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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터] 독서노트 3 - 용병, 전쟁산업을 실행하는 그림자 전사들
용병-전쟁산업을 실행하는 그림자 전사들 ; 로버트 영 펠튼 ; 교양인 ; 2009보안 청부인들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돈을 위해' 일한다고 하지만, 내가 돌아다니며 본 바로는 대다수가 '가족을 부양하려고' 일한다고 해야 더 정확할 것이다. 미야기가 LA 경찰청으로 돌아가더라도 경찰의 월급으로는 주택담보 대출금을 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전 세계에 자신의 기술을 찾는 수요가 많다는 것을 안다. (470P 중)민영화의 이익을 말할 때면 한껏 흥이 올라 열변을 토하는 프린스(주: 블랙워터 사장, 에릭 프린스)는 온갖 아이디어로 터질 듯 하며, 늘 '더 좋게, 더 빠르게, 더 효율적으로'를 판매한다. 프린스가 미국 정부에 내놓는 모든 아이디어에는 정찰 가격과 전혀 위험하지 않다는 보증이 뒤따르며, 그것은 사회 보장부터 이라크 전쟁 수행까지 모든 것을 민영화하려는 부시 행정부의 노력에도 잘 부합된다.(415P 중) ---------------------------------------------------------밀리터리라는 영역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다양한 층위가 존재한다. 그 속에는 그냥 껍데기만 바라보며 황홀경에 빠지는 부류도 있고, 힘을 행사하는데 대한 숙고를 함께 하는 부류도 있다. 그러나 현재 한국의 지평 상에서 국방과 관련하여 밀리터리란 애국심이 첨가된 당면과제로써 필요불가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밀리터리라는 영역의 내부는 약육강식이라는 단순무쌍한 시각이 기반이 되며, 오히려 그 단순함 때문에 쉽게 밀리터리의 문제들을 해석하는 방편들이 없지 않아 있다. 그 문제들의 해석에는 고전적인 국방의 방식들도 포함되어 있다. 이 책은 현재 그런 고전적인 국방의 방식들이 무너져가고 있는 일각들을 보여준다. 점점 전쟁의 양상이 저강도분쟁으로 바뀌면서 부담을 떠안고 국력을 투입하는 형태보다는 계륵같은 업무라 판단되면 아웃소싱을 해버리는 면들을 주로 다루고 있다. 힘을 가진 자들이 그 힘을 제공하고 댓가를 받는 역사는 책 중간중간에 표현된 용병집단들의 역사에서도 보다시피 녹록한 무게는 아니다. 다만, 그것은 현재 새로운 개념으로 변화되고 있다. 그 변화에는 이점과 단점들이 있고, 이 책은 그것을 둘러싼 다양한 모습들을 조명하려 노력한다. 삼인출판사의 블랙워터를 다룬 서적과 비교해보면 스펙트럼은 더 풍부해보인다. 저자는 이들에 대해 비판적이지도, 그렇다고 무조건 찬양하는 편도 아니다. 사실 본인이라도, 가족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고액의 봉급에 목숨을 팔고, 자신에게 적대적인 자들을 향해 반쯤은 공포에 사로잡혀 총을 쏴대는 퇴역 군인들의 모습을 무작정 평화주의자들처럼 비판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들의 목숨을 담보로 떼돈을 벌고 있는 회사들과 그들이 가진 생각의 오류, 그리고 그들이 하는 일들의 다양한 층위가 일반의 생각을 넘어서는 위험성을 띄고 있는 부분들에 대해서는 찬찬히 지적하고 있다. 그 위험성이란, 예를 들면 제3세계의 광물자원이익을 노리고 그 나라의 정치를 쥐락펴락하기 위해 사설군사력을 투입하는 형태의 것들도 포함된다. (놀랍게도, 이것은 실제 있었던 일이다)본인도 소말리아 해적에 대한 해군투입 당시, 이런 민간경비업체 혹은 해군력에서의 일정부분 투입이라는 주장을 해본 적이 있다. 다만 계산상에서 금액은 본인이 계산했던 것보다 훨씬 적게 할 수 있었다는게 새로울 뿐이었다. 실제로 현재 한국 선박업체들이 해외경비업체와 5만 달러 정도의 금액으로 계약하고 선박경비를 맡겼다는 뉴스도 보았던 것이 떠오른다. (가격이 너무 터무니없어서 기억이 맞는가 의심갈 정도였는데......다시 검색해보니 비무장에 그냥 연합군에 연락 정도만.......-_-;;; 보통은 10만 달러-20만 달러 정도 가격책정)그 때 당시의 생각이 이 책을 읽은 후와는 그리 같지 않다. 사실 이런 사업들의 위험성들에 대해 국가의 차원으로 어떤 대책을 가지고 있는가를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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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펌]김연아의 멘탈이 보이는 일화들 모음
김연아의 멘탈이 보이는 일화들 모음(스압주의)# 연아 주니어때 전지훈련 인솔해가셨던 코치님 (갑자기 성함이 생각이 안남;)미국 전지훈련을 갔었는데 아침에 아이들 깨우러 숙소에 가니 다른 아이들은 전부 자고 있는데연아는 이미 일어나서 머리까지 싹 빗고 소파에 앉아 선생님 기다리고 있더라~ 레알 놀랬었다고 함.훈련 다 끝나고 아이들은 다들 놀고 있는데 연아가 안보여서 찾아보니 내일 사용할 양말을 빨고 있더라.그때 얘는 다른 애들과 다르다는걸 느끼셨다고....#어머님연아에게 한번도 방치워라, 가방챙겨라..라는 말을 해보신적이 없으시다고....엄마가 말하기전에 연아는 이미 다 해놓음.자기 관리에 있어서는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만큼 철저한 아이가남에 대한 마음은 내가 깜짝 놀랄 정도로 따뜻하다는 것을 느낀 적이 있었다. 한번은 인터뷰 중에 다른 선수에 대한 질문을 받았는데...그 선수의 실수나 빈틈을 답해주길 바라는 질문이 나왔다.연아는 의외로 자신을 낮추고 그 선수를 감쌌다.나중에 인터뷰가 끝난 뒤 내가 물었다. “너 아까 왜 그랬어? 니 장점도 얘기하고, 걔가 잘못한 것도 짚어주지”그랬더니 연아한테 뜻밖의 대답이 날아왔다 “그럼 걔가 뭐가 돼?” 이것봐라. 내 딸이지만 순간 멋있었다. “너, 착하다” 이런 배려는 누구한테 배운 걸까?엄마가 굳이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연아는 어느새 성숙한 어른이 되어 있는 것 같았다. 연아양 어머님 쓰신 책 “아이의 재능에 꿈의 날개를 달아라” P156쪽 中--------------------------------------------------------------------------------------------------------------
2008년 부상중에 진통제까지 맞아가며 출전한세계선수권에서정말 어이없는 편파 판정을 받은 김연아...경기장의 관중들, 피겨 전문가들, 각종 피겨관련 매체에서도2008년 세계 선수권 진정한 금메달은 김연아라고 했었다.저 어이없는 판정 직후 경기장에 온 기자로부터경기내용에 대한 질문을 받게 되는데김연아의 대답은 딱 두마디...경기결과에 만족한다.더 열심히해서 다음번엔 더 좋은 경기 보여주겠다.끝.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다..단 한번의 인터뷰에서도 다른 선수를 자기보다 낮게 본적이 없음.어떤 선수도 다 인정함.심지어 아사다 와 일본선수들 치팅 점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잘못된 점프가 쉬운 점프는 아니다.""그 선수도 정말 많은 노력을 했다."등등 으로 쉴드쳐줌정작 본인은 교과서 점프임에도 편파 판정 당하고치팅 점프 쓰는 선수는 관대한 채점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음--------------------------------------------------------------------------------------------------------------엄청난 승냥이인 누나 덕분에 강제로 승냥이가 된 유동닉입니다^^이번 기부에 훈훈한 뒷이야기가 있어서 올려봅니다~기사에서 연아랑 사진 찍으신 이태리 수사님(공 고미노 수사님)과 어릴때부터 가족같이 지내서 뒷이야기를 들었습니다.한 열흘전에 원신부님께서 서툰 한국말로 한통 살레시오 한국 신부님께서 한통 연아양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워낙 많은 곳에서 기부요청이 들어오니 힘들지 않을까 생각하고 수사님 신부님과 한마음으로 매일 기도했는데 우리 이쁜 연아양이 3일 후에 소리소문 없이 통장에 7,000만원을 입금해주었습니다.생색내거나 하지 않고 조용히 기부하고 싶은 연아의 마음이 느껴져서 한번 감동♥신부님 수사님께서 너무 놀라고 큰 감동을 받으셔서 만나러 가겠다고 하시니 어른들을 오시게 할 수 없다며 직접 찾아오겠다고 해서 또 한번 감동♥진짜 연아는 마음 씀씀이가ㅠ.ㅠ토요일 4시 정도에 방문해서 2시간 가량 정말 행복하게 놀다가 갔다고 합니다.만난지 2시간 만에 신부님 수사님 두분다 승냥이가 되셨습니다ㅎㅎ원선오 신부님은 오늘 아침에 퓨어2통 폭풍 흡입하셨다고ㅎㅎ두분은 승냥이가 되어 오늘 저녁에 수단으로 떠나십니다^^아마도 최고령 승냥이가 될 듯ㅋㅋP.S 천주교 신자분들은 아실텐데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로다♬" 이 노래외에 여러 카톨릭 성가 작곡하신 분이 원선오 신부님이십니다. 어릴때 한국 신부님인줄 알고 있다가 나중에 이태리 분인걸 알고 놀랐던 기억이 있어서 올려봅니다.P.S2 공수사님께서는 19살때 한국에 오셔서 35년 동안 봉사하다가 92년도에 수단에 봉사하러 떠나신 분입니다^^P.S3 못 믿으실까봐 어제 수사님이 받아주신 연아 싸인 인증샷 올립니다^^연아와 두 분 신부님 수사님 많이 응원 해주세요^^출처 : http://gall.dcinside.com/list.php?id=figureskating&no=1241360'피겨여왕' 김연아(22, 고려대)가 남수단에 '김연아 학교'를 세운다.김연아는 지난 2일 오후 5시 서울 신길동 살레시오회 관구관을 방문, '남수단 학교 100개 세우기' 프로그램을 위해 모금활동을 펼치고 있는 원선오 신부와 공 고미노 수사를 만나 7천만 원을 기부했다. 김연아가 기부한 7천만원은 학교 하나를 세울 수 있는 금액이다.원 신부는 지난 5월 21일 남수단 촌락의 작은 학교 100개 건립을 위한 자신의 모금활동을 알리고 이에 도움을 줄 것을 호소사는 편지를 마음에 두고 있던 몇몇 인사들에게 보냈다. 그리고 그 중 한 명이었던 김연아가 직접 원 신부를 방문, 도움의 의지를 전한 것.--------------------------------------------------------------------------------------------------------------위에 김연아가 평창 스페셜 올림픽을 위한 행사로 장애를 가진 어린이들에게 원포인트 레슨을 함(작년 11월)그리로 최근 E1 봉사단 서포터 자격을 다시 같은 곳을 찾음.(12년 10월)평창 동계 스페셜 올림픽홍보, 광고 촬영, 폐막식 출연 다 노개런티이 사진은 내가 유독 기억에 남는 일화라 가져옴공항에서 김연아 팬 분이 연아에게 사진 함께 찍어주겠냐고 부탁함.옆에있던 곽민정은 팬분이랑 연아 언니 사직찍으라고 비키려함.(팬분은 민정 선수 같이 찍어도 좋았지만 채 말을 하기도 전에 민정 선수가 알아서 비켰다고함연아 팬분 배려해서 빠지려 한듯)그러자 김연아는 말 없이 같이 찍자며 곽민정 옷 잡아당기며 끌어옴UN 본부 평화의날 행사에 참가한 김연아스티비 원더 연설하는데 마이크가 말썽옆에 앉아있던 연아가 도와줌근데 그냥 막 도와주는게 아니라뒤에 있던 스티비 원더의 비서에게 동의를 구하고 도와줌...마음만 앞서서 도와주면 장애인들이 불쾌하게 여길수 있는 부분인데동의 구하고 돕는 부분이 인상깊었음b나중에 연느 소개될때 스티비 원더 폭풍박수~복지관 아이?가 손인가 발을 크게 다쳤는데 수술비가 없었다고함당장 수술하지 않으면 잘라내야하는 상황이었는데예전에 연아선수가 어린이들 치료비로 써달라고 맡겨둔 돈이 있어서 그돈으로 수술했다는 얘기(캡쳐해둔게 있었는데 안보인다;;)맥앤로건의 디자이너 로건이 말한가장 기억에 남는 스타는 김연아그 이유는 타임 100인 파티 참석할 드레스를 주문할때천안함 사건이 일어났었을 때였음김연아는 '화려한것 보다도, 검은색으로 해달라' 고 요청로건 씨는 정말 많은 감동을 받으셨다함.평창 올림픽 유치 때도 마찬가지어른들이 많으시니 튀는 옷은 아니었으면 한다고 요청했다함.그랑프리 파이널 우승, 세계선수권 세계 신기록 수립 이후에겨우 얻은 국민은행 스폰서와 CF.이마저도 전 소속사의 방관으로 김연아측은 국민은행의 제의를 모르고 지나칠 뻔 했음.그리고 받은 돈으로 가장 먼저 한것은 후배들 훈련금 지원.호의를 베풀면 권리인줄 아는 몇몇 선수와 부모들이 누구는 주네 안주네 하며후원받은 선수 따시키는 상황도 있었지만김연아의 후배양성은 지금까지 활발히 진행되고 있음올댓스포츠에 소속된 선수들 역시 비인기 종목의 유망한 선수들.지소연, 김자인, 곽민정, 김해진, 김진서, 천송이SBS 예능 키스 앤 크라이 도 김연아 본인은 극구 반대 했지만결국 피겨스케이팅을 알리기 위해 출연 결정지금까지 작은 피겨 전용 링크 지어준다한 곳은 많았지만단 한곳도 이행안함.제대로된 훈련장이라도 마련하려는 김연아만 동분서주 중...키앤크 참여 한 것에 이 이유도 크게 작용했음본인을 그렇게 폄하하고 공격하던 일본에 대지진이 났을때상금 전액을 지진 피해 어린이를 위해 기부.김연아의 조건 없는 선행에 일본인들이 당황함;;글케 욕했는데도 '어린이들 도와주세요' 하면서 선뜻 상금 내놓는거 보니 멘붕평소 잘 안하던 트위터에 간간히 글을 올리는 것 조차제 3세계 어린이들의 고통을 알리며 유니세프 후원 호소 하는 글이 대부분알려진것만 최소 25억종종 알려지는 비공개 기부또한 합하면 30억원 이상을 기부 추정.직접 기부한것을 제외 하더라도공익광고, 자선 행사, 홍보대사 등으로 활동하고기업 이름으로 후원한것 까지 합하면감히 게산할 엄두도 안날 금액이 나올듯....세계 여성 스포츠 선수 중 기부순위 5위나이도 가장 어리고 유일한 아마추어 현역 선수임.실력도 실력이지만 그동안 김연아가 보인 선행은우리나라 보다는 외국에서 더 알아주는듯유니세프 국제 친선대사 임명된것만 해도...최연소, 동계스포츠 선수 최초, 여성선수 최초로 선정된거거든하버드 대학교 자선 아이스쇼에 선 김연아주최 측에서 별 기대 없이 김연아에게 출연 요청을 했는데김연아는 선뜻 출연하겠다 해서하버드 측에서도 정말 많이 놀라고 고마워함(출연에 응하는 탑싱들이 별로 없다고 들었는데 잘 기억이 안난다 ㅠㅠ)김연아를 지켜보다 보면 신기한게부당한 일을 당해도 남탓 안하고 그것마저 묵묵히 받아들임.남 탓 하는걸 한번도 본적이 없어.지금까지 공식적인 행사 참가 한거 보면자선행사 같이 나누는 행사 참여한게 대부분이고알게 모르게 여기저기서 김연아 도움 받은 곳도 많음.이것도 캡쳐짤이 있는데 안보이네해외 김연아에 대한 칼럼? 에서김연아는 자신의 가장 가치있고 인정받는 순간을개인의 이익이 아니라 공적인 일로 베풀고 있다고폭풍 찬양해외에서 괜히 유스 올림픽, 스페셜 올림픽, 유니세프 홍보대사 세우는거 아님그만큼 실력, 멘탈 모두 인정받고 있는거.일반 유명 스포츠 선수를 넘어서서 한 시대를 이끌어 가는 모범적인 인물이 된 것 같음.
검선작성일
2013-06-27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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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피터 싱어에 대한 궁금증 ...
피터싱어는 모르겠고, 오래전에 칸트 본적 있는데, 것도 실천이성비판이 아니라 순수이성비판 개론좀 봤드랬죠 ... 암턴 제가 궁금한건 .. '동물 보호' 라고 했을 경우, 제가 제일 먼저 떠오른 건 .. '타자'였습니다 .. 우선, 칸트가 말한 인식할 수 없는 '물' 자체가 되겠죠 .. 레비나스의 '타자의 윤리' 를 떠올려도 좋고요 .. 암턴, 그게 '얼굴' 을 맞대고 이야기할 수 있는 '타인' 일 수도 있고, 그 이외에 '사물' 일 수 도 있을텐데,피터싱어의 경우는 '동물' 이 되겠네요 .. 그런데, 피터싱어에 대한 논증(노동쟁이가 올린 글 대충 봤을 때 ..) 에는 이런 타자 인식에 대한 철저한 고증이 없는 것 처럼 보입니다. 그럼 질문 들어갑니다 ..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것은, 우리의 감관을 통해서 들어온 감각의 종합 .. 칸트는 이걸 선험적 뭐라 그랬던거 같고 .. 후설의 말대로라면 노에시스를 통한 노에마쯤 되겠네요 .. 암턴, 결국 우리는 그 '물' 자체에는 도달하지 못합니다 ..(뭐, 후설은 '현상학적 환원'을 통해서, 하이데거도 뭔가 비슷한 방법으로 '존재' 가 드러난다 했지만, 이건 거의 보살 수준의 선문답같은 거라 일단 pass .. ) 결국, '타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낯선 무엇이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타자를 함부로 판단하거나, 취급하거나 해서는 안된다는 레비나스의 '타자의 윤리'는 근거를 얻는 샘이 되겠죠 .. 이렇게 존중받는 타자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해 여성해방, 성적소수자, 제 3세계 등등의 구호가 일어날 수 있는 철학적 받침이 되는 거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피터싱어가 뿌리를 두고 있는 인식은 무엇인가요? '감응력' ?? 노동쟁의가 쓴 글만 봐서는 이 부분이 해결이 안되네요 .. 고수님들의 좋은 의견 부탁드립니다 ... ps] '노동쟁의' 는 책도 읽어본 놈이니까, 알고 있다면 필히 댓글 달아라 ~!! 꼬우면 말고 ㅋㅋ
나는덥다작성일
2013-04-22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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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노무현의 정치노선에 대한 사회과학적 분석-신중도좌파, 사회자유주의
노무현의 정치노선에 대한 사회과학적 분석-신중도좌파, 사회자유주의 도대체 어떤 개혁인가? 어떤 사람은 노무현 대통령이 개혁적이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이라크 파병, 대북송금 특검, 철도노조 파업진압, 새만금 및 부안 환경문제 등을 놓고 노무현이 반개혁적이라고 비판한다. 그것은 개나 소나 다 개혁이라는 단어를 쓰면서 사실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의 개혁을 상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혁이란 현재 존재하는 현상을 뭔가 좋은 방향으로 점진적으로 바꾸는 것이다. 점진적이라 함은 혁명처럼 일시에 철저하게 바꾸는 것이 아니라 장시간에 걸쳐 조금씩 바꾸어 나가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좋은 방향’이란 철저하게 가치지향적이고 따라서 주관적인 것이다. 즉 개혁에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극우적 관점에서는 군사쿠데타가 하나의 정의로운 혁명이요 극우파가 선거를 통해서 정권을 장악하고 하나씩 극우지향의 개혁을 해나가면 그것이 그들의 입장에서는 개혁이다. 그들에게는 극우적, 파시스트적 사회를 만드는 것이 ‘좋은 방향’이다. 극좌적 관점에서는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프롤레타리아 무장봉기가 하나의 혁명이요 그렇지 않고 공산당, 사회당이 선거를 통해서 정권을 잡고 기업들을 국유화 또는 노동자 소유화하고 무상의료, 무상교육을 하는 것이 ‘좋은 방향’으로 개혁하는 것이다. 이처럼 개혁을 논하기 위해서는 ‘어느 방향’으로의 개혁인가가 분명히 논의되지 않으면 서로 같은 단어로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지고 헛깨비들과 싸우게 된다. 그 렇다면 이 ‘어느 방향’을 어떻게 구분해야 할까? 이것은 자기선언적이어서는 안되며 비교정치학적으로 보편성을 띤 범주이어야 비교가능하다. 즉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정치적 범주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일부 정파는 ‘한민족단군사상당’이라는 ‘자칭’ 정치노선을 가질 수 있으며, 또다른 일부 정파는 ‘혁명적 국제사회주의노동자당’이라고 스스로를 정의하지만 우리는 정치학계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몇가지 주요한 이슈에 대한 견해 여부로 극우근본주의 정당 또는 극좌파 (트로츠키주의) 정당이라고 규정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세상에는 그 이름만큼의 정치노선 숫자가 존재하게 된다. 그렇다면 어떠한 이슈들이 그러한 범주를 구분하는데 유용한 기준이 될 수 있을까? 1. 생산수단 즉 자본의 소유권 귀속 관점 2. 자유로운 매매거래가 가능한 시장경제에 대한 관점 3. 다른 사상의 소유자의 민주주의적 제권리(언론, 집회, 시위, 결사의 자유)에 대한 관점 4. 의회선거 제도에 대한 관점, 법질서 옹호에 대한 관점 5. 정치/종교 분리에 대한 관점 6. 사회구성원의 민족적/인종적 순수성 7. 미국에 대한 태도 8. 경제 및 문화의 개방성에 대한 관점 9. 경제분야에 있어서 국가의 개입 또는 기업의 자유 정도에 대한 관점 10. 복지분야에 있어서 국가의 지원 또는 개인의 책임에 대한 관점 11. 특정계층, 특히 상위소득계층의 세금제도에 대한 관점 12. 환경문제에 대한 관점 13. (한국에서는 독특하게 ‘통일’에 대한 관점이 추가될 수 있다.) 이러한 몇가지 이슈에 대한 견해를 근거로 1. 종교적 근본주의 A. 이들은 정치/종교가 미분리된 상태에서 종교적 수반이 거의 신과 같은 독재적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특징이다. 법은 중요하지 않으며 종교교리가 곧 법이고 나아가 종교지도자의 말이 곧 법이다. 민족적 인종적 순수성도 강조하지만 그 내부에서도 특정 종교적 분파에 대한 신앙 여부를 가장 중요시한다. 환경에 별로 없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신의 섭리를 이유로 순식간에 표변할 수도 있다. (한국에서 통일은 종교적 교리에 근거한 통일이어 한다고 본다.) B. 시아파가 통치하는 이란이 대표적인 경우이며 정당의 형태는 아니지만 알 카에다 역시 마찬가지이다. 한국에도 대선시기에 일부 이러한 후보들이 출마한다. 2. 극좌파 또는 스탈린주의, 구(舊) 좌파 A. 이들은 모든 자본/기업/생산수단을 국유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의회는 단지 부르주아 계급독재의 도구로써 오직 무장혁명을 통해서 정권을 탈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노선에 의해 다른 정치세력 특히 부르주아 정당과 지지자들의 민주적 제권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법보다 계급투쟁이 모든 것에 우선한다. 모든 생활용품과 모든 서비스는 무상으로 국가가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겉으로는 국제주의를 외치지만 실제로는 민족적 인종적 순수성 또는 특정 민족의 지배적 지위를 강조하거나 폐쇄적 민족주의를 주장한다. 환경에 대한 관심은 전혀 없으며 경제가 무조건 우선이다. 미국을 제국주의자로 규정하며 무력으로 궤멸시켜야 한다고 본다. 통일은 단계적으로는 연방제를 거쳐서 궁극적으로는 북한식 사회주의 통일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내심 생각한다. 또는 정반대로 북한의 김정일 및 조선노동당 정권을 무너뜨리고 남북한 모두 트로츠키주의적인 혁명적 국제노동자당이 지배하는 통일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본다. B. 시기적으로는 20세기 전반 공산당과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한 시대를 풍미하였다. 90년대초반 동구사회주의 몰락이후 현재로는 북한, 쿠바 등과 제3세계의 일부 극좌무장집단들이 대표적이다. 한국에는 과거 80년대의 소위 운동권, 현재는 주사파, 전국연합, 노동자의 힘 등이 대표적 사례이다. 3. 신좌파 또는 민주사회주의 노선 A. 이들은 생산수단의 소유와 시장 문제에 대해서 애매한 태도를 취하는데 현재는 대체로 은행 또는 금융기관을 통한 대자본/주요산업분야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주장하거나 유고식 노동자소유경영제 또는 노동자 주식소유제 등을 주장하며, 중소규모의 사기업과 시장은 일단 인정하되 강한 불신을 가지고 국가가 경제를 주도해 나가야 한다고 본다. 생활용품은 개인이 구매 가능하지만 의료/교육/교통/통신/방송 등 서비스는 국가소유로 무상으로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선거에 의한 의회민주주의, 다른 정치사상 소유자에 대한 민주적 제권리를 인정하지만 아직 체질적으로 체화시키고 있지 못하다. 아직도 계급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법질서 위반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미국을 제국주의자로 규정하고 축출해야 한다고 본다. 북한 체제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보지만 통일을 위해서는 일단은 함께 할 대상이라고 본다. B. 기존 서유럽의 공산당 내 강경파, 동유럽의 개혁공산당들이 대표적 사례이다. 한국에서는 현재 정치적 노동운동권의 주류를 형성하며 민주노동당의 ‘공식적 정치강령’이 이러한 노선의 대표적 사례이다. 사회당은 구좌파와 신좌파가 기묘하게 섞여 있는 정당이다. 4. 구(舊)중도좌파 또는 기존 사회민주주의 노선 A. 이들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와 시장을 인정하고 기업/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인정한다. 다만 국가기간산업 특히 의료/교육/교통/통신/방송 등은 국가가 소유하되 저렴한 가격으로 제공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각종 사회보장수단 특히 실업수당을 국가가 제공해야 한다. 경제정책적으로는 케인즈주의를 신봉하며 성장보다는 분배정의를 선호하고 노사정 조정기구 등을 통하여 노동조합의 의견을 상당히 반영하고 완전고용을 지향한다. 선거에 의한 의회민주주의, 다른 정치사상 소유자에 대한 민주적 제권리를 인정한다. 다른 민족 및 인종에 대해서도 가장 포용적이다. 타국에 대한 인도주의적 지원 및 민주주의 정치체제 확립을 위해 지원한다. 환경을 가장 옹호하며, 장애인, 동성애 등 소수인권을 매우 중시한다. 미국이 비록 제국주의는 아니지만 패권주의 국가로써 국제연합 등의 기구를 통해서 그 힘의 사용을 통제해야 한다고 본다. 북한체제에 대해서는 상당히 부정적이지만 대화정책을 지지하며 현재의 북한정권을 함께 할 대상이라고 본다. 통일도 중요하고 평화도 중요하다고 본다. B. 20세기 중/후반의 서유럽의 사회민주당들이 대표적인 예이다. 20세기 중반 이후의 미국 민주당 역시 여기에 속한다. 한국에는 이 사례가 드물다. 민주노동당 중앙간부들 다수파 및 주대환 등 일부 지구당 위원장들은 암묵적 또는 명시적으로 사회민주주의를 천명하고 있다. 또한 전투적 노동조합주의 운동세력 역시 여기에 가깝다. 과거 운동권 출신의 소장파 민주당 국회의원들 중 일부, 특히 신주류 중 일부도 이러한 성향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5. 신중도좌파 또는 사회자유주의 노선 A. 이들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와 시장을 인정하고 기업/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인정한다. 국가기구 및 국영기업의 비효율성을 인정하며 국가기간산업, 의료/교육/교통/통신/방송 등 분야에 있어서 시장경쟁 시스템의 도입, 민영화 내지는 민간부문과의 협력을 지지한다. 정리해고 등 노동의 유연성을 지지하며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지지한다. 경제성장을 우선시하지만 이는 그것이 빈곤문제 해결 및 분배정의를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사회복지분야에 있어서 기존의 시혜적 복지정책은 반대하지만, 새로운 산업구조에 적응할 수 있도록 개인의 경제능력을 향상시키는 방향의 생산적 복지에 있어서 정부 및 공적 자원의 역할을 강조한다. 작은 정부가 아니라 적극적/효율적 정부를 주장한다. 시장의 규율원칙을 강조하며 독점 등 불공정경쟁의 제재, 통화정책 및 산업정책을 통한 거시경제에 대한 정부의 조정자 역할 역시 여전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환경보호를 지지하지만 그것이 현지주민들의 생활수준향상과 적절한 선에서 타협되어야 한다고 본다. 경제개방 및 무역자유화를 지지하며 사회 모든 분야의 글로벌라이제이션을 지지하되 투기자본은 통제해야 한다고 본다. 외교에 있어서도 민주주의 정치체제의 교류확산, 국제협력기구의 강화를 지지한다. 미국에 대해서는 공화당의 독선적 대외호전주의 노선에 반대하지만 국제협력기구를 통한 민주당의 인권옹호 개입노선에 대해서는 지지한다. 정치적 제도 및 민주적 권리 분야에 있어서는 중도좌파 구파 즉 사회민주주의 노선과 거의 비슷하지만 법질서의 옹호 측면을 상대적으로 중시한다. 북한의 반인도적인 김정일 정권은 궁극적으로는 다른 세력으로 바뀌어야 하지만, 한반도 평화체제의 유지를 위해서 무력적인 방법은 반대한다. 통일보다 평화가 더 중요하다. B. 영국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 독일 사민당의 슈뢰더, 미국 민주당의 클린턴-고어 등이 대표적 사례이다. 한국에서는 김대중, 노무현 및 민주당 신주류의 일부, 유시민의 개혁당이 해당된다. 6. 구(舊) 중도우파 또는 기존 자유민주주의 노선 A. 4번의 중도좌파 구파의 이란성 쌍둥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적 측면(민주적 제권리, 의회민주주의 등)에서는 대부분 중도적 제정파(4, 5, 7)와 같으며, 경제적 측면에서 국가의 개입을 줄이되 통화정책 등을 통해서 거시적으로 통제하고 노동조합/빈곤층보다는 대기업/자본가/고소득층의 이익을 옹호한다는 점이 다르다. 분배보다는 경제성장을 선호한다. 그러나 재벌의 반독점 등 불공정경쟁에 대한 제재, 시장의 규율원칙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며 사회의 전반적 안정을 중시하므로 노동조합과의 협상 또한 중시한다. 방송/우편/통신/에너지/철도/항공 등 주요 국가기간산업에 대해서는 안보를 이유로 국가소유통제를 인정하며 사회안정을 위해서 국가가 어느 정도의 사회보장을 제공해주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한다. 국제적으로는 자국이익 중심적 정책을 지지하며 보호무역관세 및 자본유출입 통제가 대표적 대외정책이다. 미국은 자유민주주의의 지도적 국가이자 우방국가이지만 경제영역에서는 서로 충돌할 수도 있다. 북한체제를 부정하지만 현실적으로 협상의 대상이라고 본다. 궁극적으로 북한체제는 무너져야 한다고 본다. B. 대체로 기존 서유럽의 기독민주당 및 자유민주당 계열, 대처 이전의 영국 보수당, 20세기 후반의 미국 공화당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한국에서는 70-80년대의 군부정권에 대항하던 민주당 상당수 의원들, 그리고 현재의 민주당 상당수 의원들, 한나라당 소장파 일부, 경제관료 또는 학자 출신의 한나라당 국회의원들 일부가 대표적 사례이다. 7. 신중도우파 또는 신자유주의 노선 A. 정치적 측면에서는 4, 5, 6번과 같다. 주요 국가기간산업을 포함하여 사회의 전반적인 자유화 및 시장시스템 도입을 주장한다. 의료/교육/방송/통신/우편/에너지/철도/항공은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국방 및 교도소까지도 민영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제성장을 우선시하지만 국가주도의 경제성장이 아니라 기업의 자유로운 의사결정에 의한 경제성장을 주장하며 분배는 시장원칙에 자연스럽게 맞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회복지를 전면 축소하고 빈곤층 개인의 노력과 책임 내지는 종교/자선단체의 역할을 강조한다. 국가는 최소한의 질서유지만 하면 되며 세금감면 등을 해야 한다. 노동조합의 의견을 무시하며 필요하면 강력한 탄압도 불사한다. 자국의 일부 산업에 불리하다고 하더라도 국가간 관세철폐 및 무역자유화를 지지하며 자본유출입 통제를 감지하는 금융자유화를 주장한다. 국제협력기구를 통한 대화와 조정보다는 힘에 의한 원칙의 관철을 선호한다. 미국은 세계 민주주의 전선의 최전선에서 다른 나라들을 대신해서 희생을 치르며 싸우고 있다고 본다. 북한정권을 미국의 정확한 무력타격을 통해서 최소한의 피해로 붕괴시킬 수 있다고 본다. B. 1980년대 및 90년대 대처 부인 이후의 영국 보수당 및 레이건 이후의 미국 공화당(부시 등 매파)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한국에는 90년대 이후 정치에 입문한 기업인 및 경제학자 출신의 한나라당 및 민주당 의원들이 대표적 사례이다. 8. 수구적 우파 또는 수구보수주의 노선 A. 퇴행화된 우파로 자유주의적 원칙보다는 자기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상대적으로 봉건적 색채가 짙은 정치노선이다. 말로는 좌파 등에 대한 민주적 제권리를 인정한다고 하지만 자신의 이익에 따라서 불법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불공정경쟁의 금지 등 시장의 규율원칙을 지지하기보다는 자신을 재정적으로 후원하는 대기업의 이익을 적극 옹호하며 법적 통치보다는 인적 통치를 선호한다. 미국은 혈맹이며 미국의 이익이 곧 자신의 이익이라고 본다. 통일과 관련해서는 북한체제를 부정하지만 현실적 협상의 대상으로 본다. 궁극적으로는 붕괴되어야 한다고 본다. B. 과거 서유럽의 가톨릭 계열 정당들, 기타 제3세계의 우파 정당들이 여기에 속한다. 한국에서는 과거 50년대 자유당, 6-70년대 비(非)군부출신 공화당 의원 상당수가 여기에 속하며 군부에 저항했던 민주당 구주류도 집권후에는 이러한 경향이 강화되었다. 현재 한나라당내 민정당 구락부가 대표적 사례이다. 정당은 아니지만 조중동 역시 여기에 포함된다. 9. 극우파 또는 파시스트 노선 A. 개인적 우상숭배의 경향이 있으며, 반대파에 대한 일체의 민주적 제권리를 인정하지 않고 폭력적으로 탄압하며 살인도 서슴지 않는다. 소수자 및 다른 인종에 대해서 우월성을 주장하며 인종청소를 선호하고,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타국에 대한 무력도발도 서슴지 않는다. 자신을 후원해주는 대기업들의 이익을 보호해주지만, 자신의 요구를 어길 시에는 대기업이라도 가차없이 보복한다. 필요하면 기간산업의 몰수 및 국유화 조치도 행한다. 미국이 지원해주면 미국을 혈맹으로 간주하지만 미국이 인권문제를 내세워 개입하려고 하면 언제든지 반미적 민족주의 국가가 될 준비가 되어 있다. 통일은 무력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하루빨리 김정일 정권을 타도해야 한다고 본다. B.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당(나찌), 뭇솔리니의 파시스트당, 제3세계 우파독재정권들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한국에서는 박정희 등 5.16 세력, 전두환, 노태우 등 신군부, 민정당 및 민자당, 한나라당 주류 중 특히 정보기관 및 군부 경력이 있는 자, 예를 들어서 정형근, 장세동 등이 대표적 사례이다. 정당은 아니나 극우단체들도 여기에 포함된다. 조갑제도 여기에 당연히 포함된다. 좀 길어졌지만, 자, 이제 개혁을 논해보자. 도대체 어떤 방향으로의 ‘개혁’인가? 노무현의 지지자들이 왜 괜히 분열되겠는가? 배신 당했다고? 아니다. 원래 정치적 노선이 달랐지만 한나라당 즉 수구우파+극우파 연합에 대항하기 위해서 중도 제파 연합(신중도우파+구(舊)중도우파+신중도좌파+구(舊)중도좌파)이 노무현이라는 이름 아래 대회전을 벌인 것이 2002년 대선이었다. 문제는 이때까지 중도 제파를 대변하는 정당이 부재하였기 때문에 저항적 지역주의 세력인 호남지역의 수구우파+구 중도우파가 주도하는 민주당이라는 틀을 통해서 반한나라당 대연합을 형성하였다. 이러한 중도 제파 연합이 가능했던 것은 중도 제파가 공유하는 원칙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민주적 제권리의 보장, 정치권력을 이용한 사리사욕 추구에 반대하는 상식적 합리주의, 중산층 서민 지향성이다. 이러한 대항적 구심력은 선거승리로 인해 약해지면서 원심력이 작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현재는 반한나라당 대연합 내부에서 치열한 권력투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중에서 주류는 역시 김대중, 노무현으로 이어지는 신중도좌파이다. 김대중이 신자유주의자이지 무슨 신중도좌파냐구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국제적 정치노선의 범주들을 까맣게 모르거나 일부러 무시하는 구좌파, 신좌파들이다. 신자유주의자 즉 신중도우파와 신중도좌파의 차이점은 여전히 정부의 적극적 역할과 사회복지에 있어서 국가의 자원제공이다. 신자유주의자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정부개입을 배제하고 모든 기업규제를 완화하고 사회복지감축을 통해 개인을 무방비상태로 던져놓는다. 하 지만 신중도좌파는 소비자의 이익을 신장시키기 위해서 필수적 정부개입을 지지하고 정부가 시장규율을 확립해야 하며 이를 위한 공정거래위 등의 규제는 필요하며 사회복지분야에서도 정부가 공적 자원을 투입하여 실업자나 개인들이 새로운 산업구조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조력자의 역할을 하는 생산적 복지, 외환시장에의 개입을 통한 적정환율의 유지로 국제시장 가격경쟁력 유지 등이 신자유주의자와는 결정적으로 다르다. 김 대중 대통령의 노선,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의 노선은 일부에서는 중도우파라고 잘못 알고 있지만, 전세계적 정치노선 범주상으로는 신중도좌파가 가장 정확한 개념규정이다. 즉 클린턴, 고어, 토니 블레어, 슈뢰더 등의 노선과 일치한다. 미국과 유럽의 언론들이 노무현을 중도좌파 대통령이라고 묘사한 것은 세계적 기준과 관점에서 분석하였기 때문이다. 다만 한국에서는 레드 콤플렉스가 강하고 또 이를 우익집단과 조중동 언론들이 정치적으로 이용해먹기 때문에 (최병렬도 ‘중도좌파’라는 단어 대신에 그냥 일방적으로 ‘서구적 의미에서의 <좌파>’라고 은연중에 매도하는 것이다.) 일단은 중도파라고만 하는 것이지, 사회과학적 분석틀을 엄격히 적용하자면 신중도좌파가 올바른 개념규정이다. 서민출신의 김대중 대통령은 민주화 투쟁시기에는 구중도좌파(아직 신중도좌파가 없던 시절이기도 하지만)적 사회민주주의적 정치인이었으나 97년 집권후 즉각적으로 세계적 변화의 조류를 감지하고 ‘생산적 복지’ 등의 정책을 만들어내어 세계적인 신중도좌파의 대열에 합류하였다. 노동운동을 지원하던 인권변호사 노무현 대통령 역시 민주화 투쟁시기에는 대체적으로 구중도좌파 즉 사회민주주의적 지향성을 강하게 가졌지만 일단 세계경제의 현실과 맞닥뜨리면서는 신중도좌파 노선으로 즉시 전환한 것이다. 이미 선거운동 과정에서 토니 블레어의 신노동당 노선에 대해서 찬동을 표시하기도 하였다. 문제는 이들 정치지도자는 이러한 문제의식과 지향을 체득하고 실천하려고 하고 있는데 아직 그 내용과 의의를 제대로 파악한 정치인들과 참모들이 태부족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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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스크랩했던 글인데 얼추 잘 맞음
노무현 대통령이 가고자 했던 방향이 제3의 길 쪽이 아니었나 라고 생각되기도 하고
임기 말년에 책을 한 권 추천했었는데
'이제 당신 차례요, Mr.브라운' 임
사서 본 사람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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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나꼼수> 보며 '낄낄' '씨바' 그럼, 세상이 바뀌니?
알립니다, 자본주의가 오늘 새벽 마침내 자살을 하였습니다!?온 세상이 뒤숭숭하다. 그리스와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 국가들의 재정 위기를 둘러싼 혼란이 그렇고 뒤이어 터져 나온 유로존 붕괴를 둘러싼 흉흉한 예언이 그렇다. 이제 자본주의의 위기는 유럽으로 불똥이 튀었고, 사람들은 짐짓 "너마저" 외마디 비명이라도 지를 듯한 태세이다. 그 덕에 이제 자본주의의 위기는 거의 막바지에 이른 듯 보인다.그도 그럴 것이 2008년의 금융 위기 이후, 우리는 마치 자본주의의 부고장이 조만간 도착할 것 같은 착각이 들 지경이 되었다. 거의 날마다 자본주의의 위급을 알리는 소식이 도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가 불쑥 나타나 결국 자본주의의 숨이 끊어졌다고 말하면 곧이 믿기라도 할 태세이다. 그러나 그 속에는 은밀하게 "설마 그럴 리가 있겠어?" 하는 외설스러운 냉소가 숨어 있음을 부인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자본주의가 이런 식으로 더 이상 지탱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렇다고 그것이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역시 거의 없다. 이 부조리한 모순적인 확신보다 더 우리가 처한 세계가 무엇인지 잘 말해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기괴한 처지에서 벗어나 자본주의를 넘어설 좌파의 갈 길을 찾자는 것이, 지금 소개할 책 <자본주의와 그 적들>(한상연 옮김, 돌베개 펴냄)의 목표이기도 하다.자본주의가 위태롭고 결국 막바지에 이르렀을지도 모른다는 소식이 반가운 일인 것만은 절대 아닐 터이다. 지난 수십 년간 자본주의의 패악에 수많은 이들이 손사래를 쳤다. 그러면서도 자본주의는 그 어느 때보다 이렇다 할 저항에 직면한 적이 없었다. 외려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지금 당장 자본주의가 주저앉으면 그것이 더 큰 재앙이 되지 않을까 노심초사해야 할 형편이 되었다.세상은 자본주의가 무너진 자리에서 그로부터 벗어날 이렇다 할 플랜을 가지고 있지 않다. 외려 자본주의의 위기는 온갖 난폭하고 사악한 극우 세력이 발호할 기회를 줄 것이라는 시나리오가 더 그럴듯해 보인다. 자본주의의 위기가 곧 혁명의 서곡이 된 적은 거의 없다. 아니 전연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본주의를 위협한 정치적인 저항과 혁명은 외려 자본주의가 가장 순조롭게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시대에 일어난 경우가 많았다. 적어도 지난 시대의 기억은 그렇게 말해준다.자본주의의 위기는 무엇보다 노동자 계급을 비롯한 가난한 이들에게 가장 가혹한 시절을 견딜 것을 강요한다. 반면 자본가 계급에게 사정은 다르다. 채권이 날아가고 주식이 휴지조각이 되어버리며 주변의 조롱을 걱정해야 할 처지가 될지라도 자본가 계급에게는 그것은 그리 견디기 힘든 시간만은 아닐 것이다. 그들은 자본의 운동을 보장해 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할 것이다.그렇다면 자본주의의 위기는 그 자신에게는 호재이다. 대충 돈이 안 되거나 손해만 보는 쪽은 정리하고 이윤을 되살릴 수 있는 길을 찾아 거듭나면 되는 것이다. 그 비용과 고통은 상관할 바가 없다. 그것은 노동자 계급과 빈곤한 계층들이 모두 떠맡아줄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자 계급이 온전히 먹고 사는 데 지불해야 할 몫은 어차피 국가가 떠맡아왔다. 복지니 뭐니 하는 것이 그런 것이다. 그리고 그 몫은 자본가 계급들을 언제나 성가시게 한다.자본가들은 국가의 빚부터 갚아야 경제가 살아날 것이라 공갈 협박을 늘어놓을 것이다. 한때 미덕이던 재정 적자는 지금 경제의 적이 되었다. 그래서 '긴축'이라는 슬로건은 어느 나라에서나 자본이 들이미는 카드가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게 호락호락 자본의 뜻대로 되지는 않는다. 노동자와 민중은 거세게 저항하는 중이다.그러나 그 저항은 자본이 응당 떠맡아야 할 책임을 나눠 가지라는 충고를 건네는 데 머물 공산이 크다. 우리는 문제의 근원을 해결할 수 없을까. 우리는 그 이상을 할 수 없는 것일까.인정사정 볼 것 없는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와 그 적들>을 꿰는 물음은 아마 그런 것일지 모르겠다. 이 책은 그런 물음을 배경으로 북미 좌파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모아놓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며 처음 알게 된 미국의 공영 라디오 방송 KPFA의 프로그램 가운데 <어겐스트 더 그레인(Against the grain)>이란 것이 있다고 한다. 이 책은 그 프로그램에서 진행했던 인터뷰를 갈무리해서 책으로 펴낸 것이다.그런 사정을 알고 나면 쓴맛을 다시지 않을 수 없다. 대안적 인터넷 미디어의 모범이자 대세인 것처럼 간주되는 <나는 꼼수다>가 생각나서이다. 이 자리에서 <나는 꼼수다>에 시비를 걸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시쳇말로 이런 것이 지금 우리의 운동 문화를 대표하는 징후라면 생각은 조금 착잡해지지 않을 수 없다.운동이 미디어 이벤트에 좌우되고 이따금 "아, 씨바, 열 받아" 하는 기분에 쏠려 거리에 나가서 한번 기분 전환을 하는 일이라면, 그것은 차라리 안하느니만 못한 일이라 해야 옳다. 그것이 운동에 득이 될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코앞에 닥친 정치 일정 때문에 지지율을 끌어올리려면 뭔들 못하겠느냐는 심정은 치졸하다 못해 처참하다."떨거지" 소리까지 들어가며 곁에 둘러앉아, 조금이라도 인기의 혜택을 누려보겠다는 생각은 아무래도 속을 쓰리게 한다. 세상을 바꾸는 일이 취미 생활이라면 모를까, 제가 먹고사는 문제를 깊이 헤아려 목숨 걸고 올인까지 해봐야 하는 일이라고 보자면, 운동은 달라져야 한다. 세간 인심을 무시하자는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것을 바로잡을 용기도 역시 있어야 하지 않을까.미디어는 생각을 대신해주는 것이 아니라 생각 좀 더 해보시라고 권하는 일을 해야 하는 게 맞다. 그러나 어떻게 된 게 우리를 둘러싼 사정은 자꾸만 거꾸로 돌아가는 듯하다. 제법 비판적이라 하는 미디어들이 하는 일은 정작 운동을 도모해야 하는 주인공들을 들러리로 내세울 뿐이다. TV가 하는 일은 더 적나라하다. 세계 어디에서도 보기 힘들 만큼 엽기적인 토착 다큐멘터리인 "휴먼 다큐"란 것이 한국에는 있다.이 프로그램들은 황금시간대를 떡하니 점령하고, 맥없이 비참한 삶에 뒤척이는 이들을 시정(詩情) 가득히 비춰준다. 거기에서 비춰지는 이들의 삶은 모두 눈물겹다. 눈물겹지 않으면 보이스오버가 나서서 눈물을 쥐어짜라 부채질한다. 그래서 화면 속의 낯들은 절대 대들고 난리를 피울 위험이 없는 무력하고 안전한 피해자 꼬락서니로 전락한다.어지간한 "깡"이 아니면 눈물을 쏟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서 누가 우리 인생을 이렇게 만들었는지 잊지 않을 것이라고 두 눈 부릅뜬 목소리는 찾을 수 없다. 그럴 수밖에. 가난한 이들은 온정의 손길을 기다리거나 기업의 사회 공헌 활동을 위해 카메라 앞에 설 준비가 된 자원봉사자의 방문을 고대할 일만 남았기 때문이다. 노동자 계급과 빈곤한 자들은 자본의 "순한 양"인 한 얼마든지 미디어에 대서특필되어도 좋은 일이다.그렇기 때문에 이 책에서 나올 만한 목소리를 우리 주변에서도 들을 수 있을까 고개를 갸웃해보면, 답은 비관적이다. 물론 미국과 캐나다의 좌파에게 그런 시새우는 심정을 앞세우는 것은 어이없는 일일 수도 있다. 한국 좌파의 관록과 투지 그리고 지성도 그 못지않을 것이라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1980년대를 지나면서 제법 많은 좌파 지식인과 운동가들이 한국 사회에도 성장했다.그런데도 그들은 지금 어디에 가 있을까. 반공주의의 투사로 회심한 몇몇의 인물들은 예외로 치자. 그런 사람들이 원래 좌파라는 소리를 들어도 낯을 들지 못할 만큼 창피해 해야 한다면 사정은 어디든 다르지 않다. 왕년의 열혈 트로츠키주의자였던 사람치고 극우적인 인사가 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좌파가 멸절한 곳이 미국 아니던가.그러나 그런 대차대조표를 죽 늘어놓고 사정을 따지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문제는 지금이기 때문이다. 현재 주변의 실정을 파헤치고 이를 자본주의의 위기와 결부시켜 사고하려는 것, 나아가 이를 좌파 운동이 자신의 전열을 정비하기 위한 전망으로 끌어내려는 목소리는 어디에 있을까. 불행하게도 그것은 "트윗질"을 하거나 "댓글 놀이"를 하기엔 알맞은 건수가 아니었는지, 흔히 눈에 띄지 않는다.외려 진지한 이야기를 하는 자리는 "보편적 복지"를 떠드는 대학 교수와 전문가에 의해 점령되어 있다. 실은 "보편적 복지"란 것은 그냥 듣기 좋은 가난 구제책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목소리는 이론적인 목소리로 치장한 휴먼 다큐 버전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현 정권에 야유를 보내기 위해 만들어진, 그 내용이 무엇인지 상관없이 지지해야 하는 정치의 베일이라 불러도 좋을지 모를 일이다.복지가 대세라는 일부 좌파의 주장(물론 이는 자본주의의 위기에 겁에 질린 우파들이 부쩍 우려먹는 주장이기도 하다)은 어디에서나 똑같이 인기인 모양이다. 이 책에서 가장 공들여 비판하는 좌파 내부의 적은 무엇보다 케인스주의적 복지 국가로 돌아가자는 이들이다. 그렇게 비판하는 요지는 간단하다. 그들이 자본주의가 어떻게 지금까지 왔는지 몰라도 한참 모른다는 것이다.복지 국가의 위기를 해결할 대안으로 자본가 계급과 그 정치 세력들이 오랜 세월 공들여 만들어놓은 것이 신자유주의인 탓이다. ("일부 좌파는 케인스주의적 복지 국가가 부활하면 좋겠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자본주의 국가의 본질, 자본주의의 발전 과정을 무시한 데서 나온 지극히 비현실적이고 부질없는 바람에 지나지 않는다"고 책은 말한다).그러나 가장 잘나가던 황금기의 자본주의였던 전후 번영의 시기를 꿈꾸며 그리로 돌아가겠다고 하는 것은 개꿈이다. 더욱이 한발 더 나가자면 그 황금기의 자본주의가 모두에게 그토록 아름답고 행복한 시대였는지도 물어볼 일이다. 케인스주의적 복지 국가에서 벗어나려 했던 것은 축적의 위기에 몰린 자본가이기도 했지만 또한 노동자이기도 했다는 것을 잊고 있는 것일까.아무튼 비정규직과 실업의 만연이나 빈곤 증대가 이명박 정부의 실정 탓이라고 말하며 복지 대책을 통해 그것을 개선하겠다고 말하는 한국 좌파들의 주장은 농담처럼 들린다. 노동자와 빈곤 계층을 짓누르는 생계난의 주범이 빚과 더 크게는 금융 때문이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상식이다. 자영업자의 카드 빚이든, 노동자의 전세 빚이든, 대학생들의 학자금 대출 빚이든 그런 빚들로 자본주의는 돌아가고, 얼마 전 금융감독원이 내놓은 아주 쫀쫀한 통계에 따를 경우에만도 한국에서 거래되는 금융 파생 상품의 가치는 3경 원이 넘는다고 한다. 국내 총생산(GDP)의 100배가 넘는 액수이다.돈을 받을 수 있는 권리(청구권)에 베팅하여 돈을 버는 이 악질적인 사기가 한국 경제를 쥐락펴락 할 때, 복지니 뭐니 하는 말은 우스개처럼 들린다. 세상의 돈을 어떻게 분배하고 규제할 것인가라는 대안 없이 어떻게 복지다운 복지가 가능하겠는가. 언제부터인가 주가나 국가 신용 등급이 조금이라도 떨어질라치면 온 나라가 법석을 떠는 시대이다. 실업률과 고용률, 노동 시간, 산업 재해율 같은 소식은 모두 귓등으로 흘려듣고 만다.경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려주는 지표가 무어라 생각하느냐에 따라 경제를 바라보는 계급적인 관점 역시 다르다는 것은 복잡한 경제학적 지식을 동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알다시피 거의 모든 매체는 코스피 지수, 아니 삼성전자를 비롯한 블루칩의 주식 가격이 어떠냐에 따라 우리의 살림살이가 달라진다고 생각하는 자본가적 맹신을 고수한다. 요컨대 우리는 자본가의 편에 선 채 경제를 본다. 그것은 아마 노동자로서의 국민이라기보다는 금리 생활자로서의 국민이 되어버린, 혹은 이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노동자를 금융에 따라 사회화시킨 새로운 자본주의의 효과 때문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이 책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바로 여기이다. 이미 데이비드 하비의 <신자유주의>(최병두 옮김, 한울 펴냄)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그 이야기군 하겠지만, 그것을 미처 읽어볼 여유가 없는 사람들은 그 책의 요지를 한눈에 접할 수 있다. 자본의 음모를 파헤치는 재미난 야사를 섞어 들려주는 하비의 재담은 음모론이 무슨 이데올로기적인 악인 것처럼 경계하자는 자유주의적 히스테리 따위에 콧방귀를 뀔 뿐이다.어디에선가 지젝이 문제는 음모론이 아니라 언제나 공공연하게 성행하는 자본의 음모를 외면하는 좌파의 아름다운 영혼 탓이라고 힐난했던 적이 있다. 그렇다면 자본의 지배 자체가 음모라고 주저 없이 말하는 뻔뻔한 좌파 인물을 꼽자면 그는 당연 하비일 것이다(착취가 아닌 수탈(dispossession)을 통한 지배가 신자유주의의 특징이라는 논란거리는 일단 잠시 접어두자).하비는 1970년대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한 신자유주의적 전환이 어떻게 자본가 계급들의 조직적인 반란이었는지, 한마디로 자본에 의한 선제적 계급 투쟁이었는지를 생생하게 증언한다. 이때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은 그 음모론이라는 것이 갖는 효과라 할 것이다. 하비가 음모론을 기꺼이 편들 때, 그는 신자유주의란 소수의 극우 이데올로그와 그들을 후원한 자본가들, 정치가들이 담합한 음모의 결과라는 것이 아니다. 음모론을 과감하게 편들 때, 하비는 섬세하고 신경질적인 좌파 지식인들에게는 조잡하기 짝이 없는 사고인 음모론에 놀라운 비틀기를 부여한다.사람들은 흔히들 음모론을 이렇게 생각한다.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헤아리기 어려울 때, 무식한 사람들은 배후의 누군가가 끈을 당기면서 사태를 조종한다는 믿음에 기운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세계 지적 유행의 심장인 뉴욕에서 맹활약하는 하비 아니던가. 그런 그가 음모론을 둘러싼 요란한 비판을 몰랐을 리 만무하다.하비가 음모론을 펼칠 때 그것은 차라리 지적 용기라 불러야 옳다. 신자유주의를 어떻게 제대로 비판할 것인가. 이런 물음을 대할 때 그는 음모론을 선택함으로써 신자유주의 비판이 빠지고 마는 흔한 유혹으로부터 벗어난다. 모두가 신자유주의는 결국 국가가 후퇴하고 시장의 논리에 따라 모든 것이 지배당하는 세상이라고 말할 때, 이 주장에 빠진 것이 하나 있다면 음모론이지 않을까.국가와 시장이라는 추상적인 힘들 사이의 관계로 신자유주의를 말할 때 어딘가 미심쩍은 부분은 바로 그것이 계급 투쟁이라는 것을 빼먹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비인격적인 어떤 힘, 보이지 않는 손의 지배이기는커녕 사회 성원 대다수를 노동력으로 만들면서 자신에게 필요한 사회적 관계를 만들어내는 자본의 힘 아니던가.자본주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을 위한 사회관계를 만들어내려는 자본과 노동의 투쟁이다. 그것은 경제이기에 앞서 적대적인 사회관계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를 걱정하는 모든 고담준론이 계급 투쟁을 빼놓은 자본주의 비판에 열심일 때, 하비는 계급투쟁이 바로 신자유주의의 전말을 이해하는 열쇠임을 주장한다.그렇지만 계급투쟁의 관점에서 신자유주의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그 시점은 어떻게 마련될 수 있을까. 물론 그것은 기꺼이 음모론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가 수십 년 동안 시민들과 함께 <자본>을 읽고 강의했던 일이 전연 헛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의 음모론이 아무래도 허술하다고 생각한다면, 제1부에 실린 인터뷰들을 읽으면 된다.패니치와 헨우드, 맥낼리 등의 학자 겸 운동가들의 대담은 서로 강조하는 바가 다르고 이견이 있어도 그들은 금융화라는 관점에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솜씨 좋게 해부한다. 금융화란 실은 알고 보면 소유자 계급으로서의 자본가 계급이 자신의 부를 지키기 위해 꾀한 계급 투쟁의 음모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면 무슨 말이겠는가.안타까운 심정···모르긴 몰라도 이 책에서 아마 가장 자주 등장하는 표현을 들자면 "안타까운 심정"이 아닐까 싶다. 안타깝다니 무엇이 안타깝다고 그렇게 자주 들먹이는 것일까. 그것은 "신좌파"란 이름으로 요란하게 등장했던 이념과 운동이 신자유주의가 활개를 칠 멍석을 깔아주었다는 것이다. 요컨대 자본주의에 맞설 수 있는 투쟁에 실패한 큰 책임은 좌파의 편에도 있다는 것이다.이는 물론 우리에게도 뼈저린 이야기이다. 1987년의 민중 항쟁이 끝나고 덕을 본 자들은 자본가 계급이었지만 그들이 순조롭게 신자유주의적인 발전 국가로 도약할 수 있도록 힘을 몰아준 것은 자유주의로 전향한 운동권과 정치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이 책을 읽을 때 적잖이 침울한 기분이 드는 것도 이 때문이라 할 수 있다.그러나 마냥 침울한 것만도 아니다. 이 책은 자기비판의 통렬함만큼이나 사람들을 헷갈리게 만드는 수많은 '사이비' 좌파적인 대안(이 책에서 번역자는 놀랍게도 아주 운동권적인 용어인 "잡사상"이라는 표현을 채택한다. 이 어휘가 거친 만큼이나 또 아주 적절한 것이라고 굳이 토를 달아야 할까)에 대하여 명쾌하고 시원한 일격을 가한다. 그것은 지난 수십 년간 노동자 계급을 비롯한 기층 민중 운동을 조직하고 이들의 능력과 가능성을 굳건히 신뢰하지 못한 채 표류해온 좌파의 한계를 되짚어보는 꼼꼼한 자기반성의 결론이기도 하다.이를테면 중앙 집중은 스탈린주의적 전체주의이다, 지도자 없는 수평적 네트워크를 조직하라, 과학적 지식은 끔찍한 유토피아적인 관리 사회를 향한 꿈을 낳을 뿐이다, 그러므로 대중을 믿어라, 주변을 믿어라, 부유한 서구 세계에서가 아니라 제3세계에서 대안을 찾아라, 작은 것이 아름답다 그러므로 제발 지역화하라 운운. 이런 말들에 우리는 집요하게 시달리지 않았던가.그러나 이런 대안 같지 않은 대안들이 어떻게 운동을 좀먹고, 자본주의에 효과적으로 대항할 수 있는 좌파들의 전망을 흐리게 만들었는지 이 책의 대담자들은 앞 다투어 반박한다. 아마 그 절정은 포스트모더니즘을 비롯한 좌파들을 유혹한 여러 가지 철학적·문화적 이념에 대한 비판일 것이다. 자본의 회전율만큼이나 개념의 회전율이 가속화되면서 아카데미를 비롯한 지식계를 석권한 "바로크적 이론"(산본마쓰는 정교하고 세련되어 보이지만 기능적인 가치는 하나도 없는 바로크 시대의 문화만큼이나 신자유주의 시대에 창궐한 좌파 이론은 바로크적이라고 강변한다)은 통일된 대열을 조직하는 일을 방해했다.실은 자기표현을 비롯한 가치를 앞장세운 신좌파의 사고는 신자유주의와 "선택적인 친화성"을 갖는다고 개탄할 처지가 되었다. "지난 30년 동안 신자유주의가 시장의 마력을 등에 업고 자기 계발 이데올로기 따위를 유포함으로써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어떤 상상도 발을 못 붙이게"(41쪽) 만들었다는 것은, 이제는 널리 알려진 상식이 되어가고 있다."성실하고 용모단정한 분"을 구하던 자본가는 이제 능청스럽게 "창의적이고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진 분"을 구한다고 너스레를 떤다. 이는 개성과 자기실현, 차이를 역설하던 신좌파의 사고를 자신의 이데올로기로 삼은 자본의 능란한 변신 탓이다. 프랑스의 어느 사회학자와 경영학자 콤비가 함께 쓴 책에서 말한 것처럼 자본주의는 이제 신좌파의 미학적인 자본주의 비판(관료제인가 자율성인가, 조직 인간인가 창의적인 개인인가 등등)을 흡수하면서 자신의 위기를 모면하고 그 어느 때보다 섹시한 모습으로 변신하는 데 성공했다.자본주의는 이제 모험, 욕망, 자유, 개성, 해방, 혼돈 운운의 가치를 몸소 실천하는 것은 기업가적 자본가가 되는 일이라고 외친다. 하긴, 세계의 경영학자와 컨설턴트가 가장 존경하는 철학자가 들뢰즈라고 앞 다투어 고백하는 것도 이제는 더 이상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이 가진 가장 출중한 매력은 바로 못난 가부장적인 아버지를 씹고, 꼰대와 교감, 보스, 정치인, 중년 이성애자를 조롱하는 것이 민주주의자의 자질인 것처럼 생각하는 처량한 좌파적 상상력을 바로잡는 데 있을지도 모른다.물론 이 책이 마냥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역시 이 책에서 들을 수 있는 이야기들이 미국산이란 한계를 떨칠 수 없다(물론 그것이 단점은 아니다). 이 책이 겨냥하는 정치적인 모토가 적색·흑색 연대, 그러니까 사회주의자와 아나키스트의 단결과 화해라는 것은 적잖이 저항감을 불러일으킨다(그래서 리버테리언 사회주의를 옹호하는 타리크 알리와 놈 촘스키의 글은 십분 공감하겠지만 어딘지 피부에 와 닿지 않는다. 아이작 도이처라는 외골수 반스탈린주의적 사회주의자를 신화화하는 마이크 데이비스의 대담은 아무래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좋게 말하면 이는 좌파의 미국식 지방색일 것이다.이 책이 유럽 좌파들의 오랜 전통에서 비롯된 혁신적이고 소중한 사고들을 간단히 조롱하는 것은 불편하다. 그람시를 빼고는 모든 유럽 좌파 이론가들의 사고를 고깝게 보는 것은, 심정은 이해하겠는데 어딘지 섣부르고 경박하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특히 산본마쓰의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은 아무리 보아도 조잡하다).남미나 인도의 실패와 빗대어 근대화 연합 혹은 개발 연대라는 국가주도의 인민주의적 발전의 성공 사례로 남한을 꼽는 것은, 가뜩이나 박정희 유령에 시달리는 우리에겐 이게 웬 뚱딴지같은 소리냐 싶기도 하다(3부에 실린 치버의 글은 그래서 주의를 요한다). 따라서 "무지개 연합"을 외치던 포스트모던 좌파가 난리굿을 하더니, 이제는 골수 사회주의자들이 나서서 적흑 연합을 하자고 설레발을 친다고 비아냥거릴 수도 있을 듯싶다.그러나 그런 단점들은 독자들이 알아서 십분 헤아리면 된다. 어쨌든 이 책은 미국 공영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이뤄진 대담의 기록이다. 대중 매체에서 이만한 이야기를 곱씹었다는 것만으로도 감격하는 것은, 과연 호들갑일까. "조롱하라, 웃어라 그리고 잊어라" 하는 시크한 슬로건에서 벗어나 우리는 저 악명 높고 케케묵은 슬로건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학습하라, 선전하라, 조직하라!"내가 이해하고 동의할 수 있는 만큼만 저항하겠다는 말은 듣기엔 멋있지만 실은 대충 이러고 살자는 말과 다를 바 없다. 내가 춤출 수 없는 혁명은 혁명이 아니라는 어느 사회주의자 페미니스트의 말은 오해되어선 안 될 일이다. 그녀는 사회주의자, 여성주의자로서 말했다. 그녀가 말하는 "나"라는 인물이 대형 할인점에서 이 라면을 살까, 이 맥주를 살까 고민하는 그런 소비자를 가리키는 말은 아닐 것이다.그녀는 모두가 나이고 내가 모두일 수 있는 그런 혁명을 말했을 것이다. 그럴 거라면 굳이 그녀는 사회주의자이기도 페미니스트이기도 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녀가 한 말은 자신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인 것이 진짜 공산주의란 말을 담백하게 말했던 것 아닐까. 그러니 그녀의 말을 개성을 억압하는 사회주의 따위는 꺼져버리라는 말로 부디 오해하지 말자.이 책에서 자주 인용하듯이 프레드릭 제임슨이 했던 그 말, 우리는 자본주의가 망하기를 기대하는 것보다는 지구가 멸망하는 것을 훨씬 손쉽게 상상한다는 말, 그 말이 더 섬뜩한 일이다. 이렇게 사느니 모두 함께 죽는 게 낫다는 비관주의를 물리치고 세상을 바꿀 전망을 찾고 싶다면, 이 책을 들춰보기를 권한다.무엇보다 가뜩이나 읽을 것이 너무 많아 걱정이라면 이 책에서 출발하라. 이 책은 그럼 무엇부터 읽어야 할지 알려줄 것이다. 특히 이 책은 읽지 않아도 좋을 책이 무엇인지를 수두룩하게 알려줄 것이다. 가끔 어떤 책은 책 읽기 자체를 어떻게 해야 할지 힌트를 준다. 이 책이 바로 그런 책이다.
/서동진 계원디자인예술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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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꼼수는 진중권에게 부러우면 나꼼수 비슷한거라도 만들어서 해보라고 내부비판도 막는 모습을 목격했을 때
오래갈 리가 없다고 생각했었음
지금 와서보면 딱 사이즈 나오지
자신들은 이명박만 저격하면 될 줄 알았겠지만,, 하는 꼬라지봐서는 이명박보다 먼저가겠네 했었지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11209122545
링크임
물론 교수가 쓴 글은 민간인에게는 트로츠키 주의라느니 스탈린주의라느니 어려운 단어들이 나오긴 하지만,,
무슨 말이 이렇게 어려워영 징징징 나꼼수 왜까여 징징징
뭔진 모르겠지만 나꼼수까니 나빠요 징징징 하는 기사 댓글들을 보면
나꼼수의 영향력이란게 사이즈 딱 나오지
나꼼충들을 보면 파시즘의 전조현상이 보인다라는 댓글과
cinepot이란 사람이 말하는 '야구장으로 끌어모으긴 했으나 얘네들이 6-4-3도 모른다' 라는 표현은
촌철살인 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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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박정희대통령은 과연 친일파인가?
인터넷에 유포되는 박대통령의 친일행적을 다룬 글들은 아무런 증거도 없이, “아님 말고” “~~카더라”란 유언비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글들임을 먼저 밝힙니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박대통령에 대하여 친일파에 해당되는지 여부에 대한 상반된 논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친일파의 정의 즉 어디까지를 친일파로 분류할 것인지에 대한 판단을 차기 대선에 따른 정략적 관점(박근혜대표의 아버지)에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논쟁에 대해 크게 분류해보면
1. 적극적 친일행위자만 해당된다 : 을사오적등 대표적 친일파들로서 이부분에 대하여 진보좌익과 보수우익 이견이 없습니다.
2. 일제시대 공직에 있었던자도 포함된다. : 이부분에 대하여 논란이 끝이 없습니다..
3. 창씨개명한자도 포함된다 : 이것은 당시 독립운동가외에는 거의 모든 분들이 해당되는바, 창씨개명 자체로 친일파로 분류할 수 없다는 게 좌,우의 공통적 입장
위의 세가지 분류를 본다면 박정희 대통령은 2번에 해당됨에 따라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과연 태어날 때부터 나라가 없었던 사람들의 시대를 지금의 잣대로 평가하고 심판할수 있을까요? 많은 국민으로부터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재임시절 항일독립운동가들의 치적을 높이 평가하고 본보기로 삼아 기리며 추모했다는 것은 두말 할수없는 사실입니다
일제하 중국이나 만주로 탈출하여 항일독립투쟁이나 지하활동을 하지 않았다면 군인 뿐만 아니라 경찰이나 공무원 및 그시대 언론도 친일이고 법조인도 친일 사업가나 예술가 학자도 친일이란 식이 아니냐? 대체 싫어도 일제가 점령한 이땅에서 태어나고 살아야 했던 그 시대 사람들은 친일이란 소릴 안들으려면 뭘 할수 있을까? 따지고 보면 전부 일제 식민지 지배에 큰건 작건 협력한 게 아니냐? (일제가 철도를 통해 조선에서 수탈을 많이 해갔다는 것은 다들 아는 사실인데 그럼 조선총독부 철도국에서 근무했던 사람들은 친일파 중에서도 악질인가요?)
그당시 반체제 지하활동을 빼고 식민지 지배 권력에 대한 대립과 반목으로 그어떤 사회생활을 조선땅에서 공식적으로 할수가 있을까요
아예 시골에서 머슴 아니면 농사나 지어야 했겠는가?
친일이냐를 따지자면 지위 고하에 막론하고 자신들의 부의 축적 자기 일신의 영달과 출세를 목적으로 그 시대 일제의 힘을 등에 업고 능동적으로 같은 민족을 수탈하고 핍박 탄압하는데 앞장섰느냐 아니냐?를 객관적 증거에 근거해 따져야한다는 것이 반론으로 제기하는 것입니다.
훌륭한 독립투사의 모델들을 제시하고 "보라 박정희는 이렇게 살지 않고 만주군이 됐으니깐 '친일파다"라고 얘기하는 것은 그렇게 비난하는 당사자들이 그때 박정희와 같은 시기에 태어났으면 모두 목숨을 당연히 내걸고 독립투사로 나서 일제와 싸웠을까?하는 의문을 낳을 뿐입니다. 진짜 나쁜 놈은 저렇게 훌륭한 삶을 산 위인을 두고 나보다 훌륭한 것을 못 마땅하게 생각하며 업적을 숨기고 악의적으로 모함하고 음해를 하는 세력들입니다.
박 대통령은 위인으로 독립운동가들을 모셨고 후세가 마땅히 본 받아야 된다며 사당을 짓고 기념관을 건립하였습니다. 언제 그런 분들을 홀대하고 푸대접한 적이 있습니까?
또한 최고 권력자로서 김일성이나 김정일처럼 자신의 과거경력을 미화하지도 않았습니다.
[김승곤(92) 전 광복회장은 “박영만은 청와대에서 돈을 받을 줄 알고 ‘광복군’을 썼는데, 내용을 훑어본 박 대통령은 ‘내가 어디 비밀광복군이냐. 누가 이 따위 책을 쓰라고 했냐’며 화를 냈고, 결국 박영만은 돈 한푼 못 받고 거창하게 준비한 출판기념회도 치르지 못했다”고 증언했다.-세계일보-]
그당시에 군인이 된 표면적 형상에 집착하여 무조건 친일이다라고 주장하는 분들이 계신데요. 우선 청년 박정희가 교사직을 그만두고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간 이유에 대해 설명하자면... 어린 박정희의 생애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이 바로 나폴레옹 전기였다고 합니다.
동기생들의 증언에 의하면 소년 박정희는 여러 사람들이 쓴 나폴레옹 전기를 죄다 읽으려고 했다고 합니다 '삼국지'에 빠진 소년들이 처음에는 되풀이하여 읽다가 나중에는 저자를 바꾸어가면서 읽는 것처럼 말이죠. 청소년시절부터 군사학에 대한 흥미와 관심을 어느정도 가지고 있었다고 할수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본다면 당시에 일선 소학교 교사로서 일본인들의 눈을 피해가며 어린 제자들에게 한글을 교육하고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등 평소 일본에 대해 자꾸 반항적인 성향을 보이는 요주의 인물 박정희에 대하여 경찰,행정,학교를 장악한 일본인들의 집요한 괴롭힘과 억압이 직업을 바꾸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박 선생님이 만주로 떠난 지 3∼4년이 지난 어느 여름방학 때 군도를 차고 문경에 오셔서 십자거리(문경보통학교 아래에 있는 네거리)에 계신다는 얘기를 듣고 달려갔지요. (중략) 하숙집으로 자리를 옮긴 뒤 박 선생님은 방에 들어가자마자 문턱에 그 긴 칼을 꽂고는 무릎을 꿇고 앉아 ‘군수, 서장, 교장을 불러오라’고 하시더군요. 그때 세 사람 모두 박 선생님 앞에 와서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아마 교사 시절 박 선생님을 괴롭혔던 걸 사과하는 것 같았습니다.”(여제자 이순희씨 증언
박정희에게 배운 이영태는 이낙선(5·16군사혁명 직후 박정희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 비서관) 앞으로 보낸 편지에서 은사에 대한 기억을 이렇게 적었다. ‘조선어 시간에는 우리 나라의 태극기를 가르쳐주셨고 복도에 입초를 세우시고 우리 나라 역사를 가르쳐주셨으며 일본인 교사들과는 지금 생각하면 조국 없는 서러움 때문인지 자주 싸우시는 것을 목격했다’
[ 교사시절 제자들의 증언 자료 문경공립보통학교에서 3년간(1937-1940) 교사로 근무 ]
이영태씨의 증언입니다.
-"수업 시간에 우리나라의 태극기와 역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음악시간에는 황성옛터,심청의 노래등을 가르쳐 주시고 기타도 쳐 주셨습니다. 평소 '전세계를 얻는다 할지라도 민족이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망하는 길밖에 없다.우리는 남을 이길 수 있는 실력을 쌓아야 한다. 아는 것이 힘이다, 알기 위해서 앞으로 노력해야 한다.'라고 학생들의 분발을 촉구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조국이 없는 서러움 때문인지 일본인 교사들과는 자주 싸우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하루는 수석교사였던 일본인 야나자와와 말다툼 끝에 그가 ´조선놈´이라고 하자 의자를 집어 던진 일도 있었습니다.
그 당시 일본인 순사중에 오가와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와 자주 다툼이 벌어졌습니다. 후에 박선생님이 만주군관학교에서 군도(긴칼)를 차고 문경에 왔을 때 오가와순사가 박선생님한테 뭐라고 했는데 박선생님이 오가와순사를 크게 혼낸 적이 있었습니다."-
정순옥씨의 증언입니다. -"어느 일요일, 친구들 몇 명과 함께 새로 오신 선생님(박정희)의 하숙 집을 찾아갔습니다. 호기심을 가지고 선생님의 방을 살펴봤더니 책상 위에 커다란 사진액자가 걸려 있는데 배가 불룩 나오고 앞가슴 양편에 단추가 죽 달려 있는 사람인데 저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선생님은 영웅 나폴레옹이라고 하시며 나폴레옹에 대하여 자세히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4월 어느날 소풍을 가게 되어 고운 옷으로 갈아 입고 여러 가지 음식을 가지고 떠났습니다. 선생님은 등산복 차림에 어깨엔 나팔을 메고 길다란 막대기를 가지고 우리들이 장난을 치거나 줄이 흐트러지면 한 대씩 벌주었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고 놀고 있는데 한 아이가 깊은 물에 빠져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 순간 박 선생님이 물속으로 뛰어들어 한참 만에 그 아이를 건져내어 인공호흡을 하여 살렸습니다 다른 선생님들은 그 동안 둑에서 발만 둥둥 구르고 계셨어요. 그리고 언젠가 박선생님과 일본인 교사 두분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일본인선생 한분이 조선여성은 예의가 없다느니 젖가슴을 다 드러내고 양동이를 이고 다니느니하며 우리나라 여자의 흉을 보았습니다. 이에 박선생님은 우리들에게 ´너희들 저 말을 잘 새겨 들어라.가난하고 무지하면 남에게 멸시를 당하는 것이다.우리끼리 있을 때는 절대로 일본말을 쓰지 말고 조선말을 쓰자.´고 했을 때 우리는 철없이´조선말 쓰면 퇴학당하는데 왜 그러세요?´라고 반박한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선생님을 가장 존경하고 따랐습니다." -
주영배씨의 증언입니다. -"39년, 내가 보통학교 5학년일 때 조선어를 가르치며 박선생님께서는 ´이글을 잘 배워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박선생님은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는 분이었습니다. 가정실습때는 문경에서 12키로나 떨어진 산골까지 자전거를 타고 오셨습니다. 선생님이 돌아가시는 그 뒷모습이 산록으로 숨어들 때는 울고 싶도록 감사했습니다." -
전경숙씨의 증언입니다. -"박선생님은 우리집으로 하숙집을 옮겼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어머니를 ´모친´이라고 불렀습니다. 식사는 가리는 것이 없었고 복장은 단정하였으며 출근은 빨랐습니다. 언제나 숙제를 내주시고 철저히 검사하여 평가를 해 주셨습니다. 월요일마다 공책을 점검하시고 글씨를 바르게 쓰도록 지도해 주시고 일기와 편지쓰기를 장려하셨습니다. 5학년 20명과 2학년 40명을 한 교실에서 복식수업을 하면서도 질서가 정연했습니다. 말은 간단명료하였으며 청소에 신경을 쓰고 유리창,천정의 거미줄,화장실 청소를 철저히 시켰습니다. 그리하여 청소도구를 왼비하여 가지런히 정리정돈되도록 하였으며 책상의 줄이 비뚤어지고 환경이 지저분 한 것을 매우 싫어 하셨습니다. 위인전 같은 이야기를 자주해 주시고´너희들도 이와같은 훌륭한 사람이 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가을 소풍때 문경새재에 갔을 때는 제 1관문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 주시고 점심을 싸오지 못한 학생은 선생님이 도시락을 나누어 주시던 일, 발목을 삐어 걸음이 곤란한 학생을 업고 산길을 내려 오시던 선생님 생각이 납니다."-
전도인씨의 증언입니다. -"하루는 박선생님이 교무실에서 혼자 사무를 보고 있으면서 나를 불렀습니다. 그때 일본인 청부업자 한명이 담배를 문 채 교무실 안으로 들어 와 "오이 ! 교장 계신가?"하고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일본인을 한번 힐끗 쳐다보고 아무 대꾸가 없었습니다. 그사람이 재차 똑같이 묻자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일본인들이 부르짖는 내선일체가 진실이라면 당신이 내개 그런 언동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일등국민으로 자처하고 싶거든 우선 교양 있는 국민이 돼야지, 담배를 물고 교무실에 들어온 것만해도 무례하기 그지 없는데 언동까지 몰상식한 사람이라면 나는 너같은 사람을 상대할 수가 없다.어서 나가봐 !"라고 내몰았습니다."-
황광실씨의 증언입니다. -"박선생님이 우리학교에 오셨을 때 나는 6학년 반장을 했습니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조선어를 가르치셨습니다. 역사 시조도 가르치고 학생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하여 위인전을 많이 읽도록 하셨습니다. 박선생님이 일제 치하에서 우리글을 가르치기 위해 애쓰신 것은 분명합니다. 학생 한사람을 복도에 세워 놓고 일본인 교장이나 교사가 오지 않나 망을 보게 했습니다. 그때 한 남학생이 천황의 사진에다 장난을 하고 교무실로 불려가 혼이 난 일이 있었습니다. 천황의 눈을 연필로 까맣게 지우는 따위의 행동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인데 우리들에게 그런 생각을 갖게 한 것은 박선생님의 영향이 컸을 것입니다. 선생님의 별명은 호랑이 선생님이었으나 자주 부르지는 못했습니다. 나는 졸업때 앨범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
[(제자들의) 증언으로 미뤄볼 때 박정희는 일본인에게 지지 않으려는 오기와 배짱이 대단했던 것 같다. 이런 그의 성향은 대구사범 학생, 문경보통학교 교사 시절 일제의 지나친 황민화 정책에 대한 반발심과 연결된다. 교사 박정희가 황민화 정책에 반발하며 조선인 학생들에게 나름대로 민족혼을 불어넣기 위해 노력한 흔적은 제자들 증언에서 확인된다. -세계일보 "만주군 박정희를 보는 시각" 발췌-]
가까운 거리에서 박대통령을 지켜본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인 김종신씨의 말에 의하면 박대통령이 교사직을 그만 두고 만주군관학교로 간 이유에 대해서 묻자 간단하게 "왜놈들 하도 심하게 굴어 긴 칼 차고싶어서 갔지."라고 답했습니다.
애초에 일황에 대한 개인적 충성심과는 상관없이 청소년시절부터 가졌던 나폴레옹에 대한 동경에서 비롯된 군사학에 대한 공부욕구와 말단 교사로서 현장에서 당하는 일본인들의 지긋지긋한 괴롭힘과 위협이 문경에서 계속 교사직을 갖고 일하기가 힘들어서 무상 대학급 교육기관인 만주군관학교를 선택했던 것입니다.
[그는 교사로서 의무복무를 마치고 만주군관학교 2기로 입학한다. 그는 이곳에서도 식민지 민족으로써 민족주의 신념을 키워 나갔다. 만주군관학교 역시 사범학교에서와 마찬가지로 민족차별이 심해서 박정희의 민족감정은 부추겨질 수 밖에 없었다. 만주군관학교시절1기생 이기건의 증언에 의하면, 그가 박정희에게 '자네는 왜 여기 왔는가'라고 물었을 때, 박정희는 "왜놈 보기 싫어 왔소''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리고 박정희는 "일제는 곧 망합니다. 우리는 독립하고야 말 것입니다"라는 말을 여러 번 되풀이했다고 한다. 이섭준에 의하면, 박정희는 특히 2.26사건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박정희는 "이런 시대에 우리가 배울 것은 군사학뿐이다. 우리는 독립을 해야 한다"고 했으며, 독립은 "혼자 사는 것이다. 남의 간섭 안 받고 우리 스스로 사는 것이다"고 했다고 한다.--발췌: 권장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독립군 색출 만주특무경찰,독립운동가들 검거해 고문한 헌병 오장,식민지 착취 상징 식산은행의 금융조합 서기,황국신민 의식화 및 수탈의 선봉 훈도야말로 식민지 지배와 수탈의 최일선에서 활동한 일제의 주구들이라는 점을 먼저 지적해야 한다.)
먼저 인터넷상에 유포하는 박대통령의 친일행적에 관한 글들의 내용을 검토 해 보겠습니다.
① 일제에 대한 충성심이 태동 : 박정희가 손가락을 잘라서 쓴 충성혈서 "盡忠報國 滅私奉公(진충보국 멸사봉공)" 혈서작성?- 박정희 혈서설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박정희의 문경 보통학교 동료교사인 유증선(전 안동교육대학교 국문학과 교수)이라는 사람이 입학연한에 걸린 박정희가 군관학교 당국을 감동시키기 위해 혈서를 쓰도록 했다는 근거불명의 루머가 마치 진실인 양 되풀이 전해지고 있지만 유증선의 말은 더 이상의 말이 필요없는 명백한 거짓말입니다. 근거없는 혈서론은 박정희를 죽이기 위한 날조된 음모입니다.박정희의 군관학교졸업식은 당시의 경성의 극장에서 뉴스로 보도될 정도로 다 알려진 사실이고 만주일보(1942년 3월 24일)에도 보도되었습니다. 친일파의 출세라기보다는 오히려 조선인이 1등을 했다는 것에 민족적 자부심을 느끼게 한 사건이었습니다. 여기서 박정희가 천황에 충성하겠다는 답사를 했다는 헛소문도 나게 됩니다. 실제는 일본인 오까미 쇼히꼬(岡見尙彦) 고야마 시게요시(小山重嘉) 두사람이 했습니다. 박정희가 혈서를 썼다면 조선인들이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박정희의 혈서는 모든 만주국 신문이나 일본신문 어디에도 실려있지 않습니다. 완전히 날조된 거짓말입니다. ‘盡忠報國 滅私奉公’이란 혈서를 썼다는 허무맹랑한 주장의 출처는 전혀 근거가 없습니다. 반박정희세력들은 만주신문(滿洲新聞)에 박정희가 군관학교 입학을 위해 편지를 썼는데 그게 보도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혈서사진'을 보도한 신문기사가 있던지 적어도 '혈서를 썼다'는 신문기사가 있어야 하는데 기록 잘 챙기기로 유명한 일본이나 중국의 모든 도서관과 문헌 사료를 북한 김정일과 남한의 친북세력 특히 방송과 언론들이 샅샅히 뒤졌지만 어디에도 혈서사진이나 혈서기사는 보이지 않습니다.
② 몸과 마음을 철저하게 개조하였다? ③ 완전한 일본인이였다? - 이런 글들은 주관적인 판단과 감정이 개입된 평가들로 객관적인 평가 자료가 될 수 없습니다. 한번 미운 사람 끝까지 밉다고 이와 반대되는 글들도 엄청 많습니다.
님을 싫어하는 분들은 님을 극히 나쁘게 평가할 것이며, 님의 친구는 님을 극단적으로 좋은 평가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주관적인 사항을 인용하여 평가하는 것은 맹인모상 즉 장님이 코끼리 만지기에 지나지 않는 아전인수격 입니다. 따라서 한사람에 대한 평가는 오직 객관적이며 실증적인 자료에 의해 평가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비판과 비난이라면 더욱 더 그래야 하는 게 아닌가요?.
④ 항일세력의(독립군) 토벌 - 110여회 참가했다?- 이 주장 역시 허위 날조된 글입니다. 이런 글에서는 박정희가 "요시"하며 독립군 토벌을 신나게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박정희가 만주군으로 근무할 그당시 소속부대의 작전지역에는 독립군이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박정희는 1944년 3월부터 1년 5개월간 만주군제8단(단장은 중국인 唐際榮)소속으로 근무지는 중국 열하 요즈음의 이름은 청더 (承德,승덕)지방 이였습니다. 이지역은 독립군이 활동하던 지역까지의 지금도 기차로 24시간이나 걸리는 곳입니다.. 또한 박정희가 만주군에 복무한 1944년 당시의 만주독립군투쟁 항일기록을 보면 독립군은 1931년 중일전쟁으로 인해 중국 내륙지방의 도시인 중경(중국표현으로 "충칭")으로 본부를 옮긴 뒤 거기서 전투를 치르고 있었습니다. 즉 1944년 당시에는 만주에는 독립군이나 광복군이 없었습니다.
- 반 박정희의 대표적인 지식인 한홍구(성공회대 교양학부)의 기회주의자 청년 박정희란 글을 보면...
........ 중략 ............. 사범학교에선 꼴찌, 군관학교에선 1등 박정희에 대한 미화가 시작되고 급기야 기념관 건립 움직임까지 일자, 민족민주운동 진영에서는 박정희의 친일경력을 비판했다. 독립군 장준하와 친일파 ‘황군’ 장교 박정희, 그들 각각의 비극적 죽음처럼 우리 현대사의 역설을 보여주는 대목은 없을 것이다. 박정희의 친일이 문제되는 것은 해방 전의 그의 경력 때문만은 아니다.
[ 해방 전 박정희의 친일경력이란 만주군군학교와 일본육사를 나와 1944년 7월, 만주군 소위로 임관되어 만주군 제5군관구 예하의 만군 보병 8단에 근무했다는 것이다. 사실 이 정도의 경력은 해방 직후 반민특위를 결성할 때나 각 정치단체에서 내건 악질 친일파의 처단 기준에 포함되지 않는 ‘경미’한 것이다. 박정희가 관동군 정보장교로 독립군 토벌에 앞장섰다는 주장도, 당시 만주에서 활동한 조선인 독립군부대나 공산유격대가 없었다는 점에서 신빙성이 없다. ]......생략......
*결국 박정희가 독립군 토벌에 110여회나 참여하였다는 것은 허위 날조 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덧붙여 국내외 현재 박정희를 공격하기 위해 항일세력 및 항일군대 운운하며 중국공산당의 팔로군이 마치 조선의 독립투쟁과 관계있는 세력처럼 교묘히 속이는 조작에 관한 설명을 드립니다.
박정희가 만주군에서 근무할 1944년 당시에 만주에는 독립군이나 광복군이 같은 단체는 없었습니다. 이런 시대상황이 그들로썬 참 안타까운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팔로군을 마치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운 항일군대처럼 교묘히 속이기 시작합니다.
표면적으로 연변학계의 항일사료를 어쩌구하면서 내세우지만 말이 학계이지 그쪽은 완전 친북학계입니다. 북한 김일성,김정일 공산주의자들의 일방적 역사왜곡의 동반자들입니다.
⑤ 일본군의 특수부대(철석부대) 활약했다 - 간도특설대 활동? - 이것 역시 허위 날조된 글로서 간도특설대에 복무한 조선인 장교의 명단(出典 : 중국측 조사자료-"特設部隊", 1960, 66 - 84쪽.)은 아래와 같습니다. 박정희의 이름이 어디에 없습니다. 간도특설대(총79명) - 姜在浩 李元衡 朴鳳祚 金燦奎(金白一) 金錫範 金洪俊 宋錫夏 石希峯 崔南根 崔在恒 신현준 최경만 윤춘근 문이정 趙某(豊田) 김용기 태용범 백선엽 윤수현 이재기 김묵 豊田義雄 吳文剛 李淸甲 申奉均 海原明哲 白川** 金松壯明 伊原久 鶴原** 朴東春 李鶴汶 崔忠義 朴鳳朝許樹屛 金大植 方得官 洪淸波 金龍虎 金致斑 具東旭 朴春植 方太旭 孫炳日 劉仁煥 尹秀鉉 李德振 李龍昊 李東俊 李龍星 李準龍 李逢春 太溶範 崔在範崔炳革 李龍 金忠南 車虎聲 金忠九 柳益祚 朴春範 朴春權 曺昌大 洪性台 李東郁 廉鳳生 吳南洙 金萬玉 金鍾洙 李東和 朴蒼岩 朴泰元 李白日 金龍周 申然植李龍星 任忠植,, 馬東嶽, 桂炳輅, 全南奎
- 2004. 06. MBC에서 방송한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만주군의 친일파 내용중 간도특설대에 복무한 조선인의 명단에도 박정희의 이름은 없었습니다.(MBC 방송을 인터넷을 통해 확인해 보시길 바랍니다. 현재 박정희는 간도특설대 출신이란 저서에 대해 박대통령 유족이 고인에 대한 명예홰손으로 고소하여 재판중입니다.)
[간도특설대 1기생 이용씨 증언 "박정희는 간도특설대가 아니다"
[세계일보 2006-08-08 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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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인물이 강원도 정선의 외진 곳에서 말년을 보내고 있는 것은 뜻밖이었다. 육군 소장, 강원도지사, 교통부 차관, 철도청장, 인천제철 사장…. 화려한 이력을 뒤로하고 그는 산골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은둔’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이용(李龍·85), 해방 전엔 이집용(李集龍)이었다.
이방인의 방문을 쉽게 허락하지 않은 그였지만, 서울에서 네 시간 남짓 자동차를 몰고온 취재팀을 뿌리치지는 못했다. 이렇게 6월 중순과 하순 취재팀은 두 차례 그를 방문했고, 다시 두 차례 전화로 인터뷰했다. 그와의 대화는 6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시간 여행’이자 ‘역사 탐사’였다.
그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중요한 이력’이 있었다. 해방 전 이력, 구체적으로 일제 괴뢰국인 만주국(1932∼45년)에서의 행적이었다. ‘간도특설대’(1938∼45년). 바로 일제가 만주에서 “조선인 항일세력은 조선인의 손으로 잡는다”는 목표 아래 친일파를 앞세워 만든 조선인 부대로, 항일무장세력을 토벌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는 이 부대 1기생으로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복무했다. 1938년 지원 당시 그의 나이 17세. 그는 “군인이 되고 싶었는데, 조선인 부대라고 하기에 지원했다”고 말했다.
동기는 ‘순수’했는지 몰라도 군인이 된 그는 항일독립군과 싸우며 일제 침략전쟁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인물이 됐다. 그렇게 만주에서 일제 식민통치의 틀 속에서 출세를 도모했던 이들은 많다. 육참총장, 합참의장, 교통장관을 지낸 백선엽(87·간도특설대 출신)씨도 그 중 한 명이다.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 출신인 박정희 전 대통령도 간도특설대 근무설에 휩싸여 있다.
대다수는 ‘옛일’을 속이거나 끝내 덮어둔 채 이미 세상을 떴다. 몇 안 되는 산 자들도 열이면 열 입을 다무는 현실이다. 그 시절의 선택과 행동이 떳떳하지 않았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일까. 백씨도 거듭된 인터뷰 요청에 “골치 아프게 왜 옛날 일 갖고 그러느냐”며 끝내 만남을 허락지 않았다.
하지만 이씨는 달랐다. 그 시절의 기억을 숨기지 않았다. “만주에서 독립정신과 민족의식을 함양하며 무예를 연마했다”(간도특설대 출신으로 제2대 해병대 사령관을 지낸 김석범 회고·1987년 ‘만주국군지’)는 따위의 모순된 얘기도 하지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그 시절을 고백했다. 그는 간도특설대에 대해 제대로 증언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 시대를 평가해 달라”는 요청에 그는 “어려운 질문은 하지 말라”며 부담스러워했다. 그러면서도 “공은 공대로 평가하고 과는 과대로 밝히는 것이 역사에 대한 올바른 태도가 아니겠느냐”는 말에 “사실대로 밝히고 후세에 전해야지”라고 답했다. 이 같은 관점이 고백의 배경인 듯했다.
그는 다만 재중동포(조선족) 사회에서 간도특설대의 만행으로 전해지는 부녀자 성폭행,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는 부인했다. “군기가 엄한 부대로, 민폐는커녕 오히려 도와준 일이 많다”고 주장했다. 박 전 대통령의 간도특설대 근무설에 대해서는 “아니다. 그분은 만주 보병 8단(團)”이라고 했다. 박 전 대통령의 비밀광복군 활동설에 대해서도 “그건 거짓말”이라고 말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간도특설대에 있었나.
“아니다. 없었다. 그분을 처음 만난 것은 1944년쯤 베이징 부근에서다. 각각 팔로군 토벌작전 중이었다.”
―박 대통령이 당시 안투 명월구에 있던 간도특설대에 자주 왔다는 증언이 있는데.
“그분은 만주군 제8단 소속으로 활동영역이 달랐다. 간도특설대는 열하로 옮기기 전 백두산 밑 안투현에서 토벌을 했다. 토벌 대상은 김일성 부대였다.”
―박정희·신현준이 광복군 김학규 장군에게서 “적당한 시기에 일본군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고 1945년 7월에 베이징에서 다시 철석부대로 돌아오는 등 비밀광복군이었다는 얘기도 있던데.
“그건 거짓말이다.”
―그걸 어떻게 아나.
“그런 일이 없었으니까. 그때 내가 그 부근(베이징)에 있었으니까.”
―간도특설대 창설 목적은 알았나.
“몰랐다. 한국 사람들로 이뤄진 군대라고 해서 갔다.”
―간도특설대에 죽 있었나.
“1938년 이등병으로 들어갔다가 42년 봉천(지금의 선양) 육군훈련학교에 들어가 44년 졸업하고 소대장(소위)으로 진급했다.”
―육군훈련학교에 다니는 동안 간도특설대를 떠나 있었던건데, 그 기간에 박정희가 왔으면 몰랐을 것 아닌가.
“그럴 수도 있지만 그분은 8단에 있었다.”
―해방 후 행로는.
“해방되자마자 남한으로 왔다가 46년 4월쯤 다시 만주로 갔다. (왜 돌아갔나) 뭐, 고향이 거기니까. 모친도 거기 있었다. 그러다 남한 갔다 왔다고 해서 붙잡혀 옌지감옥에 갇혔다. 4개월쯤 살다가 노역장에 장작 패러 불려나갔을 때 탈출했다. 튀어본 사람이나 알지, 담을 넘어서 한 100m까지가 아주 무섭다.” -기사끝-]
⑥ 박정희의 창씨개명 -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이다. - 김대중대통령 시절 박 대통령을 친일파로 몰고가기 위하여 박 대통령의 창씨개명인 다카키마사오를 들고 나왔으나, 김대중대통령의 창씨개명명이 도요다다이쥬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없었던 일로 흐지부지되었는데 ....아직도 써먹고 계신 분들이 있습니다.....또한 오카모토미노루의 창씨개명을 운운하는데 어쨌든 창씨개명으로는 친일파의 기준에도 포함되지 않는 사항입니다.
⑦ 일본군인 생활에 대한 박정희의 향수? 이것 역시 ② ③번과 같이 완전 아전인수격 입니다. 첨언하자면 박정희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여러 창군 멤버들이 만주군이나 일본군에서의 군 경력이 있음을 볼수가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군대지휘관 이라 함은 전문적인 훈련과 경험이 없다면 임무를 잘 수행해 내기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군대를 가진 모둔 나라는 군지휘관 양성 전문 군사학교를 건립 운영하는 겁니다.
전쟁과 같은 급박한 상황에선 지휘관의 판단 하나가 전 부대원의 생명을 좌지우지 합니다.광복후 일본군대나 만주군대출신들이 국군에 들어간 것을 무조건 비판만 할수 없습니다.
독립군 출신들이 그자리를 전부 채울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당시 현실은 제대로 배운 사람들을 구하기 힘든 어려운 시절이였습니다.간과해선 안될 것은 6.25때 다름아닌 그들이 북괴 공산당의 침략에 맞서 싸워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를 지켜낸 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친일파 숙청을 자랑하는 북한도 만찬가지 입니다 일본군 고급장교 출신들이 고위층 장성중에 여럿 있고 특히 공군의 태반이 일본군대출신입니다.
북괴가 민족정기를 위해 친일파를 다 숙청했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관동군의 밀정이었던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가 한 때 김일성의 후계자로까지 부각되었던 사실과 김일성과 치정관계 내연녀였던 무용수 최승희가 일본군 위문공연을 숱하게 다녔으면서도 그의 남편과 함께 오랫동안 요직에 중용되었던 사실, 그리고 6.25 때 지식인이었던 이광수가 친일논란 있음에도 불구하고 숙청하지 않고 납북해 간 일 등은 무엇으로 설명합니까? 김일성한테 꺼림칙하면 친일파라 숙청하고 필요하면 넘어가고 그게 북한이 자랑하는 친일파숙청입니다.
[북한이 주장하는 친일파 청산 작업은 공작이며 음모였다
-북한 고위간부 중요 명단 -
부주석 김영주 -만주군 통역 (김일성 동생, 김정일 작은아버지) 북조선 공군 총사령관 이활 - 나고야 항공병학교출신 -허민군 9사단장
-강치우 기술부사단장
-김기옥 제1연대장 -김한욱 제2연대장 -북한공군간부 20명은대부분 일본제국군출신, 10명 만군(만주군) 출신
-장헌근 사법부장 :일제 중추원 참의
-강양욱 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 :일제하 도의원
-이승엽 남로당 2인자 :친일단체 대화숙 출신
-정군은 문화선정성 부부상 :일본군 밀정
-김정제 보위성 :일제 시대 관료
-조일명 문화선전성 부상 :친일단체 대화숙 출신
북한이 처단한 친일파 명단
1) 민족주의자 조만식 선생및 그 추종자들: 설명이 필요 없는 <한국의 간디 조만식> 선생을 처형시킨 죄목은 [친일 반민족주의자] 이다. 2)현준혁 ; 일제에 저항하던 사회주의 문학자, 김일성 보다 월등 뛰어난 지식으로 자신을 압도하자 [친일 분자] 로 몰아 처형
3)오산학교 출신들; 오산학교는 3.1 운동때 기독교 대표이신 남강 이승훈 선생이 설립하신 학교다. 남강 이승훈선생 역시 말이 필요 없는 항일운동가. 항시 학생들에게 "공부열심히 해서 일본놈을 앞지르라 그래서 독립을 쟁취하라"하신 애국자 이시고, 수차례 옥고를 치루신 분이다. 김일성이 붙인 죄명은 [친일파 학교]
4)대성학교 출신들; 평양의 대성학교는 도산 안창호 선생이 설립하신 학교이다. 이학교 출신들이 김일성 보다 명망이 크자 모조리 처형하면서 붙인 이름이 역시 [반민족주의 학교]
5)숭실학교 출신들; 오산학교나 대성학교와 같이 이학교 출신들을 무수히 사형시키고. 뒤집어 씌운 죄가 [반민족 친미주의]
6)박헌영, 이강국, 임화 등; 잘알다 싶이 남로당 이다. 모두 사형시키면서 뒤집어 씌운죄가 [친일파. 섹터주의자. 회색분자.]
7)허가이 일파; 김일성보다 좀 유식하다. 모스크바에서 유학을 한 정통 이론가 이다. 하여간 자기보다 똑똑한 사람 꼴을 못보는 김일성이 사형시키면서 씌운 죄가 가당치 않게스리 [미국 간첩] 모스크바 유학간놈이 미국 간첩이라니 김일성도 참 ...
8)윤공흠 일파: 사건이 크다. "당은 인민을 위해 한것이 무엇인가?" 하고 과감하게 김일성에게 대든 당시 "경공업 상(장관)"이다. 사형시키면서 뒤집어 씌운 죄가 [친일파]
9)김무정 일파. 중국 팔로군 포병 사령관이었던 무정을 죽이면서 뒤집어 씌운 죄가 [미국 간첩, 친일파] 일본군과 만주에서 죽어라고 전투한 사람에게 붙인 죄가 친일파입니다
김일성, 친일 인텔리도 간부로 등용했다 北 에 기록, "동생 김영주는 관동군 통역경력" [2005-09-16 12:48]
▲ 중강지질탐사대 노동자들을 지도하는 김일성 1948년 북한 정권수립 이후 친일 경력자와 인텔리, 일본인 상당수가 정권기관과 경제건설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북한 역사서와 관련자들의 증언을 통해 밝혀지면서 남한 일부에서 제기해온 '북한은 완전한 친일청산이 이루어졌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잃게 됐다.
북한의 대표적인 역사서 『조선전사』 현대편(23편) '민주건설사 1'에 의하면 “김일성 동지께서는 지난날 공부나 좀 하고 일제기관에 복무하였다고 하여 오랜 인테리들을 의심하거나 멀리하는 그릇된 경향을 비판 폭로하시면서(중략), 그들을 새 조국 건설의 보람찬 길에 세워주시었다”고 기록돼 있다.
『조선전사』는 김일성이 당시 과학자, 기술자, 문화예술인 등의 인텔리들을 인민정권기관과 중요 산업 기업소들의 책임적 지위와 그리고 교육, 문화, 보건 기관들의 중요 부서에서 일하도록 배치했다고 적고 있다.
또 이 역사서는 “지난날 식민지 노예교육을 받고 일제기관에 복무한 데로부터 자신들에게 적지 않게 남아있는 부르죠아 사상을 뿌리뽑고, (중략) 맡겨진 혁명임무를 책임적으로 수행해나갔다”며 인텔리들의 북한 사회에 대한 기여를 높이 평가했다.
친일 경력을 가지고도 북한의 정권 중심부에 진출한 인물도 적지 않다.
이 가운데 권력 핵심을 장악했던 인물로는 김일성의 친동생 김영주 (金英柱)가 대표적이다. 김영주는 만주지역에서 일본 관동군 통역으로 활동한 경력이 있다. 그는 해방 이후부터 70년대까지 북한의 실질적인 2인자로 행세해왔다.
▲ 김일성 동생 김영주 독립운동가 이용상 시인은 자신의 회고 글에서 “일본군을 탈출하여 중국군 장교 자격으로 항복한 일본군을 만났을 때 일본군 통역인 김영주를 만났고, 두 사람이 함께 중국군 부대에서 기거했다”고 증언했다.
황장엽 전 북한노동당 비서 등 고위탈북자들은 “김영주가 중국 본토에 갔다가 관동군에 체포된 것은 사실"이라며 “북한 내부에서는 김영주가 어쩔 수 없이 이용당했다는 논리를 쓰면서도 관동군 복무사실은 철저히 숨겼다”고 말했다.
친일경력 김영주, 20년간 북한의 2인자로 군림 그는 김일성의 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친일행위는 비밀에 붙여진 채 57년 노동당 조직지도부 과장을 시작으로 권력 요직을 거치면서 70년대 중반까지 김일성에 이어 실질적 2인자 역할을 했다.
북한이 1948년 채택한 헌법에 따라 구성된 초대 내각 사법상에 임명된 이승엽은 전향 친일자 교육을 담당했던 대화숙(大和塾) 출신으로 인천양곡조합 간부를 역임했다.
친일파 건국 관련자료를 집필한 김원률씨는 “여러 사료를 통해 이승엽의 친일행위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승엽은 남로당 2인자로 남로당 중앙위원과 경기도당 위원장을 거쳐 48년 월북했다. 한국 전쟁 당시에는 서울시 인민위원장 직책을 가졌다.
이승엽은 1925년 조선공산당에 입당해서 활동하고 해방 이후에는 남로당 간부로 활동한 것으로 볼 때 그의 전향과 친일 행적이 신분을 위장하기 위한 것일 가능성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도 일제 강점기 시절 관료로 일정한 직위에 복무한 것만으로 친일인사로 등록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의 기준에서 보면 친일행위자로 분류될 수밖에 없다.
▲ 1981년 출판된 북한의 대표적인 역사서 사전편찬위가 지난달 발표한 친일 인사 3090명의 명단에는 북한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572명과 이름이 일치하는 경우가 42명으로 나타났다.
이 가운데 5명은 동일 인물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지만, 나머지는 동일인 여부가 확인이 불가능한 상태. 당시 조작된 남한 출신 대의원 360명이 포함돼 있어 친일 여부에 대한 검증을 확실히 거치지 않은 채 명단이 작성됐을 가능성도 있다.
경제관련 인재 등용에서 김일성은 남한보다 더 실용적인 자세를 취했다. 김일성은 일본인과 일본기업에 종사한 기술자들을 우대했다. 남한의 미군정이 일본인 기술자를 대부분 일본으로 추방한 데 반해, 북한에서는 공장을 가동시키는 데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이같은 사실은 6,70년대 남한 경제개발의 주역이었던 오원철 전 중화학공업기획단 단장의 증언과 관련자료에서도 나타난다. 청와대 제2경제수석이었던 그는 북한의 경제건설과 관련, 매주 당시 중앙정보부로부터 보고와 중요자료를 받았다.
오 전수석에 따르면, 북한 당국이 일본인 기술자의 귀국을 허락하지 않으면서 북한에 남게 된 일본인 기술자는 1946년 11월 당시 868명이었다. 이들 가족까지 합하면 2,095명이다.
일본인 기술자에게는 월 4,500∼5,000원을 지급했다. 당시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 위원장 김일성은 4,000원, 인민위원회 과장급이 1,500원을 받았다. 또한 이들에게는 생명과 재산을 어떤 상황에서도 보장한다는 신분증을 발부하고, 생필품과 주택을 포함해 최고 대우를 해주었다.
(오원철 저 제7권) 일본인 기술자에게 '노동영웅' 칭호, 특별대우 오 전수석은 "북한 당국은 1946년 흥남 비료공장에서 근무한 일본인 기술자 코 지치로(昆吉郞)씨를 '노동영웅'으로 표창까지 했다. 이후 그는 우리나라에 와서도 울산석유화학의 폴리프로필렌 공장건설 때 산업훈장을 수여받았다"고 말했다.
북한은 1949년 실시한 ‘2개년 계획’의 경제 목표를 1944년도의 생산 수준까지 복구하는 것을 목표로 했던 상황이어서 이러한 조치가 불가피했다는 지적이다.
오 전수석은 “미군정은 일본의 기술을 무시하는 자세를 취했지만 소련은 일본인이 운영한 공장과 기술진을 적극 우대하는 정책을 취했다”면서 “김일성도 일본인과 이에 협력한 기술자들을 적극 우대하는 정책을 취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북한 정권 기관이 완비되기 이전, 해방 직후에는 상황이 달랐다. 1945년부터 1946년 초까지 해방 이후 소련 군정이 들어선 기간에는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사회주의 계급투쟁이 급진적으로 진행됐다. 일제 시대 지주, 공직자, 공장 간부, 친일 부역자뿐 아니라 재산을 소유하거나 일정한 직위를 가진 인사, 인텔리들이 재산을 몰수당하고 탄압을 받았다.
이후 1946년 3월 토지 개혁과 국유화, 선거를 거치면서 일제 강점기 토지와 재산, 공직을 가졌던 인사 대부분이 각종 권리와 지위를 박탈당했다.
이 과정에서 절대 다수가 남한으로 내려왔다.
황장엽 전 비서에 따르면 실제 북한은 건국 이후 친일 청산을 할 것도 별로 남아있지 않았다고 당시 상황을 증언하기도 했다.
북조선인민위원회가 1948년 따르면 황해도의 각급 인민위원회의 구성만 보아도 노동자 농민이 83%, 사무원이 7%, 수공업자, 상인이 9%, 중소기업가와 기타가 1%를 차지하였다.
이 과정에서 진행된 친일파 청산 작업은 구체적인 사법적 절차를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 국내 우파 진영에서 북한의 일제 청산 작업을 신뢰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북한 친일파 청산, 역사기록으로 안 남겨
나라정책연구원 김광동 박사는 “북한의 친일파 청산은 담론으로만 존재할 뿐이지 실제 법령과 재판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면서 “남의 재산을 빼앗고 부르주아 계층을 타도해 소비에트화를 완성하기 위해 친일 명분을 내세운 것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민족주의 독립운동 세력인 조만식도 불순분자, 친일파로 낙인을 찍어 숙청해버린 것처럼 정적(政敵) 제거와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친일파 청산은 사실상 구호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여기에 따르면 “지방인민위원회들로 하여금 진정한 인민의 정권기관으로서의 자기의 임무를 옳게 수행하게 하자면 무엇보다도 그 안에 기여든 친일파, 민족반역자 등 불순분자들을 적발 숙청하기 위한 투쟁이 힘차게 벌어지게 되었다”고 말해 정권기관에서 친일 행위자를 추방하기 위한 사업이 진행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또한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 조만식과 그 일당을 비롯하여 지방정권기관의 일부 책임적 지위에 기여들었던 불순분자들은 사업을 고의적으로 태공(사보타주)하면서 인민정권기관의 위신을 떨어뜨리고 민주주의 민족통일전선의 파괴하기 위하여 음으로 양으로 날뛰었다”고 기록했다.
임시인민위원회 20개조 정강 '친일잔재 청산' 천명
1946년 3월 23일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이름으로 발표한 에 첫 번째 조항 ‘조선의 정치경제생활에서 과거 일제통치의 온갖 잔재를 철저히 숙청할 것’을 밝히고 있다. 1945년 11월 15일부터 17일 사이에 열린 북조선 공산당 중앙조직위원회 제2차 확대집행위원회에서 김일성은 라는 연설에서 ‘민주주의인민공화국정부는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을 제외하고 진보적이며 애국적인 각 정당들과 각계 각층 인민의 참다운 대표들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연설 기록이 남아있다.
북한 정권 기관이 해방 이후 친일파 청산을 합리적으로 진행하지 않고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명분으로 내세운 것은 비판의 소지가 크다. 이처럼 남과 북이 모두 일제 하에서 일정한 지위와 부를 누렸다 하더라도 사회발전에 필요한 인재들은 중용한 것을 볼 때, 이번(민족문제연구소) 친일 인명사전에 일정한 직위를 갖거나 일제의 정책에 동조했다는 이유만으로 친일 인사에 포함시킨 것은 사회발전의 요구를 이해하지 못한 편향된 인식의 결과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신주현 기자 shin@dailynk.com
⑨ 박정희 그는 대통령으로써의 친일적 언동했다? 대통령이 국가이익을 위해서 일본을 방문 및 협조를 받은 것이 친일의 기준이 될 수 있을까요? 그러면 그때 일본과 외교관계를 끊어야 합니까? 또한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 외교적 수사법으로 한 발언이 친일파의 기준이 될 수 있는지요? 옛날 일제시대 자기를 가르친 일본인 선생을 만나 듣기 좋은 소리 좀 했기로소니 그게 전부 친일입니까?
못 먹고 사는 국민들을 먹이기 위해 지리적으로 가까운 위치에 있는 일본의 자본과 기술 가난한 나라로서 손을 좀 손을 벌려야 하는 상황인데 지도자면 국민들을 위해 그보다 더한 것도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공적 사적 외교석상에서 노통처럼 나오는 데로 막말을 하면 그것이 대통령으로 해야 할 언행일까요? 역대 대통령 치고 이러한 외교적 수사법을 사용하지 않는 대통령이 없습니다. 하물며 반미면 어떻냐?는 노통이 취임후 정작 미국가서는 미국이 없었다면 나는 수용소에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⑩ 박정희 대통령으로서 친일적이며 굴욕적인 한일협정체결했다~일본군국주의 세력의 정신적 유대는 대일 굴욕회담을 (한일협정) 성사시킨다. 여기서 식민지 지배 피해에 대한 거의 모든 권리와 주장을 포기한다?- 당시 우리나라는 일본과 대일청구권문제의 타결을 위해 7차례나 회담, 우리가 요구하는 8억 달러와 일본이 제시하는 최고액 7000만달러중 무상으로 3억 달러, 유상 2억달러, 민간 상업차관으로 3억 달러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타결합니다.(한일회담 당시 일본의 국고는 14억 달러 정도였습니다 그러므로 위 조건은 작은 돈이 아닙니다) 즉 80억달러 주겠다는데 박 대통령이 이렇게 받았겠습니까? 많이 받으면 좋겠지만 돈 주는 쪽이 일본인데... 우리가 많이 달라고 해서 일본이 그렇게 주겠습니까?
더우기 애석하게도 우리나라는 일본에 대한 승전국의 위치가 아니였습니다.배상금이라는 것은 패전국이 승전국에게 주는 겁니다. 일본은 협상하는 동안 시종일관 배상금이라는 이름보다는 경제협력금, 독립축하금이라는 이름으로 수교하길 원했습니다. 그들은 미국한텐 패전국이지 어부지리로 독립 얻은 한국에겐 패전국이 아니라는 겁니다. 협상의 출발부터 우리나라에게 유리한 협상카드는 별로 없었습니다.
한일협정 성사 배경에는 사실상 미국의 압력이 주효했다는 지적입니다.
미국은 동아시아 지역통합 군사전략의 일환으로 한일 양국의 국교정상화를 서둘렀다는 것이죠 그들은 우리나라한테 일본에서 자꾸만 시비를 거는 독도에 대한 고유영토권을 포기하라고까지 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절대 있을수 없는 일이다 대노할 정도로 미국의 조속한 한일수교협정체결 압력이 있었던 것이였습니다
[참고-韓日 독도 공동소유 美제안, 박정희가 거부"
1965년 박 전 대통령이 일축 ,,, 미 국무부 외교문서 확인 신용일 기자
한일협정 당시 독도 문제로 한국과 일본이 팽팽히 맞서자 미국이 협정 체결을 위해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한일 공동운영 등대를 독도에 설치하는 안을 제시했다가 단호하게 거절당한 사실이 최근 비밀해제된 미 국무부 외교문서에서 드러났다.
국무부 문서 ‘1964~68 미국의 외교관계 29편’은 363호에서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방미중인 박정희 대통령을 1965년 5월17일 만나 한일협정 진척을 축하했다. 이튿날 딘 러스크 국무장관이 한일 양국이 독도를 공유하며 천천히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공동 운영 등대를 세울 것을 제안했다가 박 대통령으로부터 있을 수 없는 일(Just would not work)’이라는 답변을 받았다“고 밝히고 있다.
당시 미국은 주한미군 유지비가 한일협정 타결로 줄어들기를 기대했으나 독도문제가 협정 타결에 장애물로 대두하자 독도에 이같은 관심을 보인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이는 로버트 W. 코머 미 국가안보위원이 1964년 5월19일 존슨 대통령과 특별보좌관 등에게 보낸 메모에서도 엿볼 수 있다.
코머는 “우리는 한국민 2,000만명을 위해 연 3억달러를 지출하고 있지만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어떡하든 한일협정을 타결시켜 일본돈이 한국으로 유입돼 주한미군 주둔경비가 감소되도록 해야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협정이 성사되도록 밀어붙일 필요가 있다”고 강조, 존슨 행정부가 독도문제에 대해 한국에 압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그러나 워싱턴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독도문제를 한일협정에 포함시킬 수 없다는 박 전 대통령의 단호한 입장은 1965년 6월15일 윈트롭 브라운 주한 미대사가 국무부에 보낸 364호 문건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브라운 대사는 문건 364호에서“독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일 외교장관 회담을 가질 것을 제안하자 박 대통령이 ‘만일 일본이 독도에 대해 계속 자신들의 입장을 주장하면 장관급 회담은 무의미하다. 만일 일본이 우리의 입장을 받아들인다면 김동조 대사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전권을 갖고 있기에 그같은 회담은 필요가 없다’고 거절했다. 일본과의 협정 그 어느 곳에라도 독도가 언급되는 것에 반대한다는 한국의 입장은 명백하다”고 재확인했다.]
돈 몇푼에 우리땅 독도를 폭파할려고 했다 삼국조정 어쩌구 하면서 독도를 넘길려고 했다며 국내 진보좌익 세력들이 끈임없이 인터넷을 통해 온갖 음해와 모함를 자행해왔지만 역사의 진실은 이렇게 미국과 일본의 큰 압력에도 불구하고 박대통령은 독도를 끝까지 배타적 경제수역 (EEZ) 우리땅으로 지켰던 것입니다 단지 국제분쟁화 지역으로 만들려는 일본의 술책에 직접적이고 감정적 대응을 자제한 정책기조를 선택했습니다. 독도영유권에 정작 큰 문제를 야기한 것은 신한일어업협정을 맺은 김대중정권 그것을 계속 연장해준 노정권입니다
60년대 그당시 냉전시대의 강대국의 논리가 없었다면 과연 일본이 뭐가 아쉬워서 우리한테 돈을 주면서까지 수교를 할려고 했을까요? 미국의 압력이 컸다는 것은 이미 뉴스에 보도되어 다들 잘 아실 겁니다. 우리가 많이 달라고 해서 되는 문제의 수준이 아니였습니다 약소국의 비애라 하겠지요
진보좌익들에 의해 박정희 정권이 독단적으로 식민지 피해에 대한 개인청구권을 포기했다고 유포된 것은 잘못 알려진 사실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받아내기 힘든 개인청구권 대신 국가가 대신 받는 정책으로 선회한 것은 이미 516혁명전의 이승만 정부 장면 정부부터 있었던 겁니다.
개인청구권이란 개인이 일본정부와 재판을 해서 배상받는 것인데 실제로 배상받은 사례는 거의 잘 없습니다. 일본이 주장했던 것은, 서류로 증빙할 수 있을 경우나 객관적 사실확인이 가능한 경우에만 보상을 하겠다는 것이고, 하지만 우리는 6.25같은 전쟁 문제도 있고, 모든 부분을 세세히 증명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 정부는 그런 개인 보상도 포함해서 국가가 조선총독부의 대일채권이라든가 하는, 국가와 개인을 포함해 포괄적으로 청구권을 행사하겠다는 태도를 견제했던 것입니다, 결코 일본 정부가 인심좋게 식민지배로부터 피해를 본 조선국민 개개인에게 광범위하게 구체적으로 넉넉히 피해보상을 하겠다는 것을 국가가 가로챈 것이 아닙니다
이런 어려운 사정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해야할 기술도입과 경제개발 종자돈을 베팅할 시기를 놓쳐야한다니....? 그당시 아사자 동사자 전염 병자 비일비재하는 최빈민국가에서 할수 있는 최선책였을까요? 회담이 성사된 후 박정희 정권은 민족의 자존심을 팔았다'는 비난과 반발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종자돈을받아 투명하게 충실히 모범적으로 사용하여 한국의 근대화와 경제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지금보면 긍정적 평가가 국민적인 대세입니다 또한 우리가 받은 금액은 보는 관점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집니다. 수십억달라를 요구만 하고 받지 못하면 괜찮고 그것보다 적은 돈이라도 받아 냈으면 친일파라니..? 논리적 설명이 되지 못합니다
박정권의 비리를 캐기 위해 만든 한.일 외교문서 공개심사단의 민간위원으로 조사에 참여한 이원덕 국민대 교수의 글 인용합니다 -세간에 의혹과 억측이 난무했던 한.일회담 관련 한국 정부 외교문서가 한 장도 빠짐없이 그 전모를 드러냈다. 한.일회담에 대한 보다 객관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는 기본조건이 비로소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반가운 일이다. 한.일 외교문서 공개심사단의 민간위원 자격으로 3만5000여 장에 이르는 외교문서의 공개 검토작업에 참여했던 필자는 한.일회담을 '대일 굴욕 협상' '매국외교'라고 단죄하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오히려 필자는 악조건과 어려운 상황 속에서 난적 일본을 상대로 당시의 박정희 정부가 국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그 결과로 최선은 아니라도 차선의 결실은 거둔 것으로 평가하는 것이 온당하다고 생각한다-
(노정권이 위촉한 학자로 조사하러 들어간 사람이 이런 평을 한 것은 박 대통령이 역사앞에 당당한 승리자라고 할수밖에 없습니다.)
- 위 사항은 정책결정사항이며 이러한 정책결정사항으로 친일파 여부를 판단한다면?
현대적 개념의 국토는 땅 하늘, 바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땅 독도는 현재 신한일어업협정에 의거해 한일공동 어로수역의 중간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즉 우리의 국토인 독도가 국제법상 일본에게도 영유권이 인정되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일본이 독도분쟁을 국제사법재판소에 위탁할려고 혈안이죠 이 협정은 1998년 11월 28일. 김대중 정권(노무현대통령은 DJ정권의 해수부장관출신입니다.)당시에 이뤄어 졌습니다. 그럼 김대중대통령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리고 일본대중문화를 완전 개방하고 신한일어업협정 연장하신 현재의 노무현 대통령은 어떻습니까? 친일파로 치자면 누가 진짜 친일분자인지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진보좌익들은 생존한 위안부 할머니들이 일본에게 보상 못 받는 이유가 위의 대일청구권자금 때문이다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대일청구권자금을 받았기 때문에 현재 못 받는 것일까요?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이 정신대문제와 관련하여 대일보상을 요구하지 않을 것임을 발표하였으며, 11월 국제법률가협회에서 일본의 배상의무가 있으며, 1965년 한일협정의 청구권에 불법인권침해와 위안부 개인의 권리침해에 관한 청구는 포함되지 않는다고 밝혔습니다.특히 위안부문제에 관하여 한국, 타이완, 일본, 필리핀, 타이, 홍콩등 아시아 6개국 여성단체에서 공동보조를 취할 것을 결의하였습니다. 즉 일본으로부터 위안부문제로 보상받은 나라는 현재까지 없습니다.
참고로 각 단체들이 선정한 박 대통령의 친일파 여부는 아래와 같습니다. - 반민특위 : 해방이후 최초의 친일청산을 위하여 7000명을 조사 이 중 690명을 친일파로 선정하였습니다만 박 대통령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았습니다... * 장면총리 : 친일파로 분류
- 독립 운동가들의 총본산인 광복회(친일반민족행위자 692명)에서도 박정희를 친일파로 분류하지 않습니다. * 장면총리 : 친일파로 분류.
- 역사광복운동본부(친일파99명):이단체는 박 대통령을 그들의 역사적 상상과 가정에 따라 신친일파로 분류했습니다. ~내용:이단체는 만주에서의 박정희의 행적과 관련, 그가 독립 운동에 참여한 주장에 대한 비판과 만일 일본이 계속 득세하고 있다면 독립 운동가를 학살했으리라는 가정 그리고 해방이후 공산주의 활동 및 정권잡은 이후 경제개발등에 대해 비판함으로써 친일파가 아닌 신친일파로 분류하였습니다. 이단체의 상상과 가정에 의한 설정에도 간도특설대이니 독립군 토벌과 같은 언급은 없음 * 장면총리 : 친일파로 분류.
- 한일역사문제연구소 : 박정희, 장면 해당없음
- 민족문제연구소 : 박정희를 친일파로 주장함. 박정희 생애에 대한 왜곡된 만화를 편찬하고 여당의원 선친을 뺀 친일인사명단발표를 함으로써 박 대통령을 대표적 친일파라 규정함 그러나 친일파로써 어떤 구체적 반민족행위를 했는지? 실체적 근거나 규명을 내놓고 있지 않습니다.
결론 : 현재까지 밝혀진 박 대통령의 친일논란은 만주군군학교와 일본육사를 나와 1944년 7월, 만주군 소위로 임관되어 만주군 제5군관구 예하의 만군 보병 8단 내근직에 근무했다는 것이 전부입니다.그 이외 사항은 전부 허위, 날조, 과장된 것들입니다
(일본육사와 인연을 맺은 한국인은 1883년부터 1945년에 이르기까지 모두 114명에 이른다. 여기에 만주국 군관학교 예과 졸업자로서 이 학교 본과에 편입, 졸업한 27명을 추가하면 141명이 된다. )
조선인 중에 박정희 혼자만 군관학교와 일본육사에 편입한 것도 아니고 역사를 극단적인 흑백논리로만 따진다면 일군 중위 까지 하다 망명하신 독립운동가 지청천 장군이나 중국의 장개석도 일본의 육사를 다녔는데 그렇다면 그런 사람들도 친일파가 되는 것인가요?
중국사람들은 장개석을 친일파라 얘기하지 않습니다.
박정희 그의 평생을 전체적으로 조감해본다면 자신의 조국을 일본보다 더 강한 나라로 만들려는 진정한 극일파였다고 생각됩니다.
--우리나라 정치에서의 지역감정 유래--
60년대 호남사람들이 선거때 박정희대통령한테 50프로 이상 표를 준 사실을 아십니까?
(김정렴 비서실장의 말 )
과거부터 유력정치인중 하나가(김대중) 호남을 차별했다고 이야기를 하고 다녀서 지역감정 그것이 마치 사실인양 되었는데요. 그렇지 않습니다.
개발 정책면에서 얘기를 해 보죠.
우리는 그 당시 일본에 대해서 100년 이상 뒤떨어져 있고, 미국, 영국에 대해서는 200년 이상 뒤떨어져 있는 데다 자원도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빨리 공업화하느냐, 이것이 초미의 과제였습니다.
그럴려면 가장 입지가 좋은 데다 공장을 세워야 되거든요. 우리 한반도를 보면 제일 좋은 곳이 동해안이고 남해안입니다. 단애가 져 가지고 바다가 급히 깊어져요. 그리고 남해에는 섬이 많고, 섬이 있으니 방파제의 필요가 훨씬 덜하고 준설도 많이 할 필요 없이 항구가 되죠. 더욱이 거긴 일제 때부터 도로와 철도가 발달되어 있단 말이에요. 그런데 서해안의 경기도, 충남, 전북, 전남은 수심이 앝으니까 여기 10만 톤, 25만 톤 급 항구를 만들려면 이만저만한 돈이 드는 것이 아닙니다. 철도도 장항까지 가는 것과 호남선 이외에는 안 되어 있었단 말이에요.
그리고 해안 따라서 도로가 없고 제한된 돈으로 일은 빨리 해야 하니 할 수 없이 남해안하고 동해안에 개발의 중점을 둔 겁니다.
당시 국토 개발 계획이 있었죠. 건설부 산하의 국토연구원이 있어서 주원 건설부장관이 국토 계획의 전문가였는데 지금 말씀대로 강원도는 관광자원, 수산자원 정도지 여기다 공장을 넣지 않는 것이 좋다 하는 식의 아이디어를 내면서 경제권을 몇 개로 나누었던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류하고 난류가 대한 해협에서 교체가 된단 말이에요. 그것이 부산 울산 포항 쪽입니다. 그러니까 공장을 거기다 지어서 오폐수를 쉽게 내보내고 특히 공해 많은 온산 공단에 들어간 유해 공장의 폐기물도 해류가 거기서 되돌아오니 거기에 넣어도 되었던 거죠. 하지만 서해 바다는 기껏해야 간만의 차이뿐이고 옆으로 크게 흐르지 않아요. 경기도, 전북, 전남 해안에 섣불리 공장을 지었다가는 해수가 들락날락만 하지 옆으로 흐르지 않기 때문에 조개고 뭐고 다 오염이 됩니다. 그 때 돈만 있었으면 환경오염을 막을 수 있었겠지요. 그러나 돈이 부족했습니다. 그 돈이 있었으면 더 급한 데 썻겠지요. 이것은 한마디로 우선 순위의 결정과 요충식 경제 개발의 불가피성 때문이었습니다.
선거 때마다 ‘호남 푸대접이다’ 하며 표가 떨어진다고 야단이었는데 왜 안 하려고 그러셨겠습니까! 오죽했으면 유세 때 전주 광주 가셔서 ‘공업화 안 돼서 당신들 안타까워하지만 나중에 두고 보시오. 다른 데서 공해로 시달릴 때 당신네들은 더 깨끗한 공장 지어 가지고 나중에 더 잘산다’ 고 하셨겠습니까. 그것은 경제 개발 정책상 할 수 없었어요. 그 대신 무척 애쓰신 것이 종합 제철을 광양에 갖다 지으신 것과 여천 석유화학 단지를 들 수가 있습니다. (........)
김정렴 정치회고록 발췌
박정희는 원래 만주군관 학교 출신이고요. 거기서 수석 졸업을 해서 일본 육사에 편입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당시 만주지역에서도 박정희를 두고, 일본인을 이긴 조선인이라 하여 조선의 자랑으로 여겼죠. 무슨 친일파니 매국노니.. 그따위 평가는 전혀 없었습니다. 오히려 자랑스럽고, 자부심 넘치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손기정 선수 아시죠? 일본 국가대표로 올림픽에 나가서 일본에 금메달을 안겨주잖아요. 그래도 조선인들은 조선인이 왜놈들 보다 잘나서 조선인의 기상을 보여줬다고 떠받을었죠. 박정희도 마찬가지였습니다.박정희는 일본군으로 잘못 아시는 분들이 많은데 사실 일본군이 아닌 만주군 하급장교로서 근무했으며 그의 비중은 크지 않았습니다.(만주국은 일본국과는 좀 다른 나라였죠. 뭐~ 괴뢰국이라고 표현하기는 하지만, 겉으로는 오족협화의 기치를 내세운 그런 나라였습니다.) 먼저 독립군 토벌 광복군 토벌이니 뭐니 하는 건 전부 근거 없는 날조이고요. 천황 혈서 충성맹세 같은 것도 아무 근거 없는 낭설입니다. 특히 창씨개명을 했다는 것도 당시 야당이었던 김대중측에서 날조한 것으로 드러났고, 김대중의 창씨개명이 도요다 다이쥬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그러한 정치공작도 쏙 하고 들어가버렸지요. 당시의 창씨개명은 조선인 80% 이상이 한 것으로 노무현 대통령의 부친도 했었던 것이고요. 별로 친일이니 매국의 증표가 될 수는 없지요.
그리고 5.16은 정변이 아니라, 명백한 혁명이고요. 당시 윤보선, 장면 정부는 무능과 부패의 절정을 달렸는데.. 박정희가 빈농의 아들인 것에 반해 윤보선은 친일명문벌열가문 출신이었고요. 장면도 역시 김구 선생의 지시로 반민특위가 작성한 친일파 살생부 268인 중에 한명으로 등재된 악질 친일파였죠. (박정희 해당없음)
4.19로 자유당 정부가 무너진 이후 장면 내각이 출범하는데... 비참한 민생은 내팽계치고 10번도 더 개각이 이뤄지죠. 이유는 바로 장관 자리 하나씩 해 먹으면 가문의 영광이요, 국가에서 연금이 나오기 때문에... 지금의 노무현 대통령처럼 코드정치다, 보은인사다.. 하면서 전부 다 해 처먹었죠... 박정희가 5.16 혁명을 일으켜, 무능하고, 부패한 정권을 심판합니다. 5.16으로 인하여 장면, 윤보선을 중심으로 한 진짜 친일파 정권이 무너지게 된거죠. 그런데 왜 쿠데타가 아니라 혁명이냐고요?
당시 4.19에 참여한 서울대 학생회가 5.16 지지성명을 발표하죠. 그리고 장준하 선생께서 5.16은 4.19 정신을 이었다며 칭찬하게 되죠. 이처럼 학생, 대중, 지식인 너나 할 것 없이 5.16을 혁명으로 규정하고, 4.19 정신의 계승이라 칭송했습니다. 군사정변??? 5.16때 아무도 안 죽었습니다. 대규모 교전도 없었죠. 그래서 5.16을 무혈혁명이라고 합니다. 즉 구국의 결단으로 이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 일어난 것이죠. 그런데 불순한 무리들은 5.16을 폄하하며.. 박정희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다고 하는데.. 이후 혁명공약을 내걸어 모두 완수하고, 민정이양을 거쳐 직접 선거로 대통령직에 당선됩니다. 당시 서민이었던 박정희와, 친일벌열가문의 후예인 윤보선이 경합을 벌이는데.. 간발의 차이로 박정희가 당선되게 되죠. 즉 국민들이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 박정희의 정통성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의 영구통치설은 터무니 없는 억지이며 반박정희 세력이 퍼뜨리는 유언비어입니다. 여기에 대해선 박대통령의 유가족인 박근혜씨의 증언을 올립니다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임종조차 못했던 자식으로서 비통한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나, 아버지께서 여한없이 눈을 감으셨으리라는 점은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 믿음에 변화가 없습니다."
▶여한이 없으리란 뜻은 무엇입니까?
"아버지는 그 무렵 국가를 위한 자신의 설계를 거의 다 이루었다는 생각을 하셨고,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날 준비를 하고 계셨습니다. 아버지의 끝은 우리 겨레의 5천년 한을 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늘 어떻게든 경제자립과 자주국방을 이루어 가난과 외침에 시달려온 민족의 한을 풀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는 그 당시 미국의 조직적인 방해를 무릅쓰고 핵개발을 추진 중이었으며, 우리가 핵을 개발함으로써 전쟁 억지력이 생겨 북의 위협을 의식하지 않고 민주주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셨습니다. 78년 9월26일 우리 힘으로 중장거리 미사일 개발에 성공하여 세계 일곱번째의 보유국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셨고, 그날 쓰신 일기를 보면 “자주국방과 조국근대화작업이 완성단계로 접어들었다. 흥분과 기쁨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그 당시 최규하 총리를 후계자로 생각하셨던 것은 확실하다고 믿습니다. 저에게 여러 번 “최총리가 하면 잘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분의 경력과 성실함을 높이 평가하시곤 했습니다. 아버지가 그런 일을 당하지 않았다면 81년까지는 핵개발과 정부이양이 이루어졌을 것이고, 오늘 우리나라는 혼란없이 선진국 대열에 섰을 것입니다."
-- 후진국에서 경제건설과 민주화가 양립가능했겠는가? --(산업화에 민주화를 동시 추진, 성공한 예는 없다) 이론적 차원에서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이 양립하지 못할 이유는 없으며 실제로 산업화의 성숙단계에 도달한 대부분의 서구국가들에서 그것은 경험적으로 실증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산업화의 초기단계에서도 이들 국가들이 민주화와 산업화를 병행추진하거나 「선민주화, 후산업화의 길을 걷는 것이 가능했겠는가? 이에 대해 선발 산업화국가들인 영국과 프랑스, 미국 등이 정치혁명(시민혁명)과 경제혁명(산업혁명)을 순차적으로 겪었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그것이 가능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러한 앵글로 아메리카적 경험을 보편적 「모델」로 삼아 많은 후속국가들에 대해서도 그 기준을 그대로 적용하는 단선적 발전개념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영국이 민주화와 산업화를 병행 내지는 순차적으로 추진했다는 것은 사실에 부합되지 않는 편견이거나 도그마이다. 19세기 영국에서 참정권의 범위가 얼마나 제한적이었고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등을 생각해 본다면 이 점은 쉽게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영국도 산업화를 어느 정도 성숙시킨 연후에야 민주화로 나아갔다는 점에서 후속 국가들과 다를 바 없다. 이렇듯 산업화 초기 단계에 민주주의에 의거해서 경제를 도약시킨 사례를 찾기는 어렵다. 특히 그 범위를 후발 산업화 국가들과 그 이후에 본격적인 산업화를 추진한 국가들로 한정시킬 경우 그 예는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경험적으로는 산업화 초기 단계에서 권위주의와 자본주의적 경제발전 사이에 「선택적 친화력」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고 권위주의 체제가 반드시 경제발전을 가져 온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제3세계에의 수많은 권위주의 체제 중 경제발전에 성공한 나라가 오히려 예외에 속한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여기서 국가의 역할과 성격에 주목하게 된다. 국가개입이 자본주의 발전과정과 불가분의 관계였다는 점은 오늘날 많은 경제학자들에 의해 증명되고 있다. 그러면 무엇이 이러한 국가개입이나 역할에 있어 정도의 차이를 낳는가. 경제발전에서 국가의 역할은 산업화의 시기가 상대적으로 늦을수록 일반적으로 커진다고 할 수 있다. 최근 들어 후발 내지 후후발 산업화과정에서 나타나는 경제적 역할이 큰 국가를 지칭하기 위해 「발전지향형국가」라는 개념이 많이 사용된다. 이러한 발전지향형 국가는 단순한 권위주의체제와는 차별성을 지닌다. 역사적으로 보아 권위주의 하에서 경제발전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경우는 국가가 사회 내의 제계급(지배 및 피지배계급 모두)으로부터 상당히 자율적이면서도(그 국가가) 발전을 도모하기에 적합한 정책적 및 제도적 능력을 갖추었을 때뿐이다. 이런 특징을 갖춘 국가를 「발전지향적」이라고 지칭하고 싶다. 그러므로 이제까지의 경험에서 관찰될 수 있는 권위주의적 발전의 예는 모두 그 국가가 「발전지향적 권위주의」체제였기 때문이지 단순한 권위주의 체제였기 때문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산업화 초기단계에서 발전지향적 권위주의 체제와 자본주의적 경제발전 사이에는 「선택적 친화력」이 있다는 명제를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1960년대의 선산업화 정책은 정당했다 이렇게 볼 때 산업화의 초기 단계인 1960∼70년대, 특히 그 초두인 1960년대 전반의 한국 상황에서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이란 두 가치는 병행추진이 어려운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 박정희 체제의 가치 선택은 발전이었고 그 선택은 현실성이 있었다. 그 이유는 다음 두 가지다. 하나는 이미 살펴보았듯이 산업화 초기단계에서 민주를 선택하여 발전을 성공적으로 이룬 선례가 없다는 경험적 근거 때문이다. 또 하나는 민주라는 가치가 중요하긴 하지만 그것이 만약 굶주림이나 절대빈곤과 배타적 선택관계에 있다면 생각을 달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산업화과정에서 생긴 고노동,저임금같은 노동권의 취약성과 환경권관한 문제는 우리나라의 초기 산업개발 당시부터 개발 우선 정책집행 과정상 당면한 고노동 저임금 및 반환경적 요소를 용이하게 피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쉽게 간과했고 넘어갔다면?박정희식 경제개발 모델을 비판하는 것이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60년대 내수시장이 열약한 상태에서 수출만이 유일한 돌파구인 상태에서 기술도 없고 자본도 별로 없는 초기 개발 단계에 바로 시작할 수 있는 분야는 상식적으로 많지 않고 선진국보다 값싼 노동력에 의존한 제한적 선택일수 밖에 없다. 박정희의 겯제개발이 바로 노동자 억압으로 주장하는 지금 좌파들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으려면 저노동 고임금과 쾌적한 환경을 유지하면서 천연자원과 산업자본의 취약성을 극복해 짧은 세월안에 산업화가 가능해야 할 것이다. 그들의 주장의 신빙성을 보여주는 선모델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선발산업국가도 후발국가도 산업화과정에서는 모두 고노동,저임금이었고 친환경적이지 못했다. 적절한 노동과 임금은 산업화가 어느정도 진척된 이후에 노동자들의 투쟁과 국가의 노동복지정책 즉 국가환경정책으로 위상이 올라간 것이 그간의 세계사이며 환경권도 마찬가지이다.더우기 경제개발시대 공무원 및 기업가들의 유착과 연결된 반노동권적 정책 집행 및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나 윤리의식 부재와 결여에서 파생한 크고 작은 사건 사고까지 모두 박정희 한 사람에게만 책임을 돌리는 것은 이성적인 역사인식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빵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민주는 그 의미가 지탱되기 어렵다. 따라서 적어도 산업화의 초기 단계에서는 민주보다 발전을 선택하는 것은 의미있다고 본다. 한국에서 이런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시발된 것이 바로 박정희 집권하의 1960∼70년대이다. 몹시도 배고팠던 시절, 남북대치상황에서 안보불안도 컸던 시절. 경제건설을 통한 산업화 근대화가 이룩되고 나면 그 토양위에서 우람하고 튼튼한 민주주의가 자리잡는다는 박정희 대통령의 신념은 옳은 것이라고 판단한다.
대한민국의 경제성장 과연 노동자 농민의 희생뿐인가?
"한국경제 약자의 희생만으로 성장했다는 교과서 서술은 잘못"
이름 : 자유주의연대
날짜 : 2005-04-28 10:3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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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이한수 기자]‘한강의 기적’이라고까지 불렸던 한국의 경제 성장은 노동자의 저임과 농촌·중소기업에 대한 차별을 바탕으로 했고, 그 결과 극심한 소득 격차를 사회문제로 낳았다는 것이 우리 사회의 통념이다. 물론 중·고등학교 교과서도 그처럼 쓰고 있다. 경제사학자 이영훈 서울대 교수가 29일 열리는 ‘교과서 포럼(상임대표 박효종)’의 ‘중·고등학교 경제 관련 교과서 이대로 좋은가’ 심포지엄에서 이 같은 교과서 서술이 객관적인 통계 수치를 무시한 오류라고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서 큰 논란이 예상된다. 이 교수는 미리 발표한 논문에서 현재 전국의 중·고등학교에서 사용 중인 경제 관련 교과서 8종을 검토하고 “한국 경제가 이룩한 성과와 문제점을 객관적으로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교과서 포럼은 지난해 일부 고교 역사 교과서가 한국 현대사를 분단 고착과 독재, 성장 과정의 독점이라는 ‘실패의 역사’로 본 것을 비판하며 태동했고, 지난 1월 주요 사회과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출범했다.이들은 대한민국사를 “기본권의 신장과 삶의 질 향상, 정치 권리의 증대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저임금으로 성장했나?… 노동생산성 만큼 임금도 올랐다경제학적으로 ‘저임금’이란 노동생산성에 못 미치는 임금을 받는 것을 말한다. 교과서는 1970~90년 동안 노동생산성은 729% 증가했는데 임금은 436%에 그쳤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통계를 확인하면 제조업체 노동자의 임금은 생산에 기여한 부분만큼 착실히 상승했다. 1960년대 이후 현재까지 노동의 한계생산성 증가율과 임금의 증가율 그래프는 완전히 겹치는 양상을 보인다. 노동 생산성만큼 임금이 상승했음을 보여주는 지표다.◆ 중소기업 희생시켰나?… 지난 40년간 中企 10배로 늘어 한국의 중소기업은 1980년대 이후 대기업과 계열관계를 강화하면서 높은 수준으로 발달했다. 중소기업 수는 급증한 반면 대기업 수는 오히려 줄어들었다.1961년 137개였던 대기업은 1988년 1318개로 정점에 달했다가 2002년 670개로 급속히 줄었다. 반면 중소기업은 1961년 1만5067개에서 2002년 10만8819개로 10배 증가했다. 1970년 10%에 불과했던 대기업에 대한 중소제조업체 수급비율은 70%로 상승했다. 대기업은 경기 변동에 따른 신축적 대응력을 높이기 위해 중소기업과의 연계 강화로 노동·자본의 감축분을 대체하고 있다.◆ 소득 분배 불균등했나?… 소득분배 수준은 국제적 모범생 소득 분배를 나타내는 지표는 한국 경제가 국제적으로 ‘소득 분배의 모범생’임을 보여준다. 소득 분배 수준을 나타내는 ‘10분위 분배율’ 지표에 따르면 1996년 한국은 0.558로 국제적으로 덴마크(0.710) 다음으로 양호하다. 한국은 미국(0.338)은 물론 복지국가를 표방하는 네덜란드(0.526)보다 소득 분배가 균등하다. 소득 분배 구조의 악화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중산층이 몰락하면서 부터이다.◆ 농촌경제 차별했나?… 쌀값 보전 등 보호정책이 더 많아 한국의 농업은 오히려 지나친 보호를 받아 왔다. 쌀값은 국제 수준보다 5~6배 높은 수준으로 계속 인상됐다. 농산품 가격은 1960년대 이후 공산품에 비해 높은 수준으로 인상됐다. 2000년을 100으로 할 때 공산품은 1965년 300에서 현재 80~90 수준으로 떨어졌지만 농산품은 30~ 40에서 120~130 수준으로 상승했다.(이한수기자 hslee@
-국내 진보세력들이 펌하한 새마을운동 세계가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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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정부가 새마을운동을 배우라고 3년간 3만명의 공무원을 한국에 보낼 것이라고 한다. 장기적으론 공무원 35만명을 한국에서 硏修연수받게 한다는 것이다. 지난 2월엔 후진타오 주석 등 최고지도부가 31개 省성·市시 간부 200명과 일주일 合宿합숙하면서 새마을운동의 역사와 성공요인을 학습했다. 중국은 세계 4위 경제대국으로 도약했지만 농민 소득이 도시 근로자의 3분의 1밖에 안 되는 都도·農농격차로 고심하고 있다. 중국 지도부는 한국 새마을운동이 낙후한 농민·농업·농촌의 ‘3農농문제’를 극복해낼 정책 모델이라고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뿐 아니라 한국의 농촌부흥운동을 배우기 위해 몽골,베트남,라오스,필리핀,말레이시아,태국, 인도를 비롯해 아시아· 아프리카의 수많은 나라가 우리 새마을운동을 배워가고 있다. 새마을 관련조직과 지방자치단체 등에서 연수받고 돌아간 각국 공무원과 농민이 160여개국 4만명에 이른다. 북한 김정일조차 새마을사업이 한국 발전에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바깥 시각은 이런데도 정작 나라 안에선 새마을운동이 ‘장기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농촌의 겉모양을 바꾸는 데 置重치중했다’고 쓴 근·현대사 교과서를 토대로 학생을 가르치고 있다. 바로 그 교과서가 북한의 천리마운동은 ‘대중의 열정을 끌어내 사회주의 경제 건설에 커다란 역할을 한’ 성공적 운동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한 마디로 중국의 開放개방과 발전 지향의 사회주의의 눈에는 보이는 것이 한국 守舊수구 左派좌파의 눈엔 거꾸로 보인다는 말이다.
정부는 새마을운동 첫해인 1970년 3만5000개 마을에 335부대씩 시멘트를 나눠주면서 마을길 넓히고 다리 세우고 창고를 지으라고 장려했다. 이듬해엔 성과가 좋았던 1만6000곳을 골라 시멘트와 철근을 추가로 나눠줬고 성과 없는 마을엔 지원을 끊었다. 경쟁을 통해 농민들의 마을 살리기 의욕을 북돋운 것이다. 국토균형발전이니 뭐니 해가며 행정도시, 혁신도시, 기업도시라고 해서 곳곳에 국민 稅金세금만 뿌려대는 이 정권과는 달랐다.
중국이 우리에게서 배운 새마을정신으로 사회통합을 이루고 그걸 디딤돌 삼아 압도적 경제력으로 한국시장에 밀고 들어올 때 ‘새마을운동 깎아내리기’에 골몰했던 사람들은 모두 꽁무니를 내리고 시치미를 뗄 게 분명하다.
[펌] 박정희를 다시 생각하며...
저는 젊은 20대의 경제학을 전공한 여성입니다. 태어날때 부터 가난이라는 것을 전혀 몰랐기에 "경제발전"이라는 말은 가슴에 다가오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원래 한국은 이 정도로 사는 나라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윗세대 분들까지만 해도 방글라데시나 아프리카보다 못살았던 세계 최고의 거지국가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고 그런 말을 학교에서 배워도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렸습니다. 대학에 들어가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쓰여진 정치학 책 몇권과 인터넷에 떠도는 쪼가리들을 읽고서는 세상에 대해서 다 아는 것 마냥 떠들고 다녔습니다. 20대 초반 특유의 정의감으로 세상을 선/악으로 구분해서 독재자를 비판하고 짓밟을수록 내가 "멋있고""진보적"이고 "도덕적"인 사람이 되는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박정희를 옹호하는 사람을 보면 "인권을 탄압하면서 유신독재를 했던 파시스트를 어떻게 옹호하나요?"며 거품 물고 비판하는 반박글을 많이 썼습니다.
박정희 시대의 경제발전을 옹호하는 교수님를 향해서 수구꼴통 교수라며 욕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보며, "독재자를 숭배하는 부끄러운 한국인의 모습을 보라. 한국인의 후진적인 정치의식을 보여준다"라며 경멸했습니다. 대학교육이라는 고등교육을 받은 내가, 박통교에 빠져있는 무식한 늙은이들과 보수꼴통들을 깨우치게 만들고 계도해야 겠다는 책임감까지 느꼈습니다. 왜냐면 박정희=파시스트 악마였고 박정희야말로 한국을 망친 챙피한 정치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경제학을 공부하게 되면서 한국의 경제발전을 알게 되고 "그래도 대단한 경제발전을 이루었구나" 정도를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 경제발전은 다른나라도 다 이루는 것이며 오히려 정경유착과 재벌만 키운 나라를 망친 경제발전이었으므로 박정희시대의 경제발전은 IMF의 원인일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저의 생각이 많이 바뀌게 된 것은 시야를 넓혀 외국의 경제발전에 대해서 알게 되면서 입니다. 한국이 당시 필리핀이나 아프리카 가나보다 못살았던 세계 최빈국이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고, 당시 신생독립국들 중에 한국이 가장 높은 경제성장률을 이루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굶어죽는 사람이 많았던 거지국가가 앞서있던 아시아 국가들을 제치고 과거 조공국가였던 중국도 너끈히 누르고 경제강국으로 떠오르는 것은 한국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 같았습니다. 그때서야 우리 윗세대들은 "보수 꼴통"이 아니라 한국역사상 가장 급격한 발전을 일으킨 "위대한 세대"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 세계적 정치인들이 박정희를 어떻게 보는 가를 알게 되면서 많이 놀랐습니다.
중국 최고 인기 정치인인 등소평에 대해서 공부하다 보면 등소평이 박정희모델을 추종해서 따라하고 포항제철을 부러워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캠브리지의 수재이자 싱가폴의 아버지인 리콴유를 알게 되면서 리콴유가 박정희에게 질투심과 경쟁심을 느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서양에서 똑똑한 촌철살인 발언으로 아시아의 입으로 불리는 마하티르는 공개적으로 "나는 박정희를 존경한다. 박정희처럼 되고 싶다. 말레이시아 비전인 "look east policy"는 한국의 경제발전을 모델로 삼은 것이다"라고 말하며 박정희의 경제정책과 어법까지도 따라하는 것을 보니 기분이 묘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파키스탄의 무샤라프도 "나는 박정희에 대해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있고 박정희 대통령처럼 되고 싶다" 라며 흠모하고, 지금도 몽골, 카자흐스탄 대통령등등 외국의 정치인들이 얼마나 박정희를 대단하게 평가하며 따라하려고 하는 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흔들렸습니다. 내가 "파시스트 악마"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외국 정치인들 사이에서는 하나의 "롤모델"로 연구되고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후진타오가 이례적으로 박대표를 만난 것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도 알려졌지만 후진타오는 대학때부터 박정희 대통령과 새마을 운동에 대해서 직접 공부까지 한 사람이고, 후진타오 이외에도 중국정치인들은 박정희 대통령 전기를 읽고 따로 공부를 한다고 합니다. 중국의 젊은이들이 한국의 경제발전에 대해서 너무 궁금해 하여 중국대학에 수업에 박정희 강좌를 개설한다는 말까지 있었습니다. 제가 촌스럽다고 무시했던 "새마을 운동"은 후진국들의 성공적 발전모델로 인식되어 이라크, 몽골, 콩고같은 아프리카 나라들에서도 한국에 새마을 운동 사절단을 보내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왜 하필 한국의 새마을 운동이냐?라고 물으면 그들은 말합니다. "한국만큼 극적인 경제발전을 이룬 나라가 없기 때문이다. 일본과 독일은 원래 부자나라였지만 한국은 전쟁을 겪은 이후 잿더미에서도 저렇게 부자나라가 될 수 있다는 것은 후진국들에게 우리도 가능하다는 희망을 준다" 외국의 경제학 책들에서도 좌우를 막론하고 한국의 경제성장을 굉장히 긍정적으로 다루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한국의 경제발전은 제 3세계 국가들에게 하나의 최상의 모델로 인식되고 있다. 경제 불평등 정도도 낮으면서 100년 걸리는 산업화를 20년 이라는 단기간내에 이루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떤 책에서는 "한국의 경제발전은 기존 경제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전쟁국가에서 20년만에 제철, 자동차, 조선업을 생산해 내는 중공업 위주로 바뀌었다는 것은 그야말로 세계경제사에서 하나의 기적으로 불릴만 하다 " 그 때서야 알았습니다.
젊은 세대가 당연히 누리고 있는 한국의 경제발전이라는 것이 외국에서는 얼마나 대단하게 평가하고있는 것인지를. 개인적으로 업적은 대단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의 개인에 대한 지나친 "숭배"나 "영웅화"는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박정희 대통령 혼자서 도로를 짓고 혼자서 공장을 돌리고 제품을 만든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경제발전이 국민들의 노력만으로 저절로 이루어 졌다고 주장하는 일부 사람들의 주장도 무식한 소리입니다. 경제발전에서는 리더의 역활이 대단히 중요하며, 특히 농업국에서 중공업 위주로 산업이 재편성 된 과정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추진력이 대단한 영향력을 끼쳤다는 것은 너무나 객관적인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백낙청, 이대근, 안병직 같은 과거 좌파경제학자들까지도 인정하는 일입니다. 저는 박근혜 대표의 지지자도 아닙니다. 하지만 박근혜 대표님 아버님 고 박정희 대통령께, 철없던 시절 아버님을 미x듯이 욕하며 저주했던 저의 무식함에 대해서 죄송하다고 전하고 싶습니다
젊은 세대들은 경제성장 이후에 태어난 아이들이기 때문에 한강의 기적이 그냥 저절로 이루어 진것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많고,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외국에서 평가를 듣지 않으면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젊은 세대들이 외국배낭여행을 가서도 'south korea'라고 하면 무시받지 않고 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인정 받을 수 있는 것은 박정희 대통령의 혜안과 추진력, 그리고 윗세대들의 땀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폴더짱작성일
2012-10-19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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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문재인, '부패와의 전쟁' 선포 왜?
문재인, '부패와의 전쟁' 선포 왜?
민주통합당 문재인 상임고문(@moonriver365)은 10일 "저는 대통령이 되면 5년 내내 부패와의 전쟁을 벌일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는 구체적으로 '공직자비리수사처 설치', '정치검찰 청산', '공정거래위의 사법경찰권 부여 등 권한 대폭 강화'라는 세 가지 방안을 제시했습니다.
한편으로 검찰에서는 이명박 대통령과 관련된 3대 의혹으로 알려진 '내곡동 사저 매입 의혹',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 'BBK 관련 가짜편지 논란'을 모두 무혐의 처리하여 꼬리자르기 수사, 부실 수사라는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습니다.
문재인 상임고문은 왜 사법개혁을 주장하고, 검찰은 여당에게는 부실 수사를 하고 야당에게는 없는 죄까지 만들어 덮어 씌우는 행태를 일삼는지, 오늘은 법무법인 청와대 혹은 법무법인 새누리당으로 불릴법한 정치검사들의 속사정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검사님의 속사정
근대 이전 재판은 동양과 서양 모두 "네가 네 죄를 알렸다"며 호통을 치는 방식인 '원님 재판(규문주의)'이었습니다. 이는 수사-기소-재판에 이르는 일련의 단계를 독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님 재판의 폐해를 없애기 위해 수사-기소-재판의 각 단계마다 권한을 나눠온 것이 근대 사법의 역사입니다. 재판권과 수사-기소권을 분리시켰고, 수사 과정에서 불법이나 인권침해 우려를 없애고자 검찰(기소)와 경찰(수사)을 나눴습니다.
이런 흐름에 비춰보면 검찰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이들은 형사부(경찰의 수사를 지휘하고 사건을 송치 받아 추가 수사를 진행하거나 기소 여부를 결정)와 공판부(기소된 피고인의 공소유지를 담당) 검사들입니다.
하지만 검사들은 영전(승진) 가능성이 낮은 형사부나 공판부의 선호하지 않고, 언론의 관심도 높고 상부에서도 주목하는 인지부서인 특수부(정치인이나 재벌 등 대형비리 사건을 수사)나 금융조세조사부(주식과 탈세 등 금융범죄를 전담)의 선호도가 높습니다.
가장 중요한 보직으로는 법무부 검찰국장, 대검 중수부장, 대검 공안부장, 서울중앙지검장으로 '빅4'라고 불립니다.
검찰사회를 잘 이해하려면 첫째 '검사동일체 원칙', 둘째 '헤게모니 20 : 셀러리맨 80'을 이해해야 합니다.
첫째, '검사동일체 원칙'은 전국 검찰은 한 몸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상명하복을 의미하며 부하 검사가 상관의 의견에 반대 의견을 표명하거나 고집을 부리면 다른 검사로 수사나 기소, 재판유지를 대신 진행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에 '철저한 기수 문화'까지 더해져 검찰조직은 피라미드형의 단일 조직체 구조이며, 자리가 올라갈수록 그에 비례해 더 많은 권력과 권한을 휘두를 수 있습니다. 이런 '검사동일체 원칙'의 덕을 가장 크게 본 이 최고 권력자를 비롯한 정권 수뇌부입니다. 법무부장관과 검찰총장만 확실한 '자기 사람'을 앉히면 전국 모든 사건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참여정부 시절인 2004년 1월 검사동일체 원칙이 삭제되고 '검찰사무에 관한 지휘·감독' 조항이 신설되어 '이의제기권'이 신설됐지만 과거 군사독재 시절 못지않은 검찰권 남용에 대해 검찰 내부의 비판 목소리를 저는 들은 기억이 없습니다. 아직도 '검사동일체 원칙'은 작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검찰청법 제11조(검사의 직무) - 검사동일체 원칙 검사는 검찰사무에 관하여 상사의 명령에 복종한다. 검찰총장과 검사장은 소속검사로 하여금 그 권한에 속하는 직무의 일부를 처리케 할 수 있다.
검찰총장과 검사장은 소속검사의 직무를 자신이 처리하거나 다른 검사로 하여금 처리케 할 수 있다. (법률 제81호, 1949.12.20 제정 및 시행)
검찰청법 제7조(검찰사무에 관한 지휘·감독)
① 검사는 검찰사무에 관하여 소속 상급자의 지휘·감독에 따른다.
② 검사는 구체적 사건에 관련된 제1항의 지휘·감독의 적법성 또는 정당성 여부에
대하여 이견이 있는 때에는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법률 제 7078호, 2004.01.20
시행)
제7조의2(검사 직무의 위임·이전 및 승계)
① 검찰총장, 각급 검찰청의 검사장 및 지청장은 소속 검사로 하여금 그 권한에 속
하는 직무의 일부를 처리하게 할 수 있다.
② 검찰총장, 각급 검찰청의 검사장 및 지청장은 소속 검사의 직무를 자신이 처리
하거나 다른 검사로 하여금 처리하게 할 수 있다.
둘째, '헤게모니 20 : 셀러리맨 80'을 살펴보면, 현재 대한민국 검사들은 근무처와 보직(전공)에서 혜택을 받고 잘나가는 20과 그렇지 못한 80으로 뚜렷이 구분돼 있다는 것입니다.
헤게모니를 쥔 정치 검사들은 검찰권력의 상징인 중수부 폐지에 관해 반대 목소리에 열을 올리지만, 대다수인 셀러리맨 검사들에게 이를 물으면 상당수는 관심이 없어한다는 것이 단적인 예일 것입니다.
결국 검찰조직을 대표하는 헤게모니를 쥔 정치검사들은 인사권과 특혜선물을 가지고 있는 정권의 입맛에 맞게 따를 수 밖에 없고 이는 사법권력의 부실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검찰은 왜 '법무법인 청와대'가 됐나
PD수첩 '검사와 스폰서'의 해고된 '최승호 PD'와 무혐의 처리 받은 '박기준 전 부산지검장'
'인사가 만사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MB정부 들어 정권의 입맛에 맞게 실력행사(?)를 한 검사들은 영전(승진)했고, 어려움(?) 속에서도 살아 남았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PD수첩 '검사와 스폰서'(다시보기)일 것입니다.
이를 보도했던 최승호 PD는 해고된데 반해 박기준 부산지검장은 증거불충분 등의 이유로 무혐의 처리를 받았습니다. 또한 '스폰서 검사'에 연루되었던 한승철 전 검사장은 대대적인 비판속에서도 복직되었습니다. 이렇게 비상식적인 일들이 자행될 수 있도록 한 MB의 '검찰 길들이기' 인사를 몇가지 사례를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미네르바 사건
정확한 경제 예측으로 유명세를 떨쳤던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를 서울중앙지검 마약조직범죄수사부(부장 김주선)는 200년 1월 온라인상에서 허위 사실을 퍼뜨렸다는 혐의(전기통신기본법 위반)로 기소했습니다.
하지만 서울중앙지법 형사5단독 유형현 판사는 "구체적 표현 방식에서 과정되거나 정제되지 않은 서술이 있다 하더라도 전적으로 '허위의 사실'이라고 인식하면서 글을 게재했다고 보기 어렵고 '공익을 해할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도 보기 어렵다"며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검찰은 비록 유죄를 이끌어내지는 못했지만 '인터넷에 함부로 글 올리다가는 큰 코 다친다'는 경고를 확실히 했습니다. 반면 100여 일간 수형생활을 한 박씨는 재판에서 이겼지만 사실은 피해자일 뿐이었습니다.
이 무고한 '미네르바 사건'을 담당했던 검사는 재판에서 지고도 영전했습니다. 김주선(현 천안지청장) 당시 서울중앙지검 마약조직범죄부장은 박씨 기소 직후 강릉지청장으로 영전했습니다.
정연주 전 KBS 사장
서울중앙지검 조사부(부장 박은석)는 2008년 8월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의 배임 혐의로 정 전 사장을 기소했습니다. 국세청과의 세금 반환 소송을 벌이던 KBS가 1심에서 이겼음에도 2심에서 재판부의 조정에 응하는 바람에 법인세 및 부가가치세 2448억 원을 포기하고 556억 원만 돌려받아 회사에 1892억 원의 손해를 끼쳤다는 혐의였습니다.
조정이란 재판부가 분쟁 당사자 간에 서로 양보하고 타협하도록 중재안을 내놓고 이를 받아들일 것을 설득하는 법률 행위를 말합니다. 이로인해 국가는 배임 범죄(?)의 결과 2000억 원에 가까운 범죄 수익(?)을 챙기게 됩니다. 당연히 1, 2심 재판부 모두 정연주 사장에게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하지만 정연주 사장은 이미 사장 자리에서 쫓겨났고 피해를 복구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KBS도 친정권 방송으로 자리를 잡은 뒤였습니다.
정연주 전 사장을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기소를 강행한 박은석(현 대구지검 2차장검사) 당시 서울중앙지검 조사부장은 다음 인사에서 법무부 정책기획단장이라는 요직을 꿰찼습니다.
PD수첩 광우병 편
한미 쇠고기 협상을 다루며 광우병 위협을 언급한 PD수첩 취재진을 제3세계 독재국가에서나 볼 수 있는, 정부 정책과 공직자의 업무 수행에 대한 언론의 비판을 명예훼손으로 처벌하는 일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벌어졌습니다. 대법원이 2011년 9월 제작진 전원에 무죄 확정판결을 내렸지만, 너무 큰 고초를 겪은 뒤였습니다.
'정부를 비판하는 내용의 보도에 공직자 개인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를 적용할 수는 없다'며 검찰을 떠난 임수빈 서울중앙지검 형사2부장을 대신해, PD수첩 제작진을 기소한 전현준(현 대검 범죄정보기획관) 부장검사는 서울중앙지검 금융조세조사1부장으로 영전했습니다.
BBK 검사들의 '영전'
BBK 사건을 다룬 검사들은 하나같이 영전했습니다. 김홍일 부산고검장(당시 서울중앙지검 3차장), 최재경 대검 중수부장(당시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장), 김기동 성남지청 차장검사(당시 특수1부 부부장)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김홍일 고검장은 사건 처리 직후 검사장으로 승진해 사법연수원 부원장과 대검중수부장을 거쳤고, 최재경 검사장도 연수원 1년 선배들을 제치고 대검 수사기획관과 대검 중수부장 자리를 꿰찼습니다. 김기동 부장은 특수1부 부부장에서 이례적으로 특수3부장과 특수1부장을 연달아 역임한 뒤 대검 선임연구관을 거쳤습니다.
BBK 수사팀 평검사들은 주요 부처에 파견을 다녀오는 헤택을 봤습니다. 특수1부 배종혁 검사는 검사들이 가장 선호하는 파견처인 금융감독원에 2년 동안 파견을 다녀왔고, 금융조세조사부 소속으로 수사팀에 합류했던 장영섭 검사는 청와대 민정수석실 행정관으로 발탁됐습니다. 첨단범죄수사부 소속이었던 김후곤 검사는 방송통신위원회 파견을 다녀왔습니다.
문재인의 '부패와의 전쟁'을 기대하는 이유
미국의 저명한 심리학자 필립 짐바르도의 책 '루시퍼 이펙트(무엇이 선량한 사람을 악하게 만드는가)'에서는 1971년 스탠퍼드대학에서 실시했던 모의 교도소 실험의 내용을 상세하게 공개합니다. 짐바르도 박사는 실험에서 얻은 결론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악한 시스템이 만들어낸 악한 상황이, 선한 사람을 악하게 만든다."
짐바르도 박사의 말에 따르면, 결국 검찰개혁을 위해서는 검찰의 시스템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독일과 프랑스로 대표되는 대륙법게에서는 우리나라처럼 검찰이 기소권을 독점하고 있지 않습니다. 개인에 의한 기소가 가능하거나 검찰의 기소권 행사에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 있는 것입니다.
프랑스는 검찰조직이 중앙집권적이지만 자체 수사력이 없으며 주요 범죄는 수사판사가 기소를 결정합니다. 독일 검찰은 수사권과 수사지휘권을 가지고 있지만, 자체 수사력이 없습니다. 또한 검찰 조직이 중앙집권적이지 않으며 일정 요건이 갖춰지면 의무적으로 기소 해야 하는 기소법정주의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영미법계 국가들 중 영국은 경찰이 수사권과 기소권을 모두 가지고 있다가 1985년 기소를 담당하는 별도 기관을 만들었습니다. 영국 검찰(국립기소청)은 공소유지를 전담할 뿐 수사권이나 수사지휘권이 없습니다. 미국은 수사는 경찰이 기소(공소유지)는 검찰이 하도록 분리돼 있으며 검찰조직도 전국적으로 단일한 중앙집권체제가 아닙니다.
일본의 경우가 우리나라 검찰과 가장 유사하지만, 경찰과의 관계가 우리처럼 수직적이지 않습니다. 수사지휘권 행사가 제한적이며 검찰과 경찰이 작성한 조서의 증거능력에서의 차이도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검찰은 직접 수사권, 수사지휘권, 기소독점권, 기소재량권(기소편의주의) 등 사법 절차와 관련한 거의 모든 분야의 권한을 가지고 있으며, 경찰의 수사파트 조직을 확실한 수하로 두고 있는 중앙집권적이고 독보적인 검찰조직입니다. 이러한 권력의 독점의 부작용으로 검찰은 법의 정신을 실현하기 보다 최고 권력자를 비롯한 정권 수뇌부의 의중이 먼저 반영되어 공명정대한 원칙을 견지하고 있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위해 첫째, 줄 세우기 인사시스템으로 돌아가는 중앙집권적 조직을 해체해야 하고 권한을 분산해야 합니다. 지역검찰청 수장은 일반 선거 혹은 검사들의 호선을 통해 뽑는 것이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현재 법무부는 법무 정책이나 행정업무만을 맡도록 권한을 축소해야 합니다.
둘째, 검찰의 권한을 분산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수사권과 기소권을 분리하는 것입니다. 검찰의 직접 수사 파트와 경찰 수사파트를 통합시켜 수사기관을 만들고, 나머지 검사들은 법률가들로서 기소권과 영장청구권을 가지고 수사팀을 통제하는 역할을 맡게하는 것이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셋째, 검사 개인의 판단에 따라 기소의 재량권을 행사하는 '기소편의주의'를 독일과 같이 혐의가 확인되면 의무적으로 기소를 하는 '기소강제주의'로 바꾸려는 노력도 필요합니다.
문재인 상임고문의 사법개혁 의지는 다른 대통령 선거 후보들과 차별성을 나타냅니다. 사법개혁 의지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보는 비전이며,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나타냅니다.
미네르바 사건에서 보듯 검찰은 시민의 자유를 대변합니다. 정연주 KBS 사장, PD수첩 광우병 편, BBK 인사에서 보듯 검찰은 정의와 상식을 대변합니다.
무엇보다 이러한 최고 권력자를 비롯한 정권 수뇌부의 칼이었던 검찰을 개혁하겠다는 것은, 문재인 상임고문이 이야기한 특권, 반칙, 부패를 청산하겠다는 말의 가장 핵심적인 행동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특권과 반칙 그리고 부패가 만연한 대한민국 사회에서 문재인 상임고문의 공약에 기대를 걸어보는 이유입니다.
가자서작성일
2012-07-14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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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이상규 3대 세습과 핵 모두 정당하다
옛 당권파 종북문제 답변 회피새누리 "주사파 당선자 제명을"그는 북핵문제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찬성할 수 없지만 가질 수밖에 없는 처지를 이해하고 평화로운 동북아 질서로 나아가기 위해서 대화가 필요하다고 믿는다. 그리고 3대세습과 인권문제에 대해서는 남한 입장에선 이해가 안 되지만 그들 입장에선 나름대로 생존방식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란 이해도 필요하며, 북한을 제대로 알려면 상호 교류와 협력이 필요하다고 설명한다.그는 이런 답변이 찬성과 반대의 ‘이분법’을 벗어나는 것이라 여길 것이다. 북한의 행동들에 대해 찬성은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반대해서는 교류협력이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이분법 반대’ 안에 깔린 논리구조다. 그러나 기자는 같은 식으로 그의 ‘이분법 반대’가 ‘이분법’에 갇혀 있다고 돌려줄 수 있다. 이상규 당선인은 북한에 대한 태도로 ‘대결국면’과 ‘교류협력’의 이분법을 상정하고 부당하게도 ‘비판’을 왼쪽에 배치한다. 분명히 그도 백분토론에서 “비판할 건 비판해야 한다”고 말했으면서도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 물으면 교류협력을 핑계로 비판을 회피하는 것이다.물론 자세히 보면 찬성할 수 없다고 말한 것도 핵무기 정도일 뿐 나머지 사안들은 ‘남쪽 입장에서’ 비판할 수 있다고 했다. 이상규나 통합진보당이란 주어는 뒤로 숨었다. 공개된 장소에서 토론하면 이런 부분에 대해 계속 질문 받을 것이다. 그렇다면 국가를 사유화하는 행태와 인권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다는 것인지, 그 문제의식을 보편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인지 등에 대해 질문받을 수 있다. 당연히 이런 질문을 하는 것도 정치인의 정치관을 알고 싶어하는 유권자의 알 권리에 해당한다. ‘반대’도 아니고 ‘찬성할 수 없다’고만 적은 북핵문제도 마찬가지다. 찬성할 수 없지만 맥락을 이해해야 한다는 그 ‘이분법 반대’가 무슨 의미인지 알아보려면 추가질문이 필요하다. 가령 이런 것이 가능하다 “구 민주노동당 시절엔 북핵 개발에 대한 비판 논평이 제대로 나오지 못했습니다. 북핵 문제가 터져도 미국만을 비판하는 논평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북핵에 찬성은 못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북한이 핵개발을 한다고 했을 때 이상규 당선인님이나 통합진보당이 그 의사를 공식적으로 말씀하실 수 있으십니까? 아니면 이해를 하기 때문에 입장을 숨기고 비판을 삼가시겠습니까?” 과거를 통해 유추할 수 있는 부분은 있을지라도, 여하간 이 문제에 대해선 아직 이상규 당선인의 입장을 알 수 없다. 그래서 토론이 필요한 것이다. 물론 계속 입장을 유보하다 북한이 핵실험을 할 때 논평만 내는 것도 그들의 ‘자유’지만, 유권자의 뒤통수를 치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인터뷰에서는 이런 질문에 대해 답변해야 할 필요가 없다. 인터뷰의 목적은 얘기를 이어나가 인식의 전환이나 합의에 도달하는 것에 있는 것은 아니고, 그저 그 사람의 생각을 알아내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이상규 당선인이 TV토론에서 질문을 받는 것보다 인터뷰에 답변하는 것을 선호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선 언론에도 아쉬운 부분이 있다. 그의 답변을 들으면 누구나 자연히 떠오르게 되는 의문들에 대해 다시 질문하고 답을 얻어내기 위해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사실은 단순한 ‘이분법’에 포섭되지 않는 입장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훨씬 많은 노력이 요구된다. 가령 엊그제 토론에서 김종철 진보신당 부대표가 사례로 제시한 당시 진보신당 대표였던 조승수 의원의 경우를 보라. 그는 연평도 포격 이후 대북결의안에 대해 ‘반대’표를 던졌다. 이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은 '찬성 아니면 반대'처럼 양자택일인 경우도 많다. 이 양자택일의 선택이 상대방이 편견으로 만든 이분법과 다른 의미임을 강변하려면 상세한 맥락의 설명이 필요하다.그러니까 스스로 이분법에 포섭되지 않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려면 누구보다도 더 많은 발언권을 요구해야 한다. 그럴 때에야 이분법을 벗어난다는 그들의 입장이 겨우 이해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상규 당선인의 태도는 사상검증을 핑계로 되도록 그 주제에 대한 언급을 피해가고 싶다는 것에 가깝다. 이분법으로 포섭되지 않는 상세한 맥락을 설명하는 것과 문제의 핵심을 회피하기 위해 이런 저런 맥락을 두서없이 늘어놓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이상규 당선인과 통합진보당이 하는 일이 전자라고 인정받으려면 훨씬 성의있는 토론의 자세가 필요하다. 진보언론도 그들의 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할 게 아니라 그 해명을 듣고 시민들이 떠올릴 의문을 대신 질문해 주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그리고 애매한 말의 성찬 속에 숨어 있는 한 가지 명백한 오류만은 지적하도록 하자. 리비아는 서방이나 미국에 의해 침략당한 것이 아니다. 리비아는 핵무기 개발 능력을 카다피 정권의 안정과 맞바꾼 후 서방 세계와 잘 지내왔다. 그러다 민중혁명이 일어났고, 그것에 학살로 대항하다 뒤늦은 UN 및 다국적군의 개입으로 카다피 정권이 전복된 것이다. 다목적군의 역할이 타당했는지에 대해선 토론이 가능하고, 북한정권 입장에서야 카다피 사례를 보고 핵과 체제안정을 맞바꿔도 실패할 수 있다는 경고를 받고 더욱 더 핵을 움켜지게 되었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사건이 서방세계의 침략 사례라는 건 어불성설이다. 모두 알다시피 카다피는 제3세계에서 반제국주의의 기치를 내건 독재자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NL 이념이 한때나마 국제주의적이었다면, 카다피야말로 그 이상에 부합한 사람 중 하나였다 볼 수 있다. 기자는 NL들이 카다피가 제 인민의 머리 위에 폭탄을 내려꽂는 이 세태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지 종종 궁금했다. 그러나 이상규 당선인의 말을 들어보면, 그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도 별 고민없이 ‘서방세계(미국)의 침략’이라고 단정짓는 모양이다. 그런 시각이라면 그들이 북한(정권)에 대한 우리의 모든 비판 행위가 사악한 것이란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해도 ‘내재적 관점에서 이해’된다. 독재자의 인민에 대한 학살에도 무신경한데 3대세습이나 인권유린 정도가 대수겠는가.이처럼 ‘이분법’을 벗어났단 그들의 발언은 꼬리에 꼬리를 묻는 질문을 낳는다. 그들이 이 모든 질문에 대해서도 ‘충분히 밝힐 수 있는 입장’이 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원내에 입성하는 상황에서 그런 게 없다면 벼락치기를 해서라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이상규 "北 3대 세습 정당하고 핵도 당연하다"종북 논란 확산!!!강기갑, 종북 질문 회피 이상규 두둔
(음 점심은 뭘 먹을까나~ ♪)이번 통진당 부정선거의 핵심당사자인 이석기 당선자도 지난 8일 북한에 대한 내재적 접근을 공감한다고 했고 이후 TV방송에 출연해 '종북(從北)보다 종미(從美)가 문제'라는 대북관을 보이기도 했다.이들이 북한 3대세습과 인권, 핵문제에 일절 비판하지 않고 침묵하거나 오히려 북한을 대변하는 입장을 보이고 있는 이유에 대해 과거 주사파 출신 인사들은 그들이 종북성향을 버리지 않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부자세습·주체사상·정치체제·인권·지도자' 등과 관련된 비판을 해서는 안 되는 조직 내부방침이 있을 것이란 지적도 나온다. 이는 김일성의 무오류성을 담은 '수령론'에 입각한 주체사상을 신봉했던 이들은 북한을 비판의 대상이 아닌 충성의 대상으로 보는 성향 때문이란 설명이다.이석기 당선자는 남한 내 지하혁명조직인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 경기남부위원장이었고, 이상규 당선자 역시 민혁당 사건 판결문에 수도 남부지역사업부 책임자로 적시됐다.민노당 출신 한 인사는 "보통 사안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다가도 수령제, 북한인권 등 북한체제에 대한 비판만 나오면 (종북파들은) 몸을 던져서 막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자신들만의 특별 교리를 가지고 움직이는 유사 종교집단화 모습을 보였다"고 덧붙였다.
주사파 출신 이종철(전 고려대 총학생회장) 'storyK' 대표는 데일리NK와 통화에서 "주사파들은 북의 지령에 따라 철저하게 임무를 수행해야 하기 때문에 (북에 대한) 비판은 있을 수 없다"면서 "수령론에 입각해 수령은 오류가 없는 존재라고 인식하고 있는 이들의 신념에 비춰봤을 때 신념과 다르게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보다 힘들 것"이라고 설명했다.한총련 중앙집행위원장 출신인 허현준 남북청년행동 사무처장도 "북한이 남한의 지하조직에 하달한 5대 금기 사항에 대해 일관된 원칙을 지키라고 지시한 것이 드러났다"면서 "조직의 가장 중요한 것은 사상적 지침이고 이는 조직 구성의 뿌리인데, 남한 지사(종북세력)가 북한 본사(북한)의 지시를 따라야 하는 셈"이라고 설명했다.허 사무처장은 이어 "이들이 북한을 비판하면 조직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면서 "자기들의 사상 노선에 대해 전면적 수정을 고려하지 않는 이상 이들의 북한 비판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덧붙였다. 유동렬 치안정책연구소 안보대책실 선임연구원은 "현재 이석기, 이상규 당선자가 북한과 직접연계가 있는지는 확인 할 수 없지만 이석기의 경우 민혁당 사건에 가담했고, 이상규의 경우 일심회 사건 판결문에 이름이 거론된자"라면서 "이들은 현재 북한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면 자신의 생각을 확실히 밝혀야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는 "종북 활동과 관계없고 대한민국의 헌법적 가치를 존중하는 국회의원이라면 자신의 생각을 확실히 밝혀야 하는데 '물타기' 하면서 회피하는 것은 종북 사상에서 전향하지 않은 것으로 봐야한다"고 강조했다.일심회 보고서에 등장한 이상규★☆★(일심회 사건때 북한에 보낸 명부에서는...)○이상규=서울시당 당직선거에 ‘자주평등 기치 아래’ 노동자 출신 후보를 진출시키기로 하고, 사무처장에 이상규 등을 출마시키기로 했다. 이정훈(일심회 조직원·당시 민노당 중앙위원)으로하여금 2006년 3월 2일 중국 베이징시 차오양 구 소재 장성호텔에서 북한 공작원 김모 지도원 등을 만나 ‘민노당 서울시당 내에 소위 위대한장군님의 영도를 실현하는 데 있어 이상규의 포섭 문제’ 등을 지시받았다.이상규 등과의 관계를 발전시켜 장군님의 유일적 영도 체계를 강화해야 한다
장군님의 유일적 영도 체계를 강화
장군님의 유일적 영도 체계를 강화
장군님의 유일적 영도 체계를 강화
장군님의 유일적 영도 체계를 강화
장군님의 유일적 영도 체계를 강화
장군님의 유일적 영도 체계를 강화
(상규 동무! 조금만 더 힘내시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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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현실감 있는 수사물 인터내셔널
※ 본 영상과 이미지들은 필자가 블루레이 타이틀에서 캡쳐 한 것들입니다. (클릭, 전체화면으로 보세요^^)
인터내셔널 (International) - 2009년
범죄, 미스터리 / 감독 : 톰 티크베어 / 주연 : 클리브오웬, 나오미왓츠, 아민뮬러
국내에서 제대로 평가 받지 못 하고 망한 영화 중에 하나가 아닐까 하는 작품이 이 인터내셔널입니다. [필자는 바디오브라이즈, 스테이트 오브 플레이 도 같은 맹락 이라고 봅니다.] 웬만큼 탄탄한 스토리가 받쳐주더라도 비쥬얼이 안따라주면 (여기서 얘기하고 픈 비쥬얼은 화려함?) 각종 포털사이트 영화평점이나 관람객들에게 외면 받는 듯 합니다.
★ 이런 영화에 보편적으로 많이 달리는 댓글은 두 부류로 나누어 집니다.
1. 보다가 몇번 몇번 잠듬 / 자다가 뛰쳐나옴
2. 애들은 봐도 이해 못할, 최고의 수작
은근히 이런 평점인플레이를 즐기고 찾아보는 사람도 많다고 합니다. 저 또한 그런 편이지만 사실 인터내셔널이란 영화는 극장에서 흡입력 있게 본 영화였고, 블루레이 타이틀로 재구매를 했을 정도로 개인적으로 소장하 고픈 영화였습니다.
본론으로 들어가 영화는 본래 시대극으로 구성되었지만 헐리우드 감성에 맞게 현실감 있는 수사물로 전환 되었습니다. 미국, 스위스, 영국, 프랑스, 룩셈부르크 같은 전 세계에 돈을 푸는 금융의 중심지라 불리는 나라들에 검은 돈이 유입되어 어떠한 목적으로 쓰여지는지를 파헤치는 영화로 보시면 되겠습니다. (픽션일수가 없는 내용들이죠)
영화는 스위스(가톨릭)계 IBBC 은행 총장이 이스라엘에 미사일을 판매함으로써 이란과 시리아를 압박하는데 도움을 주고 제3세계에서 일어나는 내전과 무기밀매 등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있음 을 알고 주인공 클리브 오웬과 나오미왓츠가 수사를 벌인다는 내용입니다.
주인공들이 실체를 파악하기 고군분투 하지만 FBI, CIA 등 수사당국은 그들에게 비협조적인 자세로 진실을 파헤치는 수사를 무모화 시킬려고 노력(?)합니다. 은행이 미사일을 구입하는 목적 또한 영화에서 소개됩니다.
“세계적인 분쟁을 조장하여 빚을 지게 만들어서 통제 하기 위해서……”
117분이란 짧은 상영시간이지만 감독은 짜임새 있게 구성합니다. 그리고 감독은 IBBC 은행총장의 입을 통해 주인공과 관객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전달합니다. (장면이나 ~ 부연설명을 하고 싶지만 스포가 될 수 있기에 생략하고 대사만 넣겠습니다) “단지, 사람만 바뀔 뿐”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국가간의 분쟁도 조장하려는 거대 은행의 음모, 과연 은행 만의 이야기라 볼 수 있을까요?
아무튼 인터내셔널 블루레이의 경우 2.40 : 1의 화면비를 갖춘 뛰어난 화질을 자랑하며 긴박감 있는 테마곡과 함께 뛰어난 사운드까지 제공합니다. 특히 구겐하임 총격신은 인터내셔널 블루레이의 장점을 극대화 시켰다고 봐도 되겠습니다. Special Feature 의 경우 본 타이틀이 디스크1장짜리 이기 때문에 많은 내용을 담고 있진 않습니다만, 감독이 의도하는 것들에 대한 설명을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 관전 포인트
01. 오프닝
02. 밀라노 광장 이중 저격 신
03. 클리브 오웬 킬러 추격 신 (추격 신이라고 해서 그렇게 긴박하게 그려낸 건 아닙니다.)
04. 구겐하임 총격 신
주문진작성일
2012-03-31추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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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혐오라는 단어가 이렇게 잘 어울리는 집단이 이 지구상에 또 있을까?....
혐오라는 단어가 이렇게 잘 어울리는 집단이 이 지구상에 또 있을까?....
[두타선생님 글]
우선 MB 정부에서 보여준 한나라당의 실력은,
그 들이 정상적으로 국가를 운영할 능력 자체가 없다는것을 너무 여실히 보여줬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국가의 것과 개인의 것을 전혀 구분하지 못하는,
그래서 사적인 집단으로 전락해버린 전형적인 제 3 세계 지배계급의 유형을 뚜렷하게 보였을 뿐이란 것입니다.
무엇이 진실인지...
역사 속에서 실체적 진실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도 그 무리들은 뉘우침은 커녕 어떠한 반성의 기미 조차도 보이질 않고 있습니다.
오직 살아남기 위한 역겨운 악다구니만 쏱아낼 뿐....
MB 정부와 같이 살아온 지옥같은 지난 4년.....
최선, 차선, 차악 같은 고상하고 계량적인 사유는 우리 모두에게 어느 정도는 마비된 것 같소이다....
정책은 물론이고 선관위 해킹 사건과 돈봉투 사건등 제 정신을 가진 정치 집단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1 주일이 멀다하고 벌어지는데 여기에 혐오라는 단어 외에 다른 감정을 가질수 있겠습니까?....
이 천부가 혐오스럽다고 생각하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사건들은 하나 둘 실체를 들어내고 있지만 누구하나 책임지는 작자가 아직도 나타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시간이 지나면 국민들 뇌리 속에서 사건의 실체가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라는
못된 버르장머리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것이죠....
어쩌면 우리는 지난 4년동안 이명박이라는 독특한 캐릭터의 가~카와 한 바탕 전쟁을 치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4 대강을 다 틀어막고, 여차하면 한 마리도 남기지 않고 소를 죽이겠다고 하는 이 황당한 시기에,
제 정신을 유지하며 살아남는다는 것 자체가 정상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리하여 한나라당과 MB 에게는 비리, 부패,거기에 혐오라는 꼬리표를 하나 더 달아주는것이 마땅하다 봅니다..
끝으로 이 천부가 일말의 상황들을 살펴볼 때,
한나라당은 당분간 혐오라는 굴레에서 빠져 나오기는 상당히 힘들것 입니다....
아니, 어쩌면 말입니다....
영원히...
이제와서 당명을 바꾸겠다?...
바꿔야 할것은 그 잘나빠진 낡은 간판이 아니라,
엉덩이에 뿔난 사악한 무리들의 뇌 구조 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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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리들은 좀 모자란 종자들 같습니다.
혐오는 우리가 저들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고,
저들의 실체는 분명 뭔가 부족하고 모자란 것들이라 보여지네요.
모자라면서도 철저히 사악한 것들..
가자서작성일
2012-01-18추천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