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들어오자마자 설현에게서 전화가 왔고 받질 않자 문자가 왔다.
[오빠, 미안해. 언니가 이상한 말 했지? 신경 쓰지 마요. 이따가 언니 가면 다시 전화할게.]
답장을 하지 않고 이번엔 내가 간단히 짐을 챙겨 부모님 집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 있냐며 걱정하는 부모님에게 별일 아니라고 둘러대고 주말만 여기 있을 거라고 하니 그러라고 했다.
휴대폰 전원을 꺼놓은 채 주말 내내 집에 있는 내가 걱정됐는지 엄마가 슬쩍 떠 보기도 했다.
“진짜 무슨 일 없는 거 맞아?”
“응, 별일 없어. 이제 좀 내가 정신 차린 거 같아서.”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한 엄마는 고개를 갸우뚱 거렸지만 더 자세하게 묻지 않았다.
일요일 저녁까지 휴대폰을 꺼놓았다가 생각을 정리하고 다시 켰을 때 설현과 채린의 문자 메시지가 들어와 있어 마음이 불편했다.
‘조금 전까지 아무런 연락이 없으니 맘이 편했는데 진짜 이젠 안녕이다.’
설현의 문자는 애타게 나를 찾는 문자 내용이었고, 채린의 문자는 욕설이 섞인 자신의 분함과 다른 남자 만나러 간다고 일러주는 문자 내용이었다.
마지막으로 채린에게 전할 말이 있어 전화를 걸었고 신호가 몇 번 울리던 중 종료버튼을 누르는 듯 그냥 끊어져 버렸다.
다시 전화를 걸었을 때 전화는 받았지만 아무 말도 안하고 있었다.
그러나 분명 듣고 있을 거라 생각해 조용히 말했다.
“이틀 전엔 내가 미안했다.”
예전처럼 숙이고 들어가는 줄 알고 채린은 신경질적으로 대꾸를 했다.
“전화 하지 마! 아무 말도 듣기 싫어!”
채린의 짜증에 이제는 이런 모습에서 해방 될 거란 생각에 나도 몰래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래, 이젠 전화 안할 거야.”
드디어 사과를 할 줄 알았던 내가 오히려 웃으면서 연락을 안 한다고 하니 이상한 낌새를 느끼는 듯 했다.
“그래 잘됐네!”
해야 할 말도 하지 못했는데 짤막한 한마디로 전화가 끊겨버려 다시 전화를 걸었다.
“왜 자꾸 전화를 하는데!”
전화기 옆으로 웬 남자의 웃음소리가 들려왔지만 개의치 않고 말했다.
“이제 전화 안 한다니깐! 한마디만 하려고.”
“무슨 할 말?”
“나 1년 동안 지방에 출장을 가기로 했어.”
물론 지방 출장 그런 거는 없이 오직 다이어트만 할 것이었지만 혹시나 또 집으로 쳐들어 올 수도 있을 것 같아 일부러 거짓말을 했다.
채린은 예상과 다른 사과가 아닌 출장을 간다는 말에 또 화를 내며 짜증을 냈다.
“그래서? 어떡하라고?”
“우린 이젠 헤어졌으니 찾아오지 말고 그 동안 다른 남자 만나서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뭐야? 참나, 누가 보면 내가 매달린 줄 알겠네. 너도 참 너그럽다. 헤어지는 마당에 내 걱정도 해주고. 이제 살 뺀다고 했으니 그 살에서 사리가 나오겠네?”
좋은 말로 좋게 끝내고 싶었지만 그녀의 비아냥거림에 더 독기가 올라 나 역시 비아냥거렸다.
“그럼 그 동안 즐거웠고 다음 달 네 생일 잘 보내. 생각나면 택배로 선물이나 하나 보내줄게. 생각날지 모르겠지만.”
“지라알하네! 네가 얼마나 나 없이…….”
그리고 그 동안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먼저 전화 끊기를 해버리자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을 받았다.
이제 남은 설현에게도 미안하지만 마무리를 지으려 전화를 했고 내 번호를 확인하고 받았는지 밝고도 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현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밝게 들려오자 미안한 마음에 쉽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오빤데…….”
“오빠! 어제 언니가 이상한 말 안했지?”
“응, 별 말 안했지.”
“참! 전에 무서운 언니도 이제 안 만나는 거죠?”
“응, 안 만나.”
내 대답이 기분이 좋아졌는지 한층 더 밝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이제 나랑 본격적으로 만나면 되겠네, 오빠.”
목소리가 떨려 들리는 것이 나름 용기를 냈다는 걸 알 수 있었지만 설희와의 약속 때문이라도 이제는 더 이상 가까이 할 수가 없어 단호하게 말했다.
“글쎄? 오빤 당분간 출장 갈 것 같은데 어쩌지?”
이젠 만나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 채라고 일부러 딱딱하게 얘기를 했던 거지만 설현은 이상하다는 듯 되물었다.
“출장 갔다 오면 만나면 되잖아.”
“1년 동안 출장을 가거든……. 거의 타... 지역 발령이지.”
말을 더듬거리며 한 거짓말은 설현이의 힘없는 목소리로 돌아왔다.
“어디로 가는데?”
“그냥 먼 곳으로. 오랫동안…….”
“오빠 올 때까지 기다리면 그 땐 내 옆에 있을 거지?”
듣기만 하고 대답이 없자, 언니와 무슨 일이 있었던 걸 눈치 채고 울먹거리며 말했다.
“오빠……. 자주 전화해도 되지?”
“그래…….”
여운이 남는 대답에 여전히 울먹거리는 설현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통화를 종료했다.
다음날 출근해서 오전에 잠시 시간을 내어 통신사에서 휴대폰번호를 바꾸었다.
부모님과 회사 동료에게만 번호를 가르쳐 주었고 동훈이에게는 한참을 망설이다 가르쳐주지 않았다.
‘훈이에게 번호를 가르쳐주면 설현이가 알게 될 거고 그럼 번호 바꾼 의미가 없을 것 같아.’
퇴근 전까지 휴대폰은 잠잠했다. 이 세상에서 잠시 사라진다는 느낌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퇴근을 하려고 회사를 나설 때 입구 쪽에서 익숙한 여성의 모습이 보여 자세히 보니 쓸쓸한 표정의 설현이가 서 있었다.
그 모습에 화들짝 놀라 건물 옆 틈새에 숨어 옆으로 스쳐지나가는 지원팀의 정보람 사원을 살짝 불렀다.
“보람씨!”
뒤를 돌아보던 보람은 웃음을 띠며 내 앞으로 걸어왔다.
“여기서 뭐하세요?”
“저기 앞에 여자 보이시죠?”
내가 손짓으로 가리키자 보람은 그 방향으로 보며 덤덤히 말했다.
“보이는 데 왜요?”
“내가 아는 여자애인데 날 찾아왔나 봐요. 나 멀리 출장 갔다고 하고 돌려보내줄래요.”
“우와! 강과장님 그렇게 안 봤는데 아가씨 나오는 술집에서 외상 달고 숨어있는 거예요?”
“그런 거 아니고 나 따라다니는 여자인데…….”
내 말도 끝나지 않았는데 보람이는 입을 손으로 가리고 소리 내어 크게 웃었다.
“하하하, 강과장님! 요즘 너무 웃긴 거 같애. 보니깐 20대로 보이는 여성분이 강과장님을? 내가 가서 확인하면 되죠, 뭐.”
내 앞에서 한참을 웃던 보람이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리고 설현이 앞으로 걸어갔다.
보람이는 설현이 등 뒤로 걸어가 어깨를 톡톡 건들었고 뒤돌아 선 설현과 인사를 하고는 몇 마디 주고받았다.
보람의 얼굴은 여전히 웃음이 머물러 있었고 무슨 말을 건넸는지 설현이의 표정은 금세 일그러져버렸다.
축 처진 어깨로 설현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보람은 다시 내게로 다가와 엄지를 척 올려 세웠다.
“우와, 내가 모르는 과장님의 매력이 뭘까나? 저 여자분 과장님 멀리 출장 갔다고 하니깐 닭똥 같은 눈물을 막 흘리는데 얼마나 안쓰러운지.”
“다른 말은 없던가요?”
“술값 얘기는 안하던데요? 호호호, 농담이고요 다른 말은 없고 그냥 인사만 꾸벅 하고 가던데요? 하여튼 오늘 도와드렸으니깐 나중에 맛있는 거 사 주세요. 그럼 오늘 수고하셨고 조심히 들어가세요.”
“네, 그래요.”
보람은 내 앞으로 먼저 걸어가면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뒤돌아 나를 쳐다봤고, 나랑 눈이 마주치자 다시 가벼운 목례를 하고 회사를 빠져나갔다.
퇴근 후 집에 들어서자마자 냉장고 안에 가득 찬 맥주와 냉동식품들을 모조리 챙겨 차에 싣고 부모님에게 드렸다.
그리고 동네에 눈여겨보았던 복싱 체육관에 등록을 했다.
이날을 시작으로 정말 이를 악물고 음식 조절과 운동을 병행했다.
평소에는 7시에 기상을 하던 내가 이제는 5시30분에 일어나서 1시간 30분 동안 유산소 운동을 했다.퇴근하면 복싱 체육관으로 향했고 끝나면 마무리로 헬스장에서 근력 운동을 했다.
그리고 다시 잠들기 전 1시간 정도 러닝머신을 하고 쓰러지듯 잠에 들었다.
이런 일과를 매일 하다 보니 처음에는 무리가 갔는지 앞 발목에서 묵직한 통증이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통증은 사라지고 몸은 무척이나 가벼워 졌다.
살이 빠질수록 거울을 볼 때마다 예전의 꿈에 그리던 그 모습의 윤각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살 빼는 중에 출근과 퇴근을 할 때 누군가가 늘 나를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갑자기 살이 빠져서일까, 기가 약해져서 그런가보다고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중에 퇴근할 때 멀리서 훔쳐보는 설현이를 보게 되었다.
‘내가 출장을 간다고 말했을 때부터 거짓말인 걸 알고 있었구나. 그래도 나를 이렇게 좋아해주고 멀리서 나를 지켜봐 준 건가?’
살이 조금 빠졌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그 누구도 만날 생각이 없었고 특히 설현이는 설희의 부탁으로 더더욱 만날 생각이 없었다.
시간이 지나 몇 달 전까지 느껴지던 설현의 시선도 이젠 느껴지지 않는 걸 보아 대학교를 졸업하고 이사를 한 것 같았다.
설현을 떠올릴 시간도 없이 운동에만 전념을 했고 예상보다 빨리 8개월 만에 43키로가 빠졌다.
허리 38인치가 30인치 입어도 될 만큼의 허리와 배에도 얼핏 복근이 보였고 턱 주위의 둥글둥글한 살들도 어디로 사라졌는지 갸름한 얼굴로 변해있었다.
10년 가까이 끼던 안경도 렌즈로 바꾸면서 거울을 보면 나도 몰라볼 만큼 변해 있었다.
변한 건 외모뿐이 아니라 성격도 여유로워졌고 자연스레 자신감도 점점 높아져갔다
이젠 출근을 하면 각 부서의 몇몇 여직원들이 몰라보겠다며 관심을 보였고 특히 정보람이 내게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출근을 하던 중에 날 발견한 정보람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좋은 아침이에요. 강과장님.”
“보람씨도 좋은 아침.”
예전에는 그렇게 날 뚱땡이로 보던 보람이는 언제부터인가 내 주위에서 맴돌고 있었고 한 번씩 뱉은 재미없는 말에도 자지러지게 웃으며 내 어깨를 툭툭 건들며 은근히 스킨쉽을 하고 있었다.
옆 부서라서 종종 보기는 했던 보람이었지만 요즘은 자주 눈에 띄었다.
매일 집에서 가져온 단백질 위주의 도시락 음식을 먹다가 이젠 회사 구내식당에서 종종 밥을 먹고 있었다.
오늘도 회사 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려고 식판에 음식을 받고 자리에 앉았을 때 누군가가 내 옆에 앉았다.
고개를 돌려 누군가 봤을 때 반짝이는 금목걸이가 눈에 잘 보이도록 셔츠 단추를 하나 푼 보람이가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했다.
“강과장님도 식당에서 점심을 먹네요? 진짜 처음 보는 듯.”
“요즘은 귀찮아서 도시락 안 챙기고 그냥 식당에서 먹어요.”
“요즘은 다이어트 열심히 안 하시나 봐요?”
“그냥 조금 해요.”
“그냥 조금 하는데 이렇게 빠지셨데? 예전에는 이런 분 인줄 몰랐는데. 전에 젊은 여자가 따라다닐 때 이런 매력이 있으니 따라다닌 건가요?”
“아, 글쎄요?”
짧게 대꾸를 하고 빙긋 웃어보이자 보람이는 내 팔뚝을 은근슬쩍 가볍게 건들면서 말했다.
“어떻게 살을 많이 빼셨어요? 비결이 뭐죠?”
“그냥 적게 먹고 매일 달리면 빠져요. 근데 보람씨는 뺄 살도 없는데?”
이 말이 그리 재미있었는지 보람이는 입을 손으로 막고 크게 웃었다.
“아니에요. 저 은근히 숨겨진 살이 많아요.”
보람이는 밥을 먹기보다 나와 대화를 계속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그런 그녀를 잠시 쳐다보다 셔츠 단추 하나가 풀린 사이로 깊게 패인 쇄골이 보여 손가락으로 살짝 건들며 말했다.
“봐봐, 보람씨도 이렇게 뼈 밖에 없는데 무슨 숨겨진 살이 있어요?”
“하하하하, 우와 강과장님 너무 재미있으세요.”
한동안 입을 막고 웃던 보람이는 그제야 밥을 조금씩 먹기 시작했다.
내게 꼬리치는 것이 너무 훤하게 보이는 보람에게 전혀 모르는 것처럼 물어보았다.
“내가 보람씨 이름은 자주 불러서 아는데 성은 어떻게 되요?”
“우와, 너무 하신 거 아녜요? 치, 제 성도 모르시고…….”
당연히 알지만 관심이 없는 척 하기 위해 일부러 물어보았고 삐친척하는 그녀에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이제 기억 할 테니 성이?”
“치! 정보람이에요.”
“아! 맞다, 정보람. 정보람씨였지.”
“너무한 거 아니에요? 제가 입사한 지 3년이 다 되어 가는데 이름도 모르고 너무 서운해요.”
투정부리는 보람의 등을 토닥이며 달래듯 말했다.
“보람씨, 저녁에 살 빼는 진짜 비법 가르쳐 드릴 테니 술 한 잔 할래요?”
“강과장님이 술을 사셔야 해요.”
“당연하죠. 전에 신세 진 것도 있기도 하고 이렇게 미인에게 술을 대접 한다고 생각하니 벌써 긴장이 되네요. 전에 맛있는 거 사주기로 한 거 맛있는 술로 갚는 걸로.”
기다렸다는 듯이 말하는 보람에게 농담 섞어 말했고 그 농담이 재미있는지 즐겁게 웃었다.
“에이, 맛있는 거는 따로 한 번 더 사주셔야죠.”
“좋아요, 그럼 우리 보람씨를 한 번 더 보는 걸로.”
“하하하하, 네. 그리고 오늘 꼭 다이어트 비법 가르쳐 주셔야 해요.”
“네, 뼈밖에 없는 보람씨지만 뼈까지 쫙 빠지는 비법까지 가르쳐드리는 걸로.”
보람이의 웃음소리를 뒤로하고 식판을 들고 구내식당을 나섰다.
퇴근 후, 차에 시동을 걸고 있으니 보람이는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듯 두리번거리며 내 차를 향해 손을 낮게 흔들며 다가와 조수석에 탔다.
“저녁은 뭐먹을까요? 보람씨.”
“강과장님 드시고 싶은 거 드시면 되요.”
“나 그럼 진짜 얼큰하고 이빨에 고춧가루 끼고 그런 거 먹으러 갈 거 같은데?”
“그런 거 나도 좋아해요. 얼큰하고 이빨에 고춧가루.”
서로 주고받는 대화에 마주보며 크게 웃었다.
불현 듯 헤어진 채린이와 데이트 할 때가 생각났고 그때 그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 했다.
“오빠는 나에 대해 아는 게 뭔데?”
“미안해.”
“뭐가 미안한데?”
“분위기가 안 좋은 이런 식당 온 거 미안해.”
“또? 더 없어?”
아무거나 먹자고 말해놓고 식당에 들어서면 이런 식당 말고 자기가 원하는 거는 분위기라고 말하던 채린이.
신경질을 내며 말도 하지 않고 눈치 보게 만들었던 기억에 쓴웃음이 났다.
하지만 옆에 있는 보람이는 진짜 날 사랑할 사람일 지도 모른다는 마음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다.
‘보람이라는 이 여자애는 시작과 첫인상은 안 좋았지만 잘 웃고 내 말도 잘 들어주고 어쩌면 나와 잘 맞을 수도…….’
회사 근처에 깔끔한 갈치 정식 식당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내리자 보람이는 내 팔짱을 자연스레 끼웠다.
그녀가 내게 관심을 가진 후부터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내 마음에 너무 들었다.
식당은 전체가 각각의 방으로 되어있어 오붓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식당이었고 마주 앉아 다정하게 바라보는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여러 가지 칭찬으로 그녀의 입가에 웃음이 계속 머물게 했다.
갈치조림이 나오자 그녀는 갈치를 접시에 덜어 뼈까지 발라 살만 담긴 접시를 내게 내밀었다.
“맛있게 드세요, 강과장님. 참! 그리고 이제 오빠라 부르면 안 돼요?”
“맘대로 하세요, 보람씨. 오빠라 불러도 되고 자기라 불러도 되고 미국식으로 베이비라 불러도 되요.”
보람이는 또다시 크게 웃으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강과장님.. 아니 우리 베이비가 이렇게 재미있는 사람인 줄 몰랐네요.”
“음, 듣다 보니 베이비는 아닌 걸로.”
“하하하하, 네. 그리고 오빠도 저 부를 때 그냥 보람이라고 불러주세요. 그리고 말도 편하게 하시구요.”
둘이 마주보며 얘기를 하다 보니 서로 대화가 오갈 때마다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고 내가 그 동안 보람이를 오해했나 싶기도 했다.
“오빠, 오빠가 여기 쏘면 2차는 제가 잘 아는 술집에서 제가 살게요.”
저녁을 먹고 식당 밖으로 나오자 밖은 이미 깜깜하게 어두워져 있었다.
다시 운전을 하고 얼마가지 않아 보람이가 말한 술집 건물 주차장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려 건물 2층 간판을 보니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이름의 바(bar)였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양옆으로 하늘색 불빛이 은은하게 켜져 있었고 술 마시기엔 이른 시간이라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 밝지 않은 술집 안에서 주인인지, 바텐더인지 모를 사람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고 자리에 앉은 보람이는 많이 와본 것처럼 주문을 했다.
“오빠, 오해하지 말구요. 여기는 친구들과 한 번씩 왔고 남자랑 온 건 오빠가 처음이에요.”
“남자랑 왔었으면 어때? 앞으로 남자는 나하고만 오면 되지.”
곧 주문했던 술이 나왔고 웨이터가 불을 붙이니 파란색 불이 은은하게 불타는 그런 술이었다.
바텐더의 불쇼를 하는 동안엔 대화가 멈췄다가 바텐더가 술잔을 넘기고 사라지자 보람이는 술을 한 모금 마신 후 내게 물었다.
“그런데 오빠는 장가 안 가세요?”
나 역시 술을 한모금하고 대답했다.
“곧 가겠지. 아니 갈 것 같은데?”
“어? 지금 만나는 사람, 아니, 애인은 있으세요?”
슬쩍 떠보려는 보람이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옆자리에 바짝 붙어 앉아 손을 잡았다.
“곧 생길 것 같은데?”
보람이는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본 후 마른침을 삼키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요?”
긴장을 하고 있는 보람의 턱을 살며시 잡은 채 키스를 하려는 포즈로 서로의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에서 말했다.
“내 앞에 앉아있네?”
“강과.. 아니 오빠가 이리 잘 생겼는지 몰랐네. 근데 오빠 너무 바람둥이 같애.”
여전히 떨리는 목소리 나지막하게 말하던 보람이는 살며시 눈을 감고 있었다.