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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트라우트, 내일 은퇴해도 명전행? 오타니·저지는 어떨까
오는 22일 미국 메이저리그(MLB) 명예의전당 헌액식이 열린다. 애드리안 벨트레, 조 마우어, 토드 헬튼과 짐 릴랜드 전 감독이 지난 1월 명예의전당 입성이 확정됐다. MLB 선수들에게 명예의전당 헌액은 최고의 영광이다.지금 현역으로 뛰는 선수들 중에는 누가 명예의전당에 자신의 이름을 새길 수 있을까. 디어슬레틱이 현역 선수들의 향후 명예의전당 입성 가능성을 등급별로 분류했다.나란히 3차례 사이영상을 수상한 투수 저스틴 벌랜더(휴스턴)와 맥스 셔저(텍사스)는 지금 당장 은퇴해도 명예의전당 입성이 확실시되는 선수로 분류됐다. 올해 겨우 32세인 외야수 마이크 트라우트(LA에인절스)도 마찬가지다. 트라우트는 2011년 데뷔부터 올해까지 불과 14시즌 만에 WAR(대체선수 대비 승리기여도·베이스볼레퍼런스 기준) 86.1을 쌓아 올렸다. 이미 명예의전당에 입성한 치퍼 존스, 켄 그리피 주니어, 페드로 마르티네스 등과 비교해도 WAR이 더 높다. 최근 4년 내내 크고 작은 부상에 시달렸고, 올해는 무릎 수술까지 받으며 향후 커리어가 불확실하지만 그렇다고 트라우트의 명예의전당 입성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부상 중인 클레이튼 커쇼와 조이 보토 역시 명예의전당이 확실시된다.LA다저스 1루수 프레디 프리먼 역시 명예의전당 입성이 확실하다고 디어슬레틱은 전망했다. 지난해 같은 내용의 기사에서는 ‘유력’으로 분류했는데, 올해 ‘확실’로 등급이 올랐다. 디어슬레틱은 “프리먼은 이미 2200안타와 330홈런을 기록했다. 통산 OPS+ 143은 올해 명예의전당에 입성한 헬튼의 133보다 높다”고 설명했다. 무키 베츠(LA다저스), 브라이스 하퍼(필라델피아), 폴 골드슈미트(세인트루이스) 등은 입성 유력으로 분류됐다. 베츠와 하퍼는 아직 누적 기록을 좀 더 쌓아야 하겠지만 이제 겨우 31세다. 명예의전당 입성을 위해 남은 기록을 쌓을 시간이 차고 넘친다. 폴 골드슈미트는 헬튼의 WAR 61.8을 넘어섰다. 놀런 아레나도(세인트루이스), 매니 마차도(샌디에이고) 등 3루수 2명도 입성 유력이다. 같은 포지션의 스캇 롤렌이 명예의전당에 이름을 올리면서 이들의 입성 가능성도 한층 더 커졌다.애런 저지(뉴욕양키스), 오타니 쇼헤이(LA다저스), 호세 알튜베(휴스턴) 등 3명은 유력 바로 아래 등급으로 분류됐다. 저지와 오타니는 현역 최고의 선수들이지만, 누적 기록이 유력 등급에 놓기에도 아직은 모자란다. 알튜베는 과거 ‘사인 훔치기’ 스캔들이 마이너스 요소다. 그러나 워낙 기록이 탄탄해 명예의전당 입성에는 큰 무리가 없을 거라는 전망이다.게릿 콜(뉴욕양키스), 카를로스 코레아(미네소타), 프란시스코 린도어(뉴욕메츠), 후안 소토(뉴욕양키스) 등은 명예의전당을 향해 순조롭게 커리어를 이어왔다. 하지만 아직 안심하기는 이르다. 꾸준히 좋은 성적을 계속 올릴 필요가 있다. 디어슬레틱은 “목표 향해 전진 중”이라고 이들이 속한 등급을 분류했다.거너 헨더슨(볼티모어), 바비 위트 주니어(캔자스시티), 훌리오 로드리게스(시애틀) 등은 24세 이하 나이로 이미 리그 최고 선수의 반열에 올랐다. 실력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그래도 너무 어리고 연차가 너무 낮다. 디어슬레틱은 이들이 속한 등급을 “5년 후 다시 이야기하자”라고 이름 붙였다. 지난해만 해도 “전진 중” 등급에 속했던 로널드 아쿠냐 주니어(애틀랜타)는 올해 “5년 후” 등급으로 내려왔다. 부상이 너무 잦았다. 일단 건강을 회복하고 나서, 꾸준히 경기에 출장하며 기록을 다시 쌓아야 한다. 그래서 5년 후 다시 봐야 할 선수로 분류됐다.제이컵 디그롬(텍사스)는 2차례 사이영상을 수상했고, 크리스티안 옐리치(밀워키)와 앤드루 맥커친(피츠버그)는 MVP 출신이다. 마커스 시미언과 코리 시거(이상 텍사스), 다르빗슈 유(샌디에이고)도 리그 슈퍼스타들이다. 그러나 명예의전당에 놓기에는 아직 커리어가 아쉽다. 베츠나 하퍼 등과 비교하면 전성기가 저물어가는 나이라는 점이 차이다. 그래서 올 시즌부터가 중요할 수 있다. 디어슬레틱은 이들을 “내년에 이야기하자” 등급으로 한데 묶었다.지안카를로 스탠튼(뉴욕양키스)와 크리스 세일(애틀랜타)은 다소 특수한 사례다. 그래서 둘만 따로 떼서 분류했다. 스탠튼은 2022시즌 타율 0.211, 2023시즌 타율 0.191을 기록하며 ‘공갈포’로 전락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홈런만은 꾸준히 때려냈다. 올 시즌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올해로 34세인 스탠튼은 이미 통산 420홈런을 때렸다. 명예의전당 보증수표로 불리는 500홈런까지 불과 80개만 남았다. 디어슬레틱은 “500홈런 선수가 명예의전당에 들어가지 못한 전례가 있느냐”고 물었다.좌완 강속구 투수 세일은 2020년 부상으로 시즌을 통으로 날린 뒤 지난해까지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했다. 세일의 명예의전당 가능성도 자연스럽게 사그라드는 거로 보였다. 그러나 애틀랜타로 이적한 올 시즌 세일은 거짓말처럼 살아났다. 올 시즌 현재 11승 3패에 평균자책 2.71을 기록 중이다. 삼진/볼넷 비율이나 WHIP(이닝당 출루 허용률) 같은 세부지표는 리그 수위권이다. 올 시즌 극적인 반등으로 명예의전당을 향한 불씨도 다시 지폈다는 평가다.불펜 투수로는 크레이그 킴브렐(볼티모어), 켄리 얀선(보스턴), 조시 헤이더(휴스턴) 등이 후보다. 내년 1월 과거의 강속구 마무리 투수 빌리 와그너가 명예의전당에 이름을 올린다면 이들 역시 가능성이 커진다. 포수들 가운데는 살바도르 페레스(캔자스시티), J.T. 리얼무토(필라델피아)가 거론된다. WAR 등은 상대적으로 부족하지만 포수로서 그 이상 팀에 기여를 했다는 설명이다.
옽하니작성일
2024-07-10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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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영원한 챔피언'최요삼' 재조명
1982년 11월 18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미국의 레이 맨시니와 장렬히 싸우다 14라운드에 TKO패배를 당한 김득구는 경기 직후 뇌사판정을 받았다. 그의 어머니는 산소호흡기를 떼어내는 것을 동의했고, 결국 김득구는 복싱경기로 인해 사망한 선수로 남게 되었다. 당시 경기 중 그가 입고있었던 노오란 트렁크 색처럼 국민들의 마음도 노오랗게 변해갔다. 과격하고 부상의 위험이 있는 복싱에 대해 복싱협회 관계자들은 물론 복싱팬들도 그 위험성에 대해 절감하게 되었고 이후 15라운드 제도는 12라운드로, 휴식시간도 60초에서 90초로 변경되었다. 그 슬픈 사건을 뒤로 하고 한국프로복싱은 이후에 수많은 세계챔피언들을 많들어냈으며 80년대 중후반은 복싱의 절정기를 달렸다. 시간이 흘러 복싱이 침체기를 겪기 시작했고 잃어버린 복싱의 인기와 함께 김득구 사건도 점점 잊혀져갔다. 하지만 26년 후 또 한명의 선수가 링위에서 운명을 달리했다. 1973년 10월 16일, 전북 정읍에서 태어난 최요삼은 영등포중학교 2학년때부터 복싱을 시작했다. 이후 프로데뷔를 위해 숭민프로모션에 소속되었는데, 이 숭민프로모션의 경우 한국프로복싱의 대모인 심영자 여사가 운영권을 쥐고 있었다. 10명도 넘게 세계챔피언을 배출해 낸 그녀에게 최요삼이 들어왔고, 기대주였던 최요삼은 실력이 일취월장하며 세계 챔피언감으로 주목받게 된다. 데뷔 후 21전 중 1패만을 오점으로 남기고 20승을 거둔 최요삼은 태국의 강펀치 <사만 소자투롱>에게 도전장을 내민다. 사만은 태국의 복싱 영웅으로, 95년 움베르토 곤잘레스를 상대로 챔피언 타이틀을 뺏어왔다. 움베르토 곤잘레스는 주니어 플라이급 역대 올타임 넘버 원에서 장정구, 유명우, 마이크 카바할 등 수많은 선수들과 비교될 정도의 대선수였다. 95년 당시 그의 말년기라 전성기는 확실히 지나긴 했지만, 사만은 곤잘레스를 피범벅으로 만드는 강펀치를 날렸다. 눈두덩이에서 흐르는 피가 그대로 입에 흘러내리는 곤잘레스의 모습은 그대로 은퇴로 이어졌다. 그 혈전은 곤잘레스의 은퇴와 타이틀 상실, 사만의 챔피언 등극과 함께 95년 미국 복싱 잡지 <링>지의 올해의 경기에 선정되었다. 99년 10월 17일, 한국에서 사만을 불러들인 최요삼은 영리하게 유효타를 적중시키면서 사만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유리하게 포인트를 가져가면서 홈어드밴티지도 생각하면 충분히 세계 챔프 등극도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데 10라운드 막판에 사만 특유의 강펀치가 최요삼의 털에 꽃혔다. 종소리가 난 후 코너로 돌아가면서 최요삼은 턱의 이상을 느끼고 턱을 움직인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11라운드, 12라운드를 초인적인 기지로 버텨내면서 결국 판정승으로 챔피언에 등극한다. 이후 1차 방어전을 무에타이 선수 출신의 차트 키타펫과 벌여 KO승으로 가볍게 성공한 뒤, 2차 방어전을 사만과의 리턴매치로 하게 된다. 당시 1,2차 경기지명권을 갖고 있는 태국 프로모터의 권한으로 리턴매치게 성사되었는데 잔뜩 벼르고 있는 사만이었기에 복싱팬들은 초조했을 것이다. 하지만 예상외로 최요삼은 사만을 KO로 무너뜨린다. 7라운드 왼쪽 잽으로 견제를 하다 사만의 안면에 맞게 되는데 그전에 누적된 데미지가 함께 쏟아나와 사만은 이내 반대편으로 쓰러진다. 당시 동급내에 최강자인 사만을 2번이나 격침시키면서 그 위용을 확인한 최요삼은 한창 전성기를 누릴때였지만 사양길로 접어든 한국프로복싱의 현실상 재정문제도 그렇고 방어전을 대비한 프로모터의 활동 약화도 큰 문제였다. 결국 그는 3차방어를 위해 일본원정을 결정하게 되는데, 당시 일본 챔피언이었던 야마구치 신고를 적수로 맞게 된다. 11승 2패 1무의 부족한 커리어 상대를 두고 원정까지 가야되는 현실. 하지만 최요삼은 자신의 역량을 보여주면서 야마구치를 10라운드까지 우세하게 밀어붙이며 KO승을 거둔다. 물론 상대가 그리 강적이 아니었지만 불리한 원정 경기를 KO로 장식한 최요삼은 커리어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3차 방어전을 승리로 장식했지만, 역시 그에게 남은 건 챔피언 타이틀 뿐이었다. 자신의 프로모터였던 심영자 여사는 재정난으로 인해 최요삼과 결별했고, 최요삼과 비슷한 활동시기를 지니고 있었던 세계챔피언들이 모두 타이틀을 상실하면서 최요삼에겐 한국 유일의 세계 챔피언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2002년, 그때 한국의 여름은 흥분의 도가니였다. 한일월드컵에서 무려 4강에 진출하면서 세계축구사에 새역사를 쓰게 된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국민들의 스포츠 그 자체였다. 6월의 흥분이 월드컵 종료후에도 축구열기로 이어지고 있을 당시, 7월 6일. 최요삼은 멕시코의 호세 아르세를 불러들여 4차 방어를 치뤘다. 그나마 최요삼이었기에 구름관중이라도 들어와 타이틀 경기의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유명가수의 오프닝 곡과 함께 당당하게 등장한 최요삼은 언제나 그렇듯 활기가 있어보였지만 그날의 악몽은 1라운드부터 시작했다. 호세 아르세의 초반 공세는 무서웠다. 1라운드 1분 40초 라이트훅이 안면을 강타했고 최요삼은 그대로 쓰러졌다. 이후 상황은 잘넘어가며 종소리를 들었지만 이후에도 계속 수세에 몰린다. 가뜩이나 펀치도 강한 호세에게 계속 펀치를 허용하지만 유효타는 그리 먹히지 않았다. 결국 6라운드 절망의 시간이 되었다. 6라운드 2분 누적데미지를 가지고 있던 최요삼은 호세와 근접전을 벌이다 펀치를 허용, 뒷걸음질치며 물러선다. 그리고 호세의 공격, 코너에서 몸이 휘청일 정도로 얻어맞던 최요삼을 보고 심판은 TKO를 선언한다. 데뷔 후 이처럼 무기력한 모습은 아마 그에게 처음이었을 것이다. 최요삼의 동생에 따르면 그때 최요삼은 라커룸에 들어가 아무도 들여보내지 않고 혼자서 분을 삭혔다고 한다. 이후 최요삼은 자신의 대선배였던 장정구를 코치로 모시고 세계 챔피언 재등극에 힘쓴다. 하지만 이미 전성기 기량을 잃어버린 상황과 복싱침체기를 겪고있던 한국에선 국내자본을 크게 들일 여력이 없었다. 이후 최요삼은 멘도사 베이비스와 잠정챔피언 매치를 벌이지만 판정패, 로렌조 파라와 세계챔피언 타이틀 매치를 벌이지만 이 역시 판정패한다. 그렇게 실의에 빠진 최요삼은 은퇴를 결심하지만 이내 다시 복귀를 선언하면서 모습을 들어낸다. 어려운 상황에서 사비를 들여가면서 복싱생활을 이어간 최요삼은 WBO 인터콘티넨탈 타이틀 획득에 성공한다. 비록 세계챔피언 타이틀은 아니지만 동양챔피언에 해당되는 타이틀을 획득하면서 세계권 진입을 노렸다. 하지만 그에 앞에 다가왔던 것은 비운의 순간이었다. 2007년 크리스마스. 12월 25일은 모두의 행복이었지만 그는 링위에서 운명하게 된다. 인터콘티넨탈 타이틀 1차 방어전, 인도네시아의 헤리 아몰을 불러들인 최요삼은 12라운드 막판 펀치를 허용하면서 다운을 당한다. 곧바로 일어나 경기를 마친 최요삼은 그대로 쓰러진다. 의식을 잃어 코치진과 의료진에게 응급처치를 받았지만 진전이 없자 병원으로 실려가게 된다. 뇌사판정 후 가족들은 수일을 기다리면서 그의 소생을 바랬지만 결국 산소호흡기 제거에 동의하면서 최요삼은 김득구 이후 사망한 프로복싱 2번째 선수가 되었다. 어떤 신문기사에선 최요삼은 그의 대선배 장정구와 닮은 점이 많다고 했다. 영리한 두뇌와 뛰어난 근성, 그것이 그 두명의 어머니와도 마찬가지였던 심영자에게 속해있던 것에 필연적인 이유였다고 한다. 최요삼도 생전에, 자신이 사만에게 뺏어온 타이틀은 사실 장정구가 선수시절 갖고있던 라이트 플라이 타이틀이라면서, 장정구 선배의 타이틀을 자신이 되찾아 온 것이라고 회상한 바 있다. 그외에도 장정구가 모든 것을 내던지고 싶었다던 마의 4차 방어전, 도카시키와의 경기와 마찬가지로 최요삼도 호세 아르세와의 4차방어전 역시 그때 모든 것을 던져버리고 싶었다고 했다. 사만과의 타이틀 매치에서 턱이 부러져 3조각이 되었는데도 초인적인 기지로 버텨낸 그의 정신력은 실로 대단했다. 경기 후 부러진 턱을 상담받으면서도 담당의사에게 챔피언 등극의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던 그는 자신의 쇠퇴기를 일기에 적었다. 유가족과 사람들은 그의 일기를 보면서 더 슬퍼했다. 복싱을 포기하지 못하면서도 맞는것이 두렵다, 피냄새가 싫다... 보통의 인간으로서는 이겨내지 못할 프로복싱의 선수였음에도 그가 느꼈을 심리적 고통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이었다. 그의 유가족들은 장기 기증에 동의하여, 최요삼의 장기들은 수명의 환자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생전에는 복싱 영웅, 사후에는 장기 기증의 천사로 남게 되었다. 수년 후, 2009년에 그가 WBC 명예의전당에 헌액되었다는 것이 뒤늦게 확인되었고 그의 이름이 다시금 언론에 오르게 되었다. 어려운 순간임에도 복싱 글러브를 놓지않았던 그에게 영원한 챔피언이라는 수식과 함께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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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NFL 역사상 가장 막기 힘들었던 러닝백의 움직임
배리 샌더스 (Barry Sanders)172.72cm (5'8" 맨발신장)92.5kg (204lbs)디트로이트 라이언스 (1989 - 1998) - 1988 하인즈만 트로피(NCAA 최우수 선수)- 1989 NFL 최고 공격신인- 1989~1998 프로볼(올스타) X10회(커리어 전체)- 1991, 1997 NFL MVP 2회- NFL 공식 홈페이지 선정 '역사상 가장 막기 힘든 러닝백 1위'- 2004 NFL 명예의 전당 헌액 172.72cm 그의 덩크 타고난 하체를 바탕으로 폭발적인 방향전환과 순발력을 보여주었던 선수로,낮고 안정적인 신체 밸런스와 순발력, 엄청난 내구력을 자랑하던 선수. 40야드 4.37초, 서전트 점프 101cm (40")러닝백 역대 레전드들 중 가장 적은, 단 10년을 뛰었지만 대기록을 남겼다.그가 3년만 더 필드에 있었다면 NFL의 기록은 달라졌을 것이다.전성기에 미련없이 은퇴한 '박수칠때 떠난' 대표적인 스타. 디트로이트 라이언스는 사실상 그의 원맨팀이라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진중한 무게감, 매너있는 행동으로도 큰 인기를 끌었다.데뷔-은퇴 10년동안 모두 프로볼(올스타)에 선정될 정도로 출중한 기량을 자랑했다. 러닝 스킬, 밸런스, 시야, 상황판단, 순발력, 신체 내구도, 자기관리, 멘탈에서 역대급으로 꼽히는 '신이 내린 다리' 배리 샌더스
하루스작성일
2020-06-04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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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글터] [국내실화] 페스카마호 조선족 선상 살인사건 - 2편
8월 2일 새벽 3시경망망대해의 깊은 어둠을 틈타, 한무리의 무리들이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습니다.이들은 한국인 선원들을 살해하기 위해 침실에서 빠져나온 조선족들로 각기 맡은 역할에 맞춰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던것 같습니다.일단 두명은 침실 중앙통로사이에서 선장의 도주로를 차단하면서 다른 선원들이 접근하는지 망을 보았고,세명은 조타실 안에서 칼을 들고 대기를 했었다고합니다.그리고 나머지 한명이 취침중인 선장의 침실에 들어가서"회사에서 호출이 왔다"는 거짓말로 선장을 조타실까지 유인했던 것입니다.잠결에 거짓말에 속아넘어간 선장은 의심없이 조타실로 들어가게되고 이들은 선장이 조타실에 들어오자마자 바로 끔찍한 칼질을 합니다.먼저 조선족 이씨가 40센티에 달하는 참치처리용 칼로 선장의 복부를 찔렀고,이에 선장이 고개를 숙이며 쓰러지자 뒷덜미에 또 다시 칼을 찔러넣었다고 합니다.그리고 백씨와 이씨도 선장의 무릎과 복부를 각각 한번씩 찔렀다고 합니다.한마디로 선장은 조선족 세명에 의해 잔인하게 난자당해 사망합니다.이들은 사망한 선장을 아무렇지 않게 바다로 던져버리고 다시 다른 한국인 선원을 살해하기 시작합니다.3시 30분경선장이 찾는다며 갑판장 강씨를 깨워 조타실로 유인한 이들은 이번에는 칼이 아닌 도끼를 이용해서 살인을 시도합니다.그게 더 편하다고 판단했던것 같습니다.강씨는 선장과는 달리 어느정도 이들과 몸싸움을 했던것으로 드러납니다.그러나 혼자서 여러명을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던것 같습니다.문을 닫고 반항을 해보았지만, 결국 강씨또한 이들에게 처참하게 살해되고 맙니다.최초 도끼질이 빗나가자 나머지 조선족이 강씨의 허벅지를 참치처리용칼로 찔렀다고 합니다.허벅지가 찔린 피해자가 계단통로에 쓰러지자, 이들은 끔찍하게도 그대로 도끼로 강씨의 목을 내리쳤다고 합니다.거기에 또 다시 피해자의 복부를 찌른이들은 선장과 마찬가지로 강씨를 들어서 바다에 던져버립니다.강씨는 던져질 당시까지 생존했던것으로 드러나 더욱 안타깝습니다..산채로 사람을 어두운 바다로 던지는 이들이단순한 선상에서의 부당폭력의 피해자들인지는 의문스럽기도 합니다.아무튼 강씨가 죽는순간까지 온몸으로 고스란히 느꼈을 그 고통과 공포의 크기는 가늠할수 없을정도로 엄청났을것으로 보입니다.이후 이들은 4시경 이번에는 항해사 이인석씨를 같은 방법으로 유인합니다.애초 항해사는 살해할 생각이 없었으므로, 포승줄로 묶어서 아침 8시30분까지 부식창고에 감금시켰다고 합니다.다만 얼굴과 복부를 무자비하게 폭행했다고 합니다.그리고는 " 선장과 갑판장은 지금 상어하고 놀고있으니 반항하지 마라"며낄낄대며 웃었다고 합니다.4시 20분경 이들은 또다른 살인대상을 선택합니다.이번의 살해대상은 32세 기관사 박씨였습니다.이번에도 이들은 선장이 찾는다는 거짓말로 박씨를 유인하여 처참하게 살해합니다.먼저 복부를 발로차고 피해자가 쓰러지자 가슴부위를 찔렀다고 합니다.그리고 여러명이 동시에 달려들어 각각 등과 허벅지등을 마구 찌른후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박씨를 바다로 던져 버렸다고 합니다.이들의 살인은 회가 거듭될수록 더 빠르고 잔인해딥니다.다음은 조기장 차례였습니다.4시40분경이들은 같은 방법으로 36세 조기장 김씨를 유인합니다.김씨는 다른 피해자들과 달리 이들을 먼저 발견하고 도망을 갔다고 합니다.그러나 좁은 배위에서 이들을 따돌릴수는 없었을겁니다.조선족들은 김씨를 쫓아가서 먼저 가슴부위를 칼로 찔러 쓰러뜨린뒤 이번에는 바로 바다로 던져넣으려고 했다고 합니다.김씨는 끝까지 이러지 말라면서 우현의 방현대를 잡고 버텼다고 합니다.그러나 이 잔인한 놈들은 어떻게든 살기위해 몸부림치는 김씨의 손가락을 칼로 내리쳐 잘라내며 바다로 밀어버립니다.끝까지 버티던 김씨는 손가락을 하나하나 자르고,젖히며 바다로 밀어넣는 이들에 의해 깊고 어두운 바다속으로 빨려들어가버립니다.5시경이들은 또다시 다른 선원들과 마찬가지의 방법으로 이번에는 45세 조리장 서씨를 유인합니다.대부분의 한국인 선원이 사망한 후라서 자신이 생겼던지 이번에는 발길질을 하며 여유있게 살인을 시도했던것 같습니다.그러나 서씨는 이들을 피해 선미방향으로 달아났다고 합니다.이들은 달아난 서씨를 쇠파이프로 내리치고, 바로 바다로 던져 버립니다.결국 서씨도 끔찍하게 산채로 망망대해속으로 던져진후 사라져버립니다.5시 20분경이번에는 53세의 기관장 김씨가 이들의 끔찍한 살인대상으로 선택됩니다.다른 이들과 같은 방법으로 김씨를 유인한 이들은 김씨의 복부를 발로 차서 쓰러뜨린뒤,이러지말라고 애원하는 피해자를 어두운 바닷속으로 던져버립니다.그렇게 항해사 이인석씨를 제외한 모든 한국인 선원을 살해합니다.그러나 당시 이들의 살인행위를 목격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인도네시아 선원들입니다.이들은 잠을 자다가 기관장 김씨의 비명소리를 듣고 달려나와 현장을 목격하게 된 것 같습니다.조선족들은 후환을 막기위해서는 이들을 공범으로 끌어들이거나 살해해야 한다고 판단합니다.결국 조선족들은 8월2일 0시 30분경인도네시아인들에게맹장수술을 위해 페스카마호로 옮겨탄 19세의 최동호 군을 살해하도록 지시합니다.이들은 최군을 깨워 조타실에 주사를 맞으러 가자는 거짓말을 하여 우현의 갑판으로 유인합니다.칼로 인도네시아 선원들을 위협하여 그들로 하여금 최군을 바다로 던져버리게 한것으로 드러납니다.결국 최군은 승선 6시간만에 아무 이유없이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것입니다.그 어둠속에서 10대에 불과한 최군이 겪었을 공포를 생각하면 너무 불쌍하고 안타깝습니다.살인사건의 근원이 한국선원의 폭력이라고 당시 주장했던 조선족들은 왜 이런 부분에는 아무말도 못하는것인지 그들의 가식디 드러난것 같습니다.7시경이렇게 항해사 이씨를 제외한 모든 한국인을 살해한 이들은 이번에는 자신들의 살인행위에동조하지 않은 조선족 선원 한명과 인도네시아 선원 3명을 동사시키기 위해 어창에 감금시켜 버립니다.그리고나서 이들은 이때부터 유일한 한국인 생존선원 이인석씨와 인도네시아 선원 6명을 조타실로 끌고온후 선박의 운항권이 전부 조선족들의 지배하에 있다고 말한뒤 선박의 모든 통제권을 빼앗고 실제 일본을 향해 운항을 계속하게 됩니다.그런데 감금되었던 조선족과 인도네시아 선원들은 이들의 예상과는 달리 멀쩡히 살아있었습니다.사실 이들이 감금된 냉동창고는 작동이 중단된 상태였기때문입니다.이들은 한국인 관리자들이 없이는 냉동창고조차 작동하지 못했던 것입니다.이들은 모두 동사의 위기에서는 벗어났으나, 결국 이를 안 조선족들은 이들을 5일간 감금하여 힘이 빠지게 만든후 몽둥이로 구타하여 산채로 바다에 던져버렸다고 합니다.이후 이들은 결국엔 인도네시아 인들도 전부 살해하려 했으나,숫자도 만만치 않고, 이인석씨의 만류도 있었으므로 일단은 그만두었던것으로 보입니다.이인석씨는 굉장히 지혜롭고 판단력이 빠른 사람이었던것 같습니다.아마도 그들에게 동조하는척 연기를 하며 기회를 엿보았던것 같습니다.같은 처지임을 부각시키며 ,그들의 의심을 벗어나려 했던것 같습니다.이런걸 보면 저는 이인석씨는 대단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만약 이인석씨가 없었다면 어쩌면 우리는 난파된 배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굳은 의지의 조선족 6인의 생생한 영웅담을 듣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아무튼 시간이 지날수록 그리고 그들의 최종 목적지가 다가올수록 이 조선족들은 이후의 구체적인 계획들을 세우기 시작합니다.다른 선원들에게는 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것 으로 보입니다.모든 범행을 알고있는 자신들을 이들이 살려둘리가 만무하다고 생각했을것 같습니다.특히 홀로 남아있던 이인석씨가 느꼈을 공포는 정말 말로 표현하기 힘들정도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8월 20일경 조선족들은 배안의 나무들을 모아서 작은 뗏목을 만들기 시작합니다.이는 여차하면 배를 가라앉히고 탈출하겠다는 의미로 볼수있을것 같습니다.즉 이들은 모든 선원들을 배와함께 수장시켜 버리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실제 이들은 일본 근해까지 배를 몰고 가서 생존 선원을 전부 죽이고, 배와 함께 바닷속으로 영원히 묻어버리려는 구체적 계획을 세웠던것으로 드러납니다. 8월 24일 페스카마호는 드디어 일본의 근해에 진입합니다.그러나 도리시마 부근을 지나면서 배는 갑자기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합니다.이것이 바로 조선족들의 선상 반란을 진압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하게 됩니다.기지를 발휘한 이인석씨는 조선족 선원들에게 냉동창고의 물류를 옮겨서 배의 평형을 맞추어야 한다는 거짓말을 합니다.이에 속아넘어간 다섯명의 조선족들이 냉동창고에 들어간 틈을 타서 인도네시아 선원들과 함께 그들을 창고안에 가둬버립니다.그리고 혼자 남은 조선족은 이미 힘이 없었으므로 인도네시아 선원들과 합세하여,간단하게 포박에 성공하는것으로 길고 끔찍했던 악몽같았던 선상반란을 완벽하게 진압하게 되고, 끔찍했던 그들의 살인행위에도 종지부를 찍게 됩니다.그리고 다행히 일본 근해까지 도착하여 배가 좌초한 덕에 일본의 어업지도선이 1시간만에 출동하게 되면서,다른 선원들도 모두 구출됩니다.이후 살인의 주범인 조선족들은 체포 후 경찰에서 조사를 받게 됩니다.기소후 재판에서 1심에서 분명 전원 사형을 받은 이들은 2심에서 문재인씨가 변호를 맡으면서 전재천을 제외하고는 모두 무기징역으로 감형받게 됩니다.이후 사형수로 남아있던 전씨도 노무현 정부 때인 2007년 대통령 특별사면에 따라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고 합니다.당시 11명이나 사망한 끔찍한 살인사건을 우발적이라고 우기며 면죄부를 주어야 한다는 인권단체들이 상당해했다고 합니다.이들의 행태를 보면 과연 저게 우발적인 사건이었는지가 의심스럽습니다.관련기사 : https://monthly.chosun.com/client/mdaily/daily_view.asp?Idx=8276&Newsnumb=2019118276출처 : https://blog.naver.com/ghshffnfffn1/221968949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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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스크롤주의) 마이클잭슨
??마이클 잭슨1958~2009'팝의 황제(King of Pop)'로 불리는 미국의 전설적인 팝스타.마이클 잭슨의 본명은 마이클 요셉 잭슨(Michael Joseph Jackson)으로, 1958년 8월 29일 인디애나 주 게리에서 9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 그는 클라리넷 연주가였던 어머니와 팔콘스(The Falcons)라는 그룹에서 기타리스트로 활동했던 경험이 있는 아버지로부터 음악적인 영향을 받고 자라났다.???마이클 잭슨은 1963년 5세 때부터 형들과 함께 '잭슨 파이브(Jackson 5)'란 그룹으로 활동하며 메인보컬을 맡았다. '잭슨 파이브'는 1968년 모타운(Motown) 레코드사와 계약한 후 1969년 최초의 싱글 음반 <I Want You Back>을 발표하였으며, 이어 첫 번째 앨범 <Diana Ross Presents The Jackson 5>의 수록곡 <ABC>, <The Love You Save>, <I'll Be There>까지 4곡 모두 전미 빌보드차트 1위를 기록했다. 1971년부터 솔로로 데뷔한 마이클 잭슨은 14세였던 1972년 발표한 <ben>으로 다시 차트 1위를 차지했다.??1975년 모타운에서 독립한 마이클 잭슨은 프로듀서 퀸시 존스(Quincy Jones)를 만난 이후 1979년 솔로 앨범 <Off the Wall>을 발표하며 당시 1500만 장이 넘는 판매량을 기록했고, 이 앨범으로 1980년 그래미 어워드에서 최우수 R&B 가수상을 수상했다.1982년 발표된 앨범 <스릴러(Thriller)>는 전 세계에서 1억 400만 장의 판매고를 올려 '최다판매앨범'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기도 했다. 수록곡 <Billie Jean>, <Beat It>, <Human Nature>, <Thriller> 등 7곡이 빌보드 10위 안에 들었으며, 37주 동안 빌보드 앨범차트 1위에 올랐다. 마이클 잭슨은 이 앨범으로 1983년 그래미 어워드에서 올해의 프로듀서상, 올해의 앨범상, 최우수 R&B 보컬상, 최우수 록 보컬상을 비롯해 총 8개 부문의 그래미상을 수상했다. 특히 <Billie Jean>은 1983년 모타운 25주년 공연에서 최초 공개된 안무 문워크(Moonwalk)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달 표면을 유영하듯 미끄러진다는 뜻의 문워크는 마이클 잭슨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또한 1985년의 싱글 음반 <We are the World>는 아프리카의 기아로 인한 난민 구호를 위해서 그가 작곡한 곡으로, 약 2000만 장 이상이 판매돼 1986년 그래미 어워드 올해의 노래상을 수상했다. 한편 1984년의 투어공연을 자선콘서트로 개최해 당시 역대 최고의 수익을 올리며, 자선단체에 수익금을 전액 기부하기도 했다.?1987년 발표된 앨범 <Bad>는 <I Just Can't Stop Loving You>, <Bad>, <The Way You Make Me Feel>, <Dirty Diana>, <Man In The Mirror> 5곡이 빌보드차트 1위를 달성하며 약 3000만 장이 판매되었고, 영화감독 마틴 스콜세지가 제작한 <Bad>의 뮤직비디오로 화제가 되었다. 수록곡 <Smooth Criminal>의 안무 린댄스(Lean Dance) 또한 유명한데, 발을 무대에 고정시키고 30도의 각도로 기울어진 몸을 지탱하는 린댄스를 위해 그가 직접 개발한 특수신발은 특허로 등록되어 있다. 이후 <Bad> 앨범의 전 세계 투어공연이 1987년부터 1989년까지 열렸다.???1991년의 <Dangerous>는 7주간 빌보드차트 1위를 차지한 <Black or White>,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히트곡으로 선정된 <Dangerous>, 세계평화를 노래한 <Heal The World> 등이 수록된 앨범으로 약 3200만 장이 판매되었다. 1992년부터 1993년까지 전 세계에서 <Dangerous> 앨범 투어공연이 열린 바 있다.1995년에는 베스트앨범 <HIStory>를 통해 히트곡과 신곡을 2CD로 발매했다. 여동생 자넷 잭슨(Janet Jackson)과의 듀엣곡인 <Scream>은 빌보드 싱글차트 5위에 올랐고, 1996년 그래미 어워드에서 최우수 뮤직비디오상을 받았다. 당시 뮤직비디오 제작에만 700만 달러가 투입돼 기네스를 기록하기도 했다. 수록곡 <You are Not Alone>도 빌보드차트 1위에 오르며 싱글 음반만 100만 장이 판매되는 등 많은 사랑을 받았다. 1996년부터 1997년까지 <HIStory> 앨범의 월드투어가 개최되었다.이후 1300만 장이 판매된 <Invincible>(2001)까지 총 10장의 정규앨범을 발표한 마이클 잭슨은 솔로 통산 7억 5000만 장의 앨범판매량을 기록, 13개의 싱글 음반을 빌보드차트 1위에 올리는 위업을 달성했다. 또한 19개의 그래미상을 비롯해 빌보드 어워드 40회, 아메리칸뮤직 어워드 22회, MTV 비디오뮤직 어워드 13회 수상 기록을 가지고 있고, 13개 부문의 기네스 월드레코드 보유자이기도 하다. 메이저 음악상에서 총 197개의 트로피를 가져간 셈이다. 그는 2001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그러나 1990년대 초반부터 성형수술 및 아동 성추행 의혹 등 사생활을 둘러싼 논란으로 언론의 집중포화를 받아왔다. 활동 초기에만 해도 흑인의 검은 피부였던 마이클 잭슨은 멜라닌 색소가 파괴되는 희귀질병인 '백반증'으로 인해 백색 반점이 피부를 뒤덮기 시작했고, 1984년 펩시콜라 광고촬영장의 화재로 머리에 화상을 입으면서 증세가 악화돼 결국 온몸이 하얗게 변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는 타블로이드지의 가십거리로 악용되며, 백인이 되기 위해 박피수술을 받았다는 루머에 시달려야 했다. 그리고 1988년 캘리포니아 주에 건립한 자신의 대저택 '네버랜드'에서 1993년에 13세 소년을 성추문한 혐의로 피소되었다. 잭슨은 혐의를 부인했고 무죄 판결을 받았으나, 1995년 소년의 부모는 법정 외 합의금으로 2200만 달러를 요구했다. 이 사건은 훗날 소년의 아버지가 꾸민 사기극으로 밝혀졌다. 2003년에도 사기전과 범죄자가 자신의 아들을 성추행했다며 잭슨을 고소했으나, 마찬가지로 무혐의 판결이 내려졌다.그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딸인 리사 마리 프레슬리(Lisa Marie Presley)와 1994년 결혼하여 19개월간 결혼생활을 지속하다 이혼했으며, 1996년 간호사인 데비 로우(Debbie Rowe)와 재혼하여 아들 프린스 마이클 주니어(Prince Michael Jackson Jr.)와 딸 패리스 마이클 캐서린(Paris-Michael Katherine)을 낳았으나 1999년 이혼했다. 2002년에는 대리모를 통해 인공수정으로 셋째 프린스 마이클 2세(Prince Michael Ⅱ)가 태어났다.한편 2009년 7월부터 영국 런던에서 <This Is It> 앨범 발매공연이 개최될 예정이었으나, 2009년 6월 25일 마이클 잭슨은 자신의 저택에서 급성 프로포폴 중독에 의한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사인(死因)은 잭슨의 주치의 콘레드 머레이(Conrad Murray)가 수면마취제인 프로포폴을 치사량 주입했기 때문으로 드러났다. 그의 사후에 2010년 제52회 그래미 어워드 평생 공로상을 수여받았으며, 잭슨의 자녀들이 대리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