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아니, 이런 거 안주셔도 되는데. 저두 방금 왔어요.”
당연히 방금 오지 않았고 10분 정도 기다렸었다.
하지만 먼저 만나자고 했던 그녀가 미안한 표정을 보일까 싶어 둘러말했다.
걸어온다고 힘들었는지 콧등에 땀방울이 맺혀있었고, 빨대를 꽂고 입술을 오물거리며 우유를 마시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 보였다.
그녀의 옆모습을 보며 내 여친이었으면 좋겠다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중에 우유를 한 번에 다 마셔버린 그녀가 말했다.
“오는 길에 배가 고파서 사는 김에 두개 샀어요.”
“아, 그래요? 하여튼 잘 먹을게요.”
그녀의 옆모습을 보며 우유를 가만히 들고 있던 걸 본 그녀가 말했다.
“왜 안 드세요?”
“아, 네. 여자 분에게 선물을 받아 본 적이 없어서 기념으로 가지고 있을려구요.”
말장난 같은 농담에 그녀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내게서 우유를 살며시 다시 가져갔다.
그리고 가방에서 주섬주섬 빨대를 꺼내 우유에 꽂아서 다시 내밀었다.
“이제는 드셔야겠네요.”
“가방이 만능 가방이네요. 우유에, 빨대에, 더 나올 건 없나요? 혹시 비둘기 나오고 그런 거 아니죠?”
“이젠 없어용.”
귀여운 표정으로 말하는 그녀의 말투를 따라했다.
“어휴, 아까워서 이걸 어떻게 마시징?”
“에이, 이런 거 뭐 기념한다고 아껴 드시려고 그래요.”
“네, 그럼 잘 마실게요.”
여자 앞에서 우유를 마시려니 쑥스러워서 어른 앞에서 술 마시는 것처럼 마냥 고개를 옆으로 돌려서 우유를 마셨다.
그녀는 이런 모습이 재미있어보였는지 소리 내며 웃고는 말했다.
“승훈이 오빠는 여전히 귀엽네요.”
“아, 그런가요.”
무심결에 별 생각 없이 멋쩍게 대답했다가 내 이름을 알고 있다는 생각에 뒤늦게 놀라며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런데 제 이름은 또 어떻게 아시죠?”
“성당동에 사는 강승훈 오빠라는 거 처음 볼 때부터 알고 있었어요. 호프집 들어올 때부터.”
내가 살이 쪄서 친한 사람들도 예전의 모습을 기억 못하는데 나에 대해 너무 잘 아는 것 같았다.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며 누구일까 떠올려보려 했다.
그러나 이 정도 나이차가 나는 여자애가 도저히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시 어떻게 아냐고 물으려고 할 때 그녀가 먼저 말했다.
“오빠 허기지시면 밥 먹으러 갈래요?”
내가 분명 궁금해 할 것을 알지만 자꾸 그 얘기는 피하는 느낌이 들었다.
“저 배 안 고파요. 그리고 이 우유를 마시니 배가 부른걸요. 그리고 이 늦은 시간에 밥 먹으로 가면 그쪽도 저처럼 살쪄요. 그것도 대따 많이요.”
그렇게 웃기려고 했던 말도 아니었지만, 그녀는 내 말이 끝날 때마다 재미가 있다는 듯 입을 손으로 가리며 웃었다.
한참을 웃다가 그녀가 말했다.
“그럼 어디 갈까요?”
“혹시 술 마실 줄 아세요?”
“잘은 못해요. 조금은 마실 줄은 알지만.”
“잘 못한다는 기준이 소주 2병? 아니구나, 분위기가 와인을 호로록 거리며 마시는 미모인데?”
내 말을 듣고 또다시 한참을 웃던 그녀는 벤치에서 일어서서 내 손을 잡고 일으키며 해맑게 웃었다.
“그럼 우리 술 마시러 가요, 와인 말고 소주 마셔요. 그쪽에게 아니 오빠에게 할 이야기도 있고.”
젊은 여자애와 같이 손을 잡고 대학가를 걷는 이 즐거움이 내 것이 맞는지, 꿈을 꾸고 있는 건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여기 지리를 잘 아는 듯 익숙한 발걸음으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퓨전 요리가 나오는 식당으로 나를 이끌었다.
식당 안의 종업원이 우리에게 앉을 자리를 안내해주었고, 그녀는 테이블 위의 메뉴판을 펼치고 고민하고 있었다.
술을 못 마신다는 말이 생각나 메뉴판을 보는 그녀에게 넌지시 물었다.
“아까 술 못 마신다더니 정말 마실 수 있겠어요?”
“조금 정도는 마실 수 있어요.”
“소주 2병? 말하는 거죠?”
“에이, 아니에요.”
그녀는 내 말이 끝날 때마다 재미있다는 듯 소리 내어 웃었고 늘 자주 시켰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종업원을 불러 주문을 했다.
다른 테이블의 술에 취한 젊은이들의 웅성거림, 웃음소리, 잔잔히 들려오는 음악소리로 식당 안은 전형적인 대학가 술집 분위기였다.
주문한 50,000원짜리 세트 메뉴와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있는 소주가 나오자 그녀가 소주잔을 내밀었다.
술을 잘 못 마신다는 말을 들었기에 소주잔의 반만 채워주었다.
그리고 내 잔에 스스로 따르려고 하자 그녀는 급하게 내 팔을 막으며 소주병을 낚아챘다.
“제가 따라드릴게요.”
“괜... 괜찮은데.”
못 이긴 척 내민 소주잔에 그녀는 천천히 소주를 따라주었고 그 모습에 가슴이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지금 만나는 채린의 날카로운 성격에만 적응되어 있다가 웃음 많고 다정한 여자를 만나니 정말 다른 세계에 있는 것 같았다.
소주를 한 번에 들이켜고 그녀를 쳐다보자 소주잔에 살짝 입술을 댄 그녀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빠, 살 많이 찌셨네요.”
날 아는 그녀의 얼굴을 다시 뚫어져라 쳐다봐도 도무지 누구인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진짜 날 아는 것 같은 그녀에게 누군지 기억이 전혀 없다고 하면 섭섭해할까봐, 안주를 하나 집어 입에 넣고 한참을 곰곰이 생각했다.
그리고 솔직히 먼저 얘기하려했다.
“군 전역하고 교통사고가 나서 병원에 입원하면서 살이 이렇게 쪘어요.”
“네, 예전에 기억으로는 오빠 꽤 인기 좋았었는데…….”
“그랬던가요? 아주 예전의 기억을 떠올리면 서글프기만 해서……. 죄송한데 누군지 도대체 모르겠어요. 저 어떻게 아시죠?”
내 말을 들은 그녀는 또다시 빙긋 웃으며 남아 있는 소주를 한 번에 마셨고 더 달라는 듯 빈 술잔을 다시 내게 내밀었다.
“술을 못 하신다더니 많이 못하신다는 말 이였나요?”
술을 받은 그녀는 손등을 눈 옆에 대고 눈을 감으며 장난스럽게 취한 척 했다.
“아니에요, 술 한 잔 마셨더니 벌써 어지러운걸요.”
“에이, 어지러운 표정 아니고 맛있어하는 표정인데요?”
“에이, 오빠도 참. 어떻게 알았찌?”
서로의 말투를 따라하며 농담과 애교가 오고가는 이런 대화가 너무 좋았다.
괜히 그녀가 더 귀여워 보였고 넌지시 건너다보는 내 눈빛에 민망한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농담이에요. 오빠.”
“에이, 아닌데? 술 마시고 나서 목 넘김 표정이 너무 행복해 보이네요?”
“우와, 또 어떻게 알았찌? 오빠 말하는 거 너무 재밌어요.”
그녀의 함박웃음을 보며 도대체 누구일까 더 궁금해졌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꾸 말을 돌리는 것 같아 다시 물었다.
“처음 봤을 때 우리 집을 알았었고.”
“네.”
“제 이름도 알고.”
“네.”
“제가 갑자기 살찐 것도 알고…….”
빙긋 웃으며 짧은 대답을 하며 사랑스럽게 쳐다보던 그녀가 이제는 말을 하려고 그러는지 침을 삼키는 목이 흔들거렸다.
“제 입술 보면 무슨 생각이 나요?”
뜬금없는 질문에 또 말을 돌리려나 싶어 짓궂게 말했다.
“키스?”
그녀는 크게 웃으며 다시 말했다.
“오빠 왜 이리 야해졌어요? 키스 말고 과일 같은 거로 비유하면요? 너무 힌트 많이 주는 거 같아.”
그녀가 무슨 뜻으로 말하는 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앵두?”
“하하. 아뇨, 저 사실 예전에 …….”
그녀가 긴장한 표정으로 말하는 중에 내 휴대폰에서 벨소리가 울렸고 그녀는 말하다 멈칫했다.
휴대폰 번호를 확인하니 채린이었다.
“저 전화 오는데 잠시 만요.”
채린과 통화를 하려니 괜히 그녀가 난감할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걸어가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이내 채린의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나랑 뭐하자는 건데!?”
“뭐하긴 그냥 너한테 지쳤다고……. 그래서 생각 좀 해보..”
말도 끝나기 무섭게 그녀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지금 어떤 년이랑 있는 거지?”
분명 넘겨 던진 말이었지만 뭐라고 대답 할 수가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약간의 정적 후 비웃음 소리가 크게 들리고 비하하는 말들이 쏟아졌다.
“헐, 돼지 같은 게 진짜 여자랑 있는 모양이네?”
방금 전까지 달달하고 행복한 순간이어서 내가 뚱뚱하다거나 못났다는 걸 잠시나마 잊고 있었다.
그런데 현실을 알게 해주는 채린의 말에 큰소리를 내질렀다.
“그래! 돼지 같은 네 남자친구는! 아니, 남자친구도 아니지. 네 머슴은 네게 지쳐서 이제 다른 여자 만난다! 왜? 안 믿겨?”
여태껏 만나오면서 처음 보는 모습이어서 그런지 채린은 차분하면서도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어딘데…….”
“그냥 끊자.”
“지금 어디냐고!”
잔득 화가 난 채린의 고함소리가 시끄러워 전화기를 잠시 귀에서 떼고 화장실에서 나왔다.
그리고 앉았던 테이블로 시선을 돌렸을 때, 내 표정이 심상치 않은 것을 보고 그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휴대폰을 귀에 댄 채 웃어 보이고 별 거 아니라는 듯 조금만 기다리라는 손짓을 했고 내 모습을 본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 지금 장난 아니다. 지금 어디냐고.”
여전히 내 위에서 날 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채린에게 그 동안 담아왔던 말을 뱉었다.
“너는 매일 다른 남자 만나면서 난 여자 만나면 안 되냐!”
며칠 전 초밥집에 나왔던 그 젊은 남자 말고도 다른 남자와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내가 그 사실을 안다는 것만으로도 오히려 그녀가 떠날 것 같아 속에 담아 두었던 말을 지금 꺼냈다.
그 사실을 내가 안다는 것에 그녀가 약간 당황한 듯 멈칫거렸고, 잠시 정적이 흐를 때 내가 다시 말했다.
“왜? 내가 모를 줄 알았냐? 그리고 내가 너 누구 만난다고 내가 뭐 한마디라도 하더나?”
“어떻게... 알았어?”
“그래도 난 너한테 한 번도 화 안냈다. 아니 모른 척 했다. 그것도 모르겠네?”
채린은 숨소리만 내며 아무런 말도 없었,고 그 잠시 흐르던 정적에 겹겹이 쌓인 울분을 토해냈다.
“왜냐고? 난 진짜 너 좋아 했었으니깐! 아니 조온나 사랑했으니까!”
“했었다니? 지금은?”
“지금은... 지금은 내가 너무 힘들어서 이젠 싫어. 나도 힘든 건 싫다고…….”
“오빠도 욕할 줄 아네. 진작에 이렇게 화냈으면 지금 우리 이 지경까지 안 왔을 텐데. 그래서 오빠도 아무 여자나 만난다고?”
“아니, 아무 여자 안 만나지만 이제 나도 지쳐서 다른 사람에게 좀 기대어 볼란다.”
“그 여자가 미쳤나? 너랑 만나주게? 나니깐 너 만나 주는 거야!”
내 말을 들은 채린은 자존심이 상했는지 가슴 언저리에 상처를 낼 말들만 쏟아냈다.
“그래, 무슨 말인 줄 알겠어. 그럼 니가 말한 미쳤다는 그 여자에게 사귀자고 지금 바로 말한다. 전화 끊지 말고 그대로 들고 있어라.”
“뭐하자는 거야?”
채린과 통화하다 보니 나 역시 흥분 상태였다.
귀에서 휴대폰을 떼도 들려오는 채린의 고함소리를 모른 척 하며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통화 종료가 되지 않은 상태로 테이블 앞에 서서 소파에 앉아있는 그녀에게 말했다.
“저기요.”
내 얼굴을 걱정스런 눈으로 올려다보는 그녀가 말했다.
“통화 다 하셨어요?”
물음에 대답도 하지 않은 채, 허리를 숙여 눈높이를 맞추고 길게 숨을 내뿜고 말했다.
“저랑 앞으로 긍정적인 만남을 해 주시겠어요?”
그녀는 놀란 듯 눈이 커졌고 입가에 옅은 미소가 잠시 스치듯 지나갔지만 모르는 척 되물었다.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저랑 사귀자고요. 정말, 정말 잘할게요.”
3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