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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엄청 길어요) 조선시대 왕들의 비하인드 스토리
< 태종 > 1. 직업정신 투철한 사관이 따라다니며 일거수일투족을 다 기록해서 태종이 걷다 헛발질한 것도 적었다태종이 그건 제발 지워달라, 창피하다 애원까지 했는데도 사관은 끝까지 "왕이 길을 걷다 헛발질하다, 헛발질한 것을 적지 말라고 말한것은 적지 말라 명하셨다"라고 적었다2. 하도 사관이 쫓아다녀서 못 쫓아오게 멀리까지 사냥을 나갔는데 사관이 거기까지 말 타고 쫓아와 사냥기록을 적었다고 한다3. 태종은 아들 양녕대군이 너무 사고를 치고 돌아다니자 속이 상해 밤새 울어 목이 쉰 적도 있다고 한다그런데 더 재미있는 점은 양녕대군의 아들인 이혜는 아버지인 양녕대군보다 더 많은 사고를 쳐 양녕대군의 속을 썩혔고, 결국 왕자의 아들의 직위인 '군'의 작위를 깎여 서산군에서 서산윤으로 강등당했다, 결국 이혜는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 자살시도를 하였고이틀 뒤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이혜는 사람을 때려 죽이라고 시키기도 하였고, 직접 사람을 죽이기도 하였으며 남의 첩을 빼앗기도 하고, 시전에서 종친들과 패싸움을 하였고 과격한 놀이판을 벌이다 놀이 중 사람이 죽어나가게 하기도 하였다실록에서는 이혜가 망가진 원인을 사랑했던 첩을 아버지에게 빼앗기고 난 후에 울화병이 생겨 이리 되었다고 한다) 4. 과거시험을 치루는데 채점관들이 보기에 두명이 너무 훌륭해서 누구를 장원급제로 찍어야 하나 고민고민하다가 태종한테 가서 전하께서 가려주시옵소서 했는데 태종이 껄껄껄 웃더니 답지 펴보지도 않고 내가 집은놈이 장원이야 하면서 생각도 않고 그냥 둘 중에 한장 집어들었다 한다< 세종 > 1. 세종대왕은 좋아하던 후궁에게 신하들 몰래 따로 불러서 말없이 귤 하나를 쑥~ 내밀어준 얘기도 있다(그 당시 귤이 귀한 것이었다)2. 친경한다고, 소 끌고 밭 갈다가 갑자기 비가 내리자 배고픔을 못 견뎌, 밭 갈던 소를 때려잡아서 국 끓여 먹은 적도...3. 명재상 황희는 청백리가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니었다, 임금이 사람을 붙여 철저하게 감시하고 너무도 기분 나쁘게 점검하는 바람에 "내참 더러워서 뇌물 먹지 않으리라" 결심한 케이스다4. 훈민정음 반포식을 축하하는 잔치 행사에는 집현전 학사 절반이 참석하지 못했다,대부분이 살인적인 과중한 업무와 임금의 요구사항에 시달리다 못 견뎌 병석에 누운 탓이었다, 성군의 캐치프레이즈는 '신하가 고달파야 백성이 편안하다'였다5. 세종은 부하들을 휘몰아치는데 도가 튼 인물이었다, 아침 조회격인 새벽 4시 상참에서부터 과업 달성이 부진한 부하들을 닦달하였다밤낮으로 시달리다 못한 김종서의 경우 임금 곁에 있다가는 제명에 못살 것 같아, 스스로 궁궐을 떠나 삭풍이 몰아치는 북방을 개척하겠다고 손을 들고 나섰다정인지는 임금이 너무 독촉하고 소위 '갈궈대는' 바람에 모친 3년상을 핑계로 상소를 올리고 낙향하려 했으나, 임금은 법령까지 바꿔서 그를 다시 붙잡아다 오히려 일을 더 시켰다6. 양녕대군이 평안도를 유람하게 되어 세종은 형인 양녕대군에게 "제발 여색을 조심하라"고 당부한다몰래 평안도 관찰사에게 명하기를, "만일 양녕대군이 기생을 가까이하거든 즉시 그 기생을 역마에 태워 서울로 올려 보내라"라고 하였다양녕은 세종과의 약속도 있고 하여 가는곳 마다 기생의 수청을 물리치고 근신하였으나, 그가 평안북도 정주에 이르렀을 때, 그만 양녕의 마음을 사로잡는 절세의 미인이 나타났다,양녕은 그날로 동침하고 귀신도 모르리라 자신했다그래서 시를 지어 하룻밤 풋사랑을 읊기를, "아무리 달이 밝다하나 우리 두사람의 베게를 들여다 보진 못할것이다, 그런데 바람은 어이해서 신방을 가린 엷은 휘장을 걷어 올리는가"라 하였다, 그러나 이튿날 정주수령은 이 기생을 역마에 태워서 서울로 보냈다세종이 기생에게 명하기를, "너는 양녕대군이 읊은 시를 노래로 불러 익혀두라" 하였다,양녕은 이런 사실도 모르고 유유히 서울로 돌아와 세종을 알현하였다세종 : 잘 다녀오셨습니까. 제가 신신당부한 말씀을 잘 지켜주셨는지요?양녕 : 물론입니다, 어찌 어명을 어기겠습니까? 한 번도 여색을 가까이 한 일 없습니다세종 : 얼마나 수고가 많으셨습니까, 제가 형님의 노고를 덜어 드리고자 가무를 준비하였습니다 양녕은 기생이 나와 노래하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누군지 몰랐다, 그런데 가사를 들어보니 자신이 지은 시구가 아닌가, 깜짝 놀란 양녕은 그 자리에서 땅에 엎드려 용서를 빌었다세종은 웃으며 형님의 손을 잡고 위로하면서, 그날 밤 그 기생을 양녕댁에 보냈다7. 나라에 큰 일이 있어, 모두 고기를 먹지 않는 기간이었다, 태종은 특별히 세종에게는 삼시 세끼 고기를 챙겨먹도록 하였는데..., 그것은 충녕(세종)이 고기가 없으면 밥을 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종 > 1. 수염이 매우 풍성하여 관운장과 같은 풍모를 냈었고, 얼굴 또한 매우 잘생겼다고 전해진다임진왜란 이후 폐허가 된 궁을 정리하는데 타다 남은 왕의 어진이 한 장 나왔다, 수염이 길고, 풍채도 당당하여 신하들은 인종의 어진이라고 생각했지만, 한 사람만은 수염이 길다는 말만 듣고 문종의 어진이라고 주장했다나중에 어진을 조사하다가 보니 어진 구석에 문종대왕의 어진이라는 기록이 나왔다고 한다2. 학식, 외모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에게 부족한 것은 단 하나... 건강 3. 조선왕조 역사상 최초로 정실부인 소생의 적장자 출신 임금이다< 세조 > 1. 술 먹고 신하 팔 꼬집고 신하한테 "너도 나 꼬집어라"라고 시키자, 신하는 세조를 꼬집었다그 뒤 자기 혼자 열 받아서 혼내주려다 그냥 넘어갔다, 세조의 팔을 꼬집은 것은 신숙주다정확히 말하면 꼬집은 게 아니라 팔씨름하다가 세조의 팔을 두 손으로 넘겼다, 그래서 세조가 신숙주 죽이려고 했다가, 술 취한 것을 감안하여 넘어갔다2. 세조는 후궁이 단 한 명뿐이고 평생 중전인 정희왕후와 금슬이 좋았는데, 국사를 논할때도, 국가의 모든 행사에도 꼭 정희왕후를 대동했으며, 사냥을 할 때도 둘이 나란히 말을 타고 사냥에 나갔다 3. 세조가 단종을 죽인 후 단종의 모후이자 문종의 비인 현덕왕후 권씨가 세조의 꿈에 나타나 "네가 내 아들을 죽였으니 나도 네 아들을 죽이겠다"고 하고 세조에게 침을 뱉자 현덕왕후의 무덤을 물가로 이장하기도 하고 온몸에 부스러기가 나자 치료를 위해 명산사찰을 찾아다니기도 하였고 세조비 정희왕후의 친정어머니와 맡아들 의경세자가 죽자 사람들은 현덕왕후의 저주때문이라고 했었다4. 현덕왕후의 저주를 받아 몸에 부스러기가 생긴 세조가 치료를 위해 명산사찰을 찾아다니다 상원사로 가게 되었는데 세조가 불공을 드리기 위해 법당안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어디서 고양이 한마리가 나타나서 세조의 곤룡포를 물고 늘어지는데세조가 쫒으려 해도 고양이가 계속 곤룡포를 잡아당기자 세조는 문득 불길한 생각이 들어 법당에 들어가지 않고 군사를 시켜 법당을 수색하게 하여 법당을 수색한 군사들은 불탑아래 숨어 있던 자객들을 잡고 보니 단종의 복위를 위하여 세조를 암살하려는 자객들이었고 화를 면한 세조는 고양이를 찾았으나 고양이는 이미 사라져 버렸으므로 세조는 강릉에서 기름진 땅으로 500석지기를 장만하게 하여 절에 헌납하면서 그 고양이를 위하여 제사를 지내 주도록 했다5. 무더운 여름에 상원사에 있는 중 홀로 계곡을 따라 들어가 보니 시냇물이 웅덩이져 흐르는 곳이 있어 그곳에서 목욕을 했는데 물은 참으로 맑고 시원했으나 주위에서 누가 볼까봐 조심하고 있는데 숲속에서 파란옷을 입은 동자가 옷을 벗고 물속으로 들어와 세조에게 목욕을 해 주겠다고 자청하며 세조의 등을 문지르기 시작하더니 세조의 온 몸에 난 종기가 벗겨져 내리는 것 같은 시원함을 느꼈는데 세조가 동자에게 다른 사람에게 자기 몸에 손 댔다고 얘기하지말라고 하자 동자는 약속을 지키겠다면서, 다른 사람에게 문수보살을 만났다는 얘기를 하지 말라고 하더니 사라졌는데 이후 세조의 몸에 난 종기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성종 >1. 성종은 후추 중개무역으로 돈을 벌기 위해 후추 씨앗을 구하려고 백방으로 알아보았지만 결국 후추는 구하지 못 하고 주변국에, 성종이 후추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나 계속해서 조공으로 후추가 들어오는 바람에 창고에 후추가 가득히 쌓여, 예쁜 비단 주머니에 담아 조정관리들에게 다 하사하였다2.성종은 보통 양반처럼 옷을 입고, 무관을 두엇 데리고, 백성들이 사는 것을 둘러 보기를 좋아하였다. 성종이 돌아다니며 생긴 이야기를 후에 사람들은 성종의 미행일화라 하였다. 3. 조선때 성종시절을 뛰어넘는 살기좋은 시절은 없었다. 성종의 정치적 능력과 행정능력은 가히 먼치킨에 가까웠다< 연산군 > 1. 성종과 연산군이 오랜만에 밖에 바람 쐬러 나와서 성종이, "융아, 좋지 않으냐?"하니 연산군이 소떼를 보며, "아바마마 저 송아지도 어미 소가 있는데 저는 왜 어미가 없습니까"라고 말했다2. 또 다른 야사에서는 연산이 동궁이었을 때 어느 날 성종에게 거리에서 나가 놀고 싶다고 하여 성종이 허락하였다저녁에 동궁이 궁궐로 돌아오자 성종이 "오늘은 밖에서 무엇을 보았느냐?"하고 묻자 연산은 "구경할만한 것은 없었습니다. 다만 송아지 한 마리가 어미 소를 따라가는데, 그 어미 소가 울면 송아지도 따라 우니 그것이 가장 부러운 일이었습니다"하여 성종이 가여워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가 전해짐3. 공부하는 걸 엄청 싫어하여, 왕자를 훈육하는 학자들이 엄청 고생을 했다고 한다, 매일 꾸중 듣고 야단맞아, 폐비 윤씨 사건이 일어났을 때 모두 죽여버렸다4. 춤을 잘 췄다고 한다5. 모후인 폐비 윤씨와 고려 공민왕의 비인 노국대장공주의 얼굴이 비슷하게 생겼다는 이유로 관공서에 노국대장공주의 초상화를 수집하게 한 일도 있었다6. 엄청난 꽃미남이었다고 한다< 중종 > 1. 자식 사랑이 남달라서 공주, 옹주랑 왕자들이 오랜만에 문안 오면 눈물을 흘렸다, 오면 버선발로 뛰어나갔다2. 또 중종은 동궁 전에서 불이 나자 맨발로 달려나와 훗날의 인종을 애타게 부르며 울었다 3. 또한 효정옹주의 남편(부마)이 바람을 피우고 다니자 철거지악이었던 질투를 하지 않는다고 딸 을 꾸짖은 적도 있었다, 결국 효정옹주가 남편의 구박을 견디지 못 하고 죽자 직접 부마를 잡아와 친국을 하기도 했다 < 인종 > 1. 인종은 모후인 장경왕후가 자신을 낳고 7일만에 죽자, 중종의 계비인 문정왕후의 손에 자란다, 하지만 문정왕후는 어린 인종을 끈임 없이 못살게 굴었다하루는 밤에 쥐의 꼬리에 불을 붙이고 인종이 잠을 자고 있는 궁 안에 들여 보냈다, 인종이 창문을 보니 문정왕후가 웃으며 빨리 불이 타오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빈궁만 내보내고 자신은 문정왕후에게 효를 행하기 위해 불 속에서 죽으려 했다빈궁과 인종이 어쩔 수 없이 불을 바라보며 울고 있는 그때, 밖에서 중종의 목소리가 들렸다,인종은 죽는 것이 문정왕후에게는 효가 되지만 중종에게는 불효가 되므로 곧바로 나왔다,그 후 인종은 불을 지른 장본인을 알고 있으면서도 중종에게 고하지 않았다 < 명종 >1. 다른 사람들은 다 물러가 있거라 하고 노래 잘 부르는 내관이랑 둘이서 내관은 노래 부르게 하고 명종은 그에 맞게 춤추며 2인조 가수 못지 않게 퍼포먼스를 선보였다2. 꾀병 부려서 총애하는 내관의 극진한 간호를 받았다, 3. 위의 내관은 동일인물로 남자이다 4. 내시와 있는 시간이 너무 좋았던 명종은 몸이 아프다고 꾀병을 부려 경연을 취소하고 내관들과 놀러 다니기 일쑤였다< 선조 >1. 임진왜란 이후 선조는 의주까지 도망을 하는데, 의주에서 어느 백성에게 생선이 올려진 상을 접대 받았다그 생선이 너무 맛있어서 인조가 생선의 이름을 묻자, 백성은 '묵'이라 대답하였다.선조는 생선의 이름이 그 맛에 비해 별볼일 없다 생각하여 '은어'라 명했다, 나중에 궁에 돌아와 그 생선을 먹었으나..., 맛이 전 같지 않아 '도로 묵'이라 하게 하였는데, 바로 여기서 '말짱 도루묵'이라는 말이 생겨났다2. 선조는 부인들 중 공빈 김씨를 가장 사랑하였다. 공빈은 아름답고 교양이 있었다고 한다.매일, 하루 종일 공빈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다른 후궁들은 만날 틈도 없었다고 한다.광해군은 공빈의 아들이며 공빈은 광해군을 낳고 2년 만에 죽는다.3. 선조는 임진왜란이 나자 가장 먼저 짐을 싸들고 도망쳤다.18살의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조선을 떠맡겼다고 한다.< 광해군 >1. 선조가 세자를 가리기 위해 여러 왕자를 시험하였는데, "반찬을 만드는 것 중 무엇이 제일이냐?"라는 질문에 광해군이 "소금이옵니다"라고 대답하였다임금이 그 이유를 묻자"여러 가지 맛을 조화시키려면 소금이 아니면 안됩니다"라고 답하여 그 현명함을 인정받았다이에 선조가 "너희에게 부족한 것이 있느냐?"라고 묻자, 광해군은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것이 가장 애통하옵니다"라고 답하였다2. 광해군은 준수한 인상이었는데, 반듯하면서도 날카롭게 생겼다고 한다.3.광해군은 매사에 논리적이고 정확한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그러나 그런 성격과는 달리친족이나 주변인들에게 매우 약했다. 알려진 것과는 달리 광해군은 "형이 그럴 리가 없다"며 믿지 않았다.대신들이 임해군의 죄목을 속속 고하면서 재촉하자, "차마 법대로는 못 하겠으니 선처할 방안을 강구하라"고 명했다고한다.4.광해군은 큰 병은 앓지 않았으나 사소한 질병은 잦은 편이었다.감기로 인해 두통이 심할 때가 있었다.그때 대신들이 찾아와 마음에 안드는 애기를 하자 "귀찮게 하지 말라"며, "가서 책이나 읽으라"고 했다.5.광해군은 왕이 되고 얼마 동안은 주기적으로 눈병을 앓았다.그러면 눈동자가 빨개지곤 했다. 대신들 중 광해군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사람은광해군이 노려보는 것을 두려워 했다.6.광해군은 친국(왕이 직접 죄인을 대함)을 매우 자주 했다.밤을 새서 해가 뜰 때 까지 심문한 적도 많았다.정확한 것을 좋아하는 광해군의 성격 때문으로 죄인을 확실하게 가리기 위해서였다.7.광해군은 고문 받은 죄인들을 추국이 끝나는 즉시 바로 의원과 각종 약재, 탕약 등을 보내 치료하게 하였다.그 다음날 추국하고 또 치료하기를 반복하였다.이 역시 무고하게 죽는 사람이 없게 하기 위함이었다.< 효종 > 1.부왕인 인조를 닮아 용모가 수려했다고 한다. 스스로도 그 사실을 아는지, 스스로의 외모와 풍채에 매우 만족하여 항상 거울을 볼 땐 입가에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2.일부일처제를 지켰다고 한다 3.봉림대군 시절. 형 소현세자와 함께 청에 볼모로잡혀갔을 때, 심심했던 봉림대군은 하인을 시켜 사주를 보게 한다.시간이 지나 하인이 결과를 들고 왔는데, 읽어보니 왕이 될거라는 내용이었다.봉림대군은 놀라서 조각조각 찢어 버렸다고한다.< 숙종 > 1. 신하들이 따뜻한 온돌방에서 꾸벅꾸벅 졸자 온돌을 빼버리고, 얼음장에서 일하게 하였다2. 관우의 팬이었다 한다< 인조 > 1. 자신의 몸과 봉림대군의 몸이 아프자, 소현세자의 아내가 저주를 내려서 아프다고 하여 사약을 내리고 가족들을 모두 죽였다소현세자를 죽일 때 11살과 6살이던 아들들도 다 죽이고 임신했던 세자빈까지 죽였다2.인조는 홍시를 좋아했다. 소현세자도 홍시를 좋아했다. 봉림대군(효종)도 홍시를 좋아했다.세 부자는 모두 모여서홍시 먹기를 즐겼다.< 영조 > 1. 연애소설을 좋아하여 가끔 자신의 글에서도 소설을 인용하기도 하였다, 성품이 근검하여 백성들에게 사치를 금하라는 뜻으로 금주령을 내리기도 하였다2. 영조의 어진에 나와있는 쌍꺼풀지고 길쭉한 눈과 오뚝한 코에 조그마한 입술은 조선의 남성들이 추구하는 최고의 미인상이었다왕실에서는 이런 외모를 천하다 하여 기피하였으나,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가 양반 사대부가 출신이 아닌 무수리 출신에서 정1품 빈까지 신분상승 한 것을 감안할 때, 숙빈 최씨는 굉장한 미인이지 않았을까3. 영조가 왕위에 등극하기 전, 연잉군이었던 시절 달성 서씨 집안의 규수(정성왕후)를 아내로 맞이하여 첫날밤을 치를 때의 일이다영조가 아내의 손을 잡고 "손이 참으로 곱다."면서 칭찬을 하자, 연잉군 부인이 무심코 "궂은 일을 해본 적이 없어 그렇다"고 했더니영조가 그날로 부인을 소박하며 그 다음부터는 멀리하였다, 아마, 무수리로 고생했던 어머니의 거친 손과 발을 생각한 게 아닌가 싶다4.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가 간택에서 아버지의 이름이 쓰인 방석에 앉지 않자, 그 이유를 물으니 "자식이 어찌 아버지의 존함이 쓰인 방석을 깔고 앉겠습니까"라고 답하였다고 한다또 "고개 중에는 어떤 고개가 제일 넘기 힘드냐"고 묻자, 강원도에서 온 규수가 대관령고개라 답하고, 경상도에서 온 규수가 추풍령고개라 답하였다, 헌데 김규수는 보릿고개라 대답하였다보릿고개라! 겨울 양식이 봄이 되자 다 떨어지고, 그렇다고 햇보리는 아직 나오지 아니한 때세 끼, 아니 두 끼, 심지어 한 끼를 채우기가 그 얼마나 난감한가이것이 보릿고개인데 김규수가 넘기 힘든 고개가 바로 보릿고개라 하니 얼마나 명답인가!다음으로 꽃 중에 제일인 꽃을 묻자, 김규수는 목화 꽃이 제일이라 답하였다이유를 물으니, "목화 꽃이 다른 꽃들보다 화려하지도 예쁘지도 않지만, 핀 연후 사람에게 혜택을 주는 면에서는 다른 꽃이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유익한 꽃이니, 바로 목화가 백성의 옷감이 되어서 예절도 지키고 품격도 살리고 추울 때 보호하여 주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하였다< 정조 > 1. 정조가 말하길, "매양 취침하기 전에 두 발바닥의 가운데를 마주 문질러 비비면 기운이 절로 퍼진다, 내가 밤마다 시험해 보았는데, 처음에는 힘이 드는 듯 했으나 오래도록 계속 했더니 신통한 효험이 있다"2. 연애소설을 비롯한 소설을 무척 싫어하여 영조가 죽고 왕이 되자마자 서고에 있던 모든 소설을 불태웠다, 또한 숙직을 하던 집현전 학자들이 몰래 연애소설을 읽고 있다 들켜서 정조에게 혼이 났고 벼슬을 삭탈했다그들은 정조에게 다시는 소설을 안 보겠다는 반성문을 쓰고 나서야 벼슬길을 다시 열어주었다3. 영조는 근검하여 백성이 먹을 쌀이 없어진다는 이유로 금주령을 내렸지만, 정조는 개인적으로 술을 너무 좋아해서 영조가 죽고 왕이 되자마자 금주령을 없앴다4. 공부 못하는 신하한테 공부하라고 끈임없이 시키며, 숙제를 내고 제대로 하지 못하면 망신을 주고, 술을 마시지 못하는 신하에게 술을 강요하여 기절할 때까지 마시게 하고, 활을 못 쏘는 신하에게 끈임 없이 연습을 시켰다고 한다5. 술을 무진장 좋아하여, 정약용에게 필통에 술 한가득 부어 원샷! 하기를 강요하여 정약용은 술을 싫어했다고 한다, 그때 당시 필통에 술 붓기라면, 요즘 사발에 소주를 들이붓는 거와 맞먹는다고 한다6. 정조 임금이 정약용한테 높은 벼슬주려고 시험을 열었는데, 정약용이 1등을 못하고 맨날 3등만 해서 결국 화나서 "경은 그거밖에 못하오?"하면서 베개를 던졌다< 헌종 >1. 이 헌종이 그렇게 미남이었다고 한다, 기록을 보면 여색을 즐기는 왕 때문에 궁궐 내 용모가 예쁘다고 하는 궁녀들은 거의 승은을 입었다고 한다(덕분에 후궁첩지도 아무나 내리지 못했음, 딸을 낳은 궁인 김씨도 첩지를 받지 못했다)왕이 너무 미남이라 젊은 궁인들이 많이 유혹을 했다, 하지만 너무 어린 나이부터 가진 잦은 성관계 때문에 건강이 악화되어, 죽기 직전에는 피가래까지 토하며 고생하다가 23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요절한다, 궁녀들이 유혹을 할 정도였으니 엄청난 미남이 아니었나 한다2. 헌종은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었으므로 늘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에 마음 아프게 여겨 한 신하에게 늘 물었는데,"진전에 모신 수용이 오히려 매우 닮으신 전하의 용안에 미치지 못합니다." 하니 헌종이 거울을 보고 눈물을 줄줄 흘렸다고 한다< 고종 >1. 고종황제가 행차하다가 땀을 뻘뻘 흘리며 테니스 라켓을 휘두르는 미국인들의 모습을 보고,"어찌 저런 일을 하인들에게 시키지 않고 귀빈들이 하느냐"고 안타까워 했다2. 명성황후가 죽고 나서 끝까지 재혼을 하지 않았지만 아끼던 후궁이 있었는데 명성황후가 부리던 상궁이었다고 한다명성황후는 그녀를 곁에 둔 이유가 못생겨서 고종이 쳐다도 안 볼 것이라고 생각하고 곁에 두었는데 나중에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녀는 명성황후와 똑같이 생겼다고 말했다3. 당시 1887년대전신(전보총국)의 등장과 함께 최초 궁궐에 가설된 전화를경험한 고종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성음을 들을 수 있군"이 생각에 고종은 상당한 고액의 전화를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141-1번지 홍릉에 설치한다.그 곳은 고종의 부인 명성황후(민씨)의 무덤.전화의 설치가 끝난 직후고종은 아침마다 그 곳으로 통화를 걸어 말을했다."여보, 어제는 춥지 않았소?"고종은 매일아침 홍릉으로 전화를 걸어죽은 민씨에게 안부를 전했고매일아침 울었다고 한다."아무리 멀리떨어진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순 있어도 저승까지는 못 하는구나."(고종의 말)그럼에도 고종은 매일아침 홍릉으로 전화하는 걸 잊지 않았고일제에 의해 강제퇴위를 당하는 그 날에도전화를 걸었다고 한다.4. 고종은 즉위하자마자 "궐문밖의 군밤장수 아무개를 죽여라, 그놈은 나에게 단 한번도 군밤을 공짜로 주지 않았느니라"라고 했다.그의나이 11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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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조선왕조 실톡
SNS 화제, '조선왕조 실톡' 10선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역사적 사실을 '모바일 메신저' 형태로 재밌게 구성한 '조선왕조실톡 Talk'(facebook.com/ChosuntTalk)이 SNS에서 화제입니다. 웹툰작가 '무적핑크'님의 작품입니다. 각 이미지의 설명은 조선왕조실톡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딸사랑이 지극했던 효종. 공주들의 새 집을 직접 설계할 정도였단다. 신하들에게 눈칫밥도 꽤 먹었다고."효종 11권, 4년(1653)8월 19일(신사) 1번째기사 - 헌부가 사치스러운 공주의 사제와 조복량·서원리의 일에 대해 의논하다"어느 왕이 낙마하고 쪽팔려서 "내가 떨어진걸 쓰지말라"고 명했더니, 사관이 실록에 "전하가 말에서 떨어진거 쓰지 말랬다."고 실록에 적어버렸다는 유명한 일화! 그 비운의 왕은 바로......!"태종 7권, 4년(1404)2월 8일(기묘) 4번째기사 임금이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졌으나 사관에게 알리지 못하게 하다" 실록에는 종종 뜬금없는 짧은 기사들이 등장합니다. "천둥이 쳤다." "꽃이 피었다." "달이 목성과 겹쳤다."이처럼 실록은 왕실 대소사뿐만 아니라, 날씨, 천문, 천재지변 정보까지 담은 만능기록물입니다. 안녕, 실록?연륜 묻어나는 태조도 좋지만, 사극은 아역시절이 별미죠. 우리의 다크 아이돌 연산군은 아버지 성종의 장례식 중간에 나와버립니다. 조선 역사상 제일 패기 쩌는 고3이네요."습을 마치고 제사가 끝나지 않아 세자가 나가자 신승선·노사신 등이 말리다" 팔만대장경 프린트해오라니까 질색하는 정총과 무안 팍팍 주는 태조 이성계. 그러니까 다량인쇄는 부하 시키지 말고 스스로 하자."정총에게 《대장경》을 인간할 발원문을 짓게 하다"양녕대군이 궁궐담을 넘어 고려말 문신의 첩 기생 어리를 탐하자, 태종 크게 진노하다.양녕 : 야 니가 꼰질렀지?충녕 : ......ㅋ...할아버지 태조의 회갑잔칫날, 충녕대군이 학문을 뽐내다.그러자 태종이 충녕의 형 양녕을 돌아보며 말하다."니는 동생만도 못해갖고ㅉㅉ" "상왕을 모시고 경회루에서 술자리를 베풀다. 충녕 대군의 학문에 감탄하다"태조가 온천가던 길,수행자의 말이 백성의 밭을 망치자 태조 빡치다. 당시 말은 비싸고 유지비도 엄청난 수입차같은 것이었기에, 수행원이 주차하다 밭이나 논에서 드리프트질을 좀 했던 모양이다."기탄에 머물다. 동지중추원사 조기에게 민폐를 끼치지 못하도록 명하다"왕 못하겠다는 이성계를 대문 밀쳐가며 궁까지 끌고온 백관들. 그러나 이성계는 두려움에 한사코 옥좌에는 앉기 싫으니 기둥앞에 서있겠다고 우겼다. 결국 그렇게 했다."태조가 백관의 추대를 받아 수창궁에서 왕위에 오르다"[태종28권,14년 10월26일 4번째 기사]츤데레 양녕대군이 매부(여동생공주 남편)집에서 기생끼고 술마시다가 "근데 사실 충녕이놈 대단하긴 해......"라 하였다. 그러나 그 말을 듣고 태종은 형제간의 우애를 칭찬하긴커녕 "그새낀 사돈댁 가서 뭔짓이냐"라고 진노하였다."부마 청평군 이백강의 연회에서 세자가 기생과 방종하게 놀다"이건 해당 실록 실제 기록페이지...ㅋ조선왕조실록 관련 기록은 여기 http://sillok.history.go.kr/url.jsp?id=kca_11410026_004http://www.wikitree.co.kr/main/news_view.php?id=18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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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조선시대 국왕들 각종 부문별 TOP 1~5위
얼짱부문1. 영조 - 당대 조선 남자들이 추구하는 최고 미남상, 즉 꽃미남 임금으로 기록되어 있음2. 문종 - 풍채가 당당하고 얼굴이 준수했다는 기록이 많음3. 효종 - 거울로 자기 얼굴을 보고 나르시즘에 빠지는 일이 잦았다는 기록4. 헌종 - 궁궐에 있는 남/녀 모두에게 영조에 버금가는 미남이라고 당대에 평가됨5. 인종 - 미남으로 유명한 문종의 어진을 보고 인종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닮았다고 함기타 - 순조 - 실록 묘사에 따르면 미남은 아니지만 훈남상이며 나이들수록 중후해지는 스타일로 보임장수한 부문1. 영조 - 83세, 이미 장수로 유명, 수랏상을 5회에서 3회로 줄이고 육식을 피하고 채식위주의 식단조절이 엄격, 거칠고 격한 운동을 즐겨했다고 알려짐2. 태조 - 74세3. 고종 - 68세4. 광해군 - 67세5. 정종 - 62세단명한 부문1. 단종 - 17세2. 예종 - 20세 (케이스가 좀 다른 단종 제외하면 가장 단명)3. 헌종 - 23세4. 연산군, 인종 - 31세부인 수 부문1. 태종, 성종 - 12명3. 중종 - 10명4. 정종, 선조 - 8명자식 수 부문1. 태종 - 29명 (12남 17녀)2. 성종 - 28명 (16남 12녀)3. 선조 - 25명 (14남 11녀)4.. 정종 - 23명 (15남 8녀)5. 세종 - 22명 (18남 4녀) - 아들 수 1위, 중전소생 자식 1위 (소헌왕후 8남 2녀)어릴때 왕 된 부문1. 헌종 - 8세2. 순조 - 11세3. 단종, 명종 - 12세4. 성종 - 13세5. 숙종 - 14세최악의 술버릇 부문공동1위 - 사대천왕 - 세조, 성종, 숙종, 정조-> 아랫사람에게 왜 더 못먹냐고 술먹이는 스타일무력 부문1. 태조 - 한국 역사상 육전부문 올타임 No.1급, 70연속 헤드샷 (정사기록)2. 정종 - 아버지를 보좌하면서 대부분의 승리에 공헌, 사냥과 격구에도 능한 무인 출신3. 태종 - 조선역사상 가장 마지막으로 전장에 친히 출정한 국왕, 왕자의 난 및 각종 반란 모두 승리4. 정조 - 별명 중 하나가 이성계의 현신, 50발중 49발 적중이 취미, 1발은 자만하지 않도록 일부러..5. 세조 - 세종의 아들 18명중 무예 분야 1위, 왠만한 무인들도 당하지 못하는 실력기타. 문종 - 직접 화차개발, 운영법 & 진법 & 불발탄 처리 방법까지 모두 구현한 밀덕후 & 군사적 재능학식/교양/독서 부문1. 세종 - 노코멘트해도 될 수준, 중국이나 일본에 갔다온 신하중 구매대행 안해본 사람이 없을 정도, 너무 책만 읽어서 태종이 운동좀 하라고 책을 싹 치웠는데 그 과정에서 실수로 책 하나 떨어져서 그것만 달달 봄, 경연때 신하들 관광보내기가 취미(1)2. 정조 - 신하들에게 주로 하는 말은 '공부좀 하시오', 세종 이후 최고 독서광이라고 평가받음, '어느 책에 보면 몇 쪽 몇째 줄에 무슨무슨 문구가 있는데 지금같은 상황에선 이런 문구를 인용하는게 맞으니 참고해보라 드립', 경연때 신하들 관광보내기가 취미(2)3. 태종 - 조선시대 국왕중 유일하게 과거급제 경험, 행정직 공무원 경험 있는 엘리트, 역시 풍부한 학식과 말빨로 신하들 관광보내는게 취미(3), 단 1->2->3으로 갈수록 그 관광의 정도는 더 무언가 폭력적임..4. 순종 - 의외의 순위이나 정조에 비견될 정도의 독서광이었다함. 특히 족보와 보학, 종학에 소질이 대단해서 유력 가문들의 족보를 모두 외우고 다닐 정도5. 고종 - 지적 능력이 뛰어나고 교양과 지식이 풍부해서 외국 선교사나 사신들이 모두 감탄하고 감, 글씨나 문장에도 소질이 뛰어났음기타 - 단종, 인종 - 명석함이 자자했으나 모두 단명문종 - 군사,병법적 지식이 매우 뛰어났고 인문적 교양도 갖추고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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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재미있는 조선시대 야사
인종 仁宗, 1515년 3월 10일 ~ 1545년 8월 7일 [재위 1544년 ~ 1545년] 조선의 제12대 임금
인종은 모후인 장경왕후가 자신을 낳고 7일만에 죽자 중종의 계비인 문정왕후의 손에 자란다. 하지만 문정왕후는 어린 인종을 끈임 없이 못살게 굴었다. 하루는 밤에 쥐의 꼬리에 불을 붙이고 인종이 잠을 자고 있는 궁 안에 들여 보냈다. 인종이 창문을 보니 문정왕후가 웃으며 빨리 불이 타오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빈궁만 내보내고 자신은 문정왕후에게 효를 행하기 위해 불 속에서 죽으려 했다. 빈궁과 인종이 어쩔 수 없이 불을 바라보며 울고 있는 그때, 밖에서 중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인종은 죽는 것이 문정왕후에게는 효가 되지만 중종에게는 불효가 되므로 곧바로 나왔다. 그 후 인종은 불을 지른 장본인을 알고 있으면서도 중종에게 고하지 않았다.
선조 宣祖, 1552년 11월 26일 ~ 1608년 3월 16일 [재위 1567년~1608년] 조선의 제14대 임금
일찍부터 여색을 탐한다는 비판을 들었으며 특히 후궁들의 횡포가 심각한 상황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몽진 도중 인빈의 가마는 백성들에게 돌을 맞기도 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파죽지세로 평양까지 밀어오는 바람에 의주로 도망하였으나 그에 만족하지 않고 명에 혼자 도망가기 위해 망명을 요청하였다. 명은 일국의 왕이 백성들을 버리고 어찌 그럴 수 있냐며 거절하지만 그에 굴하지 않고 계속적으로 명에 끊임없이 압록강을 건너겠다고 시위를 했다. 결국 명은 그렇게 오고싶으면 개처럼 네발로 기어서 북경까지 건너오라고 무안을 줬고 선조는 그제서야 망명을 포기했다. 이후 이여송이 이끄는 명 지원군이 선조앞에 도착했고 이여송은 선조가 보는 앞에서 조선의 대신들의 뺨을 후려치면서 어찌 나라를 이지경까지 만들었냐며 타박을 주었으나 선조는 아무 말도 못하였다.
1597년 7월 칠천량해전에서 전멸하다시피 궤멸된 수군, 고작 13척의 패잔선으로 왜군 대함대 133척을 격퇴시켜 서해로 북상하려는 왜적을 저지한 명량해전 전쟁의 물길을 돌려 자신의 왕위를 포함하여 왕실의 안전은 물론 국가를 멸망의 위기에서 구한 위대한 승전(勝戰)을 두고 선조는 "이순신은 사소한 적을 잡은데 불과하다. 그는 자신의 직분을 수행한 것일 뿐 큰 전공(戰功)을 세운 것은 아니다." 라고 말하였다. 그러면서 또 선조는 이듬해 4월에는 "이순신에게 벼슬을 올려주지 않으면서 상을 주는 방법을 강구해보라."는 괴상한 소리도 늘어놓았다. 반면 비변사에서 "원균은 수군의 주장으로서 수군을 전멸당하게 했으므로 그 죄는 모두 원균에게 있습니다. 그 부하들에게도 죄가 있으면 벌을 주고, 공이 있으면 상을 주어 군기를 바로 세워야 합니다."라고 건의하자 이런 말로 원균을 두둔했다. "원균 한 사람에게 책임을 돌리지 말라. 이산해와 윤두수가 그렇게 시킨 것이다." 선조 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1598년 노량해전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선조 임금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깜짝 놀라며 슬퍼했을까? ‘선조실록’은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지 닷새 뒤인 11월 24일 밤, 이 정보를 명나라 군대 쪽에서 입수한 승정원이 급히 왕에게 보고했다고 기록한다. 소식을 들은 왕은 “오늘은 밤이 깊었다”며 “내일 승정원이 알아서 하라”고만 한다. 이순신의 죽음에 대해 한마디 말도 하지 않은 것은 물론, 어딘가 귀찮아하는 기색까지 보인다. 며칠 뒤 명나라 장수 형개가 왕 앞에서 이순신의 죽음을 애석해 할 때도 선조는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황제의 은덕이 고맙다’며 세 번 머리를 조아리더니 명나라 등자룡의 죽음만을 안타까워할 뿐이었다.
“조정에서 사람을 제대로 쓰지 못해 이순신이 재능을 한껏 펴보지 못했다”며 애통해 한 사람은 임금이 아니라 실록을 기록한 사관(史官)이었다. 선조가 그렇게 감싸고 돌면서 원균의 패전 책임을 묻지 않자 사초(史草)를 담당하는 사관(史官)조차 "머리가 터질 것 같고 뼈가 녹아버리는 것 같다."면서 이렇게 선조의 어처구니 없는 처사를 비판했다. 조선시대 인물중 가장 용력이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는 의병장 김덕령(金德齡) 조선왕조 타도를 기치로 봉기한 이몽학(李夢鶴)과 연루됐다는 혐의를 받았으나 ‘김덕령이 가담했다’는 이몽학의 일방적 선전 외에는 아무 증거가 없었다. 그러나 김덕령에 대해 선조는 “김덕령은 사람을 죽인 것이 많은데 그 죄로도 죽어야 한다”면서 직접 김덕령에게 따져 묻는다.
김덕령은 고문으로 정강이뼈가 부러졌지만 스스로 변론하는데 말씨가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신에게는 만 번 죽어 마땅한 죄가 있습니다. 모친께서 돌아가셨을 때 삼 년 상을 치르지 않고 칼을 집고 분연히 일어나 왜군과 여러 해 동안 싸웠지만 작은 공도 세우지 못했습니다. 충성도 못하고 불효만 했으니 만 번 죽어도 죄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제가 모집한 용사들이 지금 감옥에 있는 데 그들에게는 아무 죄가 없으니 죽이지 마시고 쓰도록 하십시오.” 김덕령의 그 말을 전해들은 선조는 노하여, “저놈이 형벌을 가벼이 여겨 오히려 태연하니 참으로 역적이다. 쳐 죽여라!”고 명령했다. 김덕령은 선조 29년(1596) 8월 6차에 걸친 혹독한 형장(刑杖)을 당하고 29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선조는 비정상적인 성격의 주인공이었다. 자신이 적통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왕위를 이었다는 사실에 콤플렉스도 있었다. 의심과 시기심이 많고 독선적이었다. 심지어는 아들인 광해군에 의해 왕좌에서 밀려날까봐 의심하다 못해 죽이려고까지 했던 참으로 엽기적인 임금이었다. 조선의 장수 가운데서 가장 강력한 군대를 가진 이순신, 거기에 백성들에게 인기까지 높았던 이순신을 자신의 왕좌를 위협하는 존재로 여겼을 것이다. 이는 일종의 피해망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까닭에 선조는 김덕령처럼 이순신도 죽여 없애려고 했을것이다. 선조가 이순신을 '반드시' 죽여야 할 대상으로 여겼다는 사실은 선조실록(宣祖實錄)을 살펴보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선조가 이순신을 미워하기 시작한 것은 오래된 일이지만 이순신이 실각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요시라의 반간계 때문이었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밀명을 받은 요시라의 공작에 김응서와 권율이 놀아나고, 조정도 넘어갔다. 이에 따라 1597년 1월 23일부터 조정에서 논의가 시작되었으며, 2월 4일 사헌부의 주청에 따라 이순신의 체포가 결정됐던 것이다. 아니, 사헌부의 주청이라기 보다는 사실은 선조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이렇게 이순신을 제거하기 위해 일본군 수뇌부의 음모에 발맞추어 이순신을 실각시키고 조선 수군의 전멸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선조는 훗날 이순신의 전사 소식을 듣자 제문(祭文)에 이런 구절을 써 넣었다. '나는 그대를 버렸건만 그대는 나를 버리지 않았다.' 충무(忠武)라는 무관(武官) 최고의 시호도 순국한지 45년 후인 1643년(인조 21년)에 받게 되었다.
인조 仁祖, 1595년 12월 17일 ~ 1649년 6월 17일 [재위 기간: 1623년 ~ 1649년] 조선의 제16대 임금
반청 사상을 고수하던 아버지 인조와 갈등하던 중 독살로 추정되는 죽음을 맞았던 소현세자는 손톱밑이 시커멓게 변하고 얼굴은 검게 변하며 죽었다. 전혀 확인되지 않은 병이었다. 독살이라는 소문은 퍼져나갔지만 인조는 이것에 대한 조사를 피하려 했으며 어의를 처벌하지도 않았다. 자신의 몸과 봉림대군(효종)의 몸이 아프자, 소현세자의 아내가 저주를 내려서 아프다고 하여 사약을 내리고 가족들을 모두 죽였다. 소현세자를 죽일 때 11살과 6살이던 아들들도 다 죽이고 임신했던 세자빈까지 죽였다.
효종 孝宗, 1619년 7월 3일 ~ 1659년 6월 23일 [재위: 1649년 ~ 1659년] 조선의 제17대 임금
나르시즘에 빠져서 항상 거울을 보고 웃고 계셨다고 한다. 한마디로 왕자병. 인조를 닮아 얼굴이 곱상하고, 예뻤는데 본인도 그걸 알고 있었다고 한다. 거울을 끼고 자기 얼굴보며 만족하며 웃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효종의 무덤은 영릉으로, 건원릉 서쪽 능선으로 정해진 후 계획대로 안장되었다. 한창 추울 때 능이 조성되어 왕릉조성 작업은 처음부터 부실하게 이뤄져 다음해 장마 때 석물에 균열이 온다. 곧바로 석물을 고치긴 했으나 겨울이 다 지나갈 무렵 다시 석물이 무너져 이듬해 능을 다시 대대적으로 고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아들 현종은 재위 15년 내내 거의 매년 아버지 무덤 수리를 해야 했다. 결국 현종은 사망하기 일 년 전인 1673년 아버지의 무덤을 옮기기로 결정하고 현재의 여주 땅으로 이장을 한다.
현종 (조선의 제18대 임금) 顯宗, 1641년 3월 14일 ~ 1674년 9월 17일 [재위: 1659년 ~ 1674년] 유일하게 후궁을 두지 않은 왕이다.
숙종 肅宗, 1661년 10월 7일 ~ 1720년 7월 12일 [재위 1674년 ~ 1720년] 조선의 제19대 임금
따뜻한 온돌방에서 신하들이 꾸벅꾸벅 졸자 온돌을 빼버려서 얼음장에서 일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또, 관우의 팬이였다고 한다. 숙종은 개인적으로도 관우가 보여준 충의로운 모습에 푹 빠져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임진왜란 중에 들어왔지만 별 관심을 못받던 관우신앙을 왕권강화의 수단으로 이용하면서 관우에 대한 제사를 국가 주관 제사로 격상시켰고 자신이 직접 제사에 참석해서 제삿상에 술을 따르고 네 번이나 절을 올릴 정도로 열렬히 관우를 숭배했다. 당시 좌의정이었던 서종태가 항의했지만 무시했다고 한다. 이순신에 대해서도 평가를 높였는데 사후에 현충이라 호를 내리고, 현충사의 제문을 직접 지었다. '절개에 죽는다는 말은 예부터 있지만, 제 몸 죽고 나라 살린 것, 이 분에서 처음 보네.'< 현충사 제문> 숙종
숙종 14년(1688)에 장희빈이 아들을 출산하자 장희빈의 어머니가 가마를 타고 입궁한 적이 있다. 이 때 사헌부의 말단 직책인(심부름꾼) 소유들이 장희빈 어머니의 가마를 보고는 이를 적발해 가마를 부쉈다. 그 가마는 옥교라는 지붕이 달린 여성용 가마로, 당시 법에 의하면 정 3품 이상 관리의 여자 가족이나 탈 수 있었다. 즉, 소유들이 원칙대로 한 것이다. 그러나 이를 들은 숙종은 불같이 화를 내며 소유를 전부 때려 죽이라고 명했다. 신하들이 뒤늦게 말려 중단되기는 했지만, 결국 소유 중 2명은 맞아 죽었다.
영조 英祖, 1694년 10월 31일 ~ 1776년 4월 22일 [재위 1724년 ~ 1776년] 조선의 제21대 임금
손자 정조 못지 않게 대단히 학업에 열중한 군주로 경연*에서 태종, 세종, 정조와 같이 경연관들의 말문을 막히게 만든 몇 안 되는 군주 중 한 명. 왕권이 매우 강했음에도 불구하고 죽기 직전까지 학업에 열중한 군주이기도 하다. 태종이나 세조도 똑똑한 축에 속했지만 이 나이에 무슨 공부를 하냐면서 경연을 때려쳤고 연산군은 말할 것도 없으며 광해군도 여러 옥사 이후로 왕권이 강해지자 경연을 매우 게을리했다. (*경연(經筵)은 왕에게 유학의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진강(進講)해 드리고 논의를 받는 학술제도) 반면 성격은 급하고 감정적이고 눈물이 많은 타입이었다. 욕도 잘해서 면전에서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을 신료들에게 퍼붓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냉혹할 때는 냉혹함을 보여주기도 잘했다. 아버지 숙종처럼 신하들을 거의 노예수준으로 취급하는 타입이기도 했는데, 중요한 회의를 하는 중 신하들은 밥도 안 먹고 쫄쫄 굶는데, 자기 혼자서 식사때가 되면 바로 밥을 먹으러 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정조 正祖, 1752년 10월 28일 ~ 1800년 8월 18일 [재위 1776년 ~ 1800년] 조선의 제22대 임금
할아버지인 영조와 함께 조선 최후의 부흥기를 이끈 임금, 정조대왕 "매양 취침하기 전에 두 발바닥의 가운데를 마주 문질러 비비면 기운이 저절로 퍼진다. 내가 밤마다 시험해보았는데, 처음에는 힘이 드는 듯했으나 오래도록 계속했더니 신통한 효험이 있다." (밤마다 시험 ㄷㄷ) 학식, 인품, 외모 딸리는건 건강이 약했다.. 연애소설을 비롯한 소설을 무척 싫어하여 영조가 죽고 왕이 되자마자 서고에 있던 모든 소설을 불태웠다. 또한 숙직을 하던 규장각 학자들이 몰래 연애소설을 읽고 있다 들켜서 정조에게 혼이 났고 벼슬을 삭탈했다. 그들은 정조에게 다시는 소설을 안 보겠다는 반성문을 쓰고 나서야 벼슬길이 다시 열렸다. 영조는 근검하여 백성이 먹을 쌀이 없어진다는 이유로 금주령을 내렸지만 정조는 개인적으로 술을 너무 좋아해서 영조가 죽고 왕이 되자마자 금주령을 없앴다.
정조는 공부 못하는 신하한테 공부하라고 끊임 없이 시키며, 숙제를 내고 제대로 하지 못하면 망신을 주고 술을 마시지 못하는 신하에게 술을 강요하여 기절할 때까지 마시게 하고, 활을 못 쏘는 신하에게는 끊임 없이 연습을 시켰다고 한다. 술을 무진장 좋아하여, 정약용에게 필통안에 술을 한가득 부어 원샷 하기를 강요하여 정약용은 술을 싫어했다고 한다. 그때 당시 필통에 술 붓기라면, 요즘 사발에 소주를 들이붓는 것과 맞먹는다고 한다. 정조 20년, 이정용이라는 유생이 술에 취해 늦은밤 궁궐 담장아래에서 잠에 들었다 잡혀간 적이 있었다. 그러나 술을 좋아했던 정조는 요즘 유생들은 술을 잘 마시지 않는데 술을 좋아한다고 칭찬을 하였다. 그리고 많은 유생들이 숙박하던 잡촌과 집춘영은 벽을 맞대고 있으니 이정용은 잡촌에서 잤던거라는 궤변을 펼쳐서 오히려 상까지 주어서 보냈다.
헌종 憲宗, 1827년 9월 8일 ~ 1849년 7월 25일 [재위 1834년 - 1849년] 조선의 제24대 임금
엄청난 미남이었다고 한다. 기록을 보면 여색을 즐기는 왕 때문에 궁궐 내 용모가 예쁘다고 하는 궁녀들은 거의 승은을 입었다고 한다. 덕분에 후궁첩지도 아무나 내리지 못했고, 딸을 낳은 궁인 김씨도 첩지를 받지 못했다. 왕 자체가 너무 미남이라 젊은 궁인들이 상당히 많이 유혹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너무 어린 나이부터 가진 잦은 성관계 때문에 건강이 악화되어 죽기 직전에는 피가래까지 토하며 고생하다가 23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요절한다.
고종 高宗, 1852년 9월 8일 ~ 1919년 1월 21일 [재위: 1897년 ~ 1907년] 조선의 제26대 국왕, 대한제국의 건국조, 초대 황제 광무제
고종 황제가 행차하다가 땀을 뻘뻘 흘리며 테니스 라켓을 휘두르는 미국인들의 모습을 보고 '어찌 저런 일을 하인들에게 시키지 않고 귀빈들이 하느냐'고 안타까워 했다. 명성황후가 죽고 나서 끝까지 재혼을 하지 않았지만 아끼던 후궁이 있었는데 명성황후가 부리던 상궁이었다고 한다. 명성황후는 그녀를 곁에 둔 이유가 못생겨서 고종이 쳐다도 안 볼 것이라고 생각하고 곁에 두었는데 나중에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녀는 명성황후와 똑같이 생겼다고 말했다.
전신(전보총국)의 등장과 함께 최초 궁궐에 가설된 전화를 경험한 고종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성음을 들을 수 있군" 이 생각에 고종은 상당한 고액의 전화를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141-1번지 홍릉에 설치한다. 그 곳은 고종의 부인 명성황후(민씨)의 무덤. 전화의 설치가 끝난 직후 고종은 아침마다 그 곳으로 통화를 걸어 말을했다. "여보, 어제는 춥지 않았소?" 고종은 매일아침 홍릉으로 전화를 걸어 죽은 민씨에게 안부를 전했고 매일아침 울었다고 한다. "아무리 멀리떨어진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순 있어도 저승까지는 못 하는구나." (고종의 말) 그럼에도 고종은 매일아침 홍릉으로 전화하는 걸 잊지 않았고, 일제에 의해 강제퇴위를 당하는 그 날에도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장귀비작성일
2014-07-01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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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조선왕조사회에 대해서 환상을 가진 분들이 너무 많네요
짱공에서 가끔 역사 이야기도 했는데(지난번엔 안중근에 대해서도 이야기 했지만요)저도 고교 시절까지만해도 국정교과서로 국사를 배우면서찬란한 역사에 대해서 많은걸 배웠습니다물론 조선역사에서 배울점도 많습니다비교적 단일성 단일계의 왕조중심 국가로 발전하면서 좋은점들도 있었죠일련의 과학기술의 발전도 그렇고 유교적 철학과 문화의 발전도 그렇고요그런데...그것을 넘어서 환상을 가지신 분들이 너무 많다는걸 오늘 또 깨달았는데오늘은 세종에 대한 이야길를 한번 해볼까 합니다조선왕조 실록을 찬찬히 훓어보시면...저도 물론 그 많은 양을 읽어 보진 못했고큰 부분만 좀 읽었었죠...요즘엔 박시백의 만화조선왕조실록 까지 완간되면서더 접하기도 쉬워졌고요어쨋든세종조를 아주 유교적 이상국가화 된 태평성대였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은데요실제로는 관학파 사대부 즉, 훈구파 사대부(태조 이성계를 따랐던 역성파 사대부)에게는그런 세상이었겠죠...근데 백성들의 삶은 우리가 태평성대라 믿던 세종조때나 미쳐돌아가는 연산군 시절이나 남의 나라에 의해 침략당했던 선조, 인조 시절에도 그렇고 피폐한건 마찬가지였습니다여기서 제가 세종조때 특히 일반 백성들한테 피해가 극힘히 간 몇가지 큰 사건을 언급해드릴게요첫번째는 사대정책입니다 조선초기 친원파와 온건파 사대부를 숙청하면서 등장한 태조 시절에는종계변무(이성계가 실제로는 이인임의 아들이다라는 명나라 측의 기록) 문제와철령이북 지역에 대한 문제 때문에 명나라와의 사이가 굉장히 껄끄러웠습니다근데 태종조 때부터 이런 기조가 많이 바뀝니다어쨋든 태종 이방원은 자신이 형제들을 죽이거나 혹은 축출해내서 왕이 된 사람이기 때문에명나라에서 내려주는 고명과 인신을 받으면 자신의 정통성이 확립될거라고 생각해서아버지 태조 이성계가 명나라에 다소 시큰둥한 제스처를 취한것과 달리스스로 조선과 자신을 제후국의 지위로 격하시키고 명나라를 극진히 모시게 됩니다정부인이었던 원경왕후 민씨 외에 후궁들을 거느릴때제후들은 첩을 얼마나 둘수 있는지 신하들에게 물어보는 내용까지 나옵니다어쨋든 이런건 백성들에게 큰 무리가 가는 내용이 아니니 그렇다 치는데문제는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는 빈도수가 태조 시절에 비해 급격하게 증가하기 시작했습니다물론 명태조 주원장이 정통성이라는 약점을 가지고 말년에 조선을 좀 길들여야겠다 싶었는지무리한 조공을 많이 요구하게 됩니다...(이때는 태종의 세제 시절)기록에 따르면 금, 은, 인삼, 모시, 종이, 말도 모자라 해동청을 잡는답시고농번기 백성들을 동원까지 합니다...이런 기록이 태종시절에만 있는게 아닙니다태종은 상왕시절 항시 세종에게 중요한 몇가지를 언급하는데그중 하나가 명나라를 극진히 사대할 것이라는 거였습니다명태조 홍무제가 죽고 건문제가 즉위하고 나서 이런 양상이 조금 줄어들긴 했는데영락제가 쿠데타로 황제에 오르면서 또 상황이 바뀌게 되죠영락제도 말년에 좀 나아져서 그렇지 조선에 미친듯이 조공을 요구합니다그 조공내용에는 심지어 환관과 공녀까지 포함되어있었어요그게 다 어디서 나오는겁니까...양반들 사재 털어서 가져다 줬을까요??죄다 백성들 고혈을 쥐어짠 결과에서 나온거였습니다....우리가 원나라 시절...청나라 시대때 원과 청의 무리한 공물요구로얼마나 백성들이 핍박받았는지 아시지 않습니까...근데 국사책에서는 명나라에 공물 바친건 기껏해야 합리적 사대정책의 결과 였다고 자기 위안하고 있습니다그 공물 사절단이 일년에 대체 몇번 가신줄 아십니까??공식적으로(제가 알고 있는것만 언급 드리겠음)6차례인가 7차례 였을겁니다...중국 설날인 춘절, 황제 탄신일, 황태자 탄신일, 황후 탄신일, 추절(추석), 동짓날...하정사를 비롯해서비정기적인 횟수까지 포함하면 일년에 수십차례 공물을 싣고 명나라로 왔다 갔다 합니다..명나라가 요구한것도 사실이지만 조선정부에서도 적극적으로 진상을 하죠..그저 세종이 하는 말이라고는 어쨋든 작은나라가 큰나라를 섬기는데는 다소간의 어려움이 있길 마련이다정성을 다해서 모셔야 한다...이말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두번째 세종조의 실책을 들어보자면북방 사민정책이었습니다태종조 부터 시작해서 세종조에 이르기까지 활발하게 북방을 개척해서 4군과 6진을 설치하게 되었는데 문제는 춥고 얼어붙은 동토를지키려면 주민들이 살아야 하는데 날은 항상춥고 농사도 안되는 지역에어느누구도 가지 않으려했던겁니다...그러다 보니 세종조때 사민정책을 실시하는데하삼도(경상, 전라, 충청) 지방의 백성들을 함경도 일대로 강제 이주를 시키게 되는게이게 정말 말이 변방의 안정을 위해서 백성들을 이주시킨다는거였지가기 싫다는 사람들 억지로 잡아서 보내게 됩니다세종조 기록에 따르면하삼도민에 대한 초정입거는 많은 소요와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정부는 부득이한 사정을 내세워 사민에 대한 특전과 안집대책을 제시했으나, 유교사회에서 선대의 유업과 조상의 분묘를 버리고 친척들을 떠나 강제로 이주된다는 것은 죽음보다 더한 너무나 가혹한 일로 간주되었었죠... 이에 입거를 피하기 위해 신체를 자해하거나 일가족 전체가 자살하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이와 더불어 사민 대상자들은 선발 후에나 입거지에 가는 도중에, 입거지에 도착한 연후에 끊임없이 도망하였다는 기록까지 나옵니다이렇듯 4군6진과 사민정책이 정권의 강화와 대의명분에서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질수도 있지만일반 백성들 입장에서는 엄청난 고통이었던 정책이었습니다그리고 세번째로는 화폐개혁에 관한 내용입니다태종 이방원때 저화라는 것을 만들어서 시중에 유통하게끔 하는데물물교환 중심의 농본사회였던 조선에서 백성들은 화폐라는것을 불신했죠그런데 세종조에 들어서면서 화폐 사회로 이끌기 위해서백성들에게 강제로 화폐를 사용하길 강요하기 시작하는데여기서부터 문제가 삐걱대기 시작합니다..백성들이 물물교환 하는게 걸리면 곤장에 가산몰수에 벌금형까지때리는 통에 그 벌금을 내기 위해 빚을 내는데 그 빚을 못갚는 경우도 생기고 가산몰수에 따른 궁핍함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는 백성들까지 생기게 됩니다그런데 세종은 끝까지 화폐 사회로 가는것을 끝까지 고집하는데결국에는 실패하게 됩니다왜냐하면 상공업이 천시되고 발전되지 않았던 시대에는 굳이 화폐가필요없었기 때문이죠...즉 주변환경을 고려하지 않았던 엄청난 실책이었던 겁니다16세기 들어서 대동법이 제정되면서 공인과 사상이 등장하고상업과 공업이 발전하면서 백성들 스스로 화폐 사회로 진입하게 된 역사를 보면 잘 알수 있습니다그리고 마지막으로세종조의 가장 큰 실책으로 뽑히는것이 부민고소금지법입니다세종 2년 예조판서 허조의 건의로 유교적 신분사회의 확립을 위한다는 이유로백성이나 아전들이 고을의 수령이나 관찰사의 부정과 부패를 고발하지 못하게 하는 법을 만드는데이것도 정말 골때리는 법이었죠...단지 신분사회 확립이라는 이유만으로 수령의 부정과 부패를 고발하지 못하게 되니...이런 기조가 조선 말까지 이어집니다...몇몇 생각있는 집현전 학사들을 비롯한 원로 대신들도 이 법이 굉장히 부당하다고 건의하지만무슨 생각이었는지 세종은 끝까지 이 법을 고수합니다=========================================================이정도까지가 여러분의 지극한 환상을 깨줄만한 왕조사회에 대한 팩트입니다...대부분 조선왕조실록에 나와있는 내용이니 찾아보시면 바로 바로 나옵니다물론 조선시대 세종은 개.객.끼야 라고 하는건 아닙니다한글창제, 과학기술의 중흥 등 많은 것을 이뤄낸 훌륭한 군주죠...근데 그건 성리학적 질서가 사회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던조선"왕조"시대의 사대부의 입장에서 훌륭한 군주로 평가 받을수 있다는거지일반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여전히 굶주림과 역병, 심지어 떠돌이 생활을 감수해야했던것이조선민중들의 삶이었습니다..아까 어느분 글에서 댓글에 세종조에 대한 환상을 갖지 말라고 했더니교과서에서 언급하는 세금을 걷었던 실세결수나 나라 곳간에 고려말에 비해몇배는 더 많이 곡식이 쌓였는데 왜 백성들 삶이 고단해라고 항변하시는 분이 있으셨는데그거 전부 양반 사대부들한테나 돌아간거지 백성들에게 돌아간건 쥐뿔도 없습니다제발 왕조사회에 대한 환상과 교과서에서 이야기 해주는 사실만 진실로 받아들이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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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박정희 성노예 김삼화씨 이야기
http://amn.kr/sub_read.html?uid=9908§ion=sc4§ion2HOME > 품앗이(사회) >[단독] 박정희의 상습 성폭력에 한 맺인 영화배우 김삼화창원,안양 지법 공직선거법 위반 재판 과정 취재중 확인 서울의소리ㅣ 기사입력 2013/07/12 [23:58]지난 10일 국회 귀빈식당에서 ‘표현의 자유와 언론탄압 공동대책위원회’ 발족 및 피해 사례 발표가 있었다. 지난 대선을 앞두고 언론에 보도된 내용을 포털사이트와 SNS를 통하여 게재하거나 펌한 네티즌들에 대해서는 직계존속 박정희 비방 허위사실유포 선거법위반, 명예훼손, 심지어 사자 명예훼손죄라는 잣대까지 들이대며 구속, 법정구속, 벌금폭탄, 무차별 기소가 이루어 지고 있다. 또한, 검찰은 피고인 심문조서 없이 기소하는가 하면, 같은 혐의인데도 불구하고 불구속과 구속으로 이중 잣대를 들이대는 법원의 형평성 없는 법적용에 대하여 유명무죄, 무명유죄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지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미국 한겨레저널 <김현철 칼럼> ‘박정희의 승은 입은 200여명의 여인들’을 스크렙하여 포털사이트에 게제한 박모씨와 고모씨를 중앙선관위가 후보 비방 및 허위사실유포혐의로 고발하여 재판중이다. ▲박정희 의 권력형 성폭력과으로 무서움과 두려움으로 평생 노이로제에 시달린 영화배우 김삼화씨 ? 서울의소리 그러나 본지 취재 결과 박정희가 상습적으로 권력형 성폭력을 가하고 김씨의 남편을 협박하여 강제이혼을 시키고, 성노예로 취급하다가 35세 연상의 미국인에게 강제로 결혼을 시켜 미국으로 추방당한 사람이 천재무용가이자 영화배우인 김삼화(金三和)씨로 밝혀졌다.김씨는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서울대학교 미술대를 졸업했다. 6세부터 무용을 시작하여 조선무용연구소 한성준(韓成俊)에게 사사했으며, 성신여중 재학 당시 15세의 나이로 미국 대통령 특사 환영연회에서 공연을 하는 등 “천재 소녀 무용가”로 불리며 일찍부터 재능을 인정받았다. 1955년 김기영 감독의 <양산도>에서 주연을 맡으며 영화 데뷔를 했다.▲ 김삼화씨가 출연한 양산도, 논개, 대심청전 영화 포스터 ? 한국영상 자료원 http://library.koreafilm.or.kr/totalSearch.asp특기인 무용을 선보인 <논개>, 한홍합작 영화 <이국정원>, 궁중여인으로 분해 엄앵란과 칼싸움 활극을 선보인 <대도전> 등 15편 안팎의 작품에 출연했다. 영화 데뷔 이후에도 김삼화무용연구소를 운영했고, 드라마센터의 <한강은 흐른다>로 1962년 연극 무대에 서기도 했다. 지적인 배경과 거침없는 언사로 “영화가의 독설가”로 불리기도 했다. 박정희에 의해 강제로 미국으로 쫓겨난 김씨는 박정희의 상습적인 성폭력의 두려움으로 평생 노이로제로 인해 괴로워하다 세상을 떠났다고 알려졌다.▲ 박정희 이날 국회에서 열린 ‘표현의 자유와 언론탄압 공동대책위원회’에서는 저항시인이자 독립투사였던 ‘모란이 피기까지‘ 서정시인으로 유명한 김영랑 시인의 3남인 칼럼리스트 김현철씨와 인터넷 영상으로 연결하여 사실관계를 확인하였다. 김현철 씨는 김삼화씨의 실명을 거론하지 않았으나 김씨를 취재하게 된 경위와 취재 상황 그리고 박정희의 김씨에 대한 권력형 성폭력에 대한 증언을 하였다김현철 씨의 취재 수첩김현철 씨의 국회 발표회 영상 증언▲ 미국 한겨레저널 김현철 칼럼 리스트 ? 서울의소리약 력 성 명 ; 김 현 철 (독립운동가, 김영랑 시인 3남) 생 년 월 일 ; 1935년 9월 25일1965년 ~ 1972년 MBC 서울본사 기자1974년 미국 플로리다로 이주1974년 ~1990년 한인신문 우리소식 창간 발행인 겸 편집인 한국일보 시카고주재기자, 동아일보 마이아미지국장,중앙일보 마이아미지국장, 한겨레 마이아미지국장.미주한인신문 한국신보 플로리다 지사장,미주한인신문 자유신문 플로리다 지사장,1991년~2000년 미주한인신문 한겨레저널 창간 발행인 겸 편집인2001 ~ 현재 칼럼니스트 (자유기고가) 또 피해사례 발표 후 박정규씨는 "박근혜 대통령이 후보시절 국민들에게 성범죄자는 전자팔찌와 사형제로 강력히 처벌하겠다고 엄벌의지를 밝혔지만 먼저 국민들에게 박정희의 권력형 상습 성폭력에 대한 사실을 밝혀야 하며 잘못된 권력형 성범죄 행위에 대하여는 국가가 유가족들에게 사죄와 배상을 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이래는 문제가 된 김현철 칼럼리스트의 글이다.<박정희의 승은 입은 2백여 여인들> 미 한겨레 저널 김현철 칼럼 리스트 1960년대 후반까지 영화 두 편에 주연 여배우로 출연, 한국 영화의 톱스타로서 앞날이 촉망되던 미모의 영화배우(서울 명문대 출신)가 당시 결혼 1년 만에 첫아들까지 얻는 등 행복한 신혼생활로 동료 선후배 배우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 호사다마’라 했던가? 운명의 여신은 이 여인의 행복에 샘이 났던지 행복한 이 가정에 살살 바람을 불어 넣었다.어느 날 난데없이 청와대의 채홍사(採紅使, 연산군 때 전국의 창기 중 미인을 뽑아 왕에게 바치던 벼슬아치) 한 분이 집에 나타난 것이다. “각하께서 모셔오라는 명령이십니다. 잠간 청와대에 다녀오시게 화장하시고 15분 이내로 떠나실 준비를 하세요“하는 게 아니가!순간 눈앞이 캄캄했다. 워낙 박정희대통령의 부름에 응했던 연예인들이 많았던 시절이라 ‘내게도 올 것이 왔구나!’하는 체념과 함께 사랑하는 남편과 갓난 아들의 얼굴이 눈앞에 스쳤다. 그러면서 “이제 갓난애의 엄마로서 신혼 유부녀입니다. 홀로 있는 연예인들이 많은데 저는 좀 빼 줄 수 없을까요?”하고 애원했다.당시 많은 연예인들이 각하의 부르심을 영광스럽게 받아들였던 것과는 달리 이 여인은 현 남편과 만날 때 까지 연애 한 번 못 해 본 순진한 여성이었으니 각하의 부름은 상상도 못 했던 충격 바로 그것이었다. 허나 각하가 어떤 사람이라고 그런 말이 통했겠는가.“잠간 다녀온다는데 웬 말이 그렇게 많아요?”하고 위압적인 자세를 취한 채홍사의 자세를 보고 더 반항했다가는 자신도 또 영화제작 스탭인 남편도 당장 영화계에서 매장될 것을 안 여인은 순순히 따라나설 밖에 없었다.안내된 곳은 청와대가 아닌 그 옆의 다른 장소(후에 알고보니 궁정동 안가)로 그 다음 날 새벽까지 각하의 ‘성노예‘가 될 수 밖에 없었다.눈이 퉁퉁 부어 집에 돌아오니 남편은 뜬 눈으로 밤을 샌 듯 샐쭉해진 얼굴에 눈물이 글썽, 역시 울고 있는 부인의 설명을 듣고 부드럽게 위로해 줬다. “옆집에서 검은 차가 당신을 태우고 갔다기에 다른 연예인들처럼 우리에게도 차례가 온 것을 알았다”며 부인을 부둥켜안고 한 없이 울었다.그런데 1회용으로 끝나던 다른 연예인들과는 달리 이 여인에게는 1주에 한 번씩 계속 채홍사가 찾아 왔다.한 달이 지났다. 그간 체념 속에서 살아 온 남편은 이날따라 울상을 하면서 “여보, 놀라지 마, 나 오늘 무시무시한 곳에 끌려갔다 왔어, 최단 시일 내에 당신과 헤어져야 두 사람 모두 심신이 편할 거라는 협박이야, 아무래도 우리 갈라서야 하나봐. 어쩌지? ”하며 울먹였다.부부는 밤새도록 뿌리칠 수 없는 운명을 원망하며 울고 또 울었다. 둘이 모두 사는 길은 빠른 시일 내에 이혼하고 서로의 행복을 빌어주는 길 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결론 밖에는 다른 길이 안 보였다.그러고서는 어찌된 영문인지 남편은 바로 그 뒷날부터 자취를 감추었고 방안에서는 남편이 쓴 쪽지 한 장이 발견됐다. “여보, 나를 데리러 온 사람이 밖에 기다리고 있어, 따라가야 해. 날 찾지 마. 그게 당신도 사는 길이야. 우리 아이를 잘 길러 줘. 먼 훗날 다시 만나, 사랑해 여보. ” 이게 마지막이었다.그러던 어느 날, 각하는 한 밤 중에 여인과 몸을 섞고 나더니 내가 부자 미국인을 소개할테니 당장 결혼해서 미국으로 가 살라고 명령했다.여인은 무슨 후환이 있을지 두려워 목을 앞뒤로 흔들었지만 내심은 각하의 속박에서 해방된다는 희망 섞인 기쁨도 자리했다.신랑은 뜻밖에도 60이 넘은 미국계 할아버지로 신부될 여인의 아름다움에 마냥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 노인은 결혼 후 6년 만에 많은 재산과 두 아들을 남기고 저 세상으로 갔다.40여 년 전에 이토록 기구한 운명을 지녔던 할머니(현재 75)가 순간이나마 행복했던 신혼시절을 회상하며 현재 미국 하늘 아래 전 남편의 아들, 미국인 남편의 두 아들 등 세 아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 후 전 남편과는 자신이 재혼한 탓도 있어서 완전히 소식이 두절 되었다고 한다.최근 유네스코(UNESCO=국제연합교유과학문화기구)가 전 세계 독재자들의 ‘인권유린보고문’을 발행했다는 소식이다.그 중에는 김정일이 미인을 납치 후 자기 종신 첩으로 썼던 사건도 포함돼 있단다.필자가 궁금한 것은 박정희가 일회용품 내지 소모품으로 쓰던 2백여 명의 여성(김재규 변호인 이동일 변호사가 확인한 채홍사 한 명의 수첩에 기록된 것만 2백여 명임)에 관련된 내용은 왜 포함돼 있지 않느냐는 것, 이 점에서는 단연 박씨의 악행이 김정일의 추종을 불허했으니 말이다.박정희가 부하 김재규에게 사살 당하던 해, 그와 청와대에 같이 살았던 장녀 박근혜의 나이는 27세였다. 철이 난 후 아버지의 몹쓸 짓이 계속되었음을 말한다.박근혜 역시 아버지처럼 2백여 피해자들이 한낱 소모품 정도로 보였겠지? 왜냐면 40 여년이 흐른 오늘날까지 그 여자들을 한 분이라도 찾아가 아버지 대신 사죄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김대중 전 대통령에게는 직접 가서 아버지의 잘 못을 사과한 것을 보면, 박근혜가 사과할 줄 몰라서가 아니라, 박정희에게 불려갔던 모든 여성들이 영광스러워 기뻐하는 중이라고 착각하고 있지나 않은지?우리나라의 역대 어느 임금도 유부녀를 자기 노리개로 빼앗은 경우는 극히 드물다. 천인이 공노할 일이기 때문이다.어느 임금님보다도 잔인했던 독재자의 딸이 어찌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것인지? 언제쯤이면 우리 국민의 의식 수준이 대통령 될 자와 되어서는 안 될 자를 가릴 수 있을 만큼 성장한다는 것인지 답답할 뿐이다.=====================================================================================???뭐 나도 첨보는 언론사인데. 찌라시 느낌이 나기도 함 인터넷 돌아다니다가 어찌 어찌 들어가보게 됐네요. 그래도 내용 읽어보니 완존 헛소리는 아닌지라. 한번 퍼왔슴다. 자꾸 박정희가 독재자가 아니라는 듯한 뉘앙스 풍기는 분들도 있고 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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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조선시대의 성범죄 처벌.
나이, 노소를 구분하지 않고 현재 시간당 1.8건이 일어난다는 그것.성범죄인간의 역사가 오래된 만큼 초가집 짓고 살던 옛날이라고 성범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음.오히려 강력하게 처벌을 해도 성범죄는 끊이지 않고 일어나는 골칫거리였는데,그때문인지 임금이 범죄의 형벌까지 직접 논했던 조선시대에실록을 살펴보면 성범죄에 대한 기록이 심심치 않게 나옴.우선 태종."사노 잉읍급이 11살 어린아이를 강간했습니다."어느날 신하가 고하는 성범죄 소식에 태종은 쿨하게 판결을 내림. "잉읍급의 목을 매달아라."성종조에 경국대전이 완성되기 전까지 조선의 법률은 명나라의 대명률을 따랐는데,대명률에도 성범죄에 대한 처벌은 매우 추상같았음.대명률에 따르면"무릇 화간(和姦)은 장 80대, 남편이 있으면 장 90대이다.여자를 유괴한 뒤 간음하면 장 100대이고,강간한 자는 교수형(絞刑)에 처한다. 강간미수죄는 장 100대에 유배(流) 3000리에 처한다.부모상 또는 남편상을 당한 자와 비구와 비구니,여자 도사가 간음을 범하면 범간죄에다 2등을 더해 가중처벌한다."는 것이었음. 곤장 80, 90대에 유배 3천리면 인생 종치는거임.하지만 이렇게 강력하게 처벌하는데도 성범죄는 심심치 않게 일어났음.태종 4년, 위에서 잉읍급을 이승에서 로그아웃시킨 태종에게 또 한번 통한스런 보고가 들어감."판사(정1품에서 3품. 현재의 차관급) 이자지 부부가 잇달아 사망했습니다.그러자 그의 16살 짜리 딸 내은이가 삼년상을 행하려 하였습니다.그런데 가노(家奴) 실구지 형제와 그의 처남 등 3명이내은이를 자기 집으로 끌고가 손발을 묶고....내은이는 밤새도록 저항했으나그만 힘이 빠져 종내는 당해내지 못했습니다."태종은 이 보고를 듣고 교수형으로는 안되겠다고 여겼는지 또한번 쿨하게 판결을 내림."실구지 형제와 그의 처남 박질을 능지처사 시켜라."능지처사는 사지를 천천히 찢어 죽이는 끔찍한 형벌.태종이 내은이 사건에서 이렇게 극형 중에 극형을 내린 것은 실구지 형제가노비로서 상전을 능욕했기 때문임.이어 세월이 흘러 태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세종 때에는무뢰배도 아니고 웬 생원이 엄숙한 반가의 여인을 덮치는 사건이 일어났음.세종 20년, 어느 부인이 여종2명을 거느리고 성균관 앞 냇가를 건너고 있었음.그런데 부인이 냇물을 건너는 모습에 갑자기 쳐 돌았는지 그 냇가에서 목욕을 하고 있던생원 최한경이 갑자기 뛰어나와 부인을 끌어안았음.냇물을 건너다가 갑자기 ㅁㅊ놈을 만난 부인은 당연히 완강히 저항함!부인이 저항하자 최한경과 같이 있던 친구 2명까지 뛰어나와 합세를 했음.부인을 모시고 가던 여종이"우리 집 안주인 마님이시다!"하고 소리쳤으나 최한경과 친구 2명은 여종을 때려 떼어놓고부인을 잡아 옷을 벗기고 욕보이려 했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도망쳤음.봉변을 당할뻔한 여인은 곧장 관아로 달려가 최한경을 강간미수죄로 처벌해 달라고호소했음. 결국 사헌부에까지 보고가 올라간 이 사건을 접한 세종은 조사에 들어갔음.조사가 시작되자 최한경은"희롱한건 사실이지만 강간하려는 마음은 없었다."고 변명했지만 세종은 적절한 선에서 처벌을 함."곤장 80대!"조선시대 성범죄에서는 교수형이나 참형 같은 극형도 있었지만부가적으로 이렇게 곤장형이 내려지는 경우도 많았음.곤장은 십자모양으로 된 형틀에 죄인을 엎드리게 묶어놓고 나졸이 서서이런 몽둥이로 죄인의 볼기짝을 때리는 형벌임.으아니, 그런 파렴치한 놈들을 고장 엉덩이나 몇 대 때려준다고?? 할 수 있을거임.그러나 곤장을 단순히 빠따 몇 대 맞는 정도로 생각하면 하면 오산임.곤장은 넓적한 몽둥이로 정해진 만큼 죄인의 엉덩이를 후려치게 되는데,그 강도나 파괴력으로 보면 지금도 행해지고 있는 싱가포르의 "태형"과비슷함. 그냥 멍이 좀 드는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님. 몇 대만 맞아도엉덩이 살이 터져나가고 살이 곤죽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그로인한 평생 흉터+트라우마+신체불구+세상의 조롱거리가 됨은 물론맞는 도중 죽거나, 살아서 다 맞더라도 회복하는 중에 장독이 올라 죽을수도 있는매우 무지막지한 형벌이었음.흥보가에 보면 찢어지게 가난한 흥부가 돈을 받고 남의 장을 대신 맞아주는 대목이 나오는데,그런 흥부도 10대 이상은 약값이 더 나가기 때문에 안 맞아줬다고 함.이런 곤장을 80대, 100대씩 맞는 것이니 사형을 면하더라도 인생퇴갤이라 볼 수 있었음.최한경이는 아주 죽어났을 것임.특히 양반의 경우에는 성범죄로 처벌될 시에 사회적으로는 매장이나 마찬가지였음.성종3년, 군수를 지낸 전직 공무원 황우영이 반가의 부인인 반씨의 방에 들어가강간하려다 반씨의 어머니와 여종이 극렬하게 막아서는 통에 미수에 그쳤음.사헌부에서 황우영을 거론하며"죄질이 매우 좋지 않습니다."하고 고하자 성종 역시 고개를 끄덕임."ㅇㅇ 너의 생각 나의 생각 똑같애.황우영의 직첩을 거두고 앞으로 영원히 등용하지 않으며 3000리 밖으로 유배를 보내라."그러나 성종은 이것으로는 부족하다 생각했는지 황우영을변방 중의 레알 TOP 변방인 회령의 관노로 쫓아냈음.또한 성종은 성범죄에 관해서는 대사면령에서도 빼버릴 만큼 강력하게 의지를 불태움.원래 조선시대에는 국혼을 하거나, 왕자가 태어나거나, 국가에 경사가 있을때는죄인들을 용서하여 풀어주는 대사면령을 내리곤 했음.성종은 왕위에 올라 20살에 요절한 자신의 아버지 의경세자를 왕으로 추존하면서대사면령을 내렸는데, 이때에 사면령에서 제외되는 범죄를 나열하며 다음과 같이 언급함"모반(謀反)·대역 모반(大逆謀叛)한 것, 조부모나 부모를 살해하거나 때린 것,처첩으로서 지아비를, 노비로서 주인을 모살한 것, 고의살인과 독살, 염매(염魅)한 것과,강간·강도 등을 제외하고, 이미 발각되었거나 아직 발각되지 않았거나 이미 결정되었거나아직 결정되지 않았거나 다 용서하여 면제한다."그런데 그 후에 처삼촌의 조카딸을 강간한 최습이라는 사람이 뜻밖에 사면을 받은 것을사헌부 감찰이 찾아냄. 사헌부에서 최습의 죄는 강상의 도리를 저버린 일이니사면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이의를 제기하자 성종은 고개를 끄덕임."대사면령이 지났으므로 용서한 것인데 죄가 매우 중하구나.그렇다면 전가사변(全家徙邊)을 시킬테야."전가사변은 죄인의 일족 전부가 변방으로 이주당하는 강제 내쫓김임.그러나 조선에 유교가 유입되기 시작하면서 같은 성범죄라도 처벌에 따라모순이 발생하기도 하였음. 조선시대에는 남편을 잃고 수절한 여인이나성범죄 위험에 처한 여인이 굴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다 다치거나 죽거나,지조를 지키려고 자결하면열녀비나 상을 내려주곤 했는데,이런 것 때문에 되려 성범죄 피해자들에게 자결하라는 사회의 압박이 가해지곤 했던 것임.게다가 성범죄 피해자가 재혼한 여인이거나과부인데 수절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당시에 저항했다 해도 폄훼당하곤 했음.중종 15년에도 이런 일이 있었음.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을 옹립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영의정박원종에게는 진주라는 첩이 있었음. 당시에 박원종은 이미 고인이 된 상태라진주 역시 남편 없는 과부 신세였음. 그러다가 낭근손이라는 남자가 진주에게 작업을 걸려고 했지만진주는 단칼에 거절함. 진주가 거절하자 화가 난 낭근손은 진주의 집 문을 밀치고 들어갔으나진주가 제때에 도망친 덕분에 봉변을 피할 수가 있었음.조정에서는 이때 진주가 집에 있었다면 낭근손에게 틀림없이 변을 당했을 것이니근손이를 강간미수죄로 처벌하는게 옳다는 의견이 나왔음. 여기까지는 좋았음.강간미수죄는 곤장 100대에 3천리 유배보내는 중형임.그런데 사헌부에서는 낭근손의 형벌을 곤장 80대로 줄여서 올리면서 개소리를 함."처음에는 낭근손이 수절하는 재상의 첩을 강간하려 한 죄로 엄히 처벌하려고 했습니다.그런데 수사를 하다보니 진주가 이미 다른 사람과 재혼해서 아이까지 낳았다고 합니다.그러니 수절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엄한 처녀를 강간하면 중벌을 받는데 똑같은 여인임에도 재가를 했으면 죄를 감해준다는병맛논리에 열받은 중종은 폭풍호통을 침."야 이 놈들아 이게 길가던 놈이 갑자기 여인을 범한 사건이랑 같냐?근손이 진주의 집까지 쳐들어가서 뒤쫓기까지 했는데 이게 강간한 것과 다를 것이 뭐란 말이야?그럼 ㅁㅊ놈들이 여자를 강간해놓고 수절하지 않았다고 몰아붙이면 앞으로 어떻게 할래?다시 조율해서 들고 와. 그리고 앞으로 똑바로 해라. 진짜."이런 일이 있기는 했지만 대체적으로 성범죄는 강력하게 처벌되었음.그러나 조선시대라고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엄하게 처벌받는 성범죄라도왕의 사위나 왕자같은 상위 1%권력층이 가해자일 경우에는 처벌이 쉽지 않았는데임진왜란 크리를 터트려서 ㅂㅅ킹이라고 곧잘 욕을 먹는 선조임금은 자기의친아들을 강간죄로 처벌하는 단호함을 보여주기도 했음.선조33년, 선조는 자신의 아들인 순화군 이보를 처벌하라고 지엄하게 명을 내림."이보의 소행은 차마 형언할 수 없다. 여러차례 살인을 했고,오직 마음을 태우고 부끄러워 할 뿐이었다.오늘 빈전의 곁 여막에서 제 어미의 배비(陪婢)를 겁간했으니 경악을 금할 수 없다.국가의 치욕과 내 마음의 침통함을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이 자식을 둔 것은 곧 나의 죄로서 대신들을 볼 면목이 없다.다만 내가 차마 직접 정죄(定罪)할 수 없으니, 유사로 하여금 법에 의해 처단하게 하라."친아들을 처벌하라는 선조의 처사에 대신들이 나서서 혈육의 정이 있으니화를 참으시라 간언했지만, 선조는 아랑곳하지 않고 백주대낮에 궁인을겁간한 자를 용서할 수는 없다고 처벌을 종용함.결국 선조는 자신의 아들인 순화군을 유배형과 동시에 녹안에 처하는데유배형은 강간죄에 대한 처벌이었으며 녹안은 거기에 더해 낙인을 찍는 것으로,죄인의 범죄사실을 기록하여 놓는 것임. 현대로 따지자면 전과기록이 남는 것과 비슷함.왕자신분에 전과기록이 남는다는 것은제정신으로 얼굴 들고 다니기에는 다 틀렸을 정도로 치욕적인 일이었음.아들이 죄를 짓자 아버지가 나서서 가중처벌을 한 격이었던 것임.기본이 곤장 80대에서 100대, 양반일 경우에는 사회에서 매장,왕자라 해도 전과기록 낙인, 참수, 능지처참, 교수형, 유배, 노비로 전락펌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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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글터] 역대 조선왕들의 사망원인
조선 역대 왕들의 수명과 사망 원인
* 제1대 태조
청심원을 다 삼키지 못하고, 중풍으로 74세에 승하
(아들 태종과의 마찰로 인한 홧병도 그 원인 중 하나)
능은 건원릉 동구릉 안에 있다.
* 제2대 정종
오복(五福;수,부,강녕,유호덕,고종명)을 다 갖추고 63세에 승하
(상왕으로 물러난 후 편안하게 살면서 가장 많은 자식을 둔 왕임)
조선 역대 왕 중 유일하게 북한에 있는 후릉(경기도 판문군 영정리)
* 제3대 태종
상왕으로 물러난 후 태종은 폐렴으로 56세에 승하
부인 민씨도 학질로 56세졸 능은 헌릉
* 제4대 세종
대식가로 당뇨병으로 54세에 승하
(고기를 매우 즐긴 왕. 식단에 항상 고기가 있었음,
그래서 종기가 많이 났음. 그리고 여러 부인을 둔 만큼 성병도 있었다고 함)
소형왕후 심씨와 합장함으로써 조선 최초 합장릉 능은 영릉
* 제5대 문종
등창으로 39세에 승하
아버지 세종을 닮아 몸이 허약했음
능은 현릉
* 제6대 단종
수양대군의 '계유정란'으로 17살 때
서인(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 청령포에서 사사됨
숙종 때 단종으로 복위 능은 장릉
* 제7대 세조
악업으로 문둥병과 불면증으로 52세에 승하
능은 광릉
* 제8대 예종
20세에 복상사 하여 승하
안순왕후 한씨 정사를 즐기다 승하했으며,
형 의경세자(성종의 아버지, 덕종)도 20세에 급사
능은 창릉
* 제9대 성종
등창과 폐병으로 38세에 승하
28명의 자식을 두었고 주색을 즐긴 카사노바였다.
능은 선릉이며, 임진왜란 때 왕릉이 파헤쳐지고 재궁이 불에태워지는 수모를 격는다.
* 제10대 연산군
중종반정으로 왕위에서 물러난 후, 강화도로 유배
강화도에서 괴질로 31세졸
아들 넷은 강화도에서 사사됨
묘는 서울 방학동
* 제11대 중종
거머리로 등창을 치료하다, 울화병과 노환으로 57세에 승하
재위 39년
능은 정릉
* 제12대 인종
이질로 31세 승하 (문정왕후에 의한 독살설도 있다.)
하늘이 낳은 효자로 알려져 있으며, 후사가 없다.
능은 효릉
* 제13대 명종
지나친 방사로 34세에 승하
문정왕후의 아들로 마마보이로 성장 하였으며, 무수리 출신 장씨와
지나친 방사로 인한 졸지에 승하
어머니 문정왕후한테 회초리도 맞았다고 함
능은 강릉
* 제14대 선조
임진왜란 이후 중풍으로 57세에 승하
영조 다음으로 41년간 재위 능은 목릉
* 제15대 광해
가장 불운한 왕, 인조반정으로 물러난 후 유배
그 뒤 십수년을 더 살다가 제주도에서 67세로 졸
(유배생활 중에 시중 드는 사람이 '영감'이라고 불러도 꿋꿋하게 견뎠다 함)
* 제16대 인조
청나라에게 항복한 후, 홧병 걸림
신하들 손아귀에서 울화병으로 55세에 승하
아들 소현세자를 독살한(?) 왕으로 보고 있으며,
재위 중 늘 그것 때문에 신하들에게 시달려 왔으며 능은 장릉
* 제17대 효종
봉림대군
수전증있는 어의의 실수로 출혈사로 41세에 승하
강한의지의 북벌정책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승하했으며,
능은 영릉
* 제18대 현종
청 황제에게 벌금형을 받은 임금으로 학질과 과로로 34세에 승하
'하멜'에 의해 조선이 유럽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능은 숭능
* 제19대 숙종
어릴적 천연두, 후유증, 노인병, 등창, 심한 당파 싸음으로인한 스트레스로
60세에 승하 (인현왕후, 장희빈과의 문제도 있었을듯)
풍류를 즐겼던 숙종은 봄이면 3000 후궁을 거니리고 큰잔치 별러다한다
능은 명릉
* 제20대 경종
게장을 먹다 급사하여 37세에 승하
장희빈이 사약을 받기 전 아들을 보게 해달라고 하자 거절하다.
인정에 끌려 세자를 데려오자 갑자기 경종의 하초 잡아당겨
성기능을 잃어 내시와 같았다 한다.
능은 의릉
* 제21대 영조
장수하였으며 치매로 83세에승하
세자를 폐위하여 서인을 강등 한후 뒤주속에 가둬 굶어죽게 한 일과
늙어 노망 부린것이 오점으로 남았으며,
능은 원릉
* 제22대 정조
개혁적인 군주, 사도세자(장조)의 아들
등창으로 49세에 승하(독살설도 있지만,
최근 자료로 보아 등창으로 승하한게 맞다고 봄)
안경을 처음 쓴 임금
능은 건릉
* 제23대 순조
매독3기로 45세에 승하
이때 나라는 콜레라가 창궐했으며, 안동김씨 세도가 시작되었다.
능은 인릉
* 제24대 헌종
23세에 술과 여자로 보내다 폐결핵으로 승하
능은 경릉
* 제25대 철종
세도정치에 의해 졸지에 왕이 된 강화도령
33세 폐결핵으로 승하
강화도를 그리워 하며, 안동김씨 그늘에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살았다.
능은 예릉
* 제26대 고종
황제 자리에서 물러난 후
1919년 일제에 의해 독살되어 67세에 승하
능은 홍릉
* 제27대 순종
몸이 허약했고, 남성 구실을 못했다 함..
1926년, 라디오 들으면서 심장마비로 53세 승하
능은 유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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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펌] 반MB의 도그마를 넘어
mbc에서 하고 있는 드라마 중에 ‘빛과 그림자’란 것이 있다.내용은 차치하고 드라마에 등장하는 주요 기관의 벽 위로 박정희의 사진이 걸려 있고 오랜만에 ‘채홍사’란 용어가 등장하기도 하는 드라마다. 이 단어, 기억하시나? 채홍사 : 연산군 당시 전국의 미녀와 준마를 수집해 왕에게 진상하게 한 관리의 명칭. 짧게 줄여 왕 전용 포주. 박정희에게도 이런 업무를 하던 인원이 있었다. 독재정권이 국민에게 부여된 헌법적 권리를 유린하면서 ‘경제발전’이라는 미명하에 일부 특권층과 재벌들에게 특혜를 베풀거나, 맘에 들지 않는 기업이나 언론은 문닫게 만들거나 빼앗아버리는 일들이 버젓이 일어났음을 현재의 유권자들은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최근의 MBC 제작거부 사태나 부산일보 사태와 같은 일들이 버젓이 2012년의 대한민국 사회에서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상황은, 결국 여전히 지금도 이 사회가 독재정권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함을 증명하는 것이다. 박정희 이후 전두환과 노태우에 이어 김영삼 정권에 이르기까지 권력은 여전히 일부 소수의 특권층에 부여되었고 그들의 경제적 부를 증가시키기 위해 더 많은 착취와 편법과 비리가 동원되어 왔다. 이는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표면적으로는 많이 완화되었던 것처럼 국민들에게 착시효과를 불러일으켰지만 불평등한 사회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노력은 등한시했던 것이 사실이다. 실제 상황이 나아진 건 없었다. 박정희가 욕을 먹으면서도 여전히 적지 않은 국민들에게 ‘존경하는 인물’로 자리잡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원인과 배경이 있겠지만 그 중 핵심은 “탁월한 지도력으로 대한민국 경제를 살렸다!”는 것이다. 뭐 우리끼리야 코웃음을 칠 일이지만 여전히 그렇게 믿고 있는 국민들은, 특히 노년층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포진되어 있다. 그들은 “권력을 남용하고 민주화에 역행한 점은 인정하지만 그 시기는 화끈한 지도력으로 밀어붙여야 국민 모두가 살아남을 수 있는 거의 폐허인 상황 아니었나?”라고 반문하기도 한다. 그러나 가난했던 6,70년대 대한민국 경제를 살려낸 주역은 박정희와 일부 재벌들이 아니라 봉제공장에서 코피 쏟으며 일하던 우리들의 누이였고, 제대로 된 안전장치도 없는 현장에서 철야를 하던 우리들의 형과 삼촌들이였으며 아무런 연관도 없는 월남의 전장에서 목숨값으로 몇백불씩 부쳐오던 파병용사들이었다. 박정희가 망쳐놓은 경제구조가 전두환과 노태우를 거치면서 재벌들과 밀월관계를 유지하면서 온갖 통치자금과 노후대비용 비자금 축적의 수단으로 국민들에게 돌아가야 할 몫을 빼앗아 살림살이 거덜내기를 반복하였고 오만방자해진 정권의 비호 아래 재벌들의 탐욕은 끝간 데 없이 이어져 문어발식 기업확장에다 부동산투기가 겹쳐 거래은행들은 부실해지고 외환보유고까지 바닥나 결국 외환위기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았던 것이다. 그러니 박정희는 그냥 욕을 먹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경제를 망친 역사적 주범’이라는 사실에 대해 두고두고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책임이 바로 우리에게 있다. 만약 박정희 독재정권이 아닌 민주화정부가 구성되었더라면 장기적인 계획경제정책에 따라 사회불평등을 최소화하고 일부 재벌들이 아닌 중소기업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이 가능했을 것이고 좀 더 빨리 민주화가 사회저변으로 확산되었을 것이다. 닮았네 닮았어 닮았네 닮았네 닮았어~♬ 박정희 이야기를 꺼내 놓은 이유는 ‘반MB’, 또는 ‘반MB전선’을 외쳐대는 입들의 뒤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박정희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기 때문이다.혹시 대한민국 사회가 김대중정부와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상당히 평등해졌다고 믿고 계신가? 이명박 정부 4년이 웃자란 민주화를 모두 거세해버렸다고 믿고 있는 것은 아닌가?혹시 MB로 대변되는 수구이익집단의 정치권력을 교체하고 그들의 힘을 약화시키면 대한민국사회가 꽃피는 봄날이 올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계신가?대단히 미안하지만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다. 정치공학적으로 쉽게 설명을 드리자면 이미 대한민국 사회는,초헌법적인 재벌과 정치검찰, 만인 아니 만 명에게만 평등한 사법부에 포위되어 있으며,월가를 중심으로 한 투기자본세력들이 먹고 튀기 너무도 용이한 경제시스템을 보유하고 있으며,외국계 금융자본은 언제나 노동자들의 고혈을 쥐어 짜서 단기성 이익 확대와 주주배당이익의 극대화에만 혈안이 되어 있으며,성인 인구 중 90%가 고등교육 이상을 받아 전 세계에서 사례를 찾기 힘든 집중교육으로 배출된 엘리트들이 넘쳐나지만, 그들 대다수가 전혀 창의적이지도 않거니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해 볼만한 영역이 제공될 수도 없는,구조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다. 대다수 아이들은 하루에 열두 시간 이상을 의미없는 서열식 경쟁체제에 찌들어 혹사당하며 시험기계로 전락한지 오래 되었고 결국 초중고, 대학을 합쳐 연간 자살 학생의 수가 500명을 넘고 있다. 노동자들은 여전히 산업현장에서 1년에 3천 명 이상이 죽어가고 있고, 인구 10만 명 당 1천 명 이상이 우울증을 호소하며 실제 한 해 5천 명 가까이 우울증 등으로 자살하는 대표적인 우울증국가가 되었고 이는 점점 증가 추세에 있다. 2006년 자료인데, 현재도 계속 증가 추세에 있다. OECD 국가중 1위다. 한국통신에서 민영화된 이후로 악질기업의 대명사처럼 되어버린 KT. 얼마 전 이른바 ‘퇴출대상자 관리프로그램’이라는 것이 KT 내부고발을 통한 근거자료로 드러났다. 그럼에도 KT는, 본사의 지침과는 관련이 없는 것처럼 발뺌을 하다가 최근 노동부의 특별근로감독을 받으면서 ‘명단을 만들고 관리했음을 시인’하는 일이 있었다. 그 프로그램의 구체적인 내용을 일부 소개하면 “대상자를 빨리 퇴사로 유도하기 위해 같이 술을 먹고 음주운전을 하도록 유도하여 경찰에 신고하라!”, “쉽게 흥분하는 성격을 이용하여 모멸감을 주는 발언을 지속적으로 전달함으로서 싸움을 하게 만들거나 스스로 퇴사할 수 있도록 하라!”는 등의 내용까지 담겨 있다.반인권적이고 반노동적이며 반사회적인 KT의 이면이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일들이 KT에서만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노조 조직이 없는 기업들의 경우 일부 관리직을 제외하면 모든 업무가 비정규직으로 채워지는 이른바 “자본에게 꿈의 공장”인 기업들이 곳곳에 생겨나고 있고 그나마 민주노조가 있던 기업에도 복수노조 허용 이후 이른바 어용노조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다. 삼성재벌은 노동조합 자체를 건설하지 못하도록 추진주체들을 납치하거나 협박하면서 초헌법적인 행태를 반복하고 있지만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있고, 현대차는 “2년 이상 된 동일업무 비정규직 노동자를 정규직으로 전환할 것!”이라고 대법원에서 판결한 것을 쌩까고 있으며, 이에 분노하여 파업을 벌였던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수십억원의 손해배상소송을 청구했다. KTX 여승무원 문자 해고 통지. 이번 총선에서 민통당이 과반이상의 의석을 휩쓸거나 아니 헌법개정이 가능한 3분의 2 이상을 얻게 된다 한들 그것이 이런 사회구조에 어떤 변화를 가능하게 할 것이라고 믿고 계신가?총선에서의 바람을 연말까지 끌고 가서 여러분들의 바램대로 문재인이나 안철수가 대통령이 된다 한들 위에 몇 가지 언급한 것처럼 추악하고 뒤틀린 대한민국 사회가 개조가 가능하다고 믿고 계신가? 아니 어쩌면 혹시 “근본적으로 사회 개조는 어차피 불가능한 일! 속 터지고 눈버리는 일들만이라도 안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라는 소박한 꿈을 가지고 계신가.‘반MB전선’ 혹은 ‘반한나라당 전선’ 이 교조화하면 할 수록 자유주의 보수정당들의 정치이벤트에 놀아날 수 밖에 없는 법이다. 아이들이 고통 받지 않고 학교 가는 것이 너무나 즐거운 사회.파견근로제 등 비정규직법안을 근본적으로 개정하거나 폐기시키고 노동자들이 차별 받지 않고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보장받으며, 눈치보지 않고 칼퇴근할 수 있어야 하고, 경영에 부분적으로 참여하며, 부당노동행위를 하는 경영진들에게는 벌금이 아닌 징역형이 가능한 사회.여성,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들이 부당하게 차별 당하지 않고, 존중 받고 권리를 보장받으며 행복해 하는 사회. 학력이나 학벌, 지역 등으로 차별 받거나 기회의 불평등이 생겨나지 않는 공정한 사회.교육뿐 아니라 의료와 주택문제만큼은 국가가 책임짐으로써 삶의 대부분의 시간과 에너지를 비효율적인 부분에 소모시키지 않고 보다 창의적인 역할을 만들어내는 사회 를 만들어내야 한다. 국방의 경우 장기적으로 모병제로 전환하며 단계적으로 군인의 수를 축소하고 현재의 군인과 의경에게는 최저임금을 보장하여야 하고,당장 모든 핵발전을 2040년까지 중단하겠다는 것을 선언하고 대체가능에너지 체제로 돌입해야 하며,모든 국민이 산재보험과 고용보험에 가입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야 하고,세원확보를 위해 대형 종교시설과 부자들의 자산소득에 세금을 부과하고 법인세 중 재벌들에게 집중되어 있는 각종 감면혜택을 철폐해, 본래의 법인세율만큼 납부하도록 해야 한다.또한 이번 총선과 대선은 한미FTA를 폐기시키고 체결되어 있거나 예정에 있는 모든 FTA에 대해 전면 재검토할 수 있는 정치인을 선택하는 선거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사회가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시나?전혀 불가능하지 않다. 가능해, 가능하다고! 우리가 ‘반MB’와 ‘반한나라당’의 도그마를 뛰어 넘어 ‘포스트 MB’ ‘새로운 사회체제로의 상상’을 함께 꿈꿀 수 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그러니까 쫄지 말자. 담력만이 아니라 상상력도. 우린 ‘MB 이후’도 생각해야 한다.키노 http://www.ddanzi.com/blog/archives/607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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