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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글터] 죽음의 마을(1)
마침내 촬영일이 내일로 다가왔다. 해일은 자신의 아파트 거실에서 이번 촬영에 투입될 스텝과 장비들을 최종적으로 점검해 보았다. 스텝은 조연출, 스크립터, 촬영감독과 보조, 적외선 카메라맨, 스틸 사진 기사 그리고 출연진으로 그간 계속 자문 역할을 해온 한국 기공 협회 회장 오윤창씨, 무속인 이정란씨등 무속 전문가 2명과 자신을 포함하여 총 9명으로 확정지었다. 촬영 스케쥴은 일단 내일 목촌리 흉가에서 하룻밤을 지내며 밤샘 촬영을 한 다음 모레 서울로 올라와 촬영 테잎을 분석하고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다시 이틀 더 촬영하는 것으로 일정을 잡았다. 하지만 이번 촬영에 임하는 그의 마음가짐은 분명 여느 때와 달랐다. 특히 이창수의 사망과 김한수의 괴이한 행동에 이은 실종은 그를 알 수 없는 긴장속으로 몰아넣었다. 잠을 자려고 벌써 2시간째 눈을 붙이고 있었지만 그럴수록 의식은 더욱 또렷해져 엉뚱한 상상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하는 것이었다. 그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방에 불을 밝혔다. 시간은 이미 새벽 3시를 넘어 가고 있었다. 어차피 잠자긴 틀린 것 같았다. 그는 침대에 걸터앉아 무엇을 하며 이 시간을 보낼 것인가를 궁리했다. 그러나 잠시후 그를 더욱 궁지로 몰아넣은 것은 허탈한 공허감이었다. 이럴때 따스한 말 한마디 같이 나눌 사람이 곁에 있다면. 그는 비로소 혼자 산다는 것이 얼마나 적막하고 고독한 일인가를 새삼 실감하고 있었다. 이번 촬영이 끝나면 시골 부모님의 말대로 선이라도 봐서 결혼이라는 것에 대해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때 날카로운 비수처럼 전화벨이 울렸다. 해일은 전화를 받으려다 잠시 멈칫했다. 아무래도 불길한 예감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그는 그것이 김한수의 전화일 것이라는 막연한 확신을 가졌다. 그는 잠시 전화를 노려보다 거칠게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그러나 뜻밖에도 수화기 건너편에서 들려온 것은 섬뜩한 울음소리였다. 뭔가에 쫓기는 듯 다급하고 날카로운 울음소리. "여보세요? 한수냐? 너 한수 맞지?" "살..... 려...... 줘, 제발!" 흐느낌 속에서 간신히 짜내는듯한 목소리. 극도의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힌 그 목소리는 분명 김한수의 목소리였다. 해일의 가슴이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한수야, 임마! 거기 어디야? 내가 갈께,거기 어디야?" 대답 대신 흐느낌이 이어지던 수화기 건너편에서 다시 부들 부들 떨리는 김한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난 살고 싶어, 금방 놈들이 쫓아 올거야. 믿을 수가 없어, 세상에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나한테?" "누가, 대체 누가 쫓아 온다는 거야?" "끔찍한 괴물들..... 어디에도 숨을 곳이 없어..... 어디에도..... 나.... 난.... 도망갈 수 없다구" "진정하고 차근 차근 말해봐, 알아 듣게" "해.... 해일아, 그.... 그 곳에 가지마. 흉가에 가선 안돼!" "한수야! 이러지 말고 우리 만나서 얘기 하자. 도대체 어디 있는거야?" "와.... 왔어..... 무.... 무서워, 놈들이야! 안개가 보이면..... 알 수 있어. 해일아..... 난 살고 싶어, 해일아..... 아악!" "한수야, 무슨 일이야? 한수야! 한수야!" 그러나 김한수는 이미 수화기를 놓쳐버린 모양이었다. 대신 수화기 먼 곳으로부터 끔찍한 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수화기를 든 해일의 손이 부들 부들 떨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심장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김한수의 소름 끼치는 절규가 해일의 의식을 찢으며 날카롭게 파고 들었다. "더.... 덤벼봐, 이 더러운 새끼들아, 어서..... 어서 덤비란 말얏! 내가 네놈들을 겁내는 것 같애? 뭘 기다리는 거야? 어서 덤비란...... 악.... 아악!" 수화기를 움켜진채 해일은 고개를 파묻었다. 그의 어깨가 무섭도록 떨리고 있었다. 해일은 울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울고 있다는 사실조차 느낄 수 없었다. 수화기 건너편에선 계속해서 처참한 김한수의 비명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수화기에선 더이상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나 해일은 결코 수화기를 놓을 수 없었다. 그것이 김한수와의 마지막 인연이었다. 김한수의 시체가 발견된 건 다음날 아침이었다. 그의 시체는 두 눈을 부릅뜬 채 도심 뒷골목 쓰레기 더미속에서 처참한 몰골로 발견 되었다. 오열하는 지윤의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며 해일은 가슴팍을 파고드는 서늘한 냉기를 느껴야만 했다. 김한수의 마지막 비명이 지금도 그의 귓전을 맴도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의 비명 너머로 형체조차 알 수 없는 미지의 공포가 조금씩 해일의 심장을 죄어 오고 있었다. 촬영일은 하루 더 연기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망설이고 있었다. 흉가에 가지 말라던 김한수의 마지막 말이 그의 마음을 붙잡고 놓지 않았던 것이다. * * * 혜경의 자취방엔 온갖 잡다한 서류들이 하나 가득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서류들은 제각기 일정한 규칙으로 나열되고 분류되어 있었다. 벌써 새벽 5시가 가까워 오고 있었지만 그녀의 얼굴엔 피로한 기색을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녀는 허리를 펴고 밤새 정리한 자신의 노트를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갖가지 숫자와 도표들이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그녀는 그 숫자와 도표들을 하나 하나 맞추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그녀의 얼굴에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녀가 지금껏 노트에 정리한 것들은 말하자면 목촌리 마을의 내력, 그 중에서도 특히 6. 25 이후 목촌리에 거주했던 주민 신상에 대한 것 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그 자료들은 목촌리 부근 지방의 역사지, 지리지, 각종 신문 자료, 서울에서 선배가 보내준 팩스 자료, 그리고 H군 경찰서 내부적으로 보관 하고 있던 비공개 문서등 다양한 자료들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것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전쟁이 끝난 바로 그 해, 목촌리에선 전쟁때 보다 더 많은 주민들이 죽어 나갔다. 전쟁때 빨갱이를 도왔거나 간첩 활동을 한 혐의가 있는 주민들이 대거 처형을 당했기 때문이다. 당시 목촌리는 북측과 남측이 서로 밀고 밀리는 진퇴를 거듭하던 전쟁 기 간중 인민군과 국군이 번갈아 주둔하던 전쟁의 요충지 였다. 많은 주민들이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들의 사상을 수시로 바꿨을 것이라는 추측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휴전이 체결되면서 그들의 위험스런 곡예는 종지부를 찍어야만 했다. 그러자 정부는 사상범 색출 작전에 박차를 가했고 목촌리 주민중 사상범이라는 꼬리표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일부 지역을 중심으로 자발적으로 조직된 구국 결사대는 그러한 사상범 색출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주로 전쟁중 인민군에 의해 공개 처형 되었던 국군과 경찰의 일부 과격한 유가족들로 구성된 민간 사조직이었다. 휴전은 되었지만 전쟁은 끝나지 않은 셈이었다. 여전히 전국의 깊은 산골에는 공비들이 은신하고 있었고 주민중에도 상당수가 간첩활동 혐의가 짙었다. 전쟁이 끝난 직후 미처 정비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국군과 경찰의 부족한 인력들을 지원한다는 미명 아래 그들은 사냥개와 죽창을앞세우고 직접 많은 사상범들과 공비를 색출하였고 때로는 현장에서 처형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얼마나 합리적인 조사와 집행이 이루어 졌는지에 대해서는 상당한 의문점이 제기되었다. 결국 구국 결사대는 얼마 지나지 않아 강제 해산되었고 한동안 각 지방관청에는 그들의 불법적 조사과정과 야만적 행위에 대한 고소와 탄원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정부에선 그러한 고소, 탄원에 대해 단 한번도 실질적인 조사를 벌인 적이 없었다. 당시 목촌리는 구국 결사대에 의한 피해가 가장 심한 지역중 하나였다. 전쟁전 200여 가구에 달하던 목촌리의 주민수가 전쟁후 불과 20여 가구의 작은 산골 마을로 전락한 가장 큰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한가지 이상한 점은 구국 결사대 해산 결정이 내려지기 직전인 1954년 3월 목촌리를 담당했던 H군 지부 구국 결사대 삼십여명이 갑자기 실종된 사건이었다. 4.. 죽음의 마을(2) 한꺼번에 사람 십여명이 감쪽같이 사라진 이상한 사건. 당시 정부에서는 조사단을 구성하여 약 1년여에 걸쳐 그들의 실종에 대한 수사를 벌였지만 전혀 단서조차 잡지 못한 채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이상의 자료에서 혜경의 눈길을 끈 것은 바로 구국 결사대가 사상범과 공비를 색출할때 주로 사냥개와 죽창을 사용했다는 점이었다. 사냥개와 죽창이라면 이번 목촌리 살인사건 피살자들의 사인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충분한 자료가 될 수 있었다. 나아가 혜경은 어제 시경 자료실 선배가 보내준 팩스 자료들에서 더욱 결정적인 내용을 접할 수 있었다. 선배가 보내준 팩스 자료에는 지금까지 일어난 범죄들을 유형별로 분류한 방대한 자료중에서 이번 목촌리 살인사건처럼 짐승의 습격, 죽창에 의한 피살이라는 공통점을 지닌 사건들만 따로 분류한 것들이었다. 혜경의 예상대로 짐승의 습격, 죽창에 의한 피살 사건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동일한 유형의 사건이 1955년 9월에도 일어났다. 놀랍게도 사건 발생 장소가 목촌리 흉가 부근이었으며 피살자 역시 이번 살인사건의 피살자와 같은 바로 B일보 신문 기자 2명 이었다.흉가와 신 문기자. 42년이란 세월이 지난 후에 발생한 동일한 유형의 사건. 단순한 우연의 일치일까? 혜경은 다시 자료들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두번째 사건이 발생한 것은 1959년 11월의 일이었다. 그러나 혜경은 적잖은 실망을 했다. 사건 발생 장소도 흉가가 아닌 서울의 평범한 주택가 였으며 피살자 역시 신문기자가 아니었다. 피살자는 모두 4명이었다. 그들은 모두 가족이었다. 서울 한복판 주택가에서 짐승의 습격과 죽창을 이용한 살인에 의해 한 가족이 한꺼번에 살해되었다는 것이 그녀로선 도저히 믿겨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한 믿기지 않는 사건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벌어졌다. 세번째 사건 1969년 6월, 사건 발생 장소 충남, 피살자 2명(가족). 1978년 1월, 서울, 피살자 1명, 직업 무, 1981년 11월, 서울, 피살자 3명(가족), 그리고 1997년 10월, 이번 목촌리 사건. 총 6건의 사건에 사망자 15명. 다시 커다란 벽이 그녀의 앞을 가로 막고 나타났다. 첫번째와 마지막 사건은 마치 동일인의 범행인 듯 모든 정황들이 완벽하게 일치하고 있었다. 단지 두 사건 사이엔 42년이란 긴 세월만이 놓여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나머지 4건의 사건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사건 발생 장소가 목촌리도 아닐뿐더러 그들의 직업이 신문기자도 아니었다. 다만 나머지 사건들의 공통점이라면 1건을 제외하곤 가족들이 한꺼번에 살해 당했다는 점이었다. 혜경이 밝혀낸 사실은 그것들이 전부였다. 아무리 자료들을 살펴보고 머리를 쥐어짜도 그녀는 더이상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질 못했다. 갑자기 망망대해에 떠 있는듯 한 막막함이 그녀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의외로 쉽게 풀어질 듯 하던 수수께끼가 완고한 벽에 부딪힌 것이다. 혜경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갔다. 칠흙같은 어둠 속에서 차가운 새벽 공기가 비수처럼 파고 들었다. 그녀는 마당에 내려서서 최대한 숨을 깊이 마셨다가 길게 내쉬었다. 같은 동작을 그녀는 여러번 되풀이 했다. 그러자 답답했던 가슴이 조금 뚫리는 것 같았고 추위도 한결 견딜만 했다. 그녀는 복잡한 머릿속도 깨끗이 털어 버리려고 마당에 매달아 놓은 샌드백을 몇 번 두드려 보았다. 하지만 마음과는 달리 머릿속은 조금도 맑아지지 않았다. 여전히 그녀의 머릿속에는 누가? 어떻게? 무엇 때문에?라는 의문 부호들 이 신기루처럼 둥둥 떠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 * * 해일을 비롯한 스텝들을 태운 9인승 봉고가 마침내 비포장 길로 들어섰다. 한국 기공 협회 회장 오윤창과 무속인 이정란은 승용차로 뒤따르고 있었다. 저녁 나절 부터 많은 비가 이 곳 강원도 지방에 내릴 것이라는 일기예보 때문에 촬영을 늦추자는 의견이 스텝들 사이에 있었지만 해일의 강력한 주장과 귀신을 만나려면 비가 오는 습기 찬 날이 오히려 제격이라는 무속인 이정란의 의견에 따라 촬영을 강행하기로 한 것이다. 일행들이 험한 비포장 길을 한시간 남짓 달려 목촌리 입구에 닿았을때는 이미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불과 오후 4시밖에 되지 않았는데 주위엔 어느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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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글터] 몇 가지 의문들
몇 가지 의문들(1)
어디서부터 실마리를 풀어야 할 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의 석연치 않은 태도는 그녀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을 뿐 아직까지 뚜렷한 실마리 하나 잡지 못한 혜경이었다. 단서를 못 잡고 헤매긴 서울에서 내려왔던 시경 수사팀들도 마찬가진 것 같았다. 가끔씩 전화를 해선 이미 보내준 사진 자료들을 다시 한번 보내 달라거나 사건 현장 부근에 늑대과에 속하는 짐승의 서식 여부에 대한 자료 조사 요청 정도였다. 그들은 아무래도 피살자 세명의 원한 관계에 의한 계획된 살인으로 촛점을 맞추고 그들 주변 인물들을 상대로 탐문수사를 벌이고 있는 듯 했다. 그러나 그녀의 생각은 분명히 달랐다. 그녀가 조사해본 바 로는 최근 5년간 목촌리 부근에서 야생 늑대가 발견 되었다는 보고는 전혀 없었다. 그리고 설혹 원한 관계에 의한 살인이라 하더라도 흉기가 죽창이라는 점이 아무래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금방 남의 눈에 띌 수도 있고 소지하기도 불편할 뿐만 아니라 누군가를 죽이기에도 그것은 적당한 무기가 아니었다. 분명 거기에는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란 생각이 그녀의 뇌리를 맴돌았다. 그리고 그러한 이유가 어떤 식으로든 마을 사람들과 관계가 있을 것이란 생각이 그녀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일단 한가지 생각에 빠지면 헤어나질 못하는 그녀였다. 그녀는 식사도 하는둥 마는둥 하며 숟가락을 놓았다. 그러자 그녀의 앞에서 식사를 하던 구반장이 놀란 토끼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윤형사가 밥을 다 마다 하고? 최근에 무슨 충격 받은 일 있어?" "네?" "아니, 내 말은 식사때 마다 꼬박 꼬박 두 그릇은 싹싹 비우던 자기가 밥을 남기길래 혹시 누구한테 충격받고 그 뭐냐, 남들이 하는 다이어트라도 하나 해서?" "나참, 기가 막혀서.... 반장님은 왜 저만 보면 그렇게 못 잡아 먹어서 안달이세요?" "못 잡아 먹어서 안달이라니? 내가 언제 자기 못 잡아 먹어서 안달 했다고 그래? 사실 솔직히 말해서 자기가 결코 날씬한 편은 아니잖아. 그래서 밥을 안 먹길래 다이어트 하냐고 물은건데.... 그게 뭐 그렇게 잘못 한 건가? 이봐 박순경, 뭐라고 말 좀 해봐! 내가 실수한 거야?" 구반장은 짐짓 정색을 하며 옆에 있던 박순경을 바라보았다. "아니, 그걸 왜 저한테 물어 보세요? 전 아무 소리도 못 들었습니다" "됐어요, 제가 참죠. 하지만 반장님, 그러시는거 아니예요" "내가 뭘 어쨌다고 자꾸 그래? 자기 정말 성격 이상하네?" 그때 그들 사이에 식당 아줌마가 끼어 들었다. "오늘 또 사워요? 하옇튼 어떻게 반장님 하고 윤형사는 하루도 안 빼고 그렇게 티격 태격이예요, 그래? 그건, 그렇고 그 뭐냐.... 목촌리 살인사건은 어떻게 범인은 잡았어요?" 그러자 구반장이 갑자기 탁하고 숟가락을 내려 놓곤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줌마! 경찰도 사람이요, 사람! 남 식사하는데 꼭 그런걸 물어야 겠수? 아줌마는 밥 먹는데 똥 얘기하면 기분 좋아요? 그게 그렇게 궁금하면 우리 윤형사한테 물어봐요. 살인사건 아니면 상대 안 하는 형사니까" 구반장의 가시박힌 말에 혜경은 가슴이 뜨끔했다. 사실 그것 때문에 요 몇 일 관내의 다른 일들을 소홀히 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그녀의 행동을 구반장이 모를 리 없었다. 다만 모른 척 하고 넘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별로 좋지도 않은 상황에서 주책맞은 아줌마가 일부러 그 얘길 꺼내니 여간 난처한게 아니었다. "아이구, 반장님두, 별것 다 갖고 토라지실까? 에게 식사도 벌써 다 하셨네, 뭐. 근데, 이번 사건 정말 윤형사 담당이야?" "아.... 아니예요. 아줌마! 제가 무슨....." "하긴, 서울에서 형사들이 내려 왔었다며? 어떤 미친놈이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을까? 하긴 옛날부터 목촌리 그 곳이 터가 센 곳이었지. 반장님도 잘 아실걸요? 해방전엔 그 곳이 왜 전염병 환자들 격리하던 곳이었다잖아요. 그러더니 6. 25땐 빨갱이들 내려와서 반동분자들 공개 처형한다면서 죄 없는 마을 사람들 수 없이 끌어내선 죽창인가 뭔가로 마구 찔러 죽이는 바람에 얼마나 사람이 많이 죽었어요?" 그때 혜경의 의식 속을 번개처럼 파고 드는 단어가 있었다. 그녀가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아줌마! 방금 죽창이라고 하셨어요?" "아이구, 깜짝이야. 갑자기 왜 그래, 윤형사?" 6.25, 공비, 죽창. 그녀는 갑자기 눈앞이 트이는 것 같았다. 자신이 왜 바보같이 한번도 그 생각을 못 했는지 이상하기까지 했다. 죽창이란 것이 지금은 몹시 낯설지만 불과 40여년전에는 한때 그것이 가장 무섭고 두려운 무기였던 적이 있었다. 갑자기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장님, 저 먼저 일어설께요" "밥 먹다 말고 갑자기 어디 가는 거야? 만약 오후에 또 자리 비우면 그땐 정말 가만 안 있을거야! 알았지?" 구반장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리쳤다. 그러나 그녀의 귀엔 더이상 구반장의 목소리가 들려 오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엔 이미 목촌리, 6. 25, 죽창, 공비, 공개 처형..... 그런 단어들로 가득 차 있었다. * * * 해일이 김한수의 아내인 지윤으로부터 급히 만나고 싶다는 연락을 받은 것은 오늘 아침이었다. 그는 김한수가 그녀와 결혼하기 전부터 지윤과는 아는 사이였다. 그녀는 김한수의 학과 후배였고, 따라서 해일의 후배이기도 했다. 하지만 집들이나 동문회 같은 특별한 행사때 김한수와 같이 그녀를 몇 번 만난 적은 있지만 이렇게 따로 만나는 것은 결혼 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녀는 남편에겐 둘이 만나는 것을 비밀로 해 달라는 당부를 따로 남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뭔가 좋지 않은 일일 것 이라는 예감만이 막연하게 그의 머리를 떠돌 뿐 특별히 추측될만한 다른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이틀전 새벽에 걸려온 그의 전화가 조금 마음에 걸릴 뿐이었다. 감기에 걸렸다고 해서 당시엔 별 신경 않 쓰고 그냥 넘겼지만 아침에 그녀의 전화를 받고 나선 자꾸만 그때의 일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지나서인지 커피숍은 한산한 편이었다. 그는 일부러 20분 정도 일찍 나와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정확히 약속시간에 맞추어 나타났다. 해일은 그녀를 보는 순간 자신이 생각한 이상으로 그들 부부 사이에 뭔가 불길한 일이 있다는 것을 그는 직감할 수 있었다. 화장기 하나 없는 그녀의 얼굴은 몹시 초췌했으며 서둘러 나왔는지 옷차림 역시 예전의 그녀와 달리 별로 신경을 쓴 기색이 보이질 않았던 것이다. 해일의 앞에 마주 앉은 그녀의 모습은불안한 모습이 역력했다. 그녀는 몹시 망설이며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제수씨! 무슨 일인진 모르겠지만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돕겠습니다. 편하게 얘기하세요" 그러자 마침내 그녀는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바쁘신데 이렇게 만나자고 해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긴 해야 겠는데 마땅한 사람이 떠오르질 않더군요. 만나자고 한 건 다름이 아니라.... 요즘.... 그 이한테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아서요" "이... 상 한 일이라니요?" "글쎄, 어디서 부터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할지 모르겠지만 요즘 그 사람, 뭔가에 홀렸는지 예전의 그 이가 아니예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 때부터예요. 강원도에 살인사건인가, 취재를 갔다 온 그 다음부터...." 그녀는 감정이 복받치는지 거기서 말을 끊곤 다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다음부터 이어진 그녀의 얘기들은 김한수를 잘 알고 있는 해일로 선 도저히 받아 들이기 어려운 이상한 얘기들이었다. 3. 몇가지 의문들(2) 그녀의 얘기는 다음과 같았다. 김한수가 강원도 H군의 취재를 갔다 와서 밤을 세워 기사를 쓰고 집으로 들어 온 것은 점심시간이 조금 지나서였다고 한다. 그녀가 보기에 김한수는 그날따라 유독 지치고 피곤해 보였으며 집에 들어 오기가 무섭게 쓰러져 깊이 잠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잠든 김한수가 헛소리를 하기 시작한 것은 새벽녘이었다. 그는 결혼 후 한번도 헛소리나 잠꼬대를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힘든 일때문에 몸이 약해져 그런 줄만 알았다고 했다. 그런데 그런 김한수의 잠꼬대는 매일 계속 되었고 그 정도도 심해졌다. 그리고 그 잠꼬대의 대부분은 살려 달라는 비명에 가까운 것이었고 급히 잠을 깨우면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서 뭔가를 두려워 하는 기색이 완연했다. 잠꼬대만이 아니었다. 잠을 자지 않을때도 그는 이상하게 불안해 하고 초조해 했다. 그러다 바로 이틀전 해일과 통화를 한 바로 그 날밤엔 절망과 두려움에 사로잡힌 얼굴로 무섭다는 말과 함께 그녀의 앞에서 울음까지 터뜨렸다는 것이다. 해일은 참담한 기분으로 그녀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그토록 활동적이고 자신감에 넘치던 김한수가 그랬다는 것이 그로선 도통 믿기지가 않았다. "기가 막히더라구요.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그렇게 되니까. 하두 답답해서 방송국에 연락해 봤더니 갑자기 휴가를 내겠다고 했다더군요.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대답도 하지 않고. 할 수 없이 전문의의 진단을 한번 받아보자고 했죠. 정PD님도 아시죠? 그 이 친구중에 정신과 전문의로 있는 민병기박사라고......" "민박사요? 예, 압니다" "그랬더니 펄쩍 뛰면서 자기를 무슨 정신병자 취급하냐며 갑자기 집안의 물건을 닥치는대로 부수고..... 마치 딴사람처럼, 너무 무서웠어요. 그 이의 그런 모습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 했었거든요" 그녀는 더이상 말을 잊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도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그가 자신에게 테잎을 넘겨줄때만 해도 해일은 그에게서 별다른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었다. 그러고 보니 이틀전 그의 전화는 예사로운 전화가 아니었을 것이라는 확신이 그의 생각을 지배했다. 그는 분명 그에게 뭔가 말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한참을 흐느끼던 그녀가 간신히 울음을 삭키며 다시 고개를 들었다. "죄송해요, 이러지 않으려고 했는데....." "괜찮습니다. 얼마나 놀라셨겠어요?" "제가 놀라는 것이야 뭐 큰일인가요? 다만 그 이가 너무 걱정이 되서....." "그래서, 그 다음엔 어떻게 됐나요?" "그리곤 바로 어제 아침에 방송국으로부터 전화가 왔어요. 전화를 받은 그 이의 표정이 심상치 않더라구요. 그래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그이와 함께 H군에 취재 갔던 카메라맨이 갑자기 죽었다는 거예요. 그때 그 이의 표정을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을지..... 마치 세상이 끝나기라도 한 것 처럼 절망하고 좌절하던 그 표정이 지금도 눈앞에 생생한 것 같아요. 온 몸을 부들 부들 떨면서 알아 들을 수도 없는 헛소리를 지껄이기 시작더니 갑자기 방으로 뛰어 들어가 안에서 문을 잠근채 꼼짝도 하지 않는 거예요. 도대체 사람을 그토록 무섭게 만들 수 있는게 무엇인지 궁금할 정도였어요. 아무리 문을 열라고 해도 그이는 제 목소리를 듣지도 못하는 양 대답조차 하지 않았어요. 무섭고 두렵긴 저도 마찬가지였어요. 우선 방문을 열어야 겠다는 생각에 창고에서 비상키를 찾아서 다시 돌아왔을땐 남편은 이미 나가고 없더군요.남편에게서 전화가 걸려온 것은 그날 저녁이었어요. 어떤 사람들이 자신을 찾으러 올 것이라고 했어요. 그들에게 자신은 미친것이 아니라고 말해달라고 하면서.... 저 보고..... 그동안 고마웠다면서..... 그이의 전화가 끊기고 얼마후 과연 경찰이라는 사람들이 집으로 찾아와 그 이를 찾았어요. 그리곤 그 이가 집에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곤 돌아가더군요. 그 후로 지금까지 그 이한테선 아무런 연락도 없는 거예요. 도대체 그 이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죠?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아 불안하고 조마 조마해서 그냥 집에 있을 수가 없었어요. 이제 전 어쩌면 좋죠? 어떡해야 돼죠?" 그녀는 거의 절망적인눈빛으로 해일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해일이라고 해서 무슨 뾰족한 묘안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도무지 갈피를 잡기 어려운 김한수의 기이한 행동들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 그를 찾아 왔다는 경찰들은 누구일까? 그는 지금 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머리를 맴돌았다. 그는 일단 그녀를 최대한 위로하여 돌려 보냈다. 자신이 어떻게든 원인을 알아 볼테니 참고 기다려 보라는 말과 함께. 하지만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그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긴 그녀와 마찬가지인데. 그러나 한가지 그의 마음속에서 내내 떠나지 않는 생각이 한가지 있었다. 그것은 김한수의 기이한 행동과 그가 취재를 갔던 H군의 살인사건이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는 우선 김한수와 함께 취재를 갔다가 갑자기 죽었다는 카메라맨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보도국에 전화를 걸어 본 결과 그의 이름이 이창수라는 것을 알아냈고 그는 김익재 촬영감독에게 도움을 청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같은 방송국의 카메라맨이니까 서로 알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때문이었다. "뭐? 이창수가 죽었다구?" 예상대로 김감독은 이창수를 잘 알고 있는 듯 했으며 그의 갑작스런 죽음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 사람과 잘 아세요?" "잘 알 다 뿐이요? 옛날에 내 밑에서 카메라 배워서 입봉한 녀석인데... 이제 갓 서른밖에 안됐는데 도대체 어쩌다 그렇게 죽었답디까?" "저도 확실한건 잘 모르겠어요. 자신의 집에서 죽어 있는 것을 우연히 그의 집에 들른 친척이 보고 경찰에 신고했다고 하더군요" "참, 사람 목숨 별거 아니구만. 한 보름전에 만났을때만 해도 멀쩡하던 놈이!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군" 해일과 김감독이 이창수의 집 앞에 도착했을때는 이미 경찰들이 '수사중' 이라고 쓴 팻말이 달린 노란 띠를 집 주위에 둘루곤 사람들의 집안 출입을 통제한채 삼엄한 경계를 피고 있었다. 차에서 내리며 김감독이 말했다. "이거, 그냥 죽은게 아닌 모양인데? 웬 분위기가 이렇게 살벌해?" 김감독과 해일이 다가가자 근무를 서던 경찰이 앞을 막았다. "무슨 일입니까? 여긴 현재 일반인 출입이 금지 된 곳입니다" 그러자 그 경찰에게 김감독이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이보슈, 난 죽은 이창수완 아주 막연한 사인데 도대체 왜 죽었습니까? 죽은 이유나 좀 압시다" "수사상 비밀이라 현재로선 아무것도 말씀 드릴 수 없습니다" "아니, 어떻게 죽었는지도 말해 줄 수 없단 말이오?" "그만 물러나세요, 상부에 지십니다" 경찰이 김감독과 해일을 밀치듯 제지하자 김감독이 화가 난 듯 그의 손을 뿌리치며 거칠게 항의했다. "나원 참, 분통 터져서. 무슨 놈의 민주 경찰이 이 따위야. 아끼던 후배가 죽었는데 어떻게, 왜 죽었는지도 알 수 가 없단 말야?" 삿대질까지 해대며 분통을 터뜨리는 김감독을 가까스로 말린 것은 해일이었다. 공연희 소란을 피워봤자 아무것도 얻어질건 없을 것 같았다. 난감한 심정으로 이창수의 집만 먼 발치에서 바라보고 있는데 누군가가 해일을 알아보고 달려오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김한수와 보도국에 함께 있는 강상준 기자였다. 잘 알진 못하지만 해일이 김한수와 함께 몇 번 만난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정PD님, 아니세요?" "아예, 강기자님이시죠?" "근데, 여긴 어쩐 일로......" "예, 뭣 좀 알아볼게 있어서요. 강기자님은 어떻게?" "예, 저는 취재차 조문차, 겸사 겸사 나왔습니다. 저희 보도국에 있던 카메라맨 한 명이 죽었거든요" "사실 저도 이창수라는 사람의 죽음이 궁금해서 이곳에 왔습니다. 혹시 아는게 있으시면 좀....." "그 사람과 아시는 사이 셨던가요?" 그때 김감독이 나섰다. "창수와는 제가 잘 압니다. 대체 어떻게 죽었습니까?" 그러자 강기자는 곤혹스런 표정으로 잠시 난색을 표명했다. 이윽고 입을 연 그의 얘기는 뜻밖이었다. "사실 저도 같은 직장 동료의 죽음을 취재한다는게 여간 찝찝한게 아닙니다. 근데 이상하게도 취재를 할 수가 없었어요. 경찰 측에서 전혀 접근을 안 시켜 주는 겁니다. 웬만해서 그런 일이 없는데...... 현재로선 그의 죽음에 대한 어떠한 정보나 사실도 철저히 차단되고 있어요. 다만 제 정보원을 통해 어렵게 얻은 정보에 의하면 그의 시체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 을 정도로 손상되었다는 거예요" "손상이 됐다구요?" 해일이 눈을 크게 뜨며 반문했다. "한마디로 무슨 맹수에게 뜯어 먹힌 것 같았대요. 방안이 온통 핏자욱 이었는데 거세게 저항한 흔적도 역력하고..... 하옇튼 너무나 끔찍한 모습이었대요" 그러자 이번엔 김감독이 큰소리로 말했다. "맹수한테 뜯어 먹혀요? 여기 자기 집에서?" "네. 경찰도 그 점을 수상히 여기나 보더라구요. 다른 곳도 아닌 바로 자신의 집에서.... 때 아닌 맹수라니. 그리고 더욱 이상한 점은 살해된 모습이 이창수가 죽기 전 김한수 기자와 함께 취재를 다녀온 강원도 H군에서 일어난 살인사건 피살자들의 모습과 너무나 유사했다는 겁니다" 강기자의 얘기에 해일은 심한 혼란을 느꼈다. 강기자의 얘기를 들으면서 해일 역시 자연스럽게 그 H군 살인사건을 떠올렸던 것이다. 김한수가 너무나 끔찍했다며 치를 떨며 넘겨준 그의 자료들에도 그 피살자들의 시신에 대한 여러 의문점과 묘사들이 자세히 적혀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그 H군에서 일어난 살인사건과 이창수라는 카메라맨과 무슨 관련이 있길래. 그리고 김한수와는 또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의문점은 점점 더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번져 가고 있었다. "정PD님, 어제, 오늘 사이 혹시 김한수 기자 보지 못 했어요?" "김기자요? 아니요, 왜요?" "뭐, 별건 아니고 경찰에서 김기자를 좀 만났으면 하더라구요. 아무래도 H군에 이창수와 함께 다녀 왔으니까 혹시 짚이는게 있을지도 모르니까. 근데 그 사람 몇일전 휴가 내곤 전혀 연락이 안 되더라구요. 집에 전화해도 전화도 않 받고" "글세요, 저도 최근에 김기자를 만나지 못해서. 만약 만나면 그렇게 전하죠" 강기자가 가고 나자 김감독이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이봐요, 정PD. 이거 뭔가 좀 이상하지 않소? H군 살인사건은 나도 뉴스에서 봤는데 이창수가 그 사람들과 같은 모습으로 죽었다니, 이게 말이 되요? 정말 거기 귀신이라도 있는거 아닐까?" "그거야 뭐, 직접 가보면 알겠죠" "난 어째 이번엔 웬지 기분이 뒤숭숭한게.... 아무래도 보험이라도 하나 들어 놓고 가야 할 건가봐?" "김감독님 답지 않게 왜 이러세요? 분명 무슨 곡절이 있을 겁니다" 말은 쉽게 했지만 해일의 머릿속도 개운치 못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의 마음속엔 내내 김한수가 마음에 걸렸다. 이창수의 죽음이 김한수에게도 어떤 영향을 미친 것이 틀림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3. 몇가지 의문들(3) H군 도서관 한쪽 구석에서 십여권의 책더미를 쌓아놓고 뭔가를 열심히 들여다 보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윤혜경 형사와 박호철 순경이었다. 한참을 자료들을 살피던 박호철이 몸을 뒤로 젖혀 크게 기지개를 펴면서 말했다. "윤형사님, 오늘은 이만 하죠. 전 눈이 아파서 더이상 못 하겠어요. 그리고 지금쯤 반장님이 돌아오실 때도 됐고. 반장님이 알면 또 난리날 텐데" "미안해, 박순경까지 고생하게 해서....그래, 오늘은 이쯤 하자구" "그런 소리 마세요. 근데 목촌리 마을과 주민들에 대해 이렇게 조사하는 이유가 뭐죠? 이것들이 살인사건과 어떤 관련이라도 있는 건가요?" "그건 나도 아직 잘 모르겠어. 일단 찾은 자료들 복사하고 경찰서로 가지고 가서 좀 더 분석을 해 봐야 할 것 같아" 혜경과 박호철이 가슴에 하나 가득 자료들을 안고서 도서관을 나온 것은 이미 날이 어둑해질 무렵이었다. 구회열 반장이 오늘 집안 일때문에 오후 늦게나 잠깐 경찰서에 들린다는 소릴 듣고 그녀가 박순경에게 부탁하여 함께 도서관을 찾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서둘러 경찰서로 돌아 갔을때는 벌써 구회열 반장이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 다 잠깐 나 좀 보자구!" 구반장은 손에 잔뜩 서류더미들을 들고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얼굴을 해선 회의실로 그들을 불렀다. 혜경은 오늘은 아무래도 쉽게 넘어가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곤혹스런 표정으로 구반장을 따라 갔다. 회의실에 앉은 세 사람 사이에는 숨막히는 침묵이 흘렀다. 구반장은 손에 든 볼펜으로 책상을 딱딱 두드리며 두 사람을 노려만 보고 있었다. 참다못한 혜경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기 반장님.... 오늘 근무 시간에 자리 지키지 않은 건 정말 죄송해요" "죄송한게 그게 다야?" "박순경 데리고 나간 것도....." "그리고 또?" "........." 그녀가 말문이 막혀 고개를 숙이자 구반장이 자신이 들고 들어온 종이 뭉치들을 탁자위에 팽개치듯 던지곤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것들이 다 뭐야?" 구반장의 말에 혜경은 의아한 표정으로 종이뭉치를 집어 들었다. 모두가 팩스들이었다. 혜경이 서울 시경 자료실에 있는 경찰학교 선배에게 부탁 하여 받은 목촌리 출신 주민들에 대한 신상 기록들이었다. "이것들 때문에 오늘 경찰서 팩스가 완전히 마비됐어, 알아? 다른 급한 팩스가 하나도 못 들어와서 난리가 났었단 말야! 너, 나 아주 목 짤리게 만들려고 작정햇냐, 작성했어?" 구반장의 벽력같은 소리에 박호철의 얼굴은 완전히 사색으로 변했다. 가슴이 철렁한 것으로 말하자면 혜경쪽이 훨씬 더 했다. 선배가 보내 주기 로 했던 자료가 이렇게 많을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던 것이었다. "어디 한번 내가 납득하게 설명을 해 봐, 이것들이 다 뭔지" 구반장은 오늘이야말로 결판을 내고야 말겠다는 듯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많은 생각들이 그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녀가 마침내 결심한 듯 번쩍 고개를 들었다. "반장님, 이번 사건을 제가 정식으로 수사 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요. 그리고 반장님께서도 절 좀 도와 주십시요. 이번 사건은 우리가 해결해야 할 우리 일입니다" 갑작스런 그녀의 태도 변화에 구반장이 기가 막히는 표정으로 그녀를 잠 시 바라보곤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는가 싶더니 갑자기 책상을 쾅하고 내 리치며 소릴 질렀다. "그건 안될 말이야. 안된다구, 절대! 안돼!" 혜경 또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선 더 세게 책상을 내리치며 소리쳤다. "왜 안 된다는 거죠? 상부에서도 계속 시경팀을 도와 수사에 협조하라는 지시가 있었고 분명히 우리 관할내에서 일어난 우리 일인데 왜 안되요, 왜요? 겁나세요? 무서우세요?" 그러자 이번엔 구반장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리곤 붉게 상기된 얼굴을 실룩거리며 혜경을 향해 다가왔다. 박호철이 말릴 엄두도 나지 않을 만큼 상황은 더욱 험악한 분위기로 번지고 있었다. "너! 지금 나한테 반항하는 거야? 쬐끄만게 이쁘다 이쁘다 하니깐 정말 끝도 없이 기어올라!" 구반장이 금방이라도 한 대 후려칠 듯 한 기세로 노려보자 혜경도 질세라 두 눈을 똑바로 뜨며 대들 듯 가슴을 내밀었다. "저도 더이상은 못 참겠어요. 상관이면 다 예요? 근무 태만에다, 유흥업소 단속은 커녕 돈 받고 봐주기나 하고.... 제가 다 모를 줄 알아요? 경찰 옷만 입으면 다 경찰이예요?" 그녀의 말에 구반장이 부들 부들 떨면서 박호철을 향해 더듬거렸다. "야, 바.... 박순경아, 지... 지금 윤형사가 무슨 소리..... 하는 거냐?" 더듬거리며 말 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구반장을 향해 혜경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아마, 상관만 아니었더라면 벌써 예전에 제 주먹이 가만 있지 않았을 거예요" "유.... 윤형사님!" 박호철이 참다 못해 소리쳤다. 그러나 뜻밖에도 구반장은 현기증이 나는지 비틀거리며 이마를 짚곤 무너지듯 자리에 앉았다. "왜요? 양심에 찔리시나요? 더 얘기해 드릴까요?" 혜경이 여전히 소릴 지르면서 험악한 기세로 노려보자 구반장이 손을 내 저으며 힘없이 말했다. "그래, 알았어, 알았다구. 너 잘 났다, 너 잘 난거 아니깐 제발 살살 좀 얘기해라. 귀창 터지겠다. 애가 무슨 기차 화통을 삶아 먹었나? 야, 박순경 아, 문 열고 이 여자 얘기 혹시 들은 사람 없나 한번 봐라. 아이구 어지러워, 아이구 머리야" 어리둥절한 눈으로 박호철이 구반장의 말대로 회의실 문을 살짝 열고 밖을 살피곤 자리로 돌아오며 말했다. "아무도 없는데요?" "확실하냐?" "네" "제....제..... 갑자기 왜 저 여자 이름이 생각이 않 나냐?" 박호철이 얼른 대답했다. "윤형사님요, 윤형사" "그래.... 윤형사, 박순경아, 나 오늘 제 때문에 여러 번 숨넘어갈 뻔 한다. 도대체 윤형사가 뭘 믿고 내가 돈 받고 봐주기 했다는건지 난 도....저히 이해가 안간다. 박순경아, 넌 이해가냐?" "그럼, 제가 직접 증거를 들어 보일까요? 아니면 증인이 필요 하세요?" "그만! 알았어, 알았으니까 우리 서로 흥분하지 말고 차근 차근 말로 풀자구. 내가 뭐, 특별히 뒤가 캥긴다거나 부정을 저질렀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으로 착각하면 안돼. 다만, 정 윤형사가 그 사건을 그렇게 수사 하고 싶으면..... 하라 이거야. 난 단지, 그런 험한 사건에 윤형사 같은 연약한 여자를, 아니, 연약한 여자란 말은 취소하고..... 하옇튼 부하를 아끼는 마음에서 그런 것이니까, 하지만 평양 감사도 본인이 싫다면 할 수 없는 거지. 그럼, 더이상 할 말 없지? 난 몸이 좀 안 좋아서 그만 좀 퇴..... 퇴근할 테니까 퇴근 하려면 하고, 남아서 일들 하려면 하라구. 구....굿나잇!" 구반장이 비틀거리며 회의실을 나가자 박호철이 허옇게 질린 얼굴로 혜경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윤형사님, 정말 대단 하시네요? 저 같으면 꿈도 못 꿀텐데.... 근데 반장 님이 정말 돈 받고 봐 주기 했다는 거 사실이예요?" "그거야 박순경이 알아서 판단 하라구. 난 집에 가서 자료들 좀 더 뒤져봐야 겠어" 혜경은 회의 탁자에 흩어져 있는 팩스 자료들을 주섬 주섬 모으기 시작했다. 조금 심하다 싶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이 왜 이토록 집요하게 이번 사건에 매달리게 되는지 자신도 명확히 알진 못했지만 분명한 것은 목촌리 사건의 이면에는 베일에 가려진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확신이었다. 오늘도 그녀는 도서관에서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아냈다. 그것은 목촌리에서 일어난 괴이한 살인사건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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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글터] 영화로 만들면 크게 흥행할 것 같은 판타지 단편 [퍼옴] 스크롤 압박
1. 불길한 취재(1) 승용차는 어느덧 비포장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서울을 출발한지 정확히 5시간이 지난 후였다. 덜컹거리며 차의 요동이 심해지자 옆좌석에서 자고 있던 김한수 기자가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부시시 눈을 뜨곤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입을 열었다. "야, 무슨 길이 이렇게 험하냐?" "포장이 안되서 그래요. 눈 좀 더 붙이지 그래요? 이런 길로 앞으로 한시간은 더 들어가야 할 것 같은데...." 카메라맨 이창수가 연신 멋대로 돌아가는 핸들을 움켜 잡으며 소리쳤다. 그러나 김기자는 그의 말대로 또다시 눈을 붙일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잠든 동안 내내 께름칙한 악몽에 시달렸기 때문이다.그들은 QBS 방송국의 뉴스 보도국 취재기자와 카메라맨이었다. 보도국이란 곳은 원래 사람 잡기로 소문난 곳이었다. 김기자가 이번주 내내 취한 수면의 양은 모두 합해야 10시간도 체 되지 않았다. 그것도 대부분은 지금처럼 차안에서 새우잠을 잔 것이었다. 이젠 5년된 그의 엑셀 승용차가 그의 집이나 마찬가지였다. 면도도 차에서 하고 옷도 차에서 갈아 입는다. 그는 보도국에서도 악명 높기로 소문난 사회부 기자였다. 온갖 지저분한 쓰레기와 잡동사니들을 죄다 끌어다 놓은 곳이 사회부란 곳이었다. 그곳에서 버티려면 같이 쓰레기가 되고 잡동사니가 되어야만 했다. "젠장, 길 한번 더럽게 험하네" 눈을 잔뜩 찌푸린 이창수의 말대로 길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몸의 균형조차 잡기 어려울만큼 점점 더 험하게 좁아지고 있었다. "도대체 어떤 미친놈이 이런 험한 곳까지 들어와 세명씩이나 사람을 죽였는지.... 아참 김기자님, 뒤에 카메라 괜찮은지 좀 봐주세요. 또 저번처럼 I.C라도 나갔다간 저, 아주 돌아버립니다" "걱정하지마. 내가 아주 단단히 고정시켰으니까!" "어차피 오늘 마감뉴스에도 내보내긴 어려울 것 같은데 아예 새벽에 출발할걸 그랬나 봐요. 그랬으면 한 세시간이면 왔을텐데" "괜히 새벽에 있는대로 밟아 달리다 황천길 가면 박기자가 우리 취재하러 오는 수가 있어. 차라리 조금 여유있게 오는게 낫지" 그들이 목촌리라는 낡은 이정표와 함께 약간의 공터가 있는 막다른 길에 도달한 시간은 오후 5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이정표의 화살표가 가리키는 곳에는 한사람이 겨우 지나갈만한 작은 오솔길이 숲속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건 완전히 오지중에 오지구만!" 카메라를 챙기며 이창수가 투덜거렸다. 그의 그런 불평과는 대조적으로 하루해를 마감하는 붉은 노을은 늦가을의 단풍을 더욱 붉게 물들이고 있어 숲은 더없이 아름다워 보였다. 눈부신듯 김기자가 노을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올해는 이렇게 단풍구경 한번 하는 거지 뭐!" "됐습니다. 조금 있으면 끔찍한 시체들을 카메라로 찍어야 할 판인데...." 오솔길로 접어둔 후 20여분 지나자 숲은 어느새 칠흙같은 어둠으로 변해있었다. 앞장 선 김기자의 조그만 렌턴 불빛이 그들의 앞길을 불안하게 비추어 주고 있었고 늦가을의 쌀쌀한 날씨임에도 이미 두사람의 등줄기엔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하고 있었다. "길이 여기 밖에 없나? 이런 산길은 혼자 다니려면 제법 겁나겠는데요? 으시시한게 어디서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은게.... 이 안쪽에도 사람이 산대요?" "사건 현장에서 한 1킬로 떨어진 곳에 사람이 살고 있다고 하더라구. 그래도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냐, 이쪽 강원도 오지엔 이보다 더한 산속에도 사는 사람들이 있다구. 대부분 약초 같은 것 케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지" "김기자님, 천천히 좀 가요. 빈몸이라고 그렇게 빨리 가면 어떡합니까?" 이창수는 내심 겁이 나는지 김기자의 뒤에 바싹 붙어 따라오고 있었다. 겁이 나긴 김기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린아이의 울음소리를 연상시키며간헐적으로 들려오는 이름모를 짐승의 울음소리와 한치 앞을 보기 어려운 칠흙같은 어둠. 그리고 무엇보다 등산 객 세명을 잔인하게 살해했다는 그 살인마가 바로 이 숲 어디엔가 숨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저절로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들이 그렇게 어둠을 헤치며 한 40여분을 부지런히 걸어가자 그들의 앞에 꽤 넓직한 개울이 하나 나타났다. 그리고 그 개울위에는 낡은 목조다리 하나가 위태롭게 놓여 있었고 그 너머 멀리서 마을 인가의 불빛이 가늘게 새어나오고 있었다. 둘은 불빛에 겨우 한숨을 내쉬며 삐걱거리는 목조 다리를 건너 서둘러 길을 재촉했다.두사람이 현장에 도착하자 그곳엔 의외로 한 10여가구는 됨직한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마을은 쥐죽은듯 고요했으며 더우기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마을과 현장 사이에는 조그만 고개가 하나 가로막혀 있었고 고개를 넘어서자 서너명의 경찰들과 너댓명의 주민들이 현장을 둘러서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거 사람들 보이니까 엄청 반갑네" 이창수가 다소 힘이 나는지 너스레를 떨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두사람이 주민들을 헤치고 안으로 들어서자 사건 현장이 나타났다. 그리고 제일 먼저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그믐달을 뒤로 하고 유령처럼 버티고 선 음침한 기와집이었다. 그 기와집을 보는 순간 김한수 기자는 알 수 없는 공포감을 느꼈다. 사람이 살지 않은지 무척 오래된 듯 방문은 하나같이 부서졌고 찢어진 한지가 볼상사납게 이리저리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기와집 앞마당 무수히 자란 잡초위에 세구의 시체가 가마니로 덮힌채 나란히 누워 있었다. 김기자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그때 그들의 앞을 가로막으며 한 여자가 나타났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QBS 뉴스 보도국의 김한수기잡니다. 사건 취재차 지금 막 서울에서 내려왔습니다. 여기 책임자가 어느 분이신지?" "제가 책임잡니다. 이번 사건때문에 횡성군에서 파견나온 윤형삽니다" 그녀의 말에 김기자가 다소 놀랍다는 표정으로 찬찬히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가 다시 반문해 왔다. "왜요? 뭐가 잘못 됐나요?" "아... 아닙니다. 시체가 오늘 아침에 발견 되었다구요?" 김기자가 시신들을 내려다 보며 말했다. "아참, 얘기하는 동안 저희 카메라맨이 취재를 좀 해도 되겠습니까?" "예, 그러시죠. 대신 시신 촬영은 안됩니다" "가마니에 덮힌채로는 괜찮겠죠?" 윤형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김기자가 이창수에게 소리쳤다. "주변 스케치 좀 하고 특히 저 앞에 낡은 기와집 좀 잘 잡아. 시신은 있는 그대로 슬쩍 덮어 주고...." 취재팀 때문인지 주민들이 다소 술렁 거렸지만 이내 잠잠 해졌다. 곧 그들은 이창수가 하는 일을 호기심 어린 눈길로 지켜 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엔 하나같이 막연한 공포심이 서려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하긴 그럴만도 했다. 자신들의 집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사람이 셋 씩이나 죽었으니. 1. 불길한 취재(2) "신원은 확인 됐나요?" "예. 한 사람은 K일보 신문 기자이고 나머지 둘은 모 잡지사 기자들이었습니다. 자세한 인적사항은 따로 적어 드리죠" "신문 기자와 잡지사 기자요?" "취재를 하러 왔다가 변을 당한 것 같은데 무엇을 취재하러 왔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가 없습니다" "피해자들의 사인은 뭡니까? 살해된 것이라고 들었는데 확실한가요?" "아직 뭐라고 확실히 단정할 수 없습니다. 부검해 보기 전에는" "대충이라도 짐작가는게 있을 것 아닙니까?" "글세요" "혹시 목격자가 있습니까?" "현재로선 없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살해된 것인가요?" "아직 살해된 것인지 단정할 수 없다고 아까 말씀 드렸을텐데요?" "아, 그래요. 그럼 여기 이곳에서 사망한 건가요?" "그것도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쌀살하게 대답하는 윤형사의 표정에서 김기자는 그녀에게 특기할만한 정보를 얻기는 어려우리라는 판단을 했다. 앞뒤가 뻔한 얘기라해도 촌구석에 말단 형사가, 그것도 임시로 파견 나왔을 여형사가 공식화되지 않은 자신의 사견을 함부로 얘기할 리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묻는 것보단 자신이 직접 시신을 보는 편이 빠를 듯 했다. 이젠 자신도 웬만한 베테랑 형사 뺨칠 정도의 실력을 지니고 있다고 자부하는 그였다. "시신을 좀 봐도 될까요?" "보시지 않는게 좋을 겁니다" 그녀의 말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여자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적잖이 자존심이 상한 것도 사실이었다. 반발심이었는지 그는 일부러 힘주어 말했다. "사회부 기자가 어떤 직업인지 잘 모르시나본데 우리도 웬만한 형사들보단 험한 꼴 더 많이 보고 다니니까 걱정 말아요" 그 말은 사실이었다. 언젠가 그는 한꺼번에 30구의 시체를 본 적도 있었다. 시외버스가 50미터 절벽 아래로 구른 교통사고였다. 팔이 잘리고 얼굴이 뭉개진 차마 눈뜨고 보기 어려운 끔찍한 경험이었다. 이제 그에게 시체 따위를 보는 일은 백화점에 진열된 마네킹을 보는 것만큼이나 일상적인 일이었다. 김기자가 렌턴을 아래로 비추며 구둣발로 가마니를 슬쩍 걷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끙하는 신음소리와 함께 발작적으로 두어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녀의 말대로 지금까지 많은 시신을 봐 왔지만 지금처럼 끔찍한 것은 처음이었다. 시신의 이곳 저곳에는 마치 홈이 파인 흉기 같은 것으로 찌른 것처럼 굵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것은 말 그대로 구멍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를 섬뜩하게 만든 것은 시신의 부릅 뜬 눈동자에 아직 도 남아있는 형언키 어려운 공포의 잔재였다. 그의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자신을 향해 살려달라며 달려들 것 같았다. "도..... 도대체 뭘로 죽였길래?" "그러게 부검을 해 봐야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나머지 둘도 마찬가진가요?" 김기자가 두려운 눈으로 윤형사를 돌아 보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차가운 눈으로 시선을 돌릴 뿐이었다. 사실 나머니 두구의 시신은 보고 싶은 마음이 선뜻 내키지 않았지만 그래도 확인은 해야만 했다. 추정 기사라도 쓰기 위해선. 그는 이번엔 먼저보다 훨씬 신중하고 조심스런 동작으로 다시 두번째 가마니를 들추었다. 그러나 그는 아예 '욱'하는 소리와 함께 입을 틀어 막으며 그 자리에 주저 앉고 말았다. 심한 구토가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으며 머리끝이 쭈삣하는 전율이 온 몸을 휘감아 왔다. 두번째 시신은 거의 사람이라고 하기에도 어려울만큼 심하게 손상되어 있었다. 마치 짐승에게 뜯어 먹힌 것처럼 얼굴 한쪽이 거의 없어져 버렸고 오른쪽 팔꿈치 아랫 부분도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질 않았다. 특히 가슴부분의 손상은 차마 말로 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것은 마치 초원의 맹수에게 뜯어 먹히다 만 사슴의 내장을 연상케 했다. 몇번의 구토와 함께 김기자는 세번째 시신은 볼 엄두도 내질 못했다. * * * 교양 제작국의 정해일PD가 보도국 김한수 기자의 다급한 전화를 받은 것은 새벽 3시경이었다. 그들은 대학동창이자 QBS의 입사동기 였다. 그는 아직도 잠이 덜 깬 눈으로 멍하니 침대에 걸터앉아 안간힘을 쓰며 밀려오는 졸음을 쫓고 있었다. 방금전 김기자와의 전화 통화 내용이 꿈속 처럼 어렴풋이 떠올랐다. 오늘 살인사건 취재 때문에 강원도 횡성 쪽을 다녀왔는데 그 테잎을 편집하면서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는 내용이었다. 평소의 차분한 성격과는 달리 그의 목소리는 몹시 흥분되어 있었으며 약간의 두려움까지 섞인 듯 했다. 그는 한없이 가라앉는 무거운 몸을 가까스로 추스리며 방에 불을 밝혔다. 방 한쪽 구석에는 멋대로 벗어 제낀 옷가지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고 시계는 언제 밧데리가 떨어졌는지 잠자기 전부터 줄곧 8시 50분만 가리키고 있었다. 서른 여섯의 나이에도 그가 아직 독신인 이유는 전적으로 그 망할놈의 PD라는 직업때문이었다. 청바지위에 셔츠 한장과 가죽잠바를 대충 걸치 고 현관을 나서려다 그는 뭔가 잊은듯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쇼파 위에 검은 캡모자를 집어 눈썹까지 푹 눌러쓰곤 비로소 아파트 현관을 나섰다. 싸늘한 새벽 공기가 겨울처럼 매서웠다. 그는 달리듯 자신의 엘란트라 승용차까지 가서 안으로 뛰어 들었다. 그리곤 서둘러 시동을 걸고 히터를 틀었다. 추위로 이빨이 아래위로 부딪혀 왔지만 다시 올라가 옷을 더 껴입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엔진이 체 달기도 전에 그는 깊숙히 악셀을 밟았다. 그의 집은 잠실이었다. 올림픽대로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승용차의 속도계는 160을 가리켰다. 잠실에서 여의도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14분이었다. 1. 불길한 취재(3) 그가 보도국 편집실 문을 열고 들어갔을때 김한수는 자리에 없었다. 그리고 편집실 모니터에는 어느 공포영화에서나 나옴직한 음침한 기와집 한채가 을씨년스럽게 버티고 서 있었다. 그가 막 조그셔틀을 만지려는 순간 김한수가 커피 한잔을 들고 들어섰다. "어? 벌써 왔어? 또 있는대로 밟았구만?" "야, 잔말말고 그 손에 들린 커피나 빨랑 주라, 오는데 얼어 죽는줄 알았다. 이젠 완전히 겨울이다, 겨울!" 김한수에게서 건네받은 커피를 한모금 입에 넘긴 해일이 그제야 살겠다는 듯 지그시 눈을 감았다 떴다. "성질 급한건 여전하구만, 그렇게 벌벌 떨지 말고 옷이나 좀 챙겨 입고 나오든지" "새벽에 황당하게 사람 불러내 놓고 이젠 잔소리까지 늘어 놓을려구? 남 걱정 하지 말고 그렇게 불 나는 일이 뭔지 어서 용건이나 말해. 나 빨리 들어가서 다시 자야 돼! 요즘 귀신들한테 시달려 잠도 제대로 못 잔다구" 농담같은 그의 말 때문이었는지 김한수의 얼굴엔 금새 웃음기가 가셨다. 해일은 그의 진지한 표정이 웬지 마음에 걸렸다. "그래, 본론부터 말할께! 너 요즘 귀신에 대한 특집 다큐 제작중이랬지?" "그래서?" "그럼, 혹시귀신을 찍거나 본 적은 있어?" "자식! 지금 농담하냐? 뻔히 알면서 왜 그래? 정말 귀신이 있어서 프로그램 만드냐, 요즘 사람들 워낙 그 쪽으로 호기심이 많으니까 부랴부랴 특집 편성한거지. 근데 갑자기 그 얘긴 왜 묻는거야?" 잠시 망설이던 김한수가 이내 모니터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거 오늘 내가 취재 가서 찍은 테잎인데....." "아까 들어오면서 봤어. 근데, 요즘은 보도국에서도 귀신 찾아 다니냐?" "그게 아니라.... 저 곳에서 오늘 세명의 등산객이 살해 당했어" 그리곤 책상위에 종이 몇장을 집어 건네며 계속 말했다. "이따 읽어봐, 이건 그 사건에 대해 내가 작성한 내일 아침 뉴스 기사야!" "젠장 내일은 시민들이 출근길을 살인사건 뉴스로 시작 하겠구만. 근데 그게 어쨌다는거야?" "테잎을 잘 보라구" 말을 마친 그가 테잎을 되감아선 풀레이 했다. 카메라는 폐허가 된 기와집의 처마에서 부터 천천히 아래로 앵글을 움직이고 있었다. 부서진 문짝들, 찢겨져 너풀거리는 한지, 검게 그을린듯한 처마 기둥, 그리고 주위론 온통 어둠뿐이었다. 뭘 보라는건지 영문을 알지 못하고 열심히 화면을 보던 해일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잠깐, 거기!" 화면은 그가 소리친 바로 그 곳에서 멈추었다. 멈추어진 화면에는 카메라 가 기와집의 창고 내지는 부엌으로 보이는 왼쪽편의 부서진 문짝을 크로즈업으로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부서진 문짝 틈새 어둠속에서 뭔가..... 뭔가 번쩍이는 것들이 있었다. 푸른 빛을 띠고 있는 그것은 반딧불 같기도 하고, 혹은..... 광채를 내뿜는 짐승의 눈 같기도 했다. 더우기 그것들은 한두개가 아니었다. 하나, 둘, 셋..... 족히 열두세개는 될듯이 보였다. 정민수는 눈을 더욱 찡그리고 화면 가까이 얼굴을 들이대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도대체 저게 뭐야? 뭘 찍어 온 거야?" 김한수는 대답 대신 다시 화면을 플레이 시켰다. 카메라가 이번에는 기와집 대신 바로 김한수 자신과 낯선 남자 한 사람을 잡고 있었다. 김한수가 빠르게 말했다. "내 옆에 있는 남자는 현장에 있던 형사야!" 두사람을 크로즈업으로 잡고 있던 카메라가 서서히 줌아웃 되면서 그들의 발 아래 가마니로 덮힌 시신들의 모습이 막 화면 안으로 들어 올 때였다. "잠깐, 저건 또 뭐지?" 이번에도 화면은 그가 소리친 바로 그곳에서 정확하게 멈추었다. 김한수도 이미 그 곳에서 화면을 정지시키려고 준비한 것 처럼. 해일은 다시 화면 앞으로 얼굴을 바싹 갖다 댔다. 화면은 김한수와 형사라는 사내가 발 아래 가마니로 덮힌 시신을 내려다 보고 있는 장면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들의 바로 뒤 어둠속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었다. 형체는 희미해서 뚜렷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마치 화면을 막 오버랩 시킬때와 같이 보일듯 말듯 희미한 모습으로 버티 고 선 것은 분명한 사람의 형상이었다. 그리고 그 형상은 똑바로 카메라의 렌즈를 응시하고 있었다. 뚫어지게 화면을 바라보던 해일이 김한수를 돌아보며 말했다. "도대체 뭘 찍어 놓은거야? 카메라 포커스를 잘못 잡은 것 같지도 않고" "사실은 그게 뭔지 나도 잘 몰라. 물론 카메라맨도 전혀 모르고.... 분명히 현장에서 촬영할때 화인더에는 아까 보았던 그런 광채나 지금같이 저런 이상한 형상 같은건 전혀 없었다는 거야. 네가 보기엔 어떠냐?" "어떠냐니?" 김한수의 질문에 반문하며 화면에서 눈을 떼어 그를 돌아보던 해일은 그제서야 그가 이런 새벽에 자신을 급히 부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럼..... 넌 저게 카메라에 귀신이 찍힌 것이라고 생각한다는거야?" "카메라에도 이상이 없고 현장에선 보이지도 않았고, 그렇다면 저 이상한 것들을 뭘로 설명하지?" 김한수의 표정은 그 어느 때 보다 진지해 보였다. 해일은 다시 화면으로 눈길을 돌렸다. 여전히 그 이상한 형상은 똑바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었고 마침내는 해일 바로 자신을 노려보는 듯한 섬뜩함까지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는 몇 번이나 테잎을 돌려가며 두가지 이상한 형상의 수수께끼를 풀어보려고 했지만 무엇으로도 그것들을 설명하긴 어려웠다. "그리고 이건 현장에 있던 주민한테 얼핏 들은 얘긴데 말야, 그 집엔 귀신이 있다는 거야. 그러면서 취재한답시고 설치다 괜히 무서운 화를 당하지 말고 어서 돌아가라며 은근히 협박까지 하지 않겠어?" "그래서, 설마 그 주민의 얘기를 믿는단 얘긴 아니겠지? 사실 나두 귀신의 존재를 전혀 부정하는 편은 아니었는데 이번에 특집 프로 제작하면서 오히려 귀신이란 존재가 사람들의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허무맹랑한 허상이란 확신이 들더란 말야! 대부분의 귀신 목격자들을 취재하러 다녀보면 뭔가 앞뒤가 않 맞는 구석이 반드시 한 두개씩은 나오더라구. 자신의 체험을 증명할만한 객관적인 증거나 일관성이 없다는 것도 공통점이구. 귀신이 나온다는 온갖 음침한 곳과 집들을 다 찾아 다니며 카메라로 찍어댔는데 귀신의 모습은 커녕 그 비슷한 것도 한번 찍힌 적이 없어. 그래서 나는 이번 프로그램의 결론을 아예 귀신이라는 존재에 대한 부정으로 끌고 가기로 했어. 사실 처음 기획부터가 좀 우스꽝스럽기도 했구" 해일은 상당히 확신에 찬 어조로 자신의 의견을 얘기했다. 그러나 김한수는 그의 얘기에 단 한마디 반박도 없이 그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평소의 그였다면 결코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둘은 만나기만 하면 언제나 열띤 논쟁을 벌이곤했으니까. "그래, 나 자신도 내가 지금 얼마나 황당한 얘길 하고 있는지 잘 알아. 하지만 사람에겐 이성적인 논리나 합리성으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예감이나 본능같은게 있잖아. 처음 현장에서 그 기와집을 보았을때 내 기분이 어땠는지 알아? 그야말로 지옥문 앞에라도 와 있는 기분이더란 말야. 난 그기와집을 그 곳에서 처음 본게 아니었거든. 서울서 내려오는 차안에서.... 잠든 동안 내내 나는 꿈속에서 그 기와집을 봤어. 뭔가에 계속해서 쫓겨다녔던 것 같은데 자세히 기억이 나질 않아" 김한수는 지금도 그 당시의 기분이되살아 나는지 양 어깨를 움츠렸다. 몇 시간후에 보아야할 이상한 기와집을 미리 꿈속에서 보았다는 김한수의 말에 해일은 비로소 쉽게 무시하지 못할 무언가가 그곳에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막연한 예감을 가지기에 이르렀다. 그때 다시 김한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뿐이 아냐! 화면속에 그 이상한 형상이 도대체 머릿속에서 지워지질 않는거야. 마치 나를 잡아 먹을듯 노려보는 것 같더라구! 게다가 그 집앞 마당에 있던 참혹하게 살해당한 시신들. 그 시신의 눈. 대체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 눈동자에는 지금까지 한번도 상상조차 해본적이 없는 무서운 공포가 깃들어 있었어! 자꾸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군. 창피하게..... 하여튼 하고 싶은 말들은 다 했어. 어차피 판단은 네가 해야 하 니까. 아까 건네준 자료에 모든걸 자세히 적어 놨어. 집에 가서 읽어봐!" 김한수는 거기까지 얘기하고 급히 담배를 한대 피워 물었다. 2년전부터 완전히 담배를 끊었던 그 였다. 오랫동안 김한수를 봐 왔지만 오늘같은 그의 모습을 보긴 처음이었다. 얼마 후 해일은 개운치 않은 기분으로 편집실을 나왔다. 그리고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길에 그의 승용차 속도계는 한번도 120을 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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