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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정액과 혈액형이 달랐던 연쇄 살인마 안드레이 로마노비치 치카틸로
정액에서 검출된 혈액형은 A형 나머지 혈액형은 ab형이었던 특이 체질로 수사에 혼선을 주었다. 1936년 출생1994년 사망우크라이나계 러시아인총기에 죽은 인물 이름안드레이 로마노비치 치카틸로(Андрей Романович Чикатило)[1]출생1936년 10월 16일사망1994년 2월 14일 (57세)국적소련 국기 소비에트 연방 → 러시아 국기 러시아가족아내, 장남 유리 치카틸로, 장녀 류드밀라 치카틸로신장193cm혈액형AB형[2](정액만 A형)범죄 유형연쇄살인 1936년,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가난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선천적으로 병약한 체질이었던 그는 가난한 집안 환경이 겹쳐 굶기를 밥 먹듯 했고, 그로 인해 점점 시력을 잃어갔다. 게다가 유아 시절 만성적인 야뇨증으로 인해 어머니로부터 매우 혼났다고 한다.[3] 그리고 사춘기 과정에서 자신이 발기부전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심한 고민에 빠졌고, 이에 정력제를 먹거나 나뭇잎을 갈아서 으깬 것을 성기에 바르는 등의 여러 방법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로 끝나자 매우 절망했다고 한다. 그래서 치카틸로는 그 대안으로 독서와 공부에 열중하며 마을 안에서 수재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으나, 당대 최고 명문 대학이었던 모스크바 대학 법학부 수험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치카틸로 본인은 대조국전쟁 때 아버지가 독일군 포로로 끌려갔다는 기록 때문에 불이익을 받아서 떨어졌다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학교 성적이 부족해서였다. 치카틸로는 재수를 하지 않고 공업전문대학교에 들어갔고, 졸업하고 여러 기술직을 전전하다가 로스토프 대학에 입학, 35살이 넘어서야 러시아 문학과 철학 과목에 대한 교원 자격을 취득했다. 그리고 로스토프 주의 노보샤흐틴스크 시에서 교직 생활을 시작했다. 치카틸로의 어머니는 항상 어린 그에게, '네 큰 형은 반체제사상가로 몰려 공산당원들에게 산 채로 잡아먹혔단다.'라며 말을 하곤 했고, 이로 인해 생긴 극도의 강박관념과 형을 잡아먹은 존재에 대한 공포를 갖게 되었다.[4] 거기에 시력을 잃음으로써 생긴 콤플렉스가 더해져 정신적인 문제까지 생기게 되었다. 또한 몸이 약하고 발기부전이라는 병을 가지고 있어서 성생활이 매우 힘들었고, 이것이 훗날 범죄 행각에서 성폭행보다는 잔혹한 살해에 더 집중하는 원인이 되었다. 한편으로 어린 시절에는 왕따를 굉장히 심하게 당했는데 그의 여동생의 증언에 따르면, "오빠는 항상 혼자였습니다. 오빠는 아이들이 자신을 따돌리는 것을 무서워하여 항상 건물 구석에 숨어있는 불행한 사람"이라고 했다. 이러한 일들로 인하여, 그는 자신의 콤플렉스와 세상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1963년, 여동생의 친구와 결혼하였다. 여기에는 치카틸로가 술을 즐기지 않는다는 사실이 큰 이유 중 하나였다.[5] 한편 치카틸로는 연애할 때 발기부전을 숨기고자 자신의 아내에게 결혼 전 순결을 지켜주고 싶다는 핑계로 결혼 전까지 성관계를 피했지만, 그래도 불임은 아닌지라 아이는 가질 수 있었다. 그렇게 슬하에 아들인 유리와 딸인 류드밀라 두 아이를 두었지만, 허약한 체질로 인해 생긴 성기능 장애 때문에 가정생활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눈도 거의 실명상태가 된지라, 제대로 된 직업을 구하는 것도 어려웠다. 군 제대 후 대학에서 교원 자격증을 딴 그는 광산 지역에서 어린이들을 가르쳤지만 생활은 녹록치 않았다. 당시 학생들은 가난한 형편 때문에 제대로 먹지 못해 마른 몸이었던 치카틸로를 '거위'라고 부르며 비하했다. 그러다가 수영장에서 어린이들과 수영을 같이 하다가 여자아이를 성폭행하고 싶다는 욕망이 느껴져 성폭행하려고 했으나, 여자아이가 격렬히 반항하기도 하고 게다가 발기부전으로 인하여 실패하였다. 그리고 여자아이가 수치심으로 인해 이야기하지 않아서 결국 그냥 유야무야 넘어가 버렸다. 그러다가 학생 중 일부가 우연히 그의 집안에 불순분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는 이 사실을 학교에 고발, 결국 교단을 떠나야 했다. 이후에 몇몇 공장에서 일도 하다가, 80년대 와서는 지방의 작은 기숙사 학교 사감으로 일하게 된다. 4. 살인 행각그에게 숨겨진 본능이 앞의 여자아이의 강간 시도를 통해 서서히 눈을 뜨게 되고, 결국 42세가 되던 1978년 무렵부터, 그는 잔혹한 살인마 로스토프의 백정의 삶을 살기 시작한다. 9살 소녀 옐레나 자코트노바를 먹을 것을 준다며 꾀어내 오두막집에 데려와 강간하려고 했으나, 옐레나가 격렬히 저항하여 강간은 하지 못하고, 잔혹하게 목을 졸라 살해한 후 시체에 자위행위를 했다. 그러면서 밤마다 거리를 지나는 소녀와 여자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준다는 등의 유혹으로 그들을 꼬여냈다. 아이들만 죽인 것이 아니라 성인 여성들을 끔찍하게 유린한 후 성폭행을 하기도 하면서 살해했다. 치카틸로의 피해자들의 연령은 다양했다. 21살의 여성을 비롯하여, 헝가리에서 온 여자 유학생 및 16살~17살 정도의 청소년 남녀도 피해자들 중에 포함되었다. 젊은 시절의 교사 생활을 통해, 그는 아이들과 성인 여자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움직이는지를 매우 잘 알았고 이를 잘 이용했다. 충격적인 것은 치카틸로가 인육을 먹었다는 사실인데, 희생자들의 신체 일부를 절단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심지어 희생자들은 아직 살아있는 상태에서 자신의 신체가 잘리는 모습을 보기도 했으며, 다른 사람이 먼저 죽어 치카틸로가 그 사람의 인육을 잘라내는 것을 목격하며 공포를 느끼던 때도 있었다고 한다. 이때 그는 희생자가 공포심에 떠는 모습을 즐겼다고 한다. 남자는 성기를 잘라내고 여자는 내장을 무자비하게 파헤친 뒤 자궁을 꺼내가거나, 유방이나 눈알, 엉덩이 살 등 여러 신체부위를 잘라냈다. 또한 항상 시체의 눈알이 훼손되어 있었는데, 이는 치카틸로가 '사람이 죽기 전 각막에 마지막으로 본 것이 남아있다'는 러시아의 오래된 미신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시체는 거의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게 파헤쳐져 있었다고 한다. 수사관들이 검식을 하려고 왔을 때 너무도 잔인하고 무참히 시체가 훼손되어 있어서, 이건 짐승이 사람을 잡아먹고 시체를 찢어놓은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였으며[6] 러시아의 베테랑 강력반 형사들이나 검식관들도, 이런 잔인한 범죄는 처음 본다면서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러고는 태연하게 희생자들의 인육을 집에 가져가서 인육을 소고기라고 속인 뒤 가족과 함께 먹곤 했다. 그러나 피해자들도 모두 무력하게 그냥 당한 것만은 아니었다. 당시 피해자 중 한 명이자, 54번째 희생자인 16세 소년 빅토르 티셴코는 1990년 10월 30일, 묶인 상태에서도 온 힘을 다해 치카틸로 손을 힘을 다해 물어뜯어 손톱과 주변 살점까지 깊게 뽑히고 뜯기게 했으며 칼에 찔려 죽어가면서 힘을 다해 왼쪽다리를 발로 차고 그가 아퍼서 무릎을 꿇자 모든 힘을 다 해 발로 무릎을 찍고 쓰러져 죽었다. 이 덕분에 그는 왼쪽 무릎뼈나 다리뼈에 금이 가서 절뚝거려야 했다. 그밖에도 다른 피해자들이 치카틸로에게 저항하면서 그를 물어뜯어 생긴 치흔(齒很), 묶인 상태에서도 온 힘을 다해 박치기를 하여 그의 콧등이 부러졌다든지, 하이힐로 그의 손등을 찍었다든지 등 온갖 저항을 하여, 치카틸로의 몸 여기저기에는 상처가 꽤 많았다. 이는 후일 치카틸로가 용의자로 체포되었을 때, 그가 진범임을 의심케 하는 결정적 단서가 되었다. 당시 수사관 이사 코스토예프는, 치카틸로의 온 몸 곳곳에 난 상처를 보고, 이 많은 상처들은 어디서 어떻게 생긴 거냐며 끈질기게 심문했다. 처음에는 넘어졌다느니 등으로 치카틸로는 거짓 해명했지만, 상처 여러 부분은 틀림없이 사람이 물어뜯은 흔적이 깊게 남았기에 이것도 증거가 되었다. 그야말로 피해자들이 마지막으로 저항한 게 수사에 큰 도움이 된 셈이다. 후술하겠지만, 이 사건 관련 서적인 《악마사냥》에서도 이 상처 몇몇이 사진으로 나왔는데, 그야말로 피해자들이 죽기 살기로 저항했음을 보여준다. 물어뜯긴 상처를 보면, 손톱이 뽑히고 손톱 옆 살점들이 깊숙하게 뜯겨나간 깊은 상처임을 알 수 있다. 다친 지 꽤나 지나서 체포되었을 때도 흔적이 크게 남아있을 정도의 부상이었으니, 수사관들도 요모조모 캐물으며 파고든 것. 개에게 물려 다쳤다고 변명했으나, 당연히 상처를 조사하니 개와 사람 이 자체가 달라 사람이 물어뜯은 자국이라는 게 드러나자 결국 자백하고 말았다. 당시 아침마다 살덩이가 잘려나간 시신들이 발견되자, 당시 언론과 시민단체들은 이 얼굴 없는 살인자를 '시민 X(Citizen X)'라고 부르며 두려워했다. 그때까지 그에게 살해당한 이는 무려 53명 이상이었지만, 치카틸로가 체포되기 전까지 그 정체는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었다.[7] 치카틸로가 이토록 오랫동안 잡히지 않고 활개치고 다닐 수 있었던 이유들 중 하나는, 그의 지능적인 범행 수법을 들 수 있다. 희생자들 중에는 어린 남자아이도 있었고, 나이가 좀 든 소년도 있었기에 용의자를 좁히기가 힘들어 수사가 혼선에 빠지기도 했다. 거기다 정말 신기하게도, 그는 정액에서 검출되는 혈액형과 몸의 혈액형이 일치하지 않는, 100만 명에 한 명꼴로 나오는 특이체질을 지닌 인간이었다. 하필이면 이런 사람이 살인마가 되었기 때문에, 아무리 시체가 발견된 곳 주변 마을의 주민들을 모두 조사해보고, 교통기관 등으로 이동할 수 있는 범위에 사는 용의자들까지 다 조사해보아도, 피해자의 몸에 남은 정액의 혈액형과 일치하는 혈액형의 소유자를 찾을 수 없었던 것. 수사관들조차 악마가 살인을 저지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흔히 치카틸로를 잡지 못한 이유가 러시아 경찰의 삽질이거나 묻으려고만 했던 태도 때문에 잡지 못했다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러시아 경찰도 이 끔찍한 살인귀를 잡으려고 무지하게 애썼다.[8] 하지만 누가 정액의 혈액형과 실제 혈액형이 다르다는 생각을 하겠는가 말이다.[9] 실제 수사관들이 물증을 확보하거나 하여 치카틸로가 주요 용의자로 검거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증거를 대조해보고, “피해자의 몸에서 나온 정액의 혈액형과 다르잖나. 저 사람은 범인이 아니다”가 되어 치카틸로는 방면되었고, 검거된 적이 있지만 무혐의로 풀려난 치카틸로를 다시 의심하여 체포하기란 쉽지 않았던 것이다.5. 체포[편집]그러나 연쇄살인범을 끈질기게 쫓던 인구셰티야 출신의 검사 이사 코스토예프와[10] 수사반에 의하여 마침내 검거된다. 살인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현장을 배회하던 것이 결국 치카틸로의 덜미를 잡은 것이었다. 코스토예프는 그가 계속 살해 현장 근처에 있었으며, 그가 잡히기 6년 전에도 살인현장에서 같은 가방을 메고, 똑같은 물건과 노끈, 얼음송곳 등을 가지고 있었던 사실을 기억해내어 그를 체포하려고 했다. 1990년 11월 20일, 치카틸로를 용의자로 지목하고 체포할 기회를 노리던 코스토예프와 수사반은 그가 카페에 있는 것을 확인하고, 그를 체포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들어갔다. 그는 저항 없이 순순히 붙잡혔는데, 그가 체포되었을 때 보인 태도는 수사관들을 상당히 의아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범행현장의 잔혹성으로 보아, 범인은 광기에 가득 차 있고 대단히 폭력적이며 잔인한 인물일 것이라 생각해서, 건장한 형사들을 대거 대동하고 출동했는데, 정작 체포된 범인은 한때 교사였을 뿐 아니라 무척이나 침착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혐의를 완강히 부인하던 그였지만, 거듭되는 심문에 결국 범행 일체를 자백했고, 자신을 잡아주어서, 그리고 이 살인을 끝내준 당신에게 감사하다고 하였다.[11] 그의 자백 내용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그는 약 50명이 넘는 사람들을 살해했고, 인육을 먹거나 온갖 성적이고 잔인한 행위들을 했다는 것을 자백해 수사관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범행 현장들을 기억해서 그곳들에서 범행을 재현했으며, 어떻게 하면 피를 묻히지 않고 사람을 죽일 수 있는가를 설명하고, 어떻게 범행을 들키지 않았는지를 알려주었고, 소름 끼칠 정도로 날짜와 시간, 살해 방법 등을 세세하고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으며, 살인하던 순간이 떠오르는 듯이 즐겁게 웃으며 범행 재현에 임했다. 그러다 보니 수사관들도 경악을 할 정도였다. 그리고 11월 21일, 치카틸로의 혈액을 검사한 결과 혈액형은 AB형이었다. 그러나 치카틸로의 정액 샘플을 얻어 대조한 결과, 치카틸로의 정액은 A형이었다. 이로써 그가 계속 수사망에 걸리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었던 이유가 밝혀졌다. 그 자신이 꽤나 지능적인 것도 있었지만, 악마가 선사한 듯한 그의 특이한 신체가 그의 끔찍한 범죄를 계속 이어갈 수 있게 해준 셈이었다. 피해자들[편집]대부분 여성과 아이들인 피해자의 수는 지금도 확실하게 나와 있지 않다. 법원과 경찰은 치카틸로가 53명 정도를 죽였다고 추정하고 있으나, 치카틸로 본인은 자신이 적어도 56명 정도의 사람을 죽였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이 미치광이에게 공격을 받거나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들의 숫자는 약 100여 명에 달할 것이란 사실이다. 심지어 체포되기 직전에도 아이를 꾀어내 살해하려고 까지 했으니 말이다. 만일 미국이었다면 사법거래를 통해 치카틸로의 범행을 입증할 수도 있었겠지만, 당시 소련은 그런 제도가 없었다. 피해자는 소비에트 연방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딱 하나 1989년 치카틸로에게 죽은 바르가 엘레나가 헝가리인이었다. 당시 나이는 19살로 소련 유학을 온 유학생이었다. 이례적으로 치카틸로의 공판 과정이 언론에 생중계되었다. 이는 러시아에서는 굉장히 드문 일이다. 그는 철제 우리에 갇혀서 재판 과정을 지켜봤는데, 희생자의 친척이나 친구들, 그의 범죄에 분노한 사람들에게 공격을 받아 재판 진행에 방해가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취해진 조치였다. 치카틸로가 재판장에 모습을 드러내자 희생자의 가족들은 모두 원성과 분통을 터트리며, 치카틸로에게 "이 악마야,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재판장님, 우리들에게 치카틸로를 넘겨주십시오. 우리들도 그가 했던 것처럼 똑같이 그를 죽이고 싶으니까요" 라고 외쳤다. 2차 공판이 끝나고, 어떤 방청객은 판사가 재판장을 떠나자마자 방청석에서 뛰쳐나와 치카틸로에게 짧은 쇠막대기를 던졌다. 치카틸로의 머리를 맞히지는 못했지만, 그의 머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그 쇠막대가 날아가 떨어졌다. 그는 희생자들 중 한명의 오빠였으며 그는 경찰들에게 잡혀 끌려갔지만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정상참작되어 나중에 풀려났다.치카틸로는 법정에서 굉장히 이상한 행동을 했는데, 위의 영상처럼 갑자기 숨을 거칠게 몰아쉬거나 두 눈을 마구 굴리는가 하면서 피식피식 웃기도 했다.[13] 그의 정신감정을 맡은 알렉산드르 부카노프스키 박사도 방청객으로서 치카틸로의 행동을 관찰했으며, 그를 포함한 심리학자들은 치카틸로가 사형을 피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미친 행동을 한 것이라고 결론을 지었다. 실제로 정신병자였다면 아이들이 그를 따라가 살해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그가 그토록 다른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들키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설명되지 않는다. 물론 부카노프스키 박사를 비롯한 심리학자들은 치카틸로가 정신상태가 지극히 정상인 살인마라고 단언했다. 재판이 진행 중일 때에도 치카틸로는 유족들을 비웃으면서 끊임없이 재판을 방해했는데, 갑자기 러시아 정교회의 성가를 불러대거나 갑자기 큰 소리를 내면서 웃거나 피해자들을 모욕하고 조롱하기도 했으며, "나는 소련 압제의 희생자"라고 외치기도 했고 급기야는 옷을 홀딱 벗어버린 채 자신의 성기를 흔들면서 "이 쓸모없는 것을 보시오. 이것으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이오." 라고 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언행으로 그는 끌려 나갔다가 판결을 듣기 위해 다시 들어왔다. 소련이 붕괴된 뒤에는 러시아로 처벌 권한이 넘어가 재판이 계속되었다. 검사측이 나열하는 그의 범행에 법원 경비원들도 심한 충격을 받아서 어떤 사람은 동료의 부축을 받으면서 의자에 주저앉을 정도였다. 1994년 2월 14일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재판 당시 어떻게든 살아볼 생각으로 정신이상자 행세를 하였다(50여명을 넘긴 피해자를 발생시킨 범죄자에게는 정신이상자라도 웬만한 사고가 가능하기 때문에 무죄는 불가능하다). 보리스 옐친 당시 러시아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했지만, 그런 시도도 소용없이 결국 처형되었다. 이때 사람들이 환호했으며, 치카틸로만이 거짓말이라고 판사에게 격렬히 항의하였다. 관련서적인 《악마사냥》에서의 묘사나 당시 방송의 내용들을 보면, 당시 치카틸로는 항의 정도가 아니라 "난 애국자란 말이야! 왜 나를 그렇게 죽이려 드는 거지?" 라고 적반하장 격으로 판사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발광했으나, 판사는 그럴줄 알았다는 식으로 무표정하게 무시했다고 한다. 하지만 대다수의 유족들은 환호보다는 우리 아이들을 죽인 것처럼 잔인하게 죽여 달라고 요구했다. 재판 당시 아들을 치카틸로에게 잃은 한 어머니는 이성을 잃고 덤벼들었다가 제지당하자, 저 악마를 내 아들이 당한 것처럼 죽여달라고 대성통곡했다. 결국 치카틸로는 총살형에 처해졌는데, 기록에 의하면 처형당하기 전에 죽고 싶지 않다며 울면서 살려달라고 발광했다. 이에 교도관이 "그럴 놈이 사람은 왜 죽이고 법정에서 좋아라 웃어? 그냥 편하게 죽여주는 것에 고마워해라"라고 하자 그가 발버둥쳤기에, 교도관에게 얻어맞고 사형장으로 끌려가 총살이 집행되었다고 한다. 시체는 본인이 수감됐던 교도소의 죽은 재소자 묘지에 안장되어 있는 중이다. 이때 치카틸로에게 11살 난 아들을 잃은 한 내외는, 그를 너무 편하게 죽인다며 "내 아들과 많은 피해자처럼 산 채로 찢어 죽여야 했어!"라고 형이 집행된 뒤 불만스럽게 이야기했다.[14]8. 여담[편집]1995년 개봉한 ‘시티즌 X’라는 영화가 이를 배경으로 한다. 안드레이 치카틸로와 그가 일으킨 연쇄살인사건을 소재로 한 《Child 44》라는 소설이 있는데, 실제 사건과는 다르게 시대를 스탈린 시대 말기의 소련으로 설정하여 시대적 차이가 있다. 이 소설은 2015년 5월에 톰 하디, 게리 올드먼 주연의 《차일드 44》라는 영화로 개봉되었다. 2015년 개봉한 《구울》이라는 영화에서는, 안드레이 치카틸로가 죽은 후 여러 사람들에게 빙의하고 초능력을 부려서 주인공들이 서로를 의심하고 죽게 만들고, 인육을 강제로 먹이려는 악귀가 되어서 나온다. 그리고 이 악귀를 추종하며 일반인으로 위장하고 인육을 먹으며 사는 식인마도 나온다. 영화 자체는 그냥 싸구려 B급 영화라는 평. 미국 작가 리처드 루리가 이 사건을 상세하게 기록한 책을 쓰기도 했는데, 1994년에 한국에서 《악마사냥》이란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치카틸로의 사진과 피해자들 사진, 수사반장 코스토예프, 그리고 이전의 연쇄살인범 스토로젠코의 사진 및 기록도 사진과 사건 현장 사진, 수사기록, 치카틸로의 어린 시절 및 일생이 상세하게 나와 있다. 이 사건은 러시아와 전 세계를 뒤흔들었으며, 그의 악행이 알려지면서 그의 추종자들 또한 생겨났는데, 이들은 치카틸로를 옹호하고 추종하기도 하였다. 이 추종자들 중 유명한 사람들이 러시아 체스판 연쇄살인사건을 일으켰던 알렉산드르 피추시킨과 할머니 살인마 타마라 삼소노바다. 원래 러시아에서 가장 많은 살인혐의를 유죄 판결 받았던 살인마였지만 2018년 12월 미하일 포프코프(Mikhail Popkov)가 56건의 살인혐의를 추가로 유죄판결 받아 총 78건의 살인혐의로 안드레이 치카틸로의 기록인 52건을 넘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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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일반] 인문학 기초 철학 13 (비트켄슈타인 2)
언어의 용도를 결정하는 규칙은 여러 가지가 있다. 문법적 규칙도 있고, 의미론적 규칙, 구문론적 규칙도 있으며, 일반적으로 문맥의 규칙이라고 불리는 규칙도 있다. 이 규칙들은 아주 엄격하기도 하고, 아주 유연하기도 하며, 타협적이기도 하다. 여러 가지 게임을 비교할 수도 있는가 하면(예컨대, 체스의 규칙은 수건 돌리기 게임의 규칙보다 엄격하다). 게임 내부에서도 그런 비교가 가능하다(폰의 움직임을 지배하는 규칙은 엄격하지만 폰의 크기에 관한 규칙은 유연하다). “I only wish I have such eyes to be able to see nobody” 그러나 유연한 규칙도 엄연한 규칙이므로 그것을 어기면 모종의 결과가 따를 수밖에 없다. ‘언어 게임’의 일부 규칙이 미묘하게나마 깨질 경우에 그것은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빌리자면 "언어가 휴가간 날"(38)이다. 그 결과, 한편으로는 특정한 종류의 철학이 생기며(형이상학의 경우에서 보는 것처럼), 다른 한편으로는 특정한 종류의 광기가 생긴다(<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보는 것처럼), 여기서 앨리스를 언급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앨리스’ 시리즈를 무척 좋아했다. 왜냐하면 거기에 제시된 언어학적 농담들은 언어의 일부 속성들의 기능에 관해 오해가 빚어질 경우에 나타날 수 있는 광기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왕과 엘리스가 나누는 대화들을 보자. 왕이 앨리스에게 길에 누가 있는지 보라고 하자 앨리스는 “아무도 안 보여요” 하고 대답했다. 그 말에 왕은 이렇게 말한다. “내게도 그렇게 아무도 안 보이는 눈 같은 게 있엇으면 좋겠구나! 그렇게 먼 거리에서도 안 보이는 눈 말이야!”(즉, 왕은 안 보이는 게 ‘보인다’는 뜻으로 해석한 것이다. 영문에서는 앨리스의 말이 “I see nobody on the road”로 되어 있고, 왕의 대답은 “I only wish I have such eyes to be able to see nobody”라고 되어 있다. 우리 말의 부정 방식과 영어권의 언어들의 부정 방식이 다르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이 예를 이해해야 하겠댜. ‘앨리스 시리즈’의 작가 루이스 캐럴은 이런 흥미로운 어법을 많이 구사했다.) 왕의 말에는 뭐가 잘못되었을까? 그 농담은 비트캔슈타인의 추종자들이 ‘범주 착오’라고 부른 것을 말해준다. 그것은 언어학적 사실들이 범주를 착각한 탓으로 엉뚱한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을 가리킨다.('일상 언어 철학자'인 길버트 라일에 따르면, 그것은 데카르트가 정신-신체 문제를 잘못 해결함으로써 빚어진 오류다. 데카르트는 ‘정신’을 신체와 유사한 범주에 위치시킴으로써, 마치 ‘생각하는 사물’처럼 만들었다. 그 때문에 정신은 물리적 존재들과 공존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제대로 알 수 없는 유령과도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게 불닭이야? (언어가 휴가 간날) 이번에는 여왕의 경우를 보자 여왕은 하녀에게 급료로 1주일에 2페니와 이틀에 하루씩 잼을 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이틀에 하루’ 라는 날은 없다는 핑계로 잼을 주지 않겠다고 한다. 이런 경우가 바로 언어가 휴가 간 날이다. 그렇다면 과학적 토대 위에서 실재의 가장 단순한 구성 요소를 찾으려는 실증주의자들의 노력은 어떨까?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말한다. 실재를 구성하는 가장 단순한 요소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의자의 단순한 구성 요소란 무엇인가? 의자는 나무 조각들로 이루어져 있는가? 아니, 분자 혹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는가? ‘단순하다’는 말은 복잡하지 않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복잡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냥 절대적으로 "의자의 단순한 부분들" 이라고 말하는 것은 전혀 무의미하다.(47) 철학자들이 '진리란 무엇인가? 존재를 존재로 만들어 주는 본질은 무엇인가?'와 같은 무책임한 질문들을 만들어 온 이유 ‘원자적 사실’을 찾으려는 노력도 마찬가지다. <논고>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쓴 바 있다. “대부분의 철학적 명제나 질문들은 언어의 논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데에서 비롯된다.”(4. 002) <탐구>에서도 그는 어느 정도 비슷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지만, ‘언어의 논리’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큰 변화를 보였다. 철학의 임무는 언어의 ‘배후’에 숨겨진 논리를 드러내는 게 아니라, 일상 언어의 함축적인 논리를 드러내는 데 있다는 것이다(바로 여기서 ‘일상 언어 철학’이라는 용어가 생겼다). 그래서 그는 일상 언어의 논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언어를 통해 지성이 마법에 걸리는”(109) 결과가 생긴다는 것을 보여주려했고, 세계에 관해 일상적으로 사유하고 대화하는 방식에 쓸데없이 간섭할 경우에는 ‘언어학적 휴가’가 일어나며, 그 결과로 철학의 역사를 이루는 대부분의 농담이 생겨났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비트겐슈타인은 비엔나에서는 식초를 담은 병에 꿀을 넣어두고 파리를 잡았다. 병속에 파리 자유롭게 날아다니던 파리는 꿀 냄새를 맡고서 가던 길에서 벗어나 병 속으로 들어와서는 달콤한 꿀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그만 죽고 만다. 비트겐슈타인에게는 대부분의 철학이 바로 그 파리의 허우적거림처럼 보였다. “파리 병의 파리에게 벗어나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은 철학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을 용해시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문제들이 일상 언어의 길에서 벗어난 결과로 비롯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것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의 보수적인 일면을 잘 보여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철학은 언어의 현실적 사용에 결코 간섭할 수 없으며, 단지 그것을 서술할 수만 있을 따름이다. 또한 철학은 일상 언어에 어떠한 토대도 마련해 줄 수 없고, 다만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놔둘 수만 있을 따름이다.”(124) 이러한 자기 만족은 언뜻 G. E. 무어를 연상하지만, 그 비유는 사실 적절치 못하다. 비트켄슈타인의 마음속에는 항상 혼란과 혼돈이 들끓고 있었다. 그의 가슴에는 위의 말에서 본 것과 같은 베르메르 류의 부르주아적 자기 만족과는 또 다른 격정적인 동요가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네덜란드 학자 베르메르는 극히 소량의 작품만 남긴 점에서, 유작까지 해서 단 두 권의 저작만 남긴 비트겐슈타인과 비슷하다.) 이상 마무리하며, 비트겐슈타인 출현 이후 현대 철학은 혼돈의 카오스 상황으로 빠지게 됩니다. 그렇다고 철학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철학은 항상 새로운 이론이 나오면 이전 철학은 뒤집혀 지고 또다시 새로운 이론을 찾아 갑니다. 과학과 가장 큰 차이점이고 사람들이 어렵다고 생각하는 이런 철학의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로오데작성일
2022-01-27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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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일반] 인문학 기초 철학 12 (비트켄슈타인 1)
루트비히 요제프 요한 비트겐슈타인 (독일어: 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 1889년 4월 26일 ~ 1951년 4월 29일) 논리실증주의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준 책 <논리 철학 논고>의 지은이는 루트비히 비트켄슈타인(Ludwig Wittgenstein 1889~1951)이다. 그에 관해서는 지금 이 개설서에서는 어느 철학자보다도 더 길게 다룰 필요가 있겠다. 왜냐하면 논리실증주의와 아울러 ‘일상언어 학파’라고 불리는 철학자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철학 운동은 함께 20세기 분석 철학적 전통의 주류를 이루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일상 언어 학파는 논리실증주의를 여러 측면에서 비판하고 있다. 비트켄슈타인은 부유하고 세련된 비엔나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물리적 부 따위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던 그는 물려받은 유산을 모두 포기하고서 1911년에 영국 맨체스터로 가서 항공 공학을 공부한다. 영국에서는 그는 수학적 재능을 널리 인증받아 케임브리지로 가서 버트란드 러셀과 함께 공부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군에 입대하려고 오스트리아로 돌아갔는데,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는 참호에서도 배낭에 종이를 잔뜩 넣고 다녔다고 한다. 곧, 그는 이탈리아군에게 포로로 잡혔으며, 포로 시절부터 <논리 철학 논고>를 쓰기 시작했다 (그 덕분에 이 책은 보이티우스의 <철학의 위안>, 세르반데스의 <돈키호테>와 더불어 ‘감옥에서 쓴 위대한 책’의 반열에 끼게 되었다), 말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말하라. 그러나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 - 논리 철학 논고- 기껏해야 100쪽 분량에 불과한<논리 철학 논고>(이하 <논고>라고 줄임)는 7가지 명제를 다루고 있다. 각 명제들의 뒤에는 그 명제들에 관한 관찰, 혹은 그 관찰에 관한 관찰에 관한 관찰들이 숫자로 매겨져 서술되어 있다. 예를 들면, 이 책의 첫 쪽은 이렇게 시작한다. 1 - 세계는 사건의 집합이다.1.1 - 세계는 사실들의 총제이며, 사물들의 총체가 아니다.1. 11 - 세계는 사실들에 의해 결정되며, 또한 그 사실들이 곧 모든 사실이라는 점에 의해 결정된다.1. 12 - 사실들의 총체는무엇이 사건이고 무엇이 사건이 아닌지를 결정한다.1. 13 - 논리적 공간에서의 사실들은 세계다.1. 2 - 세계는 사실들로 분할된다.1. 21 - 사실들의 각 항목들은 사건이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으나, 그 밖의 모든 것은 변하지 않는다.2 - 사건을 이루는 것 - 사실 - 은 사태의 존재다. 명제 1 - 세계는 사건의 집합이다. 비트켄슈타인의 견해에 따르면, 우리는 세계에 관해 참된 것을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언어의 구조는 반드시 철학의 구조를 반영해야 한다. 그것이 1. 1 “세계는 사실들의 총체이며, 사물들의 총체가 아니다”라는 명제의 의미다. 그렇다면 세계를 이루는 사실들이란 뭘까? 그것은 러셀의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원자적 사실들이다. 그것은 가장 단순한 사실이며, 단순한 진리로서 다른 모든 복잡한 진리를 분석하는 토대가 된다. <논고>에에서 비트켄슈타인은 그 사실들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말 하지 않았다. 실증주의자들이 ‘프로토콜 명제’와 ‘확정 명제’를 만들려 하면서 찾고자 애썼던 것이 바로 비트켄슈타인이 말하는 사실들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논고>에서 실증주의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준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실증주의자들은 비트켄슈타인이 다음과 같이 제시한 철학관에 대해서도 열렬한 반응을 보였다. 철학 저작들에서 볼 수 있는 대부분의 명제와 질문들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 무의미할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런 종류의 질문에 답변할 수 없으며, 다만 그것들이 무의미하다는 점만 확증할 수 있을 뿐이다.(4.003) 올바른 철학적 방법은 다음과 같은 것이 되어야 한다. 말할 수 있는 것, 즉 철학과 무관한 중립적 과학의 명제들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형이상학적인 것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면, 그가 자신의 명제에 사용된 특정한 기호들의 의미를 밝히지 못했다는 점을 보여주면된다. …… 이 방법이야말로 유일하게 엄밀하고 올바른 철학 방법이다.(6. 53) *주석 - 괄호 안에 숫자로 표시해놓았는데, 이는 쪽수가 아니라 비트켄슈타인 자신이 문단에 며겨놓은 숫자다. 이러한 주장은 논리실증주의의 ‘강경한’ 입장을 완벽하게 대변하고 있는 듯하다. 따라서 논리실증주의자들이 비트켄슈타인을 자신들의 지지자로 여겼던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논고>에는 비엔나 서클의 철학자들에게 상당한 불안감을 안겨주는 당혹스런 진술들도 많이 있다. 예를 들면, 비트켄슈타인은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이책의 전체적 의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할 수 있는 것에 관해서는 명확하게 말해야 하며,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을 지켜야 한다." 말할 수 없는 것 비트켄슈타인의 이 말을 실증주의자들은 이렇게 해석하고자 했다. “형이상학자들은 입을 닥쳐라!” 그러나 비트켄슈타인 자신은 그가 말한 ‘침묵’이라는 것에 대해 묘한 매력을 느꼈던 듯 그것에 관해 수수께끼 같은 암시를 던지고 있다. 6. 54에서 그는 이렇게 쓴다. 나는 명제들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다.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누구나 종국에는 나의 명제들을 무의미한 것으로 인정하게 될 것이다. 즉, 내 명제들을 다 이용하여 높은 곳에 오르고 난 뒤에는 그것들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마치 사다리를 이용한 다음에는 그것을 버려야 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내 명제들을 초월해야만 세계를 올바르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용후 반납 여기서 비트켄슈타인은 자신의 명제들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특수한 형태의 고급스런 무의미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 고급스런 무의미란 어떤 것일까? 비트켄슈타인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고급스런 존재는 사물들이 세계 안에 어떻게 존재하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신은 세계 내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6. 432) 알 수 없는 것은 사물들이 세계내에 어떻게 존재하는가가 아니라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6. 44) 공간과 시간 속에 있는 삶의 수수께끼를 푸는 방법은 공간과 시간에서 벗어나 있다. (8. 4312) 그는 적군이였다 “그는 신비주의자야!” 서서히, 그리고 경악스럽게 비엔나 서클은 진실을 알게 되었다. 비트켄슈타인은 신비주의자다! 그는 형이상학자보다 ‘나쁜’ 인물이었던 것이다. 한동안 비트켄슈타인은 <논고>에 만족한 듯했다. 그 책은 유의미하게 제기된 모든 철학적 문제에 대해서 완벽하게 답변한 것처럼 보였다. 이 점은 다음과 같은 그의 말에서도 볼 수 있다. “답변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우에는 질문도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수수께끼란 없다. 질문이 제대로 이루어질 경우에만 그에 대한 답변이 가능하다.”(6. 5) 비트켄슈타인은 철학을 버렸다. 그후 그는 오스트리아 알프스 산지의 시골로 들어가서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했다. 그러나 그는 그 생활에 제대로 만족할 수 없었으며, 그의 마음은 늘 불안정했다. 비트켄슈타인을 케임브리지에 복귀시키는 일에 앞장선 인물은 러셀이었다. 그는<논고>를 비트켄슈타인의 박사 학위 논문으로 승인했다. 비트켄슈타인에게는 은퇴한 G. E. 무어의 교수직이 주어졌다. 이윽고 비트켄슈타인이 철학계에 복귀하자 사람들은 커다란 흥분을 보였다. 그러나 곧 소문이 나돌았다. 비트켄슈타인은 이제 과거와 다른 철학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괴팍한 비트켄슈타인이 자신의 견해에 대해 밝히지 않았고 자신의 학생들에게도 함구하도록 지시했기 때문에 그의 새로운 철학이 어떤 것인지는 아무도 정확히 알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강의록을 받아적어 등사한 문건들이 나돌기 시작했다. 이 시기 그의 저작은 그의 사후에야 비로소 <철학적 탐구>(이하 <탐구>로 줄임)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그러나 그 책이 모습을 드러내기 오래 전에 비트켄슈타인의 사상이 크게 달라졌다는 것은 이미 분명해졌다. 좋든 싫든<논고>의 실증주의와 신비주의는 사라졌다. 그러나 두 저작은 어느 정도 공통분모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철학은 여전히 본질적으로 의미와 관련되어 있었고, 여전히 언어 지향적이었다. <논고>에서 비트켄슈타인은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5. 6)라고 쓴 바 있는데, 그 견해는 <탐구>에서도 여전히 유효했다. 다만, <탐구>에서는<논고>보다 언어 자체가 덜 제한적이다. 철학적 탐구 먼저, 의미의 문제를 살펴보면 <탐구>에 관해 알아보자. 플라톤에서 <논고>에 이르기까지 철학사 전체를 통틀어 중요한 의미의 모델은 외연, 즉 지시의 모델이었다. 프레게나 러셀, <논고>의 지은이 같은 철학자들도 외연과 내포(지시된 사물에 관한 함축된 의미)를 구분하고 외연에 우선권을 부여했다.(즉, 언어를 언어 자체로서가 아니라 외부의 지시 대상과 관련된 것으로만 보았다는 뜻이다.) 비트켄슈타인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지시 모델을 의미론의 주요 모델로 우선시한 결과, 서양 사상에는 형이상학이 널리 퍼지는 오류가 발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단어란 불변적으로 영원히 존재하는 사물을 지시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관찰 가능한 세계에는 그런 것이 없기 때문에 그는 이상 세계의 형상론을 개발한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단어는 세계 내에 불변적으로 존재하는 것, 즉 실체를 지시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중세 유명론자들도 역시 단어가 이름(지시)의 기능을 한다고 생각했으나, 다만 그들은 아무 것도 명명하지 않았다(유명론). 따라서 그들의 결론은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장미의 이름>의 마지막 문장으로 나오듯이, “우리에겐 단지 이름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경험론자들은 단어가 감각 자료를 지시하며, 그렇지 않은 단어는 모두 의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실용주의자들은 단어가 행위를 지시한다고 믿었고, 러셀과 초기 비트켄슈타인은 단어가 원자적 사실을 지시한다고 여겼다. 후기 비트켄슈타인은 이런 전통을 완전히 부수고서 “단어의 의미는 그 사용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언어 그림 도구함 안의 도구들을 생각해보자. 망치, 펜, 톱, 드라이버, 자, 아교 냄비, 아교, 못, 나사 등등이 있다. 단어의 기능은 이 물건들의 기능만큼이나 다양하다(실제로 단어와 도구는 유사성이 있다). …… 그것은 마치 기관차의 운전실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 모든 손잡이는 서로 비슷하게 보인다.(손잡이가 있어야 다룰 수 있으니까 그건 당연하다). 하지만 어떤 손잡이는 기관차를 계속 움직이게 하는 크랭크의 핸들(밸브의 여닫음을 통제한다)이고, 또 어떤 손잡이는 기관을 켜고 끌 수 있는 두가지 기능만 가진 스위치다. 또한 잡아당기면 기관차의 작동을 멈출 수 있는 브레이크 레버가 있는가 하면, 앞뒤로만 당길 수 있도록 되어 있는 펌프 손잡이도 있다. (11. 12) 언어 역시 도구들이나 기관차 안의 장치들처럼 특정한 일을 수행할 수 있다. 언어의 의미는 언어가 수행하는 그 일 속에서 발견된다. 예를 들어, 두 사람이 특정한 목적을 향해 급히 자동차를 운전해가고 있다고 하자. 헤드라이트가 부수어졌기 때문에 해가 떨어지기 전에 목적지에 도착해야 한다. 그런데 운전자가 이렇게 말했다. “이런 제기랄! 해가 벌써 졌잖아.” 그때 조수석에 탄 사람이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이렇게 말한다면 어떻게 될까? “해가 졌다고 말하면 안되지. 그건 지구가 자전축을 중심으로 저전하기 때문에 생기는 착각이야.” 그의 말은 도대체 의미가 있을까?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그런 상황에서는 그의 말이 아무런 일도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물론, 상황에서라면 그 말도 어떤 일을 할 수 있겠지만). 그 상황에서 지구가 자전한다는 과학적인 사실을 삽입하는 것은 실상 미친 짓이나 다름없다. 또한 조수석에 앉은 사람이 자동차 글러브 박스에서 망치를 발견하고는 “망치는 치라고 있는 거야”하고 말하면서 운전자를 망치로 때리려 한다면, 그것역시 미친 짓이다. 망치의 용도가 치는 데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언제나, 어디서나, 아무나 치라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언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 주장이 성립한다. 하지만 도구는 많은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어떤 상황에서 망치는 무기로 사용할 수도 있고 문진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 언어는 어떨까? 논리실증주의에서 말하는 것처럼, 언어에는 표현적 기능과 표상적 기능이라는 두 가지 기능밖에 없는 걸까? 비트켄슈타인은 이렇게 묻는다. 그러나 문장의 종류는 얼마나 많은가? 문장에는 긍정문, 의문문, 명령문 같은 것만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종류가 있다. ‘기호’, ‘단어’, ‘문장’ 등을 사용하는 방식은 무수히 많다. 더구나 이런 방식들도 영원히 고정된 것이 아니다. 새로운 종류의 언어, 새로운 언어 게임이 탄생하기도 하고, 쓸모없어지고 잊혀지는 언어도 끊임없이 생겨나는 것이다.(23) 여기서 비트켄슈타인이 말하는 의미론의 또 다른 특성이 드러난다. 그것은 바로 “의미는 용도다”라는 주징이다. 그는 이렇게 쓴다. “단어란 진정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체스에서 말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비슷하다. …… 체스의 한 말이 가지는 의미는 체스 게임에서의 역할에 달려 있다.”(108) 모든 게임은 규칙에 의해 지배된다 비트켄슈타인은 언어를 ‘언어 게임’이라는 말로 부르면서 자신의 주장을 일반화한다. 이 점에 대해 살펴보자. 모든 게임은 규칙에 의해 지배된다. 체스 게임의 말(카드 게임의 칩이나 카드)이 가지는 ‘의미’는 체스 게임의 규칙 아래서 그것이 가지는 용도에서 비롯된다. 폰(체스의 줄)이란 무엇인가? 폰은 정사각형의 한 칸을 전진하며, 첫 번째 움직일 때는 두 칸까지 전진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말이다. 또 폰은 대각선 방향으로 적의 말을 잡아먹을 수 있고, 상대방 진영의 끝까지 가면 퀸으로 바뀔 수 있도록 되어 있는 말이다. 단어, 문구, 표현 등도 그와 마찬가지다. 즉, 규칙의 지배를 받으면, 그 의미는 언어 게임의 규칙 아래서 그것이 가지는 용도에서 비롯된다. 용어 해석 논리실증주의 (logical positivism) : 1차 대전과 2차 대전 사이에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분석 철학에서 시작된 운동, 과학적 성향을 지닌 철학자들과 철학적 성향을 지닌 과학자들이 19세기 유럽 철학자들의 거대 형이상학에 대한 대응으로 이 운동을 전개했다. 그들의 목표는 철학에 과학적 근거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철학은 논리적 문석에 국한되어야 하며, 따라서 유일하게 참되고 의미 있는 명제는 수학, 논리학, 과학의 명제뿐이다. 여타의 명제들은 시적이고, 감성적이고, 유추적이거나, 무의미하다. 원자적 사실 (atomic facts) : 버트란드 러셀과 기타 분석 철학자들이 사용하는 용어로, 모든 사실을 구성하는 가장 근본적이고 단순한 사실을 뜻한다. 원자라는 말 그대로의 의미로, 즉 더 이상 분할할 수 없다는 뜻에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원자적 사실’이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정확히 합의된 내용이 없다. 어떤 분석 철학자들은 감각 자료에 관한 사실이라고 규정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문자 그대로 물리적인 사실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철학자중 한명입니다. 나머지 부분은 2부에서 마무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로오데작성일
2022-01-23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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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일반] 인문학 기초 철학 7 정의란 무엇인가 (칸트)
오늘 짱공으로부터 택배가 왔습니다. 컵, 키홀더, 에코백, 타월, 이름 모를 부엉이 잘 사용하겠습니다.(추석 선물 같습니다.)마침 화이자 1차 접종도 오전에 완료하였고 주사 맞은 팔뚝만 조금 아프네요. 마이클 샌델 공정이란 무엇인가? 평등이란 무엇인가? 그 앞서 물어야할 질문 정의란 무엇인가?옳고 그름의 개념은 어떻게 판단할것이며, 일상에서 마주치는 도덕적 딜레마를 어떻게 풀어 나갈것인지를 철학적 해석으로흔히 정의와 좋은 사회란 무엇인가에 대한 원칙과 개념을 공론화하여 21세기 화두인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책의 5장 동기를 중시하는 시각 : 이마누엘 칸트 장이 있습니다. 책속에서도 칸트를 소개하고 있지만 추가적인 부분을 기초철학에서 보충 하려고 합니다. 이마누엘 칸트(독일어: Immanuel Kant [ɪˈmaːnu̯eːl kant], 1724년 4월 22일 ~ 1804년 2월 12일) 칸트는 프로이센의 북동부에 위치한 옛 한자 동맹의 도시 쾨니히스베르크(오늘날 러시아의 칼라닌그라드)에서 평생 살았다. 거기서 그는 적어도 50세가 될 때까지 존경받는 대학 교수로서 부르주아 생활을 마음껏 즐겼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는데, 워낙 규칙적인 생활을 한 탓에 동네 주민들은 그가 오후에 산책하는 것을 보고서 시계를 맞추었다고 한다. 칸트가 거닐었던 다리 칸트 흄을 만나다 젊은 시절에 칸트는 라이프니츠의 평범한 제자였던 크리스트안 폴 볼프에게서 합리론적 형이상학을 배웠으며, 그 기본적인 학설에 대해 전혀 의심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러나 중 중년 후반에 접어들었을 무렵의 어느 날 칸트는 흄의<<인간 오성에 관한 탐구>>를 보게 되었다. 훗날 그는 그 책을 읽는 순간, “특단의 잠에서 깨어나게 되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그는 흄의 논증으로 인해 그때까지 자신이 믿어왔던 모든 게 허물어지는 걸 느꼈으며, 따라서 흄의 회의론을 논박하지 못한다면, 진정한 철학적 진보는 전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흄에 대한 칸트의 대응은<<순수 이성 비판>>에 나와 있다. 이 저서에서 칸트는 흄의 철학으로부터 최선의 것을 추출하고, 흄의 전면적인 비판을 받은 뒤에 남아 있는 아프리오리로부터 최선의 것을 추출하여 양자를 종합하려 했다. 흄에게서 칸트는 분석/종합의 구분이라는 중요한 철학적 분석 도구를 받아들였다. 그는 모든 분석 명제들이 아프리오하며 모든 아포스테리오리한 명제들은 종합적이라는 흄의 주장을 인정했지만, 모든 종합 명제가 아포스테리오리하며 모든 아프리오리한 명제는 분석적 이라는(따라서 동어 반복이라는) 흄의 주장은 인정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칸트에 따르면 종합적 아프리오리 진리라는 게 존재한 다는 것이다. 이것은 실재의 진리성을 관찰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도 알 수 있다는 중요한 주장이다. 칸트는 그러한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해야만 흄을 철학적으로 극복할 수 있고 상식이(그리고 아마 종교도) 다시 존중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이러기 위해서는 흄이 부인한 앎이 실은 종합적 아프리오리 진리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만 했으며, 그 방식도 흄이 그런 앎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했던 것과 같은 논증이어야만 했다. 칸트는 우선 정신을 직관(즉, 인식), 오성, 이성이라는 세가지 ‘기능으로 나눈 다음에 각각의 기능에 대해서 이른바 ’초월적transcendental' 분석을 했다. 용어 해석 아포스테리오리a posteriori. : 믿음, 명제, 는증의 진리성이 오직 관찰에 의해서만 확립될 수 있는 경우를 가리킨다. 고전적 경혐론은 세계에 관한 모든 유의미한 인식이 아프스테리오리한 진리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아프리오리a priori. : 믿음, 명제, 논증의 진리성이 관찰과는 독립적으로 알 수 있는 경우를 가리킨다. 각종 정의, 수적 계산, 논리학의 원칙들은 보통 아프리오리하다고 말한다. 고전적 합리론은 세계에 관한 모든 유의미한 합리론자들은 아프리오리한 진리를 본유 관념과 연관시킨다. 경험론empiricism. : 참된 인식은 ‘일차적으로’ 감각 경험으로부터 나온다고 보는 인식론적 견해('순수한'경험론에서는 ‘오로지’감각 경험에서만 인식이 나온다고 본다). 경험론자들은 모든 유의미한 인식이 아포스테리오리하다고 여기며, 아프리오리한 인식은 존재하지 않거나 동어반복이라고 주장한다. ‘전형적’ 경험론자들은 로크, 버클리, 흄 등 17세기와 18세게 영국의 철학자들인데, 이들은 모두 본유 관념의 존재를 부인하고 인간 정신을 태어날 때부터 ‘백지’라고 가정했다. 합리론rationalism.: 참된 인식은 ‘일차적으로’이성으로부터 나온다고 보는 인식론적 견해('순수한'합리론에서는'오로지'이성에서만 인식이 나온다고 본다). 정신은 스스로 물질을 만들어내서 그것에 작용을 가할 수 있다. 대개의 합리론에서 이 물질은 본유 관념의 형태를 취한다. 그러므로 합리론에서는 아프리오리한 인식이 가장 중요한 인식 형태이다. 합리론적 존재론에서는 정신과 세계를 동일한 것으로 본다. 따라서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다. 전형적인 합리론자들은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등 17세기와 18세기에 활동했던 대륙의 철학자달인데, 그밖에 파르메니데스, 플라톤, 헤겔 같은 철학자들도 합리론자로 분류된다. 인식론dualism.: 실재는 보통 정신과 신체라고 부르는 두 가지 존재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는 존재론적 견해(데카르트가 대표자). 칸트 인식론칸트 인식론 칸트는 먼저 직관의 기능을 다룬다. 여기서 칸트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인식은 어떤 것인가?”도, “인식은 가능한가?”도 아니고, “인식은 어떻게 가능한가?”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우리가 세계를 인식한다는 상식적인 견해에서부터 출발하여, 그 인식이 가능하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한가를 물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칸트는 경험론자들이 말하듯이 우리는 공간 자체를 인식할 수 없고 오로지 감각자료만 인식할 수 있는 데에도 어떻게 마터호른산의 높이에 관해 참인 문장을 말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했다. 또한 우리는 시간을 인식할 수 없고 오직 감각 자료만 인식할 수 있는 데에도 어떻게 베를린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의 양에 관한 참인 문장을 말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이에 대한 칸트의 해결책은 공간과 시간이 인식 기능이 종합적 아프리오리한 토대라는 점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고양이가 양탄자 위에 있다”는 아포스테리오리한 문장은 실상"대상들이 공간과 시간 속에 존재한다"는 문장의 진리성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칸트에 따르면, 앞의 문장이 참이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지만 뒤의 문장이 참이 아니라면 앞이 문장도 참이 될 수 없다. 그런데 뒤의 문장은 분석 명제가 아니므로(공간과 시간에 관한 감각 자료가 없다. 이 점에서 흄은 옳다). 종합적 아프리오리 진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양이가 양탄자 위에 있다 (공간 시간) 데카르트는 이런 분석 방법을 가르켜 ‘초월적 연역’이라 불렀는데, 여기서 ‘초월’이란 직접적인 관찰을 초월하여 그 배후에 있는 필연적 조건들을 발견한다는 의미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칸트는 공간과 시간이 외부 세계의 특성이 아니라 정신의 구조 안에 내재하는 특성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내었다. 인간 정신은 공간과 시간을 통해 받아들인 자료를 분석한다. 공간과 시간은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기 위해 사용하는 ‘벗을 수 없는 안경’과 같다. 체스에 비유한다면, 공간과 시간은 체스판처럼 세계 속에 존재하는 사물이 아니라 체스의 규칙에 해당한다. 체스를 둘 때는 규칙에 따라야 하며, 규칙이 없다면 체스 게임이 불가능하다.공간과 시간의 안경 오성의 범주 이렇게 직관 기능의 종합적 아프리오리한 토대를 발견하고 난 뒤에 칸트는 오성이 가능으로 넘어간다. 이것은 세계에 관한 사실을 이해하도록 해주는 기능이다(백두산이 지리산보다 더 높다든가, 고양이가 양탄자 위에 있다든가……). 여기서도 칸트는 “세계에 관한 앎이 가능한가?”하는 질문부터 제기하지 않는다. 그는 우리가 그런 앎을 이미 가지고 있다는 상식적 전제를 출발점으로 해서 어떻게 그런 앎이 가능한가를 묻는다. 그는 그 앎이 오성 기능의 종합적 아프리오리한 토대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오성의 범주'라고 불렀다.출처 https://brunch.co.kr/@kibokk/31 이 범주에는 동일성/복수성/총체성, 인과성, 실재성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 개념들은 정신이 실제로 부터 연역해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정신이 실재에 주입한 것이다. 바로 이때문에 흄은 그것을 ‘바깥’에서 찾아내려고 했지만 실패했던 것이다. “모든 사건에는 원인이 있다”는 문장(이것을 흄은 경험적인 것도 아니고 정의상 참인 것도 아니라고 보았다)은 칸트에 따르면, 종합적 아프리오리 진리다. 수학은 종합적 아프리오리의 범주 칸트는 또한 수학이 종합적 아프리오리의 범주에 속한다고 주장했다. 우선 수학이 아프리오리의 지위를 가지는 이유는 우리의 수학적 지삭이 관찰로부터 독립적이기 때문이다.(여러분의 초등학교 1학년 선생님[다들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이 가르쳐준 것은 사실 옳지 않다. 선생님은 분필더미 두 개를 앞에 놓고 이렇게 말했다. “두 개의 분필 더미에다 세 개를 더하면 다섯 개의 분필 더미가 되죠. ‘따라서’ 2+3=5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지 않다. 2더하기 3이 5가 되는 것은 분필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그러나 수학은 또한 종합적이기도 하다. 수학은 세계에 관해 우리에게 말해주기 때문이다. 즉, 수학적 명제는 정의처럼 공허한 동어 반복에 불과한 게 아니다. 칸트가 말하는 이러한 종합적 아프리오리 이론은 분명히 플라톤-데카르트적 본유 관념을 연상케 하지만, 그들과 칸트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칸트는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특정한 관념들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 자체가 특정한 종합적이고 아프리오리한 규칙에 따라 자료를 분석하도록 구조화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감각이 정보를 입력하면 관념을 생산하도록 되어 있는 컴퓨터 프로그램과 비슷하다. 즉, 인간이라면 누구나 시간/공간/실재성/인과성 등과 같은 개념들을 통해서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신은 ‘사물성’의 관점에서 세계를 조직해야 하지만, 정신의 ‘바깥’에 실재라는 게 별도로 있는 것은 아니다. 정신은 인과적 순서에 따라 세계를 이해해야 하지만, 정신의 바깥에 어떤 사건의 원인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칸트는 서로 싸우는 합리론과 경험론을 절충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내용 없는 사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라는 그의 유명한 주장은, 합리론자들에게 감각자료만이 앎을 제공하는 게 아니라고 말하고 있으며, 경험론자들에게는 감각의 역할이 없이는 어떤 앎도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칸트의 해결책은 여러 모로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로 인해 결과적으로 칸트는 모종의 궁극적 실재가 존재하지만 인간 정신은 그것을 알 수 없다는 혼란스럼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그 실재를 칸트는 본체적 세계 또는 ‘물 자체Ding-an-sich’라고 불렀다). 본체적 세계(이 말은 사물의 ‘외양’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나온 ‘현상’이라는 말과 대조적으로, 외양의 ‘사물’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나왔다)는 외양의 배후에 있는 실재다. 우리는 외양은 뭔가의 외양이어야만 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실재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필연성의 인간인 우리는 본체적 세계에 접근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앎은 이른바 ‘현상계’-인간 정신에 의해 인식, 지각, 해석, 분석, 이론화된 세계-에 관한 지식으로 제한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인간 정신을 통해, 즉 공간과 시간, 오성의 범주라는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세계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흄의 결론과는 반대로, 칸트에 따르면 상식과 과학은 현상계에 적용되는 한에서만 타당하다. 그러나 궁극적 실재에 관해서는, 다만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 이외에는 어떠한 설명도 불가능하다. 본체적 세계라는 개념을 칸트는 제한적 개념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본체적 실재가 존재한다고는 말할 수 있으나 그 존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다. 이러한 제한적 개념은 플라톤에서부터 라이프니츠에 이르는 철학자들이 발전시켜온 전통적인 형이상학이 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뜻한다. 칸트는 이성의 기능에 대한 초월적 분석으로부터 이러한 결론을 이끌어냈다. 순수 이성 <순수 이성 비판>이 나오면서 이전의 형이상학은 붕괴 하였다. 칸트는 이성의 기능을 ‘신’이나 ‘영혼’같은 ‘순수한’ 개념(즉, 감각에 의해 오염되지 않은 개념)을 낳는 것으로 가정한다. 그럼 이런 기능에는 종합적 아프리오리한 토대가 있을까?(이 질문은 이렇게 바꿀 수도 있다. 우리는 궁극적 실재에 관해 ‘더 높은 진리’를 알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칸트는 없다고 했는데, 이러한 단정은 당시의 형이상학과 신학에 큰 파문을 불러 일으켰다. 전통적인 형이상학은 공간, 시간, 인과성 등 관찰 가능한 세계에만 적용할 수 있는 개념들을 부당하게 본체적인 세계에까지 적용하고 있으므로 잘못된 사유 체계였다. 그렇기 때문에 신의 존재에 대한 일체의 증명은 실패할 수 밖에 없으며, 그와 더불어 궁극적 실재를 ‘실체’라는 신비스러운 범주로 서술하려는 시도도 역시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우리 인간은 신, 정의, 불멸, 자유 등등에 관해 알려고 노력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면 그 관념들은 모두 인간 지식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칸트가 <순수 이성 비판>을 여기서 끝맺었더라면, 그는 상식과 과학의 옹호자들이 동의하는 선에서 형이상학과 신학에 대한 흄적인 비판을 완성했다고는 할 수 있겠지만, 인간의 내부에 있는 더 높은 정서를 향한 충동까지 만족시키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한 충동에 대해 칸트는 그 책의 다른 부분들에서 다루고 있다. 순수이성 비판 거기서 그가 주장하는 내용은 이렇다. 시간, 공간, 인과성의 관점에서 세계를 인식할 논리적 필연성은 있지만 신, 불멸, 정의, 자유의 관점에서 세계를 인식해야 할 논리적 필연성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고급 정서들이 없다면 인간은 삶의 열정을 잃게 될 것이다. 예를 들면, 인간의 영혼이 자유롭다든가 궁극적으로 정의가 승리하리라는 믿음을 가질 수 없다면, 일상 세계에 참여할 동기를 갖지 못하게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칸트는 우리가 신, 영혼, 불멸, 정의, 자유가 존재한다고 믿을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단, 그것은 형이상학적인 필요 때문이 아니라 현실적인(즉, 도덕적인) 필요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주제들이 마치 종합적 아프리오리 진리인 것처럼 여길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더 나은, 더 성공적인 인간 존재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칸트가 도덕적 필연성에 대한 믿음에 뿌리를 둔 채 지식과 믿음을 구분하려 한 것은 많은 사람의 공감을 받았다. 특히 형이상학자와 신학자들의 거창한 주장에는 신물을 느끼지만, 그래도 현대 세계에서 믿음의 적절한 역할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은 칸트의 이론에서 큰 위안을 얻었다. 그러나 칸트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가 “신을 앞문에서 내쫓고서 뒷문으로 들어오게 한데 불과하다”고 비난했다. 내용이 너무 길어지는듯 하여 2편에서 나머지 이야기를 적겠습니다. 철학편 글을 올리면 인기가 없내요. 어려운 내용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해는 합니다. 하지만 철학을 이해하면 좀더 넓은 세상을 바라 보면서 생각에 잠길수 있습니다. 한번에 이해 할수 없지만 그냥 스쳐 지나가듯 보시더라도 아 ~ 이런 철학자도 있었지 그의 사상은 무엇이였고 언제적 인물이였다 정도만 아셔도 성공이라고 봅니다.
로오데작성일
2021-09-11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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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중국 발광 또 시작
[ 위 중국어 자막 그대로 번역 ]우리 중국은 세계적으로 공인 받은 전통 문화대국이다한국은 김치를 한국의 것이라고 주장한다.그래서 한국은 『 목적 달성을 위해 갖은 수단으로 』 세계 연합국을 계속 귀찮게 했다.그러나 실패라는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한국이 여전히 포기하지 않음" 이 아니다.(그냥 한국이 좌절. 실패. 포기했다 라는 뜻 같음)또 하나의 나라가 한국처럼 하기 시작했다.인도(INDIA)가 상치(중국의 장기 이름)를 인도 거라고 한다. --------- :: 대한장기협회 ::http://www.kja.or.kr/business/business2.php장기의 기원은 지금으로부터 약 4000년 전 고대 인도의 서북부(지금의 파키스탄 지역)에서 행해지던 ‘차투랑가’(chaturanga)로 보고 있다. ‘chaturanga’ 란 고대 인도어인 범어(梵語, San skrit)로서 chatur는 넷(四, four), anga는 원(員, member)의 뜻인데, 4원(四員) 이란 군대의 구성원인 象(elephants, 馬(horses), 車(chariot), 步卒(foot-soldiers)의 네 가지니, 이는 결국 코키리 부대 · 기마부대 · 병거부대 · 보졸부대로 이루어진 당시의 전군(全軍)을 뜻한다.인도(印度, India)를 기원지로 하는 차투랑가는 서쪽으로 6세기 경(A.D. 500년경) 페르시아 (지금의 이란 지역)을 거쳤는데, 지금도 인도지역에서 행해지고 있고, 이란에서는 ‘사트란지 (charanj) 란 이름으로 행해 졌었다. 그러던 것이 7세기경A.D. 600년경) 페르시아를 정복한 아라비아(Arabia)에 들어갔고, 이것이 다시 스페인(Spain), 이탈리아(Italy), 터키(Tukey) 등 의 지역을 거쳐 유럽(Europe) 전역에 널리 퍼지고 오늘날 미주(美洲, America)에서도 널리 행해지는 체스(chess, 서양장기)가 되었다. 체스란 페르시아어로 왕(王)을 뜻하는 샤(shah) 에서 온 말이다.한편, 동쪽으로는 미얀마(Myanmar, 종전의 Burma)를 거쳐, 중국(China)으로 들어가서 오늘날 상기(象棋)가 되었고, 한국에서는 한국 장기(將棋)가 되었으며, 일본(Japan)에서는 쇼우기(將棋, しょぅぎ)로 불리는 일본 장기가 되었다.장기는 각기 그 나라의 풍속이나 민족성 등에 따라 각각 특이한 기물과 대국법이 생겼다고 보는데, 서양에서는 체스로 통일되어 있으나. 동양에서는 나라마다 특성이 다른 장기가 발전되었다.
미뿔작성일
2021-02-22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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