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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이순신과 한산도대첩 제1부
인류의 역사는 곧 전쟁의 역사입니다. 인류의 역사가 기록하고 있는, 셀 수 없이 많은 전쟁의 기록 가운데, 세계 역사학자들은 종종 역사에 길이 남을 전쟁과 전투를 재조명 시키곤 합니다. 그 가운데, 전 세계의 역사학자들이 <세계 역사적 가치가 있는 4대 해전>을 종종 말하곤 하는데, 바로 이 세계 4대 해전에 모두 알다시피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 대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다수의 학자들이 그 네 개의 유명한 해전들 중에서 한산도 대첩을 으뜸으로 여긴다는 점입니다.(생각을 달리 하시는 분도 있지만) 아직까지도 몇몇 해군사관학교에서는 한산도 대첩을 교육시킨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이순신 장군을 모를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대첩 또한 많은 사람이 알고 있겠죠. 하지만 그 한산도 대첩이 의미하는바가 대체 무엇인지, 그 한산도 대첩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사실, 그렇게 까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바로 그 한산도 대첩이 임진왜란 3대첩 중에 하나이자, 우리나라 반만년 역사 4대첩 중에 하나이면서도 세계 4대 해전에 포함되고 동시에 그 가운데서도 으뜸으로 여김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그 이유를 정확히,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저는 많은 길을 돌아가고자 합니다. 전후 상황을 비롯하여 다른 세부적인 것 까지도 언급할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지루할 수도 있겠네요. 1. 한산도 대첩(1592.7.7.) 전의 전란 상황 한산도 대첩의 정수를 느끼기 위해서는 먼저 전투일이었던 7월7일 이전의 상황을 알아야 합니다. 전란이 발발했던 1592년4월13일(4월14일로 여기는 경우도 있음) 일본은 부산을 가장 먼저 공격하여 전란의 거점으로 삼습니다. 그렇다면 일본의 대조선 전쟁 전략은 무엇이었을까요? 전란 전 일본이 한참 침략전쟁을 준비하고 있던 시절, 조선에 뿌려진 수많은 첩자들의 보고를 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및 군수뇌부는 경악을 금치 못합니다. 200년이나 되었다는 나라가 완전이 개판이었기 때문이죠. 제대로 정비되어 있는 군대도 없었거니와,(전라도 여수에서 전쟁을 열심히 준비하고 있던 영웅은 찾아내지 못했던 듯) 이를 적절히 관리 통제해야 할 조정에서는 동인과 서인들 간의 치열한 권력다툼이 있었을 뿐, 백성들을 위한 정치란 없어보였습니다. 반면 자신들에게는 이십만이 넘는 정규 군대가 존재했었으며 이들 모두 내전으로 인해 실전경험으로 다져진 병사들이었습니다. 하여 일본은 전쟁 전에 잘 알고 있었습니다. 조선은 자신들의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그들의 궁극적 목적은 조선을 병참기지화 시켜 명나라와의 전쟁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 중요한 것은 문약하기 짝이 없는 조선과의 전쟁을 최대한 빨리 끝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최단시간 내에 일본이 대조선 전쟁을 끝내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바로 선조의 항복을 받아 내거나, 선조를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한반도 전역에 땅따먹기 싸움을 위해 군대를 보낼 필요가 없으니 힘도 덜 소모하겠죠. 바로 이것이 일본의 대조선 전쟁 제1 전략이었습니다. 당시 상황에서는 일본이 매우 합리적인 전략을 세운 것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이러한 전략이 자신들의 숨통을 조이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겁니다. 왜 그런지는 차차 드러납니다. 그렇게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전달된 전략 지침에 따라 가장 먼저 부산에 상륙한 1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길 따라서 한양만 보고 진격하기 시작합니다. 그야말로 매서운 기세로 북상하기 시작하는데 경상도의 최고 지휘관들 이었던 경상좌병사, 우병사, 좌수사, 우수사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패퇴하거나 싸워보지도 않고 전장을 이탈합니다. 경상도에서 초기에 전란을 막아내지 못한 이유에는 당시 조선의 방어지침 이었던 <제승방략체계>도 한 몫을 하는데, 터무니없는 그 방어지침은 아예 언급도 하지 않겠습니다. 한편, 몇몇 성주들은 목숨을 걸고 관민이 힘을 모아 왜군을 막아보았으나 계란으로 바위치기에 불과했습니다. 왜군은 기세를 몰아 한양으로 진격하는데 저 유명한 충주의 탄금대에서 당시 조선의 영웅이라 불렸던 신립과의 일전을 벌입니다. 이 싸움에서 신립은 지금까지도 길이 회자되고 있으며 논란거리인, 배수의 진을 치고 싸우다 패합니다. 싸움이 패배 쪽으로 기울자 자신은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집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신립이 이끄는 군사들이 조선조정 입장에서는 최후의 방어선 이었다는 점입니다. 신립 자체도 영웅대접을 받아왔거니와, 나름대로 병사들을 수천 명 끌어 모아서(대략 8천으로 추정) 벌인 일전이었기에 조정에서도 내심 기대를 했지만 결과는 참패였죠. 탄금대 전투에서 신립이 전사하자 1군 선봉장 고니시는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한양까지 진격합니다. 바로 그들의 관백(도요토미 히데요시)이 내려준 대조선 전쟁 전략의 마무리 단계에 임박했던 것이죠. 조선왕을 사로잡을 시간이 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기상천외한 일이 벌어집니다. 그야말로 일본군 전체를 화들짝 놀라게 한 사건이었죠. 바로 선조가 한양을 버리고 도망치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설마설마 하였지만 당시 일본군 입장에서는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라고 합니다. 왜냐? 임진왜란 이전 일본이 수십년 동안 통일전쟁일 치루는 동안, 그들 나름대로의 철칙이 있었습니다. 성주는 결코 자신의 집인 성을 버리지 않는다. 성이 공격받는다면 그 성에서 운명을 다할 지언정, 결코 자신의 집과 백성들은 포기하지 않는다. 이런 철칙이 있었습니다. 하물며 200년이나 유지되어온 일국의 왕이, 나라의 수도이자 자신의 집인 대궐을 버리고 도망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일본 입장에서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쫓아가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개성으로 도망치던 그 선조가 그런데 또 평양으로 도망칩니다. 계속 쫓아가서 평양까지 점령해보니 이제는 신의주까지 도망쳐 버리고 없었습니다. 참으로 기가 막힐 일이었죠. 바로 이 시점에서 일본군은 딜레마에 빠집니다. 첫째는 보급의 문제였고, 둘째는 명나라의 문제였습니다.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전쟁을 하는데 있어 군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보급입니다. 당시 1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병사만 해도 1만 5천이 넘었습니다. 그 인원이 계속 진군하면서 밥을 먹어야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어마어마한 식량이 끊임없이 보급되어야 합니다. 하물며 활을 쏘면 화살이, 조총을 쏘면 탄약과 화약이 계속 필요하게 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바로 보급거점과의 거리입니다. 당시 일본의 모든 물자는 본국에서 배를 통하여 보내져 부산에 들어오게 됩니다. 부산에 떨어진 물자들은 육로를 통해 전방에 있는 전투부대에 보내지게 되는데, 당연히 부산으로부터 멀리 진군할수록, 보급거리는 멀어집니다. 보급 거리가 멀어질수록 고니시의 제1 선봉군은 보급에 차질이 생깁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지금처럼 도로가 나있던 것도 아니고, 자동차가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일반 사람이 걸어서 3주에서 4주정도 걸리는 길이가 한양에서 부산까지의 거리였습니다. 하물며 평양까지 진군한 고니시의 군대. 부산으로부터 2000리 거리였습니다. 보급은 까마득한 일이었죠. 두 번째 문제는 명나라의 문제. 한양에서 선조를 사로잡으면 그걸로 빨리 전쟁을 마무리 지으려고 했건만, 선조가 도망치는 바람에 전쟁이 끝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사이 만약 명나라가 원군을 보내면 일본 입장에서는 낭패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만약 고니시가 평양 이북으로 계속 진군하고자 하면 명나라를 더욱 자극하는 셈이었으니, 이러한 두 가지 문제 때문에 고니시는 진군을 멈춥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의 일본군의 해법은 무엇이었을까요? 길은 오직 한 가지 뿐, 바로 바닷길을 여는 것이었습니다. 왜냐구요? 바로 배의 특징 때문이죠. 좀 전의 보급문제를 다시 한 번 언급하겠습니다. 일본의 수송선 한 척을 가정합니다. 이 한 척의 수송선이 식량을 가득 싣고 부산을 출발해 남해와 서해를 거쳐 지금의 인천이나 남포까지 이르는데 빠르면 3일, 길게 잡아도 7일이면 갑니다. 그 한척이 제1군 선봉장 고니시의 1만5천 군대가 3일 동안 먹을 수 있는 식량을 수송합니다. 잘 기억해 두십시오. 하지만 동일한 양을 육로로 수송하려면 마차가 100대, 그것을 끌 소나 말이 100필 또는 100마리, 그 말이나 소를 이끌 인원이 필요하고, 불의의 기습에 대비하여 이 수송단을 호위할 병사들이 붙여져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3주에서 5주의 시간이 걸립니다. 육로와 수로의 차이는 그야말로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하여 만약 바닷길이 확보되어 부산에서 인천 또는 남포에 이르는 항로가 보장되면, 일본은 전란 초반과 같은 무서운 기세로 북상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보급문제 뿐만 아니라, 지원군도 원활하게 도착할 수 있을테죠. 바로 이렇기에, 일본군에게는 바닷길이 절실했습니다. 그렇다면 일본 수군은 당시에 뭘 하고 있었을까요? 일본 수군은 전란 초기부터 육군처럼 진군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본국으로부터 실어 날라야 하는 병사와 물자가 워낙 많았기 때문이죠. 제1군 고니시의 군대야 선봉대이니 상륙하자마자 제일 먼저 북상한 군대라 치고, 고니시의 1군 뒤로는 2,3,4,5,6,7,8,9군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수의 병사들이 상륙했습니다. 10만이 넘는 그 군대와 전쟁수행에 필요한 수많은 물자를 나르느라 일본 수군은 정신이 없었습니다. 자 그럼 이제 우리의 영웅 이야기를 하기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 과연 자국의 수도인 한양이 일본의 수중에 떨어질 때까지 우리 이순신 장군과 그가 이끄는 전라좌수군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 2부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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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이순신
우리에게는 분명 영웅이지만, 그와 대적한 일본인에게는 악인일까. 그러나 해전사를 다루는 일본인들의 이순신 장군에 대한 평가는 호의적을 넘어 경외하고 있음을 금방 알 수 있게 한다. 세계 각국의 해군사관학교에서는 생도들에게 세계 4대 해전을 가르치면서 꼭 이순신 장군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해군 준장 사토 데쯔라로 “옛부터 장군으로서 묘법을 다한 자는 한둘이 아니다. 해군 장군으로서 이를 살펴보면 동양에서는 한국의 이순신, 서양에서는 영국의 넬슨(NELSON, 1758-1805) 제독을 들지 않을 수 없다. 불행히도 이순신은 조선에 태어났기 때문에 서양에 전하지 못하고 있지만 임진왜란의 문헌을 보면 실로 훌륭한 해군장군이다. 서양에서 이에 필적할 자를 찾는 다면 네덜란드의 Ruyter Michiel(1607-1678) 이상이 되어야 한다. 넬슨과 같은 사람은 그 인격에 있어서도 도저히 이순신에 어깨를 견줄 수가 없다. 장군의 위대한 인격, 뛰어난 전략, 천재적 창의력, 외교적인 수완 등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그 짝을 찾을 수 없는 절세의 명장이며, 자랑으로 삼는 바이다.”
일본 해군제독 토고 헤이하찌로 “나를 넬슨에 비하는 것은 가당하나, 이순신에 비하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역사 작가 시바 료타로 “이순신은 청렴한 인물로, 그 통솔력과 전술능력으로 보나 충성심과 용기로 보나, 이러한 인물이 실재(實在)했다는 자체가 기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이상적 군인이었다.” 일본 해군 전략 연구가 가와다 고오 “도고가 혁혁한 전공을 세운 것은 사실이지만, 이순신 장군과 비교하면 그 발가락 한 개에도 못 따라간다. 이순신에게 넬슨과 같은 거국적인 지원과 그 만큼의 풍부한 무기와 함선을 주었다면, 우리 일본은 하루 아침에 점령을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대단히 실례인 줄 알지만, 한국인들은 이순신 장군을 성웅이라고 떠받들기만 할 뿐 그 분이 진정으로 얼마나 위대한 분인가 하는 것은 우리 일본인보다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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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해병대의 얼굴, 해병대사령부 의장대
절도있고 패기넘치는 멋진시범을 보이는 의장대원들!
국가 경축 행사나 국빈 방문 행사에서 기수와 의장 사열 등의 의식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조직된 부대인 의장대는 최근에는 군관련 행사는 물론 각지역의 축제 및 행사에도 참가하여 의장시범을 보이며 국민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각 군과 사령부에 많은 의장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국민들로부터 가장 많은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의장대는 바로 해병대사령부의장대입니다.
오늘은 대한민국 국군을 대표하는 작지만 강한 ‘정예 최강부대’ 해병대의 상징인 해병대사령부의장대를 소개해 보고자 합니다.
해병대의 전통과 명예의 상징!
해병대 사령부 의장대는 내ㆍ외국 귀빈에 대한 환영행사 및 군 행사임무를 수행하는 부대로서 엄격한 절차와 고도의 훈련을 통해 만들어진 최정예 의장대입니다.
1953년 12월10일 창설된 해병대 의장대는 해병대 각종 의식행사? 각군 의장행사? 9?15 인천상륙작전 기념행사 및 9?28 서울수복 중앙청 국기게양 기념행사와 정부기관이나 기타 사회 단체에 해병대 의장대가 초청되어 시범을 보여 해병대 군기의 표상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1955년 1월 15일 제1상륙사단 창설 이후 해병대 의장대는 한국군 최초의 의장대 쇼를 개발하여? 여러가지 형태의 대형을 만들어가며 총대를 빙빙 돌리기도 하고? 공중으로 총을 집어 던지는 의장대 시범 특별 쇼프로그램으로 관중으로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끌어 모았는데 그 의장대 쇼를 위하여 군악대는 시작부터 끝까지 의장대의 변화무쌍한 동작에 맞추어 연주를 하였습니다.
그 이후 의장대는 이승만 대통령의 특별지시로 해군사관학교 원양실습훈련단에 동승하여 동남아 순회공연 등을 실시하며 해병대의 명예와 국위를 선양하기도 했습니다.
▲ 1962년 8월 15일 제17주년 광복절경축행사에서 의장시범을 보이는 해병대사령부의장대
그러나 1973년 박정희대통령 재임시 해병대 사령부가 해군에 통폐합되면서 해병대 의장대는 해체되고 맙니다. 대신 해군 예하로 편입된 해병대 제1사단의 의장대 형태로 존속하게 되다가 1987년 11월 1일 해병대 사령부가 재창설되면서 1994년 4월 4일 해병대 의장대를 재창설하여 해병대 의장대의 전통을 계승하여 왔습니다.
해병대사령부의장대는 해병대의 위엄과 용맹스러운 모습을 표출하기 위해 6kg의 무게에 달하는 M1소총을 사용 전통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또하나의 빨간명찰을 달다!
의장대는 이병 때부터 기본 21개 동작을 시작으로 정지간 제식동작, 이동간 제식동작, 개개인의 동작을 차례로 보여주는 파도타기 대형까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는 의장시범을 간부들과 선임들로부터 교육을 받습니다.모든 동작을 익히고 어느 정도 다듬어지면 정예 21인조 시범열 동작조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고, 처음으로 의장시범행사를 무리 없이 치르게 되면 빨간 ‘해병대 의장대’ 휘장을 왼쪽가슴에 붙일 수 있게 된다고 하는데 개인의 능력차에 따라 길게는 1년,통상적으로 10개월 정도의 기간이 소요된다고 합니다.
훈련소에서 피나는 훈련과 인내를 감수한 후 빨간명찰을 다는것처럼 의장대원들의 왼쪽가슴에 새겨진 또 하나의 빨간명찰도 결코 쉽게 달아지는게 아니었습니다.
특히 해병대사령부 의장대는 타군의 의장대와는 달리 M1소총을 사용하여 시범동작을 하는데. 나무로 제작된 이 병기는 6·25전쟁 당시 전군이 사용했던 역사족인 병기로, 대검 착검시 무게는 5kg에 육박하고, 길이는 1m 40cm를 훌쩍 넘는다고 합니다! 다른 의장대가 사용하는 M16과 같은 병기보다 클래식한 멋이 있고, 묵직하기 때문에 좀 더 절도있게 보인다는 장점이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무거운 병기를 장난감 다루듯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기까지는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훈련 중에 팔은 물론이고 온몸에 멍이 들거나 상처가 나는 일은 다반사이며, 기약 없이 힘들고 지루한 훈련을 참고 이겨내야 합니다.
그렇게 숙달된 대원들로 구성된 21인조 시범열 동작조는 6명의 군기수와 함께 행사조가 편성되어 의장시범을 보이게 됩니다..
▲ 행사나 시범중에 부동자세로 대기중인 의장대 군기수,주루룩 땀이 흐를지언정 흐트러지지 않는 자세와 부릅뜬 눈이 해병정신을 대변해 주는듯 하다.
팔도사나이들
피나는 훈련으로 숙달된 대원들로 구성된 해병대사령부 의장대는 전국 방방곡곡 안가는 곳이 없습니다.
해병대마라톤, 전우마라톤대회, 지상군페스티발, 국군의날, 어린이날 전쟁기념관, 제주도 및 각 지역의 전승행사등 많은 행사장에서 해병대사령부의장대를 만날수 있었습니다.
▲ 군산장항이리지구전투전승행사에서 의장시범을 보이며 군산시내를 시가행진중인 의장대원들, 행진중인 의장대원들의 그림자마저도 오와열이 확실하다.
▲ 어린이날 전쟁기념관에서 의장시범을 보이고 있는 해병대사령부 의장대
▲ 2012 지상군페스티발 계룡군문화축제장에서 의장시범중인 해병대사령부의장대
각 행사장에서 해병대군악대의 연주와 함께 해병대의장대의 절도있고 패기있는 시범이 전개될때에는 전율을 느끼며 마치 해병혼이 살아 춤추는 듯한 느낌이 함께 합니다.
▲ 해병대의장대원들은 전국을 순회하며 해병대를 홍보하고 알리는 역할을 하며 국민들로부터 찬사와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해병대의장대원들은 해병대사령부의장대에만 있는게 아닙니다.
이전에 해병대1사단에 존재했던 의장대는 지난해 12월 군 규정에 위해 해체됐지만 국방부의장대와 해군의장대에도 해병대의장대원들이 소속되어 활동하고 있습니다.
진해군악의장페스티발
지난 4월초 진해에서 진해군항제와 함께 열린 세계군악의장페스티발에서도 해병대사령부의장대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진해군악의장페스티발에 참가한 해병대사령부의장대의 공연장면을 사진과 함께 소개합니다.
의장시범은 총 21개 동작을 기본으로 정지간 제식동작, 이동간 제식동작, 파도타기 동작 등 15분으로 구성하여 해병대의 강인함과 절도있고 패기있는 모습을 표출합니다.
이날 해병대의장대는 군악의장페스티발을 찾은 많은 관람객들에게 해병대의 강인함과 절도있고 패기있는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주며 많은 박수와 환호를 받았습니다.
정말 인기 짱! 이었습니다.
내 지문이 달아 없어질지언정, 이 총을 내려놓지 않을 것이다!
해병대의장대원들을 해병대를 알리기 위해. 해병대를 위해. 오늘도 빨간 훈련모를 쓰고 땀으로 물든 M1병기를 들고 훈련장으로 향합니다.
"내 지문이 달아 없어질지언정, 이 총을 내려놓지 않을 것이다!" 라는 어느 해병대의장대원의 글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말합니다.
남들은 말한다. “매일 총만 돌리는데 뭐가 그렇게 힘드냐” 고.
그들은 말한다. “매일 돌아가는 총의 바퀴 수만큼, 우리의 심장은 뛰고 있다고.”
아! 그리고 의장대와는 땔래야 땔수 없는 존재가 있습니다. 의장대와 항상 함께하며 의장대의 시범이 더욱 돋보이도록 멋진 연주를 해주는 해병대군악대입니다.해병대군악대도 곧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해병대블로그 펌입니다
온리원럽작성일
2013-05-11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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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중국,일본에서 보는 이순신
일본, 중국을 비롯해 다른나라 역사 학자들이 이순신에 관한 책을 편찬했다고 하네요..중국, 일본에서 보는 이순신"아시아 역사를 바꾼 이순신 " 이라는 책이 있습니다.이 책은 1990년~1998년...약 8년에 걸쳐서 중국학자 5명과 일본학자 7명 그리고 그 외 일본사관학교(육사.해사) 장교 및중국인민박물관장. 한국해군사관학교장교들의 도움으로 총 32권으로 발권된 책이죠.이 책은 크게 - 이순신장군 생애를 다룬 5권.(이순신은 누구인가?) - 일본장수가 본 이순신 2권 . - 명나라가 본 이순신1권. - 1500~1600년시대의 조선과일본 그리고 명나라 10권. - 이순신과 임진왜란 5권. - 토요토미 대 이순신 2권. 이렇게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한 내용이 25권. 그리고 역사적 근거로 가설을 부친 내용이 7권으로 나누워진 책입니다.이 중에서 좀 특이한 것은 일본 장수가 본 이순신 장군님에 관한 책이 2권이나 된다는것인데...이순신 장군께서 난중일기를 남기시듯.. 일본장수들도 나름대로 자신들의 기록을 남긴 서적들이 꽤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와키자카와 도도. 등등... 특히 이 두 사람은 이순신 장군님에 대한 기록이 유별 나다고 합니다. 아마 같은 수군이라서 그랬겠지요... 1. 와키자카가 본 이순신 전에 KBS1 역사스페셜에서도 나온 적이 있습니다. 와키자카 후손들이 매년 이순신 장군님 탄생 때 온다는거.... 와키자카가 이순신장군님을 알게된건 한산도대첩때인데... 와키자카는 우리가 알고있는 것과는 성격이 좀 많이 다르다고 합니다. 물론 한국에서 바라보는 것과 일본에서 바라보는 건 차이가 있겠지만... 아무튼 와키자카라는 장수는 전형적인 사무라이였는데 명예를 중요시 하였으며, 차를 좋아했으며, 함부로 살생하기보다는 덕을 베풀어서 적을 자기수하로 만드는 뭐랄까 그런 묘한데가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와키자카는 2천의 군사로 약 5~10만명(정확한설은 없음. 우리역사에는 5~6만명이라고 하고 일본역사에는 8~10만이라고 함) 정도 되는 조선육군을 물리친 명장 중에 명장입니다.그러한 명장이 듣지도 못한 장수 이순신장군에게 대패를 하였으니 그 충격은 대단했을 겁니다.한 예로 와키자카는 한산도대첩 이후로 충격에 6일을 굶었다고 본인이 그렇게 기록을 하고 있으니 그 충격은 대단했었나 봅니다.식음을 전폐하고 내가 왜졌는지 생각하고 고민하는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나는 이순신이라는 조선의 장수를 몰랐다.단지 해전에서 몇번 이긴 그저 그런 다른 조선장수 정도였을거라 생각하였다.하지만 내가 겪은 그 한 번의 이순신 그는 여느 조선의 장수와는 달랐다.나는 그 두려움에 떨려 음식을 몇일 몇날을 먹을 수가 없었으며, 앞으로의 전쟁에 임해야하는 장수로서 나의 직무를 다할 수 있을련 지 의문이 갔다.2천의 군사로 5만 이상의 조선군을 물리친 일본의 명장이 이렇듯 두려움에 떨 정도였으니...이후에도 와키자카는 여러번 이순신 장군님에대한 본인의 생각과 조선수군과 있었던 전투내용을 상세히 기록해 뒀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흥미로운점은 와키자카가 쓴 내용에보면.. 내가 제일로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순신이며가장 미운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좋아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흠숭하는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죽이고싶은 사람역시 이순신이며 가장 차를 함께 하고 싶은 이도 바로 이순신이다.적장이지만 와키자카도 멋있는 사람이라고 느껴지는 글이죠. 아마 이러한 이유 때문에 400년이 지난 지금도 그 후손들이 이순신장군님 탄생일때 오는가 봅니다 2. 명의 사신이 본 이순신 그리고 "운덕 " 이라는 명나라의 사신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후일 이순신 장군님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을 했습니다.하루는 어두운밤 눈이 몹시 내리고 그바람이 칼날 같아서 살결을 찢는 듯 하니, 감히 밖으로 나서지 못하겠더라.. 그러한데 그속을 통제사영감이 홀로 지나가니, 무슨까닭으로 이 어둡고 추운바람속으로 거닐고 있는걸까? 궁금하던차에 한번 따라가보니 통제사 영감이 가고 있던 곳은 바로 왜놈이 잡혀있는 현장으로 가는거 아닌가... 더욱이 이상하여 더 밟아보니 통제사영감 손에는 한권의 책이 있더라... 밖에서 보니 통제사 영감은 그 왜군에게 명심보감중 효행편을 읽어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다음날 알아보니 그 왜군의 나이는 15세이더라...10살 의 어린나이에 병사가 되어 왔음에 이 아이가 포로가 된후 이를 딱히 여긴 통제사영감이 별도로 감싸주었던 것이다... 10살에 포로가 되었으니 벌써 5년이 되었고 그동안 왜군의 아이는 조선말을 배웠으며간간히 통제사 영감이 책을 읽어주기도 했다고한다. 서로 죽이고 죽이는 전쟁이지만, 저 두사람을 보면 어찌 서로를 원수라 하겠는가... 내가 본 저 두사람은 조선장수대 왜군이 아닌 한 아버지와 그의 아들로 보였으니.. 통제사염감이 저러하다면, 그의 백성을 아끼는 마음 무엇으로 나타낼수 있겠는가!3. 명의 도독 진린이 본 이순신 명나라의 황제 신종(만력제)은 조선에서 진린도독으로부터 한통의 서신을 받는다. 황제폐하 이곳 조선에서 전란이 끝나면 조선의 왕에게 명을 내리시어 조선국 통제사 이순신을 요동으로 오라 하게 하소서.. 신(臣)이 본 이순신은 그지략이 매우 튀어날뿐만 아니라 그 성품과 또한 장수로 지녀야할 품덕을 고루 지닌 바 만일 조선수군통제사 이순신을 황제폐하께서 귀히 여기신다면 우리 명(明)국의 화근인 저 오랑케(훗날청國)를 견제할수 있을뿐 아니라, 저 오랑케의 땅 모두를 우리의 명(明)국으로 귀속시킬 수 있을 것이옵니다.혹여 황제폐하께서 통제사 이순신의 장수됨을 걱정하신다면 신(臣)이 간청하옵건데 통제사 이순신은 전란이 일어나고 수년간 수십차례의 전투에서 단 한번도 패하지 않았음에도 조선의 국왕은 통제사 이순신을 업신여기며 또한 조정대신들또한 이순신의 공적에 질투를 하여 수없이 이간질과 모함을 하였으며, 급기야는 통제사의 충의를 의심하여 결국에는 그를 조선수군통제사 지위를 빼앗아 백의종군에 임하게 하였나이다. 허나 통제사 이순신은 그러한 모함과 멸시에도 굴하지않고 국왕에게 충의 보였으니 이어찌 장수가 지녀야할 가장큰 덕목이라 하지 않을수 있겠나이까."조선국왕은 원균에게 조선통제사 지위권을 주었으나 그 원균이 자만심으로 인하여 수백척에 달한 함대를 전멸케 하였고 단 10여척만이 남았으메 당황한 조선국왕은 이순신을 다시불러 조선수군통제사에게 봉했으나, 이순신은 단 한번의 불평없이 충의를 보여 10여척의 함대로 수백척의 왜선을 통쾌하게도 격파하였나이다. 허나 조선의 국왕과 조정대신들은 아직도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또다시 통제사 이순신을 업신여기고 있나이다. 만일 전란이 끝이난다면 통제사 이순신의 그목숨은 바로 풍전등화가 될것이 뻔하며, 조정대신들과 국왕은 반드시 통제사 이순신을 해하려고 할 것입니다. 황제폐하 바라옵건데 통제사 이순신의 목숨을 구명해주소서. 통제사 이순신을 황제폐하의 신하로 두소서. 황제폐하께서 통제사 이순신에게 덕을 베푸신다면 통제사 이순신은 분명히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황제폐하게 충(忠)을 다할것이옵니다. 부디 통제사 이순신을 거두시어 저 북쪽의 오랑케(훗날의청국)를 견제케 하소서)."4. 책의 저자인 쟝웨이링 교수가 본 이순신1990년 3월 하북에서 제1차 중.일 합동 연구회(이순신)를 가졌다. 이순신??? 내가 알고있는 이순신은 조선시대 임진왜란때 장수였던거 정도로 알고 있었다. 사실 이 연구회엔 나의 절친한 동료학자의 권유로 참석하였으며 그저 잠시나마 자리에 참석할 생각이었다. 사실 조선의 역사에대해선 그다지 큰 관심이 없던터라, 나는 그저 일본교수진들의 말만 들을 뿐.....러한 내게 작으나마 충격적인 일이 있었다. 조명이 꺼지고 화면가득 보여지는게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거북선이라고 불리는 배였다. 저런 배가 400여년전에 있었단 말인가...(본것은 처음이었다) 나의 놀라움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일본 학자들은 임진왜란에 대해서 나와는 너무나 다른 시각으로 보고있었다. 아무리 나라가 다르다지만... 그 시각의 차이는 너무나도 크고 말았던것이다.. 더군다나 그차이는 중일간의 차이가 아니라 바로 조선이라는 나라를 보는것.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조선이 아닌 이순신이라는 한 인간을 보는것이었다. 일본교수진들은 이 연구회를 이순신 이라고 붙엿다.즉.. 임진왜란 자체를 이순신이라는 인물이 중심이되어서 바라보고 찾고 연구하고 가설을 붙이는 것이엇다. 이는 우리 중국 어느 누구에게도 연구해보지 않은 방법이었다. 나는 그 학술회가 끝나는데로 일본교수의 도움으로 이순신이란 인물에 대한 책자를 얻을수 있었다. 7권으로 이루어진 이순신 이라는 인물에 관한 책이었고. 나는 그 7권을 단 하루만에 다 읽고 말았으며, 책을 손에서 놓은뒤 내게 있어서 가느라한 한숨과 함께 어디선가 느껴지는 심장의 소리를 들을수 있었다. 이순신....참으로 읽으면 읽을수록 수수께끼 같은 인물. 지금까지 우리 중국학자들은 임진왜란은 일본의 토요토미가 조선을 침략하였으며, 조선의 왕 선조는 그들을 막지못하고 의주로 몽진을 하여 우리 명나라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그 위기에서 벗어날수 있었으며, 그로 인해 명나라는 국력을 소비한 나머지 지금의 청에 의해 멸하고 만다. 이것은 우리 중국과. 한국, 북한. 일본의 역사 교과서에도 별차이없이 나오는 부분이었다.그런데.. 이날 연 학술회에선 이 모든 것을 흔들어버리는 아니 뒤엎는 가설을 내놓은것이다. 바로 이순신 이라는 이름으로....... 5. 장웨이링 교수가 말하는 우리의 거북선... 1997년 10월.한번은 내게 북경대에서 초빙을 받아서 학생들과 토의를 한적이 있었다. 주제는 청나라의 멸망에 관해서 였다. 그래서 나는 한국에서 가져 온 거북선을 가지고 학생들에게 보여주며 이것이 무언지 아는 사람 있냐고 묻자 250명의 학생중 단 한명도 이것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답하였다. 어쩌면 역사학자인 나도 이 거북선을 이순신 인물에 대해서 연구하면서 처음 보았으니..학생들이 모른다고 답하는건 어쩌면 무리는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학생들이 이 거북선을 자세히 볼 수 있도록 한사람씩 돌아가면서 볼 기회를 주고난 후.. 나는 질문을 바꾸어서 왜 청나라가 망할수밖에 없었고 서양과 일본에게 전쟁에서 질수밖에 없었는지 질문을 던져보았다. 학생들은 각자의 생각에 대해서 발표를 하였으며 모두 맞는말이었다. 그래서 이번엔 다시 질문을 바꾸어서 그렇다면 그당시 전쟁에서 여러분이 아는 영웅 중 단 한명 다시 태어나 청나라를 구할수있는 위인이 누구인가라고 묻자 학생들의 답변은 내가 예상하고 있던 그대로였다. 항우.제갈공명.손자.관우...... 나는 잠시 창너머를 바라보았고... 한참동안이나 내가 강단의 창너머만 바라보자 이에 이상했는지 학생들은 왜 그러시냐고 물었다. 나는 이에 만일 지금 또다시 지금 중국이 청나라처럼 되었고 여러분들이 말한 영웅이 나타난다해도 결과는 마찬거지일거라고 답해주자.. 모두들 의아해했다. 그러자 한 학생이 손을들며 그렇다면 교수님께서는 어떤 위인 나와야 된다고 생각 하십니까? 라고 질문을 하였고.. 나는 그 질문에 거북선을 다시한번 학생들에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것은 여러분들이 생각하고 있는대로 배다.지금부터 400년전에 만들어진 전투함.. 이 전투함을 만든 이순신... 400년전에 조선과 일본의 전생시 조선을 구한 이순신장군이야말로 중국을 구할 유일한 영웅이라고 나는 여러분에 말한다.... 많은 학생들과 같이 참석한 많은 다른 교수들도 의아해 하기 시작하였고.. 여기저기서 이순신이 누구냐고 서로 묻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여기서 간단히 임진왜란에대해서 30분정도 시간을 내서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당시 일본과의 전쟁에서의 활약상을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내가 왜 이순신을 선택한지 아느냐고 물었으나 이 역시 학생중 단 한명도 알지못하였다. 단지 어느 한학생이 교수님 이순신은 해군아닙니까? 나는 그 학생의 말이 끝나기 전에 답해주었다. 바로 해군이기 때문에 청나라를 구할수 있는 것이다. 청나라가 망한건... 아편탓도있고.. 황제탓도 있다.. 정치적 이유도 맞다... 하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유능한 해군장교가 없었다는것이다. 조선수군장수 이순신은 5000명도 안대는 군사와 50척도 안대는 함대를 이끌고 40만의 왜군과 1300대의 일본함대와 맞서 싸워 단 한번의 패도 없이 모두 승리를 이끌어 조선을 구할 수 있었다. 당시 조선은 청국과 같은 처지였다... 당파싸움에 휩쌓여 있었고.. 병력이라야 5만도 안되는... 그러한 조선을 이순신장군이 지켜낸 것이다. 그리고 그 승리의 안에는 바로 이 거북선 전투함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러분들이 말한 영웅들은 모두 육지에서 뛰어난 자들이다. 그것은 우리 중국역사에는 세계에 내놀만한 수군장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중국은 대륙국가였다... 하지만 대륙만큼이나 우리 중국은 바다가 넓다. 그러자 한학생이 손을들며.. 교수님 그렇다면 주유가 있지 않읍니까? 라고 말하였고 나는 그에 질문에... 주유는 훌륭한 지휘관이다.. 그러나 주유는 이순신 장군과는 격이 다르다.... 주유는 양쯔강에서 활약한 장수지 진정한 해상지휘관은 아니다.. 영국을 보라.. 네덜란드를보라 스페인을보라.. 그들은 나라는 작아도 바다를 가졌기에 그리고 그바다를 점령하였기에 세계 최고의 국가로 일어설수 있었다... 그와 반대로 청나라는 거대한 대륙국가 이였지만 바다를 몰랐기에 무너지고 만 것이다. 여기 거북선을 보라... 누가 이 배가 400년전에 만들어졌다고 믿겠는가? 여러분들은 눈을 떠야 할것이다. 바다로 바다로 눈을 떠야 할것이다. 그리고 나는 학생들에게 일본에서 열렸던 임진왜란 모의전쟁에서 만일 이순신 장군이 일본장수였다면 당시 명나라는 물론이고 태국과 베트남 인도네시 아까지 일본국에 점령되었다... 라는 결과를 말해주자 모두들 놀라는 눈치였다. 세계 어느국가도 한 인물의 존재에 따라서 이렇게 역사가 뒤바껴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한번 거북선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나는 왜 이순신이 위대할수밖에 없는이유를 덧붙여 설명해 주었다. 이 거북선은 내가 여러분에게 이순신 장군이 만들었다고 했으나, 사실은 그가 직접 만든 것은 아니었다. 이 거북선은 나대용 이라는 사람이 만든것이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이 있었기에 거북선을 생각하고 만들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조선수군은 인진왜란 1년전만해도 허약한 병사들이었으나 그 허약한 병사를 단 1년만에 40만대군과 1300척을 거느린 일본군과 맞서 이길수 있는 군대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는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그리고 나서도 1시간정도 더 이순신 장군에 대한 삶과죽음에 대해서 이야기기를 해주고 강의를'끝마칠 수가 있었다.그리고 그강의가 끝났을때 난 처음으로 전 학생이 일어나며 기립박수를 받아 보았다... 어떤 학생은 눈물을 흘리기까지도 하면서.... 내가 처음 이순신에 대해서 자세히 알게 되었을 때 그 감정을 나의 제자들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 쟝웨이린 교수님은 1989년에 고구려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시키는 일을 맡는 주요 책임자중 한분이셨으며, 1990년 이 학술회를 시작으로해서 연구하시던 중 1995년 고구려 역사편입하는 작업에서 손수 물러나셨다고 한다 쟝웨이린 교수님은 이 책 머릿말에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기셨다. 역사학자란 후세사람들에게 부끄러운 일을 해서는 안된다.. 역사학자란 두가지의 부끄러움이 있다. 한가지는 숨기는것이다. 히틀러가 200만 유태인을 죽인것보다 그 역사를 감추려하는 역사학자들이 더 부끄러운 것이다.나의 조국의 부끄러움보다 역사앞에서 그 진실을 숨길 때 그것이 참으로 부끄러운 짓이다. 또 한가지의 부끄러움을 말한다면, 진정한 위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찾지못하는 역사학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진정한 위인은 자기가족만을 위해서 자신의 조국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아니다. 진전한 위인이란 모든 만인을 위하는 사람이 바로 진정한 위인이며.. 나는 그 위인을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 6. 일본의 아리모토라는 역사가가 본 이순신세계의 전쟁영웅은 피로만들어진다. 전쟁영웅은 만인들에게 우러러 보게끔 만든다. 알랙산더대왕도 그러했고 케사르도 그러했고,징키스칸도 그러했고,나폴레옹도 그러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우리에게 고개를 숙이게 한다. 우리 자신을 부끄럽게 한다. 이러한 표현이 맞는 지는 모르겠다. 나는 크리스챤인이다. 십자가에 못박혀 있는 그분.... 이순신 장군을 볼때면 문득 그분이 떠오른다.... 두 분 다 나의 고개를 숙이게 한다. 이순신 장군은 단순히 조선을 구한 영웅이 아니었다. 또한 이순신 장군은 피로 혁명을 일으키기보다는 바로 십자가를 선택하셨다. 모든 것을 홀로 짊어지시고 가셨다...2000년전의 한 청년이 그래햇듯이.. 이순신 장군은 그 처절한 전쟁속에서 忠.孝.義.愛.善 을 가르키신 분이셧다. 그러고 보니 한국사람들은 이순신장군을 영웅 이순신이라 말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한다."성웅 이순신" 7. 장군님의 혁명과 죽음에 대한 논란 1996.4월 이케다 하야토 교수의 [아시아 역사를 바꾼 이순신] 중에서 14부인(이순신의 혁명과 죽음) 중에서 ..... <혁명과 죽음> 이순신의 혁명.. 우리들은 왜 이순신은 혁명을 하지 않고 죽음을 선택 하였을까? 하는 의구심을 품어보았다. 수많은 전공에도 불구하고 조선조정으로부터의 의심과 질투를 받은 그에게는 단 한번의 혁명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먼저, 우린 만일 이순신장군이 혁명을 일으켰다면 과연 성공하였을까? 하는 부분부터 토론을 해보았다. 결론부터 말하면 우리 12명의 학자 모두 이순신장군은 혁명에 성공과 함께 조선의 멸(滅)과 새로운 이순신의 나라가 세워졌을 거라고 의견을 모았다. 이순신 장군에겐 2만여명의 수군과 약 5천여명으로 추정대는 의병. 그리고 전라도와 충청이남. 경상도부근에 이순신을 따르는 군(軍)의 수는 1만여명에 이른다. 총 3만 5천여명에 다다르고 이 군대에 대응할 조선의 군대는 없다고 봐야 할것이다. 이와 함께 이순신에겐 두가지의 또다른 무기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민심과 명분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명나라의 군대였다. 명나라 군대 역시 이순신에 대한 반감이 컸으며, 명나라의 장수 유정은 바로 곧 명나라의 황제를 대신 하는것이기에 이순신에겐 유정을 넘어서야 1차적인 혁명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며. 혁명 후 명나라 황제의 질타를 과연 극복할 수 있느냐 하는것이다. 그러나, 이것에 대한 대답은 너무나도 간단하였다. 조선의 선조는 이순신이 혁명을 일으키자 바로 명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구원을 청했을 것이다. 명나라의 황제가 도와준다면 이순신의 군대는 두려워 하지 않아도 될것이라 생각했기에...하지만... 조선의 왕 선조는 자신을 도와줄 군대가 올거라 생각 했지만, 뜻밖에도 명나라에서는 군대가 아닌 사신이 온다. 조선 조정으로가 아닌 명나라의 장수 유정에게........ 명나라의 황제는 조선의 왕 선조가 아닌 이순신 통제사의 편을 들어 준것이다. 왜였을까? 이 역시 답은 간단하였다.그 당시 명나라의 국력은 임진왜란(정유)으로 인하여 국력이 크게 약하게 되었으며, 게다가 북으로의 오랑케(훗날 청)의 견제가 심해져 있었으니.. 전란이 채 끝나기도전에 또한번 강력한 이순신군대와 전쟁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 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명나라는 새로운 전략을 세울수밖에 없었다. (이미 조선의 민심역시 이순신에게 있는것을 알기에) 바로 이순신에게 손을 들어주는것.. 이것은 또한 명나라에게도 커다란 이득인 것이다... 힘없는 선조가 조선의 왕이 되기 보다는 강력한 군대를 가진 이순신을 도와 그에게 왕의 자리를 주고 그 이순신의 군대로 하여금 후에 명(明)을 위협하는 오랑케를 견제 하자는것이다. 명나라의 문록(文錄)을 보면. 조선으로 건너간 명나라 장수 진린이 명나라 황제에게 올린 글에 의하면.. 폐하 이 전란이 끝나면 즉시 조선의 수군 통제사 이순신으로 하여금 요동으로 부르소서 그로하여금 북의 오랑케를 견제토록 하소서.. 이순신통제사는 능히 우리 명(明)의 후환을 없애줄것이라 신(臣) 진린은 굳게 믿사옵니다....등등) 이에 명(明)에서는 전란이 끝나면 이순신으로 하여금 그의 군대를 요동으로이동시키자라는 대신들의 논의(論議)가 있었음 알 수 있었다. 이는 이미 명나라에서는 전란이 끝나면 조선의왕 선조에게 우리 명(明)의 도움을 받았으니 조선도 명(明)을 도우라... 이순신으로 하여금 요동으로 오라하라. 이미 각본은 짜여 있었던 것이다. 이순신이 혁명을 하든 안하든... 이미 명나라에서는 훗날의 시나리오를 작성하고 있었던것이다. 그런데..... 이순신이 혁명이 아닌 죽음을 선택한것이었다. 왜였을까? 중국역사 조선의역사.. 아니 고금을 통틀어서 이와 비슷한일은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일에는 반드시 쿠테타든 혁명이든 일어나게 마련이다. 아니면 토사구팽이라도....그런데 이순신은 쿠테타도 혁명도 토사구팽도 모두 거절하였다. 이순신은 오직 죽음만을 선택 한것이었다. 이순신 과연 그는 모든것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이 내용에서는 명나라가 이순신장군님을 끌어드려서 북의 오랑캐(훗날 청나라)을 견제시킬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들은 단순히 이순신 장군께서 혁명을 이룩하면 조선이 발전되었을 거라고 단정을 내리곤 한다...물론 그럴수도 있었겠지만 국제정세란 매우 이해관계가 복잡한 일이다.. 이순신 장군께서는 어쩌면 그러한 모든것을 다 아셨는지도 모릅니다.만일 이순신장군이 혁명을 일으키고 명나라가 이순신을 도와줘서 낭떠러지에 몰린 조선왕선조와 조정대신(이순신의 반대파세력)들이 뜻밖에도 일본과 손을 잡게되고 비밀협약을한다면.. 과연 조선은 어떻해 되었을까 하는?혹시.. 이순신장군은 그러한 모든 과정까지도 생각하지않았을까... 왜냐하면 이순신장군은 너무나도 치밀한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들은 드라마를보고 흥분해서 가설을 내세우지만... 이순신장군님은 끝까지 냉정함을 잃지 않고 내가 무엇을 해야 되는가를 정확이 아셨던 분이십니다. 400년이 지난 지금 장군님께 질문을 던져 봅니다 장군님 당신은 다알고 계셨던 겁니까? 그리도 두려우셨읍니까? 조선이 피로 물들여질 거라는 걱정이 그리도 두려우셨읍니까? 그래서 죽음을 선택하신건가요? 2000년전의 예수 그리스도처럼... 장군님도 홀로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셨던 건가요?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며 모든일을 주관 하셨지만미약한 인간의 몸이셨던 장군님께서는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였으며... 얼마나 외로웠을까... 당신 앞에서 한줄기 눈물을 흘립니다...장군~~ 이순신 장군님에대한 책이 총32권... 그것도 한국 학자가 아닌 일본과 중국학자들에 의해 저서가 된 책...... 그들은 우리를 알려고 하는데.... 적어도 우린 저들을 모른다고 해도 우리역사에 대해서 만큼은 더 알았으면 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그분에 대해서 알고 있는지... 그분이 우리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씀이 무엇이 었는지...ps. 여긴 없는 내용이지만 러시아에 아주 유명한 해군사령관이 이순신에 대해 평가한적이 있습니다..그사람이 말하길 나와 이순신을 비교하지 마라..나와 그분을 비교하는것 자체가 그분이 욕보이는 것이다..이런말을 했습니다..러,일전쟁 당시 러시아함대를 대파한 일본의 함대사령관 또한 위와 비슷한 말을 했으며 그당시 러시아함대를 대파한 전법이 이순신을 연구하면서 알아낸 학익진이었습니다..이 한번의 교전으로 러,일 힘의 균형추는 일본으로 급격하게 기울어버렸죠..
성지순환작성일
2012-02-18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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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조선말기 사진
1895년
한성전기회사 [漢城電氣會社] 1898년에 전차·전등·전화 사업을 위하여 설립한 회사. 형식상 대한 제국의 회사
1890년 서울 종로
운종가의 태극기
운종가 점포
독일엽서의 조선점포
전차 개통 (電車開通)
최초의 전차 개통(電車開通)1899년
1904 제물포
마포
경복궁 건청궁(乾淸宮)1873년 창건
영국공사관 (イギリス公使館)1890년에 착공해 1892년에 준공했다
러시아 공사관 (ロシア公使館) 1896년 2월 고종이 여기서 1년간 머무룬다
한강 철교 (han江 鉄橋)1899년 9월 노량진과 인천 사이 경인선이 개통된 뒤 1900년 7월 한강을 가로지르는 최초의 철교가 완성되었다.
경성 우편국1900년 일본거류민 편의시설로 지금의 충무로2가 서울중앙전화국 부근에 건축되었다. 1905년 한일통신협정으로 서울 전체의 우편사업을 맡게 된다
덕수궁 함녕전(咸寧殿) 1897년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던 고종이 환궁하며 세운 전각인데, 1904년 화재로 소실돼 중건하였다.
대관정(大觀亭)1897~1898년 세워진 외국인 전용 호텔1905년에는 일본군 사령관저로도 사용되었다
세브란스 병원 (セブランス病院)1904년
고종의 행차(경운궁 대안문 앞, 1897)
한일병합이 있기 전에 조선의 근대화 과정의 모습
대한제국의 근대화입니다.
~행정~
1897년 관제개혁
1898년 의회 설립 (중추원 : 임명의원 25명, 민선의원 25명)
서울시청[한성부 청사]의 모습
1894년 경무청(警務廳) 창설.
근대경찰 제도 시작.
1895년 근대 소방시스템 도입
1895년 전국민 평등법 제정.
~교통, 통신~
1898년 전차개통
1898년 한성전기회사 설립. 전기보급시작
1899년 철도개통. (1899년 촬영)
1897년 착공, 1900년 개통된 한강철교
1884년 근대 우편제도 실시 (우체부)
1885년 電信 개통.
통신원 직원 기념 촬영.
1885년 電信 개통......1886년 전신교환원 사진
1903년 자동차 수입시작.
~의료~
1885년 서양의학 도입
(1904년 촬영, 세브란스병원)
(1907년 촬영, 대한의원)
박에스더(1877-1910)
최초의 여의사
1903년 제네바협약 가입. 적십자 활동시작.
~군대~
1881년 군제 개편
대한제국군복
신식 무기 도입(암스트롱 포)
1894년 사관학교 설립
(1900년 촬영, 해군사관학교)
1903년 신식군함 도입
~교육~
1883년 근대교육 실시
1883년 근대교육 당시의 교과서
1885년 서양시찰 유학생
1886년 여성교육 실시
1899년 외국어 전문학교 설립
~언론~
1883년 근대 언론 시작
(신문사의 모습)
1896년 민간 신문 발간
독립신문-한글판과 영어판으로 발간.
1898년 일간지 발행시작
1898년 민중집회 시작
만민공동회
~경제~
1902년 근대 화폐제도 실시
유통된 금화
1904년 은행권
1883년 전환국 설치. 근대화폐 발행시작.
1897년 보험회사 설립, 보험업무시작.
1897년 민간 자본은행 설립 , 1898년 대한제국의 채무 해결.
(한성은행)
충남 익산 금광
(1899년 촬영)
1895년 운산광산
1906년 공업전습소 설립. 공업개혁에 박차.
1899년 상업, 경제전문 일간지 창간
~외교~
1883년 미국에 외교사절단 파견
1888년 미국 워싱턴 주재 영사관 업무시작.
(사진은 1891년)
1907년 네덜란드에 특사파견
1900년 중명전 (외교사절 접견장)
~문화 예술~
근대 창작소설 출판(혈의 누.1906년)이인직 저서
1895년 영화관 개관(표관)
근대 공연문화 시작 (1895년 협률사 공연)
국립극장 원각사 (1908년)
~종교~
1886년, 종교와 선교의 자유 획득, 1898년 명동성당
1892년 신학교 설립
1898년 개신교 교회설립.
1890년 성공회 병원(성누가병원)설립.
샬트수녀원(1905년 촬영)
~SPORTS~
1906년 야구팀 설립.
1896년 축구팀 설립
1900년 골프장 건설.
1894년 필드하키(또는 격구)를 즐기는 사람들
면죄자작성일
2011-06-21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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