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이집트인들은 미이라를 어떻게 만들었을까요? (만드는 과정은 개인에 따라 자극적일 수 있으니 유의해서 봐주세요.)
이집트인들은 먼저 긴 갈고리를 사체의 왼쪽 콧구멍에 넣은 다음, 사골을 계속 두드리면서 부수었습니다.
그 갈고리는 코를 뚫고 들어가서 두개골이 있는 곳까지 들어갔고, 그런 다음 갈고리를 휘저어 뇌를 으깬 다음에 콧구멍을 통해 그것을 빼냈죠.
이 단계가 끝나면 야자열매로 두개골을 씻어냈고 그 안을 송진가루로 채웠습니다. 송진은 악취를 없애고 세균을 죽이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 후에 심장이 위치한 왼쪽 가슴에 상처를 내고, 심장을 제외한 모든 장기들을 제거했습니다.
이집트인들은 심장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은 생각을 뇌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심장으로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죠.
이 과정까지 마치면 향신료 소다석이 들어있는 주머니들로 사체를 감쌌습니다. 소다석은 이집트의 수도인 카이로 북쪽에서 많이 발견됩니다.
소다석은 사막의 모래와 같은 역할로, 사체를 ‘건조’시키는데 쓰였습니다.
소다석으로 사체를 덮고 35일을 기다리면 사체의 무게는 약 30kg 감소합니다. 사체의 모든 수분을 소다석이 흡수하기 때문이죠.
미이라를 만드는 마지막 과정은 붕대를 감는 것입니다. 만화나 영화에서 미이라는 붕대를 감고 있습니다. 이것은 고대 이집트만의 특별한 처리 방법이었죠.
또한 붕대를 감는 것은 하나의 의식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래서 붕대를 감는 동안, 이상한 옷차림을 한 사제들이 알 수 없는 주문을 외웠습니다.
"위대한 정의의 신이시여! 고인이 당신 앞에 나왔습니다. 그는 다른 인간을 죽인 적이 없었고 어떤 악도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로지 순수함 그 자체입니다..."
이것은 고대 이집트 문명이 남긴 신성문자를 해독한 것인데, 사제들은 미이라를 만드는 의식에서 이러한 주문들을 외웠죠.
붕대를 감는 작업이 끝나면 머리에 마스크를 씌우고 관에 넣은 뒤, 매장됩니다. 하지만 매장하기 전에도 ‘이별’이라는 최종 의식이 남아있습니다.
‘이별’ 의식은 이집트의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의식으로, 죽은 자를 다시 살려내는 환생을 의미합니다.
사제가 주문을 외우는 동시에, 죽은 자는 생전에 자신이 가졌던 모든 능력을 되찾게 되고 비로소 환생을 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미이라는 무덤 속에 안치되었습니다. 하지만 고대 이집트 왕국의 가장 큰 골칫거리는 바로 ‘도굴’이었습니다.
많은 도굴꾼들이 귀족이나 파라오들의 무덤을 도굴해갔기 때문에, 무덤들을 잘 보존하는 것이 이집트 정부의 큰 숙제였습니다.
그래서 무덤은 점점 진보된 형태로 발전했습니다. 기원 전 3000년까지는 그저 지하에 무덤을 만들고 모래로 덮어두는 형태에 불과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무덤의 규모는 점점 커졌습니다. 단순한 모래 구덩이 무덤이 계단식 무덤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죠.
그리고 기원 전 2600년 경, 파라오들의 무덤은 발전을 거듭하여 건축학적으로는 불가사의한 피라미드를 만들었습니다.
바로 카이로에 있는 ‘기자 피라미드’가 그것입니다. 이 피라미드는 3대에 걸친 파라오들의 미이라를 보존하기 위해 만든 무덤이었죠.
또한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러한 피라미드를 지킬 수호신을 만들어냈는데 그것이 ‘스핑크스’입니다.
즉, 고대 이집트인들이 제작했던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등은 모두 ‘미이라’를 안전하게 보존하기 위해서 만든 고대의 작품인 셈입니다.
이집트인들은 몇천 년에 걸쳐 수많은 미이라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미이라를 최초로 만든 이들은 따로 있었죠.
미이라를 최초로 만든 사람들은 칠레의 ‘인디언’들이었습니다. 이 인디언들은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으면서 살았던 부족이었는데요.
칠레의 영토는 대부분의 영토가 바닷가와 근접하고 있고, 안데스 산맥까지 사막이 80km나 이어진 나라이기 때문에 기후가 매우 '건조'합니다. 그래서 미이라가 만들어지기에 '최적의 장소'였죠.
1983년, 칠레에서는 고고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미이라 발굴이 이뤄졌습니다. 이 미이라의 발견으로 기존에 가졌던 고정관념이 완전히 깨졌죠.
미이라는 한 구만 발견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도시 한복판의 절벽에서 대략 80구의 미이라가 집단으로 발견되었는데, 이 미이라들의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었습니다.
미이라의 얼굴은 마치 가면을 쓴 것처럼 인위적으로 평평하게 남아있었는데, 이러한 방식의 미이라가 발견된 장소는 전 세계에서 이 곳이 유일했죠.
미이라들은 무리를 지어 누워있었고 그중 절반은 어린이였습니다. 과학자들은 이 미이라의 성분을 채취하여 탄소 연대측정을 했는데,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과학자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오래된 미이라였기 때문이었죠. 어떤 미이라는 7천 년도 넘었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고대 이집트에서 발견된 미이라들보다 적어도 2천 년은 더 된 미이라로 밝혀졌는데, 이 미이라들의 제작방식은 매우 놀라웠습니다.
이들은 말 그대로 사체의 모든 뼈들을 분리하고 재조합하는 방식으로 미이라를 만들었습니다. 뼈들을 모아 골격을 구성하고 팔과 다리, 척추를 배열했죠.
그런 다음, 두개골 위쪽을 들어내고 뇌를 빼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갈대를 넣은 뒤, 진흙으로 두개골의 본을 떴습니다.
그리고 얼굴에 피부를 붙였고, 몸 전체를 검게 칠했습니다. 이들이 미이라를 만든 방식은, 기원 전 5천 년에 만들었다고 보기엔 믿을 수 없을 만큼 정교했습니다.
그동안 고고학자들은 인간이 도구를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원시적인 삶에서 벗어났을 거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죠.
그러나 이 미이라가 발견되었던 장소에서는 어떠한 도구나 언어를 사용했다는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동안 고고학계에서 받아들여졌던 고정관념을 깨는 것이었죠.
이 인디언들은 도구나 문자를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고대 이집트인과 같은 기술을 가지고 세계에서 가장 정교한 미이라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이 점으로 보아, 그들만의 뛰어난 기술과 인체에 대한 지식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죠.
또한 기원 전 5천 년경에 살았던 사람들도 사후세계에 대해 깊은 고민과 생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죠.
이런 미이라들은 지금까지 세계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약 450년 전, 우리나라에서도 조선 중기에 살았던 할머니 미이라가 발견되었습니다. 사실 우리나라의 기후는 사계절이 뚜렷하고 다습한 편이기 때문에
미이라가 잘 만들어지는 기후는 아닙니다. 하지만 우연한 조건에 의해 만들어진 미이라가 간혹 발견되기도 하죠.
경상남도 하동에서 발견된 여자(할머니) 미이라는 사체가 썩지 않은 원형 그대로 발견되었습니다. 이 미이라는 조선 영조 때 사헌부 감찰을 지낸 박재수의 부인 성산 이 씨로 밝혀졌죠.
성산 이 씨는 신장 145cm 가량으로 피부가 전혀 부패되지 않은 채, 머리카락과 속눈썹, 손톱 등도 그대로 남아있었고 저고리와 치마를 입고 있었습니다.
아르헨티나에서도 굉장히 독특한 미이라가 발견되었습니다. (다음 페이지 사진 주의)
속칭 ‘잉카 얼음소녀’라는 이름을 가진 이 미이라는 1999년, 아르헨티나 북서부 해발 6,700m 높이의 분화구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발견된 미이라 중 가장 완벽한 상태인 이 소녀 미이라는, 사망했을 당시에 입고 있던 옷과 자세, 표정, 머리카락 등이 거의 그대로 남아있죠.
과학자들에 따르면 이 미이라는 약 500년 전, 15세의 어린 나이에 제물로 바쳐진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출처.피키캐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