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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전국 읍 +면 +동 순위~내가 사는곳은 몇위??(스압 ,비쥄 有)|
순위 지역(XX동, XX면, XX읍) 인구(명)1 서울특별시 노원구 상계동 242,3912 서울특별시 강서구 화곡동 207,4433 서울특별시 양천구 신정동 193,9554 서울특별시 양천구 목동 164,9815 서울특별시 송파구 잠실동 163,5456 서울특별시 중랑구 면목동 161,7157 인천광역시 남구 주안동 160,8818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안양동 154,8969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중동 146,63710 경기도 시흥시 정왕동 144,67111 서울특별시 구로구 구로동 143,26212 서울특별시 양천구 신월동 142,45913 부산광역시 연제구 연산동 138,96514 인천광역시 부평구 부평동 138,37215 서울특별시 도봉구 창동 137,30016 인천광역시 남동구 만수동 136,71417 서울특별시 노원구 중계동 128,96218 인천광역시 서구 검단동 121,92619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 120,82920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 119,26321 서울특별시 서초구 방배동 118,55722 경상남도 김해시 장유면 117,67323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상동 116,77224 경기도 광명시 광명동 116,75825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신길동 116,37326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신동 115,41227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동 114,62228 서울특별시 광진구 자양동 113,08829 경기도 화성시 동탄동 109,43530 서울특별시 동작구 사당동 109,38031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동 109,04932 충청남도 아산시 온양동 107,61333 인천광역시 남동구 간석동 107,20334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정자동 106,70835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매탄동 105,21736 서울특별시 금천구 독산동 104,88537 인천광역시 남동구 구월동 104,83538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동 104,33139 인천광역시 부평구 산곡동 103,72040 대구광역시 수성구 고산동 103,46941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좌동 100,55742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 98,72643 서울특별시 강동구 천호동 98,11444 경기도 의정부시 신곡동 96,65045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영통동 95,69846 서울특별시 구로구 개봉동 95,25347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반여동 95,05948 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 일산동 94,67449 인천광역시 계양구 계산동 94,32650 서울특별시 노원구 월계동 93,51751 서울특별시 강남구 대치동 93,44652 부산광역시 남구 대연동 93,22953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사동 93,12954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92,32655 서울특별시 광진구 중곡동 91,90956 울산광역시 북구 농소동 91,25157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90,12258 부산광역시 남구 용호동 89,90159 경기도 파주시 금촌동 89,12460 대구광역시 동구 안심동 88,75161 울산광역시 남구 신정동 88,28062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동 87,81263 경상남도 김해시 내외동 87,24764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 87,23965 서울특별시 강서구 방화동 86,45666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86,08267 대전광역시 서구 둔산동 85,88068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효자동 85,77369 서울특별시 도봉구 쌍문동 84,96070 부산광역시 북구 화명동 84,79071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84,66372 인천광역시 남구 용현동 83,68573 서울특별시 강서구 등촌동 82,23374 서울특별시 강남구 개포동 81,93375 서울특별시 송파구 가락동 81,65976 인천광역시 부평구 부개동 81,62777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화정동 81,56578 전라북도 군산시 나운동 81,48279 서울특별시 은평구 응암동 81,47880 경기도 광명시 철산동 80,68381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선부동 80,05982 서울특별시 광진구 구의동 79,81583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쌍용동 79,77984 서울특별시 중구 신당동 79,24385 경기도 구리시 수택동 79,22686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죽전동 78,89487 경기도 김포시 김포동 78,43988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 78,30089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 78,18990 인천광역시 계양구 계양동 77,33591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 77,31592 경기도 광명시 하안동 76,18893 경상남도 김해시 북부동 76,01594 경기도 군포시 군포동 75,82495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풍덕천동 75,49396 서울특별시 강동구 암사동 75,29797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태평동 75,17798 대구광역시 서구 비산동 75,15499 인천광역시 연수구 연수동 74,231100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내서읍 74,130101 인천광역시 서구 가좌동 73,919102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제동 73,758103 서울특별시 강동구 성내동 73,619104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 73,248105 경기도 의정부시 송산동 72,748106 경기도 양주시 회천동 72,722107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야탑동 72,663108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호계동 72,260109 대구광역시 달서구 용산동 71,697110 서울특별시 성북구 장위동 71,589111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71,499112 경기도 의정부시 호원동 71,465113 부산광역시 연제구 거제동 71,425114 부산광역시 사하구 괴정동 71,423115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 71,417116 인천광역시 계양구 효성동 71,140117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인후동 70,716118 인천광역시 부평구 삼산동 70,595119 광주광역시 서구 화정동 70,585120 서울특별시 성동구 성수동 70,563121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용암동 70,548122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장안동 69,372123 대구광역시 서구 평리동 67,901124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상대원동 67,873125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비산동 67,606126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우동 67,535127 서울특별시 강남구 역삼동 67,355128 서울특별시 은평구 불광동 67,268129 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 주엽동 67,159130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대림동 66,904131 경기도 하남시 덕풍동 66,796132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66,627133 광주광역시 광산구 첨단동 66,546134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재송동 66,336135 대전광역시 유성구 노은동 66,268136 부산광역시 금정구 부곡동 65,639137 대구광역시 동구 신암동 65,530138 부산광역시 수영구 광안동 65,344139 인천광역시 계양구 작전동 65,261140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상현동 65,037141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송천동 64,473142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개금동 64,036143 대구광역시 수성구 만촌동 63,884144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소사본동 63,325145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역곡동 63,250146 서울특별시 강북구 번동 63,161147 부산광역시 사상구 주례동 62,805148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동백동 62,733149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 62,707150 부산광역시 북구 만덕동 62,613151 전라남도 순천시 왕조동 62,602152 서울특별시 강남구 일원동 62,585153 서울특별시 마포구 성산동 62,312154 인천광역시 연수구 동춘동 62,206155 인천광역시 서구 석남동 62,072156 경기도 의정부시 의정부동 62,064157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신흥동 61,444158 울산광역시 울주군 범서읍 60,960159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신갈동 60,914160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평화동 60,707161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복대동 60,568162 충청남도 보령시 대천동 59,972163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삼천동 59,902164 대전광역시 서구 월평동 59,692165 대전광역시 유성구 구즉동 59,576166 대구광역시 수성구 범어동 59,572167 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동 59,517168 광주광역시 북구 운암동 59,449169 경상북도 경산시 서부동 59,127170 경기도 시흥시 연성동 58,874171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세류동 58,850172 경기도 평택시 비전동 58,795173 경기도 오산시 대원동 58,792174 경상남도 창원시 성산구 사파동 58,235175 서울특별시 노원구 하계동 57,934176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은동 57,841177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가동 57,809178 인천광역시 부평구 청천동 57,540179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57,351180 울산광역시 동구 남목동 57,263181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이문동 57,240182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당감동 57,191183 서울특별시 구로구 고척동 57,088184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56,878185 대전광역시 유성구 온천동 56,842186 인천광역시 남구 학익동 56,655187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금광동 56,553188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화서동 56,352189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56,264190 부산광역시 남구 문현동 55,890191 광주광역시 북구 건국동 55,444192 서울특별시 강남구 도곡동 55,428193 부산광역시 금정구 구서동 55,409194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권선동 55,208195 대전광역시 서구 갈마동 55,185196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원곡동 55,178197 부산광역시 동래구 사직동 55,160198 서울특별시 중랑구 묵동 55,114199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55,096200 경기도 안성시 안성동 54,927201 광주광역시 서구 금호동 54,922202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반송동 54,777203 경기도 남양주시 오남읍 54,695204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동 54,532205 서울특별시 은평구 갈현동 54,486206 서울특별시 중랑구 신내동 54,311207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가경동 54,275208 서울특별시 성동구 금호동 54,138209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구미동 54,107210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서현동 54,014211 경기도 화성시 병점동 53,964212 서울특별시 중랑구 중화동 53,927213 대구광역시 달서구 월성동 53,552214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송내동 53,537215 인천광역시 부평구 십정동 53,511216 부산광역시 영도구 동삼동 53,435217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당산동 53,090218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부성동 52,991219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52,823220 전라남도 순천시 덕연동 52,732221 경기도 하남시 신장동 52,677222 부산광역시 사하구 하단동 52,619223 대구광역시 달서구 진천동 52,575224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 고강동 52,509225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조원동 52,303226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52,029227 대구광역시 수성구 지산동 51,913228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답십리동 51,832229 경상북도 구미시 인동동 51,817230 대구광역시 북구 태전동 51,653231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 원종동 51,578232 서울특별시 강동구 길동 51,446233 서울특별시 은평구 신사동 51,366234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51,351235 경상남도 창원시 성산구 반송동 51,340236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백석동 51,119237 부산광역시 동래구 안락동 50,991238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명곡동 50,880239 대전광역시 서구 관저동 50,836240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 50,831241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은행동 50,751242 광주광역시 북구 두암동 50,693243 서울특별시 강남구 논현동 50,641244 경기도 의정부시 가능동 50,520245 경상남도 양산시 중앙동 50,492246 부산광역시 사상구 모라동 50,438247 서울특별시 구로구 오류동 50,365248 광주광역시 서구 상무동 50,167249 서울특별시 서초구 양재동 50,131250 제주도 제주시 노형동 49,865251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 49,451252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49,406253 제주도 제주시 이도동 49,395254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고잔동 49,269255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초지동 49,191256 서울특별시 성북구 월곡동 49,154257 대구광역시 달서구 이곡동 48,988258 부산광역시 북구 덕천동 48,884259 서울특별시 성북구 길음동 48,804260 서울특별시 강동구 둔촌동 48,557261 강원도 춘천시 후평동 48,519262 인천광역시 연수구 옥련동 48,457263 인천광역시 서구 연희동 48,343264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읍 48,236265 서울특별시 송파구 송파동 48,073266 서울특별시 강동구 명일동 48,071267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47,974268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서신동 47,950269 울산광역시 남구 삼산동 47,697270 대전광역시 중구 태평동 47,630271 대구광역시 달서구 송현동 47,389272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전농동 47,376273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 47,311274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마두동 47,284275 경기도 안성시 공도읍 47,254276 경상남도 창원시 성산구 가음정동 47,156277 경기도 평택시 중앙동 47,124278 강원도 원주시 단구동 47,014279 전라북도 익산시 영등동 46,829280 서울특별시 동작구 신대방동 46,800281 대구광역시 수성구 수성동 46,750282 부산광역시 사하구 장림동 46,680283 대구광역시 서구 내당동 46,514284 서울특별시 마포구 망원동 46,472285 울산광역시 중구 병영동 46,398286 전라남도 광양시 중마동 46,374287 서울특별시 은평구 역촌동 46,297288 경상남도 김해시 활천동 46,231289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심곡동 46,189290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팔룡동 45,993291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부암동 45,875292 서울특별시 송파구 거여동 45,834293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관양동 45,782294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월피동 45,731295 광주광역시 남구 봉선동 45,591296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와동 45,555297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북가좌동 45,544298 대전광역시 서구 도마동 45,441299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수내동 45,401300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율천동 45,379301 충청남도 당진군 당진읍 45,216302 대구광역시 북구 침산동 45,182303 서울특별시 중랑구 상봉동 45,162304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오천읍 45,065305 인천광역시 남구 도화동 45,060306 경기도 군포시 산본동 44,926306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상갈동 44,926308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호수동 44,925309 부산광역시 수영구 망미동 44,900310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44,803311 경기도 의왕시 내손동 44,736312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가야동 44,731313 부산광역시 북구 금곡동 44,692314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우만동 44,680315 전라남도 광양시 광양읍 44,324316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 성곡동 44,291317 경기도 의왕시 오전동 44,236318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영등포동 44,202319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이매동 44,122320 경상남도 김해시 삼안동 44,119321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중산동 44,074322 강원도 춘천시 퇴계동 43,850323 인천광역시 부평구 갈산동 43,808324 경기도 구리시 동구동 43,682325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백석동 43,637326 대구광역시 달서구 도원동 43,570327 대구광역시 북구 구암동 43,516328 경상북도 문경시 점촌동 43,196329 서울특별시 송파구 방이동 43,112330 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 탄현동 43,096331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율량·사천동 42,915332 서울특별시 성동구 행당동 42,901333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서둔동 42,851334 서울특별시 송파구 마천동 42,826335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42,787336 경기도 양주시 양주동 42,549337 서울특별시 성북구 돈암동 42,348338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42,345339 경기도 시흥시 신천동 42,315340 경기도 시흥시 군자동 42,028341 광주광역시 남구 효덕동 42,006342 제주도 제주시 일도동 41,892343 서울특별시 강서구 염창동 41,888344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41,841345 인천광역시 남동구 논현고잔동 41,818346 경기도 남양주시 평내동 41,683347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전포동 41,625348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휘경동 41,566349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동 41,554350 광주광역시 북구 용봉동 41,470351 서울특별시 강동구 고덕동 41,421352 대구광역시 남구 봉덕동 41,260353 광주광역시 서구 풍암동 41,248354 대전광역시 중구 문화동 41,195355 경상북도 구미시 선주원남동 41,089356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성정동 41,049357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인계동 41,000358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심곡본동 40,742359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박달동 40,735360 경기도 이천시 증포동 40,688361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성화·개신·죽림동 40,506362 서울특별시 강서구 우장산동 40,470363 경상남도 양산시 물금읍 40,433364 강원도 춘천시 석사동 40,398365 대구광역시 달서구 신당동 40,380366 경상북도 구미시 형곡동 40,321367 제주도 제주시 연동 40,233368 충청남도 연기군 조치원읍 40,220369 충청북도 청원군 오창읍 40,180370 경상남도 거제시 고현동 40,171371 광주광역시 북구 문흥동 40,151372 대구광역시 수성구 황금동 39,679373 인천광역시 남구 숭의동 39,660374 울산광역시 동구 방어동 39,604375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양정동 39,517376 경기도 평택시 안중읍 39,500377 부산광역시 금정구 서동 39,455378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39,414379 서울특별시 송파구 오금동 39,394380 서울특별시 동작구 대방동 39,235381 서울특별시 송파구 문정동 39,225382 경상남도 거제시 옥포동 39,108383 충청북도 충주시 연수동 38,950384 경상북도 경산시 진량읍 38,913385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태장동 38,795386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풍산동 38,716387 울산광역시 남구 무거동 38,659388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수진동 38,412389 강원도 원주시 태장동 38,402390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양덕동 38,386391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평동 38,330392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양평동 38,275393 서울특별시 성북구 종암동 38,183394 강원도 강릉시 교동 38,174395 대전광역시 동구 가양동 38,118396 서울특별시 성북구 석관동 38,115397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 37,943398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촌동 37,651399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의창동 37,607400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분평동 37,563401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신방동 37,533402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용지동 37,393403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웅동동 37,335404 경기도 남양주시 도농동 37,314405 경기도 김포시 풍무동 37,302406 부산광역시 사하구 신평동 37,187407 전라남도 여수시 쌍봉동 37,143408 대전광역시 대덕구 법동 37,130409 부산광역시 사하구 감천동 37,074410 서울특별시 관악구 은천동 37,046411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 37,033412 서울특별시 서초구 잠원동 37,012413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흥해읍 36,930414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장량동 36,911415 서울특별시 구로구 신도림동 36,754416 서울특별시 송파구 장지동 36,734417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금호동 36,650418 인천광역시 서구 가정동 36,622419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36,578420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36,551421 광주광역시 광산구 월곡동 36,509422 경기도 시흥시 대야동 36,460423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원미동 36,380424 광주광역시 북구 동림동 36,378425 부산광역시 사상구 학장동 36,373426 대구광역시 동구 효목동 36,318427 서울특별시 마포구 공덕동 36,302428 대구광역시 북구 복현동 36,265429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수곡동 36,205430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구성동 36,187431 서울특별시 은평구 녹번동 36,132432 부산광역시 금정구 남산동 36,091433 인천광역시 계양구 작전서운동 35,977434 서울특별시 강북구 송중동 35,818435 강원도 홍천군 홍천읍 35,807436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남가좌동 35,763437 서울특별시 송파구 석촌동 35,760438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 35,654439 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 대화동 35,379440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장동 35,368441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금천동 35,298442 서울특별시 관악구 성현동 35,201443 서울특별시 관악구 미성동 35,171444 대구광역시 수성구 범물동 35,094445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35,068446 경기도 광주시 경안동 34,984447 서울특별시 송파구 삼전동 34,979448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월영동 34,901449 경기도 광주시 송정동 34,850450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중화산동 34,796451 광주광역시 북구 일곡동 34,786452 전라북도 익산시 삼성동 34,711453 광주광역시 광산구 운남동 34,681454 경상남도 창원시 성산구 상남동 34,580454 경기도 남양주시 호평동 34,580456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34,400457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봉림동 34,381458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연일읍 34,372459 부산광역시 동래구 수민동 34,343460 대구광역시 동구 신천동 34,285461 경상북도 구미시 도량동 34,182462 서울특별시 강북구 인수동 33,896463 경기도 화성시 진안동 33,841464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동 33,754465 서울특별시 강서구 발산동 33,506466 서울특별시 관악구 청룡동 33,387467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신안동 33,347468 서울특별시 은평구 구산동 33,345469 인천광역시 연수구 송도동 33,293470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청룡동 33,282471 대구광역시 북구 동천동 33,237472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중동 33,134473 서울특별시 강북구 삼양동 33,077474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성사동 32,972475 대전광역시 대덕구 송촌동 32,954476 대구광역시 북구 무태조야동 32,809477 경기도 시흥시 은행동 32,805478 경기도 평택시 서정동 32,729479 부산광역시 영도구 청학동 32,692480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보정동 32,683481 서울특별시 강북구 송천동 32,629482 경상북도 구미시 양포동 32,589483 서울특별시 동작구 흑석동 32,411484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32,381485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32,356486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유림동 32,279487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범천동 32,174488 경기도 의정부시 자금동 32,112489 서울특별시 관악구 난곡동 32,098490 울산광역시 남구 대현동 32,058491 울산광역시 중구 다운동 32,018492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문래동 31,952493 경기도 광주시 광남동 31,942494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고양동 31,806495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성남동 31,736496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31,717497 강원도 원주시 명륜동 31,664498 경상북도 구미시 고아읍 31,635499 인천광역시 연수구 청학동 31,533500 광주광역시 남구 주월동 31,464501 울산광역시 동구 전하동 31,322502 광주광역시 남구 월산동 31,246503 서울특별시 은평구 대조동 31,242504 서울특별시 관악구 삼성동 31,198505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 31,082506 대전광역시 중구 산성동 31,050507 울산광역시 남구 달동 30,893508 서울특별시 강남구 청담동 30,827509 경상남도 진주시 하대동 30,785510 충청북도 증평군 증평읍 30,680511 경상남도 진주시 평거동 30,494512 대구광역시 달서구 두류동 30,493513 부산광역시 동구 수정동 30,475514 부산광역시 사하구 당리동 30,464515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 30,371516 광주광역시 서구 치평동 30,365517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30,315518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성포동 30,298519 대전광역시 서구 탄방동 30,286520 부산광역시 금정구 장전동 30,257521 서울특별시 관악구 행운동 30,234522 경기도 오산시 중앙동 30,174523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상대동 30,078524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30,039525 전라북도 군산시 수송동 29,992526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용신동 29,942527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곡선동 29,887528 충청남도 공주시 신관동 29,799529 경상북도 경주시 황성동 29,791530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29,689531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정발산동 29,672532 인천광역시 남동구 논현동 29,669533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효곡동 29,657534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금곡동 29,656535 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 송산동 29,644536 경상북도 구미시 상모사곡동 29,585537 울산광역시 북구 효문동 29,528538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창동 29,519539 대전광역시 유성구 진잠동 29,495540 경기도 남양주시 퇴계원면 29,457541 부산광역시 사상구 엄궁동 29,437542 경상북도 경산시 동부동 29,430543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 29,428544 강원도 강릉시 성덕동 29,379545 강원도 강릉시 포남동 29,361546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장항동 29,314547 서울특별시 마포구 서교동 29,291548 부산광역시 사상구 덕포동 29,282549 울산광역시 남구 옥동 29,257550 경기도 오산시 신장동 29,245551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분당동 29,199552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성환읍 29,124553 서울특별시 강남구 압구정동 28,995554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회원동 28,960555 서울특별시 관악구 인헌동 28,957556 부산광역시 수영구 남천동 28,873557 부산광역시 서구 서대신동 28,838558 경상북도 영주시 휴천동 28,827559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제기동 28,758560 서울특별시 강동구 상일동 28,685561 경기도 군포시 광정동 28,642562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마북동 28,625563 충청남도 논산시 취암동 28,523564 경상남도 진주시 상대동 28,495565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28,438566 울산광역시 중구 반구동 28,432567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산남동 28,356568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이동 28,287569 대구광역시 북구 읍내동 28,249570 인천광역시 동구 송림동 28,206571 광주광역시 북구 오치동 28,086572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우아동 28,036573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우창동 28,020574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27,973575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구운동 27,957576 경상남도 거제시 장평동 27,865577 대전광역시 유성구 신성동 27,775578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용흥동 27,741579 인천광역시 서구 검암경서동 27,718580 대전광역시 서구 내동 27,714581 대구광역시 달서구 성당동 27,700582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 27,664583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봉명2·송정동 27,656584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평안동 27,628585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두호동 27,573586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27,566587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부림동 27,506588 경상북도 칠곡군 석적읍 27,464589 강원도 동해시 천곡동 27,459590 경기도 의왕시 부곡동 27,390591 부산광역시 남구 감만동 27,285592 충청남도 서산시 동문동 27,191593 서울특별시 관악구 보라매동 27,185594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신동 27,167595 경상남도 양산시 평산동 26,900596 서울특별시 성북구 삼선동 26,896597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관산동 26,748598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26,722599 경기도 군포시 오금동 26,659600 대전광역시 유성구 전민동 26,629601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26,560602 제주도 제주시 애월읍 26,541603 경상북도 영천시 동부동 26,532604 전라남도 순천시 해룡면 26,514605 대구광역시 북구 국우동 26,488606 경기도 평택시 포승읍 26,479607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구갈동 26,453608 서울특별시 마포구 서강동 26,366609 충청남도 태안군 태안읍 26,328610 서울특별시 용산구 원효로동 26,251611 대구광역시 달서구 감삼동 26,239612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초읍동 26,227613 경상남도 창원시 성산구 성주동 26,195614 경상북도 경주시 동천동 26,122615 전라북도 익산시 동산동 26,108615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신봉동 26,108617 대전광역시 동구 효동 26,099618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도당동 26,002619 인천광역시 중구 영종동 25,940620 제주도 제주시 용담동 25,930621 서울특별시 성동구 마장동 25,921622 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25,864623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사동 25,740624 광주광역시 광산구 우산동 25,718625 경상남도 양산시 서창동 25,714626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일동 25,709627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25,520628 전라북도 익산시 모현동 25,365629 경상북도 칠곡군 북삼읍 25,358630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동천동 25,340631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해도동 25,217632 울산광역시 남구 삼호동 25,181633 전라북도 익산시 어양동 25,171634 강원도 원주시 단계동 25,130635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청량리동 25,127636 경상북도 김천시 대신동 25,110637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구암동 25,097638 인천광역시 남동구 남촌도림동 25,088639 경기도 평택시 세교동 25,078640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호성동 25,065641 경상남도 고성군 고성읍 25,051642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내덕동 24,918642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24,918644 인천광역시 서구 신현원창동 24,908645 경상남도 창원시 성산구 중앙동 24,775646 서울특별시 관악구 서림동 24,756647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24,668648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강서동 24,608649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성복동 24,579650 부산광역시 서구 동대신동 24,573651 서울특별시 강북구 미아동 24,458652 서울특별시 성동구 옥수동 24,423653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괴안동 24,321654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원성동 24,284655 경기도 김포시 통진읍 24,280656 대전광역시 동구 판암동 24,257657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24,210658 서울특별시 관악구 서원동 24,158659 대전광역시 중구 유천동 24,151660 경기도 군포시 재궁동 24,140661 서울특별시 강북구 삼각산동 24,101662 경기도 동두천시 송내동 24,094663 대전광역시 대덕구 중리동 24,064664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충현동 24,046665 경기도 화성시 화산동 23,987666 전라남도 여수시 문수동 23,985667 전라남도 여수시 여서동 23,982668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역삼동 23,925669 대구광역시 달성군 논공읍 23,922670 서울특별시 구로구 수궁동 23,881671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동읍 23,822672 경상남도 양산시 삼성동 23,809673 서울특별시 용산구 청파동 23,798674 경기도 동두천시 불현동 23,772675 충청남도 금산군 금산읍 23,751676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하대원동 23,689677 대구광역시 서구 상중이동 23,655678 경기도 의정부시 녹양동 23,619679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동 23,610680 대구광역시 달서구 본리동 23,607681 제주도 제주시 삼도동 23,598682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고등동 23,564683 경기도 군포시 궁내동 23,551684 경기도 평택시 신평동 23,475685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23,458686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 오정동 23,454687 충청북도 충주시 교현.안림동 23,373688 서울특별시 마포구 도화동 23,367689 경기도 김포시 고촌읍 23,343690 강원도 원주시 무실동 23,304691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직산읍 23,273692 경기도 광주시 실촌읍 23,244693 서울특별시 마포구 신수동 23,169694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죽도동 23,159695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중앙동 23,103696 전라남도 여수시 여천동 23,102697 전라남도 목포시 부흥동 23,095698 울산광역시 울주군 온산읍 23,047699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연무동 23,032700 서울특별시 관악구 대학동 23,029701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23,009702 경상북도 김천시 대곡동 22,949703 경기도 김포시 사우동 22,862704 강원도 속초시 노학동 22,850705 경기도 화성시 남양동 22,821706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운천·신봉동 22,817707 대구광역시 북구 관음동 22,801708 서울특별시 마포구 상암동 22,745709 충청북도 청원군 내수읍 22,711710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연지동 22,564711 강원도 속초시 조양동 22,422712 경상북도 안동시 용상동 22,413713 울산광역시 중구 태화동 22,405714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남동 22,398715 전라남도 무안군 삼향면 22,357716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상하동 22,289717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영화동 22,227718 서울특별시 은평구 증산동 22,188719 부산광역시 수영구 민락동 22,150720 울산광역시 울주군 온양읍 22,149721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합성동 22,096722 부산광역시 사상구 괘법동 22,053723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부곡동 22,009724 대전광역시 동구 용운동 21,984725 대구광역시 동구 방촌동 21,973726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범박동 21,870727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21,861728 경상북도 구미시 진미동 21,855729 경기도 의정부시 장암동 21,830730 경기도 오산시 남촌동 21,811731 서울특별시 강북구 우이동 21,810732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21,793733 인천광역시 연수구 선학동 21,777734 울산광역시 중구 복산동 21,770735 서울특별시 광진구 군자동 21,761736 부산광역시 남구 우암동 21,683737 강원도 춘천시 효자동 21,651738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 신흥동 21,641739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성거읍 21,636740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봉명동 21,568741 경기도 평택시 송북동 21,506742 울산광역시 중구 북정동 21,492743 강원도 강릉시 강남동 21,466744 서울특별시 마포구 용강동 21,452745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21,428746 전라남도 목포시 용당동 21,425747 울산광역시 중구 우정동 21,400748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21,353749 전라북도 완주군 봉동읍 21,340750 경기도 군포시 수리동 21,333751 서울특별시 강서구 공항동 21,323752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양학동 21,322753 경상남도 거제시 상문동 21,277754 대전광역시 동구 용전동 21,270755 대전광역시 서구 복수동 21,268756 경상남도 진주시 가호동 21,251757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도림동 21,248758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읍 21,218759 경상남도 진주시 금산면 21,203759 광주광역시 동구 산수동 21,203761 서울특별시 마포구 합정동 21,160762 광주광역시 광산구 어룡동 21,127763 강원도 동해시 북삼동 21,112764 광주광역시 북구 중흥동 21,101765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 21,088766 서울특별시 은평구 수색동 21,073767 전라남도 영암군 삼호읍 21,057768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21,020769 서울특별시 광진구 화양동 21,003770 광주광역시 서구 농성동 20,970771 전라남도 영광군 영광읍 20,952772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반월동 20,941773 경기도 군포시 금정동 20,940774 서울특별시 송파구 오륜동 20,929775 전라남도 여수시 시전동 20,839776 충청남도 당진군 송악면 20,800777 서울특별시 강남구 신사동 20,783778 제주도 서귀포시 동홍동 20,668779 강원도 춘천시 신사우동 20,662780 전라남도 순천시 삼산동 20,579781 제주도 제주시 조천읍 20,558782 광주광역시 남구 방림동 20,549783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주교동 20,508784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대이동 20,503784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모충동 20,503786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금암동 20,452787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원동 20,431788 경기도 동두천시 생연동 20,421789 충청북도 제천시 청전동 20,363790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중앙동 20,350791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20,316792 경상북도 구미시 송정동 20,315793 울산광역시 동구 화정동 20,268794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능곡동 20,217795 대전광역시 대덕구 오정동 20,214796 대전광역시 중구 석교동 20,181797 강원도 강릉시 주문진읍 20,174798 울산광역시 북구 송정동 20,158799 대전광역시 대덕구 비래동 20,113800 경상북도 안동시 옥동 20,110801 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동 20,094802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송죽동 20,061803 전라남도 목포시 상동 20,037804 충청남도 서산시 석남동 20,034805 전라북도 정읍시 내장상동 19,996806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부흥동 19,991807 대전광역시 서구 정림동 19,957808 대전광역시 동구 산내동 19,954809 서울특별시 용산구 후암동 19,934810 대전광역시 동구 삼성동 19,894811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천연동 19,892812 경기도 화성시 반월동 19,891813 경상남도 밀양시 삼문동 19,868814 경기도 이천시 창전동 19,863815 제주도 제주시 화북동 19,850816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북아현동 19,832817 충청남도 아산시 신창면 19,828818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19,795819 서울특별시 마포구 연남동 19,647820 충청남도 아산시 탕정면 19,600821 전라남도 완도군 완도읍 19,550822 서울특별시 강동구 강일동 19,535823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정동 19,455824 제주도 제주시 한림읍 19,394825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창동 19,384826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19,371827 경상남도 통영시 광도면 19,334828 대구광역시 달서구 장기동 19,325828 경기도 포천시 포천동 19,325830 부산광역시 서구 암남동 19,313831 대구광역시 동구 해안동 19,293832 대전광역시 서구 변동 19,266833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태원동 19,264834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19,233835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석전동 19,226836 충청남도 서산시 부춘동 19,186837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송도동 19,160838 대전광역시 서구 괴정동 19,156839 서울특별시 성동구 왕십리2동 19,152839 대전광역시 대덕구 회덕동 19,152841 서울특별시 금천구 가산동 19,121842 강원도 횡성군 횡성읍 19,110843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중동 19,004844 충청북도 제천시 교동 18,944845 강원도 원주시 문막읍 18,838846 부산광역시 서구 남부민동 18,805847 전라남도 목포시 신흥동 18,769848 경상남도 진주시 상봉동 18,720849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원천동 18,711850 경기도 남양주시 지금동 18,683851 전라북도 군산시 소룡동 18,607852 울산광역시 남구 수암동 18,602853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진북동 18,599854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면 18,530855 광주광역시 동구 지원동 18,525856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일봉동 18,500857 충청남도 논산시 부창동 18,484858 충청남도 계룡시 엄사면 18,460859 서울특별시 마포구 염리동 18,453860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귀인동 18,451861 서울특별시 용산구 보광동 18,408862 경상남도 양산시 소주동 18,399863 광주광역시 동구 계림동 18,339864 충청북도 충주시 칠금.금릉동 18,323865 경상남도 진주시 망경동 18,298866 제주도 서귀포시 남원읍 18,272867 인천광역시 동구 송현동 18,224868 인천광역시 남구 관교동 18,218869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18,211870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18,208871 부산광역시 영도구 봉래동 18,202872 서울특별시 관악구 난향동 18,166873 경상북도 영주시 가흥동 18,163874 경상북도 경주시 성건동 18,158875 서울특별시 관악구 조원동 18,140876 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 송포동 18,112877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신촌동 18,111878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동산동 18,104879 부산광역시 강서구 명지동 18,102880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18,090881 인천광역시 남동구 장수서창동 18,087882 울산광역시 남구 선암동 17,922883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17,883884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석동 17,764885 대구광역시 북구 칠성동 17,758886 서울특별시 관악구 남현동 17,735887 서울특별시 관악구 낙성대동 17,695888 서울특별시 성동구 응봉동 17,662889 전라북도 정읍시 수성동 17,659890 대구광역시 달서구 죽전동 17,650891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 17,642892 충청북도 제천시 용두동 17,592893 경상북도 예천군 예천읍 17,549894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범계동 17,518895 서울특별시 강남구 수서동 17,486896 서울특별시 관악구 청림동 17,472897 대전광역시 중구 중촌동 17,439898 경상북도 구미시 임오동 17,433899 대구광역시 북구 대현동 17,392900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풍호동 17,381901 전라남도 목포시 원산동 17,276902 서울특별시 마포구 아현동 17,243903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 17,216904 경상남도 사천시 사천읍 17,208905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 17,165906 강원도 원주시 반곡관설동 17,159907 대구광역시 동구 공산동 17,133908 서울특별시 성동구 용답동 17,106909 경상북도 경산시 남부동 17,092910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사창동 17,070911 경상남도 사천시 벌용동 17,046912 서울특별시 성북구 보문동 17,032913 전라남도 목포시 옥암동 17,012914 경기도 과천시 별양동 16,996915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산성동 16,984916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16,865917 대구광역시 북구 관문동 16,842918 경상북도 경주시 현곡면 16,790919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지동 16,787920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평촌동 16,750921 전라북도 남원시 도통동 16,741922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16,738923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16,724924 부산광역시 영도구 영선동 16,693925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 16,683926 대구광역시 달서구 본동 16,657927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 16,627928 울산광역시 동구 대송동 16,626929 광주광역시 북구 문화동 16,615930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사직동 16,585931 서울특별시 종로구 숭인동 16,584932 경상남도 진주시 이현동 16,547933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노송동 16,446934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16,428935 광주광역시 북구 우산동 16,417936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16,382937 경기도 평택시 고덕면 16,368938 대전광역시 서구 만년동 16,351939 전라북도 익산시 신동 16,346940 전라남도 광양시 금호동 16,338941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춘의동 16,287942 충청북도 충주시 용산동 16,272943 충청남도 서산시 대산읍 16,258944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16,250945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읍 16,237946 대전광역시 대덕구 덕암동 16,208947 인천광역시 중구 신흥동 16,200948 경기도 여주군 가남면 16,184949 부산광역시 사상구 감전동 16,164950 대구광역시 수성구 상동 16,155951 충청북도 음성군 대소면 16,066952 서울특별시 마포구 대흥동 16,034953 부산광역시 수영구 수영동 16,025954 경상북도 경주시 용강동 16,004955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 15,995956 대구광역시 남구 이천동 15,991957 광주광역시 북구 매곡동 15,884958 경상남도 진주시 신안동 15,796959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남면 15,782960 인천광역시 남구 문학동 15,776961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효자동 15,769962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산호동 15,718963 대전광역시 중구 은행선화동 15,683964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기흥동 15,675965 전라남도 강진군 강진읍 15,648966 광주광역시 광산구 도산동 15,611967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삼평동 15,547967 전라북도 김제시 신풍동 15,547969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로동 15,536970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복정동 15,515971 충청북도 보은군 보은읍 15,400972 서울특별시 구로구 가리봉동 15,364973 전라남도 장흥군 장흥읍 15,312974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15,248975 울산광역시 남구 야음장생포동 15,191976 서울특별시 성북구 동선동 15,183977 충청남도 서산시 수석동 15,145978 전라북도 익산시 남중동 15,132979 경상북도 안동시 태화동 15,099980 경기도 화성시 기배동 15,087981 대전광역시 서구 용문동 15,082981 전라남도 목포시 용해동 15,082983 부산광역시 영도구 신선동 15,027984 경기도 오산시 초평동 14,979985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신촌동 14,975986 광주광역시 남구 백운동 14,956987 부산광역시 중구 영주동 14,949988 대구광역시 동구 동촌동 14,928989 경기도 이천시 중리동 14,908990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14,895991 대전광역시 서구 가수원동 14,864992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고봉동 14,849993 제주도 제주시 구좌읍 14,813994 대구광역시 동구 불로·봉무동 14,804995 울산광역시 중구 중앙동 14,789996 인천광역시 부평구 일신동 14,747997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14,720998 제주도 제주시 외도동 14,692999 경기도 과천시 갈현동 14,6801000 경기도 과천시 부림동 14,6771001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자산동 14,6351002 대구광역시 북구 노원동 14,5781003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판교동 14,5331004 울산광역시 울주군 청량면 14,5321005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14,5091006 강원도 춘천시 강남동 14,4561007 서울특별시 관악구 중앙동 14,4281008 대구광역시 수성구 파동 14,4151009 전라남도 여수시 미평동 14,3981010 강원도 태백시 상장동 14,3881011 경상남도 통영시 무전동 14,3681012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입북동 14,3641013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14,3611014 대전광역시 동구 신인동 14,3151015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우암동 14,3051016 경기도 이천시 대월면 14,2971017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동부동 14,2781018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덕진동 14,1891019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14,1811020 충청북도 청원군 강외면 14,1401021 제주도 서귀포시 성산읍 14,1151022 전라남도 담양군 담양읍 14,1021023 전라북도 군산시 조촌동 14,0901024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산동 14,0621025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단대동 14,0401026 대구광역시 중구 성내동 14,0371027 충청북도 제천시 신백.두학동 14,0361028 대구광역시 수성구 중동 14,0011029 대전광역시 동구 홍도동 13,9881030 광주광역시 동구 학운동 13,9771031 경상남도 남해군 남해읍 13,9521032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문화동 13,8961033 대전광역시 서구 가장동 13,8861034 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면 13,8571035 경기도 포천시 선단동 13,8241036 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 13,8191037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13,8111038 대전광역시 대덕구 신탄진동 13,8091039 경기도 시흥시 매화동 13,7951040 경상남도 진주시 상평동 13,7681041 울산광역시 북구 염포동 13,7601042 전라북도 정읍시 시기동 13,7141043 충청남도 서천군 장항읍 13,6651044 충청남도 당진군 신평면 13,6571045 경상북도 칠곡군 약목면 13,6411046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13,6371047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행궁동 13,6221048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동 13,5931049 제주도 제주시 아라동 13,5871050 경상북도 경주시 선도동 13,5861050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13,5861052 광주광역시 북구 삼각동 13,5791053 경기도 의왕시 고천동 13,5741054 충청남도 서천군 서천읍 13,5391055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달안동 13,5151056 경기도 평택시 원평동 13,5101057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부전동 13,4471058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13,4311059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13,4221060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동 13,4201061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 13,3841062 경기도 화성시 정남면 13,3071063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13,2991064 경상남도 거제시 수양동 13,2821065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영운동 13,2331066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여좌동 13,1531067 서울특별시 용산구 용산2가동 13,1331068 경기도 가평군 청평면 13,1261069 강원도 춘천시 동내면 13,0151070 경기도 파주시 파주읍 13,0041071 서울특별시 성동구 왕십리도선동 12,9981072 경기도 김포시 양촌면 12,9761073 전라남도 고흥군 고흥읍 12,9551074 전라남도 장성군 장성읍 12,9191075 경상남도 거제시 능포동 12,9181076 광주광역시 북구 신안동 12,8711077 서울특별시 용산구 용문동 12,8461078 전라남도 여수시 국동 12,7911079 전라북도 익산시 마동 12,7211080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봉명1동 12,6721081 경기도 평택시 신장동 12,6431082 경상남도 통영시 미수동 12,6241083 강원도 원주시 개운동 12,6101084 서울특별시 중구 중림동 12,5781085 경상북도 경산시 북부동 12,5731086 울산광역시 중구 학성동 12,5721087 강원도 속초시 교동 12,5611088 광주광역시 서구 유덕동 12,5471089 강원도 삼척시 정라동 12,5451090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12,5431091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동해면 12,5361092 경상북도 영천시 금호읍 12,5331093 경상북도 안동시 송하동 12,5301094 경기도 파주시 월롱면 12,5111095 서울특별시 성동구 송정동 12,4951096 전라남도 순천시 남제동 12,4871097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서서학동 12,4811098 경상북도 상주시 남원동 12,4521099 강원도 삼척시 도계읍 12,4451100 경기도 시흥시 신현동 12,4401101 경상남도 통영시 북신동 12,4391102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완월동 12,4161103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12,4151104 전라남도 목포시 하당동 12,4091105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자은동 12,4061106 경상남도 양산시 덕계동 12,3671107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환여동 12,3631108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매산동 12,3561109 경상북도 경산시 압량면 12,3291110 대전광역시 동구 성남동 12,3281111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갈산동 12,3071112 울산광역시 북구 양정동 12,2881113 전라북도 군산시 미성동 12,2621114 대구광역시 동구 지저동 12,2501115 대전광역시 중구 목동 12,2081116 충청북도 충주시 문화동 12,1971117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용담·명암·산성동 12,1721118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12,1651119 대구광역시 중구 대봉동 12,1551120 부산광역시 중구 보수동 12,1461121 서울특별시 종로구 혜화동 12,1361122 경상남도 사천시 정동면 12,0961123 부산광역시 영도구 남항동 12,0901124 경상남도 합천군 합천읍 12,0611125 강원도 양구군 양구읍 12,0561126 전라남도 고흥군 도양읍 12,0501127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탑·대성동 12,0461128 경상남도 통영시 정량동 12,0411129 경기도 시흥시 목감동 12,0021130 대전광역시 동구 자양동 11,9971131 대구광역시 서구 원대동 11,9691132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북면 11,9681133 전라남도 광양시 광영동 11,9291134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경화동 11,8791135 서울특별시 중구 황학동 11,8641136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11,7541137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교방동 11,7481138 전라남도 순천시 서면 11,7451139 강원도 정선군 정선읍 11,7301140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덕산동 11,7191141 전라남도 구례군 구례읍 11,7101142 경상남도 양산시 동면 11,6591143 전라남도 목포시 목원동 11,6431144 전라남도 여수시 둔덕동 11,6271145 충청북도 단양군 단양읍 11,5961146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입장면 11,4891147 대전광역시 중구 용두동 11,4761148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매교동 11,4721149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 11,4611150 경상남도 하동군 하동읍 11,4201151 경기도 화성시 장안면 11,4021152 대전광역시 중구 대흥동 11,3781153 광주광역시 동구 지산동 11,3651154 강원도 원주시 봉산동 11,3601155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동 11,3491156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11,3301157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팔복동 11,3261158 충청남도 공주시 옥룡동 11,3141159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조촌동 11,3101160 경상북도 영덕군 영덕읍 11,3051161 전라남도 목포시 이로동 11,2931162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이동 11,2711163 대구광역시 수성구 두산동 11,2641164 경상남도 진주시 칠암동 11,2031165 경기도 안성시 대덕면 11,1271166 충청남도 홍성군 광천읍 11,1191167 부산광역시 서구 아미동 11,0901168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소사동 11,0631169 광주광역시 북구 임동 11,0581170 강원도 강릉시 내곡동 11,0551171 충청남도 당진군 합덕읍 11,0471172 충청북도 청원군 강내면 11,0391173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양지동 10,9961174 경상북도 김천시 평화남산동 10,9881175 경상남도 통영시 용남면 10,9471176 제주도 제주시 삼양동 10,9431177 경기도 의왕시 청계동 10,9381178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10,9331178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회기동 10,9331180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사동 10,9271180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면 10,9271180 전라북도 진안군 진안읍 10,9271183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10,9241184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 10,9091185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10,8641186 대구광역시 중구 동인동 10,8261187 경기도 이천시 신둔면 10,8101188 충청북도 청원군 옥산면 10,7981189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10,7841190 대전광역시 중구 오류동 10,7811191 전라남도 무안군 무안읍 10,7791192 서울특별시 광진구 능동 10,7681193 제주도 제주시 건입동 10,7571194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10,7411195 충청북도 충주시 호암.직동 10,7311195 제주도 서귀포시 표선면 10,7311197 전라북도 김제시 요촌동 10,7251198 경기도 과천시 중앙동 10,7241199 서울특별시 성동구 사근동 10,6991200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10,6981201 강원도 동해시 북평동 10,6951202 서울특별시 용산구 효창동 10,6661203 전라남도 진도군 진도읍 10,6621204 경상북도 경주시 건천읍 10,6501205 경상북도 영주시 영주동 10,6431206 전라북도 군산시 흥남동 10,6391207 대전광역시 대덕구 대화동 10,6321208 경상남도 밀양시 상남면 10,6001209 경상남도 창녕군 남지읍 10,5971210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10,5881211 전라남도 목포시 북항동 10,5371212 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10,5141213 경상남도 진주시 판문동 10,5121214 강원도 삼척시 교동 10,4831215 충청남도 서산시 음암면 10,4441216 경상북도 고령군 고령읍 10,4031217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중앙동 10,3951218 경상남도 밀양시 내이동 10,3921219 경기도 화성시 동탄면 10,3731220 충청남도 아산시 둔포면 10,3641221 경상남도 창원시 성산구 웅남동 10,3331222 전라남도 보성군 보성읍 10,3261223 경상북도 김천시 지좌동 10,2931224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도촌동 10,2711225 경기도 평택시 지산동 10,2541226 강원도 원주시 우산동 10,2531227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노포동 10,2371228 경상북도 안동시 강남동 10,2051229 전라북도 김제시 검산동 10,1981230 경상북도 구미시 원평동 10,1881231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10,1821232 경상남도 사천시 사남면 10,1791233 경기도 화성시 팔탄면 10,1781234 인천광역시 동구 화수2동 10,1651235 충청남도 청양군 청양읍 10,1501236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10,1451237 경기도 이천시 관고동 10,1301238 경기도 이천시 백사면 10,1271239 전라남도 순천시 풍덕동 10,1251240 경상북도 상주시 동문동 10,1011241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약대동 10,0961242 충청남도 공주시 웅진동 10,0861243 경상남도 양산시 강서동 10,0661244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읍 10,0561245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운중동 10,0471246 강원도 삼척시 남양동 10,0341247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 10,0291248 경상남도 김해시 한림면 10,0211249 경상남도 진주시 초장동 10,0041250 부산광역시 남구 용당동 9,9751251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9,9271252 경상북도 영천시 중앙동 9,8781253 전라남도 순천시 도사동 9,8441254 광주광역시 서구 양동 9,8331255 경기도 평택시 송탄동 9,8081256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9,8051257 충청남도 태안군 안면읍 9,7801258 충청남도 당진군 송산면 9,7761259 경상북도 영주시 상망동 9,7471260 충청북도 진천군 광혜원면 9,7421261 경기도 군포시 대야동 9,7161262 제주도 서귀포시 안덕면 9,6991263 경상북도 상주시 신흥동 9,6731264 경상남도 거제시 아주동 9,6521265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서농동 9,6481266 경상북도 김천시 자산동 9,6401267 충청북도 충주시 교현동 9,6291268 강원도 원주시 소초면 9,6261269 경상남도 의령군 의령읍 9,6111270 전라북도 무주군 무주읍 9,5951271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반월동 9,5921272 경상북도 경주시 황오동 9,5531273 강원도 인제군 인제읍 9,5341274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9,5261274 전라북도 익산시 황등면 9,5261276 경기도 김포시 하성면 9,5221277 경상남도 김해시 회현동 9,5091278 충청남도 연기군 금남면 9,4741279 경기도 가평군 하면 9,4661280 대구광역시 북구 검단동 9,4631281 전라남도 함평군 함평읍 9,4621282 경상남도 김해시 칠산서부동 9,4501283 강원도 춘천시 동면 9,4451283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9,4451285 대전광역시 동구 중앙동 9,4441286 경상남도 김해시 동상동 9,4421287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동서동 9,4371288 전라북도 군산시 월명동 9,3911289 경기도 포천시 영북면 9,3871290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9,3801291 전라북도 남원시 향교동 9,3701292 충청북도 제천시 고암.모산동 9,3551293 경상남도 거제시 연초면 9,3421294 전라북도 군산시 신풍동 9,3311295 대전광역시 동구 대동 9,3171296 서울특별시 종로구 이화동 9,2961297 경상남도 김해시 불암동 9,2821298 충청남도 공주시 유구읍 9,2441299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9,2401300 강원도 평창군 평창읍 9,2311301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안산동 9,2251302 경상남도 사천시 동서동 9,2091303 전라남도 목포시 산정동 9,1521304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중앙동 9,1481305 제주도 서귀포시 대륜동 9,1091306 전라북도 익산시 송학동 9,1061307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 9,1021308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9,0671309 전라남도 여수시 주삼동 9,0591310 전라남도 나주시 성북동 9,0581311 경상북도 안동시 서구동 9,0471312 강원도 원주시 일산동 9,0311313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9,0231314 경상북도 경주시 불국동 9,0021315 경상남도 밀양시 하남읍 8,9931316 서울특별시 종로구 교남동 8,9361316 울산광역시 중구 약사동 8,9361318 경상북도 고령군 다산면 8,9181319 전라남도 여수시 월호동 8,9161320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동서학동 8,9131321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회성동 8,9081322 강원도 삼척시 성내동 8,8851323 광주광역시 서구 광천동 8,8581324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8,8511325 전라북도 군산시 경암동 8,8041326 경상북도 구미시 신평동 8,7981327 울산광역시 울주군 웅촌면 8,7911328 경상남도 밀양시 가곡동 8,7881329 충청북도 충주시 봉방동 8,7751330 제주도 서귀포시 중문동 8,7611331 울산광역시 동구 일산동 8,7581332 경상북도 김천시 아포읍 8,7361333 부산광역시 기장군 일광면 8,7321334 부산광역시 사상구 삼락동 8,7221335 경기도 안성시 금광면 8,6731336 경기도 광주시 도척면 8,6391337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병암동 8,6331338 서울특별시 종로구 무악동 8,6151339 충청남도 계룡시 금암동 8,5991340 경상북도 울진군 후포면 8,5881341 전라남도 곡성군 곡성읍 8,5731342 경상남도 거제시 사등면 8,5631343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합포동 8,5311344 전라남도 여수시 광림동 8,5181345 충청남도 예산군 삽교읍 8,5151346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 8,5101347 전라남도 여수시 소라면 8,5091347 경기도 동두천시 소요동 8,5091349 경기도 안성시 일죽면 8,4961350 강원도 화천군 화천읍 8,4951351 부산광역시 강서구 녹산동 8,4741352 전라북도 익산시 인화동 8,4641353 인천광역시 중구 연안동 8,4571354 부산광역시 서구 충무동 8,4251355 경상북도 안동시 평화동 8,4241356 경상북도 상주시 계림동 8,4221357 충청남도 계룡시 신도안면 8,4031358 경상북도 안동시 안기동 8,3891359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8,3731360 충청남도 서산시 고북면 8,3261361 경상북도 경주시 황남동 8,3151362 전라북도 군산시 삼학동 8,3091363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범전동 8,3021364 전라남도 여수시 화양면 8,2931365 경상남도 김해시 대동면 8,2811366 강원도 춘천시 근화동 8,2721367 전라남도 여수시 만덕동 8,2531368 인천광역시 동구 화수1.화평동 8,2471369 전라남도 무안군 일로읍 8,2371370 전라남도 목포시 동명동 8,2241371 인천광역시 동구 만석동 8,2201372 경상남도 김해시 진례면 8,1881373 제주도 제주시 한경면 8,1331374 경상북도 영주시 하망동 8,1221375 경기도 과천시 과천동 8,0911376 충청북도 제천시 서부.영천동 8,0891377 강원도 인제군 북면 8,0781378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 8,0741379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대산면 8,0691380 전라남도 순천시 조곡동 8,0661381 강원도 춘천시 소양동 8,0481382 전라남도 나주시 남평읍 8,0261383 전라북도 완주군 용진면 7,9871384 경기도 양주시 남면 7,9861385 광주광역시 북구 풍향동 7,9811386 충청남도 당진군 석문면 7,9551387 충청북도 제천시 화산동 7,9461388 부산광역시 서구 부민동 7,9441389 경기도 이천시 마장면 7,9421389 전라북도 익산시 함열읍 7,9421391 경상북도 군위군 군위읍 7,9311392 충청북도 진천군 이월면 7,9261392 광주광역시 동구 학동 7,9261394 경상북도 영양군 영양읍 7,9181395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7,9171396 전라남도 영광군 홍농읍 7,9061397 광주광역시 광산구 비아동 7,9011398 전라남도 여수시 대교동 7,8941399 충청남도 서산시 지곡면 7,8901400 대전광역시 중구 부사동 7,8891401 경기도 하남시 천현동 7,8831402 충청북도 청원군 남일면 7,8701403 부산광역시 중구 대청동 7,8481404 경상남도 통영시 도남동 7,8251405 경기도 여주군 대신면 7,8221406 충청남도 연기군 서면 7,8011407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7,7941408 제주도 서귀포시 서홍동 7,7841409 경기도 남양주시 수동면 7,7701410 경상북도 영덕군 강구면 7,7651411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7,7641412 경기도 화성시 매송면 7,7521413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7,7501414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효자동 7,7411415 경상남도 밀양시 삼랑진읍 7,7291416 광주광역시 광산구 하남동 7,7061417 대구광역시 북구 고성동 7,6831418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 7,6731419 전라남도 여수시 율촌면 7,6721420 경기도 양주시 은현면 7,6581421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청림동 7,6541422 충청남도 서산시 인지면 7,6481423 부산광역시 강서구 강동동 7,6451424 전라남도 무안군 청계면 7,6431425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7,6361426 강원도 속초시 금호동 7,6301427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7,6071428 경상남도 통영시 도천동 7,5941429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송정동 7,5761430 강원도 원주시 원인동 7,5511431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7,5321432 경상남도 김해시 부원동 7,5181432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7,5181434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 7,5171435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읍 7,5151436 전라북도 익산시 팔봉동 7,5131437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태백동 7,5071438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성안동 7,5041439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7,5011440 강원도 강릉시 송정동 7,5001441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7,4971442 강원도 태백시 삼수동 7,4851443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7,4821444 서울특별시 용산구 남영동 7,4741445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7,4721445 전라남도 목포시 유달동 7,4721447 경상남도 진주시 문산읍 7,4521448 충청북도 제천시 중앙.의림.명동 7,4271449 전라남도 나주시 금남동 7,3881450 경상북도 경산시 중앙동 7,3851451 전라남도 나주시 송월동 7,3811452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7,3741453 충청북도 청원군 부용면 7,3721454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7,3431455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7,3291456 경기도 하남시 풍산동 7,3241457 경상북도 울진군 북면 7,3171458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태평동 7,3151459 전라남도 목포시 삼학동 7,3031460 경상남도 밀양시 교동 7,3021461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완산동 7,3001462 충청남도 계룡시 두마면 7,2981463 강원도 춘천시 신북읍 7,2901464 강원도 동해시 부곡동 7,2511465 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 7,2451466 강원도 태백시 황지동 7,2351467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7,2341468 충청북도 충주시 목행.용탄동 7,2101469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7,2061470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7,2021471 충청북도 청원군 남이면 7,1981472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7,1941473 인천광역시 강화군 선원면 7,1801474 전라남도 장성군 삼계면 7,1761475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7,1631476 경상남도 사천시 선구동 7,1601477 경상남도 진주시 옥봉동 7,1301478 경상남도 하동군 진교면 7,1251479 대전광역시 중구 대사동 7,1241480 경상남도 거제시 일운면 7,1221481 전라북도 정읍시 신태인읍 7,1191482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대부동 7,1141483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7,1121484 전라남도 신안군 압해면 7,1011484 경상남도 사천시 향촌동 7,1011486 경기도 포천시 군내면 7,0961487 전라북도 군산시 구암동 7,0921488 전라북도 장수군 장수읍 7,0871489 경상북도 경주시 양남면 7,0671490 경상남도 통영시 중앙동 7,0561491 부산광역시 사하구 구평동 7,0381492 경상북도 경산시 중방동 7,0271493 경상북도 구미시 공단동 7,0091494 전라남도 목포시 연동 6,9941495 경상남도 거제시 거제면 6,9901496 대전광역시 대덕구 석봉동 6,9611497 경기도 연천군 연천읍 6,9581498 전라남도 순천시 별량면 6,9481499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6,9301500 충청북도 단양군 매포읍 6,9241501 경상남도 진주시 봉안동 6,9171502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식사동 6,9151503 제주도 서귀포시 대천동 6,9121504 대전광역시 대덕구 목상동 6,9101505 충청남도 연기군 전의면 6,9011506 경기도 평택시 현덕면 6,8981507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6,8941508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 6,8931509 경기도 과천시 문원동 6,8811510 경상북도 경주시 감포읍 6,8721511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6,8651512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6,8581512 경상북도 성주군 선남면 6,8581514 충청남도 금산군 추부면 6,8561515 충청남도 공주시 의당면 6,8461516 경상북도 경주시 중부동 6,8381517 부산광역시 서구 초장동 6,7971518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중앙동 6,7931519 전라남도 목포시 삼향동 6,7841520 충청남도 공주시 중학동 6,7801521 인천광역시 중구 동인천동 6,7751522 충청북도 제천시 남천.동현동 6,7591523 전라북도 군산시 대야면 6,7261524 광주광역시 남구 대촌동 6,7231525 강원도 원주시 행구동 6,7141526 경상남도 진주시 성지동 6,6871527 충청남도 당진군 우강면 6,6701528 전라북도 임실군 임실읍 6,6661529 충청남도 아산시 영인면 6,6331530 경상남도 통영시 봉평동 6,6321531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6,6301532 경기도 동두천시 상패동 6,6281533 경기도 평택시 청북면 6,6261534 강원도 원주시 학성동 6,6171535 전라남도 여수시 중앙동 6,6021536 강원도 강릉시 중앙동 6,6001537 경상북도 영천시 고경면 6,5961538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중앙동 6,5941539 경상북도 안동시 명륜동 6,5901540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 6,5871541 경상남도 산청군 산청읍 6,5841542 전라북도 완주군 이서면 6,5701543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화전동 6,5591544 경상북도 상주시 북문동 6,5511545 경기도 평택시 오성면 6,5491546 경기도 동두천시 중앙동 6,5451547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6,5211547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6,5211547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6,5211550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6,5141551 광주광역시 남구 사직동 6,4861552 경상남도 사천시 동서금동 6,4851553 전라북도 김제시 교동월촌동 6,4801554 강원도 철원군 서면 6,4771555 강원도 원주시 흥업면 6,4701556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3가동 6,4671557 경기도 안성시 미양면 6,4511558 경상북도 경산시 와촌면 6,4491559 충청남도 서천군 마서면 6,4471560 강원도 강릉시 연곡면 6,4411561 전라남도 무안군 해제면 6,4391562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 6,4121562 경상남도 함안군 칠서면 6,4121564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 6,4011565 전라남도 목포시 연산동 6,3991566 전라남도 영광군 법성면 6,3791567 전라남도 해남군 황산면 6,3611568 인천광역시 중구 신포동 6,3541569 충청남도 논산시 양촌면 6,3501570 전라남도 순천시 매곡동 6,3461570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6,3461572 강원도 원주시 판부면 6,3411573 경상남도 진주시 강남동 6,3361574 충청남도 당진군 고대면 6,3211575 충청남도 공주시 우성면 6,3131576 광주광역시 서구 서창동 6,3111577 전라남도 장흥군 관산읍 6,2891578 제주도 제주시 오라동 6,2861579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6,2801580 전라남도 무안군 현경면 6,2761581 충청남도 당진군 순성면 6,2741582 경상남도 남해군 창선면 6,2721583 경기도 안성시 보개면 6,2681584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6,2561585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노산동 6,2501586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 6,2031587 경상북도 영천시 서부동 6,1921588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 6,1721589 인천광역시 중구 송월동 6,1691590 광주광역시 남구 송암동 6,1661591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6,1571592 대구광역시 동구 도평동 6,1561593 경상북도 안동시 중구동 6,1551594 충청북도 진천군 덕산면 6,1341595 전라북도 익산시 평화동 6,1321596 충청남도 태안군 근흥면 6,1081597 충청남도 태안군 소원면 6,1001598 경상남도 사천시 용현면 6,0931599 경상북도 경주시 월성동 6,0891600 경기도 남양주시 양정동 6,0861601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 6,0811602 강원도 평창군 대관령면 6,0581603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6,0531604 전라남도 고흥군 포두면 6,0411605 경기도 화성시 마도면 6,0191606 강원도 강릉시 초당동 6,0181607 전라남도 여수시 동문동 6,0081608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6,0041609 광주광역시 동구 동명동 6,0021609 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 6,0021611 강원도 태백시 황연동 5,9911612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5,9891613 경상남도 진주시 집현면 5,9731614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5,9601615 경기도 포천시 영중면 5,9491616 경기도 양평군 지평면 5,9481617 전라북도 정읍시 연지동 5,9261618 충청북도 청원군 북이면 5,9191619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청하면 5,9041620 경상남도 통영시 산양읍 5,8991621 충청북도 청원군 미원면 5,8951622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5,8561623 대전광역시 중구 문창동 5,8501624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 5,8471625 충청남도 공주시 금학동 5,8351626 강원도 속초시 영랑동 5,8311627 충청남도 보령시 주교면 5,8171628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5,8151629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5,8061630 경상북도 경주시 천북면 5,7881631 충청남도 보령시 남포면 5,7821632 전라북도 남원시 노암동 5,7801633 경상북도 김천시 양금동 5,7741633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5,7741635 충청남도 예산군 오가면 5,7651636 전라남도 여수시 충무동 5,7541637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 5,7491638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 5,7421639 전라북도 익산시 춘포면 5,7401640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5,7311641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기계면 5,7271642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대송면 5,7261643 전라남도 완도군 노화읍 5,7241644 경상남도 사천시 남양동 5,7101645 강원도 홍천군 남면 5,7061646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신도동 5,6841647 강원도 평창군 대화면 5,6791648 전라남도 나주시 노안면 5,6771649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5,6651650 경상남도 거제시 마전동 5,6571651 전라남도 순천시 향동 5,6341652 경기도 하남시 감북동 5,6171653 충청북도 충주시 지현동 5,6141654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5,6081655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문성동 5,6001656 충청남도 공주시 정안면 5,5771657 경상북도 청송군 청송읍 5,5441658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5,5261659 경상남도 산청군 신안면 5,5241660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장기면 5,5231661 전라남도 나주시 금천면 5,5151661 대구광역시 중구 대신동 5,5151663 광주광역시 동구 충장동 5,5141664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5,5131665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읍 5,5061666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 5,5041667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5,4961668 강원도 동해시 발한동 5,4951669 강원도 삼척시 원덕읍 5,4871670 경기도 이천시 설성면 5,4861671 경상남도 통영시 인평동 5,4851672 경상남도 고성군 거류면 5,4801673 충청남도 논산시 성동면 5,4661673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흥동 5,4661675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5,4491676 강원도 횡성군 둔내면 5,4421677 전라남도 나주시 봉황면 5,4321678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5,4251679 경기도 포천시 내촌면 5,3991680 전라북도 정읍시 북면 5,3981681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5,3781682 인천광역시 중구 도원동 5,3741683 충청남도 논산시 광석면 5,3531684 전라남도 해남군 산이면 5,3491685 서울특별시 강남구 세곡동 5,3481686 전라북도 정읍시 농소동 5,3391687 경상남도 거제시 장목면 5,3101688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5,3011689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5,3001690 경기도 여주군 흥천면 5,2871691 충청북도 제천시 송학면 5,2771692 충청남도 아산시 도고면 5,2691693 강원도 동해시 동호동 5,2521694 경기도 평택시 통복동 5,2431695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5,2421696 전라북도 군산시 옥서면 5,2301697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5,2181698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5,2131699 전라북도 완주군 상관면 5,2101700 전라남도 고흥군 금산면 5,2081701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북면 5,2061702 부산광역시 중구 부평동 5,1991703 전라남도 여수시 서강동 5,1981704 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 5,1931704 전라남도 신안군 지도읍 5,1931706 경상북도 김천시 어모면 5,1801707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5,1791708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오동동 5,1781709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 5,1771710 서울특별시 중구 광희동 5,1651711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5,1611712 강원도 동해시 송정동 5,1601713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충무동 5,1241714 전라북도 익산시 중앙동 5,1121715 경상남도 통영시 명정동 5,1041716 충청남도 공주시 장기면 5,0991717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5,0981717 충청북도 청원군 문의면 5,0981719 제주도 서귀포시 효돈동 5,0751720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5,0661721 인천광역시 중구 용유동 5,0601722 경기도 안성시 원곡면 5,0521723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성호동 5,0491724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웅천동 5,0471725 전라남도 보성군 득량면 5,0421726 전라북도 남원시 금동 5,0411727 전라북도 남원시 왕정동 5,0261728 충청남도 서천군 서면 5,0221729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덕동 5,0111730 인천광역시 중구 율목동 5,0081731 강원도 춘천시 약사명동 5,0051732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5,0031733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5,0011734 전라남도 영광군 염산면 4,9991735 충청북도 충주시 이류면 4,9971736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풍세면 4,9961737 전라북도 익산시 오산면 4,9931738 제주도 서귀포시 영천동 4,9921739 충청남도 태안군 원북면 4,9841740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4,9831741 인천광역시 옹진군 백령면 4,9811742 강원도 강릉시 경포동 4,9741743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4,9731744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4,9701745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봉암동 4,9661746 경상남도 거제시 하청면 4,9651747 경상북도 상주시 공성면 4,9571748 제주도 서귀포시 송산동 4,9551748 전라남도 목포시 죽교동 4,9551750 경상남도 진주시 봉수동 4,9511751 전라북도 김제시 백구면 4,9431752 경상북도 영천시 완산동 4,9421753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4,9401753 전라북도 임실군 오수면 4,9401755 전라북도 무주군 안성면 4,9361756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4,9301757 광주광역시 동구 서남동 4,9211758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면 4,9201759 경기도 이천시 모가면 4,9161760 전라북도 김제시 용지면 4,9121760 충청남도 논산시 은진면 4,9121762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4,9111762 경기도 이천시 호법면 4,9111764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4,8991765 전라남도 여수시 한려동 4,8801766 전라북도 남원시 죽항동 4,8751767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중앙동 4,8731768 강원도 화천군 상서면 4,8691769 경기도 가평군 상면 4,8641770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4,8631771 전라북도 부안군 계화면 4,8341772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 4,8171773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4,8141774 경상북도 상주시 낙동면 4,7981775 경상북도 영천시 북안면 4,7931776 강원도 홍천군 화촌면 4,7881777 경상북도 의성군 다인면 4,7841778 경기도 여주군 점동면 4,7731779 충청북도 음성군 맹동면 4,7641780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 4,7521781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4,7461782 전라남도 영암군 시종면 4,7451783 경기도 오산시 세마동 4,7331784 전라북도 장수군 장계면 4,7271785 강원도 동해시 묵호동 4,7241786 경상남도 남해군 이동면 4,7191787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창릉동 4,7181788 경상남도 진주시 중앙동 4,7091789 인천광역시 옹진군 영흥면 4,6961790 전라남도 함평군 학교면 4,6921791 울산광역시 북구 강동동 4,6891792 대구광역시 중구 삼덕동 4,6811793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 4,6731794 충청북도 충주시 달천동 4,6711795 전라남도 보성군 조성면 4,6701796 경상남도 김해시 생림면 4,6641797 전라남도 신안군 흑산면 4,6601798 경상남도 남해군 고현면 4,6381799 경상북도 영천시 청통면 4,6371800 경상북도 구미시 비산동 4,6361801 전라남도 영암군 신북면 4,6291802 충청북도 충주시 앙성면 4,6241803 전라남도 목포시 만호동 4,6101803 전라북도 군산시 중앙동 4,6101805 충청북도 청원군 가덕면 4,6071806 경상북도 구미시 산동면 4,5981807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 4,5891808 강원도 원주시 호저면 4,5881809 충청남도 태안군 남면 4,5851810 전라남도 완도군 고금면 4,5801811 강원도 횡성군 우천면 4,5681812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면 4,5641813 전라남도 해남군 화원면 4,5591814 강원도 강릉시 옥천동 4,5571815 서울특별시 중구 필동 4,5511816 경상남도 남해군 삼동면 4,5431817 전라북도 정읍시 상교동 4,5411818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4,5391819 전라남도 나주시 다시면 4,5381820 전라남도 나주시 영산동 4,5301821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4,5291822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 4,5281823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4,5201824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4,5151825 경상북도 상주시 동성동 4,5091826 충청남도 보령시 청라면 4,5071827 경상남도 사천시 곤양면 4,5061828 충청남도 부여군 은산면 4,5031829 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 4,5001830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4,4991831 제주도 서귀포시 중앙동 4,4891832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4,4841833 강원도 속초시 청호동 4,4771834 전라남도 담양군 대전면 4,4731835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4,4701836 경상북도 상주시 사벌면 4,4681837 전라남도 순천시 중앙동 4,4551838 광주광역시 북구 중앙동 4,4491839 충청북도 청원군 현도면 4,4481840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4,4361841 전라남도 함평군 월야면 4,4341842 대전광역시 서구 기성동 4,4331843 서울특별시 중구 회현동 4,4291844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4,4231845 경기도 화성시 양감면 4,4211846 전라남도 여수시 삼일동 4,4191847 강원도 태백시 장성동 4,4111848 경상남도 함안군 대산면 4,4091849 경기도 연천군 청산면 4,4021850 충청남도 홍성군 구항면 4,3971850 강원도 강릉시 옥계면 4,3971852 전라남도 곡성군 옥과면 4,3951853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4,3941854 전라북도 군산시 옥도면 4,3921855 경상남도 사천시 서포면 4,3871856 경상남도 남해군 남면 4,3801857 전라북도 남원시 동충동 4,3771857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북면 4,3771859 전라북도 고창군 대산면 4,3701860 전라남도 강진군 군동면 4,3671860 충청남도 논산시 부적면 4,3671862 인천광역시 중구 북성동 4,3511863 전라남도 나주시 산포면 4,3371864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4,3181865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4,3101866 충청남도 홍성군 갈산면 4,3091867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4,3051868 경상북도 청도군 풍각면 4,3011869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 4,2981870 경상남도 진주시 대곡면 4,2971871 충청북도 충주시 금가면 4,2961871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4,2961873 경상북도 김천시 대항면 4,2921874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 4,2911875 충청남도 보령시 천북면 4,2541876 경기도 하남시 초이동 4,2521877 경상남도 밀양시 단장면 4,2471878 인천광역시 동구 금창동 4,2461879 강원도 속초시 동명동 4,2361880 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 4,2281881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흥도동 4,2211882 강원도 강릉시 사천면 4,2191883 전라남도 해남군 화산면 4,2061884 경상북도 예천군 풍양면 4,2041885 경기도 양평군 개군면 4,1991886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4,1931887 충청북도 충주시 동량면 4,1921887 경상북도 군위군 효령면 4,1921889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4,1861890 전라남도 장흥군 대덕읍 4,1851891 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 4,1721892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4,1691893 경상남도 김해시 주촌면 4,1681894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백현동 4,1601895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 4,1541895 전라남도 담양군 수북면 4,1541895 경상남도 거제시 장승포동 4,1541898 강원도 동해시 망상동 4,1511899 충청남도 당진군 정미면 4,1491900 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4,1481900 전라북도 군산시 해신동 4,1481902 전라남도 고흥군 과역면 4,1421903 경기도 평택시 서탄면 4,1311904 제주도 제주시 이호동 4,1261904 전라남도 순천시 주암면 4,1261906 광주광역시 광산구 평동 4,1221907 전라남도 나주시 이창동 4,1191908 경상남도 밀양시 내일동 4,1121909 경상북도 문경시 마성면 4,1091910 경상북도 청도군 매전면 4,1081911 충청남도 연기군 전동면 4,1071912 충청남도 금산군 금성면 4,1061913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4,1021914 충청남도 연기군 동면 4,1001915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4,0991916 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 4,0971917 충청남도 아산시 선장면 4,0921918 전라남도 함평군 손불면 4,0881919 경상북도 경산시 남산면 4,0851920 경상남도 고성군 동해면 4,0831921 강원도 춘천시 교동 4,0801921 충청남도 논산시 상월면 4,0801923 인천광역시 강화군 하점면 4,0781924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4,0741925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 4,0681926 전라남도 무안군 몽탄면 4,0671926 충청남도 공주시 이인면 4,0671928 전라남도 광양시 옥곡면 4,0631929 경상남도 고성군 회화면 4,0621930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4,0611931 경기도 안성시 서운면 4,0541932 전라남도 화순군 동면 4,0511933 충청남도 부여군 세도면 4,0491934 전라북도 군산시 옥구읍 4,0481935 경상남도 창녕군 대합면 4,0471936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오근장동 4,0451937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4,0441937 전라남도 나주시 영강동 4,0441939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성남면 4,0341939 전라북도 정읍시 장명동 4,0341941 강원도 홍천군 서석면 4,0321942 경상북도 영천시 남부동 4,0281942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4,0281944 경상남도 김해시 상동면 4,0271945 강원도 춘천시 서면 4,0231946 강원도 정선군 신동읍 4,0211947 강원도 홍천군 북방면 4,0191948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 4,0181949 경기도 하남시 춘궁동 4,0171950 충청남도 당진군 면천면 4,0151951 강원도 강릉시 구정면 4,0131952 전라북도 임실군 관촌면 4,0041952 경상남도 창녕군 부곡면 4,0041954 전라남도 고흥군 풍양면 4,0001955 전라북도 익산시 여산면 3,9931956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3,9901957 전라남도 순천시 저전동 3,9891958 경상북도 김천시 감문면 3,9801959 전라남도 완도군 금일읍 3,9791960 강원도 인제군 남면 3,9761961 강원도 동해시 삼화동 3,9721962 전라남도 신안군 비금면 3,9631963 전라북도 군산시 개정면 3,9621964 전라남도 진도군 지산면 3,9611965 경상남도 밀양시 산내면 3,9601966 전라남도 나주시 왕곡면 3,9551967 충청남도 홍성군 서부면 3,9531968 경상북도 경주시 서면 3,9521969 경기도 양평군 강하면 3,9501970 충청남도 홍성군 홍동면 3,9431971 충청남도 홍성군 금마면 3,9331972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3,9201973 전라남도 무안군 운남면 3,9071974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신촌동 3,9031975 강원도 태백시 문곡소도동 3,9001976 강원도 정선군 임계면 3,8961977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3,8941978 전라북도 익산시 낭산면 3,8911979 강원도 춘천시 남산면 3,8901980 경상북도 경산시 용성면 3,8881981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3,8851982 전라북도 익산시 망성면 3,8841983 경상남도 양산시 원동면 3,8831984 전라남도 순천시 황전면 3,8771985 강원도 원주시 신림면 3,8751986 경기도 포천시 관인면 3,8741987 전라남도 목포시 대성동 3,8681988 부산광역시 중구 동광동 3,8621989 경상북도 구미시 장천면 3,8601990 충청북도 진천군 초평면 3,8541991 전라남도 고흥군 동강면 3,8531992 전라북도 부안군 동진면 3,8281993 강원도 양구군 남면 3,8261993 경상북도 성주군 용암면 3,8261995 전라남도 완도군 신지면 3,8231996 강원도 속초시 대포동 3,8151997 전라북도 군산시 개정동 3,8061998 충청남도 청양군 정산면 3,8041999 강원도 횡성군 공근면 3,7952000 전라남도 장성군 남면 3,7932001 전라북도 군산시 회현면 3,7902002 전라남도 담양군 고서면 3,7812003 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3,7762004 경상북도 문경시 산양면 3,7672005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3,7652006 제주도 서귀포시 천지동 3,7512007 충청남도 연기군 남면 3,7322008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3,7312009 경기도 연천군 군남면 3,7272010 전라남도 신안군 임자면 3,7262011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 3,7242012 전라남도 해남군 현산면 3,7192013 전라남도 고흥군 두원면 3,7172014 충청남도 금산군 복수면 3,7152014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제철동 3,7152016 충청북도 영동군 양강면 3,7142017 경상남도 하동군 금성면 3,7082018 경상북도 안동시 북후면 3,7062019 전라북도 정읍시 입암면 3,7042020 충청남도 예산군 신양면 3,6962021 전라남도 여수시 남면 3,6952022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3,6932023 전라남도 광양시 진월면 3,6902024 전라남도 영암군 학산면 3,6852025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면 3,6792026 강원도 태백시 구문소동 3,6762027 충청남도 공주시 탄천면 3,6712028 경상북도 청도군 금천면 3,6652029 충청북도 영동군 용산면 3,6642029 경상북도 영천시 화산면 3,6642031 충청북도 영동군 심천면 3,6612032 충청남도 공주시 신풍면 3,6522033 충청남도 서천군 비인면 3,6512034 전라북도 김제시 만경읍 3,6502035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3,6462036 전라남도 신안군 안좌면 3,6452036 강원도 춘천시 조운동 3,6452036 전라남도 보성군 회천면 3,6452039 전라남도 해남군 옥천면 3,6422040 경상북도 김천시 남면 3,6392041 전라남도 나주시 세지면 3,6372042 전라남도 완도군 군외면 3,6362043 경상남도 거제시 동부면 3,6332044 경상북도 김천시 봉산면 3,6302045 충청남도 부여군 석성면 3,6292046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 3,6282047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 3,6252048 경상남도 밀양시 초동면 3,6232049 경상남도 거제시 둔덕면 3,6122050 전라남도 광양시 진상면 3,6112051 경상북도 경산시 남천면 3,6012051 강원도 원주시 중앙동 3,6012053 충청북도 충주시 엄정면 3,5912054 충청북도 옥천군 청산면 3,5902055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3,5862056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3,5842057 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3,5772057 경상남도 의령군 부림면 3,5772059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3,5762060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3,5732061 강원도 홍천군 동면 3,5702062 전라북도 김제시 진봉면 3,5682063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3,5652064 전라남도 고흥군 도덕면 3,5642065 경기도 양평군 청운면 3,5622066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 3,5482067 충청남도 서산시 팔봉면 3,5412068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서면 3,5402069 경기도 안성시 삼죽면 3,5372070 충청남도 부여군 홍산면 3,5362071 경기도 가평군 북면 3,5352071 전라북도 군산시 성산면 3,5352073 충청남도 홍성군 장곡면 3,5322074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3,5222075 경상북도 예천군 지보면 3,5202076 전라북도 군산시 임피면 3,5192077 경상북도 영주시 안정면 3,5122078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 3,5112079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 3,5092079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3,5092081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3,5082082 강원도 홍천군 내면 3,5062083 강원도 영월군 한반도면 3,5012084 전라남도 순천시 승주읍 3,4982085 경기도 연천군 신서면 3,4972086 전라북도 김제시 죽산면 3,4942087 경상남도 남해군 설천면 3,4932088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3,4922089 전라남도 해남군 북평면 3,4862090 전라남도 순천시 장천동 3,4832091 경상북도 상주시 청리면 3,4802092 전라남도 나주시 동강면 3,4772093 제주도 서귀포시 예래동 3,4752094 전라북도 익산시 용안면 3,4702095 강원도 홍천군 서면 3,4642095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 3,4642097 경상북도 구미시 지산동 3,4612098 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 3,4602099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 3,4582100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3,4532101 전라북도 정읍시 감곡면 3,4512102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3,4492103 경상남도 통영시 도산면 3,4442104 전라북도 김제시 백산면 3,4332105 충청북도 옥천군 동이면 3,4292106 경상남도 진주시 일반성면 3,4152107 전라북도 고창군 해리면 3,4092107 전라남도 장흥군 회진면 3,4092109 경상북도 구미시 광평동 3,4072110 경상북도 안동시 길안면 3,4062111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3,3952112 경상북도 경주시 산내면 3,3922112 전라북도 부안군 하서면 3,3922114 경상남도 사천시 곤명면 3,3832115 경상북도 봉화군 물야면 3,3762116 충청북도 괴산군 청안면 3,3642117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 3,3612118 전라북도 부안군 줄포면 3,3602119 강원도 양양군 현남면 3,3512120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신광면 3,3502121 경상남도 남해군 서면 3,3482121 충청북도 충주시 성내.충인동 3,3482123 전라남도 장흥군 안양면 3,3442124 강원도 태백시 철암동 3,3382125 전라남도 함평군 나산면 3,3372126 경상북도 영덕군 병곡면 3,3272127 경상북도 영천시 화남면 3,3252128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3,3242128 경상남도 진주시 정촌면 3,3242130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3,3212131 전라남도 함평군 대동면 3,3072132 전라남도 장성군 북이면 3,3052133 경상남도 함안군 법수면 3,3022134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3,2952135 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3,2932136 충청북도 제천시 백운면 3,2902136 강원도 양양군 서면 3,2902138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3,2762139 강원도 정선군 남면 3,2662140 경상남도 합천군 초계면 3,2652141 전라북도 익산시 삼기면 3,2622142 전라남도 함평군 해보면 3,2562143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3,2542143 전라남도 고흥군 점암면 3,2542145 전라남도 광양시 옥룡면 3,2502146 전라남도 구례군 산동면 3,2432147 경기도 동두천시 보산동 3,2422148 경상북도 김천시 농소면 3,2412149 충청남도 보령시 청소면 3,2402150 전라북도 김제시 공덕면 3,2372151 경기도 양평군 단월면 3,2342152 전라북도 부안군 백산면 3,2332153 충청남도 금산군 제원면 3,2292154 전라북도 군산시 서수면 3,2182155 충청남도 부여군 장암면 3,2172156 경상북도 영천시 대창면 3,2162157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3,2132158 충청북도 옥천군 군북면 3,2032159 인천광역시 강화군 송해면 3,1992160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3,1982161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3,1942161 경상북도 예천군 유천면 3,1942163 전라북도 완주군 화산면 3,1902164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3,1892165 전라북도 정읍시 정우면 3,1872166 충청남도 논산시 채운면 3,1812167 경기도 구리시 갈매동 3,1762168 경상북도 예천군 감천면 3,1722169 전라남도 장성군 진원면 3,1642170 전라남도 곡성군 입면 3,1632171 전라남도 신안군 도초면 3,1552172 대전광역시 동구 대청동 3,1512173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송라면 3,1502173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3,1502175 충청남도 연기군 소정면 3,1472176 경상남도 밀양시 상동면 3,1362177 충청북도 영동군 학산면 3,1302178 강원도 인제군 서화면 3,1182179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3,1142180 경기도 포천시 화현면 3,1122181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3,1112182 부산광역시 강서구 가락동 3,1102182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3,1102184 전라북도 군산시 옥산면 3,1072185 인천광역시 강화군 내가면 3,1022186 경상북도 영주시 봉현면 3,1012187 전라남도 나주시 공산면 3,0992188 전라북도 남원시 인월면 3,0942189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시흥동 3,0932189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3,0932191 전라남도 화순군 도곡면 3,0832192 충청남도 금산군 부리면 3,0812193 전라남도 순천시 상사면 3,0722194 경상남도 고성군 하이면 3,0602195 전라남도 장성군 삼서면 3,0572196 충청남도 예산군 대술면 3,0512197 경상남도 합천군 율곡면 3,0462198 제주도 제주시 봉개동 3,0452199 충청북도 괴산군 불정면 3,0372200 경상북도 상주시 화서면 3,0352201 전라남도 해남군 마산면 3,0272202 충청남도 예산군 응봉면 3,0262203 경기도 이천시 율면 3,0232204 충청남도 보령시 주산면 3,0172205 강원도 평창군 용평면 3,0152206 전라북도 고창군 공음면 3,0112207 경상북도 예천군 호명면 3,0072208 경상북도 울진군 기성면 3,0042209 광주광역시 북구 석곡동 2,9982210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 2,9902210 전라남도 담양군 봉산면 2,9902210 전라북도 고창군 심원면 2,9902213 충청북도 괴산군 사리면 2,9882214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죽장면 2,9862215 경상북도 울진군 근남면 2,9802215 경상북도 상주시 외서면 2,9802217 경상남도 남해군 미조면 2,9792218 경상남도 합천군 야로면 2,9742219 경상남도 밀양시 산외면 2,9712220 충청남도 청양군 남양면 2,9672221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2,9642222 전라남도 완도군 소안면 2,9592223 경상북도 고령군 성산면 2,9572224 전라북도 김제시 봉남면 2,9522225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 2,9512226 부산광역시 강서구 천가동 2,9472227 충청남도 예산군 봉산면 2,9402228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2,9392229 광주광역시 광산구 삼도동 2,9362230 충청남도 당진군 대호지면 2,9182231 경상북도 영덕군 남정면 2,9132232 전라남도 강진군 칠량면 2,9122233 전라남도 곡성군 석곡면 2,9102234 충청남도 홍성군 은하면 2,8962235 충청북도 충주시 가금면 2,8932236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 2,8922237 충청남도 금산군 남일면 2,8912237 전라남도 고흥군 대서면 2,8912239 경상북도 문경시 농암면 2,8882240 충청남도 서천군 화양면 2,8832241 경상북도 군위군 의흥면 2,8762242 경상남도 창녕군 도천면 2,8742243 제주도 서귀포시 정방동 2,8702244 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 2,8692245 전라북도 고창군 상하면 2,8682245 충청남도 부여군 외산면 2,8682247 부산광역시 금정구 선두구동 2,8642248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 2,8622249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2,8612250 경상북도 문경시 영순면 2,8562251 경상남도 함안군 산인면 2,8522252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2,8472253 전라북도 남원시 금지면 2,8402254 경상남도 창녕군 이방면 2,8382255 충청남도 논산시 벌곡면 2,8372256 전라남도 구례군 마산면 2,8332257 전라북도 군산시 나포면 2,8322257 충청남도 서산시 성연면 2,8322257 전라남도 여수시 화정면 2,8322260 충청북도 충주시 산척면 2,8302261 전라남도 완도군 보길면 2,8272261 강원도 양양군 현북면 2,8272263 경상북도 문경시 호계면 2,8222264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2,8152265 경상남도 함안군 함안면 2,8102266 전라남도 담양군 무정면 2,8092267 전라남도 영암군 미암면 2,8082268 강원도 횡성군 안흥면 2,8072269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2,8062270 전라남도 고흥군 남양면 2,8052271 전라남도 광양시 태인동 2,8022272 전라남도 영광군 군남면 2,7952273 경상북도 구미시 도개면 2,7902274 충청북도 괴산군 칠성면 2,7832275 경상남도 거창군 남상면 2,7822276 전라북도 부안군 진서면 2,7802277 경상남도 하동군 고전면 2,7762277 전라남도 영암군 도포면 2,7762279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2,7712280 강원도 정선군 북평면 2,7702281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2,7662282 경상남도 합천군 용주면 2,7652282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2,7652284 충청남도 부여군 구룡면 2,7612285 전라남도 담양군 금성면 2,7592286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2,7562287 광주광역시 광산구 본량동 2,7502288 경상북도 칠곡군 기산면 2,7492289 충청남도 부여군 초촌면 2,7472290 경상남도 진주시 금곡면 2,7402291 전라북도 고창군 고수면 2,7372292 전라북도 익산시 함라면 2,7352293 충청남도 태안군 고남면 2,7282294 경상북도 김천시 조마면 2,7242295 전라북도 진안군 부귀면 2,7202296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수신면 2,7192297 전라남도 무안군 망운면 2,7122298 전라북도 순창군 구림면 2,7092299 충청북도 보은군 마로면 2,7082300 충청남도 금산군 군북면 2,7052301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2,7042302 전라남도 해남군 계곡면 2,6942302 전라북도 정읍시 산외면 2,6942304 전라남도 담양군 월산면 2,6922305 경상북도 상주시 모서면 2,6912306 경기도 광명시 학온동 2,6852307 전라남도 장흥군 용산면 2,6782308 경상남도 산청군 금서면 2,6772308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 2,6772310 전라북도 장수군 번암면 2,6592311 경상북도 상주시 공검면 2,6522312 경상북도 군위군 소보면 2,6432313 경상북도 청송군 현서면 2,6412314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2,6402315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대보면 2,6372315 충청북도 보은군 삼승면 2,6372317 전라남도 화순군 남면 2,6342317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2,6342319 전라남도 광양시 골약동 2,6302320 전라북도 남원시 이백면 2,6262321 충청북도 옥천군 청성면 2,6222322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2,6212323 전라북도 정읍시 소성면 2,6202324 경상북도 안동시 남선면 2,6152325 강원도 화천군 간동면 2,6112326 광주광역시 광산구 임곡동 2,6092327 제주도 제주시 도두동 2,6072328 전라북도 장수군 산서면 2,6052329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고등동 2,5972330 충청남도 청양군 장평면 2,5912331 전라남도 완도군 청산면 2,5902332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동면 2,5882333 전라남도 여수시 삼산면 2,5862333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 2,5862335 전라북도 남원시 주천면 2,5772335 충청북도 영동군 추풍령면 2,5772337 전라북도 익산시 성당면 2,5762338 경상북도 영주시 평은면 2,5742339 경상남도 창녕군 계성면 2,5732340 전라북도 부안군 행안면 2,5712341 충청북도 충주시 노은면 2,5662342 전라남도 구례군 광의면 2,5622343 전라남도 장성군 북하면 2,5532344 전라남도 장흥군 장평면 2,5512344 경상북도 영천시 화북면 2,5512346 경상북도 영양군 입암면 2,5502347 제주도 제주시 추자면 2,5492348 경상북도 울진군 원남면 2,5462349 전라남도 영광군 군서면 2,5452350 경상북도 청송군 부남면 2,5402351 강원도 춘천시 신동면 2,5332351 전라남도 완도군 약산면 2,5332353 전라남도 나주시 문평면 2,5312354 경상북도 김천시 대덕면 2,5262354 경상남도 진주시 수곡면 2,5262354 경상북도 영주시 장수면 2,5262357 전라남도 해남군 북일면 2,5252358 경기도 시흥시 과림동 2,5222359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2,5212360 강원도 춘천시 사북면 2,5142361 경기도 여주군 산북면 2,5132362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 2,5122363 충청북도 청원군 낭성면 2,5082364 충청남도 서천군 판교면 2,5042365 경상남도 통영시 한산면 2,4852366 충청북도 증평군 도안면 2,4842367 경상남도 산청군 생초면 2,4822367 충청남도 태안군 이원면 2,4822369 전라북도 고창군 신림면 2,4802370 충청북도 옥천군 군서면 2,4782371 경상남도 진주시 진성면 2,4732372 광주광역시 광산구 동곡동 2,4712373 전라북도 김제시 황산면 2,4682374 경상남도 창녕군 대지면 2,4652375 경상북도 영덕군 지품면 2,4632376 전라북도 남원시 송동면 2,4592376 충청남도 서천군 종천면 2,4592378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 2,4582379 전라북도 부안군 주산면 2,4522380 충청북도 영동군 상촌면 2,4422381 강원도 평창군 방림면 2,4392382 전라남도 신안군 자은면 2,4382383 경상북도 봉화군 봉성면 2,4372384 강원도 양양군 손양면 2,4302385 경상북도 상주시 이안면 2,4202386 경상북도 봉화군 소천면 2,4182387 전라남도 함평군 엄다면 2,4162388 충청북도 제천시 덕산면 2,4102389 충청남도 청양군 화성면 2,4002390 전라남도 강진군 작천면 2,3992391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2,3962391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2,3962393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2,3942394 강원도 홍천군 두촌면 2,3932395 전라북도 김제시 청하면 2,3872396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현동 2,3862397 전라남도 광양시 봉강면 2,3852398 전라북도 장수군 계남면 2,3692399 강원도 횡성군 청일면 2,3682400 강원도 양구군 동면 2,3662401 전라북도 순창군 동계면 2,3632402 경상북도 구미시 무을면 2,3612403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2,3572404 전라북도 고창군 성내면 2,3492405 경상북도 청도군 각남면 2,3472406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2,3462407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 2,3432407 경상북도 봉화군 명호면 2,3432409 충청남도 청양군 비봉면 2,3422410 경상북도 의성군 단촌면 2,3412411 강원도 영월군 남면 2,3392412 전라남도 고흥군 봉래면 2,3342413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2,3332414 경상남도 함안군 칠북면 2,3302415 경상남도 통영시 욕지면 2,3232416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 2,3212416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2,3212418 경상남도 하동군 횡천면 2,3202419 충청남도 청양군 대치면 2,3182420 전라북도 장수군 천천면 2,3162421 전라남도 영암군 금정면 2,3152422 전라남도 영암군 서호면 2,3112423 인천광역시 강화군 삼산면 2,3102424 경상북도 김천시 감천면 2,3092425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2,3052426 전라북도 순창군 쌍치면 2,3032427 충청남도 금산군 남이면 2,3022428 전라북도 김제시 성덕면 2,2962429 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면 2,2952430 경상북도 상주시 화동면 2,2912431 강원도 횡성군 서원면 2,2882432 전라남도 화순군 춘양면 2,2822433 경상남도 합천군 대병면 2,2792434 충청남도 청양군 운곡면 2,2722435 경상북도 고령군 개진면 2,2662436 경상남도 거창군 마리면 2,2622437 충청북도 제천시 금성면 2,2612437 전라남도 곡성군 오곡면 2,2612439 전라북도 정읍시 영원면 2,2552440 강원도 정선군 여량면 2,2532441 경상북도 영주시 단산면 2,2482442 강원도 영월군 북면 2,2452443 강원도 철원군 근남면 2,2422444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면 2,2382445 강원도 화천군 하남면 2,2372446 충청북도 충주시 살미면 2,2362447 전라남도 순천시 월등면 2,2352448 경상북도 군위군 부계면 2,2322449 경상북도 봉화군 법전면 2,2282450 경상남도 산청군 신등면 2,2272451 충청남도 부여군 남면 2,2252452 경상북도 군위군 우보면 2,2212453 전라남도 강진군 병영면 2,2172454 경상남도 고성군 마암면 2,2152455 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 2,2142456 전라남도 나주시 다도면 2,2112456 경상남도 하동군 적량면 2,2112458 전라남도 강진군 마량면 2,2022459 경상북도 울진군 온정면 2,1992460 경상북도 안동시 남후면 2,1982461 전라북도 남원시 주생면 2,1972462 경상북도 청도군 각북면 2,1952463 경상북도 경주시 보덕동 2,1942464 경상북도 고령군 운수면 2,1932464 경상남도 의령군 지정면 2,1932466 충청북도 진천군 백곡면 2,1902467 경상북도 의성군 옥산면 2,1892468 전라남도 강진군 신전면 2,1862469 전라북도 남원시 아영면 2,1782470 경상북도 의성군 단밀면 2,1732471 인천광역시 옹진군 북도면 2,1702472 강원도 횡성군 갑천면 2,1652473 경상남도 사천시 축동면 2,1612474 경상북도 의성군 단북면 2,1602475 경상북도 상주시 내서면 2,1592476 경상남도 합천군 쌍백면 2,1582477 경상북도 청송군 현동면 2,1572478 전라남도 신안군 증도면 2,1542479 전라북도 진안군 백운면 2,1522480 충청북도 단양군 가곡면 2,1502480 충청북도 영동군 매곡면 2,1502482 전라북도 정읍시 옹동면 2,1472483 경상남도 하동군 북천면 2,1432484 전라북도 완주군 운주면 2,1412485 전라북도 완주군 비봉면 2,1362486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2,1322487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 2,1312487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2,1312487 전라북도 고창군 성송면 2,1312490 경상남도 하동군 양보면 2,1292491 경상남도 의령군 가례면 2,1272492 경상남도 거창군 웅양면 2,1262493 충청북도 괴산군 장연면 2,1252494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2,1202495 경상북도 영주시 문수면 2,1192495 충청북도 옥천군 안내면 2,1192495 경상북도 구미시 옥성면 2,1192495 경상남도 함양군 지곡면 2,1192499 경상남도 고성군 하일면 2,1172500 충청북도 영동군 양산면 2,1132501 전라남도 장성군 동화면 2,1102501 충청북도 제천시 수산면 2,1102503 충청남도 부여군 양화면 2,1052504 전라북도 남원시 산동면 2,1032505 충청남도 청양군 청남면 2,1022506 경기도 안성시 고삼면 2,0992507 전라남도 함평군 신광면 2,0972508 충청남도 보령시 미산면 2,0962509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 2,0912510 전라북도 익산시 용동면 2,0872511 경상남도 합천군 가회면 2,0782512 경상북도 안동시 녹전면 2,0772513 전라남도 곡성군 죽곡면 2,0662514 전라남도 곡성군 겸면 2,0652514 경상북도 의성군 구천면 2,0652514 전라남도 광양시 다압면 2,0652517 강원도 원주시 귀래면 2,0632518 전라남도 담양군 대덕면 2,0572518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2,0572520 경상북도 고령군 우곡면 2,0562521 경상북도 성주군 가천면 2,0552522 경상남도 합천군 대양면 2,0492522 경상북도 봉화군 석포면 2,0492524 전라북도 남원시 대강면 2,0482525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 2,0452525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면 2,0452527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2,0422528 경상북도 상주시 외남면 2,0392529 경상남도 합천군 청덕면 2,0362530 경상남도 합천군 쌍책면 2,0342531 충청남도 서천군 기산면 2,0322532 충청북도 보은군 탄부면 2,0302533 전라남도 보성군 복내면 2,0242534 경상북도 청송군 부동면 2,0202535 경상남도 진주시 미천면 2,0172536 경상북도 청송군 파천면 2,0152537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2,0142538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 2,0062539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신동 2,0052540 경상남도 고성군 삼산면 2,0032541 충청북도 충주시 소태면 2,0022542 경상남도 창녕군 유어면 2,0002543 경상남도 합천군 묘산면 1,9982544 경상남도 창녕군 고암면 1,9972544 전라북도 임실군 운암면 1,9972546 전라남도 화순군 북면 1,9872547 경상남도 함양군 유림면 1,9862548 경상남도 진주시 이반성면 1,9852549 경상북도 예천군 보문면 1,9812549 충청북도 보은군 회인면 1,9812551 충청북도 괴산군 문광면 1,9802552 전라북도 순창군 풍산면 1,9772553 경상북도 봉화군 상운면 1,9762554 전라남도 영광군 묘량면 1,9722555 경상남도 함양군 서상면 1,9712556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동 1,9642557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동면 1,9632558 전라남도 곡성군 삼기면 1,9622559 전라북도 진안군 성수면 1,9592559 전라남도 담양군 용면 1,9592561 경상북도 예천군 개포면 1,9562562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1,9532563 전라북도 익산시 웅포면 1,9522564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사면 1,9512565 충청북도 보은군 수한면 1,9462566 충청북도 보은군 내북면 1,9432567 전라북도 순창군 금과면 1,9412568 경상북도 영양군 수비면 1,9392569 충청북도 괴산군 소수면 1,9282570 경상남도 밀양시 청도면 1,9262571 경상남도 진주시 지수면 1,9232572 전라남도 나주시 반남면 1,9202572 경상남도 남해군 상주면 1,9202572 경상북도 김천시 지례면 1,9202575 경상남도 창녕군 장마면 1,9142576 경상북도 영양군 청기면 1,9082577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동 1,9062578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1,9052579 경상남도 거제시 남부면 1,9012580 충청북도 괴산군 감물면 1,8992581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 1,8942582 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 1,8922583 전라북도 남원시 대산면 1,8912584 경상북도 상주시 중동면 1,8892585 경상남도 고성군 상리면 1,8842586 경상북도 상주시 은척면 1,8802587 전라북도 임실군 성수면 1,8762588 충청남도 부여군 내산면 1,8722588 경상남도 합천군 적중면 1,8722590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면 1,8712591 전라남도 영광군 대마면 1,8702592 경상남도 의령군 용덕면 1,8552593 충청북도 단양군 어상천면 1,8522594 충청남도 보령시 주포면 1,8512595 전라북도 남원시 사매면 1,8502596 충청북도 보은군 산외면 1,8472597 전라북도 임실군 강진면 1,8452598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가포동 1,8432599 전라남도 신안군 장산면 1,8422600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 1,8242601 충청북도 단양군 단성면 1,8212602 경상남도 통영시 사량면 1,8152603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1,8092604 전라남도 신안군 신의면 1,8072605 전라북도 김제시 부량면 1,8002606 전라남도 고흥군 동일면 1,7952607 경상북도 의성군 사곡면 1,7942608 전라북도 남원시 보절면 1,7892609 경상남도 거창군 남하면 1,7882610 경상북도 문경시 동로면 1,7832611 인천광역시 옹진군 연평면 1,7802612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1,7742613 전라북도 순창군 인계면 1,7732614 경상남도 거창군 주상면 1,7712615 경상남도 산청군 삼장면 1,7672616 경상북도 상주시 화북면 1,7652617 경상남도 고성군 대가면 1,7642618 전라남도 화순군 한천면 1,7632619 경상남도 합천군 봉산면 1,7622619 전라북도 임실군 신평면 1,7622621 경상북도 의성군 춘산면 1,7582622 전라북도 임실군 삼계면 1,7572623 전라북도 김제시 광활면 1,7562624 강원도 정선군 화암면 1,7482625 강원도 인제군 상남면 1,7452626 강원도 강릉시 왕산면 1,7382627 전라북도 진안군 주천면 1,7372628 경상남도 의령군 화정면 1,7362629 전라남도 보성군 미력면 1,7332630 충청남도 서천군 마산면 1,7292631 경상남도 의령군 정곡면 1,7272632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1,7222633 전라북도 순창군 팔덕면 1,7212634 전라북도 장수군 계북면 1,7152635 경상남도 하동군 청암면 1,7112636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1,7072636 전라남도 장성군 서삼면 1,7072638 경상남도 진주시 내동면 1,7052639 경상남도 고성군 영오면 1,6922640 경상북도 봉화군 재산면 1,6832641 경상북도 울진군 서면 1,6722642 충청남도 청양군 목면 1,6672643 전라남도 구례군 간전면 1,6662644 충청남도 부여군 옥산면 1,6602645 경상북도 의성군 가음면 1,6582646 전라남도 고흥군 영남면 1,6552647 전라남도 곡성군 목사동면 1,6402647 전라남도 곡성군 오산면 1,6402649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1,6272650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 1,6212651 전라남도 장흥군 부산면 1,6202652 전라북도 진안군 동향면 1,6192653 전라남도 장성군 북일면 1,6162654 경상남도 함양군 휴천면 1,6142655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1,6072656 강원도 영월군 중동면 1,5922657 경상남도 산청군 차황면 1,5902658 경상북도 울릉군 서면 1,5842658 제주도 제주시 우도면 1,5842660 강원도 횡성군 강림면 1,5782661 전라남도 구례군 용방면 1,5762662 경상북도 예천군 하리면 1,5722663 강원도 춘천시 동산면 1,5652664 경상남도 창녕군 성산면 1,5602665 전라북도 무주군 부남면 1,5542666 인천광역시 옹진군 대청면 1,5532667 강원도 삼척시 하장면 1,5452668 충청북도 옥천군 안남면 1,5442669 경상남도 함양군 백전면 1,5402670 전라북도 정읍시 산내면 1,5352671 전라북도 임실군 청웅면 1,5332672 전라남도 보성군 율어면 1,5222673 경상북도 고령군 덕곡면 1,5142674 부산광역시 중구 광복동 1,5102675 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 1,5012676 충청남도 서천군 문산면 1,4922676 전라북도 임실군 신덕면 1,4922678 경상남도 창녕군 길곡면 1,4872679 전라북도 순창군 적성면 1,4832680 경상북도 군위군 고로면 1,4782680 충청북도 단양군 적성면 1,4782682 경상남도 의령군 유곡면 1,4762683 전라북도 임실군 지사면 1,4642684 경상남도 거창군 가북면 1,4632685 경상남도 거창군 고제면 1,4582686 경상남도 함양군 병곡면 1,4572687 전라남도 영광군 불갑면 1,4562687 전라남도 장흥군 장동면 1,4562689 전라남도 보성군 겸백면 1,4552690 충청남도 서천군 시초면 1,4542690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 1,4542692 경상남도 함양군 서하면 1,4472693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1,4422694 부산광역시 중구 남포동 1,4272695 경상남도 의령군 궁류면 1,4242696 경상북도 울릉군 북면 1,4122697 전라남도 곡성군 고달면 1,4092698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기북면 1,4052699 경상북도 김천시 부항면 1,4022699 충청남도 부여군 충화면 1,4022701 전라남도 보성군 웅치면 1,3962702 전라북도 순창군 유등면 1,3952703 경상북도 군위군 산성면 1,3932704 경상남도 고성군 개천면 1,3742705 충청북도 보은군 장안면 1,3712706 전라북도 임실군 덕치면 1,3672707 전라북도 남원시 수지면 1,3652708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면 1,3592709 전라남도 여수시 묘도동 1,3432710 경상북도 영덕군 달산면 1,3342711 경상남도 산청군 생비량면 1,3242712 전라남도 화순군 청풍면 1,3162713 전라남도 구례군 문척면 1,2942714 전라남도 보성군 노동면 1,2882715 경상북도 김천시 증산면 1,2732716 전라남도 신안군 팔금면 1,2702717 강원도 영월군 상동읍 1,2672718 경상남도 의령군 칠곡면 1,2642719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1,2532720 경상남도 진주시 대평면 1,2522721 경상남도 의령군 대의면 1,2502722 경상북도 예천군 상리면 1,2492722 충청북도 제천시 청풍면 1,2492724 경상남도 고성군 구만면 1,2452725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 1,2352726 경상남도 의령군 봉수면 1,2022727 경상북도 성주군 금수면 1,1982728 전라북도 완주군 동상면 1,1872729 전라남도 완도군 금당면 1,1712730 인천광역시 옹진군 자월면 1,1702731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1,1612732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성동 1,1602733 전라북도 진안군 정천면 1,1492734 경상남도 산청군 오부면 1,1462735 경상남도 합천군 덕곡면 1,1412736 전라남도 순천시 외서면 1,1352737 강원도 춘천시 남면 1,1262738 전라북도 진안군 안천면 1,1222739 전라북도 남원시 덕과면 1,0962740 서울특별시 중구 소공동 1,0952741 경상남도 고성군 영현면 1,0702742 경상남도 의령군 낙서면 1,0542743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1,0522744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1,0482745 전라북도 진안군 용담면 1,0332746 전라북도 완주군 경천면 1,0212747 전라북도 진안군 상전면 1,0202748 충청북도 영동군 용화면 1,0112749 경상북도 의성군 안사면 1,0062750 전라남도 강진군 옴천면 9482751 전라남도 완도군 생일면 9292752 경상남도 함안군 여항면 9172753 경상북도 의성군 신평면 9052754 경상북도 상주시 화남면 8892755 강원도 춘천시 북산면 8622756 강원도 삼척시 노곡면 8582757 강원도 삼척시 신기면 8032758 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 7992759 강원도 삼척시 가곡면 7592760 충청북도 보은군 회남면 7442761 인천광역시 강화군 서도면 6982762 전라남도 영광군 낙월면 6572763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6562764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6482765 경기도 연천군 중면 2582766 경기도 파주시 진동면 157
난...몇위...인가??
킥오프넘작성일
2011-04-09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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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자신의 성은 몇 위 일까요??
CTRL + F 눌러서 검색해보아요 ^^1. 김해김씨(金海金氏)-4,124,934 2. 밀양박씨(密陽朴氏)-3,031,478 3. 전주이씨(全州李氏)-2,609,890 4. 경주김씨(慶州金氏)-1,736,798 5. 경주이씨(慶州李氏)-1,424,866 6. 경주최씨(慶州崔氏)-976,820 7. 진주강씨(晋州姜氏)-966,7108. 광산김씨(光山金氏)-837,008 9. 파평윤씨(坡平尹氏)-713,947 10. 청주한씨(淸州韓氏)-642,992 11. 안동권씨(安東權氏)-629,291 12. 인동장씨(仁同張氏)-591,315 13. 김녕김씨(金寧金氏)-513,015 14. 평산신씨(平山申氏)-496,874 15. 순흥안씨(順興安氏)-468,827 16. 동래정씨(東萊鄭氏)-442,363 17. 달성서씨(達城徐氏)-429,353 18. 안동김씨(安東金氏)-425,264 19. 해주오씨(海州吳氏)-422,735 20. 전주최씨(全州崔氏)-392,548 21. 남평문씨(南平文氏)-380,530 22. 남양홍씨(南陽洪氏)-379,708 23. 창녕조씨(昌寧曺氏)-338,222 24. 제주고씨(濟州高氏)-325,950 25. 수원백씨(水原白氏)-316,535 26. 한양조씨(漢陽趙氏)-307,746 27. 경주정씨(慶州鄭氏)-303,443 28. 문화류씨(文化柳氏)-284,083 29. 밀양손씨(密陽孫氏)-274,665 30. 함안조씨(咸安趙氏)-259,196 31. 의성김씨(義城金氏)-253,309 32. 창원황씨(昌原黃氏)-252,814 33. 진주정씨(晋州鄭氏)-238,505 34. 나주임씨(羅州林氏)-236,877 35. 여산송씨(礪山宋氏)-232,753 36. 남원양씨(南原梁氏)-218,546 37. 연일정씨(延日鄭氏)-216,510 38. 청송심씨(靑松沈氏)-212,717 39. 평택임씨(平澤林氏)-210,089 40. 은진송씨(恩津宋氏)-208,816 41-1. 김해김씨(金海金氏)-199,54441-2. 김해김씨(金海金氏)-199,544 42. 성주이씨(星州李氏)-186,188 43. 해주최씨(海州崔氏)-181,840 44. 강릉유씨(江陵劉氏)-178,913 45. 이천서씨(利川徐氏)-172,072 46. 창녕성씨(昌寧成氏)-167,903 47. 강릉김씨(江陵金氏)-165,953 48. 단양우씨(丹陽禹氏)-162,479 49. 연안차씨(延安車氏)-161,325 50. 하동정씨(河東鄭氏)-158,396 51. 광주이씨(廣州李氏)-158,249 52. 신안주씨(新安朱氏)-151,227 53. 의령남씨(宜寧南氏)-150,394 54. 장수황씨(長水黃氏)-146,575 55. 연안이씨(延安李氏)-145,440 56. 여흥민씨(驪興閔氏)-142,572 57. 정선전씨(旌善全氏)-141,380 58. 강릉최씨(江陵崔氏)-140,854 59. 현풍곽씨(玄風郭氏)-140,283 60. 반남박씨(潘南朴氏)-139,438 61. 평해황씨(平海黃氏)-137,150 62. 한산이씨(韓山李氏)-136,615 63. 제주양씨(濟州梁氏)-133,355 64. 전의이씨(全義李氏)-133,237 65. 천안전씨(天安全氏)-133,074 66. 양천허씨(陽川許氏)-130,286 67. 담양전씨(潭陽田氏)-128,007 68. 함평이씨(咸平李氏)-125,419 69. 영월엄씨(寧越嚴氏)-124,697 70. 함양박씨(咸陽朴氏)-123,688 71. 진주하씨(晋州河氏)-121,054 72. 김해허씨(金海許氏)-121,031 73. 능성구씨(綾城具氏)-120,503 74. 충주지씨(忠州池氏)-118,211 75. 고령신씨(高靈申氏)-116,966 76. 합천이씨(陜川李氏)-115,462 77. 풍양조씨(豊壤趙氏)-113,798 78. 기계유씨(杞溪兪氏)-113,430 79. 선산김씨(善山金氏)-109,682 80. 원주원씨(原州元氏)-109,505 81. 나주나씨(羅州羅氏)-108,139 82. 풍천임씨(豊川任氏)-99,986 83. 여양진씨(驪陽陳氏)-97,372 84. 영천이씨(永川李氏)-94,491 85. 청풍김씨(淸風金氏)-94,468 86. 나주정씨(羅州鄭氏)-93,845 87. 초계정씨(草溪鄭氏)-93,586 88. 벽진이씨(碧珍李氏)-91,907 89. 성주배씨(星州裵氏)-90,239 90 순천박씨(順天朴氏)-87,631 91. 고성이씨(固城李氏)-84,383 92. 안동장씨(安東張氏)-83,961 93. 영산신씨(靈山辛氏)-83,798 94. 나주정씨(羅州丁氏)-82,863 95. 삼척김씨(三陟金氏)-79,985 96. 연안김씨(延安金氏)-79,788 97. 무안박씨(務安朴氏)-78,817 98. 경주손씨(慶州孫氏)-78,450 99. 청도김씨(淸道金氏)-75,567 100. 성산이씨(星山李氏)-75,210 101. 영양천씨(穎陽千氏)-73,118 102. 곡부공씨(曲阜孔氏)-73,093 103. 여주이씨(驪州李氏)-71,711 104. 분성배씨(盆城裵氏)-71,268 105. 평강채씨(平康蔡氏)-69,256 106. 영양남씨(英陽南氏)-69,155 107. 인천이씨(仁川李氏)-68,628 108. 탐진최씨(耽津崔氏)-68,127 109. 원주이씨(原州李氏)-66,603 110. 진보이(眞寶李氏)-66,407 111. 백천조씨(白川趙氏)-66,155 112. 평창이씨(平昌李氏)-65,945 113. 온양방씨(溫陽方氏)-64,128 114. 부안임씨(扶安林氏)-63,589 115. 상산김씨(商山金氏)-63,528 116. 전주류씨(全州柳氏)-61,650 117. 달성배씨(達城裵氏)-61,104 118. 진주류씨(晋州柳氏)-60,104 119. 보성오씨(寶城吳氏)-59,914 120. 연주현씨(延州玄氏)-59,096 121. 예천임씨(醴泉林氏)-58,403 122. 전주김씨(全州金氏)-57,979 123. 강릉함씨(江陵咸氏)-56,718 124. 부안김씨(扶安金氏)-56,318 125. 죽산안씨(竹山安氏)-56,051 126. 해남윤씨(海南尹氏)-55,627 127. 동복오씨(同福吳氏)-55,517 128. 칠원윤씨(漆原尹氏)-54,263 129. 고흥류씨(고흥류씨)-53,981 130. 파주염씨(坡州廉氏)-53,539 131. 죽산박씨(竹山朴氏)-53,489 132. 교하노씨(交河盧氏)-53,203 133. 순천김씨(順天金氏)-52,258 134. 남원양씨(南原楊氏)-52,197 135. 수성최씨(隋城崔氏)-51,780 136. 재령이씨(載寧李氏)-50,940 137. 덕수이씨(德水李氏)-50,486 138. 옥천조씨(玉川趙氏)-49,847 139. 초계변씨(草溪卞氏)-49,506 140. 광주노씨(光州盧氏)-48,574 141. 안동김씨(安東金氏)-47,702 142. 나주김씨(羅州金氏)-46,420 143. 성주도씨(星州都氏)-46,186 144. 흥덕장씨(興德張氏)-44,705 145. 양성이씨(陽城李氏)-44,402 146. 신천강씨(信川康氏)-44,259 147. 거창신씨(居昌愼氏)-43,890 148. 광주안씨(廣州安氏)-43,609 149. 평양조씨(平壤趙氏)-41,047 150. 금성나씨(錦城羅氏)-40,493 151. 추계추씨(秋溪秋氏)-39,994 152. 풍천노씨(豊川盧氏)-39,397 153. 청주정씨(淸州鄭氏)-39,256 154. 고령박씨(高靈朴氏)-39,239 155. 삭녕최씨(朔寧崔氏)-38,736 156. 언양김씨(彦陽金氏)-38,383 157. 함안이씨(咸安李氏)-37,597 158. 원주변씨(原州邊氏)-37,505 159. 인천채씨(仁川蔡氏)-37,391 160. 진주소씨(晋州蘇氏)-37,184 161. 광산이씨(光山李氏)-36741 162. 풍산홍씨(豊山洪氏)-36,420 163. 울산김씨(蔚山金氏)-36,225 164. 충주.홍주석씨(忠州.洪州石氏)-35,461 165. 해주정씨(海州鄭氏)-35,434 166. 공주이씨(公州李氏)-35,148 167. 보성선씨(寶城宣氏)-34842 168. 청주이씨(淸州李氏)-34,756 169. 단양장씨(丹陽張氏)-33,295 170. 신평이씨(新平李氏)-33,185 171. 남원윤씨(南原尹氏)-32,731 172. 영광김씨(靈光金氏)-32,412 173. 용인이씨(龍仁李氏)-32,050 174. 조양임씨(兆陽林氏)-31,924 175. 화순최씨(和順崔氏)-31,173 176. 남양홍씨(南陽洪氏)-30,662 177. 청주김씨(淸州金氏)-29,198 178. 진천송씨(鎭川宋氏)-29,049 179. 장흥마씨(長興馬氏)-28,337 180. 서흥김씨(瑞興金氏)-28,313 181. 순창설씨(淳昌薛氏)-27,926 182. 아주신씨(鵝州申氏)-27,843 183. 충주박씨(忠州朴氏)-27,486 184. 청주양씨(淸州楊氏)-27,437 185. 초계최씨(草溪崔氏)-27,213 186. 해평윤씨(海平尹氏)-26,341 187. 함양오씨(咸陽吳氏)-26,339 188. 함창김씨(咸昌金氏)-26,318 189. 함양여씨(咸陽呂氏)-25,667 190. 나주오씨(羅州吳氏)-25,546 191. 함평노씨(咸平魯氏)-25,408 192. 영해박씨(寧海朴氏)-25,189 193. 곡산연씨(谷山延氏)-25,020 194. 온양정씨(溫陽鄭氏)-24,897 195. 신창표씨(新昌表氏)-24,822 196. 장흥위씨(長興魏氏)-24,654 197. 장흥임씨(長興任氏)-24,523 198. 안동손씨(安東孫氏)-24,187 199. 양주조씨(楊州趙氏)-23,942 200. 진원박씨(珍原朴氏)-23,839 201. 상주박씨(尙州朴氏)-23,627 202. 봉화정씨(奉化鄭氏)-23,173 203. 월성박씨(月城朴氏)-22,917 204. 남양방씨(南陽房氏)-22,496 205. 영천이씨(寧川李氏)-22,479 206. 울산박씨(蔚山朴氏)-22,427 207. 군위오씨(軍威吳氏)-22,408 208. 경주배씨(慶州裵氏)-22,069 209. 광주김씨(廣州金氏)-21,926 210. 영광정씨(靈光丁氏)-21,774 211. 행주기씨(幸州奇氏)-21,536 212. 도강김씨(道康金氏)-21,274 213. 봉화금씨(奉化琴氏)-21,072 214. 결성장씨(結城張氏)-21,068 215. 덕수장씨(德水張氏)-21,006 216. 학성이씨(鶴城李氏)-20,964 217. 울진장씨(蔚珍張氏)-20,791 218. 우봉이씨(牛峰李氏)-20,525 219. 개성김씨(開城金氏)-20,341 220. 해평길씨(海平吉氏)-20,338 221. 옥천육씨(沃川陸氏)-20,173 222. 우주황씨(紆州黃氏)-19,967 223. 개성왕씨(開城王氏)-19,808 224. 안성이씨(安城李氏)-19,739 225. 의령옥씨(宜寧玉氏)-19,368 226. 영천최씨(永川崔氏)-18,721 227. 함열남궁씨(咸悅南宮氏)-18,703 228. 상주주씨(尙州周氏)-18,384 229. 야성송씨(冶城宋氏)-18,341 230. 신창맹씨(新昌孟氏)-18,147 231. 연안명씨(延安明氏)-18,091 232. 함평모씨(咸平牟氏)-17,939 233. 고부이씨(古阜李氏)-17,790 234. 아산장씨(牙山將氏)-17,695 235. 수안이씨(遂安李氏)-17,677 236. 교동인씨(喬桐印氏)-17,448 237. 영산김씨(永山金氏)-17,120 238. 흥양이씨(興陽李氏)-16,977 239. 칠원제씨(漆原諸氏)-16,818 240. 고창오씨(高敞吳氏)-16,716 241. 의령여씨(宜寧余氏)-16,477 242. 단양이씨(丹陽李氏)-16,213 243. 창원정씨(昌原丁氏)-16,141 244. 수원김씨(水原金氏)-16,009 245. 담양국씨(潭陽鞠氏)-15,774 246. 광산탁씨(光山卓氏)-15,691 247. 서산정씨(瑞山鄭氏)-15,362 248. 예안김씨(禮安金氏)-15,313 249. 광주정씨(光州鄭氏)-15,149 250. 하빈이씨(河濱李氏)-15,058 251. 안산김씨(安山金氏)-14,975 252. 홍주이씨(洪州李氏)-14,897 253. 서산류씨(瑞山柳氏)-14,827 254. 강릉박씨(江陵朴氏)-14,703 255. 우계이씨(羽溪李氏)-14,615 256. 강화최씨(江華崔氏)-14,557 257. 김제조씨(金堤趙氏)-14,509 258 장수이씨(長水李氏)-14,324 259. 부여서씨(扶餘徐氏)-14,312 260. 낭주최씨(朗州崔氏)-14,264 261. 금산김씨(錦山金氏)-14,052 262. 창원구씨(昌原具氏)-14,035 263. 성산이씨(星山李氏)-13,758 264. 고령김씨(高靈金氏)-13,692 265. 청안이씨(淸安李氏)-13,549 266. 강화노씨(江華魯氏)-13,499 267. 충주최씨(忠州崔氏)-13,466 268. 무송윤씨(茂松尹氏)-13,384 269. 풍산류씨(豊山柳氏)-13,341 270. 함종어씨(咸從魚氏)-13,321 271. 평해구씨(平海丘氏)-13,176 272. 경주임씨(慶州林氏)-13,163 273. 평해손씨(平海孫氏)-12,831 274. 홍천용씨(洪川龍氏)-12,733 275. 무송유씨(茂松庾氏)-12,463 276. 행주은씨(幸州殷氏)-12,241 277. 청해이씨(靑海李氏)-12,002 278. 고성김씨(固城金氏)-11,888 279. 동주최씨(東州崔氏)-11,699 280. 신평송씨(新平宋氏)-11,185 281. 청주경씨(淸州慶氏)-11,128 282. 풍기진씨(豊基秦氏)-11,046 283. 탐진안씨(耽津安氏)-11,033 284. 절강편씨(浙江片氏)-10,678 285. 거제반씨(巨濟潘氏)-10,063 286. 제주부씨(濟州夫氏)-9,440 287. 의흥예씨(義興芮氏)-9,268 288. 소주가씨(蘇州賈氏)-9,025 289. 영천황보씨(永川皇甫氏)-8,877 290. 사천목씨(泗川睦氏)-8,187 291. 하음봉씨(河陰奉氏)-8,087 292. 경주석씨(慶州昔氏)-7,996 293. 하남정씨(河南程氏)-7,766 294. 청주사씨(淸州史氏)-7,486 295. 면천복씨(沔川卜氏)-7,471 296. 수안계씨(遂安桂氏)-6,242 297. 봉산지씨(鳳山智氏)-6,098 298. 진주형씨(晋州邢氏)-5,822 299. 두릉두씨(杜陵杜氏)-5,701 300. 거창장씨(居昌章氏)-5,554 301. 문경전씨(聞慶錢氏)-5,535 302. 남원진씨(南原晋氏)-5,084 303. 남양제갈씨(南陽諸葛氏)-4,374 304. 영순태씨(永順太氏)-4,142 305. 광천동씨(廣川董氏)-4,130 306. 달성하씨(達城夏氏)-4,028 307. 태원선우씨(太原鮮于氏)-3,547 308. 경주설씨(慶州& #20592;氏)-3,269 309. 금성범씨(錦城范氏)-2,991 310. 청주좌씨(淸州左氏)-2,691 311. 효령사공씨(孝令司空氏)-2,664 312. 목천상씨(木川尙氏)-2,293 313. 죽산음씨(竹山陰氏)-2,260 314. 괴산피씨(槐山皮氏)-2,204 315. 금구온씨(金溝溫氏)-2,148 316. 달성빈씨(達城賓氏)-2,115 317. 회산감씨(檜山甘氏)-2,113 318. 신평호씨(新平扈氏)-1,854 319. 안음서문씨(安陰西門氏)-1,852 320. 연일승씨(延日承氏)-1,828 321. 태인시씨(泰仁柴氏)-1,807 322. 강화위씨(江華韋氏)-1,805 323. 절강시씨(浙江施氏)-1,770 324. 김포공씨(金浦公氏)-1,715 325. 태인경씨(泰仁景氏)-1,617 326. 강음단씨(江陰段氏)-1,429 327. 전주견씨(全州甄氏)-1,141 328. 남양갈씨(南陽葛氏)-1,061 329. 홍산순씨(鴻山荀氏)-1,017 330. 밀양당씨(密陽唐氏)-1,013 331. 상곡마씨(上谷麻氏)-998 332. 남원독고씨(南原獨孤氏)-807 333. 옥천옹씨(玉川邕氏)-7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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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우리의 성씨를 찾아서...(심심해서 넣은 브금있음)|
Tip) 컨트롤+F를 사용해서 고고싱^^
1. 김해김씨(金海金氏)-4,124,934
2. 밀양박씨(密陽朴氏)-3,031,478
3. 전주이씨(全州李氏)-2,609,890
4. 경주김씨(慶州金氏)-1,736,798
5. 경주이씨(慶州李氏)-1,424,866
6. 경주최씨(慶州崔氏)-976,820
7. 진주강씨(晋州姜氏)-966,710
8. 광산김씨(光山金氏)-837,008
9. 파평윤씨(坡平尹氏)-713,947
10. 청주한씨(淸州韓氏)-642,992
11. 안동권씨(安東權氏)-629,291
12. 인동장씨(仁同張氏)-591,315
13. 김녕김씨(金寧金氏)-513,015
14. 평산신씨(平山申氏)-496,874
15. 순흥안씨(順興安氏)-468,827
16. 동래정씨(東萊鄭氏)-442,363
17. 달성서씨(達城徐氏)-429,353
18. 안동김씨(安東金氏)-425,264
19. 해주오씨(海州吳氏)-422,735
20. 전주최씨(全州崔氏)-392,548
21. 남평문씨(南平文氏)-380,530
22. 남양홍씨(南陽洪氏)-379,708
23. 창녕조씨(昌寧曺氏)-338,222
24. 제주고씨(濟州高氏)-325,950
25. 수원백씨(水原白氏)-316,535
26. 한양조씨(漢陽趙氏)-307,746
27. 경주정씨(慶州鄭氏)-303,443 ←요건 내 성씨
28. 문화류씨(文化柳氏)-284,083
29. 밀양손씨(密陽孫氏)-274,665
30. 함안조씨(咸安趙氏)-259,196
31. 의성김씨(義城金氏)-253,309
32. 창원황씨(昌原黃氏)-252,814
33. 진주정씨(晋州鄭氏)-238,505
34. 나주임씨(羅州林氏)-236,877
35. 여산송씨(礪山宋氏)-232,753
36. 남원양씨(南原梁氏)-218,546
37. 연일정씨(延日鄭氏)-216,510
38. 청송심씨(靑松沈氏)-212,717
39. 평택임씨(平澤林氏)-210,089
40. 은진송씨(恩津宋氏)-208,816
41-1. 김해김씨(金海金氏)-199,544
41-2. 김해김씨(金海金氏)-199,544
42. 성주이씨(星州李氏)-186,188
43. 해주최씨(海州崔氏)-181,840
44. 강릉유씨(江陵劉氏)-178,913
45. 이천서씨(利川徐氏)-172,072
46. 창녕성씨(昌寧成氏)-167,903
47. 강릉김씨(江陵金氏)-165,953
48. 단양우씨(丹陽禹氏)-162,479
49. 연안차씨(延安車氏)-161,325
50. 하동정씨(河東鄭氏)-158,396
51. 광주이씨(廣州李氏)-158,249
52. 신안주씨(新安朱氏)-151,227
53. 의령남씨(宜寧南氏)-150,394
54. 장수황씨(長水黃氏)-146,575
55. 연안이씨(延安李氏)-145,440
56. 여흥민씨(驪興閔氏)-142,572
57. 정선전씨(旌善全氏)-141,380
58. 강릉최씨(江陵崔氏)-140,854
59. 현풍곽씨(玄風郭氏)-140,283
60. 반남박씨(潘南朴氏)-139,438
61. 평해황씨(平海黃氏)-137,150
62. 한산이씨(韓山李氏)-136,615
63. 제주양씨(濟州梁氏)-133,355
64. 전의이씨(全義李氏)-133,237
65. 천안전씨(天安全氏)-133,074
66. 양천허씨(陽川許氏)-130,286
67. 담양전씨(潭陽田氏)-128,007
68. 함평이씨(咸平李氏)-125,419
69. 영월엄씨(寧越嚴氏)-124,697
70. 함양박씨(咸陽朴氏)-123,688
71. 진주하씨(晋州河氏)-121,054
72. 김해허씨(金海許氏)-121,031
73. 능성구씨(綾城具氏)-120,503
74. 충주지씨(忠州池氏)-118,211
75. 고령신씨(高靈申氏)-116,966
76. 합천이씨(陜川李氏)-115,462
77. 풍양조씨(豊壤趙氏)-113,798
78. 기계유씨(杞溪兪氏)-113,430
79. 선산김씨(善山金氏)-109,682
80. 원주원씨(原州元氏)-109,505
81. 나주나씨(羅州羅氏)-108,139
82. 풍천임씨(豊川任氏)-99,986
83. 여양진씨(驪陽陳氏)-97,372
84. 영천이씨(永川李氏)-94,491
85. 청풍김씨(淸風金氏)-94,468
86. 나주정씨(羅州鄭氏)-93,845
87. 초계정씨(草溪鄭氏)-93,586
88. 벽진이씨(碧珍李氏)-91,907
89. 성주배씨(星州裵氏)-90,239
90 순천박씨(順天朴氏)-87,631
91. 고성이씨(固城李氏)-84,383
92. 안동장씨(安東張氏)-83,961
93. 영산신씨(靈山辛氏)-83,798
94. 나주정씨(羅州丁氏)-82,863
95. 삼척김씨(三陟金氏)-79,985
96. 연안김씨(延安金氏)-79,788
97. 무안박씨(務安朴氏)-78,817
98. 경주손씨(慶州孫氏)-78,450
99. 청도김씨(淸道金氏)-75,567
100. 성산이씨(星山李氏)-75,210
101. 영양천씨(穎陽千氏)-73,118
102. 곡부공씨(曲阜孔氏)-73,093
103. 여주이씨(驪州李氏)-71,711
104. 분성배씨(盆城裵氏)-71,268
105. 평강채씨(平康蔡氏)-69,256
106. 영양남씨(英陽南氏)-69,155
107. 인천이씨(仁川李氏)-68,628
108. 탐진최씨(耽津崔氏)-68,127
109. 원주이씨(原州李氏)-66,603
110. 진보이(眞寶李氏)-66,407
111. 백천조씨(白川趙氏)-66,155
112. 평창이씨(平昌李氏)-65,945
113. 온양방씨(溫陽方氏)-64,128
114. 부안임씨(扶安林氏)-63,589
115. 상산김씨(商山金氏)-63,528
116. 전주류씨(全州柳氏)-61,650
117. 달성배씨(達城裵氏)-61,104
118. 진주류씨(晋州柳氏)-60,104
119. 보성오씨(寶城吳氏)-59,914
120. 연주현씨(延州玄氏)-59,096
121. 예천임씨(醴泉林氏)-58,403
122. 전주김씨(全州金氏)-57,979
123. 강릉함씨(江陵咸氏)-56,718
124. 부안김씨(扶安金氏)-56,318
125. 죽산안씨(竹山安氏)-56,051
126. 해남윤씨(海南尹氏)-55,627
127. 동복오씨(同福吳氏)-55,517
128. 칠원윤씨(漆原尹氏)-54,263
129. 고흥류씨(고흥류씨)-53,981
130. 파주염씨(坡州廉氏)-53,539
131. 죽산박씨(竹山朴氏)-53,489
132. 교하노씨(交河盧氏)-53,203
133. 순천김씨(順天金氏)-52,258
134. 남원양씨(南原楊氏)-52,197
135. 수성최씨(隋城崔氏)-51,780
136. 재령이씨(載寧李氏)-50,940
137. 덕수이씨(德水李氏)-50,486
138. 옥천조씨(玉川趙氏)-49,847
139. 초계변씨(草溪卞氏)-49,506
140. 광주노씨(光州盧氏)-48,574
141. 안동김씨(安東金氏)-47,702
142. 나주김씨(羅州金氏)-46,420
143. 성주도씨(星州都氏)-46,186
144. 흥덕장씨(興德張氏)-44,705
145. 양성이씨(陽城李氏)-44,402
146. 신천강씨(信川康氏)-44,259
147. 거창신씨(居昌愼氏)-43,890
148. 광주안씨(廣州安氏)-43,609
149. 평양조씨(平壤趙氏)-41,047
150. 금성나씨(錦城羅氏)-40,493
151. 추계추씨(秋溪秋氏)-39,994
152. 풍천노씨(豊川盧氏)-39,397
153. 청주정씨(淸州鄭氏)-39,256
154. 고령박씨(高靈朴氏)-39,239
155. 삭녕최씨(朔寧崔氏)-38,736
156. 언양김씨(彦陽金氏)-38,383 ←우리 엄마 성씨
157. 함안이씨(咸安李氏)-37,597
158. 원주변씨(原州邊氏)-37,505
159. 인천채씨(仁川蔡氏)-37,391
160. 진주소씨(晋州蘇氏)-37,184
161. 광산이씨(光山李氏)-36741
162. 풍산홍씨(豊山洪氏)-36,420
163. 울산김씨(蔚山金氏)-36,225
164. 충주.홍주석씨(忠州.洪州石氏)-35,461
165. 해주정씨(海州鄭氏)-35,434
166. 공주이씨(公州李氏)-35,148
167. 보성선씨(寶城宣氏)-34842
168. 청주이씨(淸州李氏)-34,756
169. 단양장씨(丹陽張氏)-33,295
170. 신평이씨(新平李氏)-33,185
171. 남원윤씨(南原尹氏)-32,731
172. 영광김씨(靈光金氏)-32,412
173. 용인이씨(龍仁李氏)-32,050
174. 조양임씨(兆陽林氏)-31,924
175. 화순최씨(和順崔氏)-31,173
176. 남양홍씨(南陽洪氏)-30,662
177. 청주김씨(淸州金氏)-29,198
178. 진천송씨(鎭川宋氏)-29,049
179. 장흥마씨(長興馬氏)-28,337
180. 서흥김씨(瑞興金氏)-28,313
181. 순창설씨(淳昌薛氏)-27,926
182. 아주신씨(鵝州申氏)-27,843
183. 충주박씨(忠州朴氏)-27,486
184. 청주양씨(淸州楊氏)-27,437
185. 초계최씨(草溪崔氏)-27,213
186. 해평윤씨(海平尹氏)-26,341
187. 함양오씨(咸陽吳氏)-26,339
188. 함창김씨(咸昌金氏)-26,318
189. 함양여씨(咸陽呂氏)-25,667
190. 나주오씨(羅州吳氏)-25,546
191. 함평노씨(咸平魯氏)-25,408
192. 영해박씨(寧海朴氏)-25,189
193. 곡산연씨(谷山延氏)-25,020
194. 온양정씨(溫陽鄭氏)-24,897
195. 신창표씨(新昌表氏)-24,822
196. 장흥위씨(長興魏氏)-24,654
197. 장흥임씨(長興任氏)-24,523
198. 안동손씨(安東孫氏)-24,187
199. 양주조씨(楊州趙氏)-23,942
200. 진원박씨(珍原朴氏)-23,839
201. 상주박씨(尙州朴氏)-23,627
202. 봉화정씨(奉化鄭氏)-23,173
203. 월성박씨(月城朴氏)-22,917
204. 남양방씨(南陽房氏)-22,496
205. 영천이씨(寧川李氏)-22,479
206. 울산박씨(蔚山朴氏)-22,427
207. 군위오씨(軍威吳氏)-22,408
208. 경주배씨(慶州裵氏)-22,069
209. 광주김씨(廣州金氏)-21,926
210. 영광정씨(靈光丁氏)-21,774
211. 행주기씨(幸州奇氏)-21,536
212. 도강김씨(道康金氏)-21,274
213. 봉화금씨(奉化琴氏)-21,072
214. 결성장씨(結城張氏)-21,068
215. 덕수장씨(德水張氏)-21,006
216. 학성이씨(鶴城李氏)-20,964
217. 울진장씨(蔚珍張氏)-20,791
218. 우봉이씨(牛峰李氏)-20,525
219. 개성김씨(開城金氏)-20,341
220. 해평길씨(海平吉氏)-20,338
221. 옥천육씨(沃川陸氏)-20,173
222. 우주황씨(紆州黃氏)-19,967
223. 개성왕씨(開城王氏)-19,808
224. 안성이씨(安城李氏)-19,739
225. 의령옥씨(宜寧玉氏)-19,368
226. 영천최씨(永川崔氏)-18,721
227. 함열남궁씨(咸悅南宮氏)-18,703
228. 상주주씨(尙州周氏)-18,384
229. 야성송씨(冶城宋氏)-18,341
230. 신창맹씨(新昌孟氏)-18,147
231. 연안명씨(延安明氏)-18,091
232. 함평모씨(咸平牟氏)-17,939
233. 고부이씨(古阜李氏)-17,790
234. 아산장씨(牙山將氏)-17,695
235. 수안이씨(遂安李氏)-17,677
236. 교동인씨(喬桐印氏)-17,448
237. 영산김씨(永山金氏)-17,120
238. 흥양이씨(興陽李氏)-16,977
239. 칠원제씨(漆原諸氏)-16,818
240. 고창오씨(高敞吳氏)-16,716
241. 의령여씨(宜寧余氏)-16,477
242. 단양이씨(丹陽李氏)-16,213
243. 창원정씨(昌原丁氏)-16,141
244. 수원김씨(水原金氏)-16,009
245. 담양국씨(潭陽鞠氏)-15,774
246. 광산탁씨(光山卓氏)-15,691
247. 서산정씨(瑞山鄭氏)-15,362
248. 예안김씨(禮安金氏)-15,313
249. 광주정씨(光州鄭氏)-15,149
250. 하빈이씨(河濱李氏)-15,058
251. 안산김씨(安山金氏)-14,975
252. 홍주이씨(洪州李氏)-14,897
253. 서산류씨(瑞山柳氏)-14,827
254. 강릉박씨(江陵朴氏)-14,703
255. 우계이씨(羽溪李氏)-14,615
256. 강화최씨(江華崔氏)-14,557
257. 김제조씨(金堤趙氏)-14,509
258 장수이씨(長水李氏)-14,324
259. 부여서씨(扶餘徐氏)-14,312
260. 낭주최씨(朗州崔氏)-14,264
261. 금산김씨(錦山金氏)-14,052
262. 창원구씨(昌原具氏)-14,035
263. 성산이씨(星山李氏)-13,758
264. 고령김씨(高靈金氏)-13,692
265. 청안이씨(淸安李氏)-13,549
266. 강화노씨(江華魯氏)-13,499
267. 충주최씨(忠州崔氏)-13,466
268. 무송윤씨(茂松尹氏)-13,384
269. 풍산류씨(豊山柳氏)-13,341
270. 함종어씨(咸從魚氏)-13,321
271. 평해구씨(平海丘氏)-13,176
272. 경주임씨(慶州林氏)-13,163
273. 평해손씨(平海孫氏)-12,831
274. 홍천용씨(洪川龍氏)-12,733
275. 무송유씨(茂松庾氏)-12,463
276. 행주은씨(幸州殷氏)-12,241
277. 청해이씨(靑海李氏)-12,002
278. 고성김씨(固城金氏)-11,888
279. 동주최씨(東州崔氏)-11,699
280. 신평송씨(新平宋氏)-11,185
281. 청주경씨(淸州慶氏)-11,128
282. 풍기진씨(豊基秦氏)-11,046
283. 탐진안씨(耽津安氏)-11,033
284. 절강편씨(浙江片氏)-10,678
285. 거제반씨(巨濟潘氏)-10,063
286. 제주부씨(濟州夫氏)-9,440
287. 의흥예씨(義興芮氏)-9,268
288. 소주가씨(蘇州賈氏)-9,025
289. 영천황보씨(永川皇甫氏)-8,877
290. 사천목씨(泗川睦氏)-8,187
291. 하음봉씨(河陰奉氏)-8,087
292. 경주석씨(慶州昔氏)-7,996
293. 하남정씨(河南程氏)-7,766
294. 청주사씨(淸州史氏)-7,486
295. 면천복씨(沔川卜氏)-7,471
296. 수안계씨(遂安桂氏)-6,242
297. 봉산지씨(鳳山智氏)-6,098
298. 진주형씨(晋州邢氏)-5,822
299. 두릉두씨(杜陵杜氏)-5,701
300. 거창장씨(居昌章氏)-5,554
301. 문경전씨(聞慶錢氏)-5,535
302. 남원진씨(南原晋氏)-5,084
303. 남양제갈씨(南陽諸葛氏)-4,374
304. 영순태씨(永順太氏)-4,142
305. 광천동씨(廣川董氏)-4,130
306. 달성하씨(達城夏氏)-4,028
307. 태원선우씨(太原鮮于氏)-3,547
308. 경주설씨(慶州& #20592;氏)-3,269
309. 금성범씨(錦城范氏)-2,991
310. 청주좌씨(淸州左氏)-2,691
311. 효령사공씨(孝令司空氏)-2,664
312. 목천상씨(木川尙氏)-2,293
313. 죽산음씨(竹山陰氏)-2,260
314. 괴산피씨(槐山皮氏)-2,204
315. 금구온씨(金溝溫氏)-2,148
316. 달성빈씨(達城賓氏)-2,115
317. 회산감씨(檜山甘氏)-2,113
318. 신평호씨(新平扈氏)-1,854
319. 안음서문씨(安陰西門氏)-1,852
320. 연일승씨(延日承氏)-1,828
321. 태인시씨(泰仁柴氏)-1,807
322. 강화위씨(江華韋氏)-1,805
323. 절강시씨(浙江施氏)-1,770
324. 김포공씨(金浦公氏)-1,715
325. 태인경씨(泰仁景氏)-1,617
326. 강음단씨(江陰段氏)-1,429
327. 전주견씨(全州甄氏)-1,141
328. 남양갈씨(南陽葛氏)-1,061
329. 홍산순씨(鴻山荀氏)-1,017
330. 밀양당씨(密陽唐氏)-1,013
331. 상곡마씨(上谷麻氏)-998
332. 남원독고씨(南原獨孤氏)-807
333. 옥천옹씨(玉川邕氏)-7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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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01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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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우리나라 & 일본 성씨의 인구수별 순위
우리나라 성씨의 인구수별 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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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해김씨(金海金氏)-4,124,934
2. 밀양박씨(密陽朴氏)-3,031,478
3. 전주이씨(全州李氏)-2,609,890
4. 경주김씨(慶州金氏)-1,736,798
5. 경주이씨(慶州李氏)-1,424,866
6. 경주최씨(慶州崔氏)-976,820
7. 진주강씨(晋州姜氏)-966,710
8. 광산김씨(光山金氏)-837,008
9. 파평윤씨(坡平尹氏)-713,947
10. 청주한씨(淸州韓氏)-642,992
11. 안동권씨(安東權氏)-629,291
12. 인동장씨(仁同張氏)-591,315
13. 김녕김씨(金寧金氏)-513,015
14. 평산신씨(平山申氏)-496,874
15. 순흥안씨(順興安氏)-468,827
16. 동래정씨(東萊鄭氏)-442,363
17. 달성서씨(達城徐氏)-429,353
18. 안동김씨(安東金氏)-425,264 (구)
19. 해주오씨(海州吳氏)-422,735
20. 전주최씨(全州崔氏)-392,548
21. 남평문씨(南平文氏)-380,530
22. 남양홍씨(南陽洪氏)-379,708 (당홍계)
23. 창녕조씨(昌寧曺氏)-338,222
24. 제주고씨(濟州高氏)-325,950
25. 수원백씨(水原白氏)-316,535
26. 한양조씨(漢陽趙氏)-307,746
27. 경주정씨(慶州鄭氏)-303,443
28. 문화류씨(文化柳氏)-284,083
29. 밀양손씨(密陽孫氏)-274,665
30. 함안조씨(咸安趙氏)-259,196
31. 의성김씨(義城金氏)-253,309
32. 창원황씨(昌原黃氏)-252,814
33. 진주정씨(晋州鄭氏)-238,505
34. 나주임씨(羅州林氏)-236,877
35. 여산송씨(礪山宋氏)-232,753
36. 남원양씨(南原梁氏)-218,546
37. 연일정씨(延日鄭氏)-216,510
38. 청송심씨(靑松沈氏)-212,717
39. 평택임씨(平澤林氏)-210,089
40. 은진송씨(恩津宋氏)-208,816
41-1. 김해김씨(金海金氏)-199,544 (법흥파)
41-2. 김해김씨(金海金氏)-199,544 (사성)
42. 성주이씨(星州李氏)-186,188
43. 해주최씨(海州崔氏)-181,840
44. 강릉유씨(江陵劉氏)-178,913
45. 이천서씨(利川徐氏)-172,072
46. 창녕성씨(昌寧成氏)-167,903
47. 강릉김씨(江陵金氏)-165,953
48. 단양우씨(丹陽禹氏)-162,479
49. 연안차씨(延安車氏)-161,325
50. 하동정씨(河東鄭氏)-158,396
51. 광주이씨(廣州李氏)-158,249
52. 신안주씨(新安朱氏)-151,227
53. 의령남씨(宜寧南氏)-150,394
54. 장수황씨(長水黃氏)-146,575
55. 연안이씨(延安李氏)-145,440
56. 여흥민씨(驪興閔氏)-142,572
57. 정선전씨(旌善全氏)-141,380
58. 강릉최씨(江陵崔氏)-140,854
59. 현풍곽씨(玄風郭氏)-140,283
60. 반남박씨(潘南朴氏)-139,438
61. 평해황씨(平海黃氏)-137,150
62. 한산이씨(韓山李氏)-136,615
63. 제주양씨(濟州梁氏)-133,355
64. 전의이씨(全義李氏)-133,237
65. 천안전씨(天安全氏)-133,074
66. 양천허씨(陽川許氏)-130,286
67. 담양전씨(潭陽田氏)-128,007
68. 함평이씨(咸平李氏)-125,419
69. 영월엄씨(寧越嚴氏)-124,697
70. 함양박씨(咸陽朴氏)-123,688
71. 진주하씨(晋州河氏)-121,054
72. 김해허씨(金海許氏)-121,031
73. 능성구씨(綾城具氏)-120,503
74. 충주지씨(忠州池氏)-118,211
75. 고령신씨(高靈申氏)-116,966
76. 합천이씨(陜川李氏)-115,462
77. 풍양조씨(豊壤趙氏)-113,798
78. 기계유씨(杞溪兪氏)-113,430
79. 선산김씨(善山金氏)-109,682
80. 원주원씨(原州元氏)-109,505
81. 나주나씨(羅州羅氏)-108,139
82. 풍천임씨(豊川任氏)-99,986
83. 여양진씨(驪陽陳氏)-97,372
84. 영천이씨(永川李氏)-94,491
85. 청풍김씨(淸風金氏)-94,468
86. 나주정씨(羅州鄭氏)-93,845
87. 초계정씨(草溪鄭氏)-93,586
88. 벽진이씨(碧珍李氏)-91,907
89. 성주배씨(星州裵氏)-90,239
90. 순천박씨(順天朴氏)-87,631
91. 고성이씨(固城李氏)-84,383
92. 안동장씨(安東張氏)-83,961
93. 영산신씨(靈山辛氏)-83,798
94. 나주정씨(羅州丁氏)-82,863
95. 삼척김씨(三陟金氏)-79,985
96. 연안김씨(延安金氏)-79,788
97. 무안박씨(務安朴氏)-78,817
98. 경주손씨(慶州孫氏)-78,450
99. 청도김씨(淸道金氏)-75,567
100. 성산이씨(星山李氏)-75,210
101. 영양천씨(穎陽千氏)-73,118
102. 곡부공씨(曲阜孔氏)-73,093
103. 여주이씨(驪州李氏)-71,711
104. 분성배씨(盆城裵氏)-71,268
105. 평강채씨(平康蔡氏)-69,256
106. 영양남씨(英陽南氏)-69,155
107. 인천이씨(仁川李氏)-68,628
108. 탐진최씨(耽津崔氏)-68,127
109. 원주이씨(原州李氏)-66,603
110. 진보이(眞寶李氏)-66,407
111. 백천조씨(白川趙氏)-66,155
112. 평창이씨(平昌李氏)-65,945
113. 온양방씨(溫陽方氏)-64,128
114. 부안임씨(扶安林氏)-63,589
115. 상산김씨(商山金氏)-63,528
116. 전주류씨(全州柳氏)-61,650
117. 달성배씨(達城裵氏)-61,104
118. 진주류씨(晋州柳氏)-60,104
119. 보성오씨(寶城吳氏)-59,914
120. 연주현씨(延州玄氏)-59,096
121. 예천임씨(醴泉林氏)-58,403
122. 전주김씨(全州金氏)-57,979
123. 강릉함씨(江陵咸氏)-56,718
124. 부안김씨(扶安金氏)-56,318
125. 죽산안씨(竹山安氏)-56,051
126. 해남윤씨(海南尹氏)-55,627
127. 동복오씨(同福吳氏)-55,517
128. 칠원윤씨(漆原尹氏)-54,263
129. 고흥류씨(고흥류씨)-53,981
130. 파주염씨(坡州廉氏)-53,539
131. 죽산박씨(竹山朴氏)-53,489
132. 교하노씨(交河盧氏)-53,203
133. 순천김씨(順天金氏)-52,258
134. 남원양씨(南原楊氏)-52,197
135. 수성최씨(隋城崔氏)-51,780
136. 재령이씨(載寧李氏)-50,940
137. 덕수이씨(德水李氏)-50,486
138. 옥천조씨(玉川趙氏)-49,847
139. 초계변씨(草溪卞氏)-49,506
140. 광주노씨(光州盧氏)-48,574
141. 안동김씨(安東金氏)-47,702 (신)
142. 나주김씨(羅州金氏)-46,420
143. 성주도씨(星州都氏)-46,186
144. 흥덕장씨(興德張氏)-44,705
145. 양성이씨(陽城李氏)-44,402
146. 신천강씨(信川康氏)-44,259
147. 거창신씨(居昌愼氏)-43,890
148. 광주안씨(廣州安氏)-43,609
149. 평양조씨(平壤趙氏)-41,047
150. 금성나씨(錦城羅氏)-40,493
151. 추계추씨(秋溪秋氏)-39,994
152. 풍천노씨(豊川盧氏)-39,397
153. 청주정씨(淸州鄭氏)-39,256
154. 고령박씨(高靈朴氏)-39,239
155. 삭녕최씨(朔寧崔氏)-38,736
156. 언양김씨(彦陽金氏)-38,383
157. 함안이씨(咸安李氏)-37,597
158. 원주변씨(原州邊氏)-37,505
159. 인천채씨(仁川蔡氏)-37,391
160. 진주소씨(晋州蘇氏)-37,184
161. 광산이씨(光山李氏)-36741
162. 풍산홍씨(豊山洪氏)-36,420
163. 울산김씨(蔚山金氏)-36,225
164. 충주.홍주석씨(忠州.洪州石氏)-35,461
165. 해주정씨(海州鄭氏)-35,434
166. 공주이씨(公州李氏)-35,148
167. 보성선씨(寶城宣氏)-34842
168. 청주이씨(淸州李氏)-34,756
169. 단양장씨(丹陽張氏)-33,295
170. 신평이씨(新平李氏)-33,185
171. 남원윤씨(南原尹氏)-32,731
172. 영광김씨(靈光金氏)-32,412
173. 용인이씨(龍仁李氏)-32,050
174. 조양임씨(兆陽林氏)-31,924
175. 화순최씨(和順崔氏)-31,173
176. 남양홍씨(南陽洪氏)-30,662 (토홍계)
177. 청주김씨(淸州金氏)-29,198
178. 진천송씨(鎭川宋氏)-29,049
179. 장흥마씨(長興馬氏)-28,337
180. 서흥김씨(瑞興金氏)-28,313
181. 순창설씨(淳昌薛氏)-27,926
182. 아주신씨(鵝州申氏)-27,843
183. 충주박씨(忠州朴氏)-27,486
184. 청주양씨(淸州楊氏)-27,437
185. 초계최씨(草溪崔氏)-27,213
186. 해평윤씨(海平尹氏)-26,341
187. 함양오씨(咸陽吳氏)-26,339
188. 함창김씨(咸昌金氏)-26,318
189. 함양여씨(咸陽呂氏)-25,667
190. 나주오씨(羅州吳氏)-25,546
191. 함평노씨(咸平魯氏)-25,408
192. 영해박씨(寧海朴氏)-25,189
193. 곡산연씨(谷山延氏)-25,020
194. 온양정씨(溫陽鄭氏)-24,897
195. 신창표씨(新昌表氏)-24,822
196. 장흥위씨(長興魏氏)-24,654
197. 장흥임씨(長興任氏)-24,523
198. 안동손씨(安東孫氏)-24,187
199. 양주조씨(楊州趙氏)-23,942
200. 진원박씨(珍原朴氏)-23,839
201. 상주박씨(尙州朴氏)-23,627
202. 봉화정씨(奉化鄭氏)-23,173
203. 월성박씨(月城朴氏)-22,917
204. 남양방씨(南陽房氏)-22,496
205. 영천이씨(寧川李氏)-22,479
206. 울산박씨(蔚山朴氏)-22,427
207. 군위오씨(軍威吳氏)-22,408
208. 경주배씨(慶州裵氏)-22,069
209. 광주김씨(廣州金氏)-21,926
210. 영광정씨(靈光丁氏)-21,774
211. 행주기씨(幸州奇氏)-21,536
212. 도강김씨(道康金氏)-21,274
213. 봉화금씨(奉化琴氏)-21,072
214. 결성장씨(結城張氏)-21,068
215. 덕수장씨(德水張氏)-21,006
216. 학성이씨(鶴城李氏)-20,964
217. 울진장씨(蔚珍張氏)-20,791
218. 우봉이씨(牛峰李氏)-20,525
219. 개성김씨(開城金氏)-20,341
220. 해평길씨(海平吉氏)-20,338
221. 옥천육씨(沃川陸氏)-20,173
222. 우주황씨(紆州黃氏)-19,967
223. 개성왕씨(開城王氏)-19,808
224. 안성이씨(安城李氏)-19,739
225. 의령옥씨(宜寧玉氏)-19,368
226. 영천최씨(永川崔氏)-18,721
227. 함열남궁씨(咸悅南宮氏)-18,703
228. 상주주씨(尙州周氏)-18,384
229. 야성송씨(冶城宋氏)-18,341
230. 신창맹씨(新昌孟氏)-18,147
231. 연안명씨(延安明氏)-18,091
232. 함평모씨(咸平牟氏)-17,939
233. 고부이씨(古阜李氏)-17,790
234. 아산장씨(牙山將氏)-17,695
235. 수안이씨(遂安李氏)-17,677
236. 교동인씨(喬桐印氏)-17,448
237. 영산김씨(永山金氏)-17,120
238. 흥양이씨(興陽李氏)-16,977
239. 칠원제씨(漆原諸氏)-16,818
240. 고창오씨(高敞吳氏)-16,716
241. 의령여씨(宜寧余氏)-16,477
242. 단양이씨(丹陽李氏)-16,213
243. 창원정씨(昌原丁氏)-16,141
244. 수원김씨(水原金氏)-16,009
245. 담양국씨(潭陽鞠氏)-15,774
246. 광산탁씨(光山卓氏)-15,691
247. 서산정씨(瑞山鄭氏)-15,362
248. 예안김씨(禮安金氏)-15,313
249. 광주정씨(光州鄭氏)-15,149
250. 하빈이씨(河濱李氏)-15,058
251. 안산김씨(安山金氏)-14,975
252. 홍주이씨(洪州李氏)-14,897
253. 서산류씨(瑞山柳氏)-14,827
254. 강릉박씨(江陵朴氏)-14,703
255. 우계이씨(羽溪李氏)-14,615
256. 강화최씨(江華崔氏)-14,557
257. 김제조씨(金堤趙氏)-14,509
258 장수이씨(長水李氏)-14,324
259. 부여서씨(扶餘徐氏)-14,312
260. 낭주최씨(朗州崔氏)-14,264
261. 금산김씨(錦山金氏)-14,052
262. 창원구씨(昌原具氏)-14,035
263. 성산이씨(星山李氏)-13,758
264. 고령김씨(高靈金氏)-13,692
265. 청안이씨(淸安李氏)-13,549
266. 강화노씨(江華魯氏)-13,499
267. 충주최씨(忠州崔氏)-13,466
268. 무송윤씨(茂松尹氏)-13,384
269. 풍산류씨(豊山柳氏)-13,341
270. 함종어씨(咸從魚氏)-13,321
271. 평해구씨(平海丘氏)-13,176
272. 경주임씨(慶州林氏)-13,163
273. 평해손씨(平海孫氏)-12,831
274. 홍천용씨(洪川龍氏)-12,733
275. 무송유씨(茂松庾氏)-12,463
276. 행주은씨(幸州殷氏)-12,241
277. 청해이씨(靑海李氏)-12,002
278. 고성김씨(固城金氏)-11,888
279. 동주최씨(東州崔氏)-11,699
280. 신평송씨(新平宋氏)-11,185
281. 청주경씨(淸州慶氏)-11,128
282. 풍기진씨(豊基秦氏)-11,046
283. 탐진안씨(耽津安氏)-11,033
284. 절강편씨(浙江片氏)-10,678
285. 거제반씨(巨濟潘氏)-10,063
286. 제주부씨(濟州夫氏)-9,440
287. 의흥예씨(義興芮氏)-9,268
288. 소주가씨(蘇州賈氏)-9,025
289. 영천황보씨(永川皇甫氏)-8,877
290. 사천목씨(泗川睦氏)-8,187
291. 하음봉씨(河陰奉氏)-8,087
292. 경주석씨(慶州昔氏)-7,996
293. 하남정씨(河南程氏)-7,766
294. 청주사씨(淸州史氏)-7,486
295. 면천복씨(沔川卜氏)-7,471
296. 수안계씨(遂安桂氏)-6,242
297. 봉산지씨(鳳山智氏)-6,098
298. 진주형씨(晋州邢氏)-5,822
299. 두릉두씨(杜陵杜氏)-5,701
300. 거창장씨(居昌章氏)-5,554
301. 문경전씨(聞慶錢氏)-5,535
302. 남원진씨(南原晋氏)-5,084
303. 남양제갈씨(南陽諸葛氏)-4,374
304. 영순태씨(永順太氏)-4,142
305. 광천동씨(廣川董氏)-4,130
306. 달성하씨(達城夏氏)-4,028
307. 태원선우씨(太原鮮于氏)-3,547
308. 경주설씨(慶州& #20592;氏)-3,269
309. 금성범씨(錦城范氏)-2,991
310. 청주좌씨(淸州左氏)-2,691
311. 효령사공씨(孝令司空氏)-2,664
312. 목천상씨(木川尙氏)-2,293
313. 죽산음씨(竹山陰氏)-2,260
314. 괴산피씨(槐山皮氏)-2,204
315. 금구온씨(金溝溫氏)-2,148
316. 달성빈씨(達城賓氏)-2,115
317. 회산감씨(檜山甘氏)-2,113
318. 신평호씨(新平扈氏)-1,854
319. 안음서문씨(安陰西門氏)-1,852
320. 연일승씨(延日承氏)-1,828
321. 태인시씨(泰仁柴氏)-1,807
322. 강화위씨(江華韋氏)-1,805
323. 절강시씨(浙江施氏)-1,770
324. 김포공씨(金浦公氏)-1,715
325. 태인경씨(泰仁景氏)-1,617
326. 강음단씨(江陰段氏)-1,429
327. 전주견씨(全州甄氏)-1,141
328. 남양갈씨(南陽葛氏)-1,061
329. 홍산순씨(鴻山荀氏)-1,017
330. 밀양당씨(密陽唐氏)-1,013
331. 상곡마씨(上谷麻氏)-998
332. 남원독고씨(南原獨孤氏)-807
333. 옥천옹씨(玉川邕氏)-772
나카무라...9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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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우리나라 인구별 성씨 순위
Tip) 컨트롤+F를 사용해서 고고싱^^
1. 김해김씨(金海金氏)-4,124,934 2. 밀양박씨(密陽朴氏)-3,031,4783. 전주이씨(全州李氏)-2,609,890 4. 경주김씨(慶州金氏)-1,736,7985. 경주이씨(慶州李氏)-1,424,866 6. 경주최씨(慶州崔氏)-976,8207. 진주강씨(晋州姜氏)-966,710 8. 광산김씨(光山金氏)-837,0089. 파평윤씨(坡平尹氏)-713,947 10. 청주한씨(淸州韓氏)-642,99211. 안동권씨(安東權氏)-629,291 12. 인동장씨(仁同張氏)-591,31513. 김녕김씨(金寧金氏)-513,015 14. 평산신씨(平山申氏)-496,87415. 순흥안씨(順興安氏)-468,827 16. 동래정씨(東萊鄭氏)-442,36317. 달성서씨(達城徐氏)-429,353 18. 안동김씨(安東金氏)-425,26419. 해주오씨(海州吳氏)-422,735 20. 전주최씨(全州崔氏)-392,54821. 남평문씨(南平文氏)-380,530 22. 남양홍씨(南陽洪氏)-379,70823. 창녕조씨(昌寧曺氏)-338,222 24. 제주고씨(濟州高氏)-325,95025. 수원백씨(水原白氏)-316,535 26. 한양조씨(漢陽趙氏)-307,74627. 경주정씨(慶州鄭氏)-303,443 28. 문화류씨(文化柳氏)-284,08329. 밀양손씨(密陽孫氏)-274,665 30. 함안조씨(咸安趙氏)-259,19631. 의성김씨(義城金氏)-253,309 32. 창원황씨(昌原黃氏)-252,81433. 진주정씨(晋州鄭氏)-238,505 34. 나주임씨(羅州林氏)-236,87735. 여산송씨(礪山宋氏)-232,753 36. 남원양씨(南原梁氏)-218,54637. 연일정씨(延日鄭氏)-216,510 38. 청송심씨(靑松沈氏)-212,71739. 평택임씨(平澤林氏)-210,089 40. 은진송씨(恩津宋氏)-208,81641-1. 김해김씨(金海金氏)-199,54441-2. 김해김씨(金海金氏)-199,54442. 성주이씨(星州李氏)-186,188 43. 해주최씨(海州崔氏)-181,84044. 강릉유씨(江陵劉氏)-178,913 45. 이천서씨(利川徐氏)-172,07246. 창녕성씨(昌寧成氏)-167,903 47. 강릉김씨(江陵金氏)-165,95348. 단양우씨(丹陽禹氏)-162,479 49. 연안차씨(延安車氏)-161,32550. 하동정씨(河東鄭氏)-158,396 51. 광주이씨(廣州李氏)-158,24952. 신안주씨(新安朱氏)-151,227 53. 의령남씨(宜寧南氏)-150,39454. 장수황씨(長水黃氏)-146,575 55. 연안이씨(延安李氏)-145,44056. 여흥민씨(驪興閔氏)-142,572 57. 정선전씨(旌善全氏)-141,38058. 강릉최씨(江陵崔氏)-140,854 59. 현풍곽씨(玄風郭氏)-140,28360. 반남박씨(潘南朴氏)-139,438 61. 평해황씨(平海黃氏)-137,15062. 한산이씨(韓山李氏)-136,615 63. 제주양씨(濟州梁氏)-133,35564. 전의이씨(全義李氏)-133,237 65. 천안전씨(天安全氏)-133,07466. 양천허씨(陽川許氏)-130,286 67. 담양전씨(潭陽田氏)-128,00768. 함평이씨(咸平李氏)-125,419 69. 영월엄씨(寧越嚴氏)-124,69770. 함양박씨(咸陽朴氏)-123,688 71. 진주하씨(晋州河氏)-121,05472. 김해허씨(金海許氏)-121,031 73. 능성구씨(綾城具氏)-120,50374. 충주지씨(忠州池氏)-118,211 75. 고령신씨(高靈申氏)-116,96676. 합천이씨(陜川李氏)-115,462 77. 풍양조씨(豊壤趙氏)-113,79878. 기계유씨(杞溪兪氏)-113,430 79. 선산김씨(善山金氏)-109,68280. 원주원씨(原州元氏)-109,505 81. 나주나씨(羅州羅氏)-108,13982. 풍천임씨(豊川任氏)-99,986 83. 여양진씨(驪陽陳氏)-97,37284. 영천이씨(永川李氏)-94,491 85. 청풍김씨(淸風金氏)-94,46886. 나주정씨(羅州鄭氏)-93,845 87. 초계정씨(草溪鄭氏)-93,58688. 벽진이씨(碧珍李氏)-91,907 89. 성주배씨(星州裵氏)-90,23990 순천박씨(順天朴氏)-87,631 91. 고성이씨(固城李氏)-84,38392. 안동장씨(安東張氏)-83,961 93. 영산신씨(靈山辛氏)-83,79894. 나주정씨(羅州丁氏)-82,863 95. 삼척김씨(三陟金氏)-79,98596. 연안김씨(延安金氏)-79,788 97. 무안박씨(務安朴氏)-78,81798. 경주손씨(慶州孫氏)-78,450 99. 청도김씨(淸道金氏)-75,567100. 성산이씨(星山李氏)-75,210 101. 영양천씨(穎陽千氏)-73,118102. 곡부공씨(曲阜孔氏)-73,093 103. 여주이씨(驪州李氏)-71,711104. 분성배씨(盆城裵氏)-71,268 105. 평강채씨(平康蔡氏)-69,256106. 영양남씨(英陽南氏)-69,155 107. 인천이씨(仁川李氏)-68,628108. 탐진최씨(耽津崔氏)-68,127 109. 원주이씨(原州李氏)-66,603110. 진보이(眞寶李氏)-66,407 111. 백천조씨(白川趙氏)-66,155112. 평창이씨(平昌李氏)-65,945 113. 온양방씨(溫陽方氏)-64,128114. 부안임씨(扶安林氏)-63,589 115. 상산김씨(商山金氏)-63,528116. 전주류씨(全州柳氏)-61,650 117. 달성배씨(達城裵氏)-61,104118. 진주류씨(晋州柳氏)-60,104 119. 보성오씨(寶城吳氏)-59,914120. 연주현씨(延州玄氏)-59,096 121. 예천임씨(醴泉林氏)-58,403122. 전주김씨(全州金氏)-57,979 123. 강릉함씨(江陵咸氏)-56,718124. 부안김씨(扶安金氏)-56,318 125. 죽산안씨(竹山安氏)-56,051126. 해남윤씨(海南尹氏)-55,627 127. 동복오씨(同福吳氏)-55,517128. 칠원윤씨(漆原尹氏)-54,263 129. 고흥류씨(고흥류씨)-53,981130. 파주염씨(坡州廉氏)-53,539 131. 죽산박씨(竹山朴氏)-53,489132. 교하노씨(交河盧氏)-53,203 133. 순천김씨(順天金氏)-52,258134. 남원양씨(南原楊氏)-52,197 135. 수성최씨(隋城崔氏)-51,780136. 재령이씨(載寧李氏)-50,940 137. 덕수이씨(德水李氏)-50,486138. 옥천조씨(玉川趙氏)-49,847 139. 초계변씨(草溪卞氏)-49,506140. 광주노씨(光州盧氏)-48,574 141. 안동김씨(安東金氏)-47,702142. 나주김씨(羅州金氏)-46,420 143. 성주도씨(星州都氏)-46,186144. 흥덕장씨(興德張氏)-44,705 145. 양성이씨(陽城李氏)-44,402146. 신천강씨(信川康氏)-44,259 147. 거창신씨(居昌愼氏)-43,890148. 광주안씨(廣州安氏)-43,609 149. 평양조씨(平壤趙氏)-41,047150. 금성나씨(錦城羅氏)-40,493 151. 추계추씨(秋溪秋氏)-39,994152. 풍천노씨(豊川盧氏)-39,397 153. 청주정씨(淸州鄭氏)-39,256154. 고령박씨(高靈朴氏)-39,239 155. 삭녕최씨(朔寧崔氏)-38,736156. 언양김씨(彦陽金氏)-38,383 157. 함안이씨(咸安李氏)-37,597158. 원주변씨(原州邊氏)-37,505 159. 인천채씨(仁川蔡氏)-37,391160. 진주소씨(晋州蘇氏)-37,184 161. 광산이씨(光山李氏)-36741162. 풍산홍씨(豊山洪氏)-36,420 163. 울산김씨(蔚山金氏)-36,225164. 충주.홍주석씨(忠州.洪州石氏)-35,461 165. 해주정씨(海州鄭氏)-35,434166. 공주이씨(公州李氏)-35,148 167. 보성선씨(寶城宣氏)-34842168. 청주이씨(淸州李氏)-34,756 169. 단양장씨(丹陽張氏)-33,295170. 신평이씨(新平李氏)-33,185 171. 남원윤씨(南原尹氏)-32,731172. 영광김씨(靈光金氏)-32,412 173. 용인이씨(龍仁李氏)-32,050174. 조양임씨(兆陽林氏)-31,924 175. 화순최씨(和順崔氏)-31,173176. 남양홍씨(南陽洪氏)-30,662 177. 청주김씨(淸州金氏)-29,198178. 진천송씨(鎭川宋氏)-29,049 179. 장흥마씨(長興馬氏)-28,337180. 서흥김씨(瑞興金氏)-28,313 181. 순창설씨(淳昌薛氏)-27,926182. 아주신씨(鵝州申氏)-27,843 183. 충주박씨(忠州朴氏)-27,486184. 청주양씨(淸州楊氏)-27,437 185. 초계최씨(草溪崔氏)-27,213186. 해평윤씨(海平尹氏)-26,341 187. 함양오씨(咸陽吳氏)-26,339188. 함창김씨(咸昌金氏)-26,318 189. 함양여씨(咸陽呂氏)-25,667190. 나주오씨(羅州吳氏)-25,546 191. 함평노씨(咸平魯氏)-25,408192. 영해박씨(寧海朴氏)-25,189 193. 곡산연씨(谷山延氏)-25,020194. 온양정씨(溫陽鄭氏)-24,897 195. 신창표씨(新昌表氏)-24,822196. 장흥위씨(長興魏氏)-24,654 197. 장흥임씨(長興任氏)-24,523198. 안동손씨(安東孫氏)-24,187 199. 양주조씨(楊州趙氏)-23,942200. 진원박씨(珍原朴氏)-23,839 201. 상주박씨(尙州朴氏)-23,627202. 봉화정씨(奉化鄭氏)-23,173 203. 월성박씨(月城朴氏)-22,917204. 남양방씨(南陽房氏)-22,496 205. 영천이씨(寧川李氏)-22,479206. 울산박씨(蔚山朴氏)-22,427 207. 군위오씨(軍威吳氏)-22,408208. 경주배씨(慶州裵氏)-22,069 209. 광주김씨(廣州金氏)-21,926210. 영광정씨(靈光丁氏)-21,774 211. 행주기씨(幸州奇氏)-21,536212. 도강김씨(道康金氏)-21,274 213. 봉화금씨(奉化琴氏)-21,072214. 결성장씨(結城張氏)-21,068 215. 덕수장씨(德水張氏)-21,006216. 학성이씨(鶴城李氏)-20,964 217. 울진장씨(蔚珍張氏)-20,791218. 우봉이씨(牛峰李氏)-20,525 219. 개성김씨(開城金氏)-20,341220. 해평길씨(海平吉氏)-20,338 221. 옥천육씨(沃川陸氏)-20,173222. 우주황씨(紆州黃氏)-19,967 223. 개성왕씨(開城王氏)-19,808224. 안성이씨(安城李氏)-19,739 225. 의령옥씨(宜寧玉氏)-19,368226. 영천최씨(永川崔氏)-18,721 227. 함열남궁씨(咸悅南宮氏)-18,703228. 상주주씨(尙州周氏)-18,384 229. 야성송씨(冶城宋氏)-18,341230. 신창맹씨(新昌孟氏)-18,147 231. 연안명씨(延安明氏)-18,091232. 함평모씨(咸平牟氏)-17,939 233. 고부이씨(古阜李氏)-17,790234. 아산장씨(牙山將氏)-17,695 235. 수안이씨(遂安李氏)-17,677236. 교동인씨(喬桐印氏)-17,448 237. 영산김씨(永山金氏)-17,120238. 흥양이씨(興陽李氏)-16,977 239. 칠원제씨(漆原諸氏)-16,818240. 고창오씨(高敞吳氏)-16,716 241. 의령여씨(宜寧余氏)-16,477242. 단양이씨(丹陽李氏)-16,213 243. 창원정씨(昌原丁氏)-16,141244. 수원김씨(水原金氏)-16,009 245. 담양국씨(潭陽鞠氏)-15,774246. 광산탁씨(光山卓氏)-15,691 247. 서산정씨(瑞山鄭氏)-15,362248. 예안김씨(禮安金氏)-15,313 249. 광주정씨(光州鄭氏)-15,149250. 하빈이씨(河濱李氏)-15,058 251. 안산김씨(安山金氏)-14,975252. 홍주이씨(洪州李氏)-14,897 253. 서산류씨(瑞山柳氏)-14,827254. 강릉박씨(江陵朴氏)-14,703 255. 우계이씨(羽溪李氏)-14,615256. 강화최씨(江華崔氏)-14,557 257. 김제조씨(金堤趙氏)-14,509258 장수이씨(長水李氏)-14,324 259. 부여서씨(扶餘徐氏)-14,312260. 낭주최씨(朗州崔氏)-14,264 261. 금산김씨(錦山金氏)-14,052262. 창원구씨(昌原具氏)-14,035 263. 성산이씨(星山李氏)-13,758264. 고령김씨(高靈金氏)-13,692 265. 청안이씨(淸安李氏)-13,549266. 강화노씨(江華魯氏)-13,499 267. 충주최씨(忠州崔氏)-13,466268. 무송윤씨(茂松尹氏)-13,384 269. 풍산류씨(豊山柳氏)-13,341270. 함종어씨(咸從魚氏)-13,321 271. 평해구씨(平海丘氏)-13,176272. 경주임씨(慶州林氏)-13,163 273. 평해손씨(平海孫氏)-12,831274. 홍천용씨(洪川龍氏)-12,733 275. 무송유씨(茂松庾氏)-12,463276. 행주은씨(幸州殷氏)-12,241 277. 청해이씨(靑海李氏)-12,002278. 고성김씨(固城金氏)-11,888 279. 동주최씨(東州崔氏)-11,699280. 신평송씨(新平宋氏)-11,185 281. 청주경씨(淸州慶氏)-11,128282. 풍기진씨(豊基秦氏)-11,046 283. 탐진안씨(耽津安氏)-11,033284. 절강편씨(浙江片氏)-10,678 285. 거제반씨(巨濟潘氏)-10,063286. 제주부씨(濟州夫氏)-9,440 287. 의흥예씨(義興芮氏)-9,268288. 소주가씨(蘇州賈氏)-9,025 289. 영천황보씨(永川皇甫氏)-8,877290. 사천목씨(泗川睦氏)-8,187 291. 하음봉씨(河陰奉氏)-8,087292. 경주석씨(慶州昔氏)-7,996 293. 하남정씨(河南程氏)-7,766294. 청주사씨(淸州史氏)-7,486 295. 면천복씨(沔川卜氏)-7,471296. 수안계씨(遂安桂氏)-6,242 297. 봉산지씨(鳳山智氏)-6,098298. 진주형씨(晋州邢氏)-5,822 299. 두릉두씨(杜陵杜氏)-5,701300. 거창장씨(居昌章氏)-5,554 301. 문경전씨(聞慶錢氏)-5,535302. 남원진씨(南原晋氏)-5,084 303. 남양제갈씨(南陽諸葛氏)-4,374304. 영순태씨(永順太氏)-4,142 305. 광천동씨(廣川董氏)-4,130306. 달성하씨(達城夏氏)-4,028 307. 태원선우씨(太原鮮于氏)-3,547308. 경주설씨(慶州& #20592;氏)-3,269 309. 금성범씨(錦城范氏)-2,991310. 청주좌씨(淸州左氏)-2,691 311. 효령사공씨(孝令司空氏)-2,664312. 목천상씨(木川尙氏)-2,293 313. 죽산음씨(竹山陰氏)-2,260314. 괴산피씨(槐山皮氏)-2,204 315. 금구온씨(金溝溫氏)-2,148316. 달성빈씨(達城賓氏)-2,115 317. 회산감씨(檜山甘氏)-2,113318. 신평호씨(新平扈氏)-1,854 319. 안음서문씨(安陰西門氏)-1,852320. 연일승씨(延日承氏)-1,828 321. 태인시씨(泰仁柴氏)-1,807322. 강화위씨(江華韋氏)-1,805 323. 절강시씨(浙江施氏)-1,770324. 김포공씨(金浦公氏)-1,715 325. 태인경씨(泰仁景氏)-1,617326. 강음단씨(江陰段氏)-1,429 327. 전주견씨(全州甄氏)-1,141328. 남양갈씨(南陽葛氏)-1,061 329. 홍산순씨(鴻山荀氏)-1,017330. 밀양당씨(密陽唐氏)-1,013 331. 상곡마씨(上谷麻氏)-998332. 남원독고씨(南原獨孤氏)-807 333. 옥천옹씨(玉川邕氏)-7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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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안나와 있는 성씨들도 있습니다.
EX) 나라 정(鄭)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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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상담] 지금까지 했던 알바들.
최초에 했던 알바가 20살 즈음에 친구랑 했던 주유소 알바네요.
다음이 노가다(이건 했다가 안했다가 사무소 옮겼다가... 토탈 합치면 4년 조금 넘을겁니다. 몸 많이 상했죠... 집이 어려워서 선택의 기회가 없었네요. 덩치가 커서 뒷정리일 보다는 바라시나 시멘트, 대리석 곰방같은 일을 주로 했습니다.)
그리고 사설경호(뭔콤 같은 전자 경비 업체가 아니라...xx경호같은 시커먼 양복입은 사설경호업체) 2개월. 돈을 제때 안주는 바람에 생활이 어려워서 결국 다시 노가다했습니다;;; 사기 당하는 경우 많으니 꼭꼭 챙기세요. 일부러 임금 안주다 부도내는 놈들도 있습니다.
김치냉장고 조립 공장 라인에서 몇개월,
염색공단에서 창고 관리 몇개월,
또주유소에서 몇개월,
홈플러스에서 카트 수거알바,
전단지 돌리기,
아파트 홍보 도우미,
국제영화제 행사일,
또 다른 염색공단 운반 제품 정리일,
피시방 알바(정식은 아니고 땜빵),
몇몇 단기 야간 경비일(주로 행사),
그리고 봇찌일같은 좀 비합법적인 일도 몇종류 해 봤구요.
두세개 정도 더 있는데 잘 기억이 안나네요.
돌이켜보면 직장없이 알바만 근 7년 가까이 해 왔습니다.
가장 쉬웠던 알바는 주유소이고(양아치 때문에 엿같은 경우가 몇번 있었지만), 마음이 편했던 알바는 부산 신평의 염색공단 창고관리였네요.
힘은 존나게 들었지만(하루 물량을 정해진 시간에 맞춰야 하기 때문에 땀을 한바가지는 흘렸음) 당시 여러분들이 무척 잘해 주셨고 기껏해봐야 얼굴 보는 사람이 4~5명 정도입니다. 창고에서 거의 모든 업무를 하기 때문에... 돈은 많이 못받았지만 가장 마음에 사심이나 고민이 없던 시절이라 다시 해도 열심히 하고 싶어지네요. 지금 생각하면 왜 그만둬 버렸는지 후회가 들 정도입니다.
일도 물건 맞추고 나면 쓰레기 정리나 풀뽑기등 이런저런 잔업이 많아 지루하지 않았거든요. 퇴근은 5시 정시였고...
돈을 가장 많이 받았던 업무는 역시 노가다였고, 게중에는 잠시 업자분 밑에서 고정으로 일한 적도 있습니다. 오야지 밑에서 일할 때가 제법 괜찮았죠. 사무소 거치면 5만원 받는 일을 오야지 밑에서 하면 7만원 받았거든요. 물론 3만원은 오야지가 먹긴 하지만 꽤 좋았습니다.
가장 즐거웠던 일은 국제 영화제 행사일이네요. 외국인도 많이 보고 감독님들도 보고 아는 사람 소개라 돈도 많이 받고... 부스 철거할 때 남는걸 상당히 많이 챙길 수있어서 임금외 소득이 제법 있었죠. 지금 생각해도 즐겁네요.
가장 더러웠던 경우는 이틀만에 짤렸던 차트정리 일이네요. 이틀치 임금마저 두달 후에 주는 만행을 저질렀었드랬죠. 그 때 몸이 안좋아서 다 뽀개놓지 못했던게 천추의 한입니다. 전 몸이 안좋으면 마음도 약해져서;;;
노가다 때문에 몸을 다쳐서 재택 알바로 리니지 알바 하려다 중국놈들한테 사기 당한 적도 있구요. 인생 경험 참 많이 했네요 아르바이트하면서. 이제 나이가 27에다가 몸이 많이 상해서 알바 구하기도 힘든 처지지만 마지막으로 워킹 홀리데이로 호주 날아가서 농장일 하며 본격적으로 돈을 모아볼 예정입니다.
경기가 어려워져서 생계형 알바 하시는 분들이 많이 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위기를 많은 인생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하며 좌절하지 마시고 심기일전 하시기 바랍니다. 훗날을 살아가는 인생의 주춧돌이 될 수도 있는 귀중한 시간들이지 않습니까. 젊은 분들일수록 후회할 일을 남기지 마시고 각자 뜻깊은 시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아스트랄작성일
2009-02-22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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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수다] 당신의 본관과 성씨는 몇위??
찾기 전 Ctrl+F를 잊지말자...1. 김해김씨(金海金氏)-4,124,934 2. 밀양박씨(密陽朴氏)-3,031,478 3. 전주이씨(全州李氏)-2,609,890 4. 경주김씨(慶州金氏)-1,736,798 5. 경주이씨(慶州李氏)-1,424,866 6. 경주최씨(慶州崔氏)-976,820 7. 진주강씨(晋州姜氏)-966,710 It's Me ->광산김씨(光山金氏)-837,008 9. 파평윤씨(坡平尹氏)-713,947 10. 청주한씨(淸州韓氏)-642,992 11. 안동권씨(安東權氏)-629,291 12. 인동장씨(仁同張氏)-591,315 13. 김녕김씨(金寧金氏)-513,015 14. 평산신씨(平山申氏)-496,874 15. 순흥안씨(順興安氏)-468,827 16. 동래정씨(東萊鄭氏)-442,363 17. 달성서씨(達城徐氏)-429,353 18. 안동김씨(安東金氏)-425,264 (구) 19. 해주오씨(海州吳氏)-422,735 20. 전주최씨(全州崔氏)-392,548 21. 남평문씨(南平文氏)-380,530 22. 남양홍씨(南陽洪氏)-379,708 (당홍계) 23. 창녕조씨(昌寧曺氏)-338,222 24. 제주고씨(濟州高氏)-325,950 25. 수원백씨(水原白氏)-316,535 26. 한양조씨(漢陽趙氏)-307,746 27. 경주정씨(慶州鄭氏)-303,443 28. 문화류씨(文化柳氏)-284,083 29. 밀양손씨(密陽孫氏)-274,665 30. 함안조씨(咸安趙氏)-259,196 31. 의성김씨(義城金氏)-253,309 32. 창원황씨(昌原黃氏)-252,814 33. 진주정씨(晋州鄭氏)-238,505 34. 나주임씨(羅州林氏)-236,877 35. 여산송씨(礪山宋氏)-232,753 36. 남원양씨(南原梁氏)-218,546 37. 연일정씨(延日鄭氏)-216,510 38. 청송심씨(靑松沈氏)-212,717 39. 평택임씨(平澤林氏)-210,089 40. 은진송씨(恩津宋氏)-208,816 41-1. 김해김씨(金海金氏)-199,544 (법흥파) 41-2. 김해김씨(金海金氏)-199,544 (사성) 42. 성주이씨(星州李氏)-186,188 43. 해주최씨(海州崔氏)-181,840 44. 강릉유씨(江陵劉氏)-178,913 45. 이천서씨(利川徐氏)-172,072 46. 창녕성씨(昌寧成氏)-167,903 47. 강릉김씨(江陵金氏)-165,953 48. 단양우씨(丹陽禹氏)-162,479 49. 연안차씨(延安車氏)-161,325 50. 하동정씨(河東鄭氏)-158,396 51. 광주이씨(廣州李氏)-158,249 52. 신안주씨(新安朱氏)-151,227 53. 의령남씨(宜寧南氏)-150,394 54. 장수황씨(長水黃氏)-146,575 55. 연안이씨(延安李氏)-145,440 56. 여흥민씨(驪興閔氏)-142,572 57. 정선전씨(旌善全氏)-141,380 58. 강릉최씨(江陵崔氏)-140,854 59. 현풍곽씨(玄風郭氏)-140,283 60. 반남박씨(潘南朴氏)-139,438 61. 평해황씨(平海黃氏)-137,150 62. 한산이씨(韓山李氏)-136,615 63. 제주양씨(濟州梁氏)-133,355 64. 전의이씨(全義李氏)-133,237 65. 천안전씨(天安全氏)-133,074 66. 양천허씨(陽川許氏)-130,286 67. 담양전씨(潭陽田氏)-128,007 68. 함평이씨(咸平李氏)-125,419 69. 영월엄씨(寧越嚴氏)-124,697 70. 함양박씨(咸陽朴氏)-123,688 71. 진주하씨(晋州河氏)-121,054 72. 김해허씨(金海許氏)-121,031 73. 능성구씨(綾城具氏)-120,503 74. 충주지씨(忠州池氏)-118,211 75. 고령신씨(高靈申氏)-116,966 76. 합천이씨(陜川李氏)-115,462 77. 풍양조씨(豊壤趙氏)-113,798 78. 기계유씨(杞溪兪氏)-113,430 79. 선산김씨(善山金氏)-109,682 80. 원주원씨(原州元氏)-109,505 81. 나주나씨(羅州羅氏)-108,139 82. 풍천임씨(豊川任氏)-99,986 83. 여양진씨(驪陽陳氏)-97,372 84. 영천이씨(永川李氏)-94,491 85. 청풍김씨(淸風金氏)-94,468 86. 나주정씨(羅州鄭氏)-93,845 87. 초계정씨(草溪鄭氏)-93,586 88. 벽진이씨(碧珍李氏)-91,907 89. 성주배씨(星州裵氏)-90,239 90. 순천박씨(順天朴氏)-87,631 91. 고성이씨(固城李氏)-84,383 92. 안동장씨(安東張氏)-83,961 93. 영산신씨(靈山辛氏)-83,798 94. 나주정씨(羅州丁氏)-82,863 95. 삼척김씨(三陟金氏)-79,985 96. 연안김씨(延安金氏)-79,788 97. 무안박씨(務安朴氏)-78,817 98. 경주손씨(慶州孫氏)-78,450 99. 청도김씨(淸道金氏)-75,567 100. 성산이씨(星山李氏)-75,210 101. 영양천씨(穎陽千氏)-73,118 102. 곡부공씨(曲阜孔氏)-73,093 103. 여주이씨(驪州李氏)-71,711 104. 분성배씨(盆城裵氏)-71,268 105. 평강채씨(平康蔡氏)-69,256 106. 영양남씨(英陽南氏)-69,155 107. 인천이씨(仁川李氏)-68,628 108. 탐진최씨(耽津崔氏)-68,127 109. 원주이씨(原州李氏)-66,603 110. 진보이(眞寶李氏)-66,407 111. 백천조씨(白川趙氏)-66,155 112. 평창이씨(平昌李氏)-65,945 113. 온양방씨(溫陽方氏)-64,128 114. 부안임씨(扶安林氏)-63,589 115. 상산김씨(商山金氏)-63,528 116. 전주류씨(全州柳氏)-61,650 117. 달성배씨(達城裵氏)-61,104 118. 진주류씨(晋州柳氏)-60,104 119. 보성오씨(寶城吳氏)-59,914 120. 연주현씨(延州玄氏)-59,096 121. 예천임씨(醴泉林氏)-58,403 122. 전주김씨(全州金氏)-57,979 123. 강릉함씨(江陵咸氏)-56,718 124. 부안김씨(扶安金氏)-56,318 125. 죽산안씨(竹山安氏)-56,051 126. 해남윤씨(海南尹氏)-55,627 127. 동복오씨(同福吳氏)-55,517 128. 칠원윤씨(漆原尹氏)-54,263 129. 고흥류씨(고흥류씨)-53,981 130. 파주염씨(坡州廉氏)-53,539 131. 죽산박씨(竹山朴氏)-53,489 132. 교하노씨(交河盧氏)-53,203 133. 순천김씨(順天金氏)-52,258 134. 남원양씨(南原楊氏)-52,197 135. 수성최씨(隋城崔氏)-51,780 136. 재령이씨(載寧李氏)-50,940 137. 덕수이씨(德水李氏)-50,486 138. 옥천조씨(玉川趙氏)-49,847 139. 초계변씨(草溪卞氏)-49,506 140. 광주노씨(光州盧氏)-48,574 141. 안동김씨(安東金氏)-47,702 (신) 142. 나주김씨(羅州金氏)-46,420 143. 성주도씨(星州都氏)-46,186 144. 흥덕장씨(興德張氏)-44,705 145. 양성이씨(陽城李氏)-44,402 146. 신천강씨(信川康氏)-44,259 147. 거창신씨(居昌愼氏)-43,890 148. 광주안씨(廣州安氏)-43,609 149. 평양조씨(平壤趙氏)-41,047 150. 금성나씨(錦城羅氏)-40,493 151. 추계추씨(秋溪秋氏)-39,994 152. 풍천노씨(豊川盧氏)-39,397 153. 청주정씨(淸州鄭氏)-39,256 154. 고령박씨(高靈朴氏)-39,239 155. 삭녕최씨(朔寧崔氏)-38,736 156. 언양김씨(彦陽金氏)-38,383 157. 함안이씨(咸安李氏)-37,597 158. 원주변씨(原州邊氏)-37,505 159. 인천채씨(仁川蔡氏)-37,391 160. 진주소씨(晋州蘇氏)-37,184 161. 광산이씨(光山李氏)-36741 162. 풍산홍씨(豊山洪氏)-36,420 163. 울산김씨(蔚山金氏)-36,225 164. 충주.홍주석씨(忠州.洪州石氏)-35,461 165. 해주정씨(海州鄭氏)-35,434 166. 공주이씨(公州李氏)-35,148 167. 보성선씨(寶城宣氏)-34842 168. 청주이씨(淸州李氏)-34,756 169. 단양장씨(丹陽張氏)-33,295 170. 신평이씨(新平李氏)-33,185 171. 남원윤씨(南原尹氏)-32,731 172. 영광김씨(靈光金氏)-32,412 173. 용인이씨(龍仁李氏)-32,050 174. 조양임씨(兆陽林氏)-31,924 175. 화순최씨(和順崔氏)-31,173 176. 남양홍씨(南陽洪氏)-30,662 (토홍계)
177. 청주김씨(淸州金氏)-29,198 178. 진천송씨(鎭川宋氏)-29,049 179. 장흥마씨(長興馬氏)-28,337 180. 서흥김씨(瑞興金氏)-28,313 181. 순창설씨(淳昌薛氏)-27,926 182. 아주신씨(鵝州申氏)-27,843 183. 충주박씨(忠州朴氏)-27,486 184. 청주양씨(淸州楊氏)-27,437 185. 초계최씨(草溪崔氏)-27,213 186. 해평윤씨(海平尹氏)-26,341 187. 함양오씨(咸陽吳氏)-26,339 188. 함창김씨(咸昌金氏)-26,318 189. 함양여씨(咸陽呂氏)-25,667 190. 나주오씨(羅州吳氏)-25,546 191. 함평노씨(咸平魯氏)-25,408 192. 영해박씨(寧海朴氏)-25,189 193. 곡산연씨(谷山延氏)-25,020 194. 온양정씨(溫陽鄭氏)-24,897 195. 신창표씨(新昌表氏)-24,822 196. 장흥위씨(長興魏氏)-24,654 197. 장흥임씨(長興任氏)-24,523 198. 안동손씨(安東孫氏)-24,187 199. 양주조씨(楊州趙氏)-23,942 200. 진원박씨(珍原朴氏)-23,839 201. 상주박씨(尙州朴氏)-23,627 202. 봉화정씨(奉化鄭氏)-23,173 203. 월성박씨(月城朴氏)-22,917 204. 남양방씨(南陽房氏)-22,496 205. 영천이씨(寧川李氏)-22,479 206. 울산박씨(蔚山朴氏)-22,427 207. 군위오씨(軍威吳氏)-22,408 208. 경주배씨(慶州裵氏)-22,069 209. 광주김씨(廣州金氏)-21,926 210. 영광정씨(靈光丁氏)-21,774 211. 행주기씨(幸州奇氏)-21,536 212. 도강김씨(道康金氏)-21,274 213. 봉화금씨(奉化琴氏)-21,072 214. 결성장씨(結城張氏)-21,068 215. 덕수장씨(德水張氏)-21,006 216. 학성이씨(鶴城李氏)-20,964 217. 울진장씨(蔚珍張氏)-20,791 218. 우봉이씨(牛峰李氏)-20,525 219. 개성김씨(開城金氏)-20,341 220. 해평길씨(海平吉氏)-20,338 221. 옥천육씨(沃川陸氏)-20,173 222. 우주황씨(紆州黃氏)-19,967 223. 개성왕씨(開城王氏)-19,808 224. 안성이씨(安城李氏)-19,739 225. 의령옥씨(宜寧玉氏)-19,368 226. 영천최씨(永川崔氏)-18,721 227. 함열남궁씨(咸悅南宮氏)-18,703 228. 상주주씨(尙州周氏)-18,384 229. 야성송씨(冶城宋氏)-18,341 230. 신창맹씨(新昌孟氏)-18,147 231. 연안명씨(延安明氏)-18,091 232. 함평모씨(咸平牟氏)-17,939 233. 고부이씨(古阜李氏)-17,790 234. 아산장씨(牙山將氏)-17,695 235. 수안이씨(遂安李氏)-17,677 236. 교동인씨(喬桐印氏)-17,448 237. 영산김씨(永山金氏)-17,120 238. 흥양이씨(興陽李氏)-16,977 239. 칠원제씨(漆原諸氏)-16,818 240. 고창오씨(高敞吳氏)-16,716 241. 의령여씨(宜寧余氏)-16,477 242. 단양이씨(丹陽李氏)-16,213 243. 창원정씨(昌原丁氏)-16,141 244. 수원김씨(水原金氏)-16,009 245. 담양국씨(潭陽鞠氏)-15,774 246. 광산탁씨(光山卓氏)-15,691 247. 서산정씨(瑞山鄭氏)-15,362 248. 예안김씨(禮安金氏)-15,313 249. 광주정씨(光州鄭氏)-15,149 250. 하빈이씨(河濱李氏)-15,058 251. 안산김씨(安山金氏)-14,975 252. 홍주이씨(洪州李氏)-14,897 253. 서산류씨(瑞山柳氏)-14,827 254. 강릉박씨(江陵朴氏)-14,703 255. 우계이씨(羽溪李氏)-14,615 256. 강화최씨(江華崔氏)-14,557 257. 김제조씨(金堤趙氏)-14,509 258 장수이씨(長水李氏)-14,324 259. 부여서씨(扶餘徐氏)-14,312 260. 낭주최씨(朗州崔氏)-14,264 261. 금산김씨(錦山金氏)-14,052 262. 창원구씨(昌原具氏)-14,035 263. 성산이씨(星山李氏)-13,758 264. 고령김씨(高靈金氏)-13,692 265. 청안이씨(淸安李氏)-13,549 266. 강화노씨(江華魯氏)-13,499 267. 충주최씨(忠州崔氏)-13,466 268. 무송윤씨(茂松尹氏)-13,384 269. 풍산류씨(豊山柳氏)-13,341 270. 함종어씨(咸從魚氏)-13,321 271. 평해구씨(平海丘氏)-13,176 272. 경주임씨(慶州林氏)-13,163 273. 평해손씨(平海孫氏)-12,831 274. 홍천용씨(洪川龍氏)-12,733 275. 무송유씨(茂松庾氏)-12,463 276. 행주은씨(幸州殷氏)-12,241 277. 청해이씨(靑海李氏)-12,002 278. 고성김씨(固城金氏)-11,888 279. 동주최씨(東州崔氏)-11,699 280. 신평송씨(新平宋氏)-11,185 281. 청주경씨(淸州慶氏)-11,128 282. 풍기진씨(豊基秦氏)-11,046 283. 탐진안씨(耽津安氏)-11,033 284. 절강편씨(浙江片氏)-10,678 285. 거제반씨(巨濟潘氏)-10,063 286. 제주부씨(濟州夫氏)-9,440 287. 의흥예씨(義興芮氏)-9,268 288. 소주가씨(蘇州賈氏)-9,025 289. 영천황보씨(永川皇甫氏)-8,877 290. 사천목씨(泗川睦氏)-8,187 291. 하음봉씨(河陰奉氏)-8,087 292. 경주석씨(慶州昔氏)-7,996 293. 하남정씨(河南程氏)-7,766 294. 청주사씨(淸州史氏)-7,486 295. 면천복씨(沔川卜氏)-7,471 296. 수안계씨(遂安桂氏)-6,242 297. 봉산지씨(鳳山智氏)-6,098 298. 진주형씨(晋州邢氏)-5,822 299. 두릉두씨(杜陵杜氏)-5,701 300. 거창장씨(居昌章氏)-5,554 301. 문경전씨(聞慶錢氏)-5,535 302. 남원진씨(南原晋氏)-5,084 303. 남양제갈씨(南陽諸葛氏)-4,374 304. 영순태씨(永順太氏)-4,142 305. 광천동씨(廣川董氏)-4,130 306. 달성하씨(達城夏氏)-4,028 307. 태원선우씨(太原鮮于氏)-3,547 308. 경주설씨(慶州& #20592;氏)-3,269 309. 금성범씨(錦城范氏)-2,991 310. 청주좌씨(淸州左氏)-2,691 311. 효령사공씨(孝令司空氏)-2,664 312. 목천상씨(木川尙氏)-2,293 313. 죽산음씨(竹山陰氏)-2,260 314. 괴산피씨(槐山皮氏)-2,204 315. 금구온씨(金溝溫氏)-2,148 316. 달성빈씨(達城賓氏)-2,115 317. 회산감씨(檜山甘氏)-2,113 318. 신평호씨(新平扈氏)-1,854 319. 안음서문씨(安陰西門氏)-1,852 320. 연일승씨(延日承氏)-1,828 321. 태인시씨(泰仁柴氏)-1,807 322. 강화위씨(江華韋氏)-1,805 323. 절강시씨(浙江施氏)-1,770 324. 김포공씨(金浦公氏)-1,715 325. 태인경씨(泰仁景氏)-1,617 326. 강음단씨(江陰段氏)-1,429 327. 전주견씨(全州甄氏)-1,141 328. 남양갈씨(南陽葛氏)-1,061 329. 홍산순씨(鴻山荀氏)-1,017 330. 밀양당씨(密陽唐氏)-1,013 331. 상곡마씨(上谷麻氏)-998 332. 남원독고씨(南原獨孤氏)-807 333. 옥천옹씨(玉川邕氏)-7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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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터] 삼국지 정사 요약
촉나라=====================
관우전---------------------------관우의 자(字)는 운장(雲長)으로 원래의 자는 장생(長生)이었으며, 하동(河東) 해현(解縣) 사람이었지만 탁군( 郡)으로 도망하여 망명했다. 선주(先主:유비)가 향리(鄕里)에서 무리를 모았을때 관우는 장비와 함께 이를 도왔다. 선주(先主)가 평원상(平原相)이 되자, 관우와 장비를 별부사마(別部司馬)에 임명하여 부곡(部曲)을 나누어 다스리게 하였다. 선주(先主)는 잠을 잘 때에도 두 사람과 침상(寢牀)을 함께 했으며, 그 은혜는 형제와 같았다. 그러나 관우와 장비는 여려 사람이 모여 앉아있는 자리에서도 하루종일 선주(先主)를 모시고 서 있었고, 또 그를 따라 사방으로 돌아다니면서도 어렵고 험한 것을 피하지 않았다.(1)선주는 서주자사 차주(車胄)를 기습하여 죽이고 관우로 하여금 하비성(下 城)을 지키도록 하고, 태수(太守)의 일을 대신하도록 했다.(2)그리고 선주(先主)는 소패(小沛)로 돌아갔다.건안(建安) 5년, 조공(曹公)이 동쪽 정벌길에 나서자 선주(先主)는 패(敗)하여 원소(袁紹)에게로 달아났다. 조공은 관우를 사로잡아 돌아갔는데, 그에게 편장군(偏將軍)의 벼슬을 내리고 예(禮)로써 심히 후하게 대우했다. 원소(袁紹)가 대장 안량(顔良)을 파견하여 동군태수(東郡太守) 유연(劉延)을 백마(白馬)에서 공격하자, 조공(曹公)은 장요(張遼)를 관우과 함께 선봉으로 삼아 맞서게 했다. 관우는 안량의 대장기와 마차의 덮개를 멀리서 바라보더니 말을 채찍질하여 달려나가서는 수만의 병사들 사이에 있는 안량을 찔러죽이고 그의 목을 베어 돌아왔다. 그러나 원소의 여러 장수들 중에 능히 관우를 당할 자가 없었기 때문에 원소는 하는 수 없이 백마의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 이에 조공(曹公)은 즉시 표(表)를 올려 관우를 한수정후(漢壽亭侯)로 봉했다. 처음에 조공은 관우의 사람됨이 용감하고 기상이 굳세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오래 머무를 뜻이 없는 것을 살피고 장요에게 말하기를, '경(卿)이 그의 뜻을 시험해보게.'라고 했다. 장요가 관우에게 그의 의중을 물어보니 관우는 탄식하며 말하기를, '나는 조공께서 나를 후히 대우해주는 것을 잘 알고 있소. 그러나 나는 유장군(劉將軍:유비)의 후한 은혜를 입었고, 함께 죽을 것을 맹세하였으니 이를 어길 수는 없소. 그러니 여기 끝까지 머무를 수는 없고, 대신 다른 공을 세워 조공께 보답하고 떠날 것이오.'라고 하였다.장요가 이를 조공에게 보고하자 조공은 관우가 진정 의기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1) 얼마 안있어 관우가 안량을 죽이자 조공은 그가 반드시 떠날 것임을 알고 상을 무겁게 베풀었다. 그러나 관우는 그 상을 모두 봉(封)해 놓고 떠나감을 알리는 글을 올려놓은 후 선주(先主)가 있던 원소군으로 달아났다. 조공(曹公)의 좌우에 있던 사람들은 관우를 추격하려 하였지만, 조공은 '누구나 각기 그 주인이 있는 것이니 추격하지 말라.'(2) 라고 하였다. 관우는 선주(先主)를 따라 유표(劉表)를 따르게 되었다. 유표가 죽자 조공(曹公)은 형주(荊州)를 정벌했는데, 선주는 번성(樊城)에서 남쪽으로 강을 건너려고 하며 별도로 관우를 보내 수백 척의 배를 이끌게 하여 강릉(江陵)에서 만나기로 했다. 조공은 추격을 계속하여 당양(當陽)의 장판(長阪)까지 이르게 되자, 선주는 한진(漢津)을 끼고 달려 관우의 배와 서로 만나게 되었고 함께 하구(夏口)에 이르게 되었다.(1) 손권(孫權)이 병력을 보내 선주를 도와 조공을 막도록 하자, 조공은 군사를 이끌고 퇴각하여 돌아갔다. 선주는 강남(江南)의 여러 군(郡:무릉·장사·영릉·계양 등)들을 다시 회복하게 되었고, 공이 있는 자들에게 상을 내렸으며 관우를 양양태수(襄陽太守)·탕구장군( 寇將軍)으로 봉하여 강북에 주둔하게 했다.선주가 서쪽으로 익주(益州) 원정길에 올랐을 때, 관우에게 형주(荊州)를 맡아 지키도록 하였다. 마초(馬超)가 선주에게로 투항하여 왔다는 소식을 듣자, 일찌기 그와 교류하며 지냈던 사람이 없었던 까닭에 관우는 제갈량(諸葛亮)에게 글을 써 보내 마초의 인물됨과 재주가 누구와 비교될 수 있는지를 물었다.제갈량은 관우의 오만함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곧 답장을 보내 '마맹기(馬孟起)는 문무(文武)를 겸비했고 그 능력은 보통 사람을 뛰어넘는 일세의 호걸로써, 경포( 布)·팽월(彭越)과 같은 무리일 것이니 마땅히 익덕(益德)과 나란히 앞섬을 다툴 수 있을 것이고, 미염공(美髥公)의 절륜(絶倫)함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오.'라고 했다. 관우는 수염이 아름다웠기 때문에 제갈량은 옛날부터 그를 '염(髥)'이라 했다. 관우는 서신(書信)을 살펴보더니 크게 기뻐하며 이를 빈객(賓客)들에게 보여 주었다.일찍이 관우는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그의 왼쪽 팔을 관통당한 일이 있었다. 뒷날 비록 낫기는 했지만 흐린 날이나 비가 오는 날에는 욱신거리고 아팠는데, 의원이 말하기를, '화살 촉에 독(毒)이 있어 그것이 뼈속으로 들어가서 그런 것이니, 마땅히 팔을 가르고 뼈를 깎아내면 이 고통은 자연히 없어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관우는 순순히 팔을 뻗어 의원에게 자신의 팔을 가를 것을 명했다. 이때 마침 관우는 여러 장수들을 초청하여 음식을 먹으며 서로 마주 대하고 있었는데, 피가 흘러내려 받쳐놓은 대야에 가득 넘쳤다. 그러나 관우는 구운 고기를 자르고 술을 마시며 담소(談笑)를 나눌 뿐 태연했다.건안 24년, 선주(先主)는 한중왕(漢中王)이 되자 관우에게 전장군(前將軍)의 벼슬을 내리고 절월(節鉞)을 내렸다. 그 해에 관우는 군사들을 이끌고 번성(樊城)의 조인(曹仁)을 공격했다. 그러자 조공(曹公)은 우금(于禁)을 보내 조인을 돕도록 했다. 가을이 되어 큰 장마비가 내리자 한수(漢水)가 범람하여 우금이 이끄는 칠군(七軍)이 모두 물 속에 잠기게 되었다.우금은 관우에게 항복하였는데, 관우는 또 장군 방덕(龐悳)의 목을 베었다. 양(梁)·협(陜)·육혼(陸渾)의 여러 도적들은 관우의 관인(官印)이나 봉호(封號)를 받아 그의 한 무리가 되었고, 관우의 위엄은 화하(華夏:중국을 일컫는 말)에 떨쳤다. 조공(曹公)은 그의 예봉(銳鋒)을 피해 허도(許都)를 떠날 것을 신하들과 논의하기까지 했으나, 사마선왕(司馬宣王:사마의)·장제(蔣濟) 등은 '관우가 뜻하는 바를 이루게 되는 것은 손권(孫權)이 반드시 원하는 일이 아닐 것이므로, 사람을 보내 손권에게 관우의 배후를 치도록 권하고 강남을 나누어 손권이 갖는 것을 허락해준다면 번성의 포위는 스스로 풀릴 것'이라고 주장하자 조공(曹公)은 이에 따랐다.그런데 그 이전에 손권이 사람을 보내 그의 아들과 관우의 딸을 혼인시킬 것을 제의한 적이 있었는데, 관우는 손권의 사자에게 모욕적인 말로 꾸짖으며 혼인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손권은 대노(大怒)했다.(1) 또한 남군태수(南郡太守) 미방( 芳)이 강릉(江陵)에 있었고 장군 부사인(傅士仁)은 공안(公安)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평소 관우가 자기들을 경시했던 것을 불만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관우가 군대를 이끌고 출전하면서 미방과 부사인에게 군수물 자를 공급하는 일을 맡겼지만, 이들은 서로 최선을 다해 관우를 원조하려 하지 않았다.그러자 관우는 '돌아가면 마땅히 이들을 문책할 것이다.'라는 말을 하였고, 미방과 부사인은 불안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이때 손권이 몰래 미방과 부사인을 유혹하자 이들은 사람을 보내 손권을 따르겠다고 했다. 한편 조공(曹公)은 서황(徐晃)을 보내 조인(曹仁)을 구원했다.(2) 관우는 이것을 당해낼 수 없게 되자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그러나 손권이 이미 강릉을 점령하고 관리들과 처자식을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에 관우의 군대는 흩어져버렸다. 손권은 장수를 보내 관우를 공격하여 관우와 그의 아들 평(平)을 임저(臨沮)에서 참수했다.(3)유비는 관우의 시호를 장무후라고 봉했다. 아들 관흥은 작위를 계승했다. 관흥은 자가 안국이고, 어릴때부터, 명성이 있었으므로, 승상 제갈량은 그를 높게 평가했다. 약간의 나이에 시중 증감군이 되었지만, 몇 년후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관통이 작위를 계승하였고, 공주를 아내로 맞았으며, 관직은 호분중랑장까지 올랐다. 관통이 죽은후 아들이 없었으므로, 관흥의 서자 관이에게 작위를 잊게 했다
방통전---------------------방통은 자가 사원(士元)이고, 양양군(襄陽郡) 사람이다. 소년 시절에는 소박하고 노둔했으므로 그를 높이 평가하는 자가 없었다. 영천의 사마휘(司馬徽)는 청아했는데, 인품을 감별할 줄 알았다. 방통은 약관의 나이 때, 사마휘를 찾아가 만났다. 사마휘는 뽕나무위에서 뽕잎을 따고 방통은 그 나무 아래 앉아서 낮부터 밤까지 함께 담소를 나누었다. 사마휘는 방통을 매우 특이한 인물로 느끼고, 방통을 남주(南州) 선비들 중에서 제일 인자가 될 만하다고 했다. 이로부터 방통의 명성은 점점 빛나게 되었다. 후에 군에서 공조로 임명했다. 방통은 천성이 인물을 평가하기 좋아했고 사람을 교육시키는 일에 노력했다. 그는 매번 말할 때마다 칭찬만 해서 듣는 사람은 그 사람의 재능을 뛰어넘는 경우가 많았는데, 당시 사람들은 이것을 괴이하게 여겨 질문했다. 방통은 이렇게 대답했다.
'지금 천하는 크게 혼란스러우며, 정도(正道)는 파괴되었고, 착한 사람은 적고 나쁜 사람은 많습니다. 지금 풍속을 일으키고 도덕적 행위를 드날리게 하려고 하면서 명성을 높이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우러를 가치가 충분치 못하게 될 것이고, 우러를 가치가 충분하지 못하면 착한 일을하는 사람은 적을 것입니다. 현재 칭찬한 열 명 가운데 다섯 명은 잃어도 그 절반을 얻어 세상의 교화를 높일 수 있으며, 뜻있는 선비로 하여금 노력하게 하니, 또한 옳지 않습니까?'
오나라 장수 주유는 유비를 도와 형주를 얻었으므로 남군태수를 겸임하게 되었다. 주유가 죽자, 방통이 그의 유해를 가지고 오나라로 갔다. 오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방통의 명성을 듣고 있었다. 방통이 서쪽으로 돌아오려고 할 때, 그를 전송하기 위해 모두 창문(昌門)에 모였는데, 육적(陸績), 고소(顧邵), 전종(全琮)이 모두 참가했다. 방통이 말했다.
'육 선생은 노둔한 말이니 빠른 발의 힘을 갖고 있고, 고선생은 노둔한 소니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곳까지 갈수 있겠지요.'
전종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펴는 것을 좋아하고 명성을 흠모하므로 여남의 번자소(樊子昭)와 유사한 점이 있습니다. 비록 지혜의 힘은 많지 않지만, 역시 한 시대의 빼어난 인물입니다.'
육적과 고소가 방통에 대하여 말했다.
'천하가 태평하게 된다면, 그대와 함께 사해의 인사들을 평가해야 할것입니다.'
그들은 서로 방통과 깊이 사귀고 돌아갔다.
유비는 형주를 다스리게 되자, 방통에게 종사(從事)의 신분으로 뇌양현(뇌양현)의 현령을 대행하도록 했다. 방통은 현에 재임하여 치적을 쌓지 못했으므로 면직되었다. 오의 장수 노숙이 유비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말했다.
'방사원(龐士元)은 백리(百里 : 현을 가리킴)를 다스릴 재능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치중, 별가의 임무를 맡도록 해야만 비로소 인걸의 재능을 펴게 할 수 있습니다.'
제갈양 역시 방통을 유비에게 추천했다. 유비는 방통을 만나 깊은 예기를 하고 유능한 인물로 평가하여 치중종사로 임명했다. 그에 대한 유비의 신임은 제갈양에 버금갔다. 그래서 방통을 제갈양과 함께 군사중랑장으로 임명했다. 제갈양이 형주에 남아 지킬 때, 방통이 유비를 수행하여 촉으로 들어갔다.
익주목 유장이 유비와 부성에서 회견했는데, 방통이 계책을 진언했다.
'현재 이번 회담을 이용하여 유장을 잡을 수 있다면, 장군께서는 병사를 사용하는 수고로움이 없이 앉아서 한 주를 평정할 수 있습니다.'
유비가 말했다.
'처음으로 다른 나라에 들어왔으므로 은혜나 신의는 아직 빛나지 않으니, 그것은 할 수 없습니다.'
유장이 성도로 돌아간 이후, 유비는 유장을 위해 북쪽으로 한중을 정벌해야 했다. 방통은 또 진언했다.
'은밀히 저예병사를 선발하여 밤낮으로 가서 성도를 직접 습격하십시오. 유장은 본래 무용이 없으며 또 평소 미리 방비하지 않으니, 대군이 갑작스럽게 이르게 된다면, 한 번의 행동으로 평정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최상의 계책입니다. 양회(楊懷), 고패(高沛)는 유장의 명장으로 각각 강력한 병사를 갖고 관두(關頭)를 지키고 있습니다. 듣건대 이들은 유장에게 여러 차례 간언하여 장군을 형주로 돌아가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장군은 아직 도착하기 전에 사자를 보내 그들에게 통보하여 형주에 위급한 사태가 발생했으므로 돌아와 구원을 바란다고 설명하고, 아울러 군대가 행장을 꾸려 외견상 돌아가는 형세를 만들도록 하십시오. 이 두 사람은 장군의 영명(英名)에 감복하고 있으며, 또 장군이 가는 것을 좋아하니, 틀림없이 날쌘 말을 타고 만나러 올 것입니다. 장군께서는 이 기회에 그들을 붙잡아 놓고, 진군하여 그들의 병사를 배앗아 성도로 향하십시오. 이것이 다음으로 좋은 계책입니다. 물러나 백제성으로 돌아가 형주까지 연결하여 서서히 일을 강구하십시오. 이것이 맨 마지막 계책입니다. 만일 깊이 생각만 하다가 가지 못한다면, 장차 큰 곤경에 처하게 되어 오래 지탱할 수 없을 것입니다.'
유비는 두 번째 계책을 채용하여 즉시 양회와 고패의 목을 베고 군사를 돌려 성도로 향해 가면서 지나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었다. 유비는 부성에서 대연회를 개최하여 술을 차리고 음악을 울렸다. 방통에게 말했다.
'오늘 연회는 즐겁다고 할 만합니다.'
방통이 말했다.
'다른 사람의 나라를 토벌하고 즐겁다고 여기는 것은 어진 사람의 군대가 아닙니다.'
유비는 술에 취한 상태였으므로 노여워하며 말했다.
'무왕이 주를 토벌할 때, 앞에는 노래부르는 자가 있었고, 뒤에는 춤추는 자가 있었으니, 어진 사람이 아니었겠군요? 그대의 말은 맞지 않소. 빨리 일어나 나가시오.'
그래서 방통은 머뭇거리다 물러났다. 유비는 곧바로 후회하고 돌아올것을 요청했다. 방통이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왔지만, 돌아보고 사과하지 않고 태연하게 음식만 먹었다. 유비가 말했다.
'방금 했던 논쟁에서는 누가 잘못한 것입니까?'
방통이 대답했다.
'군신(君臣)이 함께 잘못한 것입니다.'
유비는 크게 웃었고, 처음처럼 연회를 즐겼다.
진군하여 낙현을 포위했다. 방통은 병력을 인솔하여 성을 공격할 때, 화살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이때 그의 나이 36세였다. 유비는 애통해 했으며, 그의 말을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유비는 방통의 부친을 의랑으로 임명하고, 간의대부로 승진시켰으며, 제갈양이 직접 사령을 주었다. 방통에게 관내후의 작위를 추증했으며, 시호를 정후(靖候)라고 했다.
방통의 아들 방굉(龐宏)은 자가 거사(巨師)이며, 강직하고 솔직하며 다른 사람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는 인물이었다. 상서령 진지를 경시하면 오만하게 보여 진지의 미움을 받게 되었으며, 부릉태수의 직책에서 세상을 떠났다.
방통의 동생 방림(龐林)은 형주치중종사의 신분으로 진북장군 황권(黃權)을 따라 오를 정벌하러 갔다가 패배하게 되자 황권을 따라 위나라로 들어갔다. 위나라에서 열후에 봉해졌고, 관직은 거록태수(巨鹿太守)까지 이르렀다.
곽준전--------------------곽준전 곽준은 자가 중막이고 남군 지강현 사람이다. 형 곽독은 고향에서 수백 명의 병사를 모았다. 곽독이 죽자, 형주목 유표는 곽준에게 병사들을 받아 관리하도록 했다. 유표가 세상을 떠난 후, 곽준은 병사들을 이끌고 유비에게 돌아갔고, 유비는 곽준을 중랑장에 임명했다. 유비가 가맹으로부터 남쪽으로 돌아 유장을 습격할 때, 곽준을 가맹성에 머물게 하여 지키도록 했다. 장로가 장수 양백을 보내 곽준을 유인하여 함께 성을 지킬 것을 요구하도록 했다. 곽준이 말했다. '소인의 머리는 얻을 수 있어도 성은 얻을 수 없습니다.' 양백은 즉시 물러났다. 후에 유장의 장수인 부금, 상존 등의 병사 만여 명이 낭수로부터 올라와 곽준을 공격하며 포위했지만, 거의 일년이 지나도록 함락시킬 수 없었다. 성 안에 있는 곽준의 병사는 겨우 몇 백명 뿐이었는데, 적군이 게으름을 피고 있는 틈을 타서 정예병사를 뽑아 출격하여 대대적으로 격파하고 즉시 상존의 머리를 베었다. 유비는 촉군을 평정하고, 곽준의 공로를 칭찬하며 광한군을 분할해 재동군으로 만들고 곽준을 재동태수로 임명하고 비장군으로 삼았다. 곽준은 관직에 3년간 있다가 나이 40세에 세상을 떠났으며, 시신은 성도로 옮겨져 매장됐다. 유비는 매우 애석해했으며, 곧 제갈양에게 조서를 내려 말했다. '곽준은 훌륭한 선비였으며, 게다가 나라에 큰 공을 세웠다. 술을 부어 혼령을 제사지내는 의식을 거행하고 싶다. 그래서 유비는 직접 신하들을 이끌고 조제에 참석하고 그 묘위에 머물며 잤다. 당시 사람들은 이것을 영예로 생각했다.
위연전-----------------위연전(魏延傳)
위연은 자가 문장(文長)이고, 의양군(義陽郡) 사람이다. 그는 부속(部屬)의 신분으로 유비를 수행하고 촉으로 들어가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웠으므로 아문장군으로 승진했다.
유비는 한중왕이 되었을 때, 성도로 옮겼으므로 한천(漢川)을 지킬 중요한 장수를 얻어야 했다. 사람들의 의론은 틀림없이 장비가 임용될 것이라는 데 있었고, 장비 또한 마음속으로 자신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유비가 뜻밖에 위연을 발탁하여 한중왕 진원장군(鎭遠將軍)으로 임명하고 한중태수를 겸임하도록 하자 군사들은 전부 놀랐다.
유비는 신하들을 모아 놓고 위연에게 질문했다.
'지금 그대에게 중임을 맡겼는데, 그대는 직무를 어떻게 담당할 것인지 말해 보시오.'
위연이 대답했다.
'만일 조조가 천하를 들어온다면, 대왕을 위해 그를 막기를 원합니다. 부장이 인솔하는 10만 병사를 이르게 한다면 대왕을 위해 그들을 소멸시키기를 원합니다.'
유비는 그를 매우 칭찬하고, 사람들은 모두 그의 장엄한 말에 감복했다. 유비가 제호를 칭한 후, 위연을 진북장군으로 승진했다.
건흥 원년(223)에는 위연을 서쪽의 강중(羌中)으로 진입하도록 했다. 위나라의 *군 비요(費搖)와 옹주자사 곽회(郭淮)는 위연과 양계(陽谿)에서 싸웠는데, 위연은 곽회 등을 크게 격파시켜 전군사정서대장군 가절로 승진했으며 남정후(南鄭侯)에 봉해졌다.
위연은 항상 제갈양을 수행하여 출정하였다. 병사 1만 명을 요청하여 제갈양과는 다른길로 진출하여 동관(潼關)에서 만나 한신의 선례에 따르려고 했지만, 제갈양이 제지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위연은 항상 제갈양을 겁장이라고 말하며 자신의 재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음을 한탄했다.
주석) 하후무(夏侯楙)가 안서장군으로 임명되어 장안 수비를 맡았다. 제갈양이 남정(南鄭)에서 부하들과 전략을 논의할 때, 위연은 이렇게 말했다. '듣건대 하후무는 젊고, 조조의 사위이며 겁장이이고 지모가 없다고 합니다. 지금 저에게 정예 5천명과 휴대할 식량 5천 석을 주신다면, 곧장 포중(褒中)을 뚫고 나가 진령산(秦嶺山)을 따라 동쪽으로 가서 자오곡(子午谷)에 당동하여 북쪽으로 간다면 열흘이 지나지 않아 장안에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하후무는 저 위연이 갑자기 습격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면, 틀림없이 배를 타고 도주할 것입니다. 장안성 안에는 단지 어사와 경조태수만이 있을 뿐이므로, 횡문(橫門)에 있는 식량 저장 창고와 흩어지는 백성들의 곡물로 군사의 식량은 충분할 것입니다. 동쪽(위)이 병력을 모으는 데는 20일은 걸릴 것이므로 공이 사곡(斜谷)을 뚫고 나오면 반드시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한다면 한 번의 행동으로 함양(咸陽) 서쪽 지역을 평정할 수 있습니다.' 제갈양은 이것을 위험한 계책이라고 판단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위연은 사졸을 잘 양성하였고 사람들을 뛰어넘는 용맹성이 있었으며, 또 성격이 오만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은 모두 그를 피했다. 오직 양의(楊儀)만은 위연에게 조금도양보하지 않았으므로, 위연은 매우 분개했는데, 마치 불과 물 같았다.
건흥 12년(234)에 제갈양이 북곡구(北谷口)로 출병하자, 위연이 선봉이 되었다. 제갈양의 진영으로부터 10리 떨어진 곳까지 나간 위연은 머리에 뿔이 나는 꿈을 꾸었다. 꿈 해몽가인 조직(趙直)에게 묻자, 조직은 위연을 속이며 말했다.
'기린은 뿔이 있지만 쓰지 않습니다. 이것은 싸우지 않고 적군이 자멸하려는 징조입니다.'
조직은 물러나와 다른 사람들에게 말했다.
'각(角)이라는 글자는 칼(刀)아래에 쓰였습니다. 머리 위에 칼을 쓰고 있으므로 매우 불길합니다.
가을, 제갈양이 질병의 악화로 위험한 지경에 이르자, 비밀리에 장사 양의, 사마 비의, 호군 강유 등과 자신이 죽은 후에 군사를 철수시키는 일에 관한 지도를 주었다. 위연에게는 적의 추격을 차단시키도록 하고, 강유에게는 그 앞에 위치하도록 했다. 만일 위연이 혹시라도 명령을 따리지 않을 경우에는 군대를 그대로 출발시키도록 했다. 제갈양이 세상을 떠난 후, 이 사실을 비밀로 하고 상을 발표하지 않았다. 양의는 비의에게 명하여 위연이 있는 곳으로 가서 태도를 살피도록 했다. 위연이 말했다.
'승상은 비록 죽었지만, 나는 건재합니다. 승상부에서 신임을 받은 관리들은 시신을 운반해 귀국하여 장례를 치러야 합니다. 나는 직접 병사들을 인솔하여 적을 공격할 것입니다. 어떻게 한 사람이 죽었다고 하여 천하의 일을 내팽개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나 위연이 어떤 사람인데, 양의의 지휘를 받아 후방을 끊는 장수가 되겠습니까!'
그래서 비의와 함께 떠날 부대와 남을 부대를 구분하고, 비의에게 편지를 써서 자기와 이름을 나란히 하여 장수들에게 알리도록 했다. 비의는 위연을 속여 말했다.
'저는 그대를 위해 돌아가 양장사(楊長史)를 이해시킬 것입니다. 장사는 문관으로 군사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지 못하므로 틀림없이 그대의 명령을 어기지 않을 것입니다.'
비의가 문을 나와 말을 달려 떠난 후에야 위연은 비의를 보낸 것을 후회하고 추격했지만 잡을 수 없었다. 위연은 사람을 보내 양의 등을 살피도록 하여, 제갈양의 지도에 따라 군영들은 순서대로 군대를 이끌고 돌아가려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위연은 대단히 분노하여 양의가 출발하기 전에 인솔하던 자신의 부하들을 먼저 남쪽으로 돌아가도록 하고, 지나친 길은 불을 질러 다리를 끊어 놓았다.위연과 양의는 각자 서로 반역을 했다는 내용의 표를 올렸으며, 하루 사이에 긴급함을 알리는 문서가 조정으로 전해졌다. 유선은 시중 동윤과 유부장사(留府長史) 장완에게 이 일을 물었다. 장완과 동윤은 모두 양의를 보증하고 위연을 의심했다. 양의등은 산의 나무를 잘라 길을 여는 것을 밤낮으로 겸하여 역시 위연 군대의 뒤를 바짝 이었다. 위연은 먼저 도착하여 남곡구를 차지하고 병사들을 보내 양의 등을 역으로 공격했다. 양의 등은 하평(何平)에게앞에서 위연을 막도록 했다. 하평이 위연의 선봉부대에게 질책하여 말했다.
'제갈공명이 죽어 그 시신은 아직 식지도 않았거늘, 너희들은 어찌하여 감히 이런 행동을 하느냐!'
위연의 병사들은 잘못이 위연에게 있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명령에 따르는 자가 없었고 군대는 모두 흩어졌다. 위연은 혼자 아들 몇 명과 함께 도망쳐 한중으로 달아났다. 양의는 마대(馬岱)를 보내 추격하여 그의 머리를 베도록 했다. 위연의 머리가 양의에게 전해지자, 양의는 일어나 직접 그 머리를 밟고 말했다.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재능꾼아! 또 다시 나쁜 일을 할 수 있겠느냐!'
그리고 위연의 삼족을 멸했다. 당초 장완은 숙위(宿衛) 제군을 이끌고 위험을 피해 북쪽으로 갔는데, 몇 십 리 가서 위연이 죽었다는 연락을 받고 돌아왔다. 위연의 마음을 추측해 볼 때, 북쪽으로 가서 위나라에 항복하지 않고 남쪽으로 돌아온 것은 단지 양의 등을 제거하여 죽이려고 한것이다. 평상시 여러 장수들과 항상 의견이 달랐고, 그 당시 여론이 틀림없이 자신이 제갈양을 대신해야 한다고 하기를 바랐을 뿐 위연의 본래 뜻은 촉나라를 배반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조운전------------------------조운(趙雲)의 자(字)는 자룡(子龍)이고, 상산(常山) 진정(眞定)사람이다.
본래 공손찬(公孫瓚)에 속해 있었는데, 공손찬이 선주(先主:유비)에게 전해(田楷)를 도와 원소(袁紹)를 막도록 했을 때 조운은 선주를 따라 기병을 이끌었다.(1)
선주가 조공(曹公:조조)에게 쫓겨 당양(當陽)의 장판(長阪)에까지 이르게 되자 처자(妻子)를 버리고 남쪽으로 달아났는데, 조운은 유비의 어린 아들(곧 후주 유선이다)을 품에 안고, 감부인(甘夫人:곧 후주 유선의 어머니이다)을 보호하여 모두 화를 면하게 했다. 그리고 아문장군(牙門將軍)으로 자리를 옮겼다.
선주가 촉(蜀)으로 들어갈 때 조운은 형주(荊州)에 남았다.(2)
(1) 《조운별전(趙雲別傳)》에 이르는 바는 다음과 같다. 조운은 신장이 8척(尺)에 풍채는 크고 늠름했다. 본래 군(郡)에서 천거되었고, 의(義)로움을 추구하는 아전과 병사들을 이끌고 공손찬에게로 갔다. 이때 원소는 기주목(冀州牧)을 칭하고 있었는데, 공손찬은 기주 사람들이 원소를 따르는 것을 매우 우려하여, 조운이 자기에게로 온 것을 높게 평가하면서도 조운을 비웃으며 말하기를, "들으니 귀주(貴州) 사람들이 모두 원씨(袁氏)를 원한다고 하던데, 그대는 어찌하여 혼자 마음을 돌렸는가? 마음이 혼란스러워 혼자 반(反)하는 행동을 한 것이 아닌가?"라고 묻자, 조운은 대답했다. "천하가 심히 어지러운지라 백성들은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를 알지 못하는데다, 현(縣)에 재앙이 들이닥치면 백성들에게는 죽음이 있을 뿐입니다. 고을에서는 어진 정치를 펴는 쪽을 따르겠다는 것일 뿐, 원공(袁公)을 홀대하거나 장군을 섬기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는 공손찬을 따라 정벌길에 올랐다. 이때 선주 또한 공손찬에게 의지하고 있었는데, 선주는 조운과 자주 만나 사귀었다. 조운은 스스로 선주에게 의탁하려고 결심하게 되었다. 조운이 형님의 상(喪)을 당하여 공손찬의 양해를 얻어 잠시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선주는 그가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고 굳게 손을 잡으며 헤어지려 할 때 조운은 선주에게 말했다. "그간 입었던 덕(德)을 죽을 때까지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선주가 원소를 따르게 되었을 때, 조운은 업( )에서 선주를 만났다. 선주는 조운과 한 침상(寢牀)에 누워 잠을 자며 몰래 조운을 보내 병사 수백 명을 모집하며, 모두 유(劉) 좌장군(左將軍)의 부곡(部曲)이라 하였지만 원소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조운은 선주를 따라 형주(ゑ?로 갔다.
(2) 《조운별전(趙雲別傳)》에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처음에 선주가 패하자 조운이 북쪽으로 가버렸다고 말하는 자가 있었는데, 선주는 손에 극(戟:창의 일종)을 들고 소리쳤다. "자룡은 나를 버리고 달아날 사람이 아니다." 얼마 안있어 조운이 도착했다. 조운은 강남을 평정하고 편장군(偏將軍)이 되었고, 계양태수(桂陽太守)를 겸하여 조범(趙範)을 대신했다. 조범에게는 번씨(樊氏)라는 형수(兄嫂)가 있었는데 그 용모가 매우 뛰어났다. 조범은 조운과 짝을 지어주려고 했지만, 조운은 이를 사양하며 말했다. "경은 나와 같은 성씨(姓氏)이니, 경의 형수는 곧 나의 형수와 같은 것이오." 끝까지 사양하며 배필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 조운에게 번씨를 받으라고 권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조운은 이렇게 말하며 번씨를 취하지 않았다. "조범이 항복하여 따르기로 했지만, 그의 속마음을 헤아릴 수없소. 더우기 천하에 여자는 많은데 어찌 급히 취하려 한단 말이오." 과연 조범은 달아났으나, 조운은 조금도 서운해하지 않았다.
전에 조운이 하후돈(夏侯惇)과 박망(博望)에서 싸울 때, 하후란(夏侯蘭)을 사로잡았다. 하후란은 조운의 고향사람이었지만 서로 잘 알지 못했다. 그러나 조운은 선주에게 하후란이 법률에 밝아 군을 바로잡을 것이라고 하며 그를 천거하였다. 그러면서도 조운은 하후란이 자신과 가까이 있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는데, 그의 삼가고 살펴 생각함이 이와 같았다.
선주가 익주(益州)로 들어갈때, 조운을 남겨 사마(司馬)의 일을 보게 했다. 이때 선주에게 손권의 누이 손부인(孫夫人)이 있었는데, 그녀는 교만하고 굳세어 오(吳)나라의 관리와 병사들을 많이 거느리고, 방자하여 법을 따르지 않았다. 선주는 조운에게 특별히 내부의 일을 장악하도록 하여 이를 엄중히 바로 잡도록 하였다.
손권은 유비가 서정(西征)길에 올랐다는 말을 듣고, 많은 배를 보내 누이인 손부인을 데려가려고 했다. 손부인은 후주(後主)를 오나라로 데리고 가려고 하였지만, 조운은 장비와 함께 강을 끊고 후주를 데리고 돌아왔다.
선주(先主:유비)가 가맹관( 萌關)에서 돌아와 유장(劉璋)을 공격하면서 제갈량을 불렀다. 제갈량은 조운·장비 등과 함께 강(양자강을 말하는 듯함)을 거슬러 서쪽으로 올라가며 군현(郡縣)들을 평정했다. 강주(江州)에 이르자, 조운을 보내 육지로 나와 강양(江陽)으로 오도록 하여, 성도(成都)에서 제갈량과 합류하도록 했다. 성도가 평정되자 조운은 익군장군(翊軍將軍)이 되었다.(1)
건흥 원년(建興元年; 촉한 유선의 연호로 서기 223년), 중호군(中護軍) 정남장군(征南將軍)이 되었고 영창정후(永昌亭侯)에 봉해졌으며, 얼마 뒤에 다시 진동장군(鎭東將軍)으로 승진되었다.
건흥 5년, 제갈량을 따라 한중(漢中)에 주둔했다. 다음 해에 이르러 제갈량이 군대를 일으켜 사곡도(斜谷道)에서 나아가 승승장구 하자, 조진(曹眞)은 대군을 보내 이에 대적했다. 제갈량은 조운을 등지(鄧芝)와 함께 가서 항거하도록 하고, 자신은 기산(祁山)을 공격했다. 조운과 등지의 병사는 약하고 적(敵)은 강한 군사였으므로 기곡(箕谷)을 잃게 되었는데, 군사를 모아 다시 지켰으므로 대패(大敗)하지는 않았다. 군대를 물린 후, 진군장군(鎭軍將軍)으로 벼슬이 낮아졌다.(2)
(1)《조운별전(趙雲別傳)》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익주(益州)가 평정된 뒤, 성문 밖의 뽕나무 밭을 여러 장수들에게 나누어 주는 일을 논의하기 위해 성도(成都)의 옥사(屋舍:임시거처)에 모였는데, 조운이 이에 반대하고 나섰다. "곽거병(u去病:전한의 무제 때 흉노를 정벌한 명장)은 아직 흉노(匈奴)를 토벌하지 못하자, 황제가 내린 집까지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역자주: 武帝는 곽거병의 공을 높이 평가하여 그에게 대저택을 하사했는데, 곽거병은 "흉노를 멸망시킬 때까지는 저택에서 살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무제는 곽거병을 더욱높이 평가하게 되었다.] 지금 나라의 적은 비단 흉노만이 아닐진데, 어찌 편안함을 구할수 있겠습니까? 모름지기 천하가 평정된 후라고 해도, 뽕나무를 내놓고 고향으로 돌아가 밭을 가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익주(益州)의 백성들은 처음 병란(兵亂)을 겪어 어려움이 많았으니 밭과 집을 돌려주고, 영(令)을 내려 편안히 거주하며 생업에 복귀할 수 있도록 하십시오. 그런 연후에 부역을 줄여준다면 민심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선주(先主)는 그의 말을 따랐다.
하후연(夏侯淵)이 패한 후, 조공(曹公)은 한중 땅을 차지하기 위해 군량미를 북산(北山) 아래로 운반하였는데, 군량은 수천만 포대나 되었다. 황충(黃忠)이 이를 취하려 하자 조운도 군사를 이끌고 황충을 따라 나섰다. 황충이 때가 지났는데도 돌아오지 않자, 조운은 경무장(輕武裝)한 수십 기(騎)의 기병을 이끌고 나가 주위로 황충을 찾아 나섰다. 이때 조공(曹公)의 대군이 나타났는데, 조공이 병사들을 출전시키자 조운은 그 앞의 한 곳을 날카롭게 공격하며 싸웠다. 대병(大兵)이 점점 다가오자 형세는 위급해졌지만 조운은 그 진영으로 돌진해 들어가며, 한편으로는 싸우고 다른 한편으로는 빈틈을 찾았다. 조공의 군사는 패했으나 다시 세를 모아 주위를 포위했다. 조운은 적진에 빠져 있었는데 포위를 풀고 돌아왔다. 장수 장저(張著)가 부상을 입자 조운은 다시 말을 달려 장저를 구하여 데리고 왔다. 이때 면양(沔陽)에는 장익(張翼)이 있었는데 조공의 군사가 추격하여 주위를 포위하자, 장익은 문을 닫고 저항하려 했지만, 조운은 진영으로 들어오자 문을 다시 크게 열더니 기(旗)를 내리고 북소리를 멈추게 했다. 조공의 군사는 복병이 있을까 의심하여 물러갔다. 조운은 다시 하늘이 진동할 듯 북을 울리며 조공의 군사들의 뒤에 쇠뇌를 쏘아대자, 조공의 군사들은 놀라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로 짓밟고 밟히며 한수(漢水)에 이르렀는데, 죽은 자가 부지기수였다.
다음날 아침, 선주(先主)는 조운의 진영으로 와서 그가 싸운 곳을 둘러보더니, "자룡(子龍)의 몸은 담력 덩어리로구나!"라고 말하면서,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주연(酒宴)을 베풀어 먹고 마셨다. 군중(軍中)에서는 조운을 일컬어 호위장군(虎威將軍)이라고 불렀다.
손권이 형주(荊州)를 기습하자 선주(先主)는 대노(大怒)하여 손권을 토벌하고자 했다.
조운이 나서 간(諫)했다.
"국적(國賊)은 조조이지 손권이 아닙니다. 그러니 먼저 위(魏)를 멸하면 오(吳)는 곧 스스로 굴복할 것입니다. 비록 조조의 몸은 죽었다고 해도, 그의 아들 조비(曹丕)가 제위를 도적질하여 찬탈했으니, 마땅히 민심을 따라 속히 관중(關中)을 도모하여 황하(黃河)와 위수(渭水)를 점거한다면 흉악한 역적을 토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한다면 관동(關東)의 뜻있는 선비(義士)들은 반드시 군량을 가지고 말을 달려와서 대왕을 맞이할 것입니다. 위(魏)를 놔두고 먼저 오(吳)와 싸우기 위해 병력을 일으켜 교전한다면 싸움은 간단히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선주는 듣지 않고 동정(東征)길에 오르며, 조운을 남겨 강주(江州)를 감독하도록 했다.
선주가 자귀( 歸)에서 패하자, 조운은 군사를 이끌고 영안(永安)에 이르렀으나 오군(吳軍)은 이미 물러난 뒤였다.
(2)《조운별전(趙雲別傳)》이 전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제갈량이 말하기를, "가정(街亭)에서 군사를 물렸을 때 장졸들은 돌아오지 못해 흩어져 버리고 말았는데, 기곡(箕谷)에서 군사를 물렸을 때는 능히 장병들을 잃어버리지 않았으니 어찌된 연고인가?"라고 묻자, 등지(鄧芝)가 대답했다.
"조운이 스스로 후방을 끊어 엄호한 뒤 군수물자(軍需物資)를 소홀히 버리지 않았기에, 병사와 장수들도 서로 힘을 합해 나뉘어지지 않고 두루 따르게 된 것입니다."
조운의 군수물자에 명주가 많이 남아있자, 제갈량은 이를 장사(將士)들에게 나누어주려 했는데, 조운이 나서서 말했다.
"군대의 일이란 이로움이 있을 수 없는 것인데, 어찌하여 나누어 주려 하십니까?
청컨데 그 물건들을 모두 적안부(赤岸府)의 창고에 넣어두었다가, 겨울이 오는 10월이 되기를 기다려 하사하시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제갈량은 그의 의견이 옳다고 생각하여 그대로 따랐다.
7년(229)에 세상을 떠났는데, (261년 3월) 시호가 순평후로 추증되었다
장비전-----------장비는 자가 익덕(益德)이며, 탁군(啄郡) 사람이다.
젊어서 관우와 함께 유비를 섬겼다. 관우가 연장자였으므로 장비는 그를 형처럼 대우했다. 유비는 조조를 따라 여포를 공격하고, 함께 허도로 돌아왔다. 이때 조조가 장비를 중랑장으로 임명했다.
유비는 조조를 등지고 원소, 유표에게 의지했다. 유표가 죽자,조조가 형주로 들어왔으므로 유비는 강남으로 달아났다. 조조는 그를 추격하여 하루 낫, 하루 밤이 지나 당양현 장판까지 이르렀다. 유비는 조조가 곧바로 도착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처자식을 버린 채 달아나며, 장비에게 기병 20명으로 뒤를 차단하도록 했다. 장비는 냇물을 점거하여 교량을 끊고, 눈을 부릅뜨고 창을 비껴잡으며 말했다. "나는 장익덕이다. 나와 함께 죽음을 결정지으며 싸울 수 있는가!" 적군들은 모두 감히 접근하는 자가 없었고, 이 때문에 유비는 위기를 모면하게 되었다. 유비는 강만을 평정하고 장비를 의도태수(宜都太守) 정로장군으로 임명하고 신정후(新亭侯)에 봉했으며, 후에 남군(南郡)으로 전임시켰다. 유비는 익주로 들어와 군사를 돌려 유장을 공격하려고 했으므로 장비와 제갈양 등은 물을 거슬러 올라가며 나누어 각 군과 현을 평정시켰다. 장비는 강주(江州)에 도착해 유장의 부자인 파군태수(巴郡太守) 엄안(嚴顔)을 무찔러 생포했다. 장비가 엄안을 꾸짖어 말했다. "대군이 이르렀는데, 어찌하여 항복하지 않고 감히 저항하며 싸웠는냐?" 엄안이 대답했다. "당신들은 예의도 없고, 우리 주를 침략했소. 우리 주에서는 오직 머리를 잘리는 장군은 있지만 항복하는 장군은 없소." 장비는 분노하여 측근들에게 끌고가서 머리를 베도록 했지만, 엄안은 안색도 바꾸지 않은 채 말했다. "머리를 자르면 머리를 자르는 것이지, 어찌하여 분노를 하시오!" 장비는 용감함에 감복하여 풀어주고 불러서 빈객으로 삼았다. 장비는 지나는 곳마다 모두 승리하고 성도에서 유비와 만났다. 익주가 평정된후 제갈양, 법정, 장비 및 관우에게 각각 금 5백 근, 은 1천 근, 동전 5천만 개, 비단 1천 필을 내리고, 그밖의 사람들에게는 각각 격차를 두어 하사했다. 장비를 파서태수(巴西太守)로 임명했다.
조조는 장로를 무찌르고 하후연과 장합을 머물게 하여 한천을 지키도록 했다. 옮기려고 탕거(宕渠) 몽두(蒙頭) 탕석(湯石)까지 진군하여 장비와 50여 일간 서로 대치했다. 장비는 정예병사 만여 명을 이끌고 다른 길로부터 장합의 군대를 맞아 싸웠는데 장합의 군대는 길이 좁아 앞뒤가 서로 구원할 수 없었다. 장비는 그래서 장합을 무찔렀다. 장합은 말을 버리고 단지 부하 10여 명과 산을 따라서 사잇길로 물러나와 남정으로 돌아갔고, 파서 지역은 평정을 되찾았다. 유비는 한중왕이 되었고, 장비를 우장군 가절에 임명했다.
장무(章武) 원년(221) 거기장군으로 승진하고, 사예교위를 겸임하였으며, 승진하여 서향후(西鄕侯)에 봉해졌다. 책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짐은 황통을 계승하고, 대업을 이어 받들어 흉포한 무리를 제거하고 동란을 진압했지만, 아직 그 이치를 밝히지는 못했다. 현재 역적과 강도는 해악을 만들고, 백성들은 도탄의 고통을 받고 있으며, 한왕실을 생각하는 선비들은 학처럼 목을 빼고 바라고 있다. 짐은 이 때문에 슬프며, 자리에 앉아 있어도 불안하고, 음식을 먹어도 단맛을 느끼지 못한다. 군대를 정돈하기로 맹세하고 하늘의 뜻에 따라 적을 토벌했다. 그대의 충성과 강인함은 주선왕(周宣王) 때, 회이(淮夷)를 토벌한 소호(召虎)와 비교되며, 그 이름은 가까운 곳이든 먼 곳이든 펴졌기 때문에 특별히 명령을 나타내어 작위를 높이고, 경도 및 그부근을 겸하여 다스리도록 하겠다. 하늘의 위엄을 조장하고, 덕행으로 복종하는 자들을 위로하녀, 형벌로 반항하는 자를 제압하여 짐의 뜻에 따라. <<시경>>에서 '백성을 해롭게 하지 마라, 완성을 구함에 급급하지 마라. 모든 것이 바르려면 주왕조를 본받아야 한다. 큰 공업을 신속하게 세우면 너에게 북을 내리리' 라고 하지 않았던가.면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당초 장비의 웅장함 위풍 용맹함은 관우에 버금갔는데, 위나라의 모신(謨臣) 정욱 등은 관우와 장비에게는 1만 명을 상대할 만한 힘이 있다고 칭찬했다. 관우는 병사들에게는 잘 대해주었지만 사대부들에게는 오만하였고, 장비는 군자는 아끼고 존경했지만 소인은 보살피지 않았다. 유비는 항상 이것을 경계하여 말했다. "그대는 형벌에 따라 사람을 죽이는 것이 벌써 지나치고, 또 매일 병사들에게 채찍질을 하면서 그들을 측근에 임용하고 있으니, 이것은 화를 초래하는 길이오." 그러나 장비는 깨우치지 못했다. 유비가 오나라를 토벌할 때, 장비는 만 명의 병사들을 인솔하여 낭중으로부터 나와 강중에서 유비와 만나기로 했다. 출발하려고 할 때, 그의 막하의 장수 장달(張達) 범강(范疆)이 장비를 살해하고, 그의 머리를 갖고 장강을 따라 손권에게로 달려갔다. 장비 군영의 도독의 표를 올려 유비에게 보고했다. 유비는 장비도독의 표가 있음을 듣고 말했다. "아! 장비가 죽었구나 !!"
장비의 시호를 환후(桓侯)로 추증했다. 맏아들 장포(張苞)는 요절했으므로 차남 장소(張紹)가 후사를 이었는데, 관직이 시중상서복야까지 이르렀다. 장포의 아들 장준(張遵)은 상서가 되어 제갈첨을 수행하여 면죽에서 등애와 싸우다가 전사했다
강유전----------------강유는 자가 백약(伯約)이고 천수군(天水郡) 기현(冀懸) 사람이다.
어렸을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강유는 정씨(鄭氏:정현)의 학문을 좋아했다. 군에서 벼슬하여 상계연(上計연)이되었고, 주에서 초빙하여 종사로 임명했다. 부친 강경(姜경)은 옛날군의 공조였을때, 강족과 융족의 반란을 만나 직접 군태수를 보호하다가 전쟁터에서 사망했다. 그 때문에 강유에게 중랑의 관직을 주었으며, 본군의 군사에 참여시켰다.
건흥 6년(228)에 승상 제갈량의 군대가 기산으로 향했다. 그때 천수(天水)태수는 마침 밖으로 나와 강유와 공조 양서(梁緖), 주부 이상(이賞),주기(主記) 양건(梁虔) 등의 수행하에 순찰하고 있었다.
태수는 촉나라 군대가 도착하려 하자, 여러 현들이 호응한다는 소식을 듣고, 강유 등이 모두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고 의심했다.그리고 한밤중에 도망쳐 상규(上규)를 지켰다.
강유 등은 태수가 달아난 것을 알고 뒤늦게 추격했지만, 성문에 이르렀을 때는 성문이 벌써 닫혀 있었으므로 들어가지 못했다.강유 등은 서로 인솔하면 기현으로 돌아왔지만. 기현 역시 강유 등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강유등은 그래서 함께 제갈량에게로 갔다. 마침 마속이 가정에서패배했고, 제갈량이 서현을 함락시켜 1천여 인가와 강유등을 이끌고 돌아왔다. 그래서 강유는 어머니와 헤어지게 되었다. 제갈량은 강유를 불러 창조연(倉曹연)으로 임명하고, 봉의장군(奉義蔣軍)을 더했으며, 당양정후(當陽亭侯)로 임명했다.그 당시의 나이는 27세였다.
제갈량이 유부장사(留府長史)장예 및 참군 장완에게 편지를 보내말했다.
"강백약(姜伯約)은 그 시대의 일을 충성스럽고 근면하게 하며 사려가 정밀하며, 그가 갖고 있는 재능을 살펴보면, 영남 및 계상 등의 사람들도그에게 미치지 못합니다. 그 사람은 양주에서 최고의 인물입니다."
또 말했다.
"반드시 먼저 중호보병(中虎步兵) 5,6천 명을 그에게 훈련시키도록 해야 합니다. 강백약은 군사에 매우 능수능란하며, 도량과 의기가 있으며, 병사들의 마음을 깊이 이해합니다. 이 사람의 마음은 한왕실에 있으며, 재능은 일반 사람을 넘으므로 군사 훈련을 끝마치고 나서 궁궐로 보내 군주를 만나도록 해야 합니다."
이후에 중감군 및 정서장군으로 승진했다.
건흥 12년(234)에 제갈량이 죽자, 강유는 성도로 돌아와 우감군 및 보한장군(輔漢將軍)이 되어 군사들을 통솔하고, 승진하여 평야후(平襄侯)로 봉해졌다.
연희 원년(238)에 대장군 장완을 따라 한중에 주둔했다. 장완이 대사마로 승진한 후, 강유는 사마로 임명되어 여러 차례 한 군대를 인솔하여서쪽으로 침입했다.
연희 6년(243)에 진서대장군으로 승진했고, 양주자사를 겸임했다.10년(247)에 위장군으로 승진하고, 대장군 비의와 함께 녹상서사가 되었다.
이 해, 문산군 평강현(平康縣)의 이족이 반란을 일으키자, 강유는 병력을이끌고 토벌하여 평정시켰다. 또 농서 및 남안(南安) 및 금성(金城)의 경계로 나가 위나라 대장군 곽회 및 하후패 등과 조수에서 싸웠다.
호왕(胡王) 치무대(治無戴) 등이 부락을 바치고 투항했으므로, 강유는 그들을 데리고 돌아와 안주시켰다.
연희 12년(249)에 강유에게 부절을 주어 또 서평(西平)으로 출정하도록 했는데, 승리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강유는 스스로 서쪽 지역의 풍속에 익숙하며, 겸하여 자기의 재능과 무력에 자부심을 가졌으므로 강족과 호족을 유인하여 자신의 오른쪽 날개로 삼으려고 하며, 농산 서쪽을 위나라에서 끊어 지배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항상 대규모로 출병하려고 하여 비의는 늘 그것을 제지하며, 그에게 준 병력은 만 명에 불과했다.
연희 16년(253) 봄에 비위가 세상을 떠났다. 여름, 강유는 수만 명을 이끌고 석영(石營)을 나와 동정(董亭)을 지나 남안(南安)을 포위했지만, 위의 옹주자사 진대가 포위를 풀고 낙문(落門)까지 이르렀고 강유는 식량을 다 소비하였으므로 물러나 돌아왔다.
다음해, 독중외군사의 직위를 더했다. 다시 농서로 출병하였는데, 적도현을 지키고 있던 장 이간(李簡)이 성을 들어 투항했다. 강유는 나아가 양무(襄武)를 포위하고, 위나라 장수 서질(徐質)과 교전하여 머리를 베어 적을 격파시켰으므로 위나라 군대는 패하여 물러났다.
강유는 승리의 여세를 타고 진격하여 매우 많은 성들을 항복시켰으며, 하관(河關) 및 적도 및 임조 세 현의 백성들을 빼앗아 돌아왔다.
연희 18년(255)에 또 거기장군 하후패 등과 함께 적도에서 나와 조서에서 위의 옹주자사 왕경(王經)을 크게 격파시쳤다. 왕경의 병사들가운데 죽은 자는 수만 명이나 되었다. 왕경이 퇴각하여 적도성을 지키자, 강유는 그곳을 포위했다. 위의 정서장군 진태가 병사들을 이끌고
와서 포위망을 풀었고, 강유는 퇴각하여 종제(鍾題)에 주둔했다.
연희 19년(256) 봄에 강유는 원정에 앞서 대장군으로 승진했다. 다시 병사와 말을 정돈하고, 진서대장군 호제(湖濟)와 상봉에서 만날 날을 약속하였는데, 호제가 약속을 깨고 도착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강유는 단곡(段谷)에서 위나라 대장군 등애에게 격파되어 병사들을 뿔뿔이 흩어졌으며, 매우 많은 수가 사망했다. 병사들은 이로 인해 모두 강유를 원망했고, 농서 서쪽 지역에서도 소동이 일어나 안정되지 못했다. 강유는 잘못을 사과하고 책임을 지기위해 자신의 관직을 삭탈할 것을 요구했다. 그래서 *군 및 행대장군사로 강등되었다.
연희 20년(257)에 위나라 정동대장군 제갈탄이 회남에서 모반하여 관중의 병사를 나누어 동쪽으로 내려갔다. 강유는 그 틈을 타서 진천으로향하려고 또 수만 명을 이끌고 낙곡(駱谷)을 나와 곧장 침령(沈嶺)에 도착했다. 당시 장성(長城)을 점령하고 산에 의지하여 진영을 만들
었다. 사마망과 등애는 위수에 기대 영채를 공고히 하였다. 강유가 몇차례 도전하였지만, 사마망과 등애는 응하지 않았다.
연희 20년(258)에 강유는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
「여러 진영을 교차시켜 수비하는 것은 비록 《주역》에서 말하는 '중문(重門;문을 몇 겹으로 쌓는다)'의 의미로 적의 습격을 방어할 수는 있지만 큰 이익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적이 도착할때를 알도록 하여 각각, 곡식을 모아 한중과 악성의 두 성까지 물러나 적이 평지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중요한 곳에 병사를 주둔시켜 수비하도록 하는 것만 못합니다. 유사시에는 유격대를 동시에 나아가게 하여 그들의 허점을 살피도록 하십시오. 적
군은 관소를 공격해도 함락시키지 못할 것이고 들에 흩어져 있는 식량이 없어 천 리 떨어진 곳까지 식량을 운반해 와야 되므로 자연스레 피폐해질 것입니다. 적군이 퇴각하는 날, 여러 성에서 일제히 나와 유격대와 함께 힘을 합쳐 치도록 하십시오. 이것이 적군을 전멸시키는 방법입니다.」
그 결과 독한중 호제를 한수까지 물러나게 했으며, 감군 왕함(王含)에게 악성을 지키도록 하고, 호군 장무에게 한성을 지키도록 했으며, 또 서안,건위,무위,석문(石門),무성(武城),건창,임원(臨遠)에 모두 수비진을 주둔시켰다.
경요 5년(262), 강유는 병사를 인솔하여 한(漢),후화(侯和)로 출병하였다가 등애에게 격파되어 답중으로 돌아와 주둔했다.
강유는 본래 고향을 떠나 타향(촉)에 목을 기탁하고 해를 연이어 전쟁을 하면서도 공적을 세우지 못했다. 이때 환관 황호 등이 조정에서 권력을 잡고, 우대장군 염우(閻宇)가 황호와 결탁하였다. 따라서 황호는 은밀히 강유를 폐하고 염우를 세우고자 했다. 강유 또한 그들을 의심했기 때문에 자연스레 위험을 느끼고 두려워하여 다시는 성도로 돌아가지 못했다.
경요 6년(263)에 강유가 유선에게 표를 올렸다.
「듣건대, 종회는 관중에서 병사들을 훈련시켜 우리를 공격하여 취하려고 한다고 합니다. 응당 장익과 요화를 보내 각 군대를 지휘하여 양안관구(陽安關口)와 음평교두(陰平橋頭)로 나누어 지키도록 하여 미연에 방지해야만 합니다.」
황호는 귀신이나 미신의 말을 신용하고, 적군은 끝내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여 우선에게 이 일을 진행시키지 말라고 했다. 신하들은 아무것도 몰랐다. 종회가 낙곡으로 향하고, 등애가 답중으로 진입한 연후에 비로소 우거기(右車騎) 요화를 답중으로 보내 강유의 원군이 되도록 했으며, 좌거기 장익과 보국대장군 동궐(童厥) 등은 양안관구로 가서 여러 진영의 밖에서 지원부대가 되도록 했다. 음평까지 왔을 때, 위나라 대장 제갈서가 건위(建威)로 향한다는 소식을 들었으므로 정지하고 그들을 기다렸다. 한 달 남짓 후, 강유는 등애에게 격파되어 음평으로 돌아와 주둔했다.
종회가 한,악 두 성을 공격하며 포위하고, 따로 장수를 보내 관구(關口;안양관구)로 진격하도록 하였으므로, 장서(蔣舒)는 성을 열고 나와 항복했고, 부첨(傅僉)은 저항하다 전사했다. 종회는 낙성을 공격했지만 함락시킬 수 없었는데, 관구가 이미 함락됐다는 소식을 듣자 계속 달려 진격했다. 장익과 동궐이 한수에 도착하자, 강유와 요화 또한 음평을 버리고 후퇴했고, 마침 장익,동궐과 회합하여 모두 검각(劍閣)으로 물러나 지키며 종회에게 저항했다. 종회가 강유에게 편지를 보내 말했다.
「공후(公侯)께서는 문무(文武)의 덕에 의지하고, 가슴속에는 세상을 덮을 지략이 있어 파촉,한중에서 공을 세워 명성이 전국에 퍼져, 먼곳이든 가까운 곳이든 간에 당신에게 돌아가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항상 과거로 생각을 달려 일찍이 커다란 교화에 마음을 같이 했습니다. 오나라 계찰(季札)과 정나라의 자산(子産)은 그것으 좋은 점을 알 수 있었습니다.」
강유는 답장을 하지 않고 진영을 배열하여 요새를 지켰다. 종회는 함락시킬 수 없었으며, 식량 운송하는 곳이 멀었으므로 장수들과 상의하여돌아갔다.
등애는 음평으로부터 경곡도(景谷道) 옆을 지나 촉 땅으로 침입하여,마침내 면죽에서 제갈첨을 격파시켰다. 유선이 등애에게 항복을 요청하였고, 등애는 진군하여 성도를 점거했다. 강유 등이 제갈첨이 패했다는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어떤 사람은 유선이 성도를 굳게 지키려 한다고 들었고, 어떤 사람은 동쪽의 오로 들어가려 한다고 들었으며, 어떤 사람은 남쪽의 건녕으로 들어가려 한다고 들었다.그래서 강유는 군대를 이끌고 광한,처로부터 나아가 허실을 살폈다. 오래지 않아 유선의 칙령을 받고 곧 무기를 놓고 부현의 군영 앞으로 가서 종회에게 출두 했다.
장수들은 모두 분노하며 칼을 뽑아 돌을 잘랐다.
종회는 강유 등을 후하게 대접하고, 그들의 인(印), 부절, 거개(車蓋)를 돌려주었다. 종회는 강유와 나가게 되면 같은 수레에 탔고, 앉을때도 같은 자리에 앉았다. 장수 두예에게 말했다.
"백약(百約)을 중원의 명사와 비교하면, 공휴(公休;제갈탄),태초(太初;하후현)가 이길 수 없습니다."
종회는 등애를 죄에 빠지게 한 후, 등애가 호송 수레로 소환되자, 그대로 강유 등을 인솔하여 성도에 이르러 자칭 익주목이라 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강유에게 병사 5만 명을 주어 선봉에 서게 하려고 했는데, 위나라 장수들이 분노하여 종회와 강유를 죽이고, 강유의 처자식도 모두 주살했다.
극정은 강유를 평론하는 글을 써서 말했다.
「강백약은 상장(上將)의 중임을 맡아 신하들의 위에 있었지만, 초라한 집에 살았으며 여분의 재산이 없었고, 별당에 첩을 두어 불결한 행동을 하지 않았으며, 후당에는 음악을 연주하거나 노래하는 오락이 없었고, 의복은 입는 것으로 충분했으며, 수레와 말을 준비하고,음식은 절제했으며, 사치스럽지도 않고 빈곤하지도 않아 관에서 지급하는 비용은 손을 따라 모두 썼습니다. 그가 이와 같이 한 까닭을 고찰하면, 탐욕스런 자나 불결한 자를 거세게 질책하고 자기의 욕망을 억제하고 자기의 애욕을 버리려고 했던 것은 아닙니다. 이와 같이하여 만족하면 많음을 구할 필요는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일반 사람들의 견해는 항상 성공을 칭찬하고 실패를 헐뜯으며, 지위의 높음을 기대고 낮음을 떨어뜨리며, 모두 강유가 잘못된 곳에 의지하여 자신을 죽게하고 종족을 멸망시켰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폄하하고 다시 다른 일을 생각하지 않으니, 《춘추》에서 말하는 폄하의 의미와는 다른 것입니다.
강유처럼 학습을 좋아하여 게으르지 않고, 청렴하고 소박하며 절약하는 인물은 한 시대의 모범입니다.
강유와 이전에 촉으로 갔던 양서의 관직은 대홍려에 이르렀고, 이상은 집금오가 되었으며, 양호는 대장추가 되었는데, 모두 촉이 멸망한 때보다 일찍 죽었다.」
유기전--------------------유기. (?~209? 산양군 고평현 출생)
유표의 전처 진씨의 아들로 유표의 장남이자 유종의 형이다. 후에 동생 유종과의 후계자 다툼에서 밀려 강하로 내려갔고,이후 유비와 연합하여 적벽에서 승리하지만 질병에 걸려 죽었다.
유기는 기개가 있고 웅대한 포부를 가지고 있던 당당한 걸물이었다. 허나 그는 동생 유종에게 형주의 후계자 자리에서 밀려났다. 그 이유는 유종과는 달리 적극적인 호족의 지지를 받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유종또한 유기와 마찬가지로 진씨의 아들이었지만 유종은 유표의 후처 채씨의 질녀(조카딸)에게 장가를 들었다고 《후한서 유표전》에서는 알려준다. 아?이때를 전후하여 유종은 채씨 집안과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을 것이다. 이는 채씨의 동생 채모와 장윤등이 당파를 만들어 유종을 적극 지지하고 유기를 몰아세웠다는 점에서도 당시 형주의 호족들 중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고 유표와도 가장 긴밀한 관계에 있던 채씨집안이 유종을 적극 지지하며 유표의 마음또한 큰아들 유기가 아닌 유종에게 기울어지게 했음을 알 수 있다. [1]
허나 유기라고 해서 손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호족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음이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에 기록된 「유표의 장남 유기(劉琦) 또한 제갈양을 매우 중요시했다. 유표는 후처의 말을 듣고 작은 아들 유종(劉琮)을 사랑하고 유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유기는 항상 제갈양과 더불어 자신을 안전하게 할 방법을 상의하려고 했지만, 제갈양은 항상 그것을 거절하고 함께 계획을 도모 하지 않았다.」라는 점을 통해 알 수 있다.[2]
형주의 대 명사이자 여러 지역 호족들과 긴밀한 관계를 구축하고 있는 제갈량을 중시했다는 것은 유기가 기울인 노력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내용이다. 그러나 제갈량이 이를 꺼려했다는 것은 그만큼 채씨집안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당파의 힘이 그만큼 강력했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상기의 내용 중 「유표는 '후처(채씨)의 말을 듣고'...유종을 사랑하고 유기를 좋아하지 않았다」라는 내용은 주목할만하다. 확실히 형주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지닌 집안이니 말이다. 결국 유기는 후계자에서 밀려 강하로 향하여 후일을 도모하기에 이르렀다. 허나 유기가 비록 강하로 내려가긴 했으나 동생 유종에게 복속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군사적 요충지인 강하에서 독자적인 군권을 획득하며 상당한 세력을 확보했을 것이다. 아마도 유기의 이동과 함께 그의 지지자들도 상당수 유기를 따라 이동했을 것이다. [3]
삼국지 노숙전에 의하면 노숙은 당시 형주의 주요 세력으로 유비, 유종, 유기의 삼세력을 언급하고 있으며 형주의 인사들이 모두 유기와 유종의 두 파로 갈라져 있다고 알려주는데 당시 유기는 이미 강하로 내려간 상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그만큼 형주 내부에 유기의 영향력이 상실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며 강하를 중심으로 새롭게 자신의 세력을 형성했을 것이다. 이는 조조의 남진에 당시 유표의 본거지였던 양양을 중심으로 하는 형북 일대가 유종을 따라 수많은 인사들이 조조에게 투항했으며 멀리 손권의 양주에서조차 투항의 목소리가 높았던 시점에 당당히 조조에 대항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 세력 기반이 유종과는 별개의 독자적인 세력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조조의 남진에 맞서기 위해 당대의 영걸 유비를 맞아들였다.[4]
조조라는 강대한 적 앞에 두 영웅이 힘을 합친 것이다. 유기가 유종과는 달리 반 조조를 향해 움직인것은 결코 그에게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분명 당시에 객장의 신분으로 병력은 있지만 땅이 없던 유비를 맞아들여, 조조를 물리치므로 형주를 회복하고 유표를 계승하겠다는 것이 유기의 바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바램은 무참히 깨어지고 만다.
「제갈양이 말했다. "유예주의 군대는 비록 장판(長阪)에서 패배했지만, 현재 군대로 돌아온 병사와 관우의 수군 정예병사 만 명이 있습니다. 유기가 강하의 병사들을 합쳐도 만 명보다는 적을 것입니다.」-《삼국지 촉서 제갈량전》
이 내용은 제갈량이 조조와 대항하도록 손권을 설득하는 내용이다. 제갈량은 유비의 뜻을 전달하고 있으므로 병존하기 어려운 두 영웅이 나란히 서 있던 시대에 제갈량(유비의 대변자)에게서 나온 이 제안에는 어떤 음모가 있었음에 틀림없다. 제갈량은 손권을 설득하여 반조조를 외치며 유기를 폄하하고 유비를 영웅시함으로 반 조조의 동반자로서 유기가 아닌 자신의 주인 유비를 택하도록 종용하고 있다. 바로 이 시점에서 유기의 운명이 갈렸다. 반 조조 형주 세력의 리더로서 유비가 떠오르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었으며 적벽대전을 전후하여 유기의 입지는 급속도로 줄어들었다. 유비는 손권과의 유기적인 군사협력 체계를 구축하며 남은 형주세력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전장에 임했다. 그 과정 어디에도 유기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외교적인 고립은 전장에서의 군권의 주도권을 잃게 했으며 이는 곧 내부적인 입지의 약화로 나타났다. 적벽에서의 승리 이후 유비에 의해 형주자사가 되지만 그의 영향력은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형남 4군의 항복 역시 유비에 의해 장악되었으며 유기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아마 이 시점에는 이미 병권을 포함한 유기의 대내외적인 영향력은 미비한 수준으로 전락해버렸을 것이다. 모든 것이 유비에게 넘어가 버린 것이다. 유기의 죽음 시점은 여러가지로 의문을 낳는다. 정말 그의 사인은 질병이었던 걸까? 철저한 각본이고 드라마가 아닌가? 혹 유비에 의한 제거는 아니었을까? 그의 죽음이 누군가에 의한 제거이든 아니면 말 그대로 질병사이든 그의 마지막은 불우했으리라.
유기는 당대에 보기 드문 기개가 있었다. 강적 조조에 맞서 굴하지 않고 의연히 대처할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이를 뛰어넘는 모습이다. 그는 유비에 비할 만한 영웅이나 처세에 있어서는 기민하지 못하여 그의 동생 유종보다도 못했다. 그가 자신의 뜻을 크게 떨칠 수 없었던 이유는 이것이다.
[1]채씨집안이 큰아들 유기가 아닌 유종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그를 지지한 것은 유기와 유종의 개인적 역량이 차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유표는 당시 형주에서 가장 강력한 호족 세력중 하나인 채씨집안의 여자와 결혼하므로 채씨와의 긴밀한 협력체계 위에 형주를 효과적으로 통치할 수 있었다. 이들 채씨집안이 계속해서 형주의 지배력있는 가문으로 남기 위해서는 유표의 후계자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어야만 했다. 이러한 현상은 후한 말기 황실의 상황과 유사하다. 외척과 환관들이 자신들의 세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후사를 어리고 유약한 인물이 잇게 하는 것처럼 유기에 비해 비교적 유약한 유종에게 채씨(유표의 후처)의 질녀를 시집보냄으로 대를 이어 외척 세력으로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 분명 유종이 유기보다는 다루기 쉬운 상대였을 것이다. 조조의 남정군에 유종이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주변의 의견에 의해 쉬이 항복한것과는 달리 유기는 유종의 투항으로 형주 북부가 완전히 날아가버린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유비와 연합하여 굳건히 조조에 대항한 점에서 확실히 동생 유종과 비교해 보았할 때 인물의 기량은 한단계 더 높았다고 생각된다.
[2]제갈량의 큰 누이의 남편은 괴기였고, 작은 누이의 남편은 방덕공의 아들인 방산민이었다. 그리고 처의 아버지는 황승언이었고, 황승언의 부인은 유표의 후처인 채씨와 자매이며 채모와는 남매이다. 이렇게 제갈량은 혈연적으로 형주의 실력자들인 괴씨 / 방씨 / 황씨 / 채씨와 이어져있었다. 그리고 의성의 마량과는 의형제를 맺는 등 마씨형제 등과 같은 젊은 인사들과도 깊게 사귀었다.
[3]이같은 상황은 원상과 원담의 경우와 유사하다. 원상이 원소를 계승했으나 원담은 그의 지배하에 들어가지 않고 청주에게 독자적인 세력을 이끌고 원상과 대립했다. 유기와 유종의 관계도 이와 같다.
[4]유비와 유기는 서로 별개의 세력으로 별다른 유대관계는 없었다.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에 유기가 제갈량은 중시했다 하지만 이는 유비와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닌 유기와 제갈량과의 관계만을 나타낼 뿐이다. 오히려 제갈량이 손권에게 반조조를 주장할 때 유기를 폄하하는 장면은 유비와 유기가 별개의 세력임을 증명한다. 유비는 남하하는 조조의 군대에 대항하기 위해 유기와의 어떠한 연계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채 강릉으로 이동하려 했을 뿐이다. 당시의 강릉은 유종의 영향력이 크지 않았고, 강하의 유기의 영향력도 적은 양양 - 강릉 - 강하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세력권이었을 것이다. 이 강릉이 조조에 의해 막히면서 유기로의 행로를 택하게 되었을 것이다. 유기는 당시 병력은 있지만 땅이 없던 유비를 맞아들인 것이다. 적어도 유비가 강릉을 얻지 못한 시점에서는 유비는 유기에 미치지 못했다.
위연전------------------위연.자는 문장으로 형주 의양군 사람이다. 그가 역사에 그 이름을 처음 들어낸 것은 부곡의 신분으로 유비를 수행하고 촉으로 들어갔다는 촉지 위연전의 기록이다. 촉지 선주전에 따르면 형주의 인사들이 대거 유비에게로 향한 시점은 2가지가 존재한다. 하나는 유비가 형주에 정착하면서 형주의 호걸들이 대거 유비에게 향한 시점인데 유표가 이를 경계한 점을 고려해볼때 적지 않은 규모였음을 짐작케한다. 또다른 하나는 조조의 군대를 피해 유비를 따라 상당수의 형북 인사들이 남하한 시점으로 이 두가지 시점중 하나의 시점이 위연이 유비에게로 향한 시점일 것이다. 그러나 유비가 입촉할 때부터 위연이 활약하고 있다는 점은 전자보다는 후자일 가능성에 무게를 쏠리게 한다.
부곡(部曲)이라는 말은 본래 군대의 편성 단위이다. 하지만 동한 말, 명문세족들은 봉건제를 채용하여 자신의 가족ㆍ빈객ㆍ전호ㆍ문생ㆍ고리등을 관할하여 통치하였고 이때부터 사병이 생겨났고, 이들 또한 부곡이라고 칭함으로써 관부곡과 사부곡의 차이가 생기게 되었다. 사부곡은 주장(主將)에 종속되어 가병(家兵)이라고도 했다. 위연이 부곡의 신분으로 선주를 수행했다고 하니 아마도 그는 빈객의 신분을 지닌 사부곡의 일원이 아니었을까? 그의 첫 관직이 조운과 같이 측근직인 아문장군이었다는 점과 유비와의 보통 이상의 유대관계가 없이는 발탁될 수 없는 독한중의 지위에 오른 점으로 보아 그가 유비와의 개인적인 관계를 바탕으로 정치적 위상을 높여나간 인물이었음을 짐작케 해준다. [1]
위연은 입촉 후 순탄을 넘어 거칠 것 없는 정치인생을 달리게 되는데 그 절정으로는 219년. 독한중 진원장군 한중태수로 임명된 것이리라. 당시 한중은 유비정권에 있어서는 대단히 중요한 땅이었다. 군사적으로는 위와의 북방 경계선으로 익주의 목구멍에 비견되는 군사적 요충지로서 만일 이곳을 유지하지 못한다면 유비정권의 존립 자체가 위태롭게 된다. 또한 제갈량이 구상한 형주와 익주의 동시 북벌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물론, 강족과 저족등의 융적(戎狄)들을 도모하고 회유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땅이었다. 한중은 경제적으로도 유비 정권에 있어 너무도 필요하고 중요한 땅이었는데, 성도 분지와 비견되는 한중 분지의 경제력과 노동력은 훗날 최소한 촉한 정부 총 병력의 3분의 2 이상이 집결되어 동원되었다는 제갈량의 북벌을 재정적으로는 물론, 병력의 보충 면에서도 가능하게 함으로써 제갈량이 열악한 촉한의 환경에서도 기적같은 대규모 북벌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물론 이러한 한중과 성도의 양극체제는 위연이 독한중에 임명될 당시에는 성도 분지, 위연의 한중 분지, 관우의 남군 일대로 나뉘어진 3세력이라 양세력으로 나위어진 때보단 들했겠지만, 그 중요성과 의미는 대단했다. 특히 위연이 독한중이 된 219년에 유비가 유방의 선례를 따라 한중왕에 오르면서 이곳은 상징적인 의미마저 띄게 되었으니 이런 중요한 자리에 위연이 발탁되었다는 것은 곧 위연의 정치적 위상이 그만큼 신장되었음을 뜻했다. 단숨에 권력의 핵으로 떠오른 것이다.
한가지 특이점은 이러한 예상치 못한 인사조치에 대한 긴장과 혼란이 극히 제한적이라는 점이다. 저 멀리서 마초라는 자가 투항했다는 소식에도 신경을 곤두세웠던 관우가 단숨에 권력의 핵으로 오른 위연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다. 관우 뿐 아니라 유비 정권의 그 누구도 별다른 동요를 보이고 있지 않다는 점은 의아한 일이다. 이같은 점은 사람들이 놀란 이유가 한중태수에 '위연'이 되었다는 점이 아닌 '장비가 아니'라는 사실에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팽양, 요립, 이엄등의 인사들이 퇴출당한 이유는 그들의 권력욕과 시기심에 기인해있다. 비단 이들 뿐만 아니라 마초, 황충 등의 쟁쟁한 인사들이 장비도 아닌 위연이 독한중이 된 것에 대해 아무런 불만을 품지 않았단 말인가? 황충을 *군으로 임명할 때에도 관우등의 불만을 고려해 이를 말리고 우려한 점을 보아도 그렇다. 비록 관직 면에서는 사방장군직을 받은 이들에 비해 낮다고 하더라도 관직 서열과 권력서열이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이 시기 위연의 실권력은 마초와 황충을 넘어섰던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사항은 그가 벼락같이 떠오른 인물이 아닌 그 이전부터 유비정권 내에서 인정을 받고 있었음을 나타내주는 것 같다. 이 시기 유비 정권의 실세들이 모두 유비와의 의협적 관계로 맺어진 이들이엇음을 고려해 보아도 위연이 유비와의 개인적 관계를 바탕으로 정치적 위상을 높여나간 인물이었음을 짐작케 해준다.
221년. 유비가 동오정벌을 감행하면서 대규모의 인사이동이 단행되었다. 위연의 경우 진북장군으로 임명되었는데, 그 직위명으로 보아 동오정벌을 단행하는 동안 북방의 적 위(魏)로부터의 방위의 의미를 보다 구체화시킨 것 같다. 여기서 한가지 특이점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당시 유비를 따라 동오정벌에 참여한 황권의 지위 역시 진북장군이었다는 것이다. 그 직위명과 동오정벌 당시 황권이 조위의 공격을 방비하는 역할을 담당했다는 두가지 점으로 미루어보아 위연과 비슷한 시점에 진북장군이 되었음을 짐작케 해준다. 사정장군과 사진장군의 경우 같은 관직에 2명 이상이 임명될 경우 경력과 능력 면에서 앞서는 자에게 '대'자를 붙인다. 훗날 230년 위연이 정서대장군으로 임명되는데 위연의 직이 진북장군이었다면 사정장군으로 승진하면서 동시에 '대'자가 들어간 것은 조금은 이해하기 힘들다. 따라서 230년 위연이 정서'대'장군에 된 것으로 보아 유비가 동오정벌을 단행하던 시점 내지는 그 이후 기록되지 않은 시점에 진북대장군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유비의 동오정벌로 인해 위연에게는 2가지의 변화가 오게 된다. 먼저 군사적으로는 자신에게 지원을 해주는 입장에 잇지만 정치적으로는 자신에게 견제와 압력을 주는 존재인 상용의 유봉과 파서의 장비가 제거된 것은 위연을 좀 더 자유롭게 해 주었다. 하지만 자신의 강력한 후원자였던 유비의 죽음은 위연을 중앙 정치에서 소외시키고 고립시켰다. 이 후 위연이 230년까지 10년동안 계속 진북장군에 머무른 것은 중앙 조직에 별다른 세력 기반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어 유선의 즉위와 제갈량으로의 권력 집중. 남중의 반란들이 겹치면서 조정은 극도의 혼란을 겪게 되고 이러한 혼란은 위연에게도 커다란 부담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이시기 위나라의 중신들이 제갈량에게 나라를 들어 항복할 것을 종용한 것을 보아 그 혼란과 불안이 심대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위연은 한중군을 장악해 나갔던 것 같다. 지방의 위연으로서는 자신이 있는 한중을 장악하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을 것이다.[2]
위연이 한중을 완전히 장악했다는 것은 이 후의 인사이동에서 드러난다. 227년 제갈량을 북벌을 위해 한중으로 올라오는데 한중군을 장악하고 있던 위연이 불편하게 여겨졌던 것 같다. 이때의 인사이동을 보면 위연은 독전부ㆍ승상사마ㆍ양주자사로 임명되었다. 얼핏보면 승진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정 반대다. 독한중이었던 위연을 선봉부대를 담당하는 독전부로 이동시켰으며 촉지 여예전에는 이시기 위연의 한중태수직 역시 여예에게 넘어갔음을 알려준다. 한중을 장악했던 위연의 권력 기반을 붕괴시키려는 의도가 다분한 인사이동이었다. 승상사마라면 승상부의 속한 사마라는 말인데 사마는 6품 내지는 7품의 관료인데 2품의 진북장군인 위연에게는 의미없는 직이다. 비록 속관직이라고는 하지만 위연에게 별다른 의미가 부여될 만한 직은 아닌 것이다. 조정에 별다른 연고나 기반이 없는 위연으로서는 한중군의 권력기반을 와해시키는 것만으로도 큰 타격이 될 수 있었다. 양주자사라는 것 역시 이름만 좋은 명예직으로 의미없는 직으로 봐도 무방하다. 위연에게 있어 이 시기만큼 암울한 시기는 없었을 것이다. 221년부터 230년까지 10년동안 그의 장군직이 진북장군에 묶여 있었다는 것 또한 그에게는 불만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제갈량이 북벌에 위연을 적극 기용했는가 하면 그도 아니다. 그의 직은 선봉대를 이끄는 독전부와 정벌을 담당하는 사마이다. 그러나 정작 선봉이 되어 가정전에 나선 것은 마속이었다. 이 후 계속되는 북벌에서도 제갈량은 애초 중앙에서 대려온 인사들이나 새로 영입된 인물들인 진식, 왕평, 강유등을 적극 기용했지 한중군의 인물들은 이렇다할 활동이 없다. 위연뿐만 아닌 한중군의 인사들중 중책에 기용된 자가 거의 전무하다는 것은 위연의 세력 와해에 제갈량이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를 짐작케 해준다. 반대로 위연의 세력이 한중군 전체에 얼마나 퍼져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3][4]
227년 말에 있었으리라 추측되는 남정에서의 회의에서 나온 속칭 자오도 계책이라 불리는 위연의 작전은 이러한 위연의 절박한 심정이 반영되어 있는 것 같다. 단기 5천으로 적진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이 작전은 분명 뛰어난 작전으로 북벌을 성공시킬 수 있는 유일한 계책이라는 극찬을 받기도 하는 계책이지만 동시에 확실히 위험했다. 특히 실패할 경우 바로 위연 자신의 죽음이 확실시되는 이 작전을 스스로 제안하고 실행에 옮기고자 했던 것은 자신의 좁아진 정치적 위상을 다시 되찾고자 하는 의도가 다분이 담겨 있다. 여기서 또 하나의 특이점이 발견된다. 이 제안을 거절한 제갈량을 위연이 겁장이라며 비난한 것이다. 당시 최고 집권자로 권력의 정점에 있던 제갈량을 겁장이라며 비난하다니 너무나 간 큰 행동이지 않은가? 더구나 이렇게 비난을 했음에도 그 어떤 압력이나 제제를 받은 흔적이 없으니 더욱 놀랍다. 제갈량같은 이를 비난하고도 퇴출당하지 않은 이는 촉한 정권에서 위연 하나일 것이다. 227년 말이라면 위연이 독한중과 한중태수직을 놓은지 1년도 안되는 시기이니 위연의 한중 세력은 건재했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위연으로 인한 제갈량의 견제는 위기의식을 느낀 한중군의 세력이 위연을 중심으로 더욱 단결하는 효과를 낳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것을 믿었기에 위연이 저런 비난을 할 수 있었으리라.
이 후 230년이 되면 또다른 특이점이 발견된다. 그의 성격적 결함과 양의와의 불과가 언급되고 있는 것인데 특기할만한 사항은 촉지 위연전, 양의전, 비의전에서 모두 이같은 불화를 230년을 기점으로 적고 있다는 것이다. 왜 하필 230년일까. 이것이 단순한 그의 성격적 결함이거나 단순한 인간관계의 묘사라면 여러 전들에서 이렇듯 230년을 기점으로 기록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219년 그가 독한중으로 임명될 시점. 그후 8년간 한중을 진무하는 동안. 제갈량이 북벌을 위해 올라온 시점. 이 세가지 시점에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가 각 전들에서 230년을 기점으로 이러한 내용을 공통적으로 적고 있음은 이러한 문제가 그 이전부터 존재했던 것이 아닌 230년을 기점으로 발생한 문제였음을 나타내주는 것이다. 더욱이 비의전에는 ''군사' 위연과 '장사' 양의'의 다툼을 적는데 위연이 군사가 되고 양의가 장사가 된것은 모두 230년의 인사이동에서였다. 따라서 이같은 기록은 특기할 만한 내용이며 단순한 개인의 인간관계로 치부할 것이 아닌 230년 이후 나타난 당시의 정치상황을 고려해보아야 할 것이다. 과연 어떠한 정치적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230년에는 촉한 정권 전체적으로 크고 작은 변화들이 많았던 해였는데 북벌과 관련된 경우 이 해에 조위 정권의 대규모적인 침입을 받았다. 장합ㆍ사마의ㆍ조진등이 3방향에서 들어왔는데 제갈량이 직접 성고ㆍ적판에서 기다려 저지하려 했다. 이 때 조진과 사마의가 남정에서 합류했다는 기록을 보면 당시 촉군이 전선을 뒤로 미루어 적군을 깊숙이 끌어들여 저지시키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조진등이 이끌었던 위나라의 중앙군은 자연재해로 인해 퇴각하였다. 비록 중앙군은 퇴각했지만 옹주의 곽회가 이끌로 내려운 지방군은 남아있었는데 이를 토벌하도록 명받은 것이 위연이었다. 여기서 왜 하필 위연을 기용했는지는 의문이다. 지금껏 위연의 세력을 와해시키기 위해 노력해온 제갈량이 왜 갑자리 이런 행동을 취한 것일까? 여기서 위연에게 토벌령을 내린 것은 제갈량의 책략이라고 볼 수 있다. 비록 위연의 한중관련 직을 없앰으로 그의 세력을 와해시키려 했고 그것이 얼마나 효과를 거두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 위연에게 어느정도 타격은 되었을 것이다. 또한 제갈량 자신이 한중에서 따로이 승상부를 열므로 한중군을 장악하면서 한중군의 인사들을 배격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제갈량의 이러한 행동은 한중군에 흩어져있던 위연의 세력을 하나로 묶어 단일화시키는 효과를 낳았던 것 같다. 권력의 핵심은 제갈량이 차지하고 있지만 그래도 위연은 북벌의 중심이 되는 한중군에 있어서 제갈량의 가장 큰 정치적 라이벌이었다. 만일 위연이 한중군 영내로 들어온 곽회의 군대를 물리친다면 제갈량으로서는 좋은 일이고, 만약 진압에 실패하거나 어렵게 되면 위연에게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으니 그것도 괜찮은 일이다. 이는 반드시 성공해야 하는 그동안의 북벌에서 왕평, 마속, 진식, 조운, 등지등을 기용하다가 비교적 위험도가 적은 방어에 위연을 기용한 것에서도 알 수 있는데 이미 가장 큰 위협이 되는 중앙군은 퇴각이 이루어졌고 남아있는 곽회의 군대만으로는 큰 위협으로 다가오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당시 위연과 곽회가 맞붙은 지역은 양계(陽谿)라는 곳인데 여기서 표현된 양(陽)자는 양양이나 남양의 경우와 같이 대체로 강이 있는 곳에 쓰인다. 또한 계(谿)자도 시내 계자이므로 이 양계라는 지역이 강가임일 알 수 있는데 한중군 일대에 강은 한수(면수)뿐이 없으므로 이 전장이 한수 강변까지 밀고 내려온 곽회군과 벌어진 전투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제갈량의 예상치 못한 결과가 벌어진다. 당시 전투를 위지 곽회전에 실린 조방의 조서에는 한천의 싸움에서 거의 전멸할 뻔하였다고 적고 있다. 제갈량으로서는 위연의 이러한 큰 전과가 예상 이상의 큰 승리였을 것이다.[5]
그러나 단지 위연이 대승을 거둔 것 자체는 제갈량에게 그리 위협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정작 230년을 기점으로 나타나는 문제는 그 이후 위연의 인사이동에 그 원인이 있다. 이 승리를 높이 평가한 후주 유선은 그를 전군사 정서대장군으로 승격시키고 남정후에 봉했으며 가절을 부여했던 것이다. 이러한 위연의 지위 격상은 결코 제갈량이 바라는 바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선이 이러한 인사조치를 단행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제갈량을 견제하기 위해서였을까?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동안 위연을 10년동안 진북장군에 묶어두고는 갑자기 이러한 인사조치를 단행한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다. 아무튼 위연은 이 시기 10년만의 장군직 승진으로 정서대장군이 되므로 명실공히 최고의 무장으로 부상했으며 그가 받은 가절을 바탕으로 한중군에 대한 그의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또한 전군사라는 지위를 통해 북벌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할 수 있었다.
여기서의 전군사는 승상사마였던 위연의 속관직이 사마에서 전군사로 승격된 것인데 촉지 양의전에서 알려주듯이 군사직은 한가로운 때에는 별다른 권한이 없지만 당시 한중에서 북벌을 지속적으로 수행중인 상황에서는 상당한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는 요직으로 제갈량을 따르는 한중군에 올라온 승상부 사람들중 전군사 위의 직을 갖고 있는 이는 없는 것 같다. 정서대장군이라는 직은 당시 한중군 내에서 가장 높은 장군직이었는데 제갈량이 이 시기 표기장군으로 승진한 이엄에게 한중군의 일을 맡기고 북벌에 나섰던 것은 바로 위연의 한중 세력이 그만큼 큰 위협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여기서 위연이 받은 가절은 특기할만한 점이다. 아마도 위연은 이 가절을 바탕으로 사졸을 양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중군 관련 직이 없는 위연은 가절이 아니고서는 사졸을 양성할 권한이 없었을 것이다. 이 사졸의 양성은 북벌에 도움이 되는 동시에 위연의 세력 강화와 직결되므로 제갈량을 중심으로하는 승상부의 사람들은 이를 달가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주위사람들과의 불화라고 하지만 당시 한중군의 인사들은 제갈량을 따라 올라간 승상부의 사람들로 대체되어 있으므로 230년을 기점으로 나타나는 대립과 갈등은 이러한 점들로부터 기인한 위연의 한중세력과 제갈량을 중심으로 하는 승상부의 사람들과의 갈등을 묘사해놓은 것이다. 여기서 다른 이들이 위연을 피했다는 것은 그들의 지위나 역량이 위연과 대립할 수 없었기 때문인데 유독 양의만이 대립했다는 것은 당시 양의의 위치를 짐작케 하는 부면이다. 또한 그가 제수받은 작위인 남정후의 식읍은 한중군의 수부인 남정이라는 점으로 보아도 이러한 인사조치는 한중군에서의 위연의 입지를 강화하는데 상당히 유효하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이렇듯 제갈량이 한중으로 올라오면서 불거진 다툼은 230년을 기점으로 더욱 심화되어 그 갈등의 폭이 커졌다. 234년 제갈량이 이끌었던 마지막 북벌 때 조직이라는 해몽가는 선봉장인 위연을 속여 이간하고 그의 입지를 줄이려는 시도를 하는데 이와같은 기록은 당시 갈등이 얼마나 깊어졌는지를 나타내주는 것으로 제갈량의 후사조치와 위연의 최후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갈등이 심화된 234년 가을. 촉한의 집권자 제갈량은 진중에서 병사했다. 제갈량은 병사하면서 비밀리에 양의, 강유, 비의등에게 철군의 임무를 부여하고 위연에게는 적의 차단명령을 내린다. 이러한 제갈량의 지시는 역시나 위연을 견제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보여진다. 하지만 제갈량이 맨 처음 한중으로 올라올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위연을 제어할 수 없었다. 이같은 사실은 제갈량 자신도 이미 알고 있었다. 따라서 제갈량은 위연이 따르지 않을시에는 그를 남겨둔채 퇴각할것을 명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이러한 조치가 어떻게 위연을 압박했기에 위연이 철군을 반대했고, 결국 그를 죽음으로 몰고갈 수 있었을까?
먼저, 제갈량의 퇴각명령은 지금까지는 언제나 한중으로 물러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북벌기지인 한중에서 재정비하여 다시 북벌을 시도하기 위한 것으로 사실상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고 보아야 했고, 한중에는 언제나 많은 수의 군대가 주둔했고 제갈량이 부서를 열어 조정의 일을 돌보았으므로 정치적으로도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234년. 제갈량이 죽으면서 내린 철군명령은 북벌의 전면적인 퇴각령으로 성도로의 회귀를 뜻했던 것 같다. 하지만 위연이 이라한 명령에 거부한 것은 북벌의 중단보다는 다른것에 더 큰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철군의 임무가 부여된 것이 '양의'였다는 것에 있다.
위연이 북벌을 내세운 실제적인 목적은 권력장악에 있었고, 북벌은 허울좋은 명분이었을 뿐이다. 당시 한중군의 세력은 양의로 대표되는 신세력과 비위로 대표되는 구세력. 위연으로 대표되는 한중세력, 오의등의 방관자세력으로 구분할 수 있다. [6]
이보다 앞서, 양의는 위연과의 다툼으로 위연의 칼에 죽을뻔하였고 양의는 눈물을 흘리며 비의에 의해 목숨을 건진 적이 있었다. 이것은 양의의 힘이 위연에게 미치지 못햇다는 것이다. 직위상으로도 그러했고, 능력면에서도 그러했다. 위연에게는 유선으로부터 부여받은 가절이 있었으므로 제갈량 이외에는 그를 제어할 자가 없었다. 그럼에도 이미 위연과의 싸움에서 참패를 했던 양의에게 권력의 발판이 될 수 있는 철군의 임부를 부여하고 위연에게 그 뒤의 일을 맡겼다는 것은 자신의 사후 위연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한 제갈량의 초치였던 것이다. 위연이 그대로 따른다면 위연에게 정치적 타격을 줄 수 있고, 따르지 않는다 할지라도 위연을 따돌린 채 철군을 감행하므로 위연으로서는 어쩔 수 없이 따르게 될 테니 더 큰 정치적 타격을 주게 될 것이다. [7]
이미 위연과는 불구대천의 원수이며 힘에서 그를 당할 수 없었던 양의는 비의를 위연에게 보내어 그의 동향을 살피도록 했다. 여기서 다른 이가 아닌 비의였다는 점에도 정치적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양의와 같은 이들은 제갈량과 공생관계에 있는 그의 수족과 같은 이들이었다면 비의의 경우는 구세력으로 신세력인 양의등과는 그 정치적 입장에서 차이가 있었다. 비의가 위연과 양의 사이에서 중재를 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양 세력과는 다른 정치세력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당시 양의, 강유, 비의중 양의와 강유등은 친제갈량세력이었기에 그들이 갈 경우 위연은 너무 부담스런 존재였으리라.
위연은 비의로부터 제갈량의 사망소식과 철군의 소식을 듣고 자신을 권력에서 소외시키는 것에 분노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승상은 비록 죽었지만, 나는 건재합니다. 승상부에서 신임을 받은 관리들은 시신을 운반해 귀국하여 장례를 치러야 합니다. 나는 직접 병사들을 인솔하여 적을 공격할 것입니다. 어떻게 한 사람이 죽었다고 하여 천하의 일을 내팽개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나 위연이 어떤 사람인데, 양의의 지휘를 받아 후방을 끊는 장수가 되겠습니까!" 그래서 비의와 함께 떠날 부대와 남을 부대를 구분하고, 비의에게 편지를 써서 자기와 이름을 나란히 하여 장수들에게 알리도록 했다.」- 촉지 위연전 中
승상이 죽었지만 자신이 건재함을 당당히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위연의 위상을 나타내주는 대목이다. 여기서 승상부의 신임받는 관리들이란 양의등의 제갈량세력을 뜻하는 것으로 이 대립이 북벌이라는 대의명분을 앞세운 양 세력간의 권력다툼임을 알려준다. 위연은 양의등의 세력만을 내려보내고 자신의 측근들을 중심으로 하여 권력을 장악하고 제갈량을 계승하려했던 것이고 이 때 비의를 자신의 이름과 나란히 하엿던 것은 그가 바로 제 3세력으로 향후 자신이 권력을 잡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간과한 것이 잇었는데 그것은 바로 비의가 위연의 편에 서서 모험을 할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미 제갈량으로부터 양의등과 함께 철군의 임무를 부여받은 비의가 위연과 함께하기에는 그 이득에 비해 위험부담이 너무 컸던 것이다. 뒤늦게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만 이미 비의는 돌아간 뒤였다. 결국 촉군은 위연의 부대를 남겨둔채 철군을 감행한다. 위연이 조정에까지 배척당한 것은 구세력과 신세력 모두를 아군으로 만들지 못한데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당시 조정에 별다른 세력 기반이 없던 위연으로선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라고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에 위연이 군을 이끌고 촉군과 격돌하게 되는 과정에서는 촉지 위연전과 위략의 내용이 서로 어긋나는데 양 측 모두 그다지 설득력이 높지는 않다. 위연전에 따르면 단지 자신을 따돌리고 철군을 감행했다는 것 때문에 극단적인 군사적 행동에 돌입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같은 점들이 분명 위연에게 정치적 타격이 될 수 있겠지만 목숨을 건 모험을 감행할 만큼 중차대한 일이었는지는 의문이다. 제갈량또한 이러한 사태는 전혀 예상하지 않았다는 것 역시 무언가 위연의 행동에 대한 원인으로는 불충분하다. 더구나 위연의 행동을 본다면 더욱 의아함은 커진다. 위연은 양의와의 싸움에서 패한 후 한중으로 들어가는데 이것이 그저 자신을 따돌리는 것에 대한 분노로 일어난 무력충돌이었다면 패한 위연은 타국으로 망명을 가야함에도 한중으로 들어가 죽었다는 것은 설명하기 어렵다.
이에 관해 촉지 위연전과 후주전에 인용된 위략에서는 양의와 위연은 평소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다. 서로 뜻이 맞지 않았기 때문에 위연이 제갈량을 대신해 군사를 지휘하게 되자, 양의는 자신이 살해당하는 것은 아닐까 두려웠다. 그래서 '위연은 군사를 데리고 북(위)으로 투항할 생각이다'라는 소문을 퍼뜨리고, 수하의 군사를 이끌고 위연을 공격했다. 위연은 원래 북으로 투항할 생각이 없었는데도 쫓기어 살해당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위연은 다리를 끊어 양의군의 움직임을 저지시키는데 성공하지만 조정에서 양의의 편을 들어주었다. 사실상 이 때 위연의 운명이 결정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촉한의 대장 위연은 단 한번의 교전에서 무너졌다.
위연이 패한 이유는 워낙 많지만 사실상 이미 패배가 결정된 전투였다. 군사의 양적인 면도 있겠으나 뒤에서는 양의가 밤낮으로 추격해오고, 앞으로 가자니 조정에서는 반역자로 규정하였으니 스스로 포위망 속에 같히게 되어버린 것이다. 결국 추격해오던 양의군을 향해 공격을 감행하지만 이미 사면초가와 같은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이 때 위연의 병졸들의 하평의 질책에 잘못이 위연에게 있음을 알았기에 흩어졌다는 말은 주목할만하다. 바로 여기에서 위연의 패배의 또 하나의 원인을 알 수 있다. 당시 제갈량 사후 촉군은 퇴각을 하지만 승상 제갈량의 죽음을 공표하지는 않았다. 위연과 양의 등의 고위급 인사들을 제외한 다른 이들에게는 승상의 죽음을 알리지 않은 채 철군을 감행했던 것이다. 더구나 북벌을 내세운 위연으로서는 이러한 사실을 알리지 않았던 것 같다. 따라서 위연의 사졸들은 하평으로부터 승상의 죽음을 듣기 전까지는 이 사실을 몰랐을 것이며, 하평의 선전은 주요하여 위연측 병졸들의 전의를 상실시켰던 것 같다.
이 후 위연이 한중으로 돌아 들어간 것은 매우 특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권력싸움에서 패했다면 응당 타국으로의 망명을 택해야 정상인데 위연은 한중으로 들어갔으니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위연의 군사적 행동이 단지 양의가 미워서 그랬다는 진수의 설명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물론 그 발단이 된 것은 양의와의 권력 다툼이겠으나 무력 충돌이라는 극단적 움직임으로 치닫게 된것은 단지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무력충돌까지 가서 패한 권력싸움이었다면 한중으로 돌아들어갈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위연이 자신이 반역을 일으켰다는 것이 무고한 것임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라고밖에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런데 권력싸움에서 진 상황에서 자신이 무고하든 아니든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문제였을까? 위연이 마지막에 한중으로 들어간것은 여러가지로 의문을 낳는다. 이런 행동은 위연의 무고가 입증될 경우 자신이 죽음을 면할 수 잇으리라는 생각에서 나온 행동이었다고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으며 그렇게 봤을때는 단지 자신을 따돌렸기에 군사를 들어 양의에 대항한 것이 아니라 위연을 확실히 제거하기 위한 양의의 무고로 인한 싸움이었다는 위략의 내용이 더 신빙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한중으로 들어간 위연은 결국 죽임을 당했지만, 장완이 그를 장사지내준 점이나 그를 죽음으로 몰고간 양의와 비의가 한직으로 이동된 것들을 보면 조정 당국으로부터는 자신의 결백이 받아들여졌던것 같다.
[1]위연과 조운은 몇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둘 모두 유비와의 개인적 관계를 바탕으로 아문장군을 거쳐 정치적 위상을 높여나갔다는 점인데 한명은 중앙으로 한명은 지방으로 진출한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개인의 역량에 따른 유비의 판단으로 인한 차이였으리라.
[2]유비는 동오정벌을 단행하기 이전 유봉의 죽음과 파서의 장비를 데려오면서 221년. 오일을 관중도독으로 임명하였지만 오일이 위연을 견제하고 압력을 주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단지 관중도독이라는 그 직위만으로 오일이 실권력을 쥐었을 것 같지는 않다. 위연의 한중관련 직위에 변동이 없고, 이 후에 나타나는 기록들을 보면 한중의 실권은 위연이 계속 가지고 있던 것 같다. 오일의 경우 위연과 함께 한중 방위라는 임무와 함께 위연의 감시정도의 역할이 부여되었던 것 같다. 따라서 219년부터 제갈량이 올라온 227년까지의 8년간의 기간을 고려해 보았을 때, 특히 221년부터는 별다른 견제세력이 없었음을 고려해 볼 때 위연의 한중 장악은 시간적으로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또한 오일은 위연과 제갈량의 다툼에서 최소한 위연에 대한 암묵적인 지지정도는 했으리라 생각된다.
[3]여예가 한중태수가 된 시점은 명확하지는 않다. 촉지 여예전의 기록으로 보건데 227년에서 230년 사이일 것으로 추측되는데 편의상 임의대로 227년으로 적어넣었다.
[4]출사표등에서도 나타나지만 227년 제갈량이 한중으로 올라가며 시작된 촉한의 북벌은 제갈량에 의해 주도된 것이었다. 따라서 이 당시 제갈량이 한중으로 올라가며 행하진 적지 않은 규모의 인사이동은 당시의 집권자인 제갈량의 주도 하에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5]한천이라는 것은 한중군 일대를 지칭하는 말로써 이 싸움이 양계에서 벌어진 위연과의 싸움이었음을 뜻한다.
[6]신세력이란 유비와 함께 입촉한 세력이고, 구세력이란 유비보다 먼저 한중에 자리를 잡고 있던 세력을 지칭한다.
[7]만일 양의가 아닌 위연에게 철군의 임무가 부여되었다면 아마도 위연은 철군을 감행했을 것이다. 위연의 권력 승계에 별다른 지장을 받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제갈량전----------------------제갈량은 전한 원제 때 부폐한 황실과 대비되게 강직하기로 이름을 떨친 제갈풍의 10대 후손이다.
서기 181년 제갈량은 아버지 제갈규와 어머니 장씨 사이에서 3남1녀 중 둘째로 태어 났다
황건적이 일어나기 4년 전이고 후한의 마지막 황제 헌제가 태어난 시기와 같은 시기이다.
제갈량은 그가 아홉살때 어머니를 여의었다.아버지 제갈규는 벼슬을 살다가 당시 황실이 썩은걸 알고 낙향해서 자식들의 교육에 전념했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공명은 어렸을 적부터 사서 오경을 비롯한 손자나 오자 울요자 같은 병법서를 배운다.
당시는 문무관의 구별이 없던 시기라서 벼슬길에 오르려면 병법서도 배워야 했다.전쟁에서 승리해서 벼슬길에 오르는 길이 제일 빠른
길이 었으리라.당시 사대부 집안 자제들이 읽어야 했던 책은 대충 논어,맹자,역경,서경,예기,춘추 좌씨전 등이있다.
이런 책들의 분량이 또한 어마어마해서 논어가 1만1천705자요,맹자는 3만4천685자, 역경이 2만4천107자에 서경이 2만5천700자이다.
또 시경은 3만9천234자요.예기가 9만9천10자이며 춘추 좌씨전은 19만6천845자나 된다.
우리들이 학교 다닐때 까다로운 시 하나도 제대로 외우지 못한 반면에 당시 사대부 자제들은 그 엄청난 분량을 달달 외고 또 그 의미를 완전히 자기것으로 만들어야 했다.제갈량은 그런 학문을 닦으면서 자라난다.
제갈량은 그때의 학자들과 학문을 다루는 방법이 달랐는데 그때 당시의 일반적인 학자들은 책 한권을 읽더라도 글자 하나하나 신경써 가면서 정독을 한 반면 제갈량은 그 책의 전체 적인 내용을 파악하는 통독을 했다 한다.이런 제갈량의 학문 다루는 모습으로 봐서 유교 사상이 뿌리 박힌 당시 학풍과는 다르게 실학을 위주로 다루었다고 볼수 있겠다.
제갈량이 수학할 당시의 재미 있는 일화가 있다.
제갈량이 그의 최대의 라이벌인 사마의와 동문 수학 했다는 내용이다.
당시 거암 선생이란 야인이 있었는데 그가 큰 뜻을 품고 세상을 구할 인재를 기르기 위해 제자들을 모으는데 공명이 그 제자에 들어간다.
제자들 중에 사마의도 있었는데 거암 선생은 공명의 재질을 보고 제자들 중 으뜸이었던 사마의와 좋은 라이벌이 되겠다 싶어 그 둘을 좀더 신경써 가르킨다.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기서를 그 둘 중 한명에게 전하기로 마음먹고 하루는 그 둘을 데리고 나무를 하러 갔는데 한 나무꾼이 그만 발을 헛딛어 낭떠러지밑으로 떨어졌다.그 광경을 보고 사마의는 의연히 앉아 사부의 가르침을 받고 있는데
제갈량이 일어나 나무꾼을 구한다.
어느날은 사마의 집에서 아버지가 위급하다는 전갈이 왔는데 사마의는 자신이 없는 사이에 기서를 공명에게 물려 줄까봐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스승곁에 머무르게 된다.거암선생은 이때 부터 제갈량에게 마음이 쏠리게 되고 고령인 거암선생이 쓰러지자 제자들은 하나둘 떠나고 공명과 사마의 만이 남아서 스승을 간병한다.
공명이 약을 구하러 간사이 스승이 자신에게 기서를물려줄 의향이 없음을 느낀 사마의가 몰래 기서 비스무래한 책을 들고 달아난다.
기서는 스승의 베게맡에 있는 줄도 모르고..결국 거암 선생은 임종직전 공명에게 그 기서를 전하고 세상을 뜬다.
이 내용은 소설 제갈공명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아무래도 이 내용을 믿기엔 무리가 있다.
이런 중요한 내용을 연의나 정사에서는 한마디 언급한 적도 없으려니와 논리적으로 생각 하기에도 너무 허망하다.어쨌든 소설이란게 개연성을 바탕에 두고 쓰는 거니 만큼 그럴 만한 가능성이야 있겠지만 그걸 사실로 믿기엔 어려운 실정이다.
다만 실존 인물을 다룬 역사 소설이기에 호기심이 더욱 증대될 뿐이다.
어렸을 적 제갈량의 생활은 불우해서 아홉살때 어머니를 여의고 12살 되는 해엔 아버지 제갈규마저 여의게 된다.
형 제갈근과 동생 제갈균 여동생 제갈경의 4남매는 이때부터 뿔뿔이 흩어져 이산 가족이 되버린다.
공명과 형 제갈근이 각각 다른 주인을 섬기게 된게 이런 이유에서가 아닐까?
공명은 21살의 나이로 당시 천하 박색으로 유명하던 황승언의 딸 황월영과 결혼한다.
황승언의 처제가 당시 형주자사이던 유표의 둘째부인 그러니까 유종을 낳은 어머니 이고 유표의 중신 채모의 누이이다..
공명이 살던 융중이 형주에 있었으니 공명은 자신의 인맥을 넓히기 위해 황승언을 이용 했을 수도 있다.
삼국지 연의에서 나오는 여인은 초선, 오태부인, 감부인, 미부인, 추씨 정도인데 연의에서 황완정의 천하 박색을 설명하기도 한다.
얼마나 못생겼으면...공명이 국사에 전념할수 있었던 이유를 그 부인의 못생김을 드는 사람들도 있다.(色에 빠질 염려가 없어서..)
공명의 부인이 잘생겼든 못생겼든 재주하나는 비상했는데 공명이 남만 정벌때 사용했던 목우나 유마를 그의 부인이 고안했다는 설도 있다.
그런데 그 목우나 유마의 내용은 정사에는 나오지 않고 삼국지 연의 에만 전해지는데 정사 삼국지를 기술할 당시와 연의가 기술된 시간적 차이가 천 몇백인걸로 봐서 나관중이 그가 살던 당시에 나온 것을 제갈량이 고안했다고 우겼다는 설도 있다.
젊었을때 공명은 친구들과의 담소에서 자신을 제나라 명재상인 관중과 연나라 명장인 악의에 비유한 적이 있다.
관중이라면 관포지교란 고사성어에 나오는 바로 그 인물로 제환공을 도와 춘추전국시대의 패자가 되게 했던 인물이고 악의는 강대국이었던 제나라를 쳐서 대승으로 이끈 연나라 명장 이다.
대개 우리들이 어린시절이나 청년이 된 시기에 어떤 인물이 배울만 하다고 생각 되면 그의 사상과 이념을 본받게 된다.
공명이 젊어서 관중과 악의를 존경하고 받들었다면 그의 포부도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관중은 내정에 더 많은 공을 세운 사람이고 악의는 창업에 더많은 공을 세운 사람이다.
공명이 죽은 다음 그의 업적을 살펴보건데 그는 내정과 창업 면에서 관중이나 악의 못지 않은 공을 세운다.
나중 애기지만 유비가 공명을 삼고의 예 끝에 융중에서 끌어내게 되는데 어떤 책에는 공명이 먼저 조조가 공격하면 형주가 위태로울 것을 알고 유비를 찾아가 천하 삼분지계를 논했다는 내용도 있다.공명이 이미 자신을 관중과 악의에 비교했다면 이 내용도 충분히 신빙성이 있다.그만한 포부를 가진 사람이 융중에서 썩을려고 하진 않았을 것이다.유비가 자신을 찾지 않았으면 자신의 능력도 말짱 황이었을 테니까..삼고의 예의 관해서는 여러가지 의견이 많은데 공명이 유비를 세번 만에야 만나준 이유를 관우나 장비에 비해 유비진영에 늦게 가담하게 된것을 염려해서였다는 설도 있다.
삼고의 예에서 제갈량이 주장했다던 천하 삼분지계라는 것도 당시 선견지명을 가진 뜻있는 학자들 사이에서 공공연 하게 떠돌았다는 내용이 여러가지면에서 증명되고 있는 실정이다.
서기 207년 공명이 27되는 해에 유비의 삼고의 예에 탄복한 공명은 드디어 천하로의 첫발을 내 딛는다.그 첫 걸음이 천하삼분 지계이다.
47세가 되도록 거점하나 마련하지 못했던 유비는 공명을 얻은것을 고기가 물을 만난것에 비유했다.수어지교란 말이 여기에서 나온 말이다.
공명이 당시 거의 혹실히 자신의 세력을 구축한 조조나 손권을 택하지 않고 유비를 택한 이유는 사나이의 로망도 작용 하지 않았을까?
조조나 손권 수하에 들어가게 되면 그 주변 인물들의 텃새도 심하려니와 자신의 능력을 모두 못 펴게 될 상황도 고려 하고 아무것도 가지지않은 유비를 택해 자신의 능력을 한껏 발휘하려 했던게 아니었을까도 생각해 본다.
어쨌든 공명은 유비에게 형주를 얻을 수 있게 해줌으로써 자신의 천하 삼분지계의 뿌리를 내린다.
그리고 유장이 다스리던 촉을 빼앗아서 그 기반을 확실히 다진다.
공명의 장수로서의 능력보다 정치가로서의 능력이 두드러진 것은 이 파촉을 경영할때 부터이다.
제갈량의 내정을 위한 활동에서 가장 두드러진다고 할수 있는것이 칠종칠금의 고사로 유명한 대서남의 소수민족을 정복한 일이다.
이게 어떻게 정복사업이 아니고 내정에 들수 있냐고 의문을 가지는 사람이 있을것이라 생각 한다.
그러나 공명이 이 소수민족을 정복하고 나서 그곳에 촉의 인물을 파견해서 직접 관활한 것이 아니라는 데서 그 이유를 찾을수 있다.
이 사업은 촉이 북벌을 대비하여 내정을 안정시키고 경제의 개발로 국력과 국방력을 늘이자는 데 있었던 것이므로 정복활동이라기 보다는 내정을 안정시키는데 그 목적이 있다 하겠다.
공명의 남과 다른 내정 능력으로서 설명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내용이다.
공명은 전쟁에서 말대신 사륜거를 이용한다.
기동력 면에서 월등하고 장수의 상징 이기도한 말 대신에 점잖은 사륜거를 사용한 이유는 그가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공격적인 장군이기보다 불안정한 촉나라를 안정적으로 이끌어 가려는 정치가로써의 의지를 다지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여러번의 북벌을 감행한 이유도 당시 자기 뒤를 바쳐줄 만한 인물이 없는 촉을 보다 안정적인 위치에 올려 노려 함이 아니었을까도 생각해본다.
서기 223년 유비는 관우의 원수를 갚기 위해 오나라를 치다가 패해 백제성에서 63세의 나이로 죽는다.
그런데 문제는 유비가 오와의 싸움에서 국력을 너무 많이 허비하는 바람에 촉의 존망이 위태롭다는데 있다.
그래서 공명은 오와의 동맹을 생각한다.
당시 입장에서는 촉이 오에게 꿀리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깔보이지 않고 동맹을 맺을 필요 성이 있었다.
공명은 등지라는 사람을 택해 오에 사신으로 보내 깔보이지 않고 동맹에 성공한다.
공명의 인물 보는 눈도 뛰어 났다 하겠다.
하지만 마속의 예를 들면 아닌것도 같다.'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때가 있다'라는 말로 변호해주고 싶다.
그래도 공명의 전술중에 사람의 심리를 이용한 전술이 많은걸 보면 그가 사람을 판단하는 능력이 남보다 앞선다는 걸 알 수 있다.
공명의 공명정대한 법 집행을 이 마속의 예를 통해 들수 있겠다 싶어 논해 본다.
마속은 인재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촉나라에서 공명에게 인정 받은 특출한 인재 였다.
마속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는 모두들 알고 있겠다 싶어 설명하지 않는다.
공명의 지위로 보면 마속 정도 살리는 일이야 쉬웠겠지만 법의 준엄함을 세우기 위해 마속을 참하고 만다.
병사들은 법의 엄함을 원망하기보다는 그것이 공평하지 않음을 미워하기 때문이다.
내용에 두서가 없는데 여기서 잠깐 제갈 형제들에 대해서 알아보자.
정사에 나오는 제갈 형제는 제갈 근. 제갈 량. 제갈 균. 제갈 탄. 정도가 될 것이다.
형 제갈근은 오나라를 섬긴 사람이고 사촌인 제갈 탄은 위나라를 섬긴 사람이다.
제갈량은 알다시피 촉을 섬긴 사람이고 셋 모두 그 능력이 뛰어나서 형 제갈근은 손권의 신뢰를 받는 오나라의 중신이었고 사촌 제갈 탄은위나라 군장인 하후현과 어깨를 나란히 할만큼 명성이 자자한 인물이다.
공명의 아우 제갈 균은 촉나라에서 벼슬을 살았는데 관위가 장수교위(4품관으로서 궁중의 경호대장)에 이르렀다.
당시가 전화가 끊이지 않는 어지러운 시대여서 이산 가족이 많은 시기이긴 하나 제갈량의 형제들은 그들의 능력이 뛰어 나기 때문에그 비극이 절실하다.
형주를 놓고 촉과 오가 협상할때 촉측 대표자가 공명이고 오측 대표자가 제갈근이다.
그들은 공식 석상에서 주고받은 말말고 특별히 사석을 마련하지 않고 형제의 정도 느낄 겨를도 없이 헤어진다.
공명이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형 제갈 근을 아버지나 다름없이 의지하며 보낸 어린 시절을 생각 하면 너무도 비극적이다.
쫌생이 같은 유비나 손권들이 의심만 안했어도 형제의 정을 나누지 않았을까?하고 아쉬움을 남겨 본다.
그러나 그들이 전혀 형제로써의 정을 통하지 않은건 아니다. 이 문제는뒤에 논하기로 한다.
<세설신어><품조>편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품조란 일종의 품평을 이른다.
-제갈근과 량, 그리고 그들의 사촌인 탄은 모두 명성이 높았는데 각기 다른 나라를 섬기고 있었다.당시 세상에서 평하길를
"촉은 그중 용을 얻었고 오는 호랑이를 얻었으며, 위는 개를 얻었다."
용은 공명을 말하고 호랑이는 제갈근을 말한다.그리고 개란 제갈 탄을 말하는 것인데 제갈탄은 위나라의 정권이 사마씨 형제들에게 있을때 활약한 인물이다.위나라가 사마씨 형제들에게 휘둘리자 이에 격분해 수춘성에서 반란을 일으킨 관구검과 문흠을 격퇴 하기 위해 사마소는 제갈탄을 출진 시킨다. 제갈탄은 그들을 격파하고 그대로 수춘에 주저 앉아 병력을 불리기 시작한다.
(당시 위나라 정세가 사마씨들이 위나라를 섬기는 대신들을 차례로 주살하던 때라 거기에 불안을 느껴서 취한 행동이다.)
드디어 제갈탄은 심복들의 권유로 반란을 일으키고 반란에 실패하여 죽고 만다.
누가 제갈 탄을 개에 비유했는진 모르지만 일관된 행동을 보이지 않는 그의 모습을 두고 그런것 같다.
그래도 마음 씀씀이는 깔끔했는지 마지막 순간에 제갈탄을 따르던 수백명의 장병들은 그와 함께 운명을 같이 했다 한다.
이 밖에도 삼국지에는 제갈 성을 가진 이들이 몇몇 등장 하는데 제갈 량의 아들인 제갈 첨과 제갈 근의 아들인 제갈 각이 있다.
제갈씨집안의 계보를 살펴보도록 하자..
제갈량의 아들에는 제갈첨이 있고 제갈근의 아들에는 큰아들 제갈각과 둘째 제갈교가 있다.
또 제갈첨의 아들에는 제갈상 제갈경이 있고 제갈교의 아들에는 제갈반이 있다.
제갈첨은 어렷을적부터 총명하여 아비의 사랑을 받았으나 공명 자신도 큰그릇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촉의 백성들은 공명을 존경하고 사랑한 나머지 제갈첨마저도 아끼고 사랑했다.
의기가 남달라서 위의 등애가 촉을 치기위해 남하햇을 당시 제갈첨을 낭야왕(제갈량의 고향)에 봉할것을 약속하면서그의 항복을 권유했지만 오히려 화를내며 마침내 전장에서 전사하고 만다.
제갈근의 큰아들 제갈각은 어렸을적부터 아주 총명하고 뛰어나 손권에게도 귀여움을 받을정도였으나 품행이 다른이보다
좋지 못해 수많은 공을 세우고 백성들에게 인기정책을 써서 인기도 좋았지만 오나라 황제에게 주살당하고 만다.
제갈량이 그의 나이 46되는해까지도 자식을 얻지 못했는데 형 제갈근에게 아들이 둘있는걸 알고 둘째아들 즉 제갈교를 양자로 삼을려고 제갈근에게 편지를 띄우고 허락을 받아 제갈교는 제갈량의 양자가 된다.
제갈교는 형 제갈각과 함께 상당히 이름이 나있었는데 논자들은 제갈교를 말하기를 '교의 재능은 형을 따르지 못하지만 성품은 형 각을 능가한다'고 했다.그러나 명이 길지 못해 제갈량이 한중으로 출진할때 데리고 갔는데 그곳에서 병을 얻어
25의 나이로 병사했다.제갈교의 아들 반은 촉에서 벼슬을 살았는데 제갈근의 아들 제갈각이 주살당했기 때문에 제갈씨 집안의 자손이 끊길뻔 했는데 그가 다시 오로 건너가 가통을 잇게 된다.
한 집안에 이렇게 뛰어난 인물들이 나오기도 참으로 드물 것이다.
제갈 집안이 하나로 뭉쳐 위.촉.오 중 어느 한 나라를 도왔으면 어땠을까?
제갈량은 5번에 걸친 북벌을 번번히 실패하고 서기 234년 8월 말 향년 54의 나이로 오장원에서 죽는다.
삼국지에 대해 많이 아는 사람이건 적게 아는 사람이건 제갈량을 비난 하거나 욕하거나 싫어 하는 사람은 없다.
중국에서는 신으로 까지 추앙받는 관우를 요즘들어 비난 하는 이들이 있는데 반해서 여러 서적이나 그 밖의 다른 문헌에서도 그를 깍아내린 흔적이 없는 것을 보면 그의 인품이 얼마나 고결 한지 알 수 있다.
공명이 마속을 참할때 마속의 부장인 진식에게도 죄를 물어 머리카락을 잘라버린 일이 있다.
알다시피 정사 삼국지는 진수가 쓴 것이다.
이런 이유로 절대 좋은 감정도 없을 뿐더러 촉과 반대 입장인 진나라를 위주로 한 책에서 진수는 공명을 평하기를
"제갈량은 재상이 되자 백성을 위무하고 규범을 보이며 기강을 바로 세웠다. 충성을 다하여 공이 있는 자는 비록 원수진 사이라도 반드시 걸맞은 상을 내렸고, 법을 어기고 직무를 태만히 한 자는 가까운 친지라도 반드시 벌을 주었다. 진심으로 회개한 모범수는 중죄를 지었어도 너그럽게 봐주었고, 주둥이를 놀려 발명만 하는 자는 죄가 가벼워도 중하게 다스렸다.
어진 일을 한 자는 하찮아도 꼭 상을 내렸고, 작은 일이라도 못된 짓을 한 자는 빠짐 없이 벌을 주었다. 이래서 온 나라가 모두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흠모하고 따랐다. 형벌과 정치가 준절했는데도 원망하는 사람이 없었음은 그의 마음 씀씀이가 공명정대했기 때문이다."
가히 최대의 찬사이다.그러고는 진수는 공명이 젊었을 때 자부했던 대로 "다스릴 줄 아는 훌륭한 그릇이며, 능히 관중과 소하에 비길 만하다."고 결론 짓고 있다.
공명은 여러면에서 뛰어난 인물이지만 그의 능력이 더 한층 빛을 발한 이유는 그의 라이벌 들인 주유나 사마의와의 경쟁에서 이겼기 때문일 것이다.
유비전-------------------유비는 전한 경제의 황자 중산정왕 유승의 후손이다.
할아버지, 아버지가 모두 그 고을에서 벼슬을 살았는데, 아버지는 효행이 지극하고 청렴했다 하여 효렴에 천거되어 조그만 고을의 수령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유비는 그런 아버지를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와 함께 신발과 돗자리를 팔아 생계를 잇는 어려운 환경이었다.
아버지가 청렴하다 하여 효렴에 천거될 정도 였으니 돈이란 것을 몰라 재물을 모을줄 몰랐나 보다.
그 어려운 집안 사정에도 불구하고 유비의 어머니는 유비를 동향 어른으로 구강군 태수를 지낸 노식이라는 유명한 학자에게 유학을 보낸다.
후일 그가 어려울 때 도움을 준 공손찬과 동문수학 하게되고 또 다른이들보다 이들은 각별히 더친해 유비는 공손찬을 형으로 대한다.
그러나 유비는 학업을 싫어하고 몸치장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한다.
촉서는 당시의 유비의 행실을 이렇게 적고 있다.
'선주는 심히 학업을 싫어하고 사냥이나, 음악, 옷 치장 따위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요즘으로 말한다면 동네에서 흔히 볼수 있는 양아치 정도가 아니었나 싶다.
유비는 20도 체 안된 나이에 키가 약 180정도 이고 팔뚝이 길어 손이 무릎에 닿고, 곁눈질을 하면 볼수 있을 만큼 귀가 컸다니 남과 다른 분위기를 지녔고 슬픔과 기쁨을 잘 표현하지 않았으므로 어뜻 보아 거물로 보였다.
그러나 학업에서도 특출나지 못했고 집안도 변변찮은 관계로 별볼일 없이 지내다가 그가 23되는 해에 황건란이 일어 의병을 조직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관우 장비와 의형제를 맺게 된다.
황건적 토벌에서 공을 세운 그는 어렵게 안희현의 현령으로 임명되어 첫 벼슬길에 오른다.
그러나 순탄치가 못해 뇌물을 요구하는 감찰관 독우를 육실나게 패주고 도망길에 오른다.
(이 대목에서의 연의와 정사의 내용이 다르다.연의에서는 장비가 독우를 패주고 유비는 말리는 것으로 되어있는데 정사에는 유비가 독우를 만나기를 청했는데 독우는 기생들 품에 빠져 자신을 만나주지 않자 이에 격분한 유비가 독우를 패준다고 전한다.오히려 유비를 말린것은 관우와 장비이다.연의의 이같은 설정은 유비의 후덕함을 보이기 위함이고 장비의 단순함을 보이기 위한 허구일뿐이다.)
도망중에 대주의 유희에게 가서 숨었는데 유희의 추천장을 받아 유주의 유우에게로 간다.
거기서 반란군 진압에 참가하여 크게 활약했기 때문에 유우는 유비의 공로를 조정에 상주했고 그것이 받아들여져 감찰관을 패준일이 사면 되고 하밀현의 부지사로 임명된다.
그러나 이것도 오래가지 않았고 다음에는 고당현의 현령의로 옮겨졌으나 황건적과 싸워서 지는 바람에 동문 수학한 공손찬에게로 가서 의지 하게 된다.
그곳에서 공손찬과 원소의 싸움에 공을 세우며 세월을 보내다가 자신의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며 서주를 침략한 조조를 막기 위해 구원을 청해온 도겸에게로 가게 되고 뜻하지 않게 자신의 계책이 조조에게 먹히자 도겸은 서주를 유비에게 넘겨 준다.
이때 유비의 나이 34세이고 도원결의를 맺고 세상에 나온지 10년후의 애기다.
유비가 서주로 간 것은 큰 의미를 가진다.
자칫하면 공손찬 휘하에서 돌격대장 노릇이나 하게될 처지에서 벗어난 것이고 처음으로 자신만의 기반을 잡게 된것이다.
이렇게 얻은 서주도 조조의 계략으로 여포에게 빼앗기고 조조에게 의지하게 된다.
조조의 그늘에서 유비는 융숭한 대접을 받았는데 하루는 조조가 유비를 불러 천하의 영웅에 대해서 논하게 된다.
이 자리에서 조조는 유비와 자신을 가르켜 천하에 오직 영웅은 둘밖에 없다고 유비의 큰 뜻을 알아본다.
하지만 조조 자신은 유비가 큰뜻을 가지고 있고 그걸 실천할 능력이 있더라도 자신이 유비를 가두는 큰 물이 된다고 보았음인지원술의 북진을 막기위해 유비를 출진 시키고 유비의 배반으로 서주를 빼앗기고 만다.
애초부터 조조는 유비라는 인물을 잘못보았다고 볼수도 있겠다.유비가 자신과 비견될만큼 뛰어난 인물일진 몰라도 그 유비는 자신의 뜻을 실현 시키기 위해 조조의 그런 호의쯤은 간단히 버릴수 있는 인물이었다.
원소,여포,유장의 예를 보면 충분히 알수 있다.이 부분에서의 유비는 여포의 줏대 없음과 비교할수 있는데 여포와는 달리 천하의
인물들에게 손가락질 당하지 않는 이유는 유비의 배반은 항상 깔끔하고 몸을 빼낸 시기가 적절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서주를 빼앗은 것도 원래는 자기땅인 것을 조조의 계략으로 빼앗겼다가 자신의 계략으로 다시 찾은 꼴이니 나쁘게 보는게 더 이상할것이다.
그렇지만 배반이란것 자체가 그리 깔끔한것은 아니다.
어쨌든 서주에 다시 머무르게 된 유비는 원소와 동맹을 맺어 원소와 조조의 관도의 싸움때 후방에서 조조를 공격하기도 하지만
원소의 무능으로 조조에게 패배하여 원소에게 몸을 의탁하게 된다.
이 싸움에서 유비는 관우.장비등 그밖의 부하들과 처자식을 잃게 된다.
원소에게로 간 유비는 원소의 그늘아래서 그의 부장 노릇이나 하며 몇개의 공을 세우지만 조인의 계책을 받아들인 조조에게 다시 패하고 원소도 조조의 약세를 깔보다가 참패를 당해 유비는 다시 형주의 유표에게 가서 의탁하게 된다.
유비의 형주에서의 생활은 그의 일생중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로서 그곳에서 제갈량이라는 천하에 으뜸가는 기재를 만나게 된다.
또 서서,방통등의 쟁쟁한 모사들을 맞아들여 유비진영의 참모가 모자라는 결정적인 단점을 보안하게 되어 천하를 얻을 기반을 쌓게 된다.
그러나 유비의 세력은 아직 완전치가 못해 다시 조조의 침략으로 강릉으로 다시 패주하게 되고 그곳에서 손권과 연합해 적벽에서 조조군을 패퇴시킨다.
이 적벽싸움의 전리품으로 계양,영릉,장사등의 형주 남부군을 점령하고 주유는 형주의 북부에 주둔하게 된다.
(삼국지 연의에서는 이 주유라는 인물이 제갈량에게 형편없이 농락당하는 광대역활을 하는데 오히려 정사에서는 유비에게 형주남쪽 지방을 양보한 것으로 전해진다.)
제갈량이 유비의 삼고의 예 끝에 융중에서 융중대책의 하나로써 천하삼분지계의 의견을 내놓는데 이 형주 남쪽 지방의 세력 확보는 제갈량이 건의한 그 천하 삼분지계로의 첫 발을 내딛는 시점이다.
형주정벌을 기점으로 하여 세력을 다진 유비는 익주의 유장과 장노,조조와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들어가 익주를 빼앗고 만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모두들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말하지 않는다.유비가 익주를 빼앗게 된 계기는 물론 유비진영의 확고한 세력기반이 필요해서 이지만 장송이나 법정등의 도움도 컸다.
어쩌면 매국노인 이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유비인데도 유비는 자신의 진영에서 모사로는 제갈량 다음인 방통을 낙봉파에서 잃게 된다.
유비의 조조와는 반대되는 봉건 사상때문인데 그가 유장과 자신은 형제간이라는 이유로 아우의 땅을 뺏지 않고 천하의 인물들에게 비난 받지 않으려는 소의를 접어두고 하루빨리 천하를 정복해 백성들을 평안으로 다스리려는 대의로써 이 일에 매달렸더라면 유비가 천하를 얻는것도 불가능은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 제갈량에 버금가는 인물로 평가되던 이 방통을 잃지 않고 촉과 오의 싸움인 이릉의 전투에 데리고 가서 방통이 유비의 잘못을 다독였다면 당시 열세에 있던 오나라를 격파하고 조조와의 1:1싸움을 벌여 승리함으로써 천하를 다스리게 됬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어리석은 생각을 해본다.
비록 유비가 익주를 얻어 기반을 쌓았지만 방통이라는 걸출한 인물을 잃은 것은 그에겐 돌이킬수 없는 커다란 실책이다.)
유비는 이 익주를 빼앗고 내정에(익주는 원래 유장의 아버지 유언이 다스리던 땅으로써 영제때 유언이 익주에 들어와 중원에 힘을 다른곳보다 덜받으며 기반을 쌓던곳이다.
거의 30여년을 유장의 일족이 평온하게 다스리던 곳이라 백성들의 유비에 대한 반발이 커서 엄격한 법률로서 조금한 잘못을 저지른 이라 할지라도 참형에 처했다 한다.)
힘을 기울이며 북벌을 위한 준비를 하는 동안 형주에 남겨두고 왔던 관우가 위와 오의 협공에 무너지고 죽임을 당하자 다시 소의를 내세워 위나라 대신 오나라 정벌에 나서게 되고 유비의 결정적 실수로 말미암아 이릉에서 육손에게 참패를 당하게 되고 급격히 쇠약해진 몸으로 백제성에 머무르면서 죽음을 맞이한다.
임종이 가까울 무렵 성도의 제갈량을 불러 후사를 당부하는데 아들 유선에 대해서
'그 대의 재능은 조비의 10배나 되오.반드시 나라를 안정시켜 큰 일을 이룩할 것이오. 만약 내 아들이 보필할 만하면 보필하라.만약 재능이 없다면 그대 자신이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리오.' 라며 후사를 부탁하고 향년 62세 223년에 생을 마감한다.
유비가 제갈량에게 남긴 후사의 내용을 두고 그것은 유비의 계산에서 비롯된 철저한 유선에 대한 충성을 강요하는 것이라 비난 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 것은 유비가 제갈량에게 표현한 최대의 신뢰일 뿐이다.
유비의 일생을 말하는 학자중에 유비의 일생을 부도덕과, 위선, 일천한 지적 수준으로 일관된 사람이라고 비난 하는 학자들이 많다.
그런 학자들은 유비의 야망과 꿈을 그리고 그의 능력을 이해하지 못한 말이다.
비록 유비는 제갈량을 얻기 전엔 배신과 배반으로 일관되는 삶을 살아가는 건 사실이다.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야망이 그들(원소,여포,조조)로서는 채워지지 않기 때문이며 자신의 세력이 확실하지 못한데서 오는 것이다.
후에 제갈량의 도움으로 익주를 얻고 세력을 다졌을 때엔 그러한 행동을 보인적이 없다.
유비의 출발은 워낙에 빈약했고 원소나 조조같이 선대로 부터 내려오는 세력 기반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열세에 놓이게 된것 뿐이지 유비의 장수로서의 능력도 그리 많이 떨어지지만은 않았다.
흔히들 유비를 말할때 조조와 비교하기도 한다.물론 유비는 조조에 비하면 형편없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그러나 그런 단점만큼 유비에게도 그에 필적하는 장점이 있었는데 다름아닌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이다.
조조진영에도 아주 뛰어난 인물들이 많이 있다.그러나 유비의 관우나 장비,제갈량,조운,방통등의 인물들과 비교해 보면 한 두단계씩 떨어지는 인물들이다.
게다가 조조는 자신의 세력기반이 빨리 형성되 천하에 세력을 떨쳤기 때문에 그의 수하에 인물들이 많이 모일수밖에 없었지만 유비는 그렇지 않다.
세력기반도 없었을 뿐더러 조조만큼 이름이 알려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그런 인물들을 끌어 모은 것이다.
유비의 남과 다른 매력을 빼놓고는 달리 어떤 방법으로도 설명할수 없는 부분이다.
그리고 형주에서 조조에게 쫓기는 상황에서 형주 백성들이 죽음을 무릅쓰고도 유비를 따른 예에서도 유비의 매력을 설명할수 있다.
유비의 사람 대하는 방법에서 그가 취한 행동을 철저한 계산 이란 사고를 가지고 있는 학자들은 제갈량이나 관우등이 유비의 계산에 농락당했다는 의미이므로 제갈량 관우로 대변되는 촉의 진영의 인물들을 무시한 처사라 할 것이다.
오나라======================
엄준전-----------------------엄준은 자가 만재이고 팽성 사람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에 침잠하였고, <시경>,<서경>,삼례에 정통했으며, 또 <설문해자>를 좋아했다.
그는 난리를 피해 강동으로 가서 제갈근, 보즐과 이름을 나란히 하고 우정을 나누었다. 그는 성격이 소박하고 솔직하고 순후하여 재능을 갖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완미한 도의로써 성실하게 충고하여 그들로 하여금 도움을 받아 진보하도록 하는데 뜻이 있었다. 장소가 엄준을 손권에게 추천하자, 손권은 그를 기도위 종사중랑으로 임명했다. 횡강장군 노숙이 죽었을 때, 손권은 엄준에게 노숙을 대신해 병사 1만 명을 지휘하여 육구에서 주둔하도록 했다. 사람들은 모두 엄준이 임명된 것을 기뻐했지만, 엄준은 몇 번이나 간곡하게 사양했다.
'저의 본분은 책 읽는 사람으로서 군사에는 익숙하지 못합니다. 재능이 없으면서 그 자리를 차지하면 허물과 후회가 반드시 이를 것입니다.'
그의 말은 강개했으며 눈물을 흘리기조차 했다. 손권은 마침내 그의 뜻을 받아들였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사실에 근거하여 엄준의 겸양함을 칭찬했다.
손권이 오왕이 되고 황제로 칭해졌을 무렵, 엄준은 일찍이 위위로 임명되어 사자로서 촉으로 갔다. 촉의 재상 제갈양은 그를 매우 아꼈다. 그는 봉록과 상을 축적하지 않고 모두 친척이나 친구, 인연이 있는 자에게 나누어 주었으므로 집은 항상 넉넉하지 못했다.
광릉의 유영은 엄준과 교분이 있었다. 유영은 한가롭게 집에 있으면서 학문에 정통했다. 손권은 그에 대한 평판을 듣고 초빙했지만, 질병을 핑계로 나가지 않았다. 그의 동생 유략이 영릉태수로 있다가 임지에서 죽자 유영은 장례식장으로 달려갔다. 손권은 이 일로 해서 그가 꾀병을 부렸음을 알게 되었고, 황급히 체포하여 심문하도록 명령했다.
엄준 또한 유영에게 급히 달려가, 손권에게 사죄하도록 설득했다. 손권은 노여워하여 엄준을 면직시켰지만, 유영은 죄를 사면받았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엄준은 상서령으로 임명됐고, 후에 죽었다.
엄준은 <효경전>, <조수론>을 지었으며, 또 배현, 장승과 함께 관중, 계로에 대해 논의했는데, 이 내용은 모두 세상에 전한다. 배현은 자가 언황이고 하비 사람이다. 학문과 품행이 있으며, 관직은 태중대부까지 올라갔다. 배현이 아들 배흠에게 제환공, 진문공, 진이공, 진혜공 네 사람의 우열에 관해 질문하자, 배흠은 자신이 생각한대로 대답하여 배현과 서로 반복하며 논쟁을 하였는데, 각자의 말에는 문채와 이치가 있었다.
배흠은 태자 손등과 사귀었으며, 손등은 그의 문필이 우미하다고 칭찬했다
고옹전------------------
고옹은 자가 원탄(元歎)이고 오군(吳郡) 오현(吳縣) 사람이다. 채백계(蔡伯階)는 삭방군(朔方郡)에서 일찍이 사람들의 원망능 피해오현으로 왔었는데, 고옹은 그로부터 거문고와 학문을 배웠다. 주와 군에서는 표를 올려 그를 추천했으며, 약관의 나이로 합비현의 장으로 임명됐고, 이후에 누현(婁縣)?곡아(曲阿)?상우(上虞)로 전임되었는데, 모든 곳에서 치적이 있었다. 손권은 회계태수를 겸임할 때, 군에는 오지않고 고옹을 군의 승(丞)으로 임명하여 태수의 일을 대신하도록 했다. 그가 도적들을 토벌하여 군의 경내를 안정되게 했으므로 관리와 백성들이 귀순했다. 몇 해 후, 손권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 좌사마가 되었다. 손권은 오왕이 되자, 그를 거듭 승진시켜 대리봉상(大理奉常)으로 삼고, 상서령을 겸임하게 하고 양수향후(陽遂鄕侯)로 봉했다. 후(侯)로 봉해지고 관부로 돌아왔을 때, 집안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이후에 듣고는 놀랐다. 황무 4년(225), 고옹은 모친을 오현으로부터 맞이했다. 모친이 도착하자 손권이 와서 경하했으며, 직접 마당에서 모친에게 인사를 했다. 공경 대신들이 모두 모여 있었고, 이후에 태자가 또 가서 축하했다. 고옹은 사람됨이 술을 마시지 않았고, 말이 적었으며 행동거지는 때에 맞게 했다. 손권은 일찍이 감탄하여 말했다. '고군(顧君)은 말을 하지는 않지만, 말을 하면 반드시 핵심이 있다.' 연회 석상에서 술을 마시며 즐길 때도, 고옹의 주위 사람들은 술을 마시다 실수하면 고옹이 반드시 보게 될 것을 걱정하였기 때문에 감히 마음대로 하지 못했다. 손권은 또 말했다. '고군이 자리에 있으면 사람들로 하여금 즐겁게 하지 않는다.' 그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갖게 하는 것은 이와 같았다. 이 해에 태상으로 바뀌어 임명되었고, 예릉후(醴陵侯)로 승진하여 봉해졌으며, 손소를 대신하여 승상이 되었고, 상서의 일을 총괄했다. 그가 무관과 문관을 선발하여 임용할 때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임무를 맡겼으며, 자신의 감정에 좌우되는 일이 없었다. 그는 항상 백성들 사이로 들어가 의견을 구했으며, 정치적 일에 마땅히 취해야 할 것이 있으면 비밀리에 보고했다. 만일 그 의견이 받아들여 쓰인다면 공을 손권에게 돌렸고, 쓰이지 않았다면 끝까지 세상에 알리지 않았다. 손권은 이 때문에 그를 중시했다. 그러나 조정에서 의견을 서술할 때에는 말이나 안색은 비록 공손할지라도 고집하는 주장은 곧았다. 손권은 일찍이 조정의 득실에 관해 자문한 일이 있駭? 장소는 자신이 수집한 의견에 근거하여 진술하였는데, 법령은 지나치게 세분화되었고, 형벌은 약간 무거우므로 응당 삭감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손권은 묵묵히 있다가 고옹쪽으로 머리를 돌려 바라보고 말했다. '그대는 어떠하다고 생각하시오?' 고옹이 대답했다. '신이 들은 것 또한 장소가 진술한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손권은 재판 법령에 관해 상의하고 형벌을 줄였다. 오랜 시간이 지나 여일(呂壹)과 진박(秦博)을 중서(中書)로 임명하여 여러 관청과 주와 군의 문서를 감독하도록 했다. 여일 등은 이 때문에 점점 위세와 복을 누리게 되었고 마침내 술을 파는 이권과 세금 징수의 권한을 휘둘렀으며, 다른 사람의 죄악을 적발함에 있어 작은 일조차도 반드시 보고하였다. 게다가 중대한 사안도 추악하게 했으며 대신들을 비방하고 무고한 자들을 참언했다. 고옹 등은 모두 그들에게 고발당하여 견책당했다. 후에 여일의 간악한 진상이 드러나 정위에 구속되었다. 고옹은 가서 죄상을 심의했고, 여일은 죄인의 신분으로 고옹을 보았다. 고옹은 화사한 안책으로 그 사안에 대해 질문은 했으며, 옥을 나오면서 여일에게 말했다. '그대의 마음속에는 말하고 싶은 것이 없소?' 여일은 머리를 조아릴 뿐 말하지 않았다. 당시 상서랑 회서(懷敍)가 여일에게 면전에서 욕을 했는데, 고옹이 회서를 꾸짖어 말했다. '관부에는 정해진 법이 있는데, 어찌하여 이렇게 하시오!' 고옹은 승상으로 임명된 지 19년, 76세의 나이로 적오 6년(243)에 세상을 떠났다. 당초 그의 질병이 가벼웠을 때, 손권은 의원 조천(趙泉)에 명하여 진찰하도록 하였으며, 그의 막내 아들 고제(顧濟)를 기도위로 임명했다. 고옹은 이 일을 듣고 슬프게 말했다. '조천은 생사를 식별하는데 탁월하다. 내가 틀림없이 일어나지 못할 것이므로 황상께서는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고제가 관직에 오르는 것을 보도록 한 것이다.'
손권은 무늬없는 옷을 입고 조문하러 왔으며, 시호를 숙후(肅侯)라고 했다. 맏아들 고소(顧邵)가 요절했고, 둘째 아들 고유(顧裕)는 질병이 심했으므로 막내 아들 고제가 후사를 이었다. 고제에게는 후사가 없었으므로 대가 끊겼다. 영안(永安) 원년(258)에 조서가 있었다. 이전의 승상 고옹은 덕망이 지극하고 충성스럽고 어질었고, 예법에 따라 나라를 보좌하였는데, 그의 뒤를 계승할 자가 끊겼기 때문에 짐은 이것을 매우 연민하고 있다. 고옹의 차남 고유에게 작위를 계승하도록 하여 예릉후로 임명했고, 고옹의 과거 공훈을 빛내도록 하라. 고소는 자가 효칙(孝則)이고 경전을 광범위하게 읽었으며 인물 품명을 좋아했다. 어렸을 때, 숙부 육적(陸績)과 함께 나란히 이름이 있었다. 육손?장돈(張敦)?복정(卜靜) 등은 모두 그만 못했다. 주나 군의 위대한 현인이나 사방의 인사들은 고소와 왕래하며 서로 만났는데, 어떤 사람은 의론을 말하고 떠났고, 어떤 사람은 두터운 정을 맺고 헤어졌으므로 명성이 사방으로 퍼졌으며, 먼 곳이든 가까운 곳이든 간에 모두가 그를 칭찬했다. 손권은 손책의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27세에 집안을 일으키고 예장태수로 임명됐다. 그는 수레에서 내려 이전의 현인 서유자(徐孺子)의 묘에 제사지내고, 그의 후예들을 우대하였다. 음란한 제사나 예의가 아닌 제사는 금했다. 지위가 낮은 관리 중에 자질이 뛰어난 자가 있으면 학문을 하도록 시키고, 그 중에서 성적이 좋은 자를 뽑아 발탁하여 중요한 직책에 배속시켰다. 선행을 들어 가르쳤으므로 정치 교화는 광범위하게 시행되었다. 당초, 전당(錢唐)의 정서는 병졸 출신이고, 양선(陽羨)의 장병(張秉)은 서민 태생이며, 오정(烏程)과 운양(雲陽)의 은례(殷禮)는 미천한 신분에서 일어났는데, 고소는 이들의 모두 발탁하여 친하게 지냈으며, 그들을 위해 영예를 세웠다. 장병이 중대한 상사(부모의 죽음을 말함)를 만났을 때에는 직접 상복을 입고 마대를 맺다. 고소가 예장으로 가려고 할 때, 마침 장병에게 질병이 있어 전송하러 나오지 못했다. 당시 전송하는 자가 수백 명이었지만, 고소는 빈객들에게 사과하며 말했다. '장중절(張仲節)에게 질병이 있어, 와서 이별할 수 없음을 마음 아파하고 있습니다, 나 역시 그를 만날 수 없음을 유감스러워 하니, 잠시 돌아가 그와 이별을 할테니 여러분들은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가 아래의 현사들에게 마음을 기울여 곳곳마다 은혜를 편 겻은 모두 이와 같은 종류였다. 정서의 관직은 전군랑장까지 승진했으며, 장병은 운양태수가 되었고, 은례는 영릉태수가 되었으며, 오찬은 태자소부(太子少傅)가 되었다. 세상 사람들은 고소에게는 인물을 알아보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고소는 관직에 있은 지 5년만에 사망했다. 아들로는 고담(顧譚)과 고승(顧承)이 있었다. 고담은 자가 자묵(子?)이고, 약관의 나이에 제각각 등과 태자의 네 명의 친구가 되었으며, 중서자에서 보정도위(補正都慰)로 전임되었다. 적오 연간에는, 제갈각을 대신하여 좌절도로 임명됐다. 고담은 항상 문서를 살펴볼 때마다 일찍이 주판을 사용하여 계산한 적이 없고, 단지 손가락을 굽혀 마음속으로 헤아려서 의심이 나서나 잘못된 점을 모두 찾아냈다. 수하의 관리들은 이 일로 인해 그에게 복종했다. 그에게 봉거도위가 더해졌다. 설종(薛綜)이 선조상서(選曺上書)로 임명되자, 고담에게 강력히 사양하고 말했다. '고담은 생각이 치밀하고 행동이 주도면밀하며 도의에 관통하고 미묘한 감정에 밝으며 재능은 다른 사람을 비출 수 있으며, 덕행은 여러 사람의 소망을 허락하고 있으므로, 실재로 어리석은 신이 뛰어넘어 앞에 있을 수 있는바가 아닙니다.'
동습전-----------------동습은 자가 원대이고, 회계군 여요 사람이다. 신장은 8척이며, 완력은 다른 사람들을 뛰어넘었다. 손책이 회계군으로 들어왔을때, 동습은 고천정에서 맞이했다. 손책은 그를 보고 위대하다고 느꼈으므로, 관부에 도착하여 그를 문하적조로 임명했다. 당시 산음에서는 오랫동안 도적 노릇을 한 황용라와 주발이 수천 명의 무리를 모았는데, 손책이 직접 토벌하러 나갔다. 동습은 혼자 황용라와 주발의 머리를 베었으므로 돌아와서 별부사마로 임명되고 병사 수천 명을 받았으며, 양무도위로 승진했다. 손책을 수행하여 환성을 공격하러 갔으며, 또 심양에서 유훈을 토벌했고, 강하에서 황조를 토벌했다. 손책이 죽은 후, 손권은 어린 나이로 막 정치를 통솔하게 되었다. 태비는 그를 걱정하여 장소와 동습 등을 불러 강동의 보존 여부를 물었다. 동습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 강동의 지세는 견고한 산천이 있고 토역장군의 은덕이 백성들에게 미치고 있습니다. 토로장군이 기업을 계승하여 크고 작은 관원들은 임명을 받들고 있습니다. 장소는 여러가지 일을 관장하고, 저 등은 수족이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지세가 유리하고 사람들이 화합하고 있는 때인 것입니다. 만에 하나도 걱정할 것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의 말이 장대하다고 생각했다. 파양의 적 팽호 등이 수만 명의 무리를 모았다. 동습은 능통, 보즐, 장흠과 함께 각기 별도로 나누어 토벌했다. 동습이 이르는 곳은 언제나 격파되었으므로 팽호 등은 멀리서 그의 깃발을 보자마자 흩어져 달아났다. 열흘만에 전부 평정되었다. 동습은 위월교위로 임명되고, 편장군으로 승진했다. 건안 13년(208), 손권이 황조를 토벌했다. 황조는 두 척의 몽충을 면구에 비껴 놓고 지켰으며, 종려나무의 커다란 새기줄로 돌을 묶어 배를 고정시켰따. 배 위에는 병사가 1천 명이 있었고, 화살을 동시에 발사하여 날으는 화살이 비내리듯하였으므로 군대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동습은 능통과 함께 선봉대가 되었으며, 각자 죽음을 무릅쓴 1백 명의 병사를 인솔하였는데, 사람들은 두 겹의 갑옷을 입고 커다란 배를 타고 몽충속으로 돌진했다. 동습이 직접 칼로 두 가닥의 새기줄을 끊어 몽충이 표류하도록 하였으므로 대군은 전진하게 되었다. 황조는 곧 성문을 열고 달아났지만 병사들이 추격하여 그의 목을 베었다. 다음날 성대한 연회를 베풀었다. 손권은 술잔을 들어 동습에게 권하며 말했다. '오늘의 연회는 새기줄을 끊은 공로를 축하하는 자리요.' 조조가 유수를 침범하자, 동습은 손권을 수행하여 달려갔다. 손권은 동습에게 누선 다섯 척을 이끌고 유수구로 가도록 했다. 밤에 갑자기 폭풍이 몰려와서 누선 다섯 척을 전복시켰으며, 수하의 사람들은 큰 배로 뿔뿔이 흩어져 동습에게 탈출할 것을 요구했다. 동습은 진노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장군의 임무를 받아 이곳에서 적을 방비하고 있는데, 어떻게 버리고 떠날 수 있소? 감히 또 이런 말을 하는 자는 목을 베어버리겠다!' 그래서 감히 요구하는 자가 없었다. 그날 밤, 배는 파괴되었고, 동습은 죽었다. 손권은 상복으로 바꿔 입고 장례식에 참석하였으며, 매우 풍부한 물품을 공급해 주었다.
손책전-----------------손책은 자가 백부(伯符)이다. 손견이 의병을 처음 일으켰을 때, 손책은 어머니를 모시고 서현으로 이주했다. 그가 주유(周瑜)와 서로 우정을 맺고 사대부들을 규합하자, 장강과 회수 사이의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 향했다. 손책은 손견이 죽은 후, 유해를 갖고 돌아와 곡아에 안장했다. 장례가 끝나자 곧 장강을 건너 강도에 거주했다. 서주목 도겸(陶謙)은 손책을 매우 꺼려했다. 손책의 외숙 오경이 당시 단양의 태수로 있었으므로, 손책은 곧 어머니를 수레에 태워 곡아로 이주시키고, 자신은 여범, 손하와 함께 오경에게 의지했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수백명의 병사를 모집했다. 흥평 원년(194), 그는 원술을 따랐다. 원술은 그를 특별히 중시하여 손견의 부대를 그에게 돌려주었다. 태부 마일제는 부절을 갖고서 관동을 위로하고, 수춘에서 예의로서 손책을 초빙하고 표를 올려 회의교위로 임명했다. 원술의 대장 교유와 장훈은 모두 마음을 기울여 손책을 존경했다. 원술은 항상 감탄하며 말했다. '만일 내 자식이 손랑(孫郞)과 같다면 죽어도 또 어떤 한이 있을까!' 손책의 기병이 죄를 짓고 원술의 진영 속으로 달아나 마구간에 숨었다. 손책은 사람을 시켜 쫓아가서 그를 죽이도록 했다. 그는 일을 끝낸 후 원술을 찾아가 사죄했다. 원술이 말했다. '병사들은 반란을 좋아합니다. 우리들은 당연히 함께 그들을 증오해야만 하거늘. 무엇 때문에 사죄합니까?' 이로부터 군 안에서는 점점 더 손책을 두려워하고 존경하게 되었다. 원술은 처음에는 손책과 약속하여 구강(九江)태수로 임명하였지만, 이후에는 오히려 단양의 진기로 바꾸었다. 이후에 원술은 서주를 공격하려고 여강태수 육강에게 쌀 3만섬을 요구했다. 육강이 주지 않았으므로 원술은 매우 노여워했다. 손책이 이전에 육강을 방문했었지만, 육강은 만나주지도 않고 주부로 하여금 그를 접대하도록 했다. 손책은 항상 마음속에 원한을 품고 있었다. 원술은 손책을 파견하여 육강을 공격하도록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전에 진기를 임용했지만, 항상 원래의 의도가 실현되지 못함을 한스러워 했습니다. 지금 만일 육강을 잡는다면, 여강은 平ㅐ막?그대의 소유가 될 것입니다.' 손책은 육강을 공격하여 제거했지만, 원술이 또 그의 옛날 관리였던 유훈을 그곳의 태수로 임명했으므로 손책은 더욱더 실망했다. 이 이전에 유요(劉繇)가 양주자사로 임명되었는데, 양주의 옛날 관소는 수춘에 있었다. 수춘은 원술이 이미 점거하고 있는 곳이었으므로, 유요는 곧 장강을 건너 곡아를 관소로 삼았다. 당시 오경은 여전히 단양에 있었으며, 손책의 사촌형 손분 또한 단양도위로 있었는데, 유요가 무력으로 이들을 모두 쫓아냈다. 오경과 손분은 물러나 역양에서 살았다. 유요는 번능과 우미를 파견하여 동쪽의 횡강진에 주둔하도록 하고 장영은 당리구에 주둔시켜 원술에게 항거하도록 했다. 원술은 자신이 옛날에 썼던 관리, 낭야의 혜구를 양주자사로 임명하고, 다시 오경을 독군중랑장으로 삼아 손분과 함께 병사들을 인솔하여 장영 등을 공격하도록 했지만, 몇 해가 지나도록 무찌르지 못했다. 손책은 곧 원술을 설득시켜 오경 등을 도와 강동을 평정시키기를 요구했다. 원술은 표를 올려 손책을 절충교위(折衝校尉)로 임명했고, 진구장군을 대신하게 했다. 병사는 천여 명이 되었고, 말은 수십필이 되었으며, 빈객으로 따르기를 원하는 자가 수백명이었다. 역양에 도착한 후에는 병사의 수가 5, 6천명이나 되었다. 손책은 어머니를 먼저 곡아에서 역양으로 옮겼으며, 다시 부릉으로 옮기고 장강을 건너 지속적으로 공격하여 가는 곳마다 모두 무찔렀는데 감히 그의 예봉을 감당할 자가 없었다. 그리고 군령이 정돈되고 엄숙하였으므로 백성들은 그를 상당히 받들었다. 손책의 사람됨은 용모가 수려하고 우스갯소리를 좋아하며, 성격은 활달하고 다른사람의 의견을 잘 듣고 사람을 기용하는데 탁월했다. 때문에 사인과 백성들은 그를 만나기만 하면 마음을 다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기꺼이 그를 위해서 죽었다. 유요가 군대를 버리고 달아나자, 여러 군수들도 모두 성곽을 버리고 달아났다. 오나라 사람 엄백호 등은 각기 무리 만여 명씩을 모아 도처에 주둔했다. 오경 등이 먼저 엄백호 등을 격파하려고 즉시 회계에 도착했다. 손책이 이렇게 말했다. '엄백호 등 일군의 강도들은 큰 뜻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이번에 붙잡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병사들을 이끌고 절강(浙江)을 건너 회계와 동야를 함락시키고 곧 엄백호 등을 공격해 격파시켰다. 손책은 이 일대의 지방 관원을 교체시키고, 손책 자신은 회계태수를 겸임했으며, 또 오경을 단양태수로 삼고, 손분을 예장태수로 삼았다. 예장을 나누어 여릉군으로 삼구 손분의 동생 손보를 여릉태수로 임명했으며, 단양의 주치(朱治)를 오군태수로 임명했다. 팽성의 장소(張昭), 광릉의 장굉(張紘), 진송, 진단 등은 손책의 주요한 참모가 됐다. 이때 원술이 황제를 참칭하였으므로, 손책은 편지를 써서 질책하고 그와의 관계를 끊었다. 조조는 표를 올려 손책을 토역장군(討逆將軍)으로 임명하고 오후(吳候)로 봉했다. 그후 원술이 죽자, 장사 양홍과 대장 장훈 등은 그들의 부하를 이끌고 손책에게 나아가려고 했는데, 여강태수 유훈이 공격하여 전부 포로로 잡고 그들의 진귀한 보물을 탈취해 돌아갔다. 손책은 이 소식을 듣고 거짓으로 유훈과 좋은 동맹관계를 맺었다. 유훈이 막 원술의 무리를 얻었고, 당시 예장의 상료가 종교가 같은 백성 1만여명과 강동에 있었으므로 손책은 유훈에게 그들을 공격하여 취하도록 권했다. 유훈이 출발한 후, 손책은 날랜 부대를 파견하여 밤낮으로 습격하여 여강을 점령하도록 했다. 유훈의 무리들은 전부 항복했고, 유훈은 수하의 부하 수백명과 조조에게 귀순했다. 이때 원소가 막 강성해졌으므로, 손책이 강동을 병합했지만, 조조의 역량은 뜻대로 발휘할 수 없었다. 잠시 손책을 위로하기 위해 조조는 동생의 딸을 손책의 작은 동생 손광(孫匡)에게 시집보내고, 또 아들 조장(=조창)을 위해 손분의 딸을 시집오게 하고, 손책의 동생 손권과 손익을 모두 예로써 초빙하였으며, 또 양주자사 엄상에게 명하여 손권을 무재로 추천했다. 건안 5년(200), 조조와 원소가 관도에게 교전할 때, 손책은 은밀히 허도를 습격하여 한헌제(漢獻帝)를 맞이하려고 했다. 그는 비밀리에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장수들에게도 임무를 분담시켰다. 그런데 그는 출발하기도 전에 옛날 오군태수였던 허공(許貢)의 문객들에게 살해되었다. 이보다 앞서 손책이 허공을 죽였고, 허공의 작은 아들과 문객이 장강가로 달아나 숨었었다. 손책은 혼자 말을 달려 나가 결국 허공의 문객과 마주쳤는데, 그 문객이 손책을 공격하여 상해를 입혔던 것이다. 손책의 상처는 매우 심했다. 그는 장소들을 오도록 청하고는 말했다. '중원지역은 지금 혼란에 빠져 있어 오와 월의 무리와 삼강(三江)의 견고함에 의지한다면,충분히 성패(成敗)를 볼 수 있을 것이오. 여러분들은 나의 동생을 잘 도와주십시오!' 손권을 불러 인수를 차도록 하고, 이렇게 말했다. '강동의 병력을 이끌어 양쪽의 군대가 대치하는 사이에 기회를 보아 결단을 내려 천하의 영웅들과 다투며 충돌하는 것에 관한한 그대는 나만 못하지만, 현인을 선발하고 능역있는 자를 임용하며, 그들 각각의 마음을 다하도록 하여 강동을 지키는 것은 내가 그대만 못하다.' 밤이 되자 죽었는데, 그 당시 26세였다. 손권은 제(帝)를 칭한 후, 손책에게 장사환왕(長沙桓王)의 시호를 추증했고, 아들 손소를 오후로 봉했다가 나중에 상우후(上虞候)라고 고쳐 봉했다. 손소가 죽자, 아들 손봉이 뒤를 이었다. 손호(孫皓)시대에 손봉이 응당 제위에 올라야 한다는 뜬소문이 있었으므로 손봉은 주살되었다
반장전----------------반장은 자가 문규이고 동군 발간 사람이다. 손권이 양선현의 장이 되었을 때, 비로소 나가 손권을 따랐다. 하지만 성정이 호탕하고 술을 좋아하였다. 그는 집이 가난했기 때문에 외상술을 즐겼다. 빚쟁이가 대문까지 쫓아오면 항상 이후에 부귀해지면 다시 오라고 말했다. 손권은 그를 기이하게 여겨 아꼈고, 그에게 병사를 모집하도록 하여 백여 명을 얻게 되자, 부장으로 삼았다. 산월의 적을 토벌하여 공로를 세웠으므로 별부사마에 임명됐다. 이후에 오군의 큰 저자에서 침입자를 죽이자, 이로부터 도적은 단절되었다. 그는 이 일로 인해 이름이 났으며 예장군 서안현의 장으로 승진했다. 유표가 형주에 있을 때, 백성들은 여러 차례 그들의 침략을 당했다. 반장이 일을 맡은 이후부터 침략자들은 경내로 들어오지 않았다. 이웃하고 있는 현인 건창에서 강도들의 폭도가 일어나자, 전임되어 건창을 다스리게 되었고, 무맹교위를 더했다. 그는 사악한 자를 토벌하여 다스려 1개월 만에 전부 평정시켰다. 그리고 흩어져 떠도는 병사들을 소집하여 8백 명을 얻었으며, 그들을 데리고 건업으로 돌아왔다. 합비 싸움에서 장료가 급습했을 때, 장수들은 무방비 상태였고, 진무는 분투하다 죽었으며, 송겸이나 서성은 모두 후퇴하였다. 반장은 후방에 있었지만, 곧바로 급히 달려가서 말을 비껴 송겸과 서성의 병사들 중 달아나는 두 명의 목을 베었다. 그러자 병사들은 모두 돌아와서 싸웠다. 손권은 이 점을 특히 칭찬하여 그에게 편장군을 제수했다. 그래서 백 명의 교관을 통솔하여 반주에 주둔했다. 손권이 관우를 정벌할 때, 반장은 주연과 관우가 달아나는 길을 차단시켰다. 그는 임저에 도착하여 협석에 주둔했다. 반장의 부하 사마 마堧?관우와 관우의 아들 관평과 도독 조루 등을 붙잡았다. 손권은 의도군의 무현과 자귀현 두 현을 나누어 고릉군으로 만들고, 반장을 그곳의 태수로 임명했으며, 진위장군으로 삼았고, 율양후로 봉했다. 감녕이 죽자, 또 감녕의 군대를 주어 합치도록 했다. 유비가 이릉으로 출병했을 때는, 반장과 육손이 힘을 합쳐 대항했으며, 반장의 부하가 유비의 호군 풍습 등의 목을 베었고, 죽거나 부상당한 자는 매우 많았다. 반장은 평북장군, 양양태수로 임명됐다. 위나라 장수 하후상 등이 남군을 포위하고, 선봉 부대 3만 명을 나누어 부교를 만들고 백리주를 건너왔다. 제갈근과 양찬이 함께 병사를 모아 구원하러 달려갔지만, 그 사태에 대처할 바를 몰랐고, 위나라 병사들은 날마다 끊임없이 건너고 있었다. 반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위나라의 기세는 방금 흥성하기 시작했고, 강물은 또 얕으므로 그들과 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는 병사들을 인솔하여 위로부터 상류로 50리 되는 곳까지 가서 갈대를 수백만 개 베어 커다란 떼를 만들어 물의 흐름을 따라 불을 놓아 부교를 전소시키려 했다. 떼 만드는 작업이 막 끝나 강물이 가득 찬 것을 보고 띄우려고 할 때에 하후상이 이것을 알고 병사를 인솔하여 물러났다. 반장은 말에 올라 육구까지 내려가서 막았다. 손권은 제위에 오른 후, 반장을 우장군에 제수했다. 반장은 사람됨이 난폭하고 사나웠으며, 금령은 매우 숙연했다. 그는 공업 세우기를 좋아하였으며, 통솔하는 군대는 수천 명에 불과했지만 이르는 곳마다 언제나 만 명이나 되는 것 같았다. 정벌이 멈추었을 때는, 즉시 군대 시장을 세웠으며, 다른 군에 없는 것은 모두 반장의 시장에서 충족시켰다. 그러나 그의 성격은 사치스러웠고, 이런 경향은 만년에 더욱 심해져 의복이나 물건은 그의 신분을 넘는 것을 사용했다. 관리들 가운데 부유한 자가 있으면 그를 죽이고 재물을 빼앗을 때도 있었다. 법령을 받들지 않은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감시하는 자가 이 일을 들어 상주했지만, 손권은 그의 공을 아껴 항상 용서하고 죄를 묻지 않았다. 반장은 가화 3년(234)년에 죽었다. 아들 반평은 품행이 좋지 않았으므로 회계군으로 쫓겨났다. 반장의 처는 건업에서 살았는데, 밭과 가옥을 하사받았고, 또 소작인 50호의 부세를 면제받았다
주유전----------------주유는 자가 공근이며 여강군 서현 사람이다. 당조부 주경과 주경의 아들 주충은 모두 한나라 태위를 지냈다. 부친 주이는 낙양현의 령을 지냈다. 주유는 건강하고 자태와 용모가 뛰어났다.
처음에 손견이 의병을 일으켜 동탁을 토벌할 때, 그는 집을 서현으로 옮겼다. 손견의 아들 손책은 주유와 나이가 같았으며, 두 사람의 우정은 남달랐다. 주유는 길 남쪽의 큰 저택을 손책에게 주고 방으로 들어가 그의 모친에게 배례했으며, 서로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융통하며 돕고 살았다. 주유의 당부 주상이 단양태수로 있었는데 주유는 그를 찾아가 안부를 물었다. 마침 손책이 역양까지 있었으므로 급히 편지를 써서 주유에게 알렸다. 주유는 병사를 인솔하여 손책을 맞이했다. 손책은 매우 기뻐하며 말했다. "나는 그대를 얻었으니, 전쟁은 순조롭게 될 것이오." 주유는 그래서 손책을 따라 횡강과 당리를 공격하여 모두 함락시켰다. 그리고 또 강을 건너 말릉을 공격하고, 작융과 설례를 격파시켰으며, 방향을 돌려 호숙과 강승을 공격하고 곡아로 진입하자 유요는 달아났으며, 손책의 병사는 이미 수만 명이 되었다. 그래서 손책은 주유에게 말했다. "나는 이 병력이면 오국과 회계군을 취하고 산월을 평정하기에 충분하오. 그대는 돌아가서 단양을 지키시오." 주유는 돌아왔다. 오래지 않아, 원술이 주상을 대신할 태수로 사촌 동생 원윤을 보냈으므로 주유는 주상과 함께 수춘으로 돌아왔다. 원술은 주유를 부장으로 임용하려고 했지만, 주유는 원술에게는 끝내 성취할 것이 없음을 보았기 때문에 거소현의 장이 되기를 구하여서 길을 빌려 강동으로 돌아가려고 했으며, 원술은 이에 동의했다. 그래서 주유는 거소에서 오로 돌아왔다. 이 해가 건안 3년(198)이다. 손책은 직접 주유를 영접하고 아장을 수여하고 즉시 병사 2천명과 기마 50필을 주었다. 주유는 당시 24세였고, 오군 사람들은 모두 그를 주랑이라고 불렀다.
주유의 은덕과 신의는 여강에서 빛났다. 손책은 그를 지방으로 내보내 우저를 지키도록 하고, 후에 춘곡현의 장을 겸임하도록 했다. 오래지 않아, 손책이 형주를 취하려고 할때, 주유를 중호군으로 임명하고 강하태수를 겸임하도록 했다. 주유는 손책을 따라 환현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당시 교공의 두 딸을 포로로 잡았는데, 모두 절색이었다. 손책 자신은 대교를 아내로 맞이했고, 주유는 소교를 아내로 맞이했다. 또 주유는 심양으로 진격하여 유훈을 격파시켰으며, 강하를 토벌하고 예장과 여릉으로 돌아와 평정하고 파구에 남아서 지켰다. 5년(200)에 손책이 죽자, 손권이 일을 통솔했다. 주유는 병사를 이끌고 조상하러 갔다가 오에 머물러 중호군으로써 장사 장소와 함께 모든 일을 관장했다. 11년(206), 그는 손유 등을 인솔하여 마둔과 보둔 두 주둔지를 토벌하고, 그곳의 우두머리의 목을 베어 나무에 매달았으며, 1만여 명을 생포해 군사를 돌려 궁정을 지켰다. 강하태수 황조가 부장 등룡을 보내 병사 수천 명을이끌고 시상으로 진입하도록 했다. 주유는 추격하여 토벌했으며, 등룡을 생포해 오군으로 보냈다.
13년(209) 봄, 손권이 강하를 토벌하고, 주유를 전부대독으로 임명했다. 이 해 9월, 조조가 형주를 침공하자, 유종은 수하의 사람들을 들어 투항했다. 조조는 그의 수군을 얻게 되었으며, 그 결과 수병과 보병은 수십 만 명이나 되었다. 오의 장수들은 이 소식을 듣고 모두 두려워 했다. 손권은 신하들을 불러 모아서 계책을 물었다. 논의하는 자들은 모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조는 승냥이와 호랑이처럼 사악하고 무섭습니다. 그런데 그는 한나라 승상의 명의에 기대어 천자를 끼고 사방을 정벌하고 움직이면서 조정의 뜻이라고 하는데, 오늘 그에게 저항한다면 일은 더욱 순조롭지 못할 것입니다. 게다가 장군에게 있어서 유리한 형세로 조조를 대항할 수있습니다. 유표는 수군을 훈련시켰고 몽충이나 투함이 수천 대 인데, 조조가 이것을 모두 포획하여 장강가에 늘어놓고 아울러 보병도 움직여 수군과 육군이 함께 내려온다면, 이때는 장강이 위험하게 되고, 이미 우리와 공동으로 차지하게 될것입니다. 그러나 쌍堧?세력은 현저하게 차이가 나므로 또 논할 수없습니다. 가장 좋은것은 그를 맞아들이는 것이라고 저희들은 생각합니다." 주유가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조조는 비록 한나라 승상의 명의에 의탁하고 있지만, 사실은 한나라 조정의 적입니다. 장군은 신명스런 무위와 웅대한 재략을 갖고 있고, 겸하여 아버지와 형의 위세이 기대어 강동을 할거하고 수천 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병사는 정예이고 식량은 풍족하며 영웅들은 공업을 이루기를 원하고 있으므로, 오히려 웅당 천하를 횡행하며 한왕조를 위해 잔폭하고 더러운 것을 제거할 때입니다. 게다가 조조는 직접 사지로 보내져왔는데, 영접할 수 있겠습니까? 장군을 위해 헤아려보기를 요청합니다. 지금 북방의 영토를 이미 안정시켰고 조조에게 내부의 근심이 없어 시일을 늘려 오랫동안 전쟁터로 와서 싸울 수 있다고 하더라도 또 우리와 수면 위에서 싸워 이길 수 있습니까? 지금 북쪽 땅은 아직 평안하지 못하고, 게다가 마초와한수가 오히려 동관 서쪽에 있으면서 조조의 후환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병을 버리고 수군에 기대어 오나 월과 다투는 것은 본래 중원에서는 잘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또 현재는 날씨가 추워 말에게 먹일 꼴이 없고, 중원의 병사들에게 멀리 강호의 땅을 건너도록 하였으므로 물과 땅에 익숙지 못하여 반드시 질병이 생길 것입니다. 이러한 네 가지는 용병의 근심거리입니다.그러나 조조는 함부러 행동했습니다. 장군께서 조조를 잡으려고 한다면, 오늘이 마땅합니다. 저는 정예병사 3만 명을 받아서 하구로 나아가 주둔하기를 원합니다. 장군을 위해 조조를 무찌를 것을 확신합니다." 손권이 말했다. "사악한 적이 한왕실을 페하고 스스로 황제로 일어서러고 한 것은 오래되었소. 단지 원씨 두명, 여포, 유표와 남나을 꺼러했을 뿐이요. 지금 몇몇 영웅은 이미 소멸되었고, 오직 나만 여전히 남아있소. 나는 사악한 적과 양립할 수 없는 형세요. 그대가 당연히 공격해야 한다고 한 것은 나의 생각과 매우 부합하는 것이며, 이는 하늘이 그대를 나에게 준 것이오." 이때 유비는 조조에게 격파되어 병사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강을 건너려고 생각하였는데, 당양에서 노숙과 만나 함께 상의하고 계획하여 나아가 하구에 주둔하고는 제갈양을 파견하여 손권을 알현하도록 했다. 손궈은 곧 주유와 정보 등을 파견하여 유비와 힘을 합쳐 조조에게 대항하도록 했다. 두 군대는 적벽에서 만났다. 당시 조조의 병사들은 이미 질병에 걸려 있었으므로, 처음 한 차례 싸움에서 조조의 군대는 패하여 장강 북쪽에 주둔했다. 주유 등은 남쪽 해안가에 있었다. 주유의 부장 황개가 말했다. "지금 적군은 많고 아군은 적기 때문에 오랜 시간 싸우는 것은 곤란합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조조 군대의 배는 앞뒤가 서로 이어져 있으므로 불을 질러 달아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유는 몽충과 투함 수십 척을 취해 풀을 가득 싣고 그 가운데에 기름을 부어 휘장을 씌우고, 위에 아기를 세웠다. 그리고 먼저 편지를 써서 조조에게 거짓으로 항복한다고 알렸다. 또 날랜 배를 미리 준비하여 각각 큰 배의 뒤에 매고 순서대로함께 전진했다. 조조 군대의 관리와 병사들은 모두 목을 빼고 바라보며 황개가 투항한다고 말했다. 황개는 여러 배를 풀어 동시에 불을 질렀다. 당시는 바람이 매우 사나웠으므로 해안 위의 진여에까지 불길이 번졌다. 순식간에 연기와 불꽃이 하늘 가득 퍼졌고, 불에 타죽거나 익사한 병사와 말의 수는 헤아릴수 없었다. 조조의 군대는 결국 패하여군사를 돌려 남군을 지켰다. 유비는 주유 등과 함께 또 힘을 합쳐 추격했다. 조조는 조인 등을 남겨 강릉성을 지키도록 하고, 자신은 곧장 북쪽으로 돌아갔다. 주유와정보는 또 남군으로 전진하여 조인과 서로 대치하였는데, 각군은 대강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병사들이 아직 싸움을 하기도 전에 주유는 감녕을 보내 공격하며 포위해 들어갔다. 감녕은 주유에게 위급함을 알렸다. 주유는 여몽의 계획을 사용하여 능통을 남겨 그 뒤를 지키도록 하고, 자신은 여몽과 함께 감녕을 구하러 갔다. 감녕의 포위가 풀린 후, 주유는 강을 건너 북쪽 해안에 주둔하고 조인과 대전할 날을 정했다. 주유는 직접 말을 타고 싸움을 지휘하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오른쪽 겨드랑이를 맞아 상처가 대단히 심했으므로 곧 바로 돌아왔다. 후에 조인은 주유가 일어나지 못하고 누워있다는 소식을 듣고 병사를 이끌고 진영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주유는 직접 일어나서 군영을 시찰하고 관리와 병사들을 격려했다. 조인은 이 때문에 후퇴했다. 손권은 주유를 편장군으로 제수하고, 남군태수를 겸임하도록 했다. 하준·한창·유양·주릉을 그의 봉읍으로 삼게 하고, 강릉에 주둔하여 지키도록했다. 유비는 좌장군의 신분으로 형주목을 겸임하고 공안에 주둔했다. 유비가 경까지 와서 손권을 알현했을 때, 주유가 상소를 올려 말했다. --유비는 용맹하여 영웅다운 자태를 갖고 있으며, 관우와 장비처럼 곰과 호랑이 같은 장수를 끼고 있으므로 틀림없이 오랫동안 몸을 굽혀 다른 사람의 지배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제 생각으로 가장 좋은 방법은 유비를 오군으로 옮겨 놓고 그를 위해 궁전을 성대하게 짓고 미녀와 진귀한 완구를 많이 주어서 그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하고, 관우와 장비 이 두 사람을 나누어 각기 한쪽에 배치하고 저같은 자로 하여금 그들을 지휘하여 싸우게 한다면, 대사는 안정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토지를 나누어 주어서 그들이 기반을 세우는 것을 도와주고, 이 세 사람을 모아 함께 변방 땅에 있도록 한다면, 아마 교룡이 구름과 비를 얻어서 끝내 연못 속의 물건이 안되는 것과 같이 될 것입니다.
손권은 조조가 북방에 있기 때문에 응당 영웅들을 널리 촙이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 유비를 끝까지 제압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주유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당시 유장은 익주목이 임명되었는데, 밖으로는 장로의 약탈과 침략이 있었다. 주유는 경으로 가서 손권을 알현하고 말했다. "지금 조조는 방금 좌절과 고통을 당하여 마침 마음속으로 걱정하고 있으므로 아직은 장군과 병사를 이어서 서로 싸우는 일은 할 수 없습니다. 저는분위장군과 함께 촉을 취하러 나가기를 원합니다. 촉을 얻고 장로를 병합한 후에 분위장군을 남겨 그 땅을 단단히 지키도록 한다면, 마초와 동맹관계를 맺을 것입니다. 저는 돌아와 장군과 함께 양양을 점거하여 조조를 추격한다면, 북방도 도모할 수 있습니다." 손권은 주유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러나 주유는 강릉으로 돌아와 행장준비를 하고 파구를 지날 때 병사했다. 당시 그는 36세였다. 손권은 소복을 입고 애도하였는데, 주의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주유의 영구가 오나라로 돌아오자, 손권은 또 무호로 가서 맞이했으며, 모든 비용을 일체 공급했다. 후에 명령을 내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인이 된 장군 주유와 정보의 집안에 있는 손님들에게는 부세와 요역을 묻지 말라."
당초 주유는 손책에게 좋은 친구로 대우받았고, 태비 또한 손권으로 하여금 형의 예로써 받들도록 했다. 이때 손권의 직위는 장군이었고, 그의 부장들과 빈객들의 그에 대한 예절은 오히려 간단했지만, 주유만은 유독 일찍부터 존경을 다하여 신하로써의 예절을 지켰다. 주유는 성격이 너그럽고 넓어서 대체로 인심을 얻었는데, 오직 정보와는 화해롭지 못했다.
주유는 어렸을 때부터 음악에 정통하였다. 비록 술을 많이 마신 후일지라도 연주한 음악에 틀린 부분이 있으면 주유는 반드시 그것을 알아냈고, 그것을 알아내면 반드시 돌아보았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가요에서 이렇게 말했다. '곡에 잘못된 점이 있으면, 주랑이 돌아본다.'
주유는 아들 둘에 딸 하나가 있었다. 딸의 배필은 태자 손등이었다. 아들 주순은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여 기도위로 제수되었고 주유의 풍모가 있었는데, 요절했다. 주순의 동생 주윤은 처음에 흥업도위로 임명되었고 종실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으며, 병사 1천 명을 인솔하여 공안에 주둔했다. 황룡원년(229), 도향후로 봉해졌으며, 후에 죄를 범하여 여릉군으로 옮겼다. 적오 2년(239), 제갈근·보즐이 이름을 나란히 하여 상소를 올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인이 된 장군 주유의 아들 주윤은 지나친 칭찬을 받아 장군으로 봉해짐을 받았었습니다. 그는 특별히 두터운 대우를 받을 수 없을때는 공을 세우려고 생각하였으나, 도리어 방종하고 사용에 집착하여 매우 빨리 죄를지어 처벌을 초대하게 되었습니다. 신들의 사사로운 생각으로는, 주유는 과거 총애와 신임을 받았고, 안으로 들어오면 심복이 되었고, 밖으로 나가면 보좌하는 장수가 되었으며, 명을 받아 출정하면 죽음을 보고 돌아오는 것처럼 했습니다. 때문에 오림(적벽)에서 조조를 패배시키고, 영도(강릉)에서 조인을 도망치게하여 국가의 위험과 은덕을 떨쳐 전국이 진동하였으며 우매한 만형 중에 복종하지 않는 자가 없도록 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주의 방숙, 한의 한신인 영포일지라도 진실로 그를 뛰어 넘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대체로 적군을 꺾고 국가의 어려움을 막아낸 신하로서 옛날부터 제왕들에게 귀하게 여겨지고 중요시되지 않은자는 없었습니다. 때문에 한고조는 작위를 봉하는 서약서에서 말하기를, '설사 황하가 허리띠처럼 되고, 태산이 마모된 돌처럼 되더라도 그들의 봉국은 영원히 존재하도록 하여 후배 자손들에게 전하도록 한다'고 했습니다. 아울러 붉은 글로써 맹서 의식을 융숭히 하고, 종묘속에 넣어 두고 영원히 전해지게 했습니다. 이것은 공신의 후배들로 하여금 대대로 계승하여 자손뿐만 아니라 더욱 먼 후대까지도 관심을 기울려 신하의 공덕에 보답하고 표창하려는 것입니다. 간절하게 이와 같은 경지에 이르려고 하는 것은 후세의 사람들에게 권하고 경계하여 나라를 위해 충성하는 신하가 되어 죽어도 후회가 없도록하려는 것입니다. 하물며 주유가 죽은지 오래되지 않았는데, 그의 아들 주윤을 강등시켜 평민이 되게 하였으니, 더욱더 슬픕니다. 저희들의 생각으로는, 폐하께서는 고대의 일을 고찰하여 정사를 영명하게 처리하며, 제후국을 일으키고 후계자를 세우는 것을 매우 중시하고 있으므로 주윤을 위해 청하니, 그의 죄를 사면시켜 주시고 병사들을 돌려주고 작위를 회복시켜 주어서 아침을 잘못알린 닭으로 하여금 다시 한 번 울 수 있도록 하고, 죄지은 신하도 이후에 효락을 펼 수 있도록 하여 주십시오. 손권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심복이 되어 이전에공을 세우고 나의 함께 협력하여 일을 한 자 중에는 주공근이 있었는데, 확실히 잊지 못하오, 옛날 주윤이 나이가 어렸으며, 처음에는 공로가 없었는데도 정예 병사를 받아 지휘하고 왕후 장군의 작위로 봉해진 것은 주공근을 생각하여 주윤에게 미쳤던 것이오. 그런데 주윤은 이러한 것에 기대어 주색에 빠져 스스로 방자하였으며, 앞뒤로 몇 차례 말하여 깨우치게 하려고 하였지만, 일찍이 고친 일이 없었소. 나와 주공근과의 정의는 당신들 두 사람과의 것과 똑같은데, 주윤이 성취하는 것이 있기를 바라는 심정이 어찌 멈춰 있겠소? 주윤의 죄악을 구명하여 즉시 돌아오지 못하도록 하고 있는 것은 그로 하여금 고통을 받게 하여 스스로 알도록 하려는 것이오. 지금 당신들 두 사람이 한고조의 황하와 태산의 맹서를 간절히 인용하니, 나는 부끄럽소. 비록 나의 덕행은 한고조와 같았기 때문에 여러분들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오. 주공근의 자식이고 두 사람이 중간에 있으니, 고치도록 할 수 있다면 또한 무슨 근심이 있겠소!" 제갈근과 보즐은 누차 표를 올렸고, 주연과 전종 또한 함께 진술하여 요청하였으므로 손권은 비로서 이를 허락했다. 이때 주유는 병으로 죽었다.
주유의 조카 주준 역시 주유의 탁월한 공로 때문에 편장군으로 임명되었고, 관리와 병사 1천 명을 인솔하게 되었다. 주준이 죽자, 전종은 표를 올려 주준의 아들 주호를 장수로 임명하려 했으나 손권이 말했다. "이전에 조조를 달아나게 하고 형주를 개척한 것은 모두 주공근이 한일이니, 영원히 그를 잊지 않을 것이다. 처음 주준의 사망 소식을 들었을때 주호를 임용하려고 했지만, 주호의 품성과 행실이 음험하다는 것을 들었다. 그를 관리로 임명하면 화란을 만들 것이기 때문에 이 생각을 멈추었다. 그러나 내가 주공근을생각하고 있는 것이 어찌 그침이 있겠는가?"
감녕전----------------감녕은 자가 흥패이고 파군 임강 사람이다.그는 어릴적부터 기개가 있었고 유협을 좋아하였으며,무뢰한을 모아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들은 무리를 이뤄 서로 따랐고,활과 화살을 지니고 깃털을 등에 꽃고 방울을 허리에 찼다. 백성들은 방울 소리를 듣고 즉시 감녕임을 알았다. 사람들과 만나거나 그 성의 지방 관원과 만날 경우에,융숭하게 접대하면 곧 그와 즐겁게 교재했지만,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수하에 있는 자들을 풀어 그의 재물을 빼앗았다. 그래서 지방 관원 중에는 그의 박해를 받아 재산을 내놓아야 하는 부담이 있게 되었다. 이런 행위는 20여 년 간 지속되었다.
이후에 그는 이런 행위를 그치고 다른 사람의 물건을 빼앗지 않았으며,제자백가 책을 약간 읽고서 곧 유표에게로 가서 의탁했다. 그래서 남양에서 살았지만,나아가 임용되지는 않았다. 후에 그는 몸을 돌려 황조에게 의탁했다. 황조 또한 보통 사람으로서 그를 공양했다. 그래서 감녕은 오나라로 귀순했다. 주유와 여몽은 모두 그를 천거했다. 손권은 그에게 옛 신하와 같이 특별한 대우를 해주었다. 감녕이 계책을 진술하며 말했다. '지금 한나라는 매일매일 쇠미해져 가고 있고,조조는 더욱더 교만해져 끝내는 제위를 찬탈하려고 할 것입니다. 남쪽의 형주 땅은 산세가 편리하고 강과 하천의 흐름이 원활하니,진실로 우리 나라 서쪽의 유리한 형세입니다. 저는 이미 유표를 관찰했는데,그의 생각은 원대하지 않고,자식들은 또 모자라서 기업을 계승하여 전할 수 있는 자가 아닙니다. 공께서 이것을 일찍 살펴보기만 한다면 조조의 뒤에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 토지를 도모하는 계책은 응당 먼저 황조를 취하는 것입니다. 황조는 지금 연로하여 혼미함이 매우 심하고,재물과 식량은 모두 부족하며,수하의 사람들은 그를 속이고 재화를 탐하며,부하 장수들의 이익을 빼앗아 장수들의 마음에는 원한이 있고,배나 무기는 버려진 채 정리되어 있지 않으며,농경에는 게으르고 군대에는 엄한 규율이 없습니다. 공께서 만일 지금 간다면 그들의 패배는 필연적인 것입니다. 일단 황조의 군대를 파괴하고 북을 치며 서쪽으로 진군합니다. 서쪽에서 초관을 점령하여 대세를 넓히면 즉시 점차적으로 파군과 촉군을 도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손권은 그의 의견을 칭찬하고 받아들였다.장소는 그 당시 자리에 있었는데,그를 비난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나라는 현재 형세가 위급한데,만일 군대가 과감히 출동한다면 아마도 반드시 어지럽게 될 것이오.` 감녕은 장소에게 말했다. `나라에서는 소하의 임무를 그대에게 맡겼거늘,그대는 남아서 지키면서 혼란을 걱정하고 있으니,어찌 고인을 배우기를 바라시오?` 손권은 술을 들어 감녕에게 권하며 말했다. '흥패,올해 출정하여 토벌하는 것은 이 술과 같은 것이니,결정은 그대에게 맡기겠소.그대가 단지 계략을 짜는 일에 힘써 반드시 황조를 이기도록 한다면 그대의 공이오.어찌 장장사의 말을 의심하시오?'손권은 그래서 서쪽으로 나아갔는데,과연 황조를 체포했고,그의 병사들을 모두 붙잡았다. 손권은 곧 감녕에게 병권을 주고 당구에 주둔하도록 했다. 이후에 감녕은 주유를 수행해 오림에서 조조를 대항하여 무찔렀다. 남군에서는 조인을 공격했지만,공략시키지는 못햇다. 감녕은 먼저 곧장 이릉으로 진군하여 취할 것을 건의했다. 그는 가서 성을 얻었으며,들어가서는 고수했다. 그 당시 수하에는 수백 명의 병사가 있었는데,새로 얻어서 1천명을 채웠다. 조인은 곧 5,6천 명을 시켜 감녕을 포위하도록 했다. 감녕은 며칠간의 계속된 공격을 받았으며,적은 높은 누각을 세우고 성 안으로 비가 내리는 듯이 화살을 쏘았다. 병사들은 모두 두려워했다. 오직 감녕만은 태연자약하게 담소했다. 사자를 파견하여 주유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주유는 여몽의 계책을 써서 장수들을 인솔하여 포위를 풀었다. 후에 노숙을 수행하여 익양을 진무시키고 관우에게 대항했다. 관우는 3만 명의 병사 중 직접 정예병사 5천 명을 선발하여 상류 10여 리의 얕은 여울에 배치하고 밤을 틈타 냇물을 건너려 한다고 말했다. 노숙이 장수들과 상의할 때 감녕은 당시 3백 명의 병사만 있었으므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다시 저에게 5백명을 증원시켜 줄 수 있다면,제가 가서 그에게 대항하겠습니다. 관우는 제가 기침하여 가래침을 뱉는 것을 듣고 감히 물을 건너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물을 건너면 저의 포로가 될 것입니다.` 노숙은 곧바로 병사 1천명을 선발하여 감녕에게 더해 주었다. 감녕은 그날 밤에 갔다. 관우는 이 소식을 듣고 건너지 못한 채 머물러 있으면서 땔나무를 엮어 진영을 만들었는데,오늘날 이것을 관우뢰라고 부른다. 손권은 감녕의 공로를 칭찬하고 서릉태수로 제수했으며,양신.하치 두 현을 통솔하도록 했다. 후에 감녕은 환현 공격에 참가해 승성독에 임명됐다. 감녕은 직접 줄을 잡고 성벽을 기어올라가 장사들의 선봉이 되어 결국은 주광을 격파시키고 포로로 잡았다. 공로를 평가함에 있어서는 여몽이 가장 컸고,감녕이 그 다음이었으므로 절충장군으로 제수되었다. 이후에 조조가 유수로 출병했을 때,감녕은 전부독이 되어 병사를 출동시켜 적의 앞 진영을 쳐부수라는 명령을 받았다. 손권은 특별히 쌀과 술,많은 안주를 하사했다.감녕은 이것을 수하 1백명에게 내려 먹도록 했다. 다 먹은 후,감녕은 먼저 은 술잔에 술을 따라서 자기가 두 잔을 마시고,그런 연후에 수하의 도독에게 따라 주었다. 도독은 땅에 엎드려 있었으므로 그 즉시 받을 수 없었다. 감녕은 칼을 꺼내 무릎 위에 놓고 꾸짖어 말했다. `그대가 폐하에게 인정받았다고 하나,어찌 나와 함께 할 수 있소? 나는 여전히 죽음을 아끼지 않는데,그대는 어찌하여 유독 죽음을 아끼시오? 도독은 감녕의 안색이 사나운 것을 보고 즉시 일어나 공손히 술을 받았으며,그런 연후에 병사들에게 각기 한 잔씩 따라 주었다. 이경이 되었을때,나뭇가지로 위장하고 적을 쳐부수러 갓다. 적은 깜짝 놀랐으며,끝내는 퇴각했다. 감녕은 이 때문에 더욱 중시되었고,병사 2천명이 증원되었다. 감녕은 비록 사납고 살생을 좋아했지만,호방하고 맑은 성정과 계략이 있었다. 그는 재물을 경시하고 장사들을 존중했다. 유능한 인물을 후하게 대우했으며 병사들을 훈련시켰다.병사들 또한 기꺼이 그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건안 20년(215),감녕은 합비 공격에 참가했는데,마침 역병이 유행하여 군대는 모두 물러났고,오직 수레 아래의 호사 1천명과 여몽.장흠.능통 및 감녕이 손권을 따라 소요진 북쪽에 있엇다. 장료는 멀리서 이러한 모습을 관찰하고 즉시 보병과 기병을 이끌고 급습하였다. 감녕은 적에게 화살을 쏘았으며,능통 등도 필사적으로 싸웠다. 감녕은 군악대에게 무엇 때문에 북을 치고 피리를 불지 않느냐고 거세게 소리질렀다. 그는 웅장하고 강인했다. 손권은 특별히 그를 칭찬했다. 감녕의 주방에서 일하는 어린이가 일찌기 허물이 있자 여몽에게로 달려가 투항했다. 여몽은 감녕이 그 아이를 죽일 것이 두려웠기 때문에 즉시 돌려보내지 않았다. 후에 감녕이 예물을 갖고 여몽의 모친을 배알하고 직접 모친과 당을 오른 후에야 비로소 주방의 어린이를 감녕에게 돌려보냈다. 감녕은 여몽에게 그 아이를 죽이지 않겠다고 응답했다. 잠시후,배로 돌아오자 그 아이를 뽕나무에 묶어놓고 직접 활을 당겨 쏘아 죽였다. 일을 마친 후,뱃사람들에게 명하여 배의 닻줄을 내리도록 하고,옷을 벗고 배 안에 누웠다. 여몽은 매우 노여워하며,북을 쳐서 병사들을 모아 배로 가서 감녕을 공격하려고 했다. 감녕은 이 소식을 들었지만,고의로 누운 채 일어나지 않았다.여몽의 모친은 맨발로 달려 나와서 여몽에게 이렇게 권했다. `황상께서는 너를 육친처럼 대우하고 국가의 대사를 너에게 위탁하셨는데,어떻게 사사로운 노여움 때문에 감녕을 공격하여 죽이려 하느냐?감녕이 죽은 날,설령 황상께서 힐문하지 않더라도 네 행동이 신하된 자로서 법도에 부합되겠느냐.`여몽은 평소 지극한 효자였으므로 어머니의 말을 듣고는 즉시 허물을 명백히 하고 마음속의 원한도 사그라들었다.그는 직접 감녕의 배로 와서 웃으며 이렇게 외쳤다. `흥패,어머니께서 그대를 식사에 초대하셨으니 빨리 올라오시오!` 감녕은 눈물을 흘리고 흐느끼며 말했다. `그대를 저버렸소` 감녕은 여몽과 함께 돌아와 여몽의 어머니를 보고 온종일 즐겁게 지냈다. 감녕이 죽은 후,손권은 매우 애통해했다. 아들 감괴는 죄를 범하여 회계군으로 이주되었다가 오래지 않아 죽었다.
태사자전--------------------태사자는 자가 자의이고 동래군 황현 사람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공부하기를 좋아했으며,군의 관소에 임명되어 주조사가 됐다. 마침 군과 주(청주)사이에 틈이 벌어져 옳고 그른 것이 분명하지 않게 되자 조정에서는 먼저 보고하는 쪽의 것을 정확한 것으로 여겼다. 당시 주목이 군수를 탄핵하는 장이 이미 발송되었고,군수는 자신이 주목을 탄핵하는 장이 늦게 도착하게 될까 걱정이 되었으므로 이 일을 할 수 있는 자를 찾았다. 당시 태사자는 21세였는데,선발되어 수도로 가게 되었다. 그는 낮이고 밤이고 길을 갔다.그는 낙양에 이르러 공거(궁궐 남쪽에 위치하여 장이나 헌상품을 받는 곳)의 문까지 왔을 무렵,주의 관리가 막 표를 갖고 가려는 것을 발견했다. 태사渼?관리에게 물었다. `당신은 장을 올리려고 하는가?` `그렇소.` 태사자가 다시 질문했다. `장은 어디 있소?` 관리는 말했다. `수레 위에 있소.` 태사자가 말했다. `장의 겉봉에는 틀린 곳이 없소?가져와 보여주시오.` 관리는 태사자가 동래 사람임을 알지 못했기 떄문에 장을 갖다 주었다.태사자는 벌써 가슴속에 칼을 품고 있었으므로,장을 받자마자 찢어 버렸다.관리는 펄쩍 뛰며 큰 소리로 말했다. `어떤 사람이 나의 장을 찢었다!` 태사자는 그를 수레 중간으로 데려가 이렇게 말해 주었다. `만일 당신이 나에게 장을 주지 않았다면,나 역시 장을 찢을 수 없었을 것이오. 때문에 길흉화복이 생길 가능성은 똑같아졌으니,나 혼자만이 죄를 받지는 않을 것이오.어찌 침묵을 지키며 함께 나가서 삶을 죽음과 바꾸는 것과 같겠소.함께 가서 형벌을 받을 필요는 없소.` 관리가 말했다. `당신은 군을 위해 나의 장을 훼손시켜 이미 임무를 완수했는데,또 달아나려고 하시오?` 태사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당초 군수의 파견을 받은 것은,단지 장이 바쳐졌는지 아닌지를 와서 보면 되는 것이었소.나는 뜻이 너무 지나쳐 비로소 장을 훼손시키게 되었소. 지금 돌아가면,또한 이 떄문에 죄를 추궁받게 될 것이 두렵기 때문에 함께 떠나려고 하는 것이오.` 관리는 태사자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고,그날 함께 떠났다.태사자는 관리와 함께 성을 나왔지만,기회를 봐서 돌아가 군수의 장을 올렸다.
주목은 이 일을 들은 후,다시 관리를 보내 장을 올렸다.담당관리는 앞서 장이 왔다는 이유로 다시 수리하지 않았다. 주는 이 사건에 대해서는 불리한 처분을 받았다.이 일로부터 태사자는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지만,주로부터는 미움을 받게 되었다.그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 곧 요동으로 피해 갔다. 북해의 상 공융은 이 일을 듣고 태사자를 특이한 인물로 생각하고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그의 어머니를 위로하고,아울러 예물을 보냈다.
이 당시 공융은 황건적이 침입하여 폭동을 일으켰기 때문에 군대를 출동시켜 도창에 주둔했다가 적 관해에게 포위되었다. 마침 태사자는 요동에서 돌아왔다. 그의 어머니는 태사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는 공북해를 일찌기 만난 적이 없을 것이다.네가 떠난 후,성심성의껏 나를 돌봐주고 위로해 주었는데,오랜 친구 이상이었다.지금 그가 적들에게 포위되어 있으니,너는 응당 그를 도우러 가야만 한다.` 태사자는 사흘간 머문 후,혼자 걸어서 도창까지 갔다. 그떄는 포위가 삼엄하지 않았으므로 어두운 밤을 틈타 성으로 들어가 공융을 만날 수 있었다. 그래서 병사들을 내어 적을 격파시키기를 원했다. 공융은 그의 의견을 듣지 않고 외부의 구원병을 기다리려고 했다. 그러나 구원병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포위망은 나날이 좁혀졌다. 공융은 평원국의 상 유비에게 긴급함을 알리려고 했지만,성 안의 사람들 중에 나갈 만한 자가 없었다.태사자가 스스로 이 임무를 맡을 것을 청했다. 공융이 말했다. `현재 적들의 포위는 매우 엄밀하며,사람들은 모두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소.그대의 뜻은 비롯 장하지만,실제로 어려움이 없겠소?
태사자가 공융에게 대답했다. `과거 당신께서는 제 노모에게 마음을 기울여 주었습니다. 노모께서는 이러한 대우에 감격하였고,당신의 위급한 상황을 풀어주도록 저를 보냈습니다. 이것은 저에게도 취할 만한 점이 있소 장래에 반드시 이익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지금 사람들은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지만,저 역시 불가능하다고 말한다면,어찌 당신이 두터운 사랑으로 돌봐주신 정의와 노모께서 저를 보내신 뜻이겠습니까? 사태는 이미 황급해졌고,당신이 의심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공융은 비로소 태사자의 말대로 하기로 했다. 그래서 태사자는 가볍게 여장을 꾸리고 밥을 배불리 먹고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동개를 두르고 활을 손에 쥐고 말에 올라탔다. 그리고 두 명의 기병에게 자신의 뒤를 바짝 따라오도록 하고,각각에게 고삐를 하나씩 쥐고 성문을 열고 곧장 나가도록 했다. 성밖에서 포위하고 있어 양쪽 사람들은 모두 놀라며 병마를 동시에 출동시켰다. 태사자는 말을 성벽 아래 참호 안으로 끌고가 기병이 잡고 있던 고삐를 각각 하나씩 세우고 나서 참호 속에서 나아 활을 쏘았다.화살을 다 쓰자 곧장 성문으로 들어왔다. 다음날 아침,또 이와 같이 했다. 포위하고 있던 사람들중 어떤 이는 몸을 일으키고 어떤 이는 누워 있었다. 태사자는 또 고삐를 세우고 화살을 전부 쏜 후에 다시 성으로 들어갔다. 사흘째 되는 아침에도 또 나와서 이와 같이 했는데,또 일어나는 자가 없었다. 그래서 말에 채찍질을 하여 직접 포위망을 뚫고 질주했다. 적이 이것을 발각했을 때에는 태사자는 벌써 빠져나갔고,또 활에 맞아 몇 사람이 죽었고,모두 활시위에 응하여 엎어졌기 때문에 감히 추격하는 자가 없었다.
그래서 평원국에 도착하여 유비를 설득하여 말했다. `저는 동래군의 미천한 사람으로,공북해와는 친척관계도 아니며 가까운 고향 사람도 아닙니다.오로지 명성과 지조로 마음을 이끌어 재앙을 나누고 근심을 함께 하는 뜻을 맺게 되었습니다.지금 관해가 포악한 행동으로 소란스럽게 하여 공북해는 포위되었고,고립되어 원조가 없어 아침 저녁으로 위험이 있습니다.당신의 인의의 명성을 갖고 있어 다른 사람의 위급함을 구할 수 있으므로,북해에서는 한마음으로 흠모하며 목을 길게 빼고 의지하고 있습니다.저로 하여금 날카로운 칼날을 무릅쓰고 두터운 포위망을 뚫고 구사일생 중에 당신에게 의탁하도록 한 것은 당신만이 그를 구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비는 공손히 대답했다. `공북해는 세상에 유비가 있음을 아는구나!` 즉시 정예병사 3천 명을 보내 태사자를 따르도록 했다.적은 병사들이 도착한다는 소식을 듣고 포위를 풀고 흩어져 달아났다. 공융은 구원을 받은 후,태사자를 더욱더 귀중하게 여겼다. 그에게 말했다. `그대는 나의 어린 시절 친구요.` 사태가 수습되자,태사자는 돌아와 그의 어머니에게 알렸고,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네가 공북해에게 보답하여 기쁘다.`
양주자사 유요는 태사자와 같은 군 사람이다. 태사자가 요동에서 돌아왔을 때에는 아직 서로 만난 일이 없었다. 오래지 않아 장강을 건너 곡아로 가서 유요를 만나려 했다.그곳에 도착하기 전에 마침 손책의 군대가 이르렀다. 어떤 사람이 유요에게 태사자를 대장군으로 임명할 만 하다며 권유했다.유요가 말했다. `내가 만약 자의를 쓴다면 허자장(허소)가 당연히 나를 비웃지 않겠소?`
그는 단지 태사자에게 적군을 정찰하도록만 했다. 당시 태사자는 독자적으로 기병 한 명과 출발하였다가 길에서 손책을 만났다. 손책은 기병 13명을 데리고 있었는데 모두 한당,송겸,황개의 무리였다. 태사자는 곧 앞으로 가서 싸우다가 마침 손책과 정면으로 대하게 되었다. 손책은 태사자의 말을 찌르고,태사자가 들고 있는 수극을 빼앗았다. 태사자 역시 손책의 투구를 빼앗았다. 이때 양쪽의 보병과 기병이 동시에 달려왔으므로 흩어지게 되었다. 태사자는 유요와 함께 예장으로 달려가야만 했지만,도중에 무호로 달아나 산 속에서 떠돌며너 단양태수라고 칭했다. 이때,손책은 이미 선성 동쪽을 평정시키고, 단지 경현 서쪽 여섯 현만 항복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태사자는 이러한 정세를 보고 경현까지 가서 주둔하여 둔부(군사적인 행정기구)를 세웠고,산월 사람들이 다수 귀속해 왔다. 손책은 직접 공격하여 토벌했다. 마침내 태사자는 포로가 되었다. 손책은 즉시 태사자의 결박을 풀어주고,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신정 때의 일을 기억할 수 있겠소?만일 그대가 나를 붙잡았다면 어떻게 했겠소? 태사자가 말했다.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손책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 `오늘 일은 응당 그대와 함께 축하해야 할 것이오.
손책은 그 자리에서 태사자를 문하독의 관리로 임명하고,오나라로 돌아와서는 병사를 주고,절충중랑장에 임명했다. 후에 유요가 예장에서 죽자,그 수하의 병사와 백성들 1만여 명은 의지할 곳이 없게 되었다. 손책은 태사자에게 가서 그들을 위로하도록 명했다.주위 사람들은 모두 말했다. `태사자는 반드시 북쪽으로 가서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손책이 말했다. `자의가 나를 저버리면,또 누구와 함께 할 수 있겠소?` 그는 창문에서 태사자를 전송하고,그의 팔을 잡고 헤어지며 말했다. `언제면 돌아올 수 있소?` 태사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불과 16일이면 됩니다.` 태사자는 과연 기약한 대로 돌아왔다.
유표의 조카 유반은 매우 용맹하며,애현,서안등의 현을 여러 번 침공했다. 손책은 그래서 해혼,건창 및 주위의 여섯 현을 나누어 태사자에게 건창도위로 임명하고,해혼에 관소를 설치하도록 했으며,동시에 여러 병사들을 인솔하여 유반에게 대항하도록 했다.유반은 이로부터 자취를 감추고 다시는 침입하지 않았다. 태사자는 신장이 7척 7촌이며,아름다운 수염이 있었고,팔은 원숭이처럼 길며 화살을 잘 쏘아 백발백중이었다. 일찍이 손책을 따라 마둔과 보둔의 적을 토벌하여 갔었는데,그 중 어떤 적이 군영 안의 누각 위에서 욕?했다. 그 적은 손으로 누각의 기둥을 잡고 있었는데,태사자는 그를 향해 활을 쏘았다. 화살은 손을 관통하여 기둥에 박혔다. 군영을 밖에서 포위하고 있던 만 명의 병사들은 그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묘기는 이와 같았다. 조조는 그의 명성을 듣고 태사자에게 편지를 써서 상자 속에 편지를 봉했다. 그가 열어 보니 말하는 바가 없고,단지 당귀가 들어있을 뿐이었다. 손권이 정사를 통솔한 후,태사자에게 유반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이 있었으므로 남방의 일을 맡겼다. 태사자는 41세,건안 11년(206)에 세상을 떠났다.아들 태사향은 관직이 월기교위까지 올라갔다.
진수:평하여 말한다-태사자는 신의가 있고 의기가 열렬하여 옛 사람의 정의가 있었다.
손권전------------손권의 집안은 대대로 양자강 하류 부춘에서 살면서 호족으로서 명성이 있었다.
손권은 손자병법으로 유명한 춘추수대의 명장 손무자의 후손이라한다.
조조나 유비와 같이 동탁 토벌에 앞장서서 용맹하기로 이름을 떨친 손견의 둘째 아들이 바로 손권이다.
손견은 아들 넷을 두었는데 첫째가 손책이고 둘째가 손권이다.
그가 갓 태어 났을때 사람들은 그의 상을 보고 모두 크게 될 인물로 보았다고 한다.
그의 상은 '머리는 네모나고 입이 크며 눈은 파랗고 수염은 붉다'라고 여러 서적에 기록되 있다.
이런 상을 두고 혹자는 이민족의 피를 이어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사실로 믿기엔 어렵다.
손견이 죽고 그의 세력을 손책이 관할할 무렵 한 왕실에서는 멀리 떨어진 지방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공물을 바쳐오는 손책이 가상하여 유완을 사자로 보내 은사품을 내린 적이 있었다.
그 때 유완은 일행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손가의 자식들은 각기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타고난 운이 좀 모자란다.예외는 차남인 손권이다.
용모도 그렇고 골격도 그렇고 보통 사람이 아니다.그 사람은 제왕의 자리에 오를 상이다.
수명도 가장 길 것이다.'라고 하며 수행원에게 손권의 이름을 적어두도록 했다 한다.
삼국인 조조의 '위나라'나 유비의 '촉나라'에 비해 손권이 다스린 '오나라'는 그리 특이할 만한 것이 없다.
이는 '삼국지 연의'의 영향이 지대적인데 한의 정통을 유비의 '촉나라'로 본 나관중은 당연히 조조의 '위나라'를 촉의 반대입장에서 기술했고 따라서 그 두 나라는 부각되고 오나라는 뒤로 둘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 영향 때문인지 조조나 유비와는 다르게 손권의 능력을 형편없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로 알고 있다.
그러나 손권의 능력의 그 두 사람보다 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손책이 전쟁을 할때엔 항상 손권이 따라 다녔는데 손권은 형 손책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기묘한 계책을 내놓곤 했다고 한다.
그리고 조조나 유비는 창업에 능력을 발휘한 인물들이고 손권은 수성에 더 많은 능력을 발휘한 인물이다.
창업은 많은 우연과 실력이 조화되어 수성보다는 훨씬 화려한 것으로 보여지지만은 수성은 군주의 실력만으로 승부가 난다고 보아야 한다.
당연히 조조나 유비처럼 화려함은 없지만 광활한 땅에 비해 인구가 훨씬 적었던 강남에서 안전하게 나라를 이끈 손권의 능력은 그들과 비교해서 떨어지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조조와 유비와는 그 능력을 발휘한 방향이 틀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손권은 조조와는 27세 유비와는 21세의 나이차이가 있다 그 당시는 나이가 곧 연륜이고 경험이었을 시기이다.
숱한 전쟁을 격어오면서 조조와 유비가 쌓았을 경험에 비해 손권이 쌓은 경험이란 것은 극히 미미하고 보잘것 없는 것이다.
이런 차이를 극복한 손권의 능력은 더이상 거론하지 않겠다.
손권은 또한 인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관우의 죽음으로 격분한 유비가 대적인 위나라 대신에 소적인 오나라를 치려 할때 손권은 스스로 위나라에 신하가 된다.
어찌보면 그의 행동이 가볍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자기 하나를 낮춤으로써 결과적으로 오나라를 지킨 꼴이니 그의 인내를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오하(吳下)의 아몽'을 '괄목상대'할 여몽으로 재 탄생시킨 것은 손권의 힘이다.
손권은 그의 부하인 여몽과 장흠이 무예만을 믿고 학문에는 뜻이 없음을 알고 그 둘을 학문에 힘을 쏟도록 설득한다.
어디까지나 내 생각인데 그 들이 학문에의 자질이 전혀 없었다고 생각했더라면 손권 또한 그들을 설득하지 않았으리라 본다.
부하들의 자재력을 끌어 올린 손권의 선견지명에 놀라울 뿐이다.
위나라===============
순유전--------------순유전(荀攸傳)
순유(荀攸)의 자는 공달(公達)이고 순욱의 사촌이다. 조부 순담은 동한의 광릉태수를 지냈다. 순유는 어렸을 때, 고아가 되었다. 순담이 세상을 떠나자, 순담의 옛날 관리 장권이 순담의 묘를 지키기를 원했다. 이 때 순유의 나이 13세였으나, 이를 이상히 여겨 숙부 순구에게 물었다. ?이 관리는 얼굴빛이 보통 사람과 다르니 아마도 간사한 일을 꾸미고 있을 것입니다.? 순구가 깨달은 바 있어 곧 다그쳐 물어보니, 과연 그는 살인을 하고 도망친 자였다. 이 일이 있고 난 뒤 순구는 그를 다르게 보았다. 하진이 정권을 잡은 후, 순유를 비롯하여 국내의 명사 20여 명을 초빙했다. 순유는 조정으로 들어온 후, 황문시랑에 임명되었다. 동탁이 관동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군대가 일어나고, 동탁은 도읍을 장안으로 옮겼다. 순유는 의랑 정태, 하옹, 시종 종집, 월기교위 오경 등과 모의하여 말했다. ?동탁의 무도함은 걸주보다도 심하여 천하 사람이 모두 그를 원망합니다. 비록 그가 강한 군대에 의지하고 있을지라도 실제로는 한 명의 필부에 불과합니다. 지금 우리들이 직접 그를 죽여서 백성들을 위로하고 그런 다음에 효산과 함곡관을 점거하고, 천자의 명령릉 보좌함으로써 천하를 호령한다면 이는 춘추시대의 패자인 제나라 환공과 진나라 문공의 행동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공을 눈앞에 두고 발각되어 하옹과 순유는 투옥되었다. 하옹은 근심과 두려움에 자살했으나, 순유는 말을 할 때나 음식을 먹을 때 태연자약했다. 때마침 동탁이 살해되어 순유는 석방되었다. 순유는 관직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다시 공부에 초빙되고 높은 등금으로 추천되어 임성의 재상으로 승진되었으나. 가지 않았다. 촉한의 지세가 험준하고 굳세며 백성들도 풍부하고 많았으므로, 순유는 촉한의 태수가 되기를 원했으나, 길이 끊어져 이르지 못하고 형주에 머물렀다. 조조는 천자를 영접하여 도읍을 허창에 정한 후에 순유에게 편지를 보냈다. -지금 천하가 크게 혼란하니, 지모가 있는 선비가 마음을 수고롭게 할 시기이거늘 그대는 형주에 머무르면서 촉한의 변란을 관망하고 있으니, 너무 오래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 아니오?? 조조는 순유를 불러 여남태수로 삼았고, 얼마 후에 중앙으로 불러들여 상서로 임명했다. 조조는 평소부터 순유의 명성을 들었으며, 더불어 말을 나누고 나면 크게 기뻐하며 순욱과 종요에게 말했다. ?공달(순유)은 보통 사람이 아니오. 내가 그와 더불어 일을 계획하면 천하에 무슨 근심이 있으리오!? 조조는 그를 군사(軍師)로 삼았다.
건안 3년(198)에 순유는 조조가 장수를 정벌하는 데 따라나섰다. 순유가 조조에게 말했다. ?장수와 유표는 서로 의지하여 막강하게 되었는데, 장수는 떠도는 군대로 유표에게 걸식하고 있으니, 유표는 장기간 제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형세는 반드시 그들을 분리시킬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핍박하여 그들이 급학하게 되면, 형세는 반드시 서로 돕게 됩니다.? 그러나 조조는 순유의 건의를 듣지 않고 양성까지 진군하여 장수의 군대와 싸웠다. 장수가 위급해지자, 유표가 과연 그를 구하러 왔다. 조조 군대의 형세는 매우 불리했다. 조조가 순유에게 말했다. ?그대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르렀구려.? 조조는 즉시 날랜 병사를 갖추어 다시 장수와 싸워 크게 격파시켰다.
건안 3년에 조조가 완성에서 여포를 정벌하러 하비에 이르렀는데, 패배한 여포가 하비성으로 물러나 굳게 지키고 있었으므로, 그를 공격해도 함락시키지 못했고, 병사들이 피로하여 조조는 귀환하려고 했다. 순유와 곽가가 말했다. ?여포는 용감하지만 지모가 없으며, 지금까지 세 번 싸웠으나 모두 패배했으니 그의 날카로운 기운도 꺾여 있습니다. 삼국은 장수를 중심으로 하고 있는데 주장이 쇠약해지면 분투할 생각이 없게 됩니다. 지궁은 지모가 있지만 더디게 실행하며, 지금은 여포의 기력이 회복되기 이전이고 진궁의 계획도 정해지지 않았으니, 진격하여 급히 그를 공격하면 여포를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조조는 기수와 사수의 물줄기를 끌어 성으로 흘러가게 하였다. 성벽이 무너졌고 여포는 사로잡혔다.
건안 5년에 순유는 조조를 수행하여 백마에서 유연을 구했고 순유는 계책을 내어 안량을 참수했다. 이에 관한 기록은 <무제기>에 있다. 조조가 백마를 격파하고 돌아올 때, 치중대를 파견하여 황하를 따라서 서쪽으로 철수시켰다. 원소는 이 소식을 듣고 황하를 건너 추격하여 마침내 조조와 마주치게 되었다 여러 장수들은 모두 두려워하며 조조에게 치중 수레를 버리고 철수하여 군영을 지키자고 했는데, 순유가 말했다. ?이것은 적을 사로잡을 수 있는 것이거늘, 어찌 그것을 버릴 수 있습니까?? 조조는 순유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치중으로 적들을 유인하자 적은 그것을 차지하려고 다투어 진세가 혼란스러웠다. 조조는 즉시 보병과 기병을 출동시켜 크게 쳐부수고 원소 군대의 기병대장 문추를 베었다. 조조는 마침내 원소와 관도에서 서로 대치하게 되었다. 군대의 식량이 다 떨어져 갈 때, 순유가 조조에게 말했다. ?원소의 식량 운반용 수레가 조만간에 이를 것인데, 그것을 통솔하는 장수 한명은 날쌔지만 적을 경시하는 인물이니, 습격하면 격파시킬 수 있습니다.? 조조가 말했다. ?누구를 보내야 하오?? 순유가 말했다. ?서황이면 됩니다.? 조조는 곧 서황과 사환을 보내 습격하여 달아나게 하고 치중을 불태웠다. 때마침 허유가 항복해 와서, 원소는 순우경 등에게 병사 1만여 명을 이끌고 식량을 운반하는 것을 영접하도록 하였지만, 장수는 교만하고 병사들은 나태하므로 가히 공격하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조조의 모사들은 이 말을 듣고 모두 의심을 품었으나, 오직 순유와 가후만은 조조에게 허유의 계책을 받아들이라고 권했다. 조조는 곧 순유와 조홍을 남겨 본부 진영을 지키게 하였다. 조조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그들을 공격하여 순우경 등을 모두 베어버렸다. 원소의 장수 장합과 고람이 망루를 공격하여 태워버리고 투항하자, 원소는 마침내 군대를 버리고 도주했다. 장합이 항복해 오자, 조홍은 의심하며 과감히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순유는 조홍에게 말했다. ?장합은 원소가 자신의 계책을 쓰지 않아 분노하여 온 것인데 당신은 무엇을 의심하십니까?? 조홍은 곧 그를 거두었다.
7년(202)에 순유는 원담과 원상을 토벌하러 군대를 따라서 여양에 이르렀다.
이듬해(203)에 조조는 마침 유표를 토벌했고, 원담과 원상은 기주를 차지하려고 다투었다. 원담은 신비를 사자로 보내 항복을 구걸하며 구원을 요청하였으므로, 조조는 그것을 허락하려고 하면서 모든 신하들에게 물었다. 신하들은 대부분 유표가 강하므로 먼저 평정해야지, 원담과 원상은 걱정할 것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순유가 말했다. ?천하가 바야흐로 혼란하여 일이 생기려는데, 유표는 장강과 한수 일대를 앉아서 지키고 있으니, 그가 사방을 정복할 야심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원씨 일가는 네 주(기주,청주,유주,병주)의 땅을 근거지로 하여 무장한 병사 10만 명을 거느리고 있으며, 원소는 관대하고 후하여 많은 사람을 얻었는데, 만일 두 아들이 화목하게 그 아버지가 이룩한 대업을 지키려 한다면 천하의 환란을 가라앉을 것입니다. 지금은 형제끼리 증오하고 있으니, 이는 들들의 세력이 둘 다 온전하지 못한 것입니다. 만일 그 중의 하나가 합병되면 그들의 힘은 전일하게 되고, 힘이 전일하면 평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들의 혼란을 틈타 공격하여 취하면 천하는 평정될 것입니다. 이 때를 놓쳐서는 안됩니다.? 조조가 말했다. ?좋소.? 조조는 원담과의 화친을 허락하고, 마침내 군대를 돌려서 원상을 격파했다. 이후에 원담이 다시 모반하자, 순유는 대군을 따라가 남피에서 원담을 참수했다. 기주가 평정된 후, 조조는 순유를 책봉해야 한다는 표를 올렸다. -군사 순유는 처음부터 신을 도와 정벌할 때 수행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신이 앞뒤에서 많은 적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순유의 계책입니다. 조정에서는 순유를 능수정후에 봉했다.
12년(207)에 조정은 명을 내려 대내적으로 공로를 논하고, 상을 주었다. 조조가 말했다. ?충성스럽고 정직하며 치밀한 책략으로 나라의 안팎을 평안히 한 자는 문약이며, 그 다음은 공달이오.? 순유에게 식읍 4백 호를 주니 이전의 것과 합쳐 7백 호가 되었고 중군사로 전임시켰다. 조조가 위나라를 처음 세울 때, 순유를 상서령으로 임명했다. 순유는 생각이 깊고 치밀하며 지혜와 방책이 있었다. 조조가 정벌하러 가는 것을 수행한 이래, 항상 장막(帳幕) 속에서 계책을 모의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과 그 집안의 자제들도 그가 말하는 내용을 알지 못했다. 조조는 항상 일컬어 말했다. ?공달은 겉모양은 우둔하지만 내면은 지혜롭고, 밖으로는 겁이 많으나 안으로는 용감하며, 겉으로는 약하지만 안으로는 강하며, 자신의 장점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고 공적을 내세우지도 않았소. 그의 기지는 도달할 수 있지만 겉모양의 우둔함은 도달할 수 없으니, 비록 큰 지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우둔한 듯 하는 안자나 영무조차도 순유를 능가할 수는 없소.? 그 당시 문제는 동궁에 있었는데, 조조가 말했다. ?순공달은 모든 사람의 사표이니, 너는 마땅히 온 힘을 다해서 그분을 예의로써 공경해야 한다.? 순유가 병에 걸린 적이 있었는데, 조조는 문병을 가 침상 아래에서 혼자 배례하였으니, 순유가 존경과 특별한 대우를 받은 것은 이 정도였다. 순유는 종요와 절친했는데, 종요가 말했다. ?나는 매번 행동하고자 하는 것이 있을 때, 되풀이하여 생각하며 스스로 바꿀만한 것이 없다고 말했는데, 공달에게 자문을 구하면 다른 사람의 생각을 뛰어넘는 것을 문득 발견되곤 했다.? 공달은 열두 조목에 달하는 기묘한 계책을 앞뒤로 그렸는데, 오직 종요만이 그 사실을 알았다. 종요는 이것을 편찬하여 묶어보려 했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모두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순유는 조조를 수행하여 손권을 정벌하러 가는 도중에 죽었는데, 조조는 순유에 대해 말하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순유의 장남 순즙은 순유의 유풍을 갖고 있었으니 일찍 세상을 떠났다. 둘째 아들 순적이 뒤를 이었는데 아들이 없었으므로 대가 끊겼다. 황초 연간에 순유의 손자 순표를 능수정후에 봉했으며 식읍 3백호를 주었고, 후에 구양정후로 바꿔 봉했다. 정시 연간에 순유를 경후(敬侯)로 추증 하였다.
조창전-------------임성위왕 조창은 자가 자문이다. 어려서부터 활쏘기와 수레몰이를 잘 하였으며, 근력이 다른사람들보다 뛰어나 맨손으로 맹수와 격투했으며, 어렵고 힘든 일을 피하지 않았다. 여러차례 조조를 따라 정벌에 나섰는데, 의지가 강개함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조조는 일찍이 그 점을 비판하며 말했다. '너는 독서에 전념한다거나 성현의 도를 흠모하는 것은 하지 않고 말을 타고 칼을 차는 것만 좋아하는데, 이것은 한 필부의 쓰임일 뿐 어찌 족히 귀하게 되겠는가!' 조창에게 <시경>과 <서경>을 읽으라고 재촉하자 조창은 주위 사람에게 말했다. '대장부는 응당 위청(전한의 명장)과 곽거병처럼 10만 기병을 이끌고 사막을 질주하며 흉노를 쫓아 공훈을 세워 봉호를 얻어야 하는데, 어떻게 박사가 될 수 있겠습니까?' 조조는 일찍이 그의 아들들에게 좋아하는 것을 물으며 그들 각자 자기가 지향하는 것을 말하도록 했다. 조창이 말했다. '장수가 되고 싶습니다.' 조조가 말했다. '장수가 되면 어떻게 하겠느냐?' 대답했다. '몸에는 갑옷을 입고 손에는 날카로운 무기를 들고, 위급하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몸을 돌아보지 않고 사졸들의 앞에 서며, 공이 있으면 반드시 상을 주어 장려하고, 죄가 있으면 반드시 징벌을 할 것입니다.' 조조는 크게 웃었다. 건안 21년(216)에 언릉후로 봉했다. 23년(218), 대군의 오환이 모반을 일으키자, 조창을 북중랑장으로 임명하고 효기장군을 대행하도록 했다. 출발에 임하여 조조는 조창에게 계도하여 말했다. '집에 있을 때는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였으나, 일을 담당했으니 우리는 군주와 신하의 관계가 되었다. 행동을 할 때는 왕법에 따라서 일을 처리해야 하니, 너는 이 점에 주의해라!' 조창은 북정하여 탁군의 경계지역으로 들어갔는데, 반역한 오랑캐 수천 기병이 갑자기 왔다. 당시 병마는 아직 집결하지 않았고 오직 보병 천명과 기병 수백 명만 있었다. 조창이 전예의 계책을 사용하여 요새를 튼튼히 지켰으므로 적은 곧 퇴각하여 흩어졌다. 조창은 적을 추격하면서 오랑캐를 활로 쏘았는데, 활 시위에 호응하여 거꾸러지는 자가 앞뒤로 서로 이어졌다. 싸움은 반나절이나 계속되었는데, 조창의 갑옷에 몇 대의 화살이 맞았지만 투지는 오히려 더욱 앙양되었다. 승기를 잡아 적을 추격하여 상건현까지 갔을 때는, 군으로부터 2백여 리나 떨어져 있었다. 장사나 여러 장수들은 모두, 방금 너무 멀리 진군하여 사병도 말도 피곤하고, 또 위나라의 절도를 받아 대군을 지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깊숙이 진격할 수 없으며, 명령을 어기고 적을 경시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조창이 말했다. .. '군대를 이끌어 병사를 나아가게 하는 것은 그곳에서 승리할 수 있어서 가는 것인데 또 무슨 절도란 말인가? 오랑캐는 달아나더라도 멀리 가지 못할 것이니 그들을 추격하면 반드시 무찌를 수 있거늘 명령을 존중하여 지키면 오히려 적을 놓아 달아나게 하는 것이니 훌륭한 장수가 아니다.' 그리고 말에 올라 군중에 명령했다. '늦게 출동하는 자는 목을 베리라.' 하루 낮 하루 밤을 달려 적을 추격하여 크게 무찔렀으며 머리를 베거나 포로로 잡은 자가 수천 명이었다. 조창은 즉시 보통 규정의 두 배에 해당하는 상을 장병들에게 주자, 장병들 중에서 기뻐하지 않는자가 없었다. 당시 선비족의 대인 가비능은 수만 기병을 이끌고 전투를 바라보았는데, 조창 군대가 전투를 용감히 하고 가는 곳마다 무찌르는 것을 보고 곧 조조에게 귀순하기를 청했다. 북방은 모두 평정되었다. 당시 조조는 장안에 있으면서 조창을 자신이 머물고 있는 곳으로 불렀다. 조창은 대군에서 출발하여 업성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태자 조비가 그에게 말했다. '그대는 방금 공을 세워 지금 서쪽으로 가서 황상을 만나려고 하는데, 자만하지 마시오. 대답할 때는 항상 부족한 것이 있는 것처럼 겸손하게 하시오.' 조창은 장안에 도착하여 태자가 말한 것처럼 하여 공로를 장수들에게 돌렸다. 조조는 매우 기뻐하며 조창의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황수아(조창)가 이와 같다니 의외로구나!' 조조는 동쪽으로 돌아올 때, 조창에게 월기장군을 대행하도록 하여 장안에 남겨두었다. 조조가 낙양에 도착하여 병에 걸리자, 역마를 보내 조창을 불렀는데, 그가 도착하기 전에 조조는 죽었다. 문제가 왕위에 오른 후, 조창과 제후들은 자기 본국으로 돌아갔다. 조서에서 말했다. <선생의 도는 공신을 임용하고 친족을 친절하게 하고,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동생들과 함께 나라를 세워 가업을 계승하여 종묘사직을 지키고 침략을 막고 곤란함을 극복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조창은 이전에 명령을 받아 북벌을 하여 북방의 땅을 완전히 평정했으니, 그 공로가 매우 크다. 식읍 5천 호를 증가시켜 이전의 것과 합쳐 모두 1만호가 되게 하라.> 황초 2년(221)에 작위를 승진시켜 공으로 삼았다. 황초 3년, 임성왕으로 삼았다. 4년에 수도로 나아가 황상을 만났고, 병을 얻어 수도의 관저에서 죽었는데, 시호를 위라고 했다. 안장할 때, 문제는 천자용 수레, 용 모양의 깃발과 근위병 백 명을 하사하고, 한나라 동평왕의 안장 규격에 따르도록 했다. 아들 조해가 왕위를 계승했으며 중모현으로 옮겨 봉해졌다. 5년에 임성현으로 바뀌어 봉해졌다. 태화 6년에 임성국에 봉하고, 5현의 2천5백호를 갖도록 했다. 청룡 3년에 조해는 황제를 위해 물건을 만드는 중상방으로 사사로이 관리를 보내 금지한 물건을 만들게 했으므로 한 현 2천호를 삭감당했다. 정시 7년(246), 제남으로 봉하고 식읍을 3천호로 했다. 정원, 경원 초년에 연속하여 식읍이 증가해 총 4천4백호가 되었다.
우금전--------우금전(于禁傳) 우금은 자가 문칙(文則)이고 태산군(泰山郡) 거평현 사람이다. 황건의 난이 일어나자 포신(鮑信)은 병력을 소집하였고, 우금은 그에게 의탁하고 따랐다. 조조가 연주를 다스리게 되자, 우금은 그의 동료들과 함께 조조를 만나 도백(都伯:대장)이 되어 장군 왕랑(王朗)에게 소속되었다. 왕랑은 그를 높이 평가하고는 우금의 재간이면 대장군에 임명될 수 있다면서 조조에게 추천했다. 조조는 그를 불러 이야기를 해보고 군사마(軍司馬)의 관직을 주었고, 병사를 인솔하여 서주로 가서 광척(廣戚)을 공격하도록 했는데, 이곳을 함락시켰으므로 함진도위(陷陣都慰)로 임명했다. 조조를 따라 복양으로 가서 여포를 토벌하고, 따로 병사를 이끌고 성남쪽에서 여포의 두 진영을 무찔렀으며, 또 별도로 수창(須昌)에서 고아(高雅)를 무찔렀다. 조조를 따라 황건군 수장(壽張)?정도(定陶)?이호(籬狐)를 공격하고, 옹구에서 장초를 포위하여 공격했는데, 모두 함락시켰다. 우금이 조조를 따라 황건군 유벽(劉僻), 황소(黃邵) 등을 정벌하러 판양(版梁)에 주둔하고 있을 때, 조조의 진영으로 황소 등이 야습해 왔는데, 우금이 부하를 인솔해 그들을 무찌르고 황소 등을 죽였고, 황소의 부하들은 전부 투항했다. 평로교위(平虜校慰)로 승진했다. 조조를 따라 교현에서 교유를 포위하고 공격하여 교정 등 네 명의 장수를 죽였다. 그리고 완성(宛城)까지 가서 장수를 투항시켰다. 장수가 또 반란을 일으키자, 조조는 그와의 싸움에서 유리하지 못했으므로 군대를 패하여 무음(無陰)으로 돌아왔다. 이때 군 안에서 큰 혼란이 있어 장수들은 각각 조조를 구하러 갔는데, 단지 우금만이 부하 수백 명을 지휘하여 싸우고 물러났다. 이후 형세는 긴박할지라도 분산되지는 않았다. 적의 추격은 점점 완만해졌으므로, 우금은 부대를 조용히 정돈하여 북을 울리며 물러났다. 조조는 아직 주둔할 곳이 없었는데, 길에서 우연히 상처를 입은 나신의 몸으로 도주하는 10여 명을 만나게 되었다. 우금은 그들에게 무엇 때문에 이와 같이 되었는지 물으니 그들이 대답했다. '청주(靑州) 병사들에게 약탈당했습니다.' 이전에 조조에게 투항한 황건군을 청주병이라고 불렀으며, 조조가 그들에게 관용을 베풀었기 때문에 그들은 과감하게 약탈을 자행하게 된 것이다. 우금은 크게 노하여 그의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청주병도 똑같이 조공의 부하이거늘, 감히 도적질을 하다니!'' 그리고 청주병을 토벌하고 그들의 죄상을 추궁했다. 청주병은 조조에게로 달려가 우금의 죄상을 고했다. 우금이 도착한 후, 먼저 보루를 세우고 불시에 조조를 알현했다. 어떤 사람이 우금에게 말했다. '청주병이 이미 당신에 관해 조공에게 말했으니, 속히 조공을 만나 일을 처리해야 됩니다.' 우금이 말했다. '현재 적은 또 뒤에 있으니, 아무때나 추격할 수 있고, 먼저 방비를 세우지 않는다면 무엇에 의지하여 적을 받아 싸우겠소? 하물며 조공은 명찰(明察)하거늘 무슨 연고로 무고하겠소!' 참호를 파서 진영을 안정시키고, 들어가 알현하고는 당시의 상황을 상세히 설명하였다. 조조는 웃으며 우금에게 말했다. '육수 싸움에서 실패한 후, 우리는 모두 매우 조급했었소. 장군은 혼란중인데도 오히려 부대를 정돈시키고, 폭도들을 토벌하고, 진영을 공고히 하였으며, 동요되지 않는 절조(節操)가 있었소. 고대의 명장이라도 어찌 이 이상이 되겠소?' 따라서 우금 전후의 전공에 근거하여 익수정후(益壽亭侯)로 봉했다. 또 조조를 따라 양(穰)으로 가서 장수를 공격하고, 하비에서 여포를 붙잡았으며, 사환(史渙) 조인(曺仁)과 사견(射犬)에서 쉬고를 공격하여 무찌르고 쉬고를 참수했다. 조조가 처음으로 원소를 정벌할 때 원소의 병력은 강성했는데, 우금이 선봉에 서기를 희망했다. 조조는 그의 용기를 칭찬하고 보병 2천 명을 파견하여 우금으로 하여금 지휘하게 하고, 연진(延津)을 지키면서 원소에 대항하도록 하고, 조조는 병사를 인솔하여 관도로 돌아왔다. 유비가 서주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조조는 동쪽으로 가서 그를 정벌했다. 원소가 우금을 공격했으나, 우금이 굳게 지켰으므로 함락시킬 수 없었다. 또 악진 등과 보병 기병 5천 명을 인솔하여 원소의 외부 군대를 공격하였으며, 연진 서남쪽으로부터 황하를 따라 급(汲), 획가(獲嘉) 두 현에 이르기까지 30여 개의 보루를 불태웠고, 죽은 자와 포로가된 자가 각기 수천 명이었으며, 원소의 장수 하무(何茂) 왕마(王摩) 등 20여명을 항복시켰다. 조조는 또 우금에게 단독으로 병사들을 인솔하게 하여 원무(原武)에서 주둔하도록 하고, 두씨진(杜氏津)에 주둔하고 있는 원소의 다른 진영을 공격하도록 했는데, 그는 그들을 무찔렀다. 비장군(裨將軍)으로 승진하였고, 후에 조조를 따라 관도로 돌아왔다. 조조는 원소와 진영을 이어 토산(土山)을 쌓아 대치했다. 원소가 조조의 진영 안으로 화살을 쏘도록 명령하였므으로, 사졸들 중 죽거나 부상당한 자가 매우 많았고 군중의 사람들은 매우 두려워했다. 그러나 우금이 토산을 지휘하여 막고 힘껏 싸웠으므로 전의가 더욱 발분해 원소는 실패하고 우금은 편장군(偏將軍)으로 승진했다. 기주가 평정되었는데 창회가 또 모반을 하자, 우금을 보내 그를 정벌하도록 했다. 우금은 창회를 맹렬하게 공격하였는데, 창회와 우금은 과거에 우정을 나눈 사이였으므로 우금에게 투항했다. 많은 장수들은 모두 창희가 이미 투항했다고 생각하고 조조에게 알리려고 했는데, 우금이 말했다. '여러분들은 조공의 일관된 법령을 모르는군요. 포위당하여 공격을 받은 후에 투항한 사람은 사면시키지 않습니다. 군법을 준수하고 명령을 집행하는 것은 군주를 섬겨 받드는 절개와 지조인 것입니다. 창희는 비록 나의 옛 친구이지만, 이 우금이 어떻게 절개와 지조를 잃을 수 있겠습니까?' 그는 친히 가서 창희와 결별하고 눈물을 흘리며 그를 죽였다. 이때, 조조는 순우에 군사들을 주둔시키고 있었는데, 이 말을 듣고 탄식하며 말했다. '창희가 항복하여 나에게로 오지 않고 우금에게로 간 것은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우금을 더욱더 중시했다. 동해가 평정된 후, 우금은 호위장군에 임명되었다. 후에 장패 등과 매성을 공격하였고 장료와 장합 등은 진란을 토벌하였다. 우금이 도착한 후, 매성은 부하 3천여 명을 이끌고 투항했다. 투항한이후에 또 모반을 하고 부하들을 이끌고 진란에게로 달아났다. 장료 등은 진란과 서로 대치하고 있었지만, 군량미가 적었다. 우금은 군량미를 수송하는 수레의 앞뒤를 서로 연결시켰고, 장료는 진란과 매성을 죽였다. 식읍이 2백 호 증가되어 이전 것과 합쳐 총 1천 2백 호가 되었다. 이때 우금과 장료 악진 장합 서황은 모두 명장이었고, 조조가 정벌할 때마다 선봉에 섰고, 병사를 물릴 때는 뒤에서 지켰다. 우금은 군사들을 엄하게 다스렸고, 적의 재물을 얻어 자기 소유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 또한 특히 많이 받았다. 그러나 법률에 의거하여 아랫사람을 다스렸으므로 병사들의 환심을 많이 얻지는 못했다. 조조는 항상 주령(朱靈)을 증오하여 그의 부대를 빼앗으려고 했다. 우금은 위엄이 높았으므로 우금에게 기병 수십 명을 데리고 명령서를 갖고 가도록 했다. 우금은 직접 주령의 군령으로 달려가 그의 군대를 빼앗으려고 했는데, 주령과 그의 부하들은 감히 행동하지 않았다. 그래서 주령을 우금 아래의 한 지휘관으로 임명했지만, 사람들은 모두 복종하였다. 그를 좌장군(左將軍)으로 승진시키고 절월(節鉞)을 주었으며, 식읍 5백 호를 주고 한 아들을 열후로 승진시켰다. 건안 24년(219)에 조조는 장안에 있으면서 조인에게 번현(樊縣)에서 관우를 토벌하도록 하였고, 또 우금을 보내 조인을 돕도록 하였다. 가을에 비가 억수같이 내려 한수가 범람하여 평지의 물이 몇 길이나 되고, 우금 등 칠군(七軍)은 모두 물에 잠겼다. 우금은 여러 장수들과 높은 곳으로 올라?물의 기세를 바라보았는데, 돌아가 피할 만한 곳이 없었다. 관우는 이 기회를 틈타 큰 배를 타고 우금 등을 공격하였으며, 우금은 결국에는 투항하였는데, 오직 방덕(龐悳)만은 굴복하지 않아 살해되었다. 조조는 이 소식을 듣고 오랫동안 애통해 하다가 말했다. '내가 우금을 안지 30년이 되었는데, 이렇게 생각지도 않은 위험에 처하여 오히려 방덕만도 못하단 말인가!' 마침 손권이 관우를 붙잡아 그의 부하들을 포로로 얻었다. 우금 또한 오나라에 있었다. 문제가 죽위한 후 손권을 시하로 일컬었고, 우금은 돌려보냈다. 문제가 우금을 불러 만났는데, 그는 수염과 머리가 하얗게 되었고 용모가 초췌했으며, 눈물을 흘리며 머리를 조아렸다. 문제는 순림보, 맹명조(孟明祖)의 고사를 비유로 들어 위로하고 안원장군(安遠將軍)으로 임명했다. 그를 오나라에 사자로 보내려고, 먼저 북방의 업성으로 가서 고릉(高陵)을 참배하도록 했다. 문제는 사람들에게 미리 어릉(御陵) 건물에 관우가 전쟁에서 승리한 것, 방덕이 분노한 것, 우금이 항복할 때의 상황을 그리도록 했다. 우금은 그것을 보고 참회하고 한탄하다가 병이 나서 죽었다. 아들 우규(于圭)가 익수정후를 계승했다. 시호를 여후(慮侯)라고 했다
등애전------------등애는 자가 사재이고, 의양군 조양현 사람이다. 어려서 고아가 되었으며, 조조가 형주를 격파했을 때 여남으로 이사하여 농부가 되어 송아지를 길렀다. 열두 살때, 어머니를 따라 영천에 이르러 태군의 장 진식의 비문을 읽고 말했다. '문장은 세인들의 모범이 되고, 행위는 선비들의 준칙이 된다.' 등애는 마침내 스스로 이름을 범으로 바꾸고, 자를 사칙이라고 했다. 후에 종족 중에서 그와 이름이 같은 자가 있었기 때문에 다시 개명했다. 등애는 도위학사로 임명되었지만 가난하여 간좌(문서를 다루는 각 부서의 보좌관)도 할 수 없어 도전수총초리가 되었다. 같은 군 관리의 부친이 그의 집이 가난한 것을 불쌍히 여겨 재물을 후하게 주었지만, 등애는 처음부터 사례도 표하지 않았다. 그는 매번 높은 산과 큰 못을 볼때마다 군영 설치에 적당한가 헤아려서 그림으로 나타냈는데, 당시 사람들 대부분이 그를 비웃었다. 후에 전농강기가 되었으며, 상계리가 되었다. 때문에 태위 사마선왕을 만날 수 있었다. 사만선왕은 그가 보통 사람과 달리 기이한 면이 있음을 알고는 불러서 속관으로 임명했으며, 상서랑으로 승진시켰다. 당시 밭을 개간하고 곡식을 저장하고, 적국을 멸망시키려는 계책을 세우고 등애를 진과 항의 동쪽인 수춘지역까지 파견하여 시찰하도록 했다. 등애는 생각했다. '토지는 좋지만 수원이 적어 땅의 이점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겠군. 응당 운하를 개통해야 돼. 그러면 물을 끌어서 관리할 수 있겠어. 그렇게 되면 군대 식량을 대량으로 비축할 수 있고, 또 식량을 운송하는 길을 개통할 수 있지.' 그래서<<제하론>>을 지어 그의 취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과거에는 황건족을 격파시킨 것을 계기로 둔전을 실행하고, 허도에 곡식을 비축하여 사방을 제어했었습니다. 지금 세 방면의 변방은 이미 평정되었으나, 회수 남쪽만 남아 있습니다. 매번 대군이 정벌하러 출동할 때, 식량을 운송하는 병사가 절반을 넘었고, 막대한 비용이 들어 거대한 노역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진과 채 사이의 땅은 낮고 밭은 기름지므로 허창 주위의 모든 논을 없애고 물을 대면 동쪽으로 흐르게 할 수 있습니다. 회북의 둔병 2만명과, 회남의 둔병 3만 명을 10명중 2명씩 돌려가며 쉬게 하고, 항상 4만 명에게는 한편으로는 밭을 갈게 하고 한편으로는 지키도록 명령하십시오. 인원이 풍족하여 항상 서쪽 지역보다 세 배를 수확할 것이고, 경작 비용을 제외하고 계산해도 매년 5백만 석이 군대의 비용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6,7년 사이에 3천만 석이 회수의 연안 지역에 쌓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10만 병사가 5년간 먹을 수 있는 양입니다. 이런 역량으로 오나라를 공격하면 원정하더라도 승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사마선왕은 그의 진언을 가상하게 여겼으며, 이 일을 모두 시행하였다. 정시 2년(241), 곧 운하가 넓게 개통되었는데, 매번 동남쪽에 일이 발생하면 대군이 출동하여 배를 타고 동쪽으로 내려가 장강과 회수에 도착하였음, 물자와 식량이 회복되어 있고 수해가 없었으니, 이는 등애가 세운 공로였다. 등애는 지방으로 나가 참정서군사가 되었고, 남안태수로 승진했다. 가평 원년(249)에 등애는 정서장군 곽회와 함께 촉나라의 편장군 강유를 막아냈다. 강유가 물러나자, 곽회는 그 기회를 틈타 다시 서쪽으로 강인을 공격하려는데, 등애가 말했다. '적군은 아직 멀리까지 가지 못했으므로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응당 병사들을 나누어 의외의 일에 대비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사마선왕은 등애를 남겨 백수 북쪽에 주둔하도록 했다. 3일 후, 강유는 요화를 파견하여 백수 남쪽으로부터 등애를 향하여 진지를 구축하도록 했다. 등애가 장수들에게 말했다. '강유는 지금 갑자기 돌아왔고, 우리는 병사가 적소. 병법에 의하면 적은 당연히 물을 건너야 하지만 다리를 만들 수는 없소. 이것은 강유가 요화를 보내어 우리를 견제하여 돌아갈 수 없게 하는 것이오. 강유는 반드시 동쪽으로부터 조성을 습격할 것이오.' 조성은 백수 북쪽에 있었으므로 등애와는 60리 떨어져 있었다. 등애는 밤에 몰래 군사를 움직여 곧장 조성에 이르렀다. 강유는 과연 물을 건넜지만 등애가 먼저 도착하여 조성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막는 데 실패하지 않았다. 등애에게 관내후의 작위를 주었으며, 토구장군의 관직을 더하였고, 후에 성양태수로 바꿔 임명하였다. 이 당시 병주에 있던 우현왕 유표가 흉노를 합병하여 한 부족으로 받들자, 등애가 표를 올려 말했다. <융적은 야수의 마음을 갖고 있으므로 도의로써 친하지 않습니다. 강대하면 침범하여 잔폭하게 굴고, 쇠약하면 중앙으로 향해 순종하며 의지합니다. 때문에 주선왕 시대에는 험윤의 침입이 있었고, 한나라 고조 시대에는 평성에서 흉노의 침입이 있었던 것입니다. 흉노가 일단 강성해질 때마다 이전 시대에는 중대한 근심거리가 되었습니다. 선우가 중국의 밖에 있은 이후부터 그들의 부족장과 민중들을 견제할 수 없었습니다. 후에 그들을 유인하여 국내로 오게하여 의탁하게 했습니다. 이로 인하여 강이는 통솔자를 잃었고, 모이고 흩어지는 일에 만리가 하나의 규범에 따라서 일을 처리하였습니다. 지금 국경 내에 있는 선우의 권위는 나날이 감소해가고, 외지에 있는 이민족들의 위엄이 점점 높아만 간다면, 북방 오랑캐에 대해 깊이 대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유표의 부하 중에서 반란을 일으킨 자가 있다는 것을 들었는데, 반란을 틈타서 그들을 두 나라로 분할하여 세력을 나누도록 하십시오. 거비는 이전의 조대(무제 시대)에서 공적이 역력하였지만, 그의 자손은 사업을 이을 수 없었으므로 그의 자손들에게 고귀한 칭호를 더해 주어 안문에 거주하도록 하십시오. 흉노의 나라를 분리하여 세력을 약하게 하고, 옛날의 공훈에 대하여 추적하여 기록하는 것, 이것이 변방을 제어하는 장기간의 계책입니다.> 또 진술했다. <강호 중 민중과 같은 곳에 살고 있는 자들은 응당 축출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염치의 교화를 숭상하도록 하여 간사하고 악한 길을 막아야 합니다.> 대장군 사마경왕(사마사)은 이제 막 정치를 보좌하게 되었지만 등애의 건의를 대부분 받아들였다. 등애는 여남태수로 전임하였다. 등애가 여남에 이르자 과거에 자신을 후하게 대우했던 관리의 아버지를 수소문하여 찾았지만, 오래 전에 이미 죽었으므로 관리를 보내 그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하고, 그의 어머니에게 충분한 선물을 보내주었으며, 그의 아들을 추천하여 계리로 임명했다. 등애가 다스린 곳은 황량한 벌판이 개간되었고, 군대와 백성은 모두 풍족한 생활을 했다. 제갈각이 합비의 신성을 포위하였지만, 승리하지 못하고 물러나 돌아갔는데, 등애가 사마경왕에게 말했다. '손권은 이미 죽었고, 대신들은 새로운 군왕에게 아직 의지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나라의 명가와 호족은 모두 자기의 사병을 갖고 있으므로 병사의 세력에 의지하면 제위를 찬탈하기에 충분합니다. 제갈각은 방금 국정을 담당하였고, 내부에는 아직 걸주가 없습니다. 그는 윗사람과 아랫사람을 어루만져 근본을 공고하게 할 생각은 못하고 외부의 일로 바쁘며, 그 백성들을 잔폭하게 사용하고, 나라의 전 병력으로 위나라의 견고한 성을 공격하였지만 실패하여 죽은 사람이 만 여명이나 되고, 화를 싣고 돌아왔습니다. 이것은 제갈각이 죄를 받을 날인 것입니다. 옛날에 자서,오기,상앙,악의 등은 모두 당시의 군주에게 임용되었지만, 군주가 죽자 실각했습니다. 더욱이 제갈각의 재능은 네 명의 현인에 미치지 못하고, 큰 재난에 대한 근심도 없으니, 그의 멸망은 기다릴 만합니다.' 제갈각은 귀국하자 과연 주살되었다. 등애는 연주자사로 옮겼으며, 진위장군을 더하였다. 표를 올려 말했다. <나라의 긴급한 업무는 오직 농업과 전쟁뿐입니다. 나라가 부강하면 병력이 강대해지고, 병력이 강대해지면 전쟁에서 승리합니다. 그러므로 농업이 승리의 근본입니다. 공자는 정치에 대해 질문을 받자 '식량을 풍족히 하고 병사를 풍족히 하라'고 하여, 식량을 병사보다 앞에 두었습니다. 위에서 작위를 설치하여 경작을 권하지 않으면 아래서 재산축적의 공이 없게 됩니다. 지금 정치적 업적을 고찰할 때의 상을 곡식을 축적하여 백성을 풍요롭게 하는 자를 중심으로 하여 내린다면, 교류의 길은 끊어지고, 겉표면을 수식하는 풍조는 막히게 될 것입니다.> 고귀향공이 제위에 오르자, 등애를 승진시켜 방성정후로 봉했다. 관구검이 반란을 일으키고 달리기 잘 하는 병사를 파견하여 서신을 보내 대중을 혼란스럽게 하려고 했는데, 등애가 그 사람을 죽이고 아울러 신속히 군대를 나가게 하고 우선 악가성으로 달려가 부교를 만들었다. 사마경왕이 도착하자, 그대로 악가성을 점거했다. 문흠의 대군은 위의 대군보다 늦게 왔으므로 성 아래에서 패배하였다. 등애는 그를 병두까지 추격하였고, 문흠은 오나라로 달아났다. 오나라 대장군 손준등은 10만 대군이라고 외치며 장강을 건너려는 형세를 나타냈다. 진동장군 제갈탄은 등애를 보내 비양을 차지하도록 하였지만, 등애는 적군과 멀리 떨어져 있는 요해지가 아니라고 생각하고는, 신속하게 부정으로 옮겨 주둔하였으며 태산태수 제갈서등을 여장으로 파견해 막아 싸우도록 하여 적을 달아나게 했다. 정원 2년(255), 등애는 소환되어 장수교위로 임명되었으며, 문흠 등을 격파시킨 공로가 있었으므로 나아가 방성향후로 봉해졌으며, 안서장군을 대행했다. 등애는 적도에서 포위당한 옹주자사 왕경을 풀어주었고, 강유는 물러나 종제에 주둔하였다. 그래서 등애를 안서장군으로 임명하였으며, 가절,영호동강교위가 되었다. 논의하는 자들은 대부분 '강유의 병력은 이미 다하여 병사를 내어 다시 공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등애가 말했다. '왕경이 조서에서 패배한 일은 작은 실책이 아닙니다. 우리 군을 격파시키고 장수를 죽였으며, 창고는 모두 텅비었고, 백성들은 갈곳을 잃어 떠돌아다녀 거의 멸망 상태까지 되었습니다. 지금 작전상에서 말하면, 적에게는 승기를 타고 공격하는 기세가 있으며, 우리는 허약한 체질입니다. 이것이 첫째 이유입니다. 저들은 위아래가 서로 익숙하게 훈련되었고, 병기는 예리한데, 우리는 장수를 바꾸고 병사를 새로 증원하고 손상된 병기는 아직 수리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둘째 이유입니다. 적은 배로 행군하고 우리는 육로로 걸으니, 수고로움이 같지 않습니다. 이것이 셋째이유입니다. 적도, 농서, 남안, 기산은 각기 지켜야만 합니다. 적은 병력을 한곳에 집중시키지만, 우리는 네 곳으로 나누어야 합니다. 이것이 넷째 이유입니다. 남안과 농서를 향한다면 강인의 곡식을 먹을 수 있고, 만일 기산으로 향한다면 1천 이랑이나 되는 잘 익은 보리가 있습니다. 이것은 적을 유인하는 먹이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다섯째 이유입니다. 적군은 교활하고 책략에 뛰어나므로 그들이 오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오래지 않아, 강유가 과연 기산으로 향했는데, 등애가 이미 방비를 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서 곧 동정으로 돌아가 남안으로 진군했다. 등애는 무성산을 점거하고 강유와 대치했다. 강유는 등애와 요충지를 차지하려고 다투었지만 이길 수 없었으므로, 그 밤에 위하를 건너 동쪽으로 진군하여 산길을 따라서 상규로 달려갔다. 등애는 강유와 단곡에서 교전하여 크게 격파시켰다. 감로 원년(256), 조서를 내려 말했다. <역적 강유가 해마다 교활한 행동을 하여 백성들과 만족을 동요시켜 서쪽 땅은 편안할 수 없었다. 등애는 이치에 맞는 계획을 세우고, 충절과 용기를 떨쳐 일어나 적장 20여명을 죽였고, 죽인 적군의 병사는 많다. 국가의 위엄을 파와 촉에 떨치고, 무용의 명성을 장강과 민강에 흐르게 했다. 지금 등애를 진서장군, 도독농우제군사로 삼고, 나아가 등후로 봉한다. 그의 식읍 5백 호를 떼어 아들 등충에게 주어서 정후로 삼으라.> 2년(257), 등애가 장성에서 강유를 방어하자 강유는 물러나 돌아갔다. 등애는 정서장군으로 승진하였으며 앞뒤로 증가한 식읍은 총 6천 6백 호나 되었다. 경원 3년(262), 또 후화에서 강유를 격파시켰으며, 강유는 퇴각하여 답중을 지켰다. 4년 가을, 조서를 내려 각 군대가 촉나라를 정벌하도록 명령했고, 대장군 사마문왕이 모든 지휘를 하고, 등애로 하여금 강유와 전선에서 대치하도록 하였고, 옹주자사 제갈서에게 강유의 퇴로를 끊어 강유가 돌아갈 길이 없도록 하라고 했다. 등애는 천수태수 왕기 등을 파견하여 직접 강유의 진영을 공격하게 했으며, 농서태수 견홍 등을 보내 강유군대의 앞에서 싸우도록 하고, 금성태수 양흔등에게 감송으로 가도록 했다. 강유는 종회의 제군대가 이미 한중에 진입하였다는 것을 듣고 물러나 돌아갔다. 양흔 등은 강천구까지 추격하여 큰 싸움을 하였다. 강유가 패하여 달아났는데, 옹주가 벌써 길을 막고 교두에 주둔하고 있다는 것을 듣고 공함곡으로부터 북쪽 길로 들어가서 옹주 후방을 공격하려고 했다. 제갈서는 이 소식을 듣고 퇴각하여 30리를 돌아갔다. 강유가 북쪽 길로부터 30여리 진입하였는데, 제갈서의 군대가 퇴각했다는 사실을 듣고는 곧 돌아서 교두를 통과했다. 제갈서는 급히 강유의 퇴로를 차단했지만 하루 차이로 미치지 못했다. 강유는 곧 병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가서 물러나 검각을 지켰는데, 종회가 강유를 공격하였지만, 이길 수는 없었다. 등애가 상소를 올려 말했다. <지금 적군의 역량은 찢겨지고 훼손되었으므로 응당 이 기회를 타서 음평으로부터 작은 길을 달려 한의 덕양정을 지나 부성으로 간다면, 검각의 서쪽 백 리를 지나 성도로부터 3백여 리 되는 곳에서 기습병이 적의 중심부를 뚫을 수 있습니다. 검각의 수비군은 반드시 돌아서 부성으로 달아날 것이고, 이와 같이 되면 종회는 곧 큰 길을 따라 전진할 수 있습니다. 검각의 군사가 돌아가지 않으면 부성을 구원하는 병사는 적을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해서 병서에서는 '적이 방비하지 못한 곳을 공격하고, 적이 생각하지 못한 곳을 뚫어라'고 했습니다. 지금 적의 공허한 곳을 습격하면, 그들을 격파시키는 것은 필연적인 것입니다.> 겨울 10월, 등애는 음평 길로부터 사람이 없는 땅을 7백여 리나 행군하였다. 산을 뚫어서 길을 통과하게 하고 계곡에는 다리를 만들었다. 산은 높고 계곡은 깊었으므로 작업은 매우 어려웠고, 또 식량 수송의 어려움으로 인해 거의 위기에 이르게 되었다. 등애는 모전으로 자신의 몸을 감싸고 산기슭을 따라 내려갔다. 장수와 병사들은 모두 나무를 붙잡고 낭떠러지를 기어오르며 서로 이어서 전진하였다. 선두 진영이 강유(江由)에 도착하자, 촉나라 수비대장 마막이 항복했다. 촉나라 위장군 제갈첨은 부성에서 면죽으로 돌아와 진영을 나란히 정렬하고 등애를 기다렸다. 등애는 아들 혜당정후 등충 등에게 적의 오른편에서 출격하도록 하고, 사마 사찬등에게는 적의 왼편에서 출격하도록 했다. 등충과 사찬은 전세가 불리했으므로 나란히 퇴각하여 돌아와서 말했다. '적을 공격할 수 없습니다.' 등애는 화를 내며 말했다. '존망의 구분은 이 한 싸움에 달려있다. 어찌 불가능함이 있겠는가?' 곧 등충과 사찬을 질타하고 그들의 머리를 베려고 했다. 등충과 사찬은 급히 돌아가 다시 싸워 크게 격파시키고 제갈첨과 상서 장준 등의 머리를 베고, 락까지 진군했다. 유선이 사자를 보내 황제의 옥새와 인수를 받들고, 등애에게 편지를 써서 투항을 청했다. 등애가 성도에 도착하자, 유선은 태자와 제왕 및 신하 60여 명을 이끌고 결박을 하고서 군문에 출두했다. 등애는 부절(군사권)을 쥐고 결박을 풀고 관을 태우고, 그들을 받아들여 용서했다. 등애는 촉나라의 장수와 병사들을 조사하여 약탈한 일이 없고, 항복한 자를 받아들여 위로하고 옛 사업을 회복하도록 하였으므로, 촉나라 사람들은 등애를 칭찬했다. 후한 초, 등우의 이전 일에 따라서 전권을 발휘하여 유선을 행표기장군으로, 태자를 봉거도위로, 제왕을 부마도위로 임명했다. 촉나라 신하들은 각자 지위의 고하에 따라 왕의 관직으로 임명되었고, 간혹 등애 수하의 관직을 받기도 했다. 사찬을 익주자사대리로 임명하고, 농서태수 견흥 등이 촉나라 안의 각 군을 대신 관리했다. 사람을 보내 면죽에 누대를 건축하여 경관을 만들어 전공을 빛내는데 사용했다. 전쟁중에 사망한 병사들은 모두 촉나라 병사와 함께 매장했다. 등애는 자신의 전공이 탁월하다고 뽐내면서 촉나라 사대부들에게 말했다. '여러분들은 다행스럽게 나를 만났기 때문에 오늘이 있을 수 있었을 뿐이다. 만일 오나라나 한나라 같은 무리들을 만났다면 이미 주살되었을 것이다.' 또 말했다. '강유는 본래 한 시대의 영웅이었지만, 나를 만났기 때문에 곤궁해진 것일 뿐이다.' 식견있는 사람들은 그를 비웃었다. 12월, 조서를 내렸다. <등애는 군의 위엄을 나타내고 무력을 떨쳐서 적지 깊숙이 들어가 적장의 목을 베고 깃발을 빼앗고, 악한 사람들을 죽였다. 제왕이라고 참칭한 군주로 하여금 머리를 땅에 박고 목을 빼게 하였다. 몇 대를 걸쳐 처벌을 면제받았던 자들이 하루 아침에 평정되었다. 병사를 사용함에 있어서 시간을 넘지 않았으며, 싸움에 있어서는 하루를 다 사용하지 않고, 구름을 자르고 자리를 마는 것처럼 파와 촉을 평정하였다. 비록 백기(전국 시대 秦의 명장)가 강대한 초나라를 격파하고, 한신이 강력한 조나라를 이겼으며, 오한이 자양(공손술)을 잡았고, 아부(전한시대의 명장)가 일곱 나라를 멸망시켰을지라도, 공적을 계산하고 성과를 논하면 이번 훈공에 비교할 수 없다. 등애를 태위로 임명하고 식읍을 2만 호를 증가시키고, 아들 두 명을 정후로 봉하여 각기 식읍 천 호 식을 주도록 하라.> 등애가 사마문왕에게 상소를 올렸다. <병사를 다룰 때에는 먼저 성세를 조성한 후에 실제 행동을 해야 합니다. 현재 촉을 평정시킨 형세를 타서 오나라를 공격하면, 오나라 사람은 놀라고 두려워할 것이니, 오나라를 말아버릴 기회입니다. 그러나 크게 일으킨 이후이므로 장수와 병사들은 피로하여 곧 용병할 수 없으니, 이 일을 늦추십시오. 농우의 사병 2만 명과 촉나라 병사 2만 명을 머물게 하여 제염과 철주조를 흥성하게 하고, 군사와 농업의 긴급함을 만족시키는 동시에 배를 만들어 물의 흐름을 따라가 공격할 준비를 한 연후에 사절을 보내 그들에게 이해관계를 설명하도록 한다면, 오나라는 반드시 귀환하여 정벌하지 않고도 평정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응당 유선을 후하게 대우하여 손휴를 오도록 하고, 촉나라의 병사와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여 먼 곳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귀순하게 해야 합니다. 설령 곧 유선을 수도로 보내 오나라가 그를 버린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면, 그들에게 귀순하라고 다시는 권하지 못하게 됩니다. 응당 잠시 머물면서 다음해 가을과 겨울을 기다리면 오나라 또한 충분히 평정할 수 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유선을 부풍왕으로 임명하고, 재산과 재물을 내려 그의 수하들을 돌보도록 하십시오. 부풍군에는 동탁오가 있으므로 그에게 궁전을 만들어 주십시오. 그의 아들을 공작과 후작으로 봉하고 부풍군 내의 현을 다스리도록 하고 귀순하여 투항하면 총애를 받을 수 있음을 나타내십시오. 광릉, 성양을 열어서 오나라 사람을 기다리면, 당신의 위엄을 두려워하고 덕망에 감사하여 바람을 바라보고 따를 것입니다.> 사마문왕은 감군 위관으로 하여금 등애에게 말하도록 했다. '이 일은 당연히 보고해야 하므로 즉시 시행하지는 못하오.' 등애는 재차 상소를 올려 말했다. <저는 명령을 받아 출정하여 지휘 계책을 받든 결과, 원흉은 이미 항복하였습니다. 조서를 받고 임시 관원이 되기를 청하여 새로 귀순한 사람들은 안무한 것은 당시 형세에 부합되는 조치였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촉나라 백성들은 전부 귀순하였고, 영토는 남해에까지 이르렀고, 동쪽으로는 오회에 접해 있으니, 응당 빨리 진압하여 평정해야만 합니다. 만일 국가의 명령을 기다린다면, 길가에서 오가며 시간을 끌 뿐입니다. <<춘추>>의 대의는, 대부는 국경을 나와사직을 안정시키고 국가에 이익을 줄 수 있을 경우에는 독단적으로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지금 오나라는 아직 순종하지 않고 있고, 그 지세는 촉나라와 이어져 있으므로 일상적인 규정에 구애되어 성공할 수 있는 기회를 잃을 수는 없습니다. 병법에서는 나아가 명성을 구하지 않고, 물러나 죄를 피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저 등애는 비록 고인의 절의는 갖고 있지는 않지만, 자신의 불만으로 인해 나라에 손해를 끼칠 수는 없습니다.> 종회,호열,사찬등은 모두 등애의 행동은 반역에 해당되고 변란의 징조가 있다고 아뢰었다. 조서가 내려져 죄인을 수송하는 수레로 등애를 불렀다. 등애 부자가 이미 구금된 후, 종회는 성도로 가서 먼저 등애를 보낸 후에 반란을 일으켰다. 종회가 벌써 피살된후, 등애의 본 진영의 장수와 병사들은 등애를 가둬 싣고 가는 수레를 추격하여 등애를 영접하여 돌아왔다. 위관은 전속 등을 파견하여 등애를 토벌하도록 하고, 면죽 서쪽에서 만나 등애를 죽였다. 아들 등충은 등애와 함께 죽었고, 낙양에 있는 그밖의 아들은 전부 살해되었다. 등애의 처와 손자는 서역으로 옮겨 살도록 했다. 당초, 등애가 촉나라를 토벌할때, 산 정상에 앉아 흐르는 물을 보는 꿈을 꾸었었다. 진로호군 원소에게 이꿈에 관해 묻자, 원소가 말했다. '<<역>>에 괘에 의하면, 산위에 물이 있는 것을 건이라고 합니다. 건의 괘사에는' 건은 서남쪽에는 유리하고 동북쪽에는 불리하다'고 했고, 공자는 '건이 서남쪽에 유리하다는 것은 전진해 공로가 있는 것이고, 동북쪽에 불리하다는 것은 그 길이 다했다는 의미이다' 라고 했습니다. 가면 반드시 촉나라를 무찌를 수 있지만, 아마 돌아오지는 못할 것입니다!' 등애는 망연한 채 불쾌했다. 태시 원년(265), 진 왕실이 제위에 오르자, 조서를 내려 말했다. <옛날에 태위 왕릉은 제왕을 폐위시키려는 계획을 하였고, 제왕은 결국 그 자리를 지킬 수 없었다. 정서장군 등애는 공훈을 과시하여 절의를 잃었으므로 사실상 당연히 큰 죄를 받아야만 한다. 그러나 체포하라는 조서를 받았을 때는, 부하들을 멀리 보내고 손을 묶어 죄를 받았다. 살기를 구하고 악한 일을 한 자와 비교하면 진실로 또 다르다. 지금 대사면을 내리니 그들의 가솔들을 돌아오게 하라. 만일 자손이 없는 경우에는 후사를 세우게 하여 제사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라.> 3년(267), 의랑 단작이 상소를 올려 등애를 변호하는 말을 했다. <등애는 지극히 충성스런 마음을 갖고 있었지만 반역자라는 이름을 짊어지게 되었고, 파와 촉을 평정했지만 전가족이 주살되는 죄를 받았으므로, 신은 사사로이 그를 애도하고 있습니다. 등애가 모반을 했다고 말하는 것은 유감입니다! 등애는 성격이 강직하고 급하였으므로 고아한 사람과 속인을 쉽게 범하여 동료들과 합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를 위해 변호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신은 감히 등애가 모반할 수 없는 실정을 말씀드립니다. 옛날 강유가 농우를 끊으려는 마음을 품고 있었을 때, 등애는 수비를 정돈하고 엄격히 지키며 곡물을 축적하고 병력을 강하게 했습니다. 흉작과 가뭄이 있는 해에는, 등애는 직접 경작을 하고, 검은 색 옷을 입고, 손에는 보습을 쥐고 장수와 병사들을 인솔하였습니다. 윗사람과 아랫사람은 서로 감동을 받아 힘을 다하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등애는 지절을 갖고 변방을 수비하고 수만명을 통솔하였는데, 노복으로 하여금 수고롭게 하지 않았으며, 관리와 백성들의 노역을 가중시키지 않았습니다. 절의를 갖고 충성과 근면함을 다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이와 같이 할 수 있겠습니까? 때문에 낙문과 단곡의 싸움에서는 적은 병력으로 많은 수의 적을 공격하여 강한 적을 격파시켰던 것입니다. 이전의 황제께서는 그가 임용될만한 사람임을 아시고, 조정의 승리를 위임하고 훌륭한 책략을 주셨습니다. 등애는 명령을 받고는 자신의 몸을 잊고 말을 메어놓고 수레를 이어서 직접 사지에 몸을 던졌는데, 그의 용기는 구름을 덮었고, 병사들은 승리의 기세를 타고 나아갔으므로 유선의 군신들로 하여금 직접 손에 결박을 하게 하고, 우리에게 두 손의 손가락을 서로 어긋물제 끼고 무릎을 꿇도록 하였습니다. 등애의 공명은 벌써 이루어졌으므로, 마땅히 그의 공적을 대나무나 비단에 적어 만세까지 전해야만 됩니다. 일흔 살의 노인이 모반을 하여 무엇을 구하려 했겠습니까! 등애는 실제로 양육의 은혜에 기대어 마음속에는 스스로 의심하는 것이 없었으며, 잘못 전해진 명령이 조정의 조서라고 말하고 받아 사직을 안정시키려고 도모했습니다. 비록 통상적인 법령을 위배할지라도 옛날 의미에 부합되는 것이 있으며, 그의 본심에 근거하여 죄를 정하면 본래 상의할 만한 것은 있습니다. 종회가 등애의 위엄과 명성을 시기하여 이런 일을 만든 것입니다. 충성을 했지만 주살당하고, 신의를 다했지만 의심을 받은 것입니다. 등애의 머리를 말시장에 걸고 아들들이 함께 참수되었습니다. 그것을 본 사람들은 눈물을 흘렸고,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탄식을 했습니다. 폐하께서 제위에 올라 커다란 도량을 분명하게 하시어 갖가지 의혹들을 풀어주었으며, 주살당한 사람의 가족 또한 구애됨이 없이 임용했습니다. 과거 진나라 백성들은 백기의 무죄를 불쌍하게 여겼고, 오나라 사람들은 자서의 억울한 참변을 가슴 아파하고, 모두 그들에게 사당을 세워주었습니다. 지금 천하의 백성들이 등애를 애도하고 통한해 하는 것이 또한 이와 같습니다. 신은 몸과 머리가 분리되어 들판에 버려져 있는 등애의 시신을 거두어 안장하고, 그 전택을 유족에게 돌려주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촉나라를 평정한 공훈으로써 계속하여 그의 손자들을 봉하고 관을 덮은 후에 시호를 정하게 하시면 죽었지만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여 황천에 있는 등애의 영혼을 사면시켜 주시고 후세에 신의를 얻게 하십시오. 한 사람을 안장하여 천하 백성들이 당신의 덕행을 흠모하게 하고, 한 영혼을 매장하여 천하 사람들이 당신의 인의로 돌아오도록 한다면, 하시는 일은 적지만 기뻐하는 자는 많을 것입니다.> 9년(273), 조서를 내렸다. <등애는 공훈이 있고, 벌을 받았을 때 형법을 피해 달아나지 않았으나 자손들은 평민이나 노예가 되었다. 나는 항상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있었다. 지금 장손 등랑을 낭중으로 임명하라.> 등애가 서쪽에 있을 때, 변방의 경계선이 되는 성벽의 관새를 수리하고 성과 보루를 쌓았다. 태시 연간, 강족이 큰 반란을 일으켜 여러 차례 자사를 살해하고 양주로 통하는 길을 끊었다. 관리와 백성들이 안전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등애가 쌓은 성과 보루에 의지하였기 때문이다. 등애와 같은 주의 출신인 동료 남양의 주태 또한 공업을 세우기를 좋아하고 용병에 뛰어났다. 관직은 정로장군과 가절도독강남제군사까지 이르렀다. 경원2년(261)에 세상을 떠났고, 위장군으로 추증했으며, 시호를 장후라고 했다
이통전--------------이통은 자가 문달이고 강하군 평춘현 사람이다. 의로운 행동과 협기로써 장강과 여수 사이에서 명성을 떨쳤다. 그는 같은 군 사람 진공과 함께 낭릉에서 군대를 일으켰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귀의했다. 그 당시 주직(周直)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부하가 2천여 가구나 되었다. 진공과 이통은 겉으로는 조화를 이루었으나, 속으로는 틈이 벌어져 있었다. 이통은 진공에게는 과단성이 없음을 알았으므로 독자적으로 계책을 정하여 주직과 회합을 열어 주흥이 무르익었을 때 주직을 살해했다. 사람들은 큰 소동을 벌였지만, 이통은 진공을 이끌고 그 도당의 두목을 주살하고, 그 진영을 모두 병합했다. 후에 진공의 처남 진합이 진공을 죽이고, 그의 부하들을 다스렸다. 이통은 진합의 군대를 공격하여 무찌르고, 진합의 머리를 베어 진공의 무덤에 제사지냈다. 또 황건군의 대통사 오패를 사로잡았고 그의 부하들을 투항시켰따. 마침 대기근을 만나자, 이통은 집이 기울 정도로 베풀고 가산을 모두 흩어 구제하고, 사졸들과 함께 거친 음식을 먹었으므로, 모두 다투어 그를 위해 공을 세우려 했다. 이로 말미암아 도적은 감히 그를 침범하지 않았다.
건안 초, 이통은 그의 무리를 이끌고 허창에서 조조를 알현했다. 조조는 이통을 진위중랑장(振威中郞將)으로 임명하고, 여남 서쪽 경계 지역에 주둔하도록 했다. 조조가 장수(張繡)를 정벌할 때, 유표가 병사를 보내 장수를 도왔으므로 조조의 군대가 불리했다. 이통은 병사를 이끌고 밤에 와서 조조를 만났으며, 조조는 그의 부대를 다시 출전시키고, 이통이 선봉을 담당하도록 하여 장수군을 크게 이겼다. 조조는 이통을 비장군으로 임명하고 건교후(建巧侯)로 봉했다. 여남군을 두 현으로 나누고, 이통을 양안도위로 임명하여 관리하도록 했다. 이통 아내의 백부가 법률을 범하였으므로, 낭릉(朗陵)의 장 조엄(趙儼)이 체포하여 사형 판결을 내렸다. 그 당시 죽이고 살릴 수 있는 권한은 목(牧)이나 태수 손에서 결정되었으므로, 이통의 아내는 울면서 그의 목숨을 구제해 달라고 간청했으나, 이통이 말했다. '나는 조공과 함께 대업을 완성하려고 힘을 다하고 있소. 절대로 사사로운 정 때문에 공적인 법을 버릴 수는 없소.'
이통은 조엄이 법을 집행하는데 시류에 영합하지 않으려는 것을 가상히 여겨 그와 좋은 친구 관계를 맺었다. 조조가 원소와 관도에서 서로 대치하고 있을 때, 원소가 사자를 보내 이통을 정남장군(征南將軍)으로 임명했고 유표가 몰래 또다시 이통을 불렀으나 이통은 모두 거절했다. 이통의 친척과 부하들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지금 당신은 고립되어 위험한 상황에서 단독으로 지키고 있는데, 강대한 원조를 잃으면 지키며 기다릴 방법도 없으니, 빨리 원소에게 돌아가는 것이 더 나을 듯합니다.' 이통은 칼을 움켜쥐고 그들을 질타하며 말했다. '조공은 현명하고 이치에 밝아 반드시 천하를 평정할 것이오. 원소는 비록 지금은 강성하지만, 함부로 임용하고 계책도 없으니 결국에는 조공의 포로가 될 것이오. 나는 설사 죽는다 하더라도 조공에게 두 마음을 가질 수는 없소.'
즉시 원소의 사자를 죽이고, 인수(印綬)를 조조에게 보냈다. 또 군 안에 있는 도적 적공(翟恭),강궁(江宮),심성(沈成) 등을 공격하여 남김 없이 무찌르고 그들의 머리를 조조에게 보냈다. 그리고 회하와 여수 일대를 평정하였으니 도정후로 바꿔 봉하고, 여남태수로 임명했다. 이 때 도적 장적(張赤)등 5천여 명이 도산(桃山)에 모였는데, 이통이 그들을 공격하여 무찔렀다. 유비와 주유는 강릉에서 조인을 포위하여 공격하고 따로 관우를 보내 북쪽길을 끊어 놓았다. 이통은 부대를 인솔하여 관우를 공격하고 말에서 내려 방책을 걷어내고 포위권으로 진입하여 싸우면서 앞으로 나가 조인의 군사를 구출했는데, 무용이 여러 장수들 중에서 가장 뛰어났다. 이통은 도중에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는데, 그 해 42세였다. 식읍 2백 호를 추증하여 이전 것과 합쳐 4백 호가 되었다. 문제가 제위에 즉위한 후, 시호를 강후(剛侯)라고 하였으며, 조서를 내렸다.
--- 옛날에 원소가 병사를 일으켜 어려웠을 때, 허(許),채(蔡) 남쪽에서부터 사람들이 다른 마음을 품었다. 그러나 이통은 도의를 지키고 다른 것을 돌아보지도 않았으며, 마음 속에 두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충심을 따르도록 하였으므로 짐은 그를 매우 가상하게 여겼다. 불행하게도 일찍 죽어 아들 이기(李基)가 비록 작위를 계승했지만, 그의 공훈에 보답하기에는 부족하다. 이기의 형 이서(李緖)는 이전에 번성에 주둔하였고, 또 전공을 세웠다. 지금 그의 공로를 중시하여 이기를 봉의중랑장으로 임명하고, 이서를 평로중랑장으로 임명하여 그들을 특별히 총애하라. ..
조홍전---------------조홍의 자는 자렴이고, 조조의 사촌 동생이다. 조조는 의병을 일으켜 동탁을 토벌하려고 영양까지 왔지만, 동탁의 대장 서영에게 패배했다. 조조는 타고 가던 말을 잃었고, 적군의 추격은 너무도 빨랐다. 조홍이 말에서 내려 자기 말을 조조에게 주자 조조가 사양했다. 조홍이 말했다. "천하에 저 조홍은 없을 수 있지만, 당신은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고 나서 도보로 조조를 수행하여 변수가로 왔는데, 뜻밖에도 물이 너무 깊어 건널 수 없었다. 조홍은 강가를 따라가서 배를 찾아 조조와 함께 물을 건너 초현으로 달려왔다. 양주 자사 진온은 평소 조홍과 친하게 지냈으므로, 조홍은 사병 천여 명을 인솔하여 진온이 있는 곳으로 가서 병사를 모아, 여강군의 정예 무장병 2천여명을 얻었고, 동쪽으로는 단양에 가서 또 수천 명을 얻어 용강에서 조조와 합류했다.
조조가 서주를 정벌할 때, 장막이 연주를 내주어 조조를 배반하고 여포를 맞이했다. 그 당시 대기근이 있었지만, 조홍은 병사들을 앞쪽 으로 두고 나아가게 하여 먼저 동평과 번을 점거하고 식량을 모아 병사들에게 나눠주었다. 조조가 복양에서 장막과 여포를 공격하니, 여포는 패하여 달아났고 조홍은 동아를 점거하고 병사들을 돌려 제음·산양·중모·양모·경·밀 등 10여 현을 공격하여 모두 점령했다. 조홍은 앞뒤의 전공으로 응양교위로 임명되었으며, 또 양무중랑장으로 승진하였다.
천자는 수도를 허창으로 정하고, 조홍을 간의대부로 임명하였다. 유표를 정벌하도록 하여 제양·음엽·도양·박망 등지에서 유표의 부하 장수들을 물리쳤다. 전공이 있으므로 여봉광군으로 승진되고 국명정후에 봉해졌다. 조홍은 여러 차례 정벌하였으므로 훗날 관직이 도호장군으로 되었다. 문제가 즉위하자, 조홍을 위장군으로 삼았다가 표기장군으로 승진시켰고, 나아가 야왕후로 봉해 식읍을 1천 호 내렸으므로 이전의 것과 더하면 2천1백 호가 되었다. 특진의 자리를 받았으며, 나중에는 도양후로 봉해졌다. 본래 조홍은 집이 부유하였지만 성품은 인색했다.
문제는 어렸을 때 조홍의 집에서 재산을 빌리고 싶었지만 말은 하지 못하고, 항상 그를 미워했다. 즉위한 후 조비는 조홍의 식객이 법을 어긴 것을 구실로 조홍을 옥에 가두고 사형을 선고했다. 많은 신하들이 함께 그를 도우려고 했지만 어찌할 수 없었다. 문제의 생모 변태후가 곽후에게 말했다. "조홍을 오늘 죽게 한다면, 나는 내일 문제에게 칙령을 내려 당신을 황후의 자리에서 내쫓도록 할것이오." 그래서 곽태후는 눈물을 흘리며 몇 차례에 걸쳐 조홍을 대신하여 애원하고 간청하여서 조홍은 관직을 박탈당하고 작위를 말소시키는 관대한 처분을 받게 되었다. 조홍은 선제(무제)의 공신이었으므로 그 당시 사람들은 문제의 이와 같은 박해에 대해 대부분 불평했다.
명제가 즉위한 후, 조홍은 다시 *군이 되었고, 낙성후에 봉해졌으며, 식읍이 1천 호로 특진의 자리로 승진하였고, 또 표기장군이 되었다. 태화 6년(232)에 조홍이 세상을 떠나자 시호를 공후라고 했다. 조홍의 아들 조복이 후위를 이었다. 조조 때에는 조홍의 영지를 분할하며, 아들 조진에게 나누어 주고 열후로 봉했다. 조홍의 재당숙 조유는 신중하고 근명하며 성실했는데, 관직은 위장군에 이르렀고 열후에 봉해졌다.
방덕전------------방덕은 자가 영명이고 남안군 훤도현 사람이다.
젊었을 때 군리와 주의 종사가 되었다. 초평 연간, 마등을 따라 모반한 강족과 저족을 공격하여 여러 차례 공을 세웠으므로 교위까지 승진했다. 건안 연간, 조조가 여양에서 원담과 원상을 토벌하였을 때, 원담은 곽원, 고간 등을 보내 하동을 공격해 점거하였고, 조조는 종요로 하여금 관중의 여러 장수들을 통솔하게 하여 그들을 토벌했다. 방덕은 마등의 아들 마초를 따라 평양에서 곽원과 고간을 방어했는데, 방덕이 선봉에 서서 곽원과 고간을 공격하여 그들을 크게 무찔렀으며, 직접 곽원의 머리를 베었다.
중랑장에 임명되고, 도정후로 봉해졌다. 후에 황건군의 일당인 장백기가 홍농에게 반란을 일으키자, 방덕은 또 마등을 따라 장백기를 토벌하러 갔는데, 두 효산 사이에서 그를 무찔렀다. 매번 전투 때마다 항상 선봉에 서서 적의 진영을 함락시켜 적군을 퇴각시켰으므로, 마등의 군중에서 가장 용맹스러웠다. 나중에 마등이 조정의 부름을 받아 위위로 임명되자, 방덕은 남아 마초에0게 귀속되었다.
조조가 위남에서 마초를 공격하자, 방덕은 마초를 따라 한양으로 달아나서 기성을 지켰다. 후에 또 다시 마초를 따라 한중으로 달아나 장로를 따랐다. 조조가 한중을 평정하자, 방덕은 사람들을 따라 함께 투항했다. 조조는 평소 방덕의 용맹함과 위엄있는 무예를 들었으므로, 입의장군으로 임명하고 관문정후에 봉했으며, 식읍을 3백 호 주었다. 후음과 위개 등이 완성을 점거하고 조조에게 모반하자, 방덕은 부하들을 인솔해 조인과 함께 완성을 공격하여 후음과 위개를 참수했다. 남하하여 번성에 주둔하여 관우를 토벌했다. 번현의 여러 장수들은 방덕의 당형이 한중에서 유비를 받들고 있었기 때문에 모두들 방덕을 의심했다.
방덕이 항상 말하길, "나는 나라의 은혜를 깊이 입었으므로, 뜻을 세워 나라를 위해 죽겠소. 나는 몸소 병사를 이끌고 관우를 공격할 것이오. 올해 내가 관우를 죽이지 못하면, 그가 나를 죽일 것이오."
후에 친히 관우와 교전하였고, 화살로 관우의 이마를 맞추었다. 그 당시 방덕은 항상 백마를 탔으므로, 관우가 있는 번성의 군사들은 그를 백마장군이라고 부르며 모두 두려워했다. 조인은 방덕을 보내 번성 북쪽으로 10리 쯤 되는 곳에 주둔하도록 했는데, 마침 10여 일간 비를 만나 한수가 범람하고, 번현의 물이 땅 위로 5,6척이나 올라왔으므로, 방덕은 여러 장수들과 물을 피해 제방으로 올라갔다. 관우가 배를 타고 그들을 공격하였는데, 큰 배의 사면에서 제방위로 화살을 쏘았다.
방덕은 몸소 갑옷을 입고 활을 갖고 쏘았는데 빗나가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장군 동형, 부곡장 동초 등이 투항하려 하자, 방덕은 그들을 죽였다. 날이 밝을 무렵부터 해가 질 때까지 힘을 다해 싸웠지만, 관우는 더욱 급속도로 공격하였고, 화살을 모두 사용하자 짧은 병기로 싸웠다. 방덕은 독장 성하에게 말했다.
"내가 듣건대, 훌륭한 장수는 죽음을 두려워하여 구차하게 삶을 살려 하지 않고, 열사는 절개를 훼손시켜 생존을 구하지 않는다고 하오. 오늘이 내가 죽는 날이오."
싸움은 더욱 격렬해졌고, 기세는 더욱 웅장해졌다. 물이 점점 불어났으므로 관리와 병사들은 모두 투항했다. 방덕은 휘하 장수 한명, 오백 두명과 함께 작은 배를 타고 조인의 진영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물살이 급하여 배가 전복되고, 활과 화살이 모두 떨어지고, 오직 배만 껴안고 물 위에 떠 있었으므로 관우에게 붙잡혔으나, 서 있을 뿐 무릎도 꿇지 않았다. 관우가 그에게 말했다.
"당신 형이 한중에 있으니, 나는 당신을 장수로 삼으려 했는데 무엇 때문에 일찍 투항하지 않았소?"
방덕은 관우에게 심하게 욕하며 말했다.
"이놈, 무슨 투항을 말하는가! 위왕은 병사 백만을 거느리고 천하에 위엄을 떨치고 있다. 당신의 유비는 용렬한 인물에 불과한데, 어떻게 위왕과 필적할 수 있겠는가! 내가 어찌 국가의 귀신이 될 수는 있을지언정, 적의 장수가 되겠는가."
마침내 관우에게 살해되었다. 조조는 이 소식을 듣고 매우 비통해하며 눈물을 흘리고, 그의 두 아들을 열후로 삼았다. 문제가 왕의 자리에 즉위한 후, 사자를 방덕의 묘로 보내 시호를 하사하였는데, 책(위왕의 조서)에 이렇게 말했다.
<옛날에 선진이 머리를 잘리고, 춘추시대의 왕촉이 다리를 잘린 것은 몸을 훼손시켜 절개를 지킨 것으로 이전 조대에서는 그들을 찬미했다. 오직 그대만이 과감하고 강인함을 나타내고, 어려움에 직면하여 몸을 던져 공명을 성취했다. 명성은 그 당시에 가득 찼으며, 의로움은 옛날 사람보다 높으니, 과인은 그대를 안타까이 여겨, 시호를 장후라고 하노라.>
또 방덕의 아들 방회 등 네명에게 관내후라는 작위를 주고, 식읍을 각 백 호씩 주었다. 방회의 용맹함과 강인함에는 부친의 풍모가 있었으며, 관직은 중위장군에까지 이르렀고, 열후에 봉해졌다.
조조전-----------동파지림에서 왕팽상이 말하기를 '마을의 아둔한 어린 아이들은 집안에서 귀찮은 존재이므로 곧 한데 모아 놓고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삼국의 고사를 이야기할 때에 유현덕이 패배하였다는 말을 들으면 이맛살을 찡그리고 눈물을 흘리는 아이도 있으며, 조조가 패배했다는 말을 들으면, 곧 기뻐하곤 하였다' 고 했다.
나관중이 삼국지 연의를 쓸 당시에도 이와 같은 옹유반조 사상이 두드러져 나관중의 삼국지 연의에서의 조조의 모습은 그야말로 악인이오 간웅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그때 당시엔 어땠는지 몰라도 지금의 우리들은 조조의 모습을 그렇게 나쁘게 만은 보지 않는다.
하루빨리 전국을 통일해서 백성들을 평온으로 이끌기 위한 군주의 모습으로 보면은 조조의 행동이 절대 나쁜게 아니라 생각한다.
지금에 와서는 오히려 조조의 그런 모습은 당연시 되고 있다.
조조는 모든 면에서 두드러진 인물이다.
나관중 자신도 조조의 그런 두드러진 모습을 그려 내고 있다.
조조는 정치가로써 문인으로써 장수로써 일반인들이 따르지 못할 경지에 오른 사람이다.
조조의 정치가로써의 모습은 그가 전쟁을 치르고 나서 자기 고향을 지나다가 부하장수에게 자신을 위해 싸우다 죽은 고향 병사들의 가족의 생활을 보장하라고 지시한 면에서도 찾아 볼수 있다.
이런 제도는 세계 최초라 한다.(어떤 제도인지 이름이 생각이 안납니다.어디서 본것인지도 까먹어서 그냥 적습니다.)
군량의 조달과 백성의 편의를 위해 둔전제란 것도 만들어서 많은 성과를 올리기도 한다.
전쟁중에도 시흥이 돌면 시를 읊조리고 문장을 남기는등 문인으로써도 인정 받는다.
문인으로써의 조조의 모습은 그가 가진 여러 가지 능력에 비해 떨어지므로 당대 최고라 말 할 수는 없으나 일반 범인이 따를 수 없는 경지였다.
하지만 조조의 문인으로써의 재질은 그의 세째 아들 조식에게 그대로 이어져 지금도 그 문학적 가치를 인정하는 '칠보시'를 남긴다.
번외로 칠보시는 당시 왕위를 계승한 조비가 자신의 동생인 조비를 죽이기위한 핑계로 일곱 발자욱을 떼기 전까지 하나의 시를 지으라 해서지은 시라한다.
그 내용이 너무도 애절하기에 조비는 조식을 살려 주었다 한다.내용은 '낳기는 한가지에서 낳는데 어찌도 그리 핍박하냐'
뭐 그런 내용이다.조조의 장수로써의 모습도 역시 두드러진다.
장수로써 두드러진 모습 중에 몇 가지 만을 들기로 하자.
첫째로 과단성을 들 수 있으리라.
조조는 장수를 뽑는데 있어 귀천을 따지지 않았다. 오로지 그 자신의 능력만을 보고 장수를 뽑는다.일례로 전위나 허저 서황같은 이들을 들 수 있겠다.
당시 시대가 아무리 어지러운 시대라 하나 봉건 사상이 뿌리 박힌 시기에 귀천 없이 장수를 가린다는 것은 과단성 없이는 부족한 면일 것이다.
참모들이 내놓은 의견과 자신의 의견이 부딪힐때 자신의 의견이 잘못 됬다 싶으면 주저 없이 참모들의 의견을 따르는 면도 예로 들 수있겠다.
서주 침략을 놓고 그 그릇됨을 간하는 순욱이나 곽가의 의견을 따른 것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조조의 이런 모습은 그의 주변에 많은 인물이 모여 들어 천하를 통일 하는데 기반을 쌓을수 있는 밑받침이 됬다.
유비의 가식적인 면의 일면과 대비해 볼 때 한단계위의 전술이라 생각 할 수 있다.
둘째로 끊임없는 노력을 들 수 있겠다.
생각해보라 그 천재적인 두뇌를 가지고 있으면 서도 끊임없이 노력하니 남보다 나아짐은 당연 할 것이다.
조조는 일국의 지도자로써 그바쁜 와중에도 낮엔 병서를 밤엔 경서를 손에서 놓는 법이 없었다 하니 그가 얼마나 노력파인지 알 수 있으리라.
세째로 그의 재치를 들 수도 있겠다.
병사들이 배고픔과 목마름에 허덕인적이 있었다. 그때 조조는 채찍으로 먼산을 가리키며 메실이 있다면서 병사들의 목마름을 해소
시킨적이 있다.또 병사들이 행군하는데 민폐를 끼칠가봐 병사들에게 보리싹을 밟는자를 목벤다고 명한적이 있는데 그 자신의 말이 메추리에 놀라서 날뛰는 바람에 자신이 내린 군령을 자신이 어긴게 되었을때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병사들에게 보였던 적도 있다.
(재치면에서는 이것말고도 여러가지를 더 올릴 수도 있겠으나 알고 있는거 자꾸 말하면 짜증내 할까봐 삼가기로 한다.)
어떤 사람들은 조조의 이런 면을 가볍다느니 편협하다느니 하며 비난하곤 한다.
그래서 재치라는 가벼운 단어로서 표현한다.
조조의 재치를 생각할때 빼놓을수 없는 일화가 있어 올려 본다.
조조의 집안이 원채 있는 집안이라 당시 명문 가문이었던 원소와도 친하게 지냈던 적이 있다.
지금으로 말하면 오렌지족 같은 망나니 짓을 많이 하고 다녔는데 하루는 이웃 마을에 신부를 겁탈하기 위해 잔치 자리에서 소란을 피운 다음 신부방에 가서 신부를 납치해서 도망치다가 원소가 잘못해서 탱자나무숲에 빠져 움직이질 못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혼자 도망 가든지아니면 구한다고 미적거리다가 둘 다 잡히든지 할 텐데 그때 조조는 원소를 가리키며 "도둑이 여기 있다"고외쳤다.
그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 원소가 살이 찢어지는 것도 돌볼 겨를 없이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숲을 빠져나와 도망쳤다.(-세설신어-)
그 외에도 조조는 무예에도 능했다.
운동신경이 뛰어나 나는 새를 맞춰 떨어뜨리고 맹수를 생포한 일도 있으며 남피라는 곳에서 사냥 할 때는 꿩을 63마리나 잡았다고 하니 무예면에서도 뛰어났다.
조조는 평소에 사치를 싫어해서 방장이나 병풍이 찢어지면 수리해서 쓰도록 했을 만큼 검소한 면도 있었다.
논공행상이 분명해 공이 있는자에게는 천금도 아끼지 않았으나 공이 없는 자에게는 한푼도 주질 않았다.
조조는 강서땅 초군 사람으로 자는 맹덕이다.그의 아버지 조숭은 본디 하후씨 였는데 시종 환관인 조등의 양자로 들어갔고, 그때 부터 조씨가 되었다.조조는 아명을 아만, 또는 길리라 했다.
자신의 아버지가 1억전을 주고 태위 벼슬을 살만큼 부유하게 자란다.조조가 젊은 날에 방탕한 길로 빠졌다는 것은 앞에서도 언급했거니와
아마도 그가 그런길로 빠져든게 집안 사정으로 인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1억전이라면 왠만한 갑부들도 만저보기 힘든 엄청난 돈인데 그런 돈을 어디서 어떻게 구했겠는가! 모두 백성들의 땀이요 피가 아니었겠는가..집안의 그런 비리(?)를 조조의 의기가 그냥 넘기지 않았으리
라..조조는 20을 갓 넘긴 나이에 수도 경비대장으로 임명된다.이것도 아버지 조숭의 후광으로 낙하산 인사라 할 것이다.
낙하산이야 어쨌든 조조는 대장으로 임명되자 그 일에 충실하고 그의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낙양의 4대문을 보수하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법을 어기는 자는 엄중히 다스린다.어느날 십상시의 한사람인 건석이라는 자의 아저씨벌 되는 인간이 법을 어기고 야간 통행을 감행한 적이 있었다.
당시의 십상시의 영향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는데도 조조는 그 인간을 때려 죽이고 만다.
아무리 날고 기는 십상시라지만 이미 정해놓은 법을 어겨서 법대로 처리한 일가지고 어떻게 해볼수가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조조의 벼슬을 올려주고 변방의 지사로 임명해 수도에서 쫓아 낸다.하지만 워낙에 뛰어난 인물이 변방에서 썩을리 없다.
임명된 그해 다시 수도 낙양으로 돌아 온다.돌아온 그는 환관의 소행을 보다 못해 황제에게 상서하지만 워낙에 썩은 인간들이 득실거리는 황실이라 번번히 가로 막히고 만다.
조조의 인생과 우리들이 삼국지 연의를 보고 느끼는 조조의 이미지와는 판이하게 다른 조조의 젊은 시절의 모습이다.
당시 인물 감정을 잘한다는 허자장이란 사람이 조조를 보고"태평한 시대라면 유능한 신하가 될 것이고 ,난세에는 간사한 영웅이 될 것이다"라고 말한적이 있다.
조조의 젊은 시절 모습만으로 유추해 보건데 조조는 충분히 한 황실에 충성을 다하는 유능한 신하가 될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어지러운 세상에 태어난게 죄라면 죄랄까 어지러운 시대가 조조를 필요로해서 그의 행동이 한 황실과 반대되는 입장으로 바뀌지 않았을까?
삼국지 연의의 인물 형성에서 가장 두드러진 인물을 꼽으라면 제갈공명과 유비 관우 조조를 꼽을수 있겠다.
역사상 조조란 인물이 걸출한 정치가요, 군사가이면서 한편 잔혹한 압제자였던 사실과 부합되게 소설에서도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 적인 측면을 동시에 지닌 양면적인 인물로 형상화되어 있다.
조조는 그 어지러운 시대가 낳은 최고의 인물이다.
사마의전------------------사마의는 낙양 동북쪽에 있는 효경리 사람이다.
그의 형제들이 또한 모두 뛰어나 당시에는 그들 형제를 일컬어 사마팔달이라 하여 그들을 칭송했다.
사마의는 형인 사마랑을 필두로 사마팔달의 둘째였다.
사마의는 20전후에 이미 이름을 날려 여러사람으로부터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는 평을 받고 있었다.
그가 22살 되던 해에 그의 이름은 조조에게까지 전해져 조조의 부름을 받지만 중풍이 들었다 핑게대고 나가려 하지 않았다.
당시 조조의 세력은 한창 무르익는 단계였는데 원소를 분쇄하고 여남의 유비마저 깨뜨려 삼공의 자리에 앉아 있을때다.
녹록한 위인 같았으면 관운이 틔었다 좋아라 달려 갔겠지만 명문집안에서 자라난 사마의가 환관의 손자에게 고개를 숙이고 싶지 않았을 것이라 추측해 본다.
얼마 후 조조는 다시 사람을 보내어 사마의를 부르게 되는데 조조의 성미를 아는지라 이번에도 거역하면 제명에 죽지 못할것이 두려워 이번에는 조조의 부름에 응하게 된다.
이때가 사마의라는 이름이 정식으로 정사에 기록되는 처음이다.
정사의 기록에 사마의를 '낭고상(狼顧相)'이라고 말하고 있다.
'낭고'란 이리가 뒤를 잘 돌아본다 하여 사람도 누가 쫓아올까봐 두려워서 뒤를 자주 돌아보는 것을 비유해서 쓰는 말이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는 경우도 보통 사람 같으면 목뿐 아니라 몸전체를 돌리는 게 상식인데 낭고상의 사람은 몸은 그대로 앞으로 가면서도 얼굴만 돌려 뒤를 돌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사마의가 그런 인물있었는데 <진서>의 기록에 누가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을 듣고 조조가 사실인지 아닌지 실험해 보는 애기가 나오고 실험결과 사실임을 확인하는 내용이 나온다.
조조는 사마의를 처음 불러올때 부터 그를 경계하는 태도를 보였는데 처음 사마의를 불렀을때 그가 중풍을 핑계로 나오려 하지 않자 자객을 보내어 그의 말이 거짓일 경우엔 죽여버리도록 명령한 일화에서 그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사마의는 조조보다 24살이나 어리지만 자신의 속마음을 여간해서는 표현하지 않는..어찌보면 음흉하게 까지 보이는 사마의의 성격은 조조의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조조의 그같은 염려는 사마의가 훗날 사마염이 진나라를 세울 수 있도록 기반을 닦아둔 것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흔히들 제갈량과 사마의를 많이 비교하는데 실제를 보면 사마의와 제갈량이 각국의 대표장수로써 직접 대면한 것은 제갈량이 전후 출사표를 쓰고 5회에 걸친 북벌의 후반 2회에 부딪힌 것이 전부이다.
그런데도 사마의하면 '아!공명의 라이벌..'이라는 생각이 먼저 연상되는 이유는 그들의 싸움이 너무도 리얼하고 재미있게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다.삼국지 연의 전편을 통틀어 제갈량의 계획을 사마의처럼 철저히 막아낸 사람은 없다.
정사의 내용과는 틀리게 삼국지 연의에서 제갈량에게 철저히 농락당하는 주유라는 인물도 실상을 알고보면 제갈량에게 그렇게 처참하게 당하지 만은 않은 일류 장수로 등장하지만 제갈량의 뜻을 꺽진 못하고 있는 실정에서 사마의는 삼국지연의의 후반부에서 제갈량을 그리도 철저하게 막아내고 있다.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달아나게 하다.'라는 고사는 너무도 유명하다.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것이 정설이다.
공명이 아무리 전시에 돌연한 죽음을 맞았다지만 사후의 일을 정리하지 않고 그냥 죽었을리는 없다는 생각에 자신의 병력의 출혈을 없에기 위해 달아나는 촉군을 쫒지 않았다는게 그 내용이다.그리고 '공성지계'라 하여 2천5백의 군사로 사마의의 15만 대군에 맞서서 달아나게 했다는 것도정사를 되 짚어 보면 있을 수 없는 내용이다.
'공성지계'란 사마의가 공명의 허허실실 작전에 말려들었다는 내용으로 공명의 첫 원정때 마속의 실수로 가정에서 패한 공명이 군량의 수송을 위해 서성에서 2천5백의 소군으로 사마의의 15만 대군을 거문고만으로 물리쳤다는 내용이다.
이 이야기의 모태는 배송지의 주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배송지 자신도 이 주를 달면서 이 이야기는 거짓말이라고 미리 밝히고 있다.
연의의 내용이기는 하지만 공명의 공성지계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사마의에게 주어진 한 사건에 대해 남보다 더 신중하게 생각할 줄 아는 면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연의에서의 화려한 공명과 중달의 싸움에 비해 너무도 허무하게 싸움다운 싸움없이 지구전만을 꾀하다가 공명의 돌연한 죽음으로 공명과 중달의 지략싸움은 막을 내리고 만다.
공명의 도전을 물리친 중달은 약 3년간 그대로 장안에 머물러서 촉한의 움직임에 대비하고 있었는데 그 중달에게 명제로 부터 호출이 왔다.요동태수 공손연이 자칭 '연왕'이라 일컬으며 조정에 반기를 들었기에 이를 막으라는 내용이다.
당시 공손연은 오나라와 연합해서 위나라의 세력에 반기를 든 것인데 '연'과 '오'가 위,아래에서 위협을 가하면 아무리 중국의 요충을 점령한 위나라이지만 그 존망이 위태롭게 되는 상황이었다.
이 싸움에 사마의를 출진 시키는 데에는 두가지 이유가 있다.
나라가 위,아래로 위협받는 만큼 나라의 존망이 위태롭기도 하려니와 날로 높아만 가는 사마의의 명망을 두려워하여 그를 최전선으로 보냄으로써 정사에 간여하지 못하도록 하여 그의 세력확장을 막기 위함이었다.
속사정이야 어찌됬든 사마의는 연의 정벌에서 주도면밀한 전략으로 대승을 거두고 다시 회군한다.
당시 위나라는 이미 망국으로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황제인 명제가 36세의 젊은 나이로 술과 색에 빠져 몸져 눕고 그 뒤를 이어 불과 8살짜리 황태자 조방에게 제위를 물려주며 어린 태자와 모든 후사를 조조의 아들인 연왕 조우에게 맡기려 했다.
그러나 연왕 조우는 사마의가 혹시 자신에게 반기를 들까 두려와 그를 멀리 장안으로 보내려 했으나 연왕 반대파들의 조작으로 수도로 돌아오게 된다.
연왕 반대파들은 다시 조씨 일족이며 중신인 조상과 사마의를 황태자의 보좌로 천거하게 된다.
그러나 사마의의 세력이 점점커지자 조씨 일족들 안에서 사마의를 경계해야한다는 생각에 사마의를 태부로 임명해 병권을 빼앗아 조상이 모든 병권을 갖게 된다.
또한 조상은 사마의에게 자기의 실력을 과시하기 위해 사마의가 격퇴하지 못한 촉을 자기가 직접 상대하지만 결과는 참패로 끝났다.
조상 일파에 의해 점차 국정이 어지러워지자 위기의식을 느낀 사마의는 병을 핑계로 두 아들과 함께 낙향하게 된다.
고향으로 돌아온 사마의는 다시 재기할 때를 노리고 조용히 기다리는 중에 이승이라는 사람이그를 방문해 그의 상태를 감시하지만 사마의는 멋지게 따돌리고 때를 기다리다가 249년 1월,폐제(조방)가 선제의 묘소를 돌보고자 행차할 때를 노려 순식간에 낙양을 점령해버린다.
이 사태로 조상과 그의 일당은 모두 참수당해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으며,이때부터 사마의가 모든 정권을 장악한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70줄의 노인으로서는 대단한 인내이며 도박이라고 볼 수 있다.
251년 사마의는 향년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후에 5호16국으로 분열되기는 하지만 진나라를 세운 기틀은 이 사마의가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서쪽으로는 촉한을 막고,동쪽으로는 요동을 평정하여 그공로로 명제때 선왕으로 봉함받고,말년에는 혼자 위나라에 대항하는 정변을 일으켜 아들 사마사, 사마소가 권력을 계승하게 했으니 그의 신중함과 침착함은 따를 사람이 없을 것이다.
사마의의 행적을 살펴보면 위 무제 조조의 행적과 비슷함을 알 수 있다.
둘다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이고 권모술수에 능했다.
그리고 둘다 자신들의 세대에서 찬탈을 꾀할 만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일은 그들의 자손들에게 맡기고 있다.
지식이 짧아서 그들의 심리상태까지는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지만 뛰어난 인물만이 가지는 그런 특별한 뭔가가 있나보다.
사마의와 조조모두 손자병법에 능했는데 조조는 손자병법에 주를 달만큼 손자병법에 대해 연구한 사람이고 사마의도 그가 썼던 전법을 살펴보면 모두가 손자병법에 기초를 두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어리석은 생각일지 모르나 사마의의 인생은 조조의 복사판과 같은 인상을 받는다.
사마의는 자신을 닮은 조조를 연구하며 그의 행로를 정하지나 않았을까?
(사마의와 조조가 닮았다고는 하나 조조의 성격이 양성적인데 반해 사마의의 성격은 음성적인 면이 있다.)
하후돈전----------------하후돈의 자는 원양으로 패국 초 사람이다.
조조의 사촌뻘이 되는 사람이다.(원래 조조의 할어버지는 환관이다.환관은 남자로써의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당시 환관은 이런 이유로 양자를 들여 자신의 세력을 세습할수 있도록 되어있었는데
조조의 아버지 조숭을 양자로 맞아 들인다.본시 조숭은 하후씨 집안의 사람이었고 하후돈은 조조의 아버지의 생가로 따져 조조의 사촌이 된다.)어렸을적부터 품성이 맑고 검소하여 인근에 이름을 떨친 사람이다.
그가 14살때 서당에 나갔는데 어느 날 누가 자기 스승을 욕하는 것을 보고 그 자리에서 때려 죽여 버린일이 있었다.
그때 부터 그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다.
하후돈은 조떠?처음 거병할때부터 그의 비장의로써 거의 모든 전투에 나가 공을 세우고 190년에는 동군 태수가
된다.조조가 서주의 도겸을 정벌하기 위해 원정을 나갔을때 하후돈을 복양에 머무르게 하여 복양의 수비를 맡긴 적이 있었다.
이때 장막.진궁등이 모반하여 여포를 맞아들일 때 조조의 가족들이 그곳에 있었는데 여포가 원체 무식한 인간이라
조조의 가족을 헤칠까봐 가볍게 무장한 수하장병을 이끌고 여포와 전투를 벌이는 중에 여포의 계교에 빠져 여포에게 사로잡히고 만다.(이 부분에선 삼국지 연의와 내용이 틀린데 연의에는 하후돈의 부하장수가 잡히는 것으로 나오는데 정사 삼국지에는 하후돈이 잡히게 되는 것으로 나온다.)
하후돈을 사로잡은 여포는 하후돈 진영에 사람을 보내어 하후돈과 보물과 맞 바꾸자는 제안을 하게 되는데(이 것은 단순히 여포가 보물이 탐이 나서가 아니라 하후돈진영의 사기를 떨어뜨리기 위함이었다.대장이 보물과 맞바뀌게 되면
당연히 그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지고 이 전투에서 패할것은 두말 하면 자소리인 것이다.)
이때 하후돈의 부장 한호는 그런 제의를 하러온 사자를 목베고 하후돈을 구출하게 된다.
서주 침공을 하던 조조가 사태의 위급함을 알고 달려오고 하후돈에게 대군을 주어 여포를 정벌하게 하는데 이 전투에서 하후돈은 왼쪽 눈에 화살을 맞고 애꾸눈이 된다.연의에는 하후돈이 그 눈알을 먹어 버렸다고 나오나 정사에는 없는 걸로 봐서 허구일 가능성도 있다.그러나 하후돈의 성품으로 보아 충분히 있을수 있는 애기다.
애꾸눈이 된 하후돈은 맹하후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는데 하후돈은 이별명을 매우 싫어해 거울을 볼때마다 거울을 깨뜨렸다고 한다.하후돈은 수많은 전투에서 공을 세우고 그에 따라 벼슬이 복파장군에까지 오르고 식읍이 2천5백호에 이르게 된다.
위왕이 된 조조는 하후돈을 불러 항상 수레에 함께 타고 행동했으며, 특별히 친근하고 존중하여 침상에 까지 출입하는 것을 허락했다.다른 장수와는 비길바 없는 조조의 신임을 받은 것이다.
조조가 죽고 조조의 아들 조비가 왕위에 오르자 하후돈은 대장군에 임명되나 몇개월 후에 병을 얻어 생을 마감한다.
후에 문제는 하후돈에게 충후라는 시호를 내린다.
하후돈이라 하면 아까 말한 것처럼 여포와의 싸움에서 자신의 왼쪽 눈에 화살을 맞자 그대로 화살을 뽑아들고 '부모가 준 이몸을 어찌 함부로 버릴소냐!'하며 그대로 삼켜버린 일로 우리 기억속에 강하게 남아 있는 인물이다.
잘못 생각 하면 단순 무식하게 보이는 대목이나 하후돈의 성격은 청렴하고 검소하며 병사들에게 모범을 보이는 그런 인물 이었다.
진수는 그의 성격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후돈은 비록 군중에 있었으나, 스승을 직접 영접하여 가르침을 받았다.그의 성격은 청렴하고 검소 했으며, 남는 재물이 있으면 곧 사람들에게 나누어 베풀었고,부족하면 관청에서 도움을 받았으며,재산관리를 일로 삼지는 않았다.
순욱전-----------------순욱은 낙양근처의 영천군 영음현 사람이다.
순욱의 조부 순숙은 자가 계화이고 낭릉현의 령을 역임하였는데 그의 아들 8명이 모두 뛰어
난 재능이 있어 '8용'라는 소리를 들었다.
순욱은 그의 아버지가 제남의 상을 지냈었고 그의 숙부 순상은 삼공의 하나인 사공이라는 최
고의 벼슬에까지 오른 명문집안 사람이었다.
순욱은 어릴적 부터 신동이란 소릴 들었는데 남양의 명사 하옹이 그를 보고 '왕을 도와 큰일
을 할 인물'이라고 했다한다.
그는 영한 원년에 효렴에 천거되어 수궁령에 임명되었는데 동탁의 행패가 심하여 낙향하여
고향사람들에게
"영천은 사방으로부터 공격을 받는 곳입니다.천하에 정변이 있으면 이곳은 항상 군대가 충돌
하는 곳이 될 것입니다.마땅히 이곳을 빨리
떠나야만 됩니다.오랫동안 머물지 마십시오."하며 떠날것을 말하지만 고향에 집착하던 사람
들은 순욱의 말을 듣지 않다가 후에 동탁의 부하들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포로로 잡혀가는 등
험한꼴을 당하게 되고 만다.
당시 기주자사 한복이 순욱의 명성을 듣고 그를 초청하지만 순욱이 한복의 영역에 도달했을
때엔 이미 한복은 원소에게 영토를 빼앗긴 후였다.
원소또한 사람보는 있어 순욱을 최상급의 손님으로써 예우했다.
이때 같이 한복을 찾아 나섰던 이둘중에 동생 순심과 같은 군 출신인 신평과 곽도는 모두 원
소에게 임용되었다.
그러나 순욱은 원소의 인물됨을 헤아리고 그가 결국엔 큰일을 이루지 못할 인물임을 알고 몸
을 빼내 191년에 당시 분무장군이 되어 동군에 있던 조조에게 몸을 의탁하게 된다.
조조는 순욱을 얻은 것을 전한(前韓) 고조(유방)의 모사 장량에 비유하여 '나의 장자방이로
다.'라고 했다하니 순욱의 재능을 알아본것이다.
그때 순욱의 나이 겨우 29에 불과했지만 조조의 탁월한 인물보는 눈이 순욱의 재능을 꾀뚫어
본것이다.
어느날 조조는 동탁의 행패가 날로 심해 지는 것을 보고 순욱에게 이에 대한 의논을 한 적이
있는데 순욱은 동탁 내부에서 내분의 조짐이 보이니 걱정할 것 없다고 말했다 하니(동탁은 그
의 부하 여포에게 죽임을 당한다.) 순욱의 선견지명은 실로 놀라운 경지였다.
조조가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며 서주를 공격했을 당시 그를 대신해 본거지인 견성을 순욱
에게 지키게 했는데 배신이 비일비재 하던
시기에 조조에게 여간한 신임을 받은게 아니었다.
조조의 수하에 있던 진궁,장막등이 조조의 서주 침략시의 대량학살을(조조는 아버지의 원수
를 갚는다는 명목하에 서주의 무고한 백성들을 가차없이 죽였다 한다.) 못마땅히 여기다가 드
디어는 할일 없이 놀고 있던 여포를 불러들여 모반을 꾀한 사건이 벌어졌다.
하후돈 조인등의 맹장들도 여포의 군대앞에 맥을 못추고 쫓겨오는 판국이었는데 오직 순욱과
정욱이 지키던 몇개의 성만이 그들의 공격에서 무사히 성을 지킬 수 있었다.
당시 조조는 서주 침략에 많은 병력을 데리고 가는 바람에 본거지인 견성의 수비병력은 미미
한 것이었는데도 순욱은 그의 탁월한 재능과 식견의로 책임을 완수하게 된다.
조조와 원소의 관도의 싸움때 조조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원소의 무능으로 일진일퇴의 접전을
벌이고 있을 당시 조조는 아무래도 강대한 원소를 상대로 그를 깨칠 자신이 없어 후퇴할까를
생각하여 순욱에게 의견을 물었는데 순욱은 원소진영의 약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후퇴의 부당
함을 조조에게 인식시키고 총명한 조조또한 이를 받아들여 결국엔 원소를 무찌르게 되는데
순욱의 조언이 아주 합당했다고 볼 수 있다.
관도의 싸움에서 승리한 조조는 그 싸움의 일등공신을 순욱이라 칭찬하며 열후에 봉하는 동
시에 자기의 딸을 순욱의 장남인 순운에게 시집보내 사돈을 맺었다
.
순욱은 또한 조조에게 훌륭한 인재를 천거하여 그를 돕게 했었다.
순유나 곽가등 조조진영에서 1,2위를 다투는 명 참모들을 모두 순욱이 천거한것이다.
순욱의 인물감정 능력또한 남과 다름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조조가 관도의 싸움으로 기주를 평정하고 다시 형주마져 평정한 조조를 동소등이 그의 업적
을 기려 조조의 작위를 국공으로 승진시키고 구석의 예물을 갖추도록 해주자는 의견이 나왔
을때 순욱은 그일이 타당하지 못함을 간하다가 조조에게 미움을 사게되 병이나 수춘에 머무
르는 중에 조조로 부터 빈그릇을 받고 자결하란 뜻으로 알아듣고 자결했다 한다.
그의 나이 50세이고 서기 212년의 일이다.
순욱의 죽음에 대해 의심이 가는 곳이 많은데 그 이유중의 하나가 과연 조조가 순욱을 자결하
도록 유도했는지 이다.
삼국지연의에 빠져있는 우리들은 무심코 받아 들일 내용이지만 연의의 내용을 그대로 믿기엔
아무래도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
조조가 아무리 나세의 간웅이라고는 하지만 서주침략당시 자신의 본거지를 순욱에게 맡길 만
큼 그를 신뢰했었고 어려움이 있을때 마다 순욱의 적절한 조언의로 난국을 헤쳐나간것이 한
두번이 아닌데 조조같은 사람이 자신의 욕심을 책우기 위해 그의 일등공신을 죽였다는 것에
는 이의를 달지 않을 수 없다.
순욱의 죽음에 관하여는 정사의 내용과 연의의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다.
정사에는 그냥 구석의 특전 문제로 조조에게 미움을 사 수춘에서 병사했다고 전하고 있고 연
의의 내용은 아까도 말했듯이 조조가 자결하도록 유도했다고 전하고 있다.
연의의 이같은 설정은 아무래도 배송지의 주에서 떠온 것 같다.
배송지의 주에는 연의의 내용처럼 조조가 자결하도록 유도했다고 전하고 있다.
순욱이 조조에게 조언을 할 때는 많은 부분이 편지로 이루어 지고 있다.
순욱은 이같은 편지 내용을 간직하다가 죽음에 이르러 모두 태워버렸다 한다.
따라서 그의 뛰어난 책략과 치밀한 계획은 세상에 전해지지 않게 되었다고 선현들은 아쉬워
한다.
조인전-----------------조인은 조치의 아들로서 조조의 4촌 동생이다.
젊을때 부터 활쏘기 말타기등을 좋아하여 나라가 어지러울 당시 호걸들이 일제히 궐기하자
조인도 인근의 힘께나 쓰는 젊은이들 천여명을 모아서 조조의 수하에 들어간다.
무용이 출중하여 조조가 서주를 공격할 때 항상 기병을 인솔하여 선봉에서 서서 많은 공을 세
운다.
그는 어렸을때는 매우 방탕한 생활을 보냈으나 성장하여 장수가 되면서 엄격히 법령을 받들
어, 항상 법조문을 옆에 놓고 그것에 따라 일을 처리했다 한다.
장수로써의 능력이 또한 출중하여 원소와 조조의 관도의 싸움때 조조의 남쪽 지방에서 유벽
등이 모반을 일으켜 원소의 편에 서게 되었는데 이에 원소가 유비를 보내어 돕도록 하자 남쪽
지방이 위태롭게 되었던 상황이 벌어졌다.
조조가 어쩔줄 몰라하며 불안해 하고 있는데 조인이 나서서 조조에게 유비를 먼저 칠것을 진
언하고 머리회전이 빠른 조조가 이를 받아들여 조인을 출진 시키니 유비의 부대는 조인의 부
대앞에 참패를 당하고 물러 나고 만다.
또 조조가 적벽의 싸움에서 유비와 손권의 협공앞에 참패하고 허도로 돌아가며 조인에게 강
릉의 수비를 맡겼는데 오나라가 적벽의 싸움의 승세를 몰아 주유를 시켜 강릉을 치게 하였다.
오나라의 군사 수천이 몰려 오는데 조인의 부장 우금으로 하여금 수하장병 몇백기를 데리고
적의 기세가 어느 정도 인지 알아 오라며 시찰 보낸다.
그러나 얼마 못가 우금의 부대가 오나라의 수천 병력 앞에 포위당하고 만다.이때 열받은 조인
이 부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우금을 구하러 몇십기만을 데리고 적진의로 돌진한다.
그 기세에 눌린 적이 주춤하는 사이 조인은 재빨리 우금을 구하고 돌아오는데 아직도 적진에
서 헤메이는 아군을 보고 다시 적의 포위를 뚫고 들어가 나머지 병사들마자 데리고 돌아오는
데 희생자가 몇명에 불과했다 한다.
처음 조인이 출진하려할때 옆에서 말리던 진교등 다른 부하들은 조인의 그런 목습을 보고
'장군은 정말로 하늘에서 내린 사람이구나.'했다 한다.
우리의 조자룡이 장판에서 감부인과 유비의 아들 아두를 구출해온 장면과 흡사함을 알수 있
다.
조자룡과 조인의 무용을 비교하라면 어느쪽을 꼭 집어서 더 낫다고 할수가 없다.
둘이 직접 싸워서 상대를 쓰러뜨렸다는 말은 정사나 연의에서도 안나오기 때문에...
그당시 천하에 촉측에서는 조자룡이 조조측에서는 조인이 각각 그 무용을 뽐내고 있었다.
그러나 무예가 아닌 다른 장수로써의 능력을 살펴보건데 조인과 조운 둘중에 조운이 훨씬 더
낫다고 할수 있다.
당시 강릉을 수비하던 총 대장은 조인이었는데 줄잡아도 만여명을 거느린 한 부대의 우두머
리이다.
조운이라면 처음부터 조인처럼 그러한 무모한 짓(수천 병력앞에 수백의 시찰부대를 내보낸
것)은 하지 않았을 것이고 설혹 내보냈다
하더라도 단신으로 나가서 모험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조인이 그 싸움에서 살아 돌아왔으니 망정이지 그때 죽어 버렸더라면 훗날 마속의 예에서 처
럼 조조의 계획에 커다란 착오를 가져왔을 지도 모른다.
조운이 장판파에서 적진속에 뛰어들어가 감부인과 아두를 구출해 낸것은 그 당시 조운은 유
비라는 총대장이 있었고 그 밑에 있는 한낱 부장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부대의 사기에 미치는
영향이 조인과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그런 면에서 조인의 흠이 있을 수 있지만 역시 비범한 장수임은 틀림이 없다.
219년 관우가 번성에 있는 조인을 공격할때 한수가 법람하여 꼼짝 못하는 상황에서도 끝내
번성을 지켜내고야 만다.
그런 조인도 죽음앞에서는 무력해서 223년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문제는 조인에게 충후라는 시호를 내린다.
정사 삼국지에 주석을 달은 배송지는 조인에 대해서
'그의 용맹스러움은 고대의 용사였던 맹분과 하육도 미칠수 없었으며,장료도 그보다 못했
다.'고 했다.
조인은 장수로써 조조진영에서 그보다 더 할 수 없는 출중한 인걸이었다.
하후연전------------------하후연은 조조의 8촌뻘 되는 사람이다.
그가 젊었을 때 조조가 현관에게 죄를 지었다. 하후연이 대신하여 옥살이를 하였는데
나중에 조조가 나서서 빼준일이 있었다.
하후연의 의기가 남다름을 보여주는 일화인데 그런 일화가 또 있다.
하후연이 젊었을 때 식량 기근이 있자 자기 자식을 버리고 죽은 동생의 딸을 살린 일이 그것
이고 후의 애기지만 하후연의 황충에게 목이 잘려 전사하게 되는데 동쪽 지방에서 촉군을 맞
아 싸우던 장합이 고전하자 자신의 군사에서 반을 떼어줘 장합을 돕게 한일도 하후연의 남과
다른 의기이다.
하후연은 장수로써의 능력이 아주 빼어나 조조와 원소의 싸움인 관도의 싸움에서 신출귀몰한
활약을 보여 그를 보는 사람마다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또 조조가 원소를 격파한 뒤 하후연에게 연주.예주.서주의 군량미를 관장하게 했는데 당시
군중에 식량이 모자라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질때 하후연이 끊임없이 식량을 수송해와
군대의 사기가 다시 진작되는 일도 있었다.
무용이 출중하고 물러설줄 모르는 기개를 가져서 오랑캐와 싸울때 구름처럼 몰려오는
오랑캐를 보고 다른 장수들은 겁을 먹고 수비할것을 건의 하지만 하후연은 그대로 돌진해 그
기새에 눌린 오랑캐들을 괘멸 시킨 일이 있다.
또 포한과 승건이라는 자들이 양주에서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한왕이라고 일컬으며 기세가
만만치 않았다.
조조는 하후연으로 하여금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나아가 이들을 치게 했다.포위 작전을 벌인
지 한 달 만에 적의 수괴 송건 이하 간부들을 모두 참해버려 그 지역을 평정했다.
보고를 받은 조조는 하후연에게 후한 상을 내리며 치하하기를
'송건이 난리를 일으킨 지 30년이나 되는데 하후연이 하루아침에 없애버렸으니 아마 무인지
경을 간 모양이지.'했다 한다.
하후연은 남과 다른 기개에 물러 설줄 모르는 용맹으로 많은 전투에서 혁혁환 공을 세우지만
조조는 하후연의 이런 모습을 항상 경계해 대장이 된 자는 두려워하고 약함이 있어야 하며,
단지 용기만을 의지 할 수는 없는 것이오.
대장은 마땅히 용기를근본으로 삼아야 되지만, 행동으로 옮길 때는 지혜와 계책을 사용해야
되오.만일 오직 용기에 의지 할 줄만 안다면 일개 필부의 적수에 불과할 뿐이오.'라 했다 한
다.
그런 조조의 염려가 들어 맞아 하후연은 219년 양평관에서 촉군과 싸울때 자신의 무용을 믿
고 자신의 운명을 믿었음인지 자신도 위태로운데 동쪽 경계선을 지키던 장합이 고전한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병사중 반을 떼어 그곳으로 보내고 안그래도 위태롭던 하후연의 군대는
괴멸되고 마침내 하후연도 황충에게 목이 달아나는 신세가 되고 만다.
황충이 일개 필부는 아니지만 조조의 염려대로 큰 뜻을 다 이루지 못하고 전사한 것이다.
조조는 하후연에게 민후라는 시호를 내렸다.
하후연은 조조와 특별한 인척 간이었는데 그 자신이 조조의 8촌뻘이 되고 하후연의 아내는
조조의 처제였을 뿐더러 맏아들 하후형은 조조의 동생 해양애후의 딸을 아내로 맞아 들인다.
그러니까 사돈이고 팔촌이고 처남이고..등등 복잡하다.
그외 나라=================
장수전------------장수전(張繡傳)
장수는 무위군(武威郡) 조려현(祖려縣) 사람으로서 장제(張濟)의 같은 종족의 아들이다.
변장과 한수가 난을 일으켰을때 금성 사람 국승이 고려의 우두머리 유준을 습격하여 살해했다.
장수는 현의 벼슬아치로 있었으나 국승을 암살하니 군의 사람들이 모두 그의 행위를 의롭다고 하였다.
장수는 장제가 동탁의 복수를 할때부터 따라다녔다.
군공에 따라서 건충장군으로 승진하고 선위후에 봉해졌다.
장제는 홍농에 주둔하지만 식량이 부족하여서 남쪽으로 내려가 양성을 공격
하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죽고 말았다.
그후 장수는 부하들을 이끌고 완성에 주둔하여서 유표와 연합하였다.
조조가 장수를 공격할때 장수는 항복하지만 조조가 장제의 아내를 후궁으로 삼자 원한을 품는다.
그 사실을 안 조조는 장수를 암살하려 하지만 장수가 눈치채고 조조를 급습한다.
결국 조조는 두 아들을 잃고 군대를 잃고 만다.
장수는 그후에 양성으로 돌아가서 양성을 지켰다.
조조는 그후에 매년 장수를 공격하였으나 계속 실패하고 만다.
후에 조조가 원소와 관도에서 대치할때 장수는 가후의 계책에 따라서 조조
에게 항복을 해서 중용을 받는다.
이일은 <가후전>에 나온다.
장수가 도착하자 조조는 큰 환대를 한다.
아들 조균을 장수의 딸과 결혼을 시키기도 하고 장수를 양무장군으로 임명한다.
관도싸움에서 장수도 참가를 한다.
장수는 관도싸움에서 분투하여 공을 세워서 파강장군으로 승진한다.
또, 남피에서 원담을 격파할때 참가하여 식읍이 2천호로 증가한다.
다른 장수들은 식읍이 1천호도 안 되지만 장수는 다른 장수들보다 높이 대접을 받는 것이였다.
후에 장수는 오환을 정벌할때 참가를 하나 도중에 죽어서 시호를 정후(定侯)라고 한다.
그후 그의 아들 장량은 작위를 이었다.
그러나 장량은 위풍의 모반에 가담하여서 주살당하고 영지를 몰수당했다.
1.고향:무위군 조려현
2.같은 일족:장제
3.아들:장량------위풍의 모반으로 죽음
4.활약 <1>.장제의 부하로 활약 [장제를 도와서 동탁의 원수를 갚음]
<2>.개인세력 [유표와 손을 잡음] [조조를 무찌름]
<3>.조조에게 항복 [관도전투에서 활약] [남피전투에서 활약] [오환전투에서 사망]
5.식읍 [2천호]----다른 장수들보다 훨씬 많이 받음
6.죽음 [오환전투에서 사망]
7.시호 [정후]
여포전--------------여포는 자가 봉선이라 하고 오원군 구원현 사람이다.
용감하고 싸움도 잘하여 병주에서 벼슬했다. 병주자사 정원이 기도위가 되어 군대를 하내에 주둔시켰을 때 여포를 주부로 임명하였으며 매우 잘 애해 주었다.
영제가 세사을 떠나자 정원은 군대를 이끌고 낙양으로로 들어와 하진과 공모하여 모든 환관들을 주살하여록 모의하여 집금오에 임명되었다. 하진이 실패하자 동탁은 수도에 들어와 바야흐로 환난을 일으켜 정원을 죽이고 그의 군대와 군사들을 손에 넣으려고 했다.
동탁은 여포가 정원에게 신임을 얻고 있음을 알고는 여포를 유인하여 정원을 살해하도록 했다 여포는 정원의 머릴를 베어 동탁에게 바치니 동탁은 여포를 기도위로 삼고 그를 매우 아끼고 신임하였으며 부자의 서약을 맺었다.
여포는 활쏘기와 말타기에 익숙하였고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팔힘을 갖고 있었으며 자신을 비장이라고 불렀다. 그의 관직은 얼마 후에 중랑장에 이르렀으며 도정후에 봉해졌다. 동탁은 다른 사람을 만날 때 예의가 없었으며 다른 사람이 자신을 모해할까 두려워 밖을 나갈때나 집에 있을 때 항상 여포에게 자신을 호위하도록 했다.
동탁의 성격은 강퍅학 모든 일을 제멋대로 하였으며 화가 나면 자신의 위험따위는 생각하지도 않았고 조그만 일에도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화극을 여포에게 던졌다. 여포가 팔힘과 민첩함으로 그것을 피하고 동탁에게 고개숙여 사죄하면 동탁의 분노는 즉시 가라앉았다. 그러나 이런 일로 말미암아 여포는 자신도 모르게 동탁을 원망하는 마음이 들었다.
동탁은 항상 여포로 하여금 중합을 수비하도록 하였다.
여포는 동탁의 시녀와 사통하였는데 이 일이 발각될까 두려워 마음은 절로 불안했다.
이전에 사도 왕윤은 여포가 자신과 같은 고향사람이고 건장한 인물임을 알고 그를 후하게 대접하여 친해 두었다. 나중에 여포는 왕윤을 만나기를 청하여 동탁이 자신을 죽이려 했던 상황을 설명하였다. 그 당시 왕윤은 복야 사손서 와 함께 동탁을 주살하려고 몰래 모의 하고 있었는데 이 일을 여포에게 알려 여포로 하여금 스스로 응하도록 하니 여포가 말했다.
"나와 그는 부자의 관계인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소?"
왕윤이 말했다.
"당신은 본래 성이 여씨이니 그와는 본래부터 혈연관계는 아니오 지금 그대는 언제 죽을지 몰라 근심하는데 무슨 부자관계를 말하시오"
여포는 이 말을 듣고 드디어 그 일을 도모할 것을 허락하고 동탁을 찔러 죽였다. 이 일은 <동탁전>에 실려 있다.
동탁을 죽인 후에 왕윤은 여포를 분무장군에 임명하고 부하의 처벌권을 나타내는 절을 주었으며 삼공과 같은 의례를 해주고 그를 온후로 봉하고 함께 조정의 정치를 맡았다.
여포는 동탁을 죽인 후 동탁의 출신지인 양주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증오하였으며 양주 사람들 역시 여포에게 원한이 있었다. 이런 까닭으로 말미암아 동탁의 수하에 있던 이각 등이 드디어 서로 결탁을 맺어군대를 모아 장안성을 공격했다. 여포는 막아낼 방법이 없었고 이각 등은 드디어 장안에 들어왔다.
동탁이 죽은 지 60일 지나 여포 또한 패배하였다.
그는 수백 명의 기병을 이끌고 무관을 빠져나가 원술에게 가려고 하였다. 여포는 스스로 그가 동탁을 죽인 것은 원술을 위해 복수한 것이라고 생각했고 이 때문에 원술이 그의 은덕에 감격해하리라고 여겼다. 그러나 원술은 그가 반복하여 배반한 것을 증오하여 거부하고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포는 하는 수 없이 북쪽의 원소에게 갔고 원소는 여포와 함께 상산에 있는 장연을 공격했다. 장연은 정예군대 1만여 명과 기병 수천 명을 거느리고 있었다. 여포는 적토라고 불리는 좋은 말 한 필을 가지고 있었다. 여포는 그와 친하게 지내는 성렴과 위월등과 함께 예봉을 꺽고 진지를 부수고 드디어 장연의 군대를 쳐부쉈다.
이후에 여포는 원소에게 군대를 충원해 줄 것을 요구하였으며 게다가 여포의 장사들이 약탈을 일삼자 원소도 여포를 두려워하며 기피하였다. 오래지 않아 여포는 원소이 속마음 을 알아차리고 원소에게 그가 떠날 수있도록 요청했다. 원소는 여포가 돌아와서 자신을 해칠까 두려워하며 자객을 보내 밤에 여포를 암살하도록 했는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일이 분명해지자 여포는 하내로 달아나 장양과 합세했다. 원소는 병사들에게 여포를 추격하도록 명령했으나 감히 가까이 다가서려는 자가 없었다.
장막은 자가 맹탁이고 동평군 수장현 사람이다. 어려수부터 의협의 기질이 있어 이름을 나렸으며 가난한 사람을 구제해주고 위급한 사람을 구해주는 데 있어서 집안을 기울일 정도로 재산을 아끼지 않았으므로 선비 중의 대다수가 그에게 귀속되었다.
조조와 원소는 모두 장막과 친구가 되었다. 장막은 상공의 부서에 초빙되었으며 뛰어난 능력이 있어 기도위에 임명되었고 진류태수로 영전되었다. 동탁이 난을 일으키자 조조는 장막과 함께 먼저 의병을 일으켰다 변수의 싸움에서 장막은 부하 위자에게 군대를 주어 조조를 수행하도록 했다.
원소는 맹주가 된 이후에 교만하고 오만하 기색을 드러냈으므로 장막은 정론을 펴서 원소를 질책했다 원소는 조조에게 장막을 죽이도록 했으나 조조는 듣지 않고 원소를 꾸짖어 말하였다.
"맹탁은 친구이므로 그가 옳든 그르든간에 마땅히 받아들여야 하오 지금 천하는 아직 평정되지 않았는데 자신들끼리 상대방을 위험에 빠지게 해서는 안됩니다"
장막은 이 사실을 알고서 더욱 조조에게 은덕을 느꼈다. 조조는 도겸을 토벌하러 갈 때 집안 사람들을 계도하여 말했다.
"내가 만일 돌아오지 못한다면 맹탁에게 가서 의탁하라"
조조는 나주에 돌아와서 장막을 만나자 서로 얼굴을 맞대고 울움 터뜨렸다. 그들이 친밀함은 이와 같았다.
여포가 원소를 버리고 장양을 따라갈 때 먼저 장막을 찾아가 만났으며 이별할 때 두사람은 악수하며 맹세하였다 원소는 이 일을 듣고서 매우 증오했다.
장막은 조조가 결국에는 원소를 위하여 자신을 죽일 것을 두려워하여 마음이 스스로 불안했다.
흥평 원년에 조조는 다시 도겸을 토별하러 가는데 장막의 동생 장초가 조조의 장수 진궁 종사중랑 허범 왕해등과 공모하여 조조를 모반하였다. 진궁이 장막에게 말하였다.
"지금 영웅호걸이 모두 일어나 천하는 나뉘어지고 붕괴되었는데 당신은 사방 천리나 되는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고서도 칼을 어루만지며 바라만 보고 있고 도리어 다른 사람들에겍 제압당하고 있으니 넘 비굴하지 않습니까? 지금 주군은 동쪽으로 출정가서 그곳은 텅 비어 있고 여포는 장사이니 그이 앞에 적이 없듯이 잘 싸울 것이니 만일 그를 영접하면함께 연주를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천하의 형세를 보고 일의 변하고 통함을 기다려 보건대 사람들 가운데서 호걸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이는 또한 천하를 마음대로 다스릴 유일한 기회입니다"
장막은 진궁의 말을 듣고 그렇게 하기로 했다. 조조가 막 진궁에게 군대를 이끌고 동군에 주둔하라고 했을 때 진궁은 그의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부터 여포를 맞이하여 연주목이 되었으며 복양을 점거했다.
각 군과 현이 여포에게 호응하였는데 단지 견성 동아 범현등에서만은 조조를 위하여 지켰다. 조조는 군대를 이끌고 돌아와 여포와복양에서 싸웠는데 조조의 군대가 불리한 가운데 백여 일 동안 서로 대치했다. 그 당시 기후가 건조하고 병충이 있었고 식량이 적어 백성들은 서로를 잡아먹기도 하였는데 여포는 동쪽 산양에 진을 치고 있었다.
2년 동안 조조는 많은 성을 탈환하였으며 거야에서 여포를 쳐부셨다 여포는 동쪽으로 달아나 유비에게 갔다. 장막은 여포를 따라가며 장초에게 가족을 맡기고 옹구에 군대를 주군시켰다. 조조는 몇 개월 동안 공격하여 그들을 죽이고 장초 및 그의 모든 가족을 참수했다.
장막은 원술이 있는 고을로 가서 구원병을 요청했으나 구원병이 오기도 전에 그 자신도 부하의 병사에게 죽임을 당했다.
유비는 동쪽으로 향하여 원술을 공격하였고 여포는 하비성을 습격하여 취하였으며 유비는 돌아와서 여포에게 귀의했다. 여포는 유비를 파견하여 소패에 주둔시켰고 여포는 스스로 서주자사라고 일컬었다. 원술은 장수 기령등과 보병 3만 명을 파견하여 유비를 공격했으며 유비는 여포에게 구원을 요청하니 여포의 여러 장수들이 말했다.
"장군께서는 항상 유비를 죽이려고 하였으니 지금은 원수의 손을 빌려 죽이십시요"
여포가 말했다.
"그렇게 할 수 없소 원술이 만일 유비를 쳐부수면 북으로 태산의 여러 장수를 연합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나는 원술의 포위망에 있게 되므로 부득이 유비를 구해주어야 하오"
여포는 곧 굳센 보병 천명과 기병 2백명을 데리고 유비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기령 등은 여포가 온다는 말을 듣고는 군대를 모두 거두고 다시는 공격하지 않았다. 여포는 소패의 서남족 1리 떨어진 곳에서 주둔했는데 하수인을 보내어 기령 등을 불렀으며 기령 등도 여포를 초청하여 함께 마시고 먹었다. 여포는 기령 등에게 말했다.
"현덕은 나의 동생이오. 동생이 여러분의 의해 곤경에 처했으므로 그를 구하러 온 것이오 나는 성격상 서로 싸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다만 싸움을 중재하기를 좋아할 뿐이오. " 여포는 문지기들에게 진영의 문 가운데 있는 화극 하나를 가져오라고 명하고는 말했다.
"여러분은 내가 화극의 소지를 쏘는 것을 보시오. 한번 쏜것이 중심에 맞으면 여러분은 마땅히 화해하고 돌아가고 맞지 않으면 남아서 싸워도 되오"
여포는활을 들어 화극을 쏘니 화극의소지에 명중하였다 여러 장수들은 모두 놀라서 말했다.
"장군께서는 정말로 하늘의 위세를 갖추고 있소이다"
다음날 다시 즐겁게 모여서 연회를 베푼 이후에 각자 싸움을 그만두었다.
원술은 여포와 친분을 맺어 구원군으로 삼을 생각으로 곧 아들에게 여포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게 하였고 여포는 그것을 수락했다. 원술은 사자 한윤을 파견하여 참람되게도 황제의 칭호를사용하여 여포에게 논의하고는 아울러 며느리를 맞이할 것을 요청하였다.
패국의 재상 진규는 원술과 여포가 사돈을 맺으면 서주와 양주가 연합하게 될 것이며 이는 장차 국가이 재난이 되리라고 생각하여 여포에게 나아가 말했다.
"조공은 천자를 받들어 영접하고 국가의 정사를 보조하고 있으므로 그 위세는 헤아리기 어렵고 명성은 세상에 드높으며 장차 천하를 정복하려고 하고 있으니 장군께서는 마땅히 조공과 협력하여 책략을 세워 태산과 같은 안정을 도모해야 합니다. 지금 원술과 사돈지간이 되면 천하에서의 의롭지 못한 명성을 얻게 되며 반드시 계란을 쌓아 놓은 것과 같은 위험에 놓이게 됩니다."
여포 또한 원술이 처음에 자신을 받아주지 않았던 것을 원망하였다 딸은 이미 길을 떠난 뒤였으므로 그는 딸을 뒤쫓아가 돌아오게 해 혼인약속을 파기하고 한윤에게는 형틀을 채워 호송하여 허현의 저자에서 머리를 베어버렸다. 진규는 아들 진등으로 하여금 조조를 만나게 하려고 했으나 여포는 그를 파견하도록 승낙하지 않았다.
때마침 조조의 사자가 와서 여포를 좌장군에 제수했다. 여포는 매우 기뻐하여 진등이 조조를 만나러 간다는 것을 듣고는 중장을 가지고 가서 은혜에 보답하도록 했다. 진등은 조조를 만나 여포는 용맹하나 지모가 없고 배반하고 의존함을 가볍게 여기니 일찌감치 그를 제거하는것이 마땅하다고 말하니 조조가 말했다.
"여포는 야만스런 마음을 갖고 있는 이리 같으므로 진실로 오래 받들기는 어려울 것이오 그대가 아니었다면 그의 정황을 살필 수가 없었소"
즉시 진규의서열을 2천석으로 끌어올리고 진등을 광릉태수로 임명하였다. 서로 헤어질 때 조조는 진등의 손을 잡고 말했다.
"동방의 일은 단지 그대에게 달려 있소"
조조는 진등로 하여금 은밀히 부대의 군대를 모아 내통하도록 한 것이다.
본래 여포는 진등을 통하여 서주목이라는 지위를 요구하였는데 임명되지 못했으므로 진등이 돌아오자 매우 화를 내며 화극을 뽑아 상을 쪼개며 말했다.
그대의 아버지께서는 내게 조공과 협력하라고 권하였으므로 공로와의 결혼을 파기하였으나 지금은 내가 요구한 것 중에서 한가지도 얻은 것이 없소. 그런데도 그대 부자들은 높은 지위에 올랐으니 그대들에 의해 나는 팔렸을 뿐이오 그대가 나를 위해서 한 그 말은 무엇이오?"
진등은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으며 천천히 여포에게 깨우치며 말했다.
"저는 조조를 만났을 때 장군을 대하기를 마치 호랑이를 기르듯 해야 합니다. 호랑이는 고기를 먹어 배가 불러야 하지 배부르지 않으면 사람을 물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니 조조가 말하기를 그대가 말한 것과 같지 않소 비유컨대 매를 기르는 것 같소 굶주리면 그것을 이용할 것이고 배부르면 그것을 날려보낼 것이오라고 했으니 그의 말은 이와 같았습니다."
여포는 마음속의 분노가 곹 가라앉았다.
원술은 화가 나서 한섬과 양봉 등과 세력을 합하여 대장 장훈을 보내 여포를 공격하였다. 여포는 진규에게 말했다.
"지금 원술의군대를 불러들인 것은 그대 때문이니 이 일을 어찌하면 되겠소?"
진규가 대답했다.
"한섬과 양봉등의 군대는 원술과 마찬가지로 갑작스럽게 모아진 군대일 뿐이니 계책과 모략이 평소에 만들어지지도 않았으머 유지해 나가지도 못할 것입니다.
제 아들 진등이 이 일을 처리할 것입니다 비유컨대 뀡과 닭이 한군데 모여 있으면 함께 둥지를 틀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지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여포는 진규의계책을 받아들여 사람을 파견하고 한서모가 양봉을 설득하여 자신과 힘을 합쳐 원술의 군대를 공격하자고 하고는 가지고 있던 군사물자를 모두 한섬과 양봉에게 보내주었다. 따라서 한섬고 양봉은 그르 따랐고 장훈은 크게 패하였다.
건안3년(198)여포는 다시 원술과 연합하여 조조에게 반기를 들었으며 고순을 파견하여 소패에 있는 유비를 공격하여 쳐부쉈다. 조조는 하후돈을 보내어 유비를 구하도록 했으나 고순에게 패하였다 조조는 직접 여포를 정벌하기 위해 여포의 성아래에 이르러 여포에게 편지를 보내어 조조와 결합하는 것과 원술과 결합하는 것의 이해관계를 설명해주었다.
여포가 투항하려고 하자 진궁 등은 자신들이 지은 죄가 깊다는 것을 생각하여 그의 생각을 저지하였다. 그런데 여포가 사람을 파견하여 원술에게 구원을 요청하니 원술은 스스로 기병 천 여 명을 이끌고 전쟁에 나섰지만 패배하여 달아나 돌아가서는 성을 지키고 감히 나와서 싸우려 하지 않았다.
원술역시 여포를 구원할 수 없었다. 여포는 비록 용맹스럽지만 무모하고 의심과 질투가 많고 그의 부하를 통제할 수도 없었으며 단지 몇몇 장수들만 믿었다. 그러나 여러 장수들도 서로간에 의견이 같지 않아 서로 밎지 않고 이로 인하여 싸울 때마다 대부분 대패하였다.
조조가 참호를 파고 포위한 지 석 달만에 여포의 진영에 있는 사람과 위아래에 있는 사람과의 마음이 달라 그의 장수 후성 송헌 위속은 진궁을 묶어버리고 그들의 부하를 이끌고 와서 조조에게 투항했다.
여포는 직속 부하들과 함께 백문루에 올랐다 포의망이 좁혀어자 여포는 하는 수없이 내려와 항복했다 드디어 여포를 사로 잡았는데 여포가 말했다.
"너무 꽉 조이게 묶었으니 조금 느슨하게 하십시요"
조조가 말했다.
"큰 호랑이를 묶었으니 부득이 꽈 조여야 한다."
여포가 요청했다.
"명공께서 근심으로 여기던 것중세나 나 여포보다 더 지나친 것은 없습니다. 이제 이미 항복을 했으니 천하에 근심거리가 될 만한 것이 없습니다. 명공께서 보병을 거느리고 나 여포로 하여금 기병을 거느리게 하면 천하를 쉽게 평정할 것입니다"
조조는 의심하는 기색이 있었다. 유비가 앞으로 나와서 말했다.
"명공께서는 여포가 정건양과 동태사를 섬기는 것을 보지 않았습니까?"
이 말을 듣고 조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포는 손가락질하며 유비에게 말했다.
"이 녀석은 가장 믿지 못할 놈이구나!"
결국 여포를 목매달아 죽게 했다. 여포와 진궁 고순등은 목이 베어 허장까지 옮겨졌으며 그런 후에 그들을 매장했다.
조조가 진궁을 사로 잡았을때 진궁에게 그의 노모와 딸을 살려주어야 할지 죽여야 할지를 물으니 진궁이 대답했다.
"제가 듣건대 천하를 효로서 다스리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피붙이를 끊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저의 노모가 살고 죽는 것은 명공에게 달려 있지 제 뜻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조조는 그의 노모가 여생을 마칠 때까지 불러서 봉양해 주었으며 진궁의 딸도 시집을 보내 주었다.
진등은 자를 원룡이라고 하며 광릉에서 위엄과 명성이 있었다. 또 여포를 견제한 공적이 있어 복파장군까지 겸했으나 나이 서른아홉에 죽었다. 나중에 허범과 유비가 형주목 유표의 식객이 되었는데 유표가 유비와 천하의 인재에 대하여 논의할 때 허범이 말했다.
"진원룡은 남방의 인물이지만 오만한 기풍을 없애지 않았습니다"
유비가 유표에게 말했다.
"허군의 견해는 옳은 것입니까,그른 것입니까?"
유표가 대답했다.
"그르다고 말할 수 있지만 이 사람(허범)은 뛰어난 선비이니 마땅히 헛말은 아니 할 것이오 만일 옳은 말이라면 원룡의 명성은 천하에 울리고 있는것이오"
유비가 허범에게 물었다.
"당신은 그가 오만하다고 말했는데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허범이 말했다.
"옛날에 나는 전란을 만나 하비성을 지나다가 원룡을 만났습니다. 원룡은 주인과 손님의 예의도 없었으니 오랫동안 서로 말도 없이 혼자 큰 침상 위에 눕고 손님으로 하여금 침상 아래에 누워있게 하였습니다."
유비가 말했다.
"당신은 국사라는 명성을 갖고 있으며 지금 천하가 크게 혼란스러워 천자는 거처할 장소도 잃어버렸습니다. 당신은 국가를 근심학 세상을 구제하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머물만한 전원에 관심을 둘 뿐이며 말을 해도 받아들일 만한 점이 없으니 이는 진원룡에 의해서 거리낌받는 바이니 어떤 화제를 인연으로 하여 당신과 더불어 말을 하겠습니까? 만일 저 같으면 백 척 높이의 누각에 누워 당신으로 하여금 땅 위에 누워있게 했을 것인데 어찌 침상 위와 침상 밑의 구분뿐이겠습니까"
이 말을 듣고 유표가 크게 비웃었다. 유비가 이 웃음에 탄식하며 말했다.
"진원룡처럼 문무를 겸비학 담력과 웅지를 갖춘 인물은 마땅히 고대에서 찾을 뿐이니 창졸간에 그와 비견될 만한 인물을 찾는 것은 어려울 것입니다."
유표전-------------劉表傳
유표(劉表)의 자는 경승(景升), 산양(山陽) 고평(高平)사람이다. 어려서 지식으로 이름이 나서 '팔준(八俊)'으로 불렸다. 키가 8척에 용모가 매우 준수하였다. 대장군의 하급관리인 북군중후(北軍中候)가 되었다. 영제가 죽자 왕예(王叡)를 대신하여 형주자사(荊州刺史)가 되었다. 이 때 산동(山東)에서 동탁(董卓) 토벌군을 일으킬 때 유표 역시 양양(襄陽)에서 군사를 합하였다. 원술(袁術)이 남양(南陽)에 있을 때 손견(孫堅)과 연합하여 유표의 영지를 빼앗고 손견으로 하여금 유표를 공격케 하였다. 손견이 유시(流矢)를 맞고 죽자 원술군은 패하였고 결국 유표를 이기지 못하였다. 이각(李 )과 곽사(郭 )가 장안으로 들어갔을 때 유표와 연합하여 도와주려 하였고, 유표를 진남장군(鎭南將軍), 형주목(荊州牧)에 삼고 성무후(成武侯)에 봉하여 천자의 부절을 보냈다. 천자가 허(許)에 도읍하자 유표는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으며, 북쪽의 원소와 동맹을 맺었다. 치중 등희(鄧羲)가 유표에게 간언을 하였지만 유표는 듣지를 않아, 결국 등희는 병을 핑계로 물러나 유표대에 죽었다.(終表之世) 장제(張濟)가 군사를 이끌고 형주경계의 양성(穰城)을 공격하였으나, 유시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형주의 관리들이 모두 축하하였으나, 유표가 말했다. '장제는 궁하여서 왔는데 주인이 무례하여 싸움을 벌였으니, 이는 나의 뜻이 아니로다. 나는 조문을 받지 축하는 받지 않겠다.' 장제의 군사들을 들여보내게 하니 모두들 듣고서 기뻐하였으며, 결국 유표에게 복종하였다. 장사태수(長沙太守) 장선(張羨)이 유표를 배반하였는데, 유표는 포위한지 몇 년이 되어도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장선이 죽자, 그 아들 장역(張 )을 세웠다. 유표는 결국 장역을 공격하여 병합하고, 남으로 영릉(零陵), 계양(桂陽), 북으로 한천(漢川)을 거두어 땅이 수천리에 이르고 병력이 10여만에 이르렀다.
조조(曹操)가 원소(袁紹)와 이제 막 대치하고 있을 때, 원소는 사람을 보내 도움을 요청하여, 유표가 허락하였으나 이르지 못하고 또한 조조를 도운 것도 아니었다. 장강(長江)과 한수(漢水) 사이를 보전하여 천하의 변란을 관망하였다. 종사중랑(從事中郞) 한숭(韓嵩)과 별가(別駕) 유선(劉先)이 유표에게 설득하였다. '호걸들이 병립하여 다투고 조조와 원소가 서로 대치하고 있으니, 천하가 중대해짐은 장군께 달려있다고 하겠습니다. 장군께서 패업을 이루시려면 그 피폐함을 타고 일어나시고, 만약 그렇지 않으신다면 진실로 따를 자를 택하셔야 할 것입니다. 장군께서는 10만의 군대를 보유하고서 편안히 앉아 천하를 관망하십니다. 무릇 현명함을 보고서도 돕지를 아니하고, 화의를 청했는데도 얻지 못함은 양쪽의 원망이 장군께로 모이게 되어, 장군은 중립을 지킬 수 없게 됩니다. 조조는 명철하여 천하의 인재들이 모두 그에게 몰리고 있으며, 원소를 깨뜨린 후에 강한(江漢)지역으로 향할 것이니, 장군께서 막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그러므로 장군의 계책을 실행하려면 고을을 들어 조조에게 항복하면, 조조는 장군을 중히 쓰실 것이고, 오래 복을 누리시다가 후사를 물려주면 되니, 이를 만전(萬全)의 책이라 하겠습니다.' 대장 괴월( 越)도 또한 유표를 권하니, 유표가 의심스러워 한숭을 조조에게로 보내 허와 실을 관찰하게 했다. 한숭이 돌아와서 조조의 큰 덕에 감화되어 유표에게 아들을 인질로 보내자고 설득했다. 유표는 한숭이 조조에게 돌아갔음을 의심하여 매우 화를 내며 한숭과 그의 수행원들을 죽이려 하였으나, 한숭이 다른 의도가 없었음을 알고는 그만 두었다. 유표는 비록 외모는 선비처럼 단아하였지만 마음에 의심과 꺼림이 많으니, 모두가 이러한 무리들이다.
유비(劉備)가 유표에게로 달아나자, 유표는 후하게 대접했지만 쓰지는 않았다. 건안(建安) 13년(209) 조조가 유표를 정벌하니, 이르기도 전에 유표는 병들어 죽어버렸다. 처음에 유표와 처는 아끼는 작은아들 유종(劉琮)을 후사로 세우려 하였고, 채모(蔡瑁)와 장윤(張允) 등이 당파를 만들어 큰아들 유기(劉琦)를 강하태수(江夏太守)로 내보내니, 모두들 결국 유종을 후계자로 받들었다. 유기와 유종은 원수가 되었다. 괴월과 한숭과 동조연(東曹 ) 부손(傅巽) 등이 유종에게 조조에게 항복할 것을 설득하였다. 유종이 말했다. '여러분들과 함께 초(楚)땅(형주 양양지방은 옛날 춘추시대의 초나라 자리임)에 웅거하여 선군의 유업을 지켜왔는데, 천하를 관망하여 보니, 어찌 불가한 것을 한단 말인가.' 부손이 대답했다. '거스르고 순응함은 마음에 있고, 강함과 약함은 세상을 정하는데 있다고 하겠습니다. 신하로서 군주를 막는 것은 반역이며, 새로 초나라를 건설하여 국가를 통제함으로 조조의 세력을 막을 수 없으며, 유비가 조조의 적수가 된다 하나 또한 당해낼 수 없습니다. 이 세가지 모두 단점이어서 조조의 군대를 막으려 한다면 반드시 패망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유종이 말했다. '난 그렇게 못하겠소.' 부손이 말했다. '진실로 유비가 조조를 막아낼 수 없으면 비록 초땅을 보존한다 할지라도 스스로 존립할 수 없으며, 진실로 유비가 조조를 막아낸다고 한다면 유비는 장군 밑에 있을 사람이 아닙니다. 장군께서는 의심하지 마소서.' 조조군이 양양에 이르자, 유종은 항복하였고, 유비는 하구(夏口)로 달아났다. 조조가 유종을 청주자사(靑州刺史)로 삼고 열후에 봉했다. 괴월 등 제후가 된 사람이 15명이었다. 괴월은 광록훈(光祿勳), 한숭은 대홍려(大鴻 ), 등희는 시중(侍中), 유선은 상서령(尙書令)이 되었으며, 그 나머지 많은 이들이 큰 벼슬을 받았다.
유언전-----------------유언은 자가 군랑이고 강하군 경릉현 사람이며 한 대 노나라 공왕1)의 후손이다. 유언의 선조가 장제 원화 연간에 경릉에서 봉해졌으므로 분가하여 이곳에 정착했다. 유언은 어려서 주와 군의 관리로 근무하였고, 종실의 자제로서 중랑으로 임명되었지만, 이후에 스승 축공이 세상을 떠나자 복상을 이유로 관직을 떠났다. 그는 양성산에 살면서 학문을 쌓고 사람들을 가르쳤으며, 현량방정으로 추천되고, 사도의 막객이 되었으며, 낙양령 기주자사 남양태수 종정 태상을 역임했다. 유언은 후한 영제의 정치가 부패하여 혼란스러워지고 왕실에 여러 차례 변고가 발생하는 것을 보고 조정에 건의하여 이렇게 말했다. '자사나 태수는 뇌물로 관직에 올라 백성들을 가혹하게 착취하였으므로, 조정에서 마음이 떠나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청렴하고 명망있는 중신을 선발하여 지방의 장관으로 삼아 나라를 진정시켜 안정되게 해야 합니다.' 유언은 내심으로는 교지목이 되기를 희망하고, 세상의 혼란을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논의를 거친 그의 의견은 즉시 시행되지 않았다. 시중 광한사람 동부2)가 사사로이 유언에게 말했다. '수도는 장차 혼란스러워질 것입니다. 익주의 분야(전국시대 때 천문가가 중국의 전 영토를 하늘의 이십팔수에 배당하여 나눈 칭호)에 천자의 기운이 있습니다.' 유언은 동부의 말을 듣고 익주에 마음을 두게 되었다. 마침 익주자사 극검이 세금을 많이 거둬들여 백성들의 원망이 먼 곳까지 들려왔고, 병주에서는 자사 장일이 살해되고, 양주에서는 자사 경비가 살해되었으므로 유언의 계획은 실현되었다. 유언은 지방으로 나와 감구사자가 되었고 익주목을 겸임하였으며, 양성후에 봉해져 극검을 체포하여 그 죄를 취조하는 일을 맡았다.3) 동부 또한 촉군 서부의 속국도위가 되기를 희망하였고, 또 태창령 파서 사람 조위도 관직을 버리고 함께 유언을 따랐다. 이 당시 익주의 역적 마상, 조지 등은 면죽현에서 자칭 황건이라고 부르는, 역무에 지친 백성들을 불러모아 하루 이틀 사이에 무리가 수천 명이 되었으며, 먼저 면죽현의 현령 이승을 죽이고 관리와 백성들을 규합하여 총 1만여 명이 되었다. 그들은 계속 진격해 낙현을 파괴하고, 익주를 공격하여 극검을 살해하였다. 또 촉군, 건위에 도착하여 한 달 만에 삼군을 파괴했다. 마상은 스스로를 천자라고 불렀고, 인솔 병력이 수만 명이나 되었다. 익주의 종사 가룡은 사병 수백명을 이끌고 건위 동쪽 경계 지역에서 관리와 백성 천여 명을 수하에 들어오게 했다. 그리고 마상 등을 공격하여 며칠만에 패주시켜 익주 안은 평온을 되찾았다. 가룡은 관리와 병사를 선발하여 유언을 영접했다. 유언은 관청을 면죽현으로 옮기고, 반란을 일으켰던 자들을 다시 받아들여 관용과 은혜를 베푸는 정치에 힘쓰며 은밀히 독자적인 계획을 추진하였다. 장로의 어머니는 처음에 무술을 사용하여 항상 젊은 모습을 하고 유언의 집을 왕래했다. 때문에 유언은 장로를 독의사마로 임명하여 한중으로 파견해 골짜기의 다리(장안으로 통하는 길목)를 끊고 한나라 사자를 살해하도록 했다. 유언은 조정에 편지를 올려 말했다. -미적(오두미도의 신봉자)이 길을 끊어놓아 수도와 연락을 할 수 없게되었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또 다른 일을 빌려 익주의 호족 왕함, 이권 등 십여 명을 죽이고 자기의 권력 의욕을 나타냈다. 건위태수 임기 및 가룡은 이 사건으로 인해 오히려 유언을 공격하였지만, 유언은 임기와 가룡을 격파시키고는 살해했다. 유언의 마음은 점점 강렬해져 천자가 타는 수레와 용구 천여 대를 만들었다. 형주목 유표는 유언에게 자하가 공자가 죽은 후 서하에서 성인처럼 논의할 방법이 없음을 회의한 것과 같은 점이 있다고 상주했다. 그 당시 유언의 아들 유범이 좌중랑장으로, 유탄이 치서어사로, 유장이 봉거도위로 있었는데, 모두 헌제를 모시며 장안에 있었다. 단지 작은아들 별부사마 유모만이 줄곧 유언을 모셨다. 헌제는 유장을 보내 유언을 계도하도록 했는데, 유언은 유장을 머물게 하고 돌려보내지 않았다. 이 당시 정서장군 마등은 미현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모반을 했다. 유언과 유범은 마등과 내통하여 일을 도모해 병사를 이끌고 장안을 습격했다. 계획한 일이 누설되자 유범은 괴리로 도망쳤고, 마등은 패하여 물러나 양주로 돌아갔으며, 유범은 살해되었다. 그리고 유탄은 체포되어 사형에 처해졌다. 의랑 하남 사람 방희는 유언과 대대로 교제가 있었으므로 유언의 자손들을 불러 촉으로 들어오도록 했다. 이 당시 유언은 낙뢰를 맞아 성을 불태웠고, 수레 용구를 모두 탕진하였으며, 민가에까지 폐를 끼쳤다. 유언은 관서를 성도로 옮겼지만, 죽은 아들에 대한 비통함과 또 하늘에서 내린 재난으로 상심하다가 흥평 원년, 등에 악성 종양이 나 죽었다. 익주의 고위 관리 조위 등은 유장의 성품이 온후하고 인자함을 탐내, 함께 유장을 익주자사로 임명하라는 편지를 올렸다. 조서를 내려 유장을 감군자사로 임명하고 익주목을 겸임하도록 했다. 조위를 정동중랑장으로 임명하고, 병력을 통솔하여 유표를 공격하도록 했다.
황권전---------------황권은 자가 공형이고,파서군 낭중현 사람이다. 그는 어려서 군리가 되었으며, 주목 유장이 불러내 주부로 삼았다. 당시 별가 장송은 응당 유비를 영접해야만 되므로, 황권을 시켜 장로를 토벌하자고, 건의했다. 황권이 간언하여 말했다. '좌장군(유비)은 용맹한 명성을 떨치고 있습니다. 지금 이곳으로 이르도록 요청하더라도 부하로서 그를 대우한다면, 그의 마음을 만족시키지 못할것이고, 빈객으로 접대한다면, 주인은 계란을 쌓아놓은 것 같은 위험을 갖게 될것입니다. 단지 국경을 페쇄하고 황하가 맑아지기를 기다릴수밖에 없습니다.' 유장은 황권이 말을 듣지 않고, 결국 사자를 파견하여, 유비를 맞이하였으므로,황권을 밖으로 내보내 광한현의 장으로 임명했다. 유비가 익주를 습격하여, 탈취했을때. 그의 장수들은 나누어 군현을 공격했으며, 군현은 그림자가 형제를 따르듯 유비에게 귀순했는데, 황권은 성을 닫고 견고하게 수비하다가...유장이 항복하는 것을 기다린 연후에야 비로서 유비에게 귀순했다.유비는 황권을 거짓으로 임명했다. 조조가 장로를 격파하자 장로는 도주하여, 파중현으로 들어왔는데, 이때 황권이 간언했다. '만일 한중을 잃게 된다면, 삼파는 힘이 약해질것입니다. 이것은 촉군의 수족을 자르는 것이 됩니다.'그래서 유비는 황권을 호군으로 임명하고, 여러 장수들을 이끌고, 장로를 영접하도록 했다.장로는 벌써 남정으로 돌아가 북쪽으로 조조에게 투항했다. 그러나 두호,박호를 격파하고, 하후연을 살해하고 한중을 점거했는데, 이는 모두 황권의 계획이었다. 유비는 한중왕이 되어서도 여전히 익주목을 겸임하고 있었으며, 황권을 치중종사에 임명했다. 유비가 제라고 칭하며, 동쪽으로 오나라를 정벌하려 할때. 황권이 간언하여 말했다. '오나라 사람은 용감하여 전쟁을 잘하고, 또 촉의 수군은 물의 흐름을 따라 행동하므로, 전진하기는 귀워도 물러나기는 어렵습니다. 제가 먼저 가서 적군의 허실을 살피고, 페하께서는 응당 뒤에서 지키시기를 청합니다.'
유비는 황권의 의견을 따르지 않고, 황권을 진북장군으로 임명해, 강북의 군대를 통솔하여 위나라 군대를 막도록 했으며, 유비가 직접 장강 이남으로 갔다. 오나라의 장군 육의가 물의 흐름을 타고, 갑자기 포위하자 강남의 촉나라 군대는 크게 패하였다. 유비는 군대를 인솔하여 후퇴했다. 그러나 이때 길이 끊겼으므로, 황권은 돌아올수 없었기 때문에 장수들을 이끌고, 위나라로 투항했다.
담당관리가 법을 집행하면서, 황권의 처자식을 체포해야 한다고, 아뢰자. 유비가 말했다.'내가 황권을 져버렸지... 황권이 나를 져버리지 않았다...' 유비는 황권의 식구들을 이전과 똑같이 대우했다. 위문제가 황권에게 말했다. '그대가 천의를 배반한 군주를 버리고, 천의에 순종하는 군주를 위해. 노력하는 것은 진평과 한신(진평과 한신은 항우를 버리고, 한고조에게 갔던 인물.)을 따르려는 것이오 ?' 황권이 대답했다.
'신은 유주로부터,과분한 대우를 받아, 오나라에 항복하는 일은 없었는데, 촉으로 돌아가는 길이 없어서, 귀순한것입니다.그리고 전쟁에서 패배한 군대의 장수로서, 죽음을 면한 것은 다행스런 일인데 어찌 고인을 따라 흠모할수 있겠습니까 ?'
문제는 황권의 대답에 감동하여 전남장군으로 임명하고, 육양후 로 봉했으며, 시중의 관직을 더하고, 그로 하여금 수레에 함께 타도록 했다. 촉나라에 투항한 사람중 어떤이가 황권의 처자식이 처형되었다는 말을 했지만, 황권은 그말이 거짓임을 알고, 상을 치르지 않았다. 후에 상세한 소식을 듣게 되었는데, 과연 황권이 말한대로였다.'
유비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을때. 위나라 신하들은 모두 기뻐했는데, 황권만은 그렇지 못했다... 위문제는 황권이 도량이 있다고 판명하여, 그를 놀래키려는, 생각으로 주위사람을 보내,황권에게 출두하라는 칙명을 내리고, 도착하기까지 사이에 재촉하는 사자를 보냈다.말을 탄 사자가 질주하여 길에서 교체했다. 황권 수하의 기종으로 혼비백산 하지 않은사람이 없었는데, 황권의 행동거지와 안색은 태연자약했다. 후에 황권은 익주자사를 겸임하였고, 옮겨 하남을 차지하게 되었다.
대장군 사마선왕은 그(황권)를 매우 중시했다.사마선왕이 황권에게 질문을 했다...
' 촉나라에는 그대와 같은, 사람이 어느정도나 됩니까 ?'
황권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명공께서 저에 대한 관심이 그렇게 깊을 줄은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
사마선왕은 제갈양에게 주는 편지에서 말했다.
'황공형은 호바한 남자입니다. 항상 앉으나 서나 그대를 칭찬하였는데, 말을 빌려 어떤 구실을 찾을려고 하지 않습니다.'
경초 3년 (239)즉 촉나라 연희 2년에 황권은 거기장군,의도삼사,로 승진했다. 다음해, 세상을 떠났으며, 시호를 경후라고 했다.아들 황옹이 후사를 이었다. 황웅은 아들이 없었으므로 작위는 끊겼다. 황권이 촉에 남겨두었던 아들 황숭은 상서랑이 되어 위장군 제갈첨을 수행하여 등애를 방어했다. 부현에 도착하자, 제갈첨은 주저하여, 전진하지 못했다. 황숭은 제갈첨에게 응당 신속하게 가서 요충지를 점거하여 적군의 평지 진입을 저지하도록 여러차례건유했다. 제갈첨은 결정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황숭은 눈물까지 흘리게 되었다.
마침 등애가 신속하게 전진해왔다. 제갈첨은 퇴각하면서 싸워 면죽까지 이르렀다. 황숭은 병사들을 독려하며 필사의 각오로 싸우다가 전쟁터에서 죽었다...
동이전---------------'서경'에서 말하길 '동쪽은 바다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유사에 접한다.'라고 하니, 이는 그 구복의 제도를 얻음을 말한다. 그리하여, 거칠은 지역의 바깥에도, 중요한 역사들이 이르렀으나, 발자취와 수레바뀌가 미치지 않으면, 그 나라의 풍속과 타국을 알 수 없다. '우'에서 '주'에 이르기 까지 서융은 백환을 받침이 있었고, 동이는 '숙신'의 조공이 있었다. 그러나, 여러대에 이르르는 것이니, 멀고 먼 것이 이와 같은 것이다. '한'에 이르러 '장막'을 서역으로 파견하여, '황하'의 근원에 다다르고, 여러나라를 지나니, 이르러 도호를 둠으로써, 이를 다스렸다. 그러한 이후로 서역의 일이 보존하게 되고, 고로 사관들이 자세한 이야기를 얻을 수 있었다. '위'가 일어나자, '서역'이 비록 능히 煥?이르르지 못했으나, 그 큰 나라인 '구자', '우치', '강거', '오손', '소륵', '월씨', '선선', '거사'가 속하니, 세세토록 조공을 받치지 않음이 없으니, '한'의 옛일과 같은 다스림이었다. '공손연'이 아버지, 할아버지부터 삼대를 '요동'에 있으니, 천자가 그 지역과 단절하고, 해외의 일을 내버려 두었다. 이에 '동이'와 단절하고, 여러 나라들은 통함을 얻지 못하엿다. '경초'중에 군사를 크게 내어 '연'을 베고, 군사를 죽이니, '낙랑'과 '대방'의 고을을 거두어 들이니, 후에 바다가 고요해 지고, 동이가 굴복하였다. 후에 '고구려'가 모반을 하자, 또 군사를 파견하여 치고, 멀리까지 쫓아가니, '오환'과 '골도'를 넘어, '옥저'를 지나, '숙신'의 땅까지 밟으니, 동쪽으로 큰 바다에 임하였다. 늙은 노인이 말하길, 다른 얼굴을 가진 사람이 해가 떠오르는 곳 가까이 있다 하여, 두루 여러 나라를 보아 그 법과 풍속을 얻으니, 크고 작은 구별이 있고 각각 이름이 있어 가히 얻어 자세히 기록하는 것이다. 비록 오랑캐의 나라이지만, 조두모양의 그릇이 있다. 중국에서 예를 잃어 버리면, 사이에서 구한다 하는 것은 역시 믿을만 한 것이다. 고로, 그나라의 일을 기록하여, 같음과 다름을 열거하여 과거의 역사가 아직 갖추지 못한 것을 보충하려고 하는 것이다.
'부여'는 '장성'의 북쪽에 있다. '현토'에서 천리를 간다. 남으로 '고구려'가 있고, 동쪽으로 '읍루'가 잇으며, 서쪽으로 '선비'가 있다. 북쪽으로 '약수'가 있으며, 가히 이천리이고 호수는 팔만호이다. 그 백성은 토착생활을 하고, 궁실과, 창고, 감옥이 있으며, 산과능선이 많으며, 연못이 넓으니, 동이의 지역중에 가장 평평하다. 흙은 오곡에 마땅하고, 오과는 나지 않는다. 그 사람은 과격하고, 크다. 성격은 강하고 용감하며, 삼갈 줄 알고, 후덕하니 도둑질 하지 않는다. 나라에 군옹이 있고, 모두 여섯가축의 이름으로 관직을 명하니, '마가', '우가', '저가', '구가', '대사', '대사자', '사자' 가 있다. 읍락에는 호민이 있는데, 신분이 천한 사람들을 모두 노비로 하였다. 여러 '가'의 주인은 각각 사방을 다스리는데, 도가 큰자의 주인은 수가 천집이고 작은자는 백집이다. 음식을 먹음에는 모두 조두를 사용하고, 여럿이 모이는 때에는 서로 절하고 잔을 씻어 술을 마시며, 서로 읍하고 사양하면서 출입한다. '은'의 정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나라의 큰 모임이다. 연일 음식과 가무를 하는데, 이를 '영고'라 한다. 이때에는 형벌과 가둠이 없고, 죄인들을 풀어준다. 나라에서 옷에 흰색을 숭상하여, 백색 옷에 소개가 넓고, 도포와 바지가 있다. 신발은 가죽으로 한다. 나라에서 나갈때는 비단옷을 입기를 숭상한다. 성인은 여우, 원숭이, 흑색담비 가죽으로 옷을 해 입으며, 금은으로 모자를 장식한다. 통역하는 사람이 말을 전할 때는 모두 꿇어 손을 땅에 대고, 조용히 말을 한다. 형벌을 사용함에 엄하고 급하여, 살인한 자는 죽이고, 그 가족은 노비로 삼는다. 도둑질한 자는 열두배로 갑으며, 남녀가 음탕하거나, 부인이 투기를 하면, 이를 모두 죽인다. 특히 투기를 미워하여, 이미 죽은 시체를 나라의 남쪽 산위에 두고 썩힌다. 여자 집에서 이를 얻을려면, 소나 말로 갚은후 옮긴다. 형이 죽으면, 형수를 처로 삼는데, '흉노'와 풍습이 같다. 나라에서 좋은 소(제사용)을 기르고, 이름있는 말, 붉은 옥과 담비와 아름다운 구슬이 나온다. 구슬이 큰 것은 대추만 하다. 활과 화살 칼과 창으로써 병기를 하고, 집집마다 모두 갑옷과 무기가 있다. 나라의 늙은 노인이 말하길, 옛날 망명인들이 성을 지을 때 성책을 둥글게 하니, 감옥과 같았다. 밤낮 길을 가며 노인과 아이없이 모두 노래를 부르니, 종일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군사를 일으킬 때도 하늘에 제사를 지내니 소를 잡아 그 굽을 보아 길흉을 점쳤다. 굽이 풀어져 있으면 흉하고 합쳐져 있으면 길하였다. 적의 침입이 있으면, 모든 '가'들이 스스로 전쟁을 하는데, 아래 백성들은 양식과 음료를 짊어지고 이를 먹였다. 그가 죽으면, 여름에는 얼음을 사용하고, 사람을 죽여, 순장을 하는데, 많으면, 백명이나 되었다. 장사는 후하게 치루고, 곽은 있으나, 관은 없다. '위략'에 그 풍속에 장사는 오개월이나 되는데, 오랠수록 성한 것이다. 망자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산채로 하는 것도 있고, 익히는 것도 있다. 상주는 빨리 하고자 하지 않지만, 다른 사람이 강제로 잡아당겨 다투면서 이를 한다. 상에 거할 때, 남녀는 모두 하얀 옷을 입고, 부인은 베옷을 입고, 목거리와 패물을 때어 놓으니, 대체적으로 중국과 비슷함이 있다. '부여'는 본래 '현토'에 속하였는데, '한'말에 '공손도'가 바다 동쪽에서 크게 일어서자, 바깥 오랑캐를 위엄으로 복속시켰다. 부여왕 '위구태'는 다시 '요동'에 속하였다. '구려'와 '선비'가 강성하자, '공손도'가 '부여'가 두 오랑캐 사이에 있자, 종실의 여자를 처로 삼게 했다. '위구태가 죽자, '간위거'가 섰다. 적자가 없고, 첩의 아들인 '마여'가 있어, '위거'가 죽자 여러 '가'들이 함께 '마거'를 세웠다. '우가'의 형의 아들이 있는데, 그 이름도 '위거'이니, 대사로 하였다. 재물을 가벼이 여기고, 선을 배푸니, 나라사람들이 따랐다. 세세토록 사신을 파견하여 서울에 이르러 공물을 바쳤다. '정초'중에 '유주'자사 '관구검'이 '구려'를 벌하고, '현토' 태수 '왕기'를 부여에 보냈는데, '위거'가 대가를 보내어 성 밖에서 맞이하여, 군량을 보태었다. 계부인 우가가 두 마음이 있자, '위거'가 계부의 아비와 아들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아 기록하고, 염송관으로 보내었다. 옛 '부여'의 풍속에 가뭄이 들고, 날이 고르지 못하여, 오곡이 익지 않으면, 갑자기 그 왕을 책망하는데, '혹 바뀜이 마땅하고, 죽이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라고 말한'마여'가 죽었는데, 그 아들 '의려'가 여섯 살로 왕위에 올랐다. '한'때에 부여왕은 옥갑으로 장사를 지내는데, 항상 '현토군'에 놓아 두었다가, 왕이 죽으면 곧 가져다가 장사하였다. '공손연'을 쳤을 때 '현토'의 곳간에 옥갑 하나가 있었다. 이제 '부여'의 곳간에는 옥벽과 규와 제기들이 있으니, 세세토록 전하는 보물로, 늙은 노인이 말하길 선대에 하사 받은 것이라 한다. [위략에 말하길 그 나라는 몹시 부유하니 선대부터 왔다. 아직 깨어지지 않았다.] 그동장의 글자에 '예왕의 도장'이라 하니 나라의 옛성에 '예성'이 있다. 대개 근본은 '예맥'의 땅이다. '부여'가 그 가운데에서 왕노릇을 하고, 스스로 '망인'이라 하니,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위략에서 말하길 예날 북방에 '고리'국이 있었다. 그 왕의 시녀가 태기가 있어, 왕이 이를 죽이고자 하자 시녀가 말하길 계란같은 기운이 있어 내려와 내가 임신을 하게 되었다 하였다. 후에 아들을 낳으니 왕이 돼지 우리에 버렸으나, 돼지들이 입기운으로 덥히고, 마굿간으로 옮기자 말들도 이와 같아, 죽지 않았다. 왕이 괴이하게 여기고, 하늘의 아들로 간주하여 그 어미에게 거두어 기르게 하였다. 이름을 '동명'이라 하고 말을 기르게 명하였다. '동명'은 궁술에 능하자, 왕이 나라를 빼앗길까봐 두려워 하여 이를 죽이고자 하였다. '동명'이 달아나 남쪽의 '시엄수'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자,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다. '동명'이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들이 이네 흩어지자, 쫓던 병사들은 건널수가 없었다. '동명'은 이로 인하여, '부여'의 땅에서 왕노릇하고 있다.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천리에 있다. 남쪽은 '조선''예맥'이 있고, 동쪽은 '옥저'가 있으며, 북쪽은 '부여'에 접한다. 도성은 '환도'로, 사방 이천리 이며 호수는 삼만이다. 큰 산과 깊은 계곡이 많으며, 벌판과 호수가 없다. 산과 골짜기를 따라 거주하며, 계곡물을 마신다. 좋은 밭이 없어, 비록 힘써서 밭을 경작하지만, 열매가 충분하지 않아, 배가 고프다. 풍속에 음식을 절약하고, 집을 관리하는 것을 즐겨 그 거하는 곳에 큰 집을 좌우에 세우고, 귀신에 제사지낸다. 또한 신령스런 별과 토지신에게도 제사 지낸다. 그 사람들의 성품이 흉악하고 급하여, 도둑질함을 즐긴다. 그 나라에 왕이 있고 관직이 있어 '상가', '대로', '패자', '고추가', '주부', '우태승', '사자', '조의','선인'이라 하니, 높고 천함의 등급이 각각 있다. 동이의 오랜 말로써 '부여'의 다른 종류로 언어가 여러 가지이나, '부여'와 같은 것이 많다. 그러나, 그 성질과 기운과 의복은 다름이 있다. 본래는 다섯 부족으로 '연노부', '절노부', '순노부', '관노부', '계루부'가 있다. 본래 '연노부'에서 왕을 했는데, 점점 약해저, 이제는 '계루부'에서 대를 잇는다. 그 나라의 대가들은 밭을 갈지 않는데, 앉아서 밥 먹는 자가 만여호나 이른다. 아랫사람들이 멀리서부터 쌀과 양식과 물고기와 소금을 짊어지고 와서 공손히 보태준다. 그 백성들은 노래와 춤추는 것을 좋아하여, 나라의 읍락에서는 밤이 되면 남녀가 무리지어 모여들어, 서로 따르며 노래하고 춤춘다. 큰 창고는 없으나 집집마다 스스로 작은 창고가 있어, 이름하여 '부경'이라 한다. 사람들은 탐욕이 없지만, 좋은 술을 감춰두는 것을 좋아한다. 꿇어 엎드려 절할 때 다리 하나를 뻗는데, '부여'와 이것이 다르다. 길을 갈때는 모두 달린다. 시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 나라의 큰 모임으로 '동명'이라고 한다. 공적인 모임때의, 의복은 모두 비단이고 금과 은으로 스스로를 꾸민다. '대가'나 '주부'는 머리에 두건을 하는데, 수건같이 생기고, 뒤가 없다. '소가'는 절풍을 하는데, 형태가 고깔과 같다. 그 나라의 동쪽에 큰 굴이 하나 있는데, '수혈'이라 한다. 시월 나라의 큰 모임에서 수혈신을 맞이하여 나라 동쪽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나무로 수혈신의 자리를 만들어 둔다. 감옥이 없고, 죄가 있으면, 여러 '가'들이 모여 의논하여, 이를 죽인후 처자는 노비로 삼는다. 그 혼인하는 풍속은 말로써 이미 정해지면, 여자의 큰 집 뒤에 작은 집을 짓는데, 이를 '서옥'이라 한다. 사위 될 사람이 저녁무렵에 여자의 집 대문 밖에 이르러, 스스로의 신분을 밝힌 후 꿇어 엎드려 절한 후에 여자와 하룻밤 자기를 청하는데, 보통 두세번 한다. 여자의 부모님이 받아들여 작은집에서 잠잘 수 있게 하면, 돈과 비단을 내 놓는다. 아들은 낳아 장성하게 되면, 이에 마땅히 부인과 집으로 돌아 온다. 그 풍속은 음란하다. 남녀가 결혼만 하면, 조금씩 죽어서 입을 옷을 만든다. 장사는 후하게 하는데, 금은 비단을 죽은자에게 보낸다. 돌을 쌓아 봉분을 하고,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는다. 말들은 모두 작아, 산을 오르기에 편하다. 나라 사람들은 기력이 있고, 전투를 익힌다. '옥저', '동예'가 모두 속하였다. 또한 '소수맥'도 속하였다. '구려'가 나라를 일으킬 때 큰 물을 의지하여 일어났는데, '서안평현'북쪽에 소수가 잇어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구려'의 별종으로 소수를 의지해 나라를 일으키니, 인하여 '소수맥'이라고 이름한다. 좋은 활이 나오니, 소위 '맥궁'이라 한다.
'왕망'초에 '고구려'병사를 일으켜 '호'를 치려고 하는데, 가고자 하질 않았다. 강제로 다그쳐 이에 파견하였는데, 모두 변방에서 달아나 버려 도둑이 되었다. 요서 대윤 '전담'을 보내어 이를 공격하게 하였는데, 거기에서 살해 당하였다. 주군현에서 '구려후 추'에게 허물을 돌리자, '엄우'가 진언하길 '맥인이 법을 범한 것이니, 죄는 '추'에게 있지 않습니다.오히려 위로함이 마땅합니다. 이제 큰 죄를 뒤집에 쒸우면, 반란을 일으킬까 두렵습니다.' 하였으나, '망'이 듣지 않고, '우'에게 공격하라 명하니, '우'가 '구려후 추'를 꾀어, 만나길 약속하자, '추'가 이르자 이를 베고, 그 머리를 '장안'으로 보내었다. '망'이 크게 기뻐하며, 천하에 포고하길 '고구려'의 이름을 '하구려'로 바꾸어 명하게 하였다. 마땅히 이때부터 후국이 되었다. '한''광무제' 팔년 '고구려왕'이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하자, 왕이라 칭하기 시작했다. '상제'와 '안제'의 사이에 이르러, '구려왕 궁'이 수차례 '요동'을 침범하자 다시'현토'가 속하게 하였다. 요동태수 '제풍과 현토 태수 '요광'이 '궁'이 두 고을에 해가 된다 하여, 군사를 일으켜 이를 쳤다. '궁'이 거짓 항복하며 화친하길 청하자, 두 군이 나아가질 않았다. '궁'이 비밀히 군사를 보내어 '현토'를 공격하여, '후성'을 불사르고, '요수'에 들어와 관리와 백성을 죽였다. 후에 '궁'이 다시 '요동'을 침범하자, '제풍'이 제빨리 군사를 내어 이를 토벌하려 했지만, 군사가 패하고 말았다.'궁'이 죽고 아들 '백고'가 섰다. '순제'와 '환제' 사이에 다시 '요동'을 침범하여 '신안','겨향'을 약탈하고, 또한 '서안평'을 공격하였다. 길위에서 '대방' 태수를 살해하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얻어, 사로잡았다. '영제 건안' 이년 '현토'태수 '경임'이 고구려를 침공하여 포로 수백의 머리를 베자 '백고'가 항복하여, '요동'에 속하였다. '가평'중에 '백고'가 '현토'에 속하길 빌었다. '공손도'의 웅지가 바다동쪽에 이르자, '백고'가 대가 '우거'와 주박 '연인'등을 파견하여, '공손도'를 도와 '부산'의 적을 공격하는데 도움을 주어, 이를 깨뜨렸다. '백고'가 죽었는데, 두아들이 있어, 장자는 '발기'이고, 작은 아들은 '이이모'이다. '발기'가 불초하여 나라사람들이 함께, '이이모'를 왕위에 세웠다. '백고'때에 수차례 '요동'을 침략하고, 또한 망한 '호'의 오백여가를 받아들였다. '건안'중에 '공손강'이 군사를 내어, 공격하여, 그 나라를(고구려) 깨뜨리고, 고을을 불살랐다. '발기'가 형으로써, 왕이 되지 못함을 원망하여, '연노부'의 '가'와 백성 삼만여호를 데리고, '공손강'에 항복하고, '비류수'로 돌아와 살았다. 항복한 '호' 역시 '이이모'를 배반하였다. '이이모'가 다시 새로운 나라를 세웠는데, 금일의 있는 것이 이것이다. '발기'는 '요동'으로 가고, 아들을 '구려국'에 남겼는데, 지금의 고추가인 '교위거'가 이것이다. 후에 다시 '현토'를 공격하자, '현토'가 '요동'과 함께 공격하여 크게 깨뜨렸다. '이이모'는 아들이 없어, '관노부'와 음란하여 아들을 낳으니, '위궁'이다. '이이모'가 죽고 왕위에 섰다. 지금의 '구려왕 궁'이 이것이다. 그 증조의 이름도 '궁'인데, 태어나서 능히 눈을 뜨고 보았다. 그 나라 사람들이 이를 싫어 하였다. 장성하자, 흉악하고 사나워져, 수차례 도둑질과 노략질을 하여, 나라를 헤롭게 하고, 깨지게 하였다. 지금의 왕도 타지에서 태어나 역시 능히 눈을 뜨고 사람을 보니, '구려'사람들이 그 증조와 닮았다 하여, 서로 부르기를, '위궁'이라 하였다. '위궁'은 힘과 용기가 있고, 말을 잘 타며, 궁술에 능하였다. '경초'이년 태사'사마선왕'이 군사를 이끌고, '공손연'을 치자, '궁'이 주박 과 대가인 장수와 병사 수천인을 파견하여 도왔다. '정시'삼년 '궁'이 '서안평'을 침략하고, 오년 '유주자사 관구검'에게 깨졌다. '검전'에 있어 전한다.
'동옥저'는 '고구려'의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다. 큰 바다에 임하여 거한다. 그 땅의 형태는 동쪽과 북쪽은 좁고 서쪽과 남쪽은 길다. 가히 천리이다. 북쪽으로 '읍루'와 '부여'에 접하고, 남쪽으로 '예맥'에 접한다. 호수는 오천이다. 큰 군장은 없고, 세세토록 읍락 각각에 '장사'가 있다. 그 언어는 '구려'와 크게 같으나, 조금은 다르다. '한나라'초에 '연'의 망명인 '위만'이 '조선'에서 왕노릇할 때 '옥저'가 속하게 되었다. '한 무제 원봉'이년 '조선'을 치고, '위만'의 손자 '우거'을 죽인 후 그 땅을 나누어 사군을 두었는데, '옥저성'은 '현토군'이 되었다. 후에 '이'와 '맥'이 침입하여, 마을을 '구려' 서북으로 옮겼는데, 지금 '현토'에 있는 옛 마을이 이것이다. '옥저'는 다시 '낙랑'에 속하게 되었다. '한'의 땅이 넓고 멀어, '단단대령'의 동쪽을 나누어, '동부도위'를 두고, '불내성'에서 다스렸다. 주령 동쪽을 나누어 칠현을 두었는데, 이때 '옥저'역시 모두 현이 되었다. '한 건무' 육년 변방의 군을 살피고 '도위'를 없엤다. 그 후로 현에 있는 거사들을 모두 현후로 삼았는데, '불내', '화려', '옥저'의 여러 현들은 모두 후국이 되었다. 오랑캐들이 서로 공격하고 쳤는데, 오히려, '불내'와 '예후'는 '공조'와 '주박제조'를 두었다. 이는 모두 '예'의 백성들이 만든 것이다. '옥저'의 여러 읍락의 거수들은 모두 스스로 삼로라 칭하는데, 즉 옛날 현국의 제도인 것이다. 나라가 작고, 큰나라 사이에 있어 궁핍하여 신하로써 '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구려'는 다시 대인들을 사자로 삼았는데, 사는 주인인 것이다. 또한 대가들이 조세를 받도록 하였는데, 맥포와 물고기, 소금 과 바다음식이다. 천리를 메어 짊어지고 가서 받쳤다. 또한 미녀들을 보내와 첩으로 삼았는데 이는 노비와 같은 것이다. 그 땅은 기름지고,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해 있다. 오곡에 마땅하며, 밭농사가 좋다. 사람들의 성질은 곧고, 강하며, 용감하다. 소와 말이 작고, 창병과 보병에 능숙하다. 음식과 거처 의복과 예절은 '구려'와 같음이 있다. '위략'에서 말하길, 그 시집가고 장가드는 법에 여자는 십세가 되면, 이미 허락을 한다. 사위되는 집에서 이를 맞이하여, 클때까지 길러 부인으로 삼는다. 성인이 되면, 다시 여자집으로 돌아오는데, 여자집에서 돈을 요구한다. 돈이 다 떨어지면, 이내 다시 사위집으로 돌아온다. 장사지낼때는 큰 나무로 곽을 만드는데, 길이가 십여장이나 되고, 그 윗부분이 출입구를 하나 낸다. 세로 죽은자는 모두 가매장을 하는데, 겨우 형태만 덮은 후 피부와 살이 썩으면 이내 뼈를 취하여 곽 안에 둔다. 집안 모두가 하나의 곽에 공동으로 들어가는데, 나무를 살아있는 형상처럼 깍는다. 죽은자의 수와 같다. 또한 기와 모양의 솥이 있는데, 그 가운데에 쌀을 넣고, 곽의 출입구 한쪽에 메어둔다. '관구검'이 '구려'를 칠 때, '구려왕 궁'이 '옥저'로 달아났는데, 진격하여 이에 이르러 부딧쳤다. '옥저'의 읍락이 모두 깨지고, 포로와 삼천여급의 머리를 베었다. '궁'이 '북옥저'로 달아났는데, '북옥저'는 일명 '치구루'이다. '남옥저'에서 팔백여리를 간다. 그 풍속은 남북이 모두 같다. '읍루'에 접해 있다. '읍루'는 배들 타고 노략질 함을 즐기는데 '북옥저'는 이를 두려워 하여 여름에는 산속 바위 깊은 동굴속에서 있으면서 수비하고 겨울에 춥게 되어 뱃길이 통하지 않으면 이에 내려와 촌락에 거한다. '왕기'에게 부대를 나누어 궁을 토벌하려고 파견하였는데, 그 나라 동쪽의 경계에 이르러 늙은 노인에게 물었다. '바다 동쪽에도 사람이 있는가?' 늙은 노인이 말하길 나라사람이 일찍이 배를 타고 고기를 잡는데, 풍랑을 만나 수십일에 이르러 동쪽에서 하나의 섬을 얻었다. 올라가 보니 사람이 있는데, 언어가 서로 통하지 않았다. 그 풍속에 항시 칠월에 어린 여자를 바다에 받치는 것이 있다. 또 말하길 한 나라가 있는데, 역시 바다가운데에 있다. 모두 여자이고 남자가 없다. 또 말하길 바다에서 떠 다니는 옷 하나를 얻었는데, 모양은 중국인의 옷과 같고, 그 양 소매의 길이는 삼장이나 된다. 또 부서진 배를 하나 얻었는데, 파도가 밀려와 해안에 닿았다. 한 사람이 있었는데, 목에 얼굴이 또 있었다. 살아 있었는데, 말이 통하지 안고, 음식을 먹지 않아 죽었다. 이 지역은 모두 '옥저'동쪽의 큰 바다 가운데에 있는 것이다.
'읍루'는 '부여' 동쪽 천여리에 있으며 큰 바다에 닿는다. 남쪽은 '북옥저'에 닿고, 그 북쪽의 끝은 알지 못한다. 그 땅은 산이 험하고 많으며, 그 사람들의 형태는 '부여'와 유사하다. 언어는 '부여'와는 다르고 '구려'와 같다. 오곡이 있으며, 소 말 마포가 있다. 사람들은 용력이 많고, 대군장은 없다. 읍락 각각에 대인이 있다. 산림사이에 거처하면서 항상 동굴에서 산다. 큰 집은 사다리 아홉 개 정도의 깊이고 깊을수록 좋은 것이다. 땅기운이 차가운데, '부여'보다 심하다. 그 풍속에 돼지 기르기를 좋아하여 그 고기를 먹고, 가죽으로 옷을 해 입고, 겨울에 돼지 비계를 몸에 여러번 두껍게 칠하여 추운 바람을 막는다. 여름에는 곧 벌거 벋고, 한척되는 천으로 앞 뒤를 가리는 것으로 형체를 가린다. 사람들이 깨끗하질 못하여 중앙에 화장실을 만들고 사람들은 그 둘레에서 거한다. 활의 길이는 사척이고 힘이 쇠뇌만큼 든다. 화살은 싸리나무를 사용하고, 길이가 한척팔촌이다. 푸른돌로 화살촉을 만들니, 옛날부터 '숙신씨'의 나라라 한다. 궁술에 능하여 사람을 쏘면 모두 눈을 맞치고, 화살에 독을 발라 사람에 맞으면 모두 죽는다. 적옥과 좋은 담비가죽이 나오니, 이제 읍루초가 바로 이것이다. 스스로 '한'의 말기에 '부여'의 신하였다가, '부여'가 조세와 조역을 중하게 하니, '황초'중에 모반 하엿다. '부여'가 수차례 정벌하였으나, 사람들의 무리가 비록 적으나, 산이 험하고, 이웃나라 사람들이 그 활과 화살을 두려워 하여 병사로써 능히 복속시키지 못하였다. 그 나라는 배를 타고 노략질을 잘 하는데, 이웃나라들의 근심거리였다. 동이들은 음식류에 모두 조두를 사용하는데 오직 '읍루'는 아니었다. 법과 풍속이 가장 기강이 없다.
'예'의 남쪽은 '진한'이고, 북쪽은 '고구려'와 '옥저'이다. 동쪽으로 큰 바다가 있고, '조선'의 동쪽은 모두 그 땅이다. 호수는 이만이다. 옛날 '기자'가 '조선'에 이르러 팔조의 가르침으로 가르치자 문을 닫지 않고 백성들은 도둑질 하지 않았다. 그 사십여세 후에 '조선후 준'이 참람되게 왕이라 칭하였다. '진승'등이 일어나니, 천하가 '진'을 배신하였다. '연','제', '조'나라 사람들이 난을 피하여 조선땅으로 들어오니, 수만이나 되었다. '연'인 '위만'이 있어 상투틀고 이족옷을 입어 돌아와 왕노릇하였다. '한 무제'가 조선을 벌하여 멸하니, 나누어 그 땅에 사군을 두었다. 이로부터, '호'와 '한'이 점점 나뉘게 되었다. 대 군장이 없고, 스스로 한때부터의 관직에, '후', '읍군', '삼노'가 있어 하호의 주인으로 다스렸다. 그 늙은 노인들은 옛날부터 스스로 '구려'와 같은 종류라고 한다. 사람들의 성질은 삼갈 줄 알고, 성실하다. 즐기고, 탐욕함이 적고, 겸손하고, 부끄러워 할 줄 알아, '구려'에 구걸함을 청하지 않았다. 언어와 법과 풍속은 크게 '구려'와 같고 의복만은 다름이 있다. 남녀의 옷은 모두 분명하게 옷깃이 굽었고, 남자들은 넓이가 수촌이나 되는 은으로 만든 허리띠를 매는 것으로 장식을 한다. 스스로 '단단대산령'서쪽은 '낙랑'에 속하였다. 령의 동쪽에 칠현을 두었는데 도위가 주인이었다. 모두 예의 백성이다. 후에 도위를 없에고, 그 거수들을 후에 봉하니, 이제 '불내, 예'는 모두 그 종류인 것이다. '한'의 말에는 다시 '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그 풍속에 산과 천을 중하게 여기어 산천으로 각각 부를 나누어서, 서로 들어와 허망함을 바라지 못하게 하였다. 같은 성씨끼리는 혼인하지 못하니, 꺼리는 것들이 많았다. 질병으로 사람이 죽으면, 빨리 버리고, 옛집도 버린다. 새로 집을 짓는다. 마포가 있으며, 양잠을 하고, 면을 짓는다. 별자리를 보아서 그래의 풍년들 것임을 미리 알고, 구슬과 옥을 보배로 여기지 않았다. 항상 시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밤낮없이 술마시고 노래하고 츰을 추니, 이름하여, '무천'이라 하였다. 또한 호랑이를 신으로 모셔 제사지낸다. 읍락끼리 서로 침범을 하면, 서로 꾸짓어 소나 말로 갚는데, 이를 명하여, '책화'라 한다. 사람을 죽이면, 죽음으로 보상하고, 도둑이 적다. 창은 길이가 삼장이나 되고, 혹 여러 사람이 함께 창을 들기도 한다. 보병전에 능하다. '낙랑'과 '단궁'이 이 땅에서 나오고, 바다에서는 반어피가 나오며, 얼룩표범이 있고 또한 과하마가 나온다. '한 환제'때에 이것들을 받쳤다. 신하 '송지'가 말하길 과하마는 높이가 삼척이고 타면 가히 과실수를 아래로 해서 간다. 고로 과하라고 하는 것이다. '박물지', '위도부'에서 보았다.
'정시' 육년 '낙랑태수 유무' '대방태수 궁준'이 '동예'가 '구려'에 속하게 되자, 군사를 일으켜 이를 쳤다. '불내후'들이 읍을 들고 항복하였다. 팔년 대궐에 이르러 조공을 받치니, 다시 '불내'를 '예왕'이라 벼슬을 내린다고 고하였다. 그는 민간들 틈에 섞여 살면서 사시로 군에 나와 조알했다. 두 군은 군사의 일이나 세금을 바치는 일, 부역 시키는 일 등을 모두 일반 백성과 똑같이 대우했다.
'한'은 '대방'의 남쪽에 있다. 동쪽과 서쪽으로 바다를 한계로 한다. 남쪽은 '왜'와 접해 있으며, 사방 사천리이다. 세가지 종류가 있으니, 하나는 '마한'이고, 둘은 '진한'이고, 셋은 '번한'이다. '진한'은 옛날 '진국'이다. '마한'은 서쪽에 있는데, 백성들은 토착을 하며 씨를 뿌리며 양잠을 알고, 갈포를 짓는다. 각각 장사가 있는데 큰 자는 스스로를 '신지'라 하고, 그 다음은 '읍차'라 한다. 산과 바다사이에 흩어져 있는데, 성곽은 없다. <원양국>·<모수국>·<상외국>·<소석색국>·<대석색국>·<우휴모탁국>·<신분고국>·<백제국>·<속로불사국>·<일화국>·<고탄자국>·<고리국>·<노람국>·<월지국>·<자리모로국>·<소위건국>·<고원국>·<막로국>·<비리국>·<점리비국>·<신흔국>·<지침국>·<구로국>·<비미국>·<감해비리국>·<고포국>·<치리국국>·<염로국>·<아림국>·<사로국>·<내비리국>·<감해국>·<만로국>·<벽비리국>·<구사오단국>·<일리국>·<불미국>·<지반국>·<구소국>·<첩로국>·<모로비리국>·<신소도국>·<막로국>·<고랍국>·<임소반국>·<신운신국>·<여래비리국>·<초산도비리국>·<일난국>·<구해국>·<불운국>·<불사분사국>·<원지국>·<건마국>·<초리국>, 등 무릇 오십여 나라가 있다. 큰 나라는 만여가 정도이고, 작은 나라는 수천가 정도이다. 총 10여만 호 정도이다. '진왕'은 '월지국'을 다스린다. '신지' 혹은 '가우'를, '신운견지'라 부르는데, 안정됨을 지키고, 정도에 벗어남을 멀리하고, 신하를 받들어 주는 것과, 아이에게 베푸는것이 사됨이 없어 비교할수 없다. '진지'는 겸손한 호칭이다. 그 관직은 위나라를 따라서, '읍군', '귀의후', '중랑장', '도위', '백장'이다.
'후준'이 참람되게 왕이라 칭하고, '연'나라 망명인 '위만'이 공격하여 빼앗았다. [ '위략'에서 말하길, 옛날 '기자'의 후손인 '조선후'가 '주나라'가 약해짐을 보고, '연'이 스스로를 왕으로 높이고, 동쪽의 땅을 다스리려고 하자, '조선후'도 역시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병사와 함께 '연'을 공격하여 '주'의 왕실을 높이고자 하였다. 대부 '예'가 이를 간하여, 멈추게 되고, '예'를 서쪽으로 보내어 '연'에게 말하니 '연'도 이를 그치고, 공격하지 않았다. 후에 자손들이 점점 교만해지자, '연'이 장수 '진개'를 파견하여 그 땅의 서방을 공격하여, 땅 이천여리를 취하였다. '만번한'에 이르러 경계를 삼자, '조선'이 약해지게 되었다.'진'이 천하를 아우르자 '몽염'을 시켜 '장성'을 쌓아, '요동'에 이르게 하였다. 이때에 '조선왕 비'가 섰다. '진'이 엄습할까를 두려워 하여 복속하여 '진'에 속하였지만, 알현하지는 않았다. '비'가 죽고 그 아들 '준'이 섰다. 이십여년후에 '진', '항'이 일어나 천하가 어지럽자, '연', '제', '조'나라 백성들이 시름하였다. 점점 '준'에게 가서 망명을 하니, '준'이 이들을 서쪽에 두었다. '한'이 '노관'을 '연왕'으로 삼자, '조선'이 '연'과의 경계를 '패수'로 삼았다. '관'이 모반하여, '흉노'로 들어가고, '연'나라 사람 '위만'이 망명하여, '호'의 옷을 입고,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이에 이르러, '준'에게 항복하였다. '준'에게 서쪽 경계에 살기를 구하고, 중국망명인으로 '조선'을 지키는 병풍이 되고자 하니, '준'이 믿고 은혜를 베풀어, '박사'의 벼슬을 주고, 규를 하사하고, 백리의 땅을 봉하여 서쪽 변방을 지키는 우두머리로 하였다. '만'이 망한 무리들을 꾀여, 무리가 점점 많아지니, 이에 '준'에게 사람을 파견하여 거짓으로 고하길, '한'의 병사가 열길로 쳐들어 온다. 방비하기 위해 들어가니, 돌아서서 '준'을 공격하였다. '준'이 '만'과 전쟁을 하는데, 대적하질 못하였다.] 그 좌우궁인들과 도망하여 바다로 들어가, '한'의 땅에 거하였다. 스스로 '한왕'이라 하였다.[위략에 말하길 그 아들이 나라에 있어, 성을 '한씨'라 하였다. '준'이 바다가운데 있은 후로 '조선'과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그 후로 끊어져 멸망하니, 지금 '한'인이 오히려 그를 제사지내는 자가 있다. '한'나라 때에 '낙랑군'에 속하게 되고, 사시 조알하였다. [위략에, 처음 '우거'가 깨어지지 않았을 때 '조선'의 재상 '역계경'이 간하였지만, '우거'가 쓰지 않았다. 동쪽의 '진국'은 이때에 백성들이 따라나온자가 이천여호나 되었고, 역시 '조선'과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왕망 지황'때에 이르러, '염사착'이 '진한'의 우수거가 되었다. '낙랑'이 땅이 좋고, 백성들이 부유하다는 말을 듣고, 도망쳐 와서 항복하였다. 그 읍락에서 나와, 밭 가운데에서 참새를 쫓고 있는 한 남자를 보았는데, 말이 '한'인이 아니었다. 이에 물으니, 남자가 말하길, '우리는 '漢'인이다. 이름은 '호래'이다. 우리의 무리는 천오백명으로 나무를 베려다, '韓'인에게 붙잡여서 모두 머리를 깍이고, 종이 되었다. 삼년이나 되었다.' '염사착'이 말하길 '나는 '한의 낙랑'에 항복할 것이다. 당신도 같이 가겠는가?'하니 '호래'가 말하길 '좋다'했다. '염사착'이 '호래'와 '함자현'에 이르러, 현에서 군을 말하니, 군에서 '착'을 통역으로 삼고, '금중'으로 나아가 큰 배를 타고 '진한'에 들어갔다. 역시 '호래'와 함께이다. 항복받은 무리 천명을 얻었으나, 그 오백명은 이미 죽었다. '착'이 이때 '진한'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은 오백명을 돌려 보내라. 만일 그렇지 않으면, '낙랑'이 마땅히 병사 만으로 배를 타고 와서 너희를 공격할 것이다.' 하니 '진한'이 말하길 '오백인은 이미 죽었다. 나는 마땅히 재물로써 값겠다.'하고, '진한'에서 만오천명과 '변한'에서 포 만오천필이 나오니, '착'이 거두어 곧바로 돌아갔다.군에서 '착'에게 공로를 표시하고, 관책과 밭과 집을 하사하였다. 자손이 수대에 내려오다가, '안제 연광' 사년때에 옛날 복재를 받았다. '환제', 와 '영제'말에 '한예'가 강성해지자, 군현들이 능히 제도 하질 못하고, 백성들이 많이 '한국'으로 들어갔다. '건안'중에 '공손강'이 '둔유현'의 남쪽 거친땅을 나누어 '대방군'으로 삼고, '공손모', '장창'등을 보내어 유민을 모아, 병사를 일으켜 '한예'를 쳤다. 옛 백성들이 점점 나오니, 이후로 '왜'와 '한'이 '대방'에 속하게 되었다. '경초'중에 '명제'가 비밀히 '대방태수 유흔'과 '낙랑태수 선우사'를 파견하여, 두군의 바다를 건너서, 여러 '한국'의 신지에게 읍군의 인수를 하사하고, 다음으로 읍장에게 하사하였다. 그 풍속에 옷과 두건을 좋아하는데, 하호들이 군에 조알할때에 모두 옷과 두건을 한다. 이제 하사한 옷과 두건을 한자가 천여명이나 된다. '부종사 오림'이 '낙랑'이 '한국'을 통일했다고 해서 '진한'의 팔개국을 나무어 '낙랑'에게 주었다. 통역하는데 다르고 옳음이 있어 전해지자, 신지 '첨한'이 노하여 '대방군 기리영'을 공격하였다. 이때 태수 '궁준'과 '낙랑 태수 유무'가 함께 병사로 쳤는데, '준'은 전사하고, 이군은 '한'에 멸망하게 되었다. 그 풍속은 기강이 적어, 나라의 읍에 비록 주인이 있지만, 읍락에 섞여 살고, 능히 제도하거나 다스림에 능하지 못하다. 꿇어 앉아 엎드려 절하는 예의도 없다. 거처는 흙으로 만든 집에 풀로 지붕을 올리는데, 형태가 무덤과 같다. 그 문은 위로 내고, 가족이 함께 그 가운데 있다. 어른과 아이와 남녀의 구별이 없다. 그 장사는 곽은 있으나 관이 없다. 소와 말타는 것을 알지 못하여, 소나 말은 사람이 죽었을 때 보내져 쓰인다. 구슬 목걸이를 보내로 삼는데, 혹은 옷에 꾀메어 씀으로 꾸민고, 혹은 목에 매달기도 하고, 귀에 달기도 한다. 금은 비단은 보배로 여기지 않는다. 그 사람들의 성질은 강하고 용감하고, 상투를 트는데, 모양이 경병과 같다. 포로 옷을 해 입고, 신발은 가죽신을 신는다. 그 나라에 일이 있으면, 관가에서 성곽을 쌓토록 시키고, 용감하고 건강한 여러 소년들이 등가죽을 뚫어, 큰 밧줄에 이를 묶은후, 큰 나무에 붙들어 맨후 종일 지껄이며, 고함을 치며, 힘을 쓰는데, 아파하지 않는다. 그러는 동안에 힘쓰는 것과 건강함을 권하는 것이다. 항상 오월 씨뿌릴때가 되면, 귀신에게 제사지내고, 무리지어 노래하고 춤을 춘다. 밤낮없이 쉴줄 모르고 술을 마신다. 그 춤은 수십사람이 함께 일어나 따라가면서 땅을 밟는데, 손과 발이 서로 응한다. 마디마다 아뢰는 사람이 있어, 탁무와 비슷함이 있다. 시월 농사가 끝나면 다시 이와 같이 하는데 귀신을 믿는 것이다. 나라에서 각각 천신에 제사지내는 주인이 하나 있는데, 이름하여 '천군'이라고 한다. 또한 여러 나라 각가가에는 특별한 읍이 하나 있는데, 이를 '소도'라고 한다.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메달고, 귀신을 부린다. 여럿이서 그 가운데로 도망하면 이에 돌아오지 못한다. 도둑이 일어나기에 좋다. '소도'의 뜻은 '부거'와 비슷한테 선악을 행하는 것에는 다름이 있다. 그 북방 군과 가까운 나라들은 예의 풍속이 조금 있고, 먼 곳은 죄인과 같이 노비들과 서로 섞여 산다. 다른 보배는 없고, 짐승들과 초목들도 중국과 같다. 큰 밤이 나오는데 크기가 배만 하고, 또 꼬리가 가는 닭이 있는데, 그 꼬리가 오척이나 된다. 남자들은 때때로 문신을 한다. 또한 '주호'가 있는데, '마한'서쪽 바다 가운데의 큰 섬이다. 사람들이 작고, 언어는 '한'과 같지 않으며, 곤두 함이 '선비'와 같다. 가죽옷을 입고, 소나 돼지 기르기를 좋아하고, 옷에는 위는 있지만 아래는 없어 벌거 벗은 것과 같다. 배를 타고 왕래하며, '한'과 교역을 한다.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있다. 늙은 노인이 세를 전하여 말하길 옛날 '秦'의 사역을 피하여 온 망명인이 '한국'에 왔다. '마한'이 그 동쪽땅을 나누어 주었다. 성책이 있고, 언어는 '마한'과 같지 않았다. '국'을 '방'이라 하고 '궁'을 '호'라 하고, '적'을 '구'라 하고, '행주'를 '행상'이라 하였다. 서로 불러 무리로 하니 '秦'나라 사람과 같음이 있으니, 단지 '연'과 '제'의 사물의 명칭뿐이 아니다. '낙랑'사람을 '아잔'이라 하고 동쪽 사람을 '아'라고 하는데, '낙랑'사람은 본래 그 남은 세력이다. 이제 그 이름을 '진한'이라고 하니 처음에는 육국이었는데, 점점 나누어져 열두나라가 되었다. '변진' 역시 열두나라이다. 역시 여러개의 작은 별읍이 있다. 각각 거사가 있으니 큰 자의 이름은 '신지'이고 다음은 '험측'이라 하고, 다음은 '번예'라 하고 다음은 '살해', 다음은 '읍차'라 한다. <이저국>·<불사국>·<변진미리미동국>·<변진접도국>·<근기국>·<난미리미동국>·<변진고자미동국>·<변진고순시국>·<염해국>·<변진반로국>·<변진악노국>·<군미국(변군미국)>·<변진미오사마국>·<여담국>·<변진감로국>·<호로국>·<주선국(마연국)>·<변진구사국>·<변진주조마국>·<변진안사국(마연국)>·<변진독로국>·<사로국>·<우유국>이니 '번', '진한'을 합쳐 이십사개국이다. 큰 나라는 사오천가를 이루고 작은 나라는 육칠백가를 이룬다. 총 사오만호이다. 그 열두 나라는 '진왕'에 속하는데 '진왕'은 항상 '마한'사람이 하여, 대대로 잇는다. '진왕'은 스스로 왕위에 오르지 못한다.[위략에 말하길 밝음이 이주민에게 있어 고로 마한의 제도가 되었다.] 땅은 좋고, 오곡과 벼에 알맞으며, 양잠과 겸포를 하고, 소나 말을 탄다. 결혼하는데 예절이 있으며 남녀는 구별이 있다. 큰 새의 깃털로 장사지내는데, 그 뜻은 죽은자가 날아 오르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위략에 그 나라는 집을 지을 때 나무를 가로로 얽어 매는데 감옥과 비슷하다.] 나라에 철이 나오고, '한','예','왜',가 모두 이를 가져다 썼다. 저자에서 돈을 사용함이 중국의 돈사용과 같아, 두군에서도 넉넉히 사용하였다. 풍속에 노래하고, 춤추고, 음주함을 즐긴다. 거문고가 있는데, 모양이 '축'과 비슷하고, 연주하면, 역시 소리와 곡률이 있다. 아이나 태어나면 돌로 그 머리를 눌르는데, 머리를 모나게 하려고 하는 것이다. 지금 '진한'사람이 모두 '편두'이다. '왜국'과 가까워 남녀가 모두 문신을 한다. 보병전을 하고 병사의 무기는 '마한'과 같다. 풍속에 길가던 사람이 서로 만나면, 모두 길을 비켜준다. '변진'은 '진한'과 섞여 산다. 역시 성곽이 있으며, 의복과 거처는 '진한'과 같다. 언어와 법과 풍속은 서로 유사함이 있으나, 귀신에 제사함은 다른데, 부엌신을 문에서 서쪽에 두는 것이다. '독노국'은 '왜'와 접해 있다. 열두나라역시 왕이 있는데 사람들이 모두 크다. 의복은 정결하고, 머리를 길른다. 역시 폭이 넓은 가드다란 포를 짓고, 법과 풍속은 특히 엄하다.
'왜'인은 대방의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에 있고, 산과 섬을 의지하여 나라의 읍이 있다. 예로부터 백여개의 나라가 있어, '한'나라 때에는 알현하는 자가 있었다. 이제 그 역관이 통하는 곳이 삼십나라이다. 군에서 나아가 '왜'에 이르는데, 물로 가서 해안을 따라 돌면 '한국'이 나오고, 남쪽으로 가다 동쪽으로 가면 '구사한국'의 북쪽에 이르러 거리가, 칠천여리나 된다. 처음 하나의 바다를 건여 천여리에 '대마도'에 이른다. 그 큰 관리를 '비구'라 하고, 부관을 '비노모리'라 한다. 떨어진 섬에 거주하는데, 거리가 사백여리이다. 땅은 산이 험하고 깊은 숲이 많고, 도로는 짐승이 다니는 길과 같다. 호수는 천여호이고 좋은 밭은 없어, 바다에서 나오는 것을 먹어 스스로 생활하며 배를 타고 남북으로 다니며 쌀을 사들인다. 또 남으로 바다 건너 천여리에 일명 '한해'를 건너면 큰 나라가 하나 있는데, 역시 관리를 '비구'라 하고 부관을 '비노모리'라 한다. 사방 삼백리이며, 대나무와 나무가 모여 많은 산림을 이루니, 삼천가정도가 있으며 차이는 밭이 있어 밭을 경작하는데 부족함이 있어 역시 남북으로 쌀을 사들인다.또 바다를 건너, 천여리에 '말노국'에 이르는데 사천여호가 있으며, 산기슭의 바다에 거처한다. 초목이 너무 우거져, 길을 갈 때 앞사람을 볼수가 없을 정도이다. 물고기와 전복을 잡기를 좋아하는데 물이 깊이 않고 얕아 자맥질하여 이를 잡는다. 동남쪽 육지를 따라 오백리에 '이도국'이 있는데, 관리를 '이지'라 부르고, 부관을 '설모고', '병모고'라 부른다. 천여호가 있으며, 세세토록 왕이 있는데 모두 '여왕국'에 속해 있어, 고을에 사신이 왕래하고, 항상 머물러 있다. 동남으로 백리에 '노국'이 있는데 관리를 '시마고' 부관을 '비노모리'리 부르는데, 호수가 이만여호이다. 동쪽으로 백리에는 '불미국'이 있어, 관리를 '다모'라 하고 부관을 '비노모리'라 부르며, 호수는 천여가이다. 남쪽으로 '투마국'이 있어 물로 이십일을 간다. 관리를 '미미'라 하고, 부관을 '미미나리'라 부르는데, 가히 오만여호이다. 남쪽으로 '사마대국'이 잇어 여왕이 거하는 도읍으로 물로 십일을 가고 육지로는 한달이 걸린다. 관리를 '이지마'라 하고 다음을 '미마승', 다음을 '미마획지', 다음을 '노가제'라 하니 가히 칠만여호이다. 이 '여왕국'의 북쪽에 있는 나라의 호수와 길를 가히 얻어 기록한 것인데 그 나머지 주변의 나라는 너무 멀어 끊어져 가히 자세히 얻을 수가 없었다. 다음에 <사마국>, <이백지국>, <이사국>, <도지국>, <미노국>, <호고도국>, <불호국>, <저노국>, <대소국>, <소노국>, <호읍국>, <화노소노국>, <귀국>, <위오국>, <귀노국>, <사마국>, <궁신국>, <읍리국>, <지유국>, <오노국>, <노국>,이 있는데, 이 여왕을 경계의 끝이다. 남쪽에 '구노국'이 있는데, 남자가 왕을 하고, 관리를 '구고지비구'라 하는데, 여왕에 속해 있지 않다. 이 군은 '여왕국'에서 만 이천여리나 된다. 남자들은 애 어른 없이 모두 얼굴에 문신을 하는데, 예로 내려온 것이다. 사신이 중국에 이르러 스스로를 대부라 칭하였다. '하후 소강'의 아들을 '회계'에 봉하였는데, 머리를 깍고 문신을 함으로써 교룡의 해를 피하였다. 이제 '왜'의 사람들이 자맥질하여 물고기와 조개잡기를 좋아하니 문신으로 큰 물고기와 바닷짐승이 싫어하게 하여 후에 점점 꾸미게 된 것이다. 여러 나라의 문신은 각각 다르다. 혹은 왼쪽에 있고, 혹은 오른쪽에, 크고 자고, 신분의 높고 낮음의 차이가 있다. 그 길을 계산하는데 마땅히 '회계'와 '동치'의 동쪽에 있다. 그 풍속은 음란하지 않고, 남자들은 모두 상투를 틀고 무명으로 머리를 감싼다. 그 옷은 다만 가로로 하여 서로 연결하여 동여메는데 바느질 하지 않는다. 부인들도 머리를 올려 묶고, 통채로 옷을 지어 중앙에 구멍을 뚫고 머리부터 옷을 입는다. 벼가 있고, 모시 삼 양잠이 있어 길쌈하고, 가는 모시와 비단이 있고, 그 땅에 소와 말, 호랑이, 돼지, 양, 까치가 없다. 병기로 창과 방패, 나무활을 쓰고, 목궁은 아래는 짧고 위가 길다. 대나무로 화살에 쇠나 혹은 뼈로 화살촉을 하기도 하는데, '담이'와 '주애'와 같이 있고 없음에 있는 것이다. '왜'의 땅은 따뜻하여 겨울에도 여름음식과 반찬이 나오며, 모두 맨발이다. 집이 있어 부모형제가 함께 거하지만 거처는 다르다. 붉은색 진흙같은 것을 몸에 바르는데, 중국의 분가루를 사용하는 것과 같다. 음식을 하는데는 '변두'를 사용하고 손으로 밥을 먹는다. 사람이 죽으면 관이 있느나 곽은 없이 흙으로 무덤을 만든다. 처음 사람이 죽흐며 십여일을 상을 치루는데 마땅히 이때고기를 먹지 않고 상주는 곡을 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노래하고 춤추며 술을 마신다. 장사를 마치면, 집안이 모두 물속에 들어가 목욕을 하는데, '연욕'과 같다. 사신으로 바다를 건너 중국에 갈때는 한 사람이 머리에 빗질하지 않고, 이나 서캐도 잡지 않고, 의복은 더럽게 하고, 고기도 먹지 않고, 부인과 가까이 하지 않으니 상을 치루는 사람과 같다. 이를 '지쇠'라고 한다. 만일 길을 가는 자가 좋은 일이 있으면, 함께 재물을 그 사람에게 주고, 만일 질병이 있거나, 나쁜해를 당하면 이를 죽일려고 하는데, '지쇠'가 삼가지 않았다고 그런 것이다. 진주와 푸른옥이 나온다. 산에는 단사가 있는데, 그 나무로는 남·저·예장·유력·투강·오호·풍향 등이 있고, 대나무로는 가는대와 조지가 난다. 생강과 귤, 산초나무와 양화가 있지만, 맛을 보태는 것인줄 알지 못한다. 원숭이 와 검은 꿩이 있다. 그 풍속에 일이 있으면 이르는 곳이 있는데, 뼈를 불살라 점을 치는 것이다. 길흉을 점칠 때 먼저 점치는 곳에 고하는데 그 법이 거북점과 같다. 불이 터지는 것을 보아서 점을 치는 것이다. 모임에서 앉아서 하는데, 부자와 남녀의 차이가 없다. 사람들 성질에 술을 즐긴다. [위략에 그 풍속에 정확히 해와 사절기를 알지 못한다. 다만 봄에 밭갈고 가을에 거두는 것으로 그 해의 기준으로 삼는다] 어른에게 공경을 보이는 것은 단지 손을 잡고 꿇어 엎드려 절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수명은 혹은 백살이요 혹은 팔구십살이다. 풍속에 나라의 어른들은 모두 사오명의 부인이 있는데, 하호들도 혹 이삼명의 부인이 있다. 부인은 음란하지 않고, 투기 하지 않는다. 도둑이 없고, 송사가 적다. 법을 범하면 가벼운자는 그 처자를 죽이고, 무거운 자는 그 집안에서 종족까지 멸한다. 높고 낮음에 차이가 있으니, 복종해야 한다. 세금을 거두고, 문설주가 있다. 나라에 시장이 있어 교역이 있는데 '대왜'가 이를 관리한다. '여왕국'의 북쪽에 특별히 큰 기관하나를 두는데, 여러 나라를 살피는 것으로 여러나라들이 이를 두려워 하고 꺼린다. '이도국'을 다스리는데 나라 중앙에 자사와 같은 것을 항상둔다. 왕이 경도나 '대방군' 여러 '한국'과 '왜국'의 군에 사신을 보내어 여왕에게 하사하는 물건과 문서를 보내와 전하는데, 섞임이 없었다. 하호들이 길에서 대인을 만나면 뒷것을질쳐 풀속에 들어간다. 전하는 말로 혹은 웅크리고 있거나 엎드려있는데 양손을 땅에 댄어 공경을 나타낸다. 대답할때는 '아' 그러는데 이것은 그렇다는 것이다. 그 나라는 본래 역시 남자가 왕이었다. 칠팔십년후에 '왜국'에 난이 이서 서로 공격하고 벌하며 지내다가 함께 여자를 왕으로 세웠다. 일명 '비미호'로 귀신을 부리고 능히 백성을 미혹게 하여 이미 성인인데도 남편이 없다. 남자 동생이 있어 나라를 다스림을 도왔다. 왕으로써 왔는데 보았다는 사람은 적다. 여자종 수천이 시중드는데도 오직 남자 한명이 음식을 대고, 나고들면서 말을 전한다. 거처하는 궁실과 누각과 성책은 엄하게 만들었고, 항상 병사로써 지키고 있다. '여왕국'에서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 천여리에 다시 나라가 있는데, 모두 '왜'의 종류이다. 또한 그 남쪽에 '주유국'이 있는데 사람들의 키가 삼사척으로 '여왕국'에서 사천여리이다. 또한 '나국'과 '흑치국'이 그 나라 동남쪽에 있는데 배로 일년을 가야 이른다. 모두 '왜'의 땅으로 바다 가운데에 섬으로 끊어져 있고 혹은 연해 있기도 하니 사방 가히 오천리이다. '경초'이년 유월 '왜여왕'이 대부 '난승미'등을 보내어 군에 이르러, 천자에게 조언하기를 구하자 태수 '유하'가 서울에 사신을 보냈다. 그해 십이월 조서를 내려 '왜여왕'에게 말하길 친위왜왕 '비미호' '대방태수 유하'가 당신이의 대부 '난승미'와 다음사신 '도시우리'를 보내와 남자 4명과 여자 육명, 포 두필이장을 받치니 이에 이르렀다. 당신이 있는 곳이 먼데도,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받치니 당신의 충효가 이와 같아, 내가 슬프기까지 하다. 이제 당신을 '친위왜왕'을 삼는다. 그리고 금으로 만든 인과 붉은 빛 인끈을 봉해서 '대방태수' 에게 보내는 것이니, 당신은 백성을 잘 다스리고 힘써 효도하고 잘 순종하도록 하라. 당신이 보낸 사신 '난승미'와 '도시우리'는 길이 먼데 수고가 많았기로, 이제 '난승미'를 솔선중랑장을 삼고, '우리'를 솔선교위를 삼아 은으로 만든 인과 푸른 인끈을 주고 불러 보고 위로한 다음 돌려보내는 바이다. 그리고 강지교룡금 오필과 [ 신하'송지'가, 땅에 비단을 상응하게 한 것은 '한 문제'가 검은옷 입은것과, 두터운 비단을 취한것을 말했으니,이것이다. 이 글귀가 없는것은 위나라때 빠뜨린것이 아니라, 이전에,베껴쓰던 자들의 착오이다], 강지추속계 십장, 청강 오십필, 감청 오십필을 주어 당신이 받친 공물에 대해 답하는 것이다. 또 특별히 너에게 감지구문금 삼필과 새반화계 오장, 백견 오십필, 금 팔냥, 오척도 두자루, 동경 일백 매, 진주와 공단 각 오십근씩을 모두 포장하여 '난승미'와 '우리'에게 주어 돌려 보내는 터이니, 너희는 이를 갖다가 너희 나라 사람들에게 일일이 보여 주어서 우리 나라가 너희를 아끼는 뜻을 알게 하도록하라. 그래서 정중하게 이 같은 좋은 물건을 너희에게 하사하는 바이다] 했다. '정시' 원년 '태수 궁준'이 건중교위 '제휴'등을 보내서 조서와 인수를 가지고 왜국에 가서 '왜왕'에게 절하고, 아울러 금백과 금계, 도경, 채물 등을 하사하였다. 이에 '왜왕'은 표문을 올려 조서와 물건을 내린 은혜에 회답해 왔다. 사년에 '왜왕'은 다시 사신으로 대부 '이성기'와 '액사구' 등 팔인을 보내서 포로 몇 명과 왜금, 강청, 겸금, 의백, 포단, 목부, 단궁시 등을 바쳐 왔다. 이에 '액사구' 등에게 한결같이 솔선중랑장의 벼슬을 주고 인수를 주었다. 육년에 조서를 내려 '왜국'의 '난두미'에게 황기를 주고, 부군을 주었다. 팔년에는 태수 '왕기'가 와서 보고하기를, '왜국의 여왕 비미호'와 '구노국'의 남왕 '비미궁호소' 사이에 불화해서 '왜국'에서는 '재사', '오월' 등을 보내서 그들의 서로 공격하는 모양을 보고했다고 한다. 이에 중국에서는 색조연사 '장정'등을 보내서 조서와 황기를 내려 '난승미'에게 벼슬을 주고 화친하도록 타일렀다. '비미호'가 죽자 크게 무덤을 만들어 직경이 백여 보나 되게 한 다음 여기에 노비 백여 명을 순장했다. 뒤를 이어 다시 남왕을 세웠으나, 온 나라 사람들이 여기에 복종하지 않고 저희끼리 서로 죽이고 싸워서 이 때 죽은 사람만도 천여 명이나 되었다. 이리하여 그들은 하는 수 없이 '비미호'의 일가 딸이 되는 '대여'를 세웠다. 이 때 대여의 나이는 겨우 십삼세였는데 비로소 나라안의 인심이 정해졌다. '정' 등이 '대여'를 타이르는 글을 보냈더니, '대여'는 '왜국'의 대부 솔선중랑장 '액사구' 등 삼십명을 '정'에게 보내 와서 뵙고 포로 삼십명과 흰 구슬 오십덩이, 청대구주 두장, 이문잡금 이십필을 바쳐 왔다.
원소전------------원소(袁紹)는 자가 본초(本初)이고 여남(汝南) 여양(汝陽)사람이다. 고조부 원안(袁安)은 사도였다. 원안 이래로 4세가 삼공의 지위에 올라 천하를 진동하게 하였다. 원소는 용모가 아름답고 위엄이 있었으며 아랫사람에게 절도가 있어 선비들이 그를 따랐으며 조조(曹操)와는 어려서부터 교분이 있었다. 대장군이 시어사(侍御史)로 삼았으며 중군교위(中軍校尉), 사예교위(司隸校尉)에 이르렀다.
영제(靈帝 : 劉宏 재위 168∼190)가 죽자, 태후의 오라비인 대장군 하진(何進)이 원소와 함께 모든 환관들을 죽이려 했으나 태후가 따르지 않았다. 그리고 동탁을 불러 태후를 협박하려 했다. 내시들은 그 소식을 듣고 하진에게 살려달라고 하였다. 이 때 원소는 하진에게 재삼 결단을 내릴 것을 권했으나, 하진은 듣지 않았다.
원소는 낙양지역의 관리(군관, 아전, 법관)들에게 환관을 압박하도록 하였고, 아우인 호분중랑장(虎賁中郞將) 원술(袁術)에게 200여명으로 궁궐을 수비토록 하였다.
중상시(中常侍) 단규(段珪) 등은 태후의 명이라 거짓으로 하진을 불러 죽이니, 궁궐은 큰 혼란에 빠졌다. 원술은 군사를 거느리면서 남궁(南宮), 가덕전(嘉德殿), 청쇄문(靑 門)에 불을 질렀으며, 단규 등을 추격하였다. 단규 등은 탈출에 실패하자 천자와 천자의 아우 진류왕(陳留王) 협(協)을 납치하여 소평진(小平津)으로 달아났다. 원소는 목을 벤 환관들을 사예교위 허상(許相)에게 맡겨두고 군사들로 하여금 여러 궁인들을 체포하게 하였으며 노소를 따지지 말고 죽이게 했다.
어떤 이는 수염이 없어 오인되어 죽는 자도 있었고, 스스로 성기를 보여주고 죽음을 모면하는 사람도 있었다. 환관 중에는 행실이 착하고 스스로를 잘 다스리는 사람도 이와 같이 하니, 군사들의 학살이 이와 같았다. 죽은 자만 2천여 명이었다. 원소의 군대는 단규의 무리를 추격하였는데, 단규의 무리는 모두 황하에 투신자살을 하여 황제의 일행은 환궁할 수 있었다.
동탁(董卓)이 원소를 불러 천자를 폐하고 진류왕 협을 옹립할 것을 의논하였다. 이 때 원소의 숙부 원외(袁 )가 태부(太傅)였는데,
원소가 거짓으로 허락하여 말하였다.
"이는 큰일이라 나가서 태부와 상의하겠습니다."
동탁이 말했다.
"유씨의 종족은 살려두어서는 안될 것이오.(소제를 죽이겠다는 말)"
원소는 응하지 아니하고 읍을 하고 물러 나와 그 길로 기주(冀州)로 도망쳐 버렸다. 시중(侍中) 주비(周毖), 성문교위(城門校尉) 오경(伍瓊), 의랑(議郞) 하옹(何 ) 등은 모두 명사여서 동탁이 신임하고 있었는데, 몰래 원소를 위해서 동탁을 설득했다.
"모름지기 천자를 폐하고 세우는 일은 큰일인지라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아닙니다. 원소는 대체에 이르지 아니하여 무섭고 두려워 달아난 것이지 딴 마음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지금 급하게 수배령을 내리신다면 원소의 세력은 (반란으로) 변할 것입니다. 원씨 가문은 4세 동안이나 조정의 은혜를 입어 천하에 두루 집안 사람들과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 있는데, 만약 호걸들을 거둬 세력을 만들고, 영웅들이 그로 인해 봉기한다면 산동(山東)지역은 공의 소유가 될수 없을 것입니다. 원소를 사면하고 군수자리 하나 주면 원소는 죄를 면함에 기뻐할 것이니, 반드시 아무 걱정 없을 것입니다."
동탁은 그렇다고 여겨 발해태수(渤海太守)에 임명하고 항향후( 鄕侯)에 봉했다.
원소가 발해에서 군사를 일으켜 동탁을 죽이려 했으니, <무기(武紀:무제본기 인듯)>에 기록되어있다. 원소는 스스로 거기장군(車騎將軍)이라 하고 맹주가 되어 기주목(冀州牧) 한복(韓馥)과 함께 유주목(幽州牧) 유우(劉虞)를 천자로 세우려 했으나, 유우는 받지 않았다. 한복은 안평(安平)에서 공손찬(公孫瓚)에게 패하였다.
공손찬은 병력을 기주로 이끌면서 동탁을 토벌한다는 명분아래 한복을 습격하려 하였다. 동탁이 장안(長安)으로 들어가자, 원소는 연진(延津)으로 회군하였고 한복도 황망히 돌아오니 진류(陳留)의 고간(高幹)과 영천(潁川)의 순심(荀諶)이 한복을 설득했다. "공손찬이 승세를 타서 남하한다면 모든 고을에서 호응할 것입니다. 원소 장군은 동쪽으로 병력을 이동시키는데 그 의도는 알 수 없습니다만 아마도 장군을 위협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복이 말했다.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순심이 말했다.
"공손찬은 연(燕)과 대(代)의 군대를 거느리고 있어 그 날카로움을 당해낼 수 없습니다. 원씨는 한 시대의 걸출한 인물로써 장군 밑에 있을 사람은 아닙니다. 모름지기 기주는 천하의 중요한 요충지라서, 만약 두 세력이 병립하면 기주에서 교전이 벌어지게 되어, 위협이 없어짐을 기다릴 수 있겠습니다. 원소는 장군과 친구 사이여서 또한 동맹을 맺어두면 당장 장군의 계책대로 기주를 원소에게 양보함만 못하는 것입니다. 원소가 기주를 얻으면 공손찬과 맞붙지 않을 수 없으니, 반드시 장군께 덕이 두터워질 것입니다. 기주에 들어와 친교를 맺어두면 이는 장군이 양현지명(讓賢之名)이 있어 태산(泰山)에 편안히 살수 있을 것입니다. 장군께서는 의심하지 마십시오."
한복이 평소에 겁이 많아 그 계책을 그렇게 여겼다. 장사(長史) 경무(耿武), 별가(別駕) 민순(閔純), 치중(治中) 이력(李歷)이 한복에게 간하였다. "기주가 비록 시골이라 하나, 병력은 백만이요 군량은 10년을 버틸 수 있습니다. 원소가 곤궁한 지경이라 우리를 바라보며 숨쉬는 것이 마치 팔에 안겨있는 어린아이와 같아 젖을 끊으면 굶겨 죽일 수 있습니다. 이 고을을 어찌 원소에게 주려 하십니까?" 한복이 말했다. "내 원씨 집안 밑에 있었고, 또한 재주가 본초(本初)에 미치지 않아 덕을 헤아려 양보하는 것이며 옛 사람이 귀한 것인데, 그대들은 유독 병이라 하는가!!" 종사(從事) 조부(趙浮), 정환(程奐)이 군사를 동원하여 막자고 하였으나, 한복은 듣지 않았다. 한복이 원소에게 양보하여 원소는 기주목(冀州牧)이 되었다.
종사(從事) 저수(沮授)가 원소에게 설득했다. "장군께서는 약관의 나이에 조정에 등용되어 이름이 천하에 알려졌고, 천자를 폐하고 세우는 일에 충의로 분발하여 단신으로 도망쳐 나와 동탁이 두려워하였으며, 황하 이북의 모두가 발해(渤海)에 머리를 조아리게 되었습니다. 한 고을의 군사를 거느리고 기주의 인민을 꺾으니, 위세가 하북에 진동하였고 이름은 천하에 위중(威重)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황건(黃巾)이 어지럽히고, 흑산적(黑山賊)이 발호하여도 군사를 동쪽으로 돌린다면 청주(靑州)를 평정할 수 있으며, 돌아오면서 흑산적을 토벌하면 장연(張燕)을 멸할 수 있고, 북쪽으로 돌리면 공손찬은 반드시 죽게 될 것이며, 융적(戎狄)의 이민족을 협박하면 흉노(匈奴)의 이민족은 반드시 따를 것입니다. 황하(黃河)이북을 아우르고 4주(冀,靑,幷,幽)의 땅을 병합하여 천하의 인재들을 거두어 백만의 군사로 서경(장안)에서 천자를 맞아 종묘를 낙양(洛陽)으로 한 후에 천하를 호령하여 아직 수복하지 않은 땅을 토벌하여 이로써 예봉을 다툰다면 누가 대적하겠습니까? 수년동안 견주어 보아도 공을 세우기는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원소가 기뻐서 말했다.
"이것이 나의 마음이로다."
곧바로 표문을 올려 저수를 감군(監軍),분위장군(奮威將軍)으로 삼았다. 동탁이 집금오(執金吾) 호모반(胡母班)과 장작대장(將作大匠) 오수(吳修)에게 조서를 주며 원소를 꼬드기려 했지만, 원소는 하내태수(河內太守) 왕광(王匡)을 시켜 그들을 죽여 버렸다. 동탁은 원소가 관동(關東)지역(장안 동쪽지역)을 얻었다는 소식을 듣고 원소의 일족인 태부 원외의 가족을 모두 죽여버렸다. 이 때에 의협호걸들이 원소에게 의지하였고, 모두들 복수할 생각으로 각 고을이 봉기하려 하니, 그 명분에 거짓이 있을 수 없었다. 한복은 두려움을 느껴 장막(張邈)에게로 의지하였다. 훗날 원소는 장막에게 사신을 보내 의논할 것이 있는 것처럼 귓속말을 하니, 한복이 그 자리에서 목격하고 언제 일어났는지도 모르게 화장실에서 자살하였다.
처음에 천자의 위치는 원소의 의도는 아니었지만, 어가가 하동(河東)에 있자 영천의 곽도(郭圖)를 보내었다. 곽도는 원소에게 업에 천자의 도읍을 할 것을 설득했지만, 원소는 따르지 않았다. 조조가 천자를 맞아 허(許)에 도읍을 하여 하남(河南)땅을 거두었고 관중 땅이 모두 따르게 되자, 원소는 후회를 하고 조조에게 자신과 가까이 있는 견성( 城)으로 천도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조조는 거부하였다. 천자는 원소를 태위(太尉)로 삼고 바꾸어 대장군, 업후( 侯)에 봉했지만, 원소는 제후를 사양하여 받지를 않았다. 얼마 안 있어 공손찬이 역경(易京)을 공격하여 병합하였다. 장자 원담(袁譚)을 청주자사(靑州刺史)로 삼아 내보내니, 저수가 원소에게 간하였다. "반드시 화(禍)의 시작일 것입니다."
원소는 듣지 않고 말했다.
"내가 여러 자식들에게 각기 한 주(州)씩 거느리게 하려 함이네."
또한 둘째 아들 원희(袁熙)를 유주(幽州)에, 조카 고간을 병주(幷州)자사로 삼았다. 병력이 10만에 심배(審配)와 봉기(逢紀)에게 군사를 통솔하고, 전풍과 순심과 허유(許攸)는 모사를, 안량(顔良)과 문추(文醜)는 군사를 거느리니, 대강 정병 10만에 기병 1만으로 허를 공격하려 했다.
먼저 조조는 유비(劉備)를 서주(徐州)로 보내 원술을 막게 했다. 원술이 죽자, 유비는 서주자사 차주(車胄)를 죽이고 군사를 패(沛)에 주둔하였다. 원소는 기병을 보내 도와주었다. 조조는 유대(劉岱)와 왕충(王忠)을 보내 공격을 했지만, 이기지 못했다. 건안 5년(201) 조조가 몸소 유비를 정벌했다. 전풍은 원소를 설득하여 조조의 후방을 습격할 것을 건의하였지만, 원소는 아들의 병을 핑계로 허락하지 않았다. 전풍은 지팡이로 땅을 치며 말했다. "대저 우연한 찬스는 얻기도 어려운데, 어린아이의 병으로 기회를 잃을 줄이야!! 애석하도다!!" 조조는 유비를 격파하였고, 유비는 원소에게로 달아났다.
원소의 군대는 여양(黎陽)으로 진격하여 안량을 보내 백마(白馬)에서 유연(劉延)을 공격하였다. 저수가 또한 원소에게 간하였다. "안량은 성격이 급하고 속이 좁아, 비록 용감하다고 하나 혼자 맡길 수는 없습니다."
원소는 듣지 않았다. 조조가 유연을 구하고 안량과 싸워 안량의 목을 베었다. 원소는 황하를 건너 연진(延津) 남쪽에 주둔하고 유비와 문추를 보내 도전하였으나 조조가 문추를 참하였다. 다시 전투를 감행하였지만 원소의 대장이 사로잡혀 원소군은 크게 동요하였다. 조조가 관도에 돌아간 후에 저수가 원소에게 말하였다. "우리 북군은 수가 많으나 남군에 비해 굳세지 못하고, 남군의 군량은 우리에 비해 부족하여 남군은 단기전에 유리하고 북군은 지구전에 유리합니다. 마땅히 지구전을 펼쳐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게 하십시오." 원소는 듣지 않았다. 군대를 앞으로 전진시켜 관도 근처에서 교전을 벌였다.
조조군은 이기지는 못했지만 방벽을 회복하였다. 원소는 높은 망루를 흙산에 세워 조조군 진영에 활을 쏴대니 조조군은 모두 방패를 뒤집어 쓴 채 두려워하였다. 조조는 '발석거(發石車)'를 만들어 망루를 쏘아 부셔버렸다. 원소군은 이것을 '벽력거(霹靂車)'라고 불렀다. 원소는 땅굴로 조조의 진지를 습격하려 했으나, 조조가 진영 안에 긴 참호를 파 막아버리고 특공대(奇兵)를 보내 원소군의 군량수레를 부수고 군량을 불살랐다. 조조와 원소가 장기전으로 돌입하자, 백성들은 궁핍해졌고 원소편을 들어 반란하는 자도 많았으며 군량도 모자랐다. 원소는 순우경(淳于瓊)과 일만의 군사를 보내 원소군의 군량수레를 맞이하도록 하였으나, 저수가 말했다. "장기(蔣奇)를 보내 따로 군사를 편성하여(支軍) 조조의 약탈을 끊으시옵소서." 원소는 또한 듣지를 않았다.
순우경이 오소(烏巢)에 숙영하였는데 본대와의 거리는 40리(현대의 도량형은 약 20km정도)였다. 조조는 조홍(曹洪)은 수비군으로 남겨두고 보병 5천을 거느리고 밤에 몰래와서 순우경을 공격하였다. 원소는 기병을 보내 구원하였지만 패주하였다. 조조는 순우경 등을 죽여버렸다. 조조가 돌아오기도 전에 원소의 장수인 고람(高覽)과 장합 (張 )등이 군사를 이끌고 항복하였다. 원소군은 크게 무너져 원소와 원담은 단기로 황하를 건너 달아났다. 남은 병력들이 거짓 항복을 하자 모두 묻어 버렸다.(약 8만 명) 저수는 원소를 따라 건너지 못하고 잡혀 조조에게 보내졌으나 조조가 후하게 대접하였지만, 후에 원소에게 달아나려 하자 죽임을 당했다.
처음에 원소가 하남에 있을 때 전풍(田豊)이 말했다. "조조는 용병을 잘하여 변화가 끝이 없고 군사는 적지만 가볍게 볼 수 없으니, 지구전을 함만 못합니다. 장군께서는 산과 황하의 견고함에 웅거하시고 4주의 군사를 거느리시며, 밖으로 호걸들과 결탁하고 안으로 농업과 군사를 힘쓰신 연후에 정예병을 간추려 나누어 특공대를 조직하여 빈곳을 타고 교대로 나와 하남을 교란하시어 우측을 구원하려 하면 좌측을 치시고, 좌측을 구원하려 한다면 우측을 공격하여, 적으로 하여금 명령에 의해 피곤하게 하고 인민들이 생업을 편안히 할 수 없게 되어, 우리는 피로하기 전에 저들이 이미 지치게 되면 2년도 되지 않아 앉아서 이길 수 있게 됩니다. 이제 이렇게 승리하는 방법을 일러드렸는데, 한번에 승패를 결정지으려 하신다면 그 계책대로 함만 못하거니와 후회해도 쫓을 수 없는 것입니다."
원소는 따르지 않았다. 전풍이 간간이 간언을 하였지만 원소는 매우 화를 내며 저수와 같이 취급하여 형구를 씌워버렸다. 원소군이 패하자 어떤 사람이 말했다. "당신을 중히 쓰실 겁니다." 전풍이 말했다. "만약 우리 군이 이겼다면 살지만, 이제 우리 군이 패했으니 나는 죽을 것입니다." 원소가 돌아와서 좌우에게 일렀다. "내가 전풍의 말을 듣지 않아 과연 웃음거리가 되었구나!" 결국 전풍을 죽여버렸다. 원소는 겉으로는 기품이 있고 상황을 헤아릴 줄 알며 근심과 기쁨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남을 많이 꺼리고 해치려드니 모두가 이러한 종류들이다.
기주의 성읍들 중 반란이 많았지만 원소가 다시 회복하여 평정하였다. 패전 후 병이 생겨 건안 7년(203)에 질병으로 죽었다.
화타전------------어떤 사람이 청룡 연간에 산양태수로 임명된 광릉의 유경종을 만났다. 유경종은 중평시대(184~189)에 자주 화타와 만났는데, 그기 병을 치료하거나 맥을 잴 떄는 신처럼 적중시킨다고 했다.
낭야의 유훈이 하내태수로 있을 때, 스무살 가까이 되는 딸이 있었는데 왼쪽 다리와 발에 종기가 있었으나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종기는 수십 일 있다가 또 재발하기를 7년이나 계속했다. 화타를 맞이하여 그 다리를 보도록했다.
화타는
"이것은 간단히 치료하면 됩니다. 누런 빛이 나는 검정개 한 마리와 잘 달리는 말 두필이 필요합니다."
라고 했다. 줄을 개머리에 매고 말에게 개를 끌고 달리도록 하였다. 한 필이 피곤해지면 다른 말로 교체시켰다. 말이 30여 리 쯤 달렸을 때, 개는 더 이상 달릴 수 없었다. 이번에는 또 사람을 시켜 개를 끌고 걷게 하니, 이전 것과 합쳐 50리 가까이되었다. 그리고 약을 아가씨에게 마시도록 하였다.
아가씨는 편안히 잠을 자 인사불성이 되었다. 그리고 큰 칼로 개의 배를 뒷다리에 가까운 곳까지 자르고, 잘린 곳을 종기 입구로 향하게 하고 2~3촌 떨어지게 했다.
그대로 잠시 멈추었더니, 뱀같이 생긴 것이 종기 속에서 나왔다. 철로 된 방망이를 사용하여 뱀의 머리를 옆으로 베었다. 뱀은 피부 아래에서 오랫동안 요동을 쳤는데, 잠시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서 곧 끌어냈더니, 길이가 3척이나 되었고, 온전한 뱀이었는데, 단지 눈이 있는 곳에 동자가 없었고, 바늘이 역으로 나 있었다. 고약을 붙이고 7일만에 완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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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기 전 Ctrl+F를 잊지말자...1. 김해김씨(金海金氏)-4,124,934 2. 밀양박씨(密陽朴氏)-3,031,478 3. 전주이씨(全州李氏)-2,609,890 4. 경주김씨(慶州金氏)-1,736,798 5. 경주이씨(慶州李氏)-1,424,866 6. 경주최씨(慶州崔氏)-976,820 7. 진주강씨(晋州姜氏)-966,710 It's Me ->광산김씨(光山金氏)-837,008 9. 파평윤씨(坡平尹氏)-713,947 10. 청주한씨(淸州韓氏)-642,992 11. 안동권씨(安東權氏)-629,291 12. 인동장씨(仁同張氏)-591,315 13. 김녕김씨(金寧金氏)-513,015 14. 평산신씨(平山申氏)-496,874 15. 순흥안씨(順興安氏)-468,827 16. 동래정씨(東萊鄭氏)-442,363 17. 달성서씨(達城徐氏)-429,353 18. 안동김씨(安東金氏)-425,264 (구) 19. 해주오씨(海州吳氏)-422,735 20. 전주최씨(全州崔氏)-392,548 21. 남평문씨(南平文氏)-380,530 22. 남양홍씨(南陽洪氏)-379,708 (당홍계) 23. 창녕조씨(昌寧曺氏)-338,222 24. 제주고씨(濟州高氏)-325,950 25. 수원백씨(水原白氏)-316,535 26. 한양조씨(漢陽趙氏)-307,746 27. 경주정씨(慶州鄭氏)-303,443 28. 문화류씨(文化柳氏)-284,083 29. 밀양손씨(密陽孫氏)-274,665 30. 함안조씨(咸安趙氏)-259,196 31. 의성김씨(義城金氏)-253,309 32. 창원황씨(昌原黃氏)-252,814 33. 진주정씨(晋州鄭氏)-238,505 34. 나주임씨(羅州林氏)-236,877 35. 여산송씨(礪山宋氏)-232,753 36. 남원양씨(南原梁氏)-218,546 37. 연일정씨(延日鄭氏)-216,510 38. 청송심씨(靑松沈氏)-212,717 39. 평택임씨(平澤林氏)-210,089 40. 은진송씨(恩津宋氏)-208,816 41-1. 김해김씨(金海金氏)-199,544 (법흥파) 41-2. 김해김씨(金海金氏)-199,544 (사성) 42. 성주이씨(星州李氏)-186,188 43. 해주최씨(海州崔氏)-181,840 44. 강릉유씨(江陵劉氏)-178,913 45. 이천서씨(利川徐氏)-172,072 46. 창녕성씨(昌寧成氏)-167,903 47. 강릉김씨(江陵金氏)-165,953 48. 단양우씨(丹陽禹氏)-162,479 49. 연안차씨(延安車氏)-161,325 50. 하동정씨(河東鄭氏)-158,396 51. 광주이씨(廣州李氏)-158,249 52. 신안주씨(新安朱氏)-151,227 53. 의령남씨(宜寧南氏)-150,394 54. 장수황씨(長水黃氏)-146,575 55. 연안이씨(延安李氏)-145,440 56. 여흥민씨(驪興閔氏)-142,572 57. 정선전씨(旌善全氏)-141,380 58. 강릉최씨(江陵崔氏)-140,854 59. 현풍곽씨(玄風郭氏)-140,283 60. 반남박씨(潘南朴氏)-139,438 61. 평해황씨(平海黃氏)-137,150 62. 한산이씨(韓山李氏)-136,615 63. 제주양씨(濟州梁氏)-133,355 64. 전의이씨(全義李氏)-133,237 65. 천안전씨(天安全氏)-133,074 66. 양천허씨(陽川許氏)-130,286 67. 담양전씨(潭陽田氏)-128,007 68. 함평이씨(咸平李氏)-125,419 69. 영월엄씨(寧越嚴氏)-124,697 70. 함양박씨(咸陽朴氏)-123,688 71. 진주하씨(晋州河氏)-121,054 72. 김해허씨(金海許氏)-121,031 73. 능성구씨(綾城具氏)-120,503 74. 충주지씨(忠州池氏)-118,211 75. 고령신씨(高靈申氏)-116,966 76. 합천이씨(陜川李氏)-115,462 77. 풍양조씨(豊壤趙氏)-113,798 78. 기계유씨(杞溪兪氏)-113,430 79. 선산김씨(善山金氏)-109,682 80. 원주원씨(原州元氏)-109,505 81. 나주나씨(羅州羅氏)-108,139 82. 풍천임씨(豊川任氏)-99,986 83. 여양진씨(驪陽陳氏)-97,372 84. 영천이씨(永川李氏)-94,491 85. 청풍김씨(淸風金氏)-94,468 86. 나주정씨(羅州鄭氏)-93,845 87. 초계정씨(草溪鄭氏)-93,586 88. 벽진이씨(碧珍李氏)-91,907 89. 성주배씨(星州裵氏)-90,239 90. 순천박씨(順天朴氏)-87,631 91. 고성이씨(固城李氏)-84,383 92. 안동장씨(安東張氏)-83,961 93. 영산신씨(靈山辛氏)-83,798 94. 나주정씨(羅州丁氏)-82,863 95. 삼척김씨(三陟金氏)-79,985 96. 연안김씨(延安金氏)-79,788 97. 무안박씨(務安朴氏)-78,817 98. 경주손씨(慶州孫氏)-78,450 99. 청도김씨(淸道金氏)-75,567 100. 성산이씨(星山李氏)-75,210 101. 영양천씨(穎陽千氏)-73,118 102. 곡부공씨(曲阜孔氏)-73,093 103. 여주이씨(驪州李氏)-71,711 104. 분성배씨(盆城裵氏)-71,268 105. 평강채씨(平康蔡氏)-69,256 106. 영양남씨(英陽南氏)-69,155 107. 인천이씨(仁川李氏)-68,628 108. 탐진최씨(耽津崔氏)-68,127 109. 원주이씨(原州李氏)-66,603 110. 진보이(眞寶李氏)-66,407 111. 백천조씨(白川趙氏)-66,155 112. 평창이씨(平昌李氏)-65,945 113. 온양방씨(溫陽方氏)-64,128 114. 부안임씨(扶安林氏)-63,589 115. 상산김씨(商山金氏)-63,528 116. 전주류씨(全州柳氏)-61,650 117. 달성배씨(達城裵氏)-61,104 118. 진주류씨(晋州柳氏)-60,104 119. 보성오씨(寶城吳氏)-59,914 120. 연주현씨(延州玄氏)-59,096 121. 예천임씨(醴泉林氏)-58,403 122. 전주김씨(全州金氏)-57,979 123. 강릉함씨(江陵咸氏)-56,718 124. 부안김씨(扶安金氏)-56,318 125. 죽산안씨(竹山安氏)-56,051 126. 해남윤씨(海南尹氏)-55,627 127. 동복오씨(同福吳氏)-55,517 128. 칠원윤씨(漆原尹氏)-54,263 129. 고흥류씨(고흥류씨)-53,981 130. 파주염씨(坡州廉氏)-53,539 131. 죽산박씨(竹山朴氏)-53,489 132. 교하노씨(交河盧氏)-53,203 133. 순천김씨(順天金氏)-52,258 134. 남원양씨(南原楊氏)-52,197 135. 수성최씨(隋城崔氏)-51,780 136. 재령이씨(載寧李氏)-50,940 137. 덕수이씨(德水李氏)-50,486 138. 옥천조씨(玉川趙氏)-49,847 139. 초계변씨(草溪卞氏)-49,506 140. 광주노씨(光州盧氏)-48,574 141. 안동김씨(安東金氏)-47,702 (신) 142. 나주김씨(羅州金氏)-46,420 143. 성주도씨(星州都氏)-46,186 144. 흥덕장씨(興德張氏)-44,705 145. 양성이씨(陽城李氏)-44,402 146. 신천강씨(信川康氏)-44,259 147. 거창신씨(居昌愼氏)-43,890 148. 광주안씨(廣州安氏)-43,609 149. 평양조씨(平壤趙氏)-41,047 150. 금성나씨(錦城羅氏)-40,493 151. 추계추씨(秋溪秋氏)-39,994 152. 풍천노씨(豊川盧氏)-39,397 153. 청주정씨(淸州鄭氏)-39,256 154. 고령박씨(高靈朴氏)-39,239 155. 삭녕최씨(朔寧崔氏)-38,736 156. 언양김씨(彦陽金氏)-38,383 157. 함안이씨(咸安李氏)-37,597 158. 원주변씨(原州邊氏)-37,505 159. 인천채씨(仁川蔡氏)-37,391 160. 진주소씨(晋州蘇氏)-37,184 161. 광산이씨(光山李氏)-36741 162. 풍산홍씨(豊山洪氏)-36,420 163. 울산김씨(蔚山金氏)-36,225 164. 충주.홍주석씨(忠州.洪州石氏)-35,461 165. 해주정씨(海州鄭氏)-35,434 166. 공주이씨(公州李氏)-35,148 167. 보성선씨(寶城宣氏)-34842 168. 청주이씨(淸州李氏)-34,756 169. 단양장씨(丹陽張氏)-33,295 170. 신평이씨(新平李氏)-33,185 171. 남원윤씨(南原尹氏)-32,731 172. 영광김씨(靈光金氏)-32,412 173. 용인이씨(龍仁李氏)-32,050 174. 조양임씨(兆陽林氏)-31,924 175. 화순최씨(和順崔氏)-31,173 176. 남양홍씨(南陽洪氏)-30,662 (토홍계) 177. 청주김씨(淸州金氏)-29,198 178. 진천송씨(鎭川宋氏)-29,049 179. 장흥마씨(長興馬氏)-28,337 180. 서흥김씨(瑞興金氏)-28,313 181. 순창설씨(淳昌薛氏)-27,926 182. 아주신씨(鵝州申氏)-27,843 183. 충주박씨(忠州朴氏)-27,486 184. 청주양씨(淸州楊氏)-27,437 185. 초계최씨(草溪崔氏)-27,213 186. 해평윤씨(海平尹氏)-26,341 187. 함양오씨(咸陽吳氏)-26,339 188. 함창김씨(咸昌金氏)-26,318 189. 함양여씨(咸陽呂氏)-25,667 190. 나주오씨(羅州吳氏)-25,546 191. 함평노씨(咸平魯氏)-25,408 192. 영해박씨(寧海朴氏)-25,189 193. 곡산연씨(谷山延氏)-25,020 194. 온양정씨(溫陽鄭氏)-24,897 195. 신창표씨(新昌表氏)-24,822 196. 장흥위씨(長興魏氏)-24,654 197. 장흥임씨(長興任氏)-24,523 198. 안동손씨(安東孫氏)-24,187 199. 양주조씨(楊州趙氏)-23,942 200. 진원박씨(珍原朴氏)-23,839 201. 상주박씨(尙州朴氏)-23,627 202. 봉화정씨(奉化鄭氏)-23,173 203. 월성박씨(月城朴氏)-22,917 204. 남양방씨(南陽房氏)-22,496 205. 영천이씨(寧川李氏)-22,479 206. 울산박씨(蔚山朴氏)-22,427 207. 군위오씨(軍威吳氏)-22,408 208. 경주배씨(慶州裵氏)-22,069 209. 광주김씨(廣州金氏)-21,926 210. 영광정씨(靈光丁氏)-21,774 211. 행주기씨(幸州奇氏)-21,536 212. 도강김씨(道康金氏)-21,274 213. 봉화금씨(奉化琴氏)-21,072 214. 결성장씨(結城張氏)-21,068 215. 덕수장씨(德水張氏)-21,006 216. 학성이씨(鶴城李氏)-20,964 217. 울진장씨(蔚珍張氏)-20,791 218. 우봉이씨(牛峰李氏)-20,525 219. 개성김씨(開城金氏)-20,341 220. 해평길씨(海平吉氏)-20,338 221. 옥천육씨(沃川陸氏)-20,173 222. 우주황씨(紆州黃氏)-19,967 223. 개성왕씨(開城王氏)-19,808 224. 안성이씨(安城李氏)-19,739 225. 의령옥씨(宜寧玉氏)-19,368 226. 영천최씨(永川崔氏)-18,721 227. 함열남궁씨(咸悅南宮氏)-18,703 228. 상주주씨(尙州周氏)-18,384 229. 야성송씨(冶城宋氏)-18,341 230. 신창맹씨(新昌孟氏)-18,147 231. 연안명씨(延安明氏)-18,091 232. 함평모씨(咸平牟氏)-17,939 233. 고부이씨(古阜李氏)-17,790 234. 아산장씨(牙山將氏)-17,695 235. 수안이씨(遂安李氏)-17,677 236. 교동인씨(喬桐印氏)-17,448 237. 영산김씨(永山金氏)-17,120 238. 흥양이씨(興陽李氏)-16,977 239. 칠원제씨(漆原諸氏)-16,818 240. 고창오씨(高敞吳氏)-16,716 241. 의령여씨(宜寧余氏)-16,477 242. 단양이씨(丹陽李氏)-16,213 243. 창원정씨(昌原丁氏)-16,141 244. 수원김씨(水原金氏)-16,009 245. 담양국씨(潭陽鞠氏)-15,774 246. 광산탁씨(光山卓氏)-15,691 247. 서산정씨(瑞山鄭氏)-15,362 248. 예안김씨(禮安金氏)-15,313 249. 광주정씨(光州鄭氏)-15,149 250. 하빈이씨(河濱李氏)-15,058 251. 안산김씨(安山金氏)-14,975 252. 홍주이씨(洪州李氏)-14,897 253. 서산류씨(瑞山柳氏)-14,827 254. 강릉박씨(江陵朴氏)-14,703 255. 우계이씨(羽溪李氏)-14,615 256. 강화최씨(江華崔氏)-14,557 257. 김제조씨(金堤趙氏)-14,509 258 장수이씨(長水李氏)-14,324 259. 부여서씨(扶餘徐氏)-14,312 260. 낭주최씨(朗州崔氏)-14,264 261. 금산김씨(錦山金氏)-14,052 262. 창원구씨(昌原具氏)-14,035 263. 성산이씨(星山李氏)-13,758 264. 고령김씨(高靈金氏)-13,692 265. 청안이씨(淸安李氏)-13,549 266. 강화노씨(江華魯氏)-13,499 267. 충주최씨(忠州崔氏)-13,466 268. 무송윤씨(茂松尹氏)-13,384 269. 풍산류씨(豊山柳氏)-13,341 270. 함종어씨(咸從魚氏)-13,321 271. 평해구씨(平海丘氏)-13,176 272. 경주임씨(慶州林氏)-13,163 273. 평해손씨(平海孫氏)-12,831 274. 홍천용씨(洪川龍氏)-12,733 275. 무송유씨(茂松庾氏)-12,463 276. 행주은씨(幸州殷氏)-12,241 277. 청해이씨(靑海李氏)-12,002 278. 고성김씨(固城金氏)-11,888 279. 동주최씨(東州崔氏)-11,699 280. 신평송씨(新平宋氏)-11,185 281. 청주경씨(淸州慶氏)-11,128 282. 풍기진씨(豊基秦氏)-11,046 283. 탐진안씨(耽津安氏)-11,033 284. 절강편씨(浙江片氏)-10,678 285. 거제반씨(巨濟潘氏)-10,063 286. 제주부씨(濟州夫氏)-9,440 287. 의흥예씨(義興芮氏)-9,268 288. 소주가씨(蘇州賈氏)-9,025 289. 영천황보씨(永川皇甫氏)-8,877 290. 사천목씨(泗川睦氏)-8,187 291. 하음봉씨(河陰奉氏)-8,087 292. 경주석씨(慶州昔氏)-7,996 293. 하남정씨(河南程氏)-7,766 294. 청주사씨(淸州史氏)-7,486 295. 면천복씨(沔川卜氏)-7,471 296. 수안계씨(遂安桂氏)-6,242 297. 봉산지씨(鳳山智氏)-6,098 298. 진주형씨(晋州邢氏)-5,822 299. 두릉두씨(杜陵杜氏)-5,701 300. 거창장씨(居昌章氏)-5,554 301. 문경전씨(聞慶錢氏)-5,535 302. 남원진씨(南原晋氏)-5,084 303. 남양제갈씨(南陽諸葛氏)-4,374 304. 영순태씨(永順太氏)-4,142 305. 광천동씨(廣川董氏)-4,130 306. 달성하씨(達城夏氏)-4,028 307. 태원선우씨(太原鮮于氏)-3,547 308. 경주설씨(慶州& #20592;氏)-3,269 309. 금성범씨(錦城范氏)-2,991 310. 청주좌씨(淸州左氏)-2,691 311. 효령사공씨(孝令司空氏)-2,664 312. 목천상씨(木川尙氏)-2,293 313. 죽산음씨(竹山陰氏)-2,260 314. 괴산피씨(槐山皮氏)-2,204 315. 금구온씨(金溝溫氏)-2,148 316. 달성빈씨(達城賓氏)-2,115 317. 회산감씨(檜山甘氏)-2,113 318. 신평호씨(新平扈氏)-1,854 319. 안음서문씨(安陰西門氏)-1,852 320. 연일승씨(延日承氏)-1,828 321. 태인시씨(泰仁柴氏)-1,807 322. 강화위씨(江華韋氏)-1,805 323. 절강시씨(浙江施氏)-1,770 324. 김포공씨(金浦公氏)-1,715 325. 태인경씨(泰仁景氏)-1,617 326. 강음단씨(江陰段氏)-1,429 327. 전주견씨(全州甄氏)-1,141 328. 남양갈씨(南陽葛氏)-1,061 329. 홍산순씨(鴻山荀氏)-1,017 330. 밀양당씨(密陽唐氏)-1,013 331. 상곡마씨(上谷麻氏)-998 332. 남원독고씨(南原獨孤氏)-807 333. 옥천옹씨(玉川邕氏)-7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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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내 성순위가 몇위야??
Ctrl + F를 사용해서 찾아보세요~ 1. 김해김씨(金海金氏)-4,124,934 2. 밀양박씨(密陽朴氏)-3,031,478 3. 전주이씨(全州李氏)-2,609,890 4. 경주김씨(慶州金氏)-1,736,798 5. 경주이씨(慶州李氏)-1,424,866 6. 경주최씨(慶州崔氏)-976,820 7. 진주강씨(晋州姜氏)-966,710 <- Me8. 광산김씨(光山金氏)-837,008 9. 파평윤씨(坡平尹氏)-713,947 10. 청주한씨(淸州韓氏)-642,992 11. 안동권씨(安東權氏)-629,291 12. 인동장씨(仁同張氏)-591,315 13. 김녕김씨(金寧金氏)-513,015 14. 평산신씨(平山申氏)-496,874 15. 순흥안씨(順興安氏)-468,827 16. 동래정씨(東萊鄭氏)-442,363 17. 달성서씨(達城徐氏)-429,353 18. 안동김씨(安東金氏)-425,264 19. 해주오씨(海州吳氏)-422,735 20. 전주최씨(全州崔氏)-392,548 21. 남평문씨(南平文氏)-380,530 22. 남양홍씨(南陽洪氏)-379,708 23. 창녕조씨(昌寧曺氏)-338,222 24. 제주고씨(濟州高氏)-325,950 25. 수원백씨(水原白氏)-316,535 26. 한양조씨(漢陽趙氏)-307,746 27. 경주정씨(慶州鄭氏)-303,443 28. 문화류씨(文化柳氏)-284,083 29. 밀양손씨(密陽孫氏)-274,665 30. 함안조씨(咸安趙氏)-259,196 31. 의성김씨(義城金氏)-253,309 32. 창원황씨(昌原黃氏)-252,814 33. 진주정씨(晋州鄭氏)-238,505 34. 나주임씨(羅州林氏)-236,877 35. 여산송씨(礪山宋氏)-232,753 36. 남원양씨(南原梁氏)-218,546 37. 연일정씨(延日鄭氏)-216,510 38. 청송심씨(靑松沈氏)-212,717 39. 평택임씨(平澤林氏)-210,089 40. 은진송씨(恩津宋氏)-208,816 41-1. 김해김씨(金海金氏)-199,54441-2. 김해김씨(金海金氏)-199,544 42. 성주이씨(星州李氏)-186,188 43. 해주최씨(海州崔氏)-181,840 44. 강릉유씨(江陵劉氏)-178,913 45. 이천서씨(利川徐氏)-172,072 46. 창녕성씨(昌寧成氏)-167,903 47. 강릉김씨(江陵金氏)-165,953 48. 단양우씨(丹陽禹氏)-162,479 49. 연안차씨(延安車氏)-161,325 50. 하동정씨(河東鄭氏)-158,396 51. 광주이씨(廣州李氏)-158,249 52. 신안주씨(新安朱氏)-151,227 53. 의령남씨(宜寧南氏)-150,394 54. 장수황씨(長水黃氏)-146,575 55. 연안이씨(延安李氏)-145,440 56. 여흥민씨(驪興閔氏)-142,572 57. 정선전씨(旌善全氏)-141,380 58. 강릉최씨(江陵崔氏)-140,854 59. 현풍곽씨(玄風郭氏)-140,283 60. 반남박씨(潘南朴氏)-139,438 61. 평해황씨(平海黃氏)-137,150 62. 한산이씨(韓山李氏)-136,615 63. 제주양씨(濟州梁氏)-133,355 64. 전의이씨(全義李氏)-133,237 65. 천안전씨(天安全氏)-133,074 66. 양천허씨(陽川許氏)-130,286 67. 담양전씨(潭陽田氏)-128,007 68. 함평이씨(咸平李氏)-125,419 69. 영월엄씨(寧越嚴氏)-124,697 70. 함양박씨(咸陽朴氏)-123,688 71. 진주하씨(晋州河氏)-121,054 72. 김해허씨(金海許氏)-121,031 73. 능성구씨(綾城具氏)-120,503 74. 충주지씨(忠州池氏)-118,211 75. 고령신씨(高靈申氏)-116,966 76. 합천이씨(陜川李氏)-115,462 77. 풍양조씨(豊壤趙氏)-113,798 78. 기계유씨(杞溪兪氏)-113,430 79. 선산김씨(善山金氏)-109,682 80. 원주원씨(原州元氏)-109,505 81. 나주나씨(羅州羅氏)-108,139 82. 풍천임씨(豊川任氏)-99,986 83. 여양진씨(驪陽陳氏)-97,372 84. 영천이씨(永川李氏)-94,491 85. 청풍김씨(淸風金氏)-94,468 86. 나주정씨(羅州鄭氏)-93,845 87. 초계정씨(草溪鄭氏)-93,586 88. 벽진이씨(碧珍李氏)-91,907 89. 성주배씨(星州裵氏)-90,239 90 순천박씨(順天朴氏)-87,631 91. 고성이씨(固城李氏)-84,383 92. 안동장씨(安東張氏)-83,961 93. 영산신씨(靈山辛氏)-83,798 94. 나주정씨(羅州丁氏)-82,863 95. 삼척김씨(三陟金氏)-79,985 96. 연안김씨(延安金氏)-79,788 97. 무안박씨(務安朴氏)-78,817 98. 경주손씨(慶州孫氏)-78,450 99. 청도김씨(淸道金氏)-75,567 100. 성산이씨(星山李氏)-75,210 101. 영양천씨(穎陽千氏)-73,118 102. 곡부공씨(曲阜孔氏)-73,093 103. 여주이씨(驪州李氏)-71,711 104. 분성배씨(盆城裵氏)-71,268 105. 평강채씨(平康蔡氏)-69,256 106. 영양남씨(英陽南氏)-69,155 107. 인천이씨(仁川李氏)-68,628 108. 탐진최씨(耽津崔氏)-68,127 109. 원주이씨(原州李氏)-66,603 110. 진보이(眞寶李氏)-66,407 111. 백천조씨(白川趙氏)-66,155 112. 평창이씨(平昌李氏)-65,945 113. 온양방씨(溫陽方氏)-64,128 114. 부안임씨(扶安林氏)-63,589 115. 상산김씨(商山金氏)-63,528 116. 전주류씨(全州柳氏)-61,650 117. 달성배씨(達城裵氏)-61,104 118. 진주류씨(晋州柳氏)-60,104 119. 보성오씨(寶城吳氏)-59,914 120. 연주현씨(延州玄氏)-59,096 121. 예천임씨(醴泉林氏)-58,403 122. 전주김씨(全州金氏)-57,979 123. 강릉함씨(江陵咸氏)-56,718 124. 부안김씨(扶安金氏)-56,318 125. 죽산안씨(竹山安氏)-56,051 126. 해남윤씨(海南尹氏)-55,627 127. 동복오씨(同福吳氏)-55,517 128. 칠원윤씨(漆原尹氏)-54,263 129. 고흥류씨(고흥류씨)-53,981 130. 파주염씨(坡州廉氏)-53,539 131. 죽산박씨(竹山朴氏)-53,489 132. 교하노씨(交河盧氏)-53,203 133. 순천김씨(順天金氏)-52,258 134. 남원양씨(南原楊氏)-52,197 135. 수성최씨(隋城崔氏)-51,780 136. 재령이씨(載寧李氏)-50,940 137. 덕수이씨(德水李氏)-50,486 138. 옥천조씨(玉川趙氏)-49,847 139. 초계변씨(草溪卞氏)-49,506 140. 광주노씨(光州盧氏)-48,574 141. 안동김씨(安東金氏)-47,702 142. 나주김씨(羅州金氏)-46,420 143. 성주도씨(星州都氏)-46,186 144. 흥덕장씨(興德張氏)-44,705 145. 양성이씨(陽城李氏)-44,402 146. 신천강씨(信川康氏)-44,259 147. 거창신씨(居昌愼氏)-43,890 148. 광주안씨(廣州安氏)-43,609 149. 평양조씨(平壤趙氏)-41,047 150. 금성나씨(錦城羅氏)-40,493 151. 추계추씨(秋溪秋氏)-39,994 152. 풍천노씨(豊川盧氏)-39,397 153. 청주정씨(淸州鄭氏)-39,256 154. 고령박씨(高靈朴氏)-39,239 155. 삭녕최씨(朔寧崔氏)-38,736 156. 언양김씨(彦陽金氏)-38,383 157. 함안이씨(咸安李氏)-37,597 158. 원주변씨(原州邊氏)-37,505 159. 인천채씨(仁川蔡氏)-37,391 160. 진주소씨(晋州蘇氏)-37,184 161. 광산이씨(光山李氏)-36741 162. 풍산홍씨(豊山洪氏)-36,420 163. 울산김씨(蔚山金氏)-36,225 164. 충주.홍주석씨(忠州.洪州石氏)-35,461 165. 해주정씨(海州鄭氏)-35,434 166. 공주이씨(公州李氏)-35,148 167. 보성선씨(寶城宣氏)-34842 168. 청주이씨(淸州李氏)-34,756 169. 단양장씨(丹陽張氏)-33,295 170. 신평이씨(新平李氏)-33,185 171. 남원윤씨(南原尹氏)-32,731 172. 영광김씨(靈光金氏)-32,412 173. 용인이씨(龍仁李氏)-32,050 174. 조양임씨(兆陽林氏)-31,924 175. 화순최씨(和順崔氏)-31,173 176. 남양홍씨(南陽洪氏)-30,662 177. 청주김씨(淸州金氏)-29,198 178. 진천송씨(鎭川宋氏)-29,049 179. 장흥마씨(長興馬氏)-28,337 180. 서흥김씨(瑞興金氏)-28,313 181. 순창설씨(淳昌薛氏)-27,926 182. 아주신씨(鵝州申氏)-27,843 183. 충주박씨(忠州朴氏)-27,486 184. 청주양씨(淸州楊氏)-27,437 185. 초계최씨(草溪崔氏)-27,213 186. 해평윤씨(海平尹氏)-26,341 187. 함양오씨(咸陽吳氏)-26,339 188. 함창김씨(咸昌金氏)-26,318 189. 함양여씨(咸陽呂氏)-25,667 190. 나주오씨(羅州吳氏)-25,546 191. 함평노씨(咸平魯氏)-25,408 192. 영해박씨(寧海朴氏)-25,189 193. 곡산연씨(谷山延氏)-25,020 194. 온양정씨(溫陽鄭氏)-24,897 195. 신창표씨(新昌表氏)-24,822 196. 장흥위씨(長興魏氏)-24,654 197. 장흥임씨(長興任氏)-24,523 198. 안동손씨(安東孫氏)-24,187 199. 양주조씨(楊州趙氏)-23,942 200. 진원박씨(珍原朴氏)-23,839 201. 상주박씨(尙州朴氏)-23,627 202. 봉화정씨(奉化鄭氏)-23,173 203. 월성박씨(月城朴氏)-22,917 204. 남양방씨(南陽房氏)-22,496 205. 영천이씨(寧川李氏)-22,479 206. 울산박씨(蔚山朴氏)-22,427 207. 군위오씨(軍威吳氏)-22,408 208. 경주배씨(慶州裵氏)-22,069 209. 광주김씨(廣州金氏)-21,926 210. 영광정씨(靈光丁氏)-21,774 211. 행주기씨(幸州奇氏)-21,536 212. 도강김씨(道康金氏)-21,274 213. 봉화금씨(奉化琴氏)-21,072 214. 결성장씨(結城張氏)-21,068 215. 덕수장씨(德水張氏)-21,006 216. 학성이씨(鶴城李氏)-20,964 217. 울진장씨(蔚珍張氏)-20,791 218. 우봉이씨(牛峰李氏)-20,525 219. 개성김씨(開城金氏)-20,341 220. 해평길씨(海平吉氏)-20,338 221. 옥천육씨(沃川陸氏)-20,173 222. 우주황씨(紆州黃氏)-19,967 223. 개성왕씨(開城王氏)-19,808 224. 안성이씨(安城李氏)-19,739 225. 의령옥씨(宜寧玉氏)-19,368 226. 영천최씨(永川崔氏)-18,721 227. 함열남궁씨(咸悅南宮氏)-18,703 228. 상주주씨(尙州周氏)-18,384 229. 야성송씨(冶城宋氏)-18,341 230. 신창맹씨(新昌孟氏)-18,147 231. 연안명씨(延安明氏)-18,091 232. 함평모씨(咸平牟氏)-17,939 233. 고부이씨(古阜李氏)-17,790 234. 아산장씨(牙山將氏)-17,695 235. 수안이씨(遂安李氏)-17,677 236. 교동인씨(喬桐印氏)-17,448 237. 영산김씨(永山金氏)-17,120 238. 흥양이씨(興陽李氏)-16,977 239. 칠원제씨(漆原諸氏)-16,818 240. 고창오씨(高敞吳氏)-16,716 241. 의령여씨(宜寧余氏)-16,477 242. 단양이씨(丹陽李氏)-16,213 243. 창원정씨(昌原丁氏)-16,141 244. 수원김씨(水原金氏)-16,009 245. 담양국씨(潭陽鞠氏)-15,774 246. 광산탁씨(光山卓氏)-15,691 247. 서산정씨(瑞山鄭氏)-15,362 248. 예안김씨(禮安金氏)-15,313 249. 광주정씨(光州鄭氏)-15,149 250. 하빈이씨(河濱李氏)-15,058 251. 안산김씨(安山金氏)-14,975 252. 홍주이씨(洪州李氏)-14,897 253. 서산류씨(瑞山柳氏)-14,827 254. 강릉박씨(江陵朴氏)-14,703 255. 우계이씨(羽溪李氏)-14,615 256. 강화최씨(江華崔氏)-14,557 257. 김제조씨(金堤趙氏)-14,509 258 장수이씨(長水李氏)-14,324 259. 부여서씨(扶餘徐氏)-14,312 260. 낭주최씨(朗州崔氏)-14,264 261. 금산김씨(錦山金氏)-14,052 262. 창원구씨(昌原具氏)-14,035 263. 성산이씨(星山李氏)-13,758 264. 고령김씨(高靈金氏)-13,692 265. 청안이씨(淸安李氏)-13,549 266. 강화노씨(江華魯氏)-13,499 267. 충주최씨(忠州崔氏)-13,466 268. 무송윤씨(茂松尹氏)-13,384 269. 풍산류씨(豊山柳氏)-13,341 270. 함종어씨(咸從魚氏)-13,321 271. 평해구씨(平海丘氏)-13,176 272. 경주임씨(慶州林氏)-13,163 273. 평해손씨(平海孫氏)-12,831 274. 홍천용씨(洪川龍氏)-12,733 275. 무송유씨(茂松庾氏)-12,463 276. 행주은씨(幸州殷氏)-12,241 277. 청해이씨(靑海李氏)-12,002 278. 고성김씨(固城金氏)-11,888 279. 동주최씨(東州崔氏)-11,699 280. 신평송씨(新平宋氏)-11,185 281. 청주경씨(淸州慶氏)-11,128 282. 풍기진씨(豊基秦氏)-11,046 283. 탐진안씨(耽津安氏)-11,033 284. 절강편씨(浙江片氏)-10,678 285. 거제반씨(巨濟潘氏)-10,063 286. 제주부씨(濟州夫氏)-9,440 287. 의흥예씨(義興芮氏)-9,268 288. 소주가씨(蘇州賈氏)-9,025 289. 영천황보씨(永川皇甫氏)-8,877 290. 사천목씨(泗川睦氏)-8,187 291. 하음봉씨(河陰奉氏)-8,087 292. 경주석씨(慶州昔氏)-7,996 293. 하남정씨(河南程氏)-7,766 294. 청주사씨(淸州史氏)-7,486 295. 면천복씨(沔川卜氏)-7,471 296. 수안계씨(遂安桂氏)-6,242 297. 봉산지씨(鳳山智氏)-6,098 298. 진주형씨(晋州邢氏)-5,822 299. 두릉두씨(杜陵杜氏)-5,701 300. 거창장씨(居昌章氏)-5,554 301. 문경전씨(聞慶錢氏)-5,535 302. 남원진씨(南原晋氏)-5,084 303. 남양제갈씨(南陽諸葛氏)-4,374 304. 영순태씨(永順太氏)-4,142 305. 광천동씨(廣川董氏)-4,130 306. 달성하씨(達城夏氏)-4,028 307. 태원선우씨(太原鮮于氏)-3,547 308. 경주설씨(慶州& #20592;氏)-3,269 309. 금성범씨(錦城范氏)-2,991 310. 청주좌씨(淸州左氏)-2,691 311. 효령사공씨(孝令司空氏)-2,664 312. 목천상씨(木川尙氏)-2,293 313. 죽산음씨(竹山陰氏)-2,260 314. 괴산피씨(槐山皮氏)-2,204 315. 금구온씨(金溝溫氏)-2,148 316. 달성빈씨(達城賓氏)-2,115 317. 회산감씨(檜山甘氏)-2,113 318. 신평호씨(新平扈氏)-1,854 319. 안음서문씨(安陰西門氏)-1,852 320. 연일승씨(延日承氏)-1,828 321. 태인시씨(泰仁柴氏)-1,807 322. 강화위씨(江華韋氏)-1,805 323. 절강시씨(浙江施氏)-1,770 324. 김포공씨(金浦公氏)-1,715 325. 태인경씨(泰仁景氏)-1,617 326. 강음단씨(江陰段氏)-1,429 327. 전주견씨(全州甄氏)-1,141 328. 남양갈씨(南陽葛氏)-1,061 329. 홍산순씨(鴻山荀氏)-1,017 330. 밀양당씨(密陽唐氏)-1,013 331. 상곡마씨(上谷麻氏)-998 332. 남원독고씨(南原獨孤氏)-807 333. 옥천옹씨(玉川邕氏)-772 예)????[이건 순위].???씨(???)-???[이건 이 성을 가진사람수]
해애해애작성일
2006-11-04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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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당신의 본관과 성씨는 몇순위 일까요?^^
찾기 전 Ctrl+F를 잊지말자...1. 김해김씨(金海金氏)-4,124,934 2. 밀양박씨(密陽朴氏)-3,031,478 3. 전주이씨(全州李氏)-2,609,890 4. 경주김씨(慶州金氏)-1,736,798 5. 경주이씨(慶州李氏)-1,424,866 6. 경주최씨(慶州崔氏)-976,820 7. 진주강씨(晋州姜氏)-966,710 It's Me ->광산김씨(光山金氏)-837,008 9. 파평윤씨(坡平尹氏)-713,947 10. 청주한씨(淸州韓氏)-642,992 11. 안동권씨(安東權氏)-629,291 12. 인동장씨(仁同張氏)-591,315 13. 김녕김씨(金寧金氏)-513,015 14. 평산신씨(平山申氏)-496,874 15. 순흥안씨(順興安氏)-468,827 16. 동래정씨(東萊鄭氏)-442,363 17. 달성서씨(達城徐氏)-429,353 18. 안동김씨(安東金氏)-425,264 (구) 19. 해주오씨(海州吳氏)-422,735 20. 전주최씨(全州崔氏)-392,548 21. 남평문씨(南平文氏)-380,530 22. 남양홍씨(南陽洪氏)-379,708 (당홍계) 23. 창녕조씨(昌寧曺氏)-338,222 24. 제주고씨(濟州高氏)-325,950 25. 수원백씨(水原白氏)-316,535 26. 한양조씨(漢陽趙氏)-307,746 27. 경주정씨(慶州鄭氏)-303,443 28. 문화류씨(文化柳氏)-284,083 29. 밀양손씨(密陽孫氏)-274,665 30. 함안조씨(咸安趙氏)-259,196 31. 의성김씨(義城金氏)-253,309 32. 창원황씨(昌原黃氏)-252,814 33. 진주정씨(晋州鄭氏)-238,505 34. 나주임씨(羅州林氏)-236,877 35. 여산송씨(礪山宋氏)-232,753 36. 남원양씨(南原梁氏)-218,546 37. 연일정씨(延日鄭氏)-216,510 38. 청송심씨(靑松沈氏)-212,717 39. 평택임씨(平澤林氏)-210,089 40. 은진송씨(恩津宋氏)-208,816 41-1. 김해김씨(金海金氏)-199,544 (법흥파) 41-2. 김해김씨(金海金氏)-199,544 (사성) 42. 성주이씨(星州李氏)-186,188 43. 해주최씨(海州崔氏)-181,840 44. 강릉유씨(江陵劉氏)-178,913 45. 이천서씨(利川徐氏)-172,072 46. 창녕성씨(昌寧成氏)-167,903 47. 강릉김씨(江陵金氏)-165,953 48. 단양우씨(丹陽禹氏)-162,479 49. 연안차씨(延安車氏)-161,325 50. 하동정씨(河東鄭氏)-158,396 51. 광주이씨(廣州李氏)-158,249 52. 신안주씨(新安朱氏)-151,227 53. 의령남씨(宜寧南氏)-150,394 54. 장수황씨(長水黃氏)-146,575 55. 연안이씨(延安李氏)-145,440 56. 여흥민씨(驪興閔氏)-142,572 57. 정선전씨(旌善全氏)-141,380 58. 강릉최씨(江陵崔氏)-140,854 59. 현풍곽씨(玄風郭氏)-140,283 60. 반남박씨(潘南朴氏)-139,438 61. 평해황씨(平海黃氏)-137,150 62. 한산이씨(韓山李氏)-136,615 63. 제주양씨(濟州梁氏)-133,355 64. 전의이씨(全義李氏)-133,237 65. 천안전씨(天安全氏)-133,074 66. 양천허씨(陽川許氏)-130,286 67. 담양전씨(潭陽田氏)-128,007 68. 함평이씨(咸平李氏)-125,419 69. 영월엄씨(寧越嚴氏)-124,697 70. 함양박씨(咸陽朴氏)-123,688 71. 진주하씨(晋州河氏)-121,054 72. 김해허씨(金海許氏)-121,031 73. 능성구씨(綾城具氏)-120,503 74. 충주지씨(忠州池氏)-118,211 75. 고령신씨(高靈申氏)-116,966 76. 합천이씨(陜川李氏)-115,462 77. 풍양조씨(豊壤趙氏)-113,798 78. 기계유씨(杞溪兪氏)-113,430 79. 선산김씨(善山金氏)-109,682 80. 원주원씨(原州元氏)-109,505 81. 나주나씨(羅州羅氏)-108,139 82. 풍천임씨(豊川任氏)-99,986 83. 여양진씨(驪陽陳氏)-97,372 84. 영천이씨(永川李氏)-94,491 85. 청풍김씨(淸風金氏)-94,468 86. 나주정씨(羅州鄭氏)-93,845 87. 초계정씨(草溪鄭氏)-93,586 88. 벽진이씨(碧珍李氏)-91,907 89. 성주배씨(星州裵氏)-90,239 90. 순천박씨(順天朴氏)-87,631 91. 고성이씨(固城李氏)-84,383 92. 안동장씨(安東張氏)-83,961 93. 영산신씨(靈山辛氏)-83,798 94. 나주정씨(羅州丁氏)-82,863 95. 삼척김씨(三陟金氏)-79,985 96. 연안김씨(延安金氏)-79,788 97. 무안박씨(務安朴氏)-78,817 98. 경주손씨(慶州孫氏)-78,450 99. 청도김씨(淸道金氏)-75,567 100. 성산이씨(星山李氏)-75,210 101. 영양천씨(穎陽千氏)-73,118 102. 곡부공씨(曲阜孔氏)-73,093 103. 여주이씨(驪州李氏)-71,711 104. 분성배씨(盆城裵氏)-71,268 105. 평강채씨(平康蔡氏)-69,256 106. 영양남씨(英陽南氏)-69,155 107. 인천이씨(仁川李氏)-68,628 108. 탐진최씨(耽津崔氏)-68,127 109. 원주이씨(原州李氏)-66,603 110. 진보이(眞寶李氏)-66,407 111. 백천조씨(白川趙氏)-66,155 112. 평창이씨(平昌李氏)-65,945 113. 온양방씨(溫陽方氏)-64,128 114. 부안임씨(扶安林氏)-63,589 115. 상산김씨(商山金氏)-63,528 116. 전주류씨(全州柳氏)-61,650 117. 달성배씨(達城裵氏)-61,104 118. 진주류씨(晋州柳氏)-60,104 119. 보성오씨(寶城吳氏)-59,914 120. 연주현씨(延州玄氏)-59,096 121. 예천임씨(醴泉林氏)-58,403 122. 전주김씨(全州金氏)-57,979 123. 강릉함씨(江陵咸氏)-56,718 124. 부안김씨(扶安金氏)-56,318 125. 죽산안씨(竹山安氏)-56,051 126. 해남윤씨(海南尹氏)-55,627 127. 동복오씨(同福吳氏)-55,517 128. 칠원윤씨(漆原尹氏)-54,263 129. 고흥류씨(고흥류씨)-53,981 130. 파주염씨(坡州廉氏)-53,539 131. 죽산박씨(竹山朴氏)-53,489 132. 교하노씨(交河盧氏)-53,203 133. 순천김씨(順天金氏)-52,258 134. 남원양씨(南原楊氏)-52,197 135. 수성최씨(隋城崔氏)-51,780 136. 재령이씨(載寧李氏)-50,940 137. 덕수이씨(德水李氏)-50,486 138. 옥천조씨(玉川趙氏)-49,847 139. 초계변씨(草溪卞氏)-49,506 140. 광주노씨(光州盧氏)-48,574 141. 안동김씨(安東金氏)-47,702 (신) 142. 나주김씨(羅州金氏)-46,420 143. 성주도씨(星州都氏)-46,186 144. 흥덕장씨(興德張氏)-44,705 145. 양성이씨(陽城李氏)-44,402 146. 신천강씨(信川康氏)-44,259 147. 거창신씨(居昌愼氏)-43,890 148. 광주안씨(廣州安氏)-43,609 149. 평양조씨(平壤趙氏)-41,047 150. 금성나씨(錦城羅氏)-40,493 151. 추계추씨(秋溪秋氏)-39,994 152. 풍천노씨(豊川盧氏)-39,397 153. 청주정씨(淸州鄭氏)-39,256 154. 고령박씨(高靈朴氏)-39,239 155. 삭녕최씨(朔寧崔氏)-38,736 156. 언양김씨(彦陽金氏)-38,383 157. 함안이씨(咸安李氏)-37,597 158. 원주변씨(原州邊氏)-37,505 159. 인천채씨(仁川蔡氏)-37,391 160. 진주소씨(晋州蘇氏)-37,184 161. 광산이씨(光山李氏)-36741 162. 풍산홍씨(豊山洪氏)-36,420 163. 울산김씨(蔚山金氏)-36,225 164. 충주.홍주석씨(忠州.洪州石氏)-35,461 165. 해주정씨(海州鄭氏)-35,434 166. 공주이씨(公州李氏)-35,148 167. 보성선씨(寶城宣氏)-34842 168. 청주이씨(淸州李氏)-34,756 169. 단양장씨(丹陽張氏)-33,295 170. 신평이씨(新平李氏)-33,185 171. 남원윤씨(南原尹氏)-32,731 172. 영광김씨(靈光金氏)-32,412 173. 용인이씨(龍仁李氏)-32,050 174. 조양임씨(兆陽林氏)-31,924 175. 화순최씨(和順崔氏)-31,173 176. 남양홍씨(南陽洪氏)-30,662 (토홍계) 177. 청주김씨(淸州金氏)-29,198 178. 진천송씨(鎭川宋氏)-29,049 179. 장흥마씨(長興馬氏)-28,337 180. 서흥김씨(瑞興金氏)-28,313 181. 순창설씨(淳昌薛氏)-27,926 182. 아주신씨(鵝州申氏)-27,843 183. 충주박씨(忠州朴氏)-27,486 184. 청주양씨(淸州楊氏)-27,437 185. 초계최씨(草溪崔氏)-27,213 186. 해평윤씨(海平尹氏)-26,341 187. 함양오씨(咸陽吳氏)-26,339 188. 함창김씨(咸昌金氏)-26,318 189. 함양여씨(咸陽呂氏)-25,667 190. 나주오씨(羅州吳氏)-25,546 191. 함평노씨(咸平魯氏)-25,408 192. 영해박씨(寧海朴氏)-25,189 193. 곡산연씨(谷山延氏)-25,020 194. 온양정씨(溫陽鄭氏)-24,897 195. 신창표씨(新昌表氏)-24,822 196. 장흥위씨(長興魏氏)-24,654 197. 장흥임씨(長興任氏)-24,523 198. 안동손씨(安東孫氏)-24,187 199. 양주조씨(楊州趙氏)-23,942 200. 진원박씨(珍原朴氏)-23,839 201. 상주박씨(尙州朴氏)-23,627 202. 봉화정씨(奉化鄭氏)-23,173 203. 월성박씨(月城朴氏)-22,917 204. 남양방씨(南陽房氏)-22,496 205. 영천이씨(寧川李氏)-22,479 206. 울산박씨(蔚山朴氏)-22,427 207. 군위오씨(軍威吳氏)-22,408 208. 경주배씨(慶州裵氏)-22,069 209. 광주김씨(廣州金氏)-21,926 210. 영광정씨(靈光丁氏)-21,774 211. 행주기씨(幸州奇氏)-21,536 212. 도강김씨(道康金氏)-21,274 213. 봉화금씨(奉化琴氏)-21,072 214. 결성장씨(結城張氏)-21,068 215. 덕수장씨(德水張氏)-21,006 216. 학성이씨(鶴城李氏)-20,964 217. 울진장씨(蔚珍張氏)-20,791 218. 우봉이씨(牛峰李氏)-20,525 219. 개성김씨(開城金氏)-20,341 220. 해평길씨(海平吉氏)-20,338 221. 옥천육씨(沃川陸氏)-20,173 222. 우주황씨(紆州黃氏)-19,967 223. 개성왕씨(開城王氏)-19,808 224. 안성이씨(安城李氏)-19,739 225. 의령옥씨(宜寧玉氏)-19,368 226. 영천최씨(永川崔氏)-18,721 227. 함열남궁씨(咸悅南宮氏)-18,703 228. 상주주씨(尙州周氏)-18,384 229. 야성송씨(冶城宋氏)-18,341 230. 신창맹씨(新昌孟氏)-18,147 231. 연안명씨(延安明氏)-18,091 232. 함평모씨(咸平牟氏)-17,939 233. 고부이씨(古阜李氏)-17,790 234. 아산장씨(牙山將氏)-17,695 235. 수안이씨(遂安李氏)-17,677 236. 교동인씨(喬桐印氏)-17,448 237. 영산김씨(永山金氏)-17,120 238. 흥양이씨(興陽李氏)-16,977 239. 칠원제씨(漆原諸氏)-16,818 240. 고창오씨(高敞吳氏)-16,716 241. 의령여씨(宜寧余氏)-16,477 242. 단양이씨(丹陽李氏)-16,213 243. 창원정씨(昌原丁氏)-16,141 244. 수원김씨(水原金氏)-16,009 245. 담양국씨(潭陽鞠氏)-15,774 246. 광산탁씨(光山卓氏)-15,691 247. 서산정씨(瑞山鄭氏)-15,362 248. 예안김씨(禮安金氏)-15,313 249. 광주정씨(光州鄭氏)-15,149 250. 하빈이씨(河濱李氏)-15,058 251. 안산김씨(安山金氏)-14,975 252. 홍주이씨(洪州李氏)-14,897 253. 서산류씨(瑞山柳氏)-14,827 254. 강릉박씨(江陵朴氏)-14,703 255. 우계이씨(羽溪李氏)-14,615 256. 강화최씨(江華崔氏)-14,557 257. 김제조씨(金堤趙氏)-14,509 258 장수이씨(長水李氏)-14,324 259. 부여서씨(扶餘徐氏)-14,312 260. 낭주최씨(朗州崔氏)-14,264 261. 금산김씨(錦山金氏)-14,052 262. 창원구씨(昌原具氏)-14,035 263. 성산이씨(星山李氏)-13,758 264. 고령김씨(高靈金氏)-13,692 265. 청안이씨(淸安李氏)-13,549 266. 강화노씨(江華魯氏)-13,499 267. 충주최씨(忠州崔氏)-13,466 268. 무송윤씨(茂松尹氏)-13,384 269. 풍산류씨(豊山柳氏)-13,341 270. 함종어씨(咸從魚氏)-13,321 271. 평해구씨(平海丘氏)-13,176 272. 경주임씨(慶州林氏)-13,163 273. 평해손씨(平海孫氏)-12,831 274. 홍천용씨(洪川龍氏)-12,733 275. 무송유씨(茂松庾氏)-12,463 276. 행주은씨(幸州殷氏)-12,241 277. 청해이씨(靑海李氏)-12,002 278. 고성김씨(固城金氏)-11,888 279. 동주최씨(東州崔氏)-11,699 280. 신평송씨(新平宋氏)-11,185 281. 청주경씨(淸州慶氏)-11,128 282. 풍기진씨(豊基秦氏)-11,046 283. 탐진안씨(耽津安氏)-11,033 284. 절강편씨(浙江片氏)-10,678 285. 거제반씨(巨濟潘氏)-10,063 286. 제주부씨(濟州夫氏)-9,440 287. 의흥예씨(義興芮氏)-9,268 288. 소주가씨(蘇州賈氏)-9,025 289. 영천황보씨(永川皇甫氏)-8,877 290. 사천목씨(泗川睦氏)-8,187 291. 하음봉씨(河陰奉氏)-8,087 292. 경주석씨(慶州昔氏)-7,996 293. 하남정씨(河南程氏)-7,766 294. 청주사씨(淸州史氏)-7,486 295. 면천복씨(沔川卜氏)-7,471 296. 수안계씨(遂安桂氏)-6,242 297. 봉산지씨(鳳山智氏)-6,098 298. 진주형씨(晋州邢氏)-5,822 299. 두릉두씨(杜陵杜氏)-5,701 300. 거창장씨(居昌章氏)-5,554 301. 문경전씨(聞慶錢氏)-5,535 302. 남원진씨(南原晋氏)-5,084 303. 남양제갈씨(南陽諸葛氏)-4,374 304. 영순태씨(永順太氏)-4,142 305. 광천동씨(廣川董氏)-4,130 306. 달성하씨(達城夏氏)-4,028 307. 태원선우씨(太原鮮于氏)-3,547 308. 경주설씨(慶州& #20592;氏)-3,269 309. 금성범씨(錦城范氏)-2,991 310. 청주좌씨(淸州左氏)-2,691 311. 효령사공씨(孝令司空氏)-2,664 312. 목천상씨(木川尙氏)-2,293 313. 죽산음씨(竹山陰氏)-2,260 314. 괴산피씨(槐山皮氏)-2,204 315. 금구온씨(金溝溫氏)-2,148 316. 달성빈씨(達城賓氏)-2,115 317. 회산감씨(檜山甘氏)-2,113 318. 신평호씨(新平扈氏)-1,854 319. 안음서문씨(安陰西門氏)-1,852 320. 연일승씨(延日承氏)-1,828 321. 태인시씨(泰仁柴氏)-1,807 322. 강화위씨(江華韋氏)-1,805 323. 절강시씨(浙江施氏)-1,770 324. 김포공씨(金浦公氏)-1,715 325. 태인경씨(泰仁景氏)-1,617 326. 강음단씨(江陰段氏)-1,429 327. 전주견씨(全州甄氏)-1,141 328. 남양갈씨(南陽葛氏)-1,061 329. 홍산순씨(鴻山荀氏)-1,017 330. 밀양당씨(密陽唐氏)-1,013 331. 상곡마씨(上谷麻氏)-998 332. 남원독고씨(南原獨孤氏)-807 333. 옥천옹씨(玉川邕氏)-772 ..
프루미걸작성일
2006-07-20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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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펌]부산 지하철 실화
___|104:+::+::+::+::+::+::+::+::+::+::+:부산지하철에서의 실화 ^^:: 누구나 한번 쯤 타 보았을 것이다. 지하철.-_- 혹시 안 타본 사람 있으면, 지금 타보길 바란다,-_- 며칠 전 나는 학원에 가려고 지하철을 탔다. 자고로 나는 부산에 살며, 우리집은 2구간 구명에, 내가 다니는 학원은 1구간 신평이다.-_- 거기가 어딘지 모르시는 타 지역 분들은, 가까운 다이어리나 지하철 홈페이지에 접속하기 바란다. 그냥, 지하철 타고 1시간 10분쯤 가야, 학원이 나온단 말이다,-_- 하여튼, 어제는 지하철을 타고 학원에 가는데, 부산역에서, 고3쯤 되보이는 남정네+_+ 둘이가 탔다, 그 둘은 둘 다 손에, 두꺼운 책을 한 권씩 들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주먹이 불끈 쥐어지며, 이나라의 교육 현실이 바껴야 된다고 생각했다.-_-;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 둘은, 곧 나의 맞은 편 자리에 나란히 앉아, 조용히 책을 보며, 필기를 하며 앉아있었다. 정말 할 일 지지리도 없는 나는, 그들이 꺼내는 펜 색깔을 더하면 무슨 색이 될까,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_- 갑자기, 한 놈이 다른 한 놈에게 물었다. "준현이, 니 만두얘기 아나?" 한 놈 이름은 준현이었다+_+(준현이가 좀 생겼었다.ㅋ) 그러자, 그 준현이라는 네가지 없는 자식은, 말하는 사람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으면서 대답했다. "몰라-_-" 난 배웠다. 초등학교 다닐때 말하기 듣기 시간에는, 사람이 말을 할 때는 말하는 상대의 눈을 쳐다봐야 하는 거라고.-_- 그러자, 말을 꺼낸 그 자식이 말했다. "그럴 만두 하지.-_-;;"순간적으로 분위기가 싸해졌다. 그 라인에 앉은 모든 사람과 그리고 내가 앉은 라인의 모든 사람이 그들을 응시하기 시작했다-_- 그리고 나 역시 그 둘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뭔가 일이 터질것 같아서-_- 아니나 다를까, 준현이는 서서히 고개를 들더니, 그 놈을 씨익(^_^) 웃으면서 말했다. "지훈이, 니 수박 얘기 아나?" 그 놈 이름은 지훈이었다.-_- 못생긴 놈, 지훈이는 한참 생각했다.-_- 자기도 당할까봐. 그러자 준현이가 말했다. "그럴 수 밖에.-_-;;"( 그럴 ★수박★에..-_-; 으하하하-_- 귀여운 놈들, 나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다시 바라보았다. 지훈이는, 한참 동안이나 준현이를 죽일 듯 바라보았다.-_-; 그러다가, 지훈이가 다시 입을 열었닷111+_+ "준현이, 니 참외 이야기 아나?" 난 그 답을 알았다.-_- "이 참외 알아둬라" 이거라고 생각했다.-_-맞았다, 준현이는, 피식,-_- 가소로운 웃음을 흘리면 말했다. "이 참외 알아둬라 아니가?" 지훈이는 +_+ 허걱.-_- 이런 표정으로, 준현이를 바라보았다. 준현이는, 이제 자신의 승리를 확정지으며, 다시 공부에 몰입하려고 하는 그 순간 지훈이가 결정타를 날렸다. "니 설탕 얘기 아나?" 설탕얘기라.-_- 내 머릿속에는 순간적으로 많은 생각들이 지나갔다. 설탕, 그럴 설탕? 아니야, 이럴 설탕? 비록, 나 뿐만이 아니라, 그들을 보고있던, 모든 사람들이 설탕얘기를 취향대로 생각하는 듯 했다.-_-; 준현이가 서서히 입을 뗐다. "모...모..모르겠어.-_-" 그러자, 지훈이가 말했다. "이럴 슈가.+_+" 한 동안, 지하철에 조용한 침묵이 흘렀다.-_-; 그리고, 여기저기서 하나씩 웃음이 터지더니, 나중에는 데굴데굴 구르는 여대생이 하나 있었다.-_- 그러나, 그들은 점잖게 공부를 하다가, 괴정역에서, 차분히 내렸다.-_-ㅋ 출처 : 매니안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