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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노스페라투' 관련작들 ft. 막스 슈레크 (1879~1936)
'노스페라투: 공포의 교향곡' Nosferatu: A Symphony of Horror, Nosferatu – Eine Symphonie des Grauens (1922) 이전에도 1922년판 작품을 소개한 바 있는 '노스페라투' 시리즈는 본래 브람 스토커의 소설 '드라큘라'의 정식 영화화 판권 계약을 맺지 않고 일부 명칭을 바꿔 제작한 비공인 실사판 영화였으나, '막스 슈레크'(Max Schreck, 1879~1936)가 열연한 올록 백작 및 이 작품에서 각색되며 추가한 요소들이 주목 받으며 평론적으로 극찬을 받았고 이 글을 올린 시점 기준 1922년작은 한국어 자막이 첨부된 본편 영상, 컬러 복원판 양쪽 다 감상이 가능한 상황입니다. 아래 내용은 KMDB에서 인용한 작품 소개입니다. 빛의 사용, 형식적 구성, 그림자의 움직임과 전례가 없는 의상과 세트 디자인 등 영화의 모든 면을 개척한 고전영화의 걸작. 무르나우의 열 번째 영화로 영화사상 가장 훌륭한 공포영화로 손꼽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브람 스토커의 원작을 각색하여 성적 위협과 억압된 욕망을 무섭고 아름다운 악몽처럼 표현해낸 작품으로, 빛과 그림자를 탁월하게 이용한 시각적 효과를 통해 공포를 극대화시킨 진정한 “공포의 심포니”다. 로테 아이스너는 이 작품의 시각적 완벽함을 무성영화 예술의 원점이라고 격찬했는데, 이후 수많은 버전으로 상영되며 성적, 정치적 서브텍스트에 대한 다양한 분석이 행해졌다. 프로이트적인 주제 위에 사회적 관습과 위선에 대한 논의를 담고 있는 한편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을 비롯한 다른 표현주의 작품들과 더불어 당시 독일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에 대한 간접적인 비판으로 읽히기도 했다. 흡혈귀를 페스트와 쥐, 악몽, 죽음과 영화적으로 결합시킨 무르나우의 스타일은 이후 모든 드라큘라 영화에 영향을 미쳤고, 베르너 헤어조크를 비롯한 많은 감독들에 의해 리메이크되었다. 이 작품은 후대에도 일부 요소 인용, 패러디, 코믹스판 리메이크 영화들을 포함 수많은 작품들에도 영향을 주어 '노스페라투'란 용어 역사 뱀파이어(흡혈귀) 장르를 상징하는 용어 중 하나가 됐으며 이 중 일부 작품이나마 정리해보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노스페라투 더 뱀파이어 Nosferatu the Vampyre, Nosferatu: Phantom der Nacht (1979, 1986 *) 한국에선 '이사벨 아자니의 뱀파이어'이란 제목으로도 알려진 리메이크판 영화 작품으로 제작비는 동시기인 1970년대 호러 작품들인 '아미타빌 호러' 실사판 (제작비 470만), '나이트윙' 실사판 (제작비 550만), '프라퍼시' (제작비 900만)보다 훨씬 적은 초저예산인 140만 달러에 불과했으나 드라큘라를 사람을 해치는 괴물이나 단순한 퇴치 대상이 아닌 고독하고 소외된 인물로 묘사하여 평론적으로 극찬을 받았고, 여러 영화제 수상작이 되었으며, 이후 1986년에는 1970년대 리메이크판을 기반으로 한 비디오 게임판도 제작됐습니다. 아래 내용은 KMDB에서 인용한 작품 소개입니다. 부동산 중개소에서 일하는 조나단(브루노 간츠 분)은 카르파티아 산맥을 넘어 노스페라투 드라큐라 백작(클라우스 킨스키 분)의 성에 다녀올 것을 요청받는다. 정확한 체류일자를 알 수 없는 긴 여정일 뿐아니라, 아직까지도 귀신을 믿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펜실베니아 마을의 드라큐라 성. 며칠 전부터 알 수 없는 악몽과 불안에 시달린 아내 루시(이사벨 아자니 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조나단은 드라큐라 백작의 성으로 향한다. 가는 도중, 만나는 이들은 모두가 가지말 것을 권하고 여인숙 주인의 아내가 그에게 준 책에는 드라큐라 백작에 대한 온갖 으시시한 얘기들이 나온다. 그러나 그는 결국 그곳에 도착하여 백작에게 피를 빼앗기고 갇히는 몸이 된다. 한편, 드라큐라 백작은 흑해를 건너 조나단의 아내 루시가 살고 있는 마을에 침입하고 조나단 부부와 마을은 드라큐라 노스페라투의 저주와 그에 대한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는데. (출처 : 네이버영화) '노스페라투' ノスフェラトゥ, Nosferatu (1994) 1994년에 일본에서 SFC(슈퍼 패미컴, 슈퍼 컴보이), 1995년에 미국에서 SNES(슈퍼 NES) 기종으롭 발매된 액션 게임 작품으로 '페르시아의 왕자'처럼 픽셀 그래픽으로 부드러운 움직임 및 영화적 연출을 선보였으며, 게임 구성도 단순 전진식 전투가 아닌 미로를 탐색해 아이템을 얻으며 파워업하고(밸런스 조절 및 긴박감 조성을 위해서인지 제한 시간 역시 존재)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괴물, 좀비, 가고일, 유령, 로봇, 늑대인간, 원숭이, 구울, 진흙 정령, 바위 골렘, 드라큘라 백작(국가권에 따라선 노스페라투로 표기) 등 여러 종류의 캐릭터들이 나오며, 멀티 엔딩 시스템도 채용하는 등 다양성 또한 갖춘 작품이며, 특히 맨손에 맨발로 괴물들을 때려잡는 비범한 행보를 보인 주인공 캐릭터도 컬트적 인기를 얻었습니다. '쉐도우 오브 더 뱀파이어' Shadow of the Vampire (2000) '뱀파이어의 그림자', '셰도우 오브 뱀파이어'란 제목으로도 알려진 호러 장르의 독립 영화 작품으로(제작자 중 한명이 '니콜라스 케이지'), 독립영화라는 점에서 눈치챌 수 있듯 제작비는 당시 기준으로도 90년대 TV 영화 제작비보다 부족한 비용인 800만 달러의 저예산에 불과한 한계 속에서도 영화 '노스페라투'의 배우 '막스 슈레크'가 실제로 뱀파이어였을 거라는 컨셉을 활용하여 평론적으로 호평을 받아 마찬가지로 여러 영화제 수상작이 됐으며, 이 작품으로 상을 받은 '윌럼 더포'는 후술할 2024년 리메이크판에도 출연했습니다. 아래 내용은 QDVD에서 인용한 작품 소개입니다. https://qdvd.co.kr/dvd/title_detail.asp?idx=6922 독일의 유명한 영화감독인 "프레드릭 빌헬름 무르나우"는 지금까지 유래가 없었던 사실적인 뱀파이어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브람 스토커"의 소설 드라큐라의 영화 제작권을 얻어내지 못해 고민하던 중 주인공인 뱀파이어를 "올록" 백작으로 바꾸고 제목 또한 로 바꾸어 촬영을 시작하게된다. 그 후 독일에서의 실내셋트 촬영을 끝내고 스탭, 배우들과 함께 야외촬영장소인 체코슬로바키아로 떠난다.무르나우 감독은 일행들에게 "올록" 백작역을 맡을 "맥스 슈렉"을 소개한다. 모두들 실제 뱀파이어와 똑같은 그의 모습에 놀라며 묘한 공포에 휩싸이게 된다."슈렉"의 공포는 연쇄살인으로 이어지고 이제까지 느끼지 못한 공포의 한계는 끝없이 펼쳐지고, 탈출구가 없이 살아움직이는 공포는 신경세포를 끝까지 전율적으로 마비시키는데… '노스페라투: 말라이히의 분노' Nosferatu: The Wrath of Malachi (2003) 스웨덴의 비디오 게임 개발사에서 제작한 1인칭 슈팅 호러 게임 작품으로(작 중 배경에도 스웨덴에서 열린 올림픽 펜싱 경기를 언급) 단순히 적을 베거나, 쏴죽이는 내용이 아니라 제한 시간 내에 가족 구출 및 구출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보상으로 게임 진행이 용이해지는 시스템, 성 내부가 플레이할 때마다 무작위로 바뀌며 다회차 플레이도 고려한 시스템 등도 선보였으며, 본래는 패키치 CD 게임으로 판매했으나 이후 스팀 및 GOG 등의 업체에서도 이 게임과 계약해 디지털 다운로드 판매 역시 이루어졌습니다. '노스페라투' 오페라판 Nosferatu (2004, 2019 *) 노스페라투 시리즈는 연극, 교향곡 연주, 오페라 등 무대 공연 작품들로도 수차례 각색됐고, 이 중 '노바' 공연 예술센터에서 했던 공연 등 일부 작품들은 이 글을 올린 시점 기준으로 무료 공개 중입니다. '노스페라투' Nosferatu (2024) 해외 기준으로는 2024년 12월, 한국 기준으로는 2025년 1월에 극장 개봉한 리메이크판 작품으로 과거 시대 재현을 위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비용을 부담해야 되는 시대극 작품임에도 제작비는 90년대 호러, 코미디 영화보다 부족한 여건인 5000만 달러 정도만 주어진 제약 속에서도 분발해 평론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아 여러 영화제들의 수상작 및 발표 예정 후보작이 됐으며, 한국 개봉 전부터 손익분기점 (제작비 2배)를 넘는데 성공했습니다. 아래 내용은 KMDB에서 인용한 작품 소개입니다. 오랜 시간 통제할 수 없는 강력한 힘에 이끌려 악몽과 괴로움에 시달려 온 ‘엘렌’남편 ‘토마스’가 거액의 부동산 계약을 위해 머나먼 ‘올록성’으로 떠난 후부터 ‘엘렌’은 불안 증세가 심해지고 알 수 없는 말을 되뇌인다.“그가 오고 있어...”기이한 현상들이 일어나며 마을로 점점 짙게 번져오는 그림자.영원한 어둠 속에서 깨어난 ‘올록’ 백작이 찾아오는데... (출처 : 보도자료) 위에서 소개한 작품들 중 1979년 리메이크판은 Roku에서 영어 자막 지원 기능과 함께 지역 한정 공개 중이니 아래 링크도 참고해주시길 부탁 드립니다. https://therokuchannel.roku.com/watch/1706becfed795a909e6143547188685e
콩라인박작성일
2025-01-15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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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일본의 메이지 시대의 역사와 평가
메이지 시대 (1868~1912년) 1860년대 일본은 그야말로 혼란의 시대였다. 당시 미국에 굴복해 불평등 조약을 맺은 일본 에도 막부의 권위는 땅에 떨어져 있었고 황금과 은의 해외 유출로 인해 그야말로 혼란의 시대였다. 특히 그런 에도 막부에 가장 큰 반발과 불만을 품은 세력은 사츠마번과 조슈번으로 이들은 반 서양 활동을 하다가 미국과 영국에 맞서 사츠에이 전쟁과 시모노세키 전쟁을 벌이지만 결국 전쟁에서 지고 서양에 배상금까지 물어내고 개항한다. (이중에서 배상금 상당부분은 에도막부가 대신 지불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명목상으로 각 번에게 서양을 배척하라고 명령을 내린건 에도막부였으니 상당부분 덤탱이를 쓸수밖에 없었다.) 특히 서양에 가장 큰 반발을 하며 무력시위를 하며 에도막부 타도를 주장하면 여러차레 막부전복 시도를 했던번은 조슈번으로 에도막부는 그러한 조슈번은 조정의 적이라고 선포하면 조슈정벌을 실행하지만 당시 막부군의 사기는 이미 땅에 떨어져있었고 조슈번은 서양에서 수입한 신식무기로 무장하고 있었고 1차 조슈정벌은 막부군이 표면적으로 승리한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조슈번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했고 2차 조슈정벌은 결국 막부군은 전쟁에서 패배하고 조슈정벌은 실패로 돌아간다. 1866년 2차 조슈정벌의 실패로 안그래도 권위가 하락해가던 막부의 권위는 그야말로 땅에 떨어졌으며 1867년 훗날 메이지 덴노라 불리우는 무쓰히토 덴노가 122대 덴노로 재위에 오를당시 에도막부는 조슈,사츠마, 토사번의 협박으로 대정봉환을 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에도막부의 쇼군인 요시노부가 거의 대부분의 정무를 처리하였고 여전히 정권을 장악할려고 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사츠마, 조슈번를 중심으로 한 토막파와 막부를 중심으로 하는 좌막파 사이에 전쟁인 보신전쟁이 터진게 된다. 보신전쟁의 첫번째 전투는 토바 후시미 전투였다. 1868년 1월 3일 막부군은 군대를 2개로 나뉘어서 각자 도바와 후시미로 나뉘어 교토로 진압을 시작했으나 도바로 향하로 막부군은 사츠마군과 초반 포격전에 사츠마군이 쏜 포탄에 맞고 막부측 대포가 터지는 혼란이 벌어졌고 이어지는 사츠마군의 총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그와중에 막부군의 사령관인 타키가와 토모타카가 탄 말이 총에 맞고 사령관이 도주하자 결국 막부군은 전의를 잃고 도주하고 후시미로 진군한 막부군 또한 사츠마와 조슈군에게 퇴각당하면서 결국 토바 후시미 전투는 막부군의 참패로 끝난다. 토바 후시미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사츠마 조슈군은 이후 파죽지세로 연이은 전투에서도 계속 승리를 거두면서 에도성을 포위하기에 이른다. 당시 막부군은 상당한 전력을 가지고 있었고 오랫동안 에도성에서 농성을 할수 있었지만 내전이 계속 장기화되면 일본의 경제가 파탄이 날뿐만 아니라 서구열강들이 내전을 빌미로 개입할 가능성을 우려해서 관군에 맞선 막부측 인사들을 사면하는 조건으로 사츠마와 조슈번이 이끄는 관군에 항복한다. 하지만 여전히 관군에 항복하지 않은 막부측의 잔당들은 여전히 남아있었고 우에노 전투에서 쇼기타이를 내세운 막부잔당군을 진압하고 이후 계속 북진을 가행한다. 나가오카성에서 가와이 츠구노스케가 이끄는 나가오카번 군이 메이지 정부군을 상대로 선전하기는 했지만 결국 나가오카 성도 함락되고 이어진 아이즈 보나리 고개 전투에서 아이즈군 역시 정부군에게 패배하고 아이즈 번 역시 항복한다. (정부군에게 항복하는 아이즈번 번주인 마츠다이라 카타모리)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막부군 찬당들이 훗카이도로 도주에 에조 공화국을 세우며 정부군에 대항했지만 1869년 하코다테 전투에서 훗카이도에 상륙한 정부군에게 패배하면서 300년 가까이 지속되어오던 에도 막부는 완전히 막을 내리고 메이지 정부가 일본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것이다. 일본의 권력을 잡은 메이지 정부는 이와쿠라를 비롯한 사절단들을 서양에 보내 서양의 각종 근대화된 법들과 입헌군주제를 도입하고 서양식 공공기관이나 시설을 도입하며 폐도령을 내리고 징병제와 의무교육 일본의 번국체제를 철폐하는 폐번치현을 실행한다 .메이지 정부가 실행한 개혁 중에서 가장 큰 반발을 부른건 바로 무사 계급의 폐지일 것이다. 정부는 사무라이들을 대상으로 가록을 유지시킨 상태에서 신분을 평민으로 바꾸었으며 그 가록마저도 공채로 바꾸었으며 사무라이들에게도 단발령을 내리고 폐도령까지 내리자 그동안 누린 특권을 모두 박탈당한 사무라이들의 불만은 이만저만이 아니였고 결국 사츠마 사족들을 비롯한 큐슈지역 사족들을 중심으로 한 세이난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구마모토 성 전투를 그린 우키요에) 사이고 다카모리가 이끄는 사츠마 반군은 구마모토성을 포위하였지만 그런 구마모토 성에서 농성하고 있는 정부군을 구원하기 위해 메이지 정부는 지원군을 파견하지만 사이고 다카모리가 이끄는 사츠마 반군에게 패배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옹성이라 불리우는 구마모토 성의 난공불락 방어력 앞에 끝내 사츠마 반군은 2달동안 지속된 수성전을 포기하고 퇴각하고 만다. 이후 사기가 크게 떨어진 큐슈 반군들은 정부군에게 연전연패를 거듭하고 반군의 대장이 사이고 다카모리가 할복하면서 정부군은 힘들게 반란을 진압할수 있었다. 세이난 전쟁이후 무력으로 정부를 전복시킬수 없다는 현실이 명확해지자 더 이상의 사족 반란은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 이후 1889년 대일본 제국 헌법이 발표되었고 이러한 헌법은 독일의 전례를 따라서 군주의 권한이 강한 헌법으로 천황이 주권자임을 명시하였고 천황 밑으로 입법, 사법, 행정의 삼권분립을 규정하고 군대의 통수권자를 천황으로 규정하였다. 한편 계속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일본은 운요호 사건으로 1876년 강화도 조약을 맺어서 조선을 개방시키고 어느정도 조선에 대한 이권을 가지고 되었고 이후 1879년 오랫동안 사츠마번의 속국이였던 류큐왕국을 완전히 합병시킨다. 하지만 1884년 조선내 갑신정변의 실패로 조선내에서 한동안 영향력을 크게 잃게 된 일본정부는 자국 근대화에만 집중을 가한다. 사실 일본이 근대화를 이룬 과정에서는 일본이 에도시대때 이룩한 부도 있지만.(이미 메이지 유신이전부터 일본의 경제력은 조선의 경제력에 5배 이상에 달했다.) 자국민들의 희생에서 비롯되기도 했다. 근대화를 할려면 막대한 돈이 필요했고 이러한 돈을 충당하기 위해서 일본 메이지 정부는 자국의 여성들을 외국에 돈을 받고 파는 포주 노릇을 하였고 이러한 가라유키상으로 일본이 번돈은 일본의 근대화에 중요한 자금으로 쓰이게 되고 당시 거의 대부분의 일본 국민들은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사는 가난한 힘든 생활을 하면서 지내야만 했고 여전히 일본 시골지역에서는 먹을 식량이 없어 어린 자식을 죽이는 마비키가 계속 성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분명히 일본은 빠르게 근대화가 진행되고 있었고 일본 국민들은 그러한 희망을 붙잡고 하루하루 힘든 고난의 생활을 견디고 버티면서 나아가고 있었다. 그러한 일본에게 마침내 행운이 다가왔다. 조선에서 동학농민운동이 터졌고 그러한 자국내 농민반란을 제대로 진압하지 못한 조선에서 청나라에 군사지원을 요청했고 청나라에서 군대를 파견하자 텐진조약에 따라서 일본역시 조선에 군대를 보내는게 가능해졌던 것이다. 일본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조선내 자신들 친일정권을 세우기 위해 곧바로 한양으로 군대를 보내 경복궁을 기습해 경복궁을 장악한뒤 조선 조정을 협박해서 갑오개혁을 실행한다. 그리고 조선관군과 함께 동학농민군을 진압한뒤 이제 동학도 진압했으니 조선땅에서 철군하자는 청나라의 요청을 무시하고 청나라에 기습공격을 자행한 청일전쟁을 일으킨다. 청일전쟁 삽화 1894년 일어난 전쟁은 청일전쟁은 처음에는 조선땅에서 일어나다가 조선내에 있는 청나라 군대를 모두 격파하고 북진하는 일본군에 의해 만주지역까지 전선이 확대되었다. 풍도해전, 성환전투, 뤼순전투에서 연달아 청나라군을 상대로 압승을 거둔 일본군은 황해해전에서 자신들보다 전력이 우위에 있는 청나라 해군을 전멸시킴으로서 청일전쟁을 일본의 압승으로 끝났다. 청일전쟁에서 일본군이 청나라군을 상대로 압승을 거둘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당시 청나라군은 서태후와 사치와 각종 부정부패로 군비의 상당수를 횡령해서 대포에서 연달아 불발탄이 터지는등 내부에서 썩었기 때문이였다. 청일전쟁에서 압승을 거둔 일본군은 청나라로부터 대만과 요동반도를 얻게되고 청나라 재정의 2년치, 일본재정의 4년치에 해당하는 막대한 배상금을 받고 조선내에 있는 청나라에 대한 영향력은 완전히 상실되게 된다. 마침내 그동안 일본이 기울었던 노력과 근대화 과정들이 결실을 보여준 순간이라고 할수있다. 하지만 상황이 계속 일본에게 유리하게 흘러가기만 하는건 아니였다. 욱일승천하듯 나아가는 일본에게 예상치 못한 변수가 나타나니 그건 바로 러시아였다. 당시 러시아는 부동항을 원했고 때마침 요동반도는 러시아가 원하는 부동항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요동반도를 일본이 차지하자 러시아는 독일 프랑스를 끌여들여 일본에게 요동반도를 반환하라는 압박을 가했고 당시 전세계 군사력 2위였던 러시아를 당시 이제 겨우 청나라와의 전쟁을 끝낸 일본입장에서 감당해서 전쟁을 한다는건 그야말로 자살행위였고 그러한 사실들을 일본역시 알고있었기 때문에 결국 요동반도를 다시 청나라에 돌려주고 말고 그런 러시아의 군사력에 놀란 조선이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서 러시아에 자신들의 부동항을 쓰게 해주는 등 각종 이권들을 내어주면서 러시아를 끌여들이자 일본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큰 위기가 닥친 것이다. 잘못하면 러시아라는 거대한 변수로 인해 그동안 자신들이 공을들인 조선을 확보하는 일마저 물거품이 될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당시 그런 일본에게 큰 행운이 찾아온다. 바로 당시 러시아와 그레이트 게임을 하고 있었던 패권국 영국은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압승을 거두자 일본에 가능성을 엿보고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서 일본과 영일동맹을 맺고 일본을 후원해주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일본은 영국이란 든든한 뒷배가 생기고 청일전쟁이후 10년동안 힘을길러 마침내 막대한 영국의 지원을 받고 러시아를 기습공격하면서 러일전쟁이 터진다. (러일전쟁의 삽화) 러일전쟁은 청일전쟁과 달리 일본군이 압승을 거두지 못했다. 일본군은 러시아가 점령했던 뤼순항을 점령하고 봉천전투에서승리를 거두면서 분명히 군사적으로 성과를 거두기는 했지만 일본군 역시 러시아군 못지않게 큰 피해를 입었다. 특히 뤼순전투는 러시아의 뤼순기지를 공격하던 도중 일본군의 총지휘관인 노기 마레스케 장군의 차남까지 전사할 정도로일본군 역시 매우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거기다가 설상가상으로 일본의 국채를 구입하면서 경제적으로 일본을 지원해 주었던영국과 미국도 일본이 러시아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는것 까지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고 그저 최대한 전쟁을 장기전으로 이끌면서러시아의 국력을 소모시키는 정도까지만 기대했기 때문에 미국과 영국도 더이상 일본의 국채를 구입하는걸 거절했고 경제규모에서러시아에 밀렸던 일본이 먼저 돈이 다 떨어질 상황에 쳐해서 전쟁수행에 크게 차질이 생긴 그때 러시아내에서 유대인 학살과 탄압에 크게 불만을 품었던 제이콥 쉬프를 비롯한 많은 부유한 유대인들이 일본에 국채를 사주고 돈을 빌려주면서 일본은 다행히도 전쟁을 계속할수 있었고 이후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 발트함대를 전멸시키면서 전쟁의 승기를 완전히 잡게된다. 이후 미국의 중재하에 일본과 러시아는 마침내 일본의 판정승으로 강화협상인 포츠머스 조약을 맺게된다. (포츠머스 조약에서 협상을 맺기 위해 모인 일본과 러시아의 외교관들.) 당시 일본은 평화조약을 맺기 위해서 절대적 필요조건과 비교적 필요조건을 나누었는데 절대적 필요조건은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 인정이였고 비교적 필요조건은 전쟁 배상금이였다. 당시 일본은 일본이 보낸 첩자였던 아카시 모토지로가 러시아내에서 각종 선동들을 일으킴으로서 러시아 내 곳곳에 전쟁반대 시위가 벌어졌고 그러한 여론을 인식해 러시아내에서도 더 이상의 전쟁은 힘들다고 생각하고 포츠머스 조약에 일본과 강화협상을 하기 위해서 나왔지만 러시아는 일본역시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전쟁군비가 거의 다 떨어져서 더 이상의 전쟁은 사실상 힘들다는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한푼의 배상금도 지불할수 없다고 말했고 결국 일본은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 인정과 러시아가 차지하고 있던 일부 요동반도를 반환받고 북사할린 남부를 할양받는 것으로 협상을 하게 된다. 러일전쟁이 마침내 일본의 판정승으로 끝난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정작 중요한 전쟁 배상금은 단 한푼도 받지 못했고 청일전쟁에서 막대한 배상금을 받은 기억으로 일본정부를 믿고 일본이 전쟁에 필요한 군비를 마련해주기 위해서 자신들의 재산을 전부다 털어서 일본국채를 사주었던 수많은 일본국민들은 이러한 사실에 크게 분노하였고 급기야는 히비야 폭동을 일으키게 된다. 이러한 폭력을 동원한 시위를 일본정부는 경찰을 동원해서 막았고 이러한 사태로 17명이 사망하고 500명이상이 부상을 입고 2000명 이상이 검거되었다. 당시 일본정부는 오로직 자국의 승리만 보도하는 식으로 언론을 통제하였기 때문에 일본국민들 입장에서는 잘 이기고 있는 전쟁을 무능한 정치인들이 협상을 잘못해서 제대로된 배상금 한푼 받지 못하고 졸전으로 협상을 잘못 맺었다고 생각을 한 것이다. 이러한 자국내 폭력시위들을 무력으로 진압한 일본은 이후 조선을 협박으로 을사조약을 맺게 되면서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시켜 조선을 자국의 속국으로 만들며 조선을 지배권을 행사하게 된다. 이후 1907년 정미 7조약으로 조선의 군대를 해산시키고 조선의 군사권까지 장악하고 1909년 기유각서로 조선의 사법권을 박탈하면서 사실상 조선은 외교권, 군사권, 사법권까지 전부다 일본의 지배를 받는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로 전략하게 된다. 이후 1910년 6월 한일약정각서로 조선의 마지막으로 남은 경찰권까지 박탈하고 이후 1910년 8월에 한일병합조약을 반포하면서 공식적으로도 조선은 완전히 일본의 식민지로 전략하게 된다. (1910년에 발간된 한일병합조약 기념 엽서) 이후 일본은 1911년 서구열강들 하고 그동안 맺었던 모든 불평등 조약을 폐지시키면서 사실상 더디어 일본은 제국주의 국가가 되는데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서구열강들과 어느정도 동등한 취급을 받게 되는 열강에 지위에 오르게 되는데 성공한 것이다. 이후 메이지 덴노는 신해혁명으로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가 멸망하는 것까지 지켜보고 1912년 마침내 붕어하면서 메이지 시대는 끝이난다. 메이지 시대는 그야말로 영광의 시대면서 한편으로는 고난과 희생 인고의 시대였다. 메이지 덴노가 즉위할때당시 일본은 혼란한 상황으로 그러한 상황을 극복하고 근대화에 성공함과 동시에 마침내 열강에 반열에 들어가는데 성공했다. 거기에는 수많은 일본국민들의 희생과 고난이 있었고 상당한 행운까지 따라주었다. 일본은 자신들의 내전인 보신전쟁을 서구열강들이 간섭해서 자국이 서구열강들의 전쟁터가 되는걸 우려해서 정부군 역시 막부측 인물들에게 가혹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능력이 있으면 오히려 정부내 요직에 임명하는등 회유책을 써가며 항복을 유도했고 그러한 현명한 조치로 일본은 대규모 내전을 불과 1년 남짓만에 끝낼수 있었다.(만약 남북전쟁이나 훗날 벌어질 한국전쟁같이 몇년 이상 지속되었다면 일본역시도 전쟁이후 자국 경제가 파탄이 나서 그대로 외세에 경제가 종속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일본은 에도시대 수백년동안 벌어놓았던 자금력으로 메이지 유신이전에도 일본의 경제규모는 조선의 5배에 달했으며 그러한 탄탄한 경제력을 오직 큰 부정부패 없이 자국 근대화를 하는데만 쏟아부었으며 그것마저 부족하면 자국 여성들을 해외로 인신매매로 팔아넘기면서 근대화에 필요한 부족한 돈을 마련하면서 빠른 속도로 근대화를 이룰수 있었다. 또한 대부분의 일본국민들은 궁핍한 생활을 하면서도 하루하루 빠르게 근대화가 되어가는 일본의 모습에 희망을 가지고 일본 정부가 근대화에 필요한 돈을 충당하기 위해 막대한 세금을 거두면서도 불평하지 않고 세금을 내고 전쟁이 나면 일본에 전비를 마련해주기 위해서 일본의 국채를 사주면서 하루하루 희망을 가지고 견더나갔다. 그러한 희생과 고난이 부흥하듯 당시 일본정부는 각종 개혁들로 사무라이들의 특권을 없애고 서양에 사절단을 파견해서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각종 법과 제도를 흡수해서 자신들의 환경에 맞게끔 적용시켰고 외부적으로도 막대한 행운까지 찾아오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등으로 죽은 무려 10만명에 달하는 자국군인들이 흘린 시체와 피로 마침내 일본은 근대화에 성공할뿐만 아니라 오랜 숙원이였던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어 지배하고 열강의 반열에 들어갈수 있었다. 하지만 일본은 전쟁도중 철처한 언론통제로 자국내 전쟁상황을 국민들에게 자신들이 유리하게만 보도하였고 그 결과 국민들 사이에서 유능한 군인들이 흘린 피로 이긴 전쟁을 부패하고 무능한 정치인들로 인해 제대로 배상금도 받지 못하고 말아먹었다 그러니 군인들이 정권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군국주의적 여론이 싹이트고 설득력을 얻기 시작했고 그리하여 쇼와시대에 초기에 이르러서는 국민의 지지를 얻는 군부 쿠테타가 흔해졌으며 자국의 총리인 이누카이 츠요시까지 암살당함에 따라서 일본은 군국주의 사회로 빠르게 접어들면서 그러한 군부는 무모하기까지 해서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서 패망에 이르는 그 시작점이 시작 되기도 한다. 메이지 시대는 분명히 일본에게영광의 시대로 끝났지만 그러한 영광은 수많은 일본국민들의 희생으로 뒷받침되어서 이룬 그러한 영광을 이루기 위해서 수많은 일본국민들의 노력 피땀과 고난 희생을 견더야만 했던 영광의 시대임과 동시에 고난과 희생 그러한 고난을 오랫동안 참고 견더야 하는 오랫동안 긴 인고의 시대였다. 인생도 메이지 시대와 같다. 잔혹한 시대를 견더내며 지금은 힘들지만 수많은 괴로움과 고난을 인고하면 계속 희망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면 언젠가는 막대한 행운이란 것이 찾아오고 결국에는 영광이란 열매를 맛볼수 있는 것이다.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dcbest&no=280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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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네이마르, 월요일부터 출전 가능
네이마르는 부상으로 인해 1년간 경기에 나서지 못했지만, 다음 주에 열리는 AFC 챔피언스리그 경기에선, 사우디아라비아 구단 알 힐랄 소속으로 뛸 수 있게 됐다.네이마르의 마케팅 회사인 NR 스포츠는 토요일에 발표한 성명을 통해 축구에 대한 그의 사랑과 다음 월드컵에 출전하고자 하는 희망이 그를 다시 활동하게 만들었다고 밝혔다."아직 복귀에 대한 최종 결정은 내려지지 않았지만, 10번의 네이마르는 월요일 경기에 나서 놀라운 활약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알 힐랄이 아랍에미리트의 알 아인과 맞붙는 경기를 언급하며, 성명을 통해 밝혔다.지난해 10월 국가대표팀 경기 중 왼쪽 무릎 반월판과 전방십자인대가 파열되는 부상을 입고 수술을 받으면서, 네이마르는 2023년 8월 리야드 팀에 이적한 이후 단 5경기만 출장하는 데 그쳤었다."고통, 괴로움, 축구에 대한 그리움의 나날들이었는데, 우리의 10번을 위해 항상 함께해 준 가족과 친구들의 도움으로 극복했다,"라고 성명서에 덧붙여 말했다. "그리고, 소셜 미디어 네트워크에서 네이마르에게 모든 지원을 해준 전 세계의 모든 팬들. 기다림은 끝났다."토요일에 게시된 소셜 미디어 게시물에는 32세의 그가 자신의 회복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습과 복귀를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담긴 영상이 게재되었다."부상을 당하지만, 나는 결국 돌아온다,"라고 눈물을 흘리는 네이마르는 영상에서 말했다. "하지만, 반쪽짜리 상태론 돌아오지 않는다."7월, 네이마르는 훈련에 복귀하긴 했지만, 그의 소속팀인 조르제 제수스는 즉각적인 복귀에 대한 기대감을 9월에 낮췄다. 이 포르투갈 감독은 네이마르가 월요일 경기에 출전할지 컨펌하진 않았다.내년 8월에 계약이 종료되는 네이마르는 AFC 챔피언스리그에선 외국인 선수의 출전 수에 제한이 없기 때문에 경기에 출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우디 프로 리그에서는 1월에야 복귀할 수 있습니다.네이마르가 컨디션이 좋다면, 11월에 예정된 남미 월드컵 예선 2라운드를 앞두고 브라질 국가대표팀에 복귀할 수도 있다. https://amp.foxsports.com/stories/soccer/neymar-available-next-week-after-year-long-recovery-from-acl-injury
로보트카작성일
2024-10-21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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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일반] 게시글 쓰다가 책 집필. I am 도전이에요~
제가 언리얼엔진 배우다가 가끔씩 생각나는 것들로 유튜브 영상 만들고 온라인에 글을 쓰기 시작한지 2년이 벌써 넘었네요. 육아하고 일하고 설거지 하고 청소기 돌리고 멍도 때리고, 멍때리다가 와이프한테 등짝 맞고….. 등등 사는게 바쁜 와중, 틈날때 가끔씩 시간 내서 영상 만들고 글쓰고 하다 보니 생각만큼 그렇게 자주 업로드 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이 좋았는지 언리얼 관련해서 여러가지 감사한 기회가 찾아 왔었던 것 같습니다. 어쩌다 보니 공모전도 참여 해보고, 좋아하는 아티스트 분들에게 댓글 은총도 받아보고, 공짜로 텀블러도 받아보고, 일할 기회가 생겨 이직도 하고, 새로운 인연들도 만들고….. 이렇게 적으면서 차근차근 생각해보니 너무 단기간에 운을 다 몰아 쓴게 아닌지 걱정 될 정도로 감사할 일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 중에 가장 의외였던 건 언리얼엔진 관련 책을 써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주신 출판사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책이라는건 원래 읽기만 읽었지 쓸 생각은 상상으로도 안해봤었던 터라 선뜻 그러겠다고 이야기 하기가 망설여졌었습니다. 제가 뭔가 대단한 업계 전문가도 아니고, 글을 잘 쓰는 사람도 아닌데 내가 그래도 되나 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죠. 그런데 받은 메일에 있던 ‘종이책’ 이라는 단어가 계속 뇌리에서 맴돌았습니다. 뭐가 되었든 내가 쓴 글이 종이책으로 엮여서 만들어진다는 상상을 해보니 가슴이 둑흔둑흔 해서 그날 잠을 좀 설쳤던 것 같기도 합니다. 결국에는 말이나 한번 들어보자는 심정으로 기획자 분과 몇번 미팅을 했는데 두세번 같이 이야기 하다가 정신차려 보니 귀신에 홀린것처럼 챕터 내용까지 다 결정하고 계약까지 해버리는 저를 발견 할 수 있었습니다. 기획자 분께서 출판사에서 생각해 놓은 기획방향을 설명 해 주시면서도 제 이야기를 정말 잘 들어주셔서 감사하긴 했는데, 뭘까요 뭔가 숨 쉴 새도 없이 스르륵 당한 이 기분?? 원래 기획이었던 예제 따라 할 수 있는 강의책에다가 중간 중간 제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 어쩌다 주워먹은 노하우들을 포개넣어서 써보기로 했습니다. 출판과정에 대해서는 완전한 문외한이라 몰랐는데 출판 계약을 하면 계약금을 주시더라구요. 물론 나중에 도서가 팔리는 수익에서 까이기는 합니다. 저는 살면서 한번도 저한테 돈을 주려는 사람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서는 걸 경험 해본적이 없었는데, 아니 송금 정보 공유부터 이체까지 일사천리로 연락 주시고 송금 후 확인까지 퍼펙트. 그리고 제 통장에 계약금이 찍히는 순간, 아? 계약금까지 받아버렸으니 어쩌겠느뇨, 원고를 써야 하지 않겠느뇨? 저질러버렸네? 이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족쇄아닌 족쇄를 차고 원고 집필기간으로 정한 1년 동안 매일 짬내서 열심히 꾸준히 원고를 썼습니다…. 는 거짓말이고 일 때문에 바쁠때는 몇달동안 워드파일 열어보지도 못하다가, 짬날 때 찔끔찔끔 쓰기도 하고, 뭔가 뒤통수가 저릿하는 느낌이 들 때마다 왕창 벼락치기로 쓰고는 했습니다. 물론 원고 마감 두달 전에 제일 많은 내용을 완성한건 비밀입니다 쉿. 원고 쓸 때 있었으면 참 좋았을 QK80, 그래도 막판 수정 할 때 잘 쓰고 작업용으로도 잘 쓰고 있습니다. QK80 오기 전까지 메인으로 쓰던 저가형 키보드입니다. 가성비에 만족하면서 사용했습니다. 옆에는 와이프님이 하사해주신 플랫화이트 풀고 싶은 썰을 정리해서 적는 것도 이래저래 고민이 많이 되고, 썼다 고쳤다 지웠다 무한 반복을 하는 바람에 오래 걸렸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쓰려는 책 특성상, 글과 그림만 보면서 예제를 따라 할 수 있도록 하는게 어렵더라구요. 예제 프로젝트 만들고 스크린샷 찍어가면서 어떻게 해야 최대한 쉽고 간결하게 설명이 가능할지 고민 하는데에 시간을 제일 많이 쓴 것 같습니다. 새삼 중딩 때 보던 참고서, 문제집들의 위대함을 느껴지더군요. 물론 참고서가 아무리 잘 되어 있어도 제가 공부를 잘하지는 않았지만요. 그렇게 언리얼로 예제 만들고 스크린샷 정리하고 글 끄적거리고 하다보니 1년이 신기루처럼 사라졌습니다. 1년이 짧지는 않은데, 책 원고 쓰는 시점에서 보니 정말 후딱 지나간 것 같습니다. 네? 미루다가 벼락치기를 하니까 짧게 느껴진게 아니냐구요? 원고 쓰는 기간 동안 출판사 담당자님이 중간 중간 체크 할겸 연락 주시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스스로의 게으름과 귀차니즘과의 싸움인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인은 벼락치기가 국룰인가 라고도 생각했구요. 저만 그런거 아니죠?? 아니라고 해주세요 그렇게 정말로 1년이 다 가버리고 약속된 원고 마감일 이틀을 남기고 탈고에 성공했습니다. 사실 탈고라는 표현도 모르고 있었는데 출판사 분들과 이메일 주고 받다가 알게 되었습니다. 찾아보니 원고 쓰기를 마치다는 의미도 있는데 또 다른 의미로 괴로움에서 벗어나다는 의미도 있더라구요. 참 공교로우면서도 절묘하다는 생각이 듬과 동시에 두가지 의미를 굳이 나누어서 이야기 할 필요가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완성된 원고를 드디어 출판사에 보내고, 드디어 끝났다라는 성취감과 안도감이 몰려왔습니다. 아주 오랜만에 기말고사 끝난 중딩, 졸업과제 제출한 대딩의 기분을 다시금 느껴보면서 맥주 한캔을 들이키고 있을 때 였습니다. 출판사에서 답변이 와서 탈고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앞으로 있을 수정 과정에 대해 대략적인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이 때만 해도 끝났다는 기분에 취해 (혹은 맥주에 취해) 설명을 제대로 읽지 않고 대충 넘겼던 것 같습니다. 탈고는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인 걸 까맣게 모르고 말이죠. 그렇게 제 원고 수정을 담당할 편집자 분이 정해질 때까지 저는 몇 주동안 자유를 만끽했습니다. 육아도 맘껏, 일도 맘껏, 집안일도 마음껏, 밤에 맥주도 맘껏 마시고 말이죠 훗. 질풍과 노도의 시기였습니다. 그러고선 새로 정해진 편집자 분에게 연락을 받고 수정 작업을 시작하게 되자 이게 생각보다 일이 많고 오래 걸릴 것이라는 예감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편집자 분이 참 감사하게도 원고를 정말 꼼꼼히 보시고 수정사항을 체크 해주시더라구요. 심지어 원고를 보고 직접 언리얼엔진 설치까지 해보시면서 따라해보시기까지 하시는데 솔직히 이렇게까지 꼼꼼히 탈탈 털어주실 줄 상상도 못했습니다. 글과 함께 첨부한 스크린샷이 애매한 경우, 원고 글의 설명이 명확하지 않거나 표현이 중의적이라 헷갈릴 수 있는 경우, 너무 글만 길게 이어져서 자칫 잘못하면 지루해질 수 있는 경우, 예제 프로젝트 강의 내용과 부가적인 정보제공이 섞여서 간결함을 잃는 경우, 아재개그 욕심이 지나쳐서 읽는 사람에게 거부감을 유발 할 수 있는 경우 등등 시간이 지나고 편집자님과 함께 원고를 다시 보니 고칠 곳이 많았습니다. 1차 수정, 2차 수정, 3차 크리스탈을 거치면서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손 안댄 곳이 없을 정도로 싹 다 정리를 해주셨습니다. 물론 편집자님이 다 알아서 고쳐주시는 것은 아니고 의견 조율해가면서 서로 고칠부분 고치고, 수정본 토스하고 다시 토스 받고 하는 식으로 진행했습니다. 그렇게 원고 내용을 모두 수정해서 완성했다고 생각한 순간부터는 디자이너 분에게 넘겨져서 페이지 디자인 기간에 돌입했는데, 디자인 부분도 정말 신경 써야 할게 많더라구요. 글 사이 여백, 문단 모양이나 띄어쓰기, 스크린샷 배치 등등 쉽게 넘길 수 있는 부분이 없었습니다. 디자인도 수정의 수정을 거쳐서 완성에 가까워질 때 쯤 드디어 책 제목을 정식으로 정하고 표지 디자인이 나왔습니다! 표지 디자인 옵션들을 받아보고 든 느낌은 뭔가 이게 진짜로 인쇄 되어서 나올 모양이구나 라는 느낌? 저의 경우에는 탈고 하고 나서 수정 편집 과정을 거치고 표지까지 나오는데에 반년 정도 걸렸던 것 같습니다. 경험이 없어서 이정도의 기간이 일반적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꽤나 많은 시간과 공이 들어간 작업이었습니다. 초보 작가 원고 고치느라 오랜기간 고생하신 편집자님께 심심한 위로와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이제 정말 책 출간만 하면 끝인줄 알았는데 마지막으로 표지에 들어갈 추천사 받는 미션이 남았더라구요. 보통 책 표지 뒷면이나 맨 앞페이지 부속 같은데에 보시면 작가와 친분이 있는 사람이라던가, 책 내용에 관련 있으신 분이라던가 하시는 분들이 해당 도서 추천하면서 쓰는 짤막한 글들 보신적 있을 겁니다. 책 읽을 때에 저도 추천사를 본적은 많은데, 추천사를 부탁하고, 주고 받는 과정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전혀 없었습니다. 편집자님이 필수는 아니라고 하셔서 처음에는 그런가보다 했지만, 가만히 생각 해보니 꼭 추천사를 받고 싶은 분들 이름들이 자꾸 떠올라서 욕심을 내보기로 했습니다. 언리얼엔진과 3D 업계에 관련된 분들 중에 생각나는 분들이 양손에 다 꼽기 힘들 정도로 많이 계셨지만 시간상의 문제도 그렇고 수락의 가능성까지 모두 고려해서 딱 세분에게만 부탁드리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이 세분도 저의 존재는 아시지만 개인적인 친분은 없는 상태여서 부탁드리기가 매우 조심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연락드리기 전에 이 중에 한분만 수락해주셔도 다행이라고 마음을 비우기는 개뿔 제발 써주세요라고 속으로 빌고 빌었죠. 다들 바쁘신 분들이기 때문에 원고를 다 보실 수 없을거라 생각해 최대한 액기스만 간추린 요약본도 준비하고 최대한의 공손함과 평소에 동경하던 저의 진심을 담아 메세지를 보냈습니다. 너무 구구절절 쓰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최대한 공손하면서도 간결하게 쓰려고 했는데, 인스타 디엠이나 카톡을 이렇게 심혈을 기울여서 써본적은 와이프랑 싸웠다가 화해할 때 말고는 처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정말 정말 감사하게도 세분 다 추천사를 흔쾌히 써주셔서 도서에 포함 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래가지고 무사히 출간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중딩 때 괜히 광화문 교보문고 들락날락 하면서 새 책 냄새 맡고 다니던 때가 있었는데 그 교보문고 사이트에 제가 쓴 책이 올라가 있다니 뭔가 아직도 얼떨떨 하네요. 책 출간되면 꼭 알려달라고 했던 분들에게 드디어 책 나왔다고 자랑하려고 쓰려고 했는데 어쩌다보니 도서 출판 후기? 정도의 글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게시판에 아재개그 한가득한 글 올릴 때마다 응원 해주신 분들, 힘이 되는 댓글 남겨주신 분들, 특히 웃기다, 재밌다고 격려 해주신분들 덕분에 제가 글쓰기에 좀 더 자신감을 가지고 도서 집필까지 해보지 않았나 생각해보면서 깊은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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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외신이 본 잼버리 “K팝 콘서트, 전체주의 사고” “사과로 마무리”
‘엉망인 잼버리 대회’ 평가 유지“한국 정부, 콘서트로 수습 노력”가디언 “영 철수비용 환불 불확실” 외신은 11일 ‘2023 새만금 세계스카우트 잼버리’ 폐영식 소식을 내보내면서 한국 정부가 혼란스러운 대회를 수습하려는 노력으로 K팝 콘서트를 열었다고 보도했다. 급조된 K팝 콘서트가 “전체주의적 사고”를 드러냈다는 보도도 있었다. AFP통신은 12일 서울발로 내보낸 ‘K팝이 구출? 한국, 스카우트 잼버리 폐막 콘서트에 올인’ 기사에서 수만 명의 스카우트 대원들이 춤을 추고 야광봉을 흔들었다고 현장의 열띤 분위기를 전했다. 방탄소년단(BTS) 소속사 하이브가 모든 관객에게 총 8억원 어치의 BTS 포토카드를 제공한 사실도 전했다. AFP통신은 그러면서도 “정부가 재앙이 된 행사를 수습하기 위해 수백만 달러의 비상 자금을 투입했지만 K-팝 팬들로부터 공공부문 직원에 이르기까지 한국 정부의 접근 방식에 대한 비판이 커지고 있다”고 전했다. AFP통신은 잼버리 폐영식 공연과 프로그램이 일부 겹치는 방송사 음악 프로그램이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갑자기 취소됐으며, 성일종 국민의 힘 의원이 멤버 두 명이 군 복무 중인 BTS를 재결합시켜 무대에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팬들의 반발을 샀다고 전했다. 연합뉴스를 인용해 산업은행과 한국전력공사 등 공공기관 직원 1000여 명이 콘서트를 돕기 위해 ‘동원’됐다고 보도했다. K팝 콘서트가 열린 상암월드컵경기장 잔디 훼손 논란도 다뤘다. AFP통신은 엑스(구 트위터)에 올라온 “아이돌 팬은 그들이 좋아하는 그룹이 촉박한 일정에서 무대로 끌려나간 것에 눈물을 흘렸으며 축구 팬들은 비싼 잔디가 훼손돼 눈물을 흘렸다”며 “도대체 누가 잼버리 콘서트로 이익을 얻는가”라는 글을 소개하며 기사를 마무리했다. 프랑스 다국어 공영방송인 프랑스24, 프랑스 일간지 르피가로, 필리핀스타 등이 AFP통신의 기사를 전재하거나 AFP통신 기사를 바탕으로 기사를 써서 잼버리 폐영식 소식을 전했다. 로이터통신은 “한국에서 열린 폭염, 비위생적 환경에 대한 문제 제기, 대피로 얼룩진 세계 스카우트 잼버리 대회가 K팝 콘서트와 사과로 끝났다”고 전했다. 로이터통신은 “기후변화로 인한 유례없는 폭염과 태풍으로 스카우트 대원들이 피해를 입어 안타깝다”는 한덕수 국무총리의 발언과 함께 잼버리 파행 과정을 되짚었다. 스카우트 대원들이 서울역이나 전북의 카페 등지에서 시민들의 도움을 받은 사실도 소개했다. AP통신은 “태풍이 수십 채의 집을 침수시키고 거리를 진흙탕 강으로 만든 지 하루 만에 K팝 콘서트가 열렸다”며 “콘서트는 잼버리를 제대로 마무리하려는 정부의 열렬한 노력 끝에 열렸다”고 전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태풍으로 인해 새만금 야영지에서 조기 철수가 이뤄진 뒤 잼버리는 한국 지자체와 기업이 후원하는 K-pop 댄스 레슨과 전통 떡 만들기 등 견학과 축제가 포함된 잼버리로 변모했다고 전했다. 가디언은 윤석열 대통령이 폐막식 몇 시간 전 정부에 참가자 전원이 출국할 때까지 숙박, 교통, 관광 등을 지원하라고 지시한 사실도 전했다. 가디언은 “조기 이동을 위해 영국 스카우트 대표단이 지출한 약 100만 파운드가 상환될 것인지 여부는 여전히 불확실하다”며 “가디언은 아직 주최 측으로부터 답변을 받지 못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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