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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국정교과서 집필진 명단 31명
뉴라이트 학자 대거 참여···국정 역사교과서 집필진 31명 명단 공개(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11281323001&code=940401&nv=stand&utm_source=naver&utm_medium=newsstand&utm_campaign=top2#csidx26d39a8875adc6d96e50763c41b5633) - "현대 부분을 집필한 김명섭 연세대 교수, 나종남 육군사관학교 교수, 세계사 부분에 참여한 이주영 건국대 명예교수는 한국현대사학회(뉴라이트) 멤버들이다."◇국정 역사교과서 집필진 명단 및 프로필 #선사/고대■신형식 이화여대 명예교수 ·서울대 역사교육과(학사) / 사학과(석사) . ·단국대 사학과(박사) 이화여대 사학과 교수 ·역사교육연구회 회장 역임 ·서울시사편찬위원회 위원장 역임 ■최성락 목포대 고고학과 교수 ·서울대 고고학과(학사/석사/박사) ·목포대 박물관 관장 역임 ·한국고고학회 회장 역임 ·現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서영수 단국대 명예교수·서울대 동양사학과(학사)/ 단국대 사학과(석사) ·동국대 사학과(박사) ·단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고구려발해학회 회장 역임 ■윤명철 동국대 다르마칼리지 교수·동국대 사학과(학사) / 성균관대 사학과(석사) ·성균관대 사학과(박사) ·고조선 단군학회 회장 역임 ·한국해양정책학회 부회장 역임 #고려■박용운 고려대 명예교수 ·서울대 역사교육과(학사) / 고려대 사학과(석사) ·고려대 사학과(박사) ·고려대학교 사학과 교수 ·한국사연구회 회장 역임 ■이재범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성균관대 사학과(학사/석사/박사) ·국방군사연구소 연구위원,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부편수원,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경기대학교 부총장 역임 ·前 경기대학교 사학과 교수 ■고혜령 문화재청 문화재 위원·서울대 사학과(학사) / 이화여대 사학과(석사) ·이화여대 사학과(박사) ·국사편찬위원회 편사부장 역임 .現 한국고전번역원 이사 #조선■손승철 강원대 사학과 교수 ·성균관대 사학과(학사/석사/박사) ·동북아역사재단 편집위원 ·한일관계사학회 회장 역임 ·現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이상태 국제문화대학원 대학 석좌교수 ·연세대 사학과(학사/석사) ·동국대 사학과(박사)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실장 역임 ·일본 동경대 초빙교수 ■신명호 부경대 사학과 교수 .강원대 사학과(학사) / 한국학중앙연구원(석사) ·한국학중앙연구원(박사) ·부경대학교 박물관장 역임 #근대 ■한상도 건국대 사학과 교수 ·건국대 사학과(학사/석사/박사) ·중국 북경대학 한국사 객좌교수 ·건국대학교 박물관 관장 ·現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이민원 동아역사연구소 소장·청주대 영문과(학사) / 한국학중앙연구원(석사) ·한국학중앙연구원(박사)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연구위원 ·한국보훈교육연구원 연구부장 역임 ■김권정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숭실대 사학과(학사/석사/박사) ·숭실대학교 전임연구원 ·중앙대학교 전임연구원 #현대■최대권 서울대 명예교수 ·서울대 법학과(학사) / 미시건대(석사) ·UC 버클리대(석사/박사) ·서울대 법과대학 교수 ·한동대 석좌교수 ·법제처 정부입법자문위원장, 선거방송심의위원장 역임 ■유호열 고려대 북한학과 교수·고려대 정치외교학과(학사/석사) ·오하이오주립대 정치학과(박사) ·통일연구원 연구위원, 한국정치학회 회장 역임 ·現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민주평통자문회의수석부의장 ■김승욱 중앙대 경제학부 교수 중앙대 경제학과(학사/석사) ·조지아대 경제학과(박사) ·고용노동부 장애인고용촉진전문위원회 위원 ·경제사학회 회장 역임 ■김낙년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 ·서울대 경제학과(학사/석사) ·동경대 경제학과(박사) ·경제사학회 회장 역임 ·現 낙성대 경제연구소 소장 ■김명섭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연세대 정치외교학과(학사) / 정치학과(석사) ·소르본대 정치학과(박사) ·한신대 조교수, 부교수 ·한국정치외교사학과 부회장 역임 ■나종남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교수 ·육군사관학교(학사) / 서강대 사학과(석사) ·노스캐롤라이나대 역사학과(박사) #세계사■이주영 건국대 명예교수 ·서울대 사학과(학사) / 하와이주립대 사학과(석사) ·서강대 사학과(박사) ·건국대학교 교수 ·역사학회 회장, 한국아메리카학회 회장 역임 ■허승일 서울대 명예교수 ·서울대 사학과(학사/석사) ·서울대 서양사학과(박사) ·건국대 교수 ·서울대 역사교육과 교수 ·한국서양사연구회 회장 역임 ■정경희 영산대 자유전공학부 교수·서울대 역사교육과(학사) / 서울대 서양사학과(석사) ·서울대 서양사학과(박사) ·아산정책연구원 초빙연구위원 ·現국사편찬위원회 위원 ■윤영인 영산대 자유전공학부 교수 ·펜실베니아대 역사학과(학사) / UCLA 동양문화(석사) ·UCLA 동양문화(박사) ·고구려연구재단 연구위원 ■연민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동국대 사학과(학사/석사) ·큐슈대학 일본사학과(박사) ·동북아역사재단 역사연구실장 #현장교원■우장문 경기 대지중 수석교사(선사/고대) ·충북대 역사교육과(학사) / 고려대 역사교육과(석사) ·경기대 사학과(박사) ·한국고대학회 회원 ■김주석 대구 청구고 교사(고려) ·대구대 역사교육(학사) / 대구대 사학과(석사) ■유경래 경기 대평고 교사(고려)·성균관대 사학과(학사) / 아주대 역사교육과(석사) ■정일화 강원 평창고 교사(조선) ·강원대 역사교육과(학사/석사) ■최인섭 충남 부성중 교장(근대) ·공주대 역사교육과(학사) / 고려대 역사교육과(석사) ·숭실대 평생교육(박사) ■황정현 충남 온양 한올중 교사(근대/현대)·한남대 역사교육과(학사) / 공주대 역사교육과(석사) ■황진상 서울 광운전자고 교사(세계사)·서울대 국사학과(학사) '최순실교과서' 부역자 명단입니다. - 문제가 된 현대쪽 부분은 보신 것처럼 역사학 전공자는 없습니다. 김낙년 등 뉴라이트 계열이라 보면 될 것 같습니다. - 근대까지 쳐줘서 한상도, 김권정이 있는데, 이분들은 일제시대 전공자이고 박사는 각각 90년대, 00년에 낸 짬이 꽤 되는 양반들입니다. 과문하여 정확히 이분들의 연구를 제대로 본 적은 없으나, 한상도 선생은 재중 독립운동 쪽인거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전공자인 저도 이름을 처음 봅니다. - 조선시대 전공자에게도 물어보니 조선 시대 저 세 명도 자긴 잘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긴 하던데, 객관적으론 잘 모르겠네요. - 시작도 전부터 역사학계는 98%가 빨갱이들이라고 하더니 실제로 근현대사 파트에서는 역사학계를 제외했네요. 땡큐 베리 감사. 어이가 없어서... 이게 용인이 될 거라고 생각한건가....ㅋㅋ 끝까지 비공개로 진행한 이유가 역시 뻔했죠. 때려치워라이것들아..
세휘롯작성일
2016-11-28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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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축구선수 안정환(조금 김)
안정환은 무척 화려한 선수다. 한국에서는, 아니 아시아에서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한 차원 높은 화려한 플레이를 선보였고 외모는 조각처럼 잘 생겼다. 이 귀공자 같은 축구선수를 우리는 테리우스, 또는 판타지스타라고 불렀다. 안정환이 아쉬운 은퇴를 선언한 이 시점에서 우리는 화려했던 안정환의 선수 생활을 되짚어 보고 있다. 하지만 안정환의 인생이 화려했던 것만은 아니다. 오늘은 화려함 뒤에 가려진 안정환의 슬프고 외로웠던 시절을 살펴보고자 한다. 안정환이 얼마나 대단한 선수였는지는 월드컵에서의 극적인 골보다 그 순간에 도달하기 위해 열악한 환경에서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보면 더 잘 알 수 있다. 옷이 한 벌 뿐이었던 패셔니스타 안정환에게는 남다른 가족사가 있다. 이 부분에 대해 자세히 언급한다면 아마 더 구구절절한 스토리가 완성될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최대한 자제하려고 한다. 그의 힘겨웠던 유년 시절을 이야기 할 때 왜 그가 아버지 없이 자랐는지, 외할머니 품에서 커야 했는지를 소개하는 것도 언론인으로서의 의무이지만 그 전에 선수에 대한 사생활은 어느 정도 보호해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과거 안정환은 자신의 가족사를 자극적으로 다룬 언론 보도로 인해 “한국에 들어오기 싫었다”라고 밝힐 만큼 큰 충격을 받았던 적이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최대한 선수의 사생활을 보호하려 한다. 안정환은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다. 친아버지 얼굴도 모르는 그는 살 집이 없어서 초등학생 때부터 여기저기 얹혀사는 신세였다. 돈암동, 흑석동, 신길동, 부천, 수원 등 한 학기에 10번 넘게 이사를 할 정도로 가난하게 자랐다. 배불리 먹어본 적도 없고 누군가의 사랑을 받아본 적도 없었다. 지금은 패셔니스타라는 평가를 받는 안정환이지만 당시에는 옷이 한 벌밖에 없어 일주일에 닷새 씩 똑같은 옷을 입고 학교에 가야 했다. “넌 옷이 그거밖에 없니?” 친구들은 그런 안정환을 놀렸다. 그럴 때면 안정환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똑같은 옷이 다섯 벌이야.” 항상 배고팠던 안정환은 수퍼마켓 주인이 되는 게 꿈이었다. 먹고 싶은 걸 마음껏 먹고 싶었기 때문이다. 축구를 시작하게 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모 집에 얹혀살던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당시 학교에서 달리기를 잘하기로 유명했던 안정환은 “축구부에 들어오면 빵과 우유를 먹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무작정 축구부로 찾아갔다. 보육원에서 지내는 친구들이나 한쪽 부모가 없는 친구들이 안정환과 함께 우르르 축구부로 향했다. 안정환은 당시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다. “시합이 끝나면 자장면도 사 준다고 하더라고요. 빵과 우유, 자장면에 혹했죠.” 2006년 독일월드컵 당시 프랑스 유명일간지 ‘르 몽드’는 “만화에 나오는 로마왕자 같은 외모의 안정환은 생김새와는 달리 춥고 배고픈 유년기를 보냈다”고 전하기도 했다. 굿판에서 허기진 배를 채우던 안정환 안정환은 노량진의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운동이 끝나면 곧바로 한강둔치로 향했다. 지금은 한강둔치가 시민들의 공간이 됐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한강둔치는 을씨년스러웠다. 무당들이 한강 주변에서 죽은 이들을 위해 굿도 자주 열었다. 굿이 끝나면 떡과 과일을 그 자리에 놓고 갔는데 안정환은 무당들이 굿판을 벌인 뒤 남은 음식들로 허기를 채워야 할 정도로 가난했다. 그에게 있어 한강둔치의 떡과 과일은 최고의 만찬이었다. 이마저도 없을 때면 배추밭에 가서 배추 밑동을 뽑아 먹었다. 안정환의 외할머니는 “배불리 먹지 못해 또래에 비해 체구가 유난히 작던 (안)정환이의 모습이 항상 마음에 걸렸다”고 했다. 어릴 적부터 집 없이 방황하던 안정환은 항상 눈칫밥을 먹어야 했다. 이모 집에 얹혀살면서 축구를 시작한 무렵에는 이모와 이모부의 부부싸움이 잦았다. 고된 훈련을 마치고 밤늦게 이모 집으로 돌아와 문을 살짝 열고 집안의 동태를 파악하는 게 안정환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었다. 그러다 부부싸움이라도 하는 날에는 집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밤 11시건 12시건 골목에 쭈그려 앉아 싸움이 잦아지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어머, 어린 애가 왜 여기에서 이러고 있니? 너 집 없니? 이거라도 먹어.” 당시 이모 댁은 중앙대학교 근처 언덕이었는데 집에 들어가지 못할 때면 대학생 누나들이 오가다가 건네 준 과자와 사과로 끼니를 대신했다. 힘든 훈련을 마친 어린 안정환에게는 갈 곳도, 먹을 것도 없었다. 수원에 살 때는 학교까지 버스를 갈아타고 무려 두 시간이나 가야했다. 오전 운동을 해야 해 새벽 5시 반에 일어나야 시간에 맞춰 학교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초등학교 4학년 학생에게 이는 너무도 힘겨운 일이었다. 얹혀살면서 새벽부터 학교에 간다고 부산을 떠는 것도 눈치가 보였고 두 시간 넘게 만원버스를 탄다는 것도 어린 아이에게는 너무 큰 부담이었다. 그래서 안정환은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다. ‘그래, 그냥 학교에서 자자.’ 안정환이 생각해 낸 곳은 학교 창고였다. 그는 밤 늦게 몰래 학교에 남아 창고로 숨어 밤을 지샜다. 부모에게 어리광을 피울 11살의 나이에 안정환은 혼자 학교 창고에서 잠을 청하는 외로운 소년이었다. 안정환이 과일을 잘 깎는 이유 안정환은 열악한 환경에서도 언제나 노력하는 선수였고 그러면서 자연스레 실력으로도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는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 난생 처음 태극마크를 달고 청소년 대표팀에도 선발됐다. “이건 무슨 과일이죠?” 청소년 대표팀에 합류한 안정환에게는 낯선 과일이 있었다. 바로 오렌지였다. 안정환은 고등학생이 되고 처음으로 오렌지라는 걸 직접 봤다. 생전 처음 본 오렌지를 너무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남은 오렌지를 주머니에 넣었다. 동료들은 “(안)정환이는 먹을 것만 보면 욕심을 부린다”고 놀렸다. 하지만 안정환은 이 오렌지를 아끼고 아껴 집까지 가져왔다. 외할머니를 위해서였다. 생전 처음 먹어본 오렌지를 외할머니에게 가져다주기 위해서였다. 안정환은 운동을 하면서도 틈만 나면 아르바이트를 했다. 중·고등학교 시절 합숙을 하면서도 시간이 나면 돈을 벌기 위해 막노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지하철 5호선 목동역도 직접 그의 손으로 지었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이런 말을 했다. “목동역을 이용하시는 분들은 나한테 고마워해야 한다. 죽을 만큼 고생하면서 열심히 내 손으로 목동역을 지었다.” 결혼한 뒤 그의 아내는 안정환이 깎은 과일이 너무도 가지런해 놀란 적이 있었다. 물론 그럴 이유가 있었다. 학창 시절 돈을 벌기 위해 신길동 나이트클럽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덕분이었다. 곱상한 외모지만 안정환은 막노동부터 웨이터까지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해봤다. “우리 학교로 오렴. 파격적인 대우를 약속하마.” 안정환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유명 대학교에서 그의 스카우트 전쟁이 펼쳐졌지만 그는 축구에서는 다소 변방이라고 할 수 있는 아주대학교를 선택했다. 이유는 하나였다. 안정환이라면 충분히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학교에 입학할 능력이 있었지만 그의 동료들은 그럴 수가 없었다. 동료들과 함께 입학하는 조건으로 그는 아주대를 택했고 팀을 대학 최정상으로 이끌었다. 1997년 대학 선발에 뽑혀 시칠리아에서 열린 하계 유니버시아드에 참가한 뒤 대회를 마치고 귀국한 날 김포공항에서 곧바로 이동, 아주대 소속으로 대학축구연맹전 결승에 나서 두 골을 기록한 건 아직도 전설로 남아 있다. 당연히 프로팀에서도 그를 눈여겨봤고 졸업과 동시에 부산대우에 입단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때까지 외할머니에게 아파트를 장만해 드리고 어머니의 빚을 갚으며 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많은 돈을 모으지는 못했다. 이탈리아로 날아간 테리우스의 시련 K리그에서 화려한 플레이와 빛나는 외모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다. 안정환이 혜성 같이 등장해 긴 머리를 휘날리며 그라운드를 누비던 1999년 부산대우는 483,655명의 경이적인 홈 관중을 불러 모아 K리그 사상 최초로 한 시즌 40만 관중시대를 열었다. 당시 부산대우는 2만 5천 석의 관중석 규모를 훨씬 웃도는 3만 명의 관중을 세 경기 연속으로 불러 모으며 ‘안전사고 위험 지대’로까지 불렸다. 1999년 준우승 팀에서 리그 MVP를 수상한 것도 안정환이 리그 최초였다. 안정환은 전국구 스타가 됐고 안정환이 되고픈 남자들은 머리띠를 하며 그를 흉내 냈다. 각종 광고 출연 등으로 최고의 주가를 달린 것도 이때였다. 그는 실력과 상품성에서 역대 최고의 축구선수였다. 이 실력과 인기를 등에 업고 이탈리아 페루자로 날아갔다. 하지만 이탈리아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동양 선수를, 그것도 한국인을 철저히 무시했던 당시 분위기상 안정환을 인정해주는 동료는 없었다. 안정환은 당시를 회상하며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벽 보고 많은 이야기를 했다.” 페루자 측에서는 일본인들이 나타카 히데토시 영입 이후 티셔츠 구입 등 눈에 띄게 구단 매출을 올려준 것에 비춰 안정환 영입으로 한국인 마케팅을 기대했지만 이마저도 신통치 않았다. 하지만 그는 결국 실력으로 입증했다. 5번째 출장이던 아탈란타전에서 후반 추가시간에 극적인 동점골로 데뷔 첫 골을 쏘아올린 그는 곧바로 치러진 바리전에서 연속골을 뽑아내는 기염을 토했고 우디네세전에서는 두 골을 넣으며 이후 줄곧 주전 자리를 꿰찼다. 하지만 2002 한일월드컵 16강 이탈리아전이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한국 축구 역사상 가장 극적인 이 경기에서 골든골을 넣은 안정환은 이후 괘씸죄에 걸려 페루자에서 방출되고 말았다. 페루자 가우치 구단주는 국영 방송에 나와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그 녀석은 처음 이탈리아에 왔을 때 샌드위치 하나 살 돈 없는 ‘길 잃은 염소’와 같았다. 자신을 키워준 이탈리아를 몰라보고 적대적인 행위를 했다. 그는 더 이상 페루자에 머물 수 없을 것이다.”당시 이탈리아에서는 안정환에게 살해 협박을 하기도 했고 실제로 그의 차를 불태우는 일까지 벌어졌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안정환은 짐 정리도 대리인을 시켜서 해야 할 정도로 골든골 하나로 이탈리아인들에게 미움을 샀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빚 갚기 위해 뛰는 축구선수 프리미어리그 블랙번과 협상이 마무리되고 있었지만 페루자 측에서는 임대 후 완전 이적조항을 앞세워 “페루자 허락 없이는 어떤 팀도 갈 수 없다”고 주장했고 안정환을 노렸던 프리미어리그 여러 구단에서는 소유권이 명확하지 않은 안정환 영입에 뛰어 들었다가는 분쟁이 생길 것을 우려해 난항을 표하기에 이르렀다. 문제는 더 있었다. 페루자와 현대산업개발의 분쟁으로 안정환은 몸값이 점점 떨어졌고 페루자는 이적료 수입에 부산아이콘스가 해를 끼쳤다는 이유로 국제축구연맹(FIFA)에 제소했다. 결국 FIFA는 페루자의 손을 들어주면서 안정환 측이 페루자에 380만 달러(한화 약 35억 원)를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35억 원의 갚지 못하면 안정환은 그 어떤 곳으로도 갈 수 없는 처지였다. 하지만 페루자에서 두 시즌 동안 연봉 13억 원을 받은 안정환은 이 중 대부분을 어머니 빚 갚는데 쓴 터라 돈이 없었다. 한국에서는 이 상황을 안타까워했지만 어느 한 곳에서도 안정환에게 손을 내밀지 않던 그때 일본이 움직였다. 놀라운 건 전문적인 스포츠 매니지먼트사가 아닌 연예기획사에서 안정환을 끌어들였다는 점이다. PM이라는 일본 연예기획사는 페루자에 대신 35억 원을 지급하는 조건으로 안정환과 계약했다. 안정환으로서는 35억 원이라는 빚을 갚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PM과 손을 잡아야 했다. 대한민국 최고의 스포츠 스타는 이렇게 일본 연예기획사 소속의 연예인 아닌 연예인이 됐다. PM은 안정환을 이용해 돈벌이에 나섰다. 안정환을 J리그로 진출시킨 뒤 시즌이 끝나면 예능 프로그램과 광고 출연에 이용했다. 당연히 일본에서 본전을 뽑아야 하는 PM은 첼시와 라치오, 발렌시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샬케04, 블랙번 등 유럽 구단의 입단 제의를 모두 거절했고 최전성기에 있던 안정환은 어쩔 수 없이 유럽 진출의 꿈을 접고 J리그에서 3년 동안 뛰어야 했다. 그런 안정환은 결국 J리그 진출 3년 만에 요코하마를 우승으로 이끌면서 35억 원을 다 갚고 홀가분한 신세가 됐다. 이때 안정환의 나이는 이미 서른 줄로 접어들었다. 당시 나고야에서는 안정환의 기량과 상품성을 인정해 30억 원이 넘는 연봉을 제시했지만 안정환은 뒤늦게라도 유럽에 다시 진출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거액을 거절하고 프랑스 FC메츠로 떠났다. 그의 메츠 시절 연봉은 고작 연봉 8억 원이었다.우리는 안정환에게 무엇을 줬나 그는 3년 만에 유럽 무대로 복귀했지만 메츠가 리그 최하위를 면치 못하자 6개월 뒤 분데스리가 뒤스부르크로 이적했다. 하지만 뒤스부르크 또한 리그 최하위로 강등되자 계약을 해지한 후 반 년 동안 무적 상태로 지내다가 2007년 K리그 수원에 입단, K리그에 7년 만에 복귀했다. 수원 시절에는 2군 경기에 나서 가족에 대해 입에 담기 어려운 말을 내뱉은 상대팀 팬과 충돌해 벌금 1천만 원의 중징계를 당하기도 했다. 그 어떤 비난도 묵묵히 감수했던 안정환이지만 차마 가족을 욕하는 것까지는 참을 수 없었다. 경기 도중 관중석으로 진입해 팬과 충돌한 안정환은 벌금을 내고 사과문을 썼지만 정작 문제를 일으켰던 팬은 그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아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후 부산과 다롄을 거친 그는 최근 은퇴를 선언했다. 개인적인 바람으로는 더 오랜 시간 그의 플레이를 지켜보고 싶지만 이제는 그를 놓아줘야 할 때가 왔다. 우리가 그에게 해준 것이 많다면 이기적인 마음으로 그가 현역 생활을 더 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안정환에게 해준 것이 별로 없다. 이탈리아에 진출했을 때는 일본인들처럼 티셔츠를 사주지 않아 구단에서 미운 오리가 됐고 국제 미아가 됐을 때도 손을 내밀어 주지 못했다. 한국에 돌아왔을 때는 대놓고 가족 욕을 하는 이도 있었다. 아무 것도 해준 것이 없는 안정환에게 더 많은 걸 보여 달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미안하다. 그럼에도 안정환은 우리에게 너무 많은 추억을 선물했다. 긴 머리를 휘날리며 혜성처럼 K리그에 등장해 우리를 설레게 했고 20세기 마지막 한일전에서는 일본의 자존심을 꺾는 멋진 골로 우리를 열광시켰다. 2002 한일월드컵에서의 잊지 못할 활약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의 가슴에 선명히 남아있다. 2006년 독일월드컵에서 원정 첫 승을 거둔 것도 그의 발이었다. 우리는 준 게 없는데 안정환은 너무나도 많은 걸 줬다. 그래서 그의 은퇴가 더 아쉽고 슬프다. 축구를 잘하는 선수는 많지만 이토록 우리의 가슴을 떨리게 하는 선수는 몇 없었다. 안정환이 공을 잡으면 무언가 해줄 것만 같은 그 느낌은 여전하다. 우리의 영원한 판타지스타, 안정환 우리는 안정환의 화려한 모습만 봐 왔다. 귀공자 같은 외모와 화려한 플레이 때문에 그를 풍족한 환경에서 축구에 매진하는 이로 바라봤을지도 모른다. 얼굴만 믿고 공 차는 선수로 바라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에게는 어떤 선수보다도 더 많은 시련이 있었다. 외할머니 손에서 어렵게 자라 빵과 우유를 준다는 말에 처음 축구화를 신은 소년은 훗날 한국 축구사에 빼놓을 수 없는 위대한 선수로 성장했다. 안정환이 매일 새벽 남몰래 땀과 눈물을 흘렸던 시절이 있었기에 한국 축구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됐다. 먹을 게 없어 굿판을 전전했던 소년, 학교 창고에서 몰래 잠을 청하던 소년이 정상에 서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땀과 눈물을 흘렸을까. 학연과 지연이 판치는 세상에서 오로지 실력 하나로 정상에 우뚝 선 안정환은 축구를 넘어서 이 세상에 큰 메시지를 던져줬다. 마지막으로 그가 던진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어릴 적에는 어려운 형편을 많이 원망했어요. ‘아,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났을까. 더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으면 좋았을 텐데…’라고요. 하지만 그랬다면 아마 너무 마음이 편해서 쉽게 운동을 포기했을 것 같아요. 밑바닥에서 시작해 독기를 품고 노력해 축구선수로 성공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가난에는 단점도 있지만 장점도 있는 것 같아요.” 어려운 환경을 딛고 지금껏 우리에게 너무나도 많은 선물을 준 그에게 진심으로 고생했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그는 비록 그라운드를 떠나지만 언제나 우리의 판타지스타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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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북한샠휘들 초대내각 대다수가 친일파임
좌익종북의 유토피아
북한의 초대내각 및 주요인사 친일 행적
부주석 김영주(김일성 동생) 서열 2위 => 친일파 (일제 헌병보조원)
인민위원회 사법부장 장헌근 서열 10위 => 친일파 (일제 중추원 참의, 끝판왕)
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 강양욱 서열 11위 => 친일파 (일제 도의원)
문화선정성 부부장 정국은 => 친일파 (일제 아사히신문 기자)
보위성 부상 김정제 => 친일파 (일제 양주군수)
문화선전성 부상 조일명 => 친일파 (대화숙 출신, 학도병 지원 유세주도, 끝판왕)
부수상 홍명희 => 친일파 (임전대책협의회 가입 활동)
공군사령관 이활 => 친일파 (일제 나고야 항공학교 정예출신, 출격횟수 2000회 이상 베테랑, 끝판왕)
인민군 9사단장 허민국 => 친일파 (일제 나고야 항공학교 정예출신)
인민국 기술부사단장 강치우 => 친일파 (일제 나고야 항공학교 정예출신)
제주 4.3반란사건 주동자 김달삼 => 친일파 ( 일본군 소위)
노동신문 창간인 박팔양 => 친일파 (일제 만선일보 출신)
김일성대 교수 한낙규 => 친일파 (일제시대 검찰총장, 끝판왕)
행정국 산업부장 정준택 => 친일파 (일제 광산지배인 출신, 일본군 복무)
교통국장 한희진 => 친일파 (일제 함흥철도 국장)
남로당 서열2위 이승엽 => 친일파 (일제 식량수탈기관 "식량영단" 이사, 끝판왕)
좌익종북의 타도대상
대한민국의 초대내각 및 주요인사 항일 행적
대통령 이승만(李承晩) - 상해임시정부 초대 대통령-황해도 평산 출신
협성회 회보와 독립신문 주필, 교육계몽운동 등으로는 독립협회 활동 등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 방법을 놓고 의견이 갈라섰을 때 그는 국내의 사정을 외국에 알리고 양해를 구하는 외교독립론을 주장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한성 임시정부와 각지에서 수립된 임시정부의 수반을 거쳐
1919년 9월부터 1925년 3월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역임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 국무위원회 외교위원 등을 역임했다. 주로 미국에서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을 벌였다.
부통령 이시영(李始榮) - 상해임시정부 재무총장-경주 이씨
한일합방 이후 독립운동에 투신, 일가족 40인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9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고, 1919년 9월 통합 임정 수립 이후 김구, 이동녕 등과 함께 임시정부를 수호하는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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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통령 이시영(李始榮) - 상해임시정부 재무총장-경주 이씨
한일합방 이후 독립운동에 투신, 일가족 40인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9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고, 1919년 9월 통합 임정 수립 이후 김구, 이동녕 등과 함께 임시정부를 수호하는 역할을 하였다.
*국무총리*국방장관-이범석(李範奭, 광복군 참모장)
대한민국의 독립 운동가이자 정치가이다. 고등학교 재학 당시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1919년 만주에서 신흥무관학교와 북로군정서 등지에서 항일독립활동을 하였으며, 청산리 전투에 김좌진을 도와 공을 세웠다.
그뒤 소련과 만주에서 활동하던 중 중국으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 한국 광복군의 중장으로 광복군 참모장과 제2지대장 등을 지냈다.
국회의장 신익희(申翼熙) - 임시정부의 내무총장 -경기도 광주 출생
신익희(申翼熙, 1892년 6월 9일 - 1956년 5월 5일)는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며, 정치인이다. 중국의 군인으로도 있었다.
중화민국 육군 중장, 대학 교수 등을 지냈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 임정 초대 법무부 차장, 외무부 차장, 내무부장 등을 지냈다.
대법원장 김병로(金炳魯) -
항일변호사-전라북도 순창 출생.-
일제강점기 때에는 각 학교의 법률학 전문 교수와 독립운동가들을 무료로 변호하는 민족 인권변호사로 활약하여
이인,허헌과 더불어 대표적인 3대 인권변호사였다. 신간회 활동에도 참가하였다.
외무장관 장택상(張澤相) -일제시대 청구구락부 사건으로 투옥된 경험-경상북도 칠곡 출생.
일제 강점기의 금융인이자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정치인·경찰관·외교관·서예가이다.
일제 강점기 해외 유학, 파리위원부와 구미위원부 등에서 독립운동을 하였고, 소련 등을 거쳐 영국 에든버러 대학교에 유학하다 귀국,
국내에서는 청구구락부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다.
내무 장관 윤치영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교육자, 외교관이었다. 미국 유학을 다녀왔고 이승만(李承晩)의 측근으로 활동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임정 구미위원부 활동, 삼일신보 제작 등에 참여하였으며,
이승만을 보좌하는 등의 독립운동을 하다 흥업구락부 사건 당시 체포되어 9개월간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다.
재무장관 김도연(金度演) -
3.1운동에 앞선 2·8독립선언을 주도하여 투옥-경기도 김포 김도연(金度演, 1894년 6월 16일 ~ 1967년 7월 19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이다.
1919년 2·8 독립선언 당시 11명의 대표 중 한 사람이다. 유학 후 교육자로 활동하였다.
법무부 장관 이인(李仁, 1896년 10월 26일(음력 9월 20일) ~ 1979년 4월 5일)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며 법률가, 정치인이다. 일본 유학 후, 1923년 변호사시험에 합격, 변호사를 개업하고
이후 일제 강점기 당시 김병로, 허헌과 함께 독립운동가 및 애국자, 사회저명인사들을 상대로 무료변호를 하여 민족 인권 변호사로서 명망을 날렸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창씨개명을 거절하였고, 해방 후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다가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론에 가담하였다.
문교장관 안호상(安浩相)-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순흥(順興)이다. 호는 한뫼이고, 경상남도 의령(宜寧)에서 태어났다.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되었으나 병중이라 체포는 면하였다.
농림장관 조봉암(曺奉岩)-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여 1년 동안 복역하였다. 일본 주오[中央]대학에서 1년간 정치학을 공부하고
비밀결사 흑도회(黑濤會)에 참여하여 사회주의사상에 입각한 독립쟁취를 목표로 항일운동을 하다가 귀국하였다.
1925년 조선공산당 조직에 참여하고, 고려공산청년회의 간부가 되었다.
상공장관 임영신(任永信) -
중앙대학교의 설립자이며, 교육활동 외에 독립운동에도 종사하였고 이승만의 측근으로 활동하였다.
사회장관 전진한(錢鎭漢) -
일제시대에도 노동운동을 했던 사람-강원도 고성 경상북도 문경(聞慶)출생. 1928년
사진을 구할수가없어서 자제분의 사진을 올립니다.
교통장관 민희식(閔熙植) -
교통전문가-출생지 파악 안됨. 후임인 허정씨는 부산 출생이자, 독립운동가였음.
체신장관 윤석구(尹錫龜) -교육 사회운동가-충남 서천군 출생
영국 선교사가 세운 한영학교를 수석졸업, 한영학교 교사로 재직해오다 1913년 중국 만주지방에서부터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일본군에 대항하는 독립군으로 활동하던 윤석구는 황포 군관학교 2기로 졸업하면서
김구의 명령에 의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연통제 조직인 임시정부 삼수지국에 임명된다.
삼수지국은 이미 독립협회의 밀파 공작원으로 활동하던 윤석구가 삼수군(三水郡,옛 만주부근)으로 내려와 활동하는 동안
강일기,박기춘 두 명은 물론 주민에게 음과 양으로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자주정신을 배양케 해 민족항쟁의 정신적 토대를 이룬 곳이다.
이후 윤석구는 1922년 상하이 임시정부 국내 자금책에 임명돼 국내로 복귀
군산 멜볼딘여고 교사로 재직하면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계속해서 군자금을 보냈다.
국회부의장 김동원(金東元) -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되었던 독립운동가 출신- 구한말기 애국계몽운동가, 일제강점기 교육인, 사업가이자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구한말기 교사로 지내면서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에 투신하여 활동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평양YMCA 지회등 활동하여 민족주의자로 교육활동 및 사회활동등 전개하여 실력양성 및 독립운동에 투신하였으나,
일제강점기 말기(전시체제)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 이후로 친일파로 변절했다.
광복 이후 고당 조만식과 평남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해 활동했으나, 곧바로 월남하여 한국민주당에 참여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고 국회부의장으로 활동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 중 납북되었다.
국회부의장 김약수(金若水)-
일제 강점기의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통일운동가이며,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이다.
일제강점기의 사회주의단체조직과 항일활동을 하다가 해방뒤에는 한민당 조직에 가담했으나,
한민당 정치노선에 싫증을 느껴 1946년 10월 탈당. 김규식계열 정치노선에 활동하여 좌우합작운동에 투신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제헌국회에 당선되어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나 뒤에 국회프락치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으며 한국전쟁 중 조선인민군에 납치되었다.
김병연 초대 총무처장
항일 독립운동가. 간도 군관학교에서 활약하였으며, 철혈청년단(鐵血靑年團)· 흥사단 사건으로 투옥되었다.
8· 15광복 후 정부 수립과 함께 초대 총무처장, 이북 도청의 평안남도지사를 역임하였다.
초대 공보처장김동성(金東成) 1890∼1969.
1920년 4월에 동아일보사에 입사함으로써 언론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1920년 8월 중국을 비롯하여 아시아 각국을 순방중이던 미국국회의원시찰단을 우리나라에 유치하여 일제 식민치하의 실상을 해외에 알리는 데 기여하였다.
1921년 10월에 미국 하와이에서 열린 제2차만국기자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여 부의장에 피선되었으며,
같은해 11월에 미국 워싱턴에서 개최된 태평양군축회의에 한국기자로는 최초로 참석하여 취재활동을 폈다.
역시 빨갱이클라스보소
[출처] 북한샠휘들 초대내각 대다수가 친일파임[링크] http://www.ilbe.com/3183462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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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백만원짜리 대자보가 마냥 반가운 이유!!
백만원짜리 대자보가 마냥 반가운 이유!! [바람부는언덕님 글] '중앙대학교는 창학이념 '의'와 '참'의 정신을 교육이념으로 삼는다. 즉 중앙인은 학문탐구를 통해 진리를 추구하고, 올바른 인간 정신을 바탕으로 봉사와 참여를 실천하여 사회정의를 구현하여야 한다.' -중앙대학교 건학이념 중에서중앙대학교가 표방하는 교육이념 속에 등장하는 '의'와 '참'의 개념은 '옳은 것', '바른 것' 등 그 자체로 보편성을 지닌 절대적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진리 추구', '봉사와 참여', '사회 정의'의 개념 또한 사회구성원의 합리적 인식수준에 부합하는 보편성을 지닌 개념이다. 보편적이라는 단어가 '두루두루 미치고 통한다'는 사전적 의미가 있는 말이고 보면, 중앙대학교는 실천지성의 양산소가 되어야 할 대학교의 존재 이유에 부합하는 바람직한 교육이념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처럼 바람직한 교육이념도 우리사회의 공고한 현실의 벽 앞에 서면 그저 활자화 된 문자로 전락해 버리기 일쑤다. '의'와 '참'의 정신이 살아 숨쉬는, 보편적 가치를 지닌 숭고한 교육이념도 한순간에 무의미한 언어적 수사로 퇴색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중앙대학교가 파업 중인 청소 노동자가 학교 건물에서 구호를 외치거나 교내에 대자보를 붙일 경우 1인당 100만 원씩 학교에 지불하게 하는 '간접강제신청'을 낸 것으로 알려졌다. 중앙대학교의 이같은 처사는 보편성을 지닌 절대적 개념이 자의적 해석 여부에 따라 특수성을 지닌 상대적 개념으로, 나아가 언제든 무개념으로 뒤바뀔 수 있음을 보여준다. 중앙대학교 청소노동자의 이번 파업은 근로조건 개선을 위한 합법적인 파업이다. 노동자들이 사측의 (물론 중앙대학교가 사측은 아니다) 부당한 대우와 근로조건에 대응해서 교섭하고 발언하는 것은 헌법이 인정하는 지극히 보편 타당한 행위이자 노동자들의 당연한 권리다. 그러나 학교 측에서는 노동자들이 최소한의 권리 보호를 위해 벌이는 파업에 대해 '업무방해'라는 상대적 개념을 부여했다. 언급한 대로 보편성은 이처럼 언제든 상대적 개념으로 바뀔 수 있고, 주로 사회적 강자들에 의해 빈번하게 이용되며 용인되어진다. 그러나 학교 측의 행위 그 어디에도 교육이념에 명시되어 있는 '의'와 '참'의 정신, '진리 추구', '사회 정의'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오로지 힘의 논리에 입각한 가진 자의 횡포와 억압만이 존재할 뿐이다. 학생들에 따르면 중앙대학교는 이 전에도 학교 측을 비판하는 포스터의 부착을 금지하는 등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측면이 강했다고 한다. 또한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의 확산을 막기 위해 당시 학내에 붙은 대자보를 철거해 버리기까지 했던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자신들이 내세운 교육이념과는 전혀 부합하지 않는 행위들로 학교의 위상과 전통에 먹칠을 하고 있는 이 학교에서 학생들이 청소노동자들의 권리찾기를 지지하고 격려하며 응원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래서 오히려 기적에 가깝다. 청소노동자들의 파업을 지지하는 학생들의 열기가 매우 뜨겁다. 파업 중인 한 조합원이 서툰 글씨로 "파업 중이라 깨끗하게 못해줘서 미안해요" 라는 대자보를 남기자 학생들은 "불편해도 괜찮아요"라고 화답한다. 또 다른 학생은 '이것은 백만원짜리 자보입니다'라는 대자보를 통해 누구나 말할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할 대학이 기본적인 표현의 자유마저 원천봉쇄하는 곳으로 변질된 세태를 꼬집으며, 대학은 '하고 싶은 말, 해야 하는 말, 그러나 하지 못해 왔던 말을 누구나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변한다. 갑자기 코끝이 찡해온다. 이처럼 비정상적이고 비상식적인 반쪽 세상을 만든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부끄럽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썩은 내 진동하는 시궁창 그 열악한 환경에서도 풀이 자라고 꽃이 피어나듯 학생들이 공의와 정의가 무너진 이 시대에 무엇이 '의'이고 무엇이 '참'인지 헤아릴 수 있는 분별력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청소노동자의 파업에 맞서 학교 측이 보여준 무개념의 대응방식에 개념있게 되받아치는 학생들의 모습 속에서 미래를 위한 작은 희망의 씨앗 하나를 발견한다. 최첨단 디지털 방식이 판을 치는 시대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이 투박한 아날로그식 소통방식이, 시대적 양심과 사회정의에 눈감고 귀막은 이 낡은 시대와 세대를 향해 외치는 젊은 지성들의 당찬 목소리들이 그래서 반갑고 또 반갑다.
가자서작성일
2014-01-06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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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이거보면 노짱이 애초부터 넘기지 않았다는 확율이 높음
kbs1라디오 6~8시 홍지명입니다에 출연한 남영준 중앙대 문헌정보학과 교수와의 인터뷰 임
인터뷰전문 밑에 빨간색 글씨주목
홍지명국가기록원의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원본이 없다고 밝혀지면서 파장이 커지고 있습니다. 국회운영위원회는 국가기록원 자료를 재검색 해 다음주 22일 월요일까지 대화록 존재 여부에 대한 최종 결론을 내리겠다고 밝혔습니다. 없는 건지 못 찾는 건지 고의적인 유출, 또는 폐기인지 여러 추측이 무성합니다.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비롯한 국가기록물이 어떻게 관리, 보관되고 있기에 이런 일이 불거진 것인지 기록관리 전문가인 중앙대학교 문헌정보학과의 남영준 교수가 전화 연결 되어 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남영준네, 안녕하십니까.
홍지명여야 열람 위원들이 두 차례 이미 열람을 했는데 지금 원본이 없다,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남 교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남영준제 생각에는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그 당시 대통령 지정기록물은 약 한 36만 건 정도 내외입니다. 따라서 키워드로 검색을 해 보았고 결과가 없다면 해당 기록물이 대통령 기록관에 없을 가능성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국가적인 이슈가 이미 되었기 때문에 시간을 두고 좀 다양한 방법으로 검색을 해 보는 것이 여러 면에서 좋을 것 같습니다.
홍지명검색을 해 본다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 하는 궁금한 것이요, 이런 국가기록물이 어떤 형태로 보관되는지 그러니까 무슨 종이문서 형태로 보관이 되는 것인지, 아니면 전자적인 디지털 파일 형태로 보관이 되는 건지, 어떻게 돼 있는 겁니까?
남영준네. 실제적으로 대통령 기록물의 경우에는요, 대부분 전자적 형태로 되어 있는 것이 맞습니다. 그렇지만 일부에 한해서는 종이기록물로도 같이 보관 되어 있습니다. 또한 지금 이슈화가 되고 있는 지정기록물이 종이기록물인지, 전자적 기록물인지를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홍지명 아, 그렇습니까?
남영준 네.
홍지명예. 그러면 지금 이 기록물을 찾는다는 것은 도서관에서 무슨 책 찾는 것과 비슷한 겁니까? 그러니까 색인 번호를 쳐 가지고 거기에서 무슨 분류 번호가 나오면 해당 서가로 가서 책을 빼 내오는, 뭐 이런 식입니까? 어떻습니까?
남영준 그거랑 굉장히 유사합니다. 조금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합니다만, 도서관에서의 책 찾는 방식과 기록물 찾는 방식이 조금 다른 이유가요, 실제적으로 종이기록물의 경우에는 그 목록이 확인이 되고 그 목록에 맞춰서 원본을 찾아가는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통령 기록물의 경우에는 구체적인 열람을 불허하고 있기 때문에 목록 중에서 키워드를 던져서 원하는 자료가 나오면 해당되는 기록물을 보관한 서고에 가서 해당되는 기록물을 필사해서 제공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홍지명대통령 기록관 쪽에서는 비밀기록의 경우는 제목을 봐도 내용을 추측할 수 없는 식으로 바꾸는 경우가 있다. 다시 말해서 키워드 검색에서 특수기호로 보안장치를 걸어 놓았다면 찾기 어려울 수 있지만 기록물이 없을 수는 없다. 이런 발언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거 가능성이 있는 얘기입니까?
남영준저도 그쪽에 굉장히 동의하는 편입니다. 왜냐하면 대통령 기록물 중에 경호기록물 같은 경우도 목록에 있는 제목은 해당내용을 연상시킬 수 없게 기록물 건명으로만 보유하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뭐 남북대화록 기록물 같은 경우를 예들 들어서 뭐 평화협약회의록 이런 식으로 명칭을 바꿀 수도 있는 거죠. 그래서 제목만으로 해당내용을 연상시키지 못하도록 제목을 바꿔서 기입한 경우도 저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홍지명자, 그러면 제목을 바꾼다든지 무슨 특수기호나 언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뭘까요?
남영준다시 한 번 말씀드리면 해당목록을 본 사람은 지금은 없습니다. 따라서 어떤 표현으로 되어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검색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그 검색을 쉽게 해 놓기 위해서라든가, 아니면 어렵게 해 놓기 위해서 라는 주장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제 입장에서는.
홍지명예. 그런데 당초에 이런 기록물을 만들어서 이관시킬 때 이걸 만든 사람이 있지 않겠습니까? 무슨 제목을 붙인다던지, 이런 사람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 사람을 찾아서 물어보면 되는 거 아닐까요?
남영준네. 그게 뭐 어쩌면 정확 할 수 있습니다만 실제로 36만 건 이지만 전체 대통령 기록물은 뭐 갑론을박을 하면 한 800만 건 정도가 됩니다. 이관된 기록물 건 수가요. 그런데 6,7년 전의 일을, 내가 어떤 것을 넘겼다, 라고 기억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라는 것은 저는 조금 회의적입니다. 실제적인 것을 기억에 의해서 찾는다는 건, 저는 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홍지명그렇더라도 이게 뭐 30년간 열어볼 수 없도록 이렇게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기록물인 만큼 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둔만큼 검색을 그렇게까지 불가능하게 해 놨겠느냐, 이런 주장도 있어요?
남영준맞습니다. 검색을 불가능하게 해 놓았지만, 그걸 찾지 못할 정도로 해 놓았을지는 만무이입니다. 그래서 찾게 되어 있을 거고요, 실제적으로 만약에 그 안에 존재한다면 시간적 문제이지 무슨 시스템적인 문제로 못 찾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시스템을 아는 사람이 지금 신문이나 여론에서 나타나듯이 국회에서 허락만 한다면 시스템을 알고 있는 사람이 실제 들어가서 검색해 볼 수 있는 거죠. 그래서 문제 한다면 그건 시간적 문제이지 어떤 뭐 못 찾게 만들어 놓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홍지명일단 청와대 내부통신망 참여정부 때 어떤 이지원 시스템과 지금 국가기록물이 사용하는 전산시스템 팜스와 서로 뭐가 환경이 달라서 검색이 잘 안 될 거다, 이런 지적에는 동의하십니까?
남영준네. 저는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서로 시스템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요 그 시스템 안에 있는 DB를 병합하거나 이관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의 우리 기술력으로 완전히 검색이 불가능하거나 못 찾을 정도는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홍지명아, 그렇군요. 그러니까 일단 남 교수께서는 있기는 있을 것이다. 근데 찾지를 못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쪽에 무게를 두시는군요?
남영준네. 그렇지만 저는 그래서 한 이틀간 정도 찾아봤는데 그것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저는 없을 수 있다, 라고 조금은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홍지명네. 이게 아까 말씀하신 대로 어떤 전자적인 파일 말고 문서로 함께 보관되어 있다면 기록물 보관 창고로 가서 그야말로 하나하나 뒤져가면서 찾기는 어렵습니까?
남영준실제적으로 최소 열람을 법에서 명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키워드를 던져서 불필요하게 모든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관련된 것만 보도록 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하여간 지금까지는 그런 방식으로 취했습니다만, 이미 이게 국가적 이슈가 되어 버렸고 국민들은 궁금하고 또 이것으로 인해서 많은 논쟁거리가 되고 있기 때문에 처당간 합의가 있다면, 또 국민적 합의와 공감대가 있다면 저는 뭐 수작업으로 결국은 일일이 볼 수밖에 없지 않느냐,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홍지명아까 뭐 800만 건, 몇 백 만 건, 얘기를 하셨는데 사실 남북정상회담 남북관계 자료라면 분류 상 어느 한 쪽에 좀 몰아놨을 가능성이 좀 있지 않겠습니까?
남영준네. 그렇지만 분류가 이루어졌는지 아닌지는 모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분류행위가 안 이루어졌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정기록물이라는 것은 가능한 한 손을 안대고 원본 그대로 그냥 이관 해 놓는 것이 관례이거든요. 그러다보니까 아직 그 분류작업이 안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홍지명네. 또 하나 가능성이 이 대화록이 무슨 고의로 파괴됐을 가능성, 정치권에서 서로 갑론을박이 많은데 대통령 기록관에 일단 넘겨진 기록물을 외부에서 손을 대는 일이 가능합니까?
남영준 저는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굉장히 안타까운데요, 못 찾는 것은 몰라도요, 기본적으로 대통령기록관으로 이관되고 난 이후에 이를 수정하거나 변경, 삭제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하는 분들이 계신데, 이것은 현실적으로 굉장히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대통령 기록관에 지정기록물 보관소는 아무나 출입할 수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기에 출입하기 위해서는요, 보안카드하고 열쇠, 보안담당자의 지문, 실제 지문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3개 시건장치 자체가 서로 다른 사람들이 관리하고 있거든요. 또한 24시간 CCTV가 모든 자료를 녹화하고 있는데, 또 모든 기록물들이 전자테가 부착 되어 있어 가지고 불법적으로 한 거라면 그것이 감시가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거를 어떻게 누가 들어가서 훼손하고 그 다음에 삭제하고 그랬다는 것은 이건 개인적인 얘기입니다마는 너무 많은 영화를 보신 게 아닌가, 그거는 현실적으로 저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홍지명자, 그럼 외부에서 손대는 일이 불가능하다면 기록관 분들이 들으면 기분 나쁘시겠습니다마는 내부에서 어떻게 이걸 무슨 폐기한다든지 삭제한다든지 이런 건 가능합니까?
남영준내부서도 제가 알기로는요, 대통령기록관하고 국가기록원의 직원조차도 거의 대부분이 그 서고에 출입을 해본 적이 없을 겁니다. 제가 그 기록물관리위원으로 돼있음에도 저 역시도 그거는 근처에도 못 가게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출입이 엄격하게 제한이 돼있어서 그거를 뭐 내부에서, 그러니까 이관이 된 이후에 무슨 조치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 거는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홍지명이게 외부 전산망하고 연결이 돼서 혹시 무슨 외부에서 해킹을 한다든지 이런 건 불가능할까요?
남영준불가능입니다. 그거는 연결도 안 되어있을 정도로 그거는 불가능합니다.
홍지명네. 자, 그리고 혹시 삭제를 했다면 이게 전자기록이기 때문에 삭제했다는 어떤 흔적이 남아있을 가능성은 있는 거죠?
남영준아, 그럼요. 이제 고의로 파괴되었다면은 다시 한 번 말씀드리면 기록관, 대통령기록관 이관되기 이전에 어떤 상황이 일어나면 몰라도 그 이후에는요 모든 것이 기록이 남습니다. 그래서 뭐 실제적으로 전자기록물 형태를 파괴했다 그러면 다들 잘 아시겠습니다만 하나의 1번서부터 10,000번까지 있는데 뭐 100번이 빠졌다 그러면 다시 한 번 인덱싱을 해야 되는 거거든요. 그래서 결국은 다 흔적이 남기 때문에 전자기록물의 형태라면 손을 댔다는 건 어떤 형태로든 흔적이 남는다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홍지명네. 알겠습니다. 또 하나 가능성이 과연 참여정부 때 이 관련 대화록이 이관이 됐느냐 안됐느냐, 뭐 이관되지 않았다, 지금 정치권 일각에서는 이런 주장이 나오고 있는데. 대통령기록물을 국가기록원으로 옮기는 작업이 뭐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이관 작업은 제대로 됐는지, 이걸 검증할 방법은 없는 겁니까?
남영준실제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은 뭐 정확하게 명시된 방법은 없습니다만 대통령기록물은 당시 대통령께서 대통령기록관으로 이관될 기록물 목록을 담당 비서관에게서 보고를 받습니다. 그러면 이제 대통령께서 해당 기록물 목록하고 원본을 열람하면서 야, 이거는 일반에게 공개 시에 국익에 커다란 손상이나 국가 간에 불필요한 혼란을 야기 시킬 수 있다는 기록물을 지정을 합니다. 그러면 그것을 우리가 지정기록물이라고 하거든요. 그 지정기록물이 지정이 되는 순간 그 원본과 함께 거기에 있는 목록에서도 삭제가 됩니다. 왜 그러냐하면 그 목록과 원본이 대통령이 또 불필요하게, 목록조차도 불필요하게 공개되면 보고 싶은 사람이 생길까봐 아예 그것을 숨기는 거거든요. 그리고 공개 시기도 법에는 15년이라고 되어있지만 대통령께서 결심하면 30년으로 지정을 하면 30년이 돼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이 이제 다 정리가 되고 나서 퇴임 직전에 대통령기록관에 그걸 넘기면 대통령기록관에 있는 분들이 그걸 일일이 실물 건수와 목록 건수를 확인을 하는 작업을 거칩니다. 그래서 거기는 그 과정에서 누락이 뭐 인간이기 때문에 누락이 될 수 있다고도 보겠습니다만 그거는 극히 어려운, 그러니까 불가능한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홍지명그렇군요. 자, 아무리 비밀문서라고 하더라도 말이죠, 관리 책임이 있는 국가기록원이 있느냐 없느냐, 존재 여부도 확인할 수 없다는 거, 이거 문제 아닙니까? 이 점 어떻게 보십니까?
남영준네. 일단 대통령기록관에 넘겨오는 문서 중에 비밀기록물하고 지금 이슈가 되고 있는 지정기록물하고는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비밀기록물은 최소한의 목록까지도, 목록에 대해서만은 어떻게 해서든 열람이 가능할 수 있을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정기록물의 경우는요 목록도 없어지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그거의 존재 여부는 15년 혹은 30년이 지난 뒤에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근데 저는 개인적으로 지정기록물에 대한 공개는 반대하고 있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목록에 예를 들어서 남북대화록 혹은 무슨 다른 어떤 굉장히 민감한 목록이 국민이 혹은 다른 사람이 봐서 그것을 보고 싶어서 한다면 또 국회의원 2/3 얻어버리면 또 열어버리는 거거든요.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뭐 다른 어떤 방법을 개발하더라도 이것이 민간에게 공개되는 것은 저는 반대하고 있습니다.
홍지명자, 이번 사태를 계기로 국가기록 관리보존시스템을 좀 개선할 필요가 있을까요? 어떻게 보십니까?
남영준개선할 시스템이 있겠죠. 있겠습니다만, 항상 저는 이런 상황이 나타날 때마다 이제 안타까운 거는요, 시스템적인 문제보다 그것이 이제 절차라든가 운영을 한다든가 하는 과정상 일어난 사람들의 문제가 상당히 많이 있다고 저는 봅니다. 그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시스템 개선은 반드시 이뤄져야 된다고 보는 이유가요, 이 자체가 소모적인 논쟁이 또 한 번 일어나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서든 시스템 개선해서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해야 되겠죠.
홍지명자, 22일까지 일단 다시 검색해보기로 했는데, 혹시 남 교수께서 열람위원들에게 뭐 이런 식으로 한 번 좀 찾아봐라 하는 무슨 조언을 좀 해주실 수 있습니까?
남영준네. 개인적으론 절대 저는 지정기록물을 다 열어보는 것은 반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이미 국민들의 궁금증 해소라든가 진실의 해명 또는 논란의 불씨를 잠재우기 위해서는요, 지정기록물을 키워드 검색이 아니라 육안으로 목록만이라도 전수조사 하는 방법이 좀 지금 현실에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인 것 같습니다.
홍지명수작업을 해봐라, 그런 말씀이군요?
남영준네. 저는 그렇게 해야지만 또 키워드 던져서 또 안 나왔다, 나왔다, 또 논란의 여지가 너무 많아진다는 거죠.
홍지명그렇군요.
남영준그래서 저는 육안으로 전수조사 하는 방법을 저는 제안하고 싶습니다.
홍지명예. 알겠습니다. 오늘 설명 잘 들었습니다.
남영준네. 감사합니다.
홍지명중앙대학교 문헌정보학과의 남영준 교수였습니다.
출처: http://www.kbs.co.kr/radio/1radio/hello/interview/index.html
여기 좌좀횽아들이 MB가 손댔다~ 하다못해 MB가 몰래봤다~ 하시는데요
그거 불가능한 일이라네요 ^ㅛ^
그간 노짱이 자료손댔다던 기사를 봐도 유력한건 노짱뿐이죠.
얼터작성일
2013-07-19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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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수다] [MBC 다큐 스페셜 정정] 요즘 문과 대기업 스펙
[▶MBC 다큐 스페셜 정정] 요즘 문과 대기업 스펙
안녕하세요,
MBC 다큐 스페셜에 대기업 합격 스펙이라고 제 이력사항이 나왔는데...
오늘 아는 동생을 통해 얘기를 전해들었는데.... 생각보다 관련 글들이 많이 퍼져서 깜짝 놀랐습니다.
구글에서 검색해보면 [ 요즘 문과 대기업 스펙 ] 이라는 이름으로 글이 많이 퍼졌더라구요...
근데, 전해드린 것과는 잘못된 것들이 있어서 정정합니다..ㅠㅠ
아래 사항은 MBC 다큐 스페셜에 나온 이력 입니다.
위의 내용중에
[정보처리기사]는 없는 자격증입니다 ㅠㅠㅠ
순수 문과 경영학부 심화전공이라... 기사자격증은 취득 할 수도 없을 뿐더러...
언급한 적이 없는데.. 저게 왜 들어가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밀알회와 같은 동아리는 고등학교 때 장애우, 탈북자관련 피켓행사 등을 진행하면서 봉사동아리로 만든 단체입니다.
그 이외의 내용들도 조금 다른 부분이 있어서...
예전에 [고민중인 후배들에게 들려주는 경험담] 이라는 글로... 독취사와 스펙업에 글을 남겼었는데...
그 내용中 이력사항을 적어놓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
중앙대학교 경영경제대학 경영학과 졸업
現 현대자동차그룹계열
제 46회 공인회계사(KICPA) 1차 (금융감독원)
제 10회 IFRS 관리사 (한국CFO협회)
제 47회 AFPK (개인재무설계사)
자산관리사(FP) (한국금융연수원) 증권투자상담사 (한국 금융투자협회)
금융자산관리사 (한국금융투자협회)
기업회계 (한국세무사회)
TRIZ 1수준
MOS
CAU Campus CEO 창업 아이디어 경진대회 대상(1위) 수상
서울시 창조전문인력 왕중왕전 장려상 & 박원순 서울특별시장 상장
CAU Campus CEO 총장 명의 상장(교육과학기술부 및 서울시 지원)
크라제버거 "마이버거" 메뉴 아이디어 제안 및 기획-출시
[공군 중앙관리단 예산회계처] 정부-예산회계집행 지원
KB 국민은행 樂스타 서포터즈
KT&G 상상 마케팅 스쿨 2011
서울시 Hi-Seoul 대학생 창업스쿨
대학생 금융투자캠프
대학토론배틀 Season 3. [토론시대] FP Conference 2012 FP 전문가 양성과정 프로젝트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광역시 및 지역별 회계결산 보고서 검토
중앙대학교 교수학습지원센터 중급재무회계 우수튜터 , 인사관리 튜터
중앙대학교 회계와 사회 특강 진행 [학부생 대상]
MBA 대학원학생 재무회계 및 원가관리회계 과외지도
C-rite 에듀 논술 강사
7차교육과정 교학사 중학교 2학년 영어교과서 교과서 모델
EBS 지금은 마로니에에서는 조연 출연
---------------------------------------------------------------------------------------------
MBC 다큐스페셜에 취업과 관련한 요청을 받으면서...
사실, 고민을 좀 했습니다.
대단한 사람도 아니고, 좀 웃긴거 아닌가... 이런걸 오픈해도 괜찮은 걸까... 이런 저런 고민을 하다가
결국 제공을 한 이유는..
이게 정답은 아니지만, 많은 분들이 생각 못하고 있는 또 하나의 길 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분들이 [학점 X 토익 = 3600 점 이상] 이라는 공식을 외우면서 학점과 토익에 신경을 많이 쓰시는데...
그것도 하나의 길이지만...
학점과 토익 이외에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면서 그것을 자신만의 스토리로 이어 나가는 것도
하나의 길이라고 생각 합니다. 그리고 최근에 [열린채용]이란 이름으로... 채용트랜드도 점차 바뀌고 있고요..
비록 학점과 토익은 낮았지만, 서류합격률은 40% 가까이 됐습니다. 이런 또 하나의 길이 있다는 것을
전한다는 의미에서 자료를 오픈했습니다.
대학생의 자화상이라 불리우는 도서관족의 학점과 토익 이외에도...
또 다른 길에서 진정한 자신만의 스토리, 자신만의 강점을 만들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27살의 나이에 아는건 많이 없지만, 그래도 여러모로 도움드릴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business05@hanmail.net 로 메일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아래 내용은 제가 예전에 남겼던 글과 인터뷰 입니다.
혹시라도 이 글이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되면 좋겠다라는 생각으로 링크 남깁니다. ^ ^
[고민중인 후배들에게 들려주는 경험담]
- http://cafe.naver.com/specup/1422991
- http://cafe.naver.com/dokchi
[인터뷰]
- http://blog.naver.com/tmex89/130160415553
경영05작성일
2013-03-24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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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수다] [MBC 다큐 스페셜 정정] 요즘 문과 대기업 스펙
[▶MBC 다큐 스페셜 정정] 요즘 문과 대기업 스펙
안녕하세요,
MBC 다큐 스페셜에 대기업 합격 스펙이라고 제 이력사항이 나왔는데...
오늘 아는 동생을 통해 얘기를 전해들었는데.... 생각보다 관련 글들이 많이 퍼져서 깜짝 놀랐습니다.
구글에서 검색해보면 [ 요즘 문과 대기업 스펙 ] 이라는 이름으로 글이 많이 퍼졌더라구요...
근데, 전해드린 것과는 잘못된 것들이 있어서 정정합니다..ㅠㅠ
아래 사항은 MBC 다큐 스페셜에 나온 이력 입니다.
위의 내용중에
[정보처리기사]는 없는 자격증입니다 ㅠㅠㅠ
순수 문과 경영학부 심화전공이라... 기사자격증은 취득 할 수도 없을 뿐더러...
언급한 적이 없는데.. 저게 왜 들어가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밀알회와 같은 동아리는 고등학교 때 장애우, 탈북자관련 피켓행사 등을 진행하면서 봉사동아리로 만든 단체입니다.
그 이외의 내용들도 조금 다른 부분이 있어서...
예전에 [고민중인 후배들에게 들려주는 경험담] 이라는 글로... 독취사와 스펙업에 글을 남겼었는데...
그 내용中 이력사항을 적어놓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
중앙대학교 경영경제대학 경영학과 졸업
現 현대자동차그룹계열
제 46회 공인회계사(KICPA) 1차 (금융감독원)
제 10회 IFRS 관리사 (한국CFO협회)
제 47회 AFPK (개인재무설계사)
자산관리사(FP) (한국금융연수원) 증권투자상담사 (한국 금융투자협회)
금융자산관리사 (한국금융투자협회)
기업회계 (한국세무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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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군 중앙관리단 예산회계처] 정부-예산회계집행 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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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토론배틀 Season 3. [토론시대] FP Conference 2012 FP 전문가 양성과정 프로젝트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광역시 및 지역별 회계결산 보고서 검토
중앙대학교 교수학습지원센터 중급재무회계 우수튜터 , 인사관리 튜터
중앙대학교 회계와 사회 특강 진행 [학부생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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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차교육과정 교학사 중학교 2학년 영어교과서 교과서 모델
EBS 지금은 마로니에에서는 조연 출연
---------------------------------------------------------------------------------------------
MBC 다큐스페셜에 취업과 관련한 요청을 받으면서...
사실, 고민을 좀 했습니다.
대단한 사람도 아니고, 좀 웃긴거 아닌가... 이런걸 오픈해도 괜찮은 걸까... 이런 저런 고민을 하다가
결국 제공을 한 이유는..
이게 정답은 아니지만, 많은 분들이 생각 못하고 있는 또 하나의 길 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분들이 [학점 X 토익 = 3600 점 이상] 이라는 공식을 외우면서 학점과 토익에 신경을 많이 쓰시는데...
그것도 하나의 길이지만...
학점과 토익 이외에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면서 그것을 자신만의 스토리로 이어 나가는 것도
하나의 길이라고 생각 합니다. 그리고 최근에 [열린채용]이란 이름으로... 채용트랜드도 점차 바뀌고 있고요..
비록 학점과 토익은 낮았지만, 서류합격률은 40% 가까이 됐습니다. 이런 또 하나의 길이 있다는 것을
전한다는 의미에서 자료를 오픈했습니다.
대학생의 자화상이라 불리우는 도서관족의 학점과 토익 이외에도...
또 다른 길에서 진정한 자신만의 스토리, 자신만의 강점을 만들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27살의 나이에 아는건 많이 없지만, 그래도 여러모로 도움드릴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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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그리고 아래 내용은 제가 예전에 남겼던 글과 인터뷰 입니다.
혹시라도 이 글이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되면 좋겠다라는 생각으로 링크 남깁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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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MBC 다큐 스페셜에 대기업 합격 스펙이라고 제 이력사항이 나왔는데...
오늘 아는 동생을 통해 얘기를 전해들었는데.... 생각보다 관련 글들이 많이 퍼져서 깜짝 놀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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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전해드린 것과는 잘못된 것들이 있어서 정정합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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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처리기사]는 없는 자격증입니다 ㅠㅠㅠ
순수 문과 경영학부 심화전공이라... 기사자격증은 취득 할 수도 없을 뿐더러...
언급한 적이 없는데.. 저게 왜 들어가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밀알회와 같은 동아리는 고등학교 때 장애우, 탈북자관련 피켓행사 등을 진행하면서 봉사동아리로 만든 단체입니다.
그 이외의 내용들도 조금 다른 부분이 있어서...
예전에 [고민중인 후배들에게 들려주는 경험담] 이라는 글로... 독취사와 스펙업에 글을 남겼었는데...
그 내용中 이력사항을 적어놓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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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대학교 경영경제대학 경영학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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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6회 공인회계사(KICPA) 1차 (금융감독원)
제 10회 IFRS 관리사 (한국CFO협회)
제 47회 AFPK (개인재무설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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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자산관리사 (한국금융투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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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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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창조전문인력 왕중왕전 장려상 & 박원순 서울특별시장 상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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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토론배틀 Season 3. [토론시대] FP Conference 2012 FP 전문가 양성과정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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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대학교 회계와 사회 특강 진행 [학부생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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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고민을 좀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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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제공을 한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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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분들이 [학점 X 토익 = 3600 점 이상] 이라는 공식을 외우면서 학점과 토익에 신경을 많이 쓰시는데...
그것도 하나의 길이지만...
학점과 토익 이외에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면서 그것을 자신만의 스토리로 이어 나가는 것도
하나의 길이라고 생각 합니다. 그리고 최근에 [열린채용]이란 이름으로... 채용트랜드도 점차 바뀌고 있고요..
비록 학점과 토익은 낮았지만, 서류합격률은 40% 가까이 됐습니다. 이런 또 하나의 길이 있다는 것을
전한다는 의미에서 자료를 오픈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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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길에서 진정한 자신만의 스토리, 자신만의 강점을 만들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27살의 나이에 아는건 많이 없지만, 그래도 여러모로 도움드릴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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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24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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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대한민국을 말아먹은 집안족속들 6 - 방응모
방응모(조선일보) 집안족속
---
방응모, 방일영, 방우영, 방상훈과 그들이 운영하는 조선일보는 너무나도 악명이 높아서 모르는 사람들이 없을 정도다. 심지어 조선일보의 100대 죄악이라는 것을 정리해 놓은 사람들조차 있었다.
그 걸작을 한번 살펴보면 조선일보의 죄악은 크게 10가지로 분류가 된다.
◆ 우선 민족의 정기를 짓밟은 친일행각이 조선일보의 10대 죄목 가운데 하나다. 윤봉길의사를 범인이라고 지칭하고 일본군을 아군, 황군이라고 불렀다. 그러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스스로를 민족 정론지라고 칭하고 있다.
◆ 두 번째 죄악은 역사의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리는 독재정권 찬양이다. 전두환 신군부와 결탁하여 급속하게 성장한 조선일보는 지금도 전사적으로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독재정권의 찬양에 열을 올린다.
◆ 세 번째 죄악은 최대부수의 신문권력을 악용하여 민주화인사를 탄압하고 얼토당토한 사상검증을 하는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부터 시작해서 김정남, 한완상, 최장집 등을 황당한 빨갱이 여론몰이로 낙마시켰다.◆ 네 번째 죄악은 국가안보를 상품으로 팔아먹는 반민족적 행태를 서슴지 않는다는 점 이다. 전쟁위협, 공포감 조장, 적대감, 긴장감을 유발시켜 여기에 편승해 신문장사 를 한다.
◆ 다섯 번째 죄악은 악랄한 지역감정 조장이다. 특히 호남인에 대한 차별이 극단적이 다. 그래서 민주개혁세력은 조선일보를 반호남의 소굴이자 영남패권주의의 본산이라 고 본다.
◆ 여섯 번째 죄악은 반통일적인 대북 화해협력 정책에 대한 상식이하의 딴지걸기다.
◆ 일곱 번째 죄악은 잦은 오보와 상습적인 곡필로 세계적인 웃음거리가 되어 한국의 국가이미지를 실추시키는 것이다. 86년 김일성 사망설이 대표적이다. 물론 김일성 사망설 그 자체보다는 타이밍이 문제다. 정권이 존립의 위기에 있을 때 대중의 관심 을 다른 곳으로 돌리게 만드는 교묘한 공작을 조선일보는 밥먹듯이 해 왔다. 금강산 댐도 마찬가지... 서울 불바다 뻥 튀기 보도도 마찬가지...
◆ 여덟 번째 죄악은 인권유린 사건에 대한 왜곡보도와 imf 국가부도를 불러들인 책임 이다. 부천서 * 사건에 대한 왜곡보도가 대표적이다. 또 imf사태 "이틀"전까지 "외환위기 없다"며 되풀이 호언장담하면서 대한민국 일등신문이라는 것이 한가하게 사상논쟁이나 했다.
◆ 아홉 번째 죄악은 제왕적인 족벌세습경영체제를 구축한 것이다. 공공재인 신문을 사 유물로 전락시키면서 편집권을 강력하게 행사한다.
◆ 열 번째 죄악은 "나는 너를 비판해도 너는 나를 비판할 수 없다"는 오만과 독선으로 한국 사회의 최후의 성역으로 언론독재체제를 유지해 온 것이다. 이런 특권적 발상 이 오만방자한 권력을 행사하고 불법을 자행하게 하는 근원적 요인이다.
이상 조선일보의 큼직큼직한 죄악을 열 가지로 살펴보았다. 이외에도 그들의 무책임한 반민주적, 반민족적 행태는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우선 신문재벌 방씨일가의 중시조로 일컬어지는 계초 방응모에 대해 알아보자. 본래 방응모는 머리가 좋은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는 거의 맨손으로 광산사업을 시작했다. 운 좋게 금맥을 발견, 떼돈을 벌었다. 1932년에 방응모가 거머쥔 돈이 135만원. 지금 돈으로 치면 1350억원이다.
△ 계초 방응모
1350억원을 거머쥔 방응모는 광산사업을 그만두고, 20만원, 지금 돈 200억원을 투자하여 조선일보를 인수한다. 또 12만원, 지금 돈 120억원을 투자하여 태평로 일대에 1400평의 땅을 사서 당시 초고층 빌딩인 4층짜리 건물을 지었다.
방응모는 사업가다운 면모가 있었나보다. 그 후 50만원, 지금 돈 500억원을 투입하여 새로운 윤전기를 도입하는 등 시설투자를 했다. 또 50만원을 투입하여 경기도 수원에 97만평 규모의 간척사업을 전개하였다.
놀라운 것은 함경남도 일대에 무려 3천 2백만평 규모의 조림사업을 진행하였다는 거다.장차 신문용지를 확보하려는 계산이었다고 한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마케팅기법을 도입하고, 중량급의 인사들을 주필로 영입하고, 조선일보 이외에 월간지, 여성지, 소년지를 또 창간하였다.
물론 친일행각도 보통 수준이 아니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조선일보라는 신문 자체가 친일실업인 단체인 대정친목회 명의로 발행허가가 나고, 친일악덕지주 예종석을 발행인으로 하고, 친일상공인 조진태를 초대사장으로 창간되었으며(1920년), 이후 대표적인 친일 매국노 송병준이 조선일보를 경영했던 수치스런 과거를 가지고 있는 신문이다. 이것을 방응모가 사들여 운영한 것이다.
예종석과 조진태는 일본에 빌붙어 이권을 챙기고, 가난한 농민들에게 고율의 소작료를 적용하여 고혈을 짜낸 악질적인 인간들이다. 또한 송병준이 누구냐? 이완용과 더불어 이 나라를 일본에 넘겨주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일진회의 중심멤버요 최고의 매국노다.
이런 조선일보를 인수하여 방응모 또한 부끄러운 친일행각에 나서게 된다. 1934년 당시 잡지 "삼천리"에 게재된 "신문사 사장의 하루 - 방응모씨"라는 글에는 "저녁이면 사교관계로 명월관, 식도원으로 돌아다니면서 재벌과 대관 집을 찾기도 하고... 가와시마 군사령관의 저녁초대를 받고 갔다가 돌아와서는 고사포도 기부하고..."라는 대목이 나온다.
자신이 운영하는 월간지에 발행인 방응모의 이름으로 스스로 기고한 글을 봐도 친일파 방응모의 면모가 여실히 드러난다.
"대일본제국 2천 6백년의 빛나는 역사에 청렴강직한 대화정신과 팔굉일우의 이상으로써 닦아놓은 성업은 일계직통의 천황어능위를 봉하여 우리 국민은 이 성은 속에 만폭적 희열을 느끼고 있다.... 천황, 황후 양 폐하의 성수무강 하옵심을 삼가 비옵고...."
방응모가 처음부터 친일파는 아니었을 것이다. 이 사람은 일종의 장사꾼이다. 언론사를 경영하면서도 장사꾼적인 기질을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처음부터 친일파는 아니었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시기적인 변화에 편승하였던 것이다.
반도 최고 갑부에 해당되는 방응모가 먹고 살기 위한 친일을 했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에 적극적인 친일행위자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
인간적으로 좀 가엾기는 하다. 방응모가 해방이 된 이후 조선일보를 속간하면서 쓴 속간사를 보면 "우리는 입을 가졌으나 생벙어리 행세를 하여야 하였으며 할 말은 많았으나 호소할 곳이 없었다. 우리는 죽으라면 말없이 죽는 시늉을 하지 않으면 안될 환경에 놓여 있었다."고 써 있다. 물론 변명과는 달리 방응모의 친일은 자기방어의 한계를 넘는 행위였다.
부패와 타락이 그 본질인 사회에서 깨끗한 사람은 좀 거만하게 굴어도 된다는 김남주 시인의 시도 있지만 어쨌든 방응모가 겪었던 시대적 상황에 내가 처해보지 않았으니 그보다 도덕적 우위에 서서 왈가왈부할 입장은 못된다. 그러나 설령 그런 실수를 했더라도 방응모 자신과 그 일가 그리고 조선일보가 보다 통렬한 자기반성과 성찰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런 암울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정도를 걸어야 할 사회적 양식의 표상인 언론의 이름으로 행했던 자신들의 비겁함과 한계를 보다 확실하게 드러내고 그 잘못된 과거를 부끄러워하면서 철저하게 반성적 고민을 하는 모습을 조선일보가 보여주었더라면 지금처럼 시민들에게 조롱과 불신을 당하는 조선일보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 조선일보가 그 잘못된 역사를 어떻게든 변명하고, 미화하고, 굴절시키고, 은폐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방응모의 친일행각보다도 더한 퇴영적인 결과를 유발하기에 더욱 그렇다.
방응모의 친일행각은 6.25가 발발하여 북한 인민군들에게 납북되는 불행한 결과로 끝을 맺었다.
<압록강변의 겨울-납북요인들의 삶과 통일의 한>이라는 책에 의하면 방응모는 납북 도중 이회창의 고향으로 유명한 황해도 서흥군 부근에서 미군의 공습을 받고 사망하였다. 미군 전투기 4대가 날아들어 닥치는대로 폭탄을 떨어뜨리고 기총사격을 하는 바람에 노근리의 유족처럼 민간인인 방응모도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런데 참 희한한 것이 조선일보에서는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책은 1991년에 북한 정무원 부부장까지 지낸 신경완이라는 사람의 구술을 동아일보 기자 출신이자 한겨레신문 편집위원을 지낸 이태호씨가 쓴 매우 신뢰성이 높고, 자료가치가 우수하다고 평가되는 책인데, 조선일보는 사주가 미군의 무차별 폭격에 의해 사망했다는 것을 믿지 않으려고 한다.
역사는 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었으면 좋겠다. 한홍구 교수에 의하면 조선일보가 펴낸 방응모의 전기도 납북장면에서 그냥 끝나고 만다고 한다. 한홍구 교수는 그 이유를 궁금해 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납북해 간 인민군만 죽일 놈이고 정작 할아버지의 목숨을 앗아간 미군의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 폭격은 전쟁상황에서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일까?"
하여튼 방응모의 납북 이후 방일영의 시대가 도래한다.
△ 우초 방일영
방일영은 방응모의 손자다. 그 사이에는 방재윤이 있다. 방재윤은 방응모의 친아들이 아니었다. 사실은 방응모의 친형 방응곤의 아들이다. 그러니까 본래 방일영의 아버지 방재윤은 방응모의 조카다. 그러나 방응모가 아들이 없어서 조카를 양아들로 삼은 것이다.
방응모가 양자로 들인 방재윤이 방일영, 방우영 형제를 낳고 1940년에 사망하였다. 그런데 1943년, 골 때리게 방응모가 환갑의 나이에 아들을 낳았다. 생물학적 순리를 거역하면 불가피하게 심각한 투쟁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방응모가 환갑에 아들을 낳았을 때 이미 손자 방일영은 스무살이 되어 경기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중앙대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또 그 이후에는 조선일보에 근무하게 되었다. 방응모가 낳은 아들 방재선이 일곱 살이 되던 시점에서 방응모가 납북되었다. 당시 방재선은 나이가 어렸으므로 방일영, 방우영 형제가 할아버지의 조선일보를 이어받아 운영하게 된 것이다.
바로 이러한 배경이 조선일보의 경영권 분쟁을 촉발한 것이다. 글쎄, 과연 누가 옳은 것인지.. 쉽게 판단이 안 선다. 그냥 복잡하게 따지지 말고 조선일보를 방씨 일가 모두가 포기하고 시민들에게 돌려주었으면 싶다.^^
방응모에 이어 조선일보를 승계한 방일영은 호방한 성격으로 알려져 있다. 술도 꽤 잘 마시는 모양이다. 방일영의 회고록을 보면 3748평의 흑석동 대저택에 박정희가 쿠데타에 성공한 후 자주 놀러 왔다고 한다. 거기서 기생들을 불러놓고 질펀하게 놀았나보다. 그래서 육영수여사가 방일영을 무지 싫어했다고 한다. 자기 남편을 망치는 인간으로 본 것이다.
왜 박정희는 대통령 체면을 벗어던지고 방일영의 집에 가서 신나게 놀았을까?
당시 박정희를 따라다니던 전 mbc 사장 황용주의 증언에 의하면 오직 "천하의 주도 방일영" 때문이었다고 한다. 방일영이 세상에서 알아주는 주당이었다는 소리다.
카지노 황제 전낙원은 <태평로 1가>에 쓴 ‘지극하고 따스하고 멋진 방 형님’이란 제목의 헌사에서 방일영 사장을 가리켜 “권번출신 기생들의 머리를 제일 많이 얹어준 분”이라고 칭송을 했다. "머리를 얹어준다"는 의미는 다들 아실 것이다.
방일영의 동생 방우영 또한 술자리에서 박정희와 대면하게 된다.
어쨌든 간에 방일영은 박정희를 비롯해 서정귀, 이후락 등과도 상당히 어울리면서 신나게 놀았던 모양이다. 방우영의 회고록을 보면 이렇게 나온다.
△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왼쪽) 부부와 그의 아들 방성훈 조선일보 기자의 97년 모습. ⓒ 2005 <조선일보와 45년>
“내가 처음 박정희 대통령을 본 것은 그가 최고회의 의장 때 이후락 공보실장과 서정귀씨(박정희 대통령의 대구사범동창) 등을 데리고 방일영사장과 함께 한 어느 술자리에서였다. 머리에 수건을 동여맨 박 의장이 한 여배우의 손을 붙잡고 밴드에 맞춰 열심히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얼마나 재미있는 광란의 도가니가 펼쳐졌는지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술로써 맺어진 의리가 가장 끈끈하다.
명문가문 이후락 편에서 언급했듯이 신진자동차의 김창원, 극동건설의 김용산, 대농의 박용학, 한국화약의 김종희, 호남정유의 서정귀 등은 이런 배경으로 이후락 5인방으로 불려졌고, 물론 그 주변에는 방일영이 있었다.
여기에 방일영과 호형호제하는 사이였던 sk 창업자 최종건이 빠지면 안된다. 수원지방의 별 볼 일 없는 직물회사였던 선경이 급성장한 배경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최종건은 죽는 순간까지 조선일보 사외이사였다.
방일영은 박정희대통령을 "대통령 형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이었다. 이것은 그의 삼촌인 방재선의 증언이다.
“대통령 형님, 한잔 쭈∼욱 드십시오.”“내가 좀 과한 것 같은데….”“아니, 제가 대통령 형님 술 실력을 모르는 사람입니까?”
이런 대화가 바깥에까지 들려서 당시 권세가 하늘을 찔렀던 대통령 경호실 요원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고 한다.
밤의 대통령이라는 말도 사실 박정희가 방일영에게 붙인 별명이다. 그 속뜻은 요정정치에 데뷔해보니 항상 엄청난 화술과 주량으로 밤 문화를 주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방일영이라는 말이다. 박정희는 "이 세상에서 팔자 제일 좋은 사람이 방일영이다."라면서 부러워했다고 한다.
하여간 술과 여자를 매개로 한 이런 요정정치를 통해서 거대한 이권과 권력이 거래되고, 정치와 언론이 비정상적으로 유착하는 정점에 조선일보 회장 방일영이 있었다.
사주가 대통령과 술자리에서 형님, 아우하는 조선일보는 언론사에 대한 사전검열 조치가 포함된 유신쿠데타가 일어나자 서슴없이“구국의 영단”( 1 2 월 2 8 일자 사설)이라고 보도하며 언론사이기를 스스로 포기했다.
이런 방일영이 얼마 전에 죽었는데 조선일보 사이트에 가봤더니 웃음도 안 나왔다. 무슨 임금님이라도 승하한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우초의 정신을 이어받아야 한 대나 뭐래나...
우초의 정신을 이어받아 질펀한 광란의 술자리를 열라는 건가? 껄껄
민족언론의 명맥을 유지시키며 조선일보를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적 언론으로 키워낸 거성이었다고 한다.
조선일보에 전문으로 올라온 문교부장관을 지낸 권이혁이 쓴 방일영 조사를 보면 소름이 끼친다.
"우초 형의 일생은 누구도 모방할 수 없고 따를 수 없는 위대한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형의 일생은 민족 언론의 전통을 이어받은 선두주자로서 이름 있는 언론인과 문화인을 길러낸 일생이고, 사회 각 분야에서 값진 활약을 하고 있는 인재들을 양성한 일생입니다. 그렇기에 이 사람은 이 자리를 슬픔을 뛰어넘어 인간 방일영을 재평가하는 장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비록 형의 몸은 갑니다만 방일영 정신·방일영 인간성은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 그리고 이 땅에 영원히 살아 있는 것이니 계속해서 우리들을 이끌어 주시고 우리들이 가야 할 길을 밝혀 줘야 하는 의무와 소임을 다하셔야 한다는 부탁입니다."
모르는 사람이 무심코 읽다가 까딱 잘못하면 울지도 모르겠다.
박정희는 방일영이 맡았고, 그 후 전두환 신군부가 등장하자 전두환의 비위를 맞추는 역할은 방일영의 동생 방우영이 맡았다. 나치정권 선전상이던 괴벨스와 같이 국민 우민화에 나서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우던 전두환의 심복 허문도를 도와 국보위 입법위원으로 참여하여 희대의 언론통제 악법인 '언론기본법'을 만드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살인마 전두환은 조선일보에 의해 민족의 영웅이며, 구국의 지도자로 둔갑하였다.
광주학살이 끝난 후 조선일보는 다음과 같이 떠들었다.
"국군이 절대다수 광주시민, 곧 국민의 일부를 보호하기 위해 취한 이번 행동에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었음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신중을 거듭했던 군의 노고를 우리는 잊지 않는다.”
더 이상 말해 무엇하랴!!!!!
리영희선생님의 정리를 끝으로 방씨들의 끝도 없는 비리를 대충 끝내겠다. 손가락이 아프다.
“(역대정권은) 권력의 거짓을 진실로 둔갑시키고, 그들의 범죄를 ‘반공’으로 정당화하며, 그들의 사리사욕을 ‘애국충정’으로 칭송하는 ‘언론인’들이 필요했다. 광주에서의 양민 대학살을 ‘국가 안보적 합법행위’로 감싸주고, 언론자유와 민주주의를 외치는 인사들의 목을 조르는 온갖 야만적 탄압행위를 ‘빨갱이 잡기’로 정당화해주는 ‘언론사’와 ‘언론인’들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 나라의 소위 ‘언론사’와 ‘언론인’은 그 요구를 충실히 수행해 왔다. 범죄적 권력의 공범자가 된 것이다. 그 대가로 소위 ‘언론사(주)’는 비대화하고 ‘언론인’을 자처하는 기능인들은 그 직장의 안과 밖에서 화려한 승진과 영달의 사다리를 달려 올라갔다. 그렇게 해서 부정한 정치권력과 타락한 언론권력은 일체화되어갔다.”(리영희, <말> 1996.3)
△ 방상훈 조선일보 대표이사
방일영에게는 두 아들이 있다. 큰 아들 방상훈은 조선일보의 대표이사로서 현재 사주다. 숭문학원 이사장이기도 하다. 작은 아들 방용훈은 코리아나호텔 대표이사다.
방일영의 장남 방상훈의 부인은 윤순명이다. 윤순명의 아버지가 윤영구다. 그러니까 방상훈의 장인이다. 윤영구의 아버지가 윤영선이다. 윤영선은 그 악명높은 윤치호의 아들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방상훈의 부인 윤순명은 그 악명높은 윤치호의 증손녀다. 이런 부분은 조선일보에 전혀 나오지 않는 부분이다.
방상훈의 부인 윤순명의 증조부 윤치호의 친일행위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대한민국 한복판에 99칸짜리 고택을 지어놓고 명문가문 운운하는 바로 그 집안이다. 윤치호의 사촌형이 중추원 의관을 지낸 친일파 윤치소다. 그 윤치소가 낳은 아들이 바로 윤보선이다.
이 윤씨 명문가문은 앞으로 새로운 장에서 주의깊게 살펴보겠다. 아주 골 때리니까 기대하시라.
방상훈의 장인 윤영구는 교통부 관광국장, 육운국장을 거쳐 메트로 항공사 회장을 지냈다. 그의 동생 윤승구는 윤보선 비서를 지낸 뒤 개인사업을 하다가 요즘은 충남 아산의 윤치호 고택을 지키고 있다.
윤영구의 작은아버지 윤광선은 6.25 때 북한으로 끌려갔다. 물론 아버지 윤치호의 친일행적때문이다. 이 윤광선의 딸 하나가 시집을 잘 갔다. 서울대 약대 학장, 대한 약학회 회장을 지낸 채동규가 윤광선의 사위다.
채동규는 아들들을 많이 두었는데 거의 의사, 교수로 키웠다. 절반은 미국물을 먹고 있고, 절반은 한국에 있다. 한국에 있는 채동규의 가지들 가운데 채영문 연대 보건대 교수, 채기준 이대 전산과 교수 등이 대표적이다.
현재 연세대 이사장으로 있는 일민 방우영은 1남 3녀를 두고 있다. 아들 방성훈이 현재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 중이다. 방우영의 아들 방성훈의 장인은 영풍그룹의 주력사인 고려아연의 부회장 최창근이다.
나는 최창근을 전문경영인으로 보고 싶었다. 그런데 뒷조사를 해보니까 신기하게도 영풍그룹의 창업자인 장병희와 고향이 똑같다. 똑같이 황해도 봉산 출신이다. 뭐가 있는게 분명하다. 역시 개천에서 용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껄껄.
각설하고 이 부분에서 꼭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왜 방우영이 연세대학교 이사장인가? 돈 주고 산 것인가? 무슨 학문적 업적을 남겼나? 도대체 무슨 이유로, 어떤 방법으로 연세대학교 이사장이 된 건가? 거참 희한하다. 귀신이 곡할 노릇의 사연은 연대 역사 바로세우기 운동본부의 자료를 참조하시길..
어쨌든 이 방우영의 딸 방혜성이 태평양 창업자 서성환의 큰아들 서영배와 결혼하였다.
방우영의 딸이 시집간 이 서씨집안의 혼맥이 화려하다. 서성환의 큰딸 서송숙은 서강대학교 상경대학장 박내희와 결혼하였다. 그렇다면 소위 서강학파의 정점에 있는 건가?
서성환의 둘째 딸 서혜숙은 김의광과 결혼하였다. 김의광은 현재 태평양 계열사의 회장이다. 김의광의 아버지는 만주군 대위 출신으로서 국방부 차관, 상공부장관, 내무부장관, 교통부장관, 한전 사장을 지낸 김일환이다.
김일환은 대한민국에서 군생활을 얼마나 했다고 재향군인회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일본군으로 있다가 한국에서 군생활 5년 남짓하고는, 재향군인회에서 영향력 행사하는 것은 50년 세월이다. 껄껄. 김일환은 경흥학원 이사장이기도 하다.
서성환의 세째 딸 서은숙은 고려대 의대 교수 최상룡과 결혼하였다. 최상룡의 아버지는 박정희정권하에서 국회의원, 국회 건설위원장을 지낸 최두고다. 부산 동성학원 이사장이기도 하다.
서성환의 네째 딸 서미숙은 부도난 우성그룹 부회장 최승진과 결혼하였다. 서미숙은 리베라 호텔의 고문으로 있었는데 지금은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다. 비록 회사가 망했지만 굶지는 않을 것이다. 나보다는 잘 살겠지.
서성환의 둘째 아들 서경배는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의 동생인 농심그룹 신춘호 회장의 딸 신윤경과 결혼하였다. 이로서 조선일보는 막강한 롯데패밀리의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역시 조선일보 혼맥의 백미는 방상훈의 장남 방준오와 lg 공동 창업자 허정구의 손녀 허유정이 결혼한 것이다. 지난 번에 언급했듯이 이로써 조선일보는 김동조가문과 결합되면서 방준오는 정몽준의 처조카사위가 된다.
이 gs는 lg와 연결이 되어있고, lg는 한진과 연결이 되고, 한진은 롯데와 연결이 되고, 롯데는 농심과 연결이 되고, 농심은 태평양과, 태평양은 조선일보와 다시 연결이 된다.
이 부분은 훗날 한국의 명문가문 조중훈가, 신격호가를 논할 때 세밀하게 따져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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