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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최고의 홍콩 느와르는?
무비스트 기준으로 평점이 제일 높은 중국영화는 무간도네요 전체73위(평점8.68) 두번재는 영웅본색(평점8.60)
이종 횐님들은 어떤 중국영화가 가장 좋은가요?? 전 진용(평점:8.33)을 제일 감명 봤습니다.
<홍콩 느와르> 라는 용어가 어떤 특정 영화나 영화인에 의해 만들어 지거나 어떤 뚜렷한 목적을 가진 움직임에서 나온 말은 아니다. 단지 이 것은 홍콩 스타일의 <필름 느와르(film noir)>라는 말에서 따온것이다.<느와르> 가 불어로 "검은 영화"라는 뜻이니 만큼 프랑스 평론가들이 유행시킨 말인 것은 확실한데 불어에 원래 있던 <로망 느와르(roman noir)> 즉 "검은 소설"이란 말을 필름에도 옮겨 붙여 사용한 것이다. 처음 <필름 느와르>라고 불려지던 영화들은 40-50년대 헐리우드에서 만들어 졌던 주로 범죄, 탐정을 테마로 했던 어두운 분위기의 영화들이였다. 이들 영화는 이런 테마를 통해 권선징악의 예를 보여 준다기 보다 인간의 부패된 이면을 암울하고 씨니컬한 관점에서 보여 주는 것에 촛
점을 맞춘다. 영상 스타일은 이런 분위기를 강조하듯 어두운 밤 씬들과 무거운 그림자가 드리워진 침울한 세트등을 선택해서
스타일적으로 "누와르" 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홍콩 느와르는 전 세계적으론 인정되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 나라 저널리즘에서 사용되고
있는 용어이다.
1. 영웅본색 시리즈국가 홍콩런닝타임 95 분 개봉 1986년감독 오우삼주연 주윤발,장국영,적룡
줄거리 암흑가에서
성장한 송자호(적룡 분)는 경찰의 길을 걷는 동생 아걸(장국영 분) 때문에 손을 씻으려 한다. 그러나 음모에 말려 체포, 감옥에
들어가고, 친구 소마(주윤발 분)는 그의 복수를 하다가, 총에 맞아 한 쪽 다리를 저는 불구가 된다. 3년의 세월이 흘러 대만에서
출옥해 홍콩으로 와 새 생활을 시작한 자호는, 옛 부하인 아성(이자웅 분) 밑에서 자동차 세차나 하고 푼돈을 받고 있는 소마를
발견하게 된다. 지하 주차장에서 찬 도시락을 먹는 소마와 눈물 겨운 재회를 하는 자호. 소마는 의리를 저버리고 지금의 암흑가
보스가 된 아성으로부터 과거의 영광을 되찾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송자호는 자신들의 시대가 끝났음을 선언하고 갱생의 길을 걷는다.
암흑가의 새 보스 아성은 송자호의 출현에 긴장을 한다. 처음에는 그를 회유하나 이에 아랑곳하지 않자, 킬러를 보내 아걸의 집에
침입, 아버지를 죽이게 한다. 이 일로 아걸과 자호의 사이는 더욱 벌어지고 이에 아성은 소마를 기습하여 집단 린치를 가한다.간신히
아호를 구출해 낸 소마가 산 위에서 반짝거리는 홍콩 시가를 보면서 절규한다. “네 모습을 봐. 나쁜 짓을 할 때는 남한테 욕을
먹고, 좋을 일을 하려고 해도 쫓겨다니잖아.” 비장한 침묵 뒤 시가를 바라보며 “홍콩의 밤은 버리기에 아깝다”고 말하면서 두사람은
최후의 일전에 나설 각오를 한다.“강호의 의리는 땅에 떨어졌지만 영웅은 살아있다”돌아간다면 개죽음 밖에는 기다릴 것이 없다,, 하지만 그길을 그대로 간다면 자신옆에 있는 돈가방과 평생을 부귀영화 누리며 살수있다.그때 단호한 표정으로 물살을 거닐고 뱃머리를 돌리는 소마의 모습을 기억하는가?영웅본색이 개봉한지 20여년이 훌쩍 지난 지금 각종 특수효과와 기술력 자본으로 중무장한 영웅본색 리메이크판이 만들어지고있단다.영화 기술발전으로 특수효과및 거대한 자본으로 더욱 세련된 대규모의 영화를 만들어낼순 있겠지만,, 필자의 마음은 영웅본색은..그냥 1986년 영웅본색으로 놔두는게.. 좋을것같다는 생각이 든다." 형은 새삶을 살 준비가 되어있는데 넌 왜 형을 용서할 용기가 없는거야?! 형제는... "영웅본색은 미성년자 관람불가다. 당시 초등학생인 필자가 비디오가게에서 영웅본색시리즈를 빌리는건 어려운일이 아니였다.우리동네 비디오가게 아저씨는 중학생이던 나에게 뽕2,변강쇠3까지 빌려주셨으니.. ㅡ,.ㅡ;;어쨋든 영웅본색이 개봉했을때 나는 누나들과 극장을 찾아 영화를 관람했다 그때나이 엄청 어렸을때 ㅋ그때를 회상해보면,, 나처럼 꼬맹이들이 많이 있었고,, 그때 내또래들은 극장을 뛰어다니며 놀았다.여기저기서 터지는 카메라 후뢰시.. 거기에 더욱 흥분해 더욱 열심히 뛰어다녔던 기억이..영화가 끝난뒤 사람들이 전부 일어서서 아무도 없는 텅빈 스크린을 바라보고 기립박수를 친거.. 이정도다.필자가 영웅본색을 제대로 본건 중학교 수학여행을 하면서 관광버스에서.영웅본색은 최가박당및 성룡식 홍콩영화에 익숙한 한국및 아시아에서 찬밥신세를 면하기 어려워보였다.피비린내 나는 총격씬, 복수, 깍두기형님들, 죽음, 정말이지 무겁고도 무거운 주제가 아닐수없다.어쨋든 한국에서 개봉후 지금의 명성과는 달리 사람이 오지않았다. 그래서 대극장에선 소리소문없이 간판을 내리게되었는데.문제는 소극장이였다.. 발없는말이 천리간다. 입소문이 퍼지더니 너도나도 보러가고 파리만 날리던 극장은 영웅본색을 보기위한 인파로대만원을 이루더니 결국 영화를 내렸던 대극장들도 다시 영화를 상영하는 전대미문의 영웅본색 신드롬이 생기기 시작했다.영웅본색이 개봉한지 벌써 20여년이 흘렀다. m본부 라디오 김기덕의 골든디스크 한국인이 좋아하는 홍콩및 중국 영화음악에서항상 10위권에 장국영이 부른 영웅본색 주제가 당연정, 분향미래일자가 올라오는걸 봐도 한국인이 영웅본색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수있다.홍콩느와르를 만들고 한때 전 아시아인들을 열광하게 만든 홍콩느와르의 시작은 영웅본색이라 감히 말할수있다.
2. 대행동국가 홍콩개봉 1988년감독 서극,두기봉,김양화주연 이자웅,왕조현줄거리옹
와 퐁은 홍콩경찰의 존경을 많이 받는 고참경찰이다. 그러나 오른손의 심한 신경발작 때문 에 그는 경찰관직을 사임해야 하는 지경에
이른다. 이고참경찰이 퇴임할 무렵 마약밀 매단을 둘러싼 커다란 사건이발생하는데.바로 이런 와중에 그의 오랜 친구 윌리가
말레이지아에서무참히 살해된다. 실망의 연속으로 돌파구가 없는 상황에서 옹의 파트 너는불법행위를 폭로할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가
되는 녹음테이프를 제시해주는데." 제대로 된 평가를 받을 기회조차 없었던 배우 - 이자웅 " 이
자웅.. 이름만으론 그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영웅본색>에서 다리를 절룩거리는 주윤발을 향해 지폐를
내던지던 악당 아성으로 출연한 바로 그 배우라 하면 그때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일까? 8,90년대의 홍콩영화에 열광했던
팬들이 아니라면 딱히 기억할 이유도 없을 조연, 혹은 악역 전문배우이지만 이자웅이말로 홍콩느와르의 탄생에 일조한 숨은 공로자가
아닐까?그는 이국민의 공무원으로 근무하다 서극감독에게 캐스팅되어 <영웅본색1>에 아성으로
출연하게 된다. 영화 개봉후 그는 필자의 누나들을 비롯 수많은 사람들에게 욕을 먹는다. 물론 그만큼 <영웅본색>의
아성역을 기가막히게 소화 해냈기때문이다. 연기력을 인정받은 이자웅은 1988년 영화 <대행동>으로 주인공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대행동>에서 이자웅은 경찰관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그가 보여주는 경찰의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열혈 형사가 아니었다.홍콩영화 경찰 역할 전문배우 이수현, 성룡과 비교해보아도 이자웅이 연기한 경찰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실력만큼은 인정 받았으나 경찰 조직의 위계질서에 적응하지 못해 주변부를 서성이는 이수현과 따뜻한 마음씨와 굳은 심지로 경찰의 임무를 완벽히 수행하는 성룡의 모습과는 달리 <대행동>에서 이자웅이 보여주는 것은 서늘하고도 싸늘한 기운을 가진 경찰이였다.충직,성실한 태도, 언제나 팀원들과 함께 움직이는 모습등 그 시절 경찰이란 따뜻한 이웃, 최선을 다하는 열혈남아들로 넘쳐나던 시대였다.<영웅본색>에서 주윤발은 우정과의리를 위해 뱃머리를 돌린다. 그리고 그는 적들을 향해 다리가 불편하다는걸 잊은듯 낡은 코트를 휘날리며 쌍권총을 쏜다. <대행동>에서 이자웅은 사나이의 우정,의리,에는 관심없는 오른손의 마비증상으로 두손으로 권총한자루 들기 힘든 황반장으로 등장한다. 이자웅의 이런모습이 그시절 <대행동>이라는 영화가 가진 장점이자 단점이 되었다.
3. 용호풍운국가 홍콩런닝타임 101 분 개봉 1988년감독 임영동주연 주윤발,이수현줄거리비
밀경찰의 희생으로 경찰이 딜레마에 빠진 가운데, 사건을 맡은 수사관 라우는 비밀 경찰 코를 선발하여 임무를 시작한다. 코는 포라는
갱단의 소두목에게 고용된 총잡이 갱으로 가장하여 사건에 뛰어 든다. 코를 감시하던 포는 마지막 관문으로 코에게 위조지폐를
사용케하고 경찰에 정보를 흘린 후 사태를 주시한다. 목표 보석상 습격을 하던 포와 그의 갱들은 매복해 있던 경찰들에게 포위 당하자
총을 빼들고 맞선다. 불을 뿜는 총격전에서 코는 시원이 밝혀지지 않은채, 동료경찰의 총에 희생당한다." 화려한 총질을 하는 영웅은 없다. 하지만 그런 영웅이 홍콩느와르의 전부는 아니다 " 서로에게 총을 겨루는 장면은 1992년 타란티노감독의 <저주지의 개들>에서 정확히 인용인지 차용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기자가 타란티노 감독에게 베낀거 아니냐? 는 질문을 했다니 차용이 맞는거 같다.비오는날이면 영화에 흐르던 색스폰소리가 귓가에 맴돌고.. 마지막 주윤발이 춤추는 모습이 생각나는 영화.여러가지로 훗날 나온 <첩혈쌍웅>과 비교가 되는 영화다. 일단 주인공이 똑같다. ^^<첩혈쌍웅>에선 처지가 달라지지만 <용호풍운>에선 주윤발이 비밀경찰로 등장한다.<첩혈쌍웅>은 화려하게 비행하는 비둘기처럼 런닝타임내내 숨막히는 액션으로 무장되어있다면<용호풍운>은 그 반대로 화려하고 현란한 액션은 없지만 푸르스름한 회색빛 영상에서 펼쳐지는 긴장감있는 액션을 보여준다.임영동 감독의 홍콩느와르 수작.
4. 첩혈쌍웅국가 홍콩런닝타임 110 분 개봉 1989년감독 오우삼주연 주윤발,이수현,엽청문
"탄횐이 남아있나? .. 마지막 한방은 언제나 남기지 적, 아니면 나 자신을 위해 . . .개처럼 죽고싶진않아. 인간답게 영웅처럼 죽고 싶었는데.. 불행하게도 지금 탄환이 다 떨어졌어. "형만한 아우도있다.. 이영화에 너무나 어울리는 말이 아닐까? <영웅본색>이 탄생시킨 홍콩느와르. 그 절정에 서있는 영화 <첩혈쌍웅>특히 아시아뿐만 아니고 서양에서도 높은평가와 함께 극찬을 받고있는 유일한 영화가 아닌가 싶다."헤모글로빈의 시인" 이라 불리는 잔혹미학의 선두주자 "티란티노" 감독도 이영화의 열혈팬이라 알려져있다.지금도 가끔 홍콩영화의 무한총알을 개그소재로 사용할정도로 현실성과 동떨어진 모습으로 그려지지만 당시에는총알수는 중요하지 않았다.(속으론 저 코트속에 총알이 많은데 총알 바꾸는건 안보여주는거야~! 라고 믿고있었지만)총탄과 적들의 피가 난무하는 상황에서 보여주는 슬로우모션 또 그속에서 피어나는 남자들의 의리,우정 그리고.. 일당백으로 잘 싸우던 주인공이 결국 마지막엔 처절하게 죽어가는 모습... 죽기전 총알 두세발은 잠깐 아파할뿐 목숨에는 지장이 없다.<용호풍운>이 화려한 촬영기법이나 절묘한 편집없이 영화의 완성도를 높였다면 <첩혈쌍웅>은 그 반대로화려한 액션, 촬영기법과 절묘한 편짐 슬로우모션등으로 긴장감을 높여주고 속시원한 액션을 선보인다.물론 마지막.. 눈을 다치고 죽어가는 주윤발과 엽천문이 서로 어긋나는 장면은 보는이로 하여금 심금을 많이 울렸던 잊을수 없는 장면이 아닌가 싶다.
5. 흑전사국가 홍콩런닝타임 96분 개봉 1987년감독 오우삼,우마주연 이수현,주성치
" 내게 형님은 당신 뿐이란 말입니다. 태형은 영원한 제 형님입니다 " 영화 <흑전사>는 장철 감독을 기념하기위해 후배영화인들이 모여 만든 영화다.그리고 홍콩 코미디 영화의 레전드 주성치 초기작으로 그가 코미디에 손을 담구기전 모습을 실컷 감상할수있다.<흑전사>는 영웅본색을 연출한 오우삼이 메가폰을 잡은영화다. 영화의 전개가 약간(?) 산만하고 복잡하고 오리무중 일수있으나..클라이맥스에서 보여주는 처절한 액션장면은 영웅본색 페러디와 함께 깍두기형님들에 대한 환상을 깨라는 오우삼 감독의 메세지가 아니였을까?
6. 열혈남아국가 홍콩런닝타임 90분 개봉 1989년감독 왕가위주연 유덕화,장학우,장만옥
" 내가 비록 이름은 없지만 .. 그건 아직 기회가 없어서였어. "왕가위 감독의 전설적인 데뷔작이다. 열혈남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건 유덕화,장만옥의 공중전화 키스씬이 아닐까? 영화를 보면서 한가지 느낀점은,,, 사채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무서운 존재라는거,,?? ㅎ왕가위 감독에게 단한가지 물어보고싶은 말이있다... 왜? dvd에 우리가 봐왔던 비디오판엔딩을 삭제했냐고....? 설마.. 당시 한국 수입사에서 임의로 엔딩을 만든건 아니겠지???왕가위감독 영화중 수많은 걸작들이 있지만,, 나는 단연 열혈남아를 최고로 꼽고싶다.열혈남아는 영웅본색,첩혈쌍웅처럼 주인공 두세명이 백여명을 상대하지는 않는다. ^^;;영웅본색,첩혈쌍웅이 환타지같은 홍콩느와르라면 열혈남아는 진짜로 제대로 느와르다운 홍콩느와르가 아닐까?
7 .지존무상 (至尊無上: casino raiders, 1989)국가 홍콩런닝타임 123분 개봉 1989년감독 왕정주연 유덕화,알람탄,진옥련줄거리형
을 마치고 출감하던 아해는 아삼과 다시 한몸이 되어 도박계에 나탄난다. 이들의 출현과 함께 미구에서 도박장을 경영하는 친구
용가에게서 지원요청이 온다. 용가의 카지노에 도착한 아삼과 아해는 최근 카지노에서 수백만 달러를 따고있는 일본인 일당의 수법을
간파, 카지노의 위기를 면하게 했을 뿐 아니라 범인들을 체포한다. 홍콩에 돌아온 아삼과 아해는 정체불명의 괴한들에게 피습,곤욕을
치른다. 한편,미국에서 사랑에 빠진 아삼은 홍콩에 돌아온 후 카렌의 간곡한 청에 못 이겨 도박계를 떠나지만 사랑하던 친구 아해의 죽음을 맞는다. " 선택하라.. 손이냐.. 친구냐.. " 반환을 앞둔 홍콩사람 들에게는 그들의 미래가 뒤집혀진 도박판의 카드들과도 같이 보였을 것이다. 그러기에 영화는 도박판을 이리 , 저리 들춰봄으로 홍콩의 미래와 접목시켰고 그 와중에서도 가장 갈망하게 되는 의리와 믿음을 영화에 녹여냄으로 영화는 카지노 무비라는 장르와함께 대히트를 하게된다.독이든 잔과 들지 않은 잔을 섞어놓고 마신 다음에 아무렇지도 않은모습을 보여주는 장면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실력 하나로 먹고사는 유덕화의 모습은 불안한 삶을 살고 있는 반환전 홍콩인들의 일면이었을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와중 친구를 위해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은 여인을 포기하고 목숨까지 내놓는 유덕화의 모습은 기존 홍콩영화의 전형을 따른다.친구를 위해 목숨처럼 귀중한 자신의 손을 날리는장면은 자신이 유일하게 할수있는 도박을 못하는것 곧 목숨을 던진것과 마찬가지다.사나이의 의리와 우정의 극한을 진지하게 보여준영화 지존무상. 하지만 앞으론 지존파와같은 폭력조직은 안나왔으면 좋겠다. 주윤발이 연기한 느와르속 주인공은 거물급조직 부두목, 비밀경찰, 킬러 등 사뭇대단한 거물급을 연기한 반면, 유덕화가 연기한 느와르속 주인공은.. 이름없는 깡패, 건달등 말그대로 뒷골목 소영웅을 대변하듯 연기했다.열혈남아, 지존무상, 천장지구로 이어지는 뒷골목 깡패를 연기한 유덕화의 작품들이 진정한 홍콩느와르가 아닐까 생각한다.가진거 하나없는 이름조차 떠벌이 인생인 주인공.. 그에게는 이세상에 남아있는게 몇개 없다. 자존심,의리,사랑...
8. 지존무상 2 - 영패천하국가 홍콩개봉 1991년감독 두기봉주연 유덕화,오천련
줄거리전설로만 내려오는 도신의 금패를 갖고 있는 범숙에겐 아걸(왕걸)과 계익(유덕화)이라는 두명의 제자가
있었으나 범숙의 금패를 노리는 담영비에 의해 아걸은 감옥에 가게되고 범숙마저 살해된다. 이에 계익은 복수를 위해 도박기술을
연마한다. 그러나 출감한 아걸은 정신이상이 된 어린딸을 보자 모든것을 잊기로 하고 이에 격분한 계약은 단독으로 담영비에 도전하나,
애인마저 잃고 눈까지 멀게된다. 스승을 잃고 동료마저 해친 담영비에 대한 분노가 가슴끝까지 닿게 되자, 아걸과 계익은 그에 대한
복수를 맹세하고 최고의 고수를 뽑는 세계도박 대회에 참가하는데." 一起走過的日子/ 일기주과적일자 /함께 걸어온 나날/ "오
천련이 죽어가는걸 살리려고 가슴을 때리고 , 소리를 지르고 ,껴안고 , 지독하게 , 서글프게 , 그녀가 떠나는걸 , 몸의
온도가 식어가는걸 막고싶은 막는 장면은 지존무상2의 가장 명장면이자 홍콩느와르 최절정의 장면이 아닐까?유덕화가 출연한 초기 홍콩느와르에서 그는 마지막에 항상 아주 비장한모습으로 죽어간다...당시 그가 출연한 영화에서 끝까지 살아남는영화는 손으로 꼽을정도다.. 뭐 최근작 명장에서도 유덕화는 죽는다..
9. 첩혈가두 (牒血街頭: bullet in the head, 1990)국가 홍콩런닝타임 136분개봉 1990년감독 오우삼주연 양조위,장학우,이자웅" 영화가 개봉한뒤 나는 방에서 3일동안 울었다. "다들 알다시피 이 작품은 원래 영웅본색3편으로 영웅본색1편 이전의 이야기로 기획되었었다. 서극과의 의견차이로 감독 직에서 쫒겨나자 오우삼은 영웅본색3가 아닌 첩혈가두로 세상에 내놓는다.주연인 양조위는 <첩혈가두>가 개봉한뒤 첫상영을 보고 일주일간 자신의 방문을 잠그고 3일간 울었다고한다.그는 자신이 그 영화에서 어떻게 했는지, 확실한 연기를 하지 못한 것이 원망스러웠다. 만약 다른 방식으로 연기를 했다면 훨씬 더 나았을 것이라 생각했고 그 7일간의 고통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그는 자신을 채찍질하며 고통을 한번 돌아보고, 좀 풀어놔 주기도 하며 득실을 따지지 않고 계속,앞만 향해 나아갈때 최고봉에 이르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첩혈가두>는 많은 호평을 받았고, 양조위도 깊은 감동을 받았으나 자신의 연기가 단지 중간 수준 정도였다고 생각했다. 그가 자신의 연기에 대하여 후회를 하는 것은 그가 변했어야 했다는게 아니라, 더 훌륭하게 표현할수 있었을텐데라는 것이다.
10. 천장지구 (to love with no regret, 天若有情: a moment of romance, 1990)국가 홍콩런닝타임 90분개봉 1990년감독 진목승주연 유덕화,오천련" 나와 있어봤자.. 나는 해줄게 아무것도 없어.. 응.. "<
영웅본색>, <첩혈쌍웅>으로 홍콩느와르가 시작되었다. 초창기 홍콩느와르는 남자들만의
이야기였다.우정,의리,배신,죽음... <영웅본색>, <첩혈쌍웅>처럼 화려하게.. 때론 임영동감독의
<용호풍운>, 왕정감독의 <지존무상>처럼푸른빛나는 비장한영상미..그렇게 홍콩느와르는 우리곁에 다가왔다..
그리고 1990년 아시아를 뒤흔드는 영화한편이 개봉하였다. 천장지구.. 성인남자 3명중 2명에게 청자켓을 입히게만든 그영화..
깔끔한 정장차림에 검은 썬글라스 남자들의 우정 그리고 권총한자루가 80년대를 이끌었다면 90년대는 런닝에 청바 1000cc넘는
배기량의 오토바이 헬멧 칼한자루 그리고 가슴한켠을 차지하고있는 애뜻한 사랑...
밑바닥 뒷골목에서
패싸움하는게 인생의 전부인 유덕화.. 그런그가.. 사랑에 빠졌다.. 우정에 목숨걸었던 그가.. 이제 사랑에 목숨을 건다.자고로
홍콩식멜로 느와르가 탄생하는 순간이다.86년 <영웅본색>을 시작으로 90년 <천장지구> 까지 바야흐로
홍콩영화의 전성시대라 볼수있다.특히나 비장미 철철넘치는 영상과 빠질수없는 주제가 까지.. 홍콩느와르와 더불어 홍콩식 코미디영화도
더더욱 홍콩영화의 위상을 높이기 충분했다.<벽력선봉>과 <흑전사>에서 당시 어쩔수없는 느와르 대세를 따라
연기했던 주성치.. 그가.. 초창기 비장함을 벗어던지고 97홍콩반환으로 불안함, 암울함을 대체해주었던 홍콩느와르를 다른 방향으로
페러디해 홍콩인들의 불안한미래를 대변해주기 시작한다..
<지존무
상>, <도신>에서의 비장하면서 처절한 카지노무비를.. 주성치는 인간슬로우로
승화시킨다.코미디,멜로,액션,느와르까지 엄청나게 쏟아져나오는 영화들.. 2008년 현재 대한민국영화도 마찬가지지만,,당시
홍콩영화도 마찬가지였다.. 무슨말이냐? 하면.. 흥행작이 나오면 비슷한 아류작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그리고 한국 수입사들도
많은 문제가있었다.. 필자가 가장 불만인것은.. 왜 홍콩원제를 무시하고 수입사 마음대로 영화제목을 정했는지..ㅋㅋ 바로위에
10번째로 소개한 불멸의 명작이된 천장지구 역시 원제는 천약유정이다. 90년대 들어오면서 카지노무비와 주성치의 코미디영화가 대히트를 하기 시작한다. 이연걸이 출연한 <황비홍> 씨리즈도 많은 인기를 끈다. 성룡이 만들어낸 코믹액션물과 시대극 현대극을 넘나들며 홍콩영화의 전성.기를 이끌어간다.
11. 협도고비 (俠盜高飛: full contact, 1992)국가 홍콩런닝타임 96분개봉 1992년감독 임영동주연 주윤발,임달화,황추생
줄거리의협심이 강한 고비(주윤발 분)는 명사수이다. 태국의 한 나이트클럽 기도로 일하던 시절, 자신의
죽마고우인 심사(황추생 분)가 귀리라는 자에게 빚을 져 궁지에 몰릴때 심사를 구해준다. 그러나 이 일로 귀리에게 원한을 산다.
심사는 빚을 갚기위해 사촌인 판관이 이끄는 3인조 범죄조직과 손을 잡고 무기밀매를 하기로 하고 고비에게 협조를 구한다. 이때
고비는 나이트클럽 댄서인 모나(백안니 분)와 열애 중이었기에 심사의 제의를 거절하나 결국 심사의 처지를 가엾게 생각하여 범죄단체에
참가하기로 하고 먼저 모나를 홍콩으로 떠나보낸다. 고비에게 원한을 품은 귀리는 3인조 범죄집단의 하나인 판관(임달화)에게 돈을
주어 고비를 죽일 것을 부탁한다. 판관일행에게 습격을 받은 고비를 도우려던 일가족이 무고한 죽음을 당하게 되고 판관은 심사에게
고비를 죽일 것을 명령한다. 겁에 질린 심사는 정신없이 총을 쏘아댄다. 중상을 입고 간신히 목숨을 건진 고비는 오른손을 쓸 수
없게 돼 왼손으로 총을 쓰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는데. " 이미 잘못되어버린 것을 만회할순 없어 " " 더이상 의리는 없다... "
아마..
이영화였던것 같다.. 임달화가 진짜 게이라는걸.. 믿기 시작한게. (당시 소문도 한몫했다) <천왕>등 코미디영화에서
게이역을 맡은 임달화를 보면.. 코미디영화니깐.. 이란 생각으로 넘겼는데.. 사뭇 진지한 영화에서 게이로 나오니... 아..
진짜.. 게..이.. 아니야? ^^;;
임영동은 애시당초 사실성과 거리를 둔 작품을 만들기로 작정했다. 그는 이 작품에 대한 주제의 영감을 촬영 중간에 받았다고 한다.
방콕에서 촬영 중일 당시 스텝들 간에 다툼이 잦았다고 한다. 서로 도와가며 일해야 할 그들이 그와는 정 반대로 행동했다고 한다. (삐친거다)
과거의 친구였던
그들은 더이상 서로를 헐뜯기만 할 뿐이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것에 영감을 받은 그는 영화의 주제를 배반과 친구에 대한 배신으로
초점을 맞춰서 영화를 완성하기로 했다고 한다. 서로에 대한 의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 말이다.
12. 천장지구2 (天若有情續集: a moment of romance ii, 1992) 국가 홍콩런닝타임 87분개봉 1992년감독 진목승주연 곽부성,오천련
" 이번게임이 마지막이야.이걸 이겨야 니가 살수있어 니가살아야 나역시 살수있어.이번승부만 끝내고 우리 함께 살자 이젠 행복해지자.. "무의미한 삶을 살아가는 아웃사이더 곽부성. 그에겐.. 오로지 앞만보며 달리는 오토바이가 전부다.그는 시간을 거스르고싶어한다. 마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처럼 오로지 달려 시간을 돌리고 싶어하는 미래는 없고 과거도 없고 현재도 없는.. 그런 삶을 살아간다.. 그런 그에게 사랑이 찾아온다..살아갈 이유가 없었던 그에게 살고싶어지는 마음을 만들어주는 그런 사랑이..홍콩느와르를 이끌어갔던 오우삼,서극,임영동 감독이 헐리우드로 진출하게된다.홍콩영화를 이끌어갔던 배우 주윤발,성룡,이연걸등 많은 배우들이 마찬가지로 헐리우드로 진출한다..아마 이때쯤 부터였던것 같다.. 아시아영화의 꽃이라 불렸던 홍콩영화가 차츰 그 빛을 잃어가기 시작한것이..
13. 고혹자 시리즈 (古惑仔 之 人在江湖: young and dangerous, parts i, 1995)국가 홍콩개봉 1995년감독 유위강주연 정이건,진소춘유명배우들과 감독들이 헐리우드로 떠나고.. 수많은 아류작을 쏟아냈던 홍콩영화는 스스로 무너져갔다.그와중에 주성치,양조위,여명, 유진위감독, 왕가위감독등이 무너져가는 홍콩영화산업을 겨우 지탱해주었다..1997년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되고 홍콩느와르라는 장르의 영화는 더이상 설자리가 없게되었다..6편의 시리즈와 번외편이 있는 고혹자 시리즈는 홍콩느와르의 마지막 자존심을 살려주며 맹백을 이어갔다.일당백으로 싸우던 주윤발과 이수현은 말그대로 전설이 되어버린듯하다.. 그렇게 쏟아져나오던 뚝~~! 끊겨버렸다.8,90
년대 지겹게 봐온 똑같은 비슷한 부류의 영화덕에 최첨단 기술과 고자본으로 만들어지는 헐리우드영화가 전세계적으로 어필된것도
아시아에서 홍콩영화의 침몰에 큰 영향을 끼친것같다. 물론 홍콩영화의 느와르시대는 지고 멜로와 코미디영화는 매년 한두편씩은 히트를
시키면서 무너진 영화제국의 자존심은 지켜줬다. 그리고 2002년 '홍콩느와르'가 부활하였다..
14. 무간도 시리즈 2002~03 (無間道: infernal affairs, 2002) 국가 홍콩런닝타임 100분개봉 2002년감독 유위강,맥조휘주연 양조위,유덕화
" 침체된 홍콩영화의 새로운희망. 기존의 홍콩느와르를 유지하면서 다시 일어날 기회를 만들어낸 홍콩영화. " " 제 19권에 따르면 가장 심한 지옥이 무간이며, 끊임없이 고통을 받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 나는.. 무간도라는 영화가 나오기만을 손꼽아 기달렸던것같다.. 무간도가 개봉하고 극장에가서 영화를 관람했다.너무나 친숙한 배우 양조위,유덕화 출연에 앞뒤 안가리고 영화를 관람했다. 극장을 빠져나오면서 이런 생각을 들었다..오랜 초등학교 친구와 재회했다는 생각.. 오랜만에 콩닥콩닥 들려오는 심장소리.. 오랜만에 책장을 정리하는데 빳빳한 만원짜리가 쏟아져 나올때.. 어렸을때부터 강시영화, 호소자, 성룡영화, 주성치영화,카지노무비, 홍콩느와르 등 수많은 홍콩영화를 보며 자랐다..강
시영화를 보며 무서워했고.. 때론 꼬마강시덕에 웃을수 있던.. 호소자의 3총사 따라잡기.. 알지도 못하는 카드영화보며 주인공이
웃으면 이겼구나~ 하며 좋아했던.. 사랑하는 여자를 앞에두고 칼에 찔려죽고,, 총에 맞아죽고,, 사고로 죽는 남자주인공의 안타까운
죽음앞에 며칠동안 흐느끼는 누나들때문에 잠을 못이루었던... 성룡의 스턴트를 따라하겠다고 옥상에서 뛰어내려 팔이 부러지고..황비홍처럼 만들어준다고 동네 동생 머리를 가위로 싹둑 잘라주었던.. 그 시 절 . . . 한동안 잊고있었던 그때 유년의 기억을... 오늘은 지난 영화한편 보고 잠을 자야겠다..
출처 : 홍콩누아르, 영웅본색부터 무간도까지 | 리마리오
카라메롱작성일
2011-05-20추천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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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찐빵소녀 사건.. 충격이네요
아고라 펌글입니다...
내용이 꽤 기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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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무작정 이렇게 글을 씁니다.
저는 SBS긴급출동sos24 ‘찐빵소녀’ 편에 가해자로 방송되었던 휴게소 딸입니다
그 방송을 보셨던 분들도 계실 거고 못 보셨던 분들도 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글을 쓰게 된 것도 이렇게 지금 잊혀지지 않는 옛일을 다시 떠올리게 된 것도 저에겐 너무나 힘들고 어렵지만 지금부터 제가 말하는 사실들을 제발 이 세상에 알리고자 이렇게 글을 씁니다
부디 이 긴 글을 끝까지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2008년 9월 16일(1부), 2008년 9월 30일(2부), 2008년 10월 14일(3부)로 방송된 ‘찐빵소녀’편은 국도변에 위치한 한 휴게소에서 4년간 칼과 흉기 등을 이용하여 상습적인 학대를 받고있는 찐빵소녀를 긴급출동sos24 제작팀이 구출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는 내용으로 방송되었습니다. 네티즌들의 반응은 뜨거웠고, 인터넷상에서는 화제 거리가 되어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었습니다.
찐빵소녀라고 지칭하는 언니는 방송에 나갈 당시 21살 이었었고 2004년 5월경부터 저희 휴게소에 근무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언니는 학교를 다니면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집에서 출 퇴근을 하였고 집에서는 가장역할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때는 왜 그랬는지 후회스럽지만 그 말을 다 믿었습니다.
자신의 아버지는 술꾼이어서 새벽에 자고 있는 자신을 깨워 술안주를 사오라고 시켜 새벽 2-3시경에도 어쩔 수 없이 사올 수 밖에 없고, 엄마는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간 상태이며, 할머니는 집에 있으면서 손도 꼼작 안 하고, 집안일이며 동생2명까지 혼자 돌본다고 했던 그 말들을 왜 믿어야 했는지..
그리고 시간이 흘러 2007년 그 언니가 졸업하던 해 언니의 가족들과 얘기를 하던 중 언니의 모든 거짓말들은 탄로 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난 뒤 언니가 자신의 집에서 가출하게 되었던 일이 있어, 그 가족들과 언니는 저희에게 언니를 제발 휴게소에서 같이 숙식하며 데리고 있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 계기로 인해 언니는 2007년 5월 중순경부터 저희 집에서 숙식을 하며 월급제로 근무하게 된 것입니다.
방송에서는 4년동안 숙식하면서 폭행, 감금당했다고 하였으나, 사실은 1년정도 같이 생활한
것입니다. 같이 생활하면서 언니의 거짓말과 도벽등을 알게 되었는데 언니의 친할머니 말씀으론 집에서도 많은 거짓말을 하여서 할머니가 쓰러진 적도 있었다고 하였고, 집에 있는 통장에 있는 돈을 훔치는 등, 도벽때문에 비밀번호를 바꾼다는 얘기도 하였었습니다.
언니는 우리 가족에게 거짓말과 도벽이 들킬 때 마다 더욱더 찐빵판매에 집착하였습니다.
언니가 손님들 차문을 못닫게 하고 차문에 부딪혀 멍이 들어가면서도 찐빵판매에 매달리는게 우리 가족은 너무 싫었고, 손님들의 항의도 많았었고, 휴게소를 그만두게 하려고 별짓을 다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언니의 친할머니와 아버지는 우리 가족이 제발 데려가 달라고 수도 없이 부탁하자, ‘차라리
다른 곳으로 가라고 해요‘ 라며 나몰라라 하였습니다.
SBS방송국에서 처음 휴게소를 찾아온 것은 2008년 7월 3일경이였습니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의 팀장 1명과 SBS 피디가 왔습니다.
언니가 씻는곳, 자는곳, 읽는책들과 심지어 언니의 모습까지 촬영을 해 갔습니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팀장은 언니를 약간의 지적장애가 의심이 된다고 하였고, 이날 역시
언니는 그들과 상담도 하고 찐빵1박스를 팔기까지 했습니다.
그들이 가고 난뒤에 우리 가족은 ‘너 이제 정신병원 가야 되겠다, 그렇게 행동하고 모습이
그러니깐 너를 장애인으로 보는 것 아니냐‘고 하며 농담반 진담반의 얘기를 하였고,
그들은 녹음기를 몰래 설치하고 우리들이 나눈 대화내용을 그들이 말하는 편집이라는 것
(짜집기)을 하여 방송에 내보냈던 겁니다.
2008년 7월 8일경 SBS방송국에서 김일중 아나운서와 솔루션위원들과 PD들이 큰 카메라를 들고 열명이 넘는 인원이 갑자기 휴게소로 들이닥쳤습니다.
언니와 우리 가족은 ‘당신들이 생각하는 그런게 아니라고 하였고, 몰래 촬영도 했으면 알 것 아니냐고 왜 자꾸 찾아와서 귀찮게 하고 영업방해를 하느냐’고 하였지만 그들은 들은척도 하질 않았고, 촬영하기에 바빴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언니는 찐빵3박스를 그들에게 팔기까지 하였고, 엄마 아빠는 그런 언니에게 화도 내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면서 제발 좀 여기서 나가라고 사정도 하였습니다.
2008년 7월 15일경 sbs와 장애우단체 팀장이 다시 저희 휴게소를 찾아왔고, 2시간 여동안 sbs피디 1명과 장애우단체의 팀장이 같이 저희 가족들과 분리한 상태에서 면담하였고, 그 뒤 그들이 휴게소 안으로 들어왔고, 피디는 ‘이건 아닌 것 같다. 나는 여기에서 빠지겠는데 위에서는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 고 하며 돌아갔습니다.
2008년7월29일 여느 때와 다름없이 밖에서 언니는 찐빵을 팔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129차량이 저희 휴게소 주차장 밖으로 세워져 덩치가 좋고 팔에 문신을 한 사람 2명이 내려 휴게소로 걸어왔습니다. 그때 까지 만해도 그냥 손님이구나 라고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언니가 있는 쪽으로 올라온 그들은 언니의 이름은 부르면서 ‘000씨 맞으시죠?’ 언니는 ‘네?’ 하였고, 그들은 ‘000씨 맞으시죠?’라고 물으며 점점 언니 앞으로 다가가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휴게소 안에서 카운터를 보고 있어 그 상황을 정확히 목격할 수 있었고,,,순식간이었습니다. 그들이 양쪽에서 언니를 들고 그대로 휴게소를 빠져나가려고 하는 상황이었고, 언니는 저와 엄마, 아빠를 부르며‘ 00아. 아줌마, 아저씨 살려주세요.’
하며 울부짖었습니다. 저는 너무 충격적이었고, ‘뭐 하시는 거예요!’ 하며 소리쳤지만 그들은 들은 채도 하지 않고 그대로 언니를 129차량에 태웠습니다. TV속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을 제 눈으로 보게 된 것입니다. 엄마, 아빠는 밖으로 나가 그들을 말리기 위해 약간의 몸싸움이 있었고, 저는 경찰을 부르기 위해 전화를 걸었습니다. 저는 울먹이며 그 상황을 최대한 말하고 도움을 요청하였지만 그 경찰의 반응은 아무렇지 않은 듯 알았다고 하며 지금 간다고만 하였습니다. 언니는 차안에서 엄마의 손을 잡고 계속 울부짖으며 살려달라고 하였고, 그 들은 아예 창문까지 닫은 채 우리들을 제지한 것입니다. 경찰4명이 왔고
그들은 저희가족에게‘여태껏 잘 데리고 있었는데 그냥 보내줘라’ 라며 그 상황을 쉽게 넘겨버리고 그 차량을 갈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SBS방송국에서 언니를 강제로 129차량에 태워 정신병원 폐쇄병동에 입원시킨 것 이었습니다. 그것이 언니를 본 마지막이었습니다.
하지만 방송에서는 2008년 7월 29일 이미 정신병원 폐쇄병동에 언니를 입원시켜놓고, 2008.8.4일 솔루션 회의를 하고 난 후에 휴게소를 찾아와 촬영을 하고
언니를 가족들의 도움을 받아서 병원에 입원하는 것처럼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는 겁니까?
언니는 처음에 병원에서 상담하길 폭행, 감금등은 없었고, 주인부부가 친딸처럼 대해 주었다고 하다가 2008년9월3일 갑자기 말이 바뀌어 칼 등 흉기로 폭행당하고 주인부부가 파출소장에게 돈을 주어 전경들이 지키고 있어서 도망갈 수도 없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였습니다.
방송에서는 9월3일 언니의 형부로부터 연락을 받고 찾아갔다고 하였지만 정신병원
담당의사가 법정에서 말하기를 언니를 병원에 입원시켜놓고 난 뒤에 SBS에서 계속적으로
말이 바뀌었냐고 전화가 왔었고, 심지어 출장간 곳까지 전화가 왔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9.11 테러” 지금 가장 떠오르는 말은 그 것 뿐입니다.
저에게 있어서 9.11 이라는 숫자 그 날짜가 잊을 수 없는 날이 되어버린 것이 너무 힘이 들 뿐입니다.
그때만 생각하면 눈물이 나오려고 하니까요.
떠올리기 싫고 생각하기 끔찍할 정도로 싫지만 해야 합니다.
여러분들도 아셔야 하니까요.
2008년 9월 11일 이었습니다.
강원지방경찰청 경찰들, 방송국 사람들 약 20여명이 휴게소를 쳐들어 왔다고 표현해야 하나요? 제가 느꼈던 그대로를 얘기하면 되는 거겠죠..
우리 휴게소와 2층 집까지 뒤지기 시작했고, 주방에 있는 칼과 집에서 쓰는 빗자루, 언니가 입었었던 옷가지 등을 가지고 갔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희 가족은 영문도 모른 채 그냥 당하기만 했습니다.
SBS피디, 카메라맨들, 그리고 sbs팀장이라는 사람들은 뒷짐을 지고서 휴게소를 이리저리 돌아다녔습니다. 제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 그 팀장이라는 사람은 저에게 ‘비켜. 나가있는게 좋을거야. 너 잘못하다가는 다칠 수도 있어. 그러니까 나가 있어.’라며 비아냥 거렸고, 저는 너무나 어이없었고, 내가 왜 저런 사람에게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지? 왜? 나 지금 뭐하는 거지? 저 사람은 뭐고, 이 상황은 뭐지? 이거뭐야..
영문도 모른 채 있는 당시 16살 저에게 그 팀장의 말은 너무나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상처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렇게 당당해? 비켜’
왜? 왜 그런 소리 했던 건가요?
경찰은 ‘우선 아줌마와 딸만 오늘 당장 가서 조사 받아야 합니다’
또 아무것도 모르고 경찰이 가야한다고 하니까 그냥 따라갔습니다.
엄마와 저, 2명이었습니다.
휴게소 영업도 할 수 없어, 아빠는 가게 정리를 하고 경찰청으로 오기로 했었습니다.
처음으로 경찰청이라는 곳을 가게 된 저 그리고 우리엄마.
그곳으로 가는 차 안에선 여경찰이 ‘ 둘이 같이 앉혀도 돼요?’
우리 엄마 그리고 나를 보며 하는 소리였습니다.
왜?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이게 무슨 상황이지..
경찰청에 도착하자 경찰들은 로비에서 좀 기다리라고 했고, 1시간을 기다리자 올라오라고 했습니다.
저만 올라오라고 했습니다.
갔더니 sbs촬영팀이 카메라를 다 설치해놓은 상태였고, 대뜸 남자 경찰이 왜 그랬냐고 소리부터 치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 지금 뭐하시는거냐고 했더니 여기저기 경찰관들이 저에게 한마디씩하며 마치 죄인취급을 하였습니다.
공책을 던지면서 소리치면서 그렇게 했습니다. 네.. 그렇게요.
처음 경찰청이란 곳에서 16년 만에 처음 나 자신은 비참하게 짓밟혔습니다.
‘ 어디에서 눈을 똑바로 뜨냐, 무조건 인정하고 합의해라. 니가 유학간다고 했는데 너 이사 건으로 인해서 유학 못 간다. 유학 가나 두고 보자.’
‘난 왜 이 자리에서 이러한 소리를 들어야 하지? 절대 아니라고 하는 나를 왜 죄인취급하는 걸까. 뭐가 잘 못 됐지? 뭐 때문이지? 이 사람들은 경찰들인가?’ 당시 제가 생각했던 그 느낌.. 그것에 전 아직도 가슴이 먹먹합니다.
밤 12시 가까이인가.. 모르겠습니다. 저녁 늦게 까지 조사를 받았고, 그곳에 있는 경찰관 누구도 저희 말을 들으려고 하질 않았습니다.
그곳에서 우린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동물이요? 아니요. 난 표현하기 싫습니다.
방송에서 나온 내용 중 우리가 언니에게 받아둔 확인서, 각서등은 언니의 도벽과 거짓말을 고치기 위해서 작성한 것이었는데 방송에서는 말도 안되는 확인서 각서때문에 감금 당하고 폭행 당했다고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사실은 언니의 할머니와 언니의 아버지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고, 언니 역시 본인의 버릇을 고치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안다고 법정에 나와서도 얘기하였습니다.
2008년9월16일 방송1부를 하였습니다. 사실이 아니라고 하고 싶었지만 어느 누구도 우리말을 들어주질 않았고, 심지어 친척들까지 우리를 인간도 아니라고 외면하였습니다.
정말 죽고 싶었습니다. 네티즌들은 휴게소를 찾아와 돌을 던지고 욕을 하고 사진을 찍어
가고 방송이 나간 후부터 도저히 장사는 할 수도 없었고 결국엔 휴게소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고, 밤에는 불을 켤 수도 없었습니다.
방송이 정말 대단하고 무섭고 죽이고 싶도록 원망스러웠습니다.
처음 촬영할 때 언니가 자는 곳이 2층 우리와 같이 거주하는 거실임을 촬영해 갔으면서도
방송에는 주방 계단밑을 비추며 ‘마땅히 거처할 곳이 없다’고 거짓으로 방송 하였고,
처음에 몰래 휴게소를 촬영했던 피디가 말하길 언니가 하루종일 같은 테이블만 닦고 특별히 다른일 하는걸 못봤다고 하면서 ‘자기는 여기에서 빠지겠다, 더 이상 촬영하지 않겠다’고
하고 돌아 갔었는데 방송에는 ‘앉을틈조차 없이 바쁘게 일한다, 무엇엔가 쫓기듯이 몹시
허둥댄다고 하였고 ‘숟가락을 가져와서 먹어라’고 했는데 밥을 먹고 있는데도 계속적으로 일을
하라고 지시하는 것처럼 꾸며내어서 거짓으로 방송하였습니다.
정말 웃기는 건 우리 가족이 경찰에 가서 9월11일 한 번 조사 받고 바로, 9월 16일 사실 확인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방송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1부 방송 다음날 경찰청에서 두 번째 조사를 받았습니다.
9월 17일이었죠.
경찰관들은 ‘방송을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냐, 왜 인정 안하냐, 그냥 인정하고 합의하면 되지 뭘 이렇게 힘들게 하냐.’ 라고 무조건 인정하라고 했습니다.
경찰이요. 나는 안했다고 했는데, 정말 아니라고 우리 말 좀 들어보라고 그렇게 했는데, 무조건 인정하라네요. 그냥 무조건 인정했으면 우리 엄마 구속 안 시켰던 것인가요?
근데 왜 내가 인정해야 하는거죠? 난 안했는데? 난 아닌데.
전혀요.. 전혀였습니다. 전혀 우리가족의 말은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조사를 받고 있던 중 경찰관은 전화 한통을 받았습니다.
‘응. 00이야.’ 언니와의 통화였습니다.
‘응 그래 좀 있다 보자.’
경찰인가요? 아님 언니 애인인가요? 누구세요?
저희가족은 SBS담당피디에게 ‘ 왜 사실 확인도 안하고 방송을 내 보내냐, 지금 네티즌들이 찾아와서 사진 찍고 돌 던지고 우린 거기에서 살 수가 없다’ 라고 하였더니
SBS 담당피디는 ‘네티즌들은 일주일만 지나면 잠잠해 져요’ 라면서 괜찮아 질꺼라고 하고
우리가 ‘만약 이게 사실이 아니면 어떻게 할거냐’고 따지니깐 ‘손해배상 청구 하세요’라고
하였습니다.
사람 죽여놓고 손해배상청구하세요. 그거 정말 좋은 말이군요.
정말 죽이고 싶었습니다. 옆에 칼이라도 있었으면 무슨 짓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언니와 제가 경찰에서 대질하는 날, 언니는 완전히 딴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제 눈을
쳐다보지도 않았고 정말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제가 따지려고 하면 경찰들은
‘너한테 겁먹어서 눈도 못쳐다본다’고 하면서 말도 못하게 하였습니다.
언니는 경찰조사에서 우리 가족이 아니 특히 엄마가 60여차례에 걸쳐 칼로 때리고 찌르며
폭행을 하였고, 감금 당하였고, 월급도 못 받았다고 하였고, 심지어 언니가 엄마로부터 맞았던 날짜, 시간, 요일, 입었던 옷까지 상세하게 진술을 하였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정말 말도 안되는 거짓말이었고, 어떻게 몇 년전일을 그렇게 정확하게 진술할 수가 있는건지...누가 봐도 말이 안되었지만 SBS 방송국에서 말이 된다고 하면 경찰들도 말이 되는 거
였습니다.
2008년9월30일 2부를 방송하였습니다.
방송에서 언니가 드디어 말을 시작하였다고 하면서 자필진술서를 방송화면에 내보냈습니다.
자필진술서에는 우리 가족이 돈을 주고 언니를 감금하기 위해 전경을 배치하였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누가 봐도 거짓말인데 방송에서는 마치 그 내용이 사실인양 방송하였습니다.
또 볼록 튀어나온 가슴상처를 보여주면서 2008년 3월달에 칼에 찔려서 생긴 상처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2008년7월29일 강제로 정신병원에 끌려가는 날에도 이 상처는 없었고,
2008년7월3일 처음으로 휴게소를 찾아온 장애우단체 팀장도 이 상처는 없었다고 법정에 나와서 증언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휴게소에 있을 때 생긴 상처가 아님을 알면서도 방송에서는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2008년 7월 3일 처음 촬영했을 때 모든 상처부위는 다 촬영했었고
그래서 방송원본에는 분명히 상처가 없지만... 법원에서 원본을 제출하라고 하여도 방송국에서는 원본을 끝까지 제출하지 않았었습니다.
그리고 언니가 처음 말을 바꾼 뒤에 작성한 자필진술서에는 결정적으로 칼에 찔렸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경찰조사를 처음 받았던 9월9일 1회진술에서도 칼얘기는 없다가 갑자기
9월12일 2회진술에서 칼에 찔렸다고 하였습니다.
말이 됩니까. 3월달에 칼에 찔린 상처가 7월달에는 없다가 갑자기 9월달에 생겼고,
칼에 찔려 저런 흉터가 남았는데 처음으로 진술한 자필진술서나, 1회 진술에는 말하지
않았다는게 상식적으로 얘기가 되질 않는데도 무조건 방송에선 언니말은 다 맞다고 하였습니다.
또 대상포진에 걸렸던 등부분의 흉터를 보여주면서 방송에서는 ‘아줌마가 칼로 저를 찌르면서’라고 방송하였습니다. 하지만 언니가 법정에 나와서 말하길 ‘방송국에서 어떻게 캡쳐를
하셨는지 모르겠는데 이 사진을 보여줬으면 그런 얘기는 하지 않았을텐데, 이 사진은 대상
포진이라고 얘길 했는데요?‘라고 했습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게 다 거짓 방송이었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 아닙니까? 우리 가족에겐 지금 증거서류들이 라면박스로 2박스가 넘게
있습니다. 얼마만큼 우리 가족을 짓밟았는가를 알리고 싶을 뿐입니다.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방송에서는 칼에 찔려서 옷이 찢어진 부분과 상처부위가 일치하였고 피를 많이 흘렸다고 하였지만,
국과수 감정결과 옷이 찢어진 부위와 상처부위가 일치하지 않았고, 언니가 말한 목과 왼팔부분은 찢어진 부위도 없었고, 언니의 피는 전혀 나오지 않았습니다.
방송에서는 우리 가족이 조사 받는 장면등을 불법도청을 해가며 모든 내용을 촬영하였습니다. SBS팀장은 불법도청을 자기들의 노하우라고 하며 3년동안 해도 아무문제
없었다고 아주 당당하게 기자들에게 얘기까지 하였습니다.
또 9월9일 경찰서에서 찍은 언니의 다 나은 정강이 상처를 보여주며 제가 슬리퍼를 신고
차서 상처가 났다고 하였지만 방송에서는 좀더 자극적으로 방송하기 위해 7월3일 촬영한
차모서리에 찍혀 움푹파인 정강이 상처를 보여주면서 슬리퍼에 차였다고 방송하였습니다.
네티즌 여러분에게 다시 한번 비교하여 보여드리겠습니다.
<2008년7월3일 SBS촬영팀이 찍은 사진>
<2008년 9월9일 경찰이 찍은 사진>
위의 사진들을 보시고 판단해 주세요
위에 사진이 7월3일 촬영한 사진이고 밑에 사진이 9월9일 촬영한 사진입니다.
그 언니는 7월3일 촬영한 사진이 있는줄도 모르고 9월9일 촬영한 사진을 보고 2008년1월달에 슬리퍼로 차여서 이렇게 상처가 났다고 진술하였습니다.
하지만 딱딱하지도 않은 슬리퍼로 차여서 이렇게 상처를 만들수가 있겠습니까?
또 1월달에 맞았다고 하였는데 그때 맞은 상처가 낫지도 않고 이렇게 남아 있다는게 말이된다고 생각하세요? sbs는 이 말을 믿었단 말입니까.
정말 더 많은 사진들과 내용들을 얘기할 수 없어서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이런 거짓으로 꾸며진 내용들이 방송되고 난 뒤에 2008년10월7일 저희엄마는 구속되었습니다. 엄마가 구속되는 날에도 SBS피디는 웃음을 지으며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할말 없으세요?’ 엄마는 ‘ 이게 사실이 아니면 어떻게 할 거예요?’ 담당피디의 대답은 언제나 쉬웠고 당당했습니다. ‘ 손해배상 청구하세요.’
조사가 시작된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았고, 국과수 혈흔 감정결과도 나오지 않았고,
어떤 것도 확인되지 않은 상황에서 저희 엄마를 구속시켰습니다.
경찰에선 엄마를 구속시킨 날에도 저를 불러 조사를 하였습니다.
구속영장실질심사를 받으러 간 엄마는 경찰청이 아닌 경찰서에서 구속영장이 발부될 때까지
있었고, 그때 까지도 SBS피디는 좋아하며 그 과정을 모두 찍고 있었습니다.
제가 경찰청에 간 시각은 오후 1시 였고, 그때 우리 엄마는 구속영장이 발부될 때까지 유치장에 갇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비꼬우면서 비아냥 거리면서 절 조사했습니다.
경찰관들이요.
조사를 받던 중 조사관은 전화를 받더니 기쁜소식을 전해주는 것처럼 웃으며 ‘구속영장 발부됐데요.’
전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고, 울음이 나오려는 걸 참았습니다.
계속 조사를 받던 중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경찰관 한명이 오더니 다리를 꼬고 앉아 저에게 말했습니다.
‘인정하고 합의 보면되지, 엄마 감옥에다 넣어놓고 계속 이렇게 할거냐. 재판가면 몇 달 걸릴것 같냐. 엄마를 그렇게 계속 감옥에 두고 싶냐. 니네 집에서 애를 병x으로 만들어놨다. 걔가 거짓말 하겠어? 걔 눈이 거짓말 할 눈이야? 니가 16살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니가 지존파냐. 니 인생 이렇게 무너지고 싶어? 니네 엄마 봐라, 안했다고 하는데 왜 구속이 됐겠어. 합의해라.’
난 울었습니다. 참았던 눈물을 쏟아 냈습니다.
지금도 웁니다. 난 지금도 울고 있습니다.
가슴이 아프다는거 너무 아파서 숨도 못 쉬겠다는거 그때 처음 느꼈습니다.
난 그냥 계속 울었습니다.
그런데 경찰관은 계속 날 죽였습니다.
아무리 말해도 들어주지 않았고,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난 죄인이었고,인간이 아니었습니다.
날 쳐다보는 그 눈, 날 처참하게 짓밟았던 그 입을 그 사람들을 잊을 수 없습니다.
밤11시경까지 조사를 받았습니다.
아니라고 하는데 계속 받았습니다.
우리엄마는 내 엄마는 감옥에 있고, 난 조사를 받고 있고, 우리 아빠는 울고 있었습니다.
죽고싶었습니다. 정말요.
엄마가 보고 싶었고, 엄마한테 가고 싶었는데 날 계속 붙잡아두고 인정하라고 했습니다.
경찰관은 말했습니다.
‘인정 안하면 너 계속 조사받아야 돼. 그러니까 잘 생각해보고 내일 다시 와.’
다음 날도 받았습니다. 오후1시경부터 밤11시가 넘도록.. 똑같이요. 인정하라구요. 왜 인정 안 하냐구요.
엄마는 2008년11월3일 검찰에서 기소되었습니다.
2008년10월14일 방송3부가 나갔습니다.
3부가 방송되었을 때에도 엄마의 경찰수사는 끝이 나질 않았습니다.
하지만 방송에서는 수갑차는 장면을 내보내면서 마치 죄가 확정된 것처럼 방송했습니다.
그리고 언니가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난다는 내용을 방송하였지만, 10월14일에는 폐쇄병동에 여전히 입원되어 있었습니다. 12월 12일 이 사건으로 기자회견을 열어 기자들이 취재가 시작되니까 부랴부랴 이날 퇴원시켰습니다.
저희엄마는 2008년10월7일부터 182일간 구속되어 있었고, 1년여 많은 증인들이 나오고 재판을 하여서 춘천지방법원에서 2009년9월18일 무죄판결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에 검사가 항소를 하였고, 서울고등법원에서 2010년5월14일 검사항소에 대해 이유 없다고 기각하여서 현재는 무죄확정판결을 받았습니다.
저희 가족은 그동안 악몽 같은 시간 속에서 살았습니다.
엄마를 그 무서운 곳에서 꺼내기 위해 우리는 수많은 일들을 해야 했고, 실망도 많이 하고 매일 눈물을 흘리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냥 죽어버릴까? 내가 죽으면 이 모든 것이 밝혀지고 엄마가 나올 수 있을까?
이 모든 것에 한 사람이 희생되어야 한다면 그것이 내가 되어도 좋아.
엄마만 나올 수 있다면..
밝혀질 것이다. 우리아빠는 항상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맞아요. 이렇게 밝혀졌습니다.
우리엄마가 나왔습니다. 엄마를 안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게 지금 현재 우리가족에게 달라진 가장 큰 하나입니다.
하지만 저희가족은 아직도 그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휴게소는 도저히 그곳에서 살 수가 없어서 지금 지방에 내려와 겨우겨우 살아가고 있고,
엄마는 아직까지도 우울증에 걸려 약을 먹지 않으면 잠을 자지 못해 힘들어 하고 아빠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한 채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학교도 가지 못한 채 집에서 아무것도 못하고 있는 상태이고 매일매일 SBS피디와 팀장 그리고 경찰들을 생각하며 아파하고 있습니다.
방송이 1,2,3부로 나갔지만 저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말해도 저희 말은 전혀 믿어주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재판이 끝나고 사실을 말하고 싶었지만 검사가 다시 항소를 해 재판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고, 결과 무죄확정판결을 받았기에 이렇게 글을 씁니다.
언론사에게 이러한 사실들을 알렸지만 다른 언론사에서는 SBS라는 거대 방송국을 상대로는 할 수 없다, 같은 언론사에서 어떻게 같은 식구를 죽일 수 있느냐고 얘기 합니다.
이 사실을 알리게 되면 SBS 거짓이 들통나는 것이기 때문이죠.
그리고 기자들이 이 사건으로 기사를 쓰기만 하면 SBS팀장은 기자를 회유와 협박을 하여 기사를 내리라고 한답니다. SBS팀장은 기자에게 ‘법무팀에서 가만히 있지 않는다.’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수 있다’ 며 ‘SBS에서는 당신 기사를 보고 기사를 퍼와 게시판에 올리는 네티즌들의 ID추적까지 한다’ 고 하고 불법도청 부분에 대해서는 ‘자신들의 노하우’ 라고 얘기한 내용도 녹음자료가 있습니다.
이러한 얘기까지 하며 매번 이런식으로 대처하는 팀장의 태도를 어떻게 받아드려야 하나요?
SBS방송으로 얼마나 많은 시청자들이 그 방송을 보면서 울고 웃나요?
그러한 방송에서 한 가정을 짓밟고, 온 국민들을 속이고도 죄책감 조차도 없이 당당히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지금에 와서 SBS팀장은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을 한 답니다.
‘왜 언론플레이를 하려고 하느냐?’
‘억울하면 법으로 하면되지.’
‘우리는 방송에서 가해자라고 한 적 없다.’
‘그래도 폭행사실은 있지 않냐.’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언론플레이라고요? 그건 당신들이 잘 하는거 아닌가요?
어떤 방법으로든 이 사실을 알리고 싶었고 이 사실들을 기자분들에게 제보한 것뿐인데
그것이 죄인가요?
언론이요? SBS같은 거대한방송사와 어떻게 저희처럼 힘없고 가난한 사람이 싸울수 있나요?
우리 가족 모두를 이렇게 만들어놓고 온 국민들에게 죄인으로 점 찍어놓고.
이보세요. 사람 죽여놓고 법으로 하세요 하면 다인가요?
그 방송의 대단한 권력으로 이렇게 짓밟아도 됩니까?
시청률 때문에 돈 때문에 악의적으로 조작하고 사실 확인도 안하고 방송해놓고 아무렇지 않아요?
방송에서 가해자라고 한 적 없다구요? 거짓말 하지 마세요. 방송 다시 보세요.
그럼 네티즌들이 왜 그 방송보고 열받아서 저희 집 사진까지 다 올리고 시청자게시판에 그렇게 많은 글들이 올라갔는데요?
그리고 폭행사실은 있지 않냐고 하는것 정말 웃기네요
언니의 계속적인 도벽과 거짓말 때문에 엄마가 너무 화가나서 뺨을 한 번 때린적이 있고,
씻지를 않아서 물을 뿌린 적이 있다고 경찰에서 조사 받을 때 사실대로 얘기했더니
법원에서 판사님이 그 부분에 대해 벌금 백만원을 내라고 했습니다.
만약 제가 그렇게 언니처럼 거짓말을 하고 물건과 돈에 손을 댄다고 한다면 저역시 엄마는
때렸을 겁니다. 그 언니는 집에서도 거짓말과 도둑질을 자주해서 친할머니나 자신의 언니한테 맞은적이 있다고 얘기 했었었는데 그럼 그 친할머니, 친언니한테도 벌금을 물어야 하는것 아닌가요?
방송에서는 4년간 언니가 칼과 흉기 등으로 찔리고 폭행 당해서 피를 많이 흘렸다는 내용으로 방송했는데. 방송 다시보고 얘기하세요.
SBS 긴급출동sos24 제작팀장과 담당피디를 그냥 이대로 두어야 하나요.
방송국이 그렇게 대단하고 방송국에 다니면 뭐든 자기들 마음대로 할 수가 있는 건가요?
어떻게 우리 가족에게 이렇게 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시골에 살고 가진 것 없는 저희같은 사람은 죽으라고 돌을 던지고 짓밟아도 된단 말인가요
힘도 없고 빽도 없어서 누구한테 얘기를 해야 그 사람들을 벌할 수 있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그 당시 16살 소녀였습니다.
SBS방송에서 말하는 ‘찐빵소녀’ 그 언니는 당시 21살 이었구요.
진정한 소녀는 저입니다.
SBS방송은 제목부터 악의적으로 만들어 마치 불쌍한 소녀가 그렇게 폭행당하면서 지내왔다고 방송하였던 것입니다.
지금 현재 SBS 긴급출동sos24에서 구해준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고 도벽이 있는 그 언니는 무고죄와 명예훼손죄로 고소당하여 검찰청에서 조사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 언니의 형부는 법정에 나와서 거짓말 한 것이 탄로가 나서 모해위증죄와 명예훼손죄로 고소당하여 조사 받고 있는 상태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한 말이 거짓이라면 어떻게 방송에서 피해자로 나온 사람이 고소를 당할 수
가 있겠습니까?
진실은 언젠간 밝혀진다고 저희 아빠가 저에게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진실이 밝혀진 지금 달라진 게 뭐가 있습니까? 여전히 제작팀장과 담당피디는 sbs에 잘 다니고 있고 잘 먹고 잘살고 있는데 우리 가족만 폐인이 되어서 가슴 아파 하면서
피눈물을 흘리며 하루하루 살고 있습니다.
저희 가족이 겪은 이러한 일들이 누구에게나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방송이 계속 존재하는 한 어느 누구도 예외일수는 없습니다.
제작 팀장과 담당 피디 같은 사람이 거짓으로 만들어서 방송하는 이런 프로그램을
아무 힘이 없다고 가만히 보고만 있어야 하나요?
이대로 당하기만 한다면 차라리 우리 가족은 죽는 게 낫지 않을까요?
이 엄청난 사실을 모든 국민들이 알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이제는 여러분들이 저희가족을 살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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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가 다음 아고라에 나온 전문이네요...
원래 방송이라는게 편집하기 나름이고.. 시청자 입장에서는 방송에서 하는 얘기를
고지곧데로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언론의 힘이 무섭긴 무섭네요. 한 가정을 풍비박산을 내놨네요
권력자들이 언론을 잡으려는 이유를 다시한번 통감합니다.
마지막에...
"이제는 여러분들이 저희가족을 살려주세요" 이말이 참~ 가슴에 와닿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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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혐짤] 사형집행장면
영화 집행자에 한장면입니다
우리나라는 1997년 12월 30일, 23명의 사형수를 마지막으로 사형집행 했습니다.
이후 12년간 사형집행이 한건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 사형수에 숫자는 대략 63명으로 파악돼고있습니다
사형수 63인의 죄목은 다양하다. 그러나 전원이 살인을 저질렀으며 범행수법도 매우 잔혹하다는 공통분모가 있다. 대검찰청 기준으로 범죄유형을 구분해 보면 살인 28명,강도살인 23명,유괴살인 5명,*살인 3명,존속살인 2명,방화치사 2명 등이며 1975년 인혁당 사건처럼 공안사범은 1명도 없다.피해자수로 살펴보면 50명(79%)은 2명 이상을 살해했으며 이중 22명은 3명 이상을 숨지게 했다. 13명(21%)은 1명만 살해했으나 사체손괴,암매장,유괴 등 반인륜적 범죄행각을 벌였다. 자수했는데도 사형이 선고된 사람은 없었고,재판 당시 뉘우치는 모습을 보인 경우도 많지 않았다.◇사회에 충격을 준 사건=지난해 6월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된 유영철은 아직까지도 국민들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는 사형수다. 2003년 9월부터 10여달 동안 여성과 부유층 노인 등 20명을 연쇄살인한 그는 부유층과 여성에 대한 증오가 범행동기라고 밝혀 더 큰 충격을 줬다.영생교를 이탈하거나 교주를 비방한다는 이유로 신도 6명을 죽인 영생교 간부도 있다. 교주 조희성은 재판 도중 병으로 숨졌으나 이 간부에 대해 대법원은 “범행계획이 치밀한데다 수법이 잔혹해 극형을 면할 수 없다”며 사형을 확정했다.1996년 이른바 ‘막가파’ 사건의 주범도 수감 중이다. 당시 20살이던 그는 납치살인극으로 악명을 떨쳤던 ‘지존파’를 모방한 폭력조직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유일하게 군법에 의해 사형을 선고받은 수감자는 아버지의 사업실패에 고민하던 중 상관으로부터 심한 질책을 받게 되자 동료 사병에게 총기를 난사,3명을 죽였다. 군인에 대한 사형집행은 1985년 9월 이후 한 명도 없다.이밖에 1994년 재산상속을 받기 위해 부모를 죽인 사형수와 1996년 페스카마호 선상반란사건의 주범격인 사형수,1998∼2000년 부산·경남 지역에서 강·절도를 하면서 9명을 살해,1970년대 김대두(17명) 이후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것으로 지탄을 받았던 사형수도 수감 중이다.◇반인륜적 범행=사형수 중 상당수는 금품을 빼앗기 위해 강·절도를 하다 전혀 모르는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였다. 한 사형수는 밤에 혼자 지나가는 불특정 여성 10명에게 몰래 접근,둔기로 머리를 내려쳐 2명을 죽이고 8명을 다치게 했으며,다른 사형수는 전세금을 마련한다며 불과 10여일 사이에 무고한 여성 6명을 죽였다. 법원은 당시 이같은 범행에 “사람 죽이는 것을 재미로 알았고 인간성마저 포기했다”라고까지 표현했다.내연녀외에 3살난 내연녀의 아들까지 숨지게 한 사형수,자신의 가석방을 도와준 고향선배를 “돈을 빌려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숨지게 한 사형수 등 돈이나 여자 문제가 얽힌 보복성 살인에서는 비정함이 더했다.용의주도한 범행도 있었다. 부모를 살해한 사형수는 범행 전 침대 밑에 흉기를 숨겨뒀고 범행 후에는 집에 불을 질렀다. 어떤 사형수는 경찰의 수사망이 좁혀들어오자 지능이 떨어지는 사람에게 혐의를 뒤집어 씌우려 하기도 했다.◇신중해진 사형 판결=사형수 63명의 범죄내용을 살펴보면 1998년 이전 범죄 가운데는 현재라면 무기징역 정도가 되지 않을까 의문이 드는 범죄가 몇몇 눈에 띈다. 이는 1996년 헌법재판소가 사형제도에 대한 위헌심판청구에 대해 7대 2의 합헌 결정을 내린 이후 사법부의 추세가 극히 제한적인 사건에 대해서만 사형을 선고하고 있는 방향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한 대법원 판사는 “1998년에 피해자수,재범 우려,성장과정,지능 등 사형 선고요건을 매우 까다롭게 규정해놓은 대법원 판례가 나오면서 이후 사형선고가 더욱 신중해졌다”고 말했다.2001년 3월9일에 대법원이 선고한 판결(사건번호 2000도5736)을 보면 이런 점이 여실히 나타난다. 1990년대 중반까지 선고요건 중 하나로 적시됐던 ‘범죄의 일반적 예방의 견지에서 극형이 불가피하다고 인정되는 경우’라는 조건이 사라졌다. 범행의 내용 보다 사건으로 초래된 사회적 충격을 고려해 사형 판결을 내리지는 않는다는 의미다.실제 1심 형사사건의 연도별 사형인원수를 보면 1995∼2001년까지는 매년 10∼23건에 이르렀으나 2002년에는 7명,2003년 5명,2004년에는 8명으로 크게 감소했다. 2,3심을 거치며 사형이 확정된 사형수는 2002년 2명,2003년 5명,2004년 2명 등에 불과해 55%가 2,3심에서 무기징역 이하로 감형됐다. 1970∼1990년 사이 20년 동안 1심 사형 판결이 2,3심에서 바뀐 경우가 4.3%에 불과하다는 점과 비교해 보면 상당히 신중해진 것이다.
레오c작성일
2009-12-04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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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대한민국을 뒤흔들었던 대표적인 살인사건들
대한민국을 뒤흔들었던 대표적인 살인사건들[1960~2008년]
1960년대 고재봉 사건강원도 인제에서 근무하고 있던 이득중 중령의 집에 침입한 고재봉은이중령과 부인, 자녀들과 가정부. 총 6명을 들고 있던 도끼로 처참하게 살해한다.- 그 직후 범행 24일만에 서울에서 상인의 신고로 붙잡히게 되는데 조사결과그는 원래 이중령이 관사로 오기 전에 거주하고 있던 박모 중령을 죽이려고 했던거라고진술 하게 된다.- 박중령이 근무하던 시절 관사에서 근무하고 있던 고재봉은 집안에서 어떤 물건을가지고 나가려다 가정부에게 발각되고 이로 인해 징역형을 살게 된다.그후 감옥내에서 박중령을 죽이겠다고 마음 먹고 출소 후 찾아가서 관사내의사람들을 전부 죽이게 되는데 그때 머물던건 1달전에 새로 온 이중령의일가였다고 한다.
1970년대 김대두 사건1975년 9월경 일주일정도 되는 사이에 평택,양주,시흥,수원등의 4개지역의외딴집에서 일가족이 글로 표현하기도 참혹할 정도로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노인 어린이 갓난아기라 할것도 없이 생명이란게 있으면 무작정 죽이는 그런 사건이벌어진것이다 당시 신문의 1면에는 [야수의 짓] 이라는 기사가 실렸으며 현장에 남긴 단서로경찰은 당시 교도소에서 출소한지 얼마안되는 김대두(당시 25세)를 검거하게 된다.- 피해자들은 두개골이 함몰되거나 전신이 둔기로 인해 처참하게 짓이겨진 상태로숨지게 되며 그중에는 생후 3개월짜리 갓난아기도 포함되어 있었다. 돈이 없어서 범행을 저질렀다는 그가 빼앗은 돈은 모두 포함해서 3만원. 범인 김대두는 사형을 선고받고 다음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된다.
1982년 우범곤 순경 사건1982년 4월 26일에 벌어진 우범곤 순경 총기 난사사건은 우리나라 뿐만이 아니라세계에서 손꼽힐정도로 짧은시간에 대량의 피해자를 낸 사건으로 기록되어있다.- 1982년 4월 26일 저녁 8시 30분경 경남 의령군 궁유면 저서에서 근무하던우범곤 순경은 만취상태였다. 그 직후 저서와 예비군무기고에서 수류탄 7발과카빈소총 2정, 실탄 180발을 들고 나와 주민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기 시작했다. 첫번째 희생자는 우체국에서 근무하던 전화교환원이었는데 이걸로 인해 마을은외부로부터 고립된 상태가 되었고 마을을 돌아다니며 불이 켜진집을 보는대로들어가 닥치는대로 총기를 난사하고 수류탄을 던지며 사람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피해자중에는 생후 1개월된 영아도 있었는데 8시간을 그렇게 마을을 배회하며사람들을 죽이고 다녔다고 한다. 주민의 신고로 의령경찰서는 뒤늦게 사살명령을 내리고 기동대를 출동시켰지만이미 우순경은 자취를 감춘뒤였고 다음날인 27일 오전 5시 30분경 평촌리의외딴 농가에 들어가 수류탄 2발을 터뜨려 자폭하게 된다. 추후에 밝혀진 사건 동기는 평소 술버릇이 좋지 않던 우범곤 순경이 내연의 처와말다툼을 벌이고 직장내에서 좌천되는둥 평소의 불만이 한꺼번에 터지면서일어난 우발적인 사건으로 경찰은 결론지었다.- 이 사건으로 총 56명이 사망하고 34명이 부상.
1989년 심영구 사건당시 화성연쇄살인사건으로 언론에는 별로 다뤄지지 않았지만이 또한 대표적인 살인사건으로 꼽기에는 부족함이 없는듯 하다.- 89년 당시 출소를 마치고 나온 심영구는 수중에 가진 돈이 떨어지자금전을 목적으로 범행을 시작하게 되는데 총 9차례에 걸쳐서 서울과성남, 구리 지역을 배회하며 사건을 저지르게 된다.- 이 사건의 대부분은 금전을 목적으로 한 살인이 대부분이지만 평소사진을 무시하던 지인을 단숨에 죽이기도 한 경우도 있었다.- 총 8명이 이 사건으로 인해 사망했으며 3명은 중상을 입었다.
1989~1991년 화성 부녀자 연쇄 살인사건가장 유명한 살인사건이면서 결국 영구 미제사건으로 남은화성 부녀자 연쇄 살인사건4년 7개월간 경기도 화성 태안일대에서 일어난 10차례의 부녀자 *살인사건으로 2003년에는 영화 '살인의추억'으로 다뤄지게 된다.- 살인사건의 피해자들은 대부분 스타킹이나 양말같은 피해자들의 의상으로목이 졸린채 살해됐으며 음부에서 복숭아조각 등이 나와서 사람들을 경악하게 했다.- 역대 최대 경찰병력이 동원된 사건으로 기록되었으며 여기에 투입된경찰병력만 연인원 205만명이며 용의자와 참고인을 다 합치면 21280명이라고 한다.지문대조 40116명, 유전자 dna 분석 570명, 모발감정 180명의 기록을 남겼다.총 수사기록은 캐비닛 5개 분량.그럼에도 불구하고 범인을 검거하는데 실패했고 살인사건 공소시효가 15년인우리나라에서는 2006년에 결국 영구 미제 사건으로 남게 된다.- 유일하게 해결된 사건은 8차 살인사건인데 이는 현장에 남아있던 모발과범인의 모발이 일치해서 해결된 경우였으며 다른 살인사건과는 관련이 없는걸로판명나게 된다.- 사건의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다.① 피해자가 모두 여성이다.② 피해자가 젊은 층에 한정되지 않고 52세(7차)·69세(10차)·71세(1차) 등 다양하다.③ 피해자의 음부가 크게 훼손되었다(4·6·7·9차).④ 사건현장이나 피해자의 음부 안에서 정액 또는 머리카락·담배꽁초 등이 발견되었다.⑤ 피해자의 대부분이 목이 조여 살해되었다.⑥ 피해자의 국부에서 9개의 복숭아 조각이 나오고, 가슴이 19차례나 칼로 도려질정도로 범행 수법이 잔인하고 대범하다.- 현재까지 밝혀진 범인의 신원정보1) 신장은 약 165~170cm정도의 호리호리한 체형2) 당시 20대 중반의 외모, 현재는 40대3) 혈액형은 b형- 현장에서 찾아낸 범인의 유전자 정보는 현재도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보관되어 있어서 추후에라도 확인이 가능하다고 한다.
1988년지강헌 사건
1988년 10월16일 낮 12시35분께 경향신문 사회부 기자였던 김동률박사(현 kdi근무)는 인질극이 벌어지고 있던 서울시 서대문구 북가좌동 고씨네 바로 옆집에서 경찰과 동행 취재 중이었다. 이날 새벽부터 경찰과 대치 중이던 인질범 가운데 2명은 권총 자살했고 주범 지강헌은 깨진 창 유리로 자신의 목을 찔렀다. 놀란 인질이 비명을 질렀고 경찰이 들어가 지강헌에게 총을 쏘았다. 지강헌은 몇 분 더 숨을 버티다 세브란스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사망했다. 9일 동안 서울 시민을 경악과 충격으로 몰았던 탈옥수 지강헌 사건은 그렇게 끝났다.
1993년 지존파 사건원래 이 조직의 이름이 지존파로 알고 계시는 분들이 많은데 사실원래의 명칭은 '마스칸' 이라고 합니다.마스칸은 희랍어로 [야망]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당시 사건을담당한 형사분께서 "야망을 위해 남을 죽이는건 안된다" 라고 생각하셔서대신할만한 단어로 '지존'을 선택했고 세상에는 지존파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1993년 7월부터 1994년 9월까지 김기환, 강동은, 문상록, 강문섭, 백병옥, 송봉호이경숙 이렇게 7명으로 구성된 언론에 알려진 지존파의 일원들이 저지른살인사건은 당시 나라를 발칵 뒤집을 정도로 잔혹한 사건이었다.- 평소 자신들이 돈없고 교육도 못받는둥 여러모로 사회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김기환이 자신의 학교 후배, 교도소 친구등 주변의 인물들을 끌어모아 만들었고그들은 소위 말하는 돈있는 사람들에게 복수를 한다는 생각으로 현대백화점의고객명부를 입수 범행대상으로 삼게 된다.- 1993년 8월에는 조직에서 이탈한 송봉호를 살해하고 그후에 4명을 추가로 살해총 5명을 살해하게 된다.- 이들은 완전 범죄를 위해 아지트내에 감옥과 시체를 태우기 위한 소각로도설치했으며 시체를 태울때는 바베큐를 구워서 냄새를 지우려는 치밀함도 보였다.또한 이들은 서로 인육을 나눠먹으며 조직의 단결을 돈독히 했다고 한다.- 1995년 11월 강제로 조직에 참여하게된 이경숙을 제외한 조직원 5명은 전원사형되었으며 다른 조직원들이 마지막에 참회하고 죄를 뉘우치는 반면 두목인김기환 만큼은 자신을 이렇게 만든 사회와 가정에 대해서 불만을 토해냈다고 한다.
1994년 온보현 사건 한창 지존파로 시끄럽던 1994년에 일어난 소위 '살인택시 온보현' 이라고 불렸던 사건.- "내 나이만큼 죽이려고 했다" 라는 발언으로 언론을 경악하게 만들었던 그는과거 자신이 일했던 택시회사에서 택시를 훔치고 번호판을 위조하게 된다.그 후 택시를 타고 사람들을 태우고 다니며 2명을 살해하고 지존파가 검거된뒤에자신에게 수사망이 좁혀오자 결국 자수하게 된다.- 경찰에게 조사받는 중에 "지존파와 자신을 비교하고 싶으니 같은 감방에 넣어달라"라는요구를 해서 형사들을 당황스럽게 했다고 한다.- 법원은 온보현에게 사형을 구형하고 1995년 11월 2일 지존파 일당들과 함께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된다.
1996년 막가파 사건'막가는 인생' 이라는 뜻으로 내건 막가파 사건은 지존파 사건과 비슷하게'외제차를 타고 다니는 돈많은 사람들은 다 죽이고 싶었다' 라는 최정수가조직원 8명을 모아서 만든 단체가 저지른 사건이다.- 이들은 양은이파 두목 조양은과 지존파의 사건들을 참고로 해서 범행계획을세우게 되고 주 타겟은 부유층이었다고 한다.- 이 사건이 유명해진건 다름이 아니라 사람을 산채로 땅에 묻어서 죽인이른바 생매장으로 유명해지게 됐는데 이 생매장으로 인해 두명의 여성이살해당하게 되었다.
1997년신창원사건
1997년 탈옥한 것으로 유명하다. 대한민국에서 범죄자의 예로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체포 당시 입었던 화려한 빛깔의 쫄티가 유행하기도 했다.
1999년 영웅파 사건조직폭력배에 속한 이순철이 후배조직원이 싸가지 없게 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자신의 조직원을 대동해서 집단으로 폭행하게 된다.이어 혼절한 조직원을 자신들의 합숙소로 끌고가 둔기로 수차례 구타후에흉기로 찔러서 살해하게 된다.- 이후 "죽을때까지 비밀을 지킨다" 라는 의식에서 죽은 조직원을 토막낸뒤에간을 꺼내 술안주로 나눠먹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나라안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당시 경찰의 말에 따르면 "주검의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훼손되어서 dna감식을 통해 신원을 파악해야 할정도"
정두영사건(2000년)
1996년 6월부터 2000년 4월까지 9명의 시민을 살해한 연쇄살인범이다. 정두영은 지난 1999년 6월부터 강도행각을 벌이면서 17명을 살상하였다. 정두영은 18세 때인 지난 1988년 불심검문 중인 방범대원을 살해, 11년 간 복역하고 출소한 뒤 곧 바로 절도죄로 붙잡혀 다시 6개월 동안 복역한 뒤 1999년 3월 출소했다. 이후 10개월 동안 16번의 강도 짓을 했고 그 과정에서 9명을 무참히 살해했다. 주로 부산, 울산과 경남지역을 활보하며 살인강도 행각을 벌였고 천안에서 인질강도를 저지르다 체포되었다.
정남규사건(2004년)
2004년 1월부터 2006년 4월까지 13명의 시민을 살해한 연쇄살인범이다. 2004년 1월, 경기도 부천시에서 윤기현(11세)과 임영규(10세)를 납치 살해하는 등, 경기도와 서울 일대(주로 서남부 지역)를 돌아다니며 심야에 귀가하는 여성들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하거나 거주지에 침입하여 살인과 방화를 함께 저지르는 등 연쇄살인 행각을 벌여 당시 언론에서는 '서울판 살인의 추억' , '비오는 목요일밤의 괴담'이라는 등 다소 선정적인 보도를 했다.
2006년 4월 22일에 체포되었으며, 자백에 의해 유영철이 저질렀다고 주장했던 이문동 살인 사건의 진범임이 밝혀졌다. 2006년 6월 7일에 구속 기소되어, 9월 21일에 사형을 선고받았고, 2007년 4월 12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어 현재 서울구치소에 수감중이나, 김영삼 정부 말기인 1997년 12월을 마지막으로 아직까지 사형은 단 한건도 집행되고 있지 않은 실정이다.
유영철사건(2003-2004년)
20명을 연쇄 살인한 범죄자이다.
서울에서 노동일을 하는 부모 사이에 3남1녀 중 삼남으로 태어난 유영철은 중학교 1학년인 14살때 아버지가 지병인 정신분열성 간질환으로 사망하자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했다. 서울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뒤 공업고등학교 2학년을 다니던 중 절도사건으로 소년원에 수감되어 학업을 중단하고 떠돌이 생활을 했다. 유씨는 21살 때인 1991년 마사지 안마사인 황모씨와 결혼, 11살된 아들까지 두었으나 이후 14차례 특수절도 및 성폭력 등으로 형사입건 되는 등 11년을 교도소에서 보내 사회와 철저히 격리되었다. 2000년 3월 특수절도 등으로 전주교도소에 수감 중 2002년 5월께 부인이 이혼소송을 제기하여 일방적으로 이혼당했으며 이후 말을 하지 않고 대인기피 현상을 보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강호순사건(2008년)
충청남도 서천군 출신으로 2009년 1월 24일 경기도 서남부에서 연쇄적으로 여성을 납치하여 살해한 것으로 지목된 범인이다.
2009년 1월 27일에 2008년 12월 경기도 군포시에서 실종된 여자 대학생을 살해한 혐의로 경찰에 붙잡혔다. 이후 추가 수사에서 2006년 12월부터 2008년 12월까지 경기도 서남부 일대에서 여성 7명이 연쇄적으로 실종된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됐다. 처음에는 연쇄 살인을 부인하다 경찰이 증거를 제시하자, 군포 여대생을 포함해 7명을 살해했다고 털어놓았다.
강호순이 살해했다고 밝힌 부녀자는 노래방 도우미 3명, 회사원 1명, 주부 1명, 여대생 2명이었다. 추가로 2009년 2월 17일에는, 2006년 9월 강원도 정선군에서 정선군청에서 근무하던 공무원 윤 모(여성, 당시 23세)를 살해했다고 자백했다.
2008년 논현동 고시원 방화 및 살인 사건
2008년 10월 20일 오전 8시 15분 경 d고시원에서 2003년부터 거주하던 정상진(1978년생, 당시 30세)이 논현동의 d고시원에 화재를 일으킨 뒤, 화재연기를 피해 복도로 뛰어나온 피해자를, 미리 준비하고 있던 칼로 피해자들을 무차별적으로 찔러 살해 또는 중상을 입힌 사건이다. 이번 방화로 고시원의 세 층이 일부 전소했으며, 피해자는 중국동포 이월자(50세)와 서진(20세)을 비롯해 사망자 6명, 중상 4명, 경상 3명이 발생했다.
기타주요살인 사건
김해선 살인사건 연천군부대 총기 난사사건 화성 연쇄 살인 사건 안양 초등학생 납치 살해 사건 2008년 논현동 고시원 방화 및 살인 사건 안양 관양동 존속살해사건 강화도 모녀 납치 살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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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글로발 삼성 구하기, 보수/수구/우파/우익/극우까지 올인하나?
글로발 삼성 구하기, 보수/수구/우파/우익/극우까지 올인하나? [약자만때려잡는쥐님 편집]
언소주에서 광동제약을 1호 불매기업 지정한뒤 광동은 하루만에 백기,이후 삼성그룹을 2호 불매기업 지정하고 나자 호떡집에 불난듯 합니다
[검찰, 법원]김경한 장관의 수사지휘서 들통 (임채진 총장 외압설 뒷받침)검찰의 출국금지, 구속, 집과 직장 압수수색 등으로 화끈하게 김경한 장관의 지시 이행법원도 구속영장, 압수수색영장 발부로 지시(?) 이행이림판사, 언소주 1기 운영진 24명 전원 유죄 판결이림판사, 외압은 절대 없었고 진실과 법리에 따라 판결했다고 주장검찰, 언소주 2기 대표 피의자로 소환 결정
[조중동문]좌파, 조폭, 광고주 협박단체, 광고주 협박꾼, 얼치기 좌파 단체, 매국노,중대 범죄행위, 자살특공대식 불매운동, 광고테러, 천방지축, 망나니짓,
행패, 조폭적 논리, 사회적 린치 등 막말/극언 쏟아내..
특히 "세금도 쥐꼬리만큼 내는 사람들" "언소주 지지층은 구매력이 떨어진다"중앙은 좀 조용하죠? 이유가 뭔지 아시나요?사설에서 "불매운동은 한 기업이 반사회적인 일을 저질렀거나명백히 도덕성을 상실했을 때에야 정당성을 가진다"고 했었죠..삼성그룹이 불매대상으로 지목되자 할말이 없나 봅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변호사들, 공정언론시민연대, 바른사회시민회의]소비자 운동을 빙자한 정치운동이고 언론의 자유에 대한 중대한 침해라며 검찰 고발
[한국광고단체연합회]언소주 중단 안하면 고발하겠다
[한나라당, 자유선진당]한나라당 김성조 "이를 제재하는 것은 정당하다"한나라당 안상수 "업무방해죄 성립, 그런 행위는 실정법에 의해 처벌 받을 수 있다"자유선진당 박선영 "상식과 양심은 실종되고 막가파와 지존파만이 활개치고 있다" "막가파도 이런 막가파가 없다"
[자유기업원]기업에 대한 적대적 행위는 경영활동의 자유를 억압하는 일기업의 이미지를 손상시키고 기업 활동을 위축시키는 일불매운동은 순수한 소비자 운동이 아닌 좌파 정치운동의 또 다른 모습이라고 지적
[한국경제연구원]언소주의 특정기업 제품 불매운동에 대해 정당성을 확보하기 어렵다고 비판
[한국광고주협회, 방송통신위원회]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한국광고주협회로부터 현재 광고주불매 운동을 벌이고 있는
언소주의 온라인 카페 불법성에 대한 심의와 카페 운영 제한을
공식 요청받았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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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도 쥐꼬리만큼 내는 사람들이고, 구매력도 떨어지는데.. 너무 오바하는거 아녀?
호떡집에 불난 것도 아니고 아주 가관입니다
글로발 삼성구하기, 보수/수구/우파/우익 완전 몰빵으로 다 나섰고이제 곧 보안사와 국정원, 마지막으로 청와대만 나서면 되는겨?
내가 내 돈 가지고 불매운동을 하든, 구매운동을 하든 뭔 상관인겨?
대한민국에서 삼성과 싸워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언소주는, 소비자는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언소주 삼성불매펀드 2주만에 15억 돌파했군요(나도 수백만원 되는데)http://cafe.daum.net/stopcjd
하루에 1억씩이면 1년이면 365억인데..
언소주 회원 아닌 나 처럼 실천하는 사람들 아마 2~3배 정도 있지 않을까..
그럼 1년이면 700~1,000억 정도?? 좀 많네..
치열한 국내시장에서 시장점유율 1% 올리려면 수십억이상 마케팅비용 필요.. 이상 혼자 생각이었슴..
가자서작성일
2009-06-27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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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대한민국을 뒤흔들었던 대표적인 살인사건들
대한민국을 뒤흔들었던 대표적인 살인사건들[1960~2008년]
1960년대 고재봉 사건강원도 인제에서 근무하고 있던 이득중 중령의 집에 침입한 고재봉은이중령과 부인, 자녀들과 가정부. 총 6명을 들고 있던 도끼로 처참하게 살해한다.- 그 직후 범행 24일만에 서울에서 상인의 신고로 붙잡히게 되는데 조사결과그는 원래 이중령이 관사로 오기 전에 거주하고 있던 박모 중령을 죽이려고 했던거라고진술 하게 된다.- 박중령이 근무하던 시절 관사에서 근무하고 있던 고재봉은 집안에서 어떤 물건을가지고 나가려다 가정부에게 발각되고 이로 인해 징역형을 살게 된다.그후 감옥내에서 박중령을 죽이겠다고 마음 먹고 출소 후 찾아가서 관사내의사람들을 전부 죽이게 되는데 그때 머물던건 1달전에 새로 온 이중령의일가였다고 한다.
1970년대 김대두 사건1975년 9월경 일주일정도 되는 사이에 평택,양주,시흥,수원등의 4개지역의외딴집에서 일가족이 글로 표현하기도 참혹할 정도로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노인 어린이 갓난아기라 할것도 없이 생명이란게 있으면 무작정 죽이는 그런 사건이벌어진것이다 당시 신문의 1면에는 [야수의 짓] 이라는 기사가 실렸으며 현장에 남긴 단서로경찰은 당시 교도소에서 출소한지 얼마안되는 김대두(당시 25세)를 검거하게 된다.- 피해자들은 두개골이 함몰되거나 전신이 둔기로 인해 처참하게 짓이겨진 상태로숨지게 되며 그중에는 생후 3개월짜리 갓난아기도 포함되어 있었다. 돈이 없어서 범행을 저질렀다는 그가 빼앗은 돈은 모두 포함해서 3만원. 범인 김대두는 사형을 선고받고 다음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된다.
1982년 우범곤 순경 사건1982년 4월 26일에 벌어진 우범곤 순경 총기 난사사건은 우리나라 뿐만이 아니라세계에서 손꼽힐정도로 짧은시간에 대량의 피해자를 낸 사건으로 기록되어있다.- 1982년 4월 26일 저녁 8시 30분경 경남 의령군 궁유면 저서에서 근무하던우범곤 순경은 만취상태였다. 그 직후 저서와 예비군무기고에서 수류탄 7발과카빈소총 2정, 실탄 180발을 들고 나와 주민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기 시작했다. 첫번째 희생자는 우체국에서 근무하던 전화교환원이었는데 이걸로 인해 마을은외부로부터 고립된 상태가 되었고 마을을 돌아다니며 불이 켜진집을 보는대로들어가 닥치는대로 총기를 난사하고 수류탄을 던지며 사람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피해자중에는 생후 1개월된 영아도 있었는데 8시간을 그렇게 마을을 배회하며사람들을 죽이고 다녔다고 한다. 주민의 신고로 의령경찰서는 뒤늦게 사살명령을 내리고 기동대를 출동시켰지만이미 우순경은 자취를 감춘뒤였고 다음날인 27일 오전 5시 30분경 평촌리의외딴 농가에 들어가 수류탄 2발을 터뜨려 자폭하게 된다. 추후에 밝혀진 사건 동기는 평소 술버릇이 좋지 않던 우범곤 순경이 내연의 처와말다툼을 벌이고 직장내에서 좌천되는둥 평소의 불만이 한꺼번에 터지면서일어난 우발적인 사건으로 경찰은 결론지었다.- 이 사건으로 총 56명이 사망하고 34명이 부상.
1989년 심영구 사건당시 화성연쇄살인사건으로 언론에는 별로 다뤄지지 않았지만이 또한 대표적인 살인사건으로 꼽기에는 부족함이 없는듯 하다.- 89년 당시 출소를 마치고 나온 심영구는 수중에 가진 돈이 떨어지자금전을 목적으로 범행을 시작하게 되는데 총 9차례에 걸쳐서 서울과성남, 구리 지역을 배회하며 사건을 저지르게 된다.- 이 사건의 대부분은 금전을 목적으로 한 살인이 대부분이지만 평소사진을 무시하던 지인을 단숨에 죽이기도 한 경우도 있었다.- 총 8명이 이 사건으로 인해 사망했으며 3명은 중상을 입었다.
1989~1991년 화성 부녀자 연쇄 살인사건가장 유명한 살인사건이면서 결국 영구 미제사건으로 남은화성 부녀자 연쇄 살인사건4년 7개월간 경기도 화성 태안일대에서 일어난 10차례의 부녀자 *살인사건으로 2003년에는 영화 '살인의추억'으로 다뤄지게 된다.- 살인사건의 피해자들은 대부분 스타킹이나 양말같은 피해자들의 의상으로목이 졸린채 살해됐으며 음부에서 복숭아조각 등이 나와서 사람들을 경악하게 했다.- 역대 최대 경찰병력이 동원된 사건으로 기록되었으며 여기에 투입된경찰병력만 연인원 205만명이며 용의자와 참고인을 다 합치면 21280명이라고 한다.지문대조 40116명, 유전자 dna 분석 570명, 모발감정 180명의 기록을 남겼다.총 수사기록은 캐비닛 5개 분량.그럼에도 불구하고 범인을 검거하는데 실패했고 살인사건 공소시효가 15년인우리나라에서는 2006년에 결국 영구 미제 사건으로 남게 된다.- 유일하게 해결된 사건은 8차 살인사건인데 이는 현장에 남아있던 모발과범인의 모발이 일치해서 해결된 경우였으며 다른 살인사건과는 관련이 없는걸로판명나게 된다.- 사건의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다.① 피해자가 모두 여성이다.② 피해자가 젊은 층에 한정되지 않고 52세(7차)·69세(10차)·71세(1차) 등 다양하다.③ 피해자의 음부가 크게 훼손되었다(4·6·7·9차).④ 사건현장이나 피해자의 음부 안에서 정액 또는 머리카락·담배꽁초 등이 발견되었다.⑤ 피해자의 대부분이 목이 조여 살해되었다.⑥ 피해자의 국부에서 9개의 복숭아 조각이 나오고, 가슴이 19차례나 칼로 도려질정도로 범행 수법이 잔인하고 대범하다.- 현재까지 밝혀진 범인의 신원정보1) 신장은 약 165~170cm정도의 호리호리한 체형2) 당시 20대 중반의 외모, 현재는 40대3) 혈액형은 b형- 현장에서 찾아낸 범인의 유전자 정보는 현재도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보관되어 있어서 추후에라도 확인이 가능하다고 한다.
1988년지강헌 사건
1988년 10월16일 낮 12시35분께 경향신문 사회부 기자였던 김동률박사(현 kdi근무)는 인질극이 벌어지고 있던 서울시 서대문구 북가좌동 고씨네 바로 옆집에서 경찰과 동행 취재 중이었다. 이날 새벽부터 경찰과 대치 중이던 인질범 가운데 2명은 권총 자살했고 주범 지강헌은 깨진 창 유리로 자신의 목을 찔렀다. 놀란 인질이 비명을 질렀고 경찰이 들어가 지강헌에게 총을 쏘았다. 지강헌은 몇 분 더 숨을 버티다 세브란스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사망했다. 9일 동안 서울 시민을 경악과 충격으로 몰았던 탈옥수 지강헌 사건은 그렇게 끝났다.
1993년 지존파 사건원래 이 조직의 이름이 지존파로 알고 계시는 분들이 많은데 사실원래의 명칭은 '마스칸' 이라고 합니다.마스칸은 희랍어로 [야망]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당시 사건을담당한 형사분께서 "야망을 위해 남을 죽이는건 안된다" 라고 생각하셔서대신할만한 단어로 '지존'을 선택했고 세상에는 지존파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1993년 7월부터 1994년 9월까지 김기환, 강동은, 문상록, 강문섭, 백병옥, 송봉호이경숙 이렇게 7명으로 구성된 언론에 알려진 지존파의 일원들이 저지른살인사건은 당시 나라를 발칵 뒤집을 정도로 잔혹한 사건이었다.- 평소 자신들이 돈없고 교육도 못받는둥 여러모로 사회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김기환이 자신의 학교 후배, 교도소 친구등 주변의 인물들을 끌어모아 만들었고그들은 소위 말하는 돈있는 사람들에게 복수를 한다는 생각으로 현대백화점의고객명부를 입수 범행대상으로 삼게 된다.- 1993년 8월에는 조직에서 이탈한 송봉호를 살해하고 그후에 4명을 추가로 살해총 5명을 살해하게 된다.- 이들은 완전 범죄를 위해 아지트내에 감옥과 시체를 태우기 위한 소각로도설치했으며 시체를 태울때는 바베큐를 구워서 냄새를 지우려는 치밀함도 보였다.또한 이들은 서로 인육을 나눠먹으며 조직의 단결을 돈독히 했다고 한다.- 1995년 11월 강제로 조직에 참여하게된 이경숙을 제외한 조직원 5명은 전원사형되었으며 다른 조직원들이 마지막에 참회하고 죄를 뉘우치는 반면 두목인김기환 만큼은 자신을 이렇게 만든 사회와 가정에 대해서 불만을 토해냈다고 한다.
1994년 온보현 사건 한창 지존파로 시끄럽던 1994년에 일어난 소위 '살인택시 온보현' 이라고 불렸던 사건.- "내 나이만큼 죽이려고 했다" 라는 발언으로 언론을 경악하게 만들었던 그는과거 자신이 일했던 택시회사에서 택시를 훔치고 번호판을 위조하게 된다.그 후 택시를 타고 사람들을 태우고 다니며 2명을 살해하고 지존파가 검거된뒤에자신에게 수사망이 좁혀오자 결국 자수하게 된다.- 경찰에게 조사받는 중에 "지존파와 자신을 비교하고 싶으니 같은 감방에 넣어달라"라는요구를 해서 형사들을 당황스럽게 했다고 한다.- 법원은 온보현에게 사형을 구형하고 1995년 11월 2일 지존파 일당들과 함께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된다.
1996년 막가파 사건'막가는 인생' 이라는 뜻으로 내건 막가파 사건은 지존파 사건과 비슷하게'외제차를 타고 다니는 돈많은 사람들은 다 죽이고 싶었다' 라는 최정수가조직원 8명을 모아서 만든 단체가 저지른 사건이다.- 이들은 양은이파 두목 조양은과 지존파의 사건들을 참고로 해서 범행계획을세우게 되고 주 타겟은 부유층이었다고 한다.- 이 사건이 유명해진건 다름이 아니라 사람을 산채로 땅에 묻어서 죽인이른바 생매장으로 유명해지게 됐는데 이 생매장으로 인해 두명의 여성이살해당하게 되었다.
1997년신창원사건
1997년 탈옥한 것으로 유명하다. 대한민국에서 범죄자의 예로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체포 당시 입었던 화려한 빛깔의 쫄티가 유행하기도 했다.
1999년 영웅파 사건조직폭력배에 속한 이순철이 후배조직원이 싸가지 없게 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자신의 조직원을 대동해서 집단으로 폭행하게 된다.이어 혼절한 조직원을 자신들의 합숙소로 끌고가 둔기로 수차례 구타후에흉기로 찔러서 살해하게 된다.- 이후 "죽을때까지 비밀을 지킨다" 라는 의식에서 죽은 조직원을 토막낸뒤에간을 꺼내 술안주로 나눠먹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나라안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당시 경찰의 말에 따르면 "주검의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훼손되어서 dna감식을 통해 신원을 파악해야 할정도"
정두영사건(2000년)
1996년 6월부터 2000년 4월까지 9명의 시민을 살해한 연쇄살인범이다. 정두영은 지난 1999년 6월부터 강도행각을 벌이면서 17명을 살상하였다. 정두영은 18세 때인 지난 1988년 불심검문 중인 방범대원을 살해, 11년 간 복역하고 출소한 뒤 곧 바로 절도죄로 붙잡혀 다시 6개월 동안 복역한 뒤 1999년 3월 출소했다. 이후 10개월 동안 16번의 강도 짓을 했고 그 과정에서 9명을 무참히 살해했다. 주로 부산, 울산과 경남지역을 활보하며 살인강도 행각을 벌였고 천안에서 인질강도를 저지르다 체포되었다.
정남규사건(2004년)
2004년 1월부터 2006년 4월까지 13명의 시민을 살해한 연쇄살인범이다. 2004년 1월, 경기도 부천시에서 윤기현(11세)과 임영규(10세)를 납치 살해하는 등, 경기도와 서울 일대(주로 서남부 지역)를 돌아다니며 심야에 귀가하는 여성들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하거나 거주지에 침입하여 살인과 방화를 함께 저지르는 등 연쇄살인 행각을 벌여 당시 언론에서는 '서울판 살인의 추억' , '비오는 목요일밤의 괴담'이라는 등 다소 선정적인 보도를 했다.
2006년 4월 22일에 체포되었으며, 자백에 의해 유영철이 저질렀다고 주장했던 이문동 살인 사건의 진범임이 밝혀졌다. 2006년 6월 7일에 구속 기소되어, 9월 21일에 사형을 선고받았고, 2007년 4월 12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어 현재 서울구치소에 수감중이나, 김영삼 정부 말기인 1997년 12월을 마지막으로 아직까지 사형은 단 한건도 집행되고 있지 않은 실정이다.
유영철사건(2003-2004년)
20명을 연쇄 살인한 범죄자이다.
서울에서 노동일을 하는 부모 사이에 3남1녀 중 삼남으로 태어난 유영철은 중학교 1학년인 14살때 아버지가 지병인 정신분열성 간질환으로 사망하자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했다. 서울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뒤 공업고등학교 2학년을 다니던 중 절도사건으로 소년원에 수감되어 학업을 중단하고 떠돌이 생활을 했다. 유씨는 21살 때인 1991년 마사지 안마사인 황모씨와 결혼, 11살된 아들까지 두었으나 이후 14차례 특수절도 및 성폭력 등으로 형사입건 되는 등 11년을 교도소에서 보내 사회와 철저히 격리되었다. 2000년 3월 특수절도 등으로 전주교도소에 수감 중 2002년 5월께 부인이 이혼소송을 제기하여 일방적으로 이혼당했으며 이후 말을 하지 않고 대인기피 현상을 보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강호순사건(2008년)
충청남도 서천군 출신으로 2009년 1월 24일 경기도 서남부에서 연쇄적으로 여성을 납치하여 살해한 것으로 지목된 범인이다.
2009년 1월 27일에 2008년 12월 경기도 군포시에서 실종된 여자 대학생을 살해한 혐의로 경찰에 붙잡혔다. 이후 추가 수사에서 2006년 12월부터 2008년 12월까지 경기도 서남부 일대에서 여성 7명이 연쇄적으로 실종된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됐다. 처음에는 연쇄 살인을 부인하다 경찰이 증거를 제시하자, 군포 여대생을 포함해 7명을 살해했다고 털어놓았다.
강호순이 살해했다고 밝힌 부녀자는 노래방 도우미 3명, 회사원 1명, 주부 1명, 여대생 2명이었다. 추가로 2009년 2월 17일에는, 2006년 9월 강원도 정선군에서 정선군청에서 근무하던 공무원 윤 모(여성, 당시 23세)를 살해했다고 자백했다.
2008년 논현동 고시원 방화 및 살인 사건
2008년 10월 20일 오전 8시 15분 경 d고시원에서 2003년부터 거주하던 정상진(1978년생, 당시 30세)이 논현동의 d고시원에 화재를 일으킨 뒤, 화재연기를 피해 복도로 뛰어나온 피해자를, 미리 준비하고 있던 칼로 피해자들을 무차별적으로 찔러 살해 또는 중상을 입힌 사건이다. 이번 방화로 고시원의 세 층이 일부 전소했으며, 피해자는 중국동포 이월자(50세)와 서진(20세)을 비롯해 사망자 6명, 중상 4명, 경상 3명이 발생했다.
기타주요살인 사건
김해선 살인사건 연천군부대 총기 난사사건 화성 연쇄 살인 사건 안양 초등학생 납치 살해 사건 2008년 논현동 고시원 방화 및 살인 사건 안양 관양동 존속살해사건 강화도 모녀 납치 살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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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글터] [펌]한국 희대의 살인마들(기네스북에도 올라가 있는)
1.우범곤순경
1982년 4월 26일 오후 9시 30분쯤 경남 의령경찰서 궁유지서에 근무하는 우범곤 순경(당시 27세)이 예비군 무기고에서 카빈소총 2정, 실탄 129발, 수류탄 6발을 들고 나와 8시간 동안 궁유면내 4개 마을을 쏘다니며 무차별 난사, 주민 56명을 죽이고, 34명이 중상을 입었다.
우 순경은 우선 우체국에서 일하던 전화교환원을 살해, 외부와 통신을 두절시킨 뒤 전깃불이 켜진 집을 찾아다니며 총을 쏘고 수류탄을 터뜨렸다.
살해당한 사람은 1주일된 영아부터 70세가 넘은 할머니도 있었다. 우 순경은 자정이 지나자 총기난사를 멈추고 평촌리 외딴 농가에 몰래 들어가 서 씨 일가족 5명을 깨운 뒤 27일 오전 5시 30분쯤 수류탄 2발을 터뜨려 자폭했다.
경찰은 평소 술버릇이 고약했던 우 순경이 내연의 처와 말다툼을 벌인 뒤 술취한 흥분상태에서 좌천에 대한 인사불만과 애정문제가 폭발하면서 일어난 우발적인 사건으로 결론지었다.
서정화 내무부장관이 물러나고 당시 근무지를 이탈했던 의령서장 등 3명의 경찰관과 방위병 3명이 구속됐다. 허술한 무기관리와 진압체계의 취약 등 경찰의 고질적인 문제점을 드러낸 대표적인 사건으로 남아있다. 또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경찰관이 무고한 주민에게 총을 마구 쐈다는 점에서 충격이 더 했다.
2. 대구 지하철 방화범 김대한
대구광역시 중구 성내동(城 內洞) 중앙로역 구내에서 50대 남자가 플라스틱통에 들어 있는 휘발유에 불을 붙인 뒤, 바닥에 던져 12량의 지하철 객차를 뼈대만 남긴 채 모두 태워버린 대형참사로, 2003년 2월 18일 오전 9시 53분에 일어났다.사고 원인은 50대 중반의 한 지적장애인이 자신의 신병을 비관하다 판단착오로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다. 이 방화범은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南山洞) 명덕역에서 지하철을 탄 뒤 경로석에 앉아 있다가, 성내동 중앙로역에서 열차가 서행하는 틈을 타 갑자기 불을 질렀다.이 사고로 열차는 완전히 불에 타 뼈대만 남았고, 중앙로역 천장과 벽에 설치된 환풍기, 철길 바깥쪽 지붕들도 모두 녹아 내려 역 구내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바뀌었다. 출근시간이 지나기는 했지만, 많은 시민들이 타고 있어서 인명피해도 엄청나 192명이 사망하고 148명이 부상을 당하였다.사고 다음날 정부는 대구를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하였으나, 사고 직후 대구광역시와 지하철 종사자들이 사고를 축소·은폐하고, 현장을 훼손하는 등 부실한 대응으로 피해가 확대된 것으로 밝혀져 더 큰 충격을 주었다. 이로 인해 방화범과 지하철 관련자 8명이 구속 기소되었고, 방화범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이 사고로 지하철 관련기관 사이의 공조체제 구축, 사고현장 탐색 및 복구, 훼손된 시신의 개인식별, 유족지원 등 대형참사와 집단사망에 따른 각 과정의 체계화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3.유영철
유영철(柳永哲, 1970년 4월18일 ~)은 20039월부터 2004 7월까지 20명을 연쇄 살인한 범죄자이다.(21명으로 알려져 있으나 20명이다.
2003년 9월11일 전주교도소를 출소한 유영철은 13일 후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서 명예교수 이은옥(72세)과 부인 이덕(67세)을 살해했으며, 그해 10월에는 9일에 종로구 구기동에서 강은순(82세) 등 일가족 3명을, 16일에 강남구 삼성동에서 유준희(60세)여사를 살해했다. 2003년 11월 18일 화요일에는 종로구 혜화동에서 김종석(87세) 등 2명을 살해했고, 2004년 4월에 노점상 안재선(44세)을 살해하고 시신을 월미도에 버렸다. 이에 앞서 2004년 3월부터 그해 7월까지는 마포구 노고산동의 오피스텔에서 한숙자, 고선희, 우주연, 김미영, 임미연(27세) 등 2004년 한 해 동안 여성 11명을 살해하여 서울 각지에서 주로 부유층 노인 또는 출장마사지사 여성 등 총 21명을 살해한 혐의를 받았다
4.정남규
"죽이고 싶었다. 다""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자기 나름대로는 천명을 채워야 하는데, 천명을 채워야하는데, (잡혀서) 억울하다.""아주 단호하게 '내가 미안한 감을 느꼈으면 그 짓을 했겠느냐.'
죄의식이나 이런 것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어요."
5.조승희
조승희(1984년1월18일 ~ 2007년 4월 16일)는 버지니아 폴리테크닉 주립 대학교 1.5세이다.
버지니아 폴리테크닉 주립 대학교에 따르면, 조승희는 이 학교 영문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대한민국 서울시 도봉구에서 태어나, 한국 국적을 가졌지만, 어릴 때 미국으로 이민 와서 미국 영주권을 가지고 있고 버지니아 주의 센트레빌에 주소가 등록 되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학내 기숙사인 하퍼 레지던스 홀(harper residence hall)에 살고 있었다. 현지 경찰은 그가 글록 19, 발터 p22 두 정의 권총을 소지하고 기숙사에서 최초의 두 명을 총으로 쏘아 죽였으며, 2시간 반 후 수업 중이던 강의실 몇 곳을 오가며 총을 무차별적으로 난사한 뒤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이 사건으로 32명이 사망하였고, 29명이 부상 당했다고 집계되었다. 경찰은 총기 지문 확인을 통해 그가 범인이라고 밝혔다.
6.백백교 전용해
1923년 가평에서 백백교를 창시하였다. 민심 교화와 광명 세계의 실현을 명분으로 포교를 시작하여 신도들의 금품을 갈취하고 여신도들을 성폭행했다. 또한 배반할 기미가 보이는 314명의 신도를 죽이거나 생매장하였다. 1937년 수사망을 피해 도망치다가 자살했다.
7.김대두
1970년대 9월즈음 일주일 사이에 평택,양주,시흥,수원등의 4개지역의 외딴집에서 일가족이 글로 표현하기도 참혹할 정도로 살해당한는 사건이 발생했다.노인 어린이 갓난아기라 할것도 없이 생명이란게 있으면 무작정 죽이는 그런 사건이 벌어진것이다
김대두는 2004년 유영철사건이 발생할때까지 총 17명을 연쇄살인한 희대의 살인마로 기록된다.
8.지존파
현실사회에 대해 일찍부터 불만을 품어 온 김기환은 1997년 4월경 학교 후배 강동은, 교도소 동기 문상록 등과 함께 전라남도 함평군 대동면에서 대학입시 부정사건에 대해 의견을 나누다가 부유층에 대한 증오를 행동으로 나타내자는 데에 뜻을 같이하였다. 지존파라는 이름의 범죄집단을 조직하고 1,200여 명에 달하는 백화점 고객명단을 입수하여 범행대상으로 삼았다. 이해 7월 일당 6명은 충청남도 논산에서 최미자를 성폭행한 후 연습 삼아 살해 암매장한 뒤 전라남도 영광군 불갑면 금계리의 지하실 아지트에 창살감옥과 사체를 은닉하기 위한 사체 소각시설을 갖추었다. 이어서 이종원-이모 부부, 소윤오-박미자 부부를 납치 감금하였다가 가까스로 탈출한 이모 여인을 제외한 3명을 모두 살해하고 사체를 토막내어 소각하는 등 9월 15일까지 4차례에 걸쳐 엽기적인 연쇄 살인행각을 벌였다. 이 사건은 조직에 가담했던 한 여인의 제보로 10월 6일 범인들이 모두 체포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재판 결과 검거되기 이틀 전에 조직에 가담한 이경숙을 제외한 두목 김기완을 비롯하여 강동은, 김현양, 문상록, 강문섭, 백병옥 등 지존파 전원이 강도살인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항소심과 대법원의 최종판결에서도 1심의 형량이 확정되어 11월 2일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9.화성연쇄살인사건
밥은먹고 다니냐?
◇화성 부녀자 연쇄강 간살인 사건일지▲1차=86년 9월 19일 오후 2시. 태안읍 안녕리 풀밭에서 이완임 씨(71)가실종 5일 만에 하의가 벗겨진 채 목이 졸려 살해된 시체로 발견됨.▲2차=86년 10월 23일 오후 2시 50분. 태안읍 진안리 농수로에서 박현숙씨(25)가 옷이 모두 벗겨진 채 양손이 뒤로 묶이고 스타킹으로 목이 졸려살해됨. * 흔적.▲3차=86년 12월 21일 낮 12시 30분. 이계숙 씨(22)가 약혼자를 만나고 귀가하다가 살해된 뒤에 정남면 관항리 논두렁에서 스타킹으로 목졸려 숨진채 발견. * 흔적.▲4차=87년 1월 11일 오전 10시 30분. 홍진영 양(18)이 태안읍 황계리 논에서 입에 재갈이 물리고 양손은 뒤로 묶인 채 목도리로 목이 졸린 시체로발견. 국부에서 혈액(b형) 검출.▲5차=87년 4월 23일 오후 2시. 권정분 씨(25)가 태안읍 안녕리 공장 옆의울타리 넝쿨 밑에서 하의가 벗겨지고 양손이 묶인 채 시체로 발견.▲6차=87년 5월 9일 오후 3시. 박은주 씨(29) 태안읍 진안리 야산에서 브래지어, 내의, 블라우스로 각각 세 차례 목이 졸린 시체로 발견.▲7차=88년 9월 8일 오전 9시 30분. 안기순 씨(54)가 팔탄면 가재리 농수로에서 블라우스로 목이 졸려 살해된 시체로 발견됨. 입에 재갈. 양손 뒤로 묶여 있고 * 흔적.▲8차=88년 9월 16일 오전 6시 30분. 박상희 양(14)이 태안읍 진안리 집에서 잠자다가 목이 졸려 살해된 채 발견. 남자의 체모 발견. 감정 결과 b형혈액형과 티타늄 원소 분석.▲9차=90년 11월 16일 오전 9시 50분. 김미정 양(14)이 태안읍 병점5리 석재공장 뒤 야산에서 목이 졸려 숨진 채 발견.▲10차=91년 4월 4일 오전 9시 30분. 동탄면 반송리 야산에서 권순상 씨
10.김선자살인사건
1988년 가정주부 김선자(49)가 친아버지와 동생을 포함, 5명을 독살한 사건이 발각됐다.
그는 1986년부터 2년간 건강 음료에 청산가리를 넣어 권하는 방법으로 채권자를 죽이고 금품을 갈취했다.
범행 동기는 카바레에 출입하며 쌓인 빚 300만원이었다.
10.도끼살인마 고재봉
△희대의 살인마 고재봉 서울에서 검거(1963) 희대의 살인마 고재봉이 검거됐다. 강원도 인제에서 이득중(36) 중령집에 침입,이 중령과 부인 그리고 세 자녀와 가정부 등 6명을 도끼로 무참히 살해한 후 귀금속을 훔쳐 달아난 고재봉은 범행 24일만에 한 상인의 신고로 서울에서 검거된 것이다. 검거된 고재봉은 1963년 12월12일 사형을 구형받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우범곤 순경 짧은 시간안에 연쇄살인 많이 한걸로 기네스북에도 올라가 있죠
출처 : 이종격투기 카페
71번작성일
2009-05-02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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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이젠 말할 수 있다 (2)
.....도둑놈 얘기 계속.
아무튼 XIII과 S형은 그 도둑놈을 상대로 그동안 연습해온 유도기술들 중
흔히 말하는 서브미션 기술들 - 꺾기, 조르기, 누르기 - 등을 집중적으로 연습했어.
그 중 제일 잔인한건 내가 볼땐 조르기야.
조르기를 하면서 풀어주지 않으면 사람이 기절을 하더라고.
기절한거 얼굴에 술한잔 부어서 깨우고, 다시 조르고...
몇번 반복하니까 이 도둑놈...
쉬야를 하더군. -_-;;;;;;;;
괴롭기도 하고, 굴욕적이기도 하고....
역시 혀깨물고 죽는편이 플러스라고 생각했어.
내가 나중에 먹고살 길이 없어 도둑질을 하다 유도관에 잘못 들어가면,
바로 혀깨물고 죽겠다고 다짐을 했지.
그러다보니, 천성이 착하고 쌍큼발랄청순한 XIII은,
형들한테 건의해서 풀어주고 술한잔 먹이기로 했어.......라지만,
쉬야 해논거 닦으라고-_- 풀어줬지.
이놈이...... 풀어주니까 바로 뛰는거야.
하지만 이미 조르기 및 꺾기로 황폐화되어있는 도둑놈의 몸뚱이가,
지 의지대로 움직일리가 있어?
........물론 XIII이 몸을 날려서 잡았고,
마운트펀치를 두어대 쳐줬지.
바로 쌍코피 -_-;;
S형이 날 말리더라구.
"XIII아, 그만패고 얼굴에 피좀 닦아줘라."
".......이새끼가 도망가잖아요."
"한번 더 도망칠라 그러면 죽여버려."
XIII이 유도관 사무실에 들어가서 휴지를 찾는데, 휴지가 없더라구.
나와보니 S형이 친절하게 피를 닦아줬더라구.
재갈 물렸던 양말로 -_-;;
아무튼 도둑놈 앉혀놓고, 관장사부님이 소주를 한잔 따라줬어.
"넌 젊은놈이 뭐한다고 도둑질이냐?"
".............."
"씹새꺄, 어른이 물어보면 대답을 해!"
XIII이 뒤통수를 한대 때렸어.
사실, 나한테 한두대 맞는게 도둑놈한텐 자비를 베푸는거지.
"돈두 없구... 취직도 안되구...."
퍽!
"씹새꺄, 돈없구 취직안돼서 도둑질하면 우리나라에 도둑놈이 백만명이냐?"
.......역시. S형이 때리면 졸라 아파보여.
"내가 아저씨네꺼 훔친것도 아닌데 왜때려요!"
퍽! 퍽!
"씹새꺄, 여기서 뭐 훔치다 걸렸으면 니 코에다 연필 쑤셔넣었을거야."
"엉엉, 아저씨 연예인이잖아요. 연예인이 이렇게 사람 패두 돼요?"
퍽!퍽!퍽!퍽!
"씹새꺄, 니가 사람이냐? 도둑놈이지?"
...........말대꾸하면 역시 더맞어 -_-;;
자식, 나였다면 양말재갈 빼주는 순간에 바로 혀 깨물었다.
"야, 졸라 맞으니까 괜히 억울하지?"
".................."
"우리 가위바위보 해서 한대씩 때리기 할래?"
".................."
"난 남자라서 주먹밖에 안내."
".................."
"가위 바위 보!"
S형은 주먹, 도둑놈은 보자기 -_-;;
"어? 니가 이겼네. 때려, 자, 때려!"
S형이 얼굴을 들이댔어.
"..........."
"씹새끼가 무시하냐?"
퍽! 퍽! 퍽! 퍽! 퍽!
"이번건 무효로 하고, 다시하자."
내가 한마디 했지.
"너 가위말고 딴거내면 뒤진다. -_-+"
S형의 가위바위보 20연승.
S형 너무 기뻐하면서 한마디 하더군.
"야, 나 가위바위보 졸라 잘하지 않냐?"
"-_-;;;;;;;;;;;;;;;;;;;;;;;;;;;;;;;;;;;;;;;;;;;;;"
"형, 이제 불쌍한데 그냥 얘기나 해요."
"...그래. 근데 이새끼 뻥치면 한대씩 패기로 하자."
"...................."
그리고 몇가지 질문을 했는데, 대충 질문의 내용이 이래.
"너 내가 몇살인지 알어?" "너 내가 아침에 뭐먹었게?"
"내가 점심때 뭐 먹을 예정이게?"
............그게 질문이야?
그리고 대답하면 틀렸다고, 거짓말한다고 퍽!
.............대답 안하거나 모르겠다면 어른 말씀하시는데 성의 없다고 퍽!
아무튼 대화를 빙자한 꼬투리잡아 때리기 놀이를 하는데,
이녀석이 용감하게 부탁을 하더군.
"아저씨, 저 경찰 불러줘요. 그냥 잡혀갈래요.. 엉엉"
.......그새끼 참 눈물도 많더라구.
하긴...... 그렇게 무자비하게 몇시간 동안 맞으면 정말 눈물날거야.ㅠ.ㅠ
"조까~ 씹쉐야~"
퍽!퍽!퍽!퍽!퍽!퍽!퍽!
새벽까지 도둑놈을 가지고 놀던 S형과 관장사부님은,
아침이 되어서 도둑놈을 풀어줬어.
"야, 택시비하고 파스값해라"
S형이 거금 만원을 주더라구.
".....고맙습니다. 그런데 형들, 저 여기서 유도배워두 돼요?"
"........이새끼가 덜맞았나본데."
"....안녕히 계세요~!"
그놈 참, 번개같이 도망가......고 싶었겠지만,
오줌싸서 어기적, 다리뼈서 어기적,
온몸에 골병든 개처럼 기다시피 도망치더군.
그놈이 도망친 순간, S형이 무릎을 치며 후회했어.
"아, 저새끼 산속으로 끌고 갔어야 되는데."
"왜요? 묻어보고 싶어요?"
"아니.. 내가 지존파 사건땜에 가스총을 샀잖냐, 그거 한번 쏴봐야 되는데..."
"........................"
"XIII아, 내가 오만원줄께 가스총 한방만 맞아볼래?"
"...............싫어요."
"10만원 줄께."
"...............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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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글터] 14년전, 가장 끔찍했던 엽기살인 지존파 사건
아주아주 긴 내용의 글도 있었는데
그나마 짧으면서 중요부분만 있는 글이 있길래 올려봅니다.
(유일한 생존자가 있는데 그 생존자 증언 위주의 글입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더 끔찍해요..ㅡㅡ)
정말 끔찍하고 무섭습니다..ㅠㅠ
글읽기 귀찮으신분은 진한글씨만이라도 보세요
지존파살인사건 [至尊派殺人事件]이란. 다음과 같은 사건이다.
1993년 4월 경, 두목 김기환(27)은 강동은(23, 학교 후배), 김현양(23), 강문섭(21), 문상록 (24, 교도소 동기), 백병옥(21)[1995년 11월 2일 사형당할 당시 나이] 등과 함께 전라남도 함평군 대동면의 포커판에서 대학입시 부정사건에 대해 의견을 나누다가 부유층에 대한 증오를 행동으로 나타내자는 데에 뜻을 같이하고 '지존파'라는 이름의 범죄집단을 조직했다.
이들은 ‘돈 있고 빽 있는 자의 것을 빼앗고 그들을 죽인다’는 행동강령을 만들어서 10억원을 모은다는 목표 아래 1,200여 명에 달하는 백화점 고객명단을 입수하여 범행대상으로 삼았다. 93년 7월 살인연습을 위해서 충남 논산의 길에서 23살 가량의 여자(최미자씨)를 무작위로 납치한 뒤에 성폭행하고 살해하여 암매장했다. 그리고 돈을 모아 전남 영광군 불갑면 금계리에 아지트를 건설했다.
겉으로는 보통 집으로 보이지만 밤에 중장비를 동원해서 몰래 지하실을 만들어서 거기에 창살감옥과 소각장을 설치했다. 94년 9월 8일 새벽 3시, 서울 강남구 역삼동 한 까페에서 종업원 생활을 하던 이경숙은 까페 밴드 마스터인 이종현(가명:36세)의 그랜저 승용차를 타고 경기도 양평군 와부읍 양수리를 드라이브 하러 갔다. 까페 일을 마치고 경치가 좋은 양수리를 가끔 드라이브 했다고 한다. 이때 갑자기 르망 승용차가 앞을 가로막고 포터 화물차가 뒤를 막았다.
이종현은 차를 급정거 시키고 르망 승용차 운전수에게 항의를 하기 위해 그랜저에서 내렸으나 승용차에서 건장한 사내들이 뛰어내려 이종현에게 가스총을 쏘고 입과 눈을 테이프로 가렸다.
사내들은 차로 뛰어들어서 이경숙도 테이프로 입을 틀어막고 눈을 가렸다. 그리고 이경숙과 이종현은 지존파의 아지트로 납치되었다. 당시에는 그곳이 어디인지도 알수없었다고 한다. 둘은 지하실 철창 안에 감금되었다. 지존파 일당은 이경숙을 쇠파이프로 위협하여 식사를 하게 하고 샅샅이 심문했다. 그리고 차례로 이경숙을 성폭행했다. 일당은 이경숙에게 뺑기통과 야인이라는 책을 던져주고 "우리와 함께 지내면 이런 책을 읽는 것이 좋을 거야." 라고 했다.
다음날 밤 지존파는 이종현과 이경숙에게 강제로 대량의 소주와 맥주를 먹였다. 그리고 음주운전으로 죽은 것으로 해주겠다고 했다. 조사후 돈이 없다는 것을 알고 둘을 죽이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경숙은 살려만 주면 뭐든지 하겠다고 애원하여 김현양은 이경숙을 살려주려 했다.
하지만 문상록은 반대를 하여 둘은 멱살을 잡고 싸웠다고 한다. 사내들은 술에 취해 기절한 이종현을 죽이기로 하고 비닐을 쒸우고 목을 졸라 죽였다. 김현양은 이경숙에게 이종현의 목을 조르도록 강요했다.[경찰은 이 당시 이 사건을 단순 교통사고로 처리했다고 한다.] 94년 9월 13일 소윤오-박미자 부부가 지존파에게 납치되었다. 소윤오 부부는 협박당해 돈을 빼앗겼다. 9월 15일 이경숙은 협박을 받아 소윤오에게 강제로 공기총을 쏘아 살해했다. 이경숙을 공범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부인 박미자는 양 어깨와 양 다리를 도끼로 찍혀 살해당했다.
김헌양은 박미자의 시체에서 인육을 도려내 이경숙에게 먹으라고 지시했으나 이경숙은 거부하였고 인육은 김헌양 자신이 먹었다. 지존파는 소씨 부부의 사체를 소각했다. 소각할때는 마당에서 바베큐를 하여 냄새를 지웠다고 한다.
9월 15일 김헌양은 다이너마이트를 만지다가 실수하여 폭발이 일어났고 머리의 상처를 고치기 위해 영광종합병원으로 치료를 하러 가면서 이경숙과 동행했다. 그리고 치료를 받는 동안 핸드폰과 치료비에 쓰기 위해 가져간 돈 50만원을 이경숙에게 맡겼다. 이경숙은 김헌양이 치료를 받는 동안 병원에서 뛰쳐나와 택시를 타고 달아났다. 이경숙의 상태를 보고 택시기사는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고 이경숙은 폭력배들에게 쫒기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택시기사는 영광에 있는 폭력배는 자신이 다 안다고 말했다. 이경숙은 택시기사도 지존파와 한패가 아닌가 하는 공포에 사로잡혀 근처의 포도밭에 내려달라고 했다. 이경숙은 포도밭 주인에게 부탁하여 렌턴카를 타고 대전으로 왔다. 그리고 범인들이 다시 쫒아올지 몰라 택시를 바꿔타고 서울로 왔다.
밤12시가 훨씬 지난 시간에 서울에 도착해서 그녀는 우선 여관으로 갔다. 범인들이 집과 직장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새벽2시에 친구와 그 남편을 불러내서 경찰에 신고를 했다.
그리고 1994년 9월 19일 추석연휴 마지막 날. 지존파 살인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1994년 9월 20일 서초경찰서는 전국을 무대로 납치살해 소각 암매장 등의 방법으로 증거를 인멸해가며 5명(이때 이로부터 8개월 전 조직원 송 모씨를 살해한 것도 밝혀져서 한명 추가)을 살해한 살인 범죄단인 지존파 일당 6명을 검거했다.
재판결과, 정상이 참작된 이경숙을 제외한 살인ㆍ강도ㆍ사체유기죄 등을 적용, 사형을 선고받은 지존파 일당 김기환(27), 강동은(23), 김현양(23), 강문섭(21), 문상록(24), 백병옥(21)은 1995년 11월 2일 서울구치소에서 사형에 처해졌다.
두목 김기환이 최후에 대해서...
온 국민을 경악시켰던 지존파를 우린 기억한다. 두목 김기환의 경우 부하들이 종교에 귀의한 뒤에도 스스로를 ‘악마’라고 부르짖다 대법원 확정판결을 보름 앞두고 영세를 받았다.
그후 깊은 참회를 하고 불우이웃을 위해 영치금을 맡기는가 하면 자신의 장기는 물론 시신까지 기증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또 “죽일 놈들을 다 못 죽이고 잡혀 억울하다”며 세상에 대한 적개심으로 똘똘 뭉쳐있던 지존파 김현양도 세례를 받고 “피해자 가족들에게 용서를 빕니다. 큰 죄를 짓고 이곳에 왔지만 이곳에서 구원을 얻게 돼 기쁘다 ”는 유언을 남기고
형을 받았다.
- 국민일보 이지현기자의 기사에는 이렇게 되어있지만...
#1995.11.2 집행 김기환
지존파 일당 6명의 사형이 집행됐다. 두목 김기환은 7시 35분에 이끌려왔다. 최후로 할 말이 있는가라고 묻자 “죄인이 할 말은 없으나 남자는 자기가 한 말은 끝까지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했다. 회개하기보다는 자기가 했던 말을 합리화하려는 것 같았다. 그 후 냉소하는 듯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어머니를 생각하며 “어머니께 내가 새 인생을 걷는다고 전해주십시오”라고 말했다. 7시 55분에 집행됐고 8시 8분에 절명했다.
- 역시 이런 기사도 국민일보에 있다...이 부분은 ‘사형장 일기’-문장석목
사 - 에서 발췌되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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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글터] 귀신 ,저승그실체에대하여2
음 하하하 이거는 유명견문록이라는 저서입니다.. 저도 존경하는 중국 명판관 여주선생님에대한이야기구요 뭐일단 알아두면재미있는일이죠 ㅎㅎ
~~~~~~~~~~~~~~여기서부터펌
이 글은 1945년경 중국의 유명한 재판관인 여주선생이란 사람이실제 살아서 저승에 가서 명부 재판관을 지냈다는 믿기 어려운 얘기입니다.우리가 간간이 들어왔던 저승에 대한 얘기를명부에서 벌어지는 재판을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 글들이 전부 사실이라 확인할 수는 없지만 저승세계에 대해 조금 더 접근해 갈 수 있는 글이라 생각합니다.그리고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다시 한번 진지하게 되돌아 보게 하는 글이기도 합니다.
번역자의 이끄는 말
이 '저승문답'은 최근(1945) 중국의 제2의 포청천으로 명성을 드날렸던명판관 여주(黎澍)선생의 실제 저승 재판기록이다. 여주선생은 다 아는 바대로 나이 많고 덕이 높고 또 명판관으로 법률계에 소문이 난 사람이다.그는 늘 평소에 자신이 저승의 재판관으로 다년간 있었고,수면중에 잠깐 명부(冥府)에 가서 그 옥안(獄案)들을 처리했노라고 말하곤 하였다.그때 중국군의 참모장 임유양은 그와 매우 절친한 사이로 그러한 저승이야기를 자주 듣곤 하였다. 그리하여 그 바쁜 와중에도 어느 날 하루 짬을 내어 본격적으로 임참모장이 그간의 경위를 직접 묻고그에 대한 여주선생의 구술(口述)을 손수 수록하여 저승문답이란 한 권의 책이 이루어진 것이다. 흔히들 요즘 신세대인들은자칭 소위 과학과 문화를 연연하여 저 신명세계 귀신이야기를 하면아주 질겁을 하고 무슨 벌레를 씹었거나 똥밟은 것처럼 몸서릴 치고 도망간다.그리고 아주 무지몽매한 미개인 취급을 하고 있다.그리하여 저 신명세계를 부정하는 현대 문화인들이살인, 강도, 강간, 부정, 비리를 이처럼 서슴없이 자행하는 것일까? 생혈을 빨고 인육을 뜯는 저 막가파나 지존파 등이 생기는 것이 아닐까? 모든 종교의 가르침이 이 '심령' '신명세계'에 중점을 두고 교화하는 것일텐데, 이렇게 번창한 종교의 주장이 무슨 힘이 있단 말인가?불교의 윤회설은 차치하고서라도 인류의 영원한 스승인 공자도 그 주역(周易) 계사편에서" 역은 위로는 천문을 관찰하고 아래로 지리를 살피고 있다.그러므로 이승과 저승의 일을 알며, 사물의 시초를 미루어 사물의 종말을 알수 있는 것이다.그러므로 죽고 사는 이치를 알 수 있으니,정기(精氣)가 엉기어 모인 것이 생물이 되고, 변하여진 것이 영혼인 것이다. 그러므로 귀신의 실체와 정상을 알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고, 또 중용(中庸)에서 말하기를," 귀신의 덕됨이 왕성하기도 하구나.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지만 만물의 본체가 되어 있어 빠뜨릴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그런데 소위 사대부라고 하는 사람들이 귀신을 무시한다든지 귀신을 말하기를 꺼린다는 것은바로 공자를 무시한 것이며, 주역을 모르기 때문인 것이다.우주 자연의 섭리가,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모난 것이 있으면 둥근 것이 있는 것이다.이걸 미루어 생(生)과 멸(滅),음(陰)과 양(陽),유(幽)와 명(明),인(人)과 귀(鬼)가 모두 상대적으로 넓혀져 존립하는 것이 사물의 당연한 이치인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읽고 난 뒤에 두렵고 놀라서 무서워 떨면서 지나온 일들을 반성하고 다짐하였다.귀신을 믿고 안믿고간에 어쨌든 이 한편의 책은 권선징악의 공이 모두 갖추어 있어서세상인심을 바로 잡는 데에 유익된 바가 없지 않겠기에 여기에 번역하여 게재하는 바이다.
♣ 선생이 지난날, 일찍이 저승의 재판관이 되었었다 하셨는데 정말 그랬습니까? → 그렇습니다. 세간 사람들이 이런 말을 들으면 모두 괴이하게 여길 터이지만나로서 볼 것 같으면 그 일이 일상적인 일이어서 조금도 괴이하지 않았습니다. ♣ 그것이 어느 때의 일이었습니까? → 청나라말 광서(光緖) 경자(庚子, 1900)무렵의 일로써, 내 나이 열아홉살 때의 일이었습니다. ♣ 소임은 어떤 직무에 관계했으며 어느 부 밑에 속했습니까? 그리고 직원은 몇 명이 있었는지요? → 동악부(東嶽府) 아래에 속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 동악은 보지 못했습니다.다만 사건을 집행한 뒤에 공사를 가지고 보고를 올렸을 뿐입니다.나는 그때 분정(分庭)의 정장(庭長)을 책임 맡았었는데, 따로 배심원 네사람을 두었었고봉사한 귀졸(鬼卒)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 저승재판관을 몇 년이나 맡았었습니까? 그리고 그 일은 매일 가서 처리했습니까?또 어느 지방을 관할했었습니까? → 전후 4~5년간을 했었고, 날마다 가서 했습니다.관할구역은 화북(華北)의 다섯 성을 맡았었습니다. ♣ 저승에서는 왜 선생을 재판관으로 삼았었는지요? → 나 또한 일찍이 같은 사건을 맡아서 조사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지요.또 수전세(數前世)에서도 저승판관을 했었습니다.그 속세 인연의 끈으로 해서 다시 그 일을 맡았을 뿐입니다. ♣ 저승에도 규정 법률이 있습니까? 있다면 선생은 그런 율법을 학습하지 않았을 터인데,어떻게 재판에 착오가 없을 수 있을까요? → 내가 그 규정 법률이 있었던 것을 못 보았던 것 같은데,다만 그 제안을 판결하면 저절로 그 급소에 정확히 들어맞았었습니다.그러므로 처음부터 오래 생각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 선생이 맡아서 했던 일은 어떤 종류의 사건이었습니까? → 내가 맡았던 일은 사람이 죽은지 10개월 이내의 것으로,그 사람의 생전에 지은 선행과 악행의 사건을 맡아서 했습니다.기한을 넘긴 일을 따로 맡아서 처리하는 주무자가 있었습니다. ♣ 선생은 그때에 염라대왕을 보았습니까? →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 사람의 생전에 하였던 선악의 행위를 귀신이 어떻게 다 알고 다 볼 수 있단 말입니까?빠뜨리지 않고 다 기록되어 있습니까? → 예. 귀신은 형체가 없는 것도 능히 다 볼 수 있고, 소리가 없는 것도 다 들을 수 있습니다.인간 세계의 온갖 사상과 행위를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귀신은 스스로 다 알고 다 알 수 있습니다.그 기록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그리고 또 귀신은 사람의 머리 위의 붉고, 누렇고, 희고, 검은 빛깔을 보고서그 사람의 행위와 생각의 선악을 다 알 수 있습니다. ♣ 죄 지은 귀신도 또한 교활한 변명을 합니까? → 예. 극히 많습니다. 죄 지은 귀신은 그가 지은 죄악에 대해서 역시 교활한 변명을 늘어놓습니다.그러다가 그 죄의 확실한 증거를 제시하면 그때에서야 고개를 푹 떨어뜨리고 아무 말이 없습니다.일찍이 한 귀신을 심판하는데,그 사람이 생전에 겉으로는 위선적인 행위를 닦으면서 남 모르게 못된 짓을 다 했습니다.그리하여 그 악행 범죄의 사실에 대해서 극력 부인을 하는데,내가 보니까 그 사람의 죄악이 산처럼 쌓여 있었어요. 증거를 확실히 파헤쳐서 극형을 가하려 하는 찰라에,그 귀신이 뜻밖에 금강경(金剛經)을 외우고 있어요.그러니까 좌우 배심원들이 그 귀신의 머리 위에 붉은 빛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는황급히 심판을 정지할 것을 요구했습니다.나는 그 배심원들이 그 귀신한테서 뇌물을 받고 사정에 끌려서 그러는가 하고이에 형을 더 무겁게 가하려 하니 그 귀신이 더욱 힘써 금강경을 외우는 것입니다.좌우 배심원들이 나더러 "빨리 일어나서 삼가 공손히 서 있어라"고 하더군요. 내가 이르기를 ," 나는 공판정의 우두머리인데 어찌하여 범죄자를 향하여 공손히 서 있어야 하느냐? "고 했더니,좌우 배심원들이 이르기를, "아닙니다. 이 귀신의 머리정수에 불광(佛光)이 이미 나타났는데,그런데도 그를 심판하면 부처님을 모독한 게 되니 심판을 정지한 것만 못합니다"라 해요.
내가 그때 그들을 보니까 그들은 모두 일어서서 두손을 공손히 모으고 서 있는데,그 모습이 어찌나 공경한지 극히 장엄해요.내가 그들에게 묻기를,"그러면 이 죄인을 어떻게 판별하여 처리하려 하는가?" 하고 따졌더니,그들이 이르기를, "그를 판결하기를 사람의 태에 보내기를 수차례하여 그로 하여금금강경을 기억하여 외울 수 없을 때를 기다려 그때에 가서 다시 그 죄를 다스리면 됩니다."그래요. 내가 말하기를,"그를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면 그로 하여금 오히려 유익되게 하는 것이 아닌가?또 그를 수차례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면, 그가 응보(應報)를 받게 되는 것은수백년 이후라야 되는데, 어찌 그리 더디게 하여 그르치려 하는가?" 고 했더니좌우에서 말하기를,"그로 하여금 잠깐 태어났다가 금방 태안에서 죽게 하면몇 년이 안 가서 이미 몇 대를 거친 것이 되니, 그가 지은 죄업은 죄업대로 과보를 받게 되고,금강경을 외운 것은 또한 금강경을 외운 공덕이 있게 되니,이 두 가지가 모두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훗날 그가 지은 죄업을 분별하여 응보를 받게 하면두 가지 일이 조금도 어그러지지 않습니다" 그래요.그래서 내가 마침내 그렇게 하도록 윤허를 하였습니다. ♣ 사람이 죽은 뒤에 그 귀신의 뜻은 얼이 빠져 꿈속 같은 것이 아닙니까?그렇지 않으면 맑고 성성하여 평상시와 같습니까? → 맑고 성성하여 살아 있을 때와 같습니다. ♣ 저승에 들어갈 때는 매일 어느 때입니까? 그리고 그 안건을 심리하는 시간은 얼마나 걸립니까? → 최초에는 매일 해질 무렵이지만, 그후로는 대낮에도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 오후에 갑니다.오고 갈 적에는 모두 간단한 상여를 타고 가는데, 달리는 발걸음이 매우 빠릅니다.그리고 안건을 심리하는 시간은 언제나 짧은 시간 내에 합니다.그러나 복잡한 안건을 만나면 역시 연장하여 여러 날이 걸리기도 합니다.다만 이런 안건은 극히 적습니다. ♣ 저승에 들어갈 때에 그 사람의 신체는 현재 수면(睡眠)상태입니까? → 저승에 들어갈 때에는 몸은 평상 위에 누워 있고 모습은 깊이 잠이 든 것 같습니다.마시지도 않고 먹지 않아도 또한 굶주리지 않고 목마르지도 않습니다.어떤 때에는 친한 벗들이 갑자기 찾아와서 또 불편한 일을 가지고 이야기하면,눈을 감은 채 건성건성 대답하는데, 모습이 마치 잠에서 깨어난 사람 같았습니다.어떤 객이 와서 묻고 하면 또한 그 물음에 따라 대답하는데,다만 말이 입에서 나오지도 않고, 또 객이 무슨 말을 하는 지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 저승 갔다가 되살아 나오면 정신도 또한 피곤한 줄을 깨닫습니까? → 정신은 조금 피곤하고 모습은 마치 막 잠에서 깨어난 사람 같습니다. ♣ 저승길에도 음식이 있습니까? → 예, 있습니다. 그러나 다만 음식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 저승 재판관의 복장은 어떻습니까? 그리고 또 그 공문의 격식은 어떻습니까? → 내가 저승판관으로 있을 때는 아직 청나라가 있을 무렵이었습니다.그렇기 때문에 그 복장과 공문의 격식은 모두 만주국 청나라의 법식과 똑 같았습니다.다만 중화민국이 들어선 이후로는 고쳐져서 새 제도를 따랐습니다. ♣ 저승판관도 역시 봉급이 있습니까? → 예, 있습니다. 다만 사람에 대해서는 조금도 쓸 곳이 없기 때문에 수령하지 않습니다. ♣ 저승의 형벌의 종류는 얼마나 됩니까? → 저승의 형벌의 종류는 매우 많습니다.이 인간세상의 형벌에 비교하면 참혹하기가 백배나 됩니다.만약 지금 사람들이 그걸 본다면 참혹한 형벌이라 할 것입니다.그러나, 나의 경력으로 보면, 인류가 차라리 인간 세상의 형벌을 받을지언정,절대로 저승 법정에서는 형벌을 받지 말아야 합니다.
즉 이 세상에서는 형을 받으면 형이 끝나면 그것으로 끝나지만저승에서는 형이 끝난 뒤에도 또 다시 그 죄과에 따라 재형을 받습니다.비유하자면,이 세상에서는 열 사람을 죽였다면 그 죄는 한번 죽는 것으로 끝나지만,저승에서는 반드시 열 번의 형을 받습니다.형이 끝나면 다시 생을 바꿔 태어난 십대의 생까지 살인죄의 사형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형이 톱으로 자르고, 맷돌로 갈고, 칼끝이 뾰쪽뾰쪽 세운 산 위를 맨발로 걸어서오르게 하고, 기름 가마솥에 넣고 수레로 사지를 찢고 하는 등의 형이 실제로 있습니다.죄의 응보는 참으로 두렵습니다. 이와 같으니까요. ♣ 저승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어떤 종류의 덕행입니까?그리고 최악의 죄로는 어떤 종류의 죄업입니까? → 저승에서 가장 귀중하게 여기는 것은, 남자는 충과 효이고, 여자는 절개와 효도입니다. 이 두 가지를 행한 사람은 비록 죄업이 있다 하더라도 또한 반드시 경감하여 줍니다.최악으로 여기는 것은 음탕과 살인죄 두 가지입니다.그리고 살인죄는 또 음탕에 비하여 더욱 무겁습니다.만약에 음탕으로 인하여 인명까지 살해한 자는두 가지 중죄를 함께 저질렀기 때문에 한결 죄를 덧씌운 것이 됩니다.그러므로 예로부터 "만가지 악 가운데 음탕이 첫째요, 백가지 선 가운데 효도가 먼저다"라고한 말이 참으로 헛말이 아닙니다. ♣ 저승에는 이미 문장으로 이루어진 성문법률(成文法律)이 없는데,그 죄의 가볍고 무거운 것을 어떻게 저울질합니까? → 여기에서 그 범죄의 동기와 발생의 결과를 보고 그 정황을 살피고 사리를 참작하여서그 경중을 결정합니다.지금 여기에서 절도죄를 한 것을 가지고 비유한다면,그 절도질을 한 사람이 본래 생계에 압박되어 한 것이고,망녕되어 다른 나쁜 데에다가 쓰려고 한 짓이 아니라면,그리고 도둑맞은 사람이 부자인 한 사람에만 관계되었고, 그 액수도 크지 않으며,또 그 부자의 생계에 별 영향도 없고 그 부자가 그 도둑맞은 것에 대해 또한 크게 애석하게여기지도 않는다던가, 또 그 도둑맞은 것이 장차 그걸 가지고 가서 음탕한 짓이나, 도박을 하거나,담배, 술등 정당하지 못한 부정한 곳에 용도로 쓰려고 한 것이라면, 그 죄는 되려 가볍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 도둑맞은 부자가 그것을 하인들에게 의심을 두고 심하게 꾸중을 하여,그 책망을 받은 하인이 억울하고 분이 나서 자살을 하게 되었다면,또 가난한 사람의 쌀 사고 약 살 돈이라면,그리고 도둑맞은 것으로 인하여 굶어죽고 병들어 죽는 데까지 이르렀다면,또는 압박을 받아 스스로 몸을 빼어 싸움에 뛰어들어 인명을 살상하는 데 이르렀다면그 정황을 살필 때 매우 무겁습니다.그리고 이러한 경우에는 보통의 절도죄만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 저승의 법정에서 죄를 심판할 때도 간혹 착오가 있습니까? → 절대로 없습니다.저승법정에서는 범인의 죄상에 대해서 모두 일찍이 정밀히 조사해 두었고,또 확실한 증거가 있기 때문에 그 심판은 지극히 공정합니다.따라서 착오된 일이란 절대로 없습니다. ♣ 우리 범인은 하룻사이 또는 일생동안에 한 생각 일어났다가 한 생각 없어지는 것이얼마인지 모릅니다. 또 선행을 한 것, 악행을 저지른 것을 바로 자기도 다 기억을 못합니다.그러나 저승 법정에서는 사람들의 공과 죄를 아주 미세한 것까지도 죄다 기록되었다면또 어찌 그 번거롭고 수고스러운 것이 이와 같음을 꺼리지 않을까요? → 사람의 사상이란 게 마치 한 생각 일어났다가 한 생각 사라지고갑자기 해놓고선 이내 잊어버리곤 하여 저 공중의 새 발자국 같고 물위에 뜬 거품 같아서저승에서도 역시 다 기재된 것은 아닙니다.그러나 만일 한 마음을 오로지 쏟아서 그 생각하고 생각하는 것이 떠나지 않으면비록 나타나지 않은 행위일지라도 또한 공과 죄가 있으면 기록될 수 있습니다.만약 그 생각이 행위로 이뤄진다면 그 공과 죄는 더욱 현저하게 나타납니다. ♣ 크게 수행한 사람도 죽은 뒤에 역시 저승에 가서 재판을 받습니까? → 저승 법정에서 관리하는 것은 모두 업(業)안에 끌려 다니는 사람들입니다.용록(庸碌)한 사람도 평범한 사람들로서 큰 선행도 없고 큰 악행도 없는 사람들을 관리합니다.만약에 크게 수행한 사람은죽은 뒤에 곧바로 극락,천당(天界)에 올라가기 때문에 저승을 거치지 않습니다.이런 사람은 저승명부에 이름이 없기 때문에 저승에서 심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중 혹시 천당에 오르는 것이 조금 늦는 사람은 어쩌다가 저승을 거쳐가기도 하는데, 이런 사람이 저승에 오면, 저승판관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서 내려서서 그를 맞이합니다.그러면 그 혼백은 걸을 때 마다 점점 높아져서 마치 구름사다리를 걷는 것 같습니다.그가 저승법정에 가까이 오면 그 높이가 법정지붕의 용마루와 나란히 섭니다.이러한 사람은 이름점고가 끝나는 즉시 곧바로 천당에 오르기 때문에 잡아매어 둘 수가 없습니다. ♣ 저승법정에서도 서양인을 잡아옵니까? 만약에 서양인이 오면 피차에 언어는 어떻게 회통합니까?만약에 양인이 없다면 양인이 죽은 뒤에는 어디에 가서 심판을 받습니까? → 내가 저승판관이 되었을 때가 마침 경자년(庚子,1900) 8개국 연합군이 북경을 공격한 지55일만에 항복한 뒤이기 때문에 국내외의 군대와 민간인들이 많이 죽었습니다.그러기 때문에 저승에도 다소의 서양사람들이 법정에 들어온 것을 보았습니다.그러나 저승에서는 저절로 그들의 말이 통해(通解)되었습니다.어느 날 그 난리에 죽은 한 제독(提督)과 또 충성으로 나라를 보위하다가 의분이 복받쳐슬퍼하고 한탄하다가 몸을 버린 자가 심리를 받은 일이 있었는데,나는 친히 그들이 똑같이 곧바로 천계(天界)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한번도 그들의 심리를 관리하지 않았습니다.그리고 또 중국의 저승 재판소가 이 한 곳만이 아니고,또 구미(歐美)의 각 나라도 또한 따로 저승 재판소가 있어서 각기 그 정황에 따라 처리합니다. ♣ 저승에서는 어떻게 이승 사람을 써서 저승으로 데려갑니까? → 부유하고 고귀한 사람들은 그 저택에는 항상 많은 신들이 수호하고 있고,그 사람의 좌우에서 심부름하는 사람들은 오랫동안 날쌔고 힘이 장사이어서양기(陽氣)가 왕성하기 때문에, 저승사자가 그 사람 병상에 접근할 수 없습니다.비유하면 장군이 병영 안에서 병들어 죽으면 그 4주동안은 경위가 삼엄하고 창과 대포가죽 늘어서 있으며, 영내의 병사들은 또 모두 소년들이어서 양기가 펄펄 끓고 있어서저승사자 귀신이 그 앞에 가까이 갈 방법이 없기 때문에반드시 산 사람의 혼을 써서 그를 끌어갑니다. 그래서야 심리할 안건이 도달합니다. ♣ 칼로 목이 잘려 죽거나 기타 참혹하게 죽은 귀신들은 그 몸뚱이와 머리가 온전치 못한데,그 영혼들은 보통 병들어 죽은 귀신들과 구분이 있습니까? →그 영혼만은 모두 온전하여 보통귀신과 다름이 없습니다.오직 그 얼굴 모습만이 조금 모호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그리고 또 그 상처에 핏자국이 남아 있고, 용모가 참척하여 고통이 있는 것 같습니다. ♣ 귀신도 또한 소멸의 기한이 있습니까? → 예, 있습니다. 내가 본 옛 귀신은 멀리는 송나라, 원나라 때까지에만 이르고,당나라 이상의 귀신은 절대로 본 적이 없습니다.선불(仙佛)이 된 분을 제외하고는 만고에 길이 생존 할 수 없습니다. ♣ 사람은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에 이르는 동안에 용모가 점점 변하여 가는데,귀신의 용모도 또한 나이에 따라 노쇠해집니까? → 귀신의 용모는 그 병들어 죽을 때까지는 똑 같습니다.해가 오래 지났다고 해서 노쇠해지지 않습니다. ♣ 저승에도 낮과 밤이 있고, 해와 달, 별들이 있습니까? → 저승에도 역시 낮과 밤이 있어 이승과 똑 같습니다.그러나 오직 해와 달, 별들은 절대로 볼 수 없습니다.그 정확한 모습은 마치 사천(四川)에 큰 안개가 낀 것 같고화북(華北)에 뿌연 황사 덮인 날씨와 같아서 이승의 밝은 세계에는 미치지 못합니다.귀신들은 따스한 8시 이후부터 11시까지에 이르러서야 그칩니다.그리하여 귀신들은 양기가 터지기 시작하면 모두 어둡고 그늘진 곳으로 피하여 숨습니다.오후에 그늘이 점점 많아지면 외출합니다. ♣ 저승에도 역시 춥고 덥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습니까? → 예, 그렇습니다.다만 여름에는 이승같은 무더위가 없고 겨울에도 이승같은 매서운 추위에 비해 덜 춥습니다. ♣ 저승에도 역시 음식점이 있습니까?그리고 이승 사람이 만든 종이돈을 저승에서 사용할 수 있습니까? → 예, 음식점이 있지요. 거기에는 나물 음식종류가 많습니다.이승 사람이 만든 지전(紙錢)을 저들도 또한 사용하여서 물건을 살수가 있습니다. ♣ 저승에서도 매일 세끼 밥을 먹습니까? → 거기에서는 매일 한끼만 먹어도 여러 날 배부를 수 있어서 날마다 꼭 세끼를 먹지 않습니다. ♣ 저승에서도 잠을 잡니까? → 예, 거기에도 역시 침상과 잠자리, 요, 이불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잠자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겨우 가다가 잠깐 벽에 기대든지, 눈을 감고 조금 쉬든지 하면 곧 수면하는 것과 똑같습니다.이승사람들처럼 매양 잠잘 때 꼭 7~8시간씩 자는 것은 아닙니다. ♣ 저승에도 시가지가 있고, 상점이 있습니까? → 예, 있지요. 그러나 규모가 매우 작아서 여기 인간 세상의 작은 점포와 다름이 없습니다.거기서 파는 것은 음식과 잡용품들이 많고, 다만 웅장하고 화려하고 넓고 큰 인간세계의큰 공사(公司)라든지 양행(洋行)같은 것은 없습니다. ♣ 이승에서 만든 음식을 귀신들도 먹습니까? → 그렇습니다. 오직 그 기(氣)만을 흠향할 뿐이요, 진짜로 먹지는 않습니다.만약 여름철에 식품이 두 그릇이 있어서한 그릇은 귀신에게 제공을 했고, 다른 한 그릇은 제공하지 않았다면이 제공한 음식은 제공하지 않은 음식과 비교하여 반드시 먼저 부패합니다.그것은 귀신이 이미 그 음식의 기를 섭취하였기 때문입니다. ♣ 저승의 음식을 이승의 것과 비교하여 어떤 게 더 좋습니까? → 아마 이승의 것에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 귀신도 그 분묘에 가서 살고 쉬고 하는 곳으로 삼습니까? → 그렇습니다. ♣ 사람이 처음 죽을 때 영혼이 육체를 떠날 적에 역시 고통이 있습니까? → 사람이 죽을 때는 모두 질병이 있고,영혼이 육체를 떠날 때는 마치 방문을 열고 외출하는 것 같아서 처음에는 곤란이 없습니다.지금까지의 아프고 괴로운 고통을 되돌아보면 도리어 편안해지는 것 같습니다.그가 처자식들을 불쌍히 여기고 또는 두고 온 재산에 미련을 두어 마음속에 간직하고숨이 떨어지지 못하면 영혼이 쉽게 육체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 때가 가장 고통스럽습니다.만약이 사람이 타고난 성품이 맑고 깨끗하여 욕심이 없고,처자식과 재산에 대해서 또한 미련과 끌리는 욕심이 없다면,영혼이 육체를 떠날 적에 곧바로 옷을 벗듯이 훌훌 떠나가는데,조금도 힘을 허비하지 않습니다. ♣ 스님들이 경을 외워 죽은 혼령을 천도하면 망인에게 결국 이익이 있습니까? → 스님이 경을 외우면 망인에게 이익이 있는지 없는지를 특별히 일괄적으로 말하기가 어렵습니다.비유하자면 그 사람이 생전에 큰 선행을 하였으면 죽은 뒤에 곧바로 극락,천계에 오르기 때문에그 사람에게 본래 경 읽은 공덕이 필요가 없습니다.그 사람이 생전에 크나큰 죄악을 저지른 사람이라면 죽은 뒤에 즉시 지옥으로 떨어지기 때문에그 사람 역시 쉽게 이 경 읽은 공덕을 받아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그러나 우리 보통 사람에게 이르러서는 생전에 큰 선행도 악행도 없는 사람은 경을 읽어서천도를 얻으면 어두운 지옥세계가 환하게 밝아져서 죄업이 경감되고 이익이 특별히 커집니다. 그리고 경을 외우는 사람의 도의 행적이 높고 낮음에 따라서 또한 막대한 관계가 있습니다.만약 경을 외우는 사람이 도가 높은 고승이고 효자 현손과 관계가 있으면,그 경 한권을 외우는 것이 보통 중이 외우는 것보다 열배에 해당합니다.그리고 어떤 보통 평범한 스님이라도 경을 지극 정성으로 외우면 또한 상당한 이익이 있습니다.만약에 행이 없는 막행막작의 스님이고 또 마음이 전일치 못하여 건성건성 외운다면이익도 적을 뿐 아니라, 어떤 때는 터럭 끝만큼도 이익 되는 게 없습니다.더구나 망인의 과보에는 효과에 이르지 못합니다.또 송경의 가장 좋은 효과는 망인의 7일,49일 이내가 좋고,이 기간을 지나면 망인이 지은 업에 따라 이미 다른 데에 생을 바꿔 태어나 버릴 수 있습니다.그러면 그 공덕이 돌아가서 죽은 자는 바로 받을 수가 없습니다. ♣ 귀신과 사람의 수효가 어느 것이 더 많고 어느 편이 더 적습니까?그리고 사람들은 귀신을 무서워하는데, 귀신도 사람을 무서워합니까? → 귀신세계의 귀신의 수효는 인간세계의 사람들의 수효에 비해 그 숫자가 훨씬 많습니다.오고 가고 가고 오고 울타리에 맞대고 담벼락에 붙어 있어 가는 곳마다 모두 다 귀신들입니다.사람들이 다니는 길에도, 귀신들은 길 한 가운데보다는 도로 양편 곁으로 많이 걸어 다닙니다.사람들은 밝은 곳을 따라 다니는데, 귀신들은 어두컴컴한 곳을 따라 다닙니다. 그런데 사람도 귀신을 무서워 하지만 귀신도 또한 사람을 무서워합니다.그리하여 귀신도 사람이 오는 것을 보면 또한 반드시 피하여 달아나 버립니다.정직한 사람과 군자는 귀신도 반드시 공경하지만 그 귀신들이 업신여기고 농락하는 자는모두 심성이 바르지 못하거나 시운이 쇠미해진 사람일뿐입니다.그러므로 우리 인간들은 오후부터 해질 무렵 저녁 늦은 시간까지는 길을 걸어갈 때에절대로 길 양편 가장자리나 어두컴컴한 그림자 진 곳은 걷지를 말아야 합니다.저녁 늦은 시간에 문밖에 나설 때에는 반드시 느린 걸음으로 천천히 걷되가끔씩 기침소리를 내어서 그들로 하여금 피해 달아나도록 해야 합니다.그렇지 않고 뜻밖에 나오면 귀신과 대질러서 그 충격으로 거꾸러지는 일이 발생합니다.사람 몸도 역시 오싹 한기가 끼치고 겁내어 떨리게 되는데,이것은 음과 양이 서로 상충되어 피차가 모두 불편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 귀신이 걸어 다니는 것과 산사람이 걷는 것과 구분이 있습니까? → 귀신의 발 부위는 분명치 못하여 마치 안개 속을 걸어 다니는 것 같고걸음걸이가 매우 빨라서 사람의 느린 걸음과는 같지 않습니다. ♣ 귀신이 닭울음소리를 무서워하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 햇빛이 밝아오면 영혼이 불안해집니다.그러기 때문에 햇빛을 피하여 달아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이것은 마치 우리가 불이 달궈진 큰 기계의 용광로 열기를 무서워하는 것과 같습니다.그러나 몸가짐이 품행있는 귀신은 역시 닭울음소리를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 선생의 전세에서부터 쌓은 그 근기가 이와 같고 또 보통사람보다 훨씬 뛰어나셨으니,아마 내세에도 역시 윤회생사(輪回生死)를 면제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 윤회생사를 뛰어 넘는다는 게 어찌 그리 용이할 수 있습니까?즉 나의 내생에도 역시 면할 수 없습니다.일찍이 같은 종사자에게 부탁하여 이에 대하여 조사를 해보았습니다.그랬더니 그가 이르기를,나의 내세에는 응당 반드시 하남과 남양일대에서 다시 태어날 것이라 하였습니다.그러나 단 수십년 이내에 세상의 물정과 세태인사(世態人事)가 변천하여아마 저승의 기록도 고쳐질 수도 있을겁니다. ♣ 저승의 관리들도 역시 인간세상을 바꿔 생을 받아 태어납니까? → 그렇습니다. 비유하자면 현재 공무원으로 있는 사람은 특히 높이 취직하는 것이무직자인 보통사람에 비해 쉬운 것과 같습니다. ♣ 귀신이 인태(人胎)에 들어가는 것은 수태(受胎)시에 즉시 들어 갑니까?아니면 출산시에 들어갑니까? → 두 가지 다 있습니다. ♣ 여러 귀신들이 우글우글 왕성한 것은 오랜동안 저승에 떨어져 있어서어찌하여 일찍이 빠져 나오지 않는 것입니까? → 사람은 적고 귀신은 많기 때문에 그에 배당하여 분배할 수 없어서입니다.그리고 또 태어나는 집도 그 귀신과 원래 인연이 있어야지 바야흐로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만일 그 사람이 생전에 교제가 넓어서 서로 아는 사이가 많다 보면바로 그 사람 집에서 투태 되기가 자연 쉬워집니다.만약에 빈궁한 사람이 늙어 죽을 때까지 동구 밖까지도 나가보지 못해서평소 사람들과의 교제가 극히 적으면 그 사람은 죽은 뒤에 귀신무리에 젖어들어생을 받는 어떤 기회의 인연으로 나가기가 어렵기 때문에 반드시 오랫동안 기다려야 됩니다.그리하여 인연이 있는 자를 만나면 이에 곧 생을 받아 투태하게 됩니다. ♣ 불교를 배운 사람은 죽은 뒤에 극락세계에 태어나고 도교를 배운 사람은 통천복지에 태어나지만유교를 배운 사람들은 죽은 뒤에 어디에 가서 태어납니까? → 역시 하늘나라 천계(天界)에 태어납니다. 그리고 결코 소멸되지 않습니다. ♣ 선생은 그 뒤에 어찌하여 저승판관 노릇을 하지 않았습니까? → 내가 원하지 않은 지가 오래 되었고,그리고 여러 차례에 걸쳐 휴직하기를 빌었지만 번번이 모두 허락을 받지 못했었는데그 뒤에 동사자들이 금강경(金剛經)을 많이 외우도록 가르쳐 주어서 그 법대로 시행했더니그 공덕이 쌓여 2천번 이상이 찼기 때문에 드디어 다시는 가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 선생은 평소에도 늘 귀신을 볼 수 있습니까? → 내가 저승판관으로 있을 때에는 귀신을 호출했을 때나 안했을 때를 막론하고 늘 귀신을볼 수 있었지만 중화민국(中華民國)초 이후부터는 귀신을 보는 것이 점점 적어지더니,중화민국 10년 이후에는 완전히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 맨 처음 저승판관으로 들어오라는 것을 어떻게 통지 받았습니까? → 어느 날 밤에 꿈속에서 옛 의관을 단정히 갖춘 한 사람이 찾아와서내 방으로 들어서서 이르기를 "중대한 일이 있어서 정성스레 받들어 모시려하니수고스럽겠지만 바쁜 일을 도와주시기를 청합니다."라고 합니다.내가 그 사람에게 일러 말하기를,"그대가 어떤 일을 위임하려는 지는 모르나, 다만 내 힘이 모자랄까 두렵다"고 하였더니그 사람이 말하기를 "선생께서 제발 윤허만 해준다면 할 수없는 것은 아닙니다." 라고 하기에,나는 그가 본 뜻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지만 오직 그의 예의바른 용모가 단정하고 공경하며,그 태도가 지극정성 간절하여 정의상 차마 물리칠 수가 없어 마침내 묵묵히 허락하고 말았습니다.그랬더니 그 사람이 마음속으로 매우 기뻐하면서 서로 약속한 수일 뒤에 곧 모시러 오겠노라고다짐하고 드디어 이별하였습니다. 깨고 보니 꿈이었습니다.내 자신 속으로 한낮 꿈이라 여기고 특별히 마음에 두지 않았었는데 드디어 4~5일이 지난뒤에,꿈속의 그 사람이 또 와서는 내게 일러 말하기를 "지난번의 승낙해주신 은혜를 받잡고특별히 가마를 준비하여 정성스레 받들어 모시려고 왔습니다."라고 하지 않겠습니까?그때 내가 보니까 말 한 필의 수레가 문밖에 메어 있어서 드디어 함께 수레에 올랐더니,얼마 안가서 어떤 관아(官衙)에 이르렀습니다.수레에서 내려서 그 안으로 들어갔더니,그 사람이 나를 인도하여 한 행랑방에 이르러 자리에 앉은지 조금 후에 바로대청마루에 올라 안건을 심리하도록 청하였는데, 한 범죄인을 끌어다가 놓고좌우배심원들이 원안을 진술하여 주면서 나에게 판결하도록 요청하였습니다.내가 이르기를,"내 본래 이의 설정을 모르는데 어찌 감히 망령되이 판결할 수 있단 말인가?"하고 거절을 하니,좌우 배심원이 이르기를, "그대가 성심으로 미루어 헤아려 보면 그 의사가 어떠한지를곧 법에 비추어 징벌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기에 내가 잠깐 자세히 생각해보고 이르기를"이러 이러한 것이냐"고 했더니, 좌우 모두가 "그렇다"고 대답하고곧 나에게 판결문에 서명하도록 하고 죄범을 끌고 가버렸습니다.그리고는 이내 마차로 나를 돌려 보내주었습니다. ♣ 선생의 부모님도 이 실정을 아셨습니까? → 내가 저승판관이 된 최초에는 그 비밀을 잘 보전하려고 감히 드러내어 말하지 않았었는데,그 뒤에 부모님이 내가 빈방에 혼자 있으면서도 간간이 사람과 말하는 소리를 들으시고는차차 그 실정을 아시게 되었습니다.대개 내가 저승판관이 된 뒤부터는항상 저승친구들의 왕래가 있었는데 오직 나만이 볼 수 있고 나만이 들을 수 있었지,다른 사람은 모두 듣지도 보지도 못하기 때문에 오직 나의 말만을 들었었지요. ♣ 저승친구들이 올 때에는 역시 음식을 많이 장만하고 초대합니까? → 아닙니다. 다만 맑은 차 한 잔이면 이미 그 정을 다하는 데 족합니다. ♣ 저승에서도 역시 해마다 그 명절과 휴가가 있습니까? → 예. 이승과 다름이 없습니다.음력 설날과 청명, 한식, 단오, 추석, 동짓날 등을 만나면 역시 반드시 며칠을 쉽니다.그러나 단 아직 일, 월, 화, 수, 목, 금, 토 등의 주일은 없었습니다. ♣ 귀신은 어떻게 그 모습을 바꿀 수 있습니까? → 모든 귀신들은 모두 마음대로 변환(變幻)할 수가 있습니다.다만 반드시 저승 법정의 허가를 얻어야 됩니다. ♣ 선생은 일찍이 무슨 무슨 중요한 안건을 심판하였습니까? → 일체의 모든 안건이 모두 다 매우 평범한 안건으로서절대로 인정과 사리의 밖의 것은 없었습니다.또 그 죄상도 환히 밝아서 증거가 확실하기 때문에,복잡 다단하여 밝히기 어려운 정황은 없었습니다. ♣ 일찍이 각처를 유람한 경력이 있습니까? → 없습니다. ♣ 소의 머리를 하고 말 얼굴을 한 귀신이 정말 있습니까? →모두 가면의 도구를 쓰고 흉폭한 혼령들을 공포케 하려고 한 것입니다.만약 어질고 착한 혼령들에게는 이런 흉칙한 모습은 절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 새, 짐승의 혼령은 역시 새, 짐승의 형상을 하였습니까? → 이것은 따로 한 부에서 맡아서 관할한 바로써 나에게는 관계치 않았기 때문에나는 모르는 일입니다. ♣ 저승에서도 염불하면서 수행하는 자가 있습니까?염불을 하고 송경(誦經)을 한 사람은 이미 이런 공덕이 있는데, 저승의 모든 귀신들이 어찌빨리 염불 송경을 하여 지옥에서 벗어나서 극락,천당으로 오르기를 구하지 않습니까?만약에 염불을 할 줄을 모른다면 어찌 다른 사람의 염불하는 것을 따라서 본받지 않는지요? → 한 번 저승에 도착하면바로 그의 업력(業力)에 가로 막혀서 자연 그 염불하고 송경할 줄을 모릅니다.즉 우리가 염불하고 송경을 하면 저들도 보고들은 바가 없기 때문에수행은 마땅히 이 한 입기운이 끊어지기 전에 해야지 한번 숨이 끊어지면 힘이 되기가 어렵습니다. ♣ 귀신은 이미 형체가 없는 것(無形)을 볼수가 있고 소리가 없는 것을 들을 수가 있다고 하였는데어찌 우리들의 염불 수행하는 것은 도리어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것입니까? → 자기의 업력에 가리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시험삼아 비교하여 봅시다.세간의 어떤 사람이 본래 신앙이 없었는데 어쩌다가 굶주리고 추위에 핍박되어서우리들의 염불수행에 대하면 역시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그리하여 곧 그로 하여금 우연히 보고 듣게 하면그러나 그 사람의 욕심에 끌리고 얽매여서 그 신심(信心)이 일어나지 않고,또 신심이 견고하지 않아서 마침내 수행하지도 않고 염불하지도 않습니다.저 귀신들이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 귀신의 말소리와 우리 인간의 말소리와 어떻게 다릅니까? → 귀신의 말소리는 날카롭고 짧고도 급합니다. ♣ 이 세상을 귀신의 입장에서 보면 사람과 귀신이 함께 섞이어 사는 게 되고,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이승과 저승이 둘로 동떨어진 것인게 결국 그 경계는 어떻게 구분합니까? → 그 나눠진 경계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또 그 분계가 없는 것 같기도 하여이런 정황은 참으로 뚜렷이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 산 사람의 혼과 죽은 사람의 귀신이 그 형상과 그 얼굴빛이 차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 나는 그 때 거기에 대해서는 마음에 두지 않았었는데, 당연히 조금은 분별이 있지요? ♣ 귀신도 역시 어떤 감상을 가지고 있습니까? → 예. 그들도 역시 감각이 있어 심히 괴로워합니다.그러기 때문에 그들의 말은 몹시 슬픈 것이 많습니다. ♣ 귀신이 사람의 태에 들어갈 때(入胎)에 저승에서는 무슨 교훈(敎訓)이 없습니까?가령 그들로 하여금 악을 돌이켜 선으로 향하라는 말 따위 말입니다. → 없습니다. 오직 새나 짐승의 태에 던져질 때에는 귀신으로 하여금 그 정황을 모르게 하고,또 남자 여자를 바꿔 만들 때에는 반드시 어떤 누각에서 좋은 경치를 구경케 한다든지 하여그들로 하여금 그 속에 들어가는 것에 대한 즐거움을 갖게 합니다. ♣ 저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에 해와 달이 밝게 비치고 있는데,어찌 저 저승(幽界)에는 비치지 못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어떤 물건이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까?그리고 만일 이승과 저승이 다른 지역이라면 어떻게 사람과 귀신이 함께 길을 갈 수가 있습니까? → 항상 구름과 안개가 막아 가리웠기 때문에, 저 푸른 하늘과 밝은 태양을 보지 못합니다.다만 귀신들은 밝은 데서 어둡고 그늘진 곳으로만 갈 수 있고 더욱이그 밤사이에 활동하기 때문에 사람과 귀신이 동행할 수 있습니다. ♣ 저승에서는 어떤 책력을 씁니까? 음력입니까? 양력입니까?그리고 모든 공문서에 역시 년, 월, 일을 씁니까? → 예, 만청(滿淸)시대에는 만청시대의 책력을 썼고,공문서에서 쓰는 년, 월, 일도 이승과 똑 같습니다. ♣ 저승에도 또한 비,바람,눈,서리가 있습니까? → 보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이승의 비, 바람, 눈 서리를 만날 때 저승의 모든 귀신들이 역시그 추위에 덜덜 떨면서 괴로워하고 또 잔뜩 웅크리고 오그라들어 편치 못한 상태를 보입니다. ♣ 귀신들도 또한 서로 응수(應酬)하고,애경사에 경축하고 조문하는 예절이 있습니까? → 예, 이승과 다름이 없습니다. ♣ 향촉(香燭)은 어디에 쓰입니까? → 촛불은 그 광명(光明)을 취하고, 향은 그들을 불러오게 하는 데 쓰입니다. ♣ 폭죽은 어디에 쓰입니까? → 귀신들은 폭죽을 무서워합니다. 그러므로 적의하게 쓰일 데가 없는것 같습니다. ♣ 그 염불송경이 그렇게 큰 공덕이 있다면, 유가의 경서를 읽는 것도 또한 공덕이 있습니까? → 예, 공덕이 있습니다. ♣ 불교의 호법신(護法神)은 위다요,도교의 호법신은 왕영관(靈官)인데유교도 또한 호법신이 있습니까? → 모릅니다. 유교는 신도(神道)로써 설교하지 않기 때문에 호법신의 필요가 없는 것 같습니다.그러나 그 경전, 서적은 귀신의 가호를 받는 것은 역시 의심할 의의가 없습니다. ♣ 저승의 봉급은 어디에서 마련하여 옵니까?이것 역시 금전, 양곡, 세금의 항목으로 거두어들인 것입니까? → 일찍이 이것에 대해서 그들에게 물어 보았더니, 그들은 나에게 묻지 말라고 부탁합디다.그래서 잘 모릅니다. ♣ 사람의 머리 위의 빛깔은 무슨 색으로써 선과 악을 삼습니까? → 붉고, 희고, 누런 색을 좋게 여기고, 검은 색을 나쁘게 여깁니다. ♣ 귀신이 사람으로 변하고, 사람이 귀신으로 태어난다면결국 이 세간에는 사람이 먼저입니까, 귀신이 먼저입니까? → 여기에 대해서는 마땅히 두 방면으로 나누어서 말해야 할 것입니다.먼 상고시절 이전에 혼돈이 처음 열리고 순박(醇朴)한 기운이 흩어지지 않았을 때에는먼저 인간이 있은 뒤로부터 뒤에 귀신이 있었고, 그 후세에는 귀신이 먼저 있은 뒤로부터사람이 있게 되었습니다. ♣ 귀신들도 역시 생각이 있어서 이승의 아내와 여자아이들을 그리워합니까? → 예, 귀신들도 역시 매우 그리워하는 생각이 있습니다.그러나 시일이 오래가면 자연 담백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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