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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5월 6일 고속道 통행료 면제·고궁 왕릉 무료
내달 6일 임시공휴일 당일에 전국의 모든 고속도로 통행료가 면제된다.또 4대 고궁과 조선왕릉, 수목원 등이 무료로 개방되고, 5월 한 달 동안 가족단위로 열차를 이용하면 운임이 20% 할인된다.정부는 28일 청와대에서 박근혜 대통령 주재로 국무회의를 열어 5월6일 임시공휴일 지정에 따른 내수 진작 방안을 확정했다.정부는 5월 가정의 달과 1∼14일 여행주간을 맞아 침체된 사회 분위기를 되살리고, 국내 여행을 활성화하기 위해 이번 방안을 마련했다.먼저 정부는 임시공휴일 당일인 5월6일 민자도로를 포함한 전국 고속도로의 통행료를 면제하기로 했다. 또 5월1일∼31일 3인 이상의 가족이 KTX·새마을호·무궁화호 등 열차를 이용하면 모든 구간의 운임을 20% 할인하기로 했다. 단, 할인혜택을 적용받으려면 매표소에 가족관계증명서나 건강보험증 등을 제시해야 한다.5월5일∼8일 연휴기간 4대 고궁, 종묘, 조선왕릉과 과학관, 휴양림, 수목원 등을 무료로 개방한다. 또 240여개의 지방자치단체·지방공기업의 연수시설이나 60여개의 공공기관 운동장이나 강당 등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5월5일 어린이날에는 태릉 국제스케이트장 등 체육시설을 무료로 개방하고, 5월6일 임시공휴일에는 프로야구 입장권을 50% 할인한다.무료개방 시설에 대한 정보나 국내 여행 관련 정보는 문화체육관광부 등 관계기관 홈페이지와 주요 포털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정부는 특히 중소기업 근로자나 비정규직 근로자들도 이번 임시공휴일에 쉴 수 있도록 경제단체와 대기업에 납기 연장 등의 협조를 요청하기로 했다.또 학원총연합회 등에 임시휴강 등을 요청하는 한편 학생들이 연휴 기간 문화체험을 하고 보고서를 제출하면 수행평가로 인정하는 방안도 추진한다.그렇지만 부득이하게 임시공휴일에 일을 하는 근로자나 맞벌이 부부 등을 위해 초등돌봄교실을 운영하고, 어린이집 당번교사를 배치하며, 아이돌봄 서비스 등을 실시할 계획이다.[ 출처 : 연합뉴스 ]... 고속도로, 고궁 미어터지겠군요.
알이즈웰작성일
2016-04-28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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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스압)우리나라의 요괴들
게임 라그나로크에 등장하는 몹 '소희' > ▲ 강철이 가뭄, 혹은 우박의 요괴.맹렬한 열기를 품고 있어 강철이가 한번 지나가면 산천초목이 모두 말라버린다고 전해집니다."강철이 간데는 가을도 봄이라" 라는 속담마저 남아있습니다. ▲귀수산 산처럼 거대한 거북이와 닮은 커다란 동물로 수백미터를 훌쩍 넘는 엄청난 크기입니다.바다에서 사는데, 때문에 섬이나 암초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등에는 대나무와 비슷한 더듬이나 촉수같은 것이 돋아나 있습니다.이 대나무 같은 것은 두 가닥으로 되어 있는데, 보통때는 두 가닥으로 떨어져있고, 잘때나 죽었을때는 한 가닥으로 붙어 있습니다.이것을 잘라내면 곧 도망치거나 죽게됩니다.이 대나무 모양의 더음이를 잘라 물에 넣어 키우면 한 조각 한 조각이 그대로 변해서 이상한 동물의 새끼가 되며, 그 어린 모습은 용처럼 보입니다.아마도 이것이 자라나서 커지면 이렇게 거대해지는 듯 합니다. ▲ 거구귀 거구귀는 이름 그대로 입이 아주 큰 귀신인데 그 입이 얼마나 컷는지 윗 입술이 하늘에 닿고 아래 입술은 땅에 닿았다고 합니다.거대한 입에 무시무시한 외관을 하고 있지만 비범한 사람을 만나면 어린 소년의 모습인 청의동자로 변신해 그 사람을 보좌하고 수호하는 존재로 변한다고 합니다. ▲ 귀태 귀신과의 성관계로 생긴 아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비유적으로 쓰이거나 하지 않는 한, 무속용어에 가깝습니다.신라시대에 진지왕의 귀신이 도화녀와 교합하여 비형랑이 태어났다는 설화가 있을 정도로, 우리나라에서는 고대로부터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고 믿어지고 있습니다. ▲ 고관대면 높다란 관을 쓰고 있고 얼굴이 커다란 괴물.얼굴과 관에 비해 몸은 작아서, 사람처럼 서 있을 수 없다고 합니다.때문에 보통 나무에 기대어 있습니다. ▲ 그슨대 한국 민담에 등장하는 요괴. 고려시대의 수호신이었으나, 조선디래를 거치면서 악귀화되었습니다.그늘, 그믐 등의 단어에서 이름을 따온 것으로 보이며, 일단 '어둠 속에 선 것' 이라는 뜻으로 추측 됩니다.이름이 비슷한 그슨새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습니다.자그마한 어린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아이의 모습으로 나타나 사람을 방심시킨 다음, 순식간에 커져 그 사람을 놀라게 하거나 죽인다고 합니다.또한 공격 받을 때마다 점점 커지기도 해서, 결국은 공격한 사람을 해친다고 하는군요. ▲ 그슨새 제주도의 귀신 혹은 요괴. 주쟁이라는 제주도의 우장을 뒤집어 쓴채 길거리를 돌아다닙니다.일반적인 요괴나 귀신들과는 달리 낮에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홀려서 죽인다고 합니다.전체적으로 남성적인 속성이 강한 존재라고 합니다. ▲ 길달 한국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도깨비.전승에 따라 그 정체가 귀신이나 요괴라도고 합니다.신라 진평왕때 비령랑과 같이 놀던 도깨비들 중 하나로 추정되며, 비령랑의 명령에 따라 다른 도깨비와 귀신글과 함께 다리를 놓은작업을 맡아 하룻밤만에 다리를 완공하는 공을 세웠으며 후에 비형할의 추천으로 집사 벼슬을 받아 정사를 맡았습니다.마침 각간 직책에 있는 임종이라는 벼슬아치가 아들이 없었기에 왕의 명으로 그의 야아들이 되었으며, 임종을 길달에게 흥륜사 남쪽 문루 하나를 세우도록 하여 밤에 늘 그곳에서 잠을 자도록 시켰다고 합니다.그런 이유로, 세간 사람들이 이를 길달문이라 불렀다고 합니다.하지만 인간의 삶이 지루하였던 길달은 결국 여우로 변신해 달아났습니다.그 소식을 들은 비형랑은 즉시 귀신들과 도깨비들을 풀어 길달을 잡아, 직접 길달을 끔살해 버렸습니다.그 뒤부터 귀신과 도깨비들은 비령랑을 두려워하였다고 합니다. ▲ 금돼지 한국의 요괴. 이름처럼 금빛 털을 지는 돼지의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전승에 따르면 금돼지는 마산 앞바다에 있는 월영도라는 섬의 동굴에 사는 식인요괴로 아름다운 여성을 납치하여 잡아먹거나 시중을 들게하였습니다.관련된 설화 중 유명한 <<금돼지 자손 최치원>> 에서는 최치원의 아버지가 사실 금돼지란 얘기가 있습니다. '어느 한 마을에 현감이 부임하고 그 부인이 행방불명되는 사건이 일어나자 한 현감이 꾀를 내어 부인의 옷자락에 실을 꿰매어 놓았다.다음날 부인이 사라지자 현감은 부하들을 대동하고 실을 쫓아 부인이 사라진 동굴로 들어간다.거기서 범인이 금돼지라는 것을 알아내고 금돼지의 약점인 사슴 가죽을 구해 금돼지를 없앤다.부인은 그 후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최치원이었다.' 약점은 사슴 가죽, 혹은 백마 가죽이라고도 하고 양 가죽이라고도 합니다. ▲ 노옹화구 대동운부군옥에 등장하는 요괴. '신라시대에 한 늙은이가 있어서 하루는 김유신 집 대문 앞에 이르렀다.곧 김유신이 그 노인의 손을 잡고 집안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히고 말하기를, "지금도 옛날처럼 몸을 변화시킬 수 있느냐?" 하고 물었다.그러니까 노인은 곧 호랑이로 변했다. 그리고 또 닭으로 변하고, 이어서 매로 변했다.그러더니 마침내 집에서 기르는 개로 변하여 대문 밖으로 걸어나갔다' ▲ 노구화위남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한국의 요괴.남녀와 노소를 맘대로 바꿀 수 있는 요괴이나 늙은이에서 젊은이로 젊은이에서 늙은이로 바꿀 수 있지 성별을 바꿀수 없다고 합니다.기원선 6세기 백제에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 노호정 늙은 여우의 정괴입니다.여자들에게 인기가 매우 많고 지혜로운 사람의 모습으로 변신하는데, 이때 보통 승려의 모습과 비슷하나 머리를 기른 행색입니다.둔갑하면 사람과 모든 면에서 차이가 없으나, 정체가 늙은 여우인만큼 누런 개나 흰 매를 보면 사냥 당할까 두려워 갑자기 놀란다고 합니다. ▲ 노구화호 노구화호한 그 이름 그대로 늙은 할머니로 둔갑하는 요호. 혹은 여우로 둔갑하는 할머니 요괴를 가리킵니다.갖가지 요술을 배우고 기이한 일을 배운다거나 잔꾀를 써서 세상에 삿된 일을 한다고 알려져 있으며, 사람 모습일때는 노인임에도 남녀 모두 호감을 가질 정도로 아름답고 피부가 뽀얗다고 합니다. ▲ 닷발괴물 전래동화에 나오는 환상종.꼬리 깃이 닷 발, 부리가 닷 발이나 되는 새처럼 생긴 괴물로 나오며,대개는 '꽁지 닷 발 주둥이 닷 발'로 알려져 있습니다.발이란 건 한국의 옛 길이 단위인데, 한 발이 150cm(양 팔을 펼쳐서 한쪽 손에서 반대쪽 손까지의 거리)입니다.즉 꼬리가 750cm에 부리도 750cm인 셈입니다. ▲ 대선사사 여자, 특히 과부에게 가서 꿈을 꾸게 하며 희롱하는 마물.낮에는 여자들이 왕래하는 집안의 항아리 속에서 지내다가 밤이되면 나타난다고 합니다. ▲ 도피사의 도롱이옷을 거꾸로 입은 사람 모습의 괴물.둘씩 몰려 다닙니다.사람의 말을 알아들으며 사람에게 들러붙어 체온을 높여 죽입니다. ▲ 두두리 신라 고려 시대의 목신(木神).고려시대의 이의민도 두두리를 숭배했다고 합니다. '이의민은 글을 알지 못하고 무당을 믿어서, 집에 신당을 짓고 두두리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서 집에서 모셨다.하지만 어느날 두두리가 갑자기 통곡을 하고, 이의민이 놀라서 묻자 대답하기를, 자신이 지금까지 이의민의 집을 잘 수호해왔으나 이제 하늘이 재앙을 내리기로 결정하여 더 이상 이의민을 보호해줄 수 없고 자신도 의지할 곳이 없어져서 슬퍼져서 운다고 대답했다.얼마 후 이의민은 멸망했고, 관리들은 사당에 그려진 두두리 그림을 제거해버렸다고 한다.' 기록으로 미루어 볼대, 경주 지방의 토속신이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몽골의 침입으로 경주 지방이 활폐화 되면서 신앙도 소멸한 것 같다.도깨비의 기원으로 보는 설도 있다. ▲ 두억시니 도깨비, 야차와 매우 유사한 한국 전통의 요괴 개념중 하나입니다.실제로 이들은 잘 구분되지 않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사납고 못된 장난을 한다는 귀신의 하나.'두억시니'라는 단어는 국어사전에 '모질고 사나운 귀신의 일종'으로 설명되어 있는 고유명사입니다.한자로는 두옥신(斗玉神)이라고 씁니다.학술적인 기록에서는 불교의 야차와 같은 존재 내지, 야차가 한국에서 도깨비와 뒤섞이는 과정에서 나온 요괴라는 설이 우세합니다.하지만 한반도산 토종 귀신이라는 설도 있습니다.도깨비의 경우를 생각해본다면, 두억시니도 한반도 전통의 귀신개념에서 출발하여, 야차 같은 불교 개념이 넘어왔을 때 함께 뒤섞였을 확률이 높다고 합니다. ▲ 매구 천년 먹은 여우가 변한다고 전해지는 요괴.주로 소복을 입은 처녀의 모습으로 나타나 길잃은 청년들을 꼬셔 정기를 갈취합니다.그렇게 정기를 쏙쏙 빨리게되면 청년은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버린다고 합니다.하지만 대부분의 이야기에선 죽기 전에 남자의 부모나 훈장이 미리 그 사실을 알고 퇴치법을 퇴치한다고 합니다.가족들도 모르는 사이 섞여들었다는 민담도 흔히 있습니다.친국한 사람의 정체가 알고보니 괴물이었다는, 의외로 현대적인 공포 요소입니다.민담에서 가장 흔하게 보이는 경우는 그 집안의 딸로 변신하는 것.이런 경우 한밤중에 몰래 나가서 가축의 간을 빼먹거나, 무덤 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등 기괴한 행동을 반복하는 것을 목격하고 매구라는 사실을 눈치채게 됩니다.가족 사이에 매구가 섰이면 집안이 패가망신하거나 일가 식구들이 모두 죽게 됩니다. ▲ 묘두사 고양이 머리를 한 거대한 뱀요괴.새들이 이 요괴를 왕처럼 떠받들며 사람이 먹는 음식도 거리낌없이 먹는다고 합니다.묘두사가 내뿜는 푸른색 연기는 세균을 살균하고 병을 고쳐준다고 믿어 사람들 또한 신성시하였으나, 사람들이 너무 심하게 숭배하여 피해가 큰 것을 보고, 박만호라는 사람이 이 동물에 화살을 쏘아 죽여 없애 버렸다고 합니다. ▲ 백제궁인 해동이적에 등장하는 삼천궁녀 전설과 연결되는 요괴. '한 소년이 고란사에서 독서하고 있다가, 밤중에 한 여인이 나타나 호합을 하고 새벽닭이 우니 떠나갔다.소년이 요괴로 알고 여인의 옷에 실을 꽨 바늘을 꽂아두고, 아침에 그 실을 따라가보니 바위틈에 들어가 있었다.그래서 또 밤에 나타난 여인을 붙잡고 무슨 요괴인지 물으니, 백제가 망할때 궁녀들이 백마강으로 달려가 낙화암에 빠져 죽었는데, 자신도 그 궁녀의한 명으로 낙화암에 떨어져 죽을 때 석굴 속에 들어가 벽곡(곡기를 끊어 장생하는 도술)을 이루고, 소년들을 유혹해 동침하고 남자의 정기를 취해자신의 정기를 보충하여 이것이 충만해지면 승천할 수 있었는데, 이제 비밀이 탄로났으니 불가능해졌다고 말했다.그러니 이것도 인연이니 아내가 되겠다고 하여, 같이 집으로와서 살았는데, 10여일이 지나자 점점 늙어 얼마 후 죽었다' ▲ 불가사리 전설에 등장하는 괴물, 불가살이라고도 합니다.일반적인 생김새는 곰의 몸에 물소의 눈, 코끼리의 코, 호랑이의 발톱(혹은 호랑이의 손), 코끼리의 꼬리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쇠를 먹으며 자라기 때문에 몸은 단단하기 그지 없으며 털이 바늘처럼 뾰족합니다.게다가 거대화 된 상태에서 돌로 만든 성벽따위를 부수는건 일도 아니며 어떤 도검으로도 벨 수 없는 강한 육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불가(不可)살(殺)이'(죽일 수 없다)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유일한 약점은 불.불가사리라는 이름은 '불(火)가살(可殺)'(불로 죽일 수 있다)이기도 합니다.그런데 오히려 나중에는 불에 약하기는 커녕 물의 기운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목조건물을 화재에 보호하기 위해 목조건물 앞에 불가사리 석상을 세워 놓기도 했습니다.실제로 경복궁 아미산 굴뚝 밑부분에 불가사리가 새겨져 있습니다.단, 불가사리가 세겨진 이유가 불가사리가 불을 막아서가 아닌 악한 기운을 정화시키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 미비 영노라고도 하며 휘파람 소리를 낸다고 합니다.팔다리가 없는 걸 제외하고는 용과 유사한 생김새를 하고 있으며, 머리에 짧고 뭉툭한 뿔이 나있고 비늘은 푸른색입니다.또한 엄청난 식성을 자랑하는데, 사람, 짐승, 심지어 바위나 쇠도 먹어 치울 정도로 엄청나다고 합니다.그럼에도 이무기에 비하여 평판은 그리 나쁘지는 않은 모양입니다.아마 못된 양반이나 탐관오리를 잡아먹는다고 믿어서인 듯 합니다.가산오광대, 고성오광대 등의 탈놀이에서는 타락한 양반이나 타락한 양반을 상징하는 케릭터인 오방신장 앞에 나타나 희롱하다 잡아먹어 버리는 먹성을 과시합니다. 그리고 배부르고 기분좋다며 춤을 추다 지나가던 포수의 총 한방에 죽게 됩니다. ▲ 삼두일족응 삼두일족응은 머리가 세 개고, 발이 하나인 매입니다.한국인은 3을 중시했으며, 머리가 세 개가 된 것은 그 결과로 보여집니다.이 새는 삼족오와 함께 한국의 소위 '신조(神鳥)'라 할 수 있는데, 삼재를 제 개의 머리로 쪼아갈긴다고 하여 조선 후기부터 그 그림을액막이 부적으로 삼아 가지고 다니기도 했다고 합니다.절에서 주는 입춘대길 부적에도 그려져 있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인기가 어지간히 있었는지, 삼두매라고 하는 도적도 조선시대에 있었다고 합니다. ▲ 상사뱀 사람이 타인에 대한 강한 사랑과 집착으로 변한 뱀을 말합니다.상사뱀에 대한 전설은 한국의 많은 지역과 중국에 존재하지만, 가장 유명한 것은 춘천의 청평사란 절에 전설로 내려오는 상사뱀입니다. ▲ 새타니 한국의 요괴 중 하나.새타니란 말이 지칭하는 대상은 2가지인데, 우선 어미에게 버림 받아 굶어죽은 남아의 원귀를 새타니라고 부릅니다.여자아이가 굶어 죽으면 태자귀라고 하며, 새타니와 태자귀는 무당이 신력을 보충하기 위해 일부러 만들어 부리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이미 보셨던 조선시대 괴담 중 염매가 새타니와 연관이 있다고 합니다.새타니가 원한이 강하거나 경험이 많아지면 새우니가 되며, 새우니는 훨씬 강력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통제 불능이라서 자신을 부린무당을 죽이고 사람들을 괴롭힌다고 합니다.또는 이런 원귀가 들린 무당을 북부 지역에서는 새타니, 남부지역에서는 태주 또는 명도라고 부르는데, 순우리말로 '새를 탄 이', 또는 '새를 받은 이'라는 뜻입니다. 만화 '바람의 나라'에 등장한 캐릭터 중 하나인 혜압도 후자쪽의 새타니 입니다. ▲ 수일이참대 작은 도마뱀 모습의 요괴. 그러나 칼로 자르면 금새 자라나 원래보다 더 커진다고 합니다.계속 반복되면 커다란 이무기 모습으로 바뀌는데 수십명의 무사가 덤벼도 끄떡 없다고 합니다.일설에 따르면 어여뿐 여자가 토굴속 요새에서 살다가 둔갑해서 생긴 것이라 합니다. ▲ 신귀원요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몸이 조각조각 분리되어 있습니다.대체로 몸이 분리될때 6조각으로 분리되며 분리된 조각들이 스믈스믈 기어갑니다.이런 모습을 본 사람은 그 끔찍한 모습에 미치거나 놀라서 죽는다고 합니다.잘린 조각은 다시 합칠 수 있으며 다 합쳤을때는 일반 여성과 별 다를바가 없다고 합니다. ▲ 야광귀 순 우리말로는 '앙괭이'라고 합니다.음력 정월 16일을 귀신날이라 하여, 먼길 가는 것을 삼가고 집집마다 길불을 켜놓고 머리카락이나 볏집 등을 태워 쥐신을 쫓았으며, 잘때는 신발을 밖에 두지 않고, 두어야 할때는 뒤집어 놓는 등의 풍속이있었다고 합니다.이는 밤에 빛을 내는 야광귀과 이날 민가에 내려와 돌아다니다가, 아이들의 신발을 신어보고 발에 맞는 신발을 신고 가버린다는 속설 때문입니다.야광귀에 대비하여 신을 감추고, 불을 끄고 잠을 자거나, 말총으로 만든 체를 걸어두면 신발을 훔치는 대신에 체의 구멍을 세다가 첫 닭이 울면 가버린다고 합니다. ▲ 어둑시니 어덕서니, 아독시니, 아둑시니라고도 합니다.고려시대에 기록되기 시작하여, 조선시대에 요괴로 정착했다고 합니다.또한 같은 한국 요괴인 그슨대와 상당히 비슷한 요괴이기도 합니다.기본적으로 어둠을 상징하며, 어둡지 않으면 힘을 쓰지 못한다고 합니다.사람이 지켜보고 있으면 점점 커지는데, 계속 바라보고 있으면 한없이 커져서 사람을 놀래키기도 합니다.그리고 올려다보면 올려다 볼 수록 더욱 더 커져서 마지막에서 사람이 깔려버리게 된다고 합니다.반대로 그렇게 커지고 있는 것을 억지로 내려다보면 점점 작아셔 마지막에는 다시 사라지게 된다고도 합니다.또한 눈을 돌려 버리고 무시해 버리면 끝인, 관심을 주지 않으면 사라져버리는 요괴입니다. ▲ 이무기 렁이가 천년을 살면 용이 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구렁이는 느긋해서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고 합니다.또한 여의주를 두개 이상 갖고 있으면 하나만 남기고 나머지는 포기해야 용이 되는데 욕심때문에 그러지 못한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용이 되기 위해서 물 속에서 수행을 하는데, 만일 1000년이 지나도 용이 되지 못하면 절망해서 난폭해진다고 합니다.또는 1000년 수행 후 밖으로 나와서 처음 만나는 사람을 기다리는데, 그 사람이 "용이다"고 하면 용이 되지만 "뱀이다"고 하면 이무기가 되어 다시 1000년을 수련해야 합니다.그 외에도 용이 되기 직전 사람에게 하늘로 오르는 모습을 보이면 도로 땅으로 쳐박혀 처음부터 다시 수련을 시작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설질이 사납다 뿐이지 직접 해를 끼치는 경우는 적지만, 하필 인간이랑 꼬여 이무기생을 망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때문에 격노한 이무기가 사람을 해치는데, 이것이 바로 '용오름' 현상입니다.사전에 의하면 거의 모든 생물의 왕, 헤엄치는 모든 생물을 관장하는 왕이며, 그들은 모두 이무기의 지배하에 있습니다.물고기가 2500마리가 넘으면 이무기가 나타나 그들의 왕이 된다고 합니다. ▲ 이수약우 한국의 괴물 혹은 환상종에 속하는 괴이한 짐승.코와 꼬리가 길고 몸집이 큰 네발 짐승. 코끼리나 소와 비슷하지만 훨씬 더 크고 긴 느낌이며 힘이 세고식성이 매우 좋아 특별히 포악하지 않음에도 다루기 어렵다고 합니다.799년에 신라의 우두주 도독이 발견하였다고 합니다.불가사리의 원형이라 봐도 좋을 요괴입니다. 솔직히 생김새뿐만 아니라 발견된 년도도 불가사리보다 훨씬 먼저 나왔습니다.사실 그냥 평범한 코끼리인데 사람들이 소문으로 듣고 생각했던 코끼리보다 크고 괴이하게 생겨 요괴라 생각하고 이런 이름을 붙였는지도 모른다고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 인두조수 사람의 머리를 한 요괴들을 일컫습니다. 요괴들 중 서열이 높은 것은 새의 몸을 한 것으로 이승과 저승을 두루 날아다니며신령들의 사자 혹은 영혼을 인도하는 역할을 합니다.이들은 대개 사람처럼 혹은 그 이상으로 지혜롭습니다.그 모습도 선비처럼 관리나 상투를 쓰는 등의 고상한 머리장식을 하고 있습니다. 새의 몸을 한 것 말고도 뱀 혹은 사슴 등의 네발 짐승의 몸을 한것, 머리와 꼬리에머리가 둘 달린 쌍두의 것도 있습니다. 이들의 고기를 먹으면 오래 살거나 머리가 좋아지거나 빨리 달릴 수 있다고 합니다.사람의 얼굴을 한 요괴나 영물은 범세계적으로 등장합니다.우리나라의 경우 고구려의 고분벽화에 잘 나타나있으며 그 종류도 천추, 만세, 성성, 하조, 서조 등 다양합니다. ▲ 일촌법사 '김소년과 대도둑' 설화에 등장하는 요괴들 중 하나로, 만년묵은 쥐요괴입니다.대도둑의 부하요괴이며 강력한 요괴로 꼬리털을 번개처럼 돌려 물을 폭포처럼 쏟아내는 요술을 사용합니다. ▲ 제생요마 삿갓과 도롱이를 쓰고 다리가 한개뿐인 인간형 요괴.주로 어두운 밤에 두 눈을 번뜩이며 한 다리로 껑충껑충 뛰어 다닙니다.뛰는 힘이 좋으며 특정 체질의 사람을 시름시름 앓게 한다고 합니다.서울 종묘 근처에서 이유란 자가 목격하였다는 기록이 '학산한언' 이라는 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 죽통미녀 <대동운부군옥에> 등장하는 요괴. '신라시대 김유신이 서주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앞을 보니 머리 위에 이상한 기운이 서린 한 이객이 걸어가고 있었다.얼마 후 이 손님이 길가 나무 밑에서 쉬기에, 김유신도 같이 나무 밑에서 쉬었다.김유신이 잠든 체하니, 손님은 주위에 사람이 있는지 살핀 다음 품속에서 죽통을 꺼내 흔들었다.그러자 그 안에서 두 미인이 나와, 함께 앉아 다정하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얼마 후 손님은 다시 미녀를 죽통속에 넣고 일어나 길을 떠났다.김유신이 그를 뒤따라 가서 얘기를 나누니 부드럽고 친절한 사람이었다.나중에 서울 경주에 들어와 김유신이 그를 안내해 남산 및 소나무 아래에서 잔치를 베푸니, 손님은 두 미녀를 나오게해서 함께 참여케하고, 자신은 서해에 사는데동해에서 아내를 취하여, 지금 아내를 데리고 부모(처가인 동해로)에게 문안 인사차 가는 일이라고 말하였다.그리고 곧 바람이 일고 구름이 몰려와 어두워지더니 손님이 사라져 버렸다' ▲ 창귀 호랑이에게 먹힌 사람이 귀신이 되어 호랑이의 명을 받드는 것을 말합니다.주로 중국이나 한국 전승에서 등장한다고 합니다.창귀는 호랑이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호랑이가 다른 사람을 잡아먹도록 유도합니다.호랑이가 다른 사람을 잡아 먹으면 그 창귀는 호랑이에게서 해방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창귀가 호랑이가 사람을 잡아먹도록 유도하지 않아도 매우 귀찮습니다.왜냐하면 창귀가 호랑이에게 함정의 위치등을 알려주어 민가의 피해가 커지기 때문입니다.창귀를 퇴치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는데, 창귀는 신 것을 좋아하므로 매실을 길에 뿌려두면 그걸 먹고 취하여 창귀를 거느리는 호랑이가 함정에 빠진다고 합니다.이 방법 외에도 식인 호랑이를 잡아 호랑이에게 죽은 사람의 장손이 호랑의 심장을 꺼내 씹어먹거나 호랑이에게 먹힌 시체를 호식총이란 분묘에 안치하여 봉하는 방법이 있습니다.창귀 중 유명한 것은 박지원의 소설 호질에 등장하는 세 창귀입니다. ▲ 치우 치우는 65ㅐ의 팔, 4개의 눈, 그리고 소의 뿔과 발굽,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된 이마를 가지고 있었으며, 맨몸으로 맹수와도 대적할 수 있을 만큼 힘도 굉장히 강했다고 합니다.때문에 당시의 조악한 기술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으며 안개 도술까지 구사할 수 있어 어디서 어떻게 나타날지 알 수 없으니 결국 그 누구도 대적할 수 없었습니다.이것을 요사하기를 동두철액이라고 합니다.형제 81인 또는 72인과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다녔다고도 합니다.치우라는 이름이 처음 발견된 기록은 산해경인데, 산해경은 전국시대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됩니다.치우가 정말 고대의 실존 인물이었다면 수없이 발견된 은의 갑골문자에는 왜 전혀 나오지 않는지를 전혀 설명하지 못한다고 합니다.죽, 신화속의 존재일 확률이 매우 높다. 실존 인물이라는 증거라고는 전혀 없습니다.치우의 무덤이라 전해내려오는 곳들도 그냥 그렇다는 구전이 내려올 뿐, 유물이나 기록같은 제대로 된 근거가 없다고 합니다. ▲ 홍량거부 바다와 육지를 오가는 거대한 이무기 모양의 괴물. 길이가 수십미터 정도의 괴물로 육지에서 짐승을,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아먹는다고 합니다.거대한 만큼 매우 둔해 함정에 잘 걸린다고 합니다.뱃속에 진주와 비슷하게 생긴 보석들이 엄청나게 많이 있어 조선시대의 한 화포장이 무인도에서 우연히 마주친 이 요괴를 함정으로 죽이고보석들을 꺼내 무인도를 지나던 상인들에게 구출된 직후 모두 팔아 부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 탄주어 엄청나게 거대한 물고기 요괴. 배를 한입에 삼킬정도로 거대하다고 합니다. ▲ 해태 사자같기도 하고 구름같은 갈기를 가지고 코는 크고 수염이 달렸습니다.눈은 부릅뜨면서 눈썹까지 달렸습니다. 선인은 내러벼두고 악인은 해한다고 하는 한국과 중국의 상상의 동물.환상종입니다. 해치라고도하며, 뜻은 해님이 파견한 벼슬아치라고 합니다.광화문 앞에도 한 쌍 놓여있는데, 이것은 파사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경복궁을 지을 당시 관악산이 품고 있는 화기를 불을 먹는 해태를 통해억누르려고 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한국의 해태는 뿔이 없는 것이 특징입니다. 생긴 것도 중국의 해태와는 달리 삽살개나 사자를 닮았습니다.옛 그림을 보면 차이가 큰데, 한국의 해치와 사자의 차이는 순종왕릉의 궤에만 보이며, 그 차이는 해치는 사자와 달리 몸에 비늘무늬가 있고 목에 방울이 달린 정도의 차이가 납니다.그나마도 흉배나 탱화, 민화의 경우에는 그것도 없어 사실상 사자와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한국 해태가 뿔이 없는 이유로 가장 유력한 것은 해태가 본래 황제에게만 허락된 상징물이기 때문에 중국 사신이 보면 뭐라고 할까봐 속이기 위해서라고 합니다.중국 한의 양부가 지은 '이물지'에서 최초로 그 묘사를 찾을 수 있는데, 이에 따르면 "동북 지방의 황량한 땅에 어떤 짐승이 사는데 이름을 '해치'라고 한다.뿔이 하나이고 성품이 충직하다.사람들이 싸우는 것을 보면 바르지 못한 자를 들이받고 사람들이 서로 따지는 것을 들으면 옳지 못한 자를 문다" 고 합니다.그 상징성 때문에 국회, 경찰청, 대법원을 물론이고 일단 사법연수원에도 해태의 상이 세워져 있으며, 서울대학교 근대법학교육 백주년 기념관 앞에 있는 '정의의 종'에도 새겨져 있습니다.이 곳의 해태는 학교 교수의 주장으로 뿔이 있다고 합니다. 출처 : http://cafe.naver.com/pclemon2차 출처 : 네이트 판http://m.pann.nate.com/talk/322768059 3차 출처 : 오늘의 유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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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역사해석에 있어서 거시적 관점이 중요한 이유
어제밤에 올라온 이완용 관련 글에서 거시적 관점에 대해서 이야기 하던 사람입니다예전 부터 이런 글 한번 올려보고 싶었는데, 지난번 군가산점 반대글과 마찬가지로논란 각오하고 글 올려 봅니다.안중근 의사에 대한 역사적 해석을 중심으로 서술해봅니다.내용은 조금 깁니다 그래도 제 머릿속에서 여태껏 제가 문헌들 찾아보고나름의 결론을 내린 결과를 다 적은것입니다 저는 많은 사람들이 친일이냐 반일이냐에 영웅과 간신으로 나누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물론 그게 아예 틀려 먹었다는건 아닙니다..적어도 조선이 일본에 강제병합된 이후 해방전까진 친일 인사들은 진짜 매국노들이라고 보시면 됩니다즉, 강화도조약 이후 1910년 이전까지만 하더라도조선의 젊은 지식인들 대부분이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개화론에 매우 감화가 되어있었던 상태였습니다특히나 급진적 개화파들 눈에는 일본이 대단해 보였는데서구열강과 맞서서 외교적, 군사적 지위를 누리는것도 모자라동양의 절대강자로 생각했던 청나라를 청일전쟁에서 이겼기 때문이었죠급진개화파는 당시 친청 민씨척족정권이 내세우던 단순한 국왕권 강화와 유지에 머무르는 보수적 개화는당시의 세계화 흐름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죠 거기에서 출발해서 갑신정변에까지 이르게 되지만요갑신정변의 주도 인물중 하나였던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유길준 같은 사람들은일본이 시행하는 국왕중심이 아닌 내각제를 필두로한 개화정책이 최선이라고 생각하게 되죠실제로 일본에 수신사로 오고가면서 후쿠자와 유키치를 직접만나 문명개화론을 직접 듣고 그러기도 했죠여기서 잠시 정리구한말 조선 지식인은 크게 세가지 파로 나뉩니다..1. 온건적개화파(친청, 친러)2. 급진적개화파(친일)3. 위정척사파(보수사대부)이 세 세력이 지지고 볶고 싸운건 뭐 제가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가장 중요한건 이들에게도 공통점은 한가지 있었습니다즉 국왕인 고종은 곧 조선이고, 국왕을 부정하고 비판하는것은곧 조선을 부정하고 비판하는 것이라 생각했죠실제로 친일이고 친청이고 친러고, 보수유생이고 뭐고 간에 끝까지 고종은 지켰었죠임오군란, 갑신정변, 아관파천이라든가 할때도 말입니다심지어 개화와 관련해서 당시 사대부치곤 고종을 강력하게 비판했던최익현 선생조차도 을사의병 당시에 국왕의 진위대와 싸울수는 없다 하면서의병을 해산하고 자진해서 포박됩니다외교권이 넘어가고 통감부가 설치되서 본격적인 국정 간섭이 시작되는즉, 지금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관점에서는 나라가 망했는데도 말이죠-_-;이걸 봐도 을사늑약의 내용이 뭐 어떻고 자시고 간에고종만 살아있고 종묘사직만 지켜나갈수 있으면 된다이게 당시의 보수사대부에서 급진개화파 지식인들에게 이르기까지의 공통점이었습니다심지어 동학농민운동 당시에도 농민운동군이 내세운 이유가일본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우리 임금을 협박하고 있다는 것이었죠조선의 역사가 600년이 되도록 하나의 가계로 왕권이 유지될수 있었던건이런 국왕중심의 사대의식이 양반사대부들 뿐만 아니라 평민, 노비들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의식 속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었던 겁니다어찌됐든 역사는 이렇게 우리가 35년간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아온 식으로 흘러왔습니다그런데 중요한건 일본의 식민통치에 협력했던 인물들을 찾아내서 단죄시켜야하는 것도중요하지만 왜 우리가 이렇게 남의 나라에 의해서 지배를 당했느냐에 대한 근본적 해결책은 될수가 없다는것도 사실입니다지금부터 저는 역사해석에서 거시적 관점에 대해 조금 논란이 되는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여러분은 안중근 의사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계신지 모르겠습니다일제식민통치하 독립운동기 일본의 정치거물 암살미수사건은 꽤나 많았습니다그런데 안중근 의사나 윤봉길 의사처럼 성공한 사례는 극히 드뭅니다그런데 우리는 안중근 의사의 생의 전체 흔적을 잘 모르고그의 생의 마지막 3년 즉, 1907년부터 1910년까지 항일 무장투쟁운동에 참가하여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하고 일본에 의해사형당하기까지의 역사만 알고 있습니다안의사에 대한 나머지 행적에 대해서 조금 말씀 드려봅니다안의사는 황해도 출신의 봉건적 양반 가문의 유생의 손자로 태어납니다의사의 아버지 안태훈은 안의사의 할아버지와는 달리 급진적개화파 청년그룹의 일원이었죠박영효가 수신사로 왔다 갔다 하면서 약 70명의 젊은 개화지식인들을 일본으로유학시킬때도 선발됐죠...근데 일본유학은 갑신정변 으로 좌절이 됐고요어쨋든 그 이후로 안의사는 아버지 안태훈과 황해도 본가에서 은둔하는데10년 후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황해도 관찰사 정현석과 해주감사는지역 유지였던 안태훈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아버지인 안태훈이 포수를 조직해 농민군을 진압할때 16세의 안중근은 우수한 지도력을발휘해서 박석골 전투 등 많은 전투에서 농민군을 진압한 관군 승리의 견인차 역할을 했습니다여기까지의 안중근은 민중을 수탈하는 봉건지배계급의 일원이었을 뿐이었던 겁니다(동학사상사료집 466)3년 후에 아버지 안태훈이 정부문서 기록에 다시 등장합니다동학농민군이 부패한 양반집을 털어서 민중들에게 나눠줄 쌀 500석을 안태훈이정부 재가 없이 마음대로 군량미로 썼다는 이유에서였죠 그런데 이때 안태훈이 천주교회를 찾아가서 프랑스 신부의 도움을 받는데이때 부터 안씨 집안이 열렬한 천주교 신자가 되는 출발점이었습니다어쨋든 이런 아버지를 따라 안중근은 1906년 대동강 하류 진남포로 옮겨 석탄상회를 경영하다가삼흥학교과 돈의학교를 열어 교육자가 되는데 당시 진남포는 서울 용산과 더불어 러일전쟁 때 일본군이첫 상륙한 주둔지였습니다(한일 의정서에 명시된곳 중 한곳)이 전쟁은 비록 러시아와 일본의 싸움이었지만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 민중들이 겪게 되었죠이런 진남포라는 왜(倭)색 짙은 곳에서 안중근은 후쿠자와 유키치의문명개화론의 열렬한 지지자 겸 지방청년들에게 문명개화론을 가르치는 교육자가 됩니다이때 당시의 안중근은 그저 일본과 천주교(외세)를 믿는 그저 그런 봉건 양반이었을 뿐이었죠..하지만 상황은 1907년을 기점으로 바뀌게 됩니다여러분들이 아시는것처럼 정미7조약으로 고종퇴위와 맞물려서 군대해산이 되자의병운동에 참여하게 되고 일본에 맞서 싸우게 되어 마침내는 이토히로부미를 사살했죠여기서도 보시는것처럼 알수있지만 안중근도 그 당시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고종이라는 존재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 사람이었습니다반일제 무장투쟁기에 안의사는 10년전 개화파 친일 세력이었던 아버지와 자신을 어떻게극복했는지, 수탈에 못이겨 일어난 동학농민군을 때려잡는 관군 안중근이어떻게 민중과 화해했는지는 우리 역사책은 가르쳐 주지 않죠..게다가 안의사가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하면서 꿨던 이상이 억조창생의 조선왕조 복원이었는지, 조선 민중 전체의 해방이었는지 아무도 이야기 하지 않고 있습니다그저 안의사가 이토히로부미를 쏴 죽였으니 민족의 영웅이라고 서술할 뿐입니다안의사에 대한 행적중에 몇몇 부분에서 그의 친일적이고 봉건적인 사상이 드러나는데그의 저서와 이토히로부미를 암살한 죄로 재판을 받을때 동학농민군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드러냅니다실제로 재판에서는 동학농민운동군은 나라를 망하게 한 좀도둑들이라고 이야기 까지 하고요..아래는 안의사의 저서에서의 동학농민군에 대한 그의 인식입니다"그 무렵 한국 각 지방에서는 이른바 동학당이 곳곳에서 벌떼처럼 일어나, 외국인을 배척한다는 핑계로 군현(郡縣)을 횡행하면서 관리들을 죽이고 백성의 재산을 약탈했다. …… 그때 나의 아버지는 동학당의 폭행을 견디기 어려워 동지들을 단결하고 격문을 뿌려 의거를 일으켰다.포수들을 불러 모으고 처자들까지 대열에 편입시켜 정예병이 무려 70여 명이나 되었다. 청계 산중에 진을 치고 동학당에 항거했다. …… 그때 나는 동지 6명과 함께 자원하고 나서서, 선봉 겸 정탐독립대가 되어 전진 수색하면서 적병의 대장이 있는 곳에 아주 가까이 다다랐다."<안응칠의 역사 - 응칠, 안중근의 자>또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한 이유로 재판받을 당시 안의사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첫번째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두번째 고종황제폐하를 강제퇴위 시킨 죄세번째 7조약(정미7조약)을 통해 군대를 해산시킨 죄...마지막 현 천황폐하(메이지 일왕)의 아버지(고메이 일왕)를 시해한 죄위의 세가지에서는 그의 봉건적 유생으로서의 인식을 알 수 있지만...마지막 문구는...자뭇 친일적 의식이 드러나죠...꼭 일왕과 그의 아버지는 조선과 친하게 지내려 했는데이토히로부미가 꼬드겨서 일이 이지경이 되었고 나는 그를 쏠 수 밖에 없었다 이런식으로요그리고 결정적인것은 안의사가 인종주의자 였고 친일적 관점을 가진 증거는여러군데서 발견이 됩니다박노자의 당신들의 대한민국에서 발췌하자면....안중근 역시 인종주의자로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를 '황인종이 백인종을 누른 쾌거'라며 기뻐했다고 한다. 안중근이 반일로 돌아선 이유는 바로 이등후작의 배신 행위 때문이다."....라고 박노자는 그의 책에 기록하면서 이상하게 변질된 민족주의를 비판하였다.이런 관점은 시일야방성대곡을 쓴 장지연이 친일파로 규정되는 결정적 계기가 됩니다장지연은 "백인(서구열강)에 맞서 싸우려면 황인(동아시아 전체)는 일본을 중심으로 단결해야 된다"라고 이야기 한것과 사실상 일맥상통합니다이뿐만 아니라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장지연을 친일인사로 분류한건 결정적으로 일제로 부터 억압받던 민중해방이 아니라 왕조복위를 우선 했다는점이 가장 큽니다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한 것 외에는 장지연과 일맥상통하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안의사도 엄격한 관점에서 보면 친일파로 규정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그런데 이건 안의사 본인 혼자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근본적으로 제국주의 시대가 흘러오고 있고그에 대한 역사적 흐름을 전혀 읽지를 못했다는 점은 그 당시 조선 지식인들의공통적 특징이었습니다원래 구한말 조선의 개화론자들은 일본이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국가로 성장한것을본받아 조선도 그렇게 성장해야된다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그런데 그 당시 일본에서는 조선에 대한 입장을 두가지로 정리하게 됩니다메이지 유신 성공의 가장 대표적인 두 세력인 조슈와 사츠마 출신들이 메이지 유신 당시에는 에도막부를 타도하기 위해서 연합했지만 근본적으로 출신지역과 사고방식이 너무 달라 사사건건 대립했는데그와중에 사츠마 출신 대표인 다이고 사카모리가 정한론 즉, 조선을 정벌해서라도문명개화를 시켜야 한다는 쪽으로 입장을 정리하자갑자기 조슈 출신들이 안된다라고 반대하게 되죠이토히로부미는 조슈출신이어서 일단은 자기 집단의 의견을 따를수 밖에 없었고요그 이후 사츠마 출신들이 정계에 밀려나면서 일본 서남전쟁을 일으키고 거기서 승리한조슈출신들이 일본정부를 장악하는데 그들이 곧 우리나라를 식민 통치한 사람들이고현재 아베나 기타 일본 우익정치인들의 할아버지 증조 할아버지 이런 사람들입니다근데 웃긴건 당시 조선 개화파 지식인들이 단순히 정치적인 이유로 조슈출신들이사츠마 출신들이 주장하는 정한론에 반대하는거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을 도와주려는 선한 세력들이구나 하고 착각을 하고 그들을 지지하는데역사가 흘러온 방향을 보셔도 아시다시피 조슈 출신들은 정한론이나 반정한론이냐가 중요한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사츠마 출신들을 밀어내고 일본정계를 장악하느냐가더 큰 문제였고 조선정벌은 그 이후의 문제로 여겼는데도 불구하고조선 개화파 청년들은 순진하게도 그들의 의도를 간파하지 못하고나라까지 넘겨주는 꼴을 당하게 되죠....또한 안의사는 그의 저서 동양평화론에서 언급하기를일본은 즉시 청으로 빼앗은 영토를 돌려주고 조선왕조를 복원하고 청과 조선을 침략하지 말고 서로 힘을 합해일본을 중심으로 서구열강에 대항하자라는말까지 합니다이게 사실 위험한건데 일본이 제국주의 시절에 주장했던대동아공영권과 매우 일맥상통하는 내용입니다몇몇 민족주의 학자들은 안의사가 주장한 동양평화론은 오늘날 EU 같은 개념의 발상이다 라고 이야기 하지만제국주의 시대때는 완전히 시대착오적인 발상이었는건 분명합니다그리고 일본에서 아직도 안의사를 존경한다는 사람들이 있는데그들 중 일부는 안의사가 주장한 동양평화론이 일본제국주의가 주장했던대동아공영권과 일치하는거라고 생각해서 존경하는 인물도 있습니다....우리가 여태껏 민족영웅으로만 생각했던 안의사조차도 어찌 보면 정미7조약 이전까지는친일적 행적을 가지고 살아온 과거가 있습니다그런데 정확하게 이야기 하자면 식민통치 시절에 일본에 협력하여 우리 민중을 수탈해 먹던친일파들와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것이근대화의 가장 성공사례로 뽑을수 있는게 일본이었으니당시 지식인들이 일본을 본받고 배우자 했던건 당연한 일 일수도 있습니다그런데 우리는 보면 친일을 했든지 혹은 저항운동을 했든지 하는어떤 인물의 단편적이고 개괄적인 부분만 보고 나쁜놈이네 아니네를 판단하고 있습니다마치 구한말 조선 지식인들이 일제가 진정으로 바라고자 했던 식민통치와 대륙침략에 대한 커다란 야욕을 거시적인 인식으로 간파하지 못하고 단지 문명개화로 성공한 일본의 단편적인 부분만 보고 배우려고 했던 점을요저는 친일인사를 족치면 안된다 이런말을 하고 있는게 아닙니다그들의 역사적 과오는 단죄는 하되 우리가 배워야할 점은 친일이냐 반일이냐의 문제도 있지만우리가 현시대의 흐름을 미시적으로만이 아니라 과연 얼마나 거시적으로도 보느냐에 따라서 달라질수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지나치게 미시적이고 개괄적인 사고를 가지는것을 경계하는것입니다이제 댓글에 식민사관이다 하는 글이 미친듯이 올라올거 같은데우리가 알고 있는 단편적인 사실들이 모두 진실이 아닌것은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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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이 시각 언론은? GH 지지율, 9.7% 폭락
이 시각 언론은? GH, 그의 교과서는? + GH 지지율, 9.7% 폭락 [어소뷰둘암님 편집글] <한겨레>는 한국사를 수능 필수과목 추진한 대통령, 그의 교과서는 이라는 조금은 문학적인 타이틀을, <경향신문>은 10월 재보선 D-40, 새누리 '싱겁게 승리할까 를 머릿기사로 선정했습니다. 살짝 문학적인 냄새(?)가 난다고 했더니 <한겨레21>의 기사를 소개한 것이군요? "역사에 눈을 감는 자는 미래를 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갖지 못하는 것은 오늘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내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멋진 말이죠? 누구의 말일까요? 바로 GH가 지난 5월 8일 미국 의회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한 연설의 일부분입니다. 문제는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 대한 입장일 텐데요. 누구나 역사에 대해 '올바른 인식'을 강조합니다. 문제는 그 '올바른' 인식이 도대체 무엇이냐는 것이겠죠. 최근 교학사 교과서 논란은 이 부분에 대한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한겨레21>은 잘못 인용한 '북침', 전두환 실권 뒤 박정희 '복권 활동', 베트남 방문해 전쟁에 대해선 언급 안해 등을 통해 GH의 역사관을 들여다봤습니다. 흥미로운 글이네요. 링크를 걸어둘 테니 관심있으신 분들은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 기사로 이동)<경향신문>은 10월 재보선을 다뤘습니다. 조금 뜬금없는 뉴스네요? 이미 대법원에서 "이번 달에는 26~27일에만 대법원 판결이 예정돼 있는데 여기에 선거법 관련 선고는 없다. 결국 10월 재보선은 2곳에서만 치르게 됐다"는 입장을 밝혔죠? (다음 글을 참조하세요. 법을 무시한 대법원, 결국 미니 재보선으로.. 與野의 표정은?) 대법원이 입장을 바꾸기로 한 것일까요? 그것이 아니라면 <경향신문>의 기사는 상당한 '뜬금포'로 보입니다. 그 외의 뉴스들을 좀 살펴보죠. 우선, <경향신문>의 도둑맞은 문정왕후 어보 돌아온다 는 소식이 반갑습니다. 현재 미국 박물관에 소장 중인 우리의 문화재인데요. 어떻게 건너가게 된 것일까요? 다름 아니라 한국 전쟁 당시 미군 병사가 몰려 가져갔다고 하네요. 이런~! 프레드 골드스틴 LACMA 수석 부관장은 "어보가 종묘에서 불법적으로 반출된 사실이 분명하므로 한국에 반환하겠다"고 밝혔는데요. 그래도 참 멋지죠? 문제는 이런 식으로 없어진 어보가 무려 47개나 된다는 것인데요. 다행스럽게도 4개는 반환이 됐지만, 나머지 42개는 행방조차 묘연하다고 합니다. 끄응~!그 외에 후쿠시마현에 또 지진 규모 5.9 … 원전 이상 없나, 아동성범죄 평균형량 고작 3.84년 등이 눈에 띄네요. 정말 열 받는 기사죠? <한겨레>에서는 경찰, '내란음모 혐의' 이석기 의원 구속시한 연장 정도 입니다. <뷰스앤뉴스>는 朴대통령 지지율, 1주일새 9.7% 폭락, <한국일보>는 한국에 뻔뻔한 짓을 … 파렴치한 일 을 각각 메인뉴스로 선택했습니다. GH의 지지율이 상당히 많이 빠졌죠? 이와 관련해서 쓴 글이 있는데요. (다음 글을 참조하세요. 대통령의 국정수행에 불만인가요? 여론조사에 참여하세요!) 이택수 <리얼미터> 대표는 트위터를 통해 여론조사 결과를 알리면서 "박근혜 대통령이 G20 정상회담후 70%에 근접했으나 최근 채동욱 검찰총장 사의표명, 여야 3자회담 결렬과정을 거치면서 연휴 직전 59.8%까지 하락했습니다. 연휴기간 동안 청와대의 고민이 깊어보입니다" 라는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여론조사 결과가 청와대에 압박 카드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지지율이 떨어지면 청와대로서도 지금의 입장을 계속 고수할 수 있는 명분이 없어지게 되니까요. <한국일보>는 일본이 징용 조선소를 세계문화유산 후보로 결정한 것을 비난했습니다. 정말 어이없는 일이네요. 일본의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기자회견에서 "총리실 산하 내각관방 유식자 회의가 추천한 '메이지(明治)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 규슈ㆍ야마구치와 관련 지역'을 201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추천한다"고 발표하면서 "(이들 시설은) 일본이 제조문화 대국이 된 역사를 상징하는 것"이라며 추천 이유를 밝혔습니다. 일본이 유네스코에 유산 신청서를 제출하면, 세계문화유산 위원회는 심사를 거쳐 2015년 등록 여부를 결정하게 됩니다. 당연히 등재가 안 됐으면 좋겠고, 안 되어야 정상이지만 애석하게도 '등재'는 거의 확실해보입니다. 일본의 추천 목록이 거부된 사례가 거의 없다고 하네요. 일본 측에서는 무난히 등재가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외에 <뷰스앤뉴스>에서는 "4대강이 대구-부산 신부 각성시켰다", 7월까리 세수 실적 역대 최악, 환란 때보다 나빠 등이 눈길을 끄네요. <한국일보>는 "젊은 남성들, 에너지 음료 마시면…" 을 실었습니다. 호주 텔레손아동보건연구소의 연구에 따르면, 에너지 음료가 젊은 남성에게 불안감을 유도한다고 하네요. 에너지 음료를 마시는 '젊은 남성'들은 살짝 주의해야 할 것 같습니다.<조선일보>는 "북, 외교관 · 해외주재원 자녀 1명 외 '전원 귀국' 명령" 을, <동아일보>는 송강호-설경구-홍상수 한국영화 '파워 3인' 대박 팡팡 터지나 를 각각 톱뉴스로 실었습니다. <조선일보>는 북한 소식을, <동아일보>는 추석 시즌답게 '문화' 뉴스를 전면에 내세웠군요? 송강호는 '관상', 설경구는 '스파이', 홍상수는 '우리 선희'. 다들 보셨나요? '관상'의 경우에는 현재 550만을 돌파하면서 파죽지세로 내달리고 있고, '스파이'도 '추석 연휴에는 코미디가 흥한다'는 공식을 또 한 번 증명하면서 242만 명을 넘겼습니다. '우리 선희'의 경우에도 2만 관객을 돌파하면서 예술 영화 중 최단 기록을 세우고 있습니다. 아직 연휴가 이틀 남았는데요. 영화관에 들러 한국영화를 감상하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가자서작성일
2013-09-21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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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어버이연합, 존경받는 어버이가 되어주세요.
어버이연합, 존경받는 어버이가 되어주세요.
[난 아직도
ing님 글]
아버지와 어머니를 아울러 이르는 말, 어버이. 어버이연합이라는
단체는 우리가 인지하기 아주 오래전부터
있어온 단체라고 나는 그렇게 알고 있다. 본인들을 '보수'라고 칭하며, 사회 각종 논란이 일어날때마다 항상 보이는 단체, 어디선가 누구에게
무슨일이 생기면 항상 나타나는 '종북 좌파' 라고 한다면 짱가도 아닌것이 태권V도 아닌것이 바람처럼 나타나서 이슬처럼 사라지는 이 어버이연합.
존경받는 어버이 보다는, 글쎄. 눈살이 찌푸려지는 행적들이 가관이다.
외로운 노인들을 한데로 결집시킨
어버이연합
이 어버이연합의 탄생부터 지금까지 내가 봐온 것들은 이러했다.
탑골공원에서 무료한 시간을 달래던 노인들이 탑골공원 성역화가 시작되자 거리로 다시 내몰리게 되었다. 다시 거리로 내 몰린 노인들은 다시 또
이리저리 돌고 돌아 정착한 곳이 종묘공원. 종묘공원에 모인 이들을 다시 또 결집시키고, 2006년 5월
사무실을 얻어 만들어진 단체가 이 어버이 연합이다.
이 어버이연합의 회원들에겐 공통분모가 하나
있었으니, 전쟁의 참사를 몸소 느끼고 안 '노인세대' 라는것과, 그리고 외롭고 곤궁하다는 것이다. 전쟁의 참사를 몸소 느끼고, 그들이 그렇게
입에 달고 사는 '빨갱이'에 억눌려 살아오다 보니, '빨갱이' 라는 단어엔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거리로 나선다는것과, 그리고
자식들에게 외면받고 외롭다 보니, 그런곳에서 친구들을 만나 시위를 하고 라면도 나눠 먹으며 동지의식과 결집력을 다진다.
몇년전 이었나, 그때 각종언론사에 낙하산 인사를
투입한다기에 언론은 그러면 안된다는 생각에 무작정 서울로 가서 MBC를 들렀다, KBS 계단앞에 쪼그려 앉아 있을때였나보다. 나 말고도 30명
정도 사람들이 있었는데 뜨거운 날씨만큼이나 더 낯뜨거웠던건, 어디선가 누구에게 무슨일이 생기면 출동한 짱가마냥 어디서 오셧는지 우르르 몰려와
이유도 없이 '빨갱이' 폭언을 내뱉고 아무거나 막 말로차고 몸싸움을 하는 어버이연합 회원들이었다.
이리저리 사람을 밀치고 마구잡이로 빨갱이라
소리지르고, 막아서는 경찰들도 역부족. 어버이연합 회원중 한명이 들고 있던 피켓으로 아무나 막 찌르며 폭언을 내뱉자 화가 난 사람중 한명이
어버이연합 회원중 한명을 살짝 밀쳤더니 저만큼 나동그라져 '아이고 나죽네.' 소리지르며 한바탕 헤프닝이 벌어졌던거 까지 기억이
난다. 그땐 참 사람들이 안타깝기 보다는 너무 화가났다. 결국 그들이 그렇게 '빨갱이'라 부르던 사람들의
피값위에 집회 결사의 자유도 보장된 대한민국에서 아무나 무자비로 빨갱이 소리지르며 화를 내는 상황들도 너무 화가났지만, '도대체 무엇이 저들을 저렇게
극렬하게 거리로 나서게 만드는가.' 라는 생각도 들었던것도 사실이다.
그뒤로 한참을 잊고 지내다, 서울시의 무상 급식에
반대하기 위해 거리로 나선 저들을 보게 되었다. 어린아이들 밥한끼 눈치없이 먹여주자는것이 뭐가 그렇게 불만인지 정작 그들이 빨갱이라 주장하는
'무상' 지하철을 타고 서울시청앞으로 몰려와 무상급식은 빨갱이라 외치던 그들을 보며 인간적인 연민마저도 들었던것이 사실이다. 자칭
보수주의자라면서 조금이라도 진보적 색채를 띈 자들에게 아직도 빨갱이 타령이나 하고 있었다.
정말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적 국가를 원한다면 앞으로
노인들도 지하철 탈때 돈내고 타야되고, 주민세도 꼬박꼬박 내야하고, 건강보험? 그걸 왜 국가에서 하는건가, 지금 매일처럼 말이 나오는 노인복지도
사실 개인이 젊었을때 대비했었어야 하고, 이런식으로 따지면 한도 끝도 없다. 초등학교도 돈 내고 다녀야지. 경로석도 없애야지. 똑같은 돈, 아니
돈 더내고 타는 사람이 왜 자리를 양보하나? 그러면 또 빨갱이라고 할건지.
존경받지 못하는 대한민국의 어버이, 왜?
저들을 하루일당 3만원에 움직이는 노인네, 가스통
할배, 등등등 저들을 지칭하는 단어들은 아주 많다. 어버이연합 이라는 단체에 대항하기 위해, 자식연합 이라는 단체도 생기고 어버이라는 뜻이 원래
어머니와 아버지를 아울러 이야기 하지만 사실 우리 가정속의 어머니, 아버지처럼 어버이연합이 존경받지 못한다. 되려 외면받고 가스통할배,
용역집단이라 욕만 듣지. 왜 저들을 존경하지
못하는걸까? 왜 저들이 저렇게 대중에게서 외면받는걸까? 가만히 고민하고 생각한 결론은 이러하다.
일단 저들이 이야기 하고자 하는, 말의 앞뒤가 맞지
않다. 무상 복지는 나라를 망치는 포퓰리즘이라 이야기 한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국가로 받는 혜택은 아주 당연하면서, 자신들이 받지 못하는 혜택을
받는 사람을 빨갱이로 몰아세워 버린다. 그리고 그 '빨갱이' 들을 위해 거리로 나서는 불편함도 마다하지 않고 있다.
저번에 일어났었던 서울시의회로 난입해 난동을 부렸던
사건이 아주 유명하다. 그때 초등학생 무상급식에 관한 조례가 서울시의회에서 논의되고 있었다. 그때 무상급식은 복지 포퓰리즘, 빨갱이들이나
하는거라며 어버이연합 회원들은 무료 지하철을 타고 서울시청앞으로 가서 한시간여동안 시청앞에서 시위를 하다, 서울시의회로 난입해서 난동을
부렸더라지.
그때 난 참 기가차고 어이가 없었다. 왜 자신들의
복지는 '당연'한거면서, 왜 다른 사람의 복지는 그렇게 기를 쓰고 도시락 싸들고 다니며 반대를 하는건지. 예전 박정희 시대에 피땀흘려 나라
일구어놓은 것에 대한 보답이라 이야기 하는데, 그렇다면 그 어린아이들의 무상급식이나 무상복지는 앞으로 대한민국을 이끌어 나갈 아이들에게 해줄수
있는 어른들의 최소한의 배려이고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해 줄수 있는 최선이다.
왜 자신들의 무상교통에는 무상복지에는 인색하지
않으며 저들이 빨갱이라 부르는, 그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노인복지정책의 열매를 가장 달콤하게 따먹고 박근혜 대통렁이 노인복지를 받을수 있는
노인의 연령대를 올리겠다는 발표에는 파르르 떨고 분노하면서, 왜 함께 같이 살아가야 할 어떻게 보면 그들보다 우선해서 먼저 배려되어야 할
어린아이들의 밥그릇에는 그렇게 인색하고 '빨갱이' 라 낙인찍는 이유를 나는 잘 모르겠다.
'학생인권조례가 공포되면 초중고생이 자유롭게
성생활과 동성애를 할 수 있고, 자유롭게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겁니다. 선생님이 숙제를 많이 내면 ‘선생님 몰아내자’ 이렇게 나올 수 있고, 더
나아가 빨갱이들이 10대에게 죽창 하나씩 쥐여주고 "너희들이 어버이연합 어르신들 척결해라" 이런 날이 올 수도 있습니다. 이런 X같은
학생인권조례안을 내는 곽노현·민주통합당 척결하자!'
한때 어버이연합 사무실에 울려퍼진 구호다. 학생
인권 조례에 뭐 임신설명서라도 첨부되어 있는것도 아니고 자유롭게 성생활과 동성애를 하라고 권유하는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 속에는 '차별' 받지
않을 권리를 이야기 했다. 그러니까 임신한아이, 동성애 보고 놀리거나 놀라지 마라, 이상한 시선으로 보지마라 이 뜻이다. 자신들이 '노인' 이라 사회에서 외면받고 설움받는것을 어느
누구보다도 더 잘알고 또한 느끼고 있으면서 차별받고 외면받는 학생들을 구해내는데 있어 왜 이렇게 안쓰럽고 불쌍한걸까. 그것도 연관성이 전혀 없는
'빨갱이' 라는 단어에 목을 메며 말이다.
한국 고전소설들을 읽다보면, 한국이 일제식민지
시대를 거치고 독립을해 쩔둑발이 대한민국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이 묘사되어있다. 일제 식민지 시대에 일제에 앞장서 독립군들을 때려잡던 일본
앞잡이들을 '빨갱이'들이 몰려 내려와 죽창이나 각종 흉기들을 동원해서 잔인하게 살해하는 장면, 지금 저들이 아무나 대고 '빨갱이' 낙인찍는것
처럼 자신들이 원하고자 하는 사회를 만들기에 걸림돌이 되는 사람들을 '일본 앞잡이' 라 낙인찍어 잔인하게 살해하는 장면. 그리고 6.25 전쟁.
그때 이 시대가 결코 거짓이 아니었기에 저들이 저렇게 빨갱이라는 단어에 민감할테지.
하지만 시대는 바뀌었다. 정말 극렬한 저들이
상상하는 '빨갱이'는 사라진지 오래이고, 저들의 상상력이 만들어 낸 가공의 빨갱이들이 피를 흘려 찾아온 복지정책과 기본권을 너무나도 달콤하게
따먹으며 빨갱이를 운운하다. 그렇게 빨갱이가 싫으면 그 빨갱이들이 만들어내는 정책에 포함되지 말았어야지. 왜 '빨갱이 정책'은 좋아하면서 왜
아무나대고 '빨갱' 거리는가. 아직도 색깔론이 먹혀들어가는거 보면, 대한민국 멀어도 한참 멀었다 라는 생각도 든다.
사실, 지금 어버이연합에게 제일 필요한것은...
어버이연합 소속분들과 할아버님들이 안되긴 하지만 애국을 사상에 대입 시켜서 색깔론 만으로
움직이기에는 세상이 많이 변했다고 생각한다. 어버이연합이라는 단체가 과격하고 위협적인 집단이고 색깔론이나 연합의 사상에 따라 움직이는게 사실이니
지금 같은 시대에 사라져야 하는건 어쩔수 없다. 그리고 거의 사라졌던 색깔론이 다시 부활해서 국민 갈등을 유발하게 한것도 어버이연합 탓도 분명
없지 만은 않을것이다. 무슨 세뇌도 아니고 같은 국민끼리 색깔론으로 네편내편
가르는게 참.
더불어 나는 솔직히 어버이연합 어르신들을 보면 화가 난다기보다는 안타깝고, 모여서 라면을
주식삼아 드시는 모습을 보면 측은하기까지 하다. 저분들께 낙을 만들어드리는 것. 결국, `노인복지`가 답이라고 본다. 어르신들, 어르신들이
그토록 빨갱이라 손가락질하는 그 젊은이들과 빨갱이들이 만들어낸 정책들, 그리고 그렇게 거두어진 세금이 결국, 어르신들에께 복지라는 큰 혜택이
되어 돌아온답니다. 세금은 그렇게 돌고 도는 것이고, 그렇게 세상은 조금씩 바뀌는 거랍니다.
그들에게 지금 제일 필요한건 주변의 관심이다. 아무리 아프고 몸이 안좋아도 생계가 녹록치
못해 치료를 포기하는 노인인구가 늘어난다는 뉴스를 보며, 어쩌면 저 속에는 우리가 그토록 증오하고 경멸하는 어버이연합 회원들도 있겠지 싶어
마음이 안좋았다. 저들에게 조금의 관심과 대화, 그리고 '말 안 통하는 늙은이' 라 조롱하고 경멸하기 보다는 그들의 세계에 우리가 한발 들어가
그들을 품안으로 따듯하게 안아줘야 하지 않을까?
균형된 시각을 갖기가 쉽지는 않다. 또한 서로가 상대의 입장을 이해 하기는 더욱 쉽지
않다. 그 가운데에 가슴깊이 아픈 역사적인 상처가 있다면 더 더욱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려워도 이해하려 애써 보아야 한다. 잘 안되면
상대의 입장을 알려고 해보자. 역사의 긴 안목을 가지고 본다면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텐데, 사람이 동물보다 나은 것은 감정만이
아니라 이성도 가졌다는 것일텐데, 한번에 안되면 미운 마음은 조금씩 덜어내고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가자서작성일
2013-06-12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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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매국노 이완용
위키펌성명이완용(李完用)출생1858년 6월 7일, 경기도 광주사망1926년 2월 12일, 일제강점기 조선(67세 7개월 5일)분야장사꾼정치주요활동일제의 대한제국 국권 침탈에 적극 기여함평가매국노, 팔 수 없는 것을 팔아 누릴 수 없는 것을 누린 자비고친일인명사전 등재젊은 시절늙은 모습(1916년)여러분은 인간이 원숭이로 진화한 장면을 보고 계십니다그도 갔다. 팔지 못할 것을 팔아서 누리지 못할 것을 누린 자. 이제부터는 천벌을 영원히 받아야지.[1]- 동아일보, 이완용의 사망 직후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으로, 친미, 친러, 친일 코스를 차례로 밟다가 결국 친일파로 진로를 결정해 한일 병합 조약 체결을 주도한 매국노의 필두.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이란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매국노로 대한제국을 일본에 앞장서서 팔아 넘긴 매국노의 수장이다.[2]악명이 너무나 자자하여 을사오적이라고 하는데 웬만한 사람은 이완용 빼고 다른 인간들은 이름이 생각이 안 날 정도이다. 심지어 근현대사, 국사를 배울 때 을사오적 이야기가 나오면 거진 모든 아이들이 이완용 빼고 나머지를 잊는다.[3] 덕분에 자기 혼자 주야장천 까이느라 다른 지구가 끝나는 날까지 가루가 되도록 까도 시원찮은 자들의 방어막이 되고 있다(프렌드 실드?).국립중앙도서관에 보관된 우봉 이씨 족보를 보면 족보에 이완용의 이름은 의도적으로 삭제한 듯 빈칸으로 남아있고 연필로 간단히 적혀있을 뿐 사실상 족보에 이름이 파였다.위의 설명이 너무 길어 보이면 그냥 '쳐죽일 존재'나 '인간말종', '인간 쓰레기', '천하의 개쌍놈', '나라를 판 만고의 역적 쉐키',[4] 당장 전차를 몰고 가서 머리통을 날려버려야 할 새퀴, '견공자제분', '한국 역사상 최대최악의 간신' 등등으로 줄여서 말해도 문제 없으며 대놓고 깐다 해도 누구 하나 말릴 사람 없는 몇 안 되는 작자.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가루가 되도록 까도 시원찮은 인간. 어떤 의미로는 대단하다.[5]"○○○ 개.새.끼해봐의 가장 올바른 예Contents1 이완용의 생애1.1 을사조약 이전까지의 삶과 매국노로 까이는 이유1.2고종 폐위, 군대 해산에 참여하여 총리직을 얻다1.3 다시 살아난 후 합병 전야까지1.4 강제 병탄 후, 그리고 그 말로2 이완용의 성품3 이완용에 대한 떡밥4 변명은 아닌(?) 이야기5 관련 어록6 기타1 이완용의 생애 ¶1.1 을사조약 이전까지의 삶과 매국노로 까이는 이유 ¶이완용은 1858년 6월 7일 경기도 광주시 낙성면#에서 출생하였으며, 그의 부친은 우봉 이씨 이석준(李奭俊, 다른 이름은 이호석(李鎬奭))이고 생모(어머니)는 신씨였다.그의 집안은 고려시대의 잠성부원군 이공정의 후손이었다. 이공정의 아들 이자의는 문하시중을 지냈고, 조선조로 와서도 그의 조상들은 대대로 고관을 역임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이완용의 생가 15대조인 이길배가 태종 때 도관찰사를 지낸 것을 비롯해 문과 급제자 40명, 우의정 1명, 대제학 1명을 배출한 대표적 양반 씨족 가운데 하나이다.[6] 16대조 이교(李喬)는 판서, 15대조 이방년(李芳年)은 밀직이며 14대조 이순(李淳)은 과거에 급제해 감사를 역임했으며, 조선 성종 때의 유명한 청백리였다. 생가의 11대조 이세명(李世銘)은 을묘사화에 연루된 선비였으며, 10대조 이간(李人+間)은 무과에 급제해 수군절도사를 지냈다. 9대조 이의원(李義元)이 동지중추부사였고 8대조 이우(李寓)가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것을 마지막으로 더이상 관직을 배출하지 못해 몰락한 양반으로 가난하였다. 이완용의 생가 직계 가문은 9대조 이래로 이렇다할 벼슬살이를 한 사람이 없어 우봉 이씨 가문 중에서도 가세가 가장 빈한한 편에 속했다. 따라서 그의 생부 이호석은 겨우 선비의 체면을 유지하며 어렵게 살아온 것으로 추정된다.원래 몰락양반가문이었지만 이호준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권력의 핵심부에 들어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고 양자여서 출세욕이 강하였다.1882년 증광문과에 급제한 뒤 고종이 축하연주를 하라고 하였다.[7] 세자를 가르치면서 순종과는 사제의 인연을 맺었고 탄탄대로를 달리던 이완용은 또다시 변신할 기회를 맞이하는데 국제업무를 담당할 신진관료를 교육하기 위해 고종이 육영공원을 만들었는데 거기서 헐버트를 만나게 되었고 이때 영어를 배웠다.미국은 조선과 거리를 멀어 침입할 우려가 적고, 부국이니 덕을 볼 것이고, 종교지상주의 국가이니 야심이 적을거라 판단, 미국은 부강함이 천하제일이라는 당시 조선 분위기에 미국주재 공사로 나가게 되었다. 이는 청의 극심한 반대에도 무릅쓴 고종의 결단이었다. 미국에서 2년 5개월간 주미 외교관으로 근무한 기간은, 그가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관계의 현실과 근대화된 서구열강의 모습을 보면서 친미파 관료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일본을 피해 미국공사관으로 고종을 피신시키려 시도한다(춘생문 사건).[8][9] 이후 참찬관으로 미국으로 다시 건너갔다가 재차 트러블을 일으켜 미국 정권에 달라붙어 있기 어려워지자 미국의 반대세력인 친러파로 변신, 국내의 친미파 세력을 견제한다.하지만 친러파 내에서도 트러블을 내고 찍혀 활동이 어려워졌고, 1898년 3월 11일, 이완용은 전북관찰사로 발령을 받고 좌천되었다. 정치적 영향력 확대와 국내 이권을 노리는 러시아에 대해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반러여론이 커지자 독립협회에 속해있던 이완용도 정치적으로 힘을 잃은 것이다. 그리고 관찰사로 부임한지 닷세만에 직무태만으로 감봉, 공금횡령으로 파직위기를 맞고 독립협회에서도 제명되었다.이완용은 독립협회의 위원장, 부회장과 회장을 지냈으며 독립협회 존속기간의 3분의 2 이상을 이끌었다(회비도 가장 많이 냈다고 한다). 독립문 현판도 이완용이 썼으며 의무교육을 처음 정착시킨 사람이기도 했으니..[8] 나름대로는 친일 이전의 경력을 보자면 전형적인 엘리트의 삶을 살았고는 할 수 있는데... 이후의 행적으로 말짱 부질없는 약력이 되고 말았다.일부 이완용을 옹호하는 시각에서는 그가 초창기 애국계몽운동가로서 활동하면서 조선의 개화와 독립을 추진하던 중, 초반에는 일본이 조선을 둘러싼 열강 중 가장 힘이 없어서 일본과 친했다가, 카츠라-태프트 밀약을 비롯한 일련의 미국이 조선을 버리는 스탠스를 보이며 미국을 신뢰할 수 없게 되자, 스스로 자포자기, 매국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는 시각도 있다. 사람들이 이완용을 특히 매국노로 기억하는 것은 초반의 애국 개화사상가 이미지에서 돌연 변신을 한 데 대한 배신감이 커서 그렇다고 하는 견해도 있다.어쨌거나, 인생의 말로를 천하의 매국노로 보내기로 한 것은 스스로 선택한 일이며, 그 이전 활동이야 어쨌건, 결국 그는 자신의 이익과 영달을 위해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일 뿐이다.1.2 고종 폐위, 군대 해산에 참여하여 총리직을 얻다 ¶본격적인 나라 팔아먹기의 서막새로운 힘을 찾던 이완용은 이번엔 친일파로 변신해[10] 일제의 무력을 등에 업고 고종을 협박, 을사조약을 체결시켜 을사오적의 수뇌로 불리게 된다. 그런데 웃긴 건 이때 이완용의 대사가 "나라를 위해서 이 조약을 체결한다"였다. 물론 개뿔, 아주 뻔뻔함의 극치다.[11]을사조약을 체결시킨 실적 덕분에 이토 히로부미의 추천으로 내각총리대신이 되었으며 헤이그 특사 사건이 대외적으로 공표되자 이를 빌미로 고종의 양위[12]를 강요, 사실상 한 국가의 왕을 갈아치웠다. 역적 놈의 새퀴.이미 그 전부터 이토 히로부미는 을사오적 일원인 박제순[13]에게 넌지시 고종 퇴위를 제의하나, 의외로 별로 동조하지 않자 그를 물러나게 하고 이완용을 참정대신으로 앉힌 것이었다.여하간 고종은 황제 대리를 주장하며 끝까지 버텼다. 궁내부 대신 박영효마저도 그 꼴을 보기 싫어서 그 자리를 피했으나 이완용은 스스로를 궁내부 대신 서리에 임명하고(;;) 그 일을 행했다. 그 직후 (20일) 메이지 일왕의 "순종 즉위" 축하 메시지가 오자 즉각 반응, (22일) 대리청정을 황제로 바꾸어버렸다. 그리고는 24일 정미7조약(한일 신협약)으로 내정까지 통감의 지배를 받는다라는 안을 하나 수정하지 않고 통과시켰다. 황실보호 따윈 언급되지도 않았다. 그리고 8월 1일에는 군대를 해산시켰다. 그리고, 정미의병이 한창 일어났을 때 이완용은 일본군 대장 하세가와를 매일 찾아가 의병토벌에 대해 논의했었다고 알려져 있다. 거기서 '조선인 현병보조원 제도'를 계획하는 데 크게 일조했고, 의병장 허위가 체포되었을 때, 허위를 처벌할 것을 순종한테 상소를 올린 것도 이완용이었다.[14]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에게 자꾸 요구를 하고, 결국 고종은 넘겨주면서 백성들과 의논한다고 했지만 이토는 폐하가 언제 백성들과 정사를 의논했습니까?라는 말에 데꿀멍.이 시기에도 총리대신을 해먹으면서 형 이윤용을 궁내부 대신으로, 사돈 임선준은 탁지부대신으로, 승녕부 총관(고종의 비서실장)은 처남 조민희, 아들 이항구는 승녕부의 시종을 시키는 등 인척 내각을 이룩했고, 황태자 책봉 문제에도 참여하여 콩고물을 챙겼다.1909년, 이토 히로부미는 통감에서 물러나면서 일선에서 물러나는 것처럼 보였지만 동시에 사법권을 넘기는 작업을 계획하고 있었다. 심지어 사돈까지 반대하면서 내각 총사퇴를 주장했다. 내각내에서도 반대가 빗발치고 내각 총사퇴가 사실상 기정사실화 되자 그는 2대 통감 소네 아라스케와 자기 멋대로 조약에 서명하고는 회의는 없다고 통보해 버린다. 이건 무슨.....어차피 이 시기 일본 내각에서는 한일 강제합병 계획이 통과된 상태이긴 했다.12월 4일에는 일진회의 한일합방 성명서가 발표되었다. 양심은 있었는지 아니면 합방의 공을 빼앗기기 싫었는지, 그도 아니면 명목상이라도 총리 자리를 계속 하고 싶었는지 모르지만 그는 반대성명을 내고 열을 내고 반대한다. 그가 그나마 변호 될 수 있는 것은 이 부분이지만, 1910년 8월 22일 체결된 한일합병조약은 일진회의 계획보다도 한국에게 훨씬 불리했다.이런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이완용의 집은 민중들에 의해 불타버렸고 자신 또한 12월 22일 명동성당 앞에서 이재명 열사[15]의 습격을 받는다. 그러나 우연히 인력거꾼 박원문이 그의 앞을 막아서는 바람에 목숨을 건진다. 불행히도 박원문은 대신 부상을 당해 절명하고 만다. 이재명 열사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그 자리에서 재차 이완용을 공격했지만 치명상을 입히지는 못 하고 체포된다. 이재명 열사는 합병 후 박원문을 살해한 죄로 1910년 9월 교수형에 처해졌다.여담이지만 당시 이뤄졌던 외과 수술에 대한 기록은 몇 남아 있지 않은 중요한 의학사 자료로 인정된다. 동 시기의 다른 외과 수술 기록이 전부 파기된 데 비해 재판의 증거로 사용되었기에 남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 수술은 대한민국 최초의 흉부외과 수술로 기록되어 있으며, 한국 의학사를 연구하는 학자분들이 "한국 의학의 발전이 5년만 늦었어도......"라는 말을 하게 만든다. 실제로 모 의대의 흉부외과 총론 시간 첫 수업에서 이 에피소드를 소개하며 "의업에 충실한 것이 민족과 역사에 죄를 짓게도 한다."라는 농담을 했다고 한다. 흠좀무? #또한 맹꽁이 서당에서도 경술국치 당시 이용직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며 나는 너님처럼 길거리에서 칼빵맞기 싫다며 디스한 장면도 나온다.1.3 다시 살아난 후 합병 전야까지 ¶5월 30일 부로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제3대 통감에 오른다. 군부 출신으로 강경파였던 그는 일방적으로 경찰권 회수를 통보했고, 내각은 데라우치가 한국에 입국하기도 전에 무기력하게 통과시켜버렸다. 7월 23일, 한국 합병에 대한 세부사항 논의까지 마치고 데라우치는 입국했다. 이즈음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는지 이완용도 요양을 마치고 상경했다.이완용은 8월 4일부로 비서 이인직("혈의 누" 작가)을 통해 합병을 먼저 제의했다. 아마도 송병준의 일진회 등에게 선수를 뺏기기 싫었던 모양. 통감부마저도 "그물도 안 쳤는데 물고기가 뛰어들었다."라는 반응을 보냈다. 합병 조약문에서 이완용은 "국호 한국과 황실의 왕 칭호만은 절대 양보할 수 없다."라면서 추가를 요구했는데, 황실 보호가 아닌 어디까지나 황실의 지지를 통한 자기 입지 강화를 위해서였다. 일본 입장에서도 황실이 고분고분한 것은 결코 나쁘지 않았기에 이를 받아들였다.주저하는 이들을 데라우치에게 일러바쳐 압력을 행사하고, 반대하는 학부대신 이용직을 일본 수해 위문 사절단으로 동경으로 보내는 등 (이용직은 이를 간파하고 가지는 않았다.) 갖은 수단을 써서 순종의 윤허를 받았다. 고종에게는 "신이 하지 않아도 송병준과 일진회가 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는데, 이완용이 물러 난 후 고종은 "'신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런 매국의 거사는 하지 않겠다.'고 한 자는 바로 이완용 아니던가! 그가 무슨 낯으로 짐을 본단 말인가!"라고 통곡했다.그리고 8월 22일, 이완용은 이용직에게는 통보도 하지 않고 최후의 내각 회의를 열고는 한일합병조약을 통과시켜버렸다. 이후 1주일 동안은 숨겼다가 8월 29일자로 순종의 이름으로 발표 된다.그의 나이 52세, 그는 그렇게 나라를 팔아먹었다.1.4 강제 병탄 후, 그리고 그 말로 ¶1916년 8월 4일자 매일신보. 이완용이 기고한 글로 순종의 장남, 왕세자 영친왕(이은)과 일본 귀족과의 강제결혼 결정을 '내선융화'로 미화한 내용의 글이다.(이 문서의 이전 버전에 '이왕가'라는 표현이 보이는데 이는 경술국치 이후 일본이 대한제국 황실을 하대하면서 사용한 용어이다. 이왕가, 이왕직,등은 모두 황실을 격하시켜서 낮춰 표현한 것. 단 이조는 좀 다르다. 일본에서는 한반도를 모두 조선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지리적 위치와 국가의 호칭을 구별하는 것이다. 일본인 입장에서 조선 백자라고 하면 그게 한반도에서 나온 것을 말할 뿐 삼국시대인지 고려인지 조선인지 알 수 없다. 그래도 우리 입장에서는 쓰지 말자. 사실 합방 이후의 '조선' 표현 자체도 멸칭이다. 합방 직후에 일본은 '대한'을 모조리 '조선'으로 바꾸는 작업부터 했다)강제 병탄이 이루어지자, 일본으로부터 훈1등 백작 작위를 받았다. 조선인이 조선인을 감시하는 "조선인 헌병제"도 이 자의 아이디어였으니, 1910~1919년 사이의 헌병 경찰 제도는 사실상 이자가 만든 것이었다.[16]명목상의 총독 자문기관인 중추원의 고문과 부의장을 지냈다. 3.1 운동 직전에 민족대표가 가담을 요청했다는 떡밥이 있으나 그것은 뒤로 미루도록 한다.3.1 운동 직후엔 "어리석은 조선인들"이란 내용으로 시작되는 뻘글을 3번이나 발표했다가[17] 다시 집이 불탔다. 이 뻘글 발표로 다음 해 후작으로 승급하였고 팔아 먹을 나라도, 국민도 없어지자 조용히 살다가 1926년, 68세의 나이에 폐렴으로 뒈진다뻗는다.진작 좀 죽었으면 좋았으련만,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하게 시망했다니 분통 터지는 것은 당연한 일. 다만 사망원인을 보듯이 이재명이 찌른 칼날이 평생 그를 옥죄어 왔던 것은 사실이다.(1926년 2월 13일자 매일신보 기사. 신문 1면에 이완용 사망소식을 대서특필로 다뤘다.)사후는 생전보다 더 화려했는데, 일본인과 조선인으로 이루어진 50명의 장례위원들이 참석했고 조선총독부 중추원부의장정2위대훈위후작이공지구란 휘황찬란한 깃발을 들고 장례가 치뤄젔다. 그의 장례 행렬은 그의 3천평짜리 집 옥인동부터 광화문까지 이어졌는데 고종 사후 이후 최대 인파가 몰렸다고 한다. 한편 그때까지 명맥만 존속하던 대한제국 황실은 그에게 훈 1등 이화 대수장과 금척 대수장을 수여했다. 에라이...하지만 당시에도 민중에게는 증오의 대상이었으니...1926년 2월 13일자 동아일보 1면 사설에 실린 기사. '무슨 낯으로 이 길을 떠나가나'라는 제목으로 이완용에 대한 기사를 실었다. 여기서 동아일보는 "그도 갔다. 팔지 못할 것을 팔아서 누리지 못할 것을 누린 자"라는 희대의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 가면 어찌된 일인지 해당 기사 부분만 기사가 지워져서 볼 수 없다. 그러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한국근현대신문자료에 가면 원문 이미지를 볼 수 있으니 참조하자. 옛날 신문이라 한자가 좀 많다.그밖에도 동아일보 "횡설수설" 란에는 이틀 연속으로 그의 죽음에 대한 짤막한 촌평을 달아두고 있다. 이건 네이버에서도 확인 가능하다. 어떻게 보면 요즘말로 고인드립 수준이지만, 그가 저지른 짓을 생각하면 이 자한테는 그래도 된다.2월 12일 : 구문(口文 : 흥정을 붙여 주고 그 보수로 받는 돈) 후작 이완용은, 작일(作日 : 어제) 황천객이 되엿다고, 지옥행하노라고 무던이 고달풀걸2월 13일 : 구문 공신 이완용은 염라국에 입적하엿스니, 염라국의 장래가, 가려(可慮 : 걱정이 되어 마음이 편하지 못하다)[18]그의 묘는 전라북도 익산군(現 익산시) 낭산면에 있었는데, 매국노다 보니 지속적인 훼묘사건이 빈번이 일어났고, 해방 이후에는 당연히 매우 심하게 훼손되었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1978년에 이완용 후손(정확히 말하면 증손자 이석형)이 파묘를 하였다. 오늘날, 이완용의 묘가 있었던 곳은 채석장으로 바뀌었다. 파묘할 때 지속적으로 훼손된 묘였지만 붉은 명정에 쓰인 '조선 총독부 부의장'이란 글은 상하지도 않고 그대로였다고 한다. 이 관은 박물관에 있다가 이완용의 손자뻘 친척이라고 상당 기간 오해받던[19] 국사학자 이병도가 사비로 구입해 자택에서 불태워 버렸다.[20]직함도 참 여러가지로 받아서 조선귀족원 회원, 농사장려회 회장, 조선물산공진협찬회 명예회원, 일본제국군인후원회 조선지부평의원, 조선귀족회 부회장, 농림주식회사고문, 교육조사위원, 총독부산업조사위원, 조선미술전람회심사원, 조선사편찬위고문, 조선농업교육연구회고문, 선만노몽(조선, 만주, 러시아, 몽골)연구협회고문 등을 지냈다.이런 모습 때문에 그는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6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조사,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06인 명단에 포함되어 있고,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는 이완용과 그의 손자인 이병길의 재산을 국가로 환수하기로 결정하여 환수작업이 진행 중이다. 또한 2009년 공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이완용의 이름이 당연히 그리고 당당히 들어가 있다. 안 들어가 있었으면 높으신 분들은 암살당할 뻔했다.2이완용의 성품 ¶처세엔 뛰어나고 영민한 인물인 것은 확실한 것 같다. 초기에는 그의 영민함을 감탄했던 선교사 겸 의사인 앨런(알렌)도 후에 이런 평을 남겼다.이완용? 그는 한마디로 기계 같은 사람이다.즉, 머리는 잘 돌아갈지 몰라도 줏대라는 것은 찾아 볼 수가 없는 인물이란 평.[21 참고로 알렌은 고종을 어떻게 평가했냐 하면, 매천야록에는 "내가 구만 리에 사천 년의 역사를 봤지만 조선 황제 같은 인종은 처음 보는 인종이었습니다."라고 평가했다. 실제로 알렌은 조선을 그다지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개인으로 보기에는 '매국노'의 이미지와는 조금 거리가 있긴 하다. 집에서는 항상 한복을 입고, 치부에는 애썼지만 첩 하나 거느리지 않는 면모를 가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개인적인 도덕성 등이 그를 결코 정당화할 수 없었다는 것은 알아두자. 단지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이미지와 조금 다르다는 것.그러나 그 치부에 애쓴 것이 장난이 아니었다. 민영휘[22] 다음 가는 조선에서 두번째 부자가 그였다.[23] 그것도 물려 받은 것은 거의 없이 그의 대에 나라 팔아먹어 대부분을 벌어들인 것이다. 땅으로는 경기도와 전라도 일대에 여의도 2배 면적을 보유했으며,[24] 집을 여러번 옮긴 부동산 투기의 선구자이기도 했다. 한일 신협약 때 10만원, 합병 때 15만원의 은사금을 일본에게서 받았다.한국 최초의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은 그를 가리켜 '마음이 바르고 나라를 자기 목숨보다 중히 여기는 정치가', '대한(大韓)의 몇 째 안 가는 재상', '황상 폐하를 보호하여 우리나라 자주독립의 권리를 튼튼케 한 인물'로 평했다고 하지만...... 앞에도 밝혔지만 이완용은 당시 독립협회의 중심 간부였다. 더구나 당시엔 친러/친미파로 그다지 매국노 티를 내지 않았었다.3 이완용에 대한 떡밥 ¶이완용의 행적에 대해 대한제국의 근대화를 꾀한 인물이란 평가를 하는 자들이 있으나 한 마디로 말해서 헛소리이고, 여러 마디로 말해서 근거가 없다.게다가 그런 소리를 지껄이는 자가 김완섭 같은 작자이다. 뉴라이트같은 자들조차도 이완용 미화는 좀 자제하는 편. 그러나 일제 강점지가 축복의 시대라고 열광하는 자들이잖아? 아마도 환호하고 위대한 인물로 찬양할거야그 같은 주장의 증거로 자주 제시하는 것이, 당시 독립협회와 얽혔던 일인데, 이는 당시 조선 지식계층의 한계를 보여주는 대목이지 이완용의 위치를 말해주는 대목은 아니다. 게다가 정황으로 보았을 때 이완용은 지극히 개인적인 보신에 신경 썼던 사람이므로, 그가 민족이나 대의를 위해 행동했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가끔씩은 "황실을 보호했다"라는 주장이 나오기도 하는데, 위에서 보았듯이 결코 신경을 쓰지 않았으며 단지 황실에게 조금이라도 환심을 사고 입지를 넓히기 위해서였다. 이 떡밥 때문에 명성황후(드라마)에서도 마치 그 시절에는 조선 왕실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처럼 묘사되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 도리어 그는 고종 독살설의 가장 강력한 용의자이다.3.1 운동 때엔 민족대표들이 선언에 참여해 달라고 권유했으나, 최소한의 염치가 있었는지 "내가 말아 먹은 것을 다시 민족대표라고 어떻게 얼굴을 들이미냐?"라고 말했다는 주장이 있다. 추측하자면 본심은 일본한테 밉보이기 싫었던 것으로 보인다만, 그래도 그런 사건이 모의되고 있다는 것을 총독부에 고해바치지는 않았다고 한다. 정말 마지막 양심은 있었던 것일까…[25]“내가 이제 와서 이런 일에 참여함은 무안한 일이며 알긴 아는구나 이 일이 잘 되면 먼 동네 사람을 기다릴 것도 없이 이웃 사람에게 맞아 죽을 것이오. 응? 이번 운동이 성공해서 내가 맞아 죽게 된다면 차라리 다행한 일입니다.뭐라고? ” #근데 학계에서는 검증되지 않은 어디까지나 루머이다.[26] 정말 마지막 양심이 있던 측은 이용직 같은 인물이 있다.이완용의 평판이 얼마나 안 좋았는지, 아들 이승구가 요절하자, 이완용이 며느리와 간통해서 그걸 안 아들이 남 보기 부끄럽다고 자살한 거라는 소문까지 돌았다.[27] 하지만 이승구는 을사조약이 체결되기 이전인 1905년 음력 7월에 자살이 아니라 병으로 죽었다. 어렸을 때부터 몸이 허약했던 이승구는 사망 당시 26세였다.순종때인 1908년, 이완용은 한국 최고의 매국노 답게 조선시대에 간신으로 취급받은 사람들의 복권을 건의했고 결국 받아들여졌다. 순종은 실권이 없었다. 그 때 복권된 대표적인 사람이 윤원형. 다만, 복권자를 자세히 보면, 정쟁에 휘말려 역적 취급된 소론, 남인, 북인계 인사들이 있었고, 이인좌의 난에 가담한 사람들, 여기에 고종을 시해하려한 사람들이 대표적이었다. 그래서 그 와중에 임진왜란의 의병장이었던 정인홍이 복권되긴 했다.[28] 어쨌거나 당대 간신으로 취급받던 사람들임에는 맞다. 다만 그건 당대의 시선이고, 오늘날 정인홍을 간신으로 보거나, 숙종 대의 남인계 대신들이나, 영조 초반의 소론계 대신들까지 간신으로 취급하지는 않으니, 이 부분은 역사의 판단에 맡길 문제인 듯. 애당초 이 취급의 발단은 순종의 즉위 기념 대사면령의 일환이었다.1909년, 이재명 의사가 명동성당에 갔다 온 이완용을 암살하다 실패한 사건 때문에 이완용이 기독교인이라는 루머도 있는데, 이는 안티기독교의 개드립에 불과하다. 암살 시도가 있었던 그 날 명동성당에서는 벨기에 왕 레오폴드 2세의 서거로 추도식이 열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총리대신 자격으로 추도식에 참석한 것일 뿐이었다. 결정적으로 그는 일본에게 아부하고 충성했지만 일본의 문화는 불교밖에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죽는 순간까지도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29]성균관대학교 홈페이지에 역대 총장 명단에 이완용이 포함되어 있다. 정확히 말하면 성균관 대사성. 어찌되었던 총장급 인물로 성균관대학교 홈페이지에 적혀있다. 컨트롤 + f키를 이용하여 직접 찾아보자. 덕분에 성대는 훌리건들에게 '친일파가 총장한 학교 ㅋㅋㅋ'라고 억울하게 테러당한다. 정작 성균관대에서도 게재는 할지언정 흑역사로 취급하고 있건만...단, 이 당시의 '대사성'의 실질적인 위치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대사성이 당대 성균관을 총괄하던 직책인 것은 맞지만 실질적으로 현재의 총장과 비슷한 급의 인물이었다고 보기 힘들 것 같다. 조선 초기에는 실제적으로 대사성이 권위를 가진 직책이었으나, 이후 성균관은 정계진출에 그다지 유리하지 못한 뻘코스 취급을 받고 그에 따라 대사성의 지위도 급격히 추락하였다. 고종 때 와서는 그냥 좀 어느정도 실력만 되면 대사성 타이틀만 붙여줬다고 봐야 할 듯. 실제 저 페이지로 들어가보면 고종대의 대사성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80년대 동시대를 다룬 KBS 대하사극 독립문에서는 태조 왕건에서 왕건 큰 장인으로 나온 고 김진해씨가 이완용으로 열연했다. 역시 이 드라마에서는 매국노 시전을 적절히 보여주었다. 후대의 사극 명성황후에서는 충신으로 나오지만. 가문의 보정?4 변명은 아닌(?) 이야기 ¶물론, 지나치게 혼자만 대표로 까인다는 평은 있을 수 있다. 그럴 만큼 하도 나라 팔아먹는데 물불 안가리고 나서기도 했지만….학계에서 보는 이완용은 매국노로서의 위치를 제외하면 '줏대없는 개화파 정치인' 정도이다. 친미파-친러파-친일파로 변한 그의 모습도 주도적으로 변했다기 보다는 아관파천 과정에서 친러파로,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는 과정에서 친일파가 되었다. 개화를 하기는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어떤 생각을 유지하는 전개에서는 스윽 밀려나가는 인간형이었다고 보면 된다.앞에서 말했듯이 영어에 능통하고, 글도 좀 쓰고 평판도 괜찮은 등(물론 을사조약으로 매국노가 되기 이전 이야기) 얼굴마담으로서 갖추어야 할 요소는 모조리 갖추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30] 이후에도 훌륭한 얼굴마담으로서의 역할을 해내었기 때문에, 일본 측에서도 높은 평가를 하는 이유가 되었다. 의외로 멀쩡한 시대에 태어났으면 고만고만한 좋은 관료로 살았을지도 모를 인물. 그랬다고 해도 하늘을 손바닥으로 가릴 수는 없는 거고......5 관련 어록 ¶우리는 미국 같은 부강한 근대적 국가를 건설해야지, 남의 나라 노예가 되는 핀란드 같은 나라가 돼서는 안 된다.- 1896년 7월, 이완용 <독립협회 강연>중 발언 해가 아직 바다 속을 떠나지 않았을 땐 온 산이 어둡더니, 하늘로 떠오르니 온 세상이 밝아지는구나.[31]- 이완용이 일장기에 써 넣은 글 6 기타 ¶웃기는 일이지만, 일본어는 죽을 때까지 한 마디도 할 줄 몰랐다. 이토 히로부미나 데라우치 마사타케 등과 대화할 때는 반드시 영어로 했다고 한다. 처음 육영공원에서 배운 영어는 형편없는 실력이라서 미국에 파견되었을 때 같이 간 이상재의 자조(반벙어리)를 면치 못했지만, 오랜 미국생활로 인해 그의 영어실력은 일취월장. 총독부의 인간들보다도 한 수 위였다고. 흠좀무.[32] 알고 있는 일본인 인맥도 넓지 않아서, 이토 히로부미나 데라우치 총독 정도만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자가 1906년 학부대신(일종의 교육부/교과부 장관) 시기에 공교육의 일본어 시간 도입을 추진하고, 가장 교육시간이 많은 과목으로 만들어 버렸다. 일본에서는 이완용이 아니면 할 수 없었던 일이라며 칭찬했다.근대 문물에 관심은 있었던 것 같다. 낭비가 심하기로 유명한 궁중식단(상다리가 부러져라 차린다는 표현이 여기서 시작되었다)의 병폐를 비판하고 샌드위치를 점심으로 가져왔던 사람이 이완용. 당시 궁중식단의 경우 그렇게 거하게 상을 차린 후 윗사람이 다 먹지 못한 음식들은 그대로 아랫사람에게 주었다. 먹다남긴 거나 먹으라는 의미가 아니라 덕을 나눠준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반찬을 집을 때에는 결코 남이 먹다 남긴 것처럼 헤집지 않는 습관이 생겼다. 절대 임금이 그 많은 음식을 혼자만 먹고 남겨서 버리는 거 아니다. 다만 그러다 보니 식사시간이 한정없이 길어지고 임금부터 다 먹고나면 너무 많은 시간이 흐르곤 했다. 음식 쓰레기 문제가 아니라 그런 비효율성이 문제였던 것. 그리고 그 비효율성을 타파하고 덤으로 음식 쓰레기도 줄인 그는 효율적으로 나라를 팔아먹고 자신이 쓰레기가 되는 위업을 달성한 꼴이 된 것이다.앞에서 말했듯이 글씨는 꽤 잘 써서 당대의 명필축에 들었다고 한다. 실제로 독립문 현판의 '독립문'이라는 글자는 그가 쓴 것.[33] 하지만 행적 때문에 글씨의 수준과 관계없이 가격은 바닥을 긴다.또한 재테크에도 뛰어나 조선 팔도 곳곳에 이완용의 사유지를 늘려갔다. 그가 병탄 이후 벌어들인 돈이 400억 원이 넘는다고 하며 자기 재산의 3배를 늘렸다. 최근 그의 후손들이 땅을 찾는다 어쩐다 한 것도 그 때문이리라.여담으로 이완용이 같은 친일파의 추천으로 하마터면 종묘에 모셔질(배향될) 뻔한 사건이 있었다. 이게 실현됐다면 종묘에서 여러 사람 뒷목을 잡았으리라...애니메이션 코드 기아스 반역의 를르슈에 나오는 쿠루루기 스자쿠의 행동이 마치 이완용을 떠올린다 하여 스완용이라 불리며 종종 언급되기도 한다. 하지만 스완용은 별로 생각 없이 애니 보는 사람들이 스자쿠보다는 이완용을 까기 위해서 만든 용어일지도...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을 낚아서 코기 팬들을 늘리는데 일조했었는데, 매천야록에서 일본식으로 바꾼 이름이 주작 - 즉 스자쿠라는 떡밥이 돌았다. 그러나 매천야록에는 주작이란 말이 등장하지 않는다. 정식으로 창씨개명한 이름은 리노이에 칸요우(李家完用). 그냥 이씨 가문의 완용이라는 이름이다.마지막으로, 어쩌면 유일하게 긍정적인 점이다. 대한제국 최초로 의무교육을 실시한 건 이완용이었다. 하지만 그런 점이 그의 과오를 덮어줄 수는 없다. 앞 항목에서 본 그의 성품 때문에 그의 행적을 덮어줄 수도 없다. 아돌프 히틀러 항목을 참조하자. 따지고 본다면 모든 후손들이 '의무로' 자기를 욕하게끔 배우도록 한 희대의 병크.국가가 지정한 100퍼센트 매국노이니 애국열사다 뭐다라고 포장하는 짓을 하면 그 즉시 매국노로 몰린다. 아니 그 전에 포장할 만한 건덕지도 없다.그리고 이렇게 여러 가지 의미로 유명하다 보니 다른 동명이인들의 삶도 완전히 망쳐버렸다. 즉 이 인간 때문에 이완용이라는 단어는 대한민국 내에서 언급만 해도 부정타는 단어의 상징이 되버린 셈이다.[34] 어찌보면 이것도 악업에 추가해야 할지도?여하간, 인간으로서는 참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다갔다.그런데 얼마전 이완용에 대한 평전이 나왔다.(한겨레 출판사) 저자에 따르면, 이완용은 '합리적인 근대인'이었기에 ‘충군(忠君)’과 ‘애국’이라는 이데올로기적 가치를 위해 용기를 내거나 제국주의의 폭력에 분노하기보다는 자신을 포함한 다수가 문명화의 혜택을 누리기 위해 절대로 분노하지 않는 이성적 인간이었다. 그로 인해 을사조약과 한일병합조약을 주도하면서 평소 자신의 소신이었던 왕과 왕실에 대한 의리를 지켰다고 한다. 아무래도 미.친 것 같아요. 이 자식 안 되겠어 빨리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시험문제에서도 신랄하게 까였다. #국사선생님의 분노라고 치면 다 나온다.3.1 운동에 경고하는 개소리를 하기도 했다. 뒤질수록 깔 거리만 나온다.참고: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1] 그의 사망 다음날인 1926년 2월 13일자에 실린 사설이다. 하지만 일반인이 가장 접근하기 쉬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 수록되어 있는 버전은 당시에 검열을 받았던 건지 해당 부분이 훼손되어 있어서 판독할 수 없다.[2] 역시 대세에 대한 감각은 뛰어났는지, 죽기 전에 아들에게 남긴 말이... "내가 보니까 앞으로 미국이 득세할 것 같으니 너는 친미파가 되거라." 후덜덜. 역시 희대의 매국노답다.[3] 사실 이 매국노 목록을 외울 필요는 없지만 이완용이 매국노라는 것 정도는 안 외워도 다 알기 때문에 큰 차이는 없다. 학생들은 다만 이 사실을 배우면서 이완용이 얼마나 악랄한 친일파였나를 배울 뿐이다.[4] 대한제국의 시각으로 봤을 땐 명백히 역적 맞다.[5] 이러다보니 후대의 동명이인들은 그저 안습.[6]윤덕한, 《이완용 평전》 (중심, 2005) 23페이지[7]고종실록 1882년 11월 2일.[8] 1895년 11월에 있었던 고종의 경복궁 탈출 미수 사건. 이범진이 주도하였고, 이완용, 이윤용, 윤치호, 민상호 등이 참여하였다. 목표는 고종이 경복궁을 벗어나 미국 대사관으로 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병력 동원을 위해서 참여시킨 훈련대 대대장 이범래, 이진호가 이를 일본에 밀고해서 실패하였다. 이 사건에 참여했던 이들은 이후 고종의 높은 평가를 받게 되는데, 이는 이완용도 예외가 아니었다.[9] 작가 송우혜는 이 사건의 주도자를 엄비로 보고 구국의 화신 엄비 운운한다. 그러다 잊혔다. 북한에서는 일단 미국이 개입했다는 것과 이완용이 침여했다는 점을 들어 미제국주의자 대위 훈련대장 다이와 매국노 이완용, 윤치호가 작당한 고종 납치극이라고 주장한다. 전자나 후자나 흠좀무.[10] 이완용은 근본적으로 친미파였고, 1904년까지만 해도 철저한 배일(排日)세력이었다. 1890년대 아관파천을 주도하고, 친러파로 활동했던건 일시적이다. 그러나 천성적으로 권력과 돈에 민감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러일전쟁을 계기로 친미주의자에서 친일파로 변신하게 된다.[11] 당시 사람들은 이완용을 처벌할 것을 강력하게 호소했다. 이완용은 오히려 '시국은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종묘사직을 지키고자...' 하는 내용의 X소리만 남발했다.[12] "고종의 양위를 사죄의 표시로 하여 만족한 일본이 더 이상 보복을 하지 않도록" 하려고 했다나.[13] 을사조약 시기 외무대신. 이후 참정대신 한규설이 항의표시로 물러나면서 참정대신을 맡게 된다. 을사조약 시기에도 초기엔 반대하던 입장이었다. 그래봐야 매국노지만. 경술국적도 된다.[14] 의병장 허위는 결국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하고 만다.[15] 당시 현역 군인이었다. 물론 사병.[16] 헌병보조원 제도는 사실, 정미의병 때 부터 있었다.[17]1차는 4월 5일 "황당한 유언에 속지 마라."였고, 4월 7일에 "돌이켜 자신을 구하라."라는 협박성 뻘글을 다시 썼다. 5월 29일, 3.1 운동이 가라앉자 조선은 일본의 통치 아래 복지가 증가했으며, 실력양성에 힘써야 한다는 최종 뻘글을 썼다. 이런데도 그가 민족대표를 할 뻔했다고?[18] 쉽게 말해서 염라국도 팔아먹을까봐 걱정된다는 이야기(...). 왜 염라대왕도 독살하시게?[19] 이병도의 조부와 이완용의 항렬이 같아 손자뻘이란 거지 실상은 그냥 남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머나먼 친척이다. 촌수로 따지면 30여 촌 정도 될 꺼라고 하니.[20] 이에 대해 정지환 기자는 이병도가 자신의 실증주의를 져버린 행위라고 비판했다.[21] 그런데 이 부분은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다. 즉, 기계처럼 매뉴얼에 따라 딱딱 행동한다는 것이다. 마치 일본처럼 말이다.[22] 민씨척족 세도가문에서 권세를 누린 수구파 관료. 일제에 합병되고 난 이후에 악질 친일파로 변신했다. 일제시대 동안 가장 많은 재산을 가진 조선인 중 한 명.[23] 죽기 직전에 보유한 자산이 당시 돈 300만원으로, 지금 돈으로 450억원 가량 된다.[24] 이중 훗날 국가에서 귀속시킨 것이 10,900평방미터(3천평 남짓), 그의 땅의 1% 밖에 되지 못한다.[25] 이완용은 일제 경찰로부터 비밀리에 감시당하기도 했었다. 뭐, 본인은 이걸 모르고 있었지만 말이다..[26] 이 때 민족대표는 마찬가지로 박영효 에게도 같은 권유를 했었고, 이 사건 때문에 제법 까인 감이 있다. 박영효도 그 정도인데 이완용을?[27] 매천야록에 자세히 나와 있다.[28] 이완용이 자기가 찔려서 간신들의 복권을 추진했는데 그 와중에 광해군의 간신으로 취급받고 인조반정때 처형된 정인홍이 복권되었다. 문제는 근현대로 오면서 정인홍은 조선을 구원한 위대한 세 사람 중의 1인으로 까지 취급되었고 인조 는 조선 최악의 암군으로 까이고 있으니 아이러니.[29] 부연하자면, 레오폴드 2세는 유럽 열강들의 식민지 나눠먹기 행사에 동참하여 콩고라는 벨기에 영토의 50여배나 되는 식민지를 넘겨받은 위인이다. 그리고 그 땅을 왕실의 사유지 형식으로 다스렸는데, 고무 등 천연자원을 워낙 악랄하게 수탈하여 제국주의가 한창이던 유럽에서도 대차게 까였으며 인격도 별로 좋지 않아 독일의 입방정 황제 빌헬름 2세에게 사후 디스당하기도 하였다.[30] 그 전에 다른 을사오적들은 정말 평판이 안 좋았다. 이미 을사조약 한참 전부터 노골적인 성향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반대로 이완용은 그런 점이 별로였기 때문에. 그래서 을사오적에 포함된 인물 중에서는 이완용이 가장 의외의 인물로 평가받았다. 또한 이완용은 조선 말기에 임금으로부터 신임받았던 근왕주의 엘리트 관료였기에 그는 일개 매국노 정도가 아니다.[31] 未離海底千山暗 及到天中萬國明[32] 때문에 정사를 맡을 때도 이토 히로부미와 같이 영어를 그나마 할 줄 아는 일본인과 영어로 대화하며 일했다.[33] 사실, 독립문 건립에 가장 앞장섰던 사람도 이완용이었다.[34] 이완용이란 이름 가진 것 하나 때문에 불행한 삶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TV로 나올 정도이니...... 동명이인이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나왔을 때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이건 한국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이런 식의 동명이인들이 까이는데 예를 들자면 미국의 경우 독립전쟁 당시 영국과 내통하여 반역을 저지른 베네딕트 아놀드와 이름이 같은 동명이인들도 독립전쟁이 끝난 지 200여 년이 넘은 지금도 자국내에서 까이기도 한다. 히틀러의 경우는...... 말 안해도 알 거다. -------------------------------------------------------------------------------------------------------------- 밑에 LOD 보고있냐? 니놈이 말한 이완용이 진정 나라를 위해 나라를 팔았다고 생각하냐?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면 넌 진짜 정신나간 놈이다. 어떻게 하면 너처럼 될 수 있냐. 맨날 일본애니 보면서 수음 좆나게 치면 그렇게 될 수 있는거냐? 좀 알려줘라 내 주변사람들한테 절대로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게.너의 댓글을 보고 내 눈을 의심했다. 한국인이 어떻게 이완용이를 두둔할 수 있는지.. 진성 친일파매국노인 그새끼를.. 아직 늦지 않았다. 너의 그 잘못된 생각을 바꿔라. Lod쪽지보내기회원정보 보기닉네임 검색 12/04/26 13:04:46 [124.xxx.xxx.xxx]추천신고아뭐니이거 아주 환상속에 국가를 꿈꾸는 사람이군이런걸 매국노라고 하지 잘나가는 이완용집안이 돈때문에 나라를 판건줄 아나조선의 시대발전을 위해 나라를 판거다 현실을 보지못한 우매한결과가 남기 역사적 범죄다.일본의 군대부활은 생각도 못하지죠 님은 한반도 미군철수후 벌어지는 일은 단순한게 아닌데요일본군대 다시 생기고 중국 러시아 영토분쟁 시작 대한민국 국방력 경제력 딸림 결과 완벽한 패배2차대전 독일과 같은 기술적우위도 없고 전략전 우수한 지휘관도 없음 미군이 대한민국 군대 덜떨어져서 전시작전권 안주는건 아시나요그렇다고 전쟁을 치룬 국가에 절대적인 공포감도 못주고 전쟁은 끝남 결과 그냥 호구로 평생살아야함 그리고 영토분쟁에 동맹은 없는거 아시나요.백두산의 반은중국 소유입니다. 러시아는 일본과 영토분쟁이라고 하지만 엄연이 러시아도동해에대한 어느정도의 미약할정도의 주장권이 있는게 현실입니다. 그리고6.25 북한동맹군 이였던 나라입니다.일본은 독도먹으려고하고 한반도를 노린나라 러시아 중국 일본 동맹을 누가 해줄까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때와서 미국찾을 까요ㅋㅋㅋㅋㅋㅋㅋ 이제는 별힘도없는 UN이 뭔가할까요.
순강도작성일
2012-04-26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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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신화가 된 사랑- 공민왕과 노국공주
- 볼모로 잡히고, 원나라 공주들과 결혼해야만 했던 고려말 고려 태자들의 비극적인 삶.
몽고 공주와 결혼한 고려의 태자들은 왕이 되고서도, 대부분 비극적인 삶을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외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알고있는 사실이라면,
보탑실리공주, 즉 우리나라 말로 노국대장공주라고 불리는 원나라 황족 여식과.
13살때 중국으로 끌려가, 24세가 되어서야 고려로 귀국하기전까지 그곳에서 볼모로 잡혔던 공민왕.
두 남녀는 보기드물게 국적을 초월한 깊은 인연으로 만났습니다.
그리고 고려로 귀환후, 공민왕은 파격적인 개혁정책을 펼쳤고 노국공주는 공민왕을 적극 지지하며
내조하는데 큰 힘을 쏟았습니다.
공민왕이 가는곳에는 노국공주가 있었고, 공민왕은 노국공주의 지원에 힘입어 고려 제2의 부흥을
이끌었다고 할수있을만큼 여러가지 개혁을 펼치며, 원(元)으로부터의 지배를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행복도 잠시, 노국공주가 공민왕의 아이를 낳다 산고로 숨지자
공민왕은 지금껏 해오던 모든 정치를 내팽겨쳐버리고 밤낮 노국공주만 그리워합니다.
노국공주를 그리워하는 우울증이 더욱 심해져, 말년엔 입에 담기조차 어려운 짓을 했고
결국은 공민왕 자신이 만든 자제위의 소년들에 의해 무참히 난도질 당하고맙니다.
<여기까지 우리가 알고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의문점이 생깁니다.
도대체 노국공주는 공민왕에게 어떤 존재였을까요?
어떤 존재였기에, 공민왕은 그토록 힘쓰던 개혁정치마저 내팽겨쳐버리고
밤낮 노국공주만을 그리워하며- 말년을 허무하게 보냈을까요?
도대체 노국대장공주 라는 존재는 공민왕에게 어떤 존재였을까요?
역사를 통틀어서 미인(美人)에 홀린탓에 쾌락을 좇아 정사(鄭事)를 망친 왕은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지만..
사랑하는 왕비(王妃)의 죽음으로 그를 그리워하다가 정사를 망친 왕은
손으로 꼽을만큼 드뭅니다..
그동안 역사 교과서로만 읽고 끄덕거리며 생각했던 사실이지만,
되짚고 조금 더 깊게 생각해보면 이 두 사람의 이야기는 참으로 미스테리 입니다..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깊었으면
정치도, 개혁에도 일절 관심이 사라지고 그 사람에 대한 그리움만이 남았을까요?
<사료> 에서 소개하는 공민왕은 다른 고려 왕들과는 달리
호방한 기질이 없었다고 합니다.
말타기나 활쏘기, 사냥에 관심이 없었고 감성적이였으며 또한 내성적인 면이 강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공민왕은 말타기나 사냥같은 외향적인 취미보다는 다른 것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노국 공주가 죽은뒤, 밤 낮 거문고를 뜯으며 슬퍼했다고 한 공민왕.
감성적인 여성과 달리 이성적인 남성이 음악에 관심을 갖는건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공민왕은,
감성적이고 내성적이였기에 공주를 잃은 슬픔이 어쩌면 다른 사람의 몇 배로 더 충격으로
다가왔을지 모릅니다..
두사람이 처음 만난것은
원(元) 나라의 수도에서 였습니다.
당시 동양은 몽고 기병의 말발굽 아래, 무릎꿇지 않은 나라가 없었고
공민왕이 속했던 고려도 예외는 아니였습니다.
몽고와의 화친 이후, 고려는 왕자들을 몽고의 수도로 보내 볼모로 삼게 해야했고,
고려 왕자들은 타국에서 외로움을 곱씹으며, 몽고의 풍습과 문화를 익혀 고국에 돌아가
몽고인들이 바라는대로 정치를 해야만 했습니다.
특히 공민왕의 형(충혜왕)과 아버지(충렬왕)은 몽고 황제의 비위에 거슬렸다는
이유로 두번씩이나 왕 자리를 서로 맞바꾸는 아이러니한 일까지 벌이게 됩니다.
이런 상황속에서 공민왕은 형과 아버지가 했던것처럼 몽고 황족의 딸과 혼인을 하게되는데
여기서 바로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운명적인 인연의 만남이 시작됩니다.
몽고 공주와 결혼한 다른 고려 태자들의 삶은 결코 순탄치가 않았습니다.
그러나 노국대장공주는 타지에서 생활하는 고려 왕자에대한 배려를 아끼지않았고
그러한 공주의 노력에 감동을 받은 공민왕은 원나라 황제를 설득시키며 세월을 기다린 끝에
마침내 고려의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어떤 부부들은 결혼생활을 시작한지 3년만 지나도,
처음의 마음이 많이 희석되고 서서히 틈이 벌어지곤 합니다.
우리 주변에도, 그리고 TV 뉴스만 봐도 처음 사랑이 식어버린 채,
이혼이라는 파극까지 치닫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고요.
공민왕과 노국공주 역시 감정과 이성을 가진 사람이며, 365일 마주하며 산다면
서로에게 싫증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겠지요.
그러나 공민왕과 노국공주에게는 두 사람의 사랑이 더욱 깊어질만한
계기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안동 놋다리 밟기
(유래) -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피난길이 안동에 도착했을때,
작은 개울을 건너야 하는 상황이 있었다. 그때 노국공주를 태울만한 가마나 그 어떤것도
없자, 안동의 부녀자들이 자진해서 나섰다.
부녀자들은 일렬로 주욱 개울에 일자로 늘어선뒤, 등을 굽혔고
노국공주는 부녀자들의 등을 사뿐사뿐 밟으며 무사히 개울을 건널 수 있었다.
흥왕사의 변 -
1363년(공민왕 12)에 김용이 왕을 시해하려고 흥왕사 행궁(行宮)을 침범한 사건.
당시 왕과 비슷한 외모를 가진 안도치가 죽임을 당하는등, 반대파는 공민왕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었다. 반대파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노국공주가 총명과 기지를 발휘하여 공민왕의
생명을 지킬수 있었다.
노국공주와 공민왕 역시 여느 부부와 마찬가지로
이성과 감성을 지닌 인간이였지만 두사람의 사랑을 더욱 깊게 만든 것은
'시련' 이였습니다.
'시련'은 두사람의 몸을 위협했을지 몰라도 두 사람의 사랑만큼은 상하게 하지 못했습니다.
노국공주는 공민왕의 연인이자 아내요, 정신적인 지주였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시련으로 사랑을 다듬었고, 사랑은 더욱 깊어져갔습니다.
원나라 황족의 딸이였음에도 노국공주는 언제나 공민왕을 지지했고,
또한 노국공주의 지지를 발판삼아 공민왕은 여러 개혁정치를 펼쳤습니다.
그러나 그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노국공주가 죽은뒤,
공민왕은 정사에 더이상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요승 신돈을 등용했다가 그가 정사를 망치자, 그를 참형에 처하는가하면
자제위를 설치했는데, 이 자제위는 미소년들로 이루어진 집단으로 왕을 보좌하는 일을
맡았지만 사실 공민왕의 성 노리개나 다름 없었다고 합니다.
노국공주가 죽은뒤
황실에서는 공민왕에게 후처를 맞을것을 권했지만
공민왕은 ' 노국공주만한 여자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라고 일축하며
그뒤 9년동안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9년뒤, 허무한 나날을 보내던 공민왕은 결국 자신이 만든 '자제위'
소년들에의해 죽음을 맞습니다.
고려의 개혁군주로 24년
노국공주의 남편으로 16년
그리움에서 헤어나오지 못한채 9년.
공민왕의 죽음은 매우 허무했습니다.
개성시 개풍군에 있는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무덤.
공민왕은 노국공주의 무덤을 만들면서 자신의 무덤까지 함께 만들것을 설계했다고 합니다.
공민 왕릉은 고려의 왕들의 무덤중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합니다.
12지신이 왕의 관 주위를 지키듯, 벽화에 그려져있으며 그 분위기는 휘황찬란하다고 하네요.
그런데, 저 구멍이 보이시나요 ^^;
공민왕의 관 바로 옆에 아주 작은 구멍이 있습니다. 사진에서 보는것처럼..
이 구멍은..
죽음이 갈라놓지 못하도록, 죽어서도 사랑을 나눌것을 결심한 공민왕이 특별히
설계한 구멍이라고 합니다.
반대쪽 노국공주의 관이 있는곳과 공민왕의 관이 있는곳.
그 가운데를 연결하는 작은 구멍.
그것은 단순한 구멍이 아닌, 공민왕과 노국공주가 죽어서도 사랑을 나눌것을 기약하는,
영혼의 길이였습니다.
공민왕은 후세의 세계에서도 노국공주를 만나 사랑을 나눌것을 생각했을만큼,
지독하게 노국공주를 사랑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역사의 신화가 된 세기의 사랑이였습니다.
조선의 왕과 왕비가 아니면 모실 수 없는 종묘.
그러나 그곳에는 공민왕이 모셔져 있고, 노국공주가 함께 있습니다.
고려가 무너지고 조선이 들어선 뒤에도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사랑만큼은 절대 변하지않고 전해져내려왔다는거지요.
<고려사>는 조선에 의해 쓰여졌는데,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위해서
고려왕들을 상당수 폄하 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공민왕 역시 말년의 비극의 결말을 부풀려서 집필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조선의 지식인들 조차 공민왕 자체를 깎아내렸을지는 몰라도,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사랑만큼은 인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 남자가 세상에 태어나, 한 여자를 만나서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는 것.
그것은 결코 쉬운일이 아닙니다. 인간과 인간이 마주하는 일이기에 분쟁과 다툼이
분명히 있을것이고, 처음 만났을때의 사랑과 결심이 어느세 부터인가 희석되어
다툼과 분쟁만 남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공민왕과 노국공주는 끝까지 함께 했습니다.
두 사람은 죽어서도 함께 할 각오를 할만큼, 열렬히 평생을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사랑을 굳게 다져준것은..
돈, 명예, 쾌락같은 누구나 꿈꿔보고 싶은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시련 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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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터] 신화가 된 사랑 - 공민왕과 노국공주
- 볼모로 잡히고, 원나라 공주들과 결혼해야만 했던 고려말 고려 태자들의 비극적인 삶.
몽고 공주와 결혼한 고려의 태자들은 왕이 되고서도, 대부분 비극적인 삶을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외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알고있는 사실이라면,
보탑실리공주, 즉 우리나라 말로 노국대장공주라고 불리는 원나라 황족 여식과.
13살때 중국으로 끌려가, 24세가 되어서야 고려로 귀국하기전까지 그곳에서 볼모로 잡혔던 공민왕.
두 남녀는 보기드물게 국적을 초월한 깊은 인연으로 만났습니다.
그리고 고려로 귀환후, 공민왕은 파격적인 개혁정책을 펼쳤고 노국공주는 공민왕을 적극 지지하며
내조하는데 큰 힘을 쏟았습니다.
공민왕이 가는곳에는 노국공주가 있었고, 공민왕은 노국공주의 지원에 힘입어 고려 제2의 부흥을
이끌었다고 할수있을만큼 여러가지 개혁을 펼치며, 원(元)으로부터의 지배를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행복도 잠시, 노국공주가 공민왕의 아이를 낳다 산고로 숨지자
공민왕은 지금껏 해오던 모든 정치를 내팽겨쳐버리고 밤낮 노국공주만 그리워합니다.
노국공주를 그리워하는 우울증이 더욱 심해져, 말년엔 입에 담기조차 어려운 짓을 했고
결국은 공민왕 자신이 만든 자제위의 소년들에 의해 무참히 난도질 당하고맙니다.
<여기까지 우리가 알고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의문점이 생깁니다.
도대체 노국공주는 공민왕에게 어떤 존재였을까요?
어떤 존재였기에, 공민왕은 그토록 힘쓰던 개혁정치마저 내팽겨쳐버리고
밤낮 노국공주만을 그리워하며- 말년을 허무하게 보냈을까요?
도대체 노국대장공주 라는 존재는 공민왕에게 어떤 존재였을까요?
역사를 통틀어서 미인(美人)에 홀린탓에 쾌락을 좇아 정사(鄭事)를 망친 왕은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지만..
사랑하는 왕비(王妃)의 죽음으로 그를 그리워하다가 정사를 망친 왕은
손으로 꼽을만큼 드뭅니다..
그동안 역사 교과서로만 읽고 끄덕거리며 생각했던 사실이지만,
되짚고 조금 더 깊게 생각해보면 이 두 사람의 이야기는 참으로 미스테리 입니다..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깊었으면
정치도, 개혁에도 일절 관심이 사라지고 그 사람에 대한 그리움만이 남았을까요?
<사료> 에서 소개하는 공민왕은 다른 고려 왕들과는 달리
호방한 기질이 없었다고 합니다.
말타기나 활쏘기, 사냥에 관심이 없었고 감성적이였으며 또한 내성적인 면이 강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공민왕은 말타기나 사냥같은 외향적인 취미보다는 다른 것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노국 공주가 죽은뒤, 밤 낮 거문고를 뜯으며 슬퍼했다고 한 공민왕.
감성적인 여성과 달리 이성적인 남성이 음악에 관심을 갖는건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공민왕은,
감성적이고 내성적이였기에 공주를 잃은 슬픔이 어쩌면 다른 사람의 몇 배로 더 충격으로
다가왔을지 모릅니다..
두사람이 처음 만난것은
원(元) 나라의 수도에서 였습니다.
당시 동양은 몽고 기병의 말발굽 아래, 무릎꿇지 않은 나라가 없었고
공민왕이 속했던 고려도 예외는 아니였습니다.
몽고와의 화친 이후, 고려는 왕자들을 몽고의 수도로 보내 볼모로 삼게 해야했고,
고려 왕자들은 타국에서 외로움을 곱씹으며, 몽고의 풍습과 문화를 익혀 고국에 돌아가
몽고인들이 바라는대로 정치를 해야만 했습니다.
특히 공민왕의 형(충혜왕)과 아버지(충렬왕)은 몽고 황제의 비위에 거슬렸다는
이유로 두번씩이나 왕 자리를 서로 맞바꾸는 아이러니한 일까지 벌이게 됩니다.
이런 상황속에서 공민왕은 형과 아버지가 했던것처럼 몽고 황족의 딸과 혼인을 하게되는데
여기서 바로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운명적인 인연의 만남이 시작됩니다.
몽고 공주와 결혼한 다른 고려 태자들의 삶은 결코 순탄치가 않았습니다.
그러나 노국대장공주는 타지에서 생활하는 고려 왕자에대한 배려를 아끼지않았고
그러한 공주의 노력에 감동을 받은 공민왕은 원나라 황제를 설득시키며 세월을 기다린 끝에
마침내 고려의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어떤 부부들은 결혼생활을 시작한지 3년만 지나도,
처음의 마음이 많이 희석되고 서서히 틈이 벌어지곤 합니다.
우리 주변에도, 그리고 TV 뉴스만 봐도 처음 사랑이 식어버린 채,
이혼이라는 파극까지 치닫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고요.
공민왕과 노국공주 역시 감정과 이성을 가진 사람이며, 365일 마주하며 산다면
서로에게 싫증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겠지요.
그러나 공민왕과 노국공주에게는 두 사람의 사랑이 더욱 깊어질만한
계기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안동 놋다리 밟기
(유래) -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피난길이 안동에 도착했을때,
작은 개울을 건너야 하는 상황이 있었다. 그때 노국공주를 태울만한 가마나 그 어떤것도
없자, 안동의 부녀자들이 자진해서 나섰다.
부녀자들은 일렬로 주욱 개울에 일자로 늘어선뒤, 등을 굽혔고
노국공주는 부녀자들의 등을 사뿐사뿐 밟으며 무사히 개울을 건널 수 있었다.
흥왕사의 변 -
1363년(공민왕 12)에 김용이 왕을 시해하려고 흥왕사 행궁(行宮)을 침범한 사건.
당시 왕과 비슷한 외모를 가진 안도치가 죽임을 당하는등, 반대파는 공민왕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었다. 반대파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노국공주가 총명과 기지를 발휘하여 공민왕의
생명을 지킬수 있었다.
노국공주와 공민왕 역시 여느 부부와 마찬가지로
이성과 감성을 지닌 인간이였지만 두사람의 사랑을 더욱 깊게 만든 것은
'시련' 이였습니다.
'시련'은 두사람의 몸을 위협했을지 몰라도 두 사람의 사랑만큼은 상하게 하지 못했습니다.
노국공주는 공민왕의 연인이자 아내요, 정신적인 지주였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시련으로 사랑을 다듬었고, 사랑은 더욱 깊어져갔습니다.
원나라 황족의 딸이였음에도 노국공주는 언제나 공민왕을 지지했고,
또한 노국공주의 지지를 발판삼아 공민왕은 여러 개혁정치를 펼쳤습니다.
그러나 그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노국공주가 죽은뒤,
공민왕은 정사에 더이상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요승 신돈을 등용했다가 그가 정사를 망치자, 그를 참형에 처하는가하면
자제위를 설치했는데, 이 자제위는 미소년들로 이루어진 집단으로 왕을 보좌하는 일을
맡았지만 사실 공민왕의 성 노리개나 다름 없었다고 합니다.
노국공주가 죽은뒤
황실에서는 공민왕에게 후처를 맞을것을 권했지만
공민왕은 ' 노국공주만한 여자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라고 일축하며
그뒤 9년동안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9년뒤, 허무한 나날을 보내던 공민왕은 결국 자신이 만든 '자제위'
소년들에의해 죽음을 맞습니다.
고려의 개혁군주로 24년
노국공주의 남편으로 16년
그리움에서 헤어나오지 못한채 9년.
공민왕의 죽음은 매우 허무했습니다.
개성시 개풍군에 있는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무덤.
공민왕은 노국공주의 무덤을 만들면서 자신의 무덤까지 함께 만들것을 설계했다고 합니다.
공민 왕릉은 고려의 왕들의 무덤중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합니다.
12지신이 왕의 관 주위를 지키듯, 벽화에 그려져있으며 그 분위기는 휘황찬란하다고 하네요.
그런데, 저 구멍이 보이시나요 ^^;
공민왕의 관 바로 옆에 아주 작은 구멍이 있습니다. 사진에서 보는것처럼..
이 구멍은..
죽음이 갈라놓지 못하도록, 죽어서도 사랑을 나눌것을 결심한 공민왕이 특별히
설계한 구멍이라고 합니다.
반대쪽 노국공주의 관이 있는곳과 공민왕의 관이 있는곳.
그 가운데를 연결하는 작은 구멍.
그것은 단순한 구멍이 아닌, 공민왕과 노국공주가 죽어서도 사랑을 나눌것을 기약하는,
영혼의 길이였습니다.
공민왕은 후세의 세계에서도 노국공주를 만나 사랑을 나눌것을 생각했을만큼,
지독하게 노국공주를 사랑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역사의 신화가 된 세기의 사랑이였습니다.
조선의 왕과 왕비가 아니면 모실 수 없는 종묘.
그러나 그곳에는 공민왕이 모셔져 있고, 노국공주가 함께 있습니다.
고려가 무너지고 조선이 들어선 뒤에도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사랑만큼은 절대 변하지않고 전해져내려왔다는거지요.
<고려사>는 조선에 의해 쓰여졌는데,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위해서
고려왕들을 상당수 폄하 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공민왕 역시 말년의 비극의 결말을 부풀려서 집필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조선의 지식인들 조차 공민왕 자체를 깎아내렸을지는 몰라도,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사랑만큼은 인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 남자가 세상에 태어나, 한 여자를 만나서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는 것.
그것은 결코 쉬운일이 아닙니다. 인간과 인간이 마주하는 일이기에 분쟁과 다툼이
분명히 있을것이고, 처음 만났을때의 사랑과 결심이 어느세 부터인가 희석되어
다툼과 분쟁만 남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공민왕과 노국공주는 끝까지 함께 했습니다.
두 사람은 죽어서도 함께 할 각오를 할만큼, 열렬히 평생을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사랑을 굳게 다져준것은..
돈, 명예, 쾌락같은 누구나 꿈꿔보고 싶은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시련 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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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제주서 세계적으로 희귀한 황금넙치를 보다
일반적으로 한국인들은 황금색을 띠는 희귀한 동물이 발견되면 ‘행운의 상징’, ‘국운 상승의 징조’ 등으로 해석합니다. 제주도와 전남 함평 등지에서 발견되었던 황금 박쥐와 충북 옥천에서 잡힌 황금 미꾸라지 등이 그 예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황금넙치(일명 황금광어)’가 제주도에서 발견되어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서귀포시 성산읍에 위치한 '일출수산'이라는 곳에서 화제의 ‘황금넙치’를 두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었습니다.
바로 위 사진에서 보이는 넙치가 세계적으로 희귀한 ‘황금넙치’입니다. 눈이 왼쪽으로 쏠린 것을 비롯해 겉 모양은 넙치와 일치하지만, 머리에서 꼬리까지 온몸이 누런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황금넙치는 어떻게 나오게 된 것일까? '일출수산' 김성석 부장은 "30만 마리를 키우는 양어장에서 몇년에 한번씩 나온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넙치는 자라면서 몸색깔이 황금빛으로 변한다고 합니다. 또한 "보통 넙치의 중량이 1~2㎏인데 반해, 황금넙치는 5~7㎏이나 된다"고 김 부장은 전했습니다.
▲ 황금넙치(위)와 일반 넙치(아래) 비교
황금넙치에 대해 국립수산과학원 육종연구센터 노재구 연구사는 "색소 돌연변이(알비노) 현상 때문에 양어장에서 드물게 나타난다"며 "제주도에서 발견되는 이유는 이 지역이 국내 넙치 양식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어서 노재구 연구사는 "몸 색깔이 황금색이라는 것 외에 일반 넙치와 다른 점이 없지만, 동양에서 황금색 동물에 대해 심리적으로 신비롭게 여기는 관념이 있는 만큼 향후 산업적으로 연구해 볼 가치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 황금넙치의 머리 부분
현재 황금넙치가 있는 '일출수산'은 민간 기반으로 운영되고 있는 '제주 넙치클러스터'가 운영되고 있는 곳입니다. 김성석 부장은 "영어조합법인 해연수산의 서종표 사장의 주도로 2년 전부터 황금넙치 연구를 하고 있다"며 "황금넙치 암컷과 수컷을 이용해 교배를 하면 황금넙치가 나올 확률이 높아지는데, 지속적인 연구를 통해 대량 생산 기술을 확보하는 것이 목표다"라고 밝혔습니다.
1990년 8월에 시작한 '일출수산'은 현재 총면적이 8,900㎡에 달하고, 수조 면적은 4,950㎡에 이릅니다. 종묘입식은 1년에 총 30만 미를 하고 있으며, 유전개량 프로그램으로 선발·육종된 종묘를 입식하고 있습니다.
▲ 일출수산 넙치 양어장의 모습
1년에 평균 180톤이라는 생산량을 자랑하고 있으며, 중량별로 보면 0.4~0.9kg은 30톤, 1~2kg은 40톤, 2kg 이상이 110톤으로 가장 많습니다. 이 중 국내에서 163톤(2008년 기준)을 판매했으며, 미국에 5톤, 싱가폴 2톤, 일본 10톤을 수출했습니다.
'제주 넙치 클러스터'는
지역의 특화된 농수산업을 중심으로 기술과 경영이 조화롭게 융화된 지원체계를 구축해 농어가 소득증대를 도모하기 위해서 2009년 4월에 선정되었습니다. 제주 넙치 클러스터는 제주 넙치양식 산업의 고도화를 통해서 수출경쟁력을 강화하고, 정부·지자체·대학·연구소 개발 기술의 산업화를 촉진시키는 것이 목적입니다.
※ 클러스터(cluster): 상호 작용을 통하여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창출할 수 있도록 기업, 대학, 연구소 따위를 모아 놓은 지역.
[출처] 제주서 세계적으로 희귀한 ‘황금넙치’를 보다|작성자 위농
단홍비작성일
2011-04-14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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