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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남, 북한 초대 내각 라인업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 - 상해임정 초대 대통령부통령 이시영 - 상해임정 재무총장국회의장 신익희 - 상해임정 내무총장 대법원장 김병로 - 항일변호사국무총리 겸 국방장관 이범석 - 광복군 참모장외무장관 장택상 - 일제시대 청구구락부 사건으로 복역내무장관 윤치영 - 일제시대 때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복역 재무장관 김도연 - 2·8독립선언으로 복역법부장관 이인 - 항일변호사문교장관 안호상 - 철학교수농림장관 조봉암 - 좌익이었다가 전향
상공장관 임영신 - 독립운동가, 교육가사회장관 전진한 - 일제시대 노동운동가
교통장관 민희식 - 교통전문가. 체신장관 윤석구 - 교육 사회운동가. 무임소 장관 이청천 - 광복군 총사령관. 무임소장관 이윤영- 독립운동가 조만식의 제자. 국회부의장 김동원 -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복역
국회부의장 김약수 - 좌익계열 독립운동가
대부분이 항일독립운동가들이다. 몇몇은 항일독립운동 경력이 없다 뿐이지 친일파가 아니었고.
그럼 민족의 태양, 백두혈통의 개조(開祖)께서 세운 내각은 어떨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영주 - 북한 부주석, (일제시대 헌병 보조원, 그리고 김일성 동생)장헌근 - 북한 임시 인민위원회 사법부장 (일제시대 중추원 참의)강양욱 - 북한 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 (일제시대 도의원)이승엽 - 남조선 로동당 (친일단체 "대화숙" 출신, 일제 식량수탈기관 "식량영단" 이사)정국은 - 북한 문화선전성 부부상 (일제시대 아사히신문 서울지국 기자)김정제 - 북한 보위성 부상 (일제시대 양주군수)조일명 - 북한 문화선전성 부상 (친일단체 "대화숙" 출신, 학도병 지원유세)홍명희 - 북한 부수상 (일제시대 임전대책협의회 출신)이활 - 북한 인민군 초대공군 사령관 (일제시대 일본군 나고야 항공학교 정예 출신)허민국 - 북한 인민군 9사단장 (일제시대 일본군 나고야 항공학교 정예 출신)강치우 - 북한 인민군 기술 부사단장 (일제시대 일본군 나고야 항공학교 정예 출신)최승희 - 일제시대 친일예술인 총연맹 회원김달삼 - 조선로동당 4.3사건 주동자 (일본군 소위. 시다바리 노릇하던 만주군이 아니라 대일본제국 정규군이다.)박팔양 - 북한 노동신문 창간발기인, 노동신문 편집부장 (친일기관지 만선일보 편집부장, 문화부장)한낙규 - 북한 김일성대학 교수 (일제시대 검찰총장)정준택 - 북한 행정10국 산업국장 (일제시대 광산지배인)한희진 - 북한 임시인민위원회 교통국장 (일제시대 함흥철도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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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통일의 반대 세력은 한국을 떠나주길 바란다
몇몇 분들이 통일의 비용이 천문학적일거라 생각이 들어 통일을 반대하는 입장인 것 같다.
물론 통일 비용은 천문학적일 것이다. 그러나 통일이 안 된다면 우리는 일본과 섬나라로 남게 되는 것은 자명하다.
또한 통일 자체를 생각지 않는다면 중국의 만만디 정신으로 언제가는 북한을 중국의 지방성으로 만드는 노력을
착착 해 나갈 것이다.
지금 동북공정을 하는 이유도 중국은 역사적으로 볼때 만주는 원래 중국땅이 아니었다는 것을
역사를 공부한 지식인은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1950년 쯤에 중국 공산당이 김일성에게 만주가 원래 조선꺼 였으니 줄까 했는데 김일성이 거절했다는 얘기도 있다-
만주를 영원히. 중국땅으로 만들기 위해 일제가 민족말살 정책을 했듯이 만주족을 중국화 시키고 있는 것이다.
고구려 또한 중국 변방이라고 가르치는 것도 이미 북한을 중국의 지방 정권으로
만들기 위한 계획의 하나가 아닌가 심히 우려 스럽다.
우리가 삶을 이어 나가며 일을 하는 것은 행복하기 위함이고, 그 행복을 후손에게 물려 주기 위함이라고 생각한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수천년 외침의 역사속에서도 궂궂이 이나라 이민족을 지키신 위대한 의사,지사,열사, 의병의 뜻을
이어받아 후대에도 이 나라를 대한민국으로 남기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통일 자체가 우리 일이 아니라 남의 얘기이며, 돈이 많이 든다고 나 먹을 것도 없는데 더 가난해지기 싫다고
통일을 반대한다면 이 가난하고, 척박한 한국에 태어난 숙명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더이상 한국에 살지 말기 바라며 능력이 된다면 미국, 유럽등, 안 된다면 동남아 가서 살기를 간곡히 부탁드린다.
어떤 분은 북한의 2천만 동포를 난민이라고 써 났던데. 가난하다고 사람이 사람이 아닌 것은 아니며. 못 배웟다고 사람이 아닌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장애인은 오늘 내일하는 다 죽어가는 병자는 사람이 아닌가? 북한 2천만 동포는 단지 김일성, 김정은으로 이어지는 김씨 일가 욕심으로 인육을 먹는 삶을 이어 나갈 수 밖에 없는 우리의 형재요. 동포이다.
북한이 일본에 사는 조총련들에게 지들이 못사면서 최근까지도 지원을 하여서 지금도 조총련은 북조선 국적을 취득하고 있는 현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일본에 사니까 일본 국민이 되어서 천황의 신민으로 사는게 맞다고 보는가?
또 어떤 분은 구한말의 일본이 우리보다 국력이 앞섰다고 말하는데. 대다수의 역사학자들은 구한말의 국력은 엇비슷하다고 말하고 있다. 한국 역사 학계가 친일적 성격이 강한 서울대 역사학계가 주류라서 그런지 몰라도 구한말 부터 현재까지
역사는 제대로 연구된것이 없다. 우리는 구한말의 조선을 좃이라고 생각할 지 모르나. 우리의 조선은 나약하지도, 비루하지도 않은 나라엿고, 진정한 문화 강국이었다. 그러나 우리끼리 싸우고, 일제의 비열한 방해, 청나라의 방해 등 역사적인 조건과 시기가 구한말의 조선에게는 최악이었다. 물론 군사적인 면에서는 일본이 우리보다 월등히 앞설을 것이다. 그러나 군인이 많고, 무기가 많아서 국력이 앞선다면 북한은 우리보다 백배는 선진국인가? 국력은 군사적, 경제적, 문화적, 민족혼 등 모든 것을 말하는 것이지 비단 군사적인 면만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현실적이지 않은 말은 씨알도 안 먹힌다고 말하는데.. 인간의 수많은 역사가 뜬 구름 잡는 생각과 생각이 모여서
작금의 문명이 탄생한 것이다. 그 예를 들자면 손이 아프고 입만 아플 것이다.
몽고가 원나라를 건설한 것은 현실적인 일인가? 그 당시 그들은 고작 백만의 인구가 채 안 되었다.
고구려가 120만명+수송부대 200만명을 무찌른 일은 현실적인 일인가? 그 당시 고구려 총 인구는 천만이 채 안 되었다.
서희의 강동 6주 획득은 말이나 되는 일이던가?
만주족이 청나라를 일으킨 것은 어떤가? 만주족은 총 백만이 안 된다.
알렉산더의 페르시아 승리는 현실적인가?
정주영 회장이 오백원짜리 거북선으로 배 한번 만든적이 없는 현대중공업의 수주는 어떤가?
한강의 기적은 그야말로 기적 아닌가? 현실성이 하나도 없지 않은가?
일제의 대동아 전쟁으로 동남아 대다수와 중국 절반의 점유는 어떠한가?
베트남에서 1개 중대 한국군이 월맹군 1개 연대를 이긴 일은 허구인가?
나약하고 동물과 다를 것 없는 인간이 달나라를 가고 화성에 가는것은 현실적인가?
100톤이 넘는 기계덩어리가 하늘을 나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밤을 세더라고 끝이 없다고 생각한다.
현실을 인정하고 현실을 개선시키고 노력할때에 우리의 미래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한반도의 통일을 반대하는 자가 있다면 그 생각을 고치길 바라며 그렇게 못 하겠다면
한반도에서는 살지는 말기를 바란다.
죽산 조봉암
우리가 독립운동을 할 때 돈이 준비되어서 한 것도 아니고 가능성이 있어서한 것도 아니다. 옳은일이기에 또 아니하고서는 안 될 일이기에 목숨을 걸고싸웠지 아니하냐- 어록중
덧붙인다. 독립운동을 통일운동으로 고치면~~~??
일제시대때 우리가 힘을 키운후 독립 운동하고자 한 사람들, 일제의 자치속에 우리의 힘을 키우자는 자들 대다수는 친일파였다.
도깨작성일
2013-07-27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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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대한민국 민주화의 과정에서....
대한민국 4,5,6월은 참으로 고단한 역사를 품고 있지 않을까 싶네요..6.25전쟁,4.3제주도사건, 4.19혁명, 5.18광주민주화운동 , 87년6월 민주화운동 그속에서 독재정권과 싸우다 혹은 절망스런 사회현실에 좌절해서.. 혹은 누군가에 끌려가서죽음에 이른 이들이 이렇게나 많네요..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5월 6월입니다..철없는 친구들이 웃으며 민주화 민주화..하는걸 지켜보며 개탄스럽기도 하고요..------------------------------------------------------------------------------------------------1. 1950년대 이승만 정권과 4?19민중혁명19597. 31 조봉암 진보당 사건으로 사형 당함.19604. 11 김주열 시신 발견. 4.19혁명 촉발 2. 1960년대 군사독재 정권기 자본주의의 성장과 전태일 분신196112. 21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 사형 당함19697. 10 통혁당 관련 김종태 사형집행11. 4 소위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 권재혁 사형 당함11. 4 통혁당 사건으로 이문규 사형 당함11. 28 통혁당 사건으로 윤상수 사형 당함19706. 9 4.19 민주화운동 등 사회 운동에 헌신한 이상배 옥고를 치루고 고문후유증으로 운명 11. 13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 근로조건개선 요구 분신자살, 이후 학생들의 민주화투쟁 확대 3. 1970년대 유신체제와 민중운동의 발전19714. 27 3선 개헌에 반대활동하며 국회의원 선거 입후보 선거운동 중 양상석 의문사 당함 5. 17 한영섬유 노동자 김진수, 구사대에게 피습 폭행당하여 치료 중 5월 17일 운명6. 25 김창수, 5월 25일 부정선거관련 조사받으러 연행되어 상경하던 중 김제역 부근에서 죽음을 당함.7. 15 통혁당 사건으로 김질락 사형 당함10. 18. 이강복,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으로 복역중 병으로 대전교도소에서 운명19737. 6. 강무갑, 한글학회에서 활동 투옥. 사회대중당 후보 출마, 1차 인혁당 및 김배영사건으로 투옥. 고문 후유증으로 오랜 투병 중 운명10. 19 서울대 법대 교수 최종길, 중앙정보부에서 참고인으로 조사를 받던 중 간첩 자백 강요를 거부하다 고문치사 당함19744. 4 감옥에서 행해진 사상전향공작 과정에서 최석기 무차별 폭행으로 운명.7. 20 사상전향공작 고문에 항의 전향 강요말라는 혈서를 남기고 박융서 운명19754. 9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 도예종, 여정남, 김용원, 이수병, 하재완, 서도원, 송상진, 우홍선 등 8명이 비상보통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대법원 확정판결이 내려진 뒤 불과 20시간만에 사형집행(민청학련 9명은 무기징역)4. 11 서울대 농대생 김상진, 양심선언 후 할복자살8. 17 민주화와 통일운동에 평생을 바쳤던 장준하 선생, 등산 도중 의문의 죽음을 당함 10. 15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서대문구치소에서 복역하던 장석구 선생 옥사 19764. 1 대구교도소에서 복역 중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단식중 강제급식으로 손윤규 운명11. 14 심오석, 경북대생 유신반대 투쟁 중 기관원에 의해 임의동행된 후 행방불명됨11. 현승효, 경북대생 유신반대 투쟁 중 강제 군 입대 후 의문의 죽음을 당함 19771. 19 동아일보 자유언론실천선언으로 해직 된 조민기 동아투위 활동 중 지병으로 운명19787. 8 청주신학대생 정법영, 노동자들과 투쟁 중 중앙정보부의 극심한 감시와 탄압을 받던 중 죽음을 당함 19796. 14. 인천지역에서 활동하던 노동자 이경심, 헌신적 활동 속에 병이 악화되어 운명.8. 11 YH무역노동자 신민당 점거농성중 노동자 강제 해산과정에서 김경숙 경찰의 폭력적 진압에 맞서다 운명 4. 광주민중항쟁과 신군부 정권의 등장19802. 29 동아일보 자유언론실천선언 후 해고 동아투위 활동중 안종필 간암으로 운명5. 30 서강대생 김의기, 광주의 참상을 알리려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남기고 투신자결 6. 9 노동자 김종태, 노동 3권 보장과 광주학살 관련 전단을 배포하고 분신 자결 7. 11 사회안전법 보호감호 폐지 요구하며 단식중이던 김용성 강제급식 과정에서 죽임 당함7.11 사회안전법 보호감호 폐지 요구하며 단식중이던 변형만 강제급식 과정에서 죽임 당함7. 26 임기윤 목사, 민주화운동을 하다 보안사에 연행되어 의문의 죽음을 당함 19811. 2 서울대 학생운동 참여 군입대 이틀만에 이진래 목멘상태로 의문사 당함5. 27 서울대생 김태훈, “전두환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친 뒤 투신 자결6. 20 전정배, 삼청교육대에 끌려간 후 보호감호생 집단난동 사건 과정에서 총상을 입고 사망9. 1 부산대생 최종철, 부마항쟁에 참가하여 쿠데타 구속된 뒤 후유증으로 사망 11. 22 이재문, 남민전 사건으로 검거된 후 옥중에서 광주학살에 항의단식,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19824. 20 서울대생 노진수, 학생운동을 하던 중 연행된 후 행방불명됨7. 23 연세대생 정성희, 강제징집 된 뒤 보안사의 녹화사업 과정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함 8. 22 진아교통 노동자 문영수 경찰 폭행에 항의 하다 구타로 운명 10. 8 신향식 선생, 남민전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사형집행 10. 12 광주항쟁과 관련 구속 기소된 박관현 전 전남대학생회장, 옥중에서 5·18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단식 운명 19835. 3 성균관대생 이윤성, 강제징집 뒤 보안사의 녹화사업 과정에서 죽음을 당함 6. 18 고려대생 김두황, 강제징집된 뒤 보안사의 녹화사업 과정에서 죽음을 당함 7. 2 한양대생 한영현, 강제징집된 뒤 보안사의 녹화사업 과정에서 죽음을 당함 8. 14 동국대생 최온순, 강제징집된 뒤 보안사의 녹화사업 과정에서 죽음을 당함 11. 16 서울대생 황정하, 도서관 6층 난간에서 시위 중 추락하여 사망 12. 11 서울대생 한희철, 군입대 후 보안사의 녹화사업 과정에서 죽음을 당함 12. 15 시민단체 활동 중 간첩혐의로 조사 받은 정은복 누군가를 만나러 나간 후 행방불명19844. 2 부산 수산대생 허원근, 군복무 중 3발의 총상을 입고 의문의 죽음을 당함 10. 14 박영두, 삼청교육대에서 청송교도소로 이입된 후 고문과 구타를 당해 사망11. 2 연세대생 임용준, 학생운동을 하던 중 군에 입대하였으나 의문의 죽음을 당함11. 30 민경교통 택시운전사 박종만, 노조탄압에 항의 분신자살19851. 16 전남대생 기혁, 독재정권의 교육정책 반대투쟁 중 운명8. 15 건설노동자 홍기일, 전남도청 앞 금남로에서 “8·15를 맞이하는 뜨거움의 무등산이여!”라는 전단을 살포한 후 분신 자결 9. 12. 성대 학생운동 후 인천지역 노동현장 활동하던 정상윤, 해고자들과 수련회 도중 운명9. 17 경원대생 송광영, “학원안정법 반대와 광주학살 책임지고 전두환은 물러가라!”며 분신(10. 21 사망)10. 11 서울대생 우종원, 민추위 사건으로 대공과의 수배를 받아오다 경부선 철로변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해 발견 19863. 10 아산군 영농후계자 회장 오한섭, 무책임한 영농정책에 분개 음독(3.13 사망) 3. 16. 장이기, 예비군훈련 중 군사독재정권과 광주학살에 대해 발언 후 고문당해 사망3. 17 신흥정밀 노동자 박영진,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노동3권 보장하라 며 경찰과 구사대에 맞서 분신 자결4. 28 서울대생 김세진, 전방부대 입소거부 시위 도중 “반전반핵 양키고홈”을 외치며 분신, 5월 5일 운명 4. 28 서울대생 이재호, 전방부대 입소거부 시위 도중 “반전반핵 양키고홈”을 외치며 분신, 5월 26일 운명4. 30 삼환택시 노동자 변형진, 회사측의 부당해고에 항의 분신, 5월 1일 운명5. 7 전재권 선생, 소위 인혁당재건위 사건 복역 후유증으로 운명 5. 20 서울대생 이동수, 문익환 목사의 강연회 도중 “파쇼의 선봉 전두환을 처단하자” 등을 외치며 분신자살5. 21 서울대생 박혜정, 조국의 현실에 분노하며 한강에 투신 자결5. 26 노동자 김상원, 경찰의 불심검문에 항의하다 폭행으로 식물인간이 된 뒤 사망 6. 5 이경환, 청량리 맘모스 호텔 옥상에서 반정부 구호를 외치며 투신 자결6. 11 노동자 신호수, 서울 서부서 대공과에 연행, 6월 19일 의문의 죽음을 당한 채 발견 6. 18 서울대생 김성수, 기관원에 유인되어 실종, 6월 20일 부산 송도 앞바다에서 죽음을 당한 채 발견됨6. 26 강상철, 목포사회운동청년연합 활동 “민주화운동 탄압중지와 5.18진상규명, 직선제 개헌 단행을 촉구하는 양심선언”을 하고 분신11. 5 경성대생 진성일, “건대 농성사건 해명, 독재 타도, 미제 축출” 요구 분신 자결 19871. 3 이순덕, 충청지역의 교육민주화 활동에 앞장서다 운명1. 14 서울대생 박종철,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에 연행돼 조사받던 중 고문으로 운명(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 2. 6. 김문심, 4월 혁명 시 초대 교원노조위원장 지냄. 민주화운동 중 운명 2. 20 서울대생 김용권, 군입대 후 프락치 행위를 강요받다 의문의 죽음을 당함. 2. 20. 서울교대생 박선영, 비민주적 학사운영과 매판세력의 지배를 받는 조국의 현실에 대해 분노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 3. 1 노철승, 수도방위사에 근무하다 의문의 죽음을 당함 3. 3 부산대생 이승삼, 군 입대 후 의문의 죽음을 당함 3. 6 호남대 자퇴 후 노동현장활동하던 표정두, 슐츠 방한을 앞두고 ‘내각제 개헌반대, 장기집권음모분쇄, 광주사태 책임지라’외치며 미대사관 앞에서 분신, 3월 8일 운명3. 19 부산대생 박필호, 육군 입대 후 의문의 죽음을 당함 3. 27 부산대생 장재완, 방위병 근무 중 중요문건이 보안대에 넘겨지자 조직보위 위해 자결 5. 11 박상구, 군의 비리와 비인간적인 행태에 불만을 갖고 있던 중 의문의 죽음을 당함 5. 17 노동자 황보영국, “독재타도, 광주학살 책임지고 전두환은 물러가라”고 외치며 분신, 5월 25일 운명.6. 8 대우중공업 창원공장 노동자 정경식, 노조활동을 하던 중 실종됨. 88년 3월 2일 창원 볼모산에서 시신으로 발견6. 9 이한열, 6·10총궐기를 위한 결의대회 중 직격최루탄에 피습. 7월 5일 운명 6. 15 전남대생 이이동, 군에서 학생시위 옹호발언을 한 뒤 의문의 죽음을 당함 6. 18 태광고무 노동자 이태춘, 대회과정에서 경찰의 과잉진압에 의해 추락 사고.6월24일 운명6. 25 외국어대 학생 이재용, 경찰의 학내침탈 소식을 듣고 피하다 사고로 운명7. 12 채광석, 시인으로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사무국장 활동 중 사고로 운명 8. 1 인천기노련 소속 노동자 김현욱, 이대용, 박용선, 유인식, 물에 빠진 동료를 구하고 운명 8. 22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 평화시위 중 직격 최루탄에 맞아 운명9. 2 조흥택시 노동자 이석구, 노조 활동을 하다 회사측의 노조 탄압에 항의 분신.9월19일 운명.9. 8 서울대생 최우혁, 사회과학서적을 읽다 보안대 적발 뒤 의문의 죽음을 당함10. 16 고려화학 노동조합 사무장 김수배, 회사측의 노조 탄압에 항의 분신 자결 11. 3 노동자 김성애, “산재없는 세상에 살고 싶다”며 산재중앙병원에서 투신 자결 11. 26 박태조, 광주항쟁으로 4년 형을 선고받아 복역 중 81년 특별사면으로 출소 후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12. 4 정연관, 대통령선거 군부재자 투표에서 야당을 찍었다고 부대에서 구타 당해 운명 12. 5 노동자 박응수, “후보단일화하라”고 절규하며 대전역 앞에서 분신 자결 12. 10 목포대생 박태영, “거국중립내각 쟁취하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분신 자결 12. 16 심재환, 서울대 인문대 학생회장 등 학생운동. 인천 삼화실업에서 노조결성 등 노동운동을 하던 중 자신의 자취방에서 의문의 죽음으로 발견19881. 6 우성택시 노동자 이대건, 단체협약 위반에 항의하여 분신, 1월 8일 운명3. 1 인천 경기교통 노동조합위원장 김장수, 부당해고 반대 요구하며 분신, 3월 9일 운명 3. 10 대원전기 노동자 오범근, 파업농성에 대한 구사대 폭력 등에 항의하며 사장실에서 음독자살3. 25 농민운동가 김길호, 87년 부정선거 규탄투쟁 중 경찰에게 집단구타 당해 후유증으로 운명 3. 25 고려대생 유병진, 87년 대선 당시 공정선거 감시단 활동 중 화재에 의한 후유증으로 운명 4. 10 한신대생 곽현정, 86년 건국대 애학투련 항쟁 으로 구속된 뒤 자결 4. 25 고려피혁 노조위원장 최윤범, 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분신, 4월 30일 운명5. 5 유진곤,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옥고 후유증으로 운명5. 9 신영일, 전남민청련 창설과 5·3인천투쟁을 주도하는 등 민주화운동하다 운명5. 13 고정희, 민애청에서 대통령 선거운동을 하다 연행. 정신병원에 강제수용된 뒤 투신 자살5. 15 서울대생 조성만, 명동성당에서 “양심수 즉각석방” 등 구호를 외치며 할복 투신자살5. 18 단국대생 최덕수, “광주를 잊지말자”며 분신, 5월 26일 운명5. 24 순천 현대교통 택시노동자 장용훈, 부당해고와 노조탄압에 항의하여 분신, 5월 30일 사망5. 26 서울대생 안치웅, 대우어패럴 농성 사건으로 1년 복역, 출소 후 학교 마치고 외출하였으나 행방불명됨6. 4 숭실대생 박래전, “군사파쇼 타도하자”라고 외치며 분신, 6월 6일 운명 6. 9 광무택시 노동자 문용섭, 회사비리를 밝히려다 구사대의 폭행에 의해 죽음을 당함 6. 20 성균관대생 우인수, 군입대 후 의문의 사고를 당함. 6월 24일 운명 6. 23 한신대생 박인순, 대학원 원우회 회장으로 학생운동 활동 중 기숙사에서 죽음으로발견됨6. 29 강원 태백탄광 노동자 성완희, 동료의 복직을 요구하며 분신, 7월 8일 운명7. 2 협성계공 노동자 문송면, 15세 어린 나이로 수은중독 되었으나 치료를 받지 못하고 운명 7. 15 세창물산 노조 사무장 송철순, 파업 중 추락, 7월 17일 운명8. 1 박종근, 방위 근무 중 상관의 보약상납 요구 거부한 뒤 의문의 죽음을 당함8. 14 정성규, 청주민청 간부로 활동 중 운명 9. 12 현대엔진 노동자 이상남, 구사대 봉고차에 깔려 중상, 89년 5월 16일 운명 10. 10 부산대생 양영진, 군입대한 뒤 조국통일을 염원하며 투신 자결 11. 6 대원여객 노동자 이문철, 부당 해고에 항의하여 분신 자결 11. 14 금성사 노동자 배중손, 노조 민주화와 임금 인상 투쟁에 앞장서다 의문의 죽음을 당함 19892. 4 함석헌 선생, 평생을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다 운명2. 18 철거민 정상율, 돈암동 세입자 대책위 활동하다 가옥주의 칼에 찔려 운명3. 31 경희대생으로 야학활동 등 참여, 모임 후 귀가 중 의식불명 상태로 발견 운명 4. 3 덕진양행 노조위원장 김윤기, 국민대를 다니다 노동운동에 투신, 공장 이전 항의 파업중 분신 자결4. 7 서울교대생 남태현, 조국의 “자주·민주·통일을 위해 교대인이여 깨어나라”며 분신, 4월 8일 운명 4. 9 노동자 최완용, 인천 흥업사 근무 중 산재를 당하고 치료를 거부당한 뒤 분신 자결5. 3 국가보안법으로 수배중이던 조선대생 이철규, 불심검문 받고 도주 후 행방불명, 5월 10일 의문사 당한 채 발견.5. 4 노동자 김종수, 무노동 무임금 철폐, 민주노조 사수 외치며 분신 자결5. 24 노동운동가 조정식, 반제동맹사건으로 복역 후 영전기계에 입사하여 노동운동하다 불의의 사고로 운명 5. 29 대우조선 노동자 박진석, 회사측의 노조 탄압에 항의 분신, 6월 4일 운명 5. 29 대우조선 노동자 이상모, 박진석 동지 분신 후 민주노조 사수를 외치며 분신 자결 7. 3 기아자동차 노조 대의원 이종대, 해고반대 투쟁과정에서 분신, 7월 17일 운명 8. 2 남성흥진 노동자 최성조, 파업 중 구사대 폭력으로 실신, 8월 5일 운명 8. 15 중앙대 안성캠퍼스 총학생회장 이내창, 안기부 기관원에 의해 거문도로 유인된 후 거문도에서 의문의 죽임을 당함9. 2 노동자 김병구, 제13대 대선과 총선 부정을 폭로하며 자결 9. 4 경동산업 노동자 강현중·김종하, 회사의 부당징계 조치에 항의 분신(강현중 9. 9 운명, 김종하 9. 15 운명)10. 16 노점상 이재식, 노태우정권의 무자비한 노점상 철거에 항의하여 분신, 12월 11일 운명 10. 29 인천 협신사 노동자 이재호, 노동조합 재건 활동을 하던 중 의문의 죽음을 당함11. 30 임태남, 광주항쟁으로 징역 6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특별사면으로 출소 후 대광교통에서 노조활동을 하던 중 죽음을 당함.19902. 19 배주영, 봉화여고 선생님으로 참교육을 위해 헌신하다 운명 3. 28 동우전문대 총학생회장 김용갑, 학원자주화 투쟁을 하다 의문의 죽음을 당함4. 4 노동운동가 강민호, 한신대를 다니다 노동운동에 투신 활동 중 불의의 사고로 운명 5. 3 통일중공업 노동자 이영일, 경찰과 회사측의 지속적인 탄압에 항의 분신 자결5. 17 철거민 이원기, 철거투쟁 중 “무책임한 철거를 막아달라”며 목매 자결5. 18 대유공전생 신장호, 전대협 출범식 참가 중 경찰의 불심검문을 피하다 사망 5. 24 박성은, 군대 내 비인간적인 행태를 고발하는 문건 작성 뒤 의문의 죽음을 당함 6. 4 한일고생 정성묵, 교육방법의 개선을 요구하는 유서를 남기고 음독 자결 6. 5 경화여고생 김수경, 전교조 가입교사에 대한 징계반대 활동을 하다 투신 자결 6. 6 복학생협의회 활동을 통해 학생운동에 헌신하던 김학수 집회 참여 후 후유증으로 운명7. 14 경북 청도 노동자 최태욱, 부당한 해고에 항의하여 분신 자결 7. 14 전두환 물러가라 외침 정신이상으로 몰려 김진홍 의병제대. 사찰 관리 중 의문사8. 7 노동운동가 최 동, “미제와 적들의 탄압을 고발한다”는 유서를 남기고 분신 자결 8. 30 금강공업 노조부위원장 박성호, 후생복지부장 원태조, 공권력 투입에 반대하며 분신, 박성호 9월 11일 사망, 원태조 9월 18일 사망 9. 12 오원석, 교육민주화활동에 헌신하다 운명 9. 8 충주고생 심광보, “전교조여, 참교육의 함성을!” 등의 유서를 남기고 분신 자결 9. 15 서원대생 김기훈, 총학생회 등 헌신적 활동으로 몸을 돌보지 못하다 병악화로 사망11. 8 한양대생 최응현, 민주화투쟁에 제대로 복무하지 못함을 자책하여 투신 자결 12. 6 김병곤,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출소 후 민주화운동에 헌신하다 운명 12. 12 전태일 평전 의 저자인 인권운동가 조영래, 민변 창립 등 활발한 운동을 하다 운명 12. 17 자민투활동. 옥중 처우개선을 위해 단식. 출소 후 사회운동 중 박인기 운명19911. 5 원진레이온 노동자 김봉환, 아황산가스에 산재치료 받지 못하고 사망2. 3 한국외국어대생 남현진, 군대에서 통일과 외세 문제에 대해 얘기한 뒤 죽음을 당함 2. 20 서울대생 송종호, 군 입대 후 의문의 죽음을 당함 2. 22 김공림, 서울대 재학 후 노동운동. 성동지역 동부노동상담소 활동 중 위암으로 운명3. 9 신용길, 구덕교 교사로 참교육을 위해 헌신하다 운명 4. 26 명지대생 강경대, 백골단에게 쇠파이프로 집단 구타를 당해 운명4. 27 김영환, 한겨레 사회연구소 연구원으로 활동하던 중 자취방에서 변사체로 발견 4. 28 분단희생자 김광길. 교도소 생활 중 얻은 간암으로 함평군 산골에서 운명 4. 29 전남대생 박승희, “노태우정권 타도하고 미국놈들 몰아내자”라고 외치며 분신, 5월19일 운명5. 1 안동대생 김영균, “노태우정권 타도, 공안통치 분쇄”를 외치며 분신, 5월2일 운명 5. 3 경원대생 천세용, “노태우 정권 타도”를 외치며 분신 운명5. 4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박창수, 구속 수감 중 의문의 상처를 입고 병원에 입원, 치료 중 5월 6일 의문사 당함 5. 8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 서강대 옥상에서 분신사망5. 10 성남피혁 노동자 윤용하, 노태우정권 타도, 노동해방을 외치며 분신(5.12 사망)5. 18 이정순, 연세대 정문앞 철교에서 “공안통치 종식, 노태우 퇴진”을 외치며 분신 자결5. 22 정상순, 전남대 병원 영안실에서 “노태우 물러가라” 며 분신, 5월 29일 운명 5. 25 성균관대생 김귀정, 경찰의 무차별적인 진압작전에 짓밟혀 살해당함 6. 1 보성고생 김철수, “노태우정권 퇴진”을 외치며 분신 자결 6. 8 인천 삼미기공 노동자 이진희, 노조 집행부의 어용성에 항의하여 분신, 6월 15일 운명6. 15 인천 공성교통 노동자 석광수, 차량시위 도중 지도부 연행에 항의 분신, 6월 24일 운명 6. 27 노동운동가 유재관, 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에서 활동 중 경찰의 침탈소식을 듣고 피하다 운명 8. 3 신구전문대 총학생회 간부 고재욱, 수련회 중 익사로 운명8. 3 류정하, 신구전문대 총학생회 간부로 수련회 중 익사로 운명 8. 18 대구대생 손석용, 입대 후 민족을 향해 총을 겨누는 것에 고민하다 분신, 8월 19일 운명8. 22 합동물산 노동조합 위원장 김처칠, 언론에 호소 하며 파업 중 한강에 투신 운명 11. 7 양용찬, 서귀포 나라사랑청년회 회원으로 제주도개발특별법 저지 요구하며 분신 자결11. 21 30년 복역 고문과 감옥생활로 인한 병으로 최인정 운명12. 6 대봉 노동자 권미경, 미싱공으로 근무하던 중 노동통제 강화에 항의 투신 자결12. 10 창원대생 탁은주, 참교육연구회 회장 역임 등 민주화운동에 적극 참가하다 행방불명된 후 의문사 당한 채 발견19921. 18 통일운동가 24년 옥고 치른 후 출소 지병 악화로 박판수 운명1. 21 현대자동차 노동자 서영호, 노동조합 활동 중 경찰 침투대비 저지선 순찰을 하다 사고당한 후 93. 7. 1.사망 2. 15 원진레이온 노동자 강희수, 산재 치료를 거부당한 뒤 운명3. 11 노동운동가 박복실, 전북지역에서 노동운동을 하다 사망3. 21 최성묵, 부산민주화운동의 지주로서 헌신적 활동을 하다 지병으로 운명4. 12 숭실대생 이상렬, 야간강좌 부총학생회장으로 과로로 운명 4. 24 국민대생 정도준, 부대 야외 훈련기간 중 부대내부에서 의문사 함.4. 28 숭실대생 박현민, 총학생회 집행부로 활동하다 등록금 투쟁 중 과로로 운명5. 30 김기옥, 인천 영진운수노조 활동 총파업으로 구속, 해고. 복직 후 활동 중 폭행으로 운명 8. 29 한신대생 박태순, 부천에서 노동운동, 기무사의 추적을 받던 중 구로역 인근에서 행방불명된 후 시흥 전철역 부근에서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9. 11 오원진, 충남지역 청년운동을 선도하다 운명 10. 10 윤재영, 충남대 총학생회장으로 활동한 뒤 노동운동, 청년운동에 헌신하다 병으로 운명11. 2 전남대생 문승필, 학생운동을 하던 중 경찰의 협박 전화를 받아오다 철로변에서 의문사한채 발견.11. 3 철거민 김선호, 부산 장리동 철거반대 투쟁 중 용역깡패의 집단폭행으로 운명. 11. 4 임희진, 전교조 분회결성 주도로 해직된 뒤 참교육을 위해 헌신하다 운명 12. 13 최성근, 전교조 대의원 사립지회 활동 중 지병으로 운명12. 22 이광웅, 전교조 가입으로 해직된 이후에도 참교육을 위해 헌신하다 운명 2. 김영삼 정권19931. 14 권두영,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안기부에 연행되어 구속, 수감 재판을 받던 중 구치소에서 목매 자살1. 20 황인철, 인권변호사로 민주주의와 인권을 옹호해오다 운명1. 25 삼미특수강 노동자 정운갑, 노조집행부 활동 중 운명 2. 20 인천 남일금속 노동자 채희돈, 노동조합 활동 중 과로로 운명3. 12 지학순, 천주교원주교구 신부님으로 독재에 항거 민주화운동에 헌신하다 운명4. 14 정영상, 교사로 해직된 후 안동지역에서 전교조 활동을 하다 운명 5. 13 정영부, 89년 해직당한 이후 참교육 실현을 위해 활동하다 운명 5. 19 한양합판 해고노동자 조경천, 복직투쟁을 전개하다 운명 5. 21 원진레이온 노동자 고정자, 산재판정 받았으나 치료받지 못해 자결 6. 26 박미경, 전교조 활동으로 해직된 후 교육민주화를 위해 애쓰다 운명8. 8 노동운동가 김주리, 이화여대 졸업 후 노동현장에서 헌신하다 화재로 운명 8. 15 성순희, 전교조 교사가족회 등에서 활동하다 수배생활 과정에서 운명 9. 8 광주교대생 이경동, “주한미군 철수와 김영삼정권 반대” 등을 요구하며 분신, 9월 9일 운명 9. 9 노동운동가 임혜란, 인천 지역에서 노동운동을 하다 운명 9. 11 농민운동가 김영자, 자주·자립적 농업의 건설과 진정한 농민해방을 염원하다 운명 9. 26 전교조 결성 참여 후 해직되어 활동하던 길옥화, 전교조 탈퇴를 전제로 한 복직에 항의 자결10. 26 노동운동가 최웅, 경동산업 해고노동자로 노동운동에 헌신하다 불의의 사고로 운명 11. 10 광주교대생 한상용, 교대교육 정상화를 위한 투쟁 중 분신 자결 12. 27 과학기술원 유전공학연구소 노조위원장 박성호, 노조 활동 중 교통사고로 운명 19941. 18 문익환 목사, 평생을 나라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헌신하다 운명1. 24 김성윤, 상호운수노동조합 활동 중 “김영삼 대통령에게 드리는 탄원서” 작성 후 자결1. 26 이오순, 송광영 동지의 어머니로 이땅의 민주주의와 통일을 위해 헌신하다 운명 1. 27 전북산업대생 이창환, 농활 중 불의의 사고로 운명 2. 1 농민운동가 김순복·손구용, 농민대회에 참여 도중 사고로 운명 2. 13 김남주, 남민전 사건으로 석방된 뒤 투병중 운명 2. 19 노동운동가 김상옥, 노동운동에 헌신하다 운명 3. 11 성호여객 노동자 최성묵, 회사측의 부당 노동행위에 항거 분신 자결 4. 17 한국통신 노동자 김낙성, 노동조합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다 운명 5. 2 숭실대생 신건수, 가톨릭학생회 활동을 하던 중 불의의 사고로 운명 8. 12 청년운동가 이범영, 민주화운동, 통일운동에 헌신하다 운명9. 18 통일중공업 노동자 임종호, 구속된 이후 독방생활로 인한 정신질환으로 운명 19952. 24 분단 희생자, 윤기남 29년 복역 후 출소하여 통일을 염원하다 운명3. 8 노점상 최정환, 중증장애인으로 정권의 반민중적 빈민정책에 항의 분신, 3월 21일 운명 3. 17 경기대생 오원택, 사학비리 학교당국에 대항하다 군 입대 후 운명 5. 12 현대자동차 노동자 양봉수, “나는 3만 조합원을 사랑합니다”라고 절규하며 분신, 6월 13일 운명 6. 3 농산물 수입개방 반대, 수세거부투쟁 등 기독농민회 활동 중 운명 6. 21 대우조선 노동자 박삼훈, “노동자들이 단결하여 승리하자”며 분신 자결 7. 3 이민호, 서울인쇄노조 쟁의부장 등 노동운동을 하던 중 삼영화학 청주공장에서 사고로 운명8. 16 박현채, 민중경제학자로 군사독재의 온갖 탄압에도 굴하지 않으며 민주화운동에 앞장서다 운명 9. 4 철도 노동자 서전근, 철도민주화 투쟁 중 오지로 전출에 항의 분신 자결 9. 30 동래여전 졸업후 부산지역 전문대 운동의 일꾼으로 헌신하던, 육지희 지병으로 운명11. 25 노점상 이덕인, 장애인으로 노점 단속 중단 골리앗 농성 중 실종된 후 11월 28일 아암도 앞바다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채 발견 12. 14 경원대생 장현구, 파행적 학원운영 중지 요구하며 분신 자결 12. 15 대우정밀 병역특례해고노동자 조수원, 병특문제 해결을 요구하며 민주당사 농성 중 자결 19961. 13 한일병원 노조 위원장 김시자, 부당징계 철회와 어용노조 퇴진 요구 분신 자결2. 5 철거민 신연숙, 수지2 택지개발사업지구 철거 과정에서 철거깡패들의 골리앗에 자행된 방화로 운명 3. 23 한국통신 제주고산전화국 노조지부장 김왕찬, 노조민주화에 앞장서다 운명 3. 29 연세대생 노수석, 경찰의 토끼몰이식 시위진압으로 살해됨 4. 6 경원대생 진철원, 학원 자주화투쟁 과정에서 분신 자결 4. 7 성신여대생 권희정, 학원 자주화 단식투쟁 후유증으로 운명 4. 16 성균관대생 황혜인, “김영삼 정권 타도”를 외치며 분신 자결4. 18 문한영 통일운동에 힘쓰다 운명4. 19 여수수산대생 오영권, “김영삼 타도, 미제축출 조국통일 만세”를 외치고 자결 5. 2 노동운동가 유구영,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살다 운명 5. 6 대구공전생 박동학, 학생자치권 보장을 요구하던 중 학생과 사무실에서 분신, 5월 8일 운명 6. 6 연세대생 정인택 대통령 선거 공명선거 감시단 활동 후 귀가중 의문사6. 18 한국통신 노동자 오용철, 개봉전화국에서 민주노조 활동으로 구속되었다 석방된 뒤 운명 9. 9 영남대생 김하영, 96년 7차 범민족대회 참가 중 지병으로 운명9. 18 경원대생 이상희 집회 중 경찰 연행 후 정신질환을 앓다 자결10. 3 노동운동가 김말룡,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해 초지일관 싸우다 운명11. 10 박문곤, 노동법 개정투쟁과 전교조 합법화 노동자 대회 참석 후 불의의 사고로 운명 12. 26 ‘녹슬은 해방구’작가 권운상, 유신철폐, 미스유니버스대회장 폭파음모사건 구속 등 민주화운동 참여 후 병으로 운명19972. 10 용인대생 한상근, 학교당국의 일방적인 학사운영에 항의하며 분신, 2월 13일 운명 2. 2 그림으로 위안부에 대한 일본 제국주의 만행을 폭로 한 강덕경 일본의 사죄를 요구하며 활동 중 지병으로 운명2. 15 철거민 민병일, 구갈 철거민 대책위원회 활동 중 경찰의 집단폭행으로 운명 2. 25 농민운동에 투신하여 영광군농민회 활동하던 지용진, 모임 후 귀가 중 교통사고로 운명3. 18 22년 수감 생활 후 병 악화로 권양섭 운명3. 20 조선대생 류재을, 시위 도중 경찰의 강경진압에 의해 운명 4. 2 통일운동가 옥고 휴유증으로 고생하다 패혈증으로 진태윤 운명5. 31 국민캡 노동자 홍장길, 노동조합 활동을 하다 회사 분할매각에 항거 음독 7. 25 철거민 박순덕, 서울 전농3동 철탑망루 농성에서 철거깡패들의 방화에 의해 운명 9. 16 광주대생 김준배, 한총련 투쟁국장으로 수배 중 보안수사대의 프락치 활동을 통한 과잉 검거 과정에서 운명 9. 21 군산대생 이형관, 전국대학생기자연합에서 대학언론운동을 하다 과로로 운명 12. 16 위안부 피해 처음 고발했던 김학순, 공개증언으로 문제해결운동에 참여 지병으로 운명 3. 김대중 정권19981. 7 대전지역 학생운동, 민주청년회 활동 중 강연석 교통사고로 운명1. 21 범민족대회 참가 중 백혈병 증세 발견 투병생활 하던 최신애 운명 2. 13 대우조선 노동자 최대림, “정리해고, 근로자 파견법 입법화 반대”를 요구하며 분신 자결 2. 24 노동운동가 최명아, 민주노총 조직1부장으로 활동하던 중 과로로 운명5. 9 신길수, 동아엔지니어링 노조위원장 공익노련 부위원장을 역임하는 등 노동운동에 헌신하다 운명6. 13 범민련 부의장 등 평생 조국통일운동에 헌신하던 주명순 운명7. 19 구로지역에서 미조직 노동자 조직 현장활동하던 양순녀, 철원 통일수련회 도중 사고로 운명8. 4 사월혁명에 경북학생운동 대표로 참여했던 정만진 사월 혁명회 활동 중 운명 12. 7 경희대 학생운동 참여 학림사건으로 내사 고문후유증으로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던 이길상 투신12. 28 조현식, 경기도 광주지역 건설일용노동조합 위원장으로 사무실에서 화재 발생으로 운명19991. 30 정성범, 민주노총 충남서부지역 조사통계부장으로 활동 중 운명3. 14 계훈제,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상임고문 등 평생을 민주화운동과 조국통일을 위해 헌신하다 운명3. 31 김윤수, 대림자동차 노조활동 중 국가보안법으로 구속 출소 후 해고복직 투쟁 중 운명5. 17 배동복, 영창악기 풍물패 ‘어울림’ 창단, 불의의 사고로 운명5. 28 4월혁명에 서울지역 대학생연맹 활동을 통해 참여했던 심재택 사월혁명회 활동 중 운명6. 22 이상관, 창원 대우중공업 입사 근무중 산재당함, 근로복지공단에 의해 강제 퇴원 조치후 자결7. 10 윤창녕, 1급 장애인이라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대전역 지하상가에서 어려운 노점생활을 하다가 구청의 노점상 단속에 항의해 분신7. 23 장애인 인권 및 생존권 증진을 위한 활동 중 박흥수 지병으로 운명8. 24 최경철, 현대자동차 조직부장으로 임단투 승리를 위한 노조신문 차량배포 중 사고로 운명8. 25 스타TX의 박용순 동지 “사납금제 및 업무상 사고처리비 노동자 부담 철폐”를 외치며 분신 사망 8. 27 김종배, 공공연맹 정책국장·대외협력국장·교육국장 역임, 불의의 사고로 운명12. 11 해방 후 청진교원대학 지리학 교수를 역임한 최남규, 57년 구속되어 29년 투옥 후 통일을 염원하다 운명12. 14 군포 대우중공업노조 위원장 및 경기 지역 진보운동에 참여 하던 임동국, 위암으로 운명20001. 26 범민련 부의장 김양무 선생님, 직장암으로 투병 중 운명 2. 29 노동자 정치세력화 및 안산지역에서 활동하던 김명한 운명6. 20 조직사건에 연루되어 구속 수감이 되풀이하던 김현순, 고문과 오랜 옥고 후유증으로 운명8. 12 재능교육교사노조 활동 하던 유희수, 적극참여 중 수련회에서 익사사고로 운명 8. 26 사회보험노조의 최진욱 동지 공안탄압분쇄를 위한 민주노총 집회 참석 중 고압전류에 감전되어 운명 20012. 23 이옥순, 70년대 원풍모방 노동운동 통일을 여는 여성모임 ‘금강초롱’ 전국연합 대외협력위원장으로 활동하다 폐암으로 운명3. 해방전후 지역 청년동맹 활동, 25년 복역 후 대전지역 진보운동에 참여하던 안상운 중풍으로 운명4. 23 전농 경남도연맹 정책실장 등 농민운동으로 헌신한 김성원 운명5. 16 한승훈 한국통신 계약직 노조517일 투쟁 참여 후 과로로 운명5. 18 안산지역 노동자 김순조. 노동자통일운동 참여, 창흥정밀노조 사무장으로 임단협을 준비하다 불의의 사고로 운명7. 19 예덕실고 음악교사 전교조 활동으로 구속 파면 복직, 활동중 남광균 암으로 운명9. 5 전국건설운송노조 사무처장 안동근, 레미콘노동자 상경투쟁 조직 등 과로로 인한 병으로 투병하다 운명9. 12 경성대 재학 후 노동현장 활동 하던 강희완, 화물연맹 부두노동자들의 민주 노조의 틀을 잡기위해 노력하다 운명11. 14 이동현, 공무원노동조합 건설과 노동3권 쟁취를 위한 활동중 과로누적 등의 원인으로 운명20021. 18 여주지역에서 민중정치 활동하던 김남준, 민예총 여주지부 사무국장, 이천노동상담소 활동 중 운명3. 3 서울장애인연맹 정태수, ‘제1기 장애인청년학교’ 수료식 도중 과로로 운명3. 8 이천전기 노동자 유순조 세차례 옥고 치루고 IMF시 정리해고 반대투쟁 등 노동운동 중 대장암으로 운명3. 21 금강회 사건으로 제적 공주지역 사회운동 중 최연진 위암으로 운명3. 26 최옥란, ‘장애인이동권쟁취를위한연대회의’ 등 활동 중 심장마비로 운명4. 2 대우중공업노동자 김기욱, 인천지역 노동문화운동에 전념하던 중 간암으로 운명5. 21 부천시협 의장 한경석, 노동운동에 헌신하다 백혈병으로 운명7. 8 참교육 실현을 위해 활동하던 김종삼, 전교조 부산지역 활동 중 운명8. 3 민청학련사건 구속 대전지역 민주화운동에 앞장서다 강구철 간암으로 운명8. 23 박봉규, 노점상연합 활동중 노점생존권탄압에 항의하며 구청장실에서 분신, 9월6일 운명8. 25 문재룡, 범민련서울시연합 부의장 등 평생을 조국의 통일을 위해 헌신하다 폐암으로 운명11. 22 인천지역택시노동자 천덕명, 택시제도개선 파업 참여로, 사측의 집중탄압을 받던 중 월급제 사수와 인간다운 삶을 외치며 분신 운명 4. 노무현 정권20031. 9 배달호, 두산중공업의 부당해고와 징계에 맞서 투쟁하며 노조탄압에 대한 울분이 담긴 유서를 남긴 채 분신 운명1. 25 임영덕, 진해시 공무원 직장협의회 초대지부장으로 취임해 02년 11월 연가투쟁을 벌이다 건강악화로 운명1. 28 이성경, 87년 섬유노동운동 시작, 전국노운협 사무국장 등 활동하다 대장암 투병중 운명2. 11 고문피해자 강남근, 삼선개헌 반대투쟁과 야당 지지등으로 간첩으로 몰려 고문후유증으로 고통받다 운명2. 22 경기서부건설노조 및 안산지역 문예운동 참여한 권오복 교통사고로 운명4. 12 최전권, 전북도청에서 5.18 진상규명.군사독재 반대를 외치며 할복자살 기도 후유증으로 고통 받다 운명 4. 13 강희철, 전국연합 정치위원장 등 노동운동과 통일운동을 위해 헌신하다 뇌출혈로 운명4. 19 이성도, 민주노총 조직강화위원장 등 헌신적 활동 중 불의의 사고로 운명4. 28 화물연대 노동자 박상준, 파업투쟁 중 “화물연대투쟁 반드시 승리하라”는 말을 남기고 음독자살5. 7 최복남, 화물연대 부산지부 김해지회장 역임, 파업투쟁 중 선전전을 벌이다 교통사고로 운명5. 15 김정훈, 97년 한총련 기획국장 활동 전국연합 정보통신부장, ‘사람들넷’ 사무국장으로 활동하다 투병 중 운명6. 4 공무원노조 서울지역 김병진, 공직사회 개혁과 공무원 노동3권 쟁취를 위해 불철주야 투쟁하다 지병으로 운명8. 4 국민에게 기여하는 올바른 국민연금 관리가 되기를 바라며 송석찬 자결 8. 26 02. 8. 16일 노사교섭 결렬 후 파업기간중 회사의 구사대에 의해 두개골 함몰되었던 세원테크 노동자 이현중 운명 9. 2 카톨릭 신부로 평생을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김승훈 신부 운명9. 8 카톨릭학생회 활동을 거쳐 부산지하철 노조 현장활동 한던 최종만 운명 9. 10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며 자주농업을 사수를 주장하며 농민 이경해 자결10. 17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김주익, 크레인 고공 농성 129일째, 한진중공업 파업 88일째 35미터 크레인 위에서 정부와 사측의 노동탄압을 규탄하는 유서를 남기고 밧줄에 목을 매 자결10. 23 세원테크 노조위원장 이해남, 고 이현중 열사 투쟁 관련하여 업무방해, 명예훼손, 집시법 위반 혐의로 수배 투쟁중 분신, 11월 17일 운명10. 26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노동조합 광주본부장 이용석, 전국비정규직노동자대회에서 “비정규직철폐”를 외치며 분신, 10월 31일 운명10. 27 30년 복역 출소 후 통일운동에 헌신하다 장광명 운명10. 29 공무원노조 전남지역 활동한던 최주홍 공직사회 개혁을 위한 공무원노조활동에 헌신적 하다 간암으로 운명.10. 30 한진중공업 노동자 곽재규, 김주익 열사 투쟁 중 도크에 투신 자살11. 20 미군 장갑차여중생고신효순심미선살인사건범대위 상황부실장 제종철, 의정부일반노조 활동 중 의정부 철로에서 열차사고로 운명12. 7 전방입소반대 등 학생운동에 참여하였던 성기득, 교육현장의 민주화를 요구하며 자결20041. 4 권종대, 전국농민회총연맹 초대의장 활동, 전국연합 통일연대 고문 및 지도위원으로 활동, 암으로 투병하다 운명2. 13 의료보험노조 서울본부 사무국장 등 역임하였던 박동진 수배생활 중 암진단, 병원치료가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운명2. 14 민교협 공동의장 민중중심의 사회이론정립에 전념하던 김진균, 후진양성과 진보 사회단체 활동 중 직장암으로 운명2. 14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노동자 박일수, 하청노동자 처우개선 및 근로조건 개선 투쟁 중 “비정규직차별철폐” 을 외치며 분신2. 21 전북지역 농촌운동 투신한 김윤 전국여성농민회 활동 중 심장병으로 운명 4. 1 정순덕, 50년 9월 23년간 옥고를 치루고 1985년 8월 출소. 2차 송환을 애타게 기다리시다 심장마비로 운명5. 26 민주버스노조 장흥교통 노동자 정상국, 임금체불과 장흥교통 비리 진상규명 촉구투쟁 관련 징계에 항의 자결5. 28 전국여성노조 및 부산지역 사회운동에 참여했던 이경희 운명6. 8 강지연, 민중병원에서 노동운동 시작하여, 구로지역에서 문화 및 통일운동을 하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운명8. 3 이영기, 대구지역 청년운동, 민중연대 활동을 통해 통일운동과 현안투쟁에 앞장서 던 중 간암으로 운명9. 3 마산 창원지역운동 및 여성운동에 헌신하던 이경숙 운명 11. 15 종교인 조용술 목사, 오랜기간 민주화운동에 헌신하다 운명12. 21 4월 혁명 당시 경북대학생으로 참가 했던 이재형. 사월혁명회 활동 중 운명12. 27 코리아타코마 김춘봉, 희망퇴직당한 후 촉탁 비정규직으로 근무하다 비정규직 철폐 유서를 남기고 목맴12. 30 민주노총 서울본부 조직국장 박상윤 미조직,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조직하던 중 자결20051. 7 김남식, 해방 후 진보진영에서 자주적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운동에 적극 참여 현대사와 통일 관련 연구활동을 통해 많은 자료를 수집하고 저서를 남김2. 10 정종태, 한양대 구학련 활동 99년 재능교육에 입사 쟁의부장을 맡아 비정규직 특수고용노동자들의 노동운동에 앞장서다 위암으로 운명3. 5 신창균, 3.1운동 참가 등 독립운동. 48년 단독정부 수립을 저지하기 위해 평양을 방문 이후 진보당사건으로 투옥. 평생을 반독재와 통일운동의 길을 걷던 중 운명4. 1 류낙진, 통혁당 사건으로 구속되어 무기징역 선고 19년간 옥고를 치루고 94년 구국전위 사건으로 재검거. 99년 광복절에 가석방된 후 건강악화로 운명 4. 29. 엄성준 숭실대 학생운동 참여 농민운동에 투신 진천군농민회 활동 중 농활학생들과 답사중 교통사고로 운명6. 14. 한국노총충주지부장 김태환, 특수고용노동자들의 권리증진을 위해 헌신하던 중 레미콘노조 파업 지원투쟁에 참여 경찰 공권력에 의한 사고로 운명9. 3. 현대자동차 하청노동자 류기혁, 비정규직노조 활동 중 사측의 탄압에 항의 목메 자결9. 10. 화물연대부산지부 조합원 김동윤, 화물운송 제도 개선을 요구하며 분신 운명9. 21 김병권, 1921년 대구에서 태어나 30대 후반부터 50여년 동안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헌신하다 운명11. 11. 농민 정용품 농민의 날 무책임한 살농정책과 정치권의 무책임한 농정을 규탄하며 자결 함.11. 17. 경북성주농민회 문화부장 오추옥, 쌀개방을 반대하며 음독 자결 함.11. 24. 전용철 11월 15일 여의도 '쌀 비준협상 무효 농민대회' 과정에서 경찰폭력에 의해 죽음을 당함. 12. 18. 홍덕표 11월 15일 여의도 '쌀 비준협상 무효 농민대회' 과정에서 경찰폭력에 의해 죽음을 당함.12. 3선개헌 반대로 고문 당한 이기택, 후유증을 안고 전민상련과 민주화운동 명예회복 활동 중 운명20062. 9. 민주노총 전북본부 부위원장 역임한 조문익, 비정규직 조직활동 헌신. 지역공동체 활동을 준비하다 교통사고로 운명 5. 11 시인 박영근, 인천 5.3 운동 참여, 작가회의 및 민예총 활동 중 병으로 운명 7. 19. 울산건설플랜트노조 활동 농성중 주민칠, 투신한 여성을 태화강에 뛰어들어 구한 뒤 급한 물살에 휘말려 운명.8. 1. 포항건설플랜트노조 조합원 하중근, 파업투쟁 집회 중 경찰 폭력에 의해 운명.8. 19. 청구성심병원 위원장 이정미 만삭의 몸으로 노동법 개악투쟁 참여, 병원노동자들의 투쟁에 항상 함께 하던 중 위암으로 운명.8. 31. 부산민청활동 한청 지도위원과 6.15 남측위원회부산본부 집행위원장 역임한 박장홍, 민중연대 정책연구원 준비기획단 활동 중 과로로 운명9. 1 남문수, 현대자동차노조 대의원 활동. 사측의 부당 노무관리에 항의 자결 9. 6. 영천군 농민 이주영, 경북대 졸업후 농민운동에 헌신 영천군농민회 사무국장 등 역임하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운명 11. 30 전교조 인천 교사신문, 중등남부지회 활동하던 김형선, 교통사고로 운명20071. 23 인천지역 택시노조 파업에 앞장서 참여 했던 전응재,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분신 항거 2. 20 시인 조영관, 노동문학 활동 중 간암으로 운명 3. 26 김미영, 전국여성노조 인천지부 부위원장 비정규직 여성노동자 조직 활동 모임 중 운명4. 15 허세욱, 택시노동자로 온몸으로 아는만큼 실천하다 한미 FTA 협상에 반대하며 분신 운명 5. 12 강제전향 공작을 받고, 가석방 출옥 후 울산지역운동 활동하던 김재헌, 운명 6. 22 김주연, 양산지역 농민회 활동. FTA 총궐기 대회 차량선전전 진행 중 운명 7. 22 반공법 위반으로 옥고를 치루고 통일운동에 헌신하던 최상원, 범민련 활동 중 건강 악화로 운명 9. 9 박정희 독재정권에 항거하며 민족문학 작가로 활동하던 표문태 운명 10. 11 고양시에서 노점상을 하던 이근재, 폭력적인 노점 단속에 항의 민중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자결 10. 23 진주 신일교통 버스 노동자 정태봉, 체불임금, 자주관리기업 쟁취투쟁과정 중 자결 10. 27 전기원 노조 노동자 정해진, 파업과정에서 건설노동자들의 인간다운 삶을 요구하며 분신 11. 16 권중희, 김구선생 암살배후 진상규명 활동과 민족정기를 세우는 운동에 전념하다 운명 12. 10 청주산업선교회 목사 정진동, 청주지역 노동운동 및 민중운동에 참여하다 운명. 5. 이명박정권20086. 9 전주지역 공공 일반노조 조합원 이병렬, 광우병쇠고기 수입반대와 공공부문 사유화저지를 요구하며 분신 7. 26 미주지역 청년회 및 통일운동 참여 하던 정유미, 전민특위 사무총장 활동중 위암으로 운명 10. 4 공무원노조 초대위원장 차봉천, 공무원 노동자의 단결권을 지키기 위해 투쟁, 해고와 투옥 당함 암으로 운명11. 28 박윤정, 외국어대 학생운동 및 한총련 활동 후 노동운동에 투신 민주노총 상근활동중 병으로 운명12. 1 곽태영, 4월혁명에 참여 박정희기념 반대 및 민족정기 정립을 위해 헌신하다 운명.20091. 15 4월혁명에 참여했던 도강호, 범민련 등 평생 통일운동을 하다 운명1. 20 용산4지역세입자대책위 이상림, 대책 없는 개발정책에 맞서 철거민생존권을 요구하며 투쟁하다 공권력에 의해 운명.1. 20 용산4지역세입자대책위 활동하던 양회성, 대책 없는 개발정책에 맞서 철거민생존권을 요구하며 투쟁하다 공권력에 의해 운명.1. 20 수원 신동지역세입자대책위 조직부장 한대성, 대책 없는 개발정책에 맞서 철거민생존권을 요구하며 투쟁하다 공권력에 의해 운명.1. 20 수지 심봉지역세입자대책위원회 위원장 이성수, 대책 없는 개발정책에 맞서 철거민생존권을 요구하며 투쟁하다 공권력에 의해 운명.1. 20 순화동세입자대책위원회 위원장 윤용헌, 대책 없는 개발정책에 맞서 철거민생존권을 요구하며 투쟁하다 공권력에 의해 운명.4. 10 기아자동차노동자 정형기, 현장조직활동 및 노동자통일운동에 참여하다 자결4. 30 대한통운 노동자 박종태 학생운동 후 노동운동 참여, 화물노동자 권리증진을 요구하며 자결 6. 6 목사 강희남, 평생을 민주주의 발전과 통일운동에 바치다 이명박을 내치자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아직도 진행형이라는게 우울하게 만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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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한미FTA 특집 나는 꼼수다 여의도 콘서트 꼼꼼한 후기!
한미FTA 특집 나는 꼼수다 여의도 콘서트 꼼꼼한 후기! [Sisyphus님 편집]
오늘은 지난주에 예고 되었던 바와 같이 여의도 공원에서 한미 FTA 특집
나는 꼼수다 콘서트가 열렸습니다. 회사에서 조금 일찍 퇴근해서 곧장
달려간 덕분에 콘서트 시작시간인 7시 30분보다 30분 일찍 여의도 공원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작 30분 전에 이미 5만 명 이상의 많은
시민들로 인해 나꼼수 콘서트가 열리는 여의도 공원과 그 주변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저는 미리 와서 자리를 맡아주신분 덕분에 30분밖에 일찍
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운 좋게 앞에서 11번째 줄에서 콘서트를 감상 할
수 있었습니다.
8,000개 설치 했다는 좌석은 이미 콘서트 시작 전에 전혀 자리가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으며,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사람들은 콘서트를 보기 위해
남 위에 올라가서 위험천만한 자세로 나꼼수 콘서트를 보기도 했습니다.
뉴시스에서 인근 빌딩 옥상에서 촬영한 모습입니다.
최소 10만 명 이상 모인 것 같습니다.
나꼼수 콘서트의 시작은 공연기획자 탁현민씨의 멘트로 시작 됐습니다.
콘서의 시작은 나꼼수에서 한미FTA 찬성 국회의원 명단을 암기하게 만든
매국송을 완창을 시민들이 도전하는 것으로 시작 했습니다.
5명 가량의 시민들이 매국송 완창에 도전했지만, 동영상에 나오는 학생만이
매국송 완창에 성공했습니다. 매국송 완창에 성공한 결과 이 학생은 주진우
기자와 식사를 할 수 있는 식사권을 획득했습니다.
매국송 완창 콘테스트가 끝난 후, 나꼼수 맴버들이 정식으로 무대에 섰습니다.
콘서트는 아름다운 영혼의 소유자 정봉주 전 의원이 다른 국회의원들처럼 무게를
잡지 않고 얼마나 경박한가를 논하는 것으로 포문을 열었습니다.
소설가 공지영 작가님께서 콘서트에 나와 정봉주 전 의원의 경박함을 증언하고
나갔습니다. 공지영 작가께서 이런 위대한 분은 처음 봤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ㅋㅋ
공지영 작가님의 증언과 민주당 당직자인 단무지님의 증언 후,
본격적인 콘서트가 진행 되었습니다.
콘서트라는 이름에 걸맞게 모두들 즐겁게 노래를 불렀습니다.
겨울이라고 가카를 위한 캐롤을 모두가 함께 따라불렀습니다.
나꼼수 다운 절묘한 개사능력 덕분에 콘서트를 보기 위해 찾아온 10만 명이
모두 다같이 즐겁게 노래를 부르며 흥겨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시사돼지 김용민 교수님께서 요즘 한참 인기를 끌고 있는 경찰청장 조현오의
성대모사를 보여줬습니다. MBC의 카메라가 나타나 무단으로 촬영을 하자
분노한 시민들이 "MBC"를 연호했으며, 그 순간에 김용민 교수님께서 절묘하게
"만나면 좋은 친구"라는 멘트와 함께 성대모사를 시작했습니다. 개그 센스와
순발력이 남다른분 같습니다^^
두 번째 성대모사는 문재인 이사장님의 성대모사였습니다.
도대체 문재인 이사장님께서 기르는 풍산개는 무슨 죄를 많이 지었길래
이름이 '조현오'가 된 걸까요? 풍산개가 불쌍합니다.
김용민 교수의 마지막 성대모사는 한나라당의 박근혜 전 대표를 네비게이션에
비유해서 성대모사를 한 것이었습니다. 박근혜 전 대표와 너무 비슷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최근 한나라당과 조중동 및 가카로부터 고소장을 집중적으로 받고 있는
주진우 기자님께서 개인적인 감회와 포부를 말했습니다.
법을 악용하는 한나라당과 조중동 및 가카의 꼼수로 인해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주진우 기자님꼐서 부디 좌절하지 말고 말씀하신 것처럼 끝까지
시민들의 등불이 되어 함께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주진우 기자님도 책을 출판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책이라도 팔아서 소송비용을 보태야지 안 그러면 기자 월급만 가지고는
생활이 너무 힘들 것 같습니다. 기자 생활을 오래 하면서 참 많은 일을
겪으셨을 거 같은데, 부디 그 주옥 같은 경험들을 책으로 출판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나꼼수 여의도 콘서트에는 많은 정치가들이 나와서 함께 해주셨습니다.
먼저 민주당의 박영선 의원님께서 나오셔서 '나꼼수'가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지키는 희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진우 기자의 원조 누나인 심상정 전 진보신당 대표님께서도 나오셨습니다.
꾸준한 활동으로 지난날의 허물을 용서 받고 최근에는 인기 정치인으로
발돋음한 민주당의 정동영 의원께서 나오셨습니다.
한미FTA의 전문가이신 최재천 전 17대 민주당 국회의원님께서
나는 꼼수다 콘서트장에 나와 한미FTA의 위험성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심상정 전 대표와 정동영 의원님께서도 한미FTA에 대한 발언들을
하셨는데, 아이폰 배터리가 부족해서 그분들의 말씀은 녹화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민주노동당의 김선동 의원님께서도 나오셨는데, 사진 촬영 하는 걸
깜박 해서 찍지 못했습니다.
거리에서 자주 본다는 인사와 함께 말씀을 시작하신 이정희 민주노동당
대표님께서는 민노당이라고 해서 한미FTA를 막는 표족한 수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국회의원들이 할 수 있는 방법은 아무 것도 없으며
국민들이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와 주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야5당의 국회의원님들이 한미FTA를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이제는 국민들이 2008년 촛부집회 때처럼 행동하는 양심으로
용감하게 거리로 나와 추운 겨울의 날씨를 뜨거운 촛불로 활활 불태워야만
합니다.
MB정부는 2012년 1월 1일에 한미FTA를 정식으로 발효 할 예정입니다.
그 전에 오늘 나는 꼼수다 콘서트장에 모인 시민들이 모두 촛불을 들고
촛불집회에 나와주고, 그동안 시고 있었던 많은 시민들이 함께 촛불을 들고
거리로 쏟아져 나와야만 한미FTA를 막을 수 있습니다.
2012년 4월 11일 국회의워 총선거를 걱정하는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이
한미FTA 준비기간을 연장해서 19대 국회로 한미FTA 준비기간 종료를 넘기도록
만드는 것만이 우리가 지금 한미FTA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가수 이한철님께서 나와 신나는 무대를 꾸며주셨지만, 국민 여러분께서
한미FTA를 막아 주셔야 한다는 이정희 의원님의 말씀이 머리 속에서
계속 맴돈 덕분에 공연을 제대로 즐기기 어려웠습니다.
100만 명이 모여야 한미FTA를 막을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기는데, 100만 명이
과연 모일 수 있을까요? 100만 명은 커녕 10만 명이 모이기도 힘든 것이
지금까지의 현실이었습니다. 촛불집회가 계속 되는 내내 오늘 나는 꼼수다
콘서트 현장에 10만 명 이상의 사람이 모인것 만큼의 많은 시민이 나와준
적은 한미FTA 규탄 촛불집회 내내 단 한 차례도 없었습니다.
안전하게 즐길 수 있는 공연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지만, 물대포와
연행이 있을지도 모르는 한미FTA 규탄 집회는 사람들이 외면하고 있습니다.
저는 솔직히 오늘 콘서트에 나온 사람이라면 모두 대한민국의 지금 현재
시국상황을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 이런 상황에서
조차도 편히 즐길 수 있는 콘서트에만 나오고 촛불집회에는 나오지 않는다면,
그건 비겁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르고 나오지 않는 것은 비겁한 것이 아닌 무지한 것이지만,
알면서도 입으로만 욕할 뿐 행동으로 실천하지 않는 것은 비겁한 것입니다.
부디,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오늘 나는 꼼수다 콘서트에 나와준 분들 만큼은
비겁하지 않게 행동해서 한미FTA를 막을 수 있게 힘을 모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콘서트의 마지막은 나는 꼼수다 맴버들과 콘서트에 참여한 시민들이 모두 함께
김광석의 <일어나>를 부르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검은밤의 가운데 서 있어한치 앞도 보이질 않아 어디로 가야하나 어디에 있을까둘러봐도 소용없었지인생이란 강물 위를 뜻 없이 부초처럼 떠다니다가어느 고요한 호숫가에 닿으면 물과 함께 썩어가겠지
일어나 일어나 다시한번 해보는거야일어나 일어나 봄의 새싹들처럼
끝이없는 날들 속에 나와 너는 지쳐가고또 다른 행동으로 또 다른 말들로 스스로를 안심시키지인정함이 많을수록 새로움은 점점 더 멀어지고그저 왔다갔다 시계추와 같이매일매일 흔들리겠지
일어나 일어나 다시 한번해보는거야일어나 일어나 봄의 새싹들처럼
가볍게 산다는 건 결국은 스스로를 얽어매고세상이 외면해도 나는 어차피 살아있는걸아름다운 꽃일 수록 빨리 시들어 가고 햇살이 비추면 투명하던 이슬도 한순간에 말라버리지
일어나 일어나 다시 한번 해보는 거야일어나 일어나 봄의 새싹들 처럼
일어나 일어나 다시 한번 해보는 거야일어나 일어나 봄의 새싹들 처럼
부디 <일어나>를 함께 부른 모든 사람들이 봄의 새싹들처럼 일어나서
한미FTA를 막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끝으로 진보의 과거라 할 수 있는 故 조봉암 선생님께서 생전에 남기신
말씀을 통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다들 다시 한 번
생각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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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날씨 차가운 바닥에 쭈구려 앉아서, 이 정권을 비판하는 목소리 하나라도 놓칠세라 경청하는 수만 시민들의 모습에서 찐한 감동을 느낍니다.
이런 지경까지 몰고온 이 정권의 정치꾼들은 일말의 반성이라도 하는걸까요?
반성 바라지 않습니다. 아니, 이미 포기한지 오랩니다.정권을 비판하면서 쫄지마 라고 외치는 인간적인 모습들.. 이는 한편 불안감을 완전히 지우지 못한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이는 이제까지 기득권을 쥐고있는 세력들의 행태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언제까지 이나라의 미래를 이끄는 막중한 책임을 몇 분들께 의지할 수는 없지요.
우리 국민 모두가 현명한 판단으로 다음 총선과 대선에서 힘을 보여줍시다.
조중동을 비롯 지상파까지 정권의 시녀로 전락한지 오래인데, 종편 4개사까지 모두 조중동을 비롯한 아류들이 장악하여, 국민의 눈과귀를 호도하여 얼굴만 바꾸는 한날당의 장기집권 의도를 철저히 분쇄해야 합니다.
투표로!!!
가자서작성일
2011-12-01추천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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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검찰총장 종북좌파 척결...이겐 몬 시츄래요.
신임 검찰 총장이 ‘종북좌익 세력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청와대가 위장전입, 다운 계약서, 병역 기피 등 갖가지 의혹을 무릅쓰고 임용을 강행한 신임 검찰총장이 취임사에서 들고 나온 것이 공안 통치에 올인 하겠다는 시대착오적 대 국민 협박이다. 한상대 검찰총장의 이런 태도는 간첩 신고 포상금 인상, '왕재산 사건' 발표 등 이미 진행 중인 청와대 발 공안통치의 흐름 속에서 나온 것이라 새삼스럽지는 않다. 집권 후반기를 맞은 이명박 정권이 공안 통치로, 누적된 실정을 호도하면서 차기 정권 창출을 노리고 있다는 정황이 이미 여러 가지로 확인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검찰총장의 공안검찰 선포는 과거 정권의 간첩사건에 대한 무죄 판결이 줄을 잇고 있는 상황에서 나온 것이어서 더욱 생뚱맞다. 이른바 빨갱이 사냥으로 당사자는 물론 가족 등을 엄청난 고통과 불이익 속에 신음케 했던 과거 사법당국의 범죄사실이 줄지어 대법원 등에서 판결로 나오는데도 검찰 총장은 그것을 철저히 외면했다. 검찰의 존재 이유는 법치 확립을 위해 국민에게 법으로 서비스하는 것이다. 법으로 생사람을 때려잡으라는 것이 아니다.
검찰이 앞장서야 할 대 국민 법률 서비스는 시대의 요구가 무엇인가, 그리고 과거에 법과 관련해 잘못된 것이 있었다면 바로잡아 정의를 확립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검찰 총장은 거칠기 짝이 없는 어휘를 구사하면서 과거 독재정권이 써먹던 수법을 다시 들고 나왔다. 이런 자격 미달 검찰 총장의 등장은, 청와대의 민주의식 수준이 얼마나 후진적인 것인지를 드러낸 것이다.
한상대 신임 검찰총장
@CBS노컷뉴스
한 검찰총장은 취임사에서 '종북좌익세력의 척결'을 제시하면서 "북한을 추종하며 찬양하고 이롭게 하는 집단을 방치하는 것은 검찰의 직무유기"라고 규정했다. 그가 ‘종북좌익’이라는 표현을 통해 거론한 색깔론, 이념문제는 동서 냉전이 종식된 이래 지구촌에서는 거의 자취를 감춘 구시대의 유물이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힘겨루기와 갈등은 이제 역사 속에 묻힌 먼 이야기가 된 것이다. 검찰 총장이 이런 세계사적 흐름에 철저히 무지하다는 것은 경악스럽고 또한 참혹한 일이다.
검찰 총장이 종북좌익 타도의 구실로 삼을 국가보안법은 유엔 등 국제 사회가 오래전부터 그 야만성, 반인권성을 지적하면서 그 개폐를 권유하고 있다. 국가보안법은 개인의 사상, 양심,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고 남북관계에 대한 언론의 취재, 보도의 자유를 억압하는 수치스런 악법이다. 이 법이 존재하는 한 한국은 상상력을 제약하는 치졸한 후진국의 구렁텅이를 헤맬 뿐 세계 속의 일등 국가가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
검찰 총장은 최근 공안 사건에 대한 당국의 발표가 잦아지면서, ‘간첩 소탕’을 외치는 일부 수구 세력 주장의 허구성을 인식하기는커녕 되레 부화뇌동하려 하고 있다. 현대 사회는 정보화 사회다. 모든 정보가 빛의 속도로 흐르는 시대라서 구시대적인 간첩의 개념이 통할 수 없다. 특히 남북한은 특수관계다. 적대적 대립 상황이면서 통일을 달성해야 할 상대라는 이중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런 점에서 현대 사회의 간첩이란 과연 어떤 개념이 적용돼야 할지부터 검찰 총장은 깊이 숙고해야 한다. 이는 과거 군사정권이 간첩으로 몰아 엄청난 고통을 안겨줬던 사건들이 줄줄이 무죄판결이 나는 것을 살필 때 더욱 그러하다.
올 초부터, 과거 60~80년대 정보당국으로부터 고문 수사를 받고 간첩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기소돼 장기 복역한 사람들에게 잇따라 무죄가 확정되고 있는데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자. 대법원은 지난 1월 조봉암 사건의 재심 판결에서 과거 조봉암이 유죄판결을 받았던 ‘국가변란목적 단체결성과 간첩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대법원은 지난 5월 5공화국 시절 조총련계 공작원에 포섭돼 간첩 행위를 한 혐의(국가보안법 위반)로 처벌받은 구아무개(59)씨 사건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서울중앙지법은 같은 달 유신 시절 작가들에게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조작된 굴레를 씌운 이른바 '문인간첩단' 사건에 대해 무죄 판결을 내렸다. 이밖에 박정희 군사정권 때인 1961년 ‘송씨 일가 간첩단’, 1975년 '형제 간첩 조작 사건', 1980년대 '진도간첩단' 사건 등은 모두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수십년간의 억울함에서 풀려났다.
그러나 정부는 거꾸로 가고 있다. 법무부는 간첩·간첩선 신고 포상금을 종전의 5배인 5억 원으로 늘린 '국가보안 유공자 상금지급' 등에 관한 규정 일부개정 령을 지난 5일 입법 예고했다. 신임 검찰총장과 법무부 장관은 취임사에서 그 강도에서 차이가 있었을 뿐 입을 모아 좌익 타도를 외쳤다. 실정법의 집행을 담당한 실무 고위직들이 한결같이 이념전쟁을 다짐하는 것은 아픈 과거의 치유는커녕 끔찍한 공안독재의 수렁으로 국민을 몰아넣는 일이다.
이들 공직자의 법률 서비스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최소한의 공권력으로 국민의 인권 등 기본권이 신장될 수 있는 상황 조성에 노력하는 것이다. 세계가 비웃고 있는 악법을 무기 삼아 국민의 표현의 자유, 사상의 자유를 탄압하라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위장전임과 아들 병역문제 등 고위공직자의 기본적 도덕성도 갖추지 못했다는 국민의 냉소와 박탈감을 뒤로한 채 또다시 '박제화'된 국가보안법 칼끝으로 공안의 망령을 부린다면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를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가뜩이나 검찰이 넘 시른데. 몬 종북좌파랴...북한 찬양하는 사람이 있기나 한데요...
이거 몬 시츄래요...???
모종삽작성일
2011-08-13추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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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근현대사 인물] 한민족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 (2)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한국군은 낙동강 전선까지 밀립니다. 이때 김규식과 친일파 최린, 이광수등이
납북되고 서울에서는 북한군에 의해 인민재판이 열려 많은 우익들과 지주, 군인, 경찰, 공무원등이 재판에 회부되어
대부분 총살되거나 죽창, 꼬챙이등으로 사형에 처해집니다.
사열식하는 좌익들
인민재판 당시 시체
9월 15일 맥아더 유엔사령관의 인천상륙작전으로 한국군과 미군은 기사회생하게 됩니다. 13일 뒤 서울을 재탈환 하고
10월 1일 38선을 넘어 압록강까지 가는등 통일이 눈 앞에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정부는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데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배우 故이은주씨가 죽는 장면으로 대중들에게 알려진 보도연맹사건 입니다. 보도연맹은 전쟁
직후인 1949년부터 좌익세력에서 회원들을 받았으며 전쟁이 전개될 당시 회원들은 30만명에 달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가입자들 대부분이 북한군에게 살기 위해 가입했거나 가입만 하면 쌀이나 식량을 배급해줬기 때문에 일반
민중들은 대부분 먹고 살기 위해 가입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승만은 이들이 북한의 지령을 받아 전쟁중에 언제라도 북한군
에게 협조 할 수 있다는 판단을 내려 대전으로 피난시에 그들을 처리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이에 명령을 받은 시라소니
이성순의 서북청년단을 중심으로 헌병과 함께 마을마다 보도연맹에 가입된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합니다.
배급을 받기 위해 보도연맹에 가입했다가 사형당한 아낙들
당시 학살당한 시신들
사형집행중
사형직전의 한 청년
이때 학살 당한 사람만 최소 20만명에서 최대 50~100만명 가까이 죽은것으로 추산되고 재판으로 사형을 했다지만
앞 줄 사형 뒷 줄 무기징역이라는 애들 장난과도 같은 재판이 열렸다니 전쟁 동안 법 집행이 얼마나 개판이였는지
짐작이 갑니다. 그후 이승만 정부는 또 한번 민심을 잃는 짖을 저지르는데 이른바 국민방위군 사건입니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압록강 전선에서 밀리자 이승만 정부는 1950년 12월 11일 국민방위군설치법 시행으로 만17세 이상
40세 미만의 장정들을 강제 징집했습니다. 하지만 졸속 행정과 병력수송, 훈련, 무기
국민방위군
무장 등을 하는 데 필요한 예산이 확보되지 못했고 사령관 김윤근, 부사령관 윤익헌등 5명이 국민방위군에게 가야할 현금
23억 원과 쌀 5만 2천 섬을 착복하여 추운 겨울이였던 1.4후퇴때 9만명이나 젊은 장정들이 굶주림과 추위로 죽게되는 어이
없는 일이 발생합니다. 당시 국민방위군들은 4명당 쌀포대기 하나로 난방을 해결했으며 막사와 텐트가 부족해 난방도 안되
는 학교 교실에 100여명씩 쑤셔넣어 버리는 바람에 이가 들끓어 장티푸스가 유행해 많은 사람들이 죽었으며 부산까지 피난
에 성공한 사람들은 배가고파 마을 잔치집이란 잔치집은 모두 찾아가 음식을 먹었지만 몇 달씩 굶다가 급하게 먹어 급체해
죽은 사람들도 상당히 많았다고 합니다. 이 사건은 당시 민중들에게 알려져 민심은 극도 나뻐졌으며 신성모 국방부 장관이
사임하고 이회영의 동생 부통령 이시영 또한 사건을 확실하게 처리해 달라는 말을 남기고 부통령 자리를 사임합니다.
이에 김윤근과 윤익헌등 5명은 사형되고 이 사건의 처리를 맡은 이기붕은 정계에 스타로 떠오르게 됩니다.
1950년 많은 국군 장병들이 목숨을 바치고 있을때 임시수도 부산에서는 이승만의 정권 유지를 위해 11월 30일 대통령직선제
를
발췌개헌 당시 기립투표하는 국회의원들
국회에 제출하였습니다. 이유는 1950년 5월 30일 총선 결과 이승만을 반대하는 야당이 승리하자 본인의 정권 유지가 어려울
것을 예상하여 생각해 낸 치졸한 방법이 였습니다. 당시 대통령 선거에 대해 더 설명 하자면 국회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 출석
과 출석의원 3분의 2 이상의 표를 얻어야 당선됐고 국회에서 국회의원의 투표에 의한 간접선거 방식을 채택했기 때문에 이승
만에 반대하는 야당이 다수였던 국회를 봤을때 이승만이 낼 수 있었던 최상책이 대통령 직선제였습니다. 1952년 1월 18일 국
회가 이를 부결함으로써 이승만 정부와 국회에 알력이 생기자 5월 25일 국회 해산을 하기 위해 이승만은 부산과 경상도 지역
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김일성의 사주를 받았다며 국회의원 12명을 구속합니다. 하지만 국제사회에서 비난 여론이 쇄도하자
이승만은 6월 4일 국회해산을 보류한다고 표명하고, 국회의원 장택상의 중재로 대통령직선제 정부안과 내각책임제 국회안
을 발췌, 혼합한 발췌개헌안을 마련합니다. 이에 7월 4일 백골단과 경찰들을 이용해 반대하는 국회의원들 가로막고 기립투표
방식으로 출석의원 166명 중 찬성 163표, 반대 0표, 기권 3표로 발췌개헌안을 통과시켜 이승만
은 자신의 독재 기반을 확고히 하게 됩니다. 1년뒤 1953년 7월에 휴전 협정이 채결되고, 다시 년이 지나 우리나라 역사상 가
장 어이없는 개헌이 일어납니다. 5월 20일 다수당이였던 자유당은 이승만의 종신 집권을 위해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 제한
을 없앤다는 내용을 골자로하여 9월 8일 국회에 제2차 헌법 개정안을 제출하였으나, 11월 27일 국회 표결 결과 재적의원 203
명 중 2/3이 찬성해야 한다는 원칙에 따른 가결정족수 136명에서 한 명이 모자란 찬성 135표, 반대 60표, 기권 7표라는 결과
가 나왔습니다.(당시 136명이였던 자유당에서 모두 찬성만 찍으면 됐던 상황에서 자유당 의원중 한명이 투표 용지의 한자를
몰라 용지 가운데에 도장을 찍어 1표가 모자르게 나왔다고 합니다.) 이에 따라 당시 국회부의장 최순주는 부결을 선포했지만
이틀후 자유당은 서울대교수를 앞세워 재적의원 203명의 3분의 2를 수학 계산하면 135.33...으로 4사5입하면 135명이 된다는
논리로 개헌안을 통과시키는 코메디에서도 안나올 해괴한 짓을 저지릅니다.
당시 민주당의 대선 홍보포스터
2년뒤 민심을 잃을 대로 잃은 이승만과 자유당은 56년 대선을 치루게 됩니다. 자유당은 이승만을 대통령, 부통령에 이기붕을
후보로 내세웠고 민주당은 대통령 신익희, 부통령은 장면을 후보로 내세웠습니다. 하지만 신익희 후보가 호남지방으로 유세
가던 중 열차 안에서 뇌일혈(또는 심장마비라고도 합니다)로 급사하자 대선은 자유당의 이승만과 무소속의 조봉암의 대결이
됩니다. 대선이 시작되자 이승만은 70%에 가까운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되고 부통령은 민주당의 장면이 당선됩니다. 하지
만 놀라운건 조봉암의 30% 득표율이였고 이승만은 이를 경계해 1957년 평화통일을 주장했던 조봉암을 빨갱이라 모함하여 진
보당사건을 일으키고 1년뒤 1958년 조봉암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사형집행 5분전 담배 한 가치를 피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집
니다.
형을 집행 받고 있는 조봉암
2년뒤 민심은 이승만과 자유당에게 떠날대로 떠났고 운명의 1960년 대선이 다가옵니다. 자유당은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이
기붕을 후보로 민주당은 대통령 조병옥, 부통령에 장면을 후보로 내세웠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하늘이 이승만을 도우는지
조병옥이 위암 수술 중 미국에서 죽자 대통령은 이승만으로 확실시 됩니다. 이에 승계권을 쥐기 위해 이기붕은 부통령 선거
를 부정으로 조작하여 전국적으로 없는 사람을 유령유권자로 조작, 비밀이 아닌 공개투표, 임화수의 동대문상입연합회를 이
용해 야당참관인 축출, 부정개표 등을 자행해 이승만과 이기붕은 유래없는 득표율 99%~95%를 얻자 너무 높다 생각했는지
70%대로 낮춰서 발표합니다.
부정선거를 주도 했던 임화수(완쪽)와 유지광(오른쪽)
이기붕, 박마리아 부부
부정선거로 화가난 민중들
대선 바로 전 대구에서 1960년 2월 28일 민주당 후보의 유세가 있던 날 학생들이 유세장으로 갈까봐 정부에서는 일요일임에
도 불구하고 등교를 강요합니다. 이에 학생들이 학생을 정치에 이용하지 말라!라며 부정 선거에 항의하여 데모를 일으킵니
다. 이것을 도화선으로 서울과 대전, 부산에서 산발적으로 데모가 일어났고, 3월 15일 선거 당일 마산에서 학생들이 데모를 벌
이자, 시민들도 선거포기하며 학생 데모에 합류하였습니다. 이에 경찰과 동대문폭력배들은 무자비한 제지를 했고 많은 사상
자와 행방불명자가 속출하였습니다. 이후 4월 11일 마산 앞 바다에서 낚시꾼에 의해 김주열 군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수업 도
중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시민과 함께 시위를 했고 서울에서
김주열군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된 시신
4월 18일 고대생들이 대학생 최초로 국회의사당 앞에서 시위를 하고 귀가 도중 종로 4가에서 5.60명의 동대문폭배들에게 피습
을 받자 민심은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됩니다.(고대생 피습사건)
피습당한 고대생들과 민간인들
다음날 19일 수천 명의 학생, 시민이 경무대 앞까지 진출하여 '이승만은 물러가라'고 외치며 시위를 하자 오후 1시를 기해 서
울에 경비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오후 4시에는 부산, 대구, 광주 등 4개 도시에 계엄령이 선포. 오후 5시에는 비상 계엄으로 바
뀌면서, 경무대 앞의 발포로 시작된 충돌로 183명의 사망자와 6,259명의 부상자가 속출하였습니다.
발포 명령을 내린 경무대 서장 곽영주 그는 이승만의 신임으로 무소불위 권력을 행사했다.
경찰이 세운 철조망을 넘어 경무대로 향하는 시위대
25일 전국 27개 대학의 교수 300명이 학생 4.19에 쓰러져간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며 구호를 외치고 시가지에서 평화적 시위
를 하였습니다. 이는 정부의 결단을 촉구했고 결국 26일 이승만은 국민이 원하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며 성명을 발표해
12년 이승만, 자유당 독재의 종지부를 찍습니다. 이후 이기붕과 박마리아 부부, 둘째 아들 이강욱은 이강석이 쏜 총에 맞아 죽
고 이강석 자신도 자살하면서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합니다. 4월 30일 9시 50분 육군수도병원에서 장례가 치뤄지고 이승만은
부인 프란체스카와 장례식에 참가해 눈물을
이기붕 부부와 두 아들의 관이 나란히 서있다.
흘리며 5월 2일 하와이로 망명을가 5년뒤인 1965년 그곳에서 7월 19일 오후 7시 35분 90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합
니다. 그의 영구는 7월 23일 서울로 돌아와 가족장으로 장례를 치룹니다. 그는 독립활동부터 권력욕과 자신의 이득만을 챙겼
고 대통령이 된 뒤에는
이승만의 영결식
민족의 염원인 통일과 친일파 처단을 막았으며 헌법을 농단, 12년 장기 집권을 하며 그가 집권하는 동안 100만명이 넘는 사람
을 죽였지만 아직도 국회 입구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고 그를 도왔던 자유당은 현재 한나라당이 되어 광복절을 건국절로
바꾸자며 국민을 우롱하고 아직까지 건국의 아버지라며 이승만을 칭송하고 있습니다.
출처 : I Love Soccer- 孔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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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이명박, 시장만능주의 성공할 수 있을까?
좋은글이 있어서, 올립니다.
이제 좌파 보수의 이념적 논쟁을 떠나서, 이명박 정부가 전면에 내세운
신자유주의·시장만능주의, 케인스주의에 대해서 진지하게 토론할때가
왔다고 봅니다.
물론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북구식 사회민주주의"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생각하는 시간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통계자료는 제가 수집해서 임의대로 넣은 것이니 오해마시기 바랍니다
- 레이시온 -
관치경제·시장만능 두 얼굴 한국, 제3의 길을 가라
이정우| 경북대 교수·경제학
작년 세계 경제를 강타한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각국은 살길을 찾기에 바쁘다.
이번 금융위기는 미국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이래 20여년간 승승장구해온 시장만능주의가 고장을
일으킨 것이다. 레이건 이후 공화당 정권은 경제를 살린다면서 부동산 경기 부양, 금융업에 대한
투자 및 일자리 창출에 크게 의존했다. 그 수단은 규제완화, 부자 감세, 반노조라고 하는 전형적인
시장만능주의다.
미국은 이미 1920년대에 시장만능주의를 채택한 바 있고, 그 결과는 사상 유례없는 빈부격차와
대공황이었다. 레이건, 부시 부자에 의한 시장만능주의가 가져온 것 역시 사상 최대의 빈부격차와
경제위기라는 점에서 최근 상황은 역사의 반복이다. 위기 해결책을 놓고 논의가 분분하지만
그 기조는 뉴딜과 비슷하게 시장만능주의의 혁파, 시장에 대한 정부의 개입 강화, 복지 확충을
통한 분배 개선이 될 것이다.
*gdp규모에 비해서 정부지출이 상당합니다.
*단일 경제권으론 단연 eu가 최고임
미국 뺨칠 정도로 미국적인 한국경제
한국은 어떠한가? 한국의 경제체제는 미국 뺨칠 정도로 미국적이다.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미국을 능가할 정도로 시장만능주의가 횡행한다. 이런 시장만능주의는 97년 외환위기 이후
부분적으로는 국제통화기금(imf)의 강요에 의해, 또 우리 내부에서 야금야금 세력을 확장해온
시장만능주의자들의 요구에 의해 지난 10년간 빠른 속도로 확산돼 왔다.
그러나 우리 경제체제가 시장만능주의 일색은 아니고, 시장만능주의적인 요소와 더불어
60년대부터 90년대까지 30년 정도 지속된 이른바 박정희 모델이라고 하는 관치경제의
잔재가 도처에 남아 있다. 이 모델은 30년대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 파쇼국가에서 채택되었고,
처음에는 상당히 성과가 좋았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독재적인 이 모델은 처음 20~30년은
성과가 좋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비능률, 침체에 빠지는 특징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다.
*이건 뭐 딱히 할말이 없네요. 노사분규나 노동생산성 문제는 현대자동차만 봐도 아실꺼이니..
성장·분배 모두 성공한 북구 사회민주주의
우리 경제는 이런 역사적 유산을 물려받아 한편에는 관치경제, 다른 한편에는 시장만능주의가
혼재되어 있는 기묘한 성격을 갖게 됐다.
즉 한국 경제는 야누스처럼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이 두 가지는 마치 물과 불처럼 상극인데,
공존하고 있으니 우리가 길을 잃고 갈팡질팡하는 것도 결코 무리가 아니다.
이런 혼란 상태는 하루빨리 정리돼야 한다.
*이거는 논란이 많은 국가경쟁력 순위입니다. 순위도 조사하는 단체에 따라 순위가 많이 차이남
어떤 방향으로 정리돼야 할까? 박정희식 관치경제는 한때 승승장구했지만 이미 전*를 지나
수명을 다했으니 미련을 가져서는 안 된다. 시장만능주의는 이번에 미국의 경제위기로 이미 치부가
드러난 이상 우리가 맹목적으로 추종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문제는 국내에 시장만능주의 세력이
도처에 포진하여 시장만능주의를 전파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장은 물론 중요하지만 시장만능은 결코 옳지 않다.
*미국의 재정적자는 다 아실꺼라고 보고, 노르웨이는 풍부한 자원(북해원유, 산림자원, 청정해산물)이
있다고 하지만, 꽤 놀랍군요
그러면 우리에게 대안은 무엇인가? 세계 각국을 관찰해보면 관치경제와 시장만능주의를 제외하고
지금까지 존립한 시장경제체제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유럽대륙형 자본주의체제이고,
다른 하나는 북구형 사회민주주의체제다. 둘은 시장을 방치하지 않고 조정을 가한다는 점,
복지국가라는 점에서 비슷하지만 북구가 유럽보다 더 많은 세금을 거두어 모든 중요한 사회서비스를
국가가 무료로 제공한다는 점에서 좀더 좌파적이다.
한국 사람들은 좌파라 하면 무조건 색안경을 끼고 보는 버릇이 있는데, 놀랍게도 지난 수십년간 세계의
경제성적표를 놓고 볼 때, 우등상을 받아야 할 나라는 북구의 사회민주주의 국가들이다. 혁신능력이
가장 뛰어나고 경제성장률이 영미형이나 유럽대륙에 비해 높을 뿐 아니라, 소득분배가 가장 평등하다.
*외국인 투자는 당연히 미국이 압도적으로 1위입니다. 굳이 설명안함
성장과 분배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데 성공한 것이다. 몇 년 전 여론조사를 했을 때 우리 국민이 가장
살고 싶어 하는 나라도 북구형 사민주의국가였다.
그러나 우리의 토양은 과연 이 모델을 이식하기에 적합한가? 대답은 부정적이다.
첫째, 우리 노조의 조직률이 12%밖에 안 되는 데다 조직 형태도 산별이 아니고 기업별 노조이다.
북구는 산별노조 형태이면서 노조 조직률이 70~80%나 된다.
강한 힘에 비례적으로 강한 책임감을 갖고 있어서 좀체 파업과 같은 행동에 돌입하지 않는다.
반면 우리 노조는 기업별 노조여서 시야가 좁고, 경제 전체에 대한 책임감을 적게 느낀다는 한계가 있다.
노조 간부들도 단기주의의 함정에 빠져 있다. 기업도 살고 나도 산다는 장기적 시야가 아니라
매년의 임금 인상에만 급급하는 단기실적주의에 빠져 지나친 투쟁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노동운동의 이념에도 문제가 있다. 노조 중 일부는 사민주의에 대해 별로 호감을 갖지 않고,
심지어 기회주의로 간주하는 경향조차 있다.
‘가지 않은 길’을 갈 용기는 있는가
둘째, 기업가들은 원래 보수적이지만 한국의 기업가들은 특히 보수적이다.
노사 대화의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않으며, 경영권·인사권에 대한 노동자들의 약간의 발언조차 허용하지
않는 전근대적 사고에 빠져 있는 기업가가 많다.
심지어 아주 일부이긴 하지만 노동조합 자체를 아예 불순한 조직 또는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간주하는
극우파적인 사고방식도 남아 있다. 이런 환경 속에서 북구와 같은 노사 대화와 그에 기초한 산업평화,
고숙련, 고생산성을 기대하는 것은 연목구어일 것이다. 셋째, 정부의 성격으로 한국의 정부는 너무 보수적이다. 보수정부가 연이어 집권해왔으며, 사민주의 정당은
아예 정치에 발을 붙이기도 어렵다.
정부는 거의 항상 노동자보다는 기업가 편에 서 있으며, 노동자를 적대시하는 조치도 드물지 않다.
한국의 보수정당은 일본 자민당이나 미국 공화당처럼 부자 우대, 반노동자 정책을 답습하고 있다. 넷째, 국민 의식이다. 여론조사에서 국민들은 북구형 사회를 희망하면서도 그런 사회를 위해 높은
세금을 내겠느냐고 물어보면 대답은 아주 소극적이다. 게다가 우리나라에서는 과거 독재시절부터
내려온 반공 교육이 너무나 철저해 우리 머릿속에는 약간의 좌파적인 생각조차 배척하려는 편협함이 있다.
그래서 북구형 사민주의조차 생소한 것으로, 심지어 위험한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다섯째, 인구 문제다. 북구는 모두 인구가 적은 나라인데, 우리는 인구가 너무 많아서 이런 모델이
안 맞는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많은 인구가 사민주의에 결정적 장애라고 볼 수는 없다.
인구 소국은 우리와 안 맞는다고 하면서 미국이나 일본 같은 인구 대국의 관행은 열심히 답습하려 하는 것은 모순이 아닌가? 이런 저런 제약 때문에 우리에게 북구 모델은 너무나 멀리에서 깜박이는 등불일 뿐이다.
현재 우리 앞에 놓인 과제는 중차대하다. 오래 누적된 관치경제의 폐단도 씻어내야 하지만 10년간
과잉수입된 시장만능주의의 병폐도 심각하다. 정치의 독재뿐 아니라 시장의 독재도 피해야 한다.
관치경제(정치 독재)도 시장만능주의(시장 독재)도 옳은 길이 아니다. 양쪽 늪을 피하면서 제3의 길로
가는 외나무 다리를 아슬아슬하게 건너야 한다. 이 길을 통해서만 경제위기 극복이 가능하고,
장기적으로 지속가능한 경제발전을 이룰 수 있다. 세계 최고기업인 핀란드의 노키아 회장 요르마
올릴라가 올해 3월 파이낸셜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북구형 모델이 자본주의의 미래가 될 것”이라고
말한 것은 우리에게 시사점을 준다. 관건은 ‘가지 않은 길’을 걸을 용기와 의지가 우리에게 있느냐는 것이다. 일찍이 50년대에 진보당 당수 죽산 조봉암 선생은 사민주의적 신념을 가졌다. 일제시대에 독립운동을
하던 정통 공산주의자가 점차 생각을 바꾸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병폐를 함께 해결할 만한 더 인간적인
자본주의 모델을 모색했다는 점에서 죽산 선생은 놀랄 만한 선견지명을 가졌던 인물이다.
옹졸한 이승만 정권이 59년 죽산 선생에게 억지로 간첩죄를 씌워 처형함으로써 그의 높은 뜻은
안타깝게도 푸른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이제 우리 국민이 좌파에 대한 맹목적 두려움과 오해를 떨쳐내고, 과연 어떤 사회가 살기 좋은
사회인지를 생각할 때가 왔다.
경직적 좌파, 독재적 좌파는 나쁘다. 이에 반해 북구에서 보는 인간적 좌파, 민주적 좌파는 전인미답의
길을 성공적으로 개척해왔다.
틀에 박힌 사고방식을 넘어 멀리 보자. 언제까지 우리 국민이 시장만능주의와 관치경제 사이에 협착돼
고생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죽산 선생이 가신 지 어언 50년, 여전히 시기상조라고 하면 언제 그런 때가 온단 말인가?
우리 민족은 아예 안 된다고 한다면 그것은 지나친 자기비하다.
“원래 길은 없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가면 길이 된다”고 한 루쉰의 말을 명심하자.
*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9151750155&code=920100
레이시온작성일
2009-09-16추천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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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문국현이 "MB를 결사반대한 이유"
문국현이 "MB를 결사반대한 이유" -펌-
지난 대선 토론회 때 문국현 후보가 이명박 후보에게 하는 말입니다.
"레이 회장은 끝까지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4배 가중 처벌이 적용돼서 160년
형을 받았습니다. 이명박 후보님을 보면 꼭 레이 회장 생각이 납니다. 우리 국
가를 부도 위기로 몰아 넣고 우리나라의 국가 신용도를 바닥으로 떨굴
것 같습니다. 증권시장 3000, 5000 만드시는게 아니라 1000으로 떨구실 것
같습니다."
매우 불행히도 현실화 되었습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반부패 선언을 7월 4,5,6일 날 제네바에서 저희와 함
께 했는데, 한국에 하나도 안 알려진게 왜 그런지 아십니까? 정경유착 부패한
이 세력들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부패한 세력이 우리 미래를 막고 있는
것입니다. 국민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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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한 사람들은 진실을 말하는 사람들이 매우 두렵습니다.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목숨 걸고 비판할 줄 아는 용기있는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소수 야당대표인 창조한국당 문국현대표와 민주노동당 강기갑대표와 진보신당
노회찬대표는 정치적 언론적 사법적으로 매우 부당한 탄압을 받고 있습니다.
국민들은 탄압받고 있는 야당 지도자들을 반드시 지켜내야 합니다.
친일 부패 매국세력들로부터 이 분들을 반드시 지켜내야 합니다.
친일 부패 매국세력들의 왜곡과 매도와 탄압에 의해 당대에 노무현을 알아
보지 못하고 비난하고 원망하던 어리석은 국민들은 지금 크게 후회하고 있습니다.
친일 부패 매국세력들의 왜곡과 매도와 탄압에 의해 지금 문국현을 알아보지
못하고 지키지 못해서 또다시 크게 후회하는 국민이 되선 안될 것입니다.
김구, 조봉암, 장준하, 김대중, 노무현...
양심세력을 지켜드리지 못했습니다.
문국현, 강기갑, 노회찬, 유시민...
양심세력을 지켜내야 합니다.
반한나라당 세력은 모두 동지입니다.
불의에 저항하는 양심세력이 대한민국의 희망입니다.
▲ 은평구 물빛공원에서 <문국현 진실 알리기> 활동을 펼치는 문함대와 은평구민들
◆ 문함대 대표일꾼 깨끗한곰 사랑님 발언 발췌 ◆
"문함대 대표일꾼입니다. 7~80년대식 경제정책으로 국민을 우롱하는 기득권과 부패세력 그리고 친일매국의 아첨꾼인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땅투기당=땅사랑당=성추행당=성나라당)이 가장 경계하고 있는 분이 바로 문국현 의원이십니다.
저희는 지속적으로 은평구민들, 서울시민들 그리고 온 대한민국 국민들과 함께 정치보복, 정치 탄압을 받고 있는 문국현 의원을 살리는 구명운동을 전개해 나갈 것입니다.
저는 정치인이 아닙니다. 2009년 8월3일 이 땅 대한민국의 한 사람일 뿐입니다. 여러분의 힘이 정치 민주화와 경제 민주화를 실현시킬 것입니다. 함께 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이슈청원) 문국현대표 의원상실 부당선고에 반대합니다 http://agora.media.daum.net/petition/view?id=77345
[문함대] http://cafe.daum.net/kookhmoon
[문블리] http://club.cyworld.com/club/main/club_main.asp?club_id=52464359#
[아고라문함대] http://cafe.daum.net/agoramoon
친일 부패 매국세력들에게 대한민국을 이대로 도륙당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후손들까지 저들의 노예가 되게 할 수는 없습니다. 끝까지 싸워서 대한민국을 반드시 지켜냅시다!
김대중 초대 국민대통령님, 부디 속히 쾌유하소서!
노무현 2대 국민대통령님, 대한민국을 지켜주소서!
용현코비작성일
2009-08-03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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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사형제도가 없어졌지만... 예전 우리나라의 사형집행 순서입니다.
위는 서대문 형무소 사형장 모습(옛)
1) “목 좀 편하게 해줘요”사형집행자에서 사형수가 돗자리 위에 앉은 채로 유언을 끝내면 교인의 경우 이어서 예배가 진행된다. 사형수는 거개가 종교를 믿기에 집례를 안 받는 것이 오히려 예외다. 신부나 목사는 사형수와 함께 기도, 성경봉독, 찬송가 합창을 한다. 불교의식은 스님의 독경으로만 끝난다. 성직자들은 거개가 눈물을 흘린다고 한다. 사형수가 오히려 성직자를 위로하기도 한다. 집례는 사형수를 안정시켜 양순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특히 찬송합창이 그런 신경안정제 구실을 한다. 찬송소리가 작은 사형수에겐 “크게 부르라”고 옆에서 부추기기도 한다. 내용은 한결같이 하나님께서 이승의 죄를 사해주셨으니 천당은 당신 것이란 식이다. 보안직원들은 이 예배를 짧게 하여 집행을 빨리 하려고 하고 교화를 맡은 직원들은 성직자들이 그 말을 듣겠느냐고 반대하는 일도 있다. 예배시간을 단축하는 길은 찬송가 곡목을 줄이는 것 뿐이다. 서울구치소의 경우, 찬송가는 세 곡목을 넘지 않고 2절까지만 부르는 일이 많다고 한다. 집행의 신호는 예배에 참여한 교무간부가 손짓을 보고 단상의 집행관이 손짓으로 집행의 명령을 내린다. 사형수 뒤에 서 있던 3명의 연출조 중 가운데 사람이 먼저 용수를 내려온다. 나머지 2명은 들고 있던 포승으로 사형수의 발목과 무릎을 묶고 두 팔을 겨드랑이에 곡 붙여 묶는다. 항문을 막아 배설물이 나오지 못하도록 밧줄 한 가닥을 사타구니 밑으로 뽑아서 손에 찬 쇠고랑을 거쳐 발목에 잡아 맨다. 이때 “아파요. 좀 풀어줘요”라고 말하는 사형수도 있다. 다 묶으면 가운데 사람이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넣어 사형수를 비스듬히 뒤로 끌고 간다. 이때 계속해서 주기도문을 외거나 찬송가를 부르는 사형수도 있고 발버둥치는 이도 있다. 다른 연출조 직원이 뒷 쪽으로 다가가 흰 커튼을 옆으로 드르륵 당겨 열어 젖힌다. 여기가 교수장이다. 이 교수장은 집행장 뒷 쪽에 따로 만든 별실인데, 3면의 베니아판 벽은 천장까지 닿아 있고 한쪽은 커튼으로 닫혀져 있다. 커튼을 열고 사형수를 끌고 가 사방으로 금이나 있는 직사각형 판자 위에 앉힌다. 천장의 도르래에서 늘어뜨려져 있는 밧줄 올가미를 잡아당겨 사형수의 목에 건다. 이 밧줄은 천장에 달린 두 개의 도르래를 겹돌아 남쪽의 별실 벽 뒤에 있는 포인트의 쇠고리에 연결돼 있다. 이 올가미를 걸 때도 순간적인 고통을 못 참아 “목 편하게 해줘요”라고 말하는 사형수도 있다. 이 순간이야말로 이승 최후의 시점이다. 드디어 벼랑 위에 선 것이다. 못다 한 말을 할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이다.2) 비켜 ! 제껴 ! 쾅… 쇠…춘천호 토막살해 사건의 범인 임동원 씨는 무슨 생각이 났던지 낯익은 직원에게 농담조로 “나는 ××때문에 죽으니 당신들도 조심해”라고 내뱉았다. 그 말을 들은 한 직원은 그 뒤 몇 달 동안 ‘발기불능’이 돼버렸다. 목에 올가미를 건 두 연출조 직원이 사형수에게 남기는 인사말이 있다. “잘가!” 그러고는 네모 판자를 재빨리 벗어나면서 “비켜!,”“제껴!”라고 연달아 소리친다. 이미 한 연출조 직원은 별실 뒤쪽으로 돌아 별실 외벽에 붙어 있는 포인트란 손잡이를 잡고 기다리고 있다. “제껴!”란 소리와 함께 그는 손잡이를 잡아 당긴다. 네모난 마루청이 푹 꺼지면서 지하광의 벽을 “쾅”친다. 동시에 사형수의 몸은 지하로 떨어지면서 밧줄에 대롱대롱 매달린다. 주영형 씨 등 몇몇 기독교 사형수들은 떨어지기 직전“주여!”라고 최후의 기합을 넣기도 했다. 그 직전에 집행관을 비롯한 참여 직원들은 서둘러 형장 바깥으로 나가버린다. 지하로 떨어진 사형수의 몸은 핑그르 돌면서 1분쯤 흔들흔들하다가 정지한다. 잠시 그 몸이 퍼득퍼득 경련한다. 어깨와 목을 추스리기도 하지만 미동일 뿐이다. 교무간부, 담당직원, 목사(또는 신부) 등 세 명은 뻥 뚫린 구멍 바로 앞까지 다가가서 큰 소리로 찬송가를 부르고 주기도문을 왼다. “지금 의식이 있어. 기도를 들을 거야 이 시간이 가장 중요해.” 성직자가 그런 말을 하면서 독려하기도 한다. 처음 몇 번 교수형을 목격하는 사람은 이빨이 맞부딪치는 소리를 낼 만큼 덜덜 떤다. 그래서 찬송가를 힘치게 부른다. 쇳, 쇳 하는 소리, 즉 목 졸리는 사형수가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찬송이나 기도 소리 사이로 간간히 들려온다. 그 소리를 안 들으려고 더욱 목청을 높인다. 달아나듯이 형장을 빠져나간 입회인들은 느티나무 주위에 모여 담배를 피워 문다. 사형수 4백여 명의 천주교 대부였던 고중열 씨는 마루청이 둘러빠진 구멍 바로 옆에 앉아 수첩만한 ‘성교 예규’를 꺼내 임종경을 큰 소리로 꼭 읽어갔다고 한다. 대자의 몸뚱이가 매달린 것을 내려다 보면서 “예수는 나를 구하소서. 예수는 나를 구하소서. 천주여 내 영혼을 거두소서. 성모마리아는 날 위하여 비소서…” 이렇게 경을 외는 소리를 죽어가는 사형수가 알아듣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고씨는 말한다. 죽어갈 때 청각이 가장 오래 살아남아 있는 것 같더란 것이다. 고씨의 독경은 사형수의 숨이 끊어질 때까지 계속된다. 고씨는 사형수의 운명 순간을 언제나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고 증언한다. 운명 직전에는 반드시 발끝이 파르르 떨리고 그러면서 긴장상태의 목숨에서 무엇이 빠져나가는 듯이 몸뚱이가 축 아래로 쳐진다는 것이다.3) 30분간 매달아 놓아교수형이 모든 사형방법 가운데서 고통이 가장 적다는 견해가 일치하고 있다. 교살일 경우 시체부검을 해보면 사정의 흔적이 발견되는 예가 많다. 그래서 교수형에 처해진 사형수가 황홀경 속에서 간다고 얘기하는 이도 있으나 ‘죽어본’사람이 없어 확인할 방법이 없다. 심장이 멎는 것을 죽음으로 정의할 때 교수형의 경우 평균 사망시간은 교수 시작으로부터 14분쯤이라는 것이 일본측 통계다. 개인차가 많아 최단 4분35초, 최장 37분이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선 매단 지 약 20분이 지나면 일단 시체를 끌어올린다. 상체가 마루청 위로 드러날 정도로 끌어올려 놓으면 의무관이 와서 사형수의 가슴을 풀고 청진기를 갖다 댄다. 사망을 확인한 뒤에는 다시 지하로 늘어뜨려 5분 이상 더 달아두었다가 시체가 된 사형수를 풀어놓는다. 달려 있는 총 시간은 30분쯤이다. 사망진단서에는 ‘刑死’라고 쓴다. 밧줄에 매달렸을 때 사형수의 발은 지하 바닥에서 약 40cm쯤 공중에 떠 있다. 연출조 3명은 실내 계단으로 지하실로 내려가 시체를 풀어 그냥 바닥에 눕혀 둔다. 교수형에 처해진 시체의 외상은 못의 밧줄 감긴 자국이 가장 두드러진다. 떨어지는 충격으로 밧줄이 목을 홱 휘감아 지나간 마찰력으로 시커멓게 피멍이 나 있다. 자동차의 스키드 마크 같다. 혀도 입사이로 빠지고 눈알도 약간 튀어나온다. 그밖에 출혈은 없는게 보통이다. 눈알이 튀어나오는 것을 막으려면 안대를 씌워야 하는 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 다만 김재규와 그의 하수인에게만 안대를 씌워준 뒤 집행했다. 교무직원들은 구멍 앞에서 몇 분간 찬송과 기도를 올리고는 곧장 사무실로 돌아온다. 사무실에서는 미리 연락을 받고 달려온 천주교, 신교, 불교의 신앙자매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다. 이들에게 직원들은 “×××는 아주 편히 갔습니다”고 말해준다. 이때만은 종교간의 구별이 없이 한마음으로 예배를 드린다고 한다. 한30분쯤 쉰 직원들은 다음번 차례를 위해 집행장으로 향한다. 사형수들이 가끔 눈이나 콩팥을 기증하여 기사거리가 되곤 한다. 눈은 사망시간이 상당히 지난 뒤에 떼어내도 손상이 없으므로 별 문제가 없다. 콩팥은 사망한 지 20분쯤만 지나면 급속도로 손상되기 시작한다. 사형집행의 관례상 30분 이상 매달아 두어야 하므로 콩팥이 손상될 가능성이 있다. 이 문제로 이식수술을 맡은 외부 의사와 사망진단을 내리는 의사 사이에 다툼이 벌어지기도 한다. 시간이 너무 지나 콩팥을 이식받을 경우 환자가 부작용으로 죽을 수도 있다. 콩팥 기증을 약속한 사형수가 죽으면, 시체를 즉시 교도소 의무실로 운반한다. 거기서 콩팥을 떼어낸다. 사전에 서울 시내의 콩팥관계 환자들 중 이식수술을 받을 만한 사람들을 여러 명 후보로 뽑아 비상대기 시켜둔다. 사형수 체질을 검사하여 그것을 이식받아도 거부반응이 적을 것 같은, 여러 가지로 소질이 비슷한 환자에게 이식수술을 해주는 것이다.4) 너무 굵어 고통 심한 밧줄지금도 쓰이는 서울구치소의 교수용 밧줄은 언제부터 있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일제시대부터 있었다는 얘기도 있으나 다른 이들은 해방 뒤부터 쓰여진 것 같다고 말하고 있다. 40여 년간 이 밧줄은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김재규, 문세광, 박선호, 김대두, 박철웅, 주영형, 조봉암, 황태성, 이수근, 조용수, 최인규 등 희대의 살인마와 좌절한 정치인, 실패한 암살자, 간첩 등이 이 밧줄에 매달려 생을 마감했다. 앞으로도 또 누구의, 얼마나 많은 생명을 앗아갈지 모른다. 이 밧줄은 마닐라 삼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올가미 부분은 그 수많은 목에서 배어나온 지방성분과 피가 묻어 새카맣게 반들반들하다고 한다. 고중열 씨는 「서울구치소」란 저서의 끝에서 이런 실토를 했다. “…또 한가지는 밧줄이다. 일제시대부터 사용되어온 밧줄은 그 굵기가 젊은이의 팔목 정도라서 목에 걸치고 매달리게 되면 쉽사리 넘어가지 않는다. 차라리 떠나보내야 할 바에는 가느다란 로프를 사용해 긴 고통없이 보내는 것이 나으리라 생각한다. 몇몇 담당자들은 그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이를 누가 건의하려 들지 않았고, 그러다 그 직을 물러나왔다. 언제나 이 안타까운 실정은 해소되려는지…” 고씨가 안타가운 호소를 한 지 8년이 흘렀지만 그 밧줄은 그대로다. 굵은 밧줄이 목에 제대로 걸리지 않을 땐 사형수가 오랫동안 고통스럽게 허우적대고 씩씩거린다고 한다. 사형장의 기구는 교체되는 법이 없다. 바꿔 끼우면 구치소장에게 재앙이 온다는 미신 때문이란 얘기도 있다, 지방의 어느 교도소에선 교수용 밧줄이 끊어져 사형수가 지하실 바닥에 떨어진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 사형수는 비몽사몽간에 “여기가 지옥이냐, 천당이냐”고 울부짖었다는 것이다. 서둘러 밧줄을 잇고, 올가미를 늘어뜨려 지하에서 다시 목에 걸어 끌어올리는 방법으로 교수형에 처했다는 것이다. 서울구치소에서 밧줄 길이를 너무 길게 잡아 떨어진 사형수가 매달리지 않고 지하실 바닥에 부딪쳐 부랴부랴 끌어올려 집행한 적도 있었다. 봉건시대에는 사형집행의 실수로 생존한 사형수는 특별 사면해주는 관습이 세계적으로 보편화돼 있었다. 두 번 죽일 수는 없다는 배려에서였다.5) 올가미 벗겨져 두 번 죽은 사형수몇 년 전 어느 형장에서 있었던 밧줄 사고는 좀더 확실하다. 어는 가냘픈 청년 사형수의 목에 밧줄을 걸고 포인트를 잡아당겼더니 사형수의 몸이 지하로 떨어질 때 밧줄이 그만 벗겨지고 말았다. “쿵”소리와 함께 사형수는 높이가 4m쯤 되는 지하실 바닥에 낙하, 머리가 터지고 피가 튀었고 정신을 잃고 있었다. 직원들이 지하로 뛰어 내려가고, “밧줄 내려”라는 부르짖음이 들렸다. 지하로 밧줄을 잡아당겨 지하에서 사형수의 목에 밧줄을 걸고는 밧줄을 당겨 올려 사형을 집행했다. 집행인 측에서 가족들이 시신을 확인하고 항의를 할까 봐 겁을 냈다. 그래서 다음날 새벽 관을 뜯고, 사형수의 시체를 끄집어내, 머리와 가슴에서 피를 닦고 광목으로 싼 뒤 다시 입관시켰다. 그날 오후 이 관을 인수한 유족은 관 뚜껑을 열었으나 사고를 눈치채지 못했었다고 한다. 이 사형수의 이름을 밝히면 그 가족들이 마음 아플 것 같아 덮어두겠지만, “개잡는 듯한…”이란 표현이 직원들로부터 안 나오도록 법무부장관은 제발 이 밧줄을 현대화하여, 이왕 보내야 할 사람이면 조금이라도 편하게 보내야 할 것이 아닌가. 두번 죽은 이 사형수의 고통은 무엇으로 갚을 수 있을까. 기분이 나쁘겠지만 사형을 명령하고, 사형을 선고하는 분들이 꼭 알아두어야 할 일이 또 하나 있다. 서울구치소의 포인트, 즉 잡아당기면 마루판이 꺼지고 사형수가 지하로 떨어지도록 하는 손잡이(교수형장의 외벽에 붙어 있음)가 고장나도 고쳐주지 않아 직원은 잡아당긴 채 두 발을 벽면에다가 갖다대고 벽을 밀어붙이면서 사형수의 몸뚱이와 함께 시소처럼 30분간 매달려 있는 모습을 한번 상상해보라. 사형 반대론을 편 서울대 김철수 교수는“…사형제도는 사형선고인, 사형집행 확인인 등의 인간의 존엄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고 주장했다. 유언을 가족에게 전달도 않거나 적당히 알리고 진행을 서둘러 유언조차 못하게 하는 일, 그리고 이런 밧줄, 이런 포인트가 바로 사형을 집행하는 측이나 당하는 측 쌍방의 인간존엄성을 함께 더럽히는 것이리라.6) 집행인들 중 사형반대자 많아사형이 차례로 집행됨에 따라 지하실 바닥엔 시체들이 나란히 놓이게 된다. 옛날(1950.1960년대)엔 하루에 20명까지도 집행됐지만 요즘은 한번에 5-6명씩 집행하는 것이 보통이다. 한 명당 30분-1시간씩 걸린다. 집행이 끝나면 관을 들고 지하로 내려가 시체를 입관시킨다. 수의의 수인번호와 용수에 적힌 수인번호를 대조한 뒤 시체를 넣은 다음 백묵으로 관 위에다가 번호를 적어놓는다. 옷을 갈아 입히지 않고 얼굴만 닦는다. 관은 꼭 일곱 마디로 묶는다. 예산 사정이겠지만 관을 너무 허술하거나 작게 만드는 일도 있다. 이팔국 씨는 몸이 장대하여 관이 옆으로 터져 버렸다. 입관이 끝나면 관들을 집행장(1층) 마루로 들어올린다. 쥐나 벌레 등 잡것이 침범하지 못하게끔 철망을 씌운 뒤 그날 밤을 보내게 한다. 당직을 따로 두지는 않는다. 집행장 바로 옆에 망루가 있기 때문이다. 이날밤 그곳에서 보초 서는 사람들은 사색이 된다. 1982년, 1983년처럼 한 여름에 집행이 있었을 때는 시체가 썩어 그 냄새가 현장 부근에 진동하였다고 한다. 구치소 직원들이나 성직자들은 무슨 급박한 일이 있다고 복중에 집행을 하느냐고 불평이 대단했다. 사형수 1인당 집행비용은 12만 원이다. 집행이 끝나면 돈이 기만 원 정도 남는다. 이 남은 돈으로 가난한 사형수의 뒤치닥거리도 하고 그래도 남으면 술값으로 쓴다. 집행에 참여한 직원들에겐 오후에 자유시간을 준다. 집행이 끝났을때 그들은 눈에 핏발이 서는 등 제 정신이 아니다. 이들은 서둘러 구치소 근처의 술집으로 몰려간다. 깡소주만 1,2,3차로 밤새도록 퍼 마신다. 거의가 집에 들어가지도 않는다. 그 전날 밤에도 잠을 못 이룬 사람들이 많았을 텐데도, 아무리 합법적인, 또 사회정의를 위한 ‘살인’이라 해도, 그들의 손에 죽어간 사형수들은 오랬동안 부대끼면서 정이 들었던 얼굴들이다.고중열 씨 같은 고참들도 “사람이 참으로 선하게 되었을 때 죽어야 한다는 것이 가장 가슴 아픈 일이었다”고 했다. 더구나 현장에서 “억울하다”는 유언을 남긴 사형수가 있다든지, 옆에서 아무리 지켜봐도 무고한 것 같던 사람이 끈질긴 구명의 몸부림도 소용이 없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것을 목격했을 땐, 법의 정의를 세운다는 보람이 생기지 않는다는 이들이 많다. 어느 사형집행인은 집행 뒤의 소감을 “한 마디로 미친 짓 한 거지요”라고 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열렬한 사형반대론자들은 사형집행인이다.7) 신앙은 일종의 마취제?매주 사형수를 만나 교화에 힘썼던 여신도들 중에는 ‘편안히 갔다’는 목격담을 듣고 자랑이나 보람만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사형수 교화라는 것은, 결국 사형수가 소동을 부리지 않고 죽어가도록 만드는 일종의 마취제가 아닌가'하고 회의하는 여신도들도 더러있다. 특히 사형수가 억울하다고 발버둥 칠 때, “나는 법률적인 것은 상관 않겠다”는 입장에서 ‘죽음을 받아들여라’는 말로써 신앙만 심어주려 해서야 되겠느냐, 하는 의문을 많이 가졌던 사람일수록 ‘양순하게 갔다’는 의미를 되씹어보게 된다는 것이다. 사형수의 사체는 집행된지 24시간이 지나야만 유족에게 넘겨주게끔 돼 있다. 사형수의 시체는 정문출입이 허용되지 않는다. 물자, 쌀 쓰레기 등을 들여오는 통용문을 통해서 유족이 가지고 온 영구차가 들어오도록 돼 있다. ‘…정히 인수한다’는 인수증에 도장을 찍어주고 시체를 인수한 가족은 정비공장쪽으로 통하는 후문으로 빠져 나가야 한다. 이때 유족의 태도는 갖가지다. 죄스럽고 부끄러워 조용히 왔다가 슬그머니 사라지는 가족이 있고, “죄없는 내 자식 왜 죽였어”라고 호통을 친 사람도 있다. 아들의 악행에 대한 책임감은 조금도 보이지 않고 아예 드러누워 악에 바치는 저주를 하여 ‘사형수는 역시 가정에서 만드는구나’하는 소감을 불러일으키는 강파른 유족도 있다. 가족이 나타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주소지로 전보를 쳤더니 ‘유일한 생존가족은 90세 조모임. 중병에 걸려 누워 있음. 서울 갈 차비도 없다고 하니 사체는 적의 처리 바람’이란 동장의 답신이 날아오기도 한다. 옛날엔 연고자 없는 사체는 벽제에 가매장하였다. 요사이는 묻힐 곳이 없는 가난한 사형수를 위해선 교인들이 장지를 마련하여 장례식까지 대신 치러준다.6. 맺음말 : 사형제도의 인도적 운영을 위한 건의사형제도의 운영이나 사형집행은 인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사형수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집행인과 국가공권력의 권위를 위해서 그러해야 한다. 첫째, 억울함을 주장하는 사형수에 대해서는 상당기간 사형집행을 유예하여 새로운 증거가 나타날 수 있는 시간을 주어야 한다. 둘째, 너무나 까다로운 개심 개시 결정의 조건은 청구인의 이익을 위한 방향으로 탄력성 있게 해석해야 한다. 고문의 입증, 위증의 입증이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한국적 상황에서 또 오판의 가능성이 많은 풍토에서 재심 제도의 까다로운 운영은 무고한 사형수가 누명을 벗는 길을 제도적으로 봉쇄하고 있다. 셋째, 사형집행의 예고제를 신축성 있게 해야한다. 적으로 집행기일 4-5일 전에 집행 기관에게 통보하여 사전준비(신체 이식준비, 형구 및 장례용품의 준비와 점검, 사형수 교화)를 잘 할 수 있게 하고 말썽의 소지가 없는 사형수에겐 하루나 이틀정도 미리 알려 신변을 정리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속임수를 쓰듯이 후다닥 데려가 서둘러 처형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과 걸맞지 않은 행동이다. 넷째, 형구를 현대적으로 개량하여 고통이 적게 집행이 되도록 해야 한다. 다섯째, 사형수의 유언을 고치거나 빼지 말고 원형대로 유족에게 전달해야 한다. 여섯째, 사체를 가족에게 인계한 이후의 절차제도 행형 당국의 지원(차량, 매장이나 화장 수속 등이 계속 돼야겠다). 일곱째, 사형수들에 대한 생산적 활동의 허용이 아쉽다. 집필, 취미활동, 종교활동 등에 대한 특별한 배려가 필요하다. 여덟째, 사형 문제를 이성적으로 공개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 조성에 노력해야겠다. 사형은 사형수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의 문제이다. 예수도, 소크라테스도, 안중근도 사형수였다. 아홉째, 오판 문제에 대한 활발한 비판과 토론을 통해 한국의 재판 제도가 개선되어야 한다. '확정판결이 곧 진실이다' 는 우상숭배는 '억울한 사형'의 토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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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광복절인가, 건국절인가?
광복절인가, 건국절인가? (아고라 화마님 글, 편집 가자서)
8.15은 우리민족에게 커다란 의미가 있는 날이다. 하나는 일본으로 부터 식민지배를 벗어난 공식적인 첫날이고, 48년 정부수립첫날이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8.15은 우리민족에게 기쁨을 주던 날이다. 하지만 두번째 정부수립의 날은 우리민족에게 암울스러운 슬픔을 주게되었다. 한반도에 하나의 정부수립이 아닌 두개의 정부수립을 확정지은 날이었기 때문이다. 첫번째 날은 한반도에 하나의 정부 하나의 민족정권이 세워져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를 영토로 하는 대한민국이었다면, 두번째 날은 향후 60년이 넘는 분단의 세월을 겪게하는 시발점이었기 때문이다. 첫번째 날에 모든 국민이 환호했고 독립군 정치세력이 환호하였지만 두번째 정부수립의 첫날은 친일파와 그 정권주체만이 기뻐했다는 점이다.
생존하고 있는 독립투사들은 이구동성 말한다. 지금은 대한민국은 자주적인 국가가 아니라고 지금의 대한민국은 반절의 나라라고, 그 이유는 한반도의 두개의 정권이 들어서 있는 것이 바로 현재의 비극성을 심화시키는, 한반도에 정통성이 없는 두개의 정부가 있는 것이라고. 진정한 독립은 바로 두개의 나라. 북한과 남한이 하나가 되어있을때 정통성과 진정한 독립이 이루어진것이라고 말이다.
임정의 정신은 통일된 조국을 위해서 였다. 그리고 광복의 의미는 통일된 조국건설을 위한 정치인들의 꿈이자 이상이었고 대다수 정치가들은 이것이 원칙이라고 부르짖었다. 몽양 여운형선생과 백범김구선생의 꿈은 하나의 조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이념의 그늘을 던져버리고 민족을 강조했다.
그것은 이데올로기가 민족통일의 하나의 도구이지 원칙이 아닌라는 것을 공식적으로 천명했고, 몽양 백범 우사 등 민족지도자들에게 의해서 구체화되었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는 북한의 김일성, 박헌영과 남한의 이승만은 이념의 이데올로기를 원칙으로 생각하고 민족을 하위로 생각하는 우를 저질렀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민족의 독립을 부르짖었던 독립투사는 맞으나, 민족을 자신의 이데올로기의 하위개념으로 생각했었고 자신의 정권욕이 민족보다 우선했던 자들이었다.
김일성의 독재와 이승만의 독재는 하등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이승만의 독재가 김일성의 독재보다 더욱 지독한것 이었다. 왜냐하면 60년동안 청산되어야 했던 친일파 청산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사람이 바로 이승만이었기 때문이다. 8.15이후의 지상과제를 반공을 국시로 친일파 청산을 막고 반민특위를 해산한것도 이승만이요, 자신의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몽양과 백범선생을 살해한것도 바로 그가 아니었던가...
지금 뉴라이트는 하나의 발악을 하고 있는 것이며 의미축소를 통하여 자신의 생존을 도모하는 모리배들, 매국노와 다르지 않다. 조선은 통치할 능력이 없고 일본에 의해 통치받아야 할 나라가 보았던 친일파 매국노의 논리로써 반공을 국시로했던 과거를 그대로 답습하고 자 하는 것이었다. 오호 통재라, 나라를 잃어버렸던 과거를 그들은 영광의 시기로 독립군 지도자의 그후예들을 하나의 역적집단으로 테러리스트로 독립군의 후예는 처참한 말로를 걷고 있지만 일본 육사를 나와서 대통령이 되었고, 그 후예가 한국의 강력한 여당지도자로 행세하고, 대통령이라는 자가 태극기를 거꾸로 들고 일왕에게 고개를 숙이고, 뿐만 아니라 용서했다는 오만을 저지르는 것을 볼때마다 피가 거꾸로 흐른다.
대한민국은 임정의 정신을 계승하였다고 헌법전문에 나와있다. 이것은 하나의 통일된 조국을 염원하는 상징적인 말로써, 남과 북이 하나되어 다시한개의 조국을 염원한 말이다. 그러나 그 말의 주창자는 국립묘지가 아닌 효창공원에 묻혀져 있다. 그 당사자는 하나의 조국을 만들치 못한채 안두희의 총탄에 쓰러져 버렸다.
매국노들은 건국절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살아남기 위한 더러운 역사왜곡이며, 일본우익에 동조하는 논리일뿐이다. 김구는 임정법통론을 승계하엿다는 대한민국 정부의 말을 부정했다. 왜냐하면 반절의 대한민국은 그것을 부정하고 출발한 반민족적인 정권이었기 때문이다. 역적들을 , 매국노들을 청산하지 못하고 두개의 나라로 쪼개져서 출발했는데 그것이 어떻게 진정한 광복이 될수 있느냐의 말이다. 상식적으로 봐도 옳은 말이다. 백범선생은 자신의 소원은 첫번째도 독립이요, 두번째도 독립이요, 세번째도 독립이다 . 지론의 선생과 정권의 야욕에 눈이 먼 이승만과는 격이 다른 인물이다. 그가 3.8선을 넘고 대한민국의 수립을 반대한 이유는 하나의 통일정부를 염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쪽과 북쪽에서 외세를 등에 업은 괴물들이 진정한 독립군 지도자들을 암살하고, 수용소로 보내고, 그 들 덕택에 우리는 이땅에 전쟁이라는 홍역을 치러야 했다.
광복은 하나의 통일 정신을 염원하는 바로 상징적인 어휘, 두개의 나라로 갈라진 한민족을 다시 묶고자 하는 이념적 지표이다. 그러나 건국은 이러한 정신을 부정하고, 하나의 민족을 이념의 하위수단으로 묶어서 반대의 적을 상정하여 끊임없이 전쟁위기를 설파하고, 같은 민족을 적이라 가르치며, 친일청산을 외치면 반공의 이데올로기에 어긋난다고 하면서 빨갱이로 몰았지 않은가.
조봉암선생이 그러했고 조용수 사장이 그러했으며, 수많은 민족지도자들이 반공의 이데올로기에 죽음당하고 고문당해야 했으며 일평생을 암울하게 보내야 했지 않은가. 이제 헌법의 전문에 명시된 그 말조차 벗어던지려고 하는가. 이제 친일파의 나라와 싸워야 하는가 .
건국절을 주장한 그들에게 과연 동조하는 사람들은 정권에 눈먼 사람들이나 하는 짓거리이다. 건국절에 동조하는 당신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인 인가 ? 아님 일본의 앞잡이 혹은 일본인 인가 ?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 부터 나온다.
헌법에 가장 먼저 나오는 제 1조 항목입니다.
촛불을 든지 3개월이 지난 지금
헌법이 우리의 가슴속에 이렇게 다가온 적이 없었던것 같습니다.
이제 대한민국은 누구 하나에 의해 좌지우지 되지 않습니다
진정한 민주주의, 국민의 주인이되는,
국민의 주권이 살아있는 나라임을 촛불이 보여주었습니다.
이명박정부의 폭정으로 촛불을 더욱 커질 것입니다.
그리고 국민주권의 시대는 수천의 촛불로 인해
빠르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국민주권의 시대!
그 시대에 맞는 촛불을 생각하면
'국민주권기'를 두가지 만들어보았습니다.
국민 주권의 시대를 향해 함께 깃발을 펄럭여 보았으면 합니다.
100차 촛불 + 광복63주년기념 8·15민족통일대회
고개 바짝 들고 눈까지 부릅뜨고
너 취업 다했다 ㅋㅋㅋㅋ
'친일파 할아버지 고맙습니다' 라는 시사in 기사가 제 귀가를 맴돕니다
이런 현실이 오늘날 친일부정수구 매국세력에 의해 점령당한 한국의 모습입니다
가자서작성일
2008-08-16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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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보도연맹 학살...
■월간 세상만들기 기고
국가권력의 또다른 양민학살-보도연맹
김주완/경남도민일보 시민사회부 차장
잊혀진 이름 ‘보도연맹’
“보도연맹을 아십니까?”
1949년 이승만 정권이 대국민 사상통제 목적으로 결성한 좌익전향자 단체인 국민보도연맹(國民輔導聯盟)은 전국의 모든 도·시·군·읍·면·동 단위까지 지부를 갖춘 대규모 조직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한국전쟁 이후 무려 반세기동안 이 단체의 존재를 잊고 살아왔다. 역사에서도 보도연맹의 이름은 아예 지워져 버렸다. 정보의 바다라는 인터넷 검색엔진에서 이 단체의 이름을 쳐보아도 무슨 무슨 노동조합‘연맹’이나 언론‘보도’와 관련된 사이트만 줄줄이 나열될 뿐 온전한 단어를 찾기란 쉽지 않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조직원이 33만명에 달했던 이 거대한 단체에 관한 자료를 찾기가 이토록 어려운 것일까?
그것은 한국전쟁 발발과 동시에 예비검속 및 예방학살이라는 명분으로 군·경이 이들 보도연맹원들을 살해한 후 철저히 은폐해 왔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서 운좋게 목숨을 부지한 연맹원들도 있고 유가족도 살아있었지만 아무도 이에 대해 말을 꺼내진 못했다. 그들의 죽음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곧 자신도 ‘빨갱이’로 몰려 감옥에 끌려가거나 국가권력에 의해 살해될 수 있다는 걸 의미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희생됐다. 대표적으로 일찍이 50년대에 피학살자 문제를 제기한 진보당 당수 조봉암이 끝내 사상범으로 몰려 처형됐다. 60년 4·19직후 양민학살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나선 전국 각지의 유족회 간부들도 이듬해 5·16군사쿠데타와 함께 모두 용공분자로 낙인찍혀 구속됐다. 이처럼 ‘말 많고 똑똑한 자는 빨갱이’란 말은 그냥 생긴 게 아니었다. 빨갱이 취급을 받지 않으려면 그저 입을 꾹꾹 다물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군사정권은 침묵하고 있는 유가족마저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가족은 물론 친지들까지 감시대상에 올려놓고 끊임없이 그들의 자유를 억압했다. 취직도 맘대로 할 수 없었다. 공무원이나 직업군인·경찰은 물론이고, 제법 번듯한 대기업이나 은행도 경찰의 ‘신원조회’를 필한 사람만이 취업의 관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용케 말단 공무원에 합격을 해도 아예 발령을 받지 못하거나 승진·진급과정에서 영락없이 신원조회에 걸렸다. 외국에도 물론 나갈 수 없었다.
이처럼 유족들의 발목에 채워진 족쇄는 80년대 초반까지 풀리지 않았다. 연좌제 폐지로 제도적인 족쇄가 풀렸을 때 학살된 보도연맹원의 유족들은 이미 60대 노인이 돼 있었다. 모든 걸 체념할 나이가 된 후에야 비로소 정부는 그들을 놓아준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억울함을 호소할 자유까지 준 것은 아니었다. 국가보안법은 그 후에도 여차하면 용공분자로 잡아넣겠다고 을러대며 유족들의 침묵을 강요했다. 또 연좌제가 폐지되기 전까지 각 읍·면 지서와 파출소에서 관리해온 연맹원들의 신원과 유가족의 동향에 대한 기록은 지금도 상부기관에서 일괄적으로 보관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50년이 흘렀다. 그동안 정부는 왜 이토록 엄청난 행정력을 투입하면서까지 보도연맹 사건을 비밀에 부치려 노력해왔을까. 그건 이 사건이 나치의 유태인학살이나 캄보디아의 킬링필드에 못지않은 엽기적인 국가범죄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 사건은 나중에라도 진상이 드러났지만 보도연맹사건은 지금까지도 철저히 은폐돼 오고 있다는 점에서 심각성을 더하고 있다. 다시 말해 보도연맹원 학살사건은 50년전에 이미 끝난 사안이 아니라 지금도 유가족들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주고 있는 현재 진행형의 사건이라는 것이다.
학살의 실상
이 사건으로 학살된 보도연맹원의 숫자는 도대체 얼마나 될까.
정부에서 철저히 함구하고 있는 바람에 구체적인 숫자는 알 수 없지만 전국적으로 최소 수만명에서 최대 수십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우선 그 근거로 6·26 직전 전국의 연맹원 수가 33만명에 달했고, 이 가운데 미처 학살할 틈도 없이 후퇴한 서울의 2만여명을 제외하더라도 약 30만명 이상이 학살대상에 포함됐다는 것을 들 수 있다.
필자가 직접 취재한 내용(한국전쟁 전후 경남지역 양민학살의 진상, 1999. 12, 경남정대연 토론회 자료집 및 경남도민일보 기획시리즈 지역사 다시읽기)과 부산매일팀의 89~90년 취재(<울부짖는 원혼>, 1991, 부산매일), 시사저널 정희상 기자의 취재(<이대로는 눈을 감을 수 없소>, 1990, 돌베개) 등을 종합하여 경남지역의 학살자 숫자를 계산해 보자.
우선 마산지역만 1,600여명이 바다에 수장됐고, 김해와 창원군 일부지역에서 750명, 김해 진영에서 335명, 거제에서 730명이 학살됐다. 또 진주시 명석면에서도 약 200여명이 총살됐고, 진양군 금산면에서 100명, 사천에서 100명, 함안군 여항면 여양리 둔덕마을(현 마산시 진전면)에서도 200여명이 학살된 것으로 주민들의 증언에 의해 확인됐다. 이밖에도 울산 869명, 창녕군 200명, 삼랑진 200명, 통영 800명 등이 희생됐으며, 밀양과 남해·하동·함양·산청·의령·함안 등에서도 숫자는 알 수 없지만 어김없이 보도연맹원 학살이 있었다.
일부 지역과 겹칠 수 있는 자료이긴 하지만 50년 9월 3일자 <해방일보>는 진주시 명석면과 산청·하동 등지에서 모두 5,000여명이 학살됐다고 전하고 있다.
이처럼 계산이 가능한 숫자만 해도 당시 경남에선 적어도 1만명 이상이 보도연맹원 사건으로 희생됐다. 또 당시 경남에 소속돼 있던 부산지역에서도 형무소에 갇혀있던 보도연맹원과 정치범 5,000여명을 포함, 약 1만여명이 학살됐고, 마산형무소와 진주형무소의 정치범들도 대부분 학살당했다고 보면 희생자 수는 훨씬 늘어난다. 뿐만 아니라 최근 사회단체에 의해 유골이 발굴된 산청군 시천면 외공리 뒷산의 500여명과 공비토벌과정에서 무고하게 학살된 거창·산청·함양학살사건 희생자 1,700여명, 산청군 시천·삼장학살사건 200여명 등 보도연맹 이외의 사건까지 모두 합치면 적어도 부산·경남에서만 대략 3만여명 정도로 추산할 수 있다. 이같은 학살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더 밝혀질 여지가 많다. 실제로 필자는 취재과정에서 도내 어느 지역을 가더라도 학살에 관한 증언을 쉽게 들을 수 있었고, 너무나 쉽게 피학살자의 집단 암매장터를 확인할 수 있었다. 여러 가지 사정상 나머지 취재를 후일로 미뤄 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같은 사실로 보아 전국적으로는 한국전쟁 발발 후 1년여 기간동안 약 30만명이 학살됐다는 주장은 충분히 일리가 있다. 또 1945년 해방이후부터 53년까지 약 8년간 100만명의 민간인이 미 군정과 이승만 정권 치하에서 학살됐다는 주장도 전혀 무리는 아니라고 본다.
고의적이고 계획적인 살인
특히 보도연맹원 학살은 노근리 사건 등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이나 한국군의 베트남 양민학살과 달리 철저히 고의적이고 계획적인 집단살인행위라는 데 주목해야 한다.
우선 이 사건은 개전 초기인 7~8월 북한군이 점령하지 않은 비전투지역에서 이뤄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적군과 교전 중 피아를 구분하기 어려웠다거나 적군과 내통한 혐의로 처형했다는 식의 변명은 아예 통할 여지가 없다.
또한 학살 주체가 당시 이승만의 친위대였던 특무대(CIC)와 헌병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경찰과 우익단체가 보조적인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에서 일관된 명령체계에 의해 자행된 조직적인 학살이었다.
당시 목격자와 유가족의 증언에 따르면 서북청년단이나 대한청년단 등 우익단체와 경찰이 보도연맹원을 색출 또는 소집하여 형무소로 연행했고, 특무대가 일정한 선별작업을 거쳐 헌병이 학살을 집행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마산의 경우 7월 15일 평소와 같이 시민극장 등 2곳에서 시국강연회가 있다며 연맹원들을 소집한 후 모두 마산형무소로 연행했다. 또 인근 농촌지역의 경우 면소재지 지서나 파출소에서 평시처럼 교육 또는 훈련을 핑계로 연맹원들을 불러 모은 후 그대로 군용트럭에 실어 형무소로 끌고갔다.
이렇게 끌려간 연맹원들은 8월 들어 LST(상륙함)에 실려 나가 마산 앞바다에 모두 수장학살됐다. 마산시 구산면 심리·원전·옥계·남포·설진리 해안에는 연일 나일론 줄로 7~8명씩 묶인 시체가 떼밀려 왔다. 심지어 대마도에도 일본 어민들의 그물에 학살된 시체가 워낙 많이 걸려 들어 조업을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함안군 여항면 여양리 둔덕마을 골짜기의 학살은 헌병이 연맹원들을 총살한 후 그 뒤처리를 경찰에 맡긴 경우다. 이곳의 학살은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사건이므로 좀 언급을 하고 넘어가는 게 좋을 것 같다.
진주가 인민군에 함락되기 며칠전인 7월 하순 어느날 오전 8시쯤이었다. 진주시 반성면에서 마산방면 국도를 따라 10여대의 군용트럭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발산고개를 넘고 있었다. 트럭에는 흰 모시한복을 입은 민간인들이 가특 타고 있었고, 그들은 모두 손을 뒤로 한 채 묶여 있었다. 트럭은 마산시 진전면 양촌리 대정마을에 멈췄다. 트럭에서 지휘관인 듯한 헌병장교가 내렸다. 그는 지서를 찾았고, 곧이어 전투복 차림의 지서장과 순경들이 달려왔다.
그 장교가 지서장과 뭔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트럭에 실린 민간인들은 사방에서 총을 겨누고 있던 군인들의 명령에 따라 고개를 푹 숙인채 죽은 듯이 서 있었다.
“트럭은 적재함 난간을 올려세운 상태였는데, 사람들이 모두 서 있었지. 트럭 한 대에 30여명이 탔으니까 그들이 모두 앉으려면 자리가 비좁았던게지. 아마 거기서 헌병장교는 지서장을 통해 총살장소를 물색하고 있었던 것 같아.”
당시 이 모습을 목격한 옥방마을의 박모씨(69)는 이렇게 50년전의 기억을 더듬어냈다.
지서장과 얘기를 마친 장교는 다시 차에 올라탔고, 트럭은 대정마을을 지나 옥방을 거쳐 둔덕골짜기로 올라갔다. 이 골짜기는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경영하던 소화광산이 있던 곳이었다. 당시 이곳은 구리가 났었는데, 해방후에도 곳곳에 폐광이 남아있었다. 헌병들은 저수지 윗쪽 금굴이라는 폐광 앞으로 민간인들을 끌고 갔다. 곧이어 찢어발기는 듯한 총성이 둔덕 골짜기에 메아리쳤다.
“그때 우린 겁이 나서 집안에 처박혀 있었지. 총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지만 누가 나가볼 사람이 있겠어.”(김모씨·여·92·옥방마을)
총성에 놀랐는지, 갑자기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엄청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핏물이 개울물에 씼겨 내려오기 시작하더라구. 그때 비가 안왔더라면 피비린내가 더 진동했을거야.”
200명은 족히 넘는 민간인을 이렇게 학살한 헌병은 다시 지서장을 찾았다. 그에게 처형된 사람의 숫자를 말해주고 “혹시 목숨이 붙어있는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르니 철저히 확인사살하라”는 지시를 내린 후 마산쪽으로 빈 트럭행렬을 몰고 사라졌다.
명령을 받은 지서장은 그동안 집안에서 숨을 죽이고 있는 마을 사람들에게 동원령을 내렸다. 시체를 치우러 나오라는 것이었다. 둔덕과 옥방마을의 20세 이상 남자는 모두 이 일에 동원됐다. 과연 헌병의 예상대로 온몸에 총을 맞고도 그때까지 살아있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때 시체를 묻어주고 온 시숙이 벌벌 떨면서 ‘목숨이 붙어있는 사람이 살려달라고 하는데 그냥 산채로 묻을 수밖에 없었다’면서 엉엉 울더라구. 경찰이 옆에서 지켜보고 있으니 살려줄 수가 있나. 어휴 지금도 소름이 끼치네.”(김모씨·여·78·둔덕마을)
목격한 주민들의 말을 종합하면 당시 진주가 인민군에 함락될 상황에 처하자 국군이 마산쪽으로 후퇴하면서 진주형무소에 있던 정치범이나 보도연맹원들을 이곳에서 학살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보도연맹원 학살은 이처럼 국군의 후퇴시기와 맞물리면서 전국적으로 일정한 시차와 기간을 두고 진행됐다. 이는 현지 군인들의 즉흥적인 판단에 따른 것이 아니라 최상층부의 지령에 따라 일률적으로 집행됐다는 혐의를 짙게 하고 있다.
왜 죽였나
그렇다면 왜 이같은 가공할 학살이 벌어진 것일까. 우선 보도연맹이 비록 좌익에서 전향한 사람들로 구성됐다고 하지만, 막상 전시에는 이들이 인민군에 가담할 것을 우려해 예방차원에서 학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 정부는 보도연맹원 중 상당수가 신변보호 차원의 위장전향자로 보고 있었고, 전쟁이 일어나자 미리 화근을 없앤다는 차원에서 예방학살을 지시했을 가능성이 높다. 대검찰청의 좌익사건실록에 따르면 위장전향한 가입자들은 지하좌익세력과의 연계를 통해 세력확대를 위한 음성적인 협력을 했고, 한국전쟁 중에는 남한을 점령한 북한의 당조직 재건사업에서 그 활동을 인정받아 조선노동당원으로 입당하기도 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또한 일설에 의하면 한국전쟁중 어느 헌병대장이 “서울은 지금 보도연맹원들이 폭동을 일으켜 군과 경찰이 큰 희생을 당했다”고 했다고 한다.(청주기독교방송, “운명의 그날, 설마 국군이”, <보도연맹을 기억하십니까> 2부, 한지희, 국민보도연맹의 조직과 학살, <역사비평>, 96년 겨울호에서 재인용)
물론 이처럼 위장전향자가 있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이들은 인민군 점령 후 노동당에 가입하거나 인민위원회 등에 가담, 보도연맹원 유족들과 함께 군·경 및 우익단체 회원을 살해하는 데 앞장선 사례도 발견된다. 그러나 이는 대부분 개전 초기 군·경의 보도연맹원 학살에 대한 보복차원에서 이뤄졌다.
또한 서울에서 보도연맹원들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것도 확인되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처음 전쟁이 발발했을 때 보도연맹원들은 별다른 동요가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
오제도·선우종원과 함께 사상검사로서 보도연맹 창설과 서울지구 보도연맹 운영에 핵심멤버로 관여했던 정희택의 증언이다.
“6·25가 터지자 나는 서울의 보련 맹원들을 각 구별로 집합시켜 그들의 동태를 장악했어요. 이들을 시켜 서울로 쏟아져 들어오는 피난민 안내, 구호사업, 포스터 첨부 등의 일을 했어요. 일부 시민이 피난을 떠나고 행정도 마비돼 갔지만 1만6,800명의 보련은 일사불란하게 상부명령에 따라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요.”(서중석, <조봉암과 1950년대> 하, 역사비평사, 1999, 604쪽)
정희택은 수복 후 군·검·경 합동수사본부 심사실장으로 부역자들을 다뤘는데, 보도연맹원이나 서대문형무소 안에 있던 대부분의 좌익범들 중에 부역자들이 적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공산측으로부터 배척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이로 보아 서울에서 보도연맹원들이 폭동이 일으킨 것을 보고 학살명령을 내렸다는 것은 낭설에 불과하다.
오히려 서중석 교수는 일제가 패배에 임박하여 사상범이나 요시찰 인물을 학살하려 계획했던 것과 비슷하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승만이 전쟁 사흘만인 29일 대전으로 피란한 후 발표한 ‘비상사태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과의 연관성에 주목하고 있다.
종전에 임박하여 일제는 한반도에 전선이 형성될 것에 대비, 비상사태에 따른 조치를 마련하였는데, 그 골자는 연합군이 상륙하면 공산주의, 민족주의 요시찰인을 예비검속하고, 전선이 경찰서에 가까워지면 예비검속자를 후방으로 옮기고, 그럴 여유가 없으면 적당한 방법으로 처치하라고 한 것으로 전국의 경찰서장에게 암호문으로 전달됐다.(임대식, 친일·친미경찰의 형성과 분단활동, <분단 50년과 통일시대의 과제>, 1995, 서중석, 위의 책에서 재인용)
사실 보도연맹이라는 조직 자체가 일제 때 사상탄압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에서 따온 것이라는 점에서 볼 때 당시 권력 상층부에서는 전시의 이들에 대한 처리 문제에 대해서도 일제의 사례를 그대로 도입했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이같은 학살계획은 전쟁 10년 후인 60년 3·15마산항쟁과 4·19시기에도 입안된 적이 있다. 경찰과 이승만 정권은 당초 3·15마산데모를 거물 공산주의자의 배후조종으로 몰아가려 했으나 실패하자, 다시 이를 입증하기 위해 마산에서 복무한 경험이 있는 전직 사찰계 형사 30명을 마산에 투입, 시위군중 속에 들어가 ‘인민공화국 만세’를 외치고 불온유인물을 배포한다는 가공할 계획을 세웠다는 것이다.
“그들(시민으로 위장한 사찰계 형사-인용자)은 월북한 사람이나 6·25때 학살된 사람의 유족들과 해방직후 좌익단체에 이름을 건 일이 있는 시민들과 사귀면서 선동…일촉즉발의 심정에 사로잡힌 시민들이 데모를 일으키도록 유도하는 것이 첫 사명이었다. 그리고 데모가 발생한 후엔 군중 틈에 끼어서 ‘인민공화국 만세’라는 등 불온 선전물까지 살포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 결과 붙잡히게 되더라도 공작비밀계획은 절대로 누설않고 그 새 사귀어 온 사람들과 접선한 것처럼 자백한다는 것이다. 이들을 매수하기 위해서 경찰은 그들이 징역을 사는 십년동안 가족의 생활을 보장해 준다는 등 별의별 특전을 베풀기로 미리 약속하고 지키기로 했다. 또한 이들의 가장 큰 포섭대상엔 기자들이 끼어 있었다.(…중략…) 만약 4·19가 벌어지지 않았더라면 이 흉계는 실현되어 수많은 의거 시민과 기자들이 빨갱이로 몰려 투옥되고, 3·15 마산의거도 빨갱이의 장난으로 규정되고 말았을 것이다.”(지헌모, <마산의 혼>, 도서출판 엠씨와이, 1994)
“그리고 그 당시 전율할 음모가 그들의 계획대로 진행될 것을 전제로 하고, 시내 모처에서 시민대량학살계획이 모의되었다는 무서운 풍문이 유포되었다.”(김태룡, 3·15마산의거의 역사적 고찰, <마산시사자료집>1집, 1964)
이 비밀계획서는 부산지검이 4월혁명 이후 경남도경 사찰분실에서 입수했으나 아직도 그 전모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전시가 아닌 평시에 반정부 시위가 일어난 걸 갖고도 이런 가공할 음모를 세우는 정권이었으니, 전쟁 때 보도연맹원에 대한 학살명령을 내리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학살, 그 이후
이같은 엄청난 학살에 대해 그동안 우리정부는 어떤 입장을 갖고 있을까.
5·16쿠데타 이후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유족들을 용공으로 몰아 감옥에 잡아넣은 박정희 정권의 시각은 당시 재판부의 판결문에 잘 나타나 있다.
“6·25동란시에 대한민국 군·경찰에 의해 작전상 처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좌익분자가 아니라는 근거없는 망언과 재판절차없는 사형집행이 부당하다는, 당시의 전국(戰國)을 망각한 편견에 사로잡혀…군관민의 이간을 책동하면 결국 반공체제가 균열되어 간접침략을 획책하는 북한괴뢰집단의 이익이 된다는 정을 알면서도…국가의 안위 따위는 일절 불원하는 비국민적 사상의 불온분자이므로 피고인 김세룡, 동 송철순에게 각 징역 5년에 처한다.”(61년 11월 6일 동래유족회 사건에 대한 혁명재판소 판결문 요지, 정희상, <이대로는 눈을 감을 수 없소>에서 재인용)
이처럼 쿠데타세력은 판결문에서 ‘작전상 처형’‘재판절차없는 사형집행’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오히려 이에 대한 유족들의 진상규명 요구를 이적행위로 몰아 처벌한 것이다. 경상남북도 피학살자유족회 사건에 대한 판결문에도 “보련원 및 국가보안법 기·미결수의 피살은 불법에 의한 것이라 할 지라도 반공을 국시로 하는 대한민국의 충실한 국민이라고 할 수 없을 진대…”하는 구절이 나온다. 이처럼 독재정권은 ‘반공’을 위해선 국민을 얼마든지 학살할 수 있다는 정신파탄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다.
독재정권의 이같은 인명경시증은 결국 80년 광주학살로 이어진다. 이는 진상규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경우 앞으로도 유사시엔 얼마든지 이런 만행이 재발할 수도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면 현 정권은 이 문제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문화일보는 지난 7월 24일 ‘조 국방 양민학살 축소지시’라는 기사에서 조성태 국방부 장관이 “군의 최대 양보선은 양비론이며, 군이 잘못한 점이 있다면 인정하되, 이때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정도로 인정할 것 등을 지시”했다고 보도했다. 이를 통해 정부는 아직도 학살의 진상을 밝힐 의지가 없으며, 오히려 이를 적당히 축소하여 최근 거세게 일고 있는 진상규명 요구를 어떻게든 무마시켜 보려는 의도마저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경남지역 민간인학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인터넷 http://report.jinju.or.kr/massacre/에서 볼 수 있습니다.)
피빛망투작성일
2008-06-25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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