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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한국전쟁 장진호 포위망 돌파 ... (7부)
제8군과 미 제10군단으로 하여금 북한군을 포위,
격멸하여 전쟁을 승리로 종결지으려던 유엔군의 크리스마스공세는
중공군의 전면개입이라는 예기치 않았던 사태 발생으로 수포로 돌아갔다.
이미 공격준비를 완료한 중공 제4야전군의 18개 사단은 25일 밤부터
서쪽의 제8군에 대해서 공격을 개시하여 그 주공을 덕천지역으로 지향함으로써
제8군의 우측방을 위협했다. 그리고 중공 제3야전군 예하 12개 사단은 27일 밤부터
제1해병사단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여 긴 애로(隘路:좁고 험한 길)상에서
진지 사이를 차단하고 포위했다.
여기서 유엔군은 작전방침을 공격에서 방어로 전환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 무렵의 장진호부근의 전황에 관해서 북한군 史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서부전선의 반격과 더불어 동부전선 장진호지역의 인민군과 중공군의
반격이 11월 27일에 개시되었다.
장진호 반격은 처음부터 어렵고 치열했던 것이 특징이었다.
인민군 장병은 혹한과 풍설을 헤치고 해발 1000m의 험준한 산을 돌파하면서
작전을 해야했다. 11월 27일 밤, 장진호 서쪽과 서남지역에서 공세로 전환한
인민군과 중공군의 연합부대는 유담리와 사웅령의 유엔군에 대해서 강력한 타격을
가함과 동시에 양쪽에서 하갈우리의 유엔군을 압박했다...
중공군부대는 하갈우리 남방지역에서 유엔군을 공격함과 동시에
장진-함흥간의 도로를 여러 곳에서 차단하여 유엔군의 증원과 철수를 저지했다.
이리하여 장진호 일대에서 미 제10군단 예하의 주력부대는 우리에게 포위되었다."
전세계의 이목이 장진호에 집중되었다.
일본 아사히 신문은 1950년 12월 1일 "미 해병 고립되다"라는 제목으로
미 해병대는 30일 장진호지역에서 중공군에 포위 고립되었다고 보도했다.
미국 신문들은 일제히 장진호 포위 기사를 내보냈고, 급기야 "해병대원 전멸"이라는
뜬금없는 소문마저 퍼지자 해병대 사령부에는 해병대원의 가족들로부터
문의 전화가 쇄도하여 교환대는 마비될 지경이었다.
맥아더 원수가 트루먼 대통령에게 최악의 경우 원자폭탄의 사용을 고려해보라는,
이에 트루먼이 원자폭탄의 사용도 검토대상이라 말하자 전세계가 3차대전 발발을
염려하게 되었다. 이렇게되자 12월4일 영국 애틀리 수상이 미국으로 날아가 핵폭탄
사용을 만류하고 나서는 등 전세계가 한반도를 지켜보고 있었다.
제1해병사단은 1개의 도로상에 분산되어 모두 중공군의 포위망 속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당초의 목표인 무평리로 전진하는 일은 이제 가망이 없는 상태였다.
그리고 미 제10군단의 전선은 동서 400km 가까이 늘어져있었기 때문에 주공인
해병사단이 서부전선의 중공군 배후로 우회한다는 미 제10군단의 최초의 구상은
실현되기 어려웠다. 사태를 중시한 맥아더 원수는 긴급히 주한 제8군 사령관과
제10군단장을 일본 동경으로 불러 28일 밤부터 아침까지 밤을 새워 정세를 검토했다.
회의를 마친 맥아더는 다음과같은 보고서를 본국의 국방장관에게 제출했다.
1. 공격에서 방어로 전환한다.
2. 전혀 새로운 형태의 전쟁에 직면했다.
3. 사태는 일개 전선 지휘관의 결정 범위를 넘어 전세계 여론을 고려해야 한다.
4. 유엔군 사령부는 능력의 범위 내에서 모든 노력을 다했으나
이제는 그 한계점에 이르렀다.
이 보고는 중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것은 전쟁 양상이 국지전에서 중공과 미국과의 전면전쟁으로 확산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미국이 동원할 수 있는 예비병력은 본토에 있는
제82공수사단 뿐이었으며 소집된 지 얼마 안되는 주 방위부대도 바로 사용할 수
없었던 실정이었기 때문에 사실은 미국이 군사적인 곤경에 처해 있던 때였다.
그리고 극동지역 해군(사령관 터너 조이 중장)은 전반적인 정세,
특히 미 제10군단의 상황으로보아 아무래도 해상철수가 필요할 것으로 예견하고
유엔군 사령부가 결정하기 전에 이미 실무자들에게 구체적인
흥남 철수계획을 수립하도록 명령하고 있었다.
동경에서 돌아온 미 제10군단장 알몬드는 제1해병사단에게 방어로 전환할 것을 명령했다.
맥아더 원수와 워커 중장
11월29일 저녁, 제1해병사단장 스미드 소장은 10군단으로부터
"한 개 연대를 유담리에서 하갈우리로 이동시켜 장진호 동안에 고립되어있는
육군부대(페이스 부대)를 구출하고 하갈우리-고토리간의 도로를 개통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리고 동시에 장진호지역의 군단병력을 모두 제1해병사단장
스미드 소장의 지휘하에 들어가도록한다는 통보도 받았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29일 아침) 제1해병사단은 이미 공격을 중지하고,
유담리로 가는 보급로 개통에 노력하고 있었다. 즉 유담리의 제7해병연대는
사단명령에 따라 제5해병연대 A중대, 제7해병연대 B, G중대를 합쳐 1개 혼성대대로
편성하여 덕동고개의 제7연대 F중대(바아버 대위)를 구출하고
하갈우리-유담리간의 도로를 개통하려고 했다.
그러나 강력한 중공군에 저지되어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단장은 1개 연대 규모의 병력을 투입하지 않고서는
유담리 - 하갈우리간의 도로 개통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오후 3시 45분에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제5해병연대는 유담리지역을 확보하라. 필요하다면 현재의 배치를 수정해도 좋다.
제7해병연대는 전력을 다해서 신속히 하갈우리 도로를 개통하라."
이러한 사단명령에따라 제5, 제7해병연대는 긴밀히 협력하여
합동작전계획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앞서 말한 군단명령은 그 이후인 저녁 때 사단 사령부에 도착 했는데,
이에 관해 미해병대 史에는 "이미 하달한 사단명령이 군단명령과 일치했기 때문에
하등의 변동사항이 없었다"라고 기술되어있다.
그러니까 상급부대인 군단에서 "방어로 전환하라"는 명령이 있기도 전에 해병사단이
먼저 공격을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어차피 동일한 명령이었다는 말이된다.
미 제10군단장은 맥아더 원수와 회담 후, 철수가 확정된 다음 명령을 하달했을 것이다.
맥아더 원수가 철수결심을 한 것은 29일 아침이었는데, 그 무렵 해병사단은 이미
공격을 중지하고 유담리로 가는 보급로 개통에 힘쓰고 있었던 것이다.
"제5해병연대는 유담리지역을 확보하라"는 사단명령은 군단의 철수명령이 있기 전에
해병사단이 상황을 판단해서 독단으로 내린 명령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또한 스미드 사단장은 알몬드 군단장이 1개 연대를 보내어 장진호 동안으로 보내어
고립된 육군부대를 구출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이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중공군 3개 사단에 포위 고립된 제5, 제7연대중 하나를 유담리에서
빼낸다는 것 자체가 말이안되며 두 연대가 유담리에서 포위망을 돌파해 하갈우리에
들어오지 않는 한 고토리까지의 주보급로를 개통할 병력이 하갈우리에는 없었다.
거기에다 28일 밤부터 공격을 받아 근 5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다시 사단급 공격이 예상되는 마당에 병력을 빼내어 페이스 부대를 구출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던 것이다.
알몬드는 자신의 군단이 처한 참담한 상황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 육군 제7보병사단장인 데이비드 바 소장도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해병대가 제공한 헬기를 타고 직접 페이스 부대를 방문하고 난 후에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다음날인 30일 아침,
미 제10군단에 배속된 해병대 담당 고급참모이자 상륙전 전문가인
에드워드 포니 해병대령은 고토리로부터 함흥으로 돌아와 장진호지역의 상황을
자세하게 군단장인 알몬드에게 설명했다. 포니 대령의 상세한 보고에 충격을 받은
알몬드는 즉시 경비행기를 타고 하갈우리로 날아갔다. 이날 오후,
알몬드 제10군단장은 스미드 제1해병사단장, 데이비스 바 미 육군 제7보병사단장 및
부사단장을 불러 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 석상에서 알몬드는,
1. 장진호지역을 포기하고 함흥으로 철수한다.
2. 함흥으로의 철수는 신속하게 진행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제1해병사단장에게는 철수에 장애가되는 모든 장비를 파기하는 권한을
부여하고 필요한 것은 나중에 공중보급으로 지원한다고 약속했다.
알몬드 군단장은 장애가되는 모든 장비들을 버린 채 철수하고 필요할 때
항공기로 다시 공중보급을 해준다하였지만
스미드 사단장은 장비들을 고스란히 버리고 간다는 것에 어이가 없었다.
이에 대해 스미드 사단장은
1. 철수 속도는 부상자를 후송하는 능력에 달려있다.
2. 편제장비와 화기를 사용하여 해안까지 전투를 지속하며 포위망을 돌파해야 하기
때문에 그것들을 버릴 이유가 없으니 장비의 대부분을 그대로 가지고 가겠다고 말했다.
부상자는 반드시 구출한다는 것이 미 해병대의 전통이었기 때문에 사단장의 머리에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부상자의 후송문제였다. 그리고 알몬드는 스미드 사단장에게
장진호 동안에 고립되어 있는 육군 3개 대대(페이스 부대)의 구출을 명령했으나
다시 검토한 결과, 유담리의 병력이 하갈우리로 철수해 오기 전까지는 페이스 부대에
대해서 충분한 조치를 취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되었다.
이제 페이스 부대는 그 누구로부터의 도움도 기대하지 못한 채 스스로 포위망을
빠져나와야하는 처지가 되어 버렸다. 스미드 사단장은 유담리의 해병연대들이 모두
하갈우리에 도달할 때 까지도 페이스 부대가 탈출하지 못한다면 1개 해병연대를 보내
그들을 구출해낼 생각을 하고 있었다.
회의중 다음과 같은 군단명령이 하달되었다.
군단은 적과 최대한의 접촉을 유지하면서 그주력을 함흥-흥남지역으로 집결한다...제1해병사단은 먼저 하갈우리-수동간의 도로를 확보하면서 하갈우리로 집결시켜라.
이러한 군단의 명령에따라 해병사단은 30일 저녁 7시 20분, 제5, 제7해병연대에게
전보로써 "합동작전명령 제1-50호를 조속히 시행하고 두 연대는 상호 협력하여
신속히 하갈우리로 철수하고 그후의 철수를 준비하라"고 명령했다.
합동작전명령 제1-50은 29일 오후의 사단명령에 따라 제5, 제7해병연대가 서로
협력해서 작성한 명령인데, "유담리진지를 축소시켜서 제5해병연대가 이를
확보함으로써, 제7해병연대가 하갈우리 공격을 개시하는데 유리한 태세를 갖춘다"는
것을 결정한 것이었다.
양연대가 하갈우리로 철수하는 첫 단계는 이 명령을 실행하면 되는 것이었다.즉 제5해병연대가 유담리 방어진지 모두를 책임지고, 그동안 제7해병연대는
하갈우리까지의 도로를 개통시키는 작전을 신속히 개시하라는 명령이었다.
그래서 제1해병사단의 100km에 달하는 고난의 철수작전은 유담리의 2개 해병연대가
하갈우리로 향하는 작전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때 하갈우리 지휘소에서 작전을
지휘하던 스미드 사단장은 중공군의 포위망을 돌파하여 약 100km에 달하는 도로를
어떻게 철수할 것인가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었다.
그것은 이제까지 한번도 겪어 보지 못한 고통스러운 작전이었다.
유담리에 있는 2개 연대를 먼저 하갈우리로 집결시켜야 했다.
많은 부상자를 수용하고 항공기로 후송하기 위해서는 병상과 활주로를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제5, 제7해병연대가 긴 애로지역을 돌파하면서 이동하기 위해서는
인적, 물적 전력을 회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병력 보충과 각종 보급품의 공수도
필요했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하갈우리의 진지를 확
보하는 것이 절대로 필요했다.
사단장은 긴 애로상의 하갈우리진지의 필요성을 일찍이 깨닫고 확보를 위해 노력해 왔다.
활주로 건설의 굴착작업과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까지 증원부대(드라이스데일)를 보낸
것도 최악의 사태에 대처하기 위한 스미드 사단장의 깊은 생각에서 나온 것이었다.
스미드 장군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하갈우리에 충분한 양의 탄약과 보급품을
비축하고 야전 활주로 건설을 독려했으며, 알몬드 군단장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자신 휘하의 연대들을 뿔뿔이 흩트리지 않으려 노력했던 것이다.
제7해병연대장 호머 리첸버그(Homer Laurence Litzenberg)대령(좌)
제5해병연대장 레이몬드 머레이(Raymond L. Murray)중령(우)
유담리에는 제5해병연대장 레이몬드 머레이(Raymond L. Murray)중령과
제7해병연대장 호머 리첸버그(Homer Laurence Litzenberg)대령이 있었다.
두 사람은 모두 역전의 지휘관으로 다음해
1월에는 각각 대령과 준장으로 진급될 예정이었다.
유담리와 하갈우리의 사단지휘소 사이가 중공군에 의해서 차단되었기 때문에
유선전화는 불통이었고, 무선통신도 지형상의 장애 때문에 거의 불통이었다.
사단병력의 절대다수에 해당되는 2개 연대가 고립되어 있었고, 더구나
사단 사령부와의 통신 연락도 제대로 되지 않은 상황하에서는 부사단장이
현장에가서 지휘하는 것이 정상적이었으나 당시 부사단장은 긴급한 용무 때문에
본국으로 귀국중이었다. 그렇다면 선임연대장을 통합지휘관으로 임명하여
지휘하게하는 것이 옳은 일이었으나 통합지휘관은 임명되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리첸버그 준장은 당시를 회고하여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제5, 제7해병연대는 각각 별도의 사단명령에 의해서 행동했다.
타연대로 가는 명령은 이쪽 연대에도 통보되었다.
그리고 제11포병연대 4대대(155mm곡사포)는 일반지원 포병으로서
어느 연대의 지휘하에 들어가지 않았다. 우리 두 연대장은 제5연대나 제7연대
지휘하에 함께 위치하며 협조했다. 필요하면 포병 제4대대장을 불러서 토의했다.
이와 같이 협조는 매우 원만하게 이루어졌고 의견의 불일치라든가 하는 난점은 없었다."
훗날, 스미드 사단장도 선임지휘관을 임명할까도 생각했었지만 구태여 그럴
필요까지 있겠나 싶어 임명하지 않았다한다. 이것은 두 연대장의 인격이 훌륭하고
해병대가 가족적이며, 평소에 서로 잘 알고 단결력이 강하여, 미국인들이 말하는
개인의 체면보다는 합리성과 팀웍을 존중한다는 좋은 본보기 였다.
제7해병연대가 유담리 - 하갈우리간의 도로를 돌파하여 하갈우리로
전진하기 위해서는 먼저 방어진지 남쪽 출구의 요충지를 확보해둘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7연대장은 1246고지에 배치했던 3대대를 차출하기로 했다.
이를 위하여 5연대장도 그 배치를 변경해야 했다.
30일 아침, 해롤드 로이스(Harold Sigward Roise)중령의 제5해병연대 2대대가
먼저 그 배치를 변경했다. 대대의 우측방은 3대대와 인접된 상태로 그대로 두고
좌측방을 철수시켜 1249고지에 진지를 구축했다.
윌리엄 해리스(William Haris)중령이 지휘하는 제7해병연대 3대대는 종래의
진지로부터 이탈하여 유담리 남방 약 4km지점에 새로운 진지를 구축할 예정이었다.
한편 사단장의 지침에 따라 부상자를 후송하기 위하여 30일 오전 9시부터 유담리에
경비행기용 활주로 건설을 시작했다. 이것은 사단장이 얼마나 부상자 후송에 마음을
쓰고 있었는가를 나타내는 것이다. 155mm곡사포대대의 TD-18형 도우저를 사용하여
작업을했으나 활주로도 12월 1일에는 중공군의 포 사정권 안에 들어가
불과 한두 번만 사용되었을 뿐이었다.
중공군은 로버트 태플릿(Robert Donald Taplet)중령의 제5해병연대 3대대에
대하여 30일 이른아침부터 공격을 해왔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같은날 오후, 군단은 사단에 대해 종래의 계획을 변경하여 유담리의 2개 연대를
동시에 하갈우리로 신속히 철수할 것을 명령했다. 그래서사단은, 저녁 7시 20분, 두 연대에게 동시철수를 명령했다. 두 연대는 다시 합동계획을
작성하여 12월 1일 아침, 명령을 하달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5, 제7해병연대는 유담리 - 하갈우리간의 도로를 경유하여 신속하게 하갈우리로
전진한다. 먼저 보병이 도로 양측의 요충지를 점령하고, 야음을 이용하여 일부병력이
적의 간격을 돌파해 산길을 따라 은밀히 덕동고개로 진출하여, 바아버중대(F중대)를
구출함과 동시에 고개의 요충지를 점령하여 주공의 돌파를 엄호한다.
전위대대는 제5해병연대 3대대로, 산길을 기동하는 부대는
레이몬드 데이비스(Raymond Gilbert Davis)중령의 제7해병연대 1대대로 하고,
남쪽으로 공격하기 전에 제7해병연대 3대대의 주력을 가지고 1542고지를,
별도의 1개 중대를 가지고 1419고지를 탈취하여 주력이 공격개시할 발판을 마련한다.
철수개시는 12월 1일 오전 8시, 제7해병연대 1대대는 1일 저녁에 출발한다.
제5해병연대 3대대는 오전 8시에 철수를 개시하고 제7해병연대 3대대를 추월하여
전위부대가 되어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전진한다.
제5해병연대 1대대는 9시 30분에 철수하여 1100고지-장진호 서남단에 진지를
점령하여 주력의 북쪽을 엄호하고 주력이 통과한 후에는 좌측을 엄호한다.
제5해병연대 2대대는 당초 1294고지를 확보하여 제5연대 3대대와 1대대의 철수를
엄호하고 1276고지에서 제7해병연대 1대대와 교대한 후 주력의 서북방면을 엄호한다.
주력이 통과한 후에는 후위가 된다.
제7해병연대 1대대는 제5해병연대 2대대와 교대한 후, 1일 저녁에는 1419고지의
제7해병연대 3대대 H중대를 초월하여 야지기동으로 중공군의 간격을 돌파하여
바아버중대진지로 전진, 이 중대와 협조하여 고지의 요충지점을 확보한다.
제7해병연대 3대대는 1542고지, 1419고지를 확보하고 제7해병연대 1대대와
제5해병연대 3대대의 초월을 지원하며, 그 후 주력의 우측을 엄호한다."
그리고 선두에는 76.2mm주포를 장비한 유일한 전차인 M4A3셔먼 전차를 첨병부대와
같이 전진시키기로 했다. 그 승무원은 이미 하갈우리로부터 헬리콥터로 도착되어 있었다.
계속적인 화력지원을 위하여 105mm곡사포부대는 축차적으로 전진하기로 했다.
즉 행군종대 선두에서 가까운 곳에 곡사포 1개 포대를 추진시킨다.
이 포병은 이동 구간의 중간지점인 신흥리 부근에다 포를 방렬하여 후속부대를
위한 엄호사격을 실시하고, 다른 포병부대의 이동중에 엄호사격이 중단되지 않도록 한다.
제11포병연대 3대대(1개 중대 감편)는 가급적이면 신속하게 전진하여 신흥리부근의
사격진지를 점령한다.
제11포병연대 1대대는 최초 지원사격 임무를 담당한 후 후방에서 전진한다.
M4A3E8셔먼 전차와 BAR사수 (미 육군 1951년)
155mm곡사포는 너무 무겁고 너무 커서 민첩한 행동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출발전에 탄약을 다 발사해 버리고, 거대한 대포나 견인차가 도로를 폐쇄하지 않도록
차량종대의 최후미에서 전진하기로 했다.
이 작전을 위하여 소총부대의 병력을 가급적 많이 확보해야 했는데,
이 병력은 주로 포병부대에서 차출하여 26개의 소총소대를 임시로 편성하였으며,
소대장은 대부분 포병장교로 임명되었다.
특히 제11포병연대 4대대(155mm곡사포대대)에서는 9개의 소총소대를 편성하여
그 중 3개 소대를 제5해병연대에, 2개 소대를 제7해병연대에 배속하고 4개 소대를
제11포병연대 4대대장으로 하여금 지휘토록하여 차량종대를 엄호하도록 명령했다.
도중에서 발생할 것으로 예상되는 부상자와 덕동고개의 바아버중대의 부상자를
후송하기 위하여 미리 차량의 여분을 준비해 두어야 했다.
그래서 차량에는 부상이나 동상에 의해서 보행이 불가능한 병사만을 탑승시키기로 했다.
이 때문에 제5, 제7연대장 두 사람은 걸어서 이동했다.
보행이 가능한 부상자는 차량종대의 양측에서 행군하면서 엄호임무를 수행토록 했다.
그리고 승차하고 있는 부상자에게는 화기를 휴대시켜 릴요시는 사격을 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전사자의 시체는 부득이 유담리에 남겨 두기로 하고 85명의 장병에 대한
영결식을 치른 다음 매장했다. 사상자를 방치하지 않는다는 것은 미 해병대의 귀중한
전통이었다. 이 전투에서도 소대장과 분대장이 위험을 무릅쓰고 사상자를 후송하려고
하다가 자신이 사상된 예는 무수히 많았다. 사상되더라도 반드시 후송된다는
신뢰감, 서로 전우의 뼈를 묻어 준다는 뜨거운 전우애는 미 해병대의 사기와 단결력의
큰 지주가 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경우는 정말로 부득이한 예외였다.
그리고 유담리에 매장된 시체는 휴전 후 회수하여 본국으로 보내졌다
송시륜장군
중공군은 27일 밤 유담리진지를, 28일과 30일 밤에는 하갈우리를 공격했으나 어느 것도 성공하지 못하고 많은 손실을 입은 후로는 전력회복과 차기 작전준비를 하고 있었다.
미 해병사단을 분산시켜 포위는 했으나 각개 진지의 저항이 의외로 완강하였기 때문에 중공군은 마치 밤송이를 안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유담리에서 병력, 장비, 차량 등의 부산한 움직임과 보급품의 공중투하와 헬리콥터에 의한 부상자 후송 등은 독 안에 든 쥐와 같은 해병대가 탈출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바라보면서 작전을 지휘하고 있던 송 시륜은 상황판단 결과 다음과 같은 구상을 했을 것으로 보여진다.
1. 미 해병사단의 주력은 포위망에서 탈출하려 하고 있다.
2. 우리 집단군은 이것을 황초령 이북에서 포착, 섬멸한다.
3. 주공격목표는 하갈우리 해병대로 한다. 이를 위하여 주도면밀한
작전준비를 갖추고 조기에 협조된 공격을 한다.
4. 유담리의 해병대에 대해서는 미군이 철수를 개시한 다음,
긴 애로상에서 공격을 가하여 포착, 섬멸한다.
5. 황초령에서 해병사단의 도로를 완전히 차단한다.
중공군은 병력을 하갈우리. 고토리, 황초령을 향하여 추진시키고
유담리 - 하갈우리간의 도로 연변의 진지를 강화하여 유담리에서
해병대가 탈출을 시작하면 즉시 이를 공격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1950년 12월 1일 아침,
제5해병연대 제1, 제3대대는 북쪽으로부터의 중공 제79사단의 공격을 방어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5해병연대 2대대는 유담리 남서의 1294고지를 점령하여 서쪽으로부터
중공군 공격을 저지하고 있었다. 제7해병연대 1대대는 1276고지부근을 점령하여 서쪽을
엄호함과 동시에 1일 밤으로 예정된 덕동고개로 전진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제7해병연대 3대대는 1252고지와 1419고지를 공격하기 위하여 공격준비에 들어갔다.
두 연대의 근무지원부대와 포병들은 차량의 행군준비에 바빴다.
아침 8시,
제5해병연대 3대대에 이어 9시 30분에는 1대대가 예정대로 철수를 시작했다.
3대대는 G중대 엄호하에 질서정연하게 이탈했다.
최후에 남은 1282고지상의 G중대는 중공군과 수류탄전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이탈이 어려울 것으로 생각되었으나 항공기의 위협비행(실탄은 사용하지 않았다)으로
중공군이 주춤하는 사이에 중대가 이탈하여 안전한 위치까지 철수했을 때,
전방항공통제관의 요청에 따라 실탄을 사용한 지상공격을 감행했다.
그리고 포병 관측장교는 항공기와 협조하여 G중대에 접근하려는 중공군에게
105mm포 사격을 가하고 또한 대대의 81mm박격포로 중대의 철수를 지원했다.
그리고 중공군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두고 온 탄약 더미에 점화를 했기 때문에
1282 고지 전체가 폭발하는 것같았다.
이렇게 하여 G중대는 한사람의 부상자도 없이 멋지게 철수에 성공했다.제5해병연대 1대대도 B중대의 엄호하에 질서정연히 이탈했다.
B중대는 최후의 엄호부대로서 1240고지로 철수하여, 동 고지를 점령하고 있던
제7해병연대 1대대와 교대함으로써 동 대대의 덕동고개에 대한 공격준비를 가능하게 했다.
한편, 제7해병연대 3대대는, 9시, H중대로 도로의 동쪽 1419고지를, 대대주력으로
도로 서쪽의 1542고지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이 고지들은 도로를 동, 서로부터
감제하는 중요지점이기 때문에 이를 확보하면 제5해병연대 3대대가 전위대대가 되어
제7해병연대 3대대의 엄호하에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공격할 예정이었다.
또한 제7해병연대 1대대는 이날 저녁때 1419고지의 간격을 은밀히 돌파하여
덕동고개를 점령할 예정 이었다. 그런데 중공군이 이 두 고지를 구축하고 완강히
저항했기 때문에 공격은 종일토록 진전되지 않았다.
이탈을 끝낸 제5해병연대는 1대대를 장진호의 동부 하구 연변으로부터 1100고지
사이를 점령케 하고, 2대대는 1276고지를 점령케 함으로써 북쪽과 서북쪽에 대한
진지 점령이 끝난 셈이었다.
이 무렵, 제7해병연대 3대대 주력은 남쪽의 1542고지를 공격중이었으며,
이 고지를 점령하여 제5해병연대 진지와 연결해 서측으로부터의 공격에 대비하는
방어진지를 편성할 예정이었다.
전위부대인 제5해병연대 3대대는 제7해병연대 3대대가 공격목표인 1542, 1419고지를
탈취하면 이 것을 넘어서 공격을 개시할 예정이었으나 공격이 제대로 진전되지 않자,
두 대대장은 협의 끝에 1542고지와 1419고지 탈취와는 관계없이 공격을 개시하기로
하고, 제7해병연대 3대대는 오후 3시에 도로를 따라 남쪽을 향해 공격을 개시했다.
야지횡단으로 덕동고개를 향해 전진할 예정이었던 제7해병연대 1대대의
출발예정지점인 1419고지의 중공군진지는 의외로 완강했다.
그래서 연대장 리첸버그 대령은 H중대 만으로는 탈취가 어렵다고 판단하여
정오경에는 1대대 A중대에 이어서 오후에는 B중대도 이 공격에 투입했다.
이 고지에는 잡초가 무성하게 우거져 있었기 때문에 효과적인 화력지원을
제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험하고 미끄러지기 쉬운 경사면을 등반하고 있는
미군으로서는 오히려 그 잡초들이 손잡이가 되어 편리했다.
잠시 후에는 항공기, 곡사포, 박격포 등의 지원이 점차 효과를 나타내
저녁 7시경 30분에는 이 고지를 점령할 수 있었다. 이 공격으로 제7해병연대 1대대는
많은 피해가 있었기 때문에, 연대장은 H중대를 이 대대에 배속했다.
따라서 대대장 데이비스 중령은 A, B, C, H의 4개의 소총중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대대장 데이비스 중령은 1419 고지를 점령한 후 곧 재편성을 실시하여
급편방어진지를 편성했다. 그리고 사상자를 도로로 끌어내 제5해병연대 3대대의
구호소로 후송했다. 대대가 재편성을 완료하고 출발한 것은 밤 9시 경이었다.
근대화된 장비를 보유하고 화력을 중시하는 미군이 야간에 도로가 아닌 다른 곳으로
진격하여 적의 간격을 돌파하는 전법을 택했던 전례는 비교적 적었다.
유담리 - 하갈우리간의 전투에서 제7해병연대 1대대가 취한 행동은
극히 드문 전례 중의 하나일 것이다.
연대장 리첸버그 대령이 일부러 이런 전술을 택한 동기에 대해서
"중공군은, '미군은 반드시 도로를 따라서 공격한다' 라고 생각 하였다.
더구나 항공기가 포병 그리고 박격포의 지원이 별로 유효하지 못한 야간에 도로가
아닌 지형으로 미군이 기동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은 것 같았다.
따라서 적의 허를 찌르기 위해서 야간에 도로가 없는 곳으로 기동하여
적의 간격을 돌파했던 것이다"라고 술회했다.
한국전쟁 초기에 미 육군은 많은 차량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로가 아닌 지역에서의 도로의 기동은 제한을 받았고 가끔 도로변에서의
적의 매복에 걸리면 꼼짝하지 못하고 큰 피해를 입는 일이 많았다.
제7해병연대 1대대장 레이몬드 데이비스(Ramond Gilbert Davis)중령은
조지아 공과대학을 졸업한 후, 해병대에 입대하여 제2차세계대전 때에는
제1해병사단 1연대 대대장으로서 펠릴류 섬 등지에서 용감하게 싸운 역전의 장교이며,
한국전쟁 후에는 소장까지 진급하여 해병대 사령부 인사참모를 역임하게되는
우수한 인물이었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35세의 젊은 대대장이었다.
1대대의 장병 대부분이 7월에 소집되기 전까지는 농장이나 사무실 등에서 근무하던
사람들로서 제1해병사단 내의 어느 부대보다도 예비역에서 소집된 장병의 비율이 높았다.
대대는 적 진지로 침투, 돌파하기 위해서 우선 다음과 같은 준비작업을 진행했다.
휴대용 무전기(SCR-300)로는 유담리 연대본부와 연락이 두절될 지도 모르기 때문에
이에 대비하여 보병은 통달거리가 좀 더 길고, 등에 메고 다니는 AN/GRC-9를 휴대하고,
포병 연락장교는 포병통신용 SCR-610을 휴대했다. 항공연락장교는 연대본부가 있는
위치에 잔류하여 찦차에 장치된 무전기로 지원 항공기와 연락을 취하는 한편,
대대와 동행하고 있는 전방항공 통제관에게 무전으로 연락하여 지원항공기를
대대정면으로 유도하여 근접항공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대대 공용화기는 편제장비의 반수인 81mm박격포 2문과 중기관총 6정을 준비하였으며
사수는 평상시보다 2배를 할당하였고 탄약도 충분히 휴대하였다.
식량은 각자 기호에 맞는 것으로 선택하여 네 끼분을 휴대했다.
들것도 예비로 휴대했는데 이것으로 박격포 탄약과 기관총 탄약을 운반했다.
전원이 각자 침낭을 휴대했는데, 이는 부상자의 구호용이었을 뿐만 아니라,
대대가 산중에 고립되어 수일간 야영하지 않으면 안 될 경우에 대비한 것이다.
또한 전원이 소화기 탄입대 하나씩을 여분으로 휴대하였고, 예비 중대원과
대대본부 요원에게는 각각 1발씩의 81mm박격포탄을 휴대 시켰다.
야간 행동을 용이하게 하기위한 표지, 유도, 엄호를 위해
포병은 황색 연막탄 사격을 준비했다.
대대는 12월 1일 밤 9시, B중대, 대대 지휘부, A중대, C중대, 대대 본부중대, H중대
순으로 야음을 이용하여 1419고지를 출발했다. 야간 전투로 지쳐있던 부대원들은
무거운 장비를 지고 은밀히 험한 산속으로 전진해 나갔다.
방향 유지방법으로는 나침반과 하늘의 별, 산봉우리의 생김새, 포병의 신호탄 등을
준비했었지만, 깊은 계곡에 들어서서는 별은 볼 수가 없고 산봉우리의 모양은
모두가 비슷해서 구별할 수가 없었으며, 황색 연막탄 또한 눈 속에 파묻혀
잘 보이지 않아 어느 방법도 별 효과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판쵸 우의를 덮어쓰고,
그 속에서 전등기를 켜 남침반을 보고 방향을 유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위에 더욱 전진을 어렵게 한 것은 추위(포병의 기록에 의하면 영하 31도였다)와
적설과 험준한 지형이었다. 종대의 선두는 무릎까지 빠지는 적설 때문에 뜻대로
전진할 수가 없었고 후속부대는 눈에 미끄러져 넘어지는 병사가 많았다.
굴러떨어진 병사는 중장비를 지닌 채 눈이 깊이 쌓인 비탈진 언덕을 기어 올라와야 했다.
연대장이 예견한 대로 중공군은 미군이 설마 야간에 산악으로 진격하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았다
선두가 두 번째 계곡을 통과할 때 방향을 잘못 잡아 남서쪽으로 치우치기 시작했다.
이 상태로 가면 중공군이 확보하고 있는 유담리 - 하갈우리간의 도로로 나가게 되고,
또 이 도로상에는 포병의 요란사격과 저지사격 화망이 계획되어 있어서
아군 포병의 사격을 받을 염려가 있었다.
대대장은 B중대장에게 방향을 수정하도록 명령하려 했으나 무전기는 불통 이었고
두꺼운 귀덮개를 하고 있어서 구두로는 전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대대장은
직접 무선통신병과 전령을 데리고 선두로 달려가려고 하였으나 통신병과 전령이
미처 뒤따르지 못해서 대대장은 혼자 선두까지 달려갔다.
마침 부대의 선두가 다음의 급경사면을 오르기 시작한 때여서 겨우 방향을
수정할 수가 있었다. 이때가 바로 중공군의 저지선으로 들어가기 직전이었다.
도로를 수정하여 얼마동안 전진하다보니 1520고지 기슭에 도착했다.
이 고지의 동과 서에는 중공군이 진지를 구축해놓고 있었다.
대대는 81mm박격포 및 중기관총의 지원사격하에 공격을 실시하여
동쪽 경사면의 중공군 약 1개 소대를 격멸하고 이를 점령했다.
대대장은 부대를 정지시킨 후, 재편성을 명령했다.
부대를 정지 시키자마자 피로에 지친 병사들은 그대로 눈 위에 쓰러져
추위도 적탄도 아랑곳 없이 잠을 자려고 했다.
또한 동남방으로부터는 간단없이 중공군의 원거리 사격이 실시되고 있었다.
당시 장교와 하사관들은 병사들을 두드려 깨우기도 하고, 고함을 지르기도 하면서
잠들지 않게 하기 위해 이리저리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너무나 추운 탓인지 머리가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대대장도 자신이 정상적인 명령을 내리고 있는지 아닌지, 때때로 중대장에게
확인할 정도였다. 피로에 지친 병사들을 수습해서 겨우 전면방어진지를
편성했을 때에는 이미 12월 2일 새벽 3시가 되어 있었다.
여기서 대대는 날이 밝을 때까지 휴식에 들어갔는데,
각 중대는 순찰조를 편성하는 한편, 25%의 병력으로 경계태세를 취했다.
이때 AN/GRC-9무전기로 처음 연대와 교신을 시작했다.
12월 2일 새벽6시경, 대대는 1653고지(덕동산)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지형이 험준하여 공격은 몹시 곤란했다. 항공기와의 교신이 되지 않아
충분한 항공지원은 받을 수 없었다. 또한 동측방의 바아버중대(F중대)진지와도
교신이 불통이어서 바아버 중대의 81mm박격포 사격을 받을 염려도 있었다.
중간목표를 점령했을 무렵, 바아버 중대와 교신이되어 바아버 중대에서 유도를 위해
척후조를 내보겠다고 제안해 온 것이 이 무렵이었다.
바아버 중대는 항공지원을 유도하면서 동시에 81mm박격포 사격으로 대대의 공격을
지원하였다. 그 엄호하에 대대는 가까스로 1653고지를 점령하고 계속 전진하여
11시 25분에는 바아버 중대의 방어진지에 도착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대대는 22명의 부상자를 들것으로 후송했는데 그 중 전사자는 중공군 저격수에게
당한 군의관 한 명뿐이었다. 이 외에 2명의 병사는 추위와 피로와 긴장 때문에
정신이상을 일으켜서 들것에 묶어 놓았으나 곧 동사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F중대 증원임무를 완수한 후 제7해병연대 1대대는 바아버 대위의 F중대를
그 지휘하에 넣고 덕동고개 일대에 전면방어진지를 편성하고 2일 밤을 맞이 했다.
유담리의 해병대가 하갈우리로 철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될
중요한 지점이 바로 이 덕동고개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제7해병연대 1대대의
용감한 공격과 F중대의 5일간에 걸친 끈질긴 방어는
곤란한 철수작전을 성공으로 이끈 제1보였다.
데이비스 제7해병연대 1대대장과 바아버 F중대장에게는
이 전공으로 명예훈장이 수여되었다.
명예훈장을 수여받은 제7해병연대 1대대장 레이몬드 데이비스(Ramond Gilbert Davis)중령
8부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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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6월특집! 한국전쟁 장진호 포위망 돌파 ... (5부)
1950년 11월 말경, 북한에는 만주로부터 불어오는 시베리아 한풍으로
혹한이 계속 되었으며, 강과호수 산과 계곡들은 모두 꽁꽁 얼어붙어있었다.
낮 기온은 영하 20~25도 정도였지만 저녁때가 되면 급격히 내려가
새벽 04시경에는 영하 28~45도까지 내려갔다.
적설은 대체로 많지 않았으나 곳에 따라서는 60cm 이상이나 쌓인 곳도 있었다.
눈보라가 치는 날에는 시계가 제한되어 15m 이내도 잘 보이지 않았으며
흰 눈은 중공군의 백색 군복의 보호색이 되었다.
칼빈소총은 혹한으로 기름이 얼어붙어 사격을 할 수 없었고
백병전에서는 총대가 약해 잘 부러졌다.
M1소총은 칼빈소총에 비하면 추위에 강했으나 윤활유를 많이 바르면
얼어붙어 사격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윤활유는 엷게 발라야 했다.
자동소총도 불발이 되거나 단발 사격이 되는 일이 많았다.
경기관총은 얼어서 불발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2시간마다 사격을 해야만 했고,
수냉식 중기관총은 물 대신 부동액을 사용해야만했다.
부동액이 없을 때는 부득이 물을 넣지 않고 공냉식 경기관총처럼 사용했다.
박격포는 비교적 잘 작동됐지만, 포판이 사격시의 반동으로
얼어붙은 대지에 부딪혀 금이 가기도 했다. 곡사포도 복좌작용에 시간이 걸려
발사속도가 떨어졌으며(복좌하는데 30초씩 걸렸다는 기록이 있다),
강 추위로 인해 공기밀도가 높기 때문에 사거리가 단축되었고
포탄이나 수류탄의 불발도 많았다. 또 탄약을 공중에서 투하하면
바위처럼 얼어붙은 땅 표면에 부딪쳐서 깨져 사용가능한 것은 4분의1 정도였다.
트럭과 전차는 2시간마다 15분쯤 가동시켜 주지 않으면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이 엔진소리 때문에 야간 기도비닉에 문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연료와 노력이 필요했다. 그리고 두터운 옷과 장갑을 착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차량정비나 연료 보급작업에 어려움이 따랐다.
땅 표면은 35cm 두께로 얼어붙어서 야전 축성은 그야말로 중노동이었다.
미군 장비인 휴대용 야전삽은 곧잘 부러져서 중공군으로부터 노획한
대형 삽이 도움이 되었다.
유담리부근의 토질자체가 단단하여 축성작업이 한층 더 어려웠다.
손에는 피가 고인 물집이 생기고 그것이 터져서 피투성이가 되었다.
해병대원들은 이 고통을 참으며 묵묵히 땅을 팠지만, 작업은 좀처럼 진전되지 않았다.
다이나마이트를 사용하여 기관총진지를 판 곳도 있었으나,
팔 겨를이 없을 때는 바위틈이나 기타 지형지물을 이용했다.
전투가 심할 때는 전사자의 시체를 쌓아올려 방벽을 삼는 일도 있었다.
고무를 주로 사용하여 만든 군화는 땀이 많이 차서 가만히 있으면 곧 동상에 걸렸다.
그래서 때때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갈아 신거나 발을 비벼주어야 했는데,
얼어붙은 구두끈을 푸는 것도 쉽지 않았다.
겨울철 행동은 될 수 있는 대로 땀을 흘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며
이것이 동상 예방의 첫걸음이다.그래서 축성작업을 할 때는 옷을 하나씩 벗고 끝나면 다시 하나씩 입도록 했다.
그러나 전투중에는 그렇게 할 수 없으므로 밤중의 혹한에 시달리면서
오직 아침이 빨리 오기만을 빌 뿐이었다. 틈을타서 양말을 갈아 신거나
난로를 피운 천막 안으로 교대로 들어갈 수 있으면 한결 좋은 일이지만
그것조차도 할 수 없었고, 더구나 침낭 속에 들어가 잠을 자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다.
다행히 침낭을 사용할 수 있을 때는 적의 기습에 대비하여 뒤집어 쓰고
지퍼를 잠그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식품도 얼어서 C레이션은 난로에 녹여서 먹었는데 외부는 녹아도 내부는 단단한
얼음 덩어리가 남아 있어 이것을 그대로 먹으면 복통이 나거나 설사를 하였다.
눈을 먹은 병사들도 있었는데 대부분이 설사를 했다.
옷을 두텁게 입은데다 추위가 심한 야지에서 더욱이 전투중에
설사병에서 오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수통은 물이 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가득 채우지 않고,
상의 안에 넣고 있었으나 그래도 얼어서 수통이 깨지는 경우가 있었다.
수혈용 피나, 진통용 몰핀도 얼어서 녹이는 데 시간이 걸렸다.
위생병은 진통제인 몰핀이 얼지 않도록 입에 물고 전선을 뛰어다녔고
수혈용 피도 난로 곁에 놓아 두고 있었다.
부상자를 눈 위에 내 버려 두면 바로 동사해 버리기 때문에
신속히 후송을 해야 하는데 전황이 불리할 때는 더욱 어려운 문제였다.
난로를 피운 천막 안에서 잠시 몸을 녹이고 있는 해병
장진호 동안에서 하갈우리 북쪽으로 진격하던 미 육군 제7사단 부사단장 헨리 하지(Henry Hodes)준장 휘하 제31연대전투단(Regimental Combat Team)연대장 맥클린(Allen D. Maclean)대령의 특수임무부대(테스크 포스 맥클린)는 하갈우리에서 약 5km떨어진 후동 마을에 연대지휘소를 설치했다.
더 북쪽에서는 윌리엄 레일리(William Reilly)중령이 지휘하는 제31연대 3대대와 레이 앰브리(Ray Embree)중령이 지휘하는 제57야전포병대대가, 그 보다 더 북쪽에는 제5해병연대로부터 책임전술구역을 인계받았던 페이스(Don C. Faith)중령이 지휘하는 병력 3000명의 제32연대 1대대가 밤을 맞았다. 여기에는 긴급히 소집되어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한국군 병사들이 약 700명 정도가 포함되어 있었다.
맥클린 대령은 후동의 지휘소를 하지 준장에게 맡겨놓고 페이스 중령과 함께 있었다. 이들 육군부대들은 제10군단 사령부의 안일한 대처로 인해 제대로 전투태세가 갖추어지지 못한 상태였으며 월동장비와 방한피복이 몹시 부족했고 탄약, 식량도 넉넉하지 못했다. 육군 특수임무부대들은 통신망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서로 유무선 통신이 닿지 않은 채로 흩어져 숙영을해야했다.
이 중 유일하게 방한피복과 장비를 갖춘 사람은 4명 뿐 이었는데, 그들은 육군에
항공통제관(FAC)으로 파견된 에드워드 스탬포드(Edward P. Stamford)해병대위와
그 부하 3명이었다.
스탬포드 대위는 하갈우리까지 가서 자신과 부하들의 방한장비를 수령해 왔던 것이다.
27일 늦은밤, 중공군의 공격이 페이스 중령의 32연대 1대대에 가해졌다.
갑자기 공격을받자 대대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스탬포드 대위는 전사한 육군 중대장의 임무를 자신이 넘겨받아 중대를 지휘하여
중공군을 격퇴 시켰다.
다음날, 스탬포드 대위는 항모에서 출격한 코르세어 기들을 유도하여
중공군에게 큰 피해를 입히는, 항공함포통제 장교로서의 임무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러나 후동 지휘소의 제31연대 전차중대는 22대 중 4대의 전차를 잃었으며,
레일리 중령의 제31연대 3대대와 앰브리 중령의 제57야전포병대대도 큰 피해를 당했다.
연대지휘소에있던 부사단장 하지 준장은
해병대에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전차를 타고 하갈우리로 향했다
에드워드 스탬포드(Edward P. Stamford)해병대위
원산 비행장의 VMF(N)-513 비행대 소속 F4U-5N 코르세어.
이 코르세어들은 장진호 해병대 철수작전 중 대지 공격기로서 맹활약했다
11월28일.
흥남에 있던 스미드 제1해병사단장은 27일 밤부터 28일 아침에 이르는 전투상황을 보고
받으면서 예하연대의 건투를 기원함과 동시에 차후의 작전에 관하여 구상하고 있었다.
상황파악, 항공지원 보장, 공중보급을 위한 조치, 부상자 후송준비 등 많은 사항을
신속히 실행해야했다. 이 가운데 사단장이 가장 중요시한 것은
하갈우리의 작전지휘와 병참선 확보 및 보강이었다.
스미드 사단장은 28일 아침 일찍
고토리의 제1해병연대장에게 고토리-하갈우리간의 도로 개통을 명령함과 동시에
직접 헬리콥터로 흥남에서 하갈우리로 날아가 11시에 사단지휘소의 운용을 개시했다.
이날 아침 미 육군 제7사단도 지휘소를 하갈우리에 개소했다.
오후에 알몬드 군단장, 제7사단 부사단장 하지 중장이 해병사단지휘소에 도착하여
스미드 사단장과 1시간 동안 회담했다. 여기서 무엇이 결정되었는지는 모르나 전반적인
상황으로 보아 방어로 전환할 수도 있다는 점에대해 검토한 것인지도 모른다.
여하튼 사단이 방어로 전환하는 문제와 해병사단의 철수 등은 결정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맥아더 원수의 공격명령에는 아무런 변동이 없었기 때문이다.
회담을 마친 알몬드 군단장은 곧 헬리콥터를 타고 장진호 동쪽의
제7사단 31연대장 알렌 맥클린대령의 지휘소에 도착하여
"현 단계는 패주중인 적에 대한 추격이며 압록강까지 추격하라"고 격려하면서
훈장 수여식까지 남발하고 흥남의 군단 사령부로 귀환했다.
알몬드는 중공군에대한 보고를 과장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오히려 북쪽으로 패주하는 패잔병들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전쟁터에서의 호화스러운 생활과 사치스러운 행동 때문에 편하고 풍요로운 것과는
전혀 인연이없는 해병대로부터 이미 무능한 자로 낙인찍힌 알몬드는 이날도
반짝반짝 광이나는 군화에 잘 다려진 군복과 신형 파카를입고 귀족처럼 나타났다.
그는 맥클린 대령에게 북쪽으로 달아나는 패잔병을 추격하여 압록강까지 도달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제32연대 1대대장 페이스 중령에게는 전날 빼앗긴 고지를 탈환한 다음
지원부대가 도착하면 북쪽으로 진격하라고 지시했다.
이미 중공군의 강력한 공격을 받았던 31연대장과 페이스 중령으로서는
군단장이 공격을 지속하라니 난감했다. 이렇게 알몬드는 현 상황의 심각성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알몬드는 미리 준비해왔던 3개의 은성무공훈장을 꺼내더니 페이스 중령에게 한 개를
수여하고는 나머지 2개를 무작위로 선발된 병사에게 수여했다.
아무런 전공도 없이 훈장을 수여받은 병사들은 황당하기만 했다.
군단장 알몬드는 즉흥적 훈장 남발을 일삼는 미 육군의 전통을
그대로 충실히 이행하고는 흥남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전차를타고 하갈우리로 들어온 육군 제7사단 부사단장 하지준장은
스미드 제1해병사단장에게 장진호 동안의 상황을 보고했다.
그러나 스미드 사단장은 육군이 자력으로 충분히 탈출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고,
또 하갈우리 방어가 취약해질 것을 우려하여 해병 구원부대를 보내지 않기로 결정했다.
스미드 사단장은 28일 오후 4시27분,
제7해병연대에게 남쪽을 공격하여 하갈우리로 통하는 주보급로의 개통을 명령했고,
이어서 4시50분, 제5해병연대에게는 서쪽으로 향하는 공격을 중지하고
제7해병연대와 협조하여 방어진지를 점령하도록 명령했다.
이날 유담리에는 적, 청, 황 등 여러 가지 색으로 채색된 낙하산으로 각종 보급품이
투하되고 있었다. 제5, 제7해병연대는 완전히 포위되어 후방이 차단되어 있었기 때문에
공중을 이용하여 각종 보급품이 지원되었다.
그러나 제7해병연대는 유담리 - 하갈우리간의 도로와
제1해병연대는 고토리 - 하갈우리간의 도로를 강력한 중공군이 차단하고 있었기 때문에
개통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하갈우리 주변에 중공군이 총집결중이라는 정보도 입수되고 있었다.
고토리 진지에 대해서도 중공군은 동북방에서 국지적인 공격을 가해 와서
미군은 동북방에있는 돌출부 진지를 포기해야 했다.
고토리에는 이날 저녁때 영국 제41코만도 보병 2개 중대가 도착하고 있었지만
하갈우리로 전진할 수가 없었다.
28일 저녁때의 미 해병사단의 상황은 유담리, 덕동고개, 하갈우리, 고토리,
진흥리의 5개 방어진지가 중공군의 차단으로 각각 고립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갈우리 미 해병 기지
11월 26일 저녁때 제1해병연대 3대대장 토마스 L. 리지(Tomas L. Ridge)중령은
하갈우리를 확보할 임무를 띠고 소총 2개 중대와
화기중대의 주력(G중대와 화기중대의 1개 소대는 차량부족으로 잔류)을 이끌고
하갈우리에 도착했다.
다음날 27일, 제1해병연대 3대대는 그때까지 하갈우리를 방어하고 있던
제7해병연대 3대대와 교대하여 그 임무를 인수하였으나
제7해병연대 2대대장 랜돌프 록우드 중령과 대대본부, 화기중대의 주력은
차량부족으로 인하여 유담리로 들어가지 못한 채 하갈우리에 남아 있었다.
하갈우리는 장진호 남단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다. 서, 북, 남으로 향하는 도로가
이곳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교통의 중심이었다.
북서쪽에는 높이 약 150m의 고지(동부고지라고 부르기도한다)가 하나 있을 뿐,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 구릉지대로 둘러싸인 분지로서
제1해병사단의 작전지역 내에서는 가장 평탄한 장소였다.
또한 남쪽으로의 탈출로인 하갈우리가 격파된다면
그 북쪽의 유담리, 덕동고개의 미 해병대는 고립되어 섬멸될 것이 뻔했다.
하갈우리를 통제하는 요충지는 동부고지였다.
그리고 건설중인 수송기용 활주로는 보급로의 사정이 나쁜 사단으로서는
보급의 동맥으로서 또는 부상자 후송기지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활주로의 건설은 원래 제10군단 공병이 담당하였는데 부득이 사단이 직접 통제하여
제1해병사단의 1개 공병중대만으로 건설하고 있었다.
하갈우리에 이르는 중공군의 주요 접근로는 남부고지로부터 곧바로 하갈우리로
접근하는 것과 마을의 서남방으로부터 활주로에 이르는 것 등 2개가 고려되었다.
27일, 제3대대장 리지 중령은 대대작전과장과 화기중대장에게
하갈우리부근의 지형을 정찰시킨 후 진지편성을 계획했다.
비행장을 포함하여 하갈우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둘레 6.5km의 전면방어진지를 편성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이 넓은 지역을 2개 소총중대만으로 빈틈없이 방어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2개 중대를 제7해병연대 2대대가 이제까지 맡고 있었던 중요한 정면인
남쪽과 서남방향을 연한 진지에 배치하고, 다른 정면에는 보병 이외의 부대를 배치하여,
간격이 생긴 곳은 화력으로 통제하기로 했다.
그리고 동부진지에는 다음날 28일에 도착하기로 예정되었던 G중대를 배치하기로 했다.
대대장 리지 중령은 이상과 같은 부대배치를 계획한 후에 적의 상황을 알기 위하여
정찰을 실시했다.
27일은 사단의 무평리공격이 시작된 날인데 사단 사령부의 대부분이 하갈우리에
도착하여, 이미 참모본부로 업무를 개시하였으며 다음날 사단장이 도착함과 동시에
정식으로 지휘소가 개소될 예정이었다.
그리고 미 제10군단지휘소를 개소하기 위한 선발대와 사단과 군단의 직할부대도
이날 속속 하갈우리에 도착하여 차량이동이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제1공병대대는 도로의 보수 유지와 사단 사령부 시설 설치등으로 분망했다.
특히 D 중대는 열심히 활주로 건설을 계속했고 야간에도 조명하에서 굴착작업을
계속했으나 4분의1 정도밖에 진척이 되지 않고 있었다.
C-47수송기의 활주로는 해발 0m에서는 약 1.2km의 길이가 필요하고
고도 330m당 33m씩 길이를 연장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해발 1,100m인 하갈우리에서는 1km~1.3km정도면
수송기가 뜰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27일밤부터 28일에 걸쳐서 중공군 2개 사단은 유담리의 미군을 공격하여
유담리진지의 16개 소총중대 가운데 3개 중대를 격멸하고 1403고지 탈취에 성공했다.
그리고 다른 1개 사단(제59사단(은 유담리-하갈우리간을 차단하고 바아버 대위가
지휘하는 제7해병연대 F중대를 공격해 고립시켰다.
한편 중공 제27군 예하 80사단은 장진호 동쪽의 페이스 특수 임무부대를 공격하여
이를 포위했다. 이러한 공격이 실시되는 동안 중공 제20군 예하 58사단은
하갈우리부근에 진출하여 일부 병력으로 하갈우리-고토리도로를 차단하고,
중공 제60사단은 고토리 서쪽에서 공격중이며
그 일부는 27일에 진흥리의 미군에 대해서 위력수색작전을 실시했다.
28일 저녁,
전날 밤 유담리를 공격했던 중공군 제79, 제89사단은 전력이 약화되어
재편성중이었으므로 제5 및 제7해병연대의 진지에 대해서 대규모 공격을 실시할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신예의 중공 제58사단이 하갈우리를 공격하기 위하여 집
결지로부터 진출하려 하고 있었고, 전날 밤, 덕동고개의 제7해병연대 F중대진지를
포위 공격하였던 중공 제59사단은 이날 밤, 또 다시 F중대를 섬멸할 목적으로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28일, 차량부족때문에 유담리로 가지 못한 채 하갈우리에 남아있었던
제7해병연대 2대대장 록우드 중령은 F중대를 구출하기위해
제1해병연대의 소총소대와 전차의 지원을 받아 2회에 걸쳐 하갈우리-유담리사이의
덕동고개를 향해서 전진했으나 도로 양측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던 중공군에 의해
저지되어 실패했다.
그리고 제1해병연대 3대대도 고토리로 향하는 도로를 개통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I중대의 척후는 하갈우리 서남방 약 4km지점에 있는 홍문리방향을 정찰했는데
1개 중대 이상의 중공군과 조우하여 되돌아오고 말았다.
이와 같은 징후와 항공 정찰에 의하면 이미 하갈우리는 중공군에 포위되어 있다는 것이
확실해졌으므로 긴급히 방어를 강화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주민이 거주하는 지역에서 방어할 경우, 주민을 어떻게 취급하며 어떻게 활용하여
정보를 획득하는가는 어려운 문제이며 또한 중요한 일이었다.
하갈우리 방어를 맡고 있던 제1해병연대 3대대는 한때 태백산맥의
마전리(원산 북방 약30km)라는 곳에서 주민이 있는 부락을 포함하여 원형으로 진지를
편성하고 17일간 고립방어를 하면서 주민의 정보를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북한군의 공격을 격퇴해 본 경험이 있었다. 그때 이 대대를 협력했던
미 육군 제181 CIC 파견대(파견대장은 소령이었다)가 이번에도 대대에 배속되어 있었다.
대대는 하갈우리 주민의 자치를 허용하고 마을 사무소, 경찰 등도 그대로 업무를
수행하도록 했으며 주민 스스로 출입통제, 기밀보장 등의 조치를 취하도록 했다.
하갈우리로 들어오는 주민은 해병대의 검사를 받고 경찰서에 인계되어 정보부에서
심문을 받은 다음, 하갈우리 사무소에 인계되었다.
27일에는 다수의 피난민이 하갈우리로 몰려왔다. 대부분의 피난민들은 중공군에 의해
거주지에서 쫓겨나 마을의 서쪽과 북쪽에서 온 사람들 이었다.
방첩대는 이러한 피난민으로부터 많은 정보를 입수했다.
이들 주민의 정보를 종합해보면 중공군이 가까이 와있다는 것은 분명하였으나
주민의 정보만으로는 중공군의 병력과 장비 등을 정확히 판단할 수가 없어서
27일 아침부터 2명의 한국인 방첩대 요원을 침투시켜 정보를 수집하도록 했다.
이렇게 침투된 요원들은 하갈우리주변을 정찰하여 중공군과 직접 대화를하면서
정보수집활동을 실시한 결과, 장비가 양호한 중공군 부대가 주로 하갈우리 남쪽과 서쪽에
집결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그리고 항공기의 공중정찰도 이 지역에서 중공군의 활발한 움직임을 보고해왔다.
아마도 1개 사단의 중공군이 이 지역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28일에도 요원들이 중공군과 접촉하여 중공군 장교가
"28일 밤에 하갈우리를 점령한다"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는 정보를 보고해왔다.
여러 가지 분석결과, 이 정보의 신빙도는 매우 높은 것으로 판단되었다.
중공군 부대의 주력은 하갈우리로부터 8km에 위치하고 있으며 집결지로부터
공격개시선으로 전개하는 데는 3시간 30분이 소요될 것으로 판단되었다.
어두워지는 것이 대략 저녁6시이기 때문에 대대 정보과장은
"적은 1개 사단을 가지고 28일 밤9시 30분 이후 남쪽과 서쪽으로부터 공격할 것이다" 라
판단하고 이것이 중공군이 취할 수 있는 행동 가운데 가장 확률이 높은 것이라고 판단했다.
중공군이 유담리에 대하여 대규모적인 공격을 개시한 다음날인 28일 아침
제1해병연대 3대대장 리지 중령은 하갈우리진지도 신속히 강화하여 적의 공격에
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사단에
"하갈우리에 주둔한 전부대의 작전통제를 할 수 있는 통합지휘관을 임명해달라는 것과
G중대와 영국 코만도부대를 신속히 하갈우리로 이동시켜 달라"고 건의했다.
하갈우리 방어에 많은 병력이 필요함을 절감한 리지 중령은 하갈우리를 방문한
사단 작전참모인 바우저(Alpha Lyons Bowser)대령에게
자신의 중대 중 하나인 칼 시터(Carl Sitter)대위의 G중대와 영국 제41 코만도가 아직
고토리에 남아있으니 최대한 빨리 하갈우리로 보내달라고 요청했고
그 요청을 바우저 대령이 수락했던 것이다.
스미드 제1해병사단장은 28일 흥남으로부터 헬리콥터로 날아와서 11시에
하갈우리 지휘소에 도착하여 사단지휘소를 개소했다.
이때 고토리로가는 도로가 차단되어 있었기 때문에, 동부고지에 배치할 예정이었던
G중대가 도착한다는 것은 거의 기대할 수가 없었다.
28일 오후 3시. 사단 작전참모는 리지 중령에게 리지 중령을 하갈우리지역 방어작전의
통합지휘관으로 임명한다는 명령을 전화로 하달했다.
저녁 6시부터는 어두워지기 때문에 밝은 시간은 앞으로 3시간뿐이었다.
리지 중령은 바로 각 부대장을 집합 시켰다.
뒷날 조사한 바에 의하면, 그 당시 하갈우리에는 육군, 해군, 해병대, 한국군 등
58개 부대 3,913명이 있었는데 대부분이 10명 이하로 구성된 선발대나 파견대였다.
따라서 이러한 부대를 장악하기가 매우 어려웠으나 서둘러 주요부대 지휘관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각 부대의 담당지역을 배정하였다.
저녁 5시가 지나서 회의가 끝나자 각 지휘관들은 자기 부대로 급히 돌아갔다.
즉 진지서남쪽으로부터 I중대와 H중대를 배치하여 가장 중요한
접근로를 방어하게 했으며 방어정면은 약 2,200m가 되었다.
다음으로 적의 공격이 예상되는 동부고지는 1개 보병중대를 방어하도록 예정했으나
I중대가 도착하지 못했기 때문에 미 제10군단 사령부 분견대와 해병 제1근무대대가
담당하도록 명령했다. 이러한 각종 부대에 대하여 적절한 지휘와 화력지원을 제공하기
위하여 제3대대 화기중대 장교2명에게 SCR-300무전기와 무전병을 붙여
공병 D중대와 사령부 분견대에 파견 시켰다.
동부고지와 H중대 좌측방 사이는 좌로부터
화기중대(각 소총중대에 배속한 화기분대, 지휘소부근에 배치한 81mm박격포 제외)가
동부고지 남쪽과 도로의 저지임무를 맡았으며
해병 제1공병대대 D중대(활주로 공사중인 병사는 제외)가 하천의 남쪽을 맡았고,
제11포병연대 2대대 D포대(105mm곡사포)가 그 남쪽을 맡았다.
또한 D포대에게는 진지의 76%에 해당하는 지역에 대해서는 간접사격으로,
약25% 가량 되는 지역은 직접조준사격으로 지원하는 임무가 부여되고 있었다.
다음에 동부고지의 북쪽에는 제7해병연대 대전차중대,
서북방에는 제11해병연대 H포대(포대장 벤자민 리드 대위-105mm 곡사포)를 배치했다.
이 포대의 주임무는 덕동고개에 있는 F중대를 지원하는 것이었지만
포 다리를 조작해서 동부고지 북단까지 270도 범위를 어떻게든 사격이 가능하도록
조치했다.
그리고 H포대로부터 중대까지의 사이에는 북으로부터 제1근무대대 파견대,
제1수송대대, 제2해병 항공통제반, 해병사단 사령부 본부대,
제1해병연대 3대대의 본부중대가 위치하고,
I중대 북쪽의 제7해병연대 2대대 화기중대(감편)는 유담리로 가는 도로를 담당했다.
동부고지 서쪽으로부터 장진강까지의 지역은 주로 군수부대 주둔지역이기 때문에
이 지역은 제1근무대대의 찰스 뱅크스(Charles Banks)중령이 지휘했다.
그러나 전술상의 결정에 관해서는 이 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제7해병연대 2대대장
록우드 중령과 부대대장 소여(Webb Sawyer)소령의 조언을 듣도록했다.
그리고 보병 대대장인 록우드 중령이 이 지역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지 않았던 것은
록우드 중령에게는 제7연대장으로부터 덕동고개의 바아버대위의 F중대 구출작전임무가
부여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배치를 보면 예비대다운 부대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아마도 병력의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각종 파견대 등의 필요에따라
집결할 생각이었던 것 같다.
28일 저녁, 하갈우리는 적막 속에 잠기고 있었고 때때로 소화기 총성이 정적을
깨뜨리곤했다. 이때 중공 제58사단은 하갈우리 진지를 향해 남으로부터 제172연대,
동으로부터 제173연대, 그리고 제147연대를 예비부대로 하여 야음을 이용하여
서서히 접근해 오고 있었다. 이 사단은 편제상의 박격포 외에 기타 포병에 의해
증원을 받고 있는 야간전투에 능숙한 부대였다.
이 사단은 압록강을 건너올 때 각 대대마다 82mm박격포 2문과 포탄 180발,
60mm박격포 6문과 포탄 240발, 보병중대는 경기관총 12정에 각각 탄약 1상자,
120명 정도의 병사에게는 개인당 80발의 소화기 탄약을 휴대시키고 있었다.
사단으로서는 이 전투가 한국에서의 첫 전투였기 때문에 이상과 같은
탄약을 그대로 보유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하갈우리 남서정면 전투
중요정면을 담당한 H중대와 I중대는 25cm 정도 지면을 파고 호를 구축했다.
얼어붙은 지면을 판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I중대는 C-3 폭약을 사용하여 공사를 하였으며 모래주머니 약 1천개를 만들어
방어용으로 삼았다. 이렇게하여 튼튼한 엄체호를 만들 수가 있었다.
진지전면에는 지뢰, 부비츄랩, 조명지뢰, 휘발유를 채운 5갤런 드럼통으로 만든 화염통,
철조망 등을 설치하고 이것을 기관총, 무반동총, 전차포의 사격과 박격포의 탄막 등
화력으로 통제했다.
방어면적이 넓었기 때문에 양중대는 3개 소대씩 모두 6개 소총소대를 제1선에 배치했다.
또 양중대의 전투지경선 부근에는 전차 2대를 배치했다.
적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한 전투준비태세는 처음에 50% 병력을 대기시키고
예상공격시간인 밤9시 30분에는 100% 대기했다.
밤10시경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하여 시계는 나빠졌으나 매섭던 추위는 어느 정도
누그러졌다. 10시 30분경 부비츄랩으로 장치된 지뢰와 조명탄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중공군 5에서 10명 정도가 진지의 약점을 찾아 내기 위한 위력수색을 해왔던 것이다.
이것을 격퇴하자 중공군의 박격포가 제1선진지를 맹렬히 포격하기 시작했다.
이 공격준비사격이 20분간 계속되자 중공군 보병은 미군진지의 전방 지근거리까지
기어오고 있었다. 마지막 박격포탄에 이어서 피리 소리가 3번 나더니 중공군 보병이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단총으로 사격하면서 돌격해 왔다.
진지에 있었던 미군에게는 중공군이 땅 속에서 솟아난 것처럼 보일 정도로 훌륭한
돌격이었다. 그런데 중공군은 미군의 전형적인 화망 속을 뚫고 들어온 결과가 된 것이다.
해병대는 박격포, 바쥬카포, 기관총, 전차포 등 가용한 모든 화력으로 대항했는데
경, 중박격포 지원을받는 중공군은 피해를 무릅쓰고 돌격을 반복하여
미군의 최후저지선을 뚫고 돌입하여 밤11시 30분경에는 H중대 중앙을 돌파하고
중대 지휘소를 육박하여 왔다. H중대장 콜리(Clarence Corley)대위는
부근의 병력을 수습하여 이를 저지하려 했으나 H중대 지역을 화력으로 제압한 중공군은
이 소수부대의 저지진지를 돌파하고, 일부병력은 한창 조명을 비추며 공사중이던
활주로까지 진출했다. 공사중이던 공병D중대원들은 장비 담당장교인 맥파랜드 중위와
함께 역습을 가해 소총으로 활주로를 공격해 온 중공군을 몰아내고
다시 불도저를 가동하여 공사를 계속하였다.
대대장은 군단의 통신병과 공병 약 50명으로 H중대지역을 역습시켰으나
60mm와 82mm박격포, 중기관총의 화력이 뛰어난 중공군의 사격에 의하여
역습부대 지휘관은 전사하고 역습은 실패하고 말았다.
0시경, 피아가 뒤섞인 혼전상태가 되었다.
서로 분별할 수 없는 가운데 의무중대의 수용소 벽과 사단장 스미드 소장 숙소에
기관총탄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관통해 나갔다.
H중대 전역에 중공군이 난입해 있었다.
돌파에 성공한 중공군은 진지 내부에 들어가자 물자를 약탈하기 시작했다.
미군들 중에는 상의를 벗겨가는 동안 죽은 시늉을 하고 있다가 살아난 부상자도 있었다.
깡통상자를 메고 있다가 사살되는 중공군이 있는가하면, 운반할 수 없는 의류나 식료품은
총검으로 찌르거나 개머리판으로 두들겨 부수는 등 중공군은 약탈자로 변신했던 것이다.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렸던 욕구불만이 한꺼번에 폭발했던 탓일까.
아무튼 중공군 제172연대는 돌파에는 성공했으나 전과 확대를 위한
계속적인 공격은 하지 않았다.
0시 30분경, 대대에서 공병과 운전병으로 편성된 약 50명의 예비대가 H중대 부중대장의
지휘하에 역습을 감행하여 일부지역을 회복하고 저지진지를 점령했다.
I중대 정면도 H중대와 동일한 공격을 받았다.
체구가 거대한 중대장 피셔(Joseph Fisher)중위는 진지를 돌아다니면서 격려했다.
가장 심한 공격을 받은 지역은 촤측진지였다.
어느 소대의 진지는 두 번이나 중공군에게 유린당했으나 다시 탈환하였다.
I중대의 60mm박격포 3문은 하룻밤 사이에 1700발을 발사했다.
중대진지 정면에 있는 두채의 가옥이 불타기 시작하면서 중공군 병사들의 모습이
선명히 드러나자 2대의 전차에서 뿜어져나온 기관총탄이 중공군을 쓸어 버렸다.
I중대가 돌파당하지 않은 것은, 이 중대에서 성형폭약을 이용하는 등 머리를 써서
진지강화에 주력했던 것이 이 방어전투에서 크게 기여했기 때문이다.
새벽4시경, 중공군의 활동은 감소되었다.
H중대장은 60mm박격포 사격을 실시한 후 급히 집결시킨 전병력을 이끌고
선두에 서서 역습을 감행하여 아침6시 30분에는 완전히 주저항선을 회복했다.
이 전투로 H중대는 16명 전사, 배속부대를 제외한 중대 부상자가 39명이었으며
I중대에서는 2명 전사, 16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아침햇살은 H중대와 I중대정면에 수백 구에 이르는 중공군 시체를 선명하게 드러내 보였다.
눈이 그 위에 가볍게 쌓여 붉은 선혈은 부상병이 비틀거리며
지나간 방향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동부고지(이스트 힐)전투
동부고지의 방어를 담당할 예정이었던 제1해병연대 G중대는 끝내 도착하지 않았다.
칼 시터 대위가 지휘하는 제1해병연대 G중대는 고토리에서 하갈우리로 들어가다가
중공군의 강력한 공격 때문에 좌절되었다.
그렇다고 이제와서 새삼 배치를 바꿀 여유도 없으므로 긴급히 편성된 혼성부대로
방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 부대요원들은 거의 훈련도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영어도 잘 모르는 한국인 신병들이 많이 섞여 있었다.
예를 들면 이 부대들 가운데 제일 큰 미 육군 제10전투공병대대 D중대(중대장
필립 컬비스-Philip Kulbes대위)는 미군 77명, 한국군 90명으로 편성되었으며,
도로가 차단되기 직전인 28일 12시에 고토리에서 하갈우리에 도착한 부대였다.
부대는 해병부대에 흡수된다는 명령에 따라 차량과 장비를 정리한 다음 험한 산으로
올라가 방어할 동부고지 진지에 도착한 것은 저녁8시 30분이었으며
피로에 지친 상태였다. 운이 좋은 병사는 근처 개인호를 이용할 수 있었으나
대부분은 호를 파지 못하고 공격을 받아야했다.
중공군의 공격은 29일 새벽2시부터 시작되었다.
미 제10군단 사령부를 경계하고 있던 한국군 1개 소대를 돌파한 중공군은
돌파구를 확대하여 산 정상에 있는 미군을 격퇴시켰다.
미 육군 제10전투공병대대 D중대는 77명 가운데 전사 10명, 부상 25명, 실종 9명의
피해를 당했으며 한국군은 90명 중 사상자 및 실종자가 50명이었다.
미 육군 공병부대의 작전을 지휘하던 해병대위(존 쉘넛)는 전사 하였으며,
그의 무전병 부르노 포드락크 해병 일병은 휴대한SCR-300무전기를 짊어지고
산 정상에 혼자 남아서 중공군에 관한 정보를 계속 송신하고 있었다.중공군에 밀려 도망치던 자신들을 구하려했던 해병 지휘관이 전사하자 육군들은
전의를 상실하고는 황급히 후퇴하기에 바빴다.
그러나 포드락크 일병은 부상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혼자남아 고지정상의
중공군 병력과 배치에대하여 대대에 상황보고를 했던 것이다.
새벽4시가되자 미군은 겨우 동부고지 남단의 경사면을 유지하며 산기슭의 도로에 연해서
수대의 전차를 동반한 근무부대가 방어선을 미약하게 형성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이미 중공군은 동부고지에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만일 중공군이 일거에 전력을 투입하여 전과 확대를 한다면 산기슭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진지 안으로 진입하여 보급품 집적소나 사단 사령부를 공격하는 것은 아주 쉬운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에 대비하여 미군은 사단장을 위한 호위 병력을 증가 시켰다.
그러나 중공군은 산정을 점령한 것으로 만족했는지 그 이상 전과 확대를 하려 하지 않았다.
중공군은 북쪽정면으로부터 여러 차례 침투를 시도했으나 본격적인 공격은 하지 않았다.
포병, 박격포의 전투
하갈우리에서는 28일 밤 곡사포, 박격포, 기관총, 수류탄 등의 섬광이 거대한 둥근 원을
그리며 밤 하늘을 수놓았다. 발사음과 폭발음이 뒤섞여 귀를 찢을 듯한 굉음이
주위의 산을 진동시켰다. 한편 방어진지 내의 활주로 상에서는 대낮같이 밝은 조명등
불빛아래 불도저가 공사를 계속하고 있었다.
제11해병포병연대 2대대 D포대(105mm곡사포)는 제1해병연대 3대대에 배속되어
장기간 전투를 해왔기 때문에 상호 협력관계는 지극히 원만했다.
28일 정오, 중공군의 76mm 포탄 1발이 대대본부에 떨어져 대대 보급관이 중상을 입었다.
그러나 이 1발을 끝으로 더 이상의 포격을 없었으나 한 밤중이 지나
중공군 76mm포가 또다시 포격을 개시했다. 진지 내에는 대량의 연료와 탄약이
집적되어 있었기 때문에 여기에 명중하면 연쇄폭발을 일으킬 염려가 있었다.
그래서 D포대장은 6문의 곡사포사격을 중지하고 그 중 1문만 150m 정도 이동시켜
사격함으로서, 그 발사지점을 미끼로 중공군 포병사격을 유도한 다음 대포병전을 실시했다.
단 1문 만의 포가 자신들을 향해 포격을 가하는 것을 몰랐던 중공군이 포격을 가하여
섬광이 일자 침묵을 지키고 있던 나머지 포들이 그곳을 향해 일제히 포격을 가했던 것이다.
이 제압사격은 매우 정확한 효과를 가져와 중공군 포병을 침묵시켜 버렸다.
훗날, 조사에 의하면 중공군 포병은 사격진지에서 76mm포 2문이 파괴되었으며,
2문은 다른 곳으로 옮겨가고 없었다. 그리고 D포대는 하룻밤에 1200발을 발사하여
집결지에 모인 중공군에게 몇 번이고 타격을 가했다.
제11포병연대 3대대 H포대(105mm곡사포)의 주임무는 덕동고개의 바어버 중대를
지원하는 일이었는데 동부고지 능선이 탈취당했을 때는 포구방향을 180도
가까이 돌려 동부고지에 포격을 가해 중공군의 전진을 저지하기도 했다.
보병대대의 81mm박격포도 약 1100발, 2개 소총중대의 60mm박격포도 3000발 이상을
사격하여 진지방어에 기여했다.
중공 제58사단은 교묘하게 82mm박격포(소련제로서 최대 사거리 3km)를 사용해서
공격을 지원했다. 그러나 목표는 대부분 제1선 호 속에 있는 병사들에게 지향되었기
때문에 별로 효과가 없었다. 가장 취약하고 효과적인 목표인 탄약과 연료 등이
진지내부 도처에 야적되어 있었는데, 이에 대한 포격은 하나도 실시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으므로 탄약절약 때문에 목표를 제1선의 보병으로만
한정했던 것인지 또는 보급을 적지에서 획득한다는 이유에서 식량, 탄약, 연료 등을
자기들 것으로 생각해서 일부러 그랬는지는 모른다.
하갈우리 방어진지를 관측할 수 있는 동부고지를 상실한 미군으로서는
목에 비수를 들이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리지 중령은 새벽5시 30분, 부대대장 마이어 소령에게 전예비병력을 집결시켜
동부고지를 공격 탈환하도록 명령했으나 동부고지 서남쪽에 2개 소대가,
서북 반사면에 1개 소대가 겨우 진지를 유지하면서 산 정상의 중공군과 대치하고 있는
상태로 29일 밤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 무렵 고토리로부터 증원부대가 중공군의 공격을 무릎쓰고
하갈우리를 향해 접근해오고 있었다.
6부로 계속 이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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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6월특집! 한국전쟁 장진호 포위망 돌파 ... (4부)
압록강을 건너 남하하는 중공군
11월 27일 밤 북쪽 산악지역 전투
중공 제79사단은 서쪽으로부터 제237, 제235, 제236연대를 병진시켜
북쪽 산악지대의 해병대 진지를 공격했다. 각 연대의 공격목표는 1384고지,
1240고지, 1167고지였다. 이 가운데 해병대가 점령하고 있던 곳은 1240고지뿐이었다.
병력이 배치되어 있지 않은 1167고지를 중공 제236연대가 점령하게 되면
산기슭의 포병진지를 직접 공격할 수 있게 되어 분지 안의 미군에 대해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게 될 것이 틀림없었다. 각 연대는 3개 대대를 종으로 전개하여 종심대형을
유지하면서 공격했다.
제235연대의 선두인 제1대대는 어둡고 굴곡진 산길을 전진중에
차츰 우측으로 기울어져 지정된 목표인 1240고지가 아닌 1282고지로 향하고 말았다.
그 좌측에서 전진중이었던 제236연대의 선두 제3대대도 이에 따라서
우측으로 돌아 1167고지 대신에 1240고지로 향하게 되었다.
이러한 착오는 지형을 잘못 파악했던 것인지
아니면 미군의 사격 때문이었는지는 모르나 전장에서 일어나기 쉬운 착오였다.
중공군의 공격개시 시간은 이러한 일로 인해서 각각 어긋나게 되었다.
1282고지에서는 밤10시경, 1240고지에서는 밤12시경,
1384고지에서는 다음날 새벽 1시45분경부터 소규모 탐색전투가 시작되었다.
이어서 본격적인 공격은 먼저 1282고지상의 제7해병연대 E중대를 향해서
시작되었으며 약 2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중공군은 나팔과 피리를 불어 대며
해병대를 죽이자는 노래를 부르면서 수류탄을 우박처럼 던졌고,
기관총을 난사하면서 돌격을 되풀이했으나 해병대 또한 수류탄 투척과 총검으로
결사적으로 응전했다. 중공군은 중대진지를 우회하여 후방에서 공격하려고 했지만
피해가 막심하여 결국 성공하지 못했으며
새벽2시경이 되자 전투는 잠시 소강상태가 되었다.
이 공격중 중공군 제235연대 1대대 1중대와 특수임무중대의 2개 중대 약 200명은
거의 괴멸적인 피해를 당했다. 제7연대 E중대 또한 피해가 막심하여 176명의 중대원중
단 1명만이 아무런 피해를 당하지 않았을 뿐 대부분이 죽거나 다친 가운데
고지 정상을 확보하고 있었다.
중공군
고지의 산기슭에 있던 제5해병연대 제1대대장 스티븐스(John W. Stevens)중령은
1282고지의 E중대를 증원하기 위하여 새벽1시경 A중대의 2개 소대를 출발 시켰다.
중공군 제235연대 1대대는 제1차 공격부대의 잔류병력을 제3중대에 배속시켜
3시경부터 제2차 공격을 개시했다. 중공군은 해병 E중대의 잔류병력과,
이를 증원하기 위하여 도착한 해병 2개 소대를 향해
"해병대 개새끼들 다 죽여 버리겠다. 개새끼 해병대들 오늘이 제삿날이다"
고 고함치며 맹렬한 공격을 가했다.
E중대 중대장과 부중대장이 여러 차례의 부상에도 불구하고 부하들을 독려하면서
응전했으나 결국 두사람 모두 전사했으며 1282고지 정상은
새벽5시경 결국 점령 당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E중대의 생존자는 A중대에서 증원된 스나이더 소위의 지휘하에
고지 반사면에 겨우 매달려 있었다. 중공군이 고지 정상을 점령했을 무렵,
남쪽의 돌출부에 제5해병연대 C중대(감편)가 도착했다.
C 중대장은 병력을 파악한 다음 동사(凍死)를 막기 위해서 신속히 부상자를 후송했다.
그러고난 후 60mm, 81mm 박격포로 공격준비사격을 실시한 후 스스로 선두에 서서
용전분투하여 끝내 고지 정상을 탈환해내고 말았다.
이때는 이미 날이 밝기 시작했으며 중공군은 날이 밝은 후에도 과감한 공격을
되풀이했으나 막강한 화력의 우세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제5해병연대 1대대 본부요원들은 아침 일찍, 어려움을 무릎쓰고 1282고지로부터
사상자들을 후송했다. 대대장은 이 고지를 제5해병연대 A,C중대와
제7연대 E중대 생존자로 하여금 방어하게 했다.
이 1282고지전투는 유담리 방어진지전투 중에서도 가장 격렬한 전투의 하나였다.
그 세부 내용을 미군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있다.
달은 저녁6시가 지나서 떴는데 하늘을 덮은 안개는 달빛을 가로막고 있었다.
얼어붙은 눈을 밟는 발자국 소리... 중공군은 영어로 노래를 부르면서 전진해 오고 있었다.
미 해병대를 무찌르라고 외치면서...
그러자 조명탄이 터지고 밝아진 가운데 제1, 제2, 제3파의 차례로 공격해 오는 중공군의
모습이 떠올랐다. 제7해병연대 E중대의 죤 얀시(John Yancey) 중위의 소대 쪽으로
주된 공격이 일어나자 월터 필립스 중대장은 지휘소로부터 정상으로 뛰어 올라갔다.
정상의 진지에서는 얀시 중위가 소대 선임하사관과 함께 각 진지를 돌면서
탄약과 수류탄을 분배해 주며 격려와 조언을 해 주고 있었다.
수류탄 파편이 얀시 중위의 콧구멍 안에 박혔다.
그리고 어깨와 허벅다리에 관통상을 당했으나 그래도 소대를 돌며 격려했다...
일단 철수한 중공군은 전열을 가다듬어 다시 공격을 개시했다.
중공군은 해병대의 제1선소대를 돌파하고 박격포진지로 다가왔다.
얀시 중위는 생존자를 집합시켜 저지진지를 구축하고 방어에 임했다.
근처에는 피아의 사상자가 흩어져 있었다.
로버트 케네모아(Robert Sydney Kennemore)중사는 사상자로부터
수류탄을 모아 중대원에게 분배하면서 돌아다녔다.
피아가 뒤섞여 혼전상태가 되었다. 총검으로 찌르고 때리는 격투가 벌어졌다.
케네모아 중사는 날아오는 수류탄을 되받아 던지기도 하고 눈바닥에 차 버리기도 하였다.
그러다 시간이 맞지 않아 수류탄을 덮치는 순간에 폭발하여
양다리를 잃고 눈 덮인 경사면에 굴러떨어졌다...
중대장은 착검이 된 소총을 얼어붙은 대지 위에 꽂아 놓고
"이 선에서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마라. 부상자를 놔두고 물러설 수는 없다.
우리는 E중대가 아니냐."
그러나 중대장도 바로 전사하고 말았다.
두 번이나 부상을 당한 부중대장은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에 무릎쏴 자세로
중대를 지휘하면서 사격을 계속하고 격려의 소리를 외치다가 적탄에 쓰러지고 말았다.
얀시 중위는 병사 9명을 집합시켜 역습을 개시했다.
이때 기관총 탄환이 얀시의 입 안으로 튀어들어갔는데도 계속 질주하면서 사격을했다.
그러나 수류탄의 공격을 받아 이 작은 역습부대는 붕괴되었고, 1282고지 정상은
중공군이 지배하게 되었다. 이 때 수류탄의 폭발로 얀시 중위는 쓰러졌고 실명하게 되었다.
날이 밝기 전에 2개 소대를 데리고 증원하러 온 제5해병연대 C중대장 존슨 중위는
부상자를 후송한 다음 전병력을 장악하여 역습을 시도했다.
최선두에 선 존슨 중위는 총검으로 적을 찌르고 돌진했다.
이를 본 중대원들은 사기가 충천하여 중공군을 격멸하고 고지를 탈환했다.
이 제5해병연대 C중대에 대한 중공군의 공격양상을
중공군의 기사를 토대로 작성한 미 공간사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있다
중공 제235연대 1대대 3중대의 생존자는 6~7명에 불과했다.
정치장교는 대대지휘소로 철수하여 이곳에서 2중대 1소대를 이끌고
다시 산 정상을 향했다. 이때 제5해병연대 C중대의 돌격이 개시되고 있었다.
제1소대는 제3중대 진지에 도착하였다...
이때 미군(C중대)이 맹렬히 역습해 왔다...
소대장 이 봉희는 돌격을 명했다.
2개 분대가 먼저 고지 정상으로부터 10m위치까지 전진했을 때 수류탄과 소화기 사격을
받아 피해가 속출하여 돌격이 어려웠다. 다른 1개 분대도 반수 이상이 쓰러졌다...
이렇게 해서 불과 10분 사이에 전소대가 공격력을 상실하고 철수하여 방어로 전환했다.
새벽6시20분, 대대지휘소에서 제2중대장이 제2소대를 거느리고 왔다.
이 소대도 곧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격퇴당했으며 생존자는 7명 뿐이었다.
제1대대에는 제2중대 3소대만 남게되었으나 제2중대 정치장교가
공격을 계속할 것을 명령했다.
이 소대도 용감히 돌격했으나 수류탄과 사격에 의해서 격퇴 당했다.
이와 같이 제1대대는 마지막 남은 소대까지 투입시켜 공격했으나
결국 각개격파되어 괴멸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제235연대 1대대의 사상자는 대부분의 중대장을 포함하여 약 400명이었다.
이중에는 후송이 불가능하여 추위로 얼어죽은 자도 많았다.
미군측의 피해는 E중대가 총원 176명 중 사상자가 120명,
증원부대인 제5해병연대 A,C양 중대는 전사 15명, 부상 67명이었다.
만약 해병대가 1282고지를 지켜내지 못했다면 제5해병연대와
제7해병연대의 지휘소 마저 중공군에게 유린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로버트 케네모아(Robert Sydney Kennemore)중사.
두 다리를 모두 잃어 버린 용맹한 케네모아 중사는 의회명예훈장을 수여 받았다.
제7해병연대 E중대 죤 얀시(John Yancey) 중위
1282 고지 전투에서 시력을 잃어 버린 얀시 중위는
1950년6월까지 술집을 경영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소집된 장교였다.그는 태평양 전쟁 당시 과달카날, 오키나와 전투에 참가했으며
특공대원으로도 활약하여
해군십자훈장을 수여받았던 역전의 해병 장교였다.
의회명예훈장
1240고지 전투
여기에서 동남쪽으로 1500m 떨어진 1240고지의 제7해병연대 D중대에 대한
중공군의 본격적인 공격은 28일 새벽 1시가 지나서 개시되었는데
먼저 제3대대로 하여금 미군진지를 공격시켜 많은 해병들을 죽이고
3시경에는 중대지휘소를 점령했다.
후퇴한 D중대장 헐(Milton Hull)대위는 부상을 당하여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생존자를 집합시켜 역습을 감행하고 경사면의 한 모퉁이에 16명으로
고립방어진지를 편성했는데 중공군은 사방에서 이것을 포위했다.
중공군의 공격을 받지 않았던 제5해병연대 B중대의 1개 소대가 증원되어
헐 대위와 협력하여 한번은 1240고지 정상을 탈환했다.
그러나 중공 제136연대가 역습을 개시하여 미군을 정상으로부터 몰아냈다.
이 전투에서 D중대는 거의 전원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했고,
증원 부대인 C중대의 제3소대는 약 반수가 전사또는 부상당했다
1384고지 전투
1384고지에 대한 공격은 약간 늦어 28일 새벽 2시가 지나서 실시되었다.
제5해병연대 제3대대는 유담리 바로 북쪽에 집결해 있었는데 27일 저녁때는
대대지휘소를 중심으로 G,H,I 그리고 본부중대를 배치하여 전면방어태세를 갖추었다.
별도로 I중대의 1개소대를 1284고지 남쪽 능선상에 배치하였으며,
그 남쪽 300m지점에는 기관총 2정을 보유하고 있는 한국경찰 1개 소대가
진지를 점령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미군은 1384고지 정상부근에는
실제로 병력을 배치하지 않았다.
중공 제237연대는 1384고지로부터 능선을따라 서남방향으로 공격하여 고지상의
해병I중대 1개 소대를 새벽2시30분경에 돌파했으며 이어서 그 남쪽에있는
한국경찰 1개 소대도 격멸하고 고지의 첨단까지 진출햇다.
고지 기슭에있던 본부중대는 철수하고 한동안 대대본부만이 적 한가운데 남은 꼴이 되었다.
대대장은 새벽3시경, G중대의 2개 소대로 역습을 실시하여 1384고지 일부인
통제지점을 점령하고 진지를 편성함으로서 중공군의 유담리 서방에 대한 압력이
현저히 완화되었다. 즉, 1403고지와 1384고지방향으로부터의 접근로를 통제하여
1403고지에 있었던 제7해병연대 H중대의 철수를 용이하게 했다.
포병도 야간사격으로 방어를 지원했다. 지표면은 35센티미터까지 얼어붙었기 때문에
TD-14도저로도 진지구축이 불가능하여 포나 기관총이 모두 콘크리트처럼
단단한 지표면에 노출된 상태로 배치되어 있었다.
27일 주간에는 가끔씩 박격포탄이 날아왔다.
밤이되면 적의 침투로 소화기 사격이 잦았으나 피해는 적었다.
27일 밤부터 28일 아침에 걸쳐서 포병은 끊임없이
180도 전면에 사격을 했기 때문에 보유탄약이 다 소모되어 가고 있었다.
이 포병에 대한 최대의 위협은 포병진지를 감제하는 바로 북방의 1282고지와
1240고지가 돌파당하는 일이었다.
한국전쟁 초기에 북한군은 미군부대의 간격으로 야음을 이용해서 침투하여
직접 포병진지와 박격포진지를 유린함으로서 지원화력을 무력화하고
미군 보병의 퇴로를 차단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번 중공군은 야간에 해병대의 정면을 공격하고 있을 뿐,
포병을 직접 공격하지는 않았다. 지형이나 미군진지의 배치상태로 보아
침투하기가 어려웠거나 또는 정면공격만으로도 돌파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공격을 시도했던 것 같다.
산기슭에 중공군 시체가 널려있는 유담리 제5해병연대 지휘소
28일 새벽1시45분,
제5해병연대장 머레이 중령은 제2대대에게 여명에 서쪽으로 공격을 개시하라고 지시했다.
이것은 제5해병연대의 임무가 여전히 무평리방향으로 공격하는 것이었으므로
당연한 일이었다. 머레이 중령은 제2대대 뒤에 제3대대를 후속시켜 공세의 기세를
유지하려 했다. 이때 2대대는 중공 제89사단의 압력을 받으면서
겨우 1271고지를 점령하고 있었다.
그리고 중공 제89사단은 1403고지를 점령하고 있었는데,
이 지점에서 2대대의 우측 후면을 감제하면서 사격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당시 2대대는 공격으로 전환할 수 있는 태세라기 보다는
오히려 위험한 돌출부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5해병연대장은 제7연대장과 협의한 결과, 강력한 중공군에게 포위된 상태였기 때문에
두 연대는 신속히 방어로 전환하여 병력을 절약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11시, 제5연대장은 단독으로 2대대에 대하여 서남쪽 산으로 철수할 것을 지시했다.
대대는 오후부터 철수를 개시하여 밤8시에는 서남쪽 산으로 철수를 완료하고,
좌는 제7해병연대 3대대, 우는 제5해병연대 3대대와 연결하여 진지 편성을 마쳤다.
이 유담리진지에는 통합 지휘관이 없었으며 하갈우리와의 무전도 지형관계로
거의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모든 일은 유담리의 두 연대장이 협력해서 결정해야 했다.
제5연대장 머레이 중령은 지휘소를 제7연대 지휘소 근처로 옮겼다.
연대 지휘소 운영은 부연대장에게 맡기고 거의 제7연대 지휘소에 위치하여
제7연대장 리첸버그 대령과 긴밀하게 협력해 가면서 작전을 지휘하였고
참모들도 긴밀히 협조하여 업무를 진행했다.
양연대가 일체가 되어 행동하기 위해서 합동계획과 합동명령을 작성했다.
보통 이런 경우는 비록 사단으로부터 명령이 없더라도 당연히 선임연대장이
통합지휘관이되어 전반적인 행동을 통제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되는데,
여기서는 최후까지 협동관계를 유지했다.
제7연대장 리첸버그 대령은 제5연대장 머레이 중령의 의견을 존중했고,
나이도 어리고 계급도 낮았던 머레이 중령은 리첸버그 대령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졌다.
제5연대장은 돌출된 제2대대를 철수시키면서 약화된 중대를 교대시키고,
I중대로 하여금 1282고지를 점령시키고 B중대로는 1240고지를 확보하도록 하였으며
제1대대 주력을 예비로 했다.
제7연대장은 28일, 하갈우리-유담리간의 개통문제와 덕동고개에 있는
바어버 대위의 F 중대를 구출하기 위해서 제1, 제2대대를 유담리와 하갈우리 방향에서
각각 도로를 따라 공격시켰는데 중공군의 저지로 달성할 수가 없었다.
덕동고개를 점령하라!
유담리-하갈우리를 연결하는 도로는 암석으로 된 단 하나뿐인 일차선도로이며
대략 중간지점에 덕동고개라는 중요한 요충지가 있고 노면은 얼어붙은 상태였다.
이 도로는 유담리의 2개 연대로서는 유일한 보급로였다
사단은 이도로를 확보하기 위하여 덕동고개와 그 서북방 약3km 떨어진 무명고지에
보병1개 중대 정도를 배치하여 방어임무를 부여했다.
11월27일 11시30분,
하갈우리의 제7해병연대 F중대장 바아버 대위는 덕동고개로 전진하여 진지를 점령하고
주보급로를 방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바아버는 각 소대장을 동반하고 현지에
미리 가서 지형을 정찰하고 덕동산의 서남방약1km떨어진 신흥리 도로 북쪽고지에
진지를 선정했다. 저녁때 중대주력이 도착하여 바로 진지구축을 시작,
9시경에 진지편성을 마치고 대기하고 있었다.
이무렵, 중공 제79 및 제89사단은 유담리에 대하여 공격을 개시하고 있었고,
제59사단은 유담리와 덕동고개 사이의 도로를 차단하고 F중대진지에 접근하고 있었다.
덕동고개 서북쪽 무명고지(이하 터키힐)는
제7해병연대 C중대(중대장 죤 모리스대위. 1개 소대감편:이소대는 유담리의
제5,제7해병연대 통합지휘소 방어를위해 유담리에 남아 있었다)가 점령하고 있었다.
C중대진지에 대한 중공군의 공격은 28일 새벽2시30분부터 시작되었다.
중공군의 공격을 받고서 날이 밝았을 때는 이미 C중대는 전사 15명, 부상 44명이나
되었고 완전히 포위되어 1419고지의 중공군으로부터 감제당하고 있는 상태였다.
무전기도 파괴되어 항공기의 공중지원과 유담리 포대로부터도 지원을 요청할 수 없었다.
60mm박격포탄도 다 소모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자 28일 저녁때 제7해병연대 1대대가 도착하여 C중대를 구출했다.
그러나 이 대대는 F중대 위치까지는 도착하지 못했다.
이 작전의 개략적인 내용은 다음과같다.
제7연대장 리첸버그 대령은 고립된 F중대와C중대를 구출해내려는 작전계획을 수립했다.
먼저 덕동고개의 바아버 대위의 F중대가 간신히 버티고 있는
죤 모리스 대위의 C중대가있는 터키힐까지 뚫고 나오고,
A, B중대가 유담리에서 터키힐까지 뚫고 들어가 C중대와 합류하여
중공군을 격퇴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작전이 막 시작되기 전 바아버 대위의 무선보고가 들어왔다.
중공군의 강력한 공격과 많은 사상자 때문에 C중대를 구출하기위해
7km를 뚫고들어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현 위치고수를 요청하였다.
요청을 받아들인 리첸버그 대령은 차량 부족문제 때문에 유담리에 들어오지 못하고
하갈우리에 남아있던 제2대대장 랜돌프 록우드 중령에게
하갈우리 북쪽을 뚫고들어가 덕동고개의 F중대와 합류하도록 지시했다.
록우드 중령은 병력들을 F중대에 배속시켰기 때문에 중화기중대와 본부중대밖에
보유하고 있지 않았고, 중공군의 공격에 막혀 전진에 어려움을 겪다가
다시 리첸버그 대령으로부터 하갈우리로 되돌아가라는 지시를 받게된다.
터키힐의 C중대 병사들은 고장난 무전기를 고치기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려
결국 작동시키는데 성공 하였다.
한편, 제1대대장 데이비스 중령과 C중대의 무전이 연결되어 위험한 상황을 보고받았다.
데이비스 중령은 연대장 리첸버그 대령에게 구출을 허가해달라고 요청했다.
연대장은 상황이 허락된다면 C중대와 합류한 다음 가능하면 덕동고개까지 밀고들어가
F중대도 구출하도록 지시했다. A중대와 B중대를 이끌고 구출작전에 들어간
데이비스 중령은 최일선에서 전투를 지휘하였다.
그리하여 중공군을 물리치고 C중대를 구출한 데이비스는 시간 상
고립되어있는 F중대를 구출하기 힘들다 판단하여 유담리로 돌아갔다
덕동고개 전투
유담리 - 하갈우리간의 최대 요충지인 덕동고개는
27일 저녁부터 제7해병연대 F중대가 점령하고 있었다.
중대장 윌리엄 바아버(William E. Barber)대위는 11월7일에 중대장으로 임명되어
겨우 20일이 지난 때였다. 그는 1940년3월, 해병대 사병으로 입대하여
공정부대원으로 근무하다 태평양 전선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1943년11월 소위로 임관하여 유황도 전투에서 전공을세워
은성훈장을 수여받은 숙달된 전투경험자였다.
바아버 대위는 덕동고개의 진지점령시 천막 설치를 뒤로 미루고
즉시 진지구축을 개시하도록 했다.
복장이나 무기 손질에 대해서는 특히 엄격하고 꼼꼼했다.
중대에는 제2대대 화기중대의 중기관총반과
81mm 박격포반이 배속되어 있어서 그 병력은 240명이었다.
하갈우리에 있는 제11포병연대 3대대의 H포대(105mm곡사포)가
F중대를 직접 지원하도록 되어 있었다.
중대는고지 정상에서 북쪽을 향해서 1개 소대(2개 분대 제1선, 1개 분대 제2선),
서쪽과 동쪽방향으로 각각 1개 소대(각각2개 분대 병렬)를 배치하여
아치 형의 중대진지를 편성했다.
아치의 다리 부분은 반사면이었는데,
이 부분은 중대본부와 3.5인치 로켓포반으로 연결했고,
그 아래 도로 가까운 곳에 중대 지휘소와 60mm 및 81mm박격포진지를 배치시켰다.
81mm박격포는 북서쪽의 바위산에 대해서 시험사격을 실시했다.
그러나 하갈우리의 105mm포는 유담리에서 하갈우리로 가는 제1수송대대의
차량종대가 오전8시가 좀 지날 때까지 엔진소리를 내며 고갯길을
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위험하여 시험사격을 하지 못했다.
하늘은 맑고 달빛은 밝게 비쳤으며 기온은 영하 29도였다.
이무렵 중공군 제79,제89 2개 사단이 유담리에 대해 공격을 개시했다.
중공군 제59사단은 유담리와 덕동고개 사이의 도로를 차단함과 동시에,
F중대진지로 육박해 오고 있었고 1개 연대는 소리도 없이 이미 F중대의 진지를
포위하고 있었다. F중대 3소대장 로버트 맥카시 중위는 새벽1시가 좀 지나
진지를 순찰했는데, 돌처럼 얼어붙은 진지에서 암호를 수하하는 병사가 없었다.
소대장은 병사들을 집합시켜 호통을 쳤다.
그러자 분대장들은 병사들을 흔들어 깨우기도하고 발로 차기도 하며
정신차리라고 고함을 지르기도 했다.
2시경, 소대장이 다시 순찰을 했을 때는 각진지에서 활기있게 수하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무렵, 유담리방향에서도 격렬한 공방전의 총포성이 울리고 있었다.
28일 02시30분, 약 1개 중대의 중공군이 갑자기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단총을 난사하면서
북, 서, 남 등 세 방향에서 중대를 공격해왔다. 북방으로부터 능선을 따라서 돌격해 온
중공군 때문에 북쪽을 향해 배치되어 있던 약 2개 분대의 해병은 어느 사이에
많은 사상자(35명 중 27명)를 내고 후방 돌출부에 위치하고 있던 제2선 분대지역으로
철수함으로서 고지 정상은 중공군에 의해 점령되고 말았다.
이공격과 동시에 중공군은 서측방과 서북방으로부터도 돌격해왔다.
새로운 병력을 계속 투입하여 끊임없이 수류탄을 던지며 전진하는 중공군 병사와
이를 되받아 던지며 분전하는 해병대원간의 치열한 근접전투가 도처에서 전개되었는데,
해병대는 더 이상 중공군의 돌격을 허용하지 않고 끝까지 진지를 사수했다.
F중대 2소대 헥터 카페라타(Hector Caffereta)일병은
얼어서 마비된 발을 문지르려고 침낭 안에서 신을 벗고 있었는데,
중공군의 돌격 소리를 듣고 양말 바람으로 뛰어나와 호 속에 우뚝서서
소총으로 침착하게 조준사격을 했다. 10명 이상을 쏘아 넘어뜨렸을 때
소총이 작동되지 않았다. 소총을 달라고 소리치는 그에게 호 속에 넘어져있던
부상병이 장전된 소총을 건네 주었고, 그는 돌격해오는 중공군을 차례차례 쓰러뜨렸다.
실탄이 떨어지면 다시 부상병이 장전된 실탄 클립을 건네주었고
그것을 받아든 카페라타는 상반신을 노출 시킨 채 우뚝 서서 사격을 가했다.
뿐만 아니라 날아오는 수류탄을 되받아 던지고 소총을 야구배트 처럼 휘둘러
수류탄을 중공군에게 다시 날려보냈으며 때로는 발길로 차 내면서 분전했다.
F중대의 중요 요충지역을 방어해낸 카페라타의 공로가 인정되어
그에게 의회명예훈장이 수여되었다.
F중대 2소대 헥터 카페라타(Hector Caffereta)일병
중공군은 다시 진지 남쪽의 도로방향으로부터 북으로 공격을 개시하여
60mm박격포반장 이하 10명을 살상하고 중대 지휘소로 육박해 왔기 때문에
중대장은 지휘소와 박격포를 경사면 위로 이동시켰다.
도로방면에서 경사면을 올라오며 공격하는 중공군에 대해서는
미리 배치한 중기관총사격과 수류탄으로 저지했다.
60mm와 81mm박격포반의 하사관들이 모두 전사 또는 부상을 당했기 때문에
박격포는 일등병이 통합지휘하여 전투를 계속했다.
중대장 바아버 대위는 적탄의 위협을 무릎쓰고 진지들을 뛰어다니며 전투를 지휘하고
대원들을 격려했다. 동측면에 위치하고 있던 1소대는 거의 공격을 받지 않았다.
전투는 밤새도록 계속되었고, 날이 밝자 1소대는 그 주공으로서 산정을 향해
역습을 실시하여 본래의 주저항선을 회복했다.
새벽6시30분경에 전투가 거의 끝났는데,
그때까지 중대의 피해는 전사 20명, 부상 54명으로 약 31%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중공군의 시체는 약 450구였다.
이무렵 중대의 수류탄 보유량은 극히 소량이었고 박격포탄도 10발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중대는 해병 사상자와 중공군 전사자가 지녔던 화기, 탄약,
수류탄을 주워 모으는 한편, 공중보급을 요청했다.
부상자를 모두 천막에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눈 속에 구멍을 파고
그 안에 침낭을 깔아서 수용하고 교대로 난방시설이된 천막에 들어가게했다.
위생병은 몰핀 주사약을 입에 물고 녹여 가면서 부상자 구호를 위해 뛰어다녔으나,
혈액이 굳어서 수혈을 못해 죽은 부상자도 있었다.
오후늦게 해병대 R5D기가 박격포 탄약과 위생기구를 공중투하했으나
진지밖에 떨어진 것도 많았다. 주변의 고지에 대해서는 코르세어에의한
지상공격과 하갈우리로부터 포병의 엄호사격이 실시되었다.
28일에는 하갈우리와 유담리로부터 F중대에 대한 지원부대가 투입되었는데,
모두가 강력한 중공군부대에 의해 차단되어 덕동고개까지 도착하지 못했다.
28일밤, F중대의 배치는 전날 밤과 같았지만 진지에 배치된 병력수는 30%나 줄어 있었다.
하갈우리 포병은 밤중에 F중대 진지주변의 중공군에게 요란사격을 가했고,
81mm박격포는 진지 동북방의 바위 산에, 60mm박격포는 진지 북방쪽을 사격했다.
주간에 철수하여 재편성을 실시하고 있던 중공군 제59사단은 일몰 후
다시 공격을 재개하고 있었다.
밤10시30분경, 하갈우리방면에서 격렬한 포성이 들려왔다.
중공군 제58사단이 공격을 재개하고 있었던 것이다.
29일 새벽2시15분,
중공군의 한 부대가 북쪽의 3소대에 박격포 사격을 가한후 공격해왔다.
이어서 서북측과 서측 정면으로부터 전면적인 공격을 가해왔다.
40~50명의 중공군이 북쪽의 3소대 진지를 돌파하여 진내에 돌입 하였다.
진내에 들어온 중공군은 모여서 무언가 큰 소리로 떠들기 시작했다.
해병대원들은 경기관총을 후방으로 돌려 이들을 순식간에 섬멸해 버렸다.
그러나 아직도북방으로부터의 압박이 강해서 제1선부대는 20m정도 철수했다.
중대장은 왼쪽무릎에 관통상을 입었으나 부하의 부축을받아 앉은 채로 지휘를 계속했다.
29일 아침,
제3소대는 역습으로 주저항선을 회복했으며, 전날 밤의 손실은 전사 5명,
부상 29명이었으며 중공군 전사자는 200명 이상이었다.
날이 밝은 후 F중대는 주위에 낙하산을 둘러 놓아 표시를했다.
수송기는 이것을 표적삼아 정확한 투하로 탄약 등을 보급했다.
미 제6해병관측기인 헬리콥터가 SCR-300, SCR-619무전기의 건전지를 투하하다가
동체와 기수에 총격을 받았다.
C-119플라잉 박스카에서 투하된 보급품은 진지 서방 500m 지점에 떨어졌으나 낮에는
적의 사격 때문에 회수할 수 없어 밤에 포병의 엄호사격을 받으며 회수했다.
이렇게해서 박격포 탄약, 수류탄, 식량, 등을 수령했고, 모포와 들것도
보내왔기 때문에 부상자들을 땅 위에 재우지 않아도 되었다.
참고하세요
SCR-610
SCR-300 : 보병대대의 무선통신망을 구성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휴대용 경무선 전화기이며 통달 거리는 약 5km.
SCR-610 : 포병 사격 지휘용 무선 통신망을 구성하기 위해 사용하는 무선 전화기.본래는 차량 장치용으로 차량의 배터리를 사용 하도록 되어 있으나 차량에서 분리하여 건전지로 야전에서 사용할 수 있다.
통달 거리는 약8km, 공중과 지상 간의 통달 거리는 약 50km이다.
이날 오후 바아버 대위는 분대장 이상을 불러서 다음의 훈시를 하였다.
"유담리의 제5, 제7해병연대는 포위되어 격전중에 있으며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고 있다.
지난 28일 밤, 하갈우리진지도 강력한 공격을 받아 포위되어 고토리와 차단되었다.
이러한 상황이기 때문에 우리 중대가 증원을 받을 가능성은 없다.
앞으로는 보다 더 강력한 공격을 받을 것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대인지뢰와 조명지뢰를 전방에 매설하여 진지를 강화하라.
우리는 해병대답게 싸운다는 것만을 생각하면 된다."
29일 밤은 조용했으나 30일 새벽 2시경, 중공군이 영어로 소리를쳤다."F중대 제군은 포위되어있다...중공군은 따뜻한 옷을 주고 잘 대우한다.
즉시 항복하라"고했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 중대는 박격포 조명탄을 쏘아올리고 기관총탄을 퍼부었다.
30분 후 약 2개 중대의 중공군이 착검을 하고 도로의 남쪽으로부터 돌격해왔다.
중대는 주간의 공중보급 덕분에 충분한 탄약과 수류탄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박격포로 조명하고 기관총 사격과 105mm곡사포의 시한탄사격,
그리고 수류탄 투척으로 적을 완전히 격퇴시켰다.
30일, 헬리콥터가 무전기의 건전지를 가져왔고, 수송기가 탄약 등을 공중보급했다.
이로서 중대는 처음으로 예비탄을 가질 여유가 생겼다.
저녁 때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하여 4시간 사이에 7~8센티미터 정도가 쌓였다.
중공군은 4정의 기관총을 서북방 바위산에 거치하여 새벽1시가 좀 지나 사격을 가해왔다.
중대는 박격포로 조명을 하면서 105mm포로 사격을 했는데 다행히
초탄 발사된 포탄4발이 명중하여 일거에 격멸시켰다.
12월1일,
중대장은 중공군의 공격이 없었기 때문에 중대원들의 긴장이 해이해지는 것을
막기위해 중대지역을 청소하도록 명령했다. 쓰레기와 깡통은 파묻고 부상자의 장비는
한곳에 모아 정돈했으며 전사자의 시체를 나란히 누이고 모포로 덮었다.
척후를 북방으로 내보냈으나 중공군의 사격으로 거의 전진하지 못했다.
항공기와 박격포의 간단없는 공격에도 불구하고 중공군은 호 속에서 잘 견뎌내고 있었다.
12월1일 밤,
중공군은 산발적으로 장거리포 사격을 가해 올 뿐 별다른 공격은 없었다.
이날 밤 유담리로부터 제7해병연대 1대대가 쌓인 눈을 밟으며 적 진지를 돌파하여
F중대를 구원하기위해 달려오고 있었다.
2일 아침, 지원부대가 접근중이라는 것을 알게된 바아버 대위는
대대장에게 필요하다면 안내병사를 내보내겠다는 것을 무전으로 송신했다.
대대장은 그 기분은 알겠으나 그럴 필요는 없다고 응답해왔다.
2일 11시25분,
대대는 F중대의 진지에 도착하여 중대를 구원했다.
F중대는 5일동안 밤낮으로 완전히 포위된 상태에서 불과 240명으로
중공 제59사단의 맹공을 견뎌 냈고 적에게 막대한 손실을 입혔던 것이다.
중대의 피해는 약 47%로서 전사 26명, 부상 89명, 행방불명 3명 이었으며
특히 장교 중에서 부상당하지 않은 사람은 단 1명 뿐 이었다.
중대 전면에는 중공군이 유기한 시체가 1500구에 달했다.
F중대는 덕동고개를 고수함으로서
약 1주일간 중공 제59사단의 주력 2개 연대를 끌어들여 유담리진지에 대한
압력을 완화시킨 결과가 되었다. 중공군은 병력의 우세만을 믿고 인해전술로
이 작은 방어진지를 돌파하려고 용감하게 돌격을 되풀이했으나 끝내 돌파할 수 없었다.
F중대가 최종까지 건재하여 그 목적을 달성한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특히 중대장 바아버 대위의 강인한 의지, 적절한 지휘, 전대원의 왕성한 사기와 단결,
필승의 신념, 보, 포, 항공의 효과적인 협조체제, 충분한 보급 등은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바아버 대위와 카페라타 일병에게 의회명예훈장이 수여 되었다.
바아버 대위
5부로 계속 이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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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6월특집! 한국전쟁 장진호 포위망 돌파 ... (3부)
제7보병사단 부사단장 헨리 하지소장(왼쪽으로부터 두 번째).
10군단장 알몬드 소장(세 번째). 제7보병 사단장 데이비드 바 소장(네 번째).
제17연대장 허버트 포웰 대령(오른쪽 끝)
11월26일 아침.
제1해병사단장 스미드 소장은 헬리콥터로 흥남의 사령부로부터
유담리에 도착하여 정면의 적정을 보고받고 현지를 정찰했다.
이날 유담리의 제7연대는 3명의 중공군을 생포했는데 이들은 중공군 제60사단 소속으로
제20군 예하 제58, 제59, 제60 3개 사단이 20일, 전선에 도착했다고 진술했으며
또 중공군의 작전계획에 대해서도 정보를 제공했다.
그 내용은 미 해병 2개 연대가 유담리에 도착하면 중공군은 2개 군으로
해병사단을 공격한다. 유담리의 해병 2개 연대에 대해서는, 2개 사단으로
각기 북쪽과 서쪽에서 협공하게 하고, 3개 사단으로는 병참선을 차단하게 되는데,
유담리로부터 하갈우리, 하갈우리에서 고토리간, 고토리에서 진흥리간에
각각 1개 사단으로 공격하여 차단시키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야말로 아주 적절한 작전 구상이었는데,
말단 병사가 이와 같은 대규모 작전 계획을 소상히 알고 있을 리가 없다고
판단하여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없었다.
스미드 소장은 유담리에서 흥남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헬리콥터에서 눈이 덮인
고원을 정찰했으나 중공군의 징후를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사실은 이 지역에 수만명의 중공군이 숨을 죽이고 숨어있었던 것이다.
유담리는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이며, 북, 서, 서남 및 남으로 향하는 도로가
이 지점에서 시작되고 있는 교통 요충지이다. 이 분지 가까운 곳에서 분지를
잘 감제할 수 있는 1271, 1403, 1282, 1240, 1276, 1294 등의 고지가 높이 솟아 있고
이러한 고지들은 차후의 작전에서 피아 쟁탈전의 초점이 되었던 중요한 지형이다.
해병대는 자신들에게로 조용히 다가오고 있는 재앙을 알지 못하였다.
이미 육군은 해병대가 유담리로부터 서쪽으로 공격을 시작하기도 전에,
측방 엄호도없이 예정보다 더 빠르게 쾌속 전진만 하다가 제8군이 강력히 공격 당했고,
미 보병 제2사단도 4000명의 병력과 포병장비의 대부분을 잃어 버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해병대가 작전을 마칠 때까지 버텨주어야할 부대가 황급히 남쪽으로
도망치고 있었던 것이다. 맥아더 장군의 대공세는 중공군의 강력한 공격에 밀려
이미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그런데 육군은 이러한 긴급한 상황을
바로 다음날(27일)부터 작전을 개시하게되는 해병대에게 알려주지도 않고 있었다.
페이스(Don C. Faith)중령의
미 육군 제7보병사단 제32연대 제1대대(페이스 특수임무부대)가 육군 중 제일먼저
장진호 동안에 도달하여 해병제5연대로부터 책임전술구역을 인계받았다.
사단장 데이비드 바 소장대신 지휘를 총괄하고 있었던 헨리 하지(Henry Hodes)준장이
페이스 중령의 지휘소에 들러 지원부대들이 도착할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제31연대전투단(Regimental Combat Team)연대장
맥클린(Allen D. Maclean)대령도 이동해오고 있는 제3대대와 박격포 중대,
의료진, 제57야전 포병대대등으로 구성되어진 혼성부대(특수임무부대)를
지휘하기 위해 도착하였다. 페이스 중령의 제32연대 제1대대도 맥클린 대령의
지휘 하에 놓여지게 되어있었다.
페이스 부대에는 에드워드 스탬포드(Edward P. Stamford)해병대위가
3명의 부하와함께 항공함포 통제팀으로 배속되어 있었다
미 육군 제 31연대장 알렌 맥클린 대령과(왼쪽)과 돈 페이스 중령
27일 08시15분,
제7해병연대장 호머 리첸버그(Homer Laurence Litzenberg)대령 휘하 제3대대는
유담리-무평리도로 양측의 산악지대를 2개 공격제대로 나누어 서쪽방향에서 공격을
개시하여 1426고지와 1403고지를 저항없이 점령했고
G중대는 다시 서남방 쪽으로 공격을 계속했다.
주공부대인 레이몬드 머레이(Raymond L. Murray)중령의
제5해병연대 제2대대(대대장 로이스-Harold Sigward Roise중령)는
제7연대 제3대대와 동시에 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진격하였는데
제1목표인 1271고지에 포진하고 있던 중공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공격이 여의치않자 제2대대는 이미 1403고지를 점령한 제7연대 제3대대의
야포와 박격포, 그리고 공중지원을 받아 겨우 1271고지를 점령할 수 있게된다.
또한 장진호 서쪽으로 수색정찰을 나갔던 제7연대의 수색대가
중공군을 만나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귀환했다.
이날의 전투상황으로 보아 상당히 강력한 중공군이
유담리부근에 진출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리고 중공군 정찰대가 저녁 때까지 지근거리까지 접근하여
정찰을하는 모습이 목격되었다. 해병대는 중공군의 특기인 야간공격에
대비하기위하여 신속히 진지를 구축해야만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해병대는 거의 6만에 달하는
중공군의 대병력이 서서히 목을 조여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육군의 상황은 더 암담했다.
미 보병 제7사단은 각 예하부대들 간에 제대로 연락도 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장진호 주변에 분산배치 되어있던 제31연대전투단(Regimental Combat Team)연대장
맥클린(Allen D. Maclean)대령이 전초기지를 마련하기 위하여 내보낸
수색소대원 전원이 행방불명되는 불길한 사건이 발생한다.
또한 제31연대는 하갈우리를 포위하기 위해 장진호 동안으로
이동해오고 있던 중공군 제80사단의 우선 제거대상이었던 것이다
제1해병사단 제7해병연대장 호머 리첸버그(Homer Laurence Litzenberg)대령.
장진호 전투 당시 47세로서, 일개 병사에서 중장까지 승진하게되는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유럽과 태평양 전선에 참가했던 그는 대담한 작전을 수행하여
전격 리첸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부하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으며, 근무시간 외에는 부하를 절친한 친구처럼 대해
그 광경을 본 장교들을 놀라게 했던 인물이다.
또한 부하 장교들과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는 것을 즐겨했으며,
그에 대한 부하들의 신뢰도 절대적이었다 한다.
1951년 1월, 준장으로 승진한 후 중장 계급으로 예편한다.
제1해병사단 제5 해병연대장
레이몬드 머레이(Raymond L. Murray)중령.
당시 37세의 젊은 연대장이었던 머레이는 텍사스 농과대학을 졸업한 후, 1935년 소위로 임관하여 중국 북경과 아이슬란드에서 근무한 후 영국 전술학교를 졸업한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29세의 대대장으로서 과달카날, 타라와, 사이판에서 전투를 하였으며 중상에도 불구하고 용전분투하여 은성훈장 2개와 해군 십자장을 수여 받았다.
그의 용감성과 치밀한 계획, 지휘능력은 일찍부터 해병대에서 주목 받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해병대 제1진으로 제5해병연대의 파견이 결정되자 중령계급으로 연대장에 임명 되어 부산 교두보 및 인천상륙작전에서 큰 활약을 하였다.
1951년에 대령으로 승진하고 해병대 학교장, 오키나와 제3해병사단 부사단장으로
근무 했으며 1959년 소장으로 진급, 워싱턴 해병대 사령부 작전부장을 거쳐
1967년 수륙 양용군 부사령관으로 임명된다.
27일 저녁,
제5, 제7해병연대는 사단 포병의 주력과 함께 전면방어진지를 편성하고
다음날의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갈우리에는 제1해병연대 제3대대장이
지휘하는 2개 소총중대 외에 105mm 곡사포 2개 포대와
각종 보급정비부대가 위치하여 대량의 보급물자가 야적되어 있었다.
제1해병사단 사령부는 아직 흥남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28일에는 그곳에
후방 지휘소를 남겨두고 주지휘소는 아침 일찍 하갈우리로 이동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사단 본부중대와 각 참모부의 주력은 이미 하갈우리에 도착해 있었다.
또한 하갈우리에는 미 제10군단의 지휘소와 후방시설이 곧 이동해 올 예정이었고
각종 부대의 선발대는 이미 도착하고 있었다. 수송기용 활주로는 해병 공병대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작업중이었지만 아직 1/4정도만 겨우 완성되었을 뿐이었다.
이렇게 하갈우리는 지휘 및 군수지원의 중심지가 되어 가고 있었는데,
이것을 방어하기 위한 보병병력은 극히 적었다
루이스 풀러(Lewise Burwell Puller)대령
고토리에는 루이스 풀러(Lewise Burwell Puller)대령이 지휘하는
제1해병연대 2개 대대와 105mm 곡사포 1개 포대가 전면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있었으며
지휘소는 보병 1개 대대와함께 황초령에 위치하고 있었다.
당시 52세였던 풀러 대령은 1918년 일개 사병으로 입대하여 수 많은 전공을 세우고
나중엔 해병 중장까지 승진한 사람이다. 미 해병대에서는 전설적인 인물로 통했으며
그의 전기는 해병대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베트남 전쟁에 자원하여 참전하려 했으나 너무 고령이라 좌절되기도했다.
진흥리에는 제1해병연대 제1대대와 105mm 곡사포 포대가 있었으며
덕동고개에는 하갈우리로부터 이동해 온 바아버(William E. Barber)대위의
제7연대 제3대대 F 중대가 도착하고 있었다.
이 고개는 하갈우리와 유담리를 연결하는 유일한 도로를 통제하는 요충지였기 때문에
제7연대는 증강된 1개 중대로 이곳을 확보할 생각 이었다. 바아버 대위는 적의 공격이
예상되는 지점을 예측하여 방어진지를 구축하기에 유리한 지점을 찾아내었다.
이 결과로 나중에 포병지원을 보다 원활히 받을 수 있게 되는데,
이것은 유담리보다 하갈우리로 부터 더 가까운 곳에 진지가 위치했기 때문이다
바아버(William E. Barber)대위
바아버 대위는 1919년11월30일 캔터키 주에서 태어나 1940년3월 해병대에 입대하여 공수교육 이수 후 노스 캐롤라이나 뉴 리브에서 공수교육대에 근무한다.
1943년5월, 버지니아 콴티코의 장교 후보생으로 입교하여 8월11일 소위로 임관한다. 바아버는 1944년까지 제1공수연대에 근무하였고, 제5해병사단 제26연대 소대장으로 이오지마 전투에 참가하여 부상을입고 후송되었다.
그 직후 중위로 진급하여 일본에서 근무하고, 1950년10월에 대위로서 한국전쟁에 참가, 명예훈장을 수여받게된다.
바아버 대위는 전공을 세우고 성실한 성품 때문에 일개 사병에서 장교로 승진하여 한국전쟁에 중대장으로 참가한 것이다.
1960년3월에 중령으로 진급한다.
한편, 중공군은 용산동 부근에 있는 미 제25사단을 공격함과 동시에
구장동부근의 미 제2사단을 돌파하여 진격해오고 있었다.
이에 미 제8군은 정주부근까지 진출해 있던 미 제24사단에게 즉각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이무렵 송시륜(宋時輪) 장군 지휘하의 중공 제4야전군 예하
9집단군의 12개 사단 12만명은 장진호부근에 부대 전개를 거의 마치고
미군에 대한 공격준비를 완료하고 있었다.
제9집단군은 유담리 북방 16km 지점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유담리, 덕동고개에 3개 사단,
진흥리, 하갈우리, 고토리에 각각 1개 사단씩을 투입하여 동시에 공격하여 일거에
미 해병사단을 섬멸하려는 기도하에 공격개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세부사항을 보면 제20군 예하 89사단은 유담리 서방에 전개하고
제59사단은 하갈우리-유담리 간의 도로를 차단할 목적으로 유담리를 우회하여
덕동고개에 있는 제7연대소속 바아버 대위의 F중대 방어진지와
유담리 남쪽의 제7연대 C중대 방어진지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제58사단은 28일 밤에 하갈우리의 미군을 공격하는 임무를 부여받고
하갈우리 서남방을 향하여 진격중이었으며, 제60사단은 고토리-하갈우리 도로를
차단하려고 고토리 부근에서 북쪽을 향하여 이동중이었다.
제27군 예하 79사단은 유담리 북방에서 공격하기 위해 집결지로부터
공격 대기지점으로 이동중이었으며 제80사단은 장진호 동쪽인 진흥리의
미군 방어진지에 대한 공격준비를 끝냈으며 예비로 2개사단을 확보하고 있었다.
또한 제26군도 계속 남하중이었다.
지금 이 상황은 모택동이 가르친 그대로이다.
"어떠한 전투에 있어서도 압도적으로 우세한 병력을 집중하여 사방으로부터
적을 포위하여 한 명도 놓치지 않도록 완전섬멸한다.
준비없는 작전이나 확신없는 작전은 하지 않는다.
어느 싸움에서도 충분히 준비를 갖추고 적과 아군간의 조건을 비교하여
승리할 확신을 갖도록 해야만 한다"-1947년2월25일/ 당면한 정세와 우리의 임무
당시 50세이던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 겸 중공군, 북한군 통합사령부 사령관이었던
팽덕회(彭德懷)는 모택동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봉천에서 이 작전을 구상하고 결정했다 한다
팽 덕회 사령관(왼쪽)
11월27일 저녁 유담리.
27일저녁, 제5, 제7해병연대는 유담리 주위에 10개의 소총중대를 배치하여
전면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있었다.
제5해병연대 3개 대대는 연대 주력과함께 무평리에 대한 공격작전에 참가하기 위하여
장진호 동쪽 기슭에서 출발하여 27일 정오경에는 유담리 서쪽지역에 집결하였고,
제5해병연대 주력의 2개 대대는 무평리 공격을 위하여 유담리에 집결했었다.
그밖의 방어진지의 남쪽 주보급로상에는 제7해병연대 C중대가 있었고,
유담리와 하갈우리 중간지점인 덕동고개에는 바아버 대위의 F중대가 있었다.
그런데 차량부족 때문에 제7연대 제2대대장 렌돌프 록우드(Randolph Lockwood)중령을
포함한 대대본부와 화기중대의 주력과 제7연대 대전차중대는 아직 하갈우리에 남아 있었다.
따라서 제7연대장 리첸버그 대령은 각중대장들에게 록우드 중령이 도착할 때까지
제1대대장인 데이비스(Ramond Gilbert Davis)중령의 지휘를 받으라고 지시했다.
유담리에는 전차 승무원이없는 채로 M4A3셔먼 전차 1대가 남겨져 있었다.
사단장이 무평리 공격작전을 지원하기 위하여 27일 하갈우리에서 유담리를 향해
4대의 M-26 퍼싱전차에게 출동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노면이 얼어붙어
미끄럽기 때문에 유담리로 전진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더 가벼운 셔먼전차 1대로 시험운행을 해본 결과
3시간 만에 무사히 유담리에 도착했다.
승무원은 다음날 전차소대의 이동을 유도하기 위해 즉시 헬리콥터를타고 하갈우리로
돌아갔다. 이렇게 해서 승무원이 없는 셔먼전차 1대가 유담리에 있게 된 것이었다.
포병은 유담리 부락의 동남방향에 전개하여 밤11시 까지 진지편성을 완료 하였고,
제11해병포병연대의 제1대대(105mm 곡사포)와 제3대대 G포대와 I포대(105mm 곡사포),
그리고 제4대대(155mm 곡사포)로 포병대대군을 편성하였으며 총문수는
105mm곡사포 30문, 155mm 곡사포 18문으로 총 48문이었고,
그 외에 제5, 제7해병연대를 합쳐 4.2인치 박격포가 모두 24문이 있었다.
제1 근무대대의 분견대가 유담리에 도착하여 사단 보급소를 개설했는데
식량과 연료는 각각 3일분, 소화기 탄약은 부대 보유분 외에 2일분에 불과했고
포병탄약도 포대의 기본 휴대량 외에는 극히 적은 수량을 보유하고 있었다.
제1해병사단 제1수송대대는 보급품을 싣고 낮에 유담리에 도착 했는데
수송대대장은 다음날의 보급품 수송을 위하여 어두워져서야 하갈우리를 향해 출발했다.
이때 유담리의 부상자는 이 차량을 이용하여 전부 후송되었다.
또한 양 연대의 보유차량도 될 수 있는 한 많은 보급품을 수령하기 위해서
자대에 40~50대를 남겨 놓고 그 외의 차량들은 모두 수송대대장이 통합지휘하여
하갈우리로 향했다. 이들 차량은 모두 험한 덕동고개를 넘어 무사히 하갈우리로 돌아갔다.
이러한 조치로 유담리 내에는 부상자가 하나도 없게 되었고 차량 수도 줄어들어
차후 작전행동에 큰 도움을 주는 결과가 되었다. 덕동고개에 포진한 F중대원들은
전조등을 켜고 덜컹 거리며 지나가는 자동차 행렬을 보고 있었는데,
이 차량들은 그 뒤로 유담리로 돌아오지 못하고만다.
전쟁 초기에 미군은 차량이 너무 많아 행동에 지장을 받았고,
더욱이 부상자까지 동반하고 있었기 때문에 피해가 많았다.
유담리에서 부상자와 차량 숫자가 줄어든 것은 우연히 얻어진 행운 이었다.
밤이되자 하늘에는 항공기가 사라지고 기온은 영하 29도로 급격히 내려갔다.
바로 이때 어둠을 타고 소리없이 중공 제89사단이 서북방으로 부터,
제79사단은 북방으로부터 산을 타고 유담리 진지로 접근중이었으며,
제59사단은 우회하여 남산과 덕동고개를 향하고 있었다.
중공 제4야전군 사령관 송시륜은 제89사단으로 하여금 서북쪽에서
제79사단은 북쪽에서 미 해병대를 야간공격으로 돌파하게 하고
동시에 제59사단으로 하여금 퇴로를 차단하게 하여
유담리의 2개 해병연대 주공을 포착, 섬멸한다는 계획 이었다.
퇴로를 차단하여 완전히 독 안에 든 쥐로 만들어 일거에 격멸해 버린다는 것이었다
중공군의 공격 11월 27일 밤~
이해를 돕기 위해 그린 당시의
각 연대와 예하부대의 포진 상황과
중공군 주 공격 루트입니다.
미흡하지만... 클맄하셔서 좀 더 큰 그림으로 보시길...
(서북지역 산악전투 시작)
중공 제89사단은
박격포 사격을 가한 후 유담리 외곽 서북쪽을 따라 진지를 구축한
제5해병연대 제2대대(대대장 해롤드 로이스중령)와
제7해병연대 H중대(중대장 르로이 쿡대위) 정면에 대하여
제266, 제267연대를 돌격 시켰다.
이 돌격은 박격포사격과 수류탄 투척으로
27일 밤9시30분부터 10시 사이에 시작되어 밤12시 까지 계속 되었다.
용감하게 돌격해온 중공군은 소규모 돌파구는 열었으나 종심깊게 들어오지는 못하였다.
이 동안 해병대는 중대 예비병력으로 진내에 침투해온 중공군을 역습으로 격퇴하고
큰 피해를 주었다. 그러자 중공군은 일단 공격을 중지하고 다시 전투태세를
가다듬은 다음, 새로운 병력으로 28일 새벽3시경부터 다시 공격을 개시하여
일부는 돌파에 성공하여 1271고지 정상의 제5해병연대 제2대대의 진내에 돌입 하였다.
한편, 다른 중공군 부대는 지형상 고립되어있는 1403고지의 제7해병연대 H중대를 포위,
기습공격하여 치열한 전투 끝에 중대장 르로이 쿡대위등 많은 해병들이 전사, 부상 또는
실종되고 새벽6시에 고지를 점령당하고 말았다.
용감히 싸우다 겨우 살아남은 해병들은 새벽에 고지를 탈출하여 빠져 나왔다.
제7해병연대 제3대대장
윌리엄 해리스 중령(제1해병항공단장 피일드 해리스소장의 아들)은
1403고지 상황을 전달받고는 몹시 안절부절했다.
1403고지가 탈취 당했다는 것은 1271고지 정상의 제5해병연대 제2대대의
후방통로를 차단할 수 있는 유리한 위치를 중공군이 차지한 것을 의미한다.
유담리의 연대와 연결되는 도로가 고지의 중공군에게 그대로 노출되기 때문 이었다.
유엔군이 압록강에 도달하자 모택동은 대만공격을 뒤로 미루고
유엔군을 치기로 결정했지만소련은 3차대전을 우려하여 직접 참가하지는 않는다.
4부로 계속 이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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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6월특집! 한국전쟁 장진호 포위망 돌파 ... (2부)
1차 참전시 포로로 붙잡힌 중공군
해병제1사단의 정면은 어떠했을까?
당시 제1해병사단의 작전지역인 흥남, 함흥부근에는 게릴라활동이 활발했다.
그래서 사단장은 곧도착할 예정인 미 제3보병사단이 올 때 까지 2개연대로 후방지역을
방어하고 1개 연대 전투단(제7해병연대)으로 장진호를 향해 북진하기로 했다.
제7연대 전투단은 제7해병연대에 제11해병연대 3대대(105mm곡사포), 수색중대,
제1수송대대, 제1공병대대 C중대, 제1의무대대 E중대, 제1통신대대 분견대,
제1근무대대 분견대를 배속시켜 편성되어 있었다.
제7연대 전투단은 중공 제124사단의 저항을 격퇴하면서 흥남-장진호 도로를 따라
긴 도로를 조심스럽게 전진해나갔다.
한편 제1, 제5해병연대는 흥남, 함흥지역에서 게릴라와 교전 중에있었다.
해병대가 전진해야할 이 도로는 흥남을 깃점으로 약76cm의 협궤철도와
나란히 북상하여 비교적 평탄한 함흥평야를 지나 마전동을 거쳐 진흥리부근에서
산악지대로 접어들어 급경사를 이룬 황초령을 넘어 고토리를 지나서
장진호 남단인 하갈우리에 이르고 있었다.
진흥리까지는 2차선의 자갈길이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진흥리부터는 울퉁불퉁한 1차선 도로이고 고토리 남방 4km의 황초령 고갯길은
급한 낭떠러지가 있는 산허리를 꾸불꾸불 돌아가고 있었다. 철도도 급경사를
이룬 이 구간에서는 케이블카를 이용하여 고토리까지 운행하고
여기부터 다시 단선인 협소한 철도가 이어져 있었다.
도로는 장진강을따라 장진호로 통하고 있었는데, 이 도로는 고토리에서부터
기복이 심한 고지대를 지나 장진호 남쪽 하갈우리에 이르고 있었으며
경하리에서 호수 동쪽으로 북상하는 도로와 서쪽인 유담리에 이르는 도로로 갈라져 있었다.
서쪽으로가는 도로는 하갈우리 분지를 지나 덕동산(해발 1,653m)을 넘어
계곡을 따라올라가서는 호수 서남단의 유담리로 통하고 있었다.
여기서부터 도로는 다시 북쪽과 서쪽으로 향하는 두 길로 갈라져 있었다.
이 부근의 도로 양측에는 활엽수와 소나무의 엉성한 숲이 여기저기 있었으나
시계는 대체로 양호한 편이었다.
주요기점간의 노상거리는
흥남-함흥 13km, 함흥-진흥리 56km, 진흥리-고토리 16km,
고토리 -하갈우리 18km, 하갈우리-유담리 22km이다.
이 도로가 바로 미 제1해병사단이 장진호로 진출하기 위한 유일한 도로였다.
진흥리 이북은 긴 협로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일단 도로를 폐쇄하게되면
보급도 후송도 단절되고 만다는 것은 너무도 명백한 일이었다.
특히 진흥리 북쪽으로부터 고토리 남쪽 사이에
황초령 언덕길(직선거리 6.5km, 노상거리 13km, 표고 760m)은 아주 험로였다.
이것은 인공 저수지인 장진호가 양 구간의 낙차를 이용해서 발전하기 위하여
만들어 졌다는 점으로 보아서도 그 경사가 급하다는 것은 짐작이 간다.
더욱이 이 도로는 노면상태도 좋지 않은 1차선이어서 트럭의 운행이 극히 어려웠다.
도로의 한쪽은 깎아 세운 듯한 절벽이 솟아 있고 그 반대쪽은 낭떠러지였다.
그리고 도로폭이 좁아서 전차가 지나가려면 도로를 개수해야만 했다.
1950년10월. 원산항 기뢰제거 작업에 투입된 UDT.
이 당시 한국군은 중공군의 출현을 이미알게되었고, 붙잡힌 포로들이
중공 제4야전군 9집단군(병단) 42군 124사단 소속으로 밝혀졌다.
결국 제7연대 전투단은 지연작전을 실시한 중공 제124사단 병력과 실제로 만나게되어
고지 쟁탈전을 벌여야했다. 해병은 코르세어의 근접항공지원 하에 적 진지를 공격했고,
중공군은 낮에는 진지를 방어하고 있다가 밤이면 포위, 우회작전을 시도하여
미군진지를 공격해왔다. 또 일부는 밤낮없이 배후로 침투하여 후방을 차단하려했다.
산정에서는 소규모 부대 간의 근접전투가 처절히 벌어졌다.
설마했던 중공군의 개입이 현실이 되었던 것이다.
산악지대에서의 근접전에서 60, 81mm 박격포는 아주 효과적인 무기였다.
당시 중공군124사단은 북한군 344 전차연대소속 T-34전차의 지원을 받고 있었으며,
해병대와의 수동 전투에서 큰 피해를입고 잔존병력들이 북쪽으로 후퇴하여
황초령 고개로 올라가는 곳에 진지를 구축하였는데 전차들은 길이좁아 올라가지 못하고
고개 입구에 포진해야했다.
결국 이 전차들은 해병대원의 로켓포, 무반동총, 항공기의
공격에의해 고철로 변해 버렸고 포병 11연대의 대포에
중공군124사단 잔존병력은 거의섬멸되었다.
파괴된 T-34 전차
작전 내내 공중에서 필사적으로 지상군을 엄호해준 VF-791소속 FAU-4 코르세어
제10군단장 알몬드 (Edward M. Almond) 육군 소장
11월7일,
제7해병연대 전투단은 험준한
황초령 문턱까지 진출했다.
알몬드 군단장은 7일 비행기로
흥남의 미 해병사단 사령부로
날아와 사단장과 회담을 가졌다.
군단장은 사단의 공격을 독려하였
지만 스미드 사단장은 겨울이
목전에 다가왔고, 산악지대에서의
보급의 어려움과 게릴라가 날뛰고
있는 점을 고려해 볼때 험준한
황초령을넘어 산간의 긴 애로인
고토리까지 전진하는 것은 위험
하므로 우선 사단의 병력을
집결시켜 원산, 함흥, 흥남을
확보하는데 필요한 지역을 점령하는 정도로 그치는게 좋겠다고 주장했다.
제1연대는 원산, 5연대는 신흥계곡, 7연대는 수동 북쪽에있기 때문에
사단의 각 연대는 너무 멀리 분산 배치되어 있어 스미드 소장은 전투력의
약화와 무방비 상태에 놓여진 사단의 좌측면을 염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강직하고 고집이 센 알몬드는 자신의 주장을 쉽게 바꾸지 않았다.
더욱이 맥아더 원수로부터 전속력으로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이를 한사코 실행하려했다. 그리하여 스미드 소장의 건의에대해 병력 집결문제는
찬성했으나 다른 사항은 일체 승인하지 않고 사단에 대해서 다시금 북쪽으로 전진하여
하갈우리를 확보하도록 지시했다.
또한 10군단 특수작전 부대가 측면을 방어할 것이라며 안심시키려 하였지만
이 부대는 중공군에게 호되게 당해 오히려 해병대가 도와주는 처지에 놓이게된다.여러가지 불미스런 일들로 인해 해병전체로부터 이미 전술과 용병술에있어
신뢰를 잃어버린 알몬드 소장은 스미드 소장의 통찰력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제7연대 전투단은 이틀에간에 걸쳐 강력한 정찰조를 편성하여 수색을 실시했다.
연대장 호머 리첸버그 대령은 무방비 상태의 연대의 측면과 매복을 우려했던 것이다.
그런데 황초령을 지키고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던 중공군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중공군은 이미 2일 전부터 유엔군과의 접촉을 끊고 철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8군 정면의 중공군도 철수하여 자취를 감추었다.
적이 없음을 확인한 제7해병연대는 황초령을 넘어가기 시작했다.
중공군이 자취를 감춘 이유는 대략 3가지로 추론된다.
하나, 1차개입 부대는 후속부대의 전개를 엄호한다는
지연임무를 완수했기 때문에 철수했다.
둘, 본격적인 공격준비를 위해 보급 및 재편성을 실시하려했다.
셋, 유엔군을 함정에 끌어넣기 위해 일부러 철수했다는 것이다.
스미드(Oliver P. Smith)제1해병사단장
제7해병연대 전투단은
소규모적인 접전을 벌이며 10일에는
고토리, 14일에는 장진호의 남쪽
끝에있는 하갈우리를 점령했다.
제5해병연대 전투단도 마전동,
진흥리, 고토리까지 진출하여
보급로를 방호했고
제1해병연대 전투단은 그
후방지역을 확보하고 있었다.
제10군단은 11일 사단에대하여
장진호 동쪽 기슭을 거쳐 북부
국경지대를 향해 공격함과 동시에
일부 병력으로 흑수리와 유담리에
저지진지를 편성하도록 명령했다.
또 미본토에서 도착한 미 제3사단
에게는 제1해병사단과 교대하여
원산-영흥지역을 담당하라고
명령했다.
(제3사단의 일부 병력은 11월5일에서6일 동안 원산에 상륙했다.
사단주력은 샌프란시스코로부터 9월 중순 동안에 일본에 도착하여 10월 한 달간에
걸쳐서 한국군 8,500명을 보충한 뒤, 11월10일에서 17일동안
원산에 상륙하여 미 제10군단 지휘하에 들어갔다.)
이것은 아직 전투경험이 없는 보병사단을 우선 후방지역을 방어하는데 사용하고
가장 어렵다고 예상되는 정면에 숙달된 해병사단으로 공격시킬 생각이었다.
군단이 제1해병사단에 일부 병력을 좌측방에 배치하도록 지시한 것은
서쪽으로부터의 위험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제1해병사단은 하갈우리 주변에 병력을 집결시켰다.
개마고원의 겨울은 빨리 찾아와 제7연대가 고토리에 도착한 10일에는
기온이 영하 18도 이하로 급강하했고, 15일이되자 하갈우리에서는
기온이 영하 26도까지 내려갔다.
제1해병사단은 보급로의 보수, 주요 보급기지 설치,
그리고 보급과 후송용의 비행장 건설, 방한용 피복 자재 입수에 최대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것은 혹한기 산악지역과 긴 애로지역작전을위한 적절한 조치였으며
이후 작전에 매우 효과적이었는데
그 개요는 다음과같다.
제7해병연대의 고토리 점령과 동시에 사단 공병은
진흥리-고토리간의 도로를 보수하기 시작했다.
18일에는 M-26 퍼싱전차의 통과는 불가능했으나
M4A3셔먼전차는 통과할 수 있게 되어 사단 전차대대는
셔먼 3대와 도저 전차 4대로 임시편성한 전차소대를 하갈우리로 전진시켰다.
한편 활주로는 13일까지 고토리에 경비행기가 이착륙할 수 있도록 완성되었다.
그러다 19일에는 고갯길이 개통되었기 때문에 사단은 대형 도저 5대를 보유한
공병 1개 중대를 하갈우리로 이동시켜 수송기용 활주로 건설에 착수했다.
제1해병사단 제1전차대대 M32A1B3 장갑 회수차량. 1950년11월10일 함흥.
11월23일,
유엔군 전선은 한반도 중앙을 남북으로 잇는 낭림산맥을 따라 동서로 양분되어 있었다.
서쪽의 제8군은 미군 4개 사단, 한국군 4개 사단, 영국군 2개 여단을 주력으로 하여
청천강 선에서 총공격을 위하여 대기하고 있었다.
동쪽의 제10군단은 4개의 공격축선에 따라 북방 국경을 향해 북진 중이었다.
이 중 미 제7사단 17연대는 21일에 한.만국경인 혜산진에 도달하여 압록강 건너편의
눈덮힌 만주의 산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추수감사절동안 칠면조 등 여러 가지 음식들이 병사들에게 제공 되었고,
해병 제1사단은 이날 북진을 위한 명령을 하달했다.
"사단은 장진호 동쪽 기슭을 거쳐 북방 한.만국경을 향해 공격한다.
제5연대는 주력부대로서 먼저 하갈우리 북방32km 떨어진 곳을 점령하고
제7연대는 유담리를 점령하라. 제1연대는 하갈우리, 고토리, 진흥리를 점령하여
보급로를 방어하라."
그리고 병참선을 방어하기 위해 제1전차대대를 마전동부근에 배치하고
제1공병대대는 병참선 유지와 하갈우리 활주로 건설을 중점적으로 실시하라고 지시했다.
또 보급소를 하갈우리에 설치하고 1종(식량)과 3종(연료)은 8일분, 5종(탄약)은 3일분,
2,4종(각종 피복과 장비)은 편제상의 소요량을 확보하도록 명령했다.이 명령은 병력운용에 있어서 우선 1개 연대로 적을 공격하고 2개 연대로 보급로와 사단
좌측방을 엄호하려는 것이었다. 이 작전은 긴 협로를 따라 공격하는 것이므로
우선 진로상에 기지를 설치하여 필요한 물자를 집적하고 활주로를 건설하는 등
군수지원문제를 중요시한 점에 특색이있다.
이것은 제1해병사단장 스미드 소장의 의도된 바였다.
스미드 소장은 전진을 재촉하는 알몬드 군단장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사단을 한 곳에 집중시키려 부단히 노력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비록 깊은 골짜기와 험난한 협로로 꾸불꾸불 이어져있긴 했어도
사단 주둔지 끝에서 끝까지 차량으로 한시간 정도 걸리는 전술구역 내에
사단병력을 집중시키게된 것이다.
사단의 명령에따라 각 연대는 다음과 같이 조치했다.제1연대는 진흥리, 고토리, 하갈우리에 각각 1개 대대를 축차적으로 추진시켰으며,
제5연대는 장진호 동쪽 기슭을 따라 북방으로 공격하기 위하여 병력을
하갈우리 북방인 장진호 동쪽 기슭에 집결시켰다.
제7연대는 24일, 주력을 유담리로 진출시켰으며
2대대는 26일에 제1연대 3대대와 교대할 때까지 하갈우리 방어를 맡고 있었다.부대의 전진을 늦추어온 26일에야 비로소 스미드 소장의 염원대로
사단전체를 하나로 묶을 수 있게되는 것이다.
맥아더 유엔군 총 사령관
11월24일,
제8군은 8개사단을 병진시켜
압록강을 향해 공격을 개시했다.
맥아더 원수는 이날 공중에서
공격개시상황을 시찰하고 다시
압록강 상공을 비행한 뒤 동경으로
돌아와서 "유엔군의 포위작전은
계획대로 개시되었다.
적 전선의 후방과 압록강을 잇는
전국경선을 정찰한 결과 별다른
적의 군사행동은 보이지 않았다."고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맥아더가 "크리스마스는
미국본토에서"를 외치며 전개했던
이 대공세는 시작하자마자 곧
절대절명의 위기에 봉착하게된다.
제8군은 앞을 가로막는 경미한
저항을 물리치고 전진해 들어갔다.
그러나 25일부터 전혀 예상치도
못한 중공군의 맹렬한 공격 때문에
제8군의 우1선인, 동해안을 따라
북진하던 한국군 제2군단이 붕괴
되어 버렸다. 이리하여 제8군의
우측방은 포위당할 위기에 빠졌다.
워커 중장은 예비대인 미 제1기병사단과 터키 여단, 영국 제27 및 29여단을 투입하여
이를 저지하려 했으나 중공군은 압도적으로 우세한 병력(제13집단군-18개사단)을
가지고 선제공격으로 제8군의 우측방을 포위하고, 이어 정면에 압력을가하여
드디어 27일에는 유엔군전선의 중앙을 돌파하기에 이르렀다.
중공군은 제8군이 공격을 개시한 1950년11월24일 경까지 중공 제4야전군 예하
이천우 사령관의 13집단군(18개사단 약 18만명)을 제8군 정면에,
제3야전군 예하 9집단군(12개사단 약12만명)을 제10군단의 제1해병사단 정면에
전개하고, 중공 제4야전군이 제8군에 대한 선제공격을 가함으로서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지원부대인 제1, 제2 기계화 포병사단과 제5, 제42자동차연대도 이미 한국에 들어와 있었다.
유엔군사령부는 이무렵 한국에 투입된 중공군 병력을 6~7만 정도로 판단했는데
실제병력의 4분의1도 안 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과소평가된 이유는 중공군이
저녁7시부터 새벽3시 까지만 행군했고 항공정찰에 대비한 위장조치는 새벽5시30분 까지
모두 끝내어 숨어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숙영지를 정찰하기위하여 소 수의 선발대
만이 행동했고, 부득이 부대전체가 주간에 이동하게될 경우에도 항공기가 나타나면
각자는 그 자리에서 정지하여 절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철저히 훈련되어 있었다.
장교에게는 이러한 명령을 지키지 않는 자를 즉결처분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져 있었으며, 철저하게 유엔군의 항공정찰을 무력화 시켰던 것이다.
제10군단은 제8군의 공격에 호응하여 대포위작전의 일익을 맡기위해 11월23일,
작전명령을 하달했다. 이 명령은 이미 15일, 맥아더가 알몬드 군단장에게
전문을 보내 명령한 것이었다.
작전내용은
군단은 제1해병사단은 장진호 서쪽 유담리를 점령한 뒤 서쪽으로 주공의 방향을 돌려
제8군과 대치하고 있는 중공군의 배후를 공격하여 제8군과함께 격멸한 다음
유담리 서방 약 90km 떨어진 곳에있는 무평리를 점령하라는 것이었다.
이 여세를 몰아 북진하여 압록강 남쪽 기슭을 점령한다는 것이 그 골자였다.
역시 이 주공은 제1해병사단이 맡으며, 제7보병사단은 제8군의 우측부대와 협조하여
제10군단의 좌측방을 엄호하도록했다.
이렇게해서 북방을 향해 움직이던 제10군단의 주공방향이 서쪽으로 변경되는 것이고,
11월23일에 하달되었던 장진호 동쪽 기슭을 거쳐 북쪽으로 공격한다는
종래의 임무는 육군 제7사단이 인수하기로했다.
공격개시일은 27일 아침으로 결정 되었다.
이 때문에 초조해진 사람은 다름아닌 제1해병사단장 스미드 소장이었다.
제7연대가 장진호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돌리고, 제5연대는 뒤따라 황초령을 넘어와
장진호의 동안으로 나아가 제7연대의 우측을 방어하도록 되었으나 두 부대 사이가
너무 멀리 떨어져있어 측면방어를 제공할 수 가 없었다.
거기다 장진호로부터 방향을돌려 험준한 낭림산맥을 향해 전진하라는
말도안되는 작전에 해병대가 주역을 맡게될 운명이었다.
스미드는 맥아더의 명령에따라 무조건 전진을 재촉하는 알몬드에게 항의하였으나
무시되어 버렸다. 스미드는 사단병력이 다 집결하고 활주로가 완성되기 전에는
움직이지 않으려했던 것이다. 또한 작전의 변경때문에 사단의 후방지경선이
하갈우리 부락의 남단으로 조정되자 스미드 사단장은 알몬드 군단장에게
강력히 건의하여 진흥리까지를 후방책임지역으로하고 진흥리와 고토리에도
사단의 경계부대를 배치하도록했다.
이것은 작전의 특성으로 보아 군수지원이 매우중요하기 때문에 늘어난 병참선을
타부대에 의존하지 않고 해병사단 스스로 확보하겠다는 사단장의 의지를 나타낸 것이었다.
군단의 명령에따라 해병제1사단은 26일 아침,
다시 무평리로 향하라는 공격명령을 하달했다.
이 명령은 먼저 유담리 서측방 약 43km에 위치한 용림동 도로의 교차점을 점령하고,
다시 서쪽으로 공격을 계속할 준비를 하는 것으로서 공격개시는 27일 아침으로 정했다.
최초 주공부대는 제5연대이며 제7연대의 임무는 유담리를 점령, 확보하여
주공부대의 공격을 지원하면서 덕동고개-유담리 사이의 병참선을 방호하는 것이었다.
압록강을 건너 한국으로 들어가는 중공군 행렬
중공군.
중공군의 각 야전군은 몇 개의 집단군(중공은 병단으로부른다)으로 편성되어 있으며,
각 집단군은 2~8개의 군을 가지고 있었고 군은 보통 3개의 보병사단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1950년2월 중.소 방위조약에따라 3,000명 이상의 소련군과 기술자들이 중공에 파견되어
중공군을 훈련시켰다. 중공이 사단을 소련식 편제로 개편하던중에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중공은 미군과 마찬가지로 3각 편제를 채택했다. 사단은 3개 보병연대와 포병, 공병 등의
지원부대로 구성되어 있으며 보병연대는 3개 보병대대를, 보병대대는 3개 소총중대,
소총중대는 3개 소총소대를 각각 기간으로하여 지원화기를 배당받아 편성되어 있었다.
보병사단의 편제상 정원은 약8,000명 정도로 추정되며 실제로는 여기에
각종 지원부대를 배속받아 10,000명 정도가 된다.
사단은 화포 12문으로 장비된 포병대대를 가지고 있었는데 화포가 부족했기 때문에
사단에 따라서는 신형과구형 등 여러 종류의 화포를 장비하고 있었다.
중공 제9집단군은 구경이 큰 화포를 압록강 북쪽에 남겨 두고 왔었다.
아마도 이것은 예상되는 전장의 지형이 험준하여 수송이 어려우며 탄약보급이
곤란하다고 판단하여 남겨 두고 온 것으로 생각된다.
어떻든 82mm 이하의 중구경화포인 박격포가 사단 지원화력의 주무기였다.
그밖에 대부분의 사단에서는 말이끄는 견인포, 또는 조랑말에 실은 75mm 정도의
곡사포 등을 장비하고 있었다.
무전기도 몹시 부족하여 무선통신망은 연대 이상에만 구성되었다.
유선전화는 보통 대대본부까지 통했다.
때로는 중대본부까지도 유선망을 구성하기도 했다.
대대 이하의 통신수단으로는 전령, 나팔, 피리, 신호탄, 회중전등 등을 교묘히 사용했다.
군량은 소위 "적지에서 구하는 방법"을 구사하고자하였으나 주민이 별로없는
북한지역 같은 곳에서는 보급수요를 충당할 수 없어 전투력 발휘에 지장을 주는
요인이 되기도했다. 처음에 압록강 도하시 식량으로 각 개인에게 쌀,조, 콩 등을
4일분씩 지급했을 뿐, 그 후에는 거의 현지에서 조달했다.
그러나 인구가 적은 산지에서는 현지조달이 어렵기 때문에 점차 소비량을 줄여야했다.
복장은 솜누비옷을 입었다. 만주출신 병사들은 비교적 추위를 잘 견뎌냈다.
그러나 솜옷은 건조시에는 따뜻했지만 젖으면 잘 마르지 않고 무겁게 얼어붙었다.
실탄은 각 개인에게 소화기탄약을 80발씩 지급했을 뿐 그 이후는 거의 지급되지 않았다.
포탄의 휴대량도 지극히 적어서 82mm박격포는 문당 90발, 60mm박격포는 문당
40발 이었다. 그러나 수류탄은 비교적 넉넉하게 지니고 있었던 것같다.
1차 참전 시 미 육군과 한번 붙어본 중공군은 그후 미군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중공군은
" 미군은 후방이 차단되면 중장비를 포기하고 무기도 방치한 채
제멋대로 행동한다. 미군 보병은 나약하고 죽기를 두려워하며 일단 후방이 차단되면
공격이나 방어를 할 용기가없다.
전투는 주간에 실시하며 야간전투는 서툴고 백병전에 약하다.
후방이 차단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며 보급이 두절되면 전의가 사라진다." 는
팜플렛을 제작하였다. 그러나 화력이 강하다는 것은 인정하고 미군과 전투시
주요고려사항은 부대나 개인은 신속히 적을 우회하여 그 퇴로를 차단하도록
작전해야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병사들에게는 철저하게 사상교육을했다."미국은 인간이 저질 수 있는 온갖 악덕 소굴이며 미군은 짐승처럼 잔인하므로
집으로 기어 들어온 뱀을 죽이듯이 말살해야 한다" 고 되풀이해서 교육을 시켰다
3부로 게속 이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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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6월특집! 한국전쟁 장진호 전투 ...
"어떠한 난관 속에서도 한 사람이라도 살아 있는 한,
그 사람은 전투를 계속하지 않으면 안된다." (1945년4월24일 모택동)
중공군은 미군의 완전한 제공권하에서 탄약, 장비, 식량, 방한구등의 결핍으로
고통 받으면서도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명령을 충실하게 실행하며 묵묵히 행동하고
전투했다. 격렬한 미군의 포화망에도 개의치 않고 제1대대가 쓰러지면
제2대대가 그 시체를 타넘고 전진했다. 그리하여 제3, 제4대대로 이어지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최후의 한 사람까지 전투를 계속하는 모습은 순교자를 방불케 했다.
미군들도 그 용맹성에 감탄했을 뿐만 아니라 일종의 공포심마저 느꼈다고한다.
중공군의 감투정신과 강인성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단지 강제나 명령뿐만은 아닐 것이다.
공산주의에 대한 신앙심, 그리고 지금 싸우고 있는 이 전쟁은 정의의 전쟁이라는 신념,
이런 것들이 중공군 장병들의 마음 속에 깊이, 아니 골수에 박혀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중공군병사
한국으로 물밀 듯 들어오는 중공군(위)
중공군의 야간 인해전술(아래
미군의 잘못된 정보도 문제였다.
11월24일(해병사단의 공격개시 3일 전), 유엔군 사령부는 북한에 진주한 중공군은
총 12개 사단으로서 그 병력은 4~5만 명이며, 미 제10군단 정면에는 그 중 2개 사단이
있다고 병력을 과소평가했으며, 또한 중공군은 방어만 할 것이다 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사령부의 이러한 판단을 제 10군단도 똑 같이 하고 있었고,
이것이 해병사단의 판단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해병사단으로서도 다시 정밀한 지상 및 항공정찰을 했어야만했다.
해병사단은 강력한 전투정찰대를 내 보낸 것이 중공군에의해 저지되어 그냥 돌아오고
말았는데 이것이야말로 재수색을 보다 철저히 하여야 할 징후가 아니었을까...
결국 해병사단은 완전 포위당해 버렸고,
하갈우리에서는 당시 57세이던 올리버 스미드 해병제1사단장 휘하에
약 1만명의 병력들은 포위망을 뚫고 탈출할 준비를 해야만했다.
여기에는 미 해병대외에 약1500명의 군단 직할부대원,
385명의 육군 페이스부대 생존자, 125명의 영국 해병 코만도 대원과
소 수의 한국군 경찰관이 있었으며 차량은 약 1000대 가량이었다.
제10군단장 알몬드 소장은 미1해병사단장과 육군 제7보병사단장등과 함께
회의를 개최하여 장진호지역을 포기하고 신속히 함흥으로 철수한다는 결정을
내리고는 철수에 장애가되는 장비의 파기권한을 스미드 사단장에게 부여했다.
그러나 부상자를 반드시 구출한다는 신념의 스미드 사단장은
철수 속도는 부상자 후송 능력에 달려있으며, 해안까지 전투를 지속하면서
장비의 대부분을 가지고 가도록 명령하게된다.
이 당시 하갈우리를 방문했던 마가렛 허킨스 종군기자는
해병대의 모습을 그의 저서인 한국전쟁에 이렇게 기술하고있다.
"나는 하갈우리에서 전투에 지친 해병들의 처참한 모습을 보았을 때,
그들이 중공군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하여 그곳을 빠져나갈 만한 힘이 있을까
하고생각했다. 해병들의 군복은 너덜너덜하고, 그 얼굴은 살을 에는 듯한 찬바람으로
부어올라 있었다. 장갑도 뚫어져 실이 풀려 있었으며 방한모가 없어 동상으로
귀는 시퍼렇게 변색되고, 동상에 걸린 발은 부어 군화에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맨발로 군의관이 있는 천막까지 걸어온 병사도 있었다.
5연대장 머레이 중령은 너무나 야위어서 마치 망령과도 같았는데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했던 당시 5연대를 지휘하던 그의 면모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스미드 제1해병 사단장(왼쪽
텍사스 출신의 키가 크고 깡마른 사나이 올리버 스미드(Oliver P. Smith)해병소장.
1916년 캘리포니아 대학 졸업 다음 해에 24세로서 해군 소위에 임관한다.
1차대전 중에는 괌에서 복무했고 능력과 인품을 인정받아 미 육군보병학교장을 역임한다.
이어 프랑스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해병대학교 교관의 보직을 받게된다.
2차대전 중에는 핀란드에서 대대장을 역임하고 남태평양 타라와전에서 해병제5연대장을,
펠레류 도에서 해병제1부사단장, 오키나와 전에서 제10군단 참모부장을 역임한다.
그 후 2차대전이 종결되고 해병대학교장, 해병대 부사령관을 역임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제1해병사단장으로 자리를 옮기게된다.
외모는 대학교수같으나 완고하고 굴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와 강력한 투지를 지녔으며
그는 술을 마시지 않으며 심한 말도 사용하지 않는 점잖은 사람이었다.
격전 시에도 침착하여 흥분된 기색이 보이지 않기로도 유명하며
"최악에 대비하라"
"최악의 사태에 처하더라도 낙관적이어야 한다"는 두 가지 신조로 작전을 지휘했다.
그는 장진호 철수작전에서
"퇴각이라니 말도 안 돼! 우린 지금 다른방향으로 공격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해병대 대장으로 전역한 후 예비역 원로 해병으로서 각종행사에 참석하며
원기왕성하게 살았다.
목적지인 함흥으로 철수작전 중인 미해병 M4A3 105밀리/도져 셔먼 전차
유담리에서 철수준비 중인 미 해병.
하갈우리에서 출발 준비 중인 미 해병(죄송합니다 오래된 자료라서 사진이 흐리네요 ㅡ,.ㅡ;;)
부상자 후송과 탄약 수송 (하갈우리)
헬기의 후방지원.
수송기와 헬기를 이용한 부상자 후송이 빈번해지자 중공군은 미군의 철수를 예감했다.
중공군은 미군이 탈출하지 못하도록 고립시켜 완전히 섬멸할 생각이었다.
12월4일, 북경방송은 미 제1해병사단의 섬멸은 시간문제에 지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또한 미국에서는 해병사단병력 전원이 전멸했다는 흉흉한 소문이 나돌아
해병대 사령부에는 해병대원 가족들로부터 문의 전화가 쇄도했다.
일본 아사히 신문은 1950년12월1일자 기사에 미 해병 고립되다 라는 제목으로미 해병대는 30일 장진호지역에서 중공군에 완전히 포위되어 고립당했다 라고 보도했다.
트루먼 대통령이 핵무기 사용도 불사하겠다고 선언하자 이에놀란 영국수상이
워싱턴으로 달려와 전면전쟁 방지를위해 핵무기 사용을 하지말 것을 요구하기도했다.
그러나 결국 해병대는 장비를 고스란히 보존한 채 탈출에 성공하고야 말았다.
중공 제20군은 장진호 작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반성하고 있다.
우리는 적의 분산과 포위에는 성공했으나 적을 축차적으로 섬멸하는데는 실패했다.
하급부대는 상급부대의 명령을 수행할 수가 없었다.
예로서 유담리에서 적을 섬멸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갈우리에서도
적을 섬멸할 수 없게 되었다. 하급부대가 조기에 전투를 개시하여 적을
각개 격파하도록 의견을 상신했으나 이것을 상급부대가 거부했기 때문에
미군에게 포위망에서 탈출할 기회를 준 결과가 되었다.
우리의 통신수단은 불비했다. 예로서 상급부대로부터 지시를 받는 데 2일 이상이 소요됐다.
적정은 급속히 변화되어 가는데 통신연락의 지연으로 우리들은 전투에있어
호기를 놓쳤으며 상급부대의 명령은 쓸모없는 것이 되었다(미해병대 공간사)
미 해병대가 산중의 긴 애로에서 철수하는데 성공한 전술적 요인은,
양측의 감제고지를 축차적으로 탈취하면서 그 엄호 하에 철수했다는 것이다.전투교본에는 산악전에 관해서
"주요도로상에 있는 고개 및 도로탈취와 도로를 제압할 수 있는 고지의 공방은
극히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또 산악지에서의 부대이동에 있어서는 전방과 측방의
요지를 적시에 점령하고, 그 엄호하에 전진하는 것이 필요하다." 고 기술되어있다.
미해병대가 이와 같은 착실한 전법을 구사할 수가 있었던 것은
다음과 같은 몇가지 요인에 의한 것이다.
하나, 일련의 거점을 점령하고 있었다.
사단장이 군단장에게 요청하여 사단의 담당지역을 진흥리까지로했고
진흥리로부터 유담리에 이르는 사이에 일련의 거점을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에
단계적인 작전을 수행하여 재편성과 전력회복, 그리고 차후의 작전준비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둘, 항공의 우세를 유지했다.
셋, 화력과 군수지원이 우월했다.
마지막으로 해병대원이 해병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시종 왕성한 사기와
공고한 단결을 유지하고 끝까지 싸웠다는 것이다.
우세한 병력에의한 인해전술로 쇄도하는 중공군에 대해서 해병대는 일보의 양보도없이
당당히 이를 맞아 최후까지 필승의 신념하에 악전고투를 거듭했다.
특히 고지 지휘관이 투철한 해병정신으로 최악의 사태에 직면해서도 비관하지 않고,
각급 간부가 전통에따라 항상 진두지휘했다는 것이 부대의 단결을 강하게 했던 것이며
이로 인해 간부의 손실률 또한 매우 높아았다는 것이 특징이다.
중공군 제9집단군의 임무는 미 제1해병사단을 섬멸한 후 함흥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함흥의 점령은 성공했으나 해병사단을 섬멸하지는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많은 전투, 비전투손실률을 입고 전력을 상실해 버렸다.
그 피해가 너무 컸기 때문에 재 편성과 전력회복에 많은 시간이 필요했고,
1950년 말에 시작된 중공군의 미제8군에대한 대공격에도 참가할 수 었는 지경이 되었다.
즉, 3개월 간 조직적인 전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한편, 미군은 해병사단을 북한 깊숙이 진출시켜 제8군의 공세와 호응하여,
중공 및 북한군의 주력을 북방에서 포위하여 격멸하려는 전략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제1해병사단은 그 대부분의 전력을 유지하면서 철수했던
전술적 행동은 눈부신 성공이었다.
북한에서 성공적으로 철수한 미 제1해병사단은 제8군 휘하에 들어가 마산 부근에
위치하면서 강력한 예비대로 자리하게된다. 그리하여 1951년 상순에 1개
사단규모의 북한 게릴라부대가 유엔군 전선의 간격으로 침투하여 경북 안동으로부터
의성으로 육박, 대구 - 안동 -원주의 유엔군 보급의 대동맥을 차단하려하자
해병사단은 이 게릴라 사단에 대한 공격명령을 받고 급거 북상하여
이들을 토벌하고 보급로를 지켜내었다.
중공군과 정반대로 미 제1해병사단이 장비를 보유하고 건제를 유지한 채 장진호에서
탈출했기 때문에 즉시 이 전투에 참가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해병대의 감투정신으로 성공시킨 장진호 철수작전은 미 국민들에게 큰 감명과
자신감을 주었고 나아가서는 차후 한국전쟁에대한 정책결정에도 크게 기여하게된다.
철수 중인 제5, 제7 해병연대. 노상에 T-34/85 전차가 파괴되어있다.
적의매복에걸려 전사한 병사들
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과 눈보라를 뚫고 철수하는 미 해병
코르세어의 공중 근접지원을 받으며 철수하고 있는 미해병대원들.
코르세어가 공격한 지점은 중공군의 진지이다.
탈출에 성공한 제1해병사단 전차대대가 낙동강 전선에서 작전 중이다
F-84E 썬더 제트의 대 지상 항공지원
알 림 : 위 자료는 일본육전사 연구회가 발간한 한국전쟁에대한 내용입니다
알 림 : 제가 이러한 자료를 올리는 이유는 단순하게 보기만하는 자료...
혹은 흘러보네는 자료...가 아닌 좀더 자세히 알고.. 광범위하고 길지만
하나하나 이해하고 생각하고 또한 상상하고... 사실적인 내용과 자료를
나름대로 각색/편집/카피해서 올리는 것입니다...
비록 긴 자료라 할지라도 끝까지 봐주셧으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
한국전쟁 장진호편 계속 기재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