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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글터] [수정완료]20세기 UFO 사건 역사 1부: 1940년대
* UFO: Unidentified Flying Object, 미확인 비행 물체. 냉전 시대에 미국에서 보고된 미확인 비행 물체 목격담들이 그 시발점으로 이후 이러한 목격담들과 목격자들이 유명세를 얻으면서 이에 동조한 대중매체들로 인해 대중들의 인식은 점차 '적국의 정찰기'에서 '외계인이 탑승한 우주선'으로 변모. 하지만 미국 정부가 냉전 시대 동안 이 UFO가 소련의 정찰기일지 모른다고 걱정해 비밀리에 조사기관을 설립, 무려 17년간 1만여 건이 넘는 UFO 목격 보고를 모아 조사에 착수했지만, 일부 정보부족 및 추가 증언의 부재 등과 같은 목격담을 제외하곤 전부 목격자들의 착각 혹은 거짓이었음이 밝혀지면서 아직까지 'UFO=외계인이 탑승한 우주선'이라는 가설은 증명되지 못함. 어쨌든 지구에서 발견되는 UFO 일부가 정말 외계에서 날라온 우주선이라 할지라도 분명 그 안엔 외계인이 탑승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다른 행성에 정찰을 목적으로 우주선을 보내면서 목적형 로봇이 아니라 외계인을 직접 탑승시킬 만큼 무모한 문명을 존재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1940년대 1942년 2월 25일,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일명 'Battle of Los Angeles'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일본이 말레이 작전과 진주만 공격이래 아시아와 태평양 전선에서 연합군을 상대로연승을 거듭함과 함께 미국 서해안 연안을 항해 중이던 미국 측의 유조선 및 화물선을 10척 넘게 격침하는 등일본 해군 잠수함에 의한 본토 피해가 속출하자 미국은 깊은 우려를 하게 됨. 이러한 와중 일본 해군 함정의 공격이 갈수록 심해지자미국 정부는 일본이 곧 미국 내륙에 상륙작전을 준비 중일 것으로 분석,서해안 연안의 주요 항구마다 각별한 경계 태세를 갖추도록 대비. 하지만 얼마 안 있어 일본 해군 함정에 의해 새벽녘 정유시설에포격이 이루어졌음에도 미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맘. 이 폭격은 1942년 2월 24일 새벽에 시작되어 이날 밤 10시 22분에야 경계 태세가 해제되었는데경계 태세 해제가 발령된 3시간여 후인 25일 새벽 1시 44분에 문제의 사건이 벌어지게 됨. 새벽 1시 44분, 로스앤젤레스의 육군 방공 레이더가 서쪽 190km 지점에서 일본 군용기로추측되는 비행 물체의 이동을 감지하며 대공포와 육군 항공대의 요격기가 대기 태세에 들어감. 새벽 3시 16분, 15기로 추정되는 비행 물체가 서행에서 시속 320km에 이르기까지다양한 속도로 편대비행 하며 내륙으로 접근하자 탐조등을 비치고 있던미 육군 제37해안 포병 여단은 12.8파운드의 대공포를 발사하기 시작. 이날 새벽 4시 14분까지 무려 1,430발의 대공포가 발사되었음에도해당 비행 물체들은 어떠한 피해도 입지 않은 채 홀연히 사라졌으며오히려 대공포 파편으로 인해 다수 건물에 피해가 발생함과 함께3명의 민간인이 피격당하며 사망하고 맘.(이외에 추가로 3명의 민간인이 충격으로 인해 심장마비로 사망) 당시 육군 참모 총장이었던 조지 C. 마샬은 대통령인 프랭클린 루스벨트에게보내는 기밀문서에서 해당 사건을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음. "매우 느린 속력에서부터 시속 320km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속도로 비행 중이던 15기(추정)의 비행 물체가 로스앤젤레스의 대공 부대로부터 사격을 받음. 이 비행 물체들은 고도 2.7~5.4km에서 비행 중이었으며 대공 부대의 사격으로 인해 격추된 비행 물체들은 없음. 이 비행 물체들은 폭탄을 투하하거나 공격을 하지 않아 아군 부대에도 피해는 없음. 현재 조사가 진행 중으로 만약 해당 비행 물체가 적군의 것이라면 이는 공작원에 의해 민간 항공기들이 대공포의 위치를 파악함과 함께 불안을 부추기고자 한 짓으로 추정할 수 있음. 저마다 비행 속도가 제각각이며 폭탄을 투하하지 않았다는 점이 이를 증빙."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드러난 일본 해군 측의 기록에서는사건이 있었던 이날 어떠한 항공 정찰 및 공격도 하지 않았음이 밝혀짐. 한편 사건 당시의 목격담에 따르면 30~40기의 비행 물체가 편대비행을 했으며그 중 백색 발광체들은 시속 75km 정도로 서행하며 대공포를 무시하는가 하면한 붉은색 발광체는 시속 29,000km의 속도로 지그재그 비행을 했다고도 함. <사건 당시인 1942년 2월 26일 자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작성자의 개인의견 해당 사건은 UFO와 관련하여 실제로 국가 차원에서공격이 이루어진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공식 사건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정말 이 비행 물체들은 외계인이 탑승한 우주선들이었을까? 당시 실제로 비행 물체를 목격한 이들 대부분은 해당 물체들이 탐조등 불빛 근처에서발견되었으며 탐조등의 움직임에 따라 비행 물체답지 않은 느린 속력으로 이동했다고 목격했다.(시속 29,000km의 속력으로 비행했다고 주장한 목격자는 단 1명,참고로 해당 지식이 있고 없고를 떠나 사람의 맨눈으로는자신이 사전에 알고 있던 종류의 비행 물체이거나 또는 한눈에 식별이 가능한 만큼의거리에서 이루어진 관측이 아니라면 상공에서 움직이는 비행 물체의 크기 및 속력을제대로 파악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비행 물체들, 아니 비행 발광체는 사실 탐조등의 빛이 구름에 반사되어 만들어진원형의 발광체와 탐조등 빛끼리의 충돌로 인해 생겨난 빛의 클러스터(cluster)들이 아니었을까? 이러한 발광체라면 폭탄을 투하하지도 않고 대공포를마치 유령인 것처럼 그대로 통과시킬 수도 있었을 테니 말이다. <해당 현상은 손전등으로 상공을 비추던 것을 떠올리면 이해가 쉬움> 2004년에 멕시코 공군의 소령, 대위, 중위를 태운 정찰기가 거대해저 유전(油田)에서 내뿜는 불을UFO로 오인해 추격전을 벌였던 게 각국 유수 언론에 '멕시코 공군이 UFO와 추격전을 벌여'라는식으로 보도됐던 것을 떠올려볼 때 반세기 전에 벌어진 이 해프닝은 충분히 이해해줄 수 있는 수준이다. 비록 이러한 해프닝의 주인공이 미군이라 하더라도 말이다.(게다가 당시 미군은 일본군의 가미가제에 대해 반 히스테리 상태였음) 사실 해당 사건이 UFO의 소행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데에는어느 정도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탓을 할 수도 있겠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당시 여느 신문이 그랬듯 좋지 않은 사진 인쇄술로 인해사진을 선명하게 싣고자 음영을 강조한 후처리 보정을 했고이 때문에 마치 탐조등이 UFO를 비추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보정판> <원본> 1947년 6월 14일, 미국 뉴멕시코 주 링컨 군일명 'Roswell UFO incident' 개요 1947년 6월 14일, 미국 뉴멕시코 주 링컨 군의 J. B. 포스터 목장 부근에미확인 비행 물체 잔해들이 널브러져 있는 것을 목장 관리인 윌리엄 브라젤이 발견. 이후 7월 4일, 자신이 봤던 게 처음 보는 물체라 내내 신경을 쓰고 있던윌리엄 브라젤이 가족을 동반해 재차 현장을 방문. 그 이튿날, 윌리엄 브라젤은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이 비행 물체 잔해 이야기를 꺼냈고이에 친구들은 당시 미국 전역에 핫이슈였던 '케네스 아놀드가 목격한 비행접시'이야기를 들어 비행접시의 잔해를 목격한 게 아니냐고 반문. 친구들의 말을 들은 윌리엄 브라젤은 처음 기상청에 하늘에서 낙하한 잔해를 수거했다고신고하지만 기상청에서는 지역 보안관에게 말해보라고 대답, 이에 이튿날인 7월 7일윌리엄 브라젤은 시내로 나서는 길에 지역 보안관인 조지 윌콕스에게 비행접시를 발견했다고 신고. 신고를 받은 조지 윌콕스는 비행접시가 소련의 정찰기일 수 있다고 판단하여근처 군부대인 로스웰 육군항공대에 전화해 이 같은 사실을 알림.(당시 세간에 화제이던 비행접시는 외계인이 탑승한 우주선이 아니라주로 적국의 비밀 정찰기로 인식되고 있었음) 역시 신고를 받은 로스웰 육군항공대도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며제8공군 소속 509폭격부대 지휘관인 윌리엄 블랜차드 대령의 지시하에정보장교 제시 마르셀 소령을 리더로 한 잔해회수팀이 현장으로 출동. 여기서 잔해회수팀에 의해 회수된 잔해들이 상위 사령부로 이첩됐으며동시에 윌리엄 블랜차드 대령의 지시로 공보장교인 월터 하우트 중위가소문의 비행접시 잔해를 회수했다는 보도자료를 언론에 배포. 곧 해당 소식은 각 신문사는 물론 더타임스를 비롯해 타국의 주요 언론지들에도 빠르게 전파. <FBI의 종신 국장 J. 에드거 후버 또한 당시 해당 사건에 촉각을 곤두세우며FBI가 회수된 잔해에 대해 완전한 권한을 얻어야 한다고 의견을 타진>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러한 발표 당일에 상위 사령부인 제8공군의 지휘관로저 래미 준장은 자신의 사무실로 기자들을 불러모아 대대적인 기자회견을 열어해당 잔해가 비행접시의 것이 아닌 기상관측용 기구의 것이라고 정정. 로저 래미 준장뿐만 아니라 육군항공대 역시 대변인을 내세워해당 잔해가 보통의 기상관측용 기구 잔해였다고 발표. 이후 30여 년 간 묻히게 됐던 해당 사건은 UFO 연구가인 스탠튼 프리드먼과 윌리엄 무어,그리고 미스터리 작가인 찰스 베리츠에 의해 그 숨겨진 이야기가 일반에 알려지기 시작. 해당 사건의 내막은 다음과 같았다고 함. "1947년 6월 14일, 알 수 없는 이유로 외계에서 온 UFO가 뉴멕시코 주에 불시착하게 됨. 여기서 1차로 산산이 부서진 잔해들은 J. B. 포스터 목장에 떨어졌고 나머지 본체는 마그달레나 근처 샌 어거스틴 평원에 그대로 추락. 7월 3일, 토양관리국 토목기사였던 그래디 바넷과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고고학 조사단이 직경 7~9m 정도의 원반형 UFO와 외계인 시신들을 발견. 이 외계인 시신들은 인간과 비슷한 모습에 매우 작고 둥근 몸집, 머리카락이 없고 몸에 비해 큰 머리, 기묘하리만큼 떨어져 있는 작은 두 눈을 가지고 있었고 회색으로 지퍼, 벨트, 단추가 없이 상하가 연결돼있는 의복을 착용. 이 때 한 무리의 군인을 끌고 온 장교가 현장에 비상경계선을 설치하더니 이들에게 지금 목격한 것은 군사기밀이니 절대로 함구하라며 위협. 이후 펜타곤과 육군항공대의 지시하에 빠르게 사건 은폐가 이루어짐. 한편 당시 509폭격부대의 공보장교였던 월터 하우트 중위는 지휘관인 윌리엄 블랜차드 대령을 따라 한 격납고를 방문한 자리에서 UFO와 외계인 시신들을 목격. UFO는 직경 3.6~4.5m, 높이는 1.8m였으며 알 모양에 금속성으로 창문, 창, 날개, 꼬리 부분, 착륙장치가 보이지 않았다고 함. 외계인 시신들은 2~3구 정도로 방수포에 덮여 있어 자세히는 관찰하지 못했지만 대략 10세 정도 아이의 크기였다고 함." <대략 이런 분위기였을 듯> 작성자의 개인 의견 로스웰 UFO 사건 이야기야말로 역사상 가장 거대하고 뻔뻔한사기극 중 하나로 어떠한 이야기도 몇몇에 의해 그것이신화로까지 발전할 수 있다는 게 증명된 좋은 사료이기도 하다. 사건 당시 최초 목격자인 윌리엄 브라젤이 해당 잔해를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재료들이라고 진술했으며신문에서도 그러한 잔해들의 정체에 대해 상세히 보도했음에도사람들은 30년도 더 지난 후에 만들어진 이야기들을 더욱 신뢰하고 있는 셈이다. 사실 당시 발견된 잔해물은 미 공군이 시행 중이던 극비 군사 프로젝트의 부산물이었다. 헌데 이러한 부산물이 기상악화로 인해 경로를 벗어나 J. B. 포스터 목장에 불시착하였고얼마 안 있어 각국 언론에서 비행접시의 잔해가 발견됐다는 이야기로까지 진행되자당황한 미 육군항공대 측은 할 수 없이 해당 잔해물이 자신들이 극비리에 진행 중이던대(對) 소련 첩보 레이더 풍선이었음을 시인한다. 이러한 군의 시인에 해당 사건은 빠르게 잊혀졌는데 애꿎게도 30여 년 후뻔뻔한 UFO 연구가들에 의해 'UFO와 외계인의 불시착, 그리고 정부의 은폐'라는컨셉으로 다시금 재창조되기에 이른다. 여기에 이 UFO 연구가들과 협력하여 당시 세계 최고의 미스터리 작가였던 찰스 베리츠가해당 사건을 멋들어지게 집필하면서 이 로스웰 UFO 사건은 본격적으로 상업 콘텐츠화되기 시작한다.(찰스 베리츠는 버뮤다 삼각지대, 필라델피아 실험, 1999년 지구 종말과 같은 소재들을마치 실제인 양 꾸며낸 저서들로 수천만 부의 판매량을 기록한 명실상부 미스터리 업계의 전설,자세한 이야기는 '이상한 옴니버스' 시리즈 중 '버뮤다 삼각지대의 완전한 진실','시공간을 초월한 필라델피아 실험의 진실', '미스터리 업계의 전설들' 편을 참조) 이뿐 아니라 당시 509폭격부대의 공보장교였던 월터 하우트가 로스웰에 UFO 박물관을 설립,자신이 사건 당시 UFO와 외계인을 봤다고 친(親) 외계인 방송인 폭스 방송사에보도 자료를 제공하면서 사막투성이의 로스웰에 UFO와 외계인을 지역산업으로 발전시킨다. 로스웰 UFO 사건과 관련하여 보다 자세하고 개괄적인 이야기는 '이상한 옴니버스' 시리즈 중'로스웰 사건의 완전한 재구성 1~3부' 편을 참조 바라며 완벽하게 상세한 이야기는곧 출판될 이상한 옴니버스 블로그 측의 출간물에서 확인 가능. 1947년 6월 21일, 미국 워싱턴 주 몰리 섬일명 'Maury Island incident' 개요 1947년 6월 21일, 선원인 해롤드 A. 달은 섬 근처를 순찰하던 중 6기의 원반형 UFO를 목격. 이 UFO들은 도넛 모양을 하고 있어 가운데 고리 부분을 통해 상공의 하늘이 보였다고 함. 구름들 사이에서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낸 이 비행 물체들은 그의 배 쪽으로 접근해왔는데이 중 1대는 마치 기체에 고장이라도 난 듯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고 함. 그렇게 고장 난 것처럼 보이던 1기가 곧 경량의 금속 물체들을 배출하기 시작했는데이런 파편으로 인해 해롤드 A. 달의 배(boat) 일부에 손상을 입혔으며 당시 갑판에 있던자신의 아들 또한 경미한 부상을 입었고 그의 개는 그만 사망하고 맘. 이러한 파편 배출 후 문제의 비행 물체는 이번엔 검은 액체를 방출하더니곧이어 고도를 높여 다른 5기의 비행 물체들과 함께 다른 곳으로 비행했다고 함. 한편 사건이 있은 다음 날, 맨 인 블랙 1명이 해롤드 A. 달을 찾아와어제 본 것을 절대 발설하면 가족들이 위험해질 것이라고 위협했다고 함. 작성자의 개인 의견 해당 사건의 목격자가 오직 해롤드 A. 달뿐이라는 점과그가 사건 1개월 후에 한 유명인에게 편지로 이 사건을 알렸다는 점이 수상하다. 그의 편지를 받은 이는 바로 최초로 UFO를 핫이슈로 만들었던 케네스 아놀드였다. 1947년 6월 24일에 UFO를 목격했다고 밝히면서 단숨에 유명인사가 된케네스 아놀드는 이러한 이야기가 담긴 편지를 받고서 자신의 지인인미 공군 소속 스미스 대위를 대동한 채 해롤드 A. 달을 찾는다. 그러자 여기서 이 유명인이 공군 장교를 대동해 찾아올 줄 몰랐던해롤드 A. 달은 당황해 하며 자신은 그러한 사건을 목격한 적이 없다고 부인한다. 아마 유명인의 관심을 끌어내려고 했던 게 일이 커지자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이러한 만남 전에 케네스 아놀드는 스미스 대위와 함께 사건 현장을 찾아문제의 금속 파편들을 수거해 조사를 실시했는데 이 파편들의 정체는부식 방지용 코팅제와 군용 항공기에 사용되는 알루미늄인 것으로 드러났다. 한편 이후 60여 년이 지나 해롤드 A. 달의 자녀가인터뷰를 통해 아버지의 주장이 거짓이었음을 밝힌다. 하긴, 그가 만났다는 맨 인 블랙의 사건 처리 방식이 너무 낯설기는 했다. 1947년 6월 24일, 미국 워싱턴 주 레이니어 산 일명 'Kenneth Arnold UFO sighting' 개요 사업가였던 케네스 아놀드는 1947년 6월 24일, 워싱턴 주 레이니어 산 부근에서자신의 자가용 경비행기를 몰던 중 9기의 비행물체가 목격했다고 밝히며 일약 유명인사가 됨. 그는 고도 2,800m 지점에서 9기의 발광체들이 편대 비행하는 것을 목격했으며직경 8m 정도로 보이는 이 비행 물체들은 지그재그 비행을 하며 시속 2,700km의 속도를 냈다고 함. 한편 현지 신문사 기자였던 빌 베게트가 물 위를 가로지르는 비행 모습을 보였다고 증언한케네스 아놀드의 말을 인용해 비행접시(flying saucer)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킨 것을 기점으로미국 전역에 저마다 비행접시를 봤다는 사람들이 들끓기 시작. 작성자의 개인 의견 그는 최초 인터뷰에서 해당 비행 물체의 모양을확실히 파악하지 못했으며 제트 엔진 소리도 듣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비행 물체의 정확한 모습도 구분하지 못할 정도의 관측이었다면그가 밝힌 해당 물체의 크기와 속력 또한 신뢰성에 문제가 생긴다.(현대의 일류 파일럿들 조차 비행 중 상공 물체에 대한 관측에는 종종 오류가 발생참고로 해당 지식이 있고 없고를 떠나 사람의 맨눈으로는자신이 사전에 알고 있던 종류의 비행 물체이거나 또는 한눈에 식별이 가능한 만큼의거리에서 이루어진 관측이 아니라면 상공에서 움직이는 비행 물체의 크기 및 속력을제대로 파악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렇다면 당시 시기를 감안해 다음의 3가지 가정으로 추정해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유성체나 운석. 둘째, 당시 미 공군이 한창 시험비행 중이던 'V'자 형의 폭격기. 셋째, 아메리칸 화이트 펠리컨 무리. 1948년 1월 7일, 미국 켄터키 주 프랭클린일명 'Mantell UFO incident' 개요 1948년 1월 7일, 이날 아침부터 미확인 비행 물체를 목격했다는 주민들의 신고가 잇따르자오후 2시 45분경 근처를 비행 중이던 켄터키 주의 공군 대위 토마스 F. 맨텔이함께 비행 중이던 다른 3기의 비행기들과 이 비행 물체를 추적. 여기서 해당 비행 물체를 추적하던 다른 3기의 파일럿들은 연료 부족을 이유로 추적을 중단하지만토마스 F. 맨텔 대위는 계속해서 위로 상승 중인 비행 물체를 따라 계속해서 추적을 감행. 오후 3시 15분, 토마스 F. 맨텔 대위가 탑승한 전투기가교신이 끊김과 함께 행방이 묘연해지자 즉시 수색대가 파견. 이후 오후 5시경, 켄터키 주 공군 기지에서 약 150km 떨어진 한 농장 부근에추락한 노스 아메리칸 P-51 머스탱과 함께 조종석에서 토마스 F. 맨텔 대위의 시신이 발견됨. 한편 사건 당시 토마스 F. 맨텔 대위가 무선을 통해 '비행 물체에서 사람들이 보인다'라고 말했으며비행 물체가 그의 전투기를 향해 레이저 광선을 발포, 토마스 F. 맨텔 대위의 시신이 사실은사라진 상태였음, 그의 시신이 고온에 의해 구워진 상태였다라는 이야기들이 흘러나옴. 작성자의 개인 의견 먼저 토마스 F. 맨텔 대위가 무선을 통해 비행 물체에서 사람들이 보인다고 했던 것,이 비행 물체가 레이저 광선을 발포했다거나 그의 시신 상태에 대한 이야기들은모두 UFO를 좋아하는 호사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이다. 실제 당시 공군에서 공식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그는 해당 비행 물체를 추적하면서'금속성으로 보이며 엄청난 크기이다'라고 말한 게 전부이고 이후 산소마스크도 없는 상태로고도 9,000m까지 정신없이 추적을 하다 그만 산소 결핍으로 의식을 잃어 그대로 추락했다는 결론이 나왔었다. 물론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전투기에서도 어떤 공격을 받은 흔적도 없었으며파손 형태 역시 지면과 충돌하면서 생긴 것임을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또 토마스 F. 맨텔 대위의 시신 역시 조종 도중 의식을 잃은 듯 조종석에 얌전한 상태로 뉘어있었다. 한편 사건 당일 주민들이 '아이스크림콘을 거꾸로 한 형상'의비행 물체를 목격했다며 신고해왔는데 이는 당시 토마스 F. 맨텔 대위가 쫓던바로 그 비행물체로 미 해군 측의 스카이 훅 풍선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이처럼 당시 해군이 사용하던 스카이 훅 풍선은 거대한 크기에거꾸로 든 아이스크림콘 모양, 그리고 금속성으로 보이는 외관을 지니고 있음> 사실 이 스카이 훅 풍선은 로스웰 UFO 사건의 경우처럼해군이 비밀리에 진행하던 대(對) 소련 첩보 관측기구의 일종이다. 재미있는 것은, 사건 당시 조사를 진행하던 공군 측은 해군의 이러한 기밀 프로젝트를알지 못해 토마스 F. 맨텔 대위가 금성을 비행 물체로 오인해 추격하던 도중 변을 당했다고(실제로 파일럿들조차 종종 금성이나 목성을 비행 물체로 오인함) 1차 발표를 했다가이후 내막을 알고서 1956년에야 이 고도 수만 m를 떠도는 직경 30m, 높이 180m의 풍선이사고의 원인이었다고 정정 발표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1948년 10월 1일, 미국 노스다코다 주 파고일명 'Gorman dogfight' 개요 1948년 10월 1일, 노스다코타 주의 공군 소위 조지 고먼은 노스 아메리칸 P-51 머스탱을 타고다른 파일럿과 함께 비행을 하던 중 저녁 8시 30분경 파고에 도착. 여기서 다른 파일럿은 파고 내 헥터 국제공항에 착륙하나조지 고먼 소위는 구름 상태로 인해 지연 착륙하기로 결정. 저녁 9시경, 고도 300m 부근에서 비행 중이던 조지 고먼 소위는전방에서 한 발광체를 발견하곤 7분 후 관제탑에 이를 알린 뒤 접근을 시도. 시속 400km 정도의 이 발광체는 조지 고먼 소위의 전투기가 접근하면 곧바로 급선회해 상승하기를 반복. 결국, 고도 1,500m 즈음까지 접근과 선회를 반복한 이 도그파이트(제2차 세계대전 당시프로펠러 달린 비행기들이 공중전을 통해 마치 개들이 싸울 때 서로의 꼬리를 물려고빙빙 도는 것처럼 상대의 후미를 노리는 모습에서 붙여진 이름)는 무려 20분간이나 지속됐고해당 발광체는 끝내 고도 4,000m 즈음에서 조지 고먼 소위의 시야에서 사라짐. 작성자의 개인 의견 해당 사건은 앞서 토마스 F. 맨텔 대위의 경우처럼 일류 파일럿이라도(실제로 조지 고먼은 사건 당시 25세로 소위에 불과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출전 경험이 있는 베테랑 전투기 조종사였음) 비행 물체가 아닌 발광체를보고도 쉽게 오인할 수 있다는 것을 증빙할 대표적인 케이스로 볼 수 있겠다. 조지 고먼 소위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해당 발광체는 백색을 띠고 있었으며항상 자신의 전방에 위치해 있었고 전투기 내부에서 볼 때 그 직경은 20cm 미만이라고 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사건 당일 밤 9시경에 해당 장소에서 목성이 광범위하게 목격됐다는 것이다. 특히 당일엔 사건 현장에서 있었던 기온역전 현상으로 인한 중력렌즈 효과 때문에신기루 현상이 발생해 실제로 목성이 여러 곳에서 관측되기도 했었다. 사실 당시 사건 현장에서 저녁 9시 20분을 기해 목성은 지구의 자전으로 인해수평선 너머로 사라져갔기 때문에 당시 그가 저녁 9시부터 9시 27분까지 쫓던물체(계속해서 상승하던)는 실은 목성이었을 확률이 높다. 추가로 조지 고먼 소위는 해당 발광체가 지속적으로 상승하며 움직였다고 증언했는데이는 앞서 멕시코 공군이 거대해저 유전의 불꽃을 쫓았던 것처럼 멀리 있는 발광체가가만히 있다고 해도 전투기와 같이 움직임에 따라 조종사가 직접적인 요동을 느낄 경우인간의 시각은 정지 물체가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오인하기가 쉬워지는 법이다.+++++++++++++++++++++++++++++++++++++++++++++++++++++++++++++++++++++++++++++++++++++++++++++++++++++++++++++++++++++++++++* 참조문헌: UFO事件簿 위키백과 Forgetomori The Committee for Skeptical Inquiry Project Blue Book출처:http://blog.naver.com/medeiason[출처] [이상한 옴니버스] 20세기 UFO 사건 역사 1부: 1940년대|작성자 메데아
부엉잉잉작성일
2016-01-22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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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펌] 일베소방 공무원 사건의 첫 제보자 입니다.
(상당히 깁니다, 보고 싶지 않으시면 그냥 스크롤 내리셔도 괜찮습니다.)어느덧 기사까지 나와서 논란이 되었더군요. 사실 처음부터 이렇게 빠른 속도로 이 사실이 퍼져나갈것 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고, 기자분들에게 연락도 오고,기사의 당사자인 x모씨에게 제발 글을 삭제해 달라고 애원하던 메세지도 받았습니다.사실 저는 해당 사이트 회원도 아니지만, x씨께서 퇴교당한 이유와 근거를 정치적 중립에서 찾는 한심한 사람들이 있어서 사건의 개요부터 제가 왜 x씨가 소방공무원이 절대 되서는 안되었는가"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이글을 씁니다.사실 제 지인들 중에 일베를 즐겨하는 사람들도 있으며,저는 별로 개의치 않습니다. 일베를 하며 저에게 일베에는 볼것도 많고 유익한 정보들이 많다며 일베에 대해서 설명하던 직원들에 대해서도 그다지 큰 거부감이나,오유회원 분들이 말씀하시는 "인간 쓰레기"까지 생각해본적도 없습니다.다만 기사가 퍼지고나서, 그가 왜 소방관이 될수없는 이유가 단지 고 김대중 대통령을 모욕하고, 김치년이라는 글을 썼기 때문에, 공무원으로서 정치적 중립 때문이 절대 아닙니다.애초에 그런것은 생각치도 않았고요.또한 이것은 저의 주관적인 생각이나 의견이 아닌 소방조직의 한사람으로서, 저 뿐만아니라, 단순한 소방관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소사모 회원들의 의견포함, 그리고 현재 현직으로 시,도 현장,내근,본부,국민안전처,퇴직하신 소방재향동우회 선배님들을 포함한 4000여명 이상의 직원들이 계신 119소방공무원 모임(수험생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소방공무원 분들의 만장일치로 동일한 의견이며 모두가 x씨의 9급 응급구조사특채 소방사 임용건에 대해서 대다수가 격노,및 분노하였으며 소방사를 포함 일선에 계신 전국의 서장님, 고위급 소방간부 직원 여러분들 모두 "임용불가"의 의견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며 이에 대해서 반대하신 분들은 없었음을 알려드립니다.1. 공무원 중립의 문제 ?그 어느 누구도 공무원으로서의 중립의 문제를 거론한 사람은 없습니다.다만 공무원 조직사회 중에서 가장 힘없는 조직인 소방이 국민들의 이미지로나마 먹고 사는데,이것을 더럽혔다는 사실은 명백합니다. 또한 고 김대중 대통령을 향해 씹대중이라 해서 공무원으로서 정치적 중립을 위반했기 때문이 아닌,소방관으로서 갖추어야할 가장 기본적인 자질인 품위와, 명예 그리고,숭고한소방정신 을 중요시하는 특수직 공무원의 신분으로서 또한 현재 현장에서 불철주야 24시간 밤낮 가리지 않고 뛰고 계시는,그 이미지 하나를 위해 목숨을 바쳐가며 선배들 께서 목숨 바치며 쌓아 오셨던 소방의 명예에 먹칠을 하였기 때문입니다.2. 세월호 사건 모독 -제 작년 저희는 세월호 사건이라는 가슴아픈 사건을 경험했습니다.당시 사건이 일어나기 하루전 4월 15일 저는 상황실에서 근무했으며 다음날 부터 약 한달여 동안 매일 마다 가라앉은 세월호에서 꺼내온 시신 수습 이야기를 직접 들을수 있었습니다.비록 저는 현장에 투입되지는 않았으나,얼마 지나지 않아, 강원소방 소속 제로제로1이라고 부릅니다( 제1항공대 소속 헬기가 세월호 수색작전을 마치고 강원도로 귀소하기 위해 광주비행장에서 이륙하던중 불의의 사고로 1항공대 소속 고 이은교 소방교를 포함한 총 다섯분이 모두 헬기사고로 순직하시는 소방역사상 단한번도 일어나지 않은 대형사고가 일어났습니다.저는 당시 소방서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었으며,내근,외근을 포함한 모든 직원분들께서 이 모습을 직접 지켜보셨습니다.충격과 공포 혼란 이었습니다.무엇보다 불의의 사고로 순직하신 직원중 한분께서 제가 계셨던 곳에서 근무하셨던 분이었기에 가슴아픈 사건이었습니다.그리고,제가 그곳을 떠났을때, 당시 제가 근무했던 서의 현장지휘관이셨던 한xx 이라는 분꼐서 당시 사고가 일어났던 강원소방항공대로 발령되셨죠.더욱더 가슴아픈 사실은,당시 추락당시, 조종사 이셨던 고 정성철 소방령께서는 최대한 도심에 추락하지 않기 위해 조종간을 끝까지 놓지 않으셨다는 사실이었습니다.나중에 당시 출동해서 참혹했던 그현장을 직접 지켜보았던 광주서 한 구조대원의 말로는 "살점이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상황에서,조종간에 사람의 형체로 보이는 무언가가 보여 확인해보니 사람의 손이었다고 합니다.순직하시는 그 순간까지 숭고한 소방정신과 희생정신 그리고 명예를 지키시려고 자신을 희생하신 겁니다.그 이후부터 모든 본서,본부, 센터 소방서를 포함한 서에서 모든 직원들은 기동복(저희가 입는 노란색 근무복입니다.) 가슴에 노란리본과 "고인의 명복을 비는 검은색 근조를 달고 슬픔이 가실때까지 근무했습니다.그렇게 화기애애하고 기분좋았던 사무실의 분위기에는 냉기가 돌았으며, 모두가 침묵으로 일관 했습니다.그리고, 사건직후 저희는 자발적으로 모든 직원들이 모여 세월호 리본 안에 소방헬기사건으로 순직한 직원분들이셨던정성철 지방소방경박인돈 지방소방위안병국 지방소방장신영룡 지방소방교이은교 지방소방사의 이름을 넣어 근조 플래카드를 만들었습니다.지금은 세월이 흘러 당시의 그 슬픔은 저를 포함해서 모두가 이제 치유 받았겠으나.저는 지금도 이따금 떠오릅니다.한분을 제외하고 직접 고인분들을 뵌적은 없으나, 상황실에서 근무하면서 들려왔던 "제로제로1" 이라는 그 목소리가 이따금 들려옵니다.비가 많이 내려 이륙하기 힘든 상황에서도 산에 고립되어있는 요구조자들이 있다는 말에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시간이 지나면 해가 지니 지금 이륙하겠다던 제로제로1이 지금도 이따금 떠오릅니다.강원도에는 소방헬기가 2대뿐이었기에, 산악사고나, 헬기가 급히 이륙해서 환자를 이송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언제나 이분들께서 달려오셨습니다."세월호 사건은 당신 말대로 헛짓거리가 절대 아니었습니다. 생존자가 없을것이라는것을 알면서도 그래도 사체만이라도 찾아보겠다고 강원도에서 전라도 진도까지 날아가겠다고 하셨던 분들입니다.그리고 그분들이 불의의사고로 순직하셨고 우리는 그들을 추모하기위해 가슴에 노란리본을 달고,리본 안에 그분들을 영원히 기억하겠다는 플래카드를 만들었습니다.무뚝뚝하고, 근엄해보이던, 고위급 간부 분들께서 그렇게 간절하고, 어린아이처럼 엉엉 거리시던 모습은 처음 보았습니다.국무총리에게 무릎을 꿇고,라디오 인터뷰에서 감정을 주저하지 못해,울먹이시며 말씀하시던 그런 모습을 말입니다. 우리는 가족을 잃었기 때문이었습니다.정치적 중립의 문제가아닌, 순직하신 소방 선배분들을 모욕 및 사자 명예훼손하는 행위는 도저히 참을수 없었습니다.그것도 일반.인이 아닌, 내가 몸담았던 소방이라는 조직에 그러한 사상과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 들어온다는것은 있을수 없는일이라 생각했습니다.그래서 이사실을 현직을 포함한 은퇴하신 선배 분들께 모두 알렸습니다.이런 사람은 힘이 없어 이미지와 명예만 먹고 사는 소방이라는 조직에 절대 발을 들여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좀 과격한 표현이지만, 모현직 직원분께서는 입에는 담기힘든 말까지 하셨지만,이것은 어찌보면 정말 당연한 것이었을 겁니다.왜냐하면 그분 께서는 현장에서사고로 동료를 잃으셨던 분이셨으니까요.저희가 분노하고, 쫒아내자고 하는것이 그렇게 부당한 일었는지 정치적 중립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되묻고 싶습니다."세월호 사건으로 가족을 잃은 소방관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가 이 대형참사로인해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아시는지요?3. 소방관으로서의 기본자질,및 품행,인성의 결여.일반직 공무원이 절대 아닙니다.소방관은 특수직 공무원 입니다.그중에서 때에 따라서는 요구조자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일수도 있는,혹은 해야하는 직업 입니다.이러한 일을 하기위해서는 타인에 대한배려 그리고,봉사성,무엇보다 인품과,다른이를 위해 희생할수 있을 희생정신이 요구되는 극한직업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우선 당사자였던 x씨에게 제가 묻고싶습니다.거짓말은 왜하셨으며,과연 당신께서 쓰셨던 사과문이 정말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었는지 아니면 잠시 사건을 모면하기 위해서 가면을 썼던 것인지 말입니다.x씨 꼐서는 일간베스트 사이트에서 단지 정보글만 봐왔다고 말씀하셨지만 저는 당신이 일간베스트 사이트에서 활동하셨던 "부관참시대중화 와 세컨 아이디였던 xx부엉이로 쓰셨던 글들을 모두 확인했습니다.카페에서 닉네임을 가쓰라태프트로 변경하신 이유에 대해서는 굳이 구차하게 묻지는 않겠습니다만,이것 하나만 제대로 묻고싶네요.제대로 반성하고 계신것이 맞습니까?.아니면 이 사건으로 복수를 하실 생각이십니까?. 선택이야 본인의 몫이겠지만 저는 당신이 소방의 명예와, 순직하신 직원분들을 모욕하고 조롱 했다는것 만으로 저는 당신을 평생 소방인으로 인정할수 없습니다.저뿐만 아니라 이것은 전국에 계신 소방공무원 협회 회원들의 공통된 의견입니다.당신이 소방관이 그렇게 되고 싶었다는 사실을 알고있습니다. 얼만큼 간절했는지 센터 앞에서 방화복과 헬멧을 쓰고 사진을 찍었다는 사실 만으로 알겠습니다만,그렇게 당신이 바라고 원했던 소방관으로서의 기본품행과 인성,그리고 기본적으로 갖추어야할 자질에 대해서는 생각을 안하셨던 겁니까?반성문,사죄문이라는 구차한 변명은 듣고 싶지않습니다. 정말 당신이 자신의 죄를 알았다면 애초에 저에게 " 제가 원래 정치성향이 보수적이었으며 지금 신상이 모두 털려서 계속 연락이오고,너무 괴롭습니다.앞으로 일베외 어떤 커뮤니티 외에 글을 쓰지않겠습니다. 정말 삭제 부탁드립니다. 라는 말은 안나왔을것 같습니다.이전 까지는 씹대중, 세월충 이라면서 소방가족들을 포함해서 세월호 유가족들을 상대로 키보드로 쉽게 욕을 내뱉고, 조롱하셨으면서 이제와서 자신에게 감당할수도 없을 집단따돌림과 욕설을 듣는것에 대해서 너무 괴롭다고 하십니까.당신이 쉽게 내뱉을 씹대중, 김대중개1새끼 라는 말에 그럼 이희호 여사를 포함 그외 유가족들은 기분이 어떠했을까요?. 당신 뿐만아니라, 지금도 수백만명이 장난삼아,포토샵으로 씹대중이니,개대1중,부관참시 같은 말을 쓰면서 희희낙락 거리고 있습니다. 유가족분들은 바보라서 가만히 있는건가요?. 만약 저였다면 직설적으로 ,미국식으로 말씀드리컨데, 총으로 쐇을겁니다.감히 말하지만, 당신이 소방관으로서 자격이없기 때문입니다. 개중에는 이렇게 생각하시는분 있으실 겁니다. "8번 때문에 걸린거잖아?. 그거 가렸으면 넌 절대 안걸렸다" 헛소리 그만 하시지요. 소방이라는 조직이 그렇게 우습지가 않아요.당신이 모자이크를 했어도 학교에서는 다찾아냈을 겁니다.모자이크 하신 당신이 그렇게 우러러 보았던 선배분들도 다 걸리셨습니다.그러니까 혹여나 지금도 소방카페에서 기웃거리시는 일간베스트 하시는 현직,혹은 수험생들 계시면 그냥 인증을 하지 마세요. 왜 바보짓을 하십니까? 인증을 안한다고 다른 동료 직원들이 모르는게 아닙니다.아는데,그냥 아무말 안하고 눈 감아주는거에요.정치성향 상관없습니다.일베로 인증을 하건 말건 상관 안해요.다만 119마크가 그려진 소방복에 대고 그 요상한 일베마크 하지 말라는 겁니다. 하늘나라 계신 선배분들의 명예와, 헌신에 먹칠하지 마라는거요.기분이 좋지는 않습니다. 베충이가 사라졌다는 기쁨이나 환호따위는 없습니다.정의가 구현됬다는 생각도 들지 않습니다.단지 쓸쓸하고 마음 한구석이 좋지 않을 뿐입니다.다만 당신은 소방관으로서의 기본자질, 자격이 없기에 더큰 문제는 고인이 되신 선배 분들에 대해서 모욕했기 때문입니다.그리고 저는 이 결정이 올바르다고 생각합니다.앞서 말씀드렸지만, 현직에 계신 분들도 이와 같습니다.임용포기 이전에, 이미 당신의 신상과 이름에 대해서 이미 대구,전라도,서울,경기,제주,충청도 에 계신 전국의 본부,서,센터,직원들 께서 아시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씀드리며 무엇보다 첫날 학교에서 부터 교관분들이 당신에게 이따위 짓하지 말라고 할정도였다면 서에 발령되었다면 한 성격하시는 특수부대 출신 구조대 선배분들께서 반이 아니라 아예 박살을 내셧을 겁니다.왜냐하면 당신이 발령예정이었던 지역에 계신 직원분께서 "지옥을 보여주겠다고 하셨으니 말입니다.당신은 넘어서는 안될 다리는 이미 건너셨던 겁니다. 그리고 이제는 두번다시 영영 돌아오실수 없으실 거에요.http://m.todayhumor.co.kr/view.php?table=bestofbest&no=212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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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글터] [2ch] 도쿄만 상공의 전투
할아버지가 태평양 전쟁 당시 겪은 일이라고 한다.현재 할아버지는 95세로, 노인보호기관에 들어가 계신다.이 이야기를 해주실 무렵에는 이미 치매끼가 조금씩 오고 있었으니 진위 여부는 나도 모른다. 할아버지는 당시 해군 항공대에 소속되어 야간 공격대에서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했다고 한다.야간에 공습을 하러 날아오는 B-29 폭격기를 요격하는 게 주 임무였다고 한다. 쇼와 19년 말부터는 수도권에도 폭격이 빈발해졌다.그리고 종전을 맞게되는 쇼와 20년 3월 10일 일어난 것이 바로 도쿄 대공습이었다. 전날 밤 23시 무렵에 공습경보가 발령되었지만 어째서인지 곧 해제되어 할아버지는 마음을 놓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날이 바뀌고 얼마 지나지 않은 0시 30분 무렵, 다시금 공습경보가 발령되고 출격 명령이 떨어졌다. 할아버지는 다른 동료 두 명과 함께 비행기에 올라타고 출격했다.고도를 높여 도쿄 방면으로 기수를 향했다. 아래로 보이는 도쿄는 이미 불바다에 휩싸여 있었다.하늘은 불길로 인해 새빨갛게 물들고, 연기는 몇천미터 위 상공까지 퍼져있었다. 열기 때문에 일어나는 상승기류가 격렬해서, 수도권 상공을 비행하는 게 곤란할 정도였다.하지만 할아버지는 필사적으로 조종에 온 신경을 집중해서 서쪽으로 기수를 돌렸다. 그 때였다.동료 중 레이더 탐지를 맡았던 이가 [레이더에 뭔가 잡혔어.] 라고 입을 열었다.레이더 신호를 따라가니, 수도권을 이탈해 도쿄만 상공으로 나왔다. 잠시 후, 꽤 낮은 고도에서 기관총 예광탄이 빛나는 게 보였다.아무래도 전투 중인 듯 했지만, 주변에 비행기라고는 그 한 대 뿐이다. 할아버지는 아군인지 확인할 의도로 그 비행기를 향해 다가갔다.만약 적기일 경우 너무 가까워지면 선제공격을 당할 수도 있으니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그러던 도중, 할아버지는 이상한 점을 깨닫고 말았다고 한다.아래에 있는 비행기는 틀림없이 B-29였다. 4개의 엔진 중 3개가 검은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완전히 만신창이가 된 채였다. 하지만 이상한 건 그게 아니었다.그 B-29는 기체 중앙에서 기관총으로 상공으로 공격을 퍼붓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봐도 주변에 다른 비행기는 없다.그 뿐 아니라 B-29는 기체 중앙에 기관총 포탑 같은 게 설치되어 있는 비행기도 아니다. 할아버지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그리고 그것을 보고야 말았다고 한다. B-29는 기체 중앙부에 심각한 손상을 입어, 천장이 다 벗겨져 안이 훤히 들여다 보였다. 아무래도 전면 포탑에서 떼어낸 것 같은 기관총을 들고, 기내에서 미군 병사가 무언가를 향해 난사하고 있다. 그리고 그 총구 방향에는 믿을 수 없는 것이 보였다.몸은 인간과 비슷하지만, 비쩍 마르고 온 몸에 털 한 터럭 보이지 않는다.피부는 거무스름하고, 얼굴은 사람인지 짐승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것의 귀는 삐쭉하고 등에는 날개가 솟아, 마치 박쥐, 아니.. 악마의 형상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놀라운 것은 그 크기였다.눈대중으로 보아 5m는 될 키에, 날개를 펼치자 그 폭이 20m는 족히 되어 보였던 것이다. 그 녀석은 한 손에 목이 없는 미군 병사의 시체를 든 채, 한 손으로는 비행기에 매달려 기관총을 든 병사를 잡아채려 하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곧바로 동료들에게 의견을 구했지만, 한 명은 위치 때문에 목격이 불가능했고다른 한 명은 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충격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공격할까 싶기도 했지만, 더 관여했다가는 자신도 위험해질 것 같다는 생각에 도망쳤다고 한다.점점 멀어지는 B-29는, 점차 고도가 떨어져간다. 하지만 병사는 전투를 포기하지 않은 듯, 예광탄의 궤적은 밤하늘에 퍼져 갔다.할아버지는 차마 끝까지 지켜보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 후 도심부로 돌아가 요격 임무에 임했지만, 그런 광경을 보고 나니 뭘 어찌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고 한다. 이른 아침에 기지로 돌아온 후, 할아버지는 전과가 없었다고 보고를 했다.그런 이야기를 꺼내봐야 미친놈이라는 소리나 들을 테니까. 이 이야기는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 여름방학 숙제 때문에 할아버지에게 전쟁 당시 이야기에 관해 물었을 때 할아버지가 들려주셨던 이야기다. 출처 : VK's Epitaph
금산스님작성일
2015-04-05추천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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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글터] 흑피옥
안녕하세염오늘은 초고대문명의 흔적중 하나라고 믿어지는 흑피옥에 대해 조사를 해볼께염1만년 전에 시작된 신석기 문화의 특징은 인류가 식량을 생산할 수 있게 되면서정착, 촌락 생활이 가능해 졌고!! 이는 결과적으로 문명 형성의 기틀이 됩니다.신석기 문화는 B.C10세기 경에 시작된 청동기 문화까지 계속되는데요이 시기 중 BC6500년부터 5000년 경에 만주지역에서 홍산문화라는 고대 문화가 있었습니다.홍산문화란, 중국 만리장성 북동부에 존재했던 신석기 시대의 문화에요.홍산문화는 요하문명의 대표 문화로 중화인민공화국 네이멍구 자치구 츠펑 시와 랴오닝 성 조양 시 일대를 기반하고있습니다.기본적인 내용설명은 그만하구 본론으로 돌아가서위에서 말한 만주지역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옥으로 만들어진 것이 많은게 특징이라합니다.그 중에서로 옥저룡이라고 부르는 유물이 대표가 되는데요C자 모양의 녹색 옥기는 돼지 머리에 용 모양으로 되어 있어서 옥저룡이란 이름이 붙게 된거라고 하네요.홍산문화의 발견으로 그 동안 황화문명을 중국 문명의 시초로 생각해 왔던 중국은 크게 당황하였으며,중국 역사학자들 사이에는 신석기와 청동기 사이에 옥기시대가 있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이번 글에서는 홍화문화에 대하여 얘기하려는 것이 아니고, 홍화문화와 옥저룡과 비슷한 형태이기도 하나,더 정교한 형태를 가진 흑피옥이란 미스테리에 대해 알아보려고 합니다. 꺄꺄꺄꺄쀼꺄꺄꺄먼저, 흑피옥이란!!??(옥색ㅈㅅ)흑피옥이란 옥으로 만든 조각품에 검은 칠을 한 것으로 주각품의 모양은 돼지머리에 용의 몸을 한 C자 모양의'옥저룡'과 사람 형상이 합쳐져 있습니다.흑피옥이 발견된 지점은 중국 동북부 지역이며 그 수는 수천 점에 이르게 되는데요그러나 아직까지 정식발굴이 이루어지지 않아 학계에서는 정식 역사 유물로 인정받지는 못하고 있다하네요..ㅠ_ㅠ그런데 흑피옥을 두고 1만년 이전의 초 고대문명의 흔적이라거나 외계인의 작품이라는 황당한 주장이 나오고 있으나이에 대한 과학적 확인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습니다.단지 1만년 전의 기술로는 단단한 옥을 깍아 모양을 만든 뒤 검은 물질로 매끈하게 덮은 흑피옥을만든다는 것과 1만년 이상 이전이면 신석기 농업 문명이 시작하던 때로 아직 문자로 기록된 역사조차도 없던 시기이기에이런 황당한 주장이 있는 것이겠죠.그렇다면, 흑피옥이 만들어진 시기는!!??흑피옥의 제작 시기가 1만 년 이상이 되었다는 근거는 무엇으로부터 나왔을까요?국내에서 흑피옥의 연대를 측정하기 위한 시도가 두 번 있었습니다. 첫 번째 시도는 2006년 11월에 있었으며,흑피옥 표면에 염료를 이용해 탕소연대측정을 한 결과 약 1만 4300년 전의 유물이라는 결과가 나왔습니다.흑피옥이 초고대문명이라는 발상의 근거이기도 하죠.두 번째 시도는 2008년 1월 국내 흑피옥 연구 전문가인 한국항공대 우상하 교수가 1차 때와 마찬가지로 서울대에 의뢰해 실시되었는데요그러나, 1차 시도 때와는 달리 "기본의 결과는 실제보다 과장됐을 가능성이 높다. 1만 4300년 전보다는 가까운 시대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다"는 신중한 답변이었습니다.그리고 서울대 측은 흑피옥이 정식 발굴되기 전에는 흑피옥에 대한 측정 연대를 공개할 수 없다는 입장을 표하였어요.따라서 흑피옥에 대한 미스테리는 계속 되고있답니다 -_-+현재 한국과 중국에는 흑피옥을 연구하는 학자가 많지 않다고 합니다.그리고 흑피옥이 정식적으로 발굴된 적이 없기에초고대문명이라는 발상은 허황된 주장이라는 취급을 받고있다 합니다.어찌되었든, 초고대문명이 존재한다면 어떤 문화로 되어있고어떻게 살아갔는지 참 궁금하긴 하네요흑피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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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한눈으로 보는 조기경보기의 역사
재미삼아 한 눈으로 알아보는 조기경보기의 역사 입니다. ^^ 영국공군 빅커스 웰링턴 폭격기 개조형 (2차 세계대전 유럽전선)항해중인 연합군 선단을 공격하러 날아오는 독일군 폭격기나 고속정 접근을 조기에 탐지하기 위해 소수가 사용됨. 미 해군 TBM-3W 어벤저(2차 세계대전 태평양 전선) 어벤저 함재 뇌격기를 개조하여 AN/APS-20 레이더 탑재하여 함대로 접근하는 가미카제 공격기들을 탐지하기 위해 개발.100마일 거리에서 저공으로 접근하는 적기 편대를 탐지해낼 수 있었으나 개발이 늦어 실전 투입이 늦었습니다.동체 밑의 불룩한 부분이 레이더가 장착된 곳. 미 해군 PB-1W 플라잉 포트리스 (2차 세계대전 태평양 전선)육군항공대 B-17G를 해군이 개조하여 만든 TBM-3W와 같은 목적의 조기경보기. 역시 배치가 늦어 2차 세계대전에서는 활용되지 못하였고 1953년 대체될 때까지 32대가 사용되었습니다. 역시 미 해군이 육군항공대 B-29를 개조한 AEW 기체입니다.스카이레이더 AD-4W. 대형 함재 공격기인 스카이레이더를 개조한 AEW 기체로서 장비는 TBM-3W와 동일한 AN/APS-20을 탑재했습니다. 형식별로 AD-3/4/5W가 있으며 한국전쟁과 수에즈사태 당시에 사용. 역시 미 해군의 대형 함재 초계기 가디언을 개조한 AF-2W 가디언.AEW 기체였지만 모체가 대잠초계기였기 때문에 어뢰를 탑재한 가디언과 함께 헌터-킬러 임무에 사용되었습니다.AN/APS-20 레이더가 구소련 잠수함의 스노클이나 잠망경을 탐지해내는 데에도 효과가 있었던 모양... 1953년부터 생산된 록히드 L-1049 수퍼 콘스털레이션 여객기 기반의 EC-121 워닝스타.1952년 미 해군이 L-749 콘스털레이션을 개조한 두 대의 시제기가 완성되어 테스트 결과 대형기에 레이더를 탑재해 조기경보기로 쓰는 것이 적합하다는 결과가 나왔기 때문에 개량형인 L-1049를 기반으로 동체 상부와 하부에 레이더를 탑재한 워닝 스타를 제작하였습니다. 초기 해군 명칭은 WV-2(윌리-빅터 2)로 불렸으나 3군 무기체계 명칭 통일에 따라 EC-121로 변경되었습니다. 공군 역시 해군이 만든 기체를 1953년부터 발주하여 EC-121D 명칭으로 도입하여 조기경보기 기체로 사용을 시작했습니다.EC-121은 조기경보기 외에 전자정찰, 정보수집, 전자전 등의 용도로 다양한 변형이 존재하여 폭넓게 활용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북한 영공으로 들어갔다 격추된 적도 한번 있었습니다. 워닝 스타는 미 해군과 공군에서 1980년대까지 사용되었으며 사실상 현대전에서 AWACS 운용의 기틀을 마련한 기체로 평가받습니다. 어벤저와 스카이레이더의 AEW 버전을 사용했던 영국 해군은 자국산 함재 터보프롭 해상초계기인 페어리 가넷에 AN/APS-20 레이더를 탑재한 기체를 항모용으로 사용했고 1970년대 영국 해군에서 재래식 항모가 사라질 때까지 쓰였습니다. 미 해군의 함상 수송기인 C-1 트레이더를 개조한 E-1 트레이서. 1958년부터 AN/APS-82 레이더를 장착한 88대가 생산되어 1977년까지 사용되었습니다. 스카이레이더 퇴역 후 호크아이가 등장하기 전까지의 임시 전력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트레이서는 어벤저나 스카이레이더처럼 기존 기체를 개조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조기경보기로 쓰이기 위해 개발된 첫 미 해군 기체라고 합니다. E-1을 대체하기 위하여 개발된 E-2 호크아이. 사진의 기체는 초기형인 E-2A로서 1964년부터 항모에 실전 배치되었습니다.호크아이는 이스라엘, 프랑스, 일본, 대만, 싱가폴, 이집트, 멕시코가 도입하였으며 이스라엘을 제외한 다른 나라는 현재까지 운용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 기체는 아브로 샤클턴 해상초계기를 개조한 영국 공군의 샤클턴 AEW.2 기체로서 기존의 스카이레이더와 가넷에 탑재된 AN/APS-20 레이더를 기체 퇴역후 옮겨와 탑재해 1973년부터 운용을 시작했습니다. 대체기 도입이 늦어지면서 프로펠러기라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1991년까지 장기 운용되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세계 최초의 제트 여객기로 유명한 영국제 코멧에 공기역학적 테스트를 위해 레이돔을 설치한 영국공군 테스트 기체의 모습입니다. 이 기체는 코멧 기반의 해상초계기인 호커 시들리 님로드의 AEW 버전을 개발하기 위하여 제작되었습니다. 님로드 AEW는 1984년 시제기가 등장하였지만 당시의 기술로는 기수와 동체 후방에 분산 설치된 레이더를 조화시키는 것이 어려웠던지 프로젝트가 실패로 끝났고 1986년 취소되었습니다. 님로드 AEW의 독특한 외형을 알 수 있는 사진입니다. 영국공군은 이 기체 대신에 E-3C 기반의 E-3D를 도입하여 장비하게 되었습니다. 1972년 첫 등장한 미 공군의 EC-137D AWACS 시제기.날이 갈수록 발전하는 전술기의 성능에 발맞추어 AEW 기체의 성능 향상도 요구되었고 더 높이 올라갈수록 레이더 탐지가 늘어나는 것이 당연했기 때문에 제트기 기반의 AEW 기체가 필요해졌습니다. 베이스로는 당시 미 공군 공중급유기 플랫폼으로 선정되어 쓰이던 보잉 707의 군용이 사용되었고 1977년 첫 E-3A 기체가 공군에 도입되었습니다. 동체 위에 장착된 접시형의 둥그런 AN/APY-1 레이더는 많은 항공팬들에게 큰 인상을 남겼고 실제로는 이 기체가 먼저 이 형태를 채용한 것이 아님에도 누구나 AWACS 하면 E-3를 먼저 떠올릴 정도로 사실상 AWACS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E-3는 A/B/C 3가지 타입이 있으며 엔진이 교체된 영국/프랑스 기체의 변형이 따로 있습니다. 서방측만 AWACS를 만든 것은 아니고 구소련도 이러한 기체의 개발 및 도입을 진행하였습니다.사진의 기체는 Tu-126 '모스'로서 거대한 Tu-114 4발 터보프롭 여객기에 레이더를 탑재한 것으로 1962년 개발되어 1965년부터 구소련 공군에 도입되었습니다. Tu-126은 현재의 리투아니아에 위치한 공군기지에 주로 배치되어 운용되었으며 1971년 인도-파키스탄 전쟁에 한대가 인도에 잠시 파견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12대 가량이 생산되어 대량 생산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 기체는 구소련이 불시착한 B-29를 카피한 Tu-4 폭격기로서 1953년 마오 쩌둥의 생일에 스탈린이 10대를 중국에 선물로 넘겼다고 합니다. 그 기체를 1970년대 중국공군이 레이더 탑재기로 개조했으나 레이더 성능과는 별도로 무게로 인해 엔진이 개량되었음에도 기체 힘이 딸려 실패작으로 끝났습니다.1978년 Tu-126 모스를 대체하기 위해 개발된 베리에프 A-50은 일류신 IL-76 수송기를 기반으로 레이돔을 탑재했으며 1984년부터 일선 배치되었습니다.40여대가 생산된 이 기종은 지속된 업그레이드를 통해 여전히 운용중이며 여러 친러 국가가 이 기체 기반의 AWACS를 도입하였습니다. 일본은 E-2를 이미 운용하고 있었으나 전력 증강 필요성에 따라 E-3의 시스템을 보잉 767-200 여객기에 탑재한 E-767을 4대 도입하였고 2000년부터 일선 배치하여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습니다. 현재....현재는 기술의 발전으로 과거와 달리 고성능 레이더 시스템을 운용하기 위하여 무조건 대형의 기체가 필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중소 국가를 중심으로 중소형 기체에 레이더를 장착한 기체들이 등장하였으며 저렴한 가격을 무기로 선진국들만의 전유물이었던 AWACS를 중소 규모의 공군에서도 도입, 운용이 가능해졌습니다. SAAB 340 중단거리 여객기를 개조한 스웨덴 SAAB의 S100B Argus. 1997년 실전 배치되었습니다. 브라질 엠브라에르의 ERJ-145 리저널 여객기를 개조한 R-99A AEW&C 기체. 브라질 공군 외에 멕시코, 그리스, 최근엔 인도가 도입했습니다. S100B와 마찬가지로 Erieye 시스템을 장착했습니다. 이스라엘 공군의 걸프스트림 G550 비즈니스 제트기 기반의 기체. 이스라엘 엘타 사의 EL/W-2085 레이더 시스템을 동체 옆에 CFT처럼 튀어나온 페어링에 장착하여 별도의 레이더 돔이나 안테나가 보이지 않는 것이 특징입니다. G550 AWACS는 싱가폴이 최근 도입하였고 이탈리아 공군도 2012년 도입을 확정하여 차후 도입될 예정입니다. 중국공군은 베리에프 A-50 기반의 AWACS를 러시아-이스라엘-중국간의 기술협력을 거쳐 도입할 예정이었으나 지속된 미국의 압력 및 러시아의 계약 불이행으로 인해 취소하였고 A-50 기체에 자국산 레이더를 탑재한 KJ-2000 AWACS를 2003년 이후부터 도입하였습니다. 레이더는 국산 전자식 레이더를 탑재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많은 이들은 사실상 EL/W-2085 'Phalcon' 전자식 레이더의 기술이 이전되었음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 증거로 이 항공기의 레이돔은 A-50과 달리 회전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제 Phalcon 레이더를 탑재한 칠레공군 보잉 707 AEW&C 기체. 중국이 구소련 안토노프 An-12를 카피해 만든 Y-8 수송기의 최신 변형인 Y-8F에 스웨덴 Erieye 시스템과 외형상 유사한 레이더를 탑재한 KJ-200입니다. 인도공군의 A-50EI AWACS는 러시아 오리지널이 아닌 Phalcon을 개량한 이스라엘 EL/W-2090 레이더 시스템을 탑재하고 있습니다. 에어버스의 방산 분야인 에어버스 밀리터리에서 내놓은 CASA C-295 전술수송기 기반 AEW&C 기체. 레이더는 이스라엘 항공산업(IAI)에서 제작되었습니다. 아직 도입국은 없습니다. 보잉의 중단거리 여객기인 보잉 737-800에 MESA 레이더를 탑재한 E-737 '웻지테일' 입니다.터키와 호주, 그리고 마침내 한국공군이 4대를 도입하였습니다. ㅜ.ㅡ 호크아이는 호크아이 2000이라는 이름으로 기체와 전자장비를 개량하여 21세기에도 지속 운용될 전망입니다. E-3도 E-3G라는 명칭으로 최근 업그레이드가 진행중이라고 합니다. 새로운 위장색을 칠한 러시아 공군의 A-50. F-15K의 호위를 받으며 비행중인 공군 피스 아이 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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