셔야 됩니다. 난 솔직히 그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북측의 입장은 제가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남측의 이익만을 얘기를 하더라도 북측이 해로울 것이 없잖습니까. 지금 이제 우리가 자주문제와 눈치를 보는 문제? 이런 문제도 조금만 참아주시고요.
NLL 문제가 남북문제에 있어서 나는 제일 큰 문제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난 번에 장관급 회담을 여느냐 안 여느냐 했을 때, 장성급회담을 열어서 서해평화문제 얘기 진전이 안 되면 우리는 장관급 회담도 안할란다 이렇게 한 적도 있습니다. 서해에서 1차적으로 상호 교신하고 상호 알려주고 했는데, 이행은 좀 잘 안 되고 있지만, 문제는 인제 북측에서 NLL이란 본질적인 문제를 장성급회담에 들고 나온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의제로 다뤄라 지시를 했는데? 반대를 합니다. 우선 회담에 나갈 장소부터 만들어야죠. 단호하게 다뤄라 했는데 그 뒤에 그러한 기회가 무시되고 말았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 나는 위원장하고 인식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NLL은 바꿔야 합니다.
그러나 이게 현실적으로 자세한 내용도 모르는 사람들이 민감하게, 시끄럽긴 되게 시끄러워요. 그래서 우리가 제안하고 싶은 것이 안보군사 지도 위에다가 평화 경제지도를 크게 위에다 덮어서 그려보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해평화협력지대라는 큰 그림을 하나 그려놓고, 어로협력 공동으로 하고 한강하구 공동개발하고, 또 자유로운 동산? 특히 인제 대충 지역이 개발이 되면 해주를 비켜서라도 개성공단 연장선상에 계획이 서고? 되면 그 길을 위한 통로, 통로를 좁게 만들게 아니라 전체를 평화체제로 만들어 쌍방의 경찰들만이 관리하자는 겁니다.
그러면 그쪽이 서쪽은 공동어로구역을 만든다, 오른쪽에는 비무장지대에 있어서의 문제와? 많은 제안을 해왔습니다만, 평화생태공원이라든가 이런 것들을 통해서 중무기 있는 부문들이라도 우선 철수하고 점차적으로 GP도 철수하고, 그렇게 해서 자연자원도 보호하면서 남북이 협력하는 것이 큰 수입이 생기는 것이 아니냐. 힘을 모아 협력하는 것이 상징적인 시대를 만드는? 그렇게 하는데? 참 해주는 원체 완강하게 말씀하셔서 어렵습니다만?
김정일: 해주문제는 내가 오늘 점심에 가서? 정몽헌 선생하고 정주영 선생이 부탁해서 정몽헌 선생하고 토론할 때 이야기드렸습니다. 해주는 그 내가 이런 입장을 그때도 취했으니까. 정몽헌 선생이 뭘 제기했냐 하면 해주는 해주시를 다 하자는 것이 아니고 해주항만 이용권 달라. 이용권 달라면 자기가 항을 유지하면서 개성을 염두에 두고 연결시키는 안 하면 개성 아마 철길도 문제가 안 설테도 육로도로도 없을 때고 하니까 그 중앙분계선, 판문점 이외에는 일체 거래가 안되니까 그때 당시 요구가 1999년도(김양건, 연도 상기에 도움)에 제기해서 항만 갖고 어떻게 하려고 하냐 하니깐 항만 경영권 가지면 자기가 거기서 배로 들이대서 개성하고 군사분계선 아닌 새 통로를, 경제통로를 만들어서 개성에다 땅 만들면 자기가 하겠다.
대통령 : 지금도 해운통로는 필요합니다. 개성공단만 해두요. 지금도 해운통로는 필요한데..
김정일 : 그래서 오후에 가서 점심식사하고 군 장성들 좀 오라. 와서 해주 그때 99년도 그때 그 결심을 되살릴 때면 어떤 문제가 있겠냐 하니까, 답이 문제 없겠습니다.
그러면 노 대통령님하고 만나는데 항을 당장 개방하는 걸 내가 결심하라는가, 그건 문제 없겠습니다. 군에서 그렇게 나오고..해서 아직 내가 해주를 준다는 게 없고 그때 해주항을 해상으로서 물동량을 개성에다 지원하겠다 그렇게 합의를 보자고 하는데 정몽헌 선생이 2000년도 6월달에 와서는 그럴바엔 뭐.. 그분이 좀 막내가 됐는지 그 집안에서 떼를 많이 써요.
계속 앉아서 그렇게 선심쓸 바엔 그 좀 해주근방에 뭘 좀 줘야 되지, 그저 김만 쐬서 뭘 하겠는가. 약주 좀 들어가니까 그것도 떼를 쓰더구만요.
대통령 : 나도 막내입니다.
대통령/김정일 : (웃음)
김정일 : 그러면 해주. 그.. 개성을 확고히 하는 조건이면 해주항을 주겠다. 주는 것도 당시, 인제 와서.. 땅을 좀 내라 하니까 줄 수 있다. 해주 옆에 강령군이라고 있습니다. 강령군 땅을 앞으로 개성이 잘 되면 공업단지 해보라 그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대통령 : 예 그래서 그...
김정일 : 그래서 그거는. 그런데 조건이 하나있는 거는, 군부에서 내가 결심하겠다하니까 결심하시는 그 근저에는 담보가 하나 있어야 한다. 뭐야그러니까 이승만 대통령 시대 51년도에 북방한계선 있지 않습니까?
그때 원래 선 긋는 38선을 위주로 해가지구. 그거 역사적 그건데, 그걸다 양측이 포기하는,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하는 첫단계 기초단계로서는 서해를 남측에서 구상하는 또 우리가 동조하는 경우에는 제 일차적으로 서해 북방 군사분계선 경계선을 쌍방이 다 포기하는 법률적인 이런거 하면 해상에서는 군대는 다 철수하고 그담에 경찰이 하자고 하는 경찰 순시...
대통령 : 평화협력체제, 앞으로 평화협력지대에 대한 구체적인 협의를 해야 합니다.
김정일 : 그거 해야 합니다.
대통령 : 그것이 기존의 모든 경계선이라든지 질서를 우선하는 것으로 그렇게 한번 정리할 수 있지 않은가..
김정일 : 해주문제 같은 것은 그런 원칙에서 앞으로 협상하기로 했다, 앞으로 그런 문제는 군사를 포함해서, 평화지대를...
대통령 : 군사문제 이 모든 것들을 군사적 질서, 그렇죠. 평화...
김정일 : 그래서 내가 다시 한번 지도를 봤는데 그때 그 양반이 생각을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해주항에서 강령군 쪽으로 오게 되면 개성하고 연결되는 철교가 있습니다. 그 철길만 조금 손질하면 그저 개성에서부터도 해주로 기차로 오고, 해주항에서 기차로 개성으로 가고.
대통령 : 이것이 중요한 거이 평화문제와...
김정일 : 그 양반이 그걸 많이 생각했는데 그 때는 이런 법률적인 문제가 많이 구속받을 때니까, 그 때는 그저 자꾸 결심해 달라 결심하 달라 부탁을 했는데, 지금 서해문제가 복잡하게 제기되어 있는 이상에는 양측이 용단을 내려서 그 옛날 선들 다 포기한다.
평화지대를 선포, 선언한다 그러고 해주까지 포함되고 서해까지 포함된 육지는 제외하고, 육지는 내놓고, 이렇게 하게되면 이건 우리 구상이고 어디까지나, 이걸 해당 관계부처들에서 연구하고 협상하기로 한다.
대통령 : 서해 평화협력지대를 설치하기로 하고 그것을 가지고 평화 문제, 공동번영의 문제를 다 일거에 해결하기로 합의하고 거기 필요한 실무 협의 계속해 나가면 내가 임기 동안에 NLL문제는 다 치유가 됩니다.
김정일 : 그건...
대통령 : NLL보다 더 강력한 것입니다.
김정일 : 이걸로 결정된 게 아니라 구상이라서 가까운 시일내 협의하기로 한다. 그러면 남쪽 사람들은 좋아할 것 같습니까?
대통령 : 그건 뭐 그런 평화협력지대가 만들어 지면 그 부분은 다 좋아할 것입니다. 또 뭐 시끄러우면 우리가 설명해서 평화문제와 경제문제를 일거에 해결하는 포괄적 해결을 일괄 타결하는 포괄적 해결 방식인데 얼마나 이게 좋은 것입니까? 나는 뭐 자신감을 갖습니다. 헌법문제라고 자꾸 나오고 있는 헌법문제 절대 아닙니다.
얼마든지 내가 맞서 나갈 수 있습니다. 더 큰 비전이 있는데 큰 비전이 없으면 작은 시련을 못이겨 내지만 큰 비전을 가지고 하면 나갈 수 있습니다. 아주 내가 가장 핵심적으로 가장 큰 목표로 삼았던 문제를 위원장께서 지금 승인해 주신거죠
김정일 : 평화지대로 하는 건 반대 없습니다. 난 반대없고..
대통령 : 평화협력지대로...
김정일 : 협력지대로 평화협력지대로 하니까 서부지대인데 서부지대는 바다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그건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래 바다문제까지 포함해서 그카면 이제 실무적인 협상에 들어가서는 쌍방이 다 법을 포기한다, 과거에 정해져 있는 것, 그것은 그때가서 할 문제이고 그러나 이 구상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이렇게 발표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대통령 : 예 좋습니다. 실제로 한강하구에 골재 채취문제도 다 포함된 것입니다. 이 양측의 골재량이 전체적으로 약 28억불 정도가 되는데, 이 골재를 치우면 임진강 수위가 1? 낮아질 수 있기 때문에 수방효과로 굉장히 좋은 효과가 있고 또 뭐 운반선이 왔다 갔다 하고 이렇게 되면 이 일대가 그러면 나중에 인천서 개성공단으로, 남측에서는 해주얘기가 없을 때 인천서 개성공단으로 고속도로를 설치하는 것을 생각했는데 또 해주가 열리면 새롭게 구상해 봐야겠습니다.
남측에서 해주쪽도 가깝고 개성쪽도 가까운 이런 큰 길을 내서 인천 국제공항을 잘 활용하고 남쪽에 비즈니스 지대하고 북측의 생산지대 이것을 엮어 놓으면 세계적인 경쟁력이 있지 않겠습니까? 중국, 베트남이 뭐 매년 7~8%의 성장을 계속해나가는데 북측의 노동자들이 자세만 딱 바꾸고 하면 그 사람들 보다 훨씬 우수하죠. 훨씬 우수한데, 뭐 더 뒤처져서 머뭇거릴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게 그 신뢰를 가지고 가고, 인프라 문제인데요, 정부가 인프라 투자를 하는 데에는 보건 의료 이쪽이 중요하고 농업 중요하고요 궁극적으로는 경수로문제 뭐 그것은 우리가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협력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를 들면 해주가 되면은 전력문제 도로문제 항만문제 그 지역에 관한한 얘기가 되도록..
되면 주변지역으로, 또 우리가 인제 북측에 도로를 해결해야 되는데, 철도든 도로든. 그런데 산업도 없고 사람도 없고 왕래가 많이 않은데다가 투자한다고 하면 과연 국민들이 그 도로 투자해서 나중에 아무런 수익도 안 생기는데, 왜 투자하느냐 그런데 이제 예를 들면 조선특구가 만들어 졌다. 그러면 특구와 특구사이에 물류가 많이 생기는데 투자한 사람들이 거기에 남측기업들만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중국기업들도 들어올 수 있고, 또 어디 다른 기업들도 들어올 수 있고, 유럽의 기업들도 얼마든지 들어올 수 있는데 와서 물류가 막혀있는데 이거 해결해야 되지 않느냐.
우리도 지금 남측의 도로의 절반 정도가 유료도로입니다. 유료도로라는 것은 몇년뒤에 본전이 뽑히고 나면 국가로 기부채남하고 나면 무료도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경제가 성장하기까지는 유료도로를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런데 대해서는 남측정부가 거기서 수익의 차이을 보전하는 방식으로 이렇게 참여해가지고 전적으로 그것을 하기는 어렵지만 할 수 있고, 그래서 남측에서 학자들이 도로 닦는데 90조가 들어가느니 하는데 다 헛소리라고 나는 보는 것입니다.
남측은 도로 닦는데 비용이 90%, 서울같은 데는 95% 이상이 보상이 필요한데, 북측은 국유 토지이기 때문에 보상이 안 들어가니까 남측에 건설하는 도로의 10분의 1정도면 건설할 수 있거든요. 이런 문제도 우리가 이제 연구를 하고 해나가야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전력문제도 예를 들면 지금 우리가 단천에 광업개발을 하고 있습니다. 있는데 많은 전력이 필요합니다. 수력 개발을 위원장님께서 지시를 하셨습니다만, 수력 개발이 아무리 많이 해도 400만kWe를 넘어갈수 없는데 남측이 지금쓰고 있는게 6,000만kWe를 쓰고 있는데, 결국은 전력을 해야 합니다, 하는데. 그런 문제에 있어서도 우선은 답사를 해나가고 점차 점차 원전으로 바꾸어 나가는 이런 과정을 통해서 전력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단천에서 우리가 광물을 공동개발해 나가게 되면 경공업 원자재들을, 우리가 이미 일부됐습니다만은 차관인데 나중에...
김정일 : 예.. 그게 8,000만불 정도
경제인들이 아마 어제 내가 조선소 주는 경우에 동해쪽으로 주는 경우에 군사적으로 피해보지 않는 데가 어디냐고 물어보니까 우리 군대 국방위원회 동무들 의견은 그저 원산을 원래 꼽았는데 원산은 내가 그 반대하는 이유가 원산이 그 휴양지고 만이고, 원산만 만안에다가 과거 일제시대 그 건설했던게 있는데 배수니 차수니 있는데 그거 전후에 복구하자고 하니까 편하게 해먹자고 그자리에 했는데
그 오물이 만안으로 자꾸 들어가니까 그 다른데서 처리를 해야 하는데 그 뭐야 뒤에는 마식령이 병풍처럼 있으니까 그 도무지 그 정제, 정화할 수 없으니까 그 잘못하면 모두 다 몽땅 바다에다 밀어넣기 때문에 그것은 안된다.
송정호에 와서 자꾸 오염이 되고 그거 안된다. 그래서 앞으로 점차로 원산 시내에 있는 철도공장하고 조선소 다 처례해라. 앞으로 철폐할 계획에 있으니까 그러니까 어차피?
대통령 : 뭐 정해주신 대로 할 수 있을 겁니다.
김정일 : 통천에 금강산 개발이다 뭐 다 통천에 있으니까. 그 수송량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그 조선소 물동량들이 100% 해상으로 해야 된다는 소리인데 ?
대통령 : 바지선으로 끌고 갑니다. 바지선으로 다 끌고 갑니다.
김정일 : 동쪽은 거기가 우리가 승인할 수 있고 서해라 한다면 그 남포조선소, 그건 저 경제인들이 타산돼야 하겠으니까.
김만복 : 예 남포조선소도 필요한 것이 거기는 수리업을 그쪽에서 하는게 좋다고, 지금도 기히 좀 하고 있습니다.
대통령 : 지금 그 마산 앞바다 진해만이 이 청정지역인데요, 옥포 조선소 거제 옥포 조선소가 있는데 바다에 전혀 오염이 없습니다. 우선 조선은 오염이 안나오고, 인제 폐선 해체만 아니다면 신조선 한다면 오염이 없습니다.
김정일 : 정주영씨가 그거 폐선업하면서 원산 와보고 거기다 우선 1차적으로 해보자, 한두번 해보다가 수지 안맞ㅂ으니까 그 다음에 통천으로 하겠다. 그곳은 자기 고향이니까 거기에다 한번 차려보겠다 했는데 그러다 말았습니다.
김정일 : 정주영씨가 그거 폐선업하면서 원산 와보고 거기다 우선 1차적으로 해보자. 한 두번 해보다가 수지 않맞으니까 그 다음에 통천으로 하겠다 그곳은 자기 고향이니까 거기에댜 한번 차려보겠다 했느데 그러고 말았습니다.
대통령 : 지금은 남측의 조선업이 전체적으로 위기로 가고 있습니다. 중국이 세계 치고 올라온다고 보니까요. 우리의 LNG탱크선 이라든지 이런 고급기술을 갖고 왕신있기 때문에 금액 쪽으로는 중국에서 따라올지 모르겠지만은? 물량으ㅜ로서는 중국이 앞서 있지요. 우리가 이제 고급화해 가지고,? 북측과 협력을 해가진다고, 한 블록을 중국에서 만들어가지고.. 그런 것들이 얼마든지
김정일: 그건 경제인들에게 앞으로 총리급회담에서라든가 상급회담에서...동의합니다. 조선업에 대한..
대통령: 조선단지.. 뭐.. 이런 정도로만.. 표현, 말씀해 주시면..나머지 문제는 구체적으로 우리들이..
이재정: 중국에 투자하는 섟만 해도 한 17억불이 넘거든요.. 그래서 같이 우리가 전세계 조선업계 10대 회사 가운데 7개가.. 그겄때문에 북의 기술·인력도 양성하고 조선업공에 들어가는 인력이 건설, 용접 다 들어갑니다. 기술인력을 중심으로 16~8 양성할 수 있는 협력사업이 돼서 확실 우리에게 아주 굉장히 좋은 미래가 열린다고 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 조선업은 앞으로 기계공업이라든지.. 지금 우리 한국 조선업이 처해있는 또하나의 고민이 철강 부족. 철강 부족 때무에 중국 이 철강을 다 빨아가는 바람에..
내 생각에 그런 부분은 말씀드렸고,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북측에서 뭐.. 예를 들어 나진·선봉에 대해서도 할 일이 많아요...
김정일: 나진·선봉은.. 내가 모스크바에서 푸틴대통령하고 약속하기를 그 사람들이 그 나진 선봉항을 그 왜.. 과거 소련시기때부터, 소련 군대 현재 지금 러시아 군대, 그 다음에 러시아 정부, 원동정부를 비롯해서 그게 지금 울라지스토크(블라디보스톡)가 제일 유일한 자기네 물류 항구로써, 그게 지금 그쪽으로 달라 할라고 하는데, 그게 그사람들은 겨우내 항이 업니다. 나진 선봉은 얼지 않으니까.
소련측에서는 소련 군대들이 태평양 함대들이 먼먼 바다에 나가 일하다가도 들어올 때는 울라지스토크 가기 전에 나진 선봉에서 다 배를 정비하고 그 다음에 자기 기지.. 울라지스토크 글어가고 그러는데 그 사람들이 그 후예들이니까 그 후예들도 역시 미련을 가지고 아직 나진·선봉지구하고 울라지스토크와 자매항으로 해달라..
내가 모스크바 갔을 때도.. 그 사람들이 하자.. 당연히 하라.. 원유 가공시설 공장에 유일하게 나진·선봉지역에 있으니까. 지금 그 사람들이 노력헤서 가 시작되고 그 사람들이 철길 높이 쌓아가지고 원동과 나산까지 자기 특수.. 랩을 달아가지고 원유가공설비, 원유가공때문에 그 기차를 이용하고.. 앞으로 그 사람들 설계가, 부산서부터 서부철도 있지 않습니까? 서부 철도로 해서 동해선으로 넘어가는 것도 그사람이 구상하기 때문에 나선은 거의 다 러시아 사람들이 가지겠다. 나선문제도 지금 복잡합니다. 중국, 몽고 해상을 끼고 나갈라니까.. 흑룡강성 같은 거는 바다 끼고 나갈라니까.
김양건: 길림성도 같습니다.
김정일 : 지금 그건데, 러시아 사람들이 다..
대통령: 그게 동해 경제권이라고, 환동해 경제권이라는.. 우리 한반도가 환황해 경제권, 환동해 경제권이라고 그림을 그려놓고 생각해보면..나진, 원산, 부산,. 다 아주 중요한 거점이 되거든요.. 일본 사람들이 물류회사를 일본 자국내에 만들어놓지 안혹 부산으로 가지고 옵니다.
자기들이 공장에서 생산된 물건을 부산으로 갖다놓고 부산에서 다시 서쪽 영역으로 이렇게 중요한 물건들이 전부 거기 모여서 중국도 나가고 러시아도 가고 똑 그렇게 할 수 있는 훌륭한 전망이 있습니다. 그런 것은 앞으로 말씀하시는 대로 우리가 최대한?
김정일: 그건 앞으로 해 가면서.. 남측 기업도 필요하고 필요할 경우 검토돼서 열수도 있고.
대통령: 신의주 같은 곳도 상의해주시면? 어떤 방향으로 가시고자 하는지? 그쪽에도 내가? 설득을?
김정일: 신의주는? 지금 중국 사람들이 자꾸? 한동안 나? 몰랐는데? 누구지? 양빈이?
김양건: 예 양빈입니다.
김정일: 그 사람들 문제가 복잡해 가지고.
김양건:원래 하다가?
김정일: 자꾸 한동안 알고 보니까 중국 사람들 자체가 자기의 뜻과 어긋난다고 그러는데?
대통령: 중국의 이해도 반하지 않고 그러면서도 서로 좋은 방법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 것이 지금 한국 저기 인천국제공항이 운영 시스템에 효율성 가지고 세계 1위를 2년 했고 올해도 아마 1위를 할 것입니다. 부동의 1위를 할 것인데 그건 뭐냐 하면 같은 시간에 손님과 물건을 가장 빠르게 가장 편하게 하는 운영하는 노하우거든요? 그걸 맡아 있는 사람도 안목이 좋고 외국 기업에도 많이 근무하면서 안목이 좋고 해서 그런 사람이 와서 아이디어를 내 보라고 하면?우리 정부에서 우리가 해온 우리 정부에서 소위 한반도 물류 사업에 대해서 전부 구상을 짜 가지고 내놓으라고 해서 전국 그래서 중국의 예를 들면 저희가 원전 진출이라든지.. 또 고속철도 진출이라는 것이라든지 쩡칭홍 부총리와 저와 협의를 해 가지고 전부 들어가도록 서로간에 의견을 모았습니다, 중국 입장에서는 원전기술을 가지고 오는데 미국한테 의존하는 것도 문제가 있고, 캐나다, 프랑스, 한국이 네 번째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 전적으로 찬성해 가지고 이미 작년에 발주한 것, 금년에 발주한 거에 주기기를 우리가 공급하는 것으로 결정했습니다. 요번에 제가 3주전에 갔다왔는데 저쪽 얘기가 주기기 공급에 대해서 더 나가가지고 원전 운영까지 와서 해 줘야겠다. 우리한테 뭘 배우려고 그러느냐 하면은 빠른 시간 내에 전체에 설계기술 건설 기술 운영 기술을, 우리가 국산화를 했거든요. 그것을 배우겠다. 고속 철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빠른 시간 내에 한 거에 대해서 우리 것을 배우겠다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현재 협력이 굉장히 잘 됩니다. 그렇게 레벨을 올려주시면은.. 걸려 있는 거 다 해결해 나가면서 얼마든지 잘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정일 : 좋습니다. 반대 없습니다. 앞으로 좌우간 이런문제, 집행문제 가지고 아마 총리급을 아마.. 상급회담을 너어서서 총리급을.. 시기적으로 어떻게 작전할 것인가 지니하게 전문가들끼리 토의해 나가고.. 노 대통령께서 제기한 대로 조선소를 건설하겠다. 투자하겠다.. 해주 공단으로 보나, 뭐라 그러겠습니까.
대통령 : 특구로 보십시다. 그래서 전체를 서해 평화협력지대로 선포를 하고, 그 안에 한강하고 개발. 해주공단.. 공단이라고 해도 좋고 특구라도 해도 좋고.. 다 좋습니다. 그 안에 공동어로구역 만들고, 북쪽에 생태평화공원까지 되면..
김정일 : 그건 아니.. 정전협정 문제가 우선.. 그게 풀어진 조건에서.. 평화협정을.. 중간에 시범적으로 하고.. 그렇게 되야지 지금은 아마.. 아직 그 전단계로서 하면 좋지 않겠는가. 그래서 두 부장이 문서화 하십시오..
김만복 : 예, 알겠습니다.
김정일 : 남측의 반응은 어떻게 예상됩니까?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지요?
대통령 : 없습니다. 서해 평화협력지대를 만든다는 데에서 아무도 없습니다. 반대를 하면 하루아침에 인터넷에서 반대하는 사람은 바보되는 겁니다. 실제로.. 뭐가 달라졌나 하면은 이전하고 달라진 것이 이제는 기업하는 사람들이 북측에 대해서.. 반대에 앞장서 왔습니다. 이제는 기업하는 사람들이 북측과 같이 손잡고 가야 이 위기를 극복해 나갈 수 있다. 일본·중국.. 또 한가지가 있습니다. 이건 뭐.. 혹시 오해될까 싶어 조심스러운데요.. 어쨌든 북측이 경제발전해 봐야 하니까. 인민의 생활도 중요하고, 경제교류나 협력사업이 중국쪽과 많이 일어나고 있거든요.. 남측과는 불신 때문에 막혀있고.. 자꾸 일어나다 보면은 전 인민의 생활과 산업이나 경제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중국 경제권이 되어 버릴 가능성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김정일 : 걱정도 하거니와 실질적으로 많은 사람들속에 이야기 되는 것은 중국에 사는 조선상을 통해서도 많이 얘기되고 있는데 그 사람들의 경제전략이 영토나..제도나... 경제분야에서는 동북3성이 아니라 북을 염두에 두고 동북 4성으로 생각합니다. 경제면에서는 우리 인민들이 좋아합니다.
대통령 : 한민족 정체성에 심각한 위협이 되기 때문에 남측에서 가장 걱정하는 문젭니다.
김정일 : 경제적 측면에서 동북 4성이다. 중국사람들은 좋은 의미 말하면서 교통문제를 풀자면서 얘기되는데, 단동~평양, 자기네 식. 자기네 규격과 같은 고속도로를 1년 반 2년내 자기들이 만들고, 압록강 다리를 철교와 동시에 고속도로 다리를 놓겠다. 우리나라에게 부담이 안되게 자기네들이 하겠다. 좋은 의견입니다. 우리를 도와주고 하자는데 좋고...그러나 동북에 있는 조선사람들은 중국사람들에게 4성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우리 정치인들보다도 인민들이 더 신경이 더 예민합니다. 그런 측면에서는..
대통령 : 동북 5성으로 만들어 가지고 남측까지 포함해서, 그렇게 부르라고 하고 실질적으로 우리가 주도해 나갈 수 있습니다. 동북 3성과 연해주 이젠 뭐 연해주쪽에 있어서 남북협력도 장차로 구상해 볼 수 있어...
김정일 : (웃음) 좋은 일을 하자고 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그럴싸하게 비치는 말들이 많고, 실제 이간시켜서 모든일이 잘 안되게끔 하자는 것도 있고 선의에 대해서 찬물 던지는 그런게 있습니다.
이재정 : 대통령께서 이제 서해안 경제협력·평화지대 이런 말씀을 쭉 해주셔서 좋은 제안으로 위원장께서도 받아주셨는데, 우리가 개성공단 해보니까요. 어려운 점이 딱 하나입니다. 중국의 심천지구가 특구로 성장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통행의 자유... 근데 여기 개성공단에는 실지로 통행의 자유가 없습니다. 거기 기업하는 사람들도 저녁 5시면 CIQ로 나와야 하고 들어가려면 3일전에 신청해야 되고, 그래서 제일 필요한 문제가 통행과 통신.. 이 두가지 문제가 해결되어야 개성공단이 경쟁력을 가지고 빨리 성장해 나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돼야... 여러가지에 대한 기업인들의 기대가 있으리라 생각이 돼서.. 위원장께서 이 두 가지 문제는 꼭 해결해 주시면..
대통령 : 말씀을 한번 드릴려고 했는데요. 총리급 회담을 말씀하셨기 때문에 내가 그거..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김정일 : 개성공단 할 바에는 똑똑히 해주어야... 국방위원회 원래 생각도 그렇고... 민족경제협력위원회 거기서도 역시 통신이라든가 모든 게 개성지구가.. 단말이 돼야 합니다. 이게 북반부와 연결이 안돼야.. 단말이 되는 것이 기술적으로 담보되면 개성지구 통행, 통신 개방시키고 활성화시켜 나가겠다. 저번에 시멘트도 부려 봤지요. 우리가 부려봤습니다. 거기까지 기차가 마음대로 왔다갔다 합니다. 실무적으로 토론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재정 : 개성 근로자들 통근을 위해서라면 개성역까지는 아마 이걸 해야 통근에 도움이 될겁니다. 사람이 많으니까요. 지금 버스로 실어 나르는데요. 이 버스가..
김양건 : 여기 열차다니는건 또 별개 문제입니다. 화물이니까요. 화물은 봉동역...
김정일 : 여기에는 별도로 또 만들라 하지..
대통령 : 항상 남쪽에서도 군부가 뭘 자꾸 안할라구 합니다. 이번에 군부가 개편이 되서 사고방식이 달라지고, 평화협력에 대해 전향적인 태도를 갖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군부라는 것은 항상... 북측에서도 우리가 얘기 듣기로는 마찬가지 아닙니까?
김정일 : 완고한 2급 보수라 할까요?(웃음)
대통령 : 사업에 적극 참여하셔서 군부가 이 사업에 적극 참여해서 그래서 군비를 강화하는 필요있는 곳을 강화해나가는 방안을 모색해가는 방법이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제일 중요한 것은 군사적 보장... 합의가 되면 군사적 보장이 따라와 주어야 하는데..
김정일 : 그건 얘기를 하면 길어질까봐 다음 기회에 얘기를 할 수도 있고 기본, 서두에서도 얘기했지만, 미국과의 문제가 우선 기초적으로 안정이 되면 국내적으로 쌍방이 대치하고 있는 분계선은 앞으로 점차 전환되지 않겠는가. 전환되는 걸 전제로 하고 있으니까 군부가 아마 그래서 법석을 떠는 게 아닐까. 모든게 정황이 주변 정세가 안정이 되고 이렇게 되면 당연히 군부가 있을 자리가 없죠.
이재정 : 위원장님 제가 통일부 장관이라.. 관심가지고 있는 부분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그 가운데 위원장님께서 늘 생각하시는 이산가족 문제입니다. 금강산 면회소가 거의 완공.. 금년 12월에 사무국에 지원을 받고 내년부터 상시 면회가 될 수 있도록 위원장님께서 해 주시고..
김정일 : 그야 모..
김양건 : 그것은 지금하고 있습니다. 정상적으로...
김정일 : 지금 텔레비로 모 한다구만..
김양건 : 화상상봉도 하고 편지...
이재정 : 화상상봉 해보니까요. 이게 속만 타고.. 손도 못잡아보니까요. 사실은 더 안타깝더라고요.
김양건 : 그런거 있습니다. 다 연로하기 때문에. 저 멀리 지방에 있는 늙은이들 한번 여기 데려오고..
대통령 : 화상상봉은 병행하고 면회소 상봉은 상시적으로 해주십시오. 욕심을 좀 더 부리면 생사확인이 중요합니다.
김양건 : 흩어진 가족들 확인하는 과정에 생사확인을 많이들 하고 있습니다. 한번 하고자 하면 수백명씩 확인하고 있습니다.
이재정 : 우리쪽에 기다리는 이산가족이 9만3천명입니다. 이분들이 일년에 3천-4천명이 연로해서 가시니 이 사업을 빨리 성과있게 해서.. 서둘러 주십시오.
김정일 : 실무적으로 생사확인이라는 것은..
김양건 : 명단을 보내오면 전국을 다 조사해서 확인 합니다. 쉽지는 않습니다.
김만복 : 통일부 장관은 자기 소관을 이야기하는데, 저는 소관은 아닙니다만 두 가지만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자연재해 공동방지를 위한 농업협력과 보건의료 협력도 다루어 주시기 바랍니다.
대통령 : 일반적으로 농업협력을 해야하고, 자연재해 공동방지 부분에서도...
김만복 : 지금 농림부장관이 와 있습니다.
김양건 : 그거 어차피 농업·보건은 내각에서 하는 일이니까 부총리급에서 이제 새로운 협상기구를 내놓으면 거기서 포괄적으로 하는 게 합리적인 걸로 봅니다.
대통령 : 한줄에다 이거 하나로 묶어서...
김정일 : 묶어서 한줄로...
이재정 : 대표단에 보건·농림부장관도 같이 이 문제를 위원장께서 깊은 관심을 가지셔서 총리·부총리급 회담에서 아주 성과있게 일을 진행할 수...
백종천 : 이산가족들 간단한 편지 왕래는 할 수 있도록 요청드립니다.
김정일 : 우리 이번에 총리급 회담이라는게 원래 제기된 게 없지?
김양건 : 예 없습니다.
김정일 : 한두번 총리급 회담 하는 척 하다가 흐지부지 해지는 게 북남 관계의 표준이 아닌가. 제 세계에 맞는 새로운 환경 속에서 새로운 제도와 질서를 만들어 내야지 과거에 하던 제도가 미국 사람들한테도 그랬습니다. 올브라이트한테.. 과거 50년 전쟁이 과거 조상들이 만들어낸 허물을 왜 현실의 인간들이 와서 변명하고 책임져야 하고 구실을 만들어야 하는가에 올브라이트도 공감했습니다...
북남관계도 그렇습니다. 과거 조상들 거를... 모든 게 시작과 맺음이 있어야 되는데... 계속 그렇게... 그게 내 그랬어. 봉건이 심한 조선에서만 이게 있을 수 있다.
유산은 그저 계속 끌고나가는데 지금. 나쁠 땐 나쁜 것 어떻게 그 청산하면 되겠는데... 그래서 내가 앞으로 이런 면에선 모든 망념에서 우리가 새롭게 갱신시킬 것은 갱신시키면서 내 도덕관에서도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과거 조상들이 그렇게 하는데 왜 우리라고 이렇게 하겠나? 이 시대는 이미 지났단 말입니다. 20세기는 20세기의 모든 일이 다 20세기에서 시작됐고 20세기에서 끝났고 20세기 중도에서 끝난 것도 있고... 새 세기 아닙니까? 새 세긴데... 세계 누구도 지금 20세기 것... 왜 19세기 것 소리를 하냔 말이야... 그 못된 일 한 것들만 자꾸 상기시켜 가지고 이렇게 하는가?
내가 저 미국사람들 보고도 이야기 했습니다. 올브라이트한테도. 그 사람들이 인정합니다. 왜 그 조상들... 지금의 정치인들이 50년 전쟁에 관여한 사람이 있나? 그 사람들이 다...
대통령: 위원장 뜻을 잘 알겠습니다.
김정일: 그리고 새로운 관리법, 관계법, 윤리법. 도덕법 만들어야죠. 확립하고, 새 세긴데... 기술 분야는 다 지금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 다 넘어왔는데 지금... 아날로그를 찾으려고 해도 아날로그로 갈 수가 없는데 지금은 디지털이 막아놔서... 공연히 안된단 말입니다. 아날로그하고...
그런데 이것 우리 역사들이 관해서는... 우리 지금 앞으로 셔먼호 사건부터 계산하거나 3.1운동사건부터 이런 것 계산하면 미국하고도 영원히 만날 수 없고... 3.1운동 보면 영원히 뭐 상대하고 상종 안 하게 돼 있고...
광주 사건도 그렇지 광주사건도 광주의 여인들이 민족적 그 수치와 모욕당한 것 가지고 광주사건 나지 않았어요? 그런데 지금 일본사람들하고 모두다 편안하죠? 그런데 이 무슨 문서 놀음하게 되면 서로... 깔아부술려고 하고...
대통령 : 참 일본 문제는 어떻게 하실랍니까?
김정일 : 일본은 아베 요 바로... 조 위치에 아베가 왔댔습니다. 고이즈미가 오고... 아베한테 당신네 조상들을 봐서... 조상들이 아주 그 자기 조국을 위해 헌신한 분이란 것을 알고 있는데 당신도 앞으로 우리들의 기대에 어긋남이 없이 앞으로... 그런데... 부장관이지?
김양건 : 예
김정일 : 관방부장관이 돼서 왔었드랬습니다. 후꾸다가 거기(관방장관) 있었고... 그런데 집권하자마자 그냥 우리한테 뭐 악착스럽게 돌변해 가지고 이렇게 됐는데...
대통령 : 만나보니까 두 분이 아주 다릅디다. 후꾸다 수상하고 아베 수상하고 완전히 다르고요. 아베 수상은 뭐 납치문제를 가지고 정권을 잡은 사람이고 초강경이구요. 후꾸다 수상은 아베수상 되기 전부터 만나서 얘기 해봤는데... 그 양반 상당히 유연합니다. 다른 사람하고... 한국 그... 한반도 관계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존중하고 잘해가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쪽도 민심의 부담을 또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긴 하지만 어떻든 좀 유연할 것입니다.
김정일 : 우리는 지켜보고 있습니다. 금방 직위에 올라섰는데 그저... 아베꺼하고는 선을 갈라보고 똑똑히 지켜보라... 다르게 보고... 우리 내부에서는 그저 관망하는 단계입니다.
대통령 : 지난번에 일본 대사가 이임하면서 찾아왔길래... 당신들 요구가 뭐냐 물었더니, 사람 돌려달라. 다 돌아갔쟎냐 했더니, 더 있다는 겁니다. 어떻게 증거가 있냐 이랬더니. 하여튼 못 믿겠다 이런 얘기만 하는 겁니다.
김정일 : 없습니다. 우리는 공식적으로 내가 없다고...
대통령 : 그렇기는 한데... 하여튼 미일관계는 풀어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납치문제가 있어 구체적으로 내가 무슨 말씀을 드릴 수 없고 나도 일본 측의 주장을 들어봤지만 잘 못 알아듣겠고요.
이상하다 그것만... 호주 사람이 쓴 아주 잘 분석된 책을 봐도 일본이 생트집 잡고 있다고 써놓은 책도 있고 한데... 내가 그런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 것은 아니고... 어쨌든 간에 그렇기는 하지만 이번 차제에 미일관계 다 풀어버리고 통상 세계에서 한번 적극적으로 진출해서.. 새로운 전기를 한번 마련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내 주치의가 국제회의 갔다 와서 학술회의 하는데 다 오는데 북측 사람만 안 오는 회의가 많고.. 그 외에도 관세청장 회의, 국정원 정보기관 회의 있는데..... 얘네들이 뭐하냐 하면 서로들 정보교환하고 노하우들 교환하는 것인데....
이 교류의 장에서 같이 교류하지 않으면 아무래도 고립이 되고 좋은 정보들을 다 활용을 못 하기 때문에...어쨌든 이번에는 어디에서 국제회의에서 남북의 지도자가 같이 나란히 앉아서 일본이 무슨 말할 때 말도 좀 같이 하고... 의논도 좀 하고 그러는 것이... 지도자급은 아니라도.... 지도자급은 아직 그런 단계는 아니라도 실무급이 나가서 교류하고
세계 통상질서에 적극적으로 끼어들어야 이제 말하자면 21세기 한반도가 선진국대열에 들어갈 수 있지 않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남측사람들이 왜 특구 특구 하냐..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특구가 되면 인프라를 집중적으로 깔아서 편리하고, 두 번째로 사람들이 마음대로 다녀갈 수 있는... 그외의 지역은 인프라가 불편하고 사람들이 마음대로 가고 오고 할 수 없고... 만나서 상시적으로 토론하고 이런 것이 안되니까.... 이러니 기업하는 사람들이 안 하려는 것이죠.
그래서 특구 말씀 드리고 위원장께서 폭넓게 수용해주시고 그랬습니다만, 앞으로는 전체적으로 이 부분을 좀... 사람들이 통행왕래는 확 열고... 특히 기업하는 사람들은 연수 이게 중요합니다. 계속 작업하고 연수하고 또 외부 프로들을 데려와서... 기술자들을 데리고 와서.... 교육하고... 계속 연수하거든요. 학업 연수 이걸 계속하는데... 그런데 그게 자유롭지 않으니까... 지금 잘하고 있는 곳이 엘칸토가 잘하고 있고... 나머지는 그 점에 애로를 느끼고... 그 부분에 대해.... 국제사회하고의 관계는 이번에 완전히.... 6자회담 이제 털어버립시다..
김정일 : 예. 이번에 뭐 선언문이라고 보도하나?
김양건 : 원래는 선언문을 좀 토론했는데.... 합의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저 공동보도문으로 각기 표기하고 보도하는 것이 좋지 않겠나.. 하고 생각합니다.
대통령 : 선언으로 해주십시오.
김만복 : 7천만 국민들이 다 기다리고 있고 두 분 정상분을 쳐다보고 계십니다.
김정일 : 6.15 선언과 대등한 선언이라는 뜻인지요?
대통령 : 그렇지 않습니다. 후속 선언이죠.
이재정 : 6.15 선언에 기초해서 발전되는...
대통령 : 선언 많이 합니다. 중소 간에도 선언했고 한중간에도 선언하고
이재정 : 두 분 정상께서 처음 만나셔 가지고 이렇게 많은 합의를 하셨는데 그것을 선언으로... 하셔서 6.15 선언의...
대통령 : 한걸음 앞서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실무적인 회담은 아니니까요.
김정일 : 선언하는데... 그저 오늘 합의된 것... 그것 다 조항에 다 넣으시오.
김만복 : 예 그러겠습니다. 김(양건)부장하고 협의해서 넣겠습니다.
김양건 : 이번에 저희들이 선언을 기본 큰 선에서 선언문 제기했더랬는데...
김정일 : 조금 실무적인 문제들이 들어가겠구만.
김양건 : 이제 제기된 문제들... 합의한 문제들을...
김정일 : 합의한 문제를 무게있는 문장을 잘 만들어서 희망을 주고...
대통령 : 안되면 또 부속서를 만들어 가십시다.
김정일 : 희망도 주고 신심도 주고... 그렇게 하려면... 이 방북길이...
대통령 : 어떻습니까? 위원장께서 나를 좀 더 보시겠다고 하면 뮈 하루도 좋고 이틀로 좋구요. 아니면 위원장께서 저희쪽에 하실 말씀이 계시면...
김정일 : 내일 내가 국방위원회 일정이... 내민 과업들 때문에 내일은 시간이 얼마 없는데... 대통령께서 오셨기 때문에... 대통령 내외분이 평양방문을 마감 장식을 잘하기 위해서는 내가 그저 한번 대통령 하고 같이 식사를 같이 해야겠다. 그래서 일명 오찬에... 그랬는데 우리 서기진들에게서 “아니 그 오찬이라고 하면 이야기가 많이 오고 가고 하겠는데 어떻게 1시간만에...” 아니 오후에 당장 떠나는데 뭐 한시간반도 좋으니까. 건배만 할 수 있는 시간만... 건배 한 5분이면 된다. 그러고 말았는데... 오늘 비는 멎었나?
김양건 : 저녁 6시부터 9시까지 5㎜정도 비가 계속 온다고 했는데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집단체조 공연이 힘듭니다.
김정일 : 날씨 어드래?
전희정 : 지금 비가 계속 내립니다.(전희정이 중간에 들어와 답변후 퇴장)
김정일 : 지금 오오? 밤에 온다는 것이 아니고?
전희정 : 지금 계속 내립니다. 내일 오후에 비가 그치겠다고 합니다.
김정일 : 대통령 일정을 침범하지는 말자 말이오. 일국의.. 그 기다리는 분들도 많을테고... 그러니까 일정대로 그냥 하는데, 오늘 비오면 집단체조 그만두고... 100% 하고 왔다는 것보다 오늘 선언만... 합의해서 선언만 좋은 것 내면 되지 뭐. 봤다고 하는 것 까지도... 어디까지나 계획이야...
대통령 : 위원장께 청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내가 이제 뭐 임기전에 또 올 일이 있으면 와야 겠습니다만. 이제 다음 대통령 곧 뽑힐 것이니까 제대로 못할 것 같고... 임기 마치고 난 다음에 위원장께 꼭 와서 뵙자는 소리는 못하겠습니다만, 평양 좀 자주 들락날락 할 수 있게 좀...
김정일 : 대통령께서 오시겠다고 하면 우리야 언제든지 문열고 놓고 있고... 언제든지 침구는 항상 준비해놓고 있겠습니다.
대통령 : 특별한 대접은 안받아도...
김정일 : 대통령께서 시간되시면 앞으로 금강산에도 아무때나 오시고... 그리고 평양에도 아무때나 오시고...
대통령 : 백두산도 안쪽으로 해서... 중국으로 돌아오는데...
김정일 : 현정은 여사 요번에 오셨나?
김양건 : 예 왔습니다
김정일 : 현정은 여사하고 요전에 약속한 것 정세때문에 길이 끊겼는데... 백두산 관광 자꾸 해달라고... 금강산처럼 해달라 해서... 정몽헌 선생이 있을 때 정몽헌 선생보고 당신이 한번 가보라. 그래서 그분이 가보고, 야 조선땅에도 이런 무공해 지대가... 이것 최곤데... 이것 자기 달라 그래서...
대통령 : 관광사업이든 무슨 사업이든 정부하고 합의를 해 주십시오. 그러면...
김정일 : 그런데 여사께서 자꾸 뭐 남편께서 받은 것을 하겠다고... 그렇게...
대통령 : 그렇게 해도 상관은 없습니다.
김정일 : 그렇게 하는데도 정부가 개입해야죠.
대통령 : 그런데, 관광공사가 들면 좀 훨씬 잘할 수 있습니다.
이재정 : 협력해서 하면...
대통령 : 어쨌든 어떤 쪽에서든 선택하시는 대로 협력하겠습니다만, 정부 단위로 하면 자꾸만 말이죠. 흔들기를...
김정일 : 내가 말하는 것은 중국이 지금 본격적으로 최근에 백두산에 남쪽 관광객을 끌어 들이고...
김양건 : 거기로 많이 옵니다.
대통령 : 해마다 10만명씩 가는데... 우선 나부터 좀...
김정일 : 그래서 비행장 문제가 섰죠. 비행장만 되면 남측 사람들이 뭐하러 평양에서 왔다 다시 또 평양에서 비행기 타고 갈 필요가 있는가? 서울에서 직항으로 백두산으로 가면 되지 않나? 그렇게 해야지 많은 돈을 왜 중국에다 갖다 뿌리야겠나? 비행기 타는 바람에...
이재정 : 위원장님 아주 정확한 지적이십니다.
김정일 : 서울서 오면 거기와서 그저 숙식비만 내면 되는데... 비싸게 중국갔다... 아마 서울항공이 중국에서 가 내리지 않고 백두산에는 못가죠?
이재정 : 못갑니다.
김정일 : 그것이 아마 중국사람들이 자기 이해관계 때문에 그렇게 안 줄겁니다.
이재정 : 사실 매년 10만명이 엄청난 돈을 중국에다 뿌리고... 쓸데없이 자고... 그러고 하거든요. 인천에서 백두산까지 직항로로 해서 딱 가서 관광하고 돌아오게 하면 정말 얼마나 좋겠습니까?
김정일 : 글쎄 그렇게 하자구요. 현정은 여사보고 정부당국하고도 토론해서 나중에 직항하라.
이재정 : 그렇게 확실하게 좀 해주시죠.
김정일 : 백두산 관광도 합의서에 넣으십시오.
김만복 : 예. 넣겠습니다.
김정일 : 그럼 중국사람들이 좋아하지는 안하겠는데… (웃음) 자기들 거기다 기지 다 빼고 했는데….
김양건 : 지금 장백현에다 비행장 건설하고 있습니다.
김정일 : 삼지연 비행장이 작년도 그래가지고. 그게 아마 비행장 건설 때문에 남측에서 피치랑 많이 받았죠?
이재정 : 저희가 지원했습니다.
김정일 : 항공사정이 굉장히 좋아졌어요.
이재정 : 저희 생각으로는 앞으로 협력을 해가지고 백두산에 좋은 호텔도 좀 짓고요. 그래서 좀 더 활발하게 정말 좋은 지역에 우리 민족은 백두산을 영산으로 생각하지 않습니까?
김정일 : 제주도는 백두산보다 앞질러서 다 잘해놨다고…. 국제적으로 관광지를 만들어놨는데… 백두산은 그렇게 안해놨습니다.
이재정 : 그런 점에서 앞으로 좀…. 뒤에 만들면 더 잘 만들 수 있으니까요.
김정일 : 그래서 백두산 관광도 허용했다는 것을 한 줄 어떻게….
김만복 : 예.
김정일 : 그러면 노 대통령님께서 이번에 와서 그저….
김만복 : 한 보따리(웃음)
대통령 : 국민들이 아주 좋아할 겁니다.
김정일 : 어떡하시겠습니까? 오늘 구애받지 마시고…. 전 내일 오찬에 초대하겠습니다.
대통령 : 나는 기다리는 사람도 많고 해서….
김만복 : 수표는 내일 점심때 하실 수 있도록 저희들이 준비를 좀…. 그 전에라도 가져가실 수 있게….
김정일 : 오찬 들어가기 전에 오찬 여기서 하자구. 불편하게 왔다갔다 하지 말고….
김양건 : 예 알겠습니다.
김정일 : 여기서 하는데…. 오찬 직전에 여기서 수표하고 들어가면 되는 거 아니요.
김만복 : 예, 그렇게 준비하겠습니다.
김정일 : 여기 우리 합의한 것에 대해 의문점은 우리는 뭐….
대통령 : 없습니다. 아주 좋습니다.
김정일 : 김대중 대통령께서는 6.15 선언, 큰 선언을 하나 만드시고 돌아가셨는데…. 이번 노대통령께서는 실무적으로 선언보다 선언도 중요하지만 보다 해야될 짐을 많이 지고 가는 것이 됐습니다.
대통령 : 내가 원하는 것은 시간을 늦추지 말자는 것이고? 또 다음 대통령이 누가 될지 모르니까… 뒷걸음 치지 않게… 쐐기를 좀 박아 놓자?
김정일 : 잘 됐다고 생각합니다. 하여튼 오늘 만남이 대단히 유익하고 좋은 결실을 맺었다고 나는 이렇게 대만족하고 있습니다.
대통령 : 다음 여행권까지 따 놨으니까…(모두 웃음)
김정일 : 여행권인데 하나 보충하겠습니다. 무료 여행권입니다.(모두 웃음) 미리 약속합시다. 감사합니다.
대통령 : 그리고 참…. 내가 말씀드리려고 한 것 중에 구체적으로 세세하게 말씀을 못 드렸습니다. 내가 받은 보고서인데 위원장께서 심심할 때 보시도록 드리고 가면 안 되겠습니까?
김양건 : 예 저한테 주십시오.
이재정 : 위원장님 어떻게 좀 적당히 좋을 때 한 번 이산가족 고향방문 하도록 허락해 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이산가족들이 참 아주 애달프게….
대통령 : 이제 다음에 합시다. 오늘은 보따리가 넘쳐서 안돼요.(모두 웃음)
김정일 : 오늘 아주 수고 많았습니다. 정열적으로 많이 이야기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임동원 선생 건강하지요?
김만복 : 예 건강합니다.
2008년 1월 3일 최초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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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터] 나의 탈북스토리 - 장진성
나의 탈북스토리 - 장진성
1.나는 한국에서 홀로 힘들 때마다 긴장과 공포로 숨 가빴던 탈북 순간들을 생각해보곤 한다. 국적을 버릴 자유까지 허용돼 있는 자유민주주의 사고로는 탈북이란 것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결단인지 가늠조차 힘들 것이다. 자기는 이미 목숨을 버렸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탈출할 수 없는 것이 북한 땅이다. 아니 붙잡힐 경우 자기 뿐 아니라 가족은 물론 친척들의 운명까지도 위협하는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이다.내가 친구와 함께 국경연선에 도착한 시기는 오줌 싸면 얼어서 떨어진다는 2004년 북방의 추운 1월이었다. 초기 계획은 산 속 수림에 숨어 있다가 국경 경비대원들이 지나가고 나면 두만강을 넘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작 현장에 도착하고 보니 산은 높은데 몸을 숨길 나무가 한 그루도 보이지 않았다.친구와 나는 평양 밖을 벗어나 본적 없기 때문에 수 천리 떨어진 국경지역에선 거의 눈 뜬 소경과 다름없었다. 그래서 맞춤한 탈북 장소와 기회를 노리며 두만강연선을 따라 온종일 걸은 길이 백리나 되었다. 밤 열시 경, 한치 앞도 헤아리지 못할 캄캄칠야는 우리를 대담하게 했다. 하여 마침내 강기슭으로 들어서는데 “손 들엇!”하며 풀숲에서 병사가 불쑥 일어서는 것이 아닌가.그때 반사적으로 내 팔을 꽉 잡는 친구의 손이 나를 더 전율케 했다. 때려눕힐까 하고 생각하는 찰나 그 병사가 이번엔 호각을 불었다. 그러자 의외로 아주 가까운 곳에서 여럿의 손전등들이 켜지며 우릴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변명의 여지조차 없이 우리는 총구들에 떠밀려 국경경비총국 6중대 병실에 들어섰는데 가장 눈에 보이는 것이 쇠살창으로 가려진 작은 감옥과 매달린 수갑들이었다.“어떻게 이 밤에 두만강으로 접근하신 겁니까? 신분증과 통행증을 봅시다.” 북한 특권층의 아들이었던 친구는 생전 처음 당해보는 총구 앞에서 누가 봐도 탈북 용의자로 확신할 만큼 온 몸을 심하게 떨고 있었다.“우선 이 친구가 너무 추워하니깐 몸 좀 녹이게 해주시오.”그러면서 나는 신분증을 꺼내려 안주머니 손을 넣었는데 쿵쿵 뛰는 심장이 만져졌다. 가죽 케이스에 당마크가 새겨진 나의 신분증을 받아 쥔 중대장은 놀란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국경 연선에서 오랜 중대장 경험을 가진 그 군관도 아마 당마크와 빨간 색깔의 조선노동당중앙위원회 도장이 박힌 신분증을 처음 보는 듯싶었다.북한의 최고위 신분증은 금박으로 당마크가 새겨진 당 신분증과 국장이 새겨진 내각 신분증이 있다. 그 중에서도 당마크는 북한의 절대권력 기관인 조선노동당 신분을 의미하기 때문에 무소불위의 총구도 공손해지기 마련이다. 더욱이 당 통전부는 대남공작이란 특수성이 부여되기 때문에 적화통일의 무기를 쥔 병사들에겐 신비감을 조성한다. 그렇다 할지라도…….“왜 국경에 접근했습니까?”중대장은 신분증의 무게와 달리 너무 어려보이는 내 나이를 의심하는지 아래위를 흩어보며 물어보았다.“무산 시당에 간부사업 가던 중 너무 밤이 깊었고 춥기도 해서 군인병실이라도 찾아서 하루 밤 자고 가려했을 뿐인데”“아닙니다, 강에 발을 짚었습니다!”우리를 단속했던 그 재수 없는 병사가 막 소리 질렀다. 나는 이럴 땐 무엇보다 배짱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이 멍청한 놈! 너 어디 감히 총을 들이대고 그래? 아까 널 한 대 쥐어박으려다 참았어!”중대장이 짧게 지시했다.“무산시당에 전화해봐, 통전부에서 간부사업 약속 있었는지”나는 온 몸이 무너져 내려앉는 것 같았다. 난로 앞에서 손을 비비고 있던 친구도 나를 쳐다보는 눈이 끝장이라고 말하는 듯싶었다. 그런데 세상에 이런 일이!“중대장동지, 정전이어서 무산시당에 전화가 연결 안 됩니다.”그 말을 듣는 순간 살수 있다는 희망이 내 발밑에서부터 머리까지 치달아 올랐다.“그럼 내일 확인하기로 하고 일단 좀 자게 해줘! 어 중대장? 우린 피곤해!” 그때 순찰교대를 했는지 한 개 분대가 쓸어 들어왔다. 누군가고 서로 물어보던 병사들 중 소위 계급을 단 군인이 유심히 들여다보던 신분증을 흔들며 소리쳤다.“어따, 여기 근무하면 혹시 오광일이라고 알아요?”오광일? 기억을 애써 더듬는데 갑자기 친구가 말했다.“김책시에 사는 오광일이? 아버지가 김책시당 책임비서 하는 그 애?”소대장의 얼굴에 금시 화색이 돌았다.“네 맞아요, 맞아요, 중대장동지 그 시당책임비서 아들이 내 친구예요”중대장은 의심과 신뢰가 교차하는 얼굴로 소대장과 내 친구를 번갈아보았다. 나는 하늘이 준 기회다 싶어 큰 목청으로 말했다.“그 오광일이가 정말 친구 맞어? 친구의 친구를 여기서 보다니, 그럼 우리 여기서 좀 재워줄 수 있어?”나는 중대장이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이 배낭에서 술과 담배를 꺼냈다. 그날 일부러 술을 세잔이나 마셨지만 취하지 않았고 소대장 이불을 쓰고 누웠지만 잠도 오지 않았다. 순찰근무 교대는 한 시간에 한 번씩 하였고 초소로 나갈 때마다 병사들은 실탄과 심지어는 수류탄으로 무장하곤 했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소대장이 쓴 우정의 편지를 받고 다시 길을 떠났다. 은밀한 어둠만을 믿었던 우리에게 병실에서 본 경계의 밤은 거의 절망적이었다. 친구가 불쑥 물었다.“우리 다시 평양으로 들어갈까?”우리는 두만강이 옆에서 흐르는 둔덕의 레일위에 맥없이 마주 앉았다.“우리가 직장에 출근하지 않은지 벌써 3일이 됐어. 이 시간이면 벌써 평양에선 비상이 걸렸을 거야. 알잖아, 당 규정을! 이젠 돌아설 수 없어”“방법은?” 친구는 마치도 포기하는 방법을 묻는 듯싶었다.“방법은 기상천외야, 군인들이 우릴 보는 밤이 아니라 우리가 역으로 그들을 볼 수 있는 대낮이야, 지금 뛰자!”우린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재빨리 본능적으로 나는 중국 땅을 살폈고 친구는 북한 땅을 흩었다.“군인들이 안보이니 셋까지 세고 뛰자”“하나, 둘, 셋!”우린 서로를 마주보며 비장하게 셋을 합창했지만 일어서는 데는 똑같이 실패했다.군인들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문제라는 인식 앞에서 친구와 나는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었다.그렇게 말없이 십 분이란 시간이 흐르자 국경의 고요로부터 서서히 충전되는 새로운 담력이 심장을 달구었다. 우린 마침내 말없이 손을 맞잡았다. 서로의 체온을 확인하는 순간 운명의 끝에 함께 섰음을 느끼게 되었다. 아니 이미 더 돌이킬 수 없는 행동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우린 동시에 힘 있게 솟구쳤다. 그리고 돌처럼 단단한 두만강 얼음위로 달리기 시작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소원의 순간이었고 실행의 순간인 것이다. 뛰어가는 발걸음마다 운명을 두드리는 듯 요란했다.그런데 뒤에서 누군가 소리치는 것이 아닌가?“저 놈들 봐라! 저 놈들 잡아라.”본능적으로 돌아보던 나는 아연했다. 우리가 뛰어 온 그 몇 미터 굽이돌이에 바로 병사들 한 무리가 총 들고 서있는 곳이 아닌가. 격발장치를 당기며 총구를 겨누는 것까지 보고 뛰자니 갑자기 뒤통수가 불로 지지는 것처럼 뜨거워졌다. 죽었구나! 아니 죽지 않으리라! 우리는 멀리 보이는 중국의 이름 모를 산만 노려보며 그곳을 향해 서로에게 의지한 채 뛰고 또 뛰었다.한 발을 짚을 때마다 뼈 없는 살처럼 주저앉았고 또 다른 발을 내 밀어도 마찬가지였다. 산이 가까워질수록 따라오는 주먹들도 가까워지는 것만 같아 차마 돌아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달리는 동안 이상하게도 나는 공포를 초월하는 분통함이 치솟았다. 이 몇 미터 강을 넘지 못해 이때껏 북한에서 짐승처럼 살았는가! 이 몇 미터가 그렇게 혹심한 인권의 차이였던가! 이 몇 미터를 달리는데 나는 왜 죽는다고 생각하는가!드디어 북한과 달리 수림으로 우거진 중국 산기슭에 엎어졌을 때는, 따라오는 북한병사가 없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 살았다고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쫓겨 온 남의 나라가 쫓아오는 자기 나라보다 더 은혜롭고 감사함에 억이 막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선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떠나온 북한 땅을 마지막으로 바라보던 친구는 돌을 쥐고 힘껏 던지기도 하였다.이어 친구는 나무가 울창한 산의 깊은 내면에서 안정감을 얻었는지 두 팔을 기껏 벌리고 눈 위에 덥석 드러눕기까지 했다.“우리 이 산에서 며칠 푹 쉬자. 난 이젠 이 산에서 얼어 죽어도 좋아”나도 그러고만 싶었다. 수령제일주의도, 집체주의도, 국가보위부도 없는 이곳에서의 죽음이라면 해방만세였다. 그러나 목숨 걸고 온 길이어서 이제부터의 자신이 더 소중했고 그래서 이제부터 정말 탈출이라는 생각이 나를 벌떡 일으켜 세웠다.“아니야, 우리 이 지역에서 최대한 빨리 벗어나야 돼, 북한에서 중국 변방대에 연락할거고, 그럼 여기서 어물거리다간 우린 잡혀, 그러니 조금만 더 뛰자, 시내로 들어가자”“어떻게? 시내가 어딘 줄 알고?”주변을 둘러보던 나의 시야에 마을이 보였다.처음엔 그 인적이 당황스러웠지만 총구 앞에서도 탈출했다는 자신감이 머리를 쳐들었다.“꼼짝 말고 여기 숨어있어, 내가 만약 마을에서 붙잡히면 소리칠게, 그러면 즉시 산 속 깊이 뛰어!”나는 지금의 상황에선 이 선택밖에 없다고 설득했고 그래도 계속되는 친구의 만류를 뿌리치며 마을로 내려갔다.처음 만난 사람은 아줌마였는데 “말 좀 물어봅시다!”하는 내 말에 대꾸도 없이 무작정 어느 집을 손으로 가리켰다.나는 그가 중국인이고 그가 가리킨 곳이 조선족이 사는 집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그 집 대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흰 개가 짖어대는 소리에 나는 식은땀이 날 정도로 놀랐다. 친구도 뒷산에서 틀림없이 듣고 있으리라. 이 생각이 나를 금시 안심시켰다.“누구요?”40대 중반의 남성이 문을 열고 머리를 내밀었다.나는 중국 현지인을 기만하거나 설득하기엔 너무도 시간이 촉박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즉석에서 700달러를 꺼내 보였다.집주인은 돈 때문인지 아니면 나의 신변 때문인지 맨 발로 달려 나왔다. 나를 방안으로 끌고 들어가는 힘이 황소 같았다.연길시내까지만 데려달라는 내 말에는 안중에도 없이 장롱을 열어 가죽 잠바와 바지를 꺼내 던지며 함북 말투로 말했다.“빨리 입으소.”“괜찮아요, 이 옷은 일본 옷이에요, 관광객처럼 보이려면”“안돼요, 여기사람 같아야지 초소에서 단속할 때 주목받을 수 있소, 잔말 말고 이 옷을 입으소.”“잠시 만요, 저기 친구 하나가 더 있어요.”“엥? 그럼 왜 그러고 섰어?, 빨리 데리고 오소.”잠시 후 내가 친구를 데리고 나타났을 때 집주인은 이미 나들이차림을 끝내고 난 뒤였다.십분 후면 버스가 마을 앞에 도착할 시간이라며 서두르는 와중에 집주인은 주의사항을 알려주었다.“우선 말을 일체 하지 마소. 혹시 공안이 단속 할 때 말 시켜도 아픈 척 하고, 내가 옆에서 대신 말하겠으니 깐. 만약 단속 당해도 중국말 모른 척해요, 여긴 중국말 모르는 조선족들도 가끔 있으니깐? 그리고 주머니에 돈이 더 있으면 나한데 다 맡기소, 혹시 붙잡히면 내가 그 돈으로 공안과 사업 해볼 테니. 얼마나 있소?”나는 더 없다고 잘라 말했다.그의 말대로 20분 후에 버스가 정확히 도착했다. 수도인 평양에서도 불가능한 버스통행 정상화가 중국의 시골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혀를 차며 우리는 몸을 실었다. 두만강 기슭을 따라 한 시간쯤 달리는 동안 우리는 내내 북한 땅을 새삼스레 바라보았다. 벗어진 민둥산들의 모습이 곧 거기에서 살고 있는 북한 주민들의 헐벗고 굶주린 처지로 보였다. 그들에 비하면 쉼 없이 지껄이는 이 중국 시골사람들은 얼마나 축복받은 인생들인가. 선진국민의 자유로움과 풍요가 물씬 풍겼다. 갑자기 집주인이 우리 쪽을 돌아보며 눈을 끔뻑거렸다. 앞을 보니 검문소가 보였고 무장한 군인들이 손 흔들어 차를 세우고 있었다.그들이 우리를 뒤쫓아 왔고 그래서 차도 멈춰 세우는 것 같았다. 나는 공안들이 잡는 순간 어떻게 차창 밖으로 뛰어내리고 어디로 도망칠 것인가를 재빨리 살펴보았다. 그러고 나서 친구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잠든 척했다. 그 전에 친구의 감은 두 눈을 잠깐 살폈는데 눈썹을 심하게 떨고 있었다. 나는 그를 안심시켜야겠다는 생각으로 일부러 약간 코를 골았다. 차가 멈춰서고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군화발이 올라오는 둔탁한 소리에서 총의 무게도 느껴졌다. 큰 목청의 중국말이 오갔는데 군인이 우리를 향해 부르는 것 같았다. 다가오는 군화발소리, 승객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눈을 뜨면 지금 어떤 상황일까? 군인이 우리를 노려보는 것일까? 머리카락마다 촉각을 곤두세우고 숨을 세고 있는데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차가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눈을 떠보니 정말 차가 가고 있었다. 훗날 집주인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이렇게 말해주었다.“공안들은 일일이 검열하기 바쁘니깐 버스에 올라와 한번 쭉 흩어보오, 탈북자 색출이 목적이니깐, 탈북자 얼굴피부를 보면 우리랑 틀리오, 오랜 방랑생활 때문인지 새까맣고 때에 그을렸거든, 그런데 자네들 피부는 평양사람들이어선지 우리랑 비슷해서 그냥 넘어간 것 같소,”그렇게 피 말리는 두 개의 검문초소를 지나고서야 우리가 탄 버스는 앞이 확 트인 연길시내로 들어섰다. 두만강을 넘을 때의 긴장보다 바로미터의 더 큰 순간들을 체험한 나의 온 몸은 땀에 푹 젖었다. 이제는 공안도 찾기 힘든 시내로 들어섰다. 이제는 13억 중국인의 품에 몸을 숨길 수 있다. 나는 격정을 주체할 수 없어서 친구의 살을 마구 꼬집었다. 그도 같은 심정인지 차창 밖을 내다보는 자신 넘친 시선에는 거침이 없었다. 볼거리를 즐기는 여유를 과시하기나 하려는 듯 어느 한 곳을 손으로 가리키기까지 했다. “연변은 세계로! 세계는 연변으로!”라는 한글 플랜카드가 걸려있었다. “중국의 이 작은 마을도 세계를 지향하는데!” 하는 부러움의 탄성이 저절로 나왔다,“자본주의 바람을 막기 위해 모기장을 치자! 쇠살창을 치자!”는 북한 구호에 익숙했던 나였기 때문에 더더욱 그 플랜카드가 충격이고 감동이었다. 더불어 폐쇄와 야만으로부터 탈출한 우리의 용단이 천만번 옳았다는 것을 다시금 자부했다.2.버스에서 내리자 집주인은 우리에게 손을 내밀었다.“자, 연길까지 왔으니 이젠 헤어지기요, 몸조심하고 잘 가오.”난 그 손을 잡을 수 없었다.이미 날이 어두워졌고 말도 통하지 않는 타국에서 어떻게? 어디로 간단 말인가?“정말 죄송한데 우리랑 좀 더 같이 있어주면 안 돼요? 같이 있으면서 여기 사정도 좀 설명해주고. 공안에게 안 잡힐 지혜도 주면 안 됩니까?”“엥? 연길에 그럼 아무도 없다는 기요? 무작정 온 거요?”친구가 한 발 나서며 말했다.“친척이 있긴 한데 우린 거기로 갈 줄도 몰라요.”난감해하던 집주인은 보기에도 딱했는지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 전화했다.“난데요, 창용인데요, 내가 이제 두 사람을 데리고 갈 테니깐 좀 신제지오, 네, 네……. 집에서 멀지 않소”그가 세운 택시를 타고 우리는 연길시내 한 끝 외진 곳으로 갔다. 매우 어렵게 사는 장모집이라는데 정작 들어가 보니 평양 중산층 보다 나은 수준이었다.그날 창용 아저씨가 사 갖고 들어간 쇠고기로 우리는 온종일 주린 배를 채우며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김정일을 죽일 놈이라는 욕으로부터 시작한 그는 탈북자들의 처참한 방황실태와 북송참상, 공안들의 탈북자색출 광분 등에 대해 장시간 말해주었다. 왜 북한 군인들이 총을 쏘지 않았는가? 궁금해 하는 우리에게 중국 쪽을 향해 발포하면 국제 법에 어긋나기 때문이었다며, 대담하게 잘 뛰었다고 칭찬을 했다. 그는 탈북자를 많이 만나보았지만 700달러를 준 사람들은 당신들이 처음이라며 그 돈이면 견인기 한 대를 살 수 있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탈북자들에게 돈을 받으면 벌금을 20배로 물리니 만약 공안에 잡혀도 돈 이야기는 절대 해선 안 된다고 거듭 강조했다. 우린 그의 말들에서 여기가 탈북의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기름진 음식도 제 맛을 변변히 느낄 수 없었다. 이 때 창용 아저씨의 핸드폰이 울렸다.“오, 나 못 들어간다고 아까 말 했잖소 ……. 뭘? 뭘? 정말이야?”핸드폰을 받는 창용 아저씨의 얼굴빛이 심상치 않았다.핸드폰을 내려놨을 때는 우리를 마치 처음 보는 눈으로 보기까지 하였다.“자네들 살인자나?”뜬금없는 섬뜩한 그 질문에 친구와 나는 마주 보았다.“살인자라뇨?”“금방 마누라한데서 전화가 왔는데 변방대와 공안에서 마을을 수색했단 거요, 탈북시간, 복장, 키를 말하는데 당신들 찾는 게 맞소, 근데 문제는 북한에서 받은 통보에 의하면 당신들이 살인자라는데?, 무기도 휴대하고 탈북 했다며? 국경 연선에 지금 난리 났다잖소.”그의 말에 나는 분통이 터졌다. 우리가 살인자라니! 죄라면 탈북 한 죄밖에 없는 우리에게 사람을 죽인 죄를 들씌우다니!창용 아저씨가 가까이 다가앉으며 조용히 물었다.“살인자로 수배하고 찾는걸 보니 내 보기엔 당신들이 그냥 탈북자가 아닌 것 같소, 돈도 있고 얼굴 피부도 그렇고 평양사람들인 것을 보니 분명 먼 일을 하던 사람들인 것 같은데 대체 직업이 뭐였소?”공안의 시선이 우리를 노리는 이 시점에서 현지인에게 의존하는 것밖에는 다른 길이 없음을 알았다.나는 중앙기관에서 근무했고 친구 같은 경우 김정일 가까이서 10년을 근무했다는 점, 체제를 비관하고 남조선으로 갈려고 한다는 것까지 솔직히 말했다. 친구가 색 낡은 편지 봉투를 보여주었다.“우리 친척주소인데 일 년 전에 보내온 것입니다. 이 집까지만 데려다 줘도 감사하겠습니다.”창용 아저씨는 주소를 유심히 보더니 입을 쩍 벌렸다.“친척이 엄청 부자인거네요, 이 주소는 여기 동북지방에서도 다 아는 부자촌인데요.”우리에 대한 신뢰가 더 깊어졌는지 창용 아저씨의 목소리가 다시 커졌다.“한국 갈려면 나한데 맡기오, 내 조카가 전문 그 일을 하는데 당신들 정도면 편하게 보내줄 수 있소, 그 조카애는 한국 국정원이랑 직접 통화하는 애거든,”그 때 벨 소리가 울렸다.“뭐? 뭐야? 그 말을 왜 했어. 이 바보야. 모른다고 할 거지! 알고 있었다고?”창용 아저씨는 이번엔 얼굴이 창백해졌고 통화가 끝나기 바쁘게 벌떡 일어서기까지 했다.“빨리 일어섯! 공안이 이쪽으로 오고 있소. 장모집주소를 물어 봤대”새벽 두 시에 우린 다시 밖으로 나왔다. 창용 아저씨는 내가 처음 만났던 중국 여자를 개년이라며 화를 냈다. 그러더니 돈을 받지 말아야 하는데, 다시는 탈북자를 돕지 않겠다고 결심했는데,라는 말을 여러 번 반복했다.문제는 정작 밖으로 나오긴 했지만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것이었다.장모 집에서 멀리 떨어져 우두커니 서있는 창용 아저씨의 뒷모습을 보니 우리의 미래보다 더 어두워 보였다. 우리는 붙잡히면 자살할 각오라도 있지만 그에게는 불안과 후회의 고통밖에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아 맞다. 거기로 가자!”창용 아저씨가 문득 소리쳤다.그의 설명에 의하면 장모집 건너편에 빈 집이 하나 있는데 밖으로 자물쇠를 채우고 들어가 있으라는 것이다. 우리는 위험근처로 가기 싫다고 했지만 창용 아저씨는 공안이 수시로 순찰하는 이 밤에 거리를 방황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며 장담했다.“등잔불 밑이 어둡다잖소, 그리고 공안이 자물쇠가 채워져 있는 빈집에 어떻게 들어가오?”우리는 그 빈집에서 삼일을 보냈다. 한국 들어간 조카가 낼 온다며 무조건 자기를 기다리라 했다는 것이다. 음식은 창용 아저씨가 어둔 밤에 한 번씩 세끼 빵을 넣어주었다. 차라리 부잣집 친척집에 가 있는 것이 더 편하지 않냐고 물어보았다. 우리는 결단코 반대했다. 우리 신분이 이미 단속됐던 6중대에서 노출이 됐고, 3일이라는 시간 안에 공안은 북한으로부터 우리에 대한 충분한 자료를 받았을 것이다. 안내 용의자에 불과한 창용 아저씨의 장모집도 알아낸 공안이 추적범의 친척집을 수사선상에서 빼놓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설명했더니 머리를 끄덕였다.그 날도 북한이야기와 조금 엿 본 중국 시골의 발전모습에 대해 장시간 이야기하다 잠들었을 때였다. 시끄러운 중국말과 군화발소리에 눈을 뜬 나는 급히 친구를 깨웠다. 숨죽이고 밖의 동정을 살피던 우리는 동시에 방 한 구석으로 뒷걸음쳤다. 손전등을 켠 누군가 우리가 숨어있는 집을 기웃거리더니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자물쇠를 거칠게 흔들 때에는 가슴을 마구 헤집는 것 같았다. 문이 열렸다. 거구의 한 사나이가 불쑥 들어오다가 우리를 보고 흠칫했다. 보기에도 두려운 군복 입은 공안이었다. 그는 우리가 두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괴성을 지르며 달려 나갔다. 나는 방바닥에서 무엇인가 찾고 있는 친구의 등을 세차게 때렸다. “뭘 해?!”나는 낮에 내다보군했던 높은 울타리를 어떻게 날아 넘었는지 모른다. 앞에서 달려가는 형체를 쫓아 정신없이 뛰면서 나는 살아야 한다! 살아야 한다! 이렇게 계속 중얼거렸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다가 우뚝 멈춰서고 말았다. 친구인줄로만 알았던 앞의 그림자가 송아지였던 것이다.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다시 돌아섰다. 이 골목 저 골목 헤매면서도 우리가 숨어있던 빈집 근처를 어지럽게 비치는 12개의 손전등을 빠짐없이 세었다. 저 12개 불빛 중 하나라도 놓치지 말아야 나의 은밀한 행동이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나는 친구가 처음 뛸 때와 추정방향을 추적해보려 애쓰며 허리를 굽히고 이리저리 헤맸다. 그때 인기척이 들렸다. 돌아보니 손전등 불빛이 아주 가까운 곳에서 오고 있었다. 허둥거리던 나는 마침 앞에서 서성거리던 황소 뒤로 몸을 숨겼다. 공안과 나와의 거리는 불과 5미터도 안되었다. 황소 배 밑으로 뻗은 내 두 다리를 보지 않을까 숨이 컥컥 막혔다. 나를 의식해서인지 황소는 비실비실 피하다 못해 달렸고 나는 그 뒤에 숨어 어쩔 수 없이 가시나무에 찔리고 뜯기는 채로 뛰고 또 뛰었다. 그렇게 찰나의 위험을 넘기는 동안 어느새 날이 푸름푸름 밝아왔고 공안 승합차가 가는 모습도 보였다. 나는 그때야 쑤시다 못해 무감각해진 발이 양말도 안신은 맨발이라는 것을 알았다. 주저앉았다. 두 손으로 발을 비비면서도 승합차에 친구가 실려 간 것만 같아 눈물이 났다. 나의 착한 친구가 반항도 못하고 짐승처럼 끌려가는 상상에 주먹으로 눈물을 닦고 또 닦았다. 그런데 한참 후 어디선가 나를 찾는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머리를 버쩍 들고 그 쪽을 바라보니 친구였다. 그것도 산 중턱 나무 뒤에 숨어 머리만 내밀고 웃으며 손을 흔드는 것이 아닌가.나는 단숨에 달려 올라갔다. 친구의 앞에 섰을 때는 주먹으로 힘껏 얼굴과 가슴을 때리며 소리쳤다.“웃음이 나와? 너 혼자만 살자고 이렇게 멀리 왔냐? 이 나쁜!”어질기 짝이 없는 친구는 매를 그냥 맞아주었다. 내가 뒤에 따라 선 줄 알고 여기까지 오게 됐다는 말도 다 맞고서야 꺼냈다. 우린 끝내 연인처럼 그러안고 소리 내어 엉 엉 울었다. 울면서 서로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연발했다. 친구가 불의에 들이닥친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내가 북한에서부터 가져온 시집을 챙겨왔다는 것을 알았을 땐 더 미안하고 죄송했다. 그날의 아픔과 설음, 두려움의 때로 얼룩진 노트가 바로 2008년 12월 9일 일본 NHK가 9시 뉴스특보에서 카메라에 담았던 “내 딸을 백 원에 팝니다. 원본이다.3.공안이 없음을 분명히 확인한 우리는 날이 어두워질 무렵 마을로 내려갔다.물론 둘 다 맨 발로 말이다. 창용 아저씨는 장모로부터 꾸중을 받았었는지 들어오라는 말 대신 황급히 밖으로 뛰쳐나왔다.나는 우리가 무사함을 무척 기뻐해주는 그가 친삼촌처럼 느껴졌다."당신들 짐을 공안에서 다 가져갔소. 그 안에 뭐가 들어있었는데?"중국어 책과 속옷들이었다는 대답에 돈은 없었냐고 다시 물었다.돈 소리에 창용 아저씨 등 뒤에 서있던 친구 얼굴이 갑자기 사색이 됐다. 나는 그가 입을 열기 전에 재빨리 대답했다."돈은 있어요, 내가 갖고 있었어요."친구가 정말이냐는 눈으로 날 쳐다볼 때 마침 장모의 목소리가 들렸고 창용 아저씨는 집안으로 들어갔다."정말 돈을 갖고 있어? 외투 주머니에 있었던 거 아니야?"친구가 기대 절반 의문 절반으로 물으며 다가왔다.나는 그를 마당 한 구석으로 끌고 갔다."똑똑히 들어, 우린 지금 한 푼도 없어, 빈털터리라고, 그러나 있는 척 해야 돼, 저 사람은 가면 그만이지만 우린 저 사람을 잃으면 끝이야, 내 말 알겠지?"창용 아저씨가 보따리 하나를 챙겨 나왔다.우린 서둘러 대충 맞는 신발과 솜옷들을 골랐다.그리고 다시 산으로 들어갔다.창용 아저씨는 절대 불을 피워선 안 된다며 조카가 이틀 더 늦는다고 했으니 그때까지만 부디 얼어 죽지 말라고 하였다. 공안이 탈북자들을 잡아들이는 이유 중 하나가 탈북자들 때문에 산불이 많이 나서라고 했다. 그러면서 장모 집에서 자기가 더 머물고 장모 속을 편하게 해주려면 돈이 더 필요하다고 했다. 나는 몹시 화가 난 척 하며 조카가 온 다음에 보자고 단호히 잘라 말했다.친구와 나는 이렇게 창용 아저씨가 이틀 동안 날라 준 페트병의 뜨거운 물을 그러안고 산 속에서 모포 하나로 붙어살았다."우리 서로 여자라고 생각하자"한번은 친구가 불쑥 던진 이 말이 어찌나 웃겼던지, 우린 정말 아주 오랜만에 웃어보는 것 같았다. 아니 그 짧은 웃음에서 삶이란 이리도 다양하고 그래서 생존만으로도 아름답다고 여겨졌다. 그 이틀 밤의 정취를 나는 죽을 때까지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밤이 점점 깊어지니 산 속의 신비가 태동했다. 언젠가 원산 밤바다 기슭에서 끊임없는 파도소리가 심경을 사로잡았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그 바다처럼 산도 밀림이 설레는 소리로 마치 생명이 숨 쉬는 듯 했다. 우리는 고난의 자신들이 뿌듯했다. 사람은 자연 속에 산다고 하지만 바람을 머금고 산 정상에서부터 밀려 내려오는 소리를 온 밤 듣는 경험자가 얼마나 되랴, 우리는 골짜기 따라 내려오는 1월의 찬바람을 피해 이리저리 자리를 옮기며 두고 온 집이야기와 북한에서의 나날들을 옛말처럼 주고받았다. 그래선지 별들이 또렷한 밤하늘을 우러르며 두 손 모아 한국행의 소원을 빌 때는 눈시울이 젖기도 했다. 십년세월 이 고생해도 그 땅으로 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우리에겐 그날의 대한민국이 별 만큼이나 아득히 멀었다. 다음날 창용 아저씨가 우리와 비슷한 또래의 젊은이를 데리고 나타났다. 신광용으로 자기 이름을 소개한 그는 대뜸 확인 차원이라며 신분증부터 요구했다. 신분증안의 날짜들과 도장이며 인쇄 질감에 이르기까지 전문가처럼 꼼꼼히 체크한 그는 어디엔가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산 중턱까지 닛산 지프차 한 대가 올라왔다. 듣던 바대로 견인기구입에 들떠있던 창용 아저씨와는 차원이 달라보였다. 우리는 창용 아저씨와 포옹으로 이별인사를 마치고 차에 올랐다. 한국 가면 은혜 갚으려 꼭 오겠다는 인사도 잊지 않았다. 물론 돈은 주지 않았다. 다행히도 창용 아저씨가 자기에게 700달러를 준 사실을 조카에게 비밀로 해달라고 애원했기 때문이다.차는 젊은 신광용 이처럼 힘 있고 멋쟁이였다. 스피커에서 울리는 노래가 한국가요여서인지 내친 기세로 한국까지 쭉 갈 것만 같았다.그러나 차가 도착한 곳은 연길 시내 어느 번화가였다. 그동안 사람을 무서워했던 우리에겐 번잡함이 어마어마한 공포였다. 광용은 그동안 우리가 겪었던 악몽 같은 사정들을 아는지 모르는지 차에서 빨리 내리라고 하였다. 좀 뒤떨어져 오면 "얼른 오소!"하고 소리쳤고, 공안들이 사방에서 얼른거리는 백화점에 들어서선 큰 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기까지 하였다. 안하무인인 그의 행동은 괴로운 정도가 아니라 고문하는 것 같았다. 그는 일단 백화점에서 옷과 신발들을 사주었다. 나는 그때 거울을 들여다보다 깜짝 놀랐다. 이 얼굴로 여기 서있단 말인가? 서둘러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옷은 괜찮으니 선글라스를 사달라고 했다. 광용은 그게 더 의심스럽다고 했고 우리는 그냥 소원했다. 그 이후부터 친구와 나는 선글라스신사가 됐다. 검은 안경알 뒤에 자신들이 감쳐줬다고 생각하니 어깨가 펴졌다. 그 선글라스가 없었다면 광룡이가 내민 카메라 앞에도 감히 서지 못했을 것이다. 자기가 사용한 돈과 사준 상품들을 윗사람들에게 확인시켜줘야 한다며 광용은 사진을 찍어줄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찍고 보니 뒤에 공안들이 서있었다.그날은 참으로 호의호식하는 날이었다. 비싸 보이는 식당에서 푸짐하게 먹었고 우리는 난생처음 남녀공용의 찜질방이란 곳에도 갔다.역시 개혁개방은 달랐다. 어떻게 전혀 모르는 남녀들이 집체적으로, 그것도 속옷차림으로 한 공간에서 버젓이 잘 수 있단 말인가. 이런 것이 바로 북한에서 말하던 자본주의 황색바람이었구나, 빈번히 놀라는 평양촌놈 우리에게 광용은 진짜 자본주의 맛을 보여주겠다며 "때밀이"란 사람을 불렀다. 돈만 주면 내 때도 벗겨주다니. 나는 "때밀이" 아저씨가 힘을 쓰는 동안 너무도 송구하고 크게 신세지는 것 같아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자정 무렵 우리가 간 곳은 신광용의 집이었다. 마중 나온 스물다섯 돼 보이는 여자를 자기 와이프라고 소개했는데 나는 그때 여자를 그렇게 가까이서 본 다는 것이 좀 별스러웠다. 우리가 무인도에서 인간세상으로 온 느낌이랄까, 폐가 같은 빈집도 아니고 산속도 아닌 바닥이 따뜻한 아파트에서 이불을 덮고 잔다는 것 또한 이상할 정도였다. 다음날 일어나니 신광용은 어디 나갔다 왔는지 금방 들어온 옷차림이었다. 전날과는 달리 한 마디도 안했고, 아침식사를 끝내고 난 후에는 우리에게 종이와 볼펜을 각각 주었다. 자기프로필과 가족관계, 한국 정부 앞으로 제공할 수 있는 북한의 비밀정보들, 그리고 탈북이유까지 한 치의 거짓 없이 적으라고 하였다. 그가 특히 강조한 것은 비밀정보인데 그것은 자기도 다 알아서는 안 되니 간단하게 제목처럼 요약만하라고 하였다. 비밀이 뭘까? 어떤 게 정보일까? 아무튼 그의 요구는 국가조치처럼 무언가 숭엄한 감이 들었다. 나는 글을 배우고 난 후 그렇게 심혈을 기울여 곱게 써 본적이 없었다. 친구도 대한민국 대통령 앞으로 편지 쓰듯 정성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신광용은 우리의 자필서류들과 쇼핑사진, 그리고 신분증 복사사진을 우편봉투 안에 넣으며 한국에선 이럴 땐 파이팅! 한다고 했다.우리는 그 때부터 수 없이 맘속으로 파이팅! 을 곱씹었다. 우리가 더 자신했었던 것은 신광용의 처가 함북출신 탈북자라는 것을 안 후부터였다. 오갈 데 없는 탈북자를 아내로 맞은 그의 인간성이 돋보였고 그 믿음만으로도 우리는 두려움에서 해방되어 행복했다.그러나 파이팅 10일이 지나도록 그가 장담하던 기적은 오지 않았다.당신들을 더 숨겨주고 싶은데 돈이 떨어져간다는 광룡의 한숨도 점 점 커져갔다. 나는 우리가 왜 이 집에 계속 있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속 시원히 알아야 했다."오늘은 말 좀 합시다. 도대체 누굴 기다리는 것이고 어디까지 우리 문제가 진전 된 겁니까?"신광용은 처에게 술심부름을 시키고 정색해서 입을 열었다."내가 잘 알던 한국사람이 있어요, 탈북자 문제에 관심이 많은 분인데 내 생각엔 국정원 같소, 돈도 몇 번 받았고, 평양출신 탈북자가 있으면 자기에게 바로 연락하라고 했고, 또 있느냐 자주 물어보기도 했소, 그래서 당신들 문제를 그에게 이야기했소, 서류도 그 사람에게 보낸 것이고, 처음엔 돈도 보내고 당신들의 안전을 잘 부탁한다고 하더니 지금은 연락이 안 되네요, 핸드폰 번호조차 바꿔버렸어요,"나는 그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국정원 직원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사람을 우리가 지금껏 구세주처럼 기다렸단 말인가?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앞으로의 기다림도 무의미할 것이라 생각하니 막막했다. 정말 다른 방법이 없을까? 신광용은 베트남이나 몽고, 혹은 태국으로 가는 길이 있다고 했지만 우리로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국경에서 연길까지 나오는 이 수 백리에서도 여러 번 생사를 넘었는데 그 먼 길을 또 어떻게?결론은 돈이었다. 더 있자고 해도 돈이고 길을 떠나자고 해도 돈이었다.친구가 친척 주소를 다시 꺼내왔다. 창용 아저씨와 똑같이 부자촌이라며 감탄하던 광용은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중국말이어서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기분 좋은 통화인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통화 후 광용의 말은 거의 감격 수준이었다."이 친구가 기잔데 애 말로는 친척이 맞다면 한국 가는 것은 문제도 아니라오. 그러고 보니 이 이름을 나도 아는데 항일열사로 중국 교과서에도 나와 있는 분이에요. 그 자녀들도 심양에 나가 한 자리씩 하고 있고, 정말 친척이 맞소?"친구의 선친들 또한 항일투사로, 북한에서도 충신의 귀감으로 인민들에게 선전되고 있다는 말에 광용은 우리의 한국행을 백퍼센트 확신했다. 아니 확신을 넘어 자기 처도 이번 기회에 남한으로 함께 데려가 달라고 부탁까지 하였다. 탈북자의 남편으로 인정 될 경우 조선족의 한국국적 취득이 가능하다며 광용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는 한시도 지체할 수 없었다. 아침이면 중국 공안의 매복감시에 적발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이 밤에 당장 찾아가기로 하였다. 셋은 밖으로 달려 나가 택시를 잡아탔다.좋은 택시여야 공안이 설사 근처에서 지키고 있어도 의심 못한다며 비싼 택시를 골라 탔다. 30분 쯤 달려 도착해보니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궁궐 같은 집이었다. 주변이 너무 환해 어떤 문제가 생길 경우 탈출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의심스러운 승합차가 서있는 것도 보였다. 하여 나는 집근처를 두 바퀴 더 돌자고 했다. 앞 현관과 이어진 골목들과 담장 주변을 아무리 살펴도 차를 이용하지 않고서는 불의의 정황에 대처하기 힘들어보였다.우리는 논의 끝에 택시를 뒷골목에 세워두고 광용이를 우선 보내기로 했다. 광용이가 친척을 만나 시간과 약속을 따로 정하고 믿지 못할 경우 택시 있는 곳까지 직접 데려오기로 했다. 그렇게 광용이가 가고 나서부터 나와 친구는 손에 땀을 쥐고 기다렸다. 한초 한초가 일 년 같았다. 친구도 조바심이 났는지 한 바퀴 더 돌자고 했다. 그러나 우리 둘 중 누구도 그 말을 중국택시기사에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30분쯤 됐을 때 광용이가 쫓기듯 달려왔다. 택시에 오르자마자 빨리 출발하자고 두 팔을 마구 흔들었다. 좀 전의 그 어떤 긴장 때문인지 계속 뒤를 돌아보며 숨을 헐떡였다.예전 같으면 자기 집 앞에 세웠을 택시도 훨씬 멀리 지나쳐 세우게 했다.그리고 들려주는 그의 말은 전율, 그 자체였다."그 집 아들이라고 나왔는데 자긴 사촌 따위는 알고 싶지도 않대, 아버지가 이미 사망했기 때문에 더 상관없다면서 뭐라는 줄 아오? 그 놈이 살인했다며? 살인자가 어떻게 이 집에 오냐고! 공안에서 24시간 지키고 있으니 잡히지 않겠으면 두 번 다신 나타나지 말라고 하는 거요. 그래서 설득하려는데 아까 승합차 봤지요? 거기서 두 놈이 내려오더니 나에게 달려오는 거요,"나는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서늘했지만 친구는 한 쪽에 쭈그리고 앉아서 서럽게 울고 있었다.4.집에 들어가니 좋은 결과를 기대하며 김광선의 처가 특별히 불고기상을 준비하고 기다렸다. 우리는 더 할 말을 잃었다. 더욱이 친구가 자꾸 눈물을 흘리자 남자가 우는 것을 처음 봐서인지 광용의 처는 세운 두 무릎 안에 이마를 쑤셔 박고 있었다. 고기가 까맣게 타자 광용이가 술병을 들었다."자, 자 남자들이 뭐 고만한 일을 가지고,그 배짱으로 탈북은 어떻게 했소?"난 친구의 손에 술잔을 쥐어줬고 광용은 술을 채웠다. 우리는 연거푸 세 잔을 마셨다. 네 번째 잔을 비운 광용이가 "근데, 난 정말 이것만은 궁금한데 우리 처 같은 경우는 배고파서 왔어요, 쌀 가지고 다시 들어가겠다고 처음엔 난리쳤다니깐, 근데 당신들은 평양사람들이잖소, 내 보기엔 직업도 괜찮았던 것 같고, 살인할 사람들도 절대 아닌 것 같고, 탈북 한 이유, 그 이유가 도대체 뭐요?""쾅!"친구가 식탁을 내려친 주먹에 머리를 버쩍 쳐든 광용의 처가 가슴을 부여잡았다. 친구의 그런 눈빛과 목청이 처음이여서 특히 나의 놀램은 더 했다."이유? 무슨 이유를 알고 싶은데? 북한에 무슨 이유가 있는데? 이유가 있어서 사람들이 굶어죽었냐고? 이유가 있어서 당에 충성했던 사람들이 숙청됐냐고? 그럼 김일성이 제 아들놈에게 권력을 준 이유가 뭔데? 김정일이가 계속 독재를 하는 이유가 뭔데?"그 말 앞에서 우리는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그렇다. 친구와 나만이 아니라 과연 모든 탈북자들에게 자신들의 탈북을 정당화 할 수 있는 이유가 어디 있으랴. 배고파서 살자고 왔든, 핍박으로부터 도망쳐왔든, 그 정권이 싫어서 버리고 왔든, 그것이 어떻게 자기 친부모형제들과 처자, 고향을 버리고 온 인간의 이유로 될 수 있는가. 그 모든 이유를 생각할 자유마저 철저히 박탈당한 몹쓸 나라가 아닌가!나는 그날 심화조에 의해 간첩혐의로 숙청된 친구의 장인에 대해서, 남한 서적들을 친구들에게 몰래 돌린 혐의로 국가보위부의 엄격한 조사를 받았던 자신에 대해서 김광선에게 이야기해주었다. 그렇게 온 밤 탈북동기를 말 하고나니 한국행 결심과 용기가 두만강 기슭에서의 초심으로 돌아가는 듯했다.다음날 우리는 김광선과 작별했다. 우리가 친구의 친척집으로 접근할 것을 예상하고 공안과 북한 국가보위부 해외반탐과 시선이 연길에 집중됐으리라 판단해서였다. 속히 연길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러지 않아도 탈북여성과 사는 김광선의 처지도 불안한데 우리까지 얹혀있을 순 없었다. 김광선은 한국 사람이 연락 올 수도 있으니 자주 통화를 하자며 자기 연락처를 주었다. 그리고 떠나는 내 손에 중국 돈 100원을 주었다. 그는 작은 돈이라고 했지만 우리에겐 천만금과도 같았다.훗날 처와 함께 한국입국에 성공한 김광선을 만나 그 백 원에 대한 보답을 했더니 그는 그날의 우리보다 더 고마워했다. 그러한 인품을 만나지 못했다면 장담컨대 나는 한국으로 절대 오지 못했을 것이다. 어제도 노원구에 사는 그의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우리는 끔찍했던 탈북과정의 회고에 스스로 혀를 찼다…….연길시를 벗어나 친구와 내가 밖을 나와 정처 없이 찾아다닌 곳은 십자가였다. 광용의 말에 의하면 성당이나 교회들에서 탈북자들에게 돈과 먹을 것을 주고 간혹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한국에도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주의할 것은 배고파서 탈북한 사람들로 말해야지 살인자로 수배된 상황에서 자기 신분을 노출시킬 경우 신고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목사나 선교사들 중 공안과 연결 된 사람들도 많으니 그 점을 절대 잊어선 안 된다고 몇 번을 강조했다.우리는 돈과 먹을 것을 공짜로 주는 종교도 있다는 사실에 사람은 다 살게 돼 있다며 기뻐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지붕이 뾰족한 건물들과 십자가를 찾아 온 종일 헤맸지만 매 번마다 허사였다. 대부분 문이 잠겨있거나 건물을 지키는 노인들이 나와 개처럼 쫓았다. 북한에서 말하던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김정일 민족이란 것이 이 정도로 형편없는 줄 몰랐다. 그때마다 친구와 나는 우리를, 아니 북한 주민들을 세상이 이렇듯 멸시하고 천시하게 만든 김정일 정권에 대해 치를 떨었다.그렇게 날이 점점 어두워졌다. 그런데 이상했다. 배는 고팠지만 워낙 밝은 낮을 무서워했기 때문인지 밤의 어둠 속으로 기분이 풍선처럼 둥 둥 떴다. 항상 숨어 살고 갇혀 살다 넓은 공기를 마음껏 마시며, 이야기도 하며 나란히 걸으니 즐겁기까지 했다. 칼날 같은 눈바람이 무슨 대수이랴. 이대로 가다 벌판에서 쭈그리고 잔들 어떠랴, 우리는 이미 산속에서도 얼어 죽지 않고 살아남은 모진 생명들이 아닌가. 끝도 없이 무연한 중국의 농촌 길에서 우리는 밤하늘에 대고 와! 와! 고함치기도 했다.그날 밤 연길에서 멀리 떨어진 용정리 어느 집 소외양간에 나란히 누운 우리는 백 원을 들여다보며 참으로 많은 생각을 했다. 솔직히 300만 아사의 나라에서 왔지만 친구나 나는 배고픔이란 것을 남의 나라 일로만 여겼었다. 때로 지방 출장길에서 거리의 시체를 보면 왜 저 사람들에겐 먹을 것이 없었을까? 왜 사람이면서도 굶어죽을까? 왜 훔쳐서도 살려고 노력하지 않았을까? 이것이 생사에 대한 우리의 단순한 의문이었다.그런데 마지막 그 백 원 앞에서는 우리 눈에도 사람이 가진 목숨의 한계란 것이 보였다. 당장 이 돈마저 없다면, 그래서 하루 이틀 먹지 못하고 방황하다나면 이렇게 굶어죽겠구나! 이렇게 초라해지겠구나! 하는 절망으로 초조해졌다. 그러자 배고픔과 그 결말의 두려움이 육신을 파고들며 몸의 기운이 쭉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이전 같았으면 온 밤 못 자고 주변을 두리번거렸겠지만 그 날만은 공안의 추격 따위는! 하고 체념한 채 잠들고 말았다. 아마도 공안의 존재를 하얗게 잊어 본 것은 그 밤이 처음인 것 같다.다음날 소 울음소리에 깨어난 우리는 돈 백 원이 품에 있음을 먼저 확인하고서야 자리 털고 일어났다. 그러나 서로 마주보던 친구와 나는 소 외양간 밖으로 절대 나갈 수 없음을 알았다. 언젠가 창용 아저씨가 말하던 방황자의 증표가 얼굴과 옷차림에 역역했던 것이다. 이 꼴로 그냥 밖으로 나가면 누구든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배고픔도 잊고 도망치듯 가장 가까운 집 앞으로 달려가 문을 두드렸다. 노인 한분이 나오셨는데 척 보기에도 우리 꼴이 탈북자 같았는지 바로 문을 닫을 기세였다. 나는 최대한 허리 깊이 숙여 인사했다."할아버지, 세수 좀 하게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문을 반쯤 닫던 노인은 무슨 영문인지 온 몸을 밖으로 내밀고 유심히 쳐다보았다. 우리말을 못 알아듣는 중국인인줄 알았는데 갑자기 노인이 "들어오소."하는 것이 아닌가.잠시 후 노인은 큰 놋대야에 김이 물물 오르는 더운 물을 들고 나오셨다. 우리는 황급히 달려가 대야를 받아 마당 한 구석으로 가져갔다. 혹시 누가 볼세라 말이다. 먼저 씻으라고 서로 양보하던 우리를 지켜보시던 노인이 슬금슬금 다가왔다."강 넘어 왔소?"우리는 고민 끝에 대답했다."네"노인은 머리를 끄덕이시더니 담배를 꺼내 물었다."이때껏 밥 달라고 문 두드리던 애들은 많이 봤어도 씻겠다는 사람은 자네들이 처음인 것 같소, 그래 끼니는 해결했소?"우린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우물쭈물 하는 우리를 보던 노인은 "다 씻고 좀 들어오소."하는 말을 남기시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우리가 조심스레 문을 열었을 땐 노인이 부엌에서 밥을 푸는 중이었다. 그때의 밥 냄새를 나는 자부심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그 쌀밥냄새를 맡고 있는 생존의 자부심이었고, 앞으로도 목숨이 이어질 것이라는 희망의 자부심이었고, 세상이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을 것이란 믿음의 자부심이었다.노인은 우리가 밥을 먹는 동안 오랜 중국 공산당원의 눈으로 본 김정일을 격앙된 어조로 저주하시였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인민 전체를 굶길 수 있냐며 배를 보니 양심도 없는 놈이라고 했다. 중학교 교사였다는 노인은 단둥과 신의주가 개방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 물어보기도 하셨다. 우리는 북한이 절대 개방할 수 없는 체제의 속성을 장시간 설명 해드렸다. 한동안 듣고 계시던 노인이 가까이 다가앉으시며 물었다."말하는 걸 보니 자네들 배운 사람들 같은데 왜 떠돌아다니오?"남한으로 갈려고 한다는 친구의 대답에 노인은 자기가 잘 아는 한국 교회가 있으니 거기 목사를 만나면 성사될 것이라며 편지와 약도를 만들어 주셨다.우리는 노인이 주신 편지를 한국으로 가는 여권마냥 소중히 품고 다시 연길로 들어갔다. 정성껏 그려주신 약도 때문인지 시외버스 정류장들이 밀집된 연길시장 근처 "연길교회" 간판도 의외로 쉽게 찾을 수가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세 명의 중년 남성이 있었다. 그 중 안경 낀 사람이 우리를 먼저 보고 반색했다."어떻게 오셨습니까?""목사를 만나고 싶어서요."우리는 님 자를 말할 줄 모른다. 북한에서 님은 오직 김정일의 존칭어로만 사용되기 때문에 우리에겐 목사가 목사님이 아니었다."어디서 오셨는데요?'"목사에게만 말 할 수 있는데요.""목사님은 지금 한국 들어가시고 없는데요. 내가 목사님을 대리하고 있으니 나에게 말해도 됩니다."우린 편지를 꺼냈다. 그가 편지를 읽는 동안 우리는 책상 위의 십자가와 성경책을 이상한 물건처럼 눈여겨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큰 목청이 울렸다."탈북자야? 나가!""?""야, 이것들 내보내 탈북자야!"나는 뜻밖의 상황에 몽둥이로 얻어맞은 것 같았다. 앉아있던 두 사람이 벌떡 일어나 우리를 방안에서 밀어내려고까지 했다. 그 기세에 문까지 힘없이 뒷걸음쳤을 때 갑자기 친구가 무릎을 끊었다."우린 한국교회라고해서 찾아왔습니다. 우린 한국에 갈려고 목숨 걸고 탈북한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나가면 우린 죽습니다."안경 낀 사람이 악을 쓰며 소리 질렀다."너희들 같은 놈들이 한 둘이야? 우리 목사님이 너희들 때문에 공안에도 잡혀갔었어, 교회가 문 닫게 생겼어! 일어나서 안 나가? 안 나가!"나는 억이 막혔다. 이것이 우리가 갈려고 했던 대한민국이었단 말인가? 이것이 우리가 그토록 찾던 한 민족이었단 말인가? 친구의 머리까지 툭 툭 치는 그들의 행패를 보는 순간 나는 그만 이성을 잃고 말았다. 안경 낀 사람의 면상을 후려치고 두 사람을 향해 옆에 있던 십자가를 흉기처럼 쳐들었다."공안 불러! 전화해!"욕이라도 후련히 하고 싶었지만 그 소리에 나와 친구는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공안이 따라 올 것만 같은 착각에 미친 듯이 교회 멀리 뛰고 또 뛰었다. 한국입국 후 내가 한국기독교총연맹 세미나에서 그 이야기를 한 적 있다. 그랬더니 모두가 믿지를 않았다. 아마도 연길 현지 사람들일 것이라며 한국 사람이라면 절대로 그런 일이 없었을 것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그 날의 우리에겐 그 교회가 난생 처음 가 본 한국교회였고 그래서 그들도 한국인일 것이란 생각뿐이었다.인적이 없는 곳에서 숨을 고르며 도망쳐 온 교회 쪽을 바라보던 그때 우리의 가슴은 먹먹하기만 했다. 방랑자의 희망이란 밟힐 때마다 소멸되는 것이다. 주머니에 남아있던 교회약도를 천천히 찢던 친구가 돈 십 원만 달라고 하였다. 이유를 묻자 오늘만은 술 한 병 사먹자고 하였다. 내가 그 말을 무시한 채 숨어서 잘 곳이나 찾자고 했더니 친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우리가 왜 그래야 하는데? 대한민국? 우린 거기 절대 못가! 금방 보고도 모르겠냐? 저 사람들이 공안에 신고한다잖아! 너나 나나 이젠 어느 민족도 아니야, 그냥 사람 같은 사람일 뿐이라고!"난 아무 대꾸도 못했다. 우린 태어난 조국을 버렸는데 찾아가고 싶은 조국은 우리를 버린 것만 같아 육신만 있고 삶은 없는 자신들을 보는 듯해서였다.5.우린 백 원을 들고 시장 한 끝 매장으로 갔다. 술병을 들고 매만지기도 했지만 무겁게 내려놓고 말았다. 대신 백 원을 50원으로 바꿨다. 교회에서 도망칠 때 공안보다 친구 등을 놓치면 어쩌나 했던 불안이 더 컸기 때문이었다.50원은 내가, 다른 50원은 친구 손에 쥐어주었다. 불가피한 사정으로 헤어지면 어디서 만나고, 만나도 사전에 자기의 안전신호는 무엇으로 보여줄지 구체적으로 약속했다.가장 최선은 절대로 헤어지지 않는 것이어서 교회에서 도망칠 때 상황을 되새기며 뛸 때는 골목마다 무조건 오른쪽으로만 가야 한다는 것까지 약속했다. 유사시 연락처라며 그때 외웠던 신광용의 핸드폰 번호를 나는 아직까지도 잊지 않고 있다.우리는 그때부터 교회를 포기하고 한국기업들을 찾아가기로 했다. 기업인을 직접 만나 우리의 간절한 소원을 아뢰고 그래도 통하지 않을 경우 그 회사가 한국에 보내는 컨테이너에 숨어가자고 계획했다. 그러자면 항구로 가야 했다. 가는 길을 물어보기 위해 신광용에게 전화를 했더니 차라리 연길에서 기업들을 찾아보라고 하였다.연길은 정말 싫었다. 싫어도 백 원밖에 없는 처지에서 다른 방법 또한 없었다. 우리는 먼저 백 원으로 비누 한 장을 샀다. 배고픈 것은 우리 속사정일 뿐 살자면 남들에게 보여 지는 겉모양부터 다듬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잠은 반드시 우물이나 공동수도, 혹은 시냇물이 있는 외진 농촌에서 잤고. 아침이면 시내로 걸어 들어와 한글 간판 기업들을 찾아다녔다. 물론 신광용이가 사 준 선글라스를 똑같이 끼고 말이다.누구든 연길로 가보면 알겠지만 거의나 한글이다. 정작 회사를 찾아들어가 보면 한국 상품만 있지 사람은 없었다. 한국의 대표적 기업들인 SAMSUNG이나 現代, LG를 찾아 이틀 동안 헤맨 적도 있었다. 그렇게 4일이 지나는 동안 내 돈은 물론 친구 돈도 거의 바닥이 났다. 그날도 온 하루 굶주림을 참다나니 빈혈이 났다. 만두가게 앞에서 나는 친구에게 사정했다.“죽을 땐 죽더라도 오늘 네 그 마지막 십 원 쓰자”“무슨 십 원?”“너 십 원 남았잖아. 없는 척 하지 말고 좀 먹자”“정말 없는데?”처음엔 장난치는 줄만 알았는데 친구가 화까지 내며 모든 주머니를 털어 보이기에 나는 한 구석으로 이끌고 가 그동안 먹고 썼던 돈을 일전도 빠짐없이 계산했다. 두 번 세 번 계산해 봐도 틀림없이 십 원이 남았다.“너 이래도 발뺌할거야? 너 지금 나한데 십 원을 숨기려고 하는 거야? 왜 그러는데? 너 혹시 나 몰래 먹은 게 있어? 그랬어?”내 듣기에도 나의 목소리는 크게 들렸다. 그러자 내 시선을 피해 불안하게 여기저기를 둘러보던 친구가 버럭 고함치는 것이 아닌가.“그래 나 돈 썼다. 너 몰래 칼을 샀다!”그러면서 허리춤에서 정말 손칼 하나를 꺼내 바닥에 내동이 쳤다.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한 끼도 달래기 힘든 우리 형편에 굳이 칼이 무슨 소용 있는가? 아니 친구에게 왜 나 몰래 칼이 필요했단 말인가?고개를 쳐드는 친구의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이 보였다.“우리 한국 못 가, 너무 사정을 모르고 왔어. 한국 사람만 만나면 다 될 줄 알았는데 아니잖아! 우린 지금 꽃제비야. 이러다 잡힐 건 뻔해, 잡히면 너나 나나 살 수 있을 것 같아? 3대멸족이라고! 그래서 차라리 잡힐 바엔. 죽으려고 샀다! 왜?”바닥에 있는 그의 칼을 보니 내가 죽고 싶었다. 그동안 나의 유일한 위안이고 의지였던 친구가 이런 결심까지 품고 있었다는 사실 앞에 온 몸이 물먹은 솜처럼 잦아들었다. 돈 한 푼 없는 것보다 희망마저 잃는다는 것이 가장 두려운 상실감이었다. 나의 침묵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친구가 사정하기 시작했다.“이러지 말고 우리 큰 아버지 집으로 가보자. 다른 방법 없잖아. 어차피 매한가지야, 이러다 죽든, 거기 갔다가 죽든”나는 그때야 친구의 머릿속에 아직도 친척집 미련이 남아있고, 그것이 그를 그토록 나약하게 만드는 원인임을 알았다. 나는 그가 새겨들으라고 마디마다 또박또박 말했다.“너도 들었잖아. 너 같은 친척이 없다잖아”“사촌형도 공안 때문에 당황했을 거야, 살인자가 아니라는 것을 직접 설명하면 다 이해해, 광용이도 말했지? 우리가 아무 것도 모르고 이 짓하는 것보다 그 사람이 나서면 한국 가는 것은 문제도 아니라고. 가보자,”나는 당장 그를 설득하기엔 역부족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루 이틀 시간을 두고 마음을 돌려보기로 했다. 아니 친구로서 이해해주리라 믿으며 농촌에 나가 일단 집을 잡고 생각해보자고 했다.백 원이 있을 땐 어디든 괜찮았지만 무일푼 처지에선 우선 안정적인 숙식장소를 확보하는 것이 다음 일을 추진할 수 있는 선결조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날이 점 점 어두워져서인지, 아니면 사내가 둘이라 위압감을 느껴서인지 어느 집이나 냉정하게 거절했다. 친구가 한숨 끝에 제안했다.“우린 둘이잖아. 그러니 부담되기도 하고 한편 무섭기도 할 거야, 그러니 각자 집을 구하고 아침마다 이 나무 밑에서 만나자”“만약 못 구하면?”“그래도 내일 만나자, 혹시나 둘 중 한 명이 집을 못 구할 수도 있으니 낼 아침 나올 때 먹을 것을 가지고 오기!”우린 이렇게 헤어졌다. 친구는 약속한 나무의 마을에서, 나는 고개 넘어 이웃 마을로 갔다. 손 흔드는 친구가 안심되지 않았지만 웃는 얼굴이 나를 끝내 가게 만들었다. 두만강을 넘은 후 처음으로 혼자 걷는 길이어선지 그동안의 일들을 정리해 볼 여유가 있었다.한국 갈 수 있는 방법이 정말 없을까? 지금껏 만났던 사람들과 사건들에서 잘 못한 것은 무엇이고 앞으로 활용할 경험 가치는 무엇인가? 아니, 우선 무슨 말로 친구를 설득할 수 있을까? 광용이와 짜고 확 겁을 줘볼까? 어느새 날은 어두워졌고 역시나 찾아간 마을에서도 나는 냉대를 받았다. 그 마을은 이상하게도 개들까지도 어찌나 사나웠던지 도저히 편치 않았다.친구에게 칼이 마침 있으니 만약 함께 동행 했다면 한 마리 잡아먹었겠는데,이 생각에 친구가 갑자기 그리워졌고 그래서 나무마을로 발걸음이 돌아섰다. 그런데 친구는 다행히도 고마운 인정들을 만났는지 나타나지 않았고 결국 나는 나무를 벗 삼아 홀로 보냈다. 아침이 되자 친구가 가져 올 고기만두 생각에 신바람 났다. 그러나 해가 중천에 떠오르도록 친구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 밤에도, 또 다음날 아침도,나는 꼬박 이틀을 굶은 채 그냥 나무를 지켰다.3일째 되는 날, 필히 친구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광용에게 당장 전화를 해봐야겠다는 판단에 마을을 돌며 집 문들을 두드렸지만 그 소원마저도 쉽지 않았다. 정녕 방법이 없을까?사람이란 애간장 탈 때에는 저절로 눈물이 나는 것 같다. 뿌옇게 김이 서리는 선글라스를 벗고 흰 눈 위에 주저앉았는데 그 때 옆을 지나던 한 할머니가 멍해있는 나에게 한마디 던졌다.“조선에서 왔으면 여기 있지 마. 3일전에도 공안이 이 마을을 다 뒤졌어”이틀을 굶어서인지 아니면 친구의 행처를 전혀 알길 없는 허탈함 때문인지 할머니가 하신 그 말의 의미를 모두 깨닫기까지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이곳을 떠야 한다! 그런데 어디로? 나는 일어서며 정신을 가다듬기 위해 혀를 깨물어 보았다. 그랬더니 아픔과 함께 순간 뇌리를 치는 곳이 있었다. 우리에게 세숫물과 함께 밥까지 주셨던 그 노인의 집이 떠올랐다. 나는 다시 용정리까지 걸어갔고 근심했던 것과 달리 쉽게 중학교 교사를 했다는 그 노인의 집을 찾을 수 있었다.“친구는 어디 갔소?”“연길교회에서 전화로 공안을 부르기에 도망치다가 헤어졌습니다.”나는 거짓말 했다. 노인이 소개해준 곳에서 봉변을 당했으니 책임지라는 식이었다. 방으로 들어서기 바쁘게 그 집 전화로 광용을 찾았다. 신호음이 울리는 동안 광용의 첫 음성은 과연 어떨까? 혹시 친구가 받았으면…….하고 기원했다.“지금 어디요?”광용의 거친 질문에 나는 흠칫했다.“나 지금 용정리인데 혹시 친구가 전화 안 왔었어요?”“안 오긴 왜 안와, 이틀 전에 전화 왔었어요.”나는 안도의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리고 밖에 펴놓은 옥수수를 돌보고 있는 노인의 동정을 살피며 헤어지게 된 경위를 소곤소곤 말했다. 광용의 말에 의하면 급히 만나자고 해서 나갔는데 친구 주제가 말이 아니더라는 것이다.손전등들이 무리로 마을 입구로 들어서는 모습을 보고 황급히 뛰다나니 산을 넘게 되었고 길을 잃고 헤매던 중 이리저리 온 곳이 연길이었다는 곳이다. 그런데 문제는 친구가 친척집을 찾아가겠다고 고집했다는 것이다. 내가 전화 오면 자기가 친척을 데리고 올 때까지 기다리도록 잘 설득하라며 만약 잡히면 그때 도망치라했다는 것이다.“안 된다고 했지요?”“어떻게 그렇게 해요? 그 사람 혼자라도 갈 기세던데, 그러다 잡히면 나도 끝나겠는데,”일단 친구를 집에 숨겨두고 광용이는 다른 사람을 내세워 친구의 작은 삼촌이라는 사람을 만났다는 것이다. 핏줄이 가까워서인지 작은 삼촌은 자기 조카가 절대 살인할 사람이 아니라며 무척 만나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알리려 집에 전화하니 친구가 목욕하고 밖에 나갔다는 것이다.그때부터 몇 시간 연락이 두절 돼 자기도 지금 바늘방석에 앉은 것만 같다는 게 광용의 마지막 설명이었다. 나는 그동안의 방랑생활에서 자신감이 생겨 잠시 경솔해진 것이니 곧 들어올 것이라며 안심시켰다.그러나 노인의 집에서 잡일을 해주며 3일을 기다렸지만 친구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 3일 동안 나는 한 번도 심장이 조용히 뛴 적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광용의 다급한 전화가 왔다.“금방 창용 삼촌 아주머니한데서 전화가 왔는데 친구가 잡힌 것 같아요! 공안이 와서 탈북자들 한데 돈을 얼마 받았냐며 창용 아저씨를 싣고 갔대요. 나도 집을 옮길 테니 당신도 빨리 그 곳을 떠요.”나는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구나! 하는 당혹감에 두 무릎이 떨렸다. 붙잡히면 죽을 것이라는 충만했던 각오도 그 순간에는 허무하게 무너졌다. 더불어 나도 이제 곧 공안에서 덮칠 것만 같은 착각이 내 몸 안으로부터 세차게 요동쳤다.6.광용의 전화를 받고나서 나는 서둘러 옷을 입었지만 이내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돈 한 푼도 없이 어디로 간단 말인가? 그땐 정말 노인네 집 머슴이라도 될 수 있다면! 눈 감고 이런 짧은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그렇지! 눈이 번쩍 떠졌다. 창용 아저씨밖에 없다. 그는 내 돈 700달러씩이나 받지 않았는가. 주었던 걸 돌려달라면 비열한 짓인 줄 알았지만 내 처지에 무슨 인격을 돌보겠는가? 나는 전화를 들었다.“광용이한데 전화번호를 알았는데요, 창용 아저씨 아직 안 들어왔어요?”“그래,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왜 헤어진 거야?”창용 아저씨 처는 겁에 질려 목소리까지 떨고 있었다.그것을 안 그때의 나는 정말 몹쓸 인간이었다.“내 말 똑바로 들으세요, 내 친구는 돈 준 사실을 전혀 몰라요, 내가 준 돈이었거든요, 그러니 안심하세요, 그러나 만약(나는 여기서 힘을 주었다.)내가 잡히는 경우 어떻게 될지 몰라요, 그러니 내가 지금 당장 어디든 멀리 떠날 수 있게 광용이에게 전화해서 돈 100달러를 준다고 약속해요.”창용 아저씨 처는 하늘에까지 맹세했다. 하여 나는 연길에서 신광용을 만나 300원을 손에 쥘 수 있게 되었고(나머지는 만약 친구가 오면 주라고 남겨두었다.) 심양으로 가는 버스에도 오를 수 있었다. 노인의 말에 의하면 심양주재 한국 영사부가 있는데 거기를 걸쳐 한국 가는 탈북자들이 많다는 것이다.버스에 올라 털썩 주저앉고 나니 너무도 엄청난 일들이 단 몇 초 사이에 이루어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때에야 친구의 불행에 대해 돌이켜보게 되었다. 정말 잡혔을까? 잡혔다면 지금 그는? 그러나 나는 자신에게 놀랐다. 왜 친구 잃은 슬픔보다 자신을 잃을 공포부터 앞세웠던가? 생사를 약속하고도 나는 왜 자결까지 결심했던 친구를 뒤에 두고 허겁지겁 달아날 궁리부터 했단 말인가? 비겁하고 치사하고 가증스러운 나! 나! 나! 이렇게 되뇌이며 손톱으로 계속 내 살을 꼬집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용서가 안 되고 스스로에 대한 미움을 도저히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시간이 흐르자 광용의 말을 다시 한 번 곰곰이 의미해보고 싶어졌다. 창용 아저씨가 공안에 불려갔다. 친구가 잡힌 것 같다. 이것이 전부일 뿐 확실한 근거는 없지 않은가? 아니 창용 아저씨가 미워하던 그 중국여자가 신고하여 단순한 조사 차원일 수도 있지 않은가? 친구는 살아있으리라. 이 미련으로 마음을 다잡으니 박동소리가 약해지며 조금 편해진 듯싶었다.그것도 잠깐. 나는 이번엔 버스에 불안해졌다. 도 경계선은 물론 군을 하나하나 통과할 때마다 군인들이 올라와 통행증을 일일이 검열하는 북한처럼 이 버스가 검문소 앞에 멎으면 어쩌나 싶어서였다. 6시간 넘게 달리는 동안 그렇게 나는 떨어야 했고 기도해야만 했다. 마침내 야경이 넘치는 도시가 보였다. 그 화려한 중심으로 버스가 당당하게 질주할 때는 친구를 좀 더 기다렸을걸! 저 불빛들을 함께 볼 수 있다면! 하는 후회와 희망이 썰물과 밀물처럼 혈관 속으로 오고갔다. 버스가 멈추기 바쁘게 승객들 중 가장 먼저 내린 나의 눈에 거대한 시계가 보였다. 12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이젠 어디든 갈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의 시간은 그 때뿐, 공안들이 또 서있는 광경에 나는 그만 기겁하여 몸을 숨겨 찾아 들어간 곳이 PC방이었다. 물론 알아서 거기 눌러 앉은 것은 아니었지만 우연 중 다행으로 한 구석 의자에 앉아 밤새 눈을 붙일 수 있었다…….누군가 심하게 흔들어 깨웠다.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나니 핑크색으로 머리를 염색한 여자가 비명 지르며 뒷걸음 치고 있었다. 내가 몸을 솟구칠 때 떨어뜨린 만두 세 개 때문이었다. 나에겐 목숨 같은 식량인 그 만두들을 똥처럼 혐오스럽게 보던 핑크머리가 줍고 있는 내 등에 대고 욕을 했다. 그때 만두를 집으며 나는 속으로 욕했다. “북한 같았으면 네 머리 꼴만으로도 개년 돼!”나는 그 PC방을 나올 때 간판을 익혀두었다. 훗날에도 또 가리라, 물론 핑크머리년이 없는 곳으로! 밝은 거리를 걷는 나는 연길에서와 달리 발걸음이 가벼웠다. 중국이 이렇게 생겼구나, 이런 곳이 외국이구나. 여권도 없는 공짜 관광이 흡족했다. 북한에서 볼 수 없는 광고들을 신기하게 쳐다보며 걷다나니 불안이 점 점 일어섰다. 한글들이 슬 슬 지워지더니 간판들이 모두가 중국어에 가려졌기 때문이었다. 그 도시가 심양이 아닌 장춘이라는 곳을 알았을 때는 기가 막혔다. 심양은 또 어디란 말인가? 나는 일단 한국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곳부터 찾아가야겠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간 곳이 “고향밥”이란 한글간판 음식점이었다.“심양 가려고 하는데 알려주실 수 없습니까?”식당 아줌마는 골똘히 쳐다보더니 대답 대신 무언가 내밀었다. 한글로 된 관광 안내책자였다. 책이 그렇게 인간에게 필요한 물건인줄 그때 새삼 알았다. 그 책이 가리키는 곳으로 버스터미널을 찾아갔고 그 책 덕에 “썬양”하고 입을 열어 티켓도 구매할 수 있었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김광선에게 전화를 걸었다.“친구소식 없어요? 창용 아저씨는?”광용은 달라진 것이 없다며 자기 사정을 더 길게 털어놓았다. 급하게 친구 집으로 짐을 옮기다나니 여간만 불편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는 동안 나는 그가 잠시 미웠다.“내 친구가 꼭 전화 올 겁니다. 절대로 핸드폰을 꺼 놓지 말아요. 내가 지금 심양으로 가고 있으니 만약 친구가 오면 바로 출발하라고 해요”심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하마터면 환성을 지를 번했다. 관광안내 책자에 심양 주재 한국 영사관 전화번호가 있는 것이었다. 나는 흥분됐다. 장춘 버스와 달리 심양버스는 느려 터진 것만 같아 발을 굴렀다. 빨리 가면 빨리 한국 갈 수 있는데, 심양에서 내리기 바쁘게 전화박스를 찾아 뛰었다. 두만강을 넘을 때부터 이렇게 줄곧 뛰었지만 언제 단 한 번 내 발이라고 느껴본 적 있었던가.전화박스 안에서 번호를 돌릴 때에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신호음이 울리던 끝에 “여보세요”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자 숨이 컥 막혔다.“여보세요, 한국 영사관이지요?”“네, 누구세요?”“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나는 한국 영사관이 내 전화를 받고 있다는 사실에 너무도 격정이 끊어 올라 정신없이 이 말부터 마구 해댔다.“근데 누구세요?”나는 크게 호흡하고 또박또박 말했다.“저 북한에서 왔습니다. 친구도 함께 왔습니다. 한국 가려고 합니다. 신분증도 가져왔고 정말 북한 사람 맞습니다.”응답이 없었다. 기다렸지만 조용했다. 아니 전화가 끊어져 있었다. 망할 놈의 중국 전화! 나는 전화기를 주먹으로 쾅 쾅 쳤다. 고장 났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다시 뛰었다. 달리는 동안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내 전화를 애타게 기다릴 한국 영사관 직원을 생각하니 그동안의 고생들이 한꺼번에 두 눈으로 주르르 흘러 내렸다.“여보세요”다른 전화박스 안에서 이번엔 내가 먼저 불렀다.“네 누구세요?”“금방 전화했던 사람입니다. 한국 망명을 신청하려고 합니다. 신분증도 가져왔습니다. 공안이 우리를 살인자로 지목하고 수배하고 있습니다. 우린 절대 살인하지 않았습니다.”“여보세요, 다 알겠는데 내 말 잘 들으세요, 이 전화가 그렇게 안전하지 않아요, 무슨 말인지 알겠죠?”그 말에 나는 사방을 황황히 둘러보았다.“여기 심양에서는 한국 가기 힘듭니다. 한국 갈려면 북경 대사관이나 영사관을 찾아가십시오, 우린 도움을 줄 수 없습니다.”“북경 대사관에는 어떻게 가는데요? 어떻게 들어갈 수 있어요?”“그건 탈북자들이 다 알아서 들어가요. 그것까지 우리가 어떻게 알려줘요?전화 오래 못해서 그러는데 이만 끊겠습니다.”나는 전화를 그냥 들고 서있었다. 해외공관들의 전화가 주재국 정보기관들의 도청에 노출돼 있고, 그래서 혹시나 공안이 이쪽으로 올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움직이지 못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어떤 시련을 넘으며 왔는데? 설명을 잘 하지 못한 내 탓인 것만 같아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이번엔 받지 조차 않았다.마치도 그 침묵은 교회에서 중국인들이 우리를 쫒던 욕질 같았고 하루 밤만 재워달라고 애원하는 우리를 보고 쾅 닫아버리던 대문 같았다. 대한민국이 이다지도 먼 단 말인가? 대한민국이 우리 탈북자들을 구출할 권한이 이렇게까지 없었단 말인가? 전화박스 밖으로 나올 때 세상 끝으로 누가 날 밀어버리는 것만 같아 서러움이 확 북받쳤다. 스스로 알아서 가야 한다는 영사관 직원의 그 말에는 북한 주민인 내가 전혀 없었고 그래서 내 보기에도 나란 존재는 이국의 하늘 밑을 떠도는 작은 먼지 같았다.나는 그날 주머니에 남아있는 마지막 돈으로 술을 마셨다. 한 잔 두 잔 먹다나니 연길에서 친구가 술을 사자고 말했던 그 상황이 그때가 아니라 지금 같았다. 친구가 그리워졌다. 제발 살아서 나에게로 와주었으면, 제발 내일은 그와 함께 새롭게 시작했으면,아파트 옥상 위에서 그렇게 자고 일어난 나는 아침이어도 갈 데가 딱히 없었다.아래를 내려다보니 친구의 칼이 생각났다. 아직도 친구는 칼을 가지고 있을까? 만약 정말로 공안에 잡혔다면 그 칼을 원했던 것처럼 사용했을까? 이 생각까지 이르고 나니 나는 어디든 가야겠다는 결심이 서게 됐다. 그렇다. 북경으로 가자. 남들도 알아서 간다는 길을 내가 왜 못 가겠는가. 가자고 온 것이 아닌가. 여기까지 살아오지 않았는가.나는 지붕 바닥 한쪽에 고여 있는 눈 녹은 물로 세수를 했고 옷도 툭툭 털었다. 그리고 시를 쓸 때와 같은 영감으로 사색했다. 사람도 땅도 모두 낯 설은 저 밑으로 내려가면 내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계단을 내려 현관까지 가는 동안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결론은 오직 하나였다. 사람이었다. 그것도 말부터 통하는 조선족을 찾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만난단 말인가? 중국말로 꽉 찬 이 심양에서! 그때 문득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나는 우선 조용한 골목길에 섰다. 그리고 행인들을 행해 조용히 불렀다. 남자가 지나가면 “아저씨!” 여자가 지나가면 “아가씨!”했다. 중국인이라면 그냥 지나갈 것이고 조선족이라면 틀림없이 반사적으로 돌아볼 것이리라. 그렇게 한 시간 또 한 시간, 어느덧 시간이 흐르고 흘러 해가 점점 서쪽으로 기울어졌다. 세끼를 굶은 이 채로 또 하루가 지나면 어쩌나. 그 조바심에 애가 타는데 그때 저만치서 26살 돼 보이는 여자가 내 쪽으로 오고 있었다. 나는 앞에서 부르면 말을 알아듣지 못해도 목소리에 반응하기 때문에 그 여가 등을 보일 때쯤 불러보았다.“아가씨!”그러자 그 여가 걸음을 멈추었다. 돌아섰다. 그러더니 말했다.“저를 불렀습니까?”7."뭘 물어보시게요?"틀림없는 한국말에 나는 그 여자가 구면처럼 느껴졌다."네"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내가 절박해보였던지 그 녀는 선뜻 나에게로 다가오기까지 했다. 나는 그때 가까이 오는 그가 고마웠다. 누군가로부터 이런 관심을 받는다는 것이 내가 아직 멀쩡한 인간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 같아서였다."어디를 물어보고 싶은데요?"나는 마주 선 그가 며칠 동안 씻지 않은 내 몸 냄새에 불쾌해 하지 않을까 내심 걱정했다."우선 내 말을 마지막까지 들어주겠다는 것을 약속해주십시오""?"여자는 조금 당황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그때야 내 아래 위를 얼핏 흩어보았다."전 이상한 사람은 절대 아니고 아가씨에게(동무라고 말할 번했다.) 해를 끼칠 사람도 아닙니다. 그냥 5분만 시간을 내서 제 이야기를 들어주셨으면 합니다."여자는 손목시계를 들여다 보고나서 머리를 끄덕거렸다. 나는 내가 북한에서 왔고 친구랑 헤어진 딱한 사정이며, 한국으로 가려고 한다는 것까지 절절히 호소하다시피 했다. 그러나 배고픔과 관련해서는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왠지 그때에는 같은 사람 대 사람 사이에 할 말이 아닌 듯싶어서였다. 내 말을 다 듣고 난 그 여자는 자기가 도울 수 있는 것이 뭐냐고 물었다. 다 들어줄 것만 같은 그 물음에 목구멍까지 나오는 "밥입니다." 말 대신 나는 "한국 가는 방법을 좀 알려주십시오."했다.내가 그러길 잘했던 것 같다. 그 여자는 낯선 남자라는 경계심을 풀고 부지런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심양보다 북경 영사관으로 다들 간다는 것과, 한국 사람들이 많이 오는 대련으로 가면 고생이 덜하다는 것, 그리고 돈이 있으면 중국 여권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것까지 참으로 아는 것도 많았다."어떻게 그런 걸 다 알아요?" 이 질문이면 대화를 좀 더 이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역시나 그 여자는 내가 찾던 말동무임이 분명했다. 또 다시 이어가는 그 여자의 말 들 속에서 가장 반가웠던 것은 화룡시에 사는 자기 아버지가 탈북자들을 농사시키며 많이 숨겨주었다는 것이었다.나는 무척 놀라며 그의 아버지를 대단한 분이라고 칭찬해주었다. 그러고 나서 내가 연길에서 심양까지 오는 길에 신세졌던 고마운 조선족들과 그들에 대한 나의 감사함을 열렬히 토로했다. 그 여자가 불쑥 물었다."이 심양에 친척이 있습니까?"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그럼 어디서 잡니까? 밥이나 먹었습니까?"나는 먹었다는 말은 차마 입에서 안 나왔다. 잠시 고민하던 그 여자는 핸드폰으로 어딘가 전화를 했다. 혹시 공안에 신고라도 하는 것은 아닐까? 그의 핸드폰과 중국말이 조금 긴장되었다. 이윽고 나를 향해 돌아선 그 여자가 활달한 표정으로 말했다."아까 친구가 나에게 찜질방 같이 가자고 했었는데 물어보니 표를 주겠답니다. 거기서 자겠습니까? 여기서 멀지 않습니다."그 아버지의 그 딸이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나는 그와 함께 걸으며 이름을 물었다."왕초린!"몇 번을 못 알아듣는 내 귀가 신기했던지 자기 이름을 소리치며 깔깔 웃었다. 나이는 내가 알아맞히겠다고 했더니 고기 굽는 리어카를 가리키며 맞히면 저 양꼬치를 사주겠다고 했다.먹을 것 때문에 여자 나이를 가슴 조이며 점쳐 본 적은 아마 그때가 난생 처음인 것 같다. 얼마나 그게 빨리 먹고 싶었으면 "26살!"하고 외친다는 것이 "양꼬치!"해버렸다.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다행히도 초린은 내 실수를 모른 채 양꼬치를 진짜 사줄 것이라며 거듭 다짐했다."26살"조심스런 내 음성에 "몇 살?" 다시 물었다."26살"내가 좀 더 크게 말하자 초린은 손뼉을 짝짝 쳤다."틀렸어요, 에궁 양꼬치 못 사주겠다……."그 말에 양꼬치가 더 간절해졌다."도대체 몇 살이에요?""27살"단호한 그 대답에 나는 속으로 '일 년 늦게 태어 날 것이지...'하고 푸념했다. 그러나 초린은 마음이 예뻤다. 일 년 젊게 봐준 턱이라며 쪼르르 달려가 양꼬치를 네 개씩이나 사들고 왔다. 나는 사람은 역시 고기를 먹어야 한다니깐! 이렇게 감탄하며 두 개를 먹었고 초린이 준 한 개를 또 먹었다. 초린이가 꼭 소원 성취하라며 친구로부터 받은 찜질방 표를 내밀 때 나는 부탁했다."조금만 더 있다 가면 안 돼요? 난 그동안 공안에 쫒기며 사람이 무서웠었어요, 그래서 사람이 그리워요."측은한 눈길로 바라보던 초린은 미소를 지어보였다."힘내요. 나도 그러고 싶은데 내 대상이 기다리고 있어요.""대상? 그게 뭐죠.""음,,,뭐랄까. 한국에선 애인을 자기라고 부르잖아요. 우리 조선족은 대상이라고 해요"이후 목욕을 하면서 나는 초린의 말에서 새롭게 안 대상의 의미에 피씩 웃었다. 뜻은 같은데 말이 다른 이국적인 여자를 직접 만난 그 시간이 믿기지 않을 만큼 새로워서였다.나는 그날 씻고 또 씻었다. 몸이 깨끗해 질 기회가 다시 없을 것 같아 양꼬치 먹은 힘을 다해 때를 밀었다. 비누를 문댈 때 마다 친구생각이 났다. 나는 이렇게 더운 물에 목욕을 하는데 친구의 지금 상황은 어떨까. 광용에게 전화 할 돈도 남기지 않고 술을 사 먹은 내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다음날 아침, 눈을 뜨니 몸은 깨끗해졌지만 대신 아프지 않나싶을 정도로 배가 고팠다. 온 몸이 나른했다. 내가 여기서 어떻게 자게 됐는지. 그것도 한참을 생각해봐야 했다. 이어 초린이 생각이 났다. 참 고마운 애였지. 그런데 그 얼굴을 아무리 되새겨 보려 해도 좀처럼 기억나지 않았다. 그냥 양꼬치만 보였다. 그때 내 옆에 누군가 서있는 것만 같았다. 누굴까? 나는 망설였다. 두만강을 넘은 후부터 내가 먼저 남을 쳐다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맞지요? 어제 그 사람 맞지요?"그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아니 글쎄 초린이가 아닌가."어떻게? 여기 어떻게 왔어요?"나는 중국 땅에서 처음으로 지인을 우연히 만난 행운에 내가 한국말을, 그것도 북한 억양으로 소리치는 줄도 몰랐다."짜잔!"초린은 폴싹 주저앉으며 플라스틱 통에 담겨진 흰 빵을 보여줬다. 나는 그때만큼은 진심으로 음식보다 사람이 더 반가웠다."어떻게 왔어요? 친구랑 같이 왔어요?""아니, 음식 줄려 왔어요. 어제 헤어질 때 사람이 그립다면서 더 있어달라고 말하던 게 자꾸 맘에 걸려서 분명 아침을 굶었겠구나, 이러면서 왔어요. 먹어요."빵을 집어주는 그 손에 나는 무엇이든 주고 싶었다. 갑자기 공안이 가져간 내 외투안의 달러 생각이 났다."내가 어제 대상을 만나 자랑했어요. 이러이런 사람을 만났는데 이러이런 도움을 주었다고"공상에 잠긴 듯한 초린의 표정이 무척 귀여웠다."대상이 뭐라고 해요? 중국 사람인가요?""네, 여기 한족이예요, 금방 뭘 물어봤죠? 아 참 내 대상이 뭐라고 했는지 그걸 물어봤죠?"나는 그냥 웃었다."잘했다고 하던데요. 날 보고 착하다고 하면서 일요일 옷 사 주겠다고 했어요. 그 사람 착하죠?"나는 둘 다 착하다고 말하고 싶었다."우리 대상도 김정일이 엄청 싫어해요. 아마 중국 사람들은 다 미워할걸요. 배 나온 게 싫어서. 조선은 다이어트 안 하죠?"나는 마음씨도 말도 예쁜 초린에게 물이라도 떠주고 싶었다. 그래서 주변을 둘러보는데 벌써 그가 냉큼 일어나 물 컵을 두 개 들고 왔다. 그리고 허리를 굽히며 앉는데 옷 사이로 가슴굴곡이 살짝 보였다. 예쁜 그 속살은 도덕이요, 위선이요 하는 그 모든 겉 치례들을 부정하며 순수한 초린이 자체를 보여주는 듯싶었다."한국 언제 갈려고요?"나는 아무에게라도 말하고 싶었던 고민들을 모두 털어놓았다. 설사 초린이가 그냥 사라진다고 해도 그가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무엇인가 얻는 것 같았다. 초린은 영리하기까지 했다. 광용에게 친구안부를 묻는 문제는 자기가 맡겠으니 한국 갈 큰돈을 해결할 논의나 하자고 하였다."돈 좀 벌만한 재간이 뭐가 있어요?"그러고 보니 나는 정말 할 줄 아는 것이 아무도 없었다. 중국에서 지금껏 잘한 짓이란 공안을 피해 달아난 것밖에 없었다. 한숨 끝에 피아노를 좀 친다고 말을 흘렸더니 초린이가 버릇인지 손뼉을 쳤다."피아노를 칠 줄 알아요?"서울에서 내가 가끔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피아노를 치면 그들은 북한 사람이 어떻게 피아노를 치냐는 식으로 놀라군 한다. 마치도 북한은 음악도 없는 나라인 것처럼 말이다. 그때도 초린은 피아노란 말에 반신반의하는 기색이었다."어느 정도 치세요?""체르니 50번 정도"초린이가 피아노를 전혀 몰랐다. 체르니 50번이라고해도 그 의미를 이해 못하기에 나는 연습과정을 한참이나 설명해주었다. 그 말을 다 듣고 난 초린은 자기 대상 조카가 한국인이 많이 오는 서탑에 사는데 그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면 용돈도 벌고 기회도 생길 것이라고 했다. 내가 감격에 두 주먹을 불끈 들어보이자 초린은 손뼉 치며 응원해주었다.8.초린이는 나 때문에 거의나 두 시간 넘게 여기 저기 통화했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친척의 허락보다 그의 전화비가 더 걱정됐다. 북한 같았으면 그 통화 값이 일반 주민 월급의 3배가 넘을 것이다. 북한에선 핸드폰이 특권의 상징이기도 하다. 가입비만 800달러가 되고 그 외에 접수비용 100달러를 더 내야 한다. 그러고도 중앙체신성 체신상의 사인이 떨어질 때까지 일주일 넘게 기다려야 한다. 그 기간에 중앙체신성은 국가보위부와 인민보안성으로부터 신청자의 범죄경력, 혹은 핸드폰 사용가능 여부를 조회 및 협의한다.모든 신청자들을 기분 나쁘게 하는 것은 핸드폰 번호를 줄 때 중앙체신성에서 두꺼운 중국산 구식 핸드폰을 300달러에 의무적으로 사도록 바가지를 씌우는 것이다. 그러나 불평 부리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내가 번호를 받을 때만도 허가결정 번호를 보니 2000번 안이었다. 그 소수의 특권으로 들고만 다녀도 폼 나는 물건이기 때문에 대부분 핸드폰 사용자들은 돈을 따지지 않는다. 별도로 해외에서 작고 예쁜 외국 핸드폰을 구입하여 쓰면 그만인 것이다.가장 인기는 액정판이 칼라로 된 한국의 삼성 핸드폰이 다. 이렇게 핸드폰 구입비까지 합쳐 거의 1500에서 1800불을 주어야 진정 목청 큰 핸드폰 소유자가 되는 것이 내가 북한에서 탈출할 때 당시의 2004년 실상이다. 일반 직장인의 한 달 월급이 2500원인데 핸드폰 한 달 최소 통화비는 2만원이니 열배나 넘는 통화요금에 습관적으로 늘 신경이 쓰였던 나는 초린이가 통화를 끝내고 돌아설 때 손을 저었다."안 된다면 그만 둬, 어차피 한국 가야 하는데""아닌데, 데려 오라는데"초린의 대답은 짧고도 명료했다. 심양의 서탑이란 곳은 중국에 와서도 내가 처음 본 개혁개방 도시였다. 외국의 유명 로고타이프는 물론 한글간판들이 많고 너무도 번화하여 한국이 아닌가싶을 정도였다. 1월말인데도 흰 종아리를 드러낸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자들이 신기했다.김정일과 함께 원산 갈마초대소에서 식사하며 봤던 왕재산경음악단 무용수들의 짧은 치마 이후 두 번째인 것 같았다. 내가 처음 친구를 만났던 것도 그 자리에서였다. 당조직부 5과에서 지도원을 했던 친구는 할아버지가 김일성의 동지였고, 아버지는 김정일의 동창생이었다.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당조직비서가 혁명선배들을 잘 모실 줄 안다며 사례를 든 이름이여서 북한에서 더 유명했다. 그래서 또 우리는 국경을 넘은 그 순간부터 살인자가 됐을지도 모른다. 변화와 세계가 보이는 이 번영의 도시로 친구와 함께 걸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이 생각으로 초린이가 앞에서 웃으며 손 흔드는 데도 아무 반응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따라갔다.초린이가 삼촌이라고 소개한 사람의 집은 연길의 신광용의 집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평수도 꽤 넓었고 큰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볕도 무척 밝았다. 가죽소파에 앉을 때에는 뒤로 넘어지는 줄 알았다."일단 피아노를 보여 주십시오."아들 전용으로 보이는 작은 방에 검은 색 YAMAHA가 있었다. 나는 의자에 앉기 바쁘게 페달부터 밟아보았다. 그동안 얼마나 피아노를 그냥 방치했으면 오른 쪽 페달이 눌러지는 것이 아니라 뻑뻑한 게 긁히는 감이 들었다. 건반을 맨 아래 옥타브 음부터 위까지 눌러보니 소리는 괜찮아보였다. 검은색 건반들도 비교적 정상이었다. 다만 조율하지 않은지 좀 오래된 것 같았다. 나는 피아노는 노래하는 생명이기 때문에 자주 관리해주지 않으면 계절과 집안의 온도 변화로 사람의 목소리처럼 음정에도 이상이 온다고 훈시했다."한번 해봐요" 초린이가 참지 못하고 졸랐다.나는 숨찼던 시간들을 잊고 잠시나마 안정을 얻고 싶은 갈망에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를 속으로 먼저 의미해 봤다. 그러고나서 "라" 온음을 왼 손으로 지그시 누르며 오른 손으로 미 라~도 미 라~도 이렇게 8분음표로부터 시작하자 옆에 선 초린은 두 손을 살포시 마주 잡았다.나는 두 눈을 감았다. 가을의 고요를 들려주는 것만 같은 전반부 선율에서 긴장으로 종 종 잊었던 두고 온 집을 보고 싶었다. 아니 보였다. 내가 치던 피아노며 어머니가 늘 앉아 감상하시던 소파, 내 귀가 어두워진다며 아버지가 감춘 헤드폰 대신 녹음기 스피커에 갔다 대고 몰래 듣곤 했던 어머니의 청진기. 그리고 누나가 안고 있던 조카의 작은 손까지 보니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이별이 슬픔으로 이어지고, 소원이 공포로 변하던 여기까지 오는 길의 갈래마냥 내 손이 빨라지는 간주와 후반 부분에선 심장이 막 뛰었다. 마지막 음정과 함께 페달에서 조심히 발을 뗄 때에는 미간이 떨리며 끝내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물을 떠 가지고 온 초린은 건반에 그냥 올려 진 내 손에 쥐어주며 다른 때와 달리 조용히 말했다."우리 삼촌 좋은 사람이예요, 그치 삼촌? 나도 오빠가 한국 갈 때까지는 친구처럼 잘해줄게요."거실로 옮겨 앉은 우리는 앞으로 하게 될 일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초린의 삼촌 말에 의하면 애 교육은 신경 쓰지 말고 기회가 오면 내일이라도 당장 한국으로 가도 좋다고 했다. 아들에게 음악교육을 시키려는 이유는 전문성보다도 인성교육 차원이라고 했다.어린 나이에 비하면 너무도 고집이 세고 난폭해서 음악정서를 주입시켜 억지로라도 교정해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무엇이 중요한가 물었다. 나는 정서를 알자면 우선 음감부터 익혀야 하기 때문에 청음연습을 동반하며 피아노를 배워주겠다고 했다. 삼촌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지갑을 꺼내어 50원을 내밀었다. 초린이가 손뼉을 치려다 말고 자리를 박차며 발끈했다."삼촌 더 주세요!"당황한 나는 집에서 먹고 자는 것만으로도 큰 신세라며 일어선 초린의 손을 잡아당겼다. 순간 그 손의 부드러움이 내 살 속으로 스며들었다. 산 속에서 날을 새고 소외양간에서 쪼그리고 잘 때 친구와 내가 주로 만졌던 것은 거친 것들밖에 없었다. 때로 친구의 손을 덥석 잡을 때에도 사람의 손이라는 생각을 못했었다. 떨리는 전율이 만져졌고 뜻밖에 살아난 두 목숨이 만져졌을 뿐이었다.나는 초린의 그 손에서, 그 촉감에서 삶과 인간의 향수가 느껴졌다. 지금도 나는 선불일 뿐이라며 한 달에 350원을 주겠다고 말하는 삼촌을 향해 눈물에 젖어 쏘아보던 초린의 그 눈을 가끔 그려보군 한다.우리가 이야기를 거의 마칠 때쯤 문이 떨어져 나갈듯 열리며 조그만 애가 쳐들어왔다. 삼촌이 중국말로 소리치는데도 그 애는 무엇을 찾는지 아랑 곳 없이 온 집안을 뛰어다녔다. 그리고는 들어올 때처럼 나갈 때도 문이 깨져나갈 듯이 쾅 닫고 사라졌다.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10살짜리 어린 애가 아니라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듯싶어 웃음이 났다. 상상했던 것보다 그 애는 훨씬 씩씩했다. 눈 떠서 잘 때까지 뛰거나 고함쳤다. 매일 아침 9시부터 나는 가르쳤고 초린은 옆에서 통역하고, 이렇게 어른 두 명이 달라붙었는데도 통제가 안 됐다.피아노 앞에 앉으라면 의자위에 올라서 건반을 발로 밟았고 청음연습 시키려면 들려주는 음정마다 놀리듯 강아지 흉내 내며 멍멍했다. 보다 못해 삼촌 엄마가 한 손엔 막대기와 다른 손엔 칼을 들고 으름장 놓기도 했다. 초린의 설명에 의하면 삼촌엄마가 막대기를 들면 애가 부엌으로 달려가 칼을 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닐세라 삼일 후 그 녀석이 나에게도 칼을 장난감처럼 쳐들고 덤벼들기도 했다. 김광선에게 친구의 행처를 묻고 있는데 전화 선 코드를 뽑기에 쏘아본 것일 뿐인데도 말이다.나는 그날부터 음악선생이 아니라 독재자가 되었다. 야단치는 것은 기본이고 애가 반항하려면 시범으로 초린이를 때린 척 했고 초린이는 아파 죽는 척 했다. 한번은 어린놈이 초린의 가슴을 들여다보겠다고 막무가내여서 막대기로 엉덩이를 몇 대 때리기도 했다. 울지도 않고 씩씩대던 그 동심의 결심이 어떤 엄청난 계획이었는지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꿈에도 몰랐다.애가 밖으로 도망친 후 삼촌이 부르더니 70원을 주었다. 하여 내 주머니엔 120원이 모아졌다. 나는 그 돈으로 초린에게 밥을 사주고 싶었다. 고마워서이기도 하지만 그동안 도피생활로 잃었던 나의 인성을 찾고 싶었다. 떠돌며 쫓기는 과정에 밟히고 소멸된 내 인격과 자존심을 찾고 싶었다. 나를 인간으로 복원하고 싶었고 그 열정과 지혜로 하루 빨리 한국행을 다시 시도해보고 싶었다.해가 점점 식어가는 저녁 쯤 나는 처음으로 외출을 했다. 초린과 그의 대상, 이렇게 셋이서 웨이터들이 현관 앞에 줄지어 선 고급음식점으로 갔다. 내가 사는 밥이어선지 입맛에 맞았다. 초린의 대상은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맘이 통할만큼 괜찮아 보였다. 나는 비로소 초린이의 앞날이 안심되면서도 한편으론 그 대상이 은근 슬쩍 부러웠다."너 배신만 해봐라!"술이 조금 들어가니 이런 공갈도 하게 됐다. 웃으며 던진 그 말을 못 알아들은 초린의 대상은 좋은 뜻인 줄 알고 그냥 미소만 지었다. 나는 그때 언어란 것이 이렇게 중요하구나. 사람의 모든 감정은 언어로부터 시작되는구나 하고 새삼 알았다. 밥값은 내가 몰래 계산했는데 모태주가 비싸서인지 조금 모자랐다. 초린이 카운터로 달려와 야단치는 것을 나머지 돈만 겨우 내게 했다.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서탑으로 갔다. 대상이 거스름돈을 안 받겠다며 택시에서 먼저 내리자 초린은 기어이 받아내어 내 주머니에 살짝 넣어주었다. 나는 주머니에 들어온 그 손을 또 한 번 잡아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대신 초린이가 두 남자를 양 옆에 끼고 콩 콩 뛰며 걸어서 행복했다.삼촌 집 앞에서 초인종을 누를 때까지만 해도 웃고 떠들던 우리는 열려진 문 안의 광경에 굳어지고 말았다. 공안이 두 명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심장이 뚝 떨어지는 것 같았지만 왠지 이상하게도 죽고 싶은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다음의 상황에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삼촌 아들이 내 앞으로 흔들흔들 걸어오더니 내 배를 꾹 찌르며 중국말로 뭐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공안 한 명이 내 앞으로 바투 왔다. 대뜸 초린이가 나서며 그 말을 받았는데 나는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공안과 초린이 사이에 고성이 오고 갔다. 이때라 싶었는지 초린이 삼촌이 설명했다."우리가 전에 당신이 탈북자이기 때문에 공안에 말하면 붙잡히니깐 절대 밖에 나가 말하지 말라고 했어. 근데 오늘 저 놈이 나가서 탈북자가 있다면서 공안을 데리고 온 거요. 이 사람들이 그래서 왔는데 초린이가 금방 한국 사람이라고 했으니 절대 놀라지 말아요."공안이 나에게 손바닥을 펼쳐보였다. 초린이가 애인처럼 내 팔을 끼며 웃었다."여권 보여 달라고 해요. 가방을 분실했다고 내가 말해주겠으니 아무 이야기나 하세요. 빨리"우리의 긴장과는 상관없이 덩지 큰 초린의 대상이 다른 공안에게 꽥 소리쳤다. 아마 담배를 끊으라고 욕을 한 것 같았다."초린아. 미안해, 나 때문에 삼촌이 벌금 물리는 거 아니야?"내 목소리를 기다렸다는 듯 초린이가 공안에게 보다 당당하게 말했다. 그랬더니 공안이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급하게 했다. 초린이가 내 팔을 꽉 그러안았다."어머나! 차를 부르고 있어요, 어마나 어쩌지?"그리고 비명처럼 중국말로 소리치자 대상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공안을 콱 밀쳐버렸다. 그와 동시에 초린이가 내 앞을 다급히 막아섰다."뛰어요!"나는 계단을 몇 개씩 짚으며 미친 듯이 날아 내려왔다. 내 뒤에서 울리는 고함과 누군가 넘어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말이다. 그보다도 그 이후로 초린이와 영 영 헤어질 줄도 모르고 말이다.9.밖으로 달려 나와 나는 가장 구석진 곳에 숨었다. 혹시나 공안이 가고 나면 초린이를 만나고 싶어서였다. 설사 붙잡혀 북한으로 다시 끌려가도 감사하단 인사와 다음의 만남을 기약하고 싶었다. 그래서 아파트 현관이 보이는 어둠 속에 숨어 지켜보았다. 숨을 겨우 진정할 때쯤 사이렌을 울리며 공안 차가 왔다.뒤이어 두 대가 다시 들이닥치며 모두 8명이 내렸다. 4명은 올라가고 나머지는 나를 찾으려는지 흩어졌다. 그들 중 한 명이 날 발견할 수 있는 곳까지 접근할 때 나는 슬그머니 일어서 처음엔 걷는 척하다가 이어 냅다 뛰었다. 아마 십 분 넘게 달린 것 같았다. 공안이 따라 붙지 않았다는 것을 두 번 세 번 확인했을 때에야 허리를 숙이고 토하듯 기침하며 가슴을 두드렸다.그 밤은 몹시 추웠다. 연길에선 어떻게 산에서도 이틀이나 잤을까. 얼어 죽지 않았을까. 초린이 덕에 호강했던 며칠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사무치게 느껴졌다. 그래서 더 보고 싶었고, 도망칠 때 뒤에서 울렸던 쿵 소리가 공안이 문을 막고 있던 초린이를 밀어 버린 것은 아니었는지, 넘어지며 머리가 깨진 것은 아닌지 그가 불쌍해서 울고 싶었다.나는 내가 너무 멀리 왔음을 깨닫고 온 길을 더듬어 되 돌아가려했다. 그런데 초린이 삼촌 집에서 외출 첫 날 당한 일이라, 그리고 친구랑 함께 뛰었다면 약속대로 골목마다 오른쪽으로 돌아섰겠지만 너무 여념 없었기 때문에 좀처럼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창문에서 내려다 본 기억으로는 기차역과 여러 선의 레일들이 뻗은 곳이어서 나는 그 근처에서 온 밤 헤매었다. 내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그 한참 후였다. 그러나 나는 허전한 게 아니라 오히려 웃음이 났다. 초린이가 맛있다며 손뼉 치던 음식들이 아니었던가. 나는 그날 밤 장춘에서와 마찬가지로 PC방에서 잤다.다음날 아침 나는 다시 선글라스를 썼다. 시집노트와 신분증이 있는 곳을 만져보니 그대로였다. 가진 것이 많았다면 몰랐겠지만 그때에는 내 재산이 그게 전부여서 겨울옷은 주머니가 많아서 더 따뜻하게 여겨졌다. 초린이 삼촌 집을 찾아보려 노력했지만 어둠 속에서 미처 못 봤던 건물들이 난잡해서인지 밝은 낮이 도리어 더 캄캄했다.초린이가 표를 주었던 찜질방이라도 찾을 수 있다면 그 앞에서 가다려 보련만,,,,택시타고 움직였기 때문에 도통 알 재간이 없었다. 나는 목숨을 건 이 먼 탈출에서 좀 더 세심하고 치밀하지 못한 자신을 발견하고 심각하게 반성했다. 그리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고 마음을 가다듬으며 방법을 고심했다. 문득 광용이 생각이 났다. 전화를 걸군 했으니 그의 핸드폰에 삼촌 집 번호가 남아있으리라. 그래서 전화를 하면 초린은 기필코 다시 달려 나오리라. 그것이 안 된다면 그동안 고맙다고 인사라도 할 수 있지 않겠는가.전화를 찾아 두리번거리던 나는 돈! 이 생각에 기운이 빠졌다. 광용에게 전화하고 다시 초린이 삼촌 집으로 연결하자면 최소 1원이라도 있어야 하는데,,,나는 혹시나 떨어진 돈이라도 없을까. 본능적으로 보도블럭을 유심히 살폈다. 땅만 보며 30분 걸었는데도 땡전도 보이지 않았다.갑자기 초린이가 언젠가 이야기해줬던 서탑교회가 기억이 났다. 탈북자들이 거기 가서 동냥을 하는데 한국 사람들이 돈을 많이 준다는 것이었다. 어떤 탈북자는 그 돈을 모아 여권을 사서 편안히 갔다고도 했다. 하여 머리를 쳐들고 십자가가 솟아있는 그 하늘을 찾았다. 인생을 통째로 맡기는 구걸이 아니라 인간 對 인간으로서 전화비 1원만 부탁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것은 절대 동냥으로 되지 않으리라! 하지만 보이는 것은 부와 번영을 다투어 자랑하는 건물들과 고객을 부르는 광고 간판들뿐이었다. 그 속에 경회루라는 한글 간판이 보였다.나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점심 식사 전이라 청소하는 아줌마만 있었다. "안녕하세요"인사했더니 아직 식사시간 전이라고 말해 나는 얼른 서탑교회를 물었다. 그가 그려준 약도와 설명대로 15분 쯤 걸어서 찾아갔더니 마침 한 무리가 그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현재 크리스챤이다. 주말마다 강남교회에서 기도하는 지금 생각해보면 그 시간이 아마 예배 전이었던 것 같다.그때 그들이 흘리는 한국말이 나는 얼마나 반가웠던지 모른다. 내가 중국에 와서 처음으로 만난 내 민족, 대한민국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패션도 남달랐다. 옷감 재질이나 디자인도 중국 사람들과는 확실히 달라 보였다. 생머리 여자와 머리를 밤색으로 염색한 젊은 남자가 내 옆을 지나칠 땐 북한에서 보았던 "가을동화"드라마 주인공들 같기도 했다. 뿌듯했다. 나의 민족이 보기 좋아서 더 자랑스러웠다. 나는 이미 그들 속에 평등하게 서있는 것 같기도 했다.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말을 걸 수 없었다. 1원쯤은, 이런 생각으로 왔지만 1전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마치도 내가 아니라 내 아버지가 손 내미는 것 같고 내 어머니가 구걸하는 것 같아 도저히 용납 되지 않았다. 차라리 한국으로 보내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더 쉬울 것 같아 문을 열려는데 지키고 있던 사람이 물었다."어떻게 오셨어요?""목사 좀 만나려고 합니다. 꼭 말씀 드릴게 있어서 그럽니다."내 억양에서 북한 사람임을 금방 안 그 사람이 나를 밖으로 밀어냈다."죄송한데 목사님은 예배를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일요일에 오세요, 그때 돈 줄게요, 지금은 안 돼요."난 필사적으로 반항했다."난 돈 구걸하러 온 사람이 아닙니다. 돈 때문에 오지 않았습니다. 한국 가려고 왔다구요.""여기 탈북자들 오는 곳이 아닙니다. 영사관이나 대사관으로 찾아가세요, 탈북자들이 여기 자주 오기 때문에 공안도 근처에 많아요, 안 잡히겠으면 빨리 가세요."서탑교회를 빠져나와 공안을 뒤로 의식하며 걸음을 다그치는 나의 가슴 속에선 울분이 치솟았다. 시집 "내 딸을 백원에 팝니다"에는 "우리 말"이란 시가 있다. 남의 말에 억눌리며 살려 달라 애원하는 그 우리 말이 "남한 사람들이여! 당신들의 국어라고 생각해보시라"고 호소하는 시가 바로 그때 심경을 그대로 옮긴 시다. 나는 정말 그때만큼 대한민국이 미워본 적 없었다. 내 짚는 걸음마다 연길시장 끝에서 외치던 친구의 절규도 들렸다."우린 한국 못 가, 너무 사정을 모르고 왔어, 한국 사람만 만나면 다 될 줄 알았는데 아니잖아! 우린 지금 꽃제비야, 이러다 잡힐 건 뻔해. 잡히면 너나 나나 살 수 있을 것 같아? 3대멸족이라고! 그래서 잡힐바엔 차라리 죽으려고 샀다! 왜?"심장이 울렁거렸다. 친구가 선택했던 칼이 옳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지금 깨닫는 것을 친구는 그때 먼저 안 것일지도 모른다. 공원의 차디 찬 벤치에 앉아 갈 곳 없는 운명을 생각하니 만약 공안과 마주서면 어떻게 할까. 이런 마지막 상황을 그려보게 되었다. 만약 칼이라도 있었으면,,,혹시나 하는 마음에 윗 주머니를 더듬는데 무엇이 잡혔다. 손을 넣어보니 종이었다. 꺼내어 집어 던진 그 종이를 보던 나는 벌떡 몸을 솟구쳤다. 돈이 아닌가. 그것도 1원짜리 두 장이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만 같았다. 아니 어제 밤 택시에서 내릴 때 초린이가 기어이 챙겨 넣어준 거스름돈, 그 2원이었다."초린아!"나는 그 이름을 부르며 달렸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고, 주먹으로 씻고 나면 또 흐려져 앞을 가렸다. 마침내 전화를 밖에 내 놓고 통화 장사를 하는 아줌마에게 나는 돈을 던지다 시피하고 급히 수화기를 들었다. 그다음 광용의 목소리를 기다리며 초린의 얼굴을 생김 그대로 기억해내려 했다."여보세요""나예요, 내 말 좀 들어주세요"광용의 목소리가 들리기 바쁘게 통화시간을 단축할 일념으로, 그래야 초린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오직 그 한 생각으로 빠르게 말했다."돈이 없어 그러니 핸드폰을 이제 곧 닫고 내가 계속 통화를 했던 집 번호, 그 번호를 알려줘요, 내가 다시 금방 전화하겠으니깐,""지금 무슨 소리 하는거요?"다시 설명하려고 하는데 광용의 다음 말이 내 입을 막았다."친구가 죽었어요""뭐?""당신 친구가 죽었다구요""무슨 말이야! 똑바로 설명해 이 자식아!"고함치는 내 입도, 들고 있는 수화기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진정해요. 일단 진정하고 듣기만해요, 창용아저씨가 공안에 갔을 땐 친구 사진만 보여주더래요, 모른다고 하니깐 그냥 협박만 하다가 돌려보내더래요. 근데 어제 친구 작은 삼촌이라는 사람한데서 전화가 왔었어요. 친구가 당신이랑 헤어지고 나서 연길에 왔을 때 내가 말했잖아요, 친구 작은 삼촌을 찾았다고, 그때 내 전화번호를 주었었는데 어제 밤 전화가 왔었어요, 그래서 나갔더니 조카가 죽었다는거예요, 그것도 그냥 죽은 것이 아니라고 막 울어요. 공안에 붙잡혀 가던 도중 오줌 싸게 해달라고 차를 세워 벼랑에서 떨어져 죽었대요."나는 그 뒤의 광용이 말은 기억나지 않는다. 죽었다. 그 말은 내 친구와 이어질 수 있는 말이 아니어서 그냥 서있기만 했다. 설사 친구의 삼촌이 한 말이라도 절대 가능할 일이 아니었다. 사람이 어떻게 죽을 수 있는가? 다른 사람도 아닌 내 친구가 어떻게 죽을 수 있단 말인가? 틀리는 말 일거야, 아니 오해일거야, 속으로부터 치밀어 오르는 오열에 울지 말자. 울지 말자 스스로 타이르며 걸었다. 그러다 걸음을 뚝 멈춘 그 자리서 나는 주저앉고 말았다.친구가 그렇게 사정했는데도 사주지 않았던 술 생각이 나서였다. 잠시나마 한국행을 포기할지라도, 그래서 잠시나마 함께 나약해질지라도 그때 술 한 병 사서 먹었을 걸, 그러면 오히려 더 분발했을 걸,,,공안과 북한 보위부의 끈질긴 추격에 피가 타는 삶의 순간을 단 한 번 적셔보려 했을 뿐인데도 그 소원마저 이르지 못한 친구의 곡절에 울음이 터져 나왔다.그때 더 안타까웠던 것은 나에겐 돈 한 푼도 없었다. 그래서 위안으로나마 친구의 마지막을 기원하고 두 손 모아 빌어 줄 술 한 잔도 없었다!. 술 한 잔도 없었다!. 술 한 잔도 없었다!나는 자주 지인들에게 그 친구와 탈북과정을 이야기해주군 했다. 그러면 한결같이 글로 남기라고 했다. 하지만 탈북 후 5년 동안 친구의 마지막 운명을 부정하고 살았던 나였다. 혹시 글로 옮기면 지금도 어디선가 헤매고 있을 친구의 탈북을 방해할 것만 같은 미련 때문이었다.내가 대한민국 영사관에서 2달 반을 머무르고 있던 마지막 날들에도 내 얼굴을 알아본 청진과 무산에서 온 탈북자가 6명이나 되었다. 그때도 그들은 광용의 말과는 다르게 친구 소식을 전해주었다. 우리가 탈북 후 뒤늦은 조치인지 평성과 청진 등 전국 곳곳에 친구와 내 수배사진이 걸렸었다고 했다.평양시 중앙기관 사람들의 탈북인데다 친구 가문이 워낙 유명하여 사람들 속에서 소문이 자자했다는 것이다. 며칠 후 동인민반 회의에서 "배신자의 말로"라는 강연을 했는데 그 사례들 중 우리 이야기도 있었다고 한다.아마 그 6명도 이 수기를 보고 있다면 영사관에서 친구의 죽음을 결단코 부정하던 고집스런 나를 기억할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 친구의 이름을 알고 있는 평양에서 온 고위탈북자가 친구의 자살을 확인해주었고, 그 날부터 나는 매일매일 이 수기를 쓰게 되었다.이 저녁에도 나는 친구가 마지막을 결심할 때 그 심정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어질고 착한 그가 어떻게 몸이 부서지는 그 벼랑 밑으로 뛰어내릴 용단을 했을까. 하고 눈물 흘리게 된다. 북한은 중국 공안에 그를 살인자라고 신고했다.남을 살해한 도피자는 절대로 자살하지 않는다. 자유의 선택을 살인으로 규정한 김정일 독재가 살해했고. 북한의 악법인 3대멸족이 살해했다. 내 친구는 이렇게 나이 30에 죽었다. 창용아저씨가 비밀로 해달라던 그 700달러를 가슴에 품은 채, 대한민국에 오지 못한 한을 심장에 묻은 채 말이다.10.뜬 눈으로 날을 밝힌 후 나는 완전 다른 사람이 되었다. 더는 공안이 무섭지 않았다. 설사 잡힌다 해도 친구와 똑같은 선택을 하면 그만인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그때의 충격은 나에게 삶이란 매 순간이 기적이고 생명의 도전임을 느끼게 했다. 북경으로 가자! 나는 일어섰다.자살했다는 광용의 말은 친구가 그렇듯 자살하고 싶을 만큼 괴로운 처지이리라. 내가 빨리 가야 한국정부의 도움으로 그를 구출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광용의 말이 정말로 사실이라면 그렇게 가는 길이 곧 친구의 한을 갚는 복수가 될 것 같았다. 하여 나는 북경으로 가는 차비를 어떻게 구할 수 있을까? 머리를 싸쥐고 고민했다. 도둑질을 할 수 없었고, 그렇다고 일요일을 기다려 서탑교회 앞에서 동냥하는 것은 더욱 싫었다.나는 이 수기를 쓰는 기회에 심양 서탑의 경회루 사장님께 사죄를 하고 싶다. 이유야 어쨌든 나는 그 분께 사기를 쳤다. 구차한 변명이겠지만 그때 나의 처지에선 한글 간판이 유일한 희망이었고 그래서 경회루로 찾아들어간 것이다."사장 좀 불러주세요"나는 구걸이 아니라 빚 받으러 온 사람처럼 당당하게 사장을 찾았다. 잠시 후 나타난 40대 중반의 남성은 세무조사라도 나 온 중국 공무원 같은 내 폼을 살피더니 직원을 향해 소리쳤다."여기 차 두잔!"직원이 차를 놓고 가기를 기다렸던 나는 입을 열었다."전 북한에서 왔습니다."그러자 사장은 다시 소리쳤다."여기 밥 가져와!"나는 사실 문을 열고 들어설 때부터 요리 냄새에 창자가 끓었지만 그 말에 발끈하는 척했다."나는 밥 먹으러 오지 않았습니다. 그냥 말씀 드릴게 있어서 왔을 뿐입니다."사장은 나를 뚫어지게 보더니 이번에도 역시 직원들을 향해 소리쳤다."밥 취소! 가져오지 마!"나는 순간 오늘 굶겠구나 하고 속으로 탄식했다."혹시 000기업을 아십니까?""그 기업이라면 우리 한국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근데 무슨 일로?""그럼 그 회사 000회장님도 아십니까?""내가 어떻게 그런 분을 알겠소. 도체 뭘 물어 보려고?"나는 그 회장의 프로필을 알고 있었다. 북한에 있을 때 남한의 유명기업들을 대북사업으로 유도하기 위해 통전부가 작성했던 CFO들의 개인 자료들을 열람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통전부의 그 자료들을 토대로 나는 탈북자로서는 도저히 그렇게 알 수 없을 만큼 000기업 회장의 친인척관계와 알려지지 않은 약간의 가족갈등에 대해서까지 자세히 설명했다. 끝으로 중국 한인회 회장과 안면 정도는 있는 것 같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그러고 나서 또박또박 말했다."나는 그 분 조카입니다."사장은 차를 마시다 힐끔 쳐다보았다."큰 아버지가 지금 미국 갔는데 저의 탈북을 알고 모레 당장 사람을 보내겠다고 했습니다. 근데 나는 친구가 북경에서 기다리는 관계로 더 못 있을 것 같습니다. 내가 단순히 동냥이나 하러 왔으면 그 이상 요구했겠지만 난 지금 차비만 부탁드리려고 합니다. 꼭 갚겠습니다. 그 이상으로"아마 경회루 사장님은 속으로 코웃음 쳤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를 대단한 사기꾼으로 보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도 몰랐던 000기업 회장의 흥미진진한 직계 일화까지 주어 섬기는 것을 보고 정말 조카일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아무튼 경회루 사장님은 북경까지 250원 정도 소요될 것이라며 선뜻 내주셨다. 아직까지 중국에 가지 못한 이유로 나는 그 분께 빚을 졌다.훗날 심양에 가면 꼭 사장님을 만나 뵙고 용서를 빌고 싶다. 내 믿음으로는 웃으며 이해해주실 그런 분이시다.나는 그렇게 북경으로 갈 수 있었다. 버스에 오르기 전 터미널 근처에서 한국의 대표언론사의 신문을 샀다. 남이 보면 한국 사람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나는 북경으로 가면 어떻게 대사관이나 영사관으로 들어갈지 고민해보았다. 가장 큰 문제는 언어였다. 심양도 서탑을 벗어나면 힘든데 북경은 더 할 것이다. 아니 북경도 서탑처럼 한국거리가 있을 것이다. 그 쪽부터 찾아가야겠다고 결심하며 신문을 펼쳤다. 가보고 싶은 한국이어서 점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고 보게 됐다. 그런데 한 장 두 장 펼치던 나의 눈에 갑자기 불꽃이 튀었다. 한 쪽 작은 구석에 그 신문사 전화번호가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생각을 모으기 위해 눈을 감았다.북한 노동신문 같은 경우 중국 주재 특파기자 세 명 중 두 명은 단순히 기자가 아니라 대남공작부서와 국가보위부의 스파이다. 한국은 사기업이기 때문에 그런 일이 절대 없을 것이지만 그래도 특파기자의 업무 특성상 한국 국정원과 유대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바로 이 것이다! 특파기자를 찾자! 나는 무릎을 쳤다. 버스에 내리기 바쁘게 전화박스를 찾았다. 신문에 적혀있는 번호를 돌리는 동안 한국 영사관처럼 거절하면 어쩌나 싶어 두근거렸다."여보세요"아가씨 목소리였다."안녕하십니까. 제 말을 잘 들어주십시오, 저는 북한 중앙기관에서 근무하다 며칠 전에 탈출한 사람입니다. 저는 한국행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네 신문사에 특종을 제보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습니다.""잠시만요"아가씨의 목소리가 나보다 더 다급해보였다. 잠시 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여보세요, 반갑습니다. 우선 자신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소개해줄 수 있습니까?""나는 전화를 오래 할 수 없습니다. 지금 쫒기는 몸입니다. 그러니 당신네 신문사 북경 주재 특파기자 전화번호를 알려주십시오, 도청 될 우려가 있으니 반드시 그의 개인 핸드폰 번호를 알려 주십시오.""네 네, 알려드리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곧 알려드리겠습니다."나는 그가 알려준 번호를 즉석에서 다시 돌렸다. 훗날 특파기자는 나와 만난 자리에서 자기 핸드폰으로 탈북자가 전화 올지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했다. 나는 그 쪽 본사는 왜 그 정도로 멍청하냐고 웃으며 농담했지만 그때의 나에겐 그 전화번호가 운명적인 행운이었다."여보세요"특파기자 핸드폰은 세 번째 시도 끝에야 연결됐다. 나는 그 동안에 내가 한국 영사관과 통화할 때 어떤 점이 실책이었는가를 생각해 볼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단순히 탈북자의 한국행 소원보다도 내가 누구이고, 어떤 정보가 있으며, 그래서 한국에 어떻게 필요할 것이라는 구체적인 이해관계를 상대방에게 정확히 인식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그것도 단 한번 주어진 통화 기회에! 가장 분명하게!"저는 통전부에서 근무했던 사람입니다." 이 말로부터 시작한 나는 논리정연하게 탈북동기와 앞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현 처지를 이야기했다. 마지막엔 국정원과 연결시켜줄 것을 희망한다는 말로 끝맺었다. 그 분은 오랜 특파기자 경험이 있는지 아주 냉철했다."제가 국정원을 모르죠, 알 수도 없죠. 하지만 내가 아는 다른 사람에게 말해보겠으니 십분 후에 다시 전화 걸어보십시오"나는 정확히 십분 후에 수화기를 들었다. 그러자 다른 번호를 알려주며 지금 그 분이 기다리고 있으니 빨리 해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고맙다고 거듭 인사를 하면서도 혹시 날 피하려고 이러는 것이 아닌가 싶어 차마 전화를 놓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가 알려준 다른 번호는 신호음이 한 번 울리기 바쁘게 반색했다."여보세요""안녕하십니까. 저는 북한에서...""알고 있어요, 알고 있어요, 정말 만나고 싶었습니다."그 사람은 내 말을 서둘러 막으며 이야기했는데 그 내용들이 날 놀라게 했다. 그는 내가 친구와 함께 언제 탈북했으며 살인자로 수배되고 있다는 것, 공안은 물론 중국 국가안전국에서도 쫒고 있다는 것과 북한 대사관으로 어제 북한 국가보위부가 나왔다는 것까지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물었다."지금 친구랑 같이 있지요?"친구와 헤어졌다는 나의 대답에 침묵을 지키던 그는 다시 물었다."그럼 당신 신분을 확인시켜 줄 수 있는 신분증이 있지요?""네, 그건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갖고 있습니다.""알았습니다. 당신만이라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친구는 훗날 찾기로 하고, 그러니 그 자리에서 절대 떠나지 마세요. 우리가 최대한 빨리 가겠습니다."그 다음 과정부터는 나는 이야기 할 수가 없다. 내가 더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고마운 손길들의 보호로 안정을 보장 받은 그 나날에도 나는 폭풍의 공포에서 고요의 공포에 떨었다는 것이다.내가 미처 몰랐던 중국 국가안전국의 추격과 나를 체포하기 위해 별도로 북경까지 파견된 국가보위부의 존재감 때문이었다. 실제로 탈북 전 업무 차로 북경 주재 북한 대사관에 들렸던 평양출신 한 고위 탈북자는 내 사진을 들고 온 국가보위부 사람들과 대화 한 적도 있었다. 그 자리서 북한 보위부 사람들은 한 놈은 잡았으니 나만 무조건 잡아 들어가면 된다고 했고, 북한 대사는 이 넓은 중국 땅에서 어떻게 찾냐고 푸념했다고 한다. 그는 얼마 전에 호혜일이란 이름으로"북한요지경"책을 냈다.그가 내 손을 잡고 전해주던 그 끔찍한 말들이 서울 생활 5년 동안 꿈에서 자꾸 들리기도 했다. 나는 북경 주재 영사관으로 가는 차 안에서도 혹시나 이 차가 북한 대사관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부들부들 떨었다. 얼마 후 양 옆에 바투 붙어 앉았던 두 사람 중 한 명이 말했다."장선생님, 이젠 웃으세요, 머리를 들고 저기를 보세요, 태극기예요. 대한민국 국기예요"나는 그들이 가리키는 손끝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정말 파란 하늘을 뚫고 일어 선 하얀 태극기가 있었다.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하겠는데 울음부터 쏟아져 나왔다.진정해야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했지만 나는 그 울음을 그칠 수가 없었다. 그때는 내가 참아야 될 눈물이 아니었다. 눈물이 참아주고 다독여 주어야 할 나였다.내가 믿어지지 않아서 울었고 함께 못 온 친구 얼굴이 떠올라서 또 울었다. 그때 천만마디 말로도 다 표현 못할 나의 격정을 시집 "내 딸을 백원에 팝니다"에 담았다. 태극기를 보았을 때, 그 깃발을 알지도 못했지만, 그 땅을 보지도 못했지만, 자유와 민주도 몰랐지만 그 밑에 온 몸이 무너져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고,11.탈북스토리 연재 후 많은 사람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런 엄청난 고생과 위험을 겪었을지 몰랐다며 어떤 분은 통화 과정에 울기도 하셨다. 그 분들에게 나는 2만 명의 탈북자들 중 한 사람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씀 드렸다. 아니 어쩌면 난 남들에 비해 덜 고생하며 탈북한 행운아일지도 모른다. 북한에서부터 갖고 나온 달러에 기댈 수라도 있었고, 창용아저씨, 신광용씨, 왕초린과 같은 평생 못 잊을 은인들도 만날 수 있었다.나의 굶주림이란 거지처럼 거리에서 동냥을 한 번도 하지 않아도 될 정도였고, 1월의 산 속에서 추위에 떤 날도 고작 이틀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대한민국 영사관에 들어갈 때까지 중국 땅에서의 방황도 남들처럼 수년세월이 아니라 20일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산속에서 몇 년을 토굴생활 하다가 온 탈북자들, 공안에 잡혀 북송됐다 살아 온 그 기막힌 운명들을 글로 옮겼다면 아마 나의 탈출기는 배낭여행 정도 밖에 되지 않았을 것이다.그들의 곡절 많은 탈북여정을 어떻게 다 그려낼 수 있겠는가. 탈북자동지회 홍순경회장님은 태국에서 북한 보위부에 납치되어 실려 가는 과정에 불행 중 다행의 차사고로 현지경찰에 망명을 요구할 수 있었다. 자유북한방송국 김성민 국장은 쇠고랑을 찬 채로 달리는 북한열차에서 뛰어내려 자유의 소원을 두 손에 꼭 모아 쥐고 무릎걸음으로 얼어붙은 두만강을 기어서 넘었다. 우리의 탈북은 한 목숨만으로도 부족한 것이기도 하였다. 탈북자구출센터 백명학 소장은 세 번이나 북송됐다 세 번 탈출하여 대한민국 품에 안길 수 있었다.조선일보 강철환기자는 노예 같은 북한공민의 권리조차 없었기에 인권을 찾아 요덕 정치범 수용소에서 살아 나온 사람이다.이렇게 온 우리들을 대한민국 국민들은 탈북자라고 한다. 그러나 탈북자란 그 이름마저 갖지 못한 채 이국땅을 방황하다 숨진 이들 또한 얼마나 많은가. 메콩강의 급류 속에서 튜브 하나에 가족의 운명을 실었다가 아이만 살려 보낸 한 부부의 비극도 있고, 영사관 진입 도중 공안들이 달려들어 눈앞에서 생이별한 눈물의 母女(모녀)도 있다.탈북! 그 말은 이렇듯 북한체제의 탈출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결심할 때 이미 생명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목숨의 탈출이기도 하였다.하기에 인류가 말할 수 있는 모든 비극이 가슴에 응축되어 피멍든 그들, 각자마다 최소한 이별의 아픔이라도 부여안고 모대기는 그들이 바로 우리 2만 명의 탈북자들이다.나는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부르짖고 싶다. 당신들에겐 그냥 태어난 대한민국이지만 우리 탈북자들에겐 이렇게 죽기를 각오하고 찾아오지 않으면 안 되는 대한민국이라는 것을! 정녕 조국이란 태어난 곳이 아니라 죽어서도 묻히고 싶은 곳이라는 것을!나는 또한 대한민국의 어르신들에게 엎드려 큰 절을 드리고 싶다.내 조국 반쪽이라도 이렇듯 자유의 땅! 민주의 땅! 선진화의 땅으로 만들어주셨기에 우리는 우리의 생명도 사람의 것이라고 기어이 살아서 가리라! 외치며 사생결단 찾아 올 수 있었다.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나의 두 눈에선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진다.대한민국 흙 한줌도 보듬고 싶을 만큼 이 땅이 고마워서 울고, 그래서 북한에 두고 온 그리운 얼굴들 때문에 또 운다. 이별은 떠나는 마음보다 보내는 마음이 더 아프다 했지만 살아도 삶이 없던 그 땅에선 이별의 권리마저 없었기에 그 아픔마저 주지 못한 나는 이별의 죄인이다.어디 나뿐이겠는가. 우리 탈북자들 모두가 아직도 탈북하지 못한 가슴 반쪽을 부여잡고 좋은 음식이면 좋은 음식에 목이 메어 울고, 설날이면 또 가는 한 세월에 울고 있다. 분단의 철책선이 땅에만 아니라 그렇듯 생살까지 찢으며 가로 지른 그 수난자들이 바로 우리 탈북자들이다.이 수기를 쓰는 며칠 동안에도 나는 5년 동안 겨우 잠재웠던 악몽에 또 다시 시달려야 했다. 두만강을 넘다가 총에 맞기도 했고, 창용아저씨 장모집 옆 빈농가에 숨어있다 불쑥 나타났던 공안의 얼굴에 화들짝 놀라기도 했다. 친구가 공안의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 날 살리려고 벼랑에서 뛰어내린 꿈을 꾼 날에는 한 밤중에 일어나 앉아 소리 내어 울기도 했다.북한 땅에서 어떻게 살았던가 싶을 만큼 기억만으로도 공포에 시달려야 했고 악몽만으로도 숨 가쁜 생사에 가슴조려야 하는 탈북자가 어디 나뿐이랴.그렇다. 우리 탈북자들은 결코 북한체제를 탈출만 한 사람들이 아니었다.우리의 탈북은 땅에 묻은 사람들의 복수였으며 독재 권력과 인간과의 치열한 전쟁이었으며 살아서 온 인간의 승리였다.나는 이 수기를 마치며 소원하건대 심양의 왕초린을 찾고 싶다. 내가 인터넷에 글을 올린 이유 중 하나가 그 때문이기도 하다. 지금쯤 대상, 아니 남편이 되었을 그 친구와 결혼도 하고 어느덧 애들도 가졌을 것이다. 어느 날 불쑥 연락이 와서 친구처럼, 아니 친척처럼 소식을 주고받고 내왕도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루에도 수십 번 공상을 해 본다.영사관에 들어가면 신광용에게 전화를 자유롭게 할 수 있고, 그러면 초린이에게 내 소식도 전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나의 보호를 위해 허락해주지 않았다. 며칠 동안 졸라 마침내 나대신 다른 분이 연락을 넣어 봤지만 그때 신광용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 후에 주민등록증을 받아 대한민국 국민이 된 날 창용아저씨를 통해 바뀐 광용의 전화번호를 알 수 있었고, 그렇게 우리의 인연은 지금도 끈끈하게 이어지고 있다. 안타깝게도 광용은 초린이 삼촌 집 전화번호를 기억해 내지 못했다. 현재 광용은 탈북자인 청진여자와 함께 노원구에서 살고 있다. 예쁜 엄마를 닮은 아들도 있다.창용아저씨는 우리가 준 700달러로 견인기 대신 소 한 마리와 가전제품을 샀다고 했다. 나는 그들에게, 아니 조선족 사람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다. 솔직히 그들이 없다면 오늘날 2만 명의 탈북자도 없다고 본다. 비록 사회주의 중국에서 살고 있지만 민족적 동정심과 인간의 양심으로 김정일 정권에 침을 뱉는 그들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 탈북자들에겐 숨어있을 은신처와 얻어먹을 만두가 있고 탈출의 방법도 있었다. 그러고 보면 김정일은 민족의 포위망에 든 셈이다.분단의 38선 너머에는 자유민주주의 국민이 있고 내부에는 주민들의 분노가 있다. 북쪽에는 김정일을 민족의 수치로 생각하는 우리 조선족 사람들이 탈북자들의 탈출을 도와주고 있다. 그들은 중국에선 소수민족일지는 몰라도 대한민국에는 민족과 영토의 유구한 역사와 그 가치의 대를 잇고 증명하는 大민족이라고 본다.나는 누구보다도 먼저 우리 탈북자들이 그들에게 감사하고 단체 차원에서 연대활동도 벌려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더 많은 탈북자들을 구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절실히 필요하고 그들이 우리의 예의와 도리에 감동하여 탈북자들을 위해 아낌없는 지원을 하게 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정부 차원에서도 조선족 사람들이 親한정서를 가질 수 있는 정책을 추진하여 김정일 정권을 더욱 고립시켜야 한다. 또 그것이 북한체제 붕괴에 대비하는 하나의 방법이기도 하며 궁극적인 통일의 위업이라고 본다.나는 인터넷을 통해 공개되는 이 수기를 볼 북한 통전부 친구들에게 나의 오늘을 자신 있게 말해주고 싶다. 나는 밥 한 줌에 생명을 느끼고 산 속에서 추위에 떨며 날을 새던 도피자가 더는 아니다. 못 알아들을 중국말에 멸시받고, 개처럼 쫓기고 밥 한줌 값도 안 되는 동전을 소원하던 김정일정권의 주민이 아니다.나는 현재 국책연구소의 선임연구원으로 근무한다. 대학 강의도 나가고 내 손으로 쓴 책“내 딸을 백원에 팝니다”와 “김정일의 마지막 여자”를 누구의 간섭이 없이 출판할 수도 있었다. 한 달 전엔 서울 친구들도 부러워 할 새 아파트도 가졌다.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대신해주는 고마운 어르신들의 존함을 여기에 적는다면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될 것이다. 나는 이렇듯 충성으로 바치는 삶이 아니라 성취로 가지는 삶을 살고 있으며 민주적인 선거권으로 대통령을 결정할 수도 있다. 나는 내 목숨이 소중하고 내 삶이 이렇듯 풍부해질 수 있다는 것을 이 땅에서 처음 느꼈다.김정일은 자기에겐 불가능이란 없다고 했다. 그 불가능이란 정권도 총에서 나온다고 말할 줄 아는 독재자의 파렴치하고도 타락한 가능이다. 그러나 나에겐 인간으로서의 불가능이란 없다. 나는 이미 저 북한에서, 그리고 한국으로 찾아오는 험난한 길에서 극도의 공포도 체험해 보았고, 외로워 보았고, 슬퍼 보았고, 친구를 잃은 상실의 아픔도 느꼈다. 나에겐 이젠 더 이상의 아픔이란 있을 수가 없다. 이제 또 어려운 일에 부닥칠지라도 지금껏 겪었던 그 모든 좌절과 비극에 절대 비할 수는 없다. 얼마든지 견딜 수 있으며 백번이라도 다시 일어날 용기가 혈맥에 가득 차 넘친다. 대한민국에서 나에겐 행복할 권리와 성공의 의무만 있으며 또 그것을 위해 열심히 살 앞날만 남았다. 그 모든 것을 바칠 평생의 반려자를 찾아 새 가정도 예쁘게 만들기도 하리라. 이것이 바로 자기에겐 불가능이란 없다는 독재자 김정일과 전혀 다른 나의 무궁무진한 인간의 가능이다.그동안 저의 글을 보아주신 여러분께, 그리고 저의 탈북스토리를 특별히 배너로 만들어 소개해준 뉴데일리, 조갑제닷컴에 진심으로 되는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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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세계각지의 근황
레바논 베이루트 중심가에서 단체로 춤을 추는 학생들. (Reuters)
미국 인터넷 기업 ‘페이스북’의 첫 주식 거래를 기념해 마크 주커버그 최고경영자가 뉴욕 주식거래 개장 행사에 참석한 가운데,
캘리포니아 주 페이스북 본사 직원들이 대형 중계화면 앞에서 환호하고 있다. (Reuters)
카자흐스탄 바이코누르에서 발사 중인 소유즈 우주선 TMA-04M호. (NASA/Bill Ingalls)
버마 랑군 외곽, 다닌공 역 주변 고물 야적장에서 쓸만한 물건을 찾는 소녀와 동생. (Reuters)
한국 서울 조계사에서 불기 2556년 부처 탄생일을 기념해 걸린 색색의 연등. (AP)
독일 프랑크푸르트 유럽 중앙 은행 앞에서 경찰에 의해 해산되는 시위대. (AP)
쿠바 아바나 혁명광장의 노동절 기념 행진. (Reuters)
'유로2012' 를 앞두고 폴란드 바르샤바 시에 설치된 대형 축구공에 서명하는 관광객과 주민들. (AP)
러시아 모스크바의 한 식당에서 맥주를 마시는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왼쪽)과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당선자. (AP)
프랑스 파리에서 거미 인간, ‘스파이더맨’으로 알려진 등반가 알랭 로베르트가 231미터 높이의 ‘퍼스트 타워’를 오르고 있다. (Reuters)
파키스탄 라호르 운하에서 더위를 식히는 한 소녀. 최근 파키스탄은 섭씨 40도를 웃도는 무더위가 계속되고 있다. (AFP)
중국 단동과 접한 북한 신의주 황금평 섬에서 중국 관광객을 향해 장난치는 북한 군인들. (Reuters)
팔레스타인 요르단강 서안지구 라말라에서 오페르 군 감옥을 향해 돌을 던지는 팔레스타인 청년들.
1948년 이스라엘 건국과 함께 시작된 아랍의 재앙을 의미하는 64번 째 ‘낙바’를 맞아 벌어진 시위다. (AP)
파키스탄 카라치에서 아프가니스탄 내 나토 군에 연료를 공급하던 유조차들이 주차돼있다. (AP)
그리스 아테네에서 열린 2012 런던 올림픽 성화 채화식. 그리스 여배우 이노 메네가키가 성화를 전달하고 있다. (Reuters)
팔레스타인에서 오는 15일 ‘낙바’ 기념일을 앞두고 열린 집회에 참가한 어린이들. ‘낙바’는 이스라엘의 건국일로,
팔레스타인에서는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치욕적인 전쟁을 뜻한다. (Reuters)
중국 산시성 시안에서 열린 합동 전통 결혼식에서, 한나라 전통복장의 신혼부부들이 맞절을 하고 있다. (Reuters)
우크라이나 키에프 서부, 클레벤 마을에 위치한 ‘사랑의 터널’. 폐쇄된 철로가 명소가 됐다. (Reuters)
2012 이탈리아 리그 챔피언 결정전에서 승리한 유벤투스의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 선수. (Reuters)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취임식이 열린 가운데, 크렘린 궁 외곽에서 발사된 축포. (AP)
일본 도쿄 거리에서 증시 현황을 보여주는 전광판. 그리스 발 경제 위기와 미국 경기 불안으로, 니케이 지수가 123.34 포인트 급락했다. (AP)
미국 시카고에서 철거 중인 8미터 높이의 영화 배우 마릴린 먼로 동상. 선정성이 문제가 돼 결국 철거됐다. (Reuters)
예멘 사나의 한 학교에서 테러 관련 수업을 듣는 학생들. 예멘에서는 테러 근절 주간이 시작됐다. (Reuters)
바티칸에서 열린 스위스 근위대 기념 행사. 스위스 근위대는 교황궁의 치안과 교황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다. (AP)
싱가포르 금융 지구에 설치된 20~50 미터 높이의 ‘슈퍼트리’와, 이를 연결해서 사람들이 지나다니도록 한 ‘OCBC 스카이웨이’.
공중에 녹지를 조성하고, 열대도시로의 이미지를 과시하기 위해 건설됐다. (AP)
2012 한국 여수 박람회의 주요 볼 거리 중 하나인 ‘빅 오’. 물을 뿜어서 만들어진 스크린에 화려한 조명과 영상이 펼쳐진다. (AP)
인도네시아의 대표적 불교 유적, 마겔랑 보로부두르 사원에서 와이사크 축제가 열린 가운데, 하늘로 날려보낸 제등. (AP)
미국 뉴저지 웨스트오렌지에서 바라본 맨해튼의 빌딩 숲과 보름달. (Reuters)
남아프리카 케이프타운에서 안개에 뒤덮인 항구. 남반구는 겨울의 시작을 앞두고 있다.
바다펌
면죄자작성일
2012-05-23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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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북한 전망대] 한국 경제서적 모으기
[북한 전망대] 한국 경제서적 모으기
2012-05-10
MC: 북한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북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일들을 진단하는 뉴스해설 ‘북한전망대’입니다. 이 시간엔 ‘한국 경제서적 모으기’에 관해 이야기해 봅니다.
“한국 경제서적을 모으시오”
북한이 한국 경제관련 서적을 수집하고 경제정책 수립에 영향력이 큰 학자에 대해 알아보고 있다고 합니다. 북한당국이 한국의 경제발전상을 더는 외면할 수 없어 한 수 배워 북한 경제를 살리려는 것인지 정확한 속내는 알 수 없지만, 북한지도부에서 “남조선 사람들은 왜 그렇게 잘 사는가” 하며 궁금해하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북한인권단체 관계자는 북한당국이 중국에서 활동하는 국가보위부 요원들에게 이 같은 지시를 내렸다고 전했습니다. 어느 보위부 요원은 중국에 나가 있는 한국 선교사에게 이 책들을 구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답니다. 발등에 불이 붙었는지 무척 다급한 모양입니다. 하기야 북한의 경제현실을 고려하면 늦어도 이미 한참 늦은 셈이지요. 그래도 뒤늦게라도 진정으로 배우려 한다면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사실 한국의 경제발전에 관심을 보인 것은 북한이 처음은 아닙니다. 멀리는 아프리카와 중동, 중남미에서 가까이는 동남아시아에서도 높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1950년 한국전으로 쑥대밭이 된 국토를 50여 년 만에 맨손으로 이만큼 일궜으니 그럴만하지 않습니까?
동족상잔의 전쟁을 치른 남북한은 그야말로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출발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경제가 파탄지경이었습니다. 이후 공산주의 경제체제를 고수해 온 북한과 자유주의 경제를 실천한 한국은 수십 년 만에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한국은 2011년 현재 수출규모가 세계 9위, 국내총생산은 11위를 기록했습니다. 반면, 북한의 국내총생산은 한국의 5%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미국 중앙정보국이 추정했습니다. 그러니 다른 나라들이 한국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본다고 해서 주체의식이 없다고 손가락질 할 수 있겠습니까?
베트남(윁남)은 한국경제를 본떠 중장기 사회경제발전계획을 수립했습니다. 쿠웨이트와 카자흐스탄, 그리고 도미니카공화국도 국가개발계획을 세웠습니다.
한국 발전의 동력이 된 1970년대의 새마을운동의 불길은 이제 아프리카로 번졌습니다. 콩고민주공화국 마을 곳곳에 생겨난 새마을조직위원회와 르완다의 새마을 시범마을이 좋은 예입니다. 이들은 “‘어떻게 하면 한국처럼 될 수 있을까?”라는 물음을 입에 달고 산다고 합니다.
한국 정부는 2004년 ‘경제발전 공유사업’(KSP)을 시작해 지난 8년간 34개국을 대상으로 300여 건의 경제자문을 해주었습니다. 이젠 아프리카나 동남아의 후진국과 개발도상국뿐 아니라 사우디아라비아, 브라질, 멕시코 등 중동, 중남미의 중진국도 한국을 배우고 있습니다. 경제계 거물들이 직접 한국을 방문해 세계적 기업으로 우뚝 솟은 한국 기업들에서 현장학습을 받았습니다.
기업인만이 아닙니다. 아시아, 아프리카, 중동 각국의 공무원들이 잇달아 한국에 가서 경제개발 모델을 배웠습니다. 한국경제를 바로 배우려고 한국어 공부에도 열중하고 있습니다. 일례로, 아프리카 53개국의 교육장관 협의체인 ‘아프리카교육발전협의회’는 지난 2월 총회의 사전행사로 ‘한국의 날’을 개최해 한국과 한국어를 어떻게 하면 잘 배울 수 있을지 논의했습니다.
북한이라고 경제 개혁을 시도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2002년 경제 개혁을 시도했습니다. 신의주, 금강산, 개성을 경제특구로 지정하고 기업의 경영권을 확대했습니다. 그러나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당연한 결과이지요. 변하지 않는 세습 독재체제에서 진정한 변화를 추구하는 경제 개혁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한 가닥 희망을 걸어봅니다. 북한 지도부가 한국 경제서적들을 수집한다니 말입니다. 세계 여러 나라에 한국은 ‘경제개발의 교과서’입니다. 북한지도부가 이 책들을 정독하고는 “아 이래서 한국이 그렇게 발전했구나” 하고 무릎을 탁 쳤으면 합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 박봉현입니다. Copyright ? 1998-2011 Radio Free Asia. All rights reserved.
퀘팍팍작성일
2012-05-11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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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글터] 미스테리이야기
1억 4천만년전에 만들어진 쇠망치
나무 손잡이에는 수정과 방해석(方解石) 결정들이 박혀있고, 부분적으로 화석이 되었다. 베텔 연구소에서 검증한 결과, 망치는 특이한 금속(쇠:96%, 염소:2.6%, 황:0.74% , 탄소:없음)으로 만들어졌다고 밝혔다. 그것은 매우 단단하게 주조했고, 망치 표면은 산화철로 되어서 녹을 방지하고 있다. 이 산화철은 일반환경에서 쉽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망치를 발견한 곳은 1억 4천만년전에 형성된 지층이다. 그 당시에는 공룡들이 번성했던 시기였다. 인류와 공룡이 공존한다는 것은 진화론에 위배된다. 그렇다면 이 망치는 공룡이 만든 것일까?
수만 년 전의 알루미늄 물체
1974년 루마니아의 aiud에서 제방공사를 하던 인부들에 의해 발견된 이상한 물체입니다.
학자들의 분석에 의하면 이 물체는 수만년전의 것으로 추정되며 이 물체의 성분은 놀랍게도
알루미늄이 89%를 차지하고 그외 니켈,실리콘,코발트같은 성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합니다.
길이는 20센티. 넓이는 12.5센티정도인데 이 물체가 우주선의 다리 받침대부분같은 것의 용도로
사용된게 아닌가라는 추측도 있다고 합니다. 수만년전에 알루미늄을 사용한 이들은 누구였을까?
미스테리 첨단과학 유물들..
치열한 전쟁터에서는 이상한 체험이나 기괴한 현상이 흔히 일어난다고 한다.
이를테면 제2차대전이 끝나던 해인 1945년 그 당시 일본군의 한 사병이었던
이나가키는 필리핀의 민다나 오섬의 밀림에서 너무나 이상한 체험을 하게 되었다.
아니가키는 전선에서 식량이 떨어져 작전본부까지 식량 수령을 위해 전선의 토인 오두막을 출발하여
밀림속의 지름길을 달리고 있었다. 얼마후 밀림속에서 야전병원이 나타났는데 이상하게도 그 병원 안에는
사람이라고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병원 앞의 광장에는 일본군의 시체가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비참하게 나뒹굴어져 있었다.
본래 야전병원을 둘러싼 밀림지대는 웬일인지 원주민들조차 몹시 두려워 하였으며 마경 이라 부르는 곳이었다.
이나가키도 물론 마경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밀림속의 냇가를 따라 나 있는 길을 따라가만 가면
길을 잃어버릴 염려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이윽고 두 갈래길에 이르렀는데
그는 시냇물 소리가 들리는 바른쪽의 길을 택해서 전진했다.
그런데 밀림속의길을 어떻게 걸었는지 이나가키는 야전 병원앞 광장으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이번에는 밀림의 두 갈래 길을 왼쪽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어느 사이에 또다시 야전병원의 시체가 쌓여 있는 곳으로
되돌아 오고마는 것이 아닌가. 이나가키는 세번,네번, 계속해서 몇번씩 시냇물 을 확인하면서 길을 걷거나
혹은 표적을 해가면서 밀림을 전진하였지만 역시 병원 앞 광장으로 되돌아왔다.
이나가키는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사흘 밤낮을 무서운 마경의 밀림지대를 헤매며
번번히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헤메었다. '그렇다면 저 야전병원 광장의 시체는 혹시 마경의 밀림에서
출구를 찾지 못하고 끝내 지쳐서 사망한 사람들인가 ' 문득 그런 생각에 사로잡힌 아나가키는 갑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미친듯이 계속 뛰어서 강물을 발견하고 뛰어들어서 전선의 토인 오두막집으로
도망쳐 돌아왔다는 것이다.
이 기괴한 마경지대는 방향 감각을 혼동시키는 불가사의한 4차원 지대 였을까. 아니면 단순한 환각 현상이었을까.<출처 : 4차원의 세계와 심령과학>
지구공동설
지구공돌설이란 말 그대로 우리가 사는 이지구는 속이 비어있다는 것입니다.
즉, 이렇게 생겼다는 말이 됩니다.
물론 지구공동설에도 다양한 주장이 있지만 가장 그래도 쓸만해 보이는건 저런 상상도입니다.
지상인들은 태양을 근원으로 살아간다.. 그렇다면 지하인들은?
생성당시 아주 무거운 것들은 인력의 영향으로 가운데로 모여들어 불타오르게 되었다.
바로 그게 핵이다.따라서 핵을 제 2의 태양 삼아 살아간다.
이러한 지하에는 매머드도 살아있으며 과거 빙하지역에서 발견된 매머드는 길을 잃은 매머드가
헤매다가 밖으로 나와 얼은 것이다.
남극과 북극에는 어떤 특정한 시기에 얼음이 갈라져 길이 열리며 거대한 통로가 생긴다.
핵을 태양삼아 살아간다...
그렇다면 밤이 없는 세상이겠죠.
이러한 지구공동설의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드는 근거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 북극에 동물들은 겨울철이 오면 남쪽으로 내려오는 것이 아닌 북쪽으로 이동한다.
따라서 그쪽 어딘가에 따뜻한 지역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 남극과 북극을 탐험하던 사람들이 붉은색, 노란색 등의 눈이 내리는 것을 보았던 사람이 있으며
그 눈 색이 그러한 이유는 꽃가루 때문이다. 그런데 남극과 북극에는 그렇게 대량으로 꽃가루가 날릴 지역이 없으니
지구내부에서 날려온 것이다.
-인공위성을 찍었을때 극점에 구멍과 같은 것이 나타난 적이 있다. 정부는 그것을 알면서도 감추는 것이 아닌가.
올랍 얀셉의 지하문명세계 생활담
노르웨이사람 올랍 얀센(1811-1906)은 어부인 그의 아버지 옌스 얀센(Jens Jansen)과 함께 북극해를 탐험하다가
우연히 지구 내부로 통하는북극의 열려진 구멍(굴뚝)으로 들어가 1829.8월부터 1831년초까지
약 2년반간 지구 속 문명세계에서 살았으며
나올 때는 남극의 지구 밖으로통하는 구멍을 통해 나왔다고 주장하였다(지구 밖으로 나오는 과정에서 올랍 얀센만
살아 남고 아버지 옌스 얀센은 사망하였다).
그후 그가 기록한 지하세계에서의 생활담과 그림들은 미국 캘리포니아의 한 이웃사람에 의해(올랍 얀센은 말년에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지구 속 문명(The Smoky God and Other Inner Earth Mysteries)
: 국내에서는 대원출판사가 간행」이란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이제부터 올랍 얀센이 전한 지구 속 세계의 문명상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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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하세계의 지표 : 약 3/4은 육지, 약 1/4은 물(대양). 큰 대양과 많은 강과 호수가 있음.
● 지구 내부의 태양 : 지구내부의 하늘 한가운데에 ‘연기의 신(The Smoky God)'이라 불리는 내부태양이 동쪽에서 떠올라 서쪽으로 짐(실제로는 모든 방향으로 동일한 힘으로 작용하는 불변의 중력의 힘에 의해 한 가운데에 고정되어 있으며, 낮과 밤의 효과는 지구의 자전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믿음). 그것은 우리 태양처럼 빛으로 빛나는 것이 아니고, 하얗고 온화하며 반짝이는 구름으로 둘러싸인 붉은 공모양의 형태임.
● 하루 : 낮 약 12시간, 밤 약 12시간
● 평균 수명 : 600-800세(참고 : 플레이아데스인, 시리우스인 등 3-4천세 장수하는 에테르체의 은하인류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짧은 수명이며 이는 이들이 우리와 비슷한 3차원의 한계를 지닌 지구인임을 의미함)
● 평균신장 : 3m 이상의 거인족
● 교통수단 : 수평이동은 물론 직상승, 하강등이 자유자재로 가능한 자기부상 열차와 목적지로 신속히 이동하는 바퀴없는 도로를 이용
● 언어 : 산스크리트어와 비슷한 언어를 사용.
●주 산업 : 농업. 모든 동식물은 지하인처럼 엄청나게 큼. 나무높이는 수십 내지 수백미터이고, 포도알은 오렌지만하며 사과는 사람 머리보다 크고, 코끼리(메머드)는 키가 23-26m의 6-7층 건물높이 만하고 새알 하나 크기가 60㎝ 길이에 38㎝ 폭이라 함.
● 기후 : 24시간마다 한번씩 비가 적절하게 내리는 것 외에는 기후가 일정. 대기는 ‘연기의 신’에 의해 고도로 충전된 전류자기장이 충만하며 이것이 동식물의 거대성장과 장수를 가능케 함.
● 사회생활 : 20세부터 30년간 학교생활(그 중 10년은 음악공부).
75-100세가 지난후에 결혼함.
● 주택 : 외형은 동일한 형태이나 완전히 같은 것은 없음. 주요한 모든 부분은 금으로 세공
● 과학기술 : 예술과 과학, 특히 기하학과 천문학이 상당한 수준. 지구 외부세계의 지리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고 있음
화닝o작성일
2012-04-25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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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북한 휴대폰, 이렇게 생겼다
북한 휴대폰, 이렇게 생겼다
북한의 휴대폰 가입절차는 과연 어떻게 이루어질까? 새해 1월 2일, 제대군인출신 탈북자들로 구성된 “북한인민해방전선”(사령관 장세율)에 의해 북한에서 사용 중인 3세대(3G)휴대폰이 최초로 국내에 들어왔다. 이러한 휴대폰은 현재 평양의 5개 고려링크 대리점에서 판매되고 있으며 지방 도시들에서는 체신성 산하의 전신전화국(전화국)이나 우편국(우체국)에서 판매되고 있다.
알려진 바와 같이 북한은 2002년 11월 일반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휴대폰 사용을 실시했으나 2004년 4월 용천역 대폭발 사건 이후 같은 해 6월부터 휴대폰 사용을 전면 금지시켰다. 이후 지난 2008년 12월 15일부터 북한은 이집트의 통신 회사인 오라스콤이 설치한 이동통신망을 이용해 평양-신의주에서 음성통화만 가능한 3세대 이동통신 서비스를 다시 실시했다. 현재 북한 내에서 휴대폰 사용자는 약 90만명, 대부분 평양시 주민들로 알려지고 있으나 신의주와 남포, 청진시와 원산 등지에서도 휴대폰 사용자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또한 90만대 가량의 휴대폰 가운데 약 20만대는 중앙기관(노동당 포함)과 군부대 부대장(연대장 이상)들에게 공급(국가가 지급)된 것으로 밝혀지고 있어 실지 북한주민들이 현재 사용하는 휴대폰 대수는 약 60만대 가량으로 추정되고 있다. 단말기는 가입비와 함께 현재 200유로(250~300달러)로 판매된다. 휴대폰의 번호는 남한과 비슷하게 10자리 정도인데, 번호는 ‘193’으로 시작된다. 사용요금도 전신전화국이나 우편국에 납부하는데, 선불로 최소한 북한 돈 5,000원 이상을 납입한 뒤 필요할 때마다 충전해서 쓴다. 사용설명서에서 보는 바와 같이 휴대폰을 통해 유희(게임)를 할 수 있고 다매체(동영상)촬영과 편집도 가능하다. 한국과 달리 운전 중 휴대폰 사용안내가 이색적이다. “전화기 사용자는 운전을 능숙하게 하여야 하며”, “급한상황을 제회하고 전화를 받거나 걸때에는 차도로의 대피선에 무조건 정차해야 한다”고 적고 있다. 또한 개인정보에 관해 “전화기로 진행하는 사진, 음성, 비데오촬영은 그로인한 문제에 대하여 법률적으로 책임지게 되며 우발적이라도 법질서를 위반하는 경우 해당한 책임을 지게 됩니다”고 강조하고 있다.
보는 바와 같이 기능을 두루 갖춘 휴대폰과 전국 서비스망이 구축된 북한의 휴대폰 통신 실태이지만 단말기 구입비와 가입비, 그리고 1분에 1달러나 하는 통화요금으로 하여 일반 주민들은 꿈도 꾸지 못하는 이동통신이다. 실지로 자유북한방송과 연계되어 있는 북한 내 주민들은 “일반 주민들이 사용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비싼 휴대폰인지라 앞으로 가격이 콱 내려가기 전에는 사용할 엄두를 내지 못하며, 그렇지 않은 경우 현재 사용 중인 사람들로 사용자가 고착될 것이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가자서작성일
2012-01-07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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