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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전두환 최측근 최세창 부인 지나간 역사 관심 없어..왜?
5.18 당시 군 당국이 광주 시민을 향해 총을 쏘도록 발포 명령을 하달했다는 군 내부 기록이 처음 공개되면서 최세창에 대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이 같은 관심은 최세창 여단장이 공개된 문건에 실탄을 지급한 부대의 책임자이자 전두환의 최측근이기 때문이다. 네티즌들은 최세창이 최초 발포 명령자를 알고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는 상황이다.또한 지난 4월 방송된 SBS 시사교양프로그램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는 ‘화려한 휴가, 그리고 각하의 회고록’ 편이 방송됐다. 이 방송에서 최세창 부인은 SBS에서 찾아왔다는 말에 “절대 그거 안한다. 인터뷰 안한다. 기대 마라. 그거 유세 TV 유튜브에 나오던데, 우리가 말 안 해도 역사의 진실은 30 ,50년 후에는 밝혀 질 거다. 그렇게 편안하게 살고 있다. 절대 거기에 연연하지 않다. 지난 간 역사다. 관심 없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네티즌들은 “sun0**** 겨우 징역 5년도 웃긴데 거기다 1년 만에 사면이라니” “hyun**** 그런데 발포 명령을 한 사람이 합창의장에 국방장관까지 지냈어??” 등의 반응을 보이고 있다. 최세창에 대해 저도 궁금해서 나무위키에서 찾아봤습니다. 1934년 경상북도 대구부에서 태어나 서울 경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 13기로 입학하여 군에 임관하였다. 생도 시절에는 중간 정도의 성적으로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으나 임관 후에는 철저한 명령복종과 임무수행 자세로 높이 평가받아 진압 작전 등 특수 작전에 동원되곤 했다. 1950년대 말 전두환, 장기오, 차지철 등과 함께 미국에서 특수전 훈련을 받기도 했다.1977년, 육군특수전사령부 제3공수특전여단장(준장)에 임명되었고 1979년 10월의 부마항쟁 때도 진압군의 지휘관으로 투입되었다. 훗날 5.18 광주민주화운동 때에도 진압군의 지휘관 중 한 명이었다. 그리고 1979년 12.12 군사반란 제1공수특전여단장 박희도와 더불어 휘하 병력인 3공수특전여단을 동원하여 반란에 직접적으로 가담하면서 신군부의 일원이 된다.최세창은 전두환으로부터 직속 상관인 정병주 특수전사령관을 체포하라는 지시를 받았고, 정병주 장군에게 항복하라고 비선 실세의 지시를 받고 직속 상관에게 항복하라고 총부리를 들이대는 것을 설득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타당한지 생각해 볼 일이다. 하였으나 정병주의 거부로 실패하자 휘하 장교 박종규 중령에게 체포를 지시한다.[1]육군본부와 국방부를 점령한 박희도, 최전방 9사단 병력을 중앙청 앞으로 출동시킨 노태우와 더불어 불법적인 병력 동원으로 무력 행사를 한 반란 가담자로, 그 가운데에서도 자기 직속상관에게 총부리를 들이댄 점에서 가장 악질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듬해인 1980년 5.18 민주화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제3공수특전여단에 실탄 배부와 실탄 사용을 지시하는 등 신군부 정권 탄생을 위한 유혈 진압에도 일조했다.[2] 12.12 군사반란에서 공을 세운 것과 더불어 전두환의 직계 하나회 멤버[3]로서 5공화국에서 13기 선두주자로 승승장구했다. 20사단장[4], 수도방위사령관, 1군단장, 육군참모차장 등 요직을 역임했으며 대장 1차 보직 중 최고 요직인 제3야전군사령관으로 진급해 참모총장 영전을 눈 앞에 두었다. 그런데, 전두환이 정권 이임을 앞두고 충복인 하나회 12기 박희도 참모총장의 임기를 1년 연장함으로써 최세창은 어쩔 수 없이 합동참모의장[5]으로 가게 되었다.이후 노태우 정권에서 전두환의 직계 군맥이었기 때문에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대장으로 예편하였다. 이후 광업진흥공사 사장을 역임한다. 예편 후 2년 반이 지나 노태우에게 다시 등용되어 대한민국 국방부 장관 등을 역임하였다. 1997년 4월 대법원에서 열린 12.12 군사반란 및 5.18 민주화운동 관련 재판에서 반란 가담, 상관 살해 미수 등의 혐의로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1998년 8월 15일 사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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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자유한국당 홍준표후보 대구대첩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통령후보는 4. 26(수), 대구 서문시장에서 개최된 대구 지역 거점유세 자유대한민국 수호를 위한 대구 대첩에 참석했다.홍준표 후보의 서문시장 유세에는 수많은 유권자들로 서문 시장을 가득 메워 대구대첩의 한 역사를 장식했다. 이곳 서문시장은 홍준표 후보의 정신적 고향이다.이곳에서 홍준표 후보의 어머니가 좌판을 놓고 미나리 등 나물을 팔았다. 출마선언 후 벌써 5번째 방문이다. 오늘 서문시장 유세에서는 다른 때와 달리 국민의례를 했다.홍준표 후보의 선창에 시민들은 같이 애국가를 부르며 감격해 했다. 서문시장 노점에서 목기와 제기를 파는 할머니 한 분이 무대에 올라 후보와 포옹하였고 홍준표 후보는 자신이 두르고 있던 스카프를 할머니 목에 감아 드렸다. 홍준표 후보가 어렵고 힘들었던 가족사를 얘기할 때는 눈가에 이슬이 맺히고 목이 메었다.마지막으로 홍준표 후보는 "조선소 경비원의 아들도 대통령이 한번 됩시다. 까막눈 엄마의 아들도 대통령 한번 합시다"라고 외치며 유세를 마무리 하였다.존경하는 대구 시민여러분, 오늘 사실 유세로는 두 번째다. 다섯 번째 서문시장 온다. 제가 어제부로 TV토론을 하고, 오늘 아침에도 방송기자클럽 초청토론회를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저는 창녕 남지에서 태어났다. 7살 때 우리 집안이 망해서 리어카 끌고 이틀 걸어서 대구 신천동으로 왔다. 신천동에서 신천초등학교 다녔다.그때는 동사무소 다니면서 미군 구호물자 강냉이죽 그것을 타다가 먹고 살았다. 그 이듬해 신암초등학교로 갔다. 신암동으로 왜 옮겨갔냐면, 저희 아버지가 대구로 올라와서 막노동을 하면서 먹고 살았다. 신암초등학교 3학년을 다녔다. 그때 제 기억으로 신암초등학교 3학년 21반이었다. 그 당시에 27반까지 있었다.신암초등학교 1년 다니다가 도시에서 막노동하면서 먹고 살기 힘들어서, 리어카에 짐을 싣고 이틀 걸어서 창녕읍으로 갔다. 거기서 창녕초등학교 4학년 다니다가, 또 리어카 끌고 합천 산골로 들어갔다.거기서 5학년, 6학년 다니고 아버지에게 “아무래도 우리가 살 길은 이렇게 빚에 쪼들리고 매일 굶고 이렇게 사는 것보다 공부라도 열심히 하겠다.”고 했더니 보리쌀 두말 줘서 그것을 가지고 대구로 올라왔다.내당동에서 영남중학교 다녔다. 마침 공부는 잘해서 그 당시 공납금을 안냈다. 석 달에 1,650원으로 기억하는데, 공납금을 그것 안내는 맛을 작은누나는 올라와서 섬유공장에 다니면서 제 공부시켜주고 자취했다.6년 동안 대구 내당동에서 살다가 그다음 비산동에 갔다가 대명동에 갔다가 남산동에 갔다가 이렇게 돌아다니면서 살았다. 비산동에 살 때는 사보이극장 뒤에서 살았다. 지금 사보이극장 없지 않나.제가 경북대학교 의과대학을 가고 싶었다. 그래서 그 당시 문과, 이과 나눠서 공부했는데 이과로 갔다. 경북대학교 의과대학을 가면 의사 워낙 돈도 많이 벌고 의사하면 존경도 받는다 싶어서 경북대학교 의과대학을 가고 싶었다. 갈려고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 우리 영남고에서 그 당시에는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갈려고 하면 하늘에 별따기다. 지금은 학교가 아주 좋다. 그런데 그때는 그랬다.그런데 아버지가 육군사관학교를 가라고 했다. 줄 돈도 없는데 등록금이 없다고, 육군사관학교 시험쳐서 합격했다. 합격했는데 그 해 12월 되어서 우리 아버지가 도둑 누명을 썼다.비료를 훔친 사람으로부터 장물취득 누명을 써 경찰에게 붙잡혀가서 이틀을 고생한 것을 보고 경찰보다 더 높은 직업이 무엇이냐고 보니까 검사를 하면 경찰을 잡을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바로 ‘육사 안간다. 검사를 해야겠다.’고 해서 고려대 법과대 가려고, 그때는 이과에서 문과가기 하늘의 별따기이었다. 그런데 선생님에게 가서 원서를 써달라고 하니까 선생님이 하는 말씀이 영남고에서 고려대 법과대학 간일이 없는데 육사되었으면 1년에 한, 두 명 되는데 거길 가지 그 학교가면 손에 장을 지진다고 했다. 설득해서 입학원서를 받아냈다.그래서 25일 동안 문과공부해서 2월초 대학시험을 봤는데 그것이 덜컥 되어 버렸다. 대학시험 되니까 우리 아버지가 걱정이 태산이다. 그때 등록금이 56,000원이었다. 등록금이 없으니 걱정이 태산이었다.그래서 이웃집에 일해서 돈을 빌린 것이 7만원을 빌렸다. 56,000원 등록금 주고 14000원 남은 돈으로 한 달 하숙비 주고 서울로 가라고 했다. 동대구역에서 밤기차 타고 서울 올라갔다. 올라가서 그때 18살이다.그때 아는 사람 하나 없고 친척 없고 형제 없고 내 혼자 올라가서 공부하면서 지냈다. 합천에서 살다가, 내가 이런 이야기 하는 것은 재미있는 인생을 살았기 때문이다.정치이야기는 좀 더 있다가 하겠다. 정치이야기보다 홍준표 라이프스토리를 듣는 것이 더 재미있을 것이다. 서울 올라가서 고학을 하면서 학교를 다니는데 합천 우리 집이 강변에 오두막살이 짓고 살았는데 뒷집사람이 자기 집에 불 질렀는데 자기 집은 안타고 우리 집에 옮겨 붙어 홀랑 다 탔다. 그러니까 살집이 없어졌다.그때는 울산이 공업지대가 막 생기면서 굉장히 사람이 몰려들 때다. 울산으로 가자고해서 대학교 2학년 때 저는 고학을 하고 우리 집에 재산을 전부 파니까 74년도 돈으로 32만원이다. 그 32만원 가지고 울산에 가서 달셋방 하나 얻고 누나와 여동생은 공장에 다니고 저희 아버지 현대조선소에 밤에 야간경비원이 있다. 그때 현대조선소가 담이 없었다. 그냥 전하동 바닷가에 철조망 쳐 놓고 배 처음 지을 때다. 철근 떨어진 것을 사람들이 밤에 훔쳐간다고, 밤에 배짓다가 남은 철근을 지키는 백사장에서 야간경비원을 하는데 그때는 제 기억으로 전하동 바닷가 바람이 영하 18~20도 되었다. 추운데 회사에서 바람막이 하나를 안 해줬다. 백사장에 조그만 의자 하나 두고 밤새도록 지키는 것이다.그것을 쳐다보면서 ‘세상이 왜 이렇게 불공평하냐. 우리 집은 어릴때부터 지금까지 힘들게 사냐. 세상이 참 불공평하다. 세상이 한 번 뒤집어졌으면 좋겠다. 우리도 잘 살아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내가 공부라도 열심히 해야겠다. 내 아버지가 이렇게 고생하며 살고 있는데 세상이 진짜 뒤집어 져봤으면 좋겠다. 부자가 가난한 사람 되고 가난한 사람이 부자가 되는 그런 세상이 되어 봤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했다.그래서 그런 이야기를 한다. 제 아버지는 일당 800원 받던 경비원이다. 내 엄마는 글을 모른다. 까막눈이다. 경비원의 아들도, 까막눈의 어머니를 가진 아들도 열심히 노력하고 정말 바르게 살고 노력하면 대통령도 될 수 있는 세상이 대한민국이라고 난 그렇게 생각한다. 바르게 살았다. 내가 그렇게 힘들고 가난하고 밥 굶는 날이 밥 먹는 날보다 많았어도 삐뚤어지지 않고 열심히 내 부모님 모시고 살았다. 아버지는 40년 전에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20년 전에 돌아가셨다. 저를 낳은 것이 어머니는 39살 때, 아버지 41살 때 아들 하나 보려고 낳은 것이다. 늦게 낳다보니 저희 아버지 61살에 돌아가셨다. 전하동 바닷가에서 추운데 견디려고 회사 막소주를 줬다고 한다. 하루저녁에 막소주 한 병씩 마셨다고 한다. 먹다보니까 8개월인가 10개월 만에 간암으로 돌아가셨다.그래서 그것을 보면서, 대학교 2학년 때였다. 학생운동도 해봤고 세상을 뒤집어보자는 생각도 해봤다. 아버지 돌아가시면서 공부 열심히 하라고 하셨다. 그래서 그길로 학생운동 하는 것 발 끊고 공부하기 시작했다. 정말 세상이 불공평하고 어렵고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나는 밑바닥부터 경험했다.내 평생을 살면서 그 어렵게 살던 그 시절 잊지 않는다. 그래서 홍준표가 서민대통령이 한번 되어보겠다. 이 땅에 가난하고 힘들게 살고 힘없고 빽 없는 그런 사람들을 위한 대통령이 한번 되어 보겠다고 나왔다.제 각시가 제가 대학 다닐 때 군산여상을 나와서 국민은행 안암동지점의 행원이었다. 돈 찾으러 가다보니까 달덩이 같은 아가씨가 있어서 제가 200원, 300원 찾으러 매일 갔다. 넉 달 동안 아가씨 한 번 쳐다보려고. 하숙집에서 점심 먹고 올라갈 때 꼭 200~300원 찾아서 얼굴 한 번 보고 오려고 하고 넉 달 동안 올라가다가 그 해 사법시험이 연기되는 바람에 마음이 좀 풀려서, 안 그랬으면 제가 사법시험 일찍 됐을 것이다. 그래서 눈이 맞아서 연애를 시작했는데, 그것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사법시험은 5년 뒤에 된다. 제가 그거 아니었으면 일찍 되었을 텐데. 그런데 처음에 사법시험 되기 전에 졸업할 때 전라북도 부안으로 저희 장인을 찾아갔다. 장인어른이 인사를 받더니 30분 말을 시켜보더니 “부모님은 뭐하시나?”하셔서 “아버지는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는 울산에서 달세방 삽니다.” “집도 없냐?”하시니까 “집 없습니다.” “군대 갔다 왔냐?” 하시니까 “지금 가야합니다.” 그리고 “고시공부 하냐?” 하시길래 “합니다.” 그 이야기 하고 나왔는데 우리 집사람이 30분 더 있다가 나와 가지고 “너희 아버지 뭐라 카드노”이렇게 물어보니까 “저거 구름 잡는 놈이다, 저 택도 아닌 놈이다. 저게 사법시험되면 내손에 장을 지진다.”라고 극렬 반대를 했다. 저희 장모님은, “너희 엄마는 뭐라 카드노”하니까 “홍서방 참 착한 사람 같다. 그러니까 잘 좀 보살펴라.” 했다. “좋다, 내가 너희 아버지는 평생 안 본다.” 그래가지고 군대 갔다 와서 이제 사법시험 됐다. 되어가지고 우리 집사람이 자기 아버지에게 전화를 했다. 홍서방 사법시험 됐다고 하니까 그 때는 2차되면 사실 3차는 면접이었다. 그런데 신문에는 3차 되어야 나온다. 신문에 안 났다고 전화를 끊어버렸다.그래서 제가 합격하고 난 뒤에 부안에 찾아갔다. 찾아가서 “딸은 데리고 간다. 대신 제가 딸 절대 속 썩이지 않는다. 제가 공주처럼 모시고 살 거다. 대신 장인어른은 우리 집 오지마라.” 제가 26년간 못 오게 했다. 대신 장모는 깍듯이 모셨다. 용돈을 장모님께 드리면서 영감하고 같이 나눠 쓰면 그때부터 장모도 없다, 근데 장모님 임종할 때도 아들이 셋이지만 제가 했다. 그리고 장인 임종도 제가 했다.저는 참 인생이 행복하다. 요즘 대통령 선거 나와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제 두 아들이 있는데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가장 존경하는 인물란에 이순신 장군, 세종대왕 안 쓴다. 홍준표라고 쓴다. 진짜다. 아주 어릴 때부터 지금 서른여섯이 됐는데 지금까지 그렇게 쓴다. 그래서 저는 늘 그런 생각을 한다.제 아들이 곧 결혼식을 하는데, 작년 9월에 둘째아들이 이제 결혼하기로 약속을 하고 결혼을 하는데 제가 4월 29일 결혼식에 못 간다. 유세 때문에 못 간다. 그래서 영상편지 하나 띄워주고, 장가가서 잘 살아라하고 오늘 제가 내려왔다.정말 제가 서민 대통령이라는 구호를 내걸은 것은 정말 이 땅의 70%에 달하는 대한민국 서민들을 위해서 5년 동안 홍준표가 서민들의 마음을 알고 서민들이 무엇을 바라는지 그걸 한 번 알고, 그리고 서민들을 위해서 이 나라를 한 번 이끌어보자는 그런 취지에서 제가 ‘서민대통령’이라는 구호를 내걸었다.어젯밤에 JTBC에서 대선후보 토론회를 하는데 제가 문재인 후보에게 물었다. 당신 책을 보니, 문재인의 운명이라는 책의 132페이지에 이렇게 되어있다. ‘미국의 월남전 패배와 월남의 패망은 진실의 승리고 희열을 느꼈다.’ 이렇게 썼다. 그러면 그것이 공산주의가 이긴 전쟁이다. 우리나라 군인들이 거기서 5,000명이 죽었다. 그런데 그 전쟁, 월맹이 이긴 것이 그렇게 희열을 느꼈는가. 공산주의가 이긴 것에 희열을 느꼈냐고 하니 대답을 못한다. 그래서 제가 그런 얘기를 했다. 앞에도 당선되면 북한에 제일 먼저 가겠다고 하고, 북한 개성공단에 2000만평 만들겠다고 했다. 개성공단 2,000만평 만들면 북한 청년일자리가 백만 개가 생긴다. 우리나라 중소기업 중 상당수가 다 넘어 가야 한다. 창원 국가산업단지의 3배에 해당하는 공장부지다.북한에 그렇게 퍼주고 그렇게 하면 5년간 100억 달러를 북한에 주게 된다. DJ, 노무현 정부 때 10년 동안 준 게 70억 달러다. 8조 3천억 원이 된다. 그 돈을 줘서 그 돈이 핵이 되어 다 내려왔다. 그랬는데도 또 10년 뒤에 당신이 집권해서 북에 이렇게 퍼주기 하려는 것이냐고 물어보니까 자꾸 말을 이리 빼고, 저리 빼고 해서 당신 여태 여섯 가지 거짓말 한 것이 있다.오늘 일심회까지 거짓말 하면 일곱 번째 거짓말을 한다. 절대 한 나라의 지도자는 잘못을 했으면 국민 앞에 용서를 구해야지 거짓말해서는 안 된다. 거짓말 하는 것은 절대 안 된다. 그래서 내가 그런 얘길 했다. 당신이 집권하면 좌파정부라서 미국이 북한을 그냥두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자유대한민국을 내가 지킨다.두 번째, 우리 3번 후보를 한번 자세히 보면 TV토론하면서 보니 초등학교 반장선거 하는 것 같다.안철수 후보하고 문재인 후보 둘이서 싸우는 거 옆에서 가만히 보다가 제가 그런 얘기를 했다. ‘이것이 무슨 대통령 후보 선거 토론인지, 초등학교 반장선거 토론인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어떻게 조잡스럽게 그런 토론을 하는가. 그러니까 어제 토론 끝나고 난 뒤에 그런 얘길 했다. ‘안 후보, 오늘 토론은 조금 나았다’는 소리를 했는데, 문제는 그 뒤에 숨어있는 사람이 문제다. 3번 후보의 포스터 사진을 한번 자세히 보시라. 그 사진 합성한 것이다. 목하고 몸통을 합성한 사진이다. 그래서 한번 물어봤다. 사진을 왜 합성을 했느냐 물으니 그것은 디자이너가 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물어봤다. ‘목 위로는 안철수 후보가 맞는데, 몸통은 그럼 박지원이냐’ 물어봤다. 몸통은 누구냐고 하니 자기라고 한다. 혹시 박지원 대표 아닌가하고 그렇게 물어봤다. 그만큼이나 그 뒤에 숨어있는 사람이 더 무섭다. 그래서 박지원 의원이 자기는 임명직을 안 하겠다고 발표를 했다. 절대 임명직 안하겠다고 발표를 했는데 어젯밤에 또 토론 할 때 물었다. 박지원 씨가 임명직 안한다고 하지 않았냐고 하니 그렇다고 한다. 그런데 상왕도 임명하는 건지 물었다. 상왕은 임명하는 것 아니다.안철수 후보가 되면 자기는 초대 평양대사 간다고 했다. 평양대사라는 것이 무엇인가. 북한이 고려연방제를 할 때 서로 대사 교환을 하는 것이다.고려연방제라는 것이 무엇이냐. 북한이 한국을 적화하기 위한 대남전술전략으로 내세운 것이 고려연방제다. 그래서 3번 후보는 도저히 안 되겠지 않나.그러면 4번 후보는 좀 그렇지 않나. 정치적으로 배신하고, 정책적으로 배신하고, 인간적으로도 배신했다. 원래 홍준표 세탁기에는 대부분 들어갔다 나오면 깨끗해진다. 저는 한번 들어갔다 나왔다. 그런데 다 깨끗해지는데 배신한 사람은 들어갔다 나와도 배신자라는 글자가 안 지워진다.그래서 남는 사람은 저밖에 없다. 제가 경남지사를 하고 그만둬도 되는데 제 인생 성공한 인생이다. 제 주제에 밑바닥에서 자라서 무지렁이 같은 부모 밑에서, 까막눈과 무학인 부모 밑에서 경남지사까지 국회의원을 네 번하고 또 검사를 하고 그 정도 했으면 내 인생 성공했지만 제가 경남지사를 그만두고 나온 것은 여기 적혀있는 것처럼 홍준표가 나와야 자유대한민국을 지킨다.제가 마지막으로 이것 말씀드리고 가겠다. 중국과 북한 국경에 10만 명의 중국군이 집결해있다. 러시아와 북한의 국경에 러시아 군대가 속속 집결하고 있다. 서해안에 중국의 이지스함대가 군사훈련을 하고 있다. 중국의 수호이 전투기가 전투훈련을 하고 있다. 동해상에는 칼빈슨호와 일본함대가 군사훈련을 하고 있다.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상원의원 100명을 불러서 북핵의 실태를 상원의원에 다 얘기했다. 안보리 이사국을 전부 초청해서 북핵의 문제점을 다 얘기했다. 왜 그랬겠는가.북의 핵시설을 선제타격하기 위해서다. 이미 이라크 핵시설을 미국이 타격한 일이 있다. 그리고 이란핵시설은 이스라엘군이 선제타격 한 일이 있다. 핵시설을 선제타격 하는 것은 이것은 세계 어느 나라에도 비난받지 않는다. 미국이 지금 하고 있는 것은 북한 핵시설을 선제타격하기 위해서다. 그러면 핵 시설을 선제타격하게 되면 우리 한국에는 지장이 없겠는가. 북은 지금 한국을 공격하겠다고 한다.그러면 미국이 한국정부와 의논을 해야 한다. 지금 의논을 하고 있지 않다. 이것을 ‘코리아패싱’이라고 한다. 한국을 무시하고 일본, 중국, 미국 이렇게 세 나라만 의논을 하고 있다. 긴박하게 의논하고 있다. 외신에도 이것이 속속들이 들어오고 있다.그런데 유독 한국 언론만 이것을 중요기사로 취급을 하고 있지 않다. 왜 그러겠는가. 저는 그런 생각을 한다. 문재인 후보에게 불리하기 때문에 안보대선으로 긴박감이 더 해지게 되면 야당이 집권하는데 불리하기 때문에 홍준표가 될까 싶어서 그래서 중요기사로 보도하고 있지 않다.그래서 오늘 주한미국상의에 가서 제프리존스에 그런 얘기를 했다. 한국에 만약 좌파정부가 들어오게 되면 미국이 우리나라와 의논하고 북을 치겠는가. 나는 아니라고 본다. 우리나라에 미리 얘기를 해주면 좌파정부는 바로 북한에 알려줄 것이다. 그렇다면 선제타격이라는 것이 기습공격인데 할 수가 없는 것이다.그래서 선제타격을 하더라도 한국과 긴밀한 협력을 하려면 보수정권이 들어와야 미국이 안심하고 의논해준다.홍준표가 집권하면 미군의 전술핵을 한국에 배치하겠다. 핵은 핵으로 상대를 해야지 북핵을 없앤다. 지난 20년 동안 외교를 통해 핵 제거를 한다는 것이 전부 거짓말임이 드러났다. 그 사이에 북의 핵기술은 미국 동부해안까지 갈 정도로 고도화되었다. 이제는 방법이 없다. 핵은 핵으로 제압해야 한다. 미국의 전술핵 들어오게 되면 북은 절대 핵으로 한국을 위협할 수가 없다. 같이 다 죽기 때문이다.그래서 이런 핵협상을 미국과 하려면 좌파정부는 할 수가 없다. 핵 도입을 반대한다. 더 이상 대한민국 국민들이, 대한민국 대통령이 북한의 김정은에게 굽실거리면서 돈을 상납하며 살아야겠는가.대통령은 오천만의 이 나라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책임지는 사람이다. 배짱과 뱃심이 있어야 한다. 강단과 결기가 있어야 한다. 배짱과 뱃심, 강단과 결기가 있는 사람 누구인가.홍준표가 대통령 되면 절대 북의 어린애한테 굴복하지 않는다. 북의 어린애를 제압하겠다. 역대 대통령이 김정일 눈치보고 상납하고 또 문재인 후보가 되면 아마 김정은이 눈치보고 돈 들고 올라갈 것이다.홍준표가 대통령이 되면 미국의 전술핵을 도입해서 한반도에 같이 배치해서 북의 핵이 제거되면 우리나라 전술핵도 다시 돌아가면 된다. 더 이상 핵공갈에 대한민국 국민들이 벌벌 떠는 일이 없도록 반드시 하겠다.이제 시간이 많이 지났다. 우리 서문시장에 또 야시장을 해야 될 시간이다. 우리가 이제 비켜드려야 한다.정말 고향여러분들, TK는 원래 화끈하지 않나. 어제인가 대구방송을 보니 30몇 퍼센트밖에 안 나온다. 그것 말이 안 된다. 고향분들이 적어도 박근혜 전 대통령 할 때만큼은 붙여줘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 대구경북에서 홍준표에게 80%만 모아주면 홍준표가 청와대 들어간다.호남에서 김대중 대통령에게 지원하는 것만큼은 못하더라도 그래도 한 80%는 해주셔야 한다. 조선소 경비원의 아들도 대통령 한번 해보자. 까막눈 어머니의 아들도 대통령 한번 해보자. 그래야지 대한민국 젊은 청년들의 꿈과 희망이 있다.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이야기하고 가겠습니다. 대구의 고향 선배, 후배 여러분 경비원의 아들도 대통령 한번 하자. 까막눈 어머니의 아들도 대통령 한번 하겠습니다.감사합니다.#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통령후보
쥐새도작성일
2017-04-27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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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글터] 이승만 아들 이강석 생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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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자살로 비극의 생을 끝내기 전의 이기붕 일가. 왼쪽부터 장남 강석, 이기붕, 박마리아, 차남 강욱.
대한민국 건국 이래 역대 정권마다 이른바 ‘권력의 2인자’가 있었다. 그들 중 가장 강력한 권력을 휘두른 인물은 누구일까. 단연 이기붕을 꼽아야 할 것이다. 혹자는 1961년 박정희를 도와 5·16군사정변을 일으킨 후 중앙정보부장과 공화당 의장 등으로 오랫동안 권력을 누린 김종필을 들겠지만, 행사한 권력의 질과 내용, 무게와 영향력을 감안할 때 이기붕에겐 미칠 수 없다.
이기붕이 누구인가. 1950년대 집권 자유당의 실력자(중앙위 의장), 이승만 대통령의 후계자, 민의원(국회) 의장, 이른바 ‘서대문 경무대’의 주인으로 이 나라 최고 권부의 정상 바로 밑까지 올라간 실권자였다.
그는 1960년 봄 이승만 대통령후보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선거에 출마, 사상 최악의 부정선거로 당선됐다가 4·19혁명으로 몰락했다. 더욱이 그는 혁명 8일 후 일가족이 집단자살함으로써 과도한 권력욕으로 파멸한 비극의 주인공이 됐다. 이기붕의 장남이자 이승만의 양자인 이강석(당시 23세)은 부모와 남동생 강욱을 권총으로 사살하고 본인도 자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집단자살 사건을 주도한 이강석이 실제로는 자살하지 않고 비밀리에 목숨을 보전했을 가능성은 없는 걸까. 그가 극적으로 구명돼 극비리에 외국으로 보내져 세계 어디에선가 자신의 모든 것을 철저히 숨기고 살아왔을 가능성은 전혀 없는 것일까.
정광모 선생의 제보
독자는 이기붕 가족이 목숨을 끊은 지 53년이나 지난 지금 왜 새삼 이 문제를, 그것도 이강석의 구명 가능성과 생존설을 제기하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가질 것이다. 필자는 지금부터 20년 전 이강석 구명·생존설을 전해 듣고 놀라움과 호기심에 근 1년 이상 사실 여부를 확인하느라 고심하고 나름대로 전력투구한 적이 있다. 어찌 보면 한낱 ‘기이(奇異)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뒤늦게나마 이 이야기의 입수 경위와 내용을 알리고 싶어 글을 쓴다.
거기엔 두 가지 계기가 있다. 하나는 올해 2월 작고한 저명한 여성 언론인이자 한국 소비자보호운동의 창시자였던 정광모(1929~2013) 선생과의 약속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당시 정 선생으로부터 들은 이강석 생존설 관련 취재 메모를 최근 우연히 발견해서다.
6·25전쟁이 끝난 직후 언론계에 입문한 정 선생은 ‘평화신문’ ‘서울신문’ ‘한국일보’ 기자로 맹활약했던, 당시로선 매우 드문 여성 언론인으로 청와대 출입 여기자 1호였고 한국여기자클럽 초대 회장을 지냈다. 필자는 1960년대 중반 정 선생이 한국일보 정치부 차장이던 시절부터 모시고 함께 일한 적이 있다. 그 후 정 선생이 언론계를 떠나 소비자 보호와 에이즈 예방 및 퇴치 등 사회운동에 전념하는 동안에도 서로 자주 만나 시국 얘기를 나누곤 했다.
필자가 한국일보 논설위원으로 재직하던 1993년 가을 어느 날, 정 선생에게서 급히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단골 식당으로 가니 언제나 쾌활하고 명랑한 그답지 않게 굳은 표정이었다. 정 선생은 “이 위원! 이거 사실로 확인되면 당신은 세기적 특종을 하는 거야”라고 운을 뗐다.
그는 본론을 얘기하기 전에 먼저 세 가지를 반드시 지키겠다는 약속부터 하라고 요구했다. △이 이야기를 취재하는 동안 비밀로 할 것 △이야기를 전한 사람 본인과 그의 형제, 부모에 대해 일절 묻지 말 것 △취재해서 사실로 확인되면 보도하되, 확인이 안 될 경우에도 이야기의 입수 경위 등에 관해선 훗날 자기가 눈을 감은 뒤에야 밝히라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내용이 심상치 않게 느껴지는 데다 기자적 호기심이 발동해 ‘약속 준수’를 다짐한 뒤 귀를 기울였다.
정 선생 얘기의 요지는 ‘이기붕 아들 이강석이 살아 있다’ ‘믿을 만한 사람에게서 이강석을 직접 만났다는 얘기를 들었다’는 것이었다. 필자는 정신이 번쩍 들 만큼 놀랐다. 그러면서도 뭔가 허황한 꿈같은 얘기 아닌가 싶었다.
“이강석이 살아 있다”
정 선생이 전해준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국으로 이민 간 신경숙(가명)이 오랜만에 서울에 들러 며칠 전 나를 찾아왔다. 50대 초반인 그녀는 고교 및 대학교 후배인 데다 예전부터 부모님, 형제들과도 잘 아는 사이였다. 그런데 그녀가 유럽 여행에서 이미 죽은 것으로 알려진 이강석을 만났다는 게 아닌가. 3년 전(1990년) 여름 남편과 함께 결혼 후 처음으로 유럽 여행을 하던 중 묵고 있던 오스트리아 수도 빈의 한 호텔 식당에서 만나 잠시 대화를 나눴는데, 이강석이 분명했다는 것이다.’
다음은 신 여인이 전한 당시 상황이다.
호텔 식당에서 식사한 후 남편은 여행 스케줄을 문의하러 프런트로 가고 자신은 계산을 하고 나오는데 6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머리가 하얗게 센 백발의 동양인 남자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백발 : 실례지만 한국 분 아니신지요.
신 여인 : 맞는데요.
백발 : 저 모르시겠습니까.
신 여인 : 잘 모르겠는데요, 누구신지요.
백발 : 저는 대한민국의 역적(逆賊) 아들입니다.
신 여인 : 역적의 아들이라니요. 무슨 말씀이신가요.
백발 : 저는 과거 경무대에서 이승만 대통령 내외분을 모시고 살았었습니다.
(신 여인은 이상하고 엉뚱한 소리를 하는 백발 남성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다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럴 수가…. 너무나도 낯익은 얼굴, 귀에 익은 목소리 아닌가!)
신 여인 : 저, 혹시 이강석 씨…이강석 오빠 아니신가요.
(순간 백발 남성의 표정이 일그러지며 잠시 입을 굳게 다물었다.)
신 여인 : 아니, 부모님을 권총으로 쏘고 자살한 것으로 모두들 아는데 어떻게 되신 겁니까.
백발 : 누군가의 도움으로 동생(강욱)과 대만으로 나와 잠시 머물다 미국으로 가서 숨어 지내며 공부했습니다. LA, 뉴욕, 샌프란시스코 등 교포들이 많이 사는 데는 가지 않았지요.
신 여인 : 오래전의 지난 일들인데 이젠 모든 것을 떳떳이 밝히고 살아도 괜찮은 것 아닌지요.
백발 : 아닙니다. 우리 집안은 나라와 국민에게 너무도 큰 죄를 지은 만고의 역적이기 때문에 영원히 눈에 띄지 않게 숨어서 살아야지요.
신 여인 : 지금 오빠는 어디서 살고 무슨 일을 하세요? 강욱이도 잘 있는지요.
백발 : 미국에서 삽니다. 동생도 잘 있지요. 현재 ABC방송에서 일합니다.
신 여인 : 저의 형제들은 모두 미국으로 이민 가서 살아요. 지금 남편과 휴가여행 중인데…이게 제 주소와 전화번호가 적힌 명함이에요. 저에게도 명함 한 장 주세요. 미국에서 자주 연락하고 만났으면 해요.
백발 : 지금 명함이 없는데요.
(이때 남편이 가까이 다가오자 백발 남성은 갑자기 당황한 표정으로 나중에 연락하겠다고 말한 후 서둘러 호텔 밖으로 사라졌다.)
이것이 신 여인이 전한 ‘이강석과의 만남과 대화’의 전부다.
3년간 묻어둔 얘기
정 선생은 신 여인에게 ‘이기붕 일가 집단자살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인데 정말 이강석이 분명한가’ ‘혹시 과거 경무대에서 근무했던 청년들 중 이강석과 닮은 사람을 잘못 보고 착각한 게 아닌가’ ‘네가 이강석이냐고 물었을 때 그렇다고 분명한 대답이 없지 않았는가’라며 따졌다고 했다. 특히 정 선생은 그가 신 여인에게 ‘역적’ 운운했지만 진짜 이강석이라면 그토록 오랜만에 만난 한국인인데 자살 당시 상황, 양부(養父) 이승만에 관한 얘기 등을 몇 마디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이상하다며 의문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신 여인은 “선생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실 줄 알았어요. 사람을 잘못 보고 오인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이강석 씨와는 양가 아버님이 일제강점기에 미국 유학을 같이 했고, 광복 후엔 두 집안이 자주 교류했으며, 자녀들끼리는 초·중·고교와 대학 때까지 형제처럼 어울려 자랐기 때문에 착각이나 오인을 할 수는 없어요”라고 강변했다고 한다.
아울러 신 여인은 이강석이 머리가 백발이고 얼굴이 늙어 보이는 것 말고는 남자치곤 약간 작은 키와 말씨, 태도 등이 변하지 않았더라고 전했다.
정 선생은 신 여인의 부친과 이기붕이 1920~30년대 초 미국 유학을 했고 광복 후 각기 작고할 때까지 형제처럼 지냈으며, 식구끼리도 각별한 관계였음을 알고 있었기에 이강석과 만났다는 그의 얘기를 한낱 뜬소리로 여길 수 없었다고 했다. 신 여인도 어릴 때부터 너무나 모범적이고 착실한 사람이라며 거짓말은 아닌 듯하다고 했다.
신 여인의 뒷얘기는 계속된다. 남편에게는 물론 미국으로 돌아간 뒤 친형제들에게 이강석과 만난 얘기를 전하자 모두 놀라면서 절대로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말라고 재삼재사 당부하더라는 것이다. 기자들이 집요한 취재에 들어가면 오래 교류했던 집안 사정까지 이것저것 보도돼 돌아가신 부모님에게 누를 끼치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신 여인은 3년 동안 가슴속에 넣어둔 채 끙끙 앓다 당시 고국 방문길에 정 선생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되, 집안 얘기는 모두 가려달라고 거듭 부탁했다.
정 선생은 필자에게 “그녀는 내가 아직도 언론에서 현역으로 활동하는 줄 아는 모양”이라면서 “그 집안과 식구들에 관한 것은 약속한 대로 절대 취재도 보도도 하지 말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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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3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의 83회 생일 축하 케이크를 자르는 이 대통령 부부. 맨 왼쪽이 양자였던 이강석이다.
이기붕과 박마리아
이기붕(1896~1960)은 10세 때 부친이 작고해 홀어머니 밑에서 끼니를 거르며 가난하게 성장했다. 모친의 교육열로 상경해 보성중학과 연희전문에서 수학했다. 보성중학 시절엔 종로 YMCA(기독청년)회관에 나가 이상재, 이승만 등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선교사의 도움으로 미국에 건너가 농장 일, 호텔 일, 접시 닦기 등으로 고학하며 대학을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워싱턴에서 허정, 장덕수, 윤치영 등과 이승만의 독립운동을 도와 ‘3·1신문’을 발간했고 1934년 귀국 후에는 잡화상, 광산업 등에 실패한 후 종로의 대형 요릿집 국일관의 지배인을 지냈다.
부인 박마리아와는 미국 유학 중 만나 약혼한 뒤 1935년 서울에서 결혼했다.
이기붕의 출세길은 광복 후인 1945년 10월 이승만의 귀국으로 열렸다. 윤치영 비서실장의 비서를 지내다 비서실장으로 승진했고, 윤보선에 이어 서울시장(1949년 6월~1951년 4월)으로 재임하던 중 6·25전쟁을 맞았다.
이승만은 대통령 연임을 위해 부산 정치파동을 일으켜 발췌개헌안을 통과시킨 후 유공자인 장택상, 이범석을 밀어내고 1953년 원내외 통합자유당의 2인자(중앙위 의장)로 자신의 충복인 이기붕을 내세웠다. 이기붕은 3대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민의원 의장에 선출된 뒤 이승만에게 초대 대통령의 영구 출마를 보장한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안을 억지로 통과시켜 보답했다. 1956년 제3대 대통령선거 때 부통령선거에 나섰다가 장면에게 패했고, 1960년 3월 15일 사상 최악의 부정선거로 부통령에 당선됐다.
박마리아(1906~1960) 역시 가난 속에 교회 전도사인 홀어머니 밑에서 초등학교를 간신히 졸업한 후 주위의 도움으로 개성 호수돈여고를 거쳐 이화여전 영문과에 진학했다. 선교사 아펜젤러의 후원으로 미국에 건너가 매사추세츠 주 마운트 홀리요크대와 테네시 주 스칼렛대를 거쳐 피바디대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이화여전에서 교편을 잡다 결혼 후 YWCA 총무로 옮겼고 일제강점기 말 4~5년 동안엔 일제가 내세우는 동조동근(同祖同根) 내선일체(內鮮一體)에 동조해 식민정책을 찬양하고, 학병과 근로보국대 지원을 독려했다.
박마리아는 광복 후 이화여대 교수로 복귀한 뒤 이승만 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측근이 됐다. 프란체스카 여사의 총애에 힘입어 남편을 권력가도로 이끌었다. 이기붕이 권력의 2인자로 승승장구할 때 자신도 이화여대 부총장, YWCA 회장, 대한부인회 회장을 맡아 여성계를 좌지우지했다.
이강석과의 조우
1937년생인 이강석은 서울중·고교를 거쳐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다. 1957년 서울대 법대에 편입했다가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하며 퇴출운동을 벌이자 다시 육사로 갔다가 1958년 8월 육군보병학교 141기 간부후보생으로 훈련받고 소위로 임관했다.
이기붕 부부는 이승만의 83세 생일인 1957년 3월 26일 당시 20세인 이강석을 그의 양자로 입적시킨다. 이승만은 구한말 박모 여인과 결혼해 봉수라는 아들을 얻었으나 미국에 데리고 갔다 요절했고 프란체스카와의 사이엔 자녀가 없었다. 이강석이 양자로 입적해 이승만 내외와 이기붕 부부 등 5명이 경무대에서 생일 케이크 촛불을 끄는 사진을 본 많은 국민은 ‘이기붕 부부가 권력에 눈이 어두워 이제 아들까지 바친 게 아니냐’고 비아냥댔다.
필자는 딱 한 번 그와 인사를 나눴다. 1959년 여름 대학생들의 농촌계몽운동을 준비하던 무렵 백기완(백범문제연구소)과 함께 계몽대를 이끌던 고인환 선배와 세종로의 반공회관(현 미국대사관 자리, 4·19혁명 때 소실) 전시실에 갔다가 마주쳤다. 고인환이 “야! 강석아”라고 부르자 소위 계급장을 단 군복 차림의 이강석이 달려와 거수경례를 하며 “선배님, 자주 못 찾았습니다”라고 인사했다. 고인환이 필자를 가리키며 “후배인데 인사해라. 네가 조금 위일걸?”이라고 하자 이강석은 손을 내밀며 “반갑습니다. 어느 대학 다니시지요? 자주 만납시다”라고 말했다. 키가 165~168cm쯤 돼 보였는데, 친부모인 이기붕 부부를 반반씩 닮았고 똘똘하다는 인상을 줬다.
1960년 3월 15일 실시된 제4대 정·부통령선거는 여당(자유당), 정부(내각), 권부(경무대)가 장기집권을 위해 경쟁적으로 또는 혼연일체가 되어 치른 사상 최대, 최악의 불법·부정선거였다. 투표시간 종료 후 자유당의 농간으로 투표조차 못한 수천 명의 마산 시민이 ‘내 표 내놔라’ ‘선거는 무효다’ ‘선거 다시 하라’며 평화적 시위를 했다. 경찰이 이들에게 무차별 발포해 약 80명을 살상하자 전국 각지에서 연일 부정선거 항거시위가 일어났다. 정부·여당은 이를 북한의 오열(五列)이 사주한 선동으로 규정하고 강경 진압에 나섰다.
시국은 날로 급박하게 돌아갔다.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김주열 군의 시신이 발견되자 마산 시민들은 다시 대규모 규탄시위에 나섰다. 이어 18일엔 고려대생 3000여 명이 ‘부정선거 다시 하라’ ‘발포경찰 엄벌하라’ ‘이기붕은 사퇴하라’며 태평로 국회의사당까지 나가 종일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은 이날 저녁 경찰의 안내를 받아 학교로 돌아가던 도중 정치깡패들에게 습격당해 수십 명이 중상을 입었다. 다음 날 신문에 이 사실이 특보되자 서울의 각 대학 학생들이 분격해 대대적인 시위에 나섰다.
전국 주요 도시에서 부정선거에 항거하는 학생시위가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수천 명의 대학생 시위대가 경무대로 돌진하다 경찰의 발포로 수십 명이 살상되는 사건도 발생했다.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했지만 학생과 시민의 저항은 계속됐다.
4월 23일 장면 부통령은 사퇴를 선언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다음 날 아침 경무대로 찾아온 이기붕에게 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하겠다고 통고했다. 이기붕도 더는 버틸 수 없었다. 이날 오후 민의원 의장, 자유당 중앙위 의장, 국회의원 등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당선된 부통령’에 대한 사퇴는 언급하지 않았다.
다음 날 낮 서울시내 대학교수단이 선거무효와 발포경찰 처벌 등을 요구하는 시위에 나섰고, 드디어 26일 오전 이승만이 하야 선언을 했다. 장기집권을 획책했던 이승만, 이기붕과 자유당 정권은 부정선거 42일 만에 붕괴하고 말았다.
이기붕 일가의 행적
이기붕 일가는 두 차례에 걸쳐 피신했다. 제1차 피신은 19일 오후 2시경. 대학생들이 경무대 진입을 시도하다 경찰의 발포로 밀리자 광화문에 운집한 일부 군중이 ‘서대문 이기붕의 집으로 가자’며 몰려갔다. 이기붕과 박마리아, 차남 강욱, 그리고 비서와 경호원 등은 검은색 지프를 나눠 타고 허둥지둥 집을 나섰다. 먼저 창동의 검찰총장 별장에 갔으나 전화시설이 없음을 알고 다시 의정부 북쪽으로 차를 몰아 육군 제6군단 본부에 도착했다.
당시 군단장은 강영훈 중장(후에 국무총리 역임)으로 1952년 이기붕이 국방장관 때 경리 및 감리국장으로 재직했다. 강영훈 장군은 이들이 온 사실을 당시 김정렬 국방장관, 송요찬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 유재흥 1군사령관에게 보고했다. 20일 밤 김 장관이 전화로 “서울 상황이 안정돼가고 있으니 내일은 귀가해도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강 장군은 21일 아침 윤태호 군단 참모장을 안내역으로 붙여 일가를 서울로 보냈다. 이들은 서울에 도착하는 대로 경무대로 직행, 이 대통령을 면담하려 했으나 비서들이 주선해주지 않자 불쾌한 표정으로 서대문 집으로 향했다.
제2차 피신은 25일 오후. 이날 교수단 시위로 크게 불어난 군중이 ‘부정의 원흉인 이기붕을 몰아내자’며 서대문으로 몰려가자 일가는 의복과 신발도 제대로 못 갖춘 채 지프를 북쪽으로 몰았고, 밤 9시경 다시 6군단에 도착했다. 이때 군단사령부 일직 사령에게서 전화가 왔다. 방금 들어온 서울 미아리 검문소 보고에 의하면 1대당 대학생 20여 명씩 탄 화물트럭 20여 대가 의정부 쪽으로 북상 중이라고 했다.
강 장군은 이들이 이기붕 일가의 행적을 알고 6군단으로 향하는 게 분명하다고 판단했다. 군단사령부엔 전투병력이 거의 없었다. 그는 북쪽으로 30여 분 거리에 있는, 산하 1개 연대 병력이 주둔한 부군단장 숙소가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기붕은 “자네 판단대로 하게”라고 말했다. 밤 10시경 출발하려는데 경무대의 사실상 비서실장 격이자 이기붕의 직계인 박찬일 비서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승만이 허정, 변영태, 이범석, 윤치영 등 5명을 다음 날 오전 10시에 경무대로 부르라고 지시했다는 보고였다.
이때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수화기를 건네받은 박마리아가 “다섯 분 중에서 허정, 변영태 씨에게만 연락하라”고 지시하는 것 아닌가. 이승만은 대통령으로서 자신의 오랜 측근 원로들을 불러 긴박한 시국 수습 문제를 논의하려는 것이었다.
다음 날 연락을 받은 허정과 변영태만 경무대에 들어갔고, 이승만은 수석국무위원을 맡아 국가적 위기를 수습해줄 것을 요청했다. 당시는 헌법에 따라 국무총리제가 없고 수석국무위원(외무장관)제여서 이를 맡아달라고 한 것이다. 이에 변영태는 사양했고 수락한 허정은 이승만이 하야한 뒤 수석국무위원으로서 대통령권한대행 겸 과도정부 수반, 외무장관으로서 약 3개월 반 동안 헌법 개정과 총선거를 관리해 새 민주정부 수립에 진력하게 된다.
박마리아의 지시는 경무대 비서실을 휘하에 거느리고 대통령 지시도 마음대로 조정하는 ‘서대문 권력’의 막강함을 여실히 보여준다. 만일 원래 지시대로 5명이 모두 들어갔다면 허정 대신 다른 과도체제가 수립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피신, 칩거, 집단자살
이기붕 일가가 부군단장 숙소로 이동한 뒤 트럭 대열의 북상 보고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강 장군의 걱정은 계속됐다. 당시 일선 부대엔 재학 중 입대한 학보병이 많았는데 혹시나 학생시위에 자극받아 연대 내 학보병들이 이기붕 일가에 위해를 가하지 않을까 우려했다. 강 장군은 부군단장 숙소보다 훨씬 북쪽에 위치한 미군 1군단이 더 안전할 것으로 여겼다. 자정 무렵 유재흥 1군사령관에게 보고하자 유재흥은 이에 동의하면서 다음 날 오전 10시 원주사령부에서 긴급 소집되는 고위급 작전회의에 오라고 지시했다.
다음 날 아침 강 장군은 미군 1군단 본부로 갔다. 스토크 군단장은 일본 출장 중이어서 대신 샌더스 참모장에게 보호를 요청하자 그는 “요인 보호는 계엄사령부가 할 일 아니냐”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여 원주로 갔다.
작전회의는 이미 끝났고 군단장급 장성들은 시국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강 장군이 본의 아니게 어려운 일을 맡게 됐다고 위로했다. 이 자리에서 민모 장군은 “지금 팔도강산에 이기붕 의장을 위해 안전한 곳이 어디 있겠나. 방법은 두 가지뿐이다. 하나는 모든 책임을 지고 자결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해외로 망명하는 것”이라 말하기도 했다.
그 무렵 유재흥이 이기붕 의장 신병 처리 방안을 육군본부에 요청하자 오후 4시까지 기다리라는 연락이 왔다. 하지만 아무런 지시가 없어 강 장군이 군단본부로 돌아가니 부군단장이 전화를 해왔다. 조금 전 경무대 소속 경찰관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와서 이기붕 일가를 서울로 데려갔다는 것이다. 강 장군이 군사령부 회의에 참석하러 간 사이 군단 참모들이 모임을 갖고 이기붕 일가의 군단 체류가 군단장에게 불이익이 될 것이란 의견을 모아 이기붕에게 떠나달라고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기붕 일가는 이날 저녁 7시경 경무대에 도착, 이무기 비서가 묵고 있는 36호 관사로 들어갔다. 밤에는 본관으로 이승만 내외를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고별 인사를 한 것으로 보인다. 이기붕 일가는 이날 밤 거기서 묵은 후 다음 날은 온종일 누구도 외출하지 않고 관사에 칩거했으며, 그다음 날인 28일 새벽 집단자살로 세상을 등졌다.
이에 앞서 이승만은 26일 낮 곽영주 경무관(경무대경찰서장)에게 이기붕 일가를 경무대로 데려오도록 하고, 김정렬 국방장관에겐 이기붕 일가의 미국 망명을 교섭하라고 지시했다. 경무대 경찰관들은 일가를 이날 저녁 데려왔고 김 장관은 27일 밤 주한미국대사관 측과 타결을 지은 후 경무대에 보고했으며, 이 대통령은 다음 날 아침 이 사실을 이기붕에게 알려주려 했으나 자살로 물거품이 된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한미 간의 이기붕 망명 합의 내용은 지금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뒤따른 의문들
이기붕 일가 자살 후 수도육군병원에 옮겨진 이강석.
4월 28일 오전 8시경 이기붕 일가가 집단자살했다는 방송보도가 나왔다. 계엄사는 이들이 새벽 5시40~50분 사이에 서울 종로구 세종로 1번지 경무대 구내 36호 관사에서 리볼버 36구경 권총(6연발)으로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자살 당시 목격자는 없었으나 자살 이전의 동향과 이후의 상태로 보아 계획적인 자살이 분명하다면서 검시를 끝내고 4구의 유해를 수도육군병원(후에 국군보안사령부 자리)으로 이송했다고 밝혔다. 검시는 군과 일반 의사, 서울지검의 김동호·조태형 검사가 담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경무대, 군(계엄사), 검찰과 경찰 소식통들이 전한 내용을 종합한 이기붕 일가 집단자살 경위는 다음과 같다.
경무대 정문을 들어서면 우측은 잔디밭을 지나 본관으로 향하는 길이고, 정문에서 직진하면 후문까지 사이에 차고와 비서들의 관사가 있었다. 자살 장소는 관사 36호실. 오전 5시40~45분 사이에 연발하는 총소리를 듣고 별실에 머물던 이무기 비서가 즉시 경비실에 연락했고, 5시 53분경 경비원이 현장에 왔을 땐 모두 사망한 상태였다.
방 안엔 피가 낭자한 가운데 앞에서 볼 때 정면의 긴 소파 좌측에서 우측까지 이기붕-박마리아-강욱이 손을 잡고 앉은 상태로 머리는 모두 뒤로 젖혀져 있었다. 소파 1m 앞엔 이강석이 소파 쪽으로 다리를 뻗고 누워 있었다. 이들은 자살을 결심한 후 이강석이 부친, 모친, 동생을 차례로 쏜 후 자살한 듯하다. 검시 결과 이기붕과 강욱은 왼쪽 가슴에, 박마리아는 머리에 각각 1발씩 총알을 맞았고 이강석은 자신의 복부와 머리에 각 1발씩 쏜 것으로 보였다. 권총엔 탄알 1발이 남아 있었다.
이기붕은 전날 저녁 찾아온 경호원과 운전기사에게 “내 걱정은 말고 시골에 가서 농사나 짓도록 하라. 내일부터는 여기에 올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또 이강석은 사건 발생 10여 분 전 본관 숙직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아버님(이승만)께서 정말 오늘 이화장으로 가시느냐”고 물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6군단에서 돌아온 27일 종일 방 안에서 집단자살을 협의, 결심한 듯했다. 하야를 선언한 이승만 내외가 경무대를 떠나 이화장으로 가면 한 가닥 권력 유지는커녕 생명의 보호막조차 완전히 걷힌다는 절망감에 목숨을 끊은 것으로 분석됐다. 부모와 강욱이 수면제를 마시고 혼수상태에 빠졌을 때 이강석이 차례로 쏜 후 나란히 소파에 앉힌 것 같다고 했다. 방 안에선 수면제 병과 알약이 발견됐고, 이강석의 손엔 피가 많이 묻어 있었다고 한다.
현장에서 절명한 것으로 발표됐던 이강석은 빈사 상태에서 수도육군병원으로 옮겨져 응급치료를 받았으나 이날 오후 1시경 사망했다고 한국일보(4월 29일자 조간 3면)는 보도했다. 김치열 서울지검장은 “유서나 일기는 없고, 다만 당장 입을 옷 몇 가지와 약간의 일용품만이 남아 있었다”고 밝혔다.
사건 발생 후 한동안 집단자살에 대한 갖가지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첫째, 이강석이 3명을 먼저 쏘고 나란히 소파에 앉힌 후 자살했다면 3발의 총성이 나고 적어도 3~5분 후 다시 2발의 총성이 나야 하는데 계엄사는 잇달아 5발의 총성이 울렸다고 했다.
둘째, 수면제를 먹게 하고 1발씩 쐈다고 하나 적어도 한 명이라도 총성에 놀라 깨어 어느 정도 저항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셋째, 이강석이 2발을 쏴서 자살했고 머리와 복부 모두 치명상이라는데, 과연 1발을 맞은 후 머리나 복부 등을 다시 쏜다는 게 가능한가.
넷째, 바로 옆 별실에 있었다는 이무기 비서의 행적이 일절 밝혀지지 않았다. 경비실에 보고했다고는 하나 처음 총성이 났을 때 달려가 목격한 것인지, 전혀 들어가보지 않았는지 아리송하다.
다섯째, 제3자에 의한 집단타살설이다. 경무대 내부의 곽영주 경무관 등 이승만의 최측근 또는 충성분자들이 자유당의 숱한 실정(失政)과 3·15부정선거에 대한 거센 인책(引責) 공세를 예상, 이승만을 보호하려고 아예 이기붕 일가를 제거했다는 주장이다.
장례식이 끝난 후 4대의 영구차는 100여 대의 차량이 뒤따르는 가운데 서울시내를 벗어나 망우리 공동묘지에 도착했다. 이기붕과 박마리아의 유해는 이미 잠들어 있는 외동딸 강희의 묘 위쪽에, 강석과 강욱의 유해는 바로 아래에 안장됐다.
재미동포 기자와 공동 취재
여기까지가 이기붕이 이승만을 승계, 대통령이 되려는 야심 아래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정선거를 자행해 부통령에 당선됐다가 국민의 분노가 폭발하면서 절박한 궁지에서 방황한 끝에 일가족 집단자살, 장례식, 매장으로 이어진 상황이다.
그런데 이강석이 살아 있고 신 여인이 그를 직접 만났다니 놀라운 일이 아닌가. 필자는 며칠 동안 심사숙고한 끝에 사실 여부를 확인하려 국내외로 나눠 취재를 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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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의 하야와 이기붕 일가의 자살을 불러온 4·19혁명.
해외 취재 대상국은 당연히 미국이었다. 마침 재미동포 중진 언론인 가운데 뛰어난 활약으로 수많은 특종을 보도했고 탐사보도의 베테랑으로 알려진 친구 박형진(가명) 군에게 부탁하기로 했다. 그에게 연락해 비록 한강 백사장에서 바늘 찾기 같은 작업이 되겠지만 시간이 걸리더라도 한번 파헤쳐보자고 제의했다. 예상대로 그는 흥미진진한 소재라면서 당부한 대로 비밀취재와 신원보호는 반드시 지키겠다고 약속했다.
필자는 재미동포 사회를 통한 은근한 수소문, ABC방송에서의 인물 찾기, 1960년 당시 한국에서 근무했던 전직 외교관 추적, 관련 자료 입수 등을 탐사 방향의 의견으로 제시했다. 박 군은 좋은 생각이라면서 최대한 뛰어보겠다고 답했다. 그는 미국 방송계 인맥을 총동원해 ABC방송 뉴욕 본사를 비롯해 각 지사, 유럽 등 해외지사에 근무하는 동양계 사원들의 경력과 사진 등을 최대한 입수해 면밀히 점검했다. 미국식으로 이름을 개명했을 가능성, 얼굴을 숨기려 앵커나 기자 외에 PD, 카메라맨, 기술인으로 근무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이들에 대한 조사에도 나섰다.
필자는 국내에서 당시 생존해 있던 전 자유당 중진, 이기붕의 측근, 계엄사 고위 장성, 은퇴 외교관, 4·19혁명 당시 주한 미국대사관에 근무했던 한국 직원들을 상대로 수소문했다. 그때 이미 33년 전 상황이라 대부분 작고했거나 신병과 노령으로 인한 기억력 감퇴 등이 걸림돌로 드러났다.
이강석의 고등학교, 육본 근무(의장대 소속) 시절 친구들도 탐문했으나 뚜렷한 사실 또는 자료를 확인하거나 증언을 듣기 어려웠다. 한 친구는 이강석과 4·19혁명 직후 만남이 끊겼으나 자살 며칠 전 잠시 마주쳤을 때 “차라리 죽고 싶다” “멀리 어디로 떠나고 싶다”라는 말을 하더라고 전했다. 이기붕 측근과 전 자유당 간부들은 대부분 “말하고 싶지 않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라며 입을 다물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기붕이 민의원 의장이던 당시 그의 비서실장을 근 4년간 지낸 한글학자 한갑수 선생을 만난 건 행운이었다. 한 선생의 얘기로는 자살 소식을 뒤늦게 듣고 28일 낮 수도육군병원으로 달려갔으나 출입을 금지당했다고 한다. 군용전화로 송요찬 계엄사령관과 통화한 후 들어갔을 땐 이미 시신들을 입관한 상태였다. 오랫동안 모셨던 분들이라 얼굴만이라도 꼭 보고 싶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이강석의 시신을 수습할 때 눈알이 자꾸 빠져나와 담당자가 몇 차례 손으로 집어넣었다는 얘기를 나중에 전해 들었다고 했다.
이강석의 해외 도피 가능성을 묻자 필자가 접촉한 모든 자유당 간부, 이기붕 측근, 계엄사 및 외무부 출신 인사들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한갑수 선생은 그렇지 않아도 일가가 자살한 직후 몇 달 동안 ‘가족 전원이 해외로 몰래 나갔다’ ‘집단자살-4구의 관-장례식-매장은 각본이다’ ‘이 의장이 부부의 자살 조건으로 두 아들을 해외로 빼돌리게 했다’는 등의 소문에 시달렸다고 술회했다.
종적 감춘 신 여인
탐문하는 동안 만날 때마다 취재 상황을 묻던 정 선생이 어느 날 전화를 걸어와 신 여인이 전화를 끊고 번호까지 지워버렸다고 전했다. 결국 근 1년 반 동안 소리 없이 전개했던 ‘이강석 찾기’에 대한 반응은 여러 인사로부터 ‘있을 수 없다’는 부정적 의견부터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 ‘끝까지 공개적으로 수소문해볼 만한 소재’라는 격려(?)까지 다양했다. 그러나 국내외에서 모두 뚜렷한 성과를 얻지 못했다.
그 과정에서 참으로 답답했던 것은 국내에 이기붕 일가의 자살, 자살 전 행적, 현장 수사, 검시 등에 관한 기록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53년 전 일가가 자살했을 당시의 관련 인사들은 거의 다 사망했다. 정광모 선생도 작고했고 신 여인도 미궁으로 사라졌다. 이강석 형제 생존설이 과연 사실인지, 신 여인이 착각한 것인지도 가릴 수 없다.
만일 이강석이 생존한 게 사실이라면 망우리 묘소는 어떻게 된 사정인지 모를 일이다. 차라리 세상에 ‘이강석 찾기’를 널리 공지하는 방법도 고려해볼 수 있지 않을까.
이성춘│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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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국정교과서 집필진 명단 31명
뉴라이트 학자 대거 참여···국정 역사교과서 집필진 31명 명단 공개(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11281323001&code=940401&nv=stand&utm_source=naver&utm_medium=newsstand&utm_campaign=top2#csidx26d39a8875adc6d96e50763c41b5633) - "현대 부분을 집필한 김명섭 연세대 교수, 나종남 육군사관학교 교수, 세계사 부분에 참여한 이주영 건국대 명예교수는 한국현대사학회(뉴라이트) 멤버들이다."◇국정 역사교과서 집필진 명단 및 프로필 #선사/고대■신형식 이화여대 명예교수 ·서울대 역사교육과(학사) / 사학과(석사) . ·단국대 사학과(박사) 이화여대 사학과 교수 ·역사교육연구회 회장 역임 ·서울시사편찬위원회 위원장 역임 ■최성락 목포대 고고학과 교수 ·서울대 고고학과(학사/석사/박사) ·목포대 박물관 관장 역임 ·한국고고학회 회장 역임 ·現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서영수 단국대 명예교수·서울대 동양사학과(학사)/ 단국대 사학과(석사) ·동국대 사학과(박사) ·단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고구려발해학회 회장 역임 ■윤명철 동국대 다르마칼리지 교수·동국대 사학과(학사) / 성균관대 사학과(석사) ·성균관대 사학과(박사) ·고조선 단군학회 회장 역임 ·한국해양정책학회 부회장 역임 #고려■박용운 고려대 명예교수 ·서울대 역사교육과(학사) / 고려대 사학과(석사) ·고려대 사학과(박사) ·고려대학교 사학과 교수 ·한국사연구회 회장 역임 ■이재범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성균관대 사학과(학사/석사/박사) ·국방군사연구소 연구위원,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부편수원,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경기대학교 부총장 역임 ·前 경기대학교 사학과 교수 ■고혜령 문화재청 문화재 위원·서울대 사학과(학사) / 이화여대 사학과(석사) ·이화여대 사학과(박사) ·국사편찬위원회 편사부장 역임 .現 한국고전번역원 이사 #조선■손승철 강원대 사학과 교수 ·성균관대 사학과(학사/석사/박사) ·동북아역사재단 편집위원 ·한일관계사학회 회장 역임 ·現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이상태 국제문화대학원 대학 석좌교수 ·연세대 사학과(학사/석사) ·동국대 사학과(박사)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실장 역임 ·일본 동경대 초빙교수 ■신명호 부경대 사학과 교수 .강원대 사학과(학사) / 한국학중앙연구원(석사) ·한국학중앙연구원(박사) ·부경대학교 박물관장 역임 #근대 ■한상도 건국대 사학과 교수 ·건국대 사학과(학사/석사/박사) ·중국 북경대학 한국사 객좌교수 ·건국대학교 박물관 관장 ·現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이민원 동아역사연구소 소장·청주대 영문과(학사) / 한국학중앙연구원(석사) ·한국학중앙연구원(박사)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연구위원 ·한국보훈교육연구원 연구부장 역임 ■김권정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숭실대 사학과(학사/석사/박사) ·숭실대학교 전임연구원 ·중앙대학교 전임연구원 #현대■최대권 서울대 명예교수 ·서울대 법학과(학사) / 미시건대(석사) ·UC 버클리대(석사/박사) ·서울대 법과대학 교수 ·한동대 석좌교수 ·법제처 정부입법자문위원장, 선거방송심의위원장 역임 ■유호열 고려대 북한학과 교수·고려대 정치외교학과(학사/석사) ·오하이오주립대 정치학과(박사) ·통일연구원 연구위원, 한국정치학회 회장 역임 ·現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민주평통자문회의수석부의장 ■김승욱 중앙대 경제학부 교수 중앙대 경제학과(학사/석사) ·조지아대 경제학과(박사) ·고용노동부 장애인고용촉진전문위원회 위원 ·경제사학회 회장 역임 ■김낙년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 ·서울대 경제학과(학사/석사) ·동경대 경제학과(박사) ·경제사학회 회장 역임 ·現 낙성대 경제연구소 소장 ■김명섭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연세대 정치외교학과(학사) / 정치학과(석사) ·소르본대 정치학과(박사) ·한신대 조교수, 부교수 ·한국정치외교사학과 부회장 역임 ■나종남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교수 ·육군사관학교(학사) / 서강대 사학과(석사) ·노스캐롤라이나대 역사학과(박사) #세계사■이주영 건국대 명예교수 ·서울대 사학과(학사) / 하와이주립대 사학과(석사) ·서강대 사학과(박사) ·건국대학교 교수 ·역사학회 회장, 한국아메리카학회 회장 역임 ■허승일 서울대 명예교수 ·서울대 사학과(학사/석사) ·서울대 서양사학과(박사) ·건국대 교수 ·서울대 역사교육과 교수 ·한국서양사연구회 회장 역임 ■정경희 영산대 자유전공학부 교수·서울대 역사교육과(학사) / 서울대 서양사학과(석사) ·서울대 서양사학과(박사) ·아산정책연구원 초빙연구위원 ·現국사편찬위원회 위원 ■윤영인 영산대 자유전공학부 교수 ·펜실베니아대 역사학과(학사) / UCLA 동양문화(석사) ·UCLA 동양문화(박사) ·고구려연구재단 연구위원 ■연민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동국대 사학과(학사/석사) ·큐슈대학 일본사학과(박사) ·동북아역사재단 역사연구실장 #현장교원■우장문 경기 대지중 수석교사(선사/고대) ·충북대 역사교육과(학사) / 고려대 역사교육과(석사) ·경기대 사학과(박사) ·한국고대학회 회원 ■김주석 대구 청구고 교사(고려) ·대구대 역사교육(학사) / 대구대 사학과(석사) ■유경래 경기 대평고 교사(고려)·성균관대 사학과(학사) / 아주대 역사교육과(석사) ■정일화 강원 평창고 교사(조선) ·강원대 역사교육과(학사/석사) ■최인섭 충남 부성중 교장(근대) ·공주대 역사교육과(학사) / 고려대 역사교육과(석사) ·숭실대 평생교육(박사) ■황정현 충남 온양 한올중 교사(근대/현대)·한남대 역사교육과(학사) / 공주대 역사교육과(석사) ■황진상 서울 광운전자고 교사(세계사)·서울대 국사학과(학사) '최순실교과서' 부역자 명단입니다. - 문제가 된 현대쪽 부분은 보신 것처럼 역사학 전공자는 없습니다. 김낙년 등 뉴라이트 계열이라 보면 될 것 같습니다. - 근대까지 쳐줘서 한상도, 김권정이 있는데, 이분들은 일제시대 전공자이고 박사는 각각 90년대, 00년에 낸 짬이 꽤 되는 양반들입니다. 과문하여 정확히 이분들의 연구를 제대로 본 적은 없으나, 한상도 선생은 재중 독립운동 쪽인거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전공자인 저도 이름을 처음 봅니다. - 조선시대 전공자에게도 물어보니 조선 시대 저 세 명도 자긴 잘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긴 하던데, 객관적으론 잘 모르겠네요. - 시작도 전부터 역사학계는 98%가 빨갱이들이라고 하더니 실제로 근현대사 파트에서는 역사학계를 제외했네요. 땡큐 베리 감사. 어이가 없어서... 이게 용인이 될 거라고 생각한건가....ㅋㅋ 끝까지 비공개로 진행한 이유가 역시 뻔했죠. 때려치워라이것들아..
세휘롯작성일
2016-11-28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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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수다] 간편 종합뉴스?
10월 25일 신문을 통해 알게 된 이야기들
1. 청와대는 박근혜 대통령의 개헌 제안이 각종 비리의혹을 덮으려고 한다는 주장에 대해 전혀 사실무근이라고 일축했습니다. 개헌에 관한 논의는 지난 6월부터 시작했으며 추석 연휴 마지막 무렵 대통령이 개헌 준비를 지시했다고 전했습니다.
뻑 하면 사실무근... 근데 혹시 그 개헌이 ‘유신’은 아니겠지?
2. 청와대는 이른바 '비선실세' 의혹을 받는 최순실 씨가 박근혜 대통령의 각종 연설문을 미리 받아봤다는 언론 보도가 나오자 당혹감 속에서 침묵을 지켰습니다. 청와대는 ‘봉건시대에도 있을 수 없는 얘기’라며 강력히 반박한지 불과 3일 만에 이런 의혹과 관련된 정황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면 우주의 기를 받은 게 아니라 내림굿을 받았다고 봐야지? 나라 꼴 참...
3. 국회 ‘예산 전쟁’이 박근혜 대통령의 시정연설과 함께 시작됐습니다. 법인세 인상과 누리과정(만 3∼5세 무상보육) 예산 편성을 둘러싼 여야의 시각차가 확연해 대충돌이 예상됩니다.
듣도 보도 못한 미르, K재단에 수백억씩 내는 기업이 법인세 인상에 반대할 이유가 없지 싶은데? 아냐?
4. 최악의 국정감사란 비판 여론에도 불구하고, 각 당이 국회의원 300명 중 절반가량을 ‘우수 국감의원’으로 선정해 ‘낯 뜨겁다’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국감 실적과 상관없는 사실상 다음 선거를 대비하기 위한 지역구 홍보용 ‘셀프상’이란 지적입니다.
국민 스스로가 낯 뜨거운 19금을 보지 않기 위해서는 정말 잘 보고 잘 찍어야... 오케이?
5. ‘송민순 회고록’ 공방으로 정치권에 때 이른 ‘북풍’이 불고 있습니다. 북한과 관련된 ‘색깔론’은 사실 여부를 떠나 부추기면 부추길수록 정치권의 유불리가 명확해지므로 이번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전망입니다.
가을 단풍 붉게 붉게 물들어 가는 계절에 북풍한설 몰아치는 구나... 에헤라 디여~
6. 국방부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추모식 지원 보도 자료에서 박 전 대통령이 '광복군으로 활동했다'고 명시해 물의를 빚고 있습니다. 국방부는 그의 약력으로 ‘1944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945년 광복군에서 활동했다’고 서술했습니다.
일본 천황에게 혈서를 쓰고 충성 맹세한 것도 좀 쓰지 그랬어~ ‘다카키 마사오’ 말이야~
7. 최순실의 딸 정유라가 2015년 1월 페이스북에 태아 초음파 사진과 함께 ‘벌써 25주나 됐어요’라는 게시물을 올렸다가 삭제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거의 입학과 동시에 출산했다’라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습니다. 만일 게시물이 사실이라면 개인적인 사유로 1학년 1학기를 빠진 이유가 설명됩니다.
이거야 원... 무슨 70년대 ‘선데이 서울’ 보는 느낌이 들어...
8. 서울대 학생들이 백선하 서울대병원 교수에 대해 ‘학교의 명예를 실추시켜 징계위원회를 열어 해임해야 한다’고 촉구했습니다. 이들은 ‘백 교수가 작성한 사망진단서는 부검이 필요하다는 주장의 근거가 되었고 결과적으로 국가폭력을 덮을 명분을 제공했다’라고 지적했습니다.
이대도 그렇고 학교의 명예를 지키는 것은 역시 학생들 밖에 없구만... 그래서 청춘이지~
9. 농업법인으로 신고한 5만3475개소 가운데 실제 운영 중인 농업법인은 2만 4,825개소로 47%에 불과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정부는 사업범위를 벗어난 1,880곳에 대해 해산 명령을 내릴 계획입니다.
농민 팔아먹는 보조금 도둑놈들... 하여간 나라에 도둑놈이 너무 많다.
10. 일본 정부가 중국의 위안부 소녀상 설치에 불쾌감을 나타내며 ‘매우 유감으로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스가 장관은 ‘우리는 과거의 불행한 역사에 지나치게 초점을 맞추는 것보다는 국제사회가 직면한 공통 과제에 미래 지향적으로 대처하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라고 강조했습니다.
과거 청산 없이는 미래도 없는 거야 이 양반아... 우리가 왜 이러고 사는데~
11. ‘경북일보’가 미르, K스포츠재단 등 ‘최순실 게이트’로 지지율 최저치를 갱신하고 있는 박 대통령을 TK 지역민이 응원해야 한다는 사설을 써 물의를 빚고 있습니다. 이 신문은 박 대통령의 지난 구미, 영주 방문을 두고 ‘대통령의 방문 의미를 살리고 계승해나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조중동도 감히 못 하는 충성맹세를... 왜, 1면에 혈서라도 써서 올리지 그랬어~
12. 지난해 자신이 가르치던 제자들에게 '노무현 대선 조작 증거' 과제를 요구해 물의를 빚었던 부산대 철학과 최우원 교수가 결국 파면됐습니다. 파면은 공무원을 강제로 퇴직시키는 중징계로, 5년간 공무원으로 임용될 수 없으며 퇴직금도 절반으로 줄게 됩니다.
거두절미하고... 속 시원합니다 그려~ 헛소리도 꼭 책임을 져야...
13. 경찰이 지연 출동에 항의한 학교폭력 목격자와 시민에게 수갑을 채워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경찰은 지연 출동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신고자와 목격자 모두 술에 취해 공무집행을 방해했다며 공무집행방해 혐의를 적용해 불구속 입건했습니다.
오죽 답답했으면 그랬을까... 원인 제공을 한 면도 있으니 적당히 하지... 쩝...
14. 트럼프가 지난 19일 마지막 토론에서 힐러리를 향해 내뱉은 ‘이 더러운 여자 같으니라고(Such a nasty woman)’라는 네 단어가 여성 표심에 쐐기를 박는 대선 구호가 됐습니다. 이 네 단어는 토론 직후 여성들이 ‘나는 더러운 여자(#ImANastyWoman)’ 해시테그를 달면서 트럼프 반대 구호로 삼고 있습니다.
우리도 열심히... #그런데_최순실은? #그런데_우병우는? 앞으로도 쭈욱~
15. 가톨릭 교회에서 사제서품을 받은 신부가 오랜 기간 교제한 여성에게 결별을 통보해 위자료를 물어주게 됐습니다. 재판부는 ‘이 신부가 65세가 되면 신부 지위에서 은퇴하고 혼인하겠다는 합의에 따라 교제한 사실이 인정된다’며 1,000만 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판결했습니다.
세상이 점점 믿을 구석이 없어지는 게 아닌가 싶다... 믿는 자여 어이할꼬~
16. 현대차가 사내협력사 비정규직 400명을 정규직으로 채용합니다. 현대차가 사내 하도급 근로자를 자사 정규직으로 특별 고용한 인원은 2012년부터 현재까지 총 5천 명으로 내년까지 사내 하도급 근로자 1천 명을 정규직으로 추가 채용할 계획입니다.
올해 3월 노사가 협의를 통해 11년간 이어온 사내 하도급 문제가 매듭지어진 거라는 거... 암튼 이럴 땐 박수~
17. 대학수학능력시험이 한 달도 남지 않은 가운데 학원가에는 때아닌 아랍어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제2 외국어로 아랍어가 점수 따기 쉽다고 알려졌기 때문인데, 올해는 10명에 7명꼴로 선택했습니다.
설마 박근혜 대통령의 ‘젊은이들 전부 중동 가라’는 것 때문은 아니겠지? 설마...
18.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청 앞 효원로에 배우 류준열 씨의 이름을 딴 ‘류준열 스타숲 가로숲길’이 조성됩니다. 이 숲은 수원시와 ㈜트리플래닛의 ‘시민참여형 숲 조성 캠페인’ 업무협약의 첫 결과물로 수원 출신 배우인 류씨의 팬클럽이 조성한 600만여 원으로 만들어질 예정입니다.
수원시는 부지를 제공하고 팬들은 숲을 조성하고... 이거 이쁘고 좋네~
@문재인, ‘갑작스런 개헌 제안, 블랙홀이 필요한 상황인가’. 답이 없음.
@안철수, ‘개헌론, 우병우ㆍ최순실 덮으려는 게 아닌지 우려’. 현실.
@김종인, ‘개헌 적정시기 돼’ 박 대통령 개헌 제안 환영. 덥썩~
@박원순, ‘재집권 생각밖에 없는지’ 개헌제안 비판. 그러게...
@유승민, ‘박 대통령 4년 동안 개헌 반대했잖냐’. 직격탄~
@추미애. ‘개헌 제안에 박정희 3선 개헌 떠올라’ 흐미~
@조국, ‘개헌은 다목적 카드 근혜순실 게이트 심각성 반증’. 역쉬~
@안희정, ‘대통령과 청와대는 개헌 논의에서 빠져달라’. 왕따~
@이정현, ‘개헌 정략적 이용하려는 정치인 바람직 못해’. 내 말이~
@박근혜, ‘노무현 개헌 제안에 참 나쁜 대통령’. 그때그때 달라요~
거짓말을 한 그 순간부터 뛰어난 기억력이 필요하게 된다.
- 코르네이유 -
거짓말을 덮기 위해선 더 큰 거짓말이 필요한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대통령의 개헌 발언이 많은 사람을 혼란스럽게 하는 건 아닐까요?
거짓말, 그거 아무나 하는 게 아닙니다.
오늘부터 똑 부러지게 지켜봐야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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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내가 이승만 아들이오
이승만과 그의 부인 프란체스카 사이에는 소생이 없었다. 이승만에게는 전처인 박승선 사이에 봉수라는 아들이 있었지만, 미국 체류중에 그만 병사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승만은 양자로 이기붕의 아들중에서 고르게 된다.이기붕 과 그의 아내 박마리아 사이에는 이화여중 재학 중 요절한 장녀 이강희와 장남 이강석, 차남 이강욱이 있었는데.. 이승만은 그중 장남 이강석을 양자로 입적시킨다. <이승만과 부인 , 이강석, 이기붕과 그의 아내 박마리아> 작가에 따르면 83세에 달하는 이승만이 이렇게 양자를 들인 이유를 '왕조 계승의 목적'이라고 말한다. 히야시 다께히꼬(작가)에 따르면, "이승만, 이기붕의 조상은 모두 이씨 왕조 양녕대군으로 시작되며, 17대 후손인 이승만에 대해 이기붕은 18대 후손이었다. 자식이 없는 이승만은 이기붕의 장남 강석을 양자로 맞아, 늙은 집념에 따라 문자 그대로 이씨 왕조의 재현을 도모할 심산"이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 왕권을 다시 만들려는 속셈은 왕이 되어 독재를 꿈꾸었다는 애기가 된다> 한국의 제1인자를 양아버지, 제2인자를 친아버지로 둔 이강석의 위세는 막강했다. 정병준의 책 <청산하지 못한 역사>에 소개된 장면을 보자. 이강석은 백주에 정복 차림의 헌병을 구타하고 파출소의 기물을 부수고 다녀도 누구 하나 그를 고발하고 처벌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강석은 이승만의 양자가 된 직후 부정으로 서울대 법대에 편입해 서울대 법대생들이 4월 9일 동맹휴학에 돌입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해당 기사와 관련없음> 이런 사태가 벌어지자 이강석은 서울대 법대를 중퇴하고 육군 사관학교로 재입학하여 12기로 졸업했으며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이강석이 제3인자로서 그 권력이 대단하다는 소문이 널리 퍼지자, 얼마 후 '가짜 이강석 사건'이 벌어진다. 1957년 8월 21일 오전 6시부터 몰아친 태풍 아그네스가 경북 동해안 일대를 강타해 그 연안 일대는 쑥대밭이 되었다. 이 지역에 22세의 대구 출신 무직자 강성병이 나타났다. 그는 이강석 행세를 하면서 이 지역의 각급 기관장들을 농락하고 다녔다. 기관장들은 그에게 돈을 주고 아첨을 일삼는 추태를 벌였다. <가짜 이강석 강성병> 같은 해 8월 30일 밤에는 강성병이 대뜸 경주경찰서 서장실로 전화를 걸어 "나, 이강석인데…"라고 하자, 경주서장은 화들짝 놀라며 강성병이 기다리는 다방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귀하신 몸이 어찌 홀로 오셨나이까." 황송해하며 연방 머리를 조아리던 서장에게 강성병은 "나는 이강석인데 하계 휴가차 진해에 계시는 아버님의 밀명으로 풍수해 상황을 시찰하고 공무원의 비리를 내사하러 왔다. 암행시찰이니 누구에게도 알려서는 안 된다. 아버님께서 누설자는 엄중히 다스린다고 말씀하셨다. 수재민에게 나누어 줄 쌀을 준비해야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가짜 이강석은 8월 30일부터 9월 1일까지 영천, 경주, 안동, 봉화를 누비며 경찰서장 시장 군수 읍장 은행지점장 등에게 금품을 요구했다. 강준만에 따르면 경주시장은 강성병을 지프에 태워 불국사 관광안내를 하면서 각종 기념품을 사주었다. 각지 경찰서장 등과 36사단장은 경호원을 동승시켜 관용 또는 군용 지프로 목적지까지 가게 했다. 몇몇 경찰서장은 고급 요정이나 관사에서 식사와 술을 대접했다. 당시 공석 중인 치안국 통신과장 승진 운동을 한 사람도 있었고, 야당 탄압과 여당 지원 사실을 보고하면서 "명년에 있는 민의원 선거에 자유당 후보를 꼭 당선시키겠다"고 다짐한 사람도 있었다. 가짜 이강석과 같이 기념사진을 찍거나 그의 숙소 앞에 불침번을 서게 한 사람도 있었다. 뒤늦게 알고 안동에서 의성까지 뒤따라가서 인사를 한 장성도 있었다고 한다. 덜미는 경북지사 이근식이 잡았다. 진짜 이강석의 얼굴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가짜 이강석 사건을 심판하는 대구법원에서는 법원 건립 후 최고 인파인 1천여 명이 몰려들었다. 판사 전용 출입문까지 들어선 방청객 사이로 법정에 들어가느라 판사의 법복이 찢어지고 법정 안에 있는 의자의 반이 부서졌다. 가짜 이강석은 10개월 실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그의 법정 발언은 사람들의 박수를 받았다. "돈만 있으면 언제라도 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것이 오늘의 세태가 아니냐." "이번 체험을 통해 권력의 힘이 위대한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내가 시국적 악질범이면 나에게 아첨한 서장, 군수 등은 시국적 간신도배이다." "언젠가 서울에서 이강석이 헌병의 뺨을 치고 행패를 부리는 데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을 보고 한번 흉내내 본 것이며, 권력이 그렇게 좋은 것인 줄 비로소 알았다" (이상 박찬, 임영태의 책에서 발췌) 진짜 이강석은 가짜 이강석 사건 소식을 듣고 격분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어째서 가짜 이강석이 활개를 치고 다니고, 무려 46만환(750만원)이나 되는 거금까지 챙길 수 있었던 것인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의 제3인자로 알려진 진짜 이강석은 법 위에 올라선 무법자였고, 다음 정권을 이어갈 것이라고 기대되었던 또 하나의 권력이었다. 제3인자의 권력이 이러할진대, 제1인자와 제2인자의 권력과 위세는 오죽하였겠는가. 당시 이승만과 이기붕에게는 아무도 대적할 수 없었고, 또 아무도 대적해서는 안 되었다. 가짜 이강석 사건이 일어난 다음해, 1월 23일자 동아일보에서 김성환 화백이 만화 <고바우 영감>으로 이 사건을 풍자하였다가 고초를 겪었다. 대한민국 최초로 시사만화가가 당한 필화 사건이었다. 이강석은 1959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포드베닌 보병학교에서 군사 교육을 마치고 5월 25일 귀국하였다. 그리고 1960년 4월 19일 독재자 이승만에 대해 민중들이 항거한 4·19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 성명을 발표하자, 이틀 뒤 이강석은 경무대에서 아버지 이기붕과 어머니 박마리아, 그리고 동생 이강욱을 권총으로 쏘아 살해하고, 자신도 자살했다. 이기붕 일가족 자살에 대해서 당시 곽영주가 이승만의 하야를 막기 위해 여론을 무마시키고자 그를 비밀리에 살해했다는 설이 있으나 알 수 없다. 공교롭게도 이강석이 이렇게 자살한 3년 뒤인 1963년, 가짜 이강석 강성병도 자살로 삶을 마무리해 죽음까지도 진짜를 따라가게 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인연이 질겼던 진짜 이강석과 가짜 이강석. 이들이 만들어낸 블랙코미디가 아직까지도 흐릿하게 남아있는 것 같아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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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수다] 간편 종합 뉴스?
6월 28일 신문을 통해 알게 된 이야기들
1. 새누리당의 8·9 전당대회가 44일 앞으로 다가왔지만, 전대를 제대로 치를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가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있습니다.
현재 비대위 최대 쟁점은 '전대 룰'에 관한 것인데, 당 대표-최고위원 분리 선출'과 '모바일 투표' 도입이 핵심입니다.
머리 아프신 분 많으실 듯... 그러게 있을 때 잘하지 말야...
2. 더민주당 김종인 대표와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가 27일 나란히 고개를 숙였습니다.
더민주는 서영교 의원의 '가족 채용' 논란으로 국민의당은 김수민 의원의 총선 홍보비 파동으로 창당 이후 최대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여는 분열, 야는 비리... 어째 좀 뒤바뀐 것 같지 않아... 별일이야...
3.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의 의원들이 여야를 막론하고 '김영란법' 시행령 개정을 강하게 요구했습니다.
김영란법은 공직자 등이 직무와 관련하여 식사 3만 원, 선물 5만 원, 경조사비 10만 원 이상을 수수하면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더 받고들 싶어서 그러시는지... 시행도 하기 전에 이게 뭐니~
4. KBS가 자사 뉴스 비평 프로그램인 'KBS 뉴스 옴부즈맨'을 6월 방송을 마지막으로 폐지를 결정하자 시청자·언론 단체들이 반발하고 나섰습니다.
'KBS 뉴스 옴부즈맨'을 폐지하면 매체 비평 프로그램 3개 중 2개가 사라지고 'TV 비평 시청자데스크'만이 유일하게 남게 됩니다.
남의 비판도 듣기 싫은데 자기 스스로 비판하고 싶겠어? 이해한다 이해해...
5. 학교 폭력과 범죄를 막기 위해 5년 전 서울 국공립 초등학교에는 학교 보안관 제도가 도입돼 운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부 학교에서는 학부모와 학교 관계자들이 횡포를 부려 학교 보안관들이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아이 지키는 보안관을 무슨 아파트 경비 아저씨 취급하는 거지... 물론 경비 아저씨도 그럼 안돼~
6. '천황폐하 만세' 삼창으로 큰 논란을 빚은 이정호 KEI 센터장이 이종구 전 국방부 장관의 차남으로 확인됐습니다.
육군사관학교 14기 출신인 이 전 장관은 전두환 전 대통령을 필두로 한 군부 내 사조직 '하나회'의 총무를 맡았던 핵심 멤버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 역시 하나회 다운 면모를 보여주시는구만~
7. 제20대 국회의원 300명은 어떤 차를 타고 다닐까, 국회사무처 정보공개를 통해 확인해 보았습니다.
등록된 292대 차량 중 대형차는 271대, 중형차는 21대였으며, 재원을 살펴보면 대부분 3000cc 이상 대형차를 타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러니 대중교통 타는 서민들 심정을 알 까닭이... 이제 그만 서민 품으로 돌아오시죠~
8. 가습기 살균제 피해가 논란이 된 지 5년 만에 주요 책임자가 구속 기소됐지만, 준비 미비로 재판이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27일 옥시 신현우 전 대표 등의 2차 공판준비기일을 열었지만, 첫 기일처럼 ‘수사기록 복사가 아직 안 됐다’는 이유로 심리를 진행하지 못했습니다.
5년이 걸렸는데 아직도 복사 중? 이 양반들이 정말 너무하네... 짜증나~
9. 회원이 4만5천여 명에 달하는 인터넷 카페 운영자가 회원들 몰래 사업자 등록을 하고 업체로부터 수수료 등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 논란입니다.
논란이 일자 운영자는 사과문을 통해 ‘협력업체로부터 월 10만∼30만 원을 받고 있지만, 카페를 위해 돈을 사용했다’고 해명했습니다.
그러게 투명하게 하면 될 것을... 협력업체가 회원들보고 주지 운영자보고 주나 어디...
10. 12 세 여학생을 대상으로 한 자궁경부암 백신 무료 접종이 시작됐지만, 백신 접종을 위해 병원을 찾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합니다.
무료 접종 시행에 맞춰 SNS를 통해 '백신 괴담'이 전파되는 등 백신 부작용 등에 대한 오해와 불안감이 해소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빙성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정부가 괴담 해소를 위해 뭘 하고 있다는 소리가 없으니 답답할 노릇이고...
11. 올해 상반기 가장 많이 팔린 먹거리로 출시된 지 오래된 '스테디셀러' 제품들이 꼽혔습니다.
가장 노익장을 뽐내는 제품은 올해 66세인 '칠성사이다'이고 새우깡과 맛동산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이름만 들어도 정겹네... 근데 칠성사이다가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구나... 잘 모셔야지~
12. 브렉시트 결정 이후 안전자산 선호심리가 강화된 영향으로 금 1g 값이 KRX금시장 개설 이후 처음으로 5만 원을 넘어섰습니다.
금 시세가 1g당 5만 원을 넘은 것은 2014년 3월 KRX금시장이 문을 연 이후 처음입니다.
이 판국에 돈 버는 사람이 있는게지... 부럽다고 해야 하나... 쩝~
13. 한국인의 실제 수면 시간이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가장 적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한국인의 실제 수면 시간은 6.3시간으로 아태지역 평균 실제 수면 시간보다 0.6시간가량 적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잠이 보약인데... 잠이라도 푹 자면 좀 좋아...
14. 초등학생이 생각하는 '좋은 부모'는 자신의 말을 잘 들어주고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며, 남과 비교를 하지 않는 부모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부모들은 '좋은 부모'의 덕목으로 '아이의 말을 잘 들어주고 대화를 많이 하는 부모'를 첫 번째로 꼽았습니다.
아이들 생각이나 어른의 생각이나 별 차이가 없네... 단지 함께 하는 시간이 적을 뿐... 그저 미안하지...
15. 본격적인 여름철을 맞아 사용량이 급증하고 있는 에어컨, 선풍기 등 냉방기기 화재가 매년 잇따르고 있어 주의가 요구되고 있습니다.
냉방기기 화재의 주된 원인은 선풍기의 경우 모터 과열, 에어컨은 실외기의 전기합선과 모터의 열이 축적되면서 발생한다고 합니다.
먼지 제거만 잘해도 된답니다. 어떻게 청소 좀 하시죠~
16. 우리나라 학생들의 사회경제적인 수준에 따른 수학 친숙도와 이로 인한 성적 양극화가 OECD 회원국 중 가장 큰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OECD의 ‘방정식과 불평등’이란 보고서에 따르면 사회경제적 여건이 불리할수록 수학에 대한 이해가 떨어지고 성적도 낮아질 수 있다고 합니다.
그놈의 사교육이 문제라니까... 방정식과 불평등... 답이 안 보이네~
17. 연예계가 성범죄 의혹으로 또 발칵 뒤집혔습니다.
박유천을 비롯해 유상무가 성범죄 의혹으로 경찰 수사를 받고 있는 가운데, 서태지와 아이들의 멤버였던 이주노도 성추행 혐의로 입건돼 파장이 일었습니다.
하루 종일 떠들고 발칵 뒤집는 언론이 문제지~ 그만해라 지겹다~
18. 간첩 누명을 쓰고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모녀에게 32년 만에 무죄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재판부는 당시 안전기획부가 김 씨 모녀를 적법한 절차 없이 구속한 뒤 불리한 진술을 하도록 회유한 사실이 인정된다며 무죄를 판결했습니다.
이건 전두환 시절입니다. 유신에서 5공화국까지... 조작 공화국이라네~
19. 비자(VISA)카드와 국내 신용카드업계의 밥그릇 싸움이 한창입니다.
논란의 핵심은 비자카드가 해외이용수수료율을 1.0%에서 1.1%로 올리겠다고 국내 카드사에 통보했기 때문입니다.
또 비자카드가 동아시아 국가 중 한국만 인상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번에도 한국만 봉인게지... 징그럽다 아주~
20. 박 대통령 ‘브렉시트 충격, 범정부 대응체제 주문’. 한영 FTA?
검찰 '국민의당 리베이트' 수사 절정 4가지 혐의 적용. 사가지...
여야, 가습기 살균제 피해 국정조사 실시 합의. 오~~~ 환영~
국민의당 호남에서 더민주당에 지지율 추월을 허용. 찰스도?
‘JP 흉상’ 공주 모교에 설치 논란. 흉하다...
석촌호수에 한강 물 붓기 작년에만 143만 톤. 밑빠진 호수~
아름다운 것!
그것은 마음의 눈으로 보여지는 미(美)이다.
- 주베르 -
마음의 눈으로 보여지는 미가 가장 아름답다.
무슨 말인지 설명하지 않아도 아는 얘기들이 있습니다.
바로 이런 것들 아닐까요?
세상이 아무리 강요해도 각자의 마음으로 보여지는 아름다움은 따로 있을지 모릅니다.
오늘 하루를 미소로 시작하는 당신의 모습이 제 마음에는 가장 아름답습니다.
이쁜 미소로 가장 멋진 하루 되세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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