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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왜인지 꾸준히 나오는 귀얇은 사람들
특정신화나 전설이 실제 역사가 틀림없다고 철썩같이 믿는 사람들. 가장 대표적인 부류가 트로이의 예시를 들면서, “봐라 전설이나 신화도 다 뭔가가 있어서 나오는거다. 아틀란티스 같은거도 분명히 실존했다.” 라는 사람들이다. 일단 역사학에선 제대로된 기록이 남은 것도 다른 독립적인 기록들과 여러번 교차검증을 거쳐야 되고, 기록이 있다하더라도 고고학적 발굴로 반박당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보편적으로 과장이 심한 전투규모와 전과에 대한 기록이 대표적. https://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143/read/67194139 사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뻔한게, 신화와 전설은 그 목적부터가 역사적인 사실을 전달하기 위한 매체가 아니다. 구전역사는 따지고보면 제대로된 역사책이 아니라 사극에 가깝다는 뜻. 그리고 소리지만 모든 전설과 신화는 100명의 화자가 1000개의 다른 버전을 내놓는 일이 흔하고, 우리가 듣는 버전은 그저 가장 인기가 많거나 그냥 유일하게 기록된 버전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거기다 애초에 인간의 무의식이 매력적으로 생각하는 이야기와 소재라는게 거기서 거기라서, 선녀와 나무꾼 같이 서로 교류가 없음에도 유사한 구조의 이야기가 전세계에 광범위하게 퍼지는 경우도 생긴다. 즉, 전설과 신화 및 기타 구전문학은 그 자체로는 역사로 인정받지 못하는 원시고대 판춘문예라는 뜻. 역사적 사실을 가려내려면 다른 역사기록이나 고고학적 발견이 뒷받침되야 된다. 애초에 트로이만 해도 그냥 전설 하나만으로 입증된게 아니다. 일단 트로이는 고대세계에서 완전히 잊혀지지 않아 거의 1000년 뒤에 알렉산더 대왕이 위치를 알고 마을의 신전에 공물을 바치고 참배하기도 했고, 19세기에 발굴지역이 선정된 것도 그 지역에 도시가 있었다는 언덕에 대한 독립된 전승이 있었기 때문이다. 19세기 발굴후에 히타이트에 의해 남겨진 기록들이 해독되어 더 확실하게 입증 되기도 하였다. 즉, 전설 하나 만으로 입증된게 아니라 발굴을 포함한 다른 여러가지 방법이 동원되어 교차검증을 거쳤다는 말. 반면에 아틀란티스를 위시한 초고대문명론이나 유사역사학은 교차검증을 교묘하게 피하거나, 아예 날조된 주장으로 교차검증이 되는척만 한다. 아틀란티스가 2000년이 훌쩍 넘게 플라톤이 유일한 사료(구전까지 포함해서)라는 사실을 무시하고, 최근 10여년간 일명 “사하라의 눈”이 아직 발굴도 못된 것처럼 주장하는 유튜버 역사렉카들이 대표적. (실제론 1950년대부터 프랑스 학자들이 씹뜯맛 다해봤다. 렉카들이 프랑스어가 딸려서 모르는 것일 뿐이다.) 상식적으로 인터넷에만 봐도 날조와 헛소문이 일주일이면 수백수천개씩 나왔다가 사라지는데, 입에서 입으로 수백수천년간 이어진 고요속의 외침은 무조건 믿어도 괜찮을리가 있겠는가. 구전된 이야기들은 그 자체적으로는 증명할수 있는게 없다. 마치 발자국 딱 한짝만 보고 그 사람의 보폭을 알수 없듯이, 구전은 너무나도 단편적인 단서이기 때문. 구전이 무언가 의미가 있으려면 더 많은 발자국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랩터날개작성일
2024-11-23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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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스압) 스와와 스와신앙
마츠모토에서 새벽전철을 타고 넘어와 카미스와上諏訪에 도착. 카미스와역에서 동네버스를 타고 스와대사 카미샤 혼미야諏訪大社上社本宮로 가는 길. 좌우 산지에 둘러쌓인 고지대이면서도 호수와 강을 끼고 토착신앙이 자라날 면적은 갖춘 스와의 지리적 조건과 그 편린이 엿보인다. 가는 길에 있었던 스와고료닌諏訪御寮人의 모에화 캐릭터. 스와고료닌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은데 후술. 스와대사 카미샤 혼미야. 그 유명한 온바시라御柱. 신사 대각선 방향으로 4개가 서있다. 첫번째 온바시라一之御柱 뒤편 금줄 너머에 있는 아마노사카호코天逆鉾. 타카치호高千穂에 있었던 창이라는 전승으로, 이자나기와 이자나미가 이 창으로 대지를 뒤집었다고 전한다. 창세의 병장기라는 의미에서 수메르 신화의 창세검 (혹은 그 의인화된 신) 과 유사성이 엿보인다. 인류문명이 시작되기 전의 병장기이기 때문에 우리가 아는 병장기와는 그 형태가 사뭇 다른 것도 재미있다. 물론 실제로 이 아마노사카호코가 이곳에 안치된 건 에도 시대라고 하니 믿거나 말거나지만, 신화라는 것이 다 그렇듯 사실여부보다는 후대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느냐가 중요하다. 신사 경내는 시치고산七五三을 맞이하여 가을향기를 물씬 풍기고 있다. 당연한 듯이 걸려있는 이타에마. 니게와카가 새로 참전한 것도 재미있다. 스와대사는 호조 토키유키北条時行의 사실상 후견인이었던 스와 요리시게諏訪頼重로 인해 니게와카의 주요 배경이기도 하다. 가마쿠마 시대의 스와 요리시게는 전국시대의 다이묘이자 스와고료닌의 친부인 그 스와 요리시게와 한자까지 동명이인이다. 頼는 스와 가문의 통자通字로, 다케다 신겐의 후계자 다케다 카츠요리武田勝頼의 이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즉 다케다 카츠요리는 다케다 가문의 통자가 아닌 스와 가문의 통자를 이었으며, 따라서 스와 카츠요리諏訪勝頼로 불리기도 했던 것. 상세 후술. 혼미야에서 내려다본 스와의 모습이 퍽 넉넉하다. 과거엔 현인신現人神만이 드나들 수 있었다 전하는 회랑. 회랑 끝에 위치한 두번째 온바시라二之御柱. 당대의 마구 및 병마 형상도 구경할 수 있었다. 과연 현대 사극의 서러브레드와는 달리 중세의 말답게 체간이 낮고 단단하다. 스와묘진諏訪明神은 군신軍神으로 추앙받기도 하여 전란의 시대에 스와신사가 곳곳에 퍼지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매년 정초에 행하는 와수의식蛙狩神事의 장소. 고대로부터 이어진 것으로 전하는 이 의식의 의미에는 여러 설이 있으나 하나 재미있는 점은 미샤구지ミシャグジ가 개구리에 빙의한다는 인식으로, 정초에 개구리에 빙의한 미샤구지를 포획하여 바침으로서 모리야신 (토착신) 이 타케미나카타 (외래신) 에게 충성함을 보인다는 의미라고 한다. 토착신과 외래신에 대해서는 후술. 근처 스와시 박물관에는 스와시에서 출토된 죠몬, 고훈, 야요이 시대의 유물을 비롯하여 근세에 이르기까지의 고문서 및 일기들이 망라되어 있어 알찬 시간이었다. 위 사진과 같이 당대에 쓰던 가재도구도 볼 수 있고, 역사를 넓은 시각으로 통사적으로 머릿속으로 정리하기에는 박물관만한 곳이 없다. 근처의 현인신 가문 오오호리大祝의 옛 저택 터. 상당히 최근인 헤이세이 시대에 대가 끊겨 30여년째 폐가가 되어있다. 시 차원에서 관리는 한다고 하지만 간신히 폐가 신세를 면할 정도의 관리상황이다. 토리이가 서있어 이곳이 신역임을 알리고 있지만 그뿐이다. 스와대전 신화를 기반으로 거슬러 올라가보자면, 스와에는 원래 토착신 모리야와 그 추종세력이 존재했지만 (야마토 정권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외래신 타케미나카타와 그 추종세력과의 전쟁에서 패배한다. 그러나 완전히 절멸되지 않고 습합, 융화되어, 이후 타케미나카타의 자손은 세습하여 스와諏訪씨가 되어 스와 지역의 현인신 및 통치자가 되고, 모리야의 자손은 세습하여 스와신앙의 신장관 역할을 한 것이다. 그와 별도로 신앙의 대상인 스와묘진諏訪明神은 때때로 구분되지 않고 광범위한 양태를 보이는데 타케미나카타, 모리야는 물론이고 그 이전 신앙의 대상이자 나가노에서 광범위하게 발견되는 미샤구지ミシャグジ, 혹은 산악신, 수목신, 수렵신 등 애니미즘적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여 다양하게 해석된다. 오오호리大祝 가문의 위 저택 자체는 에도 시대에 형성된 것인데, 오오호리 가문은 고대로부터 스와묘진의 요리시로依代, 즉 신령이 깃든 대상으로서 현인신의 자리에 있었다. 즉 계통을 따지자면 타케미나카타 계통인 것. 동방프로젝트적으로 비유하자면, 외래신 타케미나카타가 야사카 카나코의 모티브, 토착신 모리야가 모리야 스와코의 모티브, 현인신 오오호리 가문의 세습자가 코치야 사나에의 모티브인 셈이다. 현재 일본에서 오오호리 가문은 단절되었지만, 동방프로젝트에서의 코치야 사나에는 문명개화와 신앙 사이의 중간자적 위치에 있다가 현인신으로서 환상들이한 셈이 된다. 오오호리 가문의 대는 왜 끊겼을까. 용도폐기된 것인가? 외국인으로서는 자세히 알 길은 없다. 그리고 안다고 해서 피부로 실감되는 사건일 수 없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에 의해 신앙의 대상, 즉 토착신, 외래신, 스와묘진 등의 역학관계가 어떻게 바뀌어갔는지에 대해 생각해보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대목들은 있다. 이하 후술. 근처에 있는 모리야守矢 사료관. 크진 않지만 상당히 특징적인 건물양식이다. 앞에 꽂힌 나무가 왠지 온바시라 같기도 하다. 들어서자마자 왠 박제된 토끼가 전시되어 있다. 이어서 박제된 사냥감들. 전시의 원인은 이렇듯 신장관 모리야 가문이 주관하는 어두제御頭祭에 쓰이기 때문. 스와묘진은 군신으로도 해석되기 때문에, 수렵신에게 바치는 신앙이라 생각하면 아귀가 맞다. 에도 시대 카미샤 혼미야, 마에미야 및 오오호리, 모리야 가문의 저택 위치를 그려놓은 약도. 상세히 보면 이들의 당시 역학관계가 엿보여서 재미있다. 다케다 하루노부武田晴信 (신겐信玄) 이 당시 모리야 가문의 신장관에게 통자 노부信를 내린 사료. 텐몬天文 14년 (1545년) 의 사료다. 생각해볼 부분은, 다케다 신겐은 1542년 스와를 침공하여 당시 스와의 현인신이자 통치자였던 스와 요리시게를 자결시켰다는 것. 그리고 3년 뒤 다케다 신겐이 스와의 신장관 가문 모리야에게 통자를 내린 것이다. 통자는 가문 중신일지라도 함부로 수여하지 않는다. 이는 스와 지방의 특수한 사정, 즉 스와 = 타케미나카타 (외래세력) 을 제거한 뒤 모리야 (토착세력) 에게 힘을 실어주어 Divide and rule을 하려는 목적이 아니었을까. 스와고료닌이 다케다 신겐의 첩이 된 것도 1542년~1545년 사이의 일이다. 당시 다케다 가문 중신 (= 시나노 지방의 소영주들) 들은 대체로 반대하였으나, 야마모토 간스케山本勘助의 중재로 혼인하였다 전한다. 스와고료닌은 1530년생이므로 당시 스와고료닌은 불과 10대 초반의 나이다. 이윽고 스와고료닌은 아들 카츠요리를 낳고 1555년에 사망하며, 다케다 신겐은 상락 도중 1573년 급사하고, 그로부터 10여년 후, 1582년 다케다 카츠요리는 오다 및 도쿠가와 연합군의 공세에 텐모쿠잔天目山에서 자결한다. 결과적으로 다케다 신겐은 스와의 현인신의 후계자와 혼인하여 자신이 스와의 새로운 통치자, 현인신의 피를 이었음을 스와의 주민들에게 보이려 했고, 더불어 스와의 신장관 가문 모리야에 통자를 내림으로써 자신이 스와의 신장관 가문을 통제하에 두고 있음을 명확히 하려 했다 보아도 무리한 해석은 아닐 것이다. 특히 스와의 여식과 혼인한 것은 로마노프 왕조가 비잔틴 가문의 여식과 혼인한 것과 그 수법에 유사성이 엿보인다. 그러나 다케다 신겐의 지배는 30년을 채 가지 못했고, 다케다 카츠요리는 스와의 통자인 요리頼를 이었기 때문인지 시나노 지방 영주들의 연이은 배신 속에서도 스와의 협력 속에 마지막까지 버티다가 자결했으며, 스와는 또다시 스와씨의 살아남은 후계자가 대를 이어 에도 막부로 향하게 된다. 스와 주민들에게 이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스와대전 역시 외래세력과 토착세력의 충돌이었고, 이번 역시 예전부터 있어왔던 외래세력과 토착세력의 충돌일 따름이다. 그 이전 가마쿠라의 끝자락에 호조 토키유키가 찾아왔을때 역시 스와 주민들은 비슷한 느낌으로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 이전, 과연 모리야는 태고적부터의 토착신이었을지. 이하 후술. 모리야 사료관 뒤편에는 어두 미샤구지 총사御頭御社宮司総社가 자리하고 있다. 허름해보이지만, 일본 전국의 미샤구지 신앙의 총본산격에 해당하는 곳이다. 생각해보면 모리야는 토착신이며, 미샤구지 역시 신앙의 대상으로서 사마様를 붙이는 대상이다. 신이 신을 섬긴다는게 무언가 이상하지 않나. 신토적으로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현상이지만 때때로 모리야는 미샤구지를 강림시킴으로 인해 자신들의 권위를 강화하기도 하고, 자연에 깃든 신령을 미샤구지에게 보임으로써 토지신, 스와묘진의 은총을 바라기도 하며 (와수의식의 해석 1) 자연에 깃든 미샤구지를 사로잡아 바침으로써 외래신 타케미나카타에게 충성을 맹세하기도 한다. (와수의식의 해석 2) 즉 모리야는 태고적으로부터 내려온 토착신이라기보다는 그 또한 스와에 찾아온 외래신 - 시기적으로 보자면 빠르면 야요이 시대, 외래유입된 농경세력은 아닐까. 시기적으로 보자면 미샤구지 신앙을 따르는 무리는 그 이전부터 스와에서 살았던 거주민들, 즉 야요이 시대 이전, 수렵채집의 죠몬인들은 아닐까. 다케다가 스와를 침공하여 현인신의 후계와 혼인하고 신장관 가문을 자신의 권위 아래에 두었듯이, 이전에는 막부의 마지막 후계자가 찾아오기도 하였으며, 그 이전에는 야마토 정권의 무리들이 스와를 침공하여 스와대전 신화를 쓰기도 하였으며, 그 이전에는 어쩌면 모리야를 따르는 무리와 미샤구지를 따르는 무리의 충돌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모든 신앙이 습합, 융화되어 현재의 스와를 이루고 있고, 우리는 그 흔적을 미샤구지 총사와 같은 곳에서 엿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미샤구지 총사 옆에 마련되어 있는 역대 오오호리 가문의 비석. 모두 통자 頼를 쓰고 있다. 3,000년의 광명 있으라 스와 일족. 이곳에서 편히 잠드시길. 3,000년은 그저 미사여구일수도 있겠지만, 죠몬 시대의 시작이 기원전 10세기로 비정되기도 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의미심장한 숫자다. 그러나 아직 잠들기에는 이를지도 모른다. 여전히 스와대사에는 참배객이 많았다. 오는 사람마다 박수를 두번 치며 신앙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랜 세월에 거쳐 수많은 융화를 거치며 모습과 형태는 바뀌더라도 이 땅에서 신앙은 여전히 소용되고 있다. 모리야 사료관을 나서서 마에미야로 향하는 길. 가마쿠라 시대가 전승인 듯한 길 안내도가 있다. 이 길을 따라가면 마에미야가 나온다. 적당히 걷기 좋은 산책길이다. 가을이 무르익었다. 고대로부터 신앙의 대상이었던 칠목칠석 중 하나가 아직 남아있다. 이는 모리야일까 미샤구지일까. 추측건대 아마도 미샤구지가 아닐까. 애니미즘 및 산악신앙은 농경 이전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조금 더 자연스럽다. 물론 산악신앙은 5세기 이전 일본 전역에서 발견되는 보편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그 영향을 받아 탄생한 슈겐도修験道 등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이걸 나누어 생각하는 것도 크게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습합, 융화가 이 토지의 로마법이다. 수풀이 울창하다. 마에미야 본전 옆 상류로부터 흘러내려오는 스이가水眼. 예로부터 신성한 물로 여겨졌다 하는데, 과연 산에서 내려오는 물이라 맑고 청명하다. 산악신앙이 그 본류일거라 미루어 짐작해도 크게 빗나가지는 않을 것이다. 마에미야 근처에도 어김없이 서있는 온바시라. 스와대사 카미샤 마에미야諏訪大社上社前宮는 지금은 혼미야보다 그 규모가 작지만, 연원을 따져보면 이쪽이 더 오래되었다고도 전한다. 타케미나카타를 모시는 첫 신사가 이곳이었다 하며, 무로마치 막부 때 혼미야 쪽이 본전이 되면서 말사가 되었다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무언가의 역학관계 변화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시기적으로 호조 토키유키北条時行와 어느정도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상상해보면 재미있지 않을까. 마에미야의 첫번째 온바시라一之御柱가 동방풍신록 자켓의 모토네타라고 한다. 타케미나카타 (= 야사카 카나코) 를 모신 첫번째 신사가 바로 이곳이니 실로 적절한 안배다. 잠시 머릿속을 정리하며 근처 킷사텐에서 한잔. 스와 초고수 동행분의 더할나위없이 친절한 가이드 덕분에 알찬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킷사텐 방문객들의 조공품들. 마에미야에 인사를 드리고 길을 나선다. 동네는 세월 속에 서서히 흐르고 있었다. 키오토시木落し의 현장. 여태 오면서 보았던 온바시라들은 6년마다 교체된다. 스와의 풍부한 삼림에서 거대한 나무를 벌채하여 직접 스와대사까지 옮기며 신역임을 표시하고 스와묘진에게 그 뜻을 알리는 것. 군신, 수렵신, 산악신앙의 성격을 두루 띠고 있는 스와 신앙에 걸맞는 행사다. 스와의 4개 대사뿐만 아니라 곳곳의 말사 역시 모조리 교체한다 한다. 이때 과거 전례에 맞춰 거대한 나무를 언덕에서 떨어뜨리거나木落し 강을 건너거나川越し 하는데, 이곳은 온바시라를 떨어뜨려 옮기는 장소인 셈. 온바시라 축제는 아직도 성황리에 진행되고 있다. 아직 잠들기에는 이를지도 모른다. 이렇게 보니 새삼 그 규모가 장대하다. 온바시라 축제때마다 매번 사상자가 나온다기에 거 좀 조심해서 하지 싶었는데 직접 와보니 사상자가 안 나오는게 이상한 급경사다. 근처 치노역에 잠시 들러 사슴고기라멘을 먹었다. 방금전에 본 사슴박제를 생각하며 먹으니 각별했다. 후편에서 계속. -스와와 스와신앙 (후편) 스와와 스와신앙 (후편) 아침 일찍 스와대사 시모샤 아키미야諏訪大社下社秋宮로 향한다. 시모스와의 한 노부부 집에서 따스한 환대를 받아 보무도 가볍게 발걸음이 새롭다. 바다 건너 풍문으로만 전해듣던 무지막지한 금줄. 1톤에 달하는 무게라 한다. 경내는 고즈넉하다. 시모샤下社는 춘분, 추분에 맞춰 하루미야春宮, 아키미야秋宮를 각각 활용한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기간에 하루미야가 폐쇄되어있는 것은 아니고 참배는 가능하다. 야사카 카나코의 팬들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장소인 야사카 신사도 있다. 야사카 신사八坂神社는 교토에 총본산이 있고, 그곳의 제신은 스사노오노미코토素戔嗚尊라고 하는데, 스사노오가 일본신화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생각해보면 재미있다. 이젠 없으면 이상한 이타에마들. 초고수 동행분덕분에 자세히 살펴본 이 조약돌さざれ石이 다름아닌 기미가요에 나오는 바로 그 조약돌이라고 한다. 출처: 상하이앨리스환악단 갤러리 [원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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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감옥살이에 전체 1순위 지명 12년 만에 MLB 데뷔했던 악마의 재능, 불혹 앞두고 다시 감옥행
메이저리그(MLB) 드래프트 전체 1순위, 촉망받던 유격수였지만 그라운드 위보다 감옥 안에서 보낸 시간이 더 길었던 맷 부시(38). 그가 다시 교도소로 갔다.디어슬레틱 등 은 부시가 8일(한국시간) 텍사스주 알링턴 교도소에서 포트워스 교도소로 이송됐다고 전했다.부시는 지난 6일 알링턴에서 음주운전과 상해, 도주 등 혐의로 체포됐다. 그는 음주가 의심되는 운전으로 경찰의 눈에 띄었고, 멈추라는 경고를 듣지 않고, 교차로에서 신호도 무시한채 차를 몰다 트럭 1대와 부딪쳤다. 충돌 여파로 정차 중이던 다른 차량 2대도 들이받았다. 이 사고로 1명이 다쳤다. 부시는 사고 후 차에서 나와 걸어서 도망치다 행인들에게 쫓겼고, 결국 체포됐다.부시의 감옥행은 처음이 아니다. 2004년 전미 고교 최고 유격수로 각광 받으며 샌디에이고에 1라운드 전체 1순위로 지명받았지만, 지명 몇 주 만에 술집에서 소란을 부리다 경비원과 싸운 뒤 미성년 음주와 폭행 등 혐의로 체포됐다. 마이너리그에서 투수로 전향한 그는 2009년 샌디에이고 한 고등학교에서 술에 취한채 고교생 라크로스 선수를 골프채로 두들겨 팼다. 샌디에이고에서 방출 후 토론토에 입단했지만, 불과 한 달만에 플로리다 한 파티에서 여성을 폭행해 다시 방출당했다.2012년 부시는 대형 사고를 쳤다. 탬파베이 마이너 팀 동료의 차를 다시 술 취해 운전하다 72세 오토바이 운전자를 들이 받았다. 오토바이 운전자는 크게 다쳤지만, 헬멧을 쓰고 있었던 덕분에 목숨을 잃지는 않았다.부시는 사고 직후 인근 스트립 클럽에서 난동을 부리다 쫓겨나 집으로 돌아가던 중 체포됐다. 당시 그의 혈중 알코올 농도는 0.18%로 플로리다주 법적 제한치 2배가 넘었다. 부시는 39개월을 감옥에서 보냈고, 2015년 2월에야 출소했다. 텍사스와 계약한 그는 1순위 지명 이후 장장 12년 만인 2016년 30세 나이로 MLB 데뷔했지만 별다른 활약은 하지 못했다. 지난시즌까지 텍사스와 밀워키에서 MLB 통산 6년 동안 주로 불펜 투수로 뛰며 217경기에서 12승 11패 평균자책점 3.75를 기록했다. ‘악마의 재능’이라 불렸지만, 비행과 범죄로 재능을 틔우지 못했다. 이제는 다시 감옥살이를 해야 할 처지다.
재서엉작성일
2024-10-08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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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1년에 단 하루, 기후현 히다 후루카와의 '산테라마이리' 방문기
2022년12월 홋카이도 여행에서 마주한 생경한 풍경은 남부지방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새로운 환상이었다.세상 모두에 켜켜이 쌓아 올려진 하얀 눈과 그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눈이란 겨울 중 찾아오는 질척하고 귀찮은 이벤트에 불과했던 나에게 일본의 설국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기에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그 후1년여가 지나 다시 일본을 여행하게 되었을 때,나는 당연하게도 또다시 눈으로 덮인 세상을 보고 싶었고9박10일간의 여행 동안 나고야에서 렌트카로 출발해 시라카와고-다카야마-스와-후지를 거쳐 도쿄로 향하는 일정을 계획했다.일정에 대한 여러 정보를 수집하던 중,다카야마에서 차로30분여가 걸리는 시골 마을 히다현 후루카와에서1년에 단 한번,매년1월15일 밤에 개최되는 산테라마이리라는 독특한 연래행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밤중 동행한 친구 넷과 히다 후루카와 역 주차장에 도착했다. 그런데 사람과 차가 쓰러지지 않을 정도로만 제설이 된 주차장에서 겨우 빠져나와 큰 거리로 향해보니,축제 분위기는커녕 오가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잘못된 정보를 보고 내 고집으로 친구들을 데려온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함이 엄습했고 각종 짜증과 비난이 시작되었다.그 와중 일본 촌 동네의 칼바람은 계속해서 패딩을 찢고 들어왔고,오전엔 시라카와고,오후엔 다카야마를 관광한 피로는 아스팔트 빙판길을 감당하지 못했다. 각종 비난이 인신공격으로 바뀌어 갈 때쯤 다행히 너의 이름은 성지순례로도 유명한 히다 후루카와 역의 모습이 보였고,역사 앞에 장식돼 있던 두 거대한 촛불의 모습은 그래도 뭔가가 이곳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어딘가로 향해 걸어가는 사람들의 모습도 점점 보이기 시작했고,사람들은 이내 인파로 변했으며 길 중간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불꽃을 태우는 거대한 눈 촛불의 모습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산테라마이리는2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후루카와의 연래 행사로,그 본질은 마을에 위치한3개의 영험한 절을 하룻밤 만에 모두 참배하는 것이다.역에서 가장 가까운 첫 번째 절 엔코우지부터 본격적으로 행사장이 조성되어 있었으며,우리 또한 엔코우지를 방문하는 것으로 행사를 본격적으로 즐기기 시작했다. 몹시 추운 날씨와 칼바람에도 불구하고 정말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자신의 기도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고,마을 전체의 뜨거운 축제 분위기는 어릴떄의 명절 분위기를 떠올리게 해주었다. 곳곳에서 나무로 불을 피우며 손을 녹일 수 있는 공간이 있었는데,그 옆에서 마을 사람들이 직접 만든 모주와 찹쌀떡을 매우 싼 가격에 판매하고 계셔 복을 나눠 받기 위해 얼릉 사먹었다.한잔에100엔 정도의 원가만 받는 가격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분명 마을 청년회 같은 곳에서 부스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모두가 하나같이 웃고 있는 모습이 참 정겨웠다. 따뜻한 모주는 마치 뜨거운 막걸리 찌꺼기와 술빵의 맛이 났는데,날씨가 너무 추워 따뜻한 게 목구멍으로 들어오니 그저 맛이 좋았다.찹쌀떡 또한 평범한 맛이었으나,나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장소에서 소망을 이어가고,나누기 위해 힘쓰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다는 기분이 정말 신비로웠다. 마을 중간을 가로지르는 개울에서는 산테라마이리의 상징이자 하이라이트라고 하는 풍경이 펼쳐졌다.수많은 사진사가모여 기모노를 입은 기도하는 여인 무리를 촬영하고 있었는데,원체유명한 광경이라 마을에서 고용한 일종의 모델들이라는 말을 들었다. 작은 개울을 따라 저마다의 소망을 담고 따뜻하게 눈을 비추고 있는 붉은 촛불들의 모습은 인간에게 바람과 믿음이 어떤 의미인지를 조금이나마 가늠케 해주었다. 촛불을 따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걸어가다 보니 다른 두절,혼코우지와 신슈우지에 자연스럽게 도착했고 막바지에 이른 행사의 열기가 서서히 사그라드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불앞에 모여 추운 날씨를 이겨내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의 모습은 왁자지껄 하기보단 마냥 따뜻했다. 어쨌든 우리는 행사를 그저 관광하러 온 이방인이었고,날씨도 너무 추웠기에 현지인들과 함께 줄을 서서 참배하지는 않았으나,남녀노소 모두가 이 추운 날 속에서 무언가를 기도하고,즐거움을 나누고 있는 모습은 이 전통이 오랜 시간 동안 마을에서 지켜져 온 이유를 가늠하게 해주었다. 그렇게 행사 구경을 모두 마치고 다시 추운 빙판길을 걸어 주차장으로 돌아오는 동안,아까 촛불을 발견하기 전까지 마냥 춥고 쓸쓸하게만 보였던 겨울밤 후루카와 마을의 풍경이 새롭게 보였다.이렇게 집과 상점의 불이 모두 꺼져있는 이유는 아마도 마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두 모이는 큰 행사가 열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고,그곳에서 사람들은 누구보다 즐겁게 새로운 한 해의 다짐과 소망을 쌓아 올리고 있을 것이다. 또 언제 이렇게 아름다운 눈보라 속의 일본 마을 풍경을 볼 수 있을까 싶어 가져간 오래된 필름 카메라로도 사진을 많이 찍었다. 여행 기간,일정 속 우연히 그 시간이 겹쳐 방문한 한 시골 마을의 아름다운 행사 덕분에 새로운 한해에 대한 다짐과 소망을 작게나마 마음속에 간직하고 한 해를 시작할 수 있었다. 벌써3개월밖에 남지 않은 올해를 되돌아보며, 지나간시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만약 내가 먼 훗날 후루카와의 산테라마이리에 또 방문한다면 그때는 어떤 소망을 비는 사람이 되어 있을까.그때의 나는 마을 사람들의 소망에 부끄럽지 않을 수 있을까. [원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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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글터] [5ch] 외할아버지의 장례식
외할아버지 장례식 때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대부분 어머니에게 들은 소문이라, 내가 직접 경험한 것은 아니지만.. 장례식은 차질 없이 진행되어 철야도 무사히 끝났고, 모였던 친척들도 다들 돌아갔다. 어머니와 두 삼촌은 술에 취한 채 조의금을 계산하고 있었다. 그런데 설거지를 하고 있던 숙모가 다가왔다. [여보, 참배를 하고 싶다는 분이 왔는데..] 상당히 취해있던 어머니와 삼촌들은 이상하다고 여겨, 혹시 참배를 하는 척 조의금을 훔치러 온 사람은 아닌가 의심했다고 한다. 하지만 다들 동요하고 있었으리라.. 모처럼 찾아와 준 사람인데, 실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있었을 테고.. 조의금도 다 꺼냈고, 유사시에는 삼촌들 둘이서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그 남자를 안으로 들이게 되었다. 어머니에게 물어봤지만, 남자의 모습은 확실히 기억나지 않는다고 한다. 남자인 것은 확실하지만, 중년인 것 같기도 하고, 노인인 것 같기도 했다고 한다. 옷차림도 올 때와 갈 때가 서로 다른 옷을 입고 있었던 것 같다고 한다. 인상 깊었던 것은, 남자의 몸에서 생선 비린내 같은 게 났던 점이었다. 남자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지만, 시종일관 웃고 있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웃고 있는데도 어쩐지 기분 나쁘고 섬뜩했어.]라고 말했다. 남자는 불단에 들어서자마자, [향을 끄면 안 되겠습니까?]라고 묘한 말을 꺼냈다. 무례한 놈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기껏 찾아온 참배객이니만큼 원하는 대로 하게 해주었다고 한다. 그러자 남자는 [저와 고인 둘만 있도록 해주세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것 또한 상주를 물리는 무례한 부탁이었지만, 향도 다 치웠고 조의금도 없는 데다 딱히 불심이 깊은 집안도 아니라, 남자가 원하는 대로 하게 해주었다고 한다. 장지문을 닫고 옆방에서 상황을 살피는데, 경을 읽는 기색도 없다. 아무래도 수상하다는 생각에, 유체에 해코지라도 하는 건 아닌가 싶어 슬쩍 들여다보았다고 한다. 그런데 기이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남자는 할아버지의 얼굴 코끝에 자기 얼굴을 가져다 대고, 빙그레 웃으며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 남자는 아무리 봐도 그 상태로 할아버지를 만지려는 것 같았어.] 어머니는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결코 유체를 만지려 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한동안 보고 있자니, 남자의 중얼거림이 점점 크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무념. 무념. 무념. 무념. 무념. 무념. 무념. 무념..] 남자는 그렇게 분명히 되뇌고 있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고 한다. 남자의 얼굴은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어쩐지 화를 내는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삼촌들은 갑자기 겁이 나, 장지문을 조심스레 닫고 옆방에서 한마음이 되어 경을 읊었다고 한다. 그러자 갑자기 [쾅!] 하고 장지문이 열렸다. 남자는 [감사했습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더니, 대답도 듣지 않고 서둘러 돌아갔다. 안도하는 것도 잠시, 혹시 할아버지에게 해코지라도 한 게 아닌가 싶어 관을 확인했다. 관 바깥쪽에는 무수한 발톱 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주변에는 엄청난 양의 짐승 털이 흩어져 있었다. 하지만 할아버지에게는 발톱 자국은커녕, 짐승의 털 한 올도 묻어있지 않았다고 한다. 안도감과 동시에 온몸에 소름이 돋아, 어머니와 삼촌들은 급히 청소를 했다고 한다. 다음날, 스님이 찾아왔다. 스님은 집에 들어서자마자, [짐승 냄새가 나는구려. 돌아가신 분 방에 향을 피워두길 잘했소.]라고 말했다. 어제 일이 현실이었구나 싶어, 다시금 소름이 돋았다고 한다. 나는 그런 짓을 하는 건 필시 여우일 거라 여겨, 어머니에게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바보야, 괜찮아. 여우님은 그런 나쁜 짓은 하지 않아. 우리 집에서는 모시지 않지만, 여우님을 나쁘게 말해서는 안 된단다.]라며 나를 꾸짖었다. [그럼 뭔데?]라고 되묻자, 어머니는 갑자기 입을 다물어, 그날은 더 이상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다. 그 남자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아직도 알 수 없다. 출처 : VK's Epitaph
금산스님작성일
2024-09-30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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