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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글]나도 존잘남이 되어보자 -1

진짜킹카 작성일 25.08.10 19:27:24 수정일 25.08.10 19:5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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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휴가 때 할 것도 없고 심심해서 적어본 걸 올려봅니다.

예전에 조각으로 적었던 글들도 그냥 다 섞었어요.

 

 

1부

 

탁자 위에 먹다 남은 족발과 빈 소주병 2개가 흐릿하게 보이고 갑작스런 졸음이 몰려와 거실 소파에서 잠이 들었다.

 

 

아이들의 웅성거림에 시끄러워 눈을 떠보니 초등학교 교실이었다.  

 

내 앞 자리엔 내 오랜 친구 동훈이가 20년 전 모습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너는 맨날 학교에서 잠만 자냐?”

 

이건 꿈인 걸 금방 알아챘다.

 

어깨를 톡톡 건드리는 느낌에 옆을 보니, 첫사랑 설희가 새침하게 날 보고 있었다.

 

“승훈이는 좋겠네? 잘생기고 인기가 많아서.”

 

“응? 무슨 말이야?”

 

설희는 손짓으로 앞에 보이는 칠판을 가리켰고 거기엔 우리 반 인기투표 결과가 적혀 있었다.

 

강승훈 26표

임찬정 6표

차언우 8표

 

왁자지껄 시끄러운 애들 소리와 함께 우리 반에서 인기가 제일 좋은 남자로 뽑혔다.

 

내 옆에 앉아있던 설희는 개표 결과가 마음에 드는지 흐뭇한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그렇게 좋아?”

 

설희는 이웃집에 살고 있었고 정말 친한 사이였다. 아니, 내가 많이 좋아했었다.

 

그런 설희의 얼굴을 보니 꿈속에서도 심장이 두근두근 거렸다.

 

여전히 그리운 그녀에게 왜 내게 연락도 없이 떠나버렸는지 묻고 싶었다.

 

“너 왜 날 떠났어?”

 

꿈속의 설희는 말없이 빙긋 웃고 있었고 그렇게 잠에서 깨어났다.

 

너무 생생해 꿈인지 실제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초등학교 때 꿈으로 꾸었다.

 

소파에서 비틀거리며 일어나보니 보이는 건 먹다 남은 족발과 커다란 배만 보였다.  

 

욕실 입구 옆에 놓인 체중계에 올라가니, 어제 족발에 막국수까지 먹어서 그런지 120키로가 훌쩍 넘었다.

 

 ‘183센티에 126키로라, 합치면 310이네. 오늘도 기록 갱신이구나.’

 

체중계에 찍힌 숫자를 보니, 잠시나마 두근거렸던 가슴은 금방 진정이 되어버렸다.

 

욕실에 들어가 샤워를 하던 중에 아침부터 휴대폰 벨소리가 들려왔다.

 

벨소리가 끊이지 않고 점점 늘어나자 여친이라 확신했고 물기를 대충 닦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주글래? 전화를 왜 이리 늦게 받아?”

 

신경질적인 여친의 목소리에 주눅이 들었다.

 

“미안……. 씻는 중이라서 늦게 받았네.”

 

그녀는 슬며시 웃음소리를 내며 말했다.

 

“한 동안 오빠를 예쁘게 대해줬더니 이제 막 기어오르네?”

 

농담처럼 말하고 있었지만, 항상 내 위에 자기가 있다는 그런 자신감이 가득한 그런 목소리였다.

 

자존심이 너무 상할 때는 한 번쯤 큰소리로 욕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더 화를 낼까 싶어 참았었고, 지금도 그냥 웃음을 섞어 말했다.

 

“안 기어 올랐어, 내가 감히 우리 공주님에게 기어오를까?”

 

내 농담에 용기를 얻은 듯 어제 친구들과 만났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오빠 어제 친구 만났는데.”

 

“응, 어제 술 한 잔 한다며?”

 

“응, 그런데 그 계집애 가방이 바뀐 거야.”

 

“아, 그래?”

 

“응, 내가 너무 가지고 싶은 구찌 신상인데. 근데 가방이 너무 예뻐서 어디서 샀냐고 물으니깐…….”

 

끝말을 늘어트리며 살짝 뜸을 들였다.

 

“그러니깐?”

 

“자기 남친이 사줬다더라. 진짜 부러웠어.”

 

가방을 사달라고 운을 띄우는 건 그 누구라도 눈치 챌 수 있었지만, 모르는 척 의미 없는 웃음을 흘리며 되물었다.

 

“채린아, 그런데 구찌 가방이 비싼 거야?”

 

“에이, 장난치지 말고 구찌 몰라? 얼마 안 해.”

 

여성 가방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어 생각나는 가격으로 다시금 물어봤다.

 

“구찌 들어보긴 했는데. 얼마 정도 해? 한 50만 원 정도 하나?”

 

“오빠! 진짜 왜 그래? 진짜로 구찌 몰라? 사 주기 싫으면 싫다고 해. 구질구질하게.”

 

“아냐, 진짜 가격을 몰라서 그런 거야. 내가 그런 거에 관심이 없어서 진짜 몰라서 그래.”

 

내 말을 듣고 잠시 진정하던 채린이는 한 번 헛기침을 하고는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다음 달에 내 생일인데 구찌 사주라.”

 

또다시 허영심이 그녀를 지탱하는 근본인 걸 깨달았다.

 

“그래, 그런데 그거 얼마나 해?”

 

채린은 가격을 묻는 말에 애교가 듬뿍 들어간 콧소리를 내었다.

 

“난 내가 봐 놓은 가방이 있는데 330만원 하던데. 사줄 수 있지?”

 

“뭐? 얼마?”

 

단전에서 올라오던 수많은 욕들이 울대를 지나 입 밖으로 나오려 했지만 도 닦는 심정으로 다시 삼켰다.

 

 ‘잘 못 들었겠지. 무슨 가방이 그리 비쌀까?’

 

진짜 잘 못 들은 것 같아 다시 물었고 그녀는 또박또박 정확하게 다시 말했다.

 

“330만원이야, 오빠.”

 

제대로 들은 거라고 생각 드는 순간 짜증이 북받쳐 나도 몰래 한숨이 길게 뿜어졌다.

 

“하……. 얼마 전에 화이트데이라고 금팔찌 해준지가 언젠데 또 가방을 사달라고 하냐? 너 정말 나 좋아해서 만나는 거 맞아?”

 

놀란 듯 그녀의 숨소리가 들리고 약간의 정적 후 그녀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호구로 보이니깐 맨날 선물 아님 용돈 달라는 거 아냐?”

 

짜증이 섞인 신경질에 그녀는 놀랐는지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곧 머릿속으로 할 말을 다 정리한 둣 아주 신경질 적이고 앙칼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깟 선물 얼마나 한다고 신경질이야? 그래! 나 너 안 좋아한다. 됐나?”

 

신경질적인 채린의 목소리에 점점 불안감이 커지기 시작했고 이내 주눅이 들어버렸다.  

 

“그게 아니라. 아침부터 전화해서 선물 사달라고 하니깐. 내가 조금 흥분 했나봐…….”

 

“사귀는 사이끼리 선물 해 주는 게 무슨 대수야? 그게 큰 벼슬이야?”

 

또다시 화가 끓어올랐지만, 처음 만날 때부터 갑과 을의 사이로 만났기에 또다시 습관적으로 숙이며 들어갔다.  

 

“그래. 내가 조금 전 흥분해서 미안해”

 

“됐고! 이제 내가 연락하기 전에 연락하지 마!”

 

“왜 그래. 채리...”

 

내가 분명 기분 나빠 할 줄 알면서도 말하는 중에 채린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런데 이상하게 내 곁에 없으면 아쉬울 것 같던 그녀였지만 연락을 하지 말라는 말에 마음이 더 편해졌다.

 

그녀를 만나면서 처음엔 자존심도 많이 상했고 힘들었는데, 이제는 더 이상 상할 자존심도 없는지 아무렇지도 않았고 마냥 힘들기만 했다.

 

채린을 처음 만난 것은 대학 친구와의 술자리였다.

 

아는 동생이라고 나왔던 그녀가 마음에 들어 선물 공세로 매달려 지금은 그 여자가 지금의 내 애인이긴 했다.

 

하지만 알고 지낼수록 백화점에서 일하는 그녀의 사치와 허영은 너무 과했다.

 

한 번씩 질릴 때마다 헤어지려고 해도 내 주제에 어디 가서 이런 여자를 만날 수 있을까라는 생각만 들었다.

 

오래 전 헤어진 설희에게 여전히 미련이 있었고 주위에 조금만 물어보면 만날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내 모습을 보여주기가 너무 싫었다.

 

그래서 지금의 여친을 계속 만나곤 있지만 자존감이 떨어진 내게 상처만 주는 그런 여자여서 너무 힘들었다.

 

 

아침부터 가방을 사달라는 채린의 투정에 심신이 지쳐버린 상태로 출근했다.

 

주차를 하고 회사 입구에서 지원팀의 정보람과 영업팀 임찬정 대리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찬정이는 초등학교 동창이지만 살이 찐 나를 못 알아보고 먼저 입사한 선배로만 알고 있었다.

 

이런 내 모습으로 아는 척하기도 껄끄러워 그냥 얼굴만 알고 서로 대화도 거의 안 한 상태였다.

 

그런 찬정이가 검은 색 봉지를 정보람에게 건네는 모습을 보며 사무실로 향했다.

 

출근을 하자마자 커피를 마시려고 탕비실로 들어갔다.

 

이내 지원팀 후배 정보람도 탕비실로 들어왔고 눈이 마주치자 내게 인사를 건넸다.

 

“강과장님은 이런 거 좋아하시죠? 누가 나 먹으라고 주던데 요즘 몸매 관리한다고 먹기가 좀 그래요.”

 

조금 전 임대리에게 받았던 봉지를 내밀었고 봉지 안을 보니 캔 커피와 과자 여러 개가 들어있었다.

 

옆 부서에서 일하고 있어서 잘 마주치지 않던 정보람은 뚱뚱하다고 평소에도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리고 말을 걸어도 건성으로 대하던 후배였다.

 

그런 여후배가 간식으로 나를 놀리고 있었다.

 

옅은 웃음이 머물러 있는 얼굴에 대놓고 별다른 말도 하지 못하고, 건네는 음료와 간식을 받아 책상 서랍에 넣어두었다.

 

“바로 안 드시고 모아두는 거예요?”

 

“나중에 먹을 게. 고마워.”

 

“고맙긴요. 과장님 체격 유지하시려면 부지런히 드셔…….”

 

여전히 놀리려는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자, 말은 끊고 보일 듯 말 듯 한 목례를 하고는 자기 부서로 돌아갔다.

 

예전 사내 휴게실에서 친구와 통화 하는 것을 우연찮게 들은 적이 있었다.

 

“우리 옆 부서에 연구실 뚱땡이도 여친 있다는데 난 이게 뭐야?”

 

“잘생기면 최고야. 평생 보고 살 건데. 돈도 좀 있으면 당연히 좋지.”

 

“호호호, 그래 난 얼굴 뜯어먹고 살 거다. 이 기지배야.”

 

들은 것을 말할 수도 없고 나를 꼭 집어 얘기한 것이 아니라고 발뺌을 할 수도 있어 모른 척 했었다.

 

그 때부터 내게 보이는 호의는 가식처럼 느껴지는 참으로 껄끄러운 사이였다.

 

 

평소엔 간간히 문자가 오던 여친은 점심시간이 될 때까지 연락 한 번 없었다.

 

기다리진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수시로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내가 또 한심해졌다.

 

솔직히 그녀는 처음부터 내게 조금의 호감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 집이 제법 살만하다고 해도 아주 큰 부자는 아니었다.

 

또 내 키는 남들보다 크다 하더라도 식스팩의 꽃미남도 아니었기에, 먼저 자처해서 고백을 하고 스스로 약자가 되어 숙여 들어갔었다.

 

다리를 다치고 난 뒤 공부만 하다 보니 눈이 나빠져서 두꺼운 안경을 쓰는 뚱뚱한 남자일 뿐이니깐.

 

거의 매일 이어지는 채린의 투정을 들을 때마다 오늘도 짧은 결심과 포기도 이어졌다.

 

 ‘여기서 진짜로 끝내? 아니야, 내가 또 어디 가서 저런 여자를 만날까?’

 

늘 이런 생각으로 그녀와 만난 지 2년이 다 되어갔지만 그녀와 간혹 있었던 좋았던 기억으로 버티고 있었다.

 

또 한 번씩 좋았을 때가 있어서 그 때를 떠올리면 도저히 떨쳐낼 수가 없었다.

 

하루를 채우고 퇴근시간이 될 때까지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한 통의 전화, 한 통의 문자도 하지 않았고 오지도 않았다.

 

퇴근길에 저녁이나 먹고 들어가려고 집 근처 돼지국밥 집에 주차를 했다.

 

그 때 채린이와 같은 백화점에서 일하는 정화라는 여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빠, 뭐해요?”“정화야, 오랜만이네. 그냥 밥 먹으려고 식당 앞에 있어.”

 

 

채린과 데이트를 하면서 그 주위의 친구들을 종종 만나 밥을 사주곤 했었다.

 

내 위에 있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어 하는 채린이를 유일하게 나무라던 여자가 정화였다.

 

지난 달 마지막으로 정화를 만났을 때가 생각났다.

 

채린이가 일하는 백화점 인근의 큰 횟집에서 우리 세 사람은 술자리를 가졌었다.

 

술자리가 길어질수록 우리들은 점점 취했었고 얼굴이 빨갛게 변한 정화가 내게 물었다.

 

“오빠도 살 빠지면 나쁘지 않을 인물인데 운동 같은 거 안 해요?”

 

평소에는 그냥 흘렸을 테지만 그날따라 과거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나도 군제대하고 22살 때까지는 진짜 인기 많았는데, 잘생겼다는 말도 매일 듣고 성격도 활발했었거든.”

 

“그래요? 그 때는 지금처럼 덩치가 크진 않았나요?”

 

“아, 그때 알바 하고 집에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했었어. 휴대폰 보고 걷다가…….”

 

“에휴, 어쩌나. 그래서요? 지금은 괜찮아 보이는데 다 나은 거 맞죠?”

 

옛 기억을 떠올리며 앞에 놓인 소주를 한 번에 머금었다.

 

“다리가 작살 나서 병원에 한동안 입원 했었지, 불행 중 다행은 눈에 보이는 장애가 없다는 정도?”

 

“그럼 그 때 이렇게 덩치가 커진 거예요? 에구, 혹시 제가 또 말실수 한 건가요?”

 

조심스럽게 말하는 정화에게 괜찮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뭐 뚱뚱한 사람을 뚱뚱하다고 하는데 무슨 실수야. 그땐 운동을 좋아해서 평소에 많이 먹었는데, 다치고 나니깐 먹기만 많이 먹고 운동을 안 해서 이렇게 됐지 뭐.”

 

정화는 곰곰이 생각하다 말했다.

 

“오빠만 괜찮으면 채린이랑 같이 간단하게 등산이라도 할래요? 저 한 번씩 산에 가는데.”

 

“아니, 운동하기가 겁나서……. 다리에 무리가 갈까봐.”

 

그 때 내게 계속 말을 거는 정화를 보고는 기분 나빴는지 채린이가 끼어들었다.

 

“자꾸 그렇게 챙기는 척 하지 마, 오빠 버릇 나빠진다.”

 

정화는 내 편을 들며 말했다.

 

“그래도 오빠인데 그렇게 말하면 안 되잖아.”

 

“왜? 너 할래? 이 오빠?”

 

서로가 많이 취한 상태였지만, 하면 안 되는 말을 내 뱉기에 오늘은 따끔하게 한마디 하려했다.

 

그 때 먼저 정화가 발끈했다.

 

“야! 말을 왜 그따위로 해?”

 

“왜? 싫어서 그래? 너 적당한 남자 만나는 거 좋아하잖아? 이 오빠가 딱 적당하기도 하고.”

 

곧 싸움이 벌어질 것 같아 둘을 말렸다.

 

“그만들 해. 내가 취해서 말이 많았네.”

 

서로가 말없이 가만히 있을 때 채린의 휴대폰으로 전화가 왔었다.

 

번호를 확인하며 먼저 집에 간다고 일어서는 것을 보니, 분명 남자 전화였다.

 

횟집을 나가는 채린의 뒷모습을 보던 정화가 내게 말했다.

 

“친구라고 편드는 것은 아닌데 채린이도 채린이의 방식으로 오빠를 사랑하는 거니깐 너무 속상해 하지 마세요.”

 

 

 

그렇게 지난달에 횟집에서 술자리를 가진 후에 처음으로 통화를 하는 정화였다.

 

“아침부터 채린이는 분위기 안 좋던데. 식사는 늘 꼭 챙겨 드시나 봐요. 조금 전에도 씩씩 거리던데. 둘이 무슨 일 있어요?”

 

“아니, 그런 거 없는데? 혹시 무슨 말 하든?”

 

“안 그래도 채린이가 남자 한 명 소개 시켜 달라고 해서 뭔 일 있나 싶어서 궁금해서요.”

 

분명 채린이와 가장 친한 친구가 내게 고자질 하려고 전화 한 것은 아닌 건 분명했고, 아마도 한 번 떠보라고 시킨 것 같았다.

 

“아냐, 별일 없었어.”

 

“채린이에게 이따가 남자 소개 시켜주기로 했는데.”

 

“아? 그래?”

 

둘이서 짜고 쇼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 어떤 반응도 자연스레 나오지 않았다.

 

“오빠 별로 안 놀라네요?”

 

“아냐, 너무 놀라서 입이 붙어 버린 걸?”

 

“사실은 채린이가 부탁해서 전화하긴 했는데요, 미안해요. 그래도 일단 거기로 가셔서 데리고 가세요.”

 

“알았어, 고마워.”

 

“빈말은 아닌데요. 오빠도 운동 조금만 하면 괜찮을 것 같은데……. 너무 채린이에게 휘둘리지 마세요.”

 

정화는 초밥집 상호를 가르쳐 주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돼지국밥집에서 밥도 먹지 못한 채, 차를 돌려 초밥집으로 가니 어떤 남자랑 단 둘이 앉아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우두커니 서 있는 날 발견 못했는지 둘의 대화에서 웃음소리가 오고 갔다.  

 

“채린아…….”

 

내게 고개를 돌린 채린은 전혀 놀라지도 않은 채 옆 눈으로 흘겨보았다.

 

“흥! 누구세요?”

 

“채린아, 도대체 나랑 뭐하자는 건데!”

 

“오빠는 채린이에게 애정이 식어서 다른 인연 만나려 왔어! 왜?”

 

예전에 누구에게 들었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자기 자신을 3인칭으로 쓰는 사람은 피하라는 말을 들은 것 같았다.

 

평소에는 못 느끼다가 방금 이 말을 듣고는 온몸에 찬물을 끼얹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우리 둘이 대화 하는 것을 본 낯선 남자는 빙긋이 웃고만 있었다.

 

나이도 한참 어려 보이던 그는 아마도 이 쇼를 하기 위해 임시로 데리고 나온 남자인 것이 분명했다.

 

“나 채린이에게 애정 안 식었어.”

 

“아니, 내가 보기엔 나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  

 

그녀의 투덜거리는 말에 그 동안 참았던 말들을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다.

 

“만날 때 마다 사랑확인? 애정확인? 네게 선물 못 사주면 내가 너 사랑 안 하는 거니!”

 

방금 들은 말이 기가 차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멀뚱히 그녀가 대답했다.

 

“와! 눈빛 뭔데? 칼 한 자루 쥐어주면 나 내일은 저승에 있는 거 아냐?”

 

“뭐라고?”

 

“그리고 사랑하면 원래 다 해주고 싶은 거 아니가? 내가 진짜 가방 받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알아?”

 

식당 안의 사람들 시선들이 우리 둘에게 번갈아 오고 갔다.

 

그리고 식당 주인은 말리려다 험악한 분위기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처한 표정으로 저 앞에 서 있었다.

 

식당 안 분위기를 살필 때 채린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진짜로 오빠가 내게 가방을 사 줄 만큼 사랑하는지 확인 하고 싶었단 말이야!”

 

“그럼 이야기가 원점이로 돌아가네. 채린아. 구찌인지 뭔지 그거 못 사주면 어떻게 되는데?”

 

“그럼 오빠가 나 사랑하지 않는 거니깐 여기서 접어야지.”

 

“너랑 나랑 종이 접기처럼 간단히 만난 것도 아닌데. 뭘 접어?”

 

“이상한 농담하지 말고. 나 저 남자랑 잘 해 볼 거니깐 당장 눈앞에서 사라져!”  

 

채린은 자리에 다시 앉았고 맞은편에 앉은 남자는 잔잔한 미소를 보이며 인사하듯 고개를 까닥거렸다.

 

약간이나마 남아있던 정마저 털어버리고 정말 이별을 하려 마음을 굳히며 식당을 나왔다.

 

 ‘그래. 우리 질긴 인연 이제 여기서 끝내자. 진짜로 끝내자.’

 

차에 올라타 한참을 멍하니 있어도 사라지지 않는 분한 감정인지 답답한 감정인지 모를 이 감정을 풀고 싶었다.

 

그래서 그 동안 여친을 만난다고 잘 만나지 못했던 동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내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친구 살아있네?”

 

“그러게. 넌 잘 지냈냐?”

 

“당연하지! 안 그래도 조만간에 연락하려고 했는데. 요즘 어때 살 좀 빠졌나?”

 

채린이 때문에 쓸쓸해진 기분을 약간이나마 풀고자 웃음을 섞어 농담으로 받았다.

 

“더 쪘다!”

 

“그래? 이제 굴러다니겠네.”

 

“이 색히 우째 알았냐? 주글라꼬,”

 

“근데 왜 전화 했냐? 이상한 여자 만나서 한동안 잠수만 타던 놈이.”

 

“그 이상한 여자 때문에 답답해 죽을 것 같아서, 이왕 죽는 거 술 마시다 죽으려고 전화했지. 한잔하자.”

 

“지금?”

 

“응, 지금.”

 

“제수씨랑 뭔 일 있었냐?”

 

“제수씨는 무슨! 재수 없게! 만나서 얘기해줄게.”

 

“오, 그 동안 음악 했냐? 라임이 살아있네. 그럼 내가 1시간만 아니 30분만 있다가 다시 전화할게”

 

“30분은 왜? 바로 안 나오고?”

 

“그런 게 있어. 너무 깊이 알려고 하지 마. 이따가 전화할게.”

 

동훈이와 통화하며 농담도 주고받다 보니 기분은 좀 나아졌다.

 

그리고 다시 전화 준다는 말에 혹시나 외로워진 내게 급하게 여자를 소개시켜주려나 하는 기대감도 생겼다.

 

다시 동훈에게 연락이 오고 나서 예전에 자주 갔던 호프집에서 만나기로 했다.

 

먼저 도착한 호프집은 예전과 크게 달라진 것 없이 예전 느낌 그대로였다.

 

이 호프집에서 예전 사귀었던 설희와 같이 즐거웠던 아련한 한 때를 떠올리며 친구를 기다렸다.

 

잠시 후, 동훈의 모습이 보이며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혼자 멍 때리며 뭐하냐?”

 

“너 혼자 왔냐?”

 

“그럼 이 시간에 혼자지 누구랑 같이 올 줄 알았냐?”

 

“진짜? 난 또 전화를 다시 준다기에 여자라도 한명 데리고 나올 줄 알았지.”

 

동훈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

 

“예전에 여자에게 별 관심 없던 내 친구 맞냐? 다른 약속이 있어서 취소한다고 30분 달라고 한 거였어.”

 

“여자였냐?”

 

“남자겠냐?”

 

“남자겠지, 네 주제에.”

 

“어쭈? 나중에 형아가 착한 여자 소개 시켜줄려고 했더만 안되겠네?”

 

“형! 사랑해! 근데, 보통 소개 해줄 땐 예쁜 여자라고 하지 않나? 착한 게 우선으로 말할 정도면 음, 그래도 일단 사랑해.”

 

친구와 농담을 주고받던 중에 주문을 받으러 온 여종업원이 대화를 엿들었는지 옅은 웃음을 보이며 서 있었다.

 

맥주와 소시지 감자튀김 안주를 시켰고 주방에 주문을 넣은 종업원은 종종 우리가 앉은 테이블을 쳐다봤다.

 

한 번 눈이 마주쳤을 때, 그 종업원은 살짝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버렸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종업원은 대학생 알바처럼 보였고 알바 경험이 많아 보이진 않았다.  

 

 ‘설마 저 어린애가 날 봤던 건 아니겠지? 그냥 신기해서 쳐다본 건가?’

 

친구와 그 동안 살아왔던 얘기를 하다가, 동훈의 눈치를 보고 늘 궁금했던 설희의 근황도 물어보았다.

 

나와 헤어지고 만난 남자와 아직 사귀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곧 결혼까지 할 것 같다는 말에는 눈물까지 날 것 같았다.

 

초등학교 동창이었던 설희와 동훈은 한동네에 살면서 어렸을 때부터 자주 어울렸었다.

 

특히 설희는 바로 옆집에 살아서 등교도 매일 같이 하다시피 했었다.

 

서로의 집에 자주 들락거리고 성장기 시기의 고민도 서로 공유하다 후엔 친구가 아닌 첫사랑이 되었었다.

 

술을 마시며 설희의 얘기를 계속 듣다보니 순수한 사랑을 하던 때가 생각나 감성적인 기분이 한참 올라왔다.

 

그 때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별 생각 없이 휴대폰을 집어 드니 휴대폰 창에 채린의 번호가 찍혀있었다.

 

술 때문에 조금 취기가 오른 상황이라서 그런 걸까, 아님 때마침 흘러나오는 호프집의 음악이 애잔해서 일까, 막상 그녀의 전화에 마음이 말랑말랑하게 약해져 있었다.

 

친구를 만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그녀였다.

 

그리고 동훈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안주 삼아 했었기에 난감한 상황이라 휴대폰을 들고 호프집 문을 나서서 전화를 받았다.

 

채린의 분하고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짜로 그렇게 가냐!”

 

“네가 사라지라며?”

 

“그렇다고 진짜 가냐? 진짜 오빠 재수 없다.”

 

“그럼 내가 너희 둘 앞에서 뭘 해야 됐었는데? 말해봐! 가방을 못 사준다고 무릎이라도 꿇었어야 했냐? 진짜로 넌 날 사랑하기는 했어? 사랑하기는 했냐고!”

 

가만히 듣고 있던 채린은 거짓말로 답을 해주었다.

 

“믿지 못하겠지만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입술을 허락할 정도로 난 헤프지 않아.”

 

모른 척 했지만 예전 같이 나간 동창 모임에서 다른 남자와 입맞춤을 하던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한창 그녀를 사랑하던 시기라서 그 사실을 얘기 하면 미련 없이 날 떠날까봐 가슴 속 깊이 묻어두고 그 기억들을 삭혀 없애려 했었다.

 

거의 다 삭혔다고 생각했는데 방금 말을 듣자마자 온 몸에 열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정리되지 못한 말들이 마구잡이로 튀어나왔다.

 

“딴 놈이랑은 잘도 키스 하더만. 나하고 할 때는 입술 아프다고 늘 피했잖아! 내가 모를 줄 알아? 그리고 가슴은 왜 아파? 또 뭐 방광염? 나한테만 아픈 거야?”

 

채린의 당황하는 숨소리가 들려오고 약간의 정적이 흐를 때 등 뒤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다다다다다)

 

휴대폰을 귀에 댄 채 뒤돌아보자 호프집에 그 어려 보이던 종업원이 수줍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당황한 채린의 숨소리만 들려오는 휴대폰을 귀에 대고, 쭈뼛쭈뼛 앞에 서 있는 그녀에게 소리 없이 입모양으로만 말했다.  

 

“왜요?”

 

궁금해 하는 내 표정을 읽었는지 여종업원은 굉장히 난감해 했다.

 

“그냥 가신 줄 알고요. 죄송합니다.”

 

고개를 깊이 꾸벅거리던 그녀의 귀여운 모습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전화를 끊고 넌지시 농담으로 답했다.

 

“저 술값 떼어먹고 갈 사람은 아닌데요? 안에 친구도 있고.”

 

빙긋 웃으면 시선을 맞추려 했지만 그녀는 시선을 아래로 피하며 당황한 목소리를 내었다.

 

“아뇨, 사실... 그게 아니라... 인상이 좋으셔서 휴대폰 번호라도 받으려고…….”

 

순간 잘 못 들은 것 같아 내 손가락으로 내 가슴을 가리키며 되물었다.

 

“네? 내 번호를요? 정말로요?”

 

“아뇨, 아니, 아니, 네. 그러니깐  

폰 번호를…….”

 

나만큼 아니, 나 이상으로 당황하는 그녀를 멀뚱히 쳐다보다, 그녀가 내미는 휴대폰에 건네받고 번호를 입력하려 했다.

 

당황해서일까, 잠시나마 내 번호가 기억나지 않아, 마음을 진정시키고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휴대폰에 내 폰 번호를 찍어주었다.

 

[010-1234-5678]

 

휴대폰을 건네받은 그녀는 꾸벅거리며 인사를 하고 다시 호프집 안으로 들어갔다.

 

 

 

1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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