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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내부자들 여검사버전(스압)
#1‘개..새끼’얼마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혼자만의 휴식 시간이었다. 동네 서점에 와 앉았었던 여자의 입에서, 이제는 익숙해진 욕이 자연스레 튀어나온다. 이전까지 썼던 제일 심한 욕이 ‘거지같은 놈’ 정도였던 여자였지만, 이제는 욕이라도 하지 않으면 이 모든 일들을 참아내기 어려워졌다. 이 모든 게 다 그 개..새끼 때문이야… 다시 한번 욕을 뱉어내며 앞에 놓인 책들을 전보다는 조심스럽게 모아 들려니, 조금 전 읽었던 책의 구절들이 툭툭 갈비뼈를 두드린다. 칫... 결국 이 모든 게 그저 참고 침묵하기만 했던 내 잘못이라는 건가… 하지만, 세상이 여전히 이 모양인데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냐고… 여자는 조용히 혼자서 입을 삐죽거렸다. 한동안 잊고 있던 한기에 몸이 파르르 떨려온다.엄마가 아픈 것 따윈 관심도 없이, 오랜만에 평일에 엄마가 회사에 가지 않은 것을 한없이 좋아하며 엄마를 기다리고 있을, 새끼 강아지처럼 폴짝폴짝 뛰어나올 아이 생각에 걸음을 재촉해 보려는데, 아무래도 울렁울렁 여전히 온몸이 후들거린다.정확한 원인을 모르겠다는 발작성 현기증 때문인지, 너무 오래 앉아 있어서인지, 조금 전 읽었던 책의 내용 때문인지…여자는 알기 어렵다. 여자는 다시 한번 조용히 되뇌인다. 이 모든 게 다 그 새끼 때문이야… 이 모든 게 최근 일주일 이상, 그 놈의 얼굴이 계속해서 뉴스를 도배했기 때문이다.‘쥐새끼 같은 놈. 언젠가 터질 줄 알았어’얼마 전부터 부쩍 그놈의 소식들이 인터넷에 떠돌기 시작했을 때부터 예상했던 일이었다. 한동안 자지 못하던 잠을 겨우 자기 시작한 게 얼마 되지 않았는데, 다시금 날이 밝을 때까지 하얗게 밤을 지새우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부터였다.하지만, 여자는 자신까지 그렇게 터져버릴 줄은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잊기 위해 그토록 노력했다. 용서했다고 생각했다. 복수는 신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분명 여자가 믿고 있던 신은 정의의 신이라고 했으니까…… 그렇게 믿는 방법 밖에 없었다. 헤아릴 수 없는 날들을 아무리 밀어내도 떠오르는 그놈의 그 눈빛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수시로 가슴이 조여오고, 누웠다가 발딱발딱 일어나고, 피가 발바닥에서부터 거꾸로 솟구쳐 올랐다. 이게 바로 피가 거꾸로 솟는다는 것이구나…비유적인 표현인 줄만 알았더니… 어렵게 생긴 아이까지 유산됐다. 꽤 안정기에 들어섰다 했었는데…장자연, 성완종…언젠가 들었던 그런 이름들이 떠올랐다. ‘죽어봤자 밝혀지는 것도 없는데..’라고 너무 가볍게 그들을 입에 올렸던 탓일까… 그놈은 너무나 강하고, 여자는 아무런 힘이 없는 것이 내내 너무나 분했다…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는 목숨을 던지는 방법밖에 없는 것일까....정말 그 방법 밖에는 없는 것일까… 수도 없이 여자의 머리를 뒤흔든 생각이었다.여자는 여전히 선함이 악함을 이길 것이라고, 최선을 다해 선하고자 했던 자신의 의지가 틀리지 않았었다고 너무나도 순진하게 믿고 싶었다. 자신이 보아왔던 그 숱한 불의를, 그토록 잔혹한 악의 승리를 마치 한번도 보지 못했다는 것처럼....그것은 여자에게 불의와 악에 저항하고 선을 수호하려는 강력한 의지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아무런 힘도 어떠한 빽도 없는 여자에게 오직 그렇게 믿는 외에는 달리 스스로를 위안할 방법도 상황을 해결할 묘책도 없어서였을 뿐이었다. 그렇게 계속 가슴을 쥐어 뜯다가는 결국은 마지막 선택을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2잊기 위해 그토록 노력했다. 그것만이 살아낼 수 있는 길이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여자의 뇌에는 그 날 그 곳에서의 그놈의 행동들, 그놈의 숨결, 어쩌면 그 술 냄새까지 또렷이 더 또렷이 새겨질 뿐이었다.장례식장이었다. 별로 친하지 않은 동기였지만 -부모님을 전부 잃은 여자는 미혼의 여동기가 부친상을 당한 것이 영 안쓰러웠다. 지나친 오지랖이었어… 여자는 두고두고 그것을 후회했다. 원래는 콘서트를 가려고 나선 길이었다. 10월...벌써부터 길가에는 쓸쓸한 나뭇잎들이 나뒹굴고, 아침 저녁으로 얇은 코트라도 걸쳐야 할 정도로 꽤 쌀쌀해지기 시작했는데, 야외콘서트라니 작은 연하늘색 무릎담요까지 준비한 터였다.함께 지하철을 타고 콘서트장으로 향하던 남편이, 갑자기 그 시간에 있는 어떤 강의가 듣고 싶다고 했다. 동기의 부친상이 영 마음 한켠에 걸렸던 여자는 ‘그럼 나는 장례식장에 갈테니, 당신은 강의를 들으러 가라’고 순순히 가던 길을 돌려 지하철에서 내렸다.두고두고 그 때 그 순간을 후회했다. 왜 그렇게 순순히 돌아섰는지, 왜 콘서트장을 간다고 나서면서 때마침 검은 옷을 입고 나섰었는지....여자는 두고두고 그 날의 자신이 이해되지 않았다.엄마 그리고 아빠.....그토록 그녀를 사랑해주었던 그들을 차례로 보낸 후, 여자는 한동안 장례식장에 가지 못했었다. 만삭의 상태에서 마지막으로 아빠를 보내 드린 지 3년이 넘었건만, 여전히 장례식장은 여자에게 힘든 곳이었다.가빠지려는 숨을 고르며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얼굴을 알만한 동기는 아무도 없었다. 금요일 부고 소식이 올라왔고 지금은 토요일 오후이니 그럴 법도 하지..아는 사람도 없는데, 조금만 앉아있다 조용히 일어나야지...여자가 일어서려는데 갑자기 장례식장에 장관이 들어섰다. 다른 한명의 수행검사와 함께... 페이스북인지 트위터인지도 열심히 한다는 장관을 직접 보기는 처음이었다. 장관은 언론에서 본 모습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았다.장관은 여자가 앉아있던 테이블의 중앙에 자리 잡았고, 이곳 저곳 삼삼오오 앉아있던 검사인 듯한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그를 향해 모여들었다. 수행검사가 장관 옆에 앉았다. 누군가 조용히 여자에게 그 옆에 앉으라며 여자의 팔꿈치를 밀었다...뭐지? 순간 당황한 여자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리 중 여성은 여자 혼자 뿐이었다. 여자는 어느 샌가 떠미는 대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미처 생각할 틈도 없이....이미 익숙해진 일이었다. 기수 문화가 그리도 엄격한 여자의 회사에서, 여성을 그리도 무시하는 여자의 회사에서, 기수와 상관없이 높은 양반 옆 중앙 좌석에 여성을 앉히는 일은 거의 언제나 있는 일이었다. 여자는 그때 그 수행검사가 술에 취한 상태였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것이 문제였다. 여자는, 기수상 그곳에 앉을 기수가 아니었다. 왜 도대체 그 자리에 그렇게 아무 저항 없이 앉았던 것일까....그놈이 장관을 수행하고 기자들과 전작을 하고 오는 길이라는 말을 왜 그렇게 흘려 들었을까…그놈이 자꾸 여자 쪽으로 몸을 기댔다. 마니 취했나......옆에 있던 장관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이 놈을 수행하고 다니는지, 이놈이 나를 수행하고 다니는지 모르겠어 허허허” 모두가 장관을 따라 허허허 웃었다. 콘서트장에 가려고 준비했던 무릎담요를 그놈과의 사이에 놓고 애써 그놈과의 거리를 조금이라도 더 벌리기 위해 식은 땀을 흘리고 있던 여자만 빼고.....마니 취했나....라니... 장관은 이 꼴을 보고 하는 말이야 못보고 하는 말이야.... 술을 전혀 마시지 못하는 여자는 회사에 들어온 이후부터 많은 술 취한 상사와 선배들을 마주 해왔다. 술에 취해 이 정도 기대는 것으로 불쾌감을 표현해서는 예민 떤다고 여자만 손가락질 당할 뿐이다....빨리 장관이 일어나야 하는데... 언제나처럼 여자는 아랫입술을 꾸욱 깨문다. 어찌 된 일인지 장관은 쉽게 일어날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동기가 장관과 꽤나 친밀한 관계였나보다.장관보다 먼저 일어서 나오는 것이 쉽게 양해되지 않는 회사 분위기를 알기에 적절한 틈을 타 아무도 모르게 빠져 나와야겠다는 생각에 눈치를 보고 있는데, 바로 그때였다. 여자의 허리 쪽에서 무언가 스멀스멀한 감촉이 느껴졌다. 무심히 내려다본 여자의 허리에 그놈의 손이 닿아 있었다..... 설마....땅을 짚다 잘못 닿았겠지...이렇게나 사람들이 많은데...바로 옆에 장관이 앉아 있는데.....여자는 그놈과의 사이에 놓여있던 무릎담요의 부피를 좀 더 넓히며 옆으로 삐죽삐죽 그놈과의 거리를 넓히기 위해 움직였다. 그런데, 분명 그놈의 손이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움직였다. 어느새 그놈의 손이 그녀의 엉덩이를 더듬고 있었다...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 여자는 알 수 없었다. 내가 느끼는 것은 환상일까....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바로 옆에 장관이 앉아 있는데...상식적으로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웃고 떠드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여자는 그것이 자신의 머릿속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환상인 것만 같았다. 아니 이런 건 환각이라고 해야 하나....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계속해서 하체 쪽에 느껴지는 그 스멀거림이 실제인지 환상인지 여자는 알 수 없었다. 몸을 조금씩 비틀어 조금이라도 그 스멀거림을 피하고, 그놈의 그 손을 떼어놓기 위해 애쓰던 여자 주위의 모든 것이 언제부터인지 부옇게 보이며 느릿느릿 움직였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하는 뇌를 비웃듯 또르르 또르르 떨리기 시작하던 여자의 심장이 견딜 수 없이 요동쳤다. 어떻게 그곳을 나왔는지 알 수 없었다. 언제부터 그곳에 서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여자는 화장실 거울 속에 눈을 질끈 감은 채 몸을 떨며 서있는 여자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있는 힘을 다해 눈을 크게 부릅뜨려 하면 할수록 거울 속 여자는 이를 악물며 눈을 더욱 더 세차게 내리 감았다.아무 일도 없었던 거야....어쩌면 환각이었을지도 몰라...여기는 장례식장이잖아....분명 환각이었을 거야...여기는 장례식장이잖아... 눈을 떠야지....눈을 떠야 집에 가지.... 집에 가야지....집에 가야 아이를 보지....‘아이’라는 소리에 거울 속 여자가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여자의 부모님이 꿈결처럼 그렇게 여자의 곁을 홀연히 떠난 후, 여자가 살아있는 단 하나의 이유였다.아이를 돌보아 줄 일가친척이 아무도 없는 여자에게 이모님들은 유일하게 여자가 회사에 다닐 수 있는 끈이었다. 그런 여자를 비웃듯 어떤 이모님은 애를 데리고 담배연기 자욱한 불법 도박장에 다녔다. 어떤 이모님은 3달 동안 아이에게 맨밥만 먹였다. 어떤 이모님은 알러지가 있는 약을 정량의 5배 이상 들이부어 아이를 쇼크로 잃을 뻔도 했다.‘친정엄마 없이 애 키우면서 회사 다니는 여자는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은 여자야’ ‘어휴.....내가 나라 하나 팔아먹고 이렇게 살겠어....최소 한 3개는 팔아먹었나봐’ 여자가 종종 하는 말이었다.하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아이만 바라보면 사르르 사르르 행복감이 여자의 목구멍을 간지럽혔다. 세상의 무게에 무너져 내리려 할 때면 아이에게 여자가 겪었던 엄마 없는 아픔을 겪게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언제나 말아쥔 여자의 주먹에 불끈 불끈 힘을 넣어주었다.그래 빨리 집에 가자....아이한테 가자....서서히 떨림이 잦아들며 여자는 그곳에 두고나온 핸드백과 무릎담요를 떠올렸다. 양손을 힘껏 주고 눈을 애써 부릅뜨고 그제서야 화장실 밖으로 발을 내딛었다.그곳을 들여다보았다. 그놈이 보이지 않았다. 다시금 떨려오는 가슴을 다잡으며 스르르 들어가 그까짓 크게 비싸지도 않은 핸드백과 무릎담요를 챙겨 나오던 여자 앞에 시커먼 그림자가 부딪혔다. 잘못 발이 엉긴 것으로 생각하고 슬쩍 옆으로 몸을 피해 나오려는 여자 앞에 다시금 같은 그림자가 부딪혔다.그제서야 그림자의 얼굴을 올려다본 여자 눈에 촛점이 반쯤 풀린 채 실실 거리며 여자 앞을 막아서고 있는 그놈의 얼굴이 들어왔다. 와락 풍겨오는 역겨운 술냄새에 그제서야 부옇던 여자의 눈이 여자를 흘겨보다 꾸욱 내리 감으며 코웃음 치듯 중얼거렸다. 거봐...모든 것은 현실이었다구.... #3여자는 내내 남편을 원망했다. 하지만, 그냥 ‘엉덩이를 만졌다’고 말한 여자에게 남편이 큰 감정의 동요를 보이지 않은 채 ‘고소 같은 것을 감당할 수 있겠냐’고 물었을 때,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한 것은 여자였다.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모두의 관심은 상대 여성이 누구인지에 쏠려 그저 흥밋거리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려 왔던 것을 수도 없이 봐왔던 터였다. 누구도 대놓고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상대 여성은 어느새 함께 일하기 불편하고 예민한 여성으로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당하는 것을 봐왔기 때문이었다.아니 며칠전 청 간부가 “여성들이 검사로서 인정받으려면 술자리에서 친목차원에서 있었던 일에 예민을 떨어서는 안된다. 그런 걸로 예민을 떨어대니 검사로서 인정을 못 받는 것이다”라고 대놓고 연설하는 것을 직접 듣지 않았던가.그런데도 여자는 자꾸만 남편이 원망스러웠다. 그 자리에서 있었던 일을 좀더 자세히 이야기했더라면 남편은 조금은 더 분노해주었을까....집에 오는 내내 계속 뺨에 눈물이 흘러내렸고, 집에 오자마자 화장실에 뛰어 들어가 변기를 부여잡고 한참을 꾸역꾸역 위액을 쏟아냈다는 것을 남편에게 이야기했더라면 남편의 반응이 달랐었을까....치마 속으로 손이 들어온 것만 아니라면 여성의 엉덩이와 허리를 껴안고 더듬는 것은 그렇게 치욕스럽고 끔찍한 일은 아닌 것일까.... 헤아릴 수 없는 혼란이 여자를 휘감았다. 수도 없는 ‘만약에’가 여자의 가슴을 내리찍었다. 만약에 괜한 별로 친하지도 않은 동기에게 그런 오지랖을 보이지 않았더라면...만약에 그날 검은 옷을 입고 집을 나서지 않았더라면... 만약에 강의에 가고 싶다는 남편의 말을 무시하고 계획대로 콘서트장에 갔더라면... 만약에..,....만약에........만약에.......그리고 만약에....아빠가 살아있었다면....... 중1 반장이던 언니가 반 아이들이 떠들었다는 이유로 대표로 엉덩이에 몽둥이 세례를 당하고 온 날, 아빠가 그 담임에게 전화를 해 고함을 질러댔던 일이 또렷이 떠올랐다. 만약에 아빠가 살아있었다면....만약에 아빠가 살아 있었다면 ..... 그렇게 아빠가 떠오를 때마다 여자는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아니다. 이 모든 게 아빠 때문이다. 여자가 아빠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착하고 예쁜 내 딸’이었다. 그렇다. 이 모든 게 아빠 때문이었다. 이 땅에서 살아남게 하기 위해서는 여자를 착하고 예쁜 딸로 키워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그 어떠한 불의도 참아내지 말라고, 그 어떠한 부당함에도 입 다물지 말라고, 욕설을 하고 소리를 질러대며 절대로 세상과 타협하지 말고 네 멋대로 그렇게 살아가라고 그렇게 가르쳐줬어야 했다.....아니다. 이 모든 게 엄마 때문이다. 다섯 살, 6. 25. 동란에 아버지를 잃고, 3살 동생을 등에 들쳐 업은 채 부르튼 발로 먼 길을 걸어 피난을 갔다는 여자의 엄마는 말수가 별로 없었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계집애들을 보러오다 변을 당했다'면서 ‘지 아버지 잡아먹은 딸년들’이라고 고모할머니들로부터 수도 없이 구박을 받았다면서도 일년에 한번씩은 꼬박꼬박 고모할머니 댁을 찾아가는 엄마였다. 한번씩 들이닥쳐 폭풍우를 일으키는 할머니나 고모 앞에서도 엄마는 언제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구석을 멍하니 응시한 채 입술만 깨물 뿐이었다.그렇다. 이 모든 게 엄마 때문이었다. 이 땅에서 여자를 살아남게 하기 위해서는 참고 또 참는 모습을 보여주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그 어떤 불합리도 참아내지 말라고, 여성이라고 무시하거나 업수이 여기는 것은 더더욱 참아내서는 안된다고, 그런 놈들에게는 멱살을 휘어잡고 주먹을 휘둘러줘야 한다고 그렇게 가르쳐줬어야 했다......부질없는 원망을 하던 여자는 다시금 머리를 세차게 내저었다. 모든 것은 다 내 탓이다. 모든 것은 다 내 잘못이다. 다 내 잘못이다....그놈이 그 후 회사의 빅2라는 국장 자리까지 꿰차고 수년간 절대 권력을 누려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분명히 사과를 요구했지만, 사과 따위는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대단한 힘을 가지신 분께 사과를 요구했던 것이 얼마나 순진하고 무례하고 어이없는 일이었는지를 안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그날의 일을 수많은 사람들이 수군거렸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그 자리에서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하였다는 듯 그리 웃고 떠들던 그들이- 그날의 일을 당시의 국장이 나서서 덮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불과 얼마 되지 않았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그제서야 납득할 수 없었던 사무감사와 경고와 기수에 맞지도 않게 갑작스레 이루어진 외딴 곳으로의 발령 등등 그 후 여자에게 일어났던 설명되지 않았던 모든 일들의 이유가 갑자기 또렷해진 것이 화근이었다.모든 것은 다 내 탓이다. 모든 것은 다 내 잘못이다. 다 내 잘못이다... 수없는 시간들을 수많은 밤들을 자기반성, 자체검열, 자아성찰 이딴 것들로 채워가고 있었는데, 그렇게 비틀비틀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었는데, 그렇게 꾸역꾸역 순간순간을 버텨내고 있었는데…외딴 근무지에서 혼자 있다가 갑자기 실명되어버릴 경우에 대비해 혼자서 손의 감각에만 의지해 걸어가는 연습을 해보고, 눈을 감고 휴대전화로 119 또는 남편의 번호를 누르는 연습을 해볼 때도 이제는 눈물 따위 흘리지 않았지 않은가.... 그런데 별안간 왜 세상이 그리 뱅글뱅글 돌아버린 것인지...왜 그렇게 와락 무너져 내려 버린 것인지.... #4평일 이 시간의 거리는 이토록 눈부시구나.... 오후 5시가 막 넘어섰는데도 여전히 햇살이 눈부시다. 혀 속은 여전히 쓰다. 따스한 바람 사이로 부서져 내리는 햇살은 휘청거리는 여자의 발걸음을 황홀하게 재촉한다.햇살을 머금은 채 반짝이는 바람 사이로 한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여자의 머리 속에는 아직도 책 속의 내용들이 휙휙 스쳐 지나갔다. 책 속에서처럼, ‘네 탓이 아니야.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누군가 이야기해주었다면, 조금 더 쉽게 버텨낼 수 있었을까...여자는 고개를 내저었다. 오히려 사람들은 모두 여자 탓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국장이 당시 일을 전혀 몰랐을 수도 있어. 너에게 일어난 일들은 네 자신 때문일 가능성이 커. 그게 아니더라도 그렇게 생각해야 네가 더 발전할 수 있어’ 이런 충고도 들었던 터였다.밝은 옷과 치마를 좋아했던 여자는 언젠가부터 검은 색 바지만 입고 다녔다. 치마가 조금만 짧아도 옷의 색상이 조금만 밝아도 ‘네가 이러니 그런 꼴을 당했지’ 어디선가 수근대며 여자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비웃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마지막으로 파마를 한 게 언제였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았다.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하는 여자의 머리 속엔 뱅글뱅글 돌고 있는 저 눈부신 햇살을 따라 여전히 한가지 생각이 뱅글뱅글 돈다. 누군가 처음부터 내 탓이 아니라고 내 잘못이 아니라고 이야기해주었다면, 내 삶은 달라졌을까....임관을 하자마자 부터였다. 아니 임관을 하기도 전이었다. 관사가 나왔다는 연락을 받고 이사를 하면서 인사를 간 여자를, 지방검찰청장은 떠나는 검사들을 위한 환송식에 참석시켰다. 식사 후, 청장이 떠나고 2차를 주도하던 해병대 출신의 눈이 부리부리한 부장검사는 별안간 ‘나는 술 안 먹는 검사는 검사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대생을 싫어한다. 나는 여검사를 싫어한다. 너는 내가 싫어하는 것을 다 갖추었으니 완전 악연 중에 악연이다. 너 같이 생긴 애치고 검사 오래 하는 애 못 봤다. 내가 너 검사 얼마나 하는지 지켜보겠다.’라며 독설을 퍼부어내다가, 다시 한마디 덧붙였다. ’아 참 너는 아직 검사도 아니지만....’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처음으로 시작하려는 사회 생활, 처음 보는 사람들에 둘러싸인 채, 모든 게 어색해 그저 조용히 옅은 웃음만 지으며 앉아있던 여자는 도대체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지 못했다. 부장이 여자를 처음 본 것은 불과 2시간 전의 일이었다.부장이 그다지 취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여자를 더욱 당혹스럽게 해 여자는 대꾸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그저 아랫 입술을 꾸욱 깨무는 외에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여자가 술을 못 마시는 것도, 이대를 졸업한 것도, 여성인 것도 모두 사실이었다.얼굴이 둥글둥글하고 눈이 작던 부장은 수도 없이 여자에게 이야기했다. ‘검사는 너처럼 공주 같으면 안 돼’ 그럴 때마다 여자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한없이 생각해야만 했다.밥자리에서 부지런히 뛰어다니지 않은 건 아무래도 이상해서였다. 신속하게 숟가락 젓가락과 티슈를 세팅하고, 모든 컵에 물을 따라 서열 순대로 상관과 선배 앞에 대령하고, 밥을 먹으면서도 행여나 비워진 접시나 물컵이 있는지 계속해서 살펴보다가 사라진 음식을 주문해내고 물을 따라야 하는 부지런을 떨어야 하는 것이, 자신이 말석이라서 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여성이기 때문에 해야 하는 것인지 잘 판단이 서지 않아서였다. 길을 걸을 때도 산을 오를 때도 단 반걸음이라도 윗사람보다 앞서지 않도록 수시로 애써 속도를 조정하며 서열 순대로 걸어가는 모습들이 영 어색해서였다.하지만 그 외 일에 있어서 게으름을 부린 적은 없었다. ‘올해부턴 여검사가 백명이 넘었다니...우리 회사 앞날이 큰일이다.....’라며 여자를 쳐다보며 혀를 끌끌 차대는 상관과 선배들의 걱정 어린 말들을 수도 없이 들었던 터였다. ‘나 하나 잘못하면 여검사 전체를 욕 먹게 한다’는 생각에 아무리 힘들어도 아무리 모욕적이어도 이를 악물어 왔던 터였다.생각해보면 한때 공주였던 적도 있었던 것만 같아서 -대학에 막 입학해 고등학교 때보다 몸무게가 한껏 빠져 스스로 만족감을 느꼈던 그 때 정도 - 자신도 모르는 새 무엇을 잘못했나....부장 입에 ‘공주’라는 말이 올라올 때마다 여자는 괜시리 어깨가 움츠러 들었다.얼굴이 작고 호리호리 말랐던 부장은 부임 첫날부터 회식을 했다. 술잔이 얼마나 돌았을까....눈빛이 살짝 흐려진 부장은 여자의 이름을 큰 소리로 또박또박 부르더니 이렇게 말했다.‘서지현! 나는 여성은 남성의 50프로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너는 여기 있는 애들 50프로야!. 그러니까 나한테 인정을 받으려면 너는 여기 있는 애들보다 2배 이상 더 열심히 해야 해!!!’여자의 사건을 단 한건도 결재해보지 않은 채 모든 사람 앞에서 ‘너는 여기 있는 애들의 50프로야’라고 확신에 차 말하고 있는 부장보다, 그 옆에서 연신 머리를 끄덕끄덕 하며 ‘옳으신 말씀이야. 새겨들어’라고 말하던 평소 가장 점잖다고 생각하던 바로 윗선배 A의 모습이 여자에게는 더욱 폭력적으로 느껴졌다.‘야 너는 여자애가 무슨 발목이 그렇게 굵냐, 여자는 자고로 발목이 가늘어야 한다’라는 등의 헛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뱉어대고, 술이 취해 툭 하면 머리나 어깨 등을 때려대던 B선배나, 여자가 있는 자리에서도 틈만 나면 음담패설을 늘어놓던 C선배나, 웃으면 ‘여자가 그렇게 웃음이 헤퍼서 쓰냐’고 나무라고, 웃지 않으면 ‘여자는 안 웃으면 안된다’고 설교를 해대던 D선배에 비해 젠틀한 느낌을 주던 선배였는데....딸만 둘 있고, 입만 열면 딸들 자랑에 침이 마를 새 없었던 부장은 노래방만 가면 2시간씩 혼자 마이크를 잡고 있다가, 마이크만 놓으면 여자에게 부르스를 추자면서 풀린 눈으로 집요하게 손을 내밀었다. 부장과 주말이면 ‘좋은 곳’을 다녀온 남자 선배들은 월요일 아침이면 여자의 사무실에 모여앉아 ‘부장은 왜 그 여종업원 팬티를 머리에 쓰고 있었냐’는 등의 이야기를 해대며 낄낄거렸다.그 후로도 많은 일들이 벌어졌고, 많은 말들을 들었지만, 이제는 처음처럼 그것들이 여자의 마음 속 깊이 파고들어 여자를 괴롭히는 일은 자주 없었다. 특별히 여자의 삶을 진심으로 걱정한다거나 남편감을 소개시켜주는 것도 아니면서 수시로 여자가 결혼을 안하는 것인지 못하는 것인지에 대해 자기들끼리 논쟁을 벌인다거나, 여자에게 ‘너 정도 나이면 이제는 남편감을 외국에서 찾아보거나 재혼자리를 알아봐야 한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뱉어내던 말들도 여자의 결혼과 함께 조용히 사라졌다.다시 한번 부장으로 만난 호리호리한 예전 부장이 회식자리에서 술에 취해 꽤나 오랜 시간 여자의 손을 주물러댈 때, ‘다른 사람들은 이 장면을 못보고 있나, 왜 다들 아무렇지도 않게 침묵하고 있는 것일까, 손을 주무르는 것은 추행으로 볼 수 없는 것인가’....언젠가의 그날처럼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한참을 생각해야만 했던 그런 일이라던가,회식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밤이면 여자에게 ‘너는 안 외롭냐? 나는 외롭다. 나 요즘 자꾸 네가 이뻐 보여 큰일이다’라던 E선배나(유부남이었다), ‘누나 저 너무 외로워요, 오늘은 집에 들어가기 싫어요, 저 한번 안아줘야 차에서 내릴 꺼예요’라고 행패를 부리던 F후배나(유부남이었다), 술이 취해 집으로 돌아가다가 ‘에고 우리 후배 한번 안아보자’며 와락 껴안아대던 G선배나(유부남이었다),노래방에서 나직한 눈빛으로 여자를 바라보며 ‘도대체 너는 왜 우리 회사에 왔냐’라는 알 수 없는 말을 해대더니, 술도 못 마시는 게 분위기도 못 맞춘다는 말을 피해보려 - 그 나직한 눈빛도 피해야했고 - 열심히 두드린 탬버린 흔적에 아픈 손바닥을 문지르고 있던 여자에게 ‘네 덕분에 도우미 비용 아꼈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던 이름도 기억 나지 않는 부장이나,‘잊지 못한 밤을 만들어줄테니 나랑 자자’ 따위의 미/친 말을 지껄여대더니 다음날 아무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던 F선배(유부남이었다) 따위가 이따금 있기는 했지만....그럴 때마다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랫입술을 꾸욱 꾸욱 깨무는 것 뿐이었다.그 큰 청에 성폭력 사건 전담할 검사가 여자밖에 없다고 하여 만삭상태에서 변태적인 성폭력 사건을 조사해야 할 때도, 나이트클럽에서 여성을 모텔로 떠메고 가 강..간을 한 사건에 대해 ‘여성들이 나이트를 갈 때는 2차 성관계를 이미 동의하고 가는 것이기 때문에 강..간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부장이나, ‘내가 벗겨봐서 아는데’ 식으로 강..간사건에 유달리 관심을 보이는 부장 앞에서도 여자가 할 수 있는 말은 아무 것도 없었다.평생 한번 받기도 어렵다는 장관상을 2번을 받고, 몇 달에 한번씩은 우수사례에 선정되어 표창을 수시로 받아도 그런 실적이 여자의 인사에 반영되는 일은 별로 없었다. 여자의 실적이 훨씬 좋은데도 여자가 아닌 남자선배가 우수검사 표창을 받는다거나, 능력 부족으로 여자가 80건이나 재배당받아 사건을 대신 처리해줘야 했던 남자후배가 꽃보직에 간다거나 하는 일이 종종 일어날 때도 여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아랫입술을 꾸욱 깨무는 외에는...언제부턴가 여자의 저 깊은 곳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시커먼 덩어리가 자꾸만 꿀렁꿀렁 목 밖으로 넘어오려 해 꾸욱 꾸욱 깊은 침도 삼켜내야 하는 일이 잦아졌다. #5누군가 처음부터 내 탓이 아니라고 내 잘못이 아니라고 이야기해주었다면, 내 삶은 달라졌을까....여전히 여자의 머리 속엔 계속 한가지 생각이 뱅뱅 돈다.그러다 책 속의 해설에서엔가 보았던 글이 여자의 머리를 스쳐간다. ’사회가 그랬지만, 그래도 그때그때 부당함을 그냥 넘기지 않고 또박또박 이야기해온 여성들도 있었다‘는 취지의... 역시 모든 것이 내 탓이었나. 아무런 말도 못한 채 그저 꾹꾹 삼키고 또 삼켜냈던 내가 역시나 잘못이었나.....아직도 집에 도착하려면 한참이나 남았다. 사라진 것 같았던 어지럼이 갑자기 밀려와 여자는 다시금 찬란한 햇살을 따라 빙그르르 돈다. 자신이 돌고 있는 것인지 세상이 돌고 있는 것인지 저 햇살이 돌고 있는 것인지 알아내려 애써 있는 힘껏 눈을 크게 뜨던 여자의 머릿속에 언젠가 들은 듯한, 눈을 세차게 내리감은 나직한 목소리가 여자에게 속삭인다.딸을 낳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이야....딸을 낳지 않은 게 얼마나 얼마나 다행이야.... 여자는 언제나처럼 다시금 아랫입술을 꾸욱 깨문다....짭조름한 피냄새가 여전히 쓴 여자의 입속을 적신다. 또 다시 정체모를 검은 덩어리가 뱃속에서 꿀렁거린다. - 서지현 검사의 개인적 글 -내딛으며-흔히 쓰는 게시판 유학인사, 경조사 감사인사도 용기가 없어 쓰지 못하였고, 댓글 하나 다는 것도 매우 주저하던 제가 매우 큰 용기를 내어 글을 써봅니다.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잠 못 이루는 밤들을 보내고 어렵게 쓰는 글입니다. 생각이 다른 분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수도 있고, 저만의 생각이라 비난하실 수도 있겠지만, 여러 가지 다양한 의견들이 자유롭게 개진되어야 검찰의 발전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넓은 마음으로 이해 부탁드립니다. -고백 1-나는 고백합니다. 저는 임은정 부부장님의 게시판 글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 유려한 글솜씨가 부럽기도 하고, 그 내용이나 취지에 공감을 하기도 하였으나, ‘저런 극단적인 과격한(?) 방법밖에 없나....’하는 생각을 하였던 것도 사실입니다.나는 고백합니다. 저는 그저 맡은 일 양심에 따라 최선을 다해 처리하면 내 할 일 다 하는 것이라고, 언론에 나오는 권력 하수인 같은 부끄러운 모습은 아주 극히 일부 검사들의 잘못일 뿐이고, 검찰 개혁은 나 따위 나서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이루어 질 것이라고, 일부 과격한(?) 검사들이 겪는 억울한 일 따위는 나한테 닥치는 일 결코 없을 남의 일이라고 그렇게 매우 안이하게 생각을 하였던 것도 사실입니다.그러나, 이제야 알았습니다. 이런 극단적인 과격한(?) 방법밖에 없다는 것을...... 거대한 권력을 거머쥐고, 어떠한 짓도 서슴치 않는 그들, 정권이 바뀌어도 항상 코어 1%의 흔들리지 않는 위치를 차지하고, 조금이라도 거슬리면 검사 하나 문제검사 만들거나, 심지어 옷을 벗게 하는 것까지도 손쉽게 해내면서그들의 행동이 부당하다고, 나는 그저 성실히 일하는 평범한 검사일 뿐이고, 그저 내가 바라는 것은 정당한 대우를 바라는 것 뿐이라고, 아무리 이야기해봤자, 힘 없고 빽 없는 일개 검사의 절규 따윈 비웃으며 무시하는 그들.. 그들 앞에 달리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다른 방법이라는 것은 결코 없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고백 2-저는 2010. 10. 30. 한 장례식장에서 법무부장관을 수행하고 온 당시 법무부 정책기획단장인 안태근(추후 검찰국장)에게 강제추행을 당했습니다.공공연한 곳에서 갑자기 당한 일로 모욕감과 수치심이 이루 말할 수 없었으나, 당시만 해도 성추행 이야기를 꺼내기 어려운 검찰 분위기, 성추행 사실이 언론에 보도될 경우 검찰조직의 이미지 실추, 피해자에게 가해질 2차 피해 등의 이유로 고민하던 중, 당시 소속청 간부들을 통해 사과를 받기로 하는 선에서 정리가 되었습니다.그 후 어떠한 사과나 연락도 받지 못하였으나, 저는 법무부장관 표창 2회, 대검 우수사례 다수 선정뿐 아니라, 영상녹화 매뉴얼, 장애인 조사 매뉴얼 작성 등 검찰의 조사 문화 개선에 고민을 많이 하면서, 미흡하나마 최선의 노력을 하는 그냥 평범한 검사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사무감사에서 다수 사건을 지적받고, 사무감사 지적을 이유로 검찰총장 경고를 받고, 검찰총장 경고를 이유로 전결권을 박탈당하고, 검찰총장 경고를 이유로 통상적이지 않은 인사 발령을 받았습니다. (이 부분에 관하여는 첨부한 문서에 상세히 기재를 하였습니다)납득하기 어려운 이 모든 일들이 벌어진 이유를 알기 위해 노력하던 중 (그들의 결속력은 매우 견고하여, 명확히 전 과정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였으나,) 인사발령의 배후에는 안태근 검찰국장이 있다는 것을, 안태근의 성추행 사실을 당시 검찰국장이던 최교일이 나서서 덮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임은정 부부장님의 여러 글에 등장하는 검찰간부에게 성추행을 당하고 불이익을 받은 여검사 사건이 이 내용입니다)너무나 부당하다고 이야기하고 싶었으나, 많은 사람들이 말렸습니다. “너 하나 병/신 만드는 건 일도 아니다. 지금 떠들었다가는 그들은 너를 더더욱 무능하고 문제 있고 이상한 검사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입 다물고 그냥 근무해라“저는 그저 제 무능을 탓하며 입 다물고 근무하는 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습니다. 순진하게도 저는 믿었습니다. 그냥 내가 성실히 근무를 하고, 열심히 맡은 사건을 처리하면 나의 진실성과 성실성을 알아줄 것이라고.. 검사직에 미련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10년 넘게 열심히 일해 왔는데 명예는 회복하고 나가자고 입술을 깨물며 일을 계속하였습니다. 언론에 이야기를 해보라는 권유나 기자의 접촉도 있었으나, 조직을 위하겠다는 마음에 이를 거절하였습니다. 나는 평범하게 성실히 일하는 검사이고, 내가 겪은 일련의 일들은 부당하다고 법무부 등에 조용히 의사를 표시해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들은 답변은 ‘검사 생활 얼마나 더 하고 싶냐, 검사 생활 오래 하고 싶으면 조용히 상사 평가나 잘 받아라’ 하는 것뿐이었습니다.이제는 알겠습니다. 저의 믿음이 얼마나 어리석고 순진한 것이었는지, 그들에게 힘없고 빽없는 일개 검사가 얼마나 우습고 하찮은 존재인지... -소망-정의로운 검찰, 국민의 신뢰를 받는 검찰, 투명한 인사제도, 상벌 절차의 객관화.. 이러한 검찰의 모습을 바라지 않는 검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인사제도, 상벌절차가 투명해지지 않는 한, 정의를 바로 세우고자 하는 우리 검찰에서 정의를 바로 세우기는 힘들다는 것은 제가 굳이 긴 말을 하지 않아도 모두 공감하실 것입니다.현재 진행되고 있는 개혁위 등에서 검찰 인사제도의 문제점을 개선해야 한다고 하면, ‘그 썩어빠진 것들 그냥 그대로 살라고 냅둬라’라는 의견이 나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끝을 가늠하기 어려운 암담함을 느낍니다.‘빽 젤 쎈 놈이 젤 좋은데 간다’는 인사제도, 빽 센 놈이 밀고 들어오면 인사발표 당일에도 요직 자리가 바뀌는 인사제도. 그래서 빽 없고 힘 없으면 간부 말 잘 들어서 평가라도 잘 받아야 하니, 간부의 그 어떤 갑질, 폭언, 부당한 지시에도 눈감고 입 다물게 하는 인사제도.. 제대로 소명할 기회도 주지 않고, 명확한 이유도 알 수 없는 상벌제도.. 가해자들은 당당히 잘 살아가고 피해자들만 박해를 받고 위축되어야 하는 성폭력 성추행 성희롱......우리는 언제까지 ‘그 썩어빠진 것들 그냥 그대로 살라고 냅둬라’라는 국민의 소리를 들어야 하는 걸까요. 제가 너무 검찰에 오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도 모르게 뭔가 튀는 행동은 자제하게 되고, 그저 묵묵히 내 일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내가 겪는 불의와 폭력에는 눈 감고 입 다물며, 평범하고 힘없는 일개 검사가 무엇을 바꿀 수 있나 체념하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제가 정의를 바로 세우는 검사라는 사실을 잊고 조직의 작은 부품으로 생활하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저는 아직도 너무나 검찰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아직도 검찰이 조금이나마 달라질 것을 기대하면서 이런 글을 쓰고 있으니 말입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합니다. ‘너가 뭐라고 해봤자 검찰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너가 떠들면 그들은 눈깜짝 하지 않고 너를 더 문제 있는 검사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인사에 불만 품고 떠드는 검사 취급이나 할 것이다. 그냥 조용히 있어라........’저도 그분들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냥 조용히 나 혼자 검찰을 나가면 되지 않을까...많은 고민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10년전 한 흑인 여성의 작은 외침이었던 Me Too 운동이 전 세상을 울리는 큰 경종이 되는 것을 보면서, ‘과거의 잘못을 단죄하지 않는 것은 미래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이다’라는 Albert Camus의 글을 읽으면서,아무리 제 존재가 너무나 작고 미미하더라도,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리 스스로 더 이상 침묵하지 않고, 우리 스스로 내부로부터의 개혁을 이룰 수 있는 아주 작은 발걸음이라도 된다면 하는 소망으로, 미래의 범죄에 용기는 주어서는 안되겠다는 간절함으로 이렇게 힘겹게 글을 쓰고 있습니다.저는 믿습니다. 목소리 내어 이야기하는 검사도, 묵묵히 일만 하는 검사도, 또 소위 코어의 귀족검사도, 모두 각자 다른 모습으로 검찰을 사랑하는 것이라고.하지만, 아무도 우리의 문제를 대신 해결해주지 않습니다. 미미한 발걸음일망정 한발씩 한발씩 우리 스스로 나아가야만 우리 모두가 원하는 진정한 내부의 정의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나에게 일어난 불의와 부당을 참고 견디는 것이 조직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드러내야만 이 조직이 발전해나갈 수 있겠다는 생각을 이제야 하게 됩니다.나는 소망합니다. 우리가 국민의 사랑과 신뢰를 받는 검찰, 진정 정의를 실현하는 검찰로 우뚝 서기를.... 저는 아직도 검찰을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희망을 이렇게 품고 있으니 말입니다. - 서지현 검사가 1월 29일 검찰 내부망에 올린 글 http://www.huffingtonpost.kr/2018/01/30/story_n_19111886.html?utm_hp_ref=korea
드니드니작성일
2018-02-27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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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영결식에 처음 모습 드러낸 YS 장남
▲ 왼쪽부터 YS의 차남 현철 씨, 장남 은철 씨, 부인 손명순 여사엄숙하고 경건했던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빈소 풍경에는 어색한 점이 없지 않았다. 장남인 은철(59)씨가 보이지 않고, 차남인 현철(56)씨가 줄곧 맏상주 역할을 맡았다는 것이다. 그런 은철씨가 26일 YS의 영결식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은철씨는 운구에 앞서 유해와 작별하는 인사를 할 때 중절모와 선글라스를 쓴 모습으로 다른 가족들과 함께 섰다.그는 국회에서 열린 영결식 때도 어머니 손명순 여사와 동생인 현철씨 사이에 앉아 부친의 마지막 길을 지켰다. 그동안 인터넷과 SNS상에서는 은철씨의 부재에 대해 궁금하다는 의견이 많았다.김 전 대통령과 부인 손명순 여사는 슬하에 장녀 혜영(63), 차녀 혜경(61), 장남 은철, 차남 현철, 3녀 혜숙(54)씨 등 2남 3녀를 뒀다.▲ 1992년 14대 대선 무렵 김영삼 후보와 손명순 여사가 가족들과 기념 촬영을 했다. 맨왼쪽부터 맏아들 은철 씨, 차남 현철 씨 부부, 그리고 사위 이창해 씨와 첫째딸 혜영 씨 부부, 둘째딸 혜경 씨와 사위 송영석 씨, 막내딸 혜숙 씨와 사위 이병로 씨 부부가 자리했다.딸들은 가정주부로 평범한 삶을 살아 그렇다지만, 장남 은철씨의 활동상은 외부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2008년 가을 YS의 부친상(김홍조 옹)일 때도 차남 현철씨가 사실상 상주 노릇을 했고, 장남은 오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은철씨와 관련해서는 몇 가지 일화가 전해진다.은철 씨가 결혼식을 올린 건 김 전 대통령이 신군부에 의해 가택 연금 중이던 1982년이었다. 당시 신군부는 특별히 김 전 대통령에게 은철 씨의 결혼식 참석을 허용했지만, 김 전 대통령은 이를 거부했다."나는 아버지 이전에 정치인"이라며 군부의 가택연금에 항의하는 뜻으로 결혼식 참석을 거절한 것이다.결국 은철 씨는 아버지 없이 결혼식을 치러야했고, 이후 미국으로 떠나 평생을 해외에서 은둔의 삶을 살았다고 한다.건강도 좋지 않다고 한다. MB 정부 시절 청와대 춘추관장과 홍보기획비서관 등을 지낸 이상휘 위덕대 부총장은 23일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은철씨가 몸을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많이 아프다. 원래 건강이 안 좋은데다가 지금 몸이 아파서 빈소에도 거의 못 나올 상황에 있다”며 “정말 비운의 황태자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전했다.이어 이 부총장은 1996년 일화도 전했다. 누가 전화로 부탁을 해 서울 사당동 허름한 술집에 가게 됐는데 은철씨가 만취해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 대통령 아들인 것을 술집도 몰랐고, 외상값도 많이 있었는데 술값을 못 내고 만취해 있어 술값을 내고 왔다는 것. 이 부총장은 청와대 경호팀이 와서 은철씨를 데리고 나갔다면서 “그 당시에만 하더라도 상당히 자신에 대해서 억울하다고 할까. 약간 기가 많이 눌린 듯한 느낌이 있었고 본인의 처지에 대해서 상당히 비관적인 면이 많이 보였다”며 “결국 아직까지도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는 그런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덧붙였다. ------------------------------저도 누군지 어리둥절 했는데 장남이었네요..,몸이 엄청 많이 아파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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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글터] 방배동에서 생긴 일 6
저희는 서로 식은땀이 범벅이 되어 숨죽인채 서로 부둥켜 안고 있는데
갑자기
화장실에서
'잘박' 하고 걸어 나오는 소리가 화장실에서 납니다.
‘공포에 질린다는’ 표현이 있지요
그 ‘질린다’ 라는 표현을 뼈 져리게 실감한 날 입니다.
공포감이 나를 덮어와 이성을 마비시켜 버리면 숨이 쉬어지질 않습니다.
호흡도 생각을 하고 의식을 하면서 들숨과 날숨을 내뱉어야 할 정도가 됩니다.
흔히 공포영화를 보면 너무 심한 공포에 질려 눈과 입을 뜨고 죽는 장면이 나오는데 저는 그 장면이 굉장히 디테일 하고 사실적인 묘사라 생각 합니다.
숨조차 쉬어지지 않습니다.
암튼,
그 걸음 소리가 ‘찰박……………..찰박………………찰박’ 이런 식으로,
한걸음 띠고 한참을 멈춰져 있다가 또 한걸음 띠고 한참을 멈춰져 있다가 이런식 으로 다가 옵니다.
차라리 기절이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정신은 되려 명징해 지고 온몸에 흐르는 피가 역류하는 기분이 들고 온통 식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다가 ‘찰…..박…………………..’찰…..박’…………………………….그리고는 어느 순간 그 소리가 멈췄습니다.
그때 그 모텔 방 화장실 입구가 저희 쪽이 아니 었습니다.
그러니까 현관문을 열고 들어 왔을 때 그쪽으로 나있는 화장실 이었죠.
저희가 누워 있는 침대에서는 그 방 화장실 내부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화장실쪽을 등지고 누워 있었고 저는 그녀를 안고 화장실 방향을 향해 누워 있었 습니다
당장 불을 켯으면 좋겠는데 그 전등 스위치가 화장실 벽 쪽에 붙어 있었습니다.
리모콘이 어디 갔는지 찾는것도 언강생심 엄두도 내지 못했구요.
어느 순간부터 저도 그녀를 꽉 끌어 안은채 눈을 감고 있었는데 갑자기 발자국 소리가 ‘뚝’ 끊기니 또 다른 공포가 엄습해 옵니다.
정말 일분이 한시간 처럼 느껴지다가 너무 궁금해 지길래
정말 용기 내어 눈을 떠 봤지요.
그런데 그걸 뭐라고 표현 해야 할까요.
분명 화장실 문 앞쪽에 무언가 있습니다.
거무스름하고 희미 하지만 여자의 형상이라는 것 쯤은 알수 있습니다.
그런데 또 일견 딱히 ‘사람의 형상이고 여자의 형상입니다’ 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실루엣이 화장실 앞쪽에 서 있는 겁니다.
그 형상이 포토샵으로 말하자면 50% 블러 처리된 흑백 합성 영상이라고 생각 하시면 됩니다.
이건 뭐 비명도 안나오더 군요.
다만 그녀를 끌어 안은채 움찍하며 ‘어…어…어……’ 라고 아무 말도 못했는데 갑자기 그녀가 짓눌린 공포를 마구 발산하듯 엄청난 비명을 질러 댔습니다.
그녀가 ‘꺄아아악’ 이라는 사자후 같은 비명을 토해냄과 동시에 저는 마치 무슨 주술에서 풀려난듯 침대에서 뛰쳐나가 후다닥 빠른 동작으로 벽에 붙어 있는 조명 스위치들을 다 눌렀습니다.
조명이 들어오자 갑자기 방 전체의 괴괴스럽던 알수 없는 분위기가 물러나며 다시 조금씩 따스한 기운이 방으로 스며 듭니다.
그녀는 눈물을 흘려 대며 울고 있었고 그런 그녀를 보며 저는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아무말도 하지 않은채 주섬주섬 떨어져 있던 옷들을 빠른 속도로 챙겨 입기 시작 했습니다.
벗기는데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입는 속도는 어찌나 그리 빠르던지……….
그렇게 저희는 번개 처럼 옷을 입고 나가는데 화장실 앞쪽을 지날 때 하마터면 까무러 칠뻔 했습니다.
화장실에 샤워를 한듯한 물자국 들이 있었습니다.
화장실 입구까지 물자국이 걸쳐져 있더군요.
이게……….
저희는 그날 방에 들어가서 샤워를 하지 않았거든요.
근데 욕실에 샤워 흔적은 물론이고 화장실 앞까지 물자국이 떨어져 있는거예요.
마치 발자국 처럼.
저희는 미친듯이 모텔방을 빠져나와 제 차로 옮겨 탔습니다.
그녀는 옆자리에 앉아 계속 울고 있고 저 또한 아무 말 없이 시동을 걸고 그녀의 집 쪽으로 향했습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그녀는 기운이 다 빠졌는지 축 늘어진채 멍하게 앞을 바라만 보고 있습니다.
저희는 차 안에서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가는 내내 실내등을 켜놓고 운전 했지요. 차 안에서도 너무 무서웠거든요.
왜 그런 기분 있잖아요.
내가 경험 했던 공포가 진실이 아닌 마음.
나 혼자의 착각 이었었으면 하는 심정 같은……….
그러니 무언가의 말을 꺼내 그 방에서 있었던 사실들을 확인 한다는 것이 더 무섭게 느껴 졌던 건지도 모르 겠습니다.
그녀 집 근처에 도착해 차를 정차 시키고 그녀를 보니 여전히 축 늘어져 초점 없는 눈동자로 앞만 응시하고 있더군요.
저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망설였습니다.
평소에 제 성격 같았으면 그랬겠죠.
'걱정하지 마라, 무언가 해결 방법이 있을거다' 라는 말로 다독여 주거나 최소한 아무말 없이 꼭 끌어 안아 주기라도 했을텐데 그날은 웬지 아무것도 할수 없더군요.
둘이 그렇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앉아 있는데 그녀가 조용히 문을 열고 내립니다.
차에서 내린 후 집 방향으로 너털너털 걸어 가는데 온 몸에 기운이란 기운은 다 빠져 나간 사람 처럼 걷더군요.
'무슨 말이라도 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지만 아직 그때까지 저도 공포감에 장악 당해 있던 때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녀의 뒷모습만 바라 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차를 돌려 저희 집 방향으로 차를 몰았습니다.
음악을 크게 틀어 놓고 여전히 실내등도 다 켜놓은 상태로요.
운전을 하면서 뒷자리가 무서워 계속 쳐다 보면서 운전을 했죠.
그 때 시간이 아마 새벽 1시 조금 넘은 시간 이었던 걸로 기억 합니다.
그렇게 운전을 하고 가다 문득 이렇게 집으로 도망만 간다고 무언가 해결 될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더군요.
신호에 정차 했을 때 소품녀석과 백뚱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자냐? 늦은 시간에 미안한데 안자고 있다면 전화 좀 해줘" 라고요.
무턱대고 전화를 해 대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 이거든요.
저는 기왕이면 백뚱이 전화해주기를 바랬습니다.
한 십여분이 흘러도 대답이 없길래 슬슬 둘다 자나보다 라고 생각 하고 있는데 전화가 울립니다.
받아보니 소품 녀석이더군요.
"어, 형 이시간에 웬일 이세요?"
라고 이야기 하는데 녀석의 목소리가 조금 이상 합니다.
저는 자다 일어났나? 라는 생각에 잤냐고 물어 봤더니 깨어 있었 답니다.
"그런데 목소리가 왜 그래? 많이 아픈 것 같은데 감기 걸렸어?" 라고 물어 보니
"아뇨, 그게 아니라 형 제가 요즘 몸이 좀, 아니 몸은 아닌데 그게……암튼 좀 상황이 그렇네요"
라고 이야기 하는데 전화기 너머로도 '이 녀석에게 무슨 일이 있구나!' 라는게 느껴질 정도 였습니다.
그리고는 " 형, 제가 지금 너무 전화 받을 상황이 아니라서, 죄송한데 내일 다시 전화 드릴게요"라고 얘기 하더군요.
미안한 마음에 알았다, 늦게 연락 해서 미안하다 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뭔가 소품 녀석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라는 생각이 들다가 그저 녀석이 감기라도 걸렸나 보다 라고 가볍게 생각 하기로 하고 다시 집으로 향하는데 이번에는 다시 전화가 울려 받아 보니 백뚱 이었습니다.
"우왕~ 우리 도도한 잘난이 오빠 웬일이야?" 라고 말을 하는데 이런 젠장 술을 한바지 푼 목소리 더군요.
"어? 어.그게, 너 지금 술먹냐?"
"어헝 그럼 지금 술먹고 있지, 근데 이 시간에 웬일이야? 이제 나한테 뭔가 물어 볼게 생겼나 보지?ㅋㅋㅋㅋ"
그런 식으로 말장난을 하는데 그때는 뭐 그게 얄밉고 자시고 할 게재가 아니더군요.
일단은 미친년 바지가랑이라도 붙들고 매달릴 심정 이었으니까요.
"지금 어딘데? 너 집에 안가? 내가 데려다 줄까?"
"뭐래, 오빠가 날 왜 데려다 줘. 그리고 여기 우리 동네 근처야" 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는
"오빠가 이 시간에 직접 전화한거 보니 뭔가 있긴 있었구나. ㅋㅋㅋㅋ" 라고 계속 놀리는 투로 이야기 합니다.
"어, 그래 뭔가 있긴 있었다. 암튼 지금 못봐? 내가 갈수 있는데?"
"아니에요. ㅋㅋ 나도 이제 들어 갈거야. ㅋㅋㅋ 급해도 참아 ㅋㅋㅋㅋ나중에 만나면 얘기 해줄게 안뇽~~~~" 그러더니 전화를 휙 끊어 버립니다.
이런 젠장.
그런 통화를 하는새 저는 집에 도착해 제 방으로 향했습니다.
그래도 집에 도착하니 마음이 한결 편해 집니다.
원래 저는 외출했다 들어가면 시간이 늦건 빠르건 샤워 먼저 하는데 그날은 샤워는 커녕 변기에 있는 물도 쳐다보기 싫더군요.
'햐…물 조심 해야 하는거 맞네. 그런 물일줄은 상상도 못했지만'
방에 앉아 방에 불을 켜 놓은채 멍하게 앉아 오늘 하루 하루 있었던 일들을 생각 했습니다.
그렇게 생각을 하자 오늘 있었던 일들이 마치 아주 오래전 이야기 처럼 느껴지거나 현실이 아니었던 일들 처럼 생경 하게 느껴 지더군요.
오늘, 아니 어제 있었던 일 자체가 마치 그저 상상속에 일어났던 착각들 같은 생각도 슬몃 드는 거예요.
그렇게 침대에 멍청히 앉아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다가 스으윽~ 잠에 빠져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제 꿈속에
얼굴에 반이 화상으로 뒤덮인 여자가 나타 났습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주말에 최대한 많이 쓰려고 했는데 어쩐일인지 주말에 정신 없이 바빴어요
주주회의에, 친구 부친상에, 누군가의 글을 대필해줘야 하는 사태까지.
그래도 월요 주간회의 주재가 끝나자 마자 책상에 앉아 후딱 글을 써 올립니다.
이따 오후라도 짬이 나면 최대한 빨리 글을 올려 마무리 할수 있도록 노력 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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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율곡 이이의 합격기록... 이분은 신이셨다
(22세~29세까지 아홉 번 장원급제해 ‘구도장원공’ 찬사)
조선 역사 500년간 최고의 천재를 꼽으라면 단연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들 수 있다. 율곡은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는 별명을 지녔는데, 이는 과거시험에서 9번 장원급제했다는 의미다. 한번도 급제하기 쉽지 않은 시험이 과거시험이고, 여기서 장원급제는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인데, 9번이나 장원급제했으니 가히 조선 500년 역사의 최고 천재라 할 수있을 것이다.
▲ 율곡이 외할머니등에 업힌 채 석류의 모양을 보고 시를 읊은 나이가 세살이었다. 오죽헌엔 지금도 석류나무가 있다.
조선 역사 500년간 최고의 천재를 꼽으라면 단연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들 수 있다. 율곡은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는 별명을 지녔는데, 이는 과거시험에서 9번 장원급제했다는 의미다. 한번도 급제하기 쉽지 않은 시험이 과거시험이고, 여기서 장원급제는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인데, 9번이나 장원급제했으니 가히 조선 500년 역사의 최고 천재라 할 수있을 것이다. ◇ 과거답안지 ‘천도책’으로 중국까지 명성율곡은 강릉 오죽헌에서 출생해 자라다가 6세 때에 서울로 올라와 10년간 살았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신동으로 불렸다. 13세이던 1548년(명종 3년) 진사초시에 합격하고, 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다가, 다음해 하산하여 성리학에 전념했다.하산 후 강릉 외가에서 새로이 학문에 정진한 지 1년이 되던 1556년 겨울, 율곡의 나이 스물두 살 때 한성 별시(別試)문과에서 ‘천도책(天道策)’으로 장원급제했다. 율곡이 훗날 ‘구도장원공’이라는 장안의 찬사를 받게 된 *점이 바로 이때의 장원급제였다.
천도책은 음양이라는 기(氣)의 작용으로 천지조화를 설명한 것으로 율곡의 자연 철학에 대한 근본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당시 시험관이었던 정사룡과 양응정은 율곡의 답안을 채점하면서, 자신들은 시험 문제를 만드는 데도 여러 날을 고심했건만 이 젊은이는 짧은 기간 내에 이토록 놀라운 내용의 글을 지었다면서, 실로 천재가 나타났다고 감탄했다 한다. 이 천도책은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져서 율곡이 47세 때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게 됐을 때, 명나라 사신인 황홍헌(黃弘軒)과 왕경민(王敬敏) 등은 율곡에게 ‘선생님’이라고 예를 표했다.스물여섯 되던 해 5월에는 부친상을 당하여 파주 선산에서 3년 동안 시묘를 하며 보냈고, 상복을 벗은 이듬해 명종 재위 19년 7월과 8월에는 소과와 대과에 연속으로 장원급제했다. 22세때에 별시에서 천도책(天道策)을 지어 장원하고, 이 때부터 29세에 응시한 문과 전시(殿試)에 이르기까지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율곡의 천재성은 3살 때 석류가 벌어진 모양을 보고 석류피리쇄홍주(石榴皮裏碎紅珠 석류껍질 안에 들어 있는 씨 모양이 붉은 구슬처럼 빛나는구나)라고 읊었다는 데서 드러난다. 남들이 말을 배울 시기에 율곡은 이미 글까지 깨쳤던 것이다. ◇ 훈구세력 사라지고 사림 세력 부상하던 시기율곡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사회상을 알아볼 필요가 있는데, 당시 조선은 새로운 사회적 분위기가 움트려하던 중이었다. 율곡이 관직생활을 시작한 명종 말~선조 초는 명종대에 정치를 좌우한 척신이 제거되고 새로운 정치세력인 사림(士林)이 부상한 정치적 변동기였다.율곡은 16세기의 조선 사회를, 건국초의 기강이 무너지는 ‘중쇠기(中衰期)’라고 진단했다. 따라서 율곡은 국가 재정비를 위해 일대 혁신이 필요하다고 보고 ‘동호문답(東胡問答)’ ‘만언봉사(萬言奉事)’ 등의 저술을 통해 국정 개혁안을 선조에게 제시했다. 이를 율곡의 경장론(更張論)이라 한다.율곡은 시대가 바뀌면 현실에 맞게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율곡은 국가 통치체제 정비를 통한 기강 확립, 공안(貢案)과 군정(軍政)등 부세(賦稅)제도의 개혁을 통한 백성의 고통을 덜어주어야 한다는 것 등을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드러나는 신분사회의 모순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었다. 아무리 천재라도 당시의 사회상을 뛰어넘기는 힘든 법. 이 때문에 율곡은 서원향약(西原鄕約) 해주향약(海州鄕約) 등을 통해 사림이 꿈꾸는 이상적인 향촌사회건설에는 관심을 기울였지만 사회 전체적인 모순을 꿰뚫지는 못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 태극팔괘. 율곡은 선조에게 태극도설을 지어 바치기도 했다.
◇ 이기이원론적일원론으로 성리학 집대성대개 천재들은 자기 이전의 사상을 집대성하는 업적을 보인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도 결국은 그 당시까지 알려진 양자역학 등 물리학 이론을 집대성한 것이다. 수학 최고의 난제로 불렸던 ‘페르마의 정리’를 증명한 와일즈교수도 그 이전까지의 수학이론을 집대성한 것이다. 기존이론과 학설을 집대성하려면 본인이 일단 학문적 자세를 지켜야한다. 율곡 이전의 성리학은 주기론(主氣論)과 주리론(主理論)으로 나뉜다. 주기론은 서경덕, 기대승 등이 주장했고 주리론은 퇴계 이황이 주장했다. 율곡은 이를 모두 비판하면서 집대성해 이기이원론적일원론을 제창했는데, 이는 실학과도 일부 맞닿아있고 구한말 대한제국 시기 사회개혁론으로 계승된다.퇴계는 이기론에 있어서 기뿐만 아니라 이도 발한다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設)을 주장했다. 율곡은 이발을 인정하지 않고 ‘발하는 것은 기(氣)이며 발하는 까닭이 이(理)’라고 봤다. 율곡은 이와 기는 논리적으로는 구별할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분리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봤다. 모든 사물에 있어 이는 기의 주재(主宰)역할을 하고, 기는 이의 재료가 된다는 점에서 양자를 불리(不離)의 관계에서 파악하고, 하나이며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 이들의 관계를 ‘이기지묘(理氣之妙)’라고 표현했다.결국 율곡의 이기론은 다양한 현상(氣)속에 보편적 원리(理)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율곡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변화하고 제한적인 기(氣局) 속에는 항상 보편적 이(理通)가 존재한다는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을 제시했다. ◇ 주요관직인 청요직(淸要職) 두루 섭렵율곡의 스승에 대해서는 뚜렷한 기록이 없는데, 일부에서는 율곡의 학자적 소양은 어머니 신사임당에게서 모두 나온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율곡이 퇴계 이황(1501~1570)을 만난 것은 23세 때 성주 처가에서 강릉 외가로 가는 도중이었다. 이 때 퇴계는 이미 58세였다. 젊은 율곡과 원숙한 대학자간의 만남은 짧았지만, 율곡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 때의 인연으로 두 사람은 시를 주고받고, 학문에 대해서도 서로 강론하며 후에 편지도 주고받았다. 율곡은 퇴계를 스승처럼 존경했으며, 퇴계는 율곡을 만난 후 여러 사람에게 ‘율곡이야 말로 후생가외(後生可畏 후배들의 약진이 두려울 정도라는 뜻)’라고 칭찬했다.율곡은 29세에 문과와 명경과에 장원급제한 후 호조좌랑으로 벼슬을 시작, 40세까지 예조좌랑, 이조좌랑, 홍문관 교리, 청주목사, 우부승지, 황해도 관찰사, 홍문관 부제학 등을 지냈다. 41세 이후 은퇴와 관직제수를 거듭했는데, 대사헌, 호조판서, 이조판서, 형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1583년 4월 48세에 선조와의 경연석상에서 유명한 10만양병설을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임란예견 화석정 전설은 모두 낭설율곡의 10만양병론에 대해서는 임란을 예언했다는 둥, 율곡이 은퇴한 뒤 선조의 피난길을 위해 정자에 매일 기름을 먹였다가 나중 횃불처럼 사용했다는 말들이 있지만 이는 모두 후세인들이 신격화를 위해 지어낸 낭설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율곡의 10만양병론은 서애 유성룡도 당시 반대를 할 정도로 조정에서는 먹혀들지 않았다. 사실, 당시 조선은 10만은커녕 1만의 병력도 양성할 체계가 갖춰지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더욱이 율곡이 10만 양병을 주장한 때가 병조판서를 지내고 대사헌으로 있을 때였는데, 대부분의 군신들은 병조판서로 있을 때는 침묵하다가 나중에 10만 양병 운운하는 율곡을 호되게 비판하기도 했다.율곡에 대한 또 다른 신화의 하나인 파주 임진강 가에 있는 화석정 역시 사실이 아니다. 율곡은 임금이 북으로 피난 갈 것을 미리 알고, 이 정자에다가 기름을 먹여서 폭우 속에서도 훨훨 잘 타게 해 두었던 것이, 마침내 임진란을 만나 크게 효과를 보았다는 것도낭설이다.그 당시 임금을 모시고 가던 서애 유성룡이 쓴 ‘징비록’은 「…나루를 건너서니 이미 날이 어두워 앞을 분간하기 어렵다. 임진강 남쪽 기슭에 옛 승청(丞廳)이 있는데, 혹시 왜적이 거기 있는 재목을 가지고 뗏목을 매어 건너올까 해서 임금의 명령으로 불을 붙여 태우니 그 불빛이 강 북쪽까지 비쳐 길을 찾아 갈 수가 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선조 수정실록 등 여러 기록에도 똑같은 기사들이 나온다. 지형 상으로도 동파(東坡)로 건너가는 임진강 나루터와 율곡리에 있는 화석정과는 서로 떨어져 있어 상관없는 곳이다.미인박명이라고, 율곡은 만 49세에 숨졌는데 만약 율곡이 10년만 더 살다 갔다면 많은 것들이 바뀌었을 것이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69세까지 산 퇴계의 문하에는 기라성 같은 인재들이 넘쳤지만, 율곡 사후에는 빼어난 인재가 없었던 것도 모두 율곡의 너무 이른 죽음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면죄자작성일
2011-08-17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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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율곡 이이의 합격기록... 이분은 신이셨다
조선 역사 500년간 최고의 천재를 꼽으라면 단연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들 수 있다. 율곡은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는 별명을 지녔는데, 이는 과거시험에서 9번 장원급제했다는 의미다. 한번도 급제하기 쉽지 않은 시험이 과거시험이고, 여기서 장원급제는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인데, 9번이나 장원급제했으니 가히 조선 500년 역사의 최고 천재라 할 수있을 것이다.
▲ 율곡이 외할머니등에 업힌 채 석류의 모양을 보고 시를 읊은 나이가 세살이었다. 오죽헌엔 지금도 석류나무가 있다.
▲ 태극팔괘. 율곡은 선조에게 태극도설을 지어 바치기도 했다.
조선 역사 500년간 최고의 천재를 꼽으라면 단연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들 수 있다. 율곡은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는 별명을 지녔는데, 이는 과거시험에서 9번 장원급제했다는 의미다. 한번도 급제하기 쉽지 않은 시험이 과거시험이고, 여기서 장원급제는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인데, 9번이나 장원급제했으니 가히 조선 500년 역사의 최고 천재라 할 수있을 것이다. ◇ 과거답안지 ‘천도책’으로 중국까지 명성율곡은 강릉 오죽헌에서 출생해 자라다가 6세 때에 서울로 올라와 10년간 살았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신동으로 불렸다. 13세이던 1548년(명종 3년) 진사초시에 합격하고, 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다가, 다음해 하산하여 성리학에 전념했다.하산 후 강릉 외가에서 새로이 학문에 정진한 지 1년이 되던 1556년 겨울, 율곡의 나이 스물두 살 때 한성 별시(別試)문과에서 ‘천도책(天道策)’으로 장원급제했다. 율곡이 훗날 ‘구도장원공’이라는 장안의 찬사를 받게 된 *점이 바로 이때의 장원급제였다.천도책은 음양이라는 기(氣)의 작용으로 천지조화를 설명한 것으로 율곡의 자연 철학에 대한 근본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당시 시험관이었던 정사룡과 양응정은 율곡의 답안을 채점하면서, 자신들은 시험 문제를 만드는 데도 여러 날을 고심했건만 이 젊은이는 짧은 기간 내에 이토록 놀라운 내용의 글을 지었다면서, 실로 천재가 나타났다고 감탄했다 한다. 이 천도책은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져서 율곡이 47세 때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게 됐을 때, 명나라 사신인 황홍헌(黃弘軒)과 왕경민(王敬敏) 등은 율곡에게 ‘선생님’이라고 예를 표했다.스물여섯 되던 해 5월에는 부친상을 당하여 파주 선산에서 3년 동안 시묘를 하며 보냈고, 상복을 벗은 이듬해 명종 재위 19년 7월과 8월에는 소과와 대과에 연속으로 장원급제했다. 22세때에 별시에서 천도책(天道策)을 지어 장원하고, 이 때부터 29세에 응시한 문과 전시(殿試)에 이르기까지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율곡의 천재성은 3살 때 석류가 벌어진 모양을 보고 석류피리쇄홍주(石榴皮裏碎紅珠 석류껍질 안에 들어 있는 씨 모양이 붉은 구슬처럼 빛나는구나)라고 읊었다는 데서 드러난다. 남들이 말을 배울 시기에 율곡은 이미 글까지 깨쳤던 것이다. ◇ 훈구세력 사라지고 사림 세력 부상하던 시기율곡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사회상을 알아볼 필요가 있는데, 당시 조선은 새로운 사회적 분위기가 움트려하던 중이었다. 율곡이 관직생활을 시작한 명종 말~선조 초는 명종대에 정치를 좌우한 척신이 제거되고 새로운 정치세력인 사림(士林)이 부상한 정치적 변동기였다.율곡은 16세기의 조선 사회를, 건국초의 기강이 무너지는 ‘중쇠기(中衰期)’라고 진단했다. 따라서 율곡은 국가 재정비를 위해 일대 혁신이 필요하다고 보고 ‘동호문답(東胡問答)’ ‘만언봉사(萬言奉事)’ 등의 저술을 통해 국정 개혁안을 선조에게 제시했다. 이를 율곡의 경장론(更張論)이라 한다.율곡은 시대가 바뀌면 현실에 맞게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율곡은 국가 통치체제 정비를 통한 기강 확립, 공안(貢案)과 군정(軍政)등 부세(賦稅)제도의 개혁을 통한 백성의 고통을 덜어주어야 한다는 것 등을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드러나는 신분사회의 모순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었다. 아무리 천재라도 당시의 사회상을 뛰어넘기는 힘든 법. 이 때문에 율곡은 서원향약(西原鄕約) 해주향약(海州鄕約) 등을 통해 사림이 꿈꾸는 이상적인 향촌사회건설에는 관심을 기울였지만 사회 전체적인 모순을 꿰뚫지는 못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 이기이원론적일원론으로 성리학 집대성대개 천재들은 자기 이전의 사상을 집대성하는 업적을 보인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도 결국은 그 당시까지 알려진 양자역학 등 물리학 이론을 집대성한 것이다. 수학 최고의 난제로 불렸던 ‘페르마의 정리’를 증명한 와일즈교수도 그 이전까지의 수학이론을 집대성한 것이다. 기존이론과 학설을 집대성하려면 본인이 일단 학문적 자세를 지켜야한다. 율곡 이전의 성리학은 주기론(主氣論)과 주리론(主理論)으로 나뉜다. 주기론은 서경덕, 기대승 등이 주장했고 주리론은 퇴계 이황이 주장했다. 율곡은 이를 모두 비판하면서 집대성해 이기이원론적일원론을 제창했는데, 이는 실학과도 일부 맞닿아있고 구한말 대한제국 시기 사회개혁론으로 계승된다.퇴계는 이기론에 있어서 기뿐만 아니라 이도 발한다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設)을 주장했다. 율곡은 이발을 인정하지 않고 ‘발하는 것은 기(氣)이며 발하는 까닭이 이(理)’라고 봤다. 율곡은 이와 기는 논리적으로는 구별할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분리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봤다. 모든 사물에 있어 이는 기의 주재(主宰)역할을 하고, 기는 이의 재료가 된다는 점에서 양자를 불리(不離)의 관계에서 파악하고, 하나이며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 이들의 관계를 ‘이기지묘(理氣之妙)’라고 표현했다.결국 율곡의 이기론은 다양한 현상(氣)속에 보편적 원리(理)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율곡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변화하고 제한적인 기(氣局) 속에는 항상 보편적 이(理通)가 존재한다는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을 제시했다. ◇ 주요관직인 청요직(淸要職) 두루 섭렵율곡의 스승에 대해서는 뚜렷한 기록이 없는데, 일부에서는 율곡의 학자적 소양은 어머니 신사임당에게서 모두 나온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율곡이 퇴계 이황(1501~1570)을 만난 것은 23세 때 성주 처가에서 강릉 외가로 가는 도중이었다. 이 때 퇴계는 이미 58세였다. 젊은 율곡과 원숙한 대학자간의 만남은 짧았지만, 율곡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 때의 인연으로 두 사람은 시를 주고받고, 학문에 대해서도 서로 강론하며 후에 편지도 주고받았다. 율곡은 퇴계를 스승처럼 존경했으며, 퇴계는 율곡을 만난 후 여러 사람에게 ‘율곡이야 말로 후생가외(後生可畏 후배들의 약진이 두려울 정도라는 뜻)’라고 칭찬했다.율곡은 29세에 문과와 명경과에 장원급제한 후 호조좌랑으로 벼슬을 시작, 40세까지 예조좌랑, 이조좌랑, 홍문관 교리, 청주목사, 우부승지, 황해도 관찰사, 홍문관 부제학 등을 지냈다. 41세 이후 은퇴와 관직제수를 거듭했는데, 대사헌, 호조판서, 이조판서, 형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1583년 4월 48세에 선조와의 경연석상에서 유명한 10만양병설을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임란예견 화석정 전설은 모두 낭설율곡의 10만양병론에 대해서는 임란을 예언했다는 둥, 율곡이 은퇴한 뒤 선조의 피난길을 위해 정자에 매일 기름을 먹였다가 나중 횃불처럼 사용했다는 말들이 있지만 이는 모두 후세인들이 신격화를 위해 지어낸 낭설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율곡의 10만양병론은 서애 유성룡도 당시 반대를 할 정도로 조정에서는 먹혀들지 않았다. 사실, 당시 조선은 10만은커녕 1만의 병력도 양성할 체계가 갖춰지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더욱이 율곡이 10만 양병을 주장한 때가 병조판서를 지내고 대사헌으로 있을 때였는데, 대부분의 군신들은 병조판서로 있을 때는 침묵하다가 나중에 10만 양병 운운하는 율곡을 호되게 비판하기도 했다.율곡에 대한 또 다른 신화의 하나인 파주 임진강 가에 있는 화석정 역시 사실이 아니다. 율곡은 임금이 북으로 피난 갈 것을 미리 알고, 이 정자에다가 기름을 먹여서 폭우 속에서도 훨훨 잘 타게 해 두었던 것이, 마침내 임진란을 만나 크게 효과를 보았다는 것도낭설이다.그 당시 임금을 모시고 가던 서애 유성룡이 쓴 ‘징비록’은 「…나루를 건너서니 이미 날이 어두워 앞을 분간하기 어렵다. 임진강 남쪽 기슭에 옛 승청(丞廳)이 있는데, 혹시 왜적이 거기 있는 재목을 가지고 뗏목을 매어 건너올까 해서 임금의 명령으로 불을 붙여 태우니 그 불빛이 강 북쪽까지 비쳐 길을 찾아 갈 수가 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선조 수정실록 등 여러 기록에도 똑같은 기사들이 나온다. 지형 상으로도 동파(東坡)로 건너가는 임진강 나루터와 율곡리에 있는 화석정과는 서로 떨어져 있어 상관없는 곳이다.미인박명이라고, 율곡은 만 49세에 숨졌는데 만약 율곡이 10년만 더 살다 갔다면 많은 것들이 바뀌었을 것이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69세까지 산 퇴계의 문하에는 기라성 같은 인재들이 넘쳤지만, 율곡 사후에는 빼어난 인재가 없었던 것도 모두 율곡의 너무 이른 죽음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면죄자작성일
2011-01-03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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