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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왕정복고 시기 프랑스의 한 귀족 여인의 삶
프랑스 왕정복고 시기의 아몰랑 공주 (Amolant de Yeausie). 그녀는 프랑스 마르세유 인근의 작은 마을 여시(Yeausie)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딸로 태어나, 자수성가한 근대 여성상의 대표로 꼽힌다고 일부 여성층에선 주장하고 있다. 당시 나폴레옹 정권이 실각한 직후에 혼란한 사회상을 잘 이용해 궁정 내에 퍼스트 레이디로 등극하게 된다. 그녀는 정치적인 권모술수를 사용하는 데에 타고난 재능이 있어서 자신의 정적들을 하나 하나 트집을 잡아가면서 제거하기에 이른다. 그 막강한 권력을 이용해 궁정 내에 여성들의 동경을 한 몸에 받은 그녀이지만, 그녀의 철권통치와 숙청에 의문을 표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으며 일각에서는 너무 자기중심적이 아닌가 하는 의견도 나왔다. 그녀의 인성을 알 수 있는 한 일화로, 어느 날 오스만 제국 레반트 지역 출신 궁정화가 이븐 알 레바툰 (??? ???????, Ibn al-rebatun) 이 찾아와아몰랑 부인의 존안을 화폭에 담고 싶다고 하여, 그녀는 흔쾌히 허락했다.그러나 몇 시간에 걸쳐 완성된 초상화를 보자,아몰랑 부인은 자신은 이렇게 편협하게 생기지 않았다며, 이 것은 자신에 대한 도전이라고 하며 그 그림을 이븐 알 레바툰의 얼굴에 던지고, 날이 저물기 전에 다시 그리지 못하면 평생 해 뜨는 것을 보지 못하게 되리라고 명을 내렸다.그렇게 해서 다시 탄생한 그림은 상당히 미화가 들어간 아몰랑 부인의 초상화이며, 이것만이 현세까지 전해지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당시 사교계에 드나들던 장 백작 (Jean de Mint) 을 평소와 같이 숙청을 하는 데 너무 여론의 눈을 신경쓰지 않는 나머지 겉잡을 수 없을 만큼 적을 만들고 만다. 이 과정에서 그녀의 최측근이자 가장 든든한 오른팔이었던 아일랜드의 후원자 오'유스 (Neil O'Youth) 마저 등을 돌리게 되고, 이 사태를 무마하기 위해 이 모든 것은 자신의 정적이었던 일-베 후작 (Ile-Bait de DC) 의 모함이라고 급히 무마하려고 했지만, 아무도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그녀는 자신만의 비밀 사교클럽을 운영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사건은 단연 르 라크 경(Sir. Le Raque, 약칭 SLR) 기사단에 비밀 사교클럽을 만들어 차마 글로 적을 수 없는 외설적인 행위를 해오다 발각된 사건으로서, 이 일을 계기로 프랑스 국내외의 많은 사람들을 적으로 돌림으로서 결국 그녀는 파멸을 맞게 된다.
키토모작성일
2015-05-15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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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치치시마섬 식인사건
(펌글입니다.) 스압주의. 태평양 전쟁중 일어난 치치시마섬 식인사건.태평양 전쟁 당시 발생했던 일본군의 식인 행위 중 일부의 경우에는 기아가 닥쳐오지 않은 경우에도 발생했던 사례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다른 식량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포로를 잡아먹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건이 발생한 원인으로는 패전으로 기울어지는 전황에 대한 불안감을 잊기 위해서, 포로를 잡아먹음으로써 적군에 대한 승리감을 얻고 아군의 사기를 고취시키기 위해서라고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런 사건 중에서 부시 전 미국 대통령(아버지 부시)과 관련된 사건이 있는데, 오가사와라 제도의 치치시마 식인 사건입니다.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1943년 6월 해군장교로 임관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습니다. 해군 조종사 과정을 수료한 그는 당시 만19세로 미 해군의 최연소 조종사였습니다. 그는 폭격기 조종사로 태평양 방면에 배치돼, 1944년 9월2일 오가사와라(小笠原) 제도 폭격에 나섰습니다. 치치시마섬. 오가사와라 제도는 일본 본토에서 1000km 남쪽에 위치한 중부 태평양의 전략적 요충지입니다. 그중에서 가장 큰 섬인 치치시마(父島)는 이오시마(硫黃島) 북쪽 200km에 있는 섬으로, 일본 본토와 이오시마를 연결하는 보급의 중계지였습니다. 제51 뇌격대(VT-51)의 일원으로 출격한 부시 중위의 애기(愛機) 애칭은 ‘바바라’, 고향에 두고 온 약혼녀(전 미국 퍼스트레이디 바바라 여사, 현 부시 미국 대통령의 어머니)의 이름입니다. 그런데 ‘바바라’는 8000피트 상공에서 폭탄을 투하하던 중 일본군의 대공포에 명중해서 추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비행기가 추락하기 전에 부시 중위는 낙하산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구명정은 상당히 먼 곳에 있었지만 미군기가 강하와 상승을 반복하면서 위치를 가르쳐준 덕분에 그는 헤엄쳐서 구명정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군 함정 두 척이 그를 생포하러 쫓아왔지만 미군기들이 물리쳤습니다. 부시 중위는 그렇게 두세 시간가량 치치시마 앞바다에서 표류하다가 그후 풍향이 바뀌면서 구명정이 치치지마 쪽으로 흘러가던 도중에 미군 잠수함이 그를 구조했습니다. 당시 오가사와라 제도를 겨냥한 수차례의 폭격 와중에 미군기가 격추돼, 미국 9명이 바다에 떨어졌는데, 조종사 가운데 부시 중위만 유일하게 생환했습니다. 다른 8명의 조종사인 지미 다이, 글렌 프로이저, 플로이드 홀, 마브 모숀, 워런 얼 본, 딕 울러프, 그레이디 요크, 신원미상의 비행사는 일본군의 포로가 된 후 일본군의 식인 희생자가 되었습니다. 현 부시 미국 대통령이 1946년 7월생이므로 만일 이때 부시 전 대통령이 구조되지 못하고 일본군에게 잡아먹혔다면 현 부시 미대통령은 태어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당시 치치시마에는 일본 육·해군 혼성 제1여단이 주둔해 섬의 수비를 맡고 있었습니다. 육군은 다치바나 요시오(立花芳夫) 소장이 이끄는 5개 보병대대 등 약 9000명의 병력으로 이뤄졌으며, 해군은 모리 구니조(森 國造) 소장 휘하에 치치시마 방면 특별근거지대, 통신대 등 약 6000명의 병력으로 구성돼 있었습니다. 1945년 3월 이오시마의 일본군이 전멸하자 일본 대본영은 치치시마의 다치바나 소장을 중장으로 진급시키고 제109사단장에 임명했습니다. 해군도 모리 소장을 중장으로 진급시켰습니다. 치치시마 식인사건의 주범 다치바나 요시오 (立花 芳夫) 1890년 2월 24일 ~ 1947년 9월 24일 최고 지휘관이 된 두 장성은 미군 포로 학대와 처형, 그리고 식인이라는 전쟁범죄를 직접 지휘했습니다. 그들 외에도 마토바 스에이사무 육군 소령과 요시이 시즈오 해군 대령이 사건에 깊이 관여했습니다. 치치시마 식인 사건은 승리감 고취를 위한 식인이라는 점 외에도 일본군 고위 장성이 직접 지시했다는 점에서 주목받은 사건입니다. 일본군은 미군 포로 8명을 총검이나 죽창으로 마구 찌르고 용수철채찍으로 후려치는 등의 고문을 한 후 포로의 가슴과 배를 가르고 간 등 내장과 허벅지의 살을 먹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치바나 중장과 마토바 소령은 잔인한 성격으로 평소에 호형호제하는 사이였습니다. 1947년 1월13일 도쿄재판에서 로빈슨 검사가 일본군의 전시 만행을 밝히기 위해 제출한 마토바의 진술서에는 식인 만행이 시작된 당시 상황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식인 사건은 1945년 2월23일부터 25일 사이에 일어났습니다. 그때 나는 사령부로 불려가서 다치바나 장군에게 ‘미군 비행사는 스에요시부대에서 처형해야 한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사령부에서 마련한 술자리에 참석했습니다. 화제는 부건빌이나 뉴기니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으로 옮겨졌으며, 일부 부대에서 비축된 식량이 동나고 추가 공급이 원활하지 않아 인육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나중에 가토 다케무네 대령이 우리를 위해 연회를 베푼다고 해서 갔는데, 술과 안주가 충분하게 마련되지 못한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러자 장군은 불만을 표시하면서 뭔가 육류와 술을 준비할 방도가 없냐고 물었습니다. 장군은 내게 미군의 처형에 대해 물으면서 인육을 얻을 수 없겠냐고 했습니다. 그래서 인육과 술 한 되를 준비시켰습니다. 인육은 가토 대령의 방에서 요리했는데,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조금씩 맛보아야 했습니다. 물론 인육이 맛있다고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한편 모리 구니조는 미군 고기가 너무 질기다고 위안부들의 고기를 배급해달라는 희대의 망언을 하기도... 다치바나의 명령에 따라 마토바가 처형한 미군 포로의 처리에 대해 구두명령이 내려졌습니다. 괌 군사재판에 증거로 제출된 당시의 명령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대대(大隊)는 처형된 미군 조종사의 인육을 먹을 것. 2. 간(冠) 중위는 그 인육의 배급을 담당할 것. 3. 사카베(坂部) 군의관은 처형에 입회하여 장기를 적출할 것. 1945년 3월9일 오전9시 대대장 육군 소령 마토바 스에이사무 발령방법: 간 중위와 사카베 군의관을 직접 불러 명령 하달. 다치바나 여단장에게 보고하고 호리에 참모에게도 통고함. 마토바는 보조위생병들을 집합시켜서 포로의 해부 광경을 지켜보도록 명령했습니다. 사카베는 마토바의 지시대로 시체를 처리했고 308대대의 장교 전원이 방공호 안에 있는 부대장실로 불려와 포로의 인육을 먹어야 했습니다. 다치바나는 젓가락으로 인육을 집어 옆자리에 앉은 사카베 군의관에게 먹이기도 했습니다. 대충 씹는 흉내를 내던 사카베는 곧장 화장실로 가서 모두 토해냈다고 진술했습니다.해군의 요시이 대령도 구라사키 대위, 고야마 소위 등 부하 장교들과 함께 구금 중이던 미군 포로를 살해하여 장기와 인육을 적출한 뒤 이를 병사들에게 먹도록 했습니다. 일본병사 오와미쯔의 진술에 의하면 가장 먼저 잡아먹힌 미군포로는 전신교환원 00였습니다. 일본군은 00를 새로 판 무덤앞에 꿇어앉혀놓고 눈을 가린후 군도로 머리를 자르고 살을 도려내었습니다. 다음으로 00이 처형되었는데 한 일본군 장교는 《 우리는 죽창으로 00의 간을 산산조각낸후 채소, 간장, 양념을 넣고 삶아 맛있게 먹었다》고 진술했습니다. 세번째로 학살된 미군은 비행사 00였습니다. 일본군은 00의 간과 허벅지고기를 잘게 썰어 삶아먹은 후 다른 비행사 00을 살해하고 같은 방법으로 그의 간과 허벅지고기를 먹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치치시마의 미군 포로들은 일본군에게 잡아먹히게 되었습니다. 당시 열악한 군비와 부족한 식량으로 태평양의 크고 작은 섬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던 일본군이 기아에 허덕이다 인육을 먹었다는 것은 당시 공공연한 비밀이었습니다. 전후 도쿄재판의 기록(1946년 12월11일)에 의하면, 1944년 12월 뉴기니 전선에서 제18군사령부가 “연합군의 인육을 먹는 것은 허락하지만 아군의 인육을 먹으면 엄중하게 처벌한다”는 지침을 내렸으며, 실제로 명령을 위반한 병사 4명을 처벌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치치시마의 경우는 기아나 식량부족이 원인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치치시마의 식량상황을 보더라도, 쌀 배급량이 5홉에서 3홉으로 줄었지만 본토보다는 훨씬 사정이 나았습니다. 이걸 볼 때 치치시마에서는 기아 때문이 아니라 술안주감으로 포로를 잡아먹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패전후>이윽고 일본이 패전하고 1945년 9월2일, 치치시마에도 미군이 상륙했습니다. 9월3일 다치바나 중장과 모리 중장이 대표로 미군 함정에서 정식으로 항복했습니다. 항복교섭에서 미군은, 낙하산으로 탈출한 미군 조종사가 몇 명 있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됐는지 알고 싶다고 질문했습니다. 교섭에 나섰던 호리에 요시타카 참모는 방공호에서 포로 전원이 폭사했다고 둘러댔는데, 그에 대하여 미군 대표인 스미스 대령은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했으나 이미 일본군은 전범으로 처벌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 면밀하게 입을 맞추어둔 상태였습니다. 포로들의 가짜 묘도 만들고 전 부대원에게 침묵할 것을 지시해놓았습니다. 그러나 마토바 부대의 귀환은 자꾸 연기되었습니다. 사실 그동안 미군은 일본 본토로 조사관을 파견하여 귀환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진상을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1946년 2월 초, 마침내 셰퍼 미군 소령은 호리에를 불러 “잔학행위의 수괴는 육군의 다치바나와 마토바 그리고 해군의 모리와 요시이가 아닌가?”하고 다그쳐 물었습니다. 곧이어 일본군에 대한 체포가 이어졌습니다. 5월부터 9월까지 괌에서 군사재판이 열렸습니다. 치치시마 관련 피고는 다치바나 중장 이하 25명이었는데, 토라크 섬에서 자행된 포로 생체해부 등 중부태평양 각지의 만행에 연관된 전범용의자는 모두 63명에 달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치치지마의 식인사건이 가장 주목을 끌었습니다. 심리 중에 당시 상황에 대한 증언이 이어졌는데, 특히 다치바나의 당번병이 인육을 먹던 일본군의 주연(酒宴) 상황을 묘사하면서, 다치바나가 “맛있다, 한 접시 추가!”라고 했다고 증언하자 법정은 물을 끼얹은듯 조용해졌다고 합니다. 미군신문인 ‘괌 뉴스’는 연일 ‘캐너벌리즘(cannibalism·식인풍습)’이라는 큰 제목으로 재판 경과를 보도했으며, 일부는 미국 본토 신문에도 전재됐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재판에 대한 기사가 갑자기 신문에서 사라졌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호리에가 그 사정을 미군측에 문의하자 “상부 명령으로 기사 게재가 금지됐다”는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희생된 미군의 어머니들이, “명예롭게 전사했다고 믿은 아들이 그런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니 너무도 고통스럽다”며 기사가 실리지 않게 해달라고 대통령에게 탄원했기 때문입니다. 재판 결과 다치바나 중장, 마토바 소령, 이토 중령, 요시이 대령, 나카지마 대위에겐 사형이 선고됐고, 모리 중장과 가토 대령, 야마시타 대위, 도키 대위, 사토 대위는 종신형에 처해졌습니다. 해군의 가미우라 소령은 구류 중 자결했으며, 일본 본토로 귀환한 뒤 도망갔던 고야마 소위는 집 근처 야산에서 역시 자결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도망갔다가 나중에 재판을 받은 사카베 군의관은 4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이들중 사형이 선고된 5명은 사형집행일이 다가오는 순간까지 미군헌병들에게 구타당했고 5명중 2명은 사형집행일이 오기전에 맞아 죽었다고 합니다. GHQ 기록에 의하면 당시 다치바나가 수감된 곳의 간수를 담당했던 미군 헌병들이 그들을 매일 두들겨 팼으며, 심지어 같이 수감되어 있던 일본인 장군 4명에게도 매일 두들겨 맞았다고 합니다. 자기들도 전범이지만 자기들은 그냥 전쟁 범죄자인 반면 저놈은 아예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때려도 된다는 게 이유. 게다가 이 장군들의 부하들까지 원정와서 이 식인귀를 두들겨 팼다고 합니다. <최후> 요시이 시즈오 - 해군에서 유일하게 사형선고를 받은 요시이 대령은 마지막까지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법정에서, “무차별 폭격을 한 미군이 나쁘다. 조종사는 당연히 처벌돼야 한다. 인육은 전의고양과 사기진작을 위해 먹도록 했다. 모든 명령은 내가 내렸으므로 부하들에겐 책임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을 인용하여 "너희가 심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남을 심판하지 말아라. 너희가 남을 심판하는 그 심판으로 하나님께서 너희를 심판하실 것이요, 너희가 되질하여 주는 그 되로 너희에게 되어서 주실 것이다."라며 증언하지 않겠다고 버텼다고 합니다.요시이 대령은 결국 화가난 미국 헌병들에 의해 알루미늄 배트로 죽을때까지 두들겨맞았고 뼈가 60여개 이상 부러져 가면서 사망했습니다. 유언은 "아파! 너무아파!" 라고합니다. 나카지마 노보루 - 육군의 나카지마 대위는 사형선고 직후 눈물을 흘리면서 유언을 했습니다. “포로가 되면 역적으로 취급하는 일본의 국가적 풍토가 결국 외국인 포로에 대한 잔학행위로 발전한 것 아닙니까. 포로학대는 일본 민족 전체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개인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것은 잘못 아닙니까. 나는 국가를 증오하면서 죽어갑니다.” 다치바나나 마토바의 경우는 유서나 최후진술이 없어서 그들의 심경을 헤아릴 수는 없습니다. 특히 두 사람은 사형이 집행될 때까지 약 1년 동안 매일 미군 병사들의 학대와 폭행으로 거의 초주검이 되어 사형대에 올랐다고 합니다. 종신형을 받은 모리 구니조는 후일 다른 죄상이 밝혀지고 네덜란드 법정에 기소되었고 총살형을 받게됩니다. 한편 명령으로 어쩔수없이 미군들의 인육을 요리한 사카베 데라키 군의관은 그의 상사들에게 겁쟁이, 명령불복종자 라고 욕을 먹어가며 협박과 구타를 당해가며 인육을 억지로 먹었으며 결국 이일로인해 조현병, 대인공포증, 피 공포증, 공황장애, PTSD로 정신병원 신세까지 져야만 했습니다. 정상참작을 받아 3개월만에 풀려났지만 평생을 고통속에 살아야만 했습니다.그의 아버지는 이런 아들을 보며 절규하며 소리쳤습니다. "물론 돌아가신 분들이 가장 안타깝겠지만, 저 미친 놈들 때문에 망가진 우리 아들의 인생은 누가 보상합니까? 의사까지 될 정도로 똑똑한 아이였는데...."치치시마 식인사건때 미군 포로인 웨렌 중위를 몰래 도망치게 해주려고한 호리에 요시타카 소령은 위의 인간말종들에게 걸려6개월 가량을 구타당하고 인육을 강제로 먹어야만 했고 일생을 PTSD에 시달려야만 했습니다. 재판에서는 불기소 처분을 받게됩니다. 부시 전 대통령은 1988년의 자서전에서 이 시기를 전쟁중 경험한 최악의 시기였다고 밝혔습니다. <사후>일본이 미국으로부터 주권을 되돌려받은 뒤 일본내에서 전범들에 대한 명예회복운동이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A급 전범을 제외한 B, C급 전범들이 일괄적으로 무죄, 석방 조치를 받으면서 다치바나 요시오까지 무죄 처분을 받아버립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범이 아니긴 커녕, 일본 내부의 법적인 처분만 전범이 아닐 뿐, 국제적으로는 당연히 전범으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다치바나 요시오 중장은 에히메 현의 호국신사에 있는 '순국 22열사의 비'에 이름이 올라가 있으며, 거기서 영령으로 모셔지고 있다.그리고 야스쿠니 신사에도 봉헌되어 있습니다.즉 현재 일본에서는 일본을 위해 싸우다가 죽은 순국선열로 평가받으며 야스쿠니 신사에 모셔지고 있으며, 수많은 일본인들이 그에게 참배하고 있습니다. 루리웹- 토라조우님의 게시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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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권양숙이 대통령 전용기에 100만달러를 싣고 가 국빈특권을 이용
대통령 전용기에 100만달러를 싣고 가 국빈특권을 이용
“7개 돈상자 중 남은 3상자” 노무현 전 대통령의 딸 정연
씨의 미국 고급 아파트 구입 의혹과 관련해 ‘정연 씨 측으로부터 환치기로 돈을 받았다’고 말했다는 경모 씨와 친분이 있던 이달호씨가 공개한 돈
상자 사진. 이 씨는 “내 동생이 경 씨의 부탁을 받고 2009년 1월 신원을 알 수 없는 사람에게서 13억 원이 든 사과상자 7개를 받아
4개를 먼저 전달하고 보관 중이던 상자 3개를 휴대전화로 찍은 사진을 내가 보관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이달호 씨 제공
http://news.donga.com/3/all/20120227/443462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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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혁 의원이 공개한 노정연-경연희씨의 미국 아파트 이면계약서 ⓒ뉴데일리
노무현 전 대통령 가족들의 뇌물사건도 몰랐다는 민정수석 출신
문재인노무현 정권 당시 대통령 가족을 총괄 관리하는 민정수석과 비서실장은 문재인의 자리였다. 그는 놀랍게도 일국의
퍼스트레이디인 권양숙씨가 청와대에서 100만달러의 뇌물을 받는 것도 몰랐다고 한다. 그 100만달러를 대통령
전용기를 통해 미국으로 밀반출한 것도 몰랐다고 한다. 이 정도 수준이니 당연히 대통령의 아들과 딸이 뇌물 수수 사건에 휘말리게 된
것도 당연히 몰랐을 것이다.이미 전임인 김대중 정권 시절 김홍일, 김홍업, 김홍걸 등 아들 세 명 모두가 뇌물을 받아 구속되는
참사가 벌어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대통령의 가족 모두가 뇌물 사건에 개입했고, 민정수석 출신 비서실장 문재인은 이를 몰랐다는 것이다.
탁현민이 공개한 문재인과 그의 딸의 사고방식으로 보면,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다. 이들은 대통령과 그의 가족은 별개라는 의식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대통령의 부인, 아들과 딸을 민정수석 출신 비서실장으로서 제대로 관리했을 리가 없는 일이다.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우 친인척 비리가 거의 없었다. 박정희 직계로서 정치활동을 한 이만섭 전 국회의장은 “박정희 정권 시절에 친인척들에 대해 정보원들이
미행하며 감시했다”고 밝힌 적 있다. 이 때문에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장인이 불만을 터뜨리며 죽을 때까지 박정희 전 대통령과 사이가 편치 않았다.
이런 분위기였기 때문에 불시에 퍼스트레이디직을 이어받은 박근혜 전 대표가 무리없이 직을 수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처칠의 경우는
2차세계대전 당시 아들과 딸 모두를 전쟁터로 내보냈다. 미국의 씨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경우는 아들 두 명이 각각 1차세계대전과
2차세계대전에서 전사했다. 전시 상황의 국가의 지도자의 가족들이 어떻게 처신해야한는지 대표적인 사례들이다.2012년의 대한민국은
북한에서 핵미사일을 개발하고 있고, 3대세습의 불안정성 탓에 언제 어떤 무력 도발이 시도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이런 시대의 지도자는 군대에 가
있는 남의 아들과 딸들에게 조국을 위해 목숨을 버리라는 명령을 내려야할지 모른다. 문재인이 “내 가족은 스스로 판단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면,
지도자로서 심각한 결격사유가 된다. 가족 전체가 대통령직 수행을 위해 희생과 헌신을 각오할 자세가 아니라면, 자기 딸의 주장처럼 일찌감치
대통령의 꿈을 포기하는 게 맞다.노무현 자살의 원흉 문재인, 부끄러움을 모르는 정치인그러나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아버지의 대통령직 도전과 자기 삶이 별개라고 주장하는 딸을 마치 자랑스러운 듯 공개하는 문재인 캠프의 지적 수준이다. 특히 자신이
모시던 전임 대통령이 자신의 가족들의 뇌물사건으로 자살까지 이르게 한 데 대한 무한 책임을 져야하는 문재인이라면, 더 그렇다. 이번 탁현민의
문재인 딸 관련 연출로 문재인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정치인이 되어버렸다.마지막으로 노무현 아저씨 사건으로 무섭고 슬프다는 문재인
딸이 안심할 만한 내용을 확인해준다. 문재인 딸이 처칠의 딸처럼 전쟁터로 가거나, 혹은 박근혜 전 대표처럼 불시에 퍼스트 레이디직을 맡는 것은
애초에 기대조차 하지 않겠다. 다만 노무현 가족들처럼 대통령 몰래 검은 돈에 손만 대지 않으면 그와 같은 대통령의 비극은 있을 수 없다는 점은
안심해도 될 것이다.
요약
대통령 뻘건 마나님께서 뇌물로받은 돈을 국가의 재산(전용기) 을 이용해서
밀반출(외환거래법위반)
이걸 아는 국민은 가만이
있다------------자살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인정이 너~~~~~~~~~~~무
많아~~~
그 나라의 국민들은 그
수준에
맞는 대통령을 갖는다!!!!!!
[일베 글 옮김]
석종대작성일
2013-07-19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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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최태민 사위 Mr.Q 정윤회 박근혜 막후인물설 추적
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12/09/18/201209180500008/201209180500008_1.html● 朴 의원실 비서실장 ‘문고리 권력’ ● 2004년 朴 당대표 된 뒤 자취 감춰 ● “막후에서 공천 등 정치 개입” 소문 무성 ● “박근혜-정윤회, 결별 이유 없다”정치권에서 회자되는 가장 미스터리한 남자.바로 고(故) 최태민 목사의 사위 정윤회 씨다. 새누리당 대선 후보인 박근혜 의원의 전(前) 보좌관으로 알려진 정 씨는 2004년 이후 종적을 감췄다. 박근혜 후보 진영은 “2004년 이후 박 후보와 정윤회 씨 사이에 접촉은 일절 없었다”고 말한다.그럼에도 연합뉴스, 조선일보, 경향신문 등 여러 매체는 ‘지금도 박근혜의 숨은 실세?’ ‘공천에도 관여한다?’는 각종 설을 활자화한다. “박근혜가 집권하면 정윤회는?”이라는 궁금증이 따라 나오는 게 현실이다.정치권의 ‘선수들’ 사이에서 정윤회는 이미 초미의 관심사가 되어 있다. 그러나 정작 그가 어떠한 사람인지, 박근혜와 어떠한 관계를 맺어왔는지에 대해선 한 줄기의 빛도, 정보도 새어나오지 않는다. 새누리당에선 ‘정윤회’를 언급하는 것을 금기처럼 여긴다. ‘신동아’는 그와 접촉했던 인사들의 진술 등을 통해 이 남자를 스케치해봤다.다른 증언을 소개하기 전에 우선 기자가 2000년대 초 정윤회 씨를 몇 번 만난 경험부터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약간 검고 호남형인 얼굴, 호리호리한 체형, 애연가, 부드러운 말투…. 국회 의원회관 박근혜 의원실에서 만난 그의 외형적 인상이었다. 그는 독일에서 유학했다고 했다. 박사 과정까지 거쳤다는 것으로 들었는데 확실치는 않다. 그의 집안, 고향, 학력은 박근혜 측 외에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좌장역 ‘비선(秘線) 비서실장’현재 여러 언론에 “박근혜 의원의 전 보좌관”으로 보도되는 것과 달리 당시 그는 “박근혜 의원의 비서실장”이라고 자신을 기자에게 소개했다. 그래서 그를 “실장”으로 불렀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는 박 의원실에서 풀타임으로 근무했지만 등록된 보좌관은 아니었던 것 같다. 박근혜 의원의 보좌관-비서관은 박 의원의 정계 입문 이래로 지금까지 변함없이 채워져왔다. 박 후보는 2007년 대선 경선 때 정윤회 씨를 “전직 입법보조원”이라고 설명했다. 이 발언 역시 정 씨가 공식 보좌관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일 것이다.정 씨와 자주 만났다는 A씨는 기자에게 “박근혜의 입법보조원을 지금의 인턴직원 정도로 생각하면 오산”이라고 말했다. 이어 정 씨에 대해 “‘박근혜 보좌진의 좌장 역할을 해온 비선 비서실장’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고 했다. 의원실 내에 비선을 두는 것은 지금의 시각으로 보자면 예외적인 운영체계이지만 그렇다고 법률이나 윤리에 저촉될 만한 사안은 아니었다고 한다. 이어지는 A씨의 증언은 당시 박근혜에게서 정윤회의 역할과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케 한다.정윤회“1998년 박근혜 의원이 대구 달성군 보궐선거로 정계에 첫발을 내디딜 때부터 정윤회 실장이 박 의원을 도왔다. 2012년 현재까지 그대로 이어져오는 박 의원의 보좌진 세팅에도 정 실장이 어느 정도 관여한 것으로 안다. 1998년부터 2004년까지 정 실장은 공식 직함 없이 비서실장으로, 그러니까 당연히 월급이 안 나오는 무보수로, 박근혜 의원실에서 일했다. 그렇지만 박 의원실 내부를 종합적으로 컨트롤했다. 보통 보좌관이 의원 방에 문을 열고 들어갈 때 조심스러워하고 예의를 갖추는 편인데 정 실장이 격의 없이 들어가는 것을 봤다. 그만큼 박근혜 의원과의 신뢰관계가 돈독했다.박 의원이 대정부질의 같은 의정활동을 할 때 정 실장이 가끔 자문 교수단으로 알려진 외부 싱크탱크 같은 곳에서 자료를 만들어와 박 의원에게 제공해온 것으로 안다. 이런 연유로 정 실장이 의원실에서 나간 이후에도 ‘논현동팀’‘삼성동팀’ ‘강남팀’ 등 유사한 외곽조직을 운영하면서 박 의원을 돕고 있다는 소문이 끊임없이 돌고 있는 것이다. 정 실장의 거주지는 주로 강남이었다.또한 정 실장은 박 의원실에 있을 때 박 의원과 만나기를 희망하는 외부인들을 함부로 박 의원에게 연결해주지 않았다. 정 실장에게 섭섭해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이로 인해 정 실장은 소위 박근혜의 ‘문고리 권력’으로 알려졌다.”정윤회와의 술자리정윤회 씨와 여러 번 술자리를 가졌다는 B씨는 “박근혜 후보가 가장 믿는 사람은 가족 외에는 정윤회 실장과 이상렬 전 EG회장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지는 B씨의 말이다.“박정희 대통령 시절 청와대 경호실에서 근무한 이상렬 씨는 이후 박 대통령의 아들인 지만 씨가 오너로 있는 EG그룹의 회장으로 재임했다. EG그룹의 이광형 부회장은 박 대통령 때 청와대 비서실에서 일했다. 고 최태민 목사의 사위인 정윤회, 아버지의 부하인 이상렬, 이광형을 박근혜 의원이 꽤 신뢰한 것으로 안다.정윤회 실장은 담배는 좋아하지만 술은 잘 안 마시는데 이상렬 회장과는 많이 마시는 편이었다. 논현동 카페에서 만나면 나를 포함해 셋이서 양주 두 병을 비웠다. 이 회장이 가끔 자기 차 트렁크에서 양주를 꺼내오는 경우가 있었지만 술값은 대부분 정 실장이 냈다. 정 실장은 강남 등지에 부동산을 많이 갖고 있어서인지 부담 없이 냈다.”정윤회-최순실 부부는 서울 강남구 신사동 640-1 미승빌딩을 보유하고 있다. 2008년엔 보유하던 강남구 신사동 639-11 빌딩을 85억 원 정도에 매각했다. 2002년까진 강남구 역삼동 689-25 빌라를 소유했다. 2004년엔 강원 평창군 땅 18만㎡를 사들이기도 했다. 미승빌딩 5층엔 정 씨가 대표이사로 되어 있는 ㈜얀슨이 입주해 있다. 그러나 영업활동을 거의 하지 않고 있고 정 씨도 출입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박근혜 후보가 2002년 한나라당을 탈당해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한 뒤 총재로 취임하자 정 씨는 총재비서실장으로 활동했다. 정치권 사정을 잘 아는 다른 관계자는 당시 정 씨의 영향력이 컸다고 회상했다.“한국미래연합 창당 자금을 대어온 모 씨가 당무에 자주 간섭했다고 한다. 무리한 측면이 있었지만 누구도 나서지 못하고 있는데 정윤회 실장이 그를 제지했다. 격분한 모 씨가 정 실장을 제외할 것을 요구했으나 그렇게 되지 않았다. 모 씨는 자금을 회수해 가버렸다.”또 다른 정치권 인사는 “당시 정 실장이 박근혜 의원 곁에서 창당 작업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것으로 안다”고 했다.여러 사람은 정윤회 씨가 박근혜 의원의 비서실장일 때도 은인자중(隱忍自重)해왔다고 말한다. 다음은 A씨의 설명이다.“나, 요양 가야 할 것 같다”“정윤회 실장은 의원실 일을 실질적으로 주도하면서도 소수의 사람과만 친하게 지냈다. 이들에게도 자신에 대해선 거의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의 고향, 학력, 심지어 나이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와 술을 마시다 내가 궁금해 ‘서로 민증(주민등록증) 까보자’고 했다. 그때 그가 1954년생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꽤 의식했다. 저녁 약속을 잡을 때도 ‘국회에서 가까운 여의도에서 보는 건 어떤가’라고 하면 늘 ‘강남으로 가지’라고 했다. 또한 박 의원이나 본인과 관련해 질문 받는 것을 싫어했다. 그런 질문을 받으면 ‘에이, 뭐 그런 걸 물어보나’라고 했다.”박근혜 후보는 2004년 3월 한나라당 대표가 됐다. 이후 정윤회 씨는 박근혜 의원실을 떠나 종적을 완전히 감춘다. 이 상황을 모 인사는 이렇게 술회했다.“더위가 채 가시기 전인 2004년 어느 날, 정윤회 실장이 ‘나 몸이 안 좋다. 요양가야 할 것 같다. 앞으로 한동안 못 보게 될 거다’라고 말했다. 얼마 뒤 그는 사라졌다. 그를 만나온 거의 모든 사람이 그와의 연락이 두절됐다. 2007년 대선을 앞두고 스스로 신변을 정리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최태민 목사의 사위가 곁에 있으면 아무래도 박근혜 의원에게 부담이 될 터였다. 이후 ‘정윤회가 뒤에서 박근혜를 돕는다’는 이야기만 나왔다. 그러나 그를 접촉했다는 사람을 볼 수는 없었다. 그와 통화했다는 사람이 있기에 찾아가서 ‘정말이냐’고 물어보니 ‘아니다’라고 하더라.”정윤회 씨와 관련되는 의문은,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자면,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의문은 ‘박근혜에게 있어 정윤회가 수평관계로 보인다’는 점이다. 이 수평관계에 대해 정치권에선 추측이 무성하다.이에 대해 2004년까지 정 씨를 만나본 사람들은 “핵심측근은 맞지만 멘토라는 주장은 억측”이라고 말한다. “박근혜보다 나이가 어리고 박근혜를 깍듯하게 모셨다” “오랫동안 관찰한 바로는 스마트한 스타일이라기보다는 우직한 스타일이었다” “박근혜의 워딩을 만들어줄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박근혜의 주변을 관리하는 데에 주력했다”는 이야기였다.둘째 의문은 ‘최태민 공세 차단 이외에 박근혜가 정윤회와 결별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이 점에 대해선 정윤회 씨를 만나본 이들은 대체로 수긍했다. 이들은 “정윤회가 상관인 박근혜에 대한 의리가 대단하고 일을 신중하게 처리한다”고 했다. 박근혜의 관점에서 정윤회에게 내재적으로 접근하는 경우 “최태민 목사와의 인연도 있는데다 충성심과 능력을 갖춘 정윤회를 멀리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실제로 박근혜 후보는 2007년 대선 경선 검증청문회에서 “대통령이 돼도 최 목사 가족과 계속 관계를 가질 것인가”라는 질문에 “정윤회 비서가 능력이 있어 실무 도움을 받았다. 법적으로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실력이 있는 사람이면 쓸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정윤회, 수면 위로 나와야이러한 정황상 같은 강남에 거주하면서 2004년 이후 박근혜와 정윤회가 한 번도 본 적 없다는 현실이 오히려 비정상일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정윤회에 대해 궁금해하지만 언론을 비롯해 누구도 정윤회를 만나지 못하는 점 또한 이상하다고 하겠다.이는 무엇인가 인위적이고 강력한 통제가 작동하고 있다는 반증으로 보인다. 왜 그래야 하는 걸까? 그의 증발이 더 불길해 보이는 이유다. 만약 박근혜 정권의 수립을 가정해본다면 말이다.열린 사회에서 예측불가능성보다 더 나쁜 것은 없다. 앞으로의 정권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공적(公的) 시스템’에 의해서만 작동되어야 한다. “정윤회가 ‘박근혜 정권의 블랙홀’이 될 수 있다”는 정치권 일각의 시선에 당사자들이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정윤회 씨가 수면으로 등장해 할 말을 하는 게 낫다고 본다.최태민과 박근혜고(故) 최태민 목사는 육영수 여사 사망 이듬해인 1975년 퍼스트레이디 대리를 한 박근혜 후보에게 위로 편지를 보냈다.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만남을 가졌다. 박 후보는 2007년 대선 경선 검증청문회에서 “마음에 와 닿고 만나보고 싶어 만난 분 중 하나”라고 했다.이후 최 목사는 목사 안수를 받았고 1975년 5월 개최한 구국기도회에서 박 후보를 대한구국선교단 명예총재로 추대했다. 구국선교단은 구국봉사단, 새마음봉사단으로 이름을 바꿨다.그런데 당시 중앙정보부가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최태민 관련’ 보고서에 따르면 최 목사에 대해 이권 개입, 횡령, 사기, 융자 알선 등의 권력형 비리와 여자관계 의혹이 제기됐다. 박정희 대통령 공보비서관을 지냈던 선우련 씨는 비망록에서 “1977년 박 전 대통령이 최 목사를 친국했다”고 썼다. 1979년 10·26사태 이후 최 목사는 전두환 합동수사부에 의해 강원도로 보내졌다. 그러나 이후 박 후보가 이사장을 맡은 육영재단의 고문을 지내는 등 박 후보와 인연을 유지해오다 1994년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2007년 대선 당시 ‘신동아’ 6월호는 중앙정보부의 최태민 관련 보고서를 최초로 공개하면서 보고서 내용의 사실성을 함께 검증했다. 1980년 보안사령부 처장으로서 최 목사를 수사한 이학봉 전 의원은 2007년 ‘신동아’ 인터뷰에서 “최태민 목사가 기업체로부터 돈을 뜯어낸 것으로 확인된 게 얼마나 되는지…별로 없었던 것 같다. 박근혜 전 대표는 최태민 의혹과 관계가 없었다”고 했다. 1970년대 말 중앙정보부 파견 검사로서 최 목사를 수사한 백광현 전 내무부 장관은 ‘신동아’에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최태민 문제를 억지로 갖다 붙였다. 최태민 비리가 사실인지 말하기 어렵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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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이것 설명좀 설명하고 취임식하세요.박근혜
http://m.ohmynews.com/NWS_Web/Mobile/at_pg.aspx?CNTN_CD=A0001815850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과거에 총재로 있었던 사단법인 구국여성봉사단(고문 고 최태민 목사)이 지난 1978년 경 기도로부터 수의계약으로 토지 14만3028㎡(약 4만3천 평)를 불하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오마이뉴스>가 관 련 토지대장들을 찾아 확인한 결과다. 이렇게 구국봉사단이 불하받은 토지는 안양시 만안구 석 수동과 박달동 일대 42필지로 옛 경기도 종축장 부지다. 한 감정평가 법인이 지가변동률을 고려해서 평가한 결과, 이 땅의 당시 가치는 약 40억 원, 광명 KTX 역세권에 포함 된 현재 가치로는 1500억 원 대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 다. 또 이 토지의 소유권 이전 과정에서 옛 중앙정보부가 작성 한 이른바 & #39;최태민 관련 자료& #39;에 등장하는 기업인이 연루된 증거가 포착돼 그동안 의혹으로만 떠돌던 최태민 목사 일 가의 부정축재 혐의를 밝히는 데 단초를 제공할 것으로 보 인다. 특히 구국여성봉사단이 이 땅들을 매각한 뒤 그 매각자금 을 어떻게 처리했는지에 의혹이 집중되고 있다. 최태민 목 사의 딸과 사위들이 서울 강남과 강원도 평창 등지에 수백 억 원 대의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고(관련기사 : 최태민 목 사 딸 부부 소유 평창 땅 더 있다), 연 매출이 1000억 원대 가 넘는 기업을 운영하고 있어(관련기사 : 박근혜 올케는 & #39;폐업& #39;, 최태민 사위는 & #39;매각& #39;... 왜?) 더욱 눈길을 끈다. 박 당선인은 1976년 4월 최태민 목사가 만든 구국여성봉 사단에 명예총재로 참가하면서 최 목사와 중요한 활동들 을 펼쳐 나갔다. 임의단체였던 구국여성봉사단은 1977년 3월 사단법인으로 전환했고, 이듬해 2월 박 당선인은 총재 로 취임했다. 1979년 5월 구국여성봉사단은 새마음봉사 단으로 이름을 바꿨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냈던 김정렴·김 계원씨와 박승규 전 민정수석비서관 등은 과거 최태민 목 사의 비위사실을 증언한 바 있지만, 그동안 박근혜 당선인 은 이를 모두 부인해왔다. 구국여성봉사단 소유 땅 매입자 주소지는 & #39;청와대& #39; <오마이뉴스>가 단독으로 입수한 토지대장에 따르면 안 양시 석수동·박달동 일대 토지 42필지 14만3028㎡의 소 유권은 지난 1978년 10월 21일 경기도에서 구국여성봉사 단으로 이전됐다. 관할 등기소에서 폐쇄등기부 증명서를 떼어 확인해보니 이들 토지는 1977년 2월 21일 구국여성 봉사단이 매입한 것으로 나타났다. <오마이뉴스>는 지난 1월 초 경기도에 이들 토지 매각방 법과 매각가격을 알려 달라며 정보공개를 청구했지만, 경 기도청 회계과는 "일반공개경쟁 2회 유찰에 따른 수의계 약"이었으며 "매각금액은 밝힐 수 없다"고 답변했다. 하지만 구국여성봉사단이 경기도로부터 적지 않은 땅을 특혜나 다름없는 수의계약으로 넘겨 받을 수 있었던 이유 는 당시 퍼스트 레이디였던 박 당선인이 이 단체의 총재로 있었던 것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중앙정보부가 1970년대 말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이른바 & #39;최태민 관련 자료& #39;에는 경기도 종축장 부지에 대한 언급이 다음과 같이 나온다. ○ 77. 2. 21 金OO에게 경기도로부터 안양종축장(토지 70,788평, 건물 36동)을 奉仕團(봉사단)명의로 수의계약, 매수하여 준다는 댓가로 동 토지 7,000평과 동 지상건물 36동을 받기로 約束(약속). 구국여성봉사단과 그 후신인 새마음봉사단은 이들 부동산 을 1979~1980년 사이 모두 매각했다. 이 과정에서 석연 치 않은 거래가 포착된다. 1979년 9월 19일 부로 & #39;아세아 농산주식회사& #39;로 소유권이 이전된 2필지와 같은 날 & #39;아세 아 농산주식회사 外(외) 1인& #39;으로 소유권이 이전된 2필지 다. 이들 4필지의 토지대장에는 소유주의 주소가 & #39;서울특 별시 종로구 세종로 1번지& #39;로 기록돼 있는데, 이 주소는 청 와대의 주소와 정확하게 일치했다. ▲ 아세아농산의 주소는 청와대? 토지대장에 따르면 1979년 9월 19일 새마음 봉사단으로부터 소유권을 넘겨 받은 아세아 농산주식회사의 주소지는 서울 그런데 폐쇄등기부 증명서에는 아세아농산주식회사의 소 재지가 경기도 안양시 석수동 555-7번지로 나와 있다. 소 유권을 넘긴 구국여성봉사단이나 새마음봉사단 모두 서울 시 서대문구 북아현동 775번지에 주소를 두고 있었기 때 문에 단순한 오기(誤記)라고 보기도 어렵다. 어떤 이유로 이들 4필지의 소유주 주소가 청와대의 주소 와 일치할 수 있는지는 현재로선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아 세아 농산주식회사 사장 이아무개씨는 & #39;최태민 관련 자 료& #39;에 등장하는 ㈜아시아중석 회장과 동일 인물이다. & #39;최태민 관련 자료& #39;는 최태민 목사와 경북 울진에서 중석광 산을 경영하던 이아무개 회장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 78. 1 초순 부실 금융실업인 조치대상자 李OO이 경영하 는 (주)아시아중석에 은행융자 알선 및 해외여행 제한조치 해제주선을 78.12.18 朴槿惠비서관 金OO으로 하여금 재무부 등 관 계관에게 請託(청탁), 李OO의 서독 헬텔사와의 중석가공 합작회사 설립추진을 위해 동인의 출국을 주선. 최 목사가 이 회장이 운영하는 회사의 회장으로 취임하는 것을 조건으로 박 당선인의 비서관을 통해 재무부 관계관 에게 청탁, 이 회장의 출국을 주선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김정렴 전 청와대 비서실장의 증언은 주목 할 필요가 있다. 그는 자신의 회고록 <아, 박정희>를 통해 최태민 목사가 만든 구국선교단을 지원하고 있는 기업들 의 현안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청탁을 박 당선인으로부터 받은 적이 있다고 진술했다(관련기사 : "영애 박근혜, 기부 금 낸 기업 민원해결 요청"). "육(영수) 여사 서거 후 큰따님 근혜씨가 충효사상 선양운 동을 시작했는데 이때 최모(최태민)라는 목사가 & #39;구국선교 단& #39;을 조직해서 가세하였다. 하루는 큰따님으로부터 구국 선교단을 지원하고 있는 어느 & #39;건설회사& #39;와 & #39;섬유공업회 사& #39;의 현안 문제를 해결해주었으면 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나는 아버지 박 대통령을 돕겠다고 순수하게 충효 선양운동을 시작한 큰따님이 구국선교단에 이용될 위험성 이 크다고 생각되어 즉각 박 대통령에 보고했다." (김정렴 회고록 <아, 박정희>) 김 전 실장의 회고록은 최 목사가 & #39;대통령의 큰 영애& #39; 박 당 선인을 내세워 각종 부정부패를 저질렀을 개연성이 크다 는 것을 보여준다. 지난 1991년 1월 1일 치 시사월간지 <인사이더 월드>는 "최태민은 변호사법 위반사건으로 총 1억여 원을 갈취했 으며 14만 평의 땅을 빼앗았다, 경기도 안양 근처·부산 근 교·서울 노량진 쪽에 있는 토지 15만 평은 그의 수중에 넣 었다"며 "그러나 수사기관이 그러한 소리를 듣고 철저히 조사했으나 너무도 교묘히 처리해 놓아 증거를 잡을 수 없 었다고 한다"고 보도한 바 있다. 새마음봉사단 땅 매입한 신씨는 새마을운동 충남도지부장 출신 42필지 중 26필지(그 중 2필지는 아세아농산주식회사와 공유)를 새마음봉사단으로부터 사들였던 신아무개씨의 이력도 눈길을 끈다. 충남 보령의 광산업자였던 신씨는 자 신이 산 땅을 1980년 6월 대부분 매각했다. 이후 도시가 스·부동산·종합 건설업 등으로 사업을 확장했던 그는 전성 기에 10여 개의 기업을 거느렸으며 1989년에는 고액소득 세 납부자 28위에 이름을 올렸다. 박정희 유신체제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을 두 차례 지냈던 신씨는 새마을운동중앙본부 충남도지부장과 자유 총연맹 충남지회장을 맡기도 했다. 그는 정치에도 관심을 가져 민정당 충남도당 후원회장, 민자당 대천·보령지구당 의원장을 거쳐 1991년 지방선거에는 민자당 공천으로 도 의원에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이후 금융업에 진출했던 신씨는 1994년 일반예금자들이 예금한 돈을 법정한도를 150배나 초과해 같은 계열기업 에 대출했다가 물의를 빚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경영권을 빼앗겼던 그는 1997년 재기를 노렸지만, IMF 사태의 여파 로 파산했다. 1998년 6월 한 경제신문에 실렸던 당좌거래 중지자 명단 에 오른 것을 마지막으로 신씨의 이름은 언론보도에서 사 라졌다. <오마이뉴스>는 새마음봉사단으로부터 토지를 사들인 경위를 듣기 위해 그의 행방을 수소문했지만 이미 10여 년 전 사망했다는 사실만 확인할 수 있었다. 신씨가 새마음봉사단으로부터 사들였다가 8개월 만에 판 안양시 석수동 땅은 두고두고 분란거리가 됐다. 토지대장 에 따르면 1979년 9월 11일 이 토지의 소유권을 취득했던 신씨는 이듬해 6월 22일 소유권을 넘겼다. 그런데 신씨로 부터 이 땅을 산 사람은 무려 1628명이나 된다. 어떻게 된 영문일까? 77년 구국여성봉사단 소유 땅에 청계천 공구·자동차 부품 상가 이전 계획 지난 1977년 당시 서울특별시 도시계획국은 인구 분산과 환경 정화를 위해 청계천 인근 공구 및 자동차 부품상가들 을 교외로 이전시킨다는 계획안을 발표했다. 이전 대상이 된 업종을 중심으로 한국기계공구상연합회 등 4개 단체는 상가이전합동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구국여성봉사단 소 유의 안양시 석수동 토지를 이전 대상지로 매입했다.▲ 광명 KTX 역세권 토지 1978년 구국여성봉사단이 경기도로부터 수의계약 으로 불하 받았던 석수동 일대 옛 경기도 종축장 부지. 사진 중앙 멀리 보이는 이후 1979년 9월 11일 20평 정도를 한 계좌로 만들어 상 인들에게 분양했지만, 상가개발사업은 분양 후 한 달 만에 10·26이 터지면서 난관에 부딪쳤다. 사업은 이듬해 신군 부가 집권하면서 전면 백지화됐다. 상인들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사업 재개를 요구했으나 1992년부터는 제2경인고속도로 건설 등 공공사업 집행으 로 2만5000여 평 정도의 부지가 수용 당했다. 이후 지주 들은 석수토지개발조합을 설립해 나머지 토지를 대상으로 주택개발사업을 추진했지만 2003년 광명역세권 택지개 발계획이 발표되면서 2만3000여 평이 추가로 수용돼 이 마저도 불가능해졌다. 2005년 12월 26일 치 <한국경제>에 따르면 계좌당 935 만 원이 보상가로 책정됐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보상대상 자 1700여 명 중 연락이 닿아 보상액을 받은 사람은 당시 까지 300여 명 정도에 불과했다. 과거 새마음봉사단이 소유했던 토지 중 석수동 570-2, 575번지 일원 58,936㎡(1만7828평)은 현재 석수스마트 타운 부지로 수용돼 올해 안에 17개 기업이 입주할 예정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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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박근혜씨는 돈이 많당께
박근혜 총재 구국봉사단, 땅 4만3000평 소유했었다[단독] 1978년 경기도로부터 수의계약으로 불하받아 1979~1980년에 매각
13.01.23 19:43l최종 업데이트 13.01.23 21:17l
▲ 토지대장 지난 1978년 10월 구국여성봉사단이 경기도로부터 소유권을 넘겨받은 안양시 일대 42필지 부동산 중 일부의 토지대장.
ⓒ 김도균
관련사진보기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과거에 총재로 있었던 사단법인 구국여성봉사단(고문 고 최태민 목사)이 지난 1978년 경기도로부터 수의계약으로 토지 14만3028㎡(약 4만3천 평)를 불하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오마이뉴스>가 관련 토지대장들을 찾아 확인한 결과다. 이렇게 구국봉사단이 불하받은 토지는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과 박달동 일대 42필지로 옛 경기도 종축장 부지다. 한 감정평가 법인이 지가변동률을 고려해서 평가한 결과, 이 땅의 당시 가치는 약 40억 원, 광명 KTX 역세권에 포함된 현재 가치로는 1500억 원 대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또 이 토지의 소유권 이전 과정에서 옛 중앙정보부가 작성한 이른바 '최태민 관련 자료'에 등장하는 기업인이 연루된 증거가 포착돼 그동안 의혹으로만 떠돌던 최태민 목사 일가의 부정축재 혐의를 밝히는 데 단초를 제공할 것으로 보인다.특히 구국여성봉사단이 이 땅들을 매각한 뒤 그 매각자금을 어떻게 처리했는지에 의혹이 집중되고 있다. 최태민 목사의 딸과 사위들이 서울 강남과 강원도 평창 등지에 수백억 원 대의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고(관련기사 : 최태민 목사 딸 부부 소유 평창 땅 더 있다), 연 매출이 1000억 원대가 넘는 기업을 운영하고 있어(관련기사 : 박근혜 올케는 '폐업', 최태민 사위는 '매각'... 왜?) 더욱 눈길을 끈다. 박 당선인은 1976년 4월 최태민 목사가 만든 구국여성봉사단에 명예총재로 참가하면서 최 목사와 중요한 활동들을 펼쳐 나갔다. 임의단체였던 구국여성봉사단은 1977년 3월 사단법인으로 전환했고, 이듬해 2월 박 당선인은 총재로 취임했다. 1979년 5월 구국여성봉사단은 새마음봉사단으로 이름을 바꿨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냈던 김정렴·김계원씨와 박승규 전 민정수석비서관 등은 과거 최태민 목사의 비위사실을 증언한 바 있지만, 그동안 박근혜 당선인은 이를 모두 부인해왔다.구국여성봉사단 소유 땅 매입자 주소지는 '청와대' <오마이뉴스>가 단독으로 입수한 토지대장에 따르면 안양시 석수동·박달동 일대 토지 42필지 14만3028㎡의 소유권은 지난 1978년 10월 21일 경기도에서 구국여성봉사단으로 이전됐다. 관할 등기소에서 폐쇄등기부 증명서를 떼어 확인해보니 이들 토지는 1977년 2월 21일 구국여성봉사단이 매입한 것으로 나타났다. <오마이뉴스>는 지난 1월 초 경기도에 이들 토지 매각방법과 매각가격을 알려 달라며 정보공개를 청구했지만, 경기도청 회계과는 "일반공개경쟁 2회 유찰에 따른 수의계약"이었으며 "매각금액은 밝힐 수 없다"고 답변했다.하지만 구국여성봉사단이 경기도로부터 적지 않은 땅을 특혜나 다름없는 수의계약으로 넘겨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퍼스트 레이디였던 박 당선인이 이 단체의 총재로 있었던 것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중앙정보부가 1970년대 말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이른바 '최태민 관련 자료'에는 경기도 종축장 부지에 대한 언급이 다음과 같이 나온다. ○ 77. 2. 21 金OO에게 경기도로부터 안양종축장(토지 70,788평, 건물 36동)을 奉仕團(봉사단)명의로 수의계약, 매수하여 준다는 댓가로 동 토지 7,000평과 동 지상건물 36동을 받기로 約束(약속).구국여성봉사단과 그 후신인 새마음봉사단은 이들 부동산을 1979~1980년 사이 모두 매각했다. 이 과정에서 석연치 않은 거래가 포착된다. 1979년 9월 19일 부로 '아세아 농산주식회사'로 소유권이 이전된 2필지와 같은 날 '아세아 농산주식회사 外(외) 1인'으로 소유권이 이전된 2필지다. 이들 4필지의 토지대장에는 소유주의 주소가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1번지'로 기록돼 있는데, 이 주소는 청와대의 주소와 정확하게 일치했다.
▲ 아세아농산의 주소는 청와대? 토지대장에 따르면 1979년 9월 19일 새마음봉사단으로부터 소유권을 넘겨 받은 아세아 농산주식회사의 주소지는 서울시 종로구 세종로 1번지로 청와대의 주소와 일치했다.
ⓒ 김도균
관련사진보기그런데 폐쇄등기부 증명서에는 아세아농산주식회사의 소재지가 경기도 안양시 석수동 555-7번지로 나와 있다. 소유권을 넘긴 구국여성봉사단이나 새마음봉사단 모두 서울시 서대문구 북아현동 775번지에 주소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단순한 오기(誤記)라고 보기도 어렵다.어떤 이유로 이들 4필지의 소유주 주소가 청와대의 주소와 일치할 수 있는지는 현재로선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아세아 농산주식회사 사장 이아무개씨는 '최태민 관련 자료'에 등장하는 ㈜아시아중석 회장과 동일 인물이다. '최태민 관련 자료'는 최태민 목사와 경북 울진에서 중석광산을 경영하던 이아무개 회장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 78. 1 초순 부실 금융실업인 조치대상자 李OO이 경영하는 (주)아시아중석에 은행융자 알선 및 해외여행 제한조치 해제주선을 조건으로 동사 회장직 취임을 내락하고 78.12.18 朴槿惠비서관 金OO으로 하여금 재무부 등 관계관에게 請託(청탁), 李OO의 서독 헬텔사와의 중석가공 합작회사 설립추진을 위해 동인의 출국을 주선.최 목사가 이 회장이 운영하는 회사의 회장으로 취임하는 것을 조건으로 박 당선인의 비서관을 통해 재무부 관계관에게 청탁, 이 회장의 출국을 주선했다는 것이다.이와 관련해서 김정렴 전 청와대 비서실장의 증언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자신의 회고록 <아, 박정희>를 통해 최태민 목사가 만든 구국선교단을 지원하고 있는 기업들의 현안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청탁을 박 당선인으로부터 받은 적이 있다고 진술했다(관련기사 : "영애 박근혜, 기부금 낸 기업 민원해결 요청"). "육(영수) 여사 서거 후 큰따님 근혜씨가 충효사상 선양운동을 시작했는데 이때 최모(최태민)라는 목사가 '구국선교단'을 조직해서 가세하였다. 하루는 큰따님으로부터 구국선교단을 지원하고 있는 어느 '건설회사'와 '섬유공업회사'의 현안 문제를 해결해주었으면 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나는 아버지 박 대통령을 돕겠다고 순수하게 충효 선양운동을 시작한 큰따님이 구국선교단에 이용될 위험성이 크다고 생각되어 즉각 박 대통령에 보고했다." (김정렴 회고록 <아, 박정희>) 김 전 실장의 회고록은 최 목사가 '대통령의 큰 영애' 박 당선인을 내세워 각종 부정부패를 저질렀을 개연성이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난 1991년 1월 1일 치 시사월간지 <인사이더 월드>는 "최태민은 변호사법 위반사건으로 총 1억여 원을 갈취했으며 14만 평의 땅을 빼앗았다, 경기도 안양 근처·부산 근교·서울 노량진 쪽에 있는 토지 15만 평은 그의 수중에 넣었다"며 "그러나 수사기관이 그러한 소리를 듣고 철저히 조사했으나 너무도 교묘히 처리해 놓아 증거를 잡을 수 없었다고 한다"고 보도한 바 있다. 새마음봉사단 땅 매입한 신씨는 새마을운동 충남도지부장 출신42필지 중 26필지(그 중 2필지는 아세아농산주식회사와 공유)를 새마음봉사단으로부터 사들였던 신아무개씨의 이력도 눈길을 끈다. 충남 보령의 광산업자였던 신씨는 자신이 산 땅을 1980년 6월 대부분 매각했다. 이후 도시가스·부동산·종합 건설업 등으로 사업을 확장했던 그는 전성기에 10여 개의 기업을 거느렸으며 1989년에는 고액소득세 납부자 28위에 이름을 올렸다.박정희 유신체제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을 두 차례 지냈던 신씨는 새마을운동중앙본부 충남도지부장과 자유총연맹 충남지회장을 맡기도 했다. 그는 정치에도 관심을 가져 민정당 충남도당 후원회장, 민자당 대천·보령지구당 의원장을 거쳐 1991년 지방선거에는 민자당 공천으로 도의원에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이후 금융업에 진출했던 신씨는 1994년 일반예금자들이 예금한 돈을 법정한도를 150배나 초과해 같은 계열기업에 대출했다가 물의를 빚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경영권을 빼앗겼던 그는 1997년 재기를 노렸지만, IMF 사태의 여파로 파산했다. 1998년 6월 한 경제신문에 실렸던 당좌거래 중지자 명단에 오른 것을 마지막으로 신씨의 이름은 언론보도에서 사라졌다. <오마이뉴스>는 새마음봉사단으로부터 토지를 사들인 경위를 듣기 위해 그의 행방을 수소문했지만 이미 10여 년 전 사망했다는 사실만 확인할 수 있었다. 신씨가 새마음봉사단으로부터 사들였다가 8개월 만에 판 안양시 석수동 땅은 두고두고 분란거리가 됐다. 토지대장에 따르면 1979년 9월 11일 이 토지의 소유권을 취득했던 신씨는 이듬해 6월 22일 소유권을 넘겼다. 그런데 신씨로부터 이 땅을 산 사람은 무려 1628명이나 된다. 어떻게 된 영문일까?77년 구국여성봉사단 소유 땅에 청계천 공구·자동차 부품상가 이전 계획지난 1977년 당시 서울특별시 도시계획국은 인구 분산과 환경 정화를 위해 청계천 인근 공구 및 자동차 부품상가들을 교외로 이전시킨다는 계획안을 발표했다. 이전 대상이 된 업종을 중심으로 한국기계공구상연합회 등 4개 단체는 상가이전합동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구국여성봉사단 소유의 안양시 석수동 토지를 이전 대상지로 매입했다.
▲ 광명 KTX 역세권 토지 1978년 구국여성봉사단이 경기도로부터 수의계약으로 불하 받았던 석수동 일대 옛 경기도 종축장 부지. 사진 중앙 멀리 보이는 건물이 KTX 광명역사.
ⓒ 김도균
관련사진보기이후 1979년 9월 11일 20평 정도를 한 계좌로 만들어 상인들에게 분양했지만, 상가개발사업은 분양 후 한 달 만에 10·26이 터지면서 난관에 부딪쳤다. 사업은 이듬해 신군부가 집권하면서 전면 백지화됐다. 상인들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사업 재개를 요구했으나 1992년부터는 제2경인고속도로 건설 등 공공사업 집행으로 2만5000여 평 정도의 부지가 수용 당했다. 이후 지주들은 석수토지개발조합을 설립해 나머지 토지를 대상으로 주택개발사업을 추진했지만 2003년 광명역세권 택지개발계획이 발표되면서 2만3000여 평이 추가로 수용돼 이마저도 불가능해졌다. 2005년 12월 26일 치 <한국경제>에 따르면 계좌당 935만 원이 보상가로 책정됐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보상대상자 1700여 명 중 연락이 닿아 보상액을 받은 사람은 당시까지 300여 명 정도에 불과했다.과거 새마음봉사단이 소유했던 토지 중 석수동 570-2, 575번지 일원 58,936㎡(1만7828평)은 현재 석수스마트타운 부지로 수용돼 올해 안에 17개 기업이 입주할 예정이다
최태민이 누군지 잘 모른당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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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조선일보가 말하던 박그네
"아버지 후광, 알맹이 없는 연예인식 인기"
③지지율 2위 박근혜…'이미지 정치'의 약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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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닷컴의 톱뉴스- 다음 대통령, 누구를 생각?
관련 검색어박근혜, 고건, 이명박, 정동영
조선닷컴의 연재 ‘그(녀)가 대통령이 되면 안 되는 이유 10가지’ 시리즈의 3편은 ‘지지율 2위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약점’편입니다.
조선닷컴이 이 시리즈 연재를 시작한 20일, 프레시안 데일리안 오마이뉴스 브레이크뉴스 한국아이닷컴 등의 인터넷 매체들이 다투어 조선닷컴의 이 연재를 인용해 관련기사를 보도했습니다. 주요 신문이나 방송 보도가 아닌 인터넷 매체의 특정 기사를, 그것도 스트레이트 특종이 아닌 기획기사를 이렇게 많은 인터넷 매체가 인용한 것은 유례를 찾기 힘든 일입니다. 물론 매체 성격에 따라 호의적으로 소개하기도 하고, 비판적으로 다루기도 했습니다.
특히 프레시안의 기사 <조선닷컴 “고건, 5·18 때 어디 있었나”/고건 박근혜 이명박 정동영 등 약점 10가지 시리즈>는 포털사이트 ‘다음’에 주요기사로 소개돼, 20일 ‘가장 많이 본 기사’ 2위에 올랐다가 21일 오전에는 한 때 ‘가장 많이 본 기사’1위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네티즌들의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박근혜 편에 이어 오늘(21일) 오후에는 ‘그(녀)가…’시리즈 그 마지막 회, 정동영 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계속된 관심 기대합니다.
이 시리즈는 당초 4명의 후보만 다룰 예정이었으나, 김근태-손학규-이해찬 후보 등에 대해서도 점검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독자들의 지적이 이어지고 있어, 이들에 대한 시리즈도 진행할 것을 검토 중이란 사실도 알려드립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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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표는 한나라당의 ‘구세주’나 다름이 없었다. ‘차떼기당’으로 전락한 한나라당이 2004년 4·15 총선에서 그나마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박 대표의 대중적 인기 덕이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박 대표는 지난 4·30 재보선에서도 한나라당에 29대0의 압승을 안기며 야당의 유력 대선후보로 자리를 잡고 있다.
최근 노무현 대통령과의 청와대 회동에선 자신의 새로운 이미지를 선보이면서 박 대표는 차기 대선후보를 묻는 각종 여론조사에서 2위권을 달리고 있다. 이런 박 대표이지만, 정치지도자로서 그녀의 약점을 지적하는 목소리들도 적지 않다.
◆ “컨텐츠가 없다”
박 대표는 “내용은 별로 없으면서 ‘이미지 정치’만 한다”는 비판을 자주 받는다. ‘민생정치’의 전도사로 그는 자처하고 있으나, 대선 예비후보로서 민생의 기초인 경제 등에 대한 식견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박 대표는 최근 방송기자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정부의 8.31 부동산 대책을 비판하려다 경제 관련 수치를 잘못 인용하는 일도 있었다. 이 때문에 박 대표는 여권으로부터 공격을 당했고 박 대표의 ‘자질론’까지 등장했다.
열린우리당 유시민 의원은 지난 8월 박 대표에게 “박 대표가 경제 살리는 방법을 알면 직접 와서 총리를 하라…(총리)할 배짱도 없겠지만 총리가 되면 지금처럼 무책임한 발언은 못 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당 쪽에서는 박 대표는 ‘공포의 수첩’이 없으면 ‘말도 못한다’는 비판까지 한다.
한나라당 내에서도 “이미지는 좋은데 알맹이가 없다”는 비판을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노 대통령과의 청와대 회동에서 ‘선전’한 이후 이런 비판은 다소 줄어들었다는 평가도 있다.
◆ ‘박정희 후광’, ‘유신공주’란 비판
박정희 대통령의 후광은 박 대표에게 대중적 인기를 안겨준 반면 ‘유신공주’라는 비판도 함께 받게 했다. 물론 박 전 대통령은 몇몇 여론조사에서 역대 대통령들 중 가장 영향력이 크고, 성공한 지도자로 평가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지닌 그룹으로부터는 박 전 대통령의 유신독재 및 친일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박정희’란 변수가 딸의 대선가도에 어떤 변수로 작용할 지 아무도 알 수 없다.
2004년 8월 이후 포털사이트 네이버에는 “박근혜는 대통령이 될 수 없는 건가요?”란 질문이 올라와 있고, 여기에 “될 수 없다”고 답한 네티즌들은 “박 대표가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가장 큰 이유로 꼽았다.
“전우회 같은 곳에 나가서 늘 ‘아버님 시절…’로 시작하는 말을 하는 것을 보면 과연 유신의 향수를 지우지 못한 게 아닌가 한다”(youngrak9201), “박정희에 대한 옹호적인 발언은 역사인식의 부재로 평가할 수 있으며 정치 지도자의 첫 시험대에서 우왕좌왕하는 모습은 ‘과연 스스로의 철학이 있는가’란 의문이 든다”(ywind71)는 반응이 나온다.
한나라당 내에서도 이런 비판은 나온다. 이재오 의원은 한 인터뷰에서 “군부 쿠데타와 유신독재 핵심세력의 딸이 야당의 대표가 되는 모습은 적절치 않다”며 “부친의 공과는 역사가 평가하겠지만 유신독재에 대해서는 딸이 사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 정치지도자 보다는 연예인 같은 인기
지난 4·30 재보선 때 경북 영천에서 박 대표가 지나가자 식당에서 밥을 먹거나 미용실에서 머리를 하던 아줌마, 귀가길 학생 할 것 없이 박 대표 얼굴을 보려고 몰려들었다는 일화가 화제가 됐다. 박 대표에게 사인을 받은 학생들에게 ‘박 대표가 누구냐’고 물었더니 “열린우리당 의원 아니냐”고 답하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이런 것이 박 대표 인기의 한 특성이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한나라당 대선후보로서 가장 유력한 인물’을 물으면 박 대표가 압도적 1위로 나타나지만, ‘대통령 감으로 누가 적합하다고 보느냐’는 질문에선 이명박 서울시장에게 뒤지는 것으로 나타날 때가 더 많다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한나라당의 한 의원은 “박 대표의 인기는 연예인과 비슷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어느 순간 거품이 꺼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 한나라당 내 ‘박근혜 전위대’가 부족하다
“박 대표 혼자 치마폭에 얼굴을 파묻고 심청이처럼 뛰어내려 달라는 것이냐.” 지난 2월 박 대표에 대한 당내 공격이 거세지자 전여옥 대변인이 혼자 맞서며 했던 말이다. 실제로 박 대표 곁에는 전 대변인과 유승민 비서실장 등 외에는 이렇다 할 ‘전위대’가 없다고 일부 한나라당 의원들도 공개적으로 이야기할 정도다.
계보 정치가 사라졌다고 하지만 대통령 선거든, 당내 경선이든 선거에서 이기려면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주는 ‘동지’가 있어야 한다. 과거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는 이런 열혈 지지세력이 있었다.
“계보정치 하지 않겠다”는 것이 박 대표의 소신이라고 하지만 박 대표가 흔들릴 경우 위기를 함께 넘겨줄 당내 동지는 별로 없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박사모’(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가 활발히 활동하는 것과는 대조적인 현상이다.
이처럼 확실한 자기 세력이 없는 탓에 한나라당에서는 수시로 박 대표 리더십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고, 심지어 퇴진론까지 터져 나온다. 한나라당 안상수 의원은 지난 14일 “박 대표와 현재 한나라당 틀로는 (대선에서)패배할 수 밖에 없다”며 박 대표의 퇴진을 촉구했다. 그런데도 박 대표 진영의 야무진 대응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정수장학회 등 재산 의혹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부터 물려받은 정수장학회와 스위스은행 비자금 조성 의혹 등도 박 대표에게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 있다. 박 대표는 지난 2000년 자신이 이사장을 맡고 있던 정수장학회와 관련해 탈세 논란에 휩싸인 적이 있다. 박 대표가 1998~1999년에 정수장학회로부터 섭외비 명목으로 각각 1억원, 1억5천만원을 받아 쓰고 세금을 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박 대표 측은 세금을 납부했다고 해명했다.
박 대표는 2005년 2월 정수장학회 이사장직을 사임하기 전까지 이런 금전 시비에 때론 시달렸다. 2004년 8월에는 독립유공자유족협회·민가협·박정희기념관반대국민연대 등 14개 시민사회단체가 “MBC주식의 30%, 부산일보 주식의 100%를 소유하고 있는 정수장학회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권력을 이용해 취득한 장물이므로 즉각 내놔야 한다”고 공격하기도 했다.
이들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스위스 은행 비자금 조성 의혹도 제기했다. “박정희와 박근혜가 스위스로 건너가 60억불을 은행에 예치했고, 여기에 보안사령부가 개입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뚜렷한 증거는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2002년 대선을 앞두고 박 대표가 이회창 전 대선후보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설도 있다. 당시 한나라당을 탈당해 미래연합을 창당했던 박근혜 대표가 다시 복당하는 과정에서 ‘거액’을 받았다는 의혹도 제기돼 있다. 박 대표는 당시 그 돈을 유세활동비로 쓴 것으로 돼 있지만 액수와 용도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다.
◆ 스킨십이 부족하다
스킨십 부족을 얘기하는 의원들이 많다. 박 대표는 선거 등 특별한 일이 없을 경우 ‘2차’는 거의 없다. 밤에는 혼자 집에서 주로 네티즌들과 온라인 대화를 하며 보낸다. 이것이 ‘박근혜식 정치’의 한 특성이다.
자연 ‘협상과 타협’으로 대표되는 과거의 정치와 박 대표는 다소 거리가 있다. 소속의원들에게 당 대표로서 협조를 구하기는 하지만 가슴을 털어놓고 동지를 만드는 스타일은 아니다. 이 때문에 “박 대표가 정치를 하는 것인지 시민단체식의 자원봉사를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고 말하는 의원들도 있다.
“가끔 회식은 있지만 여성대표라 술잔을 주고받는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힘들다”고 불평하는 의원들도 있다. 아주 간혹 폭탄주를 돌릴 때도 박 대표는 입만 살짝 대고 나머지는 ‘흑기사’가 마시곤 한다. 이런 박 대표의 특성을 “공주 스타일 때문”이라고 비판하는 소리도 나온다.
◆ 물러서지 않는 고집
박 대표는 자신이 설정해 둔 로드맵과 다른 얘기를 하면 좀처럼 수용하지 않는다는 비판이다. “다음 대통령은 대학 나온 사람이 돼야 한다”는 발언으로 전여옥 대변인에 대한 경질 여론이 거셌지만 박 대표는 눈도 깜짝 하지 않은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한나라당 안상수 의원은 “사람 쓰는 것도 그렇고 운영의 폭도 틀도 좁지 않느냐”며 박 대표의 당 운영 스타일을 독단적이라고 비판했다.
박 대표가 MBC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했을 때의 일이다. 공격적인 질문을 연달아 받았을 때 박 대표는 “지금 저랑 싸우자는 겁니까”라며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 당시 많은 네티즌들은 “어디 무서워서 이야기나 제대로 하겠느냐”며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베일 가린 사생활, 시한폭탄 될 가능성도
박 대표는 아주 간혹 자신이 혼자 사는 집을 기자나 정치인들에게 공개하는 ‘오픈 하우스’를 하기도 했지만 박 대표는 여전히 베일에 가려 있다는 얘기가 많다.
박 대표가 당무를 마치고 귀가한 후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수행비서도 현관문 밖에서 수행을 시작한다. 옷은 어디서 사 입고 밥은 어떻게 해 먹는지 모든 것이 장막에 가려있는 것이 박 대표이다.
이회창 한나라당 전 후보도 자신의 사생활이 공개되는 것을 싫어했다. 그러나 ‘빌라 게이트’가 터지면서 이 전 후보는 한 순간에 주저 앉았다. 특히 깨끗한 이미지, 서민들을 위하는 이미지를 트레이드 마크로 하는 정치인일수록 작은 흠집에도 큰 충격을 받을 수 있다는 게 정치권 분석이다.
어쩌면 베일에 가려져있는 박 대표의 사생활 역시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은 변수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 ‘부드러운 리더십’의 한계
‘박근혜 리더십’에 대한 한계론도 만만치 않다. 한나라당 김문수 의원은 16일 “박 대표의 리더십은 온유하고 어머니 같고 화합형이라는 점에서 장점이 있으나, 지금과 같은 위기상황에서 국가 비전을 제시하고 위기돌파를 위한 전략전술을 구사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주장했다.
다른 한 의원은 “박 대표가 기존의 정치지도자들과는 다른, 조용조용한 민생정치를 실천하고 계파를 만들지 않겠다는 실험적인 정치를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어려운 국정을 이끌어가는 야당 지도자로서는 맞지 않다”고 지적했다. 비바람을 맨 앞에서 견뎌내야 하는 대통령에는 맞지 않는 리더십이라는 주장이다.
◆정상적인 성장과정을 겪지 않았다
박 대표가 10살 무렵인 1961년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이미 5·16군사혁명을 주도해 국가 최고의 권력을 거머쥐었다. 이후 1979년 10월 김재규에게 피격당하기 전까지 20년 세월을 박 대표는 최고권력의 장막 속에 살았다.
육영수 여사 피격 이후 5년간은 사실상의 퍼스트레이디 생활을 했다. 박 전 대통령의 사망과 그 이후의 은둔생활 등 박 대표의 인생은 일반인들의 그것과는 상당히 동떨어져 있다.
물론 이런 개인 성장사는 박 대표가 선택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런 박 대표의 인생이 과연 국가 지도자로서 적합하겠느냐는 점은 논란이 되고 있다. 박 대표가 결혼을 하지 않았고, 자녀를 낳아 길러본 적이 없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비판하는 이들이 있다. 박 대표는 지난 6월 한 대학 강연에서 ‘화를 내지 않는 비결’을 묻는 질문에 “부모님이 돌아간 뒤 배신과 어려움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김재은 기자 2ruth@chosun.com
입력 : 2005.09.21 01:51 50' / 수정 : 2005.09.21 15:02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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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전에 하나 더
"할말은 하는 신문"임
단, 때에 따라 바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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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왜 문재인 후보는 패배했는가?
왜 문재인 후보는 선거에서 패배했는가? 몇 가지 이유를 정리해보았습니다. 여러분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1. 높은 투표율 = 문재인 지지 상승효과는 없었다.이번 선거가 투표율이 매우 높았는데, 새누리당은 오늘 아침 매우 초조해했다. 높은 투표율이 곧 민주당의 높은 득표율을 의미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상 투표율이 높아진 것은 양당의 지자자들이 모두 어느때보다 결집했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숨은 표가 지난 정권에 대한 심판의 의지로서 높은 투표율로 나타났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보수층과 진보층의 강한 결집력이 투표율을 높인 것이었다. 따라서 높은 투표율은 어느 한쪽에 유리한 것도 없고, 양측에 평행 상승곡선을 그려준 셈이 되었다.2. 문재인의 안보 의식보수층, 50대이상의 연령 층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안보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최소한 과거 남북전쟁의 직접적인 영향이나 간접적인 영향권 아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전쟁의 고통을 안다. 그런데 문재인 후보는 안보관에 있어 보수층을 설득하는데 실패했다. NLL파문, 친노성향, 친북정책 등으로 보수층에게 굳건한 안보의식을 보여주지 못했다. 오히려 대선 토론에서 전국민적으로 종북 의혹을 받고 있는 이정희 후보와 하나가 되어 박근혜 후보를 공격했다. 이것이 잠잠하지만 속에서 들끓었던 보수층의 결집을 더욱 가져왔다고 본다.3. 안철수 밀어내기이번 대선에서 만약 안철수가 나왔다면 100% 안철수가 대통령이 되었다고 본다. 왜냐하면 중도적 성향을 지닌 유권자들은 비교적 안보관이 투철한 안철수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보수층에서도 최소한 안보면에서는 북한을 '경계'하는 안철수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게다가 어디 한쪽에 크게 편향되지 않은 그의 합리적 중도 성향도 호감을 주었다. 안철수가 대선에 나왔을 때 당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도 그의 이념이 보수에 가깝다고 내심 환영하는 논평은 이를 뒷받침한다. 그런데 문제는 문재인과 안철수가 단일화 협상 과정에서 안철수가 민주당의 거친 공세에 흠집이 났고, 뒤로 밀리게 되었다. 그 결과 안철수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일부가 문재인에게 흡수되지 못했고, 기권 혹은 박근혜에게 흡수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이번 선거의 큰 패배요인이다.4. 박근혜 자체를 지지박근혜는 전라도를 제외한 한반도 전지역에서 고루 지지를 받았다. 또한 우리나라 20대에서도 박근혜 지지율이 34% 이상 나왔다는 것은 박근혜 후보가 사실상 20-60대를 아우르는 국민적 지지를 받았다고 해석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나라 국민의 일반적인 정서가 박정희에 대한 그리움과 퍼스트레이디로서 오랫동안 아버지 밑에서 국정을 경험했던 박근혜를 높이 평가하는 것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또한 박근혜가 그동안 자신의 공약을 비교적 잘 지켜왔고, 말수는 적지만 절제된 행동들은 국민에게 어느정도 신뢰를 그동안 쌓아온 것이라 본다.5. 민주당의 각종 네거티브 공략민주당이나 새누리당 모두 그렇게 아름다운 선거는 하지 않았다. 둘 다 네거티브를 했으며, 비슷한 수준이었다. 그런데 민주당은 막판에 다소 무리수를 두었다. 국정원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국정원 사건은 개인의 영역을 침해하는 것으로서, 논란의 여지(현재 수사가 진행중이지만)를 남겼다. 또한 신천지 관련 여러 루머들을 퍼트렸다. 나꼼수 김용민도 검증되지 않는 말을 SNS에 퍼뜨렸다. 이것이 선거에 악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6. 진보세력으로서 차별화되지 못한 정책사람이 먼저다 라는 공약을 세우고 있지만, 사실 주요 정책의 현안을 면밀하게 살펴보면, 새누리당과 크게 공약을 차별화하고 있지 않다고 본다. 국민들은 안보가 불안한 똑같은 공약을 내세우는 당보다는 안보가 굳건하면서 똑같은 공약을 내세우는 당을 택했다.7. 앞으로의 과제필자는 문재인 지지자이다. 문재인의 인품과 정치 성향을 잘 안다. 하지만, 국민은 박근혜를 택했다. 대한민국 국민의 선택이다. 이제 이것을 받아들여야 한다.승자 박근혜 후보는 패자를 잘 아울러야 한다. 이것이 대통합으로 가는 길이다. 그녀가 공약에서 밝힌대로 민주당의 인물들도 주요직에 임명하는 안을 그대로 실행해야 한다. 또한 민생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돌보아야 한다. 대기업 위주의 성장 정책에서 복지를 돌보아야 하고, 서민들의 가난한 기침 소리를 멎게 해주어야 한다.민주당은 무조건 반대에서 벗어나, 국민 대통합을 위해 함께 협력하는 관계로 성장해야 한다. 때로는 감시하고 때로는 질타해야 한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국민을 위해야 한다. 또 하나, 민주당은 반드시 이정희 후보와 인연을 끊어야 한다. 대다수의 국민들이 진보당을 불안해하고 믿지 않고 있다. 50대 이상의 국민들은 진보당을 북한괴뢰당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19대 대선에서 승리하려면 투철한 안보관으로 무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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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펌글) 왜 그들은 절대 박근혜 후보의 사과를 받아들일 수 없는가?
왜 그들은 절대 박근혜 후보의 사과를 받아들일 수 없는가?그러나 이번 박근혜 사과를 통해서 잠시나마 대선 전까지 중도층의 마음을 사로잡고 부동층의 표에 확장하는 '이익'은 별도로, 우리가 반드시 생각해볼만한 문제가 있다. 일단 무엇보다도 박근혜 후보가 사과를 해야 하는 본질적 이유가 무엇인가이다. 박정희의 딸이라서? 박정희 대통령 당시 퍼스트레이디였기 때문에? 필자의 생각에는 진보진영도 이 정도의 논리구조를 갖고 논쟁에 뛰어들 것 같지는 않다. 그런 논리라면 모든 범죄자의 아들딸도 영원히 정치를 할 수 없어야 할 것이고, 과거 영부인이었던 모든 분들은 그 당시 정권의 과오를 책임져야하는게 마땅하다. 그 누구도 전두환 前 대통령의 과오를 그 부인에게 추궁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지 않는가? 김대중 대통령 당시 햇볕정책의 과오를 이희호 여사가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도, 노무현 정부 당시 있었던 측근비리나 여러 정치적 실정을 권양숙 여사가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도 없다. 그렇다면 진보진영이 박근혜 후보에게 지속적으로 사과를 요구하고, 나아가 그 사과 마저도 진정성이 없다며 거부하는 본질적인 이유는 무엇인가?그것은 바로 박근혜 후보가 박정희 대통령을 지지하는 것, 그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박근혜 후보의 레토릭은 대충 비슷한 패턴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분명 공과 과가 있으며, 이 中 과오에 대해서는 충분히 우리가 반성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대통령이 이룩한 바가 많고 기여한 업적이 크므로 우리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종합적으로' 높은 점수를 줄 수 있을 것 같다." 수준이었던 것이다. 문제는 진보좌파 진영의 역사 의식에서 이러한 박근혜 후보의 입장이자 대부분 보수 우파의 입장이 결코 용납될 수 없는 '반동적 역사관'이라는 것이다. 사실 박근혜 후보는 자신의 아버지의 과오를 계승하겠다고 말한 바도 없고, 민주주의를 불신한다고 한 적도 없다. 심지어 종북좌파척결과 같은 흔하디 흔한 구호 조차도 정치적으로 발언한 바가 거의 없다. 그런 박근헤 후보의 입장이 명확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진보좌파 진영은 박근혜 후보가 "너 역시 독재를 할 것 같아!"라고 속단하는 것은, 바로 박근혜 후보의 역사관 그 자체에 대한 알레르기적 반응 때문이라고 읽힌다. 왜 그럴까? 왜 그들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일까? 필자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눠서 생각해본다. 첫째는 현실적 필요성 측면에서 정치공학적 해석이다. 둘째는 보다 관념적인 측면인데, 이는 대중의 사고와 맞닿아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바로 '민주주의에 대한 냉정한 태도의 결핍'이다.현실적 측면: "그들은 박근혜 사과를 원하지 않는다"유족들의 입장에서 말하는 소제목이 아니다. 유족들이야 말로 박근혜 후보의 진정성있는 사과와 향후 올바른 정치를 통한 민주주의 발전 및 정치적 보상을 원할지도 모른다. (여기서 말하는 정치적 보상이라는 금전적 보상과는 다른 개념으로, 박근혜 후보의 정치를 통한 간접적인 보상을 말하는 것이다. 오해가 없었으면 한다) 그러나 오늘날 박근혜 후보에게 줄기차게 사과를 요구하는 야권 세력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과연 박근혜 후보의 사과인지, 아니면 사과를 하지 않고 버티는 오기인지는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적어도 야권이 원하는 것이 진정성 있는 사과 정도였다면 이미 박근혜 후보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충분히 얻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그들의 정치적 상징인물이라 할 수 있는 김대중 前 대통령과 노무현 前 대통령을 참배하고, 나아가 그 유족들까지 찾아뵈어 서로 덕담을 주고 받을 수준이라면, 과연 야권 정치인이 진정성을 운운하며 사과가 부족하다고 공세를 펼만한 상황인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물론 최근 인혁당 사건에 대해 두 개의 판결이 있다는 등 몇몇 실언을 두고 문제를 삼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겠으나, 그것 역시 그 발언에 대한 사과요구 수준에서 그칠만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박정희 대통령의 과오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올바른 접근방법이 아니다.그들은 진정으로 박근혜 후보의 진정성 있는 사과와 대통합 행보를 바라는 것인가? 일단 정치공학적으로 그럴리가 없다. 박근혜 후보가 역사적 문제에 있어 좌향좌를 거듭하고, 진심으로 피해자와 유가족들을 껴안는 모습으로 간다면 그들에게 유리할 것이 전혀 없을뿐만 아니라, 그 동안 아주 유용하게 활용해왔던 공격 무기조차 잃게되는 결과가 나타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박근혜 후보가 어떠한 발언과 행동을 하더라도 결국엔 "진정성이 부족하다" "정치적 쇼에 불과하다"는 수사를 반복해가며 박근혜 후보를 "거짓말하는 정치인"으로 매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쩌면 오늘날 정말 불쌍한 쪽은 박근혜 후보가 아니라 야권일지도 모른다. 사과를 사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집념 때문이다.현실적 필요성과 솔직하지 못한 역사관필자는 현실적 측면에서 왜 그들이 사과를 받아들이지 못하는가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향후 박정희를 칭찬해야만 자신들이 정치적으로 표를 얻을 수 있는 상황이 온다면 얼마든지 '갈아탈'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보다 더 본질적인 부분은 바로 이념적인 측면에서의 역사관이다. 이는 정치인보다는 지식인과 대중을 설명함에 있어 더 유용한 접근방법이라고 생각된다."박정희에게는 공과 과가 있는데, 이중 과오는 분명히 반성해야 할 부분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과 업적이 크므로 우리는 박정희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는 주장이 그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는 본질적 이유는 또 다시 두 갈래로 나눠질 수 있다.①[박정희에게는 공과 과가 모두 있다]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일단 첫번째 부류는 박정희가 아예 공이 없다는 주장을 하는 쪽이다. 흔히 "박정희가 한게 뭐가 있느냐"는 수준의 반론인데, 이것은 사실 반론을 할 가치조차 없을 정도로 형편없는 주장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필자가 과거에 썼던 두 개의 글을 갖고 대신 설명하고자 한다. 요지를 밝히자면 박정희의 경제정책과 안보정책은 당시 어느 다른 비슷한 국가와 비교해봐도 탁월한 리더십을 보여줬음은 명백한 사실로 보이며, 특히 경제발전에 있어서 박정희 대통령이 선택한 방법론은 당시 보편적이지도 않았고 결코 쉽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다음 글은 http://blog.naver.com/jujinyoon/20167031814 에서 인용하였습니다>""박정희가 없었어도 경제발전은 가능했다"는 주장의 논거로서 흔히 장면정부에서 이미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수립되었고 박정희가 행동에 옮겼을 뿐이다.. 라는 주장들을 하시는데, 장면정부에서 마련됐던 경제개발5개년계획은 1차상품(농산물/천연자원)을 수출하여 벌어들인 돈을 공업화에 쓰자는 전략이었는데, 박정희 정부는 이를 뒤엎고 철저히 공업화전략에 집중하여 수출지향적 발전을 유도합니다. 장면정부와는 성격이 다르다.""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박정희 정부가 다른 개발도상국과는 달리 '수입대체화 전략'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제이차세계대전 이후 대부분의 개도국/후진국들이 수입으로 인한 국부유출과 무역적자를 완화하기 위해서 수입대체화, 즉 수입해서 쓰는 물건을 대신 만들어서 내수를 확장하는 전략을 선택하게 되는데, 이는 결과론적으로는 상당히 부정적인 경제개발 정책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런 환경 속에서 박정희 정부는 수출지향적 개발전략을 선택하는데, 이는 동아시아 신흥국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다."②[박정희에게 공과 과가 있는데, 이 中 공이 더 크므로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 - 이른바 '민주주의만으로 역사를 보는 입장'앞서 살펴본 1번 주장은 어차피 박정희라는 인물에 대한 연구와 탐구가 깊어지면 깊어질 수록 가치가 없어진다는 점에서 그리 신경쓸만한 부분이 아니다. 특히 1번 주장은 김대중 대통령이나 노무현 대통령이 대통령 재직 당시 인정한 부분이기도 해서, 역사적으로 그리 설득력이 있지는 않다. 오히려 필자의 생각에 비추어봤을 때 진짜 우리나라 지식인들과 대중 사이에 팽배해 있는 것은 바로 이번에 다룰 2번과 같은 경우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즉, 박정희가 잘한 것도 있고 못한 것도 있는데.. 그 못한 것이 너무나도 본질적인 것이므로 잘한 것을 도저히 인정해줄 수 없다는 논리다. 바꿔말하면 박정희가 경제발전과 안보를 잘했고 민주주의를 못했는데, 민주주의가 너무나도 본질적인 가치이므로 경제발전이나 안보에서 잘한 것으로 도저히 봐줄수가 없다는 논리다. 필자는 이들의 주장을 전혀 납득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오늘날 누군가가 민주주의와 삼권분립을 훼손해가면서까지 다른 목적을 도모하려고 한다면 필자 역시 그들을 '민주주의의 적'으로 규정하고 규탄할 것이다. 또한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이들이 당했던 수많은 고초와 고통을 생각했을 때 그들이 박정희를 선뜻 용서하기 어렵다는 것도 심정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다.하지만 우리는 역사를 감정의 잣대로, 그리고 현재의 잣대로 평가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이는 편협하기도 편협하지만, 사실 용기가 없고 솔직하지 못한 접근이다. 민주주의는 분명히 소중하다. 앞으로 절대 훼손되어선 안될 제1의 가치다. 그러나 과연 민주주의가 지난 1950~1970년대에도 제1의 가치로서, 그 어떠한 다른 가치도 모두 압도할만큼 대중적인 상식이었는지는 의문이다. 상식이 아니었던게 맞다고 하는 것도 아니고, 당시 상식이 민주주의가 아니었음을 비판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그 당시 시대를 "있는 그대로" 보자는 것이다. 필자는 가끔씩 이런 식의 논리로 반론에 재반론을 던지곤 했다. 박정희가 독재자였기 때문에 무조건 매도돼야 한다면 세종대왕이나 정조대왕도 왕조세습을 한 독재자였으니 비난받아 마땅한 것 아닌가? 혹자는 이러한 필자의 주장을 매우 무리한 접근이라며 비난하고, 어떻게 조선시대 왕조국가 체제와 1948년 이후 민주주의 체제를 단순비교할 수 있느냐며 공격한다. 그러나 필자는 생각이 다소 다르다. 과연 18세기 조선과 20세기 중반의 대한민국의 대중의 의식적 격차와, 20세기 중반 대한민국과 오늘날 21세기 대한민국의 대중의 의식적 격차 중 무엇이 더 멀고 가까운지는 속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20세기 중반 대한민국을 살아갔던 수많은 민초들과 대중들은 18세기, 19세기에 더 가까운 의식과 관념을 소유하고 있었을수도 있고.. 이승만-박정희 역시 예외가 아니었을 수 있다. 이것은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저 우리 역사가 그렇게 흘러왔다는 것 뿐이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논할 수 없는 주어진 현실이었다.우리는 민주주의만으로 역사를 볼 수 없다. 민주주의가 '매우' 소중한 것은 사실이지만, 민주주의만큼이나 소중한 여러 가치들이 있다. 먹고 사는 것, 그보다 앞서 '당장 사는 것'이 민주주의보다 덜 가치있다고 말할 수 있는 이들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나는 민주주의가 아니라면 죽음을 선택하겠다!" 필자는 그 분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다. 그러나 과연 당신이 솔직하느냐고 되묻고 싶다. 전쟁이 끝나고 만연한 빈곤을 벗어나지 못했던 대한민국이 제2의 6.25의 위협 앞에서 벌벌떨고 있는 상황 속에서 과연 민주주의는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했던 것인지 조금더 냉정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필자는 이 논쟁에 과거에 쓴 "[박정희 논란] 현재의 오만을 경계하라! http://blog.naver.com/jujinyoon/20166461083 " 를 덧붙이고 싶다. 몇 가지 단락을 소개하고자 한다."지금 이 시대는 "어떻게 하면 사람이 더욱 건강해질 수 있느냐"를 논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5.16 당시 대한민국은 "사람이 사느냐 죽느냐" "제2의 6.25가 나느냐 마느냐"를 고민하던 시대입니다. 지금의 잣대로 평가해선 안됩니다. 4.19 이후 정치판은 오늘날의 부정부패와 혼란은 비교조차도 힘들 정도의 "아수라장" 이었습니다. 혁명에 대한 국민적 지지를 등에 업고 권력다툼, 밥그릇싸움에만 빠져 국가는 치명적 위기에 놓여있었죠. 박정희는 이것을 극복한 것입니다.""경제성장과 국가발전이라는 '이익'이 인권탄압과 자유의 억압이라는 '손해'를 정당화할 수 있느냐? 물론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는 공동체를 운영함에 있어 이익과 손해를 따져가며 +의 방향으로 이끌어갈 수박에 없습니다. 그게 공동체의 본질이죠. 공리주의적 관점이 상당히 구시대적인 획일적 기준인 것 같지만, 사실상 여전히 오늘도 우리는 공동체를 꾸려가는데 있어 공리주의적 기준을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5.16과 박정희의 권위주의적 정치.. 당연히 '잃은 것'이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후퇴했고 개인의 기본권과 자유는 억압됐죠. 하지만 그것보다 훨씬 더 얻은게 많고, 그것을 우리가 현재 누리고 있기에 우리는 포용의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것입니다.""민주주의는 정말 숭고하고 소중한 가치입니다. 지금 오늘날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사람은 극히 소수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오늘의 현실입니다. 1960년대의 현실은 지금과 완전히 '다른 세계'입니다. 원치 않았던 식민지 시대를 겪고 전쟁으로 온 국토가 쑥대밭이 됐던 우리의 험난한 역사 앞에서 숙연해집시다. 그 시대를 어렵게 살아가며, 희생과 근면을 통해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었음에 감사해합시다. 그게 진짜 대한민국을 사랑하는겁니다."-------------------------------------------------------------------------------------------------------------p.s- 저는 박빠도 새누리당도 아닌 부동층의 입장에서 정봉주 "박근혜는 독재자의 딸이 아니다" 발언 파문의 글을 읽은후 올려보는 글입니다 올바른 유권자라면 반드시 추측내지 억측에 기반한 무절제한 판단은 지양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올려봅니다 섣부른 판단이나 오해로 인신공격적, 수준낮은 무논리적 주장은 정중히 사양합니다 (글 내용에서 볼수 있듯이 퍼온글의 작성시기는 지난시점임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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