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런 고백에 주위 젊은이들의 시선이 우리 둘에게 향했고 웃음소리가 섞인 여러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 고백하나봐.”
“오, 대박! 남자가 좀 그런데?”
“거절당하는 거 직관 각인가?”
나를 비웃는 웅성거림 사이로 고백을 들은 채린의 욕설이 휴대폰 너머에서 아주 크게 울려왔다.
그녀는 갑작스런 고백 후의 어수선한 분위기. 그리고 내 손에 들린 휴대폰에서 들려오는 어느 여자의 욕설에 많이 당황한 것 같았다.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손에 쥐고 있는 휴대폰으로 향하고 있었고, 여전히 욕설이 난무하는 휴대폰의 종료 버튼을 누르고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테이블 위에 놓인 소주잔을 들어 한 번에 들이켜고 자리에서 일어나 맞은편에 앉은 이름도 모르는 그녀에게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고 다시 고백했다.
“이름이 뭔지도 모르겠고 누군지도 모르지만 저랑 한 번 만나 봐요. 만나보고 아니라면 그냥 차버려도 되요. 그런 거에 익숙해서 미안해할 것도 없으니까요.”
무릎 꿇은 모습을 지켜보는 주위의 시선이 민망한지 그녀는 일어서서 내 손을 잡고 일으키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가요?”
그녀의 목소리가 내 귀에 닿을 때쯤 그녀의 눈가에 천천히 눈물방울이 스며드는 것이 보였다.
“네. 진심이에요.”
“저 누군지도 모르면서?”
“누군지는 모르지만 앞으로 만나면서 천천히 자세하게 알아갈게요.”
내 앞의 그녀는 크게 숨을 내뱉고 내 앞으로 한 걸음 더 다가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려했다.
“오빠 제가 누구냐 하면요…….”
그녀가 말을 꺼내려고 할 때 테이블 위에 올려둔 휴대폰이 또다시 울리기 시작했고 액정 앞으로 채린의 이름이 보였다.
다시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니 전화를 받으라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채린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지금 오빠 집으로 갈 테니깐 빨리 와라!”
“나 지금 안 들어간다.”
“오빠 올 때까지 기다릴 테니 빨리 와라!”
“내가 가고 싶을 때 갈 거니깐 기다리던지 말든지 알아서 해라!”
언성을 높여 통화를 하는 모습을 본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불안한 표정으로 내 눈치만 살피다 자리에 다시 앉아 그녀 역시 소주를 들이켰다.
나 역시 자리에 앉아 비어진 그녀의 잔에 소주를 채워주며 말했다.
“갑자기 만나서 이런 말해서 뭐한데……. 정말 잘 할 테니 저랑 만나줘요.”
그녀는 결심한 듯 방금 따라 준 소주를 또다시 한 번에 들이켜고 말했다.
“오빠를 만나는 건 좋은데요. 저 사실 설현이에요.”
“설현? 누군지 모르겠는데 정확히 누구?”
설현이라고 소개한 그녀는 테이블 위에 올려진 내 오른손을 양손으로 잡으며 빙긋 웃었다.
“예전에 오빠가 꼬맹이라 부르던 설현이라고요. 입술이 석류처럼 예쁘다고 그랬던 옆집 꼬맹이 기억 안나요?”
“혹시 설희 동생?”
설현은 손을 잡은 채 내 얼굴을 보며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말했다.
“네 설희 동생 설현이 맞아요. 오빠의 첫 키스였던 그 꼬맹이 맞답니다.”
내 기억과 전혀 다른 얼굴을 한 설현의 모습에 갑자기 머리가 혼란스러웠고 옛날 꼬맹이라 부르던 17년 전이 기억나기 시작했다.
그 당시 발전이 더뎠던 대구 대현동에 작은 화단이 있는 한옥 집에 살았는데 바로 이웃에 설희가 살았었다.
볕이 잘 드는 화단에 아무것도 없이 휑하다고 아버지가 석류나무 4년생 묘목을 사가지고 와서 심었었다.
혼자서는 힘들었는지 평소에 약주를 같이 하시던 옆집에 사는 설희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그 때 구경 온 설현을 처음 봤었다.
나무 심는 것을 뒤에서 구경하던 엄마는 설현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쟤는 설현이라고 하는데 막내 동생이라고 생각하고 잘 챙겨줘라.”
그 당시 설현이는 그렇게 예쁜 아이는 아니었지만 단발 곱슬머리에 정말 활발하고 잘 웃는 6살 꼬맹이였다.
“오빠는 몇 살이야?”
“언니랑 똑같은 13살이야. 그리고 같은 반이야.”
처음 나눈 대화는 나이를 묻고 대답하는 거였고 설희, 설현 두자매만 있는 집에서 설현은 오빠가 생겼다며 무척이나 나를 따랐었다.
“언니는 좋겠다. 오빠 맨날 보고. 언니도 오빠라 부르는 거야?”
“아냐, 언니랑 나는 친구니깐 그냥 이름을 불러.”
“그렇구나.”
“그리고 설현이도 오빠가 학교 끝나면 놀아 줄 테니깐 매일 놀러와.”
여자아이는 여자아이끼리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었는데 나무를 심은 후부터 설현이는 궁금한 것이 있으면 내 여동생을 제쳐두고 내게 달려와 묻곤 했다.
“오빠, 저 나무 뭐야?”
“저거 석류나무야. 이번에 심어서 가을 되면 열매도 열릴 걸?”
“먹을 수 있는 거야?”
“그럼, 열매가 얼마나 예쁜데. 설현이 입술 색깔처럼 빨간 구술 같은 열매인데 정말 맛있을 거야. 그 때 오빠가 따줄게.”
“정말?”
설명할 때도 내게 눈을 안 떼던 설현이와 손가락을 걸며 약속까지 했었다.
그 후로 6살 설현이는 대문 앞에 쪼그려 앉아 나를 매일 기다리기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 날 설희와 같이하는 하굣길에 언니보다 내게 양팔을 벌리고 달려와 내 양 허벅지를 힘껏 안았었다.
그 때 설현이의 달달한 땀 냄새가 풍겨왔고 눈높이를 맞춰 쪼그려 앉아 눈을 맞췄었다.
“오빠 많이 기다렸어?”
고개를 힘껏 끄덕이는 설현이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익지도 않은 파란 방울토마토를 한손 가득 내밀었다.
“오빠, 이거 먹어.”
“이거 파란색이라 먹으면 오빠 죽을지도 몰라.”
“안 돼, 오빠 죽으면 나도 죽을 거야.”
죽는 게 뭔지도 모를 설현의 말에 설희와 나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웃었었다.
그러자 설현은 설익은 토마토를 바닥에 내팽개치고 발로 밟았었다.
아마 자기 집 화단에서 키우는 토마토일 것 같았다.
얼굴과 손이 흙투성이라 우리 집 화단 옆 수돗가에서 설희와 같이 설현의 얼굴과 손을 씻겼었다.
설희가 수건을 챙기려고 자리에 없었을 때 같이 쪼그리고 앉은 설현은 순식간에 일어나 내 입술에 입을 맞추었었다.
“난 오빠가 세상에서 젤 좋아. 내 입술도 예쁘다고 해주고. 그래서 크면 오빠랑 결혼 할 거야.”
“나도 설현이가 좋은데 언니는 더 좋아.”
내 말을 들은 설현이의 눈가에 감당 못할 눈물이 터질 것 같아 달래 듯 말했다.
“그래도 오빤 설현이와 결혼할게. 울면 안 돼, 알았지?”
그리고 시간이 지나 그 이듬해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학교와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하게 됐었다.
이사를 하던 날 나와 떨어지지 않으려하는 설현을 달래면서 했던 말들도 생각났다.
“오빠는 멀리 안가니깐 자주 설현이와 설희를 보러 자주 놀러올게.”
고개를 크게 흔들던 설현이와 손가락까지 걸면서 약속을 했었다.
그리고 약속했던 것처럼 시간이 될 때마다 설희집으로 자주 놀러갔었다.
설희와 자주 만나면서 우리는 성인이 되자마자 연인이 되었었다.
군대를 입대했을 때도 설현은 중학생이었지만, 설희와 같이 면회를 와서는 울먹거렸었고 군 전역을 할 때도 설희와 함께 축하해주었었다.
그 후론 설희와 사귀는 걸 알고 있어서 그런지, 나이가 들어서 철이 들었는지, 예전만큼 내게 애정을 표현하지 않았었다.
전역을 한지 6개월이 지났을 때 부모님의 지원으로 학교 근처에 빌라를 얻었다.
그리고 복학 전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퇴근을 하고 설희와 문자를 주고받으며 걷던 중, 신호등 파란불을 확인하고 횡단보도를 건너다 급브레이크 소리를 들었고 감당 못할 다리 통증에 눈을 떠보니 병원이었다.
장기간 입원에 다리 골절 수술은 잘되었지만 앞으로 제대로 걸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성격은 예민해지고 쌓인 스트레스는 먹는 걸로 풀었었다.
설희의 병원 방문은 점차 주기가 길어지고 조금씩 서운함이 깊어질 때 뒤늦게 내 소식을 접한 설현이 여동생과 함께 방문했었다.
내 상태를 묻는 무덤덤한 여동생과 달리 설현은 소리 내어 크게 울음을 터트리며 여동생에게 원망하듯 말했었다.
“언니는 친동생인데 왜 그래? 오빠 걱정 하나도 안 돼?”
“설현아, 나도 처음엔 많이 걱정했지. 지금은 수술도 잘되고 했으니깐 너무 걱정 안 해도 돼.”
“아냐! 걱정 돼! 우리 오빠 이제 못 걷는 거야?”
교복을 입은 설현이는 깁스가 되어있는 내 오른쪽 다리를 끌어 앉고 대성통곡을 하고 난 후 잠시 진정이 됐는지 말했다.
“오빠, 걱정하지 마. 목발이면 내가 평생 부축하고 휠체어를 타면 내가 평생 밀어줄게. 우리 오빠 아파서 어떡해…….”
그 후 매일 찾아와 하루 일과부터 사소한 하나까지 얘기해주는 설현과 달리 대학생이었던 설희는 더 이상 방문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심란한 얼굴로 병원에 방문한 설현이 주저주저하다 어렵게 말을 꺼냈다.
“오빠, 언니 새 애인 생긴 거 같아.”
설현의 말에 적잖게 충격을 받았지만 날 보러 병원에 방문을 오랫동안 하지 상황이라 어느 정도 예측은 하고 있었다.
설희 동생과 만남이 계속 이어진다면 후에 서로가 진짜 미워하는 사이가 될 것 같아 한참을 고민하고 말했다.
“꼬맹아, 자꾸 찾아오면 이제 공부에 지장이 있을 것 같은데 너도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난 이제 다 필요 없어. 오빠만 내 옆에 있으면 돼.”
“그러지마, 오빤 이제 괜찮아. 나중에 다 나으면 오빠가 연락할게.”
“나 어릴 때 오빠랑 당연히 결혼하는 줄 알았어. 친구가 없어서 유일한 친구가 오빠였고 아빠보다 오빠가 더 좋았고 당연히 오빠가 친오빠 같았어. 그러니깐 오지 말라는 말은 하지 말란 말야. 그저 오빠는 내가 뻗으면 닿을 수 있을 만큼만, 딱 그 정도 거리에만 있어도 난 괜찮아.”
절절한 고백 같은 말을 듣고도 며칠을 고민하다가 여전히 부담이 되는 설희 때문에라도, 설현을 위해서라도, 사라지는 게 맞는 거 같았다.
그 후 어느 정도 몸이 나아졌을 때 여동생과 동훈이에게 내 얘기는 그 누구에게도 절대 하지 말라는 당부를 하고 성당동의 빌라가 아닌 부모님 집으로 들어갔었다.
휴대폰 번호를 바꾸고 복학 전에는 늘 집에만 있었으며 그렇게 하루하루 살이 쪄 갔었다.
그렇게 기억을 지운 채로 살아가던 중 우연이라고 할까, 인연이라고 할까, 또다시 설현이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그것도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새로운 얼굴로…….
내가 기억하는 설현이는 아빠를 닮아 그렇게 예쁜 편이 아니었고 젖살 때문인지 조금 통통한 외모로 기억되는데 지금 내 앞에 있는 설현은 내 기억속의 그 모습이 아니었다.
갑자기 반말을 해야 할지 존댓말을 해야 할지 어색해졌다.
“많이 예뻐졌네...요?”
“오빠, 그냥 말 편히 하세요.”
“응, 그럴까?”
떨떠름한 내 표정을 보며 설현이는 웃어 보이며 대답을 했다.
“네, 오빠는 웃는 모습이랑 남자답게 말하는 게 너무 근사하거든요.”
“내가 너 앞에서 남자다웠던 적이 있었나?”
“언제나 오빤 내겐 남자였어요. 첫키스 할 때부터.”
“야, 그 건 뽀뽀고 그것도 손 씻기다가 강제로 내가 당한 거잖아.”
민망한 웃음을 섞어 말하는 중에 어릴 적 설현의 달달하던 땀 냄새는 옅은 향수 냄새로 바뀌어 있음을 깨달았다.
어릴 때 내 허벅지를 안으며 날 따르던 설현이는 이제 서로의 어깨를 보듬을 수 있는 그런 성숙한 여인이 되어있었다.
“오빠는 너 잊고 살았는데 우리 설현이는 오빠 안 잊고 살았네?”
“오빠가 내 입술이 석류 같다고 해서 석류만 보면 오빠 생각이 나는데 어떻게 잊어? 아까 그렇게 까지 말했는데 눈치 못 채고. 미엉.”
“언니는 요즘 잘 지내?”
갑자기 꺼낸 언니의 얘기가 그리 기분이 좋지 않은지 대꾸도 하지 않고 앞에 놓인 술을 들이켰다.
“오빠 예전에 되게 잘생겼는데. 그래서 오빠 몰래 많이 좋아했었어요.”
“아닌데? 대놓고 좋아했었는데?”
내 대답을 예상 못했다는 듯이 설현이는 또 크게 웃은 후 말을 이었다.
“그래서 심술 나서 언니랑도 많이 싸웠고 예전에 언니 샤워할 때 내가 전화 받아서 언니 휴대폰 놓고 나갔다고 거짓말 한 적도 있었어요.”
“하하하, 정말?”
“네!”
“그럼 그 샤워하던 언니는 요즘 어떻게 지내?”
설현은 한참을 주저하며 망설이다 힘겹게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남친이랑 헤어졌어요. 에이, 더 묻지마요. 얘기하기 싫어. 지금 우리 얘기만 해요.”
궁금한 건 더 많았지만 설현이가 얘기를 하기 싫어하는 것 같아 화제를 돌리려 설현의 얼굴을 한참을 쳐다보고는 말했다.
“그런데 너 몰라보게 예뻐졌네?”
“앗! 몰라보게 예뻐진 건 아닌데. 원래 좀 예뻤지 않았나? 히히, 사실 그냥 쪼금 고쳤어요.”
“고쳐? 뭘 고쳐?”
“그냥 성형 조금 했어요. 오빠를 다시 보면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
“안 했어도 매력 있었을 건데.”
“봐봐! 예쁘다는 말이 아니고 매력 있었을 거래. 칫! 뭐 소개 받을 때 얘는 착해 하고 비슷한 거 아닌가?”
“근데 오빠도 왜 이렇게 달라졌어요? 몰라 볼 뻔 했잖아요.”
몰라 봤다는 말에 살이 너무나 쪄버린 자신이 자기관리를 못한 것처럼 비춰질 것 같아 주눅이 들어서 목소리가 작아졌다.
“오빠가 살이 많이 쪄서 보기 싫지?”
“살은 쪘지만. 음, 외모만 달라졌을 뿐 나도 그렇고 오빠도 그렇고 그 때랑 같은 사람이니깐요. 괜찮아요.”
이젠 훌쩍 커버린 설현이었지만 괜히 옛 여친의 여동생에게 몹쓸 짓을 한 것 같은 죄책감에 작은 소리로 말했다.
“아까 내가 흥분해서 헛소리 했는데 이해해주라.”
“무슨 헛소리요?”
“오빠가 설현이랑 사귀자고 한 말 말야…….”
내 말을 들은 설현의 얼굴이 빨갛게 변하면서 당황한 목소리를 내었다.
“아니에요, 오빠. 그냥 저랑 만나요.”
여전히 어릴 적 꼬맹이로 느껴지는 설현에게 눈웃음을 지으며 나긋하게 말했다.
“사귄다는 게 어떤 건지나 알고 말하는 거야?”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설현이는 소파에서 일어나 앞에 앉아 있는 내게 얼굴을 내밀어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주위에서 우리 상황을 틈틈이 지켜보며 언제 거절당하나 지켜보던 젊은이들이 [우워-] 라는 낮은 소리를 내었다.
설현의 돌발 행동에 눈이 커졌고 그 모습을 본 설현은 웃으면서 사랑스럽게 보고 있었다.
어리둥절히는 내게 다시 한 번 입을 맞추며 설현은 말했다.
“오빠 저 그 때 그 중딩 아니랍니다. 저두 이제 성인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