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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글터] [펌] 한국 역사 8대 미스터리
1. 고대 왕국 가야와 아유타국의 미스테리 삼국유사에서는 아유타국을 인도의 고대왕국이라고 밝히고 있고 아유타는 인도 이름으로는 아요디아(Ayodhya)이다. 아유타국은 주위가 5천여 리, 나라의 왕도는 20여 리의 성으로 둘러 싸여 있으며 곡식과 과일이 풍성하고 풀과 꽃들이 우거져 무성하였다. 그리고 기후가 화창하고 사람들의 풍습이 착하고 온순해 학예에 부지런했다고 한다. 이 나라의 영향력이 한 때는 인도 전역뿐 아니라 동남아시아 일대까지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먼 곳에서 가락국까지 올 수 있었을까? 서기 1세기 무렵에 바다는 그렇게 두렵기만 한 존재는 아니었던 것 같다. 대륙의 연안을 따라 바닷길로 이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허황옥이 인도를 출발하던 음력 5월에는 인도와 한반도를 잇는 해로는 바람과 해류가 북으로 올라가는 기간이다. 즉 그 바람은 계절풍이고 해류는 리만해류이다. 그래서 어떤 큰 이상기류를 가진 태풍만 만나지 않는다면 배가 무사해 항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허왕후가 인도의 아요디아에서 무작정 가락국에 와서 곧바로 왕후가 될 수 있었느냐는 의문이 생긴다. 아무런 사전교섭없이 바로 왕후가 됐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뭔가 그 전부터 이 두 나라간에 수많은 교섭이나 왕래가 있었기에 두 왕실의 합의에 의해 결혼이 성사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한가지 주목되는 것은 김수로왕이 죽고 난 후 가락국과 아유타국과의 교류가 갑자기 끊기게 된 점이다. 가락태조왕릉 중수비에 있는 이수는 우리나라 그 어느 비각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문양을 수놓고 있는데 태양빛 같기도 한 것이 중앙에 있고 그 주위에는 이상한 형체의 동물같은 것들이 새겨져 있다. 이것은 인도 아요디아의 태양왕조를 상징하는 붉은 바탕에 흰색의 깃발에 그려진 문양과 똑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수로왕릉 납릉 정문에 있는 신어상인데 이 상은 인도 아요디아의 관공서와 성문 그리고 저택 등에 조각된 것과 똑같은 모양이다. 이러한 일련의 흔적들은 황하문명권의 일부로만 인식되어 오던 우리의 역사가 실제로는 인도의 문명까지 흡수하면서 발전해 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2. 한국의 미스터리 - 첨성대 경주시 인왕동에 자리잡은 국보 제 31호 첨성대(瞻星臺). 동양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알려져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선덕여왕(632-647, 신라 27대 왕) 때 건립된 것이라 한다. 높이 9.17m에 밑지름 4.93m, 윗지름 2.85m이다. 첨성대의 용도에 대한 여러 학설이 제기되었지만 현재는 천문대라는 설이 유력하다. 하지만 첨성대에서 어떤 방법으로 별을 관측하였는지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첨성대가 해 그림자 길이를 재기 위한 규표(圭表)로서의 용도였다는 주장도 있었고, 정교한 기하학적 구조로부터 수학적인 비례 등을 나타내기 위한 수학적 상징물로 봐야 한다는 의견도 등장했다. 선덕여왕이 은밀하게 신하들을 만나던 장소라는 주장과 외계인이 남겨놓은 기념비라는 주장도 있었다. 이러한 첨성대에 대한 다양한 해석은 열띤 논쟁을 불러 일으켰으나 아직 어떠한 합의점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다만 원래 제단이 있었던 자리에 첨성대가 있었다는 점이나 신라의 천문관측 기록 등으로 미루어 보아 첨성대는 천문관측 외에도 종교적인 의식을 치르던 곳이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현대적인 의미의 천문대와는 다른 성격의 건축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랜 세월 모진 비바람을 견디고 그 자리를 지켜온 첨성대는 역학적 안정성, 미학적 곡선미 등을 두루 갖춘 온 세계의 소중한 문화 유산으로써 그 속에 담긴 의미를 풀어 나가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 아닌가 싶다. 첨성대를 보존하기 위한 정밀조사와 첨성대의 건립배경을 규명하기 위한 적극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3. 한국의 미스터리 - 운주사 와불과 천불천탑 운주사하면 천개의 불상과 천개의 탑이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석탑과 석불을 합쳐 100여개 남짓밖에 안 될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아마도 11세기 초반 운주사 창건 이후 수많은 전란과 재난에 의해 사라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80년대만 해도 이 운주사 돌탑과 돌부처 바로 앞까지 논밭이 있어서 이곳이 훼손될 수밖에 없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인근의 노인들에 의하면 인근 마을 사람들 중에 자기 집을 고치거나 새로 지을 때 이곳 돌부처와 돌탑을 가져다 쓰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이니 옛기록이 그저 허황된 것만은 아닌 듯 싶다.석불좌상의 높이는 12.73m이고 석불입상의 높이는 10.30m인데 이 두 석불은 대체로 북쪽 다리 부분이 남쪽 머리 부분보다 약 5도 높고 입상쪽이 좌상쪽보다 약 5도 높게 경사져 있다. 이 와불은 다른 곳에서 만들어 이곳에 옮긴 것이 아니라 산 정상에 있는 암반에 그대로 조각한 것이다. 문제는 고려 초기 당시에 어떻게 이 무거운 불상을 일으킬 생각을 했었느냐는 것이다. 아니면 이곳의 다른 불상들처럼 파격적인 모습을 구상하여 처음부터 하늘을 보고 누워 있는 불상을 조각했는지도 모른다.일반적으로 석가모니가 열반할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측와불은 인도나 스리랑카 쪽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형태는 운주사의 와불과 현격한 차이가 있다. 인도나 스리랑카의 측와불은 석가모니가 누워서 손으로 턱을 괴거나 받친 상태인데 운주사의 와불은 그저 정면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또 좌상과 입상의 다리 부분에는 떼어 내려고 했던 흔적으로 보이는 틈이 있다. 암반에 불상을 조각하고 떼어 내는 공정을 마치지 못한 미완성 불상으로 일부에서는 추측하기도 하지만 처음 불상을 조각한 후 생긴 흔적인지, 아니면 후대에 사람들이 나름대로 의미를 두면서 세워 보려고 만든 흔적인지는 단정지을 수 없다.운주사에는 천개의 불상과 천개의 탑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현재 석탑은 모양을 제대로 갖춘 것이 18기 가량밖에 남아 있지 않다. 운주사 입구에 보이는 구층석탑, 칠층석탑, 특이하게 생긴 원형다층석탑(연화탑), 원형석탑(실패탑), 오층석탑(거지탑), 원구형석탑(항아리탑) 등이 있다. 이 석탑들은 몇가지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먼저 전형적인 우리나라 석탑형식으로 탑신과 옥개석이 네모 반듯한 모양을 이룬 것과 탑신이나 옥개석이 원형을 이룬 것, 벽돌로 쌓아서 만들어진 전탑 형식, 지대석 위에 기둥 형태의 거친 석재를 얹어 놓은 형식 등이 있다. 운주사의 이 탑들이 이렇게 모양이 제각각인 이유는 무엇일까? 운주사는 창건에서 폐사까지 3~4차례의 중수가 있었는데 이 시기마다 새로운 석탑들이 세워지면서 모습이 서로 달라진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운주사에 또 하나의 수수께끼는 칠성석(七星石)이다. 운주사 입구에서 바라보면 운주사 서편 산 중턱에 놓여져 있는 칠성석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일곱 개의 자연석을 원형으로 다듬어 배치했는데 그 모양은 북두칠성의 형태와 똑같다. 그래서 운주사는 일반 불교사찰이 아니라 칠성신앙과 관련된 도교사찰이 아닌가 하는 막연한 주장이 제기되어 왔었다. 이 칠성석의 직경, 원반끼리의 중심각, 각 원반 중심간의 거리, 돌의 위치와 두께 등이 현재 북두칠성의 밝기나 위치와 똑같은 비례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칠성석의 이러한 천문학적 가치를 인정하더라도 누가, 왜, 하필 운주사 서편 산 중턱에 만들었는지, 또 천불천탑과의 관계 등 궁극적인 의문에 대한 대답은 할 수 없는 실정이다. 4. 한국의 미스터리 - 팔만대장경 6년의 제작 기간 중에 판각기간은 약 12년 정도이다. 연도에 따라 판각량은 달랐지만 이 12년 동안에 81,340여판, 글자는 5200만 자 가량을 어떻게 판각하였는지 의문이다. 아주 숙달된 각수로 하여금 옛날 방식으로 대장경판을 판각시켜 보았더니 하루에 20여자를 넘지 못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당시 판각에 참여한 각수를 추정해 보면 약 593명이 된다. 그러니까 593명의 각수가 하루도 거르지 않고 12년동안 판각만 했다는 이야기다. 593명의 아주 능숙한 각수가 존재했었는지에 대해선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리고 매년 고르게 판각한 것이 아니어서 어떤 해에는 약 1,500명 이상의 각수가 참여했었다는 결론이 나오기도 한다.흔히 강화도에서 제작되어 그 곳의 선원사 보관되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것이 어째서 현재의 해인사로 오게 되었는가? 거기에 대한 자료가 많지 못해서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는데 그것들을 살펴보자. 강화도가 아닌 남해나 거제도 등에서 새겨서 해인사로 가져왔다는 주장도 있으나 조금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대장경판이 원래 두 벌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 주장은 한 벌은 남해나 거제도에서 나무를 가져와 해안사에서 새겼고 또 하나는 서해안과 남해안에서 나무를 실어다가 강화도에서 새긴 것으로 보고 있다. 이것은 판각 위치나 옮겨온 경로에 대한 문헌의 기록과도 맞아 떨어지고 있다. 그러나 한 벌을 새기는데도 많은 국력이 동원되었는데 두 벌이나 만들 수 있었을까하는 의문이 있다. 5. 한국의 미스터리 - 거북선 거북선이 과연 철갑선이었는지는 아직까지 논란의 대상이다. 거북선이 철갑선이라는 말은 일본 기록에 많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의 수군장이 된 구끼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의 전함은 거북선 이외에도 모두 철로 감싼 전함이 많이 있다고 했다. 이외에 많은 일본 기록에서 거북선이 철갑선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기록에 거북선이 철로 장갑되어 있다는 기록은 없다. 이순신의 장계나 난중일기에도 칼 송곳을 꽂았다고는 되어 있으나 철로 덮었다는 기록은 없으며 조카 이분의 '충무공행록'에도 나무로 뚜껑을 씌우고 칼을 꽂아 적이 뛰어들 수 없게 했다고만 되어 있다. 이 때문에 학계에서는 거북선이 철갑선은 아닐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현재 각종 모형에 제시된 바와 같이 거북선의 용머리가 길게 위로 솟아 올라 있었는지도 의문이다. 용머리에서 대포를 쏘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정조 때 발간된 "이충무공전서"에 나오는 용머리의 크기(길이 133cm, 폭 93cm)로는 포를 설치하기에는 좀 작아 보인다. 이순신의 장계나 난중일기에는 용의 입으로 현자포를 치켜 쏜다고 되어 있으며 왜장을 사살한 전공도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임진란 당시 거북선의 용머리는 현재 모형보다 크고 거북선 선수부에 밀착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충무공전서에는 거북머리에서 유황연기를 뿜어 적을 혼미케 한다는 기록이 있는데 용머리의 기능이 포탑에서 연기 방출용 굴뚝으로 바뀐 것이 언제인지도 알 수 없다. 게다가 내부의 밀폐된 공간에서 수십개의 포를 발사하여 발생한 엄청난 양의 연기를 어떻게 처리하였는지도 의문이다. 6. 한국의 미스터리 - 조화의 극치, 석굴암 깊이 14.8m, 높이 9.3m의 석굴 안에 본존불이 모셔져 있다. 이 석불은 1.58m의 좌대 위에 3.26m의 거대한 불상으로 굽타 양식으로 만들어 졌다. 석굴암의 제작에 사용된 화강암은 무려 3000여톤에 이른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지금으로부터 1300년 전에 세워진 이 석굴이 기하학적으로 완벽한 설계에 의해 만들어 졌다는 점이다. 석굴의 평면은 반지름 12척(3.3m)으로 정확한 원을 이루고 있으며, 입구의 너비나 본존 석불의 높이 역시 반지름이 12척으로 되어 있다. 옛날엔 하루의 길이를 12시간으로 보았는데 이것은 하루의 길이와 일치한다. 그리고 원은 1년 365일을 상징하는 것으로 본다. 석굴암이 뛰어난 것은 천연 동굴이 아닌 인공굴 안에 만들어 졌으며, 구형, 삼각형, 사각형, 팔각형 등의 기하학적 구성에 의해 완벽한 조화와 통일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본존불의 좌대 방향은 방위각 117도(동으로부터 남으로 27도 방향)라고 하고 본존불은 좌대를 기준으로 동에서 남으로 4도가 틀어져 있다고 한다. 즉, 현재 본존불은 방위각 121도로 되어 있다. 이것은 일제가 수리공사를 할 때 본존불을 들어올리다가 잘못해서 그 방향이 틀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그 이유는 본존불과 좌대를 만들 때 애시당초 그 방향이 틀렸을 리 없고 본존불을 들어올리다가 뒷부분에 금이 간 모습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주의 일출 방위각을 보면 동지 때는 119도, 춘·추분 때는 약 90도, 하지 때는 약 60도로 나타나는데 석굴암의 본존불에는 사시사철 햇빛이 들어왔다는 이야기가 된다. 석굴암 아래에는 토함산 골짜기에서 내려오는 물을 받아서 마시는 감로수대가 설치되어 있다. 이 물은 석굴암 내의 본존불상 바로 밑부분을 타고 내려오는 물줄기라고 한다. 그 물줄기는 인조 석굴을 떠받치는 암반 사이를 흘러 석굴암 내의 습도를 조절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는데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석굴암을 완전히 해체하여 보수공사를 하면서 석굴암의 외벽과 밑을 시멘트로 짓이겨 놓고 물줄기도 석굴암의 바깥쪽으로 돌려 놓았다고 한다. 일제시대와 광복 후 후손들의 손에 의해 석굴암은 그 원형을 상실하고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해 버렸다. 우리는 아직도 예전 석굴암의 건축 원리를 알지 못한다. 1000여 년이나 원형대로 보존될 수 있었던 옛 선조들의 석굴암 건축 비법이 신기하기만 하다. 7. 한국의 미스터리 - 마이산 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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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가부장의 짐을 떠안고 가는 대한민국 남성들
가부장의 짐을 떠안고 가는 대한민국 남성들기자들이 항상 치열하게 취재하는 건 아닙니다. 우연찮게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심지어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흥미로운 기삿거리가 나오기도 합니다. 이번에 취재한 김치녀 기사 역시 시작은 친구들과의 술자리였습니다. 연애와 결혼 이야기가 한창인 30대 초반, 역시 대화의 절반은 여자 이야기였습니다. 한 친구가 자신의 소개팅 경험담을 털어놓기 시작합니다.철수(가명) : 여자한테 먹고 싶은 것 없냐고 물어보니까 스파게티를 먹자고 하더라고. 잘 아는 곳이 있다면서 날 데리고 가. 그런데 스파게티 하나에 2만 원이 넘어. 와인까지 시키니까 금세 10만 원이야. 그러더니 커피는 자기가 사겠다고 생색을 내는 거야. 정이 떨어져서…민수(가명) : 그러게. 요즘 여자들이 그래. 나랑 연봉도 비슷한데 만나면 다 남자보고 내래. 그런 여자 조심해야 돼. 남자 등쳐먹고 사는 여자 많아. 요즘 세상에 결혼하면 집은 남자보고 해오라고 하고.특별할 것도 없습니다. 남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자주 나오는 대화입니다. 제가 남자라서 그럴까요. 충분히 불합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경제 능력이 거의 비슷한데, 왜 남자가 데이트 비용을 부담해야 하는지, 같이 결혼하는 데 왜 남자가 집을 마련해야 하는지, 남자 부모들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등골이 남아나질 않는지 억울한 게 사실입니다. 그 때, 다른 친구가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영철(가명) : 그래서, 가만히 있었어? 더치페이 하자고 그러지, 왜?철수 : 어떻게 그러냐. 얼마나 쪼잔 해 보여. 너 같으면 할 수 있겠냐?영철 : 자기가 얘기도 안 해놓고 뒤에서 욕하기는…철수 : 야, 내가 돈 낼 때 옆에서 “같이 내요!” 이러면 얼마나 예뻐? 안 그러냐? 그런 건 자기가 알아서 눈치보고 해야지.철수의 화법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철수는 데이트 비용이 남자가 부담하는 걸 매우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현실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는 논리적인 근거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걸 여자한테는 당당히 말할 수가 없습니다. 남자답지 못하기 때문에, 속된 말로 ‘쪼잔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니 저 역시도, 남자들 대부분이 이럴 것 같습니다.한 번 취재해볼까 마음먹고 인터넷을 살펴봤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들이 한 두 개가 아니었습니다. 기사 제목에 ‘군대’란 말만 붙어도 댓글 수천 개가 붙습니다. 대부분 여성을 욕하는 말들입니다. 군대도 안다녀온 게 남자한테 빌붙어서 산다, 여자도 군대 가야 한다느니, 이런 식의 비난들입니다.대놓고 여성을 혐오하는 사이트들도 많았습니다. 일부 사이트에선 여자는 3일에 한 번 씩 때려야 한다는 뜻의 ‘삼일한’같은 말들이 공공연히 쓰이고 있었습니다. (더 심한 말도 많았지만 성적인 단어가 대부분이라 생략하겠습니다.) 이 곳 안에서 자신이 여성임을 밝히는 것은 금기나 마찬가지였고, 여성임이 발각(?)되면 차단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특히, 눈길을 끄는 용어가 ‘김치녀’란 말입니다. 과거 ‘된장녀’가 명품백이나 커피를 즐기는 사치스런 여성을 지칭했다면, 이 ‘김치녀’는 남녀 관계에서 수반되는 비용들, 가령 데이트나 결혼 비용을 남성에게 과도하게 전가시키는 여성을 뜻합니다. 한국 여자가 과도하게 이렇다는 뜻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 ‘김치’와 결합됐다고 합니다. ‘된장녀’에 비해 좀 더 관계 지향적인 표현인 셈이죠. 인터넷에선 이 ‘김치녀’를 혐오하는 댓글이 넘쳐납니다. 그렇다면 전문가들은 이런 여성 혐오 현상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요. 여성 단체 활동가, 여성학 전공 연구원, 심지어 여성 범죄에 대한 구체적인 취재를 위해 프로파일러도 만나봤습니다.우선, 불경기를 주목하는 분석이 있었습니다. 경기가 안 좋으면, 혹은 부가 제대로 배분되지 않으면, 그 분노를 사회적 약자에게 쏟아낸다는 겁니다. 부의 분배가 제대로 되지 않는 현실이나 그 구조적 문제점, 정부나 기업 등 분배의 주체를 욕하는 게 아니라, 그 부를 가져가는 약자에 대해 비난을 쏟아낸다는 이른바 ‘희생양’ 이론입니다. 러시아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을 겨냥한 스킨헤드 범죄와 비슷하다는 논리입니다. 과거 집에서 일만하던 여성이 적극적으로 사회에 진출해 남성의 부를 뺏어가고 있다는 위기의식 때문에, 약자인 여성을 공격한다는 식입니다.하지만, 단순히 경제적인 면에 국한시킬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사실 경기가 좋을 때도, 이런 일은 충분히 있었습니다. 다만, 그 땐 인터넷이 충분히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표면화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습니다. 오히려 경제적 배경 보다 인식의 문제가 더 중요하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여성에 대한 제도적 차별이 없어지면서 남녀가 평등해졌다는 ‘착시’가 있다는 겁니다. 사법시험, 행정고시 등 여성 수석 합격자가 다수 나오고 대통령까지 여성이 된 마당에 무슨 남녀 차별을 논하느냐는 거죠. ‘유리천장’은 말 그대로 보이지가 않으니, 남성들에게 더더욱 체감하기 어렵다는 겁니다.뭐가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제가 만난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이런 공감대가 있었습니다. 남성들도 피해자란 사실입니다. 앞서 말한 철수의 화법을 예를 들어 보죠. 데이트 비용을 온연히 남자가 부담하는 현실에 대해 뭔가 잘못됐다는 건 알고 있는데, 막상 데이트 자리에선 섣불리 말을 하지 못합니다. 네가 먹은 건 네가 내라, 이렇게 당당히 말할 수 있는 남성은 많지 않습니다. 가부장 사회, 남성은 여성을 부양하고 보호해야 한다는 무언의 압력이 끊임없이 작용하고, 남성은 여기에 부담을 느끼면서도 억지로 지킬 수밖에 없는 현실인 셈입니다. 다만, 할 수 있는 거라곤 집에 가서 컴퓨터를 켜고 댓글에 ‘김치녀’ 욕하면서 푸념하는 게 전부겠죠. 결국, 경제적으로 여성을 부양해야 한다는 가부장적 사회의 피해자가 남성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남성이 여성을 차별한 그 짐을 고스란히 남성이 이고 가야 하는 씁쓸한 현실인 거죠.예상 외로 제가 만난 여성학자들이 이런 점을 충분히 공감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댁의 김치는 안녕하십니까’란 대자보를 붙인 여학생도 인터뷰를 하면서 이런 말을 하더군요. 남자들도 참 살기 힘든 시대라고요. 우리는 여성을 혐오하는 남성을 그 적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남성과 여성을 모두 힘들게 만든 가부장 사회의 한계를 지적하고 싶었다고요.치열한 사건 사고 현장에서, 혹은 정부가 하는 브리핑이나 기자 회견에서 벗어나 긴 호흡으로 얽히고설킨 여성 혐오 문제를 취재하고, 많은 전문가를 만나 차분히 얘기를 들은 것만으로도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방송 화법의 한계, 더 명확히는 재주 없는 기자의 글 솜씨 탓에 의도가 제대로 전달되진 않았던 것 같지만, 앞으로 기자 생활 하는 데 자양분이 될 것 같습니다.끝으로 한 여성학자의 말로 결론을 갈음합니다.“이제 여성학은 차별받는 여성 뿐 아니라 차별받는 남성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남성이 처한 현실을 정확히 이해하자는 거죠. 김치녀와 같은 여성 혐오 현상은 여성 뿐 아니라 남성도 가부장 사회의 피해자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남성의 짐을 덜어주는 게 진정한 양성 평등의 시작이라는 문제의식과 더불어 여성학 내부에서 이와 관련된 연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최근 일련의 여성 혐오 현상은 여성학에 이런 식의 과제를 제시해 준다는 점에서, 마냥 사회 역행의 사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경원 기자leekw@sbs.co.kr출처 : http://news.naver.com/main/ranking/read.nhn?mid=etc&sid1=111&date=20140319&rankingSectionId=102&rankingType=popular_day&rankingSeq=1&oid=096&aid=00002968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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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펌]연쇄 살인마 유영철
지난 9월2일 ‘신동아’ 편집실로 자신이 영화계 올 상반기 최고 히트작 ‘추격자’의 실제 주인공이라는 사람이 찾아왔다.‘추격자’는 언론은 물론 일반인 사이에 희대의 연쇄살인마 유영철 사건을 모티프로 만들어진 영화로 알려져 있다.그렇다면 그는 도대체 누구인가?영화 속 주인공은 출장마사지 아가씨를 차례로 죽이는 사이코패스 ‘지영민(하정우 분)’과 온갖 고초 끝에 그를 잡아 경찰에 넘긴 업소 사장이자 포주인 ‘엄중호(김윤석 분)’ 둘뿐. 엄중호가 구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지만 끝내 살해된 윤락녀 미진(서영희 분)이 여자 주인공 격이지만 기자를 찾아온 사람은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였다.유영철은 지금 사형선고를 받아 감옥에 있고, 남은 사람은 영화 속에서 그를 잡은 포주뿐. 영화 제목이 ‘추격자’이므로 엄밀하게 이 영화의 주인공은 연쇄살인범이 아니라 이를 찾아서 잡은 ‘엄중호’다. 신동아를 찾아온 남자는 자신을 전직 출장마사지업소 사장이자 유영철을 잡은 사람이라고 소개했다.극중 엄중호가 바로 자신이라는 얘기였다. 그러면서 2004년 8월 유영철을 검거한 공로로 경찰로부터 받은 감사패와 포상금 500만원의 내역이 든 통장사본을 내밀었다.감사패엔 그의 이름 ‘정연재(38)’와 ‘연쇄살인범 유영철을 검거하는 데 큰 공을 세웠으며 경찰 발전에 기여한 공로가 인정되므로 감사패를 수여한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당시 이 사건 수사를 총지휘했던 ‘서울지방경찰청장 허준영’씨의 이름도 보이고 청장 직인도 찍혀 있다.정씨는 자신을“영화 주인공 중호처럼 전직 출장마사지업소 사장이었으며, 자신이 고용했던 아가씨 3명이 유영철에게 납치돼 죽임을 당했다”고 말했다.그래서 “영화 내용처럼 직접 납치범을 찾아 나섰고, 유영철을 잡았다”고 주장했다.“모두 밝히겠다”기자가 “당신이 영화에 나온 것처럼 정말 포주였단 말인가, 그렇게 써도 괜찮은가”라고 물으니“써도 좋다. 당시엔 그랬지만 지금은 개과천선했다. 내 이름과 과거는 밝혀도 되지만 얼굴은 가려달라”고 부탁했다.자신이 포주 출신임을 당당하게 말하는 것도 뜻밖이었지만, 자신의 이름을 밝혀도 좋다는 말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껏 살인마 유영철 사건에 대한 언론 보도는 검거 이후 경찰의 수사상황, 즉 그의 여죄를 밝히고 엽기적 살인행태를 밝혀내는 데 집중됐다.검거까지의 상황은 경찰 입장에서 씌어진 게 대부분이다. 당시 경찰이 낸 보도 자료에는 ‘노씨 등 업소 사장들의 제보로 경찰과 제보자 등이 함께 잡았다’라고만 적혀있을 뿐, 실제 그들이 어떤 사람이며 검거와 수사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선 자세히 밝히지 않았다.그도 그럴 것이, 당시 포주에다 건달이었던 제보자들이 언론 앞에 나선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었다.유영철 사건이 한창 인구에 회자되던 시절, 기자들이 그렇게 찾아 헤맸던 ‘제보자’가 제 발로 찾아오니어안이 벙벙했다. 그런데 정씨는 왜 4년이 지난 지금, 그것도 자신의 자랑스럽지 못한 전직과 이름까지 밝히며 ‘신동아’에 인터뷰를 자처한 것일까. 그에게 직접 이유를 물었다.“영화 ‘추격자’가 개봉된 후 부모님은 물론 주변 친지, 옛 동창에게서 ‘야! 저거 네 이야기 아니냐’며 연락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영화를 보니까 각색이 되긴 했지만 영락없이 제 얘기더군요.제가 서울경찰청으로부터 감사패와 포상금을 받고 주변에 자랑을 했거든요.더욱이 포상금은 바로 어머니 통장으로 들어갔고요. 칭찬도 많이 들었습니다.결정적으로 영화에 나오는 포주 엄중호의 승용차 재규어 XJ6가 내 차와 똑같습니다.요즘 잘 구할 수도 없는 차인데 그 차가 영화에 나왔어요.그러니 주변 사람들은 영화 속 주인공이 나라고 믿을 수밖에요.근데 문제는 그 영화 덕분에 제 전직이 ‘포주’였다는 사실이 들통 난 겁니다.영화 도입부분엔 악덕 포주로 묘사됐죠.실제 저는 그만큼 나쁜 사람은 아닌데…. 정말 부모님과 친지, 동료들에게 얼굴을 못 들겠어요.그런데 충무로 영화판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으니 영화사 측이 유영철에게 저작권료 명목으로 5000만원을 줬다는 겁니다. 피가 거꾸로 솟더군요. 어떻게 그런 살인마에게….게다가 제 주변인들이 영화를 보면 딱 나인 줄 알도록 영화를 만들면서 어떻게 제게 상의 한번 안 하냐고요. 그래서 영화사를 찾아가 항의했죠. 그랬더니 영화사 측은 숫제 그 영화가 유영철을 소재로 한 영화가 아니라는 겁니다.자기네들이 언론에 홍보하며 ‘유영철 영화 맞다’고 그래놓고는 이제 와서 딴 얘기를 하는 겁니다.그래서 열이 받아 언론사로 온 거죠. 이럴 바에야 다 밝히겠다고.”영화의 실제 모델인 까닭▼ 영화 ‘추격자’가 선생님을 모델로 했다는 증거가 있습니까. 당시 경찰 발표에는 제보자가 노씨라 돼 있는데.“노씨는 당시 제가 잘 알던 동생이죠.그때 유영철을 잡은 사람은 저와 노씨를 포함해 업주 3명과 제가 아는 동생(건달) 2명, 이렇게 5명입니다. 경찰도 1명 있었죠. 감사패와 포상금을 같이 받았어요.제가 제일 큰형뻘이었고, 저는 검찰과 국가정보원의 정보원 노릇을 오래 한데다 감옥을 자주 들락날락해서(폭력 혐의) 형사들 세계와 수사방법을 잘 압니다.사실은 제가 다 리드를 했죠. 실제 실종된 아가씨를 찾으러 직접 재규어 차를 몰고 다닌 것도 저였고△ 유영철이 아가씨가 마음에 안 든다고 했을 때 아가씨를 바꿔가며 보낸 장면△ 아가씨를 불러 이리저리 약속장소를 바꾸며 거리에서 만나는 행태△ 제가 사라진 아가씨의 휴대전화에 찍힌 번호를 가지고 각 출장마사지업소 사장과 보도방 주인들을 수소문해 유영철이 범인임을 밝혀낸 장면△ 사라진 아가씨의 차가 발견되는 장면△ 유영철을 잡은 후 지구대에서 벌어진 일들△ 극중 엄중호가 경찰에게 형사 행세를 하는 장면△ 지구대에서 실랑이가 있을 당시 유영철과 우리를 기동수사대장이 와서 인수해가는 장면△ 제가 지구대와 경찰서에서 유영철을 마구 팬 장면△ 마구 패는 데도 경찰은 모른 체하며 그냥 놓아두는 장면△ 희생자 중엔 실제 제가 좋아했던 여자친구도 끼어 있었고△ 연쇄살인의 결정적 증거를 제가 밝혀내는 장면…오히려 경찰이 유영철을 증거불충분으로 그냥 풀어줬다, 업주가 유영철을 집까지 쫓아가 격투 끝에 잡았다, 검거 과정에 경찰이 전혀 배제됐다는 등 몇몇 장면과 설정만이 실제와 다릅니다.”우선 정씨가 경찰이 말하는 제보자가 맞는지 확인작업부터 벌이기로 했다.그래서 당시 유영철을 직접 심문하고 조사했던 전 서울경찰청 기동수사대장 강대원씨와 수사담당자이자 검거 현장에 있었던Y 형사에게 정씨가 제보자가 맞는지, 감사패와 포상금 지급 사실이 있는지에 대해 확인을 요청했다.돌아온 답변은 “제보자 5명 중 한 사람이 맞고, 유영철을 검거한 공로로 서울경찰청 차원에서 감사패와 포상금을 전달한 게 사실”이라는 것이었다.Y 형사가 당시 작성한 진술서에도 정씨의 이름이 보인다.그런데 서울경찰청에 확인한 결과, Y 형사가 제보자들에게 전달한 감사패는 서울경찰청 차원에서 수여한 공식 감사패가 아니라 기수대(기동수사대)가 감사 차원에서 만든 사적인 것이었다. Y 형사는 “그들이 잡은 유영철은 단순 납치범이었고, 그 후 그의 연쇄살인죄를 모두 밝혀낸 건 경찰이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포상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그들의 공적은 분명히 있다”고 말했다. 포상금 500만원에 대해 서울경찰청 수사과는 확인을 거부했다. 영화 ‘추격자’의 제작사인 ‘비단길’ 관계자는 “정씨가 영화가 나온 후에 항의하러 왔었다.그러나 ‘추격자’는 딱히 유영철을 모티프로 만든 영화라 할 수 없다.다른 연쇄살인범들의 이야기들이 조금씩 섞여 있고, 거기에 작가의 상상력이 합쳐진 완전 픽션이다. 정씨의 이야기와 일부 겹친 부분들이 있다는데 우린 전혀 모르는 내용이다.차량과 일부 겹치는 내용은 우연일 뿐”이라고 반박했다.그리고 유영철에 대한 저작권료 지급 부분에 대해선 “절대 그런 일은 없었다.정씨든 유영철이든 저작권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영화‘추격자’엔 유영철 사건과 다른 픽션부분도 적지 않게 들어가 있는 게 사실.하지만 ‘비단길’ 측은 영화가 흥행에 성공한 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 영화가 유영철을 모티프로한 영화임을 시사하는 발언을 한 적이 있고, 또 ‘유영철을 모티프로 한 영화’라고 기사를 쓴 언론에대해 이의를 제기한 적이 없다. 분명한 사실은 영화 ‘추격자’를 본 당시 사건 관련자(담당 기자들 포함) 들은 ‘유영철 사건’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심지어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검사조차 유영철 사건을 회고하는 글에서 “실제 모습과(영화가) 너무 다르게 나와 실망스러웠다”는 표현을 했다.그렇다면 2004년 7월 당시 정씨와 유영철, 경찰 간에는 실제 무슨 일이 있었을까.2004년 7월26일 발표된 최종 수사 결과와 이후 경찰청에서 발간한 유영철 사건 백서에 나온 유영철의 범죄 사실은 2003년 9월부터 서울 강남, 종로 일대 고급 주택에 사는 부유층 노인 등 8명을 망치로 때려 살해하고, 다음해인 2004년 3월부터 7월 중순까진 출장마사지사 등 여성 11명을 토막 살해했으며, 그 외에 서울 황학동에서 노점상 1명을 불태워 죽이고, 동대문구 이문동에서 여성 1명을 칼로 찔러 살해하는 등 총 21명을 죽인 것이다.그 외에 경찰을 사칭해 출장마사지사 등에게 금품을 갈취한 사건이 두 건 더 있다.“납치신고 경찰이 무시”영화처럼 당시 경찰 수사도 마지막 연쇄살인 피해자, 즉 11번째 사라진 출장마사지사로부터 시작됐다.정씨는 사라진 출장 마사지사를 찾으러 나서, 11구 시체에 대한 현장검증에 참여할 때까지 사흘 밤낮 동안 지구대와 서울경찰청 기수대에서 유영철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그런데 정씨가 말하는 당시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경찰이 발표한 자료와 상충되는 부분이 적지 않게 발견된다.경찰이 밝힌 당시 유영철의 검거 경위를 보면, 경찰은 2004년 7월14일 밤 9시쯤 ‘출장마사지사 임모양(당시 29세)이 이틀 전인 7월12일 밤에 011▼ XXXX▼ 5843번 휴대전화를 쓰는 남자로부터 전화를 받고 일을 나간 뒤 사라져 이틀간 나타나지 않는다’는 제보를 처음 접하고, 다음날인 15일 새벽 4시30분쯤 ‘5843’이 다시 뜨자 제보자들과 함께 15일 새벽 5시20분쯤 유영철을 검거했다고 쓰여 있다.▼ 출장마사지사들이 사라졌다고 처음 경찰에 신고한 게 언제인가요. 경찰의 설명대로 7월14일 밤이 맞나요.“아니지요. 그 보름쯤 전인 7월1일 먼저 납치 신고가 있었어요. 그날 저녁 때쯤 서울 강남구 역삼동 업소에서 일을 나간 아가씨가 경찰 단속에 걸렸다고 연락이 왔어요. 수갑을 차고 경찰서로 끌려간다면서요. 관할 강남·서초경찰서에 확인해봤죠. 그런데 그런 사실이 없대요. 1,2시간 후에 그 아가씨에게 ‘지금 택시를 타고 가는데 납치를 당했다. 도와달라’고 연락이 왔어요. 그래서 ‘납치됐는데 어떻게 전화를 했느냐’고 물었더니 ‘그놈이 지금 차 세워놓고 오줌 싸러 갔다’고 그러더군요. ‘그럼 택시기사에게 도움을 청해라’고 했더니 ‘한패야, 같은 놈들이야’라고 해요. 그러다 ‘온다온다’ 하곤 전화가 끊겼어요. 이후로 아가씨는 연락이 되질 않았죠.우리도 더 어떻게 찾을 수 없어 잊어버렸죠. 그때 경찰관이 휴대전화 위치 추적을 하고 그 휴대전화에 대한 수사를 제대로 했더라면 적어도 3명의 목숨은 살릴 수 있었을 텐데. 납치는 아니라도 경찰관 사칭죄라도 적용할 수 있었는데 말입니다.”사건이 밝혀진 후의 경찰 기록을 보면 이 아가씨는 그날 밤 11시쯤 경찰로 위장한 유영철에 의해 그의 오피스텔로 납치 당해 토막살해됐다고 적혀 있다.유영철은 이 사건 뒤로 7월9일과 7월13일 두 명의 출장마사지사를 더 살해했다.유영철 검거 작전▼ 경찰 기록에는 경찰이 7월14일 밤 마지막 피해자인 임씨의 첩보를 미리 입수하고 수사를 하고 있었다는데 실제는 어떻습니까?“그것도 사실과 다릅니다. 후에 그렇게 짜 맞춘 거죠. 임양은 그 이틀 전 밤에 일을 나갔는데 안 들어와서 처음엔 그런가보다 했죠. 이쪽 아가씨들이 그런 일이 자주 있거든요. 그런데 다음날 같은 방을 썼던 출장마사지사 김모양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오빠, 어제 임양이 내 차를 타고 갔는데 글쎄 차가 강서구 화곡동에서 문이 열린 채, 짐도 다 없어진 채 발견됐어. 아무래도 찜찜해. 임양 어떻게 된 것 같아’라는 내용이었죠.그날 비가 억수같이 내렸어요.(영화에서도 그랬다) 저는 그때 납치라고 직감했습니다.임씨말고도 같은 방을 쓰던 장모씨가 지난 4월에 이상한 말만 하고 없어진데다 그 보름 전에 역삼동 아가씨 사건까지 있은지라 단순가출 사건이 아니라고 판단한 거죠. 그래도 저는 그때까지 유영철이 연쇄살인마인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아가씨를 납치하고 감금해서 변태 짓 하는 놈인 줄만 알았지.다음날인 14일 저녁에 서울시내 출장마사지업 하는 후배들을 르네상스호텔로 모두 소집했어요.사실 제가 그쪽 바닥에선 큰형님 격이라 부르면 다 옵니다.그리고 전화 건 손님들 휴대전화 번호를 일일이 비교했죠. 그랬더니 역삼동에서 납치됐던 아가씨를 부른 손님, 즉 경찰관을 사칭한 놈이랑 임양을 부른 손님 휴대전화 번호가 똑같더라고요. 그래서 얘기했죠.같은 번호 뜨면 바로 연락하라고요.강남경찰서에 아는 형사에게 전화를 해 휴대전화 위치추적을 부탁하고 신고를 했더니 다음날 아침에나 올 수 있다는 겁니다. 납치된 아가씨가 어떻게 될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결국 아가씨가 죽었잖아요.”▼ 그런데 이 사건을 수사한 건 서울경찰청 소속 기수대였잖습니까.“제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그런데 15일 새벽 2시쯤에 신촌 쪽 업소 후배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5843’ 떴다고(영화에선 ‘4885’). 제가 지시한 내용을 깜빡하고 아가씨를 내보냈는데, 손님이 너무 크고 글래머라 싫다며 다시 돌려보냈다는 겁니다.후배에게 그놈이 어떤 여자를 원하느냐고 물었더니 아담하고 예쁜 아가씨를 보내달라고 했다는 거예요. 나중에 유영철에게서 들은 이야기지만 자기는 시체를 토막 내기 편하게 키가 작은 여자만 골라서 불렀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일단 업소주인에겐 그놈에게 ‘우리가 원하는 애를 준비할 테니 시간이 좀 걸려도 기다리라’고 그렇게 전하라고 했죠.그러고 저는 후배들에게 전화를 돌렸습니다. 신촌 인근의 서강지구대로 모이라고.그리고 그놈을 유인할 마사지 아가씨로 차 주인인 김씨와 또 다른 아가씨 1명을 데려갔죠.기수대 Y 형사는 당시 집이 경기도 구리 쪽인 줄 아는데, 서강지구대로 가면서 전화를 했어요.그때 Y 형사에게 전화한 사람이 바로 경찰이 제보자라고 한 노씨입니다. 제 친한 후배기도 하고. 평소 Y 형사와 친했습니다.”▼ 당시 수사 담당자였던 Y 형사의 진술서에 보면 자신이 미리 현장에 도착해 유영철의 검거를 지휘하고 지시했다고 돼 있는데요.“아닙니다. 저도 그거 봤는데 사실이 아니에요. 지구대 김모 경장이 현장에 나가 수갑을 채우고 했는데, 어느새 노씨의 전화를 받고 온 Y 형사가 와서 수갑을 또 채우더군요. 거기(진술서) 보면 Y 형사가 자기가 검거 때 미리 도착해 있었고 지구대에 가서 자기이름 말하고 경찰관을 불러 붙잡으라고 제게 시켰다고 돼 있지만, 실은 그게 아니고 다급했던 제가 지구대에 직접 가서 ‘강남경찰서 강력반 정 경위인데 납치범을 잡는 데 지원해달라’고 했던 거죠. 영화처럼 경찰 사칭했어요. 그랬더니 김 경장이 바로 지원하더라고요. 다른 분은 바쁘다고 하는데 그 분만 잽싸게 사복으로 갈아입고 나왔어요.유영철 사이에 둔 경찰 간 다툼어쨌든 유영철은 우리가 유인하러 보낸 두 번째 아가씨는 못생겼다고 또 싫다고 돌려보내고, 세 번째 아가씨는 장소를 계속 이리저리 바꿨어요. 우린 이미 멀리서 그의 얼굴을 본 상태였죠.그 유명한 신촌 그랜드마트 뒷골목에서 유영철과 딱 마주쳐서 격투 끝에 잡았죠. 유영철은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격렬하게 저항했어요. 후배들도 많이 맞고 저도 맞았어요.전 가져갔던 야구방망이로 유영철의 허벅지를 몇 번 내려쳤어요.그러니까 좀 조용하더군요. 그런데 붙잡히는 순간 입에 뭔가를 급하게 집어넣고 씹는 게 보였습니다. 그 래서 입을 열려고 했는데 완강하게 거부해 제가 인근 식당에서 숟가락을 가져와서 파냈죠. 입 안에서 피와 출장마사지 안내 전단 한 뭉치가 나왔어요.그게 자백의 주요 증거가 됐습니다. Y 형사는 그때 우리가 유영철을 억지로 승용차에 태우고 난 뒤에 왔죠.”이에 대해 Y 형사는 “4년 전 사건이라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격투를 한 사람은 다른 경찰이었지만 미리 연락을 받은 것은 맞다. 내가 쓴 진술서가 다른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라고 반박했다.▼ 영화를 보면 지구대에서 경찰들 간에 유영철의 신병 인계를 두고 서로 실랑이를 벌이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직도 경찰은 터무니없는 낭설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요.“지구대에 간 뒤 바로 유영철을 숙직실에 몰아넣고 목을 우선 한 대 갈겼죠. 푹 주저앉더군요. 이후에 얼굴을 흠씬 두들겨 패줬죠. 나중에 기수대 사무실에서도 많이 팼어요. 유영철이 당시 언론에 모자를 푹 눌러 쓰고 얼굴 전체를 마스크로 가려서 안 보였지만, 당시 눈과 코 입 등 얼굴 전체가 제게 맞아서 멍이 시퍼렇게 들었죠.그래 놓고 제가 다짜고짜 물었습니다. ‘아가씨들 다 어떻게 했어’라고요. 근데 그놈 입에서 뜻밖에도 ‘제가 안 죽였어요’라는 말이 튀어나와요. 깜짝 놀랐죠. 그래서 조금 더 팼더니 ‘강남과 서울 인근에서 죽은 부잣집 노인들은 자기가 다 죽였다’는 거예요. 그러고는 아가씨들을 포함해서 모두 28명을 죽였대요.술술 불기 시작했죠. 제가 엄청 무서웠나 봐요. 사시나무 떨듯 떨었으니까요.그놈은 기수대에 가서도 내게 28명을 죽였다고 했는데, 나중에 경찰과 검찰 수사결과와 재판이 끝난 걸 봐도 21명만 죽인 걸로 돼 있더라고요.근데 숙직실 문이 조금 열려 있었는데 그걸 들은 지구대 직원들이 몰려들어왔고, 그때부터 난리가 났죠. 당시 모든 경찰의 수사력이 집중돼 있던 서울지역 부유층 연쇄살인범이 지구대에 잡혀온 거니까요. 지구대에서 바로 마포경찰서 윗선에 보고했어요. 조금 있으니까 Y 형사의 부름을 받은 서울경찰청 소속 기수대 형사들도 몰려왔고요.제 기억으로 분명히 양쪽이 유영철을 두고 서로 밀고 당기고 시비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마포서에서 누구인가 계급 높은 분이 의경들을 데리고 들어와 유영철과 저희를 마구 때렸습니다.기수대 형사들도 일부 맞았던 걸로 기억나네요. 그러더니 강대원 기수대장이 와서 상황을 일거에 정리하고 지구대에 인수증을 써준 후 유영철과 우리를 싹 다 데리고 갔습니다. 영화에서 나온 것처럼 말입니다. 다른 건 영화에는 기수대장이 경찰 정복을 입고 왔는데 실제는 사복을 입고 오셨죠.강 대장님이 그중 제일 계급이 높았어요.”‘살인백서’강대원 전 기수대장은 이에 대해 “도착하기 전 상황은 잘 모르겠지만 인수증을 써주고 유영철과 제보자들을 데리고 나온 것만은 확실하다”며 “당시 유영철을 붙잡은 지구대 김 경장과 기수대 Y 형사가 공평하게 모두 1계급 특진을 했다. 그러면 된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그런데 그의 말을 듣고 있노라니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Y 형사는 분명 제보자들에게 공식 감사패를 주지 못한 이유에 대해 “잡을 땐 연쇄살인범인지 모르고 납치범인 줄 알았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후에 연쇄살인 수사에 참여하지 않은 지구대 김 경장은 어떻게 특진을 한 것일까.하지만 강 전 대장은 “검거경위야 어떻게 됐든 간에 연쇄살인 사건은 나와 Y 형사 등 기수대가 수사해서 밝힌 것만은 분명하다”고 몇 번씩 강조했다.유영철은 지구대에서 기수대로 옮겨지면서 정씨에게 “내가 다 불면 니들이 다 감당이나 할 수 있겠느냐”며 거드름을 피웠다고 한다. 정씨가 아직 경찰관인 줄 안 것이다. 유영철과 동갑인 정씨가 “너 같은 건 쥐도 새도 모르게 파묻어버린다”고 하자 유영철은 “모두 28명을 죽인 게 맞다”고 거듭 밝혔다. 기수대로 옮겨진 유영철은 정씨가 형사가 아닌 것을 알자 말을 바꾸기 시작했다.“유영철은 기수대에 도착하자 제일 높은 사람이 오면 말하겠다고 했어요.강 대장님이 직접 심문에 참여해 자백을 이끌어내고 노인 살해사건 현장검증을 갔는데 실제 범인만이 할 수 있는 말과 행동을 해서 범인이란 확신을 주더니, 마지막엔 다시 번복하고 그런 식이었죠.예를 들면 범행 내용을 쭉 설명하다 ‘그런데 그 집 대문 앞에 노란 폴리스 라인이 쳐져 있더라고요’라고 말해, 주변 사람들을 까무러치게 하는 식이었습니다. 결국 현장검증에서 자신이 한 모든 행동이 TV를 보고 재연했다는 것 아닙니까.이후 기수대 내부에서조차 연쇄살인범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간부가 생겨났죠.살인범이 확실하다는 강 대장님을 비웃었어요. 그런데 그 비웃던 간부가 잘못해서 중간에 유영철이 탈출했어요. 화장실에서 그 간부를 밀치고 빠져나간 겁니다.저는 그때 유영철이 예전에 절도로 붙잡혔을 때 도주 경력이 있는 만큼 ‘각별히 조심하라’고 직원들에게 충고까지 해줬습니다. 저도 ‘별’을 많이 달아봐서 척 보면 알죠.” ▼ 유영철이 기수대에서 탈주한 동안 엄마와 여동생을 만났다는 게 사실입니까. “예. 저는 (유영철에게) 그렇게 들었어요. 엄마와 여동생이 자기가 사는 오피스텔에 가서 함께 살인에 쓰인 온갖 연장을 다 가져다 버리고 목욕탕 청소도 깨끗이 했답니다. 다른 것도 증거가 될 만한 건 버릴 것 버리고 했다는 거죠. 아무리 가족이라도 그렇게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걸 알고서 증거를 훼손할 수 있을까요?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그런데 제가 유영철에게서 직접 들은 이야기인데요. 그때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사람을 죽일까 살인백서를 만들어놓은 게 있는데 그것도 내다 버렸대요.거기엔 자기가 지금껏 어떻게 죽였고 피해자가 어디에 묻혔는지도 기록돼 있다는 거예요.” ▼ 살인백서 이야기 좀 자세히 해주시죠. “유영철이 한 얘기를 그대로 전하면, 처음에 노인들을 죽일 때에는 아무 이유도 순서도 없이 죽였지만 핏자국이 찍힌 버팔로 운동화 자국과 CCTV에 나온 자신의 뒷모습이 발견되고 수사망이 좁혀오는 것 같아 조금 더 체계적으로 살인할 결심을 했다는 거죠.100명을 죽이려고 했답니다.그래서 노트에 살인 계획을 적고 그대로 실행한 뒤 그에 대한 소감을 써 넣었답니다.길게는 2개월, 짧게는 수일간 업소 아가씨를 손님으로 만나서 한 번에 수백만원씩 줘가며 환심을 산 후에 그 아가씨가 가족이 없거나 없어져도 찾을 사람이 없다고 확인되면 그때 죽였다는 거죠.거기엔 살해방법, 해부법도 쓰여 있고, 장기(臟器) 등을 먹는 방법이나 시체를 유기하는 시간대, 장소를 자세히 기록해놓았답니다. 유영철이는 ‘이게 세상에 밝혀지면 대한민국이 발칵 뒤집힌다. 너희가 감당할 수 있겠느냐’며 비웃었습니다.” “그 밑에 네 애인 묻혀 있어” ▼ 사건이 검찰로 넘어간 후 재판과정에서 유영철이 사람의 간을 먹었다는 얘기가 나왔는데요.기사화도 됐고. 사실입니까. “제가 유영철에게 ‘넌 어떻게 그렇게 맞은 상처가 빨리 아무냐’고 농담조로 물었더니 그놈이 피식 웃으며 ‘사람 간을 먹어서 그렇다’고 말해요. 그래서 제가 ‘me친놈’ 그랬더니 생간을 먹으면 몸이 진짜 가벼워진대요. 심지어 심장도 믹서로 갈아서 먹어봤는데 근육 같은 게 씹혀서 못 먹었답니다.인간이 아니라 완전히 짐승이에요.”강대원 전 기수대장은 엄마와 여동생의 증거 훼손에 대해 “사실이지만 가족이라 죄가 성립하지 않았다.그래서 처벌을 못했다. 살인백서 이야긴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그리고 유영철이 간을 먹은 것에 대해선 충격적인 증언을 들려줬다. “이젠 써도 안 되겠습니까. 당시엔 워낙 민감해서…. 유영철은 당시 진술을 하면서 2004년 6월 중순 살해한 아가씨의 간을 처음 먹었답니다.유영철에겐 예전부터 간질 증세가 있었는데 혹 간을 먹으면 괜찮아질까 하고 먹었는데 후에 실제 몸이 많이 좋아지자 그 다음부터는 간을 빼 먹으려고 사람을 죽였답니다.심지어 냉장고에 보관까지 해놓고 먹었다고 합니다.” 실제 당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부검에서 마지막 피해자 사체 4구에서 간이 발견되지 않았다. ▼ 유영철은 아가씨를 만나면 바로 죽였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다른 말씀을 하시네요.“대부분은 만난 후 바로 살해했는데 아가씨 주변에 자신을 추적하거나 의심할 인물이 있다고 생각되면 그걸 다 알아낸 다음 죽였어요. 유영철이 후에 내 이름을 듣고는 내 신상을 줄줄 꿰더라고요.내 여자친구에게서 다 들었다고 하더군요.마지막 피해자 임모양과 제 여자친구였던 장모씨(2004년 4월 살해), 그리고 임씨에게 마지막 날 차를 빌려주고 후에 유영철 검거 때도 참여한 김모씨 이렇게 3명이 같은 방에 살았잖아요. 저는 장씨가 사라졌을 때 그냥 내가 싫어서 떠났나 했죠. 근데 한 10일 동안 부산이라며 전화가 4통이나 왔어요. ‘오빠랑 비슷한 사람 만났는데 너무 좋다. 결혼하겠다’고 했어요. 알고 보니 유영철이 장씨를 협박해서 저에게 전화하게 만든 거였죠. 장씨가 내 얘길 다 해줬나 봐요. 마지막 희생자 임양도 유영철을 서너 차례 만난 후에 죽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임씨, 장씨와 같은 방에 살던 김씨가 기수대에서 유영철과 마주쳤는데 ‘네가 김OO이지. 너 논현동에서 강아지랑 살지. 다음엔 네 차례였어, 이년아’ 그러더군요. 소름이 쫙 끼쳤습니다.결국 자기의 존재를 알 만한 아가씨들은 차례로 다 죽이려 했던 거죠. 나중에 봉원사 근처에서 사체발굴을 할 때였는데, 유영철이 평상에 앉아 있는 나를 보고 ‘야, 너 조심해 그 밑에 네 애인 묻혀 있어’ 그러는 겁니다. 파보니 진짜더군요.‘왜 얘만 떨어져 따로 묻었느냐’고 물으니‘걔가 죽을 때 마지막 소원을 말해보라고 하니 지는 나이도 어리고 해서 외롭지 않게 사람들 많이 오가는 곳 밑에 묻어달라고 해서 그렇게 해줬다’고 하더군요.정말 당장 때려죽이고 싶었지만 겨우 참았습니다. 이후로 우린 기수대 근처도 못 갔습니다.그때 우리가 그놈을 잡지 못했다면 얼마나 많은 아가씨가 죽어나갔을지….” ▼ 영화에서 보면 ‘지영민’이 “니가 살아서 돌아가야 하는 이유가 있으면 말해봐”라는 대사가 나오는데 혹 실제 유영철이 그런 말을 아가씨에게 한 적이 있답니까. “아가씨들 죽이기 전에 ‘네가 살아야 하는 이유를 세 가지만 대라, 들어보고 이치에 맞으면 살려준다’고 했대요. 그놈 말로는 살아야 될 필요가 있는 아가씨가 하나도 없더래요. ‘다 쓰레기’라고 그러더군요.” 공범의 전화, ‘너 누구야’ ▼ 유영철이 이혼한 부인에 대한 분노 때문에 여성을 죽였다는 설이 있는데요.“제가 본 유영철은 옛 부인에 대한 애정이 상당했어요. 자기 아들 자랑도 했고요.당시 사진에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유영철이 쓴 마스크 코 부분에 ‘아빠’라고 쓰여 있었어요.나중에 감옥에서 나와 동거했다가 떠난 여자가 이쪽 일을 하던 사람이었다는 소문이 있는데, 잘 모르겠습니다.” ▼ 혹 그때 유영철을 직접 접촉했던 민간인이 또 있나요. “예. 김씨요. 유영철이 다음 차례로 죽이려 했다는 그 아가씨. 마지막 희생자 임씨에게 차를 빌려준 방 메이트요. 그 사람은 어쩌다 자장면을 그놈이랑 같이 먹게 됐는데, 이후에 자장면은 입에도 안 댄답니다.” ▼ 그분이 기수대에 왜 왔죠? “기수대에 도착한 유영철이 계속 살해 부분에 대해 오리발을 내미니까 마냥 체포한 채 둘 수 없어서 어쨌든 다른 죄목을 만들어야 했는데요. 2004년 2월에 유영철이 위조한 경찰관 신분증으로 제 업소 기사와 아가씨에게서 39만원을 뜯어간 적이있어요. 일단 공무원 자격 사칭과 강도 혐의로 그놈을 경찰에 묶어두면 되겠다고 꾀를 냈죠.그래서 바로 그때 피해를 본 제 승용차 기사와 김씨를 부른 거죠.물론 김씨가 그때 피해를 본 아가씬 아니지만 다급해서 그때 피해를 본 것처럼 위장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정말 놀라운 일이 벌어졌어요.” ▼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제가 유영철이 체포될 때 가지고 있던 물건을 보니까 지갑과 여성용 아가타 시계, 휴대전화, 뭐 이런 게 있었는데 그놈은 그걸 모두 길에서 주웠다고 거짓말을 했거든요. 그런데 제가 형사들과 지갑을 살펴보니까 이상한 금목걸이 같은 게 묶여 있어요.김씨가 기수대에 왔길래 ‘이게 뭔지 아느냐’고 물었더니 그 자리에서 땅을 치며 대성통곡을 하더니‘이거 임OO 거야. 내가 사준 금발찌야.’ 처음엔 전 김씨가 연극을 하는 줄 알았어요.그런데 진짜래요. 시계도 임씨 것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때부터 수사가 급물살을 탔죠.유영철이 꼼짝없이 걸린 거죠.그래도 끝까지 오리발을 내미는 유영철을 강 대장님이 신경전 끝에 박살낸 일화는 잘 알려진 거구요.” ▼ 휴대전화는 누구 겁니까. “다른 여성의 것이었어요. ‘5843’ 말고요. 유영철의 진짜 자기명의 휴대전화는 뒷자리가 ‘1818’로 따로 있었죠. 그놈은 뭐가 그리 불만인지 e-메일 ID도 1818이고 뭐 번호 써야 할 게 있으면 모두 1818이에요. 심지어 아가씨 몸 대부분을 17~18토막 냈어요(경찰백서).그런데 그때 그 휴대전화로 벨이 울린 거예요. 일단 전화를 받았죠.그런데 상대편에서 웬 남자가 ‘영철아’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전 엉겁결에 ‘그래’ 그랬죠. 그랬더니‘야, 우리 또 한 건 해야지’ 그래요. 제가 가만히 있었더니 그쪽에서 ‘너 누구야’ 그러더니 전화가 딱 끊겼죠. 그때 확신했죠. ‘공범이 있구나’ 하고.” 엇갈리는 수사진과 제보자 증언 ▼ 경찰은 당시 최종적으로 단독범행으로 결론 내렸는데요. 공범이 있다는 증거가 또 있습니까?“우리가 최초로 신고했던 강남구 역삼동 아가씨 말입니다. 유영철이 경찰관 행세하며 단속한다며 납치해 죽인 아가씨 말이에요.그때 그 아가씨가 전화를 했을 때 택시기사도 한패라고 그랬잖아요.저는 그놈이 휴대전화로 전화를 건 사람이라고 확신합니다. 증거는 또 있어요.제 업소 기사가 2004년 2월에 경찰관을 사칭한 놈에게 아가씨를 데려다줬다가 단속에 걸려 돈을 뜯겼다고 했잖아요. 그때 제 기사가 모텔 밑에서 차를 대기하고 유영철을 기다리던 사람을 봤대요.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유영철이 이 어마어마한 범행을 혼자 저질렀다고 보지 않습니다.”강대원 전 대장은 “당시 공범이 있는지 백방으로 수사했지만 혐의를 발견하지 못했다”며“정씨가 하는 말의 대부분은 신빙성이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정씨는 이에 대해 “우리는 5명이다. 김씨도 다 들었다. 어떻게 내 말이 거짓말일 수 있느냐”고 항변했다.기자는 유영철 사건 당시 제보자 5명을 모두 만나보려 했지만 정씨를 제외한 4명 중 3명은 이러저러한 죄를 짓고 감옥에 있었다.김씨는 정씨의 진술에 대해 “틀린 부분이 없다”고 동의했다. 강 전 대장은 “유영철 사건에는 내 인생과 형사생활 30년의 희로애락이 담겨 있다.내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본 영화와 책이 곧 나온다.가제목은 ‘형사 25시’다. 거기에 담긴 게 진짜 유영철 사건의 진실”이라고 했다.과연 누구의 말이 옳은 것일까. 어쨌든 유영철 사건은 영화‘추격자’때문에다시 한번 세간의 화제가 되고 있다.------------------------------------------------------------------------------------------요약1정씨 = 유영철 실제로 잡은놈정씨가 신문사에 고백을 한 이유: 영화 추격자가 정씨의 일화나 마찬가지.(△ 표시가 영화의 엄중호와 현실의 정씨가 겹치는 부분.)'추격자' 저작권료 명목으로 살인마 유영철에게 5천만원 지급했다는 소문을 듣고 빡쳐서영화제작사에 항의하러 갔는데 '추격자'는 유영철이 모티브가 아니라고 돈 안줌ㅋ(홍보할때는 유영철이 모티브라고 홍보ㅋ)다 잡았더니 유영철 살인마 아니라고 옹호하며 기수대장 비웃은 기수대 간부 = 영화에선 검사로 표현그 기수대 간부가 방심한 사이 유영철 탈주함.정씨가 유영철을 죽일듯이 줘패버림유영철 사시나무 떨듯이 ㄷㄷㄷ 떨음살인백서 - 살해방법, 해부법도 쓰여 있고, 장기(臟器) 등을 먹는 방법이나 시체를 유기하는 시간대, 장소를 자세히 기록- 기수대 간부 덕분에 탈주해서 증거 인멸.택시기사-공범으로 추측됨.-유영철이 여자 데려갈때 밑에 대기하고 있던 택시-유영철에 납치되서 간신히 연락을 한 아가씨가 말하던 '택시기사도 한패'-정씨가 유영철 핸드폰 들고 있을때 걸려온 전화엄마와 여동생- 공범으로 추측됨.- 증거 인멸때 범행에 이용된 도구와 목욕탕 청소를 깔끔히 하고 살인백서를 내다 버림.- 증거인멸은 사실이지만 가족이라 죄가 성립 안된다함.
벚꽃엔딩작성일
2013-08-25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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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1948년 천조국 공군의 위엄, 베를린 봉쇄
엔하위키에서 퍼왔습니다. 베를린 봉쇄1948년부터 49년까지 소련이 서베를린에 대해 단행한 전면적인 물자공급봉쇄조치. 의미를 확장하면 이 봉쇄조치를 무력화시키기 위한 미국의 대규모 공수작전까지 포함한다.소련의 봉쇄제2차 세계대전으로 독일이 무조건 항복을 한 이래 승전 4개국(미·영·프·소)은 독일을 4개로 쪼개어 분할점령 및 통치를 하고 있었다. 그 중 베를린은 소련 점령지역 한복판에 있었지만 수도라는 특성상 역시 4등분된 상태였다.그러나 대전 말기부터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한 동서 양 진영의 갈등은 46년 이후로 극에 달하면서 날이 갈수록 첨예해졌다. 소련은 마셜 플랜을 바탕으로 하는 미국의 유럽재건부흥계획을 탐탁치 않게 여겼으며,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3개국이 공동대응을 하는 것에 위기감을 느꼈다. 당연한게, 독일 영토는 승전국끼리 거의 비슷하게 나눠먹었는데 소련을 제외한 나머지 셋이 합쳐버리면 밸런스가 확 기울어버리니까….이같은 소련의 우려는 1948년 3월에 현실화되었다. 미영프 3국이 자신들의 점령 지역에서 쓰이는 표준화폐로 독일 마르크화를 채택하며 서독의 경제단위를 통일시키자 소련은 연합국 공동관리위원회에서 탈퇴하는 것으로 응수했다.뒤이어 마르크화가 서베를린에서 사용되기 시작하자, 소련은 4개국 공동 베를린 행정위원회를 폐지했으며, 6월 18일에 서베를린으로 향하는 모든 도로와 철도를 봉쇄하고 소련 점령당국의 특별한 허가를 받지 않으면 통행을 엄금했다. 21일에는 미군의 군수물자 수송용 기차마자 회선시켰으며 22일 소련 점령지역에서 쓰일 새 화폐 오스트마르크화를 발표했다.24일에 이르러서는 최소한적으로 이뤄지던 생필품의 공급마저 전면적으로 중단되었고, 동독 지역에서 서베를린으로 이어지는 송전도 일제히 차단되었다. 당연하게도 이 모든 것은 모스크바에 있는 강철의 대원수 동지의 결정이었다.스탈린에게 있어서는 봉쇄는 매우 합리적이며 온건(…)한 정책이었다. 재래식 군사력의 우위가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 핵개발을 하지 못한 소련으로서는 서방과의 새로운 전쟁은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다. 더군다나 지난 전쟁으로 2천만이 넘는 국민이 죽고 서부 국토가 초토화된 소련으로선 종전 3년만에 더 벅찬 전쟁을 치른다는 건 선택하기 너무 어려운 문제였다. 그러나 향후 서방과의 관계나 독일 문제에 있어 연합국보다 우위를 차지할 필요성은 있었고, 때문에 서베를린을 봉쇄하는 평화로운(…) 대안으로 이를 관철시키려 했다.이로서 인구 200만의 대도시 서베를린은 졸지에 굶주리게 되었다. 당장 서베를린에 있는 물자는 36일치의 식량과 45일치의 석탄에 불과했고 그나마도 봉쇄 소식이 알려지면서 시장에서 자취를 감추고 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기 시작했다.미국의 역습봉쇄 사실을 통보받은 연합국은 매우 당황했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와 영국 모두 독자적으로 뭘 어떻게 해볼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기에 결국 연합국 진영의 맹주인 미국의 결단만을 기다려야 했다.미국도 상황이 좋지 않다고 보고 있었다. 실제 백악관의 각료회의에서 대부분의 각료와, 합참의장 오마르 브래들리 대장마저 베를린 봉쇄를 피할 수 없으며 베를린에서 철수해야 한다고 진언했다.여기에는 미국 역시 소련과 전쟁을 할 상황이 절대 아니라는 점이 감안되었다. 당시 서베를린을 포위한 소련군 병력만 50만이었고, 동독에 전개한 소련군 전체규모는 상상을 초월했다. 반면 미국과 영국은 종전 후 급속한 감군으로 병력 규모가 크게 줄어서 무력으로 봉쇄를 풀기 힘들었고, 무엇보다 서방 역시 소련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전쟁은 피하고자 했다.대규모 공수작전이 대안으로 제시되었으나 일 평균 3,600톤의 물자를 서베를린으로 공수해야 한다는 보고에 다들 꿈도 희망도 잃어버렸다. 설사 공수작전을 감행한다 해도 필요한 물자를 충분히 공급할 수 있을지조차 미지수였으며 수송기들이 중간에 소련기의 방해를 받을 수도 있었다.그러나 해리 트루먼은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베를린 공수 강행을 공군에 지시했다. 작전 개시한편, 1948년 당시 미국 유럽공군사령관은 바로 그 악명높은 석기시대 매니아였다. 르메이는 다행히 소련과 동독을 석기시대로 만들라고 하진 않고 [그런데 만약 소련이 수송대를 방해하려 했으면 이 인간 진짜로 대대적인 폭격에 나설 준비 다 하고 있었다] 전세계의 C-54 조종사들한테 전한다. 지금 즉시 독일로 날아오도록!이라는 명언을 남기며 현장에서의 공수작전을 진두지휘했다.르메이는 C-54라고 언급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작전 첫 날, C-47 수송기 32기가 제1차 수송에 나섰으나 그렇게 옮긴 물자가 꼴랑 82톤(…)이라 망했어요. 거기다 유럽공군 탈탈 털어 나오는 C-47 수송기는 달랑 100여대. 망했어요 망했어요.르메이는 여유가 있는 모든 수송기들의 증원요청과 함께 본국에 더 크고 아름다운 대형 수송기 C-54의 대규모 투입을 요청했던 것이다. 아울러 자기는 이런 대규모 수송작전에 소질이 없다며 태평양 전선에서 같이 종군하며, 인도에서 중국으로의 항공수송작전을 총괄 지휘했던 윌리엄 터너를 적임자로 천거했다.여튼 르메이의 요청을 받아들인 워싱턴은 가용 가능한 모든 수송기의 총투입을 약속, 7월 1일에 마침내 C-54의 첫 작전 투입이 이루어졌다.그리고 천조국 물량 전설이 시작되었다.작전개시 단 1달만에, 작전에 투입된 미군 수송기는 1,000여 대에 육박하고 있었다.(…) 미국은 대전 후 쓸데가 없어서 퇴역시켜 창고에 짱박아두고 있던 수송기들을 모조리 꺼내고(…) 퇴역한 예비역 파일럿들을 재소집시키기 시작했다. 아울러 서독과 서베를린 지역에선 구 독일군 출신 정비병들까지 총소집해 작전중인 수송기의 정비활동을 지원했다.7월 초가 되면 이미 미국의 1일 공중수송능력은 500톤으로 급증했고, 8월이 되면서 1천톤은 가뿐히 넘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때를 같이 하여 르메이가 전략공군사령관으로 영전하며 소련을 석기시대로 만들 준비하고 윌리엄 터너가 유럽공군사령관이 되면서 효율성이 빠르게 개선되었다.새해가 되면서 미국의 먼치킨적 물량은 소련을 충격과 공포로 몰아 넣었는데, 1월에만 171,000톤, 2월에 152,000톤, 3월에 196,223톤의 물자가 각각 공수되었다. 이 수치는 베를린 시민들이 생활을 하고도 남아서 비축(…)이 가능할 정도의 양이었다. 4월에는 극에 달해서 아예 부활절 단 하루동안 미국은 수송기 1,383소티를 투입해 서베를린에 13,000톤(…)의 물자를 때려박는 이벤트를 보여주었다. 이 시점에선 생필품이 아니라 쵸코렛과 사탕, 껌과 커피같은 기호품마저 덤으로 실려지는 판국이었으니…. 아예 애들 사탕 등 간식류만 수송해주는 수송기 소티마저 할당되어 있었다.(…)이 어처구니 없는 물량전을 본 강철의 대원수는 어이를 상실했다. 미국의 공수를 방해하고 봉쇄를 유지하려면 전투기를 동원해 직접 요격하는 방법뿐이었지만 이 짓은 미국과의 전면전쟁을 의미했기에 도저히 선택할 수 없었고, 결국 5월 12일 봉쇄령이 해제되었다.그럼에도 미국은 소련이 훼이크를 쓸지도 모른다고 생각, 공수작전을 다섯달이나 더 하다가 10월 1일에 공식적으로 작전을 종료했다.결과결국 베를린 봉쇄는 대실패로 끝나고 오히려 미국의 가공할 경제력과 동원력만을 재입증시켜주고 말았다.제6군에 200톤씩 보급해주겠다던 돼지랑은 비교가 안된다. 오히려 베를린 봉쇄로 인한 미국의 공수작전은 서방세계의 화려한 선전현장이 되었을 뿐이었다.오히려 미국에선 이를 계기로 대소 강경파가 득세하기 시작했으며, 공수 기간 중 벌어진 1948년 대선에서 트루먼이 듀이에 대역전승을 거두게 되는 이유 중 하나로도 거론되고 있다.이 작전기간동안 미국은 사고로 수송기 18기를 잃고 40여 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아래 사진은 당시 공수작전의 무대였던 베를린 템펠호프 공항에 있는 사망자 위령비.그들은 베를린의 자유를 위한 1948~49년의 항공수송작전에서 목숨을 잃었다.작전무대였던 템펠호프 공항은 통일 이후 이용객이 급감하면서 2008년 폐쇄되고 철거를 시작했다. 그러나 공항 철거에 있어서도 베를린 공수 당시의 의미있는 현장이라며 반대해 시민투표를 할 정도였고, 실제 공항이 폐쇄되는 날 마지막으로 공항을 이륙한 이벤트 기체는 공수작전 당시 투입된 기체 중 하나였던 DC-3 수송기였다.
M2HB작성일
2013-05-17추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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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kf-16
제작준비단계 파생형
YF-16
2기의 단좌 YF-16 프로토타입은 경량전투기(LWF)경쟁을
위해 제작되었다. YF-16초도기는 1973년 12월 13일 Fort Worth에서 출고되었으며 1974년 1월 21일 뜻하지 않게 초도비행을
완수한 데 이어 1974년 2월 2일 예정된 "초도비행"을 실시했다. 두번째 프로토타입은 1974년 3월 9일 초도비행을 실시했으며
YF-16 양 프로토타입은 Northrop YF-17프로토타입에 대항해 기종선정비행에 참가했다.
LWF프로그램에서 재명명된 공중전투기(ACF)프로그램에서
F-16이 승리했다.
F-16 FSD
1975년 1월, 공군은 시험과 평가를 위해 8기의 실물개발(FSD)
F-16 - 단좌 F-16A 6기, 복좌 F-16B 2기 - 을 발주했으며 FSD F-16A 초도기가 1976년 12월 초도비행을 실시했고
1977년 8월 8일 FSD F-16B 초도기가 비행을 실시했다. 수년간 이 기체들은 다양한 조사, 개발과 수정 연구 프로그램을 위한 시험실증기로
운용되었다.
주요 제작 파생형
F-16A/B
F-16A(단좌)와 F-16B(복좌)는 초기에
Westinghouse의 AN/APG-66 펄스 도플러 레이더와 14670lb, 후연소시 23430lb를 출력하는 Pratt &
Whitney의 F100-PW-200엔진을 장착하고 있었다. 미 공군은 674기의 F-16A와 121기의 F-16B를 구매했으며 1985년 3월
인도가 완료되었다.
Block 1
초기블록(Block 1/5/10)은 각 블록 사이에 상대적으로
작은 차이점이 특징이었다. 대부분은 이후 1980년대 초에 Block 10형상으로 업그레이드되었으며 94기의 Block 1, 197기의
Block 5, 312기의 Block 10기체가 제작되었다. Block 1은 흑색으로 도색된 원추형 두부 (nose cone)를 장착한 초기 제작
모델이다.
Block 5
Block 1의 흑색 원추형 두부는 장거리에서 명백한 시계 식별
단서가 된다는 점이 발견되었으며 원추형 두부의 도색이 Block 5기체에서 저 시계 회색으로 전환되었다. F-16 Block 1의 실행중 빗물에
동체 내 어떤 지점에 축적된다는 것이 발견되었고 Block 5기체에서 전방주익과 미익 수평타 구역내 배수구를 만들었다.
Block 10
1970년대 말 소련이 두드러지게 티타늄 수출을 감소시키자
F-16의 제작업체들은 알루미늄을 사용했다. 새로운 방식은 또한 파형 알루미늄이 에폭시면에 접합되었으며 초기 기체에서 운용된 알루미늄 벌집의 에폭시면
접합의 구 방식을 대체했다.
Block 15
F-16에서 최초의 주요변화인 Block 15기체는 더 커진
수평안정장치를 특징으로 하며 chin형 흡기구에 2개의 화기접점이 추가되었고 AN/APG-66(V)2레이더로 개량되었으며 주익 하부 화기접점의
기능이 증대되었다.
Block 15는 또한 Have Quick 2 보안용 극초단파 무선장비를 장착했으며 새로운 화기접점의 추가중량에
대응하기 위해 수평 안정장치가 30%가량 커졌다. Block 15는 F-16의 가장 다수의 파생형으로 983기가 제작되었다. 마지막 기체는
1996년 태국에 인도되었다.
Block 15 OCU
1987년부터 Block 15기체는 디지털 통제면을 갖춘 개량형
F100-PW-220터보팬을 장착하고 작전기능업그레이드(OCU)표준형으로 인도되었다. AGM-65 Maverick, AIM-120 AMRAAM과
AGM-119 Penguin미사일 발사기능과 대응장비, 조종사 업그레이드, 컴퓨터와 데이터 버스 개량을 특징으로 하며 최대 이륙중량은
37500lb로 증대되었고 총 214기의 기체와 일부의 Block 10기체가 이 업그레이드로 제작되었다.
F-16 ADF
F-16방공전투기(ADF)는 미국 주방위공군의 전투기 요격 임무에
활용된 Block 15의 특수파생형으로 1989년 270기의 동체변경이 시작되었다. "bird-slicing" IFF안테나를
갖춘 피아식별장비(IFF)를 포함해 항공전자장비가 업그레이드되었고 야간식별을 위해 조사등이 전방과 조종실 하부에 장착되었다.
이는 AIM-7 Sparrow 공대공미사일을 장착한 미국만의
유형으로 1994년 이 기체들은 새로운 F-16C파생형으로 대체되기 시작했으며
2005년까지 North Dakota주방위공군만이 이 기체를 운용했다.
Block 20
중화민국(타이완)이 F-16C/D Block 50/52 기능의
대부분 - 개량형 AN/APG-66(V)3레이더, AGM-45 Shrike, AGM-84 Harpoon, AGM-88 HARM미사일 적재기능과
LANTIRN 항법/조준포드 - 이 추가된 150기의 F-16A/B Block 20을 인도받았다.
Block 20에 장착된 컴퓨터는 전체 처리 속도가 740배
증가되고 전체 메모리 용량이 Block 15 OCU에 비해 180배 증가되어 초기형의 그것에 비해 상당히 개량되었다.
미 공군 F-16C
F-16C/D
F-16C(단좌)와 F-16D(복좌)
Block 25
Block 25 F-16C는 1984년 6월 초도비행을 실시했으며
9월 미 공군에 배치되었다. 기체는 Westinghouse의 AN/APG-68레이더를 장착했으며 정밀 야간 공격 기능을 보유하고 있다.
Block 25는 개량된 화력통제와 저장관리 컴퓨터, 정보통제 패널에 통합된 상방제어반(UFC), 정보전송장비, 다기능 도시 장비, 레이더 고도계와
기타 다수의 변화를 포함한 조종실 항공전자장비의 매우 많은 발전형을 도입했다.
Block 25는 Pratt & Whitney의
F100-PW-200엔진을 처음으로 인도받았으며 후에 Pratt & Whitney의 F100-PW-220E엔진으로 업그레이드되었다.
209모델 인도와 함께 오늘날 미공군의 주방위공군과 공중 교육/훈련사령부만이 이 형의 운용자로 남아있다. Lethal Lady로 명명된
F-16C 1기는 2008년 4월 7000시간 이상의 비행을 기록했다.
Block 30/32
공군 F-16 Block 30
이는 전통적인 Pratt & Whitney엔진 또는 처음으로
General Electric의 F110-GE-100을 장착한 기체 하에 대안용 전투기 엔진이 선택된 최초의 F-16 블록으로 여기서부터
"0"으로 끝나는 블록은 GE엔진을, "2"로 끝나는 블록은 Pratt & Whitney엔진을 장착한다.
Block 30 F-16의 초도기는 1987년 배치되었다. 주요한
차이점은 AGM-45 Shrike, AGM-88 HARM과 AIM-120미사일 적재를 포함한다. Block 30으로부터 기체는 증가추력 GE엔진용의
더 커진 엔진흡기구(모듈 범용 흡기관으로 불리는)를 장착했다.
Block 32가 Pratt & Whitney의
F-100엔진을 유지한 후부터 이 기체에는 더 작은 통상 충격흡기구를 유지했다. 총 733기의 기체가 제작되어 6개국에 인도되었다.
1986년과 1987년에 제작된 Block 32 H/J는 미공군의
Thunderbird 비행시연대대에 할당된 구형 실행 F-16의 일부이다. 주방위공군은 개량된 관성항법시스템, 개량형 전자전장비(ALQ-213)와
Northrop Grumman 의 LITENING 조준포드 적재를 위한 업그레이드를 포함해 노후화된 Block 30/32 비행대의 다수 업그레이드를
획득했다.
표준 관성항법장비(INU)는 처음으로 환형 레이저 회전의로 교체되었으며
후에 다시 관성항법시스템을 갖춘 전지구 위치 확인 시스템(GPS)수신장비가 조합된 임베디드 GPS/INS (EGI)시스템으로 업그레이드되었다.
EGI는 통합정밀직격병기(JDAM)와 기타 GPS유도탄약 운용을
위한 기능을 제공한다. LITENING 조준포드와 결합되어 이 기능은 이 기체들의 성능을 크게 강화시켰다. 베이스라인 Block 30으로의 이
수정의 총합은 일반적으로 F-16C++형으로 알려졌다.
F-16N/F-16TN
TOPGUN소속 F-16과 A-4
미 해군은 비유사 공중전훈련(DACT)을 위한 대항군으로써 운용을
위해 22기의 변경형 Block 30 F-16을 획득했으며 이 중4기는 복좌 F-16TN이다. 이 기체들은 1987-1988년간 인도되었으며 서부연안의
캘리포니아주 Miramar 해군비행장내 126전투비행대대(VF-126)와 해군전투기무장학교(NFWS: 또는
TOPGUN)에서 실행되었다. 동부연안의 대항군훈련 비행대대는 43전투비행대대(VF-43)와 45전투비행대대(VF-45)였다. 각 비행대대는
5기의 F-16N과 1기의 TF-16N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TOPGUN의 경우 예외적으로 각각 6기와 1기였다.
지속적인 공중전훈련의 높은 압력으로 인해 이 비행대대의 기체들은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했으며 1994년 해군은 퇴역을 발표했다. 1995년까지 이 기체들중 거의 1기는 보존과 저장을 위해 309 항공우주 정비/재생그룹(AMARG)으로
보내졌으며 F-16N 1기는 국립 해군항공박물관으로 보내졌다. 대항군기체로써 해군의 F-16N은 화려한 외관으로 주목받았으며 대부분의
F-16N기체는 3가지 색조의 청색과 회색"유령"색안으로 도색되었다. TOPGUN은 일부의 더욱 화려한 기체 - 3색 사막 색안,
연청색 1기와 해병대 표지의 녹색 분파 위장형 -를 보유하고 있었고 VF-126 또한 독특한 청색표본을 보유했다.
2002년 해군은 항공우주 정비/재생센터(AMARC)로부터 억류되기전
파키스탄에 배정되었던 14기의 F-16A와 B모델인수를 시작했으며 이 기체들(F-16N/TF-16N으로 명명되지 않은)은 대항군 훈련을 위해 해군
타격/공중전센터(NSAWC)/TOPGUN에서 실행되었으며 전신인 F-16N과 마찬가지로 이국적인 색안으로 도색되었다.
Block 40/42(F-16CG/DG)
1988년 배치가 시작된 Block 40/42는
LANTIRN포드를 장착한 개량된 전천후/주야간 타격형으로 비공식적으로 F-16CG/DG로 명명되었으며 야간기능이 "Night
Falcon"으로 이름지어질 만큼 확보되었다. 이 블록은 LANTIRN포드, 개량형 레이더, GPS수신장비를 위해 강화되고 연장된 하부구조가
특징이며 2002년부터 Block 40/42는 JDAM, AGM-154 통합장거리용무기(JSOW), 바람수정확산탄(WCMD)과 강화형
EGBU-27 Paveway 벙커버스터를 포함한 기체에 대한 무장범위효율성을 확장시켰다.
또한 이 블록내 통합은 추가적으로 야간투시경(ANMS)장비와
호환되는 조종실 조명시스템이었으며 야간시현(NVIS)-호환 시스템이 추가된 미 공군의 시한성기술지시서(TCTO)는 2004년 완료되었다. 총
615기의 Block 40/42기체가 5개국에 인도되었다.
F-16CJ/DJ Block 50D/52D
Block 50/52
Block 50/52 F-16의 초도기는 1991년말 인도되었으며 기체는 개량된
GPS/INS를 장착하고 개량형미사일; AGM-88 HARM 미사일, JDAM, JSOW와 WCMD의 추가적인 batch를 적재가능했다. Block 50기체가 F110-GE-129를운용하는 것과 동시에 Block 52기체는
F100-PW-229로 추진된다. Block 52의 발전과정에서 조종실 또한 Boeing의 통합헬멧장착조준시스템(JHMCS)을 운용하게 된다.
Block 50/52 Plus(50/52+)
"개량형 Block 50/52"로도 알려진
이 형은 2003년 4월 그리스 공군에 처음으로 인도되었다. 주요한 차이점은 등각연료탱크(CFT), APG-68(V)9레이더, 기내 산소발생(OBOGS)시스템과
JHMCS헬멧의 추가로 그리스의 Block 52+기체는 또한 IRIS-T 단거리 공대공미사일이 배치되었다. 복좌 Plus 전 기체는 중량과 저항의
소폭증가로 더 많은 항공전자장비 적재를 위해 동체를 30입방 ft연장한 확대 배측 견갑극을 가지고 있으며 F-16E/F Block 60의 토대가
되었다.
2004년 현재 60기가 그리스 공군에서 작전중이며 2009년
추가로 "Block 52개량형" 30기의 인도가 계류중이다.
폴란드공군 또한 Block 52+를 발주했다. 이 기체는 최신 항공전자장비(ALE-50 예인교란체시스템 포함)와
CFT예비를 장착하고 있으며 2006년 11월 9일, Jastrz?b (Hawk)로 명명될 폴란드 F-16이 공개되었다.
2008년 제한 작전준비가 달성되었으며 마지막 기체는 연말 인도될 것이다.
싱가포르 공군은 Block 52+복좌형을 발주했다. 싱가포르의 가장 최초 발주는 이스라엘 F-16I의 정밀한 형상으로
소문난 기체 모델로 구성되었으나 민감성을 회피하기 위해 재명명되었다. 싱가포르 공군이 발주한 최신 D+모델은 F-16I의 그것과 동일한 안테나,
탐지기 위치와 조종실형상을 가진 것으로 기록될 수 있으며 이 전투기들은 또한 DASH-3 헬멧장착 조준시스템, 600갤런 탱크, CFT,
AMRAAM, HARM과 레이저 유도 무기, 장거리 타격용의 특징을 갖추고 있다.
파키스탄 공군은 51억 달러의 무기 패키지의 일부로 18기의 추가옵션과 함께 18기의 Block 52+ F-16을 발주했으며
파키스탄 F-16은 AIM-120C-5 AMRAAM, AIM-9M 8/9, JDAM, Harpoon Block 2, JHMCS, CFT와 아마도
IRIS-T 미사일을 장착하게 될 것이다.
KF-16
한국항공산업(KAI)은 1990년대 Lockheed
Martin의 면허 하에 132기의 F-16C/D Block 52를 제작했으며 본래 F/A-18 Hornet이 한국전투기프로그램(KFP)경쟁에서
승리했으나 비용초과에 대한 논쟁과 뇌물수수혐의 고발은 한국정부가 계약을 철회하고 대신 F-16을 채택하도록 주도했다. KF-16으로 명명된 초도
12기는 1994년 12월 한국공군에 인도되었으며 원형 F-16C/D에서 거의 2500개의 부품이 교체되었다. KF-16 전기체는 AGM-84
Harpoon 대함미사일 사격기능을 가지고 있다.
F-16I Sufa
F-16I는 이스라엘공군을 위해 개발된 Block 50/52의
복좌형으로 이스라엘은 1997년 9월 요구서를 발간했으며 1999년 7월 F-15에 우선하여 F-16을 채택했다. 초기의 "Peace
Marble V"계약은 2000년 1월 14일 조인되었으며 이어 총 102기 획득을 위한 후속계약이 2001년 12월 19일 조인되었다.
이스라엘 공군에 의해 Sufa(Storm)로 불리는 F-16I는 2003년 12월 23일 초도비행을 실시했으며 2004년 2월 19일 인도가 시작되었다.
표준형 Block 50+와 F-16I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은
약 50%의 미국제 항공전자장비가 이스라엘제(이스라엘제 공중예인교란체가 ALE-50을 대체한 것과 같은)항공전자장비로 대체되었다는 것이다. 추가로
이스라엘제 자주 공중 전투기동 기기 시스템은 지상기기 시스템에 대한 의존없이 훈련을 가능하게 하며 헬멧장착 조준기 또한 표준장비이다. 헬멧장착
조준기, HUD, 임무용 컴퓨터, 표시용 컴퓨터, 디지털 맵 도시장비는 이스라엘의 Elbit Systems가 개발하였다. 더욱이 F-16I는
Rafael의 신형 Python 5 이미지화 적외선 유도 고기동 공대공미사일배치가 가능하며 항속거리 확장을 위한 IAI의 탈착 등각연료탱크를 보유한다.
핵심적인 미국제 시스템은 이스라엘 공군의 F-15I에 공통으로 제안된 F100-PW-229엔진과 APG-68(V)9레이더이다.
F-16E/F
F-16E(단좌)와 F-16F(복좌)
본래 General Dynamics F-16XL 의 단좌형이
F-16E로 명명되었으며 복좌형은 F-16F로 명명되었다. 이 기종은 1984년 강화전술전투기 기종선정비행에서 경쟁기종인 F-15E
Strike Eagle의 채택으로 밀려났으며 'Block 60'설계명은 1989년 A-16에도 참가했으나 탈락했다. F-16E/F설계명은 현재
아랍에미리트연합을 위해 특별히 개발된 특수형에 속하며 때때로 비공식적으로 "Desert Falcon"으로 불린다.
Block 60
F-16 C/D Block 50/52에 기반한 이 기종은 레이더와
항공전자장비 개량, 등각연료탱크를 특징으로 하며 아랍에미리트연합에만 판매되었다. 동시에 이 형은 "F-16U"로 명명되었다는
부정확한 인식이 있었다. 이전 블록과의 차이점은 지상과 공중위협을 동시에 추적하고 제거하는 기능을 제공하는 Northrop Grumman의
AN/APG-80능동전자주사(AESA)레이더이다.
Block 60의 General Electric F110-GE-132엔진은
-129모델의 발전형이며 32500lb를 출력한다. Block 60은 AIM-132 개량형 단거리 공대공 미사일 (ASRAAM)과
AGM-84E 장거리 지상타격 미사일 (SLAM)등의 호환무장 적재가 가능하며 CFT는 추가로 450갤런의 연료를 적재하고 항속거리 내지 체공시간을
증가시킨다. 이는 다른 방식으로는 주익하부연료탱크가 차지하는 무장용 화기접점을
자유롭게 하는 이점을 부가한다.
MIL-STD-1553데이터버스는 정보조정기능에서 1000배로
증가된 MIL-STD-1773섬유-광학 데이터버스로 대체되었다.
기술 실증기 및 기타 파생형
LTV Aerospace Model
1600/1601/1602
미 해군의 해상전투기 타격실험(VFAX)프로그램에 제안된 항공모함실행으로부터
각종 기능의 수행이 진행되었다; 3개 모델은 서로 다른 동력장비를 특징으로 한다. LTV Aerospace와 GD가 공동으로 개발하였으며
LTV가 제작을 주도했으나 1975년 해군은 대신 F/A-18 Hornet을 채택했다.
YF-16CCV
미 공군 비행역학 실험실의 통제 특성 비행체(CCV)시험기체로써
예비를 위한 초기 YF-16프로토타입의 1975년 변환형으로 CCV개념은 비행통제면 분리를 수반했으며 그 결과 독립적인 실행이 가능해졌다.
CCV시험비행 프로그램의 성공은 고등전투기 기술통합(AFTI)프로그램용 시험기체로써 F-16의 배치를 주도했다.
F-16 SFW
전진익(SFW) F-16은 시험적인 전진익기체 개발을 위해 방위고등연구기획청(DARPA)의
1976년 프로그램에 대한 GD의 후보기종이었다.
F-16/79
F-16/79는 General Electric J79 터보팬
엔진 운용을 위해 변경된 F-16A/B의 수출지향형으로 해외국가에 대해 감소된 기능의 무기판매로 군비확산을 감소시키려는 Jimmy Carter
대통령의 1977년 2월 지시를 만족시킬 목적이었으며 "제2급"전투기에 대한 관심의 결여는 F-16/79와 Northrop
F-20 Tigershark 어느 기종도 판매를 달성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
1980년 10월 초도비행을 실시했다.
F-16/101
미 공군/해군 통합 파생형전투기 엔진(DFE)프로그램하에
General Electric 의 F101터보팬 엔진을 장착한 FSD F-16A의 첫 변경형으로 F 101X DFE는 F-16의 당대 표준인
Pratt & Whitney F-100을 능가했으나 제작에 채택되지 않았다. 그러나 1980년의 F-16/101시험으로부터 추출된 정보는
F-16과 F-14 양 기종의 대안용엔진이 되는 GE의 F110터보팬 개발을 주도했다.
F-16XL
General Dynamics는 본래 초음속 순항/기동 프로그램(SCAMD)으로
알려진 프로그램하에 델타익의 새로운 "Cranked-Arrow"형식을 가진 F-16의 파생형을 개발했다. F-16XL로 명명된
이 설계는 손상을 일으키는 저속기동없이 고 아음속 내지 초음속에서 저 저항을 제공할 목적이었으며 이 접근방식은 초음속순항-후연소기 운용 없이 초음속에서
효과적으로 순항을 허용하는 것이었다.
F-16XL의 대형화된 주익은 27개 화기접점으로 F-16유효탑재량의
2배 적재를 가능하게 했고 내부연료적재량의 82%증가로 항속거리를 40%증가시켰으며 부분적으로 총 56인치의 동체연장을 수반했다.
1980년대 말 미공군에 공급된 2기의 FSD기체가 변경되었으며
단좌 F-16XL은 1982년 7월 3일 초도비행을 실시했고 이어 1982년 10월 29일 복좌기가 비행을 실시했다.
F-16XL은 강화전술전투기(ETF)프로그램에서 F-15E
Strike Eagle과의 경쟁에서 승리하지 못했다. 경쟁에서 승리했다면 양산형은 F-16E/F로 명명되었을 것이다. 1989-1999년, 양
기체는 몇 가지 시험조사프로그램을 위해 NASA에서 운용되었으며 2007년 NASA는 추가적인 항공학 연구를 위해 실행상태로 단좌 F-16XL을
복귀시키는 것을 고려하고 있었다.
AFTI/F-16
1980년 3월, General Dynamics는 통합 비행역학
실험실 - NASA 고등전투기 기술통합 (AFTI)프로그램을 위한 기술실증기체 예비로써 FSD F-16A 6번기의 변환을 시작했다. 전면디지털
자동비행시스템(DFCS), 6자유도 자동 기동타격시스템(AMAS), 자동조준 이관 시스템(ATHS)(지상스테이션 내지 기타 기체에서
AFTI/F-16으로 표적정보전송), 항공전자장비통제용의 256단어 기능 음성통제 쌍방향 장비(VCID), 조종사의 두부 움직임에 자동적으로 종속되는
전방적외선 시현장비와 레이더를 가능하게 하는 헬멧 장착 표적지시 조준기를 포함한 기술들이 AFTI F-16에 도입되고 시험되었다. AFTI F-16의 초도비행은 1982년 7월
10일 시행되었으며 1982-2000년까지 다수의 조사/개발 프로그램에 참가했다. 1987년 공군사관학교는 F-16/AFTI팀에 과학/기술분야에서의
우수한 달성으로 Theodore Von Karman상을 수여했다.
F-16A(R)
네덜란드 왕립공군의 F-16A 약 24기는 국산 Oude Delft Orpheus 저고도 전술정찰포드를 공급받았다.
F-16A(R)로 명명된 기체는 1983년 1월 27일 초도비행을 실시했으며 1984년 10월 네덜란드 왕립공군에 배치되었다. 1995년 벨기에
공군은 공여된 Orpheus포드와 Mirage에 장착되었던 Vinten카메라를 장착한 적어도 12기의 F-16A(R)로 Mirage 5BR정찰기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이 장비들은 1996-1998년에 Per Udsen 모듈러 정찰포드로
대체되었다.
F-16 Recce 와 RF-16A/C
중심선 다중탐지기 욕조형 포드를 장착한 미공군 F-16D의 첫 정찰형은 1986년 시험적으로 배치되었으며 "F-16
Recce"로 언급되었다. 1988년 미공군은 다중의 탐지기 적재가 가능한 고등전술 공중정찰시스템(ATARS)을 갖춘 RF-16C
Block 30으로 노후화된 RF-4C Phantom대체를 결정했으나 ATARS프로그램의 문제는 1993년 미 공군이 이 기체를 탈락시키도록 했으며
일련의 중심선 정찰포드설계와 시험이 지속되는 동안 그 전에 마침내 최종형의
AN/ASD-11전구 공중정찰시스템(TARS)이 결정되었다. 프로토타입 TARS를 장착한 첫 F-16이 1995년 8월 26일 비행을 실시했으며
1998년 중반부터 주방위공군 5개 비행대대의 Block 30이 이 시스템을 인도받았다. 그러나 미 공군은 이 기체를
"RF-16"으로 명명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계명 RF-16A는 덴마크 왕립공군에 의해
운용되고 있다. 1994년 초 10기의 덴마크 F-16A가 RF-16A전술정찰기로 재명명되어 1993년 말 퇴역한 RS-35 Draken을 대체했다.
본래 Per Udsen 'Red Baron'정찰포드내에서 재통합된
Draken의 광학카메라와 E-O탐지기를 장착한 임시탐지패키지로써 몇년 후 Per Udsen의 모듈러 정찰포드(MRP)로 대체되었다.
F-16 Agile Falcon
F-16 Agile Falcon은 25%대형화된 주익, 증가된
출력의 엔진, 기타 기본형 F-16에 대한 개량을 특징으로 하는, 1984년 GD에 의해 제안된 파생형이다. 실제적으로 F-22 Raptor를
주도한 고등전술전투기(ATF)경쟁에 대한 저비용대안으로는 실패했으며 이 기능의 일부가 Block 40 F-16C/D에 통합되었고 Agile
Falcon은 일본의 F-2전투기개발을 위한 토대로써 이용되었다.
F-16D 'CK-1'
1987년 이스라엘공군의 시험비행센터 MANAT에 특수제작
Block 40 F-16D 시험기체가 인도되었으며 새로운 비행특성, 무장시스템과 항공전자장비 시험을 위해 이스라엘 공군이 운용했다.
A-16과 F/A-16
근접항공지원(CAS)전용기체로 이용을 위해 변경된 파생형으로 A-16은 1980년대
말 장갑과 30mm기관포와 7.62mm Minigun 포드를 포함한 중량 무장적재를 위한 주익강화를 부가하여 기본형 F-16의 CAS형 개발을
위한 GD의 프로젝트였다. 2기의 F-16A Block 15가 이 배치를 위해 변경되었다. A-10의 후계기종으로써 계획된 이 형식은
"Block 60"이라는 설계명을 받았으나 A-16은 1990년 11월 26일 A-10의 2개 비행단을 유지하라는 미 공군에
대한 의회의 지시로 생산단계에 진입하지 못했다.
이 지시의 두번째 결과는 A-10업그레이드 대신 CAS와 전장공중저지(BAI)임무를
실행하기 위한 신형장비를 갖춘 400기의 Block 30/32 F-18에 재장착하는 것을 모색하는 미공군의 결정이었다. 그러나 이
"F/A-16" Block 30접근방식은 LANTIRN포드를 Block 40/42 F-16C/D에 장착하는 안의 지지로
1992년 1월 탈락되었다.
1991년, 24기의 F-16A/B Block 10기체가
A-10의 GAU-8/A기관포의 4연장 30mm 파생형으로 무장되었다. 이 무기는 중심선저장용위치의 General Electric
GPU-5/A Pave Claw포드에 적재되었으며 또한 이 배치를 위해 F-16C를 변환하고 A-10의 AN/AAS-35V Pave Penny레이저
지점추적기는 통합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사격시 기관포 진동이 기체의 비행과 조준에 심각한 곤란을 초래한다는 것이 입증되어 시험은 2일 후 중지되었다.
F-16AT Falcon 21
F-16AT 'Falcon 21'은 1990년에
General Dynamics가 ATF경쟁의 저비용대안으로써 제안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F-16XL에 기반한 단발엔진전투기이나 사다리형 주익을
가지고 있었다.
NF-16D/VISTA/MATV
1998년 General Dynamics와 하청계약업체
Calspan은 가변 비행중 모의실험기체(VISTA)개발을 위해 공군,해군과 NASA가 후원하는 계약을 인수했다. F-16 VISTA의 시도는
중심조종간(측면조종간 통제장비를 추가), 신형컴퓨터와 모사, 각도에 대해 기타기체의 디지털 비행통제시스템과 함께 Wright실험설비에 소속되었다.
NF-16D로 재명명된 VISTA기체의 초도비행은 1992년
4월 9일 실행되었다. 1991년, 미 공군은 F-16 다축추력편향(MATV)프로젝트를 인수했으며 F-16에 대한 추력펀향통제(TVC)기술 적용을
탐색하기 위해 General Dynamics 및 General Electric과 공동작업을 시도했다. 가변안정 컴퓨터와 중심조종간은 1993년
7월 30일 비행중 추력편향의 최초운용하에 MATV의 시험비행을 위해 VISTA에서 임시로 제거되었다.
MATV시험은 1994년 3월 종료되었으며 프로그램이 성공으로
생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추력편향은 미공군에 의해 F-16에 채택되지 않았다. 1996년 이 프로그램은 다방향 추력편향 분사구를 NF-16D에 장착하여
재개되었으나 그 해 이후 예산부족으로 취소되었다.
F-16U
F-16U는 1990년대 초반 아랍에미리트연합에 제안된 몇가지
형상 중 하나로 F-16XL의 다수 특성과 F-16X의 델타익을 조합한 복좌기였다.
F-16X Falcon 2000
1993년 Lockheed Martin은 Boeing의
F/A-18E/F Super Hornet과의 경쟁기종으로 F-16의 새로운 형의 개발을 제안했다. 이 F-16X 'Falcon 2000'은
80%로 커진 내부연료체적을 제공하는 동체강화와 통합한 F-22와 같은 델타익 플랫폼이 특징이었으며 LM은 F-16X이 Super Hornet가격의
2/3으로 제작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F-16ES
F-16강화전략형(ES)은 표준형 Block 50이상으로
40%의 긴 항속거리를 허용하는 등각연료탱크를 장착하는 F-16C/D의 항속거리확장형으로 1993년말 F-15I Strike Eagle에 대한
대안으로 제안되었으나 실패했으며 마침내 F-16E/F Block 60의 개발을 주도한 아랍에미리트연합에 제안된 몇 가지 형상안의 하나였다.
F-16 LOAN
F-16 저식별 비대칭 분사구(LOAN)실증기는 레이더/적외선
신호의 현저한 감소와 낮은 유지정비요구의 프로토타입 분사구를 장착한 F-16C로 1996년 11월 통합타격전투기(JSF)프로그램의 평가를 위한
시험을 실시했다.
F-16AM/F-16BM
이 설계명은 신뢰성, 지원성과 유지정비성을 개선하고
Block 50의 것과 유사한 표준으로 조종실을 업그레이드한 F-16 중단수명갱신(MLU)을 받은 F-16A/B에 적용되었으며 변환작업은
1997년 1월 시작되었다.
F-16 GCAS
이 기체는 1997-1998년간 "조종상태 지상충돌"(CFIT)사고감소를 위한 지상충돌회피시스템(GCHS)기술
투자지속에서 AFTI F-16대체를 위해 변경된 Block 25 F-16D이다.
F-16IN
Lockheed Martin은 126기의 인도공군 중급 다목적
전투기(MMRCA)경쟁후보로 개량형 F-16IN을 제안했다. 이 경쟁에서 채택된다면 Lockheed Martin은 초도 18기를 공급하고 잔여기의
생산을 위해 인도의 제휴업체와 협력해 인도내에 조립라인을 설치할 것이다.
GF-16
F-16A/B/C 각형식의 소량이 유지정비인력의 비 비행 지상교육에
운용되었다.
QF-16
미 공군은 QF-16 공중우위목표(AST)프로그램하에 실물표적무인비행체로
구형F-16변환을 고려중이다. QF-16은 2010년경 마지막 기체가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는 현용 QF-4무인비행체를 대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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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옆에 공격형 헬기사업 현황
향후 육군과 해군이 운용할 신형 헬기 도입사업이 오는 10월 기종 선정을 앞두고 있다. 현재 연기 가능성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는 가운데 육군 AH-X (대형공격헬기) 사업에는 보잉 AH-64 아파치 롱보와 벨 AH-1Z 바이퍼, TAI T129가, 해군의 MOH(해상작전헬기) 사업에는 시콜스키 MH-60R과 아구스타웨스트랜드의 AW159가 경쟁 중이다.대형공격헬기사업, AH-1Z 급부상이들 두 사업 중 관심이 집중된 것은 아무래도 AH-X 사업. 36대의 대형공격헬기를 해외에서 도입하는 사업으로 약 1조8,425억원에 달하는 많은 예산이 투입되는 사업이다. 특히 이번 사업에서 주목할 만한 점이 있다면 AH-1Z 바이퍼의 급부상이다. 지금까지 보잉의 AH-64D 아파치가 유력한 후보기종으로 거론되고 있는 가운데 당초 맞상대로 예상됐던 유로콥터의 타이거 대신 AH-1Z 바이퍼가 아파치의 강력한 경쟁자로 떠올랐다.한국을 바이퍼의 첫 수출국으로 목표로 잡은 벨도 늦게 사업에 뛰어든 만큼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실제로 지난 5월 10일, 벨은 육군이 주관한 ‘육군항공 전투발전 세미나 및 무기체계 소개회’를 통해 미국에서 공수해온 실제 AH-1Z 바이퍼를 육군 관계자들을 비롯한 행사 참관객들에게 직접 선보였다.마침 이날은 대형공격헬기사업 제안서 제출일. 행사에 참석한 벨의 알렉스 민(Alex B. Min) 국제군수사업개발 담당 부사장은 “제안서 내용은 밝힐 수 없지만, 바이퍼는 한국 육군이 요구하는 모든 요건을 충족시켜 준다”며 “한국 육군이 요구하는 사항을 고려하면 바이퍼가 최고의 가치를 제공할 수 있는 헬기”라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바이퍼의 대전차작전 능력은 아파치와 맞먹고, 해상특작부대저지 및 신속대응 능력은 경쟁기종보다 월등하다”며 “이번 행사를 통해 잘 알려지지 않았던 바이퍼의 진짜 성능을 보여주고 싶다”고 덧붙였다.▲ 이번 사업에서 주목할 만한 점이 있다면 AH-1Z 바이퍼의 급부상이다. / 사진: 벨이에 비해 보잉은 다소 조용한 분위기다. 제안서를 제출한 이후인 만큼 이어질 시험평가와 협상에 매진하겠다는 분위기다. 대신 보잉측은 아파치야말로 한국 육군에 가장 적합한 기종이라고 다시 한 번 강조했다. 보잉코리아의 티모시 니콜스 BDS 부문 상무는 “현재 아파치는 전 세계 많은 국가에서 운용되고 있고, 실전에 참가한 기종”이라고 강조하면서 “그런 만큼 높은 생존성과 검증된 성능, 유지보수 측면에서 한국 육군의 요구사항을 가장 잘 충족시켜줄 수 있는 헬기”라고 강조했다.해상작전헬기사업도 2파전해군의 해상작전헬기사업은 2파전이다. MH-60R을 제안한 시콜스키와 AW159를 제안한 아구스트웨스트랜드가 현재 경쟁을 벌이고 있다. 알려진 것처럼 해상작전헬기사업은 해군의 차기 호위함에 탑재할 신형 해상작전헬기를 도입하는 사업. 이 사업에 약 5,538억원의 예산이 투입될 예정이다. 한때 국내개발과 해외구매를 놓고 의견이 분분해 사업이 지연됐지만 지난해 8월 30일, 제52회 방위사업추진위원회에서 긴급소요 전력으로 8대를 해외구매하는 것으로 결정됐다.▲ 현재 해상작전헬기사업은 MH-60R을 제안한 시콜스키와 AW159(사진)를 제안한 아구스트웨스트랜드가 현재 경쟁을 벌이고 있다. / 사진: 영국 국방부특히 이들 두 기종의 경쟁은 치열할 것으로 보인다. 이 가운데 MH-60R은 향후 미 해군이 300여대를 도입, 대잠전 및 대함전을 위한 주력 헬기로 운용할 계획으로 기존 SH-60B 및 SH-60F 헬기 임무를 이어받게 된다. 또한 시호크는 거의 20년간 미 해군 해상헬기 전력의 중추역할을 하면서 SH-3, SH-2, CH-46 등을 대체해 왔다. 이는 곧 성능이 검증됐다는 얘기다. 한국 해군도 MH-60R의 이러한 점을 높게 평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이에 비해 AW159는 기존 슈퍼링스의 성능을 한층 강화시킨 기종이다. 현재 한국 해군이 슈퍼링스를 운용하고 있는 만큼 연속성 측면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다. 아구스타웨스트랜드 관계자도 “AW159는 기존 링스 헬기의 계보를 잇는 기종이자, 현재 및 향후 작전요구사항을 충족하도록 설계된 기종”이라며 “대함전과 대잠전용으로 슈퍼링스 Mk.99/A를 운용하고 있는 한국 해군의 해상헬기 현대화 요구를 충족하는 이상적인 헬기”라고 강조했다. 현재 영국 해군이 오는 2015년부터 운용할 예정인 가운데 지난 2월, 영국 해군 호위함인 아이언 듀크함(HMS Iron Duke)에서 20일간 다양한 기상조건에서의 주야간 함상시험을 마쳤다.불거진 가격 논란오는 10월, 두 사업에 대한 최종기종이 결정될 예정인 가운데 미 국방안보협력처가 미 의회에 판매승인을 요청한 보도자료 원문이 공개돼 한때 논란이 된 바 있다. 재미 언론가인 안치용씨가 공개한 이 원문에는 특히 MH-60R 한국 판매승인을 요청한 내용도 포함돼 있어 더욱 주목받았다. 이 원문에 따르면 한국 정부가 요청한 MH-60R 8대, T-700 GE 401C 엔진 18대(2대는 여유분), 통신 및 전자전 장비, 지원장비, 장구 및 시험장비, 인원훈련 및 훈련장비, 군수지원 등 총 예상가격으로 약 10억 달러를 책정했다. 10억 달러는 우리돈으로 약 1조1천5백억 원. 이는 현재 책정된 예산인 5,538억 원의 2배가 넘는 금액이다.국내 언론들도 이를 인용해 ‘정부가 미국으로부터 10억 8천4백만 달러 상당의 시호크 헬기 8대와 하푼 미사일 18기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며 일제히 보도했다. 이에 대해 방위사업청은 언론해명을 통해 “언급된 10억 8천4백만 달러는 미 정부가 미 의회에 판매승인을 얻기 위해 보고한 자료로 실제 제안가와 차이가 있다”면서 “해상작전헬기 최종가격은 두 개 기종간 치열한 가격경쟁과 협상을 통해 결정될 예정으로 현 단계에서 확정된 것이 없다”고 밝혔다.▲ 미 국방안보협력처가 의회에 판매승인을 요청한 보도자료 원문에 따르면 MH-60R(사진)의 도입 예상가격은 약 10억 달러로 현재 책정된 예산의 두 배가 넘는다. / 록히드마틴미 해군이 도입할 예정인 MH-60R 가격도 공개됐다. 안씨는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2013년 미 국방예산 원문을 공개하면서 “미 해군의 시호크헬기 1대 구매가격은 약 4천4백만 달러로, 한국이 미 국방안보협력처 예상가격대로 약 1억2천5백만 달러로 도입할 경우 대당 가격이 미 해군 구매가격의 3배에 달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는 “미 정부가 해외에 시호크 헬기를 판매할 경우 연구개발비용이 포함된다”면서 “한국은 유지보수, 교육훈련 등이 포함돼 있어 미 해군 구매가격보다는 높을 수 밖 없지만, 3배나 가격차이가 나는 것은 미국 무기가 만만치 않게 비싸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전했다. 그는 특히 “미 국방안보협력처가 카타르에 시호크 6대를 7억5천만 달러에, 덴마크에 시호크 헬기 12대를 20억 달러에 판매했다고 밝혀 한국 정부에만 비싼 가격을 적용하는 것은 아니다”고 전제하면서 “다만 한국 구매가격이 미 해군 인도가격의 3배에 달하는 만큼 가격협상을 잘해서 구매가격을 낮추기를 기대한다”고 덧붙였다.보잉, 아파치 가격 크게 낮춘 듯…현재 대형공격헬기사업에서 가장 유력한 후보기종인 아파치 블록III의 가격도 관심대상이다. 그러나 가격은 제안서에 포함되는 내용으로 외부공개가 안 되는 항목. 대신 지난 2010년 12월, 미 국방안보협력처가 인도에 판매할 22대분의 가격을 보면 약 14억 달러로 책정됐다. 이를 기준으로 계산하면 아파치 블록III 1대 가격은 약 6천3백60여만 달러에 달한다.▲ 보잉은 아파치 블록III 가격을 대폭 낮춰 제안서를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물론 이번 대형공격헬기사업이 인도와 동일한 조건일 수는 없겠지만, 만약 비슷한 조건으로 한국이 36대를 구매한다면 전체 비용은 23억 달러, 우리돈으로 약 2조6천4백여억 원으로 당초 예산의 1.4배에 달하게 된다. 이는 당연히 보잉에 불리한 상황. 하지만 이번 대형공격헬기사업에서 변수가 있을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이는 보잉이 아파치 블록III 가격을 대폭 낮춰 이번 제안서를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한 소식통은 이번에 제안된 아파치 블록III 가격이 경쟁기종인 AH-1Z 가격과 큰 차이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끝>- 유용원의 군사세계 펌http://news.bemil.chosun.com/bbs/view.html?b_bbs_id=10007&pn=1&num=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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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표절사건 일파만파 !!!
황영철 공동대변인은 20일 정세균 민주통합당 당선자(서울 종로)의
논문 표절 논란과 관련해서
“현 상황에서 거론이 적절치 않다고 생각해 안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그렇게 중요한 표절 문제를 왜 상황운운하면서 적절치 않다고 판단하는 거지? 무슨 근거일까?
그럼 문대성을 거론한것은 적절한 타이밍이 였을까? 말이 안되는데? )
"지금 문 당선자의 표절 의혹으로 문제가 발생되고 있어 한꺼번에 거론하면 문 당선자의 문제를 흐리기 위한 것으로 비춰질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본다”
( 아~ 그런 친절한 이유였구나~ 한꺼번에 거론하면 문대성 문제가 흐려질까봐 그랬던거구나~
그런 어떤 문제들이 연이어 발생하면 하나의 문제가 흐려질까봐 다른 문제들은 유보를 해야 하는거구나~
정치인으로서 옳은 말인가? 의혹이 제기되면 즉시 명명백백히 밝혀야 함이 당연하거늘 )
"국민들이 그렇게 바라볼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상황에서 같이 거론하는 것은 적절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있다”며 “그래서 의혹제기를 안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 아~ 그래서 의혹제기를 안하고 있구나~ 그럼 언제 거론할꺼지? 딱 봐도 문제를 은폐시킬려는 의도가 뻔한데 말야~ ㅋ
참 거짓말도 뭐가 맞아야 거둘어 줄텐데 그렇게 문제가 흐려질거 같아서 언급을 안하는거라면 새누리당의
정우택이나 정세균이나 한명 한명 검증해서 그렇게 말할게 아니라 일괄검증을 해야한다고 말해야 옳은거 아님? ㅎ
영철이가 거짓말을 못하는 착한 사람인지 아니면 거짓말도 제대로 못하는 멍청인지~?! ㅋㅋㅋ )
여기 님들이 말씀하시는 대로 표절이 그렇게 중요한 사안이라면 똑같이 정세균도 명명백백히
파고 들어가야 하는거 아닌가요?
난 이해할수가 없네 왜 정경사에서 정세균 언급은 하나도 없지?
( 이럼 또 문대성 두둔한다고 오해받을까봐 두렵네요 ^^ )
① 정세균 논문1) 마케팅에 대한 인식의 확대를 통한 마케팅 영역의 발전단계 마케팅은 그 경계와 관련하여 3가지의 상이한 의식수준으로 구분될 수 있는데 이러한 구분을 위해 Reich(1970)는 의식범주라는 개념을 제시하고 이를 이용해 단계별 특징을 설명하고 있다.
→ 이씨 논문2. 의식단계(意識段階)의 정치마케팅 이해(理解)마케팅은 그 경계(境界)와 관련하여 3가지의 상이한 의식수준(意識水準)으로 구분(區分)할 수 있으며 이러한 분류(分溜)를 위해 라이히(C.A Reich)의 의식범주(意識範疇)를 그가 제시(提示)한 특수한 의미를 배제(排除)한 채 사용할 수 있다
② 정세균 논문1단계의 의식수준에서 마케팅이란 본질적으로 기업주체적인 개념을 마케팅이 판매자, 구매자, 경제적 재화와 용역에 관련된다고 본다. 이 단계는 시장거래 또는 경제적 교환을 관념의 기초로 하고 있는 의식단계이다.
→ 이씨 논문 첫째, 1단계(段階) 의식(意識) 마케팅이란 본질적으로 기업주체(企業主體)적인 개념(槪念)으로 마케팅이 판매자(販賣者), 구매자(購買者), 경제적(經濟的) 재화(財貨)와 용역(用役)에 관련된다고 보는 일반적(一般的) 견해(見解)이다. 이 단계에서는 시장거래(市場去來) 또는 경제적(經濟的) 교환(交換)을 관념(觀念)의 기초로 하고 있는 의식단계(意識段階)
③ 정세균 논문2단계 의식수준에서는 마케팅을 정의하는 필요조건으로 대가의 지불을 고려하지 않는다. 즉 지불 관계없이 소비집단을 위해 재화나 용역을 생산하는 모든 조직과 관련된다. 예를 들면, 박물관은 문화인식을 일반 공중과 거래하며, 도로교통안전협회는 안전운전을 운전자 공중에게, 정치입후보자는 정직한 정부 등을 투표자 공중에게 거래하듯이 이 단계에서의 핵심개념은 조직.고객거래의 개념으로 대체된다. 따라서 2단계 의식에서 마케팅이란 우리가 조직, 고객집단 및 광범위하게 정의된 제품들을 확인할 수 있는 모든 상황에서 적절한 것으로 설명한다.
→ 이씨 논문둘째, 2단계(段階) 의식(意識) 마케팅을 정의하는 필요조건(必要條件)으로 지급(支給)을 고려하지 않는다. 즉 지급관계(支給關係)없이 소비(消費) 집단(集團)을 위해 판매(販賣)나 용역(用役)을 생산하는 모든 조직과 관련된다. 예를 들면 박물관(博物館)은 문화(文化) 인식(認識)을 일반공중(一般公衆)과 거래(去來)하며 도로 교통 안전협회는 안전운전(安全運轉)을 운전자(運轉者) 공중(公衆)에게 정치(政治) 입후보자(立候補者)는 정직(正直)한 정부(政府) 등을 투표자(投票者) 공중(公衆)에게 거래(去來)하듯이 이 단계(段階)에서의 핵심개념은 조직(組織) 고객거래(顧客去來)의 개념(槪念)으로 대체(代替)된다. 따라서 2단계(段階) 의식(意識)에서 마케팅이란 우리가 조직(組織), 고객집단(顧客集團) 및 광범위하게 정의된 제품(製品)들을 확인할 수 있는 모든 상황(狀況)에서 적절한 것으로 설명된다.
④ 정세균 논문3단계 의식수준에서 마케팅이란 조직이 소비대중뿐만 아니라 기타 모든 대중들과 관련을 맺으려는 모든 시도가 적용된다. 따라서 판매자들은 마케팅 문제를 고객집단을 훨씬 넘어서까지 확대시키고 있다.
→ 이씨 논문셋째, 3단계(段階) 의식(意識)이 단계(段階)의 등장은 아직 미미한 상태이다. 이 단계(段階)에서 마케팅이란 조직(組織)이 소비공중(消費公衆) 뿐만 아니라 모든 공중(公衆)과 관련을 맺으려는 모든 시도(試圖)가 적용된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판매자(販賣者)들은 마케팅 문제를 고객집단(顧客集團)을 훨씬 넘어서까지 확대(擴大)시키려고 한다.
⑤ 정세균 논문이상의 3단계 고찰을 통해 우리는 마케팅을 구조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기능적 과정으로 정의할 수 있고, 이러한 견지에서 볼때 마케팅은 간부직 임원의 모집, 정치선전, 정당구성원의 확대, 로비활동 등과 같은 많은 정치적 상황에서도 발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같은 상황들이 지니는 마케팅적 특성들을 검토하게 되면 전통적인 마케팅의 개념과 영역을 좀 더 포괄적인 차원으로 확대시킬 수 있다.
→ 이씨 논문즉 이상의 3단계(段階) 고찰(考察)을 통해 우리는 마케팅을 구조적(構造的) 관점(觀點)에서가 아니라 기능적(機能的) 과정(過程)으로 정의(定議)할 수 있고, 이러한 견지에서 볼 때 마케팅은 간부직(幹部職) 임원모집(任員募集), 정치선전(政治宣傳), 교인배가(敎人倍加), 로비활동(活動) 등을 포함하는 많은 상황에서 발생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같은 상황들의 마케팅적 국면(局面)을 검토시 포괄적(包括的) 성격(性格)으로 마케팅의 개념(槪念)을 확대(擴大)시킬 수 있다.
⑥ 정세균 논문요약하면, 마케팅의 학문적 초점은 거래에 있다. 어떤 사람이 특정후보에게 투표하여 자신보다 나은 정부의 기대에 대한 지지와 교환할 때 거래는 발생한다. 따라서 거래를 창출하고 자극 또는 촉진하고 평가하는 일과 관련된 마케팅의 개념을 이용해 정치서비스 마케팅의 기본구조를 이해할 수 있다.
→ 이씨 논문마케팅의 학문적(學問的) 초점(焦點)은 거래(去來)에 있다. 어떤 사람이 특정(特定) 후보(候補)에게 투표(投票)하여 자신(自身)과 보다 나은 정부(政府)의 기대(期待)에 대한 지지(支持)와 교환(交換)할 때 거래(去來)는 발생한다. 따라서 어떻게 거래(去來)들이 창조(創造), 자극(刺戟), 촉진(促進), 평가(評價)되는가에 관련된 마케팅의 포괄적(包括的) 개념(槪念)속에 정치(政治) 마케팅의 기본 영역(領域)을 확인하게 된다.
⑦ 정세균 논문 2) 정치(서비스) 마케팅의 의미 정치마케팅 또는 정치서비스 마케팅이라는 용어는 학계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최근 이를 비영리조직의 마케팅 영역의 하나로 인식하려는 성향이 증대되고 있다. 마케팅의 연구영역 확정을 위해서 이에 대한 명확한 개념정의의 작업은 별도의 연구영역으로 남겨두는 것이 바람직할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정치활동과 관련된 마케팅 활동 즉 대인마테킹, 정치후보자 마케팅, 투표자 마케팅, 정치 마케팅 등 을 모두 통치하는 의미로의 정치마케팅의 개념은 아직 비영리조직을 포함하는 광의의 마케팅 컨셉 속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 이씨 논문3. 정치(政治) 마케팅의 개념(槪念)정치(政治)마케팅이란 용어(用語)가 학계(學界)에서 일반적으로 상요되지 않고 있으며, 최근에야 비로서 비영리(非營利) 조직(組織)의 마케팅중의 한 분야로서 인식(認識)되고 있음을 고려시 정확한 정의(定議)는 일단 유보(留保)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따라서 정치활동(政治活動)과 관련된 마케팅 활동(活動) 즉 대인(對人)마케팅, 정치후보자(政治候補者)마케팅, 투표자(投票者)마케팅, 정치(政治)마케팅 등을 모두 통칭하는 의미로의 정치(政治) 마케팅의 개념(槪念)은 아직 비영리(非營利) 조직(組織)을 포함하는 포괄적(包括的) 마케팅 컨셉트 속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⑧ 정세균 논문사회심리학적 접근방법은 콜럼비아대학 Bureau of Applied Social Research(BASR)의 Lazarsfeld를 주축으로 진행되었다. 이들의 연구결과는 정치와 선거에 대해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이들 연구의 목표는 사람들이 투표를 하는데 영향력을 행사하는 큰 영향을 주었다. 이들 연구의 목표는 사람들이 투표를 하는데 영향력을 행사하는 요인들을 발견하고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첫 연구는 1940년 루즈벨트와 월키와의 대통령 선거 기간동안 오하이오의 Eire시에서 실시되었으며 5월에서 11월까지 1개월 단위로 600명씩 면접에 의한 표본조사를 실시함으로써 진행되었다.
두 번째 연구는 1948년도에 동일한 방법으로 약 1,000명 정도의 보다 큰 표본을 대상으로 진행되었다. 두 연구의 결과는 기본적으로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이들 연구에서는 선거기간동안 유권자의 태도와 정치적 선호도간의 관계를 연구하기 위해 대규모 유권자패널조사를 이용하였다. 이런 패널조사는 정치커뮤니티세이션의 영향을 연구하기 위해 이상적인 방법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 이씨 논문콜롬비아대학 Cureau of Applied Social research(BASR)의 Lazarsfeld에 의한 괄목할만한 두가지 연구는 정치선거(政治選擧)를 연구(硏究)하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영향(影響)을 주었다. 이들 연구(硏究)의 목표(目標)는 사람들이 투표(投票)를 하는데 영향을 주는 주요요인(主要要因)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첫 연구(硏究)는 1940년 루즈벨트와 윌키와의 대통령(大統領) 선거(選擧) 기간(其間)동안 오하이오 Eire에서 5월부터 11월까지 1개월 동안 600명씩 인터뷰 형식(形式)의 샘플링을 실시하였다. 두 번째 연구(硏究)는 1948년도에 동일한 방법(方法)으로 약 1000명 정도의 보다 큰 샘플링이 사용(使用)되었으며 첫 연구(硏究)가 작은 지성사회(社會地城)를 대상(對象)으로 한 반면 두 번째 연구(硏究)는 New Yo가 Elmira에서 실시되었다.
이 연구(硏究)의 결과(結果)는 기본적(基本的)으로 같았다. 이들 연구에서는 선거기간(選擧其間) 동안 유권자(有權者)의 태도(態度)와 정치적(政治的) 선호(選好)를 연구하기 위한 Large scale panel survey가 이 사용(使用)되었으며, 이 패널디자인은 정치컴뮤니케이션의 영향을 연구하기 위해 이상적(理想的)인 방법(方法)으로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졌으며 최근에도 이 분야(分野)의 연구에 골격을 그대로 유지(維持)하고 있다.
⑨ 정세균 논문 Lazarsfeld의 접근방법은 사회학적 특징을 지닌 것이었다. 왜냐하면 연구의 초점이 유권자들의 사회적 특성을 투표의사결정을 이해하기 위한 주요변수에서 찾으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유권자들의 종교적 신념, 사회계층, 도시, 농촌지역에 따라서 민주당과 공화당 중에서 어떤 정당을 선호하는지 알고자 하였다. 그 결과 카톨릭 신자와 노동계층, 농촌지역의 유권자들은 민주당에 투표하는 경향이 높고 개신교도, 중산층, 그리고 도시거주민은 공화당에 투표하는 성향이 높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 이씨 논문 Lazarsfeld의 접근방법(接近方法)은 성격면에서 사회학적(社會學的)인 것이었다. 투표자(投票者)들의 사회적 성격(性格)은 투표의사결정(投票意思決定)을 이해하기 위한 주요변수(主要變數)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즉 투표자들이 종교적(宗敎的) 신념(信念), 사회계층(社會階層), 도시(都市), 농촌(農村) 지역(地域)에 따라서 그들이 민주당(民主黨)인지 공화당(共和黨)인지 선호(選好)하는지가 알려지게 되었다. 카톨릭 신자와 노동계층(階層勞動), 농촌지역민(地域農村民)은 민주당에 투표(投票)하는 경향(傾向)이 있고 개신교도, 중산층(中産層) 그리고 도시거주민(都市居住民)은 공화당(共和黨)에 투표하는 경향이 있음을 발견했다.
⑩ 정세균 논문행동주의학자들의 두 번째 접근방법인 사회심리학적 접근방법은 미시간대학의 사회연구소(ISR)에 의해 주도되었다. 콜럼비아대학의 경우에서와 같이 이들도 유권자 개인의 의사결정을 이해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유권자를 사회학적으로 분류하는 대신 사회심리학적 차원을 기준으로 정치적 자극에 대한 유권자의 태도측정에 관심을 두었다. 이때 정치적 태도는 투표의사결정을 이해하기 위한 주요변수로 간주되었다.
→ 이씨 논문행동주의(行動主義) 학자(學者)들의 두 번째 접근방법(接近方法)은 미시간대학의 사회연구소(社會硏究所)(ISR)에 의해 주도되었다. 콜롬비아대학과 같이 이들도 개인(個人)의 투표의사결정(投票意思決定)을 이해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유권자(有權者)를 사회학적(社會學的)으로 분류하는 대신 사회심리학적(社會心理學的) 접근법(接近法)을 사용하여 정치적(政治的) 자극(刺戟)에 대한 태도(態度)의 측정(測定)에 관심을 두었다. 정치적(政治的) 태도(態度)는 투표의사결정(投票意思決定)을 이해하기 위한 주요변수(主要變數)로 간주되었다.
⑪ 정세균 논문 사회심리학적 접근법 역시 투표 행위에 관한 단기간의 영향을 이해하기 위한 유용한 체계를 제공하는 데 실패했다. 투표자들의 태도측정에 관한 관심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인 정치선거운동의 효과를 측정하기 위한 방법들을 고안해내지 못했다.
→ 이씨 논문그러나 사회심리학적(社會心理學的) 접근방법(接近方法) 역시 투표행동(投票行動)에 관한 단기간(短期間)의 영향(影響)을 이해하기 위한 유용한 체계(體系)를 제공하는 데 실패했다. 투표자(投票者)들의 태도측정(態度測定)에 관한 관심에도 불구하고 실제적(實際的)인 정치선거운동(政治選擧運動)의 효과(效果)를 측정하기 위한 방법(方法)들을 고안해내지 못했다.
⑫ 정세균 논문행동주의 학자들의 투표에 관한 초기연구는 정치캠페인 연구에 관한 후속적인 연구의 필요성을 제기하였으며 이에 따라 후속연구들은 정치커뮤니케이션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정치선거운동과 매스미디어에 관한 연구는 정치학, 심리학, 사회학, 그리고 마케팅 분야와 같이 다양한 그룹의 연구활동을 통해 시도되었다. 이러한 다양한 접근들은 모두 선거운동의 유권자의 설득을 위한 것이며, 이를 위해 커뮤니케이션 과정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가정에서 출발하고 있었다. 따라서 대부분 매스미디어의 효과에 초점을 두고 초기 Lazarsfeld에 의해 사용된 방법을 이용하였다.
→ 이씨 논문행동주의(行動主義) 학자(學者)들의 투표에 관한 초기연구(初期硏究)는 정치(政治) 캠페인 연구(硏究)에 관한 두 번째의 흐름을 발생(發生) 시켰으며, 정치(政治) 커뮤니케이션의 연구(硏究)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정치선거운동(政治選擧運動)과 매스미디어에 관한 연구(硏究)는 정치학(政治學), 심리학(心理學), 사회학(社會學), 그리고 마케팅 분야(分野) 같이 다양한 그룹의 학술활동(學術活動)에서 시도되었다. 이러한 다양한 조망과 방법(方法)에도 불구하고 연구(硏究)의 흐름은 선거운동(選擧運動)은 설득(說得)하기 위한 것이며, 이를 위해 컴뮤니케이션 과정(過程)을 이해(理解)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가정에서 출발하고 있으며, 이들 컴뮤니케이션 연구(硏究)의 대부분은 매스미디어의 결과(結果)에 초점(焦點)을 두고 초기(初期) Lazarsfeld에 의해 사용된 방법(方法)을 주로 채택한 선거운동(選擧運動)에 관한 것이었다.
⑬ 정세균 논문한편 최근의 커뮤니케이션 연구들은 행동주의자들이 간과하였던 사실을 확인함으로써 선거캠페인 전략에 보다 가치있는 정보를 제공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즉 효과적인 선거운동을 위하여 후보자는 매스미디어와 개인적 접촉을 포함하는 커뮤니케이션 매체를 이해해야하며, 인적접촉, 정치광고 DM등의 효과를 측정하는데 관심을 두고 있다.
이러한 커뮤니케이션 접근법이 선거운동에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몇가지 문제점이 제기되고 있다. 즉 대부분의 연구가 선거운동 기간동안의 모든 매스미디어 효과를 동시에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따라 각 매체들, 즉 TV, 신문, 인적 접촉같은 개별 미디어간의 효과에 대한 시사점이 미흡하다.
→ 이씨 논문최근(最近) 컴뮤니케이션 연구(硏究)는 행동주의(行動主義)자들이 무시했던 의문(疑問)들을 통해 선거(選擧) 캠페인 활동(活動)에 가치있는 정보(情報)를 제공하려 한다. 즉 결과적(結果的)인 선거운동(選擧運動)을 위하여 후보자(候補者)는 매스미디어와 개인적(個人的) 접촉(接觸)을 포함하는 컴뮤니케이션 매체(媒體)를 이해해야 하며, 인적접촉(人的接觸), 정치광고(政治廣告), DM 등의 결과(結果)를 측정하는데 관심을 두고 있다.
이러한 컴뮤니케이션 접근법(接近法)이 선거활동(選擧活動)에 중요한 정보(情報)를 제공(提供)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몇가지 그 가치(價値)를 제한하는 문제점(問題點)을 지적(指摘)할 필요가 있다. 먼저 이 분야의 대부분의 연구(硏究)는 선거운동(選擧運動) 기간(期間)동안의 모든 매스미디어의 결과(結果)를 동시에 다루고 있어 각 대체안(代替案) 즉 TV 신문(新聞 ) 인적접촉(人的接觸)과 같은 개별적(個別的) 미디어간의 결과(結果)에 대한 연구(硏究)가 미흡(未洽)하다는 점이다.
⑭ 정세균 논문1) 유권자의 이상적 행동모델 일반적인 설명 모델은 관찰된 행동을 보다 잘 이해하려는 지적인 관심 이외에 포착된 설명변수들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처리하기만 하면 관심을 두고 있는 행동들을 예측할 수 있게 해준다. 또한 분명하게 드러나 설명변수들 중 몇 개가 의도적으로 조작되는 바에 따라서 그 설명 모델들은 그 행동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하는데 도움을 준다.
→ 이씨 논문 일반적(一般的)인 설명(說明) 모델은 관찰된 행동(行動)을 보다 잘 이해하려는 지적(知的)인 관심(關心) 이외에 포착(捕捉)된 설명변수(說明變數)들에 대한 충분한 정보(情報)를 처리하기마 하면 관심을 두고 있는 행동(行動)들을 예측(豫測)할 수 있게 해준다. 또한 분명하게 드러나 설명변수(說明變數)들 중 몇 개가 의도적으로 조작되는 바에 따라서 그 설명 모델들은 그 행동(行動)들에게 영향(影響)을 줄 수 있는 방법(方法)을 선택(選擇)하는데 도움을 준다.
정세균 의원은 1998년 출간된 이종은 남서울대 광고홍보학과 교수의 저서
‘정치광고와 선거전략론’을 자신의 논문에 무단 전재함
문제가 되는 부분은? ㅎㅎㅎ
정세균 의원의 논문 16쪽과 이 교수의 저서 85쪽 중 4문장이 일치
논문 17쪽의 그림은 이 교수 저서 85쪽의 그림 2-3과 동일
정 의원의 논문 17∼19쪽과 이 교수의 저서 179∼182쪽 중 일부 문장 및 문단이 일치
18쪽에 실은 그림과 이 교수의 저서 180쪽도 유사
정세균은 타인의 석사학위 논문을 고스란히 베낀데 이어 시중에 출판된 다른 사람의 저서까지
무단으로 전제했음에도
불구하고 논문 맨 뒤의 참고문헌란에 출처를 밝혔기에 표절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음
-> 김개똥이가 철수 숙제 몰래 배끼고 연습장 뒷편에 '철수꺼 배껴씀' 이렇게 쓰면 문제가 아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여담으로...
황 대변인은 또 최근 문성근 민주통합당 대표대행이 “민주당이 오만해서 선거에 졌다는 것은 수구 언론이 씹는 용어인데 우리 진영이 멍청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등의 발언에 대해선 “적어도 당 대표의 역할을 하고 있는 상황이면 언어의 선택이나 어떤 상황을 표현할 때 있어 좀 더 신중한 표현이 필요하다고 본다. 민주당이나 문 대표대행 자신에게 오는 국민의 여론에 대해 좀 더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문성근은 똘똘 뭉쳐도 모자랄 판에 분열을 일으키려고 작당한거임?)
나는 남이 이랬으니까 너도 이렇자나 하는 식의 내용은 굉장히 싫어 하지만 그것보다
여기에 많은 분들이 정정당당 운운하면서 편협한 시각에 머물러 있다는게
너무 웃겨서 이런 글을 남겨 봅니다 이럼 또 제 글이 마음에 안드신다고
괜한 꼬투리 잡지 마시고 내용에 대해서 옳고 그름으로 반박해주세요 저도 함 보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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