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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글터] 청주시 활공장
2003년 청주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제가 워낙 넉살이 좋아서 입학 한지 2~3개월 뒤에 많은 선배들과 친해졌습니다.
그 중 이선웅(가명)이라는 1년 선배가 있었는데요. 당시 적은 나이임에도 차가 있어서 인기가 좋았던 선배였죠.
전 이 형이랑 의형제니 어쩌니 하면서 굉장히 친하게 지냈습니다. 이 형이 여름이 다가올 무렵에 이렇게 말하더군요.
"청주시에 야경이 죽이는데 있다. 함 갈래?"
당시 청주시에는 활공장이라는 곳이 있었습니다. 청주시민들도 아는 사람들만 아는, 그러나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꽤나 유명한
장소였더군요.
활공장이라는게, 활을 만드는 공장이 아니라, 행글라이더를 타고 내려오는 곳이어서 '활공장'입니다. 그러니까 청주시에서 가장
높은 산, 그리고 외지에 위치해 있겠지요. 선웅이형 말로는 그 산이 청주시 외각에 위치해 있어서 올라가면, 시가 한눈에 다 보여서
그렇게 멋스러울 수가 없다고 하더군요.
아무튼, 저는 그 이틀날 쯤, 선웅이형과 저, 그리고 여자 선배 2명과 함께 활공장을 오르기로 했습니다. 산이 높고 길이 험하고 어두워서 차가 없으면 절대로 갈 수 없습니다.
오후 9시가 넘어서, 운전자인 선웅이형을 제외한 저희 3사람은 술이 적당히 취해서 활공장을 올라갔습니다. 인적이 전혀 없고,
가로등 조차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렇기 떄문에 도로도 완전 비포장 도로였지요. 정말 완전한 산길입니다. 아무튼 그 도로를 따라 산을 향해 10분정도 올라갔을까요?
이제는 주위에 어둠밖에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믿을껀 자동차 라이트밖에 없었지만, 뭐 별로 무섭지는 않았습니다. 4명이나 있었으니까요.
15분정도 차를 타고 올라가는데, 전방 10미터 앞에서 난쟁이(선천적으로 키가크지 않는 난쟁이분들 한번씩보셨죠?)가 보였습니다.
한손은 허리를 붙잡고, 다른 한손으로 저희 차를 잡으려고 하더군요. 사실 이러면 안되는데, 그 오밤중에 보통사람이어도 태워줄까말까한 산길에서 괜히 난쟁이가 저희 차를 타려고 하니 조금 껄쩍지근하더라구요. 그래서 미안하지만 그냥 쌩까고 활공장을 향해 갔습니다.
가는 도중 한 선배가, 야경은 맥주를 먹으면서 봐야 제맛이라며 다시 돌아가서 맥주를 사오자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 좁은 산길에서
억지로 유턴을 해서 오던길로 되돌아 갔습니다. 가다보니, 그 난쟁이가 다시 보이더군요. 다시 저희차를 잡으려고 했습니다.
다시 한 손은 허리춤에, 다른 한손으로 저희 차를 잡으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런데,,, 활공장쪽으로 갈떄는 몰랐는데.. 반대 방향으로 자동차 라이트를 키면서 오다 보니까.. 난쟁이의 허리춤에 얹은 손에서
뭔가가 반짝반짝 거리는 겁니다. 저는 그게 뭔지 궁금해서(술도 좀 취했고) 창문을 열고 머리를 내밀어 그게 먼지 확인하려했습니다.
마침내 저희 차가 그 난쟁이를 지나갔고..........
........그 난장이가 허리에 얹은 손에서 빛이 나던건, 다름 아닌 부억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선행한답시고 괜히 차를 태워줬다고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르는 일이었지요. 저희는 모두 비명을 질렀고,
그날의 일정은 모두 취소했습니다.
다음날, 학교에 와서 더 윗선배들에게 이 얘기를 했는데요. 다음부터는 가지말라고 역정을 내시는 겁니다.
청주 활공장이 야경좋은 걸로 유명하지만.. 워낙에 인적이 없고 음친한 곳이라서, 청주 조폭들이 야경 보러 놀러온 커플들을 납치해서(차가 없으면 올라갈 수 없습니다) 남자의 차를 뻇고, 여자는 강 간을 몇 번당한곳이라더군요.
뿐만 아니라, 난쟁이나 여자 등을 이용해, 저희 같은 사람들을 노려 금품과 차량 탈취가 빈번한 곳이라고 소문이 난 곳이래요.
뭐 이 글을 여기까지 읽어보신 분은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인줄 모르겠지만, 저는 이때 귀신보다 사람이 무섭다는 말이 맞다고
느꼈었네요. 좋은 하루요~
출처 : http://cafe.daum.net/ssaumjil/lnom/592433
새터데이작성일
2010-06-10추천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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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터] 105세 大학자의 유언! “나의 죽음을 사회에 알리지 말라”
“나의 죽음을 사회에 알리지 말라.”대한민국학술원 창립 회원이자 한국 법학과 재야 사학계의 최고 원로였던 최태영(崔泰永) 박사가 지난달 30일 별세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향년 105세였다.4일 학술원 관계자는 “고인이 별세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말고 가족장으로 조용히 장례를 치르라는 유지를 남겼으며, 유가족들도 이에 따랐다”고 말했다. 장례는 2일 부천 순천향대학병원에서 치러졌으며 학술원에서도 문상을 가거나 조화를 보내지 않았다.1900년 3월 28일 황해도 은율에서 태어난 고인은 한국 법학사(法學史)에 큰 발자취를 남겼으며 여든이 넘어서부터 상고사(上古史) 연구에 매진하면서 단군조선의 역사적 실체를 주장했다. 그가 88세 되던 해 낸 ‘한국상고사 입문’(이병도·李丙燾 공저)은 단군조선이 대륙에 실존했던 광대한 고대국가였으며, 한사군은 랴오허(遼河) 서쪽 중국의 동북 지방에 있었다고 주장해 학계에 충격을 주었다.그는 평생 학자였다. 그리고 언제나 젊은 눈을 지녔다. “70대는 나의 한창 때였다. 내가 늙었다는 생각이 든 것은 아흔이 넘어서였다”고 회고했던 그는 1977년 원고지 1만4000장 분량의 ‘서양 법철학의 역사적 배경’을 내면서 “전부 머릿속에서 수십년간 정리해 쓴 것”이라 밝히기도 했다. 바빌로니아 법부터 근대에 이르는 방대한 서양 법철학을 해설·비판한 이 책으로 학술원상을 받기도 했다.2000년 출간한 ‘인간 단군을 찾아서’에서 그는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 충격이었지만 그래도 나는 학문에 정진했다. 그럭저럭 내 나이 백 살이 되었다”며 담담히 말했다. 당시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아직도 할 일이 있다”며 “죽기 전에 남겨야 할 것은 부지런히 기록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102세 때인 2002년에도 ‘한국 고대사를 생각한다’를 내는 등 왕성한 저작활동을 멈추지 않았다.젊은날 그는 2·8 독립선언과 3·1운동에 참여해 옥고를 치렀으며 1925년 25세의 나이로 보성전문학교(고려대의 전신) 교수로 취임함으로써 한국인 최초로 법학 정교수가 됐다. 경신학교 교장을 지내던 일제 말기엔 신사 참배와 일본어 상용을 거부하다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고, 김구·안창호·이광수·정인보·김성수 등 당대의 주요 인물들과도 교분이 깊었다. 서울대 법대 학장, 경희대 대학원장, 청주대 학장 등을 지냈으며 1954년 학술원 창립 당시부터 지금까지 회원으로 있었다. 국민훈장 모란장(1994), 국민훈장 무궁화장(2004) 등을 받았으며, 유족으로는 아들 원철(77·의사)씨, 딸 정철(70)씨 등 1남1녀와 사위 서권익(70·변호사)씨 등이 있다.◆ 77세 때 - 원고지 1만4000장짜리‘서양 법철학의 배경’저술, 대한민국 학술원상 받아◆ 88세 때 - ‘한국 상고사 입문’출간, 단군조선 실체 규명◆ 100세 때 - “아내가 세상을 떠났는데 나는 아직도 할 일이 있다”‘인간 단군을 찾아서’펴내◆ 102세 때 - “죽기 전에 남길 것은 기록”,‘한국고대사를 생각한다’집필
맹츄작성일
2005-12-05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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