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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눈팅만하다 지역감정에 대한 좋은글인듯헤서..
어떤분인지는 몰라도 네이버지식인 답변에 전라도 홍어에 관련된 답글을 써놓으셨길래
이렇게 펌했습니다. 내공이 깊으신듯하니 읽어들 보시죠?
'홍어' 저는 듣기 좋던덴요 귀엽고 지역 특산물이잖아요. ㅎㅎ 다른 차별적인 단어보다는 훨씬 낳네요
정 억울하면 경상도는 '보리'라고 하면 되요
계몽해 드리죠, 계몽이 되어야 선진국 됩니다. 유럽도 르네상스등 계몽이 되면서 발전했잖아요
냉전시대 개발축이 영남 중심이 된건 이해한다고 쳐도, 일제식민사관처럼 경상도사관을 도입하여 역사까지 왜곡하고, 지역감정을 조장해서 경상도의 독점을 정당화시켜버린 것이 지역감정이 원인이며 그 대상이 된것이 전라도입니다.
충청도는 양반소리를 들어야 하니 속으로만 앓아야 하고, 서울 경기는 떡고물이 떨어지는 영남에 우호적이 될 수 밖에요. 전라도는 반발하니 경상도가 골치가 아픈 겁니다. 덕분에 균형개발 한다고 생색내기로 서해안도 개발 시작 한겁니다. 전라도가 견제 안햇으면, 계속 서울과 서해안은 전쟁준비나 하고 경상도만 집중햇을 가능성이 큽니다.
대부분 쓸만한 대기업과 정부요직등 경상도 출신이 장악함에 있어서, 이를 정당화 시키는 도구로 경상도 사관과 지역 감정이 동원됩니다. 서울 경기 삔질이, 충청도 멍청도, 전라도 깡패 경상도는 사나이라는 당연히 부와 권력은 경상도가 차지해야 한다는 논리가 정당화 되고 반발을 최소화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몽이 되어야 하죠 그래야 괜히 종로에서 뺨맞고 엉뚱한 한강에서 화풀이 하진 않죠 ㅎㅎㅎㅎㅎ
전라도와 평야지역은 마인드가 부드럽고 융통성이 있습니다. 대륙적인 기질이 강한 성향입니다.
경상도는 산악지역 특성상 고립된 지역이라 고집이 세고 자존심이 강하며 추진력이 강한대신 독점하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무엇이 왜곡인지 사례를 들어 설명하지요. 단언컨데 박정희 이전 지역감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영호남이 같이 움직인 사건들이 많았지요. 참고로 박정희 대통령은 전라도의 압도적인 지지 덕분에 당선된 분입니다.
좌우 논란
건국초 부터 60년대까지 전라도는 우파성향 경상도는 좌파성향이 강한지역이었읍니다.
건국세력인 한민당은 전라도가 본거지이며 이승만 박사는 전주 이씨입니다. 경상도는 남노당이 주도하는 대구폭동등 좌파성향 폭동이 많았던 지역입니다.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더 많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박정희 이후 경상도 독점 이후 민주주의 자본주의 수호자인양 얼굴이 싹 바뀝니다. 거기까지는 좋은데 엉뚱하게 전라도에 좌파니 *니 하는 논조로 왜곡합니다. 공부좀 하는 영남인은 스스로를 부끄럽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전라도의 주장은 독재하지 말자는 것, 민주화 하자는 운동, 경상도만 독점하지 말자는 주장등 좌파하고는 거리가 먼 것들입니다.
* 옛날이나 지금이나 영남인 호남인 다 똑같은 사람이고 격의 없이 대합니다. 문제는 독재로 부와 권력을 지배해 버린 경상도 지배층이 문제입니다. 한번 잡은 것을 절대 포기하지 못하고, 또한 유지하기 위해 지역감정 조장과 경상도사관 주입에 혈안이 되어 있는 겁니다.
투표성향 오해
투표성향에 대한 오해인데 박정희에 대한 지지는 호남이 영남보다 비슷하거나 높았습니다. 오히려 5~60년대만 해도 영호남 공조하는 성향이 많았습니다. 역사적으로도 영호남이 같이 움직인 사건들이 많았지요
1970년대 김대중과 선거에서 가까스로 이긴 박정희가 영구집권을 꿈꾸고 유신헌법을 통해 선거자체를 없애버리고 김대중과 호남에 차별을 가합니다(지역감정의 사실상 시작이죠) 이를 계기로 호남민심도 박정희에게 등을 돌리고 김대중에게 집착하게 된 계기가 됩니다. 이후 선거에서 필승전략은 지역감정 조장해서 표가 가장 많은 영남표 확보로 흘러 가게 됩니다.
참고로 50~60년대 부터 경상도 지역은 몰표 성향을 보입니다. 아이러니 하지요
경제성장부분
물론 개발독재를 통해 국부와 위상을 높인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냉전시대 미국영향권에 있는 나라치고 발전하지 않은 나라가 없습니다. 조그만 섬나라인 대만도 위상이 대단하잖아요 일본이 핵심기술 지원하고 미국이 수입해주고 정말 쉬운 구조입니다. 단지 방법과 속도 차이라고 봐야지요
요즘도 우리 수출이 늘어나지만, 앉아서 돈버는건 핵심기술을 지원하는 일본이 버는 구조입니다. 우리도 돈을 벌지만 이윤이 박합니다. 그러다 보니 기업들이 환률차익에만 목매게 되는 것입니다.
자동차,조선,반도체,휴대폰 이런 산업은 장치산업이라 하여 왠만한 교육수준이 있는 나라가 따라 붙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핵심기술,원료,설비장비 일본등 선진국 지원 없으면 우리나라 산업 올스톱입니다. 이건 알고 계시나요?) 예로 중국 어느새 금방 쫒아오잖아요, 북한도 개방해서 일본,독일등이 지원해주면 우리정도 수준되는건 시간문제입니다. 그래서 경쟁은 가면 갈수록 치열해 질수 밖에 없습니다. 단지 차이는 디자인과 마케팅의 차이입니다.
결코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이야기 하는 겁니다. 유독 경상도 출신이 대기업을 운영하므로 발전한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식민시대와 전란을 거친후 아무것도 없는 우리민족이 이만큼 국부를 창출한 것은 정말 다행이고, 또한 핵심기술 확보와 국산화률을 높이면서 일류국가로 거듭나야 하는 중요한 기로에 있습니다. 그런데 말도 안되는 지역감정에 얽매여 있고 냉정시대 유물인 남북 대치관계 부활은 오히려 우리민족의 퇴보를 부를 우려가 높습니다.
역사적인 악평
역사적인 기록이라며 전라도 악담이 많이 나오죠, 이거 죄다 발췌하면 악담없는 도가 없습니다. 경상도 더 심한 악평 많습니다..(경상도 위주로 역사 악담 모으면 얼굴 못들고 다닙니다). 상대적으로 전라도에 좋은평이 많습니다. 호남이 없으면 조선도 없다, 충절 예의 지향이다 등등 그리고 각 지역마다 악담이 계속 등장하는 것은 왕조국가 특성상 견제에 의한 통치방법입니다.
직장생활 해본분들 사장이나 상사들이 악담을 더 많이 하지요 견제심리입니다. 너를 깍아 내려야 내가살기 때문이지요 넘 간단한 이치 아닌가요. 더구나 각 지방 수령관이 부정부패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데 각 지역민 험담하는 것이 더 많을 수 밖에 없는 것은 기본중에 기본입니다.
과거에도 영남이 우월햇다 ?
이부분까지 영남이 건들면 안되는 것이었는데 불행히도 왜곡이 된 부분이 상당히 많습니다. 뒷글에서 상세히 부연하지요
결론적으로 농경사회에서 전라도와 경상도는 비교대상이 될 수도 없었습니다. 인구에서도 차이가 많이 났고 경제적 동력이었던 호남은 특대우는 아니지만 우대를 받았던 지역입니다. 상대적으로 박해와 차별은 경상도 지역이 많이 당햇읍니다.
농경사회에서 경상도는 하나의 변방에 불과햇습니다. 농지와 산물이 풍부한 서해안 지역이 부와 권력을 장악하엿고, 옛부터 전라도는 조선 8도에서도 인구가 30%에 이를 정도로 살고 싶어햇던 곳입니다.
이유는 간단하지요 땅과 바다 그리고 뻘이 있어서 호미만 있어도 먹고 산다고 하여 가장 축복받은 땅이라고 하였습니다. 지금은 살기 위해 경상도로 많이 거지요 똑같은 겁니다.
보리문둥이
참고로 보리문둥이 라는 표현이 있는데 특정지역 폄하가 결코 아닙니다. 이건 영남인들의 서로 부르는 애칭이기도 합니다. 현재의 심각한 특정지역이 받는 오해를 바로 잡아 역사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소개합니다.
경상도 연세 많이 드신분들은 아직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너네들이 잘먹고 잘 살았지만 우리는 겨우 30년 밖에 되지 않아다고 말이죠.
구한말 간도 이주, 일본진출등 경상도 지역민들이 다수였습니다. 이유는 먹고살기 힘들엇기 때문이지요. 5~60년대만 해도 경상도는 촌스러웟고, 전라도는 교육수준이 높고,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엇으며 부자들이 많았으므로 '예향' 요즘말로 패션너블하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단적으로 5~60년대까지도 지역감정이란 것은 없다고 봐야 합니다. 애초에 농경사회에서 평야지역과 경상도 지역은 비교대상이 될 수가 없었고 인구도 비교할 수 없이 차이가 있엇기 때문입니다.
경상도는 보리문둥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평야가 적고 수자원이 열악한 지역특성상 보리농사를 많이 지었고 보리 특성상 영양이 부족합니다. 따라서 한센병 환자가 상당히 많았습니다. 일제시대 전라도 소록도에 강제 수용한 이유도, 한센병 환자가 경상도인이 많은 관계로 탈출해서 고향으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 고향에서 먼곳으로 수용하게 된것입니다.
이것도 설이 있는데 보리문동(공부하는 아이들)이 변형된거라는 설이 있습니다. 이인좌 난 이후 200년 이상 정계진출이 좌절된 영남인들이 고향에서 서원을 열어 열공했다고 합니다. (조선후기 서원이 경상도가 최다) 그리고 의견을 제출할때는 대표가 상경하여 상소를 올렸다고 하는데(예를 들면 영남 만인소) 이때 한양사람들이 이들을 보고 보리문동들 또 왔네 하였다고 합니다.
유배에 대한 편견
유배에 대한 편견인데 과거 문인은 전라도, 무인은 경상도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유배자는 조선팔도를 주기적으로 돌아 다녓습니다. 문인들 유배자가 전라도에 많은 것은 그나마 편한 곳으로 보낸 전관예우라고 보면 됩니다.
반역반란
민감한 부분까지 왜곡이 심하니 정말 할 말 없네요 바로 잡습니다.
반역 반란인데 이거 경상도 정말 할 말 없습니다. 젤 많았습니다.(이유는 농경사회에서 변방이었고 먹고살기 힘들었기 때문이지요). 단 다른지역 반란건만 부각시킨거지요. 그리고 같은 반역이라 하더라도 피해를 심하게 당했습니다.
예를 들면 고려시대내내 김사미 효심난등 신라부흥운동 성격의 반란이 발생하고 무수히 진압당한다. 그나마 우대해주던 경주까지 천민주거지역으로 강등됩니다. 천민집단 주거지인 향소부곡 400군데 중 60%가 경상도에 지정될 정도입니다. 고려시대 경상도 인구는 전체 10%정도입니다.
다른지역보다 경상도 지역에 서민들 성씨가 많고 스포츠에서 좋은 타자와 힘 있는 장사들이 많이 배출되는 이유가 있는 겁니다. 평야지역은 상대적으로 학자, 예술가들이 많이 배출되지요
조선시대에는 이인좌 난을 계기로 경상도는 과거시험까지 금지됩니다. 지역차별 성격이 전혀 아닙니다. 조선 중기 이후로 자리는 한정돼 있고 양반은 늘어나다 보니 경제적 영향력이 적은 경상도 지역의 출사길을 막아 버린 겁니다. 평야지역은 반란은 일어나도 반란으로만 끝나지요 출사길까지 막지 못합니다. 경제적인 영향력이 너무 컷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반대지요. 같은 사건 잘못이더라도 경상도는 다른지역보다도 상대적으로 면피합니다. 이쯤돼면 이해가시겟죠
역사적인 인물
정말 고치고 바로 잡아야 할 부분이 많네요
유독 영남 인물과 지역만 역사에 강조되는데, 그러다 보니 고려와 조선의 역사가 빈약해지고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되는 원인이 됩니다. 식민사관과 다를 게 무엇이 있겠습니다. 고치고 바로 잡아야 합니다.
조선중기의 이황,유성룡등만 강조되고 그나마 후기는 이인과 난을 계기로 중앙정계진출이 좌절됩니다. 대부분 경상도 관료는 경주지역, 안동지역만 등용이 이뤄지며, 이또한 지역안배차원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나마 고려시대에는 경주마저도 강등되는 아픔을 겪습니다.
그리고 이들 또한 본관만 경상도일뿐 살기 용이한 평야지역에 거주한 토착민인 경우가 많앗습니다..
일례로 조선 후기 세도가인 안동김씨는 서울 경기지역이 주류이고 그들 스스로도 실질 거주지인 장동김씨라고 자칭하였습니다. 굳이 안동김씨임을 내세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실상 조선과 유교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곳은 조선의 제2의 수도라 할 수 있는 전주입니다. 역사적인 유물만 봐도 안동과 게임이 안되죠 그런데 배제를 당한부분은 바로 잡아야 합니다.
훈요십조 논란(필독입니다.)
경상도 독점을 위한 가장 한심한 해석입니다. 후손들에게 부끄러워 해야 합니다.
고려 창건시 나주지역의 호족의 결정적인 도움을 받앗고 이후 농경사회에서 전라도 위상은 남달랏습니다.(옛부터 농경사회에서 호남은 토지, 바다, 뻘 3개농토가 있다고 하여서 가장 축복받은 땅이라 하였습니다.) 따라서 두가지 설이 존재합니다.
조작설
구술로만 전해져 오던 훈요십조가 등장한 건 8대 헌종때인데 거란침입으로 소실된 기록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최항과 최제안이 경상도 관료인데, 최제안이 최항의 집에서 발견되었다며 가져오게 되면서 조작설이 나오게 됩니다(박해받던 시절에 대한 반발심리이도 있지만 특정지역을 배제하여 상대적인 이익을 누릴려는 정치적인 목적일 가능성)
해석의 차이
지도를 보면서 봅시다. 평소 지도 같은 것은 안보는 분 많죠 ㅎ ㅎ
차령산맥이남 공주강 외 지역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차령산맥 이하라 하게 되면 경상지역, 충청지역, 전라지역 모두 포함됩니다.(고려영토 2/3에 해당합니다.) 경상도는 소백산맥이 따로 있으니 괜찮다구요 ! 그럼 전라도는 노령산맥이 있으니 괜찮겠네요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를 않습니다.
공주강(금강이라는 통설) 외라는 표현인데 금강은 거의 차령산맥 방향으로 곡선도 아닌 u자 형태로 볼록합니다. 즉 공주강(금강) 외라함은 공주강(금강) 위를 지칭하는 겁니다. 설령 아래라 지칭해도 거의 u장형태 안의 지역에 불과합니다. 그럼 다시 정확히 해석하면 전라도는 해당사항 없고 경상도만 지칭하는 겁니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아닙니까?
그리고 한자어 특성상 외라는 표현은 바깥이라는 표현과 위라는 표현이 혼용되고 있었습니다.
즉 고려초 후백제계가 주류인 상황에서 전혀 이치에 맞지않고 다른 훈요십조 내용과 상반되는 모순이 발생합니다 또한 2대 혜종의 어머니는 나주출신입니다.
따라서 실제 기록이라면 차령이남 공주강 위 특정지역만 한정한다는 것이 통설입니다. 실질적으로 이지역에서 왕건이 고난을 많이 격었다고 합니다.
지역감정의 폐혜
지역감정의 폐혜는 상당히 심각합니다. 경상도 권력은 권좌에 있을 때는 당연하게 생각햇지만 야당 10년 하면서 향수를 강하게 느끼고 있으며, 전라도는 아직 배고프다고 느끼고 있고, 충청도도 그동안 양반소리를 듣는게 더 좋아 속으로만 끙끙 앓다가 최근에는 우리도 곁불만 쬐지 말자고 하고 있지 않습니까. 강원도도 우리지역 출신 대통령 만들어 보자고 하고 있습니다. 즉 나라와 민족의 장래보다는 지역주의 한탕주의 중심의 폐혜가 심각한 상황입니다. 이러한 상황이 된 것에 대해 경상도 권력가는 역사 앞에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영남 권력이 과거의 역사를 인정하고 현재의 주도권의 당위성을 강조했으면 지금과 같은 심각한 지역감정이 발생했을까요 ?
역사 왜곡이 심각하고 이를 계몽하지 않으면 지역감정을 치유 할 수 없고, 다른 지역의 훌륭한 인재가 배제 되면 그만큼 민족적인 손실이 크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전라도 위주로 역사를 다시 한번 정리해 보지요. 하지만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경상도 지역은 박정희 이후로 이미 부각될 만큼 부각이 되었습니다.
남북국시대(통일신라 , 발해)
역사적으로 타민족 끌어들인것은 잘못 된거지만 이후 통일 왕조가 유지되는 기틀을 제공하는 시기입니다.
그러지 않앗으면 아직까지도 한반도에 여러나라가 존재햇을 가능성 배제 못합니다.
통일신라 화랑정신 김유신 불국사 첨성대 - 고구려 백제 문명은 파괴된 상태이므로 강조하는 건 이해하지만
천년이 지난 상황에서 강조되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잊혀진 고구려 백제 문명도 조명받아야 하는것이 합당합니다. 가야는 망햇어도 계속 재조명 해주고 부각시켜 주잖아요 문제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고구려를 계승한 대진국(발해)를 포함한 남북국 시대라고 해야 옳습니다. 지금 분단되어 있지만 북한을 다른 민족 취급하지 않잖아요 같은 이치입니다.
고려시대
왕건은 타민족을 끌여들여 통일한 신라에 대해 감정이 좋지 못햇었고. 신라가 붕괴된지 얼마 안된 시기이므로 신라계를 중용할 이유가 전혀 없지요. 바보가 아닌 이상 말입니다. 물론 통치와 제도 노하우를 참고해야 하므로 일부 등용하긴 합니다. 회사 m&a를 해도 일단 다 정리하지는 않잖아요.
고려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신라계가 장악했다는 말을 하면 배꼽잡고 웃습니다. 왜냐하면 전혀 근거가 없습니다.
고려초 권력은 백제계가 장악합니다. 왕건이 애지중지한 신숭겸 장군아시죠 전라도 곡성출신입니다. 전라도 출신 왕비와 왕자, 도선국사 최지몽등 중용하여 권력의 절반을 전라도출신에게 의지합니다. 이후 개성주변 경기도 권력가들이 많이 등장(경상도가 본관인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살기편한 평야지역으로 거지지를 옮긴 토착민이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호남지역 관료는 이후로도 무수히 많이 배출됩니다.
경상도는 김사미/효심난등(당시로 보면 신라재건운동일수도 있죠)으로 그나마 우대하던 경주까지 천민주거지역으로 강등됩니다. 밀양의 오치재는 까마귀가 반란군을 뜯어먹는다는 뜻입니다.
이후로도 고려시대 내내 신라부흥 운동성격을 띤 반란이 일어나고 무수히 진압당합니다.
참고로 천민주거단지인 향소부곡의 400여개중 200개가 넘는 향소부곡을 경상도에 지정합니다(농경사회에서 경상도는 인구가 적엇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다른지역보다 경상도 지역에 서민들 성씨가 많고 스포츠에서 좋은 타자와 힘 있는 장사들이 많이 배출되는 이유가 있는 겁니다. 평야지역은 상대적으로 학자, 예술가들이 많이 배출되지요
거란등 침략할때 왕의 피난처는 전라도 지역이었습니다. 이또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경상도는 과거 신라본토였기에 불안한 것이 이유엿고. 전라도지역은 풍부한 산물과 인구가 형성되어 있어서 재기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조선시대
전라도는 사실상 왕조의 발상지로 우대를 받던 지역입니다. 이성계가 전주이씨이며 전주에 경기전을 지여 6대조와 이성계를 모시고 선비들로 하여금 떠받들도록 하였습니다. 임진왜란때 전라도지역의 피해가 적고 전주사고가 유지된건 왕조차원에서 필사적으로 방어한 것이 그 이유입니다(경제적으론 농지보존이겟죠)
황희정승을 대표로(장수황씨), 전주이씨,전주최씨,반남박씨,광산김씨,나주 남평문씨,순천박씨등 조선을 관통하는 명문가 집안입니다..(vs 경상도 안동지역, 경주지역로 보시면 틀림 없습니다.) 유교사회 조선에서 본관은 절대적인 인사기준이기 때문이죠
결정적으로 조선후기때에는 이인좌의 난(남인출신)을 계기로 반란은 충청도에서 일어났고 다른지역에서도 움직임이 있었지만 영남지역은 남인중심으로 반란이 일어나는 실질적인 액션이 발생합니다. 따라서 대구에 영남토벌비를 세우고 반역향으로 못박고 100년간 과거시험금지가 시행됩니다.(그나마 추풍령 넘어 어렵게 과거시험을 보던 영남지역의 출사길을 막아버린 것입니다)
참고로 과거 사색당파는 학파와 주장의 차이로 갈렷고 지역적인 특색은 그리 강하지 않습니다.
호남또한 차별이 있었는데 정여립 모반사건입니다. 그런데 실제 액션은 없었고 모략에 의한 당파전쟁에 의한 희생인데 이때 호남 사대부가 싹쓸이 당합니다. 그런데 운좋게 몇년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호남 지역민들의 눈부신 활약으로 면피하고 이순신과 선조는 호남이 없으면 조선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다른지역도 문제가 발생하면 반역도로 찍힙니다. 충청도는 도까지 강등될 뻔 했습니다.
단지 정치적,경제적 영향력이 적은 영남이 피해가 심했습니다.
일제시대
조선말 일제의 침탈때 가장 극렬하게 저항햇던 곳이 전라도이며 또한 수탈도 심했읍니다. 그러한 사실을 일제가 악의적으로 탄압하면서 식민사관에도 인용됩니다.
건국초기
건국을 주도한 세력은 한민당인데 전라도가 본거지이며 이승만 대통령은 전주이씨입니다. 사실상 60년대까지 전라도가 주류엿습니다. 박정희도 윤보선과 선거에서 이긴것은 전라도의 압도적인 지지 덕분이죠
박정희 시대 이후
결정적으로 영남지역이 통일신라이후 천년만에 한반도의 주류로 등장한 역사적인 시기입니다.
재계의 10대그룹 대부분이 경상도 출신들로 이뤄지고 전라도 뿐만 아니라 다른지역도 경제개발에서 배제되게 됩니다 물론 냉전시대 미국과 일본축인 영남지역이 개발이 이뤄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역사의 이치입니다. 당분간 한반도의 주류는 경상도가 될 것으로 판단됩니다. 하지만 왕조국가도 아니고 민주주의 국가에서 지나친 감이 없지않아 있습니다.
지역감정은 어느지역 어느 사회에나 존재합니다. 지금은 경상도가 주류인 사회이고 경제개발의 결정적인 공로를 세웟습니다. 전라도도 인정할 건 인정하고 넘어가야 겠지요, 그런데 지나치게 왜곡된 역사에 자존감을 상실한 전라도가 이해할 수 있는 여유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윗글도 전라도 위주로 작성하였지만 어디까지나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전라도 분들이 상심할 이유가 전혀 없고, 다른지역 사람들이 정치인들이 조작한 지역감정에 휩쓸려 일방적으로 특정지역을 매도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다행히 저부터 요즘 젊은세대들은 정치적인 지역감정에 휩쓸린 경우는 매우 드물어진 것 같습니다.
농경사회에 권력과 부를 누리던 전라도, 산업사회에서 국부를 일군 경상도 지역감정은 결코 없어지지 않습니다. 단 건전한 경쟁을 통해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왕조시대를 관통하여 대부분을 주류지역으로 대접받던 전라도가 지나친 피해의식을 가질만한 역사적인 근거가 전혀 없습니다. 부디 상대를 인정하는 여유를 찾기를 바라며, 경상도 지역은 산업화의 주력세력이자 지리적으로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는 최일선에 위치하고 있으며, 앞으로 국부를 키우고 위상을 높이는 중요한 역활을 담당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민주주의 이므로 지나친 독점은 모두에게 좋지만은 않은것 같습니다. 그리고 서해안 시대가 도래할 확률이 높으므로 좀더 거시적으로 그리고 대국적으로 발전했으면 합니다.
지역감정이 지나치면 망국의 지름길입니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말입니다. 따라서 정확한 역사지식에 근거하여 특정지역이 지나치게 왜곡되지 않도록 권장하고 선도하는 정치인들의 역활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상호 존중하고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망국적인 지역감정이 건전한 지역경쟁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글을 올립니다. 짧게 되지 않네요 역사를 관통하다 보니.....
에델송작성일
2010-08-25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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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경주에서 선덕여왕 이벤트가 있던날 !!
경주에서 선덕여왕 이벤트가 있던날 !! [대 한 민 국님 글]
이 작자 이야기를 안 하고 넘어갈 수가 없군요.
정운찬 .................~!!
수많은 의혹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한날당이 총리인준을
표결로 밀어붙여 가결 시켜 버렸습니다.이것도 문제이지만
군대도 안 갔다온 쌍수 하는 말이 더 가관입니다.
표결에 불참처리한 야당에게 이런말을 하더군요
야당은 “재보선 위한 국정 발목잡기” 그만하라고 ....... 신발쉑히 ...!!
이런 자가 어찌 국민의 혈세를 축내고 사는지
국민의 정부와 참여 정부 때 한날당은 어떻게 했습니까 ?
조중동과 합세하여 온갖 공격을 다하며 한 치의 의혹이 있으면 안된다고 하던늠들이
쥐들이 정권을 장악했다고 180 도로 돌변하여 위장전입 세금포탈 같은 범죄는
이제 죄도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데도 국민들에게 법을 지키라고 할 수 있는지 참으로 개탄스럽니다.
아~!! 너무도 슬픈 대한 민국 ~~~~~~~~~!!!
이번 재보선에서 민심을 확실하게 보여 줘서 쥐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줘야 할 것같습니다
우리는 앉아서 당할 수는 없습니다.깨어 있는 시민정신을 발휘해야 만합니다.
후안무치한 이정권에 부도덕함을 온 세상에 알려 오는 10월재보선은 물론이고 내년 지방선거에서도
승리를 거둬 다시는 저들이 찍소리 못하게 만들어야만 합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함께 움직여 봅시다.
오늘도 진알시는 달립니다. 저들의 만행을 알려야 하기에
경주 진실을 알리는 시민 활동후기입니다.
☆비가 와도 멈출 수 없는 진실을 알리는 시민
경주입니다.*경북경주시민광장진알시팀(http://usimin.co.kr/network/club_main.php?cb_id=re2_189)
*대구경북아고라 http://cafe.daum.net/dgagora
*참여:타협은없다,노란집, 새날, 비에타,독립군,모닥불,지나가는나그네,끝장,매니아.성깔공주
*2009년 9월 26일 토요일 오후2시~5시 경주 아카데미 극장 사거리 일대 상가 중심 배포
*한겨레50부, 미디어 오늘 100부
경주에서 두번째 진실을 알리는 날입니다.
오늘은 대구에서 성깔공주님이 미디어 오늘을 직접 들고 원정을 오셨습니다.
대구에서 1년 넘게 진알시를 진행하고 있는 성깔공주님의 노하우를 좀 볼까요???ㅋㅋㅋ
헉!!!!!!!!!!!! 그런데 한겨레 50부밖에 없네요.
분명히 100부를 주문했었는데 나머지 50부는 어디로 갔을까요???
나머지 50부 어디로 갔는지 아시는 분은 경주진알시로 연락 부탁드립니다.
집 나간 겨레 찾아요~~~~ㅋㅋㅋ
겨레 1면을 볼까요?? 우이씨 쥐새끼 면상이.........
겨레야 앞으로 모자이크 처리 좀 부탁한다.
누나처럼 심장 약한 사람은 심장이 벌렁거리고 혈압이 급상승 한단다.ㅠㅠ
온 국민의 건강을 위해서 모자이크 처리는 필수!!
집 나간 겨레 대신 대구에서 업혀 온 미디어 오늘을 함께 나눠줬습니다.
오른쪽 사진 맘에 드네요. 온 국민이 원하고 또 바라는 그것!! 넌 아웃이야!!
성깔공주님의
삽지신공을 감상해 볼까요??ㅋㅋㅋ
삽지도 넣고...
판넬도 쫙 펼치고.........
미디어악법에 관한 내용이 주로 담겨진 판넬입니다.
진알시 무료 배포 현수막도 붙이고.........
테이블의 지킴이 이쁜 천사를 소개합니다.
경주 또 하나의 개념 천사!!! 이름은 이 하은입니다.
아빠는 새날님, 엄마는 비에타님이십니다.
저렇게 앉아서 신문도 나눠 주고 서명도 받고..........ㅎㅎ 이쁘죠??
경주에는 개념 찬 아이들이 참 많답니다.^^
대한민국의 미래는 밝습니다~~~
언니 빨리 빨리 서명해주세요~~
이명박정부와 딴나라당이 조중동과 재벌에게 언론과 방송을 넘겨주려고 하고 있어요.
국민들의 귀를 막고, 입을 막고, 눈을 가리게 만드는 나쁜 미디어악법을 막아주세요..
천사가 부탁하면 오빠도, 언니도 마구 마구 서명을 해버린답니다.^^
겨레도 나눠주고 서명도 받았답니다. ㅎㅎ 개념찬 가게였습니다.
사장님을 비롯 직원분들도 모다다 서명을 해주셨습니다.
이 날은 비가 계속 오락가락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신문 배포하는 사진을 많이 찍지 못했습니다.
비가 쏟아지니깐 신문부터 온 몸으로 감싸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신문 젖으면 안되는데 걱정부터 합니다.
신문 한부가,,,,,판넬 하나가 소중하게 생각되어 질수 밖에 없습니다.
버려진 신문을 보면 눈물이 납니다. 흡집이 난 판넬을 보면 가슴이 아픕니다.
시민들에 의해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만들어진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선덕여왕 드라마가 한창 인기를 얻고 있답니다.
드라마도 경주에서 촬영을 하고 있습니다.(그런데 경주시민인 난 드라마를 본 적이 없다는.........쿨럭쿨럭)
그런 인기를 등에 업고 매주 토요일 선덕여왕 행차 재현 이벤트를 하고 있습니다.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행차가 지나가길래 몇 장 찍어 보았습니다.
오해 하시면 안됩니다. 고현정씨,
이요원씨가 직접 행차에 참여 하는건 아닙니다.ㅋㅋㅋ
비가 와서 그런지 표정들이 다......ㅎㅎ;;
원화 언니가 제 카메라를 보고
방긋 웃어주네요.ㅎㅎㅎ
이쁜 원화 언니들..........
요것은 무엇일까요?? 왼쪽은 첨성대인건 다 아실거고..........
오른쪽은 뭘까요?? 맞춰 보세요~~~ 오늘의 퀴즈: 오른쪽은 무슨 모형일까요??
정답을 맞추시는 분에게는 선덕여왕 행차 이벤트 무료 관람권을 드립니다.ㅋㅋ
다음 경주 판넬전및 진알시는 10월 10일 토요일 오후 2시 예정입니다.
경주 아카데미극장 사거리입니다.
쥐새끼가 물어간 민주 되찾기 프로젝트에 동참 하실 개념 찬 경주시민들 함께 해요~~
ㅡ경주 진실을 알리는 시민 ㅡ
★진실을 알리는 시민 에서 알립니다.
*언론노조, 언소주, 미디어행동, 진알시에서
시사인 컨텐츠를 빌려 현정국 상황을(4대강 삽질 .미디어법 .등 각종 기사)
실었습니다. 이런 알뜰한 시사인 특별판을 10월1일 2일 이틀간
추석 귀성객을 상대로 15만부를 서울역및 전국에서 배포할 예정입니다.
(진알시홈피 공지사항 참고바람 )
서울 지역 은 다음과 같습니다.
서울역.용산역.청량리역.영등포역.강남터미널(경부) 강남터미널(호남)6곳
여러분이 희망입니다.
모든 방송이 장악되고 있는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모든 것을 시민에게 알리고 함께 하는것입니다.여러분이 희망입니다.
우리 시민이 승리했음을 역사로 기록되게 만들어 주십시오 !!
함께 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어도 환영합니다.
진실을 알리는 시민 www.jinalsi.net
10월 재보선 야당은 후보 단일화하라
성남팀입니다.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15&articleId=782118
가자서작성일
2009-09-29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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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글터] 아직까지도 풀리지 않은 한국의 9가지 미스테리
한국의 미스테리
1. 고대 왕국 가야와 아유타국의 미스테리
삼국유사에서는 아유타국을 인도의 고대왕국이라고 밝히고 있고 아유타는 인도 이름으로는 아요디아(Ayodhya)이다. 아유타국은 주위가 5천여 리, 나라의 왕도는 20여 리의 성으로 둘러 싸여 있으며 곡식과 과일이 풍성하고 풀과 꽃들이 우거져 무성하였다. 그리고 기후가 화창하고 사람들의 풍습이 착하고 온순해 학예에 부지런했다고 한다. 이 나라의 영향력이 한 때는 인도 전역뿐 아니라 동남아시아 일대까지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먼 곳에서 가락국까지 올 수 있었을까? 서기 1세기 무렵에 바다는 그렇게 두렵기만 한 존재는 아니었던 것 같다. 대륙의 연안을 따라 바닷길로 이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허황옥이 인도를 출발하던 음력 5월에는 인도와 한반도를 잇는 해로는 바람과 해류가 북으로 올라가는 기간이다. 즉 그 바람은 계절풍이고 해류는 리만해류이다. 그래서 어떤 큰 이상기류를 가진 태풍만 만나지 않는다면 배가 무사해 항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허왕후가 인도의 아요디아에서 무작정 가락국에 와서 곧바로 왕후가 될 수 있었느냐는 의문이 생긴다. 아무런 사전교섭없이 바로 왕후가 됐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뭔가 그 전부터 이 두 나라간에 수많은 교섭이나 왕래가 있었기에 두 왕실의 합의에 의해 결혼이 성사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한가지 주목되는 것은 김수로왕이 죽고 난 후 가락국과 아유타국과의 교류가 갑자기 끊기게 된 점이다.
가락태조왕릉 중수비에 있는 이수는 우리나라 그 어느 비각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문양을 수놓고 있는데 태양빛 같기도 한 것이 중앙에 있고 그 주위에는 이상한 형체의 동물같은 것들이 새겨져 있다. 이것은 인도 아요디아의 태양왕조를 상징하는 붉은 바탕에 흰색의 깃발에 그려진 문양과 똑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수로왕릉 납릉 정문에 있는 신어상인데 이 상은 인도 아요디아의 관공서와 성문 그리고 저택 등에 조각된 것과 똑같은 모양이다.
이러한 일련의 흔적들은 황하문명권의 일부로만 인식되어 오던 우리의 역사가 실제로는 인도의 문명까지 흡수하면서 발전해 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2. 첨성대
경주시 인왕동에 자리잡은 국보 제 31호 첨성대(瞻星臺). 동양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알려져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선덕여왕(632-647, 신라 27대 왕) 때 건립된 것이라 한다. 높이 9.17m에 밑지름 4.93m, 윗지름 2.85m이다. 첨성대의 용도에 대한 여러 학설이 제기되었지만 현재는 천문대라는 설이 유력하다. 하지만 첨성대에서 어떤 방법으로 별을 관측하였는지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첨성대가 해 그림자 길이를 재기 위한 규표(圭表)로서의 용도였다는 주장도 있었고, 정교한 기하학적 구조로부터 수학적인 비례 등을 나타내기 위한 수학적 상징물로 봐야 한다는 의견도 등장했다. 선덕여왕이 은밀하게 신하들을 만나던 장소라는 주장과 외계인이 남겨놓은 기념비라는 주장도 있었다.
이러한 첨성대에 대한 다양한 해석은 열띤 논쟁을 불러 일으켰으나 아직 어떠한 합의점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다만 원래 제단이 있었던 자리에 첨성대가 있었다는 점이나 신라의 천문관측 기록 등으로 미루어 보아 첨성대는 천문관측 외에도 종교적인 의식을 치르던 곳이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현대적인 의미의 천문대와는 다른 성격의 건축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랜 세월 모진 비바람을 견디고 그 자리를 지켜온 첨성대는 역학적 안정성, 미학적 곡선미 등을 두루 갖춘 온 세계의 소중한 문화유산으로써 그 속에 담긴 의미를 풀어 나가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 아닌가 싶다. 첨성대를 보존하기 위한 정밀조사와 첨성대의 건립배경을 규명하기 위한 적극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3. 운주사 와불과 천불천탑
운주사하면 천개의 불상과 천개의 탑이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석탑과 석불을 합쳐 100여개 남짓밖에 안 될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아마도 11세기 초반 운주사 창건 이후 수많은 전란과 재난에 의해 사라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80년대만 해도 이 운주사 돌탑과 돌부처 바로 앞까지 논밭이 있어서 이곳이 훼손될 수밖에 없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인근의 노인들에 의하면 인근 마을 사람들 중에 자기 집을 고치거나 새로 지을 때 이곳 돌부처와 돌탑을 가져다 쓰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이니 옛 기록이 그저 허황된 것만은 아닌 듯 싶다.
석불좌상의 높이는 12.73m이고 석불입상의 높이는 10.30m인데 이 두 석불은 대체로 북쪽 다리 부분이 남쪽 머리 부분보다 약 5도 높고 입상쪽이 좌상쪽보다 약 5도 높게 경사져 있다. 이 와불은 다른 곳에서 만들어 이곳에 옮긴 것이 아니라 산 정상에 있는 암반에 그대로 조각한 것이다. 문제는 고려 초기 당시에 어떻게 이 무거운 불상을 일으킬 생각을 했었느냐는 것이다. 아니면 이곳의 다른 불상들처럼 파격적인 모습을 구상하여 처음부터 하늘을 보고 누워 있는 불상을 조각했는지도 모른다.
일반적으로 석가모니가 열반할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측와불은 인도나 스리랑카 쪽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형태는 운주사의 와불과 현격한 차이가 있다. 인도나 스리랑카의 측와불은 석가모니가 누워서 손으로 턱을 괴거나 받친 상태인데 운주사의 와불은 그저 정면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또 좌상과 입상의 다리 부분에는 떼어 내려고 했던 흔적으로 보이는 틈이 있다. 암반에 불상을 조각하고 떼어 내는 공정을 마치지 못한 미완성 불상으로 일부에서는 추측하기도 하지만 처음 불상을 조각한 후 생긴 흔적인지, 아니면 후대에 사람들이 나름대로 의미를 두면서 세워 보려고 만든 흔적인지는 단정지을 수 없다.
운주사에는 천개의 불상과 천개의 탑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현재 석탑은 모양을 제대로 갖춘 것이 18기 가량밖에 남아 있지 않다. 운주사 입구에 보이는 구층석탑, 칠층석탑, 특이하게 생긴 원형다층석탑(연화탑), 원형석탑(실패탑), 오층석탑(거지탑), 원구형석탑(항아리탑) 등이 있다. 이 석탑들은 몇 가지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먼저 전형적인 우리나라 석탑형식으로 탑신과 옥개석이 네모 반듯한 모양을 이룬 것과 탑신이나 옥개석이 원형을 이룬 것, 벽돌로 쌓아서 만들어진 전탑 형식, 지대석 위에 기둥 형태의 거친 석재를 얹어 놓은 형식 등이 있다. 운주사의 이 탑들이 이렇게 모양이 제각각인 이유는 무엇일까? 운주사는 창건에서 폐사까지 3~4차례의 중수가 있었는데 이 시기마다 새로운 석탑들이 세워지면서 모습이 서로 달라진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운주사에 또 하나의 수수께끼는 칠성석(七星石)이다. 운주사 입구에서 바라보면 운주사 서편 산 중턱에 놓여져 있는 칠성석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일곱 개의 자연석을 원형으로 다듬어 배치했는데 그 모양은 북두칠성의 형태와 똑같다. 그래서 운주사는 일반 불교사찰이 아니라 칠성신앙과 관련된 도교사찰이 아닌가 하는 막연한 주장이 제기되어 왔었다. 이 칠성석의 직경, 원반끼리의 중심각, 각 원반 중심간의 거리, 돌의 위치와 두께 등이 현재 북두칠성의 밝기나 위치와 똑같은 비례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칠성석의 이러한 천문학적 가치를 인정하더라도 누가, 왜, 하필 운주사 서편 산 중턱에 만들었는지, 또 천불천탑과의 관계 등 궁극적인 의문에 대한 대답은 할 수 없는 실정이다.
4. 팔만대장경
16년의 제작 기간 중에 판각기간은 약12년 정도이다. 연도에 따라 판각량은 달랐지만 이 12년 동안에 81,340여판, 글자는 5,200만 자 가량을 어떻게 판각하였는지 의문이다. 아주 숙달된 각수로 하여금 옛날 방식으로 대장경판을 판각시켜 보았더니 하루에 20여자를 넘지 못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당시 판각에 참여한 각수를 추정해 보면 약 593명이 된다. 그러니까 593명의 각수가 하루도 거르지 않고 12년 동안 판각만 했다는 이야기다. 593명의 아주 능숙한 각수가 존재했었는지에 대해선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리고 매년 고르게 판각한 것이 아니어서 어떤 해에는 약 1,500명 이상의 각수가 참여했었다는 결론이 나오기도 한다.
흔히 강화도에서 제작되어 그 곳의 선원사 보관되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것이 어째서 현재의 해인사로 오게 되었는가? 거기에 대한 자료가 많지 못해서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는데 그것들을 살펴보자. 강화도가 아닌 남해나 거제도 등에서 새겨서 해인사로 가져왔다는 주장도 있으나 조금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대장경판이 원래 두 벌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 주장은 한 벌은 남해나 거제도에서 나무를 가져와 해안사에서 새겼고 또 하나는 서해안과 남해안에서 나무를 실어다가 강화도에서 새긴 것으로 보고 있다. 이것은 판각 위치나 옮겨온 경로에 대한 문헌의 기록과도 맞아 떨어지고 있다. 그러나 한 벌을 새기는데도 많은 국력이 동원되었는데 두 벌이나 만들 수 있었을까하는 의문이 있다.
5. 이순신의 거북선
거북선이 과연 철갑선이었는지는 아직까지 논란의 대상이다. 거북선이 철갑선이라는 말은 일본 기록에 많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의 수군장이 된 구끼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의 전함은 거북선 이외에도 모두 철로 감싼 전함이 많이 있다고 했다.
이외에 많은 일본 기록에서 거북선이 철갑선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기록에 거북선이 철로 장갑되어 있다는 기록은 없다. 이순신의 장계나 난중일기에도 칼 송곳을 꽂았다고는 되어 있으나 철로 덮었다는 기록은 없으며 조카 이분의 '충무공행록'에도 나무로 뚜껑을 씌우고 칼을 꽂아 적이 뛰어들 수 없게 했다고만 되어 있다. 이 때문에 학계에서는 거북선이 철갑선은 아닐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현재 각종 모형에 제시된 바와 같이 거북선의 용머리가 길게 위로 솟아올라 있었는지도 의문이다. 용머리에서 대포를 쏘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정조 때 발간된 "이충무공전서"에 나오는 용머리의 크기(길이 133cm, 폭 93cm)로는 포를 설치하기에는 좀 작아 보인다. 이순신의 장계나 난중일기에는 용의 입으로 현자포를 치켜 쏜다고 되어 있으며 왜장을 사살한 전공도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임진란 당시 거북선의 용머리는 현재 모형보다 크고 거북선 선수부에 밀착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충무공전서에는 거북머리에서 유황연기를 뿜어 적을 혼미케 한다는 기록이 있는데 용머리의 기능이 포탑에서 연기 방출용 굴뚝으로 바뀐 것이 언제인지도 알 수 없다. 게다가 내부의 밀폐된 공간에서 수십개의 포를 발사하여 발생한 엄청난 양의 연기를 어떻게 처리하였는지도 의문이다.
6. 조화의 극치, 석굴암
깊이 14.8m, 높이 9.3m의 석굴 안에 본존불이 모셔져 있다. 이 석불은 1.58m의 좌대 위에 3.26m의 거대한 불상으로 굽타 양식으로 만들어 졌다. 석굴암의 제작에 사용된 화강암은 무려 3000여 톤에 이른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지금으로부터 1300년 전에 세워진 이 석굴이 기하학적으로 완벽한 설계에 의해 만들어 졌다는 점이다. 석굴의 평면은 반지름 12척(3.3m)으로 정확한 원을 이루고 있으며, 입구의 너비나 본존 석불의 높이 역시 반지름이 12척으로 되어 있다.
옛날엔 하루의 길이를 12시간으로 보았는데 이것은 하루의 길이와 일치한다. 그리고 원은 1년 365일을 상징하는 것으로 본다. 석굴암이 뛰어난 것은 천연 동굴이 아닌 인공굴 안에 만들어 졌으며, 구형, 삼각형, 사각형, 팔각형 등의 기하학적 구성에 의해 완벽한 조화와 통일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본존불의 좌대 방향은 방위각 117도(동으로부터 남으로 27도 방향)라고 하고 본존불은 좌대를 기준으로 동에서 남으로 4도가 틀어져 있다고 한다. 즉, 현재 본존불은 방위각 121도로 되어 있다. 이것은 일제가 수리공사를 할 때 본존불을 들어올리다가 잘못해서 그 방향이 틀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그 이유는 본존불과 좌대를 만들 때 애시당초 그 방향이 틀렸을 리 없고 본존불을 들어올리다가 뒷부분에 금이 간 모습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주의 일출 방위각을 보면 동지 때는 119도, 춘·추분 때는 약 90도, 하지 때는 약 60도로 나타나는데 석굴암의 본존불에는 사시사철 햇빛이 들어왔다는 이야기가 된다.
석굴암 아래에는 토함산 골짜기에서 내려오는 물을 받아서 마시는 감로수대가 설치되어 있다. 이 물은 석굴암 내의 본존불상 바로 밑부분을 타고 내려오는 물줄기라고 한다. 그 물줄기는 인조 석굴을 떠받치는 암반 사이를 흘러 석굴암 내의 습도를 조절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는데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석굴암을 완전히 해체하여 보수공사를 하면서 석굴암의 외벽과 밑을 시멘트로 짓이겨 놓고 물줄기도 석굴암의 바깥쪽으로 돌려놓았다고 한다.
일제시대와 광복 후 후손들의 손에 의해 석굴암은 그 원형을 상실하고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해 버렸다. 우리는 아직도 예전 석굴암의 건축 원리를 알지 못한다. 1000여 년이나 원형대로 보존될 수 있었던 옛 선조들의 석굴암 건축 비법이 신기하기만 하다.
7. 마이산 탑사
마이산 탑사(馬耳山 塔寺)에는 가공하지 않는 천연석으로 쌓여진 탑들이 모여 장관을 이루고 있다. 높이 15m, 둘레 20m의 거대한 탑들도 즐비하다. 접착제를 쓴 것도 아니고 시멘트를 사용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 100여 년 동안 태풍과 회오리 바람에도 끄떡없이 버티고 서 있다. 탑들이 위치한 곳은 암마이봉과 수마이봉 사이의 계곡인데 이곳은 유난히 세찬 바람이 부는 곳이다. 지형적으로 앞쪽이 넓고 뒤쪽이 좁은 계곡이어서 바람이 세차게 휘몰아쳐 오는 것이다. 특히 여름철 태풍이 불어오면 언덕의 나뭇가지가 부러지고 웬만한 나무는 뿌리채 뽑히지만 이 곳의 돌탑은 조금씩 흔들리기만 할 뿐 쓰러지지 않는다. 이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불가사의로 손꼽힌다.
마이산 탑사에서만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신비는 바로 역고드름이다. 겨울에 정한수를 떠 놓고 기도를 드리면 그릇에서 고드름이 거꾸로 뻗쳐 오른다. 기도의 정성이 깊으면 그릇 속에는 이처사가 쓴 신서가 박힌다. 이 역고드름 현상은 요즘도 매년 한겨울에 몇 차례씩 일어나고 있다. 이는 자연적인 현상으로 탑사 오른쪽에서 천지탑을 지나 암마이봉 절벽으로 돌아 올라가는 바람에 의해 역고드름이 생긴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주장이다. 그러나 탑의 단 위에서만 고드름이 생기고 그 바로 아래의 바닥에서는 고드름이 생기지 않는 현상은 설명이 불가능하다.
8. 한반도는 중생대 백악기 공룡의 낙원이었다
지난 10여 년 동안 국내에서 발견된 공룡 발자국화석 수 엄청나다. 경상도 지역을 중심으로 50여개 지역에서 6천5백여 개의 발자국이 발견됐다. 세계적으로 매우 드문 경우다. 이곳에 공룡 발자국이 밀집된 이유는 무엇일까. 반면 완전한 골격화석은 왜 발견되지 않는 것일까. 공룡 화석에 담긴 1억 년 전 한반도의 비밀은….
82년 이후 한반도 특히 영남지역에서는 매년 새로운 공룡 발자국 산지가 보고되고 있다. 이제는 발자국 산지의 발견은 더 이상 뉴스 가치가 없을 정도로 이 지역에서는 흔한 일이 돼버렸다. 특히 고성 덕명리에서는 공룡의 종류가 적어도 사족보행(四足步行)의 용각류(龍脚類)가 3종, 이족보행(二足步行)의 조각류(鳥脚類)가 10여종, 이족보행의 수각류(獸脚類)가 2종이나 확인됐다.
경북 의성군 일대에서도 광범하게 공룡 화석들이 발견됐다. 86년에는 금성면 청로리 야산에서 공룡의 골격 부분화석이 발견된 이래 90년에는 금성면 제오리에서 공룡 발자국(천연기념물 지정)이 무더기로 발견되기도 했다. 또, 지난해 11월에는 봉양면 구미리에서 공룡 어깨뼈와 대퇴뼈가 발견됐다는 언론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영남지역 이외에서는 전남 해남군 황산면 우황리 일대에서 공룡 발자국화석이 다수 발견됐다. 이곳 9개 층준에서는 2백여개의 공룡 발자국이 발견됐는데 특히 익룡 발자국화석과 물갈퀴발 새 화석이 한꺼번에 발견돼 주목을 끌었다.
이밖에도 국내에서 발자국화석이 1백개 이상 집단 발견된 곳은 20여 곳에 달할 정도다. 지역별로는 경상도 지역이 50여 군데, 전남지역이 1군데, 북한 황해도 평산군 용궁리가 1군데 등 발자국화석은 6천개를 넘을 정도다.
그러면 한반도에서 이토록 많은 공룡 발자국이 발견되고 있는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과연 한반도는 중생대 백악기에 공룡들의 천국이었는가. 사실 발견된 발자국화석만을 고려한다면 한반도가 공룡의 천국이라는 말은 크게 틀린 것이 아니다.
출처 : 엠파스 지식
그리고 마지막 미스테리..
9. 전직 대통령의 통장에 29만원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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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글터] 아직까지도 풀리지 않은 한국의 9가지 미스테리
한국의 미스테리
1. 고대 왕국 가야와 아유타국의 미스테리
삼국유사에서는 아유타국을 인도의 고대왕국이라고 밝히고 있고 아유타는 인도 이름으로는 아요디아(Ayodhya)이다. 아유타국은 주위가 5천여 리, 나라의 왕도는 20여 리의 성으로 둘러 싸여 있으며 곡식과 과일이 풍성하고 풀과 꽃들이 우거져 무성하였다. 그리고 기후가 화창하고 사람들의 풍습이 착하고 온순해 학예에 부지런했다고 한다. 이 나라의 영향력이 한 때는 인도 전역뿐 아니라 동남아시아 일대까지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먼 곳에서 가락국까지 올 수 있었을까? 서기 1세기 무렵에 바다는 그렇게 두렵기만 한 존재는 아니었던 것 같다. 대륙의 연안을 따라 바닷길로 이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허황옥이 인도를 출발하던 음력 5월에는 인도와 한반도를 잇는 해로는 바람과 해류가 북으로 올라가는 기간이다. 즉 그 바람은 계절풍이고 해류는 리만해류이다. 그래서 어떤 큰 이상기류를 가진 태풍만 만나지 않는다면 배가 무사해 항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허왕후가 인도의 아요디아에서 무작정 가락국에 와서 곧바로 왕후가 될 수 있었느냐는 의문이 생긴다. 아무런 사전교섭없이 바로 왕후가 됐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뭔가 그 전부터 이 두 나라간에 수많은 교섭이나 왕래가 있었기에 두 왕실의 합의에 의해 결혼이 성사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한가지 주목되는 것은 김수로왕이 죽고 난 후 가락국과 아유타국과의 교류가 갑자기 끊기게 된 점이다.
가락태조왕릉 중수비에 있는 이수는 우리나라 그 어느 비각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문양을 수놓고 있는데 태양빛 같기도 한 것이 중앙에 있고 그 주위에는 이상한 형체의 동물같은 것들이 새겨져 있다. 이것은 인도 아요디아의 태양왕조를 상징하는 붉은 바탕에 흰색의 깃발에 그려진 문양과 똑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수로왕릉 납릉 정문에 있는 신어상인데 이 상은 인도 아요디아의 관공서와 성문 그리고 저택 등에 조각된 것과 똑같은 모양이다.
이러한 일련의 흔적들은 황하문명권의 일부로만 인식되어 오던 우리의 역사가 실제로는 인도의 문명까지 흡수하면서 발전해 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2. 첨성대
경주시 인왕동에 자리잡은 국보 제 31호 첨성대(瞻星臺). 동양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알려져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선덕여왕(632-647, 신라 27대 왕) 때 건립된 것이라 한다. 높이 9.17m에 밑지름 4.93m, 윗지름 2.85m이다. 첨성대의 용도에 대한 여러 학설이 제기되었지만 현재는 천문대라는 설이 유력하다. 하지만 첨성대에서 어떤 방법으로 별을 관측하였는지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첨성대가 해 그림자 길이를 재기 위한 규표(圭表)로서의 용도였다는 주장도 있었고, 정교한 기하학적 구조로부터 수학적인 비례 등을 나타내기 위한 수학적 상징물로 봐야 한다는 의견도 등장했다. 선덕여왕이 은밀하게 신하들을 만나던 장소라는 주장과 외계인이 남겨놓은 기념비라는 주장도 있었다.
이러한 첨성대에 대한 다양한 해석은 열띤 논쟁을 불러 일으켰으나 아직 어떠한 합의점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다만 원래 제단이 있었던 자리에 첨성대가 있었다는 점이나 신라의 천문관측 기록 등으로 미루어 보아 첨성대는 천문관측 외에도 종교적인 의식을 치르던 곳이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현대적인 의미의 천문대와는 다른 성격의 건축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랜 세월 모진 비바람을 견디고 그 자리를 지켜온 첨성대는 역학적 안정성, 미학적 곡선미 등을 두루 갖춘 온 세계의 소중한 문화유산으로써 그 속에 담긴 의미를 풀어 나가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 아닌가 싶다. 첨성대를 보존하기 위한 정밀조사와 첨성대의 건립배경을 규명하기 위한 적극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3. 운주사 와불과 천불천탑
운주사하면 천개의 불상과 천개의 탑이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석탑과 석불을 합쳐 100여개 남짓밖에 안 될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아마도 11세기 초반 운주사 창건 이후 수많은 전란과 재난에 의해 사라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80년대만 해도 이 운주사 돌탑과 돌부처 바로 앞까지 논밭이 있어서 이곳이 훼손될 수밖에 없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인근의 노인들에 의하면 인근 마을 사람들 중에 자기 집을 고치거나 새로 지을 때 이곳 돌부처와 돌탑을 가져다 쓰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이니 옛 기록이 그저 허황된 것만은 아닌 듯 싶다.
석불좌상의 높이는 12.73m이고 석불입상의 높이는 10.30m인데 이 두 석불은 대체로 북쪽 다리 부분이 남쪽 머리 부분보다 약 5도 높고 입상쪽이 좌상쪽보다 약 5도 높게 경사져 있다. 이 와불은 다른 곳에서 만들어 이곳에 옮긴 것이 아니라 산 정상에 있는 암반에 그대로 조각한 것이다. 문제는 고려 초기 당시에 어떻게 이 무거운 불상을 일으킬 생각을 했었느냐는 것이다. 아니면 이곳의 다른 불상들처럼 파격적인 모습을 구상하여 처음부터 하늘을 보고 누워 있는 불상을 조각했는지도 모른다.
일반적으로 석가모니가 열반할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측와불은 인도나 스리랑카 쪽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형태는 운주사의 와불과 현격한 차이가 있다. 인도나 스리랑카의 측와불은 석가모니가 누워서 손으로 턱을 괴거나 받친 상태인데 운주사의 와불은 그저 정면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또 좌상과 입상의 다리 부분에는 떼어 내려고 했던 흔적으로 보이는 틈이 있다. 암반에 불상을 조각하고 떼어 내는 공정을 마치지 못한 미완성 불상으로 일부에서는 추측하기도 하지만 처음 불상을 조각한 후 생긴 흔적인지, 아니면 후대에 사람들이 나름대로 의미를 두면서 세워 보려고 만든 흔적인지는 단정지을 수 없다.
운주사에는 천개의 불상과 천개의 탑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현재 석탑은 모양을 제대로 갖춘 것이 18기 가량밖에 남아 있지 않다. 운주사 입구에 보이는 구층석탑, 칠층석탑, 특이하게 생긴 원형다층석탑(연화탑), 원형석탑(실패탑), 오층석탑(거지탑), 원구형석탑(항아리탑) 등이 있다. 이 석탑들은 몇 가지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먼저 전형적인 우리나라 석탑형식으로 탑신과 옥개석이 네모 반듯한 모양을 이룬 것과 탑신이나 옥개석이 원형을 이룬 것, 벽돌로 쌓아서 만들어진 전탑 형식, 지대석 위에 기둥 형태의 거친 석재를 얹어 놓은 형식 등이 있다. 운주사의 이 탑들이 이렇게 모양이 제각각인 이유는 무엇일까? 운주사는 창건에서 폐사까지 3~4차례의 중수가 있었는데 이 시기마다 새로운 석탑들이 세워지면서 모습이 서로 달라진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운주사에 또 하나의 수수께끼는 칠성석(七星石)이다. 운주사 입구에서 바라보면 운주사 서편 산 중턱에 놓여져 있는 칠성석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일곱 개의 자연석을 원형으로 다듬어 배치했는데 그 모양은 북두칠성의 형태와 똑같다. 그래서 운주사는 일반 불교사찰이 아니라 칠성신앙과 관련된 도교사찰이 아닌가 하는 막연한 주장이 제기되어 왔었다. 이 칠성석의 직경, 원반끼리의 중심각, 각 원반 중심간의 거리, 돌의 위치와 두께 등이 현재 북두칠성의 밝기나 위치와 똑같은 비례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칠성석의 이러한 천문학적 가치를 인정하더라도 누가, 왜, 하필 운주사 서편 산 중턱에 만들었는지, 또 천불천탑과의 관계 등 궁극적인 의문에 대한 대답은 할 수 없는 실정이다.
4. 팔만대장경
16년의 제작 기간 중에 판각기간은 약12년 정도이다. 연도에 따라 판각량은 달랐지만 이 12년 동안에 81,340여판, 글자는 5,200만 자 가량을 어떻게 판각하였는지 의문이다. 아주 숙달된 각수로 하여금 옛날 방식으로 대장경판을 판각시켜 보았더니 하루에 20여자를 넘지 못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당시 판각에 참여한 각수를 추정해 보면 약 593명이 된다. 그러니까 593명의 각수가 하루도 거르지 않고 12년 동안 판각만 했다는 이야기다. 593명의 아주 능숙한 각수가 존재했었는지에 대해선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리고 매년 고르게 판각한 것이 아니어서 어떤 해에는 약 1,500명 이상의 각수가 참여했었다는 결론이 나오기도 한다.
흔히 강화도에서 제작되어 그 곳의 선원사 보관되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것이 어째서 현재의 해인사로 오게 되었는가? 거기에 대한 자료가 많지 못해서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는데 그것들을 살펴보자. 강화도가 아닌 남해나 거제도 등에서 새겨서 해인사로 가져왔다는 주장도 있으나 조금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대장경판이 원래 두 벌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 주장은 한 벌은 남해나 거제도에서 나무를 가져와 해안사에서 새겼고 또 하나는 서해안과 남해안에서 나무를 실어다가 강화도에서 새긴 것으로 보고 있다. 이것은 판각 위치나 옮겨온 경로에 대한 문헌의 기록과도 맞아 떨어지고 있다. 그러나 한 벌을 새기는데도 많은 국력이 동원되었는데 두 벌이나 만들 수 있었을까하는 의문이 있다.
5. 이순신의 거북선
거북선이 과연 철갑선이었는지는 아직까지 논란의 대상이다. 거북선이 철갑선이라는 말은 일본 기록에 많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의 수군장이 된 구끼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의 전함은 거북선 이외에도 모두 철로 감싼 전함이 많이 있다고 했다.
이외에 많은 일본 기록에서 거북선이 철갑선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기록에 거북선이 철로 장갑되어 있다는 기록은 없다. 이순신의 장계나 난중일기에도 칼 송곳을 꽂았다고는 되어 있으나 철로 덮었다는 기록은 없으며 조카 이분의 '충무공행록'에도 나무로 뚜껑을 씌우고 칼을 꽂아 적이 뛰어들 수 없게 했다고만 되어 있다. 이 때문에 학계에서는 거북선이 철갑선은 아닐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현재 각종 모형에 제시된 바와 같이 거북선의 용머리가 길게 위로 솟아올라 있었는지도 의문이다. 용머리에서 대포를 쏘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정조 때 발간된 "이충무공전서"에 나오는 용머리의 크기(길이 133cm, 폭 93cm)로는 포를 설치하기에는 좀 작아 보인다. 이순신의 장계나 난중일기에는 용의 입으로 현자포를 치켜 쏜다고 되어 있으며 왜장을 사살한 전공도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임진란 당시 거북선의 용머리는 현재 모형보다 크고 거북선 선수부에 밀착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충무공전서에는 거북머리에서 유황연기를 뿜어 적을 혼미케 한다는 기록이 있는데 용머리의 기능이 포탑에서 연기 방출용 굴뚝으로 바뀐 것이 언제인지도 알 수 없다. 게다가 내부의 밀폐된 공간에서 수십개의 포를 발사하여 발생한 엄청난 양의 연기를 어떻게 처리하였는지도 의문이다.
6. 조화의 극치, 석굴암
깊이 14.8m, 높이 9.3m의 석굴 안에 본존불이 모셔져 있다. 이 석불은 1.58m의 좌대 위에 3.26m의 거대한 불상으로 굽타 양식으로 만들어 졌다. 석굴암의 제작에 사용된 화강암은 무려 3000여 톤에 이른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지금으로부터 1300년 전에 세워진 이 석굴이 기하학적으로 완벽한 설계에 의해 만들어 졌다는 점이다. 석굴의 평면은 반지름 12척(3.3m)으로 정확한 원을 이루고 있으며, 입구의 너비나 본존 석불의 높이 역시 반지름이 12척으로 되어 있다.
옛날엔 하루의 길이를 12시간으로 보았는데 이것은 하루의 길이와 일치한다. 그리고 원은 1년 365일을 상징하는 것으로 본다. 석굴암이 뛰어난 것은 천연 동굴이 아닌 인공굴 안에 만들어 졌으며, 구형, 삼각형, 사각형, 팔각형 등의 기하학적 구성에 의해 완벽한 조화와 통일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본존불의 좌대 방향은 방위각 117도(동으로부터 남으로 27도 방향)라고 하고 본존불은 좌대를 기준으로 동에서 남으로 4도가 틀어져 있다고 한다. 즉, 현재 본존불은 방위각 121도로 되어 있다. 이것은 일제가 수리공사를 할 때 본존불을 들어올리다가 잘못해서 그 방향이 틀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그 이유는 본존불과 좌대를 만들 때 애시당초 그 방향이 틀렸을 리 없고 본존불을 들어올리다가 뒷부분에 금이 간 모습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주의 일출 방위각을 보면 동지 때는 119도, 춘·추분 때는 약 90도, 하지 때는 약 60도로 나타나는데 석굴암의 본존불에는 사시사철 햇빛이 들어왔다는 이야기가 된다.
석굴암 아래에는 토함산 골짜기에서 내려오는 물을 받아서 마시는 감로수대가 설치되어 있다. 이 물은 석굴암 내의 본존불상 바로 밑부분을 타고 내려오는 물줄기라고 한다. 그 물줄기는 인조 석굴을 떠받치는 암반 사이를 흘러 석굴암 내의 습도를 조절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는데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석굴암을 완전히 해체하여 보수공사를 하면서 석굴암의 외벽과 밑을 시멘트로 짓이겨 놓고 물줄기도 석굴암의 바깥쪽으로 돌려놓았다고 한다.
일제시대와 광복 후 후손들의 손에 의해 석굴암은 그 원형을 상실하고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해 버렸다. 우리는 아직도 예전 석굴암의 건축 원리를 알지 못한다. 1000여 년이나 원형대로 보존될 수 있었던 옛 선조들의 석굴암 건축 비법이 신기하기만 하다.
7. 마이산 탑사
마이산 탑사(馬耳山 塔寺)에는 가공하지 않는 천연석으로 쌓여진 탑들이 모여 장관을 이루고 있다. 높이 15m, 둘레 20m의 거대한 탑들도 즐비하다. 접착제를 쓴 것도 아니고 시멘트를 사용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 100여 년 동안 태풍과 회오리 바람에도 끄떡없이 버티고 서 있다. 탑들이 위치한 곳은 암마이봉과 수마이봉 사이의 계곡인데 이곳은 유난히 세찬 바람이 부는 곳이다. 지형적으로 앞쪽이 넓고 뒤쪽이 좁은 계곡이어서 바람이 세차게 휘몰아쳐 오는 것이다. 특히 여름철 태풍이 불어오면 언덕의 나뭇가지가 부러지고 웬만한 나무는 뿌리채 뽑히지만 이 곳의 돌탑은 조금씩 흔들리기만 할 뿐 쓰러지지 않는다. 이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불가사의로 손꼽힌다.
마이산 탑사에서만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신비는 바로 역고드름이다. 겨울에 정한수를 떠 놓고 기도를 드리면 그릇에서 고드름이 거꾸로 뻗쳐 오른다. 기도의 정성이 깊으면 그릇 속에는 이처사가 쓴 신서가 박힌다. 이 역고드름 현상은 요즘도 매년 한겨울에 몇 차례씩 일어나고 있다. 이는 자연적인 현상으로 탑사 오른쪽에서 천지탑을 지나 암마이봉 절벽으로 돌아 올라가는 바람에 의해 역고드름이 생긴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주장이다. 그러나 탑의 단 위에서만 고드름이 생기고 그 바로 아래의 바닥에서는 고드름이 생기지 않는 현상은 설명이 불가능하다.
8. 한반도는 중생대 백악기 공룡의 낙원이었다
지난 10여 년 동안 국내에서 발견된 공룡 발자국화석 수 엄청나다. 경상도 지역을 중심으로 50여개 지역에서 6천5백여 개의 발자국이 발견됐다. 세계적으로 매우 드문 경우다. 이곳에 공룡 발자국이 밀집된 이유는 무엇일까. 반면 완전한 골격화석은 왜 발견되지 않는 것일까. 공룡 화석에 담긴 1억 년 전 한반도의 비밀은….
82년 이후 한반도 특히 영남지역에서는 매년 새로운 공룡 발자국 산지가 보고되고 있다. 이제는 발자국 산지의 발견은 더 이상 뉴스 가치가 없을 정도로 이 지역에서는 흔한 일이 돼버렸다. 특히 고성 덕명리에서는 공룡의 종류가 적어도 사족보행(四足步行)의 용각류(龍脚類)가 3종, 이족보행(二足步行)의 조각류(鳥脚類)가 10여종, 이족보행의 수각류(獸脚類)가 2종이나 확인됐다.
경북 의성군 일대에서도 광범하게 공룡 화석들이 발견됐다. 86년에는 금성면 청로리 야산에서 공룡의 골격 부분화석이 발견된 이래 90년에는 금성면 제오리에서 공룡 발자국(천연기념물 지정)이 무더기로 발견되기도 했다. 또, 지난해 11월에는 봉양면 구미리에서 공룡 어깨뼈와 대퇴뼈가 발견됐다는 언론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영남지역 이외에서는 전남 해남군 황산면 우황리 일대에서 공룡 발자국화석이 다수 발견됐다. 이곳 9개 층준에서는 2백여개의 공룡 발자국이 발견됐는데 특히 익룡 발자국화석과 물갈퀴발 새 화석이 한꺼번에 발견돼 주목을 끌었다.
이밖에도 국내에서 발자국화석이 1백개 이상 집단 발견된 곳은 20여 곳에 달할 정도다. 지역별로는 경상도 지역이 50여 군데, 전남지역이 1군데, 북한 황해도 평산군 용궁리가 1군데 등 발자국화석은 6천개를 넘을 정도다.
그러면 한반도에서 이토록 많은 공룡 발자국이 발견되고 있는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과연 한반도는 중생대 백악기에 공룡들의 천국이었는가. 사실 발견된 발자국화석만을 고려한다면 한반도가 공룡의 천국이라는 말은 크게 틀린 것이 아니다.
출처 : 엠파스 지식
그리고 마지막 미스테리..
9. 전직 대통령의 통장에 29만원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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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글터] 신라무덤
일단 삼국대륙설로 재탕 삼탕 사탕 우려먹으시는 백승길님과 그 측근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저 또한 삼국대륙설 문제는 확실한 증거를 확보하기 전까지는 다시 언급하지 않기로 몇 번을 말씀해 드렸는데 다시 꺼내시는 구려.
상대가 인정한 과거 또다시 꼬집어 내는 집념(?)
자기주장의 100%를 위해 불철주야 사서책을 넘기는 근성 ...찬사를 보냅니다.
제가 해담과의 논쟁 중 달게 된 리플 한 대목을 보시고 한 말씀 하신건가요?
아마 그때 제가 했던 말이
“일본사람들에 의해 마음대로 신라왕릉의 무덤주인이 정해졌다.(사서기록에 따랐겠지 일부분은!!)”
아마 이 말이 빌미가 되어 또 다시 강단쪽의 이론을 보충설명 하신 거 맞죠??
고조선 이야기를 앞에 두고 나또한 조금은 의문점이 가는 삼국대륙설 얘기 한다는게 구미가 땡기지 않지만
상대의 도전장을 그냥 무심히 보고 넘 길수 없기에
저 또한 눈으로 보고 느낀점을 몇 글자 적어보려 합니다.
역사라는 학문 자체가 100%를 추구 할 수 없기에 제 바램 또한 헛 된 게 될 수 있지만
아무리 사서기록에 따라 그 위치를 찾아 내었다고 해도
분명히 비석하나 없는 신라왕릉 무덤을 일본인들의 손에 의해 주인자리를 되찾게 된 현재의 역사또한
100% 확신 할 수 없고 믿음이 좀처럼 가지 않아 숨겨진 먼가가 있을 꺼 라는 점이 제 바램이었습니다.
1. 사서 기록으로 찾아본 옛 신라왕들의 무덤
첨성대와 직선 거리로 200여미터 떨어져 있는 무덤이다.
'내물왕릉'이라는 네 글자가 비석에 새겨져 있다.
물론 신라시대 당시의 비석은 아니다. 아마도 경주시가 관광목적으로 세워둔 것일텐데...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런데도 비석이 없다.
신라시대 왕릉중 명확히 주인을 알 수 있는 릉은 무열왕릉뿐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본인들은 당췌 무엇을 기준으로 무덤주인을 찾았을까..
비석없는 무덤을 사서기록 하나만으로 주인찾기에 충분했을까??
경주는 무덤의 도시다.
크기로 봐서는 왕릉이 분명한데 어느 것 하나 누구 무덤인지 알려주는게 없다.
경주에 있는 왕릉 몇 개는 다닥다닥 공동묘지처럼 붙어 있는데, 정작 비석이 없다.
어느 왕의 묘인지도 모른다. 일반 백성들도 무덤을 만들어주는가??
아님 급조한 흔적??
경주의 문화재 필수코스중 하나인 천마총사진이다.
이 또한 누구의 무덤인지 알수 없다. 지증왕 무덤이 아닐까 하는 추측만 나오고 있을 뿐
천마의 그림이 그러져 천마총 왕관이 출토되어 금관총으로 왕릉으로 추측한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신라인들의 고유한 유물과 무덤의 웅장함을 관람하기 보단
왕릉의 무덤을 파헤친 일본의 만행과
그 유물들을 전시하는 현재의 한국의 모습이다.
백승길님이 내세운 신증동국여지승람 뿐만 아니라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등에
서도 신라인들의 옛 무덤의 위치를 묘사한 소절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인용해서 사서기록의 왕릉 위치 표현방법을 요약해 보자면
옛 시조의 한 가락에서 흔적을 찾고, 무덤 주위의 풍경을 묘사하여 그 위치를 추측할 단서를 남겼고
조위(曹偉)의 시에, “길가 촌락 사이에 파란 보리가 이미 패었네. 우뚝 솟은 두어 길 산봉우리, 둥글기가 엎드린 짐승 같구나. 끊어진 비석이 거친 풀 속에 누웠는데, 높이 쳐든 귀두(龜頭)가 보이네. 질펀한 초원은 길게 뻗쳤고, 시내 언덕 구불구불 달렸네. 이것이 무열왕릉, 인산(因山)의 제도가 누추하지 않구나. 말에서 내리매 머리털 으쓱하니, 두 손 모아 잡고 두 소매 여미었네. 비문을 어루만지며 읽노라니, 이지러진 글자 많아 알아보기 어렵구나. 아득한 긴 세월에, 버려둔 채 지키는 이 없네. 생각하니, 옛날에 음(陰 여자)이 양(陽 왕) 되었으니, 덕만(德曼)과 승만(勝曼)은 참 임금이 아니었다. 강한 이웃 나라가 제멋대로 침노하여 사방 국경에 병란이 많더니, 무열왕 들어와서 왕통을 계승하매 우뚝히 공덕(功德)이 성하였네
신화나 전설의 한 단편, 혹은 역사적 사실에서 그 힌트를 찾을 수 있었으며
관(官)에서 전지(田地)의 개간이나 나무 베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혁거세왕이 하늘에 올라간 지 7일 뒤에 오체(五體)가 땅에 흩어져 떨어졌다. 나라 사람들이 합쳐서 장사지내려고 하였으나 요사스런 뱀의 방해로 인하여 각각 장사지내고, 드디어 오릉(五陵)이라 하였다.”
지역명이나 정확한 무덤위치의 명칭을 사용하여 풀어쓰기도 하구려.
진흥왕릉(眞興王陵) 모두 본부의 서쪽 악리(岳里)에 있다. 선덕왕릉(善德王陵) 낭산(狼山) 남령(南嶺)에 있다. 효소왕릉(孝昭王陵) 본부 동쪽 분남리(芬南里)에 있다. 성덕왕릉(聖德王陵) 본부 동쪽 도지곡리(都只谷里)에 있다. 헌덕왕릉(憲德王陵) 본부 동쪽 천림리(泉林里)에 있다. 흥덕왕릉(興德王陵) 안강현(安康縣) 북쪽에 있다. 김유신묘(金庾信墓) 본부 서쪽 서악리(西岳里)에 있다. 김인문묘(金仁問墓) 경서원(京西原)에 있다. 김양묘(金陽墓) 태종왕릉(太宗王陵)에 배장(陪葬) 하였다.
남산이나 낭산처럼 우리가 익숙하게 들어온 명칭이나 과거와 동일한 현재의 지역명이 남아 있기에
꼭 왜곡 되었다고 볼 수는 없고 무시 할 수도 없는 사안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서들의 기록들은 일본인에 의해 주인자리를 찾게 된 현재무덤의 위치와의 일치성을 증명하기엔 약간 빈약한 느끼며 들며, 비석하나 제대로 세워지지 않은 무덤의 주인을 찾을 때는 더욱 더 부족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진덕여왕이 왕위에 있은지 8년에 죽으니,시호를 진덕이라 하고 사량부에 장사지냈다”고 하였는데,이 사량부는 경주시의 남쪽 흥륜사터가 있는 일대로 추정되어 현 지점인 현곡면과는 정반대의 위치가 된다//
이처럼 해석의 차이에 따라 그 위치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점도 빼먹을수 없다.
그리고 역으로 이용하여 중국의 영토에서도 그 명칭과 지역명이 일치한 무덤을 찾을 수도 있습니다.
앞으로 제시할 자료들로 신라대륙설을 주장하기 보단 이 같은 사서들로 우리조상의 무덤주인을 찾아준 일본인들의 행적에 역으로 모순점이 생길 수 있다는 점입니다
.1.진덕여왕의 석상 조각
당나라와 연합하며 삼국통일의 초석을 놓았던 신라 진덕여왕(?~645)의 석상 조각과 그의 직위를 새긴 명문 조각이 최근 중국 서완 근교 당나라 태종의 무덤 주변에서 출도된 것으로 밝혀졌다.
중국의 신라사 연구자인 바사 중국 산시 사범대 역사문화학원 교수가 지난 20~21일 열린 일연학연구원 국제학술대회“일연선사와 삼국유사”(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이 같은 사실을 명문 사진과 함께 공개했다.
그는 <삼국유사>에 보이는 나당관계 내용의 새로운 검토라는 논문을 통해 82년과 2002~2003년 시안 근교인 산시성 리취앤 현 동북쪽의 당 태종 이세민(재위 626~649)의 소릉 주위에서 “신라...군”,“덕”등의 명문이
새겨진 진덕여왕 석상 좌대와 그의 것으로 보이는 석상머리와 하반신 부분 조각들이 발굴됐다고 소개했다. 논문에 따르면 진덕여왕의 석상 유물은 태종의 소릉 주위에 도열했던 14개 나라 번왕(조공한 나라의 왕들)들의 좌상드 가운데 일부다.바이 교수는 84년 나온 현지 연구보고서의 내용을 빌어 여왕의 머리와 하반신 조각은 82년 소룽 박물관의 제단 정비과정에서 처음 발견되었다고 전했다. 석상 머리 부분은 “두발이 정수리 부분에서 머리 뒤쪽으로 갈라져 내려와 뒤로 땋아 묶어 상투 같은 흔적이 있는” 얼개이며 , 같은 시기 산문 밖 동북쪽 약 1000미터 부근에서도 둘로 쪼개졌으나,합치면 온전한 하반신이 되며 삼중으로 된 장포를 입고 있는 석상 조각이 바견되었다는 것이다. 배교수는 현지 학계에서 이들 석상 조각을 <장안지>에 소개된 “신라낙랑군왕긴직던”상의 남은 부분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또 2002년 7월부터 산시성 고고연구소가 솔ㅇ 북쪽 북사마문 유적을 전면 발굴한 결과 “신라...군왕..”명문이 새겨진 석상 좌대의 잔해를 발견했다고 소개했다. 이는 후대인 송나라 때 당나라 장안 서적을 기록한 <장안지>에 적은 기록과도 일치하는 것이라는 설명이다.<장안지>는 태종릉에 도열한 14번군장상의 사적을 언급하면서 그 중 하나의 석상 좌대에 “신라낙랑군왕긴진덕”이라는 명문이 새겨져있었다고 적고있다.“낙랑군왕”은 당나라가 신라 임금을 책봉하며 내린 제후의 명칭이다.(책봉이란 자기힘으로 감당할수 없는 나라에 대해 쌍무적 선린외교관계를 정하는 것이다)
당 태종의 무덤 주변에서 “신라낙랑군왕”명문 조각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2004년 국내 학계에 일부 소개된 바 있으나,명문의 주인이 진덕여왕을 뜻한다는 사실은 이번에 처음 확인된 것이다. 이한상 동양대 교수는 “새로 발견된 진덕여왕 석상 명문 조각들은 신라 복식에 대해 희귀 실물자료일 뿐 아니라, 다른 신라 유물들의 연대 추정에 큰 도움을 주는 절대 연대 유물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평가했다.
-한겨레 노형석기자-
2.배총의 행방??
또한, 당시는 왕릉주위에 배총이라고 해서, 당시의 신하나 공주,왕자의 무덤을 만들어 놓는데, 경주의 고분에는 이것이 없고, 왕릉옆에 바로 왕릉이 있다고 합니다. 학계에서는 옆의 배총은 아마 도굴이 되어서 없어졌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왕릉과 비교해서 값이 될 만한 것은 왕릉에 있지 배총에 있으면 얼마나 있겠습니까. 돈이 되는 왕릉은 도굴하지 않고, 장상(將相)의
고분만 도굴했다는 설명도 어설프게 보입니다..
3.신라의 풍습이 중국에 남아있다??
신라풍습중에
- 가배(8월 15일)
[삼국사기]에도 있지만 [입당구법순례행기]에서
8월15일 명절이 당나라나 일본에는 없는 신라의 고유명절이라고 하였고
- 중국 [오대사]에는
9월 9일이 중구일이라하여 신라의 명절이라 하였는데
당나라 이후 위 두명절을 중국에서 시작했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으나
현재 중국에는 두명절을 지키고 있다.
4.박창범 교수님이 쓴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
박창범 교수님의 글이 어쩌면 가장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사실이지만 그만큼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논문에도 해당한다. 그의 저서에서 “삼국사기의 일식 관측지는 한반도가 아니다”라는 주장을 했기에 많은 강단학자들에게 충격을 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일신상 이유로 서울대학교 천문학과 교수를 그만두고 한국 고등과학원으로 옮겼다.
인터넷 상으로 무성한 말이 오가고 있는 걸 알고 ,수많은 반론을 예상하지만 다시 한번 언급 해 보겠다.
5.헌덕왕은 희대의 악덕군주였나??
이 자료는 예전에도 올렸던 전적이 있고 아직도 궁금하게 여기는 글이라서...
그때 반박의 주 내용은
바컁님의 의견
,
신라 사람이 왜 절강성에 가서 구걸을 했느냐... 그건 당시 가까운 산동 일대에 당나라와는 다른 세력이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해상왕 장보고"에도 나오는 이사도의 가문으로부터 시작된... 당나라에 강제이주된 고구려 유민 이정기 일족이 당의 절도사 작위를 받아 출세하자... 자신의 영지를 아예 사유지화하고 당나라 중앙정부와 대립... 결국 독자적 연호를 선포하고 제나라를 세워 독립국이 되어버렸고, 이를 일컬어 "이사도의 난"이라고 하지요. 산동을 포함한 16개주의 꽤 넓은 영토였으며, 신라나 발해와의 교역 독점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불과 60년만에 패망하게 되지만...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상당한 독립 군사력을 가진 절도사들에 의해 통치되었으며, 당 중앙정부와 신라에 대해 그리 우호적이지 않았습니다. 그 절도사들이 대부분 당에 의해 멸망한 국가들의 유민출신인 경우가 많아서... 이이제이 차원에서 그들의 군사력을 활용할 수밖에 없었지만, 당나라는 절도사 때문에 흥하고 절도사 때문에 망한 나라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요.
좀 간단하게 풀어 말하자면 그때는 "이사도의 난"과 같은 난세였고 그러기에 산동성을 피해 절강성으로 갔다고 하셨는데..
제가 생각하는 방향은 좀 다릅니다.
구지 배를 타고 먼 여정을 통해 중국까지 갈 이유가 있었는지가 제일 궁금했었고
배를 타고 대륙을 건너는 여비와 식량이 오히려 구걸로 벌어들이는 식량보다 더 벅찼을텐데 .
물론 도발적인 언행과 신라대륙설의 근거를 꺼내어 게시물을 작성했지만
내가 오늘 정말로 하고싶었던 말은
사서기록에 남아 있다고 현재의 무덤주인 자리가 바르게 꿰차고 있다고 할수 있는가!!
결국 사서의 기록을 판독하고 위치를 가늠한 작자도 일본인들일텐데..
그럼으로 백승길님의 옛 사서를 바탕으로 내세운 증거로는 신라무덤의 의문점을 파헤쳐 나가기엔 부족하지 않나 싶습니다.
신라무덤얘기중 비석얘기가 나오면
여러분들이 무슨얘기 할지 충분히 알고 있으니 구지 다시 언급하지 않아도 ?윱求?
그떄는 전국이 전쟁터라서 적나라의 왕무덤을 파헤치는 경우가 많아 비석을 세우지 않았다
이런식으로 말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신라대륙설 주장이 아니라 신라무덤의 의문점을 중점적으로 얘기했다고 이해해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신라대륙설은 다시한번 말하지만 저로서도 확신이 서지 않는 얘기이기 때문입니다.
신라가 반도라서 생기는 의문점도 있겠지만
신라가 대륙일때 생기는 의문점도 한두가지가 아니기 떄문입니다.
오재성님이 그 모순점을 동신라서신라의 뿌리로 설명해 주신 글이 있긴 있던데, 아직 읽어* 못했고 납득도 가지 않아 그런 설도 있다는 말 해 드리고 싶네요.
드헤작성일
2008-01-24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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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글터] 우리나라 미스터리
고대 왕국 가야와 아유타국의 미스테리삼국유사에서는 아유타국을 인도의 고대왕국이라고 밝히고 있고 아유타는 인도 이름으로는 아요디아(Ayodhya)이다. 아유타국은 주위가 5천여 리, 나라의 왕도는 20여 리의 성으로 둘러 싸여 있으며 곡식과 과일이 풍성하고 풀과 꽃들이 우거져 무성하였다. 그리고 기후가 화창하고 사람들의 풍습이 착하고 온순해 학예에 부지런했다고 한다. 이 나라의 영향력이 한 때는 인도 전역뿐 아니라 동남아시아 일대까지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먼 곳에서 가락국까지 올 수 있었을까? 서기 1세기 무렵에 바다는 그렇게 두렵기만 한 존재는 아니었던 것 같다. 대륙의 연안을 따라 바닷길로 이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허황옥이 인도를 출발하던 음력 5월에는 인도와 한반도를 잇는 해로는 바람과 해류가 북으로 올라가는 기간이다. 즉 그 바람은 계절풍이고 해류는 리만해류이다. 그래서 어떤 큰 이상기류를 가진 태풍만 만나지 않는다면 배가 무사해 항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그런데 허왕후가 인도의 아요디아에서 무작정 가락국에 와서 곧바로 왕후가 될 수 있었느냐는 의문이 생긴다. 아무런 사전교섭없이 바로 왕후가 됐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뭔가 그 전부터 이 두 나라간에 수많은 교섭이나 왕래가 있었기에 두 왕실의 합의에 의해 결혼이 성사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한가지 주목되는 것은 김수로왕이 죽고 난 후 가락국과 아유타국과의 교류가 갑자기 끊기게 된 점이다. 가락태조왕릉 중수비에 있는 이수는 우리나라 그 어느 비각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문양을 수놓고 있는데 태양빛 같기도 한 것이 중앙에 있고 그 주위에는 이상한 형체의 동물같은 것들이 새겨져 있다. 이것은 인도 아요디아의 태양왕조를 상징하는 붉은 바탕에 흰색의 깃발에 그려진 문양과 똑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수로왕릉 납릉 정문에 있는 신어상인데 이 상은 인도 아요디아의 관공서와 성문 그리고 저택 등에 조각된 것과 똑같은 모양이다.이러한 일련의 흔적들은 황하문명권의 일부로만 인식되어 오던 우리의 역사가 실제로는 인도의 문명까지 흡수하면서 발전해 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한국의 미스터리 - 첨성대경주시 인왕동에 자리잡은 국보 제 31호 첨성대(瞻星臺). 동양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알려져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선덕여왕(632-647, 신라 27대 왕) 때 건립된 것이라 한다. 높이 9.17m에 밑지름 4.93m, 윗지름 2.85m이다. 첨성대의 용도에 대한 여러 학설이 제기되었지만 현재는 천문대라는 설이 유력하다. 하지만 첨성대에서 어떤 방법으로 별을 관측하였는지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첨성대가 해 그림자 길이를 재기 위한 규표(圭表)로서의 용도였다는 주장도 있었고, 정교한 기하학적 구조로부터 수학적인 비례 등을 나타내기 위한 수학적 상징물로 봐야 한다는 의견도 등장했다. 선덕여왕이 은밀하게 신하들을 만나던 장소라는 주장과 외계인이 남겨놓은 기념비라는 주장도 있었다. 이러한 첨성대에 대한 다양한 해석은 열띤 논쟁을 불러 일으켰으나 아직 어떠한 합의점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다만 원래 제단이 있었던 자리에 첨성대가 있었다는 점이나 신라의 천문관측 기록 등으로 미루어 보아 첨성대는 천문관측 외에도 종교적인 의식을 치르던 곳이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현대적인 의미의 천문대와는 다른 성격의 건축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랜 세월 모진 비바람을 견디고 그 자리를 지켜온 첨성대는 역학적 안정성, 미학적 곡선미 등을 두루 갖춘 온 세계의 소중한 문화 유산으로써 그 속에 담긴 의미를 풀어 나가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 아닌가 싶다. 첨성대를 보존하기 위한 정밀조사와 첨성대의 건립배경을 규명하기 위한 적극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한국의 미스터리 - 운주사 와불과 천불천탑운주사하면 천개의 불상과 천개의 탑이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석탑과 석불을 합쳐 100여개 남짓밖에 안 될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아마도 11세기 초반 운주사 창건 이후 수많은 전란과 재난에 의해 사라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80년대만 해도 이 운주사 돌탑과 돌부처 바로 앞까지 논밭이 있어서 이곳이 훼손될 수밖에 없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인근의 노인들에 의하면 인근 마을 사람들 중에 자기 집을 고치거나 새로 지을 때 이곳 돌부처와 돌탑을 가져다 쓰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이니 옛기록이 그저 허황된 것만은 아닌 듯 싶다. 석불좌상의 높이는 12.73m이고 석불입상의 높이는 10.30m인데 이 두 석불은 대체로 북쪽 다리 부분이 남쪽 머리 부분보다 약 5도 높고 입상쪽이 좌상쪽보다 약 5도 높게 경사져 있다. 이 와불은 다른 곳에서 만들어 이곳에 옮긴 것이 아니라 산 정상에 있는 암반에 그대로 조각한 것이다. 문제는 고려 초기 당시에 어떻게 이 무거운 불상을 일으킬 생각을 했었느냐는 것이다. 아니면 이곳의 다른 불상들처럼 파격적인 모습을 구상하여 처음부터 하늘을 보고 누워 있는 불상을 조각했는지도 모른다. 일반적으로 석가모니가 열반할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측와불은 인도나 스리랑카 쪽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형태는 운주사의 와불과 현격한 차이가 있다. 인도나 스리랑카의 측와불은 석가모니가 누워서 손으로 턱을 괴거나 받친 상태인데 운주사의 와불은 그저 정면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또 좌상과 입상의 다리 부분에는 떼어 내려고 했던 흔적으로 보이는 틈이 있다. 암반에 불상을 조각하고 떼어 내는 공정을 마치지 못한 미완성 불상으로 일부에서는 추측하기도 하지만 처음 불상을 조각한 후 생긴 흔적인지, 아니면 후대에 사람들이 나름대로 의미를 두면서 세워 보려고 만든 흔적인지는 단정지을 수 없다. 운주사에는 천개의 불상과 천개의 탑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현재 석탑은 모양을 제대로 갖춘 것이 18기 가량밖에 남아 있지 않다. 운주사 입구에 보이는 구층석탑, 칠층석탑, 특이하게 생긴 원형다층석탑(연화탑), 원형석탑(실패탑), 오층석탑(거지탑), 원구형석탑(항아리탑) 등이 있다. 이 석탑들은 몇가지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먼저 전형적인 우리나라 석탑형식으로 탑신과 옥개석이 네모 반듯한 모양을 이룬 것과 탑신이나 옥개석이 원형을 이룬 것, 벽돌로 쌓아서 만들어진 전탑 형식, 지대석 위에 기둥 형태의 거친 석재를 얹어 놓은 형식 등이 있다. 운주사의 이 탑들이 이렇게 모양이 제각각인 이유는 무엇일까? 운주사는 창건에서 폐사까지 3~4차례의 중수가 있었는데 이 시기마다 새로운 석탑들이 세워지면서 모습이 서로 달라진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운주사에 또 하나의 수수께끼는 칠성석(七星石)이다. 운주사 입구에서 바라보면 운주사 서편 산 중턱에 놓여져 있는 칠성석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일곱 개의 자연석을 원형으로 다듬어 배치했는데 그 모양은 북두칠성의 형태와 똑같다. 그래서 운주사는 일반 불교사찰이 아니라 칠성신앙과 관련된 도교사찰이 아닌가 하는 막연한 주장이 제기되어 왔었다. 이 칠성석의 직경, 원반끼리의 중심각, 각 원반 중심간의 거리, 돌의 위치와 두께 등이 현재 북두칠성의 밝기나 위치와 똑같은 비례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칠성석의 이러한 천문학적 가치를 인정하더라도 누가, 왜, 하필 운주사 서편 산 중턱에 만들었는지, 또 천불천탑과의 관계 등 궁극적인 의문에 대한 대답은 할 수 없는 실정이다. 한국의 미스터리 - 팔만대장경의 신비16년의 제작 기간 중에 판각기간은 약 12년 정도이다. 연도에 따라 판각량은 달랐지만 이 12년 동안에 81,340여판, 글자는 5200만 자 가량을 어떻게 판각하였는지 의문이다. 아주 숙달된 각수로 하여금 옛날 방식으로 대장경판을 판각시켜 보았더니 하루에 20여자를 넘지 못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당시 판각에 참여한 각수를 추정해 보면 약 593명이 된다. 그러니까 593명의 각수가 하루도 거르지 않고 12년동안 판각만 했다는 이야기다. 593명의 아주 능숙한 각수가 존재했었는지에 대해선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리고 매년 고르게 판각한 것이 아니어서 어떤 해에는 약 1,500명 이상의 각수가 참여했었다는 결론이 나오기도 한다. 흔히 강화도에서 제작되어 그 곳의 선원사 보관되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것이 어째서 현재의 해인사로 오게 되었는가? 거기에 대한 자료가 많지 못해서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는데 그것들을 살펴보자. 강화도가 아닌 남해나 거제도 등에서 새겨서 해인사로 가져왔다는 주장도 있으나 조금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대장경판이 원래 두 벌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 주장은 한 벌은 남해나 거제도에서 나무를 가져와 해안사에서 새겼고 또 하나는 서해안과 남해안에서 나무를 실어다가 강화도에서 새긴 것으로 보고 있다. 이것은 판각 위치나 옮겨온 경로에 대한 문헌의 기록과도 맞아 떨어지고 있다. 그러나 한 벌을 새기는데도 많은 국력이 동원되었는데 두 벌이나 만들 수 있었을까하는 의문이 있다.한국의 미스터리 - 이순신의 거북선거북선이 과연 철갑선이었는지는 아직까지 논란의 대상이다. 거북선이 철갑선이라는 말은 일본 기록에 많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의 수군장이 된 구끼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의 전함은 거북선 이외에도 모두 철로 감싼 전함이 많이 있다고 했다. 이외에 많은 일본 기록에서 거북선이 철갑선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기록에 거북선이 철로 장갑되어 있다는 기록은 없다. 이순신의 장계나 난중일기에도 칼 송곳을 꽂았다고는 되어 있으나 철로 덮었다는 기록은 없으며 조카 이분의 '충무공행록'에도 나무로 뚜껑을 씌우고 칼을 꽂아 적이 뛰어들 수 없게 했다고만 되어 있다. 이 때문에 학계에서는 거북선이 철갑선은 아닐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현재 각종 모형에 제시된 바와 같이 거북선의 용머리가 길게 위로 솟아 올라 있었는지도 의문이다. 용머리에서 대포를 쏘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정조 때 발간된 "이충무공전서"에 나오는 용머리의 크기(길이 133cm, 폭 93cm)로는 포를 설치하기에는 좀 작아 보인다. 이순신의 장계나 난중일기에는 용의 입으로 현자포를 치켜 쏜다고 되어 있으며 왜장을 사살한 전공도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임진란 당시 거북선의 용머리는 현재 모형보다 크고 거북선 선수부에 밀착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충무공전서에는 거북머리에서 유황연기를 뿜어 적을 혼미케 한다는 기록이 있는데 용머리의 기능이 포탑에서 연기 방출용 굴뚝으로 바뀐 것이 언제인지도 알 수 없다. 게다가 내부의 밀폐된 공간에서 수십개의 포를 발사하여 발생한 엄청난 양의 연기를 어떻게 처리하였는지도 의문이다.한국의 미스터리 - 조화의 극치, 석굴암깊이 14.8m, 높이 9.3m의 석굴 안에 본존불이 모셔져 있다. 이 석불은 1.58m의 좌대 위에 3.26m의 거대한 불상으로 굽타 양식으로 만들어 졌다. 석굴암의 제작에 사용된 화강암은 무려 3000여톤에 이른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지금으로부터 1300년 전에 세워진 이 석굴이 기하학적으로 완벽한 설계에 의해 만들어 졌다는 점이다. 석굴의 평면은 반지름 12척(3.3m)으로 정확한 원을 이루고 있으며, 입구의 너비나 본존 석불의 높이 역시 반지름이 12척으로 되어 있다. 옛날엔 하루의 길이를 12시간으로 보았는데 이것은 하루의 길이와 일치한다. 그리고 원은 1년 365일을 상징하는 것으로 본다. 석굴암이 뛰어난 것은 천연 동굴이 아닌 인공굴 안에 만들어 졌으며, 구형, 삼각형, 사각형, 팔각형 등의 기하학적 구성에 의해 완벽한 조화와 통일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본존불의 좌대 방향은 방위각 117도(동으로부터 남으로 27도 방향)라고 하고 본존불은 좌대를 기준으로 동에서 남으로 4도가 틀어져 있다고 한다. 즉, 현재 본존불은 방위각 121도로 되어 있다. 이것은 일제가 수리공사를 할 때 본존불을 들어올리다가 잘못해서 그 방향이 틀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그 이유는 본존불과 좌대를 만들 때 애시당초 그 방향이 틀렸을 리 없고 본존불을 들어올리다가 뒷부분에 금이 간 모습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주의 일출 방위각을 보면 동지 때는 119도, 춘·추분 때는 약 90도, 하지 때는 약 60도로 나타나는데 석굴암의 본존불에는 사시사철 햇빛이 들어왔다는 이야기가 된다. 석굴암 아래에는 토함산 골짜기에서 내려오는 물을 받아서 마시는 감로수대가 설치되어 있다. 이 물은 석굴암 내의 본존불상 바로 밑부분을 타고 내려오는 물줄기라고 한다. 그 물줄기는 인조 석굴을 떠받치는 암반 사이를 흘러 석굴암 내의 습도를 조절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는데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석굴암을 완전히 해체하여 보수공사를 하면서 석굴암의 외벽과 밑을 시멘트로 짓이겨 놓고 물줄기도 석굴암의 바깥쪽으로 돌려 놓았다고 한다. 일제시대와 광복 후 후손들의 손에 의해 석굴암은 그 원형을 상실하고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해 버렸다. 우리는 아직도 예전 석굴암의 건축 원리를 알지 못한다. 1000여 년이나 원형대로 보존될 수 있었던 옛 선조들의 석굴암 건축 비법이 신기하기만 하다.한국의 미스터리 - 마이산 탑사마이산 탑사(馬耳山 塔寺)에는 가공하지 않는 천연석으로 쌓여진 탑들이 모여 장관을 이루고 있다. 높이 15m, 둘레 20m의 거대한 탑들도 즐비하다. 접착제를 쓴 것도 아니고 시멘트를 사용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 100여년동안 태풍과 회오리 바람에도 끄떡없이 버티고 서 있다. 탑들이 위치한 곳은 암마이봉과 수마이봉 사이의 계곡인데 이곳은 유난히 세찬 바람이 부는 곳이다. 지형적으로 앞쪽이 넓고 뒤쪽이 좁은 계곡이어서 바람이 세차게 휘몰아쳐 오는 것이다. 특히 여름철 태풍이 불어오면 언덕의 나뭇가지가 부러지고 웬만한 나무는 뿌리채 뽑히지만 이 곳의 돌탑은 조금씩 흔들리기만 할 뿐 쓰러지지 않는다. 이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불가사의로 손꼽힌다.마이산 탑사에서만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신비는 바로 역고드름이다. 겨울에 정한수를 떠 놓고 기도를 드리면 그릇에서 고드름이 거꾸로 뻗쳐 오른다. 기도의 정성이 깊으면 그릇 속에는 이처사가 쓴 신서가 박힌다. 이 역고드름 현상은 요즘도 매년 한겨울에 몇 차례씩 일어나고 있다. 이는 자연적인 현상으로 탑사 오른쪽에서 천지탑을 지나 암마이봉 절벽으로 돌아 올라가는 바람에 의해 역고드름이 생긴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주장이다. 그러나 탑의 단 위에서만 고드름이 생기고 그 바로 아래의 바닥에서는 고드름이 생기지 않는 현상은 설명이 불가능하다.-한반도는 중생대 백악기 공룡의 낙원이었다 지난 10여년 동안 국내에서 발견된 공룡 발자국화석 수는 실로 엄청나다. 경상도 지역을 중심으로 50여개 지역에서 6천5백여개의 발자국이 발견됐다. 세계적으로 매우 드문 경우다. 이곳에 공룡 발자국이 밀집된 이유는 무엇일까. 반면 완전한 골격화석은 왜 발견되지 않는 것일까. 공룡 화석에 담긴 1억년 전 한반도의 비밀은…. 82년 이후 한반도 특히 영남지역에서는 매년 새로운 공룡 발자국 산지가 보고되고 있다. 이제는 발자국 산지의 발견은 더이상 뉴스 가치가 없을 정도로 이 지역에서는 흔한 일이 돼버렸다. 특히 고성 덕명리에서는 공룡의 종류가 적어도 사족보행(四足步行)의 용각류(龍脚類)가 3종, 이족보행(二足步行)의 조각류(鳥脚類)가 10여종, 이족보행의 수각류(獸脚類)가 2종이나 확인됐다. 경북 의성군 일대에서도 광범하게 공룡 화석들이 발견됐다. 86년에는 금성면 청로리 야산에서 공룡의 골격 부분화석이 발견된 이래 90년에는 금성면 제오리에서 공룡 발자국(천연기념물 지정)이 무더기로 발견되기도 했다. 또, 지난해 11월에는 봉양면 구미리에서 공룡 어깨뼈와 대퇴뼈가 발견됐다는 언론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영남지역 이외에서는 전남 해남군 황산면 우황리 일대에서 공룡 발자국화석이 다수 발견됐다. 이곳 9개 층준에서는 2백여개의 공룡 발자국이 발견됐는데 특히 익룡 발자국화석과 물갈퀴발 새 화석이 한꺼번에 발견돼 주목을 끌었다. 이밖에도 국내에서 발자국화석이 1백개 이상 집단발견된 곳은 20여곳에 달할 정도다. 지역별로는 경상도 지역이 50여군데, 전남지역이 1군데, 북한 황해도 평산군 용궁리가 1군데 등 발자국화석은 6천개를 넘을 정도다. 그러면 한반도에서 이토록 많은 공룡 발자국이 발견되고 있는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과연 한반도는 중생대 백악기에 공룡들의 천국이었는가. 사실 발견된 발자국화석만을 고려한다면 한반도가 공룡의 천국이라는 말은 크게 틀린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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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터] 나는 자랑스러운 한국인
18세기 우리나라를 거쳐간 외국선원들은 경악했다고 한다. 그후 그들의 소개로 한국은 땅속에서 썩은 야채를 꺼내 먹는 미개인으로 취급받았다. 오늘날, 그 썩은 야채가 조류독감과 사스에 효험이 있다고 호들갑들이다. 19세기만 해도 한국은 외국인들의 눈에 검은 종이를 밥에 싸서 먹는 미개인이였다. 최근의 연구결과, 그 검은 종이를 먹은 쥐는 콜레스테롤이 50퍼센트로 떨어졌다고 한다. 요오드는 우리 몸을 유지시켜주는 필수적인 음식이지만, 서양에선 최근까지도 요오드 를 먹지 못해서 각종 괴혈, 각기병 등을 앓아 왔고, 수십만, 수천만명이 죽었다. 한국에서는 생일날 미역국 한사발로 1년치 요오드를 모두 공급받는다. 미역국을 먹지 못하는 외국인들은 고육지책으로 소금에 요오드를 첨가한다. 마늘 냄새가 나는 미개인들...외국인들이 한국인을 싫어하는 이유는 마늘이였다. 마늘의 항암효과와 각종 효능들이 서양에선 최근에야 밝혀져서 마늘 붐이 일고 있다. 고추를 먹으면 조센진처럼 머리가 나빠진다? 이것은 불과 수년전까지 일본의 정설이였다. 현재의 일본은 고추의 다이어트 효과와 신진대사율을 높이는 등의 효능과 맛에 빠져 매운 열풍이 불고 있다. 외국에선 소나 돼지의 머리나 꼬리나 다리 등을 동물의 사료로 사용한다. 그래서 야기된 무서운 질병이 바로 광우병!!!! 우리나라에선 소나 돼지의 머리나 꼬리나 다리 등에 포함된 놀라운 영양을 이미 오래전부터 섭취해 왔고, 없어서 먹지 못하는 것을 사료로 사용한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일 정도다. 한식은, 일식, 중식, 양식에 비해 가장 완벽한 식단이라고 서양에선 최근에야 밝혀졌다. 콩나물은 콩에 비해 비타민의 증가가 엄청나다. 콩나물을 만들어서 숙취나 감기에 활용 하는 유일한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된장의 함암효과, 숙성된 고추장과 간장, 곰팡이를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민족... 예로부터 인삼과 홍삼의 나라이자, 쇠로된 젓가락과 숟가락을 사용해왔고, 엄청난 문자와, 첨성대, 금속활자, 도자기, 해시계. 물시계, 측우기 등을 이용할 줄 알았던 나라, 왕권의 가장 강력한 제어기구인 성리학과, 세계 유래가 없는 왕의 통치 기록을 가 진 나라, 최초의 철갑선, 광활한 영토를 호령하고, 지켜냈던 최고의 장군들을 가진 나라, 세계 최초의 평화적 독립시위를 이끌었던 나라, 평화적 정권교체와 30년에 서구 근대화를 따라 잡은 나라, 최저의 문맹률, 최고의 교육율, 최고의 기능과 최고의 머리를 가진 민족, 그러나, 이제까지 세계가 본 한국은, 이제까지 그래왔든 고작 지하철에 유모차를 끼어 넣는 무모한 민족, 개를 먹는 미개인의 나라라 조롱거리밖에 되지 않는 나라랍니다. 일류 레스토랑에서 살짝 데치거나 익힌 고기 덩어리를 최고의 요리인양 자랑하는 그들은, 요리라는 개념, 즉 원재료를 가공하여 이루어지는 음식이란 개념이 조차 희박할 뿐입니다. 원재료의 맛을 해치지 않는다면, 원시인들이 최고의 문화인이죠! 독일에서 삼성 휴대폰의 반응은 만족도는 최고이나 점유율은 최하위! 즉, 핸드폰에 카메라가 필요해?라고 하면서 일단 사서 쓰니 좋네!라는 반응입니다. 미국에서도 구지 여러기능 있는 기기 보다는 간단한 모토롤라나, 노키아가 인기라죠? 한국은 다릅니다. 이제 핸드폰은 영화에서 나오듯 원숭이 무리에 떨어진 검은 비석이 아닙니다. 무선 인터넷은 물론, 화상 통화와 길안내 등 걸어다니면서 차안에서 이동중에 거의 모든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개인용 정보 통신 단말기의 범주에 이미 들어선지 오래입니다. 한국은 최첨단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IT, 조선, 자동차, 반도체, BT, 문화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첨단 업종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고, 세계가 바라보고 동경하는 바로 그 미래 시간에 살고 있습니다. 누가 미개인이고 누가 미래인입니까? 쇼프로에서 우리나라의 삶는 세탁기에 라면을 끓여 먹으며 조롱하던 일본이 첨단 미래국가입니까? 핵폭탄 만들어 놓고 세계를 위협하며, 자국내에선 고등학교에서조차 총싸움이 벌어지는 미국이 우리가 꿈꾸는 첨단 사회입니까? 전 한류도 다른 나라 입맛에 맛추거나 눈치 보는 것을 경계합니다. 한류는 우리가 봐주길 원해서가 아니라 외국인들 스스로 한국의 문화가 좋아서 시작된 현상입니다. 우리는 세계가 우리를 어떻게 보든 우리 방식대로 우리 문화를 발전시키는 것이 오히려 한류에 유익할 것입니다. 핸드폰으로 이동 중에도 초고속 인터넷이 되는 순간, 우리의 일상은 일대 혁신이 일어납니다. 이미 개발된 핸드폰용 헤드 마운티드 모니터, 핸드폰용 키보드 장갑 등 과 함께 사무실이란 개념이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녹음, 사진, 동영상 등 통제 가능한 모든 정보의 실시간 교류와, 원격제어, 원격업무, 원격회의 등 시간, 지역의 차이도 서서히 사라질 것입니다. 핸드폰, 아니 개인용 휴대 정보단말기를 통해 우리의 눈은 천리안, 우리의 손은 무영수, 우리의 발은 무영각이 될 것입니다. 일본의 만화, 드레곤볼에서 전투력을 측정하거나 위치를 안내하는 귀에 꼽는 소형 단말기가 나옵니다. 일본이 단지 상상으로 만든 기기를 우리가 현실화하고 있습니다. 또한, 와이브로는 단지 휴대폰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노트북은 물론, 일반 데스트톱에도 이제 유선 모뎀은 서서히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HD방송이나 TV와도 결합될 것입니다. 세계가 한국을 어떻게 보든, 우리가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우리는 우리의 앞길을 스스로 개척합시다. 한국 시청자에게 인기있는 드라마가 해외에서도 인기가 있듯, 첨단 소비자인 한국 소비자가 구매한 물건이 바로 세계 최고의 물건입니다. 세계 최고의 물건을 만든다면, 당연히 최고의 가격을 받아야 하겠죠? 저가 정책보다 첨단기술로 고가의 정책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첨단이 아닌 제품을 더불어 저가에 팔수 있는 것입니다. 명심하십시요! 이제 우리민족, 우리국가는 이미 세계에서 경쟁할 대상이 없습니다. 즉, 이젠누구를 따라가야할 대상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바로 가장 훌륭한 경쟁자입니다. 한국은 이제 급변하는 한국 스스로를 매시간 뛰어 넘어야 합니다. 우리의 경쟁자는 우리 스스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