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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스압] 석유 이야기 (feat 푸틴과 빈 살만의 만남)
1. 2011년에서 2013년까지 3년간 석유 가격은 배럴당 90달러 선에서 안정세를 유지하고 있었음. 2. 10년 전에 비하면 5배나 오른 가격이었지만, 산유국들은 배럴당 90달러를 적정 가격이라고 생각함. 3. 2014년 여름이 되면서, 아시아 지역의 석유 판매량이 급감하며 석유가격이 흔들리기 시작함. 중국의 경기 둔화가 시작된 것임. 4. 2014년 10월에 유가가 84달러로 떨어졌고, 미국의 셰일오일 공급까지 확대되자 11월 유가는 77달러까지 떨어짐. 5. 예전에는 이럴 경우 OPEC이 공급물량을 조절하면서 가격을 90달러 근방으로 다시 올렸음. 6. 2014년 11월 오스트리아 빈에서 OPEC 회의가 열림. 7. 회의 며칠 전 도착한 사우디의 알 나아미 장관은 멕시코 장관 콜드웰과 미팅을 했는데, 멕시코는 현재 경제성장의 중요한 시기라서 석유 생산량을 줄일 수 없다는 의견을 밝힘. 8. 연이어 만난 러시아 측 대표인 노박 에너지부 장관도 러시아는 생산량을 줄일 생각이 전혀 없고, 사우디가 줄여주기만을 바란다는 답변을 받게 됨. 9. 2014년 11월 24일 OPEC 장관급 회담이 열렸고, 사우디는 산유국들이 다 같이 석유 생산량을 줄이자는 제안을 함. 10. 사우디를 제외한 OPEC 회원국들과 러시아는 어느 누구도 산유량을 줄이기를 원하지 않고, 사우디가 독박을 쓰기를 바란다는 태도를 보이자, 사우디의 알 나아미 장관은 "결국 어떤 나라도 생산량을 줄이진 않으려는 것 같다. 그러면 이 회담은 이걸로 끝이다"라며 서류를 챙겨서 회담장을 나감. 11. 결국 OPEC 회담은 "시장에 맡기자"라는 결론으로 종료가 되었고, 이것은 산유국들이 알아서 생산량과 수출량을 정하라는 말이었음. 12. 산유국들이 알아서 생산량과 수출량을 정하라는 말은 생산량 증가로 이어졌고, 석유가격의 추가 하락이 시작됨. 13. 2015년 1월이 되자 유가는 45불로 반 토막이 났고, 이후에도 하락은 계속되어 25불까지도 떨어짐. 14. 가장 먼저 미국의 셰일 업체들이 부도가 나기 시작함. 15. 그 당시 셰일오일은 생산 비용이 높아서 배럴당 70달러는 되어야 타산이 맞는 상황이었음. 계속되는 기술 개발로 셰일오일의 생산 비용이 하락하기 시작했지만 2015년에는 70달러는 되어야 이익이 생기는 구조였던 것임. 16. 셰일오일의 출현은 석유산업을 단기 개발과 장기 개발로 나누어지게 만듦. 17. 셰일오일은 개발을 결정하고 석유를 생산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이 6개월 정도면 가능하고, 유정 하나당 1500만 달러 정도의 비용이면 충분하지만, 유정이 금방 바닥나기 때문에 계속 새로운 유정을 개발하는 식으로 돌아가는 것임. 18. 반면에 일반 산유국들이 하는 장기 개발은 길게는 5년에서 10년의 준비작업이 필요하고, 제대로 생산하기까지 7억 달러에서 70억 달러까지도 초기 비용이 들어감. 19. 저유가 행진이 계속되자 수많은 단기 개발이 중단되며 석유 공급이 줄어들기 시작함. 20. 2016년 2월 알 나이미 사우디 장관은 이렇게 말함. "감산의 고통을 분담할 생각이 없으면 우리는 시장에 계속 맡길 것이다" 21. 사우디는 석유 생산 비용이 배럴당 10달러로 가장 낮고, 쌓아놓은 재산이 충분해서 고통을 견딜 자신이 있었던 것임. 22. 석유생산 비용이 높은 다른 석유 수출국들은 고난의 행군을 시작함. 23. 러시아까지도 석유 생산비용이 배럴당 40달러 수준이라, 외화보유액을 까먹으면서 버티는 정도가 됨. 24. 2016년 9월. 중국 항저우에서 열린 G20 회담에서 러시아의 푸틴과 사우디의 빈 살만이 단독 회담을 하게됨. 25. 무엇을 주고받았는지는 모르지만 둘 사이의 협상은 타결됨. 26. 2016년 9월 말. 알제리에서 세계 석유 공급의 90% 이상을 책임지는 72개국의 에너지 관련 장관급들이 모이는 국제 에너지 포럼이 열렸고, 러시아를 포함한 OPEC 회원국들은 따로 자리를 가짐. 27. 다들 기대를 안했지만, 뜻밖에 알제리 합의라고 부르는 감산 합의가 도출된 것임. 28. 알제리 합의 2주 뒤 OPEC 회원국들과 러시아를 포함한 산유국들은 2014년 11월 사우디가 회의장을 박차고 나갔던 오스트리아 빈에서 다시 만남. 29. OPEC 회원국들이 하루 120만 배럴을 감산하면 러시아가 30만 배럴을, 카자흐스탄, 멕시코 등 OPEC 회원이 아닌 다른 산유국들이 25만 배럴을 감산하겠다는 총 175만 배럴의 합의안이 만들어진 것임. 30. 이 새로운 합의를 OEPC 플러스 합의라고 부르게 되었고, 이때 OPEC 회원국들에 러시아가 포함되는 OEPC 플러스 회의체가 공식적으로 만들어짐. 31. 감산이 시작되자 유가는 다시 올라가기 시작함. 32. 사우디의 빈 살만과 러시아의 푸틴의 인연은 이때부터 시작됨. 33. 빈 살만과 푸틴의 친분은 갑자기 생긴게 아니라 나름 역사가 있고, 바이든을 공동의 적으로 대하며 더 친해지는 모습을 보임. 34. 빈 살만과 푸틴의 합의로 175만 배럴을 감산했던 빈 회담과 바이든의 요청으로 10만 배럴 감산한 이번 회의가 대조되는 것임 35. 셰일가스가 미국에서 엄청나게 발견되며, 천연가스와 석유를 수입하던 미국은 쓰고도 남는 에너지를 수출까지 가능해지게 됨 36. 미국이 천연가스를 수출하려면 가스전으로부터 수출항까지 천연가스를 배송하는 파이프라인이 필요하고, 천연가스를 영하 160도 이하로 냉각해서 600배 압축이 된 LNG로 만드는 시설과 LNG운반선이 필요함. 37 지금까지는 수입만 하던 터라 이 시설이 필요가 없었음 38. 미국은 13개 LNG 수입항구에 액화시설을 만들어서 수입항을 수출항으로 바꾸는 공사를 진행했고, 2021년부터 하나씩 완공 되기 시작함. 39. 이런 상황에서 미국 셰일가스의 큰 고객이 되어야 할 독일이 러시아로부터 천연가스를 공급받는 노르드 스트림 2를 진행하자 미국은 가만있을 수 없었음. 40. 19년 12월. 트럼프는 독일이 미국의 안보에 무임승차하면서 러시아 에너지의 포로가 되려고 한다고 비난을 한 후 노드 스트림 2에 관련된 기업을 제재하는 2020 국방수권법에 사인을 해버림 41. 미국의 강한 반발에 독일은 주춤했고, 공사 완공을 질질 끌기 시작할 때 OPEC 플러스 회담이 시작됨. 42. 지난번에는 사우디가 회담장을 박차고 나갔다면, 이번에는 러시아가 회담장을 박차고 나가버림. 43. 코로나로 세계가 석유를 적게 쓰게 되자, 산유국들은 석유 생산을 줄이는 감산 합의를 해서 가격을 유지하고 있었음. 44. 감산 합의가 깨지자, 감산만 안 하는 게 아니라 산유국들이 알아서 석유를 능력껏 생산할 수 있게 제한이 풀린 것임. 45. 푸틴이 감산 합의 회의장을 박차고 나가자 말릴 줄 알았는데 사우디가 동참을 해버리는 이변이 발생함. 46. 사우디도 문제가 있었음 . 사우디의 실세인 왕세자 빈 살만은 아버지 국왕이 86세로 노령이었음. 초대 왕의 유언인 형제 상속을 중단시키고, 왕족들을 힘으로 눌러 아들 상속으로 바꾸며 차기 왕권을 확보한 빈 살만은, 아버지가 갑자기 사망한 후에도 왕족들의 지지를 받아 순탄하게 왕위를 이어 받으려면 기름값을 높여야 함 47. 사우디가 버는 돈은 기름 판돈이 거의 전부인데, 쓰는 돈이 엄청나고, 네옴이라는 서울 33배 규모의 미래형 신도시를 건설하는 자금들이 추가로 필요해서, 기름값이 최소한 배럴당 85불 이상은 유지가 필요했음. 48. 사우디가 푸틴이 시작한 저유가 치킨게임에 사전 협의라도 한 듯이 동참을 하며, 하루 970만 배럴 생산량을 1,230만까지 늘리겠다고 발표함. 49. 사우디의 최고 생산능력이 1,200만 배럴인데, 1,230만까지 늘리겠다는 것은 비축유까지 풀겠다는 말이었음 50. 사우디와 러시아가 원유 증산에 나서고 여타 산유국들까지 따라 하기 시작하자, 기름값이 급락하기 시작함. 2020년 3월경이었음. 51. 사우디와 러시아가 일시적으로는 괴로운 기름값 급락을 실행한 것은 미국의 셰일 기업들이 타깃이라서 그랬음. 52 러시아는 저유가에 버틸 힘이 있다고 봤음. 배럴당 40불 정도면 재정 유지가 가능한데다, 5,700억 불의 외화가 있다고 생각함. 53. 사우디도 석유 퍼내는 원가가 배럴당 10불 수준으로 워낙 싸고, 쌓아놓은 달러가 많아 버티는데 문제가 없었으나, 미국 셰일 기업들은 달랐음. 54. 미국 셰일 기업들은 자기 돈이 아니라 남의 돈을 빌려서 투자를 함. 유가가 급락하니 셰일 기업에 돈을 빌려준 투자자와 금융기관들이 대출 만기 연장을 안 해주고, 너도 나도 빌려준 돈을 상환 받고 빠져나가니 미국 세일 기업들이 하나씩 부도가 나기 시작함. 55. 1년 가까이 계속된 저유가에 금융 햇징을 해놓은 일부 셰일 회사들은 살아남았지만, 대부분의 셰일 회사들이 망해 셰일가스 공급이 줄어듦. 56. 석유회사들을 파산시켜 공급을 줄이고 나면 유가는 다시 올리겠다는 사우디와 러시아의 작전은 성공함. 57. 셰일 회사들의 파산으로 공급이 줄어들자 사우디와 러시아는 다시 물량 조절을 하며 가격을 올리기 시작함. 58. 푸틴은 유럽에 공급하는 천연가스를 1/5로 줄여버리기까지 함. 장기계약이 되어있는 가스는 그대로 공급했지만, 현물시장에 가스를 풀지 않아 버린 것임. 59. 가스 부족으로 천연가스 가격이 역대 최고 수준으로 올라가자 천연가스 대신 석유를 쓰는 곳이 늘어나며 석유 수요까지 증가해서, 한때 마이너스 유가가 등장할 만큼 바닥이 아니라 지하를 파고 있던 기름값이 다시 오르기 시작함. 60. 원래대로라면, 에너지 가격이 오르면 셰일 기업들이 다시 생산시설 가동을 시작하고, 새로운 유전이나 가스전 개발에 투자를 시작해서 공급이 늘어나야 함. 61. 바이든이 대통령이 되며, 미국은 신재생에너지로 방향을 전환함. 62. 기름값이 오른다고 하더라도, 정부 지원은 신재생 쪽에 집중되어 있고, 신규 유전 개발이나 기존 셰일 가스전 재가동에는 정부 지원이 없을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환경규제가 추가로 걸려있다 보니, 셰일 유전에는 투자 자금이 들어오지 않게 됨. 63. 캘리포니아는 신규 셰일가스 유전 개발을 금지하는 법안에 서명하기까지 하는 정도였음. 64. 미국이 기름과 천연가스의 주요 수출국이 되는 트럼프의 계획은 바이든의 신재생 에너지 위주 전환으로 어려워 진것임. 65. 2014년~2015년 러시아 경제를 힘들게 만든 것은 미국이 유동성을 축소하는 테이프링이 주원인이었음. 66. 미국이 유동성을 회수하고, 금리를 올리자 신흥국에 가 있던 투자 자금들은 미국으로 이동함 67. 신흥국 통화로 바뀌어있던 자금들이 미국으로 이동하기 위해 신흥국 통화를 팔고 미국 달러를 사게 되었고, 미국 달러를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달러는 귀해지고 그만큼 비싸짐 68. 달러가 강세가 되었다는 말임 69. 세계의 석유 거래는 달러로만 하게 되어있음. 한 드럼통 기름값이 100불인데, 달러가 두 배 오르면 기름값은 50불이 되는 것임 70. 달러가 강세가 되었다는 말은 달러로만 결제를 하는 유가가 그만큼 약세가 된다는 말이 됨 71. 달러 강세로 유가가 약세로 돌아서니 세계 석유 생산량 3위를 차지하며 석유, 천연가스로 돈을 버는 러시아 경제가 힘들어지게 됨. 72. 2014~2015년의 러시아가 힘들었던 이유이고, 미국의 저유가 정책에 러시아가 불편해했던 이유이기도 함. 73. 2021년 말 미 연준은 물가를 잡는다는 명목으로 테이프링을 거론하며, 금리를 올리려는 움직임을 다시 보이기 시작함 74. 미국이 금리를 올린다는 것은 다시 미국으로 달러가 몰려간다는 것이고, 2014년에 발생한 달러 강세 에너지 가격 약세가 시작된다는 말임 75. 이런 타이밍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며 에너지 가격 급상승이 시작한 것임. 한 줄 코멘트. 석유나 천연가스 같은 에너지 가격은 수요와 공급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만이 아닐지도 모름 출처 https://m.dcinside.com/board/dcbest/75307
달라란작성일
2022-09-07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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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바이크] 아이오닉5 출고 및 주행기
바로 앞에 카니발 출고인증 했는데 이번엔, 아이오닉5!!! 2021년 2월 25일 사전 주문해서 만 1년을 꽉 채우고 1주일 더해서 22년 3월 2일 출고한 국산차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이유는 지난해 10월에 제가 사는 지역 보조금이 추경까지 했음에도 소진되어서, 예산 재배정할 때 다시 출고일정 잡혀서 나왔습니다. 지금도 전기차 주문하실 분들은 전기차 보조금 소진 여부를 잘 봐가면서 대기하시길 바랍니다. http://www.ev.or.kr (PC보기)로만 보임 제조사 및 유통사 입장에서도 보조금을 고루 받게 하기 위한 차량 배정 우선 순위가 있습니다. 어쨌든 수입차도 아닌데, 1년 걸려 받은 제 아이오닉은 아이오닉5 롱레인지 프레스티지 듀얼모터(4륜)+ 파킹 어시스트, 컴포트 플러스(2열 감지), 비전루프, 디지털 사이드 미러, 빌트인캠+ 실내 V2L (사전계약 이벤트) 외장 그래비티 골드 매트, 실내 테라브라운 입니다. 가격 6210만원! 보조금 넣고 세금 할인 하고 5220만원에 샀습니다. 확실히 화제성 답게 눈에 띄는 외모입니다. 특히 무광 컬러인 그래비티 골드의 반사광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날이 서 있는 면 들을 부각시켜주고, 또 부드럽게 곡면의 빛 처리를 해서, 디자인의 힘을 북돋아 주거든요. 개인적으로는 루시드 블루 펄(파랑), 디지털 그린펄(옥색 혹은 비취색) 그리고 팬텀 블랙 펄(검은색)이 도장과 색감은 좋았었습니다. 측면에서 보면 긴 휠베이스, 극단적인 오버행 그리고 큰 휠로 인해 컨셉트카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특히 뒤쪽에서 보면 이 차의 엣지들을 잘 살려 놓아서, 디자인의 힘을 느끼게 됩니다. 범퍼 하단의 조잡함은 좀 이해하기 힘들지만요. 그래도 디자인면에선 참 예쁜 차 입니다. 기존 주유구 위치는 충전 포트가 설치되어 있고, 도트 스퀘어 램프로 충전량이 표시됩니다. 외부에서 한번에 알아볼 수 있게 만들어 줘서 꽤 센스있는 부분! 20인치 255-45 미쉐린 프라이머시 투어 타이어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에코 타이어가 아닌 점이 반갑군요. OE타이어가 꽤 좋아서 돈 굳었다 생각이 듭니다. 손잡이는 차량 열림 상태면, 이렇게 튀어나와 있습니다. 잠김 상태면 당연히 접혀있습니다. 긴급으로도 열리니까 방전 때 못 열까봐 걱정은 안하셔도 될 듯. 트렁크는 넓다면 넓고 좁다면 좁습니다. 휠하우스가 튀어나와 있어서 공간 활용을 충분히 하긴 어려워 보이긴 하는데 높이도 적당하고 2열 슬라이드를 이용할 수 있어서 괜찮습니다. 골프채 실어보니까 겨우 4개 싣긴 합니다. 요령이 필요하긴 하지만요. 최소한 이건 노리고 만들었나? 생각이 들 정도. 트렁크 아래 쪽에도 짐칸이 있는데, 일단 제 차는 BOSE오디오를 넣어둬서 앰프 때문에 좀 더 솟아 있습니다. 저기 모터가 있기도 해서 썩 쓸만한 공간은 아닙니다. 충전기랑, 악세사리 넣어두는 정도면 괜찮을듯. 그러나 충전기는… 앞쪽 프렁크 공간에 이렇게 저속 충전기 넣어둘 수 있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전 듀얼 모터라 저 공간이 유난히 좁은편. 본닛 연 김에 12V 일반 배터리도 보이시죠? 저기 파랑색 빨강색 액체는 포션이 아니고 각각 배터리와 모터 냉각액입니다. 아이오닉은 히트 펌프와 공조 시스템을 이용해서 배터리 잔열 등을 효율적으로 처리합니다. 이 점에서 외산 전기차보다 낫긴 합니다. 그러나 전기차가 되면서 후드 열고 구경하는 재미는 없어졌습니다. 실내로 들어와 보면, 정말 시원시원합니다. 커다란 디스플레이 두 개를 엮어두었고, 디스플레이 주변의 하얀색 트림은 의외로 인터페이스 컬러와 어울려서 눈에 거슬리지 않습니다. 광활한 공간을 위해 스티어링 컬럼에 드라이브 셀렉터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다이얼이나 버튼 보다 훠어어얼씬 낫다 생각합니다. 슬라이딩 되는 센터 콘솔! 움직인다는 게 이렇게 공간에 큰 변화를 주는 줄 몰랐습니다. 조수석에서 탑승해서 운전석까지 쉽게 이동 가능!! ㅋㅋㅋㅋㅋ 2열 공간 확보에도 편하고, 꽤 좋습니다. 보다시피 디지털 사이드 미러의 디스플레이와 계기판, 그리고 사용자 디스플레이까지 일직선으로 주욱 연결되죠? 덕분에 꽤 통일감 있는 인테리어로 느껴집니다. 앞좌석은 넓진 않지만 충분한 크기입니다. 등판이 좀 더 넓었으면 차가 주는 편안함과 좀 이어질 수 있었을 텐데, 의외로 스포츠 시트 처럼 정확한 크기로 몸을 지지해주는 시트라서 약간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의외로 소형차인데 1열 시트 등판을 크게 만든 르노 클리오에게 칭찬을!! ㅋㅋㅋ 광고에 나왔던 대로 레그 서포트가 있어서 1열을 뒤로 눕히고 편히 드러누우면 굉장히 편하게 있을 수 있습니다. 누워서 바라보는 하늘도 굉장히 좋구요. 다만 왜 통풍/열선을 ㅄ같이 디스플레이 메뉴 안에 넣어뒀을까요. 버튼 잘 만들면서 왜????? 다행히 2열 열선은 도어에 붙어있습니다. 아! 도어 쪽 암레스트 그러니까 팔걸이가 벽면과 살짝 떨어져서 손잡이 역할까지 하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굉장히 디자인적으로는 잘 만들어진듯 2열 또한 슬라이등과 틸팅을 모두 지원합니다. 사실 앉아보면 2열이 굉장히 편안해요. 특히 3m의 휠베이스를 아낌없이 사용했단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186cm의 제가 1열에서 편히 맞추고 2열을 최대한 앞으로 당긴 상태입니다. 그럼에도 저렇게나 공간이 남아요. 가족용 차량으로 정말 강력추천입니다. 슬라이드 콘솔에는 이렇게 USB 포트가 제공됩니다. 그리고 그 맞은편, 2열 시트 아래에 이렇게 220V (V2L) 포트가 제공됩니다. 이거 정말 굉장한 경험이죠. 노트북을 무한정 쓰기도 하고, 에어컨 틀고, 선풍기 틀어서 트렁크 쪽으로 시원한 바람을 보내 캠핑에 유용하게 쓰기도 하고 등등등 정말 유용하게 쓰입니다. 하여간 전기차로 인해 라이프 스타일이 바뀐다는 게 느껴집니다. 200W 인버터랑 같은 수준으로 보시면 안됨!! 정말 차원이 다른 사용법입니다. 심지어 TV랑 게임기 가져다가 할 수 있어요. 물론 외장 V2L도 있지만 실내 V2L은 그냥 멀티탭 끼우기면 하면 되는 거라 정말 편합니다. 그러면 이제 달려본 경험을 말씀드리자면, 아이오닉5는 현대차의 플래그쉽 차량이다! 이것이 결론! 사실 풀옵션 하면 6천에 가까워지는 가격도 그렇고 승차감도 그렇고 이건 현대차의 기함이라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제네시스로 분리되어서 고급차 라인이 애매해졌지만 아이오닉5가 주는 경험은 정말 편안합니다. 주행 질감은 전기차라기 보단 사실 내연기관에 좀 가까운 셋팅입니다. 패들 시프트로 회생 제동의 강약을 조절할 수 있는 점, 그리고 회생 제동을 포기하면 내연기관차처럼 클리핑(드라이브 모드에서 악셀을 밟지 않아도 천천히 앞으로 가는 것)과 관성 주행까지 비슷하게 살려두었습니다. 아이오닉5가 내연기관에서 전기차로 넘어가는 단계에서 다리 역할을 하게 되리라는 것을 현대차의 엔지니어와 디자이너들이 확신을 갖고 만든 느낌입니다. 승차감 역시 하부에 깔린 배터리로 인한 낮은 무게 중심을 최대한 활용한 느낌입니다. 적절히 눌러주고 적절히 버텨줍니다. 거의 2톤에 가까운 중량이라 아주 단단하거나 휘청일 줄 알았는데, 꽤나 부드럽게 받아들입니다. 물론 중량 자체가 가진 관성의 힘이 있어서 시속 140km를 넘으면 잦은 요철에 허둥대긴 하는데 정말 세련된 움직임입니다. 쏘나타DN8 이후 적절한 ‘목표값’을 찾은 느낌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가솔린 엔진이 탑재된 벤츠의 승차감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ㅋㅋ 최근 포드-링컨 차량과 비슷하다고 해야할까… 프랑스제 차량에서 영감을 얻은 거 같다고 해야할까 뭐 그 정도 사이에 있는 느낌입니다. 최소한 e트론 보다는 우리 환경에 좀 더 어울린다고 느꼈습니다. 완충 주행 거리는 약 440km이고 실제 주행해도 인증 370km보단 400km에 가깝게 달릴 수 있습니다. 아쉬운 점은 가속감이 전기차 답지 않게 좀 편안한 점입니다. GV60 퍼포먼스 모델이 주는 압박감과는 달라서 아쉽지만, 또 편안한 주행 셋팅이라면 이해되기도 합니다. 부스트 모드가 있는 GV60 퍼포먼스 모델 GV60은 부스트 모드까지 써대면 진짜 신나는 차량이거든요. 할 수 있는데 뭔가 억제된 느낌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륜과 후륜 모델의 출력 차이만큼 주행 질감도 좀 차이가 있더군요. 후륜은 스티어링이 좀 편한 느낌이 있는데 가속이 좀 더딘 편입니다. 그냥 2.5NA차량 같은 느낌? 뭐 그 정도 되는 듯. 그러나 4륜 모델(듀얼모터) 모델부턴 3리터급 터보 엔진 차를 운전하는 느낌이 강하긴 합니다. 물론 180km/h 언더 제한으로. 그리고 전륜이 돌아가는 만큼 코너웍도 다른 느낌으로 갈 수 있죠. 대신 후륜 모델보다 스티어링 조작이 약간 무겁고 예민한 편이라 아이오닉5를 염두에 두고 계셨다면, 본인의 주행 스타일을 잘 파악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기아의 EV6 보다는 확실히 소프트한 편이고, 보다 실내 공간이 넓습니다. 소음 부분에선 전기차라 딱히 따질 건 없는데, 듣는 사람에 따라 모터나 전기장치의 고주파음이 “지--잉"하고 들릴 수 있습니다. 물론 저는 좀 신경쓰이게 들리는 편이었고, 제 아내는 그게 뭐임? 이런 느낌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좀 더 예민하게 듣는 편이구요. 그러나 또 신경 끄면 뇌가 알아서 차단할 수준은 됩니다. 이런 부분은 독일제 차량들이 세심하게 잘 잡았더군요. 그리고 디지털 사이드 미러는 높이 조절이 될 거 처럼 생겨서는 고정형입니다. 보통의 거울 시야보단 약간 낮게 있어서 전면부 시야가 개방되긴 하는데 익숙해짐이 약간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금방 익숙해 집니다. 딱히 기존의 시스템이 불편하지는 않아서 추천은 안하지만, 또 디지털 사이드 미러의 장점이 있거든요. 우천 및 야간 시야라던가 오히려 정확한 주차 라인이라던가 그런 것들 말이예요. 측면 틴팅을 강하게 하더라도 사이드 미러 시야에 변화가 없다는 점도 장점이긴 하죠. 어쨌든 개인적으로 참 인상 깊었던 차량이며, 굉장히 궁금했던 차량입니다. 전기차 또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하나의 당당한 선택지가 되어감에 따라 다양한 니즈를 충족하기 위해 출시될 건데, 타보니깐 정말 생활의 연장선 상에서 골라야 하는 제품까지 온 것 같습니다. 많은 칼럼리스트들 이야기와 같이 아직은 이동수단에 머무르고 있지만 조만간 스마트폰과 같은 생활과 밀접하게 쓰일 수 있는 제품이 나오리라 기대가 됩니다. 내연기관 차보다 더 다양한 목적을 충족하며 더 다양한 제품들이 나오기를 기대하며 안전한 자동차 생활 되길 기원하며 이만 주행기 마칩니다. 뾰로롱 자아, 카니발은 나왔고 아반떼N, GV70, 그리고 포터2 남았습니다… 나오겠죠?
아편쟁이작성일
2022-05-17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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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일반] 해방의 비극 (중국 혁명의 역사 - 마오쩌둥) 1945~1957 1부
마오쩌둥에 관련된 서적은 많이 있습니다. 다른 책과의 차이점은 이책은 좀더 현실적인 사회모습을 비추고 있습니다. 프랑크 디쾨터 저/고기탁 역 다수의 지지를 얻고 소수를 반대하여 모든 적을 각개 격파하라. - 마오쩌둥 연대표 1945년 8월 6일과 9일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이 투하됨 1945년 8월 8일스탈린이 일본에게 전쟁을 선포하고 소련군이 만주로 진격함. 1946년 4월공산주의자들에게 만주를 넘기고 소련군이 철수함 1946년 5월마오쩌둥이 농촌 지역에서 급진적인 토지 재분배와 전면적인 계급 투쟁을 천명함. 1946년 6월국민당 군대가 만주 북쪽 경계선까지 공산주의자들을 추격하지만 트루먼 대통령이 특사로 파견된 조지 마셜의 정전 요구로 어쩔 수 없이 진격을 중단함. 공산당은 군대를 재정비하고 소련군에게 훈련을 받음. 1946년 9월 ~ 1947년 12월트루먼이 무기 금수 조치를 단행함. 1946년 12월 ~ 1947년 12월국민당이 보유한 최고의 부대가 계속해서 만주에 투입되었고 만주가 죽음의 덫으로 화함. 1947년 12월 ~ 1948년 11월공산주의자들이 대도시를 봉쇄하는 전략으로 만주 전쟁에서 승리함. 1949년 1월 22일베이징이 포위 40일 만에 공산주의자에게 함락됨. 1948년 11월 ~1949년 1월국민당이 화중 지역인 쉬저우 전투에서 패배하고 양쯔 계곡을 비롯한 화남 지역 전체로 나아가는 길목을 공산주의자에게 내줌. 1949년 4월 ~ 5월양쯔 강 이남에 위치한 국민당이 수도 난징이 공산주의자들에게 함락됨. 오랜 포위 끝에 공산주의자들에게 함락됨. 오랜 포위 끝에 공산주의자들이 상하이를 점령함. 1949년 6월 30일중국 공산당 28주년 기념일을 맞아 마오쩌둥은 중국이 <한쪽 편에 기대야 하며>소비에트 연방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공표함. 1949년 10월 1일마오쩌둥이 베이징 텐안먼 광장에서 중화 인민 공화국을 선포함. 1949년 12월 10일충칭이 함락된 후 장제스가 중국을 버리고 타이완으로 도주함. 1949년 12월 ~ 1950년 1월마오쩌둥이 모스크바에서 스탈린 정권의 공인과 도움을 받음. 1950년 2월 14일 중국과 소비에트 연방이 중소 우호 동맹 상호 원조 조약을 체결함. 1950년 6월 ~ 1952년 10월공산주의자들이 남쪽에서 토지 개혁을 시행함. 1950년 6월 25일북한이 남한을 침공하면서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로부터 비난을 받고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연합군의 반격을 받음. 1950년 10월 7일인민 해방군이 티베트를 침공함. 1950년 10월 10일 ~ 1951년 10월<반혁명 진압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대공포 시대가 열림. 1950년 11월미국에 저항하고 한국을 돕자는 <향미 원조>운동이 시작됨. 1951년 ~ 1953년토지 재분배가 완료되고 농민들이 농기구와 역축, 노동력을 공유하는 <호조조>에 편입됨. 1951년 10월 ~ 1952년 6월정부 고위 관료들을 정화하기 위해 <삼반 운동>이 시행됨. 1951년 10월학식 있는 엘리트들을 정부 관리로 편입하고 흡수하기 위한 사상 개조 운동이 시작됨. 1952년 1월 ~ 6월마오쩌둥이<오반 운동>을 통해 민간 부문에 대해 전쟁을 선포함. 1952년 2월 ~ 4월중국 정부에서 미국이 세균전을 벌이고 있다고 주장함. 1953년 3월 5일스탈린 사망. 1953년 7월 27일 한국 전쟁에서 휴전이 선포됨. 1953년 11월양곡에 대한 전매 제도가 도입되면서 정부가 정한 가격으로 <잉여>곡식을 국가에 판매하도록 농부들에게 강요됨. 1953년 ~ 1955년 5월가오강을 비롯한 고위 간부들이 <배신>과<당의 분열을 조장>했다는 혐의로 숙청됨. 1955년 4월 ~ 12월후펑과 그 밖의 지식인들이 <반혁명적인> 집단을 이끌었다는 비난을 받고 반혁명에 반대하는 운동을 통해 77만 명 이상이 체포됨. 1955년 6월호구 제도로 농촌 사람들이 이동이 제한됨. 1955년 여름 ~ 1956년 봄<사회주의의 고조>라고 불리는 농촌의 집산화를 가속화하기 위한 조치로 농부들은 집산주의 사회로 편입되었고 더 이상 토지를 소유할 수 없게됨. 도시에서는 대부분의 산업과 상업이 국유화됨. 1956년 2월흐루쇼프가 모스크바 비공개 연설에서 스탈린과 개인 숭배를 비난함. 막대한 피해를 가져온 스탈린의 집산주의 운동에 대한 비난은 중국에서 사회주의의 고조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입지를 강화함. 마오쩌둥은 탈스탈린화를 자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임. 1956년 9월당헌에서 <마오쩌둥 사상>을 언급한 부분이 없어졌고, 집단 지도 체제의 원칙이 환영을 받았으며, 개인 숭배가 공공연히 바난을 당함. 사회주의 고조가 버림받음. 1956년 10월비스탈린화에 고무된 헝가리 국민들이 정부에 반대하여 폭동을 일으키자 소비에트군대가 헝가리를 침공하여 반대자들을 진압하고 모스크바의 지지를 받는 새로운 정부를 설립함. 1956년 겨울 ~ 1957년 봄마오쩌둥이 대다수 측근들이 반대를 무릅쓰고 헝가리에서 소련군의 침공을 불러온 사회 불안을 피하기 위해 <백화제방>운동을 벌여 정치적으로 보다 개방적인 분위기를 조성함. 중국 전역에서 학생들과 노동자들이 시위와 저항 운동, 파업등을 벌임. 1957년 여름비난 공세가 갈수록 거세져서 당의 지배권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는 등 백화제방 운동이 역화를 일으킴. 마오쩌둥이 방침을 바꾸어 이들 비난자들을 향해 당을 무너뜨리려는 악질분자라고 비난함. 반우파 투쟁의 책임자로 덩샤오핑이 임명되고 이 운동으로 50만 명에 달하는 지식인들이 박해를 당함. 대다수가 학생들과 지식인들로 이루어진 그들은 궁벽한 곳으로 강제 이송되어 고된 노동을 강요당함. 당은 주석의 뒤를 단결하고 몇 달 뒤 마오쩌둥은<대약진 운동>을 시작함. 1949년 마오쩌둥이 자금성 위로 붉은 깃발을 들어 올리며 피로 얼룩졌던 국공 내전이 종식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승리를 해방이라 일컬었지만, 중국인들이 맞이한 현실은 오히려 폭정이었다. 인간성은 짓밟혔고, 전통문화는 파괴되었으며, 500만의 민간인들이 죽음으로 내몰렸다. 이 책은 마오쩌둥 정권 아래 살았던 중국 인민의 삶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수백건의 비밀문서와, 비밀경찰 보고서, 수정되지 않은 지도자 담화, 살아남은 자들의 목격자 증언 들이 역사적 모사와 함께 어우러 진다. 그러므로 이책은 충격적인 역사에 대한 또 하나의 증언이고, 그 과정에서 죽어 간 수백만 망자들에 대한 기록이며, 21세기 가장 강력한 정권들 중 하나인 중화 인민 공화국의 토대에 대한 철저한 재조명이다. - 본문 발췌 1부 정복 (1945~1949) 스탈린은 공개적으로 장제스를 지지하면서도 한편으로 국민당 정부와 미국 지지자들에 대한 견제 세력으로 중국 공산당을 강화하고자 했다. 장제스는 소련이 만주에서 공산당과 협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뻔히 알았지만 스탈린과 다툴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전시 동맹 관계인 장제스를 지원하는 대신 조지 마셜을 파견하여 국민당과 공산당이 연립 정부를 세우도록 중재에 나섰다. 한편 공산당도 잃을 것이 없었다. 그들은 정전 협정을 이용하여 만주에서 군대를 재편성하고 대도시와 철도로부터 떨어진 외곽 지역에 단단히 뿌리를 내렸다. 마오쩌둥의 특사로 평화 협상에 파견된 정중하고 겸손한 저우언라이는 기만술의 대가였다. 심저어 마오쩌둥을 진지하게 설득해서 <중국의 민주주의는 미국의 발자취를 따라야 한다>라고 공표하도록 했다. 마오쩌둥은 자신이 현장에 벌이는 일을 견제받지 않는 한 서류상으로 거의 무엇이든 동의했다. 난징과 상하이가 공산당의 손에 넘어간 뒤로 아직 항복하지 않은 국민당 군대는 더 남쪽으로 후퇴를 계속했다. 광저우까지 밀려난 국민당정부는 혼란에 빠져 허둥지둥 충칭으로 퇴각 12월 19일 타이완으로 탈출해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마오쩌둥 vs 장제스 2부 장악 (1949~2952) 이전 정권 밑에서 일했던 공무원들은 예전의 일상적인 업무를 대체로 그대로 수행했다. 1945년 국민당 정권하에서 중국 경찰은 호적을 등록하고 관할권 내외 도시에서 신분등을 발급하기 시작했다. 호적 등록 서류 상단에는 그 사람의 출신, 직업, 개인적 지위를 포함하는 계급표가 부여되었다. 결국 혁명에 대한 충성도를 추정하여 좋음, 보통, 나쁨으로 서열이 정해졌다. 마오쩌둥은 역적과 압제자, 비적, 지주 등의 토지를 모두 몰수한 다음 가난한 농부들에게 분배하라고 지시 전면적인 계급 투쟁을 촉구했다. 이러한 일을 하기위해 공산당의 행동 대원이 필요했고 공작대는 첫 번째 임무 중 하나는 소련에서 행해진 방식 거의 그대로 마을 주민들을 다섯 계급으로, 즉 지주, 부유한 농민, 중산층 농민, 가난한 소작농, 육체 노동자로 분류하는 일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마을 지도자들로부터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그 결과 한때는 끈끈한 연대로 묶여 있던 마을이 극단적으로 양분화되었다. 공산당은 가난한 사람들을 때로는 총으로, 많은 경우에 창과 몽둥이, 괭이로 무장 시켰다. 희생자들은 지주, 폭군, 반역자로 몰려 비난을 당했고 체포되어 외양간에 갇혔다. 무장한 민병대가 마을을 봉쇄하면서 누구도 마을을 벗어날 수 없었다. 사람들은 각자의 출신 계급을 표시하는 길고 가느다란 천을 부착해야 했다. 지주는 흰색, 부유한 농민은 분홍색, 중산층 농민은 노란색 천을 부착했다. 가난한 소작농들은 붉은색천을 부착한 채 의기양양했다. 계급의 적들이 한명씩 무대 위로 끌려 나왔고 그들 앞에는 피를 갈망하며 증오심이 가득한 분위기 속에서 과거의 빚을 청산할 것을 요구하는 수백 명의 군중이 모여 있었다. <비판 투쟁 대회>의 희생양들은 무자비한 비난과 조롱, 모욕, 폭행을 당했으며 죽임을 당했다. 곧 광란에 가까운 폭력이 마을 전체를 집어삼켰고, 많은 희생자들이 맞아 죽거나 일부는 총살을 당했는데 대부분의 경우에 먼저 고문을 당했다. 그들이 실제로 보유했거나 보유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재산을 숨긴 곳을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당과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는 피의 계약이 맺어졌고 그에 따라 희생자의 토지와 재산이 대중에게 분배되었다. 대공포 시대 1950년 공산당에게는 친구가 거의 남지 않았다. 자본가들은 공산당을 싫어했고 실업 문제가 극성을 부렸으며 대다수 노동자들에게 최대치에 육박하는 세금이 부과되고 있었고 도시의 지식인들은 혹시라도 직장을 잃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 예술과 종교계에서는 정권에 반대하는 분위기가 만연했다. 누가 진짜 적이고 누구와 맞붙어야 하는가? 마오쩌둥이 계속해서 말했다.<우리의 대략적인 정책은 국민당의 잔당 세력과 비밀 요원들, 비적들을 제거하고, 지주 계급을 전복시키고, 타이완과 티베트를 해방시키고, 제국주의와 끝까지 싸우는 것이다.> 1950년 10월 당시 공산 정권을 전복시키려는 위협적 사건들이 발생하자 마오쩌둥은 뤄루이칭이라는 인물에게 감독 임무를 맡겼다. 그는 장제스 산하에 있었지만 1928년 공산당에 가입, 초기 소련에서 비밀경찰과 일했다. <거칠고 야만적이며 잔인한>일처리를 보여 주었다. 1951년 3월에 마오 주석은 이미 1만 2,000명의 반동분자를 죽이고 그해 봄에 추가로 2만 명을 더 숙청해서 총 3만 2,000명을 제거하기로 독하게 작심한 허난 성을 치하했다. <인구가 3000만 명인 성에 그 정도면 훌륭한 숫자다.> 여기에 더해서 그는 숫자란 하나의 지표에 불과할 뿐 보다 많은 사람이 제거되어야 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공포 정치란 안정적이며, 정밀하고, 무자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즉 외과 수술에 준하는 정밀함으로 절대 마구잡이식 도살이 되지 않도록 경계하면서 실행되어야 했으며 그렇지 않을 경우 당의 위치가 위태로워질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 우선하여 <<무자비함>>이란 단어가 강조되어야 한다.>뤄루칭의 보고서를 정독한 그는 중국을 더욱 거세게 밀어붙였다. <사망자가 거의 발생하지 않은 성에서는 보다 많은 사람이 죽어야 할 것이다. 너무 조기에 숙청을 중단하는 행위는 절대로 용납될 수 없다.> 뤄루이칭 1950년 한국 전쟁은 공산 정권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규합하고 불과 몇 개월전 마오쩌둥이 묘사했던 적들을 거세게 밀어붙일 단초를 제공했다. 3부 통제 (1952~1956) 마오쩌둥은 부패 척결이라는 이름하에 삼반 운동을 실시한다 과거 정풍 운동으 모태로 실시된 숙청 작업이였다.삼반 운동은 머지않아 정부의 고위 관료들에서 범위를 더욱 넓혀 갔다. 악의적인 외부 세력이 공중 도덕을 해치고 있다는 은밀한 단서들이 여기저기에서 드러났다. 1951년 11월 30일, 부패 척결 운동을 막 시작할 당시 마오쩌둥은 당 지도부에 <우리 간부들이 자본주의에 물들어 부패했다.>라고 말했다. 이후 몇 주 동안 사업가나 기업가들의 뇌물 수수와 도둑질, 탈세 사건에 정부 관리가 연루되었다는 보고서들이 전국 각지에서 날아들었다. 1952년 1월 5일에 이르러 마오쩌둥은 자본가들이 당을 상대로 <전쟁보다 훨씬 심각하고 위협적인 맹공>을 가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몇 개월 안에 필살의 일격을 날리기 위해서는 단호한 반격이 필요했다. 역사가 마이클 성의 표현을 빌리자면 <마오쩌둥은 이제 자본가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다.> 삼반 운동 <농업이 사회주의화되지 않고는 사회주의가 완성되거나 견고해질 수 없다.> 소비에트 연방의 경험을 참고해서 마오쩌둥은 이렇게 덧붙였다. 이 과업은 <시간도 오래 걸리고 힘든 일이 될 것이다.> 집산화로 가는 길은 실제로 힘들었지만 사람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시간은 훨씬 덜 걸렸다. 집산화 첫번째는, 토지를 분배받은 여러 지역의 농민들은 몇몇 가구씩 쟁기질할 가축과 농기구를 공유하기 시작했다. 농기구와 역축, 노동력을 공유하는 가구들을 <호조조>라 불렀다. 그럼에도 호조라는 말이 의미하듯 실제로 서로 도움을 주고 받는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과거 농번기에는 상부상조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했던 것이지 지방 간부의 비난이 무서워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집산화에 동참하기를 거부한 농민들은 <비애국적>이라거나 <장제스 노선>, <낙오자>라는 비난을 받을 각오를 해야 했다. 공동으로 농사짓길 거부한 사람들에게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했던 대출을 막아 버렸다. 새로운 갈등이 등장했다. 여러 가구가 빌려서 사용했는데 빌려 쓰는 사람들이 가축을 형편없이 방치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원래의 주인에게 돌아왔을 때는 흔히 비참한 몰골에 병들고 불결하기 짝이 없었다. 같은 호조조 내에서 공동으로 사용하던 농기구들도 너무 막 다루어지거나 순전히 앙심에 의해 망가지기 일쑤였다. 빌려주는 사람과 빌려 쓰는 사람 간의 갈등은 머지 않아 사유 재산이라는 개념 자체를 위협했다. 집산화 두번째는, 정부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1953년을 기점으로 호조조가 합작사로 바뀌었다. 그에 따라 농기구와 역축과 노동력은 이제 영구적으로 공유되었다. 농민은 자신의 토지에 대한 명목상의 소유권만을 가졌다. 대신 자신의 토지를 출자함으로써 다른 여러 공동 출자자들과 함께 합작사에서 자신의 몫을 보장받았다. 머지않아서 합작사는 종자와 소금, 비료 등을 판매하고, 돈을 빌려주고, 가격을 정하고, 수확 시기를 결정하고, 수매를 진행함으로써 농민들의 삶 전체에 영향력을 드리우기 시작했다. 합작사 도입으로 전체 경작지 면적은 오히려 감소했다. 사람들이 각자의 땅을 출자했지만 보상으로 주어지는 몫이 너무 작아서 굳이 고생할 필요를 느끼지 못해 버려진 땅도 매우 많았기 때문이다. 쓰촨 성의 농부 완쯔샹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조만간 공동 소유로 바뀔 텐데 무엇 때문에 공을 들이겠는가?] 농촌에 가장 큰 피해를 준 변화는 1953년 말에 시행된 전매권의 도입이었다. 정부는 농민에게 모든 잉여 곡식을 국가와 국가에서 운영하는 합작사가 정한 가격으로 국가에 판매하도록 명령했다. 바야흐로 집산화의 세 번재 단계에 접어든 것이었다. 무역은 공산당정권에 엄청난 적자를 안겨주고 있었다 소비에트 연방 지원금을 대폭 삭감하고 국가 재정이 파탄의 지경에 이르자 몇 주 뒤 마오쩌둥은 재정 위원회에 보다 많은 곡물을 징발할 방안을 내놓도록 지시했다. 정부는 먼저 모든 농지에 대하여 단위 면적당 생산량을 추산했다. 추산된 수치는 대부분의 경우에서 실제 생산량보다 훨씬 높게 설정되었으며 때로는 생산량을 늘리라는 압박에 수치가 재차 상향되었다. 수확물을 통제한다는 것은 농촌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지도부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민병대가 곡식을 징발해 가는 동안 가난한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고 굶주림에 대한 공포로 울부짖었다. 저항하거나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사람들은 매질을 당했다. 국가 양식국이 광둥 성에서 보고한 내용에 따르면 반동분자들의 옷을 벗겨 추위 속에 몇 시간씩 계속 서 있게 하는 것은 <흔한>일이었다. 광동 성 전역에서 곡식을 팔길 거부했다는 이유로 투옥된 사람이 수천명에 달했다. 보다 북쪽으로 올라가 허베이 성의 바오딩에서는 조달 임무를 맡은 대원들이 마을로 진입할 때마다 의레 일대 소동이 일어났다. 어떤 사람은 화장실에 숨었고 어떤 사람은 아픈 척 했으며 몇몇은 밖으로 나와서 당 간부에게 욕설을 퍼붓다가 매질을 당했고 나이 든 여성들은 절망과 두려움에 통곡했다. 한단 전구의 당 간부들은 매우 직설적이었다.<여러분이 잉여 곡식을 신고하지 않겠다면 우리도 열흘간 <<식용유와 소금을 비롯한 기본적인 물품>>의 판매를 중단하겠다.> 스자좡 바로 남쪽에 위치한 위안스 현의 스물네 개 마을에서는 주민들이 침세례와 난폭한 대우도 모자라 결박당한 채 매질까지 당했다. 그들에게 곡물을 내놓도록 강요하기 위해서였다. 뒤이은 조사에서 위안스의 전체 208개의 마을 가운데 절반이 넘는 곳에서 폭력이 사용된 것으로 밝혀졌다. 당 간부들은 앞서 몇번의 대대적인 운동을 수행하며 터득한 고문 기술을 이용했다. 몇몇은 공개적으로 마을 주민들을 단순한 <노예>로 치부했다. 여러 차례에 걸쳐 모의 처형식이 거행되었고 임신한 여성이 기절할 때까지 구타를 당했다. 어린이들도 일견 <매우 흔한>처벌의 한 형태로 한 번에 몇 시간씩 똑바로 서 있도록 강요 되었다. 자살과 관련해서는 으레 <끊임없는>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프로파간다의 전형적인 모습 4부 반발 (1956~1957) …………… 내용이 너무 길어서 이쯤 끊도록 하겠습니다. 타자 치는 저도 힘이 드네요. 이후 내용이 궁금하시면 책을 구매해서 한번쯤 읽어 보시기를 추천 드립니다. 2부 마오의 대기근(1958~1962)는 다음에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로오데작성일
2021-09-24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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